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원화 한류'를 기다리며

10월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경상흑자는 총 422억2천만 달러로 같은 기간 일본의 415억3천만 달러를 제쳤다. 이것도 사상초유의 일이다. 10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3천432억3천만 달러까지 증가하여,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최근의 원화가치 상승은 이러한 한국 경제의 실적을 바탕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를 믿는 마음이 반영된 측면도 있으므로 가슴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약간의 뿌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화가치의 상승은 수출업체들에게는 바로 수주물량의 감소와 채산성의 악화를 의미하는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하반기 들어 다른 통화들에 대한 원화가치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6월 이후 5개월간 달러, 엔, 위안화 등에 대해서는 약 10% 가까이 상승하고, 인도네시아 루피에 대해서는 약 20% 상승하고 있다. 환율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제공하는 수출보험 가입, 파생상품 시장에서 선물환계약을 통한 환리스크 헤지(hedge) 등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원화로 수출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환율변동으로 인한 수익성 불안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는 최근 인도네시아(100억 달러), UAE(54억 달러), 말레이시아(47억 달러)와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고 호주와 조만간 통화 스와프를 추진하고 있다. 종전까지 통화 스와프가 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 강했던 데 반해 이번 통화 스와프는 서로 자국 통화로 교환하는 LC(Local currency) 통화 스와프 방식을 통해 무역 결제 기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2월 중국과 체결한 560억 달러 상당의 한·중 통화 스와프도 위안화와 원화 간 스와프 방식이다.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는 지난달 25일 공식석상에서 "중국이 23개국과 스와프를 맺어 위안화 시장을 만든 것처럼 최근 3건의 통화스와프 체결은 원화 국제화란 큰 길에서 작은 걸음을 뗀 것"이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바가 있다. 한국은 한 해 수출입이 1조 달러를 넘는 세계 8위 무역대국이지만 원화 국제화가 이뤄지지 않아 무역대금의 결제에 막대한 거래비용을 부담하여 왔는데, 이제 원화 결제가 확대되면 환리스크 축소와 더불어 거래비용 절감효과도 기대된다.원화의 국제화란 우리나라 통화인 원화가 가치저장 수단과 지급결제 수단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원화가 결제 수단으로 인정 받는 것과 가치저장 수단으로 인정 받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외국의 수출업자가 원화로 수출대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그 원화를 투자할 수 있는 국채시장이 획기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 달러화의 경우 발행액의 40~60% 가량이 외국에서 국제화폐로 수요되고 있다고 한다. 원화발행액 중에서 국제화폐로 통용되는 금액이 증가하는 만큼 국채시장이 확대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국채시장에 외국투자자의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국내 자본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는 것이고, 국채시장에서 발생한 유동성은 각 단계의 금융시장으로 파급되어 전체적인 금리인하를 가져오는 '원화 국제화 특수'가 기대된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시뇨리지(Seigniorage) 효과' 라고 한다.외국인들이 가치저장 수단, 지급결제 수단으로 널리 인정하여 원화의 국제화가 나날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보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보다 낮은 환율변동성이 필수적이다. 이 또한 정책당국에는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지만 국민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덧붙여 원화의 국제적 통용으로부터 오는 국민적 자부심은 그 가치를 얼마로 셈할 것인가?2013년 11월, 세계 경제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하며 시계가 불투명하다. 불투명을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원화 한류'를 기다린다./옥성수 부산경제진흥원, 경제동향분석센터장

2013-11-15 옥성수

청와대 대문의일본식 석등을 철거하라

10월 21일 나는 패배했다. 물론 나는 이길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침묵하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선택한 승부였다. 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서슴없이 소송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대한민국 권력의 최고 심장부 청와대 대문에는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사에 따르면, 궁궐이나 민가에 석등이 설치된 전례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석등은 묘지나 사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석등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조명기구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로 설치되는 구조물이다.다시 말해 청와대 대문의 석등은 최소한 우리 문화적 전통에서 볼 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 우리는 청와대 대문의 석등 양식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일본 신사의 양식이란 사실과 조우하게 된다.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궁궐 건축은 일본식 조경에 많이 오염될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궁궐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어 지속적으로 철거되어 왔다. 최근에도 창덕궁 앞의 일본식 석등, 환구단의 일본식 석등, 국립서울현대미술관의 일본식 석등 등이 잇달아 철거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 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곳에 짓는다. 따라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할 때, 청와대가 일본식 조경에 오염될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이미 학계와 문화재청에 의해 '일본식 조경' 문제가 지적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일본식 조경이 철거되거나 개선된 것에 반해,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흐름들에 힘입어 나는 2013년 1월 청와대의 석등에 대해 철거를 요청하는 소장을 서울중앙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청와대 석등이 일본식 석등으로부터 파생한 것인지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실조회를 신청했었다. 문화재청은 석등은 궁궐 조경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사찰과 묘지에만 나타나는 점, 일본 신사의 출입문에 석등이 설치된다는 점, 그리고 청와대 석등이 일본 신사의 석등과 유사성을 일부 보이는 점 등을 인정했다.그러나 재판부는 끝내 청와대 석등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의 한 사람이 정부기관의 구조물에 대해 철거를 신청할 민사상의 권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되돌이켜 보면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시점에도 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상대로 무모한 소송을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국과수에 보관된 여성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라는 소송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일제시대 유명한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명월관 기생 명월이가 사망한 뒤, 일본 경찰이 성적인 호기심에 의해 명월이의 생식기를 절취, 인체 표본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확인 결과 소문은 사실이었다. 나는 성적 호기심에 의해 여성생식기를 표본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표본의 파기와 장례절차를 봉안해 줄 것을 사법부에 요청한 것이었다. 사법부는 국과수에 대해 표본을 파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화해권고를 제시했고, 국과수는 이를 받아들여 여성생식기 표본을 파기했다. 재판에는 졌지만 이른바 패배가 결국에는 승리로 이어진 셈이었다.청와대의 정문은 우리나라 얼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와대 정문이 솟을대문과 같은 모습으로 건립된다면, 경복궁의 풍광과도 어울릴 뿐만 아니라 전통의 한국미를 고상하게 풍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전통양식을 배제하고, 굳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 같은 일본식 석등을 언제까지 그곳에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즉각 항소를 결정했고, 조만간 고등법원에서 청와대 일본식 석등 철거의 2차전을 준비중이다. 문득 언젠가 청와대 앞길에서 한국미가 물씬 풍기는 전통 솟을대문을 만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꿈꾸어 본다. 어쩌면 나는 고등법원에서도 또다시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의 패배가 영원한 패배는 아닐 거라고./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2013-11-07 혜문

