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8]에필로그

때로는 시로, 때로는 소설로다양한 인천지역 모습 만나는 계기매회 이야기 끌고 가는 캐릭터 등장시켜인천의 문학 뜻하는 '인문이'로 불러인류의 문화 '人文' 의미도 담아작가는 그 시대·환경·민중 앞에 서 있고작품은 그 시대·환경·민중의 거울 되어야긴 여정을 마치며기자와 기사도 그런 역할 할 수 있길 바라2014년, 1년 동안 인천을 실컷 읽었다. 취재팀은 그동안 매주 한 차례씩 이 꼭지를 만드느라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다시 펼쳐보니 부끄러운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문학을, 그 속에 담긴 인천을 가까이 했다는 자부는 크다.취재팀은 이 연중 기획시리즈를 통해 문학과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접점이 되도록 무던히도 애를 썼다.첫발을 떼던 날 지면에는 죽 늘어선 '인천의 책'을 바라보는 안경 낀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 캐릭터는 매주 모습을 바꾸었다.고려의 대문호가 되기도 했고, 조선의 인심 넉넉한 양반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갯가 사람들의 짠내를 붓에 담는 시인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검술을 익힌 임꺽정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옥살이 하면서 인천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백범 김구가 되어 인천을 다시 찾기도 했다. 돈이 없어 갓난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난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깨 처진 아버지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나라를 빼앗기고 힘 없는 조선 백성과 닮은 흑인으로 나와 그 아픔을 읊기도 했다. 수도권의 대표적 관광지로 부상한 월미도를 바라보는 부부가 되기도 했고, 인천 앞바다 등대 밑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기도 했다. 바닷가 섬 소년이 되어 놀기도 했으며, 빚덩이만 낚는 어부가 되기도 했다. 인천항 부두에서 등짐을 진 노동자이기도 했고, 또한 가련한 여공이 되기도 했다. 그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을 그린 노동 시인일 때도 있었다. 한반도에 첫 상륙한 미군이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그 미군에 몸을 팔아야만 했던 양공주가 되기도 했다. 발가락 잘리는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문둥이 시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이 되어 인천을 노래하기도 했다. 강화도의 갯벌을, 강화도의 역사를 읊은 시인이기도 했다. 석탄 열차에서 탄가루를 훔쳐내던 여자 아이가 될 때도 있었다. 소라의 발자국을 쫓던 꿈 많은 소년이기도 했다. 협궤열차에 몸을 실은 여객이기도 했으며, 판자촌 아이들과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일 때도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갈매기를 보면서 바다에 몸을 던진 전쟁 포로이던 날도 있었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죽은 아들의 유골을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뿌리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늙은 어머니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이 되어 인천항과 월미도를 노래하기도 했다.캐릭터는 1년 동안 참 많이도 바뀌었다. 이렇듯 인천의 다양한 모습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었다. 인천은 그렇게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문학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그 문학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인천이란 도시에 쌓인 시간은 의외로 두꺼웠으며 인천을 구성하는 공간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드넓었다.취재팀은 마무리 회의를 갖던 날, 1년이나 취재팀과 함께 한 이 캐릭터에 이름을 짓기로 했다. '인천의 문학' '문학 속 인천'이란 의미를 담은 '인문이'라 이름하기로 했다. '인문이'는 '인천의 문학'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문화'나 '인물과 문물'을 일컫는 '인문(人文)'이기도 하다.취재팀은 5월 1일자에 실은 엄흥섭(1906~1987)의 '작가론'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그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취재팀은 엄흥섭이 말한 '작가'와 '작품'이란 단어에 '기자'와 '기사'를 넣어 말하곤 했다. '기자는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그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기사는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1년 동안 이 난에 많은 관심을 보여준 독자들께 감사할 뿐이다.그래픽/박성현기자 글 = 정진오기자

2014-12-24 정진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자연·삶·역사… 한편의 詩가 된 '강화'

'강화도 시인' 함민복(53). 강화 태생은 아니지만 1996년부터 줄곧 이곳에서 살았고, 강화 이야기를 시로 쓰고 있으니 '강화도 시인'이란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그의 대표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도 강화 이야기이다. 그는 영락없는 강화사람이다.함민복의 고향은 충북 충주 노은면 문바위라는 작은 마을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 부담이 없는 수도전기공고를 다녔다. 졸업 후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 정도 근무했다. 퇴사 후 뒤늦게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고, 대학 2학년 때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성선설' 전문)함민복은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의 시집과 '눈물은 왜 짠가' '미안한 마음'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등의 산문집을 냈다. 그는 강화 이야기가 듬뿍 담긴 '말랑말랑한 힘'으로 박용래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등을 받기도 했다.함민복은 서울 달동네와 친구 집을 전전하다 1996년 9월 강화군 동막리 월세 10만원짜리 빈 농가로 이사 왔다. 그는 "과거 마니산에서 내려다본 강화의 풍경도 생각나고, 집도 구하기 쉬울 것 같아 강화로 왔다"며 "역사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있어서 글쓰기도 좋은 것 같았다"고 했다.함민복의 글에는 갯벌의 소중함, 강화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벽 밖에서 못 박을 위치를 잡기 위해 망치로 벽을 두드린다. 아니, 그쪽 말고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기준을 바다로 삼는 이곳 사내들처럼, 나도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나아가 시를 좀더 짧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중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일부분)그는 '물울타리를 두른' 강화의 갯벌 위에 오늘도 시를 쓴다. 밀물이 들면 그의 시는 바다가 되리라. 함민복은 내년쯤 동시집을 한 권 낼 생각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2014-12-17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7]'강화도 시인'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무엇을 만드는 법을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함민복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中함 시인 "강화도는 도서관이자 창작실" 20년 살며 문학적 소재 얻어서정·감성적 시어 잔잔한 울림… 개발압력·구제역 아픔 표출하기도관광객 유치 vs 경관 보전 딜레마 속 '원주민과 외지인 잇는' 다리 역할갯벌은 말랑말랑하다. 갯벌은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 하늘과 바다, 모두가 수평이다. 수직은 없다. 자꾸만 높아지는 빌딩이며, 내 것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네온사인이며 나를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갯벌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에 서면 높이 오르려 하는 인간의 수직 상승 욕망을 이해할 수 없다. 갯벌은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자궁과 같이 고귀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지난 12일 오후 3시 강화도 남단 갯벌에 섰다. 갯벌이 말을 걸어왔다.강화도에서 20년 가까이 살며 갯벌의 소중함과 가르침을 글로 쓰는 시인이 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53)이다. 그는 강화도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시어로 노래해 우리 가슴속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갯벌, 갯벌 속 어민, 구불구불 골목길 등 강화도의 모든 게 그의 문학적 토대다.강화군 선원면 한 찻집에서 만난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는 많은 생각을 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라며 "도서관이자 창작실이다. 글 소재를 주고 삶을 가르쳐 준 스승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또 "강화군 동막리에 살면서 문명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며 "층을 만들고 수직화되는 것의 대척점이 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쉽게 만들 것은/아무것도 없다는/물컹물컹한 말씀이다/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소금물 다시 잡으며/반죽을 개고 또 개는/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전문)강화도 남단 동막해변 인근에는 함민복이 강화도에 처음 자리잡아 13년 정도 산 동네가 있다. 그는 동막해변 갯벌에 관한 시와 산문을 여러 편 썼다. 동막해변 앞으로 갯벌이 드넓다. 그 너머로 장봉도, 신도, 시도, 모도 등 영종도의 '형제 섬'들이 가깝다. 겨울 갯벌은 조용하다. 농게, 칠게, 방게, 망둥이로 북적거리던 갯벌이 겨울잠에 들었나 보다.인천지역 갯벌 면적은 709.6㎢인데 이 중 34%가 넘는 243.6㎢가 강화군에 속한다. 강화 남단을 중심으로 한 갯벌과 저어새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돼 있다. 갯벌은 다양한 기능을 한다. 갯벌은 어패류 등 연안 해양생물의 산란장이자 염생식물의 서식지다. 저어새 등 철새들의 놀이터이자 번식장소이면서, 토양 침식을 방지하고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도 한다. 사람도 갯벌에 붙어 산다.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집들이 다 구멍이네/구멍에서 태어난 물들/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뻘 밭' 전문)강화도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젓새우, 숭어, 넙치, 우럭, 농어, 바지락, 모시조개, 백합, 굴, 낙지 등 다양하다. 장어는 더리미항과 초지항 등 일부 지역에서 잡히고, 석모도와 볼음도 해역에서는 꽃게와 민꽃게가 잡힌다. 신상범(66) 흥왕어촌계장은 "강화 남단에서는 망둥이, 젓새우, 숭어, 농어, 꽃게, 조개가 잘 잡힌다"며 "겨울에는 주로 굴을 따는데, 한강의 민물기 때문에 얼음이 나면 배가 못 나간다"고 했다.강화도는 저어새 등 철새들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칠게, 갯지렁이, 조개, 물고기 등 먹이가 풍부하다. 또 갯벌, 논, 숲 등 철새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도 많다. 저어새, 알락꼬리마도요, 뒷부리도요, 노랑부리백로, 오리, 기러기 들의 철새가 강화 갯벌을 찾는다.새들이 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다.큰 새들의 날개는 산을 닮았다/기러기가 날아올 때 선(線)으로 된 산도 함께 날아온다/갈매기가 머리 위를 지날 때 면(面)으로 된 산도 지난다//산이 운다/울며 날아가는 산(山)아!//사람들이 서로 껴안을 때/사람들의 팔도 산 모양인 것 너희들도 보았느냐('산이 난다' 전문)강화도는 섬이지만 농업이 발달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집은 9천세대가 넘는 반면 어가는 300세대가 채 안 된다. 어선 수는 지난해 420척에서 올해 400척으로 줄었다. 배 규모도 작다. 400척 가운데 399척은 10t 미만의 소형 어선이다. 강화도 어민들은 과거보다 어종과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어민들은 영종도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물 흐름이 바뀌었다고 얘기하는데, 기후변화와 남획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중략…)/뻘길 십 리 길 가물가물 멀기는 멀지 아느껴 힘들더라도/나도 그렇게 숭어 타작 좀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시다('어민 후계자 함현수' 중에서)'서해호' 선장 함현수(44)씨는 "날씨 등에 따라 매년 상황이 바뀌는데, 어쨌든 전반적으로 바다의 씨가 마른 것은 사실"이라며 "아버지 때는 꽃게가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요즘엔 민어 보기가 힘들고 망둥이도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바다와 갯벌만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강화도 남단에는 펜션이 즐비하다. 조망이 좋은 자리는 어김없이 펜션이 차지하고 있다. 함민복 시인이 살던 동막리 양철 지붕 집 자리에도 펜션이 들어섰다. 관광객 유치와 자연 경관 보전을 놓고 딜레마에 빠진 모양새다.함민복은 김포신도시 조성에 따른 개발 압력이 강화도까지 미칠 것을 우려하며 시 한 편을 썼다.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중략…)//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아파트 논이 생겨/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모방하게 되는 날/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김포평야 물 괸 논에 아파트 그림자 빼곡하다('김포평야' 중에서)강화 축산 농가들은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졸이게 된다. 강화도는 2010년 두 차례의 '구제역 파동'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강화도에선 그해 4~6월 돼지 2만3천437마리, 소 7천630마리 등 3만1천345마리를 살처분했다.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돼지 9천149마리, 소 2천56마리 등 총 1만1천399마리를 땅에 묻어야 했다. 구제역 여파로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식당과 숙박업소 등도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 애지중지 정성을 다해 키운 가축을 땅속에 묻어야 하는 축산 농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침출수, 아, 썩어 피 썩어서도/지상으로 오르지 말란 말인가//울음 무덤 위에/긴 장마('구제역 이후' 전문)함민복은 "구제역 파동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축이 매몰됐다"며 "인간이 생명을 함부로 해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람들은 침출수로 인한 오염이나 걱정하고 있더라. 생명체에 대한 폭력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강화도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수도로 가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충지 구실을 했다. 고려는 1232년 7월 염하(鹽河)를 건너 강화도로 천도했고, 그 뒤로 강화는 39년간이나 고려 왕도 구실을 했다. 초지대교 인근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19세기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 곳이다. 어업보다 농업이 발달한 이유도 고려·조선시대 식량 확보 차원에서 간척이 이뤄졌기 때문이다.강화도와 뭍은 강화대교(1997년 개통)와 초지대교(2002년 개통)로 연결된다. 1970년 개통돼 소임을 다한 옛 강화대교는 자전거와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강화 역사체험 누리길'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교통이 편리해진 만큼 외지인들이 강화로 많이 들어왔다.함민복은 초지대교를 바라다보며 연작시 '다리의 사랑'을 썼다.서로 자기 쪽으로 당기는 힘이 아니라/서로 연결하려는 의지로 다리는 존재한다('다리의 사랑1' 전문)함민복은 "근래에는 외부에서 오신 분이 많다. 원주민과 외지인이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있다"며 "대립할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함께할 수 있는 장이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강화도에서 20년 가까이 산 함민복은 어느덧 원주민과 외지인을 잇는 다리가 돼 있었다./글 = 목동훈기자▲ 인천 강화도 남단 동막해변. 바닷물이 물러서면 드넓은 갯벌이 다가선다. 바닷물이 다가서면 갯벌은 그곳에 숨는다. 시인 함민복은 갯벌이 '물나무' 같다고 했다. 뻘에 핏줄처럼 퍼져 있는 물길들. 산 위에서 보는 물길들은 물의 뿌리란 생각이 든다. 구불구불 영락없이 나무뿌리처럼 생겼다. 그 실뿌리들은 바다 쪽으로 커가면서 가닥과 가닥을 합쳐 점점 굵은 뿌리가 된다. 그러다가 큰 물줄기가 펼쳐지고 그 줄기 위에 푸른 '물나무'가 드넓다(산문집 '미안한 마음' 중에서). /임순석기자▲ 동막해변에는 함민복의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가 새겨진 돌판이 있다. 강화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 2011년에 만든 것이다. 시비를 세우지 않고, 평평한 원형 돌판에 시를 새긴 이유가 있다. 함민복은 돌에 글 새기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 '돌에'를 쓴 적이 있다. 또 여러 편의 시에서 문명화의 상징인 '수직'을 비판했다. 이런 연유로 시비 제작을 극구 사양했지만, 강화 라이온스클럽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타협점을 찾은 것이 바로 '수평한 시비'다.▲ 2002년 8월 개통된 초지대교. 1995년 민자유치사업(20년간 통행료 징수 후 기부채납)으로 추진되다 시공사 경영난으로 중단됐다. 1999년 인천시가 공사를 맡아 사업을 완료했다. 함민복 시인은 초지대교를 바라보며 연작시 '다리의 사랑'을 썼다.

