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지역경제인 하상훈 '몹시 추운 어느날 아침 허겁지겁 등청하신 노옹(老翁). 땀이 비오듯 하다. 모자를 벗자 성긴 노발(老髮) 사이로 옥로(玉露) 같은 땀방울이 굴러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새하얀 김까지 무럭무럭 오른다. …본직인 인천곡물조합장을 제외하고도 인천시의회 부의장을 비롯해서 인천상공회의소 회두, 국민회 인천지부 참여, 그리고 무슨 조정위원, 관재위원 등 명예직이 거의 30개나 된다는 하옹(河翁)은 한참이나 손을 꼽다 말고 웃음으로 연막을 쳐버린다. “나는 인천에서 낳아서 인천서 생장하고 늙고 또 인천서 죽을 것이니까 인천을 위한 처사라면 신명을 아끼지 않겠소”'. 지난 1953년 신년을 맞아 '인천공보'가 행한 하상훈(河相勳) 인천시의회 부의장 인터뷰 내용이다. '인천공보'는 1953년 당시 시장인 표양문(表良文)을 발행인으로 출범한 주간지이다. 당시 63세인 하상훈은 인천항 항만시설 확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대 인천 건설이란 항만시설의 확장, 특히 제2축 항의 준공을 빼놓고서는 운위(云爲)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인천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인천시민의 커다란 복리가 될 수 있으며 이어서는 이것이 곧 대한민국의 건전한 경제적인 발전책이 되리라는 것이 그의 신조이다'. 인천시사와 경인일보의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를 보면 하상훈의 약력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지난 1881년 태어난 하상훈은 동학 농민봉기 때 부친이 해주(海州)에서 옮겨와서 답동 터진개 근방에서 객주업을 시작, 번창시켰다.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으로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부조합장을 맡았으며 초기 동아일보 제1대 인천지국장을 역임했다.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해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장에 추대됐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의 발기인이 됐으며, 1946년에는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돼 1952년 제3대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에 인천시 고문회장으로 추대됐으며,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하상훈은 청년운동을 통해 신앙·봉사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펼친다. 그는 1920년 감리교의 청년운동단체로 신앙운동과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엡윗청년회'의 남자 회장을 맡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이우구락부'에서 부장을 지냈다. 이 외에도 하상훈은 친목과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인천식산계'에서 평의원으로, 1927년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창립된 '신정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상훈은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하자 정해궁(鄭海宮), 전두영(全斗榮), 이열헌(李烈憲), 한청 시단장 김득하(金得河), 검찰 인천지청장 오창섭(吳昌變) 등과 함께 비상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 당면한 긴급 행정조치와 후방 치안문제를 담당했다.시인이자 인천 향토사 연구가인 조우성(광성고 교사)씨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다. “6·25전쟁으로 북한공산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하상훈 선생은 인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으로 갔습니다. 그가 시청에 도착하자 당시 공무원들은 다들 부랴부랴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인천에 남아 있다가 사태수습이 여의치 않자 김동순씨와 피란길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상훈씨와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는 김동순씨는 2003년 7월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씨는 부시장, 인천상의 사무국장, 초대 전국문화원연합회 인천광역시지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김성숙 시의원이다.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를 보면 1946년 인천경제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상훈, 권정석, 조희순, 신언해, 이병균 등은 기회있을 때마다 인천상공회의소 설립문제를 거론해왔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8일 인천의 회의실에서 하상훈, 문두호, 조희순, 김성국, 김원규, 이병균 등 인천 실업계를 총망라한 60여 명의 지도적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위원회를 개최했다. 이후 8월10일 송학동 제2공회당에서 220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인천상공업계의 총합적인 기관으로 발족한 인천상의는 1주일만인 8월17일 제1차 의원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진을 선출, 이 자리에서 하상훈이 회두에 뽑혔다. 