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과 L2L

미국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은 1994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는 자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거나, 아니면 자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는 다른 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케빈 베이컨의 6단계'라는 게임도 나오고 책도 나왔다. 케빈 베이컨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풍자기사도 있었고, 심지어 케빈 베이컨이 알카에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풍자기사도 있었다. 여섯 번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은 오늘날 SNS 활성화로 그 단계가 축소되고 있다.연결 단계가 간소화되려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케빈 베이컨처럼 큰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물류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거점(hub)이다. 항공사들은 거점 공항 중심의 항로 개발을 통해 한정된 직항로 수를 갖고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으로 운항한다. 거점(hub)-바퀴살(spoke) 방식에서 각 지역의 물건은 일단 거점으로 간 후, 그 거점에서 다른 거점으로 보내진 후, 다시 개별 지역으로 수송된다. 모든 지역은 거점에서 바퀴살로 연결되기 때문에 한정된 연결로를 갖고도 많은 개별 지역에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이러한 거점 중심 방식은 지역 간 연결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수도권 거점과 지방 거점을 각각 하나씩 운영하는 물류회사에서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물건을 운송할 때 대전을 경유할 때가 많다. 한 시간 거리를 네 시간 거리로 만드는 연결이다.특히 지방과 지방은 직접 연결되지 못하고 서울을 매개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춘천에서 부산으로 갈 때 거리상으론 중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깝지만, 시간상으론 서울을 경유해서 KTX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우리의 서울은 남한 전체의 지도상으론 서북쪽에 치우친 변방임에 분명하나, 연결 지도에 있어서는 중심이다.연결 단계가 거점을 통해 간소화되면 될수록 거점과 주변 간의 불평등은 심화된다. 세상이 연결되면 될수록 그 연결고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만 커지지 연결고리에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 머무르기가 쉽다.이에 비해 비(非)하드웨어 연결에서는 서울이라고 해서 구조적으로 지방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당 비용이 추가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아무데로 연결할 수 있고, 오프라인 식의 거점이 필수적이지도 않다. 거점을 통하지 않고 지방에서 지방으로 바로 연결하는 L2L(로컬-투-로컬)은 연결에 따른 추가 비용 없이 연결 단계를 축소시켜 효율적일 수 있다.지금 이 글은 한국지방신문협회 가입 전국 지방신문의 지면에 동시에 게재된다고 한다. 필자조차 그런 L2L 연결이 있었는지 몰랐다. 옆 동네라도 길이 없으면 서울을 둘러가야 하고, 사람들이 다니면 없던 길도 생기며,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면 있던 길도 폐쇄된다. 여론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L2L의 여론 교류는 진정한 지방 발전에 필수적이다.대한민국 지방의 문제는 지방끼리 매우 유사하다. 고민과 해결책도 유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서울 타도를 부르짖는 것은 결코 도움 되지 않는다. 서울이 죽어야 지방이 산다고 부르짖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결과는 그 집단의 권력획득이었지, 지방 전체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서울도 사람이 사는 지방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을 포함한 여러 지방들이 배타적이지 않은 협력으로 윈-윈 할 수 있다. 지방분권이 잘 된 외국의 경우, 각종 물류의 거점들이 있지만 거점이 아니라고 해서 낮은 수준의 복리를 받는 것은 아니다.현행 헌법상 국회의원 선거가 4년마다, 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실시되고 있다. 두 중요 선거가 함께 있는 해는 20년에 한 번에 불과하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이다. 두 중요 선거를 앞두고 지역마다 선심성 그리고 선동성 언행들이 난무할 것이다. 다른 지역 사정을 모르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선심과 선동이 통할 수 있다. L2L 증대는 그러한 선동을 억제시키고 동시에 지역 간 불평등을 방지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활성화된 L2L은 공정한 경쟁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2012-01-05 김재한

학교폭력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지난 20일 한 대구 중학생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매스컴엔 이 사건이 매일 보도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이 그 잔혹성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통탄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그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사람들은 망각할 것이다.그러나 이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1년 학교폭력 실태에 관한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재학기간 동안의 학교폭력 피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 대해 23%가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응답했고, 이 중 54%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경찰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과거에 별 탈 없던 평범한 학생으로 이 사건은 그저 장난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한 가족구성원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평범한 가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래의 학생지도를 피상적인 개인가정환경이나 행동양태에 따라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물어 보면 정직한 대답을 얻기 힘들지만 익명의 설문조사를 통해 학교 전체를 상대로 하면 의외로 학생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또는 목격한 폭력사태나 따돌림, 그에 대한 문제의식, 신고의 문제점 등을 말함으로써, 사태 파악이나 해결 방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학교폭력의 원인으로는 핵가족 중심구조에서 자란 결과, 부모가 과잉보호하여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잠재된 폭력성이 나타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 '소황제'라고 불리는 무례한 아이들이 양산된 경우와 같다. 학교에서는 입시교육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인성교육을 통해서 공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해결 방안을 자체적으로 모색하거나 외부에서 전문가를 모셔와서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산이 문제될 수도 있지만 미국의 경우 처럼 아는 사람을 통해서 또는 학교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전문가들이 무료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하다.현재의 처벌제도가 약해서 이런 사건이 생긴다고 믿고 강력한 처벌을 옹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처벌이 사건을 방지한다는 것은 가해자가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가정하에 통한다. 미국의 경우 처벌이 심해 억제력이 있을 것 같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학교가 정학이나 퇴학을 가할 경우, 단기간에 다른 학교 학생을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학생을 학교에서 제거함으로써 이들을 교육시킬 기회를 상실하고 이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으로 모는 경우도 많다.학교폭력은 사후대책보다 예방교육을 통해서 방지를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다. 피해 학생들이 부모, 선생,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지만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따르면 2010년의 경우 학교 폭력 피해시 도움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로, 일이 커질 것 같아서(28%),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19%), 알려지는 것이 창피할 것 같아서(15%), 보복당할 것 같아서(13%) 등이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목격했을 때 모른척 하는 것(62%)도 큰 문제다.또한 폭력이 가져오는 고통을 학생들에게 실감시키는 것도 하나의 대책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신체장애자를 위한 경사로를 설치하는 비용 때문에 건물주들이 주저했을 때 그들을 초대하여 신체장애자처럼 휠체어를 타고 하루동안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느끼도록 한 경우도 봤다. 한국 학생들도 피해자로 하루 동안 살면서 가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한다면 모든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외면하거나 또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여 장난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2011-12-29 이병수

삼년상의 정치학

삼년상은 유교의 고유한 의례다. 군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사후에는 삼년상을 치렀다. 임금이건 평민이건 사람의 자식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계든, 농사든, 학제든 주로 1년을 단위로 삼는데 부모의 장례는 어째서 3년이어야 할까? 사람이 태어나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숟가락을 뜨기까지 3년간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유교는 설명한다. 그 동안 부모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은혜를 베푼다. 이 보살핌은 일방적이기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되갚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토록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은혜를 유추하여 되갚는 의례를 재현해 볼 따름이다. 즉 태어나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3년의 경험이 삼년상의 수치적 근거다. 오늘날로 당겨와 해석하자면 삼년상은 부모의 죽음을 기화로, 인간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명상하는 '인문학 페스티벌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나아가 삼년상에는 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부모에게조차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오연한 자존심 말이다. 부모에게 입은 신세조차 빚으로 여기고, 그 빚은 장례를 통해서라도 되갚고야 말겠다는 '자존심 강한' 인간관이 그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모의 죽음에 삼년상을 치르고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통치자의 경우에서 발생한다. 과연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진 국가경영자가 제 부모의 장례 때문에 3년씩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있어도 될 것인가? 유교를 표방한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자주 삼년상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곤 했다. 특히 국가건설 초창기에는 인재풀이 좁았기에 몇몇 관리들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물러나면 국가경영에 큰 타격을 입곤 했다.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주인공인 세종의 처지가 그러했다. 그래서 세종은 한 달을 한 해로 쳐서, 삼년을 석 달로 줄이는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이것을 '단상'이라고 부른다).지난 주말,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이 죽었다. 그 아버지 김일성의 사후에 '유훈통치'라는 이름으로 삼년상을 치르더니, 그의 아들 김정은도 삼년상을 치를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유교국가일 수는 없다. 다만 북한의 문화에 삼년상을 미풍양속으로 보는 전통적 습속이 남아있는 증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서구화된 우리들 눈에 삼년상은 퇴영적이고 우스꽝스런 짓으로 보이겠지만, 북한은 여태 서구문화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습속, 그리고 생각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삼년상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유용한 제도다. 혈연으로 정통성이 계승되는 왕조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선 삼년상은 후계자가 막후에서 통치자 훈련을 받는 수습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후계자는 효성스러운 상주로 숨으면서 초창기에 빈번히 발생할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삼년상은 전통을 계승하고, 과거의 폐단은 혁신하는 개혁정치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공자가 "3년간 아버지의 정치방식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이를 수 있으리라"고 말했던 것은 전통의 계승적 측면을 유념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들을 기용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운영함으로써 향후 인재풀을 확장할 수 있다.이모저모 삼년상이라는 제도가 정치적으로 유용할 순 있지만, 그러나 이미 과거의 풍속일 따름이다. 조선시대라면 군주의 삼년상은 정쟁을 3년간 휴전시키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그런 정치적, 문화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북한의 경제사정은 통치자가 3년 동안 막후에서 책임을 비켜나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북한은 머지않아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윤택한 상황이라면 삼년상이라는 효행이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기아상태에서는 도리어 사치스런 짓거리로 폄하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맹자가 누누이 지적했듯,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여유로워야 충성심도 영속적일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진리일 터다.

