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19] 박세림 제자 '청람' 전도진

"인천은 스스로 대한 민국 서예계를 이근 거목을 버린 것입니다. 역사가 판단할 것이며 후세가 비웃을 일입니다."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사진)은 "스승의 서예 삶이 고향 인천으로부터 버림받고 대전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이 터져 몇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절이 지나고 사람이 잊혀진다지만 역사를 버려서는 안된다"면서 "선생님의 일생은 인천의 역사인 동시에 인천 서예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청람이 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동정 박세림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청람은 고등학교 다닐 무렵 동정과 처음 만났다. "중구 관동,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동정서숙이 있었어요. 무작정 붓글씨를 배우겠다고 이곳을 찾았고 당시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습니다." 그는 또 "선생님은 185cm의 장신에 몸무게도 90kg이 넘는 거구였다"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상 예를 중시하고 노력하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덧붙였다. 청람은 늘 동정과 함께 했다. 여름철 산사를 찾을 때는 묵동(墨童)으로 함께했고 동정이 마지막 예술혼을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을 때도 함깨 했다. 그러기에 스승의 자취는 청람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예술세계의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람은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스승의 서계가 대전으로 옮겨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유품이 지역에서 버림받은 채 종적을 감췄다"면서 "문화·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지역이라면 오히려 대접받는 곳에 스승의 자취를 남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2009-02-25 김장훈

[인천인물 100人·23]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할아버지 업적·행적 자료 6·25전쟁때 소실… 아쉬움" "남긴 글이 없고 집에 보관중이던 자료도 6·25전쟁으로 소실돼 할아버지의 업적과 행적을 탐구할 수 없다는게 후손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의 장증손녀로 현재 인천내리교회 집사이기도 한 김민자(46)씨와 남편 김제준(47) 권사는 요즘 증조 할아버지의 자료 발굴에 열정을 쏟고 있다. 김기범 목사는 아내 박루시 여사와 사이에 7남매를 뒀다. 그러나 2명의 딸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혼란한 시기 월북했고 나머지 자손들 역시 생업에 몰두하다 보니 선친의 업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김씨 부부는 "증조할아버지께선 당시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미국에 유학보낼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들은 이어 "교회사와 한국기독교 연구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집안에 보관중이던 자료는 인천내리교회에 모두 기증했다"며 "선친에 관한 후손들의 고증과 기억을 사료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美유학 이대 총장서리 역임… 숨겨진 근·현대교육의 '거두' 김기범의 2남5녀 중 막내딸인 김애마(1903~1996년·사진)는 김활란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한국 근·현대 교육의 거두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김애마는 선친이 설립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이화학당(현 이화여대 전신)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화보육학교 교원으로 4년간 근무하다 193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에반스턴 내셔널교육대학에서 아동교육을 전공한 뒤 귀국해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39년 보육학교 학감으로 이화학원의 행정을 총괄하던 그녀는 1945년 8·15 광복 후 종합여자대학으로 승격한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을 대신해 총장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엄격한 성품에 평생 독신으로 교육에만 매진했던 그녀의 공적을 기려 제자들은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03년 '애마선생님 이야기'란 일대기를 펴냈다. 여기에 더해 이화여대는 최근 신축한 건물에 '애마홀'과 '애마기념관'을 마련키로 했다.

2009-02-25 윤관옥

[인천인물 100人·21] 이경성 수양아들 김달진 소장

"여성잡지에 실린 미술자료를 모아 관장님께 보여드렸죠. 저를 보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더라구요." 석남 이경성이 수양아들이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는 김달진(50·김달진미술연구소장)씨. 그는 1977년 석남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석남은 홍익대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었고, 김 소장은 스물 한살의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우표, 깡통 등 닥치는대로 모으는 수집광이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주부생활', '여원'과 같은 잡지에 실린 명화 한 장씩을 뜯어서 모아 미술자료집을 만들었어요."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복궁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보고 미술자료 수집을 직업으로 삼시로 결힘했다고 했다.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 각급 박물관 관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는데 관장님만이 '홍대 박물관으로 한 번 오라'고 연락해주셨죠. 뛸듯이 기뻤어요." 이 인연으로 석남이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81)에 오르자 그는 미술관 자료실 임시직으로 특채됐다. 지금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더 끈끈한 부자지간이 됐다. 김 소장은 요즘도 일요일 마다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석남이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노인간호센터를 찾는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고, 부인도 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김소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죄송할 따름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관장님이 사람을 더 그리워하시는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2009-02-25 이우성

[인천인물 100人·22] 인천박문초교장 강경수 수녀

인천박문초등학교 복도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교장선생님들의 사진은 개교 105주년을 맞은 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 학교의 설립자 겸 제1대 학교장인 전학준 신부는 이제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학교에 남아있지만 그의 교육이념은 학교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이 학교 교장인 강경수 수녀는 "전학준 신부님은 인천 초등교육의 선구자"였다며 "전 신부님의 투철한 교육적 사명감을 이어받기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교장은 이어 "특기를 계발하고 신장시키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종교교육을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은 박문교육을 차별화 시키며 박문초등학교를 인천초등교육의 선도자로 자리매김해주고 있다"며 이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가톨릭 정신을 토대로 학교를 설립한 분들의 교육이념이 학교 곳곳에 스며있기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강 교장은 이와 함께 "학교 설립 초기에는 박문학교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며 전 신부가 1906년 뮈뗄(제8대 조선교구장)주교에 보낸 편지를 소개했다. '학교에서 나온 돈은 매달 필요한 금액의 3분의 1만을 겨우 충당하고 있고 중요한 사업을 하려면 월 50원이 필요하다'며 지원을 요구하는 전 신부의 편지에서는 박문학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전 신부의 모습이 읽혀졌다. 이 학교는 현재 개교 100년의 역사를 담은 '박문 100년사' 발간을 추진중이다. 이 책은 인천의 은인이었던 전 신부를 새롭게 조명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09-02-25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25] 신순성 선장 손자 용석씨

"제가 4살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아버지와 주변사람들로부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신용석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이 되면서 광제호 군함기를 자신의 침실에 숨겨둔채 일제 36년간을 고히 간직했었다"며 "아버지께서는 이 태그기를 1945년 해방되던 해 한국 기선취항식에서 일장기와 바꿔달라고 요구했었다"고 밝혔다. 신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 뒤에도 광제호를 잊지 못해 1917년 서울에서 지내던 가족들을 이끌고 광제호의 모항인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며 아버지와 자신이 인천사랑에 남다른 배경을 설명했다."의사로 명성을 얻었던 아버지께서 나중에는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향토사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이와함께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는 등 많은 일들을 이루셨다"고 밝혔다. 신태범 박사의 5남중 장남인 신씨는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강요없이 자유스럽게 자식들의 뜻에 맡기는 교육을 시켰다"며 할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자율적인 교육을 시켰던 가풍이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토박이답게 신씨는 아버지에 이어 현재 지인들과 함께 인천의 향토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등 인천사랑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신씨는 현재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사회부장, 논설위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9-02-24 경인일보

