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100人·38] 큰아들 성봉씨가 본 최성연선생

“아버님은 팔순을 넘기신 노쇠한 나이에도 본인이 직접 사진을 찍었던 50~60년대 당시의 인천 모습과 현재를 비교한다며 카메라를 놓지 않으셨어요.” 최성연 선생의 큰 아들 성봉(55·사진)씨는 “인천에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학자나 건축가, 사진가 등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집을 다녀갔다”고 말했다. 그만큼 선생이 남긴 지역사의 족적과 깊이가 후세에도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개항과 양관역정'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는 책을 냈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이 복받치는듯 주저한다. “개항과 양관역정이란 책을 내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요. 초등학교 시절 중구 송학동 2층 저택에 살 정도로 부유했는데, 아버님이 사비를 털어 책을 출간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정확히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준비작업에서부터 인쇄, 배포에 이르기까지 당시로선 꽤 큰 돈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듣기론 시청에서 부담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당시의 어려웠던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며 부친에 대한 애증을 쏟아냈다. “특별한 직업없이 동일방직의 사사편찬과 시사편찬 등의 일을 맡으며 지내셨던 아버님은 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주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셨습니다.”그는 또 국내 대표적인 극작가 유치진씨가 설립을 주도하던 서울예전(옛 드라마센터)을 지금의 남산 자락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기위해 정부를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2006-02-02 정진오

[인천인물100人·38] 시조시인·향토사학자 '소안 최성연'

>38< 시조시인·향토사학자 '소안 최성연' 인천 향토사 연구의 필독서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항(開港)과 양관역정(洋館歷程)'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1883년부터 1920년대까지 인천개항기 초창기 모습을 기록영화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이 책은 근·현대 지역사 연구에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인천향토사의 백미로 불리는 '개항과 양관역정'은 책 제목 그대로 인천 개항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양관(서양인들의 주택)이 건립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설계도, 사진까지 곁들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언뜻 건축학자가 썼을 법한 이 책은 그러나 한국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불리는 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1914~2000)에 의해 기록됐다는 점이 이채롭다. 감성을 먹고 산다는 시조시인이 낯선 서구식 건축물을 관찰해 설계도를 그리고, 사진과 스케치 등 다양한 기록 방법을 동원한 책 전반에 흐르는 통찰력 등이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살려 뒷얘기까지 첨부한 정성에 향토사가들의 탄성이 절로 난다. 지난 1월 31일 오전 찾은 동구 화도진도서관 2층에 별도로 마련된 '최성연 문고'는 그의 치열한 '인천 사랑'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이곳엔 그의 가족들이 기증한 유품과 유작들이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큰 아들 성봉(55)씨는 “아버님의 큰 뜻과 업적을 자식으로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이었다”면서 “후학들이 자료를 공유해 인천 발전의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뜻에서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성봉씨는 특히 “한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고증해 밝혀내신 인물이 아버님이다”며 기증처를 화도진도서관으로 정한 사유를 설명했다. 중구 율목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일찌감치 천자문을 배운 그는 아홉살에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경성제2고보(경복고교)를 졸업한 뒤 오늘날의 산림청 격인 영림서에 취직했다. 평안북도 강계 영림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소안은 친구의 소개로 김숙양씨와 결혼해 딸 다섯을 낳은 뒤 아들 둘을 더 두었다. 10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인천에 다시 내려 온 그는 중구 송학동에 터를 잡았다. 여기서 성봉씨를 낳았는데, 지역신문은 '5선녀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고 기사화해 각별한 관심을 나타낸 일화가 있다. 그는 1947년 동아일보 인천지사에서 1년여동안 사원생활도 했으며, 1948년엔 '청구사진문화사'를 직접 경영하면서 극영화 '심판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문화인 최성연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인천문인협회 발행 계간지 '학산문학' 2000년 여름호에 '현대시조의 혁명을 일으킨 향토사학자-소안 최성연 선생'을 쓴 랑승만 시인은 “당시 갈고 닦은 사진촬영은 아마추어를 뛰어 넘어 프로의 경지에 이르게 되니, 극영화를 제작하면서 더욱 사진에 심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사진실력은 '개항과 양관역정'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고 적고 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인천시 촉탁 공보담당을 잠시 지내기도 한 그는 1954년 '동방사진뉴스사'에 입사해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한국 현대 시조계에 큰 획을 그은 것은 1955년. 동아일보 창간 35주년 및 지령 1만호 기념 '문예창작 현상공모'에서 시조 '핏자국'이 당선된 것이다. 이 작품은 최전방 관측소에 6·25 전쟁 종군기자로 참전했다가 경험한 처절한 전쟁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평론가들은 이 '핏자국'의 당선을 놓고 “시조시단의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 때부터 대한민국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평가받던 그는 인천의 문화 정체성에 매달린다. 그가 지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 중에 외국인과의 대화가 출발점이라고 한다. 영어를 구사하던 그는 외국인과의 교류과정에서 인천의 역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데 대한 수치심 때문에 '지역 알기'에 천착했다. 인천 서적들을 탐독하고 역사와 문화 연구에 더욱 애정을 쏟았다. 그 결과 '개항과 양관역정'이란 보석같은 산물을 탄생시킨 그는 지역사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역사책에 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의 현장을 고증해 낸 것이다. 그는 조약 당시 미국인들이 인천의 모습을 구술한 '코리아 리뷰'란 책자를 구해 지형설명과 부정확한 지명표기 등을 종합해 '화도진지'로 확증해 냈다. 이 공로로 그는 생전인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음악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인천시립교향악단 출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특히 지역을 위한 노래가사 짓기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여명이 아시아에 비칠때 부터…”로 시작하는 '인천시민의 노래'와 “여기는 문학산의 정기 내린 곳…”으로 출발하는 '인천시민 행진곡'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김학균 전 인천문인협회장은 "1967년에 선생께서 서울신문 인천지사장을 하셨는데, 저는 그 때 연극인 전무송씨와 함께 신문배달을 하면서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면서 "선생은 매우 꼼꼼하면서도 배달원들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해 주시는 너그러운 분이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에 대해 지역에서는 그동안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 성봉씨는 일부 후대 향토사학자들이 그의 소장품을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아 조명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잇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아들 성봉씨는 인천시가 '만국공원(자유공원)' 복원사업을 통해 아버지의 '인천 사랑 정신'을 복원시키길 기대하고 있다.

