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헌법 제1조 제2항

수평적 리더십에 대한 이해와거버넌스에 대한 천착,사회와의 소통이 전제됐다면'17초 대독 사과'는 없었을것새정부는 '주권은 국민에게,국민이 주인'이란것 명심해야새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40일 남짓, 너무 어수선하다. 한국 대통령제의 구조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임기말 측근비리가 없는데도 임기초인지, 임기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단순히 새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낮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지도는 오를 수 있다. 임기초의 과도한 지지율 상승이, 지지율의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레임덕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정권 출범 초기의 낮은 지지율이 오히려 국정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역설을 설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설적 형식 논리는 안일해 보인다. 아직도 박근혜 정부의 일부 부처 장관은 인사청문회 이후 임명 여부가 불투명하다. 한미와 북한과의 긴장 국면은 적절히 관리되고 있는 건지, 심각한 위기 국면인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집권세력 내부의 권력게임이나 야당의 계파 갈등의 정도가 설령 높더라도, 한국 정치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할 수 있다. 유례없이 강도 높은 부동산 활성화 대책과 추경을 둘러싼 여야의 논점의 차이는 조율하면 된다. 문제는 한국 정치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 정치행위자 중 여전히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청와대 권력의 인식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17초 대독 사과'는 아직도 청와대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만에 하나 임기초의 정치적 부담때문이라고 백번 양보한다 해도 청와대의 인사실패와 소통 부재에 대해 보인 청와대의 '17초 대독 사과'는 민심의 소재에 대한 몰이해와 인식 부재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굳이 진정성을 거론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국민에 대한 예의 부족 등의 평가는 또 얼마나 부질없는가. 대독을 시킨 허태열 비서실장이나 이를 대독한 김행 대변인 모두 국정 최고지도자를 보좌할 참모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인사들이다. 지시를 받아도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대변인이다.국내외적으로 위기가 중첩되어 다가올 때가 있다. 정치가 문제해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해도, 시민사회의 능력이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압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2항은 실질적인 권력 현상 구현의 추동세력인 집권세력의 인식 여하에 따라 형해화, 사문화될 수 있고, 상당 부분 생활정치에서 구현될 수도 있다.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여당과 청와대 수석들을 비롯한 참모들의 역할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권을 창출한 구체적 정치 주체는 정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승리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후보자 요인도 중요했겠지만, 정당의 공천도 유권자 선택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정당정치의 설 땅이 좁아져도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을 재창출한 새누리당의 왜소한 모습과 상대적으로 강해 보이는 청와대 권력은 지극히 비대칭적이다.당·정·청 워크숍에서 인사실패에 대한 여러 비판이 나왔으나, 당청관계가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당과 청와대, 정부는 각각이 집권세력의 한 축이다. 상호 긴장과 협력 관계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물론 견제와 비판은 기본이다. 대통령제의 원리인 삼권간의 견제와 균형 이전에 관철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의 집권세력의 내부는 청와대의 우위가 압도적이다. 지나친 권력의 편중은 생산적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위기해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는 분명 위기국면이다. 안보위기는 물론이고, 경제불안, 사회적 원심력의 증가, 기대와 좌절의 교차, 이를 해결할 정치의 왜소 등 중첩된 층위가 교차하고 있는 상황이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수사와 정치공학적 언술이었는지 통합과 대탕평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딘지 쑥스럽다.아직 임기초다. 어수선하지만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한국사회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이 작동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평적 리더십에 대한 이해, 거버넌스에 대한 천착,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와의 소통이다. 그랬다면 '17초 대독 사과'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행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헌법 제1조 제2항을 곱씹어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4-07 최창렬

고용 없는 성장, 방법은 없는가

GDP대비 고용창출력 비중 큰금융등 생산자서비스 부문과복지등 사회서비스업 발전시켜일자리 획기적으로 늘리고정부는 관련 규제완화와필요규범 정립위해 적극 나서야교정 한 편에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내밀었다. 무채색의 겨울 풍경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봄이 시작되었다. 학창시절은 인생의 봄이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에게서 봄이 발산하는 생기발랄함은 찾기 힘들다.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다. 취직이 안 되어 걱정이 많은가 하고. 아니란다. 무엇이 걱정인가. 그들은 벌써부터 지킬 것이 많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편리함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이제 갓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큰 부담인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벌써부터 경쟁에 지쳐있다.그런데 부모의 그늘을 떠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기나긴 경쟁의 본선이 남아 있다. 두려운 것이다. 불안의 그늘이 깊어서 설레는 희망의 싹이 클 자리가 없다. 70년대,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있던 그 시절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고민은 취직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갈만한 직장을 찾기가 어려운 데 있는 것이다. 좋은 급여와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만 역설적이게도 잘나가는 기업의 자리는 늘어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런 기업은 고용 없는 성장의 단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생산성은 커지고 고용은 줄어들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생산에 대한 직접 기여는 거의 없어질 수도 있다. 일은 로봇에게 시키고 인간은 누리는 세상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앞서 커지는 생산성의 독점을 막을 수 있는 지혜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자의든 아니든 커지는 생산성의 소수독점으로 귀결되게 된다. 커지는 생산성이 독점되게 되면 될수록 경쟁은 심해지고 불만은 커지며 세상은 각박해진다. 일자리는 희망의 근원이다. 희망의 싹이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사회, 불안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진 사회는 가진 자 못가진 자 어느 쪽에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고용 없는 성장, 방법은 없는가.많은 연구와 대안이 모색되고 있다. GDP 대비 고용창출력이 큰 법률, 회계, 금융 등 생산자서비스 부문과 의료, 복지, 실버산업 등의 사회서비스업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하여 서비스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를 위하여 규제 완화와 필요 규범의 정립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기도 한다. 심지어 고부가가치 수공업의 부활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서비스업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나기 위해서는 그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럴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선순환의 엔진은 꺼지고 말 것이다.결국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성장의 과실이 급여를 통하여 골고루 배분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 새로운 메커니즘은 벼랑 끝에서 발견되는 공존공생의 깨달음 위에서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장의 사회환원' 과정에서 만드는 아름다운 일자리로서 인간을 위한 기술혁명을 완성시키려는 인간혁명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 땅을 사들이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말라는 '아름다운 부자' 경주 최부자의 유훈에서, 그리고 카네기의 '부자인 채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라는 교훈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고용 없는 성장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치열한 경쟁환경과 기술의 선량한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성장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만들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진정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3-31 박연수

인사청문회와 콘클라베

'자리'가 사람을 만들게해서는 안 된다.과정·절차 중시되는 제도 통해공직자를 선임해야시스템에 의한인사가 필요하다중학생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수학 시험문제를 잘 풀어 답을 찾았으나 답안지에 잘못 옮기는 실수를 했고, 결국 시험을 망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그 때 이런 망상이 떠올랐다. 만일 시험 문제와 사람의 머리를 함께 집어넣으면 바로 성적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좋은 성적을 받았을 텐데….이런 망상이 다시 떠오른 것은 아마 새 정부의 장차관과 많은 고위직 인사(人事) 때문인 것 같다. 후보로 지명되거나 거론된 사람들의 인사청문회와 각종 하마평을 보면서 편하지 못한 심사가 있어서일게다. 그러한 자리들에서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할 만한 자격과 인품 등을 입력한 다음 후보자를 넣으면 바로 가부를 알려주는 기계라도 있으면 좋겠다.정치인이든 정부 고위직 관리든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사실상 그 어떤 공복(公僕)도, 특히 고위직은 누구나 맡고 싶은 자리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명예와 권력, 부귀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줄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인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온 이력과 성품과 자질에 대한 공정하고 타당한 평가를 통해 그 자리에 맞는 인물이 선택되어야 한다.시험(고시)이나 선거를 통하든 임명권자의 임명에 의하든 간에 최대한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담보되는 공직자 임명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새 정부의 인사 문제는 그러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거나 불비한 경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명권자의 자의적 천거나 정치적 이해관계 혹은 친소(親疎)와 인맥(人脈) 등 불합리한 요인들이 인사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와 그 운영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얼마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새로 선출되었다. 무려 266대 교황이다. '콘클라베'(Conclave)로 알려진 교황 선거 시스템은 2000년의 가톨릭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제도이다. 그동안 평신도와 성직자의 대립과 갈등, 여러 명의 교황이 선출되기도 했던 혼란, 선출된 교황 자격 논란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이다. 선거의 비밀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외부의 압력을 일절 받지 않는 것, 무기명 투표 방식과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 하는 것, 선출 이후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투표용지를 소각하는 것,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계속 투표를 하는 것 등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조항들이 있다. 대부분 최적임자를 선출하고 선거 이후의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내용이며, 교황 선거방식이 가장 이상적인 선거방식의 하나로 여겨지는 이유이다.새로 선출된 교황(프란치스코)에 대한 여론의 평가도 그 선출방식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병으로 폐 하나를 절단한 채 살아왔으며, 주교 관저가 아닌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면서 대중교통을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에이즈 환자의 발을 씻겨 주고 입맞춤까지 하는 등 청빈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성직자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교황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오기보다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했다는 그의 말도 가슴을 울린다. 물론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다 만족하는 교황은 될 수 없을지라도, 시스템적으로 잘 작동되는 선거 절차와 과정을 통해 선출됨으로써 정당성과 신뢰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황이 되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교황선거를 지금의 우리나라 고위직 인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곧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하고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인사가 되도록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게 해서는 안 되며, '자리'에 맞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013-03-24 류성민

