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100人·58] 이병룡 교육국장이 본 김천홍초대교육감

“각종 교육시설과 교육시책 등 인천교육청 초기 인프라를 확실히 구축하신 분이었습니다. 특히나 선생님은 인화·협력과 연구·창안을 교육철학으로 강조하셨습니다.” 김천홍 교육감을 인천고 교사와 교육감 수행비서 장학사로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서 모셨다는 이병룡(59·사진) 인천시교육청 교육국장은 “김 교육감은 기억력이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수첩이 필요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두주불사형으로 술에는 젊은 사람 여럿이 못당할만큼 엄청난 주량을 자랑했다는 김 교육감은 순박하면서도 인자했다는게 이 국장의 설명이다. 이 국장은 또 김 교육감의 탁월한 `정치력'을 강조했다. 중앙부처는 물론 경기도 등지의 정·관계 인사들이 김 교육감의 인품을 높이 사고있던 터여서 인천을 위한 일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지금의 중구 영종도가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했을 때인 초대 교육감 시절에 인천에는 교육연구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이때 교육감이 나섰습니다. 당시에 대전고 제자였던 김영래씨가 경기지사로 있었는데, 김 지사를 몇 차례나 졸라 영종도에 인천교육과학연구원을 짓고(1983), 을왕리에 학생야영장도 개설(1986)했습니다. 김 교육감이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이 국장은 `연구하는 교사, 공부하는 학생'이란 김 교육감의 지론을 본인의 교육철학으로 여기고 있단다.

2006-11-23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58]김천홍 제1·2대 시교육감

인천시교육청 정문 오른 쪽 인도를 따라 걷다보면 잘 가꿔진 잔디밭 가장자리에 서 있는 커다란 기념석이눈에 들어온다. 그 앞면엔 `敎學相長(교학상장)'이란 네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인천교육의 상징 문구처럼 돼있는 이 글씨는 인천 서예계의 대표격인 청람 전도진이 썼다. 1988년 7월 1일 김천홍(金千洪) 교육감 시절에 교육청 개청 제7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김 교육감 퇴임 1년전이다. 김 교육감은 1981년 7월부터 1989년까지 8년동안 인천직할시교육위원회 초대와 제2대 교육감을 지내면서 인천 교육의 인프라를 깔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다.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뜻인 `교학상장'은 김 교육감의 교육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고 제자들은 전한다. 김 교육감이 인천고등학교 교장 재직시절(1977~1981) 제자인 이건주(81회 졸업)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첨단범죄수사부 부장검사는 “김천홍 교육감 하면 `큰 바위'와 `열정'이라는 두 단어가 생각난다”고 25년이 넘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격하면서도 인자하고, 발로 뛰는 교육자상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이 부장검사는 “80년도에 졸업한 우리가 제대로 평준화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김천홍) 교장 선생님은 유난히 우리에게 애정이 많았다”면서 “당시만 해도 교단엔 (교사의 학생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가 많았는데, 선생님은 억압보다는 자율과 인격을 남달리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중국의 대표 고전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을 몸소 실천했다는게 이 부장검사의 말이다. 예기의 학기(學記)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60년대 강화도 강남중학교 학생으로 김 교육감에게서 배운 고승의 인천시교육청 기획관리국장은 교육계에 발을 디뎌서도 그와 함께 했다. 고 국장이 시교육청 공보계장 시절에 그를 교육감으로 모셔야 했던 것이다. 고 국장은 “선생님은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있으셨는데, 이런 인품탓인지 인천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역에서도 훌륭한 분으로 평가받아왔다”면서 “시대가 암울했던 80년대에 선생님은 지역 교육계에 큰 별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육감은 특히 남동구 간석동에 살때 동네 반상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매사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중요 기관장의 하나인 교육감이 반상회에 나오는데, 그 반상회가 잘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교육감은 물론 반상회에서 밑바닥 교육민심을 들었고, 이를 교육 현실에 반영했다고 한다. 경인일보 1982년 7월 20일자는 김 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아 `대화로 문제 해결하는 교육풍토 조성'이란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활동하는 교육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시작하는 이 기사엔 김 교육감 초기의 바쁘고 열정적인 모습이 그대로 묻어난다. 타 시·도교육위와는 달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 교육감은 그동안 600여회에 달하는 출장으로, 1개 학교에 평균 네 차례 현장 지도점검을 벌였고, 교육을 받는 학생의 몸가짐과 교사의 자질을 중요시하는 등 1년동안 인천 교육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또 교육위원회(현 교육청) 청사를 신축하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미술교육관의 문을 열었고, 부평도서관 개관, 사립학교 교원의 공립학교 등용 등의 특색사업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시로서는 엄청난 예산인 20억원을 들여 중앙도서관을 착공한다는 내용도 있다. 김 교육감은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경성사범학교 보통과(5년제, 1939~1944)를 수료하고, 경성사범학교 본과(3년제)를 다녔다. 곧바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했다. 학교 졸업과 함께 마산상고 교사(1949~1950)로 교단에 섰다. 이후 진주사범학교, 대전고등학교, 선린중학교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56년 경기도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엔 경기도와 인천시가 광역행정구역상 분리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1961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에 부임하면서는 완전히 `인천사람'이 됐다. 강화 강남중학교, 강화여상 교장으로 5년 넘게 `섬마을 선생님'으로 있었고, 잠시 교육연구소 소장과 경기도교육연구원 원장, 경기도교육위원회 학무국장 등을 지내다 인천고등학교 교장으로 교단 일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89년 7월 16일 연임 끝에 8년동안의 교육감 생활. 김 교육감은 꼬박 40년을 교육현장에 몸을 담았다. 평소 건강을 자랑하던 김 교육감은 퇴임 이듬해인 90년에 갑자기 쓰러져 향년 65세의 나이로 홀연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초대 교육감 취임 일성으로 내세웠다는 인천시민의 애향심 고취를 위한 `인천의 얼' 교육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2006-11-23 정진오

[인천인물100人·57]인터뷰/ 조병화시인 제자 김양수씨

문학평론가로,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양수(73)씨처럼 조병화 시인의 옛일에 대한 기억이 또렷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중학교 시절 그에게 직접 배운 탓도 있지만 1991년부터 조병화 시인의 호를 따 시작한 `편운문학상'의 운영위원장을 줄곧 맡아 온 영향력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당신이 학교에 다닐 때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고, 책도 많이 팔린 것에 대해 늘 남에게 신세를 졌다고 여기셨습니다. 후진들에게 그 신세를 갚는다는 차원에서 문학상을 제정하셨어요.” 이제는 젊은 층에게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장 자리를 넘겨주고 싶다는 김씨는 조병화 시인과 인하대학교와의 인연 한토막을 들려줬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가 트럭 2대를 갖고 초기사업을 시작할 때 경영애로가 있으면 조병화 시인이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부인에게 부탁해 돈을 빌려줬다는 것이다. 이게 인연이 돼 조 회장의 부인과 조병화 시인의 부인인 김준 원장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한 번은 인하대학교 재단이사 명단에 선생님이 포함됐던 모양입니다. 부인 김준 원장이 그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조병화'란 이름을 지워버린 적이 있다고 해요. 그만큼 부인과의 불화가 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1981년부터 5년 정도를 인하대에서 교수로 생활하셨습니다.” 김씨는 또 “조병화 선생님은 인천에서는 수학교사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유명했다”면서 “길영희 교장선생님과의 불편한 관계로 서울로 떠날 때에는 서울중학교에 가서 사정을 설명한 그 날로 그 곳의 교사로 임명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조병화 시인에 대해 “시 속에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한마디로 평했다.

