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80]민족주의자 하상령

>80< 민족주의자 하상령 백발에 흰 수염, 그리고 형형한 안광. 90대 노인의 풍모는 여전히 꼿꼿했다. 인천지역 인사 중 민족진영 계열로는 유일하게 1948년 남북회담 대표단에 포함돼 방북했던 하상령(91)씨. 하씨는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백범 김구와 조소앙,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하씨에게는 이 두 사람이 결국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업'이 됐다. 지금까지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이 활동했다는 이유로 몇 십년 동안 독재정권의 요시찰 인물이 됐던 것이다. 심지어 어린 자식들의 학교까지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됐을 정도란다. 식구들은 말 그대로 밥 굶기를 밥먹듯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단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상대방이 어김없이 경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야 했다. 1961년 5월18일은 특히 잊을 수가 없다. 5·16, 이틀 뒤 무작정 경찰에 끌려갔다. 단지 남쪽 대표로 평양을 갔다왔다는 점과 조봉암의 인천연설회장에 나갔었다는 게 이유였다. 꼬박 29일 동안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유치장에 있는 동안에는 왜 잡혀 왔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중학교 1학년이던 아들이 그 이유를 수소문하고 다닐 정도였어요. 유치장엔 조봉암씨 조카와 교육노조원들, 그리고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29일째 되는 날 경찰이 나가라고 해 '죄명이나 알고 나갑시다'라고 하니 그 경찰관은 서장을 만나고 가라고 하더군요. 서장실로 갔더니 서장은 자리를 피하고 없었어요. 그런데 책상 위에 명단이 죽 있더라고요. 거기에 저는 '남북협상파'로 분류가 돼 있더라구요." 쿠데타 세력은 5·16 직후 바른 얘기를 할 사람은 모조리 경찰서에 가뒀던 것이다. 하씨는 우리나라 선거 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1950년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하나의 '신화'를 이룩했다. 그는 신생 정당인 사회당의 조소앙이 당시 막강 파워를 자랑하던 조병옥을 누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소앙은 이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했다. 조소앙이 입후보한 서울 성북구에서는 미군정 경무부장 출신의 조병옥(민국당 후보)이 경찰력을 장악했다. 당시 성북경찰서장 최병용과 사찰과장 이진숙이 바로 조병옥 계열이었던 것이다. 공공연한 테러와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그러나 조소앙은 3만4천35표를 얻었고, 조병옥은 1만3천498표에 그쳤다. 완벽한 승리였다. 하씨는 이 선거에서 조직부문을 담당했다. "선거를 5개월 정도 남겨 놓은 1949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소앙 선생의 편지가 왔어요. 선거 출마를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선 안되면 제가 책임져야 할 판이었어요. 특히 조병옥이 상대라고 하니 목숨을 건다는 각오가 없이는 뛰어들 수 없었지요. 그러나 이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조직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쪽(조병옥)은 막강한 경찰력과 돈이 있었고요. 며칠 고민 끝에 선생에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선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곧바로 저에게 안채를 내주셨습니다. 선거사무실로 쓰라는 거였습니다. 사회당 당적부도 같이 주셨습니다." 당시 조소앙의 선거운동원 중 무려 83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수모를 당했단다. 조직 총책격이었던 하씨도 여러 차례 경찰에 붙잡힐 뻔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바로 6·25 전쟁이 터졌고, 조소앙은 납북됐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선거 승리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씨는 여전히 조소앙을 숭모하고 있다. 그는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를 연구하는 삼균학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삼균학회 설립에 직접 참여했으며, 초대 회장으로 이은상을 시켰다고 했다. 1917년 인천시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난 하상령씨는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수도국산 근처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의 젊은 시절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아버님과 동업하던 사람이 정미소 창고에 쌓아 놓은 볏가마니를 모두 훔쳐간 거예요. 집을 저당잡혀 사 놓은 벼를 모두 날렸으니,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었지요. 아버님은 집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쌀 고르는 일을 하셨어요.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하씨는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지금의 동인천역 부근인 인현동 1번지에 위문당(爲文堂)이란 서점을 냈다. 하씨는 당시 명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명함엔 이름이 '하연숙(河璉淑)'으로 돼 있었다. 하씨는 집안에 남자가 귀한 탓에 여자 이름을 가지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어른들이 이렇게 지었다고 했다. 지금의 상령(相領)이란 6·25 이후에 바꾼 것이란다. 백범 김구가 친필서명해 그에 건네 준 백범일지 초판본에도 하연숙이란 이름이 선명했다. 서점을 하던 그는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몇 년 뒤 수석 사무원까지 올랐단다. 하씨는 이 때 평양에까지 다니면서 법원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고 했다. 그래선지 1948년 남북협상 때의 평양거리가 낯설지 않았다고 했다. 1930년대 중반, 그 일본인 변호사는 본국으로 떠났고 하씨는 다시 서점을 냈다. 몇년 동안 서점을 크게 하던 그는 일본의 한 대학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것은 일제의 보국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과 2년을 하고 본과로 올라간 1943년 귀국했고, 철도국 시험을 쳤다. 역시 보국대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 들어간 곳이 동구 만석동의 조선기계제작소였다. 당시 잠수함을 만들던 곳이다. 그는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하씨는 이듬 해 봄, 책 장사를 크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점을 다시 차렸다. 당시 국정교과서 지정 판매 계약을 맺을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점 옆집의 과일가게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모든 것을 화마에 날리는 아픔도 겪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지역의 유지들이 찾아왔다. 독립촉성국민회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가 사회운동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됐다. 30세의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인천지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그는 또 '대한건국 인천청년회'도 조직했다. 단체 이름도 하씨가 직접 지었단다. "당시 인천 인구는 30만명도 되지 않았는데, 공산당이 무척 기승했어요. 그에 대항하기 위해 청년회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은 만들었는데, 돈을 댈 사람이 없었어요. 인천에서 돈을 번 사람 대부분이 서울로 떠났기 때문이에요. 햇님병원을 운영하던 윤병덕씨가 자금을 대고, 회장을 맡았지요." 이 당시 하씨는 좌우 충돌 상황에서 우익계열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 대한노총이 인천에 처음 생길 때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활동이 그를 백범과 조소앙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한독당)으로 끌어들이게 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독당 중앙당 집행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백범이 소장으로 있던 '건국실천원 양성소' 1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그는 백범을 먼저 알았지만 나중엔 조소앙 쪽으로 옮겨 갔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빠진 것이다. 한독당에서 조소앙이 탈당하면서 그도 따라 나와 사회당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인천청년회 윤병덕과 마찰이 있었다. 사회당 인천위원장을 뽑는 과정에서 하씨는 윤병덕과 경선을 했고, 윤병덕이 부정선거를 했다고 하씨는 설명했다. 그러나 사회당 중앙당에선 윤병덕의 손을 들어줬고, 하씨는 제명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당 당수이던 조소앙이 당의 제명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하씨가 조소앙의 5·30 선거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하상령씨는 1948년 남북회담 때의 기억을 또렷이 떠올렸다. 그는 삼균주의 청년동맹원 자격으로 방북단에 포함됐다. "방북했는데, 길거리 위에 세운 아치탑에 '리승만, 김성수, 김구 타도'란 문구가 보였어요. 이 글귀를 급히 가리기는 했는데, 그 자국이 선명히 남았어요. 이런 마당에 무슨 얘기(협상)가 되겠어요. 평양 삼일여관에 묵었는데, 평양거리엔 탱크며 대포며 군수장비가 무척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지요. 남쪽에 돌아와 이런 얘기를 전했는데, 정부는 콧방귀만 뀌었어요." 지난 9일 오후 연수구 동춘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보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4시간 정도 계속된 인터뷰 내내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38선 이남만을 위한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아닌 김일성과 이승만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건국 대통령은 없는 것입니다. 통일 이후의 대통령이 진정한 건국 대통령이란 거예요." 그는 통일과 민족을 얘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커졌고, 현 정치 현실 아래서 빈부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대목에선 탁자를 치기도 했다. 그의 기억은 우리나라 개화기와 근현대 사회의 연구과제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2007-06-12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78] 인터뷰 / 김진용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회장

