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14] 지역대표 언론인 고일 선생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는 고일(高逸·1903~1975) 선생은 인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1954년 4월 인천지역의 대중지였던 '주간인천'에 '인천석금(仁川昔今=인천의 어제와 오늘)'이란 제목으로 개항초기부터 50년대 초까지의 인천의 사회상을 1년여간 연재한 글에서 “나는 인천의 아들, 인천은 나를 키우고 나에게 희망과 야심을 주었으며 또 가난과 버림까지 주었다”며 인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인천석금'은 인천 근현대사 100년의 '인천 향토 이야기' 책 가운데 원조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근대에서 현대에 걸쳐 있고, 또한 그 무대가 우리 나라 근대사의 선구지였던 인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과 우리 나라 근대사에 우뚝 서 있는 인천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55년 초판 발행 이후 1979년 후배 성경웅씨가 선민출판사에서 재판본을 찍어냈으나 희귀본이 됐고, 젊은 세대에 낯선 문장을 바꿔 2001년 해반문화사랑회에서 교정본을 발행하는 등 인천의 생활사로서 3판을 찍어낼 정도로 인천한세기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고일이라는 인물이 언론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것은 잘못된 점이 많다. 그는 언론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노동, 문화, 예술, 체육 분야의 수많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운동, 청년운동, 문화·예술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천의 지식층을 이끌던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고일의 본명은 '희선(羲璇)', 호는 '산재(汕哉)'로 1903년 5월6일 서울 마포에서 출생해 그해 9월 생후 3개월만에 인천으로 이주해 평생을 인천에서 살았다. 1915년(12세) 현 창영초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16세)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9년 곽상훈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 문예부에서 활동하면서 우현 고유섭, 이길용(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 주인공), 송건우, 임영균 등과 함께 기관지인 '제물포'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곽상훈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을 창단해 이끌면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독자적으로 '신정회(新正會)를 창단하고, 기관지인 '정의(正義)'를 발행했다가 일제로부터 창간호 전부를 압수당하면서 '불온한 청년'으로 일제강점기를 보내게 된다.  고일은 1923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촉탁 교원으로 연천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한지 6개월만에 한인 학생들을 도둑으로 몬 일본인 교장의 뺨을 때린 사건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인천으로 돌아와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잠시 생활하던 그는 1924년 3월31일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인천석금'에서 이 때를 자신의 전성기라로 회고했다. “소년·청년·노동·사상운동에 선봉이 됐고, 무관의 제왕으로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기개와 의협은 일생을 두고도 기억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유치장 출입은 다반사였고, 치안유지법으로 약 4년간 영어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향토사학자 조우성(57·현 광성고 교사)씨는 “일제 강점기 기자와 교사를 지낸 것은 대단한 신분적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며 “당시 고일 선생이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엘리트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신분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고일은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부두를 비롯해 방직공장, 성냥공장, 정미소, 선미공(쌀에서 뉘를 골라내는 직업) 등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관리하는 일본인들의 인권침해가 심각했다. 따라서 근로자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나왔고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사회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던 지식층에선 노동문제가 큰 이슈였다.  1925년 4월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보자'는 구호 아래 열린 '전조선기자대회' 이후 신문기자단과 신간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쯤 일이다. 고일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선미여공의 파업기사는 인천 역사 이래 노동자는 물론 남녀노소가 하나로 뭉쳐 일제의 민족차별에 거세게 항의하는 '인천 노동운동의 효시'를 제공하게 된다.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여공을 구타한 데 대한 항의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던 가등정미소를 취재하고 사진을 게재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여러 정미소가 동맹파업을 단행했고 부두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파업에 돌입, 인천 전체가 총파업함으로써 역사적인 민족 투쟁이 전개됐다.  하지만 그는 1931년 일어난 '만보산 사건'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통한 재인화교와의 교섭 친화, 신간회운동 등을 통한 민족 단일당 운동 등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32년 7월 북만주로 떠나 6년 동안 망명생활을 한다. 1938년 고일은 일본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6년여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생계난으로 인천부청(현 인천시) 임시사원으로 7년간 일하다 해방을 맞는다. 고일은 이 때의 일을 자신의 일생에서 부끄러운 일로 여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주간인천 지면을 통해 "요시찰인으로 출입왕래가 부자유, 호신책으로 여러 친지 등의 권유로 인천부촉탁으로 있었다"며 "장년기를 무능비굴하게 보냈으니 30년의 시간을 상실했다(주간인천 59년 6월 29일자)"고 자탄, 일제에 동참했다는 가책을 갖고 살아왔음을 내비쳤다. 고일 인생의 제2의 전환기는 1954년 51세에 '주간인천'의 주필로 재직하면서부터다. 고일은 1년간 '지면자(池面者=못난놈)'라는 필명으로 개항초기부터 50년대 초에 이르는 인천의 역사, 문화, 경제, 사회 발전상을 '인천석금'이라는 칼럼으로 연재하면서 호평을 받는다. 또한 그는 제2의 언론생활을 하면서 "향토를 위해 내가 할일을 하고 죽어야 할 것"이라며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각별히 챙겼다. 그는 남은 인생을 인천상고사와 인물사를 구상하다 지나친 음주와 곤궁한 생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동구 화수1동 큰 아들 흥겸(興兼)씨의 집에서 1957년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감한다. 그가 일생을 마치기 전 '신문기자로서의 길'을 적은 글은 지금도 꼿꼿한 기자정신을 일관하라는 '苦言'으로 남아 있다. "잘 살고 잘 지내려거던 신문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빈한이 도골(到骨) 하더라도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의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인물이라면 기자가 되라. 기자의 자랑은 정의의 사도이며, 국민의 벗이며, 시대의 경고자와 역사의 추진자로서 자부하는데 있다. '있는자'의 노예가 될 수 없고, 권력층의 수족이 될 수는 없다. 비굴하지 않고 천만인 앞에 나가서 오직 정의를 높이고 부정을 격멸하고 현실을 폭로하고 선악을 구분비판하여 한 자루의 붓을 무기삼아 사회를 명랑화시키는 데 사력을 다하는 것이 신문기자인것이다". ■ 인터뷰/ 고일선생 손자 고춘씨 "할아버지는 인천의 운동권 인사들과 시인, 문인 등 청년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죠. 어려운 시대를 사시면서 평생 쌓인 울분을 글과 술로 달래셨습니다." 고일 선생의 손자 고춘(47·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사진)씨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기자' 이상의 '기자'였다. 고일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올곧은 소리를 잘했던 비판적 논객활동으로 정권은 물론, 재야인사들 모두 고일 선생의 고언(苦言)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 특히 반정부적 시각으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으로부터 '감시아닌 감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고씨는 "할아버지는 후배 기자들은 물론 청년 운동, 문화예술 계통의 후배들 사이에서 큰 형님 노릇을 해왔다"며 "어린 시절 대학생들이 데모만하면 으레 경찰들이 할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올 정도로 의식있는 지식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 나무의 그늘은 더 깊다'는 말처럼 고일의 후손들은 큰 빛을 받지 못했다. "60~70년대 초기까지만해도 연좌제라는게 있었어요. 할아버지의 경력 때문에 아버지(흥겸씨)는 평생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평생 자전거 멸치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셨어요. 50년이 넘도록 화수동 판잣집을 떠나지 못하셨죠…." 고씨는 "자신과 형이 군대에 입대할때까지도 이같은 연좌제 분위기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고 했다. 고씨는 그러나 "반정부적 논조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는 시립도서관장과 문화원장, 인처시사편찬을 맡는 등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며 "그만큼 인천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인정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씨는 "할아버지는 말년에 간경화로 황달을 앓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시고, 인천상고사를 준비하셨을 정도로 열의를 보이셨다"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증조할머니·강안나)가 돌아가신지 보름 만에 영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회고했다.

2005-01-13 서진호

[인천인물 100人·13] 한글점자 창안 송암 박두성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 1963년 어느 날 인천시 중구 율목동 25의1 단층가옥 안방.  질곡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부대껴 온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1888~1963년) 선생.  그가 75년 삶을 마감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신념이 담긴 한마디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 초가집에서 모태신앙을 안고 태어난 송암의 이름은 두현(斗鉉),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교동 박씨 집안의 두터운 믿음 속에 서울로 유학간 송암은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어의동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13년 현재의 국립 서울맹(盲)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에 뛰어들었다.  '맹인'이라 불리며 사회적 천대를 받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응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송암은 시각장애인도 비시각장애인과 똑같이 직접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점자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점자는 19세기 프랑스 루이 브라이유가 종이에 점을 찍어 손가락 촉각을 이용해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 이외에 한글로 된 점자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식교육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서슬퍼렇던 일본제국주의가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기시하던 상황이어서 그의 한글점자 연구는 몹시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드디어 1926년 11월4일 송암은 한글점자의 초창기 모델 개발을 마치고 한글점자 개발을 선포했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본따 지금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송암이 가장 먼저 한글점자로 번역한 책은 성경전서였다. 1935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제헌의회로부터 승인도 얻었다.  1935년 제생원 교사를 정년퇴임한 그는 이듬해 인천에 설립된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해 한글점자 보급과 보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죽했으면 집안에 점자번역기 아연판을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한글점자 번역작업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가 평생 점역한 책만 76점에 달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효과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활로를 터 준 송암이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면 직전까지도 한글점자 번역일을 그치지 않았던 민족혼과 열정을 실천한 인물 송암에겐 순봉(작고)·순대(작고)·희복(미국 거주) 세 아들과 정희(82·화가·동구 화평동 거주)·명희(80·산부인과 전문의·부천시 거주) 두 딸이 있다.  둘째 아들 순대씨의 아들 현재(62·전 인천시 학원연합회장)씨는 “제물포고 3학년때 할아버지(송암)가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엄하실 수 없었다”며 “할아버지 앞에선 모든 가족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씀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송암의 생가와 교동교회는 지금 이종조카인 영재(80·원로목사)씨와 그 아들 용호(56)씨, 그 손자 창혁(32)씨가 지키고 있으며 생가 우물에서 나오는 신비의 쓴물(일명 마라)을 퍼 올려 강화본도 창후리 선착장 앞에서 쓴물온천탕을 운영하고 있다.  송암은 가족들에 의해 남동구 수산동 남동구청 옆 공동묘지에 안장됐는데 최근 바르게살기운동 인천시 남동구협의회(회장·김연중)가 묘역정비사업을 펼친 뒤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송암 후손과 시각장애인들은 “국가훈장을 받고 지난 2002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달의 인물로 선정된 송암을 탐구하고 기리는 연구와 향토교육이 시작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송암에 대한 잘못된 기록 '생가기념비' 송암 박두성에 대해 잘못된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인천시 중구가 기념물로 관리중인 '송암 생가 기념비'가 대표적 사례.  시와 구는 지난 1991년 12월12일 송암이 장·노년기에 거주했던 중구 율목동 25의1 집 앞에 '생가 기념비'를 이전 설치했다.  그러나 송암이 태어나 자란 곳은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이다.  생가 기념비란 표현은 자칫 후세에 율목동이 송암의 출생지인 것처럼 잘못 전해질 우려가 높다.  따라서 생가 기념비 옆에 이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유래와 함께 송암의 정확한 출생지를 설명해 주는 별도의 표지판을 설치, 정확한 역사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암이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던 율목동 집은 송암 후손이 1994년 9월15일 타인에게 팔았고 이 때문에 기념비는 관리가 안돼 주변이 쓰레기 무단투기장으로 전락했다. 중구는 고민 끝에 이달 1천만원을 들여 이 기념비를 인근 율목공원으로 옮기고 직접 관리에 나섰다. 인터뷰/ 간상복 인천시각장애인연합회장 "외면당하는 선생기념관 이제라도 관심·지원 기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틀어 인천의 대표적 역사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송암에 대해 정작 우리 인천시민은 무지하거나 무관심해 안타까울 때가 많지요." 송암 숭모사업에 십수년째 열정을 쏟고 있는 (사)인천시시각장애인연합회 간상복(56) 회장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까지 정부나 시 차원의 숭모사업은 사실상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형편. 이 때문에 연합회는 지난 1999년 9월 3일 인천시 남구 학익2동 3의 1에 인천시 시각장애인복지관을 개관하면서 복지관 1층 공간에 '송암 박두성 선생 기념관'을 직접 꾸며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기념관(032-874-3117)에는 생전 송암의 생활유품과 한글점자 번역기, 점자 성견전서, 친필 등 수백점이 전시돼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누구나 무료 입장해 송암의 일대기와 시각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 연합회는 또 매년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송암의 출생지인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 생가 앞에서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송암을 추모하고 높은 뜻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간 회장은 "이제라도 정부와 시 그리고 인천시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 한국의 역사적 인물인 송암을 추앙하고 숭모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2004-12-30 윤관옥

