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7]고유섭

우리나라 최초 '미술사학자'로 유명문학청년 시절 '경인팔경' 대표작 꼽혀주안염전 등 계절별 풍경 시조로 풀어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리더로 활동어지간한 문인보다 구성·문체 뛰어나1920년대 인천소재 작품 드물어 '의미'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에게도 그럴듯한 문학청년시절이 있었다.당시엔 흥이 날 때마다 쓴 일기문조차 소소하지 않았고, 글을 구성하는 방식과 문체가 보통을 넘었다.그는 대학에서 미술사·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부터 길지 않은 여생을 조선미술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는 일에 바쳤다.그 와중에도 우현은 고려 공민왕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취재했었다.우현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문학가'를 꿈꾸었던 듯하다.그는 문학가를 '소설·극, 기타 언어 표현을 요하는 예술가'로 정의했고, 고향 인천에서 문학적 자질을 갈고 닦았다.'문학가 우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경인팔경(京仁八景)'이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서울의 학교까지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면서 겪은, 계절별 지역별 풍경과 소회를 시조로 풀어낸 작품이다. 우현은 1920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인천에서 통학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25년에 경인팔경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시조가 발표되고 약 90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들이 볼 때는 그 시조 속 내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기만 하다. 이를테면 '염전(鹽田) 추경(秋景)'에서 우현이 "물빛엔 흰 뫼 지고 고범(孤帆)은 아득하다"고 한 건 주안 염전 풍경이다. 염전 바닥에 쌓인 소금 더미가 염수에 비친 모습과 저 너머 갯골을 묘사한 것이리라. 그 염전 자리는 지금의 수출 5·6공단 일대다. 당시 일제가 기록(1927년 '조선철도연선요람')한 주안역은 "역은 인천항에서 동북으로 일 마일 반(半)의 거리를 두고 있고, 경인가도에서 염전에 이르는 도로에 붙어 있으며, 동남에는 기복이 심한 구릉이 있고 서북에 있는 염전은 관제 천일염의 산지로 유명하다"고 그려져 있다. 주안 염전에서 나온 소금은 주안역을 통해 대전, 영동, 김천, 옥천, 조치원 등지로 수송됐다. 1920년대만 해도 지금의 십정동, 간석동 부근까지 물길(갯골)이 나 있었다. 그 주안 염전의 흔적은 홈플러스 간석점 북측, 십정동 558의7 공장용지에 남아 있다. 지난 28일 오후 1시, 새천년환경 건설폐기물집하장 출입구와 우주자원 사이 폐컨테이너 부근에서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지'란 표지석을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1989년 1월 인천시가 건립한 것인데, 이 표지석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을 정도로 꼭꼭 숨어 있다.8편 연시조 경인팔경은 '효창원(孝昌園) 춘경(春景)'에서 시작해 '차중(車中) 동경(冬景)'에서 끝을 맺는다. 마지막 편을 읽으면 서울서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실은, 한겨울 해질녘의 경인기차 내부 모습이 선하다.앞바다 검어들고 곁 산(山)은 희여진다 / 만뢰(萬뢰)가 적요(寂寥)컨만 수레 소리 요란하다 / 이 중에 차중정화(車中情話)를 알려 적어 하노라깊은 겨울밤, 자연의 온갖 소리(만뢰)가 잦아들었지만, 기차 안에서 정담이 이어진다. 이 구절에서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를 떠올릴 수 있다. 인천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경인기차통학생회가 배출한 문인은 고유섭을 비롯해 평론가 김동석,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현덕, 시인 배인철 등 쟁쟁한 인물이 많다. 문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고일은 "인천에 있어서 문화운동사의 제1페이지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발단했다"고 '인천석금'에 썼다.'철도와 문학' 연구자인 조성면 박사는 "우현은 경성제대 예과 2회 입학생으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 리더 역할을 했다"며 "전통 시조 형식으로 가장 근대적 문물인 철도를 그렸다"고 했다.보성고보 입학 첫 해, 기차간에 있던 우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중학에 처음 입학하던 해 차 속에서 매일같이 읽던 톨스토이의 '은둔'이란 소설의 기억이다. 그때 어느 상급학교에 다니던 연장(年長)이던 통학생은 내가 조그만 일개 중학 일년생으로 이런 문학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매우 건방져 보였던지, 또는 부담스러이 보였던지는 모르나, 그것을 읽어 아느냐는 물음을 받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중략) 오늘 끝없이 맑고 맑은 창공에 저 산을 넘고, 내를 끼고, 들을 덮어 길 넘는 뜰 앞의 풀 덤불을 스치며 기어드는 금풍(金風)을 가슴으로 맞이하며 톨스토이 작품집에서 '신부 세르게이'(이와나미본 12집)를 찾아 다시 읽어 보았다. 휘몰아 읽다가, 벅차면 코스모스에서 눈을 쉬고, 다시 읽다가는 이름 모를 청화(靑花)에서 숨을 쉬다가 얼마 아니하여 독파하고 보니, 인상은 다시 새로웠다.('정적한 신의 세계-삼매경' 중)우현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1914년)하기 전에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김병훈 선생이 세운 의성사숙에서 시·서·화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의성사숙 문하생으로 서예가인 유희강, 법원 판결 한글화를 이끈 조진만 대법원장 등이 있다. 우현이 한문을 배우고 동양고전을 체득하고 그림에 능할 수 있었던 자질은 김병훈 선생에게 익힌 것으로 볼 수 있다.우현 고유섭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여러 미문을 남겼다. 우현의 붓끝에 담긴 당대 인천의 모습이 새롭다.추풍이 건듯 불기로 교외로 산책을 하였다. 능허대(凌虛臺) 가는 길에 도공(陶工)의 제작을 구경하고 다시 모래밭 위에 추광을 마시니, 해향(海香)이 그윽히 가슴에 스며든다. 벙어리에게 길을 물어 가며 문학산(文鶴山) 고개를 넘으니, 원근이 눈앞에 전개되고, 추기(秋氣)가 만야에 넘쳤다. 산악의 초토에도 추광이 명랑하다. 미추홀(彌鄒忽)의 고도(古都)를 찾아 영천(靈泉)에 물마시고 대야(大野)를 거닐다가 선도(仙桃)로 여름을 작별하고 마니라.('애상(哀想)의 청춘일기' 중)가을 바람이 슬쩍 불어온다고, 발걸음을 떼고 십 리 길을 걸어 능허대로 향하며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는 이십대 문학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옛날 백제시대 중국 사신들이 후풍(候風) 하던 유서 깊은 능허대도 찾아 문장에 담았다. 우현은 이 글에서 "능허대라는 것은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편(南便)으로 한 십 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 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가게 된 풍치있는 곳"이라고 했다.백제문화사를 연구한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용동에서 출발했다면 숭의로터리, 용현고개, 옥련동 조개고개를 넘어 능허대를 찾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능허대로 가는 길의 산기슭에 독 굽는 가마가 있었고, 해안의 약물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셨다고 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능허대는 1950년대 이후 옛 자취를 감추고 육지로 변한 지 오래다. LG아파트, 윤성아파트, 백산2차아파트 사이 능허대공원에 '중국 내왕 사신 배 대이는 곳'이라고 적힌 표석만이 그 터임을 알릴 뿐이다.우현이 문학산에 올라 미추홀의 옛 도읍을 떠올렸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는 평소에 "백제의 고도 미추홀에서 나고, 조선의 도읍인 한양에서 자랐으며, 고려의 도읍인 송경(松京)에 몸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공부했고, 개성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 조선, 고려의 수도와 자신의 인연이 유난히 깊음을 빗댄 것이다.고유섭은 인천에서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월미도', '낙조(落照)', '서공원(西公園)', '신록(新綠)' 4가지를 꼽았다. '명산대천(名山大川)'이란 제목의 글에서 우현은 인천을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화폭으로 묘사했다.강화·교동·영종·덕적·팔미·송도·월미의 대소 원근의 도서가 중중첩첩이 둘리고 위워진 가까운 인천 바다를 들자, 아침마다 안개와 해미를 타고 스며 퍼져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소리, 동으로 새벽 햇발은 산으로서 밝아 오고, 산기슭 검푸른 물결 속으로 어둔 밤이 스며들면서 한둘, 네다섯 안계(眼界)로 더 드는 배,배,배. (중략) 먼 배는 잠을 자나 가도 오도 안 하고, 가까운 배는 삯 받는 역졸(驛卒)인가 왜 그리 서둘러 빨리 가노. 만국공원의 홍화녹림(紅花綠林)을 일부 데포르메(변형한다는 뜻의 미술 용어)하고, 영사관의 날리는 이국기를 전경에 집어 넣으면 그대로 모네(C. Monet)가 된다.고유섭은 미술사학자 답게 외세의 물결에 밀려 사라져가는 고향 인천의 역사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소성(邵城)은 해변(海邊)이지요 / 그러나 그 성(城)터를 볼 수 없어요 / 차고 찬 하늘과 산이 입 맞출 때에 / 이는 불길이 녹혔나 보아요 / (중략) / 나의 옛집은 해변이지요 / 그러나 초석(礎石)조차 볼 수 없어요 / 사방으로 밀쳐 드난 물결이란 / 참으로 슬퍼요 해변에 살기 ('해변에 살기' 중)우현은 인천에서 낙재고중(樂在苦中)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했다. '즐거움은 번민하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또 그는 인천 시절을 "비애를 느끼고 적막을 느끼고 번민을 스스로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썼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1920년대 인천에 대해 쓴 문학 작품이 거의 없고, 이 같은 측면에서 우현의 작품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작품 수준도 어지간한 문인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고 평가했다.글 = 김명래기자▲ 일러스트/박성현기자▲ 인천시립박물관 정문 앞 광장에 우현 고유섭 동상이 있다. 1992년 건립됐다. /김명래기자▲ 1937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반도의 근영'에 나온 천일염전. /인천시립박물관▲ 1935년경 아내 이점옥(왼쪽), 장녀 병숙(가운데)과 찍은 사진.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홈플러스 간석점 북측 길건너 공장용지 한구석에 주안 염전 표지석이 있다. 관리가 전혀 안 돼 찾기 힘들다. /김명래기자▲ 우현 고유섭은 그림과 글씨도 뛰어났다. 우현이 그린 자화상.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2014-07-30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이념 구분없는 김동석의 문학비평

김동석(金東錫·1913~?)은 인천시 남구 숭의동에서 태어나 중구 경동 싸리재에서 성장했다. 기차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학문을 닦고 학생들을 가르쳤다.그의 수필 '해변의 시' '낙조' '시계' '토끼' '나의 돈피화' '나의 서재' 등에는 아내와 함께 찾은 월미도, 어릴 적 싸리재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쓴 시 '어촌의 밤'과 '바다'의 공간적 배경도 인천으로 추정된다. 그가 1942년까지 인천에 거주한 것 등을 고려하면 시와 수필 상당수를 인천에서 썼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김동석은 해방 이후 잡지 '상아탑'을 창간하며 정력적으로 문학비평 활동을 했다. 그의 문학비평을 대표하는 글로는 '순수의 정체-김동리론'(신천지, 1947년 12월) 등이 있다.그는 문학가동맹 등에서 적극 활동했으며, 1948년 4월에는 '서울타임스' 특파원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취재하기도 했다. 김동석 연구자인 이희환 박사는 "(김동석은)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답답한 속내를 서정시와 생활수필로 표현했다"며 "해방 후에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사심 없이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했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김동석은 해방 직후 맹활약했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3~4년에 불과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김동석의)문장이 좋다. 해방 직후에 비평집을 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하지만 김동석은 평론집을 2권이나 내고 수필집도 냈다"고 했다. 이어 "지금 다시 읽어봐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2014-07-24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6]김동석

