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북녘 동포에게 보내는 밀가루는 평화의 시작

최근 탈북 여성들에 대한 특집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탈북여성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성매매 여성으로 상당수가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이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것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고 1994년 이후부터 발생한 대규모 홍수로 인하여 북한의 농토는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북한의 경제는 참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굶어서 뼈가 앙상한 어린 아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남쪽의 국민들 중에 북한 어린이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법륜 스님은 북한에 다녀와서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이 사실이라며 북한 주민들을 살리기 위하여 남쪽의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북한의 주민들이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실제 그 정도의 상황까지 갈 정도의 고통스런 세상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북한의 어린이와 노인들, 아니 북한 주민 전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의료기기와 약품이 없어서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분단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이 굶주리고 아파서 신음을 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북한에 쌀과 밀가루를 보내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도적 차원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간에 불신이 없어야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지 않으면 신뢰는 쌓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평화운동의 시작인 것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5·24조치는 해제되고 적극적으로 북한에 식량지원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최근 정부 역시 남북간 화해 분위기 조성에 나서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이야기가 솔솔 언론에 나오고 있는 것이 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남북간 평화정착 모색의 첫 번째 길이 바로 대북 식량지원이다. 인도적 식량지원만이 남북관계를 풀어내고 북한의 어린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최근 수원지역사회에서 북한의 동포들, 특히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나눔 단체가 결성되었다. '통일나눔'이 바로 그 단체이다. 우리의 것을 나누어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보수와 진보 인사들이 하나가 되어 하루에 백원씩 한달에 3천원을 모아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을 돕자고 모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통일나눔에서 12월 말까지 북한에 밀가루를 보내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2만원을 후원하면 밀가루 100㎏을 북한에 보내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이 추운 겨울에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루에 백원으로 북한의 동포를 구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작은 실천이지만 세상을 위한 거대한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한반도의 냉전은 서서히 종식될 것이다. 이는 남북간의 화해가 한반도 경제발전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지난 4년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러시아 가스와 천연자원이 북한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올 시기가 불과 몇 년 안 남았다. 이러한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북에 손을 내밀고 평화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해 탈북을 해서 몸을 파는 여성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통일나눔의 북한 동포 돕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 통일나눔 문의처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370-4번지. 전화 (031)242-6150농협 351-0381-5296-13 (예금주:통일나눔)

2011-12-13 김준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겨울은 잔혹의 계절이기도 하고 축복의 계절이기도 하다. 2011년 겨울은 내게는 축복의 계절인 것 같다. 엘리엇은 "한겨울의 봄은 독자적인 계절이다/ 해거름에 축축하지만 영원하고,/ 극지와 열대 사이 시간 속에 정지된 계절이다"라고 했다. 한겨울의 봄은 실제의 계절이어서 해질 무렵이면 축축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그 자체가 독자적인 계절이 되며, 마치 이 세상의 계절 같지 않은 영원한 계절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이 겨울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과거를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기에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확인하게 되고, 그 순간 시간은 '정지'되어 마치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거의 40년을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친구를 최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연애하듯 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하얀 얼굴에 선한 눈을 가진 그 친구는 어느 날 홀연히 외국으로 가버렸고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망각의 강 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예기치 않았던 해후의 충격은 필자로 하여금 기억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후 두어 차례 더 만나는 동안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서서히 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오히려 상대가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았다.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변화란 삶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변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과거를 환기시켜주는 아주 작은 실마리만 주어져도 우리는 곧바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고, 동시에 과거의 특정한 경험의 의미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즐겨 불렀다던 맷먼로의 워커웨이(Walk Away)나 낫킹콜의 투영(Too Young) 등 주로 노래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국에서 이 노래의 전주만 들어도 그리움에 가슴이 저려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커다란 눈에 유난히 섬세하고 다감했던 그 친구를 주로 사소한 몸짓이나 표정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각자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환기된 기억은 당시의 경험을 너무나 세밀하고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기억의 방은 마치 그 가운데 자신만의 고유한 날짜와 인상을 적어두고 있는 것 같다.나는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재동 모퉁이를 돌아 가회동 길로 접어들면 백송의 기품이 서린 학교가 나타난다. 다시 교문을 돌아 나와 안국동 길로 들어서면 '박리다매'를 외치던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타나고 그 길을 죽 따라가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입시학원이 떡 버티고 있다. 일순 아이스크림 가게는 베레모에 흰 깃을 세운 여학생들의 깔깔거림으로 하얗게 빛난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은 그만의 고유한 경험의 질과 감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때도 오늘처럼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기억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서로 환기시켜 주고 그것을 확인하면서 참으로 행복해했다. 잠시 우리는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느를 홍차에 찍어먹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듯이. 우리는 경험은 했으되 그 당시에는 그 경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경험은 회상을 통해서만 의미가 완성되기 때문일까? '네 개의 사중주'에서 엘리엇이 말하고자 한 바도 이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했으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의미에 접근함으로써 그 경험은/ 우리가 행복에 부여하는 어떤 의미 이상의/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다."바람 불어와 신산한 이 겨울, 기억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황량한 현재적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충격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2011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복잡한 마음으로 황망히 끝내는 올 한해도 훗날 또 다른 형태의 의미있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상될 수 있을까?

2011-12-06 김구슬

세대 갈등, 그 끝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10여년을 혼자 지내셨다. 산골 외진 마을을 들를라 치면 반가워 하기에 앞서 입버릇처럼 되뇌이시던 말씀이 있었다. '아가, 너는 늙지 마라. 늙으면 서러운 게 참, 많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 며느리와 불편함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완고한 편이셨다. 신식교육을 받은 며느리들을 항상 못 미더워 하셨다. 한 30년 터울로 세대를 느끼던, 그 시대에도 갈등은 있었다. 단지 담장을 넘지 않고 안에서 삭였다. 주말에 만난 유명 제약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지난 여름, 수도권 책임자들 회식 자리에서 '6월이 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당연히 6·25 전쟁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40대가 태반인 팀장들의 답은 '6·10 항쟁'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쉬운 대로 공감이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30대 후반 팀장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붉은 악마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 세대간 감성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광장의 축제는 하늘과 땅이다. 우리사회가 준비에 게을렀을 뿐, 세대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20~30대의 반항'이니, '40대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어찌 보면 붉은 악마 옷을 입고 광장으로 뛰쳐나왔을 때부터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네 골목에서 뛰놀던 그 당시 40·50대에게 광장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예쁘게만 보고, 기성의 가치를 거기에 이식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치부했던, 열린 공간의 젊은이들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목청을 높인 것이다. 동력을 잃은 기존 정치를 향해 자신들의 의지와 분노를 표로 분출한 것이다. 20~40대와 50·60대는 소통의 방식부터 극명하게 나뉜다. 50대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다. 구시대의 막내쯤 된다. 40대는 '최초의 디지털 세대'로 신세대의 맏형 격이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스마트 폰에도 익숙하다. 종이 신문보다는 21세기 광장인 소셜네트워킹 서비스(SNS)에 친숙하다. 여론의 흐름이나 정보도 인터넷으로 파악한다. 20·30대는 아예 인터넷 속에서 생활한다. 전문조사 기관에 따르면 50·60대는 한 주 동안 하루나 이틀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애초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예전 외할머니와 며느리 정도가 아니다.우리사회는 지금 모두 불안의 늪 속에 빠져 있다. 20대는 취업, 30대는 육아, 40대는 내 집, 50대는 노후, 60·70대는 건강이다. 20~40대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부잣집 아들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 사장이 되는데, 가난한 집 아들은 그 가난을 대물림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세상 보는 눈이 관대해진다. 능력과 분수에 따라 사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만 쳐다보지 말고 괜찮은 중소기업도 지천이니, 그 곳에 가서 일하라고 윽박지른다. 바탕이 이럴진대, 골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조병화 시인의 얘기처럼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에게 의자를 양보하면 쉽다. 그러나 평생을 맞대고 사는 부부의 갈등도 머리가 희끗 희끗해져서야 결판이 난다.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도 고부간에 힘의 균형이 깨질 때라야 가능하다. 공력의 기간을 쏟지 않으면 정면충돌의 불행이 불가피하다. 세대의 간극은 더하다. 이제 그 세대갈등이 집 담장을 넘어 사회 한복판으로 뛰쳐나왔다. 서울시장 보선이 전초전이 아닐까 싶다. 지난 세월 힘겹게 일궈온 사람들과, 앞으로 열심히 살아갈 사람들이 각기 피부로 느끼는 세상의 온도차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숱한 체험을 통해 안다. 부드러운 위로와 따뜻한 공감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꿰뚫어본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 터득한 경험칙이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50대 이상에게는 젊은 날의 소중한 교훈이지만, 신세대에게는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다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싶어하는 그들이다. 좀 더 세상을 아는 세대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세대 공존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2011-11-29 양승현

