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시인들의 유산 '詩로 떠나는 시간여행'

1920년대는 현대시가 막 성장하기 시작한 때다. 따라서 이 시기 쓰인 작품은 유명 시인의 것이라 해도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못한 경우가 많다.하지만 '인천'의 입장에서는 작품성을 따지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시인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은 공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김소월·정지용·김기림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시인부터 김동환·박팔양 등 남다른 개성으로 주목받은 시인까지 인천을 노래했다.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당시 문인이라면 누구나 인천에 온 경험이 있고, 인천을 배경으로 작품 한두 편 남기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했다.'불란서 수병의 노래'(박팔양·인천항), '보석장사 아가씨의 보석 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진다'(김기림·길에서-제물포 풍경) 등 시인들의 인천에 대한 시어를 볼때 인천은 시인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사정이 이럴진대 인천 토박이 시인들의 애정이 인천 곳곳에 깃들어 있음은 더 설명이 필요없다.오래 전 유명 시인들이 남긴 작품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간 보따리에 담긴 선물이다. 1920~1930년대 시에 등장하는 인천은 인천역·인천항·월미도 등 중구 일대가 주를 이룬다.마음의 여유를 조금 갖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당시 시인들이 마주한 아름답고, 활기차고, 때론 쓸쓸한 인천을 만날 수 있다. 오늘, 다함께 시(詩)를 통한 90년의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박석진기자

2014-03-06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8]1920~1930년대 詩 그리고 인천

김소월·정지용·김기림 등 유명 시인들 작품 배경으로외로움·이별·활기 등 각각의 시선 다양한 공간 표현쉽사리 상상 힘든 해녀 이야기도 전해져 '신선'한국 미학 선구자 고유섭 등 경인선이 문화역량도 키워우리나라 현대 시(詩)는 언제부터 그 틀이 갖춰졌을까.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시가 시의 격조를 갖춘 시기는 1920년대라고 말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시다운 시가 나왔고, 또한 이름난 시인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다.유종호 회장은 그 이전 시기의 시는 '습작'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면 1920년대 이후 등장한 시에 인천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김소월, 정지용, 김기림, 김동환 등 당시 유명 시인 대부분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시를 남겼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시인의 눈에 따라 인천은 외로움이 사무치는 곳이 되기도 하고, 활기가 넘치는 역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또는 이별의 한이 묻어나는 곳이 되기도 했다.인천에도 제주도처럼 해녀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는, 지금 입장에서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당시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다.따라서 1920~30년대 시 속에 담긴 인천을 살피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시대를 풍미한 시인들의 놀이터, 인천서울에 터를 잡았던 유명 시인들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인천과 가까워졌다.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경인선을 타고 온 시인들은 종착역인 '인천역'에 내려 중구 일대를 둘러봤고,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며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는 여객선이 드는 부두가 있었고, 세관은 중부서 앞쪽 도로쯤에 있었다. 또 8부두에는 어선만 닿았다. 당시에는 개항장 '제물포'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 일대를 인천보다는 제물포라는 지명으로 불렀다"고 전했다.김소월(1902~1934)이 1922년 2월 '개벽(開闢)' 20호를 통해 발표한 시 '밤'도 제물포를 그리고 있다. '밤'의 처음 제목은 '제물포에서 밤'이다.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 /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 이리도 무던히 / 아주 얼굴조차 잊힐 듯 해요벌써 해가 지고 어두운데요 / 이곳은 인천에 제물포, 이름난 곳, /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 바닷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후략,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김소월은 제물포에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극대화시켰다. 한국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진달래꽃'에서 풀어낸 이별과 헤어짐에 대한 절절함이 어두운 밤, 비 내리고 바람 부는 제물포에서도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모더니즘 시인의 대표격인 정지용(1902~1950)은 총 4편의 시에서 인천과 강화를 등장시킨다. 이중 '슬픈 인상화(印象畵)'에서 그려낸 인천은 김소월의 '밤'과 비슷한 모습이다.침울하게 울려 오는 / 축항의 기적소리… 기적소리… / 이국정조로 퍼덕이는 / 세관의 깃발. 깃발. (…중략…)아아, 애시리(愛施利) · 황(黃)! / 그대는 상해로 가는구료…… (1926.6·학조,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문학평론가 김용희는 '정지용 시의 미학성'에서 "'가는구료'에 이어 나오는 말없음표에서 명확하지 않은 불안정하고 서러운 감정의 흔들림이 보인다. 또 가고 있는 움직임을 하나의 무심한 풍경처럼, 하나의 인상화처럼 객관화 시키려고 하지만 붙잡을 수도 보낼 수도 없는 만남과 이별의 이중적 비밀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필연적 법칙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고 했다.반면, 정지용이 비슷한 시기 쓴 것으로 보이는 '내 맘에 맞는 이'에서의 인천은 밝다. 여기에는 '홍예문'이 등장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소다.감각적 시어 사용이 돋보이는 김기림(1908~?)은 '길에서-제물포 풍경'(1936.3·조광)을 남겼다. 연작시 형태인 이 시는 경인선을 타고 인천역에 내려 항구을 둘러보고 다시 인천역으로 돌아와 상행선을 기다리는 '여행과정'을 담고 있다.사용된 시어들이 함축적이고 독특해 이해가 쉽지 않지만 '메이드·인· 아메-리카의 성냥개피', '사공의 포케트',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 등의 표현으로 당시 인천을 통해 들어온 해외 문물과 문화,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한 인천항 풍경을 엿볼 수 있다. # 민족 해방을 갈구한 시인들이 그린 인천파인(巴人) 김동환(1901~?)과 여수(麗水) 박팔양(1905~?)은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계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인천 관련 시를 남겼다.최현식 인하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파인과 여수는 큰 틀에서 카프계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사상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며 "하지만 둘의 성향은 매우 다르다. 김동환이 민족, 농촌문제에 집중했다면 박팔양은 계급, 도시 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고 평가했다.늘 저물 때마다 멀어지네 내 집은 /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압바가 그리워지네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김동환이 쓴 '월미도 해녀요'는 1927년 2월 1일 인천에서 창간한 문예잡지 '습작시대' 제1호에 실렸다. 그는 인천에서 어촌을 만나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월미도는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김동환이 본 월미도와 9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월미도는 얼마나 다를까. 지난 3일 찾은 월미도는 관광지의 모습 그대로였다.횟집과 카페, 놀이기구가 길게 늘어서 있고, 관광안내소와 전망대, 유람선 선착장이 시선을 끈다. 김동환이 시에서 그린 산호를 한 바가지 캐낼 곳도, 해녀의 발자취도 찾을 길 없었다.월미도가 고향인 이범기(82) 씨는 김동환이 '월미도 해녀요'에서 말하듯이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린 '월미도 해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동네 어르신 중 몇몇 분이 과거 해녀 일을 하셨다고 들었다.당시에는 월미도 마을 주변은 온통 갯벌이었는데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질 때는 조개를 줍고, 물이 차면 나룻배를 띄워 인근 섬으로 물질을 나가는 식이었다고 했다"며 "배 크기가 다양해지고 수가 늘어나면서 해녀는 사라졌다"고 회고했다.박팔양의 '인천항'(1927.2·습작시대)은 당시 국제항으로 활약한 인천항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 특히 현실성과 서정성의 갈등, 통합에 기조를 둔 박팔양의 특색이 인천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만나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 부두. /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 잿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중략…)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 제, (…후략,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 # 애향심이 바탕된 예술가의 인천 노래한국 미학의 선구자 고유섭(1905~1944)은 인천 사람이다. 그도 인천을 노래했다. 고유섭이 남긴 시 '경인팔경(京仁八景)'과 '해변에 살기'는 고향인 인천을 향한 애정, 순수한 표현, 당시 인천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로 높은 평을 받고 있다.이 중 '경인팔경'(1925년·동아일보)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로 활동한 고유섭이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며 본 경치를 그린 것이다. 경인선 개통 초기 주안은 소금밭이 있었고, 부평은 평야였는데 경인팔경은 이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지금도 인천과 서울을 잇는 전철이 있지만 창 밖의 풍경은 다르다. 인천, 동인천, 주안, 부평할 것 없이 빽빽한 주택과 허름한 상가가 창을 가득 채운다.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일제 군사적 목적 아래 만들어진 경인선이 예상 밖으로 인천 문화 역량을 키웠고 그 중심에는 경인기차통학생들이 있었다"며 "문학과 도시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다. 이국적, 이색적, 향토적 정취가 고루 가득한 인천에서 고유섭과 같은 걸출한 문인이 탄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글 = 박석진기자

