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8]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

14년 동안 200만부 넘게 팔려 / 역경 속 서로 도우며 희망 꿈꾸는 아이들 이야기근현대사 질곡의 순간 켜켜이 쌓여 / 가구수도 점점 줄어 대부분 어르신들만 남아다닥다닥 붙어 살던 정겨움 추억으로 / 함께 어울려 뛰노는 동심 '밝은 모습' 눈길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 중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꼽힌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2000년 처음 나온 이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책이 유명해지면서 인천 동구의 빈민촌 괭이부리말도 덩달아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 책은 제목처럼 인천시 동구 만석동의 '괭이부리말'이 배경이다. 인천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각박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음만은 어느 동네보다도 더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괭이부리말에 사는 박영호는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살게 되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동준이와 동수 형제를 자기 집에 데려다 함께 산다. 형인 동수는 늘 말썽만 부리는 속칭 불량청소년이다. 영호는 그 동수 형제 구호에 지극정성이다. 이런 영호에 비해 이 동네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영호의 어릴 적 친구 김명희 선생은 자신이 졸업한 학교이건만 못사는 동네에 배치된 게 영 못마땅하다. 다른 학교로 전근갈 생각뿐이던 김명희 선생도 친구 영호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을 알게 되면서 진정한 '이웃'으로 변신한다. 김명희 선생만 바뀐 게 아니다. 동수도 변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니게 된 동수는 공장 한 편에 돋아난 민들레 새싹을 보고는 그 뿌리 주위에 흙을 긁어 덮어줄 정도로 건전 청년으로 탈바꿈한다.영호는 말한다. "아이들한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몇 년 전 가난을 벗어났다는 신호로 온 가족이 연수구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갔던 김명희 선생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괭이부리말로 이사했다. 김명희 선생은 "혼자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김명희 선생은 또 낡아빠진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 문 앞에 선 것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자동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괭이부리말 아이들'과 관련해 노출되기를 꺼리는 작가 김중미는 지난 2일 전화 인터뷰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도울 수 있고 나눌 수 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가난한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우정을 나누며 끈끈하게 뭉쳐 희망을 꿈꾸는 아이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했다.김중미는 1987년 괭이부리말에서 공부방 운영을 시작했고, 10년이 넘는 이곳의 생활이 고스란히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담겼다. 김중미는 "소설 속 인물의 모델은 없다. 그동안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들의 인상 깊었던 부분이 기억으로 쌓여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라고 밝혔다.'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건 동화 작가 권정생의 말대로 '참으로 성실하게 씌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행복'의 개념을 색다르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세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아래 인용하는 두 대목에서는 '괭이부리말의 행복'이 유난히 도드라진다.이제 겨우 열흘밖에 함께 살지 않았지만 동준이는 영호 삼촌이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다. 자다가 영호 삼촌의 통나무같은 굵고 무거운 다리에 깔려 숨이 막힐 때도 있고 발로 차여 아래턱이 얼얼할 때도 있었지만, 길고 긴 밤을 함께 지낼 사람이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어쩌다 영호 삼촌이 먼저 잠들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할 때도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새벽부터 영호네 집이 북적북적댔다. 김장을 하는 날이다. 배추를 씻고 양념 준비를 마치자, 명희와 명환이는 숙자 어머니를 도와 배추 속을 넣고, 동수와 영호는 김장독에 배추 넣는 일을 맡았다. 숙자, 숙희, 동준이는 잔심부름을 맡았다. (…중략…) 숙자와 숙희는 동수, 동준이, 명환이와 섞여 있을 때 가장 밝았다. 숙자 어머니는 많은 형제 속에 어울려 살던 어린 시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난하지만 형제들 틈에 섞여 있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숙자 어머니는 숙자와 숙희가 이렇게 어울릴 곳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괭이부리말은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몰려든 외국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이들이 옮겨와 갯벌을 메우고 살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고 한다.한국전쟁 때는 황해도 사람들이 피란을 왔고, 1960~1970대는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100년의 세월을 그렇게 모두가 빈손으로 쫓겨나오다시피한 끝에 찾아든 땅이 괭이부리말이다.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돈도 없고 마땅한 기술도 없어 괭이부리말 같은 빈민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판잣집이라도 얻을 돈이 있는 사람은 다행이었지만, 그나마 전셋돈마저 없는 사람들은 괭이부리말 구석에 손바닥만한 빈 땅이라도 있으면 미군부대에서 나온 루핑이라는 종이와 판자를 가지고 손수 집을 지었다. (…중략…) 이렇게 괭이부리말은 어디선가 떠밀려 온 사람들의 마을이 되었다. 오게 된 까닭은 모두 달랐지만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 갔다.괭이부리말에는 이처럼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의 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괭이부리말을 지난 3일 찾았다. 최근들어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가구 수다. 한때 500가구가 넘게 살았던 괭이부리말 쪽방촌에는 이제 280여 가구만이 남았다. 인천시가 2011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시작하면서 괭이부리말을 떠나는 사람들은 빠르게 늘었다. 남은 사람 대부분은 60대 이상의 노인이다.이음분(74) 씨는 53년째 괭이부리말에 살고 있다. 21세에 결혼을 하면서 와서 한 번도 괭이부리말을 떠난 적이 없다. 자식들은 결혼해 나가고,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정이 들어 동네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이씨는 "집에 화장실도, 수도관도 없어서 물도 한 통에 2원씩 주고 사다 먹을 때가 있었어. 빨래도 판유리공장에서 깨끗한 물을 내보내는 호스를 찾아 했을 정도였고.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데도 이웃끼리 잘 어울렸어. 애들도 가끔 그때를 이야기 해. 생활이 팍팍하니 더 기억이 나는거지. 나는 정이 들어서 죽을 때까지 딴 데는 못 가"라고 말했다.김연옥(81) 씨의 괭이부리말 애착도 굉장하다. 김씨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라 서로 사정을 뻔히 잘 알았어. 누구네 생일이다 하면 형편에 맞게 계란 한 꾸러미, 국수 한 줌, 부침개 한 판 등을 마련해 모여 나눠먹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 힘들기야 말로 할 수 없을 때지만 참 재미있게들 살았지. 지금도 이웃끼리 그리 지낸다"고 했다.이음분, 김연옥 씨의 얘기는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동네에도 주거환경개선사업 바람이 불어, 지난해 12월 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만석감리교회 인근에 있는 윗동네의 임대주택은 쪽방들을 헐고 올린 새 집이다. 집의 모양은 이전과 다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다.채종화(80) 씨는 "아랫동네에 살다가 임대주택으로 들어왔어. 집만 옮겼지 뭐 동네가 바뀐 건 아니니까. 요즘에도 위 아래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내. 동네 할머니들이랑 손자·손녀도 본다"고 했다.마침 지나던 두 동의 임대아파트 사이에 있는 정자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 심지어 중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놀았다. 눈에 띄게 멋들어진 장난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놀이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내 집처럼 신발을 벗고 정자 위, 아래를 뛰어다녔고, 여학생들은 수다를 떨며 요요 던지기에 빠져 있었다. 혼자가 익숙한 요즘의 또래 아이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김윤식(61) 만석초등학교 교장은 "다른 학교보다 복지 대상이 2배 정도 많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조손가정의 아이들도 적지 않다"며 "우리 학교 아이들을 보면 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같은 동네에 살면 자연스럽게 형, 누나, 언니, 동생이 되어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 참 따뜻하다. 어울려 살아 그런지 심성도 착하다. 쳇바퀴 돌듯 학교, 학원을 도는 아이들보다는 자율적으로 어울려 공부하고 뛰노는 쪽이 많다"고 말했다./글 = 박석진기자▲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인 인천 동구 빈민촌 괭이부리말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조재현기자▲ 지난 여름, 실제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곤충채집을 하면서 밝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2014-10-15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7]김탁환 '뱅크'

GCF·세계은행 이어 금융타운 등지금의 모습, 개항시기와 닮은꼴은행거리 배경 역사적 사실 다뤄일본, 경제침탈위해 은행 앞세워화폐도 바꾸려하자 상인들 '반발'백동화 남발에 위조화폐 문제도금융주권 확보 노력 불구 수포로'인천은 이야기가 득실득실한 도시'라고 소설가 김탁환(47)은 말했다. 지난 7일 서울 목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 당대의 문제의식'으로 100여년 전 인천의 '은행 거리'를 파고들어 장편 '뱅크'를 썼다고 했다. "다음 세상의 척도는 돈이라고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뱅크'의 배경은 1900년 전후의 인천이다. 그가 볼때, 인천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곳이다.소설가 김탁환에게 국제금융기관격인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이 최근 인천에 들어섰다고 했더니 흥미로워했다. GCF 사무국이 본 궤도에 오르면 직원 500명이 상주하고, 사무국 주변에 기금을 따내려는 국제 에이전시가 인천에 몰려들 것이다. 세계은행(WB) 한국사무소도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하나금융은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금융타운을 추진하는데, 서울 외곽에 조성하는 첫 금융기관 클러스터가 될 전망이다. 인천시 세금을 운용하는 시금고 모집 경쟁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때 유독 치열하다. 몇 년 사이 인천은 금융기관이 주목하는 도시가 됐는데, 김탁환이 소설 '뱅크'에서 재현해 낸 100여년 전의 인천이 그랬다. 장편 '뱅크'의 시간적 배경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러일전쟁 시기인 1905년까지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흐른다. 치열한 '돈줄' 쟁탈전이다.세 사람은 대불호텔을 지나서 은행거리로 접어들었다. 일본제1은행과 일본제18은행이 개점하면서 이 넓은 길은 '은행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중략)…왜나막신을 신은 일본인들로 붐비는 은행거리로 다시 접어들었다. 여름에 개점 예정인 제58은행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초상집과 감옥의 서글픔 따윈 낄 자리가 없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열망이 건물과 함께 우뚝했다.-<뱅크 중에서>지난 5일 오전 소설 '뱅크'의 배경인 인천 중구청 앞 일명 '은행거리'. 중구청 정문 앞 신포로 23번길을 따라 일본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제1은행과 제18은행은 중구청이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제58은행 건물은 중구요식업조합이 사무실로 쓰고 있다. "개항 이후 이 거리에 은행과 보험회사 약 20곳이 몰려 있었다"고 개항박물관 전경숙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개항 시기 인천에는 일본 금융기관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개항 이후 도쿄 제1은행, 나가사키 제18은행, 오사카 제5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뒀다. 이중 나가사키 제18은행이 최초의 지점을 인천에 만든 게 눈에 띈다. "메이지 23년(1890년) 국내외 최초의 제1호 지점으로 당시의 조선국 인천에 지점을 개설했다"고 현재 나가사키에 본사를 둔 18뱅크(18bank)는 은행 연혁에 기록해 놓고 있다. 1890년대 인천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절반가량은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선박운송업, 고리대업, 무역상, 미곡상, 정미업, 여관업, 과일상, 양복상, 요리업, 은세공업, 생수업, 전당포, 우유업, 철공업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18은행은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점을 만들었을 것이다.서울이 아닌 인천에 돈을 찍어내는 전환국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인천전환국은 주로 백동화를 주조했는데, 백동화는 대한제국이 재정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발행하던 화폐였다. 대전에 있는 화폐박물관 황윤지 학예사는 "항구 도시 인천이 주화 제조용 원료를 수입하는 게 용이해 인천에 전환국이 생겼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면서도 "서울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인천에 전환국이 설치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나라를 잃으면 장사도 맘대로 못하게 돼. 가난한 나라를 식민지로 둔 부자 나라 상인이 대거 몰려들기 때문이지. 부자 나라 상인이 이문이 큰 물품 거래를 독점할 거야. 나랏일 따로 장사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둘이 하나로 묶여 돌아간단 뜻이지.-<뱅크 중에서>일본은 조선 경제 침탈을 위해 은행을 앞세웠다. 조선 상인들은 개항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일본 상인들에게 밀려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1899년 개성, 서울, 인천 상인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한천일은행'을 세웠다. 은행의 이름에 '천일(天一)'을 넣은 것은 '하늘아래 으뜸 가는 은행'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으로 불리는 대한천일은행의 첫 번째 지점은 인천(현 동인천등기소 자리)에 설치됐다. 개항장 상품의 유통 중심지이자, 국제은행 거리가 조성돼 있던 인천에 민족은행의 첫 번째 지점이 들어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인천 다음으로 개성에도 지점을 뒀는데, 인삼 취급을 위해서였다.대한천일은행 설립에 전환국장 출신인 황실 관료가 참여했다. 대한천일은행을 통해 황실은 백동화 유통을 확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같은 유통책을 방해했다. 1902년 인천 일본상업회의소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일본 화폐로 대체하자'고 결의했고, 이후 일본 제1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했다. 인천신상협회(인천상공회의소의 전신)는 일본 제1은행권 수취 거부운동을 벌이며 일본의 움직임에 맞섰다. 인천신상협회 창립을 주도한 서상집은 인천 객주로 대한천일은행 초대 인천지점장이었다.조세금 중 상당수가 백동화로 걷혔다.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위조 동전까지 등장하여 그 가치가 폭락했다. 지방에서는 백동화를 받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다. 조세금을 백동화로 걷는다는 것은 팔도 방방곡곡에 백동화를 유통시키겠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 <뱅크 중에서>정부가 백동화를 남발하고 일본에서 위조 화폐가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백동화는 일본의 금융 침탈에 맞선 화폐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영국인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Angus Hamilton, 1874~1913)이 1904년 남긴 기록에는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일본에서 증기선이 들어올 때마다 많은 양의 위조 동전이 대량으로 들어와 국내로 밀수된다. 정부는 불법 거래로부터 이익을 챙기는데만 관심이 있어, 이런 것이 국가의 지급 능력에 항구적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이런 평가절하된 동전을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러일 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보고서'에서앵거스 해밀튼은 당시 제물포에서는 '정부 백동화', '1급 위조 동전', '2급 중급 위조 동전', '밤에만 통용되는 돈' 등 4가지만 유통됐다고 꼬집었다. 1902년 한 해 동안 제물포세관이 압수한 위조 동전은 무려 357만여개였다고 한다.대한제국이 대한천일은행 설립 등을 통해 독립된 국가로서 금융 주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화폐·재정 정리사업을 실행해 전환국을 폐쇄하는 등 한국 경제 시스템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주물렀다. 대한천일은행에 일본인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민족은행 설립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인천은 그 어느 곳보다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들어오고 지난 이야기가 쉽게 잊히는 도시였다. - <뱅크 중에서>개항기, 인천의 은행을 소재로 소설을 쓴 건 김탁환이 처음이다. 그는 2011~2012년 소설 '뱅크'를 한 신문에 연재할 당시 일주일에 2~3번씩 인천을 찾았고, 일본·청국 조계지를 가르는 계단에 앉아 '인천의 냄새와 소리와 빛깔을 기록'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인천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고, 인물들의 욕망이 잡탕밥처럼 얽혀있는 도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며 "인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중이고 내년 말에 발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드라마 제작사 에이스토리는 소설 뱅크를 50부작으로 만드는 것을 추진중이다. 에이스토리 오승준 제작2팀장은 "인천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은행에 포커스를 맞춰 개항기의 경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한다"고 했다. 김탁환이 주목한, 개항기 인천의 은행거리가 드라마를 통해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글 = 김명래기자▲ 개항 이후 인천은 사람이 몰려들고, 물자가 모이고, 돈이 흘러나오는 도시였다. 일본 은행을 비롯한 외국계 금융 기관과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이 경쟁했다. 사진은 지난 7일 오후 개항박물관(인천제1은행) 앞 거리 풍경. /임순석기자