2014-12-17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감동적 서사… 노동문학 자리매김

1980년대 인천의 노동판은 이른바 '서사의 시대'였다.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고 할 말도 많았던 시기였다. 인천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문학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인천 주안5공단 세창물산 여공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은 방현석(53·본명 방재석)의 소설 '새벽출정'(1989)이다. 앞서 유동우, 석정남의 노동수기가 본격적인 노동자문학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새벽출정'은 노동자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안착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새벽출정은 스스로 꿈을 꾸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의식변화를 감동적인 서사로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며 "방현석은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진 뒤에도 꾸준히 노동 관련 소설을 발표했고, 노동자문학을 개척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방현석은 1985년 중앙대 문창과 재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들어 갔다가 유치장에서 해태제과 여공들을 만났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무권리·저임금의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무작정 인천으로 떠나 공장에 취업했다. 학생 신분임을 드러내지 않고 인천 노동현장에서 뒹굴기를 몇 해, 방현석은 전공을 살려 세창물산 여공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그는 "'정의'라는 언어가 능멸당하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괴감을 느꼈다"며 "그렇다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고민했고 노동자의 투쟁은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방현석은 1994년 인천을 떠나 모교인 중앙대 앞에서 잠시 서점을 운영했고, 2004년부터는 중앙대 문창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1년 신동엽창작상, 2003년 오영수문학상, 2003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그는 여전히 인천을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방현석은 "소설은 경험과 철학이 동반됐을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된다"며 "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인천 생활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2014-12-10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6]방현석 '새벽출정'

주안5공단 '세창물산 여공들' 파업 이야기 학생신분 감추고 노동자로 살때 소재 얻어 송철순 추락사 계기… 노동계 전체로 확산 위장폐업 이어 산업체 학생 노조탈퇴 종용 1989년 2월 구속될 각오로 결의 '새벽출정'문제 심각성 알리고 노동운동 활성화 불씨 1980년대 후반까지 인천 주안5공단에 있던 세창물산 여공들은 깡다구가 세다고 해서 '깡순이'라고 불렸다. 김깡순, 이깡순, 박깡순 식이었고 "저기 깡순이 지나간다"고들 했다. '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에 실린 방현석의 노동소설 '새벽출정'은 세창물산 깡순이의 투쟁일기다. 소설은 1988년 노조를 설립하고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며 투쟁하던 중 사고로 숨진 '송깡순' 송철순과 회사의 위장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다.도자기 인형 생산·수출업체인 세창물산 작업 현장은 시너, 석유 등 각종 유해물질투성이였지만, 환풍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가스 가마의 뜨거운 열기에도 선풍기 없이 근무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하루 평균 11시간의 노동, 거듭되는 피로에 쌓일대로 쌓인 감정들과 지치고 야위어가는 몸. 신경은 점점 더 예민해져 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졸립고 피곤한 몸은 자판기의 130원짜리 질 낮은 커피로 일으켜 세우고 거듭 쌓이는 노동의 피로로 몸은 썩어들어가는 듯하다.이 세창물산이 소설에서는 '세광물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난 5일 소설 속 노조위원장 '미정'의 실제 인물 원미정(53·여) 전 인천시의원(현 부평문화재단 이사)을 만났다. 10년 전 정치판을 떠난 이후 세창물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란다."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세창물산에서도 파업이 일어났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요구조건 중 하나가 '쌀밥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밥은 죄다 시커먼 밥(잡곡)에 오징어국은 '오징어가 지나간 국'이었죠."1988년 6월 세창물산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조 설립은 역설적이게도 전체직원 300명 중 50명에 불과했던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남자와 여자의 급여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남자들의 남녀차별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파업이 오히려 여성노동운동으로 발전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당시 세창물산 임금은 초임 일당이 남자 4천400원, 여자 4천300원, 학생 3천770원이었다. 그때 담배 '88라이트'가 한 갑에 600원이었으니, 남자들은 담배 한 갑에 밥 두끼 사먹으면 끝나는 돈이었다는게 원 씨의 설명이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2013년 기준 1년차 제조업 근로자의 남자 평균 임금은 월 216만원, 여자는 월 160만원이었다. 요즘에도 남녀 차이가 크다.세창물산 근로자들이 당시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임금인상액을 산정했더니 1천700원이나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만큼 세창물산 노동자들의 삶이 비참했다. 노동자의 당연한 요구를 회사는 거부했고 깡순이들은 6월 28일 파업에 들어간 뒤 원씨를 위원장으로 한 노조를 설립했다.방현석이 새벽출정의 배경이 된 세창물산을 알게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6년 중앙대 문창과 학생 신분을 속이고 인천에서 노동자가 된 방현석은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인노협) 조직국장으로 일하면서 세창물산 투쟁을 지원했다. 그가 세창물산 파업을 도우면서 여공들을 대신해 쓴 유인물은 소설의 소재가 됐다.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집회 전날 노조 사무장 송철순은 해가 질 무렵 현수막을 걸기 위해 공장 2층 옥상에 올라갔다. '사장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님은 깡다귀다'라는 현수막을 걸고, 두 번째 현수막을 걸던 순간 공장 슬레이트 지붕이 주저 앉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를 다친 철순은 이틀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1988년 7월 17일 밤 9시45분, 마지막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철순은 스물여섯의 나이로 한많은 노동자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한끝을 놓지 않았던, 끝내 걸지 못한 현수막만이 뚫어진 지붕에 늘어쳐진 채 유언을 대신했다.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장내자!'철순의 죽음으로 세창물산의 싸움은 인천 노동계 전체의 싸움으로 확산됐다.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장례식장에 방문해 힘을 보탰고, 집회를 위한 장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파업은 임금 1천400원 인상으로 마무리 되는 듯했다. 하지만, 회사는 임금 인상으로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철순의 49재 추모제 행사가 있던 날 공장 문을 닫아버렸다. 위장폐업이었다. 세창물산 깡순이들은 다시 공장에 모여 길고 긴 농성을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인천에서는 세창물산뿐 아니라 신립섬유, 삼효정공 등 공장들이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폐업을 선택했다. 1988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그 해 노사분규로 폐업한 회사 25곳 중 6곳이 인천지역 회사였다.농성이 장기화되자 힘 없는 산업체 학생들에 대한 공격이 들어왔다. 당시만해도 인천여상, 예화여상, 한진실업학교, 문성여상 등 산업체 학교는 지방의 가난한 학생을 데려와 밤에는 공부를 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게 해줬다. 세창물산에도 여공 200명 중 80명이 이 같은 산업체 학생들이었다. 회사와 학교 측은 산업체 학생을 투쟁현장에서 이탈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에 맞선 언니 깡순이들은 월급이 끊긴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전세방 보증금을 빼기도 하고, 결혼적금을 깨기도 했다.농성에 참여한 산업체 야간학생들은 매일같이 교무실에 불려다녔다. 농성이탈과 노조탈퇴를 종용받지 않은 조합원은 없었다. 수업시간에도 세광 조합원들만 지적당했고, 수모를 겪었다. "하라는 공부나 잘해. 그렇게 해서 언제 공순이 신세를 면할래."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이들 산업체 학교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각각 특성화고등학교나 학력인정 고등학교 등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은 없다.세창물산 깡순이들은 지금의 동구 현대제철·서구 가좌분뇨처리장에서 인천교를 거쳐 주안5·6공단으로 이어지는 갯골인 '똥바다'에서 갈매기를 보며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똥바다에 머무는 갈매기 꼴이 꼭 자신들과 닮았다고 본 것이다. 지금 똥바다는 모두 매립돼 사라졌고, 세창물산 자리에는 다른 공장이 들어섰다."저 갈매기들은 뭘 먹고 살까.""똥바다엔 물고기도 살지 않을 텐데, 식당에서 버린 짬밥을 먹고 살까.""저 갈매기들은 아마 썰물을 따라 나가면 드넓은 바다가 열린다는 걸 모를 거야. 노동자의 운명은 가난과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처럼 똥바다가 바다의 전부라고 생각할거야."그래도 멀리 바다가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길고 긴 투쟁을 통해 세상엔 모순이 많다는 걸 알았고, 싸움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1989년 2월 20일 새벽 세창물산 깡순이들은 촛불에 불을 붙이고 '부모님 전상서'와 혈서를 썼다. 모두 구속될 각오를 하고 결의를 한 것이다. 소설 제목 '새벽출정'이 있던 날이다. 이들은 이날부터 인천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급기야 3월 16일 국회 노동위원회 이강희(민정당·인천 남구을) 의원 여의도 사무실을 점거했고, 이 사태로 원 씨 등 4명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됐다.이들의 투쟁이 결국 세창물산의 공장 재가동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위장폐업 인정, 일간지 공개 사과문 게재, 파업기간 8개월분 평균임금 전액과 해고수당 6개월분 지급, 244일간의 파업비용 전액지급 합의를 이뤄냈다.세창물산 노조의 투쟁은 무엇보다 위장폐업의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알렸고, 인천지역 노조 연대투쟁과 신규 노조 결성을 위한 거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위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의 개입 없이 노동자 스스로 '민주노조'를 결성한 것도 큰 의미였다. 특히, 해고수당의 30%인 2천700만원을 지역 노조기금으로 내놓은 것은 인노협 사무실이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졌다.조성혜 전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은 "세창물산 노조는 투쟁과정에서도 조합원들의 의견과 힘을 잘 결집해 낸 가장 민주적인 노조였다"며 "투쟁의 목표나 실천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움직여 단결의 힘이 매우 강한 노동조합이었다"고 했다.작가 방현석이 말하는 세창물산 노동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방현석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며 "그 시대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의 희망을 갖고 싸웠던 사람들이 나를 감명시켰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됐다"고 말했다.글 = 김민재기자 ▲ 1980년대 후반까지 세창물산이 있던 인천 주안5공단 전경.

