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100人·29] 인터뷰/안봉식 내동교회 관할사제

“랜디스 박사는 성공회의 정신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선교는 물론 의료·교육 분야에서 다각적인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인천 내동교회 안봉식(49·베다) 관할사제는 “성공회는 '전도'보다는 고아원 운영 등 사회선교에 중점을 둔다”며 “랜디스 박사의 활동과 연관이 깊다”고 말했다. 성공회는 전도와 사회선교 활동을 별개로 여긴다. 사회선교 활동이 복음을 위한 이용수단이 아니라는 게 안 신부의 설명이다. 그는 “성공회 교회 가운데 학원·고아원 등과 함께 출발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며 “성공회 특성상 사회선교 활동에 대단한 활동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어교육·고아원운영·의료선교 등의 활동을 벌인 랜디스는 성공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 신부는 호주 시드니에서 목회 연수를 마친 뒤 지난 1999년 12월부터 인천 내동교회 관할사제를 맡았다. 그는 선교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겠다는 의지를 갖고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1891~2001)' 책자 제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 때부터 랜디스 박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랜디스 박사를 이 책자에 담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료 수집이었다. “랜디스 박사의 자료를 찾기 위해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모닝캄(The Morning Calm)'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더군요.” 그는 교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얻기 위해 교회역사와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온 원로 교인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원로 교인 찾기가 쉽지 않음은 물론 그가 만난 교인 대부분이 랜디스 박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성공회대 도서관이나 성공회 역사연구회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도 충분치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 랜디스 박사의 증명사진 조차 구하지 못해 단체사진에서 그의 얼굴만 따로 떼어 110년사 책자에 게재했다고 한다. “성공회가 랜디스 박사 관련 자료를 모아 보전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들의 인사이동으로 인해 그를 깊게 연구하지 못한 점도 아쉽습니다.” 그는 “110년사 책자 자료를 수집하면서 랜디스 박사에 관한 얘기를 남에게 전해 들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며 이 같이 말했다. 안 신부는 교회위원회 정책세미나를 통해 랜디스 박사의 흉상을 제작해야 한다고 요구해 놓은 상태다. 그는 또 랜디스 박사의 약력을 동판으로 만들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2005-08-11 목동훈

[인천인물100人·29] 인천 내동교회는?

1890년 인천 중구 내동에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것이 한국 성공회의 시초이다. 당시 벤슨 캔터베리대주교는 1887년 중국과 일본에 있는 영국성공회 주교들에 의해 한국에 선교를 시작할 것을 요청받았다고 한다. 벤슨 캔터베리대주교가 한국 초대 교구장 주교로 선택한 사람은 찰스 존 코프. 이들은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뎌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인천지역 선교 책임은 랜디스 박사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당초 교회 건물은 1891년 9월 30일 준공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됐다. 현재 건물은 1956년 6월 23일 준공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내동교회 안봉식 관할사제는 “6·25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영국으로 되돌아가 헌금을 걷었다”며 “이 헌금이 교회를 다시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현 내동교회 건물은 한국의 건축미를 잘 살린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회는 그 곳이 초기의 선교 중심지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만큼 성장하지 못했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는 전한다. 서명원이 지은 '한국교회성장사'를 보면 1900년 통계에는 영세체자수가 겨우 10명, 1915년 123명, 1929년 112명, 1938년 86명 등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에는 200여명의 교인이 교회에 나올 정도로 교세가 약한 편이라고 한다.

2005-08-11 목동훈

[인천인물100人·28] '인천학 연구 선구자' 박광성 교수

>28< '인천학 연구 선구자' 박광성 교수 “1960년대 향토사 수준에 머물던 인천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고 선생님께서 나섰을 때 학계에선 코웃음쳤지요. 당시의 열악한 학계 사정으론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도 주목받지 못했을텐데구전으로 전해지는 인천사를 찾아내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선생은 신념과 뚝심하나로 인천학 연구를 일궈냈습니다.”  고 박광성(朴廣成·사학자·1925~1995년) 인하대 교수의 제자 강덕우(50·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씨는 인천학 연구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선생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강위원은 “박 선생은 인천 향토사 자료 등을 체계화시켰고, 그것을 인천개항 100년사(1983년)와 인천시사(1993년) 등의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물려준 진정한 인천의 사학자였다”며 “아침에 출근하면 늘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고서적들을 탐독했고 '설'과 '전설' 로만 떠돌던 인천의 역사를 입증하는 작업에 열정을 쏟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1990년 인천시사를 편찬하기 위해 연구에 몰입한 나머지 중풍으로 두차례나 쓰러졌으나 보란 듯이 일어나 작업을 마친 그의 일화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제자들은 술이나 한잔 걸쳐야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속 얘기를 털어 놓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박 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박 교수의 고집스런 열정이 인천역사와 통사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지역 학계와 후학들은 평가하고 있다. 실례로 60년대초엔 '능허대(凌虛臺)'가 백제 초기에 중국과 통교할때 사신들이 배를 띄운 장소로만 알려졌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인천부읍지'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각종 문헌을 통찰해 능허대의 명칭과 당시 주변국가의 정치형세, 사신들의 경로·횟수등을 입증해 냈다. 능허대는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기록을 통해 재조명된 것이다. 또 그는 당시의 백제와 중국 도인의 정치 지형에 대해 자세히 밝혀내는 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능허대는 연수구 옥련동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서북방향 바다쪽 구릉 돌출부의 봉우리를 가리킨다는 것도 박 교수 연구 성과다. 이 반도형 구릉 동편으로는 자연적으로 조그만 포구가 형성되고 포구 서북쪽 입구에는 '소둑'이라 불리는 둑이 가로지르고 있어 방파제 구실을 했다는 점도 처음 입증됐다. 그리고 능허대를 통해 중국으로 통교한 사실은 동진에 6회, 송에 12회, 북위에 1회 등 모두 19회에 이른다는 사실이 박교수의 '한국 중세사회와 문화'라는 논문집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밖에 박 교수는 이자겸 시대 7대 동안 인천에서 왕과 왕비가 배출되고 태어났다는 칠대어향(七代御鄕)과 강화도 광성보 맞은편에 위치한 손석항(孫石項·일명 손돌목), 인천개항(仁川開港)과 연안방비책(沿岸防備策), 인천의 조계(租界), 병자난후(丙子亂後)의 강화도방비구축(江華島 防備構築), 점조시(占潮詩) 등 수많은 인천역사를 연구해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이렇게 연구된 각종 논문과 문헌 등은 그가 몸담았던 인하대학교 박물관 등지에 모두 기증돼 있다. 한편 한국사 중에서 민란사(民亂史)를 전공했던 박 교수의 독보적인 연구 업적은 지금도 학계에 명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충북 제천 출신의 박 교수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충주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지난 1960년대 인천교육대학 교수로 지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후 그는 1980년대초에 인하대 사학과로 자리를 옮긴뒤 오직 사학에 몰두한 우리시대의 참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인하대 사학과 윤병석(75) 명예교수는 “박 교수는 수학이 출중해 학자의 풍모가 보였고 교육자로 봉직하는 오랫동안 한국사 연구에만 매달렸다”며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지방사와 문화사에 대한 그의 연구는 현 학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 박광성교수는? 박광성 교수는 1925년 충북 제원군 백운면에서 태어나 일제말기를 소년기로 보냈지만 일찌감치 교육자의 길을 택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2년 대학을 졸업하고 충주사범학교에서 사학 담당 교사로 10여년 근무하던 끝에 1960년대에 인천교육대학 교수가 됐고 기전문화연구소를 설립, '기전문학연구'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1980년대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전임교수로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정년을 맞고 대우교수로 활동했다. 박 교수는 인하대에서 근무하면서 향토사 수준에 머물던 인천사를 체계적으로 재 정립하고 인천역사를 바로잡는데 괄목할 만한 활약과 업적을 남겼다.

2005-07-28 송병원

[인천인물100人·28] 인터뷰/부인 김복주 여사가 본 남편

“말수가 적고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온화하고 자상한 가장이셨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광성 교수의 부인 김복주(75)여사는 이미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박 여사는 “집에 들어오면 늘 책과 함께 생활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4남매)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했다”며 “특히 아이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역사학자답게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느나라를 가도 가이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역사·유적에 대해서 전문가였어요.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냈고 유적지 답사는 평일이 아닌 주로 방학때 다녔다”며 남편의 애틋한 가족애를 전했다. 지난 1995년 박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40여년간 함께 하던 남동구 만수동에서 경기도 시흥시 연성지구로 집을 옮겨 막내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박 여사는 “고인의 제자들이 9년째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자리하고 있는 묘소를 찾고 있다”며 “제자들이 전해주는 살아 생전 고인의 인천학 연구 이야기는 들을때 마다 새롭고 자랑스럽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김 여사는 충주사범학교 사학 담당 교사시절 결혼해 반려자로 박 교수와 한평생을 함께 했다.

2005-07-28 송병원

[인천인물100人·27] 인터뷰/이훈익 선생 차남 원규 교수

이훈익 선생이 향토사 연구에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데는 195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부평향교 전교(全校;향교 책임자)를 지냈던 선친(이현신)의 영향이 컸다는 게 차남 이원규(57) 교수의 회고다. “선친이 돌아가시면서 부평사(史)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마 그 유언이 아버님에게는 평생 짐이 됐던 것 같습니다.”  70대에 앓기 시작한 협심증으로 개심수술(83세)을 포함해 5차례 이상의 대수술을 견뎌내며 향토사 연구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한문(漢文) 실력과 지칠 줄 모르는 인내력 그리고 오랜 공직생활을 통해 쌓은 지역유지들과의 친분 등도 선생이 향토사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계기였다. “고지식한 분이셨습니다. 노래나 바둑·장기 등 잡기는 전혀 즐기지 않으셨으니까요. 모든 에너지를 향토사 연구에 쏟아부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학술적 체계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아버님에게 부족했던 부분은 후학과 소장 학자들이 채워주리라 믿습니다.”  이 교수는 선친의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를 지켜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인천을 무대로 한 창작 소설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해방공간 인천을 무대로 좌우 이념대립을 그린 소설 '황해'를 비롯해 40여편의 소설 가운데 인천을 소재로 한 것이 30여편이나 된다.  “초등학교를 나와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아버님이 남기신 향토사료집 내용이 학술적 체계가 미진한 것은 당연합니다. 한 자연인의 순수한 향토애(愛)의 열정으로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도 향토사 연구에 밑거름을 뿌렸다는데 만족해 하실 것입니다.”

