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1]지명의 변천사와 의미

인천을 글자풀이 해서 '어진내'라고 부르는 것은 안된다. 현재 인천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 1413년 인천으로 정해지고 600년을 왔다는 것, 그 이름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인천'이란 지명을 처음 얻은 지 올해가 600년째다. '얻었다'는 표현을 쓴 건, 이 명칭이 왕(중앙)으로부터 내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인천뿐 아니라 조선 반도에서 50여곳이 새 지명을 받았다. 인천보다 역사가 긴 지명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행정구역으로 인천 지명이 처음 생긴 뒤 강산이 여러 번 바뀌고 행정구역 범위도 변화했다. 조선시대 인천이란 말이 처음 생겼을 때, 현재의 인천 관할구역 안에는 부평도호부가 있었고 그 아래 강화도호부, 인천군, 교동현 등이 속했다.행정구역상 '격' 시대따라 오름과 내림 역사 되풀이고려 인천이씨 이허겸이 외척세도 얻어 잇따라 승격仁은 왕실 관련 川은 지리적 명명… 기원은 '미추홀'조선 태종때 전국 50여곳과 함께 '仁州→仁川' 개명인천이란 지명과 함께 '인천사람'이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으로 묶인 영역 안에 거주하는 이들이 600년을 이어온 것이다. 600년 이전에도 현재의 인천땅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미추홀에서 인천까지지난 4일 오후 인천시 역사자료관을 찾아가 인천 지명의 변화 과정을 알아봤다. 먼저 인천의 '仁'과 '川'이 처음 어떻게 나왔을까.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인 강덕우 박사와 강옥엽 박사의 설명을 종합하면 '仁'은 고려 때 왕실과 관련된 사람으로부터, '川'은 조선 때 지리적 특징에서 명명된 이름이라는 것이 인천시사 기록이다.인천의 기원은 백제 건국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주몽의 아들 비류가 미추홀(彌鄒忽)국을 세웠는데, 그 위치가 문학산 주변이라는 설이 있다.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인천시사에서는 미추홀을 인천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인천은 매소홀로 불리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매소홀은 소성현(邵城縣)으로 명명됐고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다.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소성현'은 수주(樹州·옛 부평)에 속했다. 이어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인주(仁州), 공양왕 때 경원부(慶源府)란 이름으로 계속 승격된다. 인천이씨(경원이씨, 인주이씨로도 부름)의 중시조 이허겸이 외척 세도를 얻게 되면서였다.현재 인천 연수솔밭마을아파트 동남측 경원대로 건너편에 있는 원인재가 이허겸의 재실이다. 이허겸의 손녀 3명이 고려 8대 현종의 아내(妃)가 됐고, 덕종(9대)과 정종(10대)에 이어 문종(11대)이 인천이씨를 외가로 뒀다.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에게 보냈다.이 중 인예태후는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을 낳았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16대 예종, 17대 인종의 왕비로 보냈지만 훗날 반란(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다 곧 진압됐고, 인천이씨는 몰락했다.조선 태조 때 경원부는 인주로 강등됐다가 태종 때 인천군(仁川郡)이 됐다. 역사자료관 강덕우 박사는 "조선 반도에 주(州)자를 가진 군현 50여곳이 산(山) 또는 천(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천은 물이 많아 천(川)이 붙었다고들 하는데 정확한 개명 이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이어 세조 때 인천도호부로 승격했다. 이후 숙종과 순조 때 각각 인천현으로 강등됐다가 10년 만에 인천도호부로 다시 승격되는 일이 반복됐다. 근대 개항 이후 1896년 도제가 실시되면서 인천은 경기도에 편입됐다. 인천부는 8·15 해방 뒤에는 인천시로 불렸고, 1981년에 직할시로 승격해 경기도와 분리됐고, 1995년 광역시로 개편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인천 지명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강화, 옹진, 부평이다. 각 군·구청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강화군은 상고시대 갑비고차로 시작돼 혈구군, 해구군을 거쳐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군으로 승격됐다. 옹진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옹진현으로 이름 지어졌다.부평은 주부토군(고구려), 장제군(통일신라), 수주·안남도호부(고려)를 거쳐 1413년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가 됐다. 강화와 옹진은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부평은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됐다.# '인천' 변천 과정의 의미인천 지명은 담고 있는 뜻이 역사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지명학, 역사학, 국문학, 역사지리학, 국어학 전문가들에게 인천 지명 변천 과정의 의미를 물었다.한국지명학회장을 맡고 있는 전남대 손희하(국문과) 교수는 삼국시대 때 인천의 지명인 미추홀, 매소홀에서 '미'와 '매'는 물을 뜻하는 옛말이었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서해안 물때를 셀 때 아래쪽은 한물, 두물 이러는데 인천 쪽으로 가면 한매, 두매로 나간다.고구려 말로 '홀'은 성(城)을 뜻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보면 주로 옴팍진 데 산다. 능선 위에는 살지 않는다. 산을 배경으로 약간 터가 있고, 둘레가 있는 골짜기 안이란 뜻에서 매소홀이란 이름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인천 지명의 행정구역상 격(格)은 시대에 따라 오르고 내림을 반복했다. 고려 때 인천이씨의 득세로 경원부(현재의 광역시 개념)까지 올랐다가 조선 이후에는 인주, 인천군으로 강등됐다. 인천역사자료관 강옥엽 박사는 "지방 세력과 왕실과의 연관성에 따라 등급을 매겼던 고려 때와 달리 조선은 호구(戶口)와 논·밭의 생산량에 따라 물리는 전결(田結)의 규모로 행정구역의 격을 정했다. 또 해당 지역에서 반란이 있을 경우 강등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인하대 최원식(국문과) 교수는 바다가 열렸을 때의 인천과 닫혔을 때의 인천의 위상이 달랐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려 왕건은 해상세력이었다. 고려는 친해양적, 개방적인 나라였고, 개경 해상세력 왕씨를 지탱한 게 인천 해상세력 인주이씨(인천이씨)였다.인천은 한반도 서해 연안을 거쳐 중국 산둥반도까지 가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 조선왕조는 내륙국가로 바다를 다 막았다. 조세에 기반을 둔 농업국가였다. 이때 인천은 부평의 속주였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도 인천은 바다로 활발하게 교류가 있을 때는 뜨고, 바다가 죽을 때는 지는 지역이었다."인천대 김병욱(국문과·인천시 시사편찬위원) 명예교수는 "인천은 글자 뜻대로 하면 어진것(仁)과도 크게 연관성이 없고 내(川)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글자풀이를 해서 '어진내'라고 부르는 것은 안된다. 현재 인천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김 교수는 "내 이름이 아무개다 그것이 중요하지 이름의 뜻을 강조하진 않는다"며 "1413년 인천으로 정해지고 600년까지 왔다는 것, 그 이름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고 기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글/김명래·김민재기자