경기마을 사람들의 귀향

중국 지린성 류허현(柳河縣)에는 경기도의 마을 이름을 붙인 '경기툰(마을)'과 '가평툰'이 있다. 그곳에는 경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난 10월에 그곳에서 만난 서덕환 할아버지는 올해 84세로 수원 비행장 옆에 살다가 1940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지금까지 70년간 경기툰에서 살고 있는 분이다. 서 할아버지는 쩡쩡한 목소리로 젊었을 때 자신이 경기툰을 이끌어 왔다면서, 남자는 술을 잘 마셔야 한다며 대낮부터 술을 권하였다. 평택 출신의 최봉화 할아버지는 86세 나이인데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고향을 평택시 포승면 석정리 검은 돌 마을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1940년대 초 일제는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으며 땅과 집을 주겠다고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약 5만여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경기툰은 1941년 수원사람 25호와 평택사람 25호가 집단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로 서로 다른 두 지역에서 왔으나 한 마을에 정착하였기에 굳이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경기툰이라 마을 이름을 정했다. 가평툰은 1943년 가평 사람들이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이외에 광주·용인 등지의 사람들도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1945년 해방 후 다른 마을은 해체되었으나 경기툰과 가평툰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주 초기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경기툰 사람들은 강한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이 경기툰으로 이주해 오려면 마을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행정당국에 등록된 60호 중 한족 3~4호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족이다. 그런데 그 중 조선족이 살고 있는 집은 16호 정도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빈집이다. 남아있는 마을 사람도 노인과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며 청년과 아이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떠난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지린성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3성에는 한때 조선족이 200여만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50여만 명으로 줄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 와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들어 한국내 조선족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조선족 수는 2009년 38만명에 달하였으나 2011년에는 28만여 명으로 줄었다. 조선족을 외국인으로 취급해 방문취업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이 주된 이유이다. 이 통계에는 결혼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과 불법 체류자가 빠져 있기에 실제 한국 거주 조선족은 이보다 많을 것이다.한국에 돌아와서 사는 조선족이 외국인인지, 그리고 그들의 국내 입국을 제한하는 것이 타당한지 되묻게 된다. 조선족은 만주로 떠난 이주민 1세대들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현재 경기툰에 사는 이주민 1세대는 이제 거의 사망하고 경기툰의 조선족 공동체 역시 거의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대신 새로운 공동체가 한국에서 형성되고 있다. 경기툰을 떠난 이주민 2세대들은 가족의 결혼식을 한국에서 올리고 이주민 1세대인 부모의 칠순잔치도 한국에서 치른다. 많은 경기툰 사람들이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떠난 이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공동체를 이루며 삶의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이 정녕 외국인인가?그런 점에서 조선족을 다문화정책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재외동포정책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 미국과 일본 동포의 2, 3세들이 한국에 입국하는데 제한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조선족에게도 같은 정책이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여러 현실적 문제가 있겠지만 그 정도는 한국 사회가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도와 수원, 평택, 가평 등 여러 시·군도 경기툰과 가평툰 등 경기마을 출신 조선족을 고향으로 돌아온 손님으로 여기고 이들을 한자리에 초청해서 잔치를 하자. 그리고 조선족을 외국인이 아닌 재외동포로 맞이하여 이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자.

2011-11-22 강진갑

연천 자연·문화유산 세계복합유산으로

지난 11월 2일 연천군의 명예군민이 되었다. 연천의 상징이 된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아슐리안형석기 모양의 기념패에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되었음을 알리는 글귀가 선명하게 있었다. 평생을 수원에서만 살아온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 인연이 연천과 끈을 주어서인지 군수님께서 직접 필자가 명예군민임을 선포하시고 연천 공직자들에게 박수를 부탁하셨다. 참 기쁘기 그지없었다.필자는 약20년전부터 우리 역사의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기 시작했었다. 그 과정에서 찾은 곳이 연천이었고, 연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문화유산에 감동과 슬픔이 교차했었다. 연천역의 급수탑과 끊어진 경원선 대광리역에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보았고, 경순왕릉과 숭의전에서 힘없는 나라의 슬픔을, 미수 허목 선생의 묘소에서 조선후기 실학의 태동을 느꼈으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우리 민족의 문명이 세계 수준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자부심을 느꼈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의 중심이자 향후 통일코리아의 중심이 될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천 답사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천을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혹은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띠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런 고민속에서 새롭게 보였던 것이 바로 '적벽(赤壁)'이었다. 적벽은 흔히 지리적 표현에 의하면 추가령구조곡에서 발생한 강변의 암벽이다. 용암줄기가 한반도 중심부를 지나가며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에 한탄강과 임진강이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적벽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정도의 표현으로 적벽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적벽은 우리 자연유산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정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필자는 저토록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은 바로 세계복합유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 산하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유산인데, 이 유산에는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복합유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은 경기도에 있는 '수원화성'을 포함하여 9곳이 있고, 세계자연유산은 흔히 제주도로 통칭되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있다.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은 있는데 '세계복합유산'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복합유산이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유산이기에 우리나라에서 신청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연천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복합유산을 신청할 수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적벽과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그리고 임진강에 있는 고구려 성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의 환상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는 몇 년전부터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2012년 상반기에 유네스코 이사회에 등록서류를 신청하기로 하였다. 현재 전문가들이 보는 견해로는 등록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기도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경기도는 남한산성을 마무리하고 연천의 유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신청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실제 우리가 관심이 없었고, 우리 산하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라서 연천의 적벽의 가치를 몰라왔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듯이 우리는 경기산하의 자연이 이토록 세계적인 것을 몰라왔었다.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실제 전곡리 선사유적만으로도 세계유산 신청이 가능하지만 연천의 자연을 세계에 알리고 보전하기 위하여 복합유산 신청이 타당하다. 만약 연천이 세계복합유산의 도시가 된다면 분단의 상징도시였던 연천은 이제 평화의 도시, 문화의 도시, 자연의 도시로 거듭 태어나면서 경기 북부지역 발전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제 적벽과 선사유적지 그리고 고구려 성의 가치를 알기 시작하는 노력이 시작되었으니 전문가들의 고견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새로운 세계복합유산을 만들었으면 한다.