2014-10-08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우리가 겪어야 했던… 전쟁과 분단의 고통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자전적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은 한 가족이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겪어야 했던 아픔을 이야기한다.엄마의 말뚝은 모두 세 편으로 돼 있다. '엄마의 말뚝1'은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오누이와 함께 서울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어머니의 이야기다. '엄마의 말뚝2'는 한국전쟁과 오빠의 죽음을 다룬다. 전쟁은 오빠의 목숨을 앗아갔다. 어머니는 고향 땅 개풍이 보이는 강화군 양사면 바닷가에서 아들의 유해를 뿌린다. '엄마의 말뚝2'는 박완서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 주기도 했다. '엄마의 말뚝3'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소설 속 오빠의 죽음은 단지 한 가정만의 아픔이 아니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인해 겪는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당시 북쪽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고향 땅을 가 보고 싶다는 것, 가족의 생사 여부나 알 수 있게 서신 교환만이라도 자유롭게 해 달라는 게 실향민들의 마지막 바람이다.인천에는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많다. 특히 강화도와 교동도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1·4후퇴 때 바닷길로 피란 온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과 가까운 인천에 잠시 머물 생각이었는데, 눌러살게 된 것이다.실향민 1세대 대부분은 고향 갈 날만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또는 홀로 피란 내려온 1.5세대는 어느덧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목동훈기자

2014-10-02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6]'엄마의 말뚝'과 실향민

박완서의 자전적 연작소설 눈길유골 뿌리는 곳이 '강화 양사면'대룡시장·망향단·줄무덤 등교동도엔 실향민 상처 고스란히 간직인천은 지리적 이유로 이북출신 많아서해와 한강 하구가 만나는 지점 너머로 북한 땅 개풍군과 연백군이 보인다. 예성강을 가운데 두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마을은 시멘트나 벽돌로 외벽을 쌓은 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듯한 흰색의 단층 건물 일색이다. 논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 산 중턱까지 올라간 밭이 눈에 띈다.지난달 25일,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은 손에 잡힐 듯했다. 개풍군까지의 최단 거리는 2.3㎞.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고, 물살을 가로질러 헤엄을 쳐도 금세 닿을 듯했다.올 때마다 남한과 북한이 이렇듯 가깝다는 게 새삼스럽다. 북한 땅이 보이는 해안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강화군 하점면 신봉삼거리에서 강화평화전망대 가는 길에는 군 검문소가 있다.이름, 생년월일, 휴대전화 번호 등을 알려줘야 통과할 수 있다. 검문소와 해안 철책선은 이곳이 맘대로 드나들 수 없는 민통선 지역이라는 것을, 60년도 더 지난 한국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케 한다.박완서(朴婉緖, 1931~2011)는 자전적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에서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그렸다. '엄마의 말뚝'은 모두 세 편으로 돼 있다. 이 중 '엄마의 말뚝2'는 한국전쟁과 오빠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데, 오빠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장소가 북한 땅과 지척인 인천 강화도 양사면(소설 속 지명은 양산면)이다.소설 속의 오빠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숨진다. 어머니는 아들(오빠)의 유해를 안고 고향 땅 개풍이 보이는 인천 강화도를 찾는다.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아들이 빨갱이인지, 흰둥이인지는 어머니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 간 그놈의 전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바다에 뿌린 지 수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어머니는 아들을 잊지 못한다. 또 우리 민족이 왜 남과 북으로 갈려 분단의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지척의 고향 땅을 왜 밟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병든 어머니는 사후(死後)에 아들처럼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개풍군과 강화도 사이 바다에 뿌려지길 희망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전쟁을, 고향 땅을 막고 서 있는 분단이란 높디높은 장벽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인천 강화군에는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북한 땅에 서북(西北)이 둘러싸인 듯한 모양의 교동도는 실향민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황래하(73)씨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 518번지다. 한국전쟁 때 교동으로 피란을 왔다. 1950년 8월 25일이다. 황씨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황씨는 "연백 불당포 포구에서 어머니, 형님과 함께 몰래 목선을 타고 교동으로 왔다"며 "배 안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고향 땅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다.당시에는 전쟁 중인데도 교동도와 연백군을 왕래하고는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고향 집에 묻어 놓은 놋그릇을 챙겨 오겠다며 연백으로 떠났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황씨는 "어머니가 집에 올 것만 같았다. 집 앞에서 나를 부를 것 같았다"며 "어머니가 언제 내려올지 몰라 항상 현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고 했다. 황씨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향이 아닌 이북 방향으로 집을 지었다.서경헌(69)씨도 한국전쟁 때 가족과 함께 연백에서 교동으로 피란 왔다. 당시 교동의 토양은 척박했다. 잘 곳도 마땅치 않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고향을 떠난 설움도 모자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먹을 것을 찾아오겠다며 다시 고향 땅으로 들어간 할머니와 누나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서씨는 "부모님이 '곧 고향에 간다. (고향과) 가까운 데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린 세월이 60년이 지났다"면서 "북에 누님이 살아 계신다면 73살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또 "전쟁이 있기 전에는 교동도와 연백군이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며 "교동 사람들은 강화도로 가지 않고 '연백장'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했다"고 했다.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는 2008년 4월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이북에 부모나 자식을 남겨 놓고 피란 온 사연, 갓난아이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일 등 실향민의 아픔과 상처가 담겨 있다.가장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몰래 소리를 죽여가며 배를 저어가고 있는데,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뱃사공은 아기를 빼앗아 바다에 빠뜨렸다. 아기 엄마는 당혹해 하며 아기를 건지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자칫 인민군의 다발총 사격으로 모두 다 위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격강천리라더니' 中 김옥분씨 증언)한국전쟁 당시 교동도에 정착한 피란민은 1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은 50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외지로 떠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실향민에 의해 형성된 교동도 대룡시장 골목길. 1960~70년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예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안례(55)씨는 "한국전쟁 때 피란 나온 분들이 만든 시장"이라며 "비어 있는 가게가 많다. 실향민 1세대 상당수는 아프거나 돌아가셨다"고 했다.대룡시장에서 만난 조희순(71·가명, 용인시 보라동)씨는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를 찾고 있었다. 이북에서 교동으로 피란 내려와 봉소리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조씨는 "교동에서 5년 정도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다"며 "주변은 많이 변했는데, 시장 길은 그대로다"고 했다. 교동에 오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고 묻자, 그녀의 남편이 말을 받는다. "가끔 와요. (부인이) 평소에도 오고 싶어 안달이에요." 조씨에겐 교동도가 제2의 고향인 것이다.북한 땅이 보이는 교동도 북쪽에는 이북 방향으로 나란히 선 '줄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고향을 바라보고 싶은 실향민들의 애틋한 마음이 무덤을 그렇게 쓰게 한 것이다. 지금은 자식들이 유골을 수습해 납골당에 모시는 추세여서 그 '줄무덤'마저도 희미해지고 있다.소설 '엄마의 말뚝'처럼 고향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유골을 뿌리는 실향민이 지금도 있을까. 철책선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다.교동도 지석리에는 연백군민회에서 만든 망향단이 있다. 연백군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은 고향이 보이는 이곳 망향단에서 제를 지낸다.실향민 이범옥 할머니는 고향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격강천리(隔江千里)라더니/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한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을 만나/바다로 흘러드는데//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 가련만//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속에 목숨을 부지하려/허둥지둥 나왔는데/부모형제 갈라져 반 백년이 웬 말인가?//함께 나온 고향친구 뿔뿔히 흩어지고/백발이 되어 저 세상 간 사람 많은데/남은 사람 고향발 디딜날 그 언젠가!통일부에 따르면 올 8월 말 기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인천 거주자는 5천744명으로, 10년 전보다 약 2천900명 줄었다. 단순 계산으로 1년에 290명 정도가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범옥 할머니도 고향 땅에 발을 디딜 날만 기다리다 지난 2011년 8월 저세상으로 떠났다.인천은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이북 출신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 이북5도 인천사무소는 인천에 거주하는 이북 출신 실향민 가족을 7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시내의 경우, 동구 송림동과 남구 용현동 등지에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남동구 소래포구도 1960년대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를 하면서 형성됐다.'인천지구 평안남도민회' 황윤걸(82)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홀로 피란 왔다. "두 달 후에 만나자"며 고향을 떠났는데, 어느덧 60년이 넘었다고 한숨지었다. 황씨는 "흰 쌀밥, 고깃국을 먹을 때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며 "며칠 전(9월25일)이 아버님 생신이어서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일을 알 수 없어 생신날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는 게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다"고 했다.글·사진 = 목동훈기자▲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 본 북한 땅. 강화평화전망대에서는 황해도 연안군과 개풍군 평야지대를 눈 앞에서 맞이할 수 있다. 소설 '엄마의 말뚝'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유해를 뿌린 곳이 이 근처 바닷가다. 전망대에서 개풍군까지의 최단 거리는 2.3㎞에 불과하다. 개성공단까지는 약 18㎞다. /임순석기자▲ 강화평화전망대 야외 망배단에 있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시인 한상억(韓相億, 1915~1992)이 노랫말을 짓고 최영섭(崔永燮, 1929~)이 작곡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둘 다 강화 출신이다.▲ 한국전쟁때 피란 온 이북 출신 실향민에 의해 형성된 교동도 대룡시장 골목길. 1960~70년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을 준다.▲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에 있는 망향단. 연백군 등 황해도가 고향인 실향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2014-10-01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남북 이념갈등 단면… 최인훈의 소설 '광장'

최인훈(崔仁勳, 1936~)의 소설 '광장'은 이명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분단 상황의 부조리와 남북 이데올로기 갈등의 단면을 그린 작품이다. 서울의 한 대학교 철학과 학생 명준은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은' 남한 사회에 절망을 느껴 월북한다. 하지만 명준은 '개인이 아닌 당이 주인공'인 북한 사회에도 환멸을 갖는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된 명준. 그는 전쟁에서 딸을 임신한 애인 은혜를 잃고, 포로가 된다. 그는 남한과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인도행 배에서 은혜와 딸을 떠올리며 바다에 투신한다.인천은 소설 '광장'의 여러 공간적 배경 중 한 곳이다. 최인훈은 명준의 첫 번째 여자친구 윤애의 집과, 명준이 어선을 타고 월북하는 장소를 인천으로 설정했다. 명준이 윤애 집에 머물면서 선창을 배회하는 장면에선 인천의 옛 부두 풍경이 실감난다.소설 '광장'을 읽으면 전쟁 포로를 떠올리게 되고, 전쟁 포로는 포로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인천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지만, '국제도시'를 이야기 하는 지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인천은 전쟁 포로와 관련해 다른 도시에 비해 더 깊은 아픔을 갖고 있는 도시다.최인훈은 1960년 11월 종합문예잡지 '새벽'을 통해 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작품 분량을 늘려 '정향사'에서 첫 개작 단행본을 냈다. 이후 그는 신구문화사,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등을 통해 재출간할 때마다 내용을 수정하고 다듬었다. '광장'은 오랜 기간 많이 읽힌 책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만 약 68만부가 팔렸다. /목동훈기자

2014-09-24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5]소설 '광장'과 인천 포로수용소

