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아름다운 청년 유지태

[경인일보=]김동호(부산영화제명예집행위원장), 이순재, 안성기, 최불암, 임권택 감독, 김덕수(사물놀이), 송승환, 성악가 김동규, 윤도현, 김제동, 강산에, 오지혜, 유지태, 하지원, 유승호 등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내가 경기공연영상위원회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그리고 경기도문화의전당 일을 할 때 여러 가지 부분에서 적극 참여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이렇게 문화예술계의 훌륭한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건 나의 인맥 덕이라며 나를 치켜세워 칭찬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이 분들 중 친분이 두터운 분도 있으나 일을 하면서 처음 만난 분도 계시며, 그런 분들에게 행사의 취지와 진정성을 보여주고 이해시키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을뿐더러 나 역시도 많은 발품을 팔아야했다. 그 중에 나를 지속적으로 감동시키는 한 후배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작년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준비하면서 파주상공회 조찬모임 후 직원들과 영화제 트레일러(영화제를 알리는 홍보영상) 연출을 논의하다가 유지태라는 이름이 나왔다. 아침 이른 시간이고 내가 아는 유지태는 항상 예의가 바르지만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일처리 또한 깔끔하고 정확한 친구여서 쉽게 수락하지 않을텐데 하는 맘으로 후배지만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바로 전화가 왔다. 영화제에 대해선 이미 사전 지식이 있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결론은 트레일러 감독 제안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다는 얘기였다. 사실 영화제트레일러는 주로 감독들이 연출해 왔고 적은 제작비이기에 스태프들마저도 의미를 갖고 봉사하다시피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인데 영화배우가 단편영화 연출경험이 있긴 하지만 적잖은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작업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작년 8월 파주 DMZ 부근 햇볕을 피할 수도 없는 폭염 속에 30명의 스태프와 연출에 열중하는 유지태를 보며 또 한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올해 들어 제3회 영화제를 준비하며 영화제를 장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집행부 조직을 보강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유지태와 정상진이라는 두 친구를 부집행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그런데 현재 조직규정에서는 두 사람에게 어떤 대우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말이 부집행위원장이지 사실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하는 자원봉사자인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본인 돈을 쓰면서 일을 한다. 매주 월요일이면 부천 사무실에 와서 영화제 주간회의에 참여하고 밥도 산다. 그것도 소고기로~. 거기다가 캐나다 토론토 출장은 당연히 이코노미석이다. 190㎝ 가까이 되는 키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날아가서 프로그래밍까지 하고 돌아왔다. 또 내가 시간이 안되면 개막장소 섭외하러 군부대도 쫓아간다.어제였다. 내가 좀 하는 일이 많아 종종 집에서 심야 회의를 하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위안부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셔서 양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밤 12시쯤 도착해 우리 집으로 오겠다는 거다. 너무 고마워 아끼는 와인을 큰 맘 먹고 꺼내 마시며 회의를 하는데 피곤한지 눈을 지그시 감고 얘기를 듣다가 입을 연다. "저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정말 훌륭한 영화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지속해 나가시면 세계적인 영화제가 될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이 너무 과분한 역할을 맡았다는 겸손까지(사실 그 부분에선 선배들에게 혼도 났다).지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유지태라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인해 더욱 뜨겁다. 그러나 사실 그 뜨거움의 원천은 나도 유지태도 아니란 걸 우리는 안다. 우리를 이렇게 열정으로 일하게 만든 건 우리가 원하는 현실이 지금의 현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그 안의 DMZ가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정신은 평화, 생명, 소통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 이념과 정치를 뛰어넘는 영화제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건강하고 젊은 영화제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다만 이 건강한 울림이 비단 영화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2011-05-19 조재현

랜드마크 콤플렉스

[경인일보=]서양에서 역사가 오래된 도시들의 원형을 추적하다 보면 거의 로마제국의 흔적, 특히 군단 주둔지를 발견하게 된다. 파리의 원도심인 시테섬, 런던 시가의 발상지인 시티, 비엔나의 빈도보나나, 프랑크푸르트의 뢰머광장 등이 다 그렇다. 이들은 레기오(Regio)라고 부른 로마 군단의 캠프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인데, 그 당시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으니 지방을 뜻하는 Region이라는 단어도 그래서 생겼다. 카스트라라고 부른 이 캠프는, 로마에서 오는 길을 연장시킨 카르도라는 길에 데쿠마누스라는 길을 직교시킨 후, 그 교차점에 포럼을 놓고 그 정면에 사령부, 그 주변에 인슐라라는 군막사를 설치하여 담장을 두르는 게 표준적 배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배치가 그대로 그 도시의 광장이 되고 시청사가 되었으며 완고한 성벽을 가지는 서양도시의 전형이 된다.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거주지를 중심에 놓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싼 방사형의 도시가 이상도시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유럽의 방방곡곡에 세워졌는데, 그 도면들을 보면 전부 기하학적 구성이어서 이를 손쉽게 건설하기 위해서는 또한 반드시 평지를 찾아야 했다. 운하를 뚫어 강물을 끌어낸 후 해자를 만들고 성벽을 쌓은 다음 주변과는 섬처럼 단절된 요새를 만들었으니, 이는 자연과 주변을 배척하는 도시였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신도시들은 그 기반을 여전히 평지에 둔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 기능적 용도를 설정하고 땅을 평면적으로 구분해야 하는 구조는 최고의 토지 효율을 목표로 삼은 까닭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평지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 평지의 도시가 다른 도시와 구별되는 시각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세우는 게 랜드마크라는 인공구조물이다.그러나 우리가 도시를 만드는 방법은 달랐다. 예를 들어,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질 때, 서울이 가지고 있는 산세와 물길 등 지형적 형상이 우선적 요소였으니 이미 서울은 아름다운 자연적 랜드마크를 가진 도시였다. 집들은 이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양지바른 땅 위에 작은 단위로 지어져서 이루는 집합적 아름다움이 서울에 짓는 건축의 아름다움이다. 서울만이 아니었다. 전국토의 70%가 산인 우리의 땅에 지은 지방의 마을들이 모두 그러했다. 평지는 쌀농사를 위한 경작지여야 했으므로 마을은 배산임수라는 전통적 조성방식을 좇아 산자락 아래 양지바른 곳을 찾아 만들어졌다. 그 배산임수 자체가 랜드마크였다. 지형과 물길이 다 다르듯, 지형을 따라 지은 우리의 마을들은 다 다른 랜드마크를 가졌으며 그것으로 독특한 마을의 이미지를 형성했던 것이다. 주변을 압도하듯 솟아오르는 인공적 랜드마크는 그런 배산임수의 땅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고, 자연을 경외해온 우리의 심리로도 금기시되고 불가능한 구축물이었다.그러나 지난 60, 70년대 이후 온 나라가 경제개발의 격랑에 휩싸여 근대화(Modernization)라는 말이 서양화(Westernization)와 동일한 말로 간주되었을 때, 개발의 광풍에 휩싸인 우리의 국토는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은 메우며 서양의 평지도시를 추종하여 개조되었다. 당연히 자연과 부조화하였고 주변과 부조화하였으며 우리의 삶과도 유리되어 끝내 우리의 도시는 갈등과 분쟁의 용광로가 되고 말았다.그러나 여기서 멈추질 않았다. 민선의 지방자치시대에 이르러 지방도시들은 가시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랜드마크 심기를 지금도 사생결단하듯 외친다. 심지어는, 우리의 산하풍경과 전혀 다른 사막 위에 세운 두바이까지 벤치마킹하며 세계 최고, 세계 최초 같은 선정적 구호를 내세워 우리 땅의 생리와 인문적 역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으니, 가히 랜드마크 콤플렉스에 걸린 것 아닌가. 한탕주의 같은 이런 천박한 개발이 끝난 후 우리가 빚은 이 부조화한 풍경을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필시, 우리의 산하와 고유한 풍경을 파괴한 반달리즘의 세대로 우리를 규정할까 두렵다.