2011-11-15 김준혁

아이러니의 삶, 잡스

가을 어스름이 내릴 때면 양재시민의 숲으로 나간다. 어제는 석양을 배경으로 노란 은행잎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니 잠시 축복의 순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 길로 걸을까 생각하자니 불현듯 시 한편이 떠올랐다."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요./ 한 사람이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오래도록 서서/ 덤불 속으로 접어든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지요.// 그러다가 다른 길을 택했지요/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덜 다닌 듯했기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언뜻 보기에 낙엽 덮인 숲길을 걷다가 두 갈래 난 지점에 이르러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평범한 경험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선택되지 않은 것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적 배제 때문이다.필자는 스탠퍼드 대학 인근 팔로 알토에 산 적이 있다. 최근 잡스의 집이 지척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공연히 친한 이웃이나 되는 듯 더욱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그의 연설을 들으면서 필자는 그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독보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이 연설에서 잡스는 '아이러니'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잡스의 삶은 처음부터 아이러니의 삶이었다. 리드대학을 자퇴하고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어 우연히 서체강의를 듣게 되고, 강의를 들으면서 다양한 글씨들의 조합이 이루는 여백의 미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실제적인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이 경험은 10년이 흐른 후 첫 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창조적 빛을 발하게 된다.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애플의 역사는 또 어떤가. 20세가 되던 해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된 애플의 역사는 10년 후 잡스 자신이 해고를 당하는 극적 아이러니를 가져왔으나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계기로 활용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최악의 순간에도 결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로 요약되는 듯하다. 그러나 잡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죽음의식과 관계되는 것이다.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분명 옳을 것이다'라는 경구를 잡스는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이미 췌장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을 통해 그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치열한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이는 참으로 진실하고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극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삶이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잡스의 말처럼 때로 죽음은 삶에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믿음,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이다. 기대했던 일이 비틀어지거나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 인생의 끝에 도달해 되돌아볼 때, 삶의 작은 아이러니들은 인생의 커다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많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인생의 길이란 많은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 세 개의 길을 동시에 가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최악의 좌절을 경험하고도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사람이 그저 어리석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거칠고 험난한 길,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미련함, 그것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의 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잡스가 인용하고 있는 '지구백과'의 저자 스튜어트 브랜드의, '항상 배고파하라. 항상 미련하게 살아라'라는 말 뒤에 잡스 자신의 날카로운 직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2011-11-08 김구슬

L 형에게

얼마 전 중국 옌지를 방문하는 길에 백두산 중턱, 해발 1천600m 지점의 숙소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운이 좋아야 천지를 본다는 데, 옌지 국제공항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눈을 만났습니다. 첫 눈을 중국에서 맞은 셈이죠. 흩날리는 눈발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안내자가 "내일 아침이 되어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천지를 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자리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산책 겸 나섰더니, 그 사이 거센 바람에 눈발까지 굵어져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혹여 하고 밖을 내다보니 온통 눈 천지였습니다. 해발 2천750m 천지로 가는 등산로가 완전 폐쇄되었다는 전갈도 함께 왔습니다. '기왕에 왔으니, 그래도 가보자'는 심사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칼바람에 날리는 눈보라 속의 백두산은 처음 대하는 저에겐 경외 그 자체였습니다. 내내 깊은 침묵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고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한 티베트 승려들 틈에 끼어 1시간 남짓 걸어 장백폭포 부근까지 올랐습니다.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운 눈보라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좀 더 가까이 마주한 백두산은 장엄하다는 표현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작은 글 솜씨로는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어떤 성역이었습니다. 한없는 왜소함에 더없이 낮춰야만 했습니다. L형, 백두가 이럴진대,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는 어떨까요. 제가 히말라야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초반 수습기자 때입니다.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하나, 둘 모아 두었다가 한데 묶어 기사로 쓰곤 했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를 이 시절에 알았고, 그의 책 '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은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생을 잃고 그 뒤 혼자서 낭가파르바트에 오른 매스너는 '(히말라야에서는)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힘이다'고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느끼고 싶어 했던' 그는 산악인이 아니라 철학자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히말라야는 자비를 잊었는가'라는 기사입니다. 그 해에만 히말라야가 20여명이 넘는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죽음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L형, 저는 박영석 대장을 두 번 만났습니다. 첫 만남은 젊은이들과 함께 도봉산 입구에서입니다. 그는 그 때도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며 "히말라야에서 우리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어 흐뭇하다"고 했습니다. 소탈함 속에 깃든 경건함을 그에게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산을 찾게 된 것도, 히말라야 트레킹을 '꿈의 목록(버킷 리스트)'에 넣은 것도 그 때였습니다. 산에는 여럿이 함께 오르더라도, 스스로 걷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의 이치가 있습니다. 한없는 감탄이 펼쳐지고, 고독이 주는 즐거움이 동행합니다.L형,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 박영석 대장을 처음 만났던 도봉산 그 길을 혼자서 올랐습니다. 단풍도 끝 무렵이어서, 여기 저기 쓸쓸함이 배어났습니다. 어느덧 겹겹이 쌓인 낙엽의 푹신한 길을 걸으며 이 시대의 '진정한 산악인'을 떠올렸습니다. 모두 정치판의 블랙홀 현상에 눈이 팔려있지만, 우리는 도전과 탐험정신이 절실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너무 두려워합니다. 박영석 대장이 세운 히말라야 14좌, 3극점, 7대륙 최고봉 정복이라는 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도 숱한 실패와 도전의 결과 아니겠습니까? 우리사회도 패자부활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의 부재가 노쇠한 사회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이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기리는 합동 영결식이 3일 열린다는 소식입니다. 카트만두에서 '기적의 생환' 뉴스가 꼭 타전될 것만 같은데…. L형, 공자는 논어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자는 오래 산다고 했는데, 왜 히말라야는 48살인 그를 데려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땅이어서일까요. 박영석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2011-11-01 양승현

근대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전통시대 문화유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시대 문화유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 및 광역자치단체가 지정하여 관리하는 지정문화재가 1만1천여개인데 반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문화재는 476개에 불과하다. 물론 지정문화재에 천연기념물처럼 자연유산도 있고, 일부 근대문화유산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 조선시대 이전의 전통시대 문화유산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문화재 수가 적은 것은 문화재 전문가 중 일부의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이해 부족도 이유지만, 한국인들이 한국 근대사를 불행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기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주요한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19세기 후반 한국 근대사가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기에 이 시기 한국 역사는 명백히 실패한 역사이다. 그러나 19세기는 제국주의시대였다. 아시아 국가 중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터키, 태국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식민지를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식민지화가 한국만이 특별히 부족하거나 못나서 겪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기에 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역사 대응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래서 이를 탓할 수는 있으나, 마치 우리 국가의 대응만이 특별히 잘못되어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자조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19세기 후반 역사에 대한 평가를 치욕스러운 역사로만 평가해서인지 이 시기가 우리에 남겨준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되는 문화재는 극소수이다.20세기 전반기 식민지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필자는 2007년부터 2년간 독립기념관의 의뢰로 경기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및 6·25전쟁 사적지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경기도 화성시만 하더라도 3·1운동 사적지가 100여개 되나, 이미 상당수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1운동의 경우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마을 안의 특정한 집에서 3·1운동이 계획되었고, 또 다른 이웃이 3·1운동을 지도한 인물이 살던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표식이 되어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민주화와 산업화, 분단의 역사이다. 이 시기 역사 자원은 문화유산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하기에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5전쟁과 관련한 사적지 중 일부는 기념탑도 건립되어 있고 어느 정도 보존되고 있다. 나머지 분단, 산업, 민주화와 관련된 사적지는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 속에 파괴되고 있다. 필자는 1971년 도봉시민아파트에서 1박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 구조가 특이했다. 2층부터 4층까지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1층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 벽은 매우 두꺼웠고, 남쪽으로 대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입구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북쪽으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1층이 군사방어용 벙커라는 것이다. 이 아파트는 1969년 건립되었는데, 2003년 노후아파트 정비 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 다음 세대까지 보존되었더라면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을텐데 이렇게 사라졌다. 2007년 문산 역을 출발한 기차가 개성 역까지 달려갔다. 분단으로 중단된 기차 운행이 56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였으나, 경의선 철로를 복원하면서 DMZ 내의 분단 관련 문화유산이 거의 사라졌음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분단 시대가 남긴 군사 문화유산인 지뢰는 철로 복원 공사의 방해물로만 이해되어 폭파되었고, 100년 전 경의선 개통 당시 깔아놓은 옛 철로는 고철로 사라졌다. 이렇게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깨닫고 전면적인 조사 및 근대문화유산 등록 확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후세에 우리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2011-10-25 강진갑

