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별에서 온 상속자들' 영화 보셨나요?

자신의 힘만 믿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중국'콤플렉스에 가득찬 '무례한 대국' 마뜩찮아세계인들 겁내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어''별에서 온 상속자들'이란 영화를 보셨는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상속자들'의 인기에 편승해 중국이 최근 공개한 영화다. 제목이 시사하듯 성공한 두 편의 한국드라마를 적당히 섞었다. 아예 '중국 최초의 합체 드라마'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인기 한국드라마를 짜깁기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리고 있다. 더구나 중국은 이 영화를 한국에 역수출하겠다고 밝혔다.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다. 예능표절은 더 심각하다. 2010년엔 '청춘불패'를 따라한 '우상의 탄생'을 보자. 제목만 다를 뿐 기획부터 시각효과, 배경음악은 물론, 출연자가 입은 옷까지 똑같았다. '모방이 아니라 복사'다. 개그 프로그램 역시 판박이 수준이다. 최근 중국 장쑤위성 TV는 '개그 콘서트'의 핵심코너를 그대로 베껴 KBS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문제는 이 같은 저작권을 침해한 베끼기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표절에 아예 눈감고 있다. 결국 중국 법원에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지만 실질적인 승소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해결책은 없다. 2006년 이래 한국저작권위원회가 베이징에 사무소를 열고 보호활동을 하고 있지만 안하무인격인 중국의 태도에 존재감조차 찾기 어렵다.나는 오늘날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가치 못지않게,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가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관점에서 서양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이다 보니 동양의 무위자연적인 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월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The Sound of Fury)의 난해함보다는, 양귀비를 잃은 당 현종이 베갯잇을 적시며 연리지정(連理枝情)을 노래한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솔직히 햄버거보다 중국집 짜장면에 훨씬 더 정이 간다.그럼에도 중국의 근래 행태를 보면 문득 문득 나의 이 같은 호의가 빛바래져 감을 느낀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중국인은 예로부터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자 유일한 문명국가로, 자신들의 황제가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어왔다. 2천년 전 통일 진나라 이래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해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발적인 복속과 굴종이 아니면 창칼을 앞세운 무력 정복을 통해 자신들의 발 밑에 꿇게 해 왔다. 이것이 중화주의의 요체다. 그런 중국이 긴 침체기를 끝내고 두려울 만큼 굴기하고 있다. 중국 스스로도 이제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이 곳곳에 넘쳐 보인다. 명동거리를 찾는 중국 관광객의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두툼한 지갑을 여는 그들의 표정에는 이미 한국을 깔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기성세대가 중국인들에게 발마사지를 받아 보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이제 온갖 짝퉁 콘텐츠나 불량식품을 쏟아내더라도 문제 삼기가 어렵다. 연전에 베이징의 쯔진청내 스타벅스 매점이 고궁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는 글이 블로그에 등장한 지 몇 달 만에 쫓겨났다. 합법적인 계약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고궁점 폐점에 대해 중국인들은 '스타벅스 구축(驅逐·쫓아냄)'이라는 황당한 표현을 사용하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나이키·구글 등 초대형 기업들도 힘세진 중국 앞에 양들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중국이 강대국으로 굴기하는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믿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콤플렉스에 가득 찬, 이 무례한 대국이 마뜩찮은 것이다. 오랫동안 동쪽 오랑캐(東夷) 취급받으며 온갖 시달림 속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온 한반도 작은 나라에 사는 나는 거만한 이웃의 등장에 적잖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알아야 한다. 많은 세계인들이 중국을 겁내고 있기는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냉엄한 현실을./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11-27 김동률

고령화 시대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 누리도록 환경조성 중요정부·지자체, 농어촌·중소도시 많은 지원 필요경쟁·각종 범죄 등 힘겨워하는 미래들 지켜줘야최근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기본법에 의한 9~24세 청소년 인구 비율이 1978년 36.9%에서 2014년 19.5%로 감소했고, 2060년에는 10명 중 1명인 11.4% 수준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는 2014년 기준 총인구의 12.7%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고, 2026년에는 그 비율이 20%를 초과하는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처럼 초고령화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야 할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다른 계층과 분야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 특히 수도권과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지방의 농어촌지역과 중소도시일수록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공간과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든 게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된다.불과 10년 정도 뒤에 펼쳐지게 될 초고령화시대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청소년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갖고,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개발하고 잠재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 즉 청소년 친화적 도시를 만들어 가는 데 국가뿐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유니세프(UNICEF)는 2000년부터 18세 미만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기 좋은 'Child Friendly Cities' 구축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천300여개 이상의 도시가 어린이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로 인증을 받았고, 우리나라는 서울시 성북구가 2013년 11월 20일 최초로 인증을 받았다. 물론 인증을 받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가겠다는 정책적 판단과 관련 사업의 추진은 많은 도시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사례라 하겠다. 유니세프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다양한 활동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고, 쾌적한 환경과 안전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등의 노력을 어린이와 청소년 친화적 도시의 중요한 원칙임을 강조하고 있다.유니세프에서 강조하는 있는 청소년 친화적 도시의 모습에 비춰 볼때, 농어촌지역과 지방의 중소도시에 대한 국가 및 지방정부 차원의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비해 문화예술 교육환경은 그 격차가 크고 매우 열악하다. 지방의 농어촌과 중소도시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도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고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에 참여해 창의성과 감수성 등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다음으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가정·학교·지역사회 등에 산재해 있는 각종 위험요소를 제거해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통학로를 보다 안전하게 조성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활동공간을 학교 및 집 주변에 많이 조성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되겠다. 또한 지역의 공공재라 할 수 있는 자연자원을 잘 보전·관리하고,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는 등의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것도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대학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환경,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 확대로 너무나도 쉽게 접하고 있는 유해한 매체물, 각종 범죄와 사고 등으로부터 위협받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은 초고령화시대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우리들의 미래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11-20 박경훈

초등학교 1학년 할머니

3세대가 함께 다니는 학교 '새로운 실험'어르신·아이 사이 배려·사랑·존경 샘솟아봉암초 사례 흥미 넘어 진지한 연구 필요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봉암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전교생이 4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다. 이 학교 학생중 70대 할머니가 두 분 있는데 올해 1학년 신입생이다. 할머니들은 왜 칠순을 넘겨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을까. 못다 배운 한글이라도 익혀 까막눈이라도 면해 보고 싶었던 걸까. 최석진 교장은 좀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소수자와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평등과 교육정의, 세대갈등과 문화격차 해소를 위한 학교를 과감하게 디자인하는 중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다니는 학교, 3세대가 같이 다니면서 문화를 공유하는 학교, 가방은 큰아들이 사주고 조카며느리는 크레파스를 사주는 행복한 공동체 마을, 다문화가정 이주 여성도 그 자녀와 함께 다니게 되는 미래교육의 희망 제작소…. 한국사회의 새로운 교육실험이 시골 작은 마을에서 시도되고 있었다.할머니들은 아침 등교후 정규 교육과정을 익히고 손자같은 동료 학생들과 점심도 하면서 오후 4시40분까지 학교에 꼬박 남아 학습한다. 칠순 할머니가 담임선생님께 얼마나 공손하게 인사하는지 동료학생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 법도를 따른다. 김치담그는 방법이라든지 지혜로운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성교육도 저절로 된다.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학업진도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면 코흘리개 꼬맹이 학생들이 '할머니 제가 읽어 드릴게요' '할머니, 제가 써드릴게요'라며 도움을 주고 받는다. 학습자들 사이에 저절로 이뤄지는 동료애다. 보다 극적인 장면도 있다. 전주에 있는 1학년 손자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할머니가 그렇다. 도시의 손자는 시골의 문맹 할머니가 이제는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좋은 책 많이 읽으셔야 해요'라며 제법 어른스럽게 권유한다. 편지읽는 할머니 입에서 동급생 손자 목소리가 살아나온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이보다 따뜻한 가족애가 있을 수 없다. 배려와 사랑과 존경의 선의(善意)가 시골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안에 잔잔히 울린다.봉암초등학교 사례는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노년인구, 줄어드는 학령아동들, 평생학습시대의 도래, 문맹해소의 현실적 대안, 학교와 지역사회의 상생협력 방안…. 전국 어디에서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슬기롭게 대응하는 이 사례는 단순한 흥미 차원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과 같은 표심유혹 정책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삶의 질 개선이다. 그 개선 내용속에는 교육과 문화에 대한 욕구도 들어 있다. 평생학습과 교육격차해소 방안이 투자우선순위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삶의 질 개선이 예산배분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좋은 뜻'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실천 역시 중요하다.미국의 산간벽지에 명문대 졸업생들이 교사로 참여해 2년간 봉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름하여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 TFA)'다. 1990년 프린스턴대학교 졸업 예정자인 22살 여대생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사업은 지난 25년동안 4만명의 봉사자들을 훈련시켰고 한 해 1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교육여건이 부족한 곳에 교사를 파견하자는 대담한 아이디어가 그 모태가 됐다. 물론 이 프로그램 운영의 예산은 '엔젤 펀드'였다. 좋은 뜻에 후원하는 기부문화가 있기에 가능했다.봉암초등학교를 어떻게 하면 미래 희망학교로 만들 수 있을까. 전국의 수많은 사례들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까.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기대하느니 '선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젊은이들의 기개를 기대하는 게 빠를지 모르겠다./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11-13 윤재웅