2014-12-10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장소가 곧 詩' 변두리지역 풍경 생생

'반성의 시인' 김영승(56)은 1980년대 후반에 일약 스타급 시인으로 떴다. 1987년 민음사가 낸 시집 '반성'은 출간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소위 '저속한 언어'로도 좋은 시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김영승이 증명했다. 외설 논란 속에서도 이 시집은 꾸준히 팔렸고 현재까지 17쇄를 찍었다. 민음사는 1980~90년대 '민음의 시'가 배출한 대표 시인 중 하나로 김영승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반성' 이후에도 그의 시 쓰기는 계속되어 왔다. 지금껏 8권의 시집과 1권의 산문집을 냈다. 지훈문학상(2013년), 불교문예작품상(2010년), 현대시작품상(2002년) 등을 수상했다.김영승은 '반성의 시인'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욕설, 조롱, 풍자, 야유 등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시에는 '토포필리아(topophilia)', 다시 말해 '장소애(愛)'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천 남동구 구월동, 간석동, 중구 유동, 연수구 동춘동 시절의 풍경이 시편에 가득하다. 시인은 "장소가 곧 시(詩)"라고 말한다. 시의 초고를 동네별로 분류해서 보관할 정도다. 1980년대 이후 인천 변두리의 풍경이 생생하다. 더 넓게 보면 시인은 인천 도시 변천사의 굵직한 물줄기를 통과하며 시를 써왔다. 우리가 김영승의 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김영승 시 속의 시인과 이웃은 한결같이 가난하지만 그 가난을 묵묵히 견딘다. 그는 "사람들은 내가 가난하기를 원하겠지만, 건전하고 건강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가가 아니다"며 "가난한 상태를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통과하는 거다"고 말했다.그의 시집 8권 중 '반성', '화창'(2008년), '흐린 날 미사일'(2013년) 등 3권을 빼면 모두 절판됐다. 나남출판사는 나남시선으로 김영승 재출간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이르면 내년 봄에 시집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집뿐 아니라 산문과 미발표 원고, 콩트, 소묘 등을 묶어 낼 것이라고 한다. /김명래기자

2014-12-03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5]김영승이 말하는 '시와 삶의 자리'

판자촌 '붉은 고개' 위치한남동구 구월동에 살다초여름 거센바람 같은 개발 탓또다른 변두리 간석동으로비 새는 반지하, 잠수함 비유 눈길결혼 후 동춘동 임대주택 둥지그의 시편은 인천의 도시 변천사시인 김영승(56)은 가난했다. 어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 남구 용현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남동구 구월동, 간석동, 그리고 다시 중구 유동으로 되돌아갔다. 1990년대 중반 연수구 동춘동의 임대아파트를 얻기까지 가난한 시인과 그의 가족은 '도시 유목민' 신세였다. 그 고단한 여정이 김영승의 시(詩)에 녹아 있다. 도시에서 가난한 가족이 있을 곳은, 늘 변방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 "내 20대의 젊음이 맞물려 있는 곳"이라고 말한 남동구 구월동. 1980년 무렵의 구월동은 지금처럼 시청과 교육청, 경찰청, 고용노동청 등이 몰린 행정타운이 아니었다. 변변한 가게조차 없는 과수원과 농장뿐인 그저 그런 농촌 마을이었다. 일부 지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엄마들은 동네 과수원에 나가고, 청년들은 소래포구에서 하역 일을 했다. 불과 30년 전 이야기이다.가을인데 또 겨울인데 / 아무것도 없는데 // 콩깍지 턴 참깨단을 태워 / 까맣게 구운 감자 한 알 / 호호 불며 먹고 있는 젊은이 ('九月洞 金氏' 중에서)여름 내내 九月洞 동산 풀숲에서 꼬마들에게 매미나 잠자리를 잡아주며 / 동네 과수원 머리수건 쓰고 일하는 그 애들 엄마들한테 수제비나 얻어먹으며 / 道를 닦다가 ('술꾼이 있는 곳에' 중에서)구월동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 구월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됐다. 당시엔 '구월 신시가지'라고 불렀다. 중구에 있던 인천시청이 구월동 신청사로 옮겨 왔다. 도시의 중심축이 뒤바뀌었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인천시 신청사 오늘 개청'이란 제목의 1985년 12월 9일자 경인일보 기사는 구월동 청사를 "2000년대를 위한 이상적 도시 건설의 산실"이라고 썼다. 이날자 경인일보 관련기사를 보면 옛 시청사(현 중구청사)는 인구 10만을 기준으로 건설돼 여러 차례 증축 공사에도 불구하고 인천 100만 시대 인천의 행정 수요를 충족하기 힘든 공간 구조였다. 또 중구에 몰려 있던 인구가 인천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는 추세에서, 인천의 한복판인 구월동에 시청사를 건설했다.구월동에 흘러온 이들은 또 다른 변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이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구월동 개발은 '초여름의 거센 바람'처럼 낯설고 당혹스러웠다.붉은 고개 / 그 붉은 흙먼지 휘몰아치는 언덕을 넘어 왔다 / 오늘따라 초여름의 끈적끈적한 훈풍은 / 통통하게 살찐 여인의 통치마를 / 까뒤집을 만큼 거세게 불고 있다 / 교육청과 시청 그리고 사통오달 뻗어갈 / 도로의 건설을 위해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 중장비 차량들은 아비규환 지옥처럼 / 꽥꽥거린다 여기도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데 / 어처구니 없는 소음과 비켜갈 곳 없이 / 씹어뱉어 놓은 아슬아슬한 황톳길 / …(중략)… / 어찌하여 내가 사는 이곳만 생선토막처럼 / 길을 끊어 놓고 그리고 살아가라고 하는가('계십니까' 중에서)1980년대 동인천과 범아가리(호구포)를 오가는 19번 버스의 구월동쪽 정류장은 '붉은 고개', '주막 거리'였다. 붉은 고개라 불린 동네는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지금 대우재 휴먼시아와 중앙공원 자리다. 1970~80년대 구월동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차안수(55) 연수구 청학동장은 "중구 북성동쪽에서 개발에 밀려서 이곳으로 빈민들이 몰려왔는데 하루 자고 나면 흙벽돌집이 새로 생겼다"며 "옛날 공동묘지 자리였는데 출입구를 가마니로 막아두고 묘지 위에 지붕을 얹어 사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주막거리는 현 구월동 길병원 자리다. 어두워지면 구월동에서 불이 켜진 유일한 공간이었다. 단층 슬레이트 건물에 쌀집과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가게는 대폿집을 겸했다. 구월동 사람들이 시내에 나가거나 집에 들어올 때는 도로 구조상 주막거리를 거쳐야 했다. 철거 문제로 붉은 고개 주민들은 2000년까지 당국과 싸움을 벌였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붉은 고개 자리가 지금의 중앙도서관 옆 중앙공원이다.구월동을 떠난 김영승 가족의 새 둥지는 남동구 간석동 반지하 셋방이었다. 시인은 태풍에 비가 새는 반지하방을 잠수함으로 묘사했다. 물 새는 반지하방을 잠망경이 망가져 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잠수함으로 여겼다. 반지하의 고된 삶을 익살스럽게 반전시키는 게 시인이기도 하다.함장님 잠수함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요 / 물이 새들어와요 //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 이 잠수함 // 으음…… / 그래도 의연히 / 계속 잠수할 것 / (이상) ('반성 764' 중에서)1986년 아시안게임을 한 달가량 앞두고 찾아온 태풍 베라. 유가 하락, 달러 약세(엔화 강세), 금리 인하 등 3저 호황으로 '선진국 문턱이 눈앞이다'는 말이 TV와 신문지상을 뒤덮었지만, 월세 6만원도 못 내는 반지하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6만원이면 당시 24평형 중앙난방 아파트의 겨울철 한 달치 난방비 수준밖에 안 됐다. 반지하 창문 너머는 늘 공사판이었다. 김영승이 반지하에 살던 지금의 올리브백화점 주변에 광명아파트(1980년 입주), 우신아파트(1981년), 희망아파트(1983년), 동암아파트(1983년), 인향아파트(1986년), 동진아파트(1988년)가 속속 들어섰다. 아파트가 주위를 에워쌀수록, 반지하 월세방은 계속 가라앉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절망적 순간에도 시인의 기지는 빛난다. 시인의 눈에 방 안의 선풍기는 '반지하 잠수함의 스크류'가 되었다. 어느날인가는 그 선풍기에서 인간적 냄새까지 맡았다. 그 유명한 김영승의 '선풍기詩'가 이때 탄생했다.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왔다. //…(중략)…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 공손하게 없드려 두 손으로 끄자 ('반성 743' 중에서)시인은 1989년 당시 인천교대 학생에게 소개받은 여성에게 밴댕이집에서 '너 나랑 결혼해라'고 통보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결혼식을 올렸다. 당당했던 프러포즈와 달리 신혼집은 초라했다. 배다리 철길 옆 대장간과 철공소가 많았던 동네의 한 구석, 중구 유동 4번지 1통 4반 11호. 시인 말대로 하면 "귀신 몇 뛰쳐 나올 만한 폐가"였다. 이때 스스로 호를 다왜당(多歪堂)이라고 지었다. 집의 문짝과 지붕, 골목길이 모두 기울거나 비뚤어져 있어서였다. 다왜당 시절의 시는 가난하면서도 따뜻하다. 울림도 더 깊다.밥을 먹어도 이 여름 / 얼음 띄운 맑은 물에 반듯하게 썬 오이지 / 그렇게 먹고 있는 한낮 // …(중략)… // 인천에서도 배다리 그 도원고개 / 初伏 지난 이 痛快한 날 / 닭 한 마리 사다가 놓고 아내는 마늘을 까고 있구나 // 어린 아들은 부엌에서 목욕을 하고 / 나는 어느 꽃잎 어느 날개 속에 / 이들을 포근히 뉠꼬 ('꽃잎 날개' 중에서)무슨 재주가 있었는지, 아내가 신문을 보고 신청한 5년 임대 주택에 당첨됐다. 그렇게 1995년 연수구 동춘동 동남아파트에 입주했다. 연수택지는 한국토지개발공사가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발했다. 반농반어의 갯마을은 아파트숲으로 탈바꿈했다. 구월동, 간석동에서처럼 시인은 동춘동 아파트에서의 삶도 기록했다. 가정의 달인 5월 임대료·관리비를 내지 못해 강제철거당한 이웃의 젖은 가재도구('IMF 閑情')며 '손가락 두 개가 잘린 연안부두 가난한 선원의 술주정('인생')이며 가난한 시인의 눈에서는 모든 게 시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가 된 연수구의 임대아파트는 선학시영, 연수시영, 연수주공 등 약 4천 세대다.동남아파트 인근 청량산과 봉재산의 이야기도 김영승의 시에 있다. 시집 '흐린날 미사일'의 표제작에는 '봉재산 미사일 사건'이 등장한다. 1998년 12월 5일 오전 봉재산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멀리 날기도 전에 동네 상공에서 폭발하면서 파편 2만개 가량이 반경 10㎞ 안에 쏟아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근처에 미사일기지가 있는 줄도 몰랐던 주민들은 전쟁이 난 듯 혼비백산했다. 이 사건 이후 봉재산 방공포 기지이전 여론이 거세졌고, 2005년 영종도로 옮겼다. 봉재산 미사일 사건이 없었다면, 송도국제도시 주민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방공포의 포문과 마주보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김영승은 '삶의 자리로서 문학'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썼다. 김영승의 시편은 그대로 인천의 도시 변천사다./글 = 김명래기자▲ 지난 2일 오후 김영승 시인이 인천시 구월동 중앙공원에서 인천시교육청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980년대 이곳은 과수원과 농장이 몰린 인천의 변두리였다. /조재현기자

2014-12-03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파도·노을… 섬이 키운 소년감성

시인 장석남(50)은 인천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덕적도 서포리 해변의 파도 소리, 찬란한 노을, 바닷새의 울음이 '섬 소년'의 감성을 자극했고,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장석남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뭍으로 나와 송현초교를 다녔다. 인천남중과 제물포고를 거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그는 고교 시절에 신포동, 홍예문, 자유공원, 제일교회 옆 돌계단 등지를 걸으며 시인을 꿈꿨다.인천은 내 청춘의 유적지라고 해도 된다.(중략)이십여 년 전 청년기의 유적들, 그게 어디 내 추억만의 공간일까만 그 골목에서의 비틀거림이 그립고 푸근한 것은 내 뼈다귀에 그 거리가 새겨진 때문일 것이다.(산문집 '물 긷는 소리' 중 '한 장, 뱃고동의 지리부도')장석남은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그리고 김수영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미당문학상(2010), 김달진문학상(2012)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장석남의 작품에는 '인천'이 있다. '군불을 지피며' '기압골의 집' '내가 듣는 내 숨소리' '한진여' '솔밭길' 등은 덕적도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며 쓴 시다. 인천시내가 배경이 된 작품으로는 '소래라는 곳' '버스 정류장 옆 송월전파사' '송학동' '돌의 얼굴'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 등이 있다.장석남은 "내 작품에는 실명으로든 그렇지 않든, 심상의 고향은 인천과 덕적도에 닿아 있다"며 "소재가 인천이 아니더라도 늘 인천의 향기와 냄새, 리듬이 묻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 바다, 썰물과 밀물, 돛배, 뱃고동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장석남은 2003년부터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목동훈기자

