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꽃

 

[시인의 꽃]할미꽃

이른 봄 양지 밭에 나물캐던 울 어머니곱다시 다듬어도 검은 머리 희시더니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서러움도 잠드시고이 봄 다 가도록 기다림에 지친 삶을삼삼이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의 양자(樣子)그 모정 잊었던 날의 아, 허리 굽은 꽃이여하늘 아래 손을 모아 씨앗처럼 받은 가난긴 긴 날 배고픈들 그게 무슨 죄입니까적막산 돌아온 봄을 고개 숙는 할미꽃조오현(1932~2018)4월과 5월에 개화하는 할미꽃은 꽃대가 굽어서가 아니라 꽃이 지고 나서 열매에 가득 달린 흰털이 하얗게 센 할머니 머리와 비슷하여 생겨 난 말. 슬픔과 추억이라는, 꽃말을 간직한 할미꽃은 그렇게 꽃을 피우던 젊은 날을 지나 추억만 하얗게 매달고 있다. 그것도 들판의 '봄 양지 밭에'서 오지 않을 사람을 오래 기다려 온 듯이 '검은 머리'가 '희어'지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 기억하는가. 바로 당신 때문에 잠 못 이루던 그 사랑. '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기다림에 지친 삶'에서 언제든지 '삼삼이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으로서 '허리 굽은 꽃'이 되어 당신에게 오고, 당신은 '펼 수 없는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돌아가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그리움은 미안한 마음에서 제다 '슬픔의 죄'가 되어 '긴 긴 날 배고픈' 추억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오늘도 적막한 너머의 고개를 넘어간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6-03 권성훈

[시인의 꽃]장미를 위하여

단 한마디꽃 중의 꽃 장미라고 불렀을 때다른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그 이름 불렀을 때그는 다소곳이 꽃잎 갈피갈피 감춘혼의 향기를말없이 우리에게 안겨준다한 다발의 장미 그 혼의 향기를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길은길고 긴 역사의 산정이우러러 보인다홍윤숙(1925~2015)무엇을 위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적 표명이다. 당신이 위하는 꽃이 있다면 여러 종의 꽃 중에서 그 꽃을 차별해 낸 것이며, 다른 꽃들과 분리시켜 당신만의 꽃으로 담고 있는 것. 그것은 꽃에 스며있는, 혹은 겹쳐있는 경험과 시간이 그 안에 머물면서 심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만약 '꽃 중의 꽃 장미'라고 했을 때, 그 장미는 이미 당신 가슴을 물들인 추억의 잎사귀를 가슴 속에 매달고 있는 것 같이. 여름과 맞닿아 있는 오월에 피는 장미는 오월의 슬픈 역사를 관통하며 피로 물든 시기에 피어난다.'장미를 위하는 것'은 표층적 장미가 아니라 심층적 장미를 말하는 것으로, 지나간 장미라는 '그 이름'은 누군가와 잊지 못할 '꽃잎 갈피갈피 감춘' 사연과 사라진 '혼의 향기'를 지닌다. 이른바 '한 다발의 장미'는 이별한 대상에 대한 '한 다발 가슴 깊이 품고'있는 사랑인바, 한때 당신이었을 그대로부터 진동하는 그리움에서 오는 것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5-20 권성훈

[시인의 꽃]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이형기(1933~2005)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영원한 것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염원에서 기원한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기에 미련으로 남아 다른 누구를 만나게 되면, 경험칙상 벌써부터 헤어짐을 걱정하게 되는 것. 우리에게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잘 헤어지는 법'이 아닌가. 그것은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의 만남이 끝나더라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같이. 헤어짐의 아픔은 잠시이지만 만남의 즐거움은 영원한 시공간에 있는 것같이, 잘 헤어지는 법이야말로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의 역설로 교환된다. 가야 할 때를 알고 떨어지는 한 잎의 꽃처럼 그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사랑'에게 그러하다면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 되고,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나의 사랑, 나의 결별'로 인하여 '내 영혼의 슬픈 눈'에 "영원의 열매"가 맺힐지니, 안녕.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5-13 권성훈

[시인의 꽃]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찬란한 슬픔의 봄을김영랑(1903~1950)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인 모란은 5월에 개화한다. 이 꽃은 예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오면서 왕실에서 왕비나 공주와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 모란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새겨졌다. 특히 미인을 말함에 있어서 복스럽고 덕 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할 정도로 모란은 여성성이 강한 이미지다. 모란꽃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성을 그리워하듯 기다리며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 숨결과 함께 한다. 이른바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마는 것이지만 단념하기 보다는 또 다시 모란과 더불어 올 봄을 1년 동안을 잊지 않고 가슴을 내어준다. 당신의 사랑도 시든 자리에 모란처럼 피어날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 안에는 수많은 불빛이 빛나듯이 그렇게 피어났다가 시들어버린 시간들이 응집되어 있기에, 슬픔도 찬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5-06 권성훈