2011-12-22 배병삼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건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그 건축이 서는 땅이다. 이 땅과 관련한 '지문'이라는 단어가 요즘 내 건축의 중요한 화두며, 지난 일년 동안 써 온 이 칼럼의 주제어이기도 했다. 지난 글을 통해 나는 서양과 우리의 도시에 대한 차이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했다. 서양인들은 도시를 머리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평지에서 실현한 반면, 우리의 선조들은 땅을 먼저 이해해서 그 생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 맥락을 다치지 않도록 가만가만히 마을의 구조를 얽고 섞는다고 했다. 지맥과 산수, 명당이 그런 말이며 배산임수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로마군단 캠프가 유럽 중요 도시들의 원형이니 이 임시적이고 표준화된 도시는 결국 땅과는 무관한 다이어그램이었으며, 그 관습이 르네상스 시절, 더욱 다이어그램적인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 도시는 반드시 평지에 세워졌다고 했다.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놓은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살 뿐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유목민 된 우리의 삶은 떠돈다.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이 덧대어지므로 문양 문(紋)을 글월 문(文)으로 바꾼 게 지문(地文)이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이 그 생성과 변화를 기록하였고 더러는 인간이 그 굴곡된 삶을 통하여 사건과 변천을 기록한 역사다. 그래서 땅마다 다 다르며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처럼 모두 다르다.땅을 지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건축의 모든 단서는 결국 땅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 땅을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도 그릴 수 없다. 땅을 가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나는 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이 항상 벅차다. 어떤 곳은 이제껏 쌓여진 내밀한 기록을 한꺼번에 풀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땅은 좀체 그 비밀을 들려주지 않는다. 요행히 땅이 지닌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희망적 삶을 덧대어 그리면, 설계가 물 흐르듯 끝나게 된다. 장소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를 시각화하는 일, 이게 건축설계요 도시설계여야 한다.급기야 서양이 땅의 생리에 눈을 돌렸다. 우리가 서양화가 근대화인줄 착각하고 서양의 미학을 추종하고 있는 사이, 그 미학의 한계에 봉착한 그들은 도시와 건축의 윤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분열된 공동체의 문제를 심각히 겪은 그들이 이제 그 극복을 위해 거주의 방식을 다시 성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과의 평화로운 조화"라고 했으며, "거주함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며, 그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기는 일"이라고 했다. 장소에 새긴다고 하는 것, 바로 새로운 터무니를 만드는 일이다.그렇다. 구태한 서양미학의 미망에서 이제라도 벗어나, 새 역사를 창조한다며 터무니를 깡그리 지워 우리를 떠돌게 한 비뚤어진 방식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금수강산 속에 덧대어 온 아름다운 우리의 터무니를 지키는 일은 우리를 존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방식이며, 우리 삶의 존엄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 한 해의 칼럼을 마치며 하이데거가 인용한 휠더린의 시구를 덧붙이고 싶다. 마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옛 풍경 같아서이다. '시적(詩的)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2011-12-15 승효상

시장이 청중 수준을 만든다

유럽 문화에서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관객 기반이 아닐까 싶다. 정장 차림의 원숙한 관객들이란 연주가에겐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좋은 관객이 좋은 극장을 만들고 고스란히 그 감동을 되돌려 받는다. 거꾸로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관객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때문에 오페라, 콘서트, 연극, 미술관에 안목있는 청중과 콜렉터들이 얼마나 있는가가 도시의 문화 성숙도를 말해주는 증표다.필자는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80년대부터 해설음악회란 것을 수백 회나 진행해왔는데 지금은 상당한 인프라 확충과 관객 기반의 증가를 몸으로 느낀다. 돌이켜 보면 70~80년대는 르네상스, 필하모니 같은 감상실 문화가, 80년대는 오디오 및 음반 회사의 레코드 및 영상감상회가 주종을 이뤘다.그러다 번스타인 해설음악회를 본뜬 '금난새 해설음악회'가 나오면서 대중화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90년 들어 대학의 사회교육원과 지자체 구민회관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2000년 들어서 예술의전당을 출발한 '11시 콘서트'는 공연의 패러다임을 바꿔 아침 시간대에 주부들과 소통하며 전국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직업상 수천 회의 공연을 경험한 평론가 입장에서 지역에 따라 관객 편차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학부모들이 문화를 좇아 주거를 이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문화가 도시 경쟁력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청중이 없어 좋은 공연물을 소화할 수 없다면 공연 기획사들이 회피하기 때문에 그 격차가 날로 심해진다. 정부도 이런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란 것을 운영해 제작비 절감, 네트워크 교류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러시아 관객들처럼 발레리나 이름을 축구 선수 이름 외듯 한다든가, 연주회에서 무조건 큰소리로 앙코르를 외치지 않는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비평가도 필요하겠지만 행정의 장인 시장(市長)의 마인드가 대단히 중요하다.모차르트 시대의 귀족들은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에 대해 바로 즉석에서 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재 모차르트도 귀족들의 입맛을 맞추며 예술성을 유지하는 줄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다.이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과 일품 요리사를 뽑는 '공모'가 과거처럼 요식 행위로 '임무 끝'이라 생각하면 시대착오다. 방송의 '나가수'처럼 활짝 여는 방식을 취하거나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세계 최고의 악단인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단원들이 뽑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독점적 카리스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호 존중과 호흡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한 것이다. 극장장, 지휘자 어느 쪽이든 인맥, 학맥, 향토색에 얽혀 형식적인 들러리 인사를 한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가고 결국에는 '트위트의 화살'이 인사권자인 시장을 향하게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시대의 도시 건물들이 사원의 높이를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한 것처럼 오늘날엔 시장의 눈높이가 법과 같은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법인화 이후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전국 지자체의 여러 극장과 단체에서 장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부낀다.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며 부임한 예술감독의 예술성에 대해 담론하는 유럽의 행복한 관객들의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 닮을 수 있을까.지금 트위트에 정명훈 지휘자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정 지휘자를 영입한 것이 토목공사 식 발상이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토론은 소비자의 안목을 터주는 학습 효과가 있을 것이다.청중 수준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방법은 참 능력의 리더를 뽑는 것. 그 절차와 낙점은 인사권자인 시장의 몫이다. 청중이 감동하면 박수와 앙코르가, 잘못하면 야유가 기다린다.

