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다시찾은 섬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28]에필로그

"섬은 물 위로 솟아오른 육지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보다 더 큰 땅덩어리와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단절된 모습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동시에 섬마다 저마다의 특성과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독자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1988년 7월 7일 경인일보가 장기 기획시리즈 '섬·섬·섬'을 시작할 때의 프롤로그 서두다.경인일보는 당시 인천과 경기 앞바다의 섬들을 훑으며 저마다 다른 섬들의 특성과 가치, 개성을 지면에 담아냈다.그리고 강산이 두 번 바뀌고나서인 지난 2008년 3월 5일, 경인일보는 영종도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섬·섬·섬' 시리즈를 연재했다.이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섬·섬·섬' 시리즈가 막을 내린다. 다시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린 지 1년 만이다. 경인일보는 이 기간 인천·경기 앞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을 둘러보면서 20년 세월의 의미를 찾아보았다.섬도 역시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당연히 섬 사람들의 삶도 20년 전과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태곳적부터 간직해 온 원형이 아예 자취를 감추거나 흔적만을 남겨 놓기도 했고, 사실상의 육지로 변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하기도 했다.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섬들도 육지의 변화만큼은 못하지만 진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밀려드는 개발물결로 '성장통'을 앓는 가운데 관광객의 유입으로 섬 사람들의 생업수단도 바뀌고 있었다.그런가 하면 섬 고유의 정서와 섬마을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가 충돌하면서 섬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섬도 있었다.섬마다 현안과 과제 또한 제각각이었다. 물론 몇몇 섬은 여전히 안보의 요충지로, 또는 어업의 전진기지로,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섬으로 저마다의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총 27회에 걸쳐 연재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섬·섬·섬' 시리즈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하늘을 여는 신도시로 바뀐 '영종도'(인천시 중구)로 시작해 서해의 외로운 섬 '국화도'(경기도 화성시)로 끝을 맺었다. 영종·용유도 편에서는 첫 섬·섬·섬 시리즈를 게재한 20년 전 영종도와 용유도를 연결하면서 주민들에게 모세의 기적으로 다가왔던 '영종~용유 간 연륙도로'가 이제는 먼지로 뒤덮인 표지석만을 남겨 놓은 채 흔적 없이 사라진 모습을 지면에 담았고, 국화도 편에서는 서울에서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던 중 섬에 낚시하러 왔다가 섬의 자연에 빠져 아주 눌러앉았다는 한 외지인의 이야기를 곁들였다.어찌 보면 도시의 각박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섬은 '로망'이다. 갈매기도 섬에서는 숨을 돌린다.섬은 자신이 싫어 육지로 떠난 이들이 육지에서의 삶이 버거워 다시 돌아올 때에도 아무말 없이 그들을 맞고 있었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섬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했다."육지에서 어디 이렇게 싱싱한 바지락 먹어 볼 수 있겠어?"라며 능숙한 솜씨로 갓 긁어낸 조갯살을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 건네주던 장봉도 할머니의 입담은 바지락 맛보다 더 간간했다. 서엄해안을 해안선으로 갖고 있는 인천의 경우, 옹진군 관내 100개, 강화군 관내 27개, 중구 관내 14개 등 141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에 떠있다. 이번 시리즈에서 섬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그 섬의 가치와 특성을 재조명해 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여전히 태어난 바로 그 자리, 바다 한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서해의 섬들. 섬은 고즈넉한 정취로 우리 삶에 안식을 주기도 하지만 때때로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육지로 보내고 있었다.

2009-03-17 경인일보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국화도

서해 외로운 섬 국화도(菊花島). 친구라고는 갈매기와 바람이 전부인 섬.20여년전 세상 모든 것에서 부터 격리당한 것처럼 고독의 괴로운 분위기를 뿜어대던 국화도는 더이상 '떠나야했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 갈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외딴 섬이 아니었다.이 섬이 국화도란 지명을 얻은 것에 대해선 아직까지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속해 있다. 화성지 도서편은 우정면 구화도(九化島)가 원래의 지명이라고 했고,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곳으로 만화리에 속해 만화도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국화리가 되면서 섬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하지만 섬에서 만난 주민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국화도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서 많이 채취되고 있는 조개의 껍질인 조가비가 '국화꽃'을 닮았다해서 섬 이름을 예전부터 국화도로 불러왔다는 것이다.어찌됐든 주민들의 섬 사랑은 대단했고, 국화도가 꽃처럼 아름다운 섬인 것만은 분명했다. 국화도의 면적은 0.39㎢. 걸어서 족히 4~5시간 정도면 섬 전체를 모두 둘러볼수 있을 만큼 작은 섬이다.국화도를 방문해 처음 만난 '당섬'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섬 주민들은 국화도에서 변하지 않은 곳은 당섬뿐 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섬은 마을의 서낭당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둥근 형태의 약간 높은 모습에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를 틀고 앉아있는 당섬에서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간 큰 일이 난다며 귀한 대접을 받는 당섬은 섬이 생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화도를 지켜오고 있다.국화도에는 당섬이 있는 본섬에서 500m 거리를 걸어서 갈 수 있는 무인도 토끼섬과 매박섬이 위치해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 길이 잠기고,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 오묘한 자연의 기적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일출과 낙조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연간 2만~3만명의 관광객이 이 섬을 찾고 있다. 수십년전 배편이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아서 외로움에 떨어야 했던 국화도가 이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외국인들도 종종 섬을 찾는다. 이들은 토끼섬과 매박섬 산책을 최고로 치고 있다. 운이 좋으면 바위틈에 숨어있는 낙지도 잡을 수 있고, 싱싱한 굴과 조개,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외국인들은 "국화도를 개발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세계 유명 관광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며 "자연 그대로인 국화도는 그 자체가 최고의 관광상품"이라며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국화도가 그동안의 고독과 외로움을 보상받기 위해 외국인들까지 유혹하고 있는 것일까. 20년전 19가구 30여명이었던 주민수는 지금 35가구 70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 도시가 싫어 무작정 국화도로 떠나 왔다가 눌러앉은 외지인들이 관광업에 종사하면서 섬 전체 삶의 방식도 바뀌고 있다. 당시 원주민들이 한데 모여 살아 한가지 형태였던 국화도가 지금은 두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섬 중앙 좌측은 원주민들이, 관광객을 맞기 위해 지은 펜션이 있는 오른쪽은 외지인들이 생활하고 있다.주민들은 펜션이 있는 곳을 '신도시'라고 하고, 외지인들은 원주민 마을을 '시내중심'으로 불렀다. 수십년전에는 이런 일을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세월은 국화도 전체의 지형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섬에 웬 신도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부러움을 느꼈다. 편을 갈라 갈등을 양산하고, 욕심과 이기심에 얼굴을 붉히는 회색도시의 어두움은 이곳에서 찾아볼수 없었다.국화도는 예전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정기적인 배편이 없어 40리(화성시 궁평항~국화도) 남짓한 17㎞ 거리가 천리길보다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충남 당진군 장고항에서 배를 타면 20분만에 도착할수 있다.그래서 주민들의 생활은 장고항 주변에 집중돼 있다. 주민들중 일부는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아이를 장고항 근처 학교에 데려다 주고, 다시 국화도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조개를 채취하며 생활하고 있다.장고항~국화도 배편은 하루 2회 정도지만, 여름 성수기에는 4회까지 운항된다. 20년전 국화도를 가기위해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 당진 삼길포까지 운항하던 먼 뱃길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화성시도 궁평항~국화도 정기 항로를 준비하고 있어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서 차량을 이용해 충남 당진을 돌아 장고항에 도착, 국화도로 들어가는 교통불편이 크게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전 작은 배 한척만 갖다붙여도 다른 선박은 이용을 할 수 없었던 국화도 선착장(148m)은 아주 고약하기로 유명한 이곳 바다 조수 간만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설치돼 있어 항상 배가 정박하고, 뜰 수 있다. 수십년 전에 비해 방파제(249m)의 규모도 커져있고, 물양장(어구 시설들을 말리거나 보관하는 장소, 9천468㎡)도 확대돼 있었다. 섬에는 식수용 담수화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예전에 비해 살기는 많이 좋아졌다.그러나 주변 일대에서 추진되는 대규모 개발, 큰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준설 작업 등이 벌어지면서 국화도 북쪽 해안의 모래가 빠져나가 해수욕장의 모습이 변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섬 주민들은 모래가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모래를 채워놓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엔 하늘이 내려주신 천혜의 자연 경관이 훼손되는 것을 그대로 바라볼수 없다는 간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국화도 토박이인 김운학(46·김양식)씨는 "20년전 국화도에선 외지인, 또는 관광객들이 섬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뉴스였다"며 "그만큼 주민들은 순수했고, 섬과 주변 바다의 자연은 때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지금은 주민들의 소득이 그때보다 향상되고, 생활도 나아졌지만, 자연은 그만큼 훼손되고 있다"며 "자연을 통해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잃는다는 진리를 국화도는 깨우치고 있다"고 했다.김씨는 "국화도가 지금은 주변 환경의 영향에 따라 약간 변했을지 몰라도 수십년전 불리한 생활여건을 땀으로 극복해 낸 주민들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며 "국화도는 아직도 주민들에게 강인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섬에 반해 2003년 정착한 신동찬씨 "여름엔 민박집… 겨울엔 어부로… 이곳이 천국""국화도에 바다 낚시하러 왔다가 이곳 자연에 푹 빠져 아주 눌러 앉았습니다."서울에서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던 신동찬(49)씨는 지난 2003년 회사를 정리하고, 국화도에 정착했다. 그는 '국화도 섬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신씨는 "여름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민박집 운영과 겨울엔 바다낚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래도 생활하기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곳이 천국인데, 불편할게 뭐 있냐"며 "깨끗한 바다와 맑은 공기가 영혼을 살찌우고 있다"고 예찬론을 펼쳤다.그는 "국화도 주변 바다는 많은 어종의 보고"라며 "우럭, 놀래미, 붕장어 등이 많이 잡히며 해안가에선 조개, 개불, 소라, 전복, 낙지 등이 깔려있다"고 자랑했다.신씨의 말 처럼 국화도는 주변에 일출이 아름다운 석문면 왜목마을과 대호 방조제, 난지도해수욕장, 고대면의 영랑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고둥과 소라가 지천에 널려있어 누구나 쉽게 망태를 채울 수 있고, 본섬과 토끼섬, 매박섬 사이에 바닷길이 열리면 이곳에서 야간에 횃불을 들고 낙지도 잡을 수 있다.섬 주변에 난 산책로를 통해 국화도 전체를 감상할 수 있고, 바닷물이 깨끗해 스킨 스쿠버 동호인들이 섬을 자주 찾고 있다.바지락 체험, 좌대낚시도 즐길 수 있으며 건강망 체험(그물을 쳐서 잡히는 고기를 모두 가져가는 프로그램)은 예약이 밀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있다.섬 중앙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어린이 전용 풀장과 족구장도 갖추고 있으며 넉넉한 섬 주민들의 인심은 국화도를 다시찾게 하는 매력이 되고 있다.그래서인지 아직 쌀쌀한 3월의 날씨에도 불구, 선착장에는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국화도로 들어 오고 있었다.신씨는 "국화도는 말로 표현을 다할수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난 자연 경관을 갖고있다"며 "이 곳에 온 관광객들은 매우 만족해 하고있다"고 말했다.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글/김진태·김종호

