경인칼럼

 

계절의 여왕 5월은 왔지만…

새 해인가 싶더니만 벌써 5월이다. 천지가 푸르다 못해 찬란한 빛을 발하는 5월은 자연 그대로의 축복임을 느끼게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대학가에서는 봄 축제가 펼쳐진다.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이 온 천지를 흔들어놓는 듯하다. 꽃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의 봄과 지루한 여름의 사이에 있는 달이니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다. 5월은 우리말로 '다섯'이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닫고 서다(閉, 立)'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인의 날 등 좋은 날이 많다. 그래서 5월을 또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반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깐깐 5월, 미끈 6월,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 하면서 5월을 깐깐하다고 했다. 음력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떻든 농촌에서의 5월은 이것 저것 챙길 것이 많은 달이다. 보리는 파랗게 익어가는 보릿고개인데다 모판에는 볏모가 푸른 빛으로 자라 가뜩이나 부족한 일손을 기다린다. 눈코뜰 새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 있으면 라일락과 아카시아 꽃의 향기는 이제 콧 속을 마비시킬 기세다. 봄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산과 들로 뛰쳐나가 마음껏 봄의 계절을 만끽하고 싶은 게 모두의 심정이다.그런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5월이 왔지만 주변의 상황은 영 봄같지가 않다. 봄이 왔나 하고 외투를 벗어놨다가 다시 주워 입곤 하는 변덕스런 날씨랄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것 같다. 봄은 왔으되, 봄같지 않은 요즈음이다. 대학가에는 지난 해에 이어 어김없이 축제가 이어지지만 학교 밖에서는 청년실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달 통계청이 집계한 3월의 20대 취업자 숫자가 작년에 비해 10만명 이상 줄어들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20대가 학교나 학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년실업의 악순환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층의 취업이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점을 감안하면 청년실업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제자들의 일자리를 하나라도 만들어보기 위해 요즘의 대학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학교 측의 쉴새 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나선 졸업생들의 반응은 너무도 시큰둥하다. 취업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 물론 본인이 만족해 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위험스러울 정도로 태연하다. 여기에는 부모의 책임도 일부 있다. 한 둘밖에 없는 자녀가 힘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취업하기보다는 좋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생계비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캥거루족을 양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개성공단은 북한의 일방적인 통보로 폐쇄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춘래불사춘의 형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한 안보 불안은 가뜩이나 침체된 경기를 위축시키고 있다. 엔저 정책으로 인한 대일 수출감소는 현저하게 나타나 우리 기업들의 피해는 예상보다 크다고 한다. 개성공단에서 나타난 피해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민생경제 대통령, 한반도 평화 대통령이 됨으로써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정부도 출범 2달 만에 첩첩산중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봄이 왔음은 고사하고 경제 한파가 더욱 깊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를 지경이다. 계절은 봄인데 봄같지가 않다고 하는 넋두리도 이제는 무책임한 말일 뿐이다. 봄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손에 달렸다. 우리의 봄이 언제 올 것인가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종합대책을 제시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이로써 기업과 가계에 긍정 마인드가 확산되면 국민경제의 봄소식은 자연스레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진정한 축제로 즐겨보자는 것이다./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객원논설위원

2013-04-30 이준구

우리 내부의 비무장지대를 만들자

뉴스를 생산하는 입장에서도 요즈음 신문 읽기는 고통이다. 좋은 소식이 별로 없다. 가까스로 내각을 구성한 박근혜 정부는 국제외교의 시험대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다.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지만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미국측의 입장은 완고하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을 인정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에 정색을 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일본은 엔화를 무차별로 쏟아부으면서 한국의 수출경제를 목조르는 것도 모자라 각료와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보란듯이 참배해 대한민국을 모욕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결렬되고 한·중·일 정상회담도 불투명해졌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조정결과를 지켜보며 사태를 관망중이지만 수틀리면 언제든지 한반도 긴장조성에 나설 것이다. 중심을 잃고 헤매다간 우리 뜻과는 상관없는 우발적 위기가 언제 한반도를 강타할 지 모르는 형세다.국내로 시각을 돌려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창조경제는 원론 수준을 맴돌 뿐 각론 진입이 요원하다. 한 시사평론가는 "박근혜의 창조경제, 안철수의 새정치, 김정은의 생각을 아무도 모르는 세가지"라 농을 던졌다. 박근혜정부의 경제 철학이 벌써 희롱의 대상이 됐다니 이만한 낭패가 없다. 문제는 우리 경제에 창조적인 기운 대신 모든 경제주체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거나 관망하거나 규탄하는 이기적 기운이 싹트는데 있다. 재벌들은 계열사간 거래규제에 반발하거나 자세를 낮추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지하세원 발굴 의지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청년 백수들은 정년연장 추진에 울화통을 터트린다. 6억 이하 집 한채 못팔아 안달이던 사람들은 한숨 돌렸지만, 그 이상인 사람들은 "6억원으로 떨어질 때 까지 손가락 빨고 살아야 하느냐"고 원망이 늘어진다. 아파트 한채로 중산층이라 자위했던 세월들이 허망할 뿐이다.안팎의 불안한 기미 탓인가. 모두 제 앞가림에 급급하다. 대기업들은 대통령 앞에서 대규모 투자를 운운하지만 실제 금고 안에 쟁여 넣어 둔 현금을 선뜻 풀 태세는 아니다. 오히려 엔화 공습에 대비해 국내 투자 보다는 해외 투자로 자금을 돌릴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예측이 현실화된다면 국내 일자리는 그 만큼 줄어들게 된다. 소비자들도 지갑을 닫았다. 현재의 불경기가 내일 개선될 조짐이 없으니 지출을 줄이고 보자는 심산이다. 서민 뿐 아니다. 명품 시장에도 서리가 내렸다니 심각하다. 세금은 생산과 소비에서 발생한다. 제조업 가동률이 추락하고 소비시장이 얼어붙었으니 세금이 제대로 걷힐리 없다. 지하경제를 뒤진다지만 애먼 자영업자들만 들볶을까 걱정이다. 시중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5만원권은 가진 자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이제 시작하려는 이런저런 복지정책에만도 돈이 모자란 형편이다. 복지정책이 지속가능성이 깨지면 그 때는 감당할 수 없는 내부 갈등이 폭발할 수 있다.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현실이다.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심리적 비무장지대를 설정해야 한다. 정치권은 위기극복을 위한 중대현안들은 정쟁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기업과 노조도 비무장지대에서 허심탄회하게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우호적인 계층과 세대만을 대변하는 단견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의 운명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 내부의 비무장지대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각자 짊어져야 할 인내와 희생을 자임해야 한다. 덕수궁 대한문 앞 화단을 아무리 짓밟아봐야 일자리와 빵이 생기지 않는다.졸렬한 민족의 위기는 이기를 낳는다. 이기가 다시 위기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에 빠진다. 하지만 위대한 민족의 위기는 이타를 낳는다. 이타심으로 위기를 전환시켜 기회의 문을 여는 기적을 이룬다. 이미 1998년 환란시절 금모으기로 기적을 경험한 우리다. 다시 기회의 문을 열어야 할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윤인수 서울본부장