드라마 '대왕의 꿈'과 역사 이해

김춘추가 왜에 다녀온 이유는 ?백제 침략으로 위기 직면고구려 청병 요구도 거절당한 탓왜 친당 목적과도 맞아 가교역할창작물이라도 대중매체 감안정확한 역사전달위해 보완 필요신라시대 김춘추를 주인공으로 한 '대왕의 꿈'이란 TV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얼마 전에 방영된 것 중, 김춘추는 백제의 침공을 받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이 죽음을 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고, 곧이어 바다 건너 왜국에 다녀온 내용이 있었다.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청병을 했으나 실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기록이 있음을 대부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일본서기'에는 왜의 개신정권은 '임나의 조'를 끝내기 위해 효덕천왕 2년(646) 박사 고향흑마려를 신라에 보내어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이듬해(647) 김춘추가 왜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만 보이는 임나의 조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 양국 고대사 연구자들간에 가장 논쟁이 심한 것이다.임나일본부와 임나의 조가 실재했던 것이라고 하면 김춘추가 왜에 간 사실을 인질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임나의 조가 일본이 만든 허구거나 또는 일방적 명분에 그치는 것이라면 김춘추가 일본에 간 것은 실제 인질이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연구자들 간에는 임나일본부나 임나의 조가 허구이고 김춘추가 일본에 갔다는 기록 자체를 거짓이라고 보는 주장과 임나의 조는 거짓 내지 명분에 불과하지만 김춘추가 일본에 간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으로 나뉘어 있다.신라는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춘추의 고구려 청병이 실패하여 당시 백제의 대대적인 공세에 시달리면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한편 왜국에서는 645년 6월 중대형 황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백제의 소아씨 가문을 타도하는 을사정변이 있었고, 효덕천황이 즉위하여 황족 중심의 개신정권이 들어섰다. 개신정권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수립을 도모하고자, 당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방법으로 소아씨 세력을 제거한 개신정권은 646년 고향흑마려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이에 답하여 647년 김춘추가 반송사로 왜에 건너갔다. 이렇게 파견된 신라 사신 김춘추를 왜는 국내적으로는 인질이라 하여 사실과 달리 허구로 기록한 것이다.김춘추가 왜에 건너간 것은 왜가 신라에 반송사를 요청함에 자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춘추는 당시 신라가 백제 침략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또 대야성의 패전으로 자기 가문의 명성이 실추되었으며, 게다가 직접 고구려에 청병을 갔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이러한 상항에서 왜로부터 신라는 사신 파견 요청을 받았으며,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외로이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고자 혹여 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가늠하고, 또 왜가 백제와 연계할 가능성 등 왜의 국내 정세를 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추락한 자기 가문의 위상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스스로 원했을 것이다. 김춘추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 648년에는 신라 사신이 일본의 국서를 가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가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친당적인 신라에 중개를 청한 것이며, 결국은 김춘추가 입당하여 왜와 당의 우호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역사 드라마도 창작물이다. 그 소재를 역사에서 빌려왔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작가의 창작물이다. 이런 이유로 이 드라마에서는 왜 조정이 김춘추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중대형 황자가 정변을 일으키는 등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가공의 내용이 방영된 것이다.시청자들은 김춘추가 왜에 다녀온 이야기에서 보듯이 드라마의 내용 중 어떤 것이 역사 사실이고, 어떤 것이 작가가 창작한 허구인지 몰라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비록 역사드라마가 창작물이기는 하나, 현재 학교에서 역사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대중매체가 그 상당한 구실을 하는 만큼, 시청자들에게 정확한 역사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3-03-18 김창겸

여야 대치,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으로 풀어야

우리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직시하고 위기극복 위해선여야가 정치 복원에 힘쓰고박대통령의 수평적 리더십과거버넌스 리더십도 절실히 필요정부조직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도를 넘고 있다. 여야의 정치력의 복원을 요구하거나 여야 일방에게 양보를 주문하는 것도 덧없어 보인다. 요체는 미래창조과학부로의 SO업무 이관 여부이다. 여야가 타협의 진정성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지 조차 의문이다. 지난 해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국회의장 직권상정은 천재지변이나 전시사변 등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여당 원내대표는 이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여론몰이의 일환으로 제안한 것인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져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개정을 들고 나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간다. 야당도 전후맥락 없이 원내대표가 공영방송 이사 추천 요건의 강화와 언론청문회 개최 요구, MBC 사장의 퇴진 등을 조건으로 SO의 미래부 이관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함으로써 스스로 기존 주장의 당위성을 훼손하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여야 공히 당내 논의 과정없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여당에게 과연 자율성과 협상력은 있는 것인지, 야당은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인지, 무력한 여당과 무능한 야당의 카르텔 조합이 정국을 꼬이게 만들고 있다.여야 지도부의 현실인식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위기가 아닌 적이 언제 있었겠는가라는 논란을 차치하고, 지금의 대내외적 상황은 엄중하다. 대외적으로 북한은 3차핵실험 이후 남북불가침 합의나 정전협정 파기, 전면전 불사 등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고, 단순히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에 대한 반발로 보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대내적으로도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경제부흥과 국민행복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는 잔뜩 높아져 있고, 새정부의 리더십은 시험받고 있다. 야당을 지지했던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는 하시라도 등을 돌릴 태세가 되어 있다. 환율전쟁과 물가상승, 양극화는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휴화산같은 상태다. 여야는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정확한 현실진단이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이명박 정권의 장관도 현직에 있는 한 대한민국의 장관일터 당장 일상적이고 시급한 현안은 국무회의를 열어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정권출범 2주일이 지나도록 국무회의는 실종상태다. 인수위원회때부터 불거진 불통과 오만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는 것처럼 비친다. 많은 비판이 따랐던 인사스타일에서 비치는 강고하고 완고한 이미지, 정치와 조정보다는 통치와 지시의 리더십 스타일은 대선 기간의 온화한 미소와 유연하고 살가웠던 표정과는 상충된다. 야당의 책임도 가볍지 않으나, 국정을 맡은 세력은 집권측이다. 집권세력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정운영의 한 축인 야당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명분도 주어야 한다. 정권을 맡겼다 해서 만기친람(萬機親覽)형의 리더십으로 일관한다면 과거 권위주의의 리더십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직적 리더십을 지양하고 정당, 시민사회, 사회의 각 분야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거버넌스의 리더십을 확립해 나갈 때다.정부직제를 포함하여 모든 현안과 법제적 사항은 아무리 훌륭한 안(案)이라도 의회에서 추인받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정책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다소의 비능률과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많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원리이다. 더구나 대통령제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일단 국회로 안을 넘겼으면 여야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새누리당도 집권당으로 기능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과 국가를 위한 충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절차와 과정의 투명성과 적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위임민주주의와 유사민주주의로 전락한다.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좋으나,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는 정치를 우회하여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려 했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종종 차용했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처한 엄혹함을 직시하고, 여야가 정치를 복원함으로써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수평적 리더십과 거버넌스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합의도 박 대통령의 유연한 리더십에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3-11 최창렬