[인천인물 100人·끝]에필로그

'인천 인물 100인'을 찾아 나선 지 3년이 넘어서야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2년을 예상했는데, 1년이나 더 끈 셈이다.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고 근·현대 시기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100명의 인물을 선정했다. 그러나 100명의 '인천 인물'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강화를 낀 인천은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유물과 역사적 인물을 배출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특히 근·현대 시기의 인물사 연구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공간이나 6·25 전쟁 직후 좌·우 갈등이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탓에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거나 '기념'하려 하지 않았던 풍토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이름 석자나 짧은 인물 설명만을 갖고 무작정 취재에 나서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시리즈 연재 기간이 길어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매주 한 차례씩 싣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다보니 독자들의 불평도 있었다.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인천인물 기사를 모으는데, 기사 게재가 들쭉날쭉해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 괜한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독자에겐 빠뜨렸다는 지난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학생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것이 신문에 실렸는데, 어떤 게 맞냐는 식이었다. 연구자마다 시각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학생에겐 취재원이었던 연구자를 연결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 지역의 반응도 뜨거웠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주는 점에 고맙게 여긴다는 격려와 함께 누구 누구는 인천을 대표할 만한 사람인데 왜 아직 보도하지 않느냐는 식의 '제보성' 얘기도 있었다. 일반 독자 중엔 "그렇게 훌륭한 분이 인천에서 활동했는지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이런 저런 반응은 취재기자들에겐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독자에게 알려야겠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지역의 몇몇 '향토사' 연구자들이 3년이 넘는 이 '대장정'에 함께 하며 큰 힘이 됐다. 또한 '인천 인물' 기사는 지역 연구자들에게 풀어야 할 '숙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친일전력을 가진 인물이나, 건국 이후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사람, 자진 월북한 인사들을 '꼭 인천 인물에 포함시켜야 하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직도 서로에게 쌓인 게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인물' 시리즈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나 기록을 찾아 낸 일도 여럿 있었다. 특히 2006년 2월 16일자에 보도된 '우문국 화백' 취재에서 시작된 '실미도 난동자와의 동승기' 최초 공개는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할 수 있다.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 현장에 있던 우문국 화백이 당국의 발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적은 기록이 경인일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서른의 나이에 월북해 북한 미술계를 이끈 조각가 조규봉을 다루면서는 '인천이 낳았으나 인천이 잊어버린 비운의 예술혼'이라고 얘기(2006년 4월 6일자 14면 보도)했는데, 조규봉은 정작 북쪽에서도 잊혀진 존재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올 봄 취재 차 평양을 방문한 길에 북측 안내원에게 조규봉에 대해 물으니, 도무지 모르는 인물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북쪽 땅 대부분의 김일성 동상을 제작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지금에 와서 까맣게 잊혀진 이유를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되돌아 보면 부끄러운 구석이 많다. "가장 역동적인 인천시대를 열었지만 잊혀지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천 인물'을 온전히 찾아 새 역사의 씨줄과 날줄로 삼으려 한다"는 애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에서다. 시작은 거창했지만 그 알맹이를 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인 것이다. 3년을 넘게 진행해 온 이 시리즈가 '인천 역사 찾기'란 긴 여정에 작은 계단 하나를 올렸다고 여긴다면 지나친 위안일까.

2007-12-25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101]동양제철화학 창업자 송암 이회림

"사업가는 모름지기 덕장(德將)이 되어야 한다. 지략이 좀 모자라고 용맹성이 뒤떨어지더라도 직원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키워 주는 아량이 없으면 기업은 흥하지 못하는 법이다. '기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조종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창의성 있는 인재가 없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화학 이회림 명예회장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中) 기업인이 존경받기 힘든 세상이다. 기업이 경제의 원동력이자 고용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비자금과 분식회계, 편법 증여 등 여전히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은 기업의 순기능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월18일 한 원로기업인이 타계했을 때 사정은 달랐다. 후배 경영인들은 물론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들까지 고인을 기리며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고인은 동양제철화학의 창업자인 송암(松巖) 이회림 명예회장. 향년 90세였다. 당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한 신문에 기고한 추도사를 통해 "비록 고인은 멀리 떠났지만 선생의 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케 하고 나아가 장래에 분단 철조망이 끊어지는 날 통일과 번영의 터전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서 어떤 이는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를 그의 호를 따 '송암대로'(松巖大路)로 명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그를 각인시킨걸까. 그리고 개성 출신인 그가 인천과 맺은 인연은…. #마지막 개성상인 송암은 1917년 개성시 만월동에서 태어났다. 13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한 그는 14세에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용과 근면성실,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1937년 건복상회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업가로서의 여정에 뛰어들었다. 송암의 비누 사용 습관은 그의 검소한 생활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비싼' 비누는 손 씻을 때나 머리 감을 때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송암은 "남자는 웅지와 포부를 가지고 일을 펴 나갈 수 있는 기백이 있어야 하며, 사치나 교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송암은 1950년대 들어 국내에서 수출실적이 1, 2위를 다툴 정도로 규모가 컸던 개풍상사를 설립·운영했고 1955년 대한탄광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56년에 대한양회를 설립한 데 이어 1956년에는 고(故)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등과 함께 서울은행을 창립하면서 우리나라에 산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에는 국가기간산업인 화학산업에 눈을 돌렸는데 이것이 인천과 끈끈한 인연을 맺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천과의 끈끈한 인연 송암은 인천시 남구 학익동 앞의 바다를 매립하고 264만㎡의 공단부지를 조성, 1968년에 소다회 공장을 지었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는 화학산업을 국내 최초로 개척한 것이다. 당시 심한 간만의 차에서 오는 조류로 공사 진척이 더딘데다 매년 찾아오는 폭우와 태풍으로 쌓았던 제방은 유실되기 일쑤였다. 결국 3년여의 갖은 고생 끝에 2천200의 제방공사를 마무리했고 현재 이 제방은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로 인천의 중요한 산업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 도로를 '송암대로'로 명명하자는 제안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용정 전 동양화학 그룹 (주)유니드 회장은 '동양화학… 그 인고(忍苦)의 발자취'란 글을 통해 "이 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 때 한 개인 기업가가 국가 보조도 없이 이런 거창한 매립공사를 결심하고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노력의 결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실로 몇 안된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송암은 40여년간 오로지 화학산업 분야에만 매진했으며 그 결과 동양제철화학을 무기화학, 정밀화학, 석유석탄화학 분야에서 카본블랙, 핏치, 과산화수소, 과탄산소다, 소다회, TDI 등 40여종의 다양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석탑산업훈장(1971년), 산업포장(1977년), 은탑산업훈장(1979년), 금탑산업훈장(1986년)에다 세차례에 걸친 대통령 표창은 한 우물을 판 기업가로서 산업발전을 이끈 그의 발자취를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또 한국과 프랑스간 경제외교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1986년과 1991년에 각각 기사작위와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시절의 추억 송암은 경제발전 1세대로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사,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이사, 중앙노동위원회 위원, 한국중견기업연합회 고문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다. 이 중 인천상의 회장 시절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지 자서전에 상당부분을 할애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1981년 인천상의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상근부회장제를 도입, 실무를 관장하게 하는 등 조직개편을 단행했는가 하면 상공회의소까지 찾아올 시간이 없는 영세상인들을 위해 순회 세무상담 및 기장(記帳)지도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차량을 이용한 순회 세무상담 등은 우리나라에서 인천상의가 처음 실시한 사업으로 기록된다. 그는 또 인천상의 회장 당시 기능올림픽 선수들 중 교도소 재소자 선수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그들을 불러 회식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습관적으로 밥을 빨리 먹는 선수들을 보면서 "야, 이 녀석들아! 밥은 천천히 먹고 반찬을 많이 먹어라. 거기 들어가면 이런 반찬 못 먹잖아? 밥은 영양이 적고 반찬에 영양가가 많으니 반찬부터 먹어!"하고 야단(?)을 친 기억을 자서전에 남겨두었다. 1992년 남동공단에 인천상의 회관이 준공될 때는 '이 회관이 건립되기까지 제10·11대 회장을 역임하신 이회림 상임고문께서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였으므로 이를 기리는 전 인천 상공인의 고마운 뜻을 이 돌에 새겨 두다'라는 내용으로 회원들이 기념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장학사업 및 문화예술에도 남다른 관심 보여 송암은 1958년 대한탄광시절 송암장학회를 설립해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이후 사재를 털어 회림장학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1979년에는 재단법인 회림육영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이외에도 학술 문화부문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사업을 펼쳤다. 1982년에는 인천 송도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송도중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인재 배출에 힘썼다. 특히 2005년에는 평생 모은 문화재 8천400여점과 송암미술관 일체를 인천시에 기증, 평소 소신이었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정신을 실천하기도 했다. 송암은 붓을 들면 교훈이 될 만한 글귀를 써서 직원들의 사무실 벽에 걸어주고는 했는데 '부족하거나 지나치지도 않으며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담아 '중용처세'(中庸處世)란 글귀를 자주 썼다고 한다. 모든 이에게 성공한 기업인으로 기억되는 송암도 IMF의 한(恨)은 가슴에 묻어둔 채 하늘로 간 듯 하다. 그는 자서전 말미에 "친형제와도 같은 일부 임직원이 용퇴한 것은 내 살을 베어 낸 것과 같은 아픔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송암의 유족으로는 이수영 동양제철화학 회장과 이복영 삼광유리공업 회장, 이화영 유니드 회장 등 3남3녀가 있다.

