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93]인터뷰 / 원로 무대미술가 이원경씨

지난 5일 용인 자택에서 만난 이원경(90)씨(예술원 회원)는 60여 년 전 원우전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씨는 일본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1940년 직후 서울 명동과 종로 거리에서 '선배' 원우전과 자주 맞부딪쳤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동양극장에 있었고, 난 프리랜서로 부민관 근처, 명동 왔다갔다 했어. 그때는 연극하는 사람 많지 않아 서로 잘 알았지. 원우전은 나보다 연배가 십 년 이상 높은데 내게 아우님이라고 불렀어." 이씨는 일본서 무대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2세대' 연극인이었다. 1940년대 초반 무대미술 분야는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는 배경화가 없어지고 무대를 입체적으로 배치하는 흐름이 지배적이었지. 원우전은 새로운 기술을 들고 나타난 후배(이원경)를 궁금해하면서도 경계했던 것 같아." 원우전의 고향은 '광'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들었다는 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광나루 저쪽 시골마을이거나 경기도 광주, 둘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1960년 대 초반 예그린 악단(현 서울시 뮤지컬단) 공연서 이원경씨가 연출을 맡았을 때 원우전은 무대미술을 담당했다고 한다. 당시 원우전은 큰 금강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씨는 기억했다.

2007-10-09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93]예술인 원우전

1920년 이후 인천 연극 운동의 중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대미술가 원우전(元雨田, 우전은 아호 본명은 世夏·1903(?)~?)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국내 연극 발전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어디서 언제 태어났고, 언제 세상을 떴는 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그의 활동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인천에서의 기록도 희미하다. 다만 몇 줄의 기록과 몇몇 증언, 그리고 이제 시작단계인 연구논문 등을 통해 치열했던 원우전의 삶을 유추해 볼 뿐이다. 향토 언론인 고일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원우전을 대략이나 엿볼 수 있다. "토월회의 인천 공연 이후 무대 장치가인 원우전씨는 아예 인천에 거주를 정하였다. 그 덕으로 싸리재 각 상점의 간판은 근대식으로 진화했다." 연극 무대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 상점 간판까지 그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원우전의 반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접 배우로도 연극에 뛰어들었으며, 어린이들에게 아동극과 무용극을 가르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종합 예술인이었던 셈이다. 원우전은 1926년 극작가 진우촌(秦雨村), 함세덕(咸世德), 연기자 정암(鄭岩), 언론인 고일(高逸), 송수안(宋壽安) 등 인천의 젊은 지식인들과 함께 극단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결성했고, 경동 애관극장 등에서 공연을 벌였다. 1920년대 말 경동거리에 자리잡은 칠면구락부와 애관극장은 인천 공연문화를 대표했고,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1세대 무대미술가인 원우전이 서 있었던 것이다. 향토사 연구자 김양수(74)씨는 원우전이 경동거리 간판을 화려하게 꾸민 장본인이라고 전했다. "1950년대 어느 날 고일 선생과 애관극장이 있는 경동거리를 함께 걸은 적이 있었어요. 가만히 보니 거리 상점 간판들이 호사스럽고, 특이했어요. 고일 선생은 이게 모두 원우전이 만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무대미술을 그리는 일로는 돈벌이가 안 돼, 원우전은 부업으로 상점 간판을 그리는 일을 했다고 설명하셨어요. 원우전은 마치 무대장치 꾸미듯 거리 간판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원우전은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극단 토월회(土月會) 2회 공연(1923년)부터 무대미술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칠면구락부가 결성되기 직전인 1925년 12월22일. 전국에 이름을 날렸던 토월회가 인천 빈정(濱町) 가부키좌(歌舞伎座)에 공연을 내려오자 관람객들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공연 시작 전부터 자리를 채웠다. 토월회의 막이 열릴 때마다 관중의 주목을 끄는 건 배경이었다. 그 배경 담당이 바로 원우전이었다. 원우전은 이 공연이 끝난 뒤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해방 이전 원우전과 함께 무대미술가로 활동했던 이원경(90)씨는 "원우전은 무대 그림 하나만은 대단히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하면서 하나씩 기억을 떠올렸다. "동양화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잘 그렸어. 그래서 사람들이 연극보다가도 배경 보고 감탄한 거지. 당시 배경화는 무대 전체 뒷면을 가릴 수 있는 광목에 그렸어. 각종 물감을 물에 녹이고, 이게 떨어지지 않도록 아교를 끓여서 배합했어. 이렇게 그려야 배경화에서 실이 떨어지지 않았거든. 그런데 떨어지지 않도록 아교를 끓이고 배합하는 기술은 아무도 몰랐어. 원우전만이 아는 기술이었지." 이런 원우전은 인천에 무도관이 생긴 후에는 이 곳에서 소년 소녀들에게 아동극과 무용극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천 무도관은 유창호(柳昌浩)가 1927년 애관극장에 세웠는데 설립 후 정기적으로 산수정(山手町:현 동구 송현동) 공회당에서 성악가를 초청해 음악공연을 열었다. 유창호는 무도관에서 '무산아동' 80여명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했는데,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공연을 개최했다. 고일의 인천석금 기록이 정확하다면 당시 원우전은 이 공연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가르쳤을 가능성이 크다. 원우전이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고, 무대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몇 년 동안, 인천 연극 역량은 한껏 자랐다. 인천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연극 무대미술의 역사는 원우전을 빼놓고 기술할 수 없다. 연극인 고설봉은 원우전을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고안해 낸 장치가"라고 생전에 구술하기도 했다. 고설봉은 구술에서 "한번은 여름 배경에서 갑자기 겨울의 설경으로 장면 전환을 요구하는 작품을 했어. 원우전은 배경화를 겹으로 그려 끈으로 묶어둔 뒤 순간적으로 끈을 끊어 장면 전환을 하도록 장치했지. 30초의 암전만으로 장면이 바뀌자 관객들은 한동안 어리벙벙해 하는 눈치였어. 원우전은 세트를 만들기 전 모형을 만들어가며 작업한 최초의 무대미술가야"라고 했다. 원우전은 토월회와 칠면구락부 이후 신흥극단(1930년), 문외극단(1932년), 황금좌(1933년), 아랑(1939년), 청춘좌(1942년), 백화(1946년) 등에서 미술부와 장치부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실증자료는 턱없이 부족하고, 연구자들은 구술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고설봉은 원우전이 "해방 후에는 연극에 관여하지 않고 마포에서 소규모 음식점을 경영하다 6·25 직전에 타계하였다"고 구술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국립극장 50년사는 원우전이 1953년 2월 3일 대구 문화극장에서 열린 윤백남 작 '야화'에서 무대미술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장 50년사는 원우전을 '(무대미술) 제1세대 중 가장 원로'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966년 4월 9일자(조간 5면) 기사에서 드라마센터가 제정한 제4회 한국연극상 수상자로 원우전씨가 선정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기사는 원우전의 호칭을 무대인(舞臺人)으로, 나이는 70대로 소개했다. 또 '서구로부터 신연극을 들여 온 이나라 연극계의 초창기부터 한국극단에 종사하여 평생을 무대 미술에 바쳐온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수여했다'고 기록했다. 원우전의 출생시기가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원우전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다시 실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지난 8월 '인천학연구'7호에는 '최초의 무대미술가 원우전'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부산 부경대학교 김남석(35) 교수가 쓴 이 글은 원우전에 대해 쓰여진 최초의 '인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원우전은 1920~30년대 우리나라 무대미술사에서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그에 대한 자료는 크게 부족하다"면서 "특히 원우전과 칠면구락부, 애관극장의 역사에 대해 좀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천 근대 연극사는, 원우전이라는 '키워드'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07-10-09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92]항공 유체공학박사 장극

지난 14일 일본이 달 탐사위성 '가구야'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이에 질세라 중국은 오는 10월께 달 탐사선 '창어 1호', 인도는 내년 4월께 탐사위성 '찬드라얀 1호'를 발사할 예정으로 각국이 우주 항공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비해 국내의 우주항공 기술은 아직 걸음마 단계로 선진국에 비해 10여년은 훨씬 뒤처진 상태다. 하지만 10여년 전 우주 항공 분야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인천에 우주항공공학 연구센터를 건립하려던 계획을 구상한 이가 있다. 바로 항공 유체공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장극(94)박사다.그의 의지가 실현됐다면 지금 인천은 우주항공 연구 분야의 기지로 한 몫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께 인천대학교 석좌교수로 오게 된 장 박사는 인천 영종도에 국제공항이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이곳을 항공분야 기지로 발전시키려는 포부를 가졌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김재관 (74)전 인천대학교 교수는 "장 박사는 공항은 비행기가 타고 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므로 연관된 산업과 인재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비행기 수리·정비에서부터 제작 단계에 이르는 항공 기술자를 양성해야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래 우주 항공을 육성시킬 시기라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공항과 인접한 인천에 우주항공 관련 학과나 전문가 양성기관이 없으면 어느새 기술에서 앞선 외국인들이 와서 이곳을 차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우려했단다. 때마침 인천대학교에서 영종도 남서쪽에 7만여평의 부지가 있던 것에 착안, 이곳을 공항과 연계시킨 우주항공공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낙후된 분야인 우주항공공학을 인천대학교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분야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는 미국 워싱턴 등지에서 쌓은 항공 관련의 성과와 지식 등을 활용해 지원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장 박사의 이런 구상은 현실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우주항공분야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이 미흡했던 것이다. 김 교수 또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지 2년 전에도 장 박사가 있는 미국 워싱턴에 찾아가 연구 센터 건립 등 인천에서 우주 항공공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장 박사는 1985년에 '세계과학기행'이라는 책에서 '내가 일본과 자유중국을 돌아보고 느낀 바로는 항공 분야에 관해서는 우리나라가 많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은 전자·전기 분야와 자동화 분야에서의 앞선 기술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머지 않아 항공으로도 세계를 석권하려는 것 같았다. 따라서 우리들도 항공 분야에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고 서술했다. 항공분야에서 세계적인 추앙을 받았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이 분야의 연구가 미흡한 것, 본인이 국내의 항공발전에 더 힘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는 듯했다. 지금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고급 양로원 '실버스프링'에 부인 민화식(81)씨와 함께 살고 있는 장 박사. 지난 8월께 그를 만나러 갔다는 카이스트 경제학과 김원준(37) 교수는 "최근에 인천이 발전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며 "장 박사님이 미국에서 항공우주 분야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고 국내에서는 이 분야의 최초다. 하지만 국내에서 우주항공 연구가 시작된 지 10여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그의 업적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크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정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그의 활동, 업적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답변만 나왔다. 이 대학 임종태 교수는 "국내 근·현대 과학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데다 특히 항공·유체공학 부문에는 더욱 그렇다"면서 "장극 박사에 대해서 유체공학의 선구자라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해 알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가 잠시 초빙교수로 몸 담았던 인천대학교와 카이스트(1979~1990·당시 한국과학기술원)에서도 초빙교수에 대한 기록은 관리하지 않는데다 당시에 있던 원로 교수들은 이미 은퇴를 한 상태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과학자이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그에 대해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에 그를 아는 이들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의 활동 대부분이 해외에서 이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천 중구 송학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국내를 떠나 수십년을 외국에서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일본 경성제국대학 의예과를 중도 퇴학하고 공학 쪽으로 진로를 바꿔 독일 베를린 공대 항공공학과를 들어갔다. 수학의 천재로 유명해지면서 독일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독일베를린 국립공과 대학을 졸업하려면 대체로 7~8년이 걸리지만 그는 5년만에 졸업했다. 그에 대해 '한국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졸업 후 국내로 들어오려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국내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야만 했단다. 그 뒤로 스위스 국립공대 항공공학과, 미국 뉴욕대, 하버드대 노트르담대 등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서 30여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이 분야의 연구에 전념해왔다. 그가 쓴 '세계과학기행'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는 미국, 스페인, 멕시코, 러시아, 일본 등 전세계를 돌며 항공공학과 관련한 강연을 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유체 역학 부문이다. 그가 저술한 3권의 책이 그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했다. 1970년에 낸 '유체의 흐름이 표면에서 분리되는 현상(유동의 박리)'이라는 책을 시작으로 1976년 '유체 흐름 분리의 조종(유동박리의 제어)', 1983년 '최신 전개된 유동의 박리'라는 책을 냄으로써 이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가 쓴 책은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 수개 국어로 번역·출판돼 곳곳에서 절판되는 한편, 스페인, 루마니아, 러시아, 일본 등 12개국의 학술기관과 대학에서 초청돼 강의와 연구활동을 해왔다. 한편 장 박사는 세계 곳곳의 교육 제도를 파악하고 독일의 융커스 항공기 제작회사의 기사로 활동하면서 이론과 실무가 겸비된 교육 방식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김재관 교수는 "국내 대학에서는 이론위주로 교육하는데 반해 장 박사님은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실제로 비행기를 만드는 것을 지도하는 등 실질적인 교육을 강조하셨다"고 했다. 이는 공장에서의 실습과정이 필수로 돼 있는 독일의 대학 제도를 통해 그가 느낀 교육 방식이다. 그 곳에서는 학생이 만든 비행기 도면이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어야만 졸업이 가능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미래의 발전은 항공분야에서 좌우되는데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며 "항공분야에 대한 범정부차원의 지원 확대와 인재 육성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고 밝혔다.