2009-03-10 김종호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육도

안산시 대부동. 대부동 끝쪽에 있는 탄도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한 시간여를 달리면 올망졸망한 섬들이 마주보고 섰는데, 그 섬이 여섯개라 섬 이름이 육도(六道)다.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확히 따지자면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 제20통 4반이다. 20통 1~3반은 바로 풍도라는 모(母)섬이 차지하고 있다. 육도는 원래 43㎞나 떨어진 인천시 옹진군에 소속돼 있다가 1994년도에 16㎞ 떨어진 안산시에 편입됐다. # 여섯 형제로 이뤄진 섬 육도북으로부터 말육도~종육도~육도(본육도)~중육도~무르여~미육도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본육도를 빼고는 모두 무인도다. 흔히 육도라고 하면 6개의 섬을 가리키기보다는 바로 이 본육도만을 일컫는다. 그런데 다들 '도'자로 끝나는데 '여'자로 끝나는 무르여는 무엇인가. 나무나 풀 등 식물이 살지 않고 바위로만 이루어진 섬을 순우리말로 '여'라고 한다. 간혹 서(嶼)라는 한자어를 붙이는 때도 있다. 섬의 면적은 0.13㎢, 해안선 길이 3㎞ 가량에 불과한 작은 섬에는 29가구, 남자 24명 여자 18명 등 총 42명의 주민이 사는 것으로 돼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 통계이고 실제로는 3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여느 낙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노인들만 남았고 젊은이들은 모두 육지로 나갔다. 주민들 평균 나이는 60세가 훨씬 넘는다. 섬에는 학교시설이 전무하다. 1960년 6월 개교한 대남초등학교 육도분교가 있었으나 27명의 졸업생을 남기고 1990년 4월 문을 닫았다. 이 작은 외딴섬에 볼만한 게 뭐 있으랴 싶지만 그게 아니다. 1시간이면 섬 한바퀴를 돌 수 있다. 선착장을 지나 소나무 숲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면 70m정도 밖에 안되는 산 정상에 곧 다다를 수 있다. 여기서 발 아래로 바다를 굽어보면 서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맑고 짙푸른 바다는 바닥까지 훤히 비치고, 낭떠러지 아래 바위틈을 때리며 부서지는 하얀 파도는 삶의 찌든 때와 아픔, 심지어 이루지 못할 그리움까지 한줌에 날려버릴 듯 신명나는 춤사위를 한바탕 벌인다. 때마침 썰물이라 열린 북쪽 해안으로 돌아서자 갯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진경을 연출한다.# 육도의 상징물 육도교회최근 육도는 굴과 바지락 채취가 가능하고 고기잡이까지 가능해 가족나들이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더구나 염분이 전혀없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된 샘물이 솟고 있어 휴양을 위해 이곳에다 별장을 짓고 생활하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 섬 안에는 '육도쉼터'라고 부르는 2층짜리 아담한 민박집이 있다. 콘도식으로 지어진 민박집이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관광객을 위해 여름 한철에만 문을 연다는 '육도슈퍼'도 보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육도의 상징물은 역시 '육도교회'다.육도교회는 21년전 이용준(77) 목사와 임옥임(65) 사모가 이곳에 정착한 후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30여명의 주민중 정기적으로 교회를 찾는 인원은 10명내외. 걷히는 헌금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헌금이 거의 없다보니 목사와 사모도 직접 일을 해야 생활을 할 수있다. 그런데 추운 겨울날 이 목사는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러 갔다가 찬바람을 맞은 뒤 동상과 혈압으로 몸져 누워있다. 사모는 굴과 바지락을 캐다가 손에 관절염이 걸려서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다. 도시에 살다 섬에서 사는 게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임 사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섬에서 살면 생활비가 많이 들지는 않아요. 자식들이 좀 보태주기도 하고…. 단, 섬에는 땔감이 특히 부족해요. 이곳은 주로 나무보일러로 난방을 하는데 목사님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만 병이 났지 뭐예요. 그리고 여기서는 80 먹은 할머니도 바지락을 캐서 생활해야 합니다. 몸은 좀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육도를 지키는 사람들길을 걷다 한 주민을 만났다. 30여년 전 낚시를 하기위해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섬의 절경에 반해 정착하게 됐다는 차모(81)씨는 그 당시만 해도 섬에는 여섯집밖에 없었다고 했다. "옛날에는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차례 30분씩밖에 전화가 안 통했어. 태양열발전소도 2001년에 세워졌고 그 전에는 자가 발전으로 겨우 불을 밝혔지. 불편했지만 그때가 더 마음 편했던 것 같아."그러나 그는 요즘 신경 쓸 일이 좀 많아졌다고 했다. "고기가 많다는 소문이 났는지 인천 같은 데서 대형 낚싯배가 와서 바다를 오염시키고 잠깐 섬 둘러보고 쓰레기만 잔뜩 늘어놓고가질 않나…." 달갑지 않은 불청객 탓에 우럭, 놀래미, 숭어 등 그 많은 고기들의 씨가 마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차씨는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을 할까. 그 역시 겨울에는 굴을 채취하고 봄부터는 바지락을 캔다고 했다. "여기 전복 좋아. 섬사람들이 종패(씨조개)를 심으면 외지 해녀들이 와서 전복을 따요. 그럼 반반으로 나누는 거지. 굴은 갯벌에서 얼마든지 찍을 수 있어." 그의 설명이 재밌다. 굴은 '찍는' 것이고 조개는 '캐는' 것이란다. 이곳이 고향이라는 배영배(65) 반장은 부천에 있는 학교에서 기술직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자식들 대학공부시키고 시집장가까지 보내놓고나서 그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왜 그는 섬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섬은 조용하고 공기도 좋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고향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죠. 섬으로 오가는 배가 하루에 한번밖에 없어서 아프면 조금 불편해요. 그때는 모터보트를 불러서 콜택시처럼 이용하기도 하죠. 허허…."#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으로 남길 기대하며육도주민들의 생활을 돌아보면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긴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며 억척스럽게 사는 그들의 모습은 도시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멋진 펜션과 민박집들이 늘어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지인들의 몫이고 오히려 그로인해 섬사람들이 불편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햇살에 반짝이는 조약돌이 하나같이 예쁘장하다. 공깃돌로 딱 알맞은 놈, 수저 밑받침하기 좋은 놈, 도마로 쓰기에 그만인 놈, 장식용 수석으로 제격인 놈 등 저마다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해변 주위의 풀섶에는 여름철 피서객들이 버리고간 쓰레기 더미가 뒹굴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와서 아무 방해받지 않고 며칠 쉬었다 가면 딱 좋을 이 섬. 아름다운 절경을 간직한 이곳이 더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09-03-03 김선회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풍도

