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69]신학박사 갈홍기

인하대학교가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나온 삼국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얻은 수많은 판본 중 인천의 입장에서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인천출신 갈홍기(葛弘基)가 번역자로 돼 있는 삼성문화사 판본이 나타난 것이다. 이 판본은 1983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총 7권으로 나왔다. 삼국지를 쓴 수많은 사람 중 인천사람을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드디어 나온 것이다. 1906년 강화에서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떠난 갈홍기는 우리 근현대사의 한복판에 늘 있었다. 역사적 평가를 보면 그는 청년시절 전도유망한 미국유학생으로, 대학교수로 또 대표적 친일 기독교인으로,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으로 다양한 궤적의 삶을 살았다. 이 갈홍기를 '인천 인물'로 취재하면 어떻겠느냐고 연구자들에게 물으니 대답은 엇갈렸다. 그의 이미지가 너무 부정적이어서 되겠느냐는 쪽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다룰 필요가 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많은 고민 끝에 싣기로 방향을 잡았다. 갈홍기는 청년기인 1937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잡지에서 드러난다. 1937년 1월 인천에서 나온 잡지 '월미(月尾)' 창간호엔 '대(大)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여기에선 몇 안되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중 갈홍기도 나온다. "이 글을 쓰려 할 때에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인천 속의 인천'이란 좁은 의미 보다도 '조선 안에 인천'이란 넓은 범위로 보아서 깜박 잊어서는 안될 인물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 신문지상에 굉장히 소개되고 있던 '세계적 발명가' 이성원(李盛園)씨! 좁은 인천에서 조선의 중앙무대인 경성(서울)으로 진출하였으나 업적부진으로 영락(零落)하게 되자 벌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심히 한심한 노릇이다. 이와 반대로 조선 여성의 최고교육기관인 이화전문학교의 부교장으로 그 뇌명(雷名)이 천하에 떨치고 있는 김활란씨가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을 것이요. 같은 교문 내에 이화보육학감으로 계신 서은숙씨도 역시 여성인천의 대표적 선진(先進)이시다. 거기서 한 고개 넘어서 연희전문학교로 가면 청년박사 갈홍기 교수를 뵐 수 있다. 씨(氏)는 인천의 원로 갈형대씨의 아드님이시다." 갈홍기는 분명히 당시 인천이 기대하는 유명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8년 무렵부터 그의 행적은 친일로 기운다. 그 해 6월 6일 인천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는데 갈홍기는 여기서 서무 직책을 담당했다. 그 후 1943년 11월 6일 전선(全鮮)종교단체협의회가 학병 독려를 위한 조선종교전시보국회를 결성하고 감리교, 구세군, 불교, 장로교, 천도교, 천주교의 대표를 선출할 때 갈홍기는 이동욱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선정됐다. 조선종교전시보국회는 11월 16~17일 이틀 동안 지방도시를 순회하면서 학병독려 활동을 펼쳤고, 갈홍기는 함흥과 청진에서 강연했다고 한다. 일제는 특히 1944년에 접어들면서 교역자들의 정신을 일본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연성회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는데, 감리교는 이미 1943년 8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교파 이름을 개칭했다. 이 새로운 교단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갈홍기는 연성국장이란 직책으로 연성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연성(鍊成)의 목적은 목사들에게 일본 정신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감리교회사'에서 드러난다. 목사로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에 충실했던 갈홍기는 해방직후엔 이승만 정권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갈홍기가 목사가 된 것은 그의 부친 때문이다. 그의 부친 갈형대는 항일운동가인 이동휘와 함께 강화에서 교육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그는 강화보창학교, 통진의 분양학교 설립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교육자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갈홍기는 1925년 배재고등보통학교,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고, 1934년 시카고대학 신학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귀국해 모교인 연희전문의 교수가 됐다. 이 때 그는 성서, 교육학, 철학개론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교육자였던 부친이 그를 최고의 교육환경에 두었고 유학을 통해 신학을 접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적 종교인 자격으로 일제의 정책에 충실하게 된 기틀은 어이없게도 태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941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불과 2년 만에 일약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의 지위에 까지 올라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이승만 정권에 붙는다. 숙명여자대학의 문학부장으로 있던 1948년 그는 외무부 비서실장으로, 1951년엔 주일 대표부 참사관으로 일했다. 이듬해엔 외무부 차관으로, 공보처장으로 정권 핵심부 자리에도 올랐다. 그의 이후 행적은 공보처장 취임사에 밝혔듯이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 그 자체였다. 그는 또 박정희 정권에서도 여전히 실세로 행세했다. 1966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냈고, 1973년엔 1966년 서울에서 창립된 아스팍(Asia and Pacific Council)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도 맡았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이 때의 행적은 확실치 않다. 그는 1989년 8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조선일보는 1989년 8월 30일자 1단기사로 전했다. 김흥수 목원대 교수는 "갈홍기는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위해 충실히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충실히 했고, 생애 말년에는 박정희 정부를 위해 신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갈홍기 연구 글에서 밝히고 있다. 갈홍기는 또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1956)과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1955) 등 두 권의 책을 썼다. 그가 말년에 삼국지를 쓴 대목과 이상재 선생 약전을 쓴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갈홍기가 쓴 삼국지는 부실 투성이로 평가된다. 특히 해적판으로 평가받는 판본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인하대의 삼국지 연구에 참여했던 윤진현(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박사는 "삼국지는 종종 유비 삼형제의 투철한 신의와 형제애에 기대어 역자 자신의 행적과 명분을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목되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말년의 갈홍기가 자신을 위한 변명의 텍스트로 삼국지를 삼고, 여기에 이름을 얹어 출판을 성사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행적에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하수인으로 비난 받아 온 그가 새로 드러난 '삼국지 베끼기'로 다시한번 수모를 겪어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다. 윤 박사는 또 "젊은 시절의 실력과 기대에 부응해 역사에서도 그 이름을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일제와 이승만 독재권력에 부역하며 승승장구해 온 그의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단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던 옛사람들의 경계가 새로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2007-03-06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8] 인터뷰/ 유경근 선생 손자 부열씨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 고잔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마주한 유경근 선생의 손자 부열(61)씨는 할아버지와 관련한 몇 가지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퇴직 후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낼 계획이라고 했다. 자신이 선생의 손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일제 때 일본 상인들이 발붙이지 못한 곳이 개성과 수원, 그리고 강화라고 합니다. 강화에 일본상권이 들어오지 못한 것이 할아버지의 영향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할아버지를 곁에서 보아 온 부열씨는 선생의 등에 난 혹독한 고문 흔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상여 행렬이 10리나 됐어요. 그런데 이젠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행적 중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부분이 채워지길 기대하고 있다. 후세가 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선생의 생애 연구가 받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가족들이 나서 선생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후 어머니가 생전에 약간의 연금을 받으셨어요. 어머니는 그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남기셨습니다. 좋은 일에 쓰라고 말이예요."  부열씨를 비롯한 형제들은 이 돈으로 장학사업 등 할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들 수 있는 일을 펼치겠다는 각오다.

