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문화융성의 참뜻과 길

수도권과 지방·계층간 문화격차 해소 중요관람객 욕구 못 채워주는 콘텐츠 전시행정일뿐행복한 삶 위해 고품격 문화장려와 지원책 필수지난달 26일 미당 서정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 공연이 있었다. 300석 규모의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에 500명 가까이 운집했다. 관객 대부분은 시가 좋아 스스로 찾아온 중년의 문화 향유자들. 이들은 이날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시가 실시간 소리로 살아 자기 몸에 다가오는 경험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긴 것.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연극배우, 가수, 시낭송가들은 시의 생명을 매순간 새로 탄생시키고 있었다. 낭송을 마치고 객석에 앉아 있던 이시영 시인이 배우들의 낭송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극배우들이 시를 낭송하니 확실히 또록또록 들린다. 시인도 독자를 위해 더 노력해야겠네…!” 낭송의 새로운 모형을 보여준 경우는 시낭송가들. ‘국화 옆에서’가 독송, 윤송, 합송으로 변주되면서 새로운 콘텐츠로 태어나는 순간, 객석 전체에 압도적인 감동이 일었다. ‘신부’를 전통음악으로 작곡하여 초연을 한 주인공은 박정욱 명창. 소리꾼 장사익 역시 미당의 ‘저무는 황혼’을 애절한 가락으로 불러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명사들의 인터뷰 장면이 영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연극배우 손숙 선생의 뼈 있는 말. “요즘 문화융성 문화융성 하는데 그게 별건가. 삶 속에 문화를 들이는 것. 가령 일상에서 시를 자주 낭송하는 것. 우리들 삶 속에, 가슴 속에, 정서 속에 문화나 예술이 촉촉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이 한결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날 공연은 문화융성의 체험현장이었다.공연 이틀 전, 대통령은 한국메세나협회 회원 기업인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문화융성을 위한 기업 지원을 독려했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기업으로 하여금 문화의 발흥을 도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문화란 근본적으로 지원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논어’ 옹야편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 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 하다”는 대목이 있다. ‘즐기는 것(樂之者)’은 최상의 공부 방법이자 높디높은 문화향유의 기품과 관습을 뜻한다. 스스로 좋아한 나머지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은 기호와 취향. 좋은 것을 좋다 말하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말하는 풍토. 이런 문화가 풍성해야 진정한 문화융성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즐긴다는 건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이날 공연 콘텐츠를 채워준 출연자들에 그 답이 있다. 이들은 흔쾌히 재능기부를 했으며 관객들은 고품격의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출연진들 모두 미당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시인, 배우, 가수, 낭송가들의 가슴에 미당의 시는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언제든 꺼내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고급문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애호가의 정신을 관객들도 이심전심 공감하게 된 점은 이날 공연의 또 다른 수확이다.문화행사에 대한 지원도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때 그 효과가 커지게 마련이다. 수도권과 지방,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의 문화격차 해소도 중요하고 특정한 날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다양한 관람 혜택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콘텐츠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걸 제공하지 못하면 전시행정이 되기 십상인 게 정부 정책이다. 고품격 문화에 대한 장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즐기는 이들을 위한 지원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융성의 지혜로운 방책이다. 백범 김구선생께서도 ‘나의 소원’에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5-03-05 윤재웅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

요즘 가난 때문에 집단 자살하는 일 너무 많아정부, 복지없는 증세하면서 아닌척 온갖 꼼수담뱃세 올려놓고 무엇을 또 더 올릴 작정인지…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있었다. 그 빈부갈등은 인류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다. 홍익인간이니 인내천이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들도 필시 그 갈등과 더불어 움텄을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질수록 가난의 문제는 우리에게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밑이 째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밑이라는 말은 더러 성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항문을 일컫는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가난과 항문과의 관계를 잘 모르는 이가 많다. 먹은 걸 배설해 버리면 뱃속을 또 채워야 하므로 아무리 뒤(밑)가 마려워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참다 보면 변비가 심해지고 그러다가 밑이 째질 수밖에 없었다. ‘30년대 강경애의 소설 ‘적빈’에도 배변을 참느라고 깡충거리며 걷는 주인공의 안간힘이 리얼하다.우리 문학에서 흥부는 가난의 상징이다. 마음 착한 것 말고는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는 흥부였다. 흥부 내외가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도 한 달에 아홉 끼니 먹기가 어려웠던 건 놀부로 상징되는 천민자본주의의 착취구조 탓이었기에 흥부가를 즐기던 청중들은 흥부의 가난을 남의 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흥부가에는 흥부네 집의 쥐들이 먹거리를 찾아 집안을 뒤지고 다니다가 마침내는 다리에 가래톳이 서고, 가래톳 선 쥐들의 끙끙 앓는 소리로 마을 사람들이 잠을 설친다는 대목이 있다. 요즘의 흥부가 청중들은 그 대목을 들으면서 가볍게 웃고 말겠지만 옛날의 흥부가 청중들은 가래톳 선 쥐들의 끙끙 앓는 소리를 우스개로 즐기면서도 먹거리를 찾다 지친 자신들의 참담함을 쓰라리게 되새겼을 것이다.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의 원인을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미련함 게으름 낭비벽 등등에 근거를 두고자 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것은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포기해 버리는, 원망할 테면 하늘한테나 하라는,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라는 참으로 음험한 말이다. 부정부패나 봉건시대의 고질적인 착취구조 같은 것들을 희석시키려는 그 음험한 말은 지금도 이 나라에서 흥부시대처럼 톡톡히 제구실을 하고 있다.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제일 높고 자살의 상당 부분이 가난과 상대적 박탈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밑이 째지던 우리의 절망적인 가난은 과연 옛날 얘기에 불과한가? 밀린 집세와 공과금이 담긴 돈 봉투를 유서와 함께 두고 자살한 송파 세 모녀의 눈물겨운 절망이 얼마 전에도 있었다. 가난 때문에 집단 자살하는 일이 요즘 이 나라에 어디 한두 번 이던가.대선 공약이던 증세없는 복지 대신 복지없는 증세를 하면서도 정부는 증세가 아닌 척하느라 온갖 꼼수를 다 부린다. 담뱃세를 그렇게 허망하게 올려버리고도 무엇을 또 얼마나 더 올릴 작정인지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고도 우긴다. 증세 논란은 담뱃값 올리기 전에 했어야 마땅하다.이런저런 증세 논란의 중심에 현행 법인세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증세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최근 입장은 백 번 천 번 옳다. 그것이 함부로 증세를 해버린 뒤끝이 아니라면, 그리고 법인세율을 끝끝내 동결하려는 안간힘이 아니라면 말이다.공산주의가 야만의 끝에 이른 게 북한이고 자본주의가 야만의 끝에 이른 게 한국이라는 말이 꼭 악의적인 양비론만은 아니지 싶어 우리의 가난이 벼랑 끝처럼 아슬아슬한데, 요즘의 증세 논란의 꼼수도 그 안간힘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다./정 양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시인▲ 정 양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시인