2007-12-18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100]영문학자 오화섭

인천 남동면 만수리에서 태어난 영문학자 오화섭(吳華燮·1916~79)은 미국 현대극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해 알린 선구자다. 그가 번역한 미국 번역작품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비롯해 손튼 와일더의 '우리읍내',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리동물원'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지금까지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당시 연극인, 영문학자들은 오화섭의 번역을 두고 '번역을 창작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조선일보 1973년 10월 25일자 5면)를 했다. 1960년대 오화섭과 함께 연극평론계의 '쌍두마차'로 불린 여석기(84)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은 지난 2005년 유영국미술문화재단과 실시한 인터뷰에서 오 교수를 '번역의 1인자'라고 표현했다. "62년에 드라마센터의 2회 공연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라고 있어. 오닐의 맨 마지막 작품. 그건 참 좋은 작품입니다. 그 오화섭씨가 번역을 했는데, 오 선생이 미국의 현대연극을 번역하는 제1인자고, 참 부드럽게 번역을 잘해요." 한상철 한림대학교 교수는 1989년 열린 '오화섭교수 10주기 추모 연세극예술연구회 공연'에 앞서 발표한 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 서민의 일상적인 대화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다…(중략)…무대에서 배우가 그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번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중략)…짤막한 문장 길이, 적절한 어휘의 구사, 다양하고 자연스런 어미의 활용, 우리말의 리듬과 억양을 그대로 살려가는 게 오화섭 교수 번역희곡의 특징이요, 장점이다." 오화섭은 해방 이후부터 극단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을 하며 번역 대본을 무대에 올리는 데 힘썼다. 일본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4살 연상의 첫 번째 부인 박노경(朴魯慶)은 극단 '여인소극장'을 창단(1948년)한 한국 최초의 여류 연출가다. 당시 오화섭은 '吳說'이란 필명으로 번역한 대본을 여인소극장에 제공하고, 연극비용 조달 등 각종 뒷바라지를 도맡았다고 전해진다. 박노경은 1950년 9·28수복 당시 서울 북아현동 집 부근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후 극단 '떼아뜨르 리브르'(1953년), '연희극예술연구회'(1953년), 극단 '산하(山河)' (1963년) 등에서는 창립 작업을 함께 했다.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1963~65년), 한국셰익스피어협회 이사(1963~79년) 등을 지내며 학술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화섭은 음악에 조예가 상당했고, 각종 매체에 음악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래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29년)하고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한 오화섭은 당시 학교 음악선생에게 클라리넷을 처음 배웠고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 유학시절(1935~40년)에는 대학 오케스트라단에서 활동했다. 1946년에는 작곡가 현제명이 주도해 만든 고려교향악단 창단멤버로 활동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오화섭은 1950~60년대 신문에 연주회, 오페라 공연 편을 연재하기도 했다. 오화섭은 옛 경기도 부천군 남동면 만수리(현 인천 만수동) 담배고개 옆 구석마을(구석말)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혁근(吳赫根)은 남동면장, 1대 인천시의회 의원(징계자격위원장)을 지낸 '동네 어른'이었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을 때마다 '오 면장'을 찾았다고 한다. 오혁근은 자녀들을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피란시절 인천에서 잠시 머문 경험이 있는 오화섭의 딸 오혜령(65)씨는 할아버지를 "위엄이 가득하고 강직한 한학자"로 기억했다. 오화섭은 부친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우리 영감(오화섭)은 일본 유학시절 한 달에 2~3번씩 아버님께 문안편지를 보내야 했어요. 집안이 엄격했거든요. 아버님은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을 앞에 앉히고, 빨간줄이 그어진 편지를 보여주셨대요. 아버님은 아들에게 '문장이 이상하다' '단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 '어른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유학시절 문안편지를 쓰는 일이 참 어려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연세대학교에서 오화섭과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 결혼(1958년)한 김형순씨는 이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준 뒤, 오화섭은 평상시에도 우리말 사용에 굉장히 예민했다고 말했다. "집에 와 뉴스 보면서도 앉아서 아나운서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했어요. '낱말의 고저(高低), 장단(長短)이 틀렸다, 발음이 잘못됐다'는 식이었죠. 영감은 대본을 읽을 때 리듬을 중요시했어요. 이 같은 습성이 번역물에 그대로 나타났죠." 1960년 10월 14일 밤. 서울 신촌 연대 교수사택에 오화섭 친동생의 남편으로 한국전쟁 때 월북한, 대남간첩 정연철(鄭演徹)이 찾아오면서 오화섭의 삶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오화섭은 월북 후 10여년 만에 찾아온 매부를 집에 들이지 않고 내쫓았지만, 같은 해 10월 27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은 개정 국가보안법 9조 '불고지죄' 혐의로 구속기소된 첫 사례가 됐다. 오화섭은 "매부를 재워주면 은닉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까지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고 했지만 법원은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신국가보안법 9조에 규정된 불고지죄는 그 입법취지가 엄격한 처벌규정이라고 보기가 어렵고 우리 국민의 풍속상 친척을 재워주는 일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서울고법의 판결을 뒤집고 유죄를 결정했다. 김형순씨는 "이 일을 겪고 영감은 대학을 잠시 떠났고, 시골에 계신 아버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화섭은 여전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버님은 성격이 아주 명랑하시고 의지적이고, 해학이 대단하셨어요. 주변 사람들이 항상 배꼽을 잡고 웃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대학에 다니는 딸과 같이 춤을 추고, 볼에다 입을 맞춰 주셨어요." 오화섭은 위암수술을 한 뒤 숙환으로 고생하다 1979년 5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는 평소 지인들에게 "평론은 아무리 잘해도 비판을 하면 당사자에게 욕을 먹는다. 정년이 지나면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했지만, 정년을 1년 앞두고 생을 마감했다. 오화섭의 번역본은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중에 팔리고 있다. 일부 번역가들은 이 번역본을 그대로 베끼다시피해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오화섭의 번역본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 2003년 영문학관련 한 학회는 "원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한 노력이 엿보이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는 편이지만 일부 오역을 발견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형순씨는 "나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고 운을 뗀 뒤 말을 이었다. "(오화섭은) 음악을 한 분이에요. 우선 배우들이 대사를 칠 때 리듬을 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극 대본에 쓰기 위한 번역을 하셨고, 전체적인 맥락을 중요시했어요. 흐름에 방해가 안 되고, 감동을 주면 그만이었죠. 한 글자씩 떼 보고, 따져보면 틀린 게 있겠죠."