[인천인물 100人·12] 독립운동가 윤응념

1923년 9월18일 오전 9시30분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 한 젊은이가 우뚝 섰다.  서슬퍼런 일제 법정에서 이 젊은이는 검사의 심문에 당당한 어조로 자신의 혐의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그러나 검사가 자신을 파렴치한 강도로 몰아가는 데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희석시키지 못할 신념이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이 젊은이의 뒤에서 심문을 기다리던 8명 '동지'들도 결의에 찬 눈빛으로 젊은이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1923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은 이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당당히 정당성을 외치는 한 젊은이와 일제 검사간의 날카로운 신경전속에 진행됐다. 당시 27살에 불과했던 이 젊은이는 바로 인천의 부호들을 전율케 했던 독립운동가 윤응념(尹應念·1896~?)이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있으켰는지는 '조수(潮水)같은 청중 중에 인천사건 공판'이란 제목으로 결심공판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한 윤응념 일파에 대한 공판은 예정과 같이 지난 18일 오전 9시 반에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시간 전부터 군중은 사면으로 모여들어 방청석은 터지고 넘칠 듯이 되었으며 그 위에 입장하지 못하고 섭섭히 그만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중략) 윤응념부터 심문을 시작하였다. 피고는 사실 전부를 가리움 없이 모두 승인하였으나 다만 자기가 군자금을 모집할 때에 권총을 겨누고 돈을 내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였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사실이라, 자기는 조선민족을 위하여 다만 그들에게 동정을 구하였을 뿐이니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일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것만은 변명을 하였는데(하략)'(동아일보 1923년 9월19일자)  당시 '인천사건', '인천의 중대사건'으로 시시각각 보도된 이 사건은 인천항 부근의 영종·대부·장봉·시·신불도 등 섬의 부호들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윤응념을 비롯, 이호승(43·1923년 당시 나이, 이하 동일), 이동진(25), 윤경중(27), 송중식(35), 최수연(26), 김순창(31), 장수태(45), 김유근(48) 등 모두 9명이었다.  마지막까지 체포되지 않은 김원흡은 해방 후 이국에서 금의환향했는데 '대중일보'가 사건 후 24년이 지난 1947년 3월1일 '윤응념, 김마리아 사건의 혁명투사 김원흡씨 귀국'이란 제목으로 김원흡의 귀국사실을 소개한 것만 보더라도 이 사건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중량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윤응념은 서울 출생(?)으로 황해도 재령(載寧)에서 그리스도교도로 독립운동에 참가, 김마리아 등을 국외로 탈출시키고 1923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사(參事)로 있으면서 '독립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인천에 잠입했다가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 중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응념의 항일 행적에 대해선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된다.  '윤응념은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중국 지부(芝罘)로 건너가서 영어를 연구하다가 대정 8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부 참사가 되어 가지고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대정 9년 9월에는 '독립신문'과 '신한공론'을 가지고 조선에 건너와서 배부한 일이 있으며 다시 10년 4월에는 중국인으로 변장을 하고 조선에 와서 임시정부 비서국장 도인권의 처자와 대한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데려다가 그 해 7월20일에 풍범선을 타고 인천 근해에 있는 '초치도'에 상륙하였다가 그 날 저녁에 이미 약속하였던 인천을 떠나 '위해위'로 가는 중국배를 타고 위해위를 거쳐 상해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지부에서 미국인회사에 있다가 작년 3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교통총장 손정도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가지고 대활동을 하게 된 것이더라.'(동아일보 1923년 5월20일자 '인천을 중심으로 한 중대사건의 진상')  1919년 수립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을 두고 국내 민족운동을 진작시키려 노력했는데 교통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조직이었다.  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서 민족지사와 그 가족을 망명시키는 일을 담당하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임시정부의 인천지역 조직책이었던 셈이다.  인천의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열혈청년 윤응념. 윤응념은 그러나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채 역사속에 묻혀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제 후손들이 그의 발자취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윤응념과 관련된 기관·인물들 #교통국 윤응념이 참사로 활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구. 대한민국 임시정보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조직.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는 국내와의 연락 요충지인 안둥(安東)에 교통부 안둥지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각 군(郡) 단위로 교통국, 각 면 단위로 교통소를 설치해 국내와의 교통통신 및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담당토록 했다. #독립단 1919년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만주·중국 일대를 왕래하면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동녀으 이시형 등과 연결되면서 활동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연통제와 교통국의 비밀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와 중국·만주 일대의 정보를 국내에 전해 즉시 투쟁을 실현하거나 국내의 각종 정보를 임시정부와 만주 일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군자금을 500여회나 모금, 약 3천원의 현금을 임시정부와 만주·북중국 일대에 조달했으며 각종 무기와 탄약 등을 구소련 등에서 반입, 만주의 독립군 부대나 임시정부에 조달했다. 윤응념이 창단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마리아(1884.6.18~1945.3·사진) 윤응념의 도움으로 국외로 망명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1910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의 여학교를 거쳐 도쿄의 메지로 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했다. 1919년 귀국, 황에스터와 함께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됐으나 면소(免訴)돼 모교에 복직했다. 그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나 비밀조직의 탄로로 1920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이듬해 상하이(上海)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大議士)와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인터뷰/ 이희환 인하대 국문과강사 "윤응념은 3·1운동 이후에도 인천이 민족운동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인하대 국문과 강사인 이희환(39·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 집행위원장)씨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역사"라며 윤응념이 인천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같이 설명했다. 이씨는 인천문화정책연구소에서 인천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한 결과를 토대로 '굿모닝 인천'(2003년 9월호)을 통해 인천에서 윤응념이란 인물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주인공이다. 그는 "윤응념이 주도한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은 식민지 시대 인천의 역사중에서 인천 민족운동의 한 긍지로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고사하고 아직도 지난 과거의 실상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제로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과 윤응념은 '인천광역시사'에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는 이어 "인천의 항일운동사는 신간회 운동, 인천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황어장터 만세운동 등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가 고작으로 신간회 운동의 경우, 제대로 연구된 논문조차 없다"며 "지역에서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윤응념 등 무관심속에 묻혀있는 인물들을 발굴,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식민지 시대를 거쳐 급격하게 근대 도시로 성장한 인천 지역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훨씬 많은 친일파들이 존재했을 것"이라며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도시'였던 인천에서 활약한 윤응념을 계기로 친일파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민족계열 뿐만 아니라 좌익계열의 항일 운동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고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서의 인천, 가령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도 역사적 논의를 바탕으로 논쟁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 '인천이 뭐가 첫째다' 식으로 외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며 인천의 역사를 해석해선 안됩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이제 후손들이 찾아야 할 때입니다." 과거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즈음, 그의 일갈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2004-12-23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11] 인물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