"어느 순교자 못지 않은 훌륭한 삶을 사셨습니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회장 김진용(78)씨가 박순집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대 청년시절 부터였다. 김씨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묻혀 있는 안성 미리내 성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낼 때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접했다. 이때 오기선 신부에게 들은 박순집의 흔적에 김씨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시기에 순교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시신을 찾아 안전한 곳에 고이 모신 그의 의거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 정신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박순집의 증언도 한국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당시 순교자들의 거룩한 정신은 역사에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김씨는 1890년 인천 제물포에 정착한 박순집의 행적을 밝히고자 애써왔다. 인천지역 천주교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인천교구 발전에 기초를 닦은 박순집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순집이 선종하던 날에 온 마을 사람들이 '박서방네 집에 불이 났다'며 몰려 들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가보니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지붕위로 두 줄기의 광채가 하늘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죠. 인천에서 말년을 보낸 당시 박순집의 위치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김씨는 박순집이 한 순간에 목이 떨어져 나간 순교자 그 이상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2007-05-29 임승재

[인천인물 100人·78]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78<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강화대교를 넘어 좁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 5분 가량 달리자 갑곶 순교성지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자 강화읍내가 한 눈에 펼쳐졌다. 정상에 위치한 야외 미사터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신앙의 증거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박순집(朴順集·1830~1911)의 묘비 앞에 한 노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섰다. 비명에 적힌 박순집의 생전 행적을 한참 지켜본 다음 잠시 기도를 드리는 노인의 모습에서 그의 역사적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박순집은 '땀의 순교자'로 평가받는 인물. 목숨을 걸고 행한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 순교한 성직자와 평신도 153명에 대한 증언,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을 다진 그의 헌신적인 삶은 후세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서슬퍼런 칼날 앞에 목이 잘려 나간 '피의 순교자'는 아니었지만, 고인(故人)이 된 오기선 신부는 평소 박순집을 가리켜 '난세(亂世)의 성웅(聖雄)'이라 칭할 정도였다. 천주교 인천교구청의 기록에 따르면, 박순집은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밖 전생서(典牲署·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순집의 순교자적 삶은 그의 부친 박 바오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훈련도감의 포수로 있었던 박 바오로는 1893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당시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수많은 교우들이 새남터나 서소문(조선시대 사소문 중의 하나) 밖 형장에서 순교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박 바오로는 군사들이 잠든 사이 모래로 대강 덮어 놓은 무덤에서 시신을 찾아 노고산(老古山·현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기고, 훗날 삼성산(三聖山·현 관악구 신림동)에 시체를 이장시켰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박 바오로의 아들 순집은 1846년 9월16일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한 신부를 봤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이었다. 박순집의 나이 17세였다.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성장해 가던 청년 박순집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부친 박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훈련도감의 군인이 된 박순집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딱 20년 만인 1866년,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베르뇌 주교와 브르뜨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성직자, 그리고 수많은 평신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부친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받은 그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목숨을 내걸기로 결심했다. 이후 10년여 동안 계속 이어진 천주교도 박해 때 헤아릴 수 없는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박순집은 사선을 넘나들며 그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1888년 제 7대 조선 교구장이었던 블랑 주교는 프오델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프오델 신부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온 박순집을 불러 교회법정에 세웠다. 처참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증인 자격이었다. 당시 총 153명 순교자에 대한 박순집의 증언은 한국 교회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병인박해로 인해 숨진 수많은 순교자들의 흔적은 자칫 역사의 뒤편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박순집의 묘비에 '신앙의 증거자'라고 적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순집 증언록'은 현재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박순집이 인천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890년의 일이다. 인천에 사는 한 교우의 요청으로 제물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후 1893년 자신의 집터가 경인전철 부지로 편입되자, 박순집은 주안 쑥골(현 남구 도화동)에서 터를 잡아 생활했다. 1911년 6월27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889년 설립된 답동본당의 초대 주임 빌렘 신부를 도와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을 다지는데 공헌했다고 한다. 지난 23일 인천교구청 홍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회장 김진용(78)씨의 연락처를 전하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김씨는 박순집 증언록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사재를 들여 책(번역본)을 발간하고,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있는 박순집의 일부 유해를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로 옮기는데 앞장섰던 장본인이다. "오기선 신부님의 영향으로 박순집 베드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박순집은 어느 순교자 못지 않은 거룩한 삶을 살았더군요. 박순집 증언록이 혹시라도 소실되면 그의 역사가 그냥 묻혀버릴 것 같아 서둘러 책을 발행하게 됐습니다. 붓으로 써 내려간 박순집 증언록 원본은 현대인들이 보기 어려운 옛날 어법으로 구성돼 있어 번역이 필요했지요." 김씨는 박순집 증언론을 번역해 놓은 원고 초본과 두 권의 앨범을 내밀었다. 두 권의 앨범에는 박순집에 대해 1920년 무렵의 가톨릭 월간잡지인 '경향잡지' 복사본, 박순집의 유해가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로 옮겨지는 과정이 담긴 사진, 박순집의 셋째 딸로 조선인 최초 수녀 5명 중의 한 명인 박황월(朴況月·세례명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 대한 자료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박순집의 유해가 인천(도화동 성당)으로 되돌아 온 것은 2001년 5월24일. 꼬박 40년의 시간이 걸렸다. 당초 박순집의 묘는 옛 용현동 교회묘지 터(현 용현동 성당 자리)에 있었다. 이후 1970년대 경인고속도로 연장 공사가 예정되면서, 대부분의 묘가 검단면 당하리와 마전리에 새로 조성되는 교회 묘지로 집단 이장됐다. 이때 박순집의 묘는 비석과 함께 1961년 8월31일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현재 박순집의 유해는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와 인천가톨릭대학에 각기 묻혀있다. 그의 유해는 서울 순교자 기념관과 강화 갑곶 순교성지, 그리고 인천가톨릭대학 등 세 곳에 나뉘어 있는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에 있게 된 것은 젊은이들이 그의 숭고한 정신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박순집의 영정(그림)은 그의 증손자 박종수(78·남구 용현5동)씨가 보관하고 있다. "천주교 신도가 많았던 우리 집안은 병인박해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고모할머니 박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어릴 때부터 적어 놓은 글에도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수도회 역사 등이 기록돼 있죠." 역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박순집의 자손이라는 걸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진용씨는 '인천교구사'와 '병인박해 중 천주교 신자 처형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 소고'에서 박순집의 고모 박 막달레나와 부친 박 바오로 등 그의 일가에서도 16명의 순교자가 나온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인천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박순집의 흔적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인천교구청이 교구설정 50주년이 되는 오는 2011년을 앞두고 박순집 등 흩어져 있던 인천지역 천주교 역사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고 있다.