2014-03-06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개화기 인천은 '신소설 단골손님'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지만, 대개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등장한 신소설에 인천이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개화기'라는 당시 시대상황이 반영됐기 때문이다.1883년 개항한 이래 인천은 근대문물의 출입구로서 우리나라의 관문 역할을 해 왔다. 증기선과 철도가 다니고, 여러 외국 회사가 들어선 역동적인 인천의 풍경은 문명개화를 강조했던 신소설 작가에게 분명 매력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또한 개항도시 인천의 활력과 화려함 뒤에 가려진 당시 조선 사람들의 암울했던 모습을 고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대부분의 작가들은 신소설에서 인천을 스치듯 지나가는 장소로 많이 활용하지만, 인천을 거치지 않으면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는 장면이 많다.예를 들어 등장인물이 경성에서 외국으로 또는 외국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는 장면은 '인천'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완성됐다.이때 '인천'이란 단어 안에는 항만, 국제항로, 경인철도가 생략돼 있다. 하와이나 멕시코로 이민 간 가족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꼭 인천을 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미국 이민회사', '임금 노동자', '이민자를 모집하는 교회'가 있던 인천의 풍경이 그려진다.이렇듯 신소설 속 인천은 짤막하게 등장하면서도 새로움과 관련해서는 빠질 수 없는 감초 같은 공간이었다.인천이 등장하는 신소설 중 일부는 절판돼 구하기 어렵고, 미완 작품도 더러 있지만, 시중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현대어로 풀이된 신소설 전집이 많다. 원문도 국회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열람가능하다.영화에서 내가 아는 장소가 나오면 괜히 반갑듯이 신소설 속 인천을 만나는 것도 또다른 반가움이다./김민재기자

2014-02-27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7]신소설

이인직의 '혈의 누' 등서 부산보다 많은 총 17편에 등장연관 단어 '인천항·화륜선·막벌이·감리서·색주가·경인철도…''경인철도 설정' 글의 배경 경성서 인천으로 바뀌는 계기부두노동자·화개동 공창 소재 '개항의 그늘' 엿보여20세기 벽두부터 새롭게 등장한 신소설 속 인천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신소설 속 '인천'의 연관 단어는 '인천항', '화륜선(火輪船·증기선)', '개화(開化)', '막벌이·품팔이', '미국회사', '감리서(監理署)', '색주가(色酒家)집' '경인철도', '해관(海關)', '상선회사(商船會社)' 정도다.이는 신문물, 신식제도로 대변되는 개항기 인천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제 침탈로 파탄 난 조선사회의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신소설은 개화기 정치·사회·문화의 급격한 변화상을 담아낸 서사양식 가운데 하나다. 특히, 계몽적 성격을 보였던 신소설이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면서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대단했다.문학평론가 이경훈이 1905년부터 1919년 사이 발간된 서사물(신소설, 전기, 토론체, 몽유담 등) 속 어휘를 정리한 '한국근대문학풍속사전'을 보면, 전체 130편의 서사물 중 인천이 등장하는 작품은 최초의 신소설 이인직의 '혈의 누'를 비롯해 총 17편이다. 이는 인천보다 먼저 개항한 부산(13편)보다도 더 많다. ┃표 참조 신소설이 지어진 시기나 신소설 속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등장인물들이 경험한 인천은 1883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대 무렵이다. 이들 소설 속의 인천 나들이를 떠나보자.# 인천항 그리고 경인철도"옥련이가 교군(가마꾼) 바탕을 타고 인천까지 가서 인천서 윤선을 타니…."최초의 신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인직의 '혈의 누'에서 인천은 이같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인천'은 주인공 옥련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입양돼 평양에서 오사카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장소다. 이후 인천은 개화기 조선의 관문으로 신소설의 단골 메뉴다.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엔 일본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미국 등 서양인까지 몰려들었고, 나라별로 거주지(조계지)가 설정됐다. 지금의 '차이나타운'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인천과 일본의 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영사관과 상선회사, 무역회사가 인천에 들어섰다. 병원과 교회, 근대식 호텔과 식당도 생겼다. 자연스레 일거리를 찾으러 온 외지인들이 줄을 이었다.바쁘고 활기찬 '인천항'의 표정은 '혈의 누'의 속편 '모란봉'에서 잘 나타난다. "인천항 저녁 빛에 흑운 같이 검은 연기를 토하며 살같이 들어오는 화물선 화통 열어놓는 솔에 인천 상업계의 졸음을 깨트리는 어물전에 꼴뚜기 장사가 먼저 날뛰듯 밥장사나 하고 방세나 받아먹는 여인숙 반도들이 잔반의 배를 타고 정박한 화륜선에 들어가서 손님 마중을 하는데, 돈푼이나 잘 쓸듯한 일등실 손님 앞으로 몰려가서 여인숙에 갈 손님을 찾는다."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조중환의 번안소설 '장한몽'(1913년)에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도 탐이 났더란 말이냐"는 명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원래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이었다가 평양 대동강 부벽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인천은 전통적인 이별의 정한과는 거리가 먼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도시였기 때문인 듯하다.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인천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신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이때부터 소설은 '경인철도'라는 설정 하나로 소설의 배경을 경성에서 인천으로 바꿀 수 있다."네 병의 맥주를 다 마셨을 때에 기차는 이미 인천정거장에 당도하여 '인천, 인천'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 심천풍 '주'신소설 속 인천과 오늘날의 인천은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바다가 땅으로 변하는 '팽창하는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개항장이라는 국제도시로서의 위치는 송도·청라·영종경제자유구역이 대신하고 있다. 인천항이 확장됐고 영종도엔 또 다른 대한민국의 관문인 공항이 들어섰다.규모야 어찌됐든 인천은 대한민국을 찾는 이에게 첫 인상과 마지막 인상을 안겨주는 도시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 개화의 그늘신소설 속 인천은 늘 활력있는 도시로만 그려지진 않았다. 개화의 그늘에서 시름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도 바로 인천이었다."사위는 미국을 갔다하나 진적한 소문은 못들었고…(중략)…암만해도 그 (회사) 본점이 인천에 있다니 거기 가서 좀 물어보려고…."육정수의 작품 '송뢰금'은 러일전쟁 무렵 주인공 계옥이 '졸연이 일어난 풍파'로 인해 하와이 이민을 떠난 아버지 김 주사를 찾아간다는 내용의 미완소설이다. 원산에 살던 계옥이 하와이에 있는 아버지의 소식을 접한 장소는 다름 아닌 인천의 한 '미국 회사'였다.1902년 12월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이 출발한 장소가 바로 인천이다. 육정수는 실제 미국인 데쉴러가 1902년 인천 내동에 세운 이민회사인 '동서개발회사'에서 통역관 및 사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하와이 이민노동자의 고된 생활을 소설로 전할 수 있었다. 송뢰금에서 계옥의 어머니는 이 미국 회사를 '사람 팔아먹는 놈'이라고 표현한다. 개화된 이후로 일제 식민지배가 가속화되면서 전통농업사회도 파탄이 난다. 농촌 사회의 잉여 인력은 인천항 부두노동자가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이해조 소설 '빈상설'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원래 돌이가 각집 별배(別陪·하인)로 월급 푼을 얻어먹고 지내더니 개화된 이후 재상들도 구종하나 데리기도 하고 아니 데리기도 하여 생애 길이 뚝 끊어지니, 막벌이하기로 나섰는데…, 차라리 낯모르는 곳에 가 품팔이를 할 작정으로 인천항구에 와 있던 터이라."항만과 철도로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인천 화개동(지금의 중구 신흥동)을 중심으로 유곽이 자연스레 발달했다.이해조의 또 다른 작품 '모란병'은 주인공 금선이 인천 화개동 색주가(色酒家)집에 팔려가는 장면을 통해 당시 활기찼던 개항장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색주가집에서 도망친 금선을 오히려 나무라는 인천 감리의 모습은 관공서의 부정부패가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화개동 색주가집은 일제시대 총독부로부터 '공창'으로 인정받았지만, 해방 이후 폐쇄돼 인근 숭의동에서 '옐로 하우스'란 별칭으로 명맥을 이어간다.글 = 김민재기자

2014-02-27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인터뷰/전북대 신소설 강의 엄숙희 박사