본국송환 거부 중립국 선택한 포로 이야기… 인천이 남·북 잇는 상징 장소부평 등 인천에 수용소 3곳이나 위치해 전쟁 포로와 연관성 깊어서해교전·연평도 포격 등 지금도 남·북 군사적 대립·이념논쟁 진행중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3,000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최인훈(崔仁勳, 1936~)의 '광장'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인천항을 떠나 당시 중립국인 인도로 가는 배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배에는 주인공 이명준 등 본국 송환을 거부한 한국전쟁 포로들이 타고 있다. 소설을 벗어나 실제도 그러했는데, 본국 송환을 거부한 전쟁 포로 77명(중국인 포함 88명)이 1954년 2월 인천항에서 영국 수송선 '아스투리아스호'(Asturias)를 타고 인도로 떠났다. 당시 인천항에선 이들을 중립국으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소설 속 명준은 남한과 북한 사회에 실망감을 느껴 인도행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길 희망했다.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에 혐오를 느꼈다. 포로수용소 역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친공과 반공 포로간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명준은 서울의 한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남한 사회에 환멸을 가졌다."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중략…)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중략)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앞서 명준의 아버지는 남로당 활동을 하다 해방 그해 북으로 갔다. 명준은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 가 고문을 당했다. 빨갱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런 남한 사회가 더 싫어졌다. 명준에게는 인천 사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에 머물다 돌연 월북했다.뱃고동. 산새 울음. 소주잔을 들어서 쭉 들이켠다. 목에서 창자로 찌르르한 게 흘러간다. 이 목로술집은 인천에 와서부터 단골이다. 얼마 붐비지 않는 게 좋았고, 내다보이는 창밖이 좋다. 마룻장 밑에서는 바다가 철썩거린다. 다 탄 담배를 창밖으로 던진다. (…중략…) 주인이 명준에게 한 귀엣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북 가는 배 말씀입죠."얼떨결에 월북했지만 명준은 북한에 이상적인 사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중략)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 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북에서 노동신문 기자로 일하던 명준은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 은혜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명준은 인민군으로 참전하고, 은혜는 간호병이 됐다. 하지만 유엔군의 폭격으로 은혜는 숨지고 명준은 포로로 잡혔다. 은혜는 명준의 딸을 가진 상태였다. 명준에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명준이 갈구한 '진정한 광장'은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명준은 북한, 남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인도로 가는 배에서 바다에 투신했다. 거기에 명준이 바라는 '광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인천은 소설 '광장'에서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남한에서 명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 여자친구의 집이 인천에 있었고, 명준이 어선을 타고 월북한 곳도 인천이다. 인천이 남한과 북한을 잇는 상징 장소인 것이다.지금도, 인천은 남북 군사적 대립과 이념 논쟁의 '현장'이다. 서해교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맥아더 장군 동상을 둘러싼 보수·진보단체간 갈등이 이를 증명한다.소설 '광장'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전쟁 포로'와 인천과의 연관성도 깊다. 인천에는 3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인천항 인근의 연합군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당시 남구 포로수용소와 부평 포로수용소다.연합군포로수용소는 중구 신흥동3가 신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일제는 신사(神社, 현 인천여상 자리)와 인천항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곳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고 한다.한국전쟁 당시 남구 학익동에 있던 인천소년형무소(현 인천구치소)는 인민군 포로수용소로 활용됐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 수가 급증하자, 인천소년형무소를 수용소로 활용했다. 이곳 포로 수는 9월 말 6천여명에서 11월 초 3만2천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 수용소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12월 폐쇄됐다. 이곳 포로들은 기차 또는 배를 통해 부산 등 지방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반공포로 출신 이형근(85)씨는 "인천형무소에 있다가 인천항의 수송선을 통해 부산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며 "인천형무소는 인민군 포로들로 만원이었다. 형무소 주변까지 철조망과 천막을 쳐 놓았을 정도"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에는 월미도에 임시수용소도 설치됐다.유엔군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친공과 반공 포로 간 살육전이 벌어지는 데다, 포로 통제에 어려움이 크자 1952년 6월부터 포로 분산작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1953년 3월 부평미군부대에 제10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여기에는 약 1천500명의 반공포로들이 수용됐는데, 현 부영공원 자리다.부평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 석방사건' 때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당시 논산, 광주, 부산, 부평 등 8곳에 수용돼 있던 반공포로 3만5천698명 중 2만7천388명이 석방됐다. 부평포로수용소는 '석방'이 아닌 '탈출'이었다. 하루 늦은 19일이었다. 부평포로수용소 헌병대장이 헌병 총사령관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포로들은 이 헌병대장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했다. 부평에는 1천486명이 갇혀 있었는데, 탈출 과정에서 수용소를 지키던 미군의 사격으로 42명이 숨지고 6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탈출에 성공한 포로는 538명이었다.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군이 개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상자 수가 달랐다"며 "부평은 (탈출이 하루 늦어) 미군이 포로 통제를 강화한 부분이 있다. 미군이 탈출하는 포로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라고 했다.반공포로 출신 노관명(87)씨는 부평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다. 노씨는 "부평수용소에 3개 대대가 있었다. 1개 대대에 500명씩 있었는데, 나는 1대대 경비 부관이었다"며 "포로들이 철조망에 담요를 덮고 넘어가자, 미군들이 기관총을 쐈다"고 했다. 이어 "당시 수용소 주변은 모두 논바닥이었다"며 "부평 민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창영교회에서 보호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당시 남북은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 문제를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의해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대표 의장국인 인도, 유엔군 측의 스위스와 스웨덴, 공산군 측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와 인도군은 그해 9월 인천항을 통해 입국, 비무장지대에 도착했다.판문점. 설득자들 앞에서처럼 시원하던 일이란, 그의 지난날에서 두 번도 없다. (…중략…)"동무, 앉으시오."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중립국."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휴전회담의 핵심 의제였다. 남북은 휴전 후에도 이어진 '이념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머쥐려 했다. 명준의 중립국 선택은, 또 그의 죽음은 한국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민족의 비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중략…)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실제로는 본국 송환을 거부한 전쟁 포로 77명 모두가 인도에 도착, 그곳에 머물러 살거나 브라질 등에 정착했다.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 현동화(82)씨는 지난달 뉴델리에서 인천아시안게임 성화 봉송 주자로 뛰기도 했다.일러스트/박성현기자 글 = 목동훈기자▲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한국전쟁 발발 전, 인천에서 어선을 타고 월북한다. 명준은 인천의 한 부두 목로술집에서 이북 가는 배를 소개받았다. 사진은 '광장'의 장소와 꼭 닮은 옛 인천 부두의 정취가 남아 있는 화수부두 모습이다. /임순석기자

2014-09-24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프로야구 다룬 첫 소설… 박민규가 쓴 '각본있는 드라마'

스포츠 경기를 두고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들 한다. 특히 야구 경기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측 불허의 명승부가 종종 펼쳐지곤 한다. 그래서 스포츠는 경기 현장에서 보는 게 실감나게 마련이다. 스포츠를 책으로 옮긴다면 어떨까. 한 경기, 한 시즌의 결과는 이미 모두 알고 있지만, 그 결과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재미난 에피소드는 꼭 그날 그때가 아니라도 읽을 수 있다. 야구장에 가지 않아도 텔레비전 앞에 앉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다닐 수 있다.인천 최초의 프로구단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야기를 담은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그렇다.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어우러진 인천 야구와 선수들의 이야기가 한 장면 한 장면 펼쳐진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슈퍼스타즈의 팬이 되어 버리고 만다.이 '각본 있는 드라마'는 여전히 읽히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2001년 1월부터 2014년 9월까지 서울대 중앙도서관 대출 순위 100위 중 6위에 랭크할 정도다. 저마다 응원하는 야구팀은 달라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의 마음 속엔 그 옛날 인천의 '슈퍼스타'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프로야구를 다룬 첫 소설의 배경이 '인천'이라는 점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 야구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개항과 외래 문물의 도입, 야구를 좋아하는 미군부대 등 인천을 구도(球都)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많다.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도 야구 경기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등 아시아 8개 국가가 실력을 겨룬다. 1982년 인천의 한 소년이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 야구팬이 됐듯이, 아시아 어느 나라의 한 소년도 인천아시안게임을 통해 야구팬이 될 것이다. /김민재기자

2014-09-17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4]삼미 슈퍼스타즈와 인천야구

삼미가 꿈꾸던슈퍼스타야구도시 인천이계보를 잇다박민규 소설 '삼미… 마지막 팬클럽'구도 인천 최초 프로구단 이야기 담아외래문물 유입 관문이라 일찍 접해일제때 한용단·해방후 전인천군 활약유완식·박현식·임호균 등 스타 배출동산고 출신 류현진이 '바통' 이어받아리틀야구단 후배들 메이저리거 꿈 꿔지난 13일 오전 10시께 인천 남동구 도림동 주적체육공원 야구장.빨간 야구모자를 쓴 인천 남동구청 리틀야구단 선수 22명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서울 용산구청장배 대회를 앞두고 훈련에 한창이었다.주장 강현구(도림초6·투수) 군이 마운드에서 매서운 투구실력을 뽐냈다. 강군은 야구부가 있는 인천 동산중으로 진학이 결정됐다.강군은 "동산중 선배 류현진(27·LA다저스) 선수처럼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게 꿈이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시곗바늘을 32년 전으로 돌려 1982년 2월 경남 진해공설운동장으로 찾아가 보자.그해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창단된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단 선수 22명이 개막을 앞두고 진해(마산)에 차린 첫 스프링캠프에 참가하고 있었다.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슈퍼스타 선수 한 명 없었다. 그러나 팀 이름은 '삼미 슈퍼스타즈'.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하는 숙명을 지닌 '슈퍼맨'처럼 시즌이 끝날 때까지 '슈퍼스타'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꼴찌였다는 얘기다.구도(球都) 인천의 첫 프로구단 이야기를 담은 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한겨레출판)은 그들의 야구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으며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다."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3년 반의 짧디짧은 삼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단 당시 10대였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주인공 '나')이 30대에 이르러 그간 잊고 지내던 삼미의 야구철학을 따르는 마지막 팬클럽을 창단한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야구'를 소재로 해서였을까. 10년이 지났지만 2014년 9월 현재 16만권(44쇄)이 팔려나갈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인천야구팬이라면 무엇보다 소설 곳곳에 녹아 있는 '인천 야구'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나는, 신문 한 귀퉁이에서 마산을 향해 출발하는 1982년 2월 7일의 삼미 슈퍼스타즈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과거 인천 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이자 '아시아의 철인(鐵人)', '한국의 홈런왕'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장악한 한국 야구의 패왕이자 위대한 초대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 박현식씨의 사진과 그 기사가 실려 있었다."창단 첫해 삼미 슈퍼스타즈에선 감독 박현식(1929~2005)이 유일한 스타라면 스타였다.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의 박현식은 7살 때 인천으로 와 동산중(현 동산고)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했다. 박현식은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65년 6회 대회까지 빠지지 않고 출전해 '철인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59년 필리핀 대회에선 아시아인으론 처음으로 장외홈런을 날렸다. 박현식은 은퇴 후 실업팀 감독 등을 거쳐 삼미의 초대 감독직에 올랐다. 그러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성적(3승 10패)으로 시즌 도중 삼미와 작별하는 아픔도 겪었다.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인 삼미의 보잘것없는 정체가 드러나자 '슈퍼스타'를 따르던 어린 인천팬들 사이에 '변절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평에 사는 친구는 서울과 가깝다며 'MBC청룡'의 파란 야구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인천 토박이 집안에서 자란 친구는 본관(本貫)이 청주라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OB베어스로 응원팀을 바꿨다. 이기는 야구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삼미 야구잠바는 놀림거리가 됐다."무덥고 무더웠던 그 해의 여름, 정말이지 우리는 그 긴 팔의 잠바를 입은 채 동정을 받거나, 격려를 받거나, 놀림을 받거나, 외면을 받았고,…우리는 외로웠다."박현식과 더불어 삼미 슈퍼스타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천 야구스타는 임호균(58)이다.1972년 인천고에 입학한 임호균은 1974년 노히트노런 2회를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동아대와 실업팀 한전을 거쳐 박현식 등의 권유로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임호균은 입단 첫해 장명부와 함께 원투 펀치로 마운드를 책임졌고, 12승을 거두며 1982년 꼴찌였던 팀을 2위로 올려놓는 '사고'를 쳤다. 믿거나 말거나 소설에서 임호균은 이렇게 등장한다."하지만 그것은 전설의 시작에 불과했다. 우선 포수의 위치에 박스를 놓아 정확한 스트라이크 존을 만든 다음, 직구와 슬라이더, 싱커의 위치에 불붙인 담배를 한 개비씩 세워두었다. 마운드에 선 임호균은 침착한 눈빛으로 담배를 응시했고 차례차례, 바깥쪽과 가운데, 몸 안쪽의 순으로 공을 던졌다. 샤악, 위익, 스윽. 놀랍게도 침을 발라 세워둔 담배는 쓰러지지 않고, 끄트머리 담뱃불만 모두 꺼져 있었다."인천이 박현식과 임호균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에 가까웠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인천은 야구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대한야구협회(KBA)가 공식 지정한 한국야구 원년은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 Gillet)가 장비를 들여와 황성기독청년회(YMCA 전신)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는 1904년이다. 그런데 이보다 5년 앞선 1899년 2월 3일 인천고의 전신 인천영어야학회 1학년에 재학 중인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藤山藤芳)가 쓴 일기에 "서양식 공놀이인 베이스볼을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1883년 개항 이후 외래문물 유입의 관문이 된 인천에 야구가 먼저 전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인천 최초의 야구단은 1920년 곽상훈이 경인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던 16~17세 학생을 모아 만든 '한용단(漢勇團)'이다. 한용단의 홈그라운드는 일명 웃터골 경기장으로 불리던 인천공설운동장이었는데,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다. 민족의식이 짙었던 한용단은 결승전 오심으로 불거진 일본인 심판 폭행 사건으로 해체되고 만다.해방 이후 인천 야구의 중흥기를 이끈 야구팀은 '전인천군'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직장인 야구단이었지만, 실력만큼은 국가대표급이었다. 유완식과 김선웅, 장영식 등을 주축으로 1947년 전국체전 등 그해 치러진 전국 대회를 모두 휩쓸었다.당시 인천의 뛰어난 야구 실력은 인천에 주둔한 미군 부대와도 무관치 않았다. 전인천군은 부평 미군 24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24) 부대와의 연습경기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았고, 종종 내기시합을 벌여 귀한 야구장비를 얻어내곤 했다.1950년대는 인천고·동산고 전성시대였다. 인천고는 1953년부터 청룡기 대회를 2연속 제패했고, 동산고는 1955~1957년 청룡기대회 3연속 우승으로 청룡기를 영구소장하는 영광을 얻었다.1982년 인천도 프로야구 시대를 열었다. 프로 첫해 인천과 함께한 삼미는 모그룹의 경영난으로 1985년 청보그룹에 매각돼 '청보핀토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청보 역시 1988년 태평양 돌핀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1996년 시즌엔 현대 유니콘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000년 현대가 인천을 떠나면서 신생팀 SK와이번스가 둥지를 틀었다.프로출범 첫해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홈구장이었던 인천 도원야구장에 몰린 관객수는 모두 12만951명. 경기당 3천24명의 팬이 야구장을 찾았다. 2002년 SK와이번스가 문학야구장 시대를 맞았고,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인천 야구장을 찾은 누적 관객은 1천366만여 명이다.유완식과 박현식, 임호균으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스타의 계보는 동산고 출신 류현진이 이어받았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2014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 참가해 우승컵을 들어올린 문태민(남동리틀야구단) 군과 신동완(부평리틀야구단) 군이 그 계보를 이어 받을지 관심이다.2014년 9월 22일 낮 12시 30분. 인천아시안게임 야구 첫 시합이 문학경기장에서 대만과 홍콩의 맞대결로 펼쳐진다. 이번 아시안게임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중국, 홍콩, 몽골, 파키스탄, 태국 등 8개 나라가 참가한다.한국, 일본, 대만의 메달 경쟁에 못지않게 4년 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혜성'처럼 등장해 야구 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던 몽골과 파키스탄 야구 대표팀이 이번 대회에선 어떤 볼거리를 선사할 지도 관심이다. 4년 전 덥다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타석에 선 파키스탄 선수와 배트 1개 달랑 들고 대회에 참가한 몽골 선수단은 이번에도 스포츠의 '궁극의 목적'인 참가하는 것에만 의미를 둘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몽골이나 파키스탄의 야구 선수들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철학처럼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른다. 구도 인천에서 펼쳐지는 아시아 8개국의 야구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까 자못 궁금하다.사진/조재현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 글 = 김민재기자

2014-09-17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3]이가림의 '인천 시편'