2007-05-29 임승재

[인천인물 100人·77] 인터뷰/ 장명덕 전도사 딸 박미화씨

"어머니는 평소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비석에 '하나님은 일생 동안 나를 사랑하셨다'라고 써 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초동교회에서 만난 장명덕 전도사의 외동딸 박미화(87)씨. 현재 인천 창영감리교회에는 장 전도사의 친오빠 장기진씨의 손자인 장광수씨가 다니고 있었고, 그를 통해 박씨와 연락이 닿았다. 박씨는 "어머니는 일생을 교회에서 전도생활을 하시면서 보내셨을 뿐, 크게 내세울 업적을 말씀드릴 게 있을지 모르겠다"며 "어머니에 대한 자료가 이사 중에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와 관련된 것은 1989년 '주간 기독교'라는 20쪽의 얇은 잡지와 장 전도사 교회장 팸플릿, 장씨가 쓴 A4용지 두 장의 본인 이력서 정도였다. 박씨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 요청을 받고 찾아보니 그나마 이런 것이 집안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마음이 깨끗하시고 항상 기도하시는 분이셨다"며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인천의 화도교회를 함께 나갔던 것이나 천곡교회에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옆방에 최용신 선생님이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어머니가 수원지방 교회에서 활동을 하는 기간 외삼촌(장기진) 댁인 인천에서 지냈는데, 그게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때까지였다"며 "그 후에는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해서는 남편과 함께 홍콩, 제네바 등지에서 생활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또 "아버지는 결혼한 뒤 곧바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며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한국에 왔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형제, 자매가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경인일보 취재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며 오후 예배를 보러 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2007-05-23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77]장명덕 전도사

>77< 장명덕 전도사 내가 한 일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선지 그의 행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근대 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하면, 소설 속의 실제 인물 최용신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잘 알지 못한다. '상록수'에 청석학원으로 등장하는 '천곡학원'을 설립한 사람은 바로 장명덕(1901~1990) 전도사. 그의 숨결을 더듬기 위해 지난 18일 길을 나섰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1번 출구로 나가 아파트 단지 쪽으로 500여를 더 가자, 과거 천곡교회였던 샘골교회가 보였다. 천곡학원으로 썼던 이 곳 예배당 강습소를 일제의 감시 속에서 운영했던 최용신을 기리기 위해 인근의 상록수 공원엔 그의 묘소가 있었고, 기념관 건립공사도 진행 중이었다. 천곡학원의 운영에 헌신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최용신은 여성기독교청년회(YWCA)에서 교사로 뽑혀 천곡학원에 보내졌다. 그 유명한 천곡학원이 장명덕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가 1929년 수원지방 안산구역의 천곡교회로 파송된 뒤, 교회광고를 통해 30여명의 어린이를 모아 한글과 산수, 찬송가를 가르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천곡학원은 시작됐다. 홍석창 목사의 저서 '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을 통해 천곡학원에서의 장 전도사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이 책에서 홍 목사는 '천곡 등지에서 장명덕 전도사의 노고와 성과는 대단했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찌렁찌렁 울리는 듯한 큰 목소리 그리고 누구나 들으면 똑똑하다고 평할만큼 유창하고도 뚜렷한 말소리로 가,갸,거,겨, 1, 2, 3, 4를 가르칠 때면 마치 어린이의 머리를 열어 젖히고 쪽집게로 한자한자를 집어넣는 것과 같아, 배우는 어린이들은 한없이 쉽게 배웠다. 그래서 학부형들은 1년만이 아니라 계속 좀 가르쳐 주었으면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밀러 선교사에게 전해지니 밀러 선교사는 안산구역 중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천곡을 지정해서 모범적인 강습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장명덕 전도사야 말로 천곡학원의 터를 잘 닦아놓은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장 전도사를 평가하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은 왜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 의문은 장 전도사의 외동딸 박미화(87)씨가 건네준 잡지를 보고는 금세 풀렸다. 1989년의 '주간 기독교'의 임병해 편집부장은 장 전도사를 직접 만났을 때의 첫 대화라면서 이렇게 적었다. "만남과 대화는 얼마든지 좋지만, 세상에 알리거나 기사화하는 것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 정말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 장 전도사는 자신이 해 온 일을 남에게 알리길 진정으로 꺼렸던 것이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숨은 곳에서 계몽활동을 해오는 한편, 일생을 교회의 전도활동에 바쳐왔다. 그의 전도활동의 흔적은 현재 '인천 창영감리교회 70년사'를 집필중인 오상철(72)씨를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오씨는 "창영교회의 역사를 쓰던 중, 일제 말기에 장 전도사가 이곳을 다녔던 것을 알게 됐다"며 "1940년대 초 인천 화도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장 전도사가 일제의 교회 통폐합 압박으로 화도·내리교회로 통합되자, 친오빠가 장로로 있던 창영교회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해방 이후 통합돼 있던 교회들이 분리되면서 당시 창영교회와 통합돼 있던 숭의교회 교인 중 일부가 나와 인천 중구 신흥동에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에 신흥교회를 지었다"며 "장 전도사가 마침 신흥교회를 짓던 현장을 보고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초기 설립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신흥교회는 후에 중앙교회와 합쳐져 명칭이 바뀌어 현재 인천 중구 율목동에 자리잡고 있는 성산교회가 됐다. 이곳에서 장 전도사는 초기 부인회장을 맡았고 4년여간 전도활동에 힘썼다. 여성의 사회생활이 제한돼 있던 당시로서 장 전도사의 활약상은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빨리 전해졌던 지역에서 자라왔고 그의 친오빠 장기진과 가족들이 그의 학업과 사회활동을 뒷받침해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장 전도사는 지난 1901년 9월 19일 경기도 부천시(당시 부천군으로 기록) 소래면 무지리에서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이미 미국 선교사가 지은 흥업강습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공부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14년 인천 영화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1920년께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영식씨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고, 1922년 친오빠의 권유로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홍순탁 목사의 권유로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고, 수원의 삼일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미국 여성 밀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1년 정도 이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을 했다. 그 후 서울과 경기, 인천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다가 1949년께에는 서울 흑석동에 여성 종교인들의 노후를 위한 안식처인 안식관의 책임업무를 맡게 된다. 이후 14년간 이 일을 하면서 헌신적인 종교활동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에 "다리품 팔아서 남들이 가기 전에 그저 길 하나 닦아 놓은 것 외에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한다. 각 교회를 다니며 종교활동을 해온 그는 바로 여성종교인 안식처인 안식관 306호에서 여생을 보내다 지난 1990년 9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마음을 깨끗이, 생각을 깨끗이, 말씀을 깨끗이, 생활을 깨끗이'라는 글귀가 항상 놓여 있었다고 한다.

2007-05-22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76] 인터뷰 / 최신부와 함께활동한 서재송씨

"아픈 환자든 국적을 알 수 없는 혼혈아든 신부님은 섬주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희생자였습니다." 최분도 신부가 인천에 머물던 40여년의 세월동안 바로 옆에서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서재송(79·세례명 비오)씨는 "하천공사, 전기공급 등 섬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에 신부님이 직접 뛰어들었다"며 "허름한 작업복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연방 굵은 땀방울을 쏟아냈지만 안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김 양식을 벌일 때에는 찬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에 어느 일터에서건 섬주민 모두가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향 덕적도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서씨는 최 신부가 연평도 주임 신부로 활동하던 지난 1962년 첫 만남을 가졌고 백발이 된 지금까지도 고인의 생전 의지를 담아 고아와 혼혈아를 돌보고 있다. 서씨는 40년간 미국 입양만 2천여명을 보냈고, 부인 인현애(77·크리스티나)씨와 함께 입양아 친부모를 찾아주는 등 사후관리에 나섰다.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양로원에서 만난 신부님은 '비오'를 연방 부르며 아이들을 함께 돌본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며 소외된 영혼들에게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인천을 떠나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국내 현황을 자주 물어왔다"고 말한 서씨는 "신부님은 언제나 인천으로, 특히 서해 낙도(落島)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무 아쉽다"며 눈물을 훔쳤다. 서씨 부부는 최 신부가 선종한 지 나흘이 지난 2001년 3월 29일 그 소식을 들었고, 곧장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생을 함께한 정신적 지주이자 동료였던 최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부부는 장장 17시간을 달려갔다. 그리고 서씨는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했다. 최 신부가 숨을 거두자 메리놀 신학대학 총장은 서씨부터 찾았단다. 최 신부가 눈을 감기 전 그를 애타게도 찾았던 것이다. 대학측은 서씨가 오기를 기다려 장례시간을 반나절 이상이나 늦췄다고 한다.

