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④ 항만노동자

특성상 가장 먼저 인력공급 단체 생겼지만 착취 심해1926~1936년까지 수차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기도항만 노동자 주축 '인천자유노조' 분열과 갈등 겪어1960년대 이후 컨테이너 등장 하역작업 기계화 속도2007년 항운노조 상용화로 차질없는 인력 운용 가능1883년 인천항 개항은 경제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항구가 열렸고, 열린 항구로는 외국에서 사람과 물품이 들어왔다.이 물품은 조선 각지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자본주의사회로 급격히 바뀌었다.경제체제 변화는 노동자의 모습을 바꿨다. 사업자로부터 '임금'을 받는 노동 체계가 탄생한 것이다.농경사회는 '신분' '사회적 서열' '제도상 등급'을 중요하게 여겼다. 임금노동자가 가장 먼저 생겨난 곳이 항만이다.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 항만에서 일한 사람들의 역사를 훑었다. 책과 자료 등을 통해 항만 노동자의 과거를 살폈다.현직에 있는 항만 노동자와 과거 항만에서 일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항만 노동의 특성항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임금노동자가 생긴 곳이다. 항만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항만 노동의 특성에 기인한다.항만으로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나가는 배가 있어야 부두에 일이 생긴다.배의 입출항은 계절과 날씨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규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하역회사는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항만에 인력을 공급하는 단체가 생기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인천항 개항 초기에는 항만 인력을 공급하는 '창신조'라는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항만 인력을 공급하는 기업 형태로 운영됐다.때문에 노동자들의 복지나 처우 개선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만 노동자 수가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이 생겨났다.이후 노동조합에서 항만 인력을 공급하게 됐다.그러나 항만 노동자들은 하역회사에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닌 처리한 물량의 종류와 양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 이러한 인천 항만 노동의 특성은 2007년 항운노조 상용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일제시대 항만 노동자"어느날 중량물인 선로레일의 작업노임을 계산해보니 그날 취업한 반원 16명에게 1인당 12원이 삯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4전밖에 주지 않아 부십장인 이삼봉이란 자에 항의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아, 울분이 나서 구타하다 3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항운노동조합 111년사'에 기록된 고(故) 이주원씨 이야기다. 그는 1937년부터 인천항에서 하역 작업을 했다. 당시 인천에는 '창신조'라는 항만 인력 공급 단체가 있었는데, 횡포가 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창신조는 정해진 임금률로 돈을 주지 않고, 자신들이 임의로 수당을 정했다. 임금률도 일본인과 한국인 등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었다.이 때문에 해방 후에는 창신조의 일원 중 노동자에게 맞아 죽은 자가 많았으며, 언급된 이삼봉이란 사람도 노동자의 보복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항운노동조합사는 전하고 있다.일제시대 때 항만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우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파업이 이어졌다. 1926년, 1928년, 1933년, 1935년, 1936년에 각각 인천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각각 1천여명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임금 인상 또는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항만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의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제의 전시(戰時)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노동조직의 탄생과 변천인천자유노동조합은 대한노총 산하 조직 중 가장 먼저 결성됐다. 자유노동조합은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었다.자유노동조합은 항만에 인력을 공급하는 일도 맡아 그 지위를 굳건히 했다. 그 전에는 하역회사가 십장(일꾼을 감독·지시하는 우두머리)과 결탁해 노동력을 동원했다.자유노동조합은 부두를 7개 지역으로 나누는 등 조직을 정비·확장했다. 그러나 노조는 1947년에 항만연맹과 부두연맹으로 분리되는 등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도끼싸움'은 인천항 노동자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1953년 3월 13일 발생한 '도끼싸움'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생겨난 신세력과 구세력 간의 갈등이 계기가 됐다. 신파 지지세력이 도끼 등을 들고 조합 사무실에 난입해 구파 간부들을 폭행한 사건이다.이러한 갈등 끝에 1956년 인천부두노동조합이 조직됐다. 작업 권역별로 나뉘어 있던 조직을 통일해 작업권으로 인한 분규를 없애려는 움직임이었다.인천부두노동조합은 이후 새로 생겨난 인천부두자유노동조합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1958년 두 노조는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조직으로 태어났다.1961년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시행 등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보장되자, 전국의 노동자들이 전국 단위 조직을 결성했다.이 시기에 전국부두노동조합이 조직됐으며, 인천에 있던 노조는 전국부두노조 인천지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이후 1980년에는 분리돼 있던 항만노조와 운수노조가 통합되면서 전국항운노동조합 인천지부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전국항운노조 인천지부는 인천항운노동조합(1981년), 경인항운노동조합(1998년)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2004년부터는 인천항운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항만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했나?개항 이후 인천항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장됐고,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도 많아졌다. 이와 함께 진행된 것이 기계의 도입이다.개항 직후, 항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을 이용해 일해야 했다. 지게 등의 간단한 도구만을 이용해 배에 있는 물자를 육지로 내려야 했다.1960년대부터 하역 과정에 본격적으로 기계가 도입됐으며, 컨테이너가 등장하면서 하역 작업의 기계화가 빨라졌다. 하지만 벌크화물 하역 작업의 경우, 1980년대까지도 노동자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1980년대부터 인천의 하역회사에서 일한 박희국(69)씨는 "3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도 기계화가 많이 이뤄졌다. 기계 도입 전에는 안전사고도 많이 발생했다"고 말했다.사망 사고 또한 많았다는 것이 퇴직한 이들의 이야기다. 1980년대 인천항에서 일한 고상훈(61)씨는 "철재작업은 외항에서 이뤄졌다.허리에 베어링이라는 장비를 착용했는데, 실수로 바다에 빠지면 그 장비 때문에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익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점차 벌크화물의 컨테이너화가 이뤄지면서 하역 작업에서 기계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안전사고가 줄었으며, 항만 노동자의 노동 강도도 감소했다.# 항운노조 상용화항만 노동자들은 하역회사에 소속돼 있지 않고 항운노조 또는 중간 관리기관에 속해 있었다. 항운노조가 하역회사에 인력을 공급하는 방식이었다.이는 항만 물동량이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시스템이었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시스템이 2000년대 들어 바뀌게 된다.2002년 발표된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방안연구'를 계기로 정부는 부산, 인천, 평택 등 기계화가 진전된 항만을 대상으로 상용화를 추진했다.인천, 부산 등지에서는 이와 관련된 토론회가 연이어 개최됐고, 정부는 항운노조 상용화를 위한 절차를 밟았다.2005년 12월 항운노조 상용화와 이에 따른 지원책을 뼈대로 한 '항만인력공급체계의 개편을 위한 지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이후 9개월간 진행된 100여차례의 협의 끝에 2007년 7월 노·사·정 합의가 이뤄졌으며, 그해 10월 인천항의 상용화 체제가 전면 시행됐다.이 과정에서 항운노조원 800여명의 희망퇴직이 이뤄졌으며, 인력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인력풀이 구성됐다.상용화 이후 발행된 '항만인력공급체계 개편백서'는 상용화의 의미로 ▲노사정 상생 ▲인력비 감축 등 경제적 효과 ▲항운노조원 안정적 고용 등을 꼽았다.글 = 정운기자

2013-08-07 정운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③ 화교 (下)

해방이후 한국 정부의 견제로 무역상들 치명타한국전쟁당시 중공군 개입 따가운 시선 견뎌야해외취업·관광가이드·보따리상… 3세대들 변신차이나타운, 중국 전통 문화공간으로 발전 기대해방 이후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도 한국의 화교사회는 또다른 고난의 시기를 보낸다. 한국 정부의 정책이 바뀜에 따라 부침을 겪으며 생존을 위한 고민과 선택에 내몰렸다.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화교들은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화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봤다.# 해방과 한국의 화교 견제해방 이후 화교들은 일제가 아닌 한국 정부의 '견제'를 받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외국인 출입 규제와 외환 규제가 이뤄진다.이 때문에 화교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고, 화교 무역상들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은행에서 환전이 불가능해지다 보니 공식 환율보다 3~4배 비싼 암시장에서 외환 거래를 했다고 한다.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전국에 외래상품 불법 수입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에 대한 창고 봉쇄 조치가 내려진다.당시 무역업을 주도했던 물건을 대량으로 사뒀다가 시기를 봐서 매매하는 화교 무역상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인천항과 차이나타운 주변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함대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중공군의 개입 이후 화교들은 한국 사람에게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1961년에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 소유가 금지됐고, 화교들은 채소 경작지를 잃게 된다.한국인의 명의를 빌려 땅을 사기도 했지만, 사기와 배신 등으로 경작지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1968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금지법이 변경,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주택 면적은 660㎡ 이하, 점포는 165㎡ 이하 내에서만 취득이 가능하게 된다.1953년과 1962년 두차례 진행된 화폐 개혁도 화교들에게는 타격이었다. 화교는 주로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했는데 교환 한도 때문에 휴지 조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1970년에 한국 정부는 짜장면 값을 동결시켰고, 쌀을 아끼자는 절미운동을 이유로 중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했다.쌀밥 판매금지조치는 3개월 만에 해제됐지만, 이 시기에 중식당에서는 볶음밥을 팔지 못했다. 밥을 판매하다 적발돼 영업정지를 당한 곳도 있었다.한국에서 토지소유가 제한되고, 은행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없었던 화교들은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창업도 힘들었다. 화교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화교 2세대까지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대로 살았다면 3세대는 달랐다. 해외로 이주를 꿈꾸거나 친지를 통해 해외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했다.인천의 화교들은 대만에 가서 식당, 공장, 일반기업, 시장 등에서 일을 했고 임금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중국어와 한국어가 모두 가능한 이들은 관광가이드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 일본 등을 오가며 국제경제 감각을 익혀 보따리상 등 돈 되는 일들을 찾기도 했다.# 한중수교와 화교1992년 8월, 한국정부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는다. 당시 화교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한국에 살며 대만식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화교들이기에 충격이 컸다.화교 사회에서는 '감정적 한국정부가 세련되지 못한 단교를 했다'거나 '일방적인 통보였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인천의 화교사회에 닥친 직접적인 시련은 없었다.오히려 한중 수교로 중국과의 무역이 확대되며 새로운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한국과 중국을 오갔던 대 중국 보따리상 중에는 매월 수억원씩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한중 수교 이후 빠른 속도로 조선족들이 유입된다.이들은 한국의 화교와 경쟁자가 됐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화교들이 조선족들의 유입으로 손해를 많이 보는 경우도 있었다.2005년에는 영주비자가 신설되고, 그해 8월에는 선거법이 개정되며 지방선거권이 생겼다. 2006년 5월 31일 첫 지방 참정권 행사가 이뤄진다.# 차이나타운과 화교의 미래인천시 중구는 북성동 일대에 단계적으로 차이나타운을 조성, 지금의 모습이 완성됐다.3개의 패루를 설치하고 한중문화관을 건립했고, 도로 정비 등을 통해 중국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차이나타운을 조성했다.짜장면박물관 등을 개관하며 차이나타운은 나름 지역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최근들어 중구는 북성동 일부 지역에 한정된 차이나타운 특구를 송월동 일대까지 확대하는 구상을 내놓았다.인천항에 꾸준히 입항해 머무르는 크루즈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더 넓고 다양한 차이나타운을 만들겠다는 계획인 것이다.하지만 화교 사회에서는 부족함과 아쉬움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지금의 차이나타운은 '짜장면타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음식보다는 중국의 역사, 전통 문화와 예술 공연 등을 종합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태화원을 운영하는 화교 2세대 손덕준씨는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다고 할 때, 짜장면이 그들의 관광 욕구를 자극할 만한 요소가 아니다"며 "한국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역사를 소개하는 화교 역사 박물관이나 각종 문화 축제 등 콘텐츠가 보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 = 김성호기자

2013-07-31 김성호

[인터뷰]인천화교협회 진영창 회장

"우리도 인천시민입니다."인천화교협회 진영창(54) 회장이 느끼는 화교의 사회적인 지위는 예전보다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화교를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진 회장은 "수년 사이에 달라진 화교에 대한 인천시의 배려가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며 "대표적인 것이 여객선 운임 할인 혜택"이라고 했다.그동안 화교들은 외국인이란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폭우로 부평공동묘지(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 묘지)가 훼손됐는데, 인천시가 이장 작업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는 "장마철이면 유골이 유실될까 걱정했던 시름을 덜게 됐다"며 "아직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는 해당되지 않지만, 2006년부터 지방자치 투표권을 갖게 된 것도 큰 변화"라고 했다.예전보다 화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외국인' 취급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진 회장은 "은행에서 사업자금이나 생활자금 등을 빌리는 것은 꿈도 못 꾼다"며 "인터넷 가입과 휴대전화 개통에 애를 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자동차나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 신용카드 할부 결제도 불가능하다고 한다.그는 "비록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화교 대부분은 2~3세대로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며 "한국 국민이자 인천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했다.화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진 회장은 "지역사회가 우리를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지역의 구성원이자 동반자로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며 "화교들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김성호기자

2013-07-31 김성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③ 화교 (上)