우리나라 근·현대 화단에서 화미한 색채가 부여되는 미인도와 신선도를 포함한 인물화의 최고 대가(大家),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년) 선생. 심전(心田) 안중식으로 부터 받은 아호 '이당'의 '이'(以)는 주역의 24괘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흔히 이당을 가리켜 북종화법의 전통을 기반으로 시대감각과 자신의 기법을 조화시킨 유일한 거봉(巨峯)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당의 그림세계에 대해 범이(凡以) 윤희순(尹喜淳·1902~1947)은 1942년에 이미 이렇게 쓰고 있다.  “이당은 상(想)의 인(人)이 아니다. 기(技)의 인(人)이다. 기(技)에서 이루어진 품(品)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순수한 회화(繪畵)의 인(人)이다. …이당은 심전(心田)·소림(小琳·조석진) 이후의 기법인(技法人)으로 최고봉이다.” 이당의 예술경지가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승화된 품격임을 지적한 표현이다.  이당은 87살이 되던 1979년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70여년 동안 예술혼을 불태워 제자 양성에 힘썼다. 국내 미술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당 제자들의 모임 후소회(後素會·1937년) 참여 작가를 보면 그 면면을 알 수 있다. 후소회 창립멤버인 향당 백윤문,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 규당 한유동, 현초 이유태, 취당 장덕, 심원 조중현 등 현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준 작가들이다. 후소회는 그동안 회화전과 공모전 개최 등을 통해 한국 화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13일 오후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의 화실에서 이당의 마지막 제자인 이정(以汀) 장주봉(56) 화백을 만났다. 이정은 “20세 되던 해 이당선생님을 처음 만났다”며 “당시 70세를 훌쩍 넘긴 선생님께서는 나를 보자 '내 그림을 따라 그리라'고 말하셨고 다른 문하생들에게 내 그림과 선생님 그림을 나란히 걸어놓고 '어떤 그림이 내 그림인지 맞춰보라'면서 묵묵히 나를 격려해줬다”고 회고했다.  이당은 후진 양성에 있어서는 남달랐다. 품성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제자는 호통을 쳐 내쫓기 일쑤였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개성의 유명한 기생이었다'고 무심결에 말했던 제자가 선생님께 크게 혼나고 쫓겨났다는 얘기는 제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다.  이당은 유독 남자 제자들만 길러냈다. 여류 화가 숙당 배정례가 유일한 여제자다.  후소회 관계자는 “한번은 선생님이 부산 최고 부잣집으로 부터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다니는 20대 딸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허락했는데 1주일만에 되돌려 보냈다”고 말했다.  다른 문하생들이 여 제자때문에 미술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예술가 이전에 인간이 되라'는 이당의 교육철학은 오늘날에도 제자들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인천 남구 관교동에서 태어난 이당 선생은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1907년)을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17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부유했던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치고(1908)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된다. 거기서 이당은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친다(1912~1917년). 이곳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으로 부터 그림을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이름을 날렸다. 이같은 출중함은 훗날 안중식으로 부터 이당이란 아호를 받게 된 계기가 된다.  이당은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된다(1915, 1928). 초상화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당이 친일파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이다.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1937년)가 대표격이다. 1937년 8월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그림이나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였다. 이당은 그러나 서화미술회 졸업 후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전에 참여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정 장주봉 화백은 스승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가 군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기록화는 모두 인물화였다”면서 “그런데 당시 인물화 분야에 뛰어난 사람은 선생님이셨다”고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아픔이라고 말했다.  이당은 전통적인 북종화의 명맥을 유지해 자신만의 독특한 채색기법을 완성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 미단에서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이당은 안중식과 조석진으로 부터 남화(문인화)를 배웠다. 그러나 이당은 남화만 고집하지 않고 북화도 함께 그려 서양화법과 일본화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당 선생은 "국가적으로 볼때 남화가 성(盛)하면 그림이 퇴보하고, 북화가 왕성할때만 미술이 크게 진보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채색위주의 북화를 소생시키려 하자 일본그림이라는 오해를 샀지만 먹으로만 그려도 북화가 있고, 채색으로만 그려도 남화가 있는 법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당이 87살로 생을 마감하던 그해 5월 제자들은 선생님의 치열한 예술혼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인천 중구 송학동 3가 5에 인천 이당기념관을 만들었다. 초대 관장을 맡은 이정 장주봉은 1989년까지 10년동안 이 기념관을 운영하며 후소회 소품전과 이당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인천에 전시관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이곳에서는 시낭송회나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경인일보가 기획한 초대작가전 1·2회도 이곳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이당기념관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10년만에 문을 닫고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당의 제자 모임인 후소회는 창립멤버였던 장우성과 김기창 양대 맥이 서울대, 홍익대, 수도여사대 등으로 직결되고 이유태, 안동숙, 김화경의 계보가 이화여대와 수도여사대로 이어져 명실상부 우리 동양화단의 커다란 줄기를 이뤘다. ◇인터뷰/ 이당의 마지막 제자 '이정' 장주봉 화백 "선생님은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4년전에 인천에 함께 내려와 집을 알아보다가 문학산 밑에 땅 1만여평을 갖고 계신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20살이 되던 해 칠순을 훌쩍 넘긴 이당의 마지막 제자로 가르침을 받은 이정 장주봉 화백은 말년의 스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회상했다. "중구 송학동에 2층 집을 사 두었는데 그만 고향 땅도 밟아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그 때문에 그 집을 이당 기념관으로 운영하게 된 겁니다. 인천이 경기도였던 시절인데 그 당시 경기도는 생가보존사업 대상 1순위로 이당선생님을 꼽았고 홍난파, 나혜석, 박세림 등의 순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가보존은 커녕 이당기념관조차 문을 닫았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선생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비뚤어져 나가는 제자 몰래 부모를 만나 마음을 다독이게 했고, 미대 편입을 앞둔 제자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기꺼이 내놓는가 하면, 군대간 제자를 잘봐달라며 부대 윗분들에게 선물할 그림까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장화백은 20대 시절 선생에게 쫓겨날뻔 했던 일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화가생활로 벌이가 어려워 종로에서 미산이발관을 운영하셨어요. 하루는 이발관에 들러 면도사 아가씨에게 농담을 걸었는데 옆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있던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셨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나가라'는 호통과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용서를 빌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지방에 가고 안계셔 진짜로 쫓겨나는구나 생각했죠. 근데 선생님께서 제 고향인 충남 온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내가 온 것은 비밀로 해달라'며 '주봉이에게 더 관심과 정성을 쏟아달라'는 부탁을 하셨답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듣고 선생님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당은 훌륭한 교육자이자 독실한 종교인이었다고 한다. 장 화백은 "온통 남화(문인화)풍이 득세하던 시절에 환쟁이들이나 하는 북화의 명맥을 유지해야 미술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며 고집하셨고, 주일에 교회는 나가지 않아도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씩 기도를 하신 것을 보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신 참된 스승이셨다"고 선생을 기억했다.

2004-12-16 이우성

[인천인물 100人·10] 제물포고 초대교장 길영희 선생

'양심의 50년 민족을 지켰고, 학식의 50년 사회를 이끈다'. 지난 7일 찾은 인천시 중구 전동 응봉산 자락의 제물포고등학교. 최근 가진 개교50주년 행사에 맞춰 단 대형 플래카드는 '양심'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었다. 보통의 학교는 '학식'을 먼저 내세우게 마련이지만 이 학교는 양심이 먼저였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요즘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도 드물다. 올 해 치러진 대입 수학능력시험 부정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요즘 전국의 방송, 신문은 경쟁적으로 이 '양심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양심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길영희(1900∼1984년)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 교장은 1956년 봄 교직원 회의에서 '무감독 시험'을 제안했다. 당시로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격적인 얘기였다. 반대도 많았지만 선생은 그 뜻을 관철시켰고, 무감독 시험은 지금껏 제물포고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길 선생은 이 제도 시행 이후 전교생 총 569명 중 60점 이하를 받아 낙제한 53명의 학생에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제군들이야말로 믿음직한 한국의 학도”라고 칭찬한 뒤 “다음에 좀 더 열심히 노력해 진급하도록 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 낙제생들은 다음 학기에 모두 진급했단다.  이런 무감독 시험에 대한 지금 재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학년 이충일군은 “무감독 고사의 훌륭한 정신이 오늘의 (제물포고)전통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자랑스러워 했다. 같은 학년 김상민 군도 “길영희 초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무감독 시험은 학생과 선생님 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이 것은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우리 학교만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길 선생의 가르침은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학생들의 가슴 속에 이렇게나 선명히 남아 있었다.  지금도 학생들은 시험시작 전에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는 선언을 하고 무감독 시험을 치른다.  학교 교정에서 본 또하나의 눈에 띄는 것은 길 선생의 동상. 선생의 동상 앞엔 시들지 않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인중·제고 총동창회' 관계자는 “요즘들어 부쩍 길 교장 선생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면서 “아무도 모르게 꽃다발을 동상에 놓고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평안북도 희천군에서 태어난 길 선생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함석헌 선생과 교류를 시작했다. 함석헌 선생은 후일 '길영희선생 추모문집'에 실은 '이상(理想)의 인간 길영희선생'이란 제목의 글에서 길 선생에 대해 “인천에서 맹렬한 교육활동을 한 교장자격 있는 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5년부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고, 1938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 건설에 착수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나선다. 여기서 선생은 청년들을 상대로 강습회를 여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본격화한다.  일하면서 가르치는 참교육자의 길을 걷는 길 선생의 모습을 보아 온 인천중학교 한국인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 학부형대표들은 해방 직후 회의를 갖고 길 선생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의, 승낙을 얻어낸다. 하지만 이 때까지 학교엔 미군이 주둔해 있어 중구 신흥동 길 선생 자택에서 학생 60명, 교사 6명으로 4년제 4학급 학교로 문을 연다. 대한민국 교육계에 '길 교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61년 5·16 이후 교원 정년이 65세에서 5년이 단축되면서 그 해 10월4일 정년퇴임하게 된다.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지는 않았다. 자택에서 학원(대성학원)을 열어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청년들을 가르쳤다. 1967년 68세의 나이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근처에 '가루실 농민학교'를 설립했다. 여기선 금연과 도박 폐지운동도 펼친다. 평생을 교육에 정진한 것이다.  선생과 관련한 일화도 많다. 땀을 흘려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을 교육지표로 삼아 교사 신축 때 학생들도 곡괭이와 삽을 들고 공사에 참여하도록 했고, 1960년엔 학교 운동장을 야당인 민주당대통령후보 유세장으로 내줬다가 집권당이던 자유당으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다.  선생의 이런 기백을 본받은 당시 학생들도 '반골기질'이 다분했다고 한다. 5·16 직후 교원 정년을 줄여 선생이 정년 퇴임할 수밖에 없게 되자 학생들이 나서 서울에 '데모'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 때 상황을 지금의 추연화 교장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제고 2학년생이던 추 교장은 “가을 소풍으로 위장해 서울 덕수궁에서 모여 교원정년 단축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었다"면서 "이런 내용이 미리 정보기관에 알려져 결국 실행에는 실패했다"고 회상했다. 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는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길영희 교육상'과 전국 중·고·대학·일반부 대상의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 독후감현상문 공모'행사를 펼치고 있다. ◇제자 김학준의 길영희선생 회고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을 하루 앞둔 예비 소집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운동장의 교단에 올라오셔서 오른 팔을 들고 몇 마디 격려의 말씀을 주셨어요. 소박한 한국식 옷차림과 그 우렁찬 목소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길영희 교장 밑에서 배운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길 선생의 이미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꼭 두가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겨울엔 두루마기였고, 다른 계절엔 국민복이었습니다. 양복차림의 모습은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선생님은 외양에 관심이 없었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 깊었으며,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셨지요. 또 음성은 대단히 커서 운동장에서건 강당에서건 마이크가 필요 없었어요. 우국지사나 애국투사의 열정적인 연설장을 방불케 했어요." 선생은 학생들에게 '청소를 잘 해라', '예절을 잘 지켜라', '약속을 잘 지켜라' 등의 수신교과서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늘 '너희들은 커서 이 나라의 국사(國士)가 돼야 한다. 항상 이 나라 이 겨레의 운명을 걱정하고 이 나라 이 겨레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자신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국사가 돼야 한다. 이것이 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다는 '교과서 파동'을 떠올렸다. "선생님이 어느 학생이 교과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셨나봐요.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기없이 전쟁터에 나온 병사와 같다'면서 중·고교 담임교사를 불러 모든 학생이 교과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는 먹고 살기도 힘이 들었는데, 거기에 교과서까지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김 사장은 길 교장에 대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의 희망의 집을 지어 동량을 길러 내신 분"이라고 평했다. 길 교장이 작사한 인중·제고의 교가 1절은 '여기는 희망의 집 인천중학교(제물포고교)'로 시작된다.

2004-12-09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9]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