2007-05-15 강승훈

[인천인물 100人·76]벽안의 최분도 신부

>76< 벽안의 최분도 신부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지난 2001년 3월 30일.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내 대성당에서 치러진 한 신부의 장례미사에 한국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수십명의 한인이 고인이 된 신부를 애도했고 인천의 한 주민이 추도사를 읊어 내려갔다. 고인은 '서해낙도(落島)의 슈바이처'였다. 수만리 이국땅에서 젊음을 다 바친 벽안의 천주교 신부에게 섬이 붙여준 이름이다.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 출신의 최분도(Benedict Zweber) 신부.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1시간가량 달리면 옹진군 덕적도에 닿는다. 여의도의 6배가 넘는 600만평 규모로 1천여명이 살고 있는 한적한 섬에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백색의 모래가 아름다운 서포리해수욕장 인근 노송(老松) 동산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1976년 덕적도 소재 서포1·2리, 진리, 북리 주민 27명이 추진위를 구성해 건립한 공덕비 뒷면에는 최 신부를 기리는 업적이 상세히 담겨 있다.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이 낙도에서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는 물론 죽음과 생의 기로에서 헤매는 수많은 생명을 건져준… 오랜 세월을 두고 꿈에도 그려보지 못하던 전기시설을 갖추어 면을 골고루 밝혀 준 것은 너무도 엄연한 사실이며…." 1959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을 당시 27세의 최 신부는 메리놀 외방 선교회를 통해 한국 땅에서 선교사업을 펼치기로 다짐하고 자원한다. 한국과의 남다른 사연은 둘째 형에게서 시작됐다. 당시 미8군에 복무하던 친형은 1956년 8월 여름, 한강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두 소년을 구출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졌다. 고인의 모습에 감화받은 최 신부는 인천에서의 30여년 선교활동 중 고립된 섬에서만 14년을 거주했다. 첫 주임 신부로의 부임지는 1962년 연평도이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보였던 섬은 5년 뒤 발령받은 덕적도. 최 신부는 여기서 종교 이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음을 깨달았다. 섬이 준 두가지 '선물'은 바로 가난과 질병. 우선 질병에 시달리는 어민들을 위해 낡은 미군 함정을 인수, 병원선으로 개조해 '바다의 별'호로 명명하고 진료에 나섰다. '바다의 별'은 천주교에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다. 섬을 순회하며 환자들을 돌보던 최 신부는 질병 퇴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해 병원을 세운다.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건립된 '복자유베드로병원'은 60개의 병상을 갖추고 진료분야도 외과, 내과, 산부인과, X-선 등으로 세분화시켰다. 당시로서는 국내에서도 드물었던 현대 의료기구와 약품들을 미국에서 직접 들여왔다.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에서 후원을 받아 의사들의 파견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천주교 인천교구청의 기록에 따르면 최 신부의 의료 봉사 혜택을 받은 사람이 연간 입원환자 5천500여명, 외래환자 1만2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낮은 문턱과 최신 진료시설로 주변 섬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단다. 병원을 찾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최 신부는 손수 약을 지어서 각 가정을 방문하기도 했다. '고난의 길'을 자처한 셈이다. 최 신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섬 전체의 개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00㎾ 자가발전기 두 대를 미군에서 지원받아 설치했다. 손수 철근과 시멘트로 전주를 만들었다. 또 집집마다 전등을 설치해 편리한 생활을 누리도록 도왔다. 최 신부와 같이 활동했던 서재송(79)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원돼 하루를 꼬박 매달린 결과 온종일 전기를 가동해도 남을 정도였다"며 "신부님은 눈병이 나는 등 고생이 심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고 회상했다. 최 신부는 영세한 어민들의 소득 증대 차원에서 23급 어선 3척을 구입, 무상으로 기증해 주민 스스로 협동조합을 구성토록 했다. 특히 잡는 어업이 부진함에 따라 양식업으로 전환이 가능한지 고민에 빠졌고 학계의 자문을 얻어 덕적도 일대가 해태(김) 양식의 적지임을 확인했다. 곧장 시험개발에 착수했고 1970년 덕적도, 연평도, 영흥도에서 양식에 성공했다. 섬 주민에게는 생계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인근 도서에까지 이 방식을 보급했다. 고급 김으로 소문난 서해북부 김 탄생의 시초였다. 이때 서포1리는 매년 해변에서 밀려오는 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고질적인 침수지역이었다. 지방정부조차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에 최 신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1971년 추진된 하천공사는 순전히 주민들의 땀과 영국 구호단체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외국인 신부를 경계하던 주민들의 시선은 그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차츰 매료돼 갔고 미사가 있는 날이면 하나 둘씩 자발적으로 성당에 모여들었다. 당시 섬에 거주하던 1만여명 가운데 7천여명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섬 전체가 천주교 일색이었단다. 우리 정부도 그의 헌신적 노력을 인정했다. 그는 1971년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동백장(2급)을 받았다. 오경환 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왜소한 체격을 지녔던 최 신부는 언제나 열의에 넘쳤었다"며 "늘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는 관심을 쏟았고 특히 혼혈아에 대해서는 가슴으로 감싸 안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오 교수의 언급대로 최 신부는 1천명이 넘는 혼혈아의 미국 입양을 주선했다. 섬 지역을 포함한 인천 전역엔 6·25 전쟁 직후, 미군과 한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대부분 버려져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 신부에게도 아쉬움은 남았다. 27만여평의 농지조성을 위한 서포2리 간척사업은 14년간 섬 생활을 뒤로하고 송림 본당으로 발령받으면서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시내에서 세 곳의 성당을 더 만들었고 1990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의료, 입양 등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앞서 1976년 9월 최 신부는 당시 김태호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전달받으며 진정한 '인천인물'로 거듭났다. 더욱이 역사편찬회가 1988년 발간한 '대한민국 5000년사, 한국인물사'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미국으로 발령, 신학생 육성에 매진하던 최 신부는 1997년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제2의 '한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복합척수염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뉴욕 '성데레사 양로원'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병상에서 남긴 최 신부의 글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내 고통은 러시아인들이 믿음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1970년 7월 발간된 잡지 '코리아 라이프(no.48)'는 덕적도 현지르포를 통해 최 신부를 '무지와 빈곤 쫓은 기적(奇蹟)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현장취재를 담당했던 한홍석 기자는 "몽매한 폐습과 가난에 쫓기던 덕적섬을 현대화시킨 최분도 신부, 섬 전체를 전화, 수도시설 등 문명화시켰다"고 적었다.사진제공/서재송씨

2007-05-15 강승훈

[인천인물 100人·75] 인터뷰 / 강소령 아들 병훈씨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늘 '남자다운 분이었다'는 말을 했어요." 강재구 소령의 외아들 병훈(42)씨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병훈씨는 태어난 지 14개월 됐을 때 아버지의 비보를 접해야 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극장에서 아버지를 소재로 만든 '소령 강재구'란 영화를 봤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상영관을 나설 때 친구들이 저를 보고 '병훈아'하고 불렀는데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더군요. 극 중에서 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학교 시절,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렸을 때에는 선생님이 그에게 일어나서 직접 읽어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웅'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그리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을 터. 그는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웠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제약을 받는 것은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병훈씨는 합격이 보장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강 소령이 산화하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병훈군이 적령이 되었을 때 우선적으로 육사에 입학하게 하라"고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는데 이는 육사 창설 이래 처음있는 조치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07-05-01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74] 인터뷰 / 성공회 영등포교회 주성식 신부

"대한성공회 역사에서 강화도는 '한국의 아이오나(iona)' 또는 '한국 성공회의 못자리'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성식(성공회 영등포교회 관할사제) 신부는 코프 주교가 포교를 시작한 강화도를 대한성공회 117년 역사의 모태로 규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주 신부는 지난 2001년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110년사'를 연구·편찬했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아이오나는 영국 성공회 신앙전통의 모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복음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강화가 바로 아이오나란 얘깁니다." 그는 또 "강화읍교회는 본당 건물이 장방형 외형에 더해 건축자재나 지붕과 내면의 구조가 한국식으로 구성돼 있어 성공회의 토착화 선교방식을 짐작케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화도는 임진강과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뱃길로 1903년 무렵 북한에 성공회가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후 강화도는 황해도 백천과 연백으로 이어지면서 성공회가 전도되는 전초기지가 됐다는 게 주 신부의 얘기다. 주 신부는 "이는 영국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바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고 영국 아이오나의 지리·문화의 토양을 강화에서 보았던 것"이라며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강제합병으로 이어지는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성공회의 평등과 애민사상이 지식인과 민중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2007-04-17 이창열