2013-04-24 윤인수

누가 전쟁괴담을 만드나

이런 지긋지긋한 봄날이 또 있었을까. 지천에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향기가 없고 향기가 없으니 벌도 나비도 찾아보기 힘들다. 봄이 온 것을 눈치 챘는지 어제 사무실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제비가 사라진 후 파리가 봄을 알린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무실 안을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신경을 쓸수록 파리 소리가 점차 헬리콥터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들리니 말이다. 시중에 떠도는 전쟁 괴담도 그렇게 조그맣게 시작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다. 한 시간 만에 파리는 내 손에 잡혀 죽었다.지난 대선기간 종편, 이른바 종합편성채널들이 대목을 맞았었다. 선거 6개월 전부터 종편들이 대선바람을 잡기 시작하더니 선거 100일 앞두고 4개의 종편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아리아리한 '정치평론가'들을 총망라해 앞다퉈 방송에 출연시켰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고 출연자의 발언이 강할수록 시청률이 높다는 것을 종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정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등 일부 종편은 공정성을 포기한 듯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치우쳤다. 급기야 어떤 종편은 선거 당일 그동안 출연한 출연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누가 대통령이 될지 묻는 등 위험천만한 프로를 만들기도 했다. 선거가 종료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말이다. 분명 선거법 위반 같은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후 종편은 물론이고 그 어떤 출연자도 자신의 빗나간 예측에 사과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종편들도 마찬가지다. 종편들의 이런 태도가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다.그런 종편이 요즘 또 대목을 맞았다. 북한위기 때문이다. 4개의 종편이 하루종일 경쟁하듯 쏟아내는 방송의 양이 지난 대선 못지않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성이다. 태양절인 15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예측했지만 북한은 잠잠했다. 호들갑 떨던 종편들은 머쓱해 하기는커녕 '조용히 지나간 북한의 속셈은?'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방송을 시작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미사일 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하루종일 호들갑을 떨어놓고도 막상 별일 없이 넘어가자 '내일은 쏠지도 모른다'라는 멘트를 남기고 어물쩍 넘어간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의도적으로 긴장모드를 조성하는 종편도 있다.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을 출연시키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깝다. 어느 종편은 '비상사태시 행동요령'을 방송하는가 하면, 붉은 글씨의 '뉴스 특보'라는 자막 아래 하루종일 '미사일발사 임박' '남북 긴장고조' '오늘 미사일 쏘나'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긴장감을 조성시킨다. 그러다가 문득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국민들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선 안 된다"며 점잖게 훈계까지 한다. 적반하장이다. 이 모든 보도는 "국민의 알권리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출연자들에게 일일이 "전쟁이 날 것 같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예사다. 심지어 출연자들에게 '오늘 미사일을 쏜다고 생각하면 오, 아니면 엑스'라고 답하라는 프로도 있다. 이 정도면 경악할 수준 아닌가. 이게 최근 종편들의 보도 태도다.방송매체가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하니 전쟁 관련 괴담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종편들이 북한방송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3월에 '3차대전 임박' '연천서 국지전 발발' '경기도민 대피소로 피난중' 등 근거없는 전쟁괴담이 퍼졌다. 4월 들어서는 '전쟁이 나면 SUV 차량을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거나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시중에 떠도는 괴담을 주제로 토론하는 종편도 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처음 듣는 얘기들이다. 종편이 시청률을 의식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보도하는 행위는 이제 자제해야 한다. 국익이 우선되는 보도태도가 아쉽다. 4개 종편이 전문가를 불러놓고 토론하는 공통적 주제가 있다. '위기의 한반도 해법은?'이 그것이다. 나는 그 해법을 안다. 종편들이 국익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한반도를 위기에서 건져 낼 해답이다./이영재 논설위원

2013-04-17 이영재

벤처신화 부활할까

코스닥시장에서 외국인 매수세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 3월 한 달 외국인 순매수액이 9년 만에 최고를 기록한 것이다. 코스닥 지수는 올 들어 12%나 상승, 미국 나스닥의 8.2%를 능가했다. 경쟁국들의 양적 완화와 북한변수로 코스피시장이 갈수록 활력을 잃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미국 실리콘벨리를 비롯한 글로벌 기술투자붐이 주목되는데 특히 기술력 있는 국내 벤처기업들이 포진한 코스닥시장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선을 끈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벤처붐이 또다시 불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 정책은 또 다른 호재였다. 창조경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육성하겠다는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여서 예단은 금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내내 '중기대통령'을 표방, 지난 3일에는 드디어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착한 천사투자를 활성화하고 대기업들의 기술탈취문제를 근절하며 공공조달에서는 신제품이 역차별 받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할 것을 관계기관에 지시한 것이다. 벤처기업가들의 가장 큰 애로인 투자자금의 조기회수 관련 세제지원도 언급했다.근래 들어 고용없는 성장이 고착된 국내 실정을 감안할 때 중소벤처 창업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 만들기가 주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벤처시장이 다시 가열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낙관은 금물이다. 그동안 국내 벤처생태계가 형편없이 나빠진 것이다. 벤처펀드 출자 등을 목적으로 적립할 때 감세혜택을 제공하는 '기술개발준비금 손금산입'과 '투융자손실준비금 손금산입'이 2007년에 없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2000년 벤처붐 당시에 마련했던 주식 양도차익 비과세 대상도 대폭 축소되었다. 덕분에 은행과 증권사 등은 벤처에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벤처기업이나 벤처펀드에 출자할 경우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 '출자액 소득공제' 비율도 엔젤투자를 뺀 나머지는 당초 30%에서 10%로 크게 축소되었다. 개인이 벤처캐피털에 출자해 확보한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비과세 규정마저 2009년에 없앴다. 정부가 세수확보에만 연연한 나머지 민간벤처 투자시장을 크게 위축시킨 것이다. 정치권도 벤처위축에 한 몫 거들었다. 스타트업 기업 및 벤처기업 전용 주식시장인 코넥스(KONEX) 신설과 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등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지난 2월 국회에서 좌절된 것이다. 5곳의 대형 증권사에 한해 투자은행 업무를 허용하고 건전성 감독을 완화해 주는 것은 극소수 금융재벌들의 배만 불릴 우려가 크다는 것이 이유이다.자금난에 직면한 벤처기업들은 빈사지경이다. 핵심 자금조달창구인 자본시장마저 장기불황과 증시침체로 증자 혹은 회사채 발행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은행들은 과잉유동성으로 대출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음에도 벤처기업의 융자호소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벤처타령을 늘어놓곤 했으나 모두 공염불이었던 것이다.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올초 증권거래법과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금년 7월 이후 거래분부터 개인간 주식 장외거래내역을 세무당국에 제출할 것을 의무화했다. 주식을 장외에서 거래하면 상장, 비상장 구분 없이 거래대금의 0.5%를 거래세로, 매매차익의 10%를 양도소득세로 자진 납부해야 하는데 그동안에는 상당수 투자자들이 법을 준수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새정부가 지난 2일부로 일정을 앞당김으로써 신분 노출을 꺼린 큰손들이 지난달부터 한꺼번에 장외시장 거래를 중단했다. 상당수 개미투자자들의 추후동참은 불문가지여서 벤처캐피탈들은 망연자실이다. 기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함은 물론 향후 시드머니의 조달루트마저 봉쇄될 우려가 큰 것이다. 지하경제 양성화가 벤처환경을 더욱 척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천재 한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리스크는 더욱 확대된 반면에 대박 기회는 현격히 축소되어 오히려 혈세에 기생하는 좀비벤처만 키우지 않을까 걱정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4-09 이한구

창조 경제 DNA를 깨워라

'창조'라는 단어가 가장 실감나는 사례는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일 것이다. 한 명의 천재가 내놓은 혁신제품이 기존 시장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내비게이션,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등의 업종은 엄청나게 위축된 바 있다. 이중 mp3 플레이어 산업은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라고 불릴 만큼 강했던 업종인데 그 업체들이 모두 업종 전환을 해야 할 정도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이처럼 창조적인 작품 하나로 인해 모든 '게임의 법칙'이 바뀌는 세상이 되었다. 이를 창조경제시대라고 칭할 수 있으며, 창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국가경쟁력 측면에서 너무도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경제는 아직까지 어떻게 창조 능력을 키울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창조'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창조 유전자를 단련하는 작업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한국경제가 창조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면 이미 관료화 정도가 높은 대기업보다는 작지만 역동적인 벤처형 기업에 기댈 수밖에 없다. 즉, 우리도 이제 바야흐로 '작은 기업 혁신론'이 통하는 상황에 접어든 것이다. 서구(西歐)에서 시작된 '작은 기업 혁신론'은 작은 기업일수록 혁신에 적극적이지만 대기업들은 기존 성공방법을 지나치게 믿어서 혁신 역량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슨(Christensen) 교수는 벤처기업의 파괴적 혁신 효과를 2000년대 초반부터 주장한 바 있다.당시 한국경제는 대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소기업 중심의 창조경제를 구상할 여건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체(in-house) 연구소를 구축하여 창조 능력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의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제는 기술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도전적인 기업에서 창조 DNA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들어선 것이다.돌이켜 보면, 한국경제사에서 창조 DNA가 가장 잘 표출되었던 때는 벤처정신이 살아있었을 때였다. 여기서 잠시 벤처붐 시절인 1999년을 돌아보자. 당시 한국사회는 많은 신생 벤처기업들에서 젊은 청년들이 넥타이 없이 밤늦도록 일하는 소식에 열광했었다. 당시 대기업에 실망했던 대중들은 이런 도전정신에 '벤처정신'라는 이름을 주었다. 야전 침대에서 자면서도 흥겨워서 일에 미치며 열정과 능력으로 도전하는 정신, 당당하게 부(富)를 추구하는 자신감, 자신의 손으로 성공하겠다는 도전의식, 이런 속성들이 신선한 매력이었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창조 DNA의 원형(原型)이 바로 벤처정신임을 강조하고 싶다.창조 DNA를 하루빨리 단련시키고자 한다면, 한국경제는 한때나마 열광했던 벤처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방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1997년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장해온 한국벤처사를 볼 때, 진정한 창조 유전자를 갖춘 벤처들은 이미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수준으로 성장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연매출 일천억원을 넘는 벤처기업은 300개를 훌쩍 넘었으며, 심지어 연매출 일조원 이상이 되는 벤처들도 등장했다. 이는 벤처정신이야말로 지난 1960~70년대의 산업화 1세대 기업가들에게서 발견되던 불굴의 도전정신을 계승하는 정통 유전자임을 다시 확인시킨다.창조 DNA는 사실상 기업가정신과 통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업가정신은 대기업이 관료화하면서 과거보다 오히려 더 취약해졌다. 그런데 이제 기업가정신도 다른 속성을 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창조경쟁이 심해지면서 1960~70년대와 같이 창업자 개인의 기업가정신에 의존하던 시대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전 구성원이 기업가정신을 공유하는 기업이 창조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교훈 그대로, 최고 지휘자에서부터 최말단 병사까지 모두 동일한 욕망을 갖는 '상하동욕(上下同欲)'의 조직이 승리한다는 교훈이 창조 경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2013-04-02 손동원