2007-02-21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8]독립유공자 송암 유경근

>68< 독립유공자 송암 유경근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독립유공자'란 하나의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기도 했으나, 지역의 민족정신 함양에 힘쓴 교육운동가이자 기독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종교인도 되기 때문이다. 1919년 고종의 아들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를 조직, 강력한 독립투쟁을 전개하려 했던 '대동단(大同團)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으로, 또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해 나라 잃은 어린 동량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은 교육자로,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개조한 헌신적 종교인으로 한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던 그다. 그러나 고향이자 활동 근거지였던 인천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지역이 나서서 쓴 제대로 된 역사기록도 없고,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다. 후손마저 흐릿한 기억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숨결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9일 고향 강화를 찾았다. 오전 11시 강화대교를 넘자마자 차 머리를 오른 쪽으로 돌렸다. 해안도로를 10여 분 달리자 군 검문소가 나왔다. 강화 월곶리 303 유경근의 생가 터 바로 코앞이었다. 수소문해 그의 인척을 찾았다. 동네 입구에 '독립 유공자의 집'이 있었다. 선생의 손자와는 사촌뻘이 되는 유목열(68)씨 집이었다. 유씨의 부인 고정자(65)씨가 나왔다. 유경근 선생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고 하자 반갑게 맞았다. 생가 터도, 묘소도 직접 안내해 줬다. 검문소에서 가던 길로 5분여를 더 달리자 길가에 잘 단장된 묘역이 눈에 띄었다. 위엄있게 꾸며진 조상 묘 밑자락에 그가 부인 김마리아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독립지사 강릉유공경근 지묘(獨立志士 江陵劉公景根 之墓)'. 뒷면의 묘비명은 짤막했지만 그의 역사적 무게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화군 개풍군에 보창학교(광명학교의 잘못으로 보임)를 설립하시고, 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후세에게 민족사상을 교육하시었고, 1919년 3·1운동에는 강화 및 김포의 지휘관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시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광복단 군영 특파결사단의 활동을 돕기 위해 무기를 서울 내자동(內資洞) 자가에 은닉하시는 등 활동을 하시었고, 그 후 노령(러시아) 해삼위로 망명하시어 이동휘 선생이 운영하는 군관학교에 사재를 헌납하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을 모집하시어 해삼위로 보내시다가 피체돼 3년 반의 형을 받고 복역하시었습니다…'. 1988년 정부가 세운 이 묘비만 봐도 유경근이 인천지역 독립·교육 운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정부는 뒤늦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런 선생의 업적을 기려야 할 지역은 그러나 선생의 업적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인천시나 강화군 등 지방자치단체는 유경근 선생과 관련한 연구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가 세운 광명학교나 잠두교회 분회 터를 알리는 기본적 알림판도 세워 두지 않았다. 오죽하면 생가 터가 어디인지도 모를 지경이 됐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묘지를 안내하던 고씨가 갑자기 손수건을 꺼냈다. 선생의 며느리 등 가족이 어렵게 살아간 기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이었다. "결혼해서 왔는데, 후손들이 그렇게 심하게 고생할 수가 없었어요.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였지요. 식구들은 영양실조로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고요." 고씨는 선생이 자식들에게는 특별한 재산을 남겨 주지 않아서 그렇게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고 했다. 이런 고씨의 얘기는 손자 부열(61)씨에 따르면 더 확연해진다. 부열씨는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처럼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경기도 안산의 고잔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 전종임 여사의 삶은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독립 이후 처절한 극빈자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비뚤어진 역사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강화도 만석꾼 전씨 집안의 맏딸인 어머니는 생전에 '얘야 나는 속아서 시집왔다'는 말을 하실 정도로 고생이 많으셨어요. 시집오니 독에 쌀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에요. 머리에 비누를 이고 이동네 저동네를 다니시면서 장사도 하셨어요. 외가댁에서 얼마나 안쓰럽게 생각했으면 딸네 집에 땔감을 보낸다고 하면서 그 속에 남모르게 쌀을 넣어주곤 했겠습니까. 물론 아버님은 번듯한 직업도 없으셨어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족교육운동을 펼치셨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출세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 겁니다. 아니 일제에 굽히지 않았던 탓으로 생각합니다." 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강화의 2대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얼마나 항일정신이 투철했던지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으로도,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찬바람 부는 북쪽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물론 집안에는 게다와 같은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유경근의 이름은 건국대 신복룡 교수가 쓴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의 곳곳에 등장하고, 경기도교육위원회가 1975년 발행한 '경기교육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1976년 발행한 '독립운동사(제8권 문화투쟁사)'에서 언급된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대동단'. 대동단은 1919년 3월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움으로써 일본에 빼앗긴 국가의 적통을 잇게 하려 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유경근은 이 대동단 활동의 중요 인물이었다. 대동단은 크게 11개 지단으로 나눴는데, 유경근은 그 중 군인단의 총대장을 맡았다. 대동실기에 따르면 만주 독립군의 위원 모집은 대동단원에 의해서만 이뤄졌고, 이 일을 모두 유경근이 총괄했다. 당시 그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강화도의 교육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본격적인 대동단 활동과 관련해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해외파와 두루 교분을 나눴다. 대동실기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유경근은 노준, 조규상, 현완준 외 4명의 군인 지망생에게 신의주의 김성일 앞으로 암호로 된 소개장을 써 주어 7월 4~5일경에 이들이 서울 남대문역에서 신의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었다'는 대목이다. 유경근이 조직의 암호를 관장할 만큼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암호는 첫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첫 모음을 한문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 일은 결국 실패했고, 관련자는 모두 체포됐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이다. 군인 지망생 중의 하나였던 조규상이 바로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얼마나 독립운동 경계에 매달렸는지 여실히 증명하는 부분이다. 이로 인해 유경근은 1919년 12월 징역 3년을 언도받는다. 일본의 재판기록에 나타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유경근의 직업이 광업(鑛業)이란 것이다. 유경근은 금광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돈으로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개편하고 1909년 다시 광명(光明)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이 때 졸업생 10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 후 이 학교는 문을 닫았다. 광명학교의 폐교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광창학교가 보창지교로 개편한 것은 보창학교의 설립자 이동휘(경인일보 2007년 2월14일자 9면 보도)와 유경근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말해준다. 유경근은 또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썼다고 한다. 식구들이 사는 집이자, 한 쪽 공간은 학교이며, 또 다른 공간은 교회였던 것이다. 국내 기독교사의 중요한 지점에 있는 감리교 잠두교회의 분회를 지어 헌납했다고 한다. 교회가 경영난을 겪어 이를 팔았는데 유경근은 다시 이를 사들였다고 한다. 잇단 옥고를 치르며 '요시찰 인물'이 된 그는 일제에 의해 손발이 묶여 아무런 사업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만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기는 했지만 강화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유경근의 삶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는 고정자씨의 말은 정부나 연구자 모두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과거사 연구는 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2007-02-20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7] 연구가 이은용씨가 본 이동휘

"이동휘의 종적을 좇다보니 뜨거운 피가 가슴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낍니다." 이은용(53·강화군 농업기술센터 사회지도과장)씨는 "10년 넘게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던 도중 민족의 지도자 중에 걸출한 인물로 손꼽히는 이동휘를 발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동휘가 '보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던 과정이 고스란히 강화의 역사로 자리잡아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말하는 이동휘의 일생은 '기독교', '사회주의', '민족운동'으로 분류된다. 이중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던 과정과 활동에 대한 연구가 보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씨는 "이동휘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그동안 사회주의 활동 경력이 이동휘의 공적을 기리는데 발목을 잡아왔지만 독립운동의 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동휘의 보창학교는 강화도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며 "특히 보창학교 학생들에게 전술과 제식 등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하기 위한 이동휘의 숨은 의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보창학교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은 의병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훈민정음을 본따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한 박두성 선생도 이 곳을 나왔다. 이씨는 "이동휘의 업적을 국가에서 뒤늦게 인정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많다"며 "보창학교의 옛터가 강화읍 관청리 지역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휘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휘에게 강화도는 '민족운동의 본거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씨. 그는 이동휘를 기릴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강화에 동상을 건립하고, 정기적인 학술대회와 추모집회를 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2007-02-13 임승재

[인천인물 100人·67]민족운동가 이동휘

>67< 민족운동가 이동휘 일요일인 지난 11일 냉전과 분단의 그늘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한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제에 맞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지만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역사에서 과소 평가돼 왔던 인물이다. 대한자강회를 설립하고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음에도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단체였던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조직했던 경력이 문제였다. 그래도 '역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게 첫 유공 훈장이 수여됐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지난 1995년의 일이다. 이 때까지 이동휘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수많은 순국지사들과 함께 역사의 뒤편에 서 있어야 했다. 동휘의 숨결은 인천의 교회 역사와 처음부터 함께 한 강화중앙교회에서 느낄 수 있다. 100년이 넘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 기독교 전파의 산파역할을 맡았던 그 교세도 여전했다. 중앙 현관에 들어서자 강화중앙교회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졌다. 강화중앙교회의 전신, '잠두교회'를 거쳐 간 목사들의 사진은 물론 각종 역사 자료가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거기에 이동휘의 것도 있다.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찍은 사진 한 장. 이승만, 이동영, 이시영, 안창호, 박은식 등 한국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이동휘도 가운데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동휘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이은용(53)씨를 만났다. 이씨는 "우연한 계기로 강화중앙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던 중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종적을 강화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됐다"며 "이동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것처럼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한편 적극적인 전도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동휘는 기독교인으로, 강화도 지역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과 일제의 황무지개척요구에 맞서 항일 열기가 고조되던 당시 강화의병의 실질적인 수장이기도 했다. 특히 훗날 강화도를 중심으로 설립한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성공적으로 육성하면서 이동휘는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우뚝 선다. 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있는 이동휘의 또다른 사진이 보였다.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1902년, 강화군 진위대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천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引)으로 일하다 서울로 상경한 이동휘는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 눈에 띄어 육군 참령까지 빠르게 진급했다고 한다. 이씨는 "이동휘에 대한 황실의 두터운 신망으로 어린 나이였지만 강화도를 지키는 대대장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강화도는 군사전략의 요충지였다. 평양과 대동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강화도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자 대한제국의 심장부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씨는 "아쉽지만 강화도 진위대장의 직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며 "일제의 침탈이 계속되자 진위대장의 신분으로 조국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깊은 자괴감이 스스로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이후 고종에게 보낸 '유고'에서도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스스로 해임을 간청했던 이동휘였다. 당시 전국에서는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민영환·조병세·홍만식·송병선 등의 순절도 잇따랐다. 이때 이동휘는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불리는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을 처단하고 본인도 자결하려고 결심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동휘는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도 불린다.진위대장에서 물러난 뒤 그는 교육활동에 전념한다. 훗날 이종호의 '보성학교', 이준의 '보광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 불리게 되는 '보창학교'의 전신, '육영학교'를 설립한다. 1905년 3월의 일이다. 이동휘는 강화도에서 학생들을 육성하는 동안 1906년 3월에 설립한 대한자강회에서도 적극적인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보창학교의 교과목은 역사·지리·영어·일어·산술·한문 등 다양했고, 이동휘의 영향으로 상무정신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군사교육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육영학교 학생들은 두루마기 위에 비단허리띠를 둘렀다. 허리띠 위에는 오얏꽃 표식을 달았다. 근대식 복장을 갖추고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충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미였다. 육영학교는 영친왕의 지시에 따라 교명이 보창학교로 바뀐다. 특히 영친왕이 교명을 친필로 써준 교기는 이동휘의 명성을 한층 높이고, 보창학교의 발전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보창학교는 왕실과 고관들의 후원을 통해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성신문(1905년 3월 22일자)'은 민영환, 조동윤, 권중현, 민병석 등의 고위 관리들이 육영학교에 거액의 찬성금을 내놓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씨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반식민지화 과정에서도 보창학교는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고, 강화도에서는 수많은 보창학교의 지교들이 설립되고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보창학교의 옛터를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그 흔적이 묘연하다"고 말했다. 보창학교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기도 힘든 실정이다. 이동휘는 보창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당시 잠두교회 김우제 전도사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 '강화의 바울(Paulus)'. 한국주재 선교사로 활동했던 케이블(E.M.Cable) 목사가 이동휘를 보고 칭한 말이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愛國之心)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獨立之心)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獨立團合)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동휘가 쓴 '유고'에 나오는 대목이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각별한 믿음이 묻어난다. 종교 생활을 하면서 만난 잠두교회의 손승용 목사(경인일보 2006년 12월14일자 14면보도)와의 인연은 이동휘가 세운 보창학교의 발전 배경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손 목사는 1903년 영화학당을 근대식 학교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 1906년 강화읍으로 건너가 잠두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와 제일합일여학교 등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경험했던 손 목사가 보창학교의 내실을 다지는데 지원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고 말했다. 이후 이동휘는 강화도 의병활동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식민지화되자 강화도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한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에 연관된 혐의로 유배돼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10월 석방된 이동휘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데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 조직이던 '신민회'의 지도자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1913년 이동휘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동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1917년 3월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접한 이동휘는 볼셰비키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주장했다.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벌인다. 훗날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전쟁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결국 1921년 임시정부를 탈퇴한다. 이후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관여하고, 국제공산당에서도 활동했다. 머릿속에 온통 '독립'이란 두 글자밖에 없던 그는 1935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낯선 동토에서 병사했다. 이씨는 "이동휘의 삶을 굳이 규정하자면 '실천'이라는 표현이 무난할 것 같다"며 "이동휘가 걸어왔던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한국 근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2007-02-13 임승재