[인천인물 100人·74]초대 성공회 주교 코프

지난 8일 부활절을 맞은 인천 중구 내동 3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다. 이번 부활절 기념 미사에는 250여명의 신자가 참석했다.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모이다 보니, 모처럼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17년 전인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해군의 군종 사제를 지낸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주교가 그 해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다. 코프 주교는 조선 선교의 책임을 맡아 왔던 것이다. 대한성공회 역사는 이렇게 첫 줄이 쓰였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들어왔으니, 코프는 이들보다 5년이 늦은 셈. 코프 주교는 이때부터 1905년 조선을 떠나기까지 16년 동안 초대 주교로서 조선성공회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인천 내동교회를 시작으로 서울 정동과 낙동(구 대현각빌딩 부근)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고 포교에 나섰다. 특히 경기도 평택과 충북 청주·진천으로 이어지는 교세 확장이 코프 주교가 머문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회 포교의 방편으로 의료와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1890년 입국하면서 미국인 의사였던 랜디스(Eli Barr Landis) 박사와 영국 해군의 퇴역한 의무관 출신 의사인 와일스(Wiles) 등 두 명의 의사를 함께 데려왔다. 여기에는 영국 성베드로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간호교육을 받은 수녀 2명과 수병(水兵)이 동행했다. 코프 주교가 조선선교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SPG(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에서 지원했다. 이 단체는 외국의 성공회 포교활동을 돕기 위해 1701년에 설립됐다. 코프 주교는 입국한 후 곧바로 인천 중구 송학동에 큰 집을 얻어 방 두 칸에 진찰실과 입원실을 꾸렸다. 첫 포교의 방편으로 병원을 택한 것이다. 낯선 이국 땅에서 성공회의 씨앗을 뿌리자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가장 좋은 방법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현재 중구 내동 3)에 250달러를 주고 외국인 조계지역 터를 구입, '성누가병원'이라는 병원다운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인천에서 병원이란 간판을 처음 내건 서구식 병원의 효시는 또 이렇게 탄생했다. 이 병원은 랜디스 박사가 32살의 나이로 죽고 1901년 의사 충원마저 끊기면서 문을 닫게 됐다. 또 코프 주교는 의료선교에만 그치지 않고 포교 개척지마다 '진명학교' 또는 '신명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인천에도 이런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가 인천에 도착한 이듬해인 1891년 2월 27일 영국에 있는 로버트 수사(修士)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난다. "우리 선교사들은 참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인 랜디스박사의 방은 하루 종일 조선인들로 붐빕니다. 이 모든 것이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지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진료 선교가 제대로 먹혀 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코프 주교 자신은 포교활동을 하면서 의사소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입국 후 3년이 다 된 1893년 2월 6일에 쓴 편지에 "한국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많은 단어를 알게 됐지만 어떻게 발음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한국인들이 이미 가버리고 맙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 "내가 그들 속에 살지 않는 한 결코 사랑을 배운다거나 나의 선교활동에 대해 (조선인들은)알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신의 모습 속에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희망과 공포·자연숭배·일반적인 인간의 감정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켜야 합니다. 나는 무서운 표정의 영국인입니다"라며 포교활동 중 겪은 인간적인 고뇌의 단면을 보이기도 했다. 코프 주교는 강화읍교회(1897년)를 시작으로 강화도에서도 포교를 했다. 이후 강화도에는 양사면 인화리 송산교회(1907년), 선원면 내정리교회(1905년), 삼산면 석포리 삼산교회(1906년), 길상면 온수리교회(1906년), 길상면 초지리교회(1915년), 불온면 넙성교회(1901년), 양도면 삼흥리 삼흥교회(1901년), 화도면 내리교회(1901년), 화도면 흥왕리교회(1902년), 화도면 선수리교회(1902년) 등 10여개의 성공회 교회가 급속히 번성하게 됐다. 이 중 강화읍교회는 1915년 조선성공회 사상 첫 조선인 신부(김희준)를 탄생시켰고 대한성공회 내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성당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코프 주교가 시작한 강화에서의 성공회 번성은 본토 영국에서도 경이롭게 여길 정도란다. 코프 주교는 1843년 5월 14일 영국의 셀리스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옥스포드대학교 내 채플에서 뛰어난 오르간 연주와 작곡 솜씨로 유명했던 음악가였다고 한다. 코프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24살 되던 해인 1867년 해군 군종사제를 시작으로 47세에 조선성공회 초대 주교로 오기까지 20여년 동안 서인도제도와 중국을 돌며 군종사제로 복무했다. 그는 1905년 조선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서 3년여 동안 선교활동을 더 하다가 1911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건강이 악화돼 1921년 6월 30일 고향에서 영면했다.

2007-04-17 이창열

[인천인물 100人·73]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유완식

>73<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유완식 '미국에 사이 영이 있다면, 우리에겐 유완식이 있다'. 지난 달 29일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는 올해부터 지역 초·중·고교 야구 선수 중 한 해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유완식 투수상을, 타자에겐 박현식 타격상을 수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SK 관계자는 "인천 야구에 지대한 업적을 쌓은 두 분의 야구인을 기리고 이들의 정신을 후배 야구인들이 계승해 앞으로 인천 야구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상을 제정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 1일 그 주인공, 유완식(88)옹을 만났다. 그의 아들 대용(50)씨와 함께였다. 유옹은 지난 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이야기의 대부분은 대용씨의 '통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옹은 해방 이후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인천야구의 리더' '인천야구의 재건 기수' 등 인천야구와 관련된 명예로운 닉네임을 여럿 갖고 있다. 1930년만 해도 전국 최강을 자랑했던 인천야구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해방이 되던 1945년 초까지 암흑기라고 할 정도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게 없다. 이런 인천야구는 그의 등장과 함께 다시 빛을 보게 된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백천. 보통학교 때 인천으로 유학왔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를 졸업하고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초창기 일본 유학생 중의 한 명이다. 이후 일본 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유 옹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보통학교 다니던 시절 야구 용구가 없어서 찜뽕(연식야구)을 했었어. 체격조건도 남들보다 좋았고 어릴적부터 거의 모든 운동을 잘했지. 마라톤은 물론 유단자였던 유도선수를 매트에 내칠 정도로 유도에도 소질 있었고. 그러다가 일본에서 정식야구를 배웠지"라고 지난 날을 회상했다, 당시 재밌는 일화도 많다. 대용씨는 "오사카 상고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프로팀인 한큐 브레이브스 한 곳에 가 있었다"면서 "아버지는 오직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서 온 유완식인데,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한큐 측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입단 의지를 알렸고, 젊은이의 당돌함과 야구에 대한 진심을 읽은 구단측이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테스트에서 남다른 투구 폼과 뛰어난 타격 기량을 인정받아 입단에 성공한 그는 약관의 나이었던 1939년부터 7년간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포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45년 6월 혼인을 위해 인천에 왔다가 해방을 맞게 되어 인천에 정착하게 된다. 해방 후 유완식이란 거물을 얻은 인천야구팀의 활약은 사회인 야구에서 두드러진다. 사회인 야구팀 '전인천군'은 유완식을 비롯해 동년배인 김선웅, 장영식, 박현덕 등 인천야구 1세대를 풍미했던 이들이 함께 했다. 전인천군은 그 멤버만큼이나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1947년 5월 제2회 4대 도시(인천 부산 광주 대구)대항 야구대회 우승, 그해 7월과 8월 전국지구대표야구쟁패전과 월계기대회 잇단 우승을 포함해 전국체전까지 한 해에 4개 대회 우승을 싹쓸이 하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야구용품에 얽힌 이야기는 따로 있다. 해방 후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던 시절, 야구 용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야구 용구들은 모두 미군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단다. "미군들이 처음에 우리를 얕잡아봤다가 큰코다쳤지. 이후 심기일전하더라고. 그리고는 자기들이 이길 때마다 기분 좋아서는 야구용품을 주고 갔지. 우리에게 미군들은 야구용품 공급책이나 마찬가지였어." 1954년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는 한국팀이 첫 번째로 해외에서 원정경기를 치른 대회였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대회에 한국팀의 주축은 유완식, 박현식, 그리고 인천고를 갓 졸업한 팀의 막내 서동준이었다. 인천의 3인방이 우리 국가대표팀을 이끈 것이다. 당시 서동준은 19세, 유완식은 36세였다. 일본, 필리핀, 대만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대만을 상대로 4-2 역전승을 거두고 1승을 올리며 3위를 차지했다. 이는 의외의 결과였다. 해외 무대에 첫 선을 보인 한국팀이 이 대회에서 꼴찌를 차지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기 때문. 38세 되던 해 유완식은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당시만 해도 야구선수 나이 서른이면 '환갑'으로 불렸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선수관리가 없었던 시절 38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 유완식은 말 그대로 '불사조'였던 것이다. 현역 은퇴 후 유완식은 기계부품 제작회사인 인천기공사를 운영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문 역할도 했으며 유옹은 대한야구협회 이사(1969)와 경기도야구협회 부회장(1975)을 역임했다. 2005년 4월 5일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의 홈 개막전에 여든여섯의 유완식은 시구자로 나섰다. 한국야구 100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해를 맞아 3만여 명의 팬이 스탠드를 채웠다. 당시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유옹은 "왕년에 야구 선수였는데 공이 원 바운드로 가는 바람에 창피했다"면서 웃음지었다. 현재 유옹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최근 것은 기억을 잘 못하며 과거 기억만을 떠올릴 뿐이란다. 또한 심장 기능도 약해져 배터리에 의해 그 기능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야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유옹의 곁에는 친구들이 있다. 하명호 전 인천시청 감독(동산고 졸업)과 주세현 전 제일은행 감독, '막내' 서동준(이상 인천고 졸업)씨 등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듯 유옹의 야구경기는 과거 그의 친구들과 함께 여전히 진행중인지도 모른다. 특히 지역 연고 프로팀이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면서 그의 야구혼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2007-04-10 김영준