불꽃처럼 살다 요절한 한국 미학의 거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한국 미학과 미술사의 개척자로 현세 후학들에게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현의 삶이 고향 인천에서 되살아 나고 있다. 시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우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최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해방을 고뇌하는 청년으로, 말년엔 한국 미에 대한 천착으로 평생을 살다간 한 천재 학자의 연구 업적이 지금도 후학들의 학문 기반이 되고 있다.  지금도 낯선 학문으로 치부되고 있는 미학 연구를 평생 업으로 선택한 뛰어난 그의 식견도 놀랍지만 엄청난 양의 학문 결과물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더구나 서양의 학문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 낸 그의 연구 실적은 현세의 연구자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다.  우현을 따르는 후학들은 인천시립박물관에 그의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놓고 지역의 정체성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우현은 일제시대에 미학미술사를 국내에선 처음으로 전공하고 이를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일찍부터 한국미술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학문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치밀함은 지금도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1941년 발간된 '춘추' 7월호에 낸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전승문제'라는 논문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적조미',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동원해 한국적 미의식의 탐구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얘기한 '무기교의 기교'나 '무계획의 계획'이란 난해한 용어는 서구처럼 '독자성이나 자율성, 과학성' 등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 전통미술의 제작태도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조선 미의식에 개성적, 천재주의적, 기교적 미술성이 없지만 '민예적이며 신앙과 생활, 미술이 분리돼 있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무관심성'은 인위적인 완벽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적 환경이나 재료의 자연성을 애호하는 한국 미술 특유의 미적 취향을 말한다. 이같은 독특한 해석을 통해 그는 한국미술의 형식적 특질 규명을 총괄하고 미적체험이나 가치 이념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그는 자연과 인간, 예술의 하나됨이 한국미술의 미적 체험형성의 원리적 구조를 이룸과 더불어 미적 가치 이념의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미적형성의 작용과정 또는 예술적 활동주체와 관련된 정신적 가치지향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한국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서구의 시야를 차용했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미학적 보편성으로 연관시켜 미의식의 세계적 공감을 획득하려 했다.  그의 미술사 연구 업적 역시 서양의 학문 성과를 동원했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재해석하려 한 탁월한 노력이 빛난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해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하며 예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콘래드 피들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라는 논문을 썼다. 특히 그의 미술사는 19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뵐플린'과 오스트리아의 '리글', 러시아의 '프리체' 등 세분류의 전혀 다른 시각의 연구 방법이 동원됐다. 미술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뵐플린'은 미술작품들의 양식을 주창했고 '리글'은 미술품에 나타난 '예술의욕'을 중요한 동인으로 꼽았으며 '프리체'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무게 중심을 뒀다.  이 세가지 서로 다른 서구의 방법을 혼합해 그는 한국미술사를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던 척박한 우리 미학연구 성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학자 목수현씨는 “고유섭의 미술사관을 살펴보는 일은 현재 우리가 일궈놓은 미술사 연구를 그 자리에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한다”고 말한다.  우현은 지난 1905년 인천시 용동에서 아버지 고주연과 평강 채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난다. 조상때 평안도에서 제물포로 주거지를 옮겼던 아버지 고주연은 명석한 머리로 동경제대 철학과를 지망했던 재원이었으나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정책에 분개해 진학을 포기한채 인천으로 돌아와 미두업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는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했으나 잦은 병치레를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1918년 보성고교에 입학해 인천과 서울을 기차통학하면서 한용단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인천유성회'나 '경인기차통학생치목회' 등을 결성해 문화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는 보성고교에서 이강국 등과 함께 문학에 대한 재능을 다지고 민족정신 찾기에 부심한다.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고 1933년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수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미술사 연구를 시작한다. 1933년 개성의 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뒤 1944년까지 11년동안 그의 연구 실적은 가히 초인적이다. 그는 이기간에 대학 조수시절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개성지역에 대한 조사와 조선의 미의식에 대한 연구, 불교 미술과 향토예술 등 미술사 전 영역에 걸친 연구를 폭넓게 진행했다. 그러나 1940년에 접어들면서 날로 폭압적이던 일제의 통치강화에다 가정의 불행까지 겹쳐지면서 그는 심신이 극도로 유약해 진다. 결국 해방을 앞둔 1944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조선미술사' 서술을 완성하지 못한채 그는 개성박물관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우현의 위대한 업적은 한국미술사학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황수영과 진홍섭, 최순우에 의해 계승된다. 또 인천시립박물관은 우현의 영향때문에 미술사를 전공했던 후배 이경성에 의해 지난 1945년 개관돼 천재 단명의 아쉬움을 달랜다. 그러나 우현의 폭넓은 연구영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장품들은 동국대에서 보관하고 있어 지역 인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특히 그의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민족미술의 지평을 더욱 넓혀가는 일은 후학들이 개척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인터뷰/ 이경모 시립인천대 미술학과 겸임교수 "우현 고유섭은 인천이 낳은 한국의 보물입니다. 한국 미학과 미술사의 토대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서 뿐만아니라 일제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밝혀낸 민족주의자로서 우현은 높이 평가받아 마당합니다." 시립인천대학교 미술학과 겸임교수 이경모씨는 우현의 학문적 성과를 경하했다. 이 교수는 "우현이 경성제대 본과 법문학부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것도 당시로선 이례적이지만 근대적 제도교육체제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우현이 최초가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 당시 절대유물의 부족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미술사를 올바로 규명하는데 우현의 역활이 컸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7년 발견된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바로 그것. 그는 "특히 우현이 한국의 탑을 목탑과 전탑, 석탑으로 구분하고 그 변천과정을 정확하게 밝혀낸 점은 우리 미술사에서 분류방법으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7세기 세워진 광릉사 목탑이나 법륭사 목탑을 그들의 고유한 업적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우현에 의해 그 이전부터 벌써 한반도에서 목탑의 원형이 존재했고 불교문화의 전달경로를 제시한 점은 당시의 열악한 상황으로 봐선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우현의 천재적인 연구성과가 한국 미학과 미술사학계에 본류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후에 황수영(전 동국대총장), 진홍섭(이화여대 교수) 등 뛰어난 후학들이 그의 계보를 잇게 됐다"며 "특히 우현의 영향을 받은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이 '고고미술 동인회'를 구성해 오늘날 '한국미술사학회'를 만드는 디딤돌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뛰어난 우현의 학문성과를 좀 더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지역 후배들의 몫이 됐다"며 "인천에서 우현에 대한 평가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4-12-02 이희동

[인천인물 100人·8] 항도체육 영원한 후원자 정용복

1954년 10월 중순께. 인천시 중구 도원동 공설운동장(종합운동장 전신)에는 '망치'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젊은 체육인들과 인부들은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 밑과 윗부분을 쇠톱으로 도려내고 중간부분을 잘라 드럼통을 펴기 시작했다. '쫙' 펴진 드럼통은 허허벌판 논 한 가운데 위치해 있던 공설운동장 담장을 사용됐다. 당시 미군 트럭에 실려 도착한 드럼통은 수천개에 이르렀다. 양회(시멘트)와 목재 등도 속속 도착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물자였다.  이 광경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40대 중반의 신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인천 체육계의 '영원한 후원자' 정용복(丁龍福·1910~1977)씨. 그는 자주 공사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힘들게 얻어 온 드럼통과 시멘트, 목재 등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가건물에서 숙직도 자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운동장에서 사이클 선수로 활동했던 이홍복(72·58년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2관왕)씨는 “하루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 수천개와 양회(시멘트), 목재 등이 미군 트럭에 실려 운동장에 속속 도착해 어리둥절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연을 알 수 있었지요. 펴진 드럼통은 담으로 쓰였고 흙으로 되어 있던 운동장과 야구장의 계단식 스탠드에는 시멘트가 입혀지면서 흙위에 덮여 있던 가마니가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곧 '희망'이었지요.”  일제시대를 거쳐 6·25사변이 터지면서 주춤했던 인천 체육계의 새로운 시작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이듬해 정용복씨 등 몇몇 지역인사들에 의해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정용복씨는 당시 인천에선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54년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김정렬 시장의 권유로 정용복씨는 촉탁이긴 하지만, 시정자문위원직에 올랐다. 김 시장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일본어와 영어가 능통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정 선생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뛰어난 사교술로 능력을 발휘한 것이 공설운동장 보수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미군에게서 얻어낸 일이다. 당시 인천에선 이 일이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정용복씨가 그 많은 드럼통과 자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형 화재가 계기가 됐다. 미군 기름저장소인 '히다찌(현 남구 용현동 대우전자 일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 기름 수만통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인천대표 야구선수 출신인 이덕영(84·사망)씨는 “그때 사람들이 그을린 드럼통을 집으로 가져 가느라 난리였습니다. 물자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야구인 등 일부 체육인들이 드럼통을 얻어다 공설운동장의 담으로 써 '바람이라도 막아보자'고 정 선생께 제의했고, 시장과 협의를 거쳐 한미친선위원회의 도움으로 드럼통과 시멘트, 목재 등을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1년여동안 공설운동장 개·보수가 이어지면서 정용복씨는 가족들과도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고 큰 딸 경자(71·이화여대졸업)씨가 전했다. 경기도 분당에 살고 있는 경자씨는 “집 부엌이 헐고, 천장 지붕이 뚫려 빗물이 안방으로 흘러 들어도 운동장에 쌓여 있는 그 많은 양회(시멘트) 한줌 가져 오지 않으셨습니다. 공공의 물건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였지요. 당시는 왜그리 야속하던지….”  그는 “아버님은 오로지 인천의 체육발전과 사회활동만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며 “인천 체육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가족들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정용복씨가 체육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인 박흥순(지난 2001년 91세로 사망)여사가 딸 경자씨에게 전해준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한 터라 모든 분야에서 부정투성이다. 당당하게 겨뤄 깨끗하게 승부를 내는 것은 운동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운동하는 체육인들을 좋아한다.”  경자씨는 나이가 들어 이제는 아버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용복씨는 공설운동장 개·보수를 마친 뒤 인천지역 체육인 뿐만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체육계 후원자'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50~60대 정용복씨는 시 사회복지과 한편에 체육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천지역 체육인들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57년부터 60년까지 경기도 체육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활동은 체육계 후원이외에도 많은 분야에서 활동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948년에는 한국보이스카우트에 경기도 야영부장으로 취임, 57년까지 10년여동안 활동했다. 보이스카우트연맹 관계자들에 따르면 월미도에 대원들을 데리고 야영을 할때 미군부대에서 과자, 소시지 등 음식을 지원받아 연맹에서 3년여동안 사용한 일은 아직도 연맹의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또 곽상훈(전 국회부의장)씨의 국회진출에 발벗고 나섰다. 경기적십자병원 신축(55년)때 미군부대로부터 자재를 지원받거나 약품을 공급받도록 주선했고 현재 옥련동사무소 터 80평도 그가 시에 기부한 것이다. 이런 정용복 선생의 '체육사랑'은 드럼통으로 공설운동장 담을 쌓던때부터 10년뒤인 1964년 결실을 보게 된다. 1964년 9월 3일 제45회 전국체육대회가 인천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동안 정용복씨의 남다른 인천 체육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원로체육인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정용복씨는 "10년전 미군들에게 물자를 얻어 공설운동장을 개·보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스탠드에 앉아보기도 하고 트랙을 밟아 보는 등 뭑 기뻐했다고 한다. 1910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정용복씨는 그해 아버지 정일보씨와 어머니 손정수씨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는 인천창영초등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38년 일본대학 법정대에서 3년간 수학했다. 1948년 주원기씨의 설득으로 당시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민선시장에 당선된 김정렬씨의 권유로 촉탁직에 앉아 시정전반에 관한 업무에 관여했다. 1955년에는 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인천시 문화상(체육)을 수상했으며 1970년 대한체육회 창립50주년을 맞아 공로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이런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곡상(땅장사를 했다는 말도 있음)으로 엄청난 돈을 번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한 지식인으로 여유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인천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자 했다. 어수선한 시기에 유학을 통해 배우고 익힌 언어와 사교능력을 지역사회에 환원한 셈. 그러나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체육계도, 지역사회도 순수했던 그의 봉사정신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1976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1년여간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다 1977년 11월 3일 눈을 감았다. 그는 백석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소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흔적을 적은 비문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뷰/ 아시아경기 사이클 2관왕 이홍복씨 "저에게 선생님(정용복)은 '아버지'셨고, 50~60년대 인천지역 체육인들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셨습니다." 1958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부문에서 2관왕을 차지한 인천의 원로체육인 이홍복(72)씨는 정용복씨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그가 정용복씨를 처음 만난 것은 18살되던 해(1951년) 였다. 영화중학교 사이클 선수였던 그는 남구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사이클 연습도중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그 많은 종목의 선수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이클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특히 저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지요. 가끔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도 하고 당신이 아끼시던 옷도 자주 내어주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때는 옷이 무척 귀해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서 우승하고 돌아오면 성대한 환영식을 어김없이 준비해주시던 선생님은 저에게 아버지셨던 셈이죠. 사이클을 좋아했던 터라 막내 아들 일영(50·미국거주)씨에게 동산고 시절 선수생활을 잠시 시키기도 했었지요." 그는 정용복씨의 남다른 '체육인 사랑'과 운동장에서 만큼은 엄격했던 때를 기억했다. "선생님이 화를 내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일이 있었습니다. 60년대초 공설운동장에 가건물 3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인천의 체육계 관계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3곳중 한 곳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자, 선생님께서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신성한 운동장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체육인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당시 음악소리를 집 밖으로 흘러 나오게 했던 체육인은 '혼쭐'이 나기도 했지요." 그는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뿐만이 아닙니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운동을 하는데 담배를 피우시던 코치 선생님이 하루는 정용복 선생님에게 무척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운동선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파이프 담배를 자주 피우셨지만, 운동장에서 만큼은 피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후원과 그의 그칠줄 모르는 노력은 1958년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2관왕(도로와 단체)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금메달 2개를 목에 걸고 돌아왔을때 선생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시청 앞은 물론 답동성당까지 성대한 환영식을 마련해 주시고, 저녁에는 '화선장' 요릿집에서 만찬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각종 행사에는 물론 방송출연까지도 직접 챙겨주시던 자상하신 어른이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왕년의 사이클 2관왕 답게 중구 담동 신흥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자전거대리점을 운영하며 정용복 선생의 뒤를 이어 인천체육 꿈나무들을 격려하고 있다. 인천체육회 이사인 그는 오늘도 오전 일찍 자전거 대리점 문을 닫고 후배 체육인들을 만나기 위해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는 집을 나서면서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선생님의 순수했던 봉사정신을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인천체육이 이 만큼 발전한 것도 선생님 같은 분들의 공이 컸는데.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 마저 떠나면 누가 기억해 줄는지…."

