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8·끝]연중기획을 마치며-기자 방담

인천, 현재, 시민,정체성을 담은'50번의 목요일'참석자 = 목동훈 차장, 김명래, 정운, 김성호, 홍현기기자지난해 여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인천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표준국어대사전은 인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중서부, 황해에 접해 있는 광역시. 서울의 외항(外港)으로, 해산물·흑연·금속·기계류 따위를 수출한다. 명승지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 해수욕장 따위가 유명하다'.인천의 현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인천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인천의 정체성을 주제로 기획시리즈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중, 그해 12월 경인일보 편집국에서 새해 기획물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2013년은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600년, 인천항이 개항된 지 130주년이 되는 해. 이 회의에선 지명 600년, 개항 130년을 맞아 인천의 정체성에 관한 연중기획물을 진행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경인일보 2013년 1월 10일자 1면에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첫 기사(프롤로그)가 실렸다. 이렇게 시작된 연중기획 기사는 12월 12일까지 매주 목요일자에 어김없이 게재됐다. 독자와 매주 목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약 50회 분량이다.연중기획은 크게 '키워드로 본 인천', '근대도시가 열리다', '제2의 개항 꿈꾸다'로 구성됐다.이름 600년과 개항 130년에 맞춰 구성한 것으로, '인천을 본다'는 제목처럼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인천 모습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인천시민들이 애향심과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제2의 개항 꿈꾸다'를 연중기획의 한 부분으로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연중기획의 출발은 인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10대의 시선, 문학, 향우회, 개항장 문화 등 여러 소재를 통해 인천의 정체성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려고 했다.역사책 내용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쉽고 현장감 있게 쓰려고 노력했다. 물론 아쉽고 부족한 부분도 많다.책으로 묶어도 몇 권이 될 소재를 1~3개 지면으로 소화하려다 보니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 듯하다. 노동운동, 종교, 근대교육, 평화도시 등을 다루지 못한 점도 있다.연중기획을 마치면서 취재에 참여한 기자들의 방담(放談)을 통해 뒷이야기와 의미 등을 소개한다. 경인일보 인천본사 기자 10여명이 취재에 참여했으나, 다른 취재 일정 때문에 방담에는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김명래=인천이라는 도시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는 다 들어간 거 같습니다. 경인일보 기자에게도 인천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인천시가 올 한 해 정명 600년 기념 행사를 진행했는데, 독자들이 '인천은 어떤 도시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기획이었다고 자평해 봅니다.■ 김성호='10대의 시선' 기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인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매우 중요하거든요. 방학 기간이라서 취재기자가 아이들을 섭외하는 데 고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교과서' 기사도 좋았는데 70년대, 80년대, 90년대 교과서에 인천이 어떻게 소개됐는지를 비교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인천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 같습니다.■ 홍현기=인천국제공항에 가서 외국인들에게 인천에 대해 물었습니다. 상당수가 인천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키워드로 본 인천' 첫 기사부터 부정적으로 쓰고 싶지 않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기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정운='포구와 어시장'을 취재하려고 소래포구를 찾아가 상인들과 어민들을 만났습니다. 운이 좋게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산 어민을 만났습니다.이 분을 통해 소래포구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인천으로 피란을 온 이 분의 삶이 인천의 역사와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홍현기=소래포구는 매우 중요한 인천의 브랜드인 거 같습니다. 지방에 사는 지인 중에 소래포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더라구요. 하지만 꽃게나 새우젓 사러 가는 곳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김명래='문학' 편을 취재할 때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각 분야 전문가들을 만나 지면에 소개할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노동문학을 하는 '쇳물처럼' 저자 정화진씨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일산까지 찾아갔습니다.밤 10시부터 1시간 동안 막걸리를 마시면서 여러 얘기를 나눴는데, 한참 뒤 그 분이 "근데 당신은 뭔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나를 찾아왔냐"고 묻더라구요.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기사에는 한 줄 정도 들어갔습니다.■ 김성호='부평'이 과거에 꽤 넓었던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취재를 위해 부평문화원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도 옛 부평 전체를 다루지 못하고 있더라구요. 과거에는 '부평사람' '인천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지금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목동훈=대중문화에 인천이 어떻게 비치느냐도 매우 중요한 거 같습니다. 인천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등이 인천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거든요.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 조직폭력배가 활동하는 도시 등 인천이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 이미지 형성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김명래='향우회' 편을 취재하면서 '370만명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인천시 인구가 230만명인데, 향후회 회원 수를 모두 합하면 370만명이 되더라구요. 알아 보니까 배우자 중 한 명이 특정 지역 사람이면 아내나 남편은 물론 자녀들까지 회원으로 가입시킬 수 있는 향우회가 있었습니다. 반면 강원향우회는 무조건 강원도에서 태어난 사람만 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홍현기='외국 도시 네트워크' 편에서 외국인 인터뷰를 담당했습니다. 샤론 코헨 버뱅크시 공공도서관 서비스 디렉터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 분이 "버뱅크시장이랑 인터뷰를 하겠냐"고 제안하더군요.기사 마감까지 시간이 좀 있었으면 버뱅크시장 인터뷰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국가 외국인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항상 중국은 답장이 늦어요. 때문에 이번에도 중국인 인터뷰를 싣지 못했습니다.■ 목동훈='학술논문' 편을 준비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었습니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등 몇몇 기관이 인천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내놓고 있지만, 지역연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도서관에 '인천 책'도 적은 거 같아요. 논문 등을 보면 필자들이 지적하는 내용은 비슷비슷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운='개항장 문화'를 취재하면서 작은 카페를 많이 알게 됐습니다. 예상 외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닌 '문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공간이 인천에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목동훈=연중기획을 진행하면서 '도대체 인천의 정체성은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른 시·도와 경계를 만들고, 인천을 몇 개의 단어에 가두려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인천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고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정운='인천을 본다'는 제목처럼 현 시점에서 인천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연중기획 취지였습니다. 기사를 현장 중심으로 쓰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했던 부분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정리=목동훈기자

2013-12-18 목동훈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본 인천

정체성이란 말을과거가 아니라미래에 던지자고 제안하고 싶어요.정체성은 시민들이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경인일보는 2013년 연중기획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최원식(64)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를 지난 9일 오후 4시 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그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인천 토박이'로 30여년간 인하대에서 후학을 양성해 왔다.인천 문화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 교수는 인천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냈다.그는 인천을 '기회의 땅'으로 보고, 개항기 때 꽃을 핀 '개방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인천을 '서민도시'로 규정했다. 각지에서 몰려온 서민층이 이 도시에서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인천'은 어떤 도시인가요."인천은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잘 안 돼요.(인구 규모로)지금 3대 도시인데, 곧 2대 도시가 된다면서요.인천은 탈냉전시대를 맞으며 중국 교역을 뚫어서 양적으로 위상이 확대됐다고 할까, 기회가 왔잖아요.덩치도 커지고 좋은 조건을 가졌는데, 그것을 활용해서 양적인 성장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무엇인가가 한편으로는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문턱'을 싹 넘어가지를 못해 참 안타까워요."-인천이 잘 안 되는 건 무엇 때문인가요."인천시민들이 지금 우리에게 온 기회를 감당하고 이것을 더 앞으로 전진시킬 만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큰 비전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있지 않나 싶어요.괜히 '토박이 논쟁'이나 벌이고. 근대도시는 토박이가 아니라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새롭게 만드는 것이에요. 개항 이후 인천은 근대도시의 실험실 노릇을 했어요.일제의 압박 아래서도 뭔가 우리 것을 만들어 내고 정계·학계 등 각 분야에서 엄청난 인물들을 냈어요.이 도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노동자의 도시였어요.전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인천에 와서, 정당하게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살 수 있다는 그게 있었거든요.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 능력과 노력 여하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게 옛날 인천에 있었던 것 같아. 신소설에도 보면, 몰락한 양반들과 백정들도 (인천에)많이 왔고, 신분 세탁이 가능하거든. 일종의 '인천 드림'이랄까, 그게 가능했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게 안 되기 시작했어요."-인천은 개항장 때 활력있는 도시였다가, 분단 이후 서울의 배후도시로 머물렀어요. 서울에 다 빼앗겼다는 시각도 있는데요."일제 때는 서울 옆에 있는 게 나쁘지 않았어요.항구로 사방이 통했으니까. 인천이 자기 중심을 갖고 네트워킹을 하면서, 서울 덕을 많이 봤지요.서울과 가깝다는 게 물론 나쁜 점이 분명히 있죠. 5·16 이후 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던 것 같아요.항구가 항구 역할을 못했죠. 중국과 이북 모두 막히고. 중요한 기업은 다 경부선 라인으로 몰려가고.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5·16 이후 장면 총리 등 인천의 대정치가들이 다 몰락하니까, 후원자들이 함께 무너졌어요.한 예로 임창복(林昌福)씨는 이승만 시대에 중국 상하이, 홍콩을 무대로 이북과 중계무역을 하신 분이에요.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 분에게 북한과 무역할 수 있는 딱지를 주셨대요. 이분 아들이 임영방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임명방 인하대 교수예요. 임창복씨는 인천 부자였어요.황해를 건너다니며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제적 부를 쌓았죠. 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문화도 융성해요. 그런데 장면 총리가 몰락하면서 5·16 때 고문을 당하시고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죠. 그런 집안이 많대요."-인천은 '문화의 불모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이 말은 인천을 너무 낮추고, 문화를 너무 좁게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 같아요. 넓게 보면 문화는 삶의 방식이에요. 삶의 질 자체가 골고루 높아져야 고급 문화가 꽃피우거든요.밑이 튼튼해야 해요. 서민 문화가 활기차야 뭔가 살맛 나는 세상이 돼요.일제 때 보면 문학 쪽에서 인천에 중요한 인물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문학에 걸출한 인물이 잘 안 보여요. 부산 하면 영화제도 생각나고 여러 가지 있는데, 인천은 없어요."-문화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문화도시 인천의 방향성은 어떻게 보시나요."인천에서 살면 더 좋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는 비전을 만들고, 함께 노력해야 해요.인천문화재단이 할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에요. 강요된 공부만 시키니 학생들이 괴로운 거예요.체육, 예술, 독서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살찌우는 거예요. 얼마 전 저희 집 바로 옆의 율목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 강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열심히 듣는 거예요.인천의 문화적 욕구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에 불을 붙여야 해요."-인천의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세요."전 그 말을 싫어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속 좁은 향토주의자가 되거든.'옛날엔 좋았는데 마치 외지인 때문에 망했다'는 과거 지향적인 말이에요.그렇다고 정체성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위험해요. 또 인천의 정체성을 잡종성으로 보는 건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 같아 문제가 되죠.떠돌이가 들어와서 도시를 분해하면 망하는 도시가 되죠. 저는 정체성이란 말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던지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정체성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인천이라는 도시가 좋아질 때는 '서민에게도 약속이 가능한 도시'였어요. 토박이, 외지인, 부자, 빈민 따지지 않고 이 도시에 와서 자기의 꿈과 노력으로 도시를 일궜어요.그것을 회복해야 해요. 개방적인 사람들이 바깥에서 인천에 와서 뭔가 새로운 도시, 살 만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해요. 도시를 구축하는 핵, 에너지가 생겨야 하는 거죠."-그럼 인천시민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제가 처음에 인하대에 왔을 때 보니 교수의 5분의 4가 서울에서 출퇴근을 했어요.'몸은 인천에 있고 영혼은 경인고속도로를 오간다'며 동료 교수들을 비판하는 글을 대학신문에 쓴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당시에 제가 좁게 생각한 것 같아요.단, 인천에 살 때는 시민으로서 인천을 좋은 도시로 만드는 일에 몫을 나누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언젠가 이곳을 떠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인천에 살 때는 인천을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만드는 시민적 책임 의식을 갖자는 거죠.인천이 살 곳이라 생각하면 여기서 사람들도 만나고, 불편하거나 부당한 건 고치자는 의견을 갖게 되겠죠.그렇지만 곧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면 인천은 여론의 무풍지대가 돼요."-인천은 '짠물', '공부 못하는 도시', '공기 나쁘고 집값 싼 도시'라는 인식이 아직도 있어요."옛날엔 짠물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또 아니야. 짠물이라는 게 잘났다는 뜻도 되거든(웃음). 신생 도시로 활기있는 게 더 좋은 거예요. 완숙한 도시는 내리막만 남았겠죠.인천은 오랜 도시 같으면서도 신생 도시니까, 그 활기를 잘 이끌어내서 상승 기류를 타는 게 중요해요.이런 욕구는 시민들 사이에 자욱해요. 지금 지도층이 그것을 끌어서 조직하면 돼요."-인천에서 송도국제도시만 잘나가는 것 같아요. 이미지상으론 송도 역할이 크지만, 구도심과의 생활 수준 격차 등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해요."중국이 처음 개혁 개방할 때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웠어요.해양지역이 먼저 부자가 돼 중국 전체를 끌어올리자는 거예요. 그런데 선부론을 하다보니 격차가 벌어졌어요.지금은 고루 잘 살자는 균부론(均富論)이 우세하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송도, 송도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인천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도시, 서민도시예요. 딱 갈라져 있지 않은 균형사회였어요."인터뷰를 마칠 때 최원식 교수는 꼭 이 말을 적어 달라며, 수첩에 적힌 탄허 스님의 말을 인용했다."한 나라와도 바꿀 수 없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총력을 쏟아라." 최 교수는 "사람을 길러내는 데 진짜 힘을 합쳐야 한다. 자연스레 인천은 젊어질 것이고, 그 젊음이 인천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최원식교수 프로필♠ 1949년 인천 출생. 제물포고(12회). 서울대 국문과·동대학원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문 당선♠ 1979년 영남대 국문과 조교수♠ 1982년 인하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1988년 창작과비평 편집주간(~1995년)♠ 2001년 제9회 대산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제6회 시 와시학상 수상. 한국동북아지식연대 공동대표. 민 족문학사학회 공동대표♠ 2004년 인천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 2005년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한국어문학과 교수♠ 2006년 세교연구소 이사장♠ 2010년 제2회 임화예술문학상 수상글·사진 = 김명래기자

2013-12-12 김명래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제2의 개항 꿈꾸다⑦ 해양도시