2011-05-12 승효상

꽃은 피고, 지고

[경인일보=]지난 5월 초하루였다. 황사가 뒤섞인 빗발이 적시고 가는 4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소설가 김용성은 이승을 떠나 땅에 묻혔다. 세월의 격차가 있어 캠퍼스에서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나에게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선배셨다.그날 아침 조촐한 영결식장에서 그를 보내며, 이토록 추모의 절절함이 넘치는 영결식장에 앉았던 기억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약력이, 조사가 이어지는 내내 장내에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참 훌륭하게 사셨구나, 뒤늦게 깨닫듯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봄비 속에 그의 부음을 듣고 나서부터의 며칠, 선배를 보내면서 내내 생각했다. 가르침을 주셨던 은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더니… 이제는 드디어 가까웠던 선배의 영면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데까지 때가 왔는가 싶었다.한 작가의 영면을 맞아 그의 문학적 향기를 반추하며 그 가치를 되짚어 주는 기능이 점차 사라져가는 오늘의 언론풍토도 아쉬웠다. 줄기찬 산문정신으로 50여년 소설의 외길을 걸어온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생각보다 허술했기 때문이다. 연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 홍성원 선생을 그렇게 보냈듯이. 남은 우리가 기려야 할 것은, 한 작가가 그의 시대에 남겨 놓고 가는 가치와 의미 그리고 그가 맡아낸 사회적 역할이다. 한 작가가 해낸 문학적 성취나 사회적 역할과는 무관하게 '인기'에 따라 지나치다 싶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요즈음의 언론풍토, 그러나 그것 또한 품격의 의연함을 잃어만 가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던가.그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로 등단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한 청년의 이 화려한 데뷔는 실로 어린 소년에게 아름답기 그지없는 충격이었다. 그의 여러 역작 가운데는 '군대 조직 내의 비인간적인 폭력 구조를 통해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비판'했다는 평을 듣는 '리빠똥 장군'이 있다.그가 1970년대 초 '리빠똥 사장'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할 때였다. 세태를 풍자하면서 날카로운 현실비판과 풍자를 담았던 이 소설은 화제의 대상이 되었고 세간의 폭넓은 관심과 인기를 모았다. 그 무렵 전국의 이곳저곳에 리빠똥이라는 이름의 술집이 여기저기 생겨났던 사실이 그 소설의 화제성을 말해 주며, 작가 김용성의 현실인식을 보여준다.이 소설제목에서 따온 '리빠똥'이라는 상호를 단 가게들이 지금도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딱하게도, 그 가운데는 치킨집도 있다. 그런 간판 앞을 지날 때마다 리빠똥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리빠똥이란, 오직 잇속과 시류를 따라 똥파리처럼 날아다니는 인간군상을 가리키는 작가 김용성이 만들어낸 조어다.다른 면에서 작가 김용성의 산문이 가지는 힘과 취재력을 보여준 것은 '한국문학사탐방'이 아니었나 싶다. 작고 문인들을 자취를 찾아 답사하면서 살아서의 생생한 숨결을 전하고 소상한 자료를 통해 문학적 향기를 다시 음미할 수 있게 했던 이 르포물은 연구가나 일반인에게만이 아니라 특히 문학도들에게는 문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우는 지침이 되었었다.영결식을 마치고 남한강가의 서재로 돌아오니, 며칠 전까지도 하얗게 흐드러졌던 매화꽃은 지고 없었다. 흩뿌리고 간 눈발처럼 희디희게 꽃잎이 깔려 있는 뜰에서 매화는 또 새 잎을 틔우며 어느새 또 다른 봄을 만들고 있었다. 살아가는 일, 그 또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기다리지 않아도 그날은 온다. 약속하지 않아도 그날은 온다. 죽음이 갈라놓는 헤어짐은 자연이다. 발버둥치고 피하려 한다고 해도 자연은 그렇게 어긋남이 없다.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자연의 선은 곡선이라는 철학으로 일관했듯,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할, 우리는 다만 그 자연 속의 하나일 뿐이다. 올 때가 있으면 가야 할 때가 있는 그 자연의 순환을 잇는 하나의 고리일 뿐이다.꽃은 피고, 진다. 떠나보낸 김용성 선배가 어제 내린 봄비의 진실이 되어 나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떠나야 할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차가운 진실을. 그 자연의 엄격함을.

2011-05-05 한수산

원칙주의와 외교의 유연성

[경인일보=]중국의 삼국지에서 촉나라의 멸망은 형주의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형주는 삼국의 교차로 역할을 하면서 삼국의 중점, 중심의 역할을 하는 땅이었으며 촉에게 형주의 중요성은 제갈공명의 저 유명한 삼분천하(三分天下) 전략에도 나타난다. 제갈공명은 삼고초려로 자신을 모시러 온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주는 북으로 한(漢)과 강이 막고 있어 남해의 이익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장군께서 익주와 형주를 걸터 타고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지키고, 밖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고 안으로 정사에 힘을 쓰다,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상장에게 형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완성과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 몸소 익주의 군사를 모아 진천으로 나간다면 대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적벽대전의 수공으로 백하에서 조조군을 대파한 이후 유비는 형주에 본거지를 두고 익주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익주에서 군사 방통이 전사하는 등 고전하는 유비를 구원하러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의 장수들과 출병하자 관우 혼자 형주를 방비하게 되었다. 형주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특히 외교가 매우 중요한 방어수단이다. 삼국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던 당시 정세는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유연성이다.그러나 관우는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 영웅호걸이었으나 원칙주의자였다. 공명도 이점이 우려되어 서천으로 출병하기 전 관우에게 글귀를 하나 적어주고 갔는데 "북으로는 조조에 맞서고 동으로는 손권과 화친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손권의 혼사제의를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주겠느냐'며 사신으로 온 제갈근을 내쫓았다.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는데 관우의 번성 공격은 온전히 독자적인 군사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관우는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자 번성을 공격하였다. 번성공격의 실패는 부사인과 미방의 배반도 한 몫 하였는데 원래 관우는 부하 부사인과 미방을 선봉으로 삼아 번성공격을 계획하지만 부사인과 미방이 실수로 술을 마시다 불을 내어 군량과 마초가 모두 타 버리자 관우는 부사인과 미방을 불러내 혹독하게 처벌을 하며 후방에 남겨두었다. 관우의 원칙주의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관우가 보다 유연성을 갖고 대처하였으면, 삼국지는 아마 다시 쓰였을지도 모른다.중국과 미국 양국은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으로 이어지는 3단계 재개 프로세서를 갖는 것에 대한 합의를 보고 북한과 한국을 설득하여 6자회담을 재개하려 하고 있다. 현존 핵무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밟아 나가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10년 미국 핵권리장전'을 오바마 독트린으로 설정하고 있는 미국에게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은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과제이다. 국민소득을 4배로 올리고 보다 균등한 사회 건설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강사회(小康社會) 건설'을 2025년까지 완성한다는 국가적 목표와 이를 위해 야심차게 동북 4성을 개발하려 하는 중국에게 한반도 안정은 '소강사회 건설'의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다.이런 연유로 지난 1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G2 중미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오바마 대통령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한반도 긴장완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 회담에서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모종의 합의를 보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의 일환으로 중국은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은 한국을 설득하여, 즉 힐러리 국무장관의 방한을 통해 그리고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을 통해 3단계 재개 프로세서에 시동을 걸고 있다. 한국은 원칙적으로 북한이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죄하는 것을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에 3단계 프로세서는 첫 단계부터 난항을 예고하고 있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는 현실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삼국지 관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는 원칙을 고집하기보다는 유연하여야만 국익을 지키고 극대화 할 수 있다. 북한의 진정성은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이 되기보다는 남북대화를 통해서 검증하여야 할 것이다. 대화의 단절은 서로간의 더 큰 오해와 곡해 그리고 불신만을 낳을 것이며, 한국의 국익과도 상반되는 것이다.

2011-04-28 박후건

산동네 꼬마 특공대

[경인일보=]1960~70년대, 그 당시 서울은 배나무밭, 감나무밭이 대부분이었고 지금의 강남이 개발되기도 전이었으며 여의도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은 지금도 그렇지만 '종로구 성북동'이었다. 그 부촌은 바로 옆 혜화동과 동숭동 저지대까지 이어진다. 축대가 높은 대저택과 이층 양옥집들은 동숭동에 위치한 낙산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지고 산동네가 형성되면서 판잣집으로 연결된다. 난 그 산동네에 있는 꽤 괜찮은 판잣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민들의 주택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어서 남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흉도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다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여느 서울의 다른 판자촌과 달랐던 것은 어릴때부터 빈부의 차이를 확연히 보고 느끼며 커야만 했다는 것이다.초등학교 가기 전 놀이터가 없는 산동네 아이들은 오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산에서 논다. 그것은 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산에서 유격 훈련하는 꼬마특공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산동네를 내려오면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있고, 오후 3~4시가 되면 대학교 운동장이 한산해지는 것과 동시에 산동네 꼬마특공대는 길이 잘난 철조망 루트로 넘어가 대학교 운동장을 접수한다. 그러다 일몰시간이 다가오면 순찰 도는 경비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꼬마 특공대를 쫓아낸다. 그때 달려오는 경비아저씨는 혹시라도 아이들이 다칠까봐 "천천히 내려가! 조심해!"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이에게 그 소리는 자기를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호통 치는 고함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당시엔 왜 그리 경비아저씨의 호각소리와 제복이 무서웠을까?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나는 우리 특공대원들을 모아놓고 혜화동에 위치한 혜화유치원을 접수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그 유치원은 상위 5% 가정의 자녀들만 다녔을 때다. 담 너머로 살짝 보이는 아무도 없는 유치원 운동장의 놀이터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난 제일 먼저 담을 넘어 진입했다. 나머지 두명의 친구도 무사히 진입, 조용히 들어가 주위를 살피고 놀이시설을 조심스레 하나둘씩 타보며 맘껏 즐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 두 명이 잰걸음으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난 냅다 달려 담벼락에 일착으로 올라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다. 대학교 운동장 경비 아저씨와는 완전 달랐다. 결국 우리 세 명은 경비 아저씨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쥐어 박히며 혼쭐이 났다. 그런데 그 아저씨들은 얼마 전 유치원 담을 넘어와 물건을 훔쳐간 게 우리들이라며 완전히 도둑 취급을 했다. 더구나 차림새나 산동네 사는 거로 봐서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하는게 아닌가. 우린 단순히 놀고 싶어 유치원에 왔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한 친구가 급기야 울먹거리며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놀러오겠습니다…"라며 소리 내서 우는 바람에 나와 나머지 친구들마저 같이 울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그렇게 마무리 됐다.지금은 어디를 가도 놀이시설이 여유롭게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이런 일들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존재하고, 특히 부모의 잘못된 판단으로 버림받거나 내팽개쳐진 불행한 처지의 아이들 역시 많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여기저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개최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날이 오히려 가장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는 오는 30일부터 '키즈아트페스티벌'이라는 어린이 전문 예술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동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원화 전시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 교육과 체험행사 등 어린이 천국을 만들기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린이들을 배려한 무료프로그램도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특별히 형편이 어려운 상황 때문에 마음 다치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보고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 형편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 놀 수 있는 우리 사회가 빨리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11-04-21 조재현