신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신소설 속 인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전북대 국어국문과에서 신소설을 강의하고 있는 엄숙희(42·여) 박사는 "신소설 속 인천은 근대화의 명암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엄 박사는 "신소설 속에서 인천은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인천이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무게감은 크다고 할 수 있다"며 "인천은 근대화가 진행되는 조선의 면모를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낯선 곳으로의 이동을 위한 장소라는 점에서 긴장과 설렘, 또는 두려움 등을 주었던 공간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그러면서도 "인천에 모여든 노동자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경제적 이유로 농촌 경제가 파괴된 상황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노동자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엄숙희 박사는 신소설 속 인천과 현재의 인천엔 유사한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은 변모된 한국의 모습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곳이라는 점에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라고 생각한다"며 "근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관문으로 기능하면서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끊임없이 변모해가는 잠재력과 활력은 인천이라는 공간만이 지닐 수 있는 부러운 숙명"이라고 말했다./김민재기자

2014-02-27 김민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삼량중고 학생들, 강화나들길 탐방 다양한 이야기 재잘재잘

강화 삼량중고등학교 학생 300명은 졸업하기 전까지 누구나 강화나들길을 한 번 이상 걷는다. 심도기행을 강독하고 강화나들길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이 학교 전동광 교감이 2010년부터 추진한 일이다.지난해 고등학교 1학년 학생 가운데 30명은 작년에 나들길 탐방단 동아리를 만들었다. 매월 토요일마다 나들길을 코스별로 걸었다.지도교사인 전 교감은 아이들이 본인 관심사와 진로 희망에 맞는 탐구 주제를 하나씩 정해 논문을 쓰게 했다.동아리 회원인 이혜림양은 '강화 나들길을 통해 살펴본 한약재(야생초)의 효능에 대한 연구'를 썼다. 이양은 나들길 7코스에 많았던 개망초가 소화불량·위장염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약초 조사를 벌였다.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길 희망하는 장진주양은 석모도 보문사를 답사한 뒤 '사찰 건축물'을 탐구했다.이 밖에도 아이들은 '나들길을 통해 살펴본 갯벌의 특성', '강화 나들길과 심도기행', '철종과 양순'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다.전동광 교감은 "강화에 살고 있는 아이들도 동네 곳곳을 걷는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나들길을 걸어보니 아이들 반응이 좋다"며 "탐방 후 연구논문을 작성하게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교육적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김명래기자

2014-02-20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6]'심도기행'

명소등 200여곳 역사·풍물·문화 소개… 한시 256수 주석까지 곁들여2008년 인천학연구원 기획·김형우 교수등 번역 '심도기행' 다시 펴내 우리나라 답사·여행 문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책을 꼽으라면 단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으뜸일 것이다.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역사 답사 기행이 유홍준 교수가 이 책을 처음 낸 1993년 이후 대중에 널리 퍼졌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친절하게도 답사 코스까지 그려 넣었다. '국민 필독서'가 된 이 책을 들고 너나없이 가족, 친구들과 함께 주말·연휴 여행지로 시골 문화 유적지를 찾아다녔다.학생들 중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독후감을 안 써본 이들이 드물 정도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사람들은 수백 수천 년 전의 자취를 돌아봤고, 먼지 쌓인 역사를 조심스레 좇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는 지금까지 350만 권이 팔렸고, 그 열풍은 현재진행형이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앞서 문화유산 답사기의 '원조'가 인천에 따로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작가 유홍준에 앞서 강화에 살던 선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강화의 역사와 문화, 풍물을 담은 답사기를 냈다.고재형은 환갑이 된 1906년에 강화도 전역의 마을과 명소 200여 곳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겼다.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기고, 고향 산천마저 강탈당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기록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재형은 집에서 가까운 곳은 걸어서, 멀리 떨어진 마을은 말을 타고 갔다.'산천을 일람했다'하니, 그가 강화도를 죽 훑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시 256수를 짓고 설명(주석)을 곁들여 심도기행을 엮었고, 주변에 읽혔다.고재형의 권유로 1909년 심도기행을 손으로 베껴 쓴 구창서(具彰書)라는 이가 필사본 말미에 쓴 발문을 보면 고재형이 심도기행을 남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강도(江都)는 선비의 고향으로 고려의 도읍지였고, 학문이 번성한 곳이 아니었던가 … (중략) … 내가 그것을 몇 년에 걸쳐 읽어보니 강화부 산천의 유래와 사적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했다'.심도기행은 인천학연구원이 기획하고, 안양대 강화캠퍼스 김형우 교수와 강신엽 전 육군박물관 부관장이 번역해 2008년 책으로 나왔다.기자는 지난 14일 이 새로운 '심도기행'을 들고, 고재형이 걸었던 그 길을 108년 만에 따라나섰다. 강화고려역사재단 안홍민, 홍인희 연구원이 동행했다. # 고려궁지 땅속에 정말 커다란 종(鐘)이 묻혀 있을까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에 올랐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1232년에 강화로 수도를 옮겼고 관청리에 궁궐을 지었다. 강화 고려궁은 몽골의 요구로 1270년 허물었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려왕은 무슨 일로 도읍을 옮겨 왔나 / 연경궁과 강안전이 모두 다 허무하네 / 땅에 묻힌 큰 종을 누가 감히 꺼내겠나 / 하늘 가득 우레 소리가 곧바로 몰아친다는데'.고재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주석에서 고려궁지가 헐리고 수백년을 이어온 구전을 소개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그 터에 종(鐘)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발굴하려 하니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고려궁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지지 못한 곳으로 남아 있고, 주변에 건물이 많아 대대적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고려궁지에서 나와 강화북문에 이르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책로다. 북문 통로를 지나 오읍약수터 방향으로 두 갈래 오솔길이 나있다.산성 위에 올라가면 멀리 바다를 볼 수 있다. 특히 봄과 가을에 절경이다. 북문 누각에는 '진송루(鎭松樓)' 편액이 있다.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명명한 것이다. 고재형은 여기도 빼놓지 않았다.'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강화북문 밑에는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 머물렀던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용흥궁 앞 골목 식당에서 강화 전통음식인 젓국갈비로 점심식사를 하고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로 향했다. 병자호란, 신미양요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절한 충신들의 위패 28위가 모셔져 있다.관리인 이성노(70) 씨는 "매해 음력 10월 중정(中丁)날에 제향을 한다. 평소에는 후손과 학생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전했다.제단 아래 방명록을 보니,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일죽(一竹) 이돈오(李惇五) 선생 등의 후손이 다녀갔다고 되어 있다.고재형은 목숨으로 항거한 김상용, 이돈오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목욕재계한 뒤 몸을 바르게 하고 앉아 한 글자 한 글자씩 조심스럽게 기록했을 것이다. # 심도기행 따라 난 강화나들길심도기행길 답사는 지루하지 않다.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인물과 풍속, 멋진 풍광이 고루 담겼다. 책을 보면서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화는 아직도 옛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많다.고재형은 열무당 앞쪽에 큰 시장이 매월 2일과 7일에 선다고 했는데, 현재 강화중앙시장 자리다. 사람 냄새가 가장 진하게 난다는 시장은 100년의 세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강화읍 월곶리 연미정에 간 고재형은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 삼남지방 조운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라고 읊었다.연미정에는 아직도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북녘과 한강, 임진강, 염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다.2005년부터 심도기행을 강독하고 그 길을 여러 번 답사한 이들이 2009년에 '강화 나들길'을 만들었다. 현재 15개 코스가 나 있다.강화 출신으로 나들길 개발에 앞장선 강화 남궁내과의원 남궁호삼(59) 원장은 "100년 전 심도기행길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 역사도 보통 500년이 넘어 후손들이 계속 살고 있다"며 "나들길을 걸으면서 강화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불은면 두두미마을에 고재형 생가가 있다. 이 곳에서 고재형의 5대 종손인 고승국(64) 울산대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그는 "후손이라고 하지만 심도기행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그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며 "이 책을 잘 정리해서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글 = 김명래기자

2014-02-20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강화도 읽기' 화남 고재형의 심도기행