바닷물과 선착장만 아니면 호젓한 여느 산골 마을을 연상케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섬이었다. 접안시설 문턱에 자리한 승선대기소는 시골 버스정류장과 다름없었고, 물양장 앞에 붙들어 매놓은 어선들을 마주한 채 서 있는 안산단원경찰서 대부파출소 풍도분소는 경찰서라기보다는 동네 도서관이자 마을회관이었다.풍요로운 섬, 풍도(豊島). 동해의 대표적인 섬 울릉도를 빼다박은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인 섬 전체가 온통 구릉으로 이뤄진 가운데 선착장을 중심으로 50여호의 가구가 옹기종기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산 중턱에서 접안시설까지 굵은 전깃줄을 내려놓은 해군 레이더기지 1개 소대를 제외하곤 온통 민박집과 식당, 그리고 섬내 유일한 교회와 복지회관(경로당) 뿐이다.지난 18일 오후, 육상에서 그나마 가장 친숙(?)했던 경찰, 대부파출소 풍도분소의 문을 열고 풍도 주민들과의 첫 대면의 장을 열었다. 마침 전날 인사발령 통보를 받고 가족들과 한참 짐 정리에 여념이 없던 임유정 소장이 귀밑까지 덮는 털모자를 쓴 채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이삿짐을 싸면서도 주민들과 연방 차와 담소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서 외유내강형 생활치안상을 엿볼 수 있었다."섬 치고는 다소 규모가 있는 110여명 주민이 모여 살지만 범죄나 그 비슷한 사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바로 풍도입니다. 밤새 어르신들 잘 주무셨는지, 조업은 잘 끝났는지, 구릉길은 별 이상이 없는 지가 풍도 치안의 최대 관건일 정도입니다." 2층 살림공간마저 마을 도서관으로 개방한 임 소장은 입도 2년만에 어느덧 반백의 풍도 주민이 다 돼 있었다.임 소장의 안내로 직접 야생화 군락단지가 있는 산 중턱까지 오르면서 자칫 다시 한 번, 이 곳이 사면 전체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란 사실을 망각할 뻔했다. 가가호호 경운기와 농기계, 비료 포대 등이 집 마당을 차지하고 있었고, 산비탈 밭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골목길은 마치 화성이나 평택의 한 시골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단지 굳게 잠겨 있는 경로당 문만이 생업에 바쁜 섬 주민 일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신라시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심어놓고 갔다는, 야생화 군락지 입구임을 표시하는 은행나무 정자에 다다를 무렵, 안산시청 직원들과 함께 마을 지하수 관정 수질검사를 나온 김계환(67) 풍도동 이장을 만날 수 있었다. 140여명의 풍도·육도 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막중한 이장직을 맡고 있는 만큼 그의 업무 자부심과 애향심은 남달랐다. 아마도 단 1가구를 제외한 전 주민이 토박이란 사실이 그의 책임감을 더욱 다지게 했는지 모른다."딱 10일만 늦게 왔어도 절정에 달하는 풍도 별천지 꽃잔치 전경을 보는 건데, 왜 이리 일찍 왔어"라며 기자를 타박(?)한 김 이장은 "충남 변산반도 야생화가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풍도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자아도취에 가까운 고향 애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그런 김 이장도 요즘 마을 식수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다. 1990년대 초부터 섬 뒤편에 파고들어온 석산이 그 원흉으로, 60t짜리 지하수 관정이 개설돼 있지만 깨끗한 물은 충분히 올라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지난해 11월 안산시의 도움을 받아 각각 100t과 50t짜리 지하수 관정 2곳을 새로 뚫어 격월제로 물을 올리고 있지만 이번엔 소금기가 주민들의 혀를 괴롭히고 있다. 때문에 김 이장의 하루 일과는 온통 공구가방을 둘러멘 채 관정과 섬 지하수맥 곳곳을 누비는 일이다.그토록 바쁜 김 이장이지만 동네 대표를 자부하는 일상을 반영하듯 이방인들을 친절히 야생화 군락단지로 안내해 줬다. 섬 어르신 대여섯분이 이미 꽃망울이 막 피어오르려는 꽃밭 주변에서 가시풀섶 넝쿨을 다듬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노루귀, 복수초, 꿩의 바람꽃, 변산바람꽃 등 풍도의 각종 희귀 야생화들이 전국적인 입소문을 타고 있는데다 늘그막에 일터가 부족한 마을 어르신들의 품을 위해 시에서 1천만원을 들여 노인소득사업을 마련해 준 덕분이다. 인근 육도와 달리 갯벌이 없고 수심만 깊어 굴과 바지락같은 패류도 캘 수 없고, 어업 인구 6가구와 민박집 7가구에 불과한 이 곳 풍도에서 하루 5만원의 벌이는 최대 수입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인천에 나가 있는 세 자녀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간다"는 강봉환(79)씨는 "갯바위 낚시꾼 뿐인 진장수리해변에 하루빨리 해수욕장이라도 하나 조성돼 여름 피서객이라도 유치했으면 하는 게 섬 주민들의 소박한 바람"이라며 깊게 파인 눈가 주름살 속 땀방울을 훔쳤다.충남 당진에서 뱃길로 20여분, 여기까지 온 김에 풍도 최고의 젊은 집,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를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를 앞마당처럼 끼고 앉은 2층짜리 아담한 건물 앞 단상에는 여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고, 운동장 건너편에는 김수(39·분교장) 선생님과 여환선(48·여) 선생님이 지내는 관사까지 마련돼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교생은 단 3명, 이마저도 임유정 풍도분소장의 딸 다예(9)양이 뭍으로 나가게 되면 2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잔잔하고도 여유로운 섬, 풍도에도 골칫덩이가 하나 있다. 식수난의 주범이었던 석산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선 나무블록을 따라 30여분을 걸으면 나타나는 최대 170m 높이의 거대한 석산은 지난 10여년 동안 이 곳 풍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여지없이 깨뜨려놓고 말았다. 이미 2004년 채석 허가가 끝난 석산 입구엔 대형 덤프트럭과 굴삭기 등도 녹슨 채 방치돼 있어 주민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복구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제2의 섬 파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걱정도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청일전쟁 시절의 풍도해전을 연상케 한다는 석산 채석장. 그럼에도 섬 기암괴석과 해안가를 타고 올라 길게 섬 전체에 늘어뜨려진 풍도 오후의 낙조는 가히 일품이었다. 사람의 욕심이 닿고, 넉넉잖은 살림살이에 수차례 애환이 거쳐 갔어도 풍도는 여전히 서해의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게 바로 풍요로운 섬, 풍도였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09-02-24 갈태웅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대부도

