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연인

 

[시인의 연인]겨울 강가에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정호승(1950~)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고요함 속에서도 요동치는, 그 마음은 외부 충격에 의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매 순간 만져지지도, 잡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속 깊이에는 쉽게 변하지 말아야 하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자신 내부에 있기에, 그것을 지키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이 된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오히려 그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꺾이지 않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이다. '겨울강 강언덕에' 있는 갈대는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그대로 흔들릴 뿐이다.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기다림과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는 그리움을 버티는 갈대를 볼 때, 강하다는 것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갈대"에서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로 살아있다. 진정으로 고독하다는 것은, 흔들리는 것을 흔들리지 않게 보여준다는 것이다./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정호승(1950~)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7-01-08 권성훈

[시인의 연인]기러기 행군

하늘 전광판電光板에문자 뉴스 몇 줄 떠오르며 스쳐 간다.겨울 전선戰線 급속히 남하 중,지나가던 허수아비들이일제히 멈춰 서서 허공을바라보고 있다. 오세영(1942~)하늘은 하나의 채널이지만 무한한 용량과 크기를 알 수 없는 스크린을 가졌다. 태초부터 한 번도 꺼진 적 없는 '하늘 화면'은 수없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하늘이 보여주는 그것은 고개 들어 보는 자의 몫이며, 그것을 헤아릴 줄 아는 자의 것이 된다. 철새들이 날아오는 겨울 이맘 때 즈음, 기러기들의 행렬은 '하늘 전광판電光板에' 자막 방송이라도 하듯이 줄지어 지나가기도 한다. 마치 새들은 "문자 뉴스 몇 줄 떠오르며 스쳐"가지만 동일한 시선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 이처럼 기러기 무리 이미지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는 개별적인 상상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새떼를 일렬로 배열된 절도 있는 군인들의 '행군'이라고 한다면 '겨울 전선戰線'에 '급속히 남하'하는 전투적 형상으로 보게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순식간에 텅 빈 채 '허수아비'와 같이 무방비 상태에서 '일제히 멈춰 서서 허공을/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땅을 벗어난 허공에서 쓰는 '새들의 문장'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고 있는가. 혹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쓰고 있는가.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오세영(1942~)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2-18 권성훈

[시인의 연인]역사 앞에서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언제나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의 영광이여 내게 있으라.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허공에 못 박힌 듯 서서 부른다.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영원한 나의 보람이여묘막渺漠한 우주에 고요히 울려가는 설움이 되라.조지훈(1920~1968)좌절 속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은 안정과 평화 속에 있지 않고, 혼란과 불안 속에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희망의 불꽃은 위기에 빠진 '패자'의 집단적 분노에서 붉게 타오르며 절규하는 함성으로 펼쳐진다.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실패한 현실을 방관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온당한 저항'으로 타파하려고 하는 의지야 말로 '위난의 시대'를 구명하는 일이다. 다가올 미래를 아는 자가 없듯이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허공에 못 박힌 듯" 맹목적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불확실한 시대의 진실을 거짓으로 덮어버린 절망 앞에서 '새날의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새날은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패자의 영광'으로부터 있기에. 지금도 위기를 당면하고 있는 '우주에 고요히 울려가는' 우리 민족의 힘이기에./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조지훈(1920~1968)/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2-11 권성훈

[시인의 연인]해금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 소리 떠나간 이 불러다 앉혀 놓는 소리 차마 그이에게 잘못한 일들 그이 맘에 아직 남았을 상처 너는 다독여 주리라 하건만눈이 시리도록 울어 울어야 못다 맺은 인연 풀어헤칠까 저 연두빛 숲에 그늘이 지도록아픈 가슴 파고드는 네 소리 슬픔이 이렇듯 빛날 수 있나 방민호(1965~)세상에 많은 악기가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소리다. 자연의 소리에 가깝게 근접 할수록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악기는 자연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모방하는 것이며, 우리는 재현되는 그 소리를 통해 내면의 울림을 느낀다. 그러나 어떠한 소리든지 그 자체로 있을 수 없으며, 소리는 사물과 부딪힘이라는 물리적인 것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 소리"도 '떠나간 이'와의 갈등에서 고조된 것이며 "차마 그이에게 잘못한 일들"이 남은 까닭이다. 이처럼 "그이 맘에 아직 남았을 상처"에서 연원하는 가슴의 통증을 '해금 소리'가 호명하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해금이 상처 입은 감정을 다독여 주고, 눈이 시리도록 울어주면서 '못다 맺은 인연'을 풀어헤치는 사이 자신 내면에 "아픈 가슴 파고드는 네 소리"를 슬프도록 연주한다. 당신도 그렇다면 가을의 끝에선 한그루 나무처럼 눈물 흘릴 줄 아는 '몸의 악기'를 가졌다./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방민호(1965~)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1-20 권성훈