마스터플랜의 망령

[경인일보=]1972년 7월 1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11층짜리 서른 세 동의 아파트가 들어선 주거단지를 폭파하여 철거시킨 일이 일어났다. 2차 대전 전쟁영웅의 이름을 따 '프루이트 이고'라고 부르며, 새 시대 새로운 주거를 목표로 1955년에 지은 이 단지는, 가장 좋은 삶터로 평가되어 여러 건축상까지 받았던 바 있었다. 그러나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천편일률적 공간이 갖는 무미건조함으로 인해 그 속의 공공공간이 무법지대로 변하면서, 이 주거단지는 도시에서 가장 절망스럽고 공포스러운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불과 1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범죄의 온상이 된 이곳을 주정부는 폭파로 청산한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건축가 찰스 젱크스는, 이날은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한 날이라고 기록하였다.모더니즘은 19세기 말, 시대적 가치를 상실하여 세기 말의 위기에 몰린 사회가 퇴폐와 향락에 이끌리며 문화가 퇴행하던 시절,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을 꿈꾼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찾은 시대정신이었다. 그들은 전통적 양식과 역사적 관습에 억눌린 인간의 이성을 회복시키고 합리적 가치를 최선으로 내세우며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좋은 제품의 대량공급을 목표하며 통계에 근거하여 찾은 표준화라는 방식은 그들의 유용한 수단이었고, 사물을 조직화하고 환경을 체계화하며 수요와 공급을 정량화하는 방식은 그들이 목표하는 사회의 구성원리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이 문제였다. 도시를 예로 들면, 땅을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등으로 칠해 상업지역 주거지역 공업지역으로 나눠서 차등하였고, 도로는 도로의 폭과 속도를 제한하며 서열화하고, 도심과 부도심 변두리로 전체를 나누며 계급적으로 만든 도시계획을 과학적 합리라고 신봉하였다. 심지어는 오래 살았던 동네마저 이 도시계획도를 들이대며 재개발하였으니, 이게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세계대전 직후 세계의 도시가 개발의 열망에 휩싸이면서, 이 마스터플랜은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져 전 세계 방방곡곡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표준적 평면을 가진 집단화된 아파트들, 통계에 의거한 공공시설의 획일적 배분, 빠른 통행만을 우기는 교통계획, 직선화된 길, 각종 주의 표식 등, 어느새 공동체는 사라지고 각 부분의 적절한 배분을 중요시하는 집합체만 남는 도시가 양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도시의 범죄는 전통적 도시에서보다 훨씬 증가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계층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갔다. 모두가 급조된 환경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그 프루이트 이고 주거단지가 폭파되어 사라진 것이다. 모더니즘이 20세기의 유일한 시대정신이라고 믿었던 건축가와 도시학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마스터플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사건이었다.모더니즘과 마스터플랜이 간과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가치였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파악하고자 했으며 개체의 다양성을 묵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땅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장소성을 무시하였고, 그 역사적 맥락과 자연적 환경을 외면했던 것이다.문제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하루의 계획을 조리 있게 짠다고 해도 수시로 마음이 바뀔 수 있으며, 선과 악을 머리 속에 아무리 구별해도 우리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그 혼돈의 와중에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모든 땅은 얼마나 다 다른가. 기후가 다르고 지형이 다르며, 생태와 주변이 부분마다 다르고 무엇보다 살아온 역사가 다 다르다. 그 다 다른 땅을 똑같은 도형과 무늬로 뒤덮으며 한 가지 삶을 강요한 그 마스터플랜의 방법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했다. 어쩌면, 기후변화나 사회의 갈등과 분쟁 등,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재앙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사회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은 마스터플랜의 망령으로 인한 결과 아닌가.바야흐로 서양에서는 이제,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의 삶을 존중하며 오히려 비움을 그리고, 자연과 화해하는 나눔을 그리는데, 우리의 이 땅에서는 이미 폐기된 마스터플랜의 망령에 사로잡혀, 비움과 나눔이 가득했던 우리의 정겨운 옛 도시와 아름다운 산하를 유효기간이 훨씬 지난 표준도면으로 여전히 난도질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프루이트 이고'의 폭파가 떠오른다.

2011-04-14 승효상

일본침몰인가, 모더니즘의 침몰인가

[경인일보=]일흔이 가까운 일본인 친구는 그날 신주쿠의 고층빌딩에서 지진을 만났다고 했다.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서버리는 바람에 친구는 45층을 걸어서 내려와야 했고, 교통편이 사라진 암흑의 거리를 다시 4시간 동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책꽂이가 모두 넘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된 집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나는 더 묻지 못했다.9·11테러에 빗대어 일본인 스스로 '3·11 쇼크'라고 하는 일본 동북부의 대재앙으로부터 한 달여, 그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많은 겸허함을 가르쳤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했던가. 그러나 일본인이 겪어내고 있는 참담함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느껴야 했던 것은 다만 절망과 무력감만은 아니었다.그 가운데 하나가, 재해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인류의 진화'를 말하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영국의 한 일간지는 제목으로 '간바레 니폰(힘내라 일본)'을 뽑으며 일본을 격려하는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대혼란 속에서 폭동도 약탈도 없이 보여준 일본인의 자제력과 침착한 대응은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모습들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어떤 가치와 유형을 보여주는 감동으로 세계 속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지난 세기 인류가 한결같이 추구했던 가치는 모더니즘의 가치들이었다. 19세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문명과 보편성(유니버셜리티)을 인류가 공유하자면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능률의 극대화를 미덕으로 펄럭이며 도시화, 기계화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이룩해 냈다. 물질을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생활의 편의와 그것을 통한 행복에의 추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의 근대화도 다르지 않았다. 서구화가 바로 현대화라는 물결 속에서 지역문화나 고유문화는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즘의 가치와 미덕 속에서 흙벽의 초가집은 척결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삶과 도식은 비판과 심문의 대상이 되었고 현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조금 더 우회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상정하고 있던 여러 발전모델 가운데는 '일본처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미 일본이 하지 않았는가. 일본이 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전제를 깔고 우리는 얼마나 일본의 발전모델들을 따라잡기에 허둥댔던가.그러나 지금 일본의 대재앙은 모더니즘이 지향해온 모든 가치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통렬하게 성찰의 말을 건네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었다고 믿었던 일본의 초라한 실상도 있다.잘못하다간 일본이 침몰해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본인들 자신에게서 나오고 있다. 국가를 이끌어갈 주체적인 동력을 잃은 정치권에 대한 탄식만이 아니다. 너무나도 재건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하니 무엇을 하건 움직여야 한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보인다. 심지어 소비를 부추기면서 외식도 좋고 충동구매도 좋다. '차라리 사재기라도 하자'고 외치는 신문칼럼마저 보인다.그 가운데는 동물원 공짜관람도 있다. 그 동안 문을 닫고 있던 우에노 동물원을 비롯한 네 개 동물원이 4월 1일부터 다시 문을 열면서 '지진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무료입장을 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것도 10일까지 열흘 동안만 무료입장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나 지진피해자요' 하면서 동물원에 들어와 공짜로 호랑이 구경이라도 하라는 말인데, 저 대재앙 속에서 이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석탄이나 기름 같이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그 대체수단으로 부상한 것이 원자력이다. 그러나 원전이 안전성에 있어서 결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자성을 일깨우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는 '삼척핵발전소백지화'와 같은 원전 유치를 둘러싼 갈등이 일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탄을 개발하며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원자탄은 평화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이웃의 불행에서 찾아야 하는 교훈들은 더 가슴 아프다. 그러나 반면교사로서, 일본의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쓰나미처럼 많다.