임오군란 당시 이홍장의 청나라 군대 따라온 상인 40명이 원류1884년 차이나타운에 조계지 설정…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치외법권 보장'인천은 돈벌이 잘되는곳' 1890년엔 1천명 육박·청일전쟁 패전후 위상 추락일제의 만주침략위한 '완바오산 사건' 과장보도 전국적 '반화교 테러' 확산자유공원~홍예문 땅의 모습이 龍연상 '무사항해 기원' 신께 제사일본인들이 머리-몸통 자르는 도로… 공사 내내 빨간색 물 흘러'바다에 잇닿아 있는 곳이면 반드시 화교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교들이 많다는 얘기다. 한국의 화교사회는 1883년 인천항 개항과 동시에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인천 화교사회의 역사를 한국의 화교사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천은 한국 화교사에 있어 출발점이나 다름없다. 인천의 화교들은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봤다.# 화교(華僑)'화교'란 단어는 어떤 뜻이고,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사전에서는 화교를 '외국에서 사는 중국 사람',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중국인들의 해외 이주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화교'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약 110여 년 전인 청나라 말기였다고 한다.1898년 중국인들이 일본 요코하마에 '화교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웠는데, 이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옛날 청과 조선이 교환한 문서에는 청조인(淸朝人)·화인(華人)·청상(淸商) 등으로 표기돼 있었다.조선에 사는 중국인들에 대한 명칭이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청의 농공상부(農工商部) 대신이 1909년 작성한 문서에 '화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한자적 의미를 풀어보면 화(華)는 중국인을 의미하고, 교(僑)는 잠시 거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1909년 청나라 헌법과 1929년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다.# 화교의 정착과 성장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정부의 참전 요청에 의해 이홍장(李鴻章)의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했다. 이때 함께 따라온 40명의 청나라 상인이 한국에 머무른 첫 화교다.청의 파병 목적은 단순한 군란 진압이 아니라 군사력을 통한 조선 지배였다. 이후 청은 조선의 비준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1884년 4월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청국 조계지를 설정했다.지금의 인천시 중구 북성동 일대에 청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모방한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치외법권, 내지통상권, 연안어업권, 청나라 군함의 연안항해권을 보장했다. 사실상 조선 땅 내에 청나라의 무역 전진기지를 마련한 셈이다.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세워지면서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이라는 소문이 청국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산둥성 상인들이 서해를 건너 인천으로 왔다고 한다.화교의 수는 급증했다.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이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 광목, 농수산품, 경공업품 등을 팔고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는 방식으로 장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상권을 장악했다. 상가나 집을 지을 필요가 생겨 청나라의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함께 인천에 들어왔다.# 청일전쟁과 화교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지면서 조선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위상도 추락했다. 정치적 지위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일본에게 우위를 뺏겼다.청국에서 조선으로 온 화교들은 패전 국민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청국 상인들도 청일전쟁 이후 인천을 떠났고 청국 조계지는 급격하게 쇠퇴한다.이 시기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조청통상무역조약의 폐기 성명을 발표했고, 청국 조계지는 법적 근거를 상실했다.그러나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로 말미암아 전쟁 후에도 조계지로서의 지위는 그나마 유지된다. 청일전쟁 패전 후 청국 조계지는 예전처럼 많은 재화가 유통되는 곳이 아니었다.무역업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조계지는 쇠락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무역업에 기대어 살아가던 3차 산업 종사자들 역시 인천을 떠났다.1920년대에는 일본에 의해 산둥지역의 농부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는데, 채소농사 기술이 없던 조선에 이주시킨 일종의 '농사 용병'이었다.더욱이 이 시기 산둥지역의 대홍수는 많은 중국인들의 조선 이주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들이 바로 생계형 농공화교들이다.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대다수 화교들의 선조 역시 이 시기에 조선으로 이주했다. 농사를 기반으로 생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1880년대 초중반 무역업을 했던 상공화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완바오산사건과 인천의 화교 배척'완바오산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완바오산 부근에서 한·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수로공사 문제로 일어난 일상적 충돌이었다.하지만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거짓정보로 인해 '완바오산사건'이 국내에 과장 보도되면서 인천 등 전국으로 반화교 테러가 확산됐다.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졌는데, 한국인들은 화교촌으로 몰려가 음식점, 집, 이발소, 호떡집 등을 습격해 유리창을 깨는 등 소란을 피웠고 각종 기물을 파괴했다.각종 유언비어 등으로 사건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커져 갔고, 부평에서는 중국인 2명이 피살되고 한국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도 일어났다. 인천지역 경찰이 7월10일께 이미 190명을 검거해 유치장이 만원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해 한반도의 화교 배척운동을 확산시켰고, 중국으로 귀국한 중국인의 민심까지 뒤흔들어 놓으려 했다.중국 민심이 만주의 한인들을 공격하길 바란 일본은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 동북지역 침략을 기도했다.완바오산사건은 일본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완바오산사건의 충격은 화교들에게 아직도 남아있다.# 화교사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용머리 민담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는 중구 북성동 일대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지금 파라다이스호텔이 있는 곳으로 개항기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곳을 '용머리'라고 불렀다. 언덕 지점에서 시작해 자유공원과 홍예문까지 이어지는 땅의 모습이 마치 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당시 화교들은 용머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용머리 주변은 바다였다. 용머리는 경치가 좋고 바다와 가까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중국과 인천을 오가는 배의 선주들은 용머리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게 해 달라"고 바다의 신에게 빌었다고 한다.어느 날 갑자기 화교들의 성장을 시기한 일본인들이 용머리를 잘라 냈다. 용의 기운이 화교마을로 전해지는 것을 막고자 용의 머리(언덕)와 몸통(자유공원~홍예문) 사이에 도로를 낸 것이다.도로 공사가 시작돼 인부들이 땅을 파내자 빨간색 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 도로가 생긴 뒤 화교마을에선 10여 일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고 한다.화교 2세대로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중화요리 음식점을 운영 중인 손덕준(56)씨가 들려준 이야기다.손씨는 "도로공사 내내 빨간색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고 들었다"며 "우리 조상들은 빨간색 물을 용의 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인천의 화교들은 다 아는 이야기"라며 "용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이후 인천 화교의 맥이 끊겼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2013-07-24 김성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② 개항장(下)

서양인 숙박시설인 한국 최초 '대불호텔' 경인철도 개통탓 1907년께 문닫아독일 외교부 역할까지 도맡던 '세창양행' 태극기 광고 한국정부와 갈등1888년 세워진 자유공원, 근대사 '외교의 현장'… 다국적 성격의 개항도시인천 개항장 거리에는 아직 개항의 흔적이 서린 건축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는 인천이 개항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100여년의 시간동안 사라진 건축물도 많다.이 중에는 개항 당시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도 있다. 전문가의 조언과 책 등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몇 개의 건축물을 추리고, 이 건축물을 통해 개항 시기 인천을 그렸다.'없어진 흔적'을 되짚는 이유는 이들 건축물이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 인천을 만든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항장과 함께 태동하고 사라진 것들개항장은 온통 새로운 것들로 채워졌다. 서양식 시설을 갖추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이 생기고, 근대적 의료서비스가 시작됐다. 외국 기업이 한국시장에 진출하기도 했다.개항장에는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서양 각국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을 위한 근대식 숙박시설은 부족했다.개항 직후 인천에서 무역업과 해운업을 시작한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는 이 점에 착안해 1887년께 일본조계지(현 인천시 중구 중앙동1가 18)에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지었다.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大佛)호텔'이 탄생한 배경이다.당시 인천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은 경성(서울)으로 가기 위해 12시간 동안이나 우마차를 타야 했다. 이 때문에 인천에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개항장에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절실했으며, 이 시기가 대불호텔의 '황금기'였다. 해운교통의 발달과 함께 흥한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위기를 맞았다.인천에서 경성까지의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됐기 때문이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은 곧바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개항기 때는 한국이 외세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영국, 독일 등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이 개항장을 드나들었다"고 했다.이어 "러일전쟁(1905년) 등을 거치며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며 "이로 인해 서양인의 입출항이 크게 줄어든 점도 대불호텔이 경영난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대불호텔은 1907년께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호텔 건물은 중국음식점 등으로 쓰이다가 1978년 철거됐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았다.그 자리에 상가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붉은 벽돌구조물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이 터를 2011년 매장문화재로 지정하고 '원형보존' 결정을 내렸다.한국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광고를 신문에 실은 것으로 잘 알려진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마이어상사·E. Meyer&Co.)'도 개항장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1884년 독일 본사에서 인천으로 파견된 칼 볼터(C.Wolter) 지사장은 현재 인천시 중구 중앙프라자 상가 자리에 세창양행 사옥을 세웠다.세창양행은 설립 초기 주로 물물교환을 하는 무역상이었으며 점차 해운사업, 근대기기 도입, 광산 채굴, 무기 판매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한국 정부에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이를 빌미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세창양행의 태극기 광고는 당시 한국 정부와 세창양행의 갈등관계를 보여주었다.세창양행은 다른 외국 상사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1897년 4월께부터 독립신문 광고에 태극마크를 사용해 한국인 소비자들에게 접근하고자 했다.화륜선(증기선)인 '현익호' 광고였는데, 태극기와 M자가 새겨진 세창양행기가 서로 교차된 그림을 썼다.광고가 게재된 뒤 한국 정부는 사전에 승인받지 않고 국기를 사용한 세창양행에 항의했고, 더 이상 이 광고는 실리지 않았다.이는 당시 독일 정부를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던 것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의성 조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이후 개항장에서 일본의 위상이 강해지자 세창양행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세창양행은 1914년 일본의 대독 선전포고 이후, 최소 인력만을 남긴 채 한국에서 철수했다. 사옥 건물은 한국전쟁때 소실됐다.세창양행 전문가인 조선대 김봉철(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세창양행은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독일의 외교부 역할까지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독일의 입김이 줄어들면서 세창양행의 사세도 기울었다"고 했다.개항장의 외국인이 한국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1890년 10월 10일 미국인 의사 랜디스(E.B Landis)는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집을 얻어 진찰실과 약국을 차렸다.그 다음날 한국인 환자가 찾아와 랜디스에게 진료를 받았다. 인천에서 '약대인(藥大人·서양의사를 일컫음)'이 진료한 첫 사례다.환자 수가 점차 늘어나자 랜디스와 성공회교회는 1891년 현재 인천시 중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자리에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성누가병원'을 설립했다.당시 성누가병원이란 명칭은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서만 불렸다. 랜디스는 "성누가병원이란 이름은 조선인에게 의미가 없다"며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란 뜻이다.랜디스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이해했고, 한국인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원이 위치한 언덕을 '약대이산(약대인산·藥大人山)'이라 불렀을 정도다.강화도를 비롯해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병원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개원 7년 만인 1898년 랜디스는 32세의 나이에 과로로 사망한다.랜디스 이후의 성누가병원에는 몇몇 서양의사들이 거쳐 갔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병원은 1916년 폐쇄됐다. 현재 랜디스는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안장돼 있다.# 외형은 남아있되 사라져 가는 의미자유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조성 당시와는 이름이 바뀌고 외양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그 틀은 유지한 채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하지만 개항기 자유공원에 있던 건축물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실되면서 자유공원이 가지고 있던 의미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인천시 중구 관동·항동·북성동·송학동 일대의 응봉산을 자유공원이라 부른다.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은 이 공원은 1888년 조성됐으며, 조성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개항과 함께 서양인들이 인천에 정착했고 이곳 응봉산에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당시 각국공원은 서양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각국조계(各國租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일본은 각국공원의 이름을 '서공원'으로 바꿨다.자유공원은 조선 독립운동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19년 3월 9일 만세 시위가 열렸고, 같은 해 4월 '전국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려 임시정부 수립 추진의 본격화를 알린 장소였다.해방과 함께 서공원은 '만국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57년에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당시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우고, 공원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존스턴 별장은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인천의 서양식 건물 중에서도 화려한 외양 때문에 인천의 랜드마크로 불릴 정도였다.1919년까지는 존스턴의 소유였으나, 이후 일본인에게 매각돼 '인천각'으로 이름이 바뀌고 고급 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포격으로 소실됐으며, 그 자리에는 현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들어서 있다.한 개인의 별장 건물이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고, 이곳을 포격한 미국과의 수교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이런 점들은 개항도시 인천이 가지고 있는 다국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지금 자유공원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자유공원의 '간략한 연혁'만 설명돼 있을 뿐이다.김창수 박사는 "만국공원은 한국 근대사의 현장일 뿐 아니라, 동·서양 여러 국가의 동아시아 외교가 이루어진 현장이었다"면서 "지금의 자유공원에서 과거 개항기 만국공원의 모습과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자유공원은 개항기 인천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이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글 = 정운·박경호기자

2013-07-17 정운·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②개항장(上)

1898년 日 제1은행 인천지점 승격 상인대출·환전조선인 배제한 '제물포 구락부' 사교클럽 조직근대식 세법 최초 도입한 인처세관 '다국적 기관''상권 각축장' 내국인 불평등 무역구조 아이러니활발한 포교활동… 1897년 서양식 답동성당 건립1901년 6월 22일 토요일 오후 4시30분 제물포의 각국 조계(현재 인천시 중구 관동)에 새로 생긴 '제물포 구락부(Club)' 개관식.내빈들이 모이자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Allen)의 부인이 은열쇠로 문을 열고 첫 발을 디뎠다. 내빈들은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내부 시설을 돌아봤고, 영국 영사 고페(Hebert Goffe)의 연설이 이어졌다.그리고 알렌 부인에게 제물포구락부의 개회를 선언하도록 요청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알렌 여사와 숙녀분들을 위하여"라며 다같이 축배를 들었다. ('The Korean Review' 1901년 6월호)개항이 이뤄진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인천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인천 개항장 거리는 일본과 중국, 서양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로 넘쳤다.이들이 100여년 전 개항장 거리에 생활했던 흔적은 아직 인천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살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당시 개항장 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논문과 책을 뒤지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건물 몇 곳을 추렸다.#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을 통해 본 개항기 인천경제향토사학자 최성원은 1959년에 쓴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제1은행 인천지점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과 같은 화폐를 주조하는 기능을 자행하고는 오히려, 우리 정부에 자본을 융자하는 형편이었다', '재정 면에서 우리를 압도한 일본은 무법하게도 1902년 5월에 이르러서는 10원·5원·1원 등 세 종류의 은행권을 감히 우리지역(인천)에서 발행하므로, 이를 반대하는 일이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서술했다.개항 이후, 인천은 외국인 수가 급격히 늘었다. 1883년 348명에 불과한 외국인은 1910년에는 1만6천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 조선에서 이권을 취하려는 상인들도 유입됐다. 자연스럽게 인천은 조선 경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인천에 개설된 일본 제1은행은 1883년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으나, 189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된다. 이와 함께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가 만들어졌다는 점은 조선 경제에서 인천의 비중이 컸음을 말해 준다.제1은행에서는 각국 상인들에 대한 대출과 환전 등이 이뤄졌다. 이곳은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납부하는 곳이기도 했다.여기서 발행한 은행권은 상인들 사이에서 화폐처럼 통용됐다. 재밌는 점은 일본의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대출이자는 일본인 상인들에게 가장 높게 책정돼 있었다는 점이다.그 다음은 조선 상인과 청나라 상인 순으로 이자율이 높았다. 당시 인천에 온 일본인 상인들은 자본력이 약하고 신뢰도가 낮았기 때문이다.고려대 한국사학과 김윤희 강사는 "당시 인천 거류지에는 한·중·일의 금융을 담당하는 기구들이 모두 있었으며, 이는 인천이 조선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며 "당시 일본에서 온 상인들은 대부분 소규모였으며, 신용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제물포구락부-각국조계 외국인들의 사교장인가, 야합의 장인가1884년 10월 영국, 미국, 독일, 청나라, 일본 등 5개국 외국인이 거주하는 각국공동조계지가 개항장에 생겼다. 각국 조계의 유력 인사들은 개항장 내에서 서로의 이권을 조정하고자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紳董公司)'와 함께 '제물포구락부'라는 사교 클럽을 조직했다.제물포구락부 건물은 이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각국 인사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당구를 즐겼으며, 무도회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이 사교의 장에 조선인은 없었다. 당시 조선은 '수탈의 대상'이었을 뿐이다.제물포구락부 주요 멤버는 하와이 이민사업을 벌인 동서개발회사 사장 데이비드 데쉴러(David W. Deshler), 세창양행 지점장이던 독일인 칼 볼터(K.Wolter), 고종에게 하와이 이민사업을 제안한 주한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 등이다. 한국에 최초로 전차를 부설한 콜브란(H. Collbran)도 제물포구락부를 자주 드나들었다.인천시 역사자료관 강옥엽 전문위원은 "제물포 정략(政略)으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며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위해 각국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자는 목적이 컸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인천세관-최초의 근대식 세관이자 다국적 기관인천시 중구 인천항 1부두 입구 맞은편에 있는 인천세관 제1지정장치장에는 1910년대에 건립된 옛 세관 창고가 남아있다. 이 창고는 개항 당시 인천세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다.1883년 6월 16일 인천항 개항과 동시에 당시 인천해관이라 불린 인천세관도 문을 열었다.한국 최초의 세관은 가장 먼저 개항한 부산의 두모진세관(1878년 창설)으로 알려져 있지만, 근대식 세법을 도입한 실질적인 최초의 세관은 인천세관이다.인천세관 이전의 세관들은 주로 일본을 상대로 협소한 범위의 무관세 무역 관습을 철폐하지 못했었다.개항 당시 인천세관은 직원 24명 중 10명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노르웨이 국적이었을 정도로 '다국적 기관'이었다. 주로 일본을 상대했던 다른 초창기 세관과는 다른 점이다.1893년 인천전환국 직원 요코세 후미오가 쓴 '인천잡시(仁川雜詩)'를 보면 당시 인천세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영국 일본 청나라 한국 이태리 독일로 나뉘어,/이음동어의 공문서가 뒤섞여 있다./세상의 풍속은 아직 옛 모습을 수습하지 못했는데,/나 홀로 세관에서 신기함을 보았다.'인천항은 일본, 청나라, 미국, 영국 등 강대국들이 상권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각축장이 됐다.인천세관의 초대 총세무사는 뮐렌도르프(독일인)였고, 이후 64년 동안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 국적의 외국인 등이 총세무사를 역임했다.국내에 있는 세관이지만 한국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동안 이들은 한국인에게만 수입세를 징수하는 '불평등 무역 구조'를 만드는데 앞장섰다.인천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전문위원은 "근대적 세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 조선의 인천세관은 초대 총세무사인 뮐렌도르프를 파견해 준 청국 세관의 영향 아래 있었다"며 "각국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했을 뿐, 한국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답동성당-개항장을 선택한 가톨릭 전진기지인천시 중구 답동 언덕 위에 있는 답동성당(옛 제물포성당)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1892년 건립)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다. 1897년 건립됐다.조선 정부의 박해를 받던 가톨릭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이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는 전국 곳곳에 서양식 성당을 세우는 등 한국에서 더욱 활발히 포교활동을 벌인다.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 자리는,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 근처였다고 전해진다.답동성당에서 발간한 '답동대성당 100년사'를 보면, 1888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홍요셉 신부가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성당 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개항장에 있는 가톨릭 성당인 만큼 여러 나라 출신의 신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풍경도 있었다. 1892년 기록에 따르면 한국인 신자는 192명이고, 일본인 신자는 38명이었다.서양인 신자도 많았다. 답동성당의 종은 인천세관 통역관이던 중국 출신의 우리탕이 기부했다.당시 제물포에는 항구 특성상 공장 노동자, 짐꾼 등 열악한 환경 속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다. 고아도 많았다. 이는 이들을 돌보기 위한 한국 최초의 수녀원과 근대식 보육원이 답동성당에 생긴 배경이기도 하다.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손장원 교수는 "가톨릭 선교사들을 비롯한 서양의 문물들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톨릭 전파의 전진기지로 여겨졌다"며 "개항장이라는 입지 조건이 다른 곳보다 먼저 서양식 성당이 세워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글 = 정운·박경호기자