싸리재서 인천 보통·상업학교 학창시절 보내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 출신 경성제대 졸월미도 해변·애관극장등 지역소재 수필·시 발표해방이후~1948년 정곡찌르는 평론 왕성한 행보1949년 월북… 이후 작품활동 알려지지않아시방 우리는 월미도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서에서 북으로 길게 금빛 구름이 걸려있는 것이 꼭 황금다리 같다. (중략) 석양이 막 떨어진 자리는 시뻘겋게 불탔다. 간조였다. 그래도 고랑에는 물이 남아 있었다. 일몰 때는 시간의 흐름을 초일초 눈으로 볼 수 있다. 황금다리가 점점 변하여 구릿빛이 되었다가 다시 이글이글한 숯불이 되었다. (중략) 달이 개고랑 물을 헤엄쳐서 우리가 걷는 대로 따라 왔다. 물이 얕고 좁아서 달은 그 둥근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하늘에는 아직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수평선 멀리서 등대불이 반짝 하는 것이 보였다. (수필 '낙조' 중)인천 출신 시인이자,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동석(金東錫·1913~?, 아명은 김옥돌)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1940년대 월미도 부근에서의 해 지는 풍경이다. 김동석의 수필 '낙조'와 '해변의 시'는 아내(주장옥·朱掌玉)와 함께 월미도 해변가를 거닐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작품이다.지난 18일 오후 6시께 인천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찾았다. 인천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있었다. 바다는 은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그 너머로 영종도가 가깝다. 어느새 태양은 눈높이로 낮게 깔렸다. 그 순간 영종도의 하늘은 엷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석양은 구릿빛으로 변했다.김동석이 1940년 결혼하고 1942년까지 인천에서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낙조'는 1940년대 초반에 쓴 글로 추정된다. 이 글을 쓸 당시 김동석은 인천 육지부와 월미도를 잇는 다리(둑길) 위를 아내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첫여름 한나절 햇빛을 받고 월미도 조탕은 고흐의 그림인양 명암이 선명했다. 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소복한 여인(김동석 아내)과 감색 양복에 노 타이샤쓰를 입은 젊은이(김동석)가 금빛 모래사장에다 나란히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간다. 바다와 하늘은 한빛으로 파아랗고……. 젊은이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손에 맞는 돌을 집어서는 멀리 수평선을 향해서 쏘았다. 감빛 돛, 흰 돛, 보랏빛 섬들이 그의 시야에서 출렁거렸다. ('해변의 시' 중)그간 월미도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당시 월미도는 조탕(潮湯)과 해수욕장, 용궁각(龍宮閣)과 호텔 등을 갖추고 있어, 조선의 관광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고, 그 이후 미군과 우리나라 해군 기지로 사용됐다. 1989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고, 2001년에는 월미관광특구로 지정됐지만 옛 명성에는 못 미치는 듯하다. 국제공항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영종도 양옆으론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놓였다. 두 큰 다리가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의 바다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김동석은 1913년 9월 25일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403번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부천군이 시작되는 곳으로, 1936년 인천에 편입됐다. 지금의 남구 숭의동 '평양옥'(음식점) 인근으로 추정된다. 김동석은 1921년 3월 가족과 함께 인천부 외리 75번지로 이사한 뒤, 이듬해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했다. 1년 뒤 다시 인천부 외리 134번지로 이사하는데, 두 곳 모두 '싸리재'에 위치해 있다. 75번지는 현재 배다리사거리 '송월타월' 건물 인근, 134번지는 '고려만물'에서 배다리사거리 방면 옆 건물 자리로 비정할 수 있다.싸리재는 경동사거리에서 배다리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과거 조선인 상권이 형성됐던 곳으로, 배다리사거리 옆으론 기차(현 경인전철)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김동석의 부친(김완식·金完植) 직업이 '포목잡화상'이었기 때문에 싸리재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석이 다닌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는 이들 집에서 멀지 않다.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이 인근에 위치해 뒷날 서울 통학·통근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동석은 1940년 신혼집을 싸리재 인근 경동 145번지에 마련했는데, 현재 이곳에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김동석의 여러 수필에는 어릴 적 싸리재에 대한 기억이 나온다.내가 살던 거리에는 왜 그리 시계포가 많았든지 서너 집 걸러선 시계포였는데 그중에 제일 작은 시계를 진열한 가게가 '천시당'(天時堂)이었다. 나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천시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일금백원야'라는 정가표가 달린 시계에다 눈독을 들여놨었지만 부친을 암만 졸라야 막무가내였다. ('시계' 중)애관에서 본 <애국의 나팔>은 제일차대전에서 취재한 영화같은데 불란서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피난하느라고 야단법석인 장면이 있었다. 어린 소녀 하나가 토끼 한 마리 두 귀를 쥐고 서서 울고 있는 정경이 내 어린 가슴에 어찌나 귀엽고 가엽게스리 파고들었던지! ('토끼' 중)김동석이 '애국의 나팔'을 본 애관극장은 아직까지 싸리재에서 영업 중이다. 김동석은 수필 '나의 돈피화'에서 '내가 처음 가죽구두를 신게 된 것은 중학에 입격한 덕택이었다'고 했는데, 당시 싸리재에는 양화점과 양복점이 성업했다. 지금의 싸리재 길은 한산하다. 양복점 몇몇과 가구점들이 영업 중이지만, 빈 상가가 많다.김동석은 인천상업학교를 다니던 1930년 1월 학교 강당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932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한 뒤, 이듬해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에 합격했다. 1933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제대 예과 문과 합격자 명단에는 김동석, 훗날 그와 함께 수필집을 함께 낸 문인 배호(裵澔), 김동석에게 수필 발표를 권고한 출판인 노성석(盧聖錫), 원로 영문학자 방용구(龐溶九)의 이름이 있다.김동석은 경성제대 영문학과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면서 중앙고보에서 영어 촉탁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해방 전까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서 전임강사로 일했다. 김동석은 영어·일어·한문에 능숙했고, 외국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바둑, 음악 감상, 독서를 좋아했다.김동석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가 배출한 문인 중 한 명이다. 이는 배호가 쓴 김동석의 평론집 '예술과 생활'(박문출판사·1947) 서문에 잘 나타난다.나는 그를 관찰컨대 16년간의 기차 통학에서 과학을 배우고 의지력을 닦고, 인천 해변가에서 시정신을 기르고, 졸업논문 <매슈 아놀드 연구>에서 비판정신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셰익스피어에서 시와 산문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생활' 서문 중)김동석은 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1950)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수필 '시계'에서 함세덕의 고민을 들어줬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에 대한 서평을 신문에 내기도 했다.김동석은 해방 이후부터 1948년까지 활발히 문학비평 활동을 벌이다, 한국전쟁 전인 1949년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언론인 이혜복(李蕙馥·1923~2013)은 1964년 8월 월간 교양잡지 '세대' 제2권 통권 15호를 통해 '판문점에서 만난 김동석'이란 글을 발표했다. 1951년 12월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을 취재하던 중 중앙고보와 보성전문학교 스승이었던 김동석을 만났던 얘기다. 김동석은 왼쪽 가슴에 '공작원'이라고 적힌 헝겊 조각을 달고 있었다. 영어 통역원으로 차출된 것이다.옛 스승과 한자리에 만나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조국의 장벽'을 슬퍼했듯이 그도 '내 나라 안에 제자와 오래간만에 만나 입을 다물어야 할 현실'을 슬퍼했을런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판문점에서 만난 김동석' 중)잡지 '세대'에는 김동석과 이혜복이 당시 판문점에서 찍은 사진 한 장도 함께 실렸다. 이혜복씨 가족에게 연락해 "김동석과 관련된 글이나 사진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온종일 사진첩 등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다.'황해문화' 2012년 봄호에는 신태환(申泰煥·1912~1993) 전 서울대 총장의 미발표 원고가 실렸다. 글의 제목은 '인천 출신 한 공산청년의 이야기'다. 신태환 전 총장은 인천 출신으로, 김동석과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는 이 글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로당 인사들을 친미파라고 숙청할 때 없어졌으리라고 했다. 국군의 평양 진격 때 변절을 하고 남하를 한 공산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남하를 했다는 소리는 끝내 듣지 못했다"고 했다.나는 죽을 때까지 시집 하나, 소설 열 권, 수필집 셋, 기타 논문 약간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오늘같이 청명한 밤엔 잠을 자지 않아야 되겠는데 스르르 눈이 감기니 그만 자야겠다. (중략) 겨울에 동면하는 대신 오래 오래 젊어서 쓰고 싶은 글을 다 써야겠는데……. (수필 '나의 서재' 중)손이 작아 문필을 천직으로 여겼던 김동석. 오래오래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꿈도 남북 분단과 함께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김동석의 월북 이후 작품 활동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김동석 연구자 이희환 박사는 "(김동석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한 근대 지식인"이라며 "해방 이후 치열한 문학 논쟁의 정점에 서 있었다"고 했다. 또 "상아탑 정신, 양심에 기초해 정곡을 찌르는 문학비평 활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글 = 목동훈기자 사진 = 임순석기자▲ 김동석은 수필 '낙조'에 월미도 부근 해지는 풍경을 묘사했다. 사진은 인천 앞바다의 노을지는 모습.▲ 김동석이 1921년부터 1942년까지 살았던 중구 경동 싸리재 현재 모습.

2014-07-23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고향생각 평생 지우지못한 김차영

시인이면 누구나 '시란 무엇인가', '시는 왜 쓰느냐' 하는 질문에 늘 몰리게 마련이다.195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 김차영(金次榮)은 시집 '부릅뜬 태풍의 눈'(1974)에서 "시란 삶의 의미와 똑같이 절대로 비구상적(非求償的)인 것이다. 그것은 구도자(求道者)가 고행을 통하여 얻어내는 아픔 속의 희열과 같은 느낌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묻고 답했다.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 '추상애로(抽象隘路)'는 제목 그대로 추상적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바람대로 프랑스나 영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보다 더 유명해졌을까. 김차영의 작품세계를 깊게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동시대 시인 박인환은 김차영에 대해 "시에 있어서 모든 문화적인 체계를 조리있게 세우고 있다. 그리하여 철학도 얘기하고 사회학도 얘기하고 사랑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조금도 이성의 동요를 느끼지 않고 있으며 흥분된 기색이 없다"고 평가했다.천상병처럼 유명해지고 싶지만, 천상병처럼 쉬운 시는 죽어도 못 쓴다던 그는 사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강화와 인천에 대해서만은 친절한 시인이었다. 역사와 문화의 고장 강화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이면에 있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았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옛 고려의 흔적을 '江都(강도)의 하늘'이란 시에 담기도 했다. 인천을 떠나 멀리 있어도 늘 인천 문화를 그리워하고 걱정했다. /김민재기자