2006-02-02 정진오

[인천인물100人·37] 이벽선생 장남 이철기 동국대교수

“할아버지나 아버님 모두 독재정권이 활개를 치던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신 분들입니다. 특히 아버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신 불행한 언론인 이셨습니다.” 이벽 선생의 2남2녀중 장남인 이철기(49·사진) 동국대 교수는 할아버지인 이종윤 선생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위주로 말을 이었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지만 아버님께서는 '기회는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나에게도 기회는 온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셨다”고 전했다.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1973년 9월 언론계를 떠난 이후 20여년만에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 수 있는 민주화가 찾아왔지만 이미 칠순을 넘긴 고령 때문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등 학교를 벗어나 활발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집안 내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유신헌법이 통과되던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이 교수는 정말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이틀간 단식을 했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 훈기(41)씨도 모든 친구들이 유신을 찬양할 때 나홀로 '유신은 나쁘다'를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 강분희(75) 여사 역시 유신정권 시절 천주교 성당에서 열리는 시국기도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김대중의 옥중서신 등 당시로서는 불온 인쇄물(?)을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탓에 순탄치 않는 길을 걸었고 또 지금도 걷고 있는 아픈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교수는 “아버님이 한창 활동하실 때 펜을 놓았는데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언론계에 뛰어들었던 동생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어 마음이 무겁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2006-01-19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37]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37<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운영(雲影) 이종윤(李種潤·1899~1967) 선생은 8·15 광복 이후 인천 최초의 지방지인 '대중일보'창간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초창기 지역언론의 제작부터 편집과 경영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향토 언론계 개척자다. 1950~60년대 인천의 대표적 야당지인 '인천신보'와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과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언론인 상을 몸소 실천한 참 언론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향토 언론인 김응태(1921~1995) 선생은 타계하기 2년전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운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마디로 말해 전형적인 선비풍에 꼿꼿한 분이었습니다. 언론사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어깨에 힘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구요. 사리사욕이나 타협 따위의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어요.” 혈기왕성한 젊은 기자들도 평소 집안의 큰 어른처럼 모시던 운영 앞에 서면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 지 망설일 정도로 몸둘 바를 몰라했다고 한다.1899년 인천 화평동에서 고성(固成) 이씨 27대손으로 태어난 운영은 10살 무렵 박문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평생지기인 장면 박사와 인연을 맺는다. 세관장인 부친을 따라 인천에 와 있던 장면 박사와의 만남은 한학과 유교적 관습에만 젖어있던 운영에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하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가치관 확립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면 박사와의 교분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60년 가까이 이어진다. 6·25 전쟁 중 부산 임시정부시절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공보장관직을 제의하고, 4·19 직후에는 '반민주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생을 위촉했던 것도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보장관 직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선생은 반민주특위에는 참가해 5·16 군사쿠데타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주로 김포·강화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선생이 언론계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 동경고등공예학교 인쇄과로 진학하면서다. 졸업후 오사카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에서 4년간 신문제작 실무를 익혀 귀국한 뒤 1927년부터 인현동에 '선영사(鮮英舍)'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업에 뛰어들었다. 선영사는 1944년 일본의 통제경제정책에 따라 인쇄시설을 징발당하면서 간판을 내린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가 창간되면서 공무국장(제작국장)으로 신문제작에 뛰어든 운영은 이듬해 5월 부평 병기창에 있던 인쇄기를 미군정청으로부터 불하받아 대중일보 인쇄인으로 취임했다. 6·25 전쟁으로 대중일보가 해산되고 인천신보로 재편되면서 부사장겸 편집인으로 취임한 운영은 1960년 인천신보가 경기매일신문으로 개칭되면서 부사장겸 7대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편집과 경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말수가 적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선생이지만 큰 며느리인 강분희(75)씨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 누구보다 다정다감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남편(이벽)이나 시아버지나 성품이 비슷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도 없고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제 생일날만 돌아오면 잊지 않고 선물을 꼭 챙겨주었죠. 결혼해서 3년밖에 모시지 못했지만 시아버지도 남편과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선생은 자신보다 먼저 뇌졸중을 앓던 아내(민천순)가 세상을 뜬 지 17일만인 1967년 1월14일 아내의 뒤를 따랐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쳐흘렀던 선생의 기개는 2대를 넘어 3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선생과 비슷한 시기인 1947년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장남 묵천(默泉) 이벽(李闢;1926~2000)은 서슬퍼렇던 박정희 정권 시절 '편집권 독립'을 위해 언론의 정도(正道)를 걸었다. 일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벽 언론상' 제정 움직임까지 일 정도로 이벽 선생은 부친인 운영 못지않게 향토언론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생의 손자이자 이벽 선생의 차남인 훈기(41·iTV 희망노조 위원장)씨도 조부와 선친을 이어 언론계에 투신했다. 인천지역 원로 언론인들의 모임인 (사)인천언론인클럽에서는 60년에 걸쳐 향토언론 발전에 기여한 운영 집안의 공로를 인정, 가족을 대표해 이벽 선생에게 제2회 인천언론상 외길상(2003년)을 추서했다.

2006-01-19 김도현

[인천인물100人·37] 부친 대이어 언론계 투신 장남 이벽선생

운영 이종윤 선생의 8남매 가운데 장남인 묵천(默泉) 이벽(李闢·1926~2000·사진) 선생은 인천 언론계에 '편집권 독립'과 관련해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일보(73년 경인일보 전신 경기신문으로 통폐합)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지 불과 2주일도 안된 1971년 9월20일자 경기일보 1면 하단 '바람개비'란에 게재한 글은 언론 정도(正道)를 걷고자 했던 선생의 언론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이 글에서 선생은 편집권을 흔드는 이들을 향해 원색적인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로 시민의 일부나 또는 대다수가 피해를 입게된다고 하면은 그것을 모든 시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 신문의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 지 신문이 그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신문사 경영자와 신문편집자에게 갖가지 항의를 해오고 있다. 도둑에게 매를 든다고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측에서 그것을 보도할 정당한 권리와 의무가 있는 신문의 보도를 잘못한 것인 양 책하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꼬라지들인가….' 중앙정보부 등 기관원과 신문사주 등의 편집권 침해가 당연시 되던 당시 시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일대 사건으로 기억된다고 원로 언론인 오세태(66·당시 경기일보 편집차장)씨는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 뿐만아니라 선생은 편집국장으로 재직(1971년 9월~1973년 4월)하는 동안 비판적인 기사편집과 관련해서는 후배들에게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가성 짙은 기사라고 판단되면 예외없이 걸러냈다고 오세태씨는 덧붙였다. 내·외부 입김 탓에 '기사 수위'를 적절히 조절했던 전임 국장을 불신임한 편집국 직원들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편집국장이 된 선생은 그해 한국신문협회의 한국신문상 제6회 편집부문 본상(1971년)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부인 강분희(75)씨는 선생이 서울 선린상업고등학교(현재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신문학원을 수료한 뒤 1947년 대중일보에 입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중일보에 이어 '인천신보'에서 경제부장과 취재부장을 지낸 선생은 1955년 동양통신 인천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 경기일보가 창간되면서 편집부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한 선생은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정책(1道 1社)에 따라 1973년 8월31일 경기일보가 문을 닫으면서 사실상 언론계를 떠났다.