2014-11-26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4]덕적도가 키운 시인 '장석남'

20대에 등단… 시집 7권·산문집 2권 펴내유년시절 외로움 달래주던 공간이 모티브덕적면 북리는 한때 민어 파시로 명성 떨쳐홍예문·제일교회 옆 돌계단·자유공원 등옛 개항장 거리 거닐며 '시인의 꿈' 키워인천은 바다, 섬, 포구, 개항장, 빈민가, 노동판 들이 얽힌 공간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잘도 섞였다. 인천은 그만큼 다양한 문학적 모티브를 준다. 혹은 아름답기도 하고, 혹은 서민의 애환이 철철 넘치기도 하고, 혹은 민족의 아픔에 치를 떨게도 한다. 인천은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아프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 사무치게 한다.외지고도 외진 서쪽 바닷가 섬마을에 수줍음 많은 소년이 살았다. 파도소리를 듣고 자란 소년은 뭍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송학동 홍예문과 교회 옆 돌계단 등 옛 개항장 거리를 걸으며 시인을 꿈꿨다.덕적도 출신 장석남(50)은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등단해 어느덧 일곱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장석남의 작품은 고향인 덕적도와 인천에 닿아 있다. 지금도 그는 제주도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도 덕적도의 해변을 생각한다. 장석남은 "덕적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시 쓰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며 "지금도 유년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덕적도는) 내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밑그림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지난 22일 장석남의 고향이자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된 덕적도를 찾았다. 덕적도 도우선착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10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9시에 여객선을 탔으니, 1시간 남짓 걸렸다. 관광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2대의 공영버스(서포리행·북리행)와 횟집들이다. 길바닥에서 도다리, 우럭, 낙지, 소라 들을 파는 노점도 눈에 띈다. 도우선착장 건너가 소야도(蘇爺島)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섬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는 그 소야도다. 덕적도와 소야도 사이 해협을 '독강'이라고 부르는데, 이곳 물살이 여간 거센 게 아니다.덕적 독강 부두에서/우럭 회 썰어놓고 먹다/소주가 달다고 말하니 갑자기 옛 하루가 돋아나/하얗게 할아버지 한 분/돛 펴고 노 저어 오시네/멀리 당진(唐津)이 이웃처럼 가까이 보이네//지나가던 어린아이/노래 음절 맞지 않네//어깨 위의 듬성듬성 옷 기운 자국 보며/씀바귀처럼 웃네//웃음 이내 식어 노을로 뻗어가네('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중 '독강에서')날씨가 좋으면, 덕적 독강에서 충남 당진이 보인다고 한다. 덕적도는 인천과 경기 화성, 충남에 둘러싸인 모습이다. 과거, 덕적도의 뱃길은 세 방향으로 나 있었다. 인천 직통 길, 화성 남양반도 가는 길, 충남 당진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중 인천, 당진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가장 많이 이용됐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덕적도 방언에는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덕적도를 '충청도의 서산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했다.섬에서 맞는 겨울은 더욱 춥다. 덕적도 역시 그렇다. 겨울비가 지적지적 내려 어느새 웃옷을 적신다. 찬 바닷바람이 몸 주위를 맴돌더니 귓속까지 들어와 웅웅 소리를 낸다. 바람이 몰고 온 파도는 갯바위에 부딪혀 하얀 거품을 내며 부서진다. 섬에서의 겨울이 유난히 추운 것은 매서운 바닷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섬에 깊이 밴 적막함이 낯선 이를 더욱 춥게 만드는 것이다. 섬은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 그래야 섬이다. 외지인들에게 서포리 해변은 휴가철이나 주말에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다. 하지만 '섬 소년'에게는 외로움을 달래 줄 일상의 공간이었다.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와서 놀더라/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해거름을 넘길 때/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以前이/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중 '德積島 詩' 중에서)덕적도의 행정구역은 진1·2·3리, 서포1·2리, 북1·2리로 나뉜다. 장석남이 태어나 자란 곳은 서포1리 마을로, 서포리해수욕장이 유명하다. 반달 모양으로 펼쳐진 길이 약 1.5㎞의 서포리 해변. 그 뒤를 해송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고운 모래밭에 누군가 발자국 하나 새겨 놓았다.물이 들어오면 바닷속으로 잠기고, 물이 빠지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암초가 있다. '한진여' 또는 '산진여'라고 불리는 암초인데, 지금 그 위에는 등표(燈標)가 서 있다. 서포리 해변에서 이 등표를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문갑도, 저 멀리 오른쪽으론 굴업도가 흐릿하게 보인다.나는 나에게 가기를 원했으나 늘 나에게 가기 전에 먼저 등뒤로 해가 졌으며 밀물이 왔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알았으나 길은 물에 밀려가고 물 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갔다/(중략)/나는 나인 그곳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했다/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 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침묵은 늘 전위 속에만 있다는 것을('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중 '한진여')큰 섬에서는 보통 농사도 많이 짓는다. 덕적도는 그러나 산세가 험준해 농업보다는 어업이 발달했다. 특히 덕적면 북리는 과거 민어 파시(波市)로 명성을 떨쳤다. 파시로 돈이 돌자 포구 주변에는 다방, 술집, 여관 들이 생겨났다. 돈이 많아 서울, 심지어는 일본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기도 했다.덕적군도의 어업 전진기지는 굴업도였다. 하지만 1923년 8월 굴업도 내항에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쳐 큰 피해가 발생한 이후, 굴업도를 피해 덕적도 북리(북항)로 어선들이 몰렸다. 그해 8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굴업도에 13일 아침 해일이 일어나 200여 척의 배가 파손되고 선원 1천200여 명이 행방불명됐다. 파시촌의 가옥과 상점도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일제는 추후 120명 정도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집계했다. 덕적도에서도 풍랑에 의한 크고 작은 조난사고가 잇따랐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가도 집어삼킬 듯 돌변하는 것이 바다다.불현듯/비 가득 머금은 먹구름떼 몰린다/일손 놓고, 넋 놓고/바라보는/할머니 눈매/위에 흰 돛배 하나 떠서/위태롭다//여기는 모두/선상(船上)이다('젖은눈' 중 '비 가득 머금은 먹구름떼를 바라보는 할머니 눈매')남획으로 고기 씨가 마르고 1970년대 들어 선주 대부분이 인천으로 이주하면서, 덕적도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 북리는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일 뿐이다. 민어잡이배로 가득 찼던 '북항'은 선박의 피항지로만 사용되고 있다. 바닷물이 빠져 시꺼먼 갯벌을 드러낸 포구의 모습은 황량하기까지 하다.장석남의 할아버지도 뱃일을 했다. 어린 시절, 배를 밀고 맸던 시인의 기억은 그대로 시가 되었다.마당에/綠陰 가득한/배를 매다//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끝에/몇 포기 저녁별/연필 깎는 소리처럼/떠서//이 世上에 온 모든 生들/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영혼/혹은,/갈증//배를 풀어/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곧 오리라//오, 사랑해야 하리/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뒷모습들('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중 '마당에 배를 매다')장석남은 서포초등학교(1992년 2월 폐교)를 다니다 6학년 2학기 때 송현초교로 전학을 갔고, 이후 인천남중과 제물포고에 진학했다. 송현동과 화수동 셋방을 거쳐 도화동 집에서 근 십 년을 살았다. 홍예문, 제일교회 옆 돌계단, 자유공원이 있는 송학동의 분위기가 좋아, 그곳에서 한때 자취를 하기도 했다.제일교회 옆 돌계단은 개항기에 조성된 '각국 조계지 계단'이다. 그 계단 주변에는 독일인 헤르만 헨켈(H.Henkel)의 집, 중국인 사업가 우리탕(吳禮堂) 집 들의 서양식 주택이 있었다. 현재 헨켈 집과 우리탕 집 자리에는 각각 제일교회와 동국빌리지(공동주택)가 들어서 있다.제일교회 옆 돌계단에 서면 인천항과 월미도 전경이 펼쳐진다. 자유공원 광장에서보다도 인천항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장석남은 제일교회 옆 돌계단에 앉아 항구를 내려다보며, 저 먼 섬에서 인천으로 처음 오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장석남은 거기서 시 '송학동'을 잉태했다.계단만으로도 한동네가 되다니//무릎만 남은 삶의/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고동이 올라오는 그곳은/어느 황혼이 섭정하는 저녁의 나라일까//무엇인가 막 쳐들어와서/꽉차서/사는 것이 쓸쓸함의 만조를 이룰 때/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가파름만으로도 한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돌멩이처럼 생각에 잠긴다('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중 '송학동1')/글 = 목동훈기자▲ 고운 모래밭이 1.5㎞ 정도 펼쳐진 서포리 해변. 시인 장석남은 서포리 해변 뒷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임순석기자▲ 장석남이 6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서포초등학교 정문 모습. 이 학교는 덕적도의 학령 인구가 줄면서 1992년 2월 폐교됐다. 현재 덕적도에는 덕적초중고등학교 1개교만 있다. 학생 수는 초등학생 31명 등 89명이다.▲ 인천 중구 송학동 제일교회 옆 돌계단(각국조계지계단)에서 내려다본 모습. 인천항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민어 파시로 어선, 사람, 돈이 넘쳤던 북리 북항의 과거▲ 도우선착장에 있는 '민어 어부상'. 덕적도가 민어 파시로 명성을 날렸을 때를 나타내는 증표다. 현재 덕적도 인구는 약 1천400명, 어선 수는 8척(낚싯배 제외)에 불과하다.▲ 현재. 지금은 타지 어선들의 피항지로 이용되고 있다.

2014-11-26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동일방직, 노동자 문학의 시발점

노동자 문학은 노동자를 다룬 문학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든 문학이다. 노동자가 직접 겪은 희로애락의 이야기는 특별한 수사(修辭)가 없어도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1978년 동일방직 해직노동자들이 만든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가 꼭 그렇다. 부당 해고와 그에 맞서는 농성을 하면서 여공들이 직접 했던 말, 들었던 말, 속으로 했던 말을 한데 모았더니 하나의 연극 대본이 완성됐다. 아무리 외쳐도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연극이 되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희곡의 배경이 된 동일방직은 인천 노동자 문학의 시작을 알린 곳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30년대 근대 노동 문제를 다룬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동일방직의 전신 도요오(東洋)방적이 배경이었다. 인천을 대표하는 노동시인 박영근도 인천 만석동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동일방직 여공들과 만나면서 노동자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대본을 직접 쓰고 연극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던 동일방직 해직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산문과 시로 엮어 책을 내기도 했다. 해직노동자 석정남이 쓴 수기 '공장의 불빛'(1984·일월서각)과 정명자 시집 '동지여 가슴을 맞대고'(1985·풀빛)는 당시 대표적인 노동자 문학으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이후 인천 노동자 문학의 계보는 '쇳물처럼'(1986)의 정화진, '새벽출정'(1989)의 방현석 등으로 이어졌다.'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대본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에 일부 실린 것을 1992년 민족극연구회가 기관지 '민족극과 예술운동' 창간호에 전문을 소개하면서 재조명됐다.창간호는 지금 구하기 어렵지만, 민족극 연구자 이영미가 2011년 펴낸 '구술로 만나는 마당극' 제 1권에 대본 전문이 수록됐고, 해설도 곁들여져 있다.30여 년 전 연극은 사실 대본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엉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 위의 여공과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문학의 개념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공들이 관객의 마음을 훔친 이유는 관객이 공감하는 '내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리라. /김민재기자