2005-07-21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27] 이훈익을 말한다/조우성 시인·인천시사 편찬위원

  사실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지역 대학은 물론 인천 출신의 소장 학자들조차 대부분 지역사 혹은 향토사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다. 학자가 연구하기에는 그 분야가 협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한 세대를 앞서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향토사를 생애를 두고 천착하셨던 고일, 최성연, 이훈익 선생과 신태범 박사 그리고 기전문화연구를 통해 고군분투하셨던 박광성, 김순제 교수와 김양수 선생 등은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인천석금, 개항과 양관 역정, 인천 지명고, 인천충효록, 인천사담 그리고 인천 한세기, 개항 후의 인천 풍경, 기전문화연구 등은 오늘의 '인천학’을 출범케 한 기념비적인 노작들이다. 특히 이훈익 선생은 향토사학자의 일반적 연구 범주를 넘어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각사등록 등 여러 사서들 가운데 인천 기사(記事)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세들에게 남겨 주셨다.  요즘은 승정원일기조차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는 판이지만, 이훈익 선생의 연구 시대만 하더라도 웬만한 한문 실력이 아니면 범접조차 못했던 분야를 선생은 과감히 파고 드셨던 것이다. 더구나 이훈익 선생은 생전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비(自費)를 들여가며 그 많은 저서를 발간하셨는데 이는 끈끈한 지역 사랑이 없인 불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지역사회는 향토사 연구 분야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최소한 인천 지역의 각 문화재단들은 향토사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인천 각 지역의 향토사가 튼실해져야 인천의 지역사가 체계를 세울 수 있고,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의 지역사가 제대로 기술돼야 그것들이 모여 올바른 한국사가 이루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글/조우성(시인/仁川市史 편찬위원)

2005-07-21 경인일보

[인천인물100人·27] 향토사가 서계당 이훈익

>27< 향토사가 서계당 이훈익 인천 향토사가(鄕土史家) 서계당(西桂堂) 이훈익(李薰益·1916~2002).  '…1883년 개항(開港)으로 커다란 충격파를 온몸으로 견뎌내면서 서구열강을 향해 치마폭을 벌려 신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민족의 영욕을 지켜 보아 온 인천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오래 지켜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이 제일 먼저, 가장 빠르게 뿌리 뽑히고 무너져 버려가고 있는 우리 고장이기도 하다…(중략)'. 이훈익 선생이 출간한 향토사료집 8권 가운데 제2집인 '인천지지(仁川地誌·1986년)' 서문에 나와 있는 글이다. 칠순을 바라보던 1983년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 문을 열고 타계하실 때까지 향토사(鄕土史) 수집과 발굴에 그토록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선생은 향토사 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문헌자료(文獻資料)의 정리와 고증을 뚜렷한 사관(史觀)으로 다잡아 정립하는 일은 역사학자 여러분이 하시고 있으므로 나는 나의 한계가 좁음을 느끼면서도 안심하고 내 나름의 지지(地誌)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仁川地誌 서문)'. 이훈익 선생의 채취가 흠씬 배어 있는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는 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 (사)대한노인회 인천직할시연합회 부설기관으로 출범했지만 선생이 사재를 털어 운영했던 곳이다. 선생이 타계한 직후 연구소에 보관돼 있던 2천여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서구문화원에 기증했다. 선생의 3남 3녀중 차남이자 인천 출신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이원규(57) 동국대 교수는 “연구소 문을 닫은 것에 대해 돌아가신 아버님은 물론 지역 원로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며 그 당시의 결정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연구소를 어떻게 해야할 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향토사를 연구하는 분도 없어서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인천역사자료관(옛 시장관사)과 화도진 도서관 등에서 요청이 있었지만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일하다가 쓰러지신 서구문화원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 상임감사로 선생과 10여년 이상 동고동락했던 김교진(77) 서구문화원 초대감사도 연구소 폐쇄에 대해서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교진 선생은 이훈익 선생과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다. 이훈익 선생이 도서관을 비롯해 인천 앞다바 섬과 골짜기를 뒤져 자료수집을 도맡았다면 김묘진 선생은 뒷마무리를 맡아서 처리하는 식이었다.  “그 양반은 쉴 줄을 몰랐습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이란 섬은 모조리 이잡듯 뒤지고 다녔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가리지 않고 정말 열정이 대단했었습니다. 연구소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이훈익 선생은 1916년 지금의 서구 연희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서구청을 비롯한 각종 공공기관이 밀집한 행정중심지로 탈바꿈했지만 70년대초에 전기가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이 나서 자랄 당시에는 인천의 오지 가운데 한 곳이다. 선생은 계양산 자락에 있던 부평보통학교(현 부평초)를 졸업한 뒤 서곶면사무소(당시에는 부천군 소속)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는 졸업해야 정식 공무원이 될 수 있었지만 한문에 조예가 깊고 일본어에 능통했던 선생은 임용연수를 받고 곧 면사무소 서기로 승진 임용된다. 아들 이원규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1961년 5·16직후 군사정권으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할 때까지 27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다.  공직에 있는 동안 인천의 각 출장소장(지금의 구청장에 해당) 등을 두루 역임했지만 현재 인천시청이나 경기도청에는 선생과 관련된 인사기록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선생은 이후 인천원예농협 전무로 옮겨 10여년 동안 근무하다 73년 정년 퇴직했다. 수집욕이 넘쳐 흘렀던 선생의 한 단면에 대해 아들 이원규 교수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농협에 근무하실 때 아버님은 수석(水石) 수집에 매달리셨습니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하여간 정부에서 자연보호를 위해 수석 수집을 단속할 때까지 무척 열심히 모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향토사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선생은 인천교육대상(1983년)과 인천문화상(1996년), 한국향토문화대상(1998년 서울신문사) 등을 수상했다.  1997년 4월에는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장으로 당선돼 2000년 3월까지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노인회장을 그만 둔 뒤 고향 원로들의 간청으로 서구문화원 출범과 인천 서구사(西區史) 출간을 준비하던 선생은 지난 2002년 2월 서구청에서 문화원 창립준비 모임을 주재하다가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서구문화원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2002년 4월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했으며 현재는 선생의 장남인 이중규씨가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구사(西區史)는 차남인 이원규 교수가 참여해 2004년 1월 출간됐다.

2005-07-21 김도현

[인천인물100人·26] '한국정치사 대표인물' 죽산 조봉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 죽산은 2선 국회의원과 2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승만 정권 시절 간첩혐의로 구속,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최근 죽산을 기리는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1년 국회에서 여·야 정치인 86명이 서명한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당시 국회가 여·야 대립으로 파행을 거듭하면서 사면복권이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죽산을 기념하는 사업이 인천에서 열렸다. 지난 주말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역사관 입구. 입구 한편에 세워진 높이 2.5m 가량의 비(碑)가 눈에 띄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竹山 曺奉岩 先生 追慕碑)'. 비에는 큰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추모비는 지난 2001년 7월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사업회'(당시 회장·유진국)가 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의 도움을 받아 건립된 것이다. 추모비에는 “선생께서 가신 지 42년 만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지도자가 손을 마주잡고 평화적 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염원이 현실화되는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2000년 7월 6일)”고 적혀 있었다. 앞서 기념사업회는 강화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또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50 강화읍사무소에 죽산 선생 생가터 표석을 세웠다. 강화에서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던 이상태(64·향토사학자)씨는 “당시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100명이 넘는 지역 인사와 시민들이 이 사업에 동참했다”면서 “죽산은 간첩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는 이유로 사법살인을 당한 비운의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사)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은 죽산을 기념하는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동상에는 적게는 5억원부터 많게는 25억원까지 투입될 예정이다. 새얼은 건립비용을 전부 시민 후원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용택 이사장은 “많은 시민의 참여와 후원이 죽산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며 “죽산은 멸공통일을 외치던 시절에 남북 평화통일을 주장한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죽산은 인천 사람이다. 1899년 강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정치인 이전에 활발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죽산은 1919년 스무살의 나이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해방될 때까지 일본경찰에 3번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1946년) 죽산은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반공노선을 천명한다.당시 대중일보는 '좌익진영 대난조-조씨 공산당 불원 성명'이란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죽산의 공산당 탈당을 대서 특필했다. 이후 죽산은 정계에 입문한다. 그는 1948년과 1950년 인천에서 2번 국회의원을 지낸다. 또 1952년에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이게 화근이 됐다. 죽산은 대통령 출마 후 1954년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기 위해 1955년 진보당(進步黨) 창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한 것. 죽산은 야당 단일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낙선했다. 이승만은 504만표를, 죽산은 216만표를 각각 얻었다. 나중에 극심한 개표 부정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잇따라 체포했다. 또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며 간첩혐의와 진보당에서 내건 평화통일론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국가보안 위반혐의를 씌웠다.1심판결에서 재판부는 죽산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만 인정하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간첩혐의를 인정해 죽산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죽산은 결국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그는 “이승만 박사는 몇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고 나는 모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다”는 유언을 남겼다. 오경종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조직국장은 “죽산은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까지 많은 공로를 끼친 정치인”이라며 “반드시 명예회복과 간첩혐의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2005-06-30 김장훈

[인천인물100人·26] 인터뷰/정태영 역사문제연구소 자문

“죽산 선생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내몰려 처형당한 비운의 정치인입니다.” 정태영(75·역사문제연구소 자문) 박사는 죽산에 대한 재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박사는 “죽산을 비롯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내몰려 처형됐다”고 말했다. 또 “죽산은 특히 독립운동가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이승만 정권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박사는 서른살 되던 해 진보당 당원으로 활동하다 죽산과 함께 구속됐다. 당시 정 박사는 동양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진보당 사건으로 회사에서 쫓겨났고, 이 때문에 미국 유학의 꿈도 접어야 했다”고 말했다. 또 “수년간 감옥살이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자신의 무죄를 알리기 위해 진보당 연구에 몰입했다. 결과 그는 건국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 박사의 진보당 사건과 죽산을 재평가하는 작업은 이 때부터 본격화됐다. 그는 여러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99년 '죽산 조봉암 전집(5권)'을 출간했다. 정 박사는 “진보당은 반자본, 반공산의 중도파 노선을 표방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을 해산시킨 것은 진보당이 자신에게 맞선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 박사는 “죽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전장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해빙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방송과 언론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야 한다”면서 “그래야 뒤틀린 역사가 바로 잡히지 않겠냐”고 말했다.