세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비즈니스모델

햇살이 밝아지고 바람결에 온기가 실렸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 겨울은 길고도 추웠다. 그러나 시대는 온난화의 시대, 금세기 연 평균기온은 꾸준히 상승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일진대 그렇다면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워야 상승하는 평균에 맞추어질까 그리고 그 격한 더위는 얼마나 드센 태풍과 홍수와 가뭄을 불러올 것인지 걱정이다.기후가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거대한 흐름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기후변화가 무서운 것은 온유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삽시간에 노도와 같은 위력을 앞세운 무서운 재앙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의 힘은 태양 앞의 반딧불이 같이 하잘 것 없는 것일 뿐이다. 정작 진짜 위기의 상황에서는 크게 소용이 되지 못하는 문명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더럽혀서 자연을 격노하게 하는 데는 너무나도 큰 위력을 발휘한다. 화석연료 중심의 문명은 짧은 시간동안에 복원력을 넘어서는 오염의 일상화를 가져왔고 개발을 위한 과학과 장비의 발전은 지구가 감당해낼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수만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열대우림이 단 몇 년 만에 초토화된다. 이제 그 가공할 장비의 위력은 그렇지 않아도 오염으로 위협받고 있는 바다 속마저 뒤집어 나갈 태세이다. 생명의 근원이 파헤쳐지고 생태계는 무너지고 있다. 인구와 기술과 장비의 발달로 급격하게 작아진 지구, 그러나 그 지구는 인류와 지구생명체의 근원이자 터전이다.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문명이 원천적으로 자원 과소비형이자 오염 유발형이라는 데 있다. 게다가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에 길들여진 가치관이 참담한 과소비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금 이 급격한 지구의 위기를 깨닫기를 거부하고 말하기를 꺼려한다. 개발의 단물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듣지도 않는다.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공멸을 향해서 가고 있다.어떻게 해야 할까?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자리잡아야 한다.모든 과학기술역량을 총동원하여 청정, 고효율, 저위험의 에너지 혁명, 자원소모를 최소로 하는 물질 혁명, 화석연료로부터 해방되는 운송수단의 혁명을 하루빨리 이루어 내야 한다. 이와 함께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반드시 이끌어 내야 한다. 물질적 욕구중심의 생활패턴에서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풍토, 즉 문화적 생활패턴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물질적 충족과 함께 허망한 물질추구의 무한경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생활에 대한 교육과 체험을 통하여 그 가치를 터득하게 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요구된다. 변화된 인프라도 필요하다. 그 중심에 '도시'가 있다.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도시, 쾌적성을 확보하는 도시, 다양한 문화적 인프라와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 이동이 최소화되고 이동이 자유로운 도시, 그리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 아이디어와 과학기술 역량을 모으고 투자를 집중해서 정부와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우리가 60, 70년대에 동경했던 꿈의 모델이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서구화된 문명생활이었듯이 이제 이 새로운 문명과 라이프스타일이 모든 인류가 따라하고 싶어 하는 모델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인류생존과 공영의 길이 될 것이요 우리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신산업혁명이자 성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될 것이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3-04 박연수

새로운 시작이 없는 끝은 끝이 아니다

대학생들 취업 보장되는졸업 될수 있도록 해야하고퇴직자에겐 새 일자리 찾게끔기회와 준비시간 갖도록 배려를새로운 시작 불가능한 상황서끝만 강요는 절망으로 내모는것바야흐로 졸업 시즌이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졸업식이 한창이다. 학업의 한 단계를 마감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관행이다. 나라마다 그 시기와 기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학업의 전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제도이다. 마치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갈 때 줄의 중간 중간에 매듭을 만들어 놓으면 더 효과적으로 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학업의 긴 과정에 졸업과 입학이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더 능률적인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래서 졸업과 입학을 축하한다. 하나의 과정을 잘 마쳤기에 축하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정에 들어섰기에 기뻐한다. 새로운 과정으로 입학할 수 있기에 졸업이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 되고, 졸업을 하였기에 입학도 새로울 수 있다. 졸업 시즌은 곧바로 입학 시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졸업과 입학이란 사회제도를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졸업이 졸업 같지 않고 입학을 해도 새로울 것이 없어지고 있다. 선행학습이나 조기교육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졸업하기도 전에 다음 단계 입학 이후 공부를 하도록 강요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중학교 선행학습을 하도록 부추긴다. 중학교 2학년만 돼도 고등학교 공부를 미리 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그러니 졸업을 해도 졸업한 것 같지 않고 입학을 해도 새롭게 배우는 것이 없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지루한 공부의 연속이다. 이는 매듭도 없는 줄을 타고 계속 올라가도록 재촉하는 것과 같다.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도록 학교와 학원을 오가야 한다. 낮에 학교에 가서는 틈나는 대로 잠자고 밤에 학원에 가서는 쉬는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방학이 돼도 별 변화가 없고, 졸업 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한편,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유치원 졸업은 어떨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초등학교 졸업을 축하할 수 있을까? 대학 입학에 낙방한 고등학교 졸업은 또다시 고등학교 공부를 반복하는 재수(再修)의 괴로운 현실이 될 수 있다. 졸업을 해도 사실상 졸업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대학원 진학이나 취직이 안 되면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부러 졸업을 늦추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대학 5학년생, 6학년생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졸업하여 실업자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그냥 대학생으로 남아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입학과 취업이 불가능한 졸업은 무의미한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끝은 끝일 수가 없다.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0대 중반에 조기 퇴직을 하든 60대에 정년퇴직을 하든 직장을 그만두거나 직업을 잃는 것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초래하기도 한다. 퇴직을 했으나 뭔가 새로운 일거리나 할 일이 없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 준비되지 못한 끝은 좌절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불시에 정리해고나 강제 퇴직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정과 절차가 중시되어야 한다. 졸업이라는 과정과 입학이라는 절차가 실질적인 의미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작하고 끝맺는 것을 제대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입학과 취업이 보장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직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와 준비의 시간을 주면서 퇴직을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불가피한 해고라 하더라도 또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끝을 강요하는 것은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 복지(福祉)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목적보다는 수단이 중시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시작과 끝이, 끝과 시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삶 속에서 평안과 안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러한 학생복지, 사회복지가 간절하다.

2013-02-24 류성민

파른본 '삼국유사' 공개와 한국학 자료찾기

공개된 1책은 삼국유사의'왕력'·'기이' 권1·권2에 해당고대사 연구 가장 중요한 자료왕력은 고대왕들의 정보를재위 순서대로 기술한 연대력잘못된 사실 수정·보충 기대조상의 삶과 얼이 서린 흔적과 유무형의 유산을 찾아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연구하여 역사를 복원하고, 또 오늘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한편으로는 나아갈 바를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정치와 경제가 발전할수록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높아지는 것이다.얼마 전에 파른 손보기 교수의 유족은 소장하고 있던 새로운 삼국유사 1책 목판 인쇄본을 공개하고, 연세대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된 1책은 삼국유사의 '왕력'과 '기이' 권1과 권2에 해당한다.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본자료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은 몇 종이 있다. 그럼에도 저자 일연 스님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제자 무극이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언제, 누가, 어디에서 찍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오직 중종 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되어 흔히 '중종임신본' 또는 '정덕본'이라 일컫는 것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이 판본의 끝부분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발문이 붙어 있으며,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한 줄에 겨우 네 다섯 자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마멸이 심하여,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이 '중종임신본'의 간행본 몇 종이 현재 전한다.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어쩌면 고려 말이나, 늦어도 조선 초기에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판본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알려졌을 따름이다. 이번에 공개한 파른본은 삼국유사 1책이 빠진 것이 없이 완전한 상태이며,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초기 간행본 권2와 완전히 같은 판본이 확실하다고 한다.그러므로 이것은 삼국유사의 여러 판본 중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파른본보다 간행시기가 앞서는 판본이 발견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파른본 삼국유사의 왕력은 대단히 중요하다.삼국유사는 전체 5권으로 되어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편제되어 있다. 이중 '왕력'은 고대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의 왕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재위한 순서대로 기술한 일종의 연대력이다. 파른본 삼국유사의 '왕력'은 중종임신본 이전에 나온 유일한 '왕력'이다. 삼국유사 '왕력'으로 기존에 널리 이용되는 중종임신본에는 글자의 탈락이나 또는 잘못 새겨진 곳이 제법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착종을 일으키게 하거나 사실을 이해함에 혼란과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이런 처지에 파른본 왕력이 찾아짐으로써 한국 고대사, 특히 각 나라 왕실의 조상과 계보 등에 대해 기존에 잘못 알려지거나 알 수 없던 사실을 수정하고 보충해 줄 것이다. 아마 이 분야 연구에서 난제가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은 그 내용이 알려주는 정보 가치가 매우 중요하며, 또 인쇄출판과 서지학적 의미 또한 지대하여 가히 국보급으로 평가하겠다.오늘날 우리 학계에는 자료 이용의 어려움 때문에 연구가 힘들고 미진한 분야가 많다. 참된 우리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한국학'이 특히 그러하다. 한국학을 발전시키고, 분야간 융합및 균형 발전과 활성화하려면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화유산과 자료 찾기가 중요하다.아울러 선행 연구자가 고생하며 자료 찾기를 한 과정과 그 결과 및 찾은 자료는 공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후행 연구자가 동일한 자료를 찾기 위해 같은 시간을 낭비하며 노력을 되풀이하지 않고, 이미 찾은 결과와 자료를 활용하여 다음 단계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이번에 공개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에서 보듯이 한국학 연구가 한층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두가 문화유산과 자료 찾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13-02-18 김창겸