2011-12-08 탁계석

유권자는 담화의 광장이 필요하다

격동하는 현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정치가들은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면서 잘 모시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일단 유권자가 한번 모셔보라고 당선을 시켜주면 유권자는 뒷좌석에 팽개치고 사익 추구 또는 소속 정당의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한다. 야당도 집권당이 무리하게 과속할 때 절제하는 견제 장치가 아니라 깜빡 잊고 켜 논 사이드 브레이크처럼 무조건 집권당에 반대만 하면서, 타는 냄새 뿐만이 아니라 아예 최루탄 냄새까지 풍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치제도가 삐꺽거리는 것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당, 정치세력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과거에 유권자들은 선거철에만 정치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었고 평상시에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매체를 통해서 정치에 의견을 피동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쳤다. 이제는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이런 모델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경제생활에서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대접을 받아 온 유권자들은 정치면에서도 같은 대접을 바라고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했다.소셜네트워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그곳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슈에 대한 지식과 대화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다. 다른 관점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라면 담론과 소통의 장이 될 수 있고, 자신과 같은 생각만을 접하려고 한다면 선동의 매개체로 전락할 것이다.얼마 전 국회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통과된 후 각계 반응이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제는 미국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별 받지 않고 진출하여 힘을 마음껏 써 볼 기회가 될 것처럼 생각하고, 어떤 이는 좋은 세상이 다 끝나고 이제는 미국기업의 냉혹한 이윤추구 때문에 한국 산업이 거덜나고, 국민들의 삶이 더 빠듯해질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수행이 ISD(투자자 국가소송제)에 의해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망국의 조약이라고 부르고 있다.필자 의견은, 총체적인 경제적 성장은 더 빨라질 것으로 본다. 대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고, 수출이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업 내지는 생산자의 체질이 강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도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업에서 고용의 급속한 증대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경쟁에서 지는 기업이나 산업은 약화 내지는 사라짐으로써 실업자를 발생시킬 것이다. 또한 소비자들은 공급자간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받는 상황이 올 것이다. 초기에는 가격 저하로 소비자가 혜택을 누리겠지만, 소수기업이 시장을 지배할 경우 가격이 오르고, 만약 기업이 만족할 만한 이익을 거둘 수가 없다고 판단하면 서비스를 거부하는 부작용도 예상된다.한 사건이 모두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한국 전체에 단순하게 이익 또는 손해가 된다고 결정할 일이 아니라 한국 국민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되고, 어떤 손해가 되는지,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이익 보는 측과 손해 보는 측의 부의 재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라지는 산업에서의 잉여 노동을 어떻게 재훈련시켜 부흥 또는 신생 산업으로 이동을 유도할 것인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라면, 수출을 통해서인지, 내수의 진작을 통해서인지, 언제까지나 성장추구를 할 것인지, 성장과 경쟁 중심의 경제정책이 한국산업과 국민들에게 최선의 정책인지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또한 분배 중심정책은 재정적자와 경제체질의 약화를 가져오는지 등도, 모든 국민들이 충분히 논의한 후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결정을 했어야 마땅하다. 정치가들은 다차원의 문제를 일차원적으로 해결하려 하고, 소통보다는 단절 속에서 행동하여 유권자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는 짧은 의견을 달기는 적당하지만 심도 있는 논의를 다루기에는 부족하다. 천상 전통적인 대중매체인 신문이나 방송, 또는 인터넷 매체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뤄 줌으로써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쌓고 더 많은 담론의 광장을 제공한다면 국민들을 거리의 광장으로 내모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2011-12-01 이병수

'사이'에 대한 명상

사람이란 개인이 아니라 관계로 이뤄진 존재다.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제 한 몸 건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상대방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때라야 참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우리 속담도 같은 의미다. 여기 '사람 짓'이란 곧 상대방과의 사이를 제대로 수행할 적에야, 즉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덕담으로 자주 쓰는 '사이좋게 지내라'는 당부 속에도 그런 뜻이 담겨있다.이 점에 주목한 것이 유교의 오륜이다. 오륜은 5가지 인간 관계망, 즉 네트워크를 뜻한다. 부자간, 부부간, 벗들간의 사이를 잘 이룰 때라야, 사람다움을 획득한다. 오륜의 핵심은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외려 상대방을 중시하는 데 있다. 노랫말을 빌리자면,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문제는 상대방의 처지로 바꿔 생각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다. 옛날 공부란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몸에 익히는 과정을 일컬었다. 명륜당이라, '오륜을 닦아 밝히는 집'이 대학(성균관)의 본부건물이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인터넷이란 컴퓨터 통신망이다. 관계를 맺어 서로 연결하고 또 소통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핵심도 '사이'에 있다. 인간의 간(間)과 인터넷의 인터(inter)는 그 뜻이 똑같은 것이다. 인터넷의 특징은 정보교류가 상호적이고, 수평적이라는 점에 있다. 인터넷은 위에서 하달하는 명령보다는 평등하게 교류하는 정보가 주를 이룬다. '사람의 사이'가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사람다움을 이뤄낸다면, '정보의 사이' 곧 인터넷 세상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람들의 자발성으로 구성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사람이든 인터넷이든, '사이'는 도덕성을 본질적으로 내장한 듯하다.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란 청와대나 정부청사, 혹은 의사당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 과정만이 아니다. 도리어 비근하고 구체적인 일상 즉 가족간, 동료간의 사람 사이를 적절하게 소통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기능은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사람들 사이의 문제, 즉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이다. 공자가 정자정야(政者正也)라,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라고 지적한 까닭이다. 문제는 이 '사이'가 힘과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왜곡되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언론기관과 정치가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문제는 심화된다. 정치는 본래부터 정치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소통은 언론기관의 사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정치는 전문가들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의 평범하고 서투른 사람들이 행하는 유일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안철수 원장의 1천500억원 기부를 정치적 행보로 규정하며 "과학자는 과학을 해야 한다. 왜 정치권에 기웃거리느냐"고 힐난한 것은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이 지점에 오늘날 '나는 꼼수다'로 상징되는 사적 미디어의 흥기와 '안철수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모두 사람의 사이와 정보의 사이가 공정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듯, 사람과 정보의 사이를 제대로 소통하는 자가 정치가일 따름이다. 아니 평범한 시민인 내가 잘못된 정책에 분노하고 '쫄지 말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정치다. 시인도 이 생각을 응원하는 듯하다."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 시와 경제의 사이 / 정치와 경제의 사이 (…)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 억압과 통계만 남을 뿐이다." (김광규, '생각의 사이')

2011-11-24 배병삼

'성찰적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

중세에 지은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사 내부에는 암브로지오 로렌체티가 그린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나타내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그림 속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밝은 분위기의 시민들은 상거래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에 어둡게 그려진 성 밖에는 농부들이 죄다 머리를 숙이고 경작에 열중하는 동안,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성에서 나온 귀족들이 사냥도구를 실은 말을 타고 하인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옛날에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빈부와 신분의 차이였던 게다. 사실 도시가 발생하고 나서야 농촌이라는 공동체가 생겼다. 농촌은 도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공급처였으니, 늘 도시에 의해 그 성격이 정해졌고 도시가 요구하면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 특별한 신분의 도시 거주민을 성내에 산다고 하여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성벽은 농민에게는 완고한 상징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정신의 자유를 얻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의 자유를 취득하게 된 19세기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포화상태를 견디다 못한 성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이제 기회의 땅이 되어 보랏빛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확장 일로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커진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부른다. 현대에서도 주변에 위성도시를 여럿 둔 대도시를 의미하는 말이어서 그 배경은 확장과 성장에 있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오늘날 무려 450개나 되며, 이는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를 낳아 현재 세계에 20여 도시에 이르는데, 이 초대형 도시는 도시 상호간의 연합을 촉진하여 에큐메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지구 전체의 도시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폭발적이었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인류의 75%가 도시민이 된다고 한다.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죄다 비관적이었다.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석유자원의 고갈, 원자력의 공포 등등…온갖 지표와 예측도 불안하다. 과연 우리 인류는 지속할 수 있을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화려한 종착점인 메트로폴리스에 성찰이 필요할 때 아닌가.미국의 도시학자 리차드 세네트는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도시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했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 한 시노이키모스(synoikimos), 즉 종족간, 경제적 이해간 혹은 정치적 견해간의 차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집중화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이다. 이 민주주의적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의 형상은 전체로서의 도시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좋은 조짐이 보인다. 서울과 부산, 광주와 대구 등에서 도시재개발이 아니라 원주민을 정착시키는 도시재생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과거를 지워 스펙터클한 광경 만들기에 몰두해 온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성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라는 종속적 관계의 공동체가 아닌, 이 둘의 기능이 결합된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도시(Urban)와 농촌(Rural)을 합친 러반(Ruban)라이프, 농촌에서 5일을 살고 주말 이틀을 도시에서 머물며 즐기는 삶이다. 물론 IT산업이 가져다 준 스마트환경 때문에 발생한 풍경이다.도시재생이든 러반라이프든 이들 공동체는 네트워크로 묶여진다. 여기서는 땅을 구역별 용도별 기능별로 나누지도 않을 뿐더러 뒤범벅이며 다중적이고 이질적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도시가 한계에 봉착한 메트로폴리스를 뛰어넘는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라고 프랑스의 도시학자 프랑수아 아쉐가 제안하였다. 나는 이를, 지난 우리의 못난 도시개발을 반성하는 도시라고 풀이하며 '성찰적 도시'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이제 성장과 팽창은 과거의 유산이며, 개발과 재개발이 아니라 재생과 치유, 그리고 절제를 통한 지속적 삶과 우리의 감성과 지혜를 나누는 연대적 삶이 새 시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찰적 도시'가 그리는 풍경이다.