진부역

천혜의 자연 파괴하며 개최하는 '동계올림픽'마지막역 이름을 '오대산역'으로 정했으면…그게 우리가 훼손한 자연에 대한 '작은 위로'평창 동계올림픽은 2018년에 열린다. 올림픽 유치에 두번 고배를 마실 때부터 시작해서 어렵게 유치한 뒤까지 평창은 여러 방면에서 요동쳤다. 어떤 유명한 연예인은 올림픽경기장 가까운 곳에 땅을 샀다가 언론의 뭇매를 맞고 한동안 활동을 접기도 했다. 그 사람뿐이겠는가. 경기장 근처 알짜배기 땅은 이미 외지인들의 소유가 된지 오래됐다. 비싼 가격으로 땅을 판 사람들이야 행복하겠지만 거기에서 제외된 대다수의 지역민들까지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덩달아 치솟은 땅값 때문에 새 농지를 구입하거나 이사갈 집터를 장만하는 것도 쉽지 않게 돼버렸다. 이래저래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않은 까닭은 대관령이 바로 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향 풍경과 고향 사람들이 올림픽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따스했던 정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평창은 지금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길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는 일제때 개통한 신작로가 유일하게 큰 길이었다. 차가 지나가면 흙먼지 날리고 자갈이 튀던 그 길 옆에 피어나던 코스모스의 벌을 잡으며 우리는 학교를 다녔다. 눈이 1m씩 내리던 겨울이면 인근 스키장에서 나온 스노카가 눈길을 쌩쌩 달렸다. 자동차 꽁무니에 연결한 밧줄을 잡은 스키어들이 대관령에서 줄줄이 내려왔다. 스키어들을 흉내내다 지치면 우리들은 나무스키를 타고 눈덮인 비탈 밭으로 올라가 내리달리다가 밭둑에서 멋지게 점프를 했다. 신작로는 70년대에 포장되고 뒤이어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고속도로는 마치 높은 성벽처럼 보여 산골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올라가지 말라는 고속도로로 올라가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고 잠시 멈춘 관광버스에서 내린 도회지 사람들을 신기한 듯 훔쳐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고속도로는 점점 넓어지고 높아지더니 결국 마을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 또한 살 곳을 찾아 뿔뿔이 이사를 가야만 했다.국도와 고속도로에 이어 지금 평창엔 또 하나의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철길이다. 동계올림픽의 가공할 위력이다. 지금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의 풍경이 또다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진부역(珍富驛)에서부터는 험준한 대관령을 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이 뚫리고 있는 중이다. 고향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땅밑 저 아래에서 암반을 발파하는 공사때문에 한동안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도 감수했다. 마을에 처음으로 기차가 들어온다는 설렘으로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하지만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닌 내가 올림픽을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을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올림픽의 이념은 무엇인가. 올림픽은 왜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가. 우리는 올림픽을 어떻게 보는가. 혹시 돈을 벌기 위해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보다 빨리 서울에 가기 위해, 보다 빨리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올림픽 유치에 열광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집 땅값도 어마어마하게 오를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깃발을 흔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 거대한 모순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 아래 수백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진부역은 동계올림픽 주경기장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역이다. 역의 이름을 놓고 말들이 많다. 눈의 고장 평창은 동계올림픽을 인간이 아닌 천혜의 자연조건으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자연을 파괴한 뒤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동계올림픽으로 가는 마지막 역 이름을 오대산역으로 정했으면 좋겠다. 그게 여태껏 우리가 파괴한 자연에 대한 아주 작은 위로라고 본다./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11-06 김도연

터미네이터 눈물이 나는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아픔 '말없는 언어''세월호' 등 올해는 유난히 눈물 마를새 없었다저물어 가는 한해, 세상은 점점 메말라가기만…'스페이스 오딧세이'란 전설적인 SF영화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이다. 1968년, 영화 개봉 당시에는 인간이 아직 달에 가기 전이었다. 컴퓨터 그래픽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사실적인 화면과 영상미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걸작 영화다. 장황한 설명이나 대사가 거의 없다. 대사가 아니라 영상과 음향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첫 대사는 영화가 시작되고 25분이 지난 후에야 나오며, 후반 20분에도 대사가 아예 없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강렬한 사운드가 묵직한 느낌을 던져준다. 영화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인공지능 로봇 '할(Hall)'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정지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항해 인간을 공격한다.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인간의 적이 돼 버린 로봇을 다룬 이야기는 많다.최근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로봇 '페퍼(Pepper)'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 최초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 로봇이 탄생했습니다" "사장님, 너무 띄우지 마세요. 부담됩니다." 기자 회견장에서 손 사장과 로봇 '페퍼'가 나눈 대화다. 페퍼는 손 사장은 물론이고 기자들과도 얘기를 주고 받았다. 대화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그에 맞는 대답을 내놨다. 적외선 센서 등을 활용해 사람의 감정까지 측정한다. 가령 눈은 그대로인데, 입만 웃는 모양을 하면 웃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페퍼'의 감정인식 능력은 아직은 기초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학습기능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감정을 인지하게 된다고 한다. 미래에는 이처럼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로봇이 등장할 것이다. 아득한 시절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던 '아톰'처럼 인간과 친구가 되는 로봇 말이다.지난 여름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벤츠 조립공장에서 본 로봇은 충격이었다. 인간 못지않게 복잡한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MIT의 브린욜프슨, 매카피 교수는 '제2의 기계시대(The Second Machine Age)'라는 책에서 "지능형 소프트웨어의 등장으로 구글 무인차, IBM 왓슨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과 기계간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이 같은 일은 상당한 미래에나 가능하겠다. 하지만 나는 로봇을 향한 인간의 집념이 가져올 미래에 걱정이 앞선다. 업계는 저마다 로봇의 뛰어난 기능과 상품성에 주목하지만 로봇이 인간처럼 눈물 흘리는 그 날이 왠지 두려운 것이다.영화 터미네이터를 보자. 미래의 인류를 구원할 지도자를 위해 스카이 넷과 싸우던 인간 못지않은 로봇이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펄펄 끓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져 사라지려 한다. 그 순간 주인공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터미네이터가 묻는다. 도대체 그 액체가 무엇이냐고. 로봇에는 없는 액체에 대해 소년 존 코너가 답한다. 인간은 슬픔을 느끼면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나온다고. 존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로봇 터미네이터는 묘한 느낌속에 용광로에 몸을 던진다. 로봇 터미네이터가 정작 감동받은 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액체, 즉 인간의 눈물이었다.눈물은 말 없는 언어다. 여자야 기회만 되면 즉각 넘쳐흐르는 엄청난 양의 눈물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눈물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올해는 유난히 눈물 많은 한 해였다. 세월호를 시작으로 사연 많고 곡절 많은 한국인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각박해져 가는 세상, 눈물도 점차 메말라 간다. 마음은 아직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서성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문 밖에는 벌써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10-30 김동률