2014-07-16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5]김차영

1986년 고향 노래 '강도의 하늘' 발표자신의 평소 철학과 달리 '쉬운 시'앞서 탱자나무·염하 통해 '강화' 표현대몽항쟁 등 역사적 공간 의미 알려상경후에도 인천문화 현실·정체성 고민쉽게 와 닿는 시가 있고, 첫 문장부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시가 있다. 전자의 경우 대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쉽고, 후학의 연구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후자는 작가 개인의 품속에 머물다 잊히게 마련이다.인천 강화 출신 김차영(金次榮·1922~?)은 후자를 택한 시인이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데다 초현실적인 문장. 김차영은 왜 그토록 어렵게 시를 쓰냐는 주변의 질문에 "시는 사람의 심리를 드러내야 하고, 사회학적이어야 하며, 불가해(不可解·이해할 수 없음)해야 한다. 알 듯 모를 듯한 것이 시다"라고 답하고는 했다. 1950년대 명동을 주름잡던 당대 주류 시인들과 늘 가까이 지내고 어울리는 동안 "왜 나는 박인환이나 조향이나 김규동처럼 유명해지지 못하느냐"고 한탄하면서도 "파리에서는 난해한 시를 쓸수록 유명하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그런 김차영이 유난히 쉬운 시를 쓴 적이 있다. 1986년 어느날 고향 강화의 맑은 하늘에 어른거린 고려를 노래한 시 '江都(강도)의 하늘'이다.그는 강화의 곱고 짙은 푸른 색 하늘을 비취색 고려청자로 빚듯이 노래했다. 대중에겐 무명에 가까운 이 시인을 인천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고집과는 다른 '쉬운 시' 때문이다. 고향은 어려운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누구보다 강화와 인천을 잘 알고 아끼는 시인이기도 했다.지난 11일 오후 2시 30분께 김차영이 읊은 강화의 하늘을 만나기 위해 강화군 관청리 강화초등학교 뒤편의 고려궁지를 찾았다. 30℃를 넘는 무더위 때문인지 10명도 채 안 되는 방문객들은 옛 고려의 도읍터 이곳저곳을 둘러보곤 이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맑고 높은 하늘에선 구름 한 점이 보일락 말락 오갔다. 고려청자에 깃든 바로 그 하늘이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은 맺힌 땀을 들이게 했다.고려는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천연의 요새인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원종 11년(1270)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이곳을 궁궐로 사용했다. 당시 개성 송악산 자락에 있는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는데, 그 흔적을 찾아볼 순 없었다.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맺고 강화를 떠나면서 그들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헐어야 했다. 강화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땀으로 세운 궁궐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궁지는 '궁터'라는 그 이름만으로 옛 강화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강도의 하늘'은 1986년 5월 그가 '월간문학'에 발표한 시다. 그가 60세가 넘어서야 고향의 시 '강도의 하늘'을 쓰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에게 고려의 기운이 담긴 강화의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진작부터 있었다.1977년 10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이 갑곶돈대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 전적지 복원을 기념해 강화도를 찾았을 때다. 이날 박 대통령은 전적지를 둘러보고 고려의 옛 궁터를 방문해 강화 문화계 인사들과 다과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강화 출신 여류 문인 조경희가 "강화가 이제 천지개벽을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김차영에게 "시로 표현해 보는 게 어떠냐"라고 물었단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가 '강도의 하늘'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김차영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강화를 알리고 싶어했다.김차영은 1954년 7월 서울신문사 출판국이 발행한 '신천지(新天地)'에 '명도시 풍토기(名都市 風土記)' 시리즈 '강화편'을 썼다. 어렵사리 구해 본 꼭 60년 전에 나온 '신천지'에는 김차영의 강화 사랑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6쪽에 걸쳐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명소, 천연기념물과 전설을 지닌 역사의 고장(史의 郡)"이라고 자랑했다.김차영은 이 글에서 강화의 천연기념물인 탱자나무 두 그루를 빗대 강화의 정체성을 '남과 북'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강화읍 갑곶리와 화도면 사기리엔 각각 수령 4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78호, 79호 탱자나무가 있다. 주로 남쪽 지역에서 자라는 탱자나무의 최북단 서식지가 바로 강화도다. 김차영은 "탱자나무는 우리나라 양대 문화를 형성한 남방계 문화와 북방계 문화가 여기서 교접(交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김차영의 말대로 오늘날 강화는 남북 교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남북경제 협력을 위한 강화 교동평화산단 추진이나 강화와 개성의 고려시대 유적 연구를 위해 남북 학술 교류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바람이 그 예다. 김차영은 강화에서 통일한국의 미래를 일찍이 내다봤던 셈이다.김차영은 1957년 5월 '시와 비평'에 '鹽河水道(염하수도)'라는 고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내놓는다. 염하는 강화와 김포 사이의 물길을 말한다. 이 물길을 따라 갑곶돈대와 초지진, 덕진진 등 방어요새들이 들어서 있다. 유난히 빠른 유속의 염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합류시키는 듯한 인상이다.기억에 담긴 고놈의 음성이, 종내 말썽이었다/진저리 나는 검은 촉감, 무척 濕(습)해진 冷氣(냉기)와 그 고요에 둘러싸인 주검과, 또한 惡魔(악마)의 환상들이 그대로, 나의 현실로 合流(합류)해 간 鹽河水道(염하수도)…(이하 생략)<鹽河水道 중에서>강화의 찬란한 역사 뒤편에는 염하에 묻힌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거세게 흐른다. 왕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란이 발생하면 늘 외세와 맞닥뜨려야 했던 방어지였다.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근대 시기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그리고 강화도조약의 계기가 됐던 운요호 사건(1875) 등이 염하를 따라 일어났다. 김차영은 염하에 어떤 생각과 기억들을 내던졌을까.김차영은 고향 강화를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김차영과 1950년대 '다이알(DIAL)' 동인으로 활동한 김원태(金元泰·84) 시인은 지난 9일 전화 인터뷰에서 "김차영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고향생각이 나도록 했던 것 같아요. 내 출생지가 평북 강계(江界)고, 살았던 곳이 평양인데, 김차영 선생 고향 강화가 이북이랑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까 명동에서 서로 고향 얘기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김차영은 1922년 강화 길상면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인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중학교를 거쳐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문과과정을 수료하고, 타나카공업주식회사에 근무했다.해방 이후 인천에서 한상억 등과 함께 전국 최초의 동인지 '문예탑'을 만들었고, 한국전쟁 무렵엔 피란지 부산에서 김경린, 박인환, 김규동 등과 함께 후반기(後半期) 동인활동을 하면서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켰다. 개인시집으로는 '상아환상(象牙幻想)'(1969), '부릅뜬 태풍의 눈'(1984), '얼굴 그 얼굴들의 여울'(1989) 등 세 권이 있다. 대중일보, 동양통신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1970년대엔 대한상공회의소 출판부장을 맡기도 했다.김차영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떠났지만, 늘 인천 문화의 현실을 걱정했고, 정체성을 고민했다.그는 8·15해방을 기준으로 '인천인'의 개념이 달라졌다고 했다. 분단 이후 인천항은 중국, 이북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반쪽짜리 항구가 됐다. 인천은 서울의 그늘 아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북 월남민이 몰려들면서 인천은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제일관구경찰청, 수상경찰서, 여자경찰서, 철도경찰서 등 정보·치안기관이 들어서 그야말로 '경찰도시'가 됐다. 그가 1·4후퇴 이후 서울로 삶의 터를 옮긴 이유다. 그러나 김차영은 인천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인석 등 인천의 시인들과 함께 전쟁의 불안과 격분을 외치는 시를 큰 종이에 써 하인천 거리에 내다 붙이는 일을 했다고 김규동 시인의 제자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전했다.어쨌든 인천은 분단 이후, 특유의 지역문화를 형성시키지 못했다. 인천에 수준급 작가·예술인이 나타나도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고는 했다. 심지어 1947년 2월 인천에 세워진 해양대학도 1년도 채 못 돼 군산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 같은 그의 고민은 1991년 학산문학 창간호에 실린 좌담 '인천문화의 재건을 위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좌담엔 당시 윤영천 인하대 교수와 백승철 문학평론가가 함께 했다.그는 좌담 말미에 "지난날 인천이 낳은 비중 있는 문학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김차영 본인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어 후학들의 연구가 절실하다.글 = 김민재기자사진 = 조재현기자▲ 지난 11일 찾은 고려궁지의 하늘에 구름 한 조각이 보일듯 말듯 떠다니고 있다. 고려궁지엔 고려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강화 출신 시인 김차영은 강화의 맑은 하늘에 어린 고려를 노래했다.▲ 강화에서 찍은 염하.▲ 강화 광성보.▲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김차영 시집 '상아환상'▲ '부릅뜬 태풍의 눈'▲ 김차영이 쓴 '명도시 풍토기 강화편'이 수록된 신천지(1954년 7월호) 표지.

2014-07-16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4]조병화

1947년 중학교 물리교사로 인천과 인연월미도서 만난 '소라' 과학도를 시인으로 안내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절반이상 인천 배경작곡가 최영섭에 읊어 준 '추억' 가곡으로 탄생김규동이 소개한 김기림 "큰 시인 될 것" 극찬한국의 대표적 '다작 문인'으로 꼽히는 편운(片雲) 조병화(1921~2003)는 53권의 창작시집과 40여 권의 수필집을 냈다. 조병화는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7.1·산호장)에 26편의 시를 담았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는 첫 시집 출간 2년여 전인 1947년 9월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등학교) 물리 교사가 되면서 인천과 연을 맺었다. 조병화는 '시는 곧 삶'으로 생각했다. 첫 시집 속의 첫 작품 '소라'는 월미도에서 나왔다. 인천중학교 부임 1년 전이다.지난 8일 이른 아침, 조병화의 첫 작품이 탄생한 월미도를 찾았다. 섬을 빙 두르다시피한 3~4m 높이의 전동차 레일 구조물이 흉물스러웠다. 섬 입구 양쪽으로는 공장지대이고, 영종도 앞 바다가 보이는 곳은 일렬로 늘어선 횟집과 카페, 게임장 천지다. 텅빈 거리는 비둘기 떼의 놀이터였다. 조병화가 해변을 거닐면서 소라의 걸음을 뒤쫓았을 그 당시 월미도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조병화는 해방되던 해 자신이 졸업한 경성사범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교사가 됐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한 과학도였다. 하지만 이내 "교사 일은 이미 다른 천재들이 만들어 낸 이론, 실험의 결과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는 보따리 장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과학도로서의 꿈을 스스로 접어야 했다. 그 조병화는 월미도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조병화가 '소라'를 쓴 1946년 월미도는 시설 노후화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시기였다. 꿈이 꺾여 어깨를 떨군 채 조용한 월미도 바닷가를 걷던 조병화는 질긴 생명력의 '소라'를 발견했고, 그 소라는 잠들어 있던 조병화의 시상을 깨웠다. 월미도가 '과학도 조병화'를 '시인 조병화'로 탈바꿈시킨 셈이다.월미도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월미도는 1920년대 일본인 손에 의해 유원지로 개발됐고, 193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행락지(行樂地)로 이름났다. 호텔, 조탕, 요릿집 등이 쉼없이 들어섰고, 돌로 쌓은 방죽이 월미도를 '걸어서 갈 수 있는 섬'으로 만들었다.조병화가 '소라'와 처음 만날 때의 월미도는 그 화려함의 자취보다는 그냥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강하게 풍겼을 것이다.월미도에는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 부대 등 군 시설이 차지하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됐다. 2001년에야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조병화는 1991년 '나의 생애, 나의 사상'이라는 수필집에서 '소라'를 쓴 과정, 그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다.'소라'는 작품이라곤 생각치 않았고, 그저 내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천 바닷가로 갔다. 월미도라 했다. 그땐 군대도 그곳에 없었다. 마음대로 통행할 수가 있었다. 바다에서 파도가 물결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에 소라새끼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만지면 죽은 체하면서. 흡사 나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흐리고 험산한 바닷가에 연한 생명을 하나 딱딱한 껍질 속에 담아서 이리로 저리로 꿈틀거리고 있는 소라새끼를. 살려고.이때의 월미도는 '소라'를 처음 쓴 1946년 여름과는 달리 마음껏 거닐 수 없었다. 월미도 자체가 군 시설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싶을 정도다.'소라'와 같은 시집에 실린 '추억'은 조병화의 대표작이자 가곡으로 불려 유명해진 작품이다.잊어버리자고 /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 하루 / 이틀 / 사흘여름 가고 / 가을 가고 /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 /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 하루 / 이틀 / 사흘'추억' 역시 인천 앞바다에서 씌었다. 이 시에 곡이 붙여져 가곡으로 탄생하기까지의 뒷 이야기는 다음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옛날이었다. 한 시인이 음악가를 꿈꾸는 중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닌다. 시인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다. 시인은 "이봐, 한 수 읊을테니 적어봐."라고 했다. 그러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라고 소리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성질 급한 학생은 "다음은요?"라고 했다. 시인은 다시 술을 마시며 "하루 이틀 사흘, 여름가고 가을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라고 했다. 학생은 또다시 "다음은요?"라고 보챘다. 시인은 또 목구멍으로 술을 꼴깍 넘기며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학생은 이튿날 가곡을 만들어 화답했다. (서울신문 2005.6.27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최영섭 씨')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우리나라 대표 작곡가다. 조병화는 8살 아래 최영섭을 친구처럼 대했다. 아마도 예술적 감성이 통하는 '동지'로 여긴 듯하다. 최영섭 앞에서 조병화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소주병을 꺼내 단숨에 마시고, 시를 토해냈다.조병화의 제자이자 평론가인 황규수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모든 바다를 인천 바다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1권에 수록된 '추억', '소라', '해변' 등의 바다는 인천 바다다. 조병화는 시를 쓸 당시의 감회를 기술하고 있고, 그의 생애에서 만난 좌절, 포기된 꿈으로부터 탈출하고 위안을 얻는 장소가 인천 바다다"라고 설명했다.조병화의 시를 가장 먼저 알아 본 사람은 김기림이다. 시인 김규동의 주선으로 조병화와 김기림의 만남이 이뤄졌는데, 과학자적 면모를 가지고 있던 김기림에게 물리학도 출신으로 시를 쓰는 조병화는 남다르게 보였다.김규동은 "김기림 선생은 조병화에게 '당신이 시를 쓰느냐. 참 좋다. 큰 시인이 될거다'라고 했다. '버리고 싶은 유산'이라는 첫 시집 제목도 김기림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회고했다.그는 인중 교사 생활 2년 만에 서울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길영희 인천중학교 교장이 그를 인중교사로 채용하며,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소개해 줬는데 이 집을 빌려준 것인지, 사 준 것인지를 놓고 오해가 생겨 둘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인천에 자리 잡고 1950년 중반까지 살았다.이후 조병화는 생활터전을 완전히 서울로 옮겼다가 1981~1986년 초, 그러니까 약 5년 반 동안 인하대에 근무하기도 했다. 1981년 경희대 재직 당시 일부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라 비판 받은 조병화는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제안으로 인하대 문과대 학장으로 왔던 것이다. 조중훈 회장과의 인연은 조병화의 아내인 김준 씨 때문에 맺어졌다. 조병화가 인중 교사로 부임할 때 인천으로 함께 내려 온 부인은 인천 중구 관동 3의3가에 '김준 산부인과'를 개업했는데, 첫 손님이 조중훈 회장의 아내였다.지난 6월 29일 서울 혜화동 '조병화 문학관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조병화의 아들 진형 씨는 "조중훈씨의 아내가 유독 겁이 많아 1녀3남 출산을 모두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일로 연이 깊어져 조중훈씨 가족과 부산 피란도 함께 떠났다. 이후 어머니가 혜화동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할 때 부자 손님과 조중훈씨를 연결해 자금 확보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조중훈씨가 어머니에게 자금부장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고 했다.조병화는 인하대에서 문과대 학장, 부총장(1982), 대학원 원장(1984)을 거쳐 1986년 정년 퇴임했다. 조병화는 이 시기에도 인천을 배경으로 하는 시를 남겼다.지금은 이 빌딩의 숲/인간의 거리, 생존의 거리/네것 내것 담싸고 사는/돈의 거리/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은/요 몇년 전만 해도 포동포동하던/복숭아밭이었단다경인가로 자연풍경/이렇게도 아주 변할 줄이야/산 있던 곳이 인간의 거주지로/개울 있던 곳이 인간의 주거지로/논밭 있던 곳이 인간의 주거지로/해안선 따라 바다 있던 곳이/인간의 주거지로/아, 이 변화! 힘이 빠진다/쑥.조병화의 26번째 시집 '머나먼 약속'(1983·현대문학사)에 실린 '옛날엔 이곳이'는 인천이 가진 자연, 풍경이 개발로 망가지고, 사라진 모습에서 느낀 안타까움을 담아 눈길을 끈다. 특히 '아, 이 변화! 힘이 빠진다/쑥'의 마지막 구절은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인천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이며, 얼마나 황폐하게 느껴지는지 드러내고 있다.조병화는 인천에 대한 여러 시를 남겼으면서도 부정적 생각을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이현식 한국근대문학관 관장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조병화 선생님이 특별 강사로 학교에 오신 적이 있었는데, "인천은 좌파들이 우글거려서 싫다. 나는 인천이 싫다고 말씀하셨다"며 "인천에 애정이 넘치거나 긍정적으로 보신다고 느끼기는 어려웠다"고 전했다.2003년 1월 노환으로 경희의료원에 입원한 조병화는 같은 해 3월 세상을 떴다. 절필을 선언한 지 6개월 만이다. 평생을 허무, 고독, 쓸쓸함, 꿈을 시로 쓴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바람따라 흘러가는 '조각 구름(片雲)'처럼 그렇게 떠나갔다./글 = 박석진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아이클릭아트▲ 조병화는 월미도에서 '과학도'에서 '시인'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된 첫 작품 '소라'를 썼다. 사진은 2004년께 월미도 전경. /경인일보DB▲ 조병화의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표지.▲ 1949년 인천공원에서 조병화(사진 아랫줄 왼쪽에서 4번째)와 최영섭(아랫줄 중앙), 지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 /조병화문학관 제공▲ 조병화는 1947년9월~1949년2월 인천중학교 물리 교사로 일했다. 사진은 당시 학교에서 제자들과 찍은 것. /조병화문학관 제공▲ 26번째 시집 '머나먼 약속' 표지.