총리론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의 자진사퇴 이후 다시 총리 인선이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출범을 앞두고 있는 새정부의 총리에 대해서는 유독 책임총리 수행 여부가 관심이다.책임총리는 학문적 용어도 법률 용어도 아니다. 총리가 헌법에 명시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책임총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데 사회통념적인 합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책임총리가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의 보편적 합의이다.대통령제 총리위상 역할 제한적통합과 공동체 지향 가치에 대한사회적 합의도출과 효과 위해선국민적 정당성 확보가 우선존경과 신망 받는 인사 등용될때국민 통합의 기초 이룰 수 있어우리나라의 국무총리제도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헌법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무위원의 인사제청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책임총리의 근거 조항이다.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여 민생과 내치를 책임지고, 대통령은 외교나 국방 등의 외치를 맡는다는 권력 분산의 정신이다.그러나 경제부총리가 경제부처를 장악하고, 유관한 업무 조정 능력을 갖게 되며 미래창조과학부가 과학과 기술부문을 총괄한다는 새정부의 조직개편은 원천적으로 책임총리라는 개념과는 상치되는 개념이다. 단순히 내각의 인사제청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붙인다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총리의 인사제청권 행사는 대통령제하에서 원천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직접 선출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 권력과 비록 국회의 임명동의를 거친다고 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의중과 부합하지 않는 인사를 추천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총리가 각 부처의 상충되는 정책을 조율하고 부처이기주의를 조정하는 것도 총리실의 주요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총리실에 국무조정실을 부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이러한 '책임총리론'의 함의를 전제할 때,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의 기본 인선 방향을 가늠하는 최근의 총리담론은 어딘지 책임총리론과는 썩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법조인 출신의 총리 발탁과 법치와의 논리적 연관성은 피상적으로, 또는 형식논리적으로는 부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 연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그보다는 법의 공정한 집행과 정확한 적용이 '유전무죄', '유권무죄'를 추방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며, 총리가 법조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상징적 의미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를 통합과 연관시키는 것은 정치적 상징의 뉘앙스를 풍긴다. 법치와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법조인 출신이 총리가 되어야 법치가 선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총리의 정치적 의미가 통합형으로 한정될 때 이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명분은 있으되, 실질적 측면에서 모호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관리형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관리한다는 것인가.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내각의 실질적 통할이라는 의미에서의 관리인지, 형식적으로 총리의 역할을 '선량한 관리자'로 국한하고, 상징적인 위치로만 자리매김 한다는 것인지 개념적인 선명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대통령제의 권력구조하에서 총리의 위상과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원천적으로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분산은 이원집정부제의 권력구조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법적·제도적 보완 없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권력운용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명백한 한계속에서 총리가 통합과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에 상징적 효과라도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적 정당성의 확보가 우선이다. 이를 위해서 총리는 존경과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인사라야 한다. 그것이 통합의 기초다. 국민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의 궤적을 살아온 인사가 등용될 때 통합의 효과를 상징적으로나마 거둘 수 있다.왜 통합이 중요한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가 자진사퇴할 때 언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이후 해명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절차적 하자가 없음을 주장한 것은 그래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2013-02-04 최창렬

위기극복과 리더십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우리 한반도와 주변국들의 지도자가 바뀌어 새 기운의 정체가 가시화 되는 첫 해가 된다. 경제, 남북관계, 영토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은 보인다. 그것은 '변화'의 움직임이다.시대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미 변화는 시작 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화두일지는 몰라도 키워드는 아니다. 2013년의 키워드는 '리더십'이다. 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변화의 동력을 기회로 활용하느냐 변화의 분출에 함몰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리더십이기 때문이다.한반도와 주변국 지도자 바뀐해국가별 축적돼 온 변화 욕구 커새 리더들 도약 기회로 만들어야가장 중요한 역할은 위기 관리국제관계·국가안전등 미리 대처진정성 바탕으로 발상 전환해야특히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국내외적 환경은 쉽지 않다. 국내적으로는 갈등문제, 경제문제, 남북문제가 그렇고 국제적으로는 한중일간의 영토, 과거사 등을 매개로 한 국가간 갈등과 국민적 감정문제가 표면화 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한·중·일·북한의 국가 리더십이 일제히 교체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극빈의 어려움을 극복하던 시절의 최고 권력을 경험한 바 있는 박근혜 리더십이 국민통합을 앞세우며 발진을 준비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다른 체제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20대의 김정은 통치가 시험대에 올라 있으며, 중국에서는 능력으로써 권력의 후계자가 된 시진핑 체제가 시작되고, 일본에서는 침체탈출을 기치로 권토중래한 아베 내각이 출범하고 있다. 변화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면 이 시대가 축적해 온 변화의 욕구는 무엇인가. 국내적으로는 '갈등'이다. 선진경제에서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과정에 와있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지역적 갈등이 치유를 기다리면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다행스러운 것은 파국이 아니라 치유를 기다리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와 파국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남북한 간에는 첨예한 '대치'이다. 시대는 그 길었던 대치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는 잃어버린 20년으로 표현되는 오랜 '침체'가 될 것이다.일본 국민들은 이제 침체를 못견뎌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은 성장에 가려진, 그러나 성장에 의해서 자양된 '민주적 욕구'가 그것이다. 그 욕구는 답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은 갈 데까지 간 '빈곤'이 본질이다. 억누름이 길면 폭발도 큰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오랜 기간 축적돼 온 변화 욕구는 리더십의 교체라는 계기를 맞아 자극받고 동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제 각국의 새 리더는 이에 당면해야 하고 리더십의 역량에 따라 이를 해결하고 도약의 기회로 만드느냐 분출과 폭발에 함몰되느냐가 결정되게 될 것이다.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위기관리에 있다. 경제적 위기, 사회적 위기, 정치적 위기, 국제관계상 위기, 국가안전에 대한 위기 등 크고 작은 위기에 차질 없이 대처해야 한다. 리더십의 역량은 옳은 비전과 발상전환의 능력이 좌우한다. 옳은 비전은 지도자의 마음자세와 안목에서 나온다.위기감지와 위기타개의 본질적 방향성을 정하는 비전은 절실한 염원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하고 옳은 것이라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비전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가슴속으로부터의 염원의 표출이었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 수상의 대독전쟁 승리라는 목표는 제국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간절함의 산물이었다.권력욕, 과시욕, 사리사욕이 아닌 본질을 보는 진정성과 간절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옳은 답을 낼 수 있는 발상전환의 자세와 지도자적 자질이 요구된다. 결국 옳은 답과 그의 실현은 지도자의 몫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모든 위기는 나타나기 전까지는 위기가 아니다. 따라서 위기의 감지는 쉽지 않다. 또한 위기는 사소한 잘못이 한 방향으로 쌓여서 그 도를 넘을 때 생긴다. 따라서 위기의 타개는 결코 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결국 리더십에 달려있다.