새로운 여행 문화를 위하여

여행은 현대인이 가장 선호하는 여가활동이다. 이 현상은 소득 계층이나 성별, 연령과 무관한 분포를 보이고 있어 일반적 취향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인천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지표조사에서 30.7%가 주말의 여가활동으로 관광을 꼽았다. 평일의 여가 활동 중 1순위도 관광이었다. 물론 여행과 관광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은 시간과 비용의 제약 때문에 실현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시민들의 주말 여가는 '낮잠'(19%)이나 'TV시청'(15%)과 같은 소극적 여가활동으로 대체되고 있다. 여가실태는 다른 도시나 전국조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이러한 여가 수요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문화정책의 과제이겠다. 농촌 마을과 협력하여 저비용의 가족단위 체험형 여행프로그램, 환경운동단체들이 시도하고 있는 이동거리와 비용을 줄인 친환경 여행 프로그램, 그리고 여행지의 역사, 문학, 예술 테마를 여행과 결합시킨 역사·예술기행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대안적 여행 프로그램의 개발보다 여행과 관광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터 되돌아봐야겠다.'질주하는' 우리의 여행 문화! 여행상품의 숨가쁜 일정표는 물론 길을 나서면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욕심'이다. 여행지에서 다음 경유지를 향해 출발을 독촉하는 가이드, 다음 경유지를 향해 바삐 발길을 돌리는 한국 관광객들의 여행문화가 외국인들에게 이색적 구경거리이다. 사실 정상 정복에 급급하면 등산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어야 할 여행도 성과주의의 강박증이 역력하다. 모처럼의 여행에서 더 많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경유지를 훑고 지나간다면 오히려 한곳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길에서 보는 풍경과 풍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떠난 나그네 자신이다. 찾아야 할 것은 바쁜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이며 회복되어야 할 것은 노동으로 쇠약해진 자신의 영혼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지를 굳이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가까운 공원과 산, 도시 안의 마을도 여유롭게 걸으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되도록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고, 또 먼 곳을 다녀온 사람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비용과 시간이다. 유럽이나 남미를 해마다 여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곳저곳을 일과 무관하게 시간을 내어 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화려한 외국의 관광지보다는 국내를, 자신의 삶터를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세계의 도시들을 섭렵하고도 정작 자기 나라와 도시, 이웃의 삶에는 청맹과니인 '내부실향민'이 될 수도 있다.촬영 강박증에서도 벗어나야 할 듯하다. 여행지에서 기억과 느낌을 디지털 사진이 대신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애써 다녀온 여행에서 '남는 것이 사진 뿐'이라면 너무 쓸쓸하지 않는가? 취재나 조사목적이 아니라면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맨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여행지를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이 시작된다'는 역설은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가 현대 소설의 내적 형식을 진정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려는 문제적 인물의 내면으로의 여행 과정으로 비유한 데서 사용한 표현이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입증되지만, 주인공이 추구하던 조화로운 삶의 가치는 소설이 대단원을 내린 순간에 비로소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부상(浮上)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길과 여행의 아이러니는 여행 자체를 설명하는 데도 유효할 듯하다./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2013-03-27 김창수

국방장관에 비육군 출신 임명?

이미 육사 출신 3명이나 주요 보직에 내정'김병관 불가론' 속 해군·공군 박탈감 고려를박근혜 정부, 군심과 민심 동시에 달랠 '카드'박근혜 정부의 내각 인선이 마무리되는가 싶더니만 군데 군데서 파열음이 들린다.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의 두 아들 병역면제 및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인한 자진 사퇴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도 미래부 기능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국 파행을 이유로 전격적으로 내정자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이번에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후보자가 '주식 백지신탁제도'란 복병을 만나 또 사퇴했다. 황철주 후보자의 개인적 실수도 있지만 청와대 인사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인선된 3명의 공직후보자가 청문회도 열기 전에 낙마한 것이다.게다가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김병관 국방장관에 대해서는 아직 임명조차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조만간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김병관 국방장관 내정자에게 임명장을 줄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이들의 임명을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하다. 특히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김병관 불가론'이 워낙 강해 정부조직법의 여야 합의가 이뤄진 마당에 국방장관만이라도 대통령이 양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새로운 국방장관은 비육군 출신에서 고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여론이 일고 있다.이 같은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 권력 핵심부에 이미 육사 출신이 중용됐기 때문이다. 육사 27기인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노무현 정부 국방장관, 이명박 정부 여당 비례대표 의원을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 또 중용됐다. 육사 28기인 박흥렬 전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 경호실장에 발탁됐다. 강창희 국회의장과 육사 동기로 25기인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은 국정원장에 내정됐다. 육사 출신이 국회와 청와대, 정보기관, 군 핵심부에 포진한 셈이다. 박 대통령의 육사 출신에 대한 신뢰가 아무리 특별하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새 정부 주요 직책에 군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것을 두고 군에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육군에 국한한다는 얘기다. 해군과 공군 내부에서는 섭섭하지 않을 리 만무다. 육해공군의 합동성을 강화해야 하는 우리 국군의 중요한 시점에서 육군 일색이자, 더욱이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만 새 정부 안보와 정보 주요 라인에 배치한 것은 해군과 공군에 있어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국방장관만큼은 오랜만에 비육군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군별 나눠먹기는 물론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육해공군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군별(軍別) 갈등과 사기(士氣)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동안 해군과 공군에서 국방장관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초대 이범석~제43대 김관진 장관에 이르는 동안 5~6차례에 불과했다. 특히 해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지낸 경우는 1953년 손원일 제독과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윤광웅 장관 등 단 두 차례이고, 공군은 김정렬 주영복 이양호 장관 등 세 차례이다. 해병대 출신은 단 한 차례 1963년부터 5년간 김성은 장관이 지낸 바 있다. 민간인 출신 7명을 제외하고는 28명의 육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지냈다. 군 출신별로 따지면 육군이 80%에 이른다.현대전은 지상군도 중요하지만 해군력과 공군력 그리고 특수부대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경우 점차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댜오위다오 분쟁과 일본의 허무맹랑한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을 보면서 해군력 증강에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연일 계속되는 위협에도 국방장관 임명을 놓고 대통령이 계속 고심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비육군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하는 카드를 쓴다면 박근혜 정부가 군심과 민심을 동시에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이준구 객원논설위원·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

2013-03-20 이준구

박근혜의 미소가 보고 싶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는 숙명적인 배경이 있다.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의 영향이다. 어느 자식이 부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식은 부모의 얼굴이자 영혼이다. 부모의 유전자로 구성된 육체와 부모의 양육으로 조련된 인격을 바탕으로 세상에 도전하고 응전하며 그늘을 키워가는 나무와 같다.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 통용되는 경험칙이다. 박 대통령은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천부적 정치인이다. 짐작건대 그녀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정치본색인 그녀의 유전자 형질상 다른 일을 하기보다는 평생 칩거를 택했을 것임을 감히 단언할 수 있다.박 대통령이 정치권에 처음 등장했을 때 대중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모습을 동시에 목격했다. 박정희가 누군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안팎의 정적들과의 대립을 불사하고 철혈의 리더십으로 시대와 맞섰던 인물이다. 산업화의 업적이 창대해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원칙을 강조하고 약속을 앞세우며 원칙없는 타협을 배격할 때마다 대중은 박정희의 유전자를 확인했다. 반면 육영수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마할 정도로 온화한 미소의 주인공이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낮은 곳으로 내려가 따뜻한 미소만으로 온기를 불어넣을 줄 알았던 퍼스트레이디였다. 박 대통령이 수많은 선거 현장에서 환한 미소를 지을 때면 유권자들은 그 미소에서 육영수를 떠올렸다.물론 박 대통령은 오랜 정치 경험으로 자신만의 리더십을 키워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전혀 다른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대통령이다. 국정 현안이 그 시대와 다르고 국력과 국격이 그 시절과는 천양지차이다.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선택한 것은 동시대인 박근혜의 리더십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박정희와 육영수를 대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부모없는 자식이 없다. 대통령 박근혜의 정치적 자산이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했을 때부터 축적된 것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그래서 아쉽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에서 유독 아버지 박정희의 모습이 뚜렷한 점 말이다. 정치 입문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광이 짙었던 탓일까. 박 대통령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엄격했다. 남성들의 이전투구판에서 여성성에 안주할 수 없었던 한국형 정치 현실도 그녀에게 부친의 카리스마를 강요했을지 모른다. 모든 남성이 어려워하는 박 대통령의 엄격한 이미지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범접할 수 없는 권위에 짓눌려 직언이 불가하다는 측근들의 하소연에는 자포자기의 심경이 묻어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몸에 밴 카리스마에 쩔쩔매는 측근보다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대장부다운 측근의 부재를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이쯤에서 박 대통령이 어머니의 미소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육영수의 미소에 내포된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을 회복했으면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걸출한 지도자의 권위만으로 운영할 수 없는 나라이다. 전 계층이 산업화 혹은 민주화에 매진했던 시절을 극복한 나라이다. 정치적 향도들의 시대는 저물었다. 계층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욕구가 엇갈리는 다양성이 이 시대의 특징이고 이에 부응하는 정치적 덕목은 포용과 화합과 조정이다. 대통령의 권위만으로는 사회 통합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미소가 융합의 촉매가 될 때 화학적 통합이 가능하다. '정적(政敵)들과의 오찬'에서 파안대소하는 오바마는 미국 정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박 대통령의 눈에는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포용이 있다. 우리를 위협하는 북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서늘한 눈매로 맞서라. 그들은 오금이 저릴 것이다. 그리고 고단한 오늘을 사는 국민들과는 어머니의 선한 미소로 만나라. 국민들은 위안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서늘한 눈매와 어머니의 선한 미소 사이에 박 대통령만의 리더십이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윤인수 서울본부장

