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어둡고 우울한 시대 담아낸 이태준의 '밤길'

'밤길'은 상허(尙虛) 이태준이 인천을 배경으로 쓴 유일한 소설이다.그는 '가장 나다운 글쓰기'로 단편을 꼽고 평생 59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밤길'은 그 중 가장 어둡고 비극적이며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0년 '문장' 5월호와 6·7월호에 두 차례 연재됨으로써 세상에 나왔다.이태준의 삶은 시작부터 굴곡졌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친척집을 전전하며 컸다. 일찌감치 친인척과 사회 냉대를 경험한 그는 문학에 기대 살았다. 이 영향으로 이태준의 문학 속에는 조금 모자라고 어리석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밤길'의 황서방 역시 같은 경우다. '밤길'은 시종일관 컴컴하고 우울하다.이태준에게 당시 인천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가 인천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여기 인천에서, 채 숨을 거두지도 않은 갓 백일 넘은 아들을 제 손으로 묻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지난 4일 그가 살았던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수연산방(壽硯山房)을 찾았다. 단호박 빙수가 별미로 소문난 전통찻집으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돼 있었다.이태준 연구단체인 '상허학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강진호 성신여대 교수는 "이태준은 그 자체로 뛰어난 문인이고, 그의 인생과 작품은 우리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평가했다. /박석진기자

2014-05-07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7]이태준 '밤길'

인천지역 배경 공사판 황서방 처지와 고급요정 용궁각 '대조'모자라고 순박한 주인공 통해 일제 억압속 '비참한 삶' 표현궁핍함이 가정파탄으로 이어져 '아동방임 문제' 담아내 눈길아들 생사 앞에서도 자신의 안위챙기는 '인간의 악함' 꼬집어'월미도' 세 글자로 시작하는 단편소설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1904~?)의 '밤길'이다.이태준은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장에 능했는데, '밤길'은 그 이태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인천에서 큰 집을 짓는 막노동꾼과 그의 젖먹이 아기의 비극적 죽음을 다루고 있다. 서울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 하던 주인공 황 서방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인천을 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 기와집을 짓는 일을 찾았다. 두 딸과 젖도 안 뗀 막내 아들, 그리고 부인을 주인 집 행랑에 남겨 놓고 온 가난뱅이 황 서방의 눈에는 날마다 월미도의 고급 요정 건물이 보인다. 장마가 계속되면서 일당을 받지 못해 오히려 빚만 지게 된 황 서방은 어느날 일터에서 3명의 자식과 맞닥뜨린다. 젊은 부인이 도망치는 바람에 오갈 데 없는 꼴이 된 아이들을 꼼짝없이 굶길 수밖에 없었다. 젖을 못 먹은 어린 아이는 초주검 상태다.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하지만 가망이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아이를 땅에 묻는다.우선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극명한 대비가 절묘하다. 또 이곳 말고는 더 이상의 비극적 장면을 찾기 어려울 만큼의 비극성이 돋보인다. 곳곳에 인간 욕망의 본질을 녹여낸 함축적 표현도 읽을 수 있다.월미도 끝에 물에다 지어놓은, 용궁각인가 수궁각인가는 오늘도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벌써 열나흘째 줄곧 그치지 않는 비다. 삼십간이 넘는 큰 집 역사에 암키와만이라도 덮은 것이 다행이나 목수들은 토역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미장이들은 겨우 초벽만 쳐놓고 날 들기만 기다린다. (…중략…) 날이 들지 않는 것을 탓할 푼수로는 집주인보다, 목수들보다, 미장이들 보다, 모군꾼인 황 서방과 권 서방이 훨씬 윗길이라야 한다.비가 오면 일당조차 벌지 못하는 신세인 막노동꾼과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고급 요정의 풍경이 '밤길'의 시작이다. 군밤 장사할 밑천을 마련하는 게 꿈인 황 서방에게 용궁각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월미도를 포함한 개항장 일대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얽혀 사는 곳이었고, 그 빈부의 대조를 통해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삶은 더욱 두드러진다.처음 사날 동안은 품삯을 받는 대로 먹어 없앴다. 처자식 생각이 났으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선 내 입부터 널름널름 집어넣을 수가 있다. 서울서는 벼르기만 하던, 얼음 넣은 냉면도 밤참으로 사 먹어보고, 콩국, 순댓국, 호떡, 아이스크림꺼정 사 먹어 봤다. 지카다비를 겨우 한 켤레 샀을 때는 벌써 인천 온 지 열흘이 지났다. 아차, 이렇게 버는 족족 집어 써선 만날 가야 목돈이 잡힐 것 같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려 대엿새째 오륙십 전씩이라도 남겨나가니 장마가 시작이다.용궁각이 영업을 시작한 1937년께 월미도는 호텔과 임해학교 등 새 건물이 잇따라 들어서고 연일 관광객이 넘쳐 활황을 이룰 때다. 월미도 개발의 역사는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월미도와 인천역을 연결하는 방파제 공사에 착수한 것에서 시작한다. 인천부(仁川府)는 월미도의 철도국 용지를 20년간 무상 임대해 유원지로 조성했고, 1922년 월미도와 인천을 잇는 육로가 완성되었으며, 1923년에는 월미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호텔, 별장, 간이식당, 매점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예나 지금이나 건설 경기 호황은 일자리를 만들고, 일감을 찾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돈 모으기가 급한 황 서방은 3~4일 동안 물색없이 호사를 부린다. 평소 탐냈던 먹거리 앞에 행랑살이하면서 끼니도 잇지 못할 정도인 가족마저 까맣게 잊는 황 서방은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해 웃음을 자아낸다. 이태준은 조금 모자라고, 순박하고, 힘 없는 황 서방류의 인물을 줄곧 소설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강점기 억압 속에 살았던 서민들의 곤궁한 삶과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는 했다.지우산이 접히자 파나마에 금테 안경을 쓴, 시뿌옇게 살진 양복쟁이다. 황 서방의 퀭한 눈이 뚱그래서 뛰어나간다. (…중략…) 양복쟁이는 황 서방네 주인 나리였다. 다른 게 아니라, 황 서방의 처가 달아난 것이다. (…중략…) "정거장에들 앉혀뒀으니 가 인전 맡어. 맨들어만 놈 에미 애빈가! 개 같은 것들……."황 서방의 영글지 못한 성품과 질긴 가난은 결국 가정 파탄으로까지 이어진다. 돈벌이를 위해 집을 나온 가장은 제 배 채우기에 정신이 팔려 잠시나마 가족을 잊고, 몸 치장에만 관심을 두던 14살이나 어린 부인은 세 아이를 내팽개쳤다.당시 신문기사에는 어린 아이의 버려진 사체 이야기가 간혹 실리고는 했다.'초봄이라고 해도 살이 에는 듯한 조류에 갓난 어린 계집아이의 시체가 인천부두 삼신잔교 우측에서 새빨갛게 얼어 떠올랐는데 추측컨대 생활난으로 버린 것이나 불의의 씨를 감추기 위해 버린 것이나 죽은 어린애를 사망신고 매장허가 등의 법적 수속을 하기 싫어 해변에 내다버린 것 같다고 한다.'(1934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인천 송현리 부근 밭 속에서 아이 사체가 있는 것을 밭 주인이 발견해 신고했는데 검시한 결과 네살된 조선계집아이로 병사한 것을 매장할 비용이 없어 그리한 것으로 판명됐다.'(1924년5월15일자 동아일보)이러한 '아동 방임', '아동 학대'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이슈이자 고민거리이다. '밤길'은 여전히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권 서방에게 있는 돈을 털어다 호떡을 사왔다. 황 서방은 호떡을 질근질근 씹어 침을 모아 앓는 아이 입에 넣어본다. 처음엔 몇 입 받아 삼키는 모양이나 이내 꼴깍꼴깍 게워버린다. 황 서방은 아이 입에는 고만두구 자기가 먹어버린다. 종일 굶었다가 호떡이라도 좀 입에 들어가니 우선 정신이 난다.젖먹이 막내가 사경을 헤매는 이 순간에도 황 서방은 자기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돈을 빌려 사 온 호떡을 본인 입에 집어 넣는다. 황 서방의 어수룩한 성격, 나아가 자신의 안위를 가장 우선시하고 어려운 순간을 바삐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 혹은 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밭은 넓기도 했다. 밭두덩에 올라서자 돌각담이다. 미끄런 고무신 한짝이 뱀장어처럼 뻐들겅하더니 벗어져 달아난다. 권 서방까지 다시 와 암만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이거 더 걷겠나?" / "여기 팝시다." (…중략…)황 서방은 아이 무덤 쪽을 쳐다보고 멍청히 섰다."돌아서세, 어서." / "예가 어디쯤이지?""그까짓 건……. 고무신 한 짝이 아깝네만….""……"황 서방과 동료 일꾼 권 서방이 잠자는 공사현장에서 약 15리(약 6㎞) 떨어진 주안 어딘가에 아이를 묻기 위해 가는 장면이다. 이 비극적 순간에도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이 못내 아깝다는 말을 건네는 동료에게 호통 대신 무언의 동의를 내비치는 황 서방의 아이러니한 태도는 방금 전 숨이 끊어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아들을 제 손으로 묻고 돌아선 아버지라는 상황 탓에 섬뜩하리만큼 잔혹하다."내 이년을 그예 찾아 한 구뎅에 처박구 말 테여……."/ "허! 이럼 뭘 허나?" (…중략…)황 서방은 그만 길 가운데 철벅 주저앉아 버린다. 하늘은 그저 먹장이요, 빗소리 속에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뿐이다.'밤길'은 이렇게 월미도로 시작해서 개구리 맹꽁이 소리로 끝맺는다.글 = 박석진기자▲ 월미도 갯벌에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은 용궁각은 만조 때면 물에 잠긴 듯한 모양새가 됐다. 당시 용궁각은 일본인, 조선인 중에서도 상류층 생활이 가능한 이들만 드나드는 호화스러운 요정이었다. 용궁각 돌축대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월미도 인근 대성목재 정문에서 왼편을 바라보면 찾을 수 있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제공▲ 정지용, 이상 등 1920~1930년대를 주름잡던 모더니스트와 마찬가지로 이태준 역시 인천 방문이 잦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1937년 이태준(오른쪽에서 3번째)이 친구들과 어울려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을 때 찍은 것이다. /상허학회 제공▲ 이태준이 월북 전(1933~1946년)에 살았던 가옥,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문인들이 모이는 산 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이태준이 그 이름을 직접 지었다. 이태준은 '밤길'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수연산방에서 썼다. 오늘날 수연산방은 전통찻집이 됐다. /서울시 제공

2014-05-07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6]엄흥섭 '새벽바다'