2011-04-07 한수산

일본대지진과 북한 핵개발

[경인일보=]지난 3월 11일 오후 2시경 일본 동북부지역에서 일어난 강도 9의 대지진은 바로 이웃인 우리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어 이어진 원전폭발로 인해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돼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저부(底部)가 녹아버리는 멜트다운(meltdown)과 방사능 누출 위험은 원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이러한 사고는 안전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한다는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강도 9와 같은 사상 초유의 지진에 과연 안전할 원전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자아내지만, 후쿠시마 원전 1호기 폭발 뒤 미국의 기술지원 제안을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이 거부했다는 것과 폭발 직후 프랑스의 붕산 제공 의사에 답변이 없던 일본 정부가 사고 발생 나흘이 지나서야 한국과 프랑스 정부에 붕산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정부의 잘못된 판단과 자세 그리고 초기대응의 실패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키웠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이것을 리더십의 부재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안전에 대한 준비는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만심이 초기대응의 실패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대지진 그리고 원전 폭발에 대해 세계 각국 특히, 전통적으로 일본과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에서도 도움의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인류애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총 전기생산량의 약 40%를 원자력 발전에서 얻고 있어 남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이번 지진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인 여론이 일고 있지만 석유고갈시대에 아직 그 어느 나라도 확실한 대체에너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원자력발전에 대한 수요는 잠시 주춤하겠지만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자력발전의 안전은 이번 지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전을 가동하는 한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난번 구소련의 체로노빌 사태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주변국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이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국제적 협의와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필수적이다.이것은 북한과 같은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단지 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북한이 원전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전력 이외에 원자력 발전에서 부산물로 얻을 수 있는 핵 물질을 무기화해 미국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협상카드로 사용하려는 것과, 원자력 발전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이 북한에 다량으로 매장돼 있어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을 겪고 있는 북한이 이를 전력 발전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04년 5월 23일자 기사에서 백악관 트렌트 두피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북한에 고품질 우라늄 400만t이 매장돼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세계 총 매장량에 육박하는 양이다.문제는 북한이 수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고립적인 상황에서 이를 추진하는데 있다. 북한이 한국과 그리고 국제사회와 지금처럼 협의나 협력 없이 원전 건설을 추진한다면 북한의 원전은 이번 일본 동북부에서 일어난 지진과 같은 자연 대재앙에 취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지난 1985년의 체르노빌 사태를 초래한 인재의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또한 남과 북이 지금과 같은 냉전과 불안전하고 위험한 정전체제가 지속되고 악화된다면 핵을 무기화 단계로 가고 있는 북한과의 핵전쟁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일본 동북부 대지진 이후 북한은 백두산 화산에 관한 공동조사를 한국 측에 제안했다. 우리 정부는 일단 민간차원의 공동조사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발표했고 29일 첫 모임을 가졌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우려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 그리고 주변국 모두의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 역시 마찬가지이며 정치적인 사항으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6자회담이 재개돼야 하며, 6자회담이 열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개선이 필수다. 한국은 북한 원자력개발의 방관자가 아니라 중요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번 백두산 화산에 관한 공동조사가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되어 남북정상이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1-03-31 박후건

배우 이순재 '그대를 사랑합니다!'

[경인일보=]지난 설날 전이었다. 이순재 선생님께서 주연한 강풀 만화 원작 '그대를 사랑합니다' 시사회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원작 만화도 봤고 연극으로 공연된 것도 봤고, 어쩜 솔직한 심정은 존경하는 이순재 선생님 주연 영화이기에 꼭 가서 봐야겠다는 의무감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원작과 상관없이 너무 쉽게 영화에 빠져버렸다. 여느 시사회도 이런 광경은 흔치 않았던 것 같은데 많은 관계자 및 영화인들이 보는 시사회에 이토록 많이 웃고 많이 흐느끼는 객석 반응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마침 영화투자 배급사 대표를 만났다. 대표는 본인도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3번이나 시사회를 보고 또 웃고 울었음에도 흥행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이유인즉 제작비도 평균 영화 제작비의 반정도(10억원)이기에 홍보 마케팅비를 여타 상업영화만큼 집행하기도 힘들고, 잘 나가는 젊은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엇보다 노인영화라 알고 있어 주관객층이 10~20대(젊은 관객)인 영화시장에서의 승부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사회장을 나오는데 이순재 선생님이 계신다. "영화 너무 좋아요. 선생님 앞으로 멜로 계속 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하고 포옹을 했다.영화 속의 이순재 선생님은 어떤 젊은 멜로배우 못지않게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이 관객들로 하여금 70이 훨씬 넘은 나이를 모두가 잊고 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배우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송재호 선생님도, 윤소정 선생님도, 김수미 선생님도…. 영화는 개봉했고 첫 주 스코어는 전체 영화 6위로 출발했다. '아!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둘째 주는 여지없이 10위로 밀려나 버렸고 이 상태라면 보통 그 다음 주엔 영화를 보고 싶어도 상영관이 없어 못보는 상황이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주째 4위로 올라서고 지금은 한국영화 1위를 기록하면서 관객은 이미 100만을 넘어섰다. 노인영화인줄 알았는데 사랑 영화, 그것도 유쾌하고 감동적인 사랑 영화라는 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는 평일 낮 시간에는 다른 영화에 비해 2배 가까운 관객이 몰려들고 있단다. 우리는 고령화시대에 살고 있고, 지금 나를 비롯한 중장년은 10~20년 후에 노년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노인세대는 정보와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40~50대 장년층은 그렇지 않다. 물론 여전히 힘든 직장생활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역할을 하기도 벅찬 것이 대한민국 대다수 가장들의 현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문화를 찾지 않으면 고령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당사자들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문화적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영화의 관객추이를 보며 '그래도 이제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시 한번 이 영화에 열연한 노배우들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출연진 중 가장 연세가 많은 이순재 선생님을 통해 느끼는 게 많다. 현존하는 배우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최고령 선배님임에도 불구하고 밤샘 촬영에도 전혀 피곤함을 내색하지 않으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과 후학들을 위한 대학 강의도 나가시고, 지역 주민을 위한 봉사 또한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 거기엔 당신이 타고난 튼튼한 체력만이 이유가 아니란 것을 우리 후배들은 다 안다. 지금도 암기력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미국 역대 대통령이름과 우리 역대 왕 이름을 거꾸로 반복해서 암기하며 지속적으로 노력하신다고 한다. 이런 고령화시대에 생각과 마음이 젊은이보다 더 젊은 이순재라는 훌륭한 배우가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거기에 노인들만의 영화가 흥행까지 한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양한 영화들, 노인 중장년층을 위한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일단 빨간불은 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부모님께 전화 한통 해야겠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안보셨으면 꼭 가서 보시라고…. 그리고 쑥스럽지만 지금까지 건강하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라고 꼭 말씀 드려야겠다.

2011-03-24 조재현

일본이여 울지 말라

[경인일보=]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는 그 당시 거의 완벽한 도시였다. 이미 7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시행한 대규모 도시 재개발로 인해 로마에 인접한 최고의 휴양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주변의 땅은 기름져서 풍부한 농작물을 생산하고 있었고, 항구에 접한 까닭에 물자의 보급이 손쉬웠으며, 계곡 속에 우뚝 솟아 외적의 침범에도 자유로운 지형조건을 충족한 도시였다. 이만 명의 인구는 도시로서 모든 요소와 조직을 갖추기에 적절한 크기였다. 포럼의 주변에는 장엄한 신전들과 공회당들이 적절한 간격으로 들어서 도시의 위엄을 과시하였고, 여기서 뻗은 도로들은 완벽하게 도시의 모든 곳을 소통시켜 주고 있었다. 곡선으로 휘어져 후미진 거리에는 어김없이 목로주점이 있었고, 그 건너편 골목 안의 집은 하룻밤 정을 나누는 거리의 여인들이 사는 집이었다. 계곡과 이웃해서는 완벽한 형태의 노천극장에서 매일 희극이 상연되었고, 언덕너머의 경마장에서는 늘 함성이 들렸다. 놀랍게도, 도시에는 수백 명을 동시에 목욕시킬 수 있는 대중탕이 네 개나 있었다. 물은 공중의 수도관로를 통해 인근의 수원지에서 풍족히 공급받았으며, 이의 관리는 고위직의 공무원이 맡을 정도로 목욕은 시민들에게 중요한 도시 일상이었다.로마에서 휴양차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도시는 늘 분주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재미와 활력, 모험과 스릴이 넘쳤다. 그야말로 교역의 요충지였고 역사문화도시였으며, 휴양과 위락의 도시였다. 자연히 문화와 예술이 만발하고, 자유와 평화가 도시에 넘쳐났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베수비오산은 마치 이 모든 번영을 영원히 지켜줄 듯 우뚝 솟아있었으니, 폼페이 시민들은 이 늠름한 산에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믿었던 산이, 그러나 한순간에 폭발하여 모든 것을 앗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불의 신을 위한 축제를 즐긴 다음날 베수비오 화산은 불덩이를 폭발해 내었다. 이백오십 도나 되는 열기가 도시를 휘감았고, 화산재는 이십오 미터 두께로 도시 전역을 덮었다. 더러는 목욕 중 발가벗은 채로, 더러는 술집과 거리에서, 더러는 공연장에서, 혹은 신전에서, 일상을 평화롭게 보내던 모든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순간을 그대로 영원히 멈추게 하고 만 것이었다.나는 십 수년 전, 이 폐허의 도시를 가서 답사하며 그 원형을 상상하고 나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내가 믿는 이상적 도시의 모든 요소가 이미 이천 년 전의 이 도시에 다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도시였다. 선과 악, 행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 도시였고, 빈자와 부자, 낮은 자와 높은 자 등 신분과 계급이 공존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도시였다. 공공은 철저히 도시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했고, 기반시설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기에 완벽했다.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정도로 인간의 자존적 지위를 과시하는 도시였을 수 있다. 그래서 멸망했을까? 결국은 자연이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일본이 당하는 비극을 보며 이 폼페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폼페이가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참상일지도 모른다. 한 도시가 아니라 여러 도시이며, 이만 명의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데도, 땅으로부터 바다로부터 하늘로부터 비롯된 미증유의 참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세계에서 가장 진보했으며, 놀라운 자율국가 일본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자연은 인간이 만든 사회나 문명보다 더 큰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숱한 자연의 혹독함 앞에서 겸손을 배우며 우리가 늘 진보해온 것도 사실이다. 역사 속 우리의 삶터가 수없이 자연의 힘에 짓이겨졌어도, 우리의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꺾지 못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인류는 늘 진보하였고, 멸망된 폼페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도시들을 세우며 결국 우리의 지경을 넓혀왔다. 그게 우리 인간만이 갖는 존엄이었다. 일본의 이 엄청난 비극에도 우리 인류의 아름다운 삶이 지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하며 우리의 존엄을 더욱 빛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일본이여 울지 말라. 인간의 존엄으로 딛고 일어서, 역사 속에 빛으로 오라.