[인천인물 100人·66] 인터뷰/ 권평근선생 막내 딸 명숙씨

"어머니는 어린 우리가 엉엉 울까봐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울지를 못하셨어요. 나중엔 우리 딸들도 어머니가 슬퍼하실까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권평근 선생의 막내 딸 명숙(68)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렇게도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끝내 훈장받는 것도 못보시고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면서도 "이젠 아버지에게 왜 일본경찰이 총질을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2005년에 건국훈장을 받았으면서도 그 훈장엔 아버지 권평근 선생이 숨진 사건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숙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만을 바라고 있다. 명숙씨는 아버지의 길지 않은 삶이 무척이나 험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어머니에게서 들은 게 대부분이다. 강화에도 땅이 있었고, 인천에 집도 3채나 됐다고 한다. 또 운수업도 크게 했다고 한다. 물론 태평양전쟁 말미에 트럭을 일제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권평근 선생은 또 결혼을 세번이나 한 것으로 호적에 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명숙씨의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두 딸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숙씨는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어머니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형무소를 찾아가며 옥바라지를 했는데, 그 이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 해주셨다"면서 "출옥 이후엔 아버지 어머니가 부두에서 팥죽장사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5살 꼬마이던 명숙씨는 지금도 영정사진 밑에 쓰여 있던 '건국투사 권평근-건국준비위원회'란 문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

2007-02-06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6] 항일독립운동가 권평근

>66< 항일독립운동가 권평근 해방직후 한국인이 일본인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담긴 책 '요코 이야기'가 큰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역사를 왜곡했다는 얘기와 눈으로 본 것을 문학적으로 그렸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 논쟁은 한참을 더 가야 정리될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해방 이후 인천 땅에서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항일독립운동가인 권평근선생의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떻게 됐길래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 경찰이 우리민족의 가슴에 총질을 했다는 것인가. 그것도 '해방군'이라는 미군이 우리 땅을 처음 밟던 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서였다. 미군은 그 사건을 정당하다고 덮어버렸고, 대한민국은 6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조사 중이다. 분명한 것은 일제가 뒤꽁무니를 빼야 할 때 인천의 우국지사를 벌건 대낮에 총으로 쏴 죽였다는 점이다. '인천 조선해방의 사절로 지난 8일에 인천항에는 미국군의 입항이 시작되자 이날의 반가움을 참지 못하여 미군을 환영키 위하여 인천보안대원과 조선 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權平根·47)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26)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리고 중상자와 경상자 14명을 내어 도립의원에 수용하고 응급치료중인데 이 사건의 전말을 미군 CIC에서 조사중이다. 이에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도 미군을 통하여 일본관헌에 대하여 엄중 항의중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 부근에서 있었던 미군환영행사 중 일본경찰의 발포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1945년 9월 12일자) 기사다. 권평근(1900~1945).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던 그는 그렇게 광복의 햇살을 채 한 달도 보지 못하고 일제의 총탄에 쓰러졌다. 지난 5일 권평근 선생의 딸 명숙(68)씨를 만났다. 명숙씨의 딸(유경미)이 경영하는 서울 영등포의 한 학원에서다. 칠순을 바라보는 명숙씨는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몇 차례나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숨진 사건의 실체가 아직까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숙씨를 비롯한 가족은 2005년 3월 1일을 잊을 수가 없다. 청년·노동운동의 발판이 됐고, 인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권평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내려진 것이다. 선생이 숨진 지 60년 만의 일이었다. 나라가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줬지만 9월 8일의 그 사건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건국훈장은 생전의 항일운동의 유공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평근 선생이 일본 경찰의 손에 의해 숨진 이 사건은 다행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해 진실을 밝혀 낼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은 패망한 일제와 그 바통을 이어받은 미군 사이의 묵계가 있었기에 묻혔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건 사흘 뒤인 9월 11일자 미국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면서 당시 국내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를 꼬집었다고 한다. 60년 넘게 묻혀 있는 이 사건이 당시 인천에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충격파였다. 1945년 9월 22일자 해방일보는 '9월 8일의 미군 환영인파에 대한 발사로 인명의 희생이 있었음을 항의하는 시위가 인천에서 6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행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건 이후 지역사회가 얼마나 들끓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장례식도 건국준비위원회 주도로 치러졌다. 당시 매일신보는 '지난 8일에 연합군 환영을 나가다가 일본인 순사의 불법한 발포로 말미암아 즉사한 노동조합 인천중앙위원장인 권평근과 보안대원 이석우의 시민장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 지난 10일 오전 10시에 전 시민의 참열 아래 엄숙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날은 미군측으로서 각 장교들 30여 명이 여러 차례로 조문을 하였으며 장의위원장 박남칠(朴南七)의 조사를 비롯하여 각 단체 대표의 조사가 있은 다음 악대를 선두로 시가행렬을 하여 엄숙하고도 장중히 장지인 주안정(朱安町)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고 성대하고도 장엄했던 장례식 모습을 전했다. 장례식 장소는 중구 인형극장이었다. 권평근 선생에 대한 추모물결은 이듬해 5월까지가 고작이다. 추모비 건립 움직임과 표창까지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대중일보는 1945년 11월 10일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연합국의 미국이 인천항에 상륙케 되자 이를 환영나간 우리의 건국투사인 고 권평근씨외 보안대원 이석우 양씨들에 경관이 불법 발사를 한 사실은 천인이 공노할 큰 사실의 하나이었는데 이에 인천시 인민위원회에서는 이 두 투사를 추모하는 의미로서 발사 당한 그 자리에 건국투사의 추모비석을 세우고자 방금 준비중이다'라고 사건 2개월여가 지나도록 끊이지 않던 사회적 추모분위기를 전했다. 또 1946년 5월 3일에는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펼쳐진 인천노동절 기념행사장에서 표창이 있었다. 권평근 선생은 강화에서 태어났고, 인천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 신간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딸 명숙씨는 아버지가 합일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배재학당을 다니다 그만 둔 것으로 기억했다. 19세 때는 고향 강화에서 3·1운동 시위대열의 선봉에 섰다가 3년여 동안이나 충청도에서 피신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1921년엔 강화 양도면 조산교회의 '조산엡웟청년회'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이 때 선생은 의사부장을 맡았다. 1926년 11월에 중국 중산대학에 입학하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명부'엔 선생을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당국의 집중 감시대상 인물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30년 1월 6일 인천노동조합 제2차 정기총회에서 조직선전부장으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그의 노동운동은 항일투쟁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검거 투옥된다. 특히 그는 1931년의 '인천방향전환사건'의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방향전환사건이란 1931년 7월 중국의 만보산 사건(기차 폭발로 많은 중국인이 죽자 이 사고를 한국인이 일으켰다는 일본의 계략 때문에 만주에 있던 한국인들이 큰 피해를 당했음) 이후 인천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는 폭동 소요사태가 연일 벌어지자 폭동의 방향을 전환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했다는 것을 말한다. 권평근 선생은 이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당시 이 사건 최고형이었다. 권평근 선생은 여운형이나 조봉암과도 각별한 관계였다고 한다. 특히 조봉암은 선생의 '3년상' 내내 제삿날마다 집을 찾았다고 한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국가기관이 나서 해방직후 일본경찰의 발포사건을 조사한다고 하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2007-02-06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5]화가 김영건