작가란언제든지 그 시대의,그 환경의,민중의 앞에서 있어야 한다작품은그 시대,그 환경,그 민중의좋은 거울인 동시에등대여야 한다中에 팔려가는 소녀들 '비극' 그 덕에 먹고사는 지게꾼일제강점기 빈곤층의 삶 역설… 현재 도원동 배경인 듯진취·투쟁적 작품활동… 문학잡지 참여로 인천과 인연월북작가 중 한명 해방이후 대중일보 등 언론에 몸담아엄흥섭(1906~1987)은 시대의 등대가 되길 원했던 작가다. 그는 1937년 '통속작가에게 일언'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며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독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독자가 작가를 따라오게끔 만드는 게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였다.엄흥섭의 작품은 대부분 진취적이고 투쟁적이다. 그가 인천을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새벽바다'(1935)도 당대 인천지역 빈민의 곤궁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근대도시 인천이 갖고 있는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개항도시로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인천의 화려함 뒤에는 언제나 빈민들의 희생이 따랐다는 걸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데뷔작 '흘러간마을'(1930)과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출범전후'(1930)는 농민·어민들의 삶을 짓밟는 지주와 어업회사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파업, 파산, 지주, 소작농은 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엄흥섭은 동시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계열 작가나 월북작가들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카프 지도부를 비판했다가 제명당해 '주류'에서 멀어진 탓도 있을 것이지만 빼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다.월북작가 연구자인 이주형 경북대 명예교수는 엄흥섭에 대해 "양심적 지식인으로서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문학이 자신의 신념을 사회에 알리는 통로라고 여긴 작가였다"고 평가했다.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그는 인천과도 각별한 인연을 갖고있다. 인천지역 문학잡지 창간에 힘을 보탰고, 해방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하루살이 최 서방의 '새벽바다'항구에서도 가장 빈민굴에 사는 최 서방. 그는 선창(항구)에서 승객들의 짐이나 술독을 실어주며 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지게꾼이다. 역설적이게도 최 서방은 자신처럼 가난에 허덕이다 중국으로 팔려가는 계집이라도 없으면 한 끼 몫조차 벌지 못하는 신세다."경상도에서 대련으로 팔려가는 계집의 짐짝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저녁을 굶었을 것"이라는 최 서방의 푸념 속에 당시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일제강점기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은 어린 딸을 부잣집 수양딸로 보내곤 했는데, 이 과정에 악덕 '브로커'가 끼어들어 어린 소녀들을 중국으로 팔아 넘기고는 했다. 1936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는 수양딸로 보내진 14세 소녀가 중국 다롄 유곽으로 팔려갔다는 기사를 싣는다."경남 함양에 본적을 둔 권병택은 지난번 수해로 살수가 없어 그 딸(14)을 같은 마을 누군가에게 수양녀를 주었는데, 그는 중국인에게 60원에 팔려 대련 반유곽 대동강 작부로 어린몸이 외국인의 상대를 하고 있었다."이처럼 단돈 몇십원에 팔려갔을 이름 모를 소녀의 짐짝을 들어주는 대가로 최 서방이 손에 쥔 돈은 50전이었다. 소녀의 비극인 인신매매가 최 서방에게는 입에 풀칠하게 하는 생활 수단을 주는 삶의 역설을 엄흥섭은 그리려 했다.엄흥섭은 문학잡지 '월미(月尾)' 창간호에 쓴 '인천소감'이란 글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인천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인천이야말로 근대도시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장소라고 강조했다.최 서방은 날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들끓는 인천항에서도 '실그러진 성냥갑처럼,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은 빈민촌에 거주한다. 최 서방의 빈궁한 삶은 해가 저문 뒤 인천항에서 집으로 가는 퇴근길에 만난 청춘남녀와 대조된다. 최 서방은 바닷가에서 '망할놈의 석탄가루'에 눈을 비비며 일감을 찾는데 비해 젊은 연인들은 바닷바람을 쐬거나 해수욕을 즐긴다.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영화관, 숲이 우거진 집 건너편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 소리, '납량연화대회(納凉煙火大會)' 불꽃놀이는 최 서방과 상관없는 일이다. 최 서방은 밤이 늦도록 공장다니는 딸과 일본인 집으로 '오마니'(파출부) 일을 하러 가는 아내를 기다린다. 깊은 밤에는 땔감을 구하러 공동묘지의 나무말뚝을 뽑기도 한다.엄흥섭은 '인천소감'에서 "그동안 인천은 카페가 늘고 술집이 늘고 양복점이 늘고 사진관이 늘고 미두꾼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부두의 수천 노동자의 생애가 날마다 쪼들려 간다는 반향(反響)이 아닐 수 없다. 인천! 인천을 사랑하면서도 인천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일제강점기 최 서방과 같은 인천 빈민들의 삶은 처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 시장통이나 요릿집 쓰레기통을 뒤져 복어 내장을 주워먹고 중독돼 숨지는 경우도 잦았다. 실제로 1925년 1월 27일 인천의 한 노동자가 설 명절 먹을 음식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복어 내장을 날로 먹고 숨졌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빈민들이 버려진 복어내장을 먹고 죽는 일이 잦아지자 신문에서는 대책을 요구하는 기사를 싣기까지 했다."항구인천에 지금까지 있어온 복어중독사건은 먹다가 기아에 굶주린 토막민이 쓰러기통에서 주서다 먹은 것이다…. 앞으로는 복어를 먹는 가정이나 요정같은데서는 복어대가리와 내장을 쓰러기통에 버리지 말고 차라리 변소간에 버리거나 혹은 땅속에 파묻게 해야 한다…."(동아일보 1940년 5월3일자)'인천부세일반'(仁川府勢一班·1935~1936) 등에 따르면 1934년 인천부의 조선인 가구는 1만3천418호, 인구는 6만1천603명이었는데, 이중 빈민(세궁민·細窮民)은 1천974가구(14.7%), 8천419명(13.6%)이었다. 당시 인천부에 해당하는 오늘날 중·동구 지역엔 2014년 3월말 기준 7만9천462가구에 18만4천153명이 살고, 이중 3천943가구(4.9%), 5천927명(3.2%)이 기초생활보장수급자다. 지금의 남구, 연수구, 남동구 지역은 1936년에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됐다.최 서방은 하루 벌이로 짐을 날라 주고 50전을 벌었는데, 이는 '새벽바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막걸리 한 사발에 밥 한 끼'가 10전이었다고 하니 5끼니 값이다. 요즘 막노동 하루 품삯이 8만~9만원이다. 빈민계층의 삶은 지금이나 그때나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80여 년이 지난 지금, 빈민층 비율은 줄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최 서방들이 인천에 살고 있다. 당시 최 서방이 살던 곳이 어디인지는 명확지 않다. 작품 속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가파른 비탈길로 그려지는 걸로 봐서는 도원동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구름이 잔뜩 낀 지난 4월 29일 오후, 최 서방이 오르내렸을 도원동 일대를 찾았다. 도원동 꼭대기에 있는 광성중·고등학교 서동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높은 건물에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부두 너머로 멀리 인천대교가 보였다. 높게 들어선 아파트 오른편으로는 월미도 전망대와 자유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1935년 종합운동장 개발계획으로 도원동 빈민촌은 철거됐고, 그들은 내쫓겼다. 아마 최서방도 그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도시 외곽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다. 최 서방은 바다를 보면서 내일을 생각하기도 싫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내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신세다."내일은 또 어디로 팔려가는 계집애들의 짐을 져다줄 것인가도 잊어버리려했다 …. 온종일 밖에 못나가고 문고리에 매달린 채 어미 애비가 돌아올 때까지를 기다리고 울다가 울다가 나중에 까무러쳐 폭 엎드려 자는 어린 자식 돌이의 내일도 이 순간 그는 잊어버리려 했다…. 금세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최 서방은 어느 틈에 스르르 내일 일이 걱정되었다. 새벽바다는 더 한층 어둡다."# 엄흥섭과 인천엄흥섭은 1927년 '습작시대'라는 동인지 창간에 참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1937년 동아일보 '나의 수업시대-작가의 올챙이때 이야기' 시리즈에 쓴 글을 통해 "인천의 진우촌, 한형택, 김도인 제군과 손을 잡고, 습작시대란 동인지를 비로소 문단에 내놓았다"고 회고했다. 그때 함께했던 작가는 유도순, 박아지, 양재응, 최병화 등이었다. 이어 김도인과 함께 1937년 1월 창간한 '월미'라는 동인지에 참여했고, 이 월미에 '인천소감'이라는 수필을 쓴다. 해방이후 엄흥섭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등 좌파 중앙 문학조직 활동경험을 바탕으로 1945년 12월 인천에서 '인천문학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엄흥섭은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는데,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대중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고, 같은해 11월 28일 인천지역 기자 20여명이 결성한 '인천신문기자협회'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창간된 '인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시 인천시청 관련 비리 등을 보도했다가 미군정재판에 넘겨져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5천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엄흥섭은 1947년 7월 25일자로 서울의 '제일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겼고, 여기서 '북조선인민공화국 창건소식'을 보도했다가 실형을 살았다.엄흥섭은 1951년 9월 28일 서울수복 직전에 인민군에 합류해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한에서 여러 소설을 발표하고 북한작가동맹 평양지부장과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87년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글 = 김민재기자▲ 4월 29일 오후 인천 중구 도원동에 있는 광성중·고등학교 옥상에서 바라본 인천의 모습.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인천 바다는 고층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김민재기자▲ 제물포 /인천개항박물관 제공▲ 1930년대 영화관 표관 /인천개항박물관 제공▲ 문학잡지 '월미' 창간호 표지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 제공▲ 엄흥섭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대중일보 사옥 /인천시 제공

2014-04-30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5]함세덕 두번째 이야기 '무의도기행'