2005-06-30 김장훈

[인천인물 100人·25] 최초 근대식 군함 함장 신순성

>25< 최초 근대식 군함 함장 신순성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자 근대식 기선의 선장으로 알려진 신순성(愼順晟·1878~1944) 선장의 생존 당시 행적을 쫓아 지난 4월말 신 선장의 손자인 신용석(64·한국인권재단 이사장)씨의 인천시 중구 송학동 집을 찾았다. 신씨는 "아주 어렸을적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는 것이 없지만 아버지(신태범 박사)로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며 할어버지의 발자취를 비교적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함장인 신순성. 구 한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해군력의 증강을 꿈꿔왔던 고종황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55만원을 들여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도입했다. 이 군함은 고종황제에 의해 '나라의 무력을 키운다'는 뜻을 가진 '양무호(揚武號)'라고 명명됐다. 그리고 바로 이 군함을 이끌고 1903년 4월16일 인천항에 닻을 내린 이가 신순성이다. 신순성은 고종황제에 의해 양무호의 함장으로 임명된다. 황성신문은 1903년 8월19일자 보도를 통해 '군함 양무호 함장은 일본 유학생으로, 기선 견습생 신순성씨가 피임한다더라'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신 함장은 양무호의 함장으로 실제 운항을 해보지도 못했고 그리 오래 근무하지도 않았다. 당시 구 한말정부의 운명처럼 양무호의 운명 또한 순탄치 못했기 때문이다. 동경상선학교에서 근대식 기선교육을 이수한 신순성 함장과 72명의 승무원으로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해군 군함으로 출발한 양무호. 그러나 양무호는 빈약한 정부의 재정에 막대한 지출을 초래했고 군함으로서의 구실을 하기에 모든 시설이 낙후된 상태였다. 결국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한번도 하지 못한채 러일전쟁직후 화물선으로 개조됐고 1907년 부산 선원양성소의 실습선으로 사용되다 그 이듬해 일본상사의 소유가 돼 버렸다. 중고선인 양무호로 인해 골치를 앓던 구 한말 정부는 이번에는 신조선 발주를 계획, 일본으로부터 1천56t급 광제호(光濟號)를 도입했다. 물론 광제호 인수 역시 신 선장이 맡았고 광제호는 1904년 11월 인천항에 도착해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경비, 등대 순시, 세관 감시선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신 선장은 이때 이미 광제호 인수를 앞두고 정부가 개편한 해군 편제에 의해 그의 오랜 꿈이던 해군장교가 됐다. 그러나 해군사관으로서의 신 선장의 조국에 대한 봉사는 만 1년에 그치고 만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부 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광제호는 군함으로서의 임무를 거둔 채 인천항을 모항으로 하는 관세국 소속 세관 감시선으로 운명이 바뀐 것이다. 통감부 정치가 실시됐지만 광제호는 한일합방전까지 태극기를 게양하고 운항했다. 1910년 8월29일 치욕적인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기 전날밤 신 선장은 광제호에서 나부꼈던 태극기를 내려 집안에 보관했다. 이 태극기는 신 선장이 세상을 떠난 뒤 해방되던 해 한국기선의 취항식에서 신 선장의 장남인 신태범(의사·향토사학자) 박사가 가지고 나와 “구한말 광제호에 달았던 것이니 일장기와 바꿔 달아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 선장은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발족하면서 일제가 광제호를 이 회사에 이양하자, 상선의 선장으로 근무했다. 인천항이 생활의 주무대였던 신 선장은 서울의 가족을 이끌고 1917년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에 해원양성소가 개소되면서 광제호는 실습선을 겸하게 됐고 신 선장도 광제호 선장과 실습교관을 겸하면서 후배 해기사 양성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정년 퇴직후 가끔 인천앞바다에 나가 후배들의 모습을 둘러보거나 친구들을 찾아 여행을 즐기며 만년을 보낸 신 선장은 그러나 조국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2월7일 경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합방되던 해, 당시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3세에 결혼한 신 선장. 3남1녀중 장남인 신태범 박사는 경성제대를 나와 인천 최초의 개업의로 활약했으며 2001년 작고하기 전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개항이후 인천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했다. ◇신순성이 걸어온 길 1878년 신순성이 태어난 해는 서구의 열강들이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던 시기. 소년 신순성은 우리나라의 고루한 봉건사회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고 이 같은 진보적 성향은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토지의 세습이 곧 봉건적 세습제도로 이어진다고 보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집 이외에는 어떠한 부동산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개화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서당 대신 한성일어학교에 입학해 일어와 신(新)문명을 접했다. 여기서 신순성은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를 만나게 되고 인생의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박영효의 추천에 의해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신순성은 일본 구마모토현 청정횡중학교에서 2년간을 수학한 뒤 1897년 동경상선학교에 입학해 4년간의 근대식 항해교육을 받게 된다. 원래 그의 일본 유학은 조선정부의 해군사관이 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일본 해군사관학교는 일본 사족에게만 입학을 허가해 신순성은 그와 유사한 교육기관인 상선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5-06-09 김신태

[인천인물 100人·24] 항일 언론투쟁가, 파하 이길용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전 일본 언론사에선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일본 언론이 관심을 보인 것 중 하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조선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이길용(1899년~?)기자가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신문에 보도한 사건은 일본 언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길용기자의 셋째 아들 이태영(64)씨는 “88서울올림픽 당시 일본 언론인들이 취재 과정에서 총독부의 혹독한 감시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항일정신을 불태운 아버지의 기자정신에 대해 '용감했다', '기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평가하는 등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우리 나라 항일 언론투쟁사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하(波荷) 이길용은 1920년대~30년대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체육발전과 항일운동에 나섰던 대표적인 엘리트였으며, 척박한 한국 체육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한국 체육계에 남긴 업적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길용은 1899년 9월9일 음력으로는 한가위 날 경남 마산에서 이차상씨와 이복순여사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산의 경작지 중 상당 부분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게 된 그의 가족은 울분을 달래며 고향을 떠나 인천 동구 창영동(옛 인천백화점 건너편)으로 이사한다.  그는 인천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4세의 나이로 배제학당에 입학한다. 이 때부터 경인기차통학생회를 통해 인천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체육활동과 문화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916년 배제학당을 졸업한 이길용은 일본 유학에 나섰다가 가족들의 만류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 1918년 철도국의 역무원으로 취업한다.  1919년 이른 봄. 이길용은 3·1운동을 전후해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 독립운동 조직망을 확산시켜 나갈 때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고 활동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돼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3년 형의 실형을 받는다.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이길용은 인천에 거주하는 배제학교 학생들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인배회'에서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회장과 총무를 번갈아 맡아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에 문화사업을 목적으로 창립한 '제물포청년회'에도 가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1922년 이길용은 옥고를 치르다 인연을 맺은 동아일보 사장 고하(古下) 송진우를 만난다. 이길용의 명석한 두뇌와 항일정신, 필력(筆力)을 높이 산 송진우의 끈질긴 설득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해 인천지사의 일을 함께 보면서 운동부(현 체육부)를 전담한다. 1924년 8월에는 '조선운동기자단(한국체육기자연맹의 전신)'을 조직하고 체육계의 비약적인 발전에 공헌한다.  그는 이후 일본 등지를 돌며 스포츠 취재에 맹활약을 보이다 1936년 8월25일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우고 또 다시 옥고를 치른 것으로 인해 해방전까지 병고에 시달리며 암울한 시기를 맞는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과 유족들의 증언을 모으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1936년 8월 24일 오전. 출근길에 나서던 동아일보 운동부 주임(현 체육부 부장) 이길용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가 매월 2회 발행하는 '아사히 스포츠'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도려낸다.  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조선인 청년 손기정 선수가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당당히 서 있는 선명한 사진이었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현진건 사회부장에게 사진을 내보이면서 “손 선수의 가슴 부분을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운을 뗀다. 가슴의 붉은 동그라미(일장기)를 가리키는 것은 현 부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제안에 부장은 물론 국장, 동료 기자들도 의견을 같이 했다.  이길용은 곧바로 이상범 화백에게 달려가 “붉은 동그라미를 엷게 할 수 있겠나”라고 물었고, 이 화백은 “엷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편이 간단하겠다”고 답했다.  이날 오후 3시 총독부의 신문 검열을 위해 보낸 1판(版)에는 손 선수의 가슴에 클로즈업되어 있는 붉은 동그라미 마크가 선명하게 비춰져 있었다. 그러나 2판부터는 그 가슴의 일장기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 사진의 수정 사실을 재빨리 포착한 것은 일본군 사령부였다. 사령부가 신문사에 호출을 내린 것은 오후 4시. 동시에 신문의 발송과 배달 중지도 내려졌다. 그러나 이 시간에 문제의 신문은 태반이 발송과 배달이 끝난 때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 두번째로 시도된 사건이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길용은 이보다 4년 앞선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 때 이미 선수들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는 항일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대표로 마로톤 대회에 출전한 조선인 김은배 선수가 6위, 권태하 선수가 9위의 전적을 올렸다. 이길용은 이들 선수들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감쪽같이 없애 버린 채 보도했다. 사진에는 일장기가 보이지 않고 선수들의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영문 머리 글자인 'Y'마크가 표시돼 있었다. 다행히 일본 언론들은 마라톤 참가 선수 중 한국인 선수들의 사진을 한 장도 게재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길용과 화백 이상범의 비상한 고안으로 신문사 내에서 은밀히 사진 수정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한편, 이길용은 두번째 저지른 일장기 말소로 사회부장인 현진건, 사회부기자 임병철, 화가 이상범 등과 함께 연행돼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40일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모든 사회활동이 금지된 이길용은 이후에도 반일(反日) 발언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4차례나 투옥됐다가 47세의 나이에 해방을 맞는다. 이길용은 이후 김성수, 송진우, 김준연, 조병옥 등과 함께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하고 조직부 차장을 맡았다. 그는 동아일보 복간과 아울러 이듬해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되면서 체육회의 중책도 다시 맡아 활동하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피란하지 않은 그는 한민당과 반탁활동으로 북한군에 끌려가 두 차례 조사 끝에 1950년 7월 17일 다시 연행돼 납북됐다. 그러나 납북 이후 이길용에 대한 행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유족은 물론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1989년 7월 16일 한국 체육기자연맹 이사회는 독립운동가이자 체육기자로 일장기를 말살해 민족의 기상을 대변한 이길용기자의 불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했다. 이러 1991년 8월 15일 광복 45주년을 맞아 정부는 이길용기자를 건국훈장에 추서했다. ■인터뷰/ 이길용 선생 아들 태영씨 "우연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체육부기자로만 33년을 보냈습니다." 파하 이길용 선생의 셋째 아들 이태영(64·88올림픽CC 대표)씨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체육 전문기자를 거쳐 체육부장을 지냈다. 그가 33년간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체육부장을 지낸 세월만해도 14년에 이른다. "10살 때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만 기억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엄하고 강인하셨습니다. 집에서 손님들과 주연을 자주 베푸는 호인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선배인 아버지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척자 정신이 강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국일보에서 근무했을 때 당시 장기영 사장은 틈만 나면 "조상 부끄럽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길용 선생이 언론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해방 후 처음으로 레슬링에서 우승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 손기정 선생님과 함께 현장에서 시상식을 지켜봤어요. 처음으로 우리 나라 선수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모습도 감격스러웠지만, 손 선생님께서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게 난다"고 하신 말씀이 더 가슴을 시리게 하더군요." 이길용 선생은 한국체육사를 편찬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던 중 납북됐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준비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사 체육부장들과 함께 한국체육사(20권)를 편찬했다"며 "아버지가 준비하시던 작업을 뒤늦게나마 마무리한 것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처럼 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체육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체육기자연맹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KOC위원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편집위원장, 서울체육회 이사, 문화관광부 자문위원, 명지대 객원교수로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체육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인 것 같다"며 "지금도 체육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서습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있다. 납북 이후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문제다. 수십년간 여러 경로를 거쳐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다만 납북되면서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묘소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소원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것이다. '6·25납북인사 가족협의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전쟁시 납북된 인사만 8만여명에 이른다"며 "정부가 전쟁 후 어민납북자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도 전쟁전 납북자들은 행방불명자로 취급하고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2005-05-26 서진호