2014-07-09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한국의 대표적 다작 시인 '조병화'

지난 6월 29일, '다작(多作)의 시인' 조병화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조병화문학관 서울사무소'를 찾았다.조병화가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았던 집 한 편에 마련된 서울사무소에는 그가 평생 남긴 시집, 수필집, 연구서가 가득했다. 더욱 눈에 띈 것은 그림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꿀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조병화의 그림 전시는 서울사무소에서 자택 안까지 이어졌는데, 집 안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걸린 인천 풍경을 담은 그림이 단연 눈에 와닿았다. 황톳빛 산등성이와 회색빛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이 그림에 조병화는 '월미도에서 본 1947년경의 인천'이라는 제목을 달고 이렇게 덧붙였다.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며 꿈의 좌절과 그 고독을 이겨 내었다.그가 첫 작품 '소라'(1946년)를 쓸때 거닐었던 월미도, 당시의 인천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 있었다. 그림 어딘가에는 '과학도 조병화'를 '시인 조병화'로 변신시킨, 강한 생명력으로 꿈틀대던 '소라'가 기어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조병화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힘든 시기 때마다 인천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과학도의 꿈을 접었을 때도, 은사였던 신기범 선생이 서북청년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해 작고했을 때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도, 민주화 바람이 거셌던 1980년대 초에도 조병화는 인천에 있었다. 그는 인천에서 위안을 얻고 새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인천을 '시'로 남겼다. 조병화와 인천은 단단하게 묶여 있다. /박석진기자

2014-07-09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인천작가' 계보 잇는 소설가 한남철

소설가 한남철(본명 한남규·1937~93)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유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인천 송림동, 송현동에서 보낸 작가다. 창영국민학교, 서울중학교, 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55회)에서 공부했다. 그는 어렸을 적 인천과 강화에서의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했다.한남철은 소설가 현덕의 계보를 잇는 '인천 작가'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인천 하층민들의 삶을 그린 점, 인천을 문학적 탐구의 공간으로 삼은 점에서 현덕을 계승하고자 했다. "한 선생은 현덕을 통해서 문학에 눈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그의 고향 후배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말했다.신경림 시인은 "내가 인천을 처음 안 게 현덕 소설을 통해서였다. 한남철과는 현덕을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한남철은 '시·소설에 안목이 높은' 문학 기자였다. 작품을 평가할 땐 가차없었다고 한다. '한 번 아닌 건 끝까지 아닌' 성격이었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반독재 투쟁의 전면에 나서 늘 감시의 대상이 됐다. 반면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는 물렁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한남철과 인연을 맺은 채현국(79) 경남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은 "30년을 매일 만나다시피 했는데, 천진난만한 성격에 별났다. 순하고 물캥이인 사람, 강화 촌놈에 인천 짠물이었다"고 말했다.그의 소설 '바닷가 소년'은 1982년 KBS TV문학관에 방영됐다. 이듬해 이 드라마는 영국 BBC에 수출됐고,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방송영화경연대회(PRIX FUTURA)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연출가 고(故) 장형일 PD는 2009년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한남철의 장남을 찾아가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한남철이 본명 한남규로 출판한 소설집 '바닷가 소년'(창작과비평, 1992)은 아직 절판되지 않아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인천 부평·주안·화도진·미추홀·연수 도서관이 이 책을 보유하고 있어 대출해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바닷가 소년을 TV문학관 드라마로 보려면 KBS영상사업단에 전화해 주문하면 된다. /김명래기자

2014-07-02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3]한남철 '바닷가 소년'

30여년 간 쓴 14개 단편 '자전적 소설집'홍예문 등 어릴적 추억, 서민풍경에 녹여사상계로 입문한 후 문학기자 길 걸어시국선언 참여… 군사정권 강하게 비판지난 1일 낮 12시에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있는 홍예문엘 갔다. 동인천 삼치거리에서 홍예문로를 따라 신포동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아치형 터널 아래 그늘이 깊다. 일제가 송학동 마루터기를 깎아 1908년 완공한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라는 뜻이다.제국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만들었다는데, 이 화려하고 고운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생각하게 한다.한낮의 더위에 지친 행인들이 화강암과 붉은 벽돌이 만든 홍예문 그늘에 이르면 보폭을 줄이게 마련이다.한남철(본명 한남규·1937~1993)의 소설을 읽고 보니, 인천에 살면서 종종 지나치던 홍예문이 새로웠다. 어린 시절 수도국산 달동네에 살던 작가는 이따금 할머니 손을 잡고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놀러갔다. 그의 자전적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의 한 구절이다.이따금씩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만국공원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배다리를 지나 싸리재 마루턱을 넘어 한참을 걷다보면 홍여문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소리치면 목소리가 되울려퍼져 의미없이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한 재미였다. 아치형 벽은 물먹은 고목처럼 늘 거무튀튀하였고 고개너머 부두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풍성하게 쏟아져들어 그 안은 항상 서늘했다. 신포동과 송림동 쪽을 넘나들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서면 으레 땀을 들이다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홍여문 주변에는 참외, 자두, 수박 같은 여름과일과 아이스케이크, 빙수, 냉차 등속을 파는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한남철은 1992년 소설집 '바닷가 소년'을 창작과비평사에서 냈다.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집이었다. 그 이듬해 한남철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작가가 1958년 등단 이후 30여년 간 쓴 14개 단편을 담았다. 소설집은 "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강 건너 저쪽에서'로 시작해 그의 문단 데뷔 작품으로 1958년 사상계 10월호(통권 제63호)에 실린 '실의(失意)'에서 끝난다. 한남철은 사상계 작품 발표 이후 필명을 썼는데, 첫 소설집을 낼 때 본명 한남규로 돌아갔다. 바닷가 소년은 곧 작가 자신을 뜻한다. 이 책을 읽으면 한남철 개인이 거쳐온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유소년기 체험을 당대 인천의 '서민 풍경'속에 녹였다. 세상살이는 가팔랐고 서민들은 고달팠다. 한남철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렸다. 수도국산 언덕바지 초가집의 이엉을 얹힌 지붕에 올라가 본 인천 풍경을 보자. 어른들은 "비가 좀 심하게 오면 보꾹에서는 간장 빛깔의 썩은 물이 노래기와 함께 흘러"내린다고 성화였지만, 아이는 지붕에 올라가 시가지를 내다보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오른쪽으로는 측후소가 우뚝 선 오정포산, 그 옆은 만국공원, 만국공원 속에는 평화각, 또 그 옆으로는 뾰족 성당, 저 멀리 황골고개 너머 공설운동장, 그리고 바로 눈앞이다싶게 상인천 역사의 지붕, 역 좌우로 있는 배다리와 철다리 (중략)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이 엿장수의 가위소리였다. 그리고 시원한 물뼈다귀를 사가라고 목청껏 외쳐대는 아이스케이크 장사꾼들의 목소리, 자동차가 달려가는 소리, 이따금씩 역사로 진입하는 기관차의 힘찬 바퀴소리, 자장가와도 같은 희미한 뱃고동 소리도 섞여 있었다.('지붕 밑의 한낮' 중)수도국산 달동네 아이들은 부모 직업에 따라 친구의 별명을 지어 불렀다. 용동 시계포집 아들 길상이는 '시계포', 대한통운의 전신인 환성운수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삼석이는 '마루보시(丸星)'였다. 주인공 광철이는 아버지가 쌀장수인 탓에 별명이 '모리배'였다. 친구 풍길이가 '모리배란 쌀장수를 뜻한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광철은 자신의 별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해방기 쌀의 매점매석은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였다. 매점매석이 심할 경우 인천 양곡 시장의 쌀이 바닥난 적도 있었다. 양식이 없어 배를 주리는 아이들은, '이게 다 모리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머릿속에 깊이 기억했을 것이다.한남철 소설 작중 어린 화자에게 한국전쟁 발발은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고 공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학교를 쉰다는 일에 쾌재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학교에서 '국군은 문제없이 이긴다'고만 배웠다. 난리를 피해 할머니가 있는 강화로 간 아이에게 전쟁의 참화가 비켜가지 않았다.아침에 등교해보니 교정의 분위기는 어딘가 들떠 있었다. 김포 부근에서 통학하는 한반 애는 비행장의 공습광경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때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선명하게 느끼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덤벼든 침략자들을 비웃었다. 국군용사가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중략)내가 아저씨를 따라 시골로 내려온지 며칠 안 되어 전쟁이라는 살벌한 어휘와는 전혀 딴판으로,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수도는 침략자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모르는 채 그 여름을 지냈다. 얼마 오래지 않아 침략자들은 내가 있던 시골까지를 점령해버렸고, 그리하여 내 어린시절 중의 극히 짧은 부분은 전혀 상상도 못해본 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어둠의 숲' 중)한남철은 1958년 10월 사상계 신인작품 공모에 단편 '실의'가 당선돼 한국 문단에 등장했다. 하지만 응모작에 주소를 적어내지 않아 사상계 편집자들이 한동안 잡지 편집후기란에서 '한남철을 찾는다'는 글을 여러차례 남긴 일도 있었다. 지난 달 25일 서울 태평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임재경(78)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은 "당시 한남철은 서울 삼선교 무허가 판잣집에서 생활했는데, 이런 이유로 주소를 적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한남철은 서울대를 중퇴하고 1959년 사상계에 입사해 '문학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 때부터 '대표 문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시인 김수영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한남철을 친구처럼 대했고, 사석에서 '내 동생에게 장가들면 안 되겠냐'고 말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사상계 신인상 입선으로 등단했는데, 당시 편집자가 한남철이었다. 이밖에도 소설가 서기원, 이호철, 이문구,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교수 등과 가깝게 지냈다. 한남철은 사상계가 폐간된 뒤 대한일보, 신동아, 월간중앙에서 문학 기자로 일했다. 지난 달 24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신경림 시인은 한남철을 "작품을 보는 안목으로 당대 문학 기자 중 최고 수준이었다"며 "글 쓰는 사람은 글이 좋으면 그만이고,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글을 못 쓰면 빵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군사 정권에서 '기자질'을 했지만 한남철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1971년에 공명선거 등을 촉구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찬성 서명자 60인에 이름을 올렸고, 1974년에는 민주적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었다. 그는 1970년에 발표한 풍자소설 '신각설이'에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거야 벙어리나 진배없고, 눈뜨고도 멀쩡하게 속는 놈들이야 장님이지 별거냐"며 폭압 정권에 꼼짝 못하고 재갈 물린 세태를 강하게 비판했다.한남철은 1980년 여름, 신군부가 득세하던 때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아들 한기웅(41) 씨는 "당시 아버님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작가는 이후 약 4년간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소설가이자 대학 전임교수까지 했던 아내(이순)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한남철은 1984년 계약직으로 KBS 홍보위원에 취직해 사보를 만드는 일을 했다. 1985년 겨울 아내가 뇌수막염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즐기던 술·담배를 거의 하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 한남철은 1991년 집을 나서다 갑작스레 쓰러졌다. 간경화로 투병했고 1993년 4월30일 밤 10시30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용미리 1묘역(비석번호 400-6-243)에 있다.작가를 1992년 7월에 인터뷰했던 인하대 최원식 교수에 따르면 한남철은 병상에서 소설을 구상했고, 제목은 '내 고향 서쪽바다'였다.글 = 김명래기자▲ 지난 1일 오후 인천 중구 송학동 홍예문. 한 노인이 인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홍예문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송학동 마루터기를 깎아 이 홍예문을 뚫었다. /임순석기자▲ 일제강점기 홍예문. /출처=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김명래기자▲ 1 서울대 철학과 재학시절 한남철. 2 3 한남철이 KBS에서 홍보위원으로 일하던 당시의 모습. /장남 한기웅씨 제공

2014-07-02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나환자 해방 앞장선 시인 한하운의 노래