2013-03-13 윤인수

만약에…

'만약에 이랬다면'이라는 가정법은 역사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물음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디데이 하루 전날인 1944년 6월5일,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폭풍우가 갑자기 멈추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1973년 10월6일 욤 키푸르(대 속죄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침공할 것을 알면서도 선제공격하지 않고 침공을 당했던 골다 메이어 등 이스라엘 수뇌부들이 만약 두나라를 선제공격 했다면? 그래서 전 세계로부터 침략국이라는 비난을 받고 결국 미국으로부터 군수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존재했을까?하긴 멀리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야권이 안철수로 단일화가 이뤄져 안철수가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 정치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터무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약 민주당이 이번 박근혜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을 화끈하게 받아들여 그래서 큰 일 없이 무난하게 새 정부가 출범됐다면 눈치 빠른 안철수 전 교수가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뭐 그런 식이다. 아니면 말고 식. 그러나 한번 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끔찍한 가정법 말이다.언론계 종사자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짧다는 의학계의 정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갖는다. 지난해 대선이 끝난 후 어찌됐건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큰 정치적 이슈는 없어 좀 무료한 시간을 보낼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기회에 담배도 끊고, 어디 헬스클럽에 등록해 새록새록 불러오는 저 지방덩어리를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나라다. 남이 편한 꼴을 못보는 독특한 민족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왠지 한번쯤 시비를 걸고 싶어하는 게 우리의 빛나는 민족성이다. 정치부 기자들의 편한 꼴을 그들이 봐줄리 없다.담배를 피게 만들고 술을 먹게 만든다. 대선 패배의 책임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그 입을 다물고 당 결속에 매진해야 할 민주당이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정부조직개편안에 발목을 잡으면서 정국이 대혼란 속에 빠졌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장관 후보자는 대한민국 정치판의 수준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장관직을 포기하고 출국해 버렸다. 취임한 지 8일 밖에 안 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은 대국민 호소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헌정 초유의 사태'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 끝을 파르르 떨었다.만약 민주당이 한번 봐주었다면. 눈 질끈 감고 화끈하게 밀어주었다면. 그런데 민주당은 그러고 싶지 않았나보다. 한술 더 떠 청문회에 나오는 장관 후보자에게 약을 올리듯 판에 박힌 5·16에 대한 반복되는 질문, 거기에 곤혹스러워 하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며 비웃는 표정, 요즘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화법보다 낮은 수준의 말들을 늘어놓는 국회의원들의 짜증나는 어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만약 국회의원에게도 청문회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법을 만들어 거기를 통과해야만 금배지를 달아준다면?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단 한번이라도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은 평생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든다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거다.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에 대한 혐오. 그런데 정작 국회의원들은 그것을 모른다. 만약 안다면? 국민들이 국회의원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부끄러워 할까.지난 대선기간 종편채널 시사프로에 나왔던 진보 정치평론가들이 선거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시사프로에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의 절대적 우세를 장담했던 이들이다. 태생적으로 '촉'이 발달한 이들이 다시 슬금슬금 종편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 보궐선거의 판이 생각보다 무척 커졌다는 얘기다. 이번 결과에 따라 정치판은 합종연횡이 이뤄질 만큼 메가톤급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안철수 전 교수의 출마 선언으로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만약 안철수 전 교수가 당선된다면? 그래서 한심한 정치판을 갈아 엎자고, 당장 국회의원 수를 반으로 줄이자고 '국민'에게 호소한다면? 그래서 민주당이 해체된다면?/이영재 논설위원

2013-03-06 이영재

소탐대실의 부메랑효과

원시시대 특유의 문화 중에 토템신앙이란 것이 있다. 씨족 혹은 부족별로 각각 고유의 수호신들을 섬겼는데 주요 숭배대상은 호랑이나 곰, 사슴, 물고기 혹은 밀이나 보리, 귀리 등과 같은 동식물로서 원시인들의 먹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농사법을 모르던 시절 한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자원이 고갈되어 공동체 전체가 멸종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식량인 동식물 개체수가 줄어들면 다시 풍성해질 때까지 한동안 남획을 금지하고 보호에 만전을 기했는데 이런 관습이 원시사회의 발전은 물론 토템인 동식물이 조상신 혹은 마을지킴이 등으로 승화했던 것이다.바야흐로 봄철로 접어들고 있으나 불사춘(不似春)이다. 각종 생필품 가격인상 도미노는 설상가상이어서 스태그플레이션까지 염려되는 지경이다. 금년도 경기전망도 신통치 못하다. 내수가 갈수록 축소되는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내수비중은 2001년 71.6%에서 2005년에는 60.7%로, 2011년에는 47.9%로 주저앉아 G20중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가계와 기업간의 지속적인 소득격차 확대가 결정적 원인이다. 2000년 이후 기업소득의 연평균 실질증가율은 무려 16.4%에 달한 반면에 가계소득 증가율은 2.4%에 불과한 것이다. 가계기업간 소득격차가 OECD회원국들 중 헝가리에 이어 2번째로 높다. 세계적으로 매우 유례가 드문 현상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노동시장 유연화에다 기업들의 수익중시경영의 소산이다. 글로벌경영은 새로운 도전이어서 현금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등 안전판을 조기에 확보해야 했다. 오너자본주의에 순응해야하는 것은 또 다른 옵션이었다. 시간도 경제적 약자편이 아니었다. 고임금의 정규직이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빠르게 대체되었으며 대기업들의 무차별적인 대공세에 자영업자들마저 한계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빈곤율은 OECD 평균보다 1.3배나 높으며 빈곤탈출률의 대세하락은 점입가경이다.가계부채 1천조원 시대 도래는 불가항력이었다. 마른 수건을 짜듯 절약을 해도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커지기만 했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금리의 장기하향추세에도 이자총액은 오히려 증가해 민간소비를 더 압박한다는 점이다. 가계부채 원리금부담률(DSR)은 OECD 최고수준이다. 작금 내수대기업들의 영업이익률 둔화도 유의해야할 대목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후유증 탓이기도 하나 서민들의 지갑두께가 점차 얇아진 것이 더 큰 요인이다. 소탐대실의 부메랑효과가 우려된다.총수요진작이 현안이어서 '나 홀로'호황을 누려온 수출이 주목된다. 그러나 세계경기 침체로 인한 실적부진으로 성장기여도가 곤두박질하고 있다. 설혹 수출이 획기적으로 제고된다 해도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해외생산 비중을 늘리는 탓에 실익은 별로이다. 설비투자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어 난망이다. 시설투자 증가율이 1990년대의 7.6%에서 2000년대에는 5.7%로 낮아진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파동 이후에는 크게 낮아져 2008~2012년간에는 3.8%에 불과하다.국내외적인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기업들의 엄청난 내부유보금이 국내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공공지출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같은 기간 정부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는 효과가 극히 제한적일 뿐 아니라 단발적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버핏세' 도입 등 증세론도 거론되고 있으나 조세저항은 언감생심이고 물가를 자극할 수 있어 조심스럽다.박근혜정부는 성장과 복지를 선택했다. 대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여전해 전체 거시지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재정건전성을 훼손하더라도 소외계층에 대한 공적 부조를 강화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고용 없는 성장에다 자갈논에 물 붓는 격이어서 성과는 미지수이다. 분배구조 개선 등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통한 서민경제 회생이 전제되지 않는 한 백년하청일 전망이니 말이다. 이명박 정부의 낙수효과론이 반면교사이다. 파이를 키우기 위해 당장의 허기를 감내했던 원시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13-02-26 이한구