正祖 탄신일에 월가 시위를 생각하다

어제(음력 9월 22일)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의 탄신일이었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수원 화성행궁과 함께 자리잡은 화령전에 가서 정조 어진에 참배했다. 백성을 위한 개혁군주 정조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이후부터 항상 탄신일에 참배를 했는데 이번 참배과정에서 느끼는 소회는 예전과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이 과연 정조가 생각하고 있던 백성의 나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그 이유는 최근에 전 세계에 빅 이슈가 된 미국 월스트리트가(街)의 시위 때문이었다.자본주의 대표 국가인 미국에서 그것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에서 벌어진 시위는 가히 허리케인의 전주곡이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월가 중심부를 장악하며 시위를 하고 있지만 이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아마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태풍의 핵을 드러내며 세계 경제사 및 문명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고 본다.이들은 처음엔 구조조정에 의한 강제 퇴직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분노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본질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본질이란 결국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책이었음을 월가에 모이는 국민들이 금방 알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흡사 자본가 혹은 중산층이었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고, 자본가들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결국 1% 자본가들을 위하여 99% 국민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났음에도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금융자본가들을 비롯 1% 자본가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시장만능주의가 그것이다. 시장은 스스로 성장하고 운영되니 정부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시장에 대한 정보의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금융자본은 과도한 이익을 얻고 싶은 욕심에 파생상품을 남발하다 결국 붕괴직전까지 갔다. 이런 위기에서 그들이 꺼낸 것은 바로 정부가 금융자본을 도와주어야만이 나라 경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신자유주의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결국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천문학적인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 금융자본을 지원했다. 그러나 살아난 금융자본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해 준 국민에게 고마움은커녕 거꾸로 그들을 착취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을 지속하였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하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부자감세가 실시되고 복지정책이 사라진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우리 역시 1%의 세력들이 99%의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반면 정조시대는 달랐다. 소수 특정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 독점권을 혁파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였고, 왕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지방 관아로 이관하여 더 많은 백성들이 국영 농장에서 일을 해서 경제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국왕의 이익을 백성들에게 돌리고 소수가 아닌 다수의 백성들을 위한 계획경제와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전근대 봉건사회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오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욱 인간을 위한 정책으로 함께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정조의 탄신일에 화령전에서 느낀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는 사상과 정책은 처음에는 흥할 수 있으나 결국 인간에 의해 끝내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정책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을 정치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2011-10-18 김준혁

아름다운 노년과 참교육

1960년대, 건조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었던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안개 낀 무진(霧津)으로 상징되는 몽환적 이미지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무진시의 모든 사물들은 안개의 품속에서 용해되어 실체를 상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무(海霧)가 밀려드는 무진시,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 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 왔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慈愛)학원도 그렇게 안개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도가니'의 첫 장면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거대한 흰 짐승'으로 상징되는 안개는 더이상 몽환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며 야수적인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안개는 그로 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그물같은 것일게다. "철길가에는 때이르게 피어난 코스모스 무리가 창백하고 불안하게 그 안개의 그물에 덮인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심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주일예배에서 "어둠이 한번도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성경 말씀이 들리지만 말씀이 봉독되는 중에도 안개가 무섭게 주변 세계를 빨아들이고 있으니 그것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공포의 어둠이다. '빛이 어둠을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선과 악의 전도된 역학 구조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도가니'는 기본적으로 장애아에 대한 성폭력, 더 근본적으로는 인권 유린의 문제, 강자와 약자의 힘의 논리, 사회적·윤리적 무감각, 정부의 안이한 대처 등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복지재단 운영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인, 일명 '도가니법'이 발의될 예정이라고도 한다. 헤어날 길 없는 운명의 그물속에 갇혀버린 장애아들에게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철저한 법제화와 우리 모두의 각성된 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참 교육이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립학교잖아. 이사장 집안하고 연줄만 있으면 그건 괜찮대. 다들 그렇게 취직을 하고 야간대학원에 다니면서 특수교육을 잠깐 전공하면 된대. 전혀 문제가 안된다고 했다니까. 보수도 좋고 근무시간도 널널하고, 이보다 더 좋은 직장 없을거라나." 아내가 남편 강인호 선생에게 '자애학원'을 추천하며 건네는 이 말은 복지법인재단, 사학재단의 구조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애초부터 참교육은 불가능했던 것이다.5년 전에 퇴직을 하고 경기도 광주에 내려가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는 교수 부부를 며칠 전 방문했다. 부부는 힘에 좀 부치겠다 싶을 정도로 꽤 넓은 텃밭에서 온갖 먹거리를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김장철이면 김장 김치뿐 아니라 미끈한 하얀 무며 속 찬 배추 등 일용할 양식까지 제공해 주시니 한동안 연락이 안 오면 은근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번에 들려온 소식은 부인이 병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로 당장 달려가면서 우리 부부는 역시 은퇴생활은 도심에서 해야 한다는 둥, 텃밭 가꾸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둥 곧 정년을 앞두고도 시골에 밭뙈기 하나 없는 우리 처지를 서로 위로하기까지 했다.부인은 이제 건강이 좀 회복되어 우리는 시골 밥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부턴가 선생님은 시골 서당 선생 역할을 즐기고 계신다는 것이다. 형편이 어렵지만 공부에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 우리 고전뿐만 아니라 파스칼의 '빵세'까지 가르치고 계신다고 한다. 선생님 댁 문에는 '자애'나 '복지' 따위의 거룩한 현판이 아니라, '경아네 집'이라는 팻말이 손녀 사진과 함께 정겹게 매달려 있다. 학생들이 감사의 뜻으로 햅쌀도 좀 가져오고 옥수수도 쪄오니 이보다 더 따뜻한 마음이 어디 있겠느냐고 감격해 하신다. 물질적 대가없이 하는 일이니 이것이 진짜 가르치는 일의 기쁨인 것 같다고 역설하시는, 한 잔 술에 발갛게 물든 선생님의 얼굴에 소년처럼 천진한 미소가 번진다. 순간 이것이 참교육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현실적인 욕망이나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검버섯 핀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까?

