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연인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강은교(1945~) 사랑에도 법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사랑은 선행 학습인 동시에 지켜야 할 규율이 된다. 여기 의무적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책임지는 것. 사랑이 원한다면 꽃·하늘·무덤을 침묵으로 바라보듯이 떠나게 하고, 잠들게 해야 한다. 자연은 서두른다고 해서 빨라지거나 지연되지 않듯이 그대의 사랑도 훼손하지 않고 응시할 때 그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가장 멀리 왔을 때 비로소 사랑으로부터 제일 자유롭게 된다. 실눈을 감고 그대 살 속에 오래 전 굳은 등 뒤 날개를 들여다보라. 어차피 '가장 큰 하늘'은 당신 등 뒤에 있지만 가 닿을 수 없는 법. '사랑의 실체'도 그러하니 거기서부터 '사랑법'을 익혀라.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4-11-30 권성훈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만 못 보는 아름다운 구석 있지요 뒷덜미의 잔잔한 물결털 같은 귀 뒤에 숨겨진 까만 점 같은 많은 것을 용서하고 돌아서는 뒷모습 같은 우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분명 있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이 장소는 타자에 의해 볼 수 있고 촉각으로만 만질 수 있다. '나'라는 장소에 있으면서도 '나'의 시선을 벗어난 이 공간은 '인식의 사유체'로 작동한다. 인식의 사유체는 현상으로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준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시선―내―없음'이지만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으로 '가득―있음'으로 채워질 수 있는 덜미를 제공한다. 뒷덜미에 난 '점'같이 "자신만 못 보는 아름다운 구석"이 그것이다. 자신만이 보지 못하는 돌출된 상처란 무엇인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받았던 아픔은 없는가. 혹은 다른 사람의 욕심 때문에 자신이 받았던 아픔은 없는가. 잊히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라. 그렇다면 초겨울 저녁 구석에 "숨겨진 까만 점 같은 많은 것을 용서하고 돌아서는 뒷모습" 속에서 노을같이 잔잔하게 물결지는 아름다운 당신을 보지 않을까.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도종환(1954~)▲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4-11-23 권성훈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1915~2000)우리의 정서는 그리움과 기다림 사이에서 작동한다. 누군가를 눈부시게 사랑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리움 없는 기다림과 기다림 없는 그리움을. 그리움 없는 기다림은 실존하는 존재의 약속이면서 영혼 없는 대상이다. 기다림 없는 그리움은 실존하지 않는 비-존재의 약속이면서 내 속에 깃들어있는 대상의 영혼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게 되어있는 건 기다림 속에 영혼이 없는 것이지만 오지 않는 대상에 대한 맹목적 기다림은 만날 것을 전제하지 않는 실존하지 않는 영혼이다. 이 그리움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상이 지금-여기 살아있지 않고,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상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삶과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 대상의 영혼이 주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리움은 끝도 없이 푸르며 매 순간 눈이 부시도록 절실할 수밖에 없다.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권성훈 (시인·문학평론가)

2014-09-14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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