그는 상공회의소법이 공포되고 제1대 의원이 선출(1954년 1월)되기 직전까지 8년 동안 회두를 맡게 된다. 인천상의 120년사'를 집필한 김윤식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장은 "하상훈씨는 바르고 꼿꼿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에 대한 잡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객주·정미업을 한 지역거부(巨富)들이 돈을 벌면 학교·연극무대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덧붙였따. 앞서 하상훈은 미군정인 1945년 지방의회의 전신인 고문회의 고문에 임명되면서 지역정치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고문회의 형식적이며 실권도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에 대한 허약한 대표성으로 인해 출범 때부터 여론의 비난에 직면했다고 '대중일보'(1945년 11월 3일자)는 밝히고 있다. 이후 하상훈은 1948년 1월 7일 시행된 인천부 고문회 선거결과 11표를 얻어 고문자로 당선된다. 그러나 그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조봉암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하상훈은 1952년 4월 25일 실시된 역사적인 시의회 의원선거에서 당선된다. 인천시의회 '자치(自治)의 표정(表情)'을 보면 하상훈은 제5선거구에 나와 2만702표를 얻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당선자들이 평균 1천~2천표씩을 얻어 당시 기록이 잘못 된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당시 기업인들이 사회·정치·문화를 주도했다"며 인천은 공업·항만도시여서 기업인들이 더 많은 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초대 시의원에 추대된 인물을 보면 상당수가 기업인이었다"며 "일본에 협조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친일이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상훈은 같은 해 월 5일 소집된 제1회 인천시의회에서 부의장에 선출된다. '인천공보'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소위 찬탁 반탁의 의결에 앞에서 맹활동을 전개한 결과 드디어대 1이라는 절대다수로 반탁의 승리를 걷도록 진력했을 뿐 아니라 찬탁거두의 한사람인 안모(安某) 대의원 면상에 잡히는 대로 금속재떨이를 내붙인 용맹으로 해서 일약 유명해진 일화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소신관철을 위해 이처럼 물불 가리지 않는 그것이 그의 기상이며 또한 정객으로서의 관록이다'. 하상훈은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인천시의 민의원·참의원 선거 2부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됐으며, 1964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인천시사 편찬에 참여한 김양수 선생을 "하상훈씨 자손 중에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인물사를 편찬하면서 따님의 행방을 쫓았으나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인물의 후손들이 자료·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2006-01-12 목동훈
인천의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의 존재는 최근까지 묻혀 있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인천을 넘어 한국 근대 예술사의 큰 획을 그은 후학들이 최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그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는 그의 후학들은 한국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을 비롯, 법조인 조진만 선생, 한국 근대 서예의 혈맥 박세림, 유희강, 고일 선생 등이다. 이들에게 지고지순한 예술혼을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그다. 따라서 그는 한국 근대 예술의 뿌린 셈이다. 그러나 인천을 빛낸 후학들의 명성에 비해 그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따라서 일제치하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직전에 '의성사숙(意誠私塾)'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며 동시대 선각자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족적을 되짚어 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시 중구 경동 232 신신예식장 입구 4층짜리 건물은 김병훈 선생을 비롯, 5대째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가 홀로 고즈넉이 집을 지키고 있다. 집 구석구석에는 김병훈 선생의 묵은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손때 묻은 옛 수판과 탁자 등을 가족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홍씨는 “거실에 걸려 있는 호랑이 그림은 시조부께서 일본인 화가와 맞바꾼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시아버지(김상규)로부터 전해들은 시조부는 말그대로 엄격하고, 정확하고, 단정한 분이었다”며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집을 와 문밖엘 제대로 나가질 못할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또 “10살 적에 창녕초등학교에 다닐때 가끔 서당 훈장 선생님 복장을 한 근엄한 할아버지를 자주 목격했었다”며 “그런데 시집와서 그 분이 시조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있다”고 일담을 전했다. 