항만·철책에 가로막혔던 해안 친수공간 확장… 송도국제도시 고품격 '워터프론트 사업'영종도 준설토 투기장에 2조대 복합관광리조트 조성·아라뱃길 시민쉼터 정착'인천항=화물' 공식깨고 사람오가는 크루즈 거점항 변신"인천의 도시 정체성은 다문화성, 관문성, 해양성이 중층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해양성은 지문화적(Geo-cultural) 특성으로 장기 지속적이며 본질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인천의 고대 지명인 '미추홀'은 '바닷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지명에서부터 인천은 해양도시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도시는 해양 환경이나 해양 산업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바다에 거주시설이나 공항·항만 등을 건설해 해양의 공간 이용을 극대화한 도시라고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인천은 해양도시의 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인천은 140㎞의 해안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150여개의 유·무인도를 가지고 있다. 해양도시에 어울리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해양도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는 어디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인천보다는 부산을 먼저 떠올릴 것으로 예상된다.부산은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를 자처해 왔을 뿐 아니라 해양 관련 각종 기관과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반면 인천의 바다는 오랫동안 철책과 항만에 막혀 있어,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인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해 발전하기 위해선 인천이 가지고 있는 '해양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더욱 가까워지는 바다인천은 해안선을 끼고 있는 도시이지만 인천의 바다는 항만과 철책 등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인천 연안 곳곳에서 친수 공간을 확장하는 사업이 진행됐거나 계획돼 있다. 생활 수준 향상에 힘입어 해양 레저 스포츠도 활성화되고 있다.월미도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바다를 볼 수 있는 휴식 공간이다.그동안 월미도를 찾는 이들이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바다와 가까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바다가 바로 월미도였다.하지만 지난해 친수 공간 확장 공사를 끝낸 월미도는 더 이상 바라만 보는 바다가 아니다.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바다를 가르고 있던 펜스를 철거하고, 바다에 발을 담그거나 손으로 바닷물을 만질 수 있는 친수 공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바다를 매립해 만든 송도국제도시에서는 워터프론트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이 사업은 연수구 송도동 일원 53.4㎢에 9.58㎢ 규모의 친수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바다와 이어진 송도 남·북측 수로, 6·8공구 호수, 11공구 호수를 연결하고 수로변에 친수 공간을 만드는 내용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워터프론트 사업에 대해 '고품격 친수국제도시'라는 콘셉트를 내세우고 있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기존과 다른 수변 공간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영종대교 아래 위치한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도 대규모 개발이 예정돼 있다.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는 내년까지 해수부와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사업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고, 2015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할 방침이다.영종도 준설토 투기장은 여의도 면적(290만㎡)보다 넓은 316만㎡로,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는 이곳에 2조400억원을 투입해 워터파크, 골프장, 축구장, 아쿠아리움, 호텔 등을 갖춘 복합 관광 리조트를 조성할 계획이다.2012년 완전 개통한 경인아라뱃길도 시민들 휴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연결한 아라뱃길은 물류·관광·레저 기능을 겸한 복합 수변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또한 팔미도에서 아라뱃길로 이어지는 뱃길은 유람선 코스로 각광받고 있으며, 연안부두에 조성된 해양광장도 시민들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사람과 화물이 공존하는 인천항인천항은 올해 개항 130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국내 대표적인 수출입항으로서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하지만 인천항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보안 구역인 항만으로 인해 시민들은 바다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주민들은 인천항에서 발생하는 소음·분진 등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인천항은 '화물 취급 항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이는 인천이 '해양도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항구도시'에 그쳐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이러한 인천항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도심지 인근에 위치한 내항 8부두를 재개발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시기와 방법 등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항만시설로 막혀 있던 바다를 개방해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큰 틀에서는 이견이 크지 않다.8부두가 개방되면, 시민들이 바다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해양도시'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대표적인 수출입항이었던 인천항은 화물뿐 아니라 사람이 오가는 항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인천항에 크루즈가 모두 90여차례 기항했다.크루즈를 타고 온 관광객만 15만명을 넘는다. 크루즈 전용부두가 없는 상황임에도 인천항을 찾는 크루즈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올해 처음으로 인천항여객터미널을 통한 연안 여객 인원이 1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현재 인천항 남항 해상에 건설되고 있는 '신 국제 여객 부두'가 완성되면 인천항은 명실상부한 크루즈 거점항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신 국제 여객 부두는 아암물류2단지 해상에 카페리 부두 7선석과 크루즈 부두 1선석, 국제 여객 터미널 등을 2016년까지 건설하는 사업이다.국제 여객 부두가 건설되면 현재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 국제 여객 터미널을 통합해 운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전용 부두가 없어 화물 부두로 접안하는 크루즈를 전용 부두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신 국제 여객 부두 건설사업은 기존 화물 중심의 인천항을 '사람과 화물이 공존하는 인천항'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글 = 정운기자

2013-12-05 정운

해양도시로 가는길 전제 조건은?… 분쟁 파도 잦아든 '평화로운 바다'

인천이 해양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조건은 '평화'다. 1999년, 2002년, 2010년. 제1·2 연평해전,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등 북한과의 분쟁이 발생한 해이다.최근 15년동안 북한과 네 차례의 분쟁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인천이다.이는 모두 인천의 섬 또는 인천 바다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인천 앞바다는 아직도 군사적인 불안감이 상존한다. 올해 초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대북 관계가 경색되자 백령도 등 서해5도를 찾는 관광객이 급감했다. 한중 카페리를 이용한 중국인 관광객도 줄어들었다.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평도 주민들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현재 '분쟁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인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진정한 해양도시로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은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평화가 전제되지 않은 바다에서의 생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인천의 해양도시 비전은 남북간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없이 실현될 수 없다"며 "서해가 북한과 해상 분계선을 마주한 분쟁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이어 "해양도시와 평화도시는 서로 뗄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천의 발전과 인천시민의 안전 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고 했다./정운기자

2013-12-05 정운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⑥ 구도심 변화의 바람

■우각로 문화마을개발 부진 '달동네'에 예술가 입주 마을전체가 작품 변신사회적기업 '행복창작소' 성공적 운영■괭이부리마을구성원 대부분 노약자 환경 열악기억을 살리는 주거지 재생 '100% 재정착' 작은 변화부터 시작인천 구도심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재개발 지연으로 슬럼화가 됐던 남구 숭의동 우각로마을은 예술인 문화공간으로 변했다.인천의 대표 쪽방촌인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서는 주민 100% 재정착을 목표로 한 주거지 재생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두 마을은 '개발 중심'이 아닌 '주민 중심'이 되는 사업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달동네에 예술의 숨결을'… 숭의동 우각로 문화마을재개발사업 지연으로 사람이 떠나고 있는 마을. 세 집 건너 한 집이 빈집인 마을.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한부모, 조손가정 등 저소득계층이 60%인 마을.인천시 남구 숭의동 109 일대 '우각로마을'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각로마을이 '우각로 문화마을'로 변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경인전철 도원역 뒤편에 위치한 우각로마을은 865가구 1천752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달동네'다. 우각로는 마을로 향하는 길이 소뿔 모양처럼 굽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재개발 사업이 추진된 지 십수 년간 별다른 진척이 없자 사람이 점점 떠나기 시작했고, 마을 주택 611개 동 중 152개 동이 공가로 방치돼 있다.빈집은 노숙인 쉼터로 활용됐다. 쓰레기가 들끓는 낡은 가옥에 비행 청소년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쪽방 빈집이 낡아 쓰러지면 사람이 살고 있는 옆집에도 큰 영향이 됐다.2년 전 여름 숭의1·3동과 남구의제21, 지역 예술인들이 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면서 우각로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빈집을 예술인들의 작업공간으로 활용해 이 지역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고,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2011년 11월 주민, 문화예술인, 행정기관, 시민단체로 구성된 비영리 민간단체 '우각로 문화마을'이 조직됐다.행정 기관은 빈집 주인들에게 연락해 무상 또는 저렴한 임대료에 빈집을 활용할 수 없겠냐고 제안했고, 예술계에서는 입주작가를 모집했다.현재 연극, 사진, 미술, 영화 등 각종 분야별 예술가 12명이 입주해 실제 마을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예술가들이 입주하면서 마을은 변화를 하게 됐다. 골목마다 벽화가 그려졌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무너져 내린 담벼락 틈은 아기자기한 '레고' 조각으로 채워져 있었다.빈집들은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됐다. 마을 군데군데 있는 긴 의자는 달동네를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좋은 쉴 곳이 됐다. 작가들의 집은 마을의 '사랑방' 구실도 하고 있다.우각로 문화마을에 입주한 김종선 작가는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 지인 소개로 입주하게 됐다.처음 빈집에 와서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8t트럭 2대 분량이 나왔다"며 "시끄러운 도심보다는 조용한 이곳 마을이 창작활동을 하는 데 더 좋은 환경인 것 같아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오은숙 우각로문화마을 사무총장은 "빈집에 사람이 들어가 살게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문제가 해소되고 있다"며 "작가들이 각자의 예술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침체된 마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우각로 문화마을을 활성화하기 위해 '행복창작소'라는 사회적기업도 만들어졌다.도예공방 '자기랑', 무대장치를 제작·임대하는 'R-스테이지', 우각로 문화마을을 찾은 관광객이나 예술인이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면서 수익을 창출해 내고 있다.'자기랑'에서 만든 쇠뿔 모양의 컵과 화분은 지난해 6월 인천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지역특성화 부문 동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행복창작소'는 최근 협동조합으로 운영체제를 변경했다.이 마을 토박이이면서 우각로 문화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연태성씨는 "우각로 문화마을은 재개발 지연으로 침체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지만, 재개발이 다시 시작되면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라며 "작가들이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정부와 지자체에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억을 살리는 마을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주거지 재생사업인천의 대표적인 쪽방촌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아카사키촌'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마을은 골목길을 '공동 마당'으로 삼아 마을 주민들이 서로 기대며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동네다.김중미 작가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소 노동자 숙소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란민 정착촌이었다. 1970~80년대엔 인천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타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됐다.괭이부리마을은 전체 주민이 760여명이고 대다수가 노약자다. 주민의 8.5%는 기초생활수급자다. 건물 338개 동의 68%인 229개 동은 무허가 주택이며, 62개 동은 빈집으로 방치돼있다. 주민 대부분이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으며,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인천시는 괭이부리마을 재정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너무나 열악한 환경 탓에 수십 년간 누구 하나 손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마을을 한꺼번에 철거해 개발하더라도 이곳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갈 형편이 못됐다. 시간이 갈수록 낡은 마을은 붕괴나 화재 위험에 늘 노출돼 왔다.이런 괭이부리마을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노후 주택이 있던 자리에 임대 아파트가 이달 초 들어섰다. 또 공원과 공동작업장을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낡은 집들은 '리모델링'으로 바뀌고 있고, 공중위생 화장실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소위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괭이부리마을의 이 같은 변화는 전면 철거·재건축 방식에서 벗어나 마을의 특색을 보존하고, 원주민의 재정착을 최대한 이끌어내면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기억을 지우는 도시개발사업'이 아니라 '기억을 살리는 마을사업'으로 주거지 재생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원주민이 100% 재정착할 수 있는 개발사업이라는 얘기다.지난 26일 오후 찾아간 괭이부리마을에서 달라져 가고 있는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높이 6m의 방음벽으로 위압적이고 단절된 공간이었던 두산인프라코어 옆 도로에서는 재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다.회색빛으로 칙칙했던 방음벽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주민들이 굴을 까거나 어구를 말리던 곳에는 앞으로 작은 텃밭과 다용도 평상이 조성될 예정이다.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일제식 목조건물에서는 창틀을 새로 갈아 끼우고, 시멘트를 덧바르는 등 리모델링 작업이 한창이었다. 만석비치아파트로 이어지는 곳엔 주민 공동작업장인 김치공장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98가구 규모의 임대아파트 2개 동도 최근 준공돼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대아파트 중 4가구는 순환용 임대주택으로 활용돼 기존 주택 개량사업으로 잠시 보금자리를 떠나야 하는 주민들에게 임시 제공된다.하수관 교체, 건물 슬레이트 지붕 철거·교체 공사, 노후주택 개량사업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주민들의 소통공간이자 공동작업장인 '희망키움터'에서 만난 주민들은 괭이부리마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서서히 달라질 마을의 모습도 기대하고 있었다.주민 고장선(80) 씨는 "오늘 살다 내일 죽더라도 제대로 된 곳에 살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며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을이 개발되고 보상비를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다. 이 마을에 계속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김계순(86·여)씨는 "마을에 들어올 때 돈을 주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받고 나올 생각도 없다. 지키고 있는 방이라도 있어서 계속 살고 싶은 게 소원"이라며 "조금씩 조금씩 하지 말고, 한꺼번에 개발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물론 있지만, 마을이 변화되는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인천쪽방상담소 김용은 실장은 "어떤 분은 마을을 떠났다가 새로운 곳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돌아오실 정도로 이곳 주민들은 마을에 애착이 많고, 애초에 이곳을 떠날 여력도 없으신 분이 대부분"이라며 "전면적인 개발은 서로의 이해 관계가 얽혀 분쟁이 생기는데, 여기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주민 중심으로 여기 계신 분들이 떠나지 않도록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긍정적이다"고 말했다.인천시 하명국 주거환경정책관은 "괭이부리마을 가꾸기 사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며 "앞으로 마을공동체 회복과 자활을 돕는 공동이용시설을 확충하고 주민과 함께 마을 자원을 개발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 = 김민재기자

