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꽃

 

[시인의 꽃]엉겅퀴 꽃

화포는 쏟아놓은 깊은 암청색이다풀숲은 아우성인 두터운 암녹색이다그 품에 자줏빛 물감 한 방울 찍혀있다온몸의 면역세포가 상처로 달려오듯이뜨거운 여름날이 요동치며 몰려오는내 안에 지워지지 않는 너는 핏자국이다김일연(1955~)누군가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 같지만 '도덕적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강렬하고 뜨거운 사랑이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시와 같다는 사실을 아는 자의 배려와도 같은 것. 말하자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엉겅퀴처럼 상처를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 6월에서 8월 사이에 개화하는 엉겅퀴는 온 몸에 난 억센 털 때문에 만지면 가시가 박히는데, 이것은 자기보존을 추구하기 위한 오랜 존재방식으로 아직도 '그 품에 자줏빛 물감 한 방울'의 슬픔이 지워지지 않고 '온몸의 면역세포가 상처로' 피어있다는 사실은 그 누군가를 또 다시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깊은 멍자국인 것이다. 그러한 당신도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 요동치며 몰려오는' 사랑에 일순간 눈을 감고 떠보니 '내 안에 지워지지 않는' 그대라는 '핏자국'같이, 문득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의 숲을 흔들며 언뜻 보이질 않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8-03 권성훈

[시인의 꽃]내 비록 외로와도

가을 화단은 너무 눈부셔서 싫어.샐비어도 피고 홍국화도 피어노을빛을 깝북 죽여 버렸어.화단에 물을 주던 내 임은 가고 없지만.살아야지, 보랏빛으로 내 비록 외로와도.박정만(1946~1988)환경으로부터 자극을 받는 존재는 색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산다. 색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봄엔 노란색으로, 여름엔 녹색으로, 가을엔 붉은색으로, 겨울엔 흰색으로 지각된다. 이러한 자연물이 주는 색채에서 영감을 얻은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옷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까?'하는 일상적인 생각은 오늘의 날씨와 기분 그리고 사회적 환경 등이 함의 된 것. 따라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나아가 세계에게 색채로서 답하는 것. 여름부터 가을까지 빨간색 꽃이 이삭처럼 달리는 '샐비어'나 깊어가는 가을 날 붉은 국화로 알려진 '홍국화'도 마찬가지. 눈부신 가을을 피보다 붉은 색채로 태우고 있는 것이다. 당신 마음의 '가을 화단'에도 '불타는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샐비어'가 있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홍국화'가 있지 않던가. 누군가 떠나보낸 '추억의 화단'에 물을 주듯이 그러한 고독한 당신도 "살아야지, 보랏빛으로 내 비록 외로와도" 돌아보기 쉬운 것이 '이별의 색채'라고 했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7-27 권성훈

[시인의 꽃]하늘공원 야고

난지도 새 이름 하늘공원에만발한 억새풀 사이 걷다 듣는다.귀에 익은 종소리, 물 건너 제주에서 듣던 그 종소리,바람 불 때마다 딱 한번만 들려주는 소리,무자년 분홍 종소리 예서 듣는다부끄럼에 상기한 볼, 아니란다.억새 뿌리에 몸을 감춘 채살아야,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 있었단다.잎사귀 같은 서방 산으로 가 소식 끊기고돌배기 딸년의 울음소리 데리고 찾아 나선 길,어디서 시커먼 그림자 서넛이휘릭 바람을 타고 지나칠 때아이의 울음 그러 막으며 억새밭에 납작하게 엎드린 목숨,이제나 저저나 수군거리는 소리 잦아들까.변종태(1963~)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기생하며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게 기생하면서도 기생 당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면서. 여기서 기생하는 것은 기생의 시간에, 기생당하는 것은 숙주의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도 이러한 기생의 삶이 연속되지 않는 이상, 삶 또한 지속할 수 없는 것. 제주도 억새풀에 서식하는 '야고'의 꽃은 둥근 달걀모양을 하고 마치 작은 종처럼 피어난다. 이러한 '야고'가 서울 '난지도 새 이름 하늘공원에 만발한 억새풀 사이'에서 "물 건너 제주에서 듣던 그 종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도 "바람 불 때마다 딱 한번만 들려주는" 환상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기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그렇지만 미안한 듯 '부끄럼에 상기한 볼을 억새 뿌리에' 비비면서 야고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거기 '억새밭' 같은 세상 속에서 '납작하게 엎드린 당신의 목숨'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살아야,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도 둥글게 굽어진 당신의 등 뒤에 있지 않던가./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7-06 권성훈