관광명소로 자리잡은 '소래포구' 염전과 소금창고로 깊이있게 조명 우리나라 최초 천일염전 등 예로부터 인천은 소금과 밀접"인천시인에겐 인천이 중심" 지역 대표 키워드 '갯벌'의 노동·사고 다뤄 지하철 이야기 담은 작품 '2만 5천 볼트의 사랑'도 눈길인천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장소는 남동구 소래포구다. 수도권 최고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그 포구 바로 옆 소래습지생태공원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어린 유치원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이들에게는 단체 학습장이고, 어른들에게는 도심 한복판에서 쉽사리 구경할 수 없는 풍광을 주는 그런 곳이다.그 소래를 그린 시 중에 단연 이가림(1943~)의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이 돋보인다.소래포구 어디엔가 묻혀 있을/추억의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도/우연히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속셈을 슬그머니 감춘 채/몇 컷의 흑백풍경을 훔치러 갔다/가을은 서둘러 떠나버리고/미처 겨울은 당도하지 않은/서늘한 계절의 어중간/버젓이 갯벌 생태공원으로 둔갑해 있는/옛날 소금밭에 들어가서/찰칵, 찰칵, 찰칵,/사정없이 풍경을 자르는/재단사의 가위질 소리에/빼빼 마른 나문재들이 어리둥절/몸을 웅크렸다/시커먼 버팀목의 부축을 받으며/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소금창고와/버려진 장난감 놀이기구 같은 수차(水車)가/시들어가는 홍시빛 노을을/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마른 뻘밭에 엎드린/나문재들의 흐느낌 소리를/엿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을 베끼러 갔다가/오히려 풍경의 틀에 끼워져/한 포기 나문재로/흔들리고 말았음이여시인에게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마뜩지 않다. 이곳이 어떤 땅인지, 이 소금밭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신기한 듯 낯선 구경거리를 담아 가기에만 바쁜 모습이 영 내키지 않는다. '흑백풍경을 훔치러 갔다'는 것은 인천의 옛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어서 소래습지생태공원을 찾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만, 관광객들의 소란에 추억할 분위기를 빼앗기고 말았다. 오히려 시인이 그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붙잡혀 버렸다. 이런 개인적 느낌뿐 아니라 지금은 모양만 남아 사진 소재용으로 쓰이는 소래염전의 역사까지도 이가림은 풀어내고자 했다. '시커먼 버팀목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소금창고'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랜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게 한다.우리나라 천일염전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하는데, 소래염전은 그 인천의 주요 염전부지 중 한 곳이다. 일제가 중국 천일염의 공세에 맞서, 그리고 군사적 목적의 재원조달 차원에서 구상한 게 천일염이다. 그 시발지는 주안염전이다.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내는 우리 전통방식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고 대량생산하기도 어렵다보니 넓은 데 바닷물을 가둬 놓고 햇빛에 말려서 만드는 방식을 인천 땅에서부터 도입한 것이다. 1906년 주안의 시범생산이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자 남동으로, 군자로, 전국으로 확대했다. 소래염전은 1930년대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일제 강점기에 나온 '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주안과 남동 염전 조성 등 초창기 천일염 생산 상황이 자세하다. 이 '인천부사'에는 소래염전은 언급돼 있지 않다.인천은 아주 오래전부터 소금과 밀접한 곳이다. 이곡(李穀·1298~1351) 등 고려시대 문인들도 영종도 등 섬지역에서 소금을 생산한다는 내용을 시로 노래하기도 했다. 인천의 최초 개척자로 불리는 비류(沸流)도 2천년 전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찾다가 인천(미추홀)에 닿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지난달 21일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을 찾았다. 염전 옆 소금창고가 눈에 띄었다. 이가림이 노래한 것처럼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시커먼 버팀목'에 지탱하는 소금창고였다. 창고 안에는 새하얀 소금이 소복이 쌓였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시에 등장한 그 관광객들이 나타난 것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바람에 그 속에 섞여 있을 수가 없었다. 비로소 나문재들이 왜 어리둥절하고, 몸을 웅크렸는지 알 듯했다.1973~1996년 소래염전에서 일한 김동안(72)씨도 만났다. 김씨는 "소금창고는 8개가 남아 있는데 이 중에 일본인이 지은 것은 3개다. 염전 옆 소금창고는 옛 소금창고 2개를 뜯어 크기를 줄여 새로 만든 것이고, 그 바로 뒤에 예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소금창고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라고 덧붙였다.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소래염전은 이제 약 3만4천㎡ 정도 남았는데, 주말이면 1천명 이상 몰린다고 한다.추석을 앞두고 전국이 들떠 있던 지난 3일 인천 연수구 자택에서 만난 이가림 시인은 "인천에서 사는 시인은 인천을 중심으로 놓고 시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천 시인에게는 인천이 중심이다. 여기서 깊이 파고 들면 세계 문학과 통하게 된다. 시인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나의 가장 먼 여행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그 인천의 핵심 키워드는 갯벌이다. 갯벌에서 소금도 나오고, 나문재며 조개도 나오고, 포구도 나온다. 이가림의 시 중에는 갯벌에서 조개 줍는 여인들의 모습을 마치 저 유명한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다. '바지락 줍는 사람들'이다.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저녁 종소리가/천도복숭아 빛깔로/포구를 물들일 때/하루치의 이삭을 주신/모르는 분을 위해/무릎 꿇어 개펄에 입맞추는/간절함이여//거룩하여라/호미 든 아낙네들의 옆모습이가림 시인은 "송도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그러니까 매립 전인 1980년 후반~1990년 초 그곳이 바닷가였을 때 수 없이 봤던 해질녘 풍경을 그린 것이다. 노동이 종교 만큼이나 신성한 일이라는 뜻을 넣고 싶었다"며 "이 시가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과 '만종'을 떠올리게 한다고들 한다. 맞다. 그림을 상세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잘 나타내기 위해 차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갯벌은 우리에게 생명을 잇게 하는 간절함도 주지만, 그로 인해 목숨마저 잃게 하기도 한다. 바다와 갯벌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어촌 사람들도 조개를 캐러, 나문재를 뜯으러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이가림의 시 '나문재'는 갯벌에 나는 나물인 나문재를 뜯으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어촌 아낙네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누구라도/밀물 드는 저녁 갯벌에 서서/나문재 밭을 보거든/그저 붉게 깔린 바닷가 꽃밭쯤으로/ 바라보지 말 일이다//가쁜 숨 몰아쉬며/익사하는 태양이/각혈하듯 검은 피 쏟아놓아/갯벌이 팥죽빛으로 어두워진 뒤에도/나문재 뜯으러 간 어메/영 돌아오지 않아//단발머리/깡마른 막내 고모의 등에 업혀/옴마한테 얼릉 가아,/옴마한테 얼릉 가아./보채고 또 보채는/쌔까만 코흘리개 하나 있었으니//배고파서/부엉이 새끼같이 눈 껌벅이는/한밤중/쇤 나문재 몇 줄기/씹어 삼키고서야/가까스로 잠들었느니//꿈속에 무시로 떨어지는 별똥별들/하얀 튀밥 되어/머리맡에 수북이 쌓여갔느니//누구라도/밀물 드는 저녁 갯벌에 서서/나문재 밭을 보거든/그저 붉게 깔린 바닷가 꽃밭쯤으로/바라보지 말 일이다시를 읽기만 해도 그냥 눈물이 맺힐 정도로 슬픈 어조다. 갯벌이 보이는 도로변을 달리면서 보았던, 갯벌을 붉게 물들인 나문재가 이렇게 가슴을 먹먹하게 할 수가 없다. '행이재'라고도 불리는 '나문재'는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갯벌에 나가면 뜯을 수 있던 고마우면서도 슬픈 먹거리였다.이가림의 인천 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시가 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 이야기를 담은 '2만 5천 볼트의 사랑'이다.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2만 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2만 5천 볼트의 사랑과/2만 5천 볼트의 고독이/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넘실거리기 때문이다//(…중략…)//그 꿈틀거리는 몸뚱어리 마디마디/환히 불 밝힌 방 안에서/학생 공원 선생 군인 회사원/창녀 수녀 신문팔이 소매치기/이 땅의 눈물겨운 살붙이들 모두가/서로 뺨을 맞대고//(이하 생략)인천지하철 부평역에서만 하루에 12만 명이 타고 내린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지하철. 지붕에 단 전깃줄에 흐르는 2만 5천 볼트의 전기로 움직이는 그 지하철은 그 속에도 2만 5천 볼트의 인간적 뜨거움이 흐른다는 점을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지하철 1호선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다양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태웠던가.이가림 시인은 "조병화 선생님의 스카우트 제의로 1982년 인하대 불문과 조교수가 된 후 줄곧 인천에서 살았다. 제2의 고향이다. 터를 잡고 사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그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인천에 대한 애정이 시간과 비례해 커진 것도 영향이 있다"고 했다.■시인 이가림은?1943년 만주 열하(熱河) 출생1964년 시 '돌의 언어' 경향신문 신춘문예 입선1973년 첫 시집 '빙하기' 출간(민음사)1982년 인하대 불문과 조교수1993년 시 '석류' 제5회 정지용문학상 수상2001년 인하대 문과대 학장2011년 6번째 시집 '바람개비별' 출간(시학사). 이가림의 인천시 다수 수록글 = 박석진기자▲ 이가림 시인이 시 '석류'로 수상을 하게 된 '제5회 정지용문학상 시상식' 기념촬영 모습.▲ 1933년 일제시기 나온 '인천부사(仁川府史)' 표지 사진.▲ '인천부사(仁川府史)' 중 천일염 등 새로운 방식의 소금생산 방식을 소개한 내용. 내용 중 사진은 '조선염업회사 염전' 모습.

2014-09-10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70년전 인천지역 미군과 기지촌의 '민낯'

인천 부평 한복판의 미군기지 캠프마켓은 기지 '반환'(이전)을 앞두고 있다. 캠프마켓은 일제 조병창 이후 70년 이상을 외국군이 주둔해 온 곳이다.소설가 이원규(67)가 쓴 인천이야기 중 미군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분단 소설을 통해 인천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원규가 주목했던 소재는 미군이었다. 이원규의 손끝에서 인천 미군부대 주변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이 소설로 형상화 되었다.우리나라에서 미군기지와 기지촌이 처음으로 생긴 도시가 인천이다. 당시 우리는 미군을 통해 미국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출발점이 인천이었던 셈이다.미군은 일제의 침탈을 벗어나게 해준 해방군임을 자임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구 문화를 도시 곳곳에 전파했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에서 미군은 일종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반면 미군은 우리에게 점령군으로서의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웠다.어른이건 어린아이건 가리지 않고 총을 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빈번했다. 양공주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지만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양공주로 인해 이권을 챙기는 일에 몰두한 이웃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떠났다. 희미한 기억만 남았다.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조사전문위원은 "부평은 1930년대 일제가 포병 훈련장으로 쓰고 조병창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남의 땅'으로 남아있다"며 "이 공간에서 이어진 역사, 이곳을 점령했던 미국과 일본을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원규처럼 기지촌 인천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없다.그 이원규의 작품은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잊혀져가는 미군에 얽힌 기억을 되살리게 해주는 촉매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명래기자

2014-09-03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2]주한 미군, 양공주, 그리고 인천