2006-01-19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36] 지역경제인 하상훈

>36< 지역경제인 하상훈 '몹시 추운 어느날 아침 허겁지겁 등청하신 노옹(老翁). 땀이 비오듯 하다. 모자를 벗자 성긴 노발(老髮) 사이로 옥로(玉露) 같은 땀방울이 굴러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새하얀 김까지 무럭무럭 오른다. …본직인 인천곡물조합장을 제외하고도 인천시의회 부의장을 비롯해서 인천상공회의소 회두, 국민회 인천지부 참여, 그리고 무슨 조정위원, 관재위원 등 명예직이 거의 30개나 된다는 하옹(河翁)은 한참이나 손을 꼽다 말고 웃음으로 연막을 쳐버린다. “나는 인천에서 낳아서 인천서 생장하고 늙고 또 인천서 죽을 것이니까 인천을 위한 처사라면 신명을 아끼지 않겠소”'. 지난 1953년 신년을 맞아 '인천공보'가 행한 하상훈(河相勳) 인천시의회 부의장 인터뷰 내용이다. '인천공보'는 1953년 당시 시장인 표양문(表良文)을 발행인으로 출범한 주간지이다. 당시 63세인 하상훈은 인천항 항만시설 확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대 인천 건설이란 항만시설의 확장, 특히 제2축 항의 준공을 빼놓고서는 운위(云爲)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인천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인천시민의 커다란 복리가 될 수 있으며 이어서는 이것이 곧 대한민국의 건전한 경제적인 발전책이 되리라는 것이 그의 신조이다'. 인천시사와 경인일보의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를 보면 하상훈의 약력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지난 1881년 태어난 하상훈은 동학 농민봉기 때 부친이 해주(海州)에서 옮겨와서 답동 터진개 근방에서 객주업을 시작, 번창시켰다.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으로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부조합장을 맡았으며 초기 동아일보 제1대 인천지국장을 역임했다.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해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장에 추대됐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의 발기인이 됐으며, 1946년에는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돼 1952년 제3대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에 인천시 고문회장으로 추대됐으며,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하상훈은 청년운동을 통해 신앙·봉사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펼친다. 그는 1920년 감리교의 청년운동단체로 신앙운동과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엡윗청년회'의 남자 회장을 맡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이우구락부'에서 부장을 지냈다. 이 외에도 하상훈은 친목과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인천식산계'에서 평의원으로, 1927년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창립된 '신정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상훈은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하자 정해궁(鄭海宮), 전두영(全斗榮), 이열헌(李烈憲), 한청 시단장 김득하(金得河), 검찰 인천지청장 오창섭(吳昌變) 등과 함께 비상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 당면한 긴급 행정조치와 후방 치안문제를 담당했다.시인이자 인천 향토사 연구가인 조우성(광성고 교사)씨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다. “6·25전쟁으로 북한공산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하상훈 선생은 인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으로 갔습니다. 그가 시청에 도착하자 당시 공무원들은 다들 부랴부랴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인천에 남아 있다가 사태수습이 여의치 않자 김동순씨와 피란길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상훈씨와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는 김동순씨는 2003년 7월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씨는 부시장, 인천상의 사무국장, 초대 전국문화원연합회 인천광역시지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김성숙 시의원이다.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를 보면 1946년 인천경제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상훈, 권정석, 조희순, 신언해, 이병균 등은 기회있을 때마다 인천상공회의소 설립문제를 거론해왔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8일 인천의 회의실에서 하상훈, 문두호, 조희순, 김성국, 김원규, 이병균 등 인천 실업계를 총망라한 60여 명의 지도적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위원회를 개최했다. 이후 8월10일 송학동 제2공회당에서 220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상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인천상공업계의 총합적인 기관으로 발족한 인천상의는 1주일만인 8월17일 제1차 의원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진을 선출, 이 자리에서 하상훈이 회두에 뽑혔다. 그는 상공회의소법이 공포되고 제1대 의원이 선출(1954년 1월)되기 직전까지 8년 동안 회두를 맡게 된다. 인천상의 120년사'를 집필한 김윤식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장은 "하상훈씨는 바르고 꼿꼿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에 대한 잡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객주·정미업을 한 지역거부(巨富)들이 돈을 벌면 학교·연극무대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덧붙였따. 앞서 하상훈은 미군정인 1945년 지방의회의 전신인 고문회의 고문에 임명되면서 지역정치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고문회의 형식적이며 실권도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에 대한 허약한 대표성으로 인해 출범 때부터 여론의 비난에 직면했다고 '대중일보'(1945년 11월 3일자)는 밝히고 있다. 이후 하상훈은 1948년 1월 7일 시행된 인천부 고문회 선거결과 11표를 얻어 고문자로 당선된다. 그러나 그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조봉암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하상훈은 1952년 4월 25일 실시된 역사적인 시의회 의원선거에서 당선된다. 인천시의회 '자치(自治)의 표정(表情)'을 보면 하상훈은 제5선거구에 나와 2만702표를 얻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당선자들이 평균 1천~2천표씩을 얻어 당시 기록이 잘못 된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당시 기업인들이 사회·정치·문화를 주도했다"며 인천은 공업·항만도시여서 기업인들이 더 많은 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초대 시의원에 추대된 인물을 보면 상당수가 기업인이었다"며 "일본에 협조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친일이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상훈은 같은 해 월 5일 소집된 제1회 인천시의회에서 부의장에 선출된다. '인천공보'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소위 찬탁 반탁의 의결에 앞에서 맹활동을 전개한 결과 드디어대 1이라는 절대다수로 반탁의 승리를 걷도록 진력했을 뿐 아니라 찬탁거두의 한사람인 안모(安某) 대의원 면상에 잡히는 대로 금속재떨이를 내붙인 용맹으로 해서 일약 유명해진 일화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소신관철을 위해 이처럼 물불 가리지 않는 그것이 그의 기상이며 또한 정객으로서의 관록이다'. 하상훈은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인천시의 민의원·참의원 선거 2부에서 참의원으로 당선됐으며, 1964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인천시사 편찬에 참여한 김양수 선생을 "하상훈씨 자손 중에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인물사를 편찬하면서 따님의 행방을 쫓았으나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인물의 후손들이 자료·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2006-01-12 목동훈

[인천인물100人·36] 지역언론인·향토사학자 김상봉 선생

“하상훈씨는 약주를 좋아하셨고 호탕한 분이었습니다. 주책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멋을 알고 통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중심거리인 중구 '경동사거리~배다리'에서 하상훈씨가 유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맨 앞에 선 사람이 메가폰으로 '하상훈을 국회의원으로 뽑자'고 외치고, 정장차림에 중절모를 쓴 하상훈씨가 그 뒤를 애교스러운 표정으로 거닐었습니다.” 지역언론인이자 향토사를 연구한 김상봉(75) 선생은 하상훈을 이렇게 기억했다. “동아일보 인천지국장, 신간회 인천지회장을 지낸 하상훈씨의 당시 역할은 독립운동가 이상이었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큰 활약을 했다.” 김 선생은 국악동호회로 알려진 '이우구락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지낸 하상훈·서병훈·이범진씨가 주축이 돼 이우구락부를 조직했다”며 “외부에서는 국악모임으로 알고 있으나 문화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이어 “이우구락부 이후 인천에서 일어나는 민족독립운동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며 “곽상훈씨가 창단한 '한용단'(야구선수단)도 일제의 눈을 피해 많은 문화활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하상훈은 대를 이어 객주업을 한다. 1883년 개항 이후 만들어진 객주상회는 상공회의소의 전신이다. 당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인천으로 모였으며 인천을 '제밀'(제물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 선생은 “인천의 경제가 서울에도 큰 영향을 줄 정도였다”며 “이런 밑바탕이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 선생은 “그는 언제나 지역의 선두에서 리드했다”며 “사사로운 것은 다 팽개치고 국가와 인천을 보고 걸어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상봉 선생은 인천신보사·동양통신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인천신문사·경기매일신문사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국회 부의장과 신민당 원내 부총무를 지낸 김은하(金殷夏) 전 국회의원의 동생이기도 하다.