[시인의 꽃]얼음새꽃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아니 너다곽효환(1967~ )땅에서는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에서는 땅을 그리워하기에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새들도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 저 높이 있는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의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하면서 봄이 되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지 않던가. 그것은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바닥을 보인 겨울이 녹으면서 새의 날개 짓처럼 펼쳐지며 물길을 열어주면서 시작되는 것. 또한 우리는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를 땅에서 하늘을 향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힘센 존재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존재가 강한 것을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꽃의 비상에서 지각할 수 있다. 저만치 '겨울 샛강에서, 절벽에서, 골짜기 바위틈에서 피어있는 들꽃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사바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가 환하게 보내오는 '화엄의 시그널'이 아닐 수 없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6-29 권성훈

[시인의 꽃]포텐셜 에너지-꽃씨

꽃의 임종 후봉인된 유언이 되어 대지에 심어진검은 혀무한히 날고 있다 그것은지상과 천상,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둥근 문모든 물(物)과 빛시간과 어둠이 점으로 응집된광대한 우주 함기석(1966~)무구한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긴 자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한다. 이러한 죽은 사람의 '검은 혀'는 시간을 거슬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한히 날아다니며' 어떠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몸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 생성해 내는 힘으로부터 결여를 보충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여기서 영웅 신화가 탄생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포텐셜 에너지'의 원리에서 강철공이 땅에 떨어져 있을 때보다 땅 위로 올려질 때 더 큰 위치 에너지를 가지는 것처럼. 죽음으로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지상과 천상,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지금 시들어 떨어지는 민들레꽃을 보라. 살아 있을 땐 한 송이지만 그 하나의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 수천, 수만 송이로 변환된 꽃들은 '모든 물(物)과 빛'과 '시간과 어둠이 점으로 응집된' 세계의 '광대한 우주'를 말 많은 세상에 말없이 보여주고 있지 않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6-22 권성훈

[시인의 꽃]꽃잎에게 나는

떨어지는 꽃잎에게 / 나는 두 번째라네 / 깊은 그늘에 숨어싱그러운 눈짓을 바라보았지놀라워라 햇살이 물방울처럼 돋아 / 길을 만드네숲의 안쪽에서 그녀만이 온전히 주인이 숲에선 상상조차 그녀에게 헌납되었지그녀는 속삭임, 그녀는 무도회, / 잊혀지는 저녁과 귀기울임이 숲은 그녀의 것 / 꽃잎에게 두 번째는 없지망설이지 않고 사라지는 저것에게 /나는 두 번째여서 우두커니 선채로 어두워지네 / 그리고, 모든 게 눈 앞이지떨어지는 동안, 내내 / 꽃잎은 세상의 모든 것에 앞서네노춘기 (1973~)최고의 자리는 어느 순간 바뀌지만 처음의 자리는 바뀔 수 없는 것. 언제나 최고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위태로우나, 최초는 언제나 처음으로 굳게 기억되고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의미를 찾는다면 두 번째부터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순서가 아무리 늘어나도 다음만을 이어나가며 처음과는 점점 차별화되고 멀어진다. 미처 찾아내지 못했거나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최초의 새로움을 더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누구나 매일 같이 어제의 누구도 가보지 못한 '깊은 그늘에 숨어' 있는 오늘이라는 '싱그러운 하루'를 처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보아라 어제 '잊혀지는 저녁'을 지나 오늘 아침 '햇살이 물방울처럼 돋아 길을' 만들고 있지 않던가. 우리도 꽃잎처럼 '두 번째는' 없는, 목숨을 매달고 살면서 '우두커니 선채로 어두워지'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모든 떨어지는 것이 있다면 '떨어지는 동안, 내내' 생각해 보라. 그것은 처음으로 갈 수 없기에 처음으로 길을 멀리 떠나는 것이니./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6-15 권성훈

[시인의 꽃]저것은 국화 이것은?