걷기 좋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모든 도시행정 보행환경·보행자 우선 고려주거환경, 활동적인 삶 가능하게 만들 필요도시재생도 반드시 보행중심으로 계획돼야출퇴근 시간이면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차량으로 심각한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어린이보호구역에서도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차량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모든 골목길은 주차된 차량으로 점령당하고, 자가용이 없으면 생활하기 불편한 도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통행수단인 보행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도시, 과연 이런 도시가 살기좋은 도시일까?세계에서 살기좋은 도시로 평가되고 있는 도시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국의 컨설팅 업체인 머서(Mercer)는 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를 발표하고 있다. 2011년도에 이어 2013~2014년도 연속 1위를 차지한 호주 멜버른은 2030년까지 전체 이동수단의 30%를 보행자 통행이 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 외 상위권을 차지한 캐나다의 밴쿠버와 토론토,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등도 보행이나 자전거·대중교통을 우선으로 하는 도시 및 교통계획을 펼치고 있다. 물론 보행환경을 비롯 다양한 분야를 평가해 살기좋은 도시를 선정한다. 하지만 보행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도시가 과연 살기좋은 도시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현대문명의 획기적 산물인 자동차는 도시화와 산업화시대에 안성맞춤인 빠른 이동수단이기에 선진 산업국가들은 앞다퉈 보급해 왔고, 도시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이에 맞춰 빠르게 변화돼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에 따른 난개발과 도시내 도시간 교통량의 급증, 기성시가지의 쇠퇴, 지역 커뮤니티의 파괴, 그리고 신체활동 감소에 따른 비만인구의 증가 등 자동차 중심 도시로 인해 발생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문제인식이 확산되면서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서 탈피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많은 도시에서 시작되고 있다.성공이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2020년 보행수단 분담률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보행친화도시 서울 비전'은 매우 중요한 시도라 생각된다. 특히 기존의 많은 도시에서 단순히 차량을 막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보행공간 조성에 치중했던 '보행전용거리'와는 달리 주변 상권과 보행자 이동패턴, 교통량 등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지구단위의 종합적인 맞춤형 보행환경 개선을 위한 '보행친화구역'조성사업에 많은 기대가 된다.보행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살기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보행로 중심의 물리적 환경개선사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토지이용·교통·건축·보건·공원녹지 등 모든 도시행정에서 보행환경과 보행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는 자전거이용 활성화정책도 보행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자전거 통행자를 위해 기존 보행로를 자전거겸용구간으로 바꾸는 것보다는 차도를 줄여 자전거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 보행을 우선시 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또한 사람들이 자가용을 버리고 많이 걸을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나가고, 이를 위해서 보행중심의 활동적인 삶(Active Living)이 가능한 주거환경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특히 쇠퇴한 구도심권을 되살리기 위한 도시재생사업도 반드시 보행이 중심이 되면서 자전거나 대중교통이 서로 잘 연계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자동차보다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걷기 좋은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이자, 건강한 도시라는 지역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불만의 목소리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걷기좋은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현 세대가 선택해야 할 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10-23 박경훈

그리운 독도 강치

日어부들 창칼·몽둥이로 한해 3천200마리 죽여수천년 평화롭게 살다 제국주의 영토침략에 희생'생태계 보호구역 지정' 우리의 새로운 스토리텔링독도에 발을 딛고서지난 주말 독도 땅을 처음 밟아보는 행운을 누렸다. 동국대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가 참여하는 독도연구팀의 학술답사 일정에 따라가게 된 것이다. 독도평화호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은 내내 설렜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일본 수로부의 해도('조선동안', 1893)를 최근에 발굴한 교수와 그 연구팀을 실은 배는 울릉도에서 두시간을 달려 독도에 도착했다. 마침내 내 발이 국토의 최동단에 닿았다. 가슴이 다시 설렜다. 이게 뭘까. 특별한 경험에 대한 희열감일까. 치열한 영토 갈등 현장에 대한 체험감일까. 아니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뜨거운 애국심일까.우리는 섬의 해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태풍 북상조짐에 서둘러 배를 타야만 했다. 그 해안.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지표'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나는 내 설렘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운 강치. 그곳에서 수천년을 행복하게 살아오다 한 세기 전 갑자기 멸종돼 버린 생명체들. 나는 그들의 평화로운 서식지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슬픈 강치 이야기학술회의는 치밀한 논증으로 무늬를 짜 나아가고 있었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의 발표문에 일본의 영토침략 야욕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 눈에 확 다가왔다. "명치시대 일본이 무주지 선점에 얼마나 전력하고 있는가는 1898년 미나미도리지마(南鳥島)를 일본령으로 편입한 뒤, 1902년 7월 이에 항의하는 로즈힐 원정대를 막기 위해 파견된 이시이 외무서기관의 '남조도출장복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에 대한 열강의 점령 조치는 실력으로 제압해야 하며 모험적인 일본인들에게 선박과 장려금을 지급해서 섬들을 차지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같은 실력 행사론이 그대로 적용된 사례가 바로 우리 땅 독도다. 일본 상인 나카이 요자부로가 다케시마 어렵회사를 설립하고 독도의 강치를 마구잡이로 포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치는 물개과에 속하는 해양 포유류로서 바위가 많고 먹이가 풍부한 독도가 주요 서식지였다. 독도박물관에 전시된 '지키지 못해 사라져버린 슬픈 강치 이야기'에 따르면 19세기만 해도 동해 연안에 5만여 개체가 서식했으나 이제는 멸종됐다고 한다. 한 해에 무려 3천200마리의 강치가 일본 어부들의 창칼과 몽둥이질에 죽어나갔다. 당시 수컷 강치 한마리가 황소값보다 10배 비쌌다고 하니 '모험적인 일본인'에겐 황금 노다지요 일본 정부에겐 자국 산업보호의 빌미가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제국주의 영토 침략의 희생물이 된 독도 강치는 마침내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에 의해 멸종동물로 공식 선언되기에 이르렀다.새로운 독도 스토리텔링수많은 강치떼들이 평화롭게 쉬고 있는 오늘의 독도 풍경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지금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일본 시마네현청 다케시마 자료실에는 강치 캐릭터가 전시되고 있다. 캐릭터를 활용해 독도가 자기네 영토임을 홍보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다. 멸종시킨 장본인들이 이제 다시 그 망령을 캐릭터화 해서 국제분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평화와 문화를 앞세우는 일본식 스토리텔링의 정치적 이면이 씁쓸하다.독도를 해양생태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일은 우리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다. 해양수산부도 이 점의 중요성을 알고 독도 물개 복원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독도에 강치와 유사한 종들이 종종 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제대로 서식하기 위해서는 그 전단계로 독도 주변의 폐그물을 깨끗이 걷어내야 하고 선박들의 소음을 줄여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일까? 독도를 실제로 점유하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환경을 조성해 지구생태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나라. 미래 갈등에 대응하는 좋은 전략의 하나다./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10-16 윤재웅

학교는 어디에 있는가

스승과 제자 부대끼며 지냈던 아름다운 학창시절지금의 '왕따니… 자살이니' 어디서 나온 말인지선생님도 학생도 어떤 마음으로 학교로 향할까시월로 접어들기 무섭게 올해도 어김없이 휴대전화 화면에 익숙한 문자가 떴다. '부족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초등학교 동문체육잔치를 선후배 동문님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오랜 불경기와 침체된 사회분위기, 또 어떤 이유로 마음이 무거우시다면 오셔서 고향과 동문의 정을 함께 나누며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하다가,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가, 올해는 유난히 붉은 저녁 노을을 훔쳐보다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문자가 바로 초등학교 동문회에서 온 소식이다. 오래 전에 졸업한 학교로 놀러오라는 소식.학교는 왜 자꾸만 우리를 부르는 것일까. 학교는 대체 무엇일까. 떠나온 학교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스해지는가, 아련해지는가, 얼굴이 화끈거리는가. 당신은 어떤 경우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학교 따윈 두 번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가. 떠나온 학교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선생님인가, 친구인가, 좋아했지만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그 누구인가. 학교는 왜 우리들 각자의 기억속에 애증으로 자리 잡은 채 틈이 날 때마다 부르는 것일까. 마치 당시에 마무리하지 못한 오래된 숙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듯이.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인생에서 학교는 많고도 많다. 네 개의 학교를 모두 지나오려면 16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학교는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그러하기에 지나온 학교에서 부르면 그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철수는 왜 거의 매일 지각을 한 것일까. 그 선생님은 풍금도 칠 줄 모르면서 어떻게 매번 음악시간을 진행했을까. 길동이는 나머지수업을 하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선생님은 왜 그렇게 무뚝뚝했을까. 만동이는 힘이 약한 친구를 괴롭히고 때리면서 기분이 좋았을까. 그 어여쁜 처녀선생님은 산골마을에 부임해와 살면서 동네의 시커먼 총각들이 득실거리는 밤이 두렵지 않았을까. 지린내가 진동하던 화장실은 왜 그리 무서웠을까. 학교는 어떤 이유로 대부분 공동묘지 자리에 지어서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을까.초등학교 시절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중학생이 된 남학생들은 나이를 조금 먹었다고 점점 거칠어졌고 여학생들은 말이 없어졌다. 선생님들도 초등학교 때완 판이하게 달랐다. 여러 초등학교에서 모인 남학생들은 힘을 겨루려고 툭하면 싸웠다. 가출을 했다가 잡혀왔다. 선생님들의 몽둥이 굵기는 초등학교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저 이가 과연 선생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그 와중에도 사춘기로 접어든 남학생들은 젊은 여선생의 치마와 가슴을 훔쳐보며 여드름을 키우고 짰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는지 자습시키는 선생이 허다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렇고 모든 학생이 그랬었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학창시절의 기억이란 건 늘 어느 한쪽에 편중돼 있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중학교보다 초등학교의 기억이 그나마 아름다운 편에 속한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슬슬 세상의 전쟁터로 발을 들이미는 것일 테니 말할 나위도 없다.지금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어떤 학교일까. 어떤 철수·길동이·만동이들이 있고 어떤 선생님들이 교단을 지키고 있을까. 왕따니 자살이니 하는 말들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어떤 당부의 말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일까. 선생님들은 어떤 마음을 보듬으며 학교로 가는 것일까. 지금의 학교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 마음아픈 한 아이를 교정의 울타리 밖에서 홀로 울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옛날의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도 모른다. 깊어가는 가을의 동문체육대회에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미안하다는 말을 호주머니에 준비해야겠다. 그런데 정녕 학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10-09 김도연