2013-01-28 박연수

기억과 망각의 쌍곡선

잊고 싶은 것은 계속 기억되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누군가에게서 심한 모욕을 당한 일이나 기억하기조차 싫은 불행한 사건들은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일이나 성적 폭력을 당한 사건은 평생동안 상흔으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심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잊어야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스스로 정리하는 시점이 '새해'마치 쭉정이와 검불은 날리고알곡만 모으는 키질처럼…새로운 한해를 보내기위한지혜이자 문화로 형성된 것반면, 밤새워 공부했던 것도 시험지를 받는 순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쳤다가 부부싸움을 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약속도 까맣게 잊어버려 낭패를 보기도 한다. 잊을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기억해야 할 것만 영원히 기억하면 얼마나 좋을까!새해는 지난 한해의 삶에서 잊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좋은 기회이다. 새해의 풍습이 바로 그 방편이 된다.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그 주기와 기간은 다소 다르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해가 다시 시작한다고 여기고 갖가지 새해맞이 행사를 한다. 새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고 새로 만든 특별한 음식을 먹기도 한다.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노래와 춤, 산해진미와 온갖 술로 축제를 열기도 한다. 남녀노소와 귀천빈부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즐겁게 놀면서 먹고 마시면서 즐긴다. 일상의 생활을 떠나, 공부와 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놀다보면 지난날들의 아픔과 슬픔을 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을 수 있도록 잊을 것을 잊어버리는 시간이 새해이며, 그래야 새해다운 새해가 된다.새해에는, 그러나 그냥 먹고 놀지만은 않는다. 조상들에게 제사도 올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픈 소원을 빈다.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새해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환기하는 절기이다.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는 때이다. 조상들이 가르쳐준 유훈을 회상하고, 신이 지키라고 한 계명을 외우며,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는 시기가 새해이다. 새로운 삶, 변화된 생활을 위해 해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을 명심(銘心)해야 하는 때가 새해인 것이다.그래서 새해는 잊어야 할 것을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시점이다. 망각과 기억은 마치 쌍곡선을 이루는 두 정점(定點)에 비유할 수 있다.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어지는 쌍곡선은 항상 두 정점에서는 일정한 거리에 있다. 그래서 한 정점에서 멀어지면 다른 정점에서는 가까워진다. 잊어버리려면 더 잘 기억되고 기억하려면 더 쉽게 잊어버리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기억하고 있는 것과 잊어버린 것의 총합은 일정한 것이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면 그만큼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고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잊을 것은 반드시 잊어버리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그러한 지혜가 새해의 문화로 형성된 것이리라.새해는 잊을 것은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 새롭게 기억하는 시간이다. 마치 키질하여 쭉정이와 검불은 모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듯이, 적어도 지난 한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고 아프게 했던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올 한해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주는 알곡 같은 교훈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변곡점(變曲點)이 새해인 것이다.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해가 뜨고 지난해와 거의 같은 일상으로 오늘을 산다 하더라도,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을 기억한다면 전혀 다른 새로운 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각오와 기분으로 일과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해이고 새해의 문화이다. 이번 설에는 이러한 우리의 새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3-01-21 류성민

진정한 지식인, 강수 선생

지난해 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출마한 후보가 몇 있었지만 유권자의 관심을 집중시킨 유력한 후보는 두 분이었고, 사실상 두 분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선거는 극심한 양자 대결양상으로 진행되었다.신라시대 상위계층의 대학자합리주의 입각한 유교적 실천 노력삶과 학문 일치된 모습 보여줘…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층편협된 주의·완고한 명분 아닌말·행동에 대한 신념·책임 필요그 과정에서 사회지도층과 지식인이란 많은 사람들이 서로 두 후보를 지지한다고 표방하면서 이른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장마철의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시끄러웠다. 물론 여기에는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 정책과 공약에 뜻을 같이하여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 한편에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이 다른 후보를 나쁘다, 비호감이라고 하자 그쪽에 부화뇌동해야만 지식인인양 착각하고 행동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한다.평소 학문적 성향이나 언행으로 보건대, 저 사람이 저랬나? 그런가? 하고, 보는 이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한층 가관인 것은 이런 사람일수록 더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튀고자했다는 것이다. 신라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대학자요 문장가인 강수 선생이 계셨다.그는 본디 멸망한 가야의 후손이었지만 신라에 들어와 골품제에서 6두품이란 상위 지배층에 속했다. '삼국사기'에는 강수가 어릴 적에 학문의 방향을 정할 때 있었던 아주 유명한 일화가 실려 있다.아버지 석체 나마가 강수의 학문의 뜻을 알고자 해서 묻기를 "네가 불교를 배울래? 유교를 배울래?" 하니, 강수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 불교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오니 유학자의 길을 배우고자 원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관직에 오르고 학자로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한편 강수가 일찍이 신분이 낮은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여 둘 사이의 애정이 퍽이나 깊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강수의 나이 20세가 되자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읍내 여자를 골라 중매를 통해 그의 아내로 삼게 하려 했다.그러나 강수는 두 번 장가를 들 수 없다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부친이 화가 나 말하기를 "네가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여인으로 짝을 삼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니, 강수가 거듭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도리를 배우고도 옮기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일찍이 옛 사람 말을 듣건대 조강지처는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장장이 딸과 평생을 같이 하였다.강수는 출세한 뒤에도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는 학문적 신념을 앞세워 결코 미천한 신분의 아내를 버리지 않고 인간적 도리를 다하였다. 강수는 훌륭한 문장가이면서 아울러 자신의 행위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유교적 도덕률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또 신의를 중시하는 강수와 같은 면모는 대장장이 딸인 아내에게서도 함께 볼 수 있다. 뒷날 남편이 죽은 뒤에 있었던 행동에서 드러난다. 강수가 죽으매 장사 비용을 나라에서 주었다. 부의로 준 옷과 피륙이 대단히 많았으나 집사람이 그것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는 모두 불사에 바쳤다.기부 주체는 바로 강수의 아내였다. 아내 역시 강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일찍이 강수가 불교는 이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이제 강수가 죽으니, 그의 아내는 남편 강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산을 불사에 시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즉 살아서는 이 세상 학문인 유학을, 죽어서는 세상 밖의 불교를 좇겠다고 한 것을 강수 자신과 그의 부인이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지도층, 그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덕목은 바로 학문적 신념과 실천하는 행동이다. 말과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신념과 책임이 필요하다. 편협된 주의와 완고한 명분이 최고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2013-01-14 김창겸

봄을 기다리지 말라

12월 내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12월 추위로는 1956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엄동설한이란 말이 실감난다. 지구 온난화의 업보인지 기후변화의 역설인지 몰라도 그렇지 않아도 경제난에 움츠러든 어깨가 더욱 힘들어 진다.그러고 보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엄동설한이라는 말을 잊고 살았던 듯싶다. 1960~70년대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도 길었다. 초등학교 때 쉬는 종이 울리면 추운 교실 안에 있기보다 바깥으로 나가 양지바른 건물 벽에 붙어 서서 해 바라기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그 때는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봄이 기다려졌었다. 그 때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등 따습고 배부른 시절에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봄은 간절함이었고 희망이었다.2012년 겨울.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무엇인가. 학교는 전기난로와 중앙집중식 난방으로 훈훈해졌지만 예전처럼 씩씩하고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은 없다. 정신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이 내몰린, 벌써부터 지쳐버린 영혼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을 뿐이다.등 따습고 배부름을 실현한 자랑스러운 우리, 그러느라고 너무 바쁘고 각박했던 우리,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트라우마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우리, 그래서 아이들에게서마저 여유를 박탈하고 있는 우리. 얼마나 더 따뜻하고 얼마나 더 배가 불러야 하는 것일까.우리에게 봄은 이제 더 이상 등 따습고 배부름을 갈구하는 상징이 아니다. 봄은 따스함, 봄은 밝음, 봄은 푸르름, 그리고 자유로움인 그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봄을 만끽할 수 있게, 꿈을 꿀 수 있게 놓아 줄 때가 된 것이다.방법은 있다.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당겨쓰는 사교육의 상업 마케팅을 금지하고, 학교 선생님들이 보람을 캐는 교육자의 자리로 돌아오고, 정치는 양질의 직업을 많이 만드는데 능력을 발휘하는 제자리로 돌아올 때에 가능하다.1960~70년대의 봄은배부른 시절을 향한 간절함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따스함, 밝음, 푸름, 자유로움…각박했던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아이들에게 여유와 꿈을 줘야희망적인 것은 우리사회가 삶의 가치의 다양성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분상승이라는 구시대의 낡은 관념에서 떨쳐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신분상승을 위한 무한경쟁의 의미는 과연 있는 것일까.아니 지금 우리에게 신분이란 것이 있는가? 신분에 의한 제약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신분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이루어온 가장 중요한 경쟁력 중의 하나이다. 반상의 신분과 사농공상의 순서가 없어진지 오래고 고위관료, 판검사, 국회의원이 높은 신분이라고 인정받는 시대도 지나갔다.젊은이들의 배우자 직업 호감도 기준이 교사, 공무원 같은 안정추구형으로 변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었다. 불확실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대기업, 의사, 변호사는 돈은 많이 벌지만 자기 시간이 없어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이제 신분의 기준은 잘사는 것이고 그 잘사는 것의 기준은 벼슬의 높이와 돈의 많고 적음에 국한되고 있지 않다. 각자의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서 정해지는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옛날과는 달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돈과 권력만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던 시대와는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분명히 등 따습고 배부른 바탕을 만든 기성세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정작 그 다른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는 배고픔의 트라우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기준에 얽매인 채 각박한 경쟁에 몰입되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인생의 골격과 꿈의 바탕이 형성되는 소년기를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말자. 좋은 시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은 잃어버린 세월. 간절한 염원의 봄이 아닌 만물이 생동하는 푸르른 그 본래의 봄을 준비하며 이 겨울을 즐겨라. 봄이 없는 곳도 있을진대 섭리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을 가진 우리는 행복하지 아니한가.