2007-12-11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99]가수 박경원

인천 월미도 문화의거리 한 편에 서 있는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10월 9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50여 년 전 탄생한 이 노래를 이렇게 술회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구름, 푸른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이별의 인천항'(세고천 작사·전오승 작곡)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인천 출신의 가수 박경원(1931.4.3~2007.5.31)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다. 당대 유행했던 곡들을 보면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각산 소식',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피란민들이 잃어버린 가족과 등졌던 고향을 찾는 분위기를 그린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이별의 인천항'도 이들 노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천의 사랑을 그린, 인천인의 노래 '이별의 인천항'이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이 노래는 23세의 가수 박경원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박경원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부유한 집이었단다.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박경원은 넉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시대 통념상 선친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박경원의 막내 동생 광원(64)씨는 "당시 예능인들을 딴따라라고 푸대접할 때였으니, 고지식하셨던 아버지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형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어요. 어머니가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거나 한 건 아닌데, 형님이 큰 아들이었고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몰래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아마도 당시 레코드라고 부르던 녹음기가 있었던 집은 인천에서 우리집이 유일할 거예요." 박경원을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어머니란 게 동생 광원씨의 얘기다. 또 고교시절 박경원을 곁에서 지켜본 이관섭(74) 인천실버그린악단 부단장은 "40년대 후반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2년 선배였던 박경원씨는 학교 다닐때 부터 노래 연습을 했었고, 인천상업밴드와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면서 "전국 콩쿠르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는 등 그때부터 가수로서의 끼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학창시절 함께 노래를 부른 이가 '눈물의 구포다리'로 유명한 원로가수 이갑돈씨였다"고 회상했다. 박경원은 인천상업학교 시절 출전한 전국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작곡가 전오승(83·현재 미국 LA거주)의 눈에 띄게 된다. 전오승은 1953년 자신의 곡 '비애블루스'를 박경원에게 부르게 했고, 이를 통해 박경원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김점도(74)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인천실버그린악단 단장)은 "박경원씨와 전오승씨는 가수와 작곡자를 넘어서 인간적으로도 친해져 전씨가 인천을 자주 찾게 됐다"면서 "북한 진남포가 고향인 전오승씨는 인천 바다를 볼 때마다 고향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이별의 인천항' 탄생 비화를 들려줬다. "54년 어느 날 두 사람은 월미도 앞 작약도에 바람을 쐬러 갔다고 해요. 그곳에서 박씨가 ''목포의 눈물'에 필적할 만한 인천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전씨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고, 이를 통해 그 해 '이별의 인천항'이 탄생하게 됐던 것이지요." 그는 "작사자 세고천은 전오승의 필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별의 인천항'은 전오승 작사·작곡인 것이다. 작사했다는 '세고천'이 누구일까 했던 궁금증이 여기서 풀렸다.드 디어 인천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가 탄생했다. 각 지역을 대표한다고 할 '서울의 찬가', '목포의 눈물', '돌아와요 부산항', '서산 갯마을'에 견줄만한 이 노래는 누구나 인천의 한 시대를 읊을 수 있도록 쉬운 가사와 멜로디로 만들어져 전국민에 의해 불렸다. 박경원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은 것이다. 한참 후인 1972년 인천문화상(연예 부문)을 그에게 안긴 곡이기도 하다. 박경원의 노래 인생에서 또다른 영화를 준 노래인 '만리포 사랑'(반야월 작사·김교성 작곡)은 57년 발표된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로 시작하는 '만리포 사랑'은 박경원을 당시 국민가수급으로 올려놨다. "'이별의 인천항'과 곧이은 '만리포 사랑'으로 형님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어요. 두 곡과 함께 지금도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인 '남성넘버원'도 57년 발표돼 큰 인기를 누렸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당시 형님의 속내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가정적인 면에선 낙제였던 것 같네요. 이혼 후 조카들은 둘다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동생 광원씨는 "형의 사생활을 정확히 모른다"면서 가정사에 대해 더이상 말하길 꺼렸다. 50년대 후반 잇달아 히트곡을 낸 박경원의 생활은 향후 10년 정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노래가 필요한 곳에선 모든 이들이 박경원을 부르려 했고, 그만큼 수입도 따랐다. 하지만 유행음악의 특성상 10여년이 지나고 새로운 음악 소비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7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신세대들에게 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였을 뿐이다. 70년대 후반 인천연예협회를 이끌었으며 기타리스트로 박경원과 함께 무대에도 섰다는 윤일민(71)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의 나이트클럽으로 보면 되는데, 70년을 전후해 동인천에서 가장 유명했던 '장미회관'은 당대 최고 가수들이 출연했었어요. 박경원 선배도 종종 무대에 섰는데, 내가 회관 밴드의 악장으로서 박 선배의 노래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을 보면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어요. 당시 밴드 악장인 내가 사회도 봤는데, '인천의 명물 가수'로 소개하면 손님들은 의아해 하는 눈빛을 보냈죠. 하지만 과거의 히트곡을 부르면 '아~'하는 인상이었어요. 당시 출연했던 김세라, 김상희, 남진 등의 인기에 비할 수 없었죠." 하지만 박경원의 음악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서울과 인천에서 노래와 관련한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모임은 물론 노래자랑 심사 자리에 참여하는 등 항상 후배들의 활동을 지켜봤다고 한다. 아울러 불우이웃 돕기 무대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인천에서 어떠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 시작 시간보다 몇 시간 일찍 와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치고 나서도 몇 시간 더 머물면서 술 한 잔 기울이면서 그간 못했던 대화를 나눴죠. 고향이어서 각별한 마음을 담고 있었던 같아요." 윤 전 회장은 박경원의 맘에 담아 뒀던 '인천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박경원은 지난 200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 무대에 섰으며 올 초만해도 해외교포위문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당뇨 등 지병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다 결국 지난 5월 31일 숨을 거뒀다. 50여 년 전 당대 지역민의 애환을 노래했으며, 이후에도 노래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박경원은 2000년 한국연예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문광부장관표창을 받았다. 지난 6월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을 빛낸 '출향 문화예술인' 10인에 박경원의 이름을 첫 번째에 올렸다.

2007-12-04 김영준

[인천인물 100人·98] 인천언론史

1960년 대 이래 인천 언론은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과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말살 정책에 인천의 신문사들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일쑤였다. 1960년 대 인천에는 모두 3개 일간 신문사가 있었다. 1946년 발간된 인천 최초의 일간신문인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가 제호를 바꿈)을 비롯해 인천신문(1960년 창간, 현 경인일보), 경인일보(창간 연도 알려진 바 없음, 현 경인일보와 다른 신문) 등이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됐다. 윤전기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시설기준공표를 발표했다. 현 경인일보와 관련 없는 이름의 '경인일보'란 신문사는 이 때 문을 닫게 됐단다. 1966년엔 경기일보란 이름의 신문이 생긴다. 인천신문에서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역임한 김응태씨가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겨 폐간 때까지 편집인을 맡는다. 1969년 인천신문은 존폐 위기에 놓인다. 허합 사장이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허합씨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인천신문은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다. 인천신문은 수원에서 제호를 경기연합신문, 연합신문으로 잇따라 바꾼다. 당시 정권은 1973년 다시 언론말살 정책을 편다. 이름하여 '1도 1사'다. 언론인들은 1973년 8월31일을 '언론 사망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 날 언론통폐합이 강제로 이뤄진다. 김응태씨 등 많은 언론인들이 이 때 붓을 꺾었다. 송수안씨가 경영하던 경기매일신문은 창간 27년 만에, 경기일보는 창간 7년 만에 모두 문을 닫게 된다. 연합신문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등 3개 신문사가 통합된 것이다. 제호는 경기신문이었다. 그러다 1982년 지금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꾼다. 오광철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여러 과정을 거쳤으나 60년 창간한 인천신문은 경인지역 언론의 뿌리이며, 허합은 지금의 경인일보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2007-11-27 김장훈