2015-02-26 정 양

양극화 해소와 사회적 균형발전

수도권 규제완화, 중장기적 관점서 접근지방대학, 경쟁력 확보위한 발전방안 모색소득수준 건강과 연계, 간과 해선 안돼사회 전반에 걸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양극화는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고도 성장기를 지나고 저성장의 안정적 경제발전 단계에 접어들면서 소득·교육·지역·고용·복지·정보화 등 사회 전반에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양극화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경제발전의 안정화 단계에 있는 미국·프랑스·독일 등 많은 선진국에서도 소득분배·의료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 마련에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최근 수도권규제 완화와 지역균형 발전의 저해,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와 학문의 수도권 집중화 등에 따른 지방대학의 위기, 소득수준과 건강의 불균형 등이 많은 사회적 논란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과거 정부에서부터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던 수도권규제 완화와 지역의 균형발전이라는 뜨거운 감자는 양극화 해소와 사회 전반에 걸친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중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만약 수도권규제 완화로 비수도권 지역의 인구·소득·생산·고용·의료·교육·복지 등 여건이 악화되고 수도권-비수도권의 격차가 더욱 벌어져 지역 간 양극화현상이 가속화된다면, 모든 국민이 간절히 희망하는 경제활성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은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더욱이 국토의 난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 주거지와 인접한 산업단지의 입지에 따른 주거환경의 악화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규제완화는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삶을 누려야 하는 ‘환경복지의 양극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많은 논란과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수도권규제 완화는 경제활성화라는 단기적·사안적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수도권-비수도권의 양극화 해소와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중장기적이고 종합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최근 학령인구의 감소와 수도권 대학 집중화 현상의 가속화 등으로 지방대학의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물론 지방대학 스스로 지역 산업 등과 연계한 특성화 전략 등을 통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문만의 개혁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사회 전반에 걸친 지역 균형발전 정책은 지방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보다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 내부적으로도 정원감축과 학과 통·폐합 등과 연계된 학문 간, 대학 구성원 간에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갈등도 스스로 기득권을 조금씩 내려놓고, 학문 간 양극화 해소와 대학 전체의 균형발전, 학생들의 경쟁력 확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상생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소득수준과 건강의 양극화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정부에서 발표하는 건강 관련 통계자료는 소득수준 격차가 건강 격차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2013년 국민건강 행태 및 만성 질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저소득층이 고소득층에 비해 고도비만이나 만성질환 등에 걸릴 확률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소득수준과 건강의 양극화 문제는 비단 의료복지 증진뿐만 아니라 도시의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지역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상호 협력해 시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갈 때 비로소 해결될 것이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5-02-12 박경훈

봄바람 봄 냄새

민심 소통되지 않는 사회 침묵의 집단일뿐분위기 쇄신 한창인 政街… 좋은 일만 생기길정책결정·집행, 살결에 감기는 훈풍 같아야이 무렵 되면 봄 생각 절로 난다. 입춘(立春)이란 이름 때문인가. 천지 시간표가 예정 시각에 정확하게 도착하는 봄 열차를 알려주는 것 같다. 예전엔 입춘일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입춘첩’을 붙여 새 봄의 소망을 나타내곤 했다. ‘올봄엔 좋은 일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立春大吉 建陽多慶)’는 붓글씨를 써서 대문에 붙인다. 인심 좋은 집안에선 여러 장 써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행복한 세상을 위한 덕담 공유 문화다. 하지만 입춘첩은 글 읽을 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아서 식자층들만의 의사소통이 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문화나 밸런타인데이의 사랑 고백 풍습은 왜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까. 의미전달 체계인 기호(sign)만으로는 다중(多衆)에 호소하기 어렵다. 실제로 내 몸에 와 닿는 감각,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미치는 영향, 기호의 단선적 기능을 넘어서는 풍성한 스토리텔링이 결합했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게 된다. 그것이 참된 의미의 의사소통이다. ‘입춘’보다 다른 게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봄 사이의 의사소통은 뭐니 뭐니해도 감각이 우선이다. 달래, 냉이, 씀바귀 같은 나물이 밥상에 올라오면 봄은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향긋한 향내가 입안에 감돌면 묵은김치로 겨울나던 입맛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처럼, 땅에서 막 나기 시작한 풀들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 결말의 한 대목이 시사적이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는 청춘남녀의 ‘썸 타는’ 사랑을 체감하게 해준다. 그래서 봄 향기는 ‘입춘’보다 확실한 봄의 증거다.바람은 봄의 최고 짝이다. 살결에 다가오는 봄바람은 그 부드러움과 따스함으로 만물생육을 관장하는 너그러운 어머니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정치 지도자의 관대함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시가집 ‘시경’ 속에 제왕의 정치술에 관한 ‘대아(大雅)’ 편목이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백성 섬기는 지도자의 마음가짐과 국정철학에 대한 것이다. ‘대아’의 성격과 그 활용은 추사 김정희가 쓴 ‘봄바람은 제왕의 마음과 같아서 큰 아량으로 만물을 품어 안는다(春風大雅能容物)’는 글귀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진정한 봄이란 이런 것이다. 자기들끼리의 의사소통이 아니라, 청춘남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여야 하고 백성들을 고생에 빠뜨리지 말라(民勞)는 민심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살충제에 의한 지구 생태계의 재앙을 경고한 레이첼 카슨의 책에 “전에는 아침에는 울새, 검정지빠귀, 산비둘기, 어치, 굴뚝새 등 여러 새의 합창이 울려 퍼지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판과 숲과 습지에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름 하여 ‘침묵의 봄’이다. 생명이 약동하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니다. 민심이 소통되지 않는 사회는 침묵의 사회일 뿐이다. 자연은 정직하고 정확하며 예측할 수 있다. 사람 사는 세상 또한 이래야 한다. 정치가 요즘 분위기 쇄신에 바쁘다. 청와대도, 여당과 야당도 ‘올봄엔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는 입춘첩을 붙이고 싶은 게다. 그러나 개혁, 의사소통, 민심 수습 같은 말 잔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책 결정과 집행이 살결에 감기는 훈훈한 바람 같아야 한다.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연애하도록 해야 한다. 백화난만 꽃피듯이 감동의 개별적인 사례들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한다. 국정의 봄바람과 봄 냄새, 국민 모두가 바란다. 구호는 가고 체감은 오라.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5-02-05 윤재웅

이완구 총리 후보 지명의 정치적 의미

3년차 접어든 박대통령 정치적 영향력 점차 감소지지율 하락·변하는 당청관계 등 현실 반영한듯언론들 이후보에게 '대통령에 직언' 요구 분위기이완구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차기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 아직 청문회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나, 무난히 청문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청문회 통과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번 총리 후보 지명은 그 자체로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모든 언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번 후보 지명의 가장 큰 의미는 관료 혹은 교수 출신의 '관리형'이 아닌 정치인 출신의 '책임형' 총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인 출신 총리 지명은 실로 오랜만이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계속해서 관리형 총리가 임명돼 왔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 총리라고해서 뭐가 다르겠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에게 복종할 가능성이 적다. 많은 사람들이 이완구 총리 후보가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고 그를 통해 현재의 소통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물론 정치인이라고 영향력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이완구 총리 후보는 3선 의원이며, 충남도지사를 역임하고 새누리당 원내대표 출신이기 때문에 기대가 남다르다. 일단 광역단체장의 경험을 통해 이 후보는 현재 우리나라의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인 지방분권화의 필요성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시 완성 등 지방분권화를 위한 정책에 적극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이 후보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는 정당 내에서, 그리고 국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한 정치력 영향력은 쉽게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자리가 바뀐다고 해서 쉽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향후 행정부와 국회 관계, 혹은 당-청 관계가 지금보다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러한 논리를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이완구 총리 후보는 소위 '분권형 대통령제'의 실험장이 될 수도 있다. 한국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그 핵심은 대통령과 의회(국회) 간 협력의 어려움에 있다. 대통령제는 행정부와 입법부간 권력의 분립과 공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결국 그 성패는 두 부처간 협력 여부에 달려있다. 일부에서 책임총리제 실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두 부처 간 연결 고리 및 협력 강화를 위해서이다. 물론 이 후보가 분권형 대통령제 하에서의 총리와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에 근접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대(對)국회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일부에서는 이 총리 후보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이 후보가 아무리 직언을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도 박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권력은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 이 후보의 성패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임제 하에서 3년차로 접어드는 박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이완구 총리 후보 지명은 이처럼 변화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관리형 총리가 더욱 편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떨어지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변화하는 당-청 관계 등 정치적 환경 변화가 이러한 선택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완구 총리 후보는 총리가 되면 대통령에게 직언하겠다고 이미 밝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할 말은 하겠다는 공약을 통해 대표에 당선되었다. 모든 언론이 이 후보에게 직언을 요구하는 분위기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김 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 김 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