2007-09-18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91]제3대 국회의원 김재곤

'인천은 내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김재곤(金載坤·1912~1994년). 6·25전쟁이 남긴 분단의 깊은 상처 속에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인천갑·3선)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의사당을 떠나기까지 현대정치사의 한 복판에서 살다간 정치인이다. 정계 진출에 앞서 오늘날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의 전신인 '교통부 인천지방해무청'의 6대 청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젊은 야구선수를 육성하는 일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았던 인물이다.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인천에서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애석하게도 '김재곤'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난 김재곤은 '진해고등해원양성소'에 입학하면서 인천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해원양성소는 월미도에 있었다. 그는 1935년 항해과를 졸업한 뒤 도선사로 10년 가까운 해양생활을 마치고 인천에서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47년 목포항만서장을 맡으면서 인천을 떠났다가 1948년 부산항만청 부청장과 1949년 교통부 해운국 표지과장을 거쳐 1951년 인천지방해무청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해무청장으로 있던 김재곤을 기억하고 있는 임배영(78·연수구 옥련동)씨를 수소문 끝에 만났다. 옹진군에서 태어난 임씨는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마닐라) 레슬링 웰터급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낸 '인천의 자랑'이다.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1952년 헬싱키올림픽 출전에 앞서 최종 선발전에서 태극마크를 달게 됐지만 출전을 앞두고 선수명단에서 제가 제외되는 일이 발생했지요. 당시 정부와 대한체육회 모두 부산에 있어 손쓸 겨를도 없이 꿈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박학전 인천시장이 이러한 사정을 듣곤 저를 해무청에 취업시켰는데, 그때 해무청장으로 있던 선생을 만나게 됐어요. 결혼을 앞둔 저를 위해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옆에 있었던 관사에서 신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죠." 평소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김재곤은 해무청장을 역임하면서 인천 야구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고교야구의 명문, 인천고와 동산고가 전국을 잇따라 제패하던 당시엔 경기도야구협회(인천야구협회의 전신) 회장을 맡기도 했다. 훗날 야구인들은 김재곤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큰 힘을 보탰단다.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재은(76·중구 내동)씨가 어렴풋이 남아있는 옛 기억을 더듬어갔다. "6·25 전쟁이 터지던 날에 전 동대문야구장에 있었습니다. 인천상업학교 선수로 경기도 대표로 출전했지요. 내가 1951년 군에 입대하고 1954년에 제대를 했을 적에 선생은 해무청장으로 있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인천 야구인들이 선생을 야구협회 회장으로 모셨지요. 전역을 하고 잠시 성균관대학교에서 야구선수생활을 하다 경기도야구협회에서 총무직을 맡았을 때 몇 개월 동안 선생과 같이 일을 했지요. 만사가 열성적이셨어요. 젊은 선수를 육성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죠. 선생이 국회의원 출마하셨을 때 야구인들은 사방팔방으로 선전활동을 했습니다. 선생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야구장을 자주 찾으셨어요." 김재곤이 공직자의 길을 접고 정치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다름아닌 고향 친구들이 보낸 2통의 편지 때문.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3~4개월 남겨두었을 무렵 친구들이 모여 힘을 합쳐 밀어줄테니 선거에 출마하라는 내용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굳힌 그는 무소속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공천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당시 자유당은 온갖 권력기관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다. 공천을 거절하면 각종 탄압과 횡포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결국 자유당 소속으로 인천갑구에서 출마하게 된 김재곤은 그렇게 정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나 김재곤은 곧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인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 것이다. 출판사 '생각의 나무'가 지난 2004년 펴낸 '건국과 부국'이란 제목의 책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개헌 과정에서 자유당이 보여준 상식 이하의 행태 때문에 세 가지 반작용이 생겨났다. 자유당 자체에 내분이 발생했고, 반이승만 세력이 뭉쳐 강력한 야당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승만의 국부적 이미지가 훼손되고 정권의 정당성이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954년 12월 9일 무리한 개헌에 반발하여 김영삼, 김재곤, 김재화, 김홍식, 도진희, 민관식, 성원경, 손권배, 신정호, 신태권, 이태용, 한동석, 현석호, 황남팔 등 자유당 소장파 의원 14명이 탈당했다." 야당 정치인의 고단한 삶은 지용택(71)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소개로 만난 김재곤의 넷째 딸 주애(54·남구 주안동, 강화 양도초교 교감)씨를 통해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자유당의 모진 탄압 속에서 야당 국회의원으로 산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비춰볼 때 강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고서는 내릴 수 없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예요. 아마도 도선사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일찍이 해외 선진국가의 민주정치를 경험하고 느끼신 바가 많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주변에서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처음 받았을 때 우리나라 도선사 1호로 유명한 유항렬씨가 극구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어요. 야당시절에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신 것 같아요. 당시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경찰 고위 간부는 몰래 전화를 걸어 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고 길가 가장자리로 조심히 다니라고 귀띔을 해 주었대요.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셨죠." 김재곤은 박정희가 이끈 5·16 군사쿠데타 이후 오늘날 산업자원부의 전신인 상공부에서 제 11대 정무차관을 잠시 지냈다. 김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당시 재미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아버지는 상공부 정무차관 시절 두 가지 형태로 결재를 하셨대요. 상부의 불합리한 압력이 있었던 업무를 결재할 경우에는 '그냥 봤다'는 의미에서 見(볼견)자에 동그라미를 쳤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사용하셨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공화당 입당을 꾸준히 권했던거 같아요. 아버지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나중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당을 계속 고집하려면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라고 했다더군요. 그러나 아버지는 인천에 남으셨어요." 김재곤은 1994년 6월 17일 오후 7시 운명을 달리했다. 고향인 마산에 선산이 있었지만, 평소 그가 "인천은 내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인천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준 은혜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곳 인천 땅에 묻히겠다"며 고집한대로 가족들은 검단 원당초등학교 맞은 편 산자락에 고인을 모셨다.

2007-09-11 임승재

[인천인물 100人·90]옛 인천 거부 유군성

사람들은 늘 부(富)를 축적하는 일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개인이나 기업이나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러나 돈을 버는 일에만 매달리면, 자칫 그 옳은 쓰임새를 잃기 십상이다. 그래선지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갑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100여년 전 인천의 거부로 불리던 유군성의 삶은 요즘 갑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옛 인천의 부자', '조선 최고의 납세자', '우리나라 첫 근대 정미업소 운영'. 강화출신의 유군성(劉君星)을 일컫는 표현이다. 1880년 태어나 일제 강점기 국내를 대표하는 최고 상업가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적은 철저히 잊혀졌다. 당시 시대상을 볼때 부호라면 일반적으로 친일파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로써 자신 역시 사회의 전면에 나서기를 꺼린 듯 싶고 발자취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박헌용이 1932년 집필한 강도지(江都誌)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본관은 강릉으로 강화 월곶리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적 부모를 잃고 약관의 나이에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주하였다. 민첩하고 수완이 남달라 점차 상업계에서 선구자라는 명예를 얻었으며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는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성품을 지녔다. 목재업, 정미업을 경영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심각한 손실을 본 적도 있다. 또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향리인 강화의 크고 작은 일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이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 도타운 성정(性情)과 풍모(風貌)에 대하여 칭송하는 사람이 많다." 1979년 발행된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서는 유군성이 강화에서 출생, 네살때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스물아홉에 목재상을 시작한 것으로 적었다. 또 1993년도 인천시사 자료집은 '10여세 때 인천으로 옮겨와서 자수성가했다'고 말한다. 사망한 날짜가 1947년이므로 그의 생전에 쓰여진 강도지에 가장 신빙성이 높지만 워낙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작은 돈벌이에서 시작해 다양한 종류의 장사를 한 것에는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다. 제재소를 시작으로 이후 정미업을 겸했으며 19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인천상의에 따르면, 유군성이 1931년 납부한 영업세가 74원40전으로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형상점보다 훨씬 많아 그 규모를 예측했다. 사업가로서 그의 활동상은 정미업을 하면서 가장 두드러진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기록들이 '유군성 정미소'가 중구 신흥동에 문을 연 시기를 1924년, 정미기 5대를 갖추고 남녀 직공 70여명이 하루에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1915년 )'에서 유군성의 최초 공장은 18년 앞선 1906년 9월 세워졌고 전국서 한국인이 운영하던 27곳의 동종 분야 가운데 최고 자본금을 보유했다고 적고 있다. 자본금은 2천엔으로 1898년 기준으로 지금과 33만배 차이가 난다고 가정하면 현 52억여원에 달할 것으로 짐작된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미업계에서 큰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볼때 상업적 수완이 무척 뛰어났다고 보인다"며 "다만 자본금의 규모에서 단독으로 사업을 벌이지는 않고 동업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셀 수 없을 만큼의 선행을 베푼 그의 미담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정미소에서 쌀을 훔친 여공의 가정에 땔나무와 약을 보냈으며 모친의 회갑날에는 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모두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937년 김도인이 발행한 '월미' 창간호에서 임가삼(林可參)은 '대(大) 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꼭지의 글에서 유군성을 설명하면서 '조선인측 최고 납세자로는 유군성씨인데 재산보다는 사업이 많고, 지식보다 덕망이 훨씬 높기로 경향(京鄕)에 유명하신 인천의 원로로 숨은 자선행위가 한이 없건만 자기일 홍내는 것을 싫어하야 사진 한 번 내여 본적이 없다. 부의(府議)같은 공직을 일체사회하시고 다만 선거회장에서 입회인으로 자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연히 머리를 숙인다'고 적고 있다. 사업가로, 덕망가로 이름이 난 유군성은 중등교육기관 설립에도 참여한다. 유군성은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동산중·고등학교의 탄생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법인 동산육영회가 지난 1988년 펴낸 '동산50년사'에서 교육에 큰 뜻을 품었던 그의 행적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설립허가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1938년. 지금의 동산중·고교의 요람인 인천상업강습회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체계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정규기관은 아니었다. 이때 한 단계 높이 발돋움하도록 재정적 도움을 준 인물이 바로 유군성이라고 한다. 1939년 초 3년제 6학급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하는데 5명의 설립위원이 뛰어든다. 김윤복, 김종섭, 김세완, 유군성, 이흥선 등이다. 재정을 담당한 유군성은 이흥선과 함께 돈을 거둬 교사를 짓기 위한 부지를 찾아 나선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중학교가 자리한 47번지 일대다. 전체 면적이 1만여㎡를 약간 밑돌았다. 최근 중·고교를 통틀어 한 기관의 부지가 평균 1만5천여㎡를 차지하니 상당한 면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잠시였다. 재정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유군성을 비롯한 설립위원 5명은 재단법인을 만들기 위해 인천 출신으로 서울에서 재력가로 소문난 최승우 선생을 찾아가 어려움을 설명하고 일체의 권한를 양도하기에 이른다. 김건수 동산고등학교 교장은 "유군성 선생이 학교 인가를 받고 교지를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며 "하지만 지속적 운영에는 스스로 한계를 느꼈고 먼 훗날 우리나라의 교육을 위해 중대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밝혔다. '동산 50년사'는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내가 학교의 설립자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벗어나 원대한 조국발전의 앞날을 내다보는 참되고 거룩한 모습은 이렇게 순수하게 살아 있었다"고 유군성 등 5명을 회고한다. 이 교육사업에 재산의 많은 부분을 내놓았을 유군성의 흉흉하면서도 대담한 말년은 '인천시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제 말기 통제시대에 들어서자 사업이 차츰 기울어 갔고 그리하여 매우 궁급한 가운데서 마쳤다. 사업장의 문을 내릴 때도 재산을 정리하면서 자식들만이 아니라 부리던 사람들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분배하는데 인색치 않았다." 고일 선생 역시 '인천석금'에서 유군성에 대해 "화재로 손해를 보았었고 미두도 실패는 했을망정 그의 이름은 향토인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고 밝힌다. 오늘날 모두가 유군성을 정확히 찾아내고, 이를 다시 새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일 선생의 얘기는 여전히 현재진행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2007-09-04 강승훈