소셜 벤처를 키우자

자신이 입다 버린 어릴 적 '블루 스웨터'에서 큰 기회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2001년 뉴욕의 재클린 노보그라츠는 자신이 입던 '블루 스웨터'를 아프리카의 한 소년이 입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본 후, 부유층과 빈곤층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사업에 투신한다.이것이 최초 비영리 벤처캐피털인 '어큐먼 펀드(Acumen Fund)'를 창업하는 배경이다. 실로 세상의 변화가 빠르다. 비즈니스의 근본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고, 또 사업 기회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오기도 한다. 빈곤문제라든가 혹은 취약계층문제와 같은 사회적 고민을 해결하는 비즈니스가 이제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할 변화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와 경제 양극화의 심화 등 일련의 문제들을 겪으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바꾸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미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소셜 벤처' 등과 같은 새로운 기업 모델들이 언급되는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이러한 새로운 기업모델 대안 중, '소셜 벤처'의 위상이 특이하다. 소셜 벤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상업화하는 신생기업을 말한다. 그것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해서 사회 시스템을 혁신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기업모델들과 차별된다.또한 벤처라는 단어를 품고 있으므로,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인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도 특징이다. '변화 창조자'를 육성하는 세계적인 기관인 아쇼카(Ashoka) 재단의 설립자인 빌 드레이든은 소셜 벤처기업가에 대해 특별한 정의를 내린다.그는 소셜 벤처기업가를 "사람들에게 고기를 잡아 주거나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기 잡는 산업을 혁명적으로 바꾸려고 돌파구를 여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여기서 고기 잡는 산업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발상에 주목해야 한다. 소셜 벤처는 기존 기업세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회 시스템의 변혁'과 '시장의 전환점이 될 만한 비즈니스 모델의 창조'라는 두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 존재이유인 것이다.일반 '사회적 기업'이 빈곤층을 위해 기부하거나 노동취약계층을 고용하는 공헌을 한다면, 소셜 벤처는 그들보다 진정한 사회변혁을 이루려는 혁신 기업가정신에서 한 발 앞서는 편이며, 또 운영의 묘에 따라 협동조합의 외형을 갖출 수도 있어서 유연성도 높은 편이다.소셜 벤처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공공성이 강하면서도 엄청난 부(富)의 원천을 발굴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그동안 우리는 비즈니스라고 하면 인구의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만 초점을 두었지만, 이제는 '나머지 90%'를 위한 사업이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줄 보물단지로 인식되고 있다.예를 들어, 인도(印度)와 방글라데시에서 전기조차 들어가지 않는 극빈층을 위해 시작된 태양광 발전이 큰 시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사례이다. 또한 세계적인 생활가전, 위생용품 업체 중에서 이미 빈곤층 시장에서 상당 수익을 얻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실정이다.이런 큰 가능성을 가진 소셜 벤처를 키울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소셜 벤처' 개념은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벤처 인프라를 활용하고 또 그 경험을 활용할 수 있어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소셜 벤처라는 개념부터 낯설어 하며, 그것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셜 벤처도 벤처기업이다.다만 사회적 고민을 사업적으로 풀어보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들도 신생기업으로서 실패위험도 크며, 초기 투자자금이 필요하기도 하다.벤처를 육성해 본 경험을 살리면서 혁신 아이디어가 살아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창업보육 프로그램의 장단점을 돌아보면서 소셜 벤처의 보육 방안도 찾아야 할 것이다.또 벤처열풍을 소셜 벤처로서 회복할 방책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소셜 벤처가 미래의 먹을거리를 창조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3-02-20 손동원

터키도 지금 '강남스타일'

지난달 하순께부터 지난 7일까지 보름간 터키 남부지역을 돌았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한 나라이기에 꼭 가보고 싶었다. 이스탄불에서부터 이즈미르 에페소 파묵칼레 안탈리아 콘야 갑파도기아 국경지대인 안타키아와 가지안텝까지 남부지방은 거의 둘러보았다.터키 민족은 본래 돌궐족으로 고구려시대 군사적 동맹관계를 통해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던 역사를 가졌기에 우리나라를 형제국으로 역사교과서에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중해성 기후가 겨울이 우기(雨期)라고는 하지만 푸근한 날씨가 계속됐다.서기 500년대 돌궐족(투르크=터키族)이 중앙아시아 몽골을 근거로 돌궐(突厥)제국을 세웠을 때는 지금의 우리의 얼굴 모양과 비슷한 몽골인의 얼굴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唐)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란, 아랍인들과 혼혈하여 서양사람을 더 닮은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6·25 당시에도 미국 영국에 이어 1만5천명의 군인을 파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우리 전쟁 고아들을 터키군이 많이 거두어 먹여살렸다고 한다. 터키 병사들은 부대에 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씻기고 먹이기도 했다.2002년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과 4강에서 만났던 나라. 아직은 개발도상국에 있기는 하지만 경제성장률 8~9%대의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건설 붐이 일어 어디서나 건물을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절버스로 에페소로 가던 중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르자 한 무리의 터키 초등학생들이 나타났다. 점퍼차림의 나를 보자마자 "강남스타일" "코레아"를 동시에 외쳤다. 나도 모르게 "강남 스타일"을 외치며 말춤을 추기 시작하자 같이 따라 했다. 어떤 어린이는 처음 춰보는 나보다 훨씬 동작이 유연했다.가지안텝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터키 아가씨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영어는 못한다며 터키 말로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며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다.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안다.다음에 오면 자기 집에 꼭 들르라며 아예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어떻게 한국인인줄 알았느냐고 통역이 물으니 내가 입고 있는 점퍼를 보고 알았단다. 여자는 파마 머리 모양만 봐도 금세 알아본다고 했다. 휴대전화에 녹음돼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려주기도 한다.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우리를 놓아주질 않은 병원에 근무한다는 23살의 아가씨는 잠깐동안의 만남도 아쉬운지 일일이 포옹을 해준다.지난해 12월에는 터키 TV 오디션 '터키 갓 탤런트'라는 프로그램에는 7세 어린이가 싸이 '강남스타일'로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어린이는 블랙 수트(정장)에 싸이 특유의 선글래스까지 착용, 완벽한 '리틀 싸이'로 변신했다.또 한국어로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말춤'까지 선보여 심사위원들과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이스탄불의 바자르 시장에서도 점포의 종업원들마다 '강남스타일'을 외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 사람인 것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음은 물론이다.한국 사람들과 터키 사람들이 친해져야 하는 진짜 이유는 '강남스타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 한국전에 참전했던 혈맹, 한일월드컵에서의 3~4위전 만남. 볼 것도, 과일을 비롯한 먹을 것도 많은 나라였지만 사람들이 너무 따스했다. 유럽의 재정위기에 굴하지 않고 8~9%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나라다.3월부터는 양국 국회에서 이미 통과된 한국과 터키의 FTA가 발효될 전망이다. 지금도 한국 자동차와 택시가 터키 거리를 누비고, 사람들의 손에는 한국산 휴대전화가 들려져 있다. 조상 때부터 친했던 터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개강하면 터키 유학생 하산을 꼭 찾아 커피라도 한 잔 나눠야겠다.