2006-10-12 정진오

[인천인물100人·57]최고 다작 문인 조병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시집을 내며 최고의 다작 문인으로 평가받는 조병화(1921~2003) 시인. 그가 인천을 대표할 만한 `인천 인물'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다. 그가 인천에서 활동한 내용이 일반에 잘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 조병화는 고향은 인천이 아니지만 분명 '인천 인물' 임에 틀림없다. 해방 직후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중학교(6년제) 교사를 지냈고 전쟁 통에도 인천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을 이끌기도 했다. 또 1980년대엔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의 인천에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천중학교 교사 시절 부인 김준씨와 함께 살던 중구 전동의 2층 일본식 건물(당시엔 김준 산부인과병원)은 1980년대 중반 불이 나는 바람에 지금은 콘크리트 2층 건물로 변해 60여 년 전 조병화 시인의 자취를 흐릿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학창시절 유난히 운동을 좋아 해 유명한 럭비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인중에 부임하자마자 럭비부를 창설하는 의욕을 보였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시를 쓰고, 럭비부까지 창단한 것이다. 인천 학생 럭비의 주춧돌을 시인 조병화가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중시절 조병화 시인의 담임반 학생이었던 김양수(73·문학평론가)씨는 “선생님이 우리나라 문단 역사에서 제일 많이 하신 것으로 기록될 만한 게 네 가지나 될 정도로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스승 조병화에 대해 생전에 시집을 53권이나 펴냈고, 또 그 시집이 가장 많이 팔려 나갔고, 문학상도 가장 많이 받았고, 각종 세계 문학행사에 `국가 대표'로 참가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등의 기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 전쟁 중에 인천문화 부흥을 위해 문총에서 총무국장을 맡았고, 서울수복 이후엔 종군문인으로 평양에 까지 직접 갔을 정도로 현장문학을 중요시 했다고 한다. 1921년 경기도 안성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조병화는 7세때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이듬 해 모친과 함께 서울로 올라 온 뒤 서울 미동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 때부터 그의 예체능 자질이 발휘된다. 아동문선과 아동미선에 입선하고, 육상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그의낭만적 성품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특히 아시아 자유문학상(1960), 경희대학 문학상(1969), 한국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동백장(1976), 서울 문화상(1981), 대한민국 예술원상(1985), 국민훈장 모란장(1986), 3·1 문화상(1990), 세계신인대회 공로상(1991), 대한민국 문학대상(1992) 등 수상 이력은 그의 왕성한 활동상을 잘 알게 해주고도 남는다. 그런 조병화 시인이지만 인천에서의 생활 중에서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해방직후 인천교육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중시절 길영희 교장과의 불편했던 관계와 부인과의 불화 문제다. 그는 1943년 경성사범학교(중학교 격)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전문대 격) 이과(물리, 화학)에 입학했다. 경성사범학교 시절에는 중등부 조선럭비대표로 일본에 원정까지 갔다고 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5년 6월 잠시 귀국했다가 해방을 맞아 국내에 눌러앉고 만다. 해방되던 해 자신이 나온 경성사범학교 교사로 물리와 수학을 가르친다. 그러나 당시 사정상 물리·화학 등과 관련한 연구, 실험시설이 없어 교사로서의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길영희 교장을 만났고, 1947년 9월 인중교사로 부임한다. 길 교장은 젊은 조병화를 끌어오기 위해 일제 때 일본식 2층 건물(적산가옥)을 제안할 정도였다고 한다. 둘을 연결지은 이 집이 결국 둘 사이를 갈라 놓는 동기로 작용했다는 게 제자들의 얘기다. 이 집을 당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조병화는 길 교장이 자신에게 집을 사게 해줬다고 생각했고, 길 교장은 단순히 빌려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길 교장은 집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둘 사이의 다툼이 시작됐다고 한다. 아직도 인중 출신 동문 사이에선 길 교장을 좋아하는 사람과 조 시인을 좇는 사람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을 정도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서먹서먹해졌고, 결국 조병화는 1949년 서울중학교로 옮긴다. 서울중학교로 가던 해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하는 데 이 때의 시는 대부분 인중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길 교장과 조병화 시인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몇몇 제자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 김양수씨는 “물리와 수학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에 칠판 한 귀퉁이에 시를 써놓고는 했는데, 이게 결국 선생님의 시작업 초기 작품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조병화 시인은 산부인과 의사인 김준씨와 1945년 9월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생활을 계속해 오던 조병화 시인은 생활고를 벗어나고자 여 의사와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다. 문제는 조 시인의 바람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시인에게 따르는 여성들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여성 스캔들이 부부 사이를 안좋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한다. 그는 또 쥐꼬리만한 교사월급을 받는 자신에 비해 돈을 많이 버는 부인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건 “부인이 돈을 벌어 걱정없이 생활할 수 있겠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부인과 관련한 말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어쩔 수 없는 부인과의 동행여행에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부부관계가 냉랭했다는 말도 있다. 부인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이 딴집살림을 차렸을 때 그 집을 찾아가 같이 사는 여자와 멱살잡이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결국 둘은 이혼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60)의 눈물어린 재결합 요청을 받고 재결합했다고 한다. 둘 사이는 하지만 끝내 `앙숙'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부인이 세상을 떴을 때 문상객들에게 고인의 욕을 했다고 하니 둘 사이가 얼마나 벌어져 있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부인 사후 4년이 지나 쓴 시(꽃나무)에서 부인에게 미안함을 절절히 털어 놓는다. `꽃나무(부인이 집에 심은 것)를 심은 그 사람은/ 내를 떠난 지 벌써 4년/ 꽃은 해마다 더욱 화창하게/ 내 가슴에 피어서 아파라/ 중략/ 아, 서운함/ 여보, 정말 미안하오/ 미안했구려…/ 가슴 아프게.' 일본어로 쓴 시가 우리말로 쓴 것보다 더 좋게 받아들여질 만큼 일본어에 능숙했던 조병화 시인은 일본 유학생활에 대한 그의 `반성'도 손자에게 비밀스럽게 얘기한다. `이 비밀'이란 시에서 그는 우리 말에 서툰 점을 말하면서 `내 나라 사람이면서 내 나라 사람이 아니고'라는 표현까지 쓰며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점을 아파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손자에게 자신처럼 살아선 안된다고 주문하고 있다. `…너는 완전한 우리나라 주인이야/ 하늘이 네 것이고,/ 땅이 네 것이고,/ 사람이 네 것이고,/ 역사와 자연이 완전히 네 것이야/ 네 것으로 살아야 해/ 부끄럽지 않는 주인으로 살아야 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 그의 이런 바람은 아직도 유효하다.

2006-10-12 정진오

[인천인물100人·56]정계 거목 김은하

  >56< 정계 거목 김은하 5·31 지방선거 이후 첫 인천시의회 정례회가 지난 5일 시작됐다. 기초의회도 일제히 개원해 있다. 저마다 `민심'을 등에 엎고 당선됐다는 `지방 선량'들이 나름대로의 의정 활동에 바쁘다. 이들은 모두 선거전에서 수십, 수백가지의 공약을 내걸었다. 본인 스스로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하니 그 `공약'의 얕음이 눈에 보이고도 남는다.  요즘 선거에 나서면서 시민에게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나중 `결과물'로 보여주라고 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원 선거에서 최연소, 최다득표로 당선되고 국회의원 6~11대까지 내리 6선을 지내면서 `야도(野都) 인천'을 일궜다는 김은하(1923~2003) 전 국회부의장. 김 전 부의장은 선거때 공약을 하지않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모든 후보자가 선거에 나오면서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공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김·은·하' 이름 석자가 인천바닥에선 너무 유명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묵묵히 `일'로 승부하겠다는 그의 정치철학이 담겼다는게 일반적 평가다. 그는 특히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알았다. 그는 1988년 4월 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돌연 불출마를 선언, 우리 정치계에 `수수께끼'를 던지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87년 대선에서 야권(YS·DJ) 단일화에 실패해 결국 군부독재를 연장시켰다는 것을 불출마 이유라고 썼다. 김은하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3대 총선에 불출마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야권통합 실패를 거론하면서 “여섯번이나 인천시민들이 나를 국회로 보내줘 이제 중진급이 되었는데, 나로선 시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할 용기가 없다. 야권통합이 안되는 것은 야당사람 모두의 책임이며 국민에게 면목없는 노릇이다.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물론 그가 총선 불출마 이후 정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시민에게 표를 달라고 다시 말할 면목이 없어 불출마를 했던 것이지 `민주화'를 위한 일까지 그만 둔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상도동계(YS)나 동교동계(DJ)가 아닌 가운데서도 민주화 추진협의회에 들어가 활동한다. 또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도 참여했고, 1994년엔 인천시의정회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현직 인천시의원들의 모임인 인천시의정회는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인천에서 국회의원 6연속 당선의 기록을 세운 김은하의 정치력은 집안 내력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인천시 남구 숭의동 209. 그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남구청 민원실이 자리잡고 있다. `겸손'의 대명사로까지 불린 그의 부친은 숭의동 일대에서 농장을 크게 했다고 한다. 겨울에도 일거리를 찾을만큼 부지런했고, 흉년들 때면 동네 사람들을 위해 곳간도 열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는 밭에 심은 무 등 먹을거리 일부를 학생들이 맘껏 뽑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 주변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게 부친의 소신이었다고 막내 아들인 상봉씨는 회고했다. 이처럼 후덕한 김씨 집안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김 전 부의장이라고 한다. 인천 전역에 소문난 김씨 집안 인심탓에 그의 선거운동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는 것이다. 창영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 동국대학교를 나온 김은하는 1945년 8·15 광복 직후 극심한 혼란기에 `인천 학생응원대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학생응원대는 당시 인천에선 유일하게 `중도우파 계열'의 젊은이 단체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12월 27일)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국에 반탁운동이 활발했을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김은하'도 인천에서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외에도 전국 학생연맹 서울시연맹 위원장, 경인통학생 학우회장, 국방부 정훈국 인천지구파견대 조사대장, 향토방위대 부대장 등의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젊은 시절의 김은하는 지역에서 수많은 활동을 했다. 이런 활약을 펼치던 그는 전쟁통이던 1952년 4월 첫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 최연소 인천시의원으로 당선됐다.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한 것이다. 이때가 29세였다. 일부에서 30세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언론은 일제히 29세로 보도했다는게 상봉씨의 기억이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언론에도 체육에도 관심이 유난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중구 내동의 건물에 동양통신 사무실을 내고 경기지사장을 맡았다. 또 이 건물에 그는 폭격으로 터를 잃은 각 체육단체가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체육단체의 총본산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경기도(인천)육상경기연맹 이사장·회장, 경기도(인천)체육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 김은하 전 부의장의 `6선 국회의원'이란 화려한 이름뒤엔 그만큼 그림자도 크게 자리잡았다. 1958년 4대, 4·19 혁명 직후 치러진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잇따라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것이다. 4대 선거에선 지역에서 후보로 선출된 뒤 중앙당에서 `정치적 야합'으로 인한 후보교체 사건까지 겪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무소속 출마해 낙선하게 된다. 중앙정치를 위한 시작부터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불과 2년여 뒤 치러진 5대 선거에도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역시 패배했다. 그 1년뒤 5·16 사변이 터졌고, 63년 11월 6대 선거가 치러진다. 이 때부터 내리 85년 2월까지 6선 의원으로 20년 넘게 중앙정치 무대의 전면에서 활동한다. 그는 1985년 12대 선거에 나섰는데, 거센 신당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쓴맛을 봐야 했다. 그의 정치력은 75년 10월 신민당 원내총무에 뽑힌 뒤로 두드러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슬퍼런 독재정권 아래서 야당 원내총무로서 대화와 타협의 귀재로 통했던 것이다. 당시 여당내에선 여·야의 원내총무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의원의 제안을 상당수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국회부의장을 맡았던 2년간을 제외하고는 죽 교통체신위원으로 한 자리를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탓인지 그는 인천에 교통·체신 분야 업적을 많이 남겼다. 부천지역이 인천과 같은 전화번호(032)를 쓰게 된 것도, 간이역사이던 제물포 역사가 새로 지어진 것도, `시골'에 불과하던 남동구 만수동에 우체국이 생긴 것도 다 그의 노력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6량에 불과하던 경인전철을 지금처럼 긴 `장대형'으로 바꾼 것도 다 김은하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그는 68년 3선개헌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인천에 `야도' 이미지를 심어 놓은 장본인이면서, 인천 정계의 `거목'으로 시민의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아들 근영(47)씨는 “아버님은 정치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가족들에게도 늘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셨다”면서 “아버님은 인천에서도 자신과 같은 정치적 인물이 배출되기를 바라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2006-09-07 정진오