[인천인물 100人·98]언론인 허합

허합은 인천에서 경인지역 언론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신문(현 경인일보)을 창간했다. 그런데도 현재 인천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지역 원로 언론인들만이 기억할 뿐이다. 지난 2003년 그가 숨졌을 때도 그의 빈소는 인천이 아닌 막내 아들(허종)이 담임목사로 있던 대전 빈들교회에 마련됐다. 지역 신문사들은 대부분 영정사진 한 장 구하지 못한 채 그의 부고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 때, 지역 사회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당시 언론인들이 그를 '죄인' 취급했던 것이다. 권력과의 대립에 의한 '표적 수사' 결과물이란 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결국 허합은 억울함을 벗고 무혐의로 풀려난다. 그뒤 허합은 지역 언론은 물론 인천과도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허합은 1917년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출신 학교에 대해서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천 화양초등학교 졸업 후 경기도에 올라와 중·고교를 마쳤다는 말도 있고, 초·중·고교를 모두 서천에서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친척인 허숙(73·전 인천신문 기자)씨는 허합이 인천에 와서 한염해운에 입사한 뒤 1957년 쯤 퇴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이후 허합은 1959년 '주간인천'을 인수했다. 주간인천에는 '향토 언론계의 거목'이라 일컫는 김응태(당시 편집인)가 있었다. 허합은 김응태를 주간인천의 편집국장에 임명한다. 허합은 중구 사동 창고건물에 편집국과 업무국을 만들고, 1960년 8월15일 인천신문 첫 호(현 경인일보 지령 1호)를 발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인천신문 기자를 지낸 오광철(73)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경인일보가 언론 통폐합 날짜인 9월1일을 창간 기념일로 잡고 있는데, 사실은 첫 신문을 찍은 8월15일로 당겨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인천신문이 문을 연 1960년 대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군사정권의 힘에 눌려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한 신문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야 했다. 군사정권은 1962년 다시 칼을 빼들었다. 기준에 미달하는 신문사 문을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정부가 내건 기준은 윤전기. 당시 대부분 신문사가 윤전기가 아닌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인천신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허합은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말리노니'라는 일제 윤전기를 사왔다. 그리고 이 윤전기로 2개 면 신문을 발행했다. 이후 허합은 말라노니보다 성능이 좋은 대만제 윤전기를 도입해 신문을 만들었다. 허합은 직원들에게 늘 '근검절약'을 강조했다.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선 버릇처럼 "10원을 아껴야 10원을 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중구 중앙동 중앙감리교회(현재 송도동으로 이전)에서 오랜기간 장로로 활동했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한번 술을 입에 댄 적이 있단다. 문선공(활자를 뽑는 사람)들이 임금문제로 신문제작을 거부할 때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편집국에서 경제부 한 기자가 술을 마시다, 'Tis(Thi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양지바른 곳이든 그늘 속이든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란 노래 '대니보이'(Danny boy)의 한구절을 불렀다. 허합은 곧바로 편집국에 뛰어가 "신문사가 어려워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누가 노래를 불렀느냐. 애사심을 가진 기자가 대체 누구냐"며 직원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인재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 허합의 생각이었다. 허합은 '학생이 나라의 기둥'이라고 강조했다. 허합은 지역 신문 중 처음으로 학생백일장을 열었다. 중·고등학생 대상 음악콩쿠르와 무용콩쿠르도 개최했다. 비인기 운동경기 활성화를 위해 신문사 주최로 핸드볼대회도 열었다. 당시 전국 대부분 신문사는 2개 면 신문을 발간했다. 인천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신문은 1면에는 정치·경제, 2면에는 사회 소식을 각각 실었다. 군사정권은 신문을 수시로 검열했다. 반정부 성향 기사는 신문에서 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인천신문도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인천신문이 택한 것은 차별화였다. 타 신문과의 차별을 위해 잘못을 꾸짖는 강한 논조의 기사를 사회면에 실었다고 한다. 허숙씨는 "경기도청이 학생 기성회비 100% 인상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인천신문이 이를 보도하면서 교육정책 잘못을 지적했다"면서 "경기도지사가 며칠 뒤 이 정책을 철회했다"고 말했다. 그런 인천신문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 수하 군인들은 전국 각지 요직을 차지했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합은 특히 유승원 전 국회의원과 사이가 좋지 못한 것으로 지역 언론인들은 기억한다. 한 원로 언론인은 "허합은 김정렬 전 인천시장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유 전 의원과 김 전 시장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고 말했다. 인천신문은 이유없이 거래처를 하나 둘씩 잃기 시작했다. 인쇄를 맡기던 업체들이 인천신문과의 거래에 난색을 보였다. 유승원씨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란 게 일반적 시각이다. 경영이 어려워졌다. 인천신문은 직원들 봉급조차 주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경찰이 신문사 주위를 맴돈 것은 이맘 때 쯤이었다. 사복 경찰이 직원을 만나 허합의 행적을 캐고 다녔다. 일부 기자에겐 무엇인가 적힌 종이를 보이며 "허합의 범죄사실이 담긴 조사서류"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허합은 1969년 1월 사법 당국에 붙들려 갔다. 그에겐 횡령 혐의가 적용됐다. 수재의연금 중 일부를 횡령했다는 것이었다. 사법 당국이 발표한 허합의 횡령액은 당시 돈으로 5천20원. 인천신문 총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3) 전 경인일보 사장은 "쌀 한되 값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허합은 재판부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법 당국은 9년 동안 수재의연금 모금을 하면서 찢어진 지폐와 낡아서 못쓰는 돈을 왜 처리하지 않고 가지고 있느냐며 허합에게 횡령 혐의를 적용했어요. 그런데 담당 판사가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지요. 당시 정권은 허합을 구속하려는 것보다 신문사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임상규 전 사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허합은 풀려났으나 더 이상 인천신문 사장이 아니었다. 인천신문도 제 갈길을 가지 못했다. 지역 사회는 허합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장에 앉히려고 했다고 오광철 전 편집국장은 밝혔다. 결국 인천신문은 인천에서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다. 허합은 몇 해를 인천에 남아 꽃집을 운영하며 교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1975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와 4남3녀 모두가 미국과 일본, 프랑스로 떠났다. 허종 목사도 대전 빈들교회에서 극빈층과 외국인 노동자 등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이다 목회활동을 위해 작년 프랑스 몽벨리에로 떠났다. 허합은 미국 LA의 큰 아들(허강) 집에 살면서 캘리포니아주 운전면허증 시험에 응시·합격하는 등 삶에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허숙씨는 "80년 대 미국에 갔을 때 나를 차에 태우고 LA 시내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숙씨가 90년 대 다시 미국을 찾았을 때 허합은 치매를 앓고 있었다. 허합은 10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 2003년 12월 27일 향년 86세 나이로 미국에서 숨졌다.

2007-11-27 김장훈

아들 제중씨가 말하는 '아버지 유봉진'

독립·애국지사의 아들 제중(62)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3남 1녀의 자녀를 올곧게 키운 뒤 경기도 남양주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난 때문에 어떤 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올 때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다. 3·1운동을 할 때는 아버님이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집은 제법 살았던 것 같은데 독립운동하면서 다 탕진한 탓인지 사는 게 매우 힘들었다"고 소회했다. 부친 작고 후 제중씨는 17세까지 어머니 행상 덕에 살았고, 1963년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워 자녀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주변에서 '아버지가 고위층과 많이 친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하도 어렵고 해서 (서울)효자동 모 국회의원 집을 찾아갔는데 반응이 냉담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절대 찾아가지 않았고 나 혼자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힘겨웠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유봉진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아들 제중씨 때문이었다. 자식을 늦게 본 탓에 자식을 제대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제중씨는 "아버지가 저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강화 합일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서울로 전학했다. 이화여대 입구로 이사를 했는데 전세방을 얻어 살았다. 제중씨는 전세금도 아버지가 남의 돈을 빌려 마련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유봉진은 서울에 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떴다. 어린 나이였지만 제중씨 기억엔 아버지가 남을 위해 산 봉사자로 남아 있다. 서울에 올라와 '제중한의원'을 운영하면서도 "돈없는 사람은 무조건 무료로 치료를 해줬다"고 했다. 특히 왕진을 많이 했는데 아픈 사람이 의원에 오는 것을 바라기보다 직접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도 했다. "강화에 있을 때도 거지를 보면 집으로 데려와 겸상을 하고 보냈다"고 덧붙였다. 늦둥이 탓에 부친에 대한 기억은 짧지만 "어릴 적에도 국기를 집에 걸어 놓을 정도로 애국심이 높았다고 들었다. 34살에 거사를 했는데 아마 역동적으로 하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2007-11-20 지홍구