[인천인물 100人·23]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

>23<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 지난 1901년 5월14일 오후 2시 새로 건축된 서울 상동교회에서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제17회 한국선교회가 열렸다.  이날 무어 감독(Bishop D. H. Moore)의 주례로 시란돈, 조원시, 로보올 등 서양 목사 보좌를 받아 대한기독교감리회 인천내리교회 초대 교인인 김기범(1868~1920년)이 김창식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기범은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한국 개신교의 씨앗이 뿌려졌던 인천 내리교회의 초대(외국인 목사 포함하면 3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  미국 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 파견 최초 선교사로 인천내리교회의 선구자였던 아펜젤러 목사와 2대 조원시 목사의 뒤를 이어 최초의 한국인 목사를 임명함으로써 신앙과 선교활동의 폭 넓혀 가기 시작했다.  김기범은 1903~1905년, 1907~1910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세 확장은 물론 교육운동과 항일운동등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는 목회활동에 주력했다.  김기범은 황해도 연안의 부농 양반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보부상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 태어난 만큼 서울을 자주 오가며 서양 문물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보부상과 함께 인천(당시 제물포)을 찾은 김기범은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 전도활동에 매진하던 노병일 권사, 백혜란 전도사 등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한발 더 나가 이명숙, 장경화, 복정채 등과 함께 인천내리교회의 초대 교인으로 본격적인 신앙인의 길을 택한다.  인천내리교회가 지난 1985년 펴낸 '내리 100년사'는 “(김기범은)노병일씨의 전도로 후임 내리교회 전도사가 돼 1899년 신학회 전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그 해 원산(元山)으로 파송됐다가 1901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뒤 그 해 내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내리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로 봉직하던 김기범은 교회 안에 영화학교를 설립해 인가를 받아내고 1904년엔 벽돌로 된 교사(校舍)를 신축하기도 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때 교회 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체되기도 했다.  김목사는 1902년 11월 미국 하와이로 50여명의 교인들이 이민을 떠난 뒤 급격히 교세가 위축되자 헌신적 교인을 모으고 신앙심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특히 김목사는 당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선교활동에 애를 먹던 외국 선교사들과 달리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고 성실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 두터웠다고 한다. 덕분에 교세가 확장됐지만 김목사는 건강을크게 해쳐 서양 선교사들처럼 1905년 유급 안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인 목회자를 경시했던 개신교의 풍토에서 김목사가 유급 안식년을 받아낸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급 안식년제 요구가 교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목사는 스스로 교회일에서 손을 떼고 안식년에 돌입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쓰여진 연례보고서를 비롯, 각종 선교사 자료엔 이후 행적이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목사는 교계의 미움을 산 것으로 추측된다.  향토사학계와 한국기독교계 일부 인사들은 “미국 선교사들보다 훨씬 능력있는 지도자로 추앙받던 김기범의 1905년 이후 행적이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백인우월주의의 귀결”이라고 평가한다.  거부의 아들인 김기범이 안식과 돈 때문에 미국 선교본부에 유급 안식년을 요구했을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기범의 유급 안식년 요구는 7년마다 1년씩 갖는 인식년 적용을 한국인 목회자에겐 허용하지 않는 서양 선교사들의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기범의 구체적인 행적과 활약상은 변변한 자료나 고증도 없이 영영 역사 속에 묻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최영호 인천내리교회 행정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족적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김기범 목사님의 흔적을 찾는데도 힘쏟고 있으나 자료 발굴이 매우 어려워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기범의 장증손녀 김민자(46)씨는 “할아버지는 안식년은 물론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를 마친 뒤로도 지금의 북한 지역과 옹진군 섬지방을 돌며 선교활동에 힘 써 왔다고 선친들로부터 들었다”고 전한다.  그녀는 또 “이 과정에서 당시 서해안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적들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병을 앓게 됐고 병환이 심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1920년 영면한 이후 그의 묘지는 수봉공원에 있었으나 1972년 지금의 서구 왕길동 묘역으로 옮겨 졌다.

2005-05-05 윤관옥

[인천인물 100人·22] 초등교육 선구자 전학준 신부

>22< 초등교육 선구자 전학준 신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이후 전세계에서 종교와 정파를 떠나 많은 이들이 애도의 뜻을 보냈다.  천주교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교황의 서거를 애도하는 것은 교황이 전세계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헌신한 행동하는 교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교황 중 유일하게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 대해 각별히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교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교황의 선종 소식은 인천에서 교육·의료·사회사업으로 인천의 소외된 이웃들을 보듬었던 푸른눈의 한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인천 답동성당 제4대 신부였던 전학준(全學俊·Eugene Deneux·1873~1947)신부다.  그는 20대 약관의 나이로 인천과 인연을 맺어 인천답동성당의 주임신부로, 박문학교의 교장으로, 보육원 아이들의 어버이로 35년 반평생을 보냈다.  1873년 7월26일 프랑스 아라스 교구의 웨스트 햄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전 신부는 1896년 12월19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의 선교 사명을 띠고 3년후에 한국에 파견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주로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1653년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가톨릭 포교 단체다.  전 신부가 제4대 인천답동성당 신부로 부임한 것은 1904년 4월14일.  전 신부는 부임 5년전인 1899년 3월6일부터 인천답동성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서요셉 신부를 도와 사목활동을 했던 터라 인천 주민들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그의 사목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인천답동성당에도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본인들의 침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전 신부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15칸짜리 건축물을 성당 부지에 건축했으며 성당 근처에 위치한 일본학교로 통하는 도로를 내려고 성당 부지를 침범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전 신부의 각별한 애정은 우선 이같은 일제의 무분별한 침탈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천주교답동교회가 1989년 펴낸 '답동대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전 신부는 일본인들의 무단 건축에도 불만이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퇴거를 염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수월하게 들어와 일본식 건축물을 지을 경우, 한국인들에 대한 침범이 더욱 급속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전 신부의 인천에서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우선적으로 교육사업이 꼽힌다.  그는 인천에 둥지를 튼 즉시 인천박문학교를 설립(1900년 9월1일)하고 천주교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베푸는 일부터 착수했다.  그러다가 1909년에는 직접 초대교장으로 취임해 학교를 운영했다. 이 시기에 박문학교를 다닌 학생으로는 후에 제2공화국의 총리 된 장면 박사와 서예의 대가 박세림씨 등이 있다.  전 신부는 박문학교 초창기에 학교를 유지 경영하는 데 많은 고초와 희생을 겪어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재정상의 경영난보다도 천주교에서 설립 경영하는 학교라는 데서 일본인의 침략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기피하는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박문학교의 학생수는 매년 꾸준히 늘어 1908년 55명에서 1909년 65명, 1910년 118명, 1911년 165명, 1912명 182명에 달했고 1915년과 1916년에는 200명을 넘었다.  이처럼 학생수가 증가하자 전 신부는 1914년 학교 내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까지 신축했다. 이어 1917년에는 남녀 두 학교를 합쳐 인천박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박문학교의 설립, 운영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이 학교가 제3자의 도움없이 오로지 전 신부가 상속받은 유산만으로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이다.  이처럼 외국인 신부가 인천에서 교육사업에 쏟은 정열은 지금 학교 설립 100주년을 훌쩍 넘긴 인천박문초등학교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 신부는 학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후에는 바오로 수녀원을 비롯해 해성보육원 등 본당의 기반을 이루는 시설을 확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역시 사재를 털어 용현동과 영종도 등지에 20여 만평의 농토를 마련, 보육원에 기증하는 등 인천지역의 오갈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재정적 기반도 굳혀 놓았다.  전 신부는 또 인천의 건축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35년에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본당 성당 증·개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당 신축공사에 나선 것이다.  3대 서요셉 신부가 지은 구 성당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어려운 공사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데 3년이 지난 1937년에서야 준공을 보게 되었다.  높이 솟은 고딕 건축물로 새로 탄생한 인천답동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 신부는 의료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3층으로 된 현대식 해성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국만리 타향땅에서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전 신부는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전 신부가 인천에서 보낸 헌신적인 삶은 그의 장례식에 즈음해 당시 인천시장이 남긴 말에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전 신부가 1947년 12월 9일 선종한 뒤 인천시장은 "전 신부의 업적과 비교할 때 시민들이 보답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미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의 유해는 독쟁이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인천교구 하늘의 문 묘원에 이장돼 있다. ■ '답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문화재 1937년에 현재 모습 갖춰 지난 4일 인천시 중구 답동 가톨릭회관 옆 언덕길을 올라 답동성당에 이르니 성당 전면에 설치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을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전체에 애도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서도 답동성당은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답동성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제4대 전학준 신부 때다. 답동성당이 세워진 것은 제3대 서요셉(Maraval)신부 시절인 1896년 11월. 당시 성당위에 작은 뾰족탑이 있었는 데 선창가나 시내 곳곳에서 이 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답동성당은 제4대 전학준 신부에 이르러 확장공사에 돌입, 성전 외곽에 벽돌을 쌓은지 3년만인 1937년 6월 30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평 396평에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추고 있다. 경인지역 가톨릭의 모(母) 교회격인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교육, 의료, 사회사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인천의 격동의 역사와 함께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때론 쫓기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지은지 100년을 넘은 답동성당은 현재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 287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신적, 문화적, 신앙적 유산의 요람으로서의 가치에 교인과 시민들은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2005-04-14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21] 미술계 산 증인 석남 이경성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이자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석남(石南) 이경성(1919~). 우리 나라 공립박물관 1호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 나라 미술계의 '산 증인'으로 일생을 미술과 함께 했다. 미술비평가, 미술관장, 미술대학 교수, 아마추어 화가…. 미술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외길을 걸어왔다. 한평생 미술을 향한 열정으로 예술혼을 불살랐지만 여든일곱의 나이 탓인지 이젠 백발에 병색이 완연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22일 오후 8시. 그가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한 노인간호센터를 찾았다. 입원할 정도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남독녀인 딸(50)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부양가족이나 변변한 거처도 없어 이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미술 인생은 '우연'으로 시작된다. 그 운명적 우연은 몇몇 사람과 닿아 있다. 1919년 2월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되던 해에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마중나오기로 한 친구 대신 그곳에서 인천 출신 미술학도 이남수를 만나면서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방을 함께 쓰던 친구의 어깨 너머로 화집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때부터 그의 생각은 늘 미술에 가 있었다. 우리 나라 미학미술사의 선각자이자 당시 재경부립박물관장이던 우현 고유섭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우현의 조카를 통해 서책에 대한 조언과 발송을 교환하며 고유섭에 대한 존경심을 키웠다. 우현에게 띄운 서신 한 구절은 유명하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 실례가 되겠습니까?” 답장은 해주지 않았지만 우현은 박물관장이 되겠다는 꿈을 석남의 가슴에 품게 했다.  “아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 나라 현대미술은 굉장히 좋아졌어요. 한국의 미학이라는 게 서양의 것과 다르거든요. 색도 흰색, 검정색, 이런 것이 원색 같은 것은 도저히 그 사람들을 못 따른단 말이에요. 한국의 철학, 샤머니즘, 종교…. 그래서 우리 미술은 다양한 색채보다는 무색, 검정색 이런 특징이 있어요. 역시 한국적인 게 세계화의 길입니다.”  석남이 미술사학을 전공한데는 일본인 교수와의 운명적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1942년 두번째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 대학 미술사학과 아이쓰 야이치 교수가 건넨 격려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너희 나라 미술사는 일본인에 의해 연구되어 잘못 해석된 것도 많다. 너 같은 조선 청년들이 직접 조선의 미술을 연구하라'는 말이 내 인생을 결정지은 셈이죠.”  1943년 전쟁 통에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31일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된다. 5개월여 준비끝에 당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있던 향토관건물(독일인이 지은 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이듬해 4월1일 문을 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관장을 맡아 큰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 저곳을 쫓아다니며 박물관에 전시할 문화재를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시 웃지 못할 일을 하나 소개했다. “하루는 작약도에 살던 스즈키라는 사람이 일본 패전 후 귀중한 도자기를 영종도에 숨겨 놓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직접 가서 1천여 점을 압수해왔지. 고려청자로 보이는 3~4점은 박물관에 전시까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가짜였어.”  박물관을 둘러 본 고고 미술계 개척자인 우현의 제자 황수영 선생이 당시 '민성(民聲)'이라는 잡지에 인천시립박물관에 가짜 고려청자가 진열돼 있다고 기고하면서 알려졌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그는 요즘 같으면 목이 달아날 일이지만 그 일을 계기로 고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석남은 인천시립박물관 이외에도 홍익대와 이화여대 박물관 등을 새로 개관하고 초대 관장으로 취임했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는 등 박물관, 미술관과 인연이 깊다. 1947년엔 우리 나라 최초의 아트센터라고 할 만한 '인천시립예술관'을 만들어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인천은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젊은 신예 작가들의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석남은 1981년 석남미술상을 제정해 20여년에 걸쳐 35세 미만 작가들에게 수상의 혜택을 안겨주고 있다. 또 석남미술재단(1989)을 세워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 화가'라고 말한다. 수십차례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그리기에도 남다른 면이 있다. 작품 소재는 주로 '사람'과 '산'이다.  “사람을 그리다 보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 같아 텅빈 마음이 조금이나마 메워져요. 병원 생활을 하던 최근에는 병실 밖으로 보이는 산을 주로 그렸죠.”  아흔 가까운 나이로 몸은 성치 않았지만 석남은 마음만은 여유로워 보였다. 1998년에 출판한 회고록(어니 미술관장의 회상)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미술 속에 살아가고 또한 미술 속에 죽는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그는 "미술 속에서 행복하게 죽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2005-03-24 이우성