이처럼 엄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김병훈 선생의 아들 상규씨는 한약방 대제원을 운영했고 가업을 이어받은 손자 태진씨는 초대 대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후손들이 가풍을 잇고 있다. 이어 증손자 성한씨도 할아버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서예작품으로 국선에 수차례 입상하는 등 예술적 잠재력을 발산하고 있다. 홍씨는 바로 최근 유명을 달리한 태진씨의 부인이다. 그러나 현재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주 며느리 홍씨에 따르면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 집으로 쓰던 목조건물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김병훈 선생의 작품과 초상화 등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에는 김병훈 선생이 1863년 충북 단양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아홉살때 경기도 양근에 거주하는 이석재에게 한문과 화도를 배웠다. 그는 26세가 되면서 한양으로 와서 수륜원(현재 농수산행정 관련 부서) 주사가 돼 수년간 근무하다가 1908년 인천에 이주해 한문선생이 됐다. 이 당시에 그가 지금의 금곡동 창영학교 현 강당 서쪽에 지은 것이 '의성사숙'이다. 사숙은 규모가 작은 마을의 종합학교다. 조선시대 말까지 있었던 글방(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자 고일 선생은 지난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 자신의 스승을 “지조가 높고 청빈한 양반으로 박학 다재하고 강직 청렴한 인격자”로 평했다. 인천석금에는 “김병훈 선생이 머리에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등나무로 만든 긴 회초리로 학동들을 다스렸다”며 “또 중국의 유교 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매란국죽과 산수 풍경을 그리는 동양화도 지도했다”고 적고있다. 특히 고일 선생은 “고인향무군자 즉여산수위우 이무군자즉이난죽위우 좌무군자 즉이금주위우(古人鄕無君子 則與山水爲友 里無君子則以蘭竹爲友 座無君子 則以琴酒爲友=옛 사람들은 마을에 군자가 없으면, 산수와 더불어 벗을 삼고, 이웃에 군자가 없으면 난과 죽으로써 벗을 삼고, 자리에 군자가 없으면 술로써 벗을 삼았다)의 경지로 선비의 처세를 지켰다”고 스승을 추켜세웠다. 특히 그의 교습법은 특이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해 스스로가 분발하고 격려하는 경쟁심을 갖게 했다. 그는 의성사숙을 그만둔뒤 아들이 운영하는 한의원 한켠에 '지수제(芝壽齊)'라는 서재를 마련하고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손주 며느리 홍씨는 “시조부는 말년에 내동 집과 지수제를 오가며 학문을 연구했다”며 “시조부가 돌아가신 뒤에도 고일 선생 등이 지수제에 찾아와 시어버지 상규씨와 스승을 회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청빈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천석금'에는 의성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전문대학을 마친 대표적 수재를 조진만, 고유섭으로 꼽고 있다. 또 인천의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박세림, 장인식, 유희강도 김병훈 선생의 수하에서 예술혼을 갈고 닦았다. 김병훈 선생의 새로운 발굴은 인천지역사에서 남다른 의미로 평가받고 있따. 인천 근대사에서 예술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배경에는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인천의 근대 예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병훈 선생의 가치를 확인했다"며 "이번에 그의 족적이 확인된 것은 지역 예술계 연구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2006-01-05 이희동
>34< '묵헌' 김정렬 前인천시장 지난 1996년 6월10일 오후 인천시 남구 숭의동 수봉공원에서 최기선 시장을 비롯, 신맹순, 김동순, 심정구, 문병하, 이기상, 강부일, 민봉기, 곽재영 등 인천 지역의 정·관·재계 인사 3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법(司法), 행정(行政), 입법(立法)의 3부(三府)를 두루 거친 묵헌(默軒) 김정렬(1907~1974) 전 인천시장의 '송덕비' 제막식을 갖기 위해서다. 고인이 된지 22년만의 일이다. 묵헌의 큰 아들 한경(82)씨는 "2년여동안 제막식을 준비한 터라 참석자들의 얼굴은 고무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행사는 '고 김정렬 전 시장 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고 김은하 전국회부의장)'가 주관하고 지역인사 12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뜻을 모았다. "서울 지방법원 인천지원장을 거쳐 1954년 시의회 간접 선거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선출되신 후, 58년 시행된 첫 직선제 시장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선생은 민심을 모아 시 행정에 반영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시정에 전념하였으며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3·15 부정선거 획책에 정면으로 맞서 항거함으로써 행정 최일선에서 민주 질서를 지키는데 솔선수범하였고 시민으로 부터 청백리로 추앙받았다(생략)….”