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100人·48] 조선후기 효의 표상 김정후

>48< 조선후기 효의 표상 김정후 오는 7월 10일 다시 문을 여는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에는 '효'와 관련한 특별한 유물이 전시된다. 일제시대에도 '백세불후(百世不朽)'의 효행으로 기려야 한다면서 당시 유림이 나서 표창까지 한 그 숭고한 '효'의 정신이 박물관을 찾는 모든 이에게 전해지게 됐다.  조선 후기 인천의 대표 효자 김정후(金鼎厚·1789~1866).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대변(大便) 맛을 봐가며 변환상태를 살피기까지 한 김정후의 효행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병규 등 지역 유림의 청원에 의해 1891년 3월 24일 고종의 왕명으로 예조에서 입안해 효자정각을 세우고, 그 자손에 까지 포상을 실시했다. 고종 때는 정표(旌表)정책이 극도로 문란해져 개별 문중에서 자의적으로 효자각 등을 마구 세우던 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지역 학계에서는 왕이 직접 나서 세운 김정후의 효자정각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김정후의 효행이 밖에 알려진 것은 지난 해다. 그 자손이 인천시립박물관에 '김정후 효자정려 입안문서' 등 고문서를 기증하면서부터다. 이 문서는 1891년 지금의 계양구 노오지동에 사는 김정후의 효행을 기려 예조에서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해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기리던 일)를 내리게 된 내용을 적고 있다. 김정후의 효행은 참으로 지극하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고생하시기를 3년이 되던 해, 한 겨울에 동생과 함께 얼음을 깨고 고기(잉어)를 잡아 봉양했고, 특히 어머니께서 설사병으로 수개월을 고생하자 그 변을 매번 맛을 보아 상태를 살필 정도였다고 한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고기반찬 없는 밥이나 죽을 먹는 등의 철저한 시묘살이를 3년 동안 했다고 한다. 특히 매일 성묘를 가는데, 비바람이 불거나 한겨울·한여름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시묘살이가 얼마나 지독했는 지는 그 집안의 족보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성묘 길의 이슬을 누군가가 매일같이 먼저 떨쳐내 그의 옷이 젖지 않았고, 학처럼 생긴 새 한 마리가 길가에서 날아가지 않고 아는 체 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 또 칠순이 넘어서는 걷기가 불편해 지자, 꿈에 한 노인이 현몽해 지팡이를 점지해 줬다고 한다. 이러한 김정후의 효행은 지역의 대표적 효행으로 전해져 오다가 일제시대 초기인 1923년에는 당시 유림 내 중요 조직이었던 '공부자성적도오륜행실중간소(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重刊所)에서 전국의 각종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김정후의 사례를 접했다. 이 사례를 접수한 유림에선 전국에서 온 효행 사례 중 으뜸이라 여겨 포장(표창장)에 '백세불후의 효행으로 기릴 만하다'는 내용의 문구까지 담았을 정도다. 그는 1891년에 '동몽교관'이란 관직을 내려받았고, 그의 자손까지도 부역과 잡세를 면제받기도 했다.김정후의 효자문 정각은 지난 2004년 계양·김포지역 도시개발에 따라 집안 묘역이 있는 용인으로 이전한 상태다. 이 효자각은 1981년 중수하였지만 1891년 고종이 내린 현판과 당시 쓴 주요 재료가 그대로 남아 있는 원형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이 효자문을 용인으로 옮길 때는 유물 기증의 장본인이기도 한 5세손 김종헌(78)씨가 마음 고생이 심해 병을 얻기까지 했단다. 정려각은 집안에 내린 것이지만 그 지역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가 높은데, 이를 먼 지역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집안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은 할아버지의 숭고한 효행을 많은 사람이 본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른 귀한 고문서도 함께 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여기엔 김정후와 관련된 문서뿐만 아니라 19세기 이래 토지매매문서, 소송기록, 호구단자를 비롯해 일제시대 부평수리조합 관련 문서 등이 있다. 부평의 근대사를 복원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김정후의 후손에게서 기증받은 유물을 분석한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연구실장은 “김정후의 효행은 조선중기 을사사화로 낙향해 평생을 은거하면서 노모를 극진히 봉양한 11대조 김원의 뒤를 이은 가문의 전통이라고 할 만하다”면서 “특히 고종 때 예조의 정식 코스를 밟아 효자로 임명됐다는 점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김정후의 자손이 귀중한 유물을 기증한 것에 대해서는 시민을 대신해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김정후의 효행은 집안의 전통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천지역에 알게 모르게 그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부평에 사는 50대의 충남 당진 선영에서의 3년 시묘살이가 화제가 되기도 했고, 효 운동도 인천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인천순복음교회와 지역 국회의원 등이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주도하고 있고, 가천문화재단이 주는 '심청효행상'과 성산청소년육성재단이 제정한 '전국성산효행대상'등은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인천시에서도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살려 '인천 효의정신'이 전 시민에게 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찾고 있는 중이다. ■김정후 선생 6세손 기범씨/인터뷰 "할아버지의 지극한 효행을 생각할 때마다 제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할아버지의 그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천의 대표적 효자로 꼽히는 김정후 선생의 6세손이 되는 김기범(51)씨는 족보에 적힌 할아버지의 효행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한다고 말한다. 부모의 병환을 살피기 위해 대변의 맛을 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3년 시묘를 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효행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 해 아버지(78)와 상의한 끝에 할아버지와 관련한 고문서 등 유물 일체를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집안의 '가보'를 선뜻 내놓기까지는 고민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할아버지의 숭고한 효행정신을 알려 각박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효'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기증을 결심하게 됐다. 이런 김씨의 바람대로 김정후 선생의 '효 정신'은 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서 되살아 나게 된 것이다. 김씨는 2004년 할아버지의 효행정려문을 원래 있던 인천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옮긴 것에 대해 죄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아버님께서는 정려문을 이전하고 나서 뇌졸증을 앓으실 정도였어요. 대대로 전해오는 정려문을 옮기는 것은 할아버지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요즘엔 무척 좋아지셨습니다." 김씨는 "요즘 국가에서는 효행을 법으로 정해 장려한다고 하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할 효심까지 강제하는 사회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면서 "아무쪼록 할아버지의 효행이 앞으로 계속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6-06-22 정진오

[인천인물100人·47] 인터뷰/김형희 前경기매일 편집국장

“인천은 국내 어느 지역에서도 찾기 힘든 정통 지역 언론의 발생지인데 정작 인천에서 지역 언론이 설 자리는 없네요.”김형희 전 경기매일 편집국장은 지역 언론을 홀대하는 지역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뱉었다. 그는 “대중일보며 경기매일이며, 지금의 경인일보와 인천일보까지 인천에서 정론직필 정신을 이어가는 언론사들이 설립됐고 운영되고 있다”며 “이들 신문이 낸 기사로 잘못된 정치와 행정이 바뀌었고, 이런 혜택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지역 사회는 지금껏 제대로 된 언론사(史)조차 만들지 않고 있다”며 “지금까지 수백여 언론인들의 노력을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송수안의 경우가 그렇다”며 “정의를 실현했고 인천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사람인데, 그에 대한 자취가 인천에는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언론인들도 각성해야 한다”며 “선배가 이뤄 논 업적을 기리는 건 어떻게 보면 현직 언론인들의 몫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당과 유신정권에 맞선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선정되는 세상이다”며 “독재정부에 맞서 일평생을 바친 언론인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인천시와 각 언론사, 각종 사회단체가 나서 언론의 역사를 복원하고 지역 언론인들이 정론직필로 불의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달라”고 덧붙였다.