[인천인물 100人·73] 인터뷰 / 前야구국가대표 서동준씨

"초등학교 시절 존경의 대상이었던 유완식 선생님과 함께 1954년 대표팀이 됐습니다. 그 자체로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어요." 1950년대 초 인천고를 무적함대로 이끌었던 명투수 서동준(71)씨는 탁월한 실력으로 인해 졸업을 앞둔 1954년 12월 대표선수로 발탁, 필리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유완식 옹과 함께 출전했다. 서씨는 "초등학교 때 유 선생이 가끔 학교를 찾아와 귀엽다고 안아주셨다"면서 "상당히 어렵게 대하던 분이었는데 이러한 분과 한 팀에서 뛰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야구 선진국인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고, 그 곳 프로까지 경험한 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투수로서 최고였다"면서 "선생님에게선 기술과 함께 정신적인 면에서도 배울게 많았다"고 덧붙였다. 서씨는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기억을 고교시절로 되돌렸다. "당시 인천고 사령탑이었던 김선웅 감독과 선생님은 친구 사이였어요. 또 예전 인고 자리가 선생님이 운영했던 인천기공과 가까웠고. 때문에 우리들이 연습할 시간이면 운동장을 찾아와서는 그야말로 훈수를 많이 뒀지요. 같은 투수로서 커브 그립을 알려주기도 했고…." 이제 반세기가 훌쩍 흘러서 그 대선배와 오랜 친구로 유 선생님의 기억력 회복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같이 마작을 즐기고 있는 서씨. "오늘(3일)도 선생님과 마작 하는 날이에요. 조금 있다가 인천 배다리 사거리의 인천기공 자리로 가야돼요."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자택에서 만난 서씨는 시계를 보고는 야구 선배의 건강을 위해 기꺼운 발걸음으로 인천행을 재촉했다.

2007-04-10 경인일보

[인천인물 100人·72]독립운동가 유완무

>72< 독립운동가 유완무 100여년 전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어간 독립투사의 한(恨)은 풀릴 것인가? 인천지역 독립투사 가운데 한 사람인 유완무(柳完茂·1861~?)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그가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어떤 항일투쟁을 했었는지에 대한 비밀이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나와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다. 유완무는 백범 김구 선생의 활동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인물로 백범 일지에 기록되고 있지만 그의 말년 행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런 그의 항일운동 활약상이 정부의 공개조사로 제대로 조명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는 백범 김구가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리서에 투옥돼 있을 당시 백범 탈옥 계획을 세운 것으로 백범일지에 나타난다. 특히 그는 김창수(金昌洙) 라는 백범의 원래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줬고, 호를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바꿔줬다고 백범은 술회하고 있다. 열 다섯 살이나 많던 유완무가 김창수란 이름을 고친 이유를 독립운동을 하는데 불편했기 때문이라고 백범은 덧붙이고 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선생이 일본군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리서에 있을 때 유완무가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모험대를 조직해 인천항 주요 기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창수(백범 김구)를 구출해 내는 계획을 짰다' 란 대목도 있고, '감옥에서 탈출한 백범이 이런 그의 노력에 감탄해 유완무를 만나기 위해 한성 공덕리에 사는 유완무의 동서 박병태의 집에 찾아가 그를 만났다'는 얘기도 있다. 백범은 유완무를 '평생친구'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그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갔다고는 하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또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역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완무를 새롭게 조명할 단서는 그의 고향 인천에서 제공됐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이희환 박사 등 지역 향토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를 중심으로 유완무에 대한 재조명 노력이 이뤄져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유완무는 1861년(철종 12년) 부평부 시천리 (始川里) 진주 유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현재 이곳은 인천시 서구 시천동으로 흔히 시시내 유(柳)씨로 불리는 진주 유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검여 유희강 선생도 바로 이곳 시천동 출신이다. 현재 이곳엔 유씨 집안 5~6가구만 남아 있다. 이 곳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한 유흥규(85)씨는 유완무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다. 유씨는 "선생님(유완무)은 심씨와 결혼하셨고, 희달, 희영이라는 이름의 아들 둘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딸을 두었다"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정의감이 커 동네에서는 일찍부터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고 말했다. 또 유완무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충청도 지방 등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지역에서의 정확한 활동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그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만주로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떠난 이후의 행적은 더욱 가려져 있다. 다만 해방직전까지 큰아들 희달씨는 고향을 왕래했다고 한다. 유완무가 어떻게 피살됐는지에 대한 단초가 최근 나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완무의 죽음을 피살로 단정짓고 있다. 이는 독립신문 1920년 5월15일자의 '범윤(範允)이 일시의 감정으로써 그 중견인물된 유완무(柳完茂)를 살해한 그것이 또한 군심수습(軍心收拾)하는 여부(與否)에 막대한 원인이 되엿다'는 대목에 근거하고 있다. 또 1912년 러시아에서 한국 독립투사들에 의해 발간되던 권업신문 1912년 11월17일자는 '백초 유완무씨가 애국 열심을 품고 러·청 양국 영지로 다년 분후하다가 일초에 어떤 흉한에게 피살되고 지금 육년이 되도록 그 죽엄도 찾지 못하고 그 죽은 원인도 발현하지 못하고 이 안건을 한의심 구름 속에 부쳐둠은 일반 마음가진 자들의 부끄러운 매며 애통한 바이러니 근일에 북간도 등지에 유하는 몇몇 지사들이 이 일을 발현하려고 국력으로 모사하여 중국 관청에 교섭하며 마침내 흉한 몇몇을 잡아 재판정에서 공초를 받았는데… 대략이 죄와 같더라' 고 보도하고 있다. 유완무 살해사건을 조사했던 경무국비밀조사안에는 그가 '1909년 2월24일 만주지역 훈춘(渾春)에서 어떤 괴한 5~6명에 끌려가 살해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독립신문이다. 살해의 주범으로 이범윤(李範允)장군을 지목한 것이다.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1907년 간도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러시아와 간도지역을 왕래하며 독립무장단체에 무기 등을 공급하고 간도 영토문제로 청나라와 교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범윤이 직접 살해했는지, 아니면 자객을 동원해 암살을 지시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완무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완무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철행 팀장은 "이범윤은 복벽주의(왕권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 성향이 강한 무장독립운동 세력으로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 활동했었는데 이 시기에 유완무와도 함께 손잡고 무장투쟁운동을 했다는 조사자료가 있다"면서 "유완무가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을 했다면 이범윤과 이념상의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사이에선 이데올로기 논쟁이 살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유완무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꽤 영향력이 컸고, 간도문제와 관련 이범윤과 함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살해된 뒤 독립군의 마음을 다잡는 게 문제가 될 만큼 무장독립단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안창호 선생이 미주지역에서 발행했던 신한민보(新韓民報)에 따르면 그는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설립에 블라디보스토크 신입회원으로 참여했다. 북간도 활동과 관련해서는 이회영(李會榮),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등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을 세웠고,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그의 비중에 비해 연구작업이나 조명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지역사회는 물론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세기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인천의 독립운동가 유완무가 이번 기회에 우리 역사에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7-03-27 김명호