2013-11-27 김민재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⑤ 외국 도시 네트워크

500권의 책 인연 美 버뱅크시 '1호 자매도시'초기 전략적 접촉때 외국 선진도시 상대 안해줘위상 높아지면서 잠비아등 줄이어교류활동중 65%가 동북아 편중… 市 중장기 시스템 절실지난 9월 인천 송도컨벤시아.미국 버뱅크시, 중국 톈진시, 일본 기타큐슈시 등 세계 14개 도시 대표단과 UNOSD(유엔 지속발전가능센터) 등 UN기구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인천시가 주최한 '2013 인천 자매우호도시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정상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공동 선언문'을 채택, '기후변화 대응' '청정에너지 도입' '도시 협력 시스템 구축' 등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이들이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인천시가 구심점 구실을 했다.# 국제사회 변방에서 중심으로인천시가 처음 자매결연을 맺은 외국 도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시다.1961년 버뱅크시는 대한민국의 인천이라는 도시로부터 '책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평문화원의 이창근씨가 미국 각지에 책을 지원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버뱅크시는 이 같은 요구에 선뜻 영어로 된 책 500권을 인천에 기증했다. 산업화 초기 '궁핍한 도시 인천'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다.버뱅크시의 샤론 코헨 공공도서관 서비스 디렉터는 "인천의 요청에 버뱅크 주민들은 많은 책을 모았고, 이를 인천으로 보냈다"고 했다. 500권의 책을 인연으로 버뱅크시는 인천시의 '1호' 자매도시가 됐다.이후 인천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1983년), 알래스카주 앵커리지(1986년) 등 미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해당 도시 인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시민이 자매결연의 연결고리가 됐다고 한다.해외여행자유화 조치 시행(1988년), 중국과의 국교 수교(1992년) 등 여건 변화는 인천시가 자매결연 외국 도시를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인천시는 전략적으로 외국 도시들과 접촉했다. 선진국 주요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이들 도시의 발전 과정과 정책 등을 배우자는 취지가 컸다. 인천지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하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 선진 도시들은 인천이라는 대한민국의 작은 도시를 상대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인천국제공항 개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이 본격화된 2000년대에 들어서야 인천이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UN APCICT(유엔 아시아 태평양 정보통신기술 훈련센터) 등 국제기구의 잇따른 유치도 인천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인천의 자매도시가 급격히 늘어났다.인천시의 자매우호도시는 17개국 총 34개 도시에 이르는 상황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의 도시부터 이스라엘과 이탈리아 등 유럽의 도시 그리고 러시아의 도시도 있다.최근엔 인천과 자매결연을 맺고 싶다는 도시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천의 발전 과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잠비아, 인도네시아의 도시가 인천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인천시 관계자는 "예전에는 외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인천이 먼저 나서야 했지만,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며 "'인천은 꼭 둘러보고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외국 도시 관계자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인천시는 국제사회 속 인천의 비중이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 관계자는 "인천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며 "인천이 국제 도시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류활동 지역·내용 한계 극복해야인천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는 인천과의 역사적·지정학적 조건에서 유사성과 문화적 유대성, 경제적·산업적 상호 보완성 등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중국 톈진과 다롄, 일본 고베와 요코하마, 베트남 하이퐁 등은 항만을 보유한 물류도시다.미국 호놀룰루는 인천의 하와이 이민사(史)와 연관된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북아의 새로운 성장 거점이자 국제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항구 도시다. 인천시가 전략적으로 외국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하지만 인천시가 진행하는 국제교류 활동을 들여다보면 지역과 내용 등의 측면에서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인천발전연구원이 최근 펴낸 '인천시 국제교류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에 관한 연구'를 보면,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 도시들과의 교류 활동에 편중돼 있다.총 1천176차례의 교류 활동 중 65.9%(776차례)가 중국과 일본 도시와의 교류활동이었다. 동북아를 벗어난 국가 도시와는 상대적으로 교류 활동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1994년 협약을 맺은 베네수엘라의 차카오와는 지금까지 단 두 차례의 교류 활동만 진행됐다.교류 내용도 인적 교류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인적 교류는 597건으로 전체의 50.8%를 차지한 반면, 경제교류(15.6%)와 문화교류(13.2%), 체육교류(5.2%) 등의 비중은 낮았다.국제교류 활동을 위한 예산 규모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2010년엔 147억원이던 국제교류 예산이 2011년엔 121억원으로 줄더니 지난해엔 100억원 수준으로 떨어졌다.인발연 관계자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이 크지만, 현재 인천시는 국제교류를 위한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교류활동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다양한 분야의 교류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인천시가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글 = 이현준기자

2013-11-21 이현준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④ 국제기구 메카, 송도

관광산업, 컨벤션, 숙박업… 브뤼셀·제네바같은 선진 국제도시들이 지향하는 '서비스업 중심 경제구조' 따라 갈 수 있는 계기'시장 치적쌓기용' 과거 전시용 기구 내실문제 제기작년 10월 GCF본부 유치 '환산못할 유무형 효과'유네스코지정 2015 세계 책의 수도 선정 승승장구지난해 10월 20일 오후 GCF(녹색기후기금) 2차 이사회가 열리고 있는 송도컨벤시아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환경분야의 세계은행이라 불리는 GCF 본부 유치 도시가 결정되는 순간, "인천이 해냈다" "한국이 세계 환경 어젠다를 선점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는 목소리가 회의장 곳곳에서 들려왔다.산업단지가 많은 탓에 공업도시, 회색빛 도시 등으로 타지 사람들에게 각인돼 왔던 인천이 세계 환경 이슈를 선점하고, 이를 통해 도시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순간이었다.구호로만 앞세웠던 '국제도시 인천'이란 말이 이제는 말이 아닌 현실이 돼 인천시민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 GCF 본부에 이어 최근에는 세계은행 한국사무소까지 유치한 인천은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국제기구 하나가 도시를 바꿀 수 있다지난해 인천이 GCF 본부를 유치한 이후, 당시 이 업무를 담당한 청와대 관계자는 "인천이 제2의 개항을 맞고 있다"고 표현했다.1883년 인천항이 제물포조약(조선과 일본이 1882년에 체결)에 의해 개항된 이후 지금의 중구 신포동 일대에는 일본·청나라·러시아 등 각국 사람들이 거주하는 조계지가 형성됐다.외세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천으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와 경제, 도시계획 기술 등이 유입됐고, 이는 인천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데 큰 구실을 했다.철도, 우편, 전화, 통신, 등대, 기상 관측, 호텔, 정미소, 서양식 건물 등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제도와 문물이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인천에는 타 시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자리가 창출됐다.말 그대로 인천이란 도시의 근간을 바꿔 놓은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GCF 본부 유치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인천의 개항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에 있다.지금까지 제조업이 근간이 됐던 인천의 경제·사회 구조를 GCF 같은 국제기구가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그 청와대 관계자는 내다본 것이다.실제로 GCF는 2020년부터 매년 1천억 달러의 환경기금을 마련해 개발도상국의 탄소 저감을 위한 직·간접적인 지원을 해주게 된다.환경기금이 몰리고 이를 타내기 위해 각국 정부 관계자들이 앞다퉈 송도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유·무형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관광산업부터 컨벤션, 숙박업에 이르기까지 벨기에 브뤼셀이나 스위스 제네바같은 선진 국제도시들이 지향하고 있는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인천도 뒤따라 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인천 국제기구 유치 역사인천시는 2006년부터 국제기구 유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송도국제도시(경제자유구역) 개발이 속도를 내던 당시 인천은 UNAPCICT(아·태 정보통신기술 교육원) 유치를 시작으로 UNESCAP(아태 경제사회위원회 동북아지역사무소), NEASPEC(동북아 환경협력프로그램) 사무국, UNISDR(유엔 재해 경감 국제전략) 동북아사무소 등 10여개 기구를 유치했다.문제는 내실에 있다. 인천이 과거 유치했던 이런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상주 인원은 적게는 1명에서 많아야 15명 수준으로,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의 국제기구 유치 효과는 가져오지 못했다.이 때문에 인천시가 전시용으로 연락사무소 수준의 기구를 유치한 후 시장(市長) 치적 쌓기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었다.정부는 국내에 있는 41개 국제기구 중 소규모(상주 근무인원 10명 이하) 기구가 73%를 차지하고 있어, 이로 인한 효과가 미미하다는 분석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그러나 인천이 GCF 본부와 세계은행 한국사무소를 유치한 이후, 인천의 발전 가능성을 이런 대규모 국제기구에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은 GCF 직원 500명이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상주할 경우, 3천800억 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헬라 체크로흐 GCF 초대 사무총장은 "GCF를 비롯한 인천시의 국제기구 유치 전략은 도시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대표적인 촉매제로 활용될 것"이라며 "인천이란 도시의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고 차세대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세계은행은 IMF(국제통화기금), WTO(세계무역기구) 등과 함께 3대 국제경제기구로 꼽힌다.180여 개 회원국을 보유한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국제금융기관이다. 세계은행 한국사무소는 GCF 기금을 3년간 위탁 관리하게 된다.인천시는 유엔개발계획(UNDP) 산하 기관으로 한국·북한·중국 인근 해양생태계를 연구하는 황해광역해양생태계(YSLME),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유치도 추진하고 있다.한편, 인천은 유네스코 지정 '2015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됐다. 또 유네스코, 유니세프, 세계은행, 유엔개발계획, 유엔인구기금이 주최하는 '2015 세계교육회의' 개최 도시로 결정됐다.이번 세계교육회의에는 190여개 유네스코 회원국 고위 관료, 200여개 국제기구 사무총장, NGO·전문기관 대표 등 약 1천50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국제기구로 세계에 이름 알리는 인천시지난 7월 독일 본에서 만난 스테판 바그너 본시 국제기구 유치 국장은 "이전에는 인천이란 도시를 잘 알지 못했지만, 지난해 10월 GCF 본부 유치를 두고 인천과 경쟁할 때 인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국제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본에는 유엔 사막화방지협약 사무국을 비롯해 고래보호협정 사무국 등 유엔 환경관련 주요 기구 18개가 모여 있다. 본은 GCF 본부 유치를 두고 막판까지 인천과 경쟁했던 도시 중 하나다.바그너 국장은 "그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제기구를 유치해 많은 외국인들이 도시로 몰리게 하고 그들이 도시에서 보편적인 문화를 이루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국제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유럽연합(EU)본부와 의회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의 경우, 인구 110만명 중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외국인이 20만명에 이른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이름조차 낯설었던 브뤼셀이란 도시가 국제도시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이런 국제기구 유치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브뤼셀 자유대학(VUB)에서 도시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에릭 코리언 교수는 "중화학 공업 중심 도시였던 브뤼셀은 1970년부터 경제 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해 수많은 국제기구를 유치하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벨기에 전체 GDP(국내 총생산)의 5% 가량이 이런 국제기구 유치로 파생되는 경제적 효과"라고 말했다.글 = 김명호기자

2013-11-13 김명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하)

세계 각지에서 인천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는 못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은 '남'이 아닌 '우리'의 범주에 들어와 살고 있다.이들은 인천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공장 노동자, 한 남자의 아내로 온 외국인들은 인천에서 성장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한다. 우리 이웃인 인천 속 세계 사람들의 삶과 꿈, 바라는 점 등에 대해 들어봤다.■ 다문화 가정 돌보는 파키스탄 출신 목사한국인 남편이 외국인 아내따라 영어 예배땐 뿌듯파키스탄 출신 아킬 칸(45) 목사는 인천시 연수구 인천순복음하모니교회에서 '다문화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1995년 인천에 온 칸 목사는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렸고 현재 13살, 8살 아들을 두고 있다. 아내는 '다문화 가정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이 교회 교인 중 다문화 가정은 약 30명이다. 그동안 이 교회를 거쳐 간 다문화 가정 수도 많다. 다문화 가정 중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가정불화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을 더 많이 지켜봤다.칸 목사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한국인 남편이 교회에 나와 외국인 아내와 함께 영어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칸 목사는 여럿이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는 풍경을 보고 한국 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인천에서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 칸 목사 생각이다. 칸 목사는 "예전에는 (내가)지나가면 다들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공장에서 일할 때 차별당한 일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면서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점점 더 인천이 다문화 사회가 돼 가는 것 같다. 어쩌면 20~30년 뒤에는 이민자 출신 대통령도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1인 4역 우즈베키스탄 결혼이주여성시부모님 모시는것 당연한 일… 경찰·병원찾아 통역봉사우즈베키스탄 출신 샤흘로 나르츠(31·여)씨는 가정에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또한 중고차 수출업체 과장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샤흘로씨는 중고차를 러시아 또는 우즈베키스탄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샤흘로씨는 2008년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한국에 와 결혼했고, 현재 두 아이를 두고 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고, '시집살이'가 행복하다고 했다."우즈벡에서는 젊은 사람이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같이 살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시부모님이)오히려 우리를 많이 도와줘서 좋다"고 했다.그녀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외국인이나 다문화 가정을 위해 통역부터 상담까지 다양한 활동을 한다.경찰에서 통역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가천대 길병원 등에서 통역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돈을 잃어버리거나 사기를 당한 외국인은 샤흘로씨를 찾아온다. 또 출산을 앞둔 결혼이주여성과 함께 병원에 가 통역해 주는 것도 그녀 몫이다.성공적으로 인천에 정착한 샤흘로씨도 '이방인'으로서 차별을 종종 겪는다. 최근 인천에서 자신이 탈 중고차를 고르면서 고생한 얘기를 들려줬다.중고차 업자들이 허위 매물을 보여주면서 계약할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샤흘로씨는 "아직도 외국인을 상대로 한 차별이 많다"며 "이런 인식이 바뀌어 모두가 함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슬람 문화 알리는 음식점 사장한국사람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점 만들고 싶어요르단 출신 피라스 알코파히(43)씨는 터키·인도 음식점 '아라베스크'를 동인천역 부근과 연수구 옥련동 등 2곳에서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중고차 수출업체 바이어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2004년 동인천에 '사하라텐트'라는 음식점을 열었다 2011년 아라베스크로 이름을 바꿨다.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위치로 가게를 옮겼다. 그는 "이슬람 사람만 오는 음식점이 아니라 한국 사람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1년 전 연수구에 아라베스크 지점을 냈다. 지금은 손님 중 절반이 아랍권 사람이고, 30%는 한국인, 20%는 비아랍권 외국인이다.아라비아 또는 이슬람권 사원 등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무늬를 뜻하는 '아라베스크'라는 상호는 인천에 이슬람 캘리그래피를 알리겠다는 그의 꿈과 맞닿아 있다.그는 2009년 인하대 회화과에서 서양화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인천에 스튜디오를 짓고, 이슬람 캘리그래피(서예)를 전시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현재 한양대 박물관 이슬람 캘리그래피 전시회에서도 전시중인데, 그는 인천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회도 꿈꾸고 있다.한국인 아내와 9살 딸을 둔 그는 다양한 축제와 봉사활동 등에 참여하며 시민들과 어울린다.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인 그를 인천시는 명예외교관으로 임명했다. 피라스씨는 다음달 한국으로 귀화를 신청할 계획이다. 그는 "처음 인천에 왔을 때와 지금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며 "점점 더 사람들이 오픈 마인드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유학생 권익 보호하는 중국인 유학생유학온지 4년… 누가 인천 좋지않게 말하면 기분 나빠중국 출신 유학생 전원(24·인하대 정치외교학과)씨는 '전한중국학인학자 연합회 경인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 생활 4년차인 그는 자신을 '인천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한다.그는 "인천은 공항과 항만이 같이 있는 매우 특별한 도시이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도시"라며 "나는 이러한 인천과 인천사람들을 사랑하고, 누가 인천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기분이 나빠질 정도"라고 했다.그가 소속된 '전한중국학인학자 연합회'는 우리나라 88개 대학 중국인 유학생이 참여하는 단체다. 그는 "학교가 달라 자주 만나서 활동하지 못하지만 계절마다 자원봉사와 농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우리나라에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많은 숫자의 중국인 유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는데, 업주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없는 중국인 유학생의 처지를 악용해 힘든 일은 중국 학생들에게만 시킨다"며 "한국 학생에 비해 임금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 싸우고 있는 유학생들을 도와주고 있다. 유학생들을 위해 법적인 대응책을 확인하고,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항의하는 등의 행동이다.전원씨는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들의 시선이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언젠가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봐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협동조합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멘토외국인 노동자 지역사회 일원으로 어떻게 받아줄지 고민할 시점미얀마 출신 소모뚜(36)씨는 1995년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2007년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이 만든 사회적 기업 '몽땅'에서 일하며, 이곳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또 부평구에 위치한 협동조합형 기업 '브더욱 글로리(Padauk GLORY)'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남동국가산업단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소모뚜씨는 동료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브더욱 글로리에서 그는 노동자들의 애로사항을 상담하고, 이들을 구제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소모뚜씨는 "한국 사회는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이제는 그들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어떻게 받아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다"고 했다.소모뚜씨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많이 지켜봤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들 대부분이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지 못한 채 떠난다고 한다.그는 "우리가 사회활동을 벌이고, 수익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게 되면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라며 "최근에는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들이 도움을 요청해 그들의 '멘토'가 되고 있다"고 했다.글 = 홍현기·김주엽기자