[인천인물 100人·20] 사회운동가 유두희

'유두희(劉斗熙)'.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이 거세던 1920~1940년대 초기 인천지역에서 노동, 교육, 언론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중심적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철저히 외면당한 이름이다. 항일의 최선봉에 섰지만 일제 하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이후 지금까지 그에 대한 행적은 철저히 지워졌다. 지난 7일 오후 7시30분께 인천시 계양구 작전2동의 한 허름한 아파트. 어렵사리 수소문해 유두희 선생의 아들인 대관(80)씨를 찾았으나 그에게선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아버님에 대해 듣고 싶어 왔다”고 하자 백발의 노인이 된 아들은 “그 사람 여기 없다”면서 현관 문을 닫아버렸다. 말씀해 주시면 (아버님의 명예회복에)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면서 계속해 문을 두드렸지만 “됐어요!”란 한 마디 이후엔 대꾸도 없었다. 6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가족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 속에서 아들은 팔순이 될 때까지 얼마나 큰 응어리를 안고 살았으면 저렇게 아버지를 부정할까 하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 날엔 동사무소 관계자를 대동해 다시 대관씨 집을 찾았지만 여전히 현관 문을 열 수는 없었다.  유두희 선생은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나 인천 영화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영화초등학교엔 선생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고 했다. 1945년 11월 11일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행적은 당시 신문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1945년 11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전하고 있는 대중일보는 유두희 선생을 '인천 노동사상(史上) 잊지 못할 무산계급(민중) 교사였다'고 칭하고 있다. 또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유를 '재직 당시에 받은 혹형으로 다년간 병석에 누웠다가 별세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는 기사 말미에 선생의 약력을 적고 있는데, ▲동경에서 고학 ▲19세부터 소년운동 지도, 한용청년회·제물포청년회 등을 결성해 청년운동에 열성 ▲1925년 이래로 인천 무산청년동맹을 비롯 각 지방 청년회를 결성 지도,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조직 그리고 인천 최초의 공산당 및 공산 청년동맹원으로 지하운동에 심혈을 경주 ▲중외일보 기자와 무산자신문 지사장 등으로 언론지도 ▲조선 노동동맹, 경기도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5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피검돼 8년간의 옥중 생활에 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등 다방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활약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일제는 노동운동과 공산당활동을 가장 경계했다고 한다. 민족주의 인사들보다 노동운동이나 공산주의활동을 한 경우 고문의 강도도 높았고, 형량도 월등했다고 한다. 이 당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체포돼 수감생활 중 얻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20년대부터 인천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노동, 교육, 언론 등 각종 단체의 주요 인사 명단에 '유두희'란 이름 석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923년 10월 1일부터 영화학교에서 시작된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한 것으로 당시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이 야학이 이듬해엔 인천소년회 창립으로 발전한다. 1924년 5일 영화학교 강당에서 치러진 인천소년회 창립대회에서 유두희 선생이 취지를 설명할 정도로 주도적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인천소년회 총무를 맡았다. 또 1925년엔 취학연령에 있으면서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을 설립,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수는 30여 명, 교사는 선생과 고일씨를 포함해 8명이었다. 선생이 펼친 노동야학이 소년운동으로 그리고 초등교육기관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매년 조직과 역량이 커지던 선생은 1926년 2월 12일 일본검찰에 붙잡힌다. 방역비 임치금문제로 인천신용조합장 최응삼과 충돌이 있었는데, 당시 검거된 인사는 선생을 비롯해 곽상훈, 고일, 안기성, 강복양 등 5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인천정미소 파업운동을 주도하는 등 노동운동에 매진, 1926년 8월 25일엔 인천청년노동조합 창립 발기인대회 임시의장을 맡았다.  그는 특히 1927년 12월 5일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곽상훈씨 등과 함께 총무간사를 맡는다. 회장은 하상훈씨였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노동사건엔 늘 선생이 끼었고, 경찰에 여러 차례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선생 별세 6개월 여 이후인 1946년 5월 1일 치러진 노동절 기념식에선 최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권평근 선생과 함께 유두희 선생도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이날 노동절행사를 대중일보(5월 3일자)는 “해방 후 처음 맞는 공업도시 인천의 메이데이 기념식과 동 대회는 1일 오전 10시서부터 시내 도원동 공설 그라운드에서 시내 60여 노동단체가 참가해 성대히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유두희란 이름은 이날 노동절 표창 이후엔 '일제 때부터 이름있는 인천지역 공산주의자'로 내몰렸고, '반공'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수십년 동안 묻혀 있었다. ■ '유두희 선생' 취재기 '빨갱이' 치부 연구 배척… 유가족 냉담도 가슴아파 해방 60년을 맞는 올 해지만 아직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항일투쟁'에 대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제 강점기 인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유두희 선생을 취재하면서 더욱 그랬다. 사회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해방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아직도 '빨갱이'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팔순의 아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살아있다. 아들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전체의 '병'인 것이다. '유족을 취재해 살아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절반의 취재가 부끄러웠지만 아픈 현실이라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사를 작성했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유두희 선생은 인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 현대시기 사회 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배척돼 왔다"면서 "이제라도 올바른 역사의 끈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선생 등에 대한 연구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유두희 선생이 참여했던 공산당주의운동은 일제에 항거할 가장 강력한 무기로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것이란게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리민족의 힘만으로 일제를 물리치기엔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전세계의 노동자의 힘을 빌려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정권 수립 이전에 공산주의에 참여했다가 해방직후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까지 여전히 '공산당'이란 멍에를 씌워선 안된다는 것이다. 유두희 선생의 아들 대관씨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2005-03-10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19] 한국 서예계 거봉 동정 박세림

불혹(不惑)의 나이에 한국 서단 최고의 자리에 오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그는 1967년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과 대한민국 '10대 서예가'로 선정됐다.(당시 신동아 4월호) 43세 되던 해의 일이다. 동정은 인천사람이다. 강화가 그의 출생지다.  그는 짧다면 짧은 반세기 동안 인천에서 수십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인 서예계의 거봉(巨峯)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런 동정의 예술혼을 고향 땅 인천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지난달 17일 대전시 동구 용운동 대전대학교 박물관. 대전대 도서관 한켠에 자리잡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동정의 서예세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평생동안 남긴 주옥같은 작품 수백여점은 박물관 벽면에, 가족사를 담은 사진과 동정을 서예계로 이끈 각종 중국의 고서 등은 전시실에 보관돼 있었다.  한국서단을 대표하고 인천 서예의 위상을 높였다는 그의 예술혼이 대전으로 옮겨진 까닭은 무엇일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오빠(태병·동정의 외아들·사망)는 아버지의 삶을 인천에 남기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인천에서는 어느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빠는 1997년 아버지의 제자(대전대 서예과 정태희 교수)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전대에 모든 작품과 유품을 기증했습니다.” 동정의 큰딸 용병(53·서예가)씨가 설명해 줬다.  용병씨는 “아버지의 작품과 유품이 대전으로 옮겨질 당시 인천문화원 원장을 비롯 많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인천은 예술인을 천시하는가'라고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정은 1925년 4월 강화도 내가면 황청리에서 아버지 동관(東觀) 박헌용(朴憲用)과 어머니 유(柳)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동정은 6세때 한문과 궁체에 조예가 깊은 할머니 변(卞)씨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다.  할머니가 동정에게는 첫 스승이었다. 2년 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동정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서예를 배운다. 동정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며 강화도 역사책인 강도지(江島池)를 간행한 문필가였다. 서예에 있어 가학(家學)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이처럼 학식을 겸비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은 동정이 서계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정이 15세 되던 해 동관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와 홀로 남겨진 동정은 1939년 가정형편상 학교를 포기하고 독학으로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동정의 서예활동은 국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로서는 국전을 무대로 활동하는 것이 서예가로서 가장 비중있는 활동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1953년 제2회 국전 서예부문에 입선하면서 서계에 이름을 알렸다.  58년부터 60년까지 연3회 국전 서예부문 특선과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 국전 추천 초대작가를 거쳐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서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 사람들은 그를 '국전선생(國展先生)'이라고 불렀다.  '일필휘지(一筆揮之)'.  동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제자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은 동정의 예술적 기질을 이처럼 표현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붓과 먹, 종이만 있으면 즉석 휘호도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기초가 튼튼했다는 것이다.  도진씨는 “선생님은 작품활동을 하면서 망설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면서 “비슷한 나이의 서예가와 비교하면 족히 10년은 성숙한 작품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동정의 지역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지역문화예술의 부흥을 위해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을 시작으로 예총 경기도지부장을 5차례 역임했다. 1971년에는 인천문화원장도 맡았다. 지역 문화부흥을 위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동정은 그의 첫 개인전을 고향 땅 강화도에서 열었다.  동정은 당시 경기일보(단기 4291.12.13)와의 인터뷰에서 “문화의 혜택에 굶주리고 예술을 감상 음미할 기회가 드문 메마른 땅에 나의 예능 발표가 다소나마 영양소가 될까 하는 희구(希求)에서도 쾌히 결정하였던 것이다. 나의 전시가 강화(江華) 초유(初有)의 미술행사라고 하니 얼마나 문화의 혜택이나 행사에 굶주려 왔는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술회했다.  동정의 후진양성활동은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손꼽힌다. 그는 65년 당시 중구 내동 창제한의원 2층에 동정서숙(東庭書塾)을 마련하고 수십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청람과 월강 강난주, 무여 신경희 등이 그의 제자다.  동정은 부유하지 못한 탓에 개인 작업실이 없었다. 가난한 스승을 돕기 위해 무여가 자신의 한의원에 서숙을 마련해 줬고 동정은 이곳에서 제자를 길러냈다고 한다.  동정서숙은 매일 오후 7시 동정의 서예를 배우기 위한 제자들의 발길로 붐볐다. 동정은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스승이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동정의 막내딸 부곤(45)씨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반면 제자들에게는 관대하셨다"면서 "마음에 쏙 드는 제자들을 집에 데리고와 잠도 재우고 밥도 손수 지어 먹이셨다"고 말했다. 동정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여름이면 깊은 산속의 사찰을 찾았다. 그 때마다 자연이 숨쉬는 산사(寺)에서 기이한 모양을 한 돌을 집으로 가져왔다. 이 때문에 동정의 집 마당과 베란다에는 수백여점의 돌이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용병씨는 "아버지는 오전 4시면 일어나 항상 수석을 관찰하면서 하루 일과를 생각했다"면서 "수석과 불교, 자연은 아버지의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고 말했다. 청람에 의하면 1974년 동정은 인천에서는 더이상 서예가로서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동정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연 개인전을 통해 얻은 돈 50만원을 가지고 서울 공평동에 서실을 마련한다. 보다 많은 활동을 벌이겠다는 목표에서다. 서울의 서실에는 제자 서너명이 함께 했다. 서실을 연지 꼬박 한해가 지났던가. 동정은 51세가 되던 해인 1975년 2월의 어느 추운 날 새벽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두 딸을 불러내 안마를 받은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장 아끼는 제자 도진씨에게는 "내가 몸이 좋지 못해 오늘은 서울 서실에 나가지 못했다. 몸보신을 위해 돼지고기 한근 사왔으니 이 것만 먹고 일찍 잘 것이다"라고 전화를 걸었다. 동정은 자신의 집 안방에서 숨을 거뒀다. 예술의 정점에 다다르지 못한 원망 때문인지 두 눈을 감지 못한 상태였다.