[인천인물 100人·97]애국지사 유봉진

'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이끈 사건은 1919년 3·1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만세운동에 가담, 일본경찰에 체포돼 1년형을 언도받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징역형을 마치고 고향 강화에 돌아온 조봉암은 나라가 무엇이고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조봉암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실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이러한 자전적 고백과 함께 중요한 인물 한 명을 길게 소개한다. 강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진(劉鳳鎭). 조봉암의 사상형성기에 유봉진은 조봉암이 자신을 '애기패'라 규정할 정도로 감히 넘보기 힘든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걸어온 길'에 유봉진은 이렇게 소개됐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달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런데 유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맞는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선생은 마리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었어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했다. 유선생은 오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일 년 살았다.' 글에서 보듯 개화의 상징인 강화에서, 전국 3·1운동사에서 유봉진이 남긴 발자취는 대단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 재판기록 외에 더 많은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인 아들 제중(濟衆·1945년생)씨를 만났지만 그 역시 해방되던 해 태어나 3·1운동 기간에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한 기억을 쏟아놓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작성했다는 이력서를 소장하고 있어 거사를 치르게 된 동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력서는 1945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앞으로 보낸 자기소개 성격의 글인데 왜 이런 글을 주석에게 보냈는지는 명확지 않다. 특히 제중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몇몇은 해방 후 묻혀진 유봉진의 행적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여서 유봉진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봉진은 강화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는데 조봉암은 5년으로 기억했지만 유봉진은 이력서에서 1년9개월을 복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일을 "대한독립대학교에 입학해 1년9개월에 졸업했다"고 썼다. 옥살이를 독립운동을 배우는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이력서엔 강화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배경을 짐작케 하는 내용도 있다. 이에 따르면 15세부터 18세까지 강화진위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다. 군대 복무 중 일제는 강화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군인을 보냈고 유봉진은 자신이 근무하던 부대의 군기탄약고를 파괴하고 다른 군인에게 탄환을 나눠 준 다음 갑곶항으로 나가 일본군과 전투를 했다고 한다. 이 일로 강화군대는 없어지는데 유봉진이 강화 3·1운동을 주도했던 나이가 34살이니 십수년 전에 이미 일제항거 전력이 다분했음을 읽을 수 있다. 뒤이어 나오는 '우리 대한국은 반만년에 역사국으로서 악마 일본에게 불행이도…중략…일본대사 이등박문으로 대한정권을 농락하고 압박하든 일이며 명성황후께서 토유 이등이놈에게 해당하옵신 일을 일일이 대중에게 열열히 설명하야…중략…그날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부님전에 대한독립을 애걸복걸 하옵드니…'라는 표현을 볼 때 나라를 잃은 슬픔이 커 항일의식으로 연결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부님'이란 용어를 봐 그가 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봉진은 "17세때 감리교회에 입교해 60세까지 43년간 종교 봉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삼일운동재판기록부에도 유봉진은 은(銀) 세공자이면서, 예수교도로 나온다. 자신보다 3살 연상인 부인 조인애(曹仁愛)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정부는 1992년 4월 故 조인애 여사에게 조선자주독립에 헌신노력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유봉진은 1980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봉진은 은세공업자로 알려져 있지만 교육에도 남달랐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그 스스로 교육관련 이력을 상세히 적고 있기 때문이다. 19살 때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 장흥학교에 교사로 1년간 근무했고, 20살 때부터 상업에 종사했다. 31살 때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월오학교 부교장으로 일했다. 징역살이를 하고 난 뒤인 36살 땐 부천군(강화) 북도면 시도리에 사립 신창학교 설립자 겸 교장으로 근무했다. 40살 때엔 강화군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된 사립 노산학원을 개교해 스스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의사 자격증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 제중은 "집안에 은을 다는 저울과 망치는 보았는데 은세공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강화 합일국민학교에 다닐 때 부친 심부름으로 한약재를 사러간 기억이 있다. 무허가 한의사인 줄 알았는데 한의사 자격증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들 제중은 자신의 이름이 제중(濟衆:대중을 구제하는 인물이 되라는 뜻)인 것도 한의사인 아버지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와 서울에서 잇따라 운영한 한의원 이름도 '제중한의원'이었단다.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해방 후에도 그는 온통 나라걱정이었다. 단기 4280년(1947년) 4월 29일엔 당시 돈 백원을 이승만 박사에게 성금으로 내놓아 이승만 박사 비서 이기붕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광복 후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에게는 '헌책상달'(獻策上達)을 보내 민심안정을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권하기도 했다. 치솟는 물가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건의하고 독립건국을 위해 건국비를 각 도·부·군에 지시, 징수하자고 했다. 특히 해산된 강화군대를 회복시키고 각 도·부·군에 경찰협조기관 경호단을 조직할 것을 권했다. 또 중학교가 없는 각 도·부·군에 중학교를 설치해 청소년 양성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도 물가안정과 경호단 조직 등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조선해방에 중대한 사명을 봉명하옵시고…중략…감사하나이다'라는 표현을 쓴 걸 보면, 그는 미군정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보니 자식은 늦게 봤다. 독자(獨子) 제중씨가 1945년 태생이니 유봉진이 60세 되던 해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아들 제중씨에 따르면 자식을 갖기 위해 강화 마니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자식을 잉태했다고 한다. 부친보다 어머니가 3살 연상임을 감안하면 당시 마을의 경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제중씨는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실한 언급을 피했다. 유봉진의 유품은 잦은 이사과정에서 거의 다 분실돼 지금 남은 것이라곤 사진 1장과 자료 몇 가지가 고작이다.

2007-11-20 지홍구

[인천인물 100人·96]前 인천상의 회장 채호

1997년 11월21일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다. 'IMF 사태'의 시작이었다. 기업은 망했고 가장(家長)은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자살자가 속출했다. 대혼돈이었다. 온 나라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IMF사태는 1997년 중반 대기업의 연쇄 부도에서 촉발됐다. 한보그룹이 망했고 기아, 진로, 대농, 한라, 대우 등의 주인이 바뀌었다. 대기업 부도에 따라 은행들은 거액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다. 급기야 팽팽히 당겨진 금융발 뇌관은 터졌고 지역 금융계에 핵폭풍으로 몰아쳤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인천·경기의 유일한 지역은행이었던 경기은행이 '부실은행'의 명단에 올랐다. 경기은행은 이후 4개월여동안 중앙정부에 대한 탄원과 진정 등 인천지역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화, 동남, 대동, 충청은행 등과 함께 그해 6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경기은행 퇴출을 아쉬워했다. 그뒤 10여년이 지났다. 경기은행은 이제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이 경기은행을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채호(蔡浩·1909~1970) 전 인천상의 회장이다. 채호 전 회장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인천상의 회장(제5·6대)·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부평구 효성동 일대에 인천수출산업공단이 조성됐고 남구 주안 폐염전 부지에 제2단지가 들어섰다. 서울~인천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고 국철은 복선화되면서 운행 횟수를 대폭 늘릴 수 있었다. 인천항이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전면 도크화 사업이 추진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대기업들의 서울본사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한 운동을 활발히 벌여 인천제철(현 INI스틸)과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인천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율도화력발전소와 부평디젤발전소, 경인에너지 등은 지역의 수많은 공장에 풍부한 전력을 공급하며 힘을 보탰다. 인천은 이 기간 1950년 6·25 이후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 도시에서 수출 주도형 전통 공업도시로 면모를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1960~1970년대 인천지역 기업들의 수출액은 국내 전체에서 20% 가량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소릴 들었다. 그러나 채호 전 회장은 지역 중소기업들이 늘어나는 설비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현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서울을 본사로 둔 시중은행들의 지점에 흡수된 은행 자금이 지방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중앙으로 빨려들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인천지역 중소기업들은 융자를 받기 위해 시중은행의 서울본점과 지점을 번갈아 드나들어야 했다. 김한호(65) 전 인천상의 사무국장은 "채호 전 회장은 당시 지역 중소기업인들로부터 이같은 현실을 듣고 지방은행 설립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채호 전 회장의 구상은 수출과 경제발전을 지상과제로 삼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으로 탄력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1월17일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지역적 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을 위해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호 전 회장은 곧바로 그해 2월 인천상의를 중심으로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인천은행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인천상의에는 별도로 전담팀을 만들어 인천지역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주주 모집에 나섰다. 인천은행은 2년여의 노력으로 1969년 11월 수권자본금 3억원 중 1억5천만원을 불입하면서 창립총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인천은행 설립에는 18개 향토기업과 개인 152명이 주주로 참여했다. 초대 은행장에는 한국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이상윤씨가 선임됐다. 1969년 12월 8일 개점 첫날 하루동안 3억2천100만원의 예금고를 올렸다. 그동안 지방은행 설립에 목말랐던 인천시민들의 갈증을 웅변한 것이다. 인천은행 설립은 1967년 10월 개점한 대구은행을 시작으로 부산, 충청, 광주, 제주은행에 이어 전국에서 6번째였다. 개점식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서진수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석했다. 채호 전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국내 은행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어 지방경제 발전에 여러모로 지장을 준다"며 "인천은행 발족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인천금융은 시민들의 은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천은행은 창립 3년을 맞은 1972년 6월 경기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 1억5천만원은 1998년 6월 퇴출 전에는 2천2억원으로 2천배 이상 성장했다. 1998년 5월말 기준으로 총 자산은 8조5천322억원으로 인천과 경기·서울에 모두 193개의 영업점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이 중 경기은행의 중소기업 대출금은 2조3천억원으로 전체 대출금의 74.5%를 차지했다. 당시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비율이 평균 48%를 유지했다. 경기은행이 퇴출되고 10년이 흐른 지난 5월 18일 인천상공회의소는 '인천지역 경제현안 10대 과제'를 선정, 발표했다. 과제 선정에는 인천지역 345개 중소기업 경영자가 참여했다. 현안 과제는 올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선 후보자들이 공약으로 채택하도록 지난 9월 여야 각 당에 전달됐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바라는 지역경제인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한 현안 과제 중 '지방은행 설립을 위한 지원'은 8번째 과제로 목록에 올랐다. 경기은행 퇴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지역 경제인들은 여전히 아쉬워하고 지방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인석 인천상의 부회장은 "오는 2009년 인천도시엑스포를 비롯 각 지방정부에서 개최하고 있는 국제행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가올 시대는 국가중심의 중앙집중화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방도시가 국가를 주도할 것"이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지방은행인 경기은행 설립에 헌신한 채호 전 인천상의 회장은 선각자"라고 평가했다. 채 전 회장은 은행 문을 연지 불과 1개월여만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 1월 25일 오전 10시 인천 중구 송학동 구 인천상공회의소 회관 뒷마당에서는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이날 장례식장엔 1천여명이 참석했다.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을 찾은 유승원 청와대 민정담당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고인에게 산업포장을 추서했다. 유 수석은 '나흘 전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대통령이 참석할 수 없어 애석해 하신다'는 말도 유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현 두산그룹의 창업자이면서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박두병 전 회장과 남봉진 경기도지사, 유병태 인천시장은 조사를 낭독하며 고인이 가는 길을 기렸다. 박두병 전 회장은 조사에서 "모든 일에 정열을 쏟으시고 그 보람으로 인천수출산업공단의 오늘이 있게 되고 경인지구종합개발이 알차게 추진됐으며 인천은행과 기계공업공단의 빛나는 성장을 이룩했다"며 "입원 중 저를 볼 때마다 인천의 개발과 경기도의 개발을 걱정하시던 모든 일들은 이제 잊으시고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라고 애도했다. 영구차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 시내를 돌아 옥련동 선영으로 운구를 마쳤다. 경기은행(구 인천은행)의 산파였던 채호 전 인천상의 회장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은행 설립과 동시에 간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2007-11-13 이창열