2011-11-17 승효상

정치와 예술은 거리가 필요하다

10·26 재보선 서울시장 선거는 박원순 시민운동가의 승리로 끝났다. 박 시장은 변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승리라고 답했다. 재보선은 끝났다지만 정치권은 내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향해 무한질주할 것이다.국민이 요구하는 변화의 실체가 뚜렷이 무엇인지는 입장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경제가 잘 돌아가 사람 살기가 좀 편했으면 하는 요구일 것이다.이제 우리나라도 몇 번에 걸친 보수와 진보 진영의 권력 장악을 해오면서 진저리 치는 이전투구의 싸움을 펼쳐 온 만큼 이제는 투쟁보다는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반대를 위한 반대는 정치에 혐오감을 주고, 각자의 세(勢) 규합만으로는 어느 쪽도 큰 승리를 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기존의 식상한 정당(政堂)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신당론(新黨論)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안철수 서울대과학기술대학원장 같은 인물을 찾기 위해 당은 물론 지자체에서도 큰 고민에 빠진 것이다.박 시장이 오세훈 전 시장의 측근을 가까이 둔 것도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보다 강력한 변화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정치와 예술의 나쁜 관행도 이번 기회에 좀 고쳤으면 한다. 사실 MB 정부 들어 최장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 전 장관이 예술에 정치색깔은 맞지 않다고 옷을 벗긴 사례가 몇 있지 않았는가. 말은 옳지만 결과는 엉뚱하게 코드인사 역풍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옷을 함께 벗어야 한다는 관행이 이제 예술계 전체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문화계는 나름대로 굳건한 질서와 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름석자도 생소한 인물이 정치권력을 업고 등장하면 예술가들은 아연실색이다. 이들이 훈장이라도 단듯 종횡무진하면 예술가들은 허탈감에 빠져 창조력이 감퇴하고 숨고 싶을 것이다. 박수 받을 사람은 떠나고 인적 네트워크가 빈약한 실습 수준의 인물이 나타나 다시 시동을 켠다면 이는 변화가 아니라 후퇴요 잘못하면 침몰이다. 예술은 정치가 혼돈스러울 때에도 시민을 위로해 주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제정(帝政) 러시아나 세계 2차대전중에도 오페라하우스 불을 환하게 밝힌 것은 사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달래기 위한 '기도'였음을 알아야 한다.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이 고통받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 했다. 그런데 정치가 뺨치게 알량한 예술가들이 정치권의 허리띠를 붙들고 동행하면 예술은 죽고 만다. 지금 KBS 교향악단 지휘자 문제가 내홍(內訌)에 빠졌다.애시 당초 환영할만한 실력 검증의 인사였는지 들리는 소문대로 정치권 낙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갈등이 장기화 되면 국민 혈세는 물론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오케스트라는 돈이 있다고 만들고 당명(黨名) 바꾸듯 갈아엎는 정치의 희생물이 아니다. 전신인 국립교향악단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만들겠다고 정치권이 손대어 KBS교향악단으로 바꾸었는데 다시 정치가 가세해 무덤을 판다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탁월한 예술경영으로 꽃이 피는가 싶었던 고양아람누리극장, 성남아트센터, 창원성산아트홀, 대구수성아트피아 등 높은 평가를 받던 극장장들이 코드에 걸려 입장을 달리하면서 노하우를 잃어가고 있다.그래서 때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와 예술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당장 내년도 서울시 문화예산이 대폭 삭감됐다니 예술을 사치로 보는 것일까. 최고의 복지가 정신복지인데 포퓰리즘의 민생복지에 밀려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인지.가난한 아이들, 총으로 무장된 폭력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손에 들게 해 도시 전체를 변하게 한 엘시스테마 운동이 상륙한 것은 MB 예술정책의 큰 성과인데 이런 것이 뒤집힌다면 노하우를 잃는 안타까움이다. 정치와 예술의 거리를 찾기 위해서 때론 예술가들도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겠는가. '침묵은 동조'라는 말이 싫다면….

2011-11-10 탁계석

신문, 오늘날의 정당을 반면교사 삼아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유권자들이 정당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는 무소속 박원순씨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이것은 정치가들이 현 세대들이 겪고 있는 등록금, 취업, 안정적 고용, 육아, 주택 등의 문제를 유권자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당 싸움을 비롯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회에서의 몸싸움 등을 함에 따라 시민들이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 개개인의 조그만 목소리가 침묵으로 사라졌던 과거와 달리 소셜네트워크는 이를 수용, 정제, 확장함으로써 하나의 웅장한 교향악을 창출하는 효과를 냈다.과거에는 정당에 가입하면 경쟁상대가 타 정당의 소수 정치인 뿐이었으나 이제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다크호스 등장 가능성으로 과거의 좋은 시절은 다 가버렸다. 한국의 신문도 정치인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2008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 수용자 의식조사 자료에 의하면, 시민들은 신문기사 및 뉴스에 대한 설문에서 기자들의 전문성이나 신문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신문에 대한 신뢰감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라고 느낀 사람이 68.8%, 국민의 이익보다 자기 회사이익을 우선한다고 보는 사람이 67.8%, 부유층과 권력층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이 65.8%, 정치·경제에 대한 비판 부족 59.2%, 정정보도 부족 59.2%, 대책 제시없이 비판 일변도 56.6%, 사실보도와 기자의견 구분 모호가 56.4%였다. 반면에 2009년 언론인 의식조사에 의하면 국민이 신문을 신뢰한다고 보는 언론인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언론인보다 9.3%가 많았다. 신문이 이런 착각 속에서 시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기존의 일부 독자들은 관성으로 신문을 계속 읽겠지만, 어떤 독자들은 금품공세를 해야만 구독을 할 것이고, 젊은 세대들은 신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예 소셜네트워크를 주 정보원으로 삼을 것이다. 신문이 광고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면 이런 악 구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겠으나, 작금의 상황은 신문이 변화하지 않으면 정치판에서처럼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경제상황 외에 한국신문은 또 하나의 복병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광고주들은 광고를 할 때, 신문의 광고효과보다는 책정된 광고비를 다수의 신문사들에 나눠 줌으로써 신문이 자사에 유리한 기사를 내보내고, 불리한 기사는 빼거나 약화시킬 거라는 기대로 광고를 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공정사회가 진행되고 이제는 신문사 이외에 인터넷 등 수많은 정보 공급자가 생겨 신문사와 손을 잡을 경우 효과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신문사의 발행부수공개를 요구해 왔다. 한국ABC협회는 1996년 처음으로 발행부수를 공개하기 시작한지 10여년 만인 지난 2009년 말, 신문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간 신문의 부수를 공개하게 했다. 조만간 광고주들은 발행부수가 아닌 유료구독부수의 공개를 요구할 것이다.그렇다면 신문은 어떻게 해야 할까?첫째는 부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세계최고의 권위지인 뉴욕타임스의 부수는 2011년 3월말 약 92만부,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침으로써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켰던 워싱턴 포스트는 55만부에 그치고 있다. 가능한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것보다 확고한 유료독자만을 간직함으로써 안정된 구독 수입을 올리고 신규독자 확보, 신문 인쇄, 배달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둘째는 질로 승부를 봐야 한다. 수용자 조사가 보여준 것처럼 전반적으로 공정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사건이나 문제를 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독자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어 그들의 욕구와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중 어떤 분야에 집중, 특화를 하는 것이 자사에 가장 유리할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셋째는 독자들의 관심, 취향, 소비 패턴 등의 정보를 모으고 이를 매개로 광고 효과를 높여 광고 단가를 높여야 한다. 넷째, 신문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에 있는 젊은 층을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시에 급속하게 퍼지는 태블릿 PC, 스마트 폰을 통해서 어떻게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11-11-03 이병수