[인천인물100人·55]前인천 상공회의소 회장 최정환

>55< 前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최정환  최근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이하·남동산단)의 공장용지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어 아우성이다. 사업 확장을 위해 남동공단내에서 공장을 넓히고 싶은 사업주는 치솟는 땅값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안산 시화·반월 공단으로 이전하거나 아예 충청도 등 지방으로 짐을 싸서 떠나는 현상이 빚어질 정도다. 월세를 얻어 공장을 돌리는 사업주도 땅주인이 언제 임대료를 올려달란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동산단 주변 부동산 관계자들은 현재 남동산단내 공장용지가는 작년 평당 300만원에서 현재는 450만~500만원으로 급상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인천의 중요한 공업생산 기지인 남동산단이 제기능을 잃고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이 남동산단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최정환 전 인천상공회의소 회장(1917~1987)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남동공단이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최 선생이 지하에서 알게 되면 통탄할 일이다. 현재 남동산단이 위치한 남동구 고잔동은 폐염전 자리였다. 인천의 재래산업이었던 천일염은 1960년대 후반부터 가공염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결국 설자리를 잃었고 귀한 소금을 일구어냈던 소금밭은 폐염전으로 전락해 벌판으로 방치되고 만다. 2005년말 현재 4천146개의 각종 공장이 입주해 연간 9조4천385억원의 생산액을 올리는 수도권 최대 산업단지로 탈바꿈하기까지는 최정환 선생의 각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게 지인들의 얘기다. 그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남동산단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모습을 당시 비서실에 근무했던 신현수(58) 인천문화원 사무처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최 회장은 1976년부터 폐염전 자리에 공단을 유치해 달라고 4년여동안 청와대·국무총리실·국회·상공부 등을 쫓아다니면서 무려 18차례나 건의를 하고 다녔어요. 하지만 번번이 수도권정비계획법에 걸려 무산됐지요. 결국 그는 방송을 동원했어요. 1979년 12월 몹시 추웠던 날로 기억하는데 60대 노인네가 당시 MBC 방송기자를 불러 칼바람 쌩쌩 부는 그 추운 허허벌판에서 마이크를 잡고 남동공단 조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 뉴스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됐지요. 최 선생의 그때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인천에는 남동산단보다 먼저 조성된 주안(73년)과 부평(74년)산업단지가 가동되고 있었다. 정부는 1976년도에 주안·부평산단에 입주하지 못하고 난립한 `용도부적격 업체', 소규모 영세공장들에게 퇴출 명령을 내리고 충남 아산 등 지방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용도부적격 업체'는 746개에 달했다고 한다. 인천지역 영세업체들은 지방으로 내려가면 결국 공장 문을 닫고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 선생의 노력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드디어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신현수 사무처장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신군부도 수도권정비기본계획법의 골격은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최 선생이 하도 자신있게 `된다'고 말하니까, 결국 신군부에서도 수도권정비기본계획법을 일부 개정했는데, 그것이 `단, 남동공단은 제외'였습니다. 이 여덟 글자를 법 조문에 끼워 넣으면서 남동공단이 탄생한 겁니다. 최 선생은 수년간 그렇게 뛰어다녔습니다.” 남동산단 조성계획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거쳐 1980년 7월 2일 국보위 상임위원회에서 확정됐다. 이후 1985년 4월 20일 1단계 공사 착공에 들어갔고 4년여만인 89년 12월 29일 1단지가 준공된다. 당시 공장용지 분양가는 17만4천원이었다고 한다. 최 선생은 1970년부터 1982년까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제7대부터 10대까지 무려 12년을 인천상공계의 대표로 지낸 것이다. 인천상의 역대 최장수 회장의 기록이다. 따라서 최 선생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를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52년에는 초대 민선시의원을 지냈고 70년대에는 국회 원내 진출의 큰 꿈을 품고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자유당 말기 인하대학교가 한진그룹에 인수되기 전에는 인하대학교 이사를 지내며 학교를 관리했고 1972년에는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위치한 신명여고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던 교육사업가이기도 했다. 상공인으로, 정치인으로, 교육사업가로, 체육인으로 다양한 계통에서 인천의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1917년 음력 9월 24일 경기도 안산시 월곶동에서 경주 최씨 2남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농이었다고 한다. 1932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경성전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에는 야간학교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그가 상의회장을 맡았을때 임원으로 활동했던 공성운수 심영섭(84) 회장은 그의 생전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어 일본 나고야에서 고국에 들어와보니 좌익계열이 득세하고 있었어. 노조도 전부 전평계열이었지. 이듬해인 1946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최 선생은 지금의 동일방직 전신인 동양방직에서 서무계장을 맡고 있었어. 그때 우익계열인 대한노총 활동을 함께 하면서 얼굴을 알고 어울려 지냈지. 소탈한 성품에 포용력이 있고 누구 한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어. 동인천 길병원 자리가 당시 용동이었는데 정종에 빈대떡을 놓고 마시면 대적하는 사람 모두 나가 떨어졌어.” 최 선생이 인천에 남긴 자취로 인천체육 진흥에 앞장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69년에는 경기도야구협회장을 맡았고 76년에는 경기도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최 선생은 40여년전 동일방직 전무를 맡고 있을때 현재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을 창단한 주역이기도 하다.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은 60년대말 한·일 어머니배구단 교류전을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정례 경기로 개최했다. 어머니배구단은 여교사팀과 30대팀, 40대팀 등 3개팀 50여명으로 구성돼 정기적인 연습과 시합을 했다고 한다. 인천이 전통적으로 배구가 강한 것은 60~70년대 전국을 제패했던 동일방직 배구단의 영향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하대학교 최천식 배구 감독의 모친이기도 한 전 배구 국가대표 선수 박춘강(63)씨는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은 전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유명했는데, 최 선생이 시 예산만으로는 태부족이었던 선수단 운영비를 상공인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갹출해 도움을 주셨다”며 “인천에서 그 분처럼 남자다운 분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6-08-24 이창열

[인천인물100人·55] 큰며느리 박양서씨가 본 최 前회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당신 자식들 좋은 자리에 챙겨 앉히지 않는다고 시어머니는 늘 불만이셨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뒤도 돌아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큰며느리 박양서(59·부천시 상동)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은 개인 욕심이 없었던 분이었다. 살아오시면서 가족들이 섭섭할 정도로 `밖의 사람'이었다”며 “오로지 인천발전을 위해 애를 많이 쓰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정환 선생은 21살되던 해인 1938년 부인 박장순(1998년 작고)씨와 결혼했다. 슬하엔 영민(66), 영호(63), 영일(61), 영애(59), 영국(57), 영숙(54), 영훈(51)씨 등 5남2녀를 두었다. 영민·영호 형제는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현재 강원도 횡성군에서 식자재를 납품하는 소규모 군납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최 선생의 남동구 간석동 신명여고 옆 저택은 인근 유치원과 회사에서 야유회를 올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했다고 한다. 1972년 설립한 신명여고는 당시 경기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학교 운동장에 잔디가 깔린 학교로 유명하기도 했다. 박씨는 “아버님은 학교를 설립하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목장갑을 끼고 나무를 직접 전지할 만큼 많은 애착을 가졌다”며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말년에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생을 정리하셨다”고 술회했다.