2015-01-29 김 욱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건강증진 내세워 세수증대 위한 '담뱃값 인상''화가 나도 참아달라'고 정직해진다면…그나마 국민건강에 다소 도움될지도 몰라민주공화국인 남쪽에서나 인민공화국인 북쪽에서나 다투어 공화국임을 내세우는 걸 보면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쁜 말은 아닌가본데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는 그 말이 비아냥처럼 쓰이고 있다. 겨울공화국을 비롯해서 부패공화국, 비리공화국, 막장공화국, 사고공화국, 불륜공화국, 자살공화국, 투기공화국, 찌라시공화국 같은 말들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쓰이고 요즘에는 또 거짓말공화국까지 거기 보태어져 그야말로 공화국이라는 말의 체면이 말도 아닌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뭔가 찜찜하고 불쾌하고 심란한 뒷맛을 남기는 말들이지만 그 중 우리를 가장 심란하게 하는 건 아마도 거짓말공화국이지 싶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거짓말들이 하도 많아서 다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지만 필자로서는 감히 감당 못할 덩치 큰 거짓말들은 그만두고 이 글은 우선 가벼운(?) 거짓말 하나만 화제로 삼겠다. 길가에 줄 하나가 떨어져 있기에 주워들고 집에 갔더니 줄 끝에 웬 소 한 마리가 달려 있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는 민담 속의 억울하다는 소도둑은 누가 들어도 속이 환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속이 보이는 거짓말을 듣는 이들은 입술에 침이나 바르라고 비아냥거리곤 하는데, 그때 입술에 바르라는 침은 최소한적 양심 표현의 또 다른 말일 것이다.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 보통사람 같으면 입술이 바짝 마를 테고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입술에 침을 바르게 되는 상식을 바탕삼아 그런 비아냥이 생겼을 것이다. '정직'을 가훈으로 삼고 살았다는 전직 대통령에 관한 말을 들으며 오죽했으면 그런 걸 가훈으로까지 삼았겠는가 싶어 나랏일들이 아슬아슬하게 여겨지기도 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사대강 수질오염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 대통령은 TV를 통한 대국민 담화에서 느닷없는 로봇물고기 얘기를 꺼내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으시딱딱 장담을 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아니면 묵은 버릇인지 말끝마다 그는 입술에 재빠르게 침을 바르곤 했다. 지난 연말 무렵 보건복지부 장관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서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길가에 늘어진 줄 끝에 소가 매달려 있을 줄은 몰랐다는 민담 속의 소도둑이 문득 떠올랐다. 국민 건강증진은 길가에 늘어진 줄이고 줄 끝에 매달린 소는 막대한 세수증진이라는 걸 모를 이는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흡연자들은 건강이나 돈보다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꼴이 괘씸해서 이참에 아예 담배를 끊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심이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보건복지부가 그 동안의 통계를 통해서 이미 환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보다 담뱃값이 비싸다는 나라들의 국민소득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담뱃값이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들 금연을 하겠다는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얼마 안 되어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될 것이고 담배보다도 그 부글거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국민의 암 발병 확률은 아마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곧 바로잡을 때라고 한다. 보건복지부는 이제라도, 나라 재정이 어렵지만 부자감세를 철회하면 그들이 무슨 오기를 부릴지 겁나서 그렇게는 못하겠고, 생각 끝에 만만한 담뱃값을 올렸노라고, 머지않아 물값도 술값도 교통비도 전기요금도 그렇게 올리게 될 거라고, 화가 나더라도 좀 참아달라고 구차하게나마 그렇게 좀 정직해진다면 그나마 국민건강에 다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정양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시인▲ 정양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시인

2015-01-22 정양

국민대통합을 위한 국토·환경계획 연동제 필요성

정부, 국책사업 정책 국민들과 공유해야무리하게 추진땐 엄청난 행·재정적 손실중앙·지방에 사회적 갈등 중재기구도 필요지난 해 12월16일 2년여만의 오랜 논의 끝에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국토-환경계획 연동제' 추진을 위한 정부 입법절차가 마무리 됐다. 물론 국회의 심의단계가 남아있지만,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부처간 칸막이를 걷어내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친환경적 국토관리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그동안 국가에서 추진했던 영월 동강댐, 새만금 간척, 시화호 담수화, 경부고속철도, 밀양 송전탑, 4대강 살리기 등과 같은 많은 국책사업들이 단순히 개발과 환경보전간의 갈등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지역·세대·계층 간의 갈등, 이념과 가치관의 갈등, 정치·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갈등과 대립으로 확대됐다. 비단 국책사업뿐만 아니라 지자체 차원에서도 지역사회의 폭넓은 의견수렴과 합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개발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지역구성원간의 다양한 갈등과 막대한 예산낭비를 발생시킨 사례를 적지않게 접하고 있다. 따라서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토-환경계획 연동제'는 중앙 및 지방정부의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국민대통합을 이룬다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 하겠다.국책사업이 더 이상 사회적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경쟁력 확보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토계획과 환경계획의 연계를 단순히 법적인 근거에 의한 형식적인 절차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정부는 국책사업의 정책 및 계획 수립단계에서부터 국민들에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와 정보를 제공·공유하고,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국책사업과 관련된 정책과 계획을 수립하는 주체는 정부며, 국민은 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의사를 결정해 추진하는데 협력자이자 조언자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전제조건이라 판단된다. 만약 일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잘못된 방향으로 사업을 변경하거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정책의 일관성과 방향성을 잃는다면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아울러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국책사업일수록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해관계자들의 폭넓은 참여와 의견수렴과정을 거쳐 진행해야 한다. 특히 단기간에 공약사업을 달성하고 성과를 내겠다는 인식을 가지고 무리하게 추진하던 국책사업이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엄청난 행정적·경제적 손실을 야기했던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한편 국토계획과 환경계획의 연계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시급히 해결돼야 할 우선과제가 있다. 현재 국토기본법에 근거한 국토계획은 그 결과물이 공간화, 즉 지도로 나타나지만 아직까지 환경정책기본법에 근거한 환경계획의 공간화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다시 말하면, 국토계획의 주요 근간이 되는 토지이용계획을 수립할 때 환경·생태적으로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을 공간적으로 고려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군·구 단위에서 토지의 환경·생태적 가치를 평가하는데 활용가능한 환경지도를 의무적으로 제작·보급해 국토계획과 환경계획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을 때 객관적이고 공정한 절차로 합의형성을 이뤄낼 수 있는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기구를 중앙정부 및 지자체에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국토-환경계획의 연계를 위한 개발과 환경보전에 대한 균형있는 융합적 사고와 지식·소양 등을 갖춘 전문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5-01-15 박경훈

기쁘고 좋은 일

일상의 평안 비는 새해 소망 팍팍한 현실 반증영화 '국제시장' 아픈 과거사 감정이입 위로받아시인처럼 따뜻한 생명공동체 연대서 기쁨 찾아야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면 새로운 다짐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덕담도 나눈다. 올해는 좀 더 살기 편안해지기를…. 가족들 건강하고 경제사정이 보다 좋아지기를…. 가만히 헤아려보면 우리의 소망은 현실적이다. 일상의 평안이면 족하다. 실상이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전세난에 시달리고 비정규직의 설움을 감내하며 경제적 불평등과 위화감 속에서 매일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간다. 정부는 소득 3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데 삶의 구체적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진학걱정·취업걱정·결혼걱정·양육걱정·연금걱정…, 우리는 어느새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사는 사회의 일원이 되어간다.기쁘고 좋은 일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우리를 위로하는가.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경우 복고가 그 해답이 되기도 한다. 서럽고 가슴 아픈 과거라도 거기에는 최소한의 공감이 있다. 영화 '국제시장' 관객 수가 곧 1천만명을 넘어설 듯하다. 흥남 출신의 꼬마소년이 부산 국제시장에 정착해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가 골간을 이루는 가운데 필름은 격동하는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을 듬성듬성 보여준다. 흥남철수·파독광부·월남전참전·이산가족 찾기 등 당대의 주요한 사건을 재현하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영화는 주인공 윤덕수의 개인사나 가족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사를 동시에 보여준다.세대에 따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반응 차이가 있지만 조국 근대화 세대의 노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점은 많은 관객들이 동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찬란한 과거의 영화(榮華)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기억과 역사의 켜 속에 잠들어 있던 서러운 슬픔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함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면서 오늘 우리의 작은 즐거움과 기쁨이 이전 세대에게 빚지고 있다는 심리적 채무감을 확인시켜 준다.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삶이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이전에는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억척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국 근대화에 몸바쳐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헌사로 읽힌다.삶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찾는 일은 단순한 쾌락추구가 아니다. 또한 일상의 평안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선(善)도 아니다. 우리가 일상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쁘고 즐거운 일은 허공의 구름처럼 덧없게 된다. 활기찬 건강과 아름다운 외모, 신분의 안정과 물질적 풍요가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지구생명공동체 전체로 눈을 돌려 모두 함께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가짐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조언도 있다.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미당 서정주 시인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1993)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은/낳아서 백일쯤 되는 어린 애기가/저의 할머니 보고 빙그레 웃다가/반가워라 옹알옹알/아직 말도 안되는 소리로/뭐라고 열심히 옹알대고 있는 것.//그리고는/울타릿가 감나무에/산까치가 날아와서/뭐라고 거들어서/짹짹거리고 있는 것.//그리고는/하늘의 바람이 오고 가시며/창가의 나뭇잎을 건드려/알은 체하게 하고 있는 것."시인은 생명체들이 따뜻하게 연대하는 모습에서 삶의 기쁨과 공동선을 발견한다. 이런게 지혜가 아닐까? 새해 들어 새롭게 기쁘고 즐거우려면 우리도 주변에서 많이 발견하면 된다. 추운 겨울에도 햇빛은 나를 얼마나 따뜻하게 해주는가. 지금 내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밥은 우리 생태계의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나를 위해 베풀어주는 것이던가.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크게 떠서 더 멀리 바라보자./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5-01-08 윤재웅