대부도(大阜島)를 찾으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한다. 1988년 경인일보가 연재한 이후 20년만에 다시찾은 대부도는 당시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화돼 있었다. 시화방조제 도로와 화성시 송산면으로 연결된 도로가 개통돼 육지화 되다시피 했지만, 대부도는 그래도 아직 바다와 호수를 끼고 있는 살아 숨쉬는 천혜의 섬으로 남아있다. 20년전에는 대부도에서 육지로 가려면 대부도 방아머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30분을 나와 인천 연안부두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안산시청에서 대부동사무소(대부북동)까지 4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대부도를 가자면 시화방조제를 이용해야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월곶IC를 빠져나와 오이도 방향으로 5㎞를 달리다 보면 바다와 호수를 가로지르는 끝도 안보이는 도로 하나를 만난다. 이것이 바로 시화방조제다. 시화방조제는 그 길 자체가 드라이브 코스다.대부도 방아머리 방향으로 방조제 4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중간쯤 작은가리섬에는 국내 최초로 건설중인 시화조력발전소 건설 공사현장이 나온다. 시행자인 한국수자원공사 황병철 시화호환경관리소장은 "서울은 물론 지방에 사는 초등학생 등 관광객들의 견학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대부도는 시화호를 안고 있다. 대부도와 시화호 일대에는 세계적 희귀조인 검은머리갈매기와 천연기념물 큰고니 등 50여종 17만여 마리가 매년 도래해 노닐고 있다.안산시 단원구 대부동과 대부남·북동, 선감·풍도 등으로 이뤄진 대부도는 면적 40.34㎢에 지난해 10월 현재 인구 7천96명이다. 인구는 20년전 보다 2배 가깝게 늘었다. 이중 원주민은 60% 정도다. 199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시에 편입됐다.서해안에서 제일 큰 섬으로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대부도라고 했으며 이외에도 연화부수지·낙지섬·죽호 등의 전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주변에는 선감도·불탄도·풍도·육도 등 5개의 유인도와 중육도·미육도·말육도·변도·잠도·흘관도·터미섬·큰터미섬·할미섬·외지도·대가리도·소가리도 등 12개의 무인도가 있다.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 종사자가 더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포도·약초·땅콩 등도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망둥어·새우류 등이 잡히고 굴 양식업과 제염업도 활발하다. 문화유적으로 남동에서 이름난 효자였던 홍정희의 효자문과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며 살았던 이찬을 기리는 자선비가 있다.대부도는 국내 최고의 해양 관광 휴양지를 꿈꾸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볼거리는 우선 어촌민속전시관을 들 수 있다. 선감동 탄도선착장으로 가다보면 만난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사라져 가는 어촌의 전통 민속과 어업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탄도항 앞에 있는 누에섬 등대형 전망대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누에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서 하루 두차례 4시간씩 바닷물이 빠지면서 탄도와 연결된 길이 드러나 육지와 연결된다. '모세의 기적'을 언제라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홍한경 대부동장은 "바다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와 선박의 통행을 안전하게 유도하기 위한 등대가 설치돼 있어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하다"고 말했다. 대부도에서는 특히 갯벌체험이 색다른 재미다. 시화호 건너 영흥도, 탄도 방향으로 직진하다 첫번째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10여 분을 가다보면 구봉도가 나온다. 물때를 맞춰 가면 갯벌에서 굴이며 바지락 등을 쉽게 잡을 수 있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대부동 4리에 있는 '동주염전'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태양의 열과 바람의 기운을 모아 만들어지는 소금이 바로 천일염이며 염전은 물과 바람을 모으는 그릇이다. 동주염전은 1953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재래방식을 고집하며 소금을 생산한다.승마도 체험할 수 있다. 대부도에 승마클럽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난 2006년 11월 총면적 14만8천760.3㎡ 규모에 110여마리 정도의 독일산 말을 들여 와 문을 열었다. 대부도 말봉에 있는 '베르아텔 승마클럽'이 바로 그곳으로 초대형 돔형식 실내마장과 펜션도 있다.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뭐니뭐니해도 바지락칼국수와 조개구이가 으뜸이다. 시화호를 건너 첫 동네인 방아머리부터 탄도항에 이르기까지 섬 곳곳의 식당에서는 바지락 칼국수와 조개구이를 판매한다.대부포도와 대부포도주 역시 이 섬의 자랑거리다. 대부포도는 바닷바람과 뜨거운 태양의 영향으로 당도가 최고 19브릭스(Brix, 물 100g에 녹아있는 당분의 양)까지 나온다. 특히 대부포도를 원료로 한 포도주 '그랑꼬토(Grand Chteau)'는 매년 판매율이 급신장하고 있다. 이같이 해양 관광 휴양지로의 개발에 비해 기반시설이 절대 부족하고 원주민들은 불이익도 상당히 받고 있다.대대로 240여년동안 이곳에서 살아 온 밀양박씨 원충공파 16대손인 박정호 안산시의원은 "대부도 개발(육지화)에 대해 반대하지 않지만, 안산시로 편입된 이후 도심중심의 개발에 따른 예산편중으로 이곳은 부락과 부락간의 연결도로가 확충되지 않고 문화시설이 부족하며 복지관, 도서관도 없는 설정"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개발에 따른 땅값만 치솟다 보니 원주민들이 농협 등에 땅을 담보로 대출받은 부채가 1천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문처럼 지가 상승으로 벼락부자가 된 원주민들은 거의 없고 오히려 개발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특히 "대부도의 땅 소유주는 외지인이 절반"이라며 "그들이 개발 이익을 본 것이지 원주민들은 농사를 그대로 짓고 있어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대부도는 이처럼 육지화로 개발에 따른 피해와 이익이 상존하는 모순의 섬이 되었고 서해안 최고의 관광휴양지로 자리잡을 때까지 원주민들의 난개발 우려 등 육지화에 따른 진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안산시 제공

2009-02-17 김규식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승봉도

겨울 섬은 고요하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바다의 간조와 만조, 일정한 파도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다. 겨울에는 섬 사람들이 온전하게 섬의 주인이 되는 때이다.봄부터 가을까지 섬 사람들은 섬과 바다의 구경꾼이 된다.여름을 정점으로 봄과 가을, 바다가 주는 시원함을 맛보기 위해 뭍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승봉도(昇鳳島)의 겨울 풍경도 마찬가지다. 굴을 따는 일 외에는 뚜렷하게 손이 달릴만한 일도 없어 오붓하기까지 하다. 마침 섬을 찾았던 때가 설을 열흘 정도 남긴 시점이어서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명절 가족 상봉'의 설렘과 기대감까지 푸근함이 짙게 남아 있었다.'옛 정취 품에 안은 풍족한 마을'.인천 앞바다의 섬을 소개하는 '섬·섬·섬' 시리즈가 경인일보에 연재되던 20년전, 당시 승봉도를 이렇게 표현했다."농토는 논밭을 포함해서 적게는 300여평에서 많게는 1만여평을 나눠 갖고 주민들이 생활했다. 농사일이 없을 때에는 김을 양식하거나 굴을 따고 배로 낚시꾼을 실어주기도 하며 살았다. 주민들의 소득이 다른 섬에 비해 낮은 편은 아닌 곳이다. 콘도 건설에 대한 섬 주민들의 기대감도 나타나 있다."그럼 지금은….승봉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2㎞ 떨어진 군도(郡島) 중 하나로 연안부두에서 뱃길로 2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섬이다. 면적 2.22㎢, 해안선 길이 9.5㎞인 승봉도는 자월도의 자도(子島)다. 행정구역은 옹진군 자월면 승봉리다.전체적으로 구릉의 기복이 많으나, 중앙부는 분지가 발달해 농경지로 이용된다. 선착장 뒤편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섬의 남쪽 백사장 뒤편에서 북동쪽으로 수령 20~30년의 곰솔이 우거져 있다. 승봉도는 전체 면적 중 10% 가량이 논과 밭이며, 전체 80가구에 201명(지난 연말 기준)이 거주중이다.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농경지의 면적은 비슷하지만 인구는 20년전 290여명에서 3분의1 정도 감소했다. 교육 문제가 인구 감소의 주범이라고 주민들은 전한다. 학교라고는 인천 주안남초등학교 승봉분교 뿐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모두 인천으로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살림을 인천에 둘 수밖에 없는 이유다.최근 승봉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바지락을 캐고 굴을 따는 맨손 어업과 외지 방문객을 위한 민박과 낚시배를 운영하는 관광업 등을 병행하고 있다.농업은 논농사 위주다. 1년 농사면 섬 주민들이 5년간 먹을 쌀이 수확될 정도로 풍족하다. 섬의 노령화와 맞물려 손이 많이 가는 밭농사는 지을 수 없단다. 밭농사의 경우 밖으로 내다 파는 것이 아닌 자급하는 적은 규모로 짓는다.20년전 새로운 소득 사업으로 시작했던 김 양식의 흔적이 사라진 것도 밭농사와 같은 맥락이다. 노인들이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김양식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의 가격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주민들이 김양식에서 손을 뗀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종합해 보면 섬 주민들은 봄에 모를 심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 외에 여름에 여행업을 하고 바지락을 캐고, 겨울엔 굴을 딴다.선착장 옆 해안에서 굴을 따던 김명영(82·여)씨는 "물이 들어오지 않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굴을 따는데, 하루에 2㎏ 정도 캔다"며 "젊고 잘 따는 사람들은 3㎏ 이상도 따는데, ㎏당 1만원을 받기 때문에 섬에서 하루 일당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했다.굴을 제외하고는 현재 섬의 전통적인 어업 소득원이 자취를 감추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이같은 변화는 섬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진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승봉도는 서해 도서지역 유일한 콘도인 동양콘도(150실 규모)를 비롯해 섬 자체가 거대한 민박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펜션과 민박집이 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선착장에서 이일레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펜션과 민박집이 들어섰다. 황갑중(63) 승봉리장은 "주민들의 생각이 변했다. 힘들게 바지락과 굴을 캐봤자 하루에 몇 만원 벌지만, 가만히 앉아서 민박 손님 1명 받으면 4만~5만원을 쉽게 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인터넷의 발달과 입소문을 탄 승봉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섬을 찾는 관광객은 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변화는 소득의 양극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섬에 안겨주었다. 외지인들이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고급형 펜션에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기존 가옥을 민박집으로 운영하는 원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는 것이다. 한 주민은 "고급 펜션과 경쟁하느라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시설을 개선하다 어려움에 처한 주민도 있다"고 말했다.섬이 도시화되면서 자본의 논리를 따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어쨌거나 단순히 관광객 입장에서 볼때 승봉도는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아름다운 풍광에 해수욕·낚시 등 섬에서 할 수 있는 놀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다 물이 빠진 해안에선 바지락과 낙지·소라 등을 잡을 수 있어 해양체험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한겨울 승봉도에서 어렵게 만난 관광객 신정숙(54·여·경기도 안양시)씨는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승봉도를 찾았다"며 "생각보다 발전이 많이 됐지만, 고운 모래가 깔려 있는 이일레해수욕장과 울창한 소나무숲, 바위절벽 등의 경관과 조개를 캐는 등 해양체험 학습장으로도 훌륭하다"고 만족해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ak@kyeongin.com