당시 '떼무리'로 불리던 소무의도 배경 日 '중선'에 밀려난 궁핍한 삶 묘사완성도 높고 근대 어민문학 한 획 그어 친일과 월북 행적으로 아쉬움 남겨면적 1.22㎢의 작은 섬 소무의도는 일제강점기에 어선 40여 척이나 있던 어촌이었다. 사람들은 이 섬을 '떼무리'로 불렀다. 지금은 2.5t급 소형 어선 4~5척에 주민등록 인구 73명의 한적한 섬이다. 일제 때 떼무리에서 나온 건새우는 일본 시모노세키, 시즈오카 등지에 대량 수출되기도 했다. 인천 연안 섬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인천이 낳은 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50)은 1941년 떼무리를 배경으로 한 '무의도 기행'을 발표했다. 조선총독부의 전시동원체제가 우리 국민 개개인의 삶을 옥죄던 때, 함세덕은 떼무리 어민들의 신산한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서 당시 일제의 식민지 어업 수탈 행태를 엿볼 수 있다. 극적 완성도도 우수하다. 함세덕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단순히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장소적 의의를 넘어 식민지 조선의 어업 현실로부터 발원하는 한국 근대 어민문학의 한 중심을 차지하는 중대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국내 함세덕 박사 1호인 인하대 김만수 교수(문화콘텐츠학부)도 "살아있는 구어체로, 말이 길거나 장황하지 않고, 입에 감기는 대사를 쓰는 생생한 어촌 인물을 창조했다"고 설명했다.'무의도 기행'은 작품 제목처럼 기행문 형식이다. 극중 주인공(천명·天命)이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담임 선생이 떼무리에 찾아갔다가 제자의 죽음을 알고 그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담임 선생을 함세덕으로 생각하고 읽을 수 있다. 그는 실제 떼무리를 찾아가 어민들을 곁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 배를 타야 하는, 천명(天命)'무의도 기행'은 '도민(島民)들이 가장 기피하는 황량한 겨울이 접어들려는 시월 상순'에 '서해안에 면한 무의도(떼무리라고 부른다)라는 조그만 섬'에서 시작된다. '이번에 수원가는 철로가 생겼다'는 말로 미뤄보면 수인선 개통 시기인 1937년으로 추정된다. 섬사람들은 1년 중 겨울에 막 접어드는 10월 이 무렵을 싫어했다. '성해가 끼믄 민어낚시 하든 것두 못 해먹게' 되고 '한겨울 굶구 들어 앉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배경은 소무의도(떼무리)다. 지금도 영종·용유 사람들은 이곳을 떼무리라고 부른다. 떼무리와 큰떼무리(무의도) 사이를 나룻배가 오갔는데, 2년 전 두 섬을 잇는 연도교가 완공됐다.등장인물로 주인공 천명(天命)과 그의 부모인 낙경, 공씨, 천명의 외삼촌으로 선주인 공주학 등이 나온다.낙경은 강원도에서 집과 땅을 팔고 떼무리에 건너와 정착한 인물이다. 떼무리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지난 18일 소무의도에서 만난 강기인(80)씨는 "해방 무렵에 120~130호가 작은 마을에 빽빽하게 들어섰다"고 말했다. 낙경이 떼무리에 오면서 '연평 가서 조기만 잡으문,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 줍기'라고 생각했다. 한때 새우장군, 조기장군으로 '떼무리 정낙경'이 인천 앞바다뿐 아니라 서해에서 명성을 날렸다. '앰평에 천명 아버지가 쓱 내리문 계집이란 계집은 다 몰려왔고' '(낙경은) 주머니에서 돈을 푹푹 집어줬을' 정도였다. 낙경과 같이 배를 타던 동사들 모두 잘 풀렸다. 정첨지는 싸전을 내고 돈놀이를 하고, 황서방은 강화에 비단전을 냈다. 칠성할아버지는 먼우금(연수구)에 땅을 샀는데 수인선 개발로 평당 6전 주고 산 땅이 25전으로 4배 이상 올라 큰 돈을 벌었다.천명은 낙경의 셋째 아들이다. 천명의 큰형은 조기를 잡다가, 둘째형은 새우 사리 나갔다가 죽었다. 어머니 공씨는 '비나 억수 같이 퍼붓구 높새에 부엌 문작이 덜그덕거리기나' 하는 날이면 아들 생각에 밤새 운다. 낙경의 처남, 공씨의 남동생인 공주학은 천명을 동어(숭어)잡이에 내보내려 하지만 천명은 거부한다. 아들을 걱정하는 낙경과 공씨를, 내년에 발동선을 사 천명이를 일등 기관사로 키우겠다며 설득한다. 이 대목에서 일제 때 인천 섬 지역 어선의 변화상을 알 수 있다. 극중 낙경이 과거 타던 배는 풍선(風船)이었다. 낙경에게 뱃일을 배운 공씨는 일본에서 제작된 중선(일명 나가사키선)으로 고기를 잡았고, 중선은 1940년대 동력선으로 교체됐다.공주학 소유 중선이 부자리(배 밑바닥)가 헐었다는 말을 사공에게 전해 들은 천명은 부엌에 들어가 도마칼을 들고 나와 '물에서 죽나 여기서 죽나, 죽긴 마찬가지'라면서 배를 타느니 당장 죽겠다고 발악하면서 버티지만, 결국 외삼촌의 배에 오르게 된다. 천명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이름처럼 바다에서 죽는 게 타고난 운명이었을까. 그는 낡은 배와 함께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막이 내리기 전 내레이션이 흐른다.나는 이 서글푼 이야기를 고만 쓰기로 하겠다. …(중략)…천명의 집을 찾어가니, 공씨는 얼빠진 사람같이 부엌에서 멀건이 바다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드니 달려와 손을 꼭 붙들고 "선생님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눔을,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눔을…"할 뿐, 말끝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었다. 천명은 그가 6학년 때 내가 가르키든 아해(兒孩)였다.# 일제의 어업 침탈, 궁핍한 어민의 삶함세덕은 일제 강점기 소무의도를 우리 어촌의 풍경과 어민의 삶을 드러내는 전형적 공간으로 선택했다. '참 중선이란 사내 노름이지', '안될랴문 조상 산솔 팔아넣구두 빈손 싹싹 비비지만, 걸리는 날이믄 몇만원 잡긴 상치쌈에 식은 밥이지'란 대사에서 고기잡이를 대하는 당시 어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서해는 선진 기술로 무장한 일본 어선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30년대 일본 어민의 1인당 어획고는 254원으로 조선 어민(73원)보다 크게 높았다. 또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어업조합을 철저하게 감독하며 고기를 잡아 유통하는 전 과정을 장악했다. 서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정낙경이 몰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북 군산, 평남 남포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온 중선(나가사키선)에 밀려 고기잡이를 그만두게 된다. 또 정낙경은 '괴기만 잘 잡었으믄 그만이지'란 생각에 젖어 있었을 뿐 어획물을 입찰·경매하는 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낙경의 처남 공주학은 중선과 그물을 장만했지만 낡은 배를 제때 수리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결국 훗날 발동선을 사 선장을 시키겠다던, 조카(천명)를 바다에서 잃게 된다.# 친일과 월북, 인간 함세덕무의도기행 발표 당시 함세덕은 현대극장 산하 국민연극연구소 교무과장이었다. 현대극장 배우를 관리하고, 극단이 무대에 올릴 극을 쓰는 작가 역할을 겸했다 한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한창이던 1943년 함세덕은 무의도 기행을 '황해'라는 제목으로 개작해 제2회 국민연극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함세덕은 '성전 완수', '추악한 미영(美英)의 격멸'을 이야기했다. 해방 뒤 함세덕은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고, 1947년 동승을 책으로 낼 때에 서문에 "결과에 있어서는 조선문화의 정한 발전에 역행적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친일 반성문'을 쓴다. 1947년 무렵 월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뒤인 1950년 6월 29일 전쟁 통에 다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복강내출혈로 수술 도중 사망한다. 사망 일자가 6월 27일, 6월 30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유가족들은 함세덕을 장춘단 뒷산 임시묘지에 묻었고, 1954년 6월 1일에 망우리로 이장한다. 지난 11일 찾은 망우리의 함세덕 묘. 109506이란 묘지번호가 선명했다. 그의 부모, 동생(함성덕) 옆에 안치돼 있다. 죽산 조봉암 묘역 앞에 난 산책로에 있는 '동원천 입구 표지판'에서 산 아래쪽으로 1~2분 정도 가면 그의 묘를 찾을 수 있다. 비석 뒷면에 쓰인 구절이 참 인상적이다.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글 = 김명래기자▲ 70여년 전 극작가 함세덕이 소무의도를 배경으로 쓴 무의도기행은 당대 대표적인 어민극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무의도~소무의도를 잇는 연도교에서 본 소무의도 전경. /김명래기자▲ 일러스트/박성현기자▲ 소무의도는 대부분 산으로 돼 있어 논밭을 일굴 땅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과거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사진은 어선에 사용된 목재로 외벽을 덧입힌 폐가. /김명래기자▲ 끝이 뾰족하고 돛이 여러개 달린 중선배는 1930년대 우리나라 어민들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서 제작돼 나가사키선 또는 일중선이라고 불렸다. 출처='풍경, 함세덕'(윤진현 지음, 다인아트)▲ 망우리공원에 있는 함세덕의 묘비 뒷면에 "1950년 6월 29일 서울에서 ○사했다"고 써 있다. ○의 글자는 누군가 긁어 지웠다. /김명래기자

2014-04-23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4]함세덕 '해연'

신춘문예 당선작… 통속극과 차별화절제미와 낭만성 돋보이는 가작 평가인천 출신중에 문학사 비중있는 인물동승으로 유명 한국 연극 기반마련도인천상업학교 시절이 '극작가 밑거름'1941년 유치진이 세운 현대극장 참여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1950)하면 '동승(童僧)'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깊은 산속 작은 절에서 수행하는 동자승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이 작품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2003년에는 영화로 개봉돼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고, 세계 30여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이 함세덕의 서정극 중 '해연(海燕)'을 놓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팔미도를 배경으로 한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해연'은 당대 희곡의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스물여섯 함세덕은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순수한 극작가가 없고 소설가의 여기(餘技)로써 희곡이 존재"했다며 선배들을 비판하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해연'은 멜로드라마로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당시 인기를 끌었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같은 통속극과 차별화를 꾀했다. '동승'에서 선보인 함세덕 특유의 '낭만성'과 '서정성'은 '해연'에서 절정을 이룬다. 희곡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해연'을 일컬어 "절제미와 낭만성이 돋보이는 가작(佳作)"이라고 단언했다.함세덕 입장에서 '해연'은 중앙문단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희곡 '낙화암', '닭과 아이들', '오월의 아침', '서글픈 재능', '심원의 삽화', '무의도 기행' 등을 줄줄이 발표했다. 또 당대 연극계의 중심 인물로 한국 연극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해 문화계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했다.함세덕은 인천 출신 작가 중 문학사(史)에 비중있게 기록된 인물 중 하나다. 연구자들은 함세덕을 '서정적 리얼리즘 개척', '희곡의 언어부문에서 한국 희곡사의 발전적 토대 마련', '형식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 신파극적 요소를 탈피해 한국 희곡의 근대성을 획득'한 작가로 평가한다. 이 모든 요소가 '해연'에 담겨 있다.# 동복(同腹) 남매의 사랑과 팔미도작품 배경은 암초로 둘러싸인, 하얀 등대가 있는 서해의 작은 섬 팔미도. 극중 대사에 '일본 사람 무전 기수가 지난 봄 전장에 나갔다'는 것으로 미뤄보면 때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기간으로 추정된다. 겨울이 접어드는 10월, 고요하고 적적한 분위기가 섬과 바다에 가득하다. 극중 배경 묘사 중 '암초에 둘러싸인 섬', '섬 기슭의 깎아지른 절벽', '하얀 등대'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지난 11일 찾은 팔미도는 함세덕이 74년 전에 그려낸 그 모습 그대로 손님을 맞았다.'해연'의 등장인물은 등대지기와 그의 딸 진숙. 제물포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안의사(안진건)와 그의 아들 세진, 등대 잡부 윤첨지, 사공 등이다.세진은 '몸이 약해 학괄 쉬구 절루 해변으루 요양만 댕기'는 인물이다. '떼무리(소무의도)서 천막 치구 밥해 먹는 학생'으로 '가끔 나루를 건너와선 소라 고동을 잡기두 하구, 등댈 사생하기두' 하면서 자기보다 한 살 연상의 열아홉 진숙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진숙은 인천 고등 여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홀아버질 돌봐디려야겠다'며 그만두고 팔미도에서 등대일을 돕는 '근대적 세련과 분방한 야성이 회합된' 여성이다.고요한 섬에 증기선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뎀마(傳馬船)를 타고 안의사가 팔미도에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안의사 : (명함을 내며) 바쁘신데 이렇게 찾아와서 … 안진건이라구 합니다. / 등대지기 : (돌연 얼굴에 안개가 서리며) 그럼 해안정에 있는 안의과 ….안의사는 20년 전 등대지기의 아내를 꾀어낸 사람이다. 당시 학교 교장이었던 등대지기는 복막염 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내 병원비를 공금으로 냈다가 횡령죄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하니 아내는 핏덩이(진숙)를 버리고 '딴 사내를 얻어' 나갔다. 그 사내가 해안정 안의과(내과) 원장이라는 사실을 등대지기는 4년 전 제물포에 '등대 주임' 사령장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안의사는 세진과 진숙이 사랑하는 사이라 말한다. 놀란 등대지기는 진숙을 다그친다.등대지기 : (날카롭게) 네가 그 학생을 정말 친동생같이 사랑했다면, 어째서 그걸 나한터 감춰왔나? / 진숙 : 여쭐려고 했지만….안의사가 떠나고 세진이 찾아온다. 진숙이 보고 싶어서, 인천항에서 당진 가는 배를 잡아 타고 온 것이다. 세진의 설득에도 등대지기는 단호하다. 세진이 떠밀려 팔미도 앞을 지나가는 배를 잡아 섬을 뜨자, 등대지기는 진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진숙이 '비애와 괴롬을 품고 날아가는 제비떼(해연)'를 바라본다. 그리고 막이 내려간다.함세덕은 '해연'에서 팔미도와 진숙을 동격으로 담아낸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어 인천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바다를 지키는 섬이다. 등대지기는 세진에게 '출생의 비밀'을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세진이 한 말을 들어보자.세진 : 즐거울 때 외로울 때 내 눈앞에 떠오르는 건 이 섬과 등대와 푸른 바다와 자욱한 이 안개일 거에요. 그리구 그속엔 나를 보구싶어하구 걱정해주는 진숙씨가 언제든지 언제든지 저 달그림자처럼 어리구 있을거에요.윤진현 박사는 "세진은 팔미도 공간을 인격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진숙이는 남녀의 사랑을 맺지 못했지만 결국 인천항을 지키는 등대지기 처녀로서, 인천 바다를 지켜주는 어머니로서 남게 된다"고 해석했다.# 함세덕과 인천함세덕은 1915년 5월 23일 인천부 화평동 455에서 태어났다. 아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함성달이었다. 3남3녀 중 차남이었고, 큰형(함금성)은 이복형제였다. 부친 함근욱은 공무원으로 관립 인천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부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조부 함선지는 인천신상회사 부사장까지 지낸 객주(상인)였다. 함세덕이 태어나고 얼마 뒤 부친은 근무지를 목포로 옮겼다. 함세덕이 인천이 아닌 목포에서 출생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함세덕 묘비에는 강화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함세덕은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초)에 다녔고 열살 때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 인천도립상업학교(인천고)를 졸업했다.함세덕은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1929~1934년) 인천부 용동으로 이사했다. 여기에서 연극, 악극을 공연하는 애관극장이 가까웠다. 새 연극이 오르면, 시험기간일지라도 반드시 애관에 갈 정도로 연극에 빠져 지냈다. 인천상업 재학시절 경험은 극작가 함세덕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그 유명한 희곡 '동승'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린 작품이다. 함세덕이 인천상업 5학년인 1933년 여름 친구들과 금강산에 캠핑 갔다가 고찰 마하연(摩訶衍)에서 본 사미승(沙彌僧)을 떠올리며 쓴 이야기다. '동승'에 나오는 지명 가좌울은 인천 가좌동에서 비롯됐다. 이밖에도 '산허구리'의 먼우금(연수구 일대), 배다리(동구 금곡동), '고목'의 소부리(우각리·창영동), 수문리(수문통·송현동) 등의 지명은 모두 인천에서 딴 것이다. '에밀레종' 등장인물 미추홀은 인천의 원초적 지명을 빌려 쓴 것이다.인천상업을 졸업한 1934년 함세덕은 서울 본정통(충무로)에 있는 대형서점 일한서방에 취직해 1년간 일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희곡을 썼다. 한국 연극계의 거두 유치진은 이때 함세덕을 알게 됐지만, 작가로서 가치를 인정하고 '제자'로 둔 건 1940년 '해연'을 발표한 뒤부터다. 함세덕은 1941년 유치진이 창립한 현대극장에 참여했다. 그는 현대극장에서 무대미술가 이원경, 배우 이해랑 등과 함께 일했다. 인천상업시절 좋아했던 해우 강홍식도 현대극장의 단원이었다. 연극인으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이때부터 함세덕의 친일 행적은 구체화된다.함세덕은 시를 써 신문에 낸 적도 있다. 1935년 2월 동아일보에 투고한 '내 고향의 황혼'도 인천 이야기다. 당시 스물한살의 함세덕은 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에서 극작가의 꿈을 키워가는 시기였다.황혼이외다. / 팔미도 멀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검은 섬 우에 / 배부른 범포(帆布) 비치며 노을 뿜은 석양이 걸렷습니다. / 항구의 불빛 멀-게 떨어져 부두의 등대가 어렴풋이 조을 때 / 기슭에 나루배가 초저녁 반작이는 샛별 아래 / 고요히 안식의 기도를 올립니다. …(이하 생략)글 = 김명래기자▲ 팔미도에 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를 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 출입이 통제됐지만 2009년부터 개방됐다. 함세덕 생전에 팔미도는 송림이 울창하고, 물이 맑고, 낚시터가 유명한 섬이었다. /경인일보 DB▲ 해연은 극단 님비곰비가 1992년 4월 창단 공연으로 초연했다. 왼쪽부터 윤첨지, 등대지기, 진숙.▲ 함세덕