인천 출신 화가 중에 인천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김영건(1915~1976)을 들 수 있다. 세 차례나 조선미술전에 입선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그의 화폭엔 늘 '인천'이 있었다. 그의 풍경화 대상이 된 용동큰우물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인천항 그리고 청관(淸館)거리 등은 인천의 근대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동큰우물은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로 남아 있고, 만국공원은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또 인천항은 여전히 국내 대표항구로 역할을 하고 있고, 청관거리는 차이나타운 활성화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인천의 상징물에선 옛 모습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몇 십년의 세월이 그 흔적을 모두 지운 것이다. 그나마 김영건의 그림이 있기에 추억이라도 가능하다. 인천출신 미술평론가 김인환씨는 1996년 '김영건 인천 풍물화전'이 열렸을 때 "그의 유작이 발굴됨으로써 소재적 차원에서 인천항의 옛 모습을 그림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간접적인 연상에 의해 복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김영건을 '인천의 살아 있는 예술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 김영건의 작품엔 잘 찍은 풍물사진보다도 더욱 리얼리티가 살아 있고, 그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인천 모습을 생생하게 되돌아 보게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 29일 오후 2시. 김영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용동 큰 우물' 현장을 찾았다. 모텔과 여인숙, 칼국수집, 그리고 이런저런 음식점들이 즐비한 중구 용동 큰 우물 거리 한 구석에 화제(畵題)의 그 우물이 있었다. 펜스로 두른 우물가엔 전날 취객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역한 오물이 흉물스러웠고, 쓰레기가 둥둥 뜬 물은 썩어 있었다. '고종 20년(1883)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만든 현대식 우물이다. … 1967년 육각정을 지어 우물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 알림판 문구가 어이없을 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동정 박세림의 제자(題字) 보다도 큼지막하게 쓴 중수기(重修記)였다. 민선 초대와 2대 구청장의 이름이 선명한 중수기는 '…긴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우물의 맑은 샘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왔으며, 용동의 역사와 성장의 길을 같이 해 왔다'고 중수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지금의 모습에선 전혀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김영건의 '용동 큰 우물'에선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여인네들이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이며, 어린 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나온 것이며, 우물에 얽힌 우리 삶의 궤적이 선연하다. 화가이면서도 간판집을 운영해야 했던 곡절 많은 생을 살다간 김영건은 유독 '인천'에 몰입했다. 아니 서민생활에 집착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은 김영건을 일컬어 '철두철미하게 향토화가'라고 한다. 김영건이 인천에 이름을 드날린 것은 1938년이다. 당시 동아일보 11월 3일자에서다. '…이번에는 조선미전 입선의 신진화형(新進畵兄)으로 인천 미술계의 촉망을 한 몸에 모은 김영건(金英健·24)군을 필두로 6인의 한결같은 열정을 경주하여 그린 작품 50여 점을 한 곳에 모아 여섯 인사의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이 기사엔 김영건 이외에 김진태, 서본(西本), 계(堺), 윤규병, 루정(樓井) 등의 이름이 나온다. 모두 20대였고, 일본인들도 포함돼 있는 듯 하다. 인천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박석태씨는 그의 석사논문 '일제강점기 인천의 화단-향토색 논쟁을 중심으로'(2006. 12)에서 김영건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인천 출신의 조선인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영건은 젊은 시절 잠시 일본에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 태평양 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선했다고 그의 제자인 이경식은 밝히고 있다. 이경성 선생은 "나와의 관계는 해방 이전 인천의 내동에 살면서 화가로서 선전(조선미술전) 등에 출품하고, 초기 인천화단의 개척자로서 나의 소년시절 인상에 남는 존재였다"면서 그림에 신들린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회고했다. 이경성 선생은 또 자신보다 4살이 위인 김영건이 그림에 미쳐서 집안에서 내쫓겨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얘기한다. 김영건은 20세가 되던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선전)에서 풍경화 2작품이 입선한 이후 제17회(1938)와 제23회(1944) 선전에서도 입선한다. 당시의 인천 화단에서 공인된 선전에 입선, 화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은 것은 김영건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는 1952년 대한미술협회 인천지부 조직에도 참여하는 등 지역 화단활동도 열심히 했다. 또 유희강, 우문국, 이경성 등이 1969년 창립한 미술가 모임 오소회(五素會)의 전시회에도 빠지지 않고 출품했다. 이 시기 그는 또 2번의 개인전도 가졌다. 이 때는 인천에 전시회 공간이 마땅치 않아 은성다방에서 그림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은성다방 전시회는 인천 초기 화단의 활력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건은 선미사(線美社)란 이름의 간판집도 운영했는데, 생업으로 했다고 한다. 간판점이 꽤 잘 돼 생활에 여유도 있던 김영건은 신포동 시장골목의 허술한 주점인 백항아리집의 단골이었다. 이 백항아리집은 당시 인천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어울리던 중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창작여건이 좋지 않던 때의 예술가들이 일상을 털어버리던 장소로 백항아리집이 애용됐고, 김영건이 이런 자리를 주도했다고 한다. 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을 맡는 등 의욕적 활동을 펼치던 김영건은 늦게 본 외아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76년 작품 제작 중 뇌출혈로 쓰러졌고, 결국 62세의 삶을 마감했다. 김영건과 관련한 자료를 빼놓지 않고 있는 미술평론가 이경모씨는 "김영건은 인천의 미술인 중에선 중요한 지점에 있다"면서 "그의 작품을 통해 근대 인천 풍경을 재조망하고, 또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영건의 작품세계 몇가지 유형의 패턴으로 나눌 수 있다. 평론가 김인환씨는 고향 인천에 대한 향토색 짙은 애정과 서민 생활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 그리고 인물이나 동물의 자태에 대한 나름의 관찰·표출 등을 김영건 작품의 특색으로 정의한다. 만국공원에 올라서 바라본 인천항의 풍경, 또 인천상륙작전 때 부서졌지만 그래도 남아 있던 청관거리 모습, 만국공원의 상징물인 인천각 풍경 등은 그의 인천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 여인 누드도 그의 작품세계에서 한 목록을 이룬다. 김영건의 누드엔 세잔느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요소가 있다고 김인환씨는 평가한다. 한 가지 특징은 인체의 실체적 묘사에 의하지 않고, 가상의 여인나상을 통해 리드미컬한 화면의 율동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또 70년대 이전의 신포동 시장골목, 수인선 철도변 모습 등도 화폭에 담았던 그는 동물화도 그렸다. 만년에 그는 여러 애완견을 키웠는데, 그 형태와 동작을 얼마나 주의깊게 관찰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동물화에선 그의 깊은 묘사력이 잘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수묵필법으로 그린 민화풍의 호랑이 그림도 있고, 정물화도 있다. 그의 작품세계가 어느 한 대상이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의 제자로는 이철명과 이경식 등이 있다.

2007-01-30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 · 64] 친구 하명호 전감독이 본 박현식은

"현식이는 마치 야구를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어…." 동산야구 1기 멤버로 박현식과 함께 운동했으며, 1960년대 전 인천시청야구팀 감독 역임 후 1967년부터 15년간 경기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하명호 전 감독은 학창 시절 친구 박현식을 이처럼 회상했다. 하 감독은 "건장한 체구를 소유한 현식이었지만 걸음도 빨랐고 투수, 타격, 수비 공수주 3박자를 완벽히 갖췄다"며 "그는 우리가 하지 못하는 걸 하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장한 체구의 박현식이 처음부터 달리기를 잘 했던 건 아니었다. 박현식은 당시 동산중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김완희 선생과 이달성 선생이 자취하고 있던 방에서 밥과 청소를 도맡아 하는 조건으로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때 김완희 선생의 지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 감독은 "김 선생님이 현식이에게 매일 저녁 달리기를 시켰다"며 "현식이가 타고난 면도 있었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운동해 달리기 능력을 향상시켰고, 이를 통해 대형 야구선수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배트를 못질해 쓰고, 미군 부대에서 야구공을 훔치는가 하면 미군이 신던 커다란 스파이크를 줄여서 신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인천 야구의 열기는 대단했고, 그 중심에 우리가 있었다는 하 감독은 인터뷰 말미 "김선웅, 박현덕 감독님이 인천 야구 1세대를 이끄셨다면, 현식이를 비롯한 우리들이 인천 야구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시절이었다"면서 "선배들이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인천 야구를 지켜왔는지 어린 야구선수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2007-01-23 김영준

[인천인물 100人 · 64]'아시아의 야구철인' 박현식

'집으로 돌아와 계속 항암제를 투여 받으면서도 그는 7월19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꼭 한 달 뒤인 8월19일 급작스런 호흡곤란으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 그는 의료진이 호흡을 돌리기 위해 목에 구멍을 뚫어 폐에 관을 투입하자 손가락으로 장남 박홍원의 손바닥에 '빼'라고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의료진도 고개를 저으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가 생전에 유니폼을 입고 떠나고 싶다는 뜻을 받들어 장남 박홍원이 준비해둔 슬라이딩팬티부터 하나하나 유니폼을 입히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모자를 씌우자 마침내 얼굴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니폼을 다 갖춰드리자 그는 편안해진 얼굴로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다.' '인천야구 한 세기'는 야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朴賢植·1929.3.11~2005.8.20)의 임종 순간을 이처럼 기술했다.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부터 1965년 제6회 대회까지 11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20여 년간 112개의 홈런(비공식)을 기록한 한국 야구계의 거목 박현식은 2005년 8월20일 0시30분 우리 곁을 떠났고,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는 그의 장례를 최초로 '야구인장'으로 거행했다. 1929년 3월11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후포리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현식은 7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와 중구 송현동에 정착했다. 그는 창영소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동산중학교(당시 6년제)에 입학, 3학년(1946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동산중의 상업교사로 재직하며 야구 감독을 겸하게 된 둘째 형 박현덕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또 너무나도 궁핍한 시절, 야구부원으로 활동하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박현식은 1945년 6월 창단한 동산야구 1기 멤버로 참여하며 그 출발점에 선 것이다. 당시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엄하게 선수들을 다뤘던 박현덕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동산야구의 개척자들로 필드를 누볐던 이들은 박현식을 비롯, 하명호, 이근배, 한명진, 황우겸, 정진철, 최광풍, 문동현, 윤태섭 등이다. 이들은 인천학생야구를 주도했다. 동산중은 해방직후부터 6·25가 발발하는 1950년 이전까지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의 경기도 대표로 출전하며 지역 최강자로 군림했고, 그 중심에는 투수이자 팀의 4번 타자였던 박현식이 있었다. 당시 인천상업(현 인천고) 선수들은 동산을 넘어설 수 없어서 속앓이를 적잖게 했다 한다. 박현식의 볼은 위력적이었다. 동산 1기 멤버로 박현식과 함께 뛰었으며, 인천시청 감독을 역임했던 하명호(77) 전 인천시청야구팀 감독은 "당시 우리들보다 공수주 모든 부문에서 수준이 훨씬 위였다"며 "투수로는 전국에서 최고 수준이었다"고 중학시절의 박현식을 평가했다. 이렇듯 당시 학교 야구선수 중 최고의 실력자였던 박현식.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박현식에게는 가난이라는 굴레가 그를 좇아다녔고, 이는 두 번의 선택 기로에 선 그에게 모두 돈을 택하게 만든다. 박현식은 1년 여 동안 경기중학의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경기중은 스스로 전국 최강의 실력이라고 자부했지만, 1947년 제1회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장태영이 버틴 경남중학에 패한 이후, 복수전을 위해 구위가 남달랐던 동산의 박현식을 집과 생활자금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하명호 전 감독은 "동산야구의 개척자였던 우리들은 힘든 현실에서 야구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현식이가 떠난다고 말했을 때 팀 동료들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붙잡을 수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친형이었던 박현덕 감독도 그를 순순히 보냈던 점에서 당시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경기중으로 전학간 박현식은 1948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장태영(경남중학)과 진검승부를 펼친다. 호각세를 이뤘지만, 장태영의 벽을 넘지 못하고 모두 패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박현식은 동산측의 도움으로 다시 모교로 돌아온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돌아오게 됐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설에는 박현덕 감독이 동생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형제지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박현식은 졸업을 앞두고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동산중을 졸업하면서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지만 조선운수(현 대한통운)에서 서울 용산구 도원동에 집 한 채를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해 왔다. 인천에 정착한 지 20년이 됐지만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부모님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는 야구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배트와 글러브를 먼저 챙겨 나섰다고 한다. 물론 전쟁통에 야구는 2년간 중단됐다. 박현식도 전쟁이 나자 1950년 가을 대구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리고 1·4 후퇴때 부산에서 우연한 기회에 미군 병참부대원들과 야구를 하게 된 박현식은 미8군 대회에까지 출전해 미군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투수와 타자부문에서 맹활약, 소속부대를 우승시켰다. 종전 후 1955년 박현식은 창단을 준비하던 육군으로부터 받은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 학생야구시절 라이벌이었던 장태영과 김양중, 김정관 등과 육군팀에서 뛰며 육군의 전성시대를 이끈다. 1959년 군 제대 후 농업은행(현 농협)에 입단한 박현식은 1962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4번 타자로 불방망이를 휘두르던 박현식은 실업연맹전 첫 날 경기에서 송구에 얼굴을 맞는 부상을 입었고,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만 하루만인 24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는 이튿날 경기인 농업은행과 한국전력의 경기를 라디오를 통해 청취한다. 5회초 3-4로 소속팀이 지고 있는 순간에 박현식은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환자복 위에 유니폼을 껴입고 대타로 타석에 들어서서 역전 홈런을 날렸다. 박현식의 이름을 아시아에 확실히 각인시킨 경기는 대표 선수 마지막이던 1963년 제6회 아시아선수권에서의 일본과의 경기였다. 1회초 일본에 한점을 먼저 내주었으나, 박현식이 1회말 곧바로 장쾌한 홈런을 날려 1-1 원점으로 만들었고, 결국 아시아 선수권에서 일본을 처음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당시 신용균 전 쌍방울 감독이 투수로, 김응룡 전 삼성 감독과 박현식이 3번과 4번 타자를 맡았다. 이 밖에도 1959년 국제군인야구선수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장외홈런을 날려 필리핀 리잘 경기장에 '박현식존'을 만들게 했으며, 1964년 대통령배 실업연맹전 최다 출루상, 1966년 대통령배 실업연맹전 최다 홈런상, 아시아선수권대회 최다 출전(1~6회)해 필리핀에서 열린 제6회 대회에서 '아시아의 철인'으로 특별상을 받는 등 한국야구계에서 전무후무할 기록들을 쏟아내며 선수생활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슈퍼스타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항간의 속설은 박현식에게도 적용됐다. 1969년부터 12년간 경기도야구협회 사무국장을 거쳤으며 프로야구가 창단한 해인 1982년부터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등의 기록원으로 활동하며 박현식을 봐왔던 강대진(64)씨는 "선수 시절 슈퍼스타셨으며, 그 건장한 체격에 우선적으로 후배들이 주눅들었었다"며 "당신께선 야구만 알면서 그것을 위해 노력해 많은 것을 이뤘는데, 후학들은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당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많이 답답해 하셨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박현식이 1982년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으로 최단기에 낙마한 불운한 지도자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지만,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뒤흔들진 못한다. 현재 고 박현식 감독의 유족들은 인천시에 훈장 추서를 건의 중이다. 유족 측은 "최근 박치기 왕이었던 프로 레슬러 고 김일 선수도 프로 선수로 체육 훈장으로 최고의 영예인 청룡장을 수상했던 바, 고 박현식 감독에게도 훈장이 추서된다면 인천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야구인으로서 최초로 야구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렀고, 훈장 또한 야구인 최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저자 박민규씨는 '인천야구 한 세기'에서 고 박현식 감독을 이렇게 기리고 있다. '아마도 감독님은 이 세상에 출루했다 지금 막 생환하신, 가서 야구는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노래할 우리 모두의 영원한 슈퍼스타일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지금 홈플레이트를 힘차게 밟고 돌아서는 저 홈런타자를 위해, 우리 모두의 박수와 환호를 원음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다. 영면하소서 감독님, 우리의 슈퍼스타시여'.