(수봉공원 송덕비 비문중 일부) 한경씨와 고인이 된 김동순 전 인천문화원장 등에 따르면 1960년 1월 중순 인천시장 집무실에선 김 시장과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 도경 및 일선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대책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회의 주재는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0% 이상 높이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사표를 받겠다는 집권당의 압력이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관의 명령에 항명을 하기란 보통 배짱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김 시장은 달랐다. 당시 묵헌은 “선거권은 주민의 고유한 권한으로 시 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며 지시를 거부했다. 묵헌의 비서관을 지낸 정구열씨는 “항명 이후 경찰이 시장님의 집무실 출입을 금지시키고, 시장에게 부시장과 총무과장 등이 업무보고 하는 것 조차 막았다”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과 공무원들은 소신 있는 시장님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고 적힌 지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 시장은 1956년에도 자유당의 압력을 무시한 채 혁신당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씨의 후보등록을 받아주는 소신을 보였다. 묵헌은 인천과 경기도 접경인 소래(시흥)에서 1907년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원래 이름은 영복(永卜)이었으나, 17세 되던 해(1923년)에 정렬(正烈)로 개명한 것으로 호적부에 기록돼 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성균관 주사 김동일(金東一)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 438(현 시흥시 무지내동 428)이다. 묵헌은 고향에서 천자문·중용·맹자 등 한학과 사서삼경을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27세때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나왔다. 그뒤 그는 39세때인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돼 위조지폐사건, 학원통합연맹사건, 교련사건 등 정치적 사건을 원만히 처리했다. 그는 44세가 되던해 인천지원판사와 인천시선거관리위원장,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겸 인천지원장에 부임하게 된다. “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습니다. 고향에 판사로 부임하면서 어떻게 봉사할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장남 한경씨의 회고) 고향에 부임한 그는 체육회, 로타리클럽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고향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까지 소박과 청빈을 강조했다. 한경씨는 “판사시절 닭 두마리가 집에 선물로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뇌물은 반드시 사건이 묻어 들어온다며 아버지의 엄명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묵헌은 소박과 청빈함이 지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몇몇 정치인들의 권유로 지난 1954년 나이 48세때 정치와 인연을 맺는다. 원만한 인격과 청렴한 기질, 성실한 직무열을 높이 산 몇몇 시의회 의원 등의 노력으로 묵헌은 제1차 인천시의회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인하공과대학후원회장, 인천체육회장으로 당선된다. 그는 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지부 위원장, 인천정악원(仁川正樂院) 2대 위원장, 인천유도회 초대회장, 그리고 1958년 직선시장에 출마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투표 당선된다. 강인한 업무추진력과 청빈함 등이 시민들부터 높게 평가된 결과였다. 묵헌은 시장으로 재임한 7년간 배다리철문확장, 동원교, 인천교, 인천역사(仁川驛舍) 등 지역사회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역사를 펼쳤다. 특히 그는 인천시편찬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인천뿌리찾기에도 정열을 쏟았다. 풀뿌리 민주주의 기초를 다지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시 항명사건이었으며 부도덕한 정권의 서정쇄신에 희생된다. 이후 그는 무죄가 인정돼 심계원(현 감사원)차장 겸 고등고시 전형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끈을 놓기 ㅎ미들었던지 1960년 12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묵헌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966년 서울 제2변호사회 회장으로 일하다 1967년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류승원 후보를 893표 차로 누르고 당선돼 정계에 다시 투신했다. 국회에서도 그는 소양강댐 공사비리, 이수근 사건, 향토방위법 등을 처리하고 신민당내 내무·법무 탄핵심판위원을 지냈다. 1974년 의원 임기 1년여를 남겨둔 채 칩거생활에 들어간 이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남구 주안동 408 자택에서 68세로 타계했다. 그가 별세하자 인천시는 그의 공훈을 기려 하상훈에 이어 두번재로 향토사회장으로 치러 숭고한 뜻을 기렸다.