[시인의 연인]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1912~1957)사슴은 학·거북이·해·산·돌·물·소나무·달·불로초와 함께 십장생으로서 민족과 친숙하게 지내온 짐승이다. 십장생은 장수를 의미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고구려 벽화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병풍이나 이불보, 베개, 자개옷장 등에 수를 놓을 정도로 길운과 장수의 상징이다.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무척 높은 족속' 등에서 욕망이 절제된 상태의 고고하고 흔들림 없는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망울 속에서 숨겨진 '비애의 눈물'을 찾을 수 있다. 슬픔과 고독 속에 잠겨 있는 사슴은 고요한 연못의 물을 통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잃었던 전설'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나온 '지난한 향수'이며 '잃어버린 그리움'인 것 같이, 그러한 날이면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보는 '녹슨 추억'이 있질 않던가.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노천명(1912~1957)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1-13 권성훈

[시인의 연인]텔레비전 Ⅰ

박남철(1953~2014)백지 위에 사각형 '텔레비전 Ⅰ'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19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된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좌절시키면서 등장한 신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screen, sport, sex 또는 speed'에 의한 3S 정책을 사용했다. 이런 3S 정책은 세계적으로 부당하게 권력을 수립한 통치자가 국민을 조정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른바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관심을 감각과 운동으로 분산시키기 충분한 자극 요법으로 사용해 왔다. 텔레비전은 이러한 국가의 문화적 폭력을 그대로 담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백지 위에 스크린 이미지―네모만을 그려놓고, 제목을 '텔레비전 Ⅰ' 이라고 쓰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이 시에서 정권이 자행하는 폭력의 얼굴과 실체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고통받는 국민들을 '바보의 방'에 몰아넣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유린하는 현실이, 우리를 또 다시 차가운 길 위에 세우며 분노하게 만든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박남철(1953~2014)박남철 作 '텔레비전 1': 백지 위에 사각형 선만 그려놓고 국가의 문화적 폭력을 풍자함.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1-06 권성훈

[시인의 연인]가을의 뒷모습

깨끗하게 헤어지는 법을 배워야겠네여름 내내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꼭 붙어 지낸 나뭇가지와 잎사귀바람 부는 날 서둘러 헤어지는구나 뒷모습을 오래 보았지 뒤돌아보지 않고 인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그대쓸쓸한 등이 눈에 밟히고잘 지내요 힘없는 그 말 귓가에 맴도는데이 거리를 혼자 걸을 수밖에 없다그대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는겨울이 온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이이승하(1960~)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정면에서 보이는 강한 생명력도 그 뒤를 보여 줄 때, 빛이 바래고 어두워 보인다. 낙엽 물드는 10월의 마지막 날 우리는 절정에 이른 '가을의 뒷모습' 속에서 생명에의 근원적 외로움을 발견한다. 또한 거기서 '깨끗하게 헤어지는 법'을 찾아 "여름 내내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꼭 붙어 지낸 나뭇가지와 잎사귀"에서 '서둘러 헤어지는' 이별을 배운다. '뒤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나무에서 하강하는 낙엽을 보면, 어느 날 "인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그대" 가슴 아픈 사랑과 같이 아직도 "쓸쓸한 등이 눈에 밟히고" 있지 않은가. "잘 지내요" 말하고 떠나버린 '그대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는 10월의 마지막 거리에 서면 지나온 빛바랜 시간이 굴러다니다가 앙상한 얼굴로 마주치기도 한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이승하(1960~)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10-30 권성훈