[인천인물 100人·95]개항기 인천&연극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인천 관객들이 공연을 보는 안목은 상당했다. 전국을 무대로 악극을 공연하면서 '흥행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던 김석민(金石民) 단장(전 한국예술문화진흥회장)은 인천 출신인 김양수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 연습한 악극을 무대에 올리기 전 인천 애관을 찾았어요. 악극을 본 인천 관객들 반응이 좋으면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래서 애관을 찾은 관객들이 차가운 반응을 보일 때면, 단원들은 근처에 있는 여관에 방을 잡고 악극을 새로 고치고 연습하기를 반복했어요. 그 여관이 완전 우리 집이었지요." 인천 중구 사동·경동 일대는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연극의 거리'였다. 인천시사(仁川市史)는 애관극장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189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인천좌(1897년), 가부키좌(1905년), 표관(1909년) 등이 공연장으로 활용됐다. 인천 출신 극작가 함세덕과 진우촌, 무대미술가 원우전, 연기자 정암, 서일성 등이 이 거리를 거쳤다. 이들은 하나같이 서울 무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였고, 연구자들은 이 시기 이들이 남긴 족적을 하나씩 재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인천 행적은 실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밝혀진 게 적어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2007-10-23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95]배우 서일성

"서일성, 그의 연기는 관록과 함께 노련하다. 열이 있으며 정이 흐른다. 토월회로부터 오늘에 성장하였다. 힘과 열을 가진 젊은 배우이며 미남자이다." 1939년 창립한 극단 '아랑(阿娘)' 팸플릿은 연기부 소속 배우 서일성(徐一星·1906?~1950?)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천 주안 출신으로 알려진 배우 서일성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황철(?~1961)에 비견할 만한 이로 평가받았다. 원로 연극인 장민호(82) 선생은 "서일성이 활동하던 당시 황철에 버금가는 배우였다는 평을 자주 들었어요. 워낙 중량감있는 배우였죠"라고 말했다. 연극인 고설봉은 생전에 서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준좌'의 중심 스타가 황철이었다면 서일성은 '호화선'의 중심 스타였어. 뚱뚱하고 커다란 몸집이었지만 몸이 유연했고, 발성의 일인자였지. 별명이 '만능 모범꾼'이었어. 무대에 오르기 15분전 분장실에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약 5분간 얼굴을 뜯어보고 명상을 하다가, 5분만에 분장을 마치고 등장했어. 그런데 그게 30분 분장한 사람보다 훨씬 나았지." 1937년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해 연극을 시작한 고설봉은 이후 '청춘좌', '아랑' 등의 극단에서 서일성과 함께 생활했다. 향토사 연구자 김양수(74)씨는 자신이 서울 예총 사무총장하던 시절 고설봉으로부터 서일성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기억했다. 고설봉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선생 집이 인천이면 우리 서일성 선생님 잘 아시겠네요. 제가 그분 밑에서 연기를 배웠어요. 참, 어른 중의 어른이셨죠. 동양극장 일대를 연극의 거리로 만들고 이끈 분이 바로 서일성 선생님이셨어요. 비극장면을 연기할 때 서일성 선생은 무대 옆 밑에 보관해둔 숯덩어리를 이용해 즉석에서 분장을 했어요. 비탄의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숯덩이를 이용해 얼굴 분장을 했어요. 그러고나서 조명이 탁 비치면 비극적인 얼굴이 나타났어요. 이걸 본 관객들은 순식간에 변한 모습에 감탄을 연발했죠." 김양수씨는 "고설봉 선생은 평소 쾌활했는데, 서일성 선생 말만 나오면 자세를 바로잡았어요. 고 선생 이야기를 듣고 그 유명했던 서일성이 인천 출신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라고 전했다. 이처럼 서일성은 1930년대 이후 조선 연극계를 말 그대로 '주름잡았던' 배우였지만, 그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고설봉, 김양수씨의 구술과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서일성이 인천 출생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극작가 김영무씨는 저서 '동양극장의 연극인들'에서 "(서일성은)인천에서 1906년에 태어나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인천상업을 다녔는지는 불분명하다. 인천고등학교측은 "학적부 자료를 검토한 결과 1920년대 인천상업 졸업생 가운데 서일성이란 이름은 나와있지 않다"고 답했다. 서일성은 이후 인천 연극인들과의 '인연'을 계속 유지해간다. 김양수씨는 "서일성은 연기자 정암과 친구였고, 이들은 극작가인 진우촌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고 말했다. 서일성이 이들과 함께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결성해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몇몇 기록은 전하고 있다. 또 무대미술가였던 원우전과는 '연극시장', '동양극장', '아랑', '백화' 등의 극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1940년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연극을 시작한 원로 배우 황정순(82·여)씨도 서일성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수업을 했다. 서일성은 극작가 함세덕이 해방후 창립해 핵심멤버로 활동했던 '낙랑극회'에도 몸을 담았다. 이들은 모두 인천이 낳은 연극인들이다. 김영무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일성이 1925년 토월회 신인 연기자 모집 당시 응모한 170여명 가운데 최종 선발된 7명에 포함됐고, 비대한 몸집(80㎏)을 지녔다'고 기록했다. 당시 서일성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지만 이전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연극을 배웠다고 한다. 흥행을 위해, '노래와 춤에 숙련한 배우'를 원했던 토월회 측은 유랑극단의 경험이 있고 호리호리한 서일성을 적임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종합잡지 '삼천리'(1941년 3월)는 "서전(瑞典:스웨덴의 음역어)의 미남같은 황철군, 케리쿠파(Gary cooper)같이 키큰 서일성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일성은 황철과 함께 당대 '꽃미남'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연극연출가 박진(朴珍·1905~1974)씨는 연극에세이 '세세연년'에서 1946년 3월 열린 '윤봉길 의사' 공연을 김구와 함께 관람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께 첫날 참관을 청했다 …(중략)… 저 윤봉길역은 누구인가? (서일성이올시다) 그래, 그 사람 허우대가 좋군, 그렇지 윤봉길도 골격이 잘났지." 육중한 몸집을 갖추고 발성이 좋았던 서일성은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김양수씨는 "예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서일성이 공연할 때 일본의 유명한 연극평론가가 구경을 온 적이 있었어요. 이 평론가는 서일성을 보고 '동양 유일의 배우'라고 극찬했어요. 이렇게 무대를 꽉 차게 연기하는 이는 일본에도 없다고 하면서요"라고 고설봉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친일연극단체인 조선연극협회가 창설될 무렵인 1940년 김조성(金肇聲)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예원좌'에 서일성을 스카우트하면서 1만원의 돈을 지불했다. '예원좌'는 1935년 무성영화 변사 출신이었던 김조성, 임생원(林生員), 전세종(全世鍾)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단체였고 스케치, 난센스, 노래, 야담, 조선영화 해설극 등을 전문으로 했다. 김조성은 '예원좌'를 1940년부터 창작극단으로 변모시키려 했고, 당대 큰 인기를 누리던 서일성이 필요했다. 이 돈을 받은 서일성이 당시 2천400원을 주고 서울 청진동 수송공립보통학교 앞에 기와집 한 채를 구입했으니 1만원이란 돈이 어느 정도의 거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일성은 조선연극협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1942년에는 조선연극협회가 주최한 '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서일성은 이 때부터 '친일'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연극부문 자문위원인 명지대학교 이재명 교수는 "연극경연대회 1회 때는 친일 목적의식이 덜했고, 서일성씨가 맡았던 배역도 친일 색채가 덜했다"면서 "서일성씨는 친일활동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중한 쪽은 아니다"고 견해를 밝혔다. 서일성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고향인 인천에 내려와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역경찰서 문화분과 명예위원(자문위원)을 맡았다. 김양수씨는 서일성이 '정치색'이 약한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인천 유지들이 분야별로 자문위원을 맡았어요. 그 때 이 양반이 문화 쪽으로 간 것 같아요. 함세덕, 현덕 등 문화쪽 인물들이 모두 다 좌익운동을 하니까 자문위원을 문화 쪽에서 할 사람이 없었겠지요. 그런데 경찰 자문위원이래야 돈을 받아 먹었겠어요, 행세를 했겠어요?" 서일성은 이 경력을 빌미로 전쟁 기간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설봉은 처가가 있는 충남 논산에서 숨졌다고 전했지만, 고향인 인천 주안에서 총살당했다는 말도 있다. 서일성이 언제, 어디서 연기를 익히고, 배웠는지 알려진 건 없다. 하지만 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우리 연극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인 건 분명하다. 인천 연극 문화유산의 축적을 위해선, '희미한' 그의 행적을 하나씩 밝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2007-10-23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94]제자 박송우씨가 본 황추선생