2013-11-06 홍현기·김주엽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상)

산단중심 형성된 지구촌 다양한 문화 주택가까지 스며들어상점·식당·예배소… 논현동 원룸촌 '외국인 기숙사' 분포석남동 거북시장 유명·이슬람계, 옥련동 일대에 터전송도등 경제자유구역 거주 외국인 지역공동체와 융화 노력인천 속에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주변만 둘러봐도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을 접할 수 있다.그들은 인천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화를 싹 틔우고 있다. 인천은 기회의 땅이 됐고, 그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인천에 발을 내디뎠다.인천 속 외국인들은 인천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했다. 경인일보는 인천 각지에 자리잡은 외국인들의 삶을 쫓아가 봤다.이들은 라마단 등 종교와 관련된 기간에는 대규모로 모여 야외에서 기도를 한다. 이 기간에 인근 고깃집 주차장에서는 수백명의 이슬람인들이 단체로 예배를 보는 진풍경도 목격할 수 있다.중고차수출단지 이슬람 공동체는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지난 9월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암 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은 A(22·여)씨의 수술비 650만원을 자체적으로 모금해 지원하기도 했다.이들은 인천 구성원으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추석과 설에는 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후원품을 전달한다.이들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출신 쉐르자드 자키로브(35)씨는 "인천은 공항과 항구가 가까워 사업을 하기가 굉장히 편리해 많은 바이어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졌다"며 "인천의 일원으로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많은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인천 부평구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 2곳이 위치해 있어 많은 외국인들이 오간다.'부평 이슬람 사원'은 2004년에 건립됐고, '알후다 이슬람 사원'은 2009년에 세워졌다. 부평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이유는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인천부평경찰서 외사계 권태형 외사관은 "'부평 이슬람 사원'은 백운역과 부평삼거리역이 인접해 있고, '알후다 이슬람 사원'은 동암역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며 "교통이 좋기 때문에 인천은 물론 경기도 공장에서 근무하는 많은 외국인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 곳곳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았다.연세대 국제캠퍼스, 한국뉴욕주립대 등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교수나 강사 수가 늘었고, 삼성바이오 등 기업에 근무하는 외국인, 외국계 항공사 직원들, 채드윅국제학교와 달튼외국인학교 교사들도 송도·청라·영종에 둥지를 틀었다.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수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송도에 1천95명, 영종에 750명, 청라에 181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이들의 최근 '핫플레이스'는 송도국제도시 커낼워크와 센트럴공원이다. 이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교류한다.이들은 기존의 외국인 공동체를 넘어 인천의 구성원으로서 지역사회와 어울리기 위한 노력까지 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외국인자문위원회(Foreign Advisory Board)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됐다.이들이 정보 공유를 위해 만든 '위키스페이스',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면 소래포구축제 등의 정보를 공유하며 각 행사에 적극 참여하려는 열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경찰관을 대상으로 외국어 교육을 하는 등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최근 인천지방경찰청에서 영어교육 봉사활동 등의 공로로 표창을 받은 솔로몬 디아즈(Soleiman Dias) 자문위원회 회장은 "점점 더 많은 외국인들이 경제자유구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위원회 위원 숫자도 증가했다"며 "인천은 이미 국제도시다"고 말했다.인천시 중구 북성동 일대 차이나타운에는 3천700명이 넘는 중국인이 주로 요식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인천시 중구 외국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외국인 가운데 화교만 남았다. 인천 중구청이 단계적으로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가면 마치 중국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인천 화교협회 손덕균 외무부회장은 "이곳에서 태어난 화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 (화교) 수가 많이 줄었다"면서 "그래도 신 화교(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남동인더스파크(옛 남동국가산업단지) 등 인천내 산업단지는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산단을 중심으로 주택가까지 스며들었다.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550 일대 원룸촌에서는 특이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원룸촌 곳곳에 자리잡은 음식점과 상점 간판에는 베트남 수도 호찌민의 전 이름인 'Saigong'이나 'Vietnam' 등이 적혀 있다. 원룸촌 주차장에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자리잡았다.남동인더스파크와 인접한 원룸촌이 외국인 근로자들의 기숙사 구실을 하면서 이 같은 풍경이 나타나게 됐다.베트남인들이 음식점에서 자주 찾는 메뉴는 한국의 매운탕과 비슷한 '라오'다.친언니와 함께 음식점 'Saigon Quan'을 운영하는 트란 티아이(27)씨는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이곳에 음식점을 열게 됐다"며 "베트남 사람도 많이 찾지만 한국 사람들도 쌀국수나 만두를 먹으러 많이 온다"고 말했다.1만2천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남동인더스파크 외국인 근로자들의 배후단지가 이곳 뿐은 아니다. 연수구 선학동과 청학동 등에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살고 있다.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다른 지역 산단의 외국인 근로자들도 원룸촌을 찾아 인천에 자리잡고 있다.산단 내에는 예배소와 각종 상점도 생겼다. 남동인더스파크 45블록 상가 2층에는 넓은 예배실이 있다.인도네시아인 40여명이 이슬람 예배를 보기 위해 돈을 모아 빌린 곳이다. 외국인들은 각 국가별로 모여 산업단지 내에 예배실을 꾸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한다는 방글라데시인 민토(31)씨는 "돈이 없지만 예배는 봐야 하기 때문에 각자 돈을 모았다. 가끔 다른 국가 분들이 오시기도 한다"며 "공단에 있는 사람들이 예배를 하기 위해 곳곳에 예배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남동인더스파크 주변 운동장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축구나 세팍타크로, 크리켓 등의 경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지난 27일 오후 7시께 찾아간 인천시 서구 석남동 거북시장 일대에서도 외국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인근에 위치한 상점 간판에는 'World Mart', 'Halal Food' 등이 적혀 있다. 'World Mart'는 필리핀 현지에서 수입한 식품을 판매하는 곳이다.2009년부터 가게를 운영해 온 이경국(57)씨는 "하루에만 30명 정도의 필리핀인이 이곳을 방문한다"며 "주말에는 자신들이 직접 요리한 필리핀 전통 음식을 들고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거북시장 일대는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발 노점상까지 생겨났을 정도다.이곳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서부산단과 인근 주물공장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는 1만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우리나라에 거주한 지 9년이 됐다는 마리아 프렌즈(35·여)씨는 "5년 전 부천에서 생활할 때는 주변에 고향(필리핀) 친구들이 없어 너무 외로웠다"며 "이곳은 가까운 곳에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좋다"고 말했다.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일대에서 이슬람계 외국인을 만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음식점도 연수구 옥련동, 동춘동 등 여러 곳에 있다. '투르키스탄'은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대표적 음식점. 투르키스탄 주변에는 예배소 등의 역할을 하는 건물도 있어 이곳 주변으로 많은 이슬람계 외국인들이 몰리고 있다.이곳 주변으로 중앙아시아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아라베스크', 요르단·리비아·이집트 출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알라딘' 등 음식점도 들어섰다. 연수동에는 파키스탄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세븐웨이즈'가 있다.글 = 홍현기·김주엽기자

2013-10-30 홍현기·김주엽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하)-확산되는 문화공간

최근 이 지역의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젊은층이 소규모 카페 등을 개업하는 경우가 눈에 띄는데,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창업을 할 수 있다는 점과 개항장이라는 독특한 장소적인 매력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본다.십수년 전만 해도 침체된 구도심이었던 인천시 중구 개항장 일대 거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에 개관해 인천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인천개항박물관 등이 이 지역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점차 들어서고 있는 소규모 공방, 카페, 박물관 등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선보이며 이 일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지난 20일과 21일, 인천시 청일조계지 계단부터 신포시장까지 둘러봤다. 최근 새로 생겨난 많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100여m의 거리에 4개가 위치한 곳도 있었다.곳곳에 새로 생긴 공방과 박물관들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에서 공방 등의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한목소리로 "개항장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은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고 했다.# 문화향유 공간 '카페'개항장 일대에 가장 많이 들어선 것은 '카페'다. 하지만 이 지역 카페는 일반적으로 커피 등의 음료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일반적인 카페와는 달랐다.청일조계지를 가르던 계단 중턱에 위치한 '낙타사막'은 비어 있던 집을 매입해 2011년 개관했다. 내부 디자인을 주인 김홍희(45)씨가 직접했다. 각종 미술 서적을 읽을 수 있도록 북카페 역할을 하고 있다.2층에서는 종종 '소규모 영화제'가 열리기도 한다. 중구청 뒤편에 있는 '담쟁이넝쿨' 카페에는 다람쥐와 토끼, 이구아나, 여러 종의 새 등이 있는 '미니동물원'이 있다.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팟알'은 지난해 8월 문을 열었다. 19세기 후반 지어진 하역회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팟알' 외벽에는 이 건물이 등록문화란 것을 알게 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팟알 맞은편에는 지난달 초 건축·인테리어 카페 '4B'가 문을 열었으며, 여기서 20m가량 떨어진 곳에서는 카페 '라온'이 개업 준비를 하고 있다.4B는 건축 인테리어 카페답게 목조가구와 각종 인테리어 소품 등이 전시돼 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정은경(41·여)씨는 "목조 건축과 인테리어 작품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카페를 열었다"고 말했다.이 뿐만 아니라 최근 이 일대에 문을 연 카페들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이 많다.인천근대건축전시관 앞에는 서각, 규방공예, 도자기 등 전통공예 공방과 카페가 어우러진 '써니공방카페'가 생겼다. 이곳을 운영하는 박서니(51·여) 서각작가는 "차이나타운 관광객이 이쪽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 지역이 더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다.지난 7월 문을 연 'SOHO63'은 카페이지만 갤러리 역할도 한다. 주민들이 공방에서 만든 작품이나 아마추어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내리교회 인근에 위치한 '파란광선'은 설치미술가 길다래(31·여)씨가 운영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씩 전시회를 열고, 소규모 콘서트를 다섯 차례 열기도 했다.'카페 오리날다'는 주말마다 사진전을 열고 있으며, '포그시티'는 피자와 스테이크 등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가정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고대 공예품부터 주민들의 생활 작품까지카페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예술공간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중구청 정문 건너편에 두 개의 공방이 2011년부터 자리를 잡고 있다. '한지사랑채'와 자수공예를 하는 '비단공방'이다.한지사랑채를 운영하는 한지공예가 박승희(52·여)씨는 인천 동구 배다리에서 7년간 작은 공방을 두고 작업을 해오다가 '가장 인천스러운 곳'을 찾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공방 안에는 한지를 뜯어붙이는 방식으로 그린 그림, 기와를 닮은 곡선이 있는 한지그릇 등 한지를 이용한 작품이 가득했다.한지사랑채에서 아트플랫폼 방향으로 이동하면 지난 18일 개관한 '백산박물관'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고려청자를 비롯한 공예품, 조선시대 생활가구 등 정도원씨가 수십 년 동안 수집한 골동품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2010년 창단한 극단 '다락'은 2011년 7월 소극장 '떼아뜨르 다락'을 개관했다. 개항장 거리에서 하나뿐인 소극장이다. 올해 연극 '열여덟 번째 낙타', '귀여운 장난' 등을 상연했다.오는 12월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백재이(47·여) 떼아뜨르 다락 대표는 "개항장 거리의 빈 공간들이 채워지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아직까지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떼아뜨르 다락에서 신포로를 따라 신포시장 방향으로 가면 선광갤러리, 상우재 등의 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신포문화의 거리 끝자락으로 가면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을 벌이는 청년플러스의 '열린실험실'도 찾을 수 있다.# 다양한 문화공간이 모이는 이유는개항장 거리에서 새롭게 터를 잡은 이들은 한목소리로 개항장이라는 특수성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이야기했다.낙타사막을 운영하는 김홍희(45)씨는 "개항장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지역은 작가들이 작업하거나, 소규모 문화공간을 만들기에 좋다"며 "최근 카페나 갤러리 등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 자연스럽게 문화적 요소가 풍성해질 것"이라고 했다.'SOHO63'을 운영하는 이호준(32)씨는 "개항장 거리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흐르는 곳이면서도 서울의 인사동이나 삼청동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인천 중구청에 따르면 관동과 중앙동, 북성동·동인천동·신포동 일부를 포함한 개항장 문화지구에 위치한 문화공간은 2011년 37곳, 지난해 51곳에서 현재 57곳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인천문화재단 손동혁 본부장은 "최근 이 지역의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며 "특히 젊은층들이 소규모 카페 등을 개업하는 경우가 눈에 띄는데,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창업을 할 수 있다는 점과 개항장이라는 독특한 장소적인 매력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본다"고 했다.하지만 중구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개항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중구청은 '인천개항장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에 따라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12곳의 문화공간에 조세 감면, 융자, 보조금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써니공방카페' 박서니 대표는 "개항장 거리가 문화특구로 지정된 후 서울 인사동과 같은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이곳에 공방을 열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983년부터 신포동에서 재즈클럽인 '버텀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허정선 대표는 "개항장 거리가 예술가 공간에서 상업화된 도심으로 변질된 서울 홍대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팟알 백영임 대표는 "새로이 정착한 이들이 개항장 거리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더 장기적인 문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또 "단기적인 이벤트성 정책보다, 전문가와 현장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항장 거리의 발전을 위한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정운·박경호기자

2013-10-23 정운·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상) 아트플랫폼·근대문학관