[시인의 꽃]민들레꽃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아 얼마나한 위로이랴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아 얼마나한 위로이랴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조지훈(1920~1968)4월에 개화하는 민들레는 국화과 식물로 여러해살이풀이다. 누군가 보살펴 주지 않았는데도, 작고 여린 몸으로 외로움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를 보면 가슴 속 애처로움으로 남아 버린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 그리움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사랑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민들레가 소환된 것이며,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당신을 찾아온 것. 말하자면 당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이 거기에 잊지 못하고 피어있는 것. 그렇다면 그 말만큼은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아 위로가 되는 것이니,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대상을 파수꾼처럼 지키면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민들레 홀씨와 같이 멀리 날아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바라보는 것. 따라서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듯이 '사랑이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것'으로 존재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4-29 권성훈

[시인의 꽃]눈꽃

슬픔 슬픔너의 슬픔차마 슬픔이라 말 않겠네. //예까지 밀려 떠돌며가까스로 피어 오른 뜻. //밤새도록 울며 쌓여기어이 황홀한 모습 드러냈고, //밤 풍경밤 사연한 올 한 올 짜내어서 //바람 불면 무너진다슬픔으로 쌓은 공 //놓칠세라꼬옥꼬옥끼리끼리 얼싸안네.조태일(1941~1999)슬픔에도 꽃이 있는가. 슬픔이 피워내는 꽃이 있다면 밤새 잠 못 이룬 '애환의 얼굴'을 닮았으리. 그 꽃은 한 사람이 흘린 눈물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슬픔이 '삶의 현장'에서 흘린 피눈물 같은 것. 너무 아파서 그것을 '차마 슬픔이라 말'하지 못할 정도로, 침묵만이 가득한 세계의 언어가 피운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침묵의 언어는 '밤새도록 울며 쌓여' 하얗게 그 실체를 황홀하게 드러내는 '눈꽃'과 같이 '밤 풍경' 속에서 '밤 사연'을 '한 올 한 올 짜내어서' 가지 끝에 걸어둔 것. 이 꽃은 '슬픔으로 쌓은 눈물'이라서 바람 불면 무너지는 약하고 약한 한계를 가졌다. 그렇지만 힘없는 것들은 '끼리끼리' 있는 힘을 다해 서로 '놓칠세라 꼬옥꼬옥' 부둥켜안고 있는 것, 슬픔에도 피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니, 아픔이 다 녹을 때까지 감싸 안고 가리라.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4-15 권성훈

[시인의 꽃]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맑은 그 숨결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신동엽(1930~1969)사랑하는 사람이 불현듯 사라질 때 혹은 그런 사람의 곁에서 떠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 사람의 텅 빈 빈자리를 응시하게 된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늘만큼 커져만 가는, 기다림의 숱한 방황의 날들은 빈자리를 채우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을 더듬으며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만이 생각의 꽃을 피운다. 이 꽃은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시시때때로 동시다발적으로 '화사한 그의 꽃'으로 현현된다. 길을 가다가, 산과 언덕을 오르다가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 이를테면 아름다웠던 기억이 상징화된 꽃으로 되살아나는 것인 바, 사람은 가고 지나간 시간만이 꽃으로 치환된 것. 이 꽃은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의 '맑은 숨결'로서 '바람'과 '인정'을 담아서 거기에 잎사귀를 내민다. 보아라, '쓸쓸한 마음'에 흔들리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울다 간 그의 영혼'이 바람 되어 당신을 찾아온 것일지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4-08 권성훈

[시인의 꽃]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1915~2000)세상에 까닭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그냥 피는 꽃도 없으리라.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이 원인의 근원에는 인연이 있는 법. 만약 지금 당신이 꽃이라고 표상되는, 스펙트럼을 피어 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물리적인 관계에서 온 물질인 것. 봄에 마주하게 되는 '한 송이 국화꽃'은 '천둥'을 이기고, '먹구름'을 지나 존재의 형상을 영롱하게 보이지 않던가. 죽음의 입구에서 삶의 출구로 도전장을 내민 '노오란 네 꽃잎'에서 존재에 대한 비의와 경이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 배후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절과 아픔을 건너온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오는 것인 바, 그리움과 아쉬움이 깊을수록 젊음의 뒤안길은 그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그것의 출구는 기쁨과 환희로 배가 되지 않던가. 당신이 살고 있는 어두운 세상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는 이유도 지금―여기 있으니, 꽃을 피우고 싶다면 진실로 자신을 세계에 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25 권성훈