2005-12-08 송병원
>33< 극작가 진우촌 인천시 중구 경동 238에 위치한 애관극장. 지금은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지만 1920년대 이곳에서는 '칠면구락부' 즉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1904~?)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천의 소중한 문화인물인 극작가 '진우촌(秦雨村·1904~?)의 본명은 종혁(宗爀)이다.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특이한 극작가'로만 기억되고 있는 진우촌. 1920년대 인천지역 문화운동을 이끈 인물중의 한 사람인 진우촌은 인천지역 배재학교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는 물론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의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 1923년 '개혁'과 '시드러가는 무궁화'가 동아일보의 현상공모에 연속으로 당선되고 이어서 1925년 '조선문단'에 '구가정의 끝날'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진우촌은 1904년(광무 8년) 7월22일 부친 풍기 진씨 수와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11살 터울의 정옥과 18살 터울의 문옥이 있었으며 서매(庶妹) 정희와 문길도 있었다. 진우촌의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 종혁(宗爀)으로 개명했고 우촌(雨村)은 필명으로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할때부터 사용했다. 그의 보통학교 재학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지만 14세 되던 1918년 서울 배재학당의 4년제 본과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했다. 1923년 인천에서는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생들의 모임으로 인배회가 결성됐고 이에 앞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로 시작된 이들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이후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등의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이때의 구성원들이 인천의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진우촌은 경인기차통학생회와 인배회는 물론 1923년에 결성된 제물포청년회에도 속해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각종 연예 대회의 개최 등 주로 문화활동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중 소인극 공연은 매우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또 진우촌은 인천의 대표적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에도 가담했다. 1923년 창립된 인천소성노동회는 인천의 무산 대중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문화 활동을 전개해 창립 1년만에 회원 1천200명을 자랑하게 됐으며 1924년 4월 인천공회당에서 총회를 열어 노동총동맹회로 조직이 개편된다. 여기에서 진우촌은 3명의 선전부 위원 중 하나로 선출됐다. 그리고 등단 후인 1925년 12월 진우촌은 이비도, 박형남 등과 인천유성회를 조직한다. 조직 강령에 '본 회는 민중예술을 본위로 하되 더욱 푸로 문학의 건전을 도모한다”고 한 것으로 봐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문예노선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우촌은 그다지 두드러지는 활동은 펼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1926년 진우촌은 정암, 원우전 등 연극인으로 유명한 이들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골즈워디의 '승리자와 패배자' 등의 작품을 상연했고 1927년에는 문예지 '습작시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는다.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예지인 '습작시대'의 창간호에는 주요한, 김동환, 박팔양, 엄흥섭 등 이 시기의 주요 문사들의 글이 실려있다. 이를 보면 1920년대 진우촌은 인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5월 진우촌은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돼 등단한다. 이때 동화부문에 '의조혼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됐고 이어서 9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도 당선된다. 1925년 2월에는 초기 작품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고 1926년 5월31일과 6월3일 이틀간에 걸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했으며 1925년 7월에서 1926년 10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14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우촌은 1929년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습작시대' 이후 근 10년동안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진우촌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28년. 극단 낭만좌는 셰익스피어 '햄릿' 1막을 각색한 '묘지'로 동아일보 주최의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때 이 작품을 각색한 사람이 진우촌이었다. 낭만좌가 해산된 이후 진우촌은 1943년 동양극장에서 '왕소군'을, 1994년 현대극장에서 '뇌명'을 상연했고, 이는 현대극장의 후신 극예술협회에서 1948년 다시 상연된다. 1946년에는 극단 청탑에서 '보검'이란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해방후 진우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좌파성향의 자유극장에 가담한다. 자유극장은 개관작으로 진우촌의 '망향'을 상연했고, 이는 '두뇌수술'로 개제돼 '신문예 창간호(1945.12)'에 실렸다. 그리고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가 결성되고 그 대회를 공지하는 기사의 추천회원 명단에는 진우촌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러나 진우촌의 1950년대 이후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그 이후 진우촌이 어떤 작품활동을 했는지 어디에서 사망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윤진현 박사는 "진우촌은 인배회를 비롯해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이요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등의 잡지 편집에도 관여하면서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진우촌이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활동' 그자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진우촌의 인천지역활동을 평가했다./자료협조-윤진현 박사(문학박사, 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현 민예총 인천지회 정책위원장)
2005-11-10 김신태
32. 서양화가 장발 지난 2001년 4월8일 인천 출신의 장발(張勃) 화백이 미국 피츠버그 자택에서 100세의 나이로 타계한 직후 미술계와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서는 연구자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장발 화백이 민족사적 수난시대를 겪어오면서도 한국 화단과 미술교육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과 미술협회 분할과 '국전(國展)'파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건전한 발전에 제약을 가하는데 일조했다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근·현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장발 화백에 대한 평가는 작가로서, 미술교육·행정가로서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발은 우현 고유섭보다도 5년이나 앞서 한국의 화가 중 최초로 미국에 유학해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연구(미술이론)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해 서울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미대 학제를 만들고, 교수진을 구성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가톨릭)의 효시를 이루고, 대한미협에서 한국미협을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는 등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민족수난 시대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보내는 동안 그가 학계와 미술단체에서 보였던 행동은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 논란 거리로 남아 있다. 