2013-07-11 정운·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① 한반도 주변 3국이 본 인천 제물포

불결한 골목 어슬렁거리는 사람들,황량한 갈대밭사이 구성진 아리랑 가락개화 20년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청나라조공국에서 상업 확대지역으로의 '출발점''군역상인이 시장개척' 단편적 기록만 남아■러시아러~요동반도 연결 '전략적 중개기지' 역할제물포에 최초 영사관… 패전후 자취 감춰■일본인구증가·무역발달 번창기 '작은 일본' 불려식민지 지배의 실험실로 왜곡된 시각의 자료130년 전, 한반도 주변 3국이 본 '인천 개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일본은 1883년 인천의 문을 열었다. 일본은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본 청국과 극동지역 패권을 노린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하고 1905년 조선반도 지배권을 확립했다.이들의 조선 종주권 쟁탈을 위한 각축장은 인천 제물포였다. 주변 열강 3국이 인천 개항장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학계 여러 인사들에게 연락했지만 '3국이 본 인천 개항' 연구 실적은 미미하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인천 개항박물관'을 찾아갔지만 관련 기록이 전시돼 있지 않았다. 기존에 나온 책과 세미나 자료 등에서 일부를 발췌해 청국·러시아·일본이 본 인천을 정리했다.청국은 상업 확대지, 러시아는 극동정책의 주요 거점지, 일본은 '또 하나의 작은 일본'으로 제물포를 바라봤다. 제물포는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인천사람들을 '하등인', '미개인'으로 본 것은 공통점이다.# '상권 개척장'(청국)과 '극동 전략적 요충지'(러시아)우리나라 개항기, 청나라가 개항장 제물포에 대해 남긴 기록은 찾기 힘들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이희환 박사도 "당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 단편적인 삽화와 기록뿐이었다"고 말했다.'저물어 가는 왕조'였던 청국이 본 제물포는 '상업'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조선은 '조공국'에서 '시장 개척지'로 부각됐고 그 출발점은 제물포였다.청국은 1882년 '임오군란 평정'을 이유로 인천 월미도를 거쳐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는데, 당시 상인 40여명이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인하대에서 '근대 인천의 화교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중국 출신 이옥련 박사는 '인천 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라는 책에서 이들 '군역 상인'이 시장 개척자 역할을 했다고 썼다.이 박사는 이 책에서 "(청국은) 조계지 설정에 있어서 첫 번째 대상지를 인천으로 꼽았다", "청국 정부는 청국 상인의 인천 이주를 적극 권장하는 정책을 내세웠다"고 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국은 일본에 '조선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상인들은 명맥을 유지했다.아래 글은 러시아가 1900년에 정책자료집으로 출간한 '한국지(韓國誌)'의 일부분이다. 당시 제물포 풍경이 묘사돼 있다.매우 불결한 한국인 지구는 서울로 향하는 도로 변의 영국교회가 솟아 있는 언덕의 기슭을 둘러싸고 있다. 언덕의 꼭대기까지 진흙으로 된 오두막들이 뻗어있는데 이 오두막들로 가려면 온몸에 때가 낀 아이들과 할 일 없이 앉아 있거나 어슬렁거리는 한국인 남자들로 가득찬 불결한 골목들을 지나야 한다. (중략)한국인 지구의 거주민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중의 반인 남자들은 모두 항상 왔다갔다 움직인다. 좁은 거리들은 항상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꽉 차 있는데, 이들은 아무 용무도 없이 많은 상점들에서 몇 시간씩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러시아에게 '제물포 사람'들은 불결하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존재로 비쳤다.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이재훈 박사에 따르면 19세기 중·후반 러시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현상(독립) 유지'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변한다.그 중심에 제물포가 있었다. 제물포는 극동 러시아와 중국 랴오둥(요동) 반도를 연결하는 '중개기지'였다. 러시아는 1902년 제물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동국대 한철호(대외교류연구원장) 교수는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때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거점을 마련해야 했고, 대극동정책의 중요한 지점이라는 인식이 있어 러시아는 제물포에 최초로 영사관을 설치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이 영사관의 수명은 짧았다.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의 첫 교전지인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에 일격을 당한 뒤 러일전쟁 패전으로 인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일본)불과 20년 전 개항되기 전만 해도 그저 갈대만이 우거진 황량한 곳이었다.월미도 동쪽 끝이나 만석동 바닷가에 누추한 어부의 집에서는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숲을 이룬 무성한 갈대밭 속에서 때때로 흘러나오는 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을 듣는 것 외에는 사람의 왕래도 배의 출입도 드문 속세 밖의 외딴 세상이었다.1903년 당시 조선신보사 기자였던 일본인 오가와 유조가 펴낸 '인천번창기'에 나온 '개항 20년 인천 회고담'이다.인천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물리치고, 제국주의 팽창을 시작한 일본에게 제물포는 '작은 일본'이었다. 인천번창기는 일본인이 자신들의 '공적'을 기록한 자료다.왜곡된 시각이 있지만, 당시 일본이 인천 개항을 어떻게 봤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인천번창기'는 개항으로 인해 인천이 인구 증가, 무역 발달, 상업·교육·위생기관 정비, 경제 규모 증대를 이루었다고 강조한다.이같은 발전이 가능한 것은 일본인의 공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골자다. 일본에게 제물포는 '식민지 지배의 실험실'이었다. 개항기 제물포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정확히 20년 전의 산골 사람은 개화를 맞이하였고,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를 달아놓은 듯한 모습이 바로 20년이 흐른 지금(1903년) 인천의 모습이다.'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는 우리 속담 '돼지 목의 진주'와 같은 뜻이다.# 바랴크호 깃발로 얽힌 러시아, 경제교류 중심의 중국·일본2013년 중국, 러시아, 일본에게 인천은 어떤 도시로 비쳐질까? 130년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인천이 대한민국의 관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개항 당시의 인천이 제물포를 중심으로 알려졌다면, 현재는 공항과 경제자유구역이 인천을 인식하는 창구다. 한국관광공사 통계를 보면 올해 1~5월 한국에 온 중국인 134만6천명 중 70만7천명은 인천공항으로, 14만9천명은 인천항으로 입국했다.중국인 10명 중 6~7명은 인천을 통해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일본인 113만8천명 가운데 58만1천명(51%), 러시아인 7만3천명 중 3만7천명(51%)이 인천을 거쳐 한국에 온다.러시아와 인천은 '정치적'으로, 중국·일본과 인천은 '경제적'으로 얽혀 있다.러시아는 109년 전 제물포해전을 지금도 기념한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제물포해전(1904년 2월9일)에서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행사를, 1993년 이후 매년 2월 인천 앞바다에서 연다.당시 해전에서 수장된 러시아 군함 바랴크호 깃발은 일본군의 전리품이 됐다.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것을, 인천시가 2010년에 '2년 임대'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냈고 임대기간을 한 차례 연장했다.러시아는 바랴크호 깃발을 '러시아의 정신'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기지 부근 크론슈타트에 '인천광장'을 만들었고, 송영길 인천시장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일본계 파친코 자본인 '오카다홀딩스'는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복합카지노리조트를 인천 영종도에 조성할 계획이다. 일본 기업의 인천경제자유구역 진출도 눈에 띈다.세계적 반도체 제조업체인 '도쿄오카공업'(TOK)과 바이오의약품 필수 원료를 만드는 '아지노모도'가 각각 작년 하반기, 올 상반기에 송도국제도시에 생산시설을 착공했다.글 = 김명래기자

2013-07-03 김명래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4]인천항 변천사

삼국시대부터 외국과 상업 중요한 역할조선시대 바다봉쇄로 교역항 기능 잃어한적한 어촌에서 국방의 요충지로 변모개항초기 대외무역 비중 전체 50% 상회1974년 제2선거 준공으로 도약발판 마련환황해권 중심항만 목표 지금도 진화중인천은 항구도시다.1천여년 전부터 산업화 시기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인천항은 외국과의 상업이 이뤄지는 교역항,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항 역할을 했다.130년 전인 1883년에 이뤄진 '개항'은 인천이 항구도시임을, 그리고 수도 서울로 향하는 관문임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각인시켰다.인천의 개항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외세의 강압이 작용했지만, 인천이라는 도시가 개항을 통해 발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개항 전후 근·현대사에서 인천은 역사의 중심이었다. 그 인천의 역사를 한꺼풀 벗겨 보면 인천항이 자리하고 있다. 인천항의 변화과정을 통해 인천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라·고려시대, 대외교류 거점'인천'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인천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조선시대 때부터는 인천과 인천항의 역할이 축소된다.초기 백제가 사용한 대외 항로는 모두 인천을 거쳤다.한성에서 수로를 통해 강화만 바다로 나가는 항로가 있었으며, 육로로 부평을 거쳐 인천지역까지 온 다음 현재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에서 출항해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특히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년)부터 개로왕 21년(475년)까지 100년 넘게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하는 나루터로 사용됐다.고려시대에도 역시 인천은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고려의 태조인 왕건은 해상 토호세력으로, 지금의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 등이 합쳐지는 곳에서 세력을 형성한 해상(海商)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고려시대의 해양활동은 주로 서해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당시 교역의 중심지는 국제항이라고 불릴 수 있는 벽란도였다.그러나 고려와 송나라를 오가는 주요 항로 중에 강화만과 인천만을 지나는 항로가 포함되는 등 인천은 당시 수도인 개경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조선이 건국되면서 대외교역과 관련해 인천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조선이 바다를 봉쇄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상인들과 사신들의 왕래가 많았던 인천지역 항구와 포구도 그 기능을 잃고 평범한 어촌마을로 전락했다.대신 조선시대 인천의 포구는 고려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조운제도로 인해 전국의 물자를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조운은 토지에 과세된 현물 세곡을 전국 각지에서 보관했다가 선박을 이용해 서울로 수송하는 것을 일컫는다.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육로교통이 불편했고, 이 때문에 강과 바다를 이용해 세곡을 운반했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있어 서울로 향하는 전국의 물자가 모여들었다.# 근대, 열강의 각축장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인천은 국방의 요충지로 떠오른다. 강화도의 해안선에 50개의 돈대(성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한 포대)가 축조되는 등 강화도 전체가 요새화됐다.조선 후기에는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인천을 비롯한 서해안에 방어시설이 구축된다. 인천에는 경기만 일대의 해안방어사령부 역할을 맡은 제물진이 설치됐다.영종진, 화도진 등도 이 시기에 설치된다. 인천이 한적한 어촌에서 해양방어진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이후 이양선의 출현은 빈번했고, 이양선을 앞세운 미국과 프랑스 등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며, 일본도 조선에 교섭을 시도했다.결국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1876)을 맺고, 조선의 항구 3곳을 개항키로 결정한다.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부산과 원산이 차례로 개항했다. 인천의 개항은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 이는 인천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역할의 중요성 때문이다.당시 조선은 추가 개항지로 전남 진도 등을 제안했으나 이를 일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인천항의 개항을 요구했고, 조선은 인천항의 개항은 나라 전체의 개항과 다름없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다.조선은 인천항을 개항하기 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을 체결하고, 이듬해에 인천항을 개항했다.개방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문을 연 것이다.인천발전연구원 김용하 연구위원은 "부산과 원산의 개항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수동적인 개항이었지만, 인천의 개항은 조선 스스로가 세계에 나라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개항 후, 대외무역의 중심개항 초기 인천항은 조선 대외무역의 중추 역할을 했다. 1885년부터 1902년까지 인천의 무역이 조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상회했다.인천항은 주로 일본·청국과 교역했으며, 주요 교역품은 쌀과 콩 등 농산물이었다. 이때는 주로 기존의 포구를 이용해 무역이 이뤄졌다.인천항이 근대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06년 항만시설 개선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이며, 그 뒤 6년간에 걸쳐 그 설비를 갖추게 됐다. 이때 매립, 잔교 설치, 준설, 검역소 건설 등이 이뤄졌다.1911년부터 1918년에는 동양에서 보기 드문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가 건설돼 4천500t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됐으며, 연간 하역 능력이 130만t에 달하게 됐다.이후 인천항은 주변 정세에 따라 역할과 위상이 바뀌어 갔다.일제시대인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이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인천을 공업도시로 만들었다.1930년대 송현·화수·만석동 일대에 공단이 형성됐다. 1941년에 설립된 '조선이연 금속 인천공장'은 해방 후에 인천제철로 이어졌다. 인천항은 이들 공장으로 인해 공산품의 교역량이 증가하기도 했다.해방 후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무역 거점항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에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인천은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도 했다.한국전쟁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인천항에 대한 투자도 대규모로 이뤄졌다. 1974년에는 동양 최대의 갑문항인 제2선거가 준공됐다.이때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에 따르는 자연적, 기술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폐쇄형 항만이 됐다. 5만t급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해졌으며, 현재 인천항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1981년부터 1985년까지는 양곡전용부두, 사일로시설, 내항 제8부두 등이 건설됐다. 이 시기 인천항은 수도권의 관문으로 수출입항 역할을 했다.주로 유류와 목재, 양곡 등 원자재의 수입이 많았으며, 수출은 철재류와 기계류가 주를 이뤘다.# 인천항의 현재와 미래, 사람과 화물의 공존1992년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으면서 인천항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인천항은 중국과의 수교 이후 10여년 동안 두 자릿수 이상의 물동량 증가율을 나타냈다.현재도 중국은 인천의 가장 큰 교역국이며, 인천 교역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지속적인 물동량 증가로 인해 내항만으로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컨테이너부두인 남항(2004년)과 잡화부두인 북항(2010년)이 잇따라 개장한다.현재 내항과 남항, 북항이 연간 처리하는 전체 물동량은 1억5천만t, 컨테이너 물동량은 200만TEU에 육박하고 있다.인천항은 현재 '환황해권 중심항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연수구 송도동에 인천신항을 건설 중이다. 인천신항은 2020년까지 30척이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계획돼 있다.신항이 건설되면, 그동안 내항 중심이었던 인천항이 본격적으로 외항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대형 크루즈선이 접안할 수 있는 국제여객부두도 2014년 부분개장을 앞두고 있다. 수출입화물 중심이었던 인천항에 '사람'의 위상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올해, 크루즈선 전용부두가 없는 상태에서도 100차례 이상 크루즈선이 기항하는 등 크루즈항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했다.국제여객부두는 인천항이 국내 대표적인 크루즈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글 = 정운기자