[시인의 꽃]조화弔花

여기 호올로 핀 들꽃이 있어자욱-히 나리는 안개에잎사귀마다 초라한 등불을 달다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소리도 없이 퍼붓는 어둠먼-종소리 꽃잎에 지다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이는 떠나간 네 넋의 슬픈 모습이기에지나던 발길 절로 멈추어한 줄기 눈물 가슴을 적시다김광균(1914~1993)조화弔花는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는 꽃으로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초입에서 사계절 동안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조화는 한 생명이 왔던 '순백의 시간'을 펼친다. 그리고 누구도 가로질러 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개 숙여 애도하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거기에서 인간은 세계라는 들판에서 '여기 호올로 핀 들꽃'처럼 내일이라는 미지의 '자욱-히 나리는 안개' 속에서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초라한 등불' 하나 달고 있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 순간도 '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 소리 없이 퍼붓는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먼-종소리 꽃잎에' 지고 있는 누군가의 목숨인 것. "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을 보라. 그렇게 떠나간 이들의 '넋'이 슬프게 피어있지 아니한가. 이 봄날,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잊지 못해 하얀 그리움으로 당신을 찾아온 것이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18 권성훈

[시인의 꽃]산유화

산에는 꽃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 꽃이 좋아 / 산에서 /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지네.김소월(1902~1932)산유화는 꽃 이름이 아니라 '산에 꽃이 있다' 라는 의미로 '산유화(山有花)'다. 이른 봄부터 산에 피는, 이름 모를 꽃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는데, 거기에는 기다림도 설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산유화는 언제 피는지, 언제 지는지에 관한 물음을 접은 채, 피어나고 지는 데 있다. 그 꽃은 '갈 봄 여름 없이' 보는 사람에게 피어나는 꽃이며, 반대로 '갈 봄 여름 없이' 지는 꽃으로서 산속 어딘가에서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을 뿐. 마치 겨울을 홀로 보낸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함의 얼굴이 있다면 그러하리라. 따라서 산유화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통과하여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상태로서 고독의 절정이 피어 올린 근원적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 '산에서 우는 작은 새도 고독이라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는 것같이 누구나 세계라는 산속에서 잠시 홀로 왔다가 간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11 권성훈

[시인의 꽃]노변의 꽃들

저것들에게도 분명 무슨 말들이 있을 거다 / 그렇지 않고선 어찌 / 저렇게 온종일 / 바람과 낄낄거린다는 말인가저것들에게도 분명 무슨 사연들이 있을 거다 / 그렇지 않고선 어찌 / 저렇게 밤을 새워 기다린다는 말인가저것들에게도 분명 무슨 사랑들이 있을 거다 / 그렇지 않고선 어찌 / 저렇게 곱게 몸단장을 한다는 말인가그리고 저것들에게도 분명 무슨 미련이 있을 거다 / 그렇지 않고선 어찌 / 저렇게도 해마다 해마다 그 자리 / 그곳에 다시 피어난다는 말인가 / 그러나 나의 길은 가면 못 오는 길한번 지나갈 뿐 / 이제 그 길을 나는 지금 고속으로 / 너를 보며보며 지나가고 있는 거다 / 이렇게 나머질.조병화(1921~2003)이유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그냥 피어나는 꽃들도 없을 것이다. 가꾸지 않았는데도 길가 봄기운과 함께 움트고 있는 꽃들도 그러하리. 3월 어느 날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한 세상 뿌리내린 이름 없는 꽃들을 바라본다. 꽃들의 말이, 꽃들의 사연이, 꽃들의 사랑이 들리는가. 그렇다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 마다 그 자리'에 피어나는 그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으리라. 반면 꽃들의 길은 가고 올 수 있지만 사람의 길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것. 그것도 고속으로 '한번 지나갈 뿐' 그렇게 지나가고 있는 이 길에, 당신은 꽃보다 할 말이, 사연이, 사랑이 그리고 인생의 미련이 얼마나 아름답게 남았는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04 권성훈

[시인의 꽃]국화

서리에 피는 국화선생이라 불렀더니뜻을 알아주기동지라 여겼더니오늘은아내 사랑을네게 온통 바친다이은상(1903~1982)고통은 극복하고 초월하는 문제가 아니라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고통일수록 배가되며 머물렀다가는 시간마저도 알 수 없기에,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에 눈을 감고 돌아서지 않으면서 그것에 삶의 의미를 더하여 오히려 즐긴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자는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우는 존재에게서 고통을 대하는 실천적 방법을 배우는 자세로 사물을 바라본다. 가령 '서리에 피는 국화'를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본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다면 '선생'이 되는 것이다. 사실 국화를 선생으로 있게 한 것은 국화가 아니라 '서리'인바, 이 서리라는 고통이 가중될수록 반대로 선생은 더욱 심오해지며, 연민까지 더해져 '동지' '아내'로 확대된다. 바람 잘날 없는, 오늘도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있다면 뛰어넘으려고 하지 말라, 그럴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어차피 그것은 와 있는 것이니, 지나가는 동안 현자로서 마주하라.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2-25 권성훈