2011-03-17 승효상

그래도, 봄은 온다

[경인일보=]이제 몇 번의 봄비가 내리고 나면 이 겨울도 사라져갈 것이다. 눈 많았던 겨울,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지난해 11월말 안동 돼지농가의 구제역 의심신고 이후 삼백 몇 십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살처분되는 상처를 남기고 이 구제역의 겨울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겨울이 사라진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구제역의 여파는 침출수 오염 같은 우려를 미완의 숙제로 남겨놓고 있다.가축 삼백 몇 십만 마리를 경부고속도로에 늘어세우면 그 길이가 얼마나 될까. 나로서는 도대체 가늠이 안 되는 숫자의 가축이 죽어나갔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많은 소 돼지가 죽어야 했던가, 아직 아래아 한글에서 표준어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살처분'이라는 용어를 '죽여 없애다'로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이렇다. 구제역 의심 신고가 접수되자 발생농가 반경 3㎞ 이내에 있는 가축을 양성판정을 받기도 전에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땅에 파묻는 방식으로 미리 죽여 나갔다. 이러한 싹쓸이가 문제가 되자 이번에는 반경 500m 이내의 가축만 죽여 없애는 것으로 완화했다가, 지난해 12월25일부터 발생 농가의 가축만 죽여 없애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 석 달 동안 340여만 마리의 멀쩡한 가축을 병에 걸릴까 봐, 병에 걸리기도 전에 땅에 묻었다. 이러다 보니 남한강 지류의 매몰지에서 돼지 사체와 함께 침출수가 흘러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참혹한 살처분의 공포와 절망만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우리는 가축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침출수로 인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구제역을 겪으며 가슴 아팠던 것에는 또 다른 절망이 있다. 어떻게 이 나라는 이다지도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가 하는 놀라움이었다. 우리가 치러야 했던 구제역파동은 오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거나 숨기고 있는 모든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 재앙이 아니었나 싶다.'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돼지 핏물이 나왔다'는 따위의 사이버공간에서 나돈 구제역 사태 관련 유언비어의 작태는 이 절망의 하이라이트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 만이 아니다. 기르던 가축을 살처분해야 했던 농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 한다는 마음은 찾을 길이 없이, 사료값이나 겨울철 난방비 걱정 없이 한꺼번에 죽이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서 농민들이 살처분에 기꺼이 응했다거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위해 정부가 고의로 구제역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말까지 우리사회에 떠돌았기에 하는 말이다.내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의 '개군'이라는 지명은 어딘가 좀 이상한가 보다. 이 주소를 말할 때면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를 못해서 '강아지라는 개, 군대라는 군입니다'해야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남한강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산수유와 한우의 고장이다. 봄이면 산수유가 피어나면서 마을과 마을이 샛노랗게 띠로 얽힌다. 산수유와 함께 개군의 특산물이 팔당상수원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인 이곳에서 자란 한우다. 특산물 한우를 상징하듯 면 입구 도로에는 누런 플라스틱 소가 서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봄이면 산수유 꽃이 노랗게 흐드러진 속에 한우 굽는 냄새를 풍기며 봄축제가 열렸다.이 봄, 구제역의 재앙을 만난 개군에서 개군한우와 산수유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감감하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서 절망과 희망을 함께 만난다. 마을의 한 해장국집이 '구제역 발생으로 인하여'라면서 발 빠르게 음식값을 1천원이나 올렸다. 야속하지만, 내 음식값 내가 올린다는 주인에게 할 말이 없다. 그런 속에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현수막 하나가 나붙었다. '구제역 극복! 양평군민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이 현수막은 인근 제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들이 양평의 한우단지 개군 입구에 내건 현수막이다. 이 현수막에는 우리가 있다. '나'만 있지 않고 '우리'가 있다. 그렇기에 이 현수막은 희망이 되고 믿음이 된다.모든 개념에는 안팎이, 긍정과 부정이 있다. 지난 겨울, 자신이 기르던 가축이기에 그 가축을 죽일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그와 함께 우리에게는 가축을 살려내야 할 의무도 있었다. 가축을 기를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면 그들을 빛나는 생명으로 존중해야 할 의무도 인간에게는 있다.

2011-03-10 한수산

복지논쟁과 합의 민주주의

[경인일보=]요즘 정치권에서는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야권에서는 국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무상복지를, 그리고 여권에서는 필요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선별적 복지정책이 현 한국 현실에 맞는 복지 정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작 복지 논쟁에 불을 붙였던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형 복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전 의원은 민주당의 무상복지를 선거용 캐치프레이즈로, 박근혜 의원의 한국형 복지를 포장만 있고 내용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한나라당은 복지정책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며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누구의 정책이 옳건 간에 복지가 한국정치의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1997년 이른바 IMF사태라는 외환위기때부터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급속하게 이뤄졌다. 양극화 문제가 가속화되는 주된 요인들 중에는 비정규직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한국 전체 노동자의 약 50%인 830만명 정도이며 이들은 정규직의 47%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는데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또한 한국은 OECD 국가 중 저임금계층이 가장 많고 임금불평등도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저임금계층은 452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6.5%이고, 상위 10%와 하위 10% 임금격차는 무려 5.25배나 된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며 여기에 대한 건설적인 논쟁은 장려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에서 벌이고 있는 복지논쟁은 복지가 담고 있는 목적을 벗어나고 있다. 원래 복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적 혜택을 사회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줌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의식을 강화하고 진정한 공동체로서 거듭나기 위해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지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이 사회성원이면 기본적으로 부여받는 개인적 권리 차원에서의 복지와, 사회성원 그 누구도 사회에서 배제시키지 않고 평등하게 고려해 공동운명체로서 갈 수 있는 토대를 유지하겠다는 사회적 차원의 복지이다. 개인에 대한 고려와 사회에 대한 고려라는 복지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마치 사회라는 거대한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두 개의 기둥과 같고 음과 양 같은 유기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 특히,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처럼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정책은 복지의 이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복지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 경제발전을 어느 정도 이룬 후가 아니라 경제개발과 동시에 이들 국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이념적으로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각 정당들이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합의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통합을 견고히 하는 방향에서 복지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모든 후생을 보장하는 과잉복지는 국민들로 하여금 복지병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승리자와 패배자가 엄격하게 나누어지는 시장경제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패배자의 대열에 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당당한 사회성원으로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건전한 복지정책은 시장경제를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사회통합을 통한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데도 필요불가결하다. 복지논쟁이 마치 선거에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달성하겠다는 목적과 다른 정당 또는 다른 대권후보와 차별성을 갖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면 사회통합이라는 복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망각하는 것이다. 정치권은 복지를 당리당략의 도구가 아닌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정신아래 합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지는 그야말로 백년대계이며 국가발전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며 척도이기 때문이다.