2013-06-26 정운

[인터뷰]김성근 인천시 하천살리기추진단 운영위원

인천시 하천살리기추진단(이하 추진단)은 하천의 자연환경을 복원하고자 2003년 전국 최초로 행정가·시민단체·전문가가 함께 만든 조직이다.추진단의 '산파' 중 한 명인 김성근(59·사진) 운영위원은 "시민들이 하천을 보기 시작했다"는 한마디로 10년에 걸친 하천살리기운동의 성과를 정리했다.김 위원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장수천에는 인근 개도살장에서 쏟아내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며 "하수가 그대로 배출돼 악취도 심했다. 누구도 하천을 쳐다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2000년대 초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하천살리기 운동은 2003년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사업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하천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인천시, 시민단체, 전문가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곧이어 공감대를 실천할 추진단이 구성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조례가 만들어졌다.그는 "청계천 복원의 뜻은 살리되 모방은 하지 말자는 것이 추진단 구성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며 "인공적인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는 생태형 자연하천 조성이 추진단의 기본정신"이라고 강조했다.추진단은 5대 하천에 각각 테마를 설정하고, 정비계획과 설계를 주도했다.5대 하천은 '도심에 철새가 날아드는 승기천', '반딧불이와 함께하는 장수천', '자연과 이야기하며 걷고 싶은 굴포천', '창포꽃이 하늘거리는 공촌천', '백로와 가마우지가 함께 노는 나진포천' 등의 새 이름을 얻었다.정비된 5대 하천은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생태교육 현장으로 되살아났다. 김 위원은 "현재 추진단의 주요 활동은 시민을 대상으로 한 환경교육과 하천 생태계 모니터링"이라며 "누구나 수시로 와서 '놀 수 있는' 친근한 하천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최근 추진단의 활동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하천 관리권이 기초자치단체로 이관되면서 추진단의 활동은 교육사업과 모니터링으로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또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자문기관의 존속 기한이 제한되면서 추진단의 입지는 더욱 흔들리고 있다.김 위원은 "인천의 하천은 현재 가장 기본적인 지도만 그려진 상태"라며 "지도에 무엇을 채울 것인지, 모든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는 소통 창구로서 추진단은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했다./박경호기자

2013-06-19 박경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18<하천

승기천·장수천·굴포천·공촌천·나진포천…공장수용 등 정책 탓 꾸불꾸불한 본모습 잃어10년전부터 수질개선 노력… 기본틀 마련 평가시민참여 유도 자연·친수공간으로 조성 '과제''인천에도 하천이 있나요?''인천'과 '하천'이라는 키워드를 연결하는 고리를 찾는 일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인천은 하천하면 떠오르는 도시도 아니고, 특색 있는 하천을 가진 곳도 아니다.그 탓에 둘 사이에는 깊은 연상(聯想) 작용이 없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 내면 상황은 달라진다.인천의 하천은 국가 경제 정책에 의해 변화했고, 진화한 시민 활동에 의해 되살아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997년 10월 시작된 인천 하천 살리기 운동은 타 지역에 모범 사례가 될 정도로 성과를 거뒀다.인천의 하천이 특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발자취는 가지게 된 셈이다. 더불어 5개 하천을 중심으로 '생태형 자연 하천 만들기' 운동이 진행되며 타 지역과 차별점도 가지게 됐다.덕분에 하천을 통해 인천을 바라보는 일도 유의미해졌다.# 인천 하천의 과거, 현재, 미래하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달하느냐는 산의 규모, 위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인천은 산이 적은 구릉형 지형인 데다, 지역이 넓지 않아 큰 하천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생긴 하천도 길이가 짧은 편이다. 또 인천을 관통하는 대부분의 하천 종착지는 서해안이다.인천의 하천은 곧게 뻗은 일자형으로, 다소 재미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큰 공통점이다. 이는 1970년대 전개된 성장 위주의 국가 경제 정책과 관계가 깊다.당시 인천은 '수도권 최대 임해공업단지 조성'이라는 정책적 결정을 받아 서울과 경기도 등에 흩어져 있던 공장을 한꺼번에 수용하게 됐다.이 과정에서, 필요하게 된 공장용지와 주택용지는 넓은 갯벌을 메워 마련했다. 이 때문에 인천의 하천 대부분은 갯벌 매립지를 지나가게 됐다.또 홍수 등을 막기 위한 정비사업으로 인해 꾸불꾸불했던 하천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반듯한 일직선이 됐다.도심 속 하천인 승기천은 본래 염전 사이로 난 갯골을 따라 흐르는 작은 물줄기였다. 이 물줄기는 관교동~남촌동~논현동 앞바다로 흘렀다.흔히 '동양장사거리'라고 부르는 곳의 정식 명칭은 '승기사거리'다. 과거 승기천 물줄기가 이 근방을 지나갔다고 한다.하지만 남동공업단지가 들어서고, 정비사업이 진행되며 상류 모습은 사라지고 물길은 달라졌다. 현재 승기천은 남동산단과 연수구 사이를 거쳐 동춘동 동막 쪽 바다로 빠진다.'목숨이 긴 하천' 쯤으로 해석되는 장수천 역시 도심 속 하천이다.과거 장수천은 장마철이 되어야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었다. 장수천의 발원지는 금마산과 거마산이다. 이 두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일명 '무네미' 마을을 가로질러 장수천을 이룬다.특히 무네미는 한자로 '수현'(水峴)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조선시대 때 물길을 파서 굴포천과 이으려다 바위를 뚫지 못해 중도 포기한 장소다.이 근방은 물줄기가 틀어지기 전까지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덕분에 1970년대까지 멱을 감거나 등목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인천에서 가장 긴 굴포천은 부평공원묘지 내 칠성약수터, 부령약수터에서 시작됐지만 복개가 이뤄지며 부평구청 사거리로 출발점이 바뀌었다.이어 부평구~부천시~경기도 김포시 신곡동으로 물길이 이어지고 있다.굴포천은 조선 중종 때 삼남 지방에서 곡물을 싣고 바다로 이동하는 배가 강화 손돌목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아, 이 보다 안전한 운반로를 찾기 위해 만든 하천이다.더불어 조세 운송수단인 해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굴착 작업이 시도됐지만 기술 한계로 완공되지는 못했다.인천에서 가장 하천다운 하천으로 꼽히는 곳은 공촌천이다. 공촌천은 '징맹이고개' 중간 부분과 맞닿는 계양산 서쪽 골짜기에서 시작된다.다른 하천에 비해 물이 많은 편이며 지금도 도롱뇽 알 등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서구 경서동~공촌동~연희동~인천지방서부산업단지~동아매립지(청라국제도시)를 지나가는 공촌천은 1980년대까지 현재 서부산단 자리에 있던 큰 갯골에서 끝났다.또 구획정리사업지구로 개발되기 전까지 공촌천 주변에는 소나무, 참나무 등이 많이 자랐다. 이 지역 사람들은 나무 판 돈으로 삶을 꾸려나갔다.마전동 천주교 공원묘지 인근 습지가 발원지로 추정되는 나진포천은 상류 쪽에 농경지가 남아 있어 현재도 농업용 수로로 사용되고 있다.하지만 너무 많은 택지·하천변 개발로 하천 식생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해 생태 파괴, 환경 오염 우려를 받고 있는 곳이다.최계운 인천대 도시환경공학부 교수는 "인천의 하천은 썩은 물이 고인 곳, 냄새나는 곳으로 생각해 밀어 두기 십상이었지만 사실은 시민 곁에서 모든 역사를 함께 겪어 온 동반자"라며 "인천의 하천 살리기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했다.인천하천살리기추진단은 지난 10여년간 하천 정비사업을 벌였다. 하천의 수질을 개선하는 등 하천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기본 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비록 산과 어우러지는 S자형 물길은 되살리지 못했지만, 하천에 사는 조류와 동물의 쉼터 역할을 하는 하천 식생을 뿌리내리게 만들었다.추진단은 하천 살리기 활동에 남겨진 과제로 '시민 참여'를 꼽고 있다. 단순히 하천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친수공간으로 시민 곁에 두고 어울리도록 하는 것이 추진단의 목표다. 이를 위해 추진단은 하천 생태 교육, 문화 행사 등을 펴고 있다.추진단 관계자는 "다양한 의미에서 인천 하천은 소멸의 공간이 아니라 탄생의 공간"이라며 "하천 해설사, 하천 교육생 등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하천과 시민을 가깝게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글 = 박석진기자

2013-06-19 박석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17<음식

중국의 '차오장멘' 단무지·캐러멜과 결합한·중·일·서양 조화 '인천의 개방성 상징'1890년대 영국산과 교잡 '강화순무' 탄생값싼 물텀벙이탕·해장국 노동자 사랑받아'인천해물전골, 꽃게탕, 전통장어요리, 향토짜장면, 밴댕이회, 물텀벙이(아귀) 탕·찜, 시래기밥 칼싹둑이, 쫄면, 동어튀김'.인천시는 2011년 '인천 맛기행'이란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인천해물전골, 꽃게탕 등 9가지 음식을 인천향토전통음식으로 꼽았다.하지만 인천 토박이, 인천을 연구하는 학자들 생각은 좀 다르다. 이들 9가지 음식을 인천음식이라고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인천 출신 김윤식(67) 시인은 짜장면, 냉면, 물텀벙이, 해장국이 진정한 인천음식이라고 했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 박사는 짜장면, 냉면, 해장국을 인천음식으로 꼽았다.우선 공통분모로 꼽힌 짜장면을 살펴봤다. 최소 50~60년 인천음식으로 불려온 음식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음식에 나타난 인천을 찾았다.그리고 인천 음식에서 '개방성'이란 특징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항, 인천음식의 탄생중국에서 인천으로 들어온 '차오장멘'(炒醬麵)은 일본(단무지), 서양(캐러멜)의 재료와 결합됐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짜장면은 중국·한국(인천)·일본 등 동양 3개국과 서양의 만남이 이뤄진 음식. 짜장면 자체가 인천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셈이다.인천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에 '차오장멘'이 들어온 것은 인천항 개항기인 1880년대. 중국 산둥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차이나타운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차오장멘이 인천에 들어왔다.중구 짜장면박물관 관계자는 "짜장면은 산둥지역 화교들이 인천으로 유입되면서 같이 들어왔다"며 "초기 짜장면은 삶은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화교들의 '고향음식'이었다.돈을 벌기 위해 인천에 온 산둥지방 화교들이 고향 생각이 간절할 때 많이 요리해 먹던 음식이었다"고 설명했다.짜장면은 된장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의 기호에도 맞아 차이나타운의 명물이 된다. 1930년대 청(淸) 요리 부흥기가 오면서 본격적으로 음식점에서도 팔리기 시작한다. 이때 짜장면과 함께 단무지를 먹으면서 한·중·일의 음식이 결합한다.해방 이후 1950년대를 지나면서 짜장면은 또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서양식 캐러멜이 첨가된 춘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짜장면이 완성된 것이다.인천화교협회 고창신(60) 고문은 "짜장면이라는 음식 하나로 동양 3개국과 서양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인천에서는 여러 나라의 음식 재료 자체가 결합된 사례도 있다. 인천 강화도 특산물인 순무가 그 주인공. 순무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의보감은 순무에 대해 '봄엔 어린잎을 먹고 여름에 잎을 먹고 가을에는 줄기를 먹으며 겨울엔 뿌리를 먹는다'고 기록했다. 이 시기의 순무는 뿌리가 흰색이었고, 맛은 옛날 조선배추의 뿌리와 비슷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이 순무가 영국의 순무와 교잡(交雜)하면서 강화 순무가 탄생하게 된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1890년대 영국에서 강화도 해군학교 군사교관으로 파견 온 콜웰 대위가 영국의 순무 종자를 가져와 강화읍 갑곶리의 사택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콜웰의 순무는 기존의 흰색이 아닌 보라색을 띠었다. 지금 강화 순무의 색깔과 같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교잡이 쉽게 이뤄지는 순무의 특성상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토종 순무와 영국 콜웰의 순무가 서로 섞이면서 강화만의 독특한 순무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이 시기부터 강화사람들은 밴댕이를 이용한 순무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영국과 한국이 결합돼 탄생한 강화 순무에 인천의 특산물 밴댕이가 더해진 것이다.강화도에 30년 이상 거주했다는 김경숙(56)씨는 "어른들 말씀을 들어 보면 외래종인 순무와 밴댕이를 같이 섞어 김치를 담그면서 독특한 맛이 나 많이 해 먹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공업지역 확대와 노동자 음식 탄생인천에서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은 대표 음식으로는 '물텀벙이탕'과 '해장국'이 있다. 이들 음식은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몰린 부두 노동자들과 오랜 세월 함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지금도 남구 용현동에는 '물텀벙이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생기기 전 인천의 물텀벙이탕은 '매운탕'과 비슷한 맛을 냈다고 한다. 싼 가격 덕분에 부두 노동자들의 술안주로 사랑받았다.지금은 다른 생선과 비교해 결코 싸지 않은 물텀벙이(아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못생긴 외모 때문에 버려졌다. '두산백과'는 물텀벙이를 '못생겨 버렸던 생선을 칭하는 말'이라고 정의했다.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때 '텀벙 텀벙' 소리가 나 '물텀벙'이란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덕분에 물텀벙이는 노동자들이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술안주 재료였다.돈이 없는 노동자들은 소주 한잔으로 식사를 대신했고, 식당 주인이 이들에게 밑반찬으로 물텀벙이탕을 끓여 내놓았다.김윤식 시인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인천역 주변에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냄비에 매운탕처럼 끓인 물텀벙이탕 집들이 많았다"며 "당시 막걸리 한 주전자에 80원이었는데, 물텀벙이탕은 100원이었을 정도로 값이 저렴했다"고 말했다.지금은 음식 특성화 거리가 조성돼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음식이지만, 당시에는 한 끼 식사조차 하지 못했던 부두 노동자들의 애환을 풀어준 것이 물텀벙이였던 것이다.해장국도 수십 년간 인천에서 사랑받은 음식이다.새벽이 되면 쌀장수나, 쌀 거간이거나, 객주집 주인이거나, 정미 직공이거나, 목도꾼(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지게꾼이거나 모두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간다.(중략)"한 잔 주슈!"하면 으레 아침 해장 술국에 막걸리다. 한 사발 쭉 들이키고는 뜨끈뜨끈한 술국밥을 먹는 것이었다.쇠뼈다귀에 고기가 흐들흐들 붙어있으면 뼈다귀를 핥고, 구수한 콩나물과 조갯살에 선지가 들어 있어 포식 한다.(중략)5전 한 푼을 던지고 나가는 사람은 모두 칠통마당으로 발길을 재촉 하는 것이다.인천 제1세대 향토사학자인 고일 선생은 '인천 석금'(1955년)에서 '인천식 해장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천식 해장국은 1930년대 인천의 향토음식으로 명성을 높였다.인천식 해장국은 당시 외국 선원들의 식량 보충을 위해 세워진 인천 도살장(현 동구청 지역) 때문에 보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소 부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고기와 내장이 들어간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김창수 박사는 "(해장국은) 개항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일꾼들의 간편한 한 끼 식사였다"며 "한 그릇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개항장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北에서 온 인천냉면은 '실수로' 쫄면 탄생시켜분식집 납품 바빴던 '광신제면'면뽑다가 우동면 틀 사용 계기버리기아까워 고추장 비벼먹어북한 냉면은 개항기 인천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인천 냉면'은 쫄면을 탄생시켰다.1910년대 인천에 내려온 이북식 냉면이 인천식 냉면으로 재탄생해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고 김창수 박사는 설명했다.이북 사람들은 주로 겨울철에 꿩고기가 든 냉면을 먹었다. 이 냉면은 인천으로 넘어왔고, 꿩고기 대신 소고기를 얹어 사철 내내 먹을 수 있는 남한식 냉면이 됐다.김 박사는 "(북한 냉면이) 개항 후 선원들이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제빙공장과 도살장 영향으로 남한식으로 재탄생하게 된다"며 "그 후 당시 인천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냉면이 전국에 보급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김윤식 시인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20~30그릇씩 나무 판에 싣고, 서울로 냉면 배달을 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쫄면은 냉면 덕분에 '우연히' 인천에서 탄생하게 됐다. 냉면을 만들기 위해 면을 뽑다가 실수로 우동면 틀을 사용한 것이 쫄면 탄생의 비화다.쫄면을 최초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광신제면'은 인천 중구 경동에 있다. 광신제면 하경우(56) 사장은 "1968년 당시 농수산물시장도 가깝고, 인근에 분식집이 많아 정신없이 바빴다고 들었다.그러던 와중에 냉면을 만들기 위해 면을 뽑았는데, 그 전에 사용하던 우동면 틀을 그대로 써 우동 굵기의 냉면 반죽이 나왔다고 한다"며 "이것을 버리기 아까워 공장 앞에 있는 맛나분식에 줬고, 이를 고추장에 비벼 먹은 것이 최초의 쫄면"이라고 설명했다.이 음식은 이후 쫄깃한 면이라고 해 '쫄면'이라 이름 지어졌고, 신포동 분식점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글 = 김주엽기자