인생이라는 긴 여행

올해에도 어김없이 풍성한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른 추석이 지나고 추수를 하는가 하였더니 단풍이 들고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그냥 일상에 빠져 달리기만 하였던 예전과는 달리 올 가을엔 왠지 허전하고 가슴 답답하다. 그래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되돌아보니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환희와 고뇌가 함께 하였고 성공과 좌절이 반복되었다. 신비로운 생명체로 태어나 신의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던 삶이 이곳에 던져졌고 목적지도 모르는 종착역을 향해 길고 긴 여정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인들이 무언가 의미있는 세월의 절점들을 만들어 자기성찰 기회를 주는 것 같다. 70세의 고희(古稀), 77세의 희수(喜壽), 80세의 산수(傘壽), 88세의 미수(米壽), 90세의 졸수(卒壽), 99세의 백수(白壽), 100세의 천수(天壽)라는 뜻이 주는 의미가 무겁다. 요즘은 80에 돌아가셔도 아쉽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지 모르겠다. 인생도 여행처럼 출발했으니 언젠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섭리일 텐데 어리석게도 무언가 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 같다.지난 여름 이름하여 회갑여행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평소에 가고 싶은 곳을 숙의하던 중 서유럽의 박물관이 있는 대도시를 가자는 데 동의하고 10여일 만에 여기저기를 주마간산격으로 점만 찍고 다녀왔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지를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여기를 또 갈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느낌도 든다. 여행 자체가 좋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그냥 허둥지둥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차분히 보고 느끼고 올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냥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이지 여행처럼 선택하고 준비하고 나중에 스스로 되돌려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알랭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하였다. 비행기나 배, 기차보다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유도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어려운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에 따라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빅토르 위고는 여행이란 지극히 아름답고 너무 커서 좁은 시야를 벗어나 버리는 어떤 것이라 하였다. 여행은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것이다. 따라서 여행은 우리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준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이라면 여행만큼 역동적으로 풍부하게 드러내준 것은 없다. 일상으로의 벗어남, 만남과 헤어짐, 현실과 로망, 새로움에 대한 열망, 일과 생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자주 나타나는 문제는 기대와 현실의 관계와 간극이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 특히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숱한 문제와 접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조언들이 있지만 어디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가? 모두 자신의 몫으로 던져진다.그런데 우리네 청년들은 어떤가. 취업을 위해 자신의 스펙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도 여행의 참 의미를 새겨 또 다른 여행에 도전해 보아야 할 때다. 실크로드를 걷고 차마고도를 넘어보며 히말라야 계곡을 트레킹 해본 자가 영어를 잘하는 자보다 더 창의적 사고를 하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잠재적 능력이 있지 않을까? 아프리카에 봉사여행을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평화운동 여행을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위해 진정 의미있는 준비가 아닐까./천득염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

2013-10-31 천득염

한상(韓商), 글로벌 코리아의 기수

19세기말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 그리피스는 조선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채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만 의존하여 조선역사에 대해 책을 쓰고 책명을 '은둔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 Corea)'이라 붙였다. 은둔이란 단어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나 결국 그가 서양에 소개했던 조선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무기력한 이미지의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무역으로 세계 10위권의 국가경제 규모를 만들어낼 진취적인 기상이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었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다시 태어나 세계 5대양 6대주 모든 곳에 진출하여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일구고 있는 우리 한인경제인들의 모험가 정신을 본다면 한국을 운둔의 나라가 아닌 어떤 나라로 소개할는지 궁금하다.한상(韓商)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5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이민사에서 한상은 1960년대 미주지역으로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출현하였고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한상은 아직 전체적으로 경제규모 면에서나 영향력에 있어 세계의 대표적인 민족 네트워크인 중국의 화상(華商)이나 유대인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상은 동남아와 미국에, 유대인상도 미국, 유럽, 남미 일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도 길다. 그들에 비하여 짧은 기간 중 한상이 보여준 성장세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일본에서 성공한 한상들은 물론이지만 아프리카 오지를 비롯하여 극도로 치안이 나쁜 중미지역, 문화적인 어려움과 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심한 중동지역, 보통사람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서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수 없이 많은 한상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근면 성실함으로 현지에서 뿌리내리고 경제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앞으로 한상이 성장할 잠재력은 무한하다.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현재 세계 175개국에 퍼져있는 700여만명의 재외동포를 연결하는 세계적 차원의 한민족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내경제와 연계될 때 그 시너지 효과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이런 한상들의 가장 큰 비즈니스 교류의 장인 제12차 세계한상대회가 '창조경제를 이끄는 힘, 한상 네트워크!' 슬로건 아래 오는 29일부터 사흘간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해외 한상 1천여명, 국내 기업인 2천여명이 참석하게 되는 이번 대회는 식품외식, 첨단 IT, 섬유 패션 등 분야에서 기업 전시회,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 국내 중소기업들과 멘토링 세션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해외에서 온 한상들과 국내 경제인들이 전문정보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상생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한민족 경제인 네트워크'의 확장을 도모하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그동안 대회를 거치면서 세계 한상네트워크의 주축이 되어온 1세대 한상과 꾸준히 대회에 참석해왔던 한상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묵묵히 활동하고 있는 신진한상들이 참여함으로써 계속 확대 발전하고 있는 한상 네트워크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45세 미만의 한상들의 교류모임인 영 비즈니스 리더 네트워크(YBLN)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젊어진 한상대회가 될 것이며, 이들이 국내 청년 기업인들과 함께 하는 모임은 모국과 재외동포사회가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글로벌 한민족네트워크의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오늘날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국가 간의 경계는 흐려지고, 민족 간 유대가 강화되고 있다. 또한 국가보다는 지방자치정부, 기업, 개인이 경제활동의 주체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모든 나라가 해외에 있는 자신들의 민족 집단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는 이유이다. 얼마 전 이민관련 학술모임에 참석차 서울에 온 한 그리스 학자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화시대에 세계를 아우르는 민족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한민족 동포사회는 한국의 미래에 큰 축복이라고 했다. 한상들이야 말로 국가경제영토 확장의 상징이요 글로벌 코리아의 기수이다. 제12차 한상대회의 성공을 기원한다./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전 브라질 대사

2013-10-24 조규형

다양한 개성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팔공산 부근의 후배 시인 댁에서 야생화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다. 칠월말의 정원은 스산한 느낌이었다. 담장을 수놓고 있는 능소화 외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화원의 주인은 40여년 야생화를 가꿔온 고수답게 야단스런 수사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모든 꽃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화원은 넓이의 한계가 있어 필요한 것을 그 꽃의 특성에 맞게 심고 그 특성에 맞게 관리한다는 것, 재배할 자신이 없는 꽃을 아무 곳에서나 구해 와서 심어놓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잔잔하게 설명했다. 들꿩나무는 물을 많이 요구하고 산수국은 수정이 되고나면 돌아앉고 능소화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식물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 있고 음지에서도 잘 피는 꽃이 있다. 계절 따라 피는 시기도, 색깔도, 모양도, 다른 것이 꽃이다.돌아올 때 내 등 뒤에 흘리던 말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분에 담아 키워서 가끔 선물로 드렸지만 지금은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왜 주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우선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꽃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화원은 철저한 계획하에 짜여진 것이어서 어느 꽃 하나도 빠져나가면 전체의 조화가 깨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가꾸어온 많은 꽃들은 그 꽃 각각의 특성으로 그 화원의 아름다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꾸 되새겨진다. 가령 우리 한국시단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아서 좋을 수가 있다. 다만 그 많은 시인들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증명할만한 개성적인 작품을 쓰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 경우는 화가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할 기준이다. 대가들의 흉내를 내는데 평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 아예 시인이나 화가나 음악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울만큼 못 미치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만의 향기를 지닌 작품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이 자명한 이치를 다시 되뇌이며 곰곰이 주위를 살펴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건 개성의 발화를 오히려 방해하는 일들이 대세처럼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대학의 특성화란 대학의 개성 확보를 위한 몸부림이다. 잘 되고 있는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각 지역마다 제법 수준 높은 대학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 '서울대학'이라는 세인들의 인식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부동의 명문대가 우수 학생을 독점해 왔지만, 내실면에서 그다지 발전한 것 같지 않다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취직 안 되는 학과들이 퇴출되고 있다. 철학과·독문과·불문과에서 드디어 국문과까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좋건 싫건 여러 사정을 살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까지 안정을 찾기 어렵다. 로스쿨, 의학대학원의 출현은 그 영향력이 가히 태풍급이다. 바람직한가? 이런 세태에서 열심히 한 길로만 가면 된다고 충고한들 묵묵히 자신의 길로 갈 수 있을까?인간은 본능적으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그 다양한 가치야말로 인생의 풍요로움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서열화를 부추긴다. 획일화를 부추긴다.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학생에게도 성적이 우수하면 법대를 가게하고, 물리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학생에게도 의대 지망을 강요한다. 결국은 권력을 쥐고 돈을 버는 학과를 학생에게 강요하여 스스로 가고 싶은 길을 막는다. 도시 문화행사에도 내실있는 행사, 개성을 살릴 수 있는 행사보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행사, 인기있는 분야의 행사를 선호하게 된다. 여기에서 획일화의 무서운 부작용을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의 미래를 꿈꾸며 설계할 학생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다양한 개성으로 풍요로워질 도시문화가 멀어진다.문득 야생화를 그 특성에 따라 심고 가꾸던 팔공산 그 화원의 주인이 더 크게 떠오른다./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2013-10-17 이우걸