2013-02-12 이준구

힐링 코드를 돌아본다

'힐링' 코드가 어느 겨를에 우리의 일상에 넘쳐나고 있다. 예능프로와 출판에서 시작한 힐링문화에 음식과 외식산업, 건강과 여행산업의 마케팅도 의존하려는 기세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후보들이 직간접적으로 힐링 코드를 내세우거나 활용한 바 있다.힐링(healing)이란 본래 상처난 몸이나 마음을 치유한다는 말이니 의사나 종교인들의 전담 분야이다. 90년대 이후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강조한 웰빙(well-being) 코드가 트렌드였는데 몇 년 사이 힐링이 대세가 되었다. 지금의 힐링 열풍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자기계발 열풍과 결합되면서 강력한 문화코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달래고 삶의 의지를 북돋워 주는 일을 해주는 멘토들의 역할은 소중하다. 그런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따뜻해질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힐링이 문화코드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와 개인들의 삶이 그만큼 절박해졌다는 역설적 방증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턱대고 반기기만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을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인해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져든 결과로 분석한다.힐링해야 할 상처는 대부분 국민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발 경제위기와 세계 경제의 침체 속에서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성장의 결과는 대기업과 일부 계층이 독식하고 중산층은 저소득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빈부 격차가 급격하게 확대된 상황에서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경제 위기는 고스란히 서민 경제의 위기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실업률과 비정규직이 증가하면서 사회의 불안지수가 높아지고, 가정경제의 기반도 취약해지고 있다. 가계부채가 위험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생겨난 '하우스 푸어'들에게, 늘어만 가는 교육비가 힘겨운 서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당분간 꿈이다.대선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갈등과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세대간 갈등이다. 지난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2040세대와 5060세대가 총력전을 치르듯 투표한 결과였다. 51 대 48이란 근소한 차이로 승패는 결정되었지만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중산층의 감소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지역갈등도 해결될 조짐이 요원한 판국에 세대갈등까지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두 세대들이 직면하고 있는 좌절과 불안감도 따지고 보면 그 뿌리는 경제적 요인이다. 청년들은 학비와 일자리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베이비부머인 50대는 주택과 노후문제로 불안한 형국이다.예능프로에서의 힐링이나 이른바 양산해 내는 힐링상품들을 보면 상당수는 함량 미달이어서 기껏 '하루만의 위안'을 넘어서기 어렵다. 수술이 필요한데 자가치료를 권하거나, '험한 세상'과 무관하게 '착하게 살자'는 식의 해묵은 교훈들을 새로 포장한 상품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개인들이 앓고 있는 뿌리깊은 우울증이 치유될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개인을 좌절시킨 원인이나 구조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운명론과 순응주의로 대체해 버리는 위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진짜로 힐링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는 개인들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절박하게 만들고 국민들의 일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최대의 힐링은 민생이며 소통불능에 빠진 사회의 복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 그리고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주체는 국가와 정부, 정치인들이며 사회 지도층들일 것이다. 정치가들은 국민들의 절망감에 의존하여 표와 인기를 얻을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사회의 힐링'에 나서야 한다.

2013-02-06 김창수

박근혜의 해피엔딩을 희망한다

어머니 육영수를 적의 흉탄에 잃었다. 파리 유학을 접고 귀국해 어머니 대신 고운 한복 차림으로 국빈을 맞이하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떠맡은게 스물세살 무렵. 아버지 박정희도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측근인 김재규의 권총에 숨을 거두었다. 쿠데타로 집권해 한강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거인의 족적을 남긴 아버지의 서거 이후 그녀는 철저하게 대중의 시선 밖에서 은둔했다. 장장18년이다.은둔의 세월을 채운 건 배신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동생들의 크고 작은 말썽이 행여 부모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세월은 또 얼마나 길었는가. 인내하고 침묵하는 일 말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운명일까. 아니면 한 시대의 완성을 위한 역사의 소환이었을까. 박근혜는 얼굴엔 육영수의 미소를 머금고 흉중엔 박정희의 뚝심을 품고 정치에 입문했다.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선업이 그녀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그녀의 원칙과 소신은 대쪽 이회창을 압도했고, 그의 낙마 이후에는 야당으로 전락한 보수당의 잔다르크로 떠올랐다.천막선거로 탄핵역풍을 정면돌파했고 진두지휘한 모든 선거에서 승리해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가 보수의 희망으로 빛나던 시절 진보정권은 지리멸렬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과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대안없는 차기 대권후보로 우뚝 섰다.박근혜는 정치의 한 복판에서 아버지의 정적들을 만났다. 북한의 김정일과 만난게 2002년. 그는 어머니 육영수 시해의 사주자인 김일성의 아들 아닌가. 사적으로는 원수의 처지이지만 공적으로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악수를 나누어야 하는 남북의 2세 정치지도자들. 박근혜가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품었을 인간적 소회는 문학적 상상력에 맡겨야 한다.2004년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았다. 박정희의 시대적 맞수였던 그에게 아버지 시대의 박해를 사과했다. 다행히 김대중은 그녀에게 "지역갈등 해소의 적임자"라는 덕담으로 화답했다.박근혜가 밟아 온 삶의 궤적에 고인 스토리 정도면 토지에 버금가는 대하소설도 가능하다.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에 출중한 스토리텔러가 있었다면 선거가 조금 더 쉽지 않았을까. 18대 대통령당선인 박근혜는 오는 2월 25일 대통령으로서 청와대에 들어간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던 그 청와대다. 33년3개월만에 국민이 선출한 최고권력자로 복귀한다.박근혜가 난관에 부딪혔다. 김용준 총리지명자 때문이다. 장애를 극복한 청렴한 전 헌법재판소장의 맨 얼굴에 국민은 실망했다. 기대가 높았던 만큼 충격도 클 수밖에. 그나마 김 총리지명자는 자진사태 용단을 내렸다. 박근혜의 첫 시련이 고비를 넘었다. 하지만 이같은 시련은 계속 될 것이다. 원칙과 소신이 간단없이 시험대에 오를 테니 그렇다. 원칙과 소신만큼 포용과 통섭의 리더십을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박근혜의 해피엔딩을 희망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역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종결할 것인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가 가능할 것인지, 세대와 계층과 지역의 반목을 해소할 수 있을지,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어낼지. 이 모든 것이 박근혜 정부가 5년 뒤 어떤 마침표를 찍을지에 달려있다. 그녀가 해피엔딩으로 마침표를 찍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시대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한 개인이나 계급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 또는 계급의 독자적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알면 바로 그때부터 스스로를 숭배하기 시작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권력을 향한 무서운 경고다. 박근혜는 지금 자신이 살면서 마주했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봐야 한다. 시련을 극복할 용기와 지혜가 보일 것이다. 역사가 아버지에 이어 자신을 소환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13-01-30 윤인수

권력, 그 달콤한 유혹

요즘 전직 장차관들과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직 고위공무원과 일부 정치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외출할 때는 물론 사우나에 갈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꼭 들고 다닌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잠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밥 먹을 때도 식탁 위에 두고 먹는다.수신 확인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한다. 자칫 배터리가 방전되면 배고픈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외출시 예비 배터리 하나쯤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필수다. 이토록 휴대폰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입각 소식이 날아올까 봐서다. 곧 총리가 정해지면 각 부처 장관들도 임명될 것이다.혹시 자신이 낙점되었다는 연락이 왔는데 받지 못하면 거절하는 뜻으로 받아들일까 휴대폰에 목을 매고 기다리는 것이다. 권력의 맛이란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 고기도 먹어본 자만이 맛을 안다고, 권력도 누려 본 자만이 그 맛을 알 것이다.어려운 고시에 통과해 서기관이 되고 차관이 되고 장관도 하고 심지어 퇴직 후 국회의원이라는 덤까지 온갖 영화를 누리고도 은퇴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권력,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그토록 주구장창 권세를 누렸건만 불러준다면 당장 달려가고 싶은 게 권력의 속성이다.징비록이 주는 교훈=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이었다. 왕의 바로 옆에서 전란을 지켜본 최고 관직에 있던 사람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을 위해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던 비굴한 상황마저 정확하게 기록한 책이다.또한 그의 눈에 비친 전란의 비참함, 문관, 무관들의 성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에 상당부분 할애한 것도 놀랍다. 그러나 유성룡은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고향 하회로 돌아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징비록' 집필이었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당파간의 정쟁만 벌이지말고 또다시 닥칠지 모를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재상의 충언이자 고언이다. 뒤늦게 선조가 조정으로 복귀해 달라고 수차례 불렀지만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몫은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전란 중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다시 영의정에 오르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그에게 더 이상의 관직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전란중 수많은 백성들의 비참한 주검을 직접 보았던 그가 더 이상 백성들을 돌본다는 것 역시 위선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징비록'을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고위공무원들, 이번에 영광스럽게 입각할 공직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권력보다 국민 생각 헤아리는게 중요=탕평인사라는 미명아래 전 정권하에서 수차례 장관직을 지낸 사람들의 이름이 총리, 장관 하마평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나라의 비극이다. 더욱이 종편채널에 나와 얼굴을 알리고 어쩌구 저쩌구 떠들다 앵커가 "만일 전화 오면 가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어색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가증스러움을 넘어 소름마저 끼친다.나는 그들이 후세를 위해 재임시 겪었던 일들을 진솔하게 책으로 집필했다는 소식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말라고 가감없이 재직시 실정과 실책을 솔직히 밝히는 전직 정치인, 장차관들이 왜 우리 옆에 없는 것인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고위공직자들의 말 한마디가 먼 훗날 후세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는 것을 머리 좋은 그들이 모를리 없다.자리 하나 차지하는데 자칫 책 한권이 걸림돌이 되는 것을 머리 좋은 그들은 우려했을 것이다. 운 좋으면 권력을 다시 잡아 몇 년간 행복할 수 있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400여년 전에 시골의 한 초가에서 쓰여진 '징비록'이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위정자들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하는 충신보다 일신의 영달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국민의 무너지는 한숨이 들리고, 쏟아지는 눈물이 보일 리 없다. '징비록'의 글귀 한줄 한줄이 오늘따라 너무 슬프다.