2006-01-12 목동훈

[인천인물 100人·35] 항도 마지막 선비 김병훈선생

인천의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의 존재는 최근까지 묻혀 있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인천을 넘어 한국 근대 예술사의 큰 획을 그은 후학들이 최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그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는 그의 후학들은 한국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을 비롯, 법조인 조진만 선생, 한국 근대 서예의 혈맥 박세림, 유희강, 고일 선생 등이다. 이들에게 지고지순한 예술혼을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그다. 따라서 그는 한국 근대 예술의 뿌린 셈이다. 그러나 인천을 빛낸 후학들의 명성에 비해 그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따라서 일제치하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직전에 '의성사숙(意誠私塾)'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며 동시대 선각자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족적을 되짚어 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시 중구 경동 232 신신예식장 입구 4층짜리 건물은 김병훈 선생을 비롯, 5대째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가 홀로 고즈넉이 집을 지키고 있다. 집 구석구석에는 김병훈 선생의 묵은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손때 묻은 옛 수판과 탁자 등을 가족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홍씨는 “거실에 걸려 있는 호랑이 그림은 시조부께서 일본인 화가와 맞바꾼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시아버지(김상규)로부터 전해들은 시조부는 말그대로 엄격하고, 정확하고, 단정한 분이었다”며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집을 와 문밖엘 제대로 나가질 못할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또 “10살 적에 창녕초등학교에 다닐때 가끔 서당 훈장 선생님 복장을 한 근엄한 할아버지를 자주 목격했었다”며 “그런데 시집와서 그 분이 시조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있다”고 일담을 전했다. 이처럼 엄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김병훈 선생의 아들 상규씨는 한약방 대제원을 운영했고 가업을 이어받은 손자 태진씨는 초대 대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후손들이 가풍을 잇고 있다. 이어 증손자 성한씨도 할아버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서예작품으로 국선에 수차례 입상하는 등 예술적 잠재력을 발산하고 있다. 홍씨는 바로 최근 유명을 달리한 태진씨의 부인이다. 그러나 현재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주 며느리 홍씨에 따르면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 집으로 쓰던 목조건물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김병훈 선생의 작품과 초상화 등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에는 김병훈 선생이 1863년 충북 단양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아홉살때 경기도 양근에 거주하는 이석재에게 한문과 화도를 배웠다. 그는 26세가 되면서 한양으로 와서 수륜원(현재 농수산행정 관련 부서) 주사가 돼 수년간 근무하다가 1908년 인천에 이주해 한문선생이 됐다. 이 당시에 그가 지금의 금곡동 창영학교 현 강당 서쪽에 지은 것이 '의성사숙'이다. 사숙은 규모가 작은 마을의 종합학교다. 조선시대 말까지 있었던 글방(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자 고일 선생은 지난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 자신의 스승을 “지조가 높고 청빈한 양반으로 박학 다재하고 강직 청렴한 인격자”로 평했다. 인천석금에는 “김병훈 선생이 머리에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등나무로 만든 긴 회초리로 학동들을 다스렸다”며 “또 중국의 유교 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매란국죽과 산수 풍경을 그리는 동양화도 지도했다”고 적고있다. 특히 고일 선생은 “고인향무군자 즉여산수위우 이무군자즉이난죽위우 좌무군자 즉이금주위우(古人鄕無君子 則與山水爲友 里無君子則以蘭竹爲友 座無君子 則以琴酒爲友=옛 사람들은 마을에 군자가 없으면, 산수와 더불어 벗을 삼고, 이웃에 군자가 없으면 난과 죽으로써 벗을 삼고, 자리에 군자가 없으면 술로써 벗을 삼았다)의 경지로 선비의 처세를 지켰다”고 스승을 추켜세웠다. 특히 그의 교습법은 특이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해 스스로가 분발하고 격려하는 경쟁심을 갖게 했다. 그는 의성사숙을 그만둔뒤 아들이 운영하는 한의원 한켠에 '지수제(芝壽齊)'라는 서재를 마련하고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손주 며느리 홍씨는 “시조부는 말년에 내동 집과 지수제를 오가며 학문을 연구했다”며 “시조부가 돌아가신 뒤에도 고일 선생 등이 지수제에 찾아와 시어버지 상규씨와 스승을 회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청빈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천석금'에는 의성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전문대학을 마친 대표적 수재를 조진만, 고유섭으로 꼽고 있다. 또 인천의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박세림, 장인식, 유희강도 김병훈 선생의 수하에서 예술혼을 갈고 닦았다. 김병훈 선생의 새로운 발굴은 인천지역사에서 남다른 의미로 평가받고 있따. 인천 근대사에서 예술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배경에는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인천의 근대 예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병훈 선생의 가치를 확인했다"며 "이번에 그의 족적이 확인된 것은 지역 예술계 연구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2006-01-05 이희동

[인천인물 100人·35] 김병훈선생 증손주 며느리 홍사숙씨

  “시조부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기품있는 선비였다는 사실은 시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김병훈 선생의 증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는 집안 가풍에 대한 긍지가 남다르다. 대제원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했던 시아버지 상규씨는 늘 근엄하고 매사 정확한 사리로 아버지 김병훈 선생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홍씨는 기억을 되살린다. 이같은 청빈한 삶의 자세를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단단한 가풍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병훈 선생은 대제원 한쪽에 서재로 마련한 '지수제'에서 많은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은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도 선비정신 만큼은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꼿꼿하게 생을 마감했다는게 홍씨의 전언이다. 홍씨는 “지금 집안 창고에 많은 서예작품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김병훈 선생을 비롯, 가족들의 삶이 외부에 요란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수줍어 한다. 그녀는 특히 “최근까지 가족들은 3년 상을 치를 만큼 유교적 전통을 지켜왔다”며 “시집와서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 오는 한복에 버선을 신고 생활해야 할만큼 어른들이 엄했다”고 말한다. 특히 김병훈 선생의 말년에 인천지역의 최고 지식인들로 꼽혔던 후학들이 늘 '지수제'를 찾아와 자세를 가다듬곤 했다.