[인천인물 100人·89]작곡가 최영섭

인천종합문화회관 앞 공원 한 편에 서 있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2000년 8월 15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은 작품의 탄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온 겨레의 절절한 국토 사랑 겨레 사랑을 어찌 막아설 수 있으랴 이 세상의 어떠한 이념도 어떠한 사상도 겨레보다 우선하여 있지는 못하는 것이니 언젠가는 다시 금강산 순례의 길이 열릴 것을 겨레는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 기도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해 시인으로서 작곡가로서 대성한 한상억, 최영섭 두 분 선생에 의해 아름다운 말과 율을 얻어 1961년 세상에 울려 퍼지니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다 …."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작곡가 최영섭(78)과 시인 한상억(1915~1992)이 공동 작업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중 한 곡이다. 강화 출신 두 예술가가 만든 이 칸타타는 '동해의 여명'과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비롯해 산·강·바다를 각각의 주제로 한 3곡, 이렇게 모두 11곡으로 구성됐다. 이 중 '그리운 금강산'은 산에 해당하는 노래 중 한 곡으로 산뜻한 가락과 애끊는 호소력으로 맵시있게 짜여졌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노 작곡가를 마주했다. 최영섭에게 2007년은 보다 각별한 해다. 1957년 그가 첫 작품을 발표했으니, 올해로 그가 음악을 만들어 온 지 60주년. "작곡 60주년을 기념해 올해 하반기 가곡 150곡,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전 24장을 수록한 작품집을 재출판하려 합니다. 때문에 작품 손질하고 교정보며 막바지 작업에 매달리고 있어서 최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네요."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화두는 자연스레 '그리운 금강산'으로 이어졌다. "1961년 KBS 측의 청탁을 받아 인천 숭의동 집에서 작품을 썼습니다. 한상억 선생의 시와 함께 해방 후 금강산을 구경하고 온 삼촌의 이야기에 담긴 심상 등이 작품에 잘 어우러져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즈음 실향민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모든 국민에 의해 불리며 '국민 가곡'으로 애창됐다. 또한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성악가 안젤라 게오르규, 볼쇼이 합창단, 미샤 마이스키(첼로)까지 이 작품을 음반에 수록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기념 쓰리(3) 테너(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공연에서도 불리며 세계인들에게 감동의 선율을 선사했다. 그는 1929년 강화군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오르간을 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찬송가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실력이 제법일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온 최영섭은 창영초교를 다니면서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인천중학 시절의 일화를 들려줬다. "당시 인천중 강당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음악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겐 절대로 못 건드리게 했어요. 하지만 저만은 허락해 주셨죠. 이후 피아노는 제 차지가 되었고 틈틈이 피아노를 닦고 연주했습니다." 당시 독자였던 그가 실제로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그의 재능을 알면서도 사회 통념상 음악가의 길을 한사코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를 믿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권한 것은 어머니 신수례(1908~2003) 여사였다.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지금의 최영섭도 없었죠. 어머니께선 '돈과 명예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독려해 주셨습니다.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죠." 어머니의 후원을 등에 업은 그는 1945년 서울 경복중으로 전학,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이후 고1 때였던 1947년 첫 작품인 가곡 '그리운 옛 봄'을 작곡, 이어서 피아노 환상곡 '해변', 피아노 모음곡 '절름발이 인형의 슬픔' 등으로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최영섭을 있게 한 신수례 여사는 1998년 정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1965년 활동을 위해 서울로 이사한 최영섭은 방송음악인이자 편곡지휘자, 또한 시간을 내 대학 강단에도 서며 어느 한 부분 소홀함 없이 일을 해 나갔다. 특히 KBS FM '최영섭의 클래식 살롱', KBS TV '우리들의 애창곡', MBC FM '나의 음악실' 등은 1980년대 클래식 음악팬이었다면 기억 저편에서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프로그램들이다. 그는 현재까지 40년간 이어지고 있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양파에 비견했다. "그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일과 사람, 명예, 금전적인 부분까지 모든 것을 얻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양파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벗기고 또 벗겨도 알맹이 없이 껍질만 남는 양파말입니다. 반면 인천에선 진정한 '나'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지역분들에게 받은 영향은 무척이나 컸습니다. 특히 한상억, 조병화 선생과의 만남은 제 작품을 특징화하는 요소로도 작용했습니다." 이런 그도 '음악'에 대한 아픔은 있다. 음악가로서 길을 걷는 것을 후회한 적이 딱 한 번 있단다. 30여 년 전 음악에 미쳐 가족을 돌보지 못했고, 이 탓에 그의 부인이 위암 말기였던 것을 챙기지 못해 그냥 세상을 떠나게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최영섭은 "가곡 200여곡, 합창, 기악곡, 오페레타와 오페라, 기관단체가 등을 모두 합쳐 500여 곡을 작곡했어요. 이제 제가 진정 걷고 싶었던 길을 가려 합니다. 김소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이는 것이죠. 그간 소월 시의 깊이를 좇지 못해 범접하지 못했는데, 이제 적당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간 제 작품의 특징인 향토적이면서 국민주의적 색채를 탈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최근 15년간 작곡한 작품들이 전체 작품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근래 창작욕이 샘 솟는 등 음악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합니다. 이제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몸이 다하는 날까지 음악과 함께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007-08-28 김영준

[인천인물 100人·88]애국계몽운동가 정재홍

지난 15일 제62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노무현 대통령과 바로 마주보는 자리에 선 정재홍(鄭在洪) 열사의 손자 해영(68)씨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목이 멨다. 집을 나설 때부터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대통령에게서 할아버지의 애국장(건국훈장 중 넷째 등급)을 건네받은 뒤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벌써 돌아가신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세상이 할아버지의 의로운 행동을 알게 된 겁니다." 정재홍 열사. 정 열사는 구한말, 인천에 사립교육기관인 '천기의숙'(또는 인명의숙)을 설립한 애국계몽운동가다. 또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지회장을 맡으면서 인천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했다. 특히 친일파 박영효의 귀국 행사장에서 국권침탈에 분개해 육혈포(권총)로 자신의 배를 쏴 자결한 애국지사다. 인천은 정 열사가 태어난 고향이 아니다. 정 열사는 서울 출신이다. 그렇지만 사재를 털어 교육기관을 세울 정도로 정 열사의 인천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럼에도 인천은 최근까지 정 열사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인천학연구원이 2005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김형목 박사에게 '정재홍 선생의 애국계몽운동과 의열투쟁'이란 연구과제를 주면서 비로소 재조명 작업이 시작됐다. 정 열사가 자결한 지 100여년 만의 일이다. 정 열사의 정확한 출생일은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자손들의 "1907년 자결할 당시 나이가 39~41세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는 추측으로 미뤄, 1866~1868년생인 것으로 보인다. 정 열사가 인천과 연을 맺은 것은 1890년대 후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 보관 자료에 따르면, 정 열사는 1897년 12월 31일 창립한 객주단체 '인천신상회사'의 구성원으로 기록돼 있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다. 개항장 인천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일본 사람들은 자국민이 인천에 이주할 수 있도록 황태자 결혼기념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에서 국민교육을 강화해 독립의 기초를 다지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런 취지로 1906년 대한자강회가 설립됐다. 이듬해 1월 인천에도 대한자강회 인천지회가 설립됐는데, 정 열사가 지회장을 맡았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의 활동은 관내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이었다. 정 열사는 같은 해 사재를 털어 인천 우각동(지금의 창영동)에 천기의숙을 세웠다. 천기의숙에선 단순 실력배양 차원의 교육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 "제령학교 뒤에 설립된 민간 학교는 인명의숙(천기의숙)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저 일진회와 투쟁한 자강회 인천지회장이며, 박영효를 암살하려다가 사상 팔변가란 시를 남기고 자결한 정재홍씨다. 이 학교의 특색은 정치 사상을 고취했다는 점이다"라고 적었다. 구한말, 인천에서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맞서 싸운 단체는 신상회사와 미곡상회였다. 이들 단체는 사립학교나 야학의 설립을 지원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정 열사에게 신상회사와 이 회사를 세운 서상빈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교육구국운동을 함께 벌인 동지였다. "신상회사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연동맹회도 그(정 열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황성신문(1907년 5월 3일)과 "서상빈은…(중략),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 정재홍과 함께 지회 운영도 주도하였다"는 대한자강회 월보(1907년)에도 잘 드러나 있다. 정재홍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은 '박영효 저격 미수사건'이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은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부지역 농상소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대서특필 보도했다. 이곳에서 고관대작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친일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가 열렸는데, 정 열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배에 권총을 쐈다. "금릉위 박영효씨 환영회를 베푼 사건은 다아는 바이거니와…(중략), 정재홍씨가 권총을 가지고 왔다가 자기 배에 대고 쏘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일반 회원들은 당황하여 정씨를 어깨에 메어 '대한의원'(대한적십자병원)으로 보내고 일반 회원은 여흥을 마치지 못하고 폐회하였다. 오후 9시에 마침내 숨을 거두니 그가 지사 정재홍씨이다. 슬프다! (제국신문 1907년 7월 2일자 제2445호)" 정 열사의 자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격렬한 저항으로 평가받는다.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엔 그의 저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1변)나라하고 상관된 공본되게 미운 놈 한매에 쳐 죽여서 이내 분풀이로다. (제2변)잘못쳐서 못 맞치면 속절없이 나만 죽네. (제3변)육혈포로 얼른 놓고 빨리되면 일 없도다. (제4변)육혈포를 당장 쏘았네. (제5변)남 죽이고 너 살자면 천 리에 못 되리로다. (제6변)죽이고서 나도 죽자. (제7변)한 사람 남 죽이고, 한 사람 나 죽으면 둘이 원수될 뿐이라. (제8변)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이 감동하며, 이 몸에 영화되고 국가에 행복일세." 정 열사는 박영효 저격미수사건 전에도 자결을 결심한 적이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였다. 그러나 홀로 남겨질 가족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해 자결을 실행하진 못했다. 정 열사가 자결한 뒤 유족으로는 부인 최성녀씨와 종화(당시 12세)·종원(당시 9세) 형제가 남겨졌다. 성녀씨의 오빠는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 목사다. 종원씨는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연극계의 중추인물로 꼽히는 정암이다. 종화씨는 아버지가 자결한 뒤, 한 중국인의 손에 이끌려 상하이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대학을 다닌 것으로 인천석금은 적고 있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명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임시 정부 요인으로 있다가 광복을 10년 앞둔 51세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 열사 가족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는 학계의 지적은 이 때문이다. 정 열사의 자결은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형목 박사는 정 열사에 대한 연구자료에서 "그의 의거는 곧바로 젊은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종양위를 전후한 결사회 활동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인천항 주민들은 일본인 가옥에 대한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정 열사 자결이) '공립신보'에 보도됨으로써 해외 한인사회는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잊혀져가는 민족애·조국애를 분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했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정 열사는 인천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늦었지만 그의 의로운 행동이 조명받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2007-08-21 김장훈