물레방아 도는데

70년대 배고픔·가난 싫어 고향 떠난 소년소녀들구로공단생활, 고향에 대한 비애 형상화한 노래'공돌이·공순이'로 불렸지만 진정한 산업화 주역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유행가는 '물레방아 도는데'였다. 물론 유행가에 앞서 웬만한 동요는 취학 전에 이미 끝냈다. 그때 배운 동요가 아직도 선명하다. 과꽃이 어떤 꽃인지도 모르면서 올해도 과꽃이 피었고 과꽃을 좋아한 누나는 꽃이 피면 아예 꽃밭에서 살았다며 목청껏 외쳤던 기억이 새록하다. 그 뿐인가. 과꽃을 보면 누나 얼굴이 떠오르고 시집간 후 영영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난다는 구절에 어린 마음에도 숙연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동요는 딱 그 뿐이다. 초등시절, 당시 폭풍 같은 인기속에 등장한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곧 나의 애창곡이 된다. "돌담길 돌아가며 또 한번 보오오고"를 정말 열심히 따라 불렀다. 의미도 모르고 그냥 불렀다. 학교 오가는 길, 길 옆 전파사도 종일 이 노래를 틀었다. 그러나 노래가 그다지 행복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학에 들어서다.나와 같은 386세대들의 고민은 이 땅의 노동운동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어깨를 짓누르던 노동현장의 질곡속에 이 노래가 만만치 않음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1972년 발표된 노래는 창작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농(離農)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개발연대 한국인들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비애를 형상화한 노래로 이해된다. 등 떠밀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통해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사무침을 달랬다.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 다 가도록 소식이 없는' 떠난 이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너무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깊은 노스탤지어를 노래를 통해 달랬던 것이다. 꺾기로 불리는 창법도 창법이지만 노래는 너무 슬퍼 결국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그래서 가난했던 그 시절 한국인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떠난 십대 소년소녀들은 '공순이'나 '식모'로, 또는 '공돌이'로 불렸고 그들이 둥지를 튼 곳은 구로공단이다.'공순이'는 특히 서러웠다. 가난해 못 배웠으니 당연히 무식했다. 특히 어린 소녀들은 대부분 남동생이나 오빠 학비를 벌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밀려 떠난다. 속옷에다 작은 돈주머니를 달아주던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온 그들이다. 그래서 1970년대의 여공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 시절 구로공단 여공들은 국졸 혹은 국교 중퇴가 대부분. 영어로 된 라벨을 다는 것은 한글도 모르는 소녀들에게는 고역이었고 M과 W를 혼동해 작업반장에게 따귀를 맞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그런 구로공단이 '최첨단 디지털단지'로 변했다. 봉제·가발산업이 저문 빈자리엔 화려한 쇼핑몰이 들어섰다. 올해는 구로공단 조성 50년. 이를 기념한 '공단 노동자 체험관'이 문을 열었다. 체험관은 벌집으로 불리던 여공들의 주거공간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작은 방, 수십명이 살지만 사춘기 소녀들이 아침마다 긴 줄을 서야 했던 딱 한 개뿐인 푸세식 화장실 모습에 가슴이 짠해 온다. 그래서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는 지난 산업화시대에는 국민가요처럼 불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일진대 산업화 측면에서 가장 도드라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래이기 때문이다.사실 산업화의 진정한 주역은 그 시절의 공화국을 담당했던 정치인도, 경제정책 입안자도, 몇몇 이름난 민주화 운동가도 아니다. 인간에게 배고픔만큼 잊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대물림 가난이 싫어 정든 고향을 떠나 공순이·공돌이란 이름 아래 꽃다운 젊음을 바친 이 땅의 노동자들이야말로 산업화의 빛나는 주인공이 아닐까. 왔다고 느낄 때쯤이면 저만치 떠나는 가을, 구로공단 50주년에 바치는 나의 헌사다./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10-02 김동률

젊은층 고도비만 해결방안

비만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선언할 정도로 개인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비만이 국가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비만 치료와 예방에 힘쓰고 있다. 다행히 OECD 국민의료비 통계(OECD Health Data 2014)에 따르면 우리나라 과체중·비만 인구 비율은 31.8%로 이웃한 일본(23.7%)과 함께 최하위권에 속하고 있다.하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지난 12년간(2002~2013년)의 일반건강검진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1980년대 이후 출생한 20~30대 젊은층의 고도 또는 초고도 비만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젊은층의 고도비만 증가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관련 전문가들은 1980년대부터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한 패스트푸드의 소비 증가와 자동차 중심의 비활동적 생활습관에 따른 신체활동량 부족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현재 우리나라의 비만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이나 남미 국가들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현 추세대로 20~30대 젊은층의 비만율이 계속 증가한다면 머지않아 국가의 큰 사회적·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만문제를 먼저 경험하고 있는 국가들의 사례를 교훈삼아 예방적 차원에서 젊은층의 주요 비만원인이 되고 있는 패스트푸드 등에 의한 불균형적 영양섭취와 자동차 중심의 비활동적 생활습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환경적 요인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개선대책이 필요하다.특히 정부차원에서는 모든 정책에서 건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이른바 'Health in All Policies(HiAP)'개념을 보건복지부뿐 아니라, 범정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공공정책은 비만과 같이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예방 또는 최소화하고, 건강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해야 된다.비만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도 중요하다. 탄산음료를 만드는 세계 최대 음료업체는 활력넘치는 건강한 삶, 교육, 물관리, 공동체 재활용 등 지속가능한 공동체 지원을 위해 많은 재원을 기부하고 있다. 미국의 한 건강의료품 업체는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Robert Wood Johnson Foundation)을 설립해 미국인들의 비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Active Living Research 사업 등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 기업의 사례처럼, 국민들의 신체활동 감소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동차·인터넷·스마트폰 등과 관련된 국내 기업들도 보행·자전거타기 등과 같은 일상생활 중 신체활동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사업이나 환경조성사업 등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면 어떨까 한다.20대 젊은 세대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학도 학생들의 비만과 건강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캠퍼스내 자동차 통행을 제한하거나 보행전용구간을 확대하는 방안,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을 설치하고 다양한 신체활동 증진 프로그램도 개발해 시행할 필요가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졸업기준에 일정 수준이상의 운동능력, 예를 들어 수영을 1㎞이상 할 수 있는가를 포함한다면 어떨까? 농담삼아 질문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20~30대 젊은 세대들의 비만율 증가는 단지 스쳐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병들어 가는 미래세대를 위해 보다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09-25 박경훈