2011-03-03 박후건

야식 배달부 '김승일'

[경인일보=]요즘 TV 오락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감동과 휴먼은 기본이고 시청자가 직접 참여해 기적과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하고 있는 추세다. 예를 들어 지난해 케이블 사상 엄청난 시청률을 올린 '슈퍼스타 K'의 경우, 전국에 노래 잘하는 아마추어 가수지망생 수만 명을 제치고 '허각'이라는 환풍기 수리공이 최종 1인이 됐다. 이 소식에 시청자들과 네티즌은 열광했고 평범한 서민도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걸 현실로 보여줬다.그런데 최근 늦게 귀가해보니 아내가 TV를 보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가 들여다 봤더니 '스타킹'이란 프로그램에 등장한 야식배달부 김승일씨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 유명대학 성악과에 들어갈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병간호 등으로 대학을 휴학하고, 10년간 대학 동기들과 연락이 두절된 채 야식배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석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현재 그의 대학 동기들은 국·공립단체 합창단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승일씨가 대학 동기들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에 아내는 물론 나역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며칠 동안 내 머리에는 '야식배달부 김승일'이란 사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대신 허각 이란 친구처럼 감동적인 희망의 스토리로만 내 맘에 남은 게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그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상처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함께 든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야식배달부 김승일'이란 이름이 포털 사이트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고 있었고, 온 네티즌들의 환호와 지지의 글이 도배를 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김승일이라는 친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풀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회성 방송과 시청자들의 순간적인 관심이 사라질 때, 그에게는 뜻하지 않은 상처로 남을 수도 있고, 나중에는 이 프로그램에 나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부정적인 생각마저 들게 됐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타킹 담당 PD에게 용기를 내 전화를 걸었다. 담당PD는 구수한 사투리에 아주 친근한 느낌이었고, 서로 안면도 없는 첫 통화치고는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다. 담당PD 본인도 스타킹의 진행자 강호동씨와 소주를 마시며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배웠고,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노라 이야기했었다고 했다.며칠 후 나는 김승일씨와 담당PD를 만나러 방송국으로 갔다. 내가 그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방송과 대중의 속성을 좀 아는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본 김씨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도 있지만 건강함이 있었다. 그의 꽉 다문 입에선 굳은 의지가 보였고, 그의 눈에선 슬픔을 이겨낸 희망의 빛이 보였다. 그는 100일의 연습을 통해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TV 화면에 나타나 우리에게 또 한번의 감동을 선물할 것이다. 스타킹의 역할은 사실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런데 우연일까? 나는 현재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초·중·고교를 다녔고 야식배달도 수원에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100일 후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내 생애 첫번째 공연'이란 제목으로 김씨를 위한 생애 첫 번째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난 그가 파바로티처럼 늦은 나이에 성악을 시작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엄마를 일찍 여읜 한 청년의 맘에 따뜻한 희망과 용기만이라도 생기길 간절히 바란다. 김씨는 지금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번 레슨을 받고, 나머지 날에는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연습을 한다. 그를 계속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느릿하게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그의 얼굴과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제가 대학 다니면서 휴학 전까지 연습무대도 한번 못 서봤습니다…."그의 생애 첫무대가 열리는 날 난 객석에 앉아 있을 것이고, 이사장이 아닌 관객으로서 그의 앞날에 희망과 용기가 함께 하길 기도하며 또 많이 울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눈시울은 붉어진다.

2011-02-24 조재현

공공디자인 시비

[경인일보=]공공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인 지도 꽤 되어 이제는 아무도 이 단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단어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더욱이 이 단어를 영어로까지 번역하여 'Public Design'이라고 쓰는 것도 봤지만, 그 뜻을 알기 위해 위키피디어를 찾았을 때 '당신이 그 뜻을 만드시오'라고 나왔으니, 이는 영어에도 없는 단어인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도 공공디자인학과라는 것을 설립하고 이를 연합한 학회도 만들어 학문적 정당성까지 부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참으로 의문스럽다. 도대체 이 단어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공공이 디자인한다는 말인가, 혹은 공공을 디자인한다는 말인가? 급기야, 중앙정부를 비롯해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공공디자인' 사업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으니, 단어 사용의 오류로 인한 잘못된 사업의 피해를 고스란히 시민이 떠안는다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서울을 비롯한 지방도시들이 공공디자인을 한답시고 위원회도 만들면서 하는 일은 대개 도로 환경을 예쁘게 꾸미는 일이다. 도로 포장을 바꾸고, 가로등과 버스정류장, 거리간판 등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꾸거나 혹은 예쁜 공공건축물을 세워 시민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증대시키는 게 그 주된 내용이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도시환경을 바꾸는 것이 괄목할 업적이 된다고 여긴 것일 게다. 만약 이런 일이 목적이라면, '공공디자인'이란 단어는 '공공시설물디자인'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단어의 뜻과 사업내용이 일치되고 분명하다.그러나 문제는 정작 여기에 있다. 그런 시각적 세련됨으로는, 도시가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인 공공성을 조금도 진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흔해 빠진 나머지 그저 분칠하거나 립스틱 칠하는 정도, 혹은 잘 봐주어 세련된 시설물을 갖다 놓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가 행복해질까? 나는 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아마도 애초에 공공디자인을 도입한 까닭이 도시를 보다 풍요로운 환경으로 만들어보기 위함일 게다. 그렇다면, 지엽말단적인 공공시설물디자인이 아니라 '공공영역'에 대한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도시는, 농촌과 달리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익을 찾기 위해 모여 만든 사회이다.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농촌사회는 천륜이나 인륜으로 그 공동체를 지속시키겠지만, 익명성을 특징한 도시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 규율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법이 필요하다. 이 규율과 법을 도시 속에서 공간적으로 구체화한 게 바로 도시의 공공영역이다. 도로나 광장이나 공원 혹은 비어있는 공간 등, 사유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공공적 영역에서 우리는 글로 된 법조문을 들고 있지 않아도 그 공간의 구성원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소위 선진도시란, 이 공공영역이 고도의 세련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공공영역과 함께 조직되고 연결되어 있는 도시이며, 후진도시로 갈수록 그 연결이 파편적이어서 시민의 공적인 삶이 보장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산책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가 원할 때까지 끊임없이 산책할 수 있는 안전한 보도나 풍부한 녹지의 연결로 그 소박한 일상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문화활동을 즐기고자 하면 아주 쉽게 원하는 문화시설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며, 이웃과 모임을 가지고자 하면 언제든지 그들이 안정되게 모일 수 있는 공공의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선진도시라는 것이다. 이들의 공간적 흐름이 끊겨지지 않도록 구축하고 조정하는 일이 도시디자인이고 소위 공공디자인이어야 한다. 벤치나 가로등 택시정류장 등의 색채나 모양 글자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며, 언제든지 옮기거나 제거할 수 있는 이런 유의 시설로는, 우리 삶의 지속을 목표로 하는 공공의 안녕과 복지를 결단코 담보할 수 없다. 눈에 어른거리는 부질없는 게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케 하는 내면적 고양이 디자인의 바른 목표인 것이다.

2011-02-17 승효상

야노 히데키,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

[경인일보=]지난 연말, 조촐하지만 뜻 깊은 시상식이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이나 화환이 넘치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시상식장은 내내 진지했고 화기애애했다. '제4회 임종국상' 시상식이었다.수상자들의 모습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술부문 수상자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준영 씨였다. 일본이 이미 청산한 '식민지 법'을 한국은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통렬한 자성을 담아 묵묵히 일제 식민지 사법제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온 문 교수의 결실을 참석자들은 박수로 축하했다. 다만 사회부문 수상자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의 모습이 조금은 이채로웠다.'임종국상'이란 민족문제연구소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친일청산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친일청산에 공로가 깊은 분들에게 주는 상을 일본인이 받고 있다니. 그는 공식 직함이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이었다.그러나 그가 몸 바쳐 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자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아니었다. 15년이 넘게 그는 한일 과거사의 올곧은 정립을 위해 온 몸을 던져온 일본인이었다. 여러 과거사 문제를 위한 모금운동이나 변론 지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피해와 참상을 알리고 그 반성의 길을 열기 위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우익으로부터 '반일 인물'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짧은 머리에 단정한 몸매를 한 수상식장의 그는 투사로서의 이미지와는 먼 한 사람의 예의바른 일본인이었다.지난 여름이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의 '한일병합 100년과 관련한 담화'를 들은 것은 일본 후쿠오카에서였다.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피폭자 추모모임과 청소년 교류회를 마치고 다음 강연지로 향하는 나에게 한 젊은 일본 언론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오늘 발표된 총리의 담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강제병합 100년을 이야기해야 할 일본총리가 문화재 한 두 점의 반환을 언급한 담화는 과거사 문제 해결이라는 본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름대로 한일과거사에 관심을 기울여왔던 나로서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랬다. 국치 100년, 강제병합 100년을 맞으며 일본이 '선언적 의미의 반성'이라도 하기를 바랐던 원망(願望)을 뒤로 한 채 일본은 그렇게 2010이라는 중요한 매듭을 아무 매듭도 짓지 못한 채 보냈다.일본의 전후 처리는, 처음 대두되었던 천황의 전쟁책임을 군부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고 이것을 다시 전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억총참회'로 호도하면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 일본이 근자에 와서는 원폭투하에 대하여 미국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성은커녕, 전쟁 중에 '그때 왜 자신들에게 그런 폭탄을 썼는냐'고 사과를 받아내자는 발상, 이것이 일본이다. 그러나 한일과거사에도 작은 진전은 이루어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이 그 하나다. 이 책은 지난 연말로 3천850질이 팔려나가면서 3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가지는 역사와 정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뜨겁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4천389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가 기록된 이 사전의 편찬에는 국민들이 모아 준 성금도 7억원이나 들어 있었다. 인명사전에 조상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에 참여하고 도움을 주는 후손들도 많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진다.임종국상 시상식장에서 내가 느꼈던 감회의 바닥도 거기에 있었다. 강제병합 100년을 보내면서 이제 우리는 당당히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노 씨에게 친일청산에 앞장 서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상을 수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노 씨는 수상과 함께 받은 상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의 다른 시민단체에 그 상금을 희사하면서 아름다운 씨를 뿌렸다. 성숙된 한일관계가 첫걸음을 내딛는 향기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작은 향기와 씨앗들이 모여서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2011-02-10 한수산