2009-01-20 김영준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강화 교동도

"교동연륙교가 조기에 완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강화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현수막 문구다. 교동 주민들의 요즘 가장 큰 바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거리는 배로 15분 정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요즘은 30분마다 한 번씩 강화 창후리와 교동 월선포 사이를 잇는 배가 있어 사정도 나아졌다. 하지만 바닷물이 빠질 경우엔, 바다 속 모래톱이 드러나 4시간 가량을 돌아가야한다.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주민들의 불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강화와 교동을 잇는 다리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주민 한주현(66)씨는 "강화도와 연결하는 다리가 생긴다던데, 그럼 버스도 들어올 것 아니요. 죽기 전에 버스 타고 강화로 나가볼 수 있을는지. 가능할까?"라며 연륙교가 빨리 세워졌으면 하는 기대감을 내비쳤다.교동도는 강화의 부속 섬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전국적으로도 13번째로 크다. 북쪽으로는 황해도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한강 하류와 맞닿아 있다.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고려시대 때는 벽란도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에 기점역할을 하고, 조운선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도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도 했다. 섬 대부분이 간석지로 조성된 교동도는 '교동에서 풍년이 들면 교동사람들은 13년을 먹고, 강화 전체사람들은 3년을 먹고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한 토질을 자랑한다. 원(元)군에 대한 항쟁이 장기간 가능했던 이유도 이처럼 풍족한 농사가 뒷받침됐을 것이라는 풀이다. 그 때문인지 교동도는 어업이 주를 이루는 여느 섬과는 달리, 지금도 농업이 주류를 이룬다. 전체 1천390여가구 중 1천여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 정도다. 2009년을 목전에 둔 지난달 29일 교동도에서는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밭에 등겨를 태워 땅의 힘을 돋우는 농군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교동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근 생산되기 시작한 '탑라이스'는 교동도의 비옥한 토질을 증명하듯 전국 최고 수준의 '미질'을 자랑한다. 교동도는 세상에 알려진 것에 비해 선조들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교동면 고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한증막'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한증막은 순전히 황토와 돌을 재료로 삼아 '돔' 형태로 축조됐다. 돔 아래 쪽의 작은 출입구는 마치 돌로 만든 '이글루'를 연상케 했다. 한증막에서 땀을 충분히 흘린 사람들은 주변의 시냇물에 들어가 몸을 식혔다고 한다. 이 한증막의 외형은 최근 복원됐지만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옛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한증막과 멀지 않은 곳에는 교동도가 연산군의 유배지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실 교동은 연산군뿐만 아니라 안평대군, 광해군, 임해군 등 조선시대 폐군과 종친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육지와의 교통이 불편해 외부인과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차단할 수 있고 서울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국왕이나 국왕지지 세력들에게 쉽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이다.교동도는 최초로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교동향교'는 바로 유교 전파의 본산이다. '교동향교'는 지난 1286년 고려의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갖고 돌아오면서 화개산 북쪽 기슭에 처음으로 모셨다가 조선 영조 17년(174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고 한다. 이 밖에 화개사, 화개산성, 삼도수군통어영지 등 곳곳에 눈에 띄는 문화재 표지판 등은 마치 지붕없는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1950~60년대 영화세트장이 그대로 있는 곳이 있다"는 주민의 설명에 대룡리로 향했다. 총 길이가 200여나 될까. 좁은 골목 사이로 적어도 30년 이상은 돼 보이는 건물이 즐비했다. 골목 입구에는 굵은 손글씨로 적혀진 '교동이발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을 뒤로 돌린 듯했다. 이 간판을 뒤로 하고 몇 걸음 앞으로 갔더니 이번엔 태엽·괘종시계부터 전자시계까지 빽빽이 들어찬 시계방이 있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옛 시계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내부엔 시계방 주인장 황세환(71) 할아버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40여년간 이 곳에서 시계를 수리해왔단다.황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 나온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골목이었지. 그때는 육지로 가려면 인천항까지 가야 했는데, 8시간이나 걸렸어"라고 옛 시절을 회고했다. 황 할아버지는 "다리가 놓여지면 좋아지겠지?"라고 묻더니 금세 표정이 환해졌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약방과 다방, 양복점, 그리고 노란색 페인트로 숫자가 칠해진 나무판으로 가려진 가게. 대룡시장은 좁은 골목 내부의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기만 했다. 하지만 오는 2012년 당초 계획대로 다리가 완공되면 이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9-01-06 이현준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소청도

'먹고 남는 백령, 때고 남는 대청, 쓰고 남는 소청'. 인천시 옹진군 사람들이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의 섬 특징을 꼽아 설명하는 말이다. 이 얘기는 예전부터 전해왔다고 한다. 가장 큰 섬인 백령도엔 해산물은 물론이고 농산물까지 풍부하다. 사시사철 먹을 게 부족하지 않다. 백령도가 의외로 들판이 많은 형국이라면, 대청도는 온통 산이다. 땔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규모가 가장 작은 소청에도 두 섬보다 많은 게 있었는데, 바로 돈이란다. 그래서 '쓰고 남는 소청'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청사람들이 왜 큰 섬 주민들보다도 유난히 돈을 많이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대외 경제활동이 두 섬보다 활발했었을 것이란 짐작만 할 뿐이다. 소청도에는 또 공부 잘하는 학생도 많았단다. 옹진군 첫 사법고시 합격생이 이 소청에서 나왔을 정도란다. 그 사시 합격생은 지금 인천지방검찰청 검사로 근무하고 있다.관광객들이 소청도에서 맨 먼저 찾는 곳은 아마도 등대일 터이다. 소청도의 서해바다를 밝히는 불빛이다. 정식 명칭은 '인천지방해양항만청 소청도 항로표지 관리소'다. 등대 높이가 18.9나 된다. 2005년 5월부터 짓기 시작해 2006년 12월 준공했다고 한다. 34억원이 투입됐다. 소청도엔 원래 1908년에 세워진 높이 10짜리 등대가 있었다. 이 등대는 2006년 4월 7일까지 썼다고 한다. 옛 등대가 있던 자리엔 해시계도 함께 있었다.등대를 지키던 문공배씨는 전망 좋은 곳을 여기저기 소개해 줬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오랜만인 듯 말보따리가 풀리자 거침이 없었다. 등대에 서자 날 좋은 때에는 저 멀리 중국 땅까지 보일 것만 같았다. 문씨는 "소청도 서해 끝자락이 마치 거북바위 형상을 하고 있는데, 등대가 그 거북의 어깨 위에 있다"고 소개했다. 여객부두에서 이곳까지 몇 년 전에 도로포장을 했는데, 그 뒤로는 1년에 등대를 찾는 방문객이 2천여명이나 된다고 했다.면적 2.93㎢의 작은 섬 소청도에는 우리나라에 단 한 곳밖에 없다는 진귀한 게 있다. 섬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분바위 지대'다. 대리석이 띠모양을 이루어 밤에도 달이 뜬 것같이 보여 분바위라고 불린다고 한다.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선캄브리아기의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라는 이름의 특이한 암석구조라고 한다. 소청도 말고는 호주 서부 샤베크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것이란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대리석이 널려 있는 것이다.일제 때부터 이곳에서는 대리석 반출이 있었다고 한다. 분바위를 배로 실어 나를 수 있는 크기로 자른 터와 배터도 있다. 이 배터가 소청도의 원래 포구였다는 '분암포'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4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동양 대리석'이란 회사가 있었다고 한다. 근로자들에게 한 끼에 당시 돈으로 80원씩 받고 밥장사를 하는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동양 대리석이 작업한 뒤로는 이 일대에 해병대와 해군이 주둔해 왔다고 한다. 뭍으로 참 오랫동안 여기서 대리석을 조달했던 듯싶다.소청도에 돈이 많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대리석 회사가 예전부터 있었고, 또한 수산물이 많이 잡혔기 때문으로 보인다.작년에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대청면 소청출장소 직원 김동훈(32)씨는 "섬 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여유롭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그러면서도 "한창 일을 배워야 할 시기에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김씨의 여자친구도 옹진군 자월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다고 한다. 소청출장소에는 김창원 소장과 2명의 직원이 근무한다.소청도에도 대청도에서 볼 수 있었던 동백나무 자생지가 있는데, 대청도 것보다 더 컸다.소청도에서는 정말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나이 일흔에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김정자 할머니다. 대청초등학교 소청분교 1학년 1반 4번이라고 한다. 김 할머니는 올 초에 아들과 이야기하다가 얼떨결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글자를 깨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이 달래준 것이리라."남들은 나이 70이 되어서 배워 뭐 하냐고 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니까 (배우지 않고 산 그동안의)70평생을 헛것으로 산 것 같아요."김 할머니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입술이 부르터 있어 그 연유를 물었더니, 받아쓰기 연습 때문이라고 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 받아쓰기 공부를 한단다."집에서 할 때는 100점인데, 선생님 앞에만 가면 60점이나 80점밖에 안 돼요. 어쩔 때는 40점, 20점짜리도 있고요. (시험 볼 때면)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예요." 막내 딸(38)보다도 담임 교사의 나이(35)가 어린데, 그 선생님 앞에만 서면 떨린다는 것이다. 김 할머니를 포함해 소청분교 학생은 모두 7명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2학년 박수빈(9)양에게서도 가끔 받아쓰기 '과외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몸 아프지 않고 졸업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김 할머니. 그의 연필깎이는 고등학교 1학년 손녀가 사줬고, 공책은 작은 손주가 사줬단다. 김 할머니는 집 안방 벽에 고운 분홍색 가방을 걸어놓고 다닐 정도로 학용품을 애지중지했다.한나절 둘러본 소청도는 참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었다.사진/임순석기자 seok@kyeongin.com