일본이 떠난 자리또다른 점령군 미군해방이 아니었다그건 임무교대였다이원규의 '겨울새' '달무리' 등 작품 들여다보니…현장취재·어릴 적 체험 통해 미군 주둔 사회문제 조명송유관 인근 아이·청년 조준사격에 양공주 살해 사건도한국 최초의 기지촌 '부평' 1960년대 초반 양공주 1700명1955~1960년 해외 입양아 3525명중 2240명이 '혼혈아'땅굴 이용한 미군 군수물자 절도 '두더지 도둑'도 다뤄8·15 해방과 함께 인천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미군을 맞았다. 1945년 9월 8일이었다.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천항 부두에 몰렸다. 거리 질서 유지 명분을 내세우며 나와 있던 일본 경찰이 느닷없이 인파를 향해 총질을 해댔다. 항일 독립운동가 권평근(權平根·당시 47세),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당시 26세)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해방 공간에서조차도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야 하는 현실에 군중은 분노했다. 이원규 소설 '황해'에는 당시 이 사건을 겪은 인천 시민들의 반응이 잘 드러나 있다.돌덩이처럼 딱딱한 경찰들의 어깨너머로 배에서 내려 집결하고 있는 미국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훌쩍 큰 키에 철모를 쓴 군인들, 그들은 방금 자기들의 목전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을 터인데도 아무 느낌도 없다는 듯이,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을, 이 나라를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처럼 또 하나의 점령군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략)… "서형, 해방이 아니에요. 두 나라가 임무교대를 하고 있어요."제2차 세계대전 승전과 함께 미 24군단은 남한 점령 계획인 '베이커-포티 작전'에 따라 진주했고,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은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완전히 철수한 적은 1949년 6월부터 1950년 9월까지 고작 1년 남짓이다. 그 출발점 인천에는 아직도 미군 부대가 있다.우리나라 작가 중 인천에 주둔한 미군과 기지촌을 가장 실감나게 그린 작가로는 이원규(67)가 있다. 그는 '겨울새'(1987년), '달무리'(1987년), '겨울의 끝'(1988년), '까치산의 왕벌'(1993년)을 통해 인천의 미군 이야기를 다뤘다. 현장 취재를 통해 얻은 사실을 종합한 것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의 어릴 적 체험도 담았다.미군 주둔은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점도 많았다."겟 아우트 옐로우 쌔비지(꺼져라, 황색 야만인놈아)!" 좁디좁은 길, 미군 지프 앞에 가는 젊은 남녀를 향해 길을 비키라며 미군 병사가 내뱉는 이 욕설 한마디로 이원규는 미군이 한국인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송유관이 개통된 이후 철둑은 밤낮으로 순찰병들이 배치되어 도대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중략)… "얘, 사람덜이 너한테 파이푸를 열어달라구 헐 모양이다. 미군 순찰한테 들키면 총을 맞을지두 모르는 일이 아니냐. 칼 물구 뜀뛰기하듯이 위험한 일이라 난 벌써 가슴이 떨린다.-<'까치산의 왕벌' 중에서>인천 남구 숭의동·용현동의 송유관 도둑을 그린 '까치산의 왕벌'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것이다. 지난 달 30일 인천시 남구 숭의동 정아슈퍼에서 만난 김윤수(78) 씨는 비교적 정확하게 '오일 웜(기름 벌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 씨는 "숭의교회 옆에 영국 부대가 있었고, 그 옆으로 송유관이 있었다"며 "당시 용현동 사람들이 자정 무렵에 송유관 근처에 나가 새벽까지 논밭에 흐르는 기름을 퍼 담아서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를 막기 위한 미군의 경계 근무는 삼엄했다. '접근시 발포'는 경고에만 그치지 않고 실행됐다. 1957년 7월에 송유관 위에 앉아 놀던 세 살배기 김용호 어린이가 미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고, 같은 해 8월에도 송유관 인근 염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18세 조병길 군 역시 미군이 쏜 총에 왼쪽 팔과 복부를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은 대낮에 놀이 삼아, 사격 훈련 삼아 아이와 노는 청년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해 죽인 것이다.작가 이원규는 "미군은 부대 내에서 한국인이 맥주·잼을 훔치는 것을 적발하면 현장에서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계속 폭행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미군은 일제가 세운 부평 무기공장(조병창) 시설을 기지로 사용했다. 1962년 7월 29일자에 동아일보가 게재한 '미군부대촌의 현실-부평'을 보면, 부평은 휴전 이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인구는 해방 직후의 두 배가량인 8만 명을 헤아렸다. 또 크고 작은 군부대 20여 곳에서 한국인 8천 명이 일했다고 한다.미군 부대 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들이 모여들었다. 1960년대 초반 부평의 양공주는 약 1천7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양공주'를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도 몰렸다. 부대에서 나오는 미제 물자도 나돌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지촌은 이렇게 부평에서부터 형성되었다.워낙 가난한 마을이었으므로 꿀꿀이죽을 먹는 집이 절반이 넘었다. 마을을 굽어보듯이 우뚝 선 철마산 너머 부평평야에 자리잡은 크고 작은 미군 부대들. 거기서 나온 폐품과 식당 찌꺼기를 처리하는 곳은 바로 그 산 너머에 양공주촌과 붙어 있었다. 우리 동네는 거기서 나오는 폐품으로써 살림살이의 많은 부분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겨울새' 중에서>이 작품 속 폐품처리장은 지금의 인천 서구 가정오거리와 계양구 효성동 군부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천 서구 연희동에서 태어난 이원규는 "집안 어른들을 따라 우마차를 타고 2~3차례 구경간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하나 정도 크기의 공간에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면서 "그 중에서도 양말과 내복이 인기 품목이었다"고 말했다. 꿀꿀이죽은 미군 식당의 잔반이다. 폐품처리장에서 팔았다. 미군이 손조차 대지 않고 버린 게 상급이었고, 음식 건더기를 걸러서 모은 것이 중급이었다. 하급의 경우 담배 꽁초와 이쑤시개, 심지어 콘돔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양공주는 '양색시', '양키 마누라', '유엔 레이디', '양갈보' 등으로 불렸다. '겨울새'에 등장하는 양공주는 '양키하고 붙어서 나온 튀기' 아들을 새별(효성동) 인근의 한 민가에 보내 기른다. 한국전쟁 이후 부평의 양공주들은 주로 산곡동, 청천동, 신촌 등지의 영단주택, 판잣집의 단칸방에서 '영업'을 했고 아이가 있으면 인근 마을에서 따로 키웠다. 혼혈아는 아빠를 따라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외 입양되거나 고아로 남았다. 1955~1960년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입양된 3천525명 중 2천240명(64%)이 혼혈아였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에 남은 혼혈아의 절반가량은 경기도·인천의 미군부대 주변에 거주했다. 부평에 명성원이 펄벅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됐는데, 많을 때는 130명가량의 원생이 이곳에서 지냈다.양공주를 전담하는 경찰서도 있었다. 1947년 인천에 여자경찰서가 신설됐는데 '불량 부녀자'의 재활을 돕고, '화류병'(성병)을 관리했다. 성병도 심각했던 모양이다. 1969년 1월 보사부와 미8군이 동두천, 운천, 용주골, 부평, 오산 등 5개 지역 윤락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32%가 임질, 6.5%가 매독 보균자였다. 이 중 부평은 임질 14%, 매독 9.5%였다. 1개월 뒤 보사부는 이들 지역 윤락여성 1만4천 명에 대한 치료에 나섰다는 당시 신문 보도도 있다.양공주를 상대로 한 참혹한 살해사건도 많았다. 1969년 5월엔 부평에서 양공주의 성병 검진 상태를 살피러 나갔던 여경이 한 양공주의 시신을 발견했다. 숨진 양공주는 옷이 다 벗겨진 알몸이었고, 온몸이 칼로 난자를 당한 채였다. 목에는 전깃줄이 감겨 있었다.지난 달 29일 오후 부평 산곡1동주민센터 부근에서 1950년대 부평 미군부대 군속 출신인 리은경(86)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 한양아파트 자리에 있던 부평비행장에서 1959년부터 약 3년간 근무했다. 그 기간에 산곡동 집에서 양공주에게 세를 줬는데, 많을 때는 3명까지 있었다. 리씨는 "당시 미군부대 월급이 많았고, 들어가려면 여기저기 줄을 대야 했다"고 했다. 리은경 씨 역시 고향 사람이 부평에서 통역관을 하고 있어 미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군에 취직하려면 기술 등록을 하고 인터뷰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통역관의 역할이 컸다고 그는 말했다. 리은경 씨는 "여기 사람들 거의가 다 미군과 관련한 일로 먹고 살았고, 양공주에게 세 줘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달무리'는 미군부대로 땅굴을 파고 군수 물자를 훔치는 '두더지 도둑' 이야기다.동생의 배가 바가지를 엎은 것처럼 불룩 솟아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더운 여름날 상한 꿀꿀이죽을 먹어서 가스가 찬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쌀밥 한 공기 해먹이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략)… 저 창고에 의약품이 가득 차 있어요. 페니실링·구로마이싱·다이아찡 같은 건 금값허구 맞먹어요. 명섭이 치료를 하구 한밑천 잡을 수 있어요.다이아찡은 미군 진주와 함께 들어온 약으로 1950년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이나 명섭이처럼 위독한 환자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약을 구하려 했다. '달무리'에서도 명섭의 삼촌이 군부대로 땅굴을 뚫고 의약품을 훔쳐 조카를 치료하고 돈을 벌기 위해 땅굴을 파다가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1970년대 전후 인천 미군들은 명섭이 삼촌과 같은 땅굴 절도단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일명 '털보파'라는 절도단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인천 신흥동 미극동교역처 창고 등 8곳의 미군기지에서 군복, 철제 침대, 자동차 부속품 등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이원규는 "'우리에게 미군은 무엇인가', '미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어렸을 때부터 겪고 들은 미군 이야기를 양심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글 = 김명래기자▲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에 살고 있는 리은경(86) 씨는 1961년 10월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양공주와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리은경씨, 그의 아내, 양공주다. /리은경씨 제공▲ 1 1958년 11월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미군 행렬.2 1948년 인천에서 촬영된 사진. "BEST 'DAMN' PORT IN THE PACIFIC"(태평양 최고의 '빌어먹을' 항구)이라고 적힌 게 눈에 띈다. 3 1960년 부평 백마장(현 산곡시장) 거리. /Flicker 제공 4 일제가 1940년대 산곡동에 노동자 숙소로 개발한 영단주택은 지금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떠난 이후에 양공주들이 이곳에 많이 살았다. /김명래기자▲ 미군은 해방 후 부평에 있던 일제 조병창을 접수했고, 그 일대를 애스컴시티(ASCOM City)로 명명했다. 대부분의 기지가 떠나고 현재 캠프마켓(A-1·44만㎡)만 남아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김현석 학술조사연구위원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기지 위치를 재구성했다.

2014-09-03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전쟁 참혹함' 꼼꼼히 추적한 이원규

'분단 도시, 인천'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가는 소설가 이원규다.인천의 분단 상황을 꼼꼼히 추적한 이원규의 소설을 읽으면 극명했던 좌우 이념 대립, 섬 마을까지 퍼진 이데올로기로 인해 빚어진 참극, 연좌제의 고통, 실향민의 애처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작가 이원규의 선친에서부터 이어오는 '고향 앓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단한 취재를 거쳐 탄생한 인물은 살아 움직이고, 다른 분단소설에서 보기 힘든, 섬과 바다의 언어는 낯선 듯하면서도 입에 감긴다.이원규의 소설 속 전쟁은 참혹하다. 인천대 국문과 오양호(72) 명예교수는 "전쟁을 관념적으로 쓴 작품은 많지만, 전장의 참혹상을 실감있게 보여준 건 이원규가 유일하다시피 하다"고 말했다. 장편 '황해'에 나온 인천상륙작전 당시 시가지 장면을 보자.그 시각 인천의 새벽거리는 갈갈이 찢기고 있었다. 주민을 소개하는 어떤 조치도 내려지지 않고 갑자기 퍼부어진 수천 발의 항아리만한 포탄들은 공장과 집과 나무들과 길바닥을 박살내고 사람들의 몸뚱이도 박살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미군기가 날아와 공습을 했지만 그것은 월미도에 한정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천지를 흔들며 시가지로 날아와 단 한 발에 두세 채의 집을 날려버렸다.…(중략)…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포탄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온통 포탄 날아오는 소리와 터지는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그 소리들은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까지도 흡수해버렸다.인천에서 분단 도시의 상황은 지나 온 과거에 머물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이다. 강화, 옹진의 섬들은 북방한계선과 잇닿아 있다. 강화도의 많은 지역은 여전히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있다. 자유공원의 맥아더동상 철거 논란도 해마다 되풀이된다.이원규의 소설에는 분단 도시 인천의 앞날을 모색하는 데 필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념의 좌우를 따지지 말고, 우리가 지금 이원규의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김명래기자

2014-08-27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1]이원규 '분단소설'

인천의 분단현실은격해진 '좌우익 충돌' 섬까지 번져선주-선원 '소득분배' 놓고 대립고향 잃은 이들의 망향가는 '절절'이원규는 어떻게 그렸나분단의 공간 바다로 확장 큰 의미현대사 연표 작성, 역사 기록하듯전쟁·학살·실향민 아픔 끄집어내인천은 분단 도시다.서해상을 갈라 놓는 NLL(북방한계선)은 인천 앞바다를 분쟁의 바다로 만들었고, 강화의 교동은 2개월 전부터 다리가 놓여 언제나 통행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여전히 해병대원의 검문을 받아야 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인천은 해방 직후부터 유난히 좌우익 갈등이 심했고, 그 좌우익들은 한국전쟁 때 서로를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그 상처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낫기는커녕 오히려 덧난 곳이 인천에는 여러 곳이다.이런 인천의 분단 현실을 소설 속에 담아낸 작가가 있다. 이원규(李元揆·67)다.그 아버지 서계당(西桂堂) 이훈익(李薰益·1916~2002)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 이원규도 발로 뛰면서 사실을 취재해 작품에 그렸다.그래서 그의 작품은 '리얼 스토리'다.이훈익은 '인천충효록(仁川忠孝錄)' '인천지지(仁川地誌)' '인천지방 향토사담(仁川地方 鄕土史談)' '인천의 성씨 인물고(仁川의 姓氏 人物考)' '인천지명고(仁川地名考)' '인천지방의 전통 제례(仁川地方의 傳統祭禮)' '인천금석비명집((仁川金石碑銘集)' '근세인천지방의 전란사(近世仁川地方의 戰亂史)' 등을 펴낸인천의 대표적 향토사학자다.이원규는 사관(史官)처럼 썼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책장을 덮고 싶을 정도로 인천이 지나온 기억이 가슴 아프고 아리다.일제강점기 인천은 공업도시,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인천 공장과 부두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해방 이후 혼란기에 물가는 급상승했고, 공장 일자리는 줄었다. 하역 인력 시장에 사람들이 몰렸지만 상당수는 허탕을 쳤다. 좌익 단체의 침투 속도가 어느 도시보다 빨랐다. 일제 때 항일 운동가였던 인천 출신 유두희(劉斗熙·1901~1945), 이승엽(李承燁·1905~1953), 조봉암(曺奉岩, 1899~1959) 등은 좌익 청년들의 '멘토'이기도 했다. 좌우익 충돌은 테러로 격화됐고, 그 이념 대립은 인천 앞바다 섬까지 번졌다. 뭍에서는 공장주와 노동자,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일어났다면, 바다에서는 선주에 맞서 '어로 소득 분배'를 요구하는 선원의 목소리가 거셌다. 선주·군경·공무원 가족은 우익이었고, 사공을 비롯한 일용직들은 좌익이 됐다. 중립이 들어설 공간은 좁았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좌익과 우익은 번갈아가며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벌였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됐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앙갚음했다. 곧 돌아가리라고 가까운 인천에 내려와 정착한 인천 실향민들의 망향가(望鄕歌)는 언제나처럼 절절하기만 하다.이원규의 '황해(黃海)'(1989년)는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의 인천이 배경이다. 이 시기의 '인천 현대사 연표'를 작성해 마치 역사를 기록하듯 소설을 집필했다. '황해'는 분단 소설의 공간을 바다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원규는 또 단편 '포구의 황혼'(1987년)에서 소래포구를 배경으로 실향민의 아픔을 끄집어냈다. 단편 '침묵의 섬'(1988년)에서는 한국전쟁 때 덕적도 먹염에서 이뤄진 학살을 다뤘다. 단편 '바디소리'(1988년), 중편 '신열'(1990년)은 갑작스레 맞닥뜨린 '전쟁의 광풍'에 밀려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얘기다.이원규는 인천 앞바다의 섬을 핵심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 등장시켰다. 여기서 그는 농촌, 도시를 배경으로 한 다른 분단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공장주와 노동자의 갈등이 아닌, 고기잡이 배 선주와 선원들의 갈등을 내세웠다. 해방 이후 조기잡이를 마치고 덕적도에서 술을 마시던 젊은 선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말이 육사제지 칠삼이나 다를 게 없어. 출어 경비를 제멋대루 계산해서 떼어내니 이게 뭐야. 세상에 중선배가 조기잡이 나가는 데 삼할이나 떼는 법이 어디 있어. 먹는 게 나아졌다구 허지만 난 스무 날 동안 멀건 돼지고기국 두 번인가 먹은 거밖에 없어." … (중략) … "우리 선주는 자기 배가 네 척이니까 손가락에 바닷물 한방울 안 묻히구도 내가 번 돈의 쉰 배를 벌었어."-'황해' 중에서육사제(사육제), 칠삼제(삼칠제)는 당시 고기잡이 소득 분배 법칙을 뜻하는 말이다. 공동 경비를 제하면 선주가 60~70%를 갖고, 나머지 30~40%를 선원들에게 줬다. 일제강점기 고기잡이가 대형화하면서 가족·마을 단위로 구성됐던 선주와 선원은 '공장주-노동자'와 비슷한 계약 관계로 변했다. 인천 섬 사람들은 선주를 배임자, 선원을 동사(同事)로 불렀다. 선원 중 선장은 사공(사궁), 최고령자는 영자, 주방 일 하는 이는 화장(火長)으로 호칭했다. 일반 선원들과 비교할 때 선장 소득은 2배가량, 영자는 1.5배 정도 많았다. 이를 '두짓잽이', '짓반잽이'라 했다.해방무렵만 해도 덕적도는 조기파시가 대단했다. 전국에서 고깃배와 선원이 몰렸다. 북리쪽 인구가 2만을 헤아릴 때도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탄 사공들은 짓잽이 비율을 조정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불만을 터뜨린 사공은 '좌익의 조정을 받았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선주들은 단합해 이들을 배에 태우지 않았다. 선주와 선원의 이 같은 갈등 구조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지난 26일 중구 연안부두에서 만난 어선 기관사 출신의 김재근(88)씨는 "1970년대 연안부두가 생기자마자 선원들이 사육제를 요구하는 데모를 했고 결국 삼오제(3.5대6.5)로 바뀌었다"며 "당시 주동자는 연안부두에서 영원히 배를 타지 못했다"고 전했다.한국전쟁 당시 인천의 섬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 사건도 많았다."전쟁으로 배를 징발당해서 출어를 못 하니까는 까마귀들두 사람들과 같이 굶주렸소. 그놈들은 자기들끼리 싸워 약한 놈을 잡아먹었소. 그리구 민가루 날아와서 장독대에 널어놓은 망둥이나 메주 덩어리까지 물고 갔소. 그놈들 등쌀이 참 대단했지. 그 징그런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와서는 우물가에 놓인 빨래 비누, 쌀겨와 양잿물을 끓여서 만든 꺼먼 비누 덩어리까지 훔쳐갔으니까는. 그해 시월 중순이었는데 먹염 쪽에서 가마솥에 콩볶듯이 총소리가 들리구 경비정 한 척이 그 섬을 떠나는 게 보였소. 그날 오후에 까마귀란 놈들이 하나두 남지 않고 그리루 까맣게 몰려갔소. 놈들은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소".-'침묵의 섬' 중에서 '침묵의 섬'은 이원규가 대건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절에 덕적도 출신 교감에게 들은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덕적도 남측 묵도(먹염, 흑도)가 배경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2008년 발표한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결정문을 보면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덕적도에 상륙한 해군 첩보부대(해양공사)는 먹염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인공 부역자의 처형 장소로 선택했다. 먹염에서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나는 억울하게 죽는 것이다. 노래를 불러도 좋겠냐'고 한 뒤 구슬프게 노래를 했다는 이의 기록도 남아 있다.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총을 난사해 여러 명이 숨졌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동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한 여성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다는 것을 실수로 '인민공화국만세'라 불러 총을 쐈다는 당시 해병대원의 증언도 있다. 당시 군은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긴 사람', '얼굴이 새까만 사람'으로 우익과 좌익을 구분했다고 한다.전쟁 기간 민간인 피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월미도 폭격 민간인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주민들은 아직도 월미공원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농성은 곧 10년을 맞게 된다. '포구의 황혼'은 고향을 떠나 소래포구에 정착한 실향민의 아픔을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는다."소래 포구의 어선들이 고기의 회유에 따라 연평도 근해 어장, 선미도 북서쪽 어장, 목덕도 남방 어장, 풍도와 육도 주변 어장, 팔미도와 선재도 주변 어장으로 해역을 바꾸어 출어하는 데 비해서 아버지는 언제나 연평도 주변 어장에만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왜 위험하게 휴전선 쪽으로만 나가냐고 누가 물으면 연백에 살 때부터 그쪽에서 고기를 잡아 그 방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포구의 황혼' 중에서인천은 실향민의 도시다. 실향민이라면 고향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어한다. 접경지역에서의 어로 행위는 경찰의 감시하에 이뤄졌다. 소설 '바디소리'에서는 경비정의 통제 아래 고기잡이 나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해상검문소도 있었다. 하인천에 부두가 있을 당시엔 소월미도 앞에, 연안부두 개장 이후에는 무의도 부근에 바지선으로 띄운 검문소가 있었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인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5천802명으로 서울, 경기 다음으로 많다.이원규는 1992년 '황해' 증보판에서 "내 고향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이 곳이 외세 침탈의 문호였고 분단이 고착화된 절망의 시기에 민중의 의지가 번번이 꺾이고만 비운의 장이기 때문"이라며 "이 곳을 현대사의 한 의미 깊은 공간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오랜 시간 가져왔다"고 썼다.글 = 김명래기자인천 강화도와 옹진의 섬 다수는 접경지역에 포함돼 있다.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해 이념 갈등은 섬 마을까지 번졌다. 북방한계선(NLL) 주변 해역은 아직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공간이다. 그래픽/박성현기자 ▲ 천혜의 자연 환경으로 이름난 덕적도는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이 섬은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체험했고, 이원규는 덕적도를 배경으로 여러 편의 분단 소설을 완성했다. /임순석기자이원규는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장편 공모에 당선된 이후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분단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묶어 작집, 장편소설집으로 출간했다. 사진 왼쪽부터 '침묵의 섬'(1988년, 현암사) '깊고 긴 골짜기'(1991년, 고려원), '황해' 증보판 (1992년, 인문당), '천사의 날개'(1994년, 문학과지성사).