더러운 입

오백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살던 조식 선생이 출세한 제자와 함께 저녁 밥상을 맞았다. 내내 기름진 음식을 먹던 제자는 헐한 밥과 박한 찬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선생이 한 마디 던졌다. "자넨 음식을 등으로 먹질 못하는구먼!" 헐한 음식을 억지로 삼키려면 목울대를 울리고 등을 움찔해야 넘어가는 것을 두고, '등으로 먹는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음식은 창자를 채우기만 하면 될 뿐, 입맛에 집착하지 말라는 회초리다.저녁 무렵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나 먹을거리 타령이다. 이마엔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벌려 음식을 우적우적 씹는다. 또 그게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에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고서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해 가며 호들갑을 떤다. 먹는 음식을 두고 이런 추한 모습을 꼭 보여야 맛기행이 되고, 고향 탐방이 되는 것일까 싶다.50년 전 보릿고개 시절 오늘의 풍요를 헤아리지 못했듯, 또 머지않아 굶주리는 때가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저 입들이 두려운 것이다. 문득 "음식에 탐닉하는 걸 비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고작 입의 욕망에 휘둘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던 맹자의 말이 귀에 따갑다. 먹는 입은 더러워지기 일쑤인 것이다.음식을 삼키는 입보다 더 조심스런 것이 내뱉는 입이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들어있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흰소리를 자주 하면 사람이 실없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입으로 내뱉는 것이 모두 다 말은 아니다. 지키지 못할 말, 책임지지 못할 말, 거짓말은 '말'이 아니다. 말 속에 의미가 없고, 말 뒤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소리'일 뿐이다. 소리를 내는 것은 짐승이다. 흰소리, 발림말, 거짓말은 새가 지저귀는 것이나 개가 짖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까 말이 뜻을 잃고 소리로 떨어지면, 사람은 곧장 짐승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옛말에 "사람이 사람 짓하기 어렵다"라더니 말 한마디 잘못에 짐승이 되고 마는 셈이다. 그렇다면 또 알겠다. 불교에서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라, '입이 저지른 악업을 씻는 진언'을 외고 나서 의식을 시작하는 까닭을. 먹을거리에 집착하는 것이야 제 한 몸의 추잡함에 그치지만, 말을 잘못 내뱉으면 여러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말은 내뱉는 이의 사람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말에는 듣는 상대방이 있게 마련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고 맺어서 공동체를 이뤄주는 매개체요, 공공재인 것이다. 한자어 신(信)을 세로로 쪼개면 사람(人)과 말(言)로 나눠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말, 즉 사람다운 말일 때라야 신뢰가 생긴다는 뜻이다. 신뢰가 사라지면 말은 소리로 추락하고, 사회는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공자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공동체는 존재하지 못 한다"(民無信不立)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다.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유독 흑색선전이 창궐했다. 흑색선전은 오로지 상대방을 해코지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 유포하는 악독한 짓이다. 의도적으로 불신을 조장하고 조직적으로 말을 파괴하는 짓이다. '흰소리'도 사람을 실없게 만들거늘 '검은소리', 흑색선전이야 말할 게 있으랴. 한나라당 중진 김무성 의원은 선거과정이 난장판이라며, 안철수 교수더러 "난장판인 선거전에 기웃거리지 말고 강의나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말인즉 틀린 말은 아닌 듯하나, 곰곰 생각하면 참 무섭다. 본인을 위시한 의원들이 모두 협잡과 사기, 거짓말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난장판 출신이라는 자기고백으로 들려서다.정치가가 자승자박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이 뻔뻔한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음식에 껄떡대는 입이야 제 한 몸을 누추하게 만들 뿐이지만, 공공재인 말을 검은색으로 오염시켜 공동체를 망가뜨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 더러운 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2011-10-27 배병삼

광주폴리

지난 9월1일 개막된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이번 주말 막을 내리게 된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담론의 계기를 만들어 그 지평을 넓힘으로써, 디자인비엔날레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유수한 해외 언론들의 찬사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좋은 위로가 되었다. 여러 전시 중에서도 광주폴리라는 이름으로 광주의 도심에 지은 작은 공공시설물이 이번 비엔날레의 성격을 단연코 부각시켰다고 했다. 폴리(Folly)는 원래 '다소 우둔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뜻한다. 지난 80년대 중반 버나드츄미가 파리의 라빌레트공원을 설계하여 지은 35개의 시설물을 폴리라고 부른 이후, 건축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간단한 구조물이지만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의 공공시설물로 알려지게 되었다.광주는 문화수도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문화와 관련된 많은 도시정책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비엔날레의 총감독직을 맡고 광주를 오가면서 본 도시 모습은 이에 걸맞은 게 아니었다. 급조한 듯한 신도심의 풍경과 낙후된 구도심이 어정쩡하게 결합된 모습은 우리 땅에 있는 여느 지방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니, 치졸하였다. 풍부한 녹지와 유려한 광주천 그리고 언제나처럼 듬직한 무등산이 빚는 자연환경은 특별한 아름다움이며 그 속에서 빚어 온 인문의 역사는 빛나는 것임에도, 파행적 근대화 과정이 만든 불구의 풍경이었던 것이다.나는 사라진 광주의 읍성에 주목하였다. 광주가 역사도시임을 밝혀주는 광주읍성은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도시 확장을 이유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라진 읍성은 도심 내 중요한 도로가 되어 그 존재의 사실이 남아있고, 읍성 안에는 여전한 옛길들이 있었다. 이 광주읍성의 흔적을 밝혀낸다는 것은 역사도시 광주의 복원이며, 원도심과 신도시의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도시 발전의 정체성을 찾는 일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이 2.3킬로미터에 달하는 읍성길을 따라 읍성을 출입하는 문이 있던 자리와 모서리부분 10군데에 광주폴리를 짓기로 하였다. 어느 곳은 작은 공원으로, 어느 곳은 작은 공연장 혹은 전시장, 또는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출입구를 겸하는 기능을 설정하고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을 초청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이 작은 시설의 설계가 매력 있을 리가 없다. 보상도 턱없었다. 나는 이들을 찾아가 광주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그 의미를 설명했고 건축가로서 이런 문화운동에 대한 참여의 의미를 강조하며 참가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놀라운 헌신으로 마침내 개막일에 맞춰 완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벌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폴리를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것은 물론, 폴리 주변의 어느 가게는 이들을 맞기 위해 업종까지 바꿀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서 공연과 집회가 벌어지는가 하면 어떤 곳은 저녁 무렵 주민들이 이 작은 시설에 모여 같이 음식을 나누며 공동체를 확인한다. 이런 움직임은 아마도 증폭하여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마치 수면에 던져진 작은 돌 하나가 파장을 만들며 주변으로 번지듯 이 폴리를 기점으로 주변은 주민 스스로에 의해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어 나갈 가능성이 짙다. 그래서 폴리를 문화적 거점이라고 한다.도시를 재개발하기 위해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환경을 싹쓸이하듯 지워 오래된 삶터를 유린하는 일은 이미 서양에서는 폐기된 방법인데도, 유독 우리의 땅에서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야합으로 이 생소한 풍경 만들기가 성행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급조된 시민처럼 급조된 도시환경에서 파편적 삶을 살도록 강요되어 온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 없이는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고 했다. 지속 가능한 삶이 역사를 기반으로 선다는 것을 알 때, 지금까지 전 국민을 도시의 유목민으로 몰아낸 기존 재개발은 폐기되어야 한다.물론 광주폴리가 모든 도시문제에 대한 해답일 리 없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소득이 있다. 모든 광주시민이 광주가 역사도시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도심 재생에 나설 조짐이 보인 것이다. 역사를 인식하게 되면 미래가 보이는 법 아닌가.