2006-08-24 이창열

[인천인물100人·54] 천주교 나길모 주교

  >54< 천주교 나길모 주교 '격동 한세기,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반환점을 넘어서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인천 천주교의 대들보와 같은 분이 있으신데, 그 분을 빼놓아선 안된다”는 문의를 많이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와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첫 인천교구장을 맡은 뒤로 젊음을 통째로 바치며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한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천 인물'에 포함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와 함께 하다 몇 해 전 고향 미국으로 돌아간 나길모(80·세례명·굴리엘모) 주교. 인터넷 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나길모주교'를 치니 어떤 네티즌의 블로그에 그의 모습이 소개돼 있다. 사적 제287호로 지정된 인천답동성당을 배경으로 한 나 주교의 사진을 이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고, 이렇게 적었다. `오래전 기사인 것 같은데,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돌아간 신부님이다. 선한 얼굴이 좋아서 받아두었던 사진….' 나 주교가 인천교구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2002년 4월에 경인일보가 취재해 보도했던 바로 그 사진이다. 기자와 나 주교와의 첫 인연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6월 6일로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은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의 인터뷰때다. 책상 서랍 깊숙이 박혀 있던 당시 취재수첩을 꺼냈다. 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위엄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온화한 모습의 나 주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54년 우리나라에 건너와 충북 청주교구에서 7년을 보내고, 1961년 현충일인 6월 6일에 첫 인천교구장을 맡았다는 말로 인터뷰는 시작됐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인천의 공해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민의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말이다. “인천항에 처음 들어오면서 바다에서 본 인천의 첫 이미지는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는데, 요즘 유람선을 타고 인천 하늘을 바라보면 희뿌연 오염층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인천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장 큰 변화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인천 하늘을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 주교의 바람이 10년 안에 현실로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인천, 경기, 서울 등 수도권 3개 시·도의 최근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대기환경을 좋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시의 경우 2014년까지 서울 남산에서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대기를 깨끗이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인천의 여러 분야 문제에 대해 `인천 토박이'보다도 더 걱정했던 이 벽안(碧眼)의 `인천 사람'은 우리의 옛 공동체 문화를 그렇게도 그리워했다. “(전쟁 직후엔)굉장히 가난했어요. 다리란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끊겨 지프를 타고 개울을 건너야 했어요. 당시엔 천주교에서 주는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공동체 의식이 유난스러웠다는 거예요.” 한 번은 가정집에 불이 났는데,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와 우물에서부터 죽 늘어서 물동이를 건네면서 불을 끄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현대의 폐쇄적인 아파트 문화를 아쉬워 한 그는 그러면서도 지금의 한국 풍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2001년 인터뷰 당시 그는 두 가지 큰 기쁨이 있다고 귀띔했었다. 최기산 주교(현 교구장)가 부교구장이 돼 자신의 자리를 잇게 됐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인천가톨릭대학을 짓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그만큼 그는 한국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미국 본명이 윌리엄 존 맥나흐튼인 그는 아일랜드계로 캐나다에 이주한 천주교 집안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미국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시. 그는 고등학교때 어머니의 권유로 읽은 소설 `천국의 열쇠'에 감명받아 53년 매리놀 신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한 뒤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매리놀 신학교 총장 주교의 명에 따라 충북 청주교구의 장호원 감곡성당에서 보좌신부로 낯선 이국땅에서의 사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61년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부터 인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교구의 첫 교구장이 된 것이다. 34살 젊은 나이로 교구장에 임명돼 무려 41년 넘게 교구장으로 일했다. 한국 천주교 사상 가장 긴 교구장 재임기록도 세우게 됐다. 처음 9개의 본당, 공소(본당보다 규모가 작은 예배소) 59개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는 현재 그 규모가 10배 이상이나 성장했다. 여기엔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지난 2000년 그의 소원이었던 인천가톨릭대학이 설립돼 교구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나 주교는 1964년엔 부친이 돌아가셨는데도 임종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인천에 많은 열정을 쏟아왔다. 이런 탓에 1965년 6월 인천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노동자들에게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로 인천시민에게 기억되고 있다. 1968년 일어났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다 당국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국의 오해를 받은 데는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선배들 탓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 주교는 1941년께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배들에게서 신학이며, 한국의 상황 등 전반적인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 계속되는 형사들의 감시, 그리고 극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군사정권의 탄압. 그렇지만 양심을 지키려는 신부의 신념을 꺾진 못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 정부가 왜 이렇게 쓸데 없이 혈세를 낭비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최기산 주교에게 교구장 자리를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늙은 187㎝의 몸과 사제양복 3벌, 책 50여권, 부모님이 선물했다는 성작(미사 때 쓰는 잔)·십자가가 고작이었다. 물론 인천에 대한 드넓은 사랑은 별도로 맘에 담았을 것이다. 나 주교의 근황도 들을 겸 인천교구를 통해 미국 현지와의 전화연결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족 중에 몸이 많이 아픈 사람이 있어 인터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의 건강이 좋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다. ■인천지역 천주교 역사 인천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46년 지금의 부천에 해당하는 소사지역(옛 심락천)에서다.  이후 1889년 5월 1일 제물포성당(현 답동주교좌 성당)이 창설돼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일하면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1958년 6월 6일 인천지역을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운영권을 매리놀전교회에 일임, 초대 감목으로 기본스 신부를 임명했다. 또 인천과 부천, 38선 이남의 황해도 지역에 딸린 도서지방 등을 관할하도록 정했다.  3년후인 1961년 교황청은 인천감목대리구를 인천대목구로 승격시키고, 나길모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나주교는 그해 8월 24일 미국 로렌스시 성마리아 대성당에서 쿠슁 추기경주례로 주교에 서품된다. 지난 해 말 기준 인천교구의 규모는 인천광역시, 경기도 부천시, 김포시, 시흥시(일부), 안산시(일부) 등 1개 광역시, 3개 시를 관할하고 102개 본당, 37개 공소에 신자 수는 약 37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인천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답동성당이다. 답동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벽돌조 고딕식 건물로 건축면적은 약 1천15㎡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고 한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고,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이 성당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개항장 제물포 시대부터 인천지역의 대표적 건축물로 평가받아 왔다.

2006-08-17 정진오

[인천인물100人·53]차남 조우성씨의 아버지 회고

인천지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차남 조우성(60·인천 광성고 교사)씨는 “내가 문인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아버님의 영향이 컸다”고 밝혔다. 어린시절 조씨의 양철도당집 안방은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조씨는 “내 키도 훨씬 넘는 높이였는데 그 책들이 무슨 내용인지는 20대에 들어서야 겨우 살펴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르낭의 예수의 생애, 서정주 선생의 화사집, 황순원 선생의 학, 김동리 선생의 실존무 등은 그 시절 아버님 책장에서 내가 뽑아들었던 책들”이라고 회고했다. `새벗' `학원' `논단'과 같은 잡지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수필가 최정삼씨가 운영하는 서점(문조사·文潮社)에서 책을 쉽게 빌려볼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우성씨는 말했다. 천연색 사진으로 무장된 귀한 사진잡지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겐 영화와 형광등에 얽힌 일화도 좋은 추억거리. 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웠던 인천문화원 어른들이 영사기를 직접 집에 갖고 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상영했던 `메인 주(州)의 덩어리', `리버티 뉴스' 같은 영화들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또 “백열등 밖에 모르고 살던 때 아버님이 미군부대에서 구해온 형광등을 켜자 온 동네가 환호성을 질렀던 일, 저녁때마다 무슨 통과 의례 모양 끓여먹던 향기 짙은 커피 향”도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특히 조씨는 아버지가 시인이 되겠다고 허둥대던 자신을 유독 아낀 것으로 기억했다. 조씨는 “문단에 겨우 턱걸이를 하자 애지중지하던 만년필 `파커 61'을 선뜻 내주신 그 손의 온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며 “엄격했지만 인간미가 넘쳐나는 언론인이자 문인이고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립다”고 회상했다.