인천시 중구에 위치한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연중 전시회가 열린다. 현재는 '한일 영화홍보전단 비교전시회'가 진행 중이다.그리고 전시회와는 별도로 수십명의 입주작가들이 인천아트플랫폼에 마련한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맞은편에 한국근대문학관이 최근 개관했다. 지난 14일과 15일 두 곳을 찾았다.모두 개항기 건물을 리모델링해 활용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매년 입주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인천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으며, 인천근대문학관은 개항도시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근대'시기 만을 다룬 국내 최초의 문학관이다.# 소통과 교류의 공간, 아트플랫폼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전국 각지에서 온 레지던시 입주작가들은 인천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이 접한 인천을 그들만의 시각으로 재창조하고 있다.이퐁 작가는 백령도의 점박이 물범을 소재로 한 동화책 '백령도 점박이 물범 두올이'를 지난 8월 펴냈다.집필을 위해 백령도 현지 주민들을 만나고, 여러 지역을 답사하기도 했다.지난해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에 대해 "인천에서 학교를 나왔지만, 인천의 개항장거리에 대해선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며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고, 글을 쓰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그는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개항장 일대를 두고 "100여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쌓인 여러 층의 단면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개항기 사람들을 소재로 한 책을 구상하고 있다.신태수 작가는 서해5도를 그리고 있다. 지난해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백령도와 소청도, 대청도를 그리기도 했던 신 작가는 올해 연평도와 소연평도를 그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경상북도 의성이 고향인 그는 "내륙지방에서 생활하다 보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다"며 "인천에 와서 백령도 등 서해5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됐고, 분쟁지역이기도 한 서해5도를 기록하고 싶은 생각에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리금홍 작가는 인천과 서울지역의 결혼이주여성을 만나고 있다.그는 "결혼이주여성들에 대한 지원책은 많이 있지만, 정작 그들의 생활을 직접 들여다보는 작업은 많이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며 "그들이 생활하면서 겪는 일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한다"고 했다.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은 이 곳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장점으로 '소통'과 '교류'를 꼽았다.신태수 작가는 "인천 아트플랫폼은 소통과 열정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올 상반기 진행한 백령도 평화미술 프로젝트의 사례를 들며 "다른 지역 레지던시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며 "아트플랫폼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이를 프로젝트로 발현할 수 있는 조건이 좋다"고 말했다.이퐁 작가는 "여러 분야의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며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인천아트플랫폼은 타 지역의 레지던시보다 그 경쟁률이 높다. 시각미술 입주 작가를 선정할 때는 20대 1이상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한다.우선 다른 레지던시와 달리 도심에 있고, 지하철로 서울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점이 크다.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이 개항장 거리에 위치한 것도 이곳이 작가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 중 하나다. 근대 개항기 건축문화유산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작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인천아트플랫폼 이승미 관장은 "인천아트플랫폼의 위치가 개항장에 있어 역사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마련한 프로그램들은 자연스럽게 작가들로 하여금 인천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작가들은 이 곳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 곳을 떠난 이후에도 인천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말했다.# 인문학 플랫폼, 근대문학관인천아트플랫폼이 작가들을 이 지역에 머무르게 하면서 다양한 인천의 모습들을 발현시키고 있다면, 최근 개관한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문학을 매개체로 인천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한국근대문학관 이현식 관장은 "1883년 개항은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의 성격이 강했고, '수동적인 개방'이었다"며 "이어 일제식민지의 아픔을 겪었고, 분단의 아픔도 겪었다.개항장은 이같은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며 이러한 아픔을 겪으면서 근대문학은 발전했다"고 설명했다.이현식 관장은 이어 "이같은 문화적 콘텐츠를 통해 이제는 우리 손으로 '제2의 개항'을 하려고 한다"며 "영화, 드라마, 만화 등 한국문화, 나아가 한류의 원류가 한국근대문학이다.한국근대문학관은 아트플랫폼과 함께 인문학 콘텐츠를 풍성하게 만들어 나가는 '북플랫폼' 또는 '휴먼(인문학)플랫폼'을 만들고자 한다"며 설립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한국근대문학관을 설계한 황순우 건축가는 "근대문학관은 인문학 플랫폼이다"며 "인문학이란 도시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며, 과거의 자취들을 간직하면서 현 시대의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했다.이어 "이 건물의 설계는 보존이 아니라 재창조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이 한국근대문학관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한국근대문학관은 인근 지역에 주택을 매입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해외작가나 국내 유명작가를 초빙해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강연 등으로 시민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이 관장은 "입주작가들이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인천을 배경으로 한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클 것이다"고 했다.# 개항의 역사가 문화콘텐츠로인천아트플랫폼과 인천근대문학관은 모두 100년 가까이 된 기존의 건축물을 재창조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작가들이 이 곳에서 창작활동을 벌인다.인천 시민과 관광객들은 이곳에 와서 개항이후 최근까지 '인천의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이같은 구도심의 문화시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인천의 정체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인천문화재단 손동혁 본부장은 "인천아트플랫폼이 인천문화의 앵커시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시각예술 중심인 아트플랫폼과 더불어 한국근대문학관의 개관은 이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풍성하게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고 했다.그는 이어 "아트플랫폼 개관 이후 침체돼 있던 구도심 지역인 이곳 일대에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지고 있고, 현재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고 강조했다.♣ 인천아트플랫폼은인천시가 중구 해안동의 개항기 근대 건축물과 인근 건물을 매입해 조성한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과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옛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한 근대 개항기 건축물 등을 리모델링했으며, 창작스튜디오·공방·자료관·교육관·전시장·공연장 등 총 13개 동이 조성돼 있다.♣ 한국근대문학관은'근대'를 다루는 국내 최초의 문학관이다. 1890년대부터 1948년까지 한국근대문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층 상설 전시실에서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들을 터치스크린·동영상·노래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전시하고 있다.2층엔 인천의 근대문학을 주제로 한 전시실과 근대대중문화 전시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한국근대문학관 건물은 1892년에서 1941년 사이 지어진 공장 건물 4개동을 이어 하나의 건물로 리모델링했다.글 = 정운·박경호기자

2013-10-16 정운·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 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① 들어가는 글

근대화 과정 떠받친 기둥 역할 불구광역 쓰레기매립지 등 '아쉬운 대우'GCF본부 유치 등 국제사회 큰관심남북교류 이끌 '평화거점도시' 앞장인구 300만 눈앞 '튼튼한 추진 동력'능동적 변화 지향 새로운 도약 준비인천은 한갓진 어촌 제물포에서 근대를 맞았다. 130년 전 일이다. 외국에 문호를 열고 최근까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에 항구와 공장, 주택이 들어섰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렸고, 전쟁 때문에 서해로 흘러온 실향민은 인천에 정착했다.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이 도시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단지는 국가 경쟁력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이처럼 역동적인 도시가 또 있을까.하지만 인천은 '서울의 관문'이란 구실과 이미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서울에 전력을 보내는 발전소가 인천 연안에 즐비하게 들어섰다. 경인고속도로는 인천 도심을 남과 북으로 갈랐다.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광역 쓰레기매립지가 도시 한복판에 버티고 있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은 인천으로 쓰레기를 보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2013년 인천은 '제2의 개항'을 준비하고 있다. 제1의 개항이 외세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었다면, 제2의 개항은 능동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무엇보다 추진 동력이 좋다. 인천의 공항과 항만은 확장 중이다.인천은 인구 기준으로 국내 3대 도시에 올랐다.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 창출 전망이 좋다.인천시 중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화콘텐츠는 도시를 살찌우게 하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세계와 대한민국의 '접점'이 됐다.접경도시인 인천은 향후 통일시대에 대비해 남북교류의 중심지로서 구실이 가능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제2의 개항은 여느 지자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밋빛 공약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내셔널 프로젝트로도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인구 300만 시대 눈앞… 2030년께 제2의 도시지난달 말 기준 인천시 주민등록 인구는 291만9천759명으로, 3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인천 인구가 100만명을 넘어선 건 1979년. 이로부터 약 13년이 지난 1992년에 200만명에 도달했다.'200만→300만' 소요 기간도 이보다 1년 정도 앞설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하반기 인천은 인구 300만 시대를 열 것으로 전망된다.인천은 전국에서 인구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다. 지난해 인천 인구증가율은 1.41%로 전국 최고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인천 인구 증가율은 줄곧 전국 시·도에서 1~2위를 차지했다.인구 규모 1·2위 도시인 서울과 부산의 인구는 최근 감소세로 전환됐지만, 인천은 증가세에 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할 때 인천의 순유입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대로 가면 2030년을 전후해 인천 인구가 부산을 추월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인구 증가와 함께 행정구역 면적도 확장됐다.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인천 행정구역은 약 165㎢였다.이후 공업단지 조성을 위한 매립, 시 외곽지역 편입 등으로 1985년 207㎢였던 면적은 1995년 강화·검단·옹진 등의 편입으로 954㎢까지 증가했다.10년 새 4배 이상 땅이 넓어진 것이다. 2013년 현재 인천시 면적은 1천41㎢이고, 송도국제도시 매립사업 등으로 땅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지난 8월 기준 인천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약 111만대를 기록했다. 40년 전인 1973년(약 6천대)과 비교하면 185배 증가했다. 이와 함께 도로망은 촘촘해졌다. 1990년대 경인고속도로 확장, 제2경인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도로 사업이 진행됐다. 2006년 기준 인천 도로 길이는 2천370㎞였다.#내실 다지는 성장낡고 오래된 구도심을 전면개량 방식으로 뜯어고쳐 고층 아파트와 건물을 짓는 것이 2000년대 중반까지 인천시의 구상이었다. 200여곳이 개발지구(도시정비예정구역)로 지정됐다.주택재건축·재개발 붐이 일었지만, 실제 착공된 곳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부동산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개발 동력은 상실됐다. 도시는 황폐화됐고, 빈집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재개발 여부를 두고 주민들은 반목하고 대립했다.인천시는 정비예정구역에서 해제됐거나 주거 환경이 나쁜 지역을 대상으로 '인천형 마을(공동체)만들기' 사업을 기획, 추진 중이다.시작 단계이지만, '전면 철거 후 아파트 건설' 위주의 개발이 '주민 주도의 공동체 회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전환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이처럼 인천은 지난 한 세기 외형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애써 무시하거나 돌보지 못했던 '도시의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제2의 개항이 이전과 차별화되는 지점 중 하나다.이와 관련해 과거 개항장 중심지였던 인천 중구 일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가 인천 안팎에서 주목받고 있다.지난 달 27일에는 옛 창고를 개조한 건물에서 한국근대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19세기 말엽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한국 문학의 전반을 기록하는 공간이다.근대문학관 건너편에는 인천아트플랫폼이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오래된 창고의 외형을 보존한 채 내부를 리모델링해 미술전시관, 공방으로 만들었다. 전국의 미술 작가들이 인천아트플랫폼에 일정 기간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개항 도시 인천에는 외국인이 많이 산다. 지난 달 말 기준 인천의 외국인 수는 4만9천634명으로, 7대 특·광역시 중 서울 다음으로 많다.남동·주안·부평산업단지 주변에는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에서 돈벌이를 위해 인천에 온 이들이 많다. 연수구 옥련동 주변에는 중고자동차 수출업에 종사하는 요르단, 리비아, 러시아인들이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인 송도국제도시와 영종지구에서는 R&D, 대학, 국제학교, 도시개발, 호텔, 항공부문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이 거주한다.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 온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특히 인천의 직장에 단신 부임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머무르며 일정 기간 한국을 체험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게 특징이다.3D 제조업에 종사하는 저소득 외국인 노동자부터 고소득 전문직 직장인까지 인천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인천시는 올해 처음 '다문화정책과'를 신설해 이들에게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첫걸음을 뗐다.#GCF에서 남북교류 거점까지지난해 10월 녹색기후기금(GCF) 본부 소재지가 인천 송도국제도시로 결정됐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송도가 스위스와 독일 등 선진국을 제치고 사무국 장소로 낙점됐기 때문이다.세계은행 한국사무소도 서울이 아닌 송도에 둥지를 틀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밖에도 송도에는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UN ESCAP) 동북아지역사무소, 유엔 아·태 정보통신 기술훈련센터(UN APCICT), 유엔 재해경감국제전략기구(UN ISDR) 동북아지역사무소·도시방재연수원,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 파트너십(EAAF), 유엔 국제상거래위원회(UN CITRAL) 아·태 지역센터, 유엔 지속가능개발센터(UNOSD) 등의 국제기구가 입주해 있다. 인천은 대한민국이 세계와 만나는 접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도시 네트워크는 확산되고 있다. 인천은 전 세계 10여개 국가의 30여개 도시와 자매·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일부 자매·우호도시와는 공무원 상호 파견을 통해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중국 단둥에 축구화공장을 설립하는 등 남북교류사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남북관계 경색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이른바 '평화도시 거점'을 인천에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글 = 김명래기자

2013-10-09 김명래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⑧산업단지 (下)

남동산단 2010년 승인 고시… 시·산단공 등 주도 7개 완료공동물류센터 95% 가동·민간 진행 QWL밸리 사업도 속도주안·부평산단 '확산단지 응모' TF팀 꾸려 3단계로 계획인천 내 산업단지의 역사는 대부분 40년이 넘는다. 이들이 조성된 시기의 산업단지 역할은 동종 업계, 공장의 집적화에 무게가 실렸다.때문에 공장 시설과 설비를 위한 공간 외에 편의시설, 문화시설, 주차시설 등의 필요성은 대두되지 않았다. 하지만 4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산업단지의 역할이 확대되고, 그 개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인천에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산업단지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구조고도화사업'이 시작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남동국가산단은 인천에서 가장 먼저 구조고도화사업을 벌인 곳이다. 이곳은 2009년 12월 반월·시화, 구미, 익산 등과 함께 구조고도화사업 시범단지로 지정됐다.남동국가산단의 구조고도화사업은 땅의 용도를 바꿔 산단의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한국산업단지공단 인천지역본부 주도하에 남동국가산단은 2010년 11월 구조고도화 계획 승인 고시를 얻어 총 12개 사업을 추진, 현재 7개 사업을 완료했다.구조고도화사업은 산단공, 인천시, 민간 등이 어울려 진행했다. 이들은 공동물류센터와 화물주차장, 주유소, 종합비즈니스센터, 보육시설, 아파트형 공장 등을 새로 지었다.이 중 산단공이 세운 공동물류센터는 2011년 운영 사업을 시작해 현재 30~32개사가 활용하고 있으며, 가동률이 95%에 이른다. 화물주차장은 남동국가산단 내 주차장 확보, 교통 불편 감소 등의 효과를 냈다.올해 6월과 9월 각각 문을 연 성강지식산업센터, 향기나눔이보듬이 어린이집도 남동국가산단 환경 변화를 이끄는 데 한몫했다.특히 소래·논현택지개발지구 내 1호 근린공원에 위치한 어린이집은 산업단지 내 워킹맘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로, 현재 65명의 아이들과 11명의 교사가 속해 있다.민간이 주도하는 'QWL(Quality of Working Life) 밸리' 조성 사업은 올 하반기 차례로 착공할 예정이다.이 사업은 지식산업센터, 근로자복지타운, 물류센터 등을 건립해 근로자 숙소와 물류·창고시설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강소기업이 남동국가산단에 편히 머무를 수 있는 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QWL 밸리 사업은 민간 사업자 선정, 수익성 확보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 남동국가산단 입주기업인 A사가 지식산업센터와 근로자복지타운 건설을 맡으며 속도가 붙고 있다.A사는 부지 매매 계약을 완료하고 건물 설계를 진행 중이다, 운영 방식은 분양과 임대를 겸한다.계획에 따르면 QWL 밸리 사업은 2015년 완료되며, 이후 남동국가산단은 청정 도금센터를 표방하는 지식산업센터, 60여개 객실과 휴게소를 포함한 근로자복지타운 등을 갖추게 된다.주안국가산단과 부평국가산단도 구조고도화사업 초읽기에 들어섰다.한국수출국가산단으로 탄생한 두 국가산단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단지로, 지난달 3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낸 구조고도화 확산단지 공모에 응모했다. 이를 위해 주안국가산단과 부평국가산단은 지난 7월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구조고도화사업 계획을 세웠다.산단공 주안지사에 따르면 두 산업단지는 2000년부터 12년 동안 수출 증가율이 24%에 그치는 저조한 성적을 냈다.이는 주안국가산단, 부평국가산단 내 기업들이 경영 악화로 부지를 매각하거나 임대사업자로 전환한 것과 관계가 있다. 또 임차 업체가 급증하며 생산, 고용 등의 규모가 매우 작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TF팀은 두 국가산단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1~3단계 구조고도화 계획을 내놨다.1단계(2014~2015년)는 주안·부평국가산단을 구도심 허브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뿌리산업특성화센터, 비즈니스허브센터, 융복합물류센터 등을 짓는다.2단계(2016~2018년)는 지식서비스산업 유치, 육성 시기다. 이 기간 주안국가산단은 인천도시철도 2호선(2016년 준공 예정) 역세권에 지식산업센터를 개발해 연구개발업, 엔지니어링, 컴퓨터 프로그래밍, 첨단 업종 등을 본격적으로 유치한다.3단계(2019~2024년)는 1~2단계 구조고도화사업 추진과 개별 기업 참여 확대를 발판으로 삼아 주안·부평국가산단 구조고도화사업을 전 입주 업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다.TF팀에 따르면 구조고도화사업 초기 사업 대상지는 주안국가산단 전체 면적의 8%, 부평국가산단 전체 면적의 7.7%에 불과하다.이외 TF팀은 자동차부품소재 R&D연구센터, 공공임대자전거 시설, 태양광 발전 설비, 비즈니스호텔, 공공어린이집 등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TF 팀장을 맡은 조성태 산단공 주안지사장은 "10월 구조고도화 확산단지 공모 결과가 나면 곧장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사업 초기, 구조고도화 사업 대상지가 넓지 않지만 변화에 대한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돼 있기 때문에 사업 확장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한편, 산단공 인천지역본부는 구조고도화사업으로 외형적 변화를 이룸과 동시에 클러스터 사업을 추진해 내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클러스터는 부품, 소재, 기반기술 등 주요 분야별로 산·학·연 협의체(MC)를 구성해 운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들은 기업 역량 강화를 위한 과제를 발굴해 주고, 기술 도약을 위한 조언과 지원을 한다.남동국가산단은 2008년 4월, 주안과 부평국가산단은 2010년 4월 MC 구성과 운영을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 6년간 3천800여 회에 이르는 네트워크 활동을 벌였고, 802건(170억원)의 기업 어려움을 해결했다.앞으로 산단공은 MC를 중심으로 대·중소 상생 협력을 목적으로 한 구매 방침 설명회, 공동기술개발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며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공동교육훈련사업을 펼 계획이다.지자체가 관리하는 일반산업단지에도 여러 변화와 발전이 감지된다.후발 주자인 송도지식정보산단에는 엠코테크놀로지와 같은 첨단 기업체의 입주가 이어지고 있고, 인천 대표 일반산단인 서부산단 내에는 LG전자 전기자동차 부품 및 시험생산공장이 문을 열었다.특히 오래된 일반산단 내 대기업 입주는 주변 지역 발전, 구조고도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산업계 기대를 모으고 있다.글 = 박석진기자