도쿄에 잡혀간 조선 국왕의 투구를 보다

한마디로 좀 놀랐다. 2013년 10월 1일 설레는 마음으로 도쿄 국립박물관 동양관 전시실을 들어섰을 때, 그토록 바라보고 싶었던 조선 국왕이 착용한 '대원수 투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황금 용문양과 백옥 장식을 넘어서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투구를 직접 보기 직전까지 이것이 조선왕실에서 대대로 고종까지 전래된 '조선 대원수 투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어서 질문하던 기자들 조차 더 이상의 의심을 접었다. 투구에 서린 장엄한 아우라는 군신(軍神)의 수호가 함께 하는 제왕의 투구임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2010년 10월 '조선왕실의궤 반환절차'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도쿄에 갔을때, 문화재 환수운동의 협력관계에 있는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 이소령 선생님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제시대 도굴왕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직접 유물의 출처를 기록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란 책을 구했다고 했다. 이소령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을 펴자마자 나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용봉문 투구에 대한 출처부터 확인해 보았다. 오구라는 이 투구가 '조선왕실의 전래품'이라고 기재해 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막연한 추정만 있었던 '제왕의 투구'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기록은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근거까지 제시해 주고 있었다.조선왕실의 소유품이라면 개개인의 매매로 유통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궁내부장관'이란 부서가 조선 왕실의 유물과 재산을 관리했으므로, 허가없이 왕실의 물건이 민간이나 해외로 유출되는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하물며 '임금의 투구'와 같이 상징성 큰 물건이 매매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도굴 혹은 절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였을 것이다.그날 이후 나는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 문제를 제기키 위해 '조선 대원수 투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이 투구의 특별열람과 공개를 신청해 왔다. 그리고 여기에 더 큰 명분을 갖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한편 고종의 후손인 황사손 이원씨를 찾아가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해 왔다. 그런데 뭔가 중간에서 일이 틀어져버렸다. 일본 시민단체, 국회의원 그리고 문화재제자리찾기 등과 함께 협력하면서 도쿄 국립박물관에게 특별열람 허용과 오구라컬렉션의 문제를 제기해 오던 황사손의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황사손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난 수년간 노력해 왔던 사람들과 협의없이 2013년 2월 일본에 가서 비밀리에 단독으로 '특별열람'을 했다고 했다. 그분이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한다. 황사손 이원씨가 단독열람이후 소극적 자세로 전환하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측도 민족문화재 환수란 주제로 이 운동을 전개할 의향은 없는 듯했다.2013년 2월 중순 어쩔 수 없이 나는 일본 사람 8명과 동시에 도쿄국립박물관에 열람신청서를 접수하고, 더 이상 공개를 거부한다면 '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최후로 통첩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도쿄 국립박물관으로부터 뜻밖의 낭보를 전달받았다. 2013년 10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 한시적으로 '조선 대원수 투구'를 공개하겠다는 통보였다. 드디어 조선 최고 군 통수권자인 '대원수 투구'를 직접 보게 되겠구나! 나는 어린아이처럼 몇 달간 마음이 설레어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며 도쿄로 향했다.대원수 투구를 본 뒤 일종의 놀라움과 분노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가시지 않는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군 최고 통수권자의 투구를 어떻게 탈출시켜야 하는가! 끝도 없는 고민을 놓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도쿄에서 조선 국왕을 만난 분노는 아무래도 가시지 않고, 무심히 방관하는 우리 정부에 대한 원망이 피어 오른다. 무턱대고 나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아래와 같은 짧은 편지를 보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 것일까 !"일본 국민의 양심에 묻습니다. 나는 왜 일본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한때나마 조선의 국왕이었습니다." -조선 대원수 투구의 고백/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2013-10-10 혜문

우리의 행복지수가 말해 주는 것

국민의 행복감 정도를 조사하는 전문 기관들이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는 그야말로 들쑥날쑥이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발표된 유엔의 2013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조사대상 156개국 중 41위를 기록하였다. 그 이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갤럽 조사에서는 146개국 중 97위를 한 적도, 몇 년 전에는 100위 밖으로 벗어 난 적도 있다. 한편 이번 유엔 보고서는 가장 행복한 국가들로 덴마크를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을 꼽았는데,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은 오래전부터 부탄, 방글라데시, 파나마, 쿠바 등 동남아와 중남미 저개발국을 행복지수 상위권의 국가로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행복지수 150위, 개인소득 4만 달러의 싱가포르를 최하위 권으로 평가한 기관도 있었다. 이는 조사기관의 평가기준이나 조사방법이 다른 탓이겠으나, '당신은 행복 합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이 각각 해석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문화권별로 가치와 관습이 다르고, 또 행복이란 지금 내가 처한 상태에 대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에 비하여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문화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질 높은 삶, 좋은 건강, 안정된 미래를 위하여 많은 소득과 사회적 성취를 원한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재산과 성취에 만족하는가 하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밀(John S. Mill)은 사람은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듯 우리는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이든, 성취감이든 내가 가진 것을 내 주변 이웃의 것과 비교하여 만족감 또는 불만을 느낀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남과의 차이를 더 의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니, 경쟁의 룰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면 상실의 불만은 분노로 변하고 사회의 행복지수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어제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도 개인의 행복감을 좌우한다. 사람은 과거보다 좋아진 나를 발견할 때 만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이다. 수십억원의 로또 당첨자의 행복감이 대부분의 경우 짧게 끝나고 마는 이유는 로또 당첨 행운과 함께 온 재산과 변화된 생활방식이 앞으로의 행, 불행의 비교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봉 인상, 승진, 결혼, 주택 구입 등 행복해질 수 있는 요건을 이루었을지라도, 이 성취는 조만간 평소의 상태가 되고 성취에서 왔던 만족감은 이내 사라진다. 그리곤 다시 지금의 자신과 앞으로 예견되는 자신을 비교하고 미래에 기대를 갖거나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당연히 미래에 낙관적인 사람이 많은 사회의 행복지수는 높다. 유엔의 보고서를 작성한 컬럼비아 대학 지구연구소가 북유럽 국가들을 톱5로 판단한 것도 이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성장 잠재력과 복지제도가 국민들로 하여금 미래에 낙관적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편 시장경제의 경쟁구조가 초래하는 불평등에서 오는 갈등과 불만은 사회적 통합과 공동체 의식을 저해하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기 어렵다.행복지수 평가 결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때만이 사회 구성원의 행복감이 높은 공정사회로 가는데 요구되는 법의 지배, 도덕과 윤리, 관용과 개방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 물질 만능의 풍조 속에서 우리는 흔히 경제성장을 단순히 소득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지속적 경제성장은 금전의 문제를 넘어 전반적인 사회발전에 필요조건이 된다. 정체된 경제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 양보와 타협, 협동이 어렵게 되고 이런 상태에서 불평등 해소, 공동체 의식 함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전 브라질 대사