2006-08-10 지홍구

[인천인물100人·53]언론·문인 조수일

>53< 언론 ·문인 조수일 힘 있는 글이 좋아 한 평생을 신문기자로 살면서도 인천문단 바로세우기에 앞장섰던 문인 조수일(趙守逸). 그는 지난 1950년 지방신문 기자로 첫 발을 내디딘 뒤 1973년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기까지 인천 지역언론인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조씨는 본업외에 크고 작은 문단작업에 바삐 참여하며 6·25 전쟁이후에는 인천문단을 태동시킨 1세대 주역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직후 신문과 인천문인을 연결해 출판로를 열어줬고, 문인들의 만남의 공간인 다방도 제공했다. 이는 자연스레 그가 인천 인천문인들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게 된 단초가 된다. 그의 이런 노력은 인천지역 문인들에 의해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초대지부장 추대란 영예로 이어지면서 더욱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인천시민의 자긍심이라 할 만한 두 가지 궤적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지난 1950년 집필한 영화 `사랑의 교실' 시나리오와 1957년 발간한 소설동인지 `해협'이 그 것. 사랑의 교실은 개봉 며칠만에 상영금지가 되는데 상영금지 이유와 시나리오 내용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미궁속이다. 해협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란 주장이 인천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중앙문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계 일부에선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씨의 뛰어난 업적이 사실상 어둠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인천문학의 역사는 짧다. 대체로 100여년을 잡는다. 조씨의 둘째 아들 우성(60·시인)씨는 지난 1883년 개항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던 신 문화의 굴절된 수용을 인천의 문화적 시발점이라고 정의했다. 활발한 문학활동 시기래야 1945년 광복후가 고작인데 이때 쌓인 문화적 기반마저도 한국전쟁(6·25전쟁) 발발로 초토화 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은 인천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제2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제작한 `인천시사'에서는 인천의 문학적 기초를 다시 바로 세우려 노력한 문사들로 6·25 전쟁 직전 결성되었던 문총(文總) 인천지부 결성자들을 들고있다. 조씨는 당시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수복과 함께 `인천문총구국대'로 개칭되는데 문총 서울 본부가 전시(戰時) 비상조치로 그 명칭을 `문총구국대'로 임시 개칭하고 활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총구국대 초대 지대장은 전쟁전 인천시장을 지낸 표양문, 부지대장은 의학박사이며 향토사학자인 신태범과 화가 우문국이, 뒤에 이경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이 부지대장이 됐다. 총무국장에 조병화, 선전국장에 이인식, 차장에 유희강 그리고 조수일과 최성진, 이민, 최성연, 박세림, 장인식, 김차영, 김응태, 김양수, 김영달, 박윤섭, 최영섭, 백석두 등이 회원이었다. 이들은 `멸공 문화인 궐기대회' `시낭독' 등을 열었다. 그 무렵 인천의 문인들은 지역적인 사정상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 사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작품집을 낸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문총구국대가 기념행사 때마다 주로 행하는 시화전과 문학강연회를 통한 작품 발표의 기회가 고작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주요 문인들과 행보를 같이하는데 50년대를 마감할 무렵 문총구국대의 많은 문인들이 서울로 이주하거나 중앙 문단으로 활동무대를 변경하면서 인천문단을 지키는 몇 안되는 문인이었다. 김동리, 박목월 등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아들 우성씨는 자신이 한양대 입학시험을 보러갔을 때 면접관이던 박목월이 면접보다 말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줬다는 일화도 전했다. 조씨는 1950년 11월 전황을 보도한 유일한 지역신문인 인천신보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군의 정훈국에 소속돼 전방의 뉴스를 인천신보에 보도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기도 했던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이 성립된 뒤 인천에서 다시 발행된다. 1959년 9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다시 1960년 7월 경인일보의 전신인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는 데 인천문인들의 작품이 이곳에 많이 발표됐다. 그는 인천문단에서 어떤 위치였을까? 1952년 1월 잡지 `초원'에 실린 `문화인 순방기'(8~9페이지)는 그를 `몇사람 없는 인천 문단의 한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글에는 영화 `사랑의 교실' 원작자인 그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있는데 당시 문인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던 신포동 `유토피아' 다방도 가난한 문인을 위해 그가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잡지 초원은 또 그가 기자로서 근무시간이 끝나면 유토피아 다방에 들러 대부분의 시간을 창작구상에 매달렸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조씨가 인천지역의 몇 안되는 문인으로 꼽히고 있었지만 이를 증명 할 만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잡지 기사에 따르면 조씨는 1952년 전부터 문인으로서 활동이 활발했음을 미뤄 짐작 할 수 있는데 문단데뷔 시기가 언제인지조차 가늠키가 어려울 정도다. 다만 가족과 지인의 말을 모으면 대략 1949년 상업일보 인천지사장 등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으로 추정될 뿐이다. 조씨 가족들은 “아버님이 학창시절부터 습작을 많이 했지만 호구지책에 바빠 본격적인 습작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때 시작했고 해사국에 근무할 때까지 습작은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본격적인 글을 쓰게된 시기는 신문사에 들어가면서 부터”란 증언도 있었다. 이런 증언으로 볼때 조수일은 전쟁전 근무했던 신문사 시절부터 초원잡지가 발간되던 1952년 1월(1950년 9월 인천신보사에 입사한 조수일은 당시 2년차 기자, 그러나 나이는 42세 였음)전까지 인천지역 문인으로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조우성과 문학평론가 김양수(73)씨에 따르면 당시 조씨는 유토피아 다방에서 주로 시화전을 열었고 수필과 같은 산문은 주로 자신이 근무하던 인천신보에 발표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작품이 신문에 실렸지만 제대로 남아있지가 못하다. 그가 세상에 내논 소설도 1966년 양지사 발행 한국단편소설선집(하)에 실린 `용우물'이 유일하다. 아들 조우성 시인은 “자식이 불비해 글을 많이 모아 유고집을 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조씨의 또 다른 공로는 척박한 토양에 놓인 인천문인들을 신문과 연결시켜 날개를 펼수 있도록 도와준 점. 윤부현, 이광훈, 심창화, 김창흡, 김창황씨 등이 그의 도움으로 탄생한 문인들이다. 1956년 조씨는 인천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인천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김창흡, 김창황씨와는 1957년 소설동인지 `해협'을 발간, 인천의 문학적 토대를 한 단계 높였다. `해협'은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다, 아니다'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란 인천문인의 주장을 중앙문단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천 문인과 시민이 규명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12일. 인천 동방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사랑의 교실'의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이다. 당시 인천지역은 10여편의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서울과 쌍벽을 이루는 영화의 도시였다. `사랑의 교실'은 서울 국도극장에서도 동시상영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상영 며칠만에 작품내용이 사회적 관념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경기도 경찰국으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는다. 얼마뒤 전쟁이 발발해 영화와 시나리오 내용, 상영금지 이유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씨는 한국전쟁후 인천문단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남겨진 작품도 얼 마 없어 작가로서 어떠했는지는 여기에 싣지 못했다. 하지만 인천문단이 1962년 2월 17일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조씨를 추대한 것은 인천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비옥하게 다져온 공로가 분명 투영된 결과다. 당시 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던 김양수씨는 “조수일, 한상억, 조병화, 이인석 등이 인천에 문학적 분위기를 조성해 한국전쟁 이후의 인천문단을 만드신 분들”이라고 평가했다.

2006-08-10 지홍구

[인천인물100人·52] 문둥병 시인 '한하운'