2014-11-19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3]노동자 문학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똥물사건 등 동일방직 해고사태 다뤄대학생들 권유에 연극으로 '투쟁'대본은 해직자 석정남씨 일기장 바탕당시 제적생 박우섭 남구청장 집필노동자들이 살 붙여 능동적 의사표현분노·동지애, 민주주의사회 기틀로1978년 9월 22일 오후 7시30분 동일방직 해고근로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서울기독교회관에서 20대 초반의 여공 10여 명이 수줍게 무대에 올랐다. 인천 동일방직 해고사태를 다룬 연극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가 초연되던 순간이다.여공들은 긴장한 나머지 대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순서를 헷갈려 앞뒤가 뒤바뀌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21일 동일방직 회사 측이 노동조합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여공들에게 똥물을 뿌린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재연되자 무대에 오른 여공들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해설자:겨우 달아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여공에게까지 똥걸레를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직성이 안풀려 달아나는 여공에게 똥통을 머리에 뒤집어 씌웠습니다.여공3:경찰 아저씨 도와주세요!경찰3:야이 쌍년아! 입닥쳐! 있다가 말릴거야(똥을 뒤집어 쓴 그 여공만 무대에 남고 모두 퇴장한다)여공3: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여공2:어머니!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5막1장 中>여공들의 울부짖음에 관객석도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고, 무대에 올려진 현수막을 떼어 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동 삼권을 보장하라! 똥을 먹고 살 순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공연장이 시위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변을 감시 중이던 100여 명의 경찰은 소란이 나자 회관으로 난입해 관련자를 무차별 폭행하고 연행했다. 5막 16장의 이 연극은 이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거리로 내몰린 여공들이 왜 무대에 올랐던 것일까.36년 전 그날 연극무대에 오른 동일방직 해직노동자 석정남(58·여)씨를 지난 10일 충청북도 증평군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석씨가 동일방직에 다니면서 쓴 일기장은 당시 잡지 월간 '대화'에 소개되면서 이 연극 대본의 바탕이 됐다.1975년 3월 어느날 충청북도 충주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스무 살 석씨는 병든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친구가 있는 인천으로 무작정 왔다. 석씨가 친구의 소개로 입사하게 된 곳은 인천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공장 '동일방직'이었다. 이 공장은 1934년 일제강점기 '도요오(東洋)방적'에서 출발했다.이때만해도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했던 소녀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공장뿐이었다. 공장의 전체 직원 1천300여 명 중 1천200여 명이 여자였다. 석씨는 "심지어 나이 어린 소녀들조차 아는 언니의 이름을 빌려 취업하기도 했다"고 전했다.인천시교육청 통계자료를 보면 2013년 인천지역 고등학교 여자 졸업생 1만6천932명 중 기계조작·조립분야로 취직한 학생은 376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니 중고생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힘든 공장 막노동을 한다는 것은 먼 나라 얘기가 되었다.공장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하루 3교대의 고된 작업에 졸다가 실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반장과 조장, 담임의 호통이 이어졌다. 그래도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뎠다. 그땐 그렇게 일하다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만 잘 가면 되는 줄 알았다.여공1:(실을 묶다가 여공2를 보고 꼬집는다) 얘, 졸지 마. 아직 새벽 5시가 되려면 멀었는데.여공2:응. (놀라며)여공3:얘, 빨리 틀을 살려. 조장한테 들키면 또 야단난다.여공1:아까 담임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잔뜩 노려보고 가더라 얘. 전에는 하루에 한 번 정도 들리던 사람이 요새 몇 번씩 지나가니 조심해.여공3:그래. 조장한테 걸리는 건 약과야. 부서를 이동시키던지 면을 빼는 자리로 쫓겨나.여공2:(일을 하다 말고 잠을 쫓으려고 고개를 흔든다) 언니 자꾸 졸음이오니 어떡하지. 지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올 수 없을까?<2막1장 공장생활 中>석씨는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것이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의 단초가 될 줄 '스무 살 정남'은 몰랐다."공장 들어가고 어려울 땐 일기가 하나의 위안이었어요. 당시 힘들었던 하루를 푸념하고 희망을 일기장에 썼던 거예요. 저녁에 '그 짓'을 하고 나니까 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일기에 멋도 부려보고, 슬픈 척도 해보고…. 일기는 내 친구였어요."석정남 씨는 해직사태 이후 인천의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 서른 살 무렵 고향 충청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의 '동지'들은 30년 넘게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석씨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동일방직에서 만난 오랜 친구 안순애씨와 김영순씨도 함께 나왔다. 한꺼번에 3명의 동일방직 여공들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기대하지도 않았다. 김영순 씨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연극 무대에 올랐던 얘기를 계속했다. 여럿이 하는 이야기는 훨씬 더 입체적이게 마련이어서 셋이 늘어놓은 연극 얘기는 마치 당시 무대 위의 상황을 펼쳐보이는 듯했다.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똥물사건 직후인 1978년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장에서 시위를 벌인 뒤,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이들이 회사의 복귀 명령을 거부하자 회사에는 석씨를 비롯한 124명의 해고자 명단이 대문짝 만하게 나붙었다.안 씨는 "우리가 끝까지 싸웠던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끈끈한 동지애가 더 큰 이유였다"며 "시골에서 올라와 고생한 언니·동생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이때부터 동일방직 해직노동자들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석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백수가 되니까 결속력도 떨어지고 매일 술이나 마시게 되고 나태해지던 참에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동일방직 문제를 다룬 연극을 하자고 찾아왔다"며 "동일방직 사건을 외부에 알리고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는데 제격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응했다"고 했다.대본은 당시 서울대 제적생으로 탈춤과 마당극 등을 하던 속칭 '딴따라 패'에 있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이 썼다. 석씨는 해설자, 안씨는 새마을부장, 김씨는 여공 역을 맡았고, 연습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이야기 했다. 여공들이 나누는 대화가 대본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자체로 훌륭한 '노동자 문학'이 됐다. 작가의 의도나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노동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박우섭 구청장은 "석정남의 일기를 기본으로 1차 대본을 만들고, 연습을 하는 중간에 노동자들이 직접 상황을 만들고 대본에 살을 붙였다"며 "이 연극은 감동적인 노동문학이기도 했지만, 데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사표현 방법이었다"고 말했다.경찰이 체포한 여공들에게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주동자'의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주동자였고, 스스로 연극을 만든 주체였기 때문이다.희곡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노동자가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방식을 담는 게 진짜 노동문학이다"라며 "이 희곡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문학을 통해 삶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지가 담겨 있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꽃다운 청춘을 공장에서 보내다 똥물까지 뒤집어 쓴 그때 그 동일방직 여공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연극은 '동일방직 문제'에 초점을 맞췄지만,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70년대 후반 유신정권 아래 벌어진 자유의 억압과 노동 착취 등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외침이기도 했다. '민주화'라는 거창한 구호는 몰랐더라도 바로 옆 언니·동생이 부당한 일을 당한데 대한 분노와 동지애가 민주주의사회를 만들어가는 기틀이 된 것이다.한때 1천명이 넘는 직원이 상주했던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지금은 공장 자동화와 생산설비 타 지역 이전으로 천을 짜는 직포라인 45명의 근로자만 남아 있다. 회사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공장 이전설마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124명의 해직 여공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무대 위에서 그때를 이야기 한다.당시 복직투쟁을 이끌었던 이총각(66·여) 전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은 "우리가 옳은 일에 젊음을 투자했고,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며 "지금도 만족하고 살면 변화는 절대 없다. 변화를 위해선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글 = 김민재기자▲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사측이 뿌린 똥물을 뒤집어쓴 여공들의 모습. 출처/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2014-11-19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섬이 터전인 사람들 '그 고단한 바다내음'

문단에서는 이세기를 서해바다와 섬을 시적 대상에 포함시킨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1998년 등단한 이세기는 지금까지 2권의 시집을 냈다. '먹염바다'(실천문학사·2005)와 '언 손'(창비·2010)이다. 문단의 평가처럼 그의 시 대부분이 서해바다, 섬 이야기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직접 가보지는 못한, 그래서 낯익은 듯하면서도 왠지 서먹서먹한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백령도 등이 모두 이세기의 시가 되어 세상에 말을 건넨다.이세기는 틈이 날 때마다 덕적군도 곳곳을 찾아 나선다. 바다에만 의지해 그저 착하게만 사는 섬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세기는 그 속에서 문갑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안강망 어선 선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가 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한다.이세기는 "시에 등장하는 사람, 사건, 상황은 직접 만나고 경험한 것들이다"며 "27년만에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너무 황폐해진 모습에 놀랐다. 바다와 섬이 입이 없어 말을 못할 뿐 지난 시간 겪은 고초가 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입이 되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이세기의 시집에는 어업 노동에 관련한 우리말이 너무나 풍부하다. 작은 어업사전으로도 손색이 없다"며 "특히 바다를 관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세기의 시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의 내음으로 리얼하다"고 평했다.기자와 작년에 만났을 때 이세기는 덕적군도에 작은 집을 마련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아직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세기는 "누구도 눈길 주지않는 낮은 삶을 산다는 것, 보잘 것 없더라도 생명체이기에 갖는 귀중함이 어떤 것인지 섬에서 배운다"며 "시간이 갈수록 섬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꼭 섬에서 살며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박석진기자

2014-11-1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2]이세기 詩를 통해 본 '섬이야기'