2006-01-05 이희동

[인천인물100人·34] '묵헌' 김정렬 前인천시장

>34< '묵헌' 김정렬 前인천시장 지난 1996년 6월10일 오후 인천시 남구 숭의동 수봉공원에서 최기선 시장을 비롯, 신맹순, 김동순, 심정구, 문병하, 이기상, 강부일, 민봉기, 곽재영 등 인천 지역의 정·관·재계 인사 3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법(司法), 행정(行政), 입법(立法)의 3부(三府)를 두루 거친 묵헌(默軒) 김정렬(1907~1974) 전 인천시장의 '송덕비' 제막식을 갖기 위해서다. 고인이 된지 22년만의 일이다. 묵헌의 큰 아들 한경(82)씨는 "2년여동안 제막식을 준비한 터라 참석자들의 얼굴은 고무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행사는 '고 김정렬 전 시장 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고 김은하 전국회부의장)'가 주관하고 지역인사 12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뜻을 모았다. "서울 지방법원 인천지원장을 거쳐 1954년 시의회 간접 선거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선출되신 후, 58년 시행된 첫 직선제 시장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선생은 민심을 모아 시 행정에 반영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시정에 전념하였으며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3·15 부정선거 획책에 정면으로 맞서 항거함으로써 행정 최일선에서 민주 질서를 지키는데 솔선수범하였고 시민으로 부터 청백리로 추앙받았다(생략)….”(수봉공원 송덕비 비문중 일부) 한경씨와 고인이 된 김동순 전 인천문화원장 등에 따르면 1960년 1월 중순 인천시장 집무실에선 김 시장과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 도경 및 일선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대책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회의 주재는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0% 이상 높이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사표를 받겠다는 집권당의 압력이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관의 명령에 항명을 하기란 보통 배짱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김 시장은 달랐다. 당시 묵헌은 “선거권은 주민의 고유한 권한으로 시 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며 지시를 거부했다. 묵헌의 비서관을 지낸 정구열씨는 “항명 이후 경찰이 시장님의 집무실 출입을 금지시키고, 시장에게 부시장과 총무과장 등이 업무보고 하는 것 조차 막았다”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과 공무원들은 소신 있는 시장님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고 적힌 지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 시장은 1956년에도 자유당의 압력을 무시한 채 혁신당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씨의 후보등록을 받아주는 소신을 보였다. 묵헌은 인천과 경기도 접경인 소래(시흥)에서 1907년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원래 이름은 영복(永卜)이었으나, 17세 되던 해(1923년)에 정렬(正烈)로 개명한 것으로 호적부에 기록돼 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성균관 주사 김동일(金東一)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 438(현 시흥시 무지내동 428)이다. 묵헌은 고향에서 천자문·중용·맹자 등 한학과 사서삼경을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27세때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나왔다. 그뒤 그는 39세때인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돼 위조지폐사건, 학원통합연맹사건, 교련사건 등 정치적 사건을 원만히 처리했다. 그는 44세가 되던해 인천지원판사와 인천시선거관리위원장,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겸 인천지원장에 부임하게 된다. “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습니다. 고향에 판사로 부임하면서 어떻게 봉사할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장남 한경씨의 회고) 고향에 부임한 그는 체육회, 로타리클럽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고향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까지 소박과 청빈을 강조했다. 한경씨는 “판사시절 닭 두마리가 집에 선물로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뇌물은 반드시 사건이 묻어 들어온다며 아버지의 엄명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묵헌은 소박과 청빈함이 지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몇몇 정치인들의 권유로 지난 1954년 나이 48세때 정치와 인연을 맺는다. 원만한 인격과 청렴한 기질, 성실한 직무열을 높이 산 몇몇 시의회 의원 등의 노력으로 묵헌은 제1차 인천시의회에서 제2대 민선시장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인하공과대학후원회장, 인천체육회장으로 당선된다. 그는 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지부 위원장, 인천정악원(仁川正樂院) 2대 위원장, 인천유도회 초대회장, 그리고 1958년 직선시장에 출마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투표 당선된다. 강인한 업무추진력과 청빈함 등이 시민들부터 높게 평가된 결과였다. 묵헌은 시장으로 재임한 7년간 배다리철문확장, 동원교, 인천교, 인천역사(仁川驛舍) 등 지역사회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역사를 펼쳤다. 특히 그는 인천시편찬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인천뿌리찾기에도 정열을 쏟았다. 풀뿌리 민주주의 기초를 다지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시 항명사건이었으며 부도덕한 정권의 서정쇄신에 희생된다. 이후 그는 무죄가 인정돼 심계원(현 감사원)차장 겸 고등고시 전형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끈을 놓기 ㅎ미들었던지 1960년 12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묵헌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966년 서울 제2변호사회 회장으로 일하다 1967년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류승원 후보를 893표 차로 누르고 당선돼 정계에 다시 투신했다. 국회에서도 그는 소양강댐 공사비리, 이수근 사건, 향토방위법 등을 처리하고 신민당내 내무·법무 탄핵심판위원을 지냈다. 1974년 의원 임기 1년여를 남겨둔 채 칩거생활에 들어간 이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남구 주안동 408 자택에서 68세로 타계했다. 그가 별세하자 인천시는 그의 공훈을 기려 하상훈에 이어 두번재로 향토사회장으로 치러 숭고한 뜻을 기렸다.

2005-12-08 송병원

[인천인물100人·34] 장남 한경씨가 본 아버지 김정렬

“아버님께서는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반면 가족에게는 원칙을 강조하시던 냉철한 분이셨지요.” 묵헌의 큰 아들 한경씨는 부친을 이렇게 기억한다. 김씨는 “제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아버지께선 의견을 내지 않았습니다. 내심 법대를 기대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자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외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칙을 강조하는 묵헌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화를 소개했다. 김씨는 “법대는 아니지만 대학 입학 후 나름대로 아버님의 뒤를 잇기 위해 혼자 법 공부를 잠시 하기도 했다”며 “법복을 입은 아버지 모습을 보고 싶어 대학시절(21살때) 몰래 재판진행 과정을 숨어서 지켜보기도 했다”고 가족 사랑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아버지는 전국 팔도를 돌아 다니시면서 공직생활을 했던 터라 함께 생활한 기억은 별로 없다”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1945년 서울 법원 근무시설이다”고 말했다. 고인이 선비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세인들의 평가에 대해 그는 “아버님을 그렇게 훌륭한 분으로 평가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특히 지난 96년 평소 아버님과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지인들과 인천시민들이 뜻을 모아 수봉공원에 아버님의 '송덕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줘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경씨는 시흥시 소래면에 있던 아버님의 묘소를 2년전 충남 천안 소재 가족납골묘로 이장했다며 인천과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2005-12-08 송병원