2004-11-25 송병원

[인천인물 100人·7] 근·현대정치사 중심 삼연 곽상훈

'나는 어둡고 쓰라린 역사의 소용돌이에 던져져 평생을 폭풍 속에 살아왔다'. 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말년에 쓴 '삼연회고록'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한말 부산에서 태어나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 경성공업학교를 다니면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청춘을 일제강점기에 울분을 토해내며 보내고 쉰 두살 제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 5선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의회의장과 국회의장, 대통령권한대행을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유족에 대한 연결고리마저 끊겨져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의 가족사에 대해선 몇몇 향토사학자들과 지인들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곽상훈의 둘째 아들인 곽원배씨의 제물포고교(7회) 동창생인 황규동 원장(인천시 중구 인현동 황규동치과)의 기억을 빌리면 “곽상훈씨가 국회의원을 지낸 동안에는 나이가 어려 접촉할 기회가 없었고, 그의 아들 원배군이 동기생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어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며 “3년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했다.  인천 시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김양수(72) 선생은 “곽상훈씨의 가족은 60년대 중반쯤 인천 중구 중앙동(현 신포동)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갔으며 천재소리를 들었던 첫째 아들 곽현태씨가 바둑으로 유명했다는 얘기 정도만 들었다”고 한다.  곽상훈의 일생은 3·1운동, 해방기, 반민특위, 3선개헌파동, 4·19혁명, 5·16군사정변, 유신헌정을 거쳐 제3공화국,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최규하대통령 취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런 역사의 풍랑의 중심에서 벼텨왔던 것은 남다른 그의 성격 때문이다.  망국(亡國)의 세월 속에서 그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선 참지 못하고 왜경(倭警)을 때려 경찰서를 제집 들나들듯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성격은 가족사를 보면 이해가 쉽다. 곽상훈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오위장(五衛將)으로 종2품이었고, 증조부는 중군(中軍)의 요직을 지내면서 탐관오리들로부터 무서운 존재로 알려졌다고 한다.  김양수 선생은 “전해지는 얘기로는 여주군수를 지낸 곽상훈씨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의 아버지가 당시 군청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뜯어다 인천으로 가져와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근업소를 지을 만큼 위세가 컸고, 이런 가족사의 배경이 일제강점기 청년 곽상훈을 일제의 반항아(反抗兒)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던 곽상훈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도전적이었던 그는 '경인기차통핵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과 부산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조종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상훈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인 부산을 찾아 동래읍 장날인 3월13일 만세운동을 조종한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일본인 수원고농(水原高農) 도미나가 교장선생의 보증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중심으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을 받기도 했다.  이 때 고향 선배로부터 받은 아호가 삼연(三然)이다. 삼연은 산자연(山自然), 수자연(水自然), 아자연(我自然)으로 '인생'을 느긋하게 태어난 대로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거칠게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곽상훈은 1920년 신간회(新幹會)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하면서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하는 등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인다. 1925년엔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해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또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한 때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치  곽상훈은 해방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한민당의 후보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천지역 청년모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돼 52세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자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검찰관에 임명돼 친일분자 색출에 나섰다. 1950년 인천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제2대 민의원에 당선돼 전원위원장을 지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서는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제헌 및 2대 의원 때는 원내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내던 1952년 5월 한국전쟁 피난시절 부산에서 계엄령선포에 따른 일명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면서 이승만정권과 극한 대립을 보였다. 곽상훈은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국회가 마비되자 개헌국회의 의장으로 보선됐다. 그 해 5월17일부터 허정(許政)과도 정부가 들어선 22일까지 1주일 동안 법에 의해 대통령권한대행의 직무를 맡았다. 이어 그해 7월에 열린 선거에서 5대 민의원에 당선, 민주당에 의한 국회 지배 아래서 제7대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된다. 당시 민주당은 윤보선을 지지하는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김도연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을 지지하는 박순천 한근조 등을 중심으로 한 '신파'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다. 곽상훈은 장면을 지지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장면과 등을 돌리게 된다. 1961년 곽상훈은 국화의장 자격으로 37개국 순방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여행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맞는다.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는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한다. 장면 정권의 2인자였던 곽상훈의 탈당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욱 충격을 준 것은 자신의 손으로 수립한 장면 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국회의장 자격으로 5·16혁명을 적극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면서 박정희정권 지지자로 변신해 야당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는 "해산된 국회가 무능·부패하고 정쟁으로 시종했다는 국민적 비판과 역사적 판단을 전적으로 시인한다"며 "정계의 추악한 양상은 어떤 비상수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고질화했다"고 말함으로써 5·16군사정변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헌법이 정지되었으니 파쟁(派爭)을 종식시키려는 나의 모든 노력과 조정이 실패로 돌아간 그 마당에서 차라리 '쿠데타'라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혁명을 기정 사실화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법은 어겼지만 썩은 것을 도려내고 국정을 쇄신해 제발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곽상훈은 이후 박정희최고회의의장을 만나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는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절대 공명선거를 해야하는 것. 부정선거를 하려든다면 스스로가 혁명정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국민을 두번 기만하는 것이 되며 반혁명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 당시만해도 때묻지 않은 사람(군인)들에게 정치를 맡겨보고 싶었던 것 뿐, 정치를 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 곽상훈은 정계에서 일단 은퇴한 뒤 1969년 통일원 고문과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곽상훈은 1972년 유신헌정(維新憲政)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재개, 1979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곽상훈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자격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최규하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치생활을 마감하고, 3개월 뒤인 1980년 1월 9일 서울 우이동 자택에서 75세의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또 하나의 모습… 야구인 곽상훈 곽상훈은 만능 스초프맨이었다. 그가 어릴적 얼마나 운동을 좋아했는지는 회고록에서 알 수 있다. "동래고보를 다닐 때 나는 유독 운동을 좋아했다. 야구, 축구, 정구 가릴 것 없이 노상 운동장에서 살다시피했다. 운동에 열중해 있는 동안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 말썽을 부리는 것 보다는 학교 운동장에서 늦도록 운동에 열중하는 것이 대견스러웠던지 집안에서는 심한 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도 책망하는 일이 없었다." 곽상훈이 우리 나라 최초의 단일 야구팀을 창단하고 각종 청년조직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 6월 곽상훈은 자신이 주도하던 친목모임인 '경인기차통학생회'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야구선수단인 '한용단(漢勇團)'을 창단한다. 한용단에서 나뉘어져 발전한 것이 한용청년회, 제물포청년회, 인천청년회, 인천소년회, 기봉단, 인천보이스카우트 등이다. 이 조직들은 해방 이후 곽상훈을 5선의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한용단은 일본인들로 구성된 야구팀인 '미신(米信)'을 비롯해 '항(巷)', '조운(朝運)', '경전조(慶田組)', '경전(京電)', '인천철도사무소 기관고(機關庫)'등의 선수단과 웃터골운동장(현 자유공원 제물포고부지)에서 매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당시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시민들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놓고 웃터골로 모여 응원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주민들은 그때나마 소리를 질러가며 일본에 빼앗긴 한을 풀었다고 한다. 당시 야구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은 배재학당에 다니던 최영업, 이수태, 박안득과 중앙고보의 김영길 등이 있었다. 특히 배재학당의 함용화 지의식, 휘문고의 김정식 등은 요즘 얘기로 스카우트를 거친 선수들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인천야구협회가 발족해 인천야구의 정통성과 육성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이후 전국야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밑거름이 됐다. 한용단 단장 곽상훈은 한국으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야구단의 책임자로 진두 지휘를 했다. 그러던 1924년 한용단과 미신팀의 주말 결승전 때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우승을 놓치자 흥분한 곽상훈이 일본인 검도사범인 기요다(淸田)와 몸사움을 벌이자 한인 응원군중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인과 충돌을 빚어 2년간 야구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2004-11-19 서진호