2013-06-12 김주엽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16<축구

1890년대 후반 강화학당 축구팀 존재축구협 공식기록보다 보급연도 5년이상 앞서1930년대 인천 조일양조 첫 실업팀 창단한국전 이후 첩보부대 축구단이 계보 이어웃터골 → 숭의운동장 → 문학월드컵 → 전용경기장 100년에 걸쳐 구장도 진화부평고-운봉공고 양대산맥… 수도권 연고 '유공' 이후 2003년 인천Utd 창단축국(蹴鞠)은 동양의 고대 축구다.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라는 임금이 병정들을 훈련시키는 놀이로 축국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당나라 때 전해졌다.축국은 신라·고구려·백제에 전해졌으며, 일본까지 퍼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당시 가죽주머니 속에 동물의 털을 넣어 둥글게 하거나, 돼지 또는 소의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공을 만들었다. 규칙은 오늘날의 제기차기와 비슷했다고 한다.축국의 기원과 옛 문헌의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예로 부터 둥근 물체를 발로 차는 놀이를 즐겼다.말 그대로 민속 놀이였다. 일정한 규칙과 기술을 바탕으로 공을 차는 놀이, 즉 공을 차는 축구는 1882년 제물포(인천)를 통해 도입됐다.# 근대 축구의 보급임오군란 직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는 동맹 관계에 있는 일본을 지원하고자 제물포항에 주둔했다.플라잉 피시호에는 수병들이 있었고, 그들은 무기·식료품과 함께 축구공도 싣고 왔다. 수병들은 항구에 내려 쉬는 시간에는 공을 찼다. 제물포 사람들은 영국 수병들과 환담을 나누고,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공차기도 배웠다.야구와 마찬가지로 축구도 신식 교육의 수업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국내에서 점점 기틀을 잡아갔다.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 축구가 채택됐다.국내 공식 첫 경기는 1905년 6월 서울 훈련원(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경기라고 한다.하지만, 실제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는 좀 더 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2007년 인천 강화문화원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당시 강화문화원은 강화군청 의뢰로 한국 근대 해군 창설과 관련한 조사를 했다. 강화문화원은 1893년 강화에 설립된 최초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자료를 찾기 위해 문헌·현지조사를 벌이다가 성공회대학교에서 '모닝컴(Morning Calm)'이란 잡지의 마이크로필름을 발견했다.필름의 내용물 중 8줄 가량의 영문 문서와 사진 1장이 축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는 시드니 J 파커라는 사람이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는 '모닝컴' 편집자에게 보내기 위해 1901년 3월21일 제물포에서 작성한 글(편지)과 사진이다.파커는 편지에 "G.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은 강화학당 축구팀이 존재한다. 선수들은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으며, 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고 썼다.특히 선수들이 몇 년간 훈련을 받았다는 내용이 글에 담겨 있어, 이 축구팀이 189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이 때문에 강화학당 축구팀의 존재는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를 5년 이상 앞당긴다. 그럼에도, 강화학당 축구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인천 축구의 태동과 발전축구는 영국에서 근대 스포츠로 발전했다. 그 기본 동력은 '근대적인 교육 시스템'과 '시민·노동자에 의한 현대 도시문화' 등이다. 이 같은 조건이 갖춰진 곳이라면 축구가 확산될 여지가 크다.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은 항만·정미·목재·제분·철강·주류산업 등이 발달했다. 인천은 축구가 발전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1920년대 인천에는 인배회, 율목리팀, 한용단, 대성단 등의 자생적 '클럽'이 있었다. 이들 팀들이 참여한 가운데 현 제물포고교 자리인 웃터골 운동장에서 '전인천 축구대회'가 열렸다.1919년 10월 인천 중구 선화동에 설립된 조일양조(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식 소주공장)는 1930년대 들어 국내 최초의 축구 실업팀을 창단했다. '조양', '인천 조양' 등으로 불린 팀은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조양'은 1939년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 1946년과 194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48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한국 축구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유형, 이시동, 배종호, 정국진, 오경환 등 조양 선수 5명이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조일양조가 문을 닫으면서 축구팀도 없어지게 된다.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육군 첩보부대(HID) 축구단이 탄생했다. 이 축구단은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1960년대까지 존재하면서 인천 축구팀의 계보를 이어갔다.김윤식 전 인천문인협회장은 "(인천은) 개항 이후 국내 여타 지역보다 자본도 많이 있었고, 일제 치하 당시 항일의 방법으로 교육열과 함께 스포츠에 대한 응원과 열의도 컸다"면서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지역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인천 축구 경기장의 변화1900년대 초반 인천의 축구와 야구경기는 웃터골 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곳은 널찍한 평지 주변으로 야트막한 구릉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언덕이 관중석 기능을 했다.전인천 축구대회도 이곳에서 열렸으며, 국내 최초의 실업팀 조양도 창단 초기 웃터골 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지역사학자들은 예측한다.1934년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문을 열었다. 이 운동장은 1964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숭의종합운동장으로 명칭이 바뀐다.숭의종합운동장은 인접한 도원야구장과 함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전까지 인천 체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2002년 6월 15일 외신들은 "인천에서 세계 축구사가 바뀌었다"고 썼다. 한국 축구팀이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소식을 긴급 뉴스로 타전한 것이다.문학월드컵경기장이 한국 축구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문학월드컵경기장은 2003년 창단한 인천의 프로축구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됐다. 숭의종합운동장과 도원야구장을 헌 자리에 약 2만석 규모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이 경기장은 선수와 관중이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기장과 관람석이 가깝다.인천 유나이티드는 지난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홈 경기장을 옮겼다. 문학월드컵경기장은 현재 실업축구 내셔널리그 한국코레일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 프로팀의 변화부평고는 운봉공고(현재 하이텍고)와 인천 축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이 중 부평고는 1982년 창단 이래 배출한 청소년·국가대표 선수만 60여명에 이르고, 전국대회 우승 기록만 20여차례나 된다.노정윤과 이임생,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인 김봉길부터 최태욱, 김남일, 이천수, 이근호 등이 부평고 출신이다.1983년 동북아 최초의 프로리그 '슈퍼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인천 연고팀은 수도권 전체를 연고지로 뒀던 유공 코끼리 축구단이었다.이듬해 슈퍼리그에 럭키금성과 한일은행, 현대가 합류하면서 연고지가 조정됐다. 인천 연고팀은 현대 호랑이 축구단으로 변경됐다.사실상 '홈 엔드 어웨이' 경기제가 정착되는 1987년에 연고지 재조정이 있었다.유공이 인천과 경기도 지역의 연고팀으로 정해졌으며, 현대는 강원도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유공은 인천시의 비협조적 행정에 불만이 많았다. 이 때문에 1991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다.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인천시가 프로팀 유치를 추진했지만 '불발'로 끝난다. 이후 2003년 6월 시민프로축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김시석 인천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인천은 한국 축구의 발상지다. 인천 축구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민과 함께 더욱 발전하는 축구 문화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글 = 김영준기자

2013-06-05 김영준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⑮야구

공식 기록인 1905년보다 앞선 1899년인천 고교 일본인 학생 일기장에 등장일제때 웃터골 운동장서 '한용단' 경기해방 후 사회인 야구 '전인천군' 등장김선웅·장영식·박현덕·유완식 '활약'미군들 콧대 꺾고 공식대회 명성 떨쳐연고팀 변경 등 역경딛고 현대 '첫 정상'SK, 2007년부터 KS 6회 진출·3회 우승이후 스포테인먼트로 관중동원 새 역사'구도(球都)' 인천의 야구사는 한국 야구 한 세기와 맥을 같이 한다.'전통의 야구 명문' 인천고, 한국 야구를 빛낸 숱한 스타를 배출한 '야구 명가' 동산고가 고교 야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이후 제물포고가 '신흥 다크호스'로 떠오르며 고교 야구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경인기차통학생들로 구성된 한인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에서부터 현재의 인천 프로야구팀 SK 와이번스까지, 야구는 인천시민과 오랜 세월 애환을 나눈 대표적인 스포츠다.특히 SK는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정규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두산에 2패 뒤 4연승을 거뒀다.SK는 2008년과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하는 등 지난해까지 프로야구 최초로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국 야구의 태동대한야구협회가 한국 야구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한국야구사'를 보면 한국에서 야구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05년이다.미국인 선교사 질레트는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다. 이듬해인 1906년 독일어학교팀과 야구경기를 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라고 한국야구사는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한국 야구가 태동한 곳은 인천이다. 인천에서 한국 야구가 태동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이(1905년)보다 앞선다는 증거는 많다.인천영어야학회(인천고 전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가 1899년 자신의 일기에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질레트보다 무려 6년을 앞서 인천에서는 야구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인천 야구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인천야구 한 세기'에선,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실시한 일본이 인천 웃터골(현 제물포고 자리)을 공설운동장으로 개설해 야구 경기를 가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당시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한용단은 이곳에서 경기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한용단이 일본인 야구팀과 경기를 펼칠 때면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리고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을 돋우어 응원했으며 지게를 세워놓고 경기를 구경하던 생선장수는 조갯살과 생선을 썩혔다'는 일화도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다.# 사회인 야구의 효시 '전인천군'해방 후 신탁통치로 인해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군들과의 야구시합이 열렸다. 인천 사회인 야구를 대표했던 '전인천군' 역시 인천지역에 주둔하는 미군 팀들과 경기를 치르며 두드러진 활약상을 남겼다.처음에는 전인천군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미군들이 건성으로 경기에 임했으나, 몇 차례 경기에서 전인천군에 혼쭐났다.미군들은 조직적인 훈련을 했으며 차후에는 미군사령부가 주최한 두 팀 간의 정기전이 치러졌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1946년 자유신문사가 주최한 '4대 도시 대항 야구대회'가 해방 후 첫 공식대회로 열렸다.하지만 전인천군은 예상외로 서울, 부산, 대구에 잇달아 패하며 3전 전패로 첫 대회에서 최하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7년 대회에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인천 야구의 위세를 떨쳤다.전인천군은 그해 7월과 8월 전국지구대표야구쟁패전과 월계기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한 해에 4개 대회 우승을 싹쓸이하는 저력을 발휘했다.당시 전인천군 선수로는 인천 야구 1세대를 풍미했던 김선웅, 장영식, 박현덕 등이 있었다. 여기에 일본 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합류한 유완식까지 그야말로 '드림팀'이었다.# 슈퍼스타에서 비룡에 이르다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은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지금의 SK 와이번스까지 다섯 번이나 팀이 바뀌었다.프로야구 태동기엔 인천 연고 팀이 없을 뻔했고, 그 이후에도 인천 연고 팀은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다.늘 하위권을 맴도는 팀 성적과 연고 구단의 부실로 인한 잦은 팀 매각, 믿었던 팀의 배반으로 연고 팀이 없어질 위기까지, 참으로 인천 야구팬들은 힘들게 지역야구를 지켜봐 왔다.그만큼 인천 연고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인천 야구팬들의 숙원이었다.첫 한국시리즈 진출은 프로야구 출범 13년째인 1994년 태평양 돌핀스가 이루어 냈다.태평양은 선발진 김홍집·최창호·정민태에 마무리 정명원을 앞세워 정규리그에서 당당히 2위에 올랐으며,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연승으로 가볍게 제압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하지만 당시 LG의 '신바람 야구'에 밀려 4연패로 한국시리즈 제패에는 실패했다.1996년 인천 프로야구는 또다시 연고팀이 바뀌는 진통을 겪게 된다. 인천 연고 팀이 된 현대 유니콘스는 창단 3년째인 1998년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인천 연고 팀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2000년, 인천 연고 팀은 SK로 바뀌었다.인천 야구는 신생구단 SK와 함께 부흥을 준비했다. SK는 200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현대와 맞붙지만 7차전 명승부 끝에 3승4패로 우승을 내줬다.하지만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4승2패·두산)을 차지한 이후 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4승1패·두산), 2009년 한국시리즈 준우승(3승4패·KIA),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4승·삼성), 2011년 한국시리즈 준우승(1승4패·삼성), 201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2승4패·삼성)을 하는 등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SK는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2007년에 관중 동원에도 성공한다. SK가 창단한 2000년 홈 관중은 8만4천563명에 불과했다.문학구장을 개장한 2002년 40만 관중을 넘어섰으나, 이후 2006년까지 증가세는 미미했다.2007년 SK는 '팬과 함께'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를 시작, 그해 70만 관중을 넘겼다. 한동안 침체돼 있던 지역 프로야구의 부활을 알린 것이다.2010년부터는 친환경을 추구하는 그린(Green) 스포츠, 교육적 측면을 접목한 에듀(Edu) 스포테인먼트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마케팅까지 벌이고 있다.SK는 2012년 9월 15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경기(KIA전)에서 누적 관중 101만3천174명(경기당 평균 1만6천886명)을 기록했다.이로써 SK는 2011년 10월 1일 삼성과의 홈 최종전에서 수립한 인천 연고 팀 한 시즌 최다 관중기록(99만8천615명)을 깨면서 100만 관중까지 돌파했다.2012년 100만 관중을 넘어선 구단은 롯데, 두산, LG에 이어 SK가 네 번째다. 시장이 큰 서울과 부산에서만 가능했던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돌파를 인천에서도 달성한 것이다.글 = 김영준기자