2014-04-16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일제시대 '지역 계몽'앞장 선 진우촌

진우촌(秦雨村·1904~1953)은 인천에서 활약한 극작가이자 문화활동가다.1923년 한 해 동아일보 작품 공모에 희곡 '개혁', 동화 '의좋은 삼남매', 희곡 '시들어가는 무궁화' 등 3편이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1925년 '조선문단'에 희곡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하는 등 신문과 문예잡지에 희곡·시·동화·소설·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내놓았다.진우촌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인천배우회·한용단·제물포청년회·인천소성노동회·인천유성회·칠면구락부·낭만좌 등의 모임에 참여했다. 인천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문화운동을 한 그의 작품에서는 진취성과 해양성이 짙게 배어난다. 진우촌은 '청년문학가'(개혁), '경성물산장려회 특파원'(시들어가는 무궁화), '신교육을 수용한 여성'(구가정의 끝날), '신문기자'(두뇌수술) 등 의식이 깨어있는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켜 잘못된 인습을 비판하고 민족 주체성 회복을 강조한다.문학박사 윤진현은 "(진우촌은) 계몽 이성이 출중하게 보이는 청년적 능동성, 문학적 실천뿐 아니라 일상적 실천이 돋보이는 극작가 겸 문화활동가"라며 "인천 문화와 인간 발전을 위해 전방위적으로 움직인 인물"이라고 했다.인천 출판사 다인아트가 2006년 12월 출간한 진우촌전집 '구가정의 끝날'(윤진현 엮음)에서 진우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목동훈기자

2014-04-09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3]진우촌과 그의 작품들

인천서 활동한 극작가… 잘못된 인습 비판 변화시도 엿보여대표작에는 '개혁' '시들어가는 무궁화' '구가정의 끝날' 등강화도 배경 '파도'는 실제 고기잡이배 난파사건들 모티브장막극 '두뇌수술' 일제 조선문화말살 지적 국민정서 담아진우촌(秦雨村, 1904~1953)은 일제강점기 때 인천에서 활동한 극작가다. 본명은 진종혁(秦宗爀)이다.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진우촌 제적등본에는 1915년 12월 5일 인천부 율목리 180에 이주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이전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인천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작품 활동을 벌인 '인천 작가'임은 분명하다. 진우촌은 1918년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해 4년 뒤 졸업했다. 그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인천배우회(仁川培友會, 인배회), 한용단(漢勇團), 제물포청년회,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 인천유성회,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 등의 모임에 참여했다. 1927년에는 동인지 '습작시대'를 발간하고, 1938년에는 극단 '낭만좌'에 입단했다. 진우촌 작품은 잘못된 인습을 비판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진취성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1923년 동아일보 작품 공모에서 당선된 희곡 '개혁'과 '시들어가는 무궁화',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발표한 희곡 '구가정의 끝날' 등이다. 1950년 '백민'에 실은 희곡 '파도'는 부부간의 사랑과 바다에 맞서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진우촌 작품에서는 진취성과 해양성이 짙게 배어난다. 인천이 진우촌의 의식을 지배하고, 이런 '인천 의식'이 그의 작품에 투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런 의식은 강렬한 독립 의지를 작품 속 '신세계'로 상징화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단막극 '개혁'의 무대는 인천 시외 김승지 집이다. 김승지의 아들 23살 청년문학가 '도상'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19살 여종 '춘월'을 사랑한다. 도상은 춘월과 '비밀 연애'를 해 오다 결혼을 결심하고 부모의 승낙을 얻어내기로 한다.도상 : 조금도 겁내지 마오. (중략) 참된 연애에 계급이 왜 있겠소.춘월이 "영감께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찌합니까?"라고 걱정하자, 도상은 "우리는 자기들의 사랑을 위해 맹렬히 나가지 아니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오"라고 안심시킨다.도상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최씨(도상의 어머니) : 아니 네가 별안간 무슨 소리냐? 그래 어디가 색시가 없어서 집안에 있는 종년하고 혼인을 한단 말이냐?도상 :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 사람하고 혼인하는 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중략) 저는 그이와 꼭 결혼하겠습니다.도상은 "만일 집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춘월이를 데리고 이 집을 떠나겠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우리의 세계를 새로 건설하겠습니다"라며 집을 나간다.진우촌은 '개혁'이라는 작품을 통해 신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연애를 꿈꿨다. 이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천은 근대 교육과 청년·문화 운동이 활발했던 도시다. 진우촌이 참여했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인배회, 한용단 등이 그랬다. 당시 인천 문인들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등 계몽운동을 주도했다.'파도'는 '밀물이 들 때'(1939년 '영화연구'에 실린 시나리오)를 개작한 희곡이다. 한 여인이 바다에서 숨진 남편을 그리워하다 결국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 곁으로 간다는 이야기다. 진우촌은 잠시나마 강화도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이는 희곡 '파도'의 공간적 배경이 강화도 어딘가의 한적한 어촌으로 추정하게 한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바다에 나갔다가 배가 뒤집히거나 부서져 주민들이 몰살하는 사건도 많았다. 동아일보 1923년 12월 3일자는 '지난달 24일 오후 3시경에 생활이 곤란한 동네 사람 남자 5명과 여자 32인을 싣고 강화군 서도면 근해에 나가서 굴을 따는 사이에 폭풍이 일어 타고 갔던 목선이 물에 엎어져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고 전부 빠져 죽었으며 시체는 하나도 건지지 못하였다는데 그 동네의 몇 집은 한 사람도 없는 집이 있으며 부모의 자식을 찾는 소리와 자녀의 어머니를 부르는 참경은 눈으로 못보겠다더라'라고 보도했다. 며칠 뒤 강화 근해에서 배가 침몰해 40여 명이 익사했고, 이듬해 7월에도 폭풍으로 어선 11척이 파손되고 2명이 사망했다.작품 '파도' 속 김씨의 남편도 고기잡이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참변을 당한다. 배가 파선을 당해 숨진 것이다. 김씨는 썰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 바위에 올라 남편 시신을 기다린다. 밀물이 들 때 남편 시신이 해변으로 밀려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황아장수(집을 찾아다니며 잡화를 파는 사람)로부터 바다에서 송장을 봤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김씨 : 그이가, 그이가, 응 그이가 왔어. 헤엄쳐서 왔어. (중략) 기운이 없을 텐데, 기운이 없을 텐데, 어서 가서 끌어올려야지.김씨는 바위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다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한참 후 시아버지가 늘어진 김씨를 안고 바다에서 나온다.박해로(김씨의 시아버지) : 기어코 저눔에 바다가 너까지 잡아갔구나. 오냐, 넌 잘 갔다. 네 남편을 따라서 잘 갔다. 인제 저 무서운 웬수의 바다도 안 볼 것이구 저 물결 소리도 안 들을 것이다. 오냐, 내 혼자 들으마. 늙은 내 혼자 들으면서 어린 것을 길러주마.진우촌은 희곡뿐 아니라 시, 동화, 평론, 수필도 썼는데, 시 '작은 배 갑판에서' '달 뜨는 바다' '바닷가에서 올린 기도'는 진우촌의 강화도 생활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숲 사이를 거닐며'는 진우촌이 산근정(山根町, 현 중구 전동)에서 쓴 시다.'시들어가는 무궁화'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내용인데, 민족의 자각을 촉구하는 나무꾼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늙은 나무꾼 : 얼마고 말고. 왜 연전에는 최서방네 아들이 한참 난봉 필 때에 여러 백석지기를 (동양)척식회사에 팔아먹었지. 그러고 또 재작년에도 인천 가서 미두(米豆)인지 한다고 또 많이 팔아먹지 않었나. 그런데 참 자네 주인집도 자꾸 엉망이 되어간다지?미두는 일종의 투기로, 인천을 온통 투기장으로 만들었다. 인천 언론인 고일(高逸)은 '인천석금'(仁川昔今, 1955년)에서 "미두는 한때 이 항구를 번성케 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서 빚어진 희비극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진우촌이 1945년 '신문예'에 실은 장막극 '두뇌수술'은 의학박사 '오영호'라는 인물이 부잣집 아들 백치 '상도'와 가난하지만 똑똑한 시골청년 '무길'의 두뇌를 바꿔치기한 뒤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 신문기자가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기자 : 음, 그렇지 그래 현대의학이 육체는 수술할 수 있지만 정신은 수술하지 못한다. 그렇다 팔과 다리와 배 속에 창자와 눈알맹이까지도 훌륭히 수술을 하되 형체 없는 정신은 손을 못 댄다.'두뇌수술'은 일제의 조선문화말살정책을 비판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신은 일제의 의도대로 바뀌지 않을 것임을 드러낸 듯하다. 이 작품은 지난해 극단 그린피그(윤한솔 연출)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그린피그 윤한솔(단국대 공연영화학부 교수) 대표는 "해방공간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국민들의 정서가 담긴 작품"이라며 "계몽적이다. 당시의 정황 혹은 한국인의 정신적 상태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에 이 작품을 택했다"고 했다.글 = 목동훈기자▲ 진우촌은 1950년 종합문예잡지 '백민'에 희곡 '파도'를 발표했다. '파도'의 공간적 배경은 강화도 어딘가의 한적한 어촌가로 추정된다. 사진은 강화도 하점면 창후리에서 촬영한 바닷가 풍경. 북한과 가까운 이곳 바닷가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진우촌은 인천에서 활발하게 청년·문화 활동을 하다 1942년 서울로 이주했고, 1951년 월북했다. /임순석기자▲ 애관극장은 1894년에서 1900년 사이 인천 중구 경동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다. 진우촌이 참여한 극단 '칠면구락부'가 공연을 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애관극장의 현재(위)와 옛 모습.▲ 1 1923년 5월 동아일보에 실린 진우촌 희곡 '개혁'. 이 작품은 동아일보 1천호 기념 작품 공모에서 당선됐다.2 1923년 9월 동아일보에 실린 진우촌의 '시들어가는 무궁화'. 동아일보가 물산장려운동 일환으로 실시한 작품 공모에서 당선된 희곡이다.3 인천 출판사 다인아트가 2006년 출간한 진우촌전집 '구가정의 끝날'(윤진현 엮음).