시인 한하운(韓何雲, 본명 한태영, 1919~1975)은 나(癩)환자로서 느낀 고통과 분노, 불우하고 소외당한 삶을 시로 풀어냈다.그는 함경남도 함주군 태생으로, 1936년 17살때 나병(한센병) 확정 진단을 받았다. 1948년 월남후 서울 등지에서 거지 생활을 하다 이듬해 4월 '전라도 길' '파랑새' 등 10여편의 시를 월간 종합잡지에 발표하며 등단한다.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으로 여겨졌다. 일반인은 나환자와 접촉하기를 꺼렸고, 나환자들은 거리를 떠돌며 밥이나 돈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한하운은 1950년 인천 부평에 정착, 시를 통해 '나환자 해방'을 부르짖고 나환자 구제운동에 앞장섰다.그는 부평에서 '보리피리'(인간사·1955), 산문집 '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1958)와 '황토길(신흥출판사·1960) 등을 남겼다.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1949) 이후의 작품 대부분이 부평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또 '성계원'(국립부평나병원) 자치회장, 부평 신명보육원 원장 등을 지냈다.부평의 청년들이여/ 이제 아세아의 잠에서 깨어나/ 70년대의 찬란한 햇빛에 얼굴을 들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을/ 누가 부평이라 하였는가/ 얼마나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중략) // 새 부평을 창조하여/ 뭉쳐 뭉쳐서/ 부평의 청년들이여/ 이제 어두운 이씨 조선의 잠에서 깨어/ 70년대의 새 시대를 창조하는/ 이 나라에 빛나는 부평 청년이여(한하운 '부평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부평을 사랑했던 한하운은 1959년 나병에서 해방됐지만, 1975년 2월 간경화증으로 부평 십정동 자택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목동훈기자

2014-06-25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2]한하운

나병 거지로 살다 이병철 등 눈에 띄어1949년 발표 '전라도 길' 절절함 묻어나그의 詩통해 고은도 시인되기로 결심부평 공동묘지 인근 요양소 '성계원' 정착인천여고 문예반과도 각별한 인연전라도(全羅道) 길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한하운(韓何雲, 본명 한태영, 1919~75)이 1949년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를 통해 발표한 '전라도(全羅道) 길'.그는 소록도 나환자 요양원을 가는 길에서 느낀 슬픔과 괴로움을 이 시에 담았다. 한하운은 나병을 앓아 '나(癩)시인' '문둥이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다. 삼복더위에 소록도까지 천 리 길을 가야 하는 그에게는 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차장(車掌)이 그를 발길로 걷어차며 기차에서 내쫓은 것이다. 나환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발가락이 다 잘려 나가고, 혹독한 더위 속에 쓰러져 죽더라도 천 리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전라도 길'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매번 거론되는 고은은 한하운의 시를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 고은은 한하운처럼 나환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다고 털어놨다.한하운은 1949년 4월 신천지에 '전라도 길'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해 5월에는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를 냈다. 그가 시인이 된 사연은 매우 극적이다. 한하운은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며 구걸하는 나병 걸린 거지였다. 그는 추운 겨울 여관비를 마련하고자 다방 등을 돌아다니며 시를 팔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병철과 박거영 등 문인의 눈에 띄어 시를 발표하게 된다. 이병철은 한하운을 문단에 소개한 인물로,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한하운은 가깝게 지내던 이병철이 월북한 데다, 자작시 '데모'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한때 빨갱이 논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문둥이에게는 좌익도 우익도 없는 것이다. 데모에 참여하고 싶지만 참여할 수 없는 하위자일 뿐"이라며 "시 '데모'는 하위자의 발화다. 한국문학에서 소외당한 소수자의 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했다.한하운은 시를 통해 나환자의 고통과 서러움을 표출했다. 그의 시는 인간대열에 끼지 못한 문둥이의 인권 선언이기도 했다.'한하운시초'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정음사 최영해 사장은 "나문학이랄까…. 환자들의 고민 속에서 우러나는 작품을 정음사에서 다뤘습니다. 소설에 '애생금', 시에 '한하운시초' 모두 다 굉장히 인기를 얻었습니다. 나는 이 두 작품이 우수하고 우리 마음을 찌름을 느꼈습니다"라고 자평했다.(경향신문 1949년 8월 15일자 지상좌담회 기사 중)1950년, 한하운은 약 600명의 나환자와 함께 부평 공동묘지 인근 골짜기(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자치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이곳을 '성계원'(성혜원·成蹊園)이라고 명명한다. 나환자 요양소라고 했지만,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한하운은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베 총리 모교인 일본 성계(세이케이)고등학교를 다녔다. 일본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부평 나환자 요양소 이름을 '성계원'으로 지은 것은 아닐까. 한하운은 자서전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1958)에서 "동경의 2년 나머지 생활은 나의 지금까지의 반생에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가 나환자 요양소로 결정된 이유는,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을에 나환자 요양소가 들어서는 것을 주민들이 크게 반대했다.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한하운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중)나환자들은 잘못된 사회적 편견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1959년 6월 14일 한 남성이 "나환자가 아이를 산다"는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을 성계원 나환자에게 팔았고, 그 아이는 피살 직전 경찰에 구출됐다는 신문기사가 날 정도였다. 물론 기사 내용은 사실과 달랐다. 한 남성이 성계원을 찾아와 "내 아들을 사라"고 하자, 이에 놀란 성계원 측이 경찰에 신고한 것인데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가 된 것이었다.성계원은 1960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개칭됐으며, 지금은 '부평농장'이라 부른다. 나환자들이 한때 자립을 위해 양계(養鷄)업을 했는데, 당시에는 부평 쪽으로만 길이 나 있어 '부평농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평농장 권태우(62) 회장은 "15살 때 병에 걸려 청주에서 혼자 이곳으로 왔다.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다. 산이 철조망이었다"고 했다. 또 "당시에는 나환자가 400명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80명 정도 남았다"며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아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성계원에는 학교가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 오기 전에 학교 좀 다녔다고 하는 환자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의사·간호사가 나환자와의 접촉을 꺼린 탓에 환자들끼리 주사를 놔 줬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땅 용도가 주거지역에서 준공업지역으로 변경되면서,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건물 임차인들이 "사람들이 나환자를 무서워해 공장 직원 뽑기가 어렵다"는 민원을 내어, 나환자들이 총회에서 '나환자 낮 활동 금지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한하운은 성계원에 머물면서 계속 시를 썼다.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한식에 소복(素服)이 통곡할 때에//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중략)//앞날이 없는 문둥이는/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다시는 뵈올 수 없는 것은/다신 뵈올 수 없는 것은/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여가')나환자들은 성계원에서 짝을 찾아 결혼식을 올렸다.흙이 있다 하늘의 구름과 푸른 지평은 넓기만 한데/문둥이가 살 지적도(地籍圖)는 없어.//버림받은 사내와 버림받은 계집이/헌신짝에 짝을 맞추는 것이//어쩌면 울고 싶은 울고 싶은/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경사(慶事)냐.//(중략)//문둥이의 결혼이여//분홍빛 치마폭으로 신랑 방문을 가려라/어서어서 태양 앞에 새롭게 다가서라.('나혼유한')한하운도 유임수(兪壬守)라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나병을 앓았으나 증세가 경미했고, 한하운이 1975년 2월 28일 간경화증으로 타계한 뒤 치매를 앓다 숨졌다고 한다. 한하운은 1959년 음성 판명을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 이때부터 부평구 십정동 자택과 자신이 서울 명동에 설립한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성계원에서 나온 음성 나환자들은 경인농장(경인전철 동암역 근처)과 청천농장(인천나비공원 부근)에 정착지를 마련했다. 당시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오지(奧地)였다. 청천농장 어경윤(72) 회장은 "성계원에 있다가 1961년 12월에 청천동으로 왔다. 당시 이곳에는 집이 한 채밖에 없었다"면서 "정착 초기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 내다 팔고, 산에 나무를 심고 그 품삯으로 정부로부터 밀가루를 배급받아 생활했다"고 했다.한하운은 경인농장에 정착했는데, 1990년대 후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농장 건물은 몇 채 남아 있지 않다.한하운 작품 중에는 '작약도-인천여고 문예반과'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중략)//인천은 밤에 잠들고/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하략)이 시는 한하운이 시작(詩作) 강의차 인천여고 문예반과 작약도에 갔다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작약도(동구 만석동 산 3)는 섬 둘레가 1.2㎞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일본인 스즈키 히사오가 소유하고 있다가, 해방 후 정부가 동립(東立)산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이후 한보개발, (주)원광을 거쳐 2005년 6월 진성토건주식회사(현 진성주식회사) 소유가 된다. 작약도는 인천 등 수도권 주민들이 즐겨찾는 피서지였다. 하지만 여객선사 운영난 등으로 인해 2012년 1월 뱃길이 끊겼다.한하운은 인천여고 문예반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서문에서 "이 책을 엮는 데 빼놓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인천여고 경숙 양이 즐거운 겨울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추운 날씨에 하루 빠지지 않고 알뜰히 이 '황토길'을 엮어 놓았다"고 썼다.인천여고와 이 학교 총동창회가 2008년 발간한 '인천여고 백년사'를 보면 1960년대 인천여고에 '문학소녀'들이 많았고, 이들을 비롯한 많은 여학생들로 도서관 대출계는 항상 바빴다. 이 학교를 나온 유일곤(1963년 졸업)씨는 "고교 시절에 채홍덕, 황인지 선생님을 따라 서울 행사장에 간 적이 있다"며 "그곳에 계신 한하운 시인에게 꽃다발을 줬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한하운의 작품은 첫 시집 이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시인 고은은 "중학생 때 밤새 울며 '한하운시초'를 몇 번이나 읽었다"면서 "시구절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나도 이런 병에 걸려야겠다' '이런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또 "한하운으로 인해 시인이 되겠다는 최초의 맹세를 했지만 그 이후로는 그를 잊었다"며 "서울 명동에서 한하운이 박거영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지척에서 본 적은 있다"고 했다.글 = 목동훈기자▲ 1 2 시집 '한하운시초'와 '보리피리' 초판 표지. 3 한하운의 '작약도' 친필 원고.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인천문화재단이 2010년 '한하운 전집'을 엮으면서 찾아낸 친필 연보. 이 연보에는 한하운이 1920년 3월 10일생으로 돼있다. 하지만 묘비에는 1919년 2월 24일 태어난 것으로 돼있고, 김포시청 홈페이지에는 1920년 3월 20일 태어난 것으로 나와 있다. 한하운은 중국 북경(베이징)에서 북경대 농학원 축목학계를 1943년 6월 졸업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재학할 당시 북경대는 북경이 아닌 쿤밍(昆明)에 있었다. 북경대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창사(長沙)를 거쳐 쿤밍으로 이전했으며, 1946년 다시 북경으로 왔다. 한하운 이력에 대한 고증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한하운이 음성 판명을 받은 뒤 머물렀던 '경인농장'(십정농장) 전경. 그는 1975년 2월 28일 이곳 자택에서 간경화증으로 숨졌다. /조재현기자▲ 김포에 있는 시인 한하운 묘. 묘비 뒷면에는 그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목동훈기자

2014-06-25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해방후 민중의 애환 노래한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1970년대 포크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래 '세월이 가면'. 이 노래는 1956년 이른 봄 명동의 한 주점에서 서른살의 시인이 즉석으로 만든 시에 곡조를 입혀 세상에 나왔다. 그 시인은 바로 명동의 '댄디보이'라고 불렸던 박인환(朴寅煥·1926~1956)이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남기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지만, 그 노래는 지금껏 그대로다.박인환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노랫말 때문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정세를 살았던 그에게 시는 사회와 맞서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는 문학의 현실참여를 시도했고, 여러 작품을 통해 그의 신념을 알리고자 했다. 미군정기 어느날 가난한 인천항의 모습을 본 박인환은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인천항의 풍경이 언젠가 사진잡지에서 봤던 영국 식민지 홍콩의 이미지와 너무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인환은 1947년 4월 '인천항'이라는 시를 통해 미군이 점령해버린 인천항의 서러운 현실을 고발한다. 지금 시인 박인환의 이름은 점점 잊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가도 그가 인천에 남긴 시 한 편은 우리 가슴에 남으리라. /김민재기자

2014-06-19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1]박인환 '인천항'