강화에서 나고 자란 선비 화남 고재형(1846~1916)이 문한가 집안의 '일류 문인'은 아니었을지라도 그가 쓴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주목할 만하다.고재형이 환갑의 나이에 아픈 몸을 이끌고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고향의 유풍을 두 발로 찾아다니면서 쓴 기행문이 심도기행이다. 이 기록에는 강화의 역사와 인물뿐 아니라 산천이 오롯이 남아 있다.고재형이 1906년에 쓴 심도기행은 256수의 한시와 그에 딸린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8년 강화문화원이 발간한 '강도고금시선'에 심도기행의 한시가 처음 실렸고, 2008년에 전체가 완전하게 번역됐다.심도기행이 완역돼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100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심도기행을 번역한 안양대 강화캠퍼스 김형우 교수는 "화남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직접 답사했는데, 옛 선비들이 이렇게 고향을 돌아보며 남긴 자기성찰의 기록은 그 예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고재형이 심도기행을 쓴 목적은 후세에 읽히기 위함이었다. 오래 전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고재형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다.강화 삼량고 전동광 교감은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를 거쳐 건평리 바닷가 해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일명 '해가 지는 마을길'로 낙조가 일품이다"고 말했다.작년 한 해 강화를 찾은 관광객 수만 해도 247만명이다. 이들에게 심도기행을 알려주는 것은 어떨까. '2015 세계 책의 수도'인 인천에서 심도기행이 재탄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김명래기자

2014-02-20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仁川을 남다르게 생각한 '백범의 기록'

누구는 백범 김구를 '인천의 인물'이라 하고, 누구는 백범이 인천에서 잠시 옥살이한 것뿐인데 인천과의 연관성을 뭐 그리 내세우느냐고 한다.'백범'과 '인천'은 그렇게 어정쩡하게 지금껏 관계를 맺어 왔다. 김구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인천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백범일지'에서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했다.김구가 1946년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인천이다. 그는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21세 때 인천감리서 감옥에 수감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탈옥에 성공했다.김구는 인천 감옥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여기서 '대학' '세계역사·지리' '태서신사' 등의 신서적을 읽었으며,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다.인천 감옥 생활은 혈기 왕성한 애국 청년 김구에게 교육가·독립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이기도 했다.사형 선고를 받은 김구를 구명하고자 강화사람 김주경, 인천의 물상객주 박영문과 안호연 등이 애를 썼다. 김구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항상 간직했다.김구는 1900년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도에 갔으나 안타깝게도 김주경은 강화를 떠나 있었다. 김구는 김주경 소식을 기다리면서 강화도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며 30여 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39세 때는 또 다른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노역을 했다.수많은 출판사가 '백범일지'를 펴냈고, 이 책은 오랜 기간 스테디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백범은 여기에서 인천 감옥 탈옥 과정, 인천 동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담아 내고 있다.김구는 인천을 중요하게 여겼건만, 인천은 김구의 발자취를 찾고 기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백범과 인천 연관성을 크게 보지 않는 사람은 '백범일지'를 다시 한 번 읽기를 권한다./목동훈기자

2014-02-13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5]백범일지

화개동 마루터기~문학~만수~부평~양화진나루 탈출강제노역 축항 공사현장은 인천여상앞 제1부두로 추정구명도운 지인 찾아 강화 온 김구 '홍익인간' 휘호 남겨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합일초등학교 교장실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1946년 11월, 김구는 과거 자신을 위해 구명 운동을 벌인 강화사람 김주경의 흔적을 찾고자 강화도를 방문했다.당시 김주경의 집 인근 합일학교에서 '김구 선생 환영대회'가 열렸고, 그는 이 휘호를 합일학교에 남겼다. 합일초교에 김구의 휘호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김구가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에 홍익인간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그는 문화의 힘을 강조하고 평화 실현을 희망하면서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김구는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8월 인천감리서 감옥에 수감되면서 인천과 달갑잖은 인연을 맺었다. 1896년 3월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제의 국모 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쓰치다를 때려죽였다.두 달 뒤 황해도 해주부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옥에 갇혔다가 외국인 사건을 다루는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김구는 세 차례의 심문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그 당시 김구 구명 운동에 나선 사람이 바로 김주경이었다. 인천의 물상객주 박영문, 안호연 등도 옥살이 중인 김구와 그를 뒷바라지하던 부모에게 도움을 줬다.김주경은 재산을 다 팔아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김주경은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한 편의 시를 남겼고, 이는 김구가 탈옥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해방 후, 김구가 처음 조국의 땅을 밟았을 때 독립운동가 이봉창 등 3명의 가족을 찾고자 했는데, 이 중 한 명이 김주경이었다.하지만 김주경, 박영문, 안호연이 인천 어디에 살면서 무슨 일을 했고 그 후손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김구의 '인천 탈출 경로'를 알 수 있는 자료도 없다.기자는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 도움을 받아 '백범일지'를 토대로 김구의 인천감리서 탈출 경로를 추정해 봤다. 또 강화에서의 발자취도 더듬어 봤다. # '김구'를 '백범'으로 만든 인천김구는 1898년 3월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한다. '백범일지'를 보면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 '화개동 마루터기' '인천과 부평 등을 지나갔다' 등의 탈출 경로를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나온다.인천감리서가 있던 중구 내동 83에는 현재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있다. 스카이타워 아파트 앞에 '감리서 터 안내판'이 있는데, 감리서 터는 이곳부터 언덕 위에 있는 성신아파트 자리까지로 매우 넓었다.김구가 탈옥 후 감리서 뒤쪽인 성신아파트와 내동교회 샛길을 이용해 도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 길 주변에는 중국인 묘지가 있어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이 적었다고 한다.김구는 '백범일지'에 '용동 마루터기에 당도해 있었다. (중략)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였다'고 기록했다. 용동 마루터기는 우리은행 인천지점 인근으로 추정된다.여기서 능인사와 동인천효인요양병원이 있는 언덕으로 이동하면, 실제로 답동성당(천주교의 뾰죽집)이 보인다. 김구는 용동 마루터기에서 화개동(현 신흥동) 마루터기로 갔다. 화개동 마루터기는 '해광사'가 있는 언덕으로 비정할 수 있다. '백범일지'를 보면 화개동 마루터기에서 서울 가는 길로 가다 산을 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산은 문학산으로 추정된다.김구가 화개동 마루터기에서 문학동, 만수동, 부평 등을 거쳐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을 것으로 장회숙 대표는 추정하고 있다.장 대표는 옛 지도와 현 지도를 비교해 가면서 김구 탈출 경로를 그려낸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간만 4년이 걸렸다고 했다.김구는 1911년 '안악 사건'(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자금을 모집하다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일)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또 한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김구는 '백범일지'에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고 적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뛰어내려 죽고 싶을 정도였다는 심정까지 토로했다.'인천항사'를 보면, 조선총독부는 1911년 4월 축항 공사를 시작, 390여 만엔을 투자해 1918년 준공했다. 갑문(閘門) 선거(船渠)에 속하는 모든 설비는 1918년 10월에 이르러 대부분 완성됐다.당시 김구가 강제 노역을 하던 축항 공사 현장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앞 지금의 '인천항 제1부두'로 추정된다. 당시 인천여상 자리에 일본인 지휘부가 설치됐다고 한다. # 백범과 강화도의 진한 인연1900년, 김구는 수감 중이던 자신을 위해 구명 운동을 벌인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도를 간다. 그러나 김주경을 만나지 못하고 동생 진경 집에서 3개월간 아이들을 가르쳤다.'백범일지'에는 '강화에 도착해 김경득(김주경)의 집을 찾아 강화성의 남문 안으로 들어갔다'고 나와 있다. 김주경 집은 강화읍 남문안길 7 '황씨주택'(1928년 건립된 고택)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지난 8일 백범과 강화의 인연을 찾아 나섰다. 자신의 할아버지(한효석)가 강화도에서 3개월간 김구에게 글을 배웠다는 한상운(71)씨를 만났다.그는 "김구 선생이 가르친 30여 명의 아이들 가운데 1명이 우리 할아버지"라며 "황씨주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주경의 초가집이 있었다"고 했다.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강화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며 "당시 김구 선생이 황씨주택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김구는 1946년 11월 강화도에 와 김주경 집, 합일학교, 전등사 등을 방문했다. 김주경 집과 합일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사진, 황씨주택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김구는 1900년 강화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김주경의 친구이자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유완무를 만난다. 김구는 유완무 권유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고친다. 또 유완무 제자인 강화도 장곶 주윤호 진사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주진사는 백동전 4천냥을 유(완무)씨에게 보냈는데, 나는 그것을 온몸에 돌려 감고 서울로 왔다. 주진사 집은 해변이었으므로 11월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달려 있었다. 또한 해산물들이 풍족한 곳이었으므로 몇 날을 잘 지내고 왔다. 그 돈으로 노자를 해 귀향길에 올랐다'고 했다.강화 장곶은 주씨 집성촌으로, 지금은 '낙조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만난 주윤호 진사 증손인 주영목(74)씨는 주진사가 아닌 그의 형(주윤창)이 김구에게 도움을 줬다고 '백범일지'와는 사뭇 다른 얘기를 했다. 백범이든, 주영목씨든, 둘 중의 한 명은 주씨 형제를 착각하는 셈이다.주씨는 "증조할아버지(윤호)는 29살 때 돌아가셨다. 김구가 장곶에 오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며 "증조할아버지 형(윤창)이 벼 2천석을 팔아 돈을 마련해 김구에게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당시의 백동전 4천냥을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1910년에 쌀 2천석이 현재 6억2천662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한국은행은 분석한다. 4천냥은 당시 매우 큰돈으로 추산된다. 주윤창은 마을 지주로, 집 마당에 큰 연못이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주윤창 집 주위에는 아직도 감나무가 있고, 마을 토박이들은 벼농사를 짓고 있다.기자는 또 김구가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옥살이할 때 도움을 준 물상객주 안호연의 후손도 찾아 나섰다. 안호연의 증손으로 추정되는 안창원(1948년생)씨를 찾던 중 그의 친척으로부터 몇 년 전 병으로 숨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안창원)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려 했으나, 이들은 "아는 것이 없다"며 백범 얘기를 꺼려했다.'백범'과 '인천'의 깊은 연관성이 더 이상 닳아 없어지기 전에 모두가 나서서 그 인연을 복원해야 할 시점이다.글 = 목동훈기자