2011-10-11 김구슬

올 가을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가을은 정녕 모순의 계절인가. 단풍 숲의 찬란한 장관은 바람에 맥없이 날리는 낙엽과 공존한다. 인생의 깊이를 아려 사색의 저편에는, 삶의 덧없음을 깨우치는 우수(憂愁)도 함께 깃든다. 단풍 빛에 취한 산행의 잰 걸음도 숲이 앙상한 가지로 변할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느린 걸음으로 한껏 원숙해지고 넉넉해진다. 수확의 기쁨과 쇠락의 쓸쓸함이 불변의 진리처럼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가을, 참 모순덩어리다.올 가을, 모순의 현주소가 우리 사회를 마구 뒤흔들고 있다. 영화와 소설 '도가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설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성폭력 피해자인 청각 장애우들은 오늘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온전하다. 수화로 세상에 소리쳤으나, 사회는 애써 외면해 버렸다. '멀쩡한 사람들도 당하고 사는 데…'라는 집단 심리의 작동이었다. 그 사이, 고소 취하와 합의의 이름으로 가해 교사들은 법망의 그물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분노와 절망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됐다. 힘 있는 사람들의 선의가 얼마나 큰 부조리와 타락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를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부정은 아름아름으로 베푼 작은 선의들이 쌓인 자리에서 웃자라나는 것임을 다시금 보여준다.그 와중에 우리는 '짜장면 천사' 김우수씨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5년 동안 고아원에서 살다가 겨우 12살 때 거친 세상으로 나왔다. 몸 한 번 뒤척이기 힘든 1.5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살면서 다섯 아이를 후원해왔다고 한다. '철가방'으로 불리는 짜장면 배달 일로 한 달에 70만원을 벌면서도, 더 어려운 아이들을 잊지 않은 것이다. 아마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을 나눔으로 위로받고 치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는지. 하얀 헬멧을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영정 사진은 우리 스스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 여학생이 쓴 '다시 만나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라는 마지막 편지는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꿈의 상실이었다.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제 3지대의 '안철수 바람'은 또 어떤가. 견고했던 정당정치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제 1야당의 조직을 무력화 시킨 박원순의 등장은 그 바람이 도도한 시민의 힘임을 증명하고 있다. 저변에 깔린 것은 지도층을 향한 불만과 불신, 냉소의 다른 그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빈부·계층·이념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에는 절박함이 별로 없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선거 승패의 관성만이 작동한다. 학교로 되돌아간 안철수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의 경험과 정치력 유무만을 따진다. 달을 가리키는 데, 왜 손가락 끝을 바라보는 것인지.대통령 측근비리도 여지없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마치 그 수많은 역사적 교훈을 조롱이나 하듯이…이 모순과 어리석음은 또 어찌 설명해야 할까. 하긴 세상을 매력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 내고 있는 시인들의 눈에도 삶은 제각각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삶을 울음에 비유한 신경림 시인의 시어와 시의(詩意)가 늦가을의 빛깔, 그것을 닮았다. 애잔한 일상의 진면목(眞面目)이다. 그러나 이 갈대를 보고 김소월은 다르게 노래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김소월 엄마와 누나야 강변 살자)' 소월은 자연친화의 소박한 지족(知足)의 삶을 갈구했다. 달라도 여간 다른 게 아니다. 삶은 이처럼 모순과 불만의 연속이다. 이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는지….곧 단풍철이다. 어느 해 단풍이 장관이지 않을 때가 있었겠는가. '서리 맞은 잎새가 2월의 봄꽃보다 더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당나라 두목의 시 산행(山行)의 결구이다. 1995년 YS정부때 장쩌민 중국국가주석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단풍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나뭇잎이 저를 버리고 다시 대지로 돌아감으로써 빚어내는 미학이다. 감탄과 울림은 짜장면 철가방과 소리 없는 수화와 같은 낮은 곳에 머문다. 낙엽이 질 때 비로소 가을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가을, 우리가 좀 더 겸허해져야 하는 이유이지 싶다.

2011-10-04 양승현

인문학 도시 수원의 당위와 미래

벌써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홍경래 난'이라 불리는 백성들의 투쟁이 1811년에 일어났으니 올해가 꼭 200년이 되는 해이다. 홍경래의 거사에 대해 여러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을 백성답게 대하지 않은 것이 그 결정적 원인이었다.아무리 전근대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폭압과 착취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그도 모자라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를 빼앗았기에 끝내 백성들은 봉기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거사 200주년을 생각하면서 수원을 돌아보았다. 수원은 과연 어떠한가? 과연 수원은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또한 수원은 시민을 보다 평화롭게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회로 만들 것인가?민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시정을 이끌어가는 분들은 대부분 시민과 함께 하겠다는 구호를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당시 시대의 요구로 인해 시민의 삶을 중심으로 구호를 내세우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결국 "부자되세요~"라는 텔레비전 광고에 따라 온 나라가 돈벌기 열풍에 휩쓸리기도 했다. '돈'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보다 중요한 시대였고, '인간'을 이야기하는 인간은 단군신화의 시대에 사는 고루한 인간으로 매도됐다. '인간'이 가장 중요한데 '인간'은 사라지고 오로지 '물질'만이 권능의 자리에서 호령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였고, 지난 시절 수원만이 아닌 한반도 남쪽 땅 모든 곳에서 "돈, 돈!"하는 소리가 메아리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수원에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이 반갑습니다'라는 시정 구호를 보는 순간부터 감지했던 일이지만 새로운 시장이 수원을 '인문학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천박한 사회에서 다시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겠다는 발상은 너무도 올바른 것이지만 한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구호인가 싶기도 했다.우리 사회가 인간과 인간중심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지 너무 오래됐다. 개혁군주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사회는 '위민(爲民)'의 가치가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도정치시기를 거치면서 탐학과 학정이 전국을 지배하게 됐고, 그 결과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다. 어둠이 짙으면 해가 뜨는 것이라 했다. 오랜 수탈과 고통은 마침내 동학을 통해 인간으로 회복을 선언했고, 1894년 농민들은 '사람이 곧 하늘'임을 이야기하며 세상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민중들의 미약한 힘은 구호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결국 외세의 힘에 의해 다시 가진자들과 이방인들의 나라가 됐고, 끝내 몇십년의 치욕스런 일제 강점의 시대를 겪어야 했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또다른 외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으며, 그 잔존 세력들이 오늘날까지 정치와 행정 그리고 경제적 기반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호 통재라!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와 행동이 아직도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공적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앞세우고자 하는 시대가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다시 인간으로!'라는 선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이러한 시대에 수원시가 인문학의 도시를 천명하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민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 문명사의 전환기적 발상이요, 고(故) 이영희 교수가 이야기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 도시 수원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왜냐? 그것은 바로 수원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통일과 물질문명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우리 민족의 변질된 민족성과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200여년 전 개혁군주 정조가 수원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예부흥과 개혁을 추구하고, 새로운 개혁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인문학의 가치를 높이 세우고, 이를 통해 한반도의 문화를 바꾸어야 하는 민족사적 과제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2011-09-27 김준혁

나는 주말에 샤르자 서예 전시회에 간다

한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하고, 교류 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이슬람 세계와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지난 일요일 만난 역사학자에게 지금 경기도 미술관에 이슬람 서예 작품과 회화가 전시 중이며, 이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샤르자 국왕이 경기도 박물관을 방문하였다고 하니, 샤르자가 어느 나라 왕 이름이냐고 되물었다. 샤르자는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 있는 아랍 에미리트 연방 7개 토후국 중 하나인데, 명색이 역사학자가 샤르자가 왕 이름이 아니라 아랍의 토후국 이름이라는 사실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다. 서예가 한자 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나, 이슬람 문화에도 서예가 있다. 이슬람 예술에서 서예는 건축 다음으로 중요하다. 동아시아 예술에서 서예는 여러 예술 장르 중의 하나지만, 이슬람 예술에서는 두 번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인 알라를 형상화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긴다. 그래서 불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신앙의 대상을 조형물로 만들어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에서 조형 예술이 차지할 자리는 거의 없다. 이슬람 세계에서 서예는 코란을 옮겨 적는 수단이다. 필자가 이슬람 서예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방문한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에서다.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 당시 성 소피아 성당이었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지배하에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아야 소피아에 들어가면 중앙 홀 높은 벽 위에 코란 경구가 쓰여 있는 장중하고 우려한 서체의 이슬람 서예가 높이 걸려 있다. 이슬람 서예도 한국의 서예처럼 여러 서체가 있다. 모가 나고 장중한 느낌의 쿠파체, 둥그스름하고 유려한 나스히체가 있다. 나스히체는 작은 코란을 베끼는데 사용된다. 술루스체도 있는데 이는 건물의 비문에 사용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코란을 베끼는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 서예를 한다. 그러나 명상을 즐기거나 취미 생활로 서예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이 점은 서예를 정신 수양 수단과 취미 활동의 하나로 즐기는 한국인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한국에는 대학에 서예과가 있고 많은 이들이 서예를 하고 있기에,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은 한국 서예와 이슬람 서예는 문화 교류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류는커녕, 이슬람 서예가 있는 것을 아는 이도 별로 없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아랍 에미리트 연방 7개 토후국 중 우리의 귀에 익은 토후국은 두바이와 아부다비다. 두바이는 석유 수출국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버즈 두바이'와 야자수 모양의 인공 섬 '팜 주메이라'로 상징되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토후국 경영으로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하더니 파산 선언을 하여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한 토후국이다. 아부다비는 우리가 원전을 수주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토후국이다. 그러나 샤르자도 산유국이지만 문화와 교육, 그리고 어린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토후국이다. 샤르자는 1998년 유네스코에 의해 아랍 문화중심 도시로 선정되었고, 이슬람교육과학문화기구(ISESCO)가 2014년 이슬람문화 수도로 지정하였다.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에서 경제가 매우 중요하지만 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류가 그 밑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나는 이번 주말에도 경기도 미술관을 방문하여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인 샤르자 예술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한국과 이슬람 세계의 교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을 역사학계에서는 이슬람 상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1천200여 년 전 신라인이 만난 이슬람 세계와 문화를 아직도 잘 모르고, 이슬람 하면 석유와 테러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경기도 미술관에서 열리는 샤르자 전시회를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2011-09-20 강진갑