2013-10-03 조규형

길로 소통하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참으로 많은 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시 로마가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적 물적자원이 중심인 로마에 있고 이들이 서로 지역을 달리하여 쉽게 통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로마의 길은 원래 군사적이고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국 로마를 통치하는 방법은 법과 군사력에 의한 엄격한 규율이었다.흔히 비단길이라고 부르는 실크로드는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을 이어준 육해교통로를 말한다. 말이 실크로드이지 목숨을 건 머나먼 행로였다. 이 길은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길이고 문물을 거래하는 길이며 종교적으로는 포교의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25) 때이다. 한무제는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장건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의 동편에 이르는 서방 각지와 문물이 왕래하게 된 것이다.기독교가 번성하였던 중세이래 유럽인들은 크고 작은 많은 순례지들을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성지순례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속죄를 위한 중요 수단이 되었다. 본인이 신체적으로 불편하면 대리인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 어디로 순례를 다녀왔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예루살렘이 최고의 등급이고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 다음 등급이었다. 특히 북부 유럽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고 1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북부의 모든 길은 이곳으로 이어졌다. 순례자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는 대성당을 찾았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750㎞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장대한 산악지대와 고풍스런 마을들, 숲으로 뒤덮인 길을 걸어 성지에 도달하는 영적 희열은 대단하다.우리에겐 어떤 길이 있었을까? 요즘 경주에서는 문화엑스포의 일환으로 경주와 이스탄불을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가 아닌 경주에서 시작점을 잇는 실크로드이다. 8세기의 신라승려 혜초는 요즘의 인도인 천축을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썼다.한반도 서측의 해안에 형성된 고대 해양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잇는 길로 가장 활발한 문물의 교통로였다. 고대에는 육지에 가까운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중국에서 한국에까지 약 2주정도 걸렸다한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조류와 풍향에 따라 2, 3일 이내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배에서 수많은 송대 도자기가 실려 있어서 많은 상선이 드나들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길은 여기저기 생기게 마련이다.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왜군이 부산에 다다른 20여일만에 한성이 함락되었다. 오랜 평화를 믿고 이율곡의 십만 양병론 등을 무시하며 전쟁준비를 게을리한 탓도 있지만 당쟁에 국력이 쇄진해졌으며 세계와의 소통에 소홀한 까닭에 당한 굴욕이었다. 조선시대 각지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는 선비는 얼마나 걸렸을까? 걸어서 열심히 가노라면 약 2주면 족하지 않았을까? 목포와 신의주를 연결하는 국도1번길은 이제 추억의 길이 되었다. 새로운 고속도로가 개설되었으니 그 역할을 내준 셈이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을 지나고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여행을 하고 싶다. 언젠가는 통할 길이다.요즘 사회의 여러 현상이 모두 막혀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막힘은 단절이요 이어져 뚫림은 소통인데 어찌 모두 닫고 살려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홀로 있지 않고 남과 연계속에서 소통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가치가 서로 이어져야 더 높은 가치를 낳는 것이다. 정치는 대화가 중지되었고 경제는 선순환이 되지 않아 계층간에 갈등이 심하니 국민의 삶이 갈수록 어렵다. 국민들의 얼굴이 근엄하고 웃음이 적은 것도 소통이 잘되지 않음일 것이다. 소통으로 길을 열 지도자는 없는 것일까?/천득염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

2013-09-27 천득염

노산과 가고파

노산 이은상, 현대시조 개척의 선구자다. 특히 1932년 발표된 '가고파'는 김동진이 작곡하여 고향이 어디에 있건 향수에 젖어들면 누구나 부르곤 하는 국민 애창 가곡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지 81년 만인 올해 마산역장은 문화적 관문으로 역의 분위기를 가꾸고자 하는 의욕에서 '가고파'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성지 마산을 부르짖는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시비 존폐문제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차제에 '가고파' 시비 존립의견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갈등 종식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고 싶다.첫째 '가고파'는 작가의 생애보다 작품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산의 관문인 마산역에 '가고파' 시비를 세운 뜻은 정감 있고 아름다운 마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노산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 국민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고, 미항 마산의 모습을 잘 알릴 수 있는 시로 '가고파'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둘째 노산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때 '친일혐의' 운운하면서 워낙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서 지금도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은상은 올려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타계한 노산의 일생을 살펴볼 때 일제통치 36년이 그대로 그의 생애를 관통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투사였다.셋째 노산은 권력에 연연한 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산의 중요 프로필을 보면 대학교수, 언론사 간부, 문화단체 회장을 지낸 것이 대부분이다. 그가 권력에 집착했다면 장관이나 총리,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넷째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노산은 일제하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조국을 잃고 젊은 날을 보낸 그에게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산문, 그의 시조 편편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펼치며 문필생활을 영위했다. 그가 친정부적이었고 독재옹호에 기여했다는 비판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노산의 편에서 바라본다면 억울할 수 있는 것이다.다섯째 3·15에 대한 노산의 견해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마산 일부 시민단체가 노산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3·15에 대한 노산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다. 그 불만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1960년 4월 15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마산 사건의 수습책'이란 제목의 기사다. 여기에는 6개 항목의 설문에 대한 국가 원로들의 답변이 실려 있다. 이은상은 다른 원로들과 다른 태도에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다른 태도란 가장 적극적인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이다. 고향을 생각하는 노산은 사실상 정부의 총사퇴를 주장하면서도 고향 마산사람들에게 피해가 최소화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3·15가 민주주의 역사의 발자취로 인정받고 교과서에까지 기록된 지금 우리가 보는 3·15와는 다르게 그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의 노산의 심정을 배려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노산은 조국과 고향 사랑의 마음을 가장 절실하게 시조의 가락에 담아낸 시인이라는 점이다. '가고파', '옛동산에 올라'가 고향사랑의 노래라면 '길이 끝났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등은 조국사랑의 노래다. 수많은 강연과 산문 집필을 통해 청년들에게 국가관을 심어주었고 스스로 국토의 구석구석을 밟으며 노래로써 의미를 새겨 놓았다.그러나 노산인들 한 인간으로서 어찌 결함이 없었겠는가. 우리가 지금 '가고파' 시비를 지키려 함은 완전한 노산의 생애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고향을 사랑하고 각박한 현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시정(詩情)에 젖어가며 오늘의 고달픔을 이겨나가자는 데 있다. 이런 소중한 의미라면 돌에도 마음에도 새겨 간직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2013-09-12 이우걸

경복궁 이승만대통령 낚시터

2012년 7월 청남대에서는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가 열릴 즈음, 그 분과 관련된 희귀 사진들이 대거 전시공개되었다.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희귀사진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뜻밖에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대통령이 창덕궁 정자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낚시질을 하는 사진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 취미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가설에 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은 낚시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우스갯소리중 그 유명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도 낚시중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이 농담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에서 낚시를 즐기던 중 있었던 일로, 지금도 그 장소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 및 정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화진포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도 낚시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양을 위해 찾았던 화진포 별장에는 생전의 유품들을 복원해서 생동감있게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이 사용하시던 낚싯대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화진포 별장에서 즐겨 낚시를 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는 듯했다.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도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일 오전 8시경 대통령은 창덕궁 후원에서 낚시를 하던중, 황급히 달려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사실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그 분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4·19 의거에도 낚시가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전국민의 분노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던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도중 사라진 17살 남학생의 주검이 발견됐다. 어떤 낚시꾼이 마산항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시위중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었다. 당시 김주열 군의 주검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 김주열의 죽음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분노의 폭발점이 되어, 마침내 4·19를 통해 12년간 장기 독재하던 이승만 정권의 숨을 끊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한뒤 병사할 때까지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최근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취미 때문에 문화재청과 논쟁중이다. 경복궁 경회루 옆 하향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조선시대 지어진 정자가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질을 위해 지은 정자란 소문이 있었다. 최근 설마 진짜 그러기야 하겠냐는 반신반의 심경으로 문화재청에 사실 확인을 요청해 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사실이었다. 경회루 옆 하향정은 조선시대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여가와 휴양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대통령이 낚시질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든 것은 아직도 하향정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현실이었다. 경복궁 복원과 보존에 대한 문화재청의 행정원칙은 1894년 경복궁 중건 당시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증자료 없이 경복궁의 원형에 일방적으로 손상을 가한 대통령의 낚시터는 마땅히 철거되어야 할 것이 아닐까? 게다가 하향정이 마치 조선시대 궁궐의 일부였던 것처럼 아무런 설명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0보를 양보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경회루에서 낚시질을 하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그다지 흔쾌한 일은 아닌 듯싶다.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동안 경복궁 경회루 옆에 잘 있었으니 그 또한 역사의 일부이고 소중히 보존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그도 그럴법 하다. 그렇다면 썩은 이빨은 왜 뽑고, 보기싫은 흉터는 왜 성형수술을 해야 하는걸까? 썩은 이빨과 보기싫은 흉터도 자신의 몸의 일부이고 인생의 자취일진대, 왜 사람들은 제몸을 함부로 뽑고 고치려고 하는 것일까?경복궁의 하향정은 우리 시대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헌법 전문에 규정한 대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해서 세워진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지. 껍데기는 가라!/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2013-09-05 혜문