중미 정상회담과 한미동맹 외줄타기

[경인일보=]지난 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중미 정상회담은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진정한 G2 국가로 거듭나는 것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1990년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은 유일한 슈퍼파워였으나,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와 현재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먼저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대국이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이며 연간 10%가 넘는 경제성장을 하고 있어 조만간 미국을 뛰어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있다. 둘째 소련과 미국은 서로간의 교류와 대화를 극소화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냉전을 치렀지만, 현재 중국과 미국은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용어에서 나타났듯이 경제적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중국과 미국은 서로 최대교역국 중 하나이며 중국은 미국 부채의 약 10.5%를 보유하고 있어 미국국채 최대 보유국이기도 하다. 셋째 소련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부유럽에서 다수의 위성국가를 갖고 있어 불안정한 블록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은 전 세계 인구의 4분의1을 갖고 있으면서 문화적으로는 수천 년 동안의 통일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양분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나눈 대화와 협상 그리고 공동성명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것들을 제대로 해석하는데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양 정상들이 나눈 북한 관련 안건과 중미 간에 채택된 공동성명 제18항이다.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타임즈는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공산당 주석이 주요 안건이 논의되는 소규모 비공식 만찬에서 북한문제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고 보도하였다.국내·외 주요 언론들은 비공식 만찬에서 나온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과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에 대한 우려표시를 중국도 북한 압박에 동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한국의 입장이 보다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포함된 동북아 정세를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북한은 이미 작년 11월 스탠퍼드 대학의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와 밥 칼린씨를 초청해 영변에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2천개를 공개하였다. 공개 이유는 핵 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실험과 동일하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와 같은 북한 '무시정책(Ignoring Policy)'으로 일관하고 있는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이다. 중국이 UEP에 대한 우려표시를 이끌어낸 것을 외교적 승리로 해석하고 있으나 중국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의 의장국으로 있듯이 중국은 북미 간에 대화를 늘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소규모 비공식 만찬에서 한 북한 위협에 대한 미군 재배치 발언은 그동안 미국의 대북전략인 '전략적 인내'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적극적 대응으로 전환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바라던 것이다. 이것은 주류 언론에서 보도하듯이 중국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북한 압박에 동참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며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또한 이것은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이룬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목표로 하고 있는 소강(小康)사회건설을 위해서는 헤이룽장, 지린, 랴오닝, 내이멍구 등 동북4성 개발을 완성해야 하고, 동북4성 개발의 완성을 위해서는 북한의 적극적인 동참과 협력 그리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필수 조건들이다. 이러한 중국에 한미동맹을 배경으로 북한 압박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한국은 관리대상이다. 중국이 한국을 관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미국을 통해서이다. 영원한 우방도, 또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 국제관계의 냉엄한 현실이다. 한미동맹이라는 외줄타기만을 하는 한국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

2011-01-27 박후건

배우 초년생, 키높이의 기적을 이루다

[경인일보=]2년 전 소극장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했던 '민들레 바람되어'를 21일부터 다시 공연한다. 최근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미친 존재감'이란 칭호와 함께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정보석씨가 주인공 남편 역을 함께 하기로 했다. 정보석씨를 처음 만난 건 1989년께 대학로에서 내가 막 연극 배우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하이네밀러의 '청부'란 연극에 출연했고 운좋게 포스터에 기주봉, 김학철 등 대선배들과 함께 나오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런데 그때 선배들과 함께 찍은 포스터가 문제의 발단이 됐다. 포스터상에 나는 긴 의자에 앉고 그 뒤로 키가 조금 큰 김학철씨와 키가 작은 기주봉씨가 서있는 그런 구도였다. 기주봉씨의 키와 나의 앉은키가 별 차이 없이 포스터에 비쳤다.이 포스터를 보고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문열 원작, 곽지균 감독, 정보석 주연의 '젊은날의 초상'이란 작품에 운동권 친구 역으로 나를 보자는 것이었다. 조연급이었으나 신인인 나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꽃단장을 하고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를 찾았다. 나를 기다리던 감독님과 촬영감독님, 영화사 관계자들은 일제히 청바지에 운동화 신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보며 작은 소리로 뭐라고 대화를 나누셨다. "키가 좀 작지않나." "좀이 아니라 역할하고는 안 맞는데, 많이 작아" "운동권 학생이 굽 높은 구두를 신을 수도 없고…" "그런데 얼굴은 좋네"(캬~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촬영감독이신 정일성 촬영감독님의 말씀이셨다). 결국 주인공 정보석씨가 180㎝가 좀 넘는 상황이라 다른 조연으로 좀 작은 듯하니 조금 큰 사람을 구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나원참, 사람 키를 고무줄처럼 늘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키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얼굴(?)은 된다면서요, 키는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뭐 이런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맴맴거리고 그 순간 참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보자는 약속만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마음과 마지막 작은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을 고민해봐도 키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머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발목 운동화를 신고 그 안에 뭔가를 넣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넣고 실험하다 합판을 잘라 차곡차곡 5㎝를 쌓았다. 발은 몹시 불편하고 아팠지만 틀림없이 키는 커보였다. 약속한 날 영화사로 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감독님과 관계자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캐스팅당했다. 나의 연기 초년시절은 이렇게 키높이운동화의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젊은날의 초상' 주연 정보석씨와 이번에 연극으로 해후하자 그 시절이 떠올랐다. 20년이란 세월동안 고난도, 남부럽지 않던 시간도 있었고 이제는 중견 연기자가 돼 다시 만났다. 나는 배우 생활을 하며 나태하거나 초심을 잃을 것 같을 땐 항상 키높이 신발을 생각했다. 올해를 시작하며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그 시절 치열함과 절실함 그리고 설렘을….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그 당시보단 생활도 나아졌고 배우로, 제작자로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문화예술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그 시절보단 정말 스스로 나를 보는 시각도 나아진 건 확실하다.그러나 그 시절 내 가슴과 머리에 꽉 찼던 절실함과 치열함은 지금 얼마만한 크기로 나에게 있는가 반성해본다. 굳이 어려운 시절을 그리워하며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자는 구태의연한 말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으나 오히려 우리를 설렘으로 이끌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한 번 되짚어 보고 싶다.이 겨울, 유난히 춥다. 추위로 움츠린 겨울을 녹일 뿐만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키 높이의 기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혹은 마음 깊은 곳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그 기적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2011-01-21 조재현

도가도비상도(圖可圖非常圖)