스마트 시대와 인간적 서정

9월 4일 김달진 문학제 국제시낭송회가 창원시 진해, 시인의 생가 앞마당에서 열렸다. 마당을 들어서자 하얀 깃발들이 하객을 맞이하듯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돌담을 죽 돌아 올해 수상한 시인들을 포함해 그간 수상한 시인들의 대표작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소곤대고 있는 것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탑돌이 하듯 돌담을 돌며 깃발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년부터는 창원KC국제시문학상도 제정되어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최고의 시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축제가 시작되자 프랑스, 일본, 중국, 몽골 등지에서 온 각국의 시인들이 자국의 언어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마치 귀 기울이면, 언어는 잘 알 수 없지만,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들을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모두가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어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숙연하기까지 하다. 각국의 대표 시인들이 낭송을 끝내면 참으로 감동을 받은 듯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낸다. 프랑스어나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등을 아는 사람들도 꽤 있을 수 있다.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잘 할 수 있는 원로 시인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프랑스어는 학부 시절에 공부한 바 있어 한마디 한마디가 추억의 미로를 걷듯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언어로 시를 낭송하는데도 모두가 열광하고 일제히 감동과 환희의, 때로는 한숨 섞인 박수를 쏟아내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올해 창원KC국제시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시인 끌로드 무샤르는 유독 '소통'에 의미를 두어, 시란 "세상에 대한 열정"이고, 그런 까닭에 "나와 세상 간에는 '함께-사이에'라는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무엇을 구태여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전달하려 애쓰지 않았음에도 그날의 그 시들은 그대로 존재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과 진정성이 전제되고 소통과 공감을 원할 때 구태여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진실은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가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이 마련한 막걸리와 음식들이 기막히게 맛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동민들의 소박하고 훈훈한 마음이 그들이 준비한 음식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디지털 시대, 그리고 이제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농경 사회의 인간은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상호의존의 구조 속에서 훈훈하고 인정 넘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스마트 사회의 인간은 넘치는 정보와 지식으로 타자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터치스크린의 방식은 어떤가. 고도의 기술 정보 스마트 시대일수록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할 것이다. 삼성이나 애플 모두 슬라이딩 터치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터치의 방식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스마트 폰 속의 모든 정보 역시 인간의 욕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담아 놓아야 하니 스마트 폰이야말로 인간 욕망의 화신인 셈이다. 그날 시인의 생가 마당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마트 시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세련된 삶의 편리함을 즐기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농경 사회의 훈훈하고 정겨운 소통과 공감의 삶에 대한 욕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스마트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인간 삶의 복잡성, 그것은 동시에 풀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깃발 속을 뛰어다니며 유년을 그리워하다 서울로 돌아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여서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놓았던 일이 떡 버티고 있다. 이번 추석은 우리 집 차례다. 제수 준비도 해야 하고 집안 정리도 해야 한다. 명색이 스마트시대의 원조인데 이런 거 다 해결해 줄 스마트한 방법은 없을까?

2011-09-13 김구슬

가을에서 정치가 배워야 할 것

내일이면 백로(白露)다.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아침 저녁으로 성깃성깃 차가움이 느껴진다. 여름 내내 쏟아진 비를 지켜보면서 '올 더위는 끝났다' 싶었던 게 얼마 전이다. 그 두 달 사이에, 장대비에서 늦더위를 거쳐 이제 서리가 목전이다. 올 고추 농사는 금값이라는데, 고추밭도 서리를 맞으면 흐물흐물 녹아내려 못쓰게 된다. 사람의 삶도 여기에서 한 발짝도 비켜설 수 없다. 정치라고 별것이겠는가.올 가을은 묘하게 정치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생긴 정치 공간이 말 그대로 난마다. 으르렁거리는 품새들도 예사롭지 않다. 곽노현 교육감 진퇴 문제까지 겹쳐 얽히고 설킨 방정식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김문수 경기지사의 대권가도에는 일단 빨간 불이 켜졌다. 서울시장 보선에 380억원이 드는데, 김 지사마저 대권 도전을 위해 지사직을 내놓는 게 쉽지 않다. 여권에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경기지사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싸움이 될 것이다. 비장함과 결기가 뚝 떨어짐에랴.박근혜 전 대표의 선택도 여의치 않다. 사실 지난 주민투표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정치인이 박 전 대표다.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터다, 지지율 하락이 그 반증이다. 그러나 만약 지원에 나섰더라면, 아마 지금쯤 '박근혜 대세론'은 위기에 봉착해 있을 공산이 크다. 정치가 지닌 속성상, 가만히 놓아두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10월 서울시장 보선의 짜임새도 심상치 않다. 자칫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 마저 배제할 수 없다. 민심의 파고는 언제나 거칠고, 변화무쌍하지 않은가.손학규 대표라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내 경선을 치르고도 후보를 내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야권 통합의 주체가 아니라, 여럿 중 하나로의 자리매김이다. 지난 김해을 보선의 재판이 된다면, 전통 지지층의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진보성향이긴 하나, 무소속 출마가 확실해 보인다. 손 대표로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후보조차 내지 못하면 누가 야당의 맏형이라 하겠는가.그런데도 당장은 속수무책이다. 안철수 원장의 돌풍이 기성 정치를 형해화시킨 까닭이다. 안 원장이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정치를 피해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기는 이제 만만치 않다. 짧았으나, 그가 불러온 파장이 정치행위의 경계를 넘어섰다고 봐야한다. 안철수 돌풍에 마구 뒤틀린 우리 정치의 바다가 가을을 많이 닮았다. 가을은 어디까지나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봄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봄꽃의 화사함과 달리, 가을 단풍의 화려함에는 어딘지 울음도 함께 머무는 느낌이다. 겸손과 절제, 고뇌가 어우러져 있다. 아마 숲이 빚어내는 마지막 아름다움의 뒤 끝에는 결국 익숙했던 것들, 화려했던 것들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 아닐까. 수원 광교산 형제봉 초입에는 박재삼 시인의 '산에서'라는 시비가 있다. '…/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로/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정치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참, 오묘한 자연의 질서이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바다는 다시 건강해진다고 한다. 바람이 바닷속을 온통 뒤집어놓고, 혼들어 놓아 갯벌조차도 팔팔하게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 위력이 크면 클수록 정화기능도 동시에 커진다니, 자연이 지닌 아이러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정치 현역 시절, 입버릇처럼 얘기한 화두 비슷한 게 있다. '순리는 답답하고 지루하고 늘 지는 것 같고, 반대로 역리는 화려하고 돋보이고 늘 이기는 것 같지만, 역리가 순리를 결코 이기는 법은 없다'고.이 가을, 낮은 곳으로 임하는 낙엽처럼 정치권도 조락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겠다. 언젠가 안철수 원장도 맞닥뜨리게 될 근원적인 문제이다. 검투장에 들어서는 순간, 벌거벗어야 한다. 가을 단풍이 마침내 제 속살을 내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시인들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했을까. 올 가을, 정녕, 기도하는 마음이다.