2014-04-09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극작가 진우촌(1904~1953)의 행보

진우촌이 '인천작가'이기는 하지만, 인천에서의 구체적 행적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2007년 문학박사 윤진현이 1958년 북한 평양에서 나온 '현대조선문학선집'에서 진우촌 이력을 찾아냈다. 여기에 1923~1924년 강화도 '하별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한 것으로 돼있다. 또 1951년 월북해 산업예술극단·흥남질소비료공장·국립출판사 등에서 일했으며 1953년 겨울 숨을 거두었다고 나온다.강화 향토사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하별학교'는 '합일학교'를 잘못 기록한 것 같다는 의견이다. 합일학교(강화읍 신문리 소재, 현 합일초등학교)는 설립된 지 100년이 넘었다. 1901년 4월 '잠두의숙'으로 설립돼 합일보통학교(1909년), 강화 합일학교(1924년), 합일심상소학교(1938년), 강화합일학교(1941년), 합일초등학교(1993년) 등으로 교명이 변경됐다.진우촌이 합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했을 것으로 뒷받침하는 진우촌의 시 한 편도 있다. '대흥정(大興亭) 잔디에서'다. '고요하고도 깊은 밤이외다/ 세상은 다 이불에 덮여서 잠들어 있는데/ 사사로이도 마을의 등불은/ 자지도 않고 별들과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나의 가슴에서는 깊이깊이 숨어있던 사랑의 구슬이/ 가만가만 굴러나와서/ 당신 가슴으로 가려합니다'강화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흥정은 1788년 강화유수 송재경(宋載經)이 주민들과 함께 만든 활터로 시인과 묵객이 드나들던 곳이다. 1950년에 무너져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대흥정 자리는 합일학교에서 가깝다.강화교육지원청과 합일초교에는 1960년대 이전 교원 명부가 없다.진우촌은 1922년 1월 서울 출신 백용자와 결혼했다 이듬해 4월 이혼하고, 1942년 4월(입적 기준) 김필노미와 재혼했다. 진우촌은 1949년 발표한 수필 '불두화'에서 아내 김필노미가 1947년 봄에 숨졌다고 적었다.그나마 언론인 고일이 '인천석금'에서 진우촌의 결혼 얘기를 남겼다. 고일은 '극작가 진우촌 군이 인천각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을 했었고, 광복후 상처(喪妻)해서 동양헌에서 또다시 결혼식을 올렸다'고 회고했다.

2014-04-09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미두의 도시 '20세기초 한탕주의자들'아우성

개항장을 품고 있던 항구 도시 인천은 필연적으로 전국 최대 '미두(米豆)장'이 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군산, 부산 등에도 미두취인소가 세워졌지만 정부의 정식 허가를 얻은 곳은 인천미두취인소뿐이었다.미두 초기에는 실제 쌀을 쌓아 두고 거래를 했지만 1912년 이후, 급격히 거래량이 증가해 성황을 이루며 쌀은 사라지고 '사겠다', '팔겠다'는 선 주문만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투기와 요행심을 부추기는 미두에 대한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 곱지 않다. 1920년대 발행된 종합지 '개벽'은 인천미두취인소를 '피를 빨아들이는 악마굴', '민족 경제를 좀 먹는 독약' 등으로 칭하며 부정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였다.하지만 당시 모습을 글로 꼼꼼하게 옮겨 놓은 채만식의 희곡 '당랑의 전설'과 소설 '탁류', 이광수의 작품 '재생'은 미두와 미두가 성행했던 인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세태 풍자(諷刺)에 능했던 채만식은 미두를 통해 힘 없는 서민들이 몰락을 거듭하는 과정을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보여준다. 이광수는 똑같은 미두를 담담하고 정제된 표현으로 서술하며 시종일관 묵직한 분위기를 잇는다.인천에는 아직까지 인천미두취인소, 미두취인소 창고, 가마니 공장 터, 은행, 번성했던 요릿집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인천에서는 여전히 옛 소설 한 권만으로도 20세기 초반 몰려들던 '한탕주의자'들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박석진기자

2014-04-0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2]인천과 미두(米豆)

1896년 일본이 가격안정 등 명분으로 '인천미두취인소' 세워쌀 거래통한 시세차익 얻는 '투기'… 국내자본 수탈 목적사실주의 작가 채만식·이광수도 '미두열풍' 상세히 다뤄중동우체국 인근 머물며 돈 따는 날 유흥즐겨 경제에 영향카페 '금파' 있던 신포문화의거리 주변은 요릿집·술집 문전성시'강보에 싼 인천의 어린 아이도 합백(合百)과 투기를 안다.'1939년 11월 19일 동아일보는 미두장의 변화상을 다룬 기획기사 '흥망의 환무(幻舞) 반세기'를 실으면서 당시 인천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인천이 온통 미두와 관련한 투기장이었다는 얘기다. 여기 나오는 합백은 공인받지 않은 사설 미두 도박장이라고 할 수 있다.인천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고 동시에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곳이 됐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 항상 돈을 잃는 사람 만큼 따는 쪽이 생겨 '제로섬 게임'과 같았다. 1896년 일본인들이 미곡 수매 편의, 가격 안정화, 쌀의 질적 향상이라는 미명하에 세운 인천미두취인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원에 살던 부부가 인천에서 미두에 실패해 모루히네(모르핀)를 먹고 같이 죽었다'(동아일보·1922년 6월 15일)거나 '인천경찰이 절치기꾼(미두할 밑천이 없어 적은 돈으로 불법 도박을 하는 이들·하바꾼)에 엄중 경고를 했다. 어떤 효과를 낼지 주목된다'(중외일보·1927년 11월 19일)는 등의 소식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인천으로 자연스럽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당시 최고 인기 작가로 꼽힌 채만식과 이광수도 인천과 미두에 관심을 뒀다. 이들은 현실의 문제를 면밀히 관찰해 그대로 원고지에 옮긴 '사실주의' 성향이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천 미두 열풍이 이들의 글감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 미두와 인천인천미두취인소는 거래가 늘어남과 동시에 그 순기능을 잃고 중매점 인가권을 쥐고 휘두르며 철저히 국내 자본 수탈의 도구 역할을 했다. 1930년 인천 내 미두 중매점은 40여 개소에 이르렀지만, 조선인 운영자는 단 3명 뿐이었다. 더욱이 일본 오사카 증권거래소의 미곡 시세를 기준으로 쌀을 사고 팔았기에 조선 미두꾼들이 이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인천은 날마다 미두꾼들이 몰려 인생을 건 도전을 했다.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근거없는 일확천금 소식이 미두꾼들을 더 자극했다. '대박났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지방에서 논, 밭을 팔아 올라온 농사꾼 아무개였기에 미두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럴수록 재산을 순식간에 잃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늘었다.채만식이 1940년 '인문평론(人文評論)'에 발표한 희곡 '당랑의 전설'은 이런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작품 속 박 진사는 20여 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지만 가세가 기운다. 이에 장남 원석은 큰돈을 벌 목적으로 단박에 인천미두취인소를 찾아가 미두를 한다. 하지만 원석 역시 대부분의 미두꾼과 마찬가지로 전 재산을 잃는다. 의복은 땟국과 땀으로 휘감기고 얼굴엔 윤기가 없고 한 데에 완전히 일치가 되는 하바꾼, 돈 떨어진 마바라, 옥관, 구경꾼이 한떼 궁중이 미리서 등장해서 있어가지고 서로들 분주히 납뛰고 지껄이며 떠들고 하는 중에도 하바꾼들은 이 구석 저 구석, 둘씩 셋씩 모여 서서 고개를 처박고 쑥덕쑥덕하면서 간혹 돈을 서로 주고받고 하고 돈 떨어진 미두꾼들은, 혼자서 혹은 무더기로 넋을 놓고 우두커니 미두장을 바라다 보고 섰다. (중략) 그 많은 얼굴들이 만족 아니면 실망, 두 가지 표정으로 판연하게 갈려서 통일이 되어 있다.이에 앞서 채만식은 1937~1938년 조선일보에 소설 '탁류'(濁流)를 연재했는데 여기서도 미두와 얽힌 인천 이야기를 쓴다.미상불 미두장이가 울기들을 잘한다. 옛날 축현역 앞에 있던 연못은 미두장이의 눈물로 물이 괴었다고 이르는 말이 있다. 망건 쓰고 귀 안 뺀 촌샌님들이 도무지 어쩐 영문인 줄 모르게 살림이 요모로 조모로 오그라들라치면 초조한 끝에 허욕이 난다. (중략) 좀 똑똑하다는 축이 일확천금의 큰 뜻을 품고 인천으로 쫓아온다. 와서는 개개 밑천을 홀라당 불러버리고 맨손으로 돌아선다.축현역은 현재 동인천역이다. 미두 중매점에 가기 위해 인천을 찾는 외지인들은 대부분 동인천역으로 드나들었다.채만식 문학에 대한 논문을 쓴 유봉희 박사는 "형 명식이 미두를 해서 가세가 몰락하는 바람에 채만식이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게 됐다는 친구의 증언도 있다"며 "개인사 때문에 인천과 미두에 대한 채만식의 관심은 더 유별났고, 그럴수록 서술은 세세하고 사실감이 높아졌다"고 해석했다.# 미두꾼, 인천 경제에 활력을 넣다이광수가 1924~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재생'에서 남주인공 봉구가 사랑했던 여인 순영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취직하는 곳이 인천미두취인소다.그 밖에도 각처에서 미두 하러 와서 묵는 손님을 찾아다니며 주문을 받아 오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이것을 거간이라고 한다. (중략) 그리해서 제이의 반복창이가 되되. 그보다 더욱 큰 반복창이 되자 하고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길 밖에는 맘껏 순영의 원수를 갚을 수는 없는 것이다.여기 나오는 반복창은 인천에서 미두를 해서 하루에 지금 돈으로 15억원을 벌었을 정도로 '미두 갑부'의 상징이었다. 제2, 제3의 반복창이 될 것이란 기대를 안고 너나없이 인천 미두에 뛰어들었던 세태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런 '미두 왕' 반복창도 역시 미두로 쫄딱 망했다.인천을 찾은 미두꾼들은 미두 중매소와 가까우면서도 값이 싼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하숙했다. 또 돈을 따는 날이면 으레 유흥을 즐겼다. 몰려든 미두꾼들이 먹고, 자고, 놀면서 푼 돈이 인천 경제의 활력소 구실도 했다.미두꾼들이 주로 거주한 곳은 인천중동우체국(중구 제물량로 183) 맞은편과 현재 신포구민문화센터 일대였다고 한다. 더불어 카페 '금파'가 있던 신포 문화의 거리내 청실홍실 건물 양 옆으로 난 길에는 고급 요릿집과 술집이 즐비했고 문전성시를 이뤘단다. 1925년, 경성주식현물시장과 인천미두취인소를 합병해 서울로 옮겨 가려고 시도했을 때 인천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이런 점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반발에 밀리고는 했던 인천미두취인소 합병은 1932년에 가서야 성사됐다.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미두꾼들은 허황된 꿈을 깨지 못해 인천에 '피 빨아먹는 악당굴'이라는 오명을 안겼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인천 경제를 굴리는 단단한 한 축이었다"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는 오늘날도 여전하다. 다만 미두가 사라지고 로또 같은 새로운 형태가 생겨났을 뿐"이라고 했다.글 = 박석진기자