[경인일보=]BC 6세기에 중국에 살았던 노자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저술하며 동양사상의 형성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유가(儒家)의 사상이 인륜의 규범과 정치의 근본을 다룬 것이라면, 도가(道家)는 일반 대중의 삶에 대한 이치를 밝힌 것이라 우리 서민에게는 더욱 밀착된 고전이다. 도를 깨달아 덕을 얻는 내용으로 된 도덕경은 서른 세 장의 도경(道經)과 마흔 네 장의 덕경(德經)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경의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 도덕경 전체의 내용을 암시한다. 이런 글귀이다."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길이라 부르는 길이 다 길이 아니며, 이름이라고 하는 이름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이 문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나 법칙 그리고 지식의 체계나 현상들이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명구가, 내가 관련하는 건축과 디자인의 세계를 생각하면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요즘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마치 시대의 화두가 된 듯하다. 성장한계에 부닥친 기업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디자인에서 찾고, 모든 도시들이 디자인위원회를 앞다투어 신설하고 도시 디자인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아 골몰하는데…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대거 그 일들에 참여하게 되니 건축가인 나로서는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이 모든 일들이 디자인에 대한 본질을 알고 그 많은 전략과 정책을 생산해 내는 것일까? 나는 여러 곳에서 실제 진행된 디자인의 실상을 보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겉가죽의 분칠에 몰두하고 몇 가지 세련된 집기의 설치로 디자인이 다 되었다고 우기는 게 그렇다. 세계의 디자인과 문화의 중심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급속히 변모해 나가는데, 우리만 '세계디자인수도'니 '아시아문화중심도시'니 하는 허무한 레토릭으로 자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삼성이나 엘지가 그토록 휴대전화 사업에 몰입했어도, 애플은 아이폰을 내세우며 압도적 격차를 만든 게, 바로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정의로 거둔 승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디자인은 19세기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형성된 대량의 공업 생산에 근거해서 세계 시장 속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는 제품이나 오브제를 제조하여 배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종래의 미술이나 건축 공예처럼, 그 전까지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소수의 특권층만 즐기던 디자인 오브제가 대량 유통되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되면서 권력과 상상력의 문명사적 변혁을 가져왔으며, 결국 이는 근대성의 자각을 이룬 20세기의 미학적, 기술적 그리고 경제적 구심점이 되었다. 디자인이란 그 자체로서 근대를 상징했으며, 그 공급자와 디자이너의 파워는 대단한 권력이 되었다.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도 이만저만하게 바뀐 게 아니다. IT기술의 발달로 인한 디지털환경으로 디자인은 전문적 영역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된 시대에, 공급자 편의대로만 생산하는 방식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어느 장소에서나 유효했던 디자인이 특별한 장소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디자인의 유효기간도 지극히 단축되어 매일 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디자인 오브제가 가졌던 전통적 권위가 사라진 것이다. 서구에서 형성된 20세기의 디자인 관념으로는 변화무쌍한 이 미디어테크놀로지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어, 바야흐로 디자인은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나는 올해 9월에 개최되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 직을 작년에 위촉 받아 그 주제를 정하면서 노자의 도덕경을 다시 들추었다. 현상에 대한 의문이 들 때면 본질로 회귀하는 습성 때문이며, 환경이 변할 때 그 근본을 다시 묻는 것은 그 변화의 정체를 모른 채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흐름을 움켜쥘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다. 노자의 도(道)를 그림이나 디자인을 뜻하는 다른 한자인 圖로 바꾸어 '圖可圖非常圖'로 주제를 정하였다. '디자인이라고 일컫는 디자인이 다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뜻이 될 게다. 이천 오백 년이나 지났지만, 오히려 지금 이 현자의 명구가 나에게 절박하게 꽂혔다. 도가도비상도(圖可圖非常圖). 지금 이 혼돈의 디자인시대에 우리 모두를 성찰하게 하는 절실한 주제어라고 믿는다.

2011-01-13 승효상

냉수 먹고 갈비 트림

[경인일보=]새해 첫 날의 일이었다. 얼어붙은 길에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뒷바퀴가 헛돌며 비실비실 미끄러져 내려가던 차는 드디어 길 옆 개골창에 처박힐듯 아슬아슬하게 멈춘다. 미사 시간은 십여 분 앞으로 다가오는데 성당을 눈 앞에 두고 차가 움직이지를 못하니 이를 어쩔 것인가. 새해 첫 미사를 천주교 성지에서 드리기 위해 충북 진천의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왔는데 자동차가 새해 첫날부터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닌가.성지로 전화를 했다. 어떻게든 미사라도 드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에 수녀는 성지 관리인의 트럭을 보낼테니 타고오라고 했다. 공사장비가 가득한 트럭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겨우 성지에 도착했다. 서둘러 성당으로 올라가자니 가득하게 눈이 쌓인 주차장 한 옆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바라보였다. '배티(梨峙)성지가 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을 축하한다'는 신자들의 현수막이었다.지자체가 지역의 문화재를 발굴하고 개발하는데 힘을 기울여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효과를 찾자면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이곳 배티성지의 김웅렬 신부가 한 표본이 될 수 있다. 김 신부가 감곡성당을 맡아 성모님을 위한 성지로 가꾸어 가면서 전국에서 감곡 매괴성당(매괴는 장미꽃이라는 뜻)을 찾는 천주교 순례자가 하루 4천명을 넘는 날도 있었다. 한 성당을 찾아 조그만 지방 도시에 하루 4천명이 몰렸다면 이건 지역경제의 활성화라는 수치로 이야기할 일이 아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수익만도 얼마였겠는가. 그래서 김 신부가 감곡을 떠나 이곳 배티성지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감곡의 식당 주인과 택시 기사가 '신부님이 가시면 우리는 어쩌느냐'고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문화의 힘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다.지역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다듬어서 기리는 정책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도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고유문화와 제3세계의 지역문화에 눈을 돌리는데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 문화재의, 그 가치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사려 깊은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문화재를 개발한다면서 어디나 똑같은 형태의 쉼터, 벤치와 계단, 연못과 오솔길이 조경업자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다.문화재로 지정된 후 천주교 성지조차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 변신이 훼손에 가깝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가야 했던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며 담백했던 옛 사적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원처럼 쉼터가 되어가고 있다.배티가 이제 또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이다. 이곳은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1년이면 7천리를 걸어서 전국을 돌며 12년간 사목활동을 했던 거점 마을 교우촌이었다. 이곳 산골짜기에는 지금도 무명 순교자의 줄무덤이 이름 모를 들꽃처럼 피어 있다.이런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다. 이곳은 최초로 천주교 조선교구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두 칸짜리 초가집이 신학교 교사로 자리 잡고, 신학은 물론 라틴어와 프랑스어라는 최초의 서양학문과 언어를 익히는 교육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해서 1854년 3월에는 세 명의 신학생이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토록 역사적 가치가 깊은 곳이다. 한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적 눈뜸이라는 배티성지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내일의 지표로 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가치있는 일이다. 일차적으로는 사적지 담당자의 양식의 문제이겠으나, 이 가치있는 일이 그 가치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는 쪽으로 이루어지도록 충청북도 담당자들이 마음을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사를 끝내고 나오며 바라본 배티성지의 산기슭은 눈이 덮인채 얼어붙어서 가슴이 시리도록 희고 아름다웠다. 불쑥 버려두고 온 승용차가 떠올랐다.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개골창에 처박힐듯 기울어져 있는 내 차는 어찌할 것인가. 지자체의 문화 정책이 문제가 아니다. 우선 내 코가 석자로구나. 내가 지금 새해 첫날부터 냉수 먹고 갈비 트림하는 꼴이 아닌가.

2011-01-07 한수산

'박근혜식 대권 행보'에 대한 단상

[경인일보=]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대권 행보가 예상외로 빨라지고 있다. 박 전대표는 지난 20일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통해 한국형 복지모델을 제시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정책을 구상하게 될 싱크탱크 성격의 '국가미래연구원'을 발족시켰다. 박 전 대표는 연구원 발기인 총회에서 "우리나라는 지금 새로운 국가발전의 기로에 있다.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국가 안보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대권용 정책연구원을 발족시킨 것은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다 큰 틀 속에서 보면 박 전 대표의 정책연구원 발족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아직 임기가 2년이나 남은 이명박 정부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책 경쟁을 통해 대선 과정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지난 2007년 대선은 정책이 실종된 채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으로 시작해서 검찰의 BBK 수사로 끝난 선거였다. 물론 대선 후보의 도덕성 검증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도덕성에만 맞추면 정책 없는 선거로 빠지기 쉽고 선거가 끝나도 여운이 남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원 발기인의 79%가 대학교수 등 학자들이고, 현역 의원은 단 한사람만 참여했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이다. 박 전 대표가 연구조직 출범을 정치와 곧바로 연결시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현역 의원들은 후보 대선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중책을 맡아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관행은 경선이 끝나고 나서도 후유증이 심각했다. 친이-친박간의 내전은 계속되었고, 도저히 당을 같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향해 저주하고 주저 없이 칼을 겨눴다. 이런 고질적인 한국적 병폐를 타파한다는 차원에서 캠프를 현역 의원 중심이 아니라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것은 박근혜식 정치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연구원은 발기인들이 매달 내는 5만원씩의 회비로 운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과거에 대권 후보들이 사조직을 만들면서 재정의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여하튼 능동적 참여와 투명한 정치를 향한 강력한 의지로 해석된다. 박 전 대표는 연구원을 최대한 활용해 정책 전문가로서의 이미지를 확대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구원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현실에 바탕한 미래전략과 정책을 수립'하는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면 각오가 남달라야 한다. 첫째, 정치 공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박 전 대표 지지율이 다른 후보들보다 크게 앞서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 세몰이로 대세를 굳혀야 한다'는 사고로는 국민을 감동시킬 수 없다. 우리는 대세론에 도취되어 변화와 개혁을 거부한 채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대권 후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둘째,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를 자신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최근에 제시한 '한국형 복지'와 이 공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성장을 근간으로 하는 '줄푸세' 공약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무게 중심을 성장에서 복지로 옮긴 것인지 정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셋째, 열린 마음을 토대로 '정책 편가르기'를 해서는 안 된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서로 상충되는 반대 의견을 많이 청취하면서 통섭의 시각에서 진보의 가치를 수용하는 창조성이 요구된다. 넷째, 연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당장, 민주당 추천 방송통신위원인 이병기 종편심사위원장이 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함으로써 논란이 되고 있지 않은가?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 전 대표의 발 빠른 '정책행보'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행보가 한국 대선에서 최초로 후보의 철학이 살아 숨 쉬고 치열한 정책경쟁이 이뤄지는 격조 높은 선거가 도래하는 발판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10-12-31 김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