2014-08-27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향토사 연구 매진 최성연… 아픔과 일상 시조로 읊어

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1914~2000)은 1955년 동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 문예작품 공모를 통해 등단한 인천 출신 시조시인이다.최성연은 그해 12월 '은어'(서울신문사)라는 시조집을 내놓아 시조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 시조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교육문화출판사)는 그로부터 33년이나 흐른 1988년에야 냈다. 최성연은 그사이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시조의 끈은 한시도 놓지 않았다.최성연의 시조에는 한국전쟁의 아픔이 절절하게 담겨 있고, 그의 소소한 일상도 생생하다.인천의 개항 역사와 그와 더불어 들어선 서양식 건물을 소개한 '개항과 양관역정'(1959)은 언론인 고일(高逸)의 '인천석금'(仁川昔今·1955), 의학박사 신태범(愼兌範)의 '인천 한 세기'(1983)와 함께 인천 향토사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최성연의 이미지는 향토사 연구자로 고착되어 왔다.하지만 최성연의 시조를 연구한 학위 논문도 있기는 하다. 박창수의 '소안 최성연 시조 연구'(1999)다.박창수(76·시조시인) 씨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여러 번 최성연 선생을 만났는데, 강직하고 선비 같은 분이었다"며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시조와 인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면 끝이 없었다"고 했다. 또 "꾸준히 시조를 쓰셨지만, 인천 향토사 연구에 애정이 더 깊었던 것 같다"며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나 연구자가 없지 않나 싶다"고 했다.최성연은 1914년 인천 중구 율목동에서 태어나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교)와 경성제2고보(경복고)를 나왔다. 평안북도 강계 영림서(산림청)에서 근무하다 광복 후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왔다. 동아일보 인천지사 사원, 청구사진문화사 대표, 인천시 촉탁 공보담당, 동방사진뉴스사 편집장,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85년에는 제1회 육당시조·시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목동훈기자

2014-08-20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0]'시조시인' 최성연

소안의 시조집 '은어'詩세계를 넘어최고 예술인들 만난다 천 화백은 여느 작품과 다른 화풍·낙관 남겨 '연구 가치' 예술인들 모여든 '동방살롱'서 가까워져'핏자국'으로 등단 현실감 돋보여 '인천각' '들국화' 통해 사라진 유산·오염된 환경 안타까움 담아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1914~2000)은 인천 출신 시조시인이자 향토사학자다. 최성연은 1955년 7월 동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 문예작품 공모에 시조 '핏자국'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핏자국'은 한국전쟁 당시 전선의 어느 OP(Observation Post, 관측소)의 몸서리치는 전황(戰況)을 기록한 시조다.산 마루 돌벼랑이/허옇게 바스러진//금성(金城) 남방전선(南方戰線)/이름 모를 골짜기에//몰박힌/포탄 구덩이/황내 상구 풍기다.//실개천 넘어서서/비탈길 접어들자//검붉은 핏자국이/음푹 고여 잦었는데//섬뜩히/지피는 외람(畏濫) 일레/온몸 사뭇 굳어들다.(하략)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1896∼1989)은 심사평에서 "신생활감(新生活感)을 나타내려 한 노력이 현저하다"며 "시조는 어디까지나 시조여야 하겠지만 낡은 수법으로 답보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핏자국'을 당선작으로 하였으나, (최성연의) '살얼음' '물' '궂은비'도 그만 못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며 "모두 관념적인 유희보다 생생한 현실을 그려 내려 한 그 노력을 사주기로 했다"고 했다.그해 12월 최성연은 시조집 '은어'(서울신문사)를 냈다. 이듬해 1월 동아일보에 '은어'를 소개하는 시조시인 월하(月河) 이태극(李泰極·1913~2003)의 글이 실렸다.이태극은 "한 수 한 수가 심혼의 절규요, 자기생활을 통해 본 현세대의 움직임 아님이 없다"며 "소안은 곧 생활시인이라 보고 싶다. 그 작품 속에서 진실감과 직관적인 묘사안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발간 60년이 다 된 시조집 '은어'는 작가의 시세계를 노니는 것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화인들을 만나는 즐거움까지 더해준다. 서문(序文)은 당시 대표적 국어학자 이희승이 썼고, 장정(裝幀)은 천경자(千鏡子·1924~) 화백이 맡았다. 그리고 제자(題字)는 유희강(柳熙綱·1911~1976)이 했다. 특히 '은어'는 천경자 화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기회도 준다.아직까지도 우리 화단에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천경자 화백이 어떻게 시조집 '은어'의 장정을 맡게 됐을까.최성연이 '은어' 후기에서 감사의 뜻을 표시한 김동근(金東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성연이 1954년 3월 '동방사진뉴스사'에 입사해 편집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김동근은 서울 명동에 동방살롱(동방문화회관)을 세운 동방사진문화사 사장이다. 김동근은 1953년 1월 동방사진문화사를 설립하고, 그해 9월 주간 '동방사진뉴스'를 발간했다. 그가 예술인들을 위해 1955년 8월 세운 동방살롱에는 천경자, '명동백작' 이봉구, 시인 조병화와 박인환, 화가 김환기 등이 살다시피 했다. 최성연과 천경자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미술평론가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 유희강 등 인천 출신 예술인들이 다리가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최성연과 이경성은 1949년 1월 '은영회'(훗날 '제물포사진동지회'와 통합돼 인천사진협회가 된다) 출범에 앞장서는 등 인천 문화 발전을 위해 함께했다.최성연은 1988년 두 번째 시조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교육문화출판사)를 냈는데, 이 책에는 서예가 우초(又樵) 장인식(張仁植·1927~1992)의 휘호가 실렸다. 공교롭게도 최성연과 가까이 지낸 이경성, 유희강, 장인식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역임했다.서지(書誌) 연구자인 박대헌 '호산방서점' 대표는 "책에 '장정 천경자'로 표기돼 있다면, 천경자의 작품이 100% 맞다"고 했다. 또 "유명 화가들이 장정을 맡게 된 배경에는 저자 또는 저자 지인과의 친분 관계가 있다"며 "출판사에서 주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했다.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이름과 작품 연도를 한자로 적는 것이 특징인데, 시조집 '은어'에는 유독 '경'이라는 한글 낙관(落款)이 선명하다. 전문가들도 천경자 화백의 한글 낙관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16일 인천의 도서관을 뒤져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천경자 관련 책에 실린 그림을 모두 살폈지만, 한글 낙관은 보이지 않았다.천경자 화백의 제자이자 '보리밭 화가'로 유명한 이숙자 씨에게도 '은어' 속 그림에 대해 물었지만, "천경자 선생의 그림 중에서 이런 작품 풍과 낙관은 처음 본다"는 답변이었다. 시조집 '은어'는 시조 그 본령을 넘어 천경자와 관련해서도 또 다른 연구 과제를 던진다고 할 수 있다.오정포 산 허리 짬에/어리 저리 참호 파고//아람두리 나무통들/가로 세로 딩굴렀는데,//인천각/그 호화롭던 양옥 마저/심한 함포 맞고/폭삭 주져 앉다.//집 맴시 뛰어나고/쓸모 또한 큰 탓일가//모른채 석달 내내/고스란히 남겼다가//갑자기/십자 포격으로/수월하게 처부수다.//인민군 군관들이 은신처로 잘 못 알고//꾸역 꾸역 모였다가,/삼태기 쓴 꼴/됐다던가//어렵게/전쟁 겪고 세우더니,/끝내 전쟁 탓에/쓸어 지다.최성연이 1988년 8월에 쓴 '인천각'(仁川閣, 존스턴 별장)이라는 작품이다. 인천각은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이 1905년 자유공원 언덕에 지은 독일식 별장으로, 인천상륙작전 때 포격으로 파손됐다. 그 후 이 건물은 개인에게 넘겨졌고, 주춧돌과 벽돌 등이 해체 매각되면서 영원히 사라졌다. 1883년 일본의 인천항 개항으로 제물포 일대는 외국인들의 차지가 됐다.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원주민인 인천사람은 변두리로 내몰리고, 서양식 건물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이 별장은 1919년 존스턴의 사망으로 독일인 소유가 됐다 일본인에게 2차례 매도됐다. 1936년 인천부(仁川府)가 매입해 '인천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여관·요정으로 활용하던 중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미군정시대 들어 이 건물은 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8월의 첫 주말이던 지난 2일 자유공원을 찾았다. 과거 인천각이 있던 자리에는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왕년 인천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인천각. 이제는 자유공원 인근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에 전시된 미니어처와 인터넷·책자에 실린 사진으로나 만날 수밖에 없다.과거 인천각에서는 제물포 일대와 인천 앞바다 섬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배를 통해 제물포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인천각이었다고 한다. 지금 자유공원 광장에선 하버파크호텔, 중부경찰서, 파라다이스호텔, 월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멀리 인천대교를 넘어 영종도도 시야에 닿는다.최성연은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1959년 '개항(開港)과 양관역정(洋館歷程)'을 통해 인천의 개항과 서양식 건물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큰아들 성봉(62)씨는 "미군 장교가 아버지에게 인천 역사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신 뒤로 향토사에 매달리셨고, 이 때문인지 인천에 대한 자료를 많이 남기려고 노력하셨다"고 했다.한 두번 된서리에/잎은 모두 처졌어도//기쓰고 피어보는/연보라빛 들국화꽃//가으내/영근 소망인걸/어찌 지레 꺾이리까 (들국화1)하도 볶기다 못해/산 마루도 깎였는데,//어찌 들국화는/철 따라 피어나노?//옛 모습/차마 잊이 못해/그 골짝에 피었다네. (들국화2)최성연은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이 전쟁과 개발 등으로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들국화'를 썼다.그가 '신동아' 1973년 3월호를 통해 발표한 '갈매기도 사라졌는데'는 인천항의 환경오염을 고발한 작품이다.새하얀 갈매기떼/훨훨 떠돌다는//때때로 곤두박여/먹이도 쪼아가며//누백대(屢百代)/둥질 틀고서/새끼 치며 살던 포구//하 오래 겪다보니/짠물도 썩어들고//깃털을 더럽히는/체통쯤 잃을망정//옛정을/어쩌지 못해/눌러 앉아 살쟀더니,//치어랑 전어떼랑/모두 다 지레 죽고//허기져 처지는 나래/휘젓기도 힘겨운데//지겹게/깔린 오염(汚染) 일레/죽지못해 안갔나베제4회 한국시조대상 수상자인 시조시인 정수자(57)씨는 "인천의 오염 상황을 갈매기에 빗대어 나타내지만 일찍부터 오염에 주목한 것이 인천에 대한 사랑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또 "감각적인 형상화를 꾀한 작품들은 동시대에도 고시조 투를 편하게 쓴 시인들과 크게 구별되는 개성으로, 보다 주지적인 시조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정수자씨는 최성연의 1952년 작품 '오디'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했다.길가 덤불속에/때 아닌 웃음소리//입술 까만/사병(士兵) 서넛/희죽대며 내달리다//이쯤도/누에 치던 말(村)이던가/오디 꽤나 익었네(오디)정수자씨는 "전쟁 중의 한 틈을 잡아 감각적으로 그린 수작"이라며 "시골의 간식이던 '오디'라는 작은 열매를 통해 누에 치던 마을의 전쟁 이전 삶을 슬쩍 일깨우는 수법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의 포착으로 전쟁의 참상을 환기한다"고 했다.인천문인협회장을 지낸 김학균 시인은 "최성연 선생은 술을 안 마셔도 술자리를 끝까지 지킬 정도로 정이 많은 분이었다"며 "중구에 있던 '동보성'(중국집)에서 두 번째 시조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그때는 시조시인 이태극 선생도 참석하셨다"고 했다. 또 "1994년 간석오거리 갤럭시 호텔에서 팔순잔치가 열렸을 때는 문단 후배로는 나와 이석인, 손설향 등 3명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글 = 목동훈기자▲ 소안 최성연이 1955년 12월에 낸 시조집 '은어'의 겉표지를 펼치면 판화 그림(1)이 나온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화가 천경자의 작품이다. 천경자는 1955년 6월 대한미협전에서 '정'(靜)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은어'의 장정을 맡은 것이다.▲ 겉표지(2)와 속표지(3) 그림도 천경자가 그렸다. 은어 첫 장(4)에는 서문 이희승, 장정 천경자, 제자 유희강이라고 씌어 있다.▲ 동아일보 1955년 7월 6일자에 실린 기사다. 최성연의 시조 '핏자국'이 동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 문예작품 공모 시조부문에서 당선됐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최성연의 주소는 인천시 송학동 2가, 직업은 동방사진뉴스사 편집장으로 돼 있다.▲ 최성연은 1988년 8월 '인천각'(仁川閣)이라는 시조를 썼다. 인천각은 1905년 자유공원 언덕에 건립된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왼쪽 사진·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이다. 현재 이곳에는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오른쪽 사진)이 들어서 있다.▲ 소안 최성연