공무원이 존경받는 나라

최부(崔溥·1454~1504)는 조선의 관리였다. 스물여덟 과거에 급제하고 3년뒤 성균관 정6품이 돼 서거정과 함께 민족의 역사서인 '동국통감'을 편찬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 뒤 새로운 직책을 명받아 1487년 9월 제주도로 떠난다. 추쇄경차관. 정확한 인구조사가 임무다. 그러던 중 이듬해 정월 부친상을 당해 거친 바다에 배를 띄워 고향인 나주로 향한다. 일원 42명과 함께 배에 오른 이 항해는 애초에 무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배는 풍랑을 만나 정처없이 표류한 끝에 남중국 태주부 임해현 우두산 아래 당도한다.최부 일행은 중국 내륙 운하를 따라 베이징까지 이른 다음 압록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다. 표류한지 넉달 보름만이다. 왕명을 받들어 그간의 일을 소상히 기록해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표해록'이다. 이 책은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9세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13세기)과 함께 세계3대 중국견문록으로 손꼽힌다. 15세기 중국 저간의 사정을 이토록 정밀하게 서술한 기록은 중국 내부에서도 찾기 어렵다. 그는 마르코폴로처럼 구술방식을 택해 과장하지 않았으며 일본 승려 엔닌처럼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 험한 여정속에서도 '조선의 관리'로서 기품과 정직성을 잃지 않았다.'표해록'의 역사적 가치는 크다. 15세기 중국 동부지역에 대한 세밀한 기술은 그가 '동국통감'을 편찬하던 엘리트 문필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어낸 나라. 왕명으로도 고칠 수 없는 추상같은 엄정함의 정신. 그 방대하고 정밀한 데이터베이스. 이러한 문화콘텐츠가 최부같은 교양인의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게 중요하다.이 책의 가치는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고난 극복의 스토리텔링 구조에 공익의 리더십이 강해서 오늘의 답답한 현실에도 호소력이 강하다. 최부는 어떠한 난관에 닥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빗물받을 그릇조차 없어 오줌을 받아 식수로 마셔야 했고, 금은을 요구하는 해적이 어깨에 작두를 내리치며 겁박해도 "몸뚱이를 뭉개고 뼈를 부순다고 해서 금은을 얻을 수 있겠는가"며 물러서지 않았다. 해안에 표착해서는 왜구로 오인받아 모진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더로서의 지혜와 기품을 잃지 않았다. 가장 귀감이 되는 것은 함께 한 42명 전원과 동반 귀국했다는 점이다. 136일간 파란만장한 고난의 여정동안 그는 어찌하여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았던가.참된 지도자는 간난신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순신이 그러했고 그보다 100년 전엔 최부가 바로 지도자의 전범이었다. 아쉽다. 위대한 기록의 나라 조선의 선조들은 그러했는데 오늘 이 땅엔 참된 지도자가 귀하다. 불신과 배타의 논리가 유령처럼 어슬렁거리고 아프고 심란한 국민 모두의 마음 함께 껴안으려 하지 않는다.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을 수도 없이 맞으면서 최부는 일행들에게 당부한다.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해 골육지친과 다름없으니, 지금부터 서로 돕는다면 몸을 보전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구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같이 나눠 먹는다. 병이 생기면 같이 돌보아 한 사람이라도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다."최부는 어떻게 모두를 살렸던가. 그는 매순간 문제 해결을 주도했다. 공동체 정신을 강조했고 비전과 희망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당부는 왕명보다 지엄했다. 그리하여 그에겐 '존경'이라는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존경'의 힘으로 42명 전원을 살렸다고 생각한다. '존경'앞에서는 낙심도 원망도 미움도 다 사라진다. 생명의 열망과 내일의 희망이 새로 생겨난다. 이런 존경의 힘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조롱이 비판적 지성으로 위장되는 사회에 존경을 새롭게 초대해야 한다. 최부가 진정 나라의 공복아닌가. 좋은 나라 멀리에서 찾을 필요없다. 공무원이 존경받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09-18 윤재웅

보름달 아래서

추석이 지났다. 다행히 길은 그다지 막히지 않았고 날씨도 괜찮았다. 고향집은 여전했으나 부모님의 등은 조금 더 굽어져 있었다. 누렁이는 앞다리를 들어 반겨주었고 살이 오른 흰 토끼들은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빨간 눈으로 토끼장 밖의 웅성거림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난 봄 병아리였던 닭들은 어느새 중닭으로 자랐고 수탉은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을 건드릴까봐 부리부리한 눈으로 철망 앞에서 시위를 했다. 고향집에 오면 마치 순례를 하듯 하나하나 돌아보는 습관이 든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예년보다 일찍 추석이 찾아온 탓에 고추는 아직 반밖에 물들지 않았고 수수열매를 찾아왔던 새들은 양파 망이 씌워져 있는 걸 확인하자 치사하다고 지저귀며 다른 밭으로 날아갔다. 품종개량을 한 것은 아닐텐데 들깨줄기는 사람 키보다 컸다. 깨를 베고 옮겨서 털려면 꽤나 품이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쓰다듬고 담장을 따라 뻗어간 머루줄기에 매달린 검은 머루 알을 지그시 눌러본 뒤 겨우 네알밖에 열리지 않은 사과나무에 애틋한 눈길을 주었다. 작년에는 한 집에 한 봉지씩 들고 돌아갔는데 올해는 한 알씩 가져가야할 형편이었다.집 뒤편 개울가에서 자라는 돌배나무는 이미 열매를 모두 떨어트린 채 잎이 말라가고 있었다. 돌배는 다른 과일과 달리 익기도 전에 열매를 툭툭 떨어트리곤 했다. 어린 시절 돌배를 줍다가 돌처럼 단단한 돌배에 머리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고향에서는 돌배를 맛이 몹시 시다해서 심배라고 불렀다. 잘 익은 돌배라 하더라도 한 입 깨물면 그 신맛에 몸서리를 치는 게 돌배의 맛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산열매보다 인기가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와 돌배 술로 일약 주가가 치솟았다. 잘 담근 돌배 술은 외국의 와인보다 그 맛이 깊고 그윽하기 때문이다. 폭설이 내리는 길고 깊은 겨울밤, 구들장이 뜨끈뜨끈한 고향집 뒷방에 앉아 문밖의 눈을 내다보며 마시는 돌배 술의 맛을 어디에다 비교하겠는가.뿔뿔이 떨어져 사는 식구들이 먼 길을 달려와 모두 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간다. 성묘 가는 길이 어렸을 때만큼 멀고 규모가 크며 왁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옛 기억을 떠올리며 산길을 달린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 시절, 한 시간은 걸어야 되는 성묫길이었지만 사촌들은 누구하나 빠지지 않고 코를 흘리며 악착 같이 걸었다. 성묘를 가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벌에 쏘이고 넘어지고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지면서도 조만간 입으로 들어올 음식들을 상상하며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 세월을 건너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자동차를 타고 십분만에 산소에 도착한다. 그러나 사촌들은 없다. 어른이 된 사촌들은 묘소를 바꿔 자기의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딸들은 시댁의 산소에 성묘를 가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전처럼 서로 음식을 먹으려고 산소를 뱅뱅 돌며 법석을 떨지도 않는다. 그 그림자만, 그 기억만 산소 주변에 맴돌 뿐이다.추석의 밤을 밝히는 보름달을 쳐다보았다. 보름달이 떴음에도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사업에 실패했을까. 형제들과 대판 싸운 게 아직 풀리지 않았을까. 명절에 때맞춰 부부싸움을 했을까. 고향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 외국으로 여행을 간 것일까. 또 취업에 실패한 것일까. 결혼은 언제할 거냐는 친척들의 위로가 지겨워진 것일까. 이유도 가지가지일 테고 변명도 갖가지일 것이다. 세상사 그렇고 그렇지 않은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저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하루빨리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이번 추석의 소원은 그것뿐이었다./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09-11 김도연