2008-12-23 정진오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대청도

대청도를 처음 구경하는 뭍사람이라면 입을 다물지 못할 광경을 보게 마련이다. 낚시 명소나 호젓한 해수욕장을 생각하고 대청도를 찾았다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는 것, 산 속의 모래언덕이다. 해안가에서 바람에 날려 쌓인 모래가 '사막'을 이룬 것이다.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신비, 그 자체다.1990년 2월 5일자 경인일보는 이 모래언덕을 두고 '낙타 한 마리만 세우면 중동의 사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면 사막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점이다. 10여 년 전에 일부 모래밭에 소나무를 심는 조림사업을 펼쳤고, 그 결과 전체 면적의 3분의 1 정도의 사막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그 사막같은 곳에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 집터는 이제 해병대원들이 훈련을 할 때 임시 막사를 세우는 장소로 쓰인단다.대청도에서 가장 큰 산이 삼각산인데, 이 삼각산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모래가 많고, 남쪽에는 돌이 많다고 주민들은 설명했다.대청도에는 자연이 만든 신비한 풍경 한 가지가 또 있다. 사탄동 고개에서 삼각산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수리봉이란 이름의 바위가 있고, 여기서 해안가를 바라보면 산세가 날아가는 새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날개를 펼치고 바다를 향해 고개를 쳐든 독수리를 닮았다. 이 독수리의 목 부위로 길이 나 있는데 그곳에 정자각이 있다. 지나는 길손에게 쉴 틈도 주고, 좋은 풍광도 감상하라며 2000년 11월에 세웠다.사탄동(沙灘洞)이란 이름도 재미있다. 모래가 바람에 실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여울이란 의미라고 한다. 이 마을에 붙은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의 이름도 덩달아 '사탄'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교회만큼은 기독교에서 쓰는 '사탄'이란 말의 좋지 않은 느낌 때문에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사탄초등학교는 10여 년 전에 폐교돼 지금은 여름철이면 야영장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17년째 대청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김근수(48)씨는 수리봉에서 영락없는 독수리 모양의 산세를 바라보다 대청도의 매(鷹) 얘기도 꺼냈다. "대청도에는 매막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있을 정도로 매가 많았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사냥하는 매로 치면 대청도 매를 가장 알아줬다고 하고요." 중국에서 날아오는 매가 처음으로 앉는 곳이 대청도였고, 가을이면 이 매를 잡으려는 사냥꾼들로 붐볐다고 한다. 대청도에서 잡은 매를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라고 불렀다고 한다.대청도 방문객이라면 꼭 둘러볼 데가 또 있다. 천연기념물 제66호인 동백나무 군락지다. 우리나라 동백나무 자생 북방한계지가 바로 대청도다. 동백꽃은 따듯한 남쪽 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이 대청도가 깨뜨리는 것이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었는데, 염소를 방목해서인지 염소똥이 널려 있었다.대청도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백령, 대청, 소청을 연결하는 여객선에 탄 낚시꾼의 대다수가 대청에서 내린다. 섬 해안가 주변에 골고루 퍼져 있는 갯바위 낚시터 때문이라고 한다.인천 부평의 백운역 주변 상인들로 구성된 낚시 모임 회원들도 11월 초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낚은 물고기를 대형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았다. 낚시 마니아라는 김진수(58)씨는 "다른 곳에서 하는 것보다 대청도에서의 낚시 맛이 유난히 좋다"면서 "한 달에 한두 차례는 꼭 낚시하러 온다"고 말했다.대청도의 관문인 선진포항을 넓히는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늘어날 관광객에 대비하려는 듯 보였다. 가장 번화한 마을인 선진포항 일대 선진포초등학교도 폐교됐다고 한다. 젊은 층이 줄어드는 데다, 아이들 교육을 뭍에서 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일제때 고래잡이… 까나리·홍어이어 근래 활어 주종"대청도는 일제시대 때 고래잡는 회사가 있었을 정도로 포경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포경회사 건물 기초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대청도에서 잡히는 어류의 종류도 세월이 가면서 변해왔다고 한다. 일제 때는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1950~60년대에는 조기와 까나리잡이가 전성기였다고 한다. 1970~80년대에는 홍어잡이가 주류를 이뤘고,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우럭 등 활어가 주력 어종이라고 한다.대청도를 나오면서 선착장 주변에서 개인택시 기사를 만났는데, 1990년 당시 유일한 개인택시 기사 김명의씨로 기록된 김명익(57)씨였다. 19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명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청 개인택시(렉스턴 Ⅱ) 대표 김명익'이라고 쓰여 있다. 예전에는 김 대표의 차가 유일한 택시였는데, 최근에는 1대가 더 늘었다고 한다.대청도의 고기잡이가 예전같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선진포항을 가득 메운 어선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대청도/정진오

2008-12-09 정진오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백령도·下 자연

백령도는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음악가도, 여기선 감히 재주부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섬 전체가 사람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예술작품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백령도엔 천연기념물만 네 가지나 된다. 물범(제331호), 사곶해변(제391호), 콩돌해안(제392호),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제393호)다.11월6일 오후 1시57분 물범 휴식처인 물범바위를 향해 용기포항을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 물범과 가장 친하게 지낸다는 주민 김진수(51)씨의 작은 FRP배를 타고서다. 용기포항 방파제를 북쪽으로 돌자 신항건설현장이 나왔다. 그리곤 온통 흰색으로 물든 해안절벽이 나타났다. 이곳에 서식하는 가마우지의 배설물이 흰색 물감 노릇을 한 것이란다. 절벽에는 만삭의 임신부 모양을 한 바위도 있었다. 이름하여 임신부 바위. 2시 9분, 하늬해변이 먼발치에서 보이는 바다. 낮게 솟은 평평한 바위에서 뒤뚱거리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물범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100 정도 앞까지 다가갔는데 5마리는 끝내 내려가지 않았다. 물속으로 숨은 수십 마리의 물범 무리는 수시로 고개를 내밀며 이방인을 살폈다. 연구자들의 길 안내를 맡으면서 덩달아 '물범 박사'가 된 김씨는 멀리서도 물범의 암수를 구별했다. 이날 물범바위 주변엔 60마리 정도 된다고 했다. 해안가에서는 어렴풋하게 형체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물범을 직접 보니 참으로 앙증맞고,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예전에는 300여 마리씩 관찰되던 게 요즘은 200여 마리 밖에 안된다고 한다. 11월 말에 바로 위 북한해역을 거쳐 중국 쪽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내려 오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어선들에 많이 잡히는 것으로 김씨는 파악했다. 실제 우리의 서해 최북단 백령도와 북한 서해 최남단 경계해역엔 중국 어선들이 길게 늘어 서 조업 중이었다. 한눈에 봐도 50여 척은 됐다. 이들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떤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NLL을 맨눈으로 확인시켜 주려는 듯이 딱 우리와 북쪽의 가운데 라인을 형성했다. 남북을 오가는 물고기는 이들의 그물에 모두 걸려들 것처럼 보였다. 이들 중국어선의 무분별한 어족자원 남획으로 물범의 먹이가 되는 놀래미와 우럭이 줄어든다고 한다. 중국어선들은 물론 천연기념물 물범을 가릴 리 없다. 물범은 물범바위 부근에서 먹이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 쪽까지 내려가 우리 어민들의 까나리 잡이를 망치고 있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없었던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 셈이다.백령도에서 현대화를 시도했다가 다시 옛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곳이 있다. 기암괴석과 싱싱한 횟감이 널려 있는 두무진 포구다. 두무진 포구는 유람선과 어선 선착장이 있고, 여느 포구와 마찬가지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그 위에 횟집거리가 형성돼 있다. 이 콘크리트를 헐어낼 예정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 곳은 작은 돌이 해변을 이루었단다. 그 해변에 바로 배를 댔다고 한다. 여기도 콩돌해안이었던 것이다. 20년 전 경인일보의 지면(1989년 10월 19일자)에도 자연 그대로의 두무진 포구 풍경이 실렸다. 당시 어민들은 콩돌해안에서 잡은 물고기도 말리고, 어구손질도 했다. 두무진 포구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기암절벽이 뽐내는 '패션쇼'를 감상할 수 있다. 서해안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관이 펼쳐진다. 두무진 기암괴석은 아침에 보는 것과 한낮에 보는 것, 해질녘에 보는 것이 각기 다르다. 햇빛의 농도와 방향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곳은 대표적인 유람선 관광 코스이기도 하다.백령도에선 특히 '공짜'로 북쪽 최남단 장산곶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날 좋을 때는 두무진이나 심청각, 하늬해변 등 백령도 북쪽 해안 어디서나 북녘 땅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백사장이 비행기가 오르내릴 수 있는 활주로 역할을 하는 사곶해변도 백령도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천연비행장이다. 세계에 단 두 곳 뿐이란다. 안내판에는 '인천에서 228.8㎞ 떨어진 백령도 동남쪽 해안에 위치하고 길이는 4㎞, 폭은 100m'라고 쓰여 있다. 여기는 비행장 말고도 백령도의 종합운동장 역할도 한다. 얼마 전 면민의 날 행사 때는 이곳에 라인을 그려 놓고 주민들이 축구도 하고, 족구도 하고, 달리기도 했단다.찾는 사람마다 '조물주가 뿌려 놓았나, 바닷물의 장난인가'라는 식의 혼자말을 내뱉게 하는 콩돌해안도 있다. 아기 주먹보다도 작은 돌들이 모래를 대신해 해변을 이룬다. 파도에 떠밀릴 때 딸그락거리며 내는 소리도 환상적이다. 돌 하나하나가 신기하다. 6년 전부터는 콩돌해안 입구에 '지킴이'가 등장했다. 관광객들이 늘면서 너도나도 이 돌을 가져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콩돌의 외부반출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사실 백령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군포의 콩돌해안 말고도 대다수 해변이 콩돌로 돼 있다. 연화1리 해안가 역시 환상적인 콩돌해안이다.사곶해변 서쪽 끝자락엔 작은 댐이 있다. 바다를 메워 농지를 늘리는 간척사업을 하면서 담수호를 남겨 둔 것이다. 1991년 6월 3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사업이 진행됐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안내판에는 '미완공간척사업'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백령도의 '자연'은 여전히 우리 한반도의 모습을 가장 원초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천연 기념물'이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백령도/정진오