[인천인물100人·33] 극작가 진우촌

>33< 극작가 진우촌 인천시 중구 경동 238에 위치한 애관극장. 지금은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지만 1920년대 이곳에서는 '칠면구락부' 즉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1904~?)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천의 소중한 문화인물인 극작가 '진우촌(秦雨村·1904~?)의 본명은 종혁(宗爀)이다.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특이한 극작가'로만 기억되고 있는 진우촌. 1920년대 인천지역 문화운동을 이끈 인물중의 한 사람인 진우촌은 인천지역 배재학교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는 물론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의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 1923년 '개혁'과 '시드러가는 무궁화'가 동아일보의 현상공모에 연속으로 당선되고 이어서 1925년 '조선문단'에 '구가정의 끝날'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진우촌은 1904년(광무 8년) 7월22일 부친 풍기 진씨 수와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11살 터울의 정옥과 18살 터울의 문옥이 있었으며 서매(庶妹) 정희와 문길도 있었다. 진우촌의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 종혁(宗爀)으로 개명했고 우촌(雨村)은 필명으로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할때부터 사용했다. 그의 보통학교 재학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지만 14세 되던 1918년 서울 배재학당의 4년제 본과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했다. 1923년 인천에서는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생들의 모임으로 인배회가 결성됐고 이에 앞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로 시작된 이들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이후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등의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이때의 구성원들이 인천의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진우촌은 경인기차통학생회와 인배회는 물론 1923년에 결성된 제물포청년회에도 속해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각종 연예 대회의 개최 등 주로 문화활동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중 소인극 공연은 매우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또 진우촌은 인천의 대표적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에도 가담했다. 1923년 창립된 인천소성노동회는 인천의 무산 대중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문화 활동을 전개해 창립 1년만에 회원 1천200명을 자랑하게 됐으며 1924년 4월 인천공회당에서 총회를 열어 노동총동맹회로 조직이 개편된다. 여기에서 진우촌은 3명의 선전부 위원 중 하나로 선출됐다. 그리고 등단 후인 1925년 12월 진우촌은 이비도, 박형남 등과 인천유성회를 조직한다. 조직 강령에 '본 회는 민중예술을 본위로 하되 더욱 푸로 문학의 건전을 도모한다”고 한 것으로 봐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문예노선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우촌은 그다지 두드러지는 활동은 펼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1926년 진우촌은 정암, 원우전 등 연극인으로 유명한 이들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골즈워디의 '승리자와 패배자' 등의 작품을 상연했고 1927년에는 문예지 '습작시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는다.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예지인 '습작시대'의 창간호에는 주요한, 김동환, 박팔양, 엄흥섭 등 이 시기의 주요 문사들의 글이 실려있다. 이를 보면 1920년대 진우촌은 인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5월 진우촌은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돼 등단한다. 이때 동화부문에 '의조혼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됐고 이어서 9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도 당선된다. 1925년 2월에는 초기 작품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고 1926년 5월31일과 6월3일 이틀간에 걸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했으며 1925년 7월에서 1926년 10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14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우촌은 1929년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습작시대' 이후 근 10년동안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진우촌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28년. 극단 낭만좌는 셰익스피어 '햄릿' 1막을 각색한 '묘지'로 동아일보 주최의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때 이 작품을 각색한 사람이 진우촌이었다. 낭만좌가 해산된 이후 진우촌은 1943년 동양극장에서 '왕소군'을, 1994년 현대극장에서 '뇌명'을 상연했고, 이는 현대극장의 후신 극예술협회에서 1948년 다시 상연된다. 1946년에는 극단 청탑에서 '보검'이란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해방후 진우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좌파성향의 자유극장에 가담한다. 자유극장은 개관작으로 진우촌의 '망향'을 상연했고, 이는 '두뇌수술'로 개제돼 '신문예 창간호(1945.12)'에 실렸다. 그리고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가 결성되고 그 대회를 공지하는 기사의 추천회원 명단에는 진우촌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러나 진우촌의 1950년대 이후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그 이후 진우촌이 어떤 작품활동을 했는지 어디에서 사망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윤진현 박사는 "진우촌은 인배회를 비롯해 경인기차통학생회, 제물포청년회 등 당시 젊은이들의 모임은 물론이요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소성노동회와 카프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유성회에도 참여했다. 또 진우촌은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필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칠면구락부'와 같은 연극모임을 만들어 작품을 상연했으며 '습작시대'등의 잡지 편집에도 관여하면서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진우촌이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활동' 그자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진우촌의 인천지역활동을 평가했다./자료협조-윤진현 박사(문학박사, 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현 민예총 인천지회 정책위원장)

2005-11-10 김신태

[인천인물100人·33] 진우촌과 항도 인연은

  윤진현 박사는 진우촌이 인천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04년 7월22일 출생한 진우촌이 인천 출생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다만 진우촌의 재종조부이며 동아일보 초대 기자로서 일제 강점기 중요한 언론인이었던 진학문의 아버지 진상언이 인천 감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인천과 진씨 일가의 인연은 짐작보다 오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진우촌의 제적등본에는 다이쇼 4년(1915년) 12월5일 인천부 율목리 180번지에 이주한 사실이 밝혀져 있고 이어 208번지로 이사한 사실도 기록돼 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집안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율목리와 내리, 송현리 등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우촌의 아버지 진수(秦秀)는 세창양행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는 바,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부친이 여기에 근무하면서 인천으로 이주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주한 인천에 정착해 유년을 보내고 서울로 진학한 이후에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1920년대 내내 지속됐다. 따라서 인천 출생 여부와 무관하게 진우촌을 '인천인', 한 시기를 열심히 살았던 자랑스러운 '인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우촌 일가는 1942년 서울 부암정으로 이주했으며 그 후 무연고 호적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5-11-10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32] 서양화가 장발

32. 서양화가 장발 지난 2001년 4월8일 인천 출신의 장발(張勃) 화백이 미국 피츠버그 자택에서 100세의 나이로 타계한 직후 미술계와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서는 연구자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장발 화백이 민족사적 수난시대를 겪어오면서도 한국 화단과 미술교육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과 미술협회 분할과 '국전(國展)'파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건전한 발전에 제약을 가하는데 일조했다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근·현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장발 화백에 대한 평가는 작가로서, 미술교육·행정가로서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발은 우현 고유섭보다도 5년이나 앞서 한국의 화가 중 최초로 미국에 유학해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연구(미술이론)과정을 수료한 뒤 귀국해 서울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미대 학제를 만들고, 교수진을 구성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가톨릭)의 효시를 이루고, 대한미협에서 한국미협을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는 등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민족수난 시대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보내는 동안 그가 학계와 미술단체에서 보였던 행동은 지금도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 논란 거리로 남아 있다.  장발은 190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인 장기반의 3남4녀 중 둘째 아들인 장발은 형 장면(張勉)박사와 막내인 장극(張剋)박사와 함께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인물이다. 큰형인 장면박사는 60년 민주당 정부의 초대 내각수반을 역임했고, 막내인 장극박사는 항공공학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유동의박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런 집안 내력 탓에 장면은 해방 이후 화가로서 교육가로서 국내에서 쉽게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한다.  장발은 휘문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매일신문은 서울의 고등학교 연합학생미술전을 열었음을 보도하면서 장발의 재능을 남달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림을 그리는 처음부터 성화(聖畵)에 뜻을 두었다. 휘문고등학교 졸업 이후 장발은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다. 이 곳에서 서양화의 기초적 실기를 익히고 중도(1922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서 콜럼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학을 공부한다. 그의 미술적 이론의 근거는 동경미술학교 시절에 근간을 이룬다. 당시 독일 뮌헨의 기독교 미술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매월 발행하는 기관지인 '기독교 미술'을 정기 구독해 엄격한 보이론(Beuron)풍의 성화기법에 관심을 갖는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독보적인 일이다. 비록 2년 과정의 비정규코스였지만 이는 인천 출신의 고유섭보다도 5년 빠른 '근대 미술이론 연구자'라는 연대기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귀국 후 인천에서 머물면서 주로 가톨릭 성화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이 때 그린 그림이 '성인 김대건', '성녀 김골놈비와 아그네스 자매' 등이다. 그러나 모교인 휘문고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발은 작가로서보다는 미술교육자로서, 순수화가로서보다는 성화가로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활동은 많지 않았다. 당시 비평가들은 장발의 작품을 대해볼 기회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예술을 종교적 경지로 끌어올린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를 보면 장발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당시에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성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음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은 장발이 화가에서 미술교육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다. 장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시점을 기준하고 있다.  장발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창립멤버로 참가하면서 이어 미술대학 학장에 임명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작가로서보다는 교육자, 미술행정가, 이론가에 치중하게 되며, 실기지도보다는 이론 강의에 전념했다. 학장 재임기간 중 대한미술협회에서 한국미술작가협회를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의 보수적이고 독선적인 평가가 지적되고 있다. 당시 작가로 활동하려면 '국전(國展)'에서 입상해야 하는데 그의 고교 스승인 윤호중(당시 홍대 미술학부장)이 이끄는 대한미술협회가 이를 주도함으로써 홍익대 출신들과의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서울대파'와 '홍대파'라는 파벌의식을 낳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1956년 대한미협의 국전 보이콧 사건이 터지면서 미술계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됐다.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동강이가 난 미술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1960년 4·19 학생의거로 친형인 장면 민주당 정권이 등장한 직후에는 이탈리아 전권대사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전직할뻔 했으나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부임도 못한 채 해임되고 만다. 그로 인해 장발은 1962년 미국으로 출국해 세인트 빈센트대학 명예교수로서 미술사 강의 등을 하며 지내다 다시 붓을 잡아 추상화와 성화작업에 몰두하면서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장발은 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행사 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됐으며, 서울대는 교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2005-10-20 이진호