지난 7월 30일 오후 인천 부평구 십정동. 경인국철 백운역에서 동암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야트막한 소규모 공장들이 낮은 포복으로 누워있었다.  그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한 고층 아파트 노인정에서는 여남은 노인들이 10원짜리 화투를 치며 여름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지난 날 이곳에 나환자촌이 있었냐는 물음에 노인들은 화투짝 잡은 손을 무심히 들어 저 아래 공장지대를 가리킨다.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어느새 폭염의 기세가 무서웠다. 그 폭염속에 `문둥병'이라는 천형(天刑)을 온 육신으로 앓다가 생을 마감한 한 시인의 인고의 삶이 어른거린다. 문둥병 시인' 한하운(1919~1975). 그의 56세 삶의 절반은 절망, 고독과의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로서 전도 유망했던 그는 난데없이 `하늘이 내린 형벌'을 받았다. 어려움 없이 커 온 그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문둥병 환자로의 한하운 인생은 인천 부평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부평구 십정동 일대에서 나환자 자활사업에 헌신하면서 시 쓰기에도 나섰다. 시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때 쓴 시 `보리피리'와 `파랑새'는 현재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 널리 읽히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리.//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리리.//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보리피리'전문) 한하운 시인이 1945년 해방 이후 월남해 정착했던 현재의 부평구 십정동은 물론 인근의 청천동과 남동구 간석동 일대는 그가 생을 마감하기까지 시인으로서, 또 나환자 구제에 전력했던 사회사업가로서의 체취가 남아있는 공간이다. 그의 본명은 태영(泰永)으로 기미년(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하운은 자서전 `슬픈 반생기'에서 “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피면 대대로 선비의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다. 나는 이러한 부유한 환경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네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 어린것들 중에서 으스대며 자랐다”고 술회할 정도로 그의 어린시절은 유복했다. 그의 부모는 장남의 공부를 위해 함흥으로 이사했고, 그는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13세로 한창 크던 해의 봄. 그는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때 `까닭도 모르게 몸이 무겁고 얼굴이 붓기 시작하는 것을 감각'했고, 17세에 가서야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경성대부속병원에서 나병확정 진단을 받게 된다. 한하운은 당시 상황을 `슬픈 반생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히 나를 방에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고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이후 금강산 요양과 치료로 병세는 호전되었고, 일본 동경의 성계고등학교를 거쳐 북경대학 농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25세 때인 1944년 고향인 함경남도청 축산과 공무원을 시작으로 사회에 발을 디뎠다. 그 해 가을에는 경기도 용인군청으로 전근했다. 1945년에는 나병이 다시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으며 이때 부모가 몹쓸 병마에 시달리는 장남이 안쓰러워 `태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운'을 쓰게했다고 한다. 그가 인천에 정착한 것은 재산을 북한 정권에 몰수당하면서다. 1950년 3월 당시 경기도 부평 소재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이주해 자치회장에 선임됐다. 그는 부친과 함께 월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에는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 577의 4일대에 나환자 자녀들의 복지시설인 `신명보육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다. 당시는 허울만 좋은 `복지시설'이었지, 사실은 나환자인 부모와 나병에 걸리지 않은 자녀들을 격리해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인천지역에는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과 청천동, 남동구 간석동 등에 대표적인 나환자 치료시설과 격리시설이 설치됐다. 이곳에서 살게 된 나환자들은 국고 구호품외에도 국유지를 불하받아 황무지를 개간해 양돈과 양계농장을 만들어냈다. 부평농장, 청천농장, 십정농장이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 일군 농장이었다. 이 중 십정농장은 지난 1998년 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당시 거주했던 나환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부평농장(130여명)과 청천농장(60여명)은 농장자치회를 만들었고 아직도 70~80대 노인 나환자들이 생존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 농장은 현재 축사를 개조해 소규모 영세 제조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한하운의 축산분야 전공지식은 농장을 구획하고 운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원도상(84) 전 신명보육원장은 “당시 한 선생은 보사부와 갈등을 빚어 보사부가 1년치 식량을 주지 않아 곤란을 겪어도 부모들이 생활하는 성계원에서 조달하면서 여러 달 동안 맞설 만큼 강직했다”며 “체구가 우람하고 당당했다”고 기억했다. 한하운에 대한 연구작업은 아직도 여러 모로 부족하다. 연구자에 따라 태어난 해도 달리하고, 결혼여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의 묘비와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한하운은 결혼했던 게 확실해 보인다. 그는 1950년대 초 성계원에 거주하고 있던 유임수(兪壬守)라는 여인과 결혼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김포공원묘지에 있는 한하운 묘비엔 `유임수'란 이름을 미망인으로 적고 있다. 이 여인은 경미한 나환자였다고 하며, 그는 한하운이 죽자 부천으로 이사했고, 김포 묘지를 매일 찾아 애도할 정도로 부부의 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출생연도를 `1920년생'으로 밝히는 경우가 많으나 그의 묘비엔 `1919년생'으로 나와있다. 신명보육원 하성도 원장은 “하 선생의 부인 유씨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보육시설에서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 선생에 대한 여러 유품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아는데 부인이 사망해 자료수집이 난감하다”고 말했다. 중앙대학교 이승하(문창과) 교수는 “한하운은 나병의 한(恨)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이것으로 사회와 소통하려 했던 예술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며 “그의 고통, 절망, 슬픔, 영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평 일대에 하운의 체취를 복원하는 체계적인 연구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전라도 길'이란 시는 문둥병 환자의 고통과 참담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중략)…//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한하운, `전라도 길')

2006-08-03 이창열

[인천인물100人·52] 인터뷰/ 원도상 前 신명보육원장

“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습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저녁이면 산을 돌아 넘어 몰래 만나곤 했을 정도였어요. 그럴 때면 한 선생이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원도상(84) 전 신명보육원장은 한하운 시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다. 1952년 5월 한하운 시인이 현재의 부평구 십정동 자리에 나환자 자녀들의 양육을 위한 성계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에 취임했을 때 원씨는 총무를 맡았다. 그는 또 1975년 2월 28일 한 원장이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 했을 때 시신을 손수 염하고 김포공원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는 궂은 일을 도맡으며 30년을 넘게 한하운 시인의 손과 발 노릇을 했단다. 그는 “한 선생이 시를 쓰고 나환자 구제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친 것도 결국 지난 날 나환자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차가운 시선에서 비롯됐다”며 “한센인들에 대한 냉대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동암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 부평농장, 십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분교를 개교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도 학교 선생님과 같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씨는 “최근에 한 선생을 기리는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얘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나환자 가족들은 오히려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며 “부모가 나환자였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리는 그들의 한맺힌 마음도 함께 헤아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2006-08-03 이창열

[인천인물100人·51] 인천신상협회는

인천신상협회는 189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객주단체에서 발전했으며 서상집과 박명규, 서상빈 등의 객주상인이 주도했다. 1885년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된 객주조합이 때로는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생기자 정부는 이를 관장하고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 32) `상무회의소규례'를 제정·공포하였다. 신상협회는 이름이 변경되어 1889년에 신상회사로, 1911년에는 다시 신상협회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에 준거해 인천객주상회가 모체가 되어 만들어진 이 협회의 목적은 상인에 대한 계몽과 국가 재원을 부유하게 하는데 있었다. 정부를 대신해서 영업세를 객주들로부터 연 2회 대신 징수하는 특권을 가졌고, 외국상인으로부터 회원의 상권을 옹호하는 등 민족계 상인의 상업자세 혁신을 촉구했다. 우리 상인들이 외국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는 한편, 협회의 기업가들은 의연금 모집 등에 동참해 국채보상운동과 학교설립 비용으로 사용하는 등 애국 활동에도 힘썼다. 인천신상협회는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며 폭력적 상거래를 한 일본인 계림장업단의 비행을 규탄하고 정부에 그 단체의 해산을 강력히 건의해 결국 계림장업단을 해체시켰다. 역사적으로는 객주조합에서 근대적 상업회의소로 발전해 나가는 과도적 상인단체였다. 1905년 인천신상회사는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로 전환되었다.

2006-07-27 윤문영

[인천인물100人·51] 서상빈의 후손들은

서상빈의 후손들은 인천 경제계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서상빈의 아들인 서병훈은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이사로 활약하며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그는 대표적인 항일민족 단체인 신간회 인천지회의 간사를 맡는 등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병훈의 아들 서정익은 일본 나고야공업학교 방직학과를 나온 뒤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로 취직을 했다. 광복후 일본이 남겨두고 간 이 공장(적산공장)을 동일방직으로 재발족시켜 사주로 취임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 갔다. 인천에 있던 수많은 적산공장 중 현재까지 운영해 발전시킨 것은 동일방직 뿐으로, 서정익씨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3년 전국경제인협회 이사로 취임했고 1970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상무이사로 선임돼 한국 경제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했다. 또한 그의 아들 서민석은 현재 동일방직 회장으로,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지난 3월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국내 경제계의 큰 역할을 맡고 있다. 동일방직에 얽힌 노동문제를 차치하고, 개항 이후 인천에서 활약하던 사업가들 모두가 당대로 그친 반면 서씨 일가는 대를 이어 인천 경제에 기여한 바는 주목할 만하다.