[시인의 연인] 가을 산길

맨 앞에 아버지가 가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고 오리는 내 뒤를 따라오고 모처럼 산길에서 만나 함께 길을 가지만 도시락도 들고 가지만 아무도 말이 없다 아버지는 옛날에도 말씀이 없으셨다 나도 아버지 닮아 말이 없고 오리도 말이 없다 가을 산길 이승훈(1942~)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생은 어디서 출발했는가?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이별하며 길에서 길을 물으면서 살아가는, 당신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통하는 길을 통해 인생이라는 길에서 길로 나아가며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길의 주체는 당신이지만 길을 있게 한 것은 아버지이므로 "아버지가 가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피동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뒤뚱거리는 '오리'가 '맨 앞에' 닮아 있는 오리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이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놓여 진 길들이 있지만 이러한 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이 유사하지만 다르며,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와 같이 말없이 익어가는 '가을 산길'에 서면 '나도 아버지 닮아 말이 없고' 묵묵히 아버지가 된 당신도 가족이라는 무리를 이끄는 한 마리 오리와 같이 아픔을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가 먼저 간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어갈 뿐이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이승훈(1942~)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09-18 권성훈

[시인의 연인] 들국화

너 없이 어찌/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너 없이 어찌/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이렇게 늦게 내게 와/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너 없이 어찌/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도종환(1955~)누구에게나 고향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하나이며 어머니로 표상되는 곳이다.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은 차마 돌아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고향의 회귀 의식은 존재적 본능이며, 그 장소에 우물과 같이 '상상의 두레'로 날마다 퍼내도 '그리움의 샘물'로 고이는 이유는 마르지 않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험하고 거친 인생길을 방황하다가 먼 하늘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쉴 수 있는 것도, 삶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고향이 하늘 너머에 있기에 그렇다. 고향이 있는 자, 혼자가 아니기에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이며,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이랴. 고향은 기쁘고 즐거울 때 생각나지 않지만 지치고 힘겨울 때 "늦게 내게 와/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변하지 않는 향수인 것이다.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가득한 것도, 이와 같지 않던가./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도종환(1955~)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09-11 권성훈

[시인의 연인] 너를 위한 노래 1

어디까지 갈지 나도 몰라강물 따라 가노라면 너 있는 곳바로 보이는지 그것도 몰라다만 나 지금은내 몸에서 깨어나는 신선한 피뜨거움으로 일렁이는 처음 떠오르는 말을하루 한 편의 시로 네게 전하고 싶다신달자(1943~)우리는 존재 이유를 대상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상대의 있음은 존재감의 시작이다. 그 사람은 인연으로 된 '관계 맺음'이며, 몸과 몸이 교합된 '에로스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나의 길은 오로지 그 사람의 길 위에 있는 것이며, 나는 온전히 '너를 위한 노래'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노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상대가 주체가 되는 것이며, 상대를 위해 나는 자동적으로 불려지게 된다. 그 노래는 "어디까지 갈지 나도 몰라/강물 따라 가노라면 너 있는 곳"이라면 어디인지 길을 묻지 않으며, 가는 길이 맞는지 의심하지 않는 "바로 보이는지 그것도 몰라" 날마다 사랑이 곁에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내 몸에서 깨어나는 신선한 피"의 생성은 그와 같이 아침을 맞이하며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삶의 피스톤'이 된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야, 말로 "뜨거움으로 일렁이는 처음 떠오르는 말을/하루 한 편의 시로 네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당신, 오늘부터 시인이 될 수 있다. 아니, 인연을 만난 날 이미 당신은 아름다운 '한편의 시' 인줄 몰랐을 뿐이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신달자(1943~)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09-04 권성훈

[시인의 연인] 처서(處暑) 지나고

처서 지나고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한밤에 또 내린다.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새로 한 번 젖는다.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김춘수(1922~2004)성장기가 지난 사람은 더 이상 자라지 않듯이 자연의 풀도 '처서 지나고' 성장이 멈춘다. 처서는 뜨거운 시간을 지나온 여름의 끝이며,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시작이다. 끝과 시작의 모퉁이에서 사물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저녁, 가랑비가 내렸다. 크든지 작든지, 많든지 적든지, 있든지 없든지 처서 이후에 비를 맞았다. 이제 비를 맞는다고 해서 그것들의 차지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며, 가을빛으로 물들며 떨어져 내릴 것이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도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메아리처럼" 다시 돌아갈 그때가 지금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해지는 이 시간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젖어가듯 세상에 당신이 피워낸 '초록의 욕망'도 소리 없이 가랑비에 풀이 죽는다. '귀뚜라미 무릎'까지 차오른 가랑가랑한 죽음을 보면 가야할 길이 그렇게 멀지 않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신도,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성장이 멈춘 처서에 들고 있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김춘수(1922~200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6-08-28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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