2007-01-23 김영준

[인천인물 100人·63]'흑인詩' 천착… 시인 배인철

희수(喜壽)의 노교수는 60년 전의 기억을 또렷이 떠올렸다. "어머니는 병풍 뒤 관속에 누워 있는 오빠를 향해 '너도 나라를 위해 일했지만, 쏜 사람도 나라를 위한다며 그런 것 아니겠냐'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어머니의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너무나 태연하신 그 말씀에, 또 우익테러를 확신하시는 그 모습에 두 번 놀랐습니다." 인천시 남구 도화동 '아세아여성법학연구소'에서 만난 배경숙(77) 인하대 법대 명예교수는 1947년 5월 있었던 셋째 오빠 배인철(裵仁哲·1920~1947)의 갑작스런 죽음이 당시 김두한 일파에 의한 테러 때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도 말하기가 꺼려진다"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오빠는 뒷머리 위쪽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장소가 남산이었어요. 그 곳은 김두한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입니다. 큰 오빠(배인복)는 많은 돈을 써가면서 범인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겐 2중 3중의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급격한 우경화의 바람잡이를 하던 경찰은 사흘만에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수사를 종결지었다고 한다. 배인철이 총에 맞을 때 당시 이화여대 문과 2년생이던 김현경이 있었는데, 김현경은 나중에 시인 김수영의 부인이 됐다. 김수영은 이 때 배후인물로 지목돼 경찰조사도 받았다고 한다. 해방공간에서 우리에게 '흑인시'란 장르로 억압받는 소수자를 대변하던 젊은 시인 배인철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시인 김광균과 임호권이 쓴 배인철 추모시는 당시 문인들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주안(朱安) 묘지 산비탈에도 밤버레가 우느냐/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보고 있다.//…//번역한다던/리차드 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철쭉꽃 피면/강화(江華) 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좋아하던 쫀슨 뿌라운 테일러와/맥주를 마시며/저세상에서도 흑인시를 쓰고 있느냐,//해방 후/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땅 진흙밭에/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김광균의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중. "그 모습 별처럼 꺼졌는가/니그로의 시인아/빛깔을 통해/약소민족의 슬픈 노래하던/그대 육체란/흑인부대 실은 열차이던가/남기고 간 많지 않은 시편들은/목메어 외치던/서글픈 기적 소리//…//색(色) 있는 비애/테프는 끊기지 않았는데"-임호권의 '검은 슬픔' 중. 스물 일곱의 한창 나이에 총탄에 스러져 간 배인철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늘 소외계층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또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해방직후 인천에서 발간되던 대중일보 지면에 나타난 '배인철'이란 이름 석자는 그의 당시 지역 문화·예술계에서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대중일보 1945년 10월 22일자(제16호) 1면엔 '신예술가협회 제물포에 탄생'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단체의 대표자가 바로 배인철이다. 또 회원 중엔 서정주도 있고, 조규봉, 함세덕 등 대표적 '인천인물'도 있다. 특이한 점은 레이몬 푸렌이나 린우드 이 뿌라운 등 외국인 이름도 나온다. 신예술가협회를 소개하는 기사는 이렇다. 국제문화의 교류도시로서 앞날이 총망되는 인천에 신예술가협회가 탄생됐고, 이 협회에서는 기관지로 문예미술, 연극, 음악 등 예술부문의 지도향상을 위해 '신예술'이란 문예 문화종합잡지를 발행키로 했다. 또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의장 임화 등 각 부문의 대표를 초빙해 문화강연을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배인철은 어떻게 해방직후 고향 인천에서 만들어진 문화예술단체의 대표를 맡게 됐을까. 이는 그의 피억압 계층에 대한 탐구정신이 민족예술로 승화됐고, 또 집안의 부(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신예술가협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지금의 중구청 뒤편에 있던 인천에서 제일 큰 일본인 요정 긴스이(銀水)를 접수해 '예술가의 집' 간판을 내걸고 중앙의 시인 화가 조각가 20여 명을 모아 한때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안의 돈을 활동공간이 부족하던 예술인들에게 아낌없이 썼다는 얘기다. 윤영천 인하대 교수는 배인철을 작품적 실천이 뒷받침된 문학운동가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배인철은 월북문인도 아니고 명망가 시인은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편 안되는 그의 시가 그 나름의 문학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세계지배를 목표한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재분할 전쟁이었던 제2차대전의 전승국으로서 전후 자본주의권의 주도세력으로 부상, 분단된 남한에 진주한 미국의 실체적 의미를 그의 흑인시에서 바르게 형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배인철은 1920년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한 배명선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1934. 4. 1~1940. 3. 5)를 거쳐 일본 니혼(日本)대학(1940~1942) 영문과에서 공부했다. 배인철은 일본 유학시절 권투도 하고, 흑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배경숙 교수는 "오빠가 늘 보던 책이 있었는데, 그 첫 머리의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됐다'는 글귀가 아직도 기억난다"면서 "백인들의 흑인 멸시에 대해 오빠는 유난히 분개했다"고 떠올렸다. 배인철이 권투를 한 것도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측면이었다고 배 교수는 전했다. 실제로 배인철은 우리나라 사람이나 흑인들을 괴롭히며 거들먹거리는 백인들을 뛰어난 권투실력으로 혼내주곤 했단다. 일본 유학을 중도에 접은 그는 귀국 후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가 거기서 무역업을 하던 큰 형 배인복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해방 직후엔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교장이던 길영희 선생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진해 해양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한 배인철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펴낸 '1946년판 조선시집'(아문각, 1947)에 '인종선(人種線)-흑인 쫀슨에게'를 발표한 때부터 '암살'된 1947년 5월까지라고 볼 수 있다. 배인철의 죽음을 우익테러에 의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가 1946년 11월의 남로당 결성에 깊이 관여했고, 월북시인 이병철과 우익 청년단체를 이끌던 김두한의 밀회장면을 목격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꼽힌다. 배경숙 교수는 또 배인철의 죽음 직후 있었던 웃지못할 해프닝도 소개했다. "오빠가 남산에서 쓰러진 뒤 옮겨진 세브란스병원에서 오빠의 뇌를 실험용으로 기증하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약물에 오빠의 뇌를 넣으려는 의사와 큰오빠가 크게 싸우기도 했어요." 배 교수는 오빠의 뇌가 의사에게 연구대상으로 호기심이 갔었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배인철이 죽자 서울의 수많은 문인들이 인천에 내려와 직접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까지 갔다고 한다. 이들은 또 그의 무덤 앞에 '인민의 시인 배인철의 묘'란 비명의 비석도 세웠단다. 이 비는 지금의 신기촌 진흥아파트 주변이 개발되면서 묘지 이장 때 땅에 묻히고 말았다. 이 점을 배경숙 교수 등 가족은 크게 애석해 하고 있다. 부잣집 출신인 배인철은 왜 약자에 천착했을까. 그의 천성이 약자에 있었던 것 같다. 고급 옷을 사도 며칠 뒤면 누군가에게 벗어줄 정도로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못사는 사람을 보면 가만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님 성격을 타고났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배인철의 작품은 고작 5편 정도다. 노예 해안, 흑인녀, 인종선-흑인 쫀슨에게, 쪼 루이스에게-세계권투선수권 쟁탈전 쪼 루이스 대 빌이 콘: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 흑인부대 등이다.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면서도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흑인들의 서글픈 처지를 읊은 것들이다. 배인철에게 흑인 처지는 바로 일제에 짓밟히고, 다시 미국에 침탈당한 조선민족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배경숙 교수는 여기에 '어린 쿠리'란 제목의 시 등 몇 편의 시가 더 있을 텐데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배인철의 죽음에 얽힌 진실 밝히기와 그의 나머지 작품세계 탐구는 이제 후대의 몫으로 남았다.