2013-01-23 이영재

IMF의 두 얼굴

재작년 5월 스릴러 영화의 거장 커티스 핸슨 감독이 만든 '투빅 투페일(Too big to fail)'이란 제목의 영화가 출시된 적이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이 아슬아슬하게 수습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다큐멘터리 형식이었는데 리먼브라더스은행 파산 장면이 인상적이었다.영원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세계 4위의 공룡은행이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 영화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탐욕과 이를 부채질한 미국정부와의 야합이 빚은 범죄로 규정했다.한국민들에겐 더 깊고 큰 상처가 있다. 1997년 1월 23일 한보그룹 부도로 표면화된 위기가 갈수록 확대되자 다급했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담보로 경제주권을 넘겼다.IMF는 재정지출 축소와 증세, 은행 폐쇄와 금융긴축, 공기업 헐값 매각과 노동시장 유연화 등 규제완화를 요구했다. 30대 재벌의 절반이 좌초하는 등 2만2천여 기업들이 무더기로 부도를 맞았는데 그중 7천여 기업은 흑자도산했다.무려 250만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대마불사신화에 도취된 수많은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빨아들여 몸집을 키운 것이 화근이었다. 작금의 양극화와 평생직장 종식, 경제불안 심화, 캔두(can-do)정신 실종 등은 16년 전 악몽의 유산(遺産)이다.이 무렵 인도네시아는 IMF로부터 100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벨트타이트 프로그램을 강요받은 결과 1998년 한 해 동안에만 경제규모가 13%나 위축되었다. 태국도 수술후유증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시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IMF의 초긴축처방이 그릇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막무가내였다. 저금리에 근거한 빚잔치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 과감하게 척결했던 것이다. 국제금융자본의 진입장벽까지 일거에 허물어버렸다. 채무국들에게 소방수 IMF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저승사자였던 것이다.그런데 근래 들어 IMF에 이상기운이 감지된다. 지난해 10월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총재가 뜬금없이 1990년대 말의 아시아외환위기 대처가 잘못되었다며 처음으로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후임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한술 더 떠 독일의 시장근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그리스 등에 강요하고 있는 긴축을 완화할 것을 촉구했다. IMF의 입장변화는 이론적 측면에서도 감지된다.지난 3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AEA) 연례총회에서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유럽의 쥐어짜기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논증(論證)한 것이다. 재정적자 1유로를 줄이는데 따른 생산감소분이 1유로보다 더 크다는 것이 요지이다. IMF가 포르투갈을 비롯한 인근 국가들의 재정적자 목표를 완화한 것이 시사하는 바 크다.블랑샤르는 미국의 재정절벽 해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로 훈수했다. 미국도 유럽 국가들처럼 긴축은 불가피하나 추진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일 미국 의회는 개인소득 연 40만 달러 이상 계층에 한해 소득세율을 인상하고 정부지출 자동삭감 시한을 다음 달까지 연장하는 내용에 동의했다.미국은 재정적자 규모가 물경 1조 달러로 세계최대임에도 초저금리의 빚의 향연을 묵인한 것이다. 살인적인 고금리로 국부(國富)를 거덜 냈던 아시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미국과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터여서 함부로 허리띠 조르기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시장신뢰에 치명적인 대마불사신화가 금융의 본고장에서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오죽했으면 헤지펀드의 귀재 조지 소로스가 "금융위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겐 금리를 인상하도록 하고 미국과 유럽에선 금리는 낮춘 것은 도덕적 해이"라며 날을 세우겠는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과거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던 금융약소국들만 억울하게 생겼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인 IMF의 두 얼굴에 실망이 크다.

2013-01-16 이한구

중소기업 시대 명분은 충분하다

박근혜 당선인은 역대 대통령 중 중소기업에 가장 많은 애정을 쏟는 대통령이 될 듯 싶다. 줄곧 한국경제를 중소기업 위주로 운영할 것임을 표현하면서 '중소기업 대통령'을 자임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그런데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꾸려가려면 그것을 통해 한국경제의 현안이 해결된다는 명분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 후부터 중소기업 위주의 정책에 대해 다양한 쟁점과 도전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무엇보다 제한된 요소와 자원을 어떤 부분에 투입할 것인가에 대한 쟁점이 부각될 것이며, 또한 한국경제의 당면과제인 '일자리'와 '혁신' 문제를 중소기업이 과연 해결하는지에 대한 도전이 등장할 것이다. 이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명분을 갖고 있어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가장 중요한 명분은 '중소 제조업'이라는 테마이다. 이는 케케묵은 전통적인 주제로 보이지만, 실상은 한국경제의 현안인 일자리와 혁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세계경제는 이미 중소 제조업 경쟁으로 진입했는데, 가장 적극적인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미국은 지난 시절 서비스업 중심의 전략을 반성하면서 제조업 르네상스의 깃발을 내세운 지 벌써 2~3년이 되었으며, 독일은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중소 제조업체들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위기를 뚫고 고속성장을 누리고 있다.이들이 중소 제조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집중하는 이유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특히 대기업 위주의 경제에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전환하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가졌던 큰 오해는 제조업은 비선진국 산업이자 사양산업인 것처럼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정확히 이해하면 그렇지 않다.혁신과 일자리 측면에서 제조업의 가치는 실제 놀랍다. 첫째, 제조업이 있는 곳에 연구개발(R&D)이 따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제조업이 인근에 있을 때 과학자들이 자신의 발명을 직접 검증할 수 있었고 또 그 발명을 상업화할 수 있었다.생산현장이 멀다면 연구개발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혁신이 줄어든다는 발견이 쌓이고 있다. 독일 기계 산업의 높은 경쟁력에 대해 생산기술과 연구개발을 독일 내에서 공유한 덕분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미국이 제조업을 다시 자국 땅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을 펼치는 이유도 연구개발과 혁신을 강화하려는 방편인 것이다.둘째, 일자리 창출 능력에서 제조업만큼 우수한 산업도 없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조업은 서비스업에 비해 5배나 더 큰 일자리 창출효과를 낸다고 한다. 일자리 창출이 국정의 핵심 어젠다가 된 우리 입장에서 제조업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이슈임이 분명하다.미국 정부는 지난 2~3년 동안 제조업 부흥에 노력한 결과, 제조업에서 2010년에서 2011년 동안 약 32만8천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는데 이는 2.7%나 늘린 유례없는 실적이다. 또한 제조업은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비스업이 일자리 창출 영향력에서도 떨어지지만 주로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비교된다.셋째, 부가가치 측면에서도 제조업의 가치는 크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제조업 1달러 생산은 1.4달러의 가치를 낳지만, 서비스업 1달러 생산은 0.7달러의 가치를 낳는 데 그친다고 한다. 제조업은 자체 혁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연관 서비스업의 혁신을 유인하는 효과까지 있다고 알려진다.중소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지속하려면, 국민들에게 그것이 한국경제의 현안을 해결하는 정책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중소 제조업이 주는 일자리와 혁신 측면의 높은 가치는 그 믿음의 단초로서 충분하다.또한 중소 제조업은 주로 부품소재 분야이기 때문에, 이 분야가 발전한다면 기존 대기업의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득력이 따라온다. 갈림길에 선 선택의 시점에서, 중소기업의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혜안(慧眼)에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거친 파고를 뚫고 반드시 중소기업 성공시대를 활짝 열어주기 바란다.

2013-01-09 손동원

인천 600년과 계사년

지난 2012년은 유달리 사건도 많고 탈도 많은 임진년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로 피난했던 해인 1232년(고려고종 19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1592년(선조 25년)도 모두 임진년이었다니, 우리가 지난해 겪은 일들은 오히려 액땜 정도로 위안해야겠다.이제 2013년, 계사년(癸巳年)의 새해가 시작되었다. 올해로 지명을 얻은 지 600년인 지방이 여럿 있다. 인천시를 비롯하여 경기도의 고양시와 양주시, 용인시, 충북 제천시, 전남 함평군 등 전국의 지자체가 지명 600돌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600년 '묵은' 지명은 대부분 조선 태종 13년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군현체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명명된 것으로 당시 이웃 군현과 통폐합되거나 지위가 격하된 경우도 있으나 이후 600년 동안 같은 땅이름으로 '장기지속(Longue Duree!)'해온 것만도 장엄하지 않은가. 사람으로 따지면 회갑을 10번째 맞이하는 10주갑(周甲)에 해당하며, 30년을 한세대로 치면 무려 20세대가 바뀌어 갔으니 참으로 장구한 역사이다.이 가운데 인천의 변화는 극적이다. 1413년 당시 기초 단위였던 군(群)에서 도호부로, 직할시로, 광역시로 바뀌면서 지금은 한국 제3의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인천의 위상은 인주 이씨가 고려왕실과 7차례나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을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인천 지명이었던 경원(慶源)이니 인주(仁州)니 하는 지명은 고려 왕실의 왕비들이 태어난 고향이라는 말이며 '고려 왕실 경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대체로 도호부격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올해는 제물포 개항 1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883년 개항이 이뤄지면서 수도 한양의 방어 진지였던 제물포는 국제항구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제물포개항은 조선정부의 능동적 의지가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요구를 수용하여 이뤄졌다는 점이다.개항과 동시에 조선은 세계열강의 이권 쟁탈장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제물포 개항이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한국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에 해당하므로 그 과정을 찬찬히 되새겨 봐야할 것이다. 1883년 제물포 개항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역사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파급된 문화 변동의 결과는 오늘의 한국, 오늘의 한국인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계사년에 기억해야 할 문화적 '사건' 하나가 더 있다. 600년 전인 1413년(조선 태종 13년) 계사년에는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업인 태조실록 편찬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왕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기본 사료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및 국보 제151호로 지정돼 있다.조선왕조가 국력을 기울여 사료편찬사업을 지속했던 것은 단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600년 '묵은' 땅이름을 돌아보면서 인천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해야 할 일은 그동안 변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경계해야 할 일은 행사치레에 급급하여 애초의 동기나 목적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현상만 주목하게 되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게 된다.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 구조적 요인이 무엇인지도 찾아야 한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 의존하며 변화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도시의 미래도 결국 '바다'에 달려 있다는 점일 터이다. '미추홀'이라는 가장 오래된 인천의 지명이 '해상도시'를 의미하듯이.