2006-05-11 김장훈

[인천인물100人·47] 지역 첫 일간신문 설립 송수안

>47< 지역 첫 일간신문 설립 송수안 서슬퍼런 유신정권에 맞서 인천 언론의 자존심을 지켰던 송수안(宋壽安·1903~1983). 인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지역 일간지인 '대중일보'를 설립한 그는 인천 언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현재 송수안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와 함께했던 언론인 대부분이 생존해 있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인천이 30여년동안 지역 언론 발전을 위해 온몸을 바친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송수안은 1903년 인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송수안의 아버지는 외항선원이었고, 송수안은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청년기 무렵 황해도를 떠나 '혈혈단신' 인천으로 온다. 그의 손자 송대열(씨티은행 송탄지점장)씨는 “할아버지(송수안)가 증조 할아버지가 재혼하시자 집을 나섰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며 “아마 할아버지가 30대 초반 쯤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송수안은 인천에서 피복업에 뛰어들어 성가해 한 때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을 지낸 적이 있다. 이후 1944년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맡게 되면서 언론에 첫 발을 들인다. 고일선생은 인천석금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 '동아', '중앙'이 모두 폐간되자 인천에서는 '조선매일신문'과 '매일신보', '경성신보'의 독무대였다. 송수안군이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신문 판매가 가장 왕성한 시기를 만난 행운아였다”고 적고 있다. 이듬해 광복이 찾아왔고 송수안은 이종윤과 함께 대중일보를 설립한다. 정통 언론인이 아닌 자신은 운영이사장을 맡고, 인쇄책임자 겸 편집국장에는 언론인인 이종윤을 앉혔다. 지역 일간지의 설립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지역 신문을 독차지하고 사세를 확장, 우리 손으로 신문사를 꾸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송수안은 대중일보 창간과 함께 인천의 중요성을 이 처럼 적었다. '인천은 우리 도부의 관문이며 동시에 심장부인 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여기에서 대성할 것이니 우리의 국가의 성장과 함께 본지는 같이 성장하면서.(중략) 본지는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대중일보 1945년 10월 7일 창간사). 1950년 9월 송수안은 사장으로 취임, 제호를 '인천신보'로 변경한다. 인천신보는 당시 전황을 보도한 유일한 지역 신문이었다. 그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컸다고 한다. 한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던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이 성립된 뒤 인천에서 다시 신문을 제작한다. 1959년 9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다시 1960년 7월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 경기매일에서 송수안은 자신이 회장직을 맡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산업은행에서 근무하던 큰 아들 용호(1981년 사망)씨를 사장에 앉힌다. 부자가 이끄는 경기매일은 야성이 강한 지역 신문이었다. 인천에서 유신정권에 맞선 유일한 신문이었다.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매일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고 한다. 때문에 정부의 협박도 심했다. 송수안과 용호씨는 며칠에 한번 꼴로 '인하공사'(당시 중앙정보국 경기도지사)에 끌려 가거나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정론직필' 정신을 굽히지 않았다. 경기매일이 야성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기자들에게 편집권 독립을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 김형희(82) 전 경기매일 편집국장은 “내가 사회부장으로 있을 당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힘이 막강한 한 군 장성의 비리를 캔 적이 있다”며 “회사에서 더 이상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회장(송수안)님은 '기사작성은 잘 하고 있느냐'는 격려와 '결코 불의를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여느 신문사에서 찾을 수 없었던 편집권 독립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정부의 회유와 협박을 거절한 언론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될 형편에 이른다. 1970년대 초반부터 언론인들 사이에서 맴돌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다. '1도1사'. 유례없는 언론탄압이 시작됐다. 전북에서 전북일보와 전북매일신문, 호남일보가 통합·폐간됐고 대구일보와 대구경제신문이 폐간됐다. 이 같은 변화가 일었으나, 송수안은 태연했다. 사세로 보나 시설 규모로 따져도 다른 신문사에 통합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기매일에서 기자로 활동한 바 있는 장길환 은혜병원 홍보이사(전 연합통신 기자)는 “인천의 내로라 하는 언론인들의 집합소인 경기매일이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생각은 인천 시민 누구도 갖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73년 7월 경기매일은 경기일보, 연합신문 등 경인지역 3개 신문사와 자진폐간 성명서를 발표하고 1개월 뒤 제9818호 종간호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이에 대해 정치적 논리에 밀려 일어난 일이란 평가도 있다. 오종원 전 경기매일 편집부국장은 "당초 경기매일이 인천과 경기도의 언론사 1곳씩을 흡수키로 했는데, 정치인들이 막판에 이를 뒤바꿔 놨다"고 주장했다. 한 평생을 바쳐 일궈 논 신문사를 송두리째 빼앗긴 송수안은 절망에 빠진다. 용호씨는 대열씨 등 3형제를 이끌고 서울로 이사간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인쇄업을 경영하며 식솔을 이끌던 용호씨는 술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고혈압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 송수안은 부천 막내 아들 용선씨 집에서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큰 아들에게 짐을 짊어지게 한 미안함과 정치적 논리에 신문사가 문을 닫게 됐다는 설움으로 아들 딸 6남매 집을 전전하던 송수안도 1983년 숨을 거둔다.

2006-05-11 김장훈

[인천인물100人·46] 원고지에 핀 '사회변혁의 꿈'…작가 엄흥섭

일제 식민지시대 인천지역 빈민들의 삶에 천착한 작가 엄흥섭(1906~?). 해방 이후 지역 언론운동을 주도했던 그의 행적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 자체다. 그는 월북으로 끝내 자신의 종적을 남한에서 감춰 버렸지만 일제시대 소외된 조선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과 명확한 이념적 활동 등을 통해 현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인천스러웠던 그의 활동 궤적은 일제시대와 해방후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의 대표적 유작들은 월북작가들의 해금과 동시에 조명을 받고 있지만 행적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형편이다. 일제 식민시대 인천지역 민중들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소설 '새벽바다'. 지난 1935년 12월 '조광'지에 발표해 당시 인천 상황을 사진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식민시대와 자본주의로부터 동시적 고통을 겪는 민중들의 힘겨운 삶이 잘 드러나 있다. “'뚜우…'하고 부두의 공기를 흔들은 대련환(大連丸)은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슬며시 이륙하기 시작한다. 쨍쨍 쪼이던 해가 바다 저끝에 기울어지자 물결은 갑작이 피를 토해 놓은 것 같다”로 시작하는 '새벽바다'는 당시 인천항의 전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인천항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새벽바다'의 주인공 최 서방은 부두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노동자. 농촌에서 밀려 인천의 빈민굴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최 서방과 그의 가족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치하의 가혹한 농업정책과 일제의 착취로 도시 부랑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식민지 민중들의 암담한 현실을 그린 작품이 바로 '새벽바다'다. 일제의 가공에 의해 근대 도시화되는 인천의 모습과 자본주의 병리 현상이 이 소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엄흥섭은 지난 1906년 충남 논산군 채운면 양촌리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기독교 신자이며 인텔리인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받지만 11살 때 어머니 마저 잃고 경남 진주로 옮겨가 숙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가 동인지활동을 시작한 것은 진주중학 시절 '학우문예'를 조직하면서부터. 이후 그는 인천을 중심으로 진우촌, 박아지 등과 함께 '습작시대'에 참여하고 단편소설 '국밥'을 발표한다. 당시 엄흥섭은 경남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에서 10리 떨어진 '평거'라는 낙후된 농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경남에서 인천을 오가며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붓는다. 엄흥섭은 진주에서 교원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해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그는 카프(KAPF)에 가담하고 중앙집행위원에 보선된다. 그는 지난 1937년 인천에서 발간된 '월미'지에서 지독한 인천 사랑을 표현한다. 그는 이 잡지에 수록한 수필 '해방항시 인천소감'에서 “나는 인천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슬퍼한다. 그것은 인천이 항구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한 항구 가운데서도 해방된 낭만적 항구이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이유에서다”라고 적고 있다. 해방이후 그는 1945년 결성된 좌익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프로문맹)에 가입한다. 이후부터 그는 아예 인천에 터를 잡고 더욱 지역 문화 운동에 매진한다. 해방 직후 인천지역은 젊은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민족문화와 지역문화 건설을 둘러싸고 뜨거운 열기로 충만했다. 그는 특히 1945년 12월18일 결성된 인천문학동맹의 위원장을 맡는다. 프로문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엄흥섭의 활동 상황은 자연스럽게 인천문학동맹위원장으로 만들었다. 엄흥섭은 1945년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고 창간한 '대중일보'의 편집국장과 인천신문기자회 위원장직을 겸직하며 언론계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인 논조를 표방하던 대중일보가 중도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자 새로 창간한 '인천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을 맡는다. 그는 이 신문사에서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창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구속되는 필화사건으로 타격을 입는다. 이로 인해 신문사는 폐간되고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은 실형을 언도받는 수난을 겪는다. 이후 엄흥섭은 좌익 인사들을 감시하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1950년 6·25 전쟁과 동시에 월북한다. 그의 월북 이전 남한 행적은 좌·우를 넘나드는 당시 치열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 석사 논문에서 이봉범씨는 엄흥섭과 관련, “그는 일제하 다른 작가들과 달리 인천을 중심으로 왕성한 문예활동을 벌였다”며 “그는 또 문학을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성실한 문학가”라고 평가했다.