2005-03-03 김장훈

[인천인물 100人·18] 영원한 '이화인' 우월 김활란

올들어 가장 추운 겨울날. 매섭고 시린 겨울바람마저도 끌어안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하면서도 강인한 백합의 향기가 흐르고 청롱하면서도 우렁찬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 년에 한 번 우는 꾀꼬리'의 후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천 년에 한 번 난 백합'의 자애로운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라. (모윤숙의 김활란 추모시 중)  “이 땅에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날까지 기필코 이화를 여자대학으로 키워나가겠다.” 김활란 박사의 확실하고 단호한 다짐이다.  지난 주말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이 곳에서 한평생 배우고 가르치며 총장직까지 지냈던 그를 좀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이대 교정을 찾았다. 김활란 박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아직도 이 곳에서 그리고 많은 여성들로부터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김 박사에 대해 묻자, 한 여학생은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나 지나치게 과오의 행적을 들추는 것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월(又月) 김활란. 그에게는 '여성운동가', '교육자', '최초의 여자 박사', '신앙인', '외교가'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지난 1899년 인천 배다리마을(현 동구 창영동)의 작은 초가지붕 아래서 여러 형제들 중 막내딸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김진연·金鎭淵)는 선비풍의 섬세한 용모를 지닌 침착한 분이었다고 한다. 평북 철산의 농토를 조카들에게 맡기고 개항이 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인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그의 이름은 '기득'(己得).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에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이 세례명은 미신을 신봉하던 그의 가정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한 백 헬렌 여사의 이름과 같다.  백 헬렌 여사의 끊질긴 설득으로 전 가족이 내리교회에 나가게 됐고, 교회에 나간 지 여섯달 후 전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다. 김 박사의 조카 김정옥은 '이모님 김활란'이란 책에서 '그 당시 인천 바닥에 자자하게 소문이 퍼질 만큼 화제가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목사님의 실수만 없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김또라'가 됐을 것이다.  '이모님(김활란)의 세례명 헬렌은 본래 외할머니가 원했던 이름이었다. 자신을 기독교 신자가 되도록 이끌어 준 전도부인 헬렌을 좋아했던 외할머니는 자기도 똑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세례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목사님이 잠깐 착각을 일으켜 어머니 몫인 헬렌과 막내딸(김활란) 몫인 또라를 바꿔 부르고 말았다'.  김 박사의 조카 김정옥이 쓴 책인 '이모님 김활란'에 나와 있는 글이다. 향후 김정옥은 이화여대를 나와 이대교수로 봉직하면서 이대 학생처장, YWCA 고문, 동구학원 이사장 등을 지낸다. 이모(김활란)의 뒤를 따라 한평생을 여성교육에 앞장서온 그는 지난해 노환으로 별세한다.  조카 김정옥은 김활란 박사의 별명이 '화평둥이'였다고 고백한다. 형제사이에 다툴 줄 모르고 싸움이 벌어지면 '얘는…'하고 자리를 피할 뿐 맞서서 아웅다웅하는 성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8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영화소학교에 입학한다. 내리예배당 운영을 맡은 조원시 목사는 지난 1892년 내리교회 구내에 강재형 전도사 부처와 함께 아이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학생을 맡아 가르친 학급은 후에 '영화학교'가 되고, 그의 부인이 여학생을 맡아 지도한 것이 '영화여자학교'의 시초가 된다.  김 박사는 영친왕이 11살의 나이로 일본의 볼모가 돼 인천항을 떠났을 때의 슬픔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왕자를 배에 태우려 하자 왕자는 어마마마를 불러 통곡하며 안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더라고 했다. …몰래 뒤뜰로 가 축축한 굴뚝 뒤에 숨어 흐느껴 울었다. 잠자리에서도 남몰래 울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최초의 슬픔이었다…'. 그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글이다.  김활란 박사의 인천에서의 소녀시절은 곧 끝나지 않으면 안됐다. 큰외삼촌의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태산 같은 빚을 지게 되자 집과 남은 살림은 모두 빚쟁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울의 한 빈촌에 집 한 채를 얻어 하숙을 치기 시작했고, 이 때 김 박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인천 내리교회에는 김활란 박사의 사진과 약력이 패널로 걸려 있다.  김 박사가 기독교·교육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소녀시절을 바로 인천에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개항 후 서구문물이 제일 먼저 들어온 인천에서 소녀시절을 보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기숙사에는 많은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집안 사정이나 고민을 털어놓고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제자 김자경씨는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운 신세에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래 자경아, 너는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수 있어'. "선생님의 이 말씀이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내 음악 인생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녀의 교육에 대한 의지는 여러 사례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피란 중에 세운 학교는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녀의 의지였다. 또한 많은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 너무 빨리 결혼해 가정에 묻혀버리는 것을 보고 계속 배우지 아니하고 사회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을 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의 간섭과 억압이 점점 심해지면서 이화를 지켜내기 위한 그녀의 노고는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항이다. '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일본어 강제 사용'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당시 여성교육을 관철시키겠다는 그녀의 의지와 희생이 후에 친일 행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곳에 열정을 쏟느라 다른 여유가 없어 결혼을 안했다는 그녀는 독실한 신학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헬렌 킴이라는 이름으로는 외교활동을 했다. YWCA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30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라는 논문으로 우리 나라 첫 여성박사가 됐다.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6·25전쟁 시절에는 '코리아 타임즈' 영자신문을 창간했다.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공익부분을 수상하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다락방상을 수상했다. 70살이 되던 1970년 유언에 따라 '개선행진곡'과 '할렐루야'가 울려 펴지는 가운데 금란동산에 모셔졌다. 그녀의 여성교육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을 때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동상을 세우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두려움이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의 지나친 호의가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 괴로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해져서 양심을 찌릅니다'. 그녀의 삶이 과장되었는지, 과소하게 평가되었는 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다.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김형목 박사 "당대 최고 지성인·여성운동가… 친일행위는 비판받아야 마땅" "김활란 박사의 친일 행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목(46)박사는 16일 "김활란박사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자 여성운동가 위치에 있었다"며 "민족의 양심을 가졌더라면 차라리 현실에서 도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개인 김활란이 아닌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활란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박사는 "김활란이 평범한 한 여성이었다면 그녀의 친일행위를 문제삼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일제 식민지였다는 한계성은 있지만 그녀의 친일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김활란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교육 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김활란이 우리나라 여성의 고등교육을 이글어 온 인물임은 분명하다"며 "그녀가 교육계와 여성계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활란을 통해 우리나라 교육계의 작태와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김박사는 "우리 교육계는 자기 대학 출신들만 챙기는 일명 동종교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육운동과 육영사업이 지나치게 미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에서 교육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많다"며 "이런 인물을 찾아내고 알리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말했다. ■ 김활란 박사의 '친일'논란 일제침략정책 선전행위 기록남아… '동기·당시상황 감안해야' 의견도 지난해 11월, 정부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광복60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함께 전 국무총리 서리가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됐으나 지난 1월 장상전 국무총리 서리는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화여대 총장 시절 '김활란 상'을 제정하려 했던 일이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여러 시민단체들의 힐책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조카 김정옥은 그녀가 병중에 있을 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닌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술회했다고 전했다.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의 저자 정운현은 책에서 "그녀가 60년 가까이 이화인으로 살면서 일제하에서부터 건국기까지 이대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이 너무 많다"고 적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실장은 더욱 강경하다. 김 연구실장은 "그녀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학교를 키기기 위해 친일적 행위를 했다지만 그것은 변명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며 "친일행위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활란을 친일파 명단에 넣은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현했다. '김활란이 없었으면 오늘의 이화여대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김활란, 모윤숙, 송금선, 황신덕… 그들은 민족을 반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겨레를 살리기 위해 일제하에 엄청난 고난을 감수했다'. 기록이 남아 있기에 그녀가 일제의 침략정책을 선전하고 징용을 부추기는 활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친일의 동기가 무엇이며 당시 현실상황에서 얼마나 절박할 수 밖에 없었느냐를 감안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자가 이화여대에 자료협조를 요청했을 때 취재 의도와 기사의 내용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활란 박사가 또다시 친일논란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학교측은 김 박사의 업적을 무시한 채 친일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김 박사의 주변 인물과 역사 학자들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여성운동·교육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김활란 박사의 친일논란은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과 더불어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설치로 더욱 공론화 될 전망이다.