사법 민주주의에 대한 경계

헌재, 권력 본래목적 뭔지 스스로 염두에 둘 필요사법부가 지나친 정치개입은 정치권 잘못도 커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떠넘겼기 때문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눈에 띄게 중요해지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 행정부의 힘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헌재가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행정부와 입법부의 결정에 반하는 판결을 종종 내놓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정치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적 예로 2004년 5월 노무현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기각 결정과 동년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결정이 있다. 보다 최근으로는 2014년 10월 선거구제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과 12월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이 있었다.이러한 헌재의 영향력과 독립성 증대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의 원칙중 하나인 3권 분립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며, 나가 입헌주의 원칙 아래에서 헌법의 절대성을 수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재의 지나친 영향력과 그에 따른 소위 '사법민주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 또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법을 대표하는 입헌주의와 정치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와의 잠재적 갈등은 분명히 존재한다.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선출되지 않고 정치적 책임도 직접 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에게 막강한 정치적 권한을 부여함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을 비롯해 미국·독일 등 일부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사법부에게 행정부와 입법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위헌심사권을 부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다수결 원칙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다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다수결 원칙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칫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헌법에 명시돼 있는 소수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헌법을 다수결 원칙의 상위에 두는 것이다.모든 권력은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헌재의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헌법은 추상적이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사법부의 권력은 입법부나 행정부와 달리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남용의 정도와 부작용이 더욱 심할 수 있다. 위헌심사제도가 처음 시작된 미국도 사법부가 지나치게 정치적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행정부와 크게 충돌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뉴딜 입법이 계속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자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법원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통해 대법원의 정치개입 자제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 이후 미국 대법원은 소위 '자제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판결을 자제하고, 주로 소수자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사건에 전념하는 전통을 가지게 됐다.여기서 한국 헌재가 그 동안 내린 주요 판결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판결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이처럼 평가가 엇갈린다는 사실이 그 판결의 정치적 성격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헌재가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이나 의견을 내세우거나 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민 다수의 여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헌법에 보장된 소수의 기본권 보호를 우선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사법부가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데에는 정치권의 잘못도 크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에 떠넘기거나, 선거구 획정 불합치 사례와 같이 심각한 문제를 방치해 둠으로써 사법부의 개입을 초래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이 앞으로도 사법부에게 정치적 판단을 맡길 생각이라면, 독일의 경우처럼 헌재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현행 대통령 중심의 판사임명 방식을 바꿔 입법부와 정당의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법부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줄이거나, 아니면 정치적 책임성을 증가시키거나, 이 두 가지 방안중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사법부가 정치를 좌우하는 사법민주주의의 폐해가 앞으로 심각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김 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 김 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

2015-01-01 김 욱

행복한 왕자가 불행하게 울고 있다

타인의 성공·불행이 나에겐 정반대로 가고 있어우리사회 사라져 가고 있는 이타주의 안타까워남을 위해 희생한 왕자와 제비가 몹시 그립다지난 주 종강을 했다. 여름방학과 달리 겨울방학 캠퍼스는 눈 내린 산사(山寺)처럼 적요하다. 나는 이제 몇 달동안 내 나름의 동안거에 들어간다. 먼 훗날 서울거리 어디에서 문득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졸업을 앞둔 제자들과의 마지막 강의는 헤어짐으로 인해 묘한 느낌을 준다. 해마다 종강 날에는 나는 짧은 동화 '행복한 왕자'로 작별의 인사에 가름한다.어느 늦가을 저녁, 따뜻한 남쪽을 향하던 제비 한마리가 행복한 왕자의 동상 발등에서 잠을 청한다. 순간, 행복한 왕자가 흘리는 눈물에 놀라게 된다. 살아생전 불행을 몰랐던 왕자는 죽어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자리잡게 되자 세상의 온갖 슬픈 일을 지켜보게 된다.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을 치장한 수많은 보석을 떼내어 그들에게 나눠주게 한다. 왕자를 장식한 모든 보석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제비는 남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남과 동시에 얼어 죽는다. 봄이 오자 마을 사람은 한때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멋진 동상이 보석이 사라진 흉측한 무쇠덩이로 변해 있자, 창피하다며 부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하느님이 천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가지 즉, 제비와 왕자의 심장을 가져오게 해 하늘나라에서 다시 행복하게 살게 했다는 줄거리다.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쓴 동화다. 19세기 말 산업혁명과 함께 불어 닥친 당시 영국사회의 이기주의·물질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타인에 대한 사랑의 존귀함을 호소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유미주의자이지만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와일드는 아일랜드출신의 다른 저명 작가인 예이츠나 버나드 쇼 등과 마찬가지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이래 빼어난 작품으로 일약 유럽의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30대 중반 16세 연하의 옥스퍼드 대학생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요즈음 말로 성 소수자, 즉 동성애다. 당시 지배세력에 의해 외설로 단죄되어 2년 형에 처해지는 등 불행한 삶을 이어가다 1900년 파리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다.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속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나머지 극도로 버림받은 삶이었다. 하지만 사후 90여년 뒤인 1998년 영국 정부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그의 동상을 건립함으로써 비로소 명성을 인정받았다.나는 동화 '행복한 왕자'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런던에 갈 때면 반드시 와일드 동상을 찾는다. 이 불행했던 천재의 행복론을 읽으며 나는 우리 사회의 사라져 가는 이타주의(altruism)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 개념을 창안한 석학 자크 아탈리는 초연결망 사회에서는 이타주의가 미래의 세상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마치 혼자만 전화기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 곧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미래사회에서는 타인의 성공이 곧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도 재앙이 되는 경우가 많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나는 '행복한 왕자'를 종강의 변으로 수강생들에게 들려줄 때마다 한세기 전 와일드가 우리에게 던져 준 타인을 위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가엾은 제비는 점점 추워졌지만, 왕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빵집 문앞에 떨어진 부스러기빵을 쪼아 먹고 양날개를 파닥이며 몸을 녹이려고 했다. 하지만 제비는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남은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왕자의 어깨 위로 날아 올랐다. 제비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산타클로스를 철석같이 믿다가, 믿지 않다가, 스스로 산타클로스가 되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다.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왕자와 제비가 몹시도 그리운 한해의 끝이다. 아듀 2014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