새 시대를 여는 한민족네트워크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개인·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민족까지도 네트워크를 통하여 소통의 기반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네트워크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낳고,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여 하나의 허브를 만들고, 서로 다른 허브들이 연결되어 더 큰 네트워크를 만든다. 1+1=2로만 인식되던 것이 100도 되고 무한대(∞)도 되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사회적 연결고리'(social connectedness)가 활성화된 결과이다.그런 시각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자. 150여년 전, 당시 조선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내 나라를 등져야만 했던 해외 이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집단이주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국권 상실과 함께 졸지에 외지에서 나라 없는 백성이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제동원, 강제이주, 징병 등등의 이유로 원하지 않는 해외 이주가 계속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남북이 갈라지고 국경이 가로막혀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 없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사람들의 해외이주는 계속 되었다. 해방 전 이주는 자기의사에 반한 이주였거나 국내 사정이 워낙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강제이주라면 해방 이후의 이주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해외이주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오늘날 전 세계 170여개국에 720만명에 이른다.그렇지만 태평양바다 건너에서, 중앙아시아와 동북만주에서, 일본열도에서, 그리고 5대양 6대주 이역의 땅에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이 살고 있을 걸로 생각했던 나라를 떠난 이들과 그 후손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쿠바의 한인 후손 3~4대들이 인천의 이민박물관을 방문하여 100여년 전 제물포를 떠났던 선조들의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면은 그들이 이제 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우리와 뿌리를 같이하는 한민족의 후손임을 말해준다. 또 특기할만한 것은 한인들 대부분 어느 곳이고 할 것 없이 각자의 거주국에서 성실과 강인함으로 수난과 차별을 극복하고 주류사회 속으로 꾸준히 파고들어 오늘날의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이다.아직 우리 주변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들어 재외동포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재외국민용 주민등록증 발급, 복수국적 허용연령 확대, 우수동포인재 유치, 한글교육 및 한국문화·역사교육 확대, 분야별 전문네트워크 확충 등 재외동포를 싸안으려는 정부의 노력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해외동포를 품어야한다는 국민공감대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역이민동포, 국내체류·취업동포, 영주귀국동포, 국적취득동포, 국제결혼가정자녀 등 다양한 유형의 디아스포라를 글로벌 한민족공동체라는 큰 틀 안으로 통합하려는 뜻있는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민족네트워크의 소중한 일원으로서 우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잠재력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정부는 국익과 국민행복의 관점에서 정책과 사업의 우선순위를 재검토하고, 재외동포의 정체성과 뿌리의식을 함양하는데 힘을 쏟아야한다. 이미 구축해 놓은 재외동포사회 내 각종 네트워크를 더욱 확대하고 모국과의 연결밀도를 더욱 정교하게 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더 큰 대한민국, 희망의 새 시대'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역할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와 시각이 요구된다./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전 브라질 대사

2013-08-29 조규형

근대유산과 인문학을 통한 도시재생

인간이 집짓기를 시작한 이래로 그들의 희망은 안전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집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동물이나 곤충까지도 건축적 본능이 있는데 인간은 건축과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신에 도전이라도 하듯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열망을 끊임없이 드러내곤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도시화 추세는 50%에 이르고 장차 20년 후가 되면 약 75%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토마스 무어가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에도 인류는 현실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세계를 원하였다. 이런 인류의 열망은 어려움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이상향으로 나타나며, 해결 방안으로 도시구조에 대한 얘기도 거론되고 있다. 무어는 이상도시왕국 건설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사회경제적 병폐와 종교적 자유 및 개방화되어가는 유럽 경제체제에 대한 경제적, 공유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려고 하였다.그렇다면 온갖 열망으로 가득한 지구상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에 6시간 노동하고 8시간 잠자고 나머지는 오락이나 취미생활을 하며, 경직된 관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가 정립되는 나라가 있을까. 또한 도시공간이 유토피아처럼 구현될 수 있을까? 19세기말 영국인 하워드는 대도시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지역에 전원과 도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자족적인 도시건설이 황폐화된 도시를 개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건축가 라이트는 브로드에이커 시티라는 이상도시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극단적인 저밀도도시로 특징적인 것은 교통체계다. 거주자 모두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헬기형태의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입체화된 여러 층의 도로로 구성되어 철도, 화물수송차, 고속교통수단인 모노레일 등이 층별로 이용된다.이처럼 혁신적인 사상가와 건축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도시공간을 통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수백년간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열망과 도시성장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산업화를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한 현대도시들은 일정한 공간 안에 사람과 건물을 비롯한 엄청난 재화를 탐욕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도시는 도시외곽부로 확장되었고 기존의 전통적 도시환경은 공동화되고 변모되어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도시는 장구한 세월동안 건물과 길, 식생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생성되고 변해가는 공간이다. 도시의 품격은 사람과 공간, 전통과 일상문화가 어울려 생성된 것이다. 더욱이 장소와 역사에 대한 애정과 인식이 이어져갈 때 도시는 기품을 더해가는 것이다.지난 4월 국토부는 앞으로의 도시개발은 신도시, 혁신도시 등 역대 정부에서 펼쳤던 새로운 단지 조성 정책을 지양하고 기존 도시를 활성화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의미있는 정책으로 여겨진다. 그간 지방도시의 성장구조를 보면 인구는 한정되어 있는데 도시는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당연히 인프라가 좋은 신도시 쪽으로 인구가 집중되게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구도심의 공동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지난 시대의 역사유적을 활용한 구도심의 활성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실효성이 입증된 사례가 많다. 즉 전통공간을 문화적으로 재생시켜 주변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근대건축이나 유적도 그 몫을 크게 하고 있다. 인천과 군산, 목포 등은 일제강점기의 항구시설을 이용하고 있으며, 대전의 경우도 철도청 옛 관사를 활용한 구도심 활성화가 진행중이다. 통영의 동피랑은 벽화로 명소가 되었다. 붉은벽돌조 근대건축 이외에도 소금창고와 골목길, 교도소 등 경향각지에 그뿐이랴. 한편 유럽은 지금 문화예술로 도시를 재생중에 있다.근자의 화두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으로 현실의 도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인문학에 노크하고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다. 공간의 이용주체인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가치를 고민하고 판단하게 하는 생각의 틀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된다. 도시의 생성원리에 대한 고민없이 일방적으로 조성되어온 도시의 양적 성장에 대한 반성과 정체성 모색이 결국 인문학에서 찾아야 할 해법인 것이다./천득염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