[인천인물 100人·87]시인·언론인 김차영

김차영(金次榮·1922~1997)은 1940년 대를 인천에서 보낸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강화 길상면 출신의 그는 당시 이름을 날렸던 문인 임화(林和), 오장환(吳章煥), 현덕(玄德), 배인철(裵仁哲)과 교류하며 문학적 자양분을 쌓았다. 1945년 11월에는 지역 문인들과 힘을 모아 동인지 '문예탑'을 발간하기도 했다. 나중에 대중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한 시인 윤기홍(尹基洪), 동화작가 우봉준(禹奉俊),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韓相億) 시인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는 그동안 최초의 문예지로 알려진 '예술부락'보다 2개월 앞선 것이다. 또 김차영은 언론인으로서 첫 발을 인천지역 최초 일간지 대중일보에서 시작했다. 당시 대중일보 편집국장은 극작가 진우촌이었다. 인천에서 그 20대 청년이 남긴 발자취는 작지 않다. 하지만 그 흔적을 더듬어 찾는 건 쉽지 않았다. 1991년 '학산문학' 창간 때 김차영과 좌담했던 윤영천 인하대 교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수소문 끝에 김차영과 1950년대 동인활동을 했던 김규동(81) 시인에게서 소한진(70) '문예한국'주간을 소개받았다. '문예한국'의 전신은 '시와 의식'(1975년 발간)으로 모더니즘 수용잡지를 표방했다. '문예한국'은 1997년 봄호 표지작가로 김차영을 선정, 그의 시 10편과 시론 1편을 실었다. 지난 11일 오후 1시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주택 3층 서재에서 소한진 주간을 만났다. 소 주간은 김차영과 약 30년 동안 친분을 가졌고,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 조치원에서 만났다고 했다. 김차영 얘길 꺼내자 소 주간은 집안 이곳 저곳을 뒤진 끝에 '문예한국'1997년 봄호를 찾아 내밀며 말했다. "1974년 김차영 선생과는 동양통신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내 첫 시집을 들고 청진동에 있는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그 전에도 몇 번 만났지만 정식으로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지요. 50대 나이였지만 키도 크고, 멋쟁이였어요. 소주 2병 정도는 마셨구요. 선생은 동양통신에서 20년, 상공회의소에서 10년 정도 근무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퇴직할 때까지 인근 술집에 단돈 100원 외상이 없었어요. 한 번은 청와대 부근에 있는 집에서 점심을 대접한다고 저를 초대한 적이 있었어요. 70평이 넘는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런데 토스트 한 조각 주고 말더라구요. 그런 점심대접은 처음이었어요." 이런 김차영은 해방 이후 국내 최초의 문예지를 인천에서 만들었다. 그는 당시를 1991년 있었던 '학산문학' 창간좌담에서 소상히 회상한 바 있다. "광복되던 날 밤에 저는 쇠뿔고개(牛角洞, 현 창영동) 조금 못미쳐 영화학교(永化學敎)에서 철로변으로 가는 쪽에 있었던 송종호의 집으로 갔어요. … 아마 그날에는 8~9명 정도 모였을텐데, 거기서 동인지 발간이 발기되었고, 약 일주일 뒤에 지금 기독병원 아래에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신문화협회'라는 걸 결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약 한 달간이나 고생한 끝에, 골필로 써가지고 '문예탑'·'동화세계' 등을 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모두 미쳤던 거지요." 김차영은 같은 해 12월께 인천문학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인천 최초 일간지로 1945년 10월 창간된 대중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김차영은 인천에서 고등 보통학교 입시 재수를 했고, 당시 월북 소설가 현덕(玄德·1909~?)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현덕은 인천 부근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동문학 작가이고, 인천문화재단은 최근 그를 '2007 대표인물 조명사업 대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현덕은 제가 일찍이 사귀었습니다. … 그가 '남생이'를 쓸 무렵, 저는 그때 고보 입시를 준비하던 재수생이었는데, 지금 자유공원 아래 박물관 자리에 있던 도서관엘 함께 오르내리면서 그를 볼 기회가 잦았습니다. … 도서관 문을 나서선 도산동(桃山洞), 지금의 도원동 산비탈 빈민소굴 같은 데로 줄곧 걸어 다녔습니다." 김차영은 현덕을 통해 월북문인 임화(林和), 박찬모(朴讚謨), 김태진(金兌鎭), 오장환(吳章煥) 등과 교류를 맺었고, 좌익계열 작가들과의 인연은 한국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김차영은 1941년에는 문예지 '신시대(新時代)'에 '야영(夜詠)' 외 5~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해 1월 창간된 '신시대'는 친일성향의 대중 잡지였고, 이 잡지에는 일본어로 된 글이 실렸었다. 그는 1940년대 초반 기차로 통학하며 서울서 학교를 다녔고,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일제시대 조선 엘리트들이 많이 갔던 도쿄대(동경제국대), 와세다대, 메이지대(명치대) 등 3개 대학에 비해 리쓰메이칸 대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히다치 제작소(日立製作所), 타나카공업주식회사(田中工業株式會社) 등에서 근무했다. 이런 이력에서도 드러나듯 김차영은 친일과 좌·우익을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김양수(74)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제 통치시기에는 학교나 기관 등이 일본 대학 유학생을 선호했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지요. 주로 동경제대, 와세다대, 명치대학 등을 다녔고. 이 대학교에 갈 실력이 안 되거나, 고학생들은 다른 학교를 선택해 다니기도 했어요. 김차영 선생도 이 두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와 학교 선생을 하지 않은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해요." 해방 뒤 김차영은 동인지 '문예탑'과 함께 '시와 산문'을 펴내는 등 본격적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1·4 후퇴로 인천을 떠나 부산에 내려갈 때까지 김차영이 보인 행적을 두고 김양수씨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다고 전했다. "김차영 선생은 해방 후 현덕을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레 좌파 문인들과 어울렸습니다. 훗날 서울서 만난 김차영 선생이 제게 이런 말을 했지요. 용동 술집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나가는 데 한 좌익 문인이 그에게 배인철은 속이 비었고 이경성이는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곧 숙청하겠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구요. 배인철은 시를 쓰는 청년이었고, 이경성은 시립미술관장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이 말을 들은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좌익 모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김차영은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좌익 계열 작가들로 구성된 조성문학가 동맹에 참여해 활동했다. 서울수복 후 조선문학가 동맹에서 활동한 시인 조병화, '그리운 금강산' 작사가 한상억은 '부역문인'이라는 이유로 청년단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지만 김차영은 피란민들과 함께 인천에 돌아왔다고 한다. 김양수씨는 이 말을 들려주면서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1951년 '1·4후퇴'를 겪으며 김차영은 인천을 떠나 부산서 피란 생활을 했고, '후반기(後半紀)' 동인에 참가해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차영은 동양통신 기자, 대한상공회의소 출판부장 등을 역임했다. 조봉제(80) 전 동아대 교수는 김차영을 '에고이스트'였다고 전했다. 조 교수는 "남 생각을 잘 안했어요. 자존심이 강했죠. 문단에서 적이 많았어요. 실력도 없이 문단에 기웃거리기만 하는 이들을 보면 사람 취급도 안했거든요"라고 말했다. 김차영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퇴직한 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작은 문구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청주에 있는 한 전문대학에 취직한 아들을 따라 내려갔다는 것 정도다. 그나마 소한진 주간의 말에서 김차영의 말년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쯤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김차영 선생은 조치원역 부근에 있는 15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어요. 집안 이야기를 일절 안 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왜 아들 집을 나와 혼자 사는지 알 수 없었지요. 일본에서 들여온 불경을 번역해 용돈벌이를 하셨어요. 특집(문예한국 1997년 봄호)을 내고 1~2년 뒤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차영은 해방 후 최초의 동인문예지 발간에 참여했고, 인천 최초 일간지 대중일보에서 근무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명망있는 문인들과 어울렸다.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대립, 그리고 전쟁, 산업부흥기 등을 거치면서 그가 걸은 발자취를 하나씩 찾는 작업은 곧 숨겨진 인천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2007-08-14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86]인천시의회 초대의장 이명호