작가의 문갑도 어린시설집안 간첩사건에 충격아픈 상처 詩로 쏟아내납북어민 인천 비중높아연좌제로 가족도 비참주홍글씨 수십년 몸서리한때 최고 어장 덕적군도그 많던 색주가 작부도밀물처럼 모두 빠져나가파시는 희미한 기억만…가진것 없는 이들의 터전점점 황폐해져 가지만섬은 엄연한 '삶의 현장'문갑도 선착장에서 바다를 보면대이작도, 소이작도, 영흥도의 늘어선 모습이한눈에 잡힌다.문갑도 선산 너머에는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들도멀리서 줄지어 엎드린 듯 보인다.'입동(立冬)'이던 지난 7일,덕적도를 거쳐 문갑도엘 갔다.'태생적 고향'은 문갑도이며'영혼의 고향'은 덕적군도라고 말하는시인 이세기(51)의 '글 밭'을 찾아서였다.덕적군도는 1950~70년대 국내 최고의 어장이었다.민어, 조기, 새우 등이 그물 가득이었다.그물을 내렸다 올리면 배는 곧 만선이 됐고,뱃사람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인천에서 배를 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이야기가 퍼졌다.인천의 섬과 바다에는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전국에서 물고기,아니 돈을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김진규(70)씨는 아버지 때부터 문갑도에서 배 사업을 크게 했었다. 김씨는 "지금은 문갑도에 70명 정도 살고 있지만 어업이 잘 됐던 1960년 후반에는 주민이 650명을 넘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도 꽤 많았다. 어족자원이 풍부했던 덕분에 사람도, 배도 문갑도로 몰렸었다"고 회고했다.바다가 늘 넉넉하게 베풀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태풍이 몰아쳐 어민의 생명줄인 배를 한순간에 망가뜨리고, 목숨마저 앗아가기도 했다. 김진규씨 집안도 태풍에 배를 모두 잃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덕적군도 바다에는 숨겨진 얼굴이 하나 더 있다. '납북어민'들에게 새겨진 간첩이란 '주홍글씨'다.그해에는 삼월에도 눈이 내렸습니다//가랑눈은 인적 없는 바닷가에 내리고/간간이 눈발이 날리듯/그해에//배를 타고 월북을 하였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반공법으로/월남에서 돌아온 매형은/목발을 한 채/이틀 밤을 묵고 섬을 떠났습니다//무서운 밤이 지났습니다 (…중략…) 배를 탈 수 없었던/털보 작은아버지와 넙적이 작은아버지는 인천으로/아버지는 목포로 갔습니다 (…중략…) 피 묻은 뱃사람이 거적을 뒤집어쓴 채/마을로 올 것만 같은/밤이 지나고//그해의 상수리나무 숲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후략…) <이세기의 시 '서쪽' 중에서>이세기는 어린 시절 고향 문갑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1972년이었다. 군경이 간첩을 잡겠다면서 문갑도 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납북어민 즉, 간첩으로 몰린 이세기의 작은아버지도 그 수색 대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수십 명의 군인과 경찰은 이세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살 이세기는 부모님과 문갑도를 떠나 인천으로 왔다. 그에게는 또 연좌제라는 굴레도 따라붙었다.이세기는 "등단하고 이듬해 우연히 문갑도를 찾아갔다. 27년 만에 고향을 간 것인데,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상처를 건드린 것인지 이후에 벼락같이 시가 쏟아졌다"고 했다. 바다와 섬은 아픈 상처에서도 시를 쏟아내는 풍성한 시의 밭이기도 하다. 이세기는 그 모순과 역사적 아이러니에 가득찬 '바다'를 꼭 붙들고 있다.이세기 시인은 "인천 바다는 남·북해양경계선과 닿아 있어 납북어민 중에는 인천 어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좌제가 사라지기 전까지 납북어민과 그 가족들은 매우 비참하게 살았다. 가장들은 다시 배를 탈 길이 없어 일자리를 잃었고,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문갑도에서 만난 김종석(74) 씨의 삶도 험난했다. 공식 기록으로는 아직까지도 집단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는 김 씨는 문갑도에 남은 유일한 '간첩'이다. '납치'된 것이라는 주장은 소용없었다. 부인도 남편 김 씨 등 일행이 바다로 나간 사이 누군가 와서 "남편의 뱃일 대가"라면서 건넨 돈을 받았다가 그만 간첩이 되고 말았다. 김종석 씨는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었다. 이후 무기징역, 15년형으로 감형받았다. 김씨는 스물두 살에 옥살이를 시작해 서른일곱에 풀려났다고 했는데, 그의 수사 기록에는 1972년 4월 서른한 살에 감옥살이를 시작한 걸로 돼 있다. 기억과 기록의 차이가 크다. 젊을 때 다시 세상에 나왔지만 고문으로 망가진 몸, 간첩 낙인은 이겨내기 어려웠다.김종석 씨는 살아 생전에 꼭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다. '간첩의 굴레'를 벗는 것이다. "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슬슬 피해. 똑같은 땅에 사는데 나는 사람 아닌 취급을 당하며 살고 있는 거지. 공작금을 대신 받았다는 이유로 아내도 7년 형을 살고 나왔어. 지금도 사람 무서워하고 싫어해. 못 믿는 거지. … 자식들? 다섯 명을 낳았는데 헤어져 산 지 오래야."당국의 발표대로 그와 함께 1968년 5월 북한으로 넘어가 약 6개월간 머물다 돌아온 덕적도 어민 8명은 모두 납북이냐 간첩이냐를 따질 것도 없는 저세상으로 갔다. 이제 김종석 씨만 남아 46년을 옥죈 그 '주홍글씨'에 몸서리치고 있다.'간첩'의 굴레를 쓴 '납북어민'과 그 가족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세기의 시는 사실적이어서 더 아프게 한다.마을에선 누구도 말을 걸지 않던/당너머 집//조깃배를 타던 쌍둥이 아들이/월경을 하였다는/소문이 들리던 그 겨울 이후/그 집에는 밤마다 부엉이가 운다고 하였다//벌써 삼십여 년/쌍둥이 아들은 배를 타고 나간 후/돌아올 줄 몰랐다//다만 관에서 나온 소식 몇 자/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요시찰인가라는 딱지만 없었더라도 잊었으리 (…후략…)<시 '당너머 집' 중에서>김종석 씨는 국가보안법 조작 사건을 다시 조사해 진상규명을 하는 모임 '지금 여기에'의 도움을 받아 재심 재판을 준비 중이다. '지금 여기에' 관계자는 "납북어민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는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한다. 때문에 납북어민들은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진짜 간첩 활동을 했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납북어민들이) 평생 실제 지은 죄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이세기의 시선은 섬사람에 가 있다. 평생을 바다에 순응하며 살았듯이 힘 없이 '납북'도 되고, 또는 '간첩'도 되고 하는 그런 사람들, 혹은 도시에서 떠밀려 시골 섬 구석까지 찾아들어 웃음을 팔아야 하는 '늙은 아가씨'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남겨야 하겠기에 그렇다.대청도 부둣가 엄지다방에/서울 용산에서 왔다는 귀화라는 이름의 다방 아가씨/짙은 화장에 동백꽃 같은 연지를 하고//텅 빈 다방에 앉아 창 너머/선창가를 보는데//이삼 일을 못 버티고 짐을 싸고 돌아가는/신참 아가씨 뒷모습이 애닯다 한다 (…중략…) 연평도/백령도/대청도/안 거쳐온 곳이 없단다//애처로이 객선을 타고/외딴섬 부둣머리를 떠도는 객지의 몸이 되어/이제는 먼 데 바다를 바라본다 <시 '귀화 이야기' 중에서>이세기가 섬 기행 중 찾은 엄지다방과 그곳에서 만난 다방 아가씨 귀화 이야기는 '파시(波市)'의 흔적이다.섬 여행가 강제윤의 말이 아니더라도, 덕적군도는 일제강점기 초부터 굴업도 민어어장과 울도 새우어장을 발견해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덕적군도 파시는 크게 열렸다. 파시에는 어판장과 수십 개의 색주가(色酒家), 잡화점, 숙박시설들이 자리했다. 특히 덕적도 민어파시에는 색주가 작부들만 200명이 넘을 정도로 술 장사가 호황이었다. 맨몸으로 고된 노동을 견뎌낸 뱃사람들은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술 생각에, 여자 생각에 색주가를 찾아 탕진했다.20여년간 배를 탔다는 문갑도 주민 김웅현(71) 씨는 12일 전화통화에서 "배에서 내리면 곧장 술집으로 가는 뱃사람들이 많았다. 육지가 그리운 걸 술로 푸는지 밤을 새면서 술을 마시는 일도 허다했다. 배를 타면 제법 돈을 만졌는데 술값으로 다 쓰는 경우도 흔했고, 심지어 술값이 모자라 배나 그물을 잡히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물고기가 몰리면 돈도 몰리고, 돈이 몰리면 자연히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다. 물고기는 무한한 바다 자원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욕심이 그 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말았다. 내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심산에서였다. 어린 물고기가 크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결국 물고기는 사라졌고 돈도 오지 않았다. 돈이 없으니 사람도 떠났다.덕적군도의 파시는 먼 옛날얘기가 되었다. 색주가 작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섬은 텅 비었다.이세기 시인은 "덕적군도가 어업 호황기를 벗어나자 밀물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파시도 이젠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라며 "사람들은 섬을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 관광지로 본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 섬은 별로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맨몸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점점 더 황폐해져가고는 있지만 엄연한 삶의 현장"이라고 했다.글 = 박석진기자▲ 덕적군도 중에서도 산이 높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는 문갑도(文甲島). 문갑도는 젓갈용 새우가 유난히 많이 잡혔고, 민어와 조기 어장을 가진 덕적도, 연평도 등과도 가까워 어선과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어민 간첩 사건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둘 다 잊혀진 옛날 얘기가 되었다. /경인일보 DB

2014-11-1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철거민·공장 노동자 소외된 자들의 고통

출간 이후 4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는 1970년대 철거민과 공장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개발에 밀려 갈 곳 없는 달동네 철거민들의 사연은 안타깝기만 하다. 밤낮 휴일 없이 일해도 소위 '최저임금'도 쥐지 못하고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난장이'는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을 상징한다.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고 소설은 1970년대의 어느 가족의 삶을 기록했다. 난쏘공의 난장이는 키가 117㎝, 몸무게는 32㎏이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는 난장이 아들의 독백은 1978년 메아리치기 시작해 아직까지 울리고 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 우리 문학을 논의할 때 하나의 뚜렷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고 서울대 김윤식 명예교수는 그의 '난장이론'에서 썼다. 조세희는 '끝까지 살아 독자에게 전달되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난쏘공의 동화같은 내용과 형식이 군사 정권의 검열을 피해갈 수 있게 했다.난쏘공에 등장하는 노동 착취는 경제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조건으로 이해되는 문제가 아닌 불법 행위가 됐다. 철거민 4명과 진압 경찰 1명이 숨진 2009년 서울 용산참사의 비극은 잊힌 지 오래다. 난쏘공에 등장하는 난장이는 이미 사라진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여전히 난장이가 산다. 주민 5명중 1명은 65세 이상 노인인 만석동. 공장 담벼락보다 낮은 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여전한 '난장이'다. 작가는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며 난쏘공을 썼다.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시대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아직도 난쏘공은 인쇄되어 팔리고 있다.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난쏘공 중에서> /김명래기자

2014-11-05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1]조세희 '난쏘공'

연작소설 12편 묶어 1978년 펴낸 '스테디셀러'주요 배경 '은강 = 인천' '기계도시 = 만석동'이젠 주민수 크게 줄어 활기잃은 공장지대삼남매 통해 인천지역 노동착취 현실 담아내지금도 임금 수준은 타지역보다 '열악'"배고파 우는 아이 방관도 폭력" 메시지 전해인천 동구 만석동은 면적 1.15㎢ 중 절반이 넘는 0.66㎢(59%)가 공장지대다. 두산인프라코어, 동일방직, 동아원, 삼미, 삼화제분, 한국기초소재, 혁진산업, 원일제강, 올파인텍 등 크고 작은 공장 50여 개가 이 작은 동네에 들어서 있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출퇴근 시간대 만석동거리는 공장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공장 숫자는 많지만 언제부턴가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 됐다. 공장지대로서의 활기마저 잃었다.지난 4일 만석동 주민 김선현(84·여) 씨는 "(1970년대에는) 사람이 말도 못했어. 젊은이들이 많았고. 정말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지"라고 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72)도 당시 인파의 어느 틈엔가 끼어 사람들을 관찰했을 것이다. '난쏘공'이란 줄임말로 더 잘 알려진 이 스테디셀러의 주요 배경인 '은강'은 인천이고, '기계도시'로 설명하는 공장지대는 동구 만석동이다.은강의 면적은 백구십육제곱킬로미터, 인구는 팔십일만 명이다.…(중략)…은강 공업 지대는 금속·도자기·화학·유지·조선·목재·판유리·섬유·전자·자동차·제강 공업이 성하고, 특히 판유리는 한국 최고의 존재로 교과서에 나와 있다. -<난쏘공 '기계도시' 중에서>조세희는 1975년부터 3년 동안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등 8곳에 연작소설 12편을 발표했고, 이를 묶어 1978년 6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작품의 배경인 은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된 '기계도시'는 1977년 6월 '대학신문'에 실렸다. 1977년 하반기 나온 인천통계연보는 인천 면적을 199.9㎢, 인구를 83만명(1976년 10월 기준)으로 기록했다. 한국판유리(한국유리공업) 공장도 인천 만석동에 있었다. 1950년대 만석동에 자리잡은 판유리 공장은 국가기간산업 육성 정책에 따라 건설됐다. 주민들은 "엘리트들이 다니는 공장"으로 기억하고 있다.1970년대 인천은 중구, 동구, 남구, 북구로 나뉘어 있었다. 1976년 인천 동구에는 17만3천명이 살았고, 만석동 주민 수는 1만6천500명이었다. 한 가구당 가족수는 4.6명이었다. 지난 9월말 기준 만석동 인구는 7천900명이다. 30여년 전에 비해 인구가 절반 이상이나 준 것이다.만석동에서 만난 손강식(63) 씨는 "지금 동일방직 주변과 만석비치타운 정문쪽은 출퇴근시간에 사람으로 가득했다"며 "지금의 아카사키촌(만석동 9)에는 막걸리집이 꽤 있어 퇴근길 노동자들이 들어가 한잔씩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었"던 난장이와 그의 가족(아내와 3남매)을 그린 난쏘공에서 은강(인천)은 암울하다. 서울 낙원구 행복동에서 난장이 아빠를 하늘로 떠나보낸 뒤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보겠다고 정착한 곳이 은강이다. 소설은 은강을 "버려진 도시"로 묘사한다.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장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다. 모든 공장이 제품 생산량에 비례하는 흑갈색·황갈색의 폐수·폐유를 하천으로 토해낸다.…(중략)…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인천 동구 서쪽 끄트머리 바다를 끼고 있는 만석동에서는 삼미, 그 옆 북성동에서는 대성목재 등이 바다에 저목장(목재 저장소)을 운영했다. 밀물이 들 때 주민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저목장에 나가 원목의 껍질을 벗겼다. 나무 껍질은 땔감으로 쓰고, 남는 것을 팔았다.1970년 중학생 때 북성동에 정착한 백석두(59) 흥사단 인천지부장은 "대성목재 주변 폐수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며 "나무 껍질을 벗기다가 물에 빠지면 몸이 새까맣게 될 정도였다"고 했다. 동구에서도 만석동은 낙후한 동네였다.동구 송림동에서 닭알탕집을 운영하는 정봉덕(74·여) 씨는 "70년대 만석부두 옆에 가본 적이 있는데, 동네 화장실은 넘쳐 흘러 냄새가 지독했고 담장에 나무 껍질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이런 동네가 다 있나'하고 놀랐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노동 착취에 시달렸다. 난쏘공에서 난장이네 큰아들 영수는 공장(은강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기계와 매일 사투를 벌인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중략)…날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나를 구해주고는 했다.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중략)… 혓바늘이 빨갛게 돋고, 입에서는 고무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물로 양치질을 해도 냄새가 났다. 큰 식당에 가 차례를 기다려 밥을 타지만 수저를 드는 손은 언제나 떨리기만 했다.가진 것 하나 없는, 비숙련 노동자들이 만석동에 와 부두, 공장에 취직했다. 노동시간이 길고, 임금이 낮아도 입에 풀칠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지난 2일 오전 만석동 9번지의 조그만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있던 임순서(76) 씨도 그랬다고 했다. 1970년대 전북 김제에서 인천으로 올라온 그의 첫 직장은 만석동 삼미사(三美社)였다고 한다. "기술이 있어야 돈을 벌지. 여기저기 뜨내기로 그냥 주면 주는대로 받고. 말 많으면 사람 안 쓰니까. 행여나 내년은 괜찮을까, 내년은 괜찮을까. 그러면서 온 거여."소설에서 난장이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하고 한 달에 모두 합해 8만231원을 번다. 보험료, 국민저축, 상조회비, 노조비, 후생비, 식비 등을 빼면 6만2천351원을 쥔다. 난쏘공이 출간된 1978년에 한국노총이 발표한 '18세 전후 근로자 최저임금선'이 월 4만8천원이었다. 셋이 합하면 아무리 못 벌어도 14만원 이상을 벌었어야 했는데 여기에 크게 못 미쳤다. 그래서 난장이네 가족은 월급을 생계비가 아닌 '생존비'라고 부른다.지금의 인천 만석동 주변 근로자 처우는 난쏘공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지난 4일 만석동주민센터 입구의 취업게시판이 열악한 현실을 보여줬다. 나붙은 모집 공고는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었다. '지게차 운전, 납품 배송원'은 월급이 180만원(청년층 우대)이었고, 철강 재료 무역 업체 경리 회계 사무원은 연봉이 2천만원이었다. 그나마 경력 3년 이상이 지원할 수 있고, 토요일은 격주마다 나와 일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식당 주방 보조원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30만원이었다. 휴무일은 매월 이틀뿐이었다.인천상공회의소가 지난 3월 발표한 '10인 이상 제조업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천의 제조업 1인당 평균 급여액은 3천275만원으로 전국 평균(3천581만원)보다 낮았다. "종업원 10인 이하의 제조업체에 대한 통계는 따로 나와 있지 않지만, 임금 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크게 열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인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말했다.난쏘공은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이야기가 시간 흐름에 따라 전개되지 않고, 소설 속 화자도 여러 명이다.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출간 6개월만에 9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됐다. 처음 접하는 형식과 내용의 소설에 지식인층은 충격을 받았다. 사회과학도들은 이 책을 교재 삼아 공부했다. 영화가 제작되고 연극으로도 올랐다. 노동자들은 이 책을 읽고 세상에 눈을 떴다. 조세희는 인천 만석동, 서울 면목동·가리봉동·무악동 일대를 취재해 난쏘공을 썼다. 동일방직 사건 실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면목동에서 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에 박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난쏘공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진 적도 있다. 악덕 기업인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논의를 이 소설이 촉발한 것이다.난쏘공 작가 조세희는 벌써 몇 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다. 지난달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 내가 아주 안 좋아 아무도 못 만나요. 나중에 나아지면 만나기로 해요"라고 힘겹게 말했다. 난쏘공은 그동안 100만부 넘게 팔렸다. 쇄를 거듭해 지난 6월 기준으로 5판287쇄를 찍었다. 1980~90년대 대학생들이 교과서처럼 읽으며 공부한 소설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됐고, 대입 수학능력시험에도 나왔다.난쏘공 이후 조세희는 늘 우리 시대의 '난장이' 곁에 있었다. 그는 "우리 시대 어느 아이 하나가 배고파 우는데 그것을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고 했다. '난장이'가 꿈꾸던 '모두가 일자리를 얻고, 일한 만큼의 대우를 받는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작가 조세희가 전하려는 메시지다./글 = 김명래기자▲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 출생으로 서라벌예대 문창과,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8년 연작 소설 12편을 묶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그는 "우리 시대 어느 아이 하나가 배고파 우는데 그것을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고 했다. 출처/문학과 지성사▲ 197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석동 전경 사진이다. 조세희는 난쏘공에서 만석동을 배경으로 한 은강이란 도시의 풍경을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고 묘사했다. 출처/인천 동구청