2008-11-25 정진오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백령도·上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 사람들이 사는 모양새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년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30대 젊디 젊던 청년이 50대 장년으로 변했을 뿐이었다.새파랗게 젊던 어민 후계자 장태헌(56)씨는 다시마 종묘 양식의 국내 최고 기술자가 돼 있었다. 20년 전 경인일보는 그를 '작은 어선을 한 척 장만할 꿈을 가꾸고 있는 젊은 사람 중 하나'로 그렸다. 어촌계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전복이나 가리비, 멍게 양식에 관심을 보인다고도 했다. 바다에서 잡는 것만으로는 수지를 맞추기도 어렵고 기복이 너무 심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고도 했다.그는 지금 '백령바다영어조합법인'의 대표이사다. 여기에선 슈퍼다시마 포자를 개발·생산하고 2년산 다시마를 생산·가공·유통한다. 해조류연구소도 뒀다. 다시마 양식에 도전한 지 19년 됐다는 장태헌씨는 "다시마에도 명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어업은 생산개념의 1차산업에서 가공하고 유통하는 2차, 3차 산업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어민 후계자가 된 지 25년 째란다. 20여년 만에 큰 결실을 거둔 그는 분명 '선구자'였다. "19년 전에는 전남 완도에서 다시마 종묘를 가져왔는데, 이제는 그곳으로 '역수출'한다"고 자랑하는 그는 "다시마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백령도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했다.용기포에 사는 김진수(51)씨는 까나리액젓을 만든다. 30년이 넘었다. 올해 그는 200ℓ짜리 100통을 생산했다고 한다. 돈으로 치면 2천만원 정도 된단다. 20년 전에 그는 까나리로 당시 돈 1천여 만원의 수익을 올렸다.까나리는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 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시기는 5월과 6월이다. 까나리와 소금을 3대1 비율로 섞은 뒤 숙성시킨다. 1년 반 정도 숙성된 게 가장 좋다고 한다. 숙성이 잘 되면 그해에 액젓을 뽑기도 한단다. 아주 오래전에는 항아리에 숙성시켰는데, 지금은 플라스틱 통에 숙성시킨다. 20년 전에도 그랬다.어촌계 공동어장에서 전복이며 해삼, 성게 등을 잡는 김씨는 잠수부이기도 하다. 최근에 자부심을 갖는 게 하나 생겼다. '물범 박사'란 호칭이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물범이지만 그는 작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들었다. 지난 6일 기자는 김씨의 배를 타고 천연기념물 제331호이자 백령도의 자랑인 물범을 보러 갔다. 이날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여객선 운항이 통제됐다. 오후에 바람이 잦아들었고, 김씨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용기포항에서 물범들의 숨터격인 '물범바위'까지는 10분 남짓 걸렸다. 100여 앞까지 갔다. 김진수씨는 암수를 구분할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은 물범떼가 김씨의 배는 알아본다고 했다. 김씨 배가 가까이 가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때는 마침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 관계자들도 백령도에 들어와 있었는데, 김씨의 배를 함께 타고 가지는 못했다.20년 전 경인일보가 백령도에서 만났던 정명암(55)씨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경진공업사라는 이름의 차량 정비소를 운영했다. 부친 정장화(작고)씨가 백령도에서 처음으로 낸 정비소였다. 지금은 대우자동차 간판을 달고 있었다. 부친은 일제 때부터 기계 다루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정비소를 했다고 한다. 26년 전만해도 1곳 뿐이었던 정비소는 20년 전에는 2~3곳이었고, 지금은 5곳이나 된단다. 10여 년 전만해도 장사가 잘 돼 종업원까지 둘 정도였는데, 지금은 고치려는 차 한 대 없을 만큼 불경기라고 했다. 낚시광이기도 한 그는 5년 전에는 아예 배를 샀고, 낚시로 잡은 우럭을 팔아 올리는 부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그는 "배를 타고 나가 하루에 잘 하면 20만원 벌이는 된다"고 했다.4천850명(남자 2천581명, 여자 2천269명)이 사는 백령도의 면적은 50.96㎢다. 농지가 31.6%인 16.13㎢이다. 임야는 60%에 가까운 30.52㎢다. 어업을 하는 인구보다 농사 짓는 사람이 더 많은 곳이 백령도다. 전체 가구의 33%인 718가구가 농가라고 한다. 어가는 8%에 불과한 174가구란다. 나머지 59%인 1천348가구는 기타로 분류된다. 식당, 숙박업 등 서비스업이란 얘기다. 자동차는 1천892대나 됐지만 어선은 123척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2곳과 중·고등학교가 각각 1곳이다. 인천항에서 백령도까지는 여객선으로 4시간이면 된다. 하루에 세 차례나 여객선이 뜬다. 20년 전만해도 1주일에 단 두 번 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10시간 이상씩 걸렸단다. 지난 4일 오전 8시 인천항을 출발한 백령도행 데모크라시호는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360명이나 탔다. 주민도 있었지만 관광객이 많았다. 올 9월부터는 인천시민에게는 여객선 요금의 50%를 할인해 주고 있다. 백령도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관광산업도 덩달아 커졌다. 백령도에만 여행사가 7곳이나 된다. 이들은 백령도유람선협회도 만들었다. 많을 땐 하루에 1천여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백령도 용기포항에 내리면 공항 출국장과 비슷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여행사 직원들이 사람 이름을 적은 푯말을 들고 서 있는 풍경이 그것이다.서울 효자동에 산다는 박옥지(59)씨는 칠레에 이민간 친구 송윤정씨와 둘이서 백령도를 찾았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칠레로 간 친구가 모처럼 찾아와 택한 여행지가 백령도라고 했다. 박씨와 송씨는 백령도 곳곳을 도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장산곶 등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백령도는 '해병대의 섬'이기도 하다.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에는 붉은 색 옷을 입은 해병대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주민들의 일손을 돕는 중이었다. 해병대가 없으면 농사짓기 어려울 정도로 군인들의 대민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령도에서 나는 쌀 등 먹을거리 상당수가 군부대로 들어간다. 민·관·군이 함께 하는 체육대회도 이틀에 걸쳐 열리기도 했다. 예전엔 백령도 멸치도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 멸치배를 끄는 집은 많지 않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그에 비해 벌이는 신통치 않기 때문이란다. 두무진 포구에서 멸치를 하는 집은 단 2곳 뿐이라고 한다. 멸치를 삶던 최순자(52)씨는 "5~6년 전부터 관광객이 많아지고, 횟집이 생기면서 주민들이 멸치를 그만 뒀다"고 했다.여수에서 시집왔다는 최씨는 "처음에는 답답해서 뭍으로 나가려고 보따리를 쌌다가 배를 타고 고생할 걱정에 그만 둔 적이 많았는데, 이제는 여기가 좋다"고 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고도 했다.백령도의 겨울은 조용하다. 주민 상당수가 도회지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김예찬 백령면장은 "12월에서 2월까지는 주민들이 자식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가 있어 60% 정도의 집이 빈다"면서 "면사무소는 그 빈집을 관리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될 정도"라고 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11-11 정진오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문갑도