6·25 전쟁 중인 1952년 구성된 인천시의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이명호(李明浩·1890~1968)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언뜻 생각하기에도 당대 최고 명망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변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고 이훈익 선생의 저서 '인천 성씨·인물고'와 인천시의회가 2005년 발간한 '인천광역시의회사' 정도에 짧게 언급되는 게 고작이다. 이들 책자에서는 이명호를 '대표적 인물', '선비', '전국 유일의 최장 동장 기록보유자', '인천의 산 역사', '재건 인천의 호프'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모두 극존칭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을까. 그나마 있는 기록마저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어떤 곳엔 태어난 연도가 1888년으로 나와 있기도 하고, 심지어 인천시의회사에 보이는 생년월일의 날짜도 잘못돼 있다. 7월30일생인데 7월31일로 돼 있는 것이다. 지난 5일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그의 셋째 딸 임숙(85)씨가 살고 있다는 경기도 안양시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임숙씨는 몸이 많이 불편하다고 했다. 이날 만난 이명호 의장의 외손자 김창현씨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어머님에게 조금 들은 게 전부"라고 했다. 이 의장은 아들이 없이 딸만 6명을 두었다는 얘기도 외손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외할아버지가 김찬삼 선생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고, 동산고등학교 지원 과정에서 두 분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그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나마 생생한 이모가 서울에 계시다고 알려줬다. 하루 뒤 다섯째 딸인 양숙(79)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명호 의장과 관련한 종전 기록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몇 가지 중요한 얘기를 해줬다. 6·25 전쟁 중에 인민군이 인천에 왔을 때 평소 행한 선행으로 지주였지만 화를 면했다는 것과 조봉암 선생이 농림부 장관을 할 때 단행한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소작농들에게 내어 줘야 했고, 세상을 떠났을 때 화장을 했다는 것 등이었다. 기존 기록엔 이 전 의장의 사망연도를 1970년으로 적고 있지만 양숙씨는 1968년 9월14일(음력 7월27일)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온유하시고, 대쪽같이 청렴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의 것에는 전혀 욕심을 내시질 않으셨습니다. 특히 재물에 대한 애착이 없으셨어요." 만석동과 송도 쪽에 땅이 많았다는 이명호 의장은 6·25 때 큰 곤욕을 치를 뻔 했단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지역주민들에게 베푼 일과 수도국산 달동네의 없는 사람들에게 잘 해준 일로 인해 그 화를 면했다고 양숙씨는 전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우리집으로 빨갱이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때 제가 그랬어요. 우리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수도국산에 가서 알아보고 오라고요. 그랬더니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이명호 의장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갈 처지에 있는 우리 젊은이들을 많이 빼돌렸다고 했다. 지주로서 일본인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공을 나중에 돌려받은 것이리라. 그는 또 조봉암 선생이 농림부 장관으로 있을 때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양숙씨는 기억했다.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 선생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딸의 설명이었다. 특히 조봉암 선생의 딸 호정씨와 양숙씨는 고등학교(인천여고) 동기동창이라고 했다. 양숙씨는 나중에 적십자사 인천지회장을 맡기도 했단다. 인천시의회사는 '제1편 지방자치시대의 개막과 인천시의회의 성립'에서 초대 시의원을 설명하면서 1953년 발행된 '인천시공보'에 나온 소개 글을 싣고 있다. 여기에선 이명호 의장을 '드높은 향기 풍기는 향토 인천의 산 역사'로 평가하고 있다. 1953년 1월17일자 인천공보는 이명호 의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당 63세로 현 시의원 중 최고령자인 초대 인천시의회 의장 이명호씨는 그야말로 인천의 산 역사이다.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등 유전무상(流轉無常)한 역사의 호흡을 인천이라는 공간 속에서 응시하여 온 씨는 명실공히 재건 인천의 호프인 것이다. 선천적으로 씨가 소유하고 있는 품격과 후천적으로 축적된 고결한 인격이 씨의 귀중한 인생경험과 아울러 높은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러기에 씨가 주재하는 의정단상은 늘 풍부한 인간미와 성실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의정단상의 이명호씨의 특징은 부드러운 어조와 인생의 달관에서 오는 태도가 있는가 하면 씨는 연설할 적에 늘 오른편 손을 허리에다 대고 있는데, 일부 인사는 숙환인 요통의 소치라 하지만 그것은 오류로, 대 인천의 무거운 짐을 쌍견(雙肩)에 진 씨의 상부의 중량이 너무나 가중하기에 어느 안정성을 기하려는 씨의 생활태도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앞으로 씨의 책무는 매우 무거우며 시민의 시대는 크다." 이 때 공보는 시의회 구성 이후 새해를 맞아 신년 연쇄 인터뷰 형식을 취해 시의원 개개인의 면면을 꼼꼼히 담았다. 당시 공보의 시의원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띄워주기 위주였다고는 하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은 짚을 수 있다. 28명의 초대 시의원 중 최고령이었다는 점과 개항기 격동의 공간이었던 인천에서 죽 살았다는 점, 인간미가 있었고 성실했다는 점, 그리고 고질적인 요통을 앓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이명호 의장이 상당한 재산가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가 재산가이자 명망가였다는 점은 이훈익 선생의 '인천 성씨·인물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천 토박이 가운데에도 손꼽히는 송림(松林) 이씨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인고(仁高)의 전신인 초창기 일어학교 출신이며 한학을 겸비한 선비였다. 일제 때 월미도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일인(日人) 설립자만 있는 가운데서 유일한 한국인 자격으로 이사가 돼 활약했다. 또한 인천 송림동의 오랜 연고로 해서 송림동 동장만 27년간 맡아 함으로써 전국 유일의 기록을 남겼다. 8·15 광복 후 인천 동명학원의 재단 이사로서 학교 운영에 뒷받침을 크게 하였고, 1952년 인천시지방의회가 구성되자 초대의원으로 당선됨과 동시에 초대의장으로 선출돼 지방의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의장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인천에서 이승만 계열에 속해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 선거과정을 기록한 김영일의 '격동기의 인천 광복에서 휴전까지'란 책에 비친다. "… 당시 이곳(인천)의 여당으로는 자유당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은 과거 '민족청년단' 출신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년 7월 말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저녁 필자는 최성길 동인천서장의 초대를 받고 서장관사에 가보니 약간의 음식준비가 되어 있어 술 몇 잔씩이 오고 갔는데 최 서장은 별안간 특청이 있으니 꼭 승낙해 달라는 전제로 내용인 즉,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 후보에 함태영 선생 체제의 인천지구 '선거사무장'이 되어 달라는 청이었다. … 그때 선거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이명호, 부위원장에 김경일(金京日), 사무장에 김영일(金英一)로 결정되었으며, 불과 1주간이란 짧은 시간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상부 의도대로 두 분이 모두 당선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대통령 선거의 지역 책임자는 그 지역에서 최고의 명망가 중에 뽑기 마련이다. 이명호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은 그가 당시 인천에서 이승만 정권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전 의장도 이 대통령을 얼마나 떠받들었으면 자신의 땅을 빼앗는 토지개혁을 실시해도 조용히 따랐을까 싶다. 이런 이명호가 초대 인천시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권의 힘이 지방의회에도 크게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있은 지 10여 일이 지난 1952년 5월5일에 처음 소집된 제1회 인천시의회에서 그가 초대의장에 뽑혔고, 부의장은 하상훈씨가 됐다. 하 부의장은 인천곡물조합장 등 지역의 유망단체 30여 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런 하 부의장을 눌렀다는 것은 이 의장의 당시 사회적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의장은 의원들을 향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3년 6월18일 제7회 인천시의회가 열렸는데, 의원 16명만이 출석했다. 그러자 이 의장은 개회사에서 "오늘은 전례없이 출석률이 좋지 못한데 출석하신 여러분께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마는 시민들로부터 부탁받은 우리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 의원께서는 항상 출석에 유의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송림동 219가 집이었던 이명호 의장은 사랑방을 송림동 사무소로 내줬다고 한다. 그러나 27년을 한 동사무소(송림동)의 동장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딸 양숙씨도 정확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주안 선산에 모셔져 있던 조상들을 화장했고, 자신도 화장할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게 양숙씨의 얘기다. 이명호 의장의 행적과 관련해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가 어떻게 일본인이 운영하는 월미도관광주식회사의 유일한 한국인 이사로 활동했는지와 미군정 시기, 그리고 시의원 이후의 활동이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어찌됐든 인천공보에 나오는대로 '인간 이명호'의 삶은 그 자체로 개항기 인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역정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분명하다.