2013-05-29 김영준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⑭ 경인로

46번 국도 주축 서울과 인천 연결 모든 도로 포함제물포 중심 개항후 급속 변화 경인고속도 등 다양한 길 열려서울위해 동서축으로 뻗어 남북간 도로 별로없어도심 허리끊어 놓은 '공간의 학살' 서울에 종속된 결정적 계기'경인로(京仁路)'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선의 변화가 있었지만, 개항 이후 인천과 한양을 오갔던 길은 지금의 46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경인로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서울과 연결된 모든 도로를 뜻한다. 3개의 경인고속도로와 46번 국도를 포함해 6번, 42번 국도 등이 모두 인천과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도로다. 심지어 쓰레기수송도로와 경인아라뱃길도 경인로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인천의 역사는 경인로의 역사와 함께 했다. 경인로의 노선이 바뀌면서 인천의 중심도 바뀌었고, 개항 이후 도로의 확장과 새로운 도로의 개설로 인천은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인로는 인천 내부의 자생보다는 서울을 위한 기능에 더 충실했고, 인천을 남북으로 단절시켰다는 그늘도 있다.개항 전후의 경인로 노선 변화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김종혁 교수의 '근대 지형도를 통해 본 경인로의 노선 변화(2007)'를 참고했다.경인로에 대한 인문사회적 시각과 교통공학적 관점은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 박사와 도시기반연구원 석종수(도시기반연구부 연구위원) 박사의 말을 빌렸다.# 경인로의 변화"명색이 반도에서 가장 좋은 도로라는데도 그 길은 수레바퀴가 굴러다니기에는 너무 험했다… 결국 1마일도 채 못가서 (수레) 한 대가 부서지면서 거기 탔던 연대장이 나가떨어졌다."1883년 개항 직후 제물포를 통해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1855~1916)은 그의 회고록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서울 가는 길(경인로)'을 이같이 묘사했다.당시 인천에서 한양 가는 길은 제물포에서 출발해 인천도호부가 위치했던 관교동, 경신역(남동구 수산동), 성현, 동소정(부평동), 역곡, 오류원(오류동)을 거쳐 양화동에 도착하는 코스였다.이어 양화동에서 배를 타고 마포나 용산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이 길은 개항 이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닦이지도 않았고, 조선 사람조차도 길을 잃을 정도로 '주요하지 않은' 도로였다.서울 가는 길은 개항 이후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 인천의 중심지는 도호부가 있는 관교동에서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제물포로 이동했다.때문에 경인로는 종점과 종점 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관교동을 지나지 않고, 주안을 경유하게 된다. 자연도로에 가까웠던 경인로는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된다.자동차가 지날 수 있는 신작로로 바뀐 것은 러일전쟁(1904년) 직후였다. 1915년에는 10m 너비의 도로로 바뀌었고, 1917년 한강인도교가 가설되면서 경인간 도로 통행에 큰 변화가 생겼다.1931년에 이르러서는 30m로 확장됐다. 광복 이후 경인로에도 근대적인 도로시설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로수, 가로등, 이정표 등이 세워졌다. 인천~서울은 '하루 거리'에서 '반나절 거리'로 단축됐다.경인로의 확장은 곧 인천의 팽창을 대변했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에 구한말엔 마차가, 일제시기에는 승합차량이 정기적으로 운행됐다. 또 한국전쟁 이후 미군을 통해 들어온 군용차량과 일반차량이 늘어나면서 1958년 경인로가 포장됐다.1960년대 이후 인천은 서울의 관문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국가정책적으로 중화학공업이 육성됐다. 항만의 발전과 함께 급증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경인고속도로(인천 용현~가좌~부평~서울 양천)가 1968년 개통된다. 경인고속도로는 국도를 이용하면 1시간이었던 인천~서울 거리를 20분으로 단축시켰다.1970년대 서울의 인구 증가 등 도시 팽창으로 인천, 부천 등 주변 중소도시가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거대도시가 만들어진다. 주거지 확장으로 도로망도 확장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천~서울 간 교통망이 조밀해진다.그러면서 '경인로'는 개항 이후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갔던 기존 경로(46번 국도) 외에도 서울과 통하는 모든 길을 뜻하게 된다.3개의 경인고속도로, 제1경인고속도로와 노선이 거의 같은 6번 국도, 간석오거리에서 남동구 만수동을 지나는 42번 국도 등이 모두 경인로라 할 수 있다.인천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박사는 "개항 이전에는 인천에서 서울 갈 일이 별로 없으니 경인로라는 표현 자체가 필요 없었지만, 개항 이후부터는 왕래가 잦아지면서 서울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경인로라고 불렀던 것 같다"며 "오늘날의 경인로는 도로명이라기 보다는 수많은 서울 가는 길을 포괄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경인로의 그늘서울과 인천의 거리를 가깝게 해 준 경인로는 반대로 인천 내부를 단절시켰다.인천은 서울의 관문항으로 발전해 왔다. 경인로는 태생부터 서울을 위한 도로였던 것이다. 경인로는 동서축으로 뻗어 있는데, 이는 인천의 남북 간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경인로라 할 수 있는 인천의 주요 간선도로는 인천의 서쪽인 중구 파라다이스호텔 인근의 선교 100주년 기념탑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42번 국도와 46번 국도는 동쪽으로 뻗어나가다 간석오거리에서 분리돼 서울 방향으로 간다.부산과 대구 등 다른 도시의 경우, 중심지에서 도로가 부채살 모양의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의 경우 동서 간 도로 때문에 도시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을 꼽기 어렵다.인천발전연구원 석종수 박사는 "인천은 지형상 남북으로 길다란 모습이지만, 주요 도로를 보면 남북 간 도로는 별로 없는데 비해 동서 간 도로는 여러 개가 있다"며 "이는 서울과의 연계성에 따라 도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이어 "경인로의 원래 기능을 위해서라도 인천의 남북을 소통해주는 도시고속도로 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종점과 종점만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는 인천을 단절시켰다. 지금 제1경인고속도로는 부평구와 계양구의 경계선이 됐고, 인천 서구 도심을 갈라놓았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물자의 운반, 서울과 관련된 종사자의 편의 제공의 기능은 충실했지만, 인천 도시 공간이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심한 표현을 쓰자면, 도로는 '공간의 학살'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경인로는 단시간에 서울을 갈 수 있게 해줬지만, 인천이 서울에 종속되는 계기가 됐다. 경인로의 확장은 서울에 대한 종속을 가속화시켰다.교육, 문화, 경제활동 등을 인천 자체적으로 소화하기 보단 서울에 의존하게 됐다. 서울 목동 학원가에 인천 학생들이 몰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경인로는 '서울과 인천을 이어주는 길'이라는 표현보다 '서울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김창수 박사는 "큰 도시와 작은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가 확장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도시에 대한 종속이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서울 가는 길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인천의 자족성이 떨어질 수 있다.예를 들어 현재는 목동으로 학생들이 몰리지만, 강남 가는 빠른 길이 뚫린다면 학생들은 강남 학원가로 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서울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독특한 경인로도 있다. 서울시가 수도권매립지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만든 '쓰레기 수송도로'다.서구 백석동 수도권매립지와 계양구를 지나 서울로 가는 이 도로는 반대로 '서울 가는 길'이 아닌 '쓰레기 버리러 인천에 가는 길'이다.석종수 박사는 "기존의 경인로는 원래 있는 인천의 지형지물(항만, 산업단지 등)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면, 쓰레기 수송도로는 인위적으로 매립지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라며 "다른 도로는 인천 발전에 기여를 한 측면이 있지만, 이 도로는 피해만 주는 도로"라고 말했다.글 = 김민재기자

2013-05-23 김민재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⑬향우회

이북 실향민들, 성냥·그릇공장 등 세워 근대화 앞장… 황해도 출신·상업 종사자 많아충남도민회가 규모는 가장 크고 호남 사람들은 초기에 부평·동인천쪽 자리수도권·접경지역·연안도시라는 지리적 조건 영향 서울과 가까운 점도 한몫"인천은 제2의 고향" 재인향우회 회원수가 무려 370만명… 개방·다양성 엿보여'토박이보다 충청·호남인들이 많다'는 도시가 인천이다. 이들은 어떤 목적과 경로로 인천에 도달했을까.인천에 있는 향우회를 찾아갔다. 취재 과정에서 이북도민회, 충남도민회, 호남향우회, 강원도민회 사람들을 만났다.수도권 도시 대부분이 인천과 상황이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인천의 외지인 유입 과정에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한국전쟁과 산업화 등 현대사의 주요 과정을 겪으며 외지인들이 인천에 몰렸다. 여기에는 연안·접경도시인 인천의 지리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향우회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인천은 배타성이 없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례를 들며 '차별'을 당한 경험도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인천의 '개방성' '다양성'을 알 수 있었다. 향우회원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만큼, 수십 년을 살아온 인천에 대한 애정도 깊다"고 말했다.# 향우회로 인천시민을 본다1950년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의 인천 유입이 시작됐다. 이북5도위원회는 인천에 사는 실향민의 절반 가량을 황해도 출신으로 보고 있다.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동인천 부근의 시장에서는 '연백상회'라는 간판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지금도 인천 중·동구 쪽에는 연백상회란 상호가 남아 있다. 작년 인천시청 앞 새마을회관 5층에 '인천지구 이북도민회'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지난 14일 찾아간 이 사무실은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등 3개 도민회가 사용하고 있었다. 황해도와 함경북도는 따로 사무실을 두고 있다.이북도민회에서 만난 이길호(86·함경남도 도민회 사무국장)씨는 사변 때 월남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지리산 공비 토벌대'에 들어갔고, 다리를 다쳐 1956년 당시 동인천경찰서로 발령받아 인천에 정착하게 됐다.한일태(83·평안북도도민회 사무처장)씨는 1950년 8월 동원령으로 인민군에 징집됐고, 그해 10월 전쟁 포로가 됐다. 거제도와 전남 쪽 포로수용소에 3년간 있다가, 1953년 6월 석방됐다.동가식서가숙하다가 1957년 인천에 올라와 부두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실향민들은 인천 근대화의 선봉에 섰다. 동양제철화학 창업주인 고 이회림 회장은 '개성상인'이었고, 대한제분을 세운 고 이한원 회장은 평남 사람이었다.이북5도위원회 유현종(51) 인천사무소장은 "1950~60년대 인천 성냥공장, 그릇공장 중에는 이북 분들이 세운 게 많았다"고 말했다.충청향우회는 충남·충북 도민회가 따로 운영되고 있다. 인천의 향우회 중 세(勢)가 가장 큰 단체는 충남향우회다. 충남도민회는 1987년 창립했고, 1992년 남구 관교동에 충남도민회관을 세웠다. 충남도민회 이영일(70) 사무국장은 당진사람이다. 1967년 인천에 직장을 잡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충남에서 인천에 정착한 1세대는 주로 1960년대에 많이 몰렸다고 한다. 한국유리,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중공업(현대제철) 등 대형 공장에서 일했다. 이 때문에 중구와 동구에 터를 잡은 이들이 많다.당시에는 공장 인력이 부족해 "고향 친구와 친인척을 데려오면 돈을 준다"고 한 기업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정기여객선을 타고 인천으로 넘어왔다. 당시만 해도 해로가 육로보다 빠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충청향우회는 1946년 충우회로 출발했지만, 1968년에 충남과 충북 조직이 분리됐다. 이후 도민회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다.호남향우회는 1963년에 발족했다. 발족 당시부터 전남과 전북 향우회가 하나로 뭉쳤다. 호남향우회 라기삼(61) 사무총장은 초기 정착민들은 부평 아니면 동인천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했다.부평에서는 미군부대 부근에서 일하는 이들이, 동인천에서는 항만 관련 일자리를 잡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는 인천 부평과 계양구에 호남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향우회관은 남동구 간석동에 1989년 준공됐다.향우회관 앞에는 '애향 애족 애국'이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무실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휘호가 걸려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로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다'는 뜻이다.강원도민회는 1956년 창립됐다. 부평구 십정동에 있는 사무실을 최근 구월동으로 이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원도민회 이창훈(53) 사무총장을 그가 중구에서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만났다.이 총장은 강릉 출신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15년간 근무한 뒤 경기도 여러 지역을 돌며 사업을 했다. 2007년 중구에 주유소를 개업하면서 인천에 터를 잡았다.이 총장에 따르면 강원도민은 계양과 부평 쪽에 많이 거주한다. 인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정착하거나 직장을 얻어 이전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고, 공무원과 교사가 많다고 했다.# 충남, 이북, 호남 출신 왜 많을까?인천은 수도권이면서 접경지역이고 연안도시다. 이로 인해 타지에서 인구 유입이 많았다. 서울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서울의 비싼 집값을 감당하기 힘든 이들도 인천에 온다.인천은 전국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뱃길을 따라 충남에서 유입 인구가 많았던 것도 인천의 지리적 조건 때문으로 풀이된다.고려대 김종혁(역사지리학전공) 박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은 서울로 진입하는 여건을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한 이들이 사는 도시였다. 이 때문에 대체로 자녀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말했다.인천은 서울의 배후도시로 산업화 기능을 담당했던 탓에 각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왔다. 1960~70년대에는 제철·목재 등의 산업이, 1980년대 이후에는 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이 성했다.한국교원대 류제헌(지리교육과) 교수가 2010년에 낸 '인천시 아이덴티티 형성의 인구·문화적 요인'이란 제목의 학술보고서에 따르면 바다와 가까운 황해도, 충남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왔다.1990년대 초반 인천시 인구의 3분의 1이 충남사람이었다. 호남 출신의 이주는 1980년대 해로가 아닌 육로(고속도로)를 통해 이뤄졌다. 때문에 서울과 가까운 부평과 계양에 호남 출신이 많이 거주하게 됐다는 것이 류 교수 분석이다.# 인천 ○○향우회의 특징… 인천은 제2의 고향충남향우회는 전국에 있는 충남향우회 중 유일하게 자체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학사관 건립을 위한 모금을 벌이고 있다. 100억원이 모이면 충남에서 인천으로 유학온 청년들이 묵을 수 있는 학사관을 건립할 계획이다.호남향우회는 100억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간석동에 있는 건물과 서구 백석동에 있는 공원묘지(1만3천341㎡) 등 부동산 자산이 대부분이다.향우회 라기삼 사무총장은 "공원묘지는 1960년대쯤에 80만원인가를 주고 매입했는데, 지금은 평당 감정가격만 120만원대에 이른다"고 설명했다.강원도민회는 전국에 있는 44개 강원도민회 중 유일한 사단법인체다. 지난해 사단법인으로 전환했고, 이후 장학기금과 도민회관 건축기금을 별도 회계로 설치해 관리하고 있다.인천시의 '재인 향우회 현황' 자료를 보면 회원수는 충남(120만명), 호남(80만명), 충북(60만명), 경상(40만명), 강원(20만명) 순이다. 여기에 이북5도위원회 집계에 따른 50만명을 더하면 모두 370만명이 된다.올 3월 290만명을 넘은 인천시민 수를 80만명 정도 상회한다. 이는 각 향우회의 회원 자격이 넓기 때문이다.특정 지역 출신자의 선대와 후대, 배우자까지 회원에 가입할 수 있게 돼 있다. 반면 강원도민회는 '강원도 출생자 본인'만을 회원으로 인정하고 있는 게 차이점이다.고향은 다르지만 향우회에서 활동하는 이들 대부분은 인천을 '제2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있다. 인천에서 배우자를 만나 자녀들을 낳아 기르고, 직장을 다니고, 친구를 얻었기 때문이다.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인천지역에 대한 사랑을 키우려는 노력을 대부분의 향우회가 하고 있다. 강원도민회 이창훈 사무총장은 "강원도에서 태어난 건 운명이고 바꿀 수 없다.하지만 현재 인천 땅에 발붙이고 살고, 어차피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한 인천은 제2의 고향이다"고 말했다.글 = 김명래기자