2011-10-20 승효상

클래식 레퍼토리 준비하는 지자체들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의 뮤지컬 오라토리오 '모세(우효원 작곡)'공연이 있었다. 시립합창단으로선 이례적으로 2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브랜드 상품을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그런가하면 고요하고 정적인 정가를 음악극으로 만들어 새로운 변화의 옷을 입히는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의 전당 개관 기념으로 월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콘서트가 있었는데 5천명의 청중이 큰 감동을 느꼈다. 각 도시마다 시립교향악단이 있긴 하지만 시가 월드필하모닉을 지원해 시민 만족을 높이고 도시 문화 역량을 키웠다는 평가다.대전시립교향악단도 지난달 서울 콘서트에서 변신의 모습을 보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극장은 극장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문화 역량을 키우기 위해 그간 소외되었던 예산을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다.관객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 대중문화 쪽이지만 이제는 사회 전체가 명품을 찾는 고급 정서가 지배적이어서 클래식을 선호하는 쪽으로 방향이 선회된 느낌이다.서울시합창단은 오는 12월 '칸타타 한강'(임준희 작곡)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 은행에서 전석 티켓을 구매하겠다고 요청이 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그만큼 클래식에 대한 시장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이다.경남에서도 경남오페라단에 매년 지원을 하는 지역은행이 있어 문화가 풍성하게 꽃피고 있는 데 이는 나눔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때문이고, 지자체도 공공투자를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하는 것은 문화의 방향을 바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무릇 세상의 이치가 풍성해지면 보다 나은 것을 찾게 된다. 대중문화 한류가 시장 논리 면에서 거대한 수효를 만들어 가고는 있지만 '동남아'라는 한계시장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의 10대 청소년과 드라마 청중들로 채워진 시장을 벗어나 유럽시장을 공략하려면 현재의 상품으로는 지속적인 시장 개척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유럽은 동유럽과 서유럽에서조차 서로의 문화적 자존심에서 격차를 보이고 있는데 자신들이 접하지 않은 동양의 문화가 이곳 상류사회로 쉽게 젖어들 수 없음은 당연하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일방적으로 우리 것만 이야기해서는 좋은 대화법이 못 된다.클래식에 대한 사회 인식이 달라지면서 지자체의 브랜드 클래식을 만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축적하고 있는 엄청난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얼마 전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아리랑 깐딴떼'라는 성악 그룹이 결성되는 가하면 새로운 동호인 시장 개척을 하려는 움직임도 부산하다.이제 지자체 행정 담당직원들도 보다 많은 정보들을 흡수하고 전문가들과 실질적인 네트워크를 형성 좋은 프로그램을 짜는데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할 것 같다.엊그제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자(김성진)가 터키극장에서 우리 연주가들과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들고 한터문화교류의 밤을 열어 우리 전통음악과 우리 클래식을 소개한다니 이런 일들이 더욱 왕성해 질 것은 분명하다.그간 우리가 성장에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지만 이제는 발상을 달리해야 할 때가 왔다. 고부가가치의 블루오션 시장에 고급클래식이 나가야 한다. 서구사회에 코리아의 멋과 신명을 잘 보여 줄 때가 왔다. 그들도 동양의 문화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콘서트나 오페라극장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대상으로 우리 문화를 알리면 그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겠는가. 이제는 양에서 질적인 전환을 해야 한다. 이제 창작자를 우대하고 단체 지원법도 고쳐 선의의 경쟁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할 때다.중앙 공급식 문화도 이제 지자체마다 바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해야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때가 아닌가.시민들은 정치권에서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도 신선한 바람을 원하고 있다. 그 변화를 수용하고 다시 일으키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특히 시민의 문화 반응과 요구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2011-10-13 탁계석

'소셜네트워크' 직접민주주의 불러 올까?

미국에선 지금 기존의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운동이 뉴욕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구호 아래 3주째 접어든 젊은이들의 데모는 잠깐 모였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은 아예 인근 공원에 노숙을 하며 데모를 하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불만을 기존 정당정치가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전달된 정보에 따라 데모에 참석하여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다. 기업의 남용과 탐욕, 월스트리트 파워에 반대하는 데모가 지난 9월 17일 뉴욕에서 시작되어 10월 2일 일요일에는 700명의 참가자가 도로 점거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런 취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보스톤 등 여타 대도시에서도 데모를 시작했다.지금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주로 80년대 또는 9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질적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내 왔고 또한 인터넷을 통한 정보 소통에 익숙한 세대다. 부시 대통령 말기 때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에 직면한 젊은이들은 대학을 다닐 당시엔 비싼 등록금을 지불했고, 졸업 후엔 일자리가 없어 융자받은 부채에 허덕인다. 또한 직장을 찾기는커녕 인턴십도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 세대들은 지금 좌절을 경험하면서 낙담하지 않고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과거에는 이런 불만의 소리는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나 술집에서 하는 토론 속의 불평으로 끝났겠지만, 이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덕분에 불만이나 다양한 의견들이 인터넷에서 수렴되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데모 참가자는 온라인 조직을 통해서 돈, 음식, 담요 등을 기부받기도 하고, 새로운 참가자들도 모으고 있다.그 이전 세대들도 현실에 불만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다. 경기 침체로 실직한 사람들이 은행으로부터 집을 몰수 당한 경우도 많이 있다. 금융기관의 방만한 주택자금 대출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정부의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금으로 진정되었지만 정부지원이 주택상환금 감소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금융기관들이 CEO들의 경제적 희생 없이 직원 감소를 통해 이익금을 늘리려고 하는 전략은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아 왔고, 또한 전반적으로 미국 전체의 부가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쏠리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증대되어 왔다.상업분야에서는 이미 인터넷 및 소셜미디어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에는 구매를 할 때, 가족, 친지, 친구 등 몇몇 지인의 사용경험이나 기업 또는 상인들이 보내는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소비자가,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 창구 덕분에 더 많은 판매처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서적분야 판매에서 보더스라는 서점은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을 해버렸고 반스엔노블스라는 서점은 살아 남았지만 눅이라는 e북리더를 만들 만큼 인터넷 시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대신 아마존 같은 온라인 기업이 생겨나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최근에는 월마트같은 거대기업과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한 시민운동은 지난 봄 아랍국가에서 억압적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절대적인 일조를 했다.미국의 경우도 특정 정당이 좋아서 지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두 당을 비교했을 때 덜 나쁘다고 느껴지는 당을 골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떤 이는 이 데모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한국의 경우도 안철수 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정당정치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폭발적으로 단합하는 시대에, 만약 정당들이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아 사라졌듯이 정당들도 기반을 잃고 무너질 것이다.이러한 풀 뿌리로부터의 운동이 어디로 귀착할 것인가는 데모대와 정치인들에 달려있다. 운동권이 기존의 정치판에 불만을 토로하고, 기존 정치조직이 이를 반영하면 여론의 원활한 반영이라는 결과로 귀착할 것이다. 운동권이 기존의 정치조직에 기대를 걸지 않거나, 또는 기존 정치인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경우는 제3의 신 세력이 대두할 수 있다.

2011-10-06 이병수

조장(助長) 의 끝

가을이 익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논배미에 가까이 가서 보면 이 논이나 저 논이나 벼들의 키가 가지런하다. 이삭의 무게로 고개를 숙인 각도조차 한결같다. 문득 놀라움에, 내리비치는 햇살을 따라 하늘위로 눈길을 돌린다. 눈이 부시다. 태양과 하늘의 공평함에 눈이 부신다.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늘과 땅은 어떤 종류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더니 지금 들판에서 그 현장을 본다. 햇살이 고루고루 비치기에 벼의 키 크기가 저리 고르고, 하늘에서 뿌려주는 빗줄기도 이곳저곳이 두루같기에 이삭의 무게조차 저렇게 평등한 것이리라. 저 천지자연의 공평무사함에 기대어, 제 욕심만 채우는 자를 두고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이고 또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라며 제 결백을 하소연하기도 했을 터였다.그러나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공평과 공정에 목마르다. 지난 해 난데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낯선 책이 초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 그러하고, 올 여름 느닷없이 안철수 현상이 온 나라를 들었다 놓았던 것도 그러하다. 안철수 현상을 두고, 좌파라느니 우파라느니 편을 가르는 분석들도 있었지만, 실은 유독 이 정권들어 심각해진 권력의 사유화와 공공성의 훼손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문득 조장(助長)의 고사가 떠오른다. 옛날 중국 땅에 오랜 가뭄이 들었다. 봄에 심은 묘들이 크지를 못하고 말라 죽을 판이었다. 하루는 정신이 맑지 못한 노인이 들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이구, 힘들구나. 내가 묘를 키워주고 왔네"라는 것이다. 자식들이 놀라 들로 나가보니 묘를 키워준답시고 뿌리를 뽑아 올려, 온 들판의 싹들이 말라죽게 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오늘날까지도 나쁜 짓을 도우는 것을 '조장한다'라고 쓰는 어투가 된 내력이다. 조장의 고사는 사사로움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세상의 어려움을 '내'가 나서서 널리 바로 잡겠다는 설익은 영웅주의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채 덤벼드는 무지의 낭패가 이 고사속에 들어있다. 조장이 무서운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더 나쁜 해악을 상대방에게 끼친다는 점에 있다. 지금 이 땅 도처에는 조장의 흔적들이 낭자하다. 흐르는 강을 막느라 억지공사를 한 탓에 끊임없이 관리 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이 눈에 띄는 조장의 흔적이요, 경제를 발전시킨다면서 재벌들만 배불려 이젠 국민의 복지를 그들 자선에 기대야 하는 꼴로 만든 것이 또다른 조장의 사례이다.듣기로 대통령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근로와 수고로움의 정체다. 그의 말투를 놓고 보면 짐작가는 데가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투가 그러하다. 이 말투를 두고 사람들은 그저 조롱조로 비웃고 마는데, 실은 대통령의 정체가 들어있는 말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속에는 오만과 무지, 곧 조장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다. 맹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비평한 바다.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라는 오만한 말투와 낯빛이 권력자의 표정에 비치면 올바른 조언자들은 천리만리 떠나버리고 만다. 그 빈자리를 아첨하고 굽신거리며 아양 떠는 자들이 메우게 마련이다. 이 따위 아첨하고 아양 떠는 자들과 함께 한다면, 과연 나라를 잘 다스려보고자 한들 그게 가능키나 하겠는가?"'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라는 말 한 마디 속에, 독선과 무지와 어설픈 영웅주의가 오롯하다.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껏 일한다고 자부하기에 안 되는 일과 잘못된 결과를 남 탓으로 돌리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공공성을 훼손하는 이 정권의 행태도 실은 이 '나'속에 들어있다. 이 정권들어 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이 내내 불법과 탈법을 기본으로 깔고있는 이유도 이 속에 들어있다. 나를 깨우쳐 공공성과 공정성을 함께 실현할 사람이 아니라, '나 개인'의 아이디어를 집행할 손이나 발과 같은 인간만 필요로 할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장의 끝이다. 대통령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서 수고롭다는데, 국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하다. 옛 이야기 속의 사태 역시 꼭 같았다. 노인은 피곤한데 그쳤지만, 들판의 묘들은 말라죽었다.