2014-02-13 목동훈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문인 이규상의 '인천 노래'

조개 줍는 아낙·소금밭 염염이의 고달픔…18세기 '인주요' '속인주요' 깊은 애민의식자취 감춘 송도 갯벌이 '빌딩 숲 상전벽해'250년 전 '인천 노래'를 읽었다. 선비 이규상(李奎象·1727~1799)이 18세기 중반에 인천을 읊은 '인주요(仁州謠)', '속인주요(續仁州謠)'다.많이 알려진 인천 노래와 달랐다. 민요, 가요 할 때 '요(謠)'는 노래를 말한다. '이별의 인천항'(박경원)은 한국전쟁으로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한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심수봉)는 인천항에서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인의 마음을 담았다.이규상이 쓴 인천 노래는 외딴 시골에서 조개를 줍는 어민들의 얘기다. 마치 갯가에서 일하던 여인들이 노래한 갯가노래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지체 높은 양반이 일반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시선을 고정했다는 점이 생경할 따름이다. 연안부두, 월미도, 산업단지, 국제도시 등으로 상징되는 지금 인천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옛 모습이 이규상의 노래에 오롯이 담겼다.지난 달 26일 이규상이 올랐을 문학산에 갔다. 이규상은 문학산성이 있는 주봉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갯마을과 바다를 조망했을 것이다.현재는 아파트, 빌라로 빽빽하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인주요·속인주요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옛 갯벌이 자연스레 눈앞에 펼쳐진다. 이 노래를 처음 접했다는 민속학자의 이야기도 귀를 기울일 만하다. # 250년 전 인천과 문학산 남쪽 바다이규상은 제263대 인천부사였던 부친 이사질(李思質)과 인천도호부 안채(內衙)에 기거하면서 인천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1899년 편찬된 인천부읍지를 보면 인천도호부에서 먼우금(지금의 옥련·동춘·청학·연수동)까지 거리는 10리길(약 4㎞)이었다.247가구에 조세와 부역의 대상이 되는 남성 796명과 여성 727명이 살았다. 대부분 조개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었다.동막부락에서 태어난 정태칠(65) 남인천농협 이사는 "하늘만 보고 산 동네였다"고 말했다. 그는 "천수답이었는데 날이 가물고 땅에 짠기가 많아 쩍쩍 갈라졌다. 반농반어로 어머니는 주로 바다에 나갔고 농사는 함께 지었다"고 전했다. 이규상은 이렇게 기록했다.'발 엮어 말장에 늘어놓아 횡행의 바다 끊으니 / 겹겹이 어살 안에는 내중성이 되었네 / 바닷물 오고 간 잠깐 사이에 / 소라, 게, 물고기, 새우가 모두 가득하네'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갯벌에는 물이 흐르는 길이 있다. 옛 어민들은 이곳에 나무 울타리(어살)를 설치해 물고기를 잡았다.정태칠 이사는 "숭어는 봄철 조금 전후에 많이 올라왔다. 안개 낀 날에는 엄청 잡혔다"고 했다. 조금은 조수가 가장 낮을 때로 갯벌이 넓게 드러나지 않는다. 갯벌에 직접 발을 담그고 어살에 가득찬 물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규상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이다.이규상의 노래에는 백합, 준치, 소라, 숭어, 게, 새우가 등장한다. 대부분 갯벌에서 난 것들이다. 송도 갯벌은 한때 우리나라 최대 조개 생산지였지만, 신도시 매립사업으로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인천시청 손시형 수산자원팀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인천 최대 어획량 어종은 갯벌에서 나온 패류에서 어류, 꽃게 순으로 변했다"며 "현재 숭어는 강화·무의도에서, 백합은 장봉도에서, 소라는 덕적·영흥도에서, 새우는 영흥도에서 조금씩 잡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 봄날의 생생한 어촌 풍경지난 달 22일 오후. 남인천농협 창고에서 만난 옛 동막부락 출신들에게 이규상의 노래를 들려줬다.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앞둔 이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다.이들은 '어린 대합 얕게 묻혀 있고 큰 대합은 깊게 있되'란 구절을 듣고는 "백합은 겨울잠을 잘 때 한 자(약 30㎝) 이상 들어가고, 4~5월에 아지랑이 필 때 숨구멍을 뚫고 솟구쳐 올라온다"고 했다.'능허대 아래 백사장 길게 뻗어 있고 / 점점 나타난 붉은 꽃은 모두 해당화' 구절에선 "능허대 백사장이 돌산 앞에서 빙 돌아 타원형으로 300m 정도 이어졌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쭉 서 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煮鹽) 생산 풍경도 이규상의 관심거리였다. '벌집과 제비집인양 소금솥 늘어있고 / 소금솥의 소금은 흰 눈처럼 퍼져있네'란 구절을 본 부산박물관 류승훈 학예사는 "(지금 방식의) 천일염은 1907년 이후에 생겼다. 그 이전 해안가에는 뻘막, 즉 소금굽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고 했다.'어부들 염부들 귀신을 좋아하여 / 돼지를 찌고 쌀밥을 해서 새봄에 제사 지내네'란 구절에 대해 류승훈 학예사는 "첫 소금을 낼 때가 보통 3월인데, 염전에 돼지 뼈다귀를 걸어 놓고 고사를 지냈다"고 말했다.조선은 고려와 달리 개인이 세금만 내면 소금을 자유롭게 만들도록 했다. 염부들의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염부가 눈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시받았고, 마을에서는 염염이·염한이로 불렸다.이처럼 천한 일에 선비 이규상은 왜 관심을 보였을까. 그의 노래에 답이 있다. 그는 '물에 기댄 인생 그대는 비웃지 마소 / 모든 백성들이 일반 구해 먹는 것이라네'라고 적어, 깊은 애민 의식을 '인천 노래'에서 드러내고 있다.일제가 1907년 주안염전을 만들면서 우리나라에서 천일염이 처음 시작됐다. 해방 후 전매청이 운영하던 주안·남동·소래염전은 1963년 설립된 대한염업주식회사로 넘어갔다. 당시 대한염업은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제염업 회사였다. 주안염전은 1968년에 폐전됐고, 남동염전은 1986년 문을 닫았다.소래염전은 1996년 대한염업이 폐업하면서 사라졌다. 1970년 무렵 4~5년간 남동염전에서 일했다는 임춘식(61) 씨는 "동춘동, 선학동, 문학동에서 온 사람들이 염전에 많았고, 월급은 3천원 정도로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었다"고 말했다.이규상은 덕적도와 용유도의 풍경도 노래에 담았다. 덕적도에서는 당나라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온 역사를 떠올렸다. 중국에 진상품으로 보내는 진헌마 정책이 사라진 뒤 쇠락한 용유도의 쓸쓸한 정취도 느낄 수 있다.또 임진왜란 때 주민들과 함께 문학산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던 중 병사한 인천부사 김민선을 주민들이 모신 사당(안관당), 고려 때 왕에게 뱃길을 안내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설화의 주인공 손돌 무덤도 이규상이 현장 답사를 통해 기록했다.글 = 김명래기자사진 = 임순석기자