2007-08-07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85]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1945년 11월 1일 얼굴에 채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25살의 청년에게 잊지 못할 날이다. 그동안 선원생활과 연안부두에서 작은 자동차 공구상을 하며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자신의 가게를 여는 날이기 때문. 청년은 인천 중구 해안동 4가3에 있는 허름한 창고 하나를 개조해 한진상사(韓進商社)란 간판을 내걸었다. 비좁은 공간에 미군이 쓰던 트럭 한대로 시작하는 사업이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나만의 가게를 갖게 된다는 마음에 뿌듯하기만 했다. 한국 수송(輸送)의 거목(巨木)이라 불리는 고(故) 조중훈(趙重勳·1920~2002) 한진그룹 회장의 첫 발은 이렇게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다. 지난 7월 27일 고 조중훈 회장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그가 처음 사업을 시작했던 중구 해안동 일대를 찾았다. 한진그룹의 모태가 된 옛 한진상사 건물은 인천시 중구 해안동 2가 9에 자리잡고 있다. 그간 인천에서 진행된 토지구획사업으로 주소는 바뀌었지만 건물 자체는 원형 그대로다. 한진상사 자리는 기계식 저울을 만드는 인일공작소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인일공작소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쇳가루와 기름 냄새가 섞여 코를 자극했고 군데군데 쌓여 있는 기계류와 고철 더미가 눈에 띄었다. 60여평 남짓 돼 보이는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지금의 한진그룹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2대째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염태진(65)사장은 바로 이 곳 해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천 토박이다. 81년 사망한 그의 아버지가 인일공작소란 간판을 1945년 해방 이전에 내걸었으니 한진상사보다 먼저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염 사장은 "우리가게 바로 옆에 한진상사가 붙어 있어 아버지는 물론 나도 조중훈 회장과는 가족처럼 지냈다"며 "6·25전쟁 때는 조 회장 가족과 우리 식구 모두 지금의 주안으로 피란을 같이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염 사장이 기억하는 조 회장은 소탈하고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려면 외형상 듬직해 보여야 한다며 큰 솥에 돼지고기를 넣어 삶아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이를 염 사장 가족과 나눠먹기도 했으며 인천앞바다에서 잡은 민어와 농어 등으로 끓인 매운탕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조 회장은 신용을 목숨으로 여기고 한진상사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염 사장은 '미스터 신용'으로 불린 조 회장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6·25 전쟁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소유했던 트럭과 장비 등 모든 것을 군수품으로 징발당한 조 회장은 다른 사람의 트럭을 임차해 한진상사를 운영해야만 했다. 인천 곳곳에 흩어져 있던 트럭 소유자들을 모아 자동차에 HJT란 한진상사 마크를 달고 인천항을 통해 전달된 미군 캔 맥주 등의 군납품을 부평 미군기지와 의정부 일대로 수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정부로 물건을 배달하러 간 트럭 기사가 중간에 물건을 빼돌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전국이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트럭 기사가 다른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조 회장은 이 소식을 접한 후 제 시간에 물건이 도착하지 않으면 미군으로부터 얻은 신용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고 생각해 한밤중에 직접 지프를 몰고 의정부로 가 없어진 트럭 기사를 찾으러 동분서주 했다고 한다. 결국 이 트럭 기사는 조 회장의 손에 잡혔고 물건도 제 시간에 미군에 전달될 수 있었다. 염 사장은 "조 회장이 6·25 후 신뢰를 쌓았던 미군 초급 장교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국방부 고위 관리로 진급하면서 한진이 베트남에서 물류사업을 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렇듯 신용과 성실함으로 한진을 일궈냈다는 게 염 사장의 기억이다. 조중훈 회장은 1920년 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선친을 비롯한 할아버지 등 선대는 대대로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휘문고보 1학년을 중퇴하고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수료한 후 1937년 화물선 선원생활을 시작한다. 첫 직장이었던 것이다. 선원 생활을 하며 전 세계를 돌아본 청년기 경험이 향후 조중훈 회장이 운송, 항만, 항공 등 물류사업에 뛰어들게 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가 인천에서 생활한 것은 1945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10여년이었지만 이 시절 인천과의 인연으로 지역 대학인 인하대학교를 인수하고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참여하는 등 많은 사업을 인천에서 벌이게 된다. 그가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는 그가 왜 인천을 첫 사업의 근거지로 택했는지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조 회장은 자서전에서 '인천은 경부·경의선 철도의 개통으로 서해안 개항장으로의 우위를 부산항에 빼앗긴 느낌이 있었지만, 서쪽으로 중국과 상대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중국무역 기지로서는 단연 수위(位首)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항내(港內)가 광활하고 수심이 깊으며, 크고 작은 섬들이 내외항(內外港)을 감싸고 있어 풍파(風波)와 동결(凍結)이 적은 천혜(天惠)의 항구였던 것이다'라고 썼다. 조중훈 회장은 이렇게 인천을 수입항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항구도시로 평가해 자신의 사업 근거지로 삼았다. 특히 그는 인천에서 전국 최초로 인천~서울을 오가는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해 당시 인천 시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 인천에서 서울을 오갈 수 있었던 교통수단은 인천역에서 영등포역 등을 잇는 기차와 강남여객을 비롯한 몇몇 버스가 전부였다고 한다. 서울을 가는 시민들은 매일 콩나물 시루같은 만원 버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를 본 조 회장은 1961년 8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지정좌석 방식의 버스를 인천~서울간 노선에 도입하게 된다. 주한 미군에서 2년마다 교체하는 통근용 일제 버스를 불하받아 시작한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기존 업계의 반발로 번듯한 새 도로를 놔두고 서울에서 출발, 김포 사거리 뒷길을 따라가다 배다리를 거쳐 동인천으로 나가는 비포장길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의 끈질긴 협상 끝에 6개월 만에 새롭게 포장된 경인가도를 달릴 수 있는 통행권을 정부로부터 따냈고 인천시민들은 편하게 앉아 서울을 오갈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됐다. 향후 이 좌석버스 사업은 인기를 얻어 조 회장이 한진고속을 만들 수 있게 한 견인차 역할을 한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을 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기차 대신 버스를 많이 이용했는데 사람이 많아 짐짝처럼 실려 다녔다"며 "그나마 조 회장이 만든 좌석버스 때문에 서울 가는 길이 편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렇게 조중훈 회장은 인천에서 갈고닦은 사업 기반을 통해 1966년 베트남전쟁 당시 미 군수품 수송용역계약을 체결해 제2의 도약기를 이뤘고 이를 발판으로 1967년 동양화재보험을 인수하고 1968년에는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해 당시 국내 3대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가 대한항공을 맡게 된 것은 어쩌면 '한진'이라는 이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세계를 향한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과 항공사는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당시 KAL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뒤처진 회사였다. 보유 항공기 8대. 이 중 DC-9 제트기를 제외하면 수명이 다해 더이상 날기 어려운 비행기가 대부분이었다. 금융부채 27억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도 경영하기 어려운 이 회사를 조 회장에게 떠넘겼다.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 보는 게 소망이라면서. 청와대 독대자리에서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한참을 망설이던 조 회장은 KAL을 맡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KAL은 세계 유수의 항공사가 됐다. 1945년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트럭 한대로 시작해 지금의 글로벌 한진을 일궈낸 고(故) 조중훈 회장. 옛 한진상사 자리인 인일공작소의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맡았던 고철과 기름 냄새가 지금의 한진그룹을 있게 한 조중훈 회장의 역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역한 쇠붙이 냄새가 향기로 남는 듯하다.

2007-07-31 김명호

[인천인물 100人·84]인천 최초 치과개원 임영균

>84< 인천 최초 치과개원 임영균 24일 오전에 찾은 인천시 동구 배다리의 옛 '인천양조장' 건물은 내부 수리를 하느라 부산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곳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술을 다시 빚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인천의 유명 문화단체인 '스페이스 빔'이 이곳에 둥지를 새로 틀기로 하고 리모델링을 하는 중이었다. 이 인천양조장 건물 바로 옆에는 80년 된 한옥이 한 채 있다. 인천 최초로 치과의원을 낸 임영균(林榮均·1904~1966)의 집이다. 지금도 그의 며느리 주현숙(72)씨와 손자 상호(50)씨 가족이 살고 있다. 집이 양조장과 붙어 있는 것은 바로 임영균이 양조장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임영균의 이력은 참으로 다양하다. 치과의사이면서 양조장 사장에 그친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인이었고, 언론인이었다. 또 로타리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런 그의 다양한 삶의 궤적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기록된 게 없다. 집안 식구들도 희미한 기억만을 떠올릴 뿐이다. 가장 가깝게 지냈다는 김관철(90) 지성소아과 원장도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김 원장은 임치과 임영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왔다는 물음에 "치과의사뿐만 아니라 굉장히 유명한 분이다"라면서 며칠 내로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 주겠다고 했으나, 연로한 탓인지 임영균에 대한 뚜렷한 행적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그는 다만 "임영균 원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었고, 과거 지성소아과를 운영할 때 무료로 건물을 임대해 주기도 했다"면서 고마워했다. 손자 상호씨는 "할아버지는 밖에서 하시는 일을 집안에서는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40년 가까이 한 집에 살았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에 대해 아시는 게 많지 않았다"고 했다. 임영균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고일 선생이 1955년 펴낸 '인천석금'에 있다. 이 책의 인천 문화 운동사 편에만 임영균의 이름이 문학, 연극, 신문 등 세 군데나 등장한다. 당시 임영균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고, 또 직접 참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다음과 같이 임영균을 언급하고 있다. 그 첫째가 개항 이후 인천의 최대 엘리트 집단으로 불리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부분이다.'인천 문화 운동사의 첫 장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열었다. 한용단의 어머니 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 청년을 아들로 탄생시켰던 셈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운동경기를 내세웠으나,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을 펼쳤다. 정노풍, 고유섭, 이상태, 진종혁, 임영균, 조진만과 필자는 문학 동호인으로서 습작이나마 등사판 간행물을 발행했었고,…' 이때는 1917년 이후 서울 YWCA중학에 다닐 때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얘기하고 있듯이 어린 임영균은 독립운동도 직접 펼쳤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통신망을 절단하고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죄명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 문학에만 심취했던 게 아니다. 인천석금에는 그가 연극과 무척 깊은 연관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인천의 극(劇) 연구와 공연 단체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칠면구락부'의 출현이다. 그 부원은 비록 몇몇 동호인이었으나, 인천 연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토월회의 무대 장치가 원우전, 노련한 영화 배우이자 연출자인 정암, 극작가 진우촌과 그 외 임창복, 임영균, 한형택, 김도인, 필자 등이 간부진이었다. '칠면구락부'가 조직되기 전의 인천 연극 운동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별다른 목적 의식이 없어 이따금 청년들에 의해 공연을 가진 데 불과했다.' 정암, 진우촌 등은 우리나라 초창기 연극계의 중추인물이다. 임영균은 이들과 함께 연극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영균은 지역 언론 발전을 위한 일에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석금에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현재 발간되는 '주간 인천'은 순 민간인의 향토지로 임영균 군이 발행인이고, 대중일보와 인천신보에서 다년간 종사했던 김응태 군이 편집 책임자이며, 반민특위에서 엄정한 판단을 내렸고 청년 단체와 정당에서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던 권성오 군이 주간이다.' 신문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순수 향토지를 경영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언론 종사자들과 말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1950년대 후반에 경기매일신보(문)를 설립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며느리 주씨는 "해방 이후 언론인으로 신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막내 동생(임근수)의 권유로 경기매일을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때 아버님은 송수안씨를 부사장으로 앉혔다"고 말했다. 송수안씨는 대중일보의 발행인을 지낸 인천언론계의 대부 격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해방 이듬해 대중일보를 만들었던 송수안은 1950년 9월 사장으로 취임하고 제호를 '인천신보'로 변경했다고 한다. 인천신보는 당시 전쟁상황을 보도한 유일한 지역 신문이었다. 한때 부산으로 피란을 가기도 했던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이 성립된 뒤 인천에서 다시 신문을 제작한다. 1959년 9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다시 1960년 7월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 여기서 말하는 경기매일신문과 임영균은 분명히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씨는 "아버님이 경기매일을 설립하시고 2년 정도 있다가 경영이 제대로 안돼 언론을 잘 아시는 송수안씨에게 넘긴 것으로 안다"면서 "경기매일은 이후 송수안씨의 아들 용호씨가 맡아서 했는데, 신문이 통합되면서 화병으로 용호씨는 세상을 떴다"고 회상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임영균은 언론사를 두 개 설립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인천석금에 나오는 주간 인천은 1954년에 법인 등록을 했다. 고일 선생이 당시 상황을 기록했으니 틀릴 리는 없는 것이다. 또 10여 년이 지난 뒤에 경기매일신문을 세웠다가 이를 송수안씨에게 넘겼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가족들은 먼저 있었던 주간 인천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있고, 나중의 경기매일신문 부분만을 기억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영균이 경기매일신문을 설립하게 했다는 동생 근수씨는 우리나라 신문학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연희전문을 나와 배재중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있었으나 해방 이후 언론계에 투신, 영문판 코리아타임즈 기자를 했다. 또 외무부 의전과장도 역임했다고 한다. 1950년대엔 서울신문사 상무이사도 했다. 홍익대에서 신문학과 조교수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신문학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전하는 임영균 선생의 이력은 간단하다. 영화학교를 졸업하던 1915년에 잠시 취업했다가 1917년 서울 YWCA중학에 입학했고, 3·1운동 때 투옥됐다. 1922년에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치전에 입학했다. 1926년에 치전을 졸업하고, 그 해 서울대학병원에 취직했다. 이듬해 인천에서 '임치과'란 이름의 첫 치과병원을 개원했다. 그리고는 1966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물론 경기도 치과협회 회장, 인천 로타리클럽 회장, 경기매일신문사 설립(1956~1957) 등의 사회활동 경력도 있다. 임치과 개원 이후의 상세한 활동 내역이 없는 것이다. 임영균은 치과의사들 사이에선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게 분명할 만큼 활동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 경기도 치과의사회 회장을 맡았던 김성우씨는 한 기고에서 '회보가 창간될 초창기만 해도 구강보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극히 저조하였고, 도회나 회원들도 다양한 회무를 수행할 만큼 여건이 좋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초대 회장인 인천 출신 임영균 회장은 평소 도회 소식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A4 4면의 경기도치과의사회보를 최초로 발간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대 집행부를 거치면서 회보 내용과 편집에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임영균 선생은 어디를 가나 소식지 등 '언론'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임영균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갑득이었다고 한다.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밑으로 호적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의 큰 아들은 임명진(70) 전 대사다. #임영균치과와 인천양조장 치과의사 임영균이 양조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조장 집 무남독녀를 부인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 최정순 여사는 지난 해 세상을 떴다. 동덕여대의 전신인 동덕고녀를 다니다 임영균 선생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고 한다. 최정순 여사의 집안이 양조장을 했다고 한다. 손자 상호씨는 "양조장 이름을 인천양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양조장이 인천에서 가장 먼저 법인 등록을 했기 때문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지금은 부평으로 터를 옮긴 배다리 인천양조장의 규모는 무척이나 컸다고 한다. 직원만도 20~30명이나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며느리 주현숙씨는 "아버님은 명의만 양조장 대표로 돼 있었지 양조장 일에는 크게 관여하시지 않았다"고 했다. 양조장 일은 직원들이 다 알아서 했다는 얘기다.