2007-01-16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 ·62] 이희환씨가 말하는 비평가 김동석

1995년 잊혀진 해방기의 비평가 김동석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김동석 문학 연구)을 썼던 이희환씨가 최근 박사논문 '김동리와 남한의 국민문학의 형성'을 마무리했다. 석사 이후 12년 만의 일이다. 해방공간에서 우리 문학사의 가장 대척점에서 치열한 논쟁을 펼친 김동석과 김동리 두 문인의 연구를 석·박사 논문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희환씨는 김동석을 그동안 우리 문단에서 치부하던 좌익 계열 비평가로만 보지 않고 있다. 그는 "김동석은 당시 우익으로 분류되던 이광수나 김동리 등에 대한 비판 뿐만아니라 좌쪽에 있던 이태준, 임화, 정지용 등도 함께 비평했다"고 강조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비평했다는 얘기다. 김동석 전집발간 등 인천을 대표할 문인 조명 작업이 절실하다는 그는 "김동석은 문학비평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비평도 정력적으로 펼쳤다"면서 "비평 이외에도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연구와 수많은 시, 수필 등을 통해 짧은 기간에 참다운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그는 김동석과 김동리의 유명한 순수문학 논쟁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김동석이 김동리에게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던 부분과 김동리가 김동석에게 "이념에 사로잡힌 독조(毒鳥) 비평가"로 지적했던 것 중에서 김동석, 김동리 중 누가 진정한 문인의 모습을 지향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7-01-10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 ·62] 해방기 문학비평가 김동석

인천 출신으로 국내 현대수필의 개척자로 평가받으면서 해방기 문학비평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김동석(1913~?). 이 김동석이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아니 왜곡된 채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몇 안되지만 김동석 연구자들에게 현재의 잘못된 인터넷 정보는 땅을 칠 노릇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4곳의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김동석'을 쳤다. 인물정보란에 문인 김동석이 뜬다. 그 설명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어떤 곳엔 한국의 좌익계열 문학 평론가로 경기도에서 태어났고, 1950년 월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생몰연대 없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에 월북했다고 소개하는 사이트도 있다. 또 다른 곳은 경기 인천에서 1913년 9월 25일 태어났으며, 6·25 전쟁 전에 월북해 전쟁 때 인민군 소좌 신분으로 서울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고 있다. 가장 긴 설명을 하고 있는 곳에서조차 김동석의 인생 초기를 그리면서 '경기 부천 출생으로, 인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했다가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고만 기술하고 있다. 현재 사람에게 정보를 제대로 주기 위해선 당시의 경기도 주소를 오늘의 인천으로 바꿔 얘기하는 게 맞다고 본다. 또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여도 관련 연구물을 찾아 충실하게 김동석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신속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인터넷 포털 4곳이 한 인물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르게 할 수 있는지 한심스러울 뿐이다.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아예 빼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김동석에 대한 인물정보 왜곡현상은 우리 문단의 비뚤어진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월북했다는 사실만 갖고 그는 지금까지 '해방기 좌익측 소장비평가'로만 묻혀 있었던 것이다. 김동석 연구는 고향 인천에서 10여 년 전부터 본격 시작됐다. 김동석의 생애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그의 부친 김완식(金完植) 제적등본(민적부)이 세상에 드러난 게 1995년이다.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이현식씨가 '황해문화' 1994년 여름호에 '김동석 론'을 발표하면서 그의 부친이 김완식이란 사실을 알렸고, 이를 본 인하대 석사과정에 있던 이희환씨가 '김완식'이란 이름 석자를 갖고 중구청에서 제적등본을 찾고, 결국 김동석의 인생 초반을 조명한 것이다. 이는 이희환씨의 석사논문 '김동석 문학연구'로 빛을 발했다. 김완식의 제적등본에 보면, 본적은 경기도 인천부 외리 75번지로 돼 있다. 중구청에서 일일이 제적대장을 조회해본 결과 찾은 이 제적등본에서 이희환씨는 김동석의 아명이 '김옥돌'(金玉乭)임을 밝혀냈다. 제적등본엔 또 김동석과 누나 금순의 모친 성씨가 윤씨와 김씨로 각기 표기돼 있다. 부친이 첫 아이(금순) 출생 이후 윤씨와 다시 결혼해 옥돌(동석), 옥구, 옥순, 도순, 덕순 등 네 자녀를 더 둔 것으로 나온다. 김옥돌이란 아명을 찾아낸 것은 김동석 생애 연구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학적부를 찾을 수 있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희환씨는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 1928년 18회 졸업생 중에서 '김옥돌'의 학적부를 발견했다. 여기엔 그의 주소, 생년월일, 입학전 경력, 졸업연도, 보호자 직업, 학년별 학업성적, 신체발달상황 등이 훤히 나와 있다. 학적부엔 김옥돌이 입학 전에 서당에 다녔으며, 주소지는 외리 134번지로 돼 있다. 또 부친의 직업란엔 '포목잡화상'(布木雜貨商)으로 기록돼 있다. 또 재학 중 사고로 학교를 빠진 적은 없고 2학년 때 14일, 5학년 때 4일, 6학년 때 1일 등을 질병으로 결석했다. 성적은 모든 과목에서 상위 점수를 받았다. 학년 평균으로 볼 때 10점 만점에 1~3학년 9점, 4~6학년 10점이었다. 특히 조선어는 3학년(9점)을 제외하곤 모두 10점을 받았다. 이현식씨의 글에서 시작한 김동석 연구는 결국 고향 인천에서 석사논문으로 성과를 냈고, 그 뒤 많지는 않지만 몇 편의 김동석 관련 글이 뒤를 이었다. 특히 최근엔 부산 해양대의 구모룡 교수가 '김동석 비평선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김동석 연구의 근간은 결국 이름 석자가 가져온 셈이다. 김동석의 부친 김완석이란 이름과, 이를 통해 김동석의 아명 김옥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학계의 연구작업이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인터넷상에선 여전히 반영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동석이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10세 때인 1922년 4월이다. 다소 늦은 입학이었다. 아버지가 포목잡화점을 경영해 집안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시작된 학창시절은 김동석에게 '나팔꽃 넝쿨처럼 뻗어가는' 꿈을 키우던 시기다. 크레용을 사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내손으로 크레용을 만들겠다고 초에다 물감을 들이려 했던 보통학교 1학년 때의 기억(수필 '크레용')이라든가, 월미도에서 갈매기와 흰 범선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진 낭만과 동경(수필 '해변의 시'), 사기등잔불 밑에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어린이'니 '별나라'를 읽던 일(수필 '나의 서재'), 시계포가 많던 동네를 나다니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던 일(수필 '시계'), 애관극장에서 보았던 활동사진의 영향(수필 '토끼') 등은 모두 소년 김동석에게 삶의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희환씨는 확신하고 있다. 동석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학교(인천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1928년이다. 그는 수필 '봄'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동창생에 대한 부러움과 자기자신의 옹졸한 처지를 토로하는 회고를 한다. 그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의 권유로 인천상업학교에 진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은 조선에서 학생운동이 맑시즘의 영향을 받아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3학년 때인 1930년 겨울, 친구 김기양, 안경복 등과 광주학생의거 1주년 기념식을 주도해 퇴학당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교장(向井最一)은 그의 재능을 너무 아깝게 여겨 서울의 인문계 학교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추천한다. 이 때 퇴학과 전학(편입)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상업학교 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경성이라는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중앙고보를 졸업(24회)하고, 그 학교에선 유일하게 당시 입학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경성제대에 거뜬히 입학한다. 1933년이다. 김동석의 공식적 문학활동은 대학시절에 시작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7년 9월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최초의 글 '조선시의 편영'은 김동석이 학위논문으로 연구하던 매슈 아놀드의 문학관에 기대어 당대의 한국 현대시를 비평한 글이다. 그는 여기서 '부정(否定)만을 일삼는 것은 비평의 본도가 아니다'는 비평관을 피력한다. 1938년 경성제대 본과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모교인 중앙고보에 영어 촉탁교사로 부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선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전임강사로도 출강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억압 아래서도 그의 문학혼은 치열했던 듯 하다. 이희환씨는 "그는 골방에서 한글로 시와 수필을 마치 '지하운동'하듯 썼다"고 할 정도다. 해방의 벅찬 감격도 그에겐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을 맞아도 일본군대가 남아있는 어수선한 시국은 계속됐고,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좌우익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다. 이런 와중인 1945년 12월 잡지 '상아탑'을 창간한다. '상아탑'은 1946년 6월 7호까지 발간된다. 그의 문학적 기저를 '상아탑의 정신'으로 요약하기도 하는데, 이 상아탑의 정신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조선문학의 건설을 위한 지식인의 사명과 문화의 역할 강조에 있다.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우익의 대표적 논자인 김동리와의 '순수문학 논쟁'이다. 이 논쟁 탓에 그는 아직까지도 그저 '좌익계열 문학평론가'로 낙인찍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38선이 굳어지던 1948년 '서울타임즈'의 특파원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취재차 김구 주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다. 이때 평양방문에서 본 북측의 모습이 김동석을 월북하게 만든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치는 않지만 1949년 여름에 김동석이 월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49년 5월 '희곡문학'에 발표한 문예수필 '쉐익스피어의 주관(酒觀)'과 태양신문 5월 1일자에 나온 수필 '봄'이 그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그의 공식적 지면에 등장한 마지막 글이기 때문이다. 김동석이 가족과 함께 월북한 이후의 기록이 없지만 이현식씨는 1958년 남파됐다 수감 중이던 이구영씨와의 1996년 인터뷰를 근거로 월북한 김동석이 북측에서 활동하다 남로당 숙청 때 처벌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의 실천적 측면을 유난히 강조하고, 몸으로 실천했다는 김동석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2007-01-10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61]손승용 목사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낯선 이름이다.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구국교육운동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의 생애와 이력은 아직까지 역사 속에 가라앉아 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나서는 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뒤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교육에 힘을 쏟았던 시기의 자취를 찾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인천에 머문 기간은 약 8년. 그의 생애 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그가 인천에 뿌린 씨앗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동포 우리 민족아, 우리의 독립만세를 위해 자유정신을 진흥하여라'. 손승용 목사가 남긴 수첩에 적혀있는 창가 중 일부다. 20페이지 정도의 조그만 수첩에는 애국정신이 물씬 묻어나는 창가들이 그의 자필로 빽빽이 적혀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은 창가들로 보인다. 그는 이 수첩을 항상 몸에 지니고,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창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막 전래된 기독교는 민족운동의 자궁역할을 했다. 국권침탈 위기에 놓인 시기 뜻있는 인사들이 기독교 아래 모여들었고,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구국교육운동과 결합됐다. 신앙과 교육의 합일은 특히 강화에서 감리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손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첩과 가족 사진 몇장 외 손 목사와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 전면에 드러나기 보단 후방에서 조력자로 활동한 그였기에 언론사(言論史)와 감리교에 남은 흔적을 제외하곤 이름 석자 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흔적들과 손 목사를 연구하는 이성진(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씨 등의 조언으로 그의 생애를 어렵게 짜맞출 수 있었다. 손 목사의 고향은 전남 나주다. 양반 출신으로 줄곧 고향에서 한문학을 가르치다 30대에 들어 개화사상을 접한 뒤 서울로 상경, 관직생활을 했다. 개항과 함께 외세가 밀려드는 걸 직접 목격한 그는 1986년부터 독립협회에서 활동한다. 이때 맡은 일이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 기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기자인 셈이다. 언론학계에선 그를 주필 서재필 다음인 조필이자, 실질적인 독립신문의 2인자로 인정하고 있다. 손 목사는 독립협회가 수구세력 단체인 황국협회와 어려운 싸움을 벌이던 시기 독립협회 중추원 의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 함께 활동한 회원들로는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이동휘, 이동녕, 주시경, 신채호 등이 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이동휘와는 약 10년 뒤 강화에서 교육구국운동을 벌이며 다시 엮이게 된다. 서재필이 국외로 추방되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독립신문을 운영하자 기자였던 손 목사는 그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다. 당시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다. 1900년 5월 손 목사는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 그가 인천에 내려온 건 조원시(George Heber Jones, 경인일보 2005년 9월15일자 14면보도) 목사의 초빙 때문이었다. 당시 제물포교회(내리교회) 담임이었던 조 목사는 영화학당을 책임지고 운영할 교사가 없어 적임자를 찾던 중이었다. 손 목사는 양반출신에 신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을 뿐 아니라 애국사상도 투철한 최적임자였다. 손 목사는 교사로 부임하자 학업에 게으르거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단호히 그만두게 했다. 엄정한 성격의 일면이 드러나는 동시에 서당식으로 운영됐던 영화학당을 근대식 학교로 전환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손 목사는 기독교를 통해 애국충정과 개화지식을 갖춘, 쓸모있고 강한 인재를 키워내려 했던 것이다. 조원시 목사는 1901년 연례보고서에서 '손씨는 훌륭한 교사고, 엄격한 훈육가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이쪽으로 펼쳐진 분야가 가장 유망하다'고 손 목사를 극찬했다. 1903년 영화학당은 미 감리회 한국선교부에 의지하지 않는 사립 영화학교로 인가를 받는다. 이 때 손 목사는 근대식 정규학교로 인가받기 위한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정규학교에 맞는 새 학칙을 제정하고, 학제도 개편했다. 이후 영화학교는 타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몰릴 정도로 활성화된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 손 목사는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교육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해에 치러진 졸업식 사진에선 당시 영화학교를 감싸고 있었던 강한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졸업식 때도 교사 앞에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한 것이다. 요 시기 영화학교를 거쳐간 그의 제자들로는 이미 경인일보가 '인천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보도한 하상훈과 유두희 등이 있다. 1906년 손 목사는 민족정신의 씨앗을 뿌린 영화학교를 떠나 강화읍 잠두교회 담임을 맡는다. 1908년엔 조원시 목사 등과 함께 잠두의숙을 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로 다시 세웠다. 이듬해엔 제일합일여학교를 세웠고, 두 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때 개교기념일을 5월 31일로 정했다. 손 목사는 합일학교 외에도 강화에서 활동한 약 5년간 교회부설 매일학교를 확산시키는 등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강화에 왔을 때 5개 였던 매일학교는 3년 만에 17개로 늘어났고, 교동에서도 2개였던 매일학교가 같은 기간 13개로 확대됐다. 지난 12일 찾은 인천 강화군 합일초등학교에선 희미하게나마 손 목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학교에서 기념하는 공식 설립자는 손 목사가 아니지만 '합일초교 백년사'엔 그의 이름이 2대 설립자 겸 교장으로 기록돼있다. 이 학교엔 보통 가을에 여는 운동회를 봄에 하는 특이한 전통이 있다. 손 목사가 교장시절 정한 개교기념일에 100년 가까이 운동회를 맞춰온 것이다. 합일초등학교 옆쪽으로 강화중앙감리교회도 보였다. 옛 잠두교회다. 잠두(蠶頭)는 한자 그대로 누에 머리. 지형이 툭 튀어나온 형상이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현재도 교회부설 유치원 이름은 '잠두유치원'이었다. 교회 1층 전시실에는 1대 담임인 조원시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옆으로 5대 담임인 손 목사의 사진도 보였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인천 강화에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이은용 장로는 "손 목사는 20세기 초 강화 기독교와 교육운동사에서 굉장히 비중있는 인물"이라며 "특히 손 목사의 활동 시기는 이동휘가 강화에서 보창학교를 세우고 구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절묘하게 겹친다"고 말했다. 이동휘가 보창학교운동을 시작한 건 1905년이다. 보창학교운동의 중심이 감리교였고, 이동휘와 손 목사의 독립협회 시절 인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이 연계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동휘가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세웠다면, 손 목사는 교회를 기반으로 학교의 틀을 다지는 등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게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 독립운동가 중 한명으로 자리잡은 이동휘와 달리 손 목사의 활동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진씨는 "관직생활과 영화학교에서 쌓은 경험, 여기에 교육운동에 대한 손 목사의 열정을 감안하면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이 부분이 앞으로 우리가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2006-12-13 김창훈

