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연인

 

여름숲에서 그을린 삶을 보다

길은 사라지고/굽고 휘고 뒤틀린 나무들 뒤섞여/더 깊이 더 무성히 울울한 여름 숲/문득 펼쳐진 낙엽송 군락에 서서/오래전 사람들의 그림자를 본다/산나물과 약초를 캐고/화전을 일구며 살다 간/쓰러진 고목 위로 귀틀집 한 채 혹은/너와집이나 굴피집 한 채 지어/몸 들였을 까맣게 그을린 삶들/맨손으로 도끼와 톱과 낫과 삽과 괭이를 부린/지도에는 사라진/고단한 빈손들이 어른어른 지나간다 곽효환(1967~)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기록이다. 시에서 사람들의 출입이 끊긴 이곳은 “굽고 휘고 뒤틀린 나무들 뒤섞여/더 깊이 더 무성히 울울한 여름 숲”으로 재현된다. 여기서 화자는 “문득 펼쳐진 낙엽송 군락에 서서/오래전 사람들의 그림자를 본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낙엽송에서 오래전 살았던 사람들의 그림자를 찾아낸다. “쓰러진 고목 위로 귀틀집 한 채” “너와집이나 굴피집 한 채”는 누군가의 흔적이다.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화전을 일구며 살다 간” 화전민들을 떠올린다. 이들이 “맨손으로 도끼와 톱과 낫과 삽과 괭이를 부린” 산속 생활을 통해 “까맣게 그을린 삶들”을 유추한다.지금은 “지도에는 사라진” 여름 숲 속에서 바람이 불 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고단한 빈손들이 어른어른”거리는 것으로 묘사된다.이 시는 사라지고 없는, 사람들의 길을 덮고 있는, 지도에도 없는, 이른바 ‘그을린 숲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5-06-07 권성훈

위치

커튼과 커튼이 보폭처럼 펄럭였지만 다른 창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당신은 거기에 있는가? 심 년 전에, 혹은, 십년 후에.김행숙(1970~)우리는 사이에 있다. 현재와 과거, 이곳과 저곳, 사람과 사람, 생각과 생각들 사이에 당신도 존재한다. 이 사이에는 무수한 갈등과 충돌 그리고 모순이 숨어 있다. 이 숨겨진 사이 면면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사이의 비밀을 인간의 말로서 그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말하는 순간에 이미 원래의 것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이에 있는 것을 일상의 언어로 포장할 수 있어도 전달되면서 왜곡되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이때 작동되는 기지가 문학에서 말하는 암시와 비유다. ‘사이’는 암시와 비유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사이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시인의 언어는 추상적인 본질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자리에서 본래의 소리로 풀어놓는 데 있다. ‘커튼과 커튼이 보폭처럼 펄럭’이며 흘러가는 말들을 통해 커튼과 커튼 사이를 해방시킨다. 각자의 사물에 창을 내고 있는, 언어는 각자의 언어로 ‘다른 창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십 년 전에’ 누군가에게 고백했던 두 사람의 말이 ‘십년 후에’도 그 사이에서 두근거린다./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5-04-26 권성훈

노란 종이배 -세월호 0509

그해 오월은 추웠다고 쓰겠지먼먼 오월처럼 그해 오월도 추웠다고 사월부터 일찍 죽도록 추웠다고그해에 죽음은 노란 빛이었고사람들은 가슴에 노란 리본 꽂고전경들 버스에도 노란 배가 달렸다고종이배가 밀물에 서울로 떠밀려 와 그해 슬픈 빛깔은 노란 빛이 되어 사람들은 노란 리본 가슴에 달고 노란 종이배를 광화문에 띄웠다고 방민호(1965~)4월을 채색하고 있는 노란색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사실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색상이다.” 스에나가 타미오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노랑은 숨겨진 사실에 빛을 비춘다. 노란리본이 등장하게 된 것은 개나리 피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우리 마음이 SNS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 이미지로 사용한 데서 비롯됐고, 5월에는 지구적인 캠페인으로 확산 되었다. 시인은 “사월부터 일찍 죽도록 추웠다고 / 그해에 죽음은 노란 빛이었고”라고 기록하며 ‘세월호 추모 시집’에서 “내 고통은 바닷속 한 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라고 말한다. 시인의 ‘노란 종이배’는 바다 깊숙이 침몰한 세월호를 우리들 애타는 가슴에서 떠오르게 하고 ‘증언, 애도 그리고 치유의 빛’이 되어 ‘어두운 진실’을 향해 출항한다. 보아라, 누구나 ‘노란 종이배’를 띄울 수 있지만 아무도 ‘노란 종이배’를 막을 수는 없다./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5-04-12 권성훈

대부분 그는

대부분의 그는 음영이 없다. 당분간 그를 세워 두는 게 좋겠다. 그를 거리에 한 줄로 늘어뜨려 놓는 게 좋겠다. 대부분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들어간다. 들어가서 휘어진다. 대부분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제 목을 자른다. 그는 우두커니 바닥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 대부분의 그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잊어버리려고 손을 들고 있다. 이제 그는 나을 것이다. 손이 굳어질 것이다.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그는 한꺼번에 발견된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입천장을 두드려 본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한데 뒤얽힌다. 대부분의 이동하는 그는 이동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동하는 그는 이동이 식어 있다. 그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그는 대부분의 그에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 부서진 한복판에서 잊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려고 그는 서 있다. 이수명(1965~)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는가? 당신이 만나본 사람을 제외하고 나면 반대로 당신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빠른 속도로 제 갈 길을 가는 거리의 사람들, 밀려왔다 밀려가는 지하철의 사람들, 오래 전부터 땅속에 묻혀있던 지구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알겠는가. 당신이 그들을 본다는 것은 식별가능한 거리에서 잠깐의 마주침, 얽히고 설킨 지하철에서 보이는 머리와 손들, 땅 속에 묻혀있는 이동이 정지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것도 역시 “잊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려고 그는 서 있다” 여기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쳐지나간 ‘당신’이다.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5-03-15 권성훈

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발르다 나는 보았네/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진실이란 이런 것인가/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차가운 비늘을 꽂았지살아서 팔딱이던 말들/살아서 고프던 몸짓/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입안 가득 고여오는/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1961~)그녀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굴비 한 마리를 아침상에서 해체한다. 굴비의 형태파괴에서 화자는 해제된 기억을 시작(詩作)으로 곱씹는다. 굴비는 현실물의 구조를 파괴하고, 해체된 존재를 통해 해제된 생각을 보여주는 열쇠다. 이른바, ‘실존의 해체’와 ‘기억의 해제’로서 시의식을 갱신한다. 굴비를 바르다가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을 본다. 이 비밀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이 존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시인은 해체된 굴비 이미지로서 세계를 이해하며, 존재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굴비의 일탈과 파괴는 “입안 가득 고여오는/마지막 섹스의 추억”의 몸짓을 드러내는 미학적 방법이다./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5-03-08 권성훈
1 2 3 4 5 6 7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