[인천인물 100人 ·71] ■ 영화학당은

현재 인천 동구 창영동에 위치한 인천 영화초등학교의 역사는 지난 1892년 영화학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으로 23세에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내려와 제물포 교회 존스 목사와 결혼한 뒤 여자 아이 한 명을 데려다 키우면서 영화학당이 시작됐다. 1892년 8월 사립학교로 영화학교가 탄생, 교육에서 배제돼온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대부분 기독교 집안의 자녀들이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선교사 추천과 시험 등을 통해 서울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의 보통과, 고등과, 중등과, 대학과로 들어가는 수순이었다. 당시에는 여학생만을 받는 학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화학당의 대학과 제1세대로 불리는 김활란,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 모두 인천 영화여학교 출신으로 이들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우선, 김활란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을 맡고 1960년께는 명예총장, 이사장직 등을 역임하며 이화 10년 발전 계획을 수립해 학교내 동상으로도 세워져 있다. 서은숙과 함께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애마도 이화여대 사범대학 학장을 맡았다. 김영의는 피아노를 전공해 이화여대 음악대학 학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학교내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의 홀'이 있어 각종 공연이 열리고 있다. 현재 영화초등학교에는 이들에 대한 학적부는 찾을 수 없지만, 이들은 '영화를 빛내는 자랑의 선배들'로 꼽히고 있다.

2007-03-20 경인일보

[인천인물 100人·71] '梨花人' 외길 서은숙 선생

'이화의 딸이셨고 그 한평생을 이화 동산에 바치셨습니다'. 1979년부터 90년까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 박사는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선구자인 서은숙(徐恩淑·1900~1977) 선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한 선생 삶의 60여 년은 이화학당, 이화여자대학교와 이어져 있다. 지난 14일 서은숙 선생의 '이화인'으로서의 숨결을 직접 느끼기 위해 서울 신촌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학교에 대한 오랜 기록을 담고 있는 역사자료관을 찾았다. 1층 행정실에서 담당 직원에게 서은숙 선생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 왔다고 이름 석자만 댔을 뿐인데 총장서리, 이사장이었다는 대답이 대뜸 나왔다. 자료관에는 그에 대한 경력사항과 함께 이대학보나 다른 신문, 잡지 상에 나온 기록 복사본이 남겨져 있었다. 다른 기록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이대학보사에 연락을 했다. 여기에서도 서은숙에 대한 경력은 쉽게 나올 정도로 그와 이대의 인연은 깊은듯 했다. 그런 그를 인천의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배움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인천, 영화학교라는 점이다. 이곳을 발판으로 그는 여성의 최고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으로 인생 진로를 결정짓게 되며 당시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커간 것이다. 이는 1937년 1월 인천에서 나온 잡지 '월미' 창간호 '대(大)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제목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글쓴이 임하삼은 '조선 여성의 최고교육기관인 이화전문학교의 부교장으로 그 뇌명(雷名)이 천하에 떨치고 있는 김활란씨가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을 것이요. 같은 교문 내에 이화보육학감으로 계신 서은숙씨도 역시 여성 인천의 대표적 선진이시다'라고 했다. 여성 교육이 크게 제약받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인천사람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김활란에 이어 서은숙을 꼽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900년 12월19일 인천 율목동의 한 농가에서 그는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선생은 몸에 커다란 반점이 있어, 집안 식구들이 '점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적 상에도 그 발음이 비슷한 '정순'이라고 올렸단다. 학교에서도 그는 점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지만, 1933년 7월 호적 정정을 통해 '은숙'이라고 개명을 했다. 학창시절의 별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일본과 미국 등 외세가 몰려오던 때로 당시에 선교사들도 인천의 제물포를 통해 들어오며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여느 집과 같이 그의 집안도 이를 예수쟁이라 배척했지만, 서씨가 6살 때 어머니가 서양 선교사의 기도를 받고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 된 뒤 가족들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 초등과(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대에 있던 그는 선교사의 추천을 통해 1909년 영화여학교에 입학, 큰 언니의 지원을 받으며 집안 내에서 유일하게 신교육을 받게 됐다. 영화여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선생은 1913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 인천을 떠나 서울 정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내게 됐다. 선생이 평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꼽던 김활란 선생을 이곳에서 만나게 됐다. 한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지만 이미 대학과 과정을 밟아 학년으로는 5년이나 위였던 김활란은 기숙사 방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서은숙에게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인생의 고민도 상담해 줬다.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당시만 해도 드물게 독신을 고집했던 것도 김활란이 "결혼과 직업을 병행하는 것은 어려우니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라고 한 조언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부에 매진하다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후에 서은숙이 학교의 회계과장직, 보육학교 학감 등의 행정사무를 도맡고 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는 과정 등 전반에 김활란의 영향은 막대했다. 하지만 김활란이 사안의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던 반면, 서은숙은 김활란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등 자신이 직접 외부에 나서지 않는 편이라 일부에서는 중요한 일에서는 뒷전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서은숙은 몸집이 왜소했고, 허약했다고 한다. 중등과에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 당시 선·후배들이 만세운동으로 검거되고 있을 때도 그는 학교 안에서 창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 정도였단다. 자신의 방관이 끝내 견디기 힘든 자책감으로 남았는지, 1966년 4월 이대학보에 그는 "김활란 선배가 '너는 몸이 약해 나가면 밟혀 죽는다'고 말려서 나가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나 원통하던지 하루종일 앉아 울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과를 졸업, 대학과에 입학한 뒤 그는 이화학교 부속의 유치원 사범과 과장인 밴플리트 등을 도우면서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923년 대학과를 졸업한 뒤 바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교육계에 발을 들여 놓은 뒤에도 그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고 당시에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해외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는 1928년에 미국으로 떠나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사범대학과 컬럼비아 사범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화보육학교 학감을 맡았다. 1939년 도쿄문리과 대학에서 아동교육과 심리학을 연구하며 당시에 국내에선 간과됐던 유아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다.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을 개척,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서은숙'은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며 어린이 중심의 교육을 유난히 강조했다. 1933년 잡지 '신동아'에서도 "어린이는 물이나 점토와도 같아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모양이 되는데 그 담는 그릇의 모양은 바로 어른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어린이에게 명령조의 말보다는 의견을 주는 언어를 쓰며 신용할만한 부모가 돼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어린이의 일은 장난, 즉 노는 것이고 사회의 첫걸음이 되는 유치원은 자유롭게 노는 곳'이라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움을 갖게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1937년 잡지 '여성'에서 "인형놀이를 통해 가정에 대한 애착심과 가족 구성원의 직무를 배우고, 모래장난을 통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며 장난감 자체에 학습의 의미를 설명했다. 서씨는 1965년에는 6개월간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서리를 맡았으며, 1970년 김활란이 죽자 후임으로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노년엔 당뇨를 오랜기간 앓다 1977년 7월2일 세상을 떠났다.