2007-07-24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83]국내 첫 도선사 유항렬씨

인천항의 상징 시설물인 갑문에는 관제탑이 바라다보이는 친수공간 한 편에 높이 3 너비 80~100㎝가량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1984년 12월 21일 한국도선사협회가 세운 도선사 기념비(導船士 記念碑)다.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 기념비는 고 유항렬(劉恒烈) 도선사가 1937년 5월 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항에서 도선 업무를 개시한 것을 기념하고 또한 1957년 11월 22일 도선업무 수행 중 순직한 김선덕(金先德) 도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를 건립하다'. 비문의 주인공인 도선사 유항렬(1900~1971.12).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갑종 선장이자 도선사로 인천항은 물론 근대 국내 해운계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20년대 후반~30년대 초 일본에서 유럽과 북미항로 항해사로, 30년대 중반에는 인천에서 중국을 오가는 상선의 선장으로 망망대해를 누볐다. 제2차 대전의 광풍이 인천항을 휩쓸던 40년대 암울한 시기와 해방 직후 및 6·25를 거쳐 60년대 경제성장 시기까지 도선사로서 그는 인천항을 묵묵히 지켜냈다. 도선사를 천직으로 여겼던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사명감은 그가 마지막 도선을 마친 뒤 가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가 숨지기 1년 전인 1970년 11월 21일 팔미도에서 각종 잡화를 가득 실은 미국 국적의 1만급 상선 하와이호를 인천항 내항까지 도선한 뒤 토로한 심경이다. 유항렬 선생은 1900년 11월 22일 충남 공주군 공주읍 교동 51에서 태어났다. 공주 공립보통학교와 일본 나고야 중학을 거쳐 일본 동경고등상선학교에 입학한 뒤 1925년 3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일본에서 유럽과 북미 항로를 오가는 상선회사에서 2등 항해사로 일하다 1930년 귀국한다. 귀국 후 상하이 항로에 취항하던 평안환(2천t) 등에서 선장으로 일하던 그는 1937년 5월 인천항 도선업 면허를 획득한다. 이후 1970년 11월 21일 마지막 도선할 때까지 그는 34년간 3천척가량의 각종 선박을 안전하게 인천항으로 입·출항시켰다. 그는 30년이 넘는 도선사 생활 중 가장 보람이 있었던 기억으로 1947년 미 화물선 리퍼블릭호(2만5천t) 등 구호물자 등을 실은 군함과 화물선 50여척을 인천항에 입항시킨 일을 꼽았다. 구호물자를 실은 선단은 심한 풍랑 때문에 상륙을 못했다고 한다. 육지에서는 물자 고갈로 난리를 겪고 있었지만 속수무책. 그 당시 심경을 그는 이렇게 밝혔다. 또 1·4 후퇴 당시에는 도선사라는 책임 때문에 인천항에 있는 모든 선박을 안내해서 출항시킨 다음 최후로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선사는 위험하지만 고수입 업종이다. 그가 타계하기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일화를 보면 믿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정도다. 보도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그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직을 제의받았고 또 4·19 직후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에서는 해양대학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에 대해 그는 한 언론인터뷰에서 솔직히 털어놨다. "난 바다를 떠날 생각도 없었지만 내가 장관을 하면 어떻게 먹고 삽니까? (거짓말하는 재주가 없으니까)장관 월급이 얼마요? 파일럿(도선사) 노릇하는 것만 못합니다." 고수입 덕분에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근면성실하고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10남매 중 넷째 며느리인 정경희(60)씨는 "식구들과 외식을 하면 자식들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 아버님께서는 오므라이스만 드셨어요. 가장 저렴한 음식이었죠. 옷도 작업복을 즐겨 입으셨어요. 당시 주안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벌레가 먹거나 상처가 난 것은 항상 아버님이 드셨다고 해요"라고 회상했다. 근대 해운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련 업·단체 및 지역사회에서의 관심이나 재조명은 아직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일제 강점기 수탈과 전쟁 수행을 위한 창구로서, 또 경제성장기 수출입 무역항으로 성장해온 인천항. 도선사 유항렬은 그 역사발전 과정에서 큰 획을 그었지만 지금 그에 대한 업적과 평가는 너무 초라하다. ■ 인천 중구 내동 '유항렬 주택' 인천시 중구 내동 143의 1에 위치한 '유항렬 주택'은 근대 건축물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 지어졌다. 대지면적 223.47㎡에 건축면적은 115.37㎡. 유항렬 도선사의 후손들이 번갈아 거주하다 10여년 전부터는 방치돼 왔다. 유항렬 도선사의 4남 부부가 내년부터 다시 거주하기 위해 현재 내부 수리가 한창이다. 건축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문틀이 전혀 변형되지 않을 정도여서 내부 수리공사 관계자들이 놀라 입을 벌릴 정도다. 현대식 붙박이장을 비롯해 채광과 통풍을 조절할 수 있는 이중 덧창 구조도 이채롭다. 조형미도 뛰어나 창호는 벽돌아치를 틀고 현관은 원주를 세웠다. 2층에 있는 베란다는 남쪽이 아니라 서쪽인 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유항렬 도선사가 집에서 망원경을 통해 인천항에 입항할 선박이 오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쉽지만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다. ■ 도선(導船)이란 ? 항만·운하·강 등의 일정한 도선구(導船區)에서 선박에 탑승해 해당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안내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선박이 아닌 500t 이상의 선박과 국제항해에 취항하는 500t 이상의 우리나라 선박 등은 해양수산부령이 정하는 도선구에서 해당 선박을 운항할 때에는 반드시 도선사를 태워 지시를 받게끔 강제도선 규정을 두고 있다. 6천t 이상의 선박에서 5년 이상 선장으로 근무해야 도선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231명의 도선사가 활동 중이고, 인천항에는 52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도선사협회 자료 등에 따르면 도선사의 역사는 기원전 1천년께까지 거슬러올라가 고대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부근)의 '다니아'라는 항구에서 도선서비스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도선이 이뤄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신라시대 일본의 '유당사선(630~804년)'이 한반도 남해안을 통과할 때 도선사가 승선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현물로 거둔 조세를 선박으로 운항하는 '조운(漕運)'의 귀선 시 선박마다 도선에 능한 자 2~3인을 승선시켜 선박마다 지휘하게 하라는 규정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선서비스가 일본인에 의해 이뤄졌고 한국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1945년 해방 직후 일본인 도선사가 모두 떠난 뒤 인천항에서는 유항렬 도선사만 있었을 정도였다.

2007-07-10 김도현

[인천인물 100人·82] 맏딸 계성씨가 본 조석기 교장

"구두 한 켤레로 거의 반생을 사셨습니다. 아버님은 오로지 '교육'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던 분이셨습니다." 백파 조석기 교장의 장녀 계성(75·수원시 영통구 영통동)씨는 선친을 청렴결백과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조씨는 "당시 아버님의 적은 월급으로 7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어머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칭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교사들은 적은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가기 빠듯했어요. 그래서 일부 교사들은 적은 월급을 보충할 요량으로 반 아이에게 개별 과외수업을 지도하기도 했지요. 일종의 부수입인 셈인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관행으로 묵인됐어요. 당시 창영초교의 어떤 교사도 과외수입을 올리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 아버님은 대로하며 꾸짖었습니다. '교사가 교권을 바로 세우지않고 돈때문에 학부형에게 굽신거리면 더이상 선생을 하지 말라' '배다리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백파가 15년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살았던 창영초교의 좁은 사택에는 9식구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부인 김중구(200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지만 6·25때 사망한 남동생 소생의 조카 2명과 가난한 제자 1명이 더해 7명의 아이들이 좁은 사택에서 북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씨는 "아버님은 대한제국 말기에 난 사람이지만 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뻗거나 누울 만큼 자유스러운 집안 분위기를 만들었다"며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지않고 화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고 술회했다.