2014-12-25 김동률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환경교육

작은단위 전문 기관·단체 적극 양성해야조사·평가 직접 할 수있게 행·재정 지원도생활문제점 해결 프로그램으로 발전 시켜야이번 학기 전공과목에서 '주민들이 생각하는 동네환경'이라는 팀 과제를 학생들에게 냈다. 학생들은 동네의 공기질과 하천수질·소음·쓰레기처리 등 생활환경과 공원이나 하천·호수·야생동물 등 자연환경에 대한 만족도, 보행친화도, 주민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해 주민을 만나 인터뷰했다.과제 발표를 마친 후 학생들로부터 주민과 인터뷰하면서 느꼈던 점을 들었다. 학생들의 소감은 다양했지만 '몇 년 동안 살고 있는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동네환경에 대해서 너무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는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이 같은 소감은 '내가 그동안 시민들을 대상으로 국가와 지구적 차원에서 발생되고 있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와 멸종위기종의 증가, 자연자원 고갈과 에너지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강의가 과연 의미있는 환경교육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게 했다.매일같이 가족·친구·이웃들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동네 환경부터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깨끗하게 가꾸어 가는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촉매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환경교육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지난 2008년 9월 제정된 환경교육진흥법은 환경교육을 '국가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발전을 목표로 국민이 환경을 보전하고 개선하는데 필요한 지식·기능·태도·가치관 등을 배양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다. 환경부는 이 법을 근거로 2010년 9월 '학습과 실천을 통한 지속가능한 녹색사회 구현'을 비전으로 하는 제1차 환경교육종합계획(2011~2015)을 수립·추진하고 있다. 또 지난 11월 1일 수원시는 2018년까지 45만 전 가구가 환경교육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환경교육 시범도시'를 선언하는 등 지자체 수준에서도 환경교육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국가와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다양한 환경교육 정책·계획, 프로그램에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없다면, 이것은 단지 행정기관과 교육을 담당하는 다양한 주체들만의 잔치에 그칠 수밖에 있다. 실제 지자체나 민간단체, 학교 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환경교육사업들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눈에 보이는 수치적인 실적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지금까지 환경교육의 주된 주체가 되었던 환경관련 민간단체(NPO 또는 NGO)는 무분별한 개발행위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환경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국민들의 환경의식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고, 현재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젠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지방의제21(Local Agenda21)의 목적과 부합되게 환경교육의 공간적 범위와 대상을 좀 더 좁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동네(또는 마을) 단위로 가야할 것이다.따라서 지역사회의 관심과 실천의식을 제고할 수 있도록 동네와 같은 작은 단위의 환경교육 전문기관 또는 단체·동네에서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해 온 풀뿌리 단체를 적극적으로 양성·지원해야 할 것이다. 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동네환경을 조사·평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지자체를 비롯해 전문 연구·교육기관 등이 행정·재정 및 전문지식·기술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아울러 지자체 등의 행정기관은 주기적으로 주민들의 생활과 밀착된 동네환경 이슈를 찾아내고, 이를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고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환경교육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12-18 박경훈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며

경쟁에서 빠른 디지털족과 뒤처지는 아날로그족불안하다는 배회족… 행복하지 않다는 질주족짧아지는 젊음의 그림자… 소중한건 오직 지금뿐어느덧 12월이다.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문다. 거리에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고 성탄트리도 반짝인다. 예전에 그 많던 크리스마스카드와 캐럴송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구두닦이 소년과 엿장수 아저씨와 연하장 그려 팔던 예쁜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가수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마저 노래방기기나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시대. 디지털기기 속으로 들어간 게 어디 한 둘이랴. 세상 참 빠르게 변한다. 손 안의 스마트폰 속으로 세상은 몸을 꾸기며 들어간다. 잠깐 사이에 세상은 천지개벽하고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변화의 속도가 가속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식총량은 73일마다 두배씩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다. 너무 빠르다. 디지털종족들은 생존가능성이 높지만 아날로그종족들은 생존경쟁에서 뒤처지게 마련이란다.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논리가 디지털 진화론을 만든다.그래도 오늘은 잠시 아날로그식 삶이 그립기도 하다. 회룡고조(回龍顧祖). 먼 길 달려온 산줄기가 제 온 곳 돌아보듯 잠시 지나온 시간 생각해 본다. 조금 있으면 언론들은 올해의 10대뉴스를 경쟁하듯 발표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시간 열차속에 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나간 사건의 풍경들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내게서 떠나 허공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럴수록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빛나는 전제임이 절실해진다. 연말이라는 추상적 '끝'이 안개 진군하듯 다가오는 시간에.가만히 내게 물어보니 내 삶의 진짜 주인은 속도로구나. 무리지어 달리는 말처럼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어 질주해 왔지. 시간의 바람은 무서운 속도로 휙휙 지나가고 붙잡아달라는 손들 이루 다 잡을 수 없었네. 그렇게 됐어. 갑오년 올 한해, 바쁘다는 말 입에 달고 살아온 건 분명하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이 땅의 허망한 죽음들이며 숨가쁜 삶들은 망각의 저녁 강 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는구나. 세월호의 꽃다운 생명들, 분신한 아파트 경비원, 고독사한 옆집 할아버지, 직장 구하지 못한 늙은 청년들, 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유령들.그래도 좋아, 나도 좀 바빠 봤으면. 노동열차를 놓친 '배회족'들은 오늘 저녁 노을이 더욱 검붉고 처량하다. 그들 식탁엔 매번 불안과 초조가 올라오지. 질주해도 좋아. 난 지속적인 속도가 필요해.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가상의 속도를 꿈꾸며 2천원이나 오른 담뱃값 걱정을 잠시 잊는다.탑승에 성공한 '질주족'도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대기는 마찬가지다. 나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목표와 성과의 기관차에 올라타 전력질주만 했을 뿐 잠든 아내 흰 머릿결 이제야 세어본다. 오늘도 늦네요, 카톡 문자만 몇 번이던가.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 그 모습 비슷도 하건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의 모습은 같지가 않구나(年年世世花相似 世世年年人不同).' 세월의 무상함과 나이 드는 서글픔을 노래하는 당시(唐詩)의 빛나는 명구 비로소 실감하니, 내 근본의 팔할이 시간이란 걸 불현듯 알겠구나. 해서, 저무는 해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시간을 스케치 해보는 것이다.시간은 정직하다. 배회족이건 질주족이건 그들 몫만큼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남은 인생에서 제일 젊다. 앞으로는 젊음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진다. 그러니 소중한 것은 오직 지금뿐. 그림자가 몽당연필처럼 짧아져 스러져 가는데 지나온 기차역에서 만나지 못한 그녀를 애달파한들 무엇하리. 여기 3차원 우주에서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전부. 배회족도 질주족도 속도와 싸우는 게 아니라 오직 지금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아주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행복의 정의이자 실현이다. 한 해가 저문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12-11 윤재웅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많은 일이 가깝고 먼 곳에서 벌어진 올 한해술에 취해 간신히 혹독한 세상을 버티고있나약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상처주진 않았을까…어느 해 가을 잣나무 숲을 지나간 적이 있다. 청설모 한마리가 잣나무 우듬지를 바삐 오가며 잣송이를 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보통의 경우 청설모는 잣 한송이를 따면 입에 물고 나무를 내려와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행동을 반복하는데 이 녀석은 다른 방법으로 잣을 따고 있었다. 잣을 따서 나무 아래로 떨어뜨린 뒤 어느 정도 양이 쌓이면 내려와 옮기는 방식이었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다른 누군가에게 도둑맞을 위험이 다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술안주로 잣을 좋아하는 나는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녀석이 딴 잣을 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무 위의 청설모가 반응을 했지만 청설모의 말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나 다름 없었기에 개의치 않고 비닐봉지를 채워나갔다. 녀석은 뭐라고 한참을 씩씩거리다 다른 나무로 옮겨갔다.또 어느 해 가을에는 고향 친구들과 산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어느 수컷 다람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람기가 많은 다람쥐였는데,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에는 아름다운 첩을 서넛이나 두고 산다는 것이다. 당연 먹을 게 많으니까 첩이 많아도 먹여 살리기가 쉽다. 그런데 이 녀석,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닥쳐오면 모두 정리하고 딱 한마리만 남겨둔다고 한다. 그것도 애꾸눈인 다람쥐를. 당연히 왜냐고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눈이 애꾸면 한겨울 굴속에서 잣이나 도토리를 반밖에 먹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다. 올해 역시 많은 일들이 가깝고 먼 곳에서 벌어졌다. 누가 올 한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나는 이렇게 쓸 것 같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이것은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이라크와 이란의 박해를 받으며 양국의 국경에 사는 평범한 쿠르드인들에 관한 슬픈 이야기다. 소년 가장이 된 주인공이 하는 일은 유일한 생존수단인, 국경을 몰래 오가며 밀수를 하는 것이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워낙 추운 지역이라 눈으로 덮인 국경을 넘으려면 말(馬)에게 독한 술을 먹여야만 되어서 붙여진 제목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이 내게는 말(言)로 여겨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올 한해 이 땅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과 거기에 뒤따라오는 무수한 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마치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고, 달려가고, 몰려오고, 쓰러지는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더 나아가 취한 배에, 취한 기차에, 취한 그 무엇에 실려 눈보라 일렁이는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영화 속 일찍 가장이 된 어린 주인공도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은 채 영화는 끝이 났다. 정녕 그래야만 되는가….그런데, 지금껏 나는 취한 말들의 공격만 받으며 살았던 걸까. 나 역시 나보다 약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취한 말들을 던져온 것은 아닐까. 그 말에 누군가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아파했던 것은 아닌가. 다른 이들이 던진 취한 말에는 온갖 괴로운 표정과 신음을 토해놓곤 내가 던진 취한 말엔 모르는 척, 기억나지 않는 척, 대수롭지 않은 척 등을 돌려버렸던 건 아닐까. 내가 던진 말은 절대 취한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고 고집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으니. 취한 말뿐만이 아니라 취한 행동까지 저질러놓곤 억지로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그해 가을 나는 잣나무 우듬지의 청설모를 계속 따라갔다. 녀석이 떨어뜨리는 잣송이를 빠짐없이 비닐봉지에 담으며. 나무 위에서 방방뛰며 고함을 치는 청설모에 대해 재밌어하며. 녀석이 견뎌야할 길고 깊은 겨울은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렇게 낄낄거리다가 제법 묵직해진 봉지를 든 채 잣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술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 청설모 얘기를 들려주며 재밌지 않느냐고 낄낄거렸다.그들은 슬픈 눈으로 저 위의 다람쥐를 보듯 취한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12-04 김도연