2007-03-20 윤문영

[인천인물 100人 ·70]문인 김도인

>70< 문인 김도인 "인구 십만을 산(算)하는 인천에 이곧을 본위(本位)로 삼는 출판물 한개쯤 없을소냐? 미력이나마 공헌이 있고저 출생하였으니 왈 '월미(月尾)'."('월미'발간사 중) 1937년 1월 7일, 월간지'월미'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 인천엔 '창간호' 한 권이 전해지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에 박혀 있던 이 책은 2001년에야 세상의 빛을 다시 봤다. '인천문화비평'호에 특집으로 '월미'의 영인본이 게재된 것이다. '월미'는 원래 '백미(白尾)'란 이름으로 창간이 준비됐다고 한다. 이 잡지의 편집·발행인 김도인(金道仁)은 잡지 명을 월미로 바꿔 창간호를 낸 이유를 '제호변경에 대하야'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양자(兩者)가 다 자의(字意)가 깊고 예술미가 있거니와 백미(白眉)는 보통적이 않이로되 뜻이 높은 것, 월미는 우리 인천을 표시하는 점에 있어서 적당하다." 김도인은 잡지 명칭을 정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인천성'을 담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월미'를 편집할 때 인천을 지리적·정서적·문화적 중심축으로 삼았다. 인천 중심적 편집방향은 '월미'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 인천을 노젓는 이들', '인천의 인물은 누구누구?', '인천지형의 곡선미' 등 지역성을 반영하는 글이 앞부분에 배치돼 있다. 이어서 '인천', '가정란'이란 고정꼭지를 마련해 '권투계의 장래', '가정상식' 등 지역 소식과 실생활에 필요한 상식을 전달하려 했다. '월미'는 문예전문지가 아닌 지역종합소식지로 기획, 발간됐다. 김도인이 개화기와 해방 전후에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굵은 선'을 그은 건 분명하다. 그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의미있는 잡지를 발행한 것은 물론 신문기자로, 교육운동가로, 연극인으로, 문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인천의 무대 중앙을 장식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김도인이 태어나고 죽은 연대조차 확실치 않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11일자로 김도인을 인천지국 기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5일엔 '본인 뜻에 따라(依願)' 해직했다. 동아일보사에 연락해 김도인에 대해 물었지만 상세한 신상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김도인의 행적은 당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 활동한 극작가 진우촌(秦雨村·1904~?)이 주도한 지역 문학청년들의 동인지인 '습작시대'에도 참여한 김도인. 그는 '나의 결투장'이란 글을 통해 '습작시대' 동인들의 '미숙함'을 비판한 김기진(金基鎭·1903~1985)에게 공개서한을 보낸다. 이 서한에서 보인 다음과 같은 '단호함'은 김도인의 젊은 패기를 보여준다. "일보를 압섯다는 이들의 주제넘은 꼴이란 대개 이와가튼 모양이니 여긔서 더욱 습작시대의 출발한 뜻이 깁거니와 …(중략)…우리의 칼날이 엇더한지도 몰으고 어는새 나대이는 것은 너무나 경망한 짓이 안일까합니다." 그는 연극 및 공연에도 손을 댔다. 인천 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인 대중일보(大衆日報)는 1947년 3월 18일자로 인천 문학·연극·미술 동맹 등 여러 단체가 주최한 종합예술제 흥행책임자로 김도인 등 3명을 '검속'(鈐束·엄중하게 단속)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들 단체는 경찰에 연극 '하곡(夏穀)'을 상영하기로 허가받고 취주, 시낭송, 무용 공연 등을 했다는 이유로 인천 경찰서의 단속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앞선 1926년 김도인은 진우촌과 함께 연극모임 '칠면구락부'에 참여해 활동했다. 김도인은 8·15 해방 후 대중일보에 다양한 형식의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10일자는 그가 '소년소설'이라 이름 지은 '말다툼'을 싣고 있다. 같은 날 대중일보는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한 김도인의 '야담' '삼불당(三不堂)'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는 1부 32회, 2부 5회까지 나간 뒤 중단됐다. 안정현 인하대 강사는 지난 2003년 '인천학연구' 2-1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김도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습작시대'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 '월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그리고 미군정기에는 인천문학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인천문학동맹의 기관지인 '인민문학'의 발간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여러 단체와 연극 '하곡'을 상연하였는데 … 이처럼 김도인은 인천지역에서 활동을 왕성하게 한 문인이었다." 김도인은 1945년 말부터 '월미'속간을 추진했다. 작업은 인천 본정(本町) 2정목(丁目) 10번지(현재 중구 중앙동 2가)에서 진행됐다. 지난 12일 중앙동 2가 제물포조약길에서 만난 이종학(82)씨는 2정목 10번지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1946년 황해도 장연에서 월남해 이곳에 정착한 이씨는 "해방 이후 최고였지, 본정(중심가)이니까, 시청도 있었지. 하여튼 사람이 늘 끊이지 않았어"라며 당시 거리 분위기를 전했다. 해방이 가져다 준 '활기'가 '월미' 속간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 기사는 '월미'를 '향토지'(1945년 11월 13일), '대중적 향토종합지'(1945년 12월 21일)로 소개했다. 다음 해 1월 10일자 기사는 '월미'인쇄가 오는 1월 중순에 이뤄질 예정임을 알리고 있지만 다시 발간된 월미의 그 모습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도인이 교육활동을 했다는 기사도 보도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는 1935년 2월 14일자에 '강화 동검도에 사립학교 설립'이란 제목의 2단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김도인이 "300여명 학령아동이 노상에서 방황한다는 기막힌 사정"을 듣고 "소규모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했다. 지난 2001년 이희환 박사가 '인천문화비평' 9호에서 '월미'를 발굴전재하고 김도인을 조명한 뒤 6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가 남겼던 흔적은 주 활동무대였던 인천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김도인의 출생과 유년시절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다. 김도인에 대한 공식적 기록은 1948년 8월 25일자 대중일보에 실린 수필이 마지막이다. '월미'문예란을 맡았다고 알려졌고 1946년 월북한 송영(1903~1978)과 친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김도인이 월북했을 거라는 말도 있다. 전쟁통에 행방불명됐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도 있다. 기자가 취재를 하며 이곳저곳에 수소문하던 중 강화교육청 한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관련 서류를 찾아 봐야 하고, 그가 강화에서 교육활동을 하던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이분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김도인의 구체적 행적을 밝히고, 유물을 찾아내고, 정리할 때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7-03-13 김명래

[인천인물 100人 ·70] 인터뷰 / 이희환 인천학연구원 박사

"인천에서 '월미'가 발간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몇 년이 지나서야 원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세대학교 함태영(당시 국문과 박사과정)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희환 인천학연구원 박사(41·인하대 강사)는 지난 2001년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월미'를 구해 읽어본 뒤 잡지의 편집 방향인 '인천에 대한 관심'에 주목했다. 그는 '인천문화비평'에 실린 '월미'와 김도인에서 "문예 이외에도 인천에 대한 여러 정보를 담고 있고 생활과 교양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포괄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그는 '월미'에 대해 "예술과 체육, 실업계 등 인천의 여러 면모를 살피면서 뚜렷하게 지역의 목소리를 담았다"면서 "이는 곧 인천 시민의 문화 향유 의욕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또 "지역성에 고립되지 않고 중앙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소통하면서 인천의 문화적 역량을 키워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일제 시대에서 해방공간에 이르는 시기에 인천에서 문화·예술·교육 분야의 중요 지점을 차지하는 김도인에 대한 연구가 지역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무척이나 안타까워 했다. "생몰연대 확인조차 어려운 사람을 연구하고 조명하는 데는 민간 연구자의 힘으론 한계가 명확합니다. 인천시와 같은 관이 적극 나서야 합니다. 이같은 필요성은 물론 김도인에만 국한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천에서 새롭게 발굴해야 할 수많은 인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7-03-13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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