2006-07-27 윤문영

[인천인물100人·51] '상권수호' 서상빈

>51< '상권수호' 서상빈 지난 24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은 서해 제일의 무역함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형 화물선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인천항이 세계 각지의 수·출입 화물선이 대형 항구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됐다. 과거 이곳은 인근 주민들이 낚시를 하는 어촌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어촌마을이 지금과 같이 항구로 변모된 과정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은 우리 경제를 이끄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과거 이곳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항구를 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현장이었다. 인천항 인근에 남아있는 일본식, 중국식의 주택과 과거 일본제일은행 건물 등 개항기 건축물에서는 당시 외세의 압박과 그에 대응했던 한국인들의 아우성이 묻어난다. 인천항이 개항된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23년전인 1883년.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조규가 체결된 후 일본은 인천에 대한 개항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인천이 수도에서 가까운 해안의 요충지인 점을 들어 거부했지만 결국 인천 개항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항된 이상, 외국 상인들의 치외법권지대가 된 인천항은 각국의 영사의 영향력이 미치며 외부 세력에게만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상인들이 살아남기에는 상인 개개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기업들의 경영상 어려움을 해소하고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가 존재하듯, 그 시절의 상인들도 외세의 힘에 맞설 조직 구성이 시급했다. 자연히 상인들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것을 주도한 역량있는 인물이 바로 서상빈이다. 서상빈은 1897년 조직화되지않은 객주들의 모임(인천 객주회)을 모체로 인천신상협회를 조직했다. 그는 일제의 강요로 개항된 무역시장에서 우리 상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쓴 인물이지만 오히려 인천의 역사는 그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위대한 인천인물'을 인천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서상빈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후손을 찾아봤지만 이조차 쉽지 않았다. 서상빈의 4대손인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측을 통해 서상빈에 대한 자료 여부를 물었지만, 동일방직 측에서는 “회장의 증조부이고 너무 오래 전 분이라 회장님과 회사 내부에 그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인천시나 인천상공회의소 등의 기관이 적극 나서 `잃어버린 서상빈'을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조우성 인천향토사 연구가는 “서상빈에 대해서는 신상협회와 인천 최초의 사학인 제녕학교의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일면에 대한 기록만 있다”며 “그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없어, 그의 태생과 죽음 등 삶의 전반에 대해 알기에는 미흡하다”고 밝혔다. 다만 `대한상공회의소 100년사’에서 상공회의소의 모체가 된 신상협회의 설립에 대한 기록과 `인천석금’에서 그가 제녕학교를 세운 과정의 일부분에서 그에 대한 일면을 그려낼 수 있다. 서상빈은 학식을 가진 양반인 진신(벼슬아치)으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상인이 아니었던 그가 상인단체인 신상협회를 설립한 독특한 이력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신상협회 창립문에는 `서양조합을 본뜨고 회사를 조직하니 진신과 민상이 합하여 상업의 규모를 일신하고 상권을 주장하게 되어 외국인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그들의 매점에 이익을 갈취당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세에 맞서기 위해 학식을 갖춘 지식인의 역할이 필요했고 서상빈이 그것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은 부산항에 있는 일본 제일은행에서 불법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본 재정고문의 화폐개혁으로 생긴 국내의 금융공황에 대한 건의를 하는 등 일본 상인들이 국내 경제를 침탈하는 것에 대응했다. 따라서 서상빈이 상인단체를 이끈 것은 단지 상인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애국적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의 인생에선 인천 최초로 사립학교(제녕학교)를 설립한 대목을 빼놓을 수 없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제녕학교 설립 과정이 언급돼 있다. 서상빈은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자 서울의 관문이란 것을 알고 인천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치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칠 학교가 없는 것을 고민하던 중, 러일전쟁 초기 침몰한 러시아 군함을 인양해 큰 돈을 번 김정곤씨의 협조를 얻어 초가 30여평의 건물에 학교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는 주간에는 일반 보통학교 수업을 하고 야간에는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인천외국어학교 출신인 인천세관 관리 30여명이 교대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일본이 득세하면서 제녕학교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1907년 6월 1일 창영초등학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됐다. 서상빈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최초로 육영사업을 실천했고, 온몸으로 혼란기 경제판을 이끈 선구자였다. 김윤식 한국 문인협회 인천시지회장은 “서상빈은 성균관 진사로 점잖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인천사람이면서도 개항 후 부내면장을 지낸 것이 전부일 정도로 처세술에 밝기보다는 침착하고 심중한 진신의 자세를 갖췄다”고 말했다.

2006-07-27 윤문영

[인천인물100人·50] 인터뷰/최원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진정한 인천사람이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는 “인천의 최고 의학박사로, 때론 향토사가로, 그가 남긴 업적 모두가 인천을 위한 것들이었다”며 이처럼 말했다. “사람들과 만남을 가져도 대화 주제는 언제나 인천에 대한 것들이었다”고도 했다. 최 대표는 월미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신 박사의 집을 떠올리며 “지인들이 돈과 명예를 얻어 인천을 떠났으나 그는 작고하기 전까지 인천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최 대표는 신 박사의 책 `인천한세기'를 높이 평가했다. 앉아서 쓰는 작문이 아닌 현장을 직접 살펴 확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쓴 진정한 역사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는 “근대 인천사를 꿰뚫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신 박사가 만들었다”면서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과 더불어 인천한세기는 인천의 근대사를 가장 잘 표현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최 대표는 또 인천한세기를 학술적 자료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기억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역사를 잘 알아야 나라가 발전하듯, 신 박사의 서적들은 인천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신순성부터 장남 신용석까지 신씨 3대가 인천 사회에 끼친 영향이 무척 큽니다. 신씨 가족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도 필요합니다.”

2006-07-13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50] 의학박사 '한옹 신태범'

>50< 의학박사 '한옹 신태범' 한옹(汗翁) 신태범(愼兌範·1912~2001) 의학박사.  신 박사는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인천을 사랑한 `인천인'이었다. `인천 1호 의학박사'란 직함으로 40여년간 많은 인천 시민에게 `인술'을 펼쳤고, 중년 이후부터는 인천 근대사를 담은 각종 서적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가 인천에 대해 가졌던 애정만큼 지역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1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학연구소. `신 박사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김창수 선임연구원이 손때가 먹은 책 몇 권을 내놨다. 그러면서 “신 박사의 서적들은 인천 근대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그가 남긴 서적 몇 권 외에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다음날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번도 인천을 떠날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고 했다. 신 박사는 1912년 서울 관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첫 군함 함장인 신순성(愼順晟)씨이다. 신 박사는 6살때 아버지가 인천에 정착하면서 인천 사람이 됐다. 비교적 부유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제가 태어나기를 다행히도 중의 상쯤 되는 가정에서였어요. 그래서 서울 중류 가정의 상쯤 되는 그런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 시대로서는 행운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황해문화 1993년 겨울·창간호-원로를 찾아서 중) 대한민국 최초 국비 유학생으로 뽑힐 정도로 머리 좋기로 이름 난 아버지 영향때문인지, 신 박사는 `축현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립중학교'(현 서울고 전신)에 무난히 합격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 경성중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조선 사람은 의사가 돼야 일본인들의 간섭을 덜 받으면서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아버지 가르침을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83㎝, 90㎏. 당당한 체격을 가진 신 박사는 운동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대학생때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전국대학 빙상경기대회'에 3차례나 출전한 경험이 있고, 유도(4단) 선수로도 이름을 알렸다. 개업의로 활동할 때는 대학생때 틈틈이 익힌 야구 실력을 `전국 성인야구대회' 인천 대표로 출전, 뽐내기도 했다. 신 박사는 대학 졸업후 `순천도립병원'(당시 전라남도 소재)에서 외과과장을 지내다 1942년 고향 땅 인천으로 와서 당시 일본지계의 중심지인 `본정'(本町), 지금의 중구 중앙동에 병원 문을 열었다. `신(愼)외과'. 일본 침략기에 그것도 일본지계에서 창씨 개명을 하지않고 자신 이름으로 병원을 낸 것이다. 그의 의술은 뛰어났다고 한다.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 “신태범은 광복 4년전 인천에서 일본인 최고 권위자인 `서야입외과'(西野入外科), `목뢰외과'(木瀨外科), `산구(山口)병원'과 경쟁해서 우위를 점하였고, 1942년에는 인천의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였다”고 적었다. 광복후 신 박사에게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10월 신 박사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과 처음 만난다. 죽산이 열개 손가락 중 여섯 개가 상한채 신 박사를 찾아온 것이다. 당시 인천에서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 때문에 죽산의 손가락이 많이 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신 외과에서 입원 치료를 통해 죽산은 완쾌했고, 이후 이들은 가끔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만남은 정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서로의 지식을 논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듬해 죽산은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으로 선출되고, 신 박사는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신 박사는 이후 각종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죽산과 나는 이념이 달랐다”며 “부의장은 내가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고 했다. 신 박사의 부의장 선출 사실이 지역 신문에 소개되자, 인천 사회는 그에게 `공산당'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신 박사는 한 달뒤 죽산에게 사표를 냈다. 죽산도 자신과 신 박사의 사표를 박헌영에게 내던지고 공산당 탈당을 선언했다. 죽산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 박사는 1991년 MBC TV의 `잊을 수 없는 사람' 코너에서 “죽산이 농림부장관에 취임한 뒤 유능한 친구를 소개하라는 부탁에 동경일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조동필을 소개했다. 조동필이 농림부 국장이 돼 초기 농림 정책의 시행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 후로 죽산과 인연이 끊어졌다”고 했다. 신 박사는 1954년 자유당으로 총선에 출마할 의사를 갖고 있었으나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4년뒤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했지만 아깝게 차점으로 낙선했다. 1960년 3월에는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인천시 갑구 지구당 총책으로 인천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 선거운동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한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의 정치인생은 최대 고비를 맞는다. `4·19 혁명'이 터진 것이다. 이후 신 박사는 `정계에 복귀하라'는 정치인들의 권유를 딱 잘라 거절했다. 정치와는 더이상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 박사는 책을 가장 큰 스승이요, 보물로 여겼다. 80살이 넘어선 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조우성(광성고 교사) 시인은 “작고하시기 전에 찾아뵈었는데, 뉴스위크 영어판을 보고 계셨어요. 눈이 침침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아직도 책을 읽는게 가장 큰 낙이라고 하셨어요”라고 했다. 6·25동란 후 그의 글 재주를 탐낸 지역 신문사들이 줄줄이 칼럼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신 박사는 1956~1957년 주간인천에 `전망차'(展望車), 1964~1965년 인천신문엔 `반사경'(反射鏡)이란 제목으로 각각 칼럼을 실었다. 80년대 초반 어느 날 한진그룹 회장이던 고(故) 조중훈씨가 신 박사를 찾아왔다. 신 박사가 병원 문을 닫고 지낸 뒤였다. 조 회장은 자신의 그룹에 소속된 대학(인하대학교)에서 교의(校醫)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신 박사는 이를 승낙했다. 2년여간 인하대에서 교의로 활동하다 인하대 총장의 권유로 `영양과 건강'이란 주제로 교양과목을 10여년간 맡아 강의했다. 신 박사의 강의는, 처음 개강할 무렵 몇 안되던 수강생이 3년뒤에 400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인기만점'이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내장탕으로 유명한 동구 송림동 `아리랑관'을 찾아 내장탕을 함께 먹으며 인생을 논했다고 한다. 신 박사는 2001년 작고하기 전까지 인천 근대사를 담은 책들을 발간했다.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이 `인천한세기'다. 1983년 인천 개항 100주년을 맞아 경인일보에서 시작한 시리즈에 신 박사가 직접 집필한 글이 실렸다. 70살을 넘긴 고령임에도 신 박사는 직접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를 했다. 시리즈 하나하나가 모여 `인천한세기'란 이름의 책이 발간됐을 때, 신 박사는 `인천 최고의 향토사가'란 호칭을 얻게 된다. 신 박사는 인천한세기를 비롯해 `먹는 재미 사는 재미', `음식문화탐험', `개항후의 인천 풍경', `인천 중구의 옛 풍물' 등을 펴냈다. 신 박사는 자신의 지난 세월과 평가가 담긴 자료를 책으로 엮어 가장 아끼는 후배 중 하나였던 조 시인에게 건넨 뒤 2001년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회갑때 본인이 직접 지은 호 `한옹'처럼 끝까지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2006-07-13 김장훈