2013-01-10 김명래

역사가 도시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도시는, 삶이 되었다

'우리나라 중서부, 황해에 접하여 있는 광역시. 서울의 외항(外港)으로, 해산물·흑연·금속·기계류를 수출한다. 목재·섬유 등을 수입하며,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명승지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 해수욕장이 유명하다. 면적은 997.12㎢'.국립국어원 홈페이지 표준국어대사전은 '인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서울의 외항'이라니, '인천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구기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또 송도 해수욕장이 명승지라고 했는데, 송도 해수욕장은 2011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이 곳은 1950~1970년대 여름나기 풍경을 떠올릴 때 등장하는 추억의 장소다. 인천 면적은 지난해 1월 기준으로 1천32.41㎢에 이르고 있다. 해산물, 흑연, 목재, 섬유는 인천의 수출입 품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용어나 개념 설명과 관련해 우리나라 대표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국어원의 '2013년 인천'에 대한 설명이 실제 모습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2013년은 '인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지 600년이 되는 해다. 인천항 개항 130주년이기도 하다.그 이전에도 '인천'이란 공간은 있었지만 지명이 만들어진 후 6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천'은 많이 변했다. 서울(중앙정부)의 위성도시에서 '광역시'로, 하늘과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문도시'로 성장했다.1883년, 외세에 의한 강제적 개항으로 근대도시가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세계로 나가고자 '제2의 개항'을 꿈꾸고 있는 곳이 인천이다. 인천국제공항, 인천경제자유구역 등이 '제2의 개항'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 내용처럼 '인천'을 잘못 소개한 곳이 많을 듯하다. 우리가 '인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지금의 인천 일대는 비류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미추홀'(彌鄒忽)이라고 불렀다. 이후 매소홀(買召忽), 소성(邵城), 경원(慶源), 인주(仁州) 등을 거쳐 인천(仁川)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삼국사기를 보면,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온조 집단이 미추홀(비류)을 비하하려고 만든 논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지를 정한 것은 소금과 해산물을 얻을 수 있고, 해양 교역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이 과거부터 '해양 교역도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김창수 박사는 인천의 도시적 성격 변화를 시기별로 정리했다.근대 이전은 '한양의 목구멍', 개항 이후는 '국제적 항구도시', 1920~1935년 '쌀의 도시', 1936~1945년 '무기의 도시', 1970년대 '공단도시', 1990년대 '국제항구도시', 2000년 이후는 '동북아 허브도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인천항 개항은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개항으로 인해 근대도시가 형성됐다. 인하대 최원식(국문과) 교수는 "인천이 근대도시의 위대한 실험실이 됐다"고까지 표현한다.항만시설 등을 확보하기 위해 공유수면 매립이 시작됐고,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생겼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천이 서울과 동반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천의 상권과 유동인구를 서울에 빼앗기는 이른바 '빨대효과'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인천에 들어선 공업단지들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선도했다. 하지만 지금 공단의 모습은 처량하다. 도시공간 팽창으로 주변에 주거지역이 생겨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산업구조를 고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더 크다. 이런 것들이 인천의 현재 모습이다.2013년, 창간 53주년을 맞은 경인일보는 연중기획 주제를 '이름 600·개항 130, 인천을 본다'로 정했다. '600년 만에 쓰는 새로운 인천 이야기'를 하려 한다.지금의 인천 모습을 총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본격적으로 인천을 이야기하기 전, 2차례에 걸쳐 인천지명과 도시공간의 변화를 먼저 설명한 뒤 '인천', '인천시민', '인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매주 갖게 될 것이다.경인일보의 야심찬 특별기획 '이름 600·개항 130, 인천을 본다'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목동훈기자

2013-01-10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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