"화가로서, 교사로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분이셨습니다." 1956~58년 인천송도고등학교에서 황추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 화가 박송우(66)씨. 박씨는 1957년 고2때 친구, 후배들을 모아 미술부를 창설했단다. 이 때 황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박씨는 "원래 기계체조를 하다가 선배들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며 "황 선생님에게 찾아가 미술부를 만들겠다고 하니깐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지원을 해줬다"고 회상했다. 황추 선생은 본인의 작품 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학생들의 교육에도 무진 애를 쓰셨단다. 박씨는 "그동안 한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석고 데생이 미대 입시 실기시험 과목인 것을 알고 당황했던 적이 있었는데 황 선생님이 직접 서울에 가서 비너스 상을 사가지고 오셨다"며 "그 때 석고 데생을 한번 해보고 시험을 봤는데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는 미술 재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던 터인데 황 선생의 도움이 컸다는 것이다. 그 뒤로 박씨도 인천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황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됐다고 한다. 그는 "황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면 저한테도 보여주시면서 의견을 물으시곤 했고 미국에 가서도 종종 연락을 해 미국으로 들어와 함께 지내자고 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황 선생님이 1993년께 한국에 와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 일일이 대화하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가셨었는데 1년뒤 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왠지 이전부터 (죽음을) 준비하셨던 것이 아닌가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제가 교사를 해보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개인 작품활동까지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는데 황 선생님은 항상 점잖게 여유있는 모습을 지니면서 그림에 매진했던 분으로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2007-10-16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94]화가 황추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인천, 게다가 먹고 살기에 바빴던 50~60년대.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천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치에 비해 지금은 이름조차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같이 활동했던 미술계 원로들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화가 황추(1924~1994). 누를 황(黃), 가을 추(秋). 황추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캔버스 위에 칠해진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풍경화를 집중적으로 그린 그의 그림 속에는 가을 분위기를 나타내는 노랗고 붉은 계통의 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다. 인천여성작가 연합회 고문인 김옥순(76·여)씨는 "황추 선생은 바다풍경이나 석양을 많이 그렸는데, 바다를 그릴 때도 해가 뜨거나 질 때에 붉게 물든 바다를 위주로 그렸다"며 "그러다보니 따뜻한 느낌이 나는 붉은 색조의 그림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미술협회 고문인 이철명(72)씨도 "황 선생이 마지막 전시회에서는 추상화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석양을 그려낸 풍경화가 대부분이었다"며 "노란색과 주황색 계통으로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려낸 투박한 스타일의 그림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생각해 일부러 붉은 색 위주의 화풍을 잡아나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름과 그림 모두 '황추'라는 단어로 드러낼 수 있을듯 싶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입선, 특선 등을 거머쥐면서 인천뿐만 아니라 중앙 화단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미술평론가 이경모씨는 "지금은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당시에는 국전이 작가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등용문이었고 황 선생은 여기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면서 국전 초대작가까지 됐다"고 설명했다. 황추는 1958년 국전을 시작으로 아홉 차례에 걸쳐 입선을 차지했고 1966년과 1967년에는 연거푸 특선을 받았다. 특선을 두 번 타게 되면 국전의 '추천작가' 자격을 얻어 작품의 출품은 가능하지만 심사는 받지 않게 돼 있다. 두 번의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된 황추는 이 때 다섯번 작품을 출품하게 돼 총 16차례나 국전에 작품을 걸게 됐다. 추천작가가 된 이후 2년이상의 활동경력이 인정된 뒤 황추는 국전의 심사위원 자격이 있는 '초대작가'가 됐다. 또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현직작가초대전과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 1975년에는 한국미협전에서 이사장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써 1971년 대통령장 문화훈장을 수상한 화가 박영성씨와 함께 인천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됐다.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황추는 1947년 해주미술학교에서 서양화 표현기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때 서양화단의 원로로 알려진 박성환 화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고향 해주를 떠나 인천으로 오게 된 그는 1953년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24년간 교사로 재직할 당시 그림에 대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이 미술에 매달려왔던 것으로 당시 작가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황추의 제자였던 화가 박송우(66)씨는 "황 선생님이 군부대에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미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대학수준 이상의 전문 교육은 받지 못한 것으로 들었다"며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황추가 나온 해주미술학교는 현재의 전문학교 수준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6·25전쟁 이후 당시 문교부에서 미술을 정규과정으로 만들면서 부족한 교사들을 대거 확보하던 시기에 황 선생님이 송도고등학교에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다른 학교 미술교사였던 박영성, 장선백, 박응창, 김옥순 선생 등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미술에 더 매진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화가들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터라 학교를 중심으로 미술계의 활동이 이뤄졌던 시기였다. 황추는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기 전에 경기도 미술교사 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교사들 사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1965년에는 대한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을 맡고 제4회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지역 미술계를 이끌어 '미협 맨'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에서 1959~64년 당시 미협회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을 여는 등 지역사회 미술전 곳곳에 작품을 출품했다. 1963년을 시작으로는 개인전을 11차례나 지속적으로 여는 등 화가로서의 작품활동에 매진했고 인천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으로서 지역을 위한 봉사에도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교사로서 학생들의 지도에도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제자 박씨는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서 학생들한테 그림공부를 시켰고, 당시 대학에서 실시하는 각종 미술대회에서 자기 학생들이 큰 상을 받게 하려고 정말 기를 쓰고 가르쳤다"고 밝혔다. 이렇게 국내에서 화가와 교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황추가 1976년 돌연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시카고로 이민을 가게 됐다. 당시 미협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철명씨는 "이민 즈음에 중구의 답동관이라는 식당에서 송별회를 하면서 황 선생에게 국문과 영문으로 공로상을 만들어 전달했던 것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이민이 쉽지 않았을 땐데 중앙정보부 쪽에서 일했던 황추 선생의 동생이 미국으로 파견을 가면서 초청이민을 도운 것으로 안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시카고 시장 초대 개인전이나 LA현대 미술관 초대전, 워싱턴 국립미술관 초대전 등에 참여하고 한인미술협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해왔지만 국내에서만큼 인정받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 원로 화가들은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김옥순씨는 "누런 황소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셨던 분이셨다"며 "황 선생이 미국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국내에서 더 활동을 많이 하시고 좀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황추는 미국에서 20여년 가까이 살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 엄청난 벌금을 물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입는 등 타국에서 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단다. 그의 딸이나 부인이 김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황 선생이 많이 외로우신 것 같으니깐 미국으로 와서 함께 활동해보라는 내용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1985년 귀국해 여의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1988년에는 인천 몽마르트 화랑에서 두 번째 귀국전을 했다고 한다. 이 때에는 기존의 풍경화 위주에서 벗어나 추상화로 전환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단다. 이경모씨는 "황추 선생이 인천의 미술계를 주도하며 쌓아온 업적에 비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지금이라도 황추 선생을 재조명하고 인천의 인물로 되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2007-10-16 윤문영
1 2 3 4 5 6 7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