[시인의 꽃]난蘭

이쯤에서 그만 하직下直하고 싶다. //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 여유 있는 하직은 // 얼마나 아름다우랴. // 한 포기 난蘭을 기르듯 //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 조용히 살아나고, // 가지를 뻗고, //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 아아 // 먼 곳에서 그윽이 향기를 // 머금고 싶다.박목월(1915~1978)인간의 욕심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에서 생긴다.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있는 것 이상,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욕심은 부피를 채워간다. 가령 욕심은 없음에서 있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더 있음으로의 충족되지 않는, 탐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라는 두 글자에 서식하는 욕구와 요구에 관한 양상과 대상은, 지구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다. 그것은 충족 가능한 생물학적인 기질과 다르게 충족될 수 없는 주체와 주체 사이, 구성원과 구성원의 상호 관계를 매체로 진화하는데, 거기에는 갈등과 분쟁, 불화와 분열 등이 등식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하는, 것은 물욕과 작별하는 것이며, 욕망에 하직을 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유가 생기는 그 사이 난초와 같이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는' 것은 정신이며, 그 정신은 가지를 뻗고 '스스로 꽃망울'의 고귀함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윽이 향기'를 머금고 있는 난초꽃은 분명 무욕이 피워 올린 없음에서 있는 꽃이 아닐 수 없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2-18 권성훈

[시인의 꽃]낙화

돌돌돌 가랑잎을 밀치고어느덧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한 뒷골짝에 멧비둘기 종일을 구구구 울고 동백꽃 피 뱉고 떨어지는 뜨락 // 창을 열면 우윳빛 구름 하나 떠 있는 항구에선 언제라도 네가 올 수 있는 뱃고동이 오늘도 아니 오더라고 / 목이 찢어지게 알려오노니 //오라 어서 오라 행길을 가도 훈훈한 바람결이 꼬옥 향긋한 네 살결 냄새가 나는구나 네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이는구나 //오라 어서 오라 나의 기다림도 정녕 한이 있겠거니 그때사 네가 온들 빈 창밖엔 멧비둘기만 구구구 울고 뜰에는 나의 뱉고 간 피의 낙화!유치환(1908~1967)겨울은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그 기세를 몰고 오지만 그럴수록 봄은 조금씩 겨울을 파고들고 있다.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겨울과 오려고 하는 봄은 숙명적으로 가고 오지만 그 사이 무엇이 있는가. 겨울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인연처럼 묶여 있다가 '돌돌돌 가랑잎을 밀치고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할 때 즈음 낙화하는 "동백꽃 피 뱉고 떨어지는 뜨락"처럼 목매는 기다림이 있는 것. 이제 곧 '훈훈한 바람결'에서 '향긋한 네 살결 냄새'에서 '간질이는 네 머리칼'에서 그리움이 봄바람에 실려 올 것이다. 그러나 항구의 뱃고동이 목이 찢어지게 우는 것은,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늘도 아니 오더라고" 애절하고 서글픈 사연들 때문이다. 낙화한 동백꽃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오라 어서 오라" 애타게 부르다가 '피' 토한 붉은 '그리움의 언어'인 것처럼.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2-11 권성훈

[시인의 꽃]매梅 수선水仙 난蘭

영하 십오 도의 대한大寒도 다 지내고잦았던 눈도 어제부터 다 녹이고뜰 앞의 매화 봉오리도 볼록볼록 하고나한잠 자고 나면 꿈만 시설스러웠다이 늙은 몸에도 이게 벌써 봄 아닌가일깨어 손주와 함께 뛰고 놀고 하였다한 분盆 수선은 농주를 지고 있고여러 난과 혜蕙는 잎새만 퍼런데호올로 병을 기울여 국화주를 마셨다이병기(1891~1968)대한은 '큰 추위'라는 뜻으로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이며 음력 12월 섣달에 들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후다. 그러나 소한을 지나 대한이 일 년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한 것은, 절기가 중국에서 온 기준인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무렵이 더 춥다."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처럼 '영하 십오 도의 대한도 다 지내고 잦았던 눈도 어제부터 다 녹이고'있는 뜰 앞을 살펴보면 볼록볼록 움트는 것. 영원히 겨울 속으로 묻혀 버릴 것 같은 시간을 지나 "늙은 몸에도 이게 벌써 봄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밖에는 봄을 먼저 알리는 '매화' '수선화'가, 안에는 잎 새만 시퍼런 '난'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시인은 벌써 다시 올 봄을 위해 국화주를 마시며 벌그레한 생각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1-21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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