노란색이 이거다 싶게 / 국화는 국화 / 만개하여 뒤집힌 꽃 //내가 늙으면 저렇게 될까 싶게 / 차가운 할머니가아파트 뒤편에 몰래 심은 꽃 / 몰래 심었지만 가릴 수 없이 큰 꽃저것은 국화//아름답다 국화 / 몇 달째 잘 가꿔진 꽃 / 오래가는 죽음국화가 피어 있는 동안//먼 친척이 결혼을 하고 / 삼촌이 돌아가시고 / 딸아이가 돌을 맞고//이번 주에도 다음 달에도 /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이근화(1976~)가장 먼저 와서 맨 나중에 가는 꽃이 있다. 장례식장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국화. 흰 국화는 조문객보다 빨리 와서 화환으로 서 있기도 하고, 한 송이씩 영전에 올려 망자의 넋을 기리기도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풍속은 문명 이전인 10만 년 전 살았던 인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네안데르탈인에도 존재했다고 하는데, 독일의 네안데르 골짜기에서 발견된 이들도 장례를 치르고 꽃을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처럼 '만개하여 뒤집힌 꽃'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산자와 죽은 자를 배웅하는 꽃으로 '오래가는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피어나는 것인가. '국화가 피어 있는 동안'에 '먼 친척이 결혼을 하고 삼촌이 돌아가시고 딸아이가 돌을 맞고'.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뜨거웠던 생명이 다하는 사람 곁에 머문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오늘을 위해 국화는 '이번 주에도 다음 달에도' 그렇게 당신을 희미하게 쳐다보며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6-08 권성훈

[시인의 꽃]칸나는 붉다

당신을 위한, 당신에 의한, 바로 당신의 것이었던 모든 열정들은그러니까 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해를 통과하면서급격하게 냉각된다.마치 적대와 분노가 얼굴을 굳게 하듯사후경직 같은 감정의 시멘트.나는 굳어 생각한다.무슨 뜨거운 것을 삼킨 것인가. 무엇과 뒤섞이고 있었는가.세상이 이렇게 더운데 오들오들 떠는 사람이 있듯우리의 적대가 우리의 열정의 다른 근원이다.약국 가서 몸살감기약 사먹고 오면서 보았던 근처 화단의 칸나그러니까 칸나는 한없이 붉게 피어그 붉음은 마치 모든 색을 빨아들일 듯이 검다. 이현승(1973~) 꽃은 꽃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표상되는데 대부분 마음을 전할 때 쓰인다. 홍초라고도 불리는 파초의 일종인 칸나는 존경과 행복한 종말이라는 꽃말을 가진다. 다년생 식물인 이 꽃은 빨간색·노란색·보라색·오렌지색·흰색 등의 꽃을 6월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우는데 거기엔 "당신을 위한, 당신에 의한, 바로 당신의 것이었던 모든 열정들"에 대한 존경이 헌시와 같이 담겨있다. 그러나 우러러 보는 마음이 생기기까지 '그러니까 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해를 통과하면서 급격하게 냉각'되어 갔을 서로의 갈등 또한 생겨났을 것이다. 칸나가 경직된 자세로 자라나 붉은 얼굴을 보여주기까지 '감정의 시멘트'로 얼마나 자신을 치장해야 했을까. 알고 보면 "우리의 적대가 우리의 열정의 다른 근원"을 만드는 것일 뿐. 이것을 깨달을 때까지 초여름 피어난 칸나는 늦가을에도 '한없이 붉게 피어 그 붉음은 마치 모든 색을 빨아들일 듯이 검'게 서 있는 것은, 삶에 지쳐버린 당신과 함께 행복한 종말을 맞이하고 싶은데 있다./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이현승(1973~)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6-01 권성훈

[시인의 꽃]새가 날고 꽃이 피다

지구는 인간이 남기고 간 진실의 자리이다바이러스가 지나간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죽음을 배우러 가는 행렬처럼미동도 않고 걸어가는 하얀 마스크들 사이로고개 떨군 꽃대처럼산 자들이 하나씩 쓰러져간다//혼자서 살아남는 것은 벅찬 일인 듯모두 조용히 숨을 죽이고살아남은 자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내고한 순간 떨어진 목련 꽃잎들을 응시한다//어둠 속에서도 매 순간은 태양을 향하고꽃잎 떨어진 자리에 새싹이 돋듯이//깊은 하늘 속 밤이 끝나는 자리죽은 자들이 떠난 자리에새가 날고 꽃이 필 것이다김구슬(1953~)우리는 최대한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서 최소한의 적은 것을 공유하려고 한다. 인간과 달리 작은 몸짓으로 큰 것을 보여주는 꽃은 한겨울을 보낸 외로운 시간의 끝에서 잠시 피어나기에 더욱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고귀함'이란 꽃말을 가지고 부푼 가슴을 하얗게 3~4월에 개화하는 목련같이. 그 '진실의 자리'에서 생명의 고결함을 나뭇가지에 매단 목련은 욕망의 바이러스로 '고개 떨군 꽃대처럼' 허망하게 가는 '산자들'의 행렬에 '희미한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꽃이 다 진 후에 '어둠 속에서도 매 순간은 태양을 향하고' 있는 희망이 있기에 '꽃잎 떨어진 자리에 새싹이 돋듯이' 우리도 이제 깨달아야 할지니. '밤이 끝나는 자리'에서, '죽은 자들이 떠난 자리'에서 '새가 날고 꽃이 필 것'이라고 믿는 당신, 적은 것을 소유하지만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꽃을 피어내야 할 때가 아닌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5-18 권성훈