2006-04-27 목동훈

[인천인물100人·46] 엄흥섭은 어떤 작가인가

엄흥섭은 어떤 작가인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엄흥섭을 연구했거나 그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 엄흥섭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박진숙 성균관대 교양학부 교수는 '탄생 100주년 문인 기념행사'를 위해 엄흥섭 관련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박 교수는 “엄흥섭은 카프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며 “그는 군기사건으로 인해 카프중앙위원에서 제명되지만 그 사건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카프계열 작가들은 농민과 지주 간의 갈등, 공장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을 그렸다”며 “그는 인천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동인활동을 해서 그런지 어부 노동자의 삶을 그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봉남(성균관·세명·성공회대 등) 강사는 “당시 인천을 중심으로 문학이나 연극의 동인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됐다”며 “그때 엄흥섭은 박아지, 진우촌 등과 함께 활발한 동인활동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군기사건과 엄흥섭의 초기소설'이란 글을 쓴 장명득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카프계열 작가들이 전향을 거치는 데 비해 엄흥섭은 40년대 전까지 계급적이고 적극적인 글을 썼다”며 “40년대 이후 통속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해방 후 다시 그 이전에 보여줬던 적극적인 글쓰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월북 후 쓴 '동틀무렵'이란 작품은 북한 문학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며 “북한에서는 월북작가인 한설야만큼이나 엄흥섭의 가치를 높게 사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주형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엄흥섭은 문단에 등장하기 전부터 사회주의적이고 계급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회고담에서 밝혔듯이 소학교 시절 자유주의적 진보주의 사상을 가졌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형님이 망하면서 숙부 밑에 가난한 생활을 지냈기에 사회주의적 노선을 가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에 대해선, “투사후일담 같은 몰락상을 통해 강한 현실인식의 모습을 보여줬다”면서도 “그들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갖고 있는 지, 어떻게 투쟁했는 지에 대한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또 “문학적 성취도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작가”라며 “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 때문에 다른 동반자·월북작가에 비해 덜 조명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대학연구소 관계자는 “엄흥섭은 월북과 함께 문단계에서 멀어지면서 그 후 관심을 덜 받았다”며 “80~90년대 월북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새롭게 이뤄졌지만 엄흥섭은 그의 작품세계와 경향에 비해 덜 주목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에 대한 재조명·재인식이 가치가 많을 것이다.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6-04-27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46]이희환 인하대국문과 강사가 말하는 엄흥섭

“일제 식민지시대의 현실을 그 나름대로 소설에 담으려 노력했던 인천의 작가입니다.” 지난 24일 인천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희환(40) 인하대 국문과 강사는 엄흥섭이 인천과 연관성이 깊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강사는 “엄흥섭은 1926년대 진주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습작활동을 했다”며 “당시 인천을 오가며 문학청년들과 교류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희곡작가) 진우촌을 중심으로 인천 문학청년들과 교류가 이뤄졌던 것으로 짐작된다”며 “어느 시기에는 인천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강사는 지난 2004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학술지 '한국학연구'에 '엄흥섭과 인천에서의 문화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인천의 문학운동사와 근대문화를 찾다보면 쉽게 만나는 이름이 바로 엄흥섭이었다. 그는 “해방 후 자료를 보면 대중일보의 엄흥섭을 알게 되지만 작가 엄흥섭과 연결이 안 된다”며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엄흥섭을 연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을 배경으로 쓴 엄흥섭의 작품으로는 '새벽바다', '고민', '정열기' 등이 있다. 이중 '새벽바다'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현실과 당시 인천의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 강사는 “이 작품은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중심가와 조선서민들이 사는 뒷골목이 대조를 보이고 있다”며 “엄흥섭은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는 소설을 왕성하게 썼다”고 설명했다. 또한 “30년대 후반에는 통속소설로 변화, 일제 말에는 친일적인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엄흥섭은 문학사에서 동반자 작가로, 통속소설을 쓴 작가로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인천을 문화·소설적 공간으로 적극 탐구한 인천 문화운동의 숨은 주역입니다.” 이 강사는 “인천문화·언론에서 중심인물이 된 것을 보면 지역에서 숨은 활동이 있었을 것 같다”며 “글솜씨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왕성하고 성실하게 활동한 작가였다”고 말했다.

2006-04-27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45] 조각가 조규봉

>43< 조각가 조규봉 '인천이 낳았으나 인천이 잊어버린 비운의 조각가. 조규봉(曹圭奉)'. 인천시립박물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이경성씨는 1997년 '황해문화'(새얼문화재단 발행) 겨울호에서 조각가 조규봉(1917~1997)을 이렇게 평하며, 그에 대한 지역의 '홀대'를 아쉬워했다. 나이 서른에 월북해 북한 조각계를 이끈 조규봉은 고향 인천에서는 철저히 잊혀졌다. 조규봉이 초등학교 때 살던 동구 신화수리(新花水里·지금의 화수1·화평동) 77이 화도진공원 부지에 편입되는 바람에 지금은 집터의 흔적조차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다녔던 창영초등학교에 어린 조규봉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학적부가 보관돼 있을 뿐이다. 조규봉의 예술가적 기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타난다. 일제치하에서 초등학생 조규봉은 국어(일어), 조선어, 산술(산수), 일본역사 등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학년 때 이들 4개 과목의 점수는 모두 4점(10점 만점)에 그쳤다. 그러나 도화(그림)와 창가(노래)는 5~6학년 기간에 자신의 최고 점수인 8~9점을 각각 받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서 학교는 물론 주변에 까지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경성씨의 말이 초등학교 성적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본에 유학 가 조각을 배운 조규봉은 1944년 입국,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다. 이 때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미술가협회, 조형예술동맹 등으로 이어지는 미술단체 조직활동도 활발히 했다. 조규봉의 북한 행은 '일감 찾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강원도해방탑 건설 등 북측에서 쏟아지는 각종 기념물 사업이 남측 조각계의 선구자들을 불러들인 꼴이 된 것이다. 조규봉은 북측에 가기 전인 1946년 8월 인천시립예술관 개관기념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인천시립예술관 설립은 이경성씨가 주도했다. 일본 유학생활을 같이 했던 이경성씨는 “만국공원 세창양행 사택을 개조해 만든 인천시립박물관 정원 잔디에 누워 조규봉과 한참을 얘기했는데, 얼마후 일을 하기 위해 이북으로 간다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씨는 또 “그 때만해도 38선이 없어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한국에는 아직 미군정 시절이라 이렇다할 일거리도 없는 터였으나 이북에는 온갖 모뉴먼트(기념물)가 한참 만들어졌기 때문에 조규봉은 그런 일을 찾아서 몇몇 친구들과 이북으로 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념에 따라 북측으로 간 것이 아니라 조각이란 예술활동 무대를 따라 갔다는 것이다. 이후 평양 북조선미술가동맹 조각분과위원장, 평양미술대학 교수 등으로 있으면서 북한 미술계의 '기둥'으로 활약했다. 조규봉의 작품세계는 월북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경성씨는 “조규봉 자체가 휴머니스트였고, 낭만에 가득 찬 사람이었기 때문에 작품세계도 그러한 휴머니즘과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면서 “그는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반드시 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미오'같은 이탈리아 가곡을 꽤 잘 불렀다”고 조규봉의 작품세계와 인간적 풍모를 평했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낭만주의의 극치'로까지 평가받던 조규봉의 면모는 북측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통일문화재단 자료에 따르면 조규봉의 고음독창은 전문가들도 왔다가 울고 갈 만큼 청이 높고 기량 또한 대단했다. 특히 우리 민요를 잘 했고, 이탈리아, 쿠바의 민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조규봉의 음악적 기질은 조각 작품 현장에서도 발휘됐다. 밤을 지새며 계속되는 대규모 기념비 제작으로 피로해진 조각가들의 제작 속도가 떨어질 때면 조규봉은 고음의 노래선율로 지친 조각가들을 위문했다는 것이다. 북측에서는 조규봉을 조각가들의 엄격한 스승이면서도 불타는 정열과 의지로 노래를 불러 조각가들의 사기를 북돋아준 '화선선동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월북 이전의 조규봉 작품에 대해 이경성씨는 '부드러운 감각에 싸인 구상의 세계'로 말한다. 특히 그는 아카데미의 총본산이라는 동경미술학교 조소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작품세계도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아카데믹한 구상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휴식'과 '여인상' 같은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북측에서의 작품은 확연히 달라진다. 1959년 제작된 '남녘 땅의 어머니'(높이 93㎝)는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차지한 조규봉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데, 부드러움보다는 내면의 강력한 힘이 넘쳐난다. 북한 미술에 정통한 박계리 계원예술대학 강사는 “허기진 아이를 가슴에 안은 피끓는 모성의 절절함이 강인하게 전달돼 오는 작품”이라고 '남녘 땅의 어머니'를 말했다. 가녀린 아이의 가냘픈 어깨와 대조되는 편안하고 넓은 손, 여윈 아이의 어깨로부터 등까지 감싸안은 마디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은 모성애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박계리씨는 “북한 조각계에서 조규봉이 차지하는 역할은 단순히 그가 좋은 조각작품을 남겼다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면서 “대기념비미술에 대한 선례가 없던 북한에서 이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재능있는 조각가들을 키워냈고, 그와 더불어 대기념비 조각을 성공적으로 건립해 내는 중심에 조규봉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북에 있는 김일성 동상 대부분을 조규봉이 세웠다는 얘기도 있다. '개항과 양관 역정'의 저자 최성연 선생과도 창영초등학교 동기동창(19회)인 조규봉은 어릴 적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조규봉의 집은 전통적인 한국 가옥에 정원을 곁들였다고 한다. 또 거기에 동산과 정자, 연못 등도 집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규봉이 살던 동구 '화도'에는 부유층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조규봉의 먼 친척이 되는 광운대학 설립자 조광운 선생도 이 동네에서 살았고, 장면 박사도 화도진공원 부근에서 살았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부친 조정섭의 직업이 초등학교 학적부와 북측 기록에 다르게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창영초등학교 학적부 상의 부친 직업란에는 '質屋'(질옥·전당포)으로 돼 있는데, 북측은 조규봉을 소개하면서 '사무원 가정에서 자랐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규봉이 월북한 뒤 착취계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부친의 전당포 운영 사실을 숨겼기 때문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조규봉의 부인 구영림은 평양미술대학 졸업생으로서 조선화 화가였고, 딸 조윤미, 아들 조육석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 예술인이라고 한다. 아쉬운 점은 이경성씨가 조규봉을 회상하면서 '황해문화'에 글을 쓸 때인 1997년 1월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향 인천에서는 까많게 모르고 있었다.