2012-12-24 박연수

웰빙에서 힐링으로

한 때 웰빙(wellbeing)이 대세였다. 언론에서든 출판에서든 너나없이 웰빙을 말했다. '편안함', '안녕', '복지', '행복' 등이 웰빙의 원래 의미이고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지시하는 말이다. '참살이'라는 멋진 우리말도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우리 사회에서는 웰빙이 주로 건강이나 장수(長壽)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웰빙이란 수식어를 붙인 온갖 식품들이 나왔고, 다이어트도 운동도 모두 웰빙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웰빙 보조약품도 있고 웰빙여행에 웰빙의복까지 갖가지 웰빙 상품이 넘쳐났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웰빙이라 여기고,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다.'잘 먹고 잘 사는 것' 자체가행복한 삶 보장 할수는 없어정신적 평안·건전함 더해져야…억압·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우리사회를 치유할 수 있어이웃·자연과 더불어 사는삶 필요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건강 자체가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잘 먹는 것이 잘 사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평안하고 건전해야 참된 의미의 웰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근에 힐링이란 말이 더 자주 회자되고 있는 것도 웰빙이 건강을 위한 것이라는 단면적 인식의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최근에는 웰빙보다는 힐링이 뜨고 있다.'치유'(治癒)라는 의미의 힐링(healing)은 '완전해지는 것' 혹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정신적인 치유의 의미로 힐링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지만, 육체적으로 상처가 나거나 병이 들었다가 회복되는 것도 힐링이고,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억압을 받아 괴로워하다가 평온하고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도 힐링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치유되는 것이 힐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힐링의 의미가 가장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 종교일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힐링 관련 책들의 대다수가 종교인들의 저작이고, 힐링을 위한 프로그램도 종교단체들에서 제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책이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일상에서 벗어나 이웃과 자연에로 관심을 돌리는 일이다.공부와 일에 지친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힐링이 시작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곰곰이 명상하는 것이 힐링의 주된 방법이다.자기 자신만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먹고 더 많은 것을 얻으며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했던 지난날의 모습을 반성하는 것이 힐링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육체적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인식하며,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결심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힐링이 된다고 본다.그렇기 때문에 힐링이 되었더라도 그 이전과 똑같이 살면 다시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힐링이 필요 없는 삶을 사는 것, 아니 일상의 삶 자체가 힐링이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힐링 자체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사실상 우리는 힐링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공부와 일을 해야 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세계 1위의 자살률이라는 불명예를 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만 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병이 든 것이 아닌가.산다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아무리 웰빙을 하고자 해도 소용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힐링이 필요하다. 아마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고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힐링이 될 수 있다. 산과 강, 대지와 바다를 자연 그 자체로 되돌리는 것이 힐링이다. 한번 실험해 보시라.

2012-12-17 류성민

당성의 역사문화와 개발에 대한 단상

인간은 땅을 중심으로 생활하기에 지역과 국가는 물을 경계로 나뉜 경우가 많다. 물에는 크고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지만 사람들은 왕래하고자 한다. 바다의 경우는 안전한 항로를 찾고, 튼튼하고 빠른 배를 건조하고, 바다로 출입하기 편리한 지역을 택하여 시설을 갖추면서, 한편으로는 항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안녕을 추구하는 신앙심을 발현하였다.서해 당은포 물류·무역 요충지中 당나라~신라 사신 교류 길패권 타툼 끝에 진흥왕때 복속해로 기착지 한반도 입국 관문고대 해상 실크로드 역사 간직사신 길 복원 등 정비계획 앞둬신라는 황해를 건너 중국 당나라와 교류에 노력하였다. 당의 도움을 받아 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이후에도 신라의 국제적 위상과 국내 정치와 사회·경제 및 사상·예술 등에서 당과 관계는 중요했다. 당 또한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에 양국간에는 잦은 사신과 상인, 승려 등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다.한반도의 서해안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다. 이런 까닭에 신라와 당 사람들은 대부분 서해안 항구를 이용하였다.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사신은 왕경 경주를 출발해 육로로 서해안에 이르고,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중국 동해 연안에 도착한 뒤, 육로로 당 장안에 갔다. 반대로 당에서 신라로 오는 사신은 장안을 출발하여 바닷가에 이른 뒤, 황해를 건너 신라 서해안에 도착하고, 육로로 경주에 들어갔다.신라시대 서해안의 항구로는 화성 남양만의 당은포, 당진의 대진, 옥구 임피면 금강 하구의 진포, 부안 변산반도 남단인 희안현 연안, 나주 영산강 하구의 회진 등이 있는데, 이 중 당은포가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당은포는 '당성' 또는 '당항성'이라고 불렸다.백제 영역이었으나, 고구려에 점령되어 '당성군'이 되었다가, 진흥왕 때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이곳을 빼앗긴 백제는 642년 고구려와 함께 공격해 신라가 당과 통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 신라 선덕여왕은 사신을 보내 당에 이것을 알렸다.이처럼 당과 교통요충지로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에도 서해안에서 해상 교역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당성으로 복구하였으며, 829년(흥덕왕 4) 군사적 중요성이 커져 당성진을 설치했다.'해동역사'에는 '당 정관 16년(642)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인들이 들어오는 길을 끊었으며, 당항성은 (조선시대) 안산군'이라 했다. 또 낭혜화상 무염이 822년(헌덕왕 14) 당은포에서 출발하여 당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 김흔의 배를 타고 입당한 기록이 있듯이,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사신들은 당은포에서 출발하였다.또 가탐의 '도리기'에 의하면, 당에서 신라로 가는 길은 등주를 출발하여 요동반도 서남단의 노철산을 경유,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초도, 마전도, 덕물도 등을 거쳐 당은포에 이르렀다가, 육로로 동남쪽으로 700리 가면 신라 왕성에 이른다고 하였다.즉 등주를 출발하여 당에서 신라로 오는 경우도 당은포는 해로의 최종 기착지였고, 신라 입국의 관문이었다. 결국 당은포는 신라와 당을 오가는 사신과 유학생, 구법승, 상인을 실은 배들의 중요한 출항지이고 입항지였다.최근 연구에 의하면, 황해를 건너 당은포에 도착한 당 사신들은 여주를 거쳐 남한강 수로를 따라 충주에 도착하였다가 계립령을 넘어 함창―상주―선산―경주에 이르거나, 아니면 당은포에서 육로로 죽산을 거쳐 충주에 이른 뒤 계립령을 넘어 함창―상주―선산―경주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한다.얼마 전에 문화재청이 화성 당성의 체계적 보존관리를 위해 종합정비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라 하였다. 조만간 이 계획은 여러 전문가들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추진될 것이다. 그러면서 너무 많은 것보다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핵심 내용을 담은 문화콘텐츠를 갖추어 해당 지역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 지역 및 관련 지역과 연계하여 폭넓은 역사문화교육 공간으로 만들어질 것을 기대한다.그 하나로 화성시가 당성을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라 표방하듯이, 당성에서 경주 가는 사신 길 복원과 체험, 당성에서 등주 가는 뱃길 체험과 문화행사 등을 생각해 본다.