2013-01-02 김창수

심판대에 오를 박 당선자의 인재등용

'고소영S라인', '회전문 인사'. 이명박 정권의 인사 스타일을 두고 한 말이다.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서울시청 출신들을 국가의 주요 보직에 대거 등용한 것을 두고 일컬은 일종의 비아냥이다.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았던 측면도 있겠지만 실제로 앞에 거론된 출신들이 많이 중용됐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되면 선거때 혼신의 힘을 쏟은 측근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자신이 부리기 좋고, 또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회전문 인사의 경우도 그렇다.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닐텐데 한 사람에게 돌려가며 자리를 주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자는 이를 인식한 듯 탕평인사와 통합을 원칙으로 내걸고 있다. 그래서 선대본부장을 지낸 '친박'의 좌장격인 김무성 전의원을 비롯한 많은 측근들이 공직에 대해 손사래를 치며 낙향한 것으로 전해졌다.멋진 사람들이다. 비서실장과 대변인들을 기용하면서도 박 당선자는 '친이'계를 중용했다. 이도 일단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윤창중 수석대변인의 임명을 놓고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야당은 물론 보수 언론들마저 윤 대변인의 임명에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처음부터 '옥에 티'라 할까?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윤 대변인의 임명에 대해 야당은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논평했다. 윤관석 의원은 윤창중 수석대변인에 대해 "48% 문 후보 지지자들에 대해 '국가전복세력', '반대한민국세력', '정치적 창녀' 등 온갖 막말을 대선 당시 뿐만 아니라 대선 이후에도 쏟아내고 있는 전형적인 국민분열 획책 인물"이라고 평가했다.보수언론들마저도 자극적인 표현으로 야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연재한 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날 임명 직후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지독한 고민 속에서 (수석대변인 수락을) 결심했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박근혜 당선자의 첫 번째 인사여서 거절하는 건 참으로 힘들었다"고 했다.이런 논란을 의식한 듯 윤창중 수석대변인은 25일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에서 취임인사를 겸한 첫 기자회견을 갖고 "제가 쓴 글과 방송에 (출연해 한 말에) 의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많은 분께 송구스러운 마음"이라고 말했다.또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국정철학인 국민대통합과 약속 대통령, 민생 대통령의 의지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임명과 관련해 박 당선자와 개인적인 인연이 전혀 없고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고 했다.박 당선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임명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해 우호적인 글을 많이 쓴 이백만씨를 홍보수석으로 임명한 것과, 윤창중 대변인이 야당측을 비판하고 박근혜 후보에 대해 우호적인 칼럼을 많이 연재한 때문에 임명된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아무튼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첫 인사에 대해 뒷맛이 남아있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인사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들을 주요 보직에 등용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섀도우 캐비닛'을 구성하는 즈음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링컨 루스벨트 레이건 오바마 등 많은 미국의 대통령들이 자신의 정적을 비서실장이나 장관 등 주요 보직에 임명함으로써 환영을 받았고,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보여줬다. 비록 정적이라 하더라도 실력과 덕을 갖추고 국민들로부터 신망받는 인물이라면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올해 총선과 대선 등 양대 선거에서 나타난 분열을 하나로 통합하는 길 중의 하나는 탕평인사다. 문재인 후보도 패배후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기대한다고 했듯이 통합, 포용, 상생이 국정운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청나라 관리 심문규가 충언했듯 하늘은 한 세대에 충분히 쓰고도 남을 인재를 내려준다. 주위에서만 찾지 말고 높은 데서 눈을 크게 뜨고 인재를 골라야 시빗거리가 줄어들 수 있다.

2012-12-26 이준구

분노와 저주의 폐허에서 장미는 필 것인가

오늘은 18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4천만명이 넘는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차기 대통령을 지목하는 날이다. 어제 일기예보대로라면 아침 날씨는 꽤 추우리라. 날씨뿐이랴.투표소를 향하는 유권자들의 마음도 추우리라 짐작해 본다. 어제까지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분노와 저주의 언어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분노와 저주를 대리해 투표하는 처지에 몰렸으니 마음이 시린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반의 진영에 포함돼 나머지 절반을 배격하는 선택, 괴롭지 않겠나.이번 대통령 선거는 모처럼 양자대결로 뜨거웠다. 보수진영은 열외없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우산 아래 집결했다. 진보진영은 우여곡절 끝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단일화의 월계관을 진상했다. 그래서였나. 안철수의 단일화 곡예와 이정희의 무개념 원맨쇼 말고는 무미건조했던 선거전이 막판에 달아올랐다.국민들은 신사와 숙녀의 페어플레이를 기대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지금과 같은 정치는 안 하겠다고 공언했다. 정치쇄신은 피할 수 없는 대선화두로 자리잡았다. 안철수를 중심으로 새정치 희구세력이 정치개혁을 시대정신으로까지 승화시켜 놓은 덕도 컸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안철수가 몇 번의 투정과 몽니 끝에 자진 하차한 뒤 양자대결이 현실화되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의 분노와 저주가 곧바로 부활했다. 박빙의 판세가 전개되자 새정치의 희망을 노래하던 그 입으로 저주와 독설을 쏟아내고, 국민통합을 약속하던 선한 미소는 적개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한때 박근혜와 문재인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안철수가 낙마하자 정당이 현실을 장악했고 새정치의 꿈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여야의 공방에 실체적 진실은 유효한가. 아니다.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을 보자. 민주당측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문재인 후보에 대한 악성댓글 작성반을 운영했다며 20대 국정원 여직원을 지목했다. 이후 과정은 모두 건너뛰자.여하튼 경찰이 그녀의 컴퓨터를 들고가 조사했고 결과를 발표했다. 댓글작성 흔적이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경찰의 조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재인 후보의 사과를 요구하는 새누리당의 역공과 경찰의 부실수사를 성토하는 민주당의 재반격이 어제까지 격렬하게 반복됐다. 국가정보기관과 공권력까지 무력화시키는 선거판의 생리를 체득해서일까.검찰은 국정원이 제출한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선거 전에는 열어보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련한 경찰과 영리한 검찰은 무책임한 우리 선거문화를 선연하게 비추는 수많은 거울 중 하나이다.유권자들은 역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에서도 미래를 노래하는 후보와 정당을 만나지 못했다. 정당과 후보들은 미래를 역설했지만 실현할 수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누가 인내해야 하는지 말한 적도 없다.청년실업과 정년연장을 동시에 실현하는 식의 공허한 미래를 열거했을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가 도래하면 특정한 계층과 세대는 개미지옥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행복하다는 막연한 미래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은 마타도어와 흑색선전이라는 마약을 삼켰다.상대를 집권불가 세력으로 세뇌시키는 흑색선전에 후보와 당이 앞장서고 지성인들은 진영의 앞잡이로 전락해 추임새를 넣었다. 이렇게 새정치가 화두였던 18대 대선은 한국적 구태로 초토화됐다. 대한민국 유권자 대다수가 누가 대통령이 돼도 괜찮겠다는 희망 대신 절대 당선되면 안 되는 누군가를 버리는 선택을 위해 오늘 기표소 장막 안에 설 것이다.그래도 기권은 안 된다. 스스로 선거에서 열외시키는 일이야말로 작금의 정치와 같이 무책임하다. 특히 부동층이 궐기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의 결과를 한 표로 표시해야 한다. 그래야 분노와 저주의 폐허에서 장미를 피울 수 있다. 장미는 단 한 모금의 물만으로도 꽃을 피운다. 내 한 표가 그 한 모금의 물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2012-12-19 윤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