[인천인물100人·32] 이경모 / 미술평론가·인천대 겸임교수

  “장발 선생은 근대 미술교육의 골격을 다졌고 기독교 미술의 질과 양에서 현격한 발전을 보이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지요. 그런 점에서 그가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미술평론가인 이경모 인천대 겸임교수는 장발 화백에 대해 “장발 선생은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가톨릭 성화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 교육, 행정에 치중해 작가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근·현대 미술에서 그의 족적은 그 누구보다도 크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는 금방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인천의 유력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다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미술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에서 미술대학을 설치해 우리 근대적 미술교육의 틀을 짜는 한편 서구의 이론서들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이론부재의 한국미술계를 자극했지요.” 이 박사는 “일제 강점기에 장발 선생은 일인들이 주관하던 조선미전에 출품하지 않는 대신 네모듬회, 목시회, 목일회 등을 주도하며 엘리트미술가들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조선미전에 주도되던 일제시대 우리 화단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이는 민족의식의 발로였으며 미국 유학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반영하는 행동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발 선생은 기독교미술뿐만 아니라 추상미술에도 관심을 보여 6·25전쟁 이후 수많은 추상회화를 남겼다”며 “서양 모더니즘 운동을 피상적으로 습득하고 외형만 배워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장발 선생의 정서가 치열함과 높은 감수성을 요구하는 추상미술을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장발이 작가와 미술교육·행정가로서의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구미 유학생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단지 화가라는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점이 장발을 갈등케 만들었을 것”이라며 “그가 귀국 이후 점차적으로 미국유학생이라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작가보다는 교직이나 미술행정, 단체결성, 고위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주도된 국내의 여러 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그의 선구자 신화는 확대재생산되고 이는 한국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으로 작용했다”며 “여러 연구자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장발 선생이 근·현대 미술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2005-10-20 이진호

[인천인물 100人·31]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31.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만일 딱 한 문장으로 선교사로서의 조원시 박사를 말한다면 이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깊은 동정심을 지닌 학자의 본능과 습관을 가진 분이었다.” 인천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목사의 삶은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A, Noble)의 이같은 추모의 글로 압축된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특히 선교활동은 물론 교육사업, 하와이 이민, 학술 연구 등 그가 인천에서 남긴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1867년 8월14일 뉴욕 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난 조원시 목사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미북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서 1888년 5월1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인천에 온 것은 1892년.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들이 이 당시에 설립됐다. 선교활동 외에 조원시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교육사업이다. 그가 인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또한 교육사업으로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한국어 선생 부부를 인천으로 이주시켜 '소년 소녀 매일학교'(영화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조원시 목사는 한국 역사와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학술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국어 사전을 직접 편찬해 한국어에 서툰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 12월에는 제물포 우각현(현 영화학교 자리)에서 최초의 우리말 신학연구지인 '신학월보'를 창간, 사장 겸 주필로서 깊이 있는 논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가 창간한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장로교에서 발간한 'The Korea Field'와 함께 '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됐는데, 이 통합잡지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사를 서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원시 목사가 인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그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02년 12월22일 한국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가운데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하와이 이민을 실질적으로 주선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조원시 목사였다. 이어 조원시 목사는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오늘의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태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진형 목사(죽림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이민과 조원시'란 세미나 발표자료를 통해 조원시 목사가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데 대해 “당시 극심한 가뭄이 중부지방을 휩쓰는 등 한국에서의 삶이 힘든 상황에서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낫고 신앙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2005-09-15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31] 인천내리교회 김흥규 담임목사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는 '조원시의 한국선교'란 주제로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 선교역사는 물론 인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푸른눈의 선교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세미나를 주도한 인천내리교회 김흥규 담임목사는 “일찍이 한국에 와서 활동했던 이국 선교사들 가운데 조원시 목사만큼 이채로운 이력을 가진 분도 드물 것”이라며 “조원시 목사는 윌리엄 스크랜턴과 헨리 아펜젤러에 이어 미국 선교사로서 세번째로 파송을 받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두 분 못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에 따르면 조원시 목사는 한국에 온 선교사 중 제일 나이가 어린 선교사였고 가장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갖춘 선교사였다. 또 미국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교수로 초빙을 받을 정도로 한국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풍속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이기도 했다.  김 목사는 “조원시 목사가 당시 기고한 글들을 읽어보면 오늘의 수준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한국 역사와 종교, 어원학에 정통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인천에서 감리교가 강세였던 것은 조원시 목사의 선교 열정 때문이었다”며 “특히 교육사업이 복음 전도사업에 필수적인 발판이 된다는 확신으로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은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말했다.

2005-09-15 임성훈

[인천인물100人·30] 인터뷰/10여년간 '현덕 복원작업' 펼친 원종찬씨

“현덕의 동화 속에서 나오는 노마는 한국문학이 창조한 가장 매력적이고 잊을 수 없는 캐릭터의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현덕 연구에 지난 10여년을 보냈던 부평여자공업고등학교 원종찬(47) 교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현덕의 뛰어난 동화를 추켜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 원 교사의 연구 결과가 세상에 나오면서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현덕을 연구하게된 계기는. “현덕을 처음 알게된 것은 인천지역과 관련된 문학을 공부하고자 전교조 인천지부에서 마련한 인하대 최원식 교수의 강연에서죠. 당시 뛰어난 작가를 세상이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어요. 작가의 순결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현덕의 소설을 접하고 저도 한동안 접어뒀던 문학의 꿈을 다시 지폈습니다.” -현덕을 연구한 과정은. “정말 지난 10여년동안 그의 종적을 쫓아다니는데 어려웠습니다. 특히 그의 연고가 남한에 전무하다시피해 각종 자료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심지어 현덕이라는 인물의 종적을 찾다보니 본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하기까지 했지요.그러나 연구를 위한 자료와 씨름하다보니 그의 주옥같은 동화 작품들을 발견하게되는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어요.” -현덕에 대한 평가는. “그의 동화집이 새로 출간된 이후에는 아동문학쪽에서 현덕의 위치는 확고합니다. '노마'라는 캐릭터가 현재를 사는 아이들에게 순수함과 꿈을 불어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의 삶에 천착했던 그의 작품 활동은 이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어요.”