2011-09-06 양승현

연천군 바로알기, 연천의 미래를 바꾼다

동두천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을 타고 연천으로 들어서다보면 너른 들판과 개천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동두천 일대의 미군기지와 여타의 군부대들이 아직도 한반도의 냉전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긴 하지만 그래도 한강 북부지역의 아름다움은 감동이었다.경원선을 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연천군청의 요청으로 연천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연천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필자가 연천을 가게 된 것은 어찌보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천과의 인연은 우리 산천과 문화유산 답사를 좋아해 연천 일대를 꽤나 많이 돌아다니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보니 연천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우연한 자리에서 지인들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다가 연천군청의 강의 요청을 받게 됐다.연천군청이 필자를 포함해 '연천군 바로알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연천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한편으로는 경기도의 대부분 지자체들이 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연천이 소외되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현지에서 근무하는 공직자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공직자들의 의식과 변화는 지역의 발전과 절대 무관할 수 없다. 필자가 지금은 대학에 근무하지만 몇 달 전까지 수원시청에 소속된 공직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역이 변하기 위해서 공직자가 변해야 하고 공직자가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시작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듯이 자기가 사랑하는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 이전과 달리 더욱 헌신하며 공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주 단순한 논리인 것 같지만 실제 이는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된다.연천의 역사와 문화 강의 내용에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짧은 소견으로 연천의 미래 역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천은 엄청난 미래가 예고되고 있다. 연천이 오늘날 낙후된 것은 철저하게 분단 때문이다. 분단으로 인해 경원선이 막혔기 때문이다. 경원선의 단절은 연천 발전의 단절을 가져왔다. 18세기 이후 한반도는 물류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서울과 연결되는 6대로, 10대로가 만들어졌고, 교통이 좋은 지역이 대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때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철도가 연결된 곳은 발달하고, 철도가 연결되지 않은 도시는 쇠퇴하게 된다. 지금도 KTX가 정차하는 지역은 성장하고 역사가 없는 곳은 쇠퇴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북관계의 개선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가스공급의 논의가 시작되고, 북한이 남한으로의 가스 수송로를 인정하겠다는 뉴스도 나오기 시작한다. 이는 분명히 현실화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가스 수송로는 러시아 지역에서 두만강 건너 동해안을 타고 내려오다가 원산에서 연천으로 올 수밖에 없다. 경원선의 부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금강산도 연천에서 경원선을 타고 갈 것이다. 경원선의 부활은 머지않은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연천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비롯한 역사자원과 한탄강 임진강을 비롯한 천연자연은 남북의 소통이라는 시너지 효과와 더불어 연천을 역사문화도시와 교통을 통한 혁신도시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필자의 강의와 토론을 통해 연천의 공직자들은 서서히 자부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미래를 예견하면 준비를 해야 그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에 연천군민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자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연천을 지켜보기 바란다. 지금은 느린 것 같지만 향후 다가올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에서 무서운 속도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연천 사람들 모두가 연천인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만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오늘 필자는 또 경원선을 탈 것이다.

2011-08-30 김준혁

앙코르 와트에서 뱀은 친숙한 존재였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그동안 미루어왔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다녀왔다. 앙코르 와트는 19세기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밀림 속에서 발견한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앙코르 와트로 떠나면서 궁금했던 것은 그 위대했던 문명이 어떻게 한 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는가, 그리고 비록 폐허가 되었겠지만 꽤 큰 도시인데 외국인에게 발견될 때까지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았을까 였다. 앙코르 와트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15세기이다. 앙코르 와트 유적 주인공은 앙코르 왕국이다. 왕국은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번창하였으며, 앙코르 왕국의 대표적 유적인 앙코르 와트는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만명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만든 거대한 사원이다. 해자를 포함한 동서의 길이는 1천500m, 남북은 1천300m이며 넓이는 210㏊로 약 198만㎡에 달한다. 사원 주위에 해자가 있어 앙코르 와트 사원은 거대한 저수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전성기 앙코르 왕국의 인구는 100여만명에 달하였다 한다. 1432년 앙코르 왕국은 이웃한 타이 시암족의 침략을 받았다. 시암 족은 앙코르 왕국의 무희 압사라와 왕국의 신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사원을 포함하여 도시 시설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남아 있던 앙코르 왕국 사람들은 수리 시설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가 없어 앙코르를 떠났고, 앙코르 유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침략하던 19세기에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이곳을 찾았다. 이 때 앙코르 유적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박물학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 와트를 조사한 후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박물학자가 앙코르 와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맞으나 그가 발견했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으로 서술한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났다. 앙코르 와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앙코르 와트 사원을 둘러보는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뱀신 '나가' 조형물이다. '나가'는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코브라이다. 그런데 얼굴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앙코르 신화 속에 나오는 동물이다. 뱀신 '나가'는 힌두교에서 불사(不死)를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부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3중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랑에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의 신상(神像)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상징물이 부조되어 있다. '나가'는 사원 회랑은 물론이고 사원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난간에도 조각되어 있다. '나가'가 인간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인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원 곳곳에 무희(舞姬) 압사라가 조각되어 있다. 캄보디아 민속춤인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화려한 춤이다. 그런데 압사라 춤의 동작이 '나가'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캄보디아 인에게 뱀신 '나가'는 경외로운 존재이다. 캄보디아 건국 신화에도 뱀이 나온다. 인간이 뱀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캄보디아 인이라는 것이다. 왕이 뱀의 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인도 원주민들은 뱀 숭배 신앙이 있다. 캄보디아 인들에게 뱀은 매우 친숙한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엠립 시내 곳곳에서 머리가 일곱 달린 뱀신 '나가'를 만날 수 있었다. 사원 입구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인이 드나드는 호텔 입구에도 상징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국인에게 무섭고도 징그러운 뱀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성스럽고 친근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와 씨엠립에 며칠 있는 동안 뱀신 '나가' 조형물이 혐오스럽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 상징물로 느껴졌다. 성스러움과 혐오스러움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문화 경험의 소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2011-08-23 강진갑

동해표기와 작은 풀꽃

국내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인체의 곡선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섬세한 이해와 해석을 주무기로 한 한국 디자이너들의 독창적인 행보는 한류열풍에 새로운 불을 지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한류열풍이 뜨거운 다른 한 편에는 반(反)한류의 차가운 물결도 거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류열풍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일본 도쿄에서 극우파들이 주도하는, 한류 드라마 방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트위터에서는 반한류를 외치면서 한류 드라마를 비판하는 논쟁이 뜨겁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미묘한 역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류열풍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이 세계지도 제작의 표준이 되는 해도(海圖)를 만드는 곳인 국제수로기구(IHO)에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단독 표기하는 것을 지지하는 서한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어 미 국무부는 9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해'를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82년간 유지해 온 '일본해' 표기의 기득권을 바꾸기 위해 그간 우리 정부가 제대로 노력해 왔는지 의심하는 눈길이 따가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18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세계지명사전에 동해를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야 야단스럽게 소동을 벌이는 한국식 대응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7월 15일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퇴계학회에 참석한 바 있다. 21세기에 무슨 16세기의 고전적 학자 퇴계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퇴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퇴계가 지닌 현대적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퇴계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지 30년을 넘기면서 일본, 대만,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홍콩 등의 세계적 학자들이 대거 퇴계학에 관심을 가지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사상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우주를 리(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성질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로 보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다. 또한 그의 제자 이굉중이 주자서를 읽으려 하자 "옛날부터 어찌 시서를 공부하지 않은 이학이 있겠느냐"고 한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文)과 리(理)가 분리될 수 없다는 퇴계의 통합적 사유야말로 객체를 포용하고 타자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소통과 융합이 요구되는 21세기에 신선한 화두가 된다는 것을, 이것이 퇴계학이 지닌 현대적 의의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의 폐해를 도처에서 보고 있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아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개발하고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사유가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자연의 재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퇴계학의 정수는 무엇보다 겸손에 있다. 광기의 욕망 때문에 남의 것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억지로 빼앗으려는 폭력적 이기심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관용과 겸양의 자세야말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 될 것이다. 퇴계학이 세계적 학문의 하나로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일시적이고 시류적인 한바탕 물결에는 범람하는 홍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단지 가시적이고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깊이 들여다볼수록 진가를 발하는 것일 때 지속적 의미를 지닐 것이다. 30년 이상 동서양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그 열기를 더해가는 퇴계학의 진수가 이것이다. 동해 표기 문제의 해법도 시끄러운 소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300여 년 전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에서 찾아야 할 지도 모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아 면밀하게 사실을 검토한다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이 들여다볼 때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번 홍수에, 즐겨 걸었던 '예술의 전당' 옆 예쁜 오솔길이 다 망가져버렸다. 비 그치고 난 뒤 다시 찾은 그 길에 진흙을 뒤집어쓴 채 작은 풀꽃 하나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마치 진흙 속에 핀 연꽃같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나태주,「풀꽃」). 동해야, 너도 그렇다.