2006-04-06 정진오

[인천인물100人·44] 한국 경제학계 개척자 신태환박사

>44< 한국 경제학계 개척자 신태환박사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걸출한 석학(碩學)이었다.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개척자'였고 1960년대 전쟁의 폐허속에서 한국경제를 앞에서 이끌어 간 '기적'과 신화의 '연출가'였다. 그는 수렁에 빠진 한국경제를 어떻게하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인들과 밤새워 토론하고 그 해법을 제시했던 '지도자'였다. 연세대 교수, 연세대 상대학장,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건설부장관, 서울대 총장,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 학술원 회장, 한국경제 연구원장, 경제정책자문회의 위원장 등 그의 화려한 경력만 봐도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이런 그를 두고 경제학계 및 교육계에선 “전쟁의 폐허속에서 한국경제를 이끈 그가 없었다면 눈부신 한국경제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신 박사는 서울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가장 행복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 박사의 호칭을 총장으로 하기로 했다. 신 총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집안에선 일찍이 그의 성공을 알아 차렸다. 인천고를 졸업한 그는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동경상과대학 본과에 합격했다. 그 시절 동경상과대학 본과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내세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이 대학(동경상과대학)에 85명이 붙었는데, 한국인은 저 혼자였습니다.”(1991년 당시를 회고한 인터뷰 자료에서) 신 총장은 졸업 무렵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연희전문 교수직을 제의받게 되면서 부터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졸업 무렵 연희전문 교수였던 유억겸이라는 분이 같이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백남운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정인보를 위시한 민족주의자 교수들이 대부분 잡혀 들어가 교수요원이 부족했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편지를 가지고 지도교수와 상의한 끝에 유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3년 미국무성 초청 교환교수로 노스웨스턴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1년간 경제학을 연구하고 1955년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뒤 1964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연희전문 교수때 부터 케인즈 화폐이론의 성격, 화폐적 균형의 개념, 케인즈 화폐론 등 '케인즈 경제이론'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면서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 '법학지'를 처음 만들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만드는 등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밖에도 경제학회 학술지를 처음 발간했으며, 외국어 학원 설립 등 학계는 물론 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이런 그의 활약상은 박정희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신 총장은 회고록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초기 어느날 청와대에서 불러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문제 전반에 대해 이야기 했고, 박 대통령은 내 의견을 내내 경청하면서 수첩을 꺼내 깨알같은 글씨로 열심히 메모하더군요.” 그는 당시 한국경제 문제를 꿰 뚫고 있었고, 박 대통령은 그에게 경제에 대한 '과외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1962년 국가최고회의로 부터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지시받게 된다. 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안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후 그는 2대 건설교통부장관,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입각해 한국경제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휘청거릴때면 늘 그가 있었다. 그의 활약상은 경제계 뿐만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남달랐다. 서울대 총장시절 그는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목소를 높였던 장본인. 그는 1965년 서울대 총장시절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징계하라는 정부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한 뒤 대학을 떠난 일은 유명하다. 그는 이임사를 통해 “정부가 학생들의 징계를 요구하며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사례는 한국교육역사상 일찍이 찾아 볼수 없었다”며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에서 지성이 유린된다면 건전한 국가가 건설될 수 없다”고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또 “그간 우리가 교권의 확립을 위해 정치로 부터 대학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목마르게 부르짖어 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소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대학을 떠나서도 그는 많은 활동을 펼쳤다. 산학협동재단 이사, 한국경제연구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태평양과학협회 총재, 안세재단 이사장, 단암장학재단 이사,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 정보통신발전협회 회장,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다산경제학상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무성 초청 교환교수로 몬마우스대학과 디킨슨대학에서 한국문화와 경제학강의를 했다. 신 총장의 셋째 아들 국조(61)씨는 “선친께서는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대학을 떠나서도 서울대 사랑은 대단했다”고 말했다.국조씨 말대로 그의 서울대 사랑은 남달랐다. 1975년 그는 기고를 통해 '서울대 사랑'을 이렇게 적었다. “서울대가 그 숙원을 이루고 관악산록에 일대 '파노라마'를 펼쳐 놓고 그 발전의 신기원을 시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동숭동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향수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른 아침 등교 길을 서두르는 학생들의 바쁜 걸음걸이에 용솟음치는 힘을 느껴 왔고 밤늦게 대학 앞을 지날때면 불야성을 이룬 중앙도서관의 불빛을 보고 꺼질줄 모르는 한국의 희망을 감득했다. '마로니에'의 그늘 밑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청년들의 약동하는 생명 가운데 한국사회의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 4·19탑 앞에 옹기종기 모여 속삭이는 학생들의 대화 가운데 민족고난기 청년들의 용기와 예지를 엿볼 수 있었다. 우거진 향의 숲. '마로니에' 산 목련의 거목. 한국 '아카데미즘'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연륜을 가리키는 담장의 덩굴, 그 가운데 나는 서울대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번영하는 조국의 한없는 힘을 느꼈다…."신 총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지난 93년 12월 31일 작고하기 직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영원한 학자' 였고 '교육자'였다. 그의 서재에는 1천 600여권의 각종 서적들로 가득했고, 유언에 따라 책들은 모두 서울대학교에 기증됐다. '인재양성만이 살 길'이라던 신 총장의 뜻을 이어 받아 그의 셋째 아들 국조씨가 서울대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2006-03-16 송병원

[인천인물100人·44] '셋째아들 신국조교수'가 본 아버지는

“선친께서는 인재양성만이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친의 뒤를 이어 서울대 자연과학대 화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셋째 아들 신국조(61)씨는 “아버님께서는 수렁에 빠진 한국경제를 어떡하면 다시 일으켜 낼 수 있을까 늘 고민하셨다”며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된 대학에서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 사회 각 분야에 진출시키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회고했다. 국조씨는 “선친께선 서울대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친의 꿈은 '경제학자'가 아닌 '화가'였다고 소개했다. “선친께서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어려서 부터 그림 그리기와 예술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님은 미술분야 전공을 마음먹고 미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님의 반대에 부딪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제학자가 되셨다고 자식들에게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가끔 말씀하셨던 것으로 미뤄 못내 아쉬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선친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것도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아버님은 서울대에서, 어머님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육계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대학진학 무렵 아버님께서 서울대 총장이셨는데 서울대 이공계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화학과를 선택했고, 아버님의 뒤를 이어 학생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님이 계셨던 대학에서 뒤를 이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선친의 열정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6-03-16 송병원