'별에서 온 상속자들' 영화 보셨나요?

자신의 힘만 믿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중국'콤플렉스에 가득찬 '무례한 대국' 마뜩찮아세계인들 겁내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어''별에서 온 상속자들'이란 영화를 보셨는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상속자들'의 인기에 편승해 중국이 최근 공개한 영화다. 제목이 시사하듯 성공한 두 편의 한국드라마를 적당히 섞었다. 아예 '중국 최초의 합체 드라마'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인기 한국드라마를 짜깁기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리고 있다. 더구나 중국은 이 영화를 한국에 역수출하겠다고 밝혔다.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다. 예능표절은 더 심각하다. 2010년엔 '청춘불패'를 따라한 '우상의 탄생'을 보자. 제목만 다를 뿐 기획부터 시각효과, 배경음악은 물론, 출연자가 입은 옷까지 똑같았다. '모방이 아니라 복사'다. 개그 프로그램 역시 판박이 수준이다. 최근 중국 장쑤위성 TV는 '개그 콘서트'의 핵심코너를 그대로 베껴 KBS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문제는 이 같은 저작권을 침해한 베끼기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표절에 아예 눈감고 있다. 결국 중국 법원에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지만 실질적인 승소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해결책은 없다. 2006년 이래 한국저작권위원회가 베이징에 사무소를 열고 보호활동을 하고 있지만 안하무인격인 중국의 태도에 존재감조차 찾기 어렵다.나는 오늘날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가치 못지않게,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가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관점에서 서양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이다 보니 동양의 무위자연적인 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월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The Sound of Fury)의 난해함보다는, 양귀비를 잃은 당 현종이 베갯잇을 적시며 연리지정(連理枝情)을 노래한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솔직히 햄버거보다 중국집 짜장면에 훨씬 더 정이 간다.그럼에도 중국의 근래 행태를 보면 문득 문득 나의 이 같은 호의가 빛바래져 감을 느낀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중국인은 예로부터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자 유일한 문명국가로, 자신들의 황제가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어왔다. 2천년 전 통일 진나라 이래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해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발적인 복속과 굴종이 아니면 창칼을 앞세운 무력 정복을 통해 자신들의 발 밑에 꿇게 해 왔다. 이것이 중화주의의 요체다. 그런 중국이 긴 침체기를 끝내고 두려울 만큼 굴기하고 있다. 중국 스스로도 이제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이 곳곳에 넘쳐 보인다. 명동거리를 찾는 중국 관광객의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두툼한 지갑을 여는 그들의 표정에는 이미 한국을 깔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기성세대가 중국인들에게 발마사지를 받아 보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이제 온갖 짝퉁 콘텐츠나 불량식품을 쏟아내더라도 문제 삼기가 어렵다. 연전에 베이징의 쯔진청내 스타벅스 매점이 고궁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는 글이 블로그에 등장한 지 몇 달 만에 쫓겨났다. 합법적인 계약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고궁점 폐점에 대해 중국인들은 '스타벅스 구축(驅逐·쫓아냄)'이라는 황당한 표현을 사용하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나이키·구글 등 초대형 기업들도 힘세진 중국 앞에 양들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중국이 강대국으로 굴기하는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믿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콤플렉스에 가득 찬, 이 무례한 대국이 마뜩찮은 것이다. 오랫동안 동쪽 오랑캐(東夷) 취급받으며 온갖 시달림 속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온 한반도 작은 나라에 사는 나는 거만한 이웃의 등장에 적잖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알아야 한다. 많은 세계인들이 중국을 겁내고 있기는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냉엄한 현실을./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11-27 김동률

고령화 시대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 누리도록 환경조성 중요정부·지자체, 농어촌·중소도시 많은 지원 필요경쟁·각종 범죄 등 힘겨워하는 미래들 지켜줘야최근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기본법에 의한 9~24세 청소년 인구 비율이 1978년 36.9%에서 2014년 19.5%로 감소했고, 2060년에는 10명 중 1명인 11.4% 수준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는 2014년 기준 총인구의 12.7%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고, 2026년에는 그 비율이 20%를 초과하는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처럼 초고령화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야 할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다른 계층과 분야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 특히 수도권과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지방의 농어촌지역과 중소도시일수록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공간과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든 게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된다.불과 10년 정도 뒤에 펼쳐지게 될 초고령화시대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청소년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갖고,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개발하고 잠재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 즉 청소년 친화적 도시를 만들어 가는 데 국가뿐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유니세프(UNICEF)는 2000년부터 18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기 좋은 'Child Friendly Cities' 구축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천300여개 이상의 도시가 어린이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로 인증을 받았고, 우리나라는 서울시 성북구가 2013년 11월 20일 최초로 인증을 받았다. 물론 인증을 받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가겠다는 정책적 판단과 관련 사업의 추진은 많은 도시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사례라 하겠다. 유니세프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다양한 활동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고, 쾌적한 환경과 안전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등의 노력을 어린이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의 중요한 원칙임을 강조하고 있다.유니세프에서 강조하는 있는 청소년 친화적 도시의 모습에 비춰 볼때, 농어촌지역과 지방의 중소도시에 대한 국가 및 지방정부 차원의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비해 문화예술 교육환경은 그 격차가 크고 매우 열악하다. 지방의 농어촌과 중소도시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도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고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에 참여해 창의성과 감수성 등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다음으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가정·학교·지역사회 등에 산재해 있는 각종 위험요소를 제거해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통학로를 보다 안전하게 조성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활동공간을 학교 및 집 주변에 많이 조성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되겠다. 또한 지역의 공공재라 할 수 있는 자연자원을 잘 보전·관리하고,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는 등의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것도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대학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환경,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 확대로 너무나도 쉽게 접하고 있는 유해한 매체물, 각종 범죄와 사고 등으로부터 위협받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은 초고령화시대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우리들의 미래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11-20 박경훈