2014-02-06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인터뷰

국립민속박물관 정연학 학예연구관은 이규상의 인주요·속인주요에 대해 "18세기 중후반 인천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한 훌륭한 기록물이다"고 평가했다.지난 달 23일 오후 안산외국인주민센터에서 만난 정연학 연구관은 "오히려 문헌에는 이런 기록이 안 남아있다"며 "지명과 어종 등이 확실하게 나와 있고 어촌 생활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다"며 이렇게 평가했다.그는 이규상의 노래에서 특히 문학산 안관당과 손돌 무덤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에 주목했다. '속인주요'에서 이규상은 문학산 꼭대기 안관당에서 굿을 하는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했다.또 이규상은 조선 말엽까지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손돌제사의 모습을 '인주요'에 남겼다.정연학 연구관은 "이규상 노래에 나온 문학산 안관당과 손돌무덤 이야기 등은 향후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특히 손돌 무덤에 직접 가서 뱃사람들이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기록한 자료로는 이규상이 가장 앞서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손돌설화를 담고 있는 현존 기록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년)·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년) 두 권뿐이다.정연학 연구관은 '인천 연안의 어업'(2011년), '인천 섬 지역의 어업 문화'(2008년)를 집필한 인천 어업문화 전문가다. 현재는 안산 원곡동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문화를 탐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김명래기자

2014-02-06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서민 생활상 담아낸 '선비의 노래'

문학이 때론 사서(史書)보다 더 많은 역사적 기록을 담아내기도 한다. 18세기 선비 이규상이 쓴 '인주요(仁州謠)'와 '속인주요(續仁州謠)'가 그렇다.조선시대 지방에 간 서울 양반들이 '외부의 시선'으로 시골에 펼쳐진 자연 속에서 풍류를 노래하거나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드러낸 게 일반적이었다면 이규상은 촌동네의 평범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해 시로 남겼다. 그는 명문가 집안의 양반이었지만 하층민과 접촉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천시하던 갯가의 염부(鹽夫)와 외딴 섬에서 말을 기르는 목자(牧子)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또 세속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1413년에 왕이 내린 '인천'이란 지명 대신에 당시 민가에서 널리 쓰이던 '인주'를 택해 시의 제목으로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려 때도 그랬지만 당시까지도 서울 양반들 눈에는 인천이 '외딴 시골'에 불과했다.당시 기록문화는 양반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바닷가를 생계의 터전으로 삼은 옛 어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갯가노래', '뱃노래' 등과 같은 구전 민요 정도였다.이 같은 상황에서 이규상의 인주요·속인주요는 조선 후기 인천 지역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쓰일 만하다.지금 우리는 어떤 '인천 노래'를 쓸 것인가. 모두가 함께 고민할 문제다./김명래기자

2014-02-06 김명래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숨은 문인 이규상의 '김부자전'

재산 있으되 나누고, 부유하되 권력탐하지 않는 '착한 부자'18세기 인물전 '일몽고' 180명 이야기중 하나… 김한진과 문답 형식 기록'문학산 등지고 있다' 내용 미루어 인천도호부청사 맞은편 자락 집터 추정 이규상(李奎象·1727~1799)은 인천을 노래한 '숨은 문인'이다. 그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이사질(李思質)이 1765~1768년 인천부사를 지낼 당시 인천에서 생활했다.학계에서는 인천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문인으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과 이규상을 꼽는다. 이규상은 자신이 쓴 18세기 인물열전인 '일몽고(一夢稿)'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일몽고는 18세기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 180여명의 이야기를 담은 문집으로, 1935년 간행된 한산 이씨 문집 '한산세고(韓山世稿)'에 포함(제19권~제31권)돼 있었다. 이중 권28에는 총 17개의 전(傳)이 실려 있다. '김부자전(金富者傳)'은 그중 하나다.이규상이 1765년 인천 곳곳을 유람하고 이를 소재로 지은 '인주요' 9편과 '속인주요' 9편은 당시 인천의 현실, 인천 사람들의 삶, 복식, 역사와 유적, 풍류 등을 고루 담아 인천의 '죽지사'(竹枝詞)로 불린다. '문학 속 인천을 찾다' 다음 편에서는 '인주요'와 '속인주요'에 그려지는 인천을 찾아 나선다.명문가인 한산 이씨 자손이었던 그는 잠시 최말단직 품관인 참봉(參奉)을 지내기도 했지만 이내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평생 학문·문장에 묻혀 살았다.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규상은 호를 일몽(一夢)이라 했는데 쉰 살에 부인을 잃고 학문에 의지해 살아가는 허망한 인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평생 시만큼 좋아한 것이 없어 '시를 보면 큰 사내가 음식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샘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라고 했다"고 전했다.이규상의 '일몽고(一夢稿)'는 유학자·실학자·기술자·서예가·화가 등 18세기 이름난 180여명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특히 이규상은 이야기 대상을 당파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정해 당시의 사회상·문화·예술 등을 짐작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일몽고에 담긴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김부자전(金富者傳)'은 단연 눈에 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재물·부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관직을 뒤로 하고 평생 글을 지으며 살았던 이규상이 이와 달랐을 리 없다.그런 그가 열녀·효자·충신이 아닌 인천 문학산 자락에 살았던 부자 '김한진'을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규상은 김부자전 말미에서 그 이유를 밝혀 놓았다."대저 부자의 말은 졸렬한 것 같으나 실질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긴한 밑바닥에서부터 하여 이후 것을 만든 것이니, 황로의 뜻에 몰래 합하는 자인가. 천만의 재화를 쌓았고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순수한 복을 누릴 만한데도 스스로 엎어지지 않았다…(중략)…'하려고 해서 한 것이 없는데도 되었다'는 것은 천명을 아는 자의 말에 가깝다. 이런 까닭에 김부자전을 짓는다."이규상이 김부자전에서 그리는 김한진은 그야말로 '착한 부자'다. 분수를 알고, 나눔을 실천하고, 과한 욕심을 품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어쩌면 이규상이 김한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김한진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착한 부자에 대한 희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규상과 김한진이 나눈 문답에서는 평범한 삶의 모습과 소시민이 기대하는 긍정적 부자상을 찾아보는 일도 가능하다. # 부자 김한진의 검소한 생활김부자전에 따르면 김한진은 가진 돈이 만 냥에 가깝고, 곡식은 천 석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을 통해 김한진의 재력을 추측해 보자.주인공 허생이 한양에서 제일 부자인 변씨에게 빌린 돈이 딱 만 냥이다. 허생은 이 돈으로 안성에서 시세의 두 배로 과일을 모조리 사들여 나라 경제를 뒤흔든다.조용헌(불교민속학박사)은 '소설보다 더 재미난 조용헌의 소설'에서 "조선시대 7~8인 가족이 1년동안 먹는 쌀의 양이 대략 5가마라는 통계가 있었다. 1천가마는 2천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고 썼다.김한진은 큰 부를 축적했지만 무척이나 검소하게 생활했다."김부자 부자(父子)의 집은 제도가 일정하여 주방이 두 칸, 마루가 두 칸, 방이 두 칸이고, 또 한 칸 방 좌우에 처마를 더하여 모두 일곱 칸이었다.…(중략)…마당은 겨우 말을 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중략)…집에 완호물은 없이 다만 농기구와 풀을 저장해 놓았을 뿐이다."이 김한진의 집은 '문학산을 등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미뤄보면,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던 남구 문학초등학교 맞은 편 문학산 자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규상은 재력에 비해 소박한 집을 보고 느낀 의아함을 글로 그대로 드러냈다.또 문답을 이어가며 김한진이 비단 옷을 입지 않고, 말을 타지 않으며, 육식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규상이 짧은 문답에서 굳이 김한진이 입고, 먹고, 즐기는 것을 물은 것은 부에 휘둘리지 않고 평범하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함이다.김부자전에는 당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삶의 변화도 보인다.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17~18세기 인천의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어 낼 자료는 찾아내기 어렵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 이앙법 등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돼 전국적으로 농사를 통해 부를 쌓은 이들이 출현했다.바다에 인접해 어업 치중이 높았던 인천에서도 같은 변화가 있었을 거라 본다. 김부자전에서 김한진의 아버지가 어업에서 농업으로 바꾼 후 재산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 그 역시 농사를 통해 계속 부를 쌓았다는 것은 시대상에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 현대판 김한진의 등장을 기대하며여러 학자들이 김부자전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시대 치부담(致富談)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긍정적 부자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이 시기 치부담 주인공은 대부분 우연한 횡재, 조력자의 등장, 매점매석 등으로 부를 쌓는다. 또 부자는 주변으로부터 원망을 받는다. 하지만 김부자전은 이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김한진은 부를 쌓는 과정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김한진은 가치관에서도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권력으로는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당신의 부유함으로 첨사나 만호의 공명을 바꾸고자 하십니까?"하니 "바꾸기도 어렵고 비록 바꿀 수 있더라도 낮은 관직으로는 오래도록 먹고 살 수 없으니 본분을 지키느니만 못합니다"하였다. …(중략)…"한 사람이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없는데, 당신이 농사를 지을 때는 좋은 땅을 택하여 농사를 짓습니까?"하니 "내 땅이지만 좋지 못한 땅은 남에게 주면 사람들이 경작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쉽게 묵은 땅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좋지 못한 것을 골라 내가 스스로 거기에 농사를 짓습니다"하였다.이규상은 대화를 통해 김한진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부자임을 알아봤고, 그의 삶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문답법을 선택해 가능한 객관적으로 김한진의 삶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배우도록 했다.최기숙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연구교수는 "조선시대는 윤리의식이 경제관념에 앞섰던 때지만 후기로 가면서 사람들은 화폐의 가치, 돈의 힘을 알게 됐고 바람직한 부자에 대한 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눔을 아는 부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놀부와 같은 인물을 내세워 문학 작품속에서 현실의 기대와 아쉬움을 녹여냈다. 현재 우리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김한진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김한진은 이들 5명에게 재산을 똑같이 배분했다고 한다. 김한진 집안에는 유산을 둘러싼 다툼도 없었다. 상속재산 분배 문제로 칼부림까지 나는 세태에서 볼때 무척이나 선구적인 부의 분배였다.'착한 인천 부자' 김한진이 살다 간 지 250여 년. 문학산을 병풍삼아 빽빽하게 들어선 문학동 빌라촌. 지난 21일 오후 찾은 문학동 일대의 고만고만한 건물들에는 우리네 소시민들의 삶의 풍상이 짙게 배어났다.김한진과 아들들의 집도 이곳 어딘가에서 한 마을을 이룬 10여채의 가옥과 비슷한 모습으로 섞여있었을 듯 눈에 아른거렸다. 가진 것을 드러내지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말이다.작가 이규상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인천도호부청사의 흔적이 남은 인천문학초등학교 교정에서 문학산을 바라보니, 부자이면서도 진정 나눔을 알고, 소박한 생활을 즐겼던 김한진 같은 현대판 '착한 인천부자' 이야기를 많이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밀려왔다.글 = 박석진기자