2013-05-15 김명래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⑫부평

예전엔 택시타도 웃돈 지불하던 지역특유의 끈끈한 정 '마피아' 등 별칭의사회장 선거에선 '부평놈' 비아냥도日·美·韓 군부대 차례로 주둔 '멍에''풍물대축제'로 지역 정체성 회복나서실질적 인천 중심서 개항후 '변방으로''부평 마피아', '부평 빨대들'….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두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인천 부평지역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이 곳에서 자라온 '부평토박이'들은 같은 인천시(市)에 살면서도 자신을 '인천사람'이 아닌 '부평사람'이라고 외지인들에게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부평사람'은 사는 곳을 말할 때도 '인천에 산다'고 말하기 보다는 '부평에 산다'고 소개한다. 그동안 기자가 만나 본 부평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 그랬다.부평의 원로인 임남재(74) 전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회장, 부평의 대표적인 네트워크 중 하나인 인천부평사랑회를 만든 이필주(56) 고문, 부평역사박물관이 추천한 남달우(53) 인하역사연구소장 등 부평사람 3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들이었다. 이들을 만나 '부평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천사람'과 '부평사람'인천시와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인 부평구 삼산동에서 택시를 타고 시청에 가자고 하면 기사는 부천시청을 말하는지, 인천시청을 가자고 하는 것인지를 묻곤 한다.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택시는 부평과 인천을 각각 따로 돌아 서로 섞이지 않았다. 당시 인천에서 부평으로 가거나 부평에서 인천으로 이동해야 할 경우, 택시요금 미터기는 무시됐고 웃돈을 얹어줘야 다녔다고 한다.서울의 언론사들은 국회의원 선거 개표방송 등에서 부평시와 인천시가 따로 있는 줄 착각해 오보를 내는 경우도 많다.부평 특유의 끈끈한 정서를 빗대 '부평 마피아'란 말이 나왔다. 주당으로 소문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재임 당시 부평사람들을 만나 두 차례나 '알코올성 혼수상태'에 빠진 일이 있다. 부평사람들이 최 전 시장보다 술을 잘 마셨다고 해서 '부평 빨대'라는 말도 생겼다."부평놈들 한테 뭘 맡겨?"임남재 전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회장이 1994년 5대 인천시 의사회장으로 출마했을 당시 들어야 했던 말이라고 한다. 임 회장은 "당시 의사회장 후보들끼리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나를 두고 '부평놈'이라는 비아냥이 계속 나왔다"며 "당시 인천의 정서는 지역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인천부평사랑회 이필주 고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기도 하겠지만 부평사람을 만들어 낸 것은 부평의 정서를 낯설게 느낀 인천사람이란 측면이 더 커 보인다"면서 "바닷가 인천사람과 내륙에 가까운 부평사람은 분명 달랐는데 서로가 낯설다 보니 구분 짓는 일이 반복되며 습관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군부대 주둔지'의 상처와 풍물대축제근대 이후 부평에는 일본군과 미군, 한국군이 차례로 주둔했다.1939년 말 부평에는 일본육군조병창이 가장 먼저 들어섰다. 조병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한 병기공장으로, 소총·탄환·포탄·선박·자동차 등을 생산했다. 전쟁 말기에는 잠수정까지 건조했다고 한다.수천의 군인과 군속이 종사한 까닭에, 일제 말기 부평하면 조병창을 떠올렸단다. 부평은 조병창을 중심으로 거대한 군수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조병창과 그 하청공장에서 일하면 징용을 면제해 주는 특혜도 있어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해방 이후에는 조병창 자리에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 부대가 들어서게 된다. 보급창, 의무대, 공병대 등의 부대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여기에 한국인 종업원이 4천여명 근무했다.이필주 고문은 "일제시대 조병창과 미군부대 그리고 5·9공수부대 등이 부평에 차례로 들어서며 이곳 아이들은 자연스레 군대 문화를 경험해야 했다"고 말했다.옛 부평의 산업 기반은 농업이었다. 부평은 부천과 함께 대표적인 미곡 생산지였다. 1997년 시작된 부평풍물대축제는 이러한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풍물대축제는 1996년 '부평문화 예술제'라는 기획안이 당시 최용규 구청장에게 제출되면서 논의가 시작됐다.예술제 개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평의 역사적 정체성을 염두에 둔 '풍물'이 축제의 핵심이 된다. 부평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혹은 지역민을 묶어 줄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부평풍물대축제'가 탄생하게 된다.부평은 급격한 산업화와 수도권의 팽창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지역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돌파구로 '축제'를 택했다. 부평풍물대축제는 지역 밀착형 축제다.이 축제를 끌고 나가는 주체는 축제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오피니언 리더 그룹과 전문가 그룹, 각 동마다 조직된 풍물단이다. 자연스레 지역의 의견을 수렴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부평의 라이벌 인천이름이 생겨난 순서로만 따지면 '부평'이 형이 되고 '인천'은 아우가 된다.지명의 역사를 살펴볼 때 부평이 등장한 시기는 인천이 등장한 시기보다 100여년 앞선다. '부평'이라는 이름은 1310년(고려 충선왕2)에 길주목이 부평부로 바뀌며 등장했다.'인천'이라는 지명은 1413년 조선 태종이 현재 인천의 일부를 '인천군'으로 명명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됐다. 부평의 이름은 고구려 때 주부토에서 통일신라 때 장제군, 940년(고려시대) 수주, 1150년 안남도호부, 1215년 계양도호부, 1308년 길주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310년 부평부, 1413년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가 된다. 인천은 고려 현종 때 수주에 속했던 소성현이었다.부평은 지방관이 파견됐던 고을이었던 반면 인천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다. 부평은 관할 아래 인천이라는 속현을 거느리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관계는 개항 이후 뒤바뀌기 시작했다. 농경이 중심이었던 조선시대 때는 부평이 중요시됐지만, 개항과 함께 중요성이 인천(개항장 중심)으로 옮겨갔다.남달우 인하역사연구소장은 "전통시대 부평은 1883년 개항이 이뤄지기 이전까지 군사·경제 등 여러모로 실질적인 인천의 중심지였다"며 "개항 이후 인천과 부평이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부평사람들의 상실감이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조선시대 부평도호부 읍격 '3차례 강등' 수난세종의 눈밖에 나서연산군 심기 건드려장릉 방화사건 범인 탓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읍격이 3차례 강등됐다.첫 번째 강등은 1438년 세종 때의 일로 '온천파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등에는 부종이 있어 힘들어 했는데, 그러면서도 책읽기를 좋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시력이 나빴다. 세종은 대신들의 권유에 따라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한 후 이런저런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그러다 어느 날, 세종은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부평의 온천을 찾아볼 것을 명령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수백 곳의 땅을 파 보았지만 온천을 찾을 수 없었다.세종은 왕이 자주 찾아오면 불편할 것을 걱정한 부평사람들이 일부러 온천을 숨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현으로 강등시켰다. 8년이 지난 1446년이 돼서야 도호부로 복구됐다.1505년 내시 김순손(부평 출신)이 죄를 짓자 그를 처형하고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년 만에 복구한 일도 있었다. 1495년 연산군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궁중에서 문란한 생활을 하자, 이에 대해 김순손이 직언을 했다.김순손은 제주도로 유배됐는데 결국 참형을 당했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쫓겨 나서야 김순손의 공이 인정돼 도호부로 복구된다.1698년 세 번째로 강등된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에 방화사건이 있었는데, 죄인 최필성의 출생지가 부평이라는 것이 이유였다.최필성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부인은 양반집의 노비가 됐다. 현으로 강등된 지 10년 만인 1707년(숙종33)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됐다.글 = 김성호기자

2013-05-09 김성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⑪갯벌과 매립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 갯벌 매립… 1980년대 가장 활발서울 인구·공장 포화 탓 연안 개발후 혐오시설까지 '자리'송도 공유수면 매립에 어촌계 터전잃고 조개·철새들 줄어소규모 섬들도 함께 사라져… 퇴색된 문화적 가치 아쉬워'갯벌과 매립'의 역사를 보면 인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인천은 갯벌을 메워 땅을 만들었고, 그 곳에는 아파트와 공장, 심지어 쓰레기매립장과 발전소 등이 들어섰다.사람들이 갯벌의 생태적·경제적 가치와 보전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시기는 연안관리법과 습지보전법이 제정된 1990년대 후반.그 전에도 갯벌을 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도시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묵살됐다. 이들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인천의 갯벌 매립은 계속됐다.인천은 갯벌을 매립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항만과 공항, 산업단지, 아파트단지, 경제자유구역(송도·청라·영종) 등을 얻었을 것이다. 잃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갯벌은 하천을 따라 바다로 유입되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각종 미생물, 어패류, 철새의 산란지 또는 서식지이기도 하다.갯벌은 또 자연학습 장소로 이용되는 등 문화적 가치가 있다. 매립사업은 이런 생태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갯벌은 물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들까지 집어삼켰다.# 갯벌, 근대·산업·세계화의 '희생양'이 되다인천의 갯벌 매립은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과 관련이 깊다. ┃표 참조인천에서 갯벌 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3년 개항 이후다. 일본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듬 해 전쟁이 끝난 뒤 개항장 일본조계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게 된다. 주거 공간이 필요했던 일본인은 서서히 갯벌을 매립하기 시작한다.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매립 목적은 주거용지에서 항만·공업·상업용지 확보로 바뀐다. 이 시기에 인천 내항 제1선거(船渠)가 완공되고, 그 북부지역에서 매립사업이 진행된다. 이 곳에는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동국제강, 현대제철 등이 들어서 있다.매립사업으로 인해 월미도와 소월미도는 하나가 된다. '낙섬'과 용현동·학익동 해안도 육지로 변한다.매립사업은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잠시 멈췄다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면서 다시 시작된다.이때부터 김포갯벌, 남동갯벌, 송도갯벌이 인간의 간섭을 받게 된다. 60~70년대 매립사업으로 서부산업단지, 주안수출산업단지, 가좌동 목재단지, 갑문 등이 생겼다. 동양제철화학의 폐석회 매립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80년대는 갯벌 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이 시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매립지는 김포간척지(동아매립지)와 남동국가산업단지다. 동아건설은 농림수산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김포갯벌 36.37㎢를 매립했다. 남동산단은 수도권에 산재해 있는 공해 공장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됐다.90년대 들어 송도갯벌 매립이 시작됐고, 이 곳은 2003년 청라·영종과 함께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송도갯벌 매립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강화도 갯벌을 훼손하는 강화조력발전 건설사업은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돼 있는 상태다. 이혜경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인천은 여전히 갯벌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며 "바다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데, 인지를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갯벌 매립으로 혐오시설이 인천에 들어앉다갯벌 매립으로 바다만 오염된 것이 아니었다. 갯벌을 메운 땅에는 회색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이 들어섰다.서울이 더 이상 인구와 공장을 수용하지 못하자, 인천연안 갯벌이 개발 대상이 된 것이다. 갯벌 매립으로 산단이 조성된 인천은 서울의 위성도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매립지에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것은 그나마 낫다.1970년 일도와 율도에는 복합화력발전소와 한화발전소가 있었다. 김포간척지 사업으로 이들 발전소는 육지에 자리잡게 됐다. 환경부는 1988년 김포간척지 북쪽지역을 넘겨받아 쓰레기매립장을 조성했다.이 때문에 서울과 경기도의 '쓰레기장'인 수도권매립지가 인천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수도권매립지 때문에 인천시민들은 악취와 분진 등에 시달리고 있다.1990년대, 한국가스공사 등은 송도 해상을 매립해 LNG인수기지를 건설했다.# 바다와 멀어지다과거 인천에는 갯골을 중심으로 연안, 송도, 척전, 동막, 고잔, 소래 등의 어촌계가 형성됐다. 이 중 송도·척전·동막·고잔어촌계는 송도갯벌을 터전으로 생계를 유지했다.하지만 이들은 송도국제도시 공유수면 매립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어업권을 상실했다. 인천시는 송도갯벌 매립을 추진하는 대신 이른바 '조개딱지'(송도어민생활대책용지 분양권)를 어민들에게 나눠 줬다. 시가 어촌계의 자진 해산을 유도한 셈이다. 이후 많은 어민들이 갯벌을 떠났다.삶의 터전을 빼앗긴 송도어촌계 어민들은 승합차를 타고 영종도 갯벌까지 나가 조개 등을 잡고 있다. 황인국 송도어촌계장은 "송도갯벌은 조개와 물고기를 잡아 아이들을 키운 삶의 터전"이라며 "송도갯벌이 사라져 몇 년 전부터는 영종도 갯벌에서 조개 등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현재 고잔어촌계 어민은 30명 정도인데, 이들 모두가 갯벌에 나가지는 않는다. 갯벌에 나가도 조개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방영애 고잔어촌계장은 "매립으로 흙물이 바다에 들어가 조개가 없어졌다"며 "옛날에는 철새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바다에 가도 새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매립사업으로 사라진 것은 어민, 조개, 철새뿐만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들도 사라졌다.인천항 축조사업으로 분도, 사도, 낙섬, 소원도가 없어졌다. '괭이부리'라 불리던 동구의 '묘도'는 1910년 매립으로 육지가 됐다. 연수구 '아암도', 남동구 '대원예도'와 '소원예도' 등도 사라졌다. 이후 율도, 청라도, 일도, 장도, 거첨도, 안암도, 가서도 등 육지와 가까운 수십개의 섬들이 육지와 연결됐다.해안에 산업시설과 항만시설 등이 들어서면서 인천시민들은 바다를 접하기가 어려워졌다. 갯벌 매립이 있었기에 인천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전'보다 '개발'을 우선시했고,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백용해 (사)녹색습지교육원장은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갯벌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며 "갯벌이 인천에 있고, 그 가치를 알면서도 안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글 = 목동훈기자

2013-05-01 목동훈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⑩ 강화도

인천편입당시 반발… 아직 경기도 환원 주장토박이 아니면 어울리기 힘들어 '배타적'전란 속 상처입은 주민 피해의식 더해진 탓한국전때 민간인끼리 학살이 '트라우마'로반면 조봉암 등 개혁·진보 인물 많이 배출성당 청년회 주축 '심도직물 노동 운동' 유명김포 거쳐야하는 비월지적 특성도 불통 원인인천사람들은 강화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강화군은 행정구역상 인천시에 속해 있고, 이곳 사람들도 엄연한 인천시민인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말이 안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화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반(半) 인천사람'이라 부른다. 행정구역상 인천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인천과는 동화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경기도에 속해 있던 강화군이 인천에 편입된 것은 1995년이다.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 포함돼 있던 강화군과 옹진군, 김포군(현재 김포시) 검단면 등이 인천에 편입됐다. 어떻게 보면 인천을 지금의 광역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 준 곳이 강화·옹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인천 편입 당시 강화군 주민들은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였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간간이 강화도의 경기 환원론을 주장한다. 강화사람들이 자신들을 반인천사람이라 부르는 것도, 경제·문화·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인천과는 다른 강화도만의 특수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리산, 고인돌, 전등사, 고려의 왕도, 신미·병인양요…. 우리가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역사서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화에 대한 정보는 많다. 강화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책이 가르쳐 주지 않는, 이곳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삶과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닫힌 공간 강화도, 배타적인 그들"타지 사람들한테 이렇게 배타적인 곳은 처음 봐요." 지난 19일 강화읍에서 만난 한 향토사학자는 강화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묻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1986년부터 강화도에서 교편을 잡다 최근 퇴직하고, 이곳의 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그는 이런 말을 이름을 밝히고 하면 큰일 난다며, 손사래를 쳤다. 타지에서 강화에 정착해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엔 강화도 사람들만의 첫번째 특성을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강화 토박이가 아니면 쉽사리 그들과 어울리기 힘들고, 남한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는 것도 꺼린다. 다른 지방에도 이런 특색이 있지만 강화는 해도 너무하다는 것이다.인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강화 주민들의 특성에 대해, 섬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지역성에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다치고 상처 입은 이곳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더해진 결과라고 말한다.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김창수 박사는 "몽골과의 전쟁, 신미·병인양요 등 강화도가 여러 전란을 겪었지만, 근대에 있어서 강화도 사람들을 더욱 배타적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이 한국전쟁"이라고 말했다.한국전쟁 당시 강화도 내에서는 군(軍)에 의한 학살이 아닌 지역민들끼리의 학살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전장이 남과 북으로 펼쳐지면서 육지와 떨어져 있던 강화도는 남북 양측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강화 내부의 좌익 세력과 북한에서 피란온 사람들로 구성된 민간인 비정규 군대간 끊임없는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혈연관계로 얽혀 있고,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수 있는 이웃사촌간 벌어진 이런 끔직한 학살의 기억은 이곳 사람들이 더욱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이다.2006년 김귀옥씨는 '경제와 사회' 가을호에 쓴 '지역의 한국전쟁 경험과 지역사회의 변화'란 제목의 글에서 교동도에서 벌어진 민간인들끼리의 학살에 대해 '1950년 한국전쟁은 침묵을 강요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냉전의 시계가 작동해, 교동도는 아래로부터 불신과 반목이 깔려 배타성이 더욱 깊어졌다'라고 서술했다.# 열린 공간 강화도, 개혁·진보적 인사들의 산실이런 강화도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적 특성과는 정반대로, 강화에서는 기존의 사상과 사회적 이념을 뒤엎은 개혁·진보적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중국 중심의 주자학을 비판하며 실사구시, 인간중심의 학문을 외쳤던 강화학파의 효시 정제두(1649~1736년)와 이런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후기의 명필가 이건창(1852~1898년) 선생은 강화를 기반으로 양명학을 태동시키고 발전시켜 나간 인물들이다.근대사에 있어서는 평화통일론과 농지개혁 등을 과감히 주장했던 죽산 조봉암(1899~1959년)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밖에 1920~1940년대 인천지역 노동, 교육, 사회운동의 중심에 섰던 유두희(1901~1945년) 선생도 꼽을 수 있다.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70~1980년대 이전에 이미 강화도에서 대규모 노동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1968년 강화 심도직물공업주식회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벌인 파업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강화에는 20여개의 직물공장이 밀집돼 있었고, 그 종업원 수만 4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심도직물은 그중에서도 직원들이 1천2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직물공장이었다.이 곳에서 천주교 강화성당의 가톨릭청년회(J.O.C)가 '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를 결성했고 임금 인상, 노동시간 시정 등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회사측과 맞선 파업을 벌였다.강화 향토사학자 김경준(66)씨는 "파업때 여공들이 썼던 혈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며 "당시 한국가톨릭청년회 주교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강화성당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당시 김 추기경은 강화성당 미사에서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가톨릭청년회에 존경을 표한다"며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당 역사가 증명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사회정의 실현과 노동자들의 인권 수호를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게 퍼져나갔다고 한다.강화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적 풍토 속에서도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고, 개혁·진보적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사실은 강화도만이 갖고 있는 역사적 아이러니(irony) 이기도 하다.# 강화도의 지리적 특성과 사투리강화도는 행정구역 상 인천에 포함돼 있지만, 인천 도심 사람들은 쓰지 않는 사투리가 있다. 말미에 붙는 '~하시겨', '~하시껴' 같은 특유의 어법이 존재한다.류중현 강화문화원 부원장은 "강화도의 경우 고려의 피난처였고, 6·25 이후에는 황해도, 개성 사람들이 많이 흘러들어 왔다"며 "강화도 사투리도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강화도만이 갖고 있는 지리적 특수성도 눈여겨볼 만하다. 섬이란 일반적 지리적 특성 외에 비월지(飛越地)란 행정구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비월지는 다른 마을을 뛰어넘어 있는 행정구역을 말한다. 즉 인천에서 볼 때 강화는 같은 행정구역임에도 경기 김포를 거쳐 가야 하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다.강화도가 인천 땅인데도 김포시를 거쳐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월지적 특징 때문에 강화도 사람들은 1995년 인천 편입 당시, 생활권과 경제권 등이 모두 김포와 연결돼 있어 인천과의 통합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김창수 박사는 "인천과 강화의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 중 지리적인 것이 바로 강화도의 비월지적 특성"이라며 "전국에서 이런 비월지 성격을 갖고 있는 곳은 강화가 유일하다"고 말했다.글 = 김명호기자