초등학교 1학년 할머니

3세대가 함께 다니는 학교 '새로운 실험'어르신·아이 사이 배려·사랑·존경 샘솟아봉암초 사례 흥미 넘어 진지한 연구 필요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봉암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전교생이 4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다. 이 학교 학생중 70대 할머니가 두 분 있는데 올해 1학년 신입생이다. 할머니들은 왜 칠순을 넘겨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을까. 못다 배운 한글이라도 익혀 까막눈이라도 면해 보고 싶었던 걸까. 최석진 교장은 좀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소수자와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평등과 교육정의, 세대갈등과 문화격차 해소를 위한 학교를 과감하게 디자인하는 중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다니는 학교, 3세대가 같이 다니면서 문화를 공유하는 학교, 가방은 큰아들이 사주고 조카며느리는 크레파스를 사주는 행복한 공동체 마을, 다문화가정 이주 여성도 그 자녀와 함께 다니게 되는 미래교육의 희망 제작소…. 한국사회의 새로운 교육실험이 시골 작은 마을에서 시도되고 있었다.할머니들은 아침 등교후 정규 교육과정을 익히고 손자같은 동료 학생들과 점심도 하면서 오후 4시40분까지 학교에 꼬박 남아 학습한다. 칠순 할머니가 담임선생님께 얼마나 공손하게 인사하는지 동료학생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 법도를 따른다. 김치담그는 방법이라든지 지혜로운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성교육도 저절로 된다.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학업진도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면 코흘리개 꼬맹이 학생들이 '할머니 제가 읽어 드릴게요' '할머니, 제가 써드릴게요'라며 도움을 주고 받는다. 학습자들 사이에 저절로 이뤄지는 동료애다. 보다 극적인 장면도 있다. 전주에 있는 1학년 손자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할머니가 그렇다. 도시의 손자는 시골의 문맹 할머니가 이제는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좋은 책 많이 읽으셔야 해요'라며 제법 어른스럽게 권유한다. 편지읽는 할머니 입에서 동급생 손자 목소리가 살아나온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이보다 따뜻한 가족애가 있을 수 없다. 배려와 사랑과 존경의 선의(善意)가 시골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안에 잔잔히 울린다.봉암초등학교 사례는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노년인구, 줄어드는 학령아동들, 평생학습시대의 도래, 문맹해소의 현실적 대안, 학교와 지역사회의 상생협력 방안…. 전국 어디에서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슬기롭게 대응하는 이 사례는 단순한 흥미 차원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과 같은 표심유혹 정책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삶의 질 개선이다. 그 개선 내용속에는 교육과 문화에 대한 욕구도 들어 있다. 평생학습과 교육격차해소 방안이 투자우선순위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삶의 질 개선이 예산배분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좋은 뜻'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실천 역시 중요하다.미국의 산간벽지에 명문대 졸업생들이 교사로 참여해 2년간 봉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름하여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 TFA)'다. 1990년 프린스턴대학교 졸업 예정자인 22살 여대생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사업은 지난 25년동안 4만명의 봉사자들을 훈련시켰고 한 해 1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교육여건이 부족한 곳에 교사를 파견하자는 대담한 아이디어가 그 모태가 됐다. 물론 이 프로그램 운영의 예산은 '엔젤 펀드'였다. 좋은 뜻에 후원하는 기부문화가 있기에 가능했다.봉암초등학교를 어떻게 하면 미래 희망학교로 만들 수 있을까. 전국의 수많은 사례들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까.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기대하느니 '선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젊은이들의 기개를 기대하는 게 빠를지 모르겠다./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11-13 윤재웅

진부역

천혜의 자연 파괴하며 개최하는 '동계올림픽'마지막역 이름을 '오대산역'으로 정했으면…그게 우리가 훼손한 자연에 대한 '작은 위로'평창 동계올림픽은 2018년에 열린다. 올림픽 유치에 두번 고배를 마실 때부터 시작해서 어렵게 유치한 뒤까지 평창은 여러 방면에서 요동쳤다. 어떤 유명한 연예인은 올림픽경기장 가까운 곳에 땅을 샀다가 언론의 뭇매를 맞고 한동안 활동을 접기도 했다. 그 사람뿐이겠는가. 경기장 근처 알짜배기 땅은 이미 외지인들의 소유가 된지 오래됐다. 비싼 가격으로 땅을 판 사람들이야 행복하겠지만 거기에서 제외된 대다수의 지역민들까지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덩달아 치솟은 땅값 때문에 새 농지를 구입하거나 이사갈 집터를 장만하는 것도 쉽지 않게 돼버렸다. 이래저래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않은 까닭은 대관령이 바로 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향 풍경과 고향 사람들이 올림픽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따스했던 정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평창은 지금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길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는 일제때 개통한 신작로가 유일하게 큰 길이었다. 차가 지나가면 흙먼지 날리고 자갈이 튀던 그 길 옆에 피어나던 코스모스의 벌을 잡으며 우리는 학교를 다녔다. 눈이 1m씩 내리던 겨울이면 인근 스키장에서 나온 스노카가 눈길을 쌩쌩 달렸다. 자동차 꽁무니에 연결한 밧줄을 잡은 스키어들이 대관령에서 줄줄이 내려왔다. 스키어들을 흉내내다 지치면 우리들은 나무스키를 타고 눈덮인 비탈 밭으로 올라가 내리달리다가 밭둑에서 멋지게 점프를 했다. 신작로는 70년대에 포장되고 뒤이어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고속도로는 마치 높은 성벽처럼 보여 산골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올라가지 말라는 고속도로로 올라가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고 잠시 멈춘 관광버스에서 내린 도회지 사람들을 신기한 듯 훔쳐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고속도로는 점점 넓어지고 높아지더니 결국 마을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 또한 살 곳을 찾아 뿔뿔이 이사를 가야만 했다.국도와 고속도로에 이어 지금 평창엔 또 하나의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철길이다. 동계올림픽의 가공할 위력이다. 지금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의 풍경이 또다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진부역(珍富驛)에서부터는 험준한 대관령을 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이 뚫리고 있는 중이다. 고향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땅밑 저 아래에서 암반을 발파하는 공사때문에 한동안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도 감수했다. 마을에 처음으로 기차가 들어온다는 설렘으로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하지만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닌 내가 올림픽을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을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올림픽의 이념은 무엇인가. 올림픽은 왜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가. 우리는 올림픽을 어떻게 보는가. 혹시 돈을 벌기 위해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보다 빨리 서울에 가기 위해, 보다 빨리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올림픽 유치에 열광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집 땅값도 어마어마하게 오를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깃발을 흔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 거대한 모순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 아래 수백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진부역은 동계올림픽 주경기장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역이다. 역의 이름을 놓고 말들이 많다. 눈의 고장 평창은 동계올림픽을 인간이 아닌 천혜의 자연조건으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자연을 파괴한 뒤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동계올림픽으로 가는 마지막 역 이름을 오대산역으로 정했으면 좋겠다. 그게 여태껏 우리가 파괴한 자연에 대한 아주 작은 위로라고 본다./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11-06 김도연

터미네이터 눈물이 나는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아픔 '말없는 언어''세월호' 등 올해는 유난히 눈물 마를새 없었다저물어 가는 한해, 세상은 점점 메말라가기만…'스페이스 오딧세이'란 전설적인 SF영화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이다. 1968년, 영화 개봉 당시에는 인간이 아직 달에 가기 전이었다. 컴퓨터 그래픽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사실적인 화면과 영상미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걸작 영화다. 장황한 설명이나 대사가 거의 없다. 대사가 아니라 영상과 음향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첫 대사는 영화가 시작되고 25분이 지난 후에야 나오며, 후반 20분에도 대사가 아예 없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강렬한 사운드가 묵직한 느낌을 던져준다. 영화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인공지능 로봇 '할(Hall)'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정지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항해 인간을 공격한다.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인간의 적이 돼 버린 로봇을 다룬 이야기는 많다.최근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로봇 '페퍼(Pepper)'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 최초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 로봇이 탄생했습니다" "사장님, 너무 띄우지 마세요. 부담됩니다." 기자 회견장에서 손 사장과 로봇 '페퍼'가 나눈 대화다. 페퍼는 손 사장은 물론이고 기자들과도 얘기를 주고 받았다. 대화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그에 맞는 대답을 내놨다. 적외선 센서 등을 활용해 사람의 감정까지 측정한다. 가령 눈은 그대로인데, 입만 웃는 모양을 하면 웃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페퍼'의 감정인식 능력은 아직은 기초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학습기능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감정을 인지하게 된다고 한다. 미래에는 이처럼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로봇이 등장할 것이다. 아득한 시절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던 '아톰'처럼 인간과 친구가 되는 로봇 말이다.지난 여름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벤츠 조립공장에서 본 로봇은 충격이었다. 인간 못지않게 복잡한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MIT의 브린욜프슨, 매카피 교수는 '제2의 기계시대(The Second Machine Age)'라는 책에서 "지능형 소프트웨어의 등장으로 구글 무인차, IBM 왓슨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과 기계간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이 같은 일은 상당한 미래에나 가능하겠다. 하지만 나는 로봇을 향한 인간의 집념이 가져올 미래에 걱정이 앞선다. 업계는 저마다 로봇의 뛰어난 기능과 상품성에 주목하지만 로봇이 인간처럼 눈물 흘리는 그 날이 왠지 두려운 것이다.영화 터미네이터를 보자. 미래의 인류를 구원할 지도자를 위해 스카이 넷과 싸우던 인간 못지않은 로봇이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펄펄 끓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져 사라지려 한다. 그 순간 주인공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터미네이터가 묻는다. 도대체 그 액체가 무엇이냐고. 로봇에는 없는 액체에 대해 소년 존 코너가 답한다. 인간은 슬픔을 느끼면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나온다고. 존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로봇 터미네이터는 묘한 느낌속에 용광로에 몸을 던진다. 로봇 터미네이터가 정작 감동받은 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액체, 즉 인간의 눈물이었다.눈물은 말 없는 언어다. 여자야 기회만 되면 즉각 넘쳐흐르는 엄청난 양의 눈물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눈물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올해는 유난히 눈물 많은 한 해였다. 세월호를 시작으로 사연 많고 곡절 많은 한국인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각박해져 가는 세상, 눈물도 점차 메말라 간다. 마음은 아직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서성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문 밖에는 벌써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10-30 김동률