2007-07-03 이창열

[인천인물 100人·82]창영초교 교장 백파 조석기

인천 창영초등학교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실험장이었다. 학생들이 만드는 어린이 신문이 국내 최초로 생겼으며, 학생용 골프장과 교사용 당구장, 어린이은행 등도 50여년 전에 이미 창영초교엔 있었다. 이때 학생들은 각종 클럽활동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창영초교 학생들이 맨 처음 조직했다. 설마 그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싶은 이 모든 일은 한 명의 교장에 의해 이뤄졌다. 백파(白派) 조석기(趙碩基·1899.12.9~1976.9.28). 창영초등학교는 학생들이 집에서 신고 온 신발 채로 교실을 드나든다. 실내화로 바꿔 신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는 벌써 조 교장이 50년 전에 시행한 것이다. 전쟁 직후 실내화를 장만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아이들이 맨발로 교실바닥을 돌아다니다 거친 마루에 다치기라도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조 교장은 집에서 신고 온 신발 그대로 교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학생들이 신문기자도 되고, 용돈을 은행에 넣어 스스로 관리하고, 다양한 클럽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게 했던 오래 전의 창영초교 모습은 지금 왜곡된 우리 교육 현실과 극명히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백파는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불린다. 백파는 1899년 12월9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원면 주곡동에서 한양 조(趙)씨의 4남3녀 중 맏이다. 고향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왔다. 이후 10여년간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했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지금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북의전을 2년간 다니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교육자의 길이 천직임을 깨닫고 의전을 중퇴하고 만다. 백파는 1930년대 당시 격월간으로 발행됐던 문예지 '시원(詩苑)'에 시를 지어 발표할 만큼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기도 했다. 1935년 2월 시원 1월호에 발표한 백파의 시 '잔디의 유언'은 이렇다. '늦은 가을/쌀쌀한 바람이 벌판을 지나거든//말러진 나의 등에 불놓아 주소//어지러운 옛기억을 잊고/값헐한 환상을 버린 다음에/따뜻한 대지의 가슴 속에서/침묵의 겨울을 쉬이려 하는/마지막 남기는 부탁이외다' 그는 경기도 부천 소래초등학교와 강화도 선원초등학교에도 있었고, 서울 매동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의 첫 교장 부임지는 강화도 서곶 정상공립초등학교였다. 1943년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은 당시 일제시대의 잔재와 사회 혼란을 슬기롭게 수습할 수 있는 해방 이후 첫 창영초교 교장으로 백파를 택했다. 백파는 1907년 창영초교 개교를 기준으로 제10대 교장에 해당된다. 그는 1946년 부임 이후 5·16이 일어난 해인 1961년까지 15년 동안 근무했다. 아직도 창영초교의 최장수 교장으로 남아 있다. 백파는 15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창영초교를 해방 이후 근대교육의 온전한 산실로 만들고자 했다. 어린이들에게 자율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집회활동(대의원회·임원회 등)이 가능토록 했다. 또한 어린이신문 발행, 어린이방송국, 어린이우체국, 어린이은행, 야구·축구·수영·연극부 등 각양각색의 클럽도 만들었다. 각기 소질에 맞는 클럽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린이신문은 6·25가 끝난 해인 1953년 10월 창간됐다. 지금의 대학신문과 같은게 54년 전에 초등학교에서 발간된 것이다. 이 신문은 국내 최초의 교내 어린이 신문으로 기록됐다. 주간으로 4면 가량이 발행됐던 이 신문은 어린이 기자들이 학교 안팎을 돌며 직접 취재하고 편집했다. 조판과 인쇄는 교내 인쇄소에서 맡았다. 인쇄소까지 뒀던 것이다. 이 신문은 매주 월요일 아침 일찍 아이들 책상 위에 놓여졌다. 창영초교 45회 졸업생인 이인석(63) 인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이 때 어린이신문 기자와 연극부 활동을 했다. 5학년이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매주 신문사 담당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편집회의도 하고 취재했던 기억과 함께 비록 누더기 옷이지만 세계 각국의 전통의상을 만들어 무대에 올랐던 생각이 난다"고 회상했다. 창영초교는 1956년 8월에 열린 전국수상경기대회에 참가해 평영 100에서 1·2·3등을 모두 휩쓸만큼 당시 전국수영대회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왕성한 클럽활동의 덕이었다. 백파는 어린이은행을 설치한 동기로 "개인소비생활을 균형있게 하는 동시에 경제 자립을 위하여는 국민의 저축 정신을 높여 주어야만 한다. 오늘의 학교는 실천적 교육을 지향하여 보다 나은 실천인을 양성하는데 있다"며 "다액의 저금액을 나타냄이 유일의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경제인을 육성하기에 어린이은행이 필요한 것이다"고 밝혔다고 한다. 당시 창영초교 운동장에는 606㎡ 규모의 '베이비 골프장'도 만들어졌다. 신축 교사(校舍)에는 당구대도 갖다 놓아 교사들이 즐기도록 했다. 당시 교감으로 함께 재직했던 최태호(아동문학가) 전 춘천교육대학장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걱정하는 교사들의 지적에 백파는 "(골프는)어린이들이 할 것을 어른들이 한 것 뿐이지, (당구는)선생이라고 하지 말란 법 있소? 나도 이제는 30은 치는 걸"이라며 유쾌한 위트로 받아 넘겼다고 한다.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백파가 있던 창영초등학교다. 1956년 당시 보이스카우트 세계연맹 총재였던 스파라이장군이 그해 12월 창영초교를 방문했던 것이 계기다. 서성옥(73·남양주시 도농동) 전 서울시교육위원회 의장은 백파가 창영초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평교사로 근무했는데, 그는 "백파 선생님은 이 기간동안 미군청의 조선교육심의회의 회원과 대한교육협의회 부회장, 경기도교육협의회장, 인천초등교육회장, 인천교육연구소장, 한글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며 "해방 후 격동하는 현대사에서 교육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고 미래의 아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생활교육을 강조하신 한국교육의 건국자"라고 평가했다. 제자들과 지인들은 1959년 백파 선생의 환갑을 맞아 발간한 기념 문집 '노변야화'를 묶어냈다. 이 문집은 1970년대 당시 '주간 인천신문(경인일보 전신)'과 교육전문지인 '새교육'에 발표했던 논문, 1955년 터키에서 열렸던 제3회 세계교육자대회(WCOPT) 등에 참가했던 기행문 등으로 엮어졌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노변야화'의 서문을 썼다. 외솔은 서문에서 "내가 재작년 창영초등학교 창립 50돌(1957년) 기념식에 참석하였을 적에 창영학교의 바깥스런 발전상과 아낙스런 진보상을 듣보고서 님의 교육공로가 그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의 큼에 감탄 경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조 교장은 노변야화에 실린 '노교사(老敎師)의 넋두리'에서 교육현실에 대해 "중학교 입시가 이제는 거지반 끝난 상 싶다. 좁은 문은 의연히 어린 가슴을 조리게 했었고 이에 따르는 희비극이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의 참다운 해결은 실로 전도요원의 감이 있다. 초등학교가 국민의 기초 교육을 담당한 완성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연한 존립 가치를 상실하고 중학 입시 준비의 장소로 전락된 현실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한국에서는 오직 대학만이 완성 교육기관이요, 그 외의 초·중·고등학교들은 모두 입시 준비교로서의 가치밖에 없는상 싶다"라고 당시 교육현실을 꼬집었다. 당시에도 입시 위주의 교육이 심각했다는 얘기다. "교육이 잘 되고 잘 못되는 데 따라서 다른 모든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사회의 잘 되고 잘못되는 것이 결정될 것"이라는 그의 교육철학은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다.

2007-07-03 이창열

[인천인물 100人·81] 인터뷰 / 방순자 목사

"전밀라 목사님은 제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전밀라 목사와 인천에서 2년간 생활하고 6·25전쟁 당시 부산과 제주도로 피란을 함께 다녔던 방순자(82·여) 목사. 그는 1949년 인천 동구 창영동의 기독교 사회관에서 야간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사회관의 이옥신 선생, 전밀라 목사와 같은 주택에서 생활했다. 그는 "당시 전 목사님은 하루종일 교인 가정을 돌며 기도를 했고 저와 이 선생님은 계몽운동을 하러 다녔다"며 "밤에 한방에 모이면 저와 전 목사님은 전구에 양말을 끼워 구멍난 것을 꿰매고 이 선생님은 소설책을 읽어주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갔을 때는 방 목사와 이 선생이 뜨개질로 번 돈으로, 제주도에서는 교회에서 주는 전 목사의 생활비로 셋이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방 목사는 "전 목사님은 말수가 적으셨고 한번도 본인이 힘든 것에 대해서 표현한 적이 없으셨다"며 "남을 흉보는 말, 낙심하는 말을 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전 목사에 대해 "설교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 설교와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한편, 그는 "6·25전쟁 당시 창영교회 1층이 북한 인민군 장교들의 병원으로 점령돼 있어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전 목사님은 바로 2층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릴 정도로 담대하고 용기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 목사님이 은퇴 후에 예배가 끝난 뒤 돌아오다가 칼로 위협하는 강도를 만났는데도 그것을 몇달이 지난 뒤에야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밝혔다. 지난 1967년 목사안수를 받고 1996년에 은퇴한 방 목사는 "지금도 기일때마다 전 목사의 둘째 조카가 담임목사로 있는 구기교회를 찾고 있다"며 전 목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2007-06-26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81]개신교 최초 여성목사 전밀라

>81< 개신교 최초 여성목사 전밀라 올해로 70년을 맞는 인천 동구 창영동에 위치한 창영감리교회. 이곳 1층 사무국 내 한쪽 벽면에는 역대 목사 12명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남성 목사의 사진이 이어져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목사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벽 가운데에 놓여진 제 7대 목사, 바로 전밀라(1908~1985) 목사다. 전 목사는 이 교회에서의 최초 여성 목사로서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를 통틀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목사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의 윤춘병(90) 감독은 "1930년 조선감리교회가 조직되면서 여자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면서 "하지만 여성들은 신학교를 나왔어도 대부분 목사를 돕는 전도부인에 그치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이같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회,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깨고 여성 목사가 된 것. 윤 감독은 "그 당시에는 여성이 목사로서 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 섞인 의견들도 나오곤 했다"면서 "전 목사는 이 같은 편견을 깨도록 만든 인물로 이후에 여성 목사가 나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단정했다. 그는 "전 목사가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남자 못지 않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고 여성 목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며 "그렇다고 괄괄한 성격으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온건하면서 강한 의지를 가진 것이 얼굴에까지 그대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1955년 서울 중구의 정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처음 목사로서의 역할을 맡기 시작한 곳이 창영교회였다. 이곳의 부목사로 파견됐던 전 목사는 1958년에 제 6대 목사인 박신오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담임목사로 1년여간 교회를 이끌었다.하지만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인천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35년께부터 강원도 원주 제일 감리교회, 함경남도 원산 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에서 전도사로서 활동을 해오다 인천으로 파견됐던 것. 처음 창영교회에 파견돼 인천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해왔던 것은 1947년부터였다. 그는 이때부터 4년여간을 창영교회에서 황치헌 목사를 도우며 전도사로 있었다. 그 뒤 1951년부터는 인천 부평구 갈산동의 갈월교회에서 교회 담임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는 목사로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담임 전도사로 2년여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그와 인천에서 2년여간을 같이 살았던 방순자(82·여) 목사는 "창영교회의 강치안 장로가 당시 전밀라 전도사에게 목사가 되라고 권유하며 갈월교회를 소개시켜 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전 목사는 개인적인 고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며 "그래서인지 목사가 되려고 하는 때에도 불안한 모습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인천 창영교회 70년사'에서 전 목사가 창영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가장 좋아하던 찬송가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였다고 써 있는 것을 통해, 어려움을 담담하게 감내하는 성격이 신앙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을 엿볼 수 있었다. 1908년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에서 1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기독교를 일찍부터 받아들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을 갖게 됐다. 그의 아버지인 전연득씨는 당시 청양, 충주 등지를 돌며 전도활동을 해왔고 가족들은 집에서 매일 가족예배를 했다. 방 목사는 "전 목사의 아버지는 각 동네를 돌며 성경의 부분부분을 모아 만든 책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들었다"며 "그러다보니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워 전 목사는 학교도 뒤늦게 들어갔고 주변의 이웃이나 선교사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원해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1931년 공주의 영명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에는 감리회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전도활동을 하면서 1939년부터 1년간 일본의 아오야마 학원(청산학원)에서 신학부를 수료하기도 했다. 전 목사는 창영교회를 거쳐 1960년에는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양광교회의 초대 목사를 6년여간 맡고, 여선교회 전국 연합회 총무로도 8년여간 일했다. 그의 활동은 교회에 그치지 않고 인천 영화학교 재단이사, 배화학교 재단 이사, 명덕 학교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에서도 역할을 했다. 이같은 다양한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냈다. 전 목사는 1979년 5월13일 서울 양광교회에서 은퇴를 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특별한 과오없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교회를 중심으로 일하겠다"고 밝힌 소감처럼, 서울 정릉의 안식관에서 성서교육과 전도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1985년 10월30일 그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남동생(전재희)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진= 감리교 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 제공

2007-06-26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80] 아들 석용씨가 본 하상령옹

"아버님은 아직도 선거 때면 가장 진보적인 정당의 후보를 찍어요." 하석용(58) 유네스코 인천광역시협회장은 부친이 아직도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를 주창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백범 김구와 조소앙 선생 때문에 우리 가족은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부친이 역대 정권의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그와 가족들은 늘 가난에 허덕여야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엘 진학할 수 없었어요. 생계 때문이지요. 벽돌공장에서도 일하고, 전봇대 전기공으로, 솜털공장 공장장으로, 하역회사 경비원으로 온갖 일을 전전했습니다." 젊었을 때의 고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그는 공무원 생활도 했다. 부친이 요시찰 대상이었지만 그가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했다.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연좌제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김구와 조소앙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결정되신 분이에요. 결국 당신의 신념만을 위해 가족을 고생시킨 꼴이지요. 어쩔 때는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사회운동에 매달리고 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아버님과 같은 선대가 살아 온 세월의 상황이 지금까지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게 모두가 지식인의 책임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앞으로 서로가 '적'으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며 사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2007-06-12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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