2013-04-25 김명호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⑨ 바다와 옛 이야기

피란 온 왕에 죽임당한 '뱃사공 손돌'문헌마다 고려·조선 임금 엇갈려강화에 깃든 민족 수난 역사 대변어민에 조기잡는 법 알린 '임경업 장군'연평도선 '바다 수호신'으로 모셔평화와 만선기원 풍어제 매년 열어이윤생이 의병 이끌고 전사한 '낙섬'매립으로 사라져 바다정서도 퇴색지리적 배경 이야기 잊혀질까 걱정인천에도 옛날 옛적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지명의 유래, 처녀·총각의 사랑 이야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이야기, 부모를 극진히 모신 효자에 관한 전설 등이다. 이 중에서도 인천이 아니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인천만의 이야기가 있다.연평도 사람들에게 조기잡이를 처음 알려준 '임경업 장군', 강화로 피란길에 오른 왕을 배에 태우고 염하를 건너다 억울하게 죽은 '사공 손돌', 병자호란 때 의병장 이윤생과 의병들이 청나라 군사에 맞서다 전사한 '낙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다'와 '섬', '전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이 같은 전설은 문헌으로도 전해지지만,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 경인일보는 위의 세 가지 전설을 '책'이 아닌 '사람'에게서 찾기로 했다. '사공 손돌' 이야기는 전 덕신고등학교 교감 김경준(66)씨가, '임경업 장군' 이야기는 그를 '신(神)'으로 모신다는 서해안풍어제 보존회 김혜경(52·여)씨가 들려줬다. '낙섬 이야기'는 인천 출신 시인 김윤식(67)씨가 들려줬다.# 누가 손돌을 죽였나지난 15일 손돌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화도에서 전 덕신고 교감 김경준씨를 만났다. 1987년 강화읍에 있는 덕신고에 부임하면서 강화와 인연을 맺은 김씨는 현재 '강화 향토사 박사'로 통하고 있다.김씨는 손돌 이야기에 앞서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손돌의 묘가 있는 김포시 덕포진으로 안내했다.손돌 묘지 앞 안내판에는 손돌 전설이 담겨 있었다. 안내판은 손돌을 죽인 왕을 '고려 고종'이라고 했다.손돌 전설은 몽골(원나라)이 침략했을 때 고려 고종이 1232년 강화로 천도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김씨는 덕포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강화 광성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광성보 안내판에는 손돌을 죽인 왕이 '조선 인조'라고 나와 있었다. 1627년 후금의 조선 침략 당시 인조가 강화로 몸을 피했을 때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두 곳을 보여준 김씨는 본격적으로 손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손돌을 죽인 왕은 누구인가. 손돌을 죽인 왕에 대해 강화문화원의 '강도(江都)의 민담과 전설'은 조선 인조, '김포군지'는 고려 고종, '여지도서'는 고려 공민왕으로 전한다. 그러나 저마다 특정 시기라고 자신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전설이란 것이 원래 있음직한 일을 전하는 건데, 거짓말이라도 서로 입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강화군과 김포시가 각각 다르게 해놓은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꼭 보여주고 싶었어. '고려의 어느 왕' 또는 '조선의 어느 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어."김씨는 손돌 이야기가 강화가 갖고 있는 수난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화도는 국난 극복의 역사를 갖고 있어. 강화는 고려·조선의 피난처로,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많은 왕과 왕족이 이 땅을 밟았을 텐데, 아마 그 와중에 어떤 왕과 손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강화도의 지리적·역사적 배경과 함께 극적으로 재구성했겠지. 백성들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 왕에게 목숨까지 바쳤고, 그게 바로 손돌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바다의 신' 임경업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인천의 서해안 풍어제는 황해도 지방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경업 전설의 배경이 되는 연평도가 인천 내륙보다는 황해도와 더 가까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서해안풍어제' 보유자인 김금화 선생도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서해안풍어제 보존회 사무실은 인천시 남구 주안동 경원초등학교 맞은편의 한 상가 건물에 있다. 지난 12일 이곳에서 서해안풍어제 이수자인 김혜경씨를 만났다. 김씨는 이른바 '무당'이다. 20여년 전 '신내림'을 받고, '장군님(임경업)'을 모시고 있단다.김씨는 서해안 풍어제 '전성기'인 1990년대 초반을 떠올렸다."풍어제를 열면 임경업 장군님 깃발을 제일 앞에 내세우고 집집마다 돌며 만선과 안전을 기원했어요. 조기잡는 법을 알려준 임경업 장군과 인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그렇게 집을 돌고 사당으로 들어가 깃발을 매달려고 하면 선주들이 서로 자기 깃발을 임 장군님 깃발 가까이 매달려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죠.당시만 해도 연안부두, 소래, 덕적도에서 선주들이 돈을 모아 풍어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배도 많이 줄었고 종교적인 문제도 얽혀 있어 많이 쇠퇴했어요."서해안풍어제 보존회가 매년 6월 연안부두에서 주최하는 '배연신굿'은 올해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배연신굿'은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하는 풍어제인데, 올해는 보존회가 배를 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커 주로 바지선을 이용하는데, 안전상의 이유로 해경 등 관련기관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김씨가 말하는 인천 바다는 '기가 센 바다'다.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숨진 수병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 한다."3년 전 천안함 사태가 터지고 수십명의 장병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을 때 혼을 달래 주려고 '진혼제'를 열려고 했는데, 실제로 하진 못했어요.이제는 고기잡는 배만 다니는 것이 아니니까 임경업 장군의 역할도 조금 달라졌다고 보여요. 요즘 연평도 등 서해 섬이 안보 문제로 시끄럽지만, 연평도에 모셔진 임 장군님이 잘 지켜주실 거라 믿습니다."# 낙섬과 함께 사라진 인천사람들의 바다지난 14일 중구 신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인천 출신 시인 김윤식씨. 그는 "낙섬이 사라지면서 바다에 대한 시민들의 정서도 사라졌다"고 했다.김씨가 기억하고 있는 낙섬은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섬이 아닌 '놀이터'였다.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낙섬 옆으로는 염전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었다.이곳이 학생들의 수영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낙섬 제사는 조선시대 후기 폐지됐다. 일제가 없앴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내려올 뿐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지금 인천사람들은 바다를 가까이 접할 수 없었지만, 그때는 낙섬으로 가는 축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곤 했지. 지금은 인천이 바다도시인데도 배가 어떻게 들어오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낙섬이 갖고 있는 전설 외에도 손돌 사공이나 임경업 장군 전설은 모두 전쟁과 연관이 있다. 김씨는 인천이 '한반도의 배꼽'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한반도 모습이 호랑이든 토끼든, 인천은 배꼽에 위치해 있어. 서울이나 평양, 개성이랑 그렇게 멀지 않았단 말이야. 지리적 요충지다 보니까 이윤생 이야기처럼 군사적으로도 인천이 외침을 당하기 쉬운 지역이었던 것 같아. 또 각종 전설들이 조선시대 이후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해양술이 발달하면서 이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김씨는 지금의 인천 바다가 철책과 항만시설로 가로막혀 있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시민들이 바다를 가까이 접하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다와 관련된 옛 이야기도 같이 잊힐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군산이나 다른 지역은 바다가 삶에 들어와 있는데, 지금 인천사람들은 바다와 별개야. 지역정서에 바다가 들어와 있지 않은 것 같아. 바다는 경제적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있잖아. 어린 학생들이 바다를 보면서 꿈을 키우는 것, 그게 바로 교실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인천을 제대로 배우는 것 아니겠어."글 = 김민재기자

2013-04-17 김민재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⑧ 포구와 어시장

화수·만석부두·북성포구 등과 함께종합어시장 형성된 연안부두 '북적'수도권 최대 소래포구는 '향수' 간직활기 여전해도 만선의 풍요 흔적없어포구로 들어선 배·늘어선 좌판사이관광객·구경꾼들 포구의 풍경 만끽어획량 줄어 어민들 한숨소리 뒤섞여지난 8일 오후 소래포구를 찾아갔다. 초기 정착민 몇 명이 아직도 거주하고 있다는, 만수동 치안센터 부근의 낡은 단층집 골목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조두영(90)씨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뱃일을 했다. 한국전쟁 때 부인 민금실(86)씨와 함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인천 연평도, 충남 원산도, 인천 덕적도를 거쳐 1960년대에 소래에 정착했다.당시만 해도 소래에는 배가 드나들지 않았다. 피란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배를 부리고 고기를 잡으면서 포구가 형성됐다. 어선 수는 7척이었다. 포구를 나선 배가 돌아올 때는 늘 만선이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배를 팔았지만 소래를 떠나지 않았다."예전에 같이 뱃일하던 사람들은 다 죽고 나만 남았어. 예전에는 배가 나갈 때마다 한가득 싣고 돌아왔어. 배가 작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고기가 많이 잡혔어. 새우가 많았어. 예전에는 나무배를 타기도 했고, 조금 돈을 벌어 배에 기계를 달고 다녔어.처음에 빚을 내서 일을 시작해서, 그 빚 갚고 또 배를 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어. 지금은 이곳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야.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니까."조씨가 뱃일을 그만둔 지 20여년이 흘렀다. 현재도 소래포구는 포구의 활기를 가지고 있지만, 이곳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어민들은 조씨가 활동했던 시기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소래포구 어시장 뒤편, 어선들이 정박하는 물양장은 활기로 넘쳤다. 조업을 마친 배들은 포구로 들어섰고, 어민들은 그날 잡은 고기들을 뭍으로 내려놓았다. 어민들이 고기들을 분류하다 남은 찌꺼기들을 바다에 흩뿌릴 때마다 갈매기떼가 모여들었다. 인근에는 상인들의 좌판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손님을 부르고,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거리에 넘쳤다.새우, 주꾸미, 광어, 가자미 등의 어획물은 육지로 내려져 플라스틱 상자에 담겼다. "비켜요! 비켜요!" 어민들은 관광객 사이로 어획물이 담긴 손수레를 수십 미터 떨어져 있는 인천수협소래공판장으로 옮기는 일에 분주했다. 공판장에서는 경매가 한창이었다. 무게를 재고 '물건'의 상태를 확인한 뒤, 자신들만의 수신호로 거래가 이뤄졌다. 이게 신기한 듯 바라보는 구경꾼들도 많았다.활기찬 어시장 뒤편에는 어민들의 한숨이 섞여 있었다. 어획량 감소 때문이다. 어민들은 "지금이 주꾸미 철이기는 하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절반이 채 안 되는 것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소래포구 방문객 수는 연간 1천만명으로 추산된다. 이곳에는 싱싱한 수산물을 사려는 이들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다. '포구의 정취', '협궤열차의 추억'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소래는 협궤열차 수인선의 주요 정거장이었다. 일제는 당시 이곳 노동자의 값싼 노동력과 갯벌을 이용해 천일염을 생산했고,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천일염과 쌀, 광물자원이 수인선을 통해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됐다. 소래는 일제의 수탈 기지로 활용됐지만, 현재와 같이 어민들로 활기가 넘치는 포구의 모습은 아니었다.연안부두의 인천종합어시장은 생업을 영위하기 위한 이들이 많이 찾는 대표 어시장이다.인천종합어시장의 하루는 오전 4시30분께 시작된다. 전국 각지에서 잡힌 수산물이 이 시간에 시장으로 들어온다.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의 상인들이 이곳을 찾아 수산물을 고르는 일이 새벽부터 이뤄진다. 전통시장 소매업을 운영하는 상인, 학교급식이나 회사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납품업자 등의 발걸음이 이어진다.오전 7시께에는 일식집 등을 운영하는 이들이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일반 소비자들이 어시장을 찾는 것은 오전 10시가 지나서다. 이렇게 매일 이들은 어시장에서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의 가게에서 사용할 식재료를 구한다.인천종합어시장이 지금의 모습을 이루기까지는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1900년대 초 배가 드나들었던 신포동 어귀에 만들어졌던 어시장은 그곳이 매립되면서 북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70년대 연안부두 일대가 매립되면서 어시장 상인들이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됐다.어시장에서 만난 김지희(42·여)씨는 "인천에 이런 어시장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너무 좋은 일이다"며 "수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과는 다른 인천만의 특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아한다"고 했다.■지자체들 '소규모 포구' 활성화 노력 이어져기능 쇠퇴속 '생생한 어민의 삶' 명맥 유지소래포구와 인천종합어시장을 제외한 인천의 나머지 포구는 그 기능이 쇠퇴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해당 기초자치단체들은 포구 재정비 사업을 벌여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동구청은 예산을 들여 지난해 만석부두에 수산물직매장을, 화수부두에 수산물유통물류센터를 건립했다. 과거 어선들이 드나들며 주민들에게 싼 가격에 수산물을 공급했던 기능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구는 화수부두 인근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을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만석부두에도 어민과 낚시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물을 설치할 예정이다.동구청 배영일 해양수산팀장은 "기능이 많이 쇠퇴하긴 했지만, 만석·화수부두를 기억하고 찾는 분들이 많이 있다"며 "소래포구보다 규모는 작지만, 만석·화수부두도 수산물을 판매하고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인천시 중구 북성동에 위치한 북성포구 역시 과거보다 침체돼 있다.'똥마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북성포구는 1970년대까지 화수·만석부두와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포구로 꼽혔다. 수십여 척의 배들이 드나들었던 이곳은 이제 10여 척의 배만 남았다. 아직도 과거를 추억하며 싱싱한 수산물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화려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중구청은 인천시와 함께 북성포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인천발전연구원 김용하 선임연구위원은 "인천은 바다를 매립해 항만·공장부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포구의 기능이 쇠퇴했다"면서도 "작은 배가 드나들며 어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포구가 수도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글 = 정운기자

2013-04-10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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