걷기 좋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모든 도시행정 보행환경·보행자 우선 고려주거환경, 활동적인 삶 가능하게 만들 필요도시재생도 반드시 보행중심으로 계획돼야출퇴근 시간이면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차량으로 심각한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어린이보호구역에서도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차량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모든 골목길은 주차된 차량으로 점령당하고, 자가용이 없으면 생활하기 불편한 도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통행수단인 보행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도시, 과연 이런 도시가 살기좋은 도시일까?세계에서 살기좋은 도시로 평가되고 있는 도시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국의 컨설팅 업체인 머서(Mercer)는 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를 발표하고 있다. 2011년도에 이어 2013~2014년도 연속 1위를 차지한 호주 멜버른은 2030년까지 전체 이동수단의 30%를 보행자 통행이 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 외 상위권을 차지한 캐나다의 밴쿠버와 토론토,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등도 보행이나 자전거·대중교통을 우선으로 하는 도시 및 교통계획을 펼치고 있다. 물론 보행환경을 비롯 다양한 분야를 평가해 살기좋은 도시를 선정한다. 하지만 보행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도시가 과연 살기좋은 도시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현대문명의 획기적 산물인 자동차는 도시화와 산업화시대에 안성맞춤인 빠른 이동수단이기에 선진 산업국가들은 앞다퉈 보급해 왔고, 도시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이에 맞춰 빠르게 변화돼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에 따른 난개발과 도시내 도시간 교통량의 급증, 기성시가지의 쇠퇴, 지역 커뮤니티의 파괴, 그리고 신체활동 감소에 따른 비만인구의 증가 등 자동차 중심 도시로 인해 발생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문제인식이 확산되면서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서 탈피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많은 도시에서 시작되고 있다.성공이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2020년 보행수단 분담률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보행친화도시 서울 비전'은 매우 중요한 시도라 생각된다. 특히 기존의 많은 도시에서 단순히 차량을 막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보행공간 조성에 치중했던 '보행전용거리'와는 달리 주변 상권과 보행자 이동패턴, 교통량 등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지구단위의 종합적인 맞춤형 보행환경 개선을 위한 '보행친화구역'조성사업에 많은 기대가 된다.보행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살기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보행로 중심의 물리적 환경개선사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토지이용·교통·건축·보건·공원녹지 등 모든 도시행정에서 보행환경과 보행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는 자전거이용 활성화정책도 보행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자전거 통행자를 위해 기존 보행로를 자전거겸용구간으로 바꾸는 것보다는 차도를 줄여 자전거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 보행을 우선시 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또한 사람들이 자가용을 버리고 많이 걸을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나가고, 이를 위해서 보행중심의 활동적인 삶(Active Living)이 가능한 주거환경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특히 쇠퇴한 구도심권을 되살리기 위한 도시재생사업도 반드시 보행이 중심이 되면서 자전거나 대중교통이 서로 잘 연계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자동차보다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걷기 좋은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이자, 건강한 도시라는 지역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불만의 목소리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걷기좋은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현 세대가 선택해야 할 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10-23 박경훈

그리운 독도 강치

日어부들 창칼·몽둥이로 한해 3천200마리 죽여수천년 평화롭게 살다 제국주의 영토침략에 희생'생태계 보호구역 지정' 우리의 새로운 스토리텔링독도에 발을 딛고서지난 주말 독도 땅을 처음 밟아보는 행운을 누렸다. 동국대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가 참여하는 독도연구팀의 학술답사 일정에 따라가게 된 것이다. 독도평화호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은 내내 설렜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일본 수로부의 해도('조선동안', 1893)를 최근에 발굴한 교수와 그 연구팀을 실은 배는 울릉도에서 두시간을 달려 독도에 도착했다. 마침내 내 발이 국토의 최동단에 닿았다. 가슴이 다시 설렜다. 이게 뭘까. 특별한 경험에 대한 희열감일까. 치열한 영토 갈등 현장에 대한 체험감일까. 아니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뜨거운 애국심일까.우리는 섬의 해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태풍 북상조짐에 서둘러 배를 타야만 했다. 그 해안.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지표'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나는 내 설렘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운 강치. 그곳에서 수천년을 행복하게 살아오다 한 세기 전 갑자기 멸종돼 버린 생명체들. 나는 그들의 평화로운 서식지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슬픈 강치 이야기학술회의는 치밀한 논증으로 무늬를 짜 나아가고 있었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의 발표문에 일본의 영토침략 야욕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 눈에 확 다가왔다. "명치시대 일본이 무주지 선점에 얼마나 전력하고 있는가는 1898년 미나미도리지마(南鳥島)를 일본령으로 편입한 뒤, 1902년 7월 이에 항의하는 로즈힐 원정대를 막기 위해 파견된 이시이 외무서기관의 '남조도출장복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에 대한 열강의 점령 조치는 실력으로 제압해야 하며 모험적인 일본인들에게 선박과 장려금을 지급해서 섬들을 차지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같은 실력 행사론이 그대로 적용된 사례가 바로 우리 땅 독도다. 일본 상인 나카이 요자부로가 다케시마 어렵회사를 설립하고 독도의 강치를 마구잡이로 포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치는 물개과에 속하는 해양 포유류로서 바위가 많고 먹이가 풍부한 독도가 주요 서식지였다. 독도박물관에 전시된 '지키지 못해 사라져버린 슬픈 강치 이야기'에 따르면 19세기만 해도 동해 연안에 5만여 개체가 서식했으나 이제는 멸종됐다고 한다. 한 해에 무려 3천200마리의 강치가 일본 어부들의 창칼과 몽둥이질에 죽어나갔다. 당시 수컷 강치 한마리가 황소값보다 10배 비쌌다고 하니 '모험적인 일본인'에겐 황금 노다지요 일본 정부에겐 자국 산업보호의 빌미가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제국주의 영토 침략의 희생물이 된 독도 강치는 마침내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에 의해 멸종동물로 공식 선언되기에 이르렀다.새로운 독도 스토리텔링수많은 강치떼들이 평화롭게 쉬고 있는 오늘의 독도 풍경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지금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일본 시마네현청 다케시마 자료실에는 강치 캐릭터가 전시되고 있다. 캐릭터를 활용해 독도가 자기네 영토임을 홍보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다. 멸종시킨 장본인들이 이제 다시 그 망령을 캐릭터화 해서 국제분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평화와 문화를 앞세우는 일본식 스토리텔링의 정치적 이면이 씁쓸하다.독도를 해양생태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일은 우리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다. 해양수산부도 이 점의 중요성을 알고 독도 물개 복원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독도에 강치와 유사한 종들이 종종 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제대로 서식하기 위해서는 그 전단계로 독도 주변의 폐그물을 깨끗이 걷어내야 하고 선박들의 소음을 줄여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일까? 독도를 실제로 점유하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환경을 조성해 지구생태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나라. 미래 갈등에 대응하는 좋은 전략의 하나다./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10-16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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