2011-08-16 경인일보

오세훈과 김문수

정치적 라이벌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얽혀 있다. 일반인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앙금 같은 것, 자기는 갖지 못한 특장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끝없는 견제…. 이런 것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기 마련이다. 범부들의 눈높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 관계이다. 죽음의 시간 까지 경쟁했던 미 대통령 애덤스와 제퍼슨,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도 라이벌군에 속한다. 한국정치를 30년 넘게 재단했던 YS와 DJ 역시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경쟁과 협력을 반복해온 두 사람의 정치역정을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으로만 평가하긴 어렵다.송영길 인천시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라이벌로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을 꼽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 여건상 그럴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라이벌은 말로,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라이벌, 그 자체가 역사적 맥락이고 궤적이다. 나이와 정치적 위상, 야망이 엇비슷하다고 해서 라이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전당대회장에서 격돌하는 한 때의 경쟁관계일 뿐이다.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까지는 못된다. 라이벌은 오랜 시간 정치 현장에서 함께 하고, 오랜 기간 국민의 희망이어야 한다.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는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을까. 긴 정치적 경쟁과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조건은 좋다. 사법고시를 거쳐 잘나가는 변호사 출신으로 정치권의 영입 대상 1호였던 오 시장은 흔히 말하는 '꽃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젊은 날, 노동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르고 민중당을 거친 김 지사는 말 그대로 '가시밭길' 인생에 가깝다. 96년 15대 총선 때 YS에 의해 나란히 국회에 입성했고, 같은 모임에서 활동도 했다. 여야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의 정치적 파괴력이 어디 여느 보통 자리와 같은가. 대중성과 단박에 주자로 도약할 정치적 위상을 어느 정도 갖췄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은 수도권을 대표하고, 또 한 사람은 대구·경북 출신으로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맞수로서 호조건이다. 50대 초반과 후반으로 낡은, 오래된 느낌도 주지 않는다.그러나 두 사람이 라이벌로 서기엔 아직 미흡하다.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다. YS와 DJ의 '40대 기수론'과 같은 대반전의 신화도, 국민의 정서적 에너지를 모을 시대적 이슈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다. 여의도에 집중되는 한국정치의 특성상, 지방자치 단체장으로서 이 한계를 넘기가 어쩌면 역부족일 지도 모르겠다. 오 시장이 승부수로 던진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위력도 그런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복지 포퓰리즘의 종언'이 되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많다. 서울이라고 하지만 지역적인 한계에다가, 계몽적 성격이 강하다. 서울을 강타한 폭우와 태풍 무이파의 피해 여파로 달궈지지 않고 있지만, 곧 판이 뜨거워지긴 할 것이다. 만약 오 시장의 정치적 중간평가와 겹치게 되면 부분적으로 치열한 양상을 띨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국지전의 형태를 벗어나기는 아마 힘들 것이다. 김 지사가 '이 일을 가지고 주민투표까지 할 일인가'라고 나름 각을 세우고 있는 것도 진정한 승부처가 되지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오 시장의 정치적 수를 어느 정도 읽고 있는 그로선, '취지에 공감한다'는 선에서 더 나아가진 않을 게 틀림없다. 김 지사로서는 의회를 우회한 서울 주민투표를 또 다른 포퓰리즘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는 경기 도의회와 좋은 관계 아닌가. 오 시장도 '4년 뒤에 두 사람이 어떤 성적표를 받을 지 지켜봐 달라'며 섭섭한 속내를 애써 감추지 않고 있다. 그의 언급에는 김 지사에 대한 서운한 심사와 정치적 견제가 깔려 있다고 봐야 옳다.정치에도 운동경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상대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반 성장하는 경우도 많다. 흥행성을 높이는 요소로도 작동한다. 오 시장은 주민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시민들에게 복지이슈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적 성향을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정치인 오세훈'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각인시키는 득은 얻게 될 것이다. 김 지사는 김 지사대로 소탈한 대중적 의회주의자로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다. 이제 두 사람을 빼놓고 한나라당의 미래를 얘기하긴 어렵다. 주목할 만한 정치적 동행이다. 그러나 라이벌, 그 첩첩이 힘든 길은, 두 사람을 넘어 국민이 주는 선물이다.

2011-08-09 양승현

분노한 영혼의 눈물과 우리의 죽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100년 만의 폭우라고. 대통령도 그렇게 이야기하셨단다. 내가 서울에 53년을 살면서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라고. 맞다. 100년 만에 가장 많이 내린 비이기도 하고, 근 반세기만에 서울에서 내린 가장 많은 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환경론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동으로 한반도가 아열대지대로 변하고 있어 장마가 아닌 우기의 시대가 와서 비가 많이 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 실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닌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엄청난 비가 내린 것은 우리들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천대 때문이다. 이 끊임없이 흐르는 비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속절없이 죽음에 이른 수많은 생명들의 저주의 눈물이었다. 그들의 영혼이 구천에서 떠돌다가 마침내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며 미친 듯 울고만 눈물이 바로 이 비였다.2011년 한반도는 근 100년 만에 가장 끔찍한 일이 발생하였다. 올해 초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인해 무려 600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어 인간이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에 매몰되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구제역에 걸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식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우리에 가두어 비정상적인 음식을 먹게 했기에 구제역이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이른 것이다.그들을 구덩이로 몰아넣을 때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마취제라도 맞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죽은 그들은 차라리 나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가축 마취제가 떨어졌다고 그냥 구덩이에 묻혀진 생명체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이런 악독한 인간들이 아니었는데 그런 일을 하고 말았다.우리 민족은 정말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과거 백정들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스님이 오셔서 독경을 하고 염불을 외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를 그저 농사일을 도와주는 가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여 가급적이면 소 잡는 일을 금하였지만 피치 못할 공동체의 행사를 위하여 소를 잡아야 했다. 그럴때마다 소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가 극락왕생하여 훗날 축생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길 기원해 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문화였다. 그런데 이제 그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는 사라졌다. 평화로운 강에서 살던 생명들이 사라지고, 뭍에서 살던 생명들도 사라졌다. 뭍에서 사라진 600여만의 생명은 강에서 사라진 생명에 비하면 그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다.좋다!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 치자. 그 생명보다 인간의 생명이 중요했기에 더 중요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명복을 빌어줄 겨를이 없었다 치자. 그랬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명을 마감한 이후 우리 삶이 안정되었다고 생각되었을때 그들을 위한 기도를 했어야 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뭍에서 죽은 축생들을 위해 '포제'를 지냈다. 길거리에 떠돌다 죽은 행려자들을 위한 제단인 '여단'도 만들고 또 그들을 위한 '여제'를 해마다 지냈다. 인간에 대한 제사만이 아니라 '포제'를 통해 축생을 위한 제사 또한 지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내세의 삶을 빌어주었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가치이자 최소한의 양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린 어땠는가? 대다수의 국가지도자들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려주어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왜? 생명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내린 이 엄청난 비는 바로 우리가 버린 저들 생명체의 눈물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비가 끝나면 이번에 생을 마감한 고인들을 위한 기도와 인간의 욕망으로 사라진 생명들을 위한 정성어린 제사를 지냈으면 한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야만 한다.

2011-08-02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