2014-04-0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인터뷰/위문복 하나대투증권 부부장

"인천미두취인소는 우리나라 120년 증권 역사의 출발과 닿아 있습니다."위문복(사진) 하나대투증권 이비즈니스(e-Business) 지원부 부부장은 현직 증권맨이자 국내 증권시장 역사를 더듬는 연구자다. 위문복 부부장은 "인천미두취인소는 정부의 허가를 얻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미두취인소다. 일본인들이 우리 자본 수탈을 목적으로 미두취인소를 세웠다는 것, 순기능을 저버리고 투기로 지나치게 흘러버렸다는 점에서 인천과 미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미두는 증권에서 파생된 선물거래의 시초다. 역사, 그 자체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위 부부장은 "세계 모든 증권시장은 초기에 경제 발전 기여도보다 투기성이 명확했고, 지금도 거품을 먹고 산다"며 "증권시장이 가진 문제를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중요하다. 아직 온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는 증권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인천은 미두취인소를 통해 100여 년 전에 이미 세계경제계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인천의 미곡 거래량은 오사카뿐 아니라 대만, 톈진 등을 넘어서는 큰 시장이었고, 돈 있는 외국인들도 인천미두취인소를 기웃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재미난 사실입니다. 또한 아픈 역사도 역사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그 의미를 찾아 이어가야 합니다. 미두도 엄연한 우리나라 경제 역사의 일부입니다. 인천이 나서서 미두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위문복 부부장은 미두 연구와 관련한 인천의 역할을 주문했다.

2014-04-0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일제강점기 소설 '욕망으로 얼룩진'월미도

일제 강점기 서울 사람이 '월미도에 놀러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러 간 사람도 있고, 바닷물을 가둬 끓인 조탕(潮湯)에 목욕을 즐기러 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인 또는 가족끼리 호텔에서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월미도를 찾았을 수도 있다. 봄철 벚꽃놀이를 즐기기에도 월미도는 제격이었다.이유야 어찌됐든 월미도는 도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에 사람들이 늘 몰리는 장소였고, 월미도에 가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본래의 것에서 벗어난 '일탈'이었다.당대의 소설가들은 월미도에서 이뤄지는 크고 작은 '일탈' 가운데 유독 남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사건에 주목했다. 성관계를 암시만 하는 데에도 월미도가 배경으로 잡혔다.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선 청춘남녀가 호텔에서 몸을 섞는 장소로, 이광수의 '사랑'에서는 남녀간 욕망을 끄집어내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효석의 '주리야'는 사회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조차 욕망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로 사용된다.이 소설들 속에 나타난 장면이 당시 월미도의 전부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은 일본이 인공적으로 만든 월미도유원지가 조선인들의 타락의 장소가 되는 것에 분개했다. 이들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휴양지' 월미도의 진면목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다.월미도는 일제시대엔 일본이 만든 유락시설로 뒤덮였고, 한국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각종 놀이시설과 식당, 공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등지고 서면 월미도에선 언제나 똑같은 바닷바람과 바다 내음을 느낄 수 있다. /김민재기자

2014-03-26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1]일제 강점기 소설 속 월미도

일제가 만든 조탕과 더불어 소설 곳곳 등장… 야반도주·하룻밤 등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이후 지식인들 '인천의 명물… 조선의 자랑' 목소리 높여 민족적 아픔 달래주던 공간 부각'디스코팡팡' 새명물 된 지금… 천혜자원 활용 해수족욕탕 추진돼 옛명성 회복 기대감일제 강점기 발표된 소설 속 인천, 특히 월미도는 '일탈과 유흥'의 장소로 그려진다. 인천은 경성에 살고 있는 청춘남녀가 기차 타고 '바람 쐬러 가는 곳', '은밀한 무언가'를 하는 장소로 툭하면 등장한다.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광수의 '사랑', 이효석의 '주리야' 등에 나타난 인천이 그러하다. 소설은 월미도에 놀러가는 남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월미도를 다녀왔다는 것 만으로 둘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 버리고 만다. 이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조탕(潮湯)이라는 특별한 시설이 월미도에 있었기 때문인데, 호텔 앞에 바닷물을 가둬 만든 조탕에 벌거벗은 남녀가 함께 있다는 것은 '타락'과 '일탈'을 상징했다.반면, 이같은 일탈의 이미지 너머에도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갖춰진, 그 자체만으로도 휴양지의 역할을 하는 월미도도 분명 존재했다. 2014년 인천 월미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놀 수 있는 공간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 각종 놀이시설이 월미도를 채우고 있다.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아무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오갈 수 있는 바닷가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구보씨의 친구는 왜 월미도에 갔을까?경인철도가 개통되고 1917년 월미도와 인천역을 연결하는 방파제가 완공된 이후 경성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인천은 당일치기 행락지로서 인기였다.특히, 1923년 일본 자본의 '월미도유원회사'가 월미도에 만든 조탕(바닷물을 끓여 만든 일종의 목욕탕)은 그야말로 '인공낙원'이었다. 해수욕장엔 캠핑촌이 생겼고, 벚꽃놀이 인파로 월미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도 신문에 연일 보도됐다.이 같은 인기와 더불어 월미도는 일제 강점기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여기서 월미도는 '쾌락', '욕망', '일탈'의 장소였다.소설가인 주인공 구보가 하루동안 경성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내용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 구보는 경성역에서 애인과 놀러가는 듯한 동창을 만나는데, 목적지가 월미도라는 이유로 그들이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상상한다."이러한 시각에 (월미도로)떠나는 그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를 그곳에서 묵을 게다. 구보는 문득, 여자의 발가숭이를 아무 거리낌없이 애무할 그 남자의, 야비한 웃음으로 하여 좀더 추악해진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염상섭이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진주는 주었으나'에서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이 월미도 조탕에서 한 여성 음악가와 중년 남성이 목욕가운 차림으로 같이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둘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이 같은 이미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이효석의 소설 '주리야'(1933년)에서는 월미도를 찾는 남녀의 심리가 직접 묘사된다. 집에서 정혼해 준 남자를 거부하고 경성에 숨어 지내던 주인공 주리야는 자신을 찾으러 온 오빠를 피해 사회주의자 민호와 월미도로 야반도주한다. 늦은 밤 월미도 여관에서 주리야와 한방에 묵게 된 민호는 혼란스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주리야의 몸에 손을 대고 만다. 다음 날 아침 민호는 자신의 뺨을 때리는 주리야에게 "그러면 그때까지에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중략)육체적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든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라고 반박한다. 월미도로 자신을 이끈 것 자체가 '유혹'이었다는 얘기다.이광수 소설 '사랑'(1938)에서 주인공 순옥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허영과 함께 조탕이 딸린 월미도의 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다. 순옥은 단지 의사 안빈의 혈액성분 실험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허영과 월미도를 찾은 것뿐인데, 도리어 순옥과 허영이 '약혼관계'였다는 소문이 나돈다."아니, 저 석순옥이가 말야. 본래 약혼한 남자가 있었거든….(중략) 굳게 굳게 약혼꺼정 하고, 월미도인가 어디서 하룬가 이틀인가 같이 자기까지 했대."작가가 피를 뽑는 기괴한 장면의 배경을 굳이 인천으로 정한 것은 월미도가 갖고 있는 육욕의 이미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 순옥이 얻으려 했던 피의 성분은 다름아닌 '애욕'과 '욕정'의 성분이었다.당대 월미도가 일탈과 유흥의 공간으로 그려진 것은 비단 문학작품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1923년 8월 12일자 '월미도의 일야(月尾島의 一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일요일이나 제일(祭日)에는 청년 남녀가 너나 없이 살에 착 붙는 해수욕복을 입고 뒤섞이어 노는 양은 참으로 큰 작란판을 이룬다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일제 강점기 소설의 풍속을 연구한 김주리 한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조탕의 물은 깨끗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라 불결하고 뜨거운 물로써 수많은 익명의 몸이 부딪히는 공간이다"라며 "당시 문학 속 월미도가 타락한 공간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월미도의 이러한 이미지는 당시 대표적인 상류층 휴양지였던 강원도 원산 해수욕장과 극명히 대비되는데, '사랑'에서 원산 해수욕장은 병에 걸린 안빈의 아내가 요양을 하고 매일같이 산책을 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김주리 교수는 "상류층, 외국인의 별장이 있던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원산과 달리 인천은 식민지 중산층의 무교양과 속물성, 경박함과 타락을 환기하는 공간으로 그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의 자랑' 월미도, 그리고 지금행락지로서의 월미도는 인천을 넘어 당시 조선의 자랑거리였지만, 일제의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진 월미도 조탕에 조선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고, 월미도는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휴양지로서 역할해 왔다는 주장도 나왔다. 1926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의 '인천의 명물 월미도의 풍광'이라는 기사를 보자."월미도는 꽃아침 달저녁 정남정녀(情男情女)의 놀이터로만 만족하지 아니한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때때로 우국지사의 한많은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충신협객의 뜨거운 머리를 식혀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말의 김옥균 선생이 망명의 길을 밟으실제 이 월미도를 거쳤으며 여류운동가 김마리아 양이 이 월미도에 은신을 하였다가 황해를 건넌 것은 최근의 사실이어니와 기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무명의 지사들도 아담하고 다정한 이 월미도의 위안을 얼마나 받았으랴? 월미도는 인천의 명물이다. 조선의 자랑이다."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월미도가 경성을 끼고 있는 대규모 행락지로 개발된 건 분명하지만 지식인들은 월미도가 행락지로만 부각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라며 "이들은 월미도가 우국지사들이 바다를 보면서 머리를 식힌, 즉 민족적인 아픔을 달래주는 공간이었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주말이었던 지난 22일 찾아간 월미도에선 더 이상 옛 월미도 조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이공원의 '디스코 팡팡'은 월미도의 새로운 명물이 됐고, 횟집과 식당, 카페들이 문화의거리에 줄지어 들어서 있다. 월미공원엔 가볍게 산책을 하는 중년 부부들이 많았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2년 한 해 무려 185만 명의 내외국인이 문화의거리를 찾았다고 한다.이러한 풍경 속에 월미도 문화의거리에서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해수족욕탕 시설이 눈에 띄었다. 인천 중구가 추진하는 해수족욕탕은 오는 5월까지 월미도 문화의거리에 해수를 담아두는 대형 야외 욕탕과 무대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월미도의 옛 명성을 되찾아 줄 것으로 기대되는 해수족욕탕 구상은 9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인공을 가미하더라도 바다라는 전제조건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수도권 한복판 월미도에서 느낄 수 있는 바닷바람과 바다 내음은 세월이 지나도 바뀔 수 없는 인천의 자랑이다.인천발전연구원 조혜정 연구위원은 "관광지를 인공적으로 조성한다고 해도 결국 '자연'이 주는 경치를 따라가진 못한다"며 "1·8부두 내항재개발과 연계된 개항창조문화도시 사업이 추진되면 월미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더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글 = 김민재기자▲ 일제 강점기 위락지로 명성을 떨친 월미도는 지금도 수도권 시민들의 여가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2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찾은 시민들의 모습. /조재현기자▲ 월미도 테마파크에 있는 '디스코 팡팡'은 이제 월미도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았다. /조재현기자