2014-08-20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남다른 향토애 '인천시인' 한상억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산/그리운 만이천 봉 말은 없어도/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발 아래 산해 만리 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 까지/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인천 강화 출신 한상억(韓相億·1915~1992)의 시에 동향 작곡가 최영섭(1929~)이 곡을 붙인 '그리운 금강산'. 이 노래는 1961년 8월 31일 KBS 교향악단 연주로 처음 전파를 탄 뒤로 일약 남북분단의 현실을 대표하는 곡이 됐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때 다시 주목을 받았고, 당시 반공성격이 짙은 가사 일부가 수정되기도 했다.1957년부터 KBS에서 '이 주일의 노래'를 만들던 작곡가 최영섭은 우리나라의 강, 산, 바다를 주제로 곡을 만들어달라는 방송국 담당자의 요청에 따라 당시 문총 인천지부장이었던 한상억에게 가사를 부탁했다.최영섭 작곡가는 "앞서 몇차례 '남산에 올라', '한강의 노래' 등을 (한상억 선생과) 함께 만들었는데, 동요작가 한용희씨가 '왜 금강산 노래는 만들지 않느냐'고 해 아차 싶어 한상억 선생을 찾아갔더니 이미 만들어 놓았다며 서랍에서 원고지를 꺼내 주시더라"라며 "시를 읽는 동시에 멜로디가 떠올라 그날 밤 바로 곡을 썼다"고 회상했다.한상억의 '그리운 금강산'이 고향 잃은 이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던 배경에는 그의 남다른 향토애가 있었다. 그는 고향 인천을 사랑했고, 더 나아가 조국 산천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노래했다.한상억 작고 이후 발간된 유고시집에 실린 '그리운 금강산'은 2절뿐이지만, 사실 최영섭이 처음 받은 '그리운 금강산' 원고엔 3절까지 있었다. 당시 방송분량 때문에 2절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나머지 3절로 한상억과 '그리운 금강산', 그리고 인천을 다시 추억한다.기괴한 만물상과 묘한 총석정/풀마다 바위마다 변함 없는가/구룡폭 안개비와 명경대 물도 장안사 자고향도/예대로 인가/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김민재기자

2014-08-13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9]한상억

강화 태생… 해방이후 김차영과 함께 동인회 만들어 활동문인협 인천지부위원장 등 맡아 지역 문화계 이끌어연작시 6편 '인천찬가' 등 애향심 가득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1987년 美 LA로 떠난 뒤 생애마감 한달전 돌아와 문인들 만나 "모두 버리고 가는 것 같아 가슴아파" 이민직전 인터뷰 직접 스크랩 인천의 대표 향토시인 한상억(韓相億·1915~1992)은 인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친 시인이었다.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는 천생 '인천시인'이다.1915년 9월 1일 강화 양도면에서 태어난 한상억은 1930년 길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립상업고에 진학했다.해방이후 동향 시인 김차영과 함께 '시와 산문' 동인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195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위원장을 시작으로 문총 인천지부 위원장(1961), 한국예총 경기지부장(1963) 등 인천 문화계에서 주된 역할을 맡았다.한상억이 생전에 발표한 시집 2권 '平行線의 對決(평행선의 대결·1961)'과 '窓邊思惟(창변사유·1976)', 그리고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1993)'엔 그의 인천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특히 '仁川讚歌(인천찬가)'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시 6편이야말로 그를 왜 인천시인이라 부르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천찬가'는 첫 번째 '파도의 노래'에서 시작해 '싸리재의 노래' '월미도의 노래' '송도의 노래' '신포동의 노래' '문학산의 노래'로 이어진다.싸리, 싸리재/구름 무심히 넘던/싸리재 고개/수건 쓰고 고개 숙인/방앗간 아가씨/한숨이 넘던 고개//솔가래 한동 팔아/동태 한마리/지게다리에 매달고//취해 넘던 긴담 모퉁이/싸리꽃 하늘거리던 언덕을/高層建物(고층건물)이 내려 누르고/세상은 많이도 변했는데/黃海(황해)의 鄕愁(향수)만은/潮水(조수)처럼 밀려 넘는 고개…(이하 생략)한상억이 제2시집 '창변사유'에 남긴 '인천찬가 2편'인 '싸리재의 노래'. 과거 1960~70년대 인천 중심가 중 하나였던 싸리재는 애관극장, 신신예식장, 인천기독병원을 중심으로 양복점과 가구점, 약국 등이 줄지어 있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한상억이 고향 강화를 떠나 1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싸리재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신포동과 배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다니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는 싸리재를 시에 담았다.지난 8일 오후 한상억이 살았던 율목동 231번지를 찾았다. 지금 옛 집은 사라졌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인천기독병원과 인천성산교회 사이다. 싸리재는 한상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상억이 장로 안수를 받았다는 성산교회에서 최상용 담임목사를 만났다. 최 목사는 1980년대 부목사로 있을 때 교역자와 성도 관계로 한상억을 만났다고 한다. 최 목사는 한상억을 시인이면서 '신앙인'으로, 또 '인천 역사가'로 기억했다.최 목사는 "인천역사에 대해선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한 분이었다"며 "노인대학 어르신들을 모시고 강화의 역사 유적지로 갈 때면 늘 동행해 설명하셨다. 아마 지금의 역사해설가보다 더 뛰어나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목양실을 나와 싸리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산교회 주차건물 옥상에서 인천을 감상했다. 월미도 너머로 인천항 부두 크레인과 인천대교가 어렴풋이 보였다. 한상억도 아마 여기 어딘가에서 월미도와 서해바다를 보면서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천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으리라.해가 솟는 아침/별이 뜨는 밤/노래 소리/물결 소리/끊이지 않는/너는 오랜 歲月(세월) 지금도/港口(항구)의 感覺(감각)/그리고 鄕愁(향수)…(중략)…/너의 발자취/하나, 둘,/차라리 뼈저린 歷史(역사)/누가 여기를 다녀 갔기에/누가 여기서 말씀했기에/누가 여기서 노래했기에/지금은 사라진/潮湯(조탕), 龍宮閣(용궁각)의 幻影(환영)…(생략)'월미도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인천찬가 3편'이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옛날 것'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1976년 12월 5일 한국문인협회 경기지부(인천 중구 신생동)에서 발행한 '경기문예' 창간호에 실렸다. 70여 편의 작품 중 첫 번째로 수록돼 그야말로 '경기문예' 창간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한상억이 인천시와 지역 문단에서 보인 왕성한 활동은 유명하지만, 강화 유년기와 미국에서 보낸 말년의 생활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9일 시인 한상억 인생의 밑거름이 된 유년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강화 양도면 도장2리 대흥마을에 갔다. 마을 이장 고두관(65) 씨의 소개로 한상억을 알고 있다는 토박이 구영회(68) 씨를 만났다. 구씨의 외삼촌이 한상억과 길상보통학교를 함께 다녔고, 그의 어머니는 한상억의 부인 이호숙(1915~1997) 씨와 자매처럼 지냈다고 한다. 구 씨는 한상억을 '아저씨'라고 불렀다.구 씨는 "아저씨가 길상보통학교에서 성적 1, 2등을 다퉜다고 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천상고를 떨어졌는데, 당시 길상학교 교장이 인천상고 교장한테 '한상억이 입학 못하면 우리 학교 문 닫아야 한다'고 애걸복걸 해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었어요"라고 한상억의 학창시절에 얽힌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그는 한상억의 예명이 '대남'이었음을 알려주기도 했다.구 씨와 함께 찾아간 한상억의 생가터. 지금은 옛 초가집이 헐리고 2층 양옥집이 들어섰다. 한상억 생가는 정남향으로 있었다고 한다. 마루에 걸터 앉으면 바로 앞 논밭 너머로 마니산 풍경이 펼쳐지는 자리였다. 제1시집 평행선의 대결엔 '마니산'을 비롯해 '삼랑성 동문', '보문암' 등 강화를 그린 작품이 여러 개 있다."맑게 갠 開天節(개천절)의 오후/피크니크를 나온 서울 사람들의/츄잉껌 종이가 산길에 散亂(산란)해도/五千年(오천년)이라던가 寂寞(적막)의 터전/여기는 都會(도회)의 公園(공원)이 아니다/都會(도회)와 바다는 내가 지나온 人生(인생)의 市場(시장)…" ('마니산' 중에서)이날 강화 해안도로를 따라 동막해수욕장을 거쳐 들른 마니산엔 피서철과 주말을 맞아 등산객으로 붐볐다. 인파를 뒤로하고 강화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마니산은 관광지의 어수선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고요함 그 자체였다. 5천 년 역사의 시작을 알린 마니산의 기운이 강화 곳곳에 뻗치고 있는 듯했다.한상억은 1987년 10월 10일, 아들 충희 씨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났다. 부인과 함께 아들 집 인근 노인요양 아파트에서 지냈다. 2명의 어린 손녀(미경, 미선)를 보는 게 하루의 낙이었다고 한다.1992년 가을 한상억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인천을 찾아 그동안 못 만났던 인천 문인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도 만났다.최영섭 작곡가는 "마지막이란 걸 직감하셨는지 당시 고국을 방문했을 때 설악산이며 경주, 제주도, 한려수도, 강화도 등 전국을 둘러보시곤 기력이 다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고 회상했다.한상억은 그해 11월 7일 할리우드 프레스비터리언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상억의 임종은 며느리 김정애(62)씨가 지켰다. 그가 병원에서 즐겨 들었던 노래는 찬송가 '본향가는 길'과 요단강 건너 만나리라는 가사로 유명한 '해보다 더 밝은 천국'이었다.충희 씨는 "아버지에 대해 존경하는 부분은 인천에 대해 애착을 갖고 문화산업의 기초를 닦기 위해 노력하셨던 점이다"라며 "인천을 위해 희생하셨다고나 할까. 굉장히 인천을 좋아하신 분이셨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말했다.한상억의 묘지는 미국에 있지만, 그가 남긴 노래와 시는 책으로 시비로 인천지역 곳곳에 남았다. 지난 7월에는 고향 강화 양도면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한상억의 유품과 유작은 부인 이씨가 정리해 미국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하고, 유고시집 출판을 위해 인천문협 등에 전달해 지금은 충희 씨 집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충희 씨는 최근 몇 차례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를 계기로 유품과 사진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스크랩해 놓은 1987년 10월 3일자 경인일보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고 지난 10일 알려왔다. 미국으로 이민가기 꼭 1주일 전 인터뷰다. 기사본문 위에 제호, 날짜, 지령까지 하나 하나 오려 붙인 스크랩이었다.충희 씨는 또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 속 가족사항에 딸 소개가 잘못됐다며 '큰 손녀'를 미경(1984년 생)으로, '작은 손녀'를 미선(1989년 생)으로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한상억은 미국 이민 직전에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늘 인천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모두 버리고 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문화는 서울과 지방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 강원도 산골이나 인천 바닷가에서 일하면서 작품활동하는 것이 오히려 보람있고 필요한 것이다."글 = 김민재기자▲ 7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사진 오른쪽으로 해금강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2004년 개통한 지 4년 만에 폐쇄된 금강산 육로관광 도로가 나 있다. /김민재기자▲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 표지.▲ 강화 양도면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미국 이민 당시 한상억과 부인 이호숙씨. /한충희씨 제공▲ 인천찬가(3) '월미도의 노래'가 실린 '경기문예' 창간호. /신연수씨 소장▲ 한상억 장례식 모습. /한충희씨 제공▲ 한상억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 직전 인터뷰 기사가 실린 1987년 10월 3일자 경인일보 10면. 한상억은 이 기사를 직접 스크랩해서 간직하고 있었다. /한충희씨 제공