[인천인물 100人·60]칠곡 김숙현선생

칠곡(七谷) 김숙현(金淑鉉·1917~2003) 선생을 시인 김수복(金秀福·단국대 교수)씨는 '학이 날아간 자리에 무지개 오르네'라는 시로 선생의 업적과 생애를 담아냈다. 이 시는 지난 1997년 3월 칠곡 선생의 팔순기념에 부쳐 '목계(木鷄)의 비상(飛翔)'이란 책에 실렸다. 칠곡 선생은 인천이 자랑하는 큰 어른이었다. 국회의원, 변호사, 학자로서 모든 정열을 인천에 쏟아 붓고 빈손으로 떠난 '부평의 개척자'였다. 그는 원칙주의자였고 적당한 타협은 통하지 않았다. 판단력은 정확했고 늘 빨랐다. 맺고 끊음이 너무 정확해 인간적인 면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다. 다른 정치인 처럼 유연성만 있었다면 더 큰 인물이 됐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아쉬워 하고 있다. 선생은 191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봉산동에서 태어나 36년 선천 소재 신성중학교를 거쳐 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평북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약 5년간 근무하다 46년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한으로 내려와 전공을 살려 단국대에서 형법학 전임강사로 일하다 군에 입대했다. 육군 고등군법회의 검찰관, 국방부 법무과장(대령)을 끝으로 나와서는 단국대 형법학 교수, 단국대 재단이사 등으로 일하다 58년 변호사 사무실을 꾸렸다. 선생과 인천의 인연은 운명과도 같았다. 선생의 초대 비서관을 지낸 허문명(부평문화원장)씨는 “선생께서 1960년 초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캠프마켓 등) 외국인 기관 근로자 노조의 법률고문을 맡으면서 부평과 인연을 맺었다”고 전했다. 당시 선생은 대한변호사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운명처럼 다가 온 `부평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칠곡은 이후 1962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서 인천 부평 지구당위원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면서 곧바로 서울에서 이사를 내려와 세상을 떠날때 까지 부평을 지켰다. 선생은 선거에서 패배해도 항상 `오뚝이' 같았다고 허씨는 회고했다. 고인이 된 조기준(향토사학자)씨는 “선거에 패배해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모든 것을 잊고 꾸준히 노력했다. 부평라이온스클럽을 이끌면서 지역사회 봉사 등 모든 일에 앞장서 그의 역량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며 기록했다. `목계의 비상'에서 조씨가 밝힌 선생의 업적에 따르면 1965년 정부시책의 일환으로 인천에 처음으로 수출산업공단 설치인가가 되자 인천과 부평은 서로 공단유치를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부평은 미군보급창이 자리잡은 덕분에 서민들의 젖줄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철수키로 돼 있어 경제자생력의 빈곤으로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선생은 부평의 유력인사들을 긴급 소집했다. `수출공단유치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부지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일억원(현재 10억원 정도)이 넘는 돈을 모아 시민들의 힘으로 땅 수 만평을 매입했다. 그리고 부지선정 책임을 맡은 인천상공회의소 채호 회장과 윤갑노 당시 인천시장을 설득, 1966년 부평공단 유치에 성공했다. 선생은 또 1967년 인천시민들의 문화공간 확보를 위해 또 다시 인천시민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모금운동은 성공했고 부평동 229 중심지에 지상 3층 연건평 370평의 제2공보관을 건립했다. 학자답게 재정부족으로 건축이 중단됐던 부평중학교를 주둔 미군부대와 각계의 도움을 받아 개교시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은 부평동중과 부평여중 등을 잇따라 설립해 열악한 부평지역의 교육환경을 개선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이' 변호사로 서울에서 벌어다 부평에 쏟아 붓기를 무려 8년만인 1971년 제8대(인천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선생은 국회에 입성해서는 국회법제사회법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역을 위해 1972년 국방부 소관이던 7천여평의 땅을 문교부 소관으로 이관시켜 부평고를 설립했고, 법률가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무료변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선생의 노력은 11·12대 국회의원으로 이어져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대한산업안전협회중앙회장, 민정당 중앙당 윤리위원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5·6공 교체시기던 지난 1987년 민정당 헌법제도특위위원장으로 개헌 기초안을 입안하는 중심에 서기도 했다. 선생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부평에 머물면서 교육계에 정열을 쏟았다. 서인천고등학교 재단이사, 인천교육대학 유치, 학교법인 단국대학교 재단 이사장 직무대행 등으로 일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런 선생을 두고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은 `영원한 金靑年'이라고 별호했고, 故 조기준 향토사학자는 `위대한 개척자', 김학준(전 인천대총장 시절) 동아일보 사장은 `인천이 자랑하는 큰 어른'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선생은 2003년 10월 27일 부평 자택에서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숙현선생 약력 ▲191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봉산동에서 출생 ▲1936년 평북 신성중학교졸업 ▲1940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률학과 졸업 및 신의주법원 근무 ▲1946~7년 공산정권 수립되자 월남, 단국대 전임강사 ▲1951~5년 육군 고등군법회의 검찰관, 국방부 법무과장(육군 대령) ▲1955년 단국대 형법학 교수 ▲1958년 변호사 개업 ▲1962년 민주공화당 인천 제2지구당 위원장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1년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1982년 대한산업안전협회 중앙회장 취임 ▲1983년 민주정의당 중앙당 윤리위원장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5년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및 중앙회 이사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국대회 임시의장 ▲1993년 단국대학교 이사장