지배·억압 '인천항' 현실 고스란히일부 미군들 만행 하소연도 못해현재 주한미군 사건사고의 출발점'詩쓰기란 사회와 싸움' 분노 표출기자시절 반감 키우다 체포되기도종로에 서점 '마리서사' 문 열어조병화 등 문인들 사랑방 역할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 등 남겨해방 직후 인천항의 비극을 담은 박인환(朴寅煥·1926~1956·사진)의 시 '인천항'. 1947년 4월 월간지 '신조선'을 통해 발표한 이 작품엔 미군정 깃발 아래 자행된 미군의 횡포와 모리배가 판쳤던 인천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인환은 힘 없는 민족의 아픔이 서린 장소가 인천항이었음을 기억했다.박인환은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 서정적인 시로 유명하지만, 사실 현실인식이 아주 강했던 시인이다.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대부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는 사실을 분개하는 내용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박인환은 도시적 서정주의 특색이 드러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한다.박인환 평전을 쓴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문학이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1960~70년대 '참여문학'을 박인환은 1940년대부터 앞장섰다고 보면 된다"며 "'인천항'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문명과 미개' 등으로 이분화된 서양 중심의 근대성을 타파하려는 그의 현실 인식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인천항,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박인환은 1955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박인환 선시집' 후기를 통해 '시 쓰기란 사회와의 싸움'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 왔다.…(중략)…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고 했다.박인환은 해방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억압하고 있던 미군에 대한 분노를 '인천항'이란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밤이 가까울수록/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정크의 불빛은 푸르며/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香港·홍콩)의 야경을 닮아간다//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인천항 곳곳에 펄럭이는 성조기. 그들은 조선인을 구하러 온 해방군이 아니라 또다른 외세였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은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고, 일본인이 남겨둔 재산을 몰수했다. 항만도시 인천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항마저 미군이 점령해버렸다.인천항만 시설의 노란자위라 할 수 있는 인천선거(도크)를 해방후 미군이 점령하여 독점 사용중인 까닭에 항만도시로서의 인천부는 지금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중략)… 이에 대하여 인천항만 관계측은 선거사용을 우리에게 일부라도 개방치 않으면 중부조선의 사업은 쇠잔하여지고 민생문제에도 큰 불안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대중일보 1947년 3월7일자)미군이 인천항을 점령해 버리면서 까다롭고 복잡한 수속절차 등을 이유로 선박의 움직임이 둔화됐다. 항만 노동자들은 일감을 잃어버렸고, 항도(港都) 인천은 쇠퇴해 갔다.죄 없는 시민들은 일부 몰지각한 미군의 만행에 하소연 한 번 못하고 당했다. 1947년 1월 11일 새벽 1시 인천 옥련동의 한 가정집에 미군 헌병 3명이 몰래 들어가 아이들 곁에서 잠을 자던 한 부인을 총으로 위협하고 겁탈한 사건이 대중일보에 실린다. 이 사건은 인천시민에 대한 미군의 횡포를 보여준 단적인 예였다.미군들은 조선인 경찰의 범인체포를 방해하거나 부대 인근에 살던 죄 없는 시민들을 총으로 쏘기도 했다. 미군의 풍기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됐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했다. 효순이 미선이의 생명을 앗아가 버린 미군 장갑차 사건(2002년 6월 13일)을 비롯해 요새 심심하면 터져나오는 주한미군의 성추행 사건이나 음주뺑소니, 폭행 등 각종 사건들은 이미 70여 년 전 인천에서 시작된 비극이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쫓겨나는 신세가 된 일본인들은 도리어 미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귀국길에 오르기도 했다. 인천 출신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는 '인천철수지'(1948)에서 "군정청의 프라친스키 중위는 처음부터 일본인 편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특별 배려해 준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었다"며 "그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다루는 태도와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 일본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고, 개인적인 편의를 제공받은 사람이 많았다"고 회고했다.박인환은 이 같은 미군의 모습을 보면서 미군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박인환은 1949년 7월경 자유신문 기자로 활동할 당시 동료기자 4명과 함께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기도 했다.인천항은 미군이 첫 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했지만, 중국, 일본 등지에 있는 동포들이 귀환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방직후 귀환 해외동포는 250만 명에 달했고, 이중 75만명 가량이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동안 서울에서 돈 보따리를 둘러메고 온 모리배는 인천시민들을 농락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수법은 쌀값 조작과 일본인이 남겨두고 간 적산가옥·공장 매점, 고리대부, 밀수였다.고향에 돌아가도 농사지을 땅이 없던 귀환동포들은 인천에 머물며 일본인 소유 여관을 개조한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미군정은 일본인 가옥을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려 했지만, 모리배들이 이미 일본인으로부터 집을 사들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2일자 사설을 통해 모리배들을 "동포의 이익을 약탈함으로써 자가(自家)의 번영을 추구하는 죄과를 그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비판한다. 박인환은 귀환동포들의 설움이 담긴 봇짐과 모리배들의 돈 보따리를 대비시키면서 인천항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었다.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올때/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인천항구이다//그러나 날이 갈수록/은주(술)와 아편과 호콩(땅콩)이 밀선에 실려오고…//(중략)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중국서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 같이/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이처럼 인천항은 조선의 가난을 대변했다. 박인환이 목격한 인천항은 영국이 지배했던 홍콩 식민항이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짓밟혔던 상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인천항 미군 막사에 펄럭이는 성조기와 화려한 네온사인을 본 박인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박인환은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등과 함께 발간한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인천항'을 다시 싣는다. 그리고 서문에서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며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박인환과 마리서사박인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스무살 무렵 종로에 세운 서점 '마리서사'다.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이사했다. 1944년 부모님의 뜻에 따라 평양의전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자퇴하고, 1945년 말 아버지에게 3만원,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려 지금의 파고다공원 인근 낙원동에 고서점을 열었다. 마리서사라는 이름은 그가 존경한다는 프랑스 출신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책방을 뜻하는 서사(書舍)를 합친 것이다.마리서사는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인천의 시인 조병화, 배인철 등도 이곳을 제 집 같이 드나들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결국 책장사는 뒷전이 돼 버리고 1948년 봄 마리서사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만다. 이후 박인환은 자유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경향신문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종전 뒤 다시 찾은 명동에서 그는 짧은 문학생활을 불태웠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기행문을 남겼고, 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시에 녹였다. 박인환은 외국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에는 영국의 유명 소설가 버지니어 울프(1882~1941)가 등장한다.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오후 9시께 술을 마신 뒤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했다. 명동의 한 주점에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라는 명시 '세월이 가면'을 남긴 지 얼마 안 된 때다. 박인환이 그렇게도 가난하게,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 해에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도 세상을 등졌다. 그 이듬해에는 '사슴 시인' 노천명이 저세상으로 갔다.박인환과 가깝게 지냈던 조병화는 "시를 쓰는 것만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생이요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쓸쓸한 것도 아닌 것, 외로운 것도 아닌 것, 이렇게 너는 말을 했다.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고 멋있는 시를 쓰고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 인생을 지내왔다"는 내용의 조시(弔詩)를 바쳤다.글 = 김민재기자▲ 미군 사진병 돈 오브라이언(Don Obrien)이 해방 이후 1945년 10월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LST함(전차상륙함)을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오기 직전 찍은 사진.▲ 1949년 박인환이 김수영, 김경린, 임호권 등과 만든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실린 '인천항'.▲ 1947년 3월 박인환(오른쪽)이 문우 임호권과 함께 마리서사 앞에서 찍은 사진.▲ 강원도 인제군에 세워진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마리서사 내부 모습.

2014-06-18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흑인시 씨앗뿌린 '인천사람' 배인철

朱安묘지 산비탈에도 밤벌레가 우느냐,/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보고 있다.//가물에 들끓는 서울 거리에/정다운 벗들이 떠드는 술자리에/애닯다/네 의자가 하나 비어 있고나.//월미도 가까운 선술집이나/미국 가면 하숙한다던 뉴요크 할렘에 가면/너를 만날까./있다라도 '김형 있소'하고/손창문 마구 열고 들어서지 않을까./네가 놀러 와 자던 계동집 처마끝에/여름달이 자위를 넘고/밤바람이 찬 툇마루에서/나 혼자/부질없는 생각에 담배를 피고 있다.//번역한다던/리처드 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철쭉꽃 피면/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좋아하던 존슨 부라운 테일러와/맥주를 마시며/저 세상에서도 흑인詩를 쓰고 있느냐./해방 후/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땅 진흙밭에/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詩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시인 김광균(1914~1993)이 흑인시인 배인철을 인천 주안 공동묘지에 묻고 나서 쓴 '詩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란 조시(弔詩)이다. 시인은 배인철이 없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읊었다. 그리고 배인철과의 정감 넘치는 기억을 달에 실려 보내고 있다. 시인은 또 흑인시가 왜 하필이면 인천땅에서 출발하게 되었는지도 풀어낸다.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외세에 점령당해 사람이 죽어가야 했던 인천에서 약소 민족의 슬픔을 흑인을 통해 노래하던 배인철은 해방공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스물일곱이라는 짧디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꽤나 굵은 울림을 던져 놓고 갔다. /정진오기자

2014-06-11 정진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0]배인철의 흑인시

해방후 흑인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작품 5개에 '약소민족' 아픔 녹여1947년 남산서 총격 피살… 우익테러 의혹 속 치정관계로 몰아 수사종결사후 시세계 비평·회고 줄이어… 인천서 '흑인시' 태동시켜 문학사 의미여전히 낯설기만 한 '흑인시'라는 장르가 이 땅에 생겨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그 흑인시는 미군의 첫 상륙지점인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흑인시라는 씨앗을 우리 땅에 처음으로 뿌린 이는 흑인이 아니라 '인천 사람' 배인철(裵仁哲, 1920~1947)이다.인천은 흑인시의 개척도시이고, 배인철은 흑인시의 선구자이다.배인철이 정체 모를 흉한의 총탄에 죽던 날, 이 땅에서 갓 돋아난 흑인시의 싹도 그만 죽고 말았다.# 흑인시의 기원, 인천과 배인철지금까지 드러난 배인철의 흑인시 작품은 5개다. 맨 처음 나온 것은 1947년 1월 1일 '독립신보'에 실린 '노예해안'이다.아프리카 연안 SLAVE COAST는 아직도 울고 있는가//깊은 바닷속 물결이 일 때마다 네들의//울음소리 내고 있는가이렇게 시작하는 이 작품은 흑인 노예의 역사를 꿰고 있는 작가의 의식이 깊이 녹아 있다.그렇다//1619년 열두의 黑奴가//和蘭船에 이끌린 다음 첩첩이 쌓인 헤아릴 수 없는 검은 송장이//고향 잃은 몸들이 노예선의 바닷길//바닷길을 지은 것이다 …(중략)… 흑인들이여//젊은 몸 붉은 피 이기지 못하여//파리로 모스크바로 달리는 동무들이여//또한 내 黑人部隊여//이 고장 떠난 자유로운 내 땅에서도//또다시 새로운 奴隸商//아니 낯 설은 손님마저//SLAVE COAST를 그리고 있다흑인노예무역의 역사적 배경과 그 세부 상황까지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특히 '새로운 노예상'이란 시어에 다다르면 흑인 노예의 상황은 미군과 소련군이란 새로운 '점령군'을 맞은 한반도의 현실에 와 닿는다. 배인철이 그리는 흑인시에는 약소민족이라서 겪어야 했던 우리의 아픔까지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배인철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니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학도였다. 배인철이 본격적인 흑인시를 쓰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흑인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다.배인철은 일본 유학 중에는 위의 '노예해안'에서 흑인혁명에 빗대어 노래한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 심취할 정도로 좌편향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배인철과 일본 유학 중 공동생활을 했다는 이경성(1919~2009)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의 회고록 '아름다움을 찾아서' 등에 따르면 배인철은 유학 당시에는 블레이크(William Blake)와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등 신비주의나 낭만주의 쪽에 심취했다고 한다. 배인철은 일본 유학 시절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앞선다"면서 까만 양복에 빨간 장미를 꽂고 다녔던 오스카 와일드를 흉내낼 정도였으며, 고베 출신의 여성과 아주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이경성 관장은 또 "그(배인철)는 인천 만석동에 있는 미군 부대에 자주 들러 흑인 병사들과 만났다. 나도 한번 그 부대에 들러 그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많은 흑인 병사와 인사한 적이 있다. 이 무렵 배인철은 흑인 문학에 심취해서 '흑인 권투 선수 조 루이스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시를 써서 중앙문예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고 회고했다.'쪼 루이스에게'는 배인철이 1947년 3월 '문화창조'에 발표한 시다. '세계권투선수권 쟁탈전 쪼 루이스 대 빌이 콘: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이란 다소 긴 부제를 붙인 이 시는 1937년부터 1949년까지 장장 12년간이나 헤비급 세계타이틀을 보유하며 일명 '갈색 폭격기'로 불렸던 흑인 권투선수 J. 루이스(1914~1981)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배인철 자신도 일본에서 권투를 배웠다.배인철이 남긴 작품은 '노예해안'과 '쪼 루이스에게' 이외에도 1947년 1월 '백제'에 발표한 '흑인녀', 1947년 나온 '1946년판 조선시집'에 실은 '人種線-흑인 쫀슨에게', 그리고 언제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병화 시인이 '현대문학' 1963년 2월호에서 소개한 '흑인부대'가 있다. 이 '흑인부대'란 제목의 시 때문인지 일부 연구자 중에는 인천 월미도에 미군 흑인부대가 있었고, 배인철이 그 부대에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주한미군 당국은 역대 주한미군 중에는 흑인부대가 단독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경성 관장의 증언대로 미군정 당시 미군부대가 만석동 쪽에 있었고, 그 부대원 중 흑인병사들이 꽤나 되었는데 배인철은 그 흑인병사들을 통칭해 '흑인부대'로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월미도에 있던 미군부대는 1950년에 가서야 터를 잡은 주한미군 인천항사령부였다. 해방공간 미군정기 인천주둔 미군들의 일상과 흑인 병사들의 상황을 엿보기 위해 1950년대 후반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했던 김두호(79·인천 강화군 교동읍)씨를 어렵사리 만났다. 김두호씨는 "미군 사령부 사병 중에 흑인도 많았고, 가깝게 지낸 흑인 친구들도 많았다"면서 "미군들은 일과가 끝나면 당시 인천항 주변으로 외출 나가 술집 등에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고 전했다. 그 10여 년 전인 해방공간에서의 인천 주둔 미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배인철과 어울린 사람들배인철을 찾아 나서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문인들이 있다. 박인환,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현덕, 함세덕, 임호권, 이병철, 정지용들이다. 모두가 우리 문학사의 보석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배인철과 깊은 교유의 정을 나눴다.사실감 넘치는 해방 전후의 문단 이야기로 평가받는 안도섭의 실명소설 '명동시대'는 박인환과 배인철 얘기로 시작한다. 1946년 봄 박인환이 문을 연 서점 '마리서사'에 배인철이 들러 책을 사는 장면이다. 이렇게 첫 페이지를 연 '명동시대'는 배인철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배인철은 해방직후 2년여의 짧은 시기를 보냈지만, 우리 문단을 주도했던 젊은 문인들 가슴 속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배인철은 1945년 10월 '신예술가협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문단에 알려졌고, 당시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교) 영어 교사를 맡기도 했다. 또한 1947년 2월 1일 인천에서 문을 연 해양대학교 영어 교수도 했다.# 탕! 탕! 남산의 총소리, 그리고 기억1947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께 서울 남산 장충단공원 산책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데이트 중이던 젊은 남녀 한 쌍이 쓰러졌다. 머리를 맞은 남성은 즉사했고, 여성은 옆구리 관통상을 당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배인철과 김현경이었다. 김현경은 당시 이화여대 2학년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현경은 나중에 시인 김수영과 결혼했다.'자유신문'과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묘한 차이를 보였다. 자유신문은 5월 13일자에서 '모젤 권총 난사, 시인 배인철씨 피살'이란 제목의 팩트 위주 사건 기사를 실었는데, 동아일보는 역시 5월 13일자 기사에서 '3각 관계? 질투의 총탄 백주에 남녀를 살상'이라는 제목으로 치정관계 쪽으로 몰아갔다. 동아일보는 당시 경찰이 흘린 정보를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우익단체에 의한 테러라는 말이 많았는데, 당시 경찰은 배인철, 김현경과 얽혀 있던 박인환, 김수영 등 수많은 문인들을 용의자로 보고 수사했으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하고 서둘러 종결했다.배인철 사후 68년, 우리로 하여금 배인철의 흔적을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은 조병화, 이봉구, 김차영 등이 당시를 회상하고 기록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다. 배인철 사망 이후 발표한 김광균과 임호권의 조시(弔詩)가 남아 있고, 1947년 12월 오장환은 '남조선의 문학예술'이란 산문 말미에 '끝으로 이 수기를 1947년 5·1절이 지난 며칠 후 남산 미군 사격장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을 한 시인 배인철 동지에게 주노라'라고 덧붙이면서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 바 있다. 본격적으로는 조병화가 '현대문학' 1963년 2월호에 배인철 얘기와 배인철의 흑인시 2개 작품을 선보이면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작가 이봉구가 1967년에 '명동-세월따라 바람따라'란 산문집을 내면서 배인철의 활달했던 모습이 자세히 드러났다. 이후 명동 일대와 관련된 문화인들의 일화를 엮은 책자에 배인철은 단골 격으로 등장한다.배인철의 흑인시와 그의 시세계가 비평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89년 봄이다. 당시 인하대 윤영천 교수가 배인철의 작품 5개와 그 시세계에 대한 평론을 '창작과 비평'에 실은 것이다. 그리고 199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의 '학산문학' 창간호 좌담회에서 배인철과 함께 활동했던 김차영 시인이 비교적 상세한 회고담을 풀어 놨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도 '배인철 묘비명' 등의 글을 짓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 '제3세계 문학'의 길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차원에서 배인철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배인철의 흑인시를 태동시킨 인천 땅과 미군 진주에 얽힌 사연들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국에서의 흑인문학에 대해 본격 연구를 시작한 김재용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배인철 사후에도 흑인문학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고, 그 흐름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면서 "인천이라는 지역 속에서만, 또는 흑인시 5편에만 국한해서 보면 오히려 배인철을 작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배인철은 한국의 흑인문학 전체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오히려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게 김재용 교수의 얘기다. 앞으로 있을 배인철 연구에서 빼놓지 말고 새겨야 할 지적이다.글 = 정진오기자▲ 배인철의 삶과 시 작품을 볼 수 있는 책자들. '현대문학' 1963년 2월호, 1967년에 나온 산문집 '명동-세월따라 바람따라', '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 '학산문학' 1991년 창간호, '명동야화', '명동시대', '명동 20년', '김광균 연구'(사진 왼쪽부터).▲ 1945년 9월 8일 해방 후 한반도 첫 상륙부대인 미 육군이 인천항 잔교에 올라서고 있다. 바다에 떠있는 미 함선들도 보인다.▲ 배인철이 총격을 받아 숨진 사흘 뒤에 이 사건을 보도한 1947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당시 경찰의 정보대로 이 사건을 치정에 얽힌 질투심에 의한 테러인 것처럼 보도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직도 이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14-06-11 정진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조병창에서 시작된 근대 부평의 역사