장발은 190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인 장기반의 3남4녀 중 둘째 아들인 장발은 형 장면(張勉)박사와 막내인 장극(張剋)박사와 함께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인물이다. 큰형인 장면박사는 60년 민주당 정부의 초대 내각수반을 역임했고, 막내인 장극박사는 항공공학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유동의박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런 집안 내력 탓에 장면은 해방 이후 화가로서 교육가로서 국내에서 쉽게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한다. 장발은 휘문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매일신문은 서울의 고등학교 연합학생미술전을 열었음을 보도하면서 장발의 재능을 남달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림을 그리는 처음부터 성화(聖畵)에 뜻을 두었다. 휘문고등학교 졸업 이후 장발은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다. 이 곳에서 서양화의 기초적 실기를 익히고 중도(1922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서 콜럼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학을 공부한다. 그의 미술적 이론의 근거는 동경미술학교 시절에 근간을 이룬다. 당시 독일 뮌헨의 기독교 미술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매월 발행하는 기관지인 '기독교 미술'을 정기 구독해 엄격한 보이론(Beuron)풍의 성화기법에 관심을 갖는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일이다. 비록 2년 과정의 비정규코스였지만 이는 인천 출신의 고유섭보다도 5년 빠른 '근대 미술이론 연구자'라는 연대기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귀국 후 인천에서 머물면서 주로 가톨릭 성화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이 때 그린 그림이 '성인 김대건', '성녀 김골놈비와 아그네스 자매' 등이다. 그러나 모교인 휘문고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발은 작가로서보다는 미술교육자로서, 순수화가로서보다는 성화가로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활동은 많지 않았다. 당시 비평가들은 장발의 작품을 대해볼 기회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예술을 종교적 경지로 끌어올린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를 보면 장발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당시에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성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음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은 장발이 화가에서 미술교육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장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시점을 기준하고 있다. 장발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창립멤버로 참가하면서 이어 미술대학 학장에 임명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작가로서보다는 교육자, 미술행정가, 이론가에 치중하게 되며, 실기지도보다는 이론 강의에 전념했다. 학장 재임기간 중 대한미술협회에서 한국미술작가협회를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보수적이고 독선적인 평가가 지적되고 있다. 당시 작가로 활동하려면 '국전(國展)'에서 입상해야 하는데 그의 고교 스승인 윤호중(당시 홍대 미술학부장)이 이끄는 대한미술협회가 이를 주도함으로써 홍익대 출신들과의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서울대파'와 '홍대파'라는 파벌의식을 낳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1956년 대한미협의 국전 보이콧 사건이 터지면서 미술계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됐다.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동강이가 난 미술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1960년 4·19 학생의거로 친형인 장면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 직후에는 이탈리아 전권대사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전직할뻔 했으나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부임도 못한 채 해임되고 만다. 그로 인해 장발은 1962년 미국으로 출국해 세인트 빈센트대학 명예교수로서 미술사 강의 등을 하며 지내다 다시 붓을 잡아 추상화와 성화작업에 몰두하면서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장발은 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행사 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됐으며, 서울대는 교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2005-10-20 이진호
31.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만일 딱 한 문장으로 선교사로서의 조원시 박사를 말한다면 이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깊은 동정심을 지닌 학자의 본능과 습관을 가진 분이었다.” 인천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목사의 삶은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A, Noble)의 이같은 추모의 글로 압축된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특히 선교활동은 물론 교육사업, 하와이 이민, 학술 연구 등 그가 인천에서 남긴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1867년 8월14일 뉴욕 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난 조원시 목사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미북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서 1888년 5월1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인천에 온 것은 1892년.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들이 이 당시에 설립됐다. 선교활동 외에 조원시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교육사업이다. 그가 인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또한 교육사업으로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한국어 선생 부부를 인천으로 이주시켜 '소년 소녀 매일학교'(영화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조원시 목사는 한국 역사와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학술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국어 사전을 직접 편찬해 한국어에 서툰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 12월에는 제물포 우각현(현 영화학교 자리)에서 최초의 우리말 신학연구지인 '신학월보'를 창간, 사장 겸 주필로서 깊이 있는 논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가 창간한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장로교에서 발간한 'The Korea Field'와 함께 '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됐는데, 이 통합잡지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사를 서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원시 목사가 인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그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02년 12월22일 한국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가운데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하와이 이민을 실질적으로 주선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조원시 목사였다. 이어 조원시 목사는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오늘의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태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진형 목사(죽림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이민과 조원시'란 세미나 발표자료를 통해 조원시 목사가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데 대해 “당시 극심한 가뭄이 중부지방을 휩쓰는 등 한국에서의 삶이 힘든 상황에서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낫고 신앙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2005-09-15 임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