[인천인물100人·43] 민족자본가 석계 장석우선생

>43< 민족자본가 석계 장석우선생 인천박문여자 중·고등학교 본관 앞 광장에는 설립자 석계(石溪) 장석우(張錫佑:1870~1941)선생의 흉상이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근대 인천 여성 교육의 산실을 만든 장본인 답게 지금도 후학들에게 민족 사랑을 올곧이 전하려는 장선생의 흉상은 이 학교의 역사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일본 상인에 맞선 민족자본가의 한 축으로, 또 인천 여성 교육의 씨를 뿌린 그의 족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이 지난 1940년 설립한 인천 소화고등여학교(현 인천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당시 여성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인천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인천에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현 인천여고)가 있었지만 일본인 자녀가 주로 다니고 한국인 학생은 불과 2~3명이 특별 입학하는 등 여성 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선생의 1남 2녀중 막내 딸인 장보원(92·미국 LA거주)씨는 “평소 아버님께서는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여성이 배워야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기억하고 있어 여학교를 설립하게된 배경을 짐작케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평소 장 선생은 나라를 잃은 근대기에 여성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학교 설립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선생의 외아들이자 해방이후 잠시 재단이사장을 지낸 소계(小溪) 장광순(1907~1998) 선생이 개교 50주년을 맞은 지난 1990년 털어놓은 학교 설립당시의 상황이다. '그 당시 경기도(당시는 인천이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의 방침은 내선공영(內鮮共榮)이라는 미명 아래 ▲학생수를 한국인과 일본인 반반으로 할 것 ▲학교 위치는 부평으로 하여 조병창내의 일본인 직원들에게 편의를 줄 것 ▲재단이사장에 부윤(시장)을 임명할 것 ▲학교명은 소화(昭和)고등여학교로 하라는 명령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조선인의 운영은 극히 경계할 때인지라 이러한 악조건을 감수하며 학교를 설립하여야 하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망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교를 학수고대하는 입학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개교를 먼저 해 놓고 보아야 하겠다는 일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학급을 2학급으로 증설하는 대신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수를 5대5에서 6대4로 개정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학교 설립인가를 받아낸 장석우 선생은 지난 1940년 5월 18일 동구 송림동에 있는 '인천송림공립심상소학교(현 인천 송림초등학교)' 일부 교사를 임대해 1학년 2개학급 120명을 모집해 가교사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그해 12월 인천시 부평동 현 경찰종합학교 부지 1만여평을 매입해 학교 신축에 들어갔지만 선생은 준공식을 불과 3주 앞둔 1941년 10월 14일 숨을 거뒀다. 해방 후 일본으로부터 학교를 되찾은 장광순씨는 1945년 9월 30일 천주교 서울교구에 양도함으로써 현재의 박문여자 중·고등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박문여고 1회 동창회장이었던 이민각(1926~2005) 전 서울 중동고 재단이사장은 지난 1991년 2월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당시를 회상하며 장석우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한국사람이 민족자본을 들여 세운 학교였지만 당시 일제는 재단이사장, 학교장을 일본인으로 할 것과 학생수도 50%를 일본학생으로 채워야만 개교를 시켜주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때 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려갔을 지도 모르죠. 설립자의 높은 교육열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요.” 1870년 2월 강화에서 태어난 장석우 선생은 인천항 개항(1883년) 직후 인천으로 건너와 장사를 시작했다.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1900년을 전후해 주명서·김용태 등과 주단 포목점인 '서흥태'를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 당시 인천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가로 급 성장하게 된다.향토사가 조우성씨는 “장석우 선생이 주로 일본과 청국으로부터 면직물과 비단을 수입해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당시 인천에 4~5곳의 포목점이 크게 번창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장석우 선생의 가게가 대표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선생의 장손자인 장동현(62) 소계장학회 이사장은 “할아버지는 돈을 버시면 주로 토지를 구입하셨다고 합니다. 현재 인천대학교 주변 등 당시 농경지였던 부평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경인선 철로부지 가운데 부평지역을 관통한 땅은 거의 대부분 할아버지 소유일 만큼 땅 부자였지요”라고 말했다.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인천상업계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 장석우 선생은 당시 해운업을 하던 정치국 등과 함께 제국주의 권력을 등에 업은 일본 상인에 맞서기 위해 1905년 7월 '인천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창립해 활동한다. 인천 조선인 상업회의소는 1916년 1월 인천 일본인 상업회의소와 합병돼 '인천상업회의소'로 발족했는데 선생은 특별위원에 선임된다. 이후 그는 인천상업회의소의 부회두(부회장, 1921~22)를 맡는 등 1928년까지 경제계를 이끈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어 당시 활동 상황이 지역 경제계에 구전으로만 전해 지고 있다. 막내 딸 장보원씨는 “요즘 농협에 해당하는 금융조합의 조합장도 맡아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며 “또 지금의 인천대학교 주변에서 과수원도 운영하셨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가지고 있다. 사업가로 성공한 장석우 선생은 인천지역에 여학교를 설립하기 전부터 육영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화학교(현 인천 영화초등학교)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 창영초등학교)의 학교 운영비를 지원한 것은 물론 1940년에는 부평보통학교(현 인천 부평초등학교) 건축을 위한 대지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선생의 민족사랑은 소화고등여학교 설립이 그 종착지였던 셈이다.

2006-03-09 김도현

[인천인물100人·43] '석계' 아들 장광순선생은

인천 박문여자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장석우 선생을 거론하면서 아들인 '소계(少溪) 장광순(1907~1998)' 선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장광순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을 두고 양로원을 건립할 지 학교를 지을 지 고민하던 장석우 선생의 결심을 교육사업으로 굳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학교 설립 1년만에 유명을 달리 한 부친을 대신해 사실상 학교 운영을 책임지고, 해방 직후에는 천주교 서울교구에 학교를 넘겨줬다.학교를 천주교 재단에 양도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해방이 되자 입학시험에 불합격했던 학생의 학부형들이 집단으로 학교를 사회에 기증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 우리는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과거 동경(도쿄)에 있는 쌍엽(雙葉)학원을 시찰하였을 때 구내에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있어 함께 운영되는 것을 보고 나도 이런 학원을 설립해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랄까 욕망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기증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었을 때에는 차라리 유치원, 소학교에다 후일 대학까지 설립하면 한국의 쌍엽학원이 되어 여성교육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톨릭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일제시대 인천부의회(현 시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한 탓에 해방 이후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였지만 백범 김구선생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는 게 가족들의 주장이다. 선생의 호인 '소계'를 본떠 만든 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장남 장동현(62) 이사장은 어릴적 기억을 조금씩 떠올렸다. “백범 선생이 나서서 할아버지와 아버님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받아 썼다고 하시면서 친일파가 아님을 강조해 주신 것으로 압니다. 백범 선생은 인천에 와서 머물 때면 저희 집에서 묵으시곤 했는데 주변에는 항상 건장한 청년단원들이 있어서 무척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장광순 선생은 해방 직전에 당시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화약 인천공장의 인수 제의를 거절한데 이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가 총살 위기도 맞았다고 가족들은 전하고 있다. 개교 50주년을 맞은 지난 1990년 박문여고 본관 건물 앞 광장에 세워진 아버지 장석우 선생의 흉상은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를 찾아가 흉상 건립을 요청했지만 우상숭배 등의 이유로 거절당한 뒤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문여고 1회 동창회장인 이민각씨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지금의 자리에 흉상이 건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2006-03-09 김도현

[인천인물100人·42]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42< 계몽가 강화석·강준 부자 가톨릭 신자이자 관인의 신분으로 개항당시 인천지역사회에 깊이 관여하며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친 강화석(세례명 요한). 그리고 그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한 강준(세례명 바오로) 역시 신앙생활은 물론 교육사업에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갔다. 하지만 강화석이 아들(강준 1910년 이주)을 따라 1917년 황해도 수안지방의 들무정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인천을 떠나게 된다. 특히 관직에 있으면서 근대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계몽가로도 활동한 강화석은 당시 보기 드문 신지식인중 한사람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1910년 창간된 뒤 지금까지도 발행되고 있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잡지 가운데 하나인 경향잡지에는 강화석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해 당시 강화석이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얼마나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들 부자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상태로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 지역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인천학연구원 시절 강화석에 대한 연구를 했던 이희환(도서출판 작가들대표)씨는 “강화석·강준 부자는 당시 인천지역에서 다양한 교육 및 계몽활동을 펼쳤지만 1910년 강준, 1917년 강화석이 황해도로 이주,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인천지역에서는 이들 부자의 이름을 듣기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하지만 이들 부자가 인천지역에서 벌였던 다양한 사업들을 계기로 인천지역에서는 이후 학교설립이 이어졌고 계몽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인천지역에서 이들 부자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강준이 설립자로 참여한 인천박문초등학교측에서는 강준에 대한 근거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학교 관계자는 “세월이 너무 오래돼 당시 자료들이 보관돼 있지않고 설립자들에 대한 자료도 제대로 보관돼 있지않아 100년사를 발간하려다 자료부족으로 중단되기도 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강화석은 1845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출생했다. 황해도 지방의 권세있는 반가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강화석은 어려서 사서를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다 1865년 20세의 나이로 가톨릭에 입문한다. 당시 대원군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황해도지방에서 전교활동을 벌이던 베르뇌 주교로 부터 영세를 받은 것이다. 이후 강화석은 일생동안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며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한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여러차례 체포되지만 강화석은 부친의 영향력으로 풀려난다. 결국 병인박해를 피해 1870년 중국으로 건너간 강화석은 이곳에서 한어를 공무하는 리데주교를 만나게 되고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을 비롯해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등지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서양문명을 접하게 된다. 일본 고베와 상하이를 오가며 일어와 영어를 배우게 된 강화석은 1882년 10월 민영익,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함께 상하이에서 10여년만에 귀국한다. 귀국후 조선해관 창설업무를 담당하게 된 강화석은 1883년 조선 해관이 설치될때 방판에 임명돼 처음 관직에 나선다. 그러나 강화석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87년 3월16일 교섭아문(交涉衙門)의 주사직급으로 인천 해관의 방변에 발령된 뒤부터의 일이다. 이해 11월16일자로 주 일본 조선공사관에 파견돼 1년간 근무하다 귀국해 다시 인천항 서기관으로 일했다. 1893년에는 강화수군 총제영(總制營)에서 운영하는 학당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교섭아문의 주사로, 189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근무했다. 청일전쟁의 수습차 2개월간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해 5월 개항장에 새로 경무청관제가 실시되자 제물포 경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1896년에는 개혁법령 제1호 재판소구성법이 제정공포됨과 함께 한성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됐다. 당시 한성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민형사 사건 외에도 외국인과 조선인간의 민형사 사건을 재판했고 원칙적으로 단독판사가 재판권을 행사했다. 해관 업무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뒤로 강화석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내왕하며 중요한 외교적 현안을 관장했고 귀국해서는 경무청 경무관, 재판소 판사 등의 직책으로 새로운 근대적 제도를 안착시키는데 일정 역할을 해나갔다. 1897년 9월19일 강화석은 복설된 감리서 제도에 따라 인천항 감리 겸 부윤 겸 판사(종3품)로 임명됐다. 복설된 감리서의 감리는 각국 영사 교섭과 조계 및 항내 사무일체를 관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1895년 이전의 감리 업무보다 그 업무가 확대됐다. 여러 개항장 중에서도 가장 큰 인천 개항장에 그가 감리겸 부윤으로 임명됨으로써 그는 '새인천'의 근대적 제도화의 선두에 서게 됐다. 게다가 당시의 감리는 학교관제에 따라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겸임하게 됐다. 강화석은 그 교장직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인천항 감리로 부임한 기간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다. 징계를 받고 갑자기 감리에서 해임됐던 것이다(관보 광무 원년 9월 22일자). 징계의 사유는 천주교 신자를 경무청의 순검으로 채용한 것에 반감을 품은 경무사 및 감찰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징계는 1898년 4월에 풀려 6월에는 중추원 2등 의관(議官)으로 임명된다. 한달만에 다시 외부(外部) 참서관으로 임명돼 2년간 일하다 1900년 농상공부 기사주임 1등으로 점임됐고 1902년 8월에는 박람회(博覽會) 위원까지 겸임했다. 1904년 농상공부 참서관 주임 1등으로, 1907년 6월에는 서기관으로 승진돼 정년을 마쳤다. 관진에서 물러난 강화석은 인천천주교회의 박문학교, 시립 오성학교 및 서울 종협 천주교회의 계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00년 9월 1일 김교원, 아들 강준은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을 교육하기 위해 '천주학방'으로 박문학교를 설립. 1908년 학생수 55명을 헤어렸으나 일제의 사립학교명 반포로 개인으로 운영이 어려워 1909년 12월 8일 인천본단에 운영권을 인계, '인천항사립박문학교'로 개칭됐고 인천본당의 주임인 드뇌 신부가 설립자가 됐다. 강화석은 1917년 반신불수병을 얻어 황해도 수안지방의 들무정이라는 곳으로 거쳐를 옮겨 살게된다. 그가 수안지방으로 옮긴 이유는 그의 뒤를 이어 인천 해관에서 근무하던 아들 강준이 1910년 경술국치후 관직을 사임하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수안광산의 총지배인 겸 영어 통역관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인지방에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해 영향력이 컸던 아들 강준 곁에서 강화석은 병고를 겪으면서 10여년동안 죽음을 준비했다. 강화석의 천주교 입교이후 그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아들 강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강화석의 손녀이자 강준과 유마리아 사이의 둘째딸인 강마리아는 어린 나이에 수녀가 돼 종교생활을 정진하다 1918년 11월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강화석은 1926년 3월 2일 생을 마감한다. 강준 역시 1933년 신장병으로 서울에서 입원 요양중 사망한다. 가톨릭 기관지인 '경향잡지'는 가톨릭 유력신자인 강화석의 사망소식을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강화석은 조선이 근대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해관, 경무청, 재판소, 감리서 외부, 농상공부 등의 다양한 부서에서 여러 업무를 통괄하며 근대 제도가 안찬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실무의 중책을 담당한 직업적 행정관료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비단 관직의 공무에 한정해 활동한 인물만이 아니라 인천을 주무대로 삼아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에 걸쳐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아들 강준과 함께 설립한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 인천지부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인천의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민족운동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2006-03-02 김신태