한 교포가 울고 있다

7년간의 미국 유학생활동안 인종차별을 느낀 적은 많지 않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주립대학이 대부분 소도시에 위치한데다 주민들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학도시라 외국인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다. 그런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 남부를 여행하던 중 일어났다. 미시시피 어느 시골에서 자동차에 가솔린을 넣은 뒤 화장실을 찾은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화이트(white)라고 쓰인 화장실이 전면에 있고, 컬러(colors)라고 적힌 화장실은 주유소 건물 뒤편에 있었다. 뒤편 화장실은 불결하기 그지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 우리 가족은 백인 화장실을 이용했다. 다행히 주유소측에서 시비를 붙지 않아 무사히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나는 여행내내 흑인들의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50년이 지났지만 미국 남부 오지에 가면 아직도 이같은 행태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미국에서 남부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을 넘어서 복잡미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예해방, 남북전쟁 패배 등으로 인해 남부는 양키(북부)에 대해 뿌리깊은 증오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남부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상하며 우아한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된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거대한 저택과 화려한 파티 등을 상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인종차별과 가난에 찌들은 암울한 지역을 떠올린다.남부에 대한 북부의 경멸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심하다. 북부 백인들은 게으른 남부 백인을 일컬어 화이트 트래쉬(white trash), 레드 넥(red neck) 이라고 비웃는다.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사람'이란 뜻이다. '레드 넥'은 '목덜미가 빨갛게 익었다'는 의미로 볕에 탄 무지한 백인 단순 노동자를 뜻한다. 또 남부의 여러 주들을 두고 바이블 벨트라고 비웃는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골수 기독교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실제로 앨러바마·미시시피 등 남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래서 놀랄때 급히 나오는 "오 마이 갓"조차도 불경스럽다며 문제삼는 이도 있다. 반대로 골수 남부인들의 양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또한 만만찮다. 필자가 남부 어느 대학의 세미나 중 뉴욕 타임스 기사를 인용하자 양키신문을 언급 말라는 일부 참석자들의 항의에 당황했던 기억도 있다.불과 195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남부는 북부에 싼 원료를 공급하고 가공품을 비싼 값으로 되사는 전형적인 식민지형 경제였다. 정서적·문화적으로 북부에 대해 우월주의에 취해 있던 남부로서는 엄청 자존심 상하는 구조였다. 남부가 성장한 것은 1970년대 후반.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 공장들이 크게 기여했다. 현대·기아차도 남부에 똬리를 틀어 이 지역 경제발전에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남부 주들이 점차 살만해졌고 '양키들이 목화밭을 구경오던 시절에서 이제는 살기 위해 남부로 온다'는 말들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남부의 가난한 흑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북쪽으로 이주한다. 미주리·네브래스카 등등 중북부 공장지대가 커지면서 남부 흑인들의 대규모 인구 유입이 시작된 것이다.흑인 시위사태로 지구촌의 관심을 모은 미주리 퍼거슨 시도 이같은 흐름의 중심에 있다.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흑인 인구가 급증, 전통적인 백인거주지역이 무너지면서 흑백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이 이번 사태의 숨겨진 원인쯤 된다. 문제는 백인에 대한 흑인들의 적대감이 점차 동양인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평양 건너 퍼거슨 시의 상황은 미국생활을 경험한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다. 불탄 가게를 무대로 한국TV와 인터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교포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의 외로움·고통 등을 실감한다. 초록이 야위어 가는 구월, 태평양 건너 들려오는 한 교포의 울음소리에 나는 오늘 밤 잠을 뒤척이고 있다./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09-04 김동률

지속가능 발전 위한 경제활성화 대책 필요

최근 정부는 경제활성화 대책으로 관광·의료·교육 등 서비스업 진흥을 위한 규제완화 및 지원방침을 발표했다. 한편에서는 서민경제와 내수경기를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대책으로 환영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국민의 안전과 건강, 환경훼손을 담보로 하는 규제완화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이처럼 여론이 나누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 용어는 1987년 발표된 유엔(UN)보고서 '우리들의 미래(Our Common Future)'에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다소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한 개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자연 또는 환경용량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경제·사회·환경, 나아가 문화부문의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이런 측면에서 경제활성화와 규제완화는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간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기업의 생산성을 감소시키고 투자를 어렵게 하는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히 완화하고 복잡한 행정절차는 혁신적으로 간소화해야 한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고 미래세대에 물려줘야 할 우수한 자연자원이 훼손될 수 있는 환경규제 완화는 성급하게 실행하기보다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수렴과 규제완화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예를 들어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내 유해 부대시설이 없는 관광숙박시설을 허용하는 것도 학부모와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매체를 통해 학교 주변의 각종 유해업소들이 불법으로 영업하다가 적발되거나 스쿨존에서 어린이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뉴스를 접하는 상황에서 안전과 학습환경을 저해할 수 있는 관광숙박시설을 허용한다는 경제활성화 대책에 대해서 자녀를 둔 부모라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규제완화 이전에 아이들이 교통사고 위험 없이 안전하게 통학하고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 청소년이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대책이 보다 시급하다.최근 늘어나는 폭염·폭설·집중호우 등 이상기후로 재해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많은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사회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다. 이에 환경부는 2012년 이상기후로 인한 도시재해 등에 대응하기 위해 환경영향평가 단계에서 이상기후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환경생태계획 수립 지침을 마련했다. 또 '선계획 후개발' 체계구축을 위해 계획단계부터 환경을 고려하기 위한 전략환경영향평가제도 도입, 각종 환경정보의 구축 및 제공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물론 개발사업자의 입장에서는 환경영향평가 협의절차가 부담스러운 환경규제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개발로 발생할 수 있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재해 등에 따른 피해는 개발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훨씬 초과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제활성화 측면에서 환경영향평가제도를 개선한다면 환경적 영향이 미미한 사업에 대해서는 협의절차를 보다 간소화 또는 면제하고 소규모 개발이라도 환경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이뤄지는 사업의 환경영향평가는 보다 철저히 실시하는 등 유연한 제도 마련과 적용이 필요하다.사회 전반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더욱 팽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들의 미래세대를 생각하고 경제와 환경,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현 정부의 경제활성화 대책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08-28 박경훈

미래의 엘론들 한국의 희망

엘론, 밤의 뺨에 걸려 있는 보석안녕, 엘론? 어느덧 가을의 문턱에 왔네요. 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죠? 동아시아 농경문화권에서는 1년을 24절기로 나누고 이 무렵을 '처서'라 부릅니다. 처서가 되면 왕성한 여름기운이 수그러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차분한 마음으로 책도 많이 읽곤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부르기도 한답니다.엘론, 당신은 24절기 내내 바쁘죠? 당신 이름자 앞에 붙는 수식어는 화려해서 셰익스피어 식으로 말하면 '밤의 뺨에 걸려 있는 보석'처럼 현란하고 아름답죠. 21세기형 슈퍼 히어로, 혁신의 아이콘, 제2의 스티브잡스, 영화 '아이언 맨' 주인공의 실제 모델…, 당신이 창업한 회사들의 면면 또한 세계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죠. 태양에너지 기업 '솔라시티', 친환경 전기차 브랜드 '테슬라', 인류의 화성시대를 개척하려는 민간 우주선 제작업체 '스페이스X'. 그곳의 CEO가 자산 91억달러의 43세 미남자라니, 많은 이들에게 어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특히 테슬라가 보유한 300여개의 특허권을 모두 개방해 버린 당신의 대담한 결정을 보면 충격 그 자체죠. '기업이 빠른 혁신을 계속하면 기존 특허권이 의미없게 된다'는 당신의 선언은 삼성과 애플에도 귀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엘론,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엘론 머스크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죠? 우리나라에도 미래의 엘론들이 있지 않겠어요? 풋내기 공학도가 단순한 엔지니어로 기업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창의적 상상력과 도전정신으로 사회의 틀 자체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당신은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그걸 미국의 힘이라고 진단하는데요, 당신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더군요. …미국은 누구에게나 창업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대학에서도 체계적으로 창업교육을 시키고 국가적인 지원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그러니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갖춘 사람이 벤처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결국 시스템 이야기네요. 대학과 기업과 국가가 미래의 수많은 엘론들을 위해 어떤 시스템을 만드느냐가 국력을 좌우한다는 건데, 이는 국가의 진정한 내공이죠. 국가경쟁력 생태계라고 할까요, 교육과 생산과 관리의 주체들이 상호 공생적으로 협력해서 발전하는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한데 저 수많은 청년들을 어쩌면 좋겠어요. 10대 20대를 온통 공부에 매달려 전력투구했는데 사회에 나오니 일자리 부족하죠, 선망하던 기업에 취업해도 거시구조에서 보면 패스트 팔로어 체제로는 퍼스트 무버 체제를 따라잡을 수 없다보니까 기업 경쟁력이 금세 뒤처지는 겁니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다 포기해버리는 안타까운 엘론, 엘론들…. 문제는 이들이 진정한 엘론으로 다시 태어나기 힘든 구조속에서 살아간다는 거죠. 국가가 책무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이 헛된 싸움만 계속 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요?시스템 탓, 정치인 탓…. 남 탓만 하고 있다간 해결되는 게 없죠. 그래서 개인의 구체적 행위의 좋은 사례를 찾아봤어요. 엘론 머스크씨, 당신의 이력 중 이채로운 건 독서더군요.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죠. 동생을 비롯해 주위의 친구들이 모두 장난감에 빠져 지낼 때도 당신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책을 읽었죠.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빠져들었던 소년. 호기심 많고 질문을 많이 하던 엘론.우리나라 엘론에겐 어림없는 이야기죠. 여기는 참 이상한 나라예요. 초등학교때까지는 경쟁적으로 책을 읽는데 중학교만 가면 갑자기 이상해지죠. 입시위주 교육정책의 대표적인 폐해인데 그게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최고수준이 되면서 전 연령대로 확대되네요. 나이가 들수록 책을 더 안 읽는 나라란 말씀이죠.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곳에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말 걱정돼요. 난 미래의 엘론들이 우리나라의 희망이라고 꿈꿔요. 그들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08-21 윤재웅