2013-08-22 천득염

한 여름밤의 영웅론

가끔 밤하늘에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또 지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혼잣말로 탄식한다. 그런 상상력은 물론 역사소설을 읽어 얻은 것도, 무협지를 통해 학습한 것도 아니다. 유년시절 어른들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그런 상상력을 갖게 했다. 여름이 되면 별식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식구들은 멍석이나 마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곧잘 옛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영웅들의 얘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대의 아이들이었지만 그런 얘기들이 우리들에게 꿈을 갖게 했다. 삭막한 세상을 건너면서 허방에 쉽게 빠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런 영웅을 닮고 싶었던 소박한 소망 때문인지도 모른다.영웅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탄생될 수 있지만 대체로 수난의 시대에 나타난다. 주권을 상실한 나라, 민권을 탈취당한 독재정권,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거나 민족이 곳곳에 흩어진 불행한 나라,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그 어둠을 헤치고 일어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사람이 영웅이다.그러나 오늘날은 영웅의 탄생이 어려워졌다. 대체로 많은 나라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있고 쉽게 명분 없는 전쟁을 할 수가 없고 매스컴의 발달은 한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용인하지 않고 그 내면을 낱낱이 밝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정상적인 나라의 국민들은 영웅이 출현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또 아무나 영웅이라 말할 수도 없다. 토머스 카알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들었다. 그래서 평생 갖지 않겠다는 소신을 실천한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영웅으로 인정하면서도 통찰력이 부족한 나폴레옹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견해와 관계없이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동서양이 인정하는 현존하는 영웅이 있다면 누가 그 호칭에 가장 적당한 인물일까? 그 답변으로 만델라를 든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할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시한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만델라는 필생의 목적을 성취한 90대 중반의 유네스코 친선대사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지금도 그가 남아프리카의 양심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나라 안정의 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흑백차별이 지나쳤던 나라의 민주화와 안정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경사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영웅이 과연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주화가 많이 진전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는 모든 국정이 시스템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충분히 그런 시스템을 운영할 능력을 가진 나라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투른 영웅적 오버액션이 나라의 평안을 깨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다. 적지 않은 충돌이 해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상대는 이제 핵으로 위협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고 그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국군포로의 귀환, 개성공단의 정상화,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문제 등 적지 않은 현안이 쌓여 있을 뿐 특별한 묘안은 없다. 신뢰를 쌓아가면서 상호 협조해야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할 경우 좌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또 어떤 새로운 안으로 꾸준히 신뢰를 쌓고 마침내 한 겨레 한 나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통일이 되는 날 칠천만 동포는 그 일의 선봉에 섰던 가장 헌신적인 지도자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런 영웅의 출현이라면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고민하고 땀 흘렸던 우리의 동료일 것이다./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2013-08-15 이우걸

도산서원 대통령 기념식수는 가짜

학창 시절 도산서원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거짓을 행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정신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그려졌던 나무 '금송'을 기억한다. 금송의 표지석에는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으로서 도산서원의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1970년 12월 8일 손수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거기서 나는 친구들과 유명한 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남아 있다.2011년 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도산서원 관련 파일을 읽다가 도산서원의 금송이 혹시 가짜가 아닌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문화재청과 안동시에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인지의 여부를 묻는 사실조회를 신청했고, 두 기관은 고심 끝에 '현 금송은 1973년 4월 22일 새로 구입한 것을 원위치에 재식수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국기기록보존소에 보관된 문서에 따르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금송은 2년만인 1972년 고사했고, 현 금송은 안동군이 당시 예산 50만원을 들여 한국원예건설을 통해 1973년 심은 나무로 판명되었다. 대통령 기념식수가 관리소홀로 고사하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몰래 새 금송을 심은뒤, 지금까지도 사실을 은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도산서원의 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일본 특산종이란 이유로 여러차례 구설에 올랐었다. 금송은 금강송 등 소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낙우송과로 일본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이며 고유종으로, 한반도에는 자생하지 않는 식물이다. 일제시기 현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관저를 건립할 때,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들이 일본에서 옮겨다가 심은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금송은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이자 일본 왕실과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화폐도안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게다가 금송이 40년간 지나치게 성장해서 도산서원의 경관을 가리는 등의 문제가 드러나자 안동시는 2003년 금송을 이전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현상변경허가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청은 '대통령 기념식수'라는 이유로 도산서원의 금송 이전에 대해 반대, 이전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한 적도 있었다.그런 의미에서 금송이 가짜란 사실은 충격이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40년간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 안동시가 2003년 금송을 이전하겠다고 했을 때, 문화재청은 가짜란 걸 알면서 왜 대통령 기념식수란 이유로 이전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일까?결국 2011년 12월, 문화재청은 금송 앞의 거짓말 표지석을 철거하고, 새로운 표지석을 설치했다. 바뀐 표지석에는 '이 곳은 1970년 12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청와대의 금송을 옮겨 심었던 곳이나 1972년 고사(枯死)됨에 따라 1973년 4월 동 위치에 같은 수종(樹種)으로 다시 식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표지석 철거가 사건의 끝은 아니었다. 나는 또 다른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만약 금송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아니라면, 일본 특산종 나무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걸까? 이 질문에 대해 문화재청은 안동시와 협의해야 한다고 하고, 안동시는 도산서원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도산서원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사안은 아니라고 했다. 결국 사건은 진전되지 못했고, 부득이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의 결정을 묻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2013년 8월 1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는 도산서원 금송 철거 여부를 놓고 첫 번째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논점은 2003년 안동시가 제출한 금송의 이전승인신청에 대해 문화재청이 '대통령 기념식수'란 이유로 이전금지시킨 것은 부당한 행정행위란 취지이다.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나무가 무슨 죄냐고? 말 그대로 나무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이건 나무 이야기가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君子)의 길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無自欺)'이라고. 대학(大學)에 나오는 이 구절을 퇴계선생은 평생 가슴속에 새기고 살았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벽에 써놓고 실천하고자 했다고 한다.그래서 나는 묻는다. 도산서원의 금송은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것이 아니라 안동 군수가 심은 가짜임이 밝혀진 지금, 도산서원의 금송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다./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2013-08-08 혜문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을 생각하며

국가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꿈을 꾼다. 1776년 대서양 연안에서 출발했던 신생 미국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도달하는 꿈을 꾸었고, 그로부터 70년 후 멕시코와 전쟁 끝에 지금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5개주를 매입함으로써 20세기 팩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우리에게도 꿈이 실현되었던 위대한 역사의 장이 많다. 멀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정복과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도 꿈의 결실이고, 가까이는 1960년대 잘 살아보세 꿈과 80년대 민주화의 꿈은 오늘의 발전된 한국의 모습으로 실현되었다.중국도 꿈을 꾸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의 꿈'(中國夢)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꿈'이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13억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해석도 있고, 중국 전래의 유교문화와 공자사상의 회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시 주석이 '중국의 꿈'을 발표한 장소가 국립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내용보다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국립박물관은 아편전쟁(1840) 이래 중국이 서방 열강에 의해 당했던 '굴욕의 세기'를 공산당이 영광스럽게 만회했음을 가르치는 선전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꿈'이 어떤 함의를 갖든 그 것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거인의 귀환과 같이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한편 일본의 아베 총리가 꾸는 꿈에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다. 작년 말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아베 총리가 보인 대외침략 부인 발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허용 등 우경화 행보는 그의 역사 인식이 퇴행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더욱이 지난달 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상하원을 다 장악한 아베의 자민당이 이른바 보통국가로 가기위한 평화헌법 개정과 같은 국수주의 기치를 더욱 노골적으로 내세우지 않을까 걱정된다. 만에 하나 중국의 정책에서 패권주의적 색채가 엿보인다면 우리는 우려와 이의를 제기해야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조짐에는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역 내외 국가들과 공동 대응하는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우리 스스로 찾는 일이다. 과연 우리의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해답을 백범 김구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919년 3·1 운동이후 4반세기 동안 중국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해외독립운동의 본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45년 8·15 해방이후 혼란의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자존과 독립사상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분투하였던 백범이 꿈꾸었던 나라는 민족이 하나 되어 문화로 융성하는 나라였다. 그러기에 선생은 "몸이 반으로 갈라질지언정 허리 끊어진 조국은 차마 볼 수 없노라"고 절규했고, "한없이 갖길 원하는 것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아닌 오직 높은 문화의 힘"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21세기, 더욱 빠르게 진전되는 세계화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생존경쟁의 단위로서 민족의 개념이 중요시 되고 문화와 지식이 한 나라 국력의 척도가 되고 있다.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된 우리민족이 창의문화로 우뚝 서길 바랐던 백범의 꿈이야 말로 참으로 오늘 이 시대를 예견한 혜안이요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평생 교육자로 자처했던 선생이 저서 '백범일지'를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마무리 지으며 글 끝에서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 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이달 17일(음력7월11일)은 백범 탄신 137주년이다./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전 브라질 대사