[인천인물100人·42] 강화석·강준 부자가 설립한 인천박문협회는

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6월8일 결성됐다. 1898년 6월25일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중 가장 큰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는 협성회(1896년 11월30일 창립)에서 발행하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는 당일 잡보란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소식을 최초로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각처의 신문 및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구비해 놓고 모든 회원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하고 연설해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회원은 설립되자 순식간에 100여명에 이르렀다. 1898년 7월4일 '박문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독립신문)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취지는 외세의 침탈 아래 놓여있는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애국자강운동 노선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1898년 10월15일 인천박문협회가 독립협회의 인천항지회로 정식인가 된다.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인천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계몽사업으로 이어졌고 협회창설 한달여만에 회관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야간영어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이 사립영어학교는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사립박문학교(현 박문초등학교)의 모태가 된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며 현재 박문초등학교의 학교명칭은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인천박문여자중학교는 박문초등학교에 이어 세워진다.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강화석으로, 그는 아들 강준과 함께 인천박문협회의 운동노선을 정했고 그를 중심으로 인천해관과 외국상사, 교회와 관공서 등에 종사하는 인천의 신지식인들이 모여 다양한 계몽운동을 펼친 단체가 바로 인천박문협회다. 그러나 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12월말에 강제해산된 독립협회운동의 운명과 함께 신문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박문협회의 '박문(博文)'이란 이름은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박학어문(博學於文) 약지이례(約之以禮)'란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

2006-03-02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41] 큰아들 기웅씨가 본 아버지 한남철

“아버님과 친분을 쌓으셨던 주위분들을 만날 때면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많은 일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렸을 적의 일이라 기억나는 게 없어 아쉬움이 많아요.” 한남철 선생의 큰 아들인 한기웅(34)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아쉬움으로 대신했다. “어렸을적 아마 초·중학교 시절이었을 거예요. 집에 부모님이 사용하시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 곳엔 책이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실에 책이 더 많았지요. 작업실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어머님이 소설을 쓰시면 아버님이 읽고 조언을 해주시곤 했어요.” 한씨는 “아버님이 작품을 쓰시지 않는 대신 어머님의 작품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며 “어머님이 원고를 작성하시면 꼼꼼히 읽으시고 조언을 해주셨다”고 기억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 이순씨는 소설가로 방송 진행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당시 아버지께서 KBS방송국에서 홍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터라 어머님과 일을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러던 중 뇌막염으로 어머님이 쓰러지시면서 아버지는 퇴근 후에는 거의 병원에서 생활하셨어요. 저희도 주말이면 병원에서 어머님의 간병을 맡았는데 여러 모로 가정이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대화를 자주 나누거나 단란했던 기억은 많지 않다”고 했다. 한씨는 “아버님께서는 간경화가 악화되는 데도 어머님에 대한 간호에 더 열심이셨다”며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도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유언만 남기셨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하셨다”고 말했다.한씨는 “요즘들어 아버지의 글을 읽다보면 고향에 대한 애착과 가족의 소중함, 문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열정을 느끼고 있다”며 “아버님과 어머님의 작품집을 모은 문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6-02-23 이진호

[인천인물100人·41] 소설가 한남철

>41< 소설가 한남철 한남철(본명·한남규, 1937~1993)은 소설가로는 유일할 정도로 분단시대의 인천을 속 깊이 그려낸 작가로, 6·25 이후 인천문학의 공백을 홀로 메웠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11월 18일 오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30주년 기념행사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행사장 앞줄에 선 젊0은 문인들은 인천 출신 작가인 한남철을 비롯해 김정한, 고정희, 김남주, 김도연, 김소진 등 작고한 문학인들의 영정을 들고 있었다. 영정의 주인공들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74년 11월 18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로 의사회관 앞에 모여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양심수 석방과 자유민주주의의 새헌법 마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이날 바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를 창립했던 인물들이다. 당시 한남철을 포함해 고은, 이호철, 백낙청, 조해일, 황석영 등 101명의 문인들은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쳤고, 헌법 개정을 요구해 문인사회는 물론 전국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화도에서 가난한 어부의 맏아들로 태어난 한남철은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비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던 한남철은 철학과 재학 중인 1958년 돌연 학교를 중퇴한다. 그 해 10월 그의 소설 '실의(失意)’가 '사상계’에 발표되자 학업을 접었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 사상계에 입사해 문학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한남철의 문학활동은 1960년부터 1966년까지가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평생 남긴 작품은 단편 33편이 전부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 21편이나 되었으니 작가로서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활동이 주춤해지는 시기에 한남철은 월간중앙과 신동아 등에서 기자로 활동한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문인들과 인연을 맺고 이들의 후견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당시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문인들에게 월간중앙에 글을 쓰도록 해 원고료를 챙겨주기도 했다. 동료 문인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직장을 갖고 있어 동료나 후배 문인들의 술자리를 자주 챙겨 제일 인기가 좋았었다고 한다. 그는 주로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을 통해 많은 문인들과 교우했다. '창비’는 1966년 1월 백낙청이 주도해 한남철, 임재경, 이종구, 김상기, 채현국 등의 도움으로 창간한 계간지다. 백낙청과 한남철은 어려울 때마다 서로 의지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이후 한남철이 병환으로 고통을 겪고 임종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을 정도로 둘의 우정은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작가 황석영도 창비를 통해 한남철과 오랜 친분을 쌓았다. 그의 자전소설에서 한남철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당시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 소설인 '객지’를 창비에 실었는데 창비에 찾아가 만난 편집자가 평론가 염무웅과 월간중앙 기자 한남철이었다. 인천 사람 한남철은 시원시원하고 어딘가 기자다운 시니컬한 데가 있어서 술자리에서 그의 농담을 듣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이후 몇 년에 한번씩은 부딪히는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한남철은 내가 여전히 글을 쓰는가 묻곤 했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만나자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눈이 번쩍 뜨이게 좋은 작품이야.” 한남철은 좋은 작품만 보면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이라도 먼저 연락해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시인 신경림과 황석영, 홍길동의 저자 박연희 작가였다. 얼굴도 모르는 박연희에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선생에게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알린다”는 편지를 보냈고 박연희가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둘은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됐다. 월간중앙 편집을 맡으면서 한동안 주춤했던 그의 작품 활동은 1970년대 초반(5편의 단편)과 1979년에서 198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짧으나마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간경화를 앓으면서 작품 활동은 멈추고 유명 소설가이며 대학 교수로, 80년대 방송 진행자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아내 이순의 외조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마저 뇌막염으로 쓰러지자 방송사(KBS) 일을 하면서 밤에는 아내를 간호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엔 그의 지병인 간경화가 극도로 악화돼 그 또한 병마에 시달린다. 바로 이 시기에 한남철은 필명을 본명인 한남규로 바꾸고 유작(遺作)인 '강건너 저쪽’이란 작품을 내놓는다. 한남철은 힘들고 어렵던 이 시기에 고향의 모습을 자신의 소설에 녹여내면서 단편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선 연안부두와 강화 사이를 오가던 배, 만국공원, 홍여문과 산으로 둘러싸인 인천중학교, 신포동과 송림동의 모습을 사진처럼 박아내고 있다. “필명을 본명으로 바꾸고 말년(돌아가기 3년 전) '강건너…'를 쓴 것 을 보면 아마도 자신이 러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엇떤 것 같아요." 그를 옆에서 지켜 본 고향 후배인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의 얘기다. 최교수는 "작가들이 죽기 전 유언 같은 작품을 쓰곤 하는데 '강건너 저쪽'이 바로 그의 유언이었다"며 "이 작품을 쓰면서 내게 한남철이 아닌 한남규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그런 상징을 내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강건너 저쪽'이란 작품의 처음부분과 끝부분을 보면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략) 나룻배를 먼저 탔기 때문에 앞서 떠나게 된 (돌아가신)할머니가 강 저쪽에서 뒤의 행보에 타고 올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할머니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투덜대고 있으리라. 그런데 이 애들은 뭘 꾸물대고 여지껏 안 오는 거지!" 간경화 악화로 병상에 누운 한남철의 마지막 소원은 "정말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거였다. 이 때 장편소설 '내고향 서쪽바다'를 구상한다. 그는 병실에서 후배인 최원식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화수동이니 화평동이니 그 경계가 어딘지 아슴아슴해. 자료 좀 구해봐"라며 옛지도를 구해달라고 했었지만 끝내 소설을 마치지 못하고 자신이 얘기했던 강건너 저쪽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한남철은 어떤 문학적 야망은 고사하고 '작가'라는 이름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어느 기고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직도 내게는 '작가'라는 이름이 붙어있음을 문득문득 생각할 때마다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006-02-23 이진호