[시인의 꽃]나를 구부렸다

복도 끝에 너는 서 있다. //너에게 가려고 / 가지 않으려고 /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 피어난 바닥의 꽃을 향해 그때 숨어든 꽃의 그림자를 향해 / 허리를 구부렸다. //구부러진 채 / 나는 펴지지 않았다. //복도를 떠돌던 / 나의 빛은 구부러진 채나의 나날들은 구부러진 채 / 펴지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 그때 흔들린 꽃에 대해 /그때 사라진 꽃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았다. / 너에게 가려고 / 가지 않으려고 //구부러진 채이수명 (1965~)낮은 곳에 있는 상대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만큼 낮아져야 한다. 이것은 선행적으로 몸을 구부려 다가갈 대상을 향해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며, 그러할 때 정면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허리를 구부리는 행위는 동적인 것이지만 정적인 의지로부터 시작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봄날 땅 속에서 굽어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있는 꽃을 보고 '그때 피어난 바닥의 꽃을 향해' 가려고 한다면 반대로 허리를 구부리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니. 그러한 자세로 오래 들여다보면 '구부러진 채 펴지지 않는' 지난날의 자신이 '가만히 손을 내밀고' 피다가 만, "그때 흔들린 꽃에 대해/그때 사라진 꽃의 그림자에 대해" 말해 줄 것이다. 모든 꽃들은 구부러진 것을 펴면서 피어나지만 그것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구부러진 채'로 맞이해야 하는 법, 그렇게 할머니들의 굽은 허리는 '삶의 본질'에 가닿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바닥'이 닳고 닳아 휘어져 있는 것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5-11 권성훈

[시인의 꽃]할미꽃

그 누가밉게 보았나저리도 다소곳이고운 여인을정숙자(1952~)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은 눈에 보기 좋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우선 취하려고 하는 물욕으로 인해 생긴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도 사실상 그러한 것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산과 들에 있는 꽃들을 옮겨 심거나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 4월과 5월에 개화하는 공경과 슬픈 기억, 전설 등의 꽃말을 가진 할미꽃은 그 이름만큼이나 박대받은 불쌍한 꽃이 아닐 수 없다. 전해 내려오는 할미꽃에 얽힌 전설 또한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난 후 죽어서 피어난 슬픈 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인지 양지바른 무덤가 허리 굽어 피어나는 이 꽃은, 꽃대가 굽어서 할미꽃이 된 것이 아니라 꽃이 지고 나서 백발의 할머니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름과 유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 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누가 밉게 보았나"라는 새로운 자각과 "저리도 다소곳이 고운 여인을" 만날 수 있는, 인식의 반전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관습화된 것으로 오만과 편견이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처럼 정보만으로 섣불리 판단한다는 것은, 불행히도 미적인 본질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말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4-27 권성훈