2005-02-17 목동훈

[인천인물 100人·17] 향토계 언론 거목 벽안 김응태

1973년 서슬퍼런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 말살정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향토 언론계의 거목 '벽안(碧眼) 김응태(金應泰:1921~1995)' 선생. 강제 통폐합을 당할 당시 선생의 참담한 심정에 대해 언론계 후배(오광철·70·인천일보 주필)는 이렇게 술회했다. “1973년 8월 31일 경기일보 마지막 신문을 찍어낸 뒤 신문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모(字母):활자를 주조할 때 자면(字面)을 만드는 형(型). 모형(母型)이라고도 한다)' 를 고철로 팔기 위해 삽으로 가마니에 퍼담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조금 뒤면 고철 덩어리가 될 자모를 '살살 다뤄라. 자모 상할라' 라고 흐느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8·15 해방직후인 1948년 창간된 인천지역 최초의 지방지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지 25년, 역정의 세월을 선생은 그렇게 정리했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이방인을 닮았다고 해서 '벽안(碧眼:푸른 눈)'이란 아호를 가진 김응태 선생은 1921년 7월 23일 인천시 동구 화평동 409에서 태어났다. 내리교회 부설 미션 사학인 '영화학교(초등교육기관·74년 폐교)'를 졸업(1933년)한 뒤 곧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넉넉지는 않은 편이었다.  후배 언론인 김양수(73·평론가) 선생은 “영화학교 졸업 당시 김응태 선생이 2등, 한양대 교수를 지내신 이순복씨가 1등이었다. 이순복씨와 김응태 선생 모두 집안 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하루는 두분이 함께 자유공원에 올라가 가난을 한탄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김응태 선생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선생은 영화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인천공립상업보습학교(현재의 중학교 과정)'에 진학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부터 1944년 6월까지는 인천우체국에서 우편서기보로 일을 했다.  8·15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판임(判任:현재의 공무원 직급상 7~9급) 직위로 인천부(현 인천시청)에 들어간 선생은 '대중일보'로 자리를 옮기기 전인 1947년 2월까지 공직생활을 계속한다.  선생이 공직을 그만두고 언론계에 뛰어든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인천일보 오광철 주필은 “인천시청에서 시정계장으로 근무하던 선생이 초대 인천시장인 임홍재(任鴻宰)씨가 대중일보로 자리를 옮길 때 함께 갔다는 얘기를 선배들을 통해 알고 있다”고 전할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인지 '대중일보' 당시 선생은 인천시청을 출입했다고 한다.  '대중일보' 기자로 명성을 떨치던 선생은 6·25 전쟁이 발발하고 9·15 인천 수복을 계기로 '대중일보'가 '인천신보'로 제호를 바꿔 속간되면서 사회부장을 맡는다.  당시 '대한신문'기자였던 김양수 선생도 1953년 '인천신보' 문화부장으로 입사하면서 편집국장이었던 김응태 선생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1954년 '주간인천'이 창간되면서 김응태 선생은 편집국장과 사장(1960년)을 역임하고 1960년 '주간인천'이 '인천신문'으로 바뀌면서 다시 편집국장과 부사장(1965년)을 맡게된다.  1966년 경기일보가 창간되자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편집국장(72년)을 거쳐 부사장(73년)까지 오르지만 여기서 붓을 꺾고 만다.  당시 유신정권의 지역언론 말살정책인 '1도 1사주의(一道一社主義)'에 따라 1973년 7월 31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는 '경기매일신문+경기일보+연합신문'을 통폐합한 '경기신문(현 경인일보)'을 9월 1일부터 발행한다는 조인식이 치러졌다.  선생의 3남4녀중 막내인 영욱(42·인하공전 학생복지팀)씨는 “아버님이 '경기신문' 사장을 제의받았지만 고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님께서 제의를 받으신 뒤 그렇다면 식자공 몇 명과 함께 입사하겠다고 하자 '경기신문'에서 이런 제의를 거부해 언론계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도 있다.  통폐합 당시 한 신문사 고위간부였던 향토 언론인은 익명을 요구하면서 “당시 여러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김응태 선생이 사장직을 제의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경기신문' 창간을 주도한 인사들과 선생은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응태 선생은 이후 인척관계인 한진그룹 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인하대 사무처장(75년)과 인하학원 사무국장(78년), 인하학원 이사(80)로 근무한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언론중재위원으로 다시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지만 1995년 7월 29일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현역 복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인천 로타리클럽 창립(1957년)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67년부터 맡은 클럽 주보(週報) 편집위원장 자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애착을 갖고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선생은 현역 언론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60년대에 '인천 신문 박물관' 건립을 꿈꾸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따. 인천일보 오광철 주필은 1966년 선생이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긴 뒤 인사차 들렀을 때 문서고를 구경시켜주면서 건네준 활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초호(금속 활자 크기의 한 종류) 크기의 '마루 종(宗)' 자 였는데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1971년 제가 경기일보로 옮긴 뒤 선생에게 활자를 내놓자 하시는 말씀이 '신문박물관 만들면 내놓지'였습니다. 미뤄 짐작해 볼때 선생은 당시 신문박물관 건립에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인천 신문 박물관'에 대한 자료나 기억은 더 이상 구하지 못해 어느 정도 구체화됐는지는 알 수 없다. 유려한 말솜씨를 자랑한 선생이었지만 평소 집필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1971년 6월말부터 이듬해 4월말까지 '경기일보' 1면하단에 고정으로 실렸던 '바람개비'란에 초창기 몇 편을 직접 작성한게 육필 원고로 알려져 있따. '智能化된 副讀本 消化'라는 제목의 글(경기일보 1971년 6월 28일자 2면 바람개비)에서 선생은 학생들에게 책을 강매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이후 몇 편을 더 집필했다고 하지만 필자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선생이 세상을 뜬 지 어언 10년이 흘러가고 있다. 향토 언론계의 스승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지금 선생을 떠올릴만한 흔적을 쉽게 찾아 보기는 어렵다. 시립도서관(중구 율목동)의 낡은 문서창고에 남아있는 신문 몇 점이 고작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선생이 건립을 구상했다는 '인천 신문 박물관'이 강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은 기자만이 아닐 듯 싶다. ■ 오광철 인천일보 주필이 말하는 김응태 선배는… 일에는 엄하지만 어없이 자상한 '큰형님' 언론인 오광철(70·현 인천일보 주필)씨는 김응태 선생을 '정열과 집념이 넘치면서 정열적으로 신문을 만들었던 선배'로 기억하고 있따. 김응태 선생이 인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1961년 수습기자였던 오 주필은 한 일화를 들면서 꼼꼼했던 선생의 면면을 소개했다. "후배들이 한글맞춤법을 잘 몰라 옆사람에게 물어볼라치면 선생님은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지요. 물어서 맞춤법을 알고나면 금방 잊어버리지만 사전을 찾아 확인하면 기억이 오래가기 때문에 그렇게 하곤 했지요. 그래서 후배기자들이 사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을 지켜보면 '목수가 대패를 안갖고 다니느냐'며 호통을 치시곤 하셨습니다." 한번 화가 나면 후배들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들 정도였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주재기자가 자신이 취재한 기사를 엉뚱하게 편집해 신문에 실었따고 항의전화를 했죠. 그러자 당시 국장석에 앉아계시던 선생님이 해당 편집기자를 불러 교정원고(당시는 원고를 며칠씩 보관)를 가져오라고 한 뒤 사실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편집기자의 잘못이 확인되자 그자리에서 원고를 찢은 뒤 얼굴에 뿌려버리시더군요." 그러나 이런 모습 보다는 '정이 뚝뚝 흘러 넘칠 정도로 자상한 선배'였다는게 오 주필의 기억이다. 김선생은 '뻐끔 담배'로 하루 몇갑을 태울 정도의 '골초'에, 배갈이든 소주든 종류에 관계없이 언제나 사기로 만든 물컵에 가득 따라 한숨에 들이켜던 애주가였단다. 당시만해도 언론계에서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머리나 주머니에 술을 부어 마시게 했지만 김 선생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 주필은 "73년 9월 유신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현직을 떠난 뒤에도 항상 옆구리에 신문 뭉치를 끼고 다닐 정도로 애착을 보이던 선생의 열정이 아직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2005-02-03 김도현