2014-11-05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수인선 협궤열차 배경… 80년대 사랑·이별가

'협궤열차를 아는가?'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조그마한 크기의 동차(動車)가 있었다. 운행 구간이 수원~인천이고, 궤간 너비가 표준보다 좁다고 해서 수인선 협궤열차다.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60년 동안 서민의 애환을 싣고 달렸다. 교통망 확충으로 이용객이 줄어들어 운행거리가 점점 짧아졌고, 결국 1995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협궤열차는 일제의 쌀·소금 수탈 수단으로 건설됐지만, 광복 이후에는 서민들의 발 역할을 했다. 협궤열차가 운행을 중단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했다. 하지만 경제성 논리에서 협궤열차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68)은 1990년 계간지 '현대소설'에 단편소설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이 단편을 '협궤열차'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만들어 1992년 출간했다. 협궤열차를 배경으로 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다. 사랑과 이별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어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소임을 다하고 종운(終運)을 맞이한 협궤열차.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같은 듯하다.이 소설은 1980년대 협궤열차 운행 당시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철교, 고깃배가 포구로 들어오는 장면 등 소래포구의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윤후명은 "경기도 안산에서 7년간 살면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포구를 자주 다녔다"며 "수인선에서 사람의 삶이 있는 곳은 인천이었다"고 했다. 또 "1991년 안산을 떠난 뒤에 협궤열차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매우 섭섭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지만, 어느 선까지는 놔둬도 됐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2014-10-29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0]윤후명 '협궤열차'

지난 22일 오후 1시께 찾은 인천 소래포구.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 끝을 자극했다. 때마침, 고깃배가 밀물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포구로 들어왔다. 갈매기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솟구쳤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어시장은 젓갈, 꽃게, 생선 들을 사러 온 사람으로 북적였다.포구를 가로질러 새로 놓인 철교 위로는 전동차가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2012년 6월부터 오이도~송도 구간을 오가는 수인선 복선 전철이다. 철교는 하나가 더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협궤열차가 다니던 것인데, 지금은 인도교로 쓰임새가 바뀌었다.어른 둘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철교 위를 열차가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협궤(狹軌)다.젊은 세대에게는 협궤열차란 말부터가 낯설 수밖에 없다. 1980년대 협궤열차 운행 모습과 소래포구의 풍경을 감성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이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68)이 1992년 출간한 장편소설 '협궤열차'다. 이 소설은 수인선 협궤열차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옛 애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등 협궤열차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 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중략…) 가을에 그 작고 낡은 기차는 어차피 노을 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1980년대 생활·통학열차 배경 이야기1937년 일제가 쌀·소금 운송위해 개통소금수탈 야욕 염전과 소래역 연결도1995년 '운행중단' 포구는 재래항 유지작고 느려 버스와 충돌하고도 넘어져유원지 나들이 등 잊지못할 추억남겨소래포구 근처에는 협궤열차 소래역이 있었다. 그 옛 역사가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변했다. 한적한 포구마을에 협궤열차 역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소래염전 때문이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경기도에서 나는 쌀과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을 인천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1937년 8월 개통됐다. 일제는 소금을 수탈하고자 소래 갯벌에 염전을 만들고, 염전과 소래역을 잇는 짧은 철길을 놓아 수인선과 연결했다. 소래습지생태공원 입구의 소염교(蘇鹽橋)는 과거 '소금 열차'가 다니던 소래염전지선의 흔적을 증언한다.1970년대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수인선의 화물과 여객이 크게 줄면서 1973년 11월 종착역인 남인천역(수인역)이 폐쇄됐다. 이후 수원~송도 구간만 운행하다 1977년부터 화물 운송이 중단됐고, 1995년 12월에는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여객 운송마저 멈춰 종운(終運)을 맞이했다.협궤열차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싣고 달렸다. 쪼그리고 앉은 몸빼 차림의 아낙네, 마고자 차림의 노인네, 피곤에 지친 듯 조는 더벅머리 젊은이, 칭얼대는 어린애를 어르는 아낙네… 왜 이들은 이 조그만 열차에 몸을 실었을까. 수인선은 서민들의 생활선이고 통학·통근선이었다.윤후명은 1983년부터 약 7년간 안산에서 살았다. 그는 "황량한 땅에 알 수 없는 열차가, 열차 같지도 않은 그게 나타나서 지나다녔다. 이상한 느낌이었다"면서 "살기 좋아서 (수인선 주변) 그곳에서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고독감이나 소외감 속에 살다가도, 그 열차 속에는 그래도 삶이 있다. 서민들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대부분의 도시가 옛 모습을 잃어 가듯, 소래포구 주변 역시 마찬가지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포구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와 대형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소래에서 '호구포식당'을 운영하는 최재수(79)씨의 얘기가 실감나지 않을 만큼 변했다. "옛날에는 소래역 바로 앞에서 식당을 운영했었지. 주변이 허허벌판이었어. 아스팔트는 무슨, 죄다 모랫길이었지. 메밀도 심고 그랬어. 그때는 간이역 같았어. 동차도 하루에 3번밖에 안 다녔어."배들이 바다에 쳐놓았던 그물을 걷어 어획물을 싣고 들어올 때면 멀리서부터 밀물이 앞서 밀려들어 오고 갈매기 떼가 하늘에 떠오른 것을 먼저 볼 수 있다. 소래강이라고 했지만 말이 강이지 위로부터 흐르는 물도 그저 질척질척한 정도인 데다가 염분에 절고 절어서, 깊게 팬 골짜기는 썰물 때는 회갈색으로 가랑이를 벌린 채 헤벌어져 누워 있는 꼴이었다. 거기서 밀물을 기다리기란 여간 막막한 일이 아니었다. 늘 겪으면서도 정말 물이 넘쳐들 것인가 의아심을 품게 하는 것이 소래의 골짜기였다.포구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포구만은 재래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래포구를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수인선은 현재 복선전철 조성사업이 진행중이다. 전체 노선 가운데 오이도~송도 구간은 2012년 6월 개통됐다. 송도~인천구간 공사는 내년 말에 끝나고, 수원~한대앞 구간은 2017년 완공될 예정이다.오이도역에서 송도행 전철을 탔다. 출발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소래포구역에 도착했다. 새 소래철교를 건널 때는 전동차 안에서도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전동차는 빠르고 쾌적했다. 냉난방 시설은 물론 객차 사이에 자동문도 설치돼 있다.협궤열차 운행 시절에는 어땠을까. 협궤열차는 궤도 너비가 762㎜로, 표준궤간(1천435㎜)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꼬마열차' '작은 철' '소철(小鐵)'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철길 건널목에서 버스나 트럭과 충돌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차체가 작고 가벼운 탓에 자빠지는 쪽은 십중팔구 '꼬마열차'였다."협궤열차 타봤어?" 그녀가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무슨 물음인가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중략…) "그걸 한번 타보고 싶어서. 요전번에도 트럭하고 부딪혀서 넘어졌다면서?" (…중략…) 그 열차가 그런 식으로 넘어지는 것이 어쩌다 없지 않았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불현듯 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일었다. 그것은 욕망에 가까웠다.실제로 차와 부딪혀 열차가 넘어지고는 했다. 동아일보 1978년 9월 19일자에는 수인선 협궤열차 사고 기사가 실렸다. 전날, 수인선 일리역 남쪽 200m 지점 건널목에서 협궤열차와 시내버스가 충돌한 사고가 났다.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이 실소를 자아낸다. 협궤열차 1개 량이 풀밭에 넘어져 있는 사진에 '버스와 충돌, 나동그라진 협궤동차'라는 제목이 붙었다.협궤열차로 옥련동에서 신흥동까지 통학했다는 이동열(60)씨는 "열차가 힘이 없어 언덕길에서 낑낑거렸던 기억이 난다"며 "속도가 워낙 느려서 달리는 열차에 뛰어오르는 무임승차도 많았다"고 했다.소설 '협궤열차'에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오! 인천' 촬영에 수인선 증기기관차까지 동원된 일, 인천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한 남자와 소래철교 위에서 떨어져 죽은 그의 아내 이야기, 어린애가 열차에 치인 사고 등도 나온다.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점은 수인역이었다. 중구 신흥동 '한별프라이빌' 아파트 인근에 역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화물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 옆에서는 수인선 복선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이 아파트 뒤편 골목에는 '수인곡물거리'가 있다. 과거 수인역 주변에는 큰 장이 형성됐다. 사람들은 협궤열차로 이곳까지 와서 잡곡이나 해산물을 팔았다. 연백상회 유연길(59)씨의 머릿속에는 당시 시장의 활발했던 모습이 아직도 훤하다. "원래 시장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아파트 쪽에 노상으로 있었어. 365일 내내 장이 열렸지. 지금으로 얘기하면 도매시장 정도 된 것 같아. 옛날에는 장사가 잘됐지. 별놈의 장사가 다 있었어. 근데 지금은 '이빨'이 다 빠졌어." 지금은 장사가 잘 안돼 문을 닫은 가게가 많다는 얘기다.협궤열차를 타고 안산 쪽으로 망둥어 낚시를 다니고는 했다는 유씨는 "협궤열차, 없애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낭만이 있었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수인역이 1973년 11월 폐쇄되면서 종착역은 송도역이 됐다. 옛 송도역사는 연수구 옥련동 송도역삼거리에 아직 남아 있다.1985년 7월부터 1988년 1월까지 송도역장을 지낸 박철호(71) 씨는 "역 앞 시장에 수인선 풍물들이 많이 나왔다"며 "보통 2량인데, 주말에는 승객이 많아 1량을 더 달아 운행했다"고 했다. 또 "짐을 나눠 들고, 중매가 이뤄질 정도로 협궤열차 안에는 정이 있었다"고 했다.수도권 대표 휴식 공간 중 하나였던 송도유원지를 가려면 송도역에서 내려야 했다. 박철호 씨는 "송도역에서 내려 송도유원지를 돌고 외식이라도 하면, 그보다 더 좋은 날이 언제냐"며 "협궤열차는 역사의 산물이고 주민들의 사랑을 받은 귀물"이라고 했다. 송도유원지는 2011년 9월 문을 닫았다.열차니 배니 하는 탈것들은 공연히 사람의 마음을 들쑤시는 데 뭐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주기 때문이다. 시간을 당겨주고 공간을 넓혀준다. 새벽 협궤열차는 시간과 공간을 열며 앞으로 향하여 나아갔는데, 나는 그 작은 열차에 의탁해 과거로 나아가고 있는 나를 본다.시간과 공간을 옮겨주던 그 협궤열차는 빠르고 진동도 거의 없는 전동차로 대체되었다. 최신형 전동차보다는 황량한 들판을 달리던 꼬마열차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아쉬워하면서./글 = 목동훈기자▲ 옛 송도역사 건물. /조재현기자▲ 1994년 8월 촬영한 협궤열차 내부 모습. /경인일보DB▲ 1978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협궤열차-버스충돌사고' 사진.