세월은 약이 아니다

지난 봄날 나는 강원도의 어느 산골에 자리한 문인집필실에 입주해 있었다. 그곳에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술을 마시며 봄날을 건너가던 중이었다. 때늦은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마침내 봄을 알리는 목련이 하나둘 피었다. 어느 날 비가 눈으로 변해 아직 활짝 피어나지도 못한 목련이 얼어버렸고 그 참담한 모습을 목격한 시인·소설가·동화작가들은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 얼마 후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태운 한 척의 배가 맹골수도(孟骨水道)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그렇게 잔인한 봄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도착했다. 그 사이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일부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복과 입추가 겹친 날 세월호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했지만 곧바로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는 세월호 특별법 무효를 선언했다. 요지는 이렇다. 참극에 대한 1차 책임이 있는 집권세력이 진상조사위와 특검을 꾸리는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지 않는 특별법 합의는 의미가 없다는 것. 게다가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별검사가 무슨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득권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고 동시에 축소·은폐의 길을 열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지난 넉 달 동안 우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텔레비전과 신문·인터넷을 들여다보며 살아왔다. 술을 마시다가도 문득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술에 취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운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문득 이 웃음이 과연 온당한 웃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의 웃음을 황급히 지우기도 했다. 복 더위를 넘기기 위해 삼계탕 집에서 닭 뼈에 붙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다가도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을 놓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아직도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직도 뜨거운 천막 안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술 냄새를 감추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닦은 채 저자거리를 떠나야만 했다. 혹시 우리의 불의(不義)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죄의식을 껴안은 채.세월호를 둘러싼 온갖 의혹들이 세상에 떠다니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내 일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조금씩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다. 잊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세월은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돌아가고 새로운 사건은 마치 예정돼 있었던 것처럼 뻥뻥 터진다. 하지만 우리는 저 캄캄한 바다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외롭지 않도록 기억해야만 한다. 언제·어떻게·누가·무엇을 잘못해서 그리 되었으며, 또 누가 무엇을 감췄고, 누가 어떻게 꼬리를 자르고 달아났는지 하나하나 또렷하게 밝혀내고 머리에 새긴 뒤에야 비로소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앞에 겉모습만 바뀐 세월호가 도착해 다시 침몰을 준비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 세월호에 탑승할 여행객이 바로 나일지도, 당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세월호, 또 그 다다음 세월호, 앞으로도 똑같이 침몰할지 모를 무수한 세월호들에 우리가 오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세월은 약이 아니다. 세월이 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야가 합의한 특별법은 결국 세월이 약이라고 우기는 특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게 틀림없다. 온갖 의혹들의 시비를 밝히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 그리고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는 길은 제대로 된 특검법을 만드는 것뿐이다. 그것만이 지난 봄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며 동시에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08-14 김도연

정의는 뱀처럼 가난한 사람의 맨발부터 문다

학창시절, 국사 수업에서 가장 알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는 의병에 관한 기록이었다. 임진왜란 의병 기록은 지도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소상히 배웠다. 그뿐인가, 크고 작은 시험에 자랑스런 의병의 역사는 꼭 출제되었고 행주치마 유래까지 곁들인 역사 선생님의 자부심이 가득한 수업을 들으며 뿌듯해 했다. 그런데, 커서 어른이 된 뒤 가진 의문은 병자호란 때에는 어찌하여 자랑스러운 의병의 역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의병의 활약사는 배운 기억이 많지 않다. 아니 나의 경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이같은 의문은 책을 읽고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며 조금씩 풀려 나갔다. 임진왜란은 조선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알려진 대로 선조는 전쟁이 발발하자 의주로 도망간다. 조선의 정궁은 왜적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에 의해 불타는 치욕을 겪게 된다. 선조의 도망은 곧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도피하면서 사흘 뒤 평양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허언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당시 선조의 명나라 망명 시도는 걸내부(乞內附) 파동으로 정의된다. 걸내부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속으로 들러붙기를 애걸한다는 의미다. 곧 자신과 비빈들만이 살기 위해 조선을 버리겠다는 것. 그러던 이 저열한 조선왕은 이내 왜적과 싸우기로 맘을 바꾼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이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명에 빌붙어 비빈들을 거느리며 제후로 살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내키지 않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이 시기 류성룡은 노비들이 왜적의 수급을 가져 오면 양민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획기적인 면천법을 강행한다(선조 26년). 왜적 수급 하나면 양민으로 돌려준다는 데 의병을 마다할 노비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몇몇 개혁입법과 함께 수많은 조선 의병들을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노비제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들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런 개혁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임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그러나 선조는 이같은 기대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고 자리가 어느 정도가 보전되자 생각이 달라진다.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육지전투의 영웅 의병장 김덕령을 역적모의했다며 혹독하게 고문해 죽인다. 이순신도 제거 대상. 선조는 "이순신은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6월 26일)고 비판했다.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 등 서인의 비판을 핑계로 이순신 제거에 나선다. 한달간 처절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목숨만 건져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이 와중에 원균이 1597년 한산도와 칠천도에서 거듭 대패해 수군은 궤멸되고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스스로 수군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하기까지 한다.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는 대목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지루했던 전쟁은 끝났다. 수백만 백성의 죽음 위에 선조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왜적을 죽이면 양민으로 신분을 돌려주겠다는 면천법을 선조는 아예 없던 일로 해 버렸다. 이후 44년 만에 병자호란이 터졌다. 의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백성들을 저버리고 저 혼자 살기위해 의주까지 도망간 기득권 세력에 대해 민초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슬프게도 정의는 뱀처럼 가난한 사람의 맨발부터 문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계절은 어느 덧 여름의 끝이다. 이순신 영화가 화제라고 한다. 이 비운의 영웅을 생각하며 올 여름과 이제 이별해야 겠다./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

2014-08-07 김동률

건강한 자연공원과 건강한 삶

요즘 도심 인근의 산과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아마도 건강한 삶, 웰빙(well-being)에 대한 욕구와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최근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캠핑문화의 확산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쾌적한 공기를 마시면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최근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도립공원을 대학원생들과 함께 가서 방문객들에게 태백산이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질병 치유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그리고 태백산의 건강증진 가치를 위해서 얼마를 기부할 수 있는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백산을 찾는 것이 건강과 질병 치유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흥미있는 부분은 건강증진을 위해서 태백산을 많이 찾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기부금을 낼 수 있다고 답하였다. 이처럼 전국의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 등과 같은 자연공원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장소일 것이다.최근 미국과 호주 등의 국가에서는 'Healthy Parks Healthy People(HPHP)'이라는 새로운 국립공원 관리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HPHP는 인간과 자연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건강한 지역사회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립공원 등의 자연공원은 야생동물의 서식지 역할, 생물종 다양성 증진, 미기후조절, 수원함양, 공기정화 등의 생태적·환경적 가치를 강조해 왔다면, 이젠 인간의 건강한 삶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우리는 국립공원 등의 우수한 자연자원을 보전할 것인가, 지역 경제발전을 위해서 개발할 것인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건강의 중요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과 호주 등의 HPHP 정책과 같이 어떠한 모습을 가진 국립공원일 때 과연 인간의 건강증진에 도움을 줄 것인가, 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가를 공원정책수립에 중요하게 고려한다면 개발과 보전의 충돌을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인들의 많은 관심이 건강과 웰빙에 있다면, 이젠 국립공원 등의 자연공원 관리정책도 그에 부합하도록 발전시켜나가야 될 것이다. 공원 방문객들의 신체활동을 감소시키는 편의위주의 과도한 시설물 설치, 건강한 먹거리와 거리가 다소 먼 음식문화 및 관련시설 등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 듣고, 다양한 동식물들을 볼 수 있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건강한 먹거리를 경험할 수 있는 자연공원을 통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단기간에 많은 관광객을 유도해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고자 하는 공원개발행위 못지않게 잘 보전된 자연공원을 통해 오랜 시간동안 지역주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문득 태백산에서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공원 출입구 주변의 식당에서 담배를 아주 맛있게 피우며 술을 드시고 계시는 한 할아버지께 다가가 "할아버님, 좋은 공기도 마시고 땀도 흘리시고 한 십년은 젊어지셨을 것 같네요. 담배와 약주만 줄이시면 더 건강해 지실 것 같네요"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경훈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2014-08-01 박경훈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늘