[인천인물 100人·6] '황어장터 3·1만세' 주역 심혁성

해방 59주년을 맞은 지난 8월15일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친일파 청산'을둘러싼 정치권의 뜨거운 공방 속에서 열린 '황어 장터 3·1만세 운동 기념관' 준공식이 바로 그 것. 애국 지사 심혁성(沈爀誠·1888~1958)은 이 3·1 만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3월24일 오후 2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황어장터(장리기시장)에선 주민 600여명이 일제히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곳은 소가 주로 거래되는 우(牛)시장으로 매월 5일(음력) 장날에는 1천여명의 인파가 모였다.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3·1독립 운동이 일어난 터라 경계를 강화해 만세 운동 발생 3시간만인 오후 5시께 거사를 주도한 오류리 주민 심혁성을 체포했다. 그러나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 4명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다.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李殷先)은 칼에 맞아 살해되고 주민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순사들은 이 틈을 타 심혁성을 부평 주재소로 연행했다. 계양면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날 밤 친일파로 지목되는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당시 일제침략의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이때 주민들은 일제의 조선지배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임학, 용종, 병방,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계양주민들은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구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인 3월25일에도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포를 발사하며 제지해 가까스로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킬 수 있었다.  '황어장터 3·1만세 운동 기념관'은 계양구가 지역의 역사적 전통성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19억원을 들여 건립했다. 인천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朴桓·46) 교수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3·1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독립 운동사를 전공한 박 교수는 “인천에서 벌어진 다른 소규모 만세운동과 비교해 볼때 가장 적극적이고 규모가 큰 항일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검토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손자마저도 고령화되고 있어 인천지역 3·1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3·1 운동이 전개된 1919년 인천에서는 3월6일부터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3월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특히 부두와 정미소 노동자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격문이 시내 곳곳에 붙었다. 다음 날인 3월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본격적인 대규모 항일운동이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3월27일 문학동 시위, 3월28일 남동시위, 4월1일 월미도 등지의 만세운동에 밑거름이 됐다.  1919년 3월27일자 '매일신보'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23일 순사 3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그런데 24일 부평읍 밖 시장에서는 장날을 좋은 기회로 삼아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심혁성)을 빼앗고자 돌을 경관에게 던지고, 경찰관에게 달려든 자도 있어서 경관 등은 발검하여 소요자편에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  심혁성 지사를 비롯해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일부 인사들은 김포 등 타 지역으로 피신했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은 1919년 10월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상고했으나 11월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량이 최종 결정됐다. 심혁성 징역 8월, 이담 징역 2년, 임성춘 징역 1년, 최성옥 징역 10월, 전원순 징역 10월, 이공우 벌금 20원 등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는 풍산(豊山) 심씨 문식(文植)씨의 큰 아들로 1888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주로 농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기록과 자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3·1운동이 국내외 각지에서 발발하자 심혁성은 당시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 기독교 세력과 농민들을 규합해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보안법 위반 및 소요·훼방·직무집행방해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심혁성 지사는 1921년 만기출옥한 뒤 서울에 잠입해 천도교인 장동호와 함께 암약했다. 1927년에는 함경도 안변군 위익면 청학리에서 임시거처하며 상해 임시정부와 두차례에 걸쳐 국내외 활동지시를 받고 활동했으며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 강원도 영월 등지를 돌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심혁성 지사는 한평생 일제와 싸우며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끔찍히 생각했고, 자신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손자 며느리 권옥규(67)씨는 "처음 시집을 와서 진지를 올리는데 밥상에 세가지 반찬을 올렸다가 혼났다. 해방 후에도 밥상에 여러가지 반찬을 못올리게 했고 은수저도 못놓게 하셨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에게 뭔가 나눠주고 베푸는데는 인색하지 않으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심혁성 지사는 1958년 12월 14일 인천시 북구 백석동에서 타계했다. 향년 70세.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인터뷰/ 심혁성지사 손자 심현조씨 "한겨울에 길에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집에 오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일을 해도 '당연히 할 일이다'며 주위에 한번도 내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심혁성 지사의 손자인 심현조(沈鉉祚·67)씨는 해방때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등 산속에서 생활하던 어린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혁성 지사가 아들 홍기(鴻基·1990년 별세)씨와 함게 강원도 영월에 피신했던 1937년 태어난 심씨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강직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한번 옳은 일이라고 마음을 정하면 누구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다니다 보니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와 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씨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인천시 북구 백석동으로 이사를 오고, 아버지가 한약방을 열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매일 아침 기도(천도교)를 드렸다고 했다. 심씨는 지난 1982년 심혁성 지사의 평생이력을 정리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냈고,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의 장손인 심씨가 한해 정부에서 받는 돈은 단 돈 20만원. 해마다 심혁성지사의 제사가 있는 12월에 제수비용으로 나오는 돈으로, 다른 연금은 없다고 했다. 심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병역 기피로 물의를 빚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면서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결연히 목숨을 바쳤던 조상들의 모습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4-11-04 신민재

[인천인물 100人·5] 개항기 대부호 서상집

'민족자본을 결집한 상업적 선각자에서 친일까지'. 개항기 인천의 대표적인 부호였던 서상집(徐相集·1853~?)의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도덕사관'에 입각해 그의 삶을 조명할 때 그의 친일행적은 분명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도덕성'을 배제할 경우, 역사 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삶은 개항기의 인천을 이해하는 '키 워드'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이 한·청·일 등 삼국 상인이 각축전을 벌일때 한국상인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는 바이다. 이 때문인지 몇몇 기록에서 서상집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천시 중구 홈페이지 향토자료실에서는 서상집에 대해 “인천부사겸 감리를 지내고 인천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1897년에 신상회사를 발기하고 인천의 물산 객주 50여명을 단결하여 조선인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서상집이 인천상공회의소의 전신으로 민족자본의 결집체인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의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상인 출신으로 지금의 경제특구청장 또는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인천항 감리를 지낸 그의 입지전적 삶도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의 단초를 제공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서상집이 활동할 시기의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많은 상인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때였다. 이에 따라 민족상인들도 외국상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객주(客主)들을 주축으로 1885년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인천객주회'는 조직이나 기능면에서 근대적인 상인단체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이때 제대로 구색을 갖추고 등장한 게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인 '인천항신상협회'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인천객주회를 모체로 1896년에 인천항신상협회가 출범했는데 인천항의 객주 서상집 등이 주동이 돼 서상빈, 박명규 등의 진신(縉紳·벼슬아치)과 민상(民商) 등이 설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처음 회원은 50명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객주들이었으나 적지 않은 명망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는 서상집에 대해 “인천항신상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서상집은 대구출신(인천시 중구청 자료에는 서상집의 출신지가 중구 내동으로 기록돼 있음)이었음에도 인천항감리서의 감리직에 있었고 또 전환국의 지사를 지낸바도 있어 경제문제에 깊은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천항신상협회'는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탈에 대항해 민족상권을 옹호하는 한편 민족계 상인들의 상업자세의 혁신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때로는 일본상인들의 비위행위를 규탄했고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탈을 정부에 호소해 시정을 촉구하고 상업정보를 수집해 민족계 상인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김윤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논문 '개항기 인천유통네트워크와 한상의 성장조건'을 통해 “인천-상해, 인천-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 유통네트워크의 작동으로 다양한 수입상품이 유입되었던 인천항은 경인지역과 평양, 군산, 목포 등지에 수입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인천-서울간 무역에서 한국산 취급은 대부분 한상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개항기 인천의 분위기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인천항신상협회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상집은 또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 인천지점의 지배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 본점으로부터 영업점 표창장과 포상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인천의 재발견-일본제일국립은행에서 대한천일은행까지).  그러나 서상집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까지다.  그는 40대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친일행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서상집의 친일행적은 기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서상집은 자신의 토지 5천630평을 일본거류지에 기부하기도 했다.  국내 처음으로 서상집의 호적대장을 발췌, '한국근대상업도시연구'(국학자료원, 1998)를 펴낸 오성 세종대 교수는 “서상집은 인천의 거상(巨商), 부상(富商), 호상(豪商)으로 불릴만큼 인천항의 상업계를 대표할 만한 상인으로 선박을 이용한 해운이나 무역사업에도 손을 댔다”며 “그가 45세였던 1989년 당시 호적표에 나오는 그의 가옥은 기와집이 56칸, 초가 6칸 등 모두 74칸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왕족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규모의 저택이었다. 그는 토지도 많이 보유해 당시 인천에선 “웬만한 땅은 서상집의 땅”이란 말이 회자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부를 가늠케하는 또하나의 기록은 흥미를 더해준다.  '개항과 양관역정'(최성연 저)에 따르면 서상집의 자녀는 '언제나 뉴우·스타일의 양복을 쪽쪽 빼고 다녔으며 신기한 소지품이 많았고 또 멋진 오토바이를 몰고 으스대던 모던·뽀이'였다. 서상집은 특히 배다리 십자로에서 율목동으로 뚫린 행길 초입에 인천에서 최초로 2층 벽돌 양옥집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 서상집의 행적 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중의 하나가 개화 운동가 '유길준'과의 관계다. 오성 교수에 따르면 서상집은 당시 외무참의(外務參議)였던 유길준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 1894년 발족한 군국기무처의 회의원까지 됐다가 1902년 유길준이 일본 망명 당시, 황제를 시해하고 의친왕을 옹립, 망명자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유길준의 계획을 밀고했다. 서상집은 같은해 인천항의 감리로 임명돼 40여일간 재직했는데 유길준의 계획을 밀고한 포상으로 추측된다. 서상집의 사망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들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하이, 톈진 등지에서 살았는데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혐의를 받고 독립군의 손에 일가 몰살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개항과 양관역정). ◇인터뷰/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 개항기의 인천을 조명하기 위해 몇몇 학자들이 서상집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의 상임연구위원인 김창수(46)박사가 그 중 한 사람. 김 박사는 "서상집은 인천을 움직였던 사람 중 하나로 서상집이나 객주에 대한 연구는 인천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뿌리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박사는 이어 "서상집은 공과를 떠나 한·청·일 삼국상인이 각축전을 벌일 때 한상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 인물로 어찌보면 중국에서 유통노하우, 근대식 비즈니스를 체득한 상업적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상집을 연구하면 개항장의 경제가 거의 드러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 김 박사는 또 "군국기무처의 일원이었던 점, 유길준의 개혁에 깊이 관여하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개인의 치부를 위해 변절하는 과정은 군국기무처의 형성배경, 더 나아가 한국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며 서상집 인물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서상집에 대한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다는 게 김 박사의 고백. "인천항 감리까지 지낸 중요한 인물인데도 인물 사진 하나 없고, 인천시사 인물편에 기재되지 않을 정도로 서상집에 대한 연구는 일천한 수준입니다. 더욱이 현존하는 몇몇 기록들도 일본인의 관점에서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관리하는 부분도 미흡한 실정입니다." 김박사는 이에 따라 "내년부터는 개항기의 객주연구, 인천의 상업사 연구를 연구사업 특수과제로 정해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의 연구가 과거의 인천을 재조명하고 더 나아가 경제자유구역 인천의 미래에 이정표를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2004-10-21 임성훈