2006-12-07 송병원

[인천인물 100人·60] 인터뷰 / 큰 아들 김윤수씨

칠곡 선생의 큰 아들인 윤수(63·서울 대윤병원 병원장)씨는 “대학시절 부터 선거판을 쫓아 다니며 어깨 넘어로 배운 아버님의 왕성한 사회활동 모습이 지금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마다 냉철하면서도 정확하고 빨랐던 아버님의 결단력이 그립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버님은 인천을 위해 태어나셨고, 당신 소원대로 부평에서 세상을 떠났다”며 “어려서 부평에만 정열을 쏟으시는 아버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제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육군사관학교를 가려고 했다가 아버님의 권유로 의대갔다는 윤수씨는 “아버님께서는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은 용서하지 않으셨다”며 “공부를 잘 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권한과 자유를 주셨다”고 칠곡 선생의 자녀교육 방식을 소개했다. `피는 속이지 못 한다'는 옛말이 윤수씨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윤수씨는 현재 고려대 의대 동창회장을 비롯 고대의대·한림대 의대·이대의대 외래교수, 대한병원협회 홍보위원장, 대한정형외과 학회 홍보위원장, 서울중소병원회 회장 등 이력서 두장이 모자랄 정도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칠곡선생의 기질을 그대로 빼 닮았기 때문이다. 거리를 거닐다 아버님과 함께 다녔던 식당 앞에서 서면 아버님이 무척이나 그립다는 윤수씨는 왕십리 비포장길에서 아버님과 자전거를 함께 타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잊었다.

2006-12-07 송병원

[인천인물100人·59]제자 김재은시가 본 김선웅 감독

“제자들을 가족처럼, 친동생처럼 돌봐주신 분이었지….” 김선웅 감독의 제자 김재은(75·현 인천고 야구동문회 고문·서예가)씨는 김 감독과의 각별한 인연을 잊지 못한다. 바로 김 감독의 야구 유니폼을 물려받은 `행운'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해방후 인천에 상륙한 미군팀과 인천팀이 친선경기를 하던 날, 인고 전신인 인천상업학교 학생으로 담장으로 넘어가는 공을 챙기며 `배트 보이' 역할을 했던 김씨는 이날 김 감독을 처음 만났다. “시합이 끝나고 한 선수의 배트에 글러브를 낀 도구를 하나 맡아 어깨에 짊어지고 도원고개를 넘어오는 데 누군가가 `너 야구가 좋으냐'하고 묻는거야. 그래서 `좋다'고 말했더니 다음날 다시 만나자고 해서 찾아갔는데 유니폼을 건네주시면서 열심히 야구를 하라고 격려해주시더군.” 그런데 옷이 너무 컸다. 상의가 마치 오버코트 같았다. 그때 김 감독은 웃으면서 “줄여입고 야구장에 나와라. 야구복은 내가 연습할 때 입었던 것이고 스타킹은 일본 갑자원 대회에 출전했을 때 신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야구복을 줄여 입고 야구장에 나갔더니 모두들 `꼬마 야구선수'라고 놀리는 거야. 그래도 야구복을 처음으로 입은,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학생선수라는 자부심에 기쁨에 들떠 있었지.” 변변한 야구도구가 없어 부러진 배트는 못을 박아 전기테이프로 감아 쓰고, 실이 뜯어진 공은 구두 수선할 때 쓰는 밀초를 실에 발라서 꿰매어 쓰곤 했던 시절에 `대선배'의 유니폼, 그것도 갑자원 대회 출전 당시의 스타킹을 `하사'(?) 받았으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같은 인연으로 김씨는 인천고 야구선수에 이어 경기도 야구협회 총무 및 이사, 전무이사, 인고야구동문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야구 행정가로서 김 감독의 바통을 이어갔다. 그는 김 감독을 `온화하면서도 강렬한 지도력을 갖춘 감독'으로 기억했다. “그 분이 운동 열심히 하라고 창영학교 앞 시장에서 사주시던 꿀꿀이죽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후배 양성에 무진 애를 쓰신 분이었는데….” 김씨는 김 감독이 타계한 후 애통한 마음을 글로 남겨 그의 추도비에 새기기도 했다.

2006-11-30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59]전 인천고 야구부감독 김선웅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한무리의 야구 꿈나무를 이끌고 허름한 시장의 음식점을 찾아 당시 최고의 영양식이었던 `꿀꿀이죽'으로 꿈나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이가 있었다. 허겁지겁 꿀꿀이죽을 한 순간에 뚝딱 비워버리는 꿈나무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 그가 바로 `한국야구 100년을 빛낸 10명' 중 한사람으로 인천고 야구 감독을 지낸 故 김선웅(金善雄·1919.4.3~1978.3.28) 감독이다. `인천야구의 대부', `영원한 인고 감독'. 그의 야구사랑은 이같은 수식어를 이름 앞에 올려놓았다.  김선웅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4월3일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이어 4세 때 인천으로 건너와 평생을 인천의 야구발전에 헌신했다. 특히 그가 감독을 맡던 인천고의 50년대는 그야말로 `야구의 황금기'였다.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 24회인 그는 재학시절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선수의 길을 걸었다. 그가 학생선수 시절 남긴 기록 중 하나는 좌익수 장영식(인천상업 24회)과 함께 마지막 한국인 선수로 일본 갑자원(甲子園) 대회(1932년 제22회 대회) 본선에 참가했다는 점. 갑자원 대회는 일본 조일신문사 주최로 창설된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로 선수들이 지역 예선을 통과해서 본선 무대를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인기를 끌던 `꿈의 제전'이었다. `인천야구 한 세기'에 따르면 당시 인천시민들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인천고의 고시엔 대회 진출이 확정된 후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이 대회에 피지배 민족인 조선인이 참가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갑자원 개막 직전 1932년 8월10일 끝난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을 차지해 국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 등 항일 감정이 비등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선웅과 장영식이 제2의 손기정과 같은 쾌거를 또 한번 이루는 게 `조선인의 꿈'이었다고 `인천야구 한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 대회 이후 김선웅은 형(김선영)이 경영하는 삼화정미소의 전무로 근무하면서 해방을 맞았다. 당시 정미소는 조선인이 할 수 있었던 대규모 기업에 속했었고 그는 이 같은 물질적 기반을 바탕으로 해방 후 인천지역 최초의 성인 야구팀인 `전인천군'을 조직하는 데 기여하면서 전인천군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학생선수 시절 이름을 날리던 그는 해방후 1950년에 모교의 감독을 맡아 야구 인생을 이어갔다. 김선웅이 감독을 맡으면서 인천고 야구부는 1952년 10월 열린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제5회 쌍용기대회 우승(1953년), 제8·9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1953, 1954년), 제8회 황금사자기 야구대회 우승(1954년), 학도호국단 주최 체육대회 야구 우승(1955년)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벅찬 성적들이 그의 지휘아래 쏟아져 나왔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처럼 화려한 성적을 이끌어내면서도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줄곧 무보수로 일했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재를 털어 수시로 선수들의 영양보충을 시켜주는 등 헌신적인 후배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선웅의 제자인 김재은(75·인천고 제49회) 인천고 야구동문회 고문은 “당시만 해도 점심을 굶고 연습을 하러 나오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감독님께서는 `운동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면서 수시로 선수들을 창영학교 앞 시장으로 데려가 `꿀꿀이죽'을 사주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감독으로서의 김선웅은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 또는 덕장(德將)에 가까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 한 일간지에는 김영조 전 국가대표 감독이 기록한 김선웅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의 성격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인천고 감독 김선웅은 위기나 찬스 때면 땅을 손톱으로 긁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날(제10회 청룡기대회 인천고·동산고 결승전) 결승전이 끝났을 땐 열손가락에 모두 피가 맺혀 있었다.” 후에 김선웅의 이같은 버릇은 사실 그의 독특한 `사인'이라는 부인 손경옥 여사의 증언이 나와 흥미를 자아내기도 했다. 김선웅은 1960년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시작으로 1961년 경기도야구협회장, 인고야구동문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야구 감독직을 떠나 야구행정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가 1978년 3월28일 지병인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야구인생도 접었다. `인천야구 한 세기'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가 보여주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이 소개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반신마비 상태에서 당시 인천고 감독이었던 박정석 감독을 불러 일본어 야구교본을 구술해 받아 적도록 했다. 이 야구교본은 야구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일제시대부터 모아둔 것으로 그가 감독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침서이자 선진야구를 인천고 야구부에 접목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부축을 받으면서 운동장에 나가 후배들을 격려하고 돌봐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을 인천의 야구 발전을 위해 바치신 선생님의 웅지는 태양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들을 감싸주리라.” “야구를 좋아하고 제자를 사랑하여 인천야구계의 스승이 된 이가 계셨으니 그가 바로 여기 누워계신 김선웅 선생님이시다.” 제자들이 마련한 그의 추도비는 그의 외길 야구인생을 함축하고 있었다.

2006-11-30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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