[인천인물100人·40] 고여 우문국 화백

>40< 고여 우문국 화백 1998년 6월16일부터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한 원로화가의 회고전이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정작 화가는 전시회 기간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뇌졸중으로 5년째 병상에 누워있는 처지였다.이 전시회는 해방 후 평생을 인천화단의 발전을 위해 몸 바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배 화가들과 대학교수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만큼 원로화가는 인천 미술계의 큰 별이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나고 한달 가량이 지난 후 그 원로화가는 82세를 일기로 정열적이고 파란만장했던 예술인생을 접었다.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 1917~1998). 화가로서 모두 18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것은 물론, 초대 인천문화원장, 인천시립박물관장, 미술협회 고문, 문필가 등으로 활동한 해방후 인천 미술의 지도자였다. 우 화백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21세 때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9년간 동·서양화를 익혔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 검여 유희강을 만나게 되고 1946년 유희강과 함께 귀국한다. 귀국후 시천동 검여의 집에서 숙식을 하던 우 화백은 할 일을 찾아 서울 인천 등지를 돌아보던 중 '시립 우리예술관'(현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자리)을 찾게 되고 상설화랑 및 음악연구실, 카페 등이 갖추어진 이곳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네모난 단층집 방이 구자(口字)로 둘러있고 음악실에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며 남향한 몇개의 방은 상설화랑으로 국내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분위기도 조용하고 전망도 좋았다. 서울에도 없는 이런 문화시설을 가진 인천시민을 부러워했다.”(인천상의보. 1970) 그는 '시립 우리예술관'을 둘러보고 나서 38선이 열리지 않을 경우 인천에 정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수년 후 인천에 정착을 하고 시립 우리예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 예술관은 좌익 예술인들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시립예술관의 폐쇄는 그가 “사기를 당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에게 극도의 실망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 화백은 실망에 그치지 않고 예술관을 부활시켜 보겠다고 나섰고, 이는 우 화백이 문화운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예술관의 폐쇄로 좌익계열에 대해 분노를 느낀 그는 1949년 문인연합 총회의 전신인 인천예술인협회의 발족을 주도, 해방후 처음으로 인천에 우익 문화단체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고 1950년에는 구국대를 결성해 부대장으로서 좌익 계열 문화단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 화백은 이어 1955년 유희강이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박물관에 문화원이 설립되자 초대 인천 문화원장으로 취임, 1959년까지 문화원을 이끌면서 초기 문화원의 기반을 닦았다. 특히 1966년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한 우 화백은 박물관을 알리고 박물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생전에 쓴 '나의 공무원 생활'(1969)이란 글을 보면 '음침한 골동품으로서 자체가 진열장에 들어가야 할 운명'인 열악한 박물관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나는 건물수리 때에 나온 낡은 판자와 각재를 모아 (박물관의) 입간판을 세우기로 했다. 나는 이 일을 하는데 몇 몇 안되는 직원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며칠이 걸려 세 개의 입간판을 완성했다. 직원들은 나의 이 행위가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만 있었다. 요소(要所)에다 세운 이 입간판들은 제법 선전효과를 나타내 예년에 비해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였다.” 그는 우여곡절끝에 박물관을 개수(改修)하고 국립박물관에서 보물급의 고려청자를 비롯, 30여점의 귀중품을 빌려 '건물개수기념 특별전시회'를 열면서 전시기간 전시실에 의자를 모아놓고 숙직을 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교대로 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귀중한 문화재를 대여받은 책임감은 그에게 박물관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3년간의 박물관장 임기를 마감하고 나서는 인천여고 국민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미협 이사로 인천 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인천화단을 지켰다. 화가로서 그의 삶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서양화에서 한국화, 여기에서 다시 패분화, 그리고 다시 한국화로 돌린 그의 예술편력은 지금도 미술계에서 회자된다. 이경모 미술평론가는 우 화백이 작고한 뒤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고여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소개했다. “고여의 작품세계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서양화적 공간구성과 입체감의 표현 그리고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수묵(담채)화는 80년대 초에 절정기를 맞는다. 특히 1981년 제작한 횡폭의 산수화는 말끔한 선과 절제된 준법, 현대적 채색과 공간구성 등 소상팔경 중 '원포기법'을 연상케 하는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특히 만년의 작품들은 대담한 축약과 절제된 표현으로 일종의 선기(禪氣)마저 풍기고 있다." 우 화백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패분화(貝粉畵·조개껍질을 곱게 가루를 내 매체로 사용하는 그림)다. 그는 한때 패분화에 집착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 "패분화를 시작한지 이년째 접어들었다. 패분화가 회화냐 공예냐 하는 논의는 평론가나 사가(史家)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선 패분화가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척되었다는 것을 외국에 인식시키고 이것을 더 연구 발전시켜 재료에 적응한 패분화의 스타일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자화상, 1968) 이렇듯 예술인으로서의 우 화백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했던 도전자였으며 집에서 나와 홀로 송도로, 강화로 떠돌던 자유인이기도 했다. 또 문필가로서 상당한 필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다음은 그가 77세에 쓴 '고개를 넘으며'. "지루하고도 짦은 세월/ 허우적 허우적 땀흘려 오른 일흔일곱의 고개/ 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 보이지 않네/ 그러나 지금/ 돌밭에서 거둔 이삭 몇 줌/ 이 자리에 모아보니/ 어설프나 즐거워"

2006-02-16 임성훈

[인천인물100人·40] 딸 미령씨가 본 우문국 화백

“아버지는 배고프고 힘든 길을 걸으셨어요. 그렇지만 항상 당당하셨지요. 청렴결백하고 담백하게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어요.” 고여 우문국 화백의 딸 우미령(48·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씨는 고여의 삶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베레모가 아주 잘 어울리셨던 분이었고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는 항상 꽃과 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우문국 화백의 예술적 정열을 가늠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우 화백의 부인은 백범 김구 선생의 수양딸로 김구선생이 직접 쓴 글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 화백이 한국전쟁 당시 피란차 머물렀던 경주에서 백범 선생의 글을 전당포에 맡기고 가마를 사서 인형을 제작했다. 가장으로서, 생활인으로서는 낙제점을 받을지 모르나 어찌 보면 '엄마 어렸을적에' 등 인형을 이용한 전시회가 보편화된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시간을 앞서간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김구 선생의 글을 찾기 위해 전당포를 찾아갔을 때는 전당포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고 한다. 우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동석했던 기억을 털어놓으면서 “그 당시 예술인들은 지금의 술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사들이었다”며 “술 자리에서도 항상 존칭이 오갔고 술자리가 파하는 시간까지 자세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말했다. 우씨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아버지가 후진들에 의해 회고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접하고 크게 기뻐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을 맺었다.고여 우문국 작품세계는 유족들이 운영하는 다음 카페(http:cafe.daum.net/goyeo)에서 만날 수 있다. 우 화백의 유족은 부인 최분순(77)씨와 경복(56)·선덕(52·여)·미령(48·여)·경원(46)씨 등 4남매. 이 중 우선덕씨는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가브리엘의 침대', '서서 자는 나무들', '살아있는 산', '하얀 여자' 등 다수의 장편소설을 발표, 우 화백에 이어 부녀 2대에 걸친 인천 예술인 가족의 맥을 잇고 있다.