2005-08-25 이희동

[인천인물100人·30] 아동작가 현덕

>30> 아동작가 현덕 뛰어난 아동작가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를 냉전 이데올로기로 지난 70여년을 묻어 왔다. 작품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인천도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동안 작가 현덕을 외면했다. 좌익과 월북 작가라는 미명하에 그의 작품을 장농 한 편에 숨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동화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현덕이라는 작가의 종적이 탐구되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의 인생 역정을 연구한 결과물이 최근 학계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또 '너하고 안놀아' 등 동화는 어린이들의 필독서로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연극 작품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 우리 동화에 '노마'라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내놓은 현덕의 업적은 입이 닳도록 칭찬해도 아깝지 않다. 지난 1988년 정부가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조치를 하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현덕과 그의 작품을 금기의 영역에 가둬 놓았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부터 카프 이후의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현덕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새로 발굴 소개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쌓여가고 있는 추세다. 부평여자공업고등학교 원종찬 선생은 지난 10여년동안 현덕 복원 작업에 매달린 끝에 인하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현덕이 그동안 남한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몇가지로 분석한다. 오랫동안 '레드 콤플렉스'의 덫이 그의 작품을 우리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또 남한에는 그의 연고자들이 거의 없어 지금까지 생애조차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단의 대립도 현덕을 지워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 현덕에 대한 기념비를 인천에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부 작가들에 의해 거론됐으나 좌익과 월북이라는 그의 행적이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문학계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21세기에 그의 전력보다는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울 출생이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천에서 성장한 탓인지 그의 작품 배경은 인천이 주류를 이룬다. 때문에 현덕이 인천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지역 문인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덕의 본명은 현경윤이다. 현덕이라는 이름은 그가 문학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쓰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난 1909년 2월15일 서울에서 아버지 현동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현흥택은 민영익 수하의 무관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친러시아파에 속했던 그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한후 기록이 보이질 않는 점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소외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현덕이 태어난 삼청동 별장은 조부 현흥택의 사교장소다. 때문에 현덕의 가계는 당시 상당한 재력을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업을 하다 가산을 모두 탕진한 그의 부친 때문에 현덕은 어렸을적 생활이 고달팠다. 위세가 당당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늘 자신을 밑바닥 인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고 그의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모친이 어렵게 생계를 이으면서 그는 어린시절 대부도와 인천 등의 친척집을 떠돌아야 했다. 대부도 당숙 집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 집으로 옮겨 제일고보를 다니면서도 그는 한동안 인천을 오갔다고 한다.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쓴 그의 대표작 '남생이'와 안산 일대가 보이는 대부도 근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경칩'은 당숙의 집에서 살았던 체험과 관련이 있다. 제일고보를 중퇴한 그가 힘겨운 청년기를 보내면서 위안이 됐던 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었다. 또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떠돌던 때 김유정을 만나 문단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지난 1927년 한 신문사 주최의 독자공모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로 일등 당선한다. 현덕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일등 당선하면서부터다. 이후 1940년까지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며 뛰어난 단편소설과 동화 등을 세상에 내놓는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에 뛰어들어 진보적인 문학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좌익 색출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문학운동을 벌인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월북하게 되고 숙청당한 지난 1962년까지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사라진다. 지금도 현덕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덕은 식민지와 분단으로 말미암은 파행의 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여전히 낯설다. 아직도 굳건한 이념의 틀이 현덕을 옥죄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근대 문학의 양대틀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합류 지점을 만들어낸 현덕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시점이다. 사회의 통합과 건강한 문학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2005-08-25 이희동

[인천인물100人·29] 의학박사 엘리 바 랜디스

>29< 의학박사 엘리 바 랜디스 지난 주말, 인천시 중구 내동 3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교회 마당에는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남득시)박사 기념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랜디스 박사 기념비는 보셨나요?”  랜디스 박사에 대해 기사를 쓰고자 찾아왔다는 말에 인천 내동교회 김철환 사무장은 이 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인천내동교회 110년사'라는 책을 건네주며 그(랜디스 박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라고 했다.  김 사무장은 “사실 랜디스 박사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다”며 “선교활동으로 인천을 찾은 코프 주교와 함께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의료사업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분”이라며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려 토착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있는 랜디스의 묘를 매년 여기서 관리한다고 한다. 또한 지난해에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동판으로 제작한 감사패를 주었다고 한다. 러·일 전쟁 당시 랜디스 박사가 러시아 군인들을 치료해 준 것에 감사를 전한 것이란다. 이 동판은 빨간 벽돌의 옛 병원건물에 붙어 있다. 이 교회 안봉식 관할사제는 “가끔 보면 감사패 밑에 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러시아인이 자국 선원의 희생을 추모하고, 랜디스 박사를 기억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랜디스 박사는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1888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랭카스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선교지원운동에 영향을 받아 성공회 부속기관인 제성요양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 후 그는 코프 주교와의 만남으로 1890년 9월29일 마침내 인천에 터를 잡는다. 곧 그는 셋집을 구해 약국과 진찰실로 사용하면서 인천사람들에게 의술을 펼친다. 1891년 10월 개원한 성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의 최초로 의료사업을 벌인 서양 의사였던 것이다. 랜디스의 통계에 따르면 1892년 모두 3천594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1894년에는 더욱 늘어나 4천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와 방문치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천에서 1891년 최초로 영어학교를 만들어 인천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1892년에는 고아를 데려와 보살피면서 최초의 고아원을 창시했다. 랜디스 박사는 40명의 학생을 4개 반으로 나눠 일주일에 6일씩 하루 3시간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이중 6~8명 정도의 중국인도 끼어 있었다. 그는 또한 당시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길렀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 책자는 전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 같다. 성누가를 기념하는 첨례일에 새 병원에 입주한다 하여 성누가병원이라 이름 지은 것을 두고 그는 “성누가병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며 '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라고 번역한 '낙선시의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랜디스 박사는 프랑스 신부가 지은 한국어 문법책을 가지고 한국어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1890년 11월23일 코프 주교는 “랜디스가 심부름하는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며 '놀라운 발전'이라고 그의 한국말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근황을 알렸던 소식지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의 기록에는 “랜디스가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 중 우리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지칭해 '약대인(藥大人·서양의사)'이라 불렀고, 병원 일대(지금의 자유공원 자락)를 '약대인산(藥大人山, 당시 사람들은 '약대이산'이라고 불렀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천 한 世紀(세기)'라는 저술의 기록에는 '언덕 아래에 있던 성당보다도 오히려 성누가병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나와 있다. 또한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 중인 '랜디스문고'는 그가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민속을 연구한 것으로 당시 한국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랜디스문고'에는 그가 당시 연구를 위해 수집했던 많은 서적들과 집필들 300여권이 있다. 연세의대 의사학교실 여인석 교수는 1897년 홍콩서 발간된 '차이나 리뷰(China Review)'지에 동의보감 내용 일부가 영어로 완역(完譯)돼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다. 동의보감을 영역한 사람은 랜디스 박사. 여 교수는 “랜디스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의보감 전체가 완역됐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연세대측과 일반인들은 '랜디스문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접근 또한 쉽지 않았다. 어떤 서적·집필들이 보관돼 있는 지 알고 싶어 연세대 도서관을 방문했지만 끝내 '랜디스문고'를 찾지 못했다. 도서관 담당자가 의대에도 문의했으나 "잘 모르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랜디스 박사는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1898년 4월 16일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장례가 있던 날은 천둥과 번개가 몹시도 심했다고 한다. 장례식은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한국식으로 시체를 제일 좋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혀 안장했다고 110년사 책자에 기록돼있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묻어 있는 인천 청학동의 외국인 묘지를 찾았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철문이 굳게 닫힌것을 보니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2005-08-11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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