2014-01-22 박석진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고려문인 이규보의 詩에 투영된 인천

'동국이상국집' 현존 문학작품중 인천 첫 등장1219년 계양부사 부임… 60여편 넘는 글 남겨스스로 '詩魔'라 지칭·강화서 74세때 생 마감150년전 류씨 집안 땅에서 방치된 묘역 발견항몽시절 귀족들 무덤터 '우리나라 7대명당'인천의 지형과 인물, 풍습을 가장 먼저 문학으로 남긴 이는 이규보(1168~1241)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문학 작품 중에서 인천이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다.이규보는 1219년 여름부터 1220년 여름까지 1년여를 계양부사로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인천광역시장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그리고 이규보는 여몽항쟁기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1232년 강화에 들어와 거기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이규보는 자신이 평생 지은 시가 8천여 수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밝힐 정도로 다작이었다. 이규보는 말년에 자신을 일컬어 시 쓰는 귀신에 씌었다는 뜻으로 시마(詩魔)라 칭하기도 했다. 다음 글은 그가 얼마나 시 쓰기에 열중했는지, 잘 드러낸다.'내가 나이 들어 오랫동안 색욕(色慾)은 물리쳤으나 시와 술은 버리지 못했다. 시와 술도 단지 때때로 흥미를 붙여야 할 뿐이지 벽(癖)을 이루면 곧 마(魔)가 되는 것이다'.벽을 넘어 마가 될 정도로, 눈에 보이고 생각이 미치는 것은 시로 남겨야지 직성이 풀리는 이규보였다. 그 이규보는 인천에서 짧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60편이 넘는 글을 남겼다.이규보의 글 속에 투영된 인천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근무했던 계양구 일대를 찾아 나섰다. 또한 이규보가 누워 있는 강화 묘역도 둘러보았다. 거기서는 깜짝 놀랄 얘기도 들었다. # 계양산에 올라 바다를 보니올해 들어 가장 추웠다는 지난 13일, 고려의 대표 문인 이규보가 바라본 시선을 따라가기 위해 계양산을 올랐다.계양의 태수로 있던 이규보는 1220년 여름, 수도인 개경으로 인사발령을 받아 놓고 이곳에 자주 놀러 다니고는 했다.794년 전 이규보가 들러 술을 마시면서 놀았다는 계양산 정상 부근의 만일사(萬日寺)와 명월사(明月寺)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계양구청이나 계양문화원에서도 이 두 절의 터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계양산 정상에는 평일의 혹한 속에서도 등산객이 꽤나 됐다. 땀이 쏟아지고, 숨이 헐떡이는 상황에서도 시선은 서해로 먼저 향했다. 이규보가 만일사 누대에 서서 구경했다는 풍광을 찾기 위해서다. 그는 여기서 본 것을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로 남겼다.'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작은 배가 떠 있던 곳은 육지가 되어 청라경제자유구역의 고층빌딩 숲으로 변했다. 중국발 공해물질로 인해 저 멀리 여러 섬은 희미했다.만일사의 스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자연도(紫燕島)는 인천대교로 송도국제도시와 연결되고, 영종대교로 서울과 이어졌다. 자연도는 영종도의 옛말이다.개경의 곡령은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통진의 망산인 애기봉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인천 도심은 아파트촌과 공장지대가 뒤섞여 차가운 대기에 희뿌연 연기를 여기저기서 내뿜고 있었다.천년 전에 대한 상상이 너무 깊었던 것일까. 계양산 아래 펼쳐진 풍광을 바라보는 시선은 흔쾌하지 않았다. # 가난함을 스스로 즐겼다는 자오당(自娛堂) 터는 활터가 되고계양산에 오르기 전 이규보가 지냈던 관사 자리부터 찾았다. 계양부사로 발령받고 와 처음 본 자신이 묵을 관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그는 그 집의 당호(堂號)를 '자오당(自娛堂)'이라 붙였다. 홀로 즐거워 한다는 의미다. 이규보는 부임 직후인 1219년 음력 6월 24일에 '자오당기(自娛堂記)'를 지었다. 이규보는 이 작품 속에서 계양부사의 관사가 얼마나 궁상맞은지 여실히 보여준다.'고을 사람들이 산기슭의 갈대 사이에 있는, 마치 달팽이의 깨어진 껍질 같은 다 쓰러진 집을 태수(太守)의 거실이라고 했다. 그 구조를 살펴보니, 휘어진 들보를 마룻대에 걸쳐 놓고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 했을 뿐이다'.식구들은 하루도 묵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규보는 홀로 이 초라함을 즐긴다는 의미로 '자오당'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이 자오당 터는 지금 계양구청 소속 양궁선수단의 훈련장소로 쓰이고 있다. 양궁장 한가운데 서 있는 표지석이 이곳이 이규보가 묵었던 관사 자리라는 것을 알릴 뿐이다. 기자가 찾은 이날은 강추위가 맹위를 떨쳤는데도 선수들은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 초정(草亭)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자오당 터에서 내려오면 바로 신도브래뉴아파트 단지 앞에 도로변 공용주차장이 있는데, 여기에 이규보가 중건해 여름철 더위를 피하는 곳으로 이용했던 초정(草亭) 터가 있다. 지금은 빌라가 들어서 있을 뿐 아무런 표식도 없다.'뒤에 오는 자에게 가볍게 허는 일이 없기를 부탁하고, 또 이 태수(이규보)를 위하여 불후(不朽)의 자취를 보존하게 하려는 것이다'.이규보가 개경으로 임지를 옮기기 직전인 1220년 음력 7월에 '계양 초정기(草亭記)'를 일부러 남기며 한 간곡한 부탁을 세월은 잊고 말았다. # 묘역에선 천년의 시혼(詩魂)이 숨쉬고계양산에서 바라본 김포, 강화, 개성의 잔영이 가시기 전인 지난 14일, 이규보 묘역을 살피기 위해 길을 잡았다. 1시간여를 달려 강화군청에 도착해 이규보 묘의 위치가 그려진 강화군 관광안내도부터 찾았다.길상면 전등사 가는 길 쪽으로 옥토끼우주센터를 조금 지나치자 '이규보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우회전 하자마자 대번에 알 수 있는 너른 묘역이 눈에 들어왔다. 이규보를 기리는 사당과 문학비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주인 모를 묘를 지나 위쪽에 이규보가 잠들어 있다.지방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이규보 묘역이다. 형태만 겨우 남아 있는 문인석이 좌우에 섰고, 그 앞에는 역시 좌우에 양석(羊石)이 있다.봉분 바로 앞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갈이 서 있고, 조금 떨어져서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묘표가 지난 세월의 풍상을 설명한다.손이 곱아서 비문의 내용조차 제대로 옮겨 적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전해 오는 이규보의 문학적 울림은 뚜렷했다. # 영영 사라질 뻔한 이규보 묘이규보 묘역 부근에는 민가가 몇 채 있다. 묘역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아주 엉뚱한 얘기를 들었다.이규보 묘가 세상에 드러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아주머니는 저기 기와집이 오랫동안 묘역을 관리했던 집이어서 그 내막을 알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이렇게 만난 류호옥(57)씨는 귀가 솔깃할 얘기를 했다."고조할아버지가 어느 날 나무 하러 뒷산에 올라가셨다가 이규보 묘비임을 알리는 비석을 발견하셨대요. 한 150년 전일 겁니다. 그 산은 우리 집안 땅이었는데, 이규보 문중인 여주 이씨 종친회에 내어 주셔서 지금처럼 묘역을 꾸밀 수 있었다고 합니다."류씨의 얘기를 종합하면,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조차 이곳에 이규보 묘소가 있는 줄도 몰랐다. 봉분조차 뚜렷하지 않을 만큼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몽골은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강화에 있는 모든 건축물을 헐어버릴 것을 명령했는데, 묘역이 이때 훼손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돌보는 이 없이 오랜 비바람 속에서 숲에 묻힌 것일 수도 있다.어찌되었든, 류씨 집안은 비석을 발견하고 이를 여주 이씨 문중에 알렸고, 비석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유물을 수습하고 해서 지금의 묘소 자리를 새로 잡았다고 한다.이 때문에 봉분 위치가 원래부터 이 자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류씨 집안은 이때부터 최근 30여 년 전까지 줄곧 이규보 묘역 관리를 맡아 왔다고 한다.지금처럼 묘역이 크게 갖춰진 것은 1980년대 초반, 여주 이씨인 이규호 문교부 장관 시절이었다고 류씨는 설명했다.이규보 묘역은 우리나라 7대 명당에 속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이 일대에는 고려가 수도를 강화로 삼았을 때인 40여 년간 귀족들의 무덤이 몰려 있었을 것으로 류씨는 추정했다. 그 근거로 류씨는 고려자기류 무더기 출토를 들었다."50년 전만 해도 이규보 묘가 있는 산을 포함해 이 일대에 도굴꾼들이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때는 무슨 규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도굴꾼들이 참 많이도 파갔습니다. 귀족들의 무덤이 많았다는 얘기이지요."이규보 묘역에 얽힌 뒷얘기는 문학도들에게 또 다른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할 것만 같다.글 = 정진오기자