[인천인물 100人·16] 제3·4대 대법원장 조진만

인천 출신 대법원장 조진만(趙鎭滿·1903~1979). '학창시절 3·1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자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고등문관시험사법과에 합격(1925년), 제5대 법무부장관 역임, 우리나라 민사소송의 틀을 세운 법조인, 판결문을 한글화 시킨 장본인,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절제된 삶을 살아 온 격변기 대법원장….'  그는 190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인천이 고향이며, 어린시절 인천에서 생활한 것은 분명하다. 경기고를 잠시 다녔다.  경기고교 동창회에 따르면 조진만 대법원장은 “모교에 입학했던 것은 사실이나 졸업했다는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1923년 경성법학전문대학(京城法學專門大學·서울법대 전신)을 졸업했다.  고 이영섭 대법원장의 경기고교 동창 회보를 통해 조진만 대법원장은 모교 2학년때 3·1만세 사건에 참여했고,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잡혀갔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는 나이도 어렸고, 우리나라 제1의 명문학교를 다니던 터라 경찰은 그를 특별히 석방시켜주면서 '반성문'을 써오라고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조 대법원장은 이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내 나라의 독립을 외쳤는데 반성문을 쓸만한 잘못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동기생들과 함께 그해 경성법전(京城法專)에 입학했다. 조 대법원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25년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합격이후 경성지법 사법관 사보를 거쳐 1927년부터 해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법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평양지법과 대구지법 등을 거쳐 해방전인 1943년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1951년 제5대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법무부 장관 재임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960년에는 서울 제1변호사회장을 역임한 뒤 1961년에 제3대 대법원장에 임명돼 4대 대법원장까지 7년여동안 청렴결백한 법관으로 법조인들의 귀감이 됐다. 당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려워 할 정도로 바른말과 직언을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역대 대법원장들은 정치적 격변기때마다 수난을 겪은 것과는 달리, 7년여 동안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동료 법조인들이 증언했다.  조 대법원장과 제7대 대법원장을 지낸 이 대법원장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이 대법원장의 추억이다.  이 대법원장은 해방이후 법관들의 봉급이 쌀 한 가마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박봉이라 법관을 그만두고 이화여대 교수를 할때 조진만 대법원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하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법관을 그만뒀습니다”하고 조 대법원장에게 말했더니, “이 사람아! 자네가 배고플적에 난들 배고프지 않겠나. 법관이라는 것이 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거지”라는 말을 듣고 이 대법원장은 법조계로 돌아왔고, 그는 훗날 대법원장에 올랐다. 조진만 대법원장과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바뀐 셈이다.  그의 삶에서 느낄 수 있듯이 법조계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조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에 취임하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민사 소송의 틀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배우고 익힌 사법제도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활용하면서 민사소송 체계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특히 대법원장 시절 판결문을 한글로 쓰도록 하는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다. 이유는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 왜 다른 나라말로 판결문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재야법조인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화를 추진, 법원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판결문 뿐만 아니라 법원의 모든 문서를 한글로 전용토록 했다.  퇴임이후에도 그의 삶은 한결 같았다. 1968년 대법원장 퇴임이후 그는 서울 종로구 계동 104의 4에 새로 마련한 2층 양옥 집으로 이사해 외부인사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100여평의 사저엔 20평 남짓한 잔디도 깔고 대문을 석조로 대폭 보수했다고 당시 언론은 그의 삶을 보도했었다. 가족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으며, 재혼한 부인과는 1남 1녀.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조언(변호사)씨와 조윤(변호사)씨는 부친의 뒤를 이어 법조인이다. 현직과 퇴임이후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기고, 회고록 조차 쓰거나 펴내지 않았다. 당시 집을 기습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법관이 일반인과 같은 생활을 하면 곧 비난의 대상이 되는 한국 실정에 비추어 법조인들은 더욱 소심해지게 마련”이라며 재임기간중 특별히 감격했던 일, 슬펐던 일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전했다. 재혼한 부인 홍순희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재임시에도 미국 등 3개국의 방문 초청과 박 대통령이 세계일주 여행권을 선물하겠다는 권유에도 '외화를 낭비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뿌리쳤다고 한다. 대법원장 시절 축사를 쓰기 위해 폐지 5장 중 1장을 홍 여사가 다른 일에 쓴 것을 알고 국민의 혈세임을 잊어버린 망동이라고 크게 꾸지람을 했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퇴임하면서 후배들에게 볼품은 없으나 '담담한 물맛' 같은 생활로 일관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법원 청사를 지을 때 한글로 '큰 터에 머릿돌 놓았다. 길이 맑고 밝고 바르다'라고 적는 등 한글 사용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물맛이 짜고 맵기를 바라는 것은 법관이 이미 사도(邪道)의 길목에 들어서 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 모두 되새겨야 할 때 같다. ■ 대법원장 퇴임사 토요일 귀한 시간에, 이처럼 법원직원 여러분을 모이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내일, 10월 20일 일요일 정년으로 대법원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므로 퇴임인사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바 적은 자로서 재판사무에 얼마쯤 경험이 있다는 까닭으로, 그 그릇이 아닌데도, 1961년 7월서부터 오랫동안 법원의 최고책임자의 자리를 감히 맡고 있었습니다. 당초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재덕을 잘 헤어리지 않고 국민이 믿어주는 법원, 옳은 일을 이행하는 법원, 끊임없이 근면하는 법원, 인화있고 단결된 법원, 그리고 명랑한 법원을 이룩해 보자고 큰 소리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의 직분을 다하게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매우 비근한 일이나 실현은 가장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뒤, 이를 목표하여 힘을 기울여왔으나, 무능한데다가 법원이란 원래 인원, 시설, 예산 등 여러면에 제약이 많고, 복잡한 사건의 폭주와 사무처리 절차의 비현대적인 점 등으로 예기하였던 목적을 못 달하였다고 스스로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그중에 얼마쯤 목표를 향하여 나간바가 있다면, 이는 직원 여러분이 분투·노력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동안의 잘 못된 점에 대한 모든 꾸지람은 본인이 홀로 달게 받겠습니다. 직원 여러분께서는 위에서 말씀한 목표 달성에 대하여 계속 힘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인은 굳은 뜻을 세운 바 없이 법률책을 좀 읽고, 철이 덜 나서 법관이 되어, 평온·평범한 인생살이를 하게 한곳이 법원입니다. 잔 뼈가 굵어진 내집입니다. 모든것을 잘 모르고 있음을 개닫게한 스승입니다. 그 온정은 잊을 길이 없습니다. 본인은 물러간 뒤에도 아마 법원 근처에서 방황·소요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법원의 발전·향상이 곧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향상임을 여러분은 명심하시어 꾸준히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댁의 만복을 빌면서 퇴임인사를 맺겠습니다. 1968년 10월 19일 대법원장 조진만 인터뷰/조진만 대법원장 아들 조윤씨 "기억나는건 '절제된 삶'… 모든글 한글만 사용해" "아버지는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엄격하셨습니다." 조진만 대법원장의 셋째아들인 조윤(71) 변호사는 "아버지는 '절제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며 "자기 생전에 마음에 드는 땅과 골동품이 있어도 절대 구입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어떤 물건을 사면 나중에 이익이 될 것 같다는 말씀은 자주 하셨지만, 정작 자신은 '흠'이 될까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은. "엄격하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을 바라셨던 모양입니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방공부를 하셨던 터라 아는 것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도 먼저 아는 척하거나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편이었습니다. 자식들은 그 것이 불만이기도 했지요. 아버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아 함부로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거든요." -판결문 한글화를 추진했는데.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많이 했던 터라 한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지요. 그런 연유로 집에는 늘 고문서들로 가득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한문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집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메모와 글씨를 한글로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한글학회에 친구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그들은 늘 아버지를 한글보급에 일등공신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형제 두분이 아버님의 뒤를 이어 법조인이 됐는데. "아버지께서는 형님은 처음부터 법조인으로 키우시려고 했습니다. 저는 법조인 보다는 이공계(화공과)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대학시험을 앞두고 아버님께서 법대를 권유하셨습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근 과거사 문제 등으로 옛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 때문인지 여러가지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2005-01-27 송병원

[인천인물 100人·15]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봉' 극작가 함세덕

굴절된 현대사에 억눌려 천재성이 증발된 극작가 함세덕. 친일의 오점과 월북작가로 낙인 찍혀 남한에서 그의 작품이 금기시됐다. 그의 처절한 삶은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한장의 흑백사진에 압축한 것처럼 가슴 찡하기만 하다. 연극에 대한 치열한 열정과 천재적인 재능이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혀 이름 석자 제대로 활보하지 못했던 암울했던 우리 역사를 탓해야 할까.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수로 꼽히는 그의 작품에는 인천이 오롯이 녹아 있다. 고향 인천의 머릿속 잔상은 그의 훌륭한 작품 모티프였다. 그래서 항도 인천인들에게 그와 그의 작품은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인천에선 그의 재능을 심정적으로만 인정할 뿐 구체적인 기념사업 하나 제대로 이뤄진게 없다. 그를 아끼는 지역 문인들이 추모비를 만들자는 미세한 움직임은 있었으나 불발에 그쳐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태.  그러나 학자들은 함세덕의 평가와 관련, 빠른 시일내 그의 친일 행적을 공개적으로 청산하고 뛰어난 작품에 천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제는 친일과 월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예술성에 접근하는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세출의 극작가 함세덕의 본적은 '경기도 인천부 화평리 455번지'로 돼 있다. 그의 조부 함선지는 정3품 벼슬을 지냈으나 대원군때 낙향해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또 부친 함근욱은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일본어학교'를 졸업한뒤 전남 나주군청 주사로 발령받는다. 그해 1915년 5월23일 함세덕이 태어 났고 부친을 따라 목포로 이주한다. 그는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고 부친도 객주를 시작한다. 1929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한뒤 금강산이나 인천앞바다 섬 여행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쌓는다. 특히 학창시절부터 연극에 심취했던 그는 영화와 악극, 연극을 공연하던 용리의 '애관'을 자주 드나들며 문학적 갈증을 해소했다고 그의 동창생들이 증언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입문한 것은 1936년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하면서부터. 이 작품은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Jhon Millington Synge)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인천 인근의 섬과 주민들의 생활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초기 대표작인 '동승'은 1939년 동아일보사의 제2회 연극대회 참가작으로 상연됐다. 동승은 지난 2003년 주경중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했고 상하이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시카고영화제 관객상을 받는 등 뛰어난 작품성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초기 작품은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해연'의 당선은 유치진과 교류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시기는 일제의 광기가 극에 달한 1940부터 1944년까지다. 작품활동의 황금기를 맞은 그에게 가장 극렬한 친일 연극판이 자리잡았던 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1940년 발표한 '낙화암'은 백제 패망이라는 민족적 감정을 담고 있지만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친일의 소지가 발견된다. 이후 발표한 '에밀레종'과 '추장 이사벨라', '거리는 쾌청한 가을날씨' 등의 창작 희곡은 그의 친일 행적이 더욱 노골화한다. '에밀레종'은 신라와 일본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선전하고 나라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의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깔고 있다. '추장 이사벨라'나 '거리의 쾌청한 가을 날씨' 역시 일본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이와 관련해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만수 교수는 “당시 한막 이상 일본어를 사용한다든 가 국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주제만 연극공연이 가능한 일제의 통제정책을 감안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1942년 일본 동경의 극단 '전진좌'에 연구생으로 유학하면서 그의 친일 색깔이 더욱 짙어 진다.  그러던 그가 해방 이후엔 돌연 좌익에 몸을 담근다. 이해가 어려운 사상의 널뛰기다. 그는 조선연극동맹에 가입해 운명을 같이하고 '인민민주주의 민족전선'의 노선으로 활동을 벌이다 1947년 월북한다. 이시기 그의 좌익 작품은 친일행위에 대한 보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미년 3월1일'이라는 작품은 청년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의 부르주아적 허위성을 깨닫고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계급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1947년 미군정청의 마녀사냥식 좌익 색출에 쫓겨 친구들과 월북한 그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산사람들'과 이승만대통령을 타도대상으로 삼은 '대통령' 두작품을 쓴다. 그러나 이념적 판단과 더불어 당시 남한에 비해 북한이 훨씬 더 연극 활동을 하기에 좋은 여건이었던 점도 월북의 상황논리로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연극에 대한 그의 불같은 열정때문이다. 이는 6년전 동생 성덕(작고)씨의 항변에서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운명을 달리한 동생 성덕씨는 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라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열정이 뜨거웠따고 한다. 그는 특히 형의 작품을 공연하는 연극단원들과 연구 학자들을 도와주는 등 애틋한 형제애를 보였던 것으로 주변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1950년 6월 29일 함세덕은 북한 인민군 선무반 제2진으로 남하하다가 서울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데올로기의 기늘에 가려 그에 대한 평가는 저질의 목적극만을 양산했지만 재능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작가 정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지난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작품에 녹아있는 치열한 시대의식과 연극혼이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친일과 친북으로 얼룩진 그의 작품은 인천에서 부활해야한다.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연극판이 친북 행적만을 앞세워 함세덕을 매도하는 현실은 이제 작품성으로 걸러져야 한다. 목숨을 담보했던 월북행적 역시 북한으로부터 외면받으면서 함세덕은 남·북 양쪽의 미아다. 작품 속에 녹아있는 인천의 서정성을 다시 복원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반쪽' 함세덕이 아닌, 작품만을 위해 짧은 생을 쏟아 부었던 천재성을 모두 발굴해 내야 한다. 부끄러운 그의 삶을 모두 해부해서라도 말이다. ■ 김만수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친일·월북' 과거사 청산통해 작품 재조명돼야" "인천이 낳은 함세덕은 이제 천재적인 극작가로서 재조명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만수(45)교수는 민족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외투를 벗어 던져야만 함세덕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연극계의 거목처럼 추앙받는 유치진보다 한단계 더 높게 함세덕을 평가한다. 작품에 녹아있는 그의 천재성이 당시 열악한 연극계의 토대에서도 가능했다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5년전 별세한 동생 함성덕을 인터뷰하면서 김 교수는 함세덕의 친일과 친북 행적의 관점을 이제 청산해야 할때라고 직시했다. 형에게 지극했던 동생 성덕씨는 김교수가 함세덕에 대한 책을 쓸 당시 친일과 월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증언했다. 김 교수는 "함세덕의 친일행위는 모두 드러내 공개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며 "그러나 이런 과거사 청산을 통해 함세덕의 뛰어난 작품을 재조명하는 사회의 포용력이 절실한 때"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난 2003년에 펴낸 '현실과 무대 사이에서 표류한 극작가 함세덕' 책에서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타고난 천재를 다하지 못하고 떠난 함세덕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길 기대한다"며 발상의 전환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199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함세덕 연구에 몰두해 박사학위를 받은 그로서는 왜곡된 현실의 족쇄가 채워진 함세덕을 이제 해방시켜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함세덕이 태어난 인천에서 그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친일이나 월북으로 덧씌워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손실이다"고 말했다.

2005-01-20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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