[시인의 꽃]제비꽃이 피었다

우리 집 담 밑에 제비꽃이 피었다봄날의 마법처럼 깊은 어둠 뚫고 피었다아무리 힘든 세상도 사는 게 더 낫다며 피었다꽃도 사람처럼 누군가의 환한 시선 받고 싶다며 피었다슬픔은 삶을 낭비할 때 생기는 회한의 그림자서로서로 격려하며 기쁘게 한 시절 잘 보내자고 피었다눈물 나게 따뜻한 작은 꽃잎들 불쑥불쑥 내밀며외로울 땐 거울 보듯 자신을 보러 나오라며 피었다사방이 연둣빛으로 감격스런 화창한 봄날 오후자꾸만 잊혀지고 멀어지는 첫 순정, 첫사랑처럼저 혼자, 저 멀리서 찾아와우리 집 담 밑에 작고 예쁜 보랏빛으로 피었다향기로운 봄바람에 수줍은 서정(抒情)처럼 피었다어린 날, 쬐그만 내 얼굴처럼 피었다김상미(1957~)제비꽃은 말 그대로 제비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른 봄 잎사귀 사이 긴 꽃대 끝에 "봄날의 마법처럼 깊은 어둠 뚫고"보라색 또는 자주색 꽃을 한 개씩 피워 올리는, 제비꽃은 제비가 겨울나고 돌아오는 4월 무렵에 개화한다. 또한 이 꽃은 여러해살이풀로서 "서로서로 격려하며 기쁘게 한 시절 잘 보내자고"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오랑캐의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 오랑캐꽃, 반지를 많이 만들어서 반지꽃, 병아리처럼 작고 귀여워서 병아리꽃 등의 별칭을 가진다. 여기에 "눈물 나게 따뜻한 작은 꽃잎들 불쑥불쑥 내밀며" 얽힌 설화도 많지만 대부분 '나를 생각해 주세요'라는 꽃말과 통한다. '화창한 봄날 오후' 거리를 걷다가 '첫 순정, 첫사랑처럼 저 혼자, 저 멀리서 찾아와'있는 제비꽃을 보라. 그것은 누군가 잊혀지거나, 멀어지지 말았으면 하는'보랏빛 그리움'이 넘을 수 없는 마음속 담장 밑에 피어난 것이 분명하다./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4-20 권성훈

[시인의 꽃]백일홍

개심사 배롱나무뒤틀린 가지들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을 허공에 내고 있다하나의 행선지에 도달할 때까지변심(變心)과작심(作心) 사이에서마음은 얼마나 무른가푸른 마음이 파고들기에 허공은 또 얼마나 단단한가새가 앉았다날아간 방향나무를 문지르고 간 바람이,붐비는 허공이배롱나무의 행로를 고쳐놓을 때마음은 무르고 물러서그때마다 꽃은 핀다 문득문득핀 꽃이 백일을 간다장만호(1970~)인간은 서로 볼 수 없는 생각과 만질 수 없는 감정과 느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 마음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말이나 행동으로 통하는 고유한 이것은 상호 소통을 목표로 하지만 사실상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거나, 또한 내면을 온전하게 구현하지 않을 때,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어 낸다. 거기서 개별적인 마음이 '뒤틀린 가지들'처럼 뻗어가고 육신의 창자처럼 이리저리 꼬부라진 험한 산길을 '변심(變心)과 작심(作心) 사이에서' 배회하기도 한다. 어느 방향으로 꽃을 피울지 모르는 백일홍은 자신을 열면서 언제 바뀔 지 모르는 '무르고 무른' 인간의 마음을, 보라는 듯이 백일동안 허공에 펼쳐놓고 단단하게 피었다가 간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4-13 권성훈

[시인의 꽃]백일홍

어젯밤 / 어디서 잤는지 / 머리에 / 붉은 실밥이 가득하다 //수박장사 리어카조차 / 그늘에서 쉬고 있는 / 한낮 //지린내가 진동하는 / 공터에 //태양을 독점한 듯 / 미친 여자 하나 / 눈부시게 / 서 있다문성해(1963~)무엇보다 시인은 시어를 통해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고 한다. 그럴 때 표상되는 대상과 원래 대상 사이의 유사한 형태나 성질을 매개로 전혀 다른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명명된 '백일홍'은 순결이라는 꽃말처럼 고귀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 꽃은 6월에서 10월 사이 개화하는데,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이며 잎자루가 없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털이 나서 거칠고, 끝이 뾰족하며 밑은 심장 모양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시인은 백일홍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제거하며 순간적으로 '미친 여자 하나'로 전환시켜 버린다. 말하자면 '어젯밤 어디서 잤는지 머리에 붉은 실밥이 가득'한 그것도 '한낮에 지린내가 진동하는 공터' 위에 피어난 존재일 뿐이다. 시어의 프리즘을 통과한 백일홍은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은 '눈부시게 서있는 미친 꽃'으로 전복되는 데에서 놀라움이 발생되는 것. 이것이 바로 존재를 다시 드러내며 각인시키는 언어의 힘이며, 마법 같은 미적 성취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4-06 권성훈