2014-10-29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70~80년대 억압된 민중·노동자 '해방'을 읊조리다

박영근(1958~2006)은 인천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대표 노동시인이다. 그는 펜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마지막 놓을 때까지 문학을 통해 억압된 민중과 노동자의 해방을 꿈꿨다.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이란 굶주림의 추억으로부터, 사슬의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는 '이 땅의 주인'이라고 했다.박영근이 인천에서 시를 쓴 것은 숙명에 가깝다.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 인천은 공장이 많아 전국의 노동자들이 몰려든 곳이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당연히 인천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지난 9월 27일 오후 인천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안치환의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래의 원작자를 기리기 위해 인천의 노동계, 문화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박영근이 1983년 발표한 '백제(百濟)6'의 시구를 고쳐 만든 노래다.박영근 기념사업회는 이날 그의 시비가 세워진 곳에서 창립식을 갖고 전집 제작, 문학관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도시 인천이 박영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그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견제 없이 견고해지는 자본주의사회에 일침을 가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바탕이 된 박영근의 원작은 이렇다.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주저앉아 우는 누이들/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솔아 솔아 푸른 솔아/샛바람에 떨지 마라/어널널 상사뒤/어여뒤어 상사뒤 …(중략)…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살아서 가다가 가다가/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네가 묶인 곳, 아우야/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가겠네, 다시/만나겠네. /김민재기자

2014-10-22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9]박영근과 노동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통해 관심가져군 제대후 노동현장 뛰어들어두번째 시집 '대열' 투쟁의지 드러내고탄압 속 '노동이 세상 움직인다' 외쳐민예총·민족문학작가회의 지회 설립 앞장2006년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 떠나"박영근은 인천이 꼭 기억해야할 작가"기름밥 세월 이십 년짜리 구닥다리 안전등도 없는 프레스란 놈. 개눈깔을 달았는지 제 멋대로 내려앉아 덜컥 손가락이 잡혔는데…. 병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이게 또 무엇이냐 죽일 놈들 일이 없으니 회사를 떠나라네….노동시인 박영근(1958~2006)의 두 번째 시집 '대열'에 실린 '여우발'의 일부다. 산재보상도 제대로 못받는 노동자의 하소연이 마음을 울린다. 그의 시 대부분이 이렇다. 박영근은 노동자 탄압이 극심하던 1970~80년대 공돌이·공순이가 돼 그들의 목소리를 시로 옮겼다.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박영근은 전주고등학교 1학년 열여섯 나이에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더 이상 필요없다"며 자퇴했다. 이후 혼자 서울로 올라가 영등포 신정동 뚝방촌 단칸방에 살면서 혼자 책을 읽고, 글쓰기를 읽혔다. 이때 박영근은 김지하, 고은, 황석영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지식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스무 살 무렵 인천에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를 만나면서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1978년 인천은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 종교계, 학생들이 한데 뭉쳐 회사와 국가의 조직적인 노동탄압에 저항하던 시기였다. 박영근은 2004년 쓴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에서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하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을 만날 무렵이었다. 거기서 그들의 일기며 투쟁일지와 '객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등의 나의 서투른 문학적 체험과 지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뜨거움 만큼 나는 늘 막막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은 자의 무력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노동자가 되었고, 급진적 운동이 시작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박영근은 군 제대 후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듬해 구로공단 가구공장에 취업해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4년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를 냈다. 그는 이 시집을 "돌아보면 스스로에게도 가혹할 만큼 잘못 살아온 한 사내가 때때로 허기진 마음의 눈물 같은 것을 뿌리치면서 기대어 보았던 작은 불빛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이 작은 불빛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대열'(1987)에서 불꽃으로 변해 활활 타올랐다. 무언가와 한바탕 싸워보려는 듯한 의지가 시집 전체에 담겼다.'대열'은 서정성이 가미된 첫 시집과 달리 마치 노동자의 수기형식이다. 기댈 곳 없는 노동자들의 삶이 너무 구체적이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남자가 아내와 주고 받는 편지가 그러하고, 제멋대로 철야 명단을 작성해 위에 올리고, 생산량 어쩌구 사장님 말씀 어쩌구 짖어대는 계장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밤 늦게 일을 마치고 노동자끼리 '소주 한잔' 하면서 늘어놓은 푸념이 문학이 됐다. 박영근 기념사업회 대표인 문학평론가 김이구 씨는 "80년대 박영근의 시는 이야기 형식의 '담시(談詩)'다"라며 "기교를 최대한 배제한 '난장판의 시정 잡설'이 그의 시 세계였다"라고 했다.1986년 8월 인천 경동산업 파업 농성 중 회사에서 작성한 해고자와 위장취업자 1천662명의 블랙리스트가 발견됐다. 블랙리스트라는 꼬리표가 달리면 다른 회사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박영근의 작품은 이 같은 시대상을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시에 담았다.너희가 누구 팔아서/좆나발 불고 있는데/멀쩡한 청춘 위에/블랙리스트 말뚝을 박아/병신을 만들겠다는거냐/죄인을 만들겠다는거냐/너희가 누구 팔아서/꽃세상 살고 있는데…(중략)… 다시 돌아올 때는/머리 수그리고 납작 엎디어/노동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야/그게 아니야/빼앗긴 우리들 노동의 땅에/깃발을 세우러 올거야 -'농성장의 밤2'박영근은 이런 현실에서도 노동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세상에 알렸다. 금, 은, 기계, 자동차, 빌딩, 석탄, 옷, 종이, 나사 한 개, 수돗물 한 방울 좌우간 세상의 모든 것은 돈 많은 사장이나 힘 좋은 장군이 아닌 '우리 노동자'들이 만들어 간다고 시에 썼다. 노동자들이 '일 없네' 하고 손 터는 날이면 모든 것이 멈춘다. 그래서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다.우리가 노동으로 일군 세상/일제 때 호남쌀 눈물 구슬프던 군산 부두/미곡선 하역부 목도꾼 할애비로부터/할애비로부터/양키 군대 설치던 군정시절/아우성 끓던 경성 철도 노동자/해방노래 부르다 총맞아 죽은 애비로부터/애비로부터/주물에 썩어가는 십년 노동자 이내 몸까지/이내 몸까지/뼈골 박아 일군 세상 -'겨울밤 학습'내 나이 열 다섯부터 공장엘 나갔지/나는 언제나 부끄러움에 젖어/노동자라는 내 이름/숨겼다네//언제부터였나/스무살 방직공장 시절이었지/다정한 언니들을 따라 지친 마음 녹여줄 /사랑을 찾아다녔네/아아 억압도 눈물도 없는 곳//친구야, 가난한 노동자들의 집에서 나는 배웠다네/노동자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이제는 노동자라는 내 이름/감출 이유가 없어졌다네//싸움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모진 비바람 몰려올수록/노동자라는 내 이름/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게 빛난다네-'노동자'하지만, '개털 같은 임금' 10% 올려받자 했더니, 없는 놈들이 단결하면 나라가 불안해 진단다. 노동여건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한들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반영하는 것이 기업의 존폐와 직결된다"는 오늘날 기업의 논리는 그때와 다를 바 없다. '노동고용부'가 아닌 '고용노동부'는 그 의도가 어찌됐든 노동자보다 고용주를 중시한다는 사회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리라. 정부가 안전을 중시한다면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칭한 것처럼 말이다.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동지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박영근의 작품세계도 변화를 맞는다. 꿈꾸던 세상으로의 변혁이 희박해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더 집중했다.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후일담' 같은 얘기였다.1990년대 초 여름의 어느 해일 것인데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 무렵 나는 인천 부평 산곡동의 유난히 샛골목이 많고 월세짜리 단칸방이 흔한 공단마을의 무력한 기식자였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활동가라고 불리던 '정치적 인물들'은 말 그대로 썰물처럼 공단과 그 주변을 빠져나간 뒤였고, 전망은 어떤 주석도 달지 못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차체부 이십년, 공장의 불빛은 지척인데/웬일로 친구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담벽/그 너머 어두운 소문으로 몰려와 나를 부르는 소리//길 위에 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천막 농성장엔 아내가 있을 게다//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길 위에서'그럼에도 박영근은 꾸준히 노동과 현실을 다룬 작품을 발표하고 1994년 제12회 신동엽 창작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1995년 인천 민예총을 창립하는데 앞장섰고, 19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설립할 때는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엔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로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쓰러진 동료를 안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대열'의 표지(판화)를 비롯한 박영근 시집의 표지 그림과 디자인은 그의 부인이자 노동미술 작가인 성효숙(56) 씨가 도맡았다. 말년에 잠시 헤어져 산 적이 있지만, 성효숙 씨는 기념사업회를 통해 박영근 삶의 흔적을 복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부평에 세워진 시비의 글씨도 성효숙 씨가 박영근의 육필을 한 글자 한 글자 따와 새긴 것이다.박영근은 2005년 11월 정들었던 부평을 떠나 인천 용현동으로 이사했다. 술은 원래부터 좋아했지만, 삼시세끼를 술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가장 젊은 시절, 예민한 시기에 노동운동의 메카였던 인천의 노동현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기 때문에 박영근은 인천이 꼭 기억해야할 중요한 작가다"라고 말했다.다시는 펜을 들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을까. 생을 마감하기 직전 '리토피아' 2006년 봄호에 쓴 그의 마지막 시 '이사'는 박영근이 박영근에게 쓴 시다. 박영근은 이제 없지만, 그 자리에서 오늘날 노동의 현실과 노동자의 외침을 시에 담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김명인 교수는 이 시를 추천하면서 "박영근이 탈혼(脫魂)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쓴 작품"이라고 했다.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중략)…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 터트리는/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소주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글 = 김민재기자▲ 2012년 9월 부평 신트리공원에 세워진 박영근 시비.

2014-10-22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괭이부리말 아이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여유가 없다. 나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들 한다. 14년 전에 나온 책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앞만 보고, 나만 생각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가만히 주변을 살피게 한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게도 한다. 인천의 대표적 빈민촌 괭이부리말과 그곳에 얽혀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참 따뜻한 책이다.행복! 모두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일 것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그 행복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작가 김중미는 '괭이부리말 아이들' 머리말을 배를 곯던 아이 얘기로 채웠다. 8개월 동안 같이 지내던 아이가 집을 떠났는데, 더 일찍 만나서 함께 했더라면 그 아이에게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마음을 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그 아이를 데려 온 뒤로는 세 끼를 꼬박 챙겨 주었는데, 그 아이는 행복해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배만 고팠던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고팠기 때문이라고 김중미는 생각했다. 그래서 후회가 된다고, 더 일찍 만났더라면 마음까지 채워주지 않았을까 하면서.그렇다. 행복은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다. 그래서 행복하기는 맘 먹기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말한다. 마음을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행복해지지 않는 마음과 정신이 가난한 우리들에게, 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꼭 맞는 '치유제'이다. 가난한 이들의 얘기에서 거꾸로 배고픈 마음을 채우게 된다.사는 게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혹시라도 더 갖기 위한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들고 괭이부리말에 한 번 가보자. 책장을 덮을 때는, 거기에서 돌아올 때는 내 맘이 든든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박석진기자

2014-10-16 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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