2014-03-26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인천 노동자의 하루 '옆에서 보는 듯'

소설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는 38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요절 작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인간문제'(人間問題)로 한국문학사(史)에 우뚝 섰다. 이십대 후반의 강경애는 인천 방직 공장과 부두 날품팔이 노동자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켰다. 부두 노동자 쟁의와 공장 노동 현장이 근대 장편 소설의 소재로 쓰인 건 강경애의 '인간문제'가 처음이었다.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인천 부두·공장 노동자의 하루를 세밀하게 묘사했다.'인간문제'는 80년 전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기록을 보면 1930년대 발표된 장편 소설 120여 편 중 100여 편이 신문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인간'과 '문제'라는 다소 어려운 인문학적 개념이 들어간 소설이라고 해서 딱딱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인간문제'는 인천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당대 인천이 아니면 풀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강경애가 소설에 담았다. 1990년대부터 강경애 연구가 활발했지만, '강경애와 인천'이란 주제에 매달린 연구자는 흔치 않다. 강경애의 인천 행적, 당시 동양방적을 중심으로 이뤄진 노동운동과 강경애의 연관성 등이 아직 구체화 돼 있지 않다. '인간문제' 삽화를 청전 이상범 화백이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소설 중간에 삽화가가 이청구 화백으로 바뀐 것에 어느 연구자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청구 화백은 조선인 최초로 동경미술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훗날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낸 청구 이마동 화백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청구'와 '이마동'을 동일 인물이라고 지칭하는 연구나 조사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마동 화백은 강경애 작품 연재가 끝난 뒤 같은 신문에서 주요섭의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의 삽화를 그렸는데, 이 장편에도 인천이 등장한다.식민지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강경애의 '인간문제'의 주요 바탕이 되는 인천에서 먼저 나서서 '인간문제와 인천'에 대해 뚜렷한 연구 성과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부터가 안타까운 일이다. 강경애가 살았던 간도 룽징에 1999년 문학비가 세워졌지만 인천에서는 언감생심인 분위기다. 강경애가 세상을 뜬 지 70년이 지난 2014년, 인천은 여전히 '노동자 도시'다. 부두와 공장으로 몰렸던 노동력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채우고 있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내가 강경애라면 나는 어떠한 '인간문제'를 쓸 것인가. /김명래기자

2014-03-19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0]강경애 '인간문제'

1934년 신문에 120차례 연재공간과 장면 사실적 묘사외리 3번지·사정 5번지…동양방적 모델 공장도 실감여직공들 근무조건도 상세직접 와보지 않고 쓰기 어려워간도에 살던 중 잠깐 머문듯사회주의자 남편 영향 느껴져황해도서 시작해 공간 확장인간 본질 지적 '인천 형상화'+인천은 '노동자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아 오는 '외지인'의 발걸음이 19세기 말 개항 이후 끊이지 않았다.농촌에서 부칠 땅이 없고 빌어먹을 것조차 마땅치 않았던 사람들, 지주의 등쌀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에 몰려들었다.193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의 중심에는 '돈 받고 일하는 살기 좋은 땅' 인천이 있었다.남자들은 일용직으로 부두에서 짐을 부렸고, 어린 여성들은 방직공장에 들어갔다. 강경애(姜敬愛·1906~1944)의 '인간문제'는 이런 인천을 잘 보여준다.'인간문제'는 중국 간도에 머물던 젊은 여류 작가에 우리 문단이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인천은 근대 노동 운동을 상징하는 도시가 돼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문학의 소재로 차용된다.'인간문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선비, 첫째, 신철 등이고, 배경은 황해도 용연(장연), 서울, 인천 순서로 이어진다. 선비는 "얼굴빛은 좀 푸른 기를 띠었으나 티 없이 맑은" 여성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지주(정덕호)에게 스무살에 정조를 잃고 고향을 떠나 인천 방적공장에 취직한다. 이 공장에서 "덕호와 같은 수없는 인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자각하지만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세상을 뜬다. "술 잘 먹고 사람 잘 치기로 유명한" 첫째는 어려서부터 선비를 좋아한다. 신철은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엘리트 청년으로 덕호의 딸(옥점) 집에 놀러왔다가 선비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첫째는 지주에게 억울하게 땅을 잃고 배 곯며 살다가 "돈 받고 일하며 살기 좋은" 공장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인천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한다. 신철은 부잣집 외동딸 옥점과 결혼하라는 부친의 말을 거역하고 서울 집을 나와 "노동자의 씩씩한 참 동무가 되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인천에 간다. 신철은 우연히 첫째를 알게 되고 첫째에게 계급의식을 심어준다. 인천에서 첫째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변모한다. 반면 신철은 사상전환을 한 뒤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 많은 계집"을 얻는다.강경애 인간문제는 1934년 8~12월 동아일보에 120차례 연재된 신문소설이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군데군데 복선이 깔려 있어 책을 읽는 게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공간과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특징이다. 1930년대 인천이 소설에 그대로 겹치는 것도 흥미롭다. 작가가 직접 와 보지 않았으면 쓰기 어려울 것들이다.# 인간문제 속 인천신철은 인천 '외리 3번지'에서 노동운동가 철수를 만난 뒤 '사정(寺町) 5번지'에 정착한다. 외리 3번지는 현재의 율목동으로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부근이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1920년대까지 이 지역에 직업소개소가 많았고, 현재 율목동 54에는 일용 노동자들이 묵는 공동숙박업소가 있었다"고 말했다. 신철이 집을 얻은 사정 5번지는 지금의 답동성당 주변이다. 소설에서 신철은 첫째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줄 때 '사정으로 올라가누라면 천주교회당이 있지요. 그 집을 지나 공동변소가 있지유. 그 우에는 장작 패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바루 그 우에 조고만 초가집이 있지우. 그 집 뒷방이 바루 나 있는 방이오'라고 말한다.신철이 부두 노동시장에 나갔을 때 십장에게 붉은 끈(일표)을 받고, 하루 품삯을 받는 장소는 옛 인천세관 부근(중구 항동)이다. 여기서 신철의 집까지 가는 길 사이에 서양식 술집인 '킹바아'가 등장한다. 지금의 신포동 청실홍실 자리다.'인간문제'에 나온 대동방적공장은 일제가 1934년에 인천 만석정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방적을 모델로 삼았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공장 묘사가 생생하다.고치를 삶는 가마도 서울서는 대개 세숫대야만 하고 와꾸도 하나였는데, 여기 것은 가마가 장방형으로 길게 되었으며 서울 가마의 10배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와꾸도 한 사람 앞에 10여 개 내지 20개까지 쓰게 된다고 하였다.이 공장에는 여러분의 장래를 생각하여 저금 제도를 맨들었소. 저금은 인생의 광명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은 노동만 하면 공장에서 밥을 먹여주고 일용품을 대주고 나머지는 저금을 시켜주니...이밖에도 당시 동양방적 여직공들의 근무 조건이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동양방적의 후신인 동일방직에서 1970년대에 일한 최연봉(59) 인천남구자원봉사센터장은 "우리 때에도 회사에서 직공들에게 의무적으로 신협 통장을 개설하게 했다", "공장 일이 힘들어 최근에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강경애와 인천강경애가 인천에 언제 왔고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수의 연구자들은 강경애가 1931년 남편 장하일과 간도에 가기 전 잠깐 인천에 기거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동양방적 공장은 1932년 말에 건립이 확정됐다. 강경애는 동양방적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었을까.강경애 연구에 정통한 중국 중앙민족대 최학송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간도에 살던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연재하기 전인) 1934년 7월 20일경 조선에 한 번 다녀오는데 그때 인천에 들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강경애가 1936년 발표한 전기적 소설 '산남'에서 "지금으로부터 이태 전 칠월 이십일경에 돌연히 나에게 전보 한 장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내 어머님의 병환이 위중하니 곧 오라는 것입니다"는 내용을 근거로 최학송 교수가 추정한 것이다.최학송 교수는 또 "남편 장하일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하일은 해방 이후 북에서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노동신문 부주필을 지냈다. 장하일은 강경애 소설의 첫 독자로 영향을 미쳤다. 1935년을 전후해 '인천에서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직한 인천적색노동조합이 공장뉴스 등의 출판물을 간행해 동양방적 등에서 노동자들을 의식화·조직화'했다는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는 기록은 '인간문제'의 내용과 연결된다.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한 조직이다. 최학송 교수의 말을 종합해보면 강경애가 간도에서 남편과 그 지인들을 통해 또는 1934년 인천을 방문해 소설 집필에 앞서 사전취재를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동아일보는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연재하기 전 작품 줄거리를 '삶에 허덕이는 조그마한 농촌의 생활 현실을 그리어' 내는 것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인간문제'의 영역은 황해도 시골 마을을 넘어서 인천까지 확장한다. 연재소설 예고에서 강경애가 말한대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포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요소와 힘을 구비한 인간이 누구며 또 그 인간으로서의 갈 바를 지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형상화한 공간이 인천이었다. '인간문제' 이후 80년이 지난 인천, 그 인천의 현재적 '인간문제'는 무엇일까.글 = 김명래기자 ▲ 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은 일제가 1934년에 인천 만석정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방적을 모델로 삼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진은 동양방적의 후신인 동일방직 전경. /조재현기자 ▲ 신연재 소설 예고.▲ 부두 노동시장에서 신철의 집까지 가는 길 사이 서양식 술집인 '킹바아'가 등장하는데 지금의 신포동 청실홍실 자리다. 사진은 신포동 일대 거리. /조재현기자

2014-03-19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소설가 강경애는?