2013-10-02 박석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⑧ 산업단지 (上)

'인천 최고령' 부평국가산단 섬유·봉제업체가 주류 이뤄시간 지날수록 업종의 변화 주안산단 기계류 집적화 특징남동산단, 1980년대 LH 2단계로 공사… 입주경쟁도 치열인천에는 3개의 국가산업단지(국가산단)가 있다. 남동국가산단, 부평국가산단, 주안국가산단이 그것이다. 이 중 부평국가산단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산단이다.1960년대,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섬유, 봉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수출에 앞장섰고,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 '구로공단'이 탄생했다.수출 물꼬가 터지면서 구로공단 입주 희망자가 늘어갔고, 이는 금천구 가산동 일대 수출2~3단지, 부평국가산단(수출4단지), 주안국가산단(수출5~6단지) 조성으로 이어졌다.부평국가산단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수출5단지는 폐염전 지역을 매립해 만든 것이며, 수출6단지는 인천 비철금속공업단지로 땅 고르기 작업을 하던 중에 편입됐다.1960~70년대 조성된 부평국가산단과 주안국가산단은 '수출전진기지화'라는 목표에 걸맞게 우리나라 초기 수출 효자 품목인 섬유, 봉제 업체가 다수 자리했다.'똥물사건'으로 우리나라 노동사에 뚜렷한 기록을 남긴 동일방직도 부평국가산단 내 위치해 있었다.부평국가산단, 주안국가산단 등과 같이 40~50년 전 조성된 산단은 그야말로 같은 업종을 밀집시켜 놓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 만들어진 산단은 공장 부지 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땅이 없었다.2000년대 들어 국가산단에 대한 구조고도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근로자에 대한 처우, 근로 환경 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며 산단 내에도 근로자를 위한 복지공간과 편의시설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이외에도 부평국가산단과 주안국가산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업종 변화를 겪었다.산업 환경이 바뀌며 국가산단별 특성과 주요 업종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데, 특히 주안국가산단은 대우통신, 새한미디어, 로얄동도 등 당시 대기업으로 불릴 만했던 기업들이 자리를 잡으며 기계 업종 집적화 특징을 드러냈다.부평국가산단에는 전기, 전자 업종이 다수 모여들었다.한국샤프가 이를 대표하는 업체다. 이외 커피 등 먹거리를 만드는 동서식품이 아직도 부평국가산단을 지키고 있다.남동국가산단은 인천 내 국가산단 중 가장 늦게 조성됐지만,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인천 전체 산단을 놓고 봐도 남동국가산단 규모가 가장 크다. 약 957만㎡ 규모의 남동국가산단은 '중소기업 집합소'다.가장 큰 공장이 1만6천㎡ 내외며 현재도 이 정도 규모를 가진 기업체는 5곳 정도다. 이외 대부분은 990~1천650㎡로 매우 영세하다.남동국가산단은 알려진 대로 매립지다.19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인천 남동지역 일대를 공업단지로 조성하기로 확정했다. 이는 서울지역 내 용도지역 위반공장을 이전하기 위함이었다.용도지역 위반공장은 공해, 폐수 등을 동반하는 염색, 도금, 주물 등이 해당됐다. 한국산업단지공단 기록에 따르면 서울 내 용도지역 위반공장은 7천559개였고, 당장 서울을 떠나야 하는 공장은 3천151개였다.이 중 1천개 공장은 반월국가산단에서 수용이 가능했지만 나머지 2천100여개는 이전지 확보가 막막한 상황이었다.강제 이전으로 다수의 공장을 문 닫게 할 수 없었던 정부는 남동국가산단을 조성해 이들 공장을 이전하기로 했다.남동국가산단 조성 자금은 한국산업단지공단 자금과 국민투자기금으로 마련했다. 또 조성 공사 시행은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가 맡아 두 차례에 걸쳐 조성했다.수인선 협궤철도(현 남동인더스파크역 등)를 기준으로 내륙 쪽 즉, 현재 인천상공회의소와 인천중소기업청 등이 위치한 쪽이 1단계 공사로 조성됐다. 바다 쪽 2단계 공사는 1986년 10월 시작돼 1992년 6월 끝났다.남동국가산단은 당시 폐염전이 70%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논·밭·구릉지였다. 1단계 공사 후 분양이 이뤄진 1989년에도 2단계 공사 지역에서는 모래와 자갈 등을 수차례 부으며 매립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1985년 1단계 공사가 시작되며 남동국가산단 분양과 관리 업무를 전담할 기관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대통령 경제비서관, 경제기획원, 건설부, 상공부 등이 관리 기관 확정을 위해 회의를 벌였고 인천시가 직접 관리하는 방안을 거론했지만 결국 경인지역 수출공업단지를 관리하고 있었던 한국산업단지공단이 남동국가산단 관리처가 됐다.1989년, 남동국가산단 분양 업무를 맡았던 이순노 한국산업단지공단 인천지역본부장은 "정부로부터 이전 명령을 받은 공장, 수도권 과밀억제지역에 위치한 공장 등이 우선적으로 남동국가산단에 입주할 수 있었다.입주 경쟁도 심했다. 분양 공고일에는 사무실 밖으로 길게 줄을 서는 일이 흔했고, 4대 1의 경쟁률도 심심치 않게 기록했다"고 했다.그의 기억 속에서 남동국가산단의 예전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남동국가산단 조성으로 근로자 거주 시설, 숙소가 필요해지면서 연수택지, 논현택지 개발이 시작됐다.남동국가산단 조성 이전에 남동지역의 아파트라고는 만수동 주공아파트가 유일했다. 매립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남동국가산단 끝 경계에는 바다가 맞닿아 있었다.매립지이기에 정밀기계 공장은 입주가 어려웠고, 공업용수가 부족해 원단 가공 등 용수 다소비 업종은 입주 부적격 업종으로 분류돼 있었다.이 본부장은 "지금은 남동국가산단이 매립지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조성 초기에는 공장 앞이나 길가에 심어 둔 나무가 누렇게 말라 죽고 일부 공장에는 금이 가는 등 염분기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고 했다.이어 "송도국제도시가 생기며 남동국가산단의 성격도 바뀌었다. 조성 초기는 바다를 낀 임해공업단지였지만 지금은 완전한 도심형 산업단지가 됐다"고 했다.7개 일반산단중 후발 송도지식정보·검단산단 조성진행개별 관리주체 효율적 총괄할 '인천산업단지공단' 시급인천에는 국가산업단지 외에 7개의 일반산업단지가 존재한다.인천기계산단과 인천지방산단의 태동은 도심내 공업시설과 주거시설 분리, 지역경제 성장을 주도할 업종 육성, 밀집화 등으로 비슷하다.인천기계산단은 인천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소규모 기계 공장을 모으기 위해 만든 민간 공업단지다. 1968년 12월 기계공업공단설립기성회가 발족했고, 공업지정지역 부지정리공사 등을 추진해 기계산단을 조성했다.인천지방산단은 1965년 10월, 남구 도화동 일대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며 탄생했다.하지만 본래 이곳은 개별적으로 자생한 공장이 몰려 산업단지를 이룬 것으로 목재·가구·금속·기계 등 다양한 업종이 골고루 섞였다.현재도 이건산업·이건리빙·이건창호시스템·동부제강·태화금속·서울엔지니어링·현우산업 등 여러 업종의 기업이 생산 활동중이다.송도지식정보산단·검단일반산단 등은 일반산단 후발 주자로 2000년대 계획적으로 조성 사업이 진행된 곳이다.특히 검단산단은 검단신도시 사업 등과 맞물려 이전이 불가피해진 공장에게 부지를 공급하고, 새로운 산업 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조성됐다.검단산단은 오는 12월 조성사업 완료를 앞두고 있으며, 현재 분양률은 73.4%(산업시설 면적 기준)다.한편, 인천시는 2007년 도심 재개발 계획을 추진하며 '인천지역 산업 재생을 위한 공장 재배치 정비계획' 용역을 진행했다.여기에는 일반산단 배치, 특화 업종 지정과 육성, 경쟁력 향상 방안 등이 담겼지만 아직까지 현실화된 내용은 많지 않다.그해 발족한 인천산업단지포럼은 총 5차례 포럼을 통해 일반산단의 통합관리 필요성을 강조했다.당시 인천산업단지포럼측은 "국가산단과 일반산단, 신규 산단 공급·관리를 책임질 가칭 인천산업단지공단을 세워야 한다.산단별 관리 주체를 통합해 총괄관리체계를 만들어야 효율적인 단지 관리가 가능하며 구조고도화 사업 역시 일관성있게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박석진기자

2013-09-25 박석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⑦경인선(경인전철)

부설권 딴 미국서 중도포기 일본이 건설객차 6량 하루 2차례 왕복·90분 소요개통 초기 주안 염전·부평 미곡 수송서울로 경제력 흡수되는 '빨대효과'"철도는 문화적 충격" 작가 감수성 자극1960년대 복선화·1970년대 전철화 발전일본은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는 철도를 건설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다.일본은 '식민지 수탈'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등 경제적·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조선에 철도를 놓았다. 철도가 수탈과 전쟁의 수단이었던 셈이다.반면 철도가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이와 같이 경인선에 대한 평가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경인선은 인천 도시공간 구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역사 주변에 주거지와 상업지역이 형성되는 등 경인선은 인천의 도시공간 구조가 단핵(單核)에서 다핵(多核)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경인선으로 인해 서울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서울이 인천의 경제력을 흡수하는 이른바 '빨대 효과'(Straw Effect)가 나타나기도 했다.빨대 효과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의 부작용 중 하나다. 하지만 경인선이 있었기에 인천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천의 도시공간·산업 구조가 변하다경인선은 인천의 도시공간 구조를 변화시켰다.인천항 개항 이전 제물포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개항 이후 일본과 청나라 등 각국의 조계지가 생겼고, 개항장 도시 개발에 근대식 도시계획이 적용됐다.경인선은 공유수면 매립과 함께 시가지를 확산시키는 촉진제가 됐다. 경인선 역사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됐다.이에 따라 인천의 시가지는 경인선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확산되는 형태가 됐다. 반면 역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도시화가 더디게 진행된다.1980~90년대 인천시 청사가 중구에서 남동구로 이전하고, 택지 개발, 산업단지 조성, 송도 공유수면 매립 등이 이뤄지면서 인천 남북 축에 시가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변화에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도 영향을 미쳤다.경인선 개통 초기 주안에는 소금밭(염전)이 있었고, 부평은 평야였다. 일제강점기 때 경인선은 주안의 천일제염업, 부평의 미곡농업·군수공업 수송 라인 구실을 했다.1960~70년대 정부의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주안과 부평지역에 공업단지가 조성된다.공단 인근에는 주거단지와 상업지구가 들어서게 됐고, 이로 인해 경인선의 여객 수송 기능이 강화됐다. 경인선은 1970년대 전철화 이후 광역도시권 교통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이화여대 이영민(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철도와 고속도로 라인에 맞춰 새로운 도시공간 구조가 형성되게 돼 있다"며 "경인선 개통으로 인해 인천의 도시 기능이 외곽으로 확산되고, 도심 면적이 넓어졌다"고 했다.수인선 완전 개통, 인천 2호선 완공,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송도국제도시~청량리 구간 개통이 이뤄지면 인천 도시공간 구조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경인선 개통으로 서울 접근성이 향상됐다. 이는 인천이 서울의 배후지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경인선 개통 전에는 인천이 독자적 중심성을 갖고 있었다"며 "경인선 개통으로 인천은 서울의 베드타운 성격을 갖게 됐다"고 했다.배재대 김종헌(건축학부) 교수는 '20세기 초 철도부설에 따른 우리나라 도시 구조의 변화에 관한 연구'(2006년) 논문에서 "인천을 거점으로 하던 일본의 침략성은 점차 경인선을 따라 서울로 옮겨지게 된다"고 했다.이어 "경부선·경의선 개설에 따라 인천의 상권이 일본과 훨씬 가까운 부산에 의해 위축된다"며 "이는 인천에 있던 중요 상사, 금융기관, 관청, 언론기관 등이 서울로 이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필연적 결과라는 의견도 있다. 건국대 윤현위(지리학과) 강사는 "개항 당시에는 서울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며 "인천에 임시적으로 있다가 경인선 개통 이후 서울로 이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그런 과정이 인천의 역사"라며 "개항장을 역사·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경인선은 인천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질러 서울로 이어진다. 경인선이 인천의 남북을 갈라놓다 보니, 도시 기능 단절로 인해 남북 간 연계 발전이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경인선 지상 구간을 지하화(地下化)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인선과 문학'부평 하경/청리(靑里)에 백조 날아 그 빛은 학학(鶴鶴)할시고./허공 중천에 우즐이 나니 너뿐이로다./어즈버 청구의 백의검수(白衣黔首) 한 못 풀어 하노라.'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이 1925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경인팔경' 일부다.조성면 문학평론가는 "우현 고유섭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인선은 한국 근대문학의 또 다른 산실이었다"고 했다.또 "철도는 교통수단이자 문화였고, 문화적 충격이었다"며 "철도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했고, 이것이 작품으로 나타났다"고 했다.인하대 최원식(인문학부) 교수는 '황해문화' 1996년 가을호에 기고한 '경인선의 문화지리'란 제목의 글에서 "경인선은 일제의 군사적 목적 아래 계획됐지만, 뜻밖에도 인천의 문화 역량을 한층 북돋았다"고 했다.이어 "그 첨병 노릇을 맡아 한 것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들이었다. 이들의 경인선 근거지가 바로 축현역이었다"고 했다.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가 배출한 문인은 고유섭, 김동석, 정노풍, 함세덕, 현덕, 배인철, 진우촌 등이 있다.# 철도 교통 시대 개막1899년 9월 18일 인천과 노량진 33.8㎞를 운행하는 철도가 개통된다. 이 철도가 바로 경인선이다. 이날 개통식이 열렸지만, 경인선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이듬해 7월 8일 노량진~경성역 구간이 연결되면서 경인선은 완전 개통됐고, 그해 늦가을 개통식이 또 열린다. 이후 경인선은 1960년대 복선화, 1970년대 전철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경인선 건설공사는 미국인이 시작하고 일본이 끝냈다.미국의 기업가 모스(Morse, James R.)는 1896년 3월 29일 조선 정부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얻어 냈다. 일본도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했다.하지만 청일전쟁(1894~95년)을 치른 데다, 을미사변(1895년)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부설권을 얻지 못했다.모스는 1897년 3월 22일 경인선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난으로 결국 일본에 부설권을 넘기게 된다.'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스씨는 그가 미국으로부터 건설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고, 그 사업은 매우 수지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이러한 예상은 실수였다. (중략) 미국의 자본가들은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꺼렸다'.영문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 1898년 3월호에 게재된 글이다.1899년 개통 당시 모갈탱크형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이 시속 20~22㎞(최고 속도 60㎞/h)로 하루에 두 차례 왕복했다. 소요 시간은 1시간30분이었다.운행 초기에는 일본인 등 외국인이 주로 이용했다. 노선의 정식 명칭은 '인천~노량진'이었지만 '제물포~노량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당시 외국인들은 '인천'보다 개항장인 '제물포'라는 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승차권에도 제물포로 표기됐다고 한다.코레일 배은선 철도사·철도박물관 담당은 "경인선 이용객 대부분이 일본인 등 외국인이었다"며 "이 때문에 행정구역 지명은 무시되고, 외국인이 이해하기 쉬운 지명이 사용됐다"고 했다.당시 행정구역으로 보면 인천과 노량진 모두 경기도에 속했다.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기 전까지는 광역철도가 아닌 도시철도였던 것이다.글 = 목동훈기자