2012-12-10 김창겸

안철수 현상은 미래진행형인가

18대 대선도 네거티브와 흠집내기, 지역정서에 호소하는 선거전략 등 역대 대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몇 가지 차이가 있다.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정당 제대로 표출시키지 못해무당파·중도층에게 나타난새로운 메시아 안철수새정치·쇄신의 아이콘으로서대선 이후 모습이 궁금하다우선 여야의 정책동조화 현상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일자리 창출, 정치쇄신 등이 주요 어젠다들이다. 16대 선거때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선거판세 전체를 흔들었고, 17대 대선이 이명박 후보에게 쏟아진 비리와 의혹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경제살리기 어젠다가 대선정국을 관통했던 것과는 큰 차이다.둘째, 민주화 이후 선거때마다 예외없이 등장했던 대통령에 대한 여당의 탈당 요구나 스스로 탈당했던 정치적 데자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일단 정당정치의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다. 더 중요한 관점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살아있는 권력'과의 적절한 수위에서의 관계 조절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셋째, 이전 대선과의 가장 큰 차이이자, 한국정치가 고민할 지점을 제공한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가 단일화 국면에서 후보직을 일방적으로 사퇴한 이후, 오히려 안철수에 대한 여야의 쏠림 현상은 절실해지고 있는 국면을 맞고 있다.부동층의 향배가 다시 대선 정국의 핵심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 전 후보의 사퇴 이후 그를 지지했던 무당파와 중도층이 다시 부동층으로 돌아선 결과이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로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부동층이 늘어난 것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중도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가 박 후보에게 돌아선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안철수는 기존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정치판에는 혜성처럼 나타난 정치신인이다. 아직도 '정치'라는 단어를 그에게 붙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대선 이후에 정치를 업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엄연한 정치인이다.이 부분이 역설적으로 현재진행형인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다. 강고하게 자리잡은 기득 거대정당의 카르텔화는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표출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당이란 사회의 균열을 제대로 관리하고, 갈등이 제도권 내에서 수렴되며 일정 부분 사회적 합의로 도출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민주화 이전의 정치구도가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의 쟁투과정이었고, 군사권위주의적 정치문화가 관통했던 정치에서, 서구식 정당 일체감(party identification)과 이념적 정체성을 한국정치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이는 정부수립 후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성취된 1987년까지 불과 39년 동안 무려 9차례나 개헌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라는 기득정당의 체제에서 기존 정치에 식상한 무당파는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당연히 중도층일 개연성이 높다. 다른 범주에 속하나 개념적 친화력을 보이고 있는 중도무당파는 그래서 당연히 전통적 새누리당 지지도 아니고, 확고한 민주통합당 동조집단도 아니다.이러한 유권자군에게 안철수라는 존재는 그의 개인적 리더십이나 정치적 스타일과는 연계되지 않는 새로운 메시아로 나타난 것이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다. 즉 정당체제(party system)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표출시키지 못할 때 나타난 것이 안철수다.그가 지금 다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원의 대결에서 승패의 향배를 거머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행태는 기존의 정치문법에서 볼 때 흔쾌히 승복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18대 대선기간에 그는 어떤 행보를 할지, 야권의 승리를 위해 어떤 수위와 방법으로 역할을 할지 또다시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대선 이후 '정치인 안철수'가 그가 주창하는 새 정치와 정치쇄신의 아이콘으로 부활할 가능성 여부는 더욱 궁금하다.

2012-12-03 최창렬

아카사키 촌의 화분

아카사키 촌은 일본에 있는 마을이 아니다.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이 시려운 등을 기대고 사는 도시 가운데의 낮은 언덕배기 쪽방촌이다. 성장·팽창에 길들여진 사회더 많아지고 빨라지지 않으면불안에 빠져 증오만 키워이러한 '성장기 갈등' 해결너그러운 사회분위기 조성할진심·역량있는 지도자 그리워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자의 가슴에 아리게 그러나 훈훈하게 남아있는 그 마을은 일본식 이름이 말해주듯이 생겨난 유래부터 아픈 기억을 가진 '붉은 땅(赤琦)' 위에 지어진 일제치하 부두공사장 노동자들의 창고형 집단 합숙소였다. 해방 후 낡은 건물의 내부를 합판으로 얼기설기 칸을 치고 천장을 대어서 허리를 펴고는 들어갈 수 없는 2층짜리 쪽방을 만들어 갈 곳 없는 이들이 들어와 살았다. 아침이면 공동변소 앞에 줄을 서야 했다. 1989년 12월 말 동구청장으로 임명 받은 필자가 취임식에 가기 전 맨 먼저 방문한 곳이 거기였다. 초겨울 한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코끝이 매워서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가 설 곳이 여기로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있구나 하며 의지를 다잡았었다. 그러나 정말로 나를 울렸던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늘 순찰코스에 넣어 들르던 중에 쇠약한 노인네 두 분이 사는 칸에 갔을 때 집 앞에 나란히 열 지어 선 허름한 화분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직업 없는 남편과 초등생 아이들을 힘겹게 키우던 억척 아주머니네도, 막일 가서 아무도 없는 위칸 집에도, 집집마다에 옹기종기 투박한 화분들이 보였고 꽃들은 건강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화장실만 공동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물도 멀리 공동수도에서 길어다 써야 했었다. 이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작으나마 행복을 키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로 고마워서 눈시울이 적셔 왔다. 그 당시 그 희망의 싹은 온 국민의 것이었고 우리의 하나로 된 힘과 면면히 이어져 온 지혜의 각성을 바탕으로 아낌없이 쏟아 낸 땀방울은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나라는 발전의 터전을 굳게 했으며 국민은 가진 것이 있게 되었다. IT와 자동차를 넘어서 '강남스타일'이 세계인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어느 나라도 쉽사리 해내지 못했던, 국제사회에서 마음을 얻는 문화적 단계까지 지평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성장과 팽창에 길들여져 온 50년, 마치 마약의 금단현상처럼 더 많아지지 않으면, 더 빨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하다. 못견뎌한다. 남의 탓으로 돌린다. 증오를 싹틔운다. 그 부작용을 극복하지 못하면 넘쳐나는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우리 것이 아니다. 왜?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해 왔던 것일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인이 부러워할 만큼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 불만은 더 커져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자문하고 있다. 이 성장통은 성숙기에 접어들면 멈춰질 수 있을까? 성장기를 지나면 성숙기. 성숙기의 특징은 슬로 템포(slow tempo)이고 그것은 거스르기 어려운 과정의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인해 금단현상을 겪는다. 그 금단현상의 기간을 줄이고 성장통을 치유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넘쳐나는 싸구려보다는 작고 적지만 제대로 된 것을 추구하는 단계가 되었음을, 헤픈 씀씀이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소비를 체득해 가는 튼실한 가계의 보람을, 그리고 행복도 물량으로서가 아니라 내실의 진한 향기를 만끽하는 진정한 자아를 일깨우면서 나눔으로써 넉넉한 그리하여 너그러움이 각박함을 밀어내는 존귀한 사회분위기를 애써 설득하고 제도적으로도 만들어 가는 진심과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그립다.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성장기의 갈등에서 벗어나야 할 때 그 때가 된 것이다. 언제까지 불만 속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을 것인가.행복과 풍요는 가진 것에만 비례하지 않는다는 진실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큰 평등이요 은총임을 깨달을 때이다.

2012-11-25 박연수

과학과 종교는 다르기 때문에 상보적일 수 있다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달은 지구 주위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태양은 은하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아는 과학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태양이 떠오르고 달이 진다고 말한다. 한 해가 가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고 말해야 과학적인 발언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감각은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이는 태양에 더 민감하다. 지구가 자전(自轉)하고 공전(公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분명 우리의 눈에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보이고, 석양을 남기며 산 너머로 지고 있는 붉은 해가 보인다. 정월 초하루(설날)의 태양은 새해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를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소원을 빈다. 몸이 아픈 환자에게과학자로서 의사의 치료와성직자의 기도, 모두 필요해세계와 인간에 대한 다른관점아름다운 조화 이뤄가야사람들이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망원경으로 달의 분화구를 볼 수도 있지만, 계수나무와 방아 찧는 토끼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도 있다. 하늘에 맞닿아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분명 다르지만 모두 의미 있는 삶이다.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해묵은 논쟁거리이나 여전히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곤 한다. 특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은 우리 사회에서조차 '교과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계속 재연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모든 생명이 진화의 과정을 밟으며 인간도 진화의 산물로 본다. 창조론은 신이 인간도 생명도 세계도 모두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두 이론에 모두 다양하고 복잡한 견해들이 있고 더 많은 입장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주장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의 관점이고 창조론은 특정 종교의 관점이다.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과학적 탐구의 과정이고, 창조론의 수용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시간에는 과학적 이론인 진화론을 가르쳐야 한다. 종교적 설교 시간에는 창조론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창조 이야기가 과학시간에 가르쳐져서는 안 되고, 설교 시간에 진화론을 비판하는 것도 적절치 못하다. 망원경으로 달의 토끼를 찾으라고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며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까?중요한 점은 과학과 종교가 비록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사는 과학자로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한다. 성직자는 병의 치유를 위해 기원할 수 있다. 환자에게는 의사도 필요하고 성직자도 필요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들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할 수 있다. 음식은 영양가가 있어야 하지만 맛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과학적인 성과도 도움이 되지만 종교적인 믿음도 삶을 의미있게 할 수 있다.진화론의 주창자였던 찰스 다원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게 진화를 해온 생명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술회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을 최고로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생명을,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아름답게 보존하는 일에 진화론자도, 창조론자도 힘을 합칠 수 있지 않을까?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의사의 노력과, 환자의 구원이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성직자의 간절한 기도가 함께 어우러지는 호스피스 병동의 모습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아름다운 조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2012-11-19 류성민