[인천인물100人·49] 인터뷰/ 변영로의 종손 호달씨

“수주 할아버지는 주위에 문인들이 끊이지 않았던 분입니다.” 조선 한학자 변영만과 1950년대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 그리고 시인 변영로 등 자신의 길에서 최고에 오른 3형제는 '부평삼변'이라 불린다. 이 중 변영태는 아들 3명이 모두 일찍 죽었고, 변영로의 5형제 중에선 2명이 생존해 있지만 한명은 미국에 사는 등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부평삼변의 향제터에 살고 있는 변영만의 맏손자 변호달(61)씨를 통해 조금이나마 변영로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수주 할아버지는 굉장히 특이한 분이셨다”며 “워낙 주위에 지인들이 많아서인 지 사실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잘 상대도 해주지 않으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변호달씨는 “세분 중 영태 할아버지가 가장 가정적이었고, 두분은 그렇지 않았다”며 “우리 할아버지와 수주 할아버지는 집에서 죽이 끓는 지 밥이 끓는 지도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술에 얽힌 인생을 소탈하게 써내려간 변영로의 수필 '명정(酩酊) 40년'의 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변영로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게 그의 어린시절 기억이다. 그는 “워낙 술을 많이 드셨던 분이라 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암에 걸려 외국에서 수술을 받은 뒤 얼마있다 돌아가셨다”고 변영로의 사인에 대해 설명했다. 향학열이 굉장히 뜨거웠던 가문이 자랑스럽다는 변호달씨. 그는 “대대로 여기서만 살아서인 지 이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며 “조상들의 얼이 서려있는 이곳을 계속 지키며 살겠다”고 말했다.

2006-06-29 김창훈

[인천인물100人·49]'부평삼변' 변영만·영태·영로 3형제 소속논란

■'부평삼변' 변영만·영태·영로 3형제 소속논란 '인천의 대표인물이냐, 부천을 빛낸 인물이냐'. 부평삼변(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3형제)의 고향이자 그들이 묻혀있는 고강본동은 행정구역상 부천시 오정구에 속한다. 반면 이 형제들이 애착을 가졌던 수주는 부평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인천에 부평이 포함된 걸 감안할 때 이들의 수주는 결국 현재의 인천이라는 논리도 묵직한 설득력을 얻는다. 머지않아 인천과 부천 이 두 지자체들간 변영로를 서로 끌어가기 위한 논쟁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부터 인천대표 인물을 조명하고 있는 인천문화재단은 비공식적이지만 곧 부평삼변을 다음 인물로 정해 조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지난 16일 그동안 변영로에 가려있었던 변영만의 전집 발행을 기념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인천문화재단 이현식 사무처장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한강 이남까지를 관할했던 도호부로 인천도호부보다도 규모가 더 컸다”며 “부평삼변도 현재의 행정구역을 떠나 부평문화권의 인물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도 변영로를 비롯한 부평삼변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천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변영로를 '부천을 빛낸 인물'로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청사 1층 로비와 홈페이지에 변영로의 사진 등을 내걸었을 뿐 아니라 향제터와 선영에도 이미 기념비들을 세워놨다. 또 몇년 전 고강본동 비포장 도로를 확장하며 도로 이름을 '수주로'라고 붙이기도 했다. 변영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시작한 '수주문학상'은 올해로 벌써 8회째를 맞았다. 반면 변영만과 변영태 등 부평삼변 중 2명에 대한 조명은 변영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부천시 관계자는 “부평삼변을 어느 지역의 인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며 “변씨 문중 선영과 땅, 집들이 모두 부천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2006-06-29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49]수주 변영로 시인

>49< 수주 변영로 시인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생시에 못 뵈올 님을 中) 지난 26일 오전 11시 제 1경인 고속도로 신원 IC를 빠져나와 서울 양천구 신월동을 5분쯤 가로 질렀을까 '경기도 부천'이란 표지판과 함께 '수주로(樹州路)'가 눈에 띄었다. '수주(樹州)'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나무 고을', 현재 부평(富平)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주삼거리에서 좌로 꺾어 밀양 변(卞)씨 집성촌이 있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본동으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였다. 주택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변씨 문중 선영(先塋). 조상이 대대로 500여년 살아 온 동네 이름을 아호로 삼은 시인 변영로(1897~1961)는 이곳 수주의 선영 한 쪽에 잠들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교과서에서 한번 쯤은 읽어봤을 시 '논개'로 널리 알려진 수주(樹州) 변영로 (卞榮魯). 부평이 인천에 속하기에 엄연한 인천의 인물이지만 행정구역상 부천으로 갈리며 그의 시 한 구절처럼 그립던 '그대'는 가까울 듯 멀어져 버렸다. 늦었지만 인천문화재단은 곧 변영로를 '인천대표인물'로 정해 집중조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첫번째 인천대표인물로 우현 고유섭을, 올해는 두번째로 검여 유희강을 조명하고 있다. 내년도 인물로 확정된다면 변영로는 세번째 인천대표인물이 되는 것이다. 변영로는 서울 맹현(孟峴:현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수주에 있는 집은 삼화감리를 지낸 부친 변정상(卞鼎相)의 향제(鄕第:벼슬아치의 고향집)였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 보통학교와 계동 보통학교를 거친 뒤 사립 중앙학교를 다니다 자퇴했다. 18세 되던 해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친 뒤 자신이 자퇴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 '천재시인'이란 찬사를 받았다. '3·1 운동'이 벌어진 22세 때엔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발송, 우리 겨레의 울분과 독립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변영로의 활동무대 역시 당대의 문인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서울이었다. 그가 남긴 시나 수필 등에서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989년 '번영로 전집'을 펴낸 연세대 국문과 김영민 교수는 “책을 쓴 지 오래돼 정확하진 않지만 시 중에선 고향에 대한 게 없었고, 수필 중 1편에서 '부평'에 대한 얘기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영로의 호인 '수주'에 대한 애정은 그의 큰형 변영만(1889~1954)의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변영만은 조선 말기 유명한 한학자로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등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영어까지 통달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지난 15일 출판된 '변영만(卞榮晩) 전집' 중엔 '여러 자식(별호) 중 또 특별히 사랑하는 자식이 있듯이 나는 항상 수주를 애용했지만 (동생 변영로가)양도해 달라는 말에 오륙분 동안 주저하다 결연히 수주를 동생에게 내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상들의 동네 이름을 호로 쓰고 싶어 형을 졸랐다는 일화를 통해 변영로의 고향사랑과 형제들의 수주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변영로가 한창 시인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형식을 정립해가던 시기였다. 당시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변영로 역시 최고 수준의 작품을 많이 쏟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기개높은 민족정신이 깊이 새겨진 그의 유일한 시집 '조선의 마음'(1924) 등이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세월의 물결을 따라 후세에 그의 작품세계를 전하고 있으며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은 무류실태기(無類失態記)로서 너무나 유명하다.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는 “변영로의 시는 서정시 초창기의 기법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며 “작품을 떠나서라도 그가 썼던 아호 수주가 나타내는 부평 사랑은 탁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6-06-29 김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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