2011-09-29 배병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를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는데 비해, U의 의미가 이중성을 띤다. '유'라고 발음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eu, ou가 다 같이 '유'로 발음되지만,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 된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내부를 해자가 또 감싸고 도는데, 곳곳에 설치된 감시망루를 거쳐 섬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나타난다. 즉 한 통치자의 지배하에서 철저한 감시체계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가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준 이 책은 급기야 신도시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윽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세워졌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적 세계를 동경한 것이었으며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우리의 땅에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은 많은 신도시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워졌으나 많은 도시문제를 양산한 바 있다. 신도시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고유한 삶터를 일구어온 우리의 옛 도시에 불기 시작한 재개발이라는 사업이었다. 우리의 마을은 서양의 도시와는 그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머리 속에서 유토피아를 그려서 평면 위에 실현한 도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산과 물이 만든 지리에 복속하며 일궈놓은 풍경이었으니 그 자체가 아름다운 산수화였다.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서양의 도시이론을 흉내낸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터가 유린당하고 만 것이다. 우리 옛 도시에 불현듯 등장한 아파트단지가 그 유토피아를 치졸하게 실현한 대표적 결과였다. 몇 채가 들어서든지 아파트 단지는 울타리를 치고 주변을 단절시켰으며 으레 몇 개의 출입구를 통해서 출입을 통제하고, 도시의 도로는 이 단지만 만나면 통과되지 못하고 둘러서 지나야 했다.결국 도시의 섬이 되고만 아파트단지는 다른 섬들과 부동산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며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적대적 공동체였다. 더구나 이 땅에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였다. 정치가가 몇 채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건설자본은 이를 뒷받침하여 그 임기 내에 졸속으로 지어댔으니, 어디에도 우리들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담론이 없었고 건축의 시대적 정신도 없었다. 그 분별없는 유토피아는 오로지 스스로 폐쇄함으로 고립된 부동산공동체일 뿐이었다.유토피아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다. 1932년 알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타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철저히 통제된 사회가 바로 이 디스토피아다. 외부와 소통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 역시 애초에는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였으니, 결국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폐쇄적 공동체인 까닭이다.얼마 전 서울에서 무상급식에 관한 투표가 있던 날, 서울의 최상류층이 산다는 어느 고층아파트 단지에서 투표참관인조차 출입을 거부당한 일이 발생했다.외부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사회의 통념과 법규마저 무시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벌인 희극이었다. 이 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무엇이든, 폐쇄공동체를 지향하는 한 그 결과는 비극일 게다.

2011-09-22 승효상

말랑말랑한 힘 소프트파워를 키우자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으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구글이 모토롤라와 합병하면서 IT코리아가 2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IT 강국으로까지 불렸던 우리 대부분의 SW회사들도 경영 악화로 워크아웃에 놓인 상태다. 업계는 이 모두가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 혼선이 빚은 결과라고 성토한다. SW 경쟁력의 핵심이 기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해 뒤늦게 뒷북을 치고 있지만 앞으로 이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키웠던 벤처기업이나 신지식인을 부추겨 세웠던 신화는 신지식인 1호였던 영화 용가리 심형래 감독의 좌절로 막을 내리고 말 것인가. 지금껏 소프트웨어를 지켜 온 기업들은 대기업들이 부족한 인력을 모두 빼가는 현실에서 할 말을 잃는다. 비단 IT 업계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의 현상일 것이다. 가깝게는 겉만 화려하게 지어진 미술관, 공연장, 무늬만의 오페라하우스 등 선진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강정의 궁색함이 그대로 드러난다.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소프트웨어의 근간이 되는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의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왜곡, 변질되기가 일쑤다. 소설가, 화가, 작가, 발명가 등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진심어린 창작 지원이 없다. 때문에 창작자들이 겪는 척박한 현실은 양질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래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등 세계시장에서 큰 호응을 끌고 있다거나 걸음마 단계에 있지만 우리 공연물들이 국제무대 진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은 희망이다. 엊그제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보았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Achim Freyer) 프라이어가 1인 오페라라 할 수 있는 판소리에 스토리 배역을 나누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판소리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결코 우리 힘으로 세울 수 없었던 정교한 무대와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판소리의 새 지평을 열어 보인 것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쉽게 알아듣기 힘든 사설이나 문화적 차이를 과연 외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궁금하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인 말랑말랑한 작가의 힘이 느껴졌다.획일적이고 답습의 문화가 범람하는 우리 공연 풍토에서 예술이 창의(創意)에 넘치는 사회를 끌어가려면 창의력과 소프트웨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도처에서 펼쳐지는 예술행위들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예술의 가치를 피부로 느끼게 할 것인가. 지난 7월 국립오페라단이 개최한 한 토론회에서 밝힌 자료에는 우리 창작오페라가 300편이 넘게 무대에 올랐지만 상설 레퍼토리로 정착된 작품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주어졌다. 막대한 예산과 노력이 일회성 공연에 그친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이며 안이한 제작 방식과 지원 시스템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다. 그 원인 규명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탁상공론에 그치고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한계를 이제는 극복해야 할 때가 왔다. 창작의 원천인 작가의 창작 에너지가 변색되지 않도록 높은 보장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고 저작권 횡포 등 고압적인 시각도 개선해야 할 대목이다. 바야흐로 한류 덕분에 우리 국악을 비롯한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전통은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우리 것을 소재로 탁월한 문화상품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시인 함민복의 詩(시)에서처럼 '말랑말랑한 힘' 즉 소프트웨어의 파워가 절대 필요하다. 소프트웨어의 대명사라 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정치권에 메가톤급 파장을 몰고 온 것처럼 문화계도 혁신적인 인물이 나올 수 있으려면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 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다면 삭막한 소프트웨어 예산편성부터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스포츠의 힘이 유연성에 기초하듯 목에 힘을 주던 카리스마보다 한국인의 미소같은 소프트웨어가 세계를 이길 날이 와야 하지 않겠는가.

2011-09-15 탁계석

다양성은 왜 필요한가?