[시인의 꽃]산벚꽃

재잘대며 흐르는 시냇물 따라 / 산기슭이다 산기슭 위로 /벚나무들 한데 어울려 / 무데기로 무데기로 꽃 피우고 있다 //꽃수레를 타고 찾아가야 하는 / 꽃대궐이 여기인가 /입 벌려 놀랄 틈도 없이 / 하르르 불어오는 바람… //순간 산벚꽃 꽃잎들 / 떨어져 내린다 흐르는 시냇물 위 /갓 태어난 나비 떼들 / 새하얀 날개 파닥거린다 //연분홍 복사꽃잎까지 / 꼬리치며 떨어져 뒤섞이고 있다 /흐르며 흔들리는 세상 / 황홀하다 잠시 여기가, 정토인가.이은봉(1953~)3월에 개화하는 화려한 벚꽃은 그 생김새에 따라서 다양한 꽃말을 가지고 있다. 숲속에서 볼 수 있는 산벚나무는 고상함을, 강가 부근에 피는 수양벚나무는 은총을, 거리에 일렬로 서 있는 왕벚나무는 순결을, 여러 장의 꽃잎이 겹쳐 피는 겹벚나무는 교양을 통해 우리에게 '정신의 아름다움'을 가르친다. 말도 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흰색, 분홍색, 보라색 등으로 마중 나와 여기저기 우리의 마음을 물들인다. 그것도 "벚나무들 한데 어울려 무데기로 무데기로 꽃 피우고" 있는 힘을 다해 땅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하늘을 흔들고 있지 않던가. 그러다가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에 '입 벌려 놀랄 틈도 없이' '황홀하게' 떨어져 내리는 '산벚꽃 꽃잎들'을 바라보면 추운 겨울을 앙상하게 버틴 것들의 침묵을 알게 한다./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3-30 권성훈

[시인의 꽃]산수유

세상에,갓 태어난 아기 울음 그치는가 싶더니무명천 안개 자락에 지리는 배냇똥살얼음 헛디디며 몇 만리를 흘러왔는지반가부좌 엉덩이마다 환하게 피는 봄깨금발로 지나쳐간 내 사랑의 뒤란에 샛노랗게 반짝이는 등불 한 송이 윤향기(1953~)탄생은 인류가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듯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도 불변의 이치이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들은 서로 유사한 동질성을 지니고 있지만 차별된 것이며 독립된 개체일 뿐. 그것은 봄이 되면 새롭게 탄생하는 생명들의 축제 속에서도 경이롭게 발견되는데, 다 같은 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관찰해보면 꽃 하나 하나의 피어남이 다르듯이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3월에 개화하며 '지속'과 '불변'이라는 꽃말을 가진 산수유 꽃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 울음'으로 제각기 피어 있다. 그것도 '무명천 안개 자락에 지리는 배냇똥'처럼 바람이 허공에 배설을 한 것같이. 얼어붙은 반가부좌 자세로 참선을 끝낸 겨울이 환하게 봄으로 환생해 있지 않던가. 거기서 사랑을 잃어본 당신도 그 생각 속 뒤란에서 사랑과 유사한 '샛노랗게 반짝이는 등불 한 송이' 그리움을 찾을 수 있는 것.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3-23 권성훈

[시인의 꽃]먼, 분홍

윤이월 매화는 혼자 보기 아까워 없는 그대 불러 같이 보는 꽃생쌀 같은 그대 얼굴에 매화 한 송이 서툰 무늬로 올려놓고 싶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자르고 사흘만 같이 살아보고 싶었다혼자 앓아누운 아침 어떻게 살아야 매화에 닿는가 꽃이라는 깊이 꽃이라는 질문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매화는 분홍에서 핀다 분홍은 한낮의 소란스러움을 물리친 색 점자처럼 더듬거리다 멈춰서는 색새벽의 짐승처럼 네 발로 당신을 몇 번이나 옮겨 적었다 분홍이 멀다먼, 분홍 서안나(1965~)가끔 자연 속에서도 예상치 못하게 시작되는 것들이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먼저 온다는 것은 빨리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 이를테면 기다림보다 앞서 와 오히려 기다려주는 2월에 피는 매화 꽃. 혼자 보기에는 '아까워 없는 그대 불러 같이 보는 꽃'이 아닐까. 원래 매실나무에 '생쌀 같은 그대 얼굴'처럼 피는 매화는 3월에 만개하며 지난한 겨울을 지나온 봄의 표상이다. 이런 매화는 색깔에 따라서 꽃말이 다른데, 백매라고 불리는 흰색은 고결과 기품을, 홍매라고 불리는 붉은 색은 결백과 충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시 분홍을 피워낸 홍매는 '한낮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멈추게 하는 '색'이 아닐 수 없다. 매화에게 다가갈수록 허물 많은 우리는 '먼, 분홍'으로부터 시련을 깨끗이 잊고 눈가와 입가가 활짝 개화한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20-03-16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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