한국 성씨의 진실과 거짓

최근에 성씨의 출자와 조상 찾기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다문화사회가 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혈연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현상으로 보겠다. 물론 그것이 긍정적 기능을 하지만 때로는 역기능도 한다. 조상과의 연계와 혈연의식을 표현하는 대표적 방법이 각 개인의 성씨와 이름을 통해서라 하겠다.한국인은 누구나 성명이 있으며, 성명에서 성과 본관은 소속 가문을, 이름은 흔히 가문에서의 세대수를 나타내는 항렬자와 각 개인을 구별하는 글자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성명은 개인의 구별뿐만 아니라 가문의 세대까지 드러내주는,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의 성씨에서 가장 큰 특징은 본관제도이다. 본관은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대개 고려초 이후 성이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달리하는 같은 성이 많이 생겨남에 다른 혈족의 성과 구별하기 위해 쓰이게 되었다.조선후기 신분 해방전까지인구 절반은 성씨 없이 지내격동의 시대에 위조족보 판쳐혈족 아니어도 동성동본 오인성씨에 대한 배타적 현창 보다사실 여부 검증 먼저해야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다른 혈족이다.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원칙론이지 실제는 예외가 많아 대단히 복잡하다. 씨족의 뿌리를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달리하는 성씨가 있고, 반대로 다른 혈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동일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보니 실제 동일 직계는 물론 친족도 아니면서 동성동본으로 오인된 경우가 있다. 그 연유는 후대에 여러 이유로 고치고 바꾼데 있지만, 그 중에는 처음 고려 태조가 사성과 사관하면서부터 그렇게 유래된 것도 더러 있다.태조의 사성은 특정한 세력가 개인에게 준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그의 친족 구성원과 집단에 포함된 일정지역의 모든 양민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공신들과 고위관료 및 협조한 세력가들에게 출신지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내렸다. 그리고 전국 군현을 개편하여 명칭을 변경함과 더불어 각 지역의 토착 유력층에게 토성을 분정하고 본관을 사여하면서 지방사회를 재편성해 나갔다. 그 실질적 작업은 호적의 정리 작성으로 이루어졌다.이러한 사성과 본관 사여 및 호적 작성은 곧 국가의 구성상 필수요건인 백성들에 대한 파악을 전제로 하면서 후삼국시대 심각한 사회적 현상의 하나였던 유이민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성씨 시조를 일정한 지역단위에 본관의 수호신으로 인정하여 공동 시조 내지는 수호신으로 제사를 행함으로써, 지역단위의 공동체의식을 고취시켜 주민의 안정을 도모함과 여기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택리지'에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여, 우리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초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반민과 하층민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성씨가 없는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인구의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치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 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자들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본관을 유력 가문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며, 더구나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본관과 시조를 중국의 같은 성씨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위조족보가 대량 작성되었다. 그리하여 무명 성씨나 신흥 세력들은 대부분 큰 성씨와 명망있는 가문에 투탁함으로써 기존의 큰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1894년 갑오경장으로 종래의 신분제가 없어져 성씨의 일반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의 시행으로 누구나 모두다 법적으로 성과 본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성이 없던 사람들이 새 성을 갖게 되자 호적담당 관리나 경찰이 임의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종전 주인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을 거치면서 모든 한국인은 성과 본관을 갖게 되었고, 또 모두 양반성씨가 되고 훌륭한 가문이 되어졌다.현대사회에서 문중과 사람들은 조상과 성씨를 배타적으로 현창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 성씨의 변천이 이러할진대, 맹신적 행위보다는 우선 스스로가 그 사실 여부를 검증해 봄이 어떠할지?

2012-11-11 김창겸

'스윙 보터'의 선거

어느 선거나 부동층의 향배가 승패를 가른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어느 선거보다 부동층이 줄어들고, 대신 '스윙 보터'라고 불리는 유동층이 선거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10%내외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 변동은 그래서 거의 한 달째 고착화된 상태이다. 통념적 분석은 각 후보의 공약이 결정적 차별성을 드러내지 않고, 정수장학회와 NLL 공방, 야권후보 단일화, 여성대통령론, 투표시간 연장 관련 등 정치공학적 접근이 유난히도 대선 정국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지지율의 고착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16대, 17대 대선때의 수도 이전이나 대운하와 같이 대선의 명운을 가를 대형 공약이 없는 것을 이유로 꼽는다.한국정치 관통 '진영논리'보수 vs 비보수 구도 양분후보3인 지지율 고착화정책·공약도 큰영향 못미쳐10%내외 변덕스런 유동층승패 좌우할 키 가져그러나 유심히 들여다 보면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진영논리가 주범이다. 한국정치의 기본 지형은 보수와 진보의 양립 구도가 아니라, 보수 대 비보수의 구도이다. 현재의 정당체계로 보면 새누리 대 비새누리의 얼개로 짜여져 있는 형국이다. 진보가 집권했던 15대 선거는 DJP 연합으로 진보 진영이 승리할 수 있었다. 이는 보수의 분열로 인한 보수 진영의 패배로 보는 것이 야권의 단일화로 보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다.보편적 분석과 전망에 의하면 결국 이번 대선의 표심은 40대와 50대 초반이 좌우할 것이라고 한다. 대학시절에 민주 대 반민주의 정치구도를 타파하는 대열에 섰던 나이든 386이 현재의 40대 중후반과 50대 초중반이다. 지역적으로는 수도권을 꼽는다.그러나 이는 어찌보면 도식적 분석이다. 부산도 대선의 향배를 가를 지역이라고 하고, 충청은 영원한 캐스팅 보트다. 호남은 또 어떤가. 야권 지지의 정치적 상징이지만 지난 총선때 새누리당의 약진도 돋보였던 지역이다. 제주와 강원은 유권자의 비율은 적지만 어차피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이번 선거에서 어느 지역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러한 분석은 대선의 핵심을 관통하지 못한다.박근혜 후보의 갈 길을 더디게 만들곤 하는 이른바 '과거사' 논란은 생각보다 박 후보의 결정적 아킬레스건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설적 현상이다. 유신에 대해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과 '정치발전을 지연'시켰다는 인식을 보인 것은 나름대로 진전된 발언이라고 보자.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관련 발언에서는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박 후보의 지지율이 결정적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여론조사 시기와 기관에 따라 지지율의 혼조가 보이긴 하지만 세 후보의 대결구도에서 대체로 박 후보는 40%대, 문 후보와 안 후보는 20~25%대에서 고착되어 있다. 양자대결 구도에서는 40~45%대로 여야 후보 지지율의 등락이 엇갈린다. 웬만한 정치적 충격이나 반전의 카드로는 지지율의 고정화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45%대의 보수층은 박 후보의 어떠한 실수에도 관대하다. 정책이나 공약은 별로 의미가 없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냈던 '노사모'의 응집력 못지 않게 표의 충성도를 자랑한다. 그것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장 시대에 대한 회고적 지지에 기반하거나, 봉사와 배려의 아이콘처럼 인식돼온 고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 후보에 대한 중첩적 이미지가 작동했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야권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지지층, 또는 집토끼라고 정치권에서 표현하는 지지층은 야권의 어떤 실언이나 실수에도 관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한국정치를 퇴행적으로 몰아가고 있는 이른바 진영(陣營)논리다.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구도의 정치적 잔재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성장 이데올로기와 안보논리가 정권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했던 어두웠던 시대의 잔영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 대결은 선거 정국을 좌우할 추동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유권자들은 정책이나 공약을 따지려 들지 않는다. 결국 대선이 사회적 합의와 국민적 지향을 도출해 내는 정치 과정이 아니라, 양 진영의 차이를 확인하는 선거공학으로 일관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번 선거도 결국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10% 내외의 '변덕스런' 유동층(流動層)이 승패를 좌우할 키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18대 대선은 이래저래 '스윙 보터'의 선거이다.

2012-11-04 최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