2013-08-01 조규형

환갑 즈음에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벌써 환갑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60갑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자꾸 이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다들 건강하고 오래 사니 환갑이라 하여 어디에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음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늙어감이다. 어느덧 눈도 침침해지고 다리에 힘도 없고 인지능력도 많이 떨어져 간다. 제자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꾸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다.공자님은 '논어'에서 나이 예순에 이르자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하여 이순(耳順)이라 하였는데 아무리 보통사람이라고 하여도 난 도무지 그렇지 않다. 명색이 교수이고 이제 손자까지 보았는데 오히려 화를 더 자주 내고 잘 토라지고 갈수록 어린 애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에 비하여 남자가 나이 들면 원래 그렇다 한다. 그래서 조금은 위로가 되지만 몸은 쇠잔해 가고 마음은 쫌생이처럼 좁아진다. 살 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젠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위치로 물러나 자족하고 은둔하듯 지내야 할 터인데 아직도 꼭 이름 석자를 어딘가에 올리려 하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재산을 모으려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마치 떨어지려는 밧줄이라도 잡고 바둥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불편하다.나보다 생일이 빨라 이미 환갑을 지낸 아내는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인인 아들 내외는 일생 아들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온 엄마 환갑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엎드려 절 받는 것처럼 내가 며칠 후면 엄마 환갑이야! 라는 정보를 미리 주어 겨우 몇 푼 용돈을 받아내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예전엔 거의 아들과 동지적 입장에서 공감하였던 내가 이젠 아내의 편이 되었다. 아니 더 솔직히 얘기하면 나도 몇 달 후면 환갑이 되어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 아들 편이 되지 않고 아내와 동지가 된 것이다.사실 난 몇 년 전부터 노후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다. 건강관리, 정년 이후 일거리 찾기, 악기연주와 합창단 활동, 환갑 이벤트 준비,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 모으기 등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였다. 열심히 운동을 하여 아직 정기건강검진에서 지적받는 사항이 거의 없다. 일자리 찾기는 포기하였다. 내가 정년 이후에 돈을 버는 일을 하려 하면 제자들과 부딪치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먹을거리를 스승이 나누어 뺏어 먹는 모습이 좋을리 없다. 색소폰은 몇 달 연습하다 자연스레 그만 두게 되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연습장소 구하기가 어려웠다. 합창단 활동은 내가 선택한 큰 행복이다. 4부 혼성합창은 화음도 아름답고 남녀가 함께하니 즐겁기도 하다. 환갑 이벤트로 해외여행을 가려한다. 아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선택하여 좀 럭셔리하게 해주고 싶다.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을 모으다 정말 혼이 났다. 남자만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선배님들의 충언에 몇 년간 모은 돈을 몽땅 털리고 또 배신감에 분해하는 아내에게 부도덕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이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지금 나의 환갑 즈음의 푸념은 남들이 보면 염장 지른다고 할 속없는 호사가 아닌가. 아직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것도 65세까지 해먹는(?) 직업으로 평생 공부하며 가르치는 행복함이 얼마나 큰가. 나를 '평생 웬수'라고 부르는 아내가 곁에 있어 더욱 행복하다. 얼마 전에 태어난 손자 놈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제 그동안 잠시 쉬었던 성당에도 다시 나가려 한다. 갈 곳이 없는 탕아가 다시 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이 이해하시리라 믿는다.화를 내고 토라지는 것은 자기 콤플렉스라고 한다. 근자에 나의 못난 마음과 행동은 늙어감을 또 부족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 현명하다면 이만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천득염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

2013-07-25 천득염

철없는 철새들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노래해서 화제가 되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는 '한국의 정치인'이란 작품이 있다.대학은 그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집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지나치게 직설적이어서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여기 그려진 현실은 당연히 이 시 속의 가상(假想)현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속의 가상(假想)현실을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실제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시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는 것은 이 시가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깨어있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런 일상으로 부터 탈출을' 꿈꾸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띄는 성과가 별로 없다. 또 이 풍경이 중앙정치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기가 어렵다. 학식도 인품도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예사로 주는 지역 대학들이 있고 무소불위의 파워로 제왕적 지자체장을 지낸 뒤 사법 처리되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지금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역 정가의 미풍은 태풍을 예고하는 신호다. 텃새들은 텃새들대로 새로운 일전을 준비하고 있고 철새들은 철새들대로 성공을 꿈꾸며 조심조심 끼어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텃새라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철새라고 굳이 내칠 필요도 없다. 여러 지역, 여러 기관에서 경험을 쌓은 눈 밝은 철새들이 있다면 근시안적이고 비전 없는 텃새들보다 훨씬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선거 때만 고개 숙이고 찾아오는 철새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을 더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그 첫 번째, 당신은 정말 이 지역을 사랑하는가? 두 번째, 당신은 이 지역에 대한 사랑만큼 철저한 공부를 하고 왔는가? 세 번째, 중앙정치의 어떤 힘만을 믿고 지역 일을 맡으려는 것은 아닌가? 네 번째, 이 일을 맡게 된다면 스스로도 행복하고 지역민도 행복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봉사하는 습관이 있는가? 이다.흔히 외지에서 갑자기 날아온 철새들의 수사는 상투적이다. 이 지역이 고향과 같다거나 제 2의 고향이라거나 하는 경우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는 지키기 어려운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금력이 유일한 실력인 철새의 경우 정작 일전을 벌이게 되면 룰과 관계없이 심각한 위법행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중앙 정치에 연줄을 대며 우쭐거리는 철새는 대개 지역 관리 대리인 수준이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마스터키를 가진 권력자가 어디 있는가. 대부분 이런 철새들은 허풍과 비현실적인 공약을 남발한다.지역 단체장이 되거나 의원이 될 경우 지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그 직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런 자세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습관화 되어있지 않으면 마음 따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울러 열과 성을 다해서 주민들의 신임을 얻으면 자연히 권력자가 된다. 자기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가질 수밖에 없는 영향력이 권력이다. 직무와 관련된 공권력과 주민의 신임으로 얻게 되는 영향력이 합쳐지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이 힘을 자제하여 현명하게 쓸 줄 아는 지혜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철저한 자기 검정도 없이 권력의 맛을 보려고 뛰어드는 철새가 있다면 철없는 철새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은 벌써부터 그런 철새들을 가려내기 위해 조심조심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다./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2013-07-18 이우걸