작가 이규원(李揆元·1911~?)은 소설 '해방공장'에서 인천 부평 근대사의 질곡을 증언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핵심 군사 기지로 터를 잡은 부평이 소설 속에 생생하다.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인들은 "연명은 시켜 놓아야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다"며 총독부에서 배급쌀을 받아 놓고서도 이를 빼돌렸다. 노동자들은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대두박(콩깻묵)으로 허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사흘째 되던 날까지도 일본 헌병의 기세가 죽지 않았다. 게양탑에 태극기를 달았다는 이유로, '조선 독립 만세'를 써 집 대문에 붙였단 이유로 헌병들은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소설을 보면 당시 민중들은 '해방군'과 함께 당연히 독립 운동가들이 올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 독립의 투사들도 함께 상륙했다는 소문이 있어 지프 위에 앉은 늙은 통역관들을 혁명가로 잘못 알고 슬며시 모자를 벗는 사람들"이 있었다.'해방공장'의 배경은 일제강점기의 부평의 한 군수 공장이다. 이 공장은 군수 물자를 만들어 일본 육군 조병창에 납품했다. 미군은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해 조병창을 '접수'하고 부평이 아닌 '애스컴 시티'로 불렀다. 현재 에스컴 시티의 '캠프 마켓'은 통행증이 있는 약 300명(2012년 기준)만이 기지를 드나들 수 있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전진 기지에서 미군의 군사 기지로 이어오기까지의 역사가 부평 한복판에 남아 있다.조병창에서 시작된 근대 부평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소설 '해방공장'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작점을 문학으로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반의 관심이 없어서 였는지 '해방공장'이 실린 책은 모두 절판돼 시중에서 구할 수조차 없다. 주요 도서관 디지털원문검색 시스템으로나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출발'에 대해서도 낯설어 해야 하는 처지다. /김명래기자

2014-05-21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9]이규원 '해방공장'

해방 당시 '한 달 보름간의 이야기'日관리자-노동자 사건 상세 묘사조병창은 근대도시 부평의 기원캠프마켓 건물·미쓰비시 사택촌 등문화유산 보존 방법 과제로 남아인구 55만명의 인천 부평구. 그 한복판 아파트 밀집 지역에 미군 기지 캠프 마켓(Camp Market)이 있다. 이 터에 군사기지가 들어선 것은 75년 전인 1939년에 완공된 일본 육군 조병창이 시작이다. 조병창에 납품하는 기계·금속·자동차·방직 공장이 생겼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제의 식량수탈 정책으로 땅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 전쟁터에 강제로 징용되는 것을 피하려는 젊은이들, 무기와 그 기술을 빼내려는 독립운동가들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지금의 산곡동, 청천동, 부평동 일대에 정착했다. 조병창을 중심으로 철로가 생기고 도로가 뚫렸다. 부평이라고 하면 조병창을 떠올릴 정도였다. 당시 부평은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을 뒷받침하는 대규모 군산복합단지 기능을 감내해야 했다. 근대 도시로서 부평의 출발점은 '군사 도시'였고, 그 역사는 캠프 마켓으로 이어져 현재진행형이다.1945년 '팔월의 해방'은 끝이 언제인지도 모른 채 끼익끼익대며 숨가쁘게 돌아가던 부평 공장의 기계 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선 반도에서 일제의 패망을 이토록 실감나게 느낀 곳이 또 있을까. 소설가 이규원(1911~?)은 부평의 한 군수공장을 무대로 소설 '해방공장(解放工場)'을 완성했다. 해방 당일인 8월 15일부터 10월 1일까지 한 달 보름간의 이야기다. 일본인 관리자와 조선 노동자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사실적으로 풀어낸 기록 문학이다. 소설 속 인물의 목소리가 생생하고 풍경 묘사가 사실(史實)과 겹친다. 조병창에 대한 사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규원의 단편 '해방공장'은 역사에 괄호로 남겨진, 부평의 해방공간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비록 작가가 '메시지'에 치중한 나머지 문학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해방공장'은 인천이란 도시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코 기념비적이다.# "오늘부터 당신 명령은 통하지 않소"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정오. 서울과 인천을 이어놓은 식민도로(植民道路)-말하기를 산업도로를 앞에 끼고 부평평야에 풍덩 주저앉은 이 군수공장은 거무하에 들려올 역사적 통곡도 모르고 압박과 착취의 고역을 계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서울과 인천을 잇는 식민도로는 경인로(46번 국도)를 가리킨다. 이 도로를 끼고 부평평야에 주저앉았다는 표현으로 미뤄 보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장은 현재의 부평공원 자리에 있었던 미쓰비시(三菱)제강일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1942년 히로나카(弘中)상공 부평공장을 인수한 뒤 미쓰비시제강을 만들었다. 히로나카상공은 1939년에 건설된 회사로, 당시 이 공장과 부평역을 연결하는 철도인입선이 생겼다.해방 당일 조회시간. 이 공장 포탄직장(砲彈職場)의 한 선반공은 불량품을 냈다는 죄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그런데 곧 "천황 폐하가 울면서 항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 틈에 공장 간부들은 '중대 방송'을 들으러 빠져나갔다 돌아왔다. 호시노 공장장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는 줄 알았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따라 오란 줄 알았더니"라며 탄식했다. 기계가 멈췄다. 허공에 회색 가루만 자욱했다. 공장장은 배전실 스위치를 올리라 지시했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용해공(溶解工) 김용갑의 시커먼 손이 공장장 손목을 잡는다.당신 맘대로 기곌 돌릴 수 없소. 오늘부터 이 공장에서 당신 명령은 통하지 않소. 명령할 권리는 우리들에게 있소.# 미완의 기획, '팔월공장''해방공장' 속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구성해 공장 인수를 준비했다. 현장관리, 반제품 재료 관리, 경리 업무 책임자를 정했다. 자위대를 운영해 공장 파괴를 막았다. 공장을 경영하던 야마니시 사장, 노야끼 전무, 호시노 공장장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노동자들이 이들을 찾으러 사택으로 향했다.옹기종기 닭집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공원 사택 앞을 지났다. 바라크 건물로 칠팔채 한데 붙어 있는 줄기집들인데 퇴색한 채 수리를 하지 않아 양철은 삭아 내려앉고 벽은 허물어졌다. 앞가슴 뼈가 앙상하고 배때기만 불룩한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뛰놀았고 (…중략…) 조금 언덕진 남양 쪽은 일본인 사원들 사택이다. 골목이 넓고 줄렁집이 아닌 데다가 상나무, 사철나무 등을 심어 제법 주택의 면모를 이룩했다.지금도 부평공원에서 남측 철길을 건너면 옛 미쓰비시 사택촌이 남아 있다. 당시 '나까마치'라고 불렸다는 길을 사이에 두고 일본식 기와가 얹힌 단층 목조 주택이 즐비하다. 이른바 줄사택으로, 한 줄에 7~8호씩 거주했다고 한다. 청천동 영아다방사거리 부근에도 사택촌이 남아 있는데, 검정사택으로 불렸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양색시들이 많이 거주했다. 부평 산곡동에 조선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공급한 임대주택인 영단주택이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조선인 직원 사택의 아이들은 헐벗어 뼈가 앙상한데, 사장 아내와 딸들은 포동포동 살이 쪘다는 묘사가 대조적이다. 노동자들은 사장 집에서 직원용으로 나온 배급쌀을 발견하고 눈이 뒤집힌다. 다다미 아래 숨어 있는 사장, 전무, 공장장을 끌어냈다. 공장해산금, 월동준비금 등의 명목으로 300만원을 요구했다. 호시노 공장장은 "물론 여긴 일본도 아니다. 또 조선도 아니다. 여긴 연합군 점령지가 될 것이고 그동안까지의 치안권은 일본군에게 있다"며 며칠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얘기가 안 통하자 노동자들은 이들을 공장으로 끌고 가 방공호에 감금했고, 결국 요구액의 절반인 150만원을 받기로 약정을 맺는다.'해방공장'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의 '발전적 해체'를 거쳐 공장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공장 이름을 '팔월공장'으로 바꾸고 공장 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소설이 끝을 맺는다.이 때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은 '미완의 기획'에 그쳤다. 우선 노동자들은 원료, 연료, 자본 등이 부족했다. 대중일보는 '인천 130개 공장 중에 근근 조업 불과 사할'(1945년 11월 26일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인천 130개 공장 중 조업 공장수는 48개(부평은 10개 중 2개)였다고 기록했다. 또 미군정은 군정령 2호, 33호를 통해 일본인 소유 재산 매매를 금지했고, 그 재산(적산)을 군정청에 귀속했다.# 조병창과 캠프마켓, 그리고 부평'해방공장' 노동자들이 일본인 경영진에게 넘겨받은 건 "현금 없는 장부와 중요재료빠진 명세표와 그밖에 수금능력이 없는 채무권리서 등" 이었다. 당시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산업 시설과 재산 파괴·반출 행위는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였다. 항복했는데도 일본인들은 공장은 물론 학교와 주택가에 폭발물을 설치해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할 정도였다. 왕실 기록에서부터 심지어는 기상 통계까지 일본인들은 폐기·반출하려 했다. 실질 임금 하락, 실업률 상승으로 고통받는 당시 민중에게 필요한 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이 같은 이유에서 공장 노동자들은 자위대를 구성해 공장 설비 파괴를 막으려 했다.'해방공장'은 1948년 9월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가 발행하던 '우리문학 제10호'에 발표됐다. 편집자는 잡지 끄트머리 여록(餘錄)에서 해방공장이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후속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한다"고 적었다. 해방공장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미쓰비시중공업은 국군이 차량 기지로 사용하다가 철수했고 그 자리는 2002년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조병창을 이어 받은 캠프 마켓은 2016년에나 반환될 예정이다.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조사전문위원은 "조병창은 근대 도시 부평의 기원이고, 조병창이 만들어지면서 부평이 새롭게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며 "현 캠프마켓의 조병창 건물과 이 일대 사택, 영단주택 등을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글 = 김명래기자▲ 근대 도시로서 인천 부평의 출발점은 75년 전인 1939년에 완공된 일본 육군 조병창을 시작으로 '군사 도시'였고, 그 역사는 캠프 마켓으로 이어져 현재진행형이다. 인구 55만 명의 인천 부평구. 아파트 밀집 지역 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 기지 부평 캠프 마켓(Camp Market). /임순석기자