강경애는 1906년 4월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인근 장연으로 갔다. 새 아버지는 환갑이 지난 늙은이였다. 여덟 살 때 의붓아버지가 보던 춘향전으로 글을 깨쳤다. 이후 삼국지, 옥루몽, 조웅전, 숙향전 등 "눈에 뜨인 소설책이라고는 기어코 독파"했다. 동네 할아버지·할머니는 이런 강경애에게 과자를 사다주면서 집에 데려와 소설을 읽혔다. 당시 별명이 '도토리 소설쟁이'였다.열 살이 지나 형부의 도움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학비가 늘 부족했다. 남이 다 읽은 책을 얻어 공부했다. 종이와 붓을 훔쳐 쓰기도 해 친구들이 '도적년'이라고 놀렸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을 맞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서 국문학자인 무애 양주동(1903~1977)과 동거한 사실은 유명하다. 강경애는 와세다대 영문과 출신의 양주동과 살면서 체계적으로 문학 소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양주동은 "18세의 여학교 4년생으로 많은 문학사상 서류를 읽었다. 나의 권고로 근대문학십강을 졸업한 그녀는 다시 근대사상십육강을 흥미있게 공부하더니 어떤 날 그녀는 책점에서 다시 자본론과 맹자를 사가지고 와서 나더러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엄청난 지식욕 탐구열이었다"고 강경애를 추억했다.'인간문제' 원고료 200여 원을 놓고 남편 장하일과 다툰 기록도 있다. 당시 중학교 교사로 있던 남편 장하일의 월급이 30~50원이었으니 큰 돈이었다. 강경애는 원고료로 겨울 외투, 목도리, 금반지, 남편 양복을 사려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감옥에서 나와 투병하는 동지의 입원비, 생계가 어려운 동지의 가족을 위해 쓰자고 한다. 이때 남편과 크게 싸웠지만 강경애가 물러섰는데, 이 일을 동생에게 설명하며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가치를 향상시킴에만 몰두한다면 너는 낙오자요 퇴폐자이다"고 적었다.강경애는 1939년 신병이 악화돼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명래기자

2014-03-19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소설 임꺽정 '계양산이 낳은 의혈남아'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껏 '국민소설' 지위를 놓치지 않고있는 '소설 임꺽정'과 인천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소설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쓴 대하소설이다.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홍명희는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전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임꺽정전은 작가의 병환으로 1939년 신문 연재가 중단됐다 이듬해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 '조광'지에 한 차례 실렸다. 하지만 결국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됐다.소설 임꺽정에는 양주·청석골·칠장사 등 다양한 지명이 나온다. 공간적 범위도 백두산부터 제주도까지 광범위하다. 이중 임꺽정이 까닭없이 칼을 쓰지않기로 맹세하고 검술을 익힌 곳이 인천 계양산이다. 계양산은 힘센 망나니 임꺽정이 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됐다. 또한 소설 임꺽정에 여러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허암 정희량 등은 인천과 관련이 있다.홍명희가 소설 임꺽정에 다양한 지명과 인물, 민중생활상 등을 담은 것은 일제에 의해 지리·역사·전통문화 교육이 어려웠기 때문에,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의 것을 알리겠다는 의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소설 임꺽정과 홍명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한 강영주(상명대) 교수는 "읽는 시기에 따라 작품의 특징이 달라 보인다"며 "70·80년대에는 민중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소설에 주목했다"고 했다. 이어 "홍명희 선생이 소설 임꺽정을 쓸때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이 나의 목표라고 했다"며 "그 말씀처럼 90년대 이후에 다시 읽었을 때는 우리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준 작품이 됐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2014-03-13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9]임꺽정

의적으로 거듭난 임꺽정부평 계양산 자락서새로운 세상 꿈을 꾸다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인천사납기만 했던 양주 백정의 아들새삶 다짐 '계양산' 성장기 주요 배경징매이고개 등 주변에 도적 많았던 탓인근 주막 늙은이에게 검술 배워소설 임꺽정과 관련 인천 인물허암산에 갓바치 스승 정희량 흔적이지함·이규보도 스토리상 거론저자인 홍명희는 부친 영향 '독립운동'신문사 사장 역임·신간회 결성 주도임꺽정은 조선시대 양주(楊州)의 한 백정에게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놈'인데, 외조모가 장래의 걱정거리라며 '걱정아, 걱정아'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누나(섭섭이)가 외조모 흉내를 내어 '꺽정이'라고 부른 것이 이름이 됐다. 그래서 임꺽정이다.임꺽정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사납고 심술스러웠다. 글공부를 싫어하고 달음질과 뜀박질 등 노는 것을 좋아했다. 힘이 장사였다. 이런 임꺽정이 '의혈 남아'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 공간이 당시 인천 부평에 속했던 계양산이다. 임꺽정은 계양산 기슭 주막에서 어떤 늙은이로부터 검술을 배운다.이후 임꺽정은 청석골 화적패의 대두령이 된다.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는 "소설 임꺽정은 계급적 관점을 기본 내용으로 해 민중의 저항성이 강조된 역사소설"이라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천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임꺽정이 앞날을 준비하는 구원의 공간이란 의미"라고 했다.# 소설 임꺽정과 인천 공간망나니처럼 뛰놀기만 하던 임꺽정은 양주 어물도가(漁物都家)에서 인천 부평 구슬원(球瑟院) 인근에 검술을 잘하는 화적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검술을 배우고 싶은 생각으로 무작정 양주를 떠나 부평을 찾아간다.서울을 비켜놓고 한강 하류를 건너 김포 땅에서 남으로 내려오는데 구슬원 길을 물어 나오기는 양주서 떠나던 이튿날이었다. 무인지경 숲 속 길을 들어섰다. 숲이 크거나 길지는 아니하지만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까닭에 대낮에도 길이 어둠침침하였다.(소설 임꺽정 피장편 中)구슬원은 조선시대 여관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부평도호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계양산 북서쪽인 서구 방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위치를 눈대중으로라도 잡아보기 위해 지난 8일 계양산 정상에 올랐다. 계양구 일대와 김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임꺽정은 계양산 자락 어디쯤에서 검술을 익혔을까.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임꺽정은 구슬원을 찾던 중 외딴 주막에서 늙은이를 만나게 된다. 이 늙은이가 바로 검술을 잘하는 화적이었다. 임꺽정은 까닭 없는 미움과 쓸데없는 객기로 칼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늙은이에게서 검술을 배운다. 임꺽정이 인천 부평 땅 계양산 인근 주막에서 검술을 배운 기간은 1년 반 정도. 짧은 기간이지만, 이때 배운 검술은 향후 임꺽정이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 만일 임꺽정이 계양산 인근 주막에서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임꺽정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의 성장 과정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공간을 하필이면 왜 인천 부평 땅 계양산으로 설정했을까. 산을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뾰족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천 설화 모음집과 부평사(富平史)에 나오는 것처럼 계양산 주변에 도적이 많았기 때문일까. 계양산은 높고 산림이 우거져 도적들이 은신하기 좋고, 산 주변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에게 빼앗을 것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개성과 한양 가는 길목인 경명현(징매이고개)은 도둑이 많아 1천명이 모여 집단을 이뤄야 산을 넘을 수 있다는 뜻에서 '천명고개'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소설 임꺽정 의형제편 '결의'를 보면, 박유복과 서림이 달골을 떠나 청석골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인천 소래산과 미라원(彌羅院)이 등장한다.인심이 소동되고 기찰이 심하여지는 것을 보고 서울길을 피하고 안산으로 작로하여, 안산 오자산과 인천 소래산 줄기를 밟아나와서 인천 미라원 적당의 연신 있던 사람을 찾아서 만나가지고 배를 주선해 달라고 청하여 풍덕 조강까지 배를 타고 와서 청석골로 돌아왔었다.이는 인천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남정맥'을 따라 갔다는 것으로, 아마도 박유복과 서림이 소래산, 계양산을 거쳐 문수산까지 온 뒤 김포 조강포에서 배를 탄 것으로 보인다. 김포시사(金浦市史)를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 때 월곶면 조강리 일대에 나루터가 있었다. 인천 미라원은 구슬원 서쪽에 있었던 여관이라고 한다.# 소설 임꺽정과 인천 관련 인물들소설 임꺽정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이 중 갖바치(양주팔) 스승인 허암 정희량, 임꺽정과 갖바치가 제주도 가는 길에 동행한 토정 이지함은 인천과 관련이 있다. 고려 문인 이규보도 잠깐 거론된다.허암 정희량(1469~?)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1492년 초시과거에 장원급제해 생원이 됐다. 모친상을 당해 시묘를 하던 중 1502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김포 강변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자취를 감추고 죽은 것처럼 가장해 허암산에서 은거했다고 서구사(西區史)는 설명한다. 서구 검암동 허암산 북쪽(서인천고등학교 앞 도로 맞은편 부근)에는 '허암지'가 있다. 정희량이 은거했던 암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터만 확인될 따름이다. 현재 이곳에는 정희량 시비와 허암차샘이 있고, 주변은 고급 빌라촌으로 변모했다. 정희량은 소설 임꺽정에서 몇 마디 주문으로 여우 같은 짐승을 죽게 하고, 자신이 죽는 날까지 예언하는 신비의 인물로 나온다.토정 이지함(1517~1578)은 조선 중기 문신이다. 이지함은 소설 임꺽정에서 갖바치 친구인 심의(1475~?)와 관계가 두터운 화담 서경덕(1489~1546)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지함이 인천에서 상을 당한 제자 중봉 조헌(1544~1592)을 조문했는데, 그날 밤 요사한 혜성이 하늘에 뻗쳤다. 이지함은 조헌에게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해도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라고 했다. 이 말이 임진란(壬辰亂)에 이르러 부합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헌은 임진왜란에 대비해 인천 율도를 개간한 뒤,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율도로 보내놓고 자신은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했다.고려 때 문신인 이규보(1168∼1241)의 경우, 소설 임꺽정 피장편에서 신임 부평부사가 계양산 도적의 존재를 알게 되는 장면에서 잠깐 거론된다.부평부사가 나이 젊은 탓으로 동헌에 들어앉았기가 갑갑하여 고려 이상국(李相國·이규보)의 놀던 자취를 찾아 계양산 명월사(明月寺)에를 올라가려 하니 이방이 부사 앞에 나아가서…(생략)저자 벽초 홍명희를 따라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인천 인물과도 만나게 된다. 벽초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 아버지 홍범식(1871~1910)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했다. 신문사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내고,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민주독립당 대표를 맡았으며,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뒤 북한에 남아 81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마흔 살이 넘어 '조선일보'와 '조광'지 등에 임꺽정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3재(三才)로 불린다.임꺽정전 연재 기간이 길다 보니 삽화를 맡은 화백도 여러 명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임꺽정전 삽화를 그린 이 중 한 명이 정현웅(1910~1976)이다. 정현웅이 동아일보에 근무할 때 인천에서 성장한 이길용(1899~?) 기자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벌어진다. 이길용은 정현웅에게 사진 수정을 부탁했다.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울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근무하던 청전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사건으로 이길용과 이상범은 옥고를 치르게 됐고, 정현웅도 동아일보에서 해직됐다.글 = 목동훈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아이클릭아트▲ 임꺽정이 늙은이로부터 검술을 배웠다는 계양산 전경. /임순석기자▲ 조선일보가 1939~1940년에 출간한 소설 임꺽정 초판(한국근대문학관 소장). /조재현기자▲ 인천 서구와 계양구를 연결하는 경명대로. 조선시대 때는 '경명현'(징매이고개)이라는 길고 높은 고개였다. /목동훈기자▲ 인천 서구 검암동 허암산 북쪽에 위치한 '허암지'. 이곳은 허암 정희량이 은거했던 장소로 현재 시비(사진)와 허암차샘이 있다. /목동훈기자

2014-03-13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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