[인천인물 100人·4] 인천상업강습회 설립 주도한 이흥선

일제시대 인천 10대 부호 중 한 사람이었던 '이흥선(李興善·1877~1975년)'의 발자취를 찾기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다.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일을 도모했던 겸양의 성품이 한 가지 이유이고, 후손들도 이미 작고했거나 뿔뿔이 흩어져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이 또 다른 이유다.  이흥선은 일본제국주의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우리나라를 극도로 착취하던 1938년 7월14일, 인천의 유지들과 힘을 모아 인천 최초의 민족사학인 '인천상업강습회'를 개교시킨 주인공이다.  창씨개명, 조선어교육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때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교육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지금의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민족학교를 연 것이다.  중구 율목동 239에 둥지를 튼 인천상업강습회는 이듬해 4월1일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하고 학생 120명, 교사 3명으로 개교식을 갖고 교육을 시작했다. 이흥선을 비롯 김윤복, 유군성, 김세완, 김종섭 등 당시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부호들은 각기 사재를 털어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 밀알을 뿌렸다.  66년의 세월동안 인천상업강습회→인천상업전수학교→동산중→동산고로 발전하면서 인재를 길러 온 학교법인 동산육영회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인천시사 인물편에는 이흥선이 '김포' 출생으로 기록돼 있지만 사실은 '황해도'라고 한다.  인천시사 편찬위원회 김양수(71) 상임위원에 따르면 이흥선의 가족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포로 이주했고 9살 소년이 된 이흥선은 입에 풀칠할 요량으로 혈혈단신 인천에 올라 왔다.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미두(米豆)거래소 사환으로 취직한 그는 19살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이 곳에서 10년간을 열심히 일했다.  결혼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두려 하자 미두거래소 일본인 사장은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돈 1천환(10억원 상당)을 퇴직금으로 지급했다. 이흥선은 이 돈을 밑천삼아 1918년 중구 유동에 인흥정미소를 차렸고 탁월한 경영실력으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고 한다.  1936년엔 석유와 곡물업을 겸한 인흥상사를 차려 인천의 10대 부호 반열에 올랐다.  일본인과 합작해 지금의 동인천역 앞 용동에 당시로선 최첨단인 단층건물의 '인영극장'을 건립, 공연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부를 얻은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배움에의 목마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 부실운영을 명분으로 민족사학을 하나 둘 폐교시키는데 혈안이 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교육정책에 맞서 민족자존을 지켜 낼 미래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결심도 이 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인천경제계 유지들과 뜻을 모은 이흥선은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헌납해 인천상업강습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육영사업에 대한 그의 강한 의욕은 훗날 학교법인 동산육영회 이사장으로 취임하던 1973년 4월21일 발표한 글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배움의 길을 부단히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도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일본이 요즈음 경제대국이 되어 세계 강국으로 군림하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문화의 근간은 모두 우리 민족이 전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오늘은 왜 세계 강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국제정세의 흐름에 당황해야만 하는 슬픈 위치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일까요? 배움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배움의 길을 걷는데 있어 배움, 그것과 민족에 대한 사명감없이 우왕좌왕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절대로 되지 맙시다.”  이흥선의 민족교육애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일화도 밝혀졌다.  일제시대 당시 영화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갔다가 공부를 중도포기하고 귀국한 인천여성 박창례가 있었다.  박창례는 못배운 한이 쌓였다고 한다. 박창례는 1040년께 인천에 산재해 있던 선미공장(정미공장에서 키로 곡식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 공장), 동양방직, 성냥공장 등에서 일하던 여공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유동 보각선원에 야학을 개설했다. 그러나 한글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일본경찰로부터 갖은 폐쇄협박을 받아야 했다.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이흥선은 선뜻 자신이 경영하던 유동 인흥정미소 창고를 야학 공간으로 무상임대해 주고 일본경찰의 탄압으로부터 적극 보호해 줬다. 결국 박창례는 이흥선의 정미소 창고에 '동명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여공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일본경찰의 강압으로 나중에 '소화학원'으로 교명이 바뀌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의 인천동명초교로 발전하는 모태가 됐다. 인천의 10대 부호 중 한 명이었고 어렵게 모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민족사학을 설립하는데 이바지한 이흥선이었지만 그는 유벌나게도 전면에 나서길 꺼렸다. 수십년의 풍상 속에서 학교법인 동산육영회 설립과 발전에 끊임없이 동참하고 관여한 그였지만 설립동료들이 모두 타계하고 그 자신도 90대 노객이 된 1973년에야 떠맡다시피 법인 이사장직에 취임했다. 마지막 인생의 투혼을 자신의 혼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동산육영화에 쏟은 이흥선은 1975년 6월 10일 내동 자택에서 조용히 서거했다. 우리나라 고고학의 대가인 고유섭 선생의 부인이었던 맏딸 그리고 경기은행 설립멤버로 상무이사를 역임한 영래씨가 차남이다. 이흥선의 종손자로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 코치를 지낸 이춘근(58·동산고 15회)씨는 "할아버지는 평소 과묵하고 엄한 성품이어서 감히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건네지 못할만큼 위엄이 넘치는 분이었다"고 전했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 편찬을 주도했던 오종원(75·전 인천일보 편집국장)씨는 "이흥선은 근대 인천의 경제와 교육을 부흥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라며 "인천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그 분의 행적과 이력에 대해 보다 자세한 사료취합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향토사학계 일각에서는 일제시대 식민지 식량수탈의 창구였던 정미소를 통해 부를 축적한 측면 등 비판적 관점에서 연구할 부분도 적지 않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인터뷰/ 김양수 인천시사편찬 상임위원 "인천시사 인물편에 '이흥선'이란 인물을 수록하면서도 그 분의 자세한 이력과 행적을 담지 못해 여지껏 아쉬움 속에서 지냈는데 인흥정미소와 자택 터를 찾게 돼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요." 노환으로 불편한 몸을 이글고 지난 12일 이흥선 발자취 더듬기에 동행한 김양수(71·사진)씨는 남다른 감회를 보였다. 젊은 시절 언론인, 문학평론가 등을 거쳐 지금도 인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인천시 문화재위원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어린시절 아련하게 떠오른 기억을 더듬어가며 중구 율목동, 유동, 내동, 신포동 일원을 훑기 시작했다. 이흥선 정미소로도 불렸던 인흥정미소 터는 이미 흔적 조차 사라진지 오래지만 유동 11 버드나무3길에서 찾아냈다. 1940년 이흥선이 박창례에게 야학 동명학원 교무실로 무상임대해 줬던 인흥정미소 창고는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붉은 벽돌 형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곳 토박이 김태원(66)씨가 30여년 전 매입해 거주하고 있었다. 이흥선이 건립한 신식 영화관이었던 동인천역 맞은편 용동 인영극장은 지금은 높다란 은행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널따란 기와집 10여채가 몰려 있어 이흥선이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내동 부촌(답동성당 맞은 편 신포시장 초입)은 지금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의류매장건물로 변해 있었다. 김씨는 "이흥선의 집은 유년시절 우리 집(용동)과 가까운 내동에 위치해 있었고 이흥선의 맏딸(약 15년 전 작고)과 친했던 친척 누님을 따라 자주 이흥선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흥선의 이력과 행적을 추적하려 애썼지만 그분 자신이 워낙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길 싫어하는 성품인데다 차남 영래(2001년 작고)씨도 풍부한 자료를 내놓지 않아 인천의 거목을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인천경제의 거목이자 육영사업에 헌신한 이흥선 연구가 시와 향토사학계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2004-10-14 윤관옥

[인천인물 100人·3] 운석 장면 선생

30여년간 군사독재의 막을 연 1961년 5월 16일. 서울 혜화동 깔멜수도원으로 몸을 피한 제2공화국 총리 운석(雲石) 장면(張勉·1899~1966).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군인들을 피해 미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깔멜수도원으로 찾아가 친교가 있던 원장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9개월이라는 짧지만 소중한 민주주의 경험을 맛 봤던 제2공화국 총리 장면에게 '무능'과 '나약'이라는 평가가 따라붙게 된 결정적 사건이다. 이런 꼬리표는 어쩌면 1960년 4월 '피로 쟁취한 자유'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한 우리의 원망과 질책을 그에게 돌려버린 탓일 것이다.  수녀원으로 몸을 피했던 운석은 정치정화법에 엮여 구속된 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형집행 면제로 석방됐다. 그후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1966년 6월 4일 간암으로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분명 굵었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운석연구회에서 운석 재조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는 “수도원으로 몸을 숨긴 운석이 그 곳에서 미국측에 쿠데타 세력의 진압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운석을 '무능한 정치인'으로 만든 것은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민주주의 실현' '언론 자유' '지방자치 실현' 등 숱한 성과에도 장면 정부에 대해선 늘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신·구파간의 끊이지 않는 정쟁, 눈만 뜨면 벌어지는 데모, 주체할 수 없는 언론자유, 유약한 정부 등 '혼란·무능'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또 한국정치사에서 읍·면·이장까지 선거로 뽑는 어느때보다 민주주의가 꽃핀 시기였다는 게 또 하나다. '무능한 정치인'과 '민주주의를 중시한 지도자'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정체성이 흔들리는 오늘 우리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데 장면 정부가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단순히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다시 조명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천이 낳은 한 정치인의 뒤틀려진 평가를 밝혀내고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의식의 발로라는 접근이 타당하다.  운석의 고향은 인천부 다소면 화촌동(현 인천시 동구 화수동→광복후 1946년 동명을 화수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외가가 있는 서울 적선동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인천으로 옮겨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1906년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에 입학해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동감 등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웠다.  박문학교 고등과와 서울대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운석은 YMCA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에 진학, 3년간 수학했다. 이어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턴대학과 시튼 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천주교 학교를 중심으로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당시 동성상업학교) 등 20여년간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운석의 후손인 춘천교구장 장익(71) 주교는 “아버님은 추운 겨울이면 학생들이 추위에 떨 것을 걱정해 등교 1시간 전에 교실을 돌며 장작불을 펴놓을 정도로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다”며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젊은이들 곁에 계셨다”고 선친을 회고했다.  운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과 입법의원에 잇따라 뽑혀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된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한국 정부의 국제 승인을 얻어냈고, 6·25 발발 후 미군과 유엔군을 파병토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이때부터 독재를 일삼던 이승만 대통령에 항거, 1956년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으로 얻어 낸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5·16쿠데타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허동현 교수는 “민주주의 원칙을 중시한 장 총리가 4·19로 얻은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게 제2공화국 총리로서 강력한 권력의 체취도, 카리스마도 느껴지지 않는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 계기”라며 “하지만 당시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운석을 달리 평가한다. 고려대 조광 교수 역시 “운석은 탁월한 종교·교육 운동가인 동시에 특출한 외교관”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한국형 경제성장 신화를 이뤘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장면 정부가 뿌리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알려진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운석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회에서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는 “장면 정권이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은 박정희 정권에 계승되었다. 이는 당시 경제난 해결이란 시대적 과제를 위해 전력을 다한 장면 정권의 의지가 담긴 작품이었다”고 운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공과를 토대로 무능한 정부로 인식되어 온 제2공화국과 장면의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다. 운석의 정치적 역정은 좌절과 실패로 끝났으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실천의지는 오늘 우리를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숙제로 남아 있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힘을 쏟았던 장면의 인생역정은 곧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되새기게 하는 교본(敎本)이 아닐까. ◇인터뷰/ '운석연구회' 허동현 경희대 교수 운석(雲石) 재조명 연구단체 운석연구회(회장·조광 고려대 교수 )에서 활동 중인 경희대 교양학부 허동현 교수. 수원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정부의 유엔 승인과 한국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낸 외교적성과 그리고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 준 반독재 투쟁 등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한국은 유럽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몇 안되는 아시아국가로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시민사회로 압축성장을 해왔어요." 오늘 우리사회에서 깊숙이 자리매김한 언론의 자유, 지방자치 실현 등의 뿌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실현'을 중시한 제2공화국 시절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경제정책 분야에 무능했다는 운석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그는 제2공화국에서 추진한 국토개발사업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 정권이 이어받아 추진한 점을 들어 장총리가 경제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개발전략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는 정치가 장면의 어떤 점이 5·16쿠데타를 촉발했는가라는 결과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운석은 다원화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주도의 경제발전, 대화의 정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아래서 실천에 앞장선 이상적, 선각적 정치가였습니다. 그런데도 무능한 정권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은 군사정권이 그를 왜곡했기 때문일 겁니다." 늦게나마 운석연구회를 중심으로 장면 박사의 재조명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나라를 맡길 수 없었다'는 5·16쿠데타 세력의 그늘에서 한국 현대사가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라고 강조했다. "양심적인 교육자며 탁월한 외교관, 권모술수를 버리고 정도(正道)를 걷던 보기 드문 선각자입니다. 지금 우리 정치인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운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9년 발족한 운석연구회 활동에 정성을 쏟고 있는 허 교수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2004-10-07 이우성