- 장마철 풍경장마철에 접어들어도 마른 장마가 지속되더니 어느새 국지성 호우가 물폭탄을 쏟아 붓는다. 모자라도 걱정, 넘쳐도 걱정이라더니 여름 한 철 강수량이 꼭 그렇다. 예측 가능하다면 퍽이나 좋을까. 장마철엔 비가 오래도록 많이 내려야 제격이다. 산과 들이 충분히 젖고, 저수지가 만수위에 올라 넉넉해져야 안심이다. 농부는 논에 물꼬를 터주고 시청 공무원들은 지난해에 넘쳤던 도심 하수구를 새로 정비한다. 그러는 사이 천산만야의 풀과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절기도 질서가 있어야 제격인 법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삶의 축축한 비애를 한 장의 빈대떡으로 달래보는 소시민들의 심사는 제법 풍류에 속한다. 제격이건 풍류건 그런 빗속 풍경이 문득 그립다. 요즘 장맛비는 예측하기 어렵다.- 분단의 해소와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윤흥길의 소설 '장마'에 보면 빗속 풍경은 '제격'도 '풍류'도 아닌 하나의 상징이다. 현대사 최고의 비극과 갈등이 압축돼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중 외할머니가 할머니 집으로 피난살이를 온다. 두 할머니의 아들들은 국군과 빨치산이다. 소년 화자인 '나'에게는 외삼촌과 삼촌이 된다. 전사한 외삼촌을 그리워하면서 외할머니는 문득 비내리는 앞산을 바라보며 바위 새에 숨은 '뿔갱이'를 다 쓸어가라고 저주한다.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격분한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사돈의 저주는 금기 위반을 넘은 전쟁선포와 다름없다.마을의 소경 점쟁이는 모월 모일에 아들이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그 날 나타난 것은 빨치산 삼촌이 아니라 큰 구렁이다. 동네 아이들은 구렁이를 향해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치며 쫓아버린다. 이를 본 할머니는 기절하고 외할머니가 뒷일을 수습한다. 그녀는 나타난 뱀을 자신이 저주했던 빨치산 사돈의 혼령이라 생각하고 잘 달래서 좋은 곳으로 보낸다. 뒤에 깨어난 할머니가 이를 알고 사돈 간에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진술이 소설을 마감한다. 장마의 끝과 함께 사람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도 끝난다.여기서의 장마는 한 집안의 갈등과 비극적 상황을 암시하면서 한국전쟁의 민족적 아픔을 극화한다. 갈등의 해소와 비극적 아픔의 치유를 통한 화해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분단 극복의 방안이다. 1980년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장마철에 문득 이 소설이 생각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소설 속의 갈등과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분단이래 남북한의 대치는 소설 속 '빗속 풍경' 그대로다. 두 어른 사이의 갈등은 남북의 갈등구조를 빼닮았다. 35년 전, 작가가 상징적으로 갈파했던 화해의 요청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통일준비위원회에 바란다지난주에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대통령이 위원장이고 위원이 50명에 이르는 특별조직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연구가 이뤄지고 수많은 시나리오에 대한 실무 검토가 진행될 모양이다. 외교적 상황관리가 막중할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민족 내부적으로도 준비해야 할 사안들이 많을 듯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이미 한 세대 전에 작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두 갈등 주체들은 이념적 판단이나 경제적 득실에 따라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맺힌 감정을 풀어버림으로써 평온에 이른다. 민족화해에도 감정의 영역이 중요한 단초가 된다는 뜻이다.남과 북이 오래 헤어져서 이념과 관습과 문화가 많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바로 감정이다. 슬프고 기쁜 것,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 감정의 교류를 통한 동질성 회복은 막대한 통일비용을 줄이는 선결과제다. 북한의 인천 아시안게임 참가,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기회는 많다. 통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다면 감정교류를 통한 동질성 회복을 통일준비의 중요한 내용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한용운 시인이 노래한 '푸른 하늘'이 아닐까. 명시 '알 수 없어요'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2014-07-25 윤재웅

군대 이야기

집에 총을 든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나를 찾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트럭 안에는 민간인 복장을 한, 나처럼 끌려온 사람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헌병에게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붙잡아 가는 거냐고 물었다. 헌병은 귀찮은 듯 서류를 뒤적이더니, 군 시절 서류를 위조해 세 달이나 빨리 전역을 한 게 발각이 됐으므로 다시 군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서류란 대학 일·이 학년 때 받는 군사교육 이수증명서를 말하는 것인데 이러저런 이유로 그 수업에 F를 맞으면 3개월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즉 30개월을 꼬박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보니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 서류를 위조해 제출한 뒤 3개월 먼저 전역을 하는 사병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해서 일찍 전역을 했다가 들통이 나 잡혀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맙소사! 내가 전역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가만, 저 인간은? 트럭 안쪽에서 나를 주시하는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전역하는 날까지 나를 괴롭혔던 Y병장이었다. 내 가슴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저 인간과 또 군 생활을 함께 해야 한다니….이것은 내 꿈의 일부다. 오랜만에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꿈을 꾼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놀란 내 가슴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왜 오래전에 사라졌던 꿈이 되살아났을까. 군대란 곳이 과연 무엇이기에 남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떤 계기만 있으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것일까. 군대에 대한 꿈은 이것 외에도 많았다. 소총을 잃어버리고 전전긍긍하는 꿈. 전역을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도무지 제대특명이 내려오지 않는 꿈. 찾아가 항의를 하니 시국이 불안정해 한 달을 더 복무해야 한다는 꿈. 참 종류도 가지가지였고 그 까닭도 그럴 듯해서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그 꿈들에서 벗어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나는 군사교육이수증명서를 위조하지도 않았고 현역 시절 총을 잃어버린 적도 없었으며 어처구니없는 제대특명 역시 받지 않았다. 선임에게 못 견딜 정도의 고통을 받은 적도 없다. 대부분의 병사들처럼 합리적이지 않은 일들에 대해 그저 묵묵히, 비겁하게 견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악몽들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텔레비전 화면으로 눈에 익은 철책선 풍경이 흐르고 있다. 나도 저들처럼 야간 근무를 섰고 밀어내기를 하느라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갔다.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을 지겹도록 들었다. 폭설이 철책을 덮을 정도로 내리면 며칠이고 제설작업에 매달렸다. 거의 매일같이 산꼭대기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며 막사로 돌아와 빵을 먹고 잠들었다. 어떤 밤에는 철책까지 접근한 산양을 만나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제대특명을 받고 '추억록'을 한 장 한 장 채워나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오래된 '추억록'을 찾아 펼쳤다. 함께 군 생활을 했던 선임과 후임들의 얼굴이 사진 속에서 하나둘 튀어나왔다. 그때 우리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꿈을 꾸며 저 산꼭대기의 날들을 건너갔던 것일까. 모두들 잘 살고 있을까. 벌써 자식을 군에 보낸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추억록' 속의 풍경과 텔레비전 화면 속, 총기난사의 가슴 아픈 풍경을 흐린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둘 다 틀림없이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이십여 년 전 같은 막사에서 생활했던 한 병사이기에 먹먹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이 악몽을 막을 방법은 정녕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귀찮다고 쉬쉬하는 건 아닐까./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2014-07-17 김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