LA 주립박물관 조선왕실어보는 도난품

2010년 이후부터 나는 미국 LA로 건너간 조선왕실 어보(御寶)의 행방을 추적 중이다. 현재 LA의 주립 박물관(LACMA)에 전시중인 이 어보는 높이 6.45㎝, 가로·세로 각 10.1㎝로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1547년 아들인 명종(재위 1545~1567)이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 종묘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던 조선왕실의 어보가 어떤 이유로 LA까지 흘러가게 된 것일까?이 어보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2010년 여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국지역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LA 주립박물관이 문정왕후 어보를 소장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6·25를 전후한 시점에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한 입장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그즈음 나는 직접 미국 메릴랜드의 국가기록원을 방문, '아델리아 홀 레코드'라고 불리는 문서 전문을 입수하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 관련 '아델리아 홀'여사가 작성한 이 문서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흘러들어온 불법 문화재를 조사하고, 원산국으로 문화재를 반환한 경위를 작성한 문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6·25전쟁 당시 한국에서 문화재를 약탈한 미군범죄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반환 경위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었다.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마이크로필름 4 :774에는 '한국의 도장(Korean official seals)'이란 파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열어 보니 1956년 5월 21일 아델리아 홀이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와 전화로 나눈 통화내용이 있었다. 47개의 조선왕실 어보가 미군에 도난당했다고, 미국 정부에 분실사실을 신고하는 내용이었다.더불어 '한국의 보물이 사라졌다'는 제목의 1953년 11월 17일 볼티모어 선이란 신문기사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양유찬 주미대사는 47개 조선왕실의 도장이 미군에 의해 도난당했고, 행방을 아는 사람은 주미대사관으로 신고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귀국 후 나는 LA 주립박물관 소장 문정왕후 어보를 되찾기 위해 수차례 LA 주립박물관에 반환요청서를 보내왔다. 문정왕후 어보는 6·25 전쟁중 미군이 약탈한 문화재인 만큼, 원산국으로 돌려주기 바란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LA 주립박물관은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희망없는 막연한 싸움이었다.2013년 1월 나는 다시 미국에 갔다. 거기서 교포들과 문정왕후 어보를 되찾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고, 교포들과 함께 LA주립박물관에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측에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국내에서도 안민석(민주당) 의원이 국회에 'LA소장 문정왕후 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정치권의 호응도 있었고, KBS가 6·25전쟁 당시 미군이 약탈한 문화재들에 주목, '미국에서 찾은 국보(國寶)'란 다큐를 방영하기도 했다.결국 LA주립박물관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LA 주립박물관측은 반환요청에 대해 " 아직 한국정부로부터 문정왕후 어보가 도난품이란 어떤 지적도 없었다. 만약 문정왕후 어보가 도난품이 확실하다면 관련된 증거를 제출해 달라"고 답신했다. 그리고 우리측의 면담 요청을 수락, 반환협상의 테이블이 마련되게 되었다.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7월 27일로 다가온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비록 민간차원이지만 그 당시 약탈된 문화재 반환협상이 시작된다. 문정왕후 어보는 다시 우리 민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가슴이 뛴다.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2013-07-11 혜문

한민족 디아스포라, 국력의 외연

민족분산 또는 집단이주를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BC 6세기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였던 유태인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역사에서 패전국민이 승전국의 노예로 전락한 예가 수없이 많을 테지만 유독 2천600년 전 바빌론에서 포로로 지냈던 유태인을 지칭했던 디아스포라의 의미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로 집단이주하여 사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진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빌론의 유태인들은 현지에서 동화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오히려 번성했고, 훗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유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유엔 인구국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3%에 해당하는 2억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75개 국가에 720만의 해외동포가 있다. 물론 이 통계에는 이주 1세대의 후손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국내인구(남북한 전체)의 10%에 달하는 우리 동포가 전 세계 5대양6대주에 퍼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한민족은 중국인, 유태인 못지않은 세계적인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각지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이 시대별로 다르고 현지 문화와 사정도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사회를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기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가 재외동포들은 어는 곳에서든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현지 다른 이민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둘째로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과 우수함으로 다음세대의 현지 주류사회 진출률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높다. 셋째로 강한 뿌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헌팅턴(S. Huntington)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끝나면서 문화, 민족의 개념이 중요시되는 시대조류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199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은 현지에서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현지화정책에 초점이 두어졌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외동포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한 우리정부와 사회의 인식이 현저히 바뀌고 있다. 세계화 진행으로 국경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민족 간 연대는 강화되고 있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국경을 초월한 민족네트워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미국과 중국 방문 시 현지동포들과의 대화에서 말했듯이 우리정부는 우수한 해외 인재들이 국가경제에 참여하고 기여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산업과 기술 간의 융합이 창조경제의 주요한 요소이듯이 해외에서 교육받고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익힌 글로벌 창의 인재들이 우리 경제에 접목된다면 경제 활성화에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뿐만 아니다. 수천을 넘는 세계 곳곳의 한상(韓商)들이 수출입, 투자, 합작, 청년인력의 해외취업 등 국가의 경제영토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 또한 미국 의회의 일본 위안부 강제동원 비난 결의안 통과에 재미 한인단체의 막후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재외동포의 외교적 지원은 한반도 안정과 미래 남북 통일과정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민족적 뿌리를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간적, 문화적으로 떨어져 있는 세계 각지의 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없다. 한민족공동체가 건설되고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정부는 복수국적 허용확대, 재외국민용 별도의 주민등록증 발급 등을 검토하고 있고 동포재단은 한인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재외동포 차세대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각종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재외동포들과 함께하는 한민족공동체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도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져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력의 외연 그 끝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있음을 잊지 말자./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전 브라질 대사

2013-07-04 조규형

불쌍한 작가들

한국사회에서 작가들은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도 좋은 존재들일까?수년 전 작가들의 수입을 조사한 결과 한국 작가들은 월 평균 20만원의 수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악화돼있는 만큼 한국 작가들은 한 마디로 수입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다른 직업이 없이 순수하게 창작에만 매달려있는 전업 작가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극빈계층에 속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한쪽 구석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방치되어있다.작가는 한 국가의 문화를 창조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외되어있고, 버림받은 처지나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문학은 한 국가와 민족의 혼과 얼이 배어있는 것이고, 작가는 자기 나라의 언어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읽힌다. 문학이 없으면 언어가 없어지고, 언어가 없는 국가와 민족은 망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 언어를 이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세련되게 다듬은 사람들은 정치가도 아니고 기업가도 아니다. 작가들이야말로 주린 배를 달래면서 우리 언어를 살려온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쓰레기처럼 방치되어있다.아파트가 안 팔리고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는 법을 뜯어고치고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부동산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작가들의 작품이 진열되어있는 책방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출판사들이 줄줄이 폐업을 하는데 대해서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지금까지 역대 정부에서 작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군사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민주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가 하고 두리번거린다. 정부나 국민들이나 염치가 없기는 막상막하이다.한국에서는 작가라는 존재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일지 모르지만 외국에 나가보면 작가 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가 먹고 살고 활기에 차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까운 일본의 에치코 유자와에 가면 가와바타가 노벨상 문학상 수상작인 '설국'을 집필했던 여관이 있다. 지금도 그 여관은 영업을 하고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가면 가와바타가 작품을 집필했던 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방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에치코 유자와를 방문하고 있고, 그 마을은 에치코 유자와라는 이름보다 아예 '설국'으로 더 유명해졌다.영국의 자존심,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셰익스피어는 영국인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태어난 스트랫포드 어펀 에이번에는 셰익스피어 생가를 비롯해 셰익스피어 극장 등 그와 관련된 자취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도시 전체가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고, 그가 도시를 먹여살리고 있다. 문학에 대한 자존심도 없는 우리하고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런던에는 셜록홈즈 박물관이 있다. 홈즈는 코난 도일이 창조한 탐정으로 가공인물이다. 그런데도 영국인들은 그를 실제 인물처럼 만들어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 홈즈팬들은 홈즈가 가공 인물인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추리의 세계에 빠져보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그곳을 방문한다.파리 센강변에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한 세기 가까운 연륜을 지닌 조그만 고서점이 있다. 1920년대 헤밍웨이, 피츠제랄드, 제임스 조이스, 헨리 밀러 등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들이 방황하던 시절 그 책방을 사랑방처럼 드나들면서 그들이 신세를 졌던 곳이다. 그 고서점은 오늘도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작가는 과연 필요없는 존재인가?/김성종 소설가·추리문학관장

2013-06-27 김성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