2014-01-16 정진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프롤로그

이규보·삼국유사·홍명희·김소월…시로, 수필로, 소설로 되살아나는 인천작품속 관찰장소 찾아가는 즐거움도문학의 맛·역사적 경험 '색다른 기획'문(文) 사(史) 철(哲).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 말은 인문학의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문부터 시작해 문사철일까.사철문도 아니고 철사문도 아니다. 가나다 순일까. 그러기엔 왠지 가벼워 보인다. 굳이 순서를 정해 문사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순서가 바로 인문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문학이 원초적인 인간 정신을 구현하는 기본이 되고, 그 문학이 쌓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깊어질 때 철학이 되는 것이리라.경인일보가 올해 2014년 연중기획의 대주제를 '책'으로 정했다. 인천은 내년 1년 동안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수도'이다. 책의 수도라는 말에 걸맞은 역할을 하기 위해, 책 읽는 인천을 위해, '책'을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매주 목요일 문학 작품 속의 인천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문학 속에 드러난, 혹은 숨어 있는 인천은 인천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일 터이다. 그 문학 속 인천은 곧 인천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이다.인천은 어떤 도시인가. 인천은 애초부터 저 멀리서 흘러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인천의 시작이라고 하는 2천년 전의 미추홀부터가 그렇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이 유난히 많은 곳이 인천이다. 지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산업화가 진행되면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거주지로 삼은 곳이 바로 인천이다. 각종 공장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이런 인천은 그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문학 속에 투영되고는 했다. 그래선지 현대로 올수록 인천의 풍광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보다는 인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무게가 실린 게 많다. 그걸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 모습이 바로 인천이기 때문이다.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천. 그 인천을 그려낸 문학은 한국인의 삶을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시로, 소설로, 수필로 해서 되살아나는 인천은 한국의 가장 기본 바탕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인천이 문학 작품이 되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때일 것이다. 고려의 시성(詩聖)으로 일컬을 수 있는 이규보는 인천의 산천과 사람 사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렸다.그는 인천에서 관료 생활을 하면서 1년가량 살았다. 그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인천은 숨 쉰다.그리고 수많은 한시(漢詩) 속에도 인천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현대 문학이 등장하면서 인천은 더욱 절절하게 작품이 되었다. 벽초 홍명희는 그의 대표작 '임꺽정'에서 꺽정이가 검술을 터득하는 장소로 인천을 설정해 놓고 있다.또한 일제강점기 현실 비판의식을 작품 속에 녹아 낸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신도시 인천'을 중심 무대로 해서 식민지 조선의 아픈 현실을 묘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김소월, 김기림도 인천에 왔다가 꿈틀대는 시적 감흥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에 이태준의 '밤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방현석의 '새벽출정' 같은 작품들도 인천을 그린 문학 작품 중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올 연중기획의 제목을 '문학 속 인천을 찾다'로 정했다. 매주 한 차례씩 만나게 될 이 코너에서 독자들은 문학 속에서 도드라지는 인천의 모습뿐만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쓴 관찰 장소까지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작품의 시대상과 지금을 비교하는 시간 여행도 하게 될 것이다.문학이란 장르와 그 속에 담긴 '인천'을 매개로 시공간을 넘나들게 될 것이다. 문학의 맛도 느끼고 역사적 경험도 하는 색다른 페이지가 될 것을 약속한다.경인일보 '문학 속 인천을 찾다' 기획팀이 어떤 방식으로 얘기할지 상상해 보자. 본격 기획물에서 싣지 않을 작품으로 예를 들어본다. 가장 최근의 인천 모습을 시로 표현한 작가 중에는 정호승이 있다.봄비 내리는 부평역/마을버스 정류장 앞허연 비닐을 뒤집어쓰고/다리 저는 아주머니밤 깊도록 꽃을 판다/사람들마다 봄이 되라고살아갈수록 꽃이 되라고/팔다 남은 노란 프리지어 한 묶음젊은 역무원에게 슬며시/수줍은 듯 건네주고승강장 노란 불빛 사이로/허옇게 쏟아지는 봄비 속을절룩절룩 떠나간다/동인천행 막차를 타고다운증후군 아들의/어린 손을 꼭 잡고정호승의 시집 '밥값'에 실린 '부평역'이란 시다. 이 시가 인천이란 도시 입장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부평역'이란 제목 때문이 아니다. '동인천행 막차'가 아니라 '서울행 막차'였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부평에서 동인천까지 가면서 내릴 수 있는 전철역 주변은 대개가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빗속에 팔다 남은 꽃을 역무원에게 주는 아주머니는 생활형편이 어려울 것임은 뻔하다. 가난한 아주머니에게는 다운증후군 아들까지 있다.그러나 그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다. 그 아주머니는 어디에서 내릴까. 취재팀은 작가 정호승이 서 있던 자리를 찾고, 부평역과 그 일대에 얽힌 각종 이야기를 주워 담고, 작품 속 아주머니가 어디에서 내리고,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그려볼 것이다.물론 경인전철의 옛 모습과 현재도 설명할 것이다. 이렇게 1년 동안 매주 한 차례씩 50여 작품이 모이면 또 다른 인천이 그 안에 담길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비평을 당부한다.글 = 정진오기자

2014-01-08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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