2006-02-16 임성훈

[인천인물100人·39] 박창례 선생 '평생단짝' 이옥녀 선생

이옥녀(1910~1987년) 선생은 박창례 선생과 늘 함께했다. 박 선생이 처음 보각선원 강당에서 야학을 열었을 때부터 이들은 함께였다. 이 선생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여장부'로 통했던 박 선생과는 달리 조용한 성격인 데다 늘 학교에 남아 박 선생의 교육사업을 뒷바라지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1910년 강화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천시내로 와서 1929년 인천영화여자보통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도포기했던 박 선생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동명초교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일본 조도전대(현 와세다대) 고등여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에는 경성보육학교를 졸업했다. 박 선생과 이 선생의 만남은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제자 김상열(75·여)씨는 “박 선생님과 이 선생님은 한 동네에서 학교(인천보통공립·영화여자보통학교)를 다녀 오래 전부터 친구사이였다고 하셨다”며 “그 때부터 두분이 평생지기로 지내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글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1946년 동명학원이 6년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승격된 뒤 교가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작곡은 경성보육학교 재학 당시 은사였던 홍난파가 했다. 매사에 꼼꼼한 성격인 이 선생의 존재는 박 선생에겐 특별했다. 박 선생이 대외적으로 활동을 벌이며 학교 발전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끌어오면, 이 선생이 이를 분석하고 사업성공을 위한 최대 공약수를 내놨다고 한다. 박 선생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았다면, 이 선생은 어머니였다.그는 교감으로 재직 할 당시 박 선생에게 혼쭐이 난 교사들에게 “너희가 잘 되라고 하시는 거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라”며 다정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동명초교 뒤편 방 한칸에서, 박 선생의 방 옆에서 혼자 살았다. 늘 정갈한 옷차림에 교양있는 말투로 여 학생과 여 교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대한적십자사에서 오랜기간 봉사활동을 한 그는 1982년 경인일보사로부터 '경인봉사상'을 받기도 했다.평생을 함께 한 친구였기에 박 선생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 선생은 박 선생이 죽음으로 학교를 비운 뒤 동명초교 이사장직을 맡던 중 1987년 7월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다. 박 선생이 작고한 뒤 교장직을 맡은 나찬원(75) 전 동명초교 교장은 “이 선생님도 박 선생님 못지않은 훌륭한 교육자이셨다”며 “만인평등교육을 실천하신 두분 선생님께 깊은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2006-02-09 김장훈

[인천인물100人·39] 동명초교 설립 박창례 선생

>39< 동명초교 설립 박창례 선생 사랑의 교육자, 스위스의 '페스탈로치'를 닮았다고 해서 '인천의 페스탈로치'로 불리는 박창례(1910~1983·여·인천동명초등학교 설립자) 선생. 일제 강점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교육받지 못한 수백여 지역 청소년들에게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친 참교육자였으나, 박 선생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설립한 동명초등학교(동구 송림동)에 남겨진 빛바랜 사진 몇 장이 고작이다.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다른 인천 인물들과는 달리 지금껏 평생을 지역에서 '만인평등교육'을 실천한 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린 단체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박선생은 1910년 11월 인천시 중구 도원동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가계'(家系)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박 선생의 유년기는 가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1남2녀 중 막내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박 선생은 1923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정신여자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학교를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귀향 후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도전대'(현 와세다대) 2년 과정을 수료한다. 신식 교육을 접한 박 선생은 이후 인천으로 건너와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결심한다. 박 선생은 1930년 4월 고향 땅에서 야학을 열었다.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보각선원'(현 중구 도원동) 강당을 빌려 '관서학원'(關西學院)이란 간판을 내걸고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소년·소녀 직공 100여 명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야학에는 '평생지기'인 이옥녀(전 동명초교 이사장·1987년 사망) 선생이 함께했다. 그러나 야학은 오래가지 못했고 6개월만에 문을 닫게 된다. 학생들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고 운영한 까닭도 있지만, 일본 경찰의 간섭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박 선생은 관서학원 문을 닫은 뒤 부평에 사는 부농 박백순씨에게 당시 돈으로 500원을 빌려 '이흥선정미소'(현 중구 유동) 창고를 매입해 '광명학원'(光明學院)이란 간판을 내걸고 다시 야학을 열었다. 그러나 이 학원도 몇 달 뒤 문을 닫는다. 박 선생과 돈독한 관계였던 고일 선생은 자신의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일본 경찰은 이 학원의 운영을 위하여 두 사람의 독립군이 암암리에 도와주었다는 핑계로 해산시키고 마니, 투자한 박씨가 원금 상환을 독촉했다”고 그 이유를 적었다. 박 선생은 1931년 유동에 일본인의 땅을 빌려 현 동명초교의 시초인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한다. 그러나 1939년 일본 경찰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을 딴 간판은 내걸 수 없다'는 이유로, 강제로 학교 이름을 일본식 이름인 '소화강습회'(昭和講習會)로 개명했다. 1945년 빼앗긴 들에도 봄이 찾아왔다. 광복과 동시에 동명학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박 선생의 학원은 일경의 탄압 속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친 공로를 인정받아 지역 내 사설강습소 중 유일하게 6년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승격됐다. 그는 관계기관의 협조를 얻어 송림동에 있던 '일본동경대 전염병연구소'의 실험용 우사를 인수해 지금의 동명초교 터를 만들었다. 제자 김상열(75·여)씨는 “선생님이 학교 터를 보시고 어찌나 기뻐하셨는 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며 “매일 밤낮으로 선생님과 학생 모두가 '일심동체'가 돼 학교를 쓸고 닦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 선생은 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외세침략이 잦았던 이 나라의 설움과 일본에 무릎꿇어야 했던 굴욕의 역사에 대한 그의 교육은 제자들의 가슴에 애국애족정신을 뿌리내리게 했다. 그는 사적인 일에선 늘 관대함을 잃지 않았으나, 공적인 일로 돌아서면 누구보다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명초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아침엔 조례문을, 오후엔 반성문을 읽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행함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사색이 없는 실천은 맹목이니 우리는 아동과 함께 배우고 아동과 함께 노는 곳에서 진리의 교육을 터득하고 목적달성에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오늘을 반성합니다.”(동명초교 반성문 중에서) 박 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단순한 사제지간이 아닌 끈끈한 정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학교로 불러내 손수 가르쳤고, 이들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도왔다. 어려운 형편 탓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제자들에겐 매달 학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동명초교 4회 졸업생인 김정욱(73·여)씨는 “하루는 선생님이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오라'고 하셔서 찾아 뵀더니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다”며 “나를 비롯해 선생님이 아끼는 제자들이 동명초교에서 교사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명초교를 졸업한 제자들 중 우수한 학생이 인천사범학교(현 인천교대)에 진학하면 학비를 보태셧고 나중엔 학교로 불러 교편도 잡게 하셨다"고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학교 뒤편 방 한 칸에서 혼자 지냈던 선생을 위해 제자들은 식사며 빨래 등 가정일을 대신 해줬다. 선생의 장례 때도 그랬고, 지금까지 그의 기일을 챙기는 일도 제자들이 하고 있다. 가난을 잘 알고 있는 박선생은 늘 검소했다. 교장으로 재직 중에도 그는 신발대신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특히 허름한 옷차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잘 알려져있다. 인천시교육청 공보팀 유준우씨는 "예전 동명초교를 방문했을때 '포대자루'처럼 보이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교장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또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 사진한장 찍은게 없어 제자들이 박 선생이 돌아가신 뒤 영정사진을 구하지 못해 내가 업무 때문에 찍었던 사진을 건네준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의 제자들은 선생을 '여장부'로 기억한다. 항상 남자들과 경쟁을 했는데, 늘 이기는 쪽은 박 선생이었다. 그가 가장 즐겼던 스포츠는 테니스며, 학교에서 열렸던 체육대회에서도 그는 항상 남자들과 경쟁했다. 이런 이유에 대해 박 선생의 여 제자들은 "선생님이 '힘이 없으면 사회에서 도태당한다. 여자들도 머리엔 지식을 쌓고 육체엔 힘을 불어 넣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남성중심 사회에 여자가 진출하기 위해선 동등한 힘을 갖춰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동명초교가 지역에서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잡을 무렵, 박 선생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다. 인천기독병원에서 10개월간 병마와 싸우던 그는 1983년 10월 만인평등교육 실천을 제자들에게 당부한 뒤 눈을 감았다. 그가 훌륭한 교육정신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 한국일보사가 선정한 '제1회 교육대상'을 받은 지 1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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