2013-09-11 목동훈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下)

1883년 인천해관 창설 '비자주적 관세행정'우편제도 1884년 분국 개국… 전화와 함께 일본과 이원화조선 첫 기독교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목사 1885년 부활절에 도착인천내리교회 새로운 사상 전파제물포로 들어온 서양의 물품들이 조선인에게 근대를 경험하게 했다면, 새로운 제도나 인프라는 제물포를 근대도시로 만드는 토대가 됐다. 새로운 종교는 전통적인 사고를 바꾸기도 했다.하지만 이 같은 제도나 인프라의 유입은 외국세력이 당시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려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근대적인 행정체계, 통신수단 등은 외국세력이 조선의 이권을 편리하게 가져가는 일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애썼지만, 근대 문물로 무장한 외국세력의 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국제적 기준에 맞춰 변화하는 행정개항과 함께 일본, 청나라, 서구 국가 등을 상대로 한 '근대적 의미'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각국을 오가는 수출입 화물에 대해 국제적 기준에 맞는 '관세업무'가 필요했으며, 이를 뒷받침해 주는 '통상사무'를 볼 기관이 필요했다.조선은 부산항 개항 이후 7년 만인 1883년에 관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무관세로 통관 절차를 밟았다.제물포에 인천해관(仁川海關)이 창설된 건 1883년으로, 부산항 개항(1876년)보다 7년이 늦다.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 직후 일본과 7년간 수출입물품에 대해 관세를 받지 않겠다는 '무관세 각서'를 교환했다.같은 해 부산이 가장 먼저 개항을 하고 두모진해관(豆毛鎭海關)을 설치했지만, 일본과의 무관세 각서 탓에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관세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의 중요한 수입이 되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 관계에 있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 정부는 이 같은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인천해관은 자주적인 관세 행정을 펼치지 못했다.조선은 해관 설치를 위해 청나라 해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G. von Mollendorff)를 초청해 총세무사를 맡기고, 청나라에서 창설 자금 21만냥을 빌렸다.인천해관이 생긴 직후인 1883년 8월 조선은 제물포에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를 설치해 해관 사무를 관장했다.인천감리서의 당시 정식 명칭은 인천감리아문(仁川監理衙門)으로, 초기에는 개항장에 설치된 조계의 행정 업무도 함께 처리했다.제물포를 드나드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수출입 화물이 증가하자 감리서의 역할은 점점 커졌다.1895년 갑오개혁의 지방제 개편에 의해 잠시 동안 폐지됐다가 1년 만에 부활한 감리서는 근대적인 경찰 업무와 재판소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면서 근대적인 행정기관의 면모를 갖추었다.인천감리서는 백범 김구가 수감돼 재판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살해한 김구는 재판을 받기 위해 황해도 해주에서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이는 개항 후 최초로 이뤄진 외국인 관련 재판이었다.인천감리서 터를 역사관광지로 조성하자고 최근 인천 중구청에 제안한 중구의회 전경희 의원은 "개항기 감리서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행정기관으로, 개항장이 외세 침탈의 상징이라면 감리서는 반대로 외세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려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근대 통신수단을 둘러싼 '한일전'개항장 제물포는 수도 한성의 관문이자 일본, 청, 서구 국가 등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외교전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발빠른 정보는 필수였다.전통적인 역참제에서 정보 전달과 교류는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일본과 청나라 등은 조선 내에서 근대적인 통신수단 점유권을 앞다퉈 차지하려 했다.근대 통신이 도입되는 과정을 보면, 각국의 이권 침탈 야욕과 함께 통신수단마저 다른 나라에 넘길 수 없다는 조선의 치열한 견제를 엿볼 수 있다.조선에 가장 먼저 도입된 근대 통신 체계는 '우편제도'다. 1884년 11월 18일 한성의 우정총국(郵政總局)과 제물포의 인천분국이 개국해 우편 업무가 시작됐다.하지만 같은 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김옥균 등 개혁파에 의해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폐지됐다.10여 년 뒤인 1895년 7월 갑오개혁 일환으로 우정총국의 후신인 우체사(郵遞司)가 한성과 인천에 설치돼 우편업무가 재개됐다.인천우체사의 관할 구역은 구내(우체사 소재지로부터 10리 이내)와 구외(20리 이내)로 구분됐다.당시 우편물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기 전까지 한성우체사와 인천우체사 집배원이 각각 우편물을 수거한 뒤 중간지점(현 인천시 서구 오류동 부근)에서 만나 우편물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배달됐다.하루에 한 번만 맞교환이 이뤄졌는데 무려 9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한편 조선에 우체사가 설치되기 전, 일본은 이미 인천에 위치한 일본영사관에 '우편국(郵便局)'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외국의 필요에 따라 우편체계가 이원화됐던 것이다.인천 일본영사관 내 우편국은 1888년 한성의 일본공사관에 출장소를 설치해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의 우편 사무까지 관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 자체적인 우편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 사는 외국인들도 일본우편국을 이용했다.전화 개통도 우편제도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1898년 조선 정부는 덕수궁에 전화를 개설해 정부 각 부처는 물론 인천해관까지 연결했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오후 3시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외아문(外衙門·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던 중앙관청)에 보고한 것이 인천 최초의 전화 통화다.1902년에는 일반인들도 시외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당시 가입자 수는 총 5명이었다고 전해진다.조선 정부가 일반 시외전화 개설을 서두른 것은 일본의 전화 개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당시 일본은 1902년 6월 개설을 목표로 한성과 제물포 일본조계에 전화 교환시설을 설치하고 한성~인천 간 전화 개설권을 요구했다.조선 정부가 이에 대응해 같은 해 3월 20일 인천~서울 간 전화선을 개설한 것이다. 결국 일본의 전화 개통을 막지 못하고 시외전화도 우편제도와 마찬가지로 이원화되고 말았다.# 제물포에 첫발 내디딘 기독교개항장에 유입된 획기적인 근대 문물 중 하나는 기독교다. 당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성과 인천 등지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과 함께 근대 문물을 전파했다.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북감리교 본부에서 파견한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부부와 미국 장로교에서 파견한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다.조선에 기독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한 날이다.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목사는 기독교 전래의 신호탄이 될 유명한 첫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우리는 부활절 날 아침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절벽을 무너뜨리고 일어나신 주여. 이 나라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에게 광명을 주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소서."조선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정국이 불안했다. 이 때문에 임신한 부인과 함께 제물포에 온 아펜젤러 목사는 한성에 가지 못했다.아펜젤러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6월 20일 다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다. 그는 제물포에 한 달 동안 머물다가 한성으로 갔다.이 한 달은 한국 기독교 또는 감리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간이다. 아펜젤러 목사가 이 기간에 제물포에서 종교 집회를 가졌다면, 한국 최초로 교회가 성립된 곳은 제물포일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로 알려져 있다.1922년 신흥식 목사가 편집한 '인천내리교회역사'에는 인천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정동장로교회보다 2년여 앞선 1885년 처음 시작됐다고 나와 있다. 기독교는 제물포에 근대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1892년부터 1903년까지 내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존스(G.H.Jones) 목사는 1892년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보통학교를 세우고, 5년 후 영화여자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기독교는 모두를 형제라 부른다. 기독교 정신 중 우애, 평등과 같은 개념은 당시 전통적인 신분제 사회에서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며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글 = 박경호기자

2013-09-04 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上)

'유행의 최첨단도시' 제물포에 1886년 첫 성냥공장서구물질 서민층까지 확산 '근대화 천지개벽''세창바늘' 짝퉁까지 판치고 만병통치약인 '금계랍'도 선풍적 인기조선 만물상인 육의전 상권 붕괴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들여온 물품, 즉 '양품(洋品)'은 조선사람들이 서양의 근대적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양품이 조선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준 것은 물론 사고의 변화도 가져왔다.서양상인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개항장의 황금기를 열었다. 하지만 서양상인의 등장으로 500여년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장사해 온 조선상인들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제물포로 들어온 양품서양상인들이 화륜선과 철선에 가득 싣고 온 진기한 양품들은 개항장 제물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양품들은 하루 이틀 밤을 꼬박 새며 우마차로 경성에 당도하기 전, 제물포에서 먼저 소비됐다. 당시 제물포는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였다.제물포를 통해 들어온 획기적이고 다양한 양품들은 조선사람들의 일상에 천지개벽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기록에 따르면 1886년 제물포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생겼다. 부싯돌로 간신히 불씨를 만들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 아녀자들의 중요한 일인 시절에 나타난 성냥, 빨래를 손쉽게 해주는 양잿물 등은 여성을 전통적인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값비싼 한약을 이용할 수 없어 토속신앙에 의존하며 치료를 바랐던 각종 질환은 간단한 양약(洋藥)으로 금세 나았다.아주까리, 동백, 들깨 등의 기름을 짜내 등잔불을 켜 놓았던 조선에, 한 홉(약 0.18ℓ)이면 열흘까지도 불을 밝힐 수 있는 석유가 등장했다.양품들은 조선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편리함을 가져다줬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따른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사람들의 사고를 변화시켰다는 것이 학계 설명이다.인천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전문위원은 "양복(洋服)이 들어오면서 당시 신분을 나타내던 옷자락이 짧아졌다"며 "양담배로 인해 역시 신분의 상징이던 곰방대 길이도 짧아지는 등 양품의 유입이 유교적 신분질서나 사고체계를 서서히 바꿨다"고 했다.이어 "개항으로 서양의 물질문명이 서민층까지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근대적인 가치관으로의 변화가 가속화됐다"고 했다.양품들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양수 인천시문화재위원은 '인천개화백경'(1998)에서 "없는 것이 없을뿐더러 진기하다는 소문까지 난 양품을 사려고 경성, 경기, 충청지방의 상인들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고 했다.물밀듯이 들어오는 양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독립신문은 1897년 8월 7일자 1면에 게재한 논설에서 '조선사람이 쓰는 옷감의 3분의 2는 외국에서 사서 입고, 켜는 기름도 외국 기름이요, 성냥도 외국 성냥이요, 대량으로 쓰이는 종이 역시 수입해다 쓰니 나라에 돈이 남아나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세창바늘과 금계랍개항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상품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1884년 제물포에 진출한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Mayer&Co)이 가져온 '세창바늘'이 오늘날로 치면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꼽혔다.양침(洋針)이라 불린 세창바늘의 인기는 서양 옷감의 도입과 맞물려 있다. 투박한 조선 바늘로는 새로운 옷감에 바느질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잘 부러졌다고 한다.날렵하고 단단한 독일제 바늘은 부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1900년대부터는 소위 '짝퉁'도 판을 쳤다고 전해진다.세창양행은 조잡한 짝퉁 바늘이 나돌자 1924년 8월 1일부터 나흘 연속으로 조선일보 광고를 낸다. '부덕(不德)한 상인들에게.본년 8월 21일까지 시장에 재(在)한 위조바눌 전부를 회수하야 각자 자기의 상표를 밧구어 부치라. 가짜가 또 발견되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또 다른 인기 상품은 역시 세창양행이 수입한 의약품 '금계랍(金鷄蠟)'이다. 원래 제품명은 키니네(kinine)로, 말라리아(학질) 치료제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당시에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해 해열제, 강장제, 위장약으로도 쓰였다.또 강한 쓴 맛으로 인해 어린아이를 키우는 여성들 사이에서 '젖 떼는 약'으로 사용됐다.당시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말라리아를 다스린다는 서양 의약품이 소개되자, 파급효과는 엄청났다.조선 말기 유학자 황현(黃玹)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조선사회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하루걸러 앓는 학질(당학)에 걸리면 노쇠한 사람은 열에 네다섯은 죽었으며, 젊고 기력이 좋은 사람도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금계랍이란 약이 서양에서 들어온 뒤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한 돈쭝(3.75g)만 복용해도 즉효가 있었다. 이에 '우두법이 나오자 어린아이가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오자 노인들이 명대로 살게 되었네'라는 노래가 유행했다"는 내용이 있다.금계랍은 독립신문에만 무려 600여 차례의 광고가 실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광고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와 학의 그림이 함께 실리기도 했다.금계랍 인기는 서양의학이 민간에 깊숙이 전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서구 문화와의 만남'(2010)을 공저한 건양대 이철성 교수는 "서양의학에 기초한 약품들은 복용의 편리함과 효능면에서 한의학 약재들이 주지 못하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며 "서양 의약품이 민간의 주요 소비품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조선사람들은 근대적 위생관과 질병관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됐다"고 했다.# 서양상인 진출과 쇠락하는 조선상인개항을 계기로 제물포에 서양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했다.그 전까지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 이후 밀려 들어온 일본상인들과 청나라상인들이 외국무역상인의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후발주자에 속한 서양상인들은 진기한 양품들을 앞세워 개항장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다.가장 주목할 만한 서양 무역상은 독일계 세창양행이다. 독일계 마이어상사가 설립한 세창양행은 홍콩, 톈진, 상하이, 고베 등 아시아 곳곳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세창양행은 1884년 제물포에 지점을 개설하자마자 육혈포(六穴砲·탄알을 재는 구멍이 6개 있는 권총), 양포, 바늘, 의약품, 인쇄기계, 광산기계 등을 들여왔고, 조선에서 홍삼과 금·은 등을 가져갔다.세창양행은 단순한 무역상의 범주를 넘어 광산권 획득, 해운사업, 화폐사업 등 조선과 경제교역을 넓히기 위한 독일의 산업기지 구실도 했다.1905년부터 조선에서 석유 판매를 독점한 미국계 타운센드상회(Townsend & Co·담손이 상사)도 빼놓을 수 없다. 타운센드상회는 선박, 화약류, 잡화류 등을 가져왔다.특히 이 회사는 스탠더드 석유회사(The Standard Oil Co.)의 등잔용 석유를 독점 판매하면서 유명해졌고, 1892년 타운센드 정미소(담손이 방앗간)란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를 경영하기도 했다.개항장에 최초로 진출한 무역상은 1883년 9월 제물포 출장소를 개설한 영국계 무역상사 이화양행(怡和洋行·Messrs, Jerdine, Mathson&Co)이다. 이화양행은 소가죽을 들여오면서 광산업과 해운업에 손을 뻗쳤다.양품과 함께 밀려든 서양상인들로 인해 조선의 전통적인 상권은 직격탄을 맞았다. 개항이 될 때까지 조선정부가 공인한 조선의 유일한 시장은 도성 안 종루통(현 종로 일대)의 육의전(六矣廛)이 전부였다.육의전 상인들은 조선정부에게 막대한 세금을 주면서 자신들 이외에 모든 상업활동을 불법 행위로 여긴다는 이른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받고, 500여년간 독점적인 상업활동을 누렸다.조선 후기에 금난전권이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육의전의 위세는 기울었지만, 직접적인 상권 붕괴 원인은 개항이었다.한국 경영사 전문가인 박상하 작가는 '경성상계'(2008)에서 '1899년 개통된 경인철도는 근대화의 물결을 싣고서 개항장 제물포에서 경성의 턱밑까지 한달음에 들이닥치게 했다"며 "사람들은 굳이 육의전의 상인들을 통하지 않고도 진기한 개화 물품을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만물상이던 육의전 거리는 서서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글 = 박경호기자