2014-08-13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어린아이 눈에 비친 '한국전 이후의 삶'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짜장면 집이 즐비한 차이나타운이나 화교들이 사는 모습을 볼 것이라 기대해서는 크나큰 오산이다. '중국인 거리'는 한국전쟁 직후 여러 인간 군상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인천의 도시 모습을 초등학교 어린이의 시선에 맞추어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는다.폭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조그만 베란다가 붙은, 같은 모양의 목조 이층집들이 늘어선 거리는 초라하고 지저분했으며 새벽닭의 첫날개질 같은 어수선한 활기에 차 있었다. 그것은 이른 새벽 부두로 해물을 받으러 가는 장사꾼들의 자전거 페달 소리와 항만의 끝에 있는 제분공장 노무자들의 발길 때문이었다. 그들은 길을 메우고 버텨 선 트럭과 함부로 부려진 이삿짐을 피해 언덕을 올라갔다.'중국인 거리' 주인공 '나'의 눈에 비친 1950년대 후반의 인천 자유공원 자락의 모습이다.오정희는 1955~1959년 인천에 살았는데 그 당시의 느낌을 '나'를 통해 전한다. 전쟁 통에 부서진 극장을 다시 짓는 모습, 양공주 방에서 친구와 몰래 양주를 나눠 마신 일, 열차에서 석탄 가루를 훔쳐 낸 뒤 먹을 것과 바꿔 배고픔을 달래던 일, 여덟째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의 상황 등은 모두 어린 오정희가 겪은 일이다. 아니, 우리 부모 세대면 누구나가 온몸으로 부딪치며 지나온 시간이었다.평론가 김병익은 '중국인 거리'를 "우리 단편문학의 한 뛰어난 범례가 될 작품"이라고 했다. 전개, 캐릭터, 시대 상황, 공간적 묘사. 그 어느 하나 느슨한 것 없이 꼭 맞물려 균형을 이루었다는 얘기다.오정희는 '중국인 거리'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했다. 그는 "작가 누구나 인생의 특별한 시기를 글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도 같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소설로 형상화시키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중국인 거리'다"라고 말했다.오정희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작가 오정희에게 인천은 '마음 속 보물창고'다. 여전히 많은 글감과 자극을 주는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오정희는 "인천에 대해 쓰고 싶은 게 많다. 어렸을 때 미국 독립기념일이라 자기들 축제삼아 불꽃놀이를 했던 걸 자유공원에 올라가서 구경했다. 데모를 하거나 야경을 보러 오르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을 복원해 보고 싶다"고 했다. /박석진기자

2014-08-06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8]오정희 '중국인 거리'

인천 살던 유년시절 기억 소설에 녹여중구 중앙동 1가 19번지 일대 배경열두살 어린아이 '나' 관점으로 표현친구들과 석탄 훔치던 현장부터청·일 조계지 경계·자유공원 등 찾아서민들 애환 서린 차아니타운글쓰기 동력이자 작가 꿈꾸게 한 곳'중국인 거리'의 작가 오정희(67)를 그 '중국인 거리'에서 만났다.지난 4일 오후 3시30분께 인천역. '중국인 거리'를 꽉 쥔 두 손에서는 땀이 배어났다.전후(戰後) 인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 대표적 작가와그 작품의 배경 장소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은 극한까지 치달았다.더욱이 몇 차례나 인터뷰 요청을 거절당한 터였다. "중국인 거리를 쓴지 30년이 넘게 지났어요. 이제 인터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딸 같은 여기자의 집요한 요청 때문이었을까. 어렵사리 인터뷰를 허락했다.'중국인 거리'를 같이 답사하자는 바람까지 성사됐다. 1950년대 후반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그림처럼 묘사한 '중국인 거리'를 작가와 함께 걸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만큼 손에 땀을 쥐는 것은 당연지사.인천역에 모습을 드러낸 오정희는 단아한 기품이 넘쳤다. 한눈에 그가 오정희임을 알아차리게 했다."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장면을 가지고 모자이크 하듯 쓴 소설이에요. 기억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상상력이 제한될까봐 (중국인 거리를 쓸 때) 일부러 차이나타운을 찾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50세가 넘어 비로소 이곳에 와 봤어요.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놀랐어요."드디어 화차가 오고 몇 번의 덜컹거림으로 완전히 숨을 놓으면 우리들은 재빨리 바퀴 사이로 기어들어가 석탄가루를 훑고 이가 물어진 문짝 틈에 갈퀴처럼 팔을 들이밀어 조개탄을 후벼 내었다. (중략) 선창의 간이 음식점 문을 밀고 들어가 구석자리의 테이블을 와글와글 점거하고 앉으면 그날의 노획량에 따라 가락국수, 만두, 찐빵 등이 날라져 왔다. (중략) 어쨌든 석탄이 선창 주변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현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때문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철 검정 강아지였다.어린 시절 친구들과 석탄을 훔치던 바로 그 현장에 선 오정희는 60여년의 세월을 단번에 건너 뛰었다. 당시 그대로라는 철로가 타임머신 역할을 훌륭히 했다.오정희는 1955년 조양석유(주) 인천출장소 소장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충남 홍성에서 인천으로 이사했다. 신흥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해 5학년을 마칠 때까지 약 4년간 인천에 살았다."인천에서는 세 번 이사했는데, '중국인 거리'는 마지막에 살았던 인천 중구 중앙동 1가 19번지 일대를 배경으로 삼아 쓴 것이에요. 소설 얼개는 봤던 것, 들었던 것으로 짰어요. 12살 어린아이 '나'의 눈으로 가감없이 당시 모습을 쓰고자 했어요."오정희가 살았던 1가 19번지 집은 대불호텔 터 바로 맞은편으로 지금은 '포그시티(POG CITY)'라는 카페가 됐다. 이곳은 '중국인 거리' 속 '나'가 살던 집이다. 여기서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소설에 나오는 중국인 주인의 푸줏간(현재 청화원)이 있다.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던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도 그대로다. 다만 지금처럼 큰 건물이 여럿이지 않았고, 반듯한 보도블록 대신 돌멩이가 섞인 흙 길이었다."당시 인천은 전쟁으로 부서진 건물을 손보고 새로 건물을 짓느라 분주했어요. 해인초(해초)를 끓여 벽에 칠했는데 그 냄새가 무척 독했어요. 동네 가득 풍기는 해인초 냄새,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바람, 거기에 실려오는 석탄가루, 흔하게 볼 수 있는 중국인과 미군들. 인천은 신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빛깔의 도시였어요. 소설에 그 느낌을 모두 담았지요."살던 곳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끗한 뒤 오정희가 말을 이었다. 9살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보다시피 우리집은 중국인 거리의 시작점, 그러니까 일본인 거리 끝자락에 있어요. 집 위쪽의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옆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요. 소설 속 메기언니 같은 양공주들은 그 쪽에 세들어 살았어요. 내가 생각한 메기언니 집, 그러니까 친구 치옥이 집 외관은 이 집과 비슷해요."오정희가 가리킨 집은 대불호텔 터와 나란히 붙은 회색 이층집이었다. 폭이 좁은 베란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소설 속 그 집이 눈앞에 다가왔다.'중국인 거리'에 등장하는 '나'는 어린 나이에 전쟁과 피난 생활을 겪고, 가난 속에 늘어만 가는 동생들로 부담을 느낀다.친구 '치옥이'는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결핍된 상태로 자라며 위층에 세들어 사는 메기언니의 화려한 미제 물건에 빠져 '양공주가 될꺼야'라고 말하고는 한다. 국제결혼을 꿈꾸며 흑인 군인과 살림을 차린 '메기언니'는 술 취한 그 군인이 2층에서 내던지는 바람에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메기언니가 또다른 백인 사이에서 낳은 딸 '제니'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이후 치옥이도 공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은 아버지, 계모에게 버림받아 학교를 그만 두고 동네 미용실에 맡겨진다."딱 누구를 모델로 삼아 탄생시킨 캐릭터들은 아니에요. 당시 내 주변에는 수많은 나, 치옥이, 메기언니, 제니가 있었어요. 캐릭터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내 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만든 것이지만, 있었던 일, 없었던 일로 나눌 수 없어요. 실제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문제의식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역사 속 한 장면이 됐어요. 부끄럽고 불편한 역사지만,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요."오정희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했던 한국전쟁 직후 중구 관동 적산가옥에는 그 미군들과 살림을 차린 양공주들이 모여 살았다.1951년, 이 동네로 이사왔다는 김막내(84) 할머니의 기억도 오정희와 같다. "양공주들은 언제든 떠날 사람들로 보였어. 거의 대부분 세살이를 했고, 살림은 임시로 차린 듯 싶었고. 중구청 옆 언덕의 2층 집에도 양공주가 여럿 살았지. 주말이면 양공주들을 찾아 나온 미군들이 동네에 몰렸어. 알 수 없는 말로 싸우며 시끄러운 밤도 많았고. 양공주들이 짐을 싸 떠나면, 국제결혼이 이뤄졌거나 이사를 갔나보다 생각했어."'나'가 뛰놀던 자유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미도 옆 바다가 훤히 보이는 조망대에 도착했을 때 오정희는 망설임 없이 난간에 올랐다. "그때는 바다가 훨씬 더 가까웠는데…."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종소리가 꽤나 가깝게 들리곤 했단다."모두 성당 종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아원을 운영하는 성당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어렴풋이 나요. 학교를 가면 한 학년에 10%쯤은 고아원에 사는 아이들이었어요. 버려진, 어린 혼혈아이들도 고아원으로 몰렸던 때예요."50년 넘게 덕적도, 동구, 부평구 등지에서 고아원을 운영한 서재송(86)씨의 기억과 '중국인 거리'에서 제니가 맡겨진 고아원을 맞춰보면 그 고아원이 딸린 성당은 답동성당이다."1950년대 말 중구에서는 답동성당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어. 월미도에 미군, 양공주 가정집이 내동에 몰려 있었기에 답동성당 고아원 쪽에도 꽤나 많은 혼혈 고아들이 맡겨진 것으로 기억해. 나중에는 동두천, 의정부, 평택, 군산 등 미군 부대가 진을 친 타도시에서 태어난 혼혈 고아들도 인천으로 보내지고는 했지. 그 도시들에는 임시보호소밖에 없던 탓이지."한국전쟁 중심에 있었던 인천은 미군들이 휘젓는 공간이 되고, 수많은 이의 삶이 치옥이, 메기언니, 제니와 같은 불행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어린 오정희의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은 '중국인 거리' 속에 박제처럼 생생하다."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그 중요한 시기를 차이나타운에서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해요. 스스로 아이도, 어른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성장의 공포를 느낀 예민한 그때 낯설면서도 신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차이나타운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줬어요. 또 작가라는 꿈을 꾸게 했고, 글쓰기 동력이 됐어요."자유공원을 내려오면서, 오정희가 2004년에 시작한 뒤 아직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소설 '목련꽃 피는 날'에 대해 물었다. 이 소설 역시 인천 차이나 타운을 배경으로 한다. "제2의 중국인 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오정희는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비슷한 생각으로 시작한 글이에요. 오래 멈춘 채로 남겨둬 마음에 숙제로 남은, 그래서 늘 찜찜한 생각에 뒷맛이 개운칠 않아요. 언젠가는 완성해야 하겠지요."어느덧 다시 인천역이다. 헤어질 시간이다. 역 뒤에선 '나'와 친구들이 멈춰선 화차의 석탄가루를 훔치러 들락였던 철길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축항선'이라 불리는 이 철길은 지금도 살아있다."철길은 예전 그대로예요. 지금은 석탄을 훔쳐 먹거리로 바꿔 먹는 사철 검정 강아지 같은 아이들은 없지만요.(웃음) 지켜야 할 옛 것은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한 차이나타운이었음 좋겠어요."글 = 박석진기자▲ '중국인 거리'는 석탄 철도와 제분공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두 어려웠던 1950년대,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석탄 철도에서 석탄을 훔쳐 먹거리로 바꿔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석탄 철도(축항로)를 걷는 오정희씨. /조재현기자▲ 오정희는 1955~1959년 인천에 살며 3번의 이사를 했다. 오정희가 가리키고 있는 카페 '포그시티(POG CITY)'는 가장 마지막에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중국인 거리' 속 '나'의 집 모델이다. /조재현기자▲ '중국인 거리'에서 "한없이 올라가는 공원의 층계"로 표현된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소설에 등장하는 메기언니와 같은 양공주들은 계단 오른쪽(사진상) 일본인 적산가옥에 세들어 살았다. /중구청 제공▲ 자유공원은 '중국인 거리' 주인공 '나'의 놀이터다. '나'는 오정희의 분신으로, 그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오정희 기억 속에 자유공원에서 바라보는 인천항. 바다는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어두웠으며 깊었다. /조재현기자

2014-08-06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미술사학자 고유섭 문인으로의 발자취

우현 고유섭(1905~1944)은 만 서른아홉의 길지 않은 삶에 우리 근대 미술사학계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미술사학계의 거목인 수묵 진홍섭,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낸 초우 황수영이 우현을 사사했다. '박물관이 나의 무덤'이라고 말하고, 국립중앙박물관장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난 혜곡 최순우 역시 고유섭의 제자였다. 우현을 알지 못하고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우현은 1933년 개성박물관장에 취임한 뒤 간경화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10년 동안을 조선 미술의 특징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조선 미술사를 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문학에도 맞닿아 있었다. 우현은 1941년 일기에서 "후세에 남을 것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뿐이다. (중략) 가장 널리 남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고 적었다. 실제 우현의 글은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필치다. 문학적 표현으로 더욱 빛나는 '문화답사기'였다. 그가 문무대왕릉의 존재를 언급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1939년)는 문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우현 고유섭은 인천이 배출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미술사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가 자신의 학문적 자양분과 문학적 자질을 고향 인천에서 익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약 26년간 우현이 남긴 시와 산문 여러 편에 담긴 1920년대 인천의 풍경은 역사적 기록으로 가치가 충분할 뿐 아니라, 문학 활동을 통해 학문의 큰 줄기를 잡은 우현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는 "우현의 문학적 충동과 학문적 충동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이런 측면에서 우현의 문학 작품이 아직껏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된 적이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문학계에서 우현이 남긴 글을 학문적 과제로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학적 기록은 '우현 고유섭 전집 9권'(열화당·3만2천원)에서 읽을 수 있다. 옥련동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우현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김명래기자

2014-07-31 김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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