애플 최고 경영자(CEO)였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서 서체를 공부했고 그것이 훗날 애플 컴퓨터의 아름다운 활자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 그는 서체 공부와 컴퓨터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잡스의 지식은 놀랍게도 훗날 애플 컴퓨터회사에 혁신을 가져왔다.이처럼 혁신은 기존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에서 생긴다. 따라서 혁신은 대부분 과거의 틀에 얽매이는 다수의 집단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추구하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하다. 기존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고집하면 정체된 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역동적인 국제화 사회를 헤쳐가는 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의 대학들도 이런 점을 생각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예전에는 미국 대학들이 역사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에게 보상해주는 차원에서 다양성(diversity)의 문제를 다뤘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배경 (인종, 성별, 소득, 종교 등 여러 측면)과 사고 방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 가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사회환경을 반영해서다.다양화는 항상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들은 수업 중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도, 학생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백인이 대부분인 대학이나, 교수가 종신 계약 (테뉴어)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수는 학생들의 수업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왜 자기와 다른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까?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나 불편함이다.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가슴이 설레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아름답다고 평판이 난 곳에 여행하는 것도 그런데 하물며 낯선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또는 평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어떻겠는가?자신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은 열린 마음으로 듣지 않으면, 이치가 안 맞는 것 같고 억지를 쓰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서로간에 대화할 때 자기 생각만 외치고 상대방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뿐 절대 남의 생각을 진정으로 이해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미국과 한국에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인들은 한치의 양보없이 자신들의 선명성과 위대함 만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매스미디어가 다양한 후보와 그들의 생각을 비교 분석하는 교육의 광장을, 또한 여러 의견이 교류할 수 있는 대화의 광장을 제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독자 자신이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도록 복수의 채널을 통해서 정보를 구해야 한다. 또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직접 또는 인터넷을 통한 접촉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 방식을 접하는 것도 중요하다.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정치 후보자의 선거 공약이나 정책에 대한 평가를 현명하게 할 수 없고 감정적으로 호감이 가는 후보자에게 한표를 던지는 양상이 발생할 것이다. 이 시대에 맞는 혁신적인 변화가 무엇이고 이것을 정치지도자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려면 기존의 관념틀을 벗어나서 다양한 견해에 접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우리는 자신과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접했을 때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곰곰이 타인의 생각을 음미하기 보다는, 무시하거나 자신에게 편한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우리는 입에 꼭 맞는 것만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1-09-08 이병수

버선과 양말

천도교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권력이 곧 하느님'으로 바뀌거나 '돈이 곧 하느님'으로 변질되는 순간, 어떤 종교든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종교사의 교훈이다. 신라 제2대 임금의 왕호는 '남해차차웅'이다. 훗날 당나라 유학생 김대문은 차차웅이 곧 무당(巫)을 뜻한다는 기록을 남겼다(삼국사기). 신라 초기 임금님들은 무당이었다는 말이다. 하나 권력에 취하고 돈과 결탁한 무당들은 힘을 남용하다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자 신라땅의 해가 빛을 잃었다는 설화는 샤머니즘의 몰락을 상징한다(삼국유사).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한때는 개성의 대사찰에 속한 사병들이 시내에서 세력을 다퉈 전투를 벌일 정도였다. 조선의 건국 명분 가운데 하나가 권력화한 불교의 척결이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속에 불교 배척의 철학이 오롯하다. 이에 응대하여 승려 함허가 '현정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유불공존을 모색했지만, 때가 늦었다. 조선조 500년간 승려들은 천민 대접을 받았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조선 후기 고을마다 서원들로 넘쳐났다. 시골 선비들의 패악질에 지방 수령들이 곤욕을 치렀다. 흥선대원군이 600여곳의 서원들을 혁파하면서, "정녕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지금 텅빈 채로 퇴락한 향교 건물이나, 먼지만 소복하게 덮어쓴 골짝구비의 열녀비·효자각·홍살문 등은 경직된 조선 유교의 폐해를 증거한다.새로운 종교나 사상은 '약한 고리'를 치게 마련이다. 조선말기 천주교는 천민들과 양반가 주부들 사이에 은밀히 퍼져 나갔다. 당시 양말도 함께 전래되었던듯, 푸른 눈의 신부들은 천주교를 양말에 비유했단다. 버선이 사람의 발에 꼭 끼어 발을 압박하는 반면, 양말은 누구든 신을 수 있는 신축성에 빗댄 것이었다. 버선이 계급과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는 유교를 상징한다면 양말은 양반상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천주교의 평등한 사랑을 상징한 것이다. 개신교는 일제하 3·1운동의 주축이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옥살이를 치른 목사들도 드물지 않았다. 해방후엔 민주화 운동의 추동력이기도 하였다.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교회에서 은신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개신교는 눈부신 성장과 더불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초대형 교회들의 행태는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최근 초등학생들 급식을 둘러싼 주민투표가 있었다. 결과에 다급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누군가 '밥 달라고 우는 경우는 봤어도, 밥 주지 말자고 우는 꼴은 처음 봤다'는 촌철살인을 날렸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의 목사들은 이 투표에 편파적으로 깊숙이 개입하였다. 운동이 금지된 투표일 아침에조차 투표 참여를 유도할 정도였다. 종교가 특정한 사안을 두고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권력과 결탁하는 일이다. 불교쪽에서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했는데, 이제는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이 땅에서 명멸하는 종교들의 이력은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주역의 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특정 종교가 왕이나 권력자를 배출할 때나, 사람이 아닌 돈과 권력을 숭배할 때가 실은 몰락의 징후다. 제 종교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기고만장과 안하무인의 '바벨탑'을 높게 쌓을 때, 추락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라는 것이 이 땅 종교사의 교훈이다. 무당이 사라진 굿터를 다져서 사찰이 들어섰고, 폐사지에 향교와 서원이 세워졌다. 그리고 퇴락한 향교의 터에 성당과 교회가 들어섰다. 그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초창기 양말의 정신, 그러니까 사람의 발을 감싸던 신축성과 평등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즉 사람이 버선에 발을 맞추는 전도된 사태로 뒤집어지는 순간, 어떤 종교든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의 본래 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헤아려야 할 때다. 눈앞의 힘과 권력이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임은 '성경'에서도 누누이 경고하고 있지 않던가!

2011-09-01 배병삼

'스펙터클의 사회'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행사 중 하나인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해마다 내거는 주제 또한 세계에 던지는 파장이 크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 열린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문구였다. 나도 그 전시회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였지만, 이 주제를 접하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내가 아는 한, 서양건축사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그리스시대 이후에 사용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윤리는 우리 선조들의 덕목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늘 자연과 건축과 인간 간의 관계를 염려했으며, 집은 그 관계를 잇는 고리의 역할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집의 형태는 기와집 초가집 뿐이었지만 내외부의 공간은 주변의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근대화가 서양화인 줄 착각하게 되면서 이 아름다운 윤리의 방식을 추방하고 서양이 일러준 미학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데, 이제 서양은 윤리를 끄집어 내며 새 시대 새로운 화두로 삼는다고 하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건축사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전과 성당, 왕궁이나 별장, 경기장, 공연장 등 기념비적 건축물의 나열이며, 이들 건축에 대한 형태와 비례, 장식이나 재료 등에 관한 미학적 해설로 일관한다. 즉 한 건축물 자체만의 존재 방식과 그 역사가 서양건축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건축물이 스펙터클할수록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며 그 시대의 중요한 성취로 기술되는 게 당연시되었다.도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스펙터클한 건축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이들을 대각선의 각도로 이어서 가장 스펙터클한 광경을 확보한 곳에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자의 궁전을 두면, 이게 바로 봉건시대의 도시가 된다. 르네상스시대 전 유럽에 걸쳐 이상도시란 이름으로 유행처럼 지어진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으며, 베르사유를 필두로 한 바로크의 도시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현대의 신도시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중앙로가 있고 중앙공원 중앙광장 그리고 중심지구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대도시라면 이들 또한 봉건적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좌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스펙터클의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서양은 이제 그 스펙터클의 역사를 폐기하자며 윤리의 사회를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20세기 사회에 대한 절망으로 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기드보르는 그가 쓴 '스펙타클의 사회'란 책에서, 스펙터클은 종교적 환상의 물질적 재구성이라고 하며 우리 진실한 삶을 시각적으로 부정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게 받아들여졌을까? 문제는 우리의 사회다. 서양문명의 파편에 종속되어 윤리의 건축과 도시를 팽개친 지 오래지만,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추종은 이미 도를 넘었다. 특히 민선지방자치시대가 도래한 다음,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세우기에 혈안이 된 민선단체장들의 스펙터클한 풍경 만들기를 위해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곳곳에 랜드마크, 테마공원, 혁신도시, 기업도시, 무슨 프로젝트 등으로 도시의 풍경은 괴기하게 되었고 우리의 아름답던 산하와 마을들은 죄다 삽질과 분탕칠로 미증유의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달 어느 중앙 일간지에서 80년대 이후 조성된 건축물 중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 각각 다섯 장소에 대해 식견있는 건축가와 건축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통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나쁜 다섯 예로, 광화문광장, 청계천복원, 예술의 전당이 각각 상위에 선정되었다. 모두 역대 정권과 단체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스펙터클의 대표적 보기였다.기드보르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펙터클은 기만과 허위를 공통적 기반으로 서며,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이다. 그래서 서양은 이제, 그들이 만드는 도시와 건축의 목표는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고 했으며,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고 했고, 완성된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 만들기에만 올인하는 자체단체장들이 곱씹으며 들어야 할 말 아닌가.

2011-08-25 춘추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