2013-08-28 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下)

이름아닌 '번호'가 신분증 역할 농장관리자 '루나' 채찍들고 감시독립운동·교육에 헌신적 모습… 1906년 '한인기숙학교' 첫 설립1907년 자치단체 '한인합성협회' 결성·2세대 '정체성 유지' 힘써지상낙원을 꿈꾸며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1세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사탕수수 농장에서 농장주 감시를 받으며 적은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지만 자식들을 가르치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돕는 데는 물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250만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이 됐다. 하와이 동포들은 이들을 '뿌리'라고 표현한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삶1903년 8월 고종이 각처에 붙인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공고에는 '기후 온화', '영어 교육', '학비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하와이 이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도 신도들에게 하와이를 '낙원'이라고 소개했다.현실은 달랐다. 하와이로 건너간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다. 당시 노동자들은 등록번호가 있는 '방고(Bangos·번호의 일본말)'라는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하루 10시간의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으며, 이민 초기 월급은 17달러 수준이었다.1905년 하와이 65개 농장에서 약 5천명의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탕수수 농장 관리자 '루나'들은 손에 가죽 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선임위원은 "미국 이민법에 계약이민은 금지돼 있었지만, 사실 이들(하와이 이민자)은 이민사업자가 세운 은행에서 뱃삯과 초기 정착비를 빌린 뒤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으로 갚아 나가는 계약이민자였다"며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으로 하와이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해 줬다"고 설명했다.올 4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조사 분석한 '하와이 이민 1세대 함호용 일가 자료'를 보면 이들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1905년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간 함호용(1864~1954년)은 등록번호 '381'을 받고, 마우이섬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그가 1927년 5월 기록한 농장일지를 보면, 매달 40달러의 수당을 받았는데 지출이 더 많았다. 옷가지, 고기 등을 사려면 47.95 달러가 들어가 매달 적자가 났다.경제적 어려움은 겪었지만, 하와이 사회에는 빠르게 정착해 갔다. 함호용은 4남6녀를 뒀는데, 출생증명서를 보면 이들의 이름은 '써니' '메리' '클라라' 등 모두 미국식이었다. 이들은 미국에 세금을 내기도 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는 "함호용의 자료를 통해 고된 노동을 감수해 온 이민 1세대의 수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대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했던 역사적 모습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뿌리가 되다이민 1세대들이 하와이에 정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과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힘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이들은 믿었다.한인들을 위한 첫 학교는 1906년 9월 감리교 선교회 와드만 감리사가 앞장서 세운 '한인(남학생)기숙학교'다. 한인 동포 몇 명이 교육회를 결성하고 2천 달러를 기부해 만든 학교다.1913년 이승만 박사가 한인 동포 교육사업에 참여하면서 큰 변화가 찾아온다. 그는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교명을 '한인중앙학교'로 변경했다.이승만 박사는 1915년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이주 한인들로부터 3천600 달러를 기부받아 푸우누이 지역에 '한인여학원'을 설립한다.이 학교는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감리교로부터 독립했고, 향후 1953년 인하대학교(당시 인하공과대학) 개교의 밑바탕이 된다.한인 학생들은 당시 하와이 사립학교(유료)에 다니기도 했는데, 이는 한인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사립장학금을 만들어 농장 노동자의 자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940년대 들어 한인 동포 대부분이 시내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한인기독학원은 학생 수 감소로 1947년 폐교됐다.김도형 선임위원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졸지에 국제 미아가 되어 버린 1세대 이민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교육열이 뜨거웠다"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라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게 첫 번째였다.때문에 한인 1.5세대나 2세대 중에서는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 많이 배출됐다"고 설명했다.초기 이민사회에는 선교사 홍승하를 주축으로 한 '신민회' 등 정치·사회단체가 있었다.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농장 캠프마다 '동회'도 있었다. 이들 단체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항일단체 성격을 보이기 시작해, 1907년 9월에는 24개 단체와 30개 동회가 모여 '한인합성협회'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조국 국권 회복과 교육 장려였다.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1일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공립협회와 통합돼 '대한인국민회'가 된다.대한인국민회 창립은 하와이를 비롯한 재미 한인사회의 결집을 상징했다. 이후 노선에 따라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채를 발행했다.여성들도 지금의 적십자사와 같은 '한인 부인구제회' 등 단체를 결성해 만주의 독립군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하와이 이민 1세대가 교육과 국권 회복에 매진했다면, 2세대들은 문화 친교 모임을 통해 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힘썼다.이들은 조선의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나 '애국가', '독립선언가' 등이 담긴 가곡집을 갖고 다니며 음악 활동을 하는 등 조국을 잊어버리지 않았다.현재 하와이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이 지금의 미주 한인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여창석 하와이한인관광협회 고문은 "사람은 누구나 뿌리가 있다. 우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을 현재의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을 다진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하와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최고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한인사회를 지켜 냈다"고 말했다.이어 "한인 최초의 미국 주대법원장인 문대양 전 하와이주 대법원장 등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후손들이 미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민 1세대 덕분"이라고 강조했다.여 고문은 "멀리서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무명의 애국지사들'(하와이 이민 1세대)을 대한민국 국민이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글 = 김민재기자

2013-08-21 김민재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上)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근대 문물 유입의 시발점이 됐지만, 한편으로 인천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했다.1902년 12월 22일 121명의 한국인이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간 것이 우리나라 첫 번째 공식 이민 기록이다.이후 1905년까지 7천여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이들은 낯선 땅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 공동체를 만들어 자녀들을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상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과정과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국내 최초 해외 선교사 홍승하를 소개한다.웨인 패터슨의 책 '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비롯, 국내외 하와이 이민 관련 서적과 논문을 참고했다. 하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1세대와 후손들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가자, 아메리카로!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배 '켄카이마루'가 한국인 121명을 태우고 나가사키로 떠났다.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121명 가운데 19명은 일본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은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이 중 16명은 병에 걸려 귀국길에 올랐고,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이들은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o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정도 일했는데, 당시 성인 남자 월급은 17달러였다고 한다.1900년대 초 하와이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과 우리나라의 열악한 정세가 맞물려 이뤄졌다. 여기에 미국 영사관 알렌(Allen) 공사가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업이 일찍이 이뤄져 1850년대부터 중국인을 비롯 일본인, 포르투갈인, 독일인 등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1897년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하는 조약이 체결됐고, 당시 미국의 '중국인 입국 금지법'이 하와이에도 적용돼 중국인 노동자 도입이 중단됐다. 이에 하와이 정부와 사탕농장주협회는 중국인의 대안으로 한국인들을 제시한다.한편, 한국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극심한 가뭄과 홍수 등으로 기근이 계속됐다. 일본이 한국의 쌀을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국내 양곡시장마저도 무너져버린 상태였다.이런 와중에 1902년 2월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 알렌 공사는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 사탕농장주협회 어윈(Irwin)을 만나 "한국 노동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알렌 공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한국인 노동자를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 굶주린 백성들의 어려움 극복 등을 이유로 내세운 알렌 공사는 1902년 3월 고종의 윤허(允許)를 얻어냈다.알렌 공사는 여권 발급 업무를 보는 유민원을 신설하고, 미국의 사업가 데쉴러(Deshler)를 한국인 이민 모집책으로 선정했다.데쉴러는 신문광고와 공고, 인천 내리교회 도움 등으로 이민자를 모집했고, 1905년 8월 8일 공식 이민이 끝나기까지 총 7천415명의 한국인을 하와이로 보냈다.하와이 이민은 1905년 4월 초 고종이 이민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 종료된다.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이민금지령 이후 2천여명의 한국인이 고국으로 돌아왔고, 5천여명은 하와이에 남았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사업을 벌이거나 로스앤젤레스 등으로 진출해 새로운 한인사회를 만들었다.# 인천과 하와이 이민하와이 이민의 중심에는 인천과 기독교가 있었다.인하대 이영호(사학과) 교수는 "첫 이민선이 인천에서 떠난 것, 이민회사 본사가 인천에 있었던 것, 인천이 수도 서울의 관문인 점 등에서 하와이 이민의 연고를 찾는다면 응당 인천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83년 개항 이후 제물포엔 개항장을 총괄하는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가 설치됐고, 각국 영사관과 조계가 들어선다.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됐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폐쇄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변화시켰다.하와이 이민 책임자 데쉴러는 인천 내리교회 인근에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고, 이민자 모집에 본격 들어갔다. 같은 건물에 이민 비용을 대출해 주는 데쉴러은행도 설립했다.한국인들은 고향 땅을 버리고 타지로 떠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어 이민자 모집이 쉽지 않았다. 여기서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하와이 이민사업에 힘을 보탠다. 존스는 신도들에게 "하와이는 기후와 경치가 좋고, 원주민들을 선교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갤릭호에 탄 1차 이민자 102명 중 제물포, 부평, 강화 등 인천 출신이 86명으로 가장 많았다.이는 존스 목사가 인천지역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하와이 한인 공동체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기독교가 자리잡게 된다.제물포지방교회사를 연구한 동탄감리교회 홍석창 원로목사는 "하와이 이민사를 얘기할 때 기독교는 빠질 수 없는 존재"라며 "이런 이유에서 오늘까지 교회는 미주사회에서 지주 역할을 해왔고, 1920년대에는 교회가 중심이 돼 각종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인천항 개항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인 동시에 디아스포라(방랑하는 유태인·우리나라의 경우 한말 이후 대규모로 해외로 이주해 나간 재외 한국인)의 출구이기도 했다.1860년대 북방지역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중국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월경해 토지를 개간하며 생업을 일군 것과 달리, 하와이 이주는 합법적인 이민이었다.방법은 달랐지만,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국인의 정체성 유지,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 등은 다른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다르지 않았다.홍승하 전도사 최초로 하와이 선교길한국인 감리교회 초대 담임목사 맡아일제 대항·단결 자치모임 '신민회' 조직1903년 하와이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인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나왔다.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는 영흥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전도사 홍승하를 하와이 선교사로 파송한다.홍승하는 1863년 옹진군 영흥면(당시 남양군) 내동에서 태어났다.그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했는데, 1890년대 후반 서울에서 일본인 순사의 따귀를 때리고 도망치다 숨어들어 간 곳이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 집이었다고 한다.아펜젤러 집에서 기독교를 접한 홍승하는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전도했다. 여기서 존스 목사를 만나게 됐고, 1902년 5월 전도사 임명을 받아 영흥도 일대를 담당하게 됐다.전도 활동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홍승하는 이듬해 가을 하와이 전도사로 낙점됐다.하와이에 도착한 홍승하는 1903년 11월 감리교 피어슨 감리사와 함께 한국인전도회를 조직하고 한국인감리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된다.홍승하는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간 단결을 위한 자치모임 '신민회'를 하와이에서 조직한다.신민회는 한국인들의 교육과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기독교 공동체로 시작해 점차 정치적·사회적인 색채를 띠게 됐다.홍승하가 조직한 신민회가 1907년 안창호 등이 국권독립운동을 위해 결성한 신민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하지만 인적 구성, 같은 명칭을 사용한 점을 보면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홍승하는 1904년 귀국 후 강화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06년 인천 영화학교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1918년 지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수원에서 주로 활동한다.수원대 박환(사학과) 교수는 "인천 출생으로 내리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홍승하는 굉장히 주목받아야 할 인물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며 "하와이 초기 이민사회에 끼친 영향도 컸고,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운동 발전 과정에서도 기여가 아주 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김민재기자

2013-08-14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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