2014-05-21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8]현덕 '남생이'

1930년대 후반 인천항 인근 빈민촌으로 이사 온 노마 가족개항 이후 항만시설 확장속 부두하역 노동·주변풍경 상세 묘사이발사·쓰레기꾼 등 당시 최대상권내 다양한 인생사 담아부모의 비극적 상황 소년의 성장통해 끈질긴 우리네 삶 투영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작가 현덕(玄德, 1909~?, 본명·현경윤)이 쓴 소설 '남생이'의 도입부다. 현덕은 1930년대 후반 소년 주인공 '노마' 가족이 살고 있는 인천항 인근 빈민촌을 이렇게 묘사했다. 당시 인천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이 눈앞에 선하다.노마 아버지는 농촌 작은 마을에 살다 인천항 인근 빈민촌으로 이사 왔다. 마름(소작지 관리인) 김오장의 부당한 행위를 참다못해 멱살잡이를 벌였고, 이 일로 땅을 뜯겼기 때문이다. "선창 벌이가 좋아 하루 이삼 원 벌이는 예사고 저만 부지런하면 아이들 학교 공부시키고 땅섬지기 장만한 사람도 적지 않다"는 영이 할머니의 권유가 컸다.인천항 개항 이후, 항만시설이 확장되면서 전국 각지 사람들이 일감을 찾아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농사일이 없는 시기에만 인천에 머물며 인천항 부두 하역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고, 노마 아버지처럼 아예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한 이들도 있었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제물포 일대 인구는 1897년 1만4천280명, 1911년 3만2천701명, 1931년 6만3천655명, 1935년 8만2천977명 등으로 증가했다. '항만시설 확장'과 '경공업 발달'이 인구 증가의 주요 요인이었다.지금은 하역 작업 대부분이 기계화됐지만, 당시 하역 노동은 화물을 어깨에 메고 배에 싣거나 내리는 중노동이었다. 노마 아버지는 중국 호렴(중국에서 나는 굵고 거친 소금)배에서 소금 내리는 일을 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소금, 중국산 수입염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하역 노동자들이 지게로 지어 쌓아 올린 소금이 산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7년 11월 27일자는 '인천 전매국 내의 주안, 남동·군자·소래인천염업 등 각 구역에서 상당히 많은 원염을 산출했고, 외지에서 수입한 소금도 벌써 1억근이나 준비됐다'고 싣기도 했다. 당시 중국산 소금은 국내에서 생산된 소금보다 값이 싸고 품질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일제강점기 인천항은 소금보다도 쌀이 중심인 수출항이었다. '남생이'는 1930년대 후반 이러한 인천항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인천항 부두와 그 주변 풍경을 이처럼 세밀하게 파고든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시커먼 화물차가 한참 지나가고 훤하게 앞이 열리자, 건너편 일대는 전부 볏섬이 더미더미 산을 이루었다. 말구루마, 소구루마가 길이 미어 나온다. 볏섬 사잇길을 왼편으로 꺾어 나서면 바다, 제2잔교서부터 제3잔교 일폭은 크고 작은 목선이 몸을 비빌 틈이 없이 들어찼다.놀라움밖에 더 표현할 줄 모를 커다란 기선이 떠 있다. 잔교 한편에 여객선이 붙어 서서 사람과 짐을 모아들인다. 통통통 고리진 연기를 뽑으며 발동선이 우편으로 물살을 가르며 달아난다.(중략)마침내 발동선은 시커먼 중국배 뒤로 사라진다.'남생이'에는 이발기계를 들고 부두에 나가 머리를 깎는 이발사, 떡목판 또는 엿목판을 들고 장사하는 사람, 모자점, 국숫집, 구둣방 등 인천항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당시 인천항 주변은 인천 최대 상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는 작은 규모의 중국 무역상점들만 있을 뿐 과거의 활발함을 찾아볼 수가 없는 그야말로 구도심이 됐다.노마 아버지는 폐결핵에 걸려 선창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몸져눕자 노마 엄마가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우선 인천항 주변에서 낙정미(落庭米)를 주워다 생활하는 일명 쓰레기꾼 일부터 했다. '남생이'에는 낙정미를 주워 입에 풀칠하는 가난한 여성들의 암울한 삶이 나온다.번히 쓰레기꾼이란 정작 볏섬도 산으로 쌓이고 낙정미도 많이 흘려 있는 지대조합 구역 내에는 얼씬을 못하고, 목채 밖에 지켜 섰다가 벼를 싣고 나오는 마차가 흘리고 가는 나락을 쓸어 모은다. 그러나 기실은 구루마 바닥에 흘려 있는 나락을 쓸어 담는 척하고 볏섬에다 손가락을 박고 치마 앞자락에 후비어 내는 것을 본직으로 꼽는다. 그러나 들키면 욕바가지를 들씌운다. 쓰레받이 몽당비를 빼앗긴다. 앙가슴을 떠다박질리고 채찍으로 얻어맞는다.노마 엄마는 낙정미를 줍다가 돈벌이가 좀 더 나은 속칭 '들병장수'로 나선다. 당시 손구루마에 떡과 막걸리를 싣고 다니며 술 장사를 하는 사람을 들병장수라고 했다.'남생이'가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다보니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어느 대목에 가면 웃음을 터트리게도 한다. 노마가 몰래 엄마의 뒤를 밟아 들병장수 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들킨 엄마는 노마에게 돈 한 푼을 쥐어주고 무마한다. 노마는 집에 홀로 남은 아버지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준 돈으로 사과, 귤, 감, 과자 들과 같은 먹을 것을 사서 갖다 드리려 하지만 값이 맞지를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붕어과자 하나를 샀다. 그런데 집에 갔을 때는 붕어과자가 반은 없어졌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앓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해 산 것이 그만 자기 입에 어느새 반토막은 들어간 것이다.조금 후 눈으로 박은 콩알이 떨어져 손에 잡힌다. 할 수 없으니까 노마는 먹는다. 비위가 동한다. 이번에는 제 손으로 지느러미를 떼어 먹는다. 이런 것은 없어도 붕어 모양이 틀려지는 것이 아니니까 표가 안 난다. 그러나 꽁지만 먹자는 것이 야금야금 절반을 녹이고 만다.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봤을 듯한 어린 아이의 행동을 기막히게도 그렸다. 불쌍한 마음에 눈물이 돌다가도 금세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들병장수 하던 엄마는 결국 선창 마당지기 앞잡이 노릇을 하는 '털보'라는 남자와 눈이 맞았다. 털보는 때로 노마 집으로도 와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내가 들병장수를 못 나가게 하려고 집에서 성냥갑 붙이는 일을 시작하지만 중환자가 벌이를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그래도 노마 아버지는 재기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몸을 추수는 대로 나두 하던 일을 계속하겠구, 하루 천이 되든 이천이 되든 붙이는 대로 쓰지 않고 모으면 새끼 꼬는 기계 한 틀쯤은 장만할 밑천은 모일 게구. 그것 한 틀만 가졌으면 앉어서두 아내가 하는 하루벌이는 나두 능히 벌 수 있겠구. 오냐 두 달만 참아라." 쌀가마니를 짤 때 필요한 새끼 만드는 일은 주요 돈벌이 수단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에는 '조선인촌주식회사' 등의 성냥공장이 생겼고, 성냥갑 만드는 일도 당시 인기 있던 가내수공업이었다.소설 제목 '남생이'는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영이 할머니는 영물(靈物)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남생이 한 마리를 부적과 함께 노마 아버지에게 줬다. 노마 아버지는 남생이가 자신의 병을 고쳐 줄 것이라 믿으며 귀하게 다룬다. 현덕이 왜 이 남생이를 제목으로 삼았는지 파고들다보면 생각의 끝이 한이 없이 간다.노마는 평소에 토담 모퉁이에 서 있는 버드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고자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나무 오르기의) 이 고비를 넘기기만 하였으면 금방 거기는 선창이 있고, 활동사진이 있고, 돈이 있고, 그리고 능히 어른의 세계에서 한몫 들 수 있는 딴 세상이 있다. 그때에 노마는 자기 아니라도 족히 아버지 모시고 잘 살 수 있는 노마임을 여봐란 듯이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련만 아아!노마의 아버지는 영이 할머니가 준 남생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노마가 하필 버드나무에 오르는 데 성공한 날이다. 이는 어린 노마가 아버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우리의 서민들은 이렇게 노마처럼 끈질기고도 억세게 대를 이어 살아왔다.글 = 목동훈기자▲ 이상권 作 '인천 부두 마을 전경'. 서양화가 이상권이 소설 '남생이'를 읽고 상상한 인천 부두 마을 전경.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토담집들이 빽빽하다.▲ 노마 캐릭터(이상권 作)▲ 1930년대 인천항의 미곡 수출 광경. 하역 인부들이 지게 또는 어깨에 쌀가마니를 메고 이동하고 있다. 쌀가마니가 수레에 잔뜩 쌓여 있는 모습, 쌀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진 인부들이 줄지어 배에 오르고 있는 모습 등이 보인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북한에서 간행된 소설집 '수확의 날'(1962년)에 실린 현덕의 초상화. /'한국 근대문학의 재조명'(원종찬 저) 발췌

2014-05-15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인터뷰/원종찬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인하대 원종찬(한국어문학과·사진) 교수는 "소설 남생이는 1930년대 후반 인천항 부두 하층민의 삶을 노마의 눈으로 아주 예리하게 포착한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원종찬 교수는 현덕 연구 권위자다.원 교수는 소설 남생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농민과 자유노동자라는 역사성을 천진한 어린 아이 눈으로 포착했다"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했다. 또 "어머니는 타락하고 아버지는 숨지는 등 부모가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했는데, 노마는 성장한다"며 "이것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균형점"이라고 했다.그는 "노마의 독특한 시선이 읽는 재미도 있지만, 미학적으로도 중요하다"며 "민중의 삶의 조건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30년대 후반기 리얼리즘에 도달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노마의 시선이라는 방법적인 고민을 모던이라고 한다면, 민중의 현실을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은 리얼리즘"이라며 "리얼과 모던이 합류하는 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전향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원 교수는 "현덕은 인천에서 잊을 수 없는, 인천에서 매우 중요한 점을 찍은 작가임은 분명하다"며 "인천의 생태를 그린 남생이로 문학사에서 중요한 성과를 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2014-05-15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현덕 '남생이' 조선문학 통틀어 대표 작품'

작가 현덕(玄德, 1909~?, 본명·현경윤)의 '남생이'는 인천항 주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도시 빈민의 삶을 어린아이 '노마'의 시선으로 포착한 단편 소설이다. 현덕의 데뷔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다.소설 '남생이'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후 현덕은 소설, 동화,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그는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월북했다.'남생이'는 1930년대 후반 인천항과 그 주변 빈민촌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싸리전 거리, 등대, 기차, 윤선, 세관, 수상경찰서, 칠통마당 등 공간적 배경이 인천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말들이 나온다. 낙정미를 줍는 여성, 엿목판을 들고 장사하는 사람 등 노마 가족과 주변 인물의 생활상에서도 인천 부둣가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마 가족은 항구 주변 언덕의 빈민촌에 살았는데, 이곳은 지금의 중구 도원동으로 추정된다. 현덕은 '남생이'를 집필할 당시 인천에서 살았다.작가 현덕과 소설 '남생이'는 당시 문인들로부터 '우리 조선문학을 송두리째 톡톡 털어놓아도 그중 남생이 일편이 우리의 전 문학적 수준을 대표할 만한 작품'(안회남), '이러한 이가 이제껏 문단에 나오지 않고 그 해 평가들은 부질없이 문단이 침체하였으니 어쨌느니 그랬을 것인가'(박태원) 등의 극찬을 받았다. '남생이'뿐 아니라 다른 동화 작품에도 '노마'라는 어린아이가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이놈아' '저놈아'에서 땄다고 한다.인천문화재단과 한국근대문학관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학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애니메이션 원화전 '노마야, 놀자'를 열고 있다. ┃관련기사 11면 /목동훈기자

2014-05-14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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