[인천인물 100人·2] 검여 유희강 선생

우리나라 현대 서예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의 예술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검여의 서(書) 세계를 온전히 이어가고 있다는 원중식(64)씨를 찾았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한적한 시골마을에 새로 지은 2층 집이 눈에 띄었다. 2층 서실에서 마주한 원씨는 검여 작품 몇 점과 검여를 소개한 책자 등 이런저런 자료부터 꺼냈다. “지금 우리 서단의 기초를 마련한 분이 바로 검여 선생이십니다. 선생님이 활동하실 당시엔 대부분의 서체가 당나라 이후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하지만 남북조 서체를 하셨어요. 지금은 모두가 그 남북조 서체를 하고 있습니다.” 검여가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얘기다. 이런 검여가 인천출신이다. 서구 시천동이 검여가 태어난 곳이다. 하지만 검여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검여의 작품도 고향 인천엔 많지 않다. 오른손으로 경지에 이를 즈음 중풍을 얻는 바람에 오른 쪽이 마비됐다. 다들 검여의 예술활동도 끝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검여는 다시 일어섰다. 왼손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서단에선 유일하게 좌수서(左手書)로 일가를 이뤘다. 검여의 삶은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검여 유희강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로 꼽히는 이경성(85)씨는 자신의 책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 “검여 유희강의 예술은 겸허한 인간성 위에 자리잡고 있기에 옥같이 은은한 빛을 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검여는 각 체를 모두 잘 했으나 특히 행서에서 필치의 묘미를 드러냈다. 그 행서가 무르익을 무렵 불행하게도 그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수십년 간 오른손에 의탁하여 연마했던 서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 것이다. 원점에로의 귀환,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며 그 예술가가 이미 일가를 이룬 경우 그 비극은 더욱더 커진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쯤에서 그의 역사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의 예술가 검여는 다시 돌아온 원점에서 왼손으로 새로운 서체를 개척해 낸다”라고 검여를 평가하고 있다. 이씨는 특히 검여를 한국예술의 전형을 세웠다면서 두 가지 예를 든다. 하나는 그 능력의 결정으로 이룬 서예의 예술적 완성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의지로 초극해 수준 높은 예술을 창조한 기적이란 것이다. 서구 검단 오류리에 있는 '검여 유희강 선생 묘비'엔 검여를 오히려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전통과 속기(俗氣)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근대에 와서 추사 김정희가 비로서 새 경지를 개척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검여가 그 뒤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 쓰라린 변천이 계속되는 민족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와 방랑과 청빈 질병과 싸우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을 즐기면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갔으니 아아 검여는 불우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다행했다고 할까….” 검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제자 원씨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검여가 1960년대 초 한 달여 동안이나 간첩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62년 아니면 63년일 겁니다. 서울 안국동에 서실이 있을 때예요. 아침 10시면 꼭 나오시는데 그 날은 안나오시는 거예요.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이른 아침 댁(인천 남구 도화동)에 지프가 와 선생님을 모셔갔다는 겁니다. 월북한 명륜학교 동창생이 북에서 내려왔는데 선생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잡혔다는 거예요. 간첩을 재워주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을 받은 모양입니다. 선생님은 하지만 일체의 말씀이 없으셨어요. 때문에 그 얘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1911년 5월 22일 태어난 유희강은 우리나라 전통 서예의 마지막 세대로 불린다. 서예는 어릴적부터 한학에 기초해야 하는 가학(家學) 전통이 중요한데 검여는 유명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현감을 지낸 유태형이 할아버지로, 유년기에 튼실한 한학과 서예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또 24세부터 27세까지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을 다녔다. 이후엔 경성기독교청년회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도 졸업했다. 여기서 배운 중국어를 바탕으로 1938년엔 아예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서화와 금석학 연구에도 매달린다. 항간엔 백범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 유학을 떠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이란 얘기다. '한구무한보'와 '남창민보' 등 중국 신문에서 기자생활도 한다. 검여는 또 35세이던 1945년부터 1년여 동안 광복군 주호지대장(駐滬支隊長) 비서도 지냈다. 귀국하기 전 서예가로선 드물게 서양화도 공부한다. 서양화 실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동시에 출품해 둘 다 입선한 것이다. 1946년 고향에 돌아오자 마자 지역 예술·교육활동에 전념한다. 인천시 성인교육회 서곶지부 교육부장,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문총 인천지부 집행위원, 인천 해성중학교 미술교사,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시립도서관장, 인천 한미문화관장, 인천시문화위원, 인천교육대학 강사, 한국서예가협회 회장 등의 이력이 검여의 왕성한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증명하고도 남는다.1968년 중풍으로 쓰러진 검여는 수원에서 치료받으며 좌수서를 시작한다. 상형문자를 주로 해 좌수서의 경지를 한층 높인 그는 1973년엔 발병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른손으로 쓴 '柳得恭 洗心 第六句節' 작품을 제6회 검여서원전에 출품한다. 당시 동양TV는 이런 검여의 치열한 예술세계를 특집(인간만세)으로 다루기도 했다. 1976년 10월 16일 간송미술관 사군자전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온 검여는 이튿날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이 재발하고, 다음날 세상을 뜬다.◇죽정서원 연 제자 원중식씨검여 유희강 선생의 '먹갈이'를 하면서 그의 서풍을 잇고 있는 원중식(64)씨는 강원도 시골에서 후학양성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원씨가 집을 서당식 2층으로 지은 것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란다. "서예는 어릴 때 하되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을 이름을 따 '죽정서원'이라고 정했습니다."제물포고등학교 미술반 시절 '인천시 중·고 미술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을 때 심사위원이던 검여를 처음 봤다는 원씨는 1960년 대학 1학년 때 검여에게서 직접 서예를 배웠다.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 몇 명과 같이 가 선생님에게 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인천시립 박물관장으로 계셨는데 박물관 한 편에 우리를 모아놓고 붓잡는 법부터 가르치셨어요."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검여'를 배우게 된 원씨는 3년 만인 대학3학년 때 국선에 입선한다. "선생님은 시·서·화를 다 해야 하는 우리 전통 서예 맥락의 끝머리에 있는 분입니다. 특히 선생님은 작품을 팔지 않았어요. 돈을 받고 (작품을)줬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애관극장 근처에 있던 은성다방에서도 전시회를 하셨어요. 작품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전시장 임대료를 작품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방 주인도 선생님 작품을 여러 점 갖고 있을 겁니다."작품을 팔지 않다보니 검여는 표구비 마련도 어려웠다고 한다. "1962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전시회를 가졌는데 표구를 맡았던 박당표구사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을 보관했어요. 그런데 그만 박당표구사에 불이나 작품이 모두 없어졌어요. 이 때부터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아쉬워요." 10년여 전에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강원도로 들어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원씨는 검여의 에술혼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2004-09-23 정진오

[인천인물 100人·1] 시리즈를 시작하며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나려 합니다. '인천 사람' 말입니다. 인천에서 난 것 만으로 '인천사람'일까요. 인천에서 살며 인천을 위했으면 다 '인천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경인일보는 올 해로 창간 44년을 맞았습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경인일보는 이제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자세로 '인천사람'을 만나려 합니다. 인천의 역사를 새로 쓰려합니다. 가장 역동적인 인천시대를 열었지만 잊혀지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천의 인물'이 많습니다. 그들을 온전히 찾아 새 역사의 씨줄과 날줄로 삼으려 합니다. 격동의 한세기 동안 문화·예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인천의 인물 100인'을 선정해 매주 한 명씩 만나봅니다.  ◇왜 '인천의 인물'인가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도시의 효시로 불립니다. 인천항은 남북교류, 특히 서해안을 하나로 잇는 중심항이었습니다. 물론 해외 교역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인천엔 다양한 사람이 살았고, 그 만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인천의 인물'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근대 인천의 형성은 그 이전인 '구 인천'과는 비연속성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불행했던 '식민지 항구'로 시작됐지만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개항과 함께 인천은 전혀 다른 도시로 태어난 것입니다. 외국인 거주지도 따로 있었고, 각종 문물이 드나드는 하나의 용광로였던 셈입니다. 그 치열함과 긴박함 속에서 살며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이 인천엔 유난히 많았습니다. 결국 '인천의 인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곤 했습니다.  중풍으로 오른 손을 쓸 수 없자 왼손으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해 '좌수서'란 특별한 서풍을 일으킨 검여 유희강으로 첫 페이지를 열려 합니다. 조봉암과 장면 등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사의 거물도 있습니다. 늘 친일문제에 휩싸여 있는 이당 김은호 화백과 여성계의 대표주자격인 김활란 여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항해술사인 신순성, 한국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여성야학의 뿌리를 심은 것으로 평가받는 박창례,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를 만든 엿장수 출신 인천갑부 정치국 등이 대표적 인천의 인물입니다.  최근들어 이런 인천의 인물을 볼 수 없다는 얘길 많이들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인천은 늘 서울의 변방이었고 인천 만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인물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항만 기능이 축소된 데서 그 이유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천이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항만'이란 상징성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이 동북아 허브공항을 꿈꾸며 초일류공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송도, 영종, 청라 등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자유구역입니다. 송도신도시엔 거대한 항만시설을 새로 짓습니다. 인천은 이제 '제2의 개항'을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새로운 '인천의 인물'이 나와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보려 합니다. '인천의 인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끈으로 잇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천의 인물'을 어떻게 만나나  한 인물을 얘기하다 보면 늘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 모습이 함께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각 분야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합니다. 소문으로만 있던 한 인물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도록 갖가지 '끈'을 모으려 합니다. 지금까지 정리된 자료를 토대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가족과 지인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독자와 전문가들이 할 것입니다. 인물의 선정과 그 인물과 관련한 '끈'을 찾는데 각계 전문가들도 함께 합니다. 최대한 많은 분량의 자료와 증언을 모으겠습니다. 아직까지 인천의 인물을 100명이나 선정해 다뤄 본 적이 없다고들 합니다. 옛 일을 정리하는 데 그만큼 무심했던 것입니다. 미래로 향한다는 뜻에서 배제는 최소화하고, 포용은 최대한 많이 하려 합니다.  인천은 일제 강점기엔 친일도 유난히 많았고, 동시에 독립을 향한 본거지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무렵엔 좌·우의 대립도 여기서 공존했습니다. 그래서 '인천의 인물' 중엔 친일문제와 좌·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 자체가 인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동한 쉬쉬하고, 숨어서 얘기해야 했던 것들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생산적인 '미래 읽기'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섭니다.  '인천의 인물'을 찾아 나서는 일은 인천을 '열린 도시'로 만들어가는 길 닦기라는 생각입니다. '인천의 인물'과 함께 동행하며 제대로 된 '인천 찾기'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의 의미 /최원식 인하대 문과대학장 “비전이 없었던 시대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제2의 개항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부흥의 기운을 맞고 잇는 지금의 인천에선 꼭 옛 일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원식(55) 인하대 문과대학장은 "인천의 과거사 정리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 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인천을 무대로해 살았던 인물을 찾아내고, 발굴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또 "인천에서 아직까지 근대 이후의 인물 중 100명이나 뽑아낸 적은 없는 것 같다"면서 이번 경인일보의 기획시리즈가 갖는 의미를 부여했다."개항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개항 이후 인천은 전혀 다른 개념의 새 도시를 창조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영욕과 함께 하며 산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바로 인천의 현대사를 거꾸로 재정립하는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최 교수는 인천을 '근대 도시의 흥미로운 실험실'이자 '근대 도시사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식민지 항구'로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 도시를 형성했고, 특히 가장 반식민지적이었고, 진보진영의 거점이 될 정도로 근대 인천은 역동적이었다는 얘기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연 인천엔 그 만큼 '인물'도 많았습니다. 문화·예술, 정치,경제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인천사람들이 전국의 중요 인물로 꼽혔습니다. " 최 교수는 그 당시 인천의 인물들이 꿈꿨던 각종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이게 우리나라 현대 사회의 불행이라고도 했다. "이승엽과 조봉암 등 좌 성향의 프로젝트(정치세계)와 장면의 자유민주주의적 프로그램 등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분단상황이 용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왜 실패했는 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의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2004-09-16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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