문갑도(文甲島)는 문갑(文匣)과 닮지 않았다. 문갑은 옛날 선비들이 문방구와 문서를 넣어두는 세간을 뜻한다. 한자 표기도 다르다. 인터넷과 백과사전은 문갑도 지명 유래를 '문갑과 닮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관할청인 옹진군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지난 21일부터 3일 동안 문갑도에 머물렀다. 작은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웅현(66)씨에게 섬 이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답했다."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예요. 원래 물갑도였대요. 이곳은 산이 높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에요. 최근까지도 우물이 5곳이나 있었어요. 조선시대 말엽에는 가뭄이 들면 울도, 지도, 굴업도, 승봉도 사람들이 물갑도까지 물을 길러 왔다고 해요. 갑(甲)은 첫째를 나타내는 말이고요."20년 전 경인일보가 연재한 '섬섬섬' 시리즈에 문갑도는 빠져 있다. 문갑도는 섬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덕적도 진리선착장에서 해양호를 타고 20분 정도만 가면 닿는 곳에 있다. 가까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 문갑도다. 2008년 10월 현재 이 섬에는 53가구에 103명이 주민등록을 두고 있다. 김현복 이장은 "실제 섬에 살고있는 주민은 약 80명 정도고 고령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문갑도의 과거'를 물었다. 주민들이 끄집어내 보여준 기억 속 풍경은 희미했다. 그러나 문갑도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시끌벅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20년 전까지 마을에서는 두레굿이 열렸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창호지에 소원을 적으면, 이것을 모아 지푸라기로 만든 배에 넣고, 이 배를 물에 띄워 보내는 마을 잔치였다고 한다. 이후 2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7년부터는 발전소가 생겨 하루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자가발전기를 활용해 오전 5~10시, 오후 6시에서 12시까지만 전기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앞 해변에 있는 문갑내연발전소는 하루 600㎾의 전력을 생산한다. 문갑초등학교는 1999년 문을 닫았다. 폐교 당시 학생 수는 남자 2, 여자 3명이었다. 아이들은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문갑도에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문갑도에서 태어난 배종만(59·남구 학익동)씨와 해양호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과거 옹진군이 부천군에 속했던 때 문갑도는 부천에서 2번째 가는 부자동네였어요. 배가 많았거든요"라고 전했다.1960년대까지 섬 부근에서는 새우와 조기가 많이 잡혔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새우의 80%가 문갑도 앞바다에서 나온다는, 약간은 과장섞인 말이 돌던 때였다. 어선 수만도 100척이 넘었다. 승봉도, 이작도, 덕적도, 소야도 등에서 배를 타러 문갑도까지 왔다. 풍어제가 열리는 날은 마을 축제였다. 아이들은 배를 돌며 제상에 올려진 떡과 조기, 건어물 등을 몰래 빼먹었다. 폭이 약 300에 이르는 마을 앞 해변은 오색깃발을 달고 정박한 배들로 가득해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이북에서 피란 내려와 정착한 이들과 선원들로 붐빈 해변에는 술집 2곳이 생겨났다. 섬 할머니들의 말을 빌리면 "고기는 안 잡고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다"고 했다. 당시 이북 피란민 출신 박모씨가 운영하던 식당은 외상 술값을 대신해 어선을 받아 팔아넘겼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한다. 이를 참지 못한 섬 여성들이 모여 술집에 가 내부 기물을 때려부쉈다. 이후 40~50년간 문갑도는 술집이 없는 전통을 이어왔다.새우를 보관할 수 있는 독을 만드는 공장도 2곳이 있었다. 한월리해변 양쪽 끝자락이 독공장 자리였다. 독공장마다 10~20명의 직원이 있었다. 공장 주변에는 직원 숙소도 있었다. 독을 구웠던 토굴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독공장은 싼 가격의 드럼통이 대량 생산 유통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된다.남중심(82) 할머니는 덕적도에서 문갑도로 시집왔다. 일본사람들이 처녀는 공출해 간다고 해 부랴부랴 문갑도로 건너왔다. 당시 남 할머니 나이는 18살이었다. 이듬해 8월 해방을 맞았다.그리고 1950년. 전쟁의 포화는 외딴 섬에도 찾아왔다. 인민군과 국방군(연합군)이 차례로 섬에 왔다. 국방군은 섬에 들어오기 전 해변과 산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고 한다. 배는 모두 불타 가라앉았다. 혹시 숨어있을지 모르는 인민군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문갑초등학교 마룻바닥 아래에 노동당 입당원서 서류를 두고 갔다. 국방군은 이들을 찾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장을 찍은 이들은 갈대숲에, 갯바위 틈에, 산속 굴에 숨어 지냈다. 문갑초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종철이란 총각 선생이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것이다"고 나서 혼자 잡혀갔다고 김웅현씨는 전했다.그해 동짓달, 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섬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남중심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이듬해 5월에 돌아왔다.현재 문갑도에는 꽃게잡이배 광복호를 비롯해 태광, 옥잠, 영덕, 성영호 등 배 8척이 남아 있다. 문갑도 남쪽 바다에서 '그물이 터질 만큼' 잡히던 새우는 씨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마을 주민 상당수는 바다쓰레기를 수거하는 공공근로를 해 일당을 받고, 굴을 따 인천에 내다 팔아 돈을 번다.젊은 사람들은 뭍으로 나갔다. 한국전력으로부터 발전소를 위탁해 운영하는 (주)전우실업에서 일하는 20대 중반의 직원이 가장 어린 주민이다.전우실업 직원들은 해양호가 도착하기 전 1.5 트럭을 끌고 선착장에 나온다. 배에 싣고 온 짐을 옮겨주고, 다리가 아픈 주민들을 태워주기 위해서다.'섬개발 열풍'이 불던 3~4년 전에는 부동산 투자를 위해 문갑도를 찾는 외지인이 많았다고 한다. 문갑도 남쪽 해변에 있는 작은 산은 한 중소기업인이 매입했다. 여름철에 직원들이 쉴 수 있는 휴양터를 만들겠다는 이유였다. 며칠 전에는 외지인들이 이 임야를 보러 왔다가 투자를 포기했다. 땅 주인은 마을 이장에게 전화해 "말 좀 잘해주지 그랬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장은 땅을 보러 온 사람들 얼굴도 보지 못했다.문갑도 마을 앞 해변 한 구석에 있던 마을터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인근 선갑도와 충남 앞바다 쪽에서는 모래를 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모래가 사라지고 있다. 마을터 앞 모래사장에는 성인 남자 키높이의 자주색 철근이 박혀 있었다. 2~3년 전 해양연구원 박사들이 나와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설치 당시보다 70㎝ 이상의 모래가 유실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러다가 갯바위만 남게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모래가 사라지는 만큼 관광지로서 섬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선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섬에 들어왔다. 징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저게 우리 배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조용히 되뇌었다고 한다.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문갑도는 어떤 모습일까? 주민들은 관광지로 탈바꿈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그런데 1년에 한두 번 섬을 방문하는 옹진군수는 "모래를 파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고 한다.사진/윤상순기자 youn@kyeongin.com

2008-10-28 김명래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이작도

일상의 피로가 느껴질 때 한번쯤 호젓한 바닷가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본적이 있을 것이다.안락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바쁜 도시 생활로 인해 쌓인 피로가 사라지지 않을까?이런 상상을 하며 바닷가를 찾지만 붐비는 인파로 인해 오히려 피로가 가중 되고는 한다.연안부두 또는 대부도에서 배를 타고 쾌속선으로는 40분, 카페리를 이용하면 1시간 30분가량 가야 만날 수 있는 이작도는 20년이 지난 지금, 섬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에게 유럽 해양 휴양지가 주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있다.이작도는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로 나뉘어져 있다.행정명으로는 대이작도는 이작1리, 소이작도는 이작2리로 불리고 있지만 두 섬은 배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다.7월말 현재 대이작은 102가구 215명이, 소이작도는 54가구 9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20년 전 이작도 하면 떠오르던 파 재배는 옛말이다.지금은 특정 작물을 대규모로 심는 모습을 볼 수 없다.단지 섬에서는 채소를 외부에서 가져와 먹기 힘들기 때문에 각 가정마다 집에서 먹기 위해 농작물을 텃밭에 기를 뿐이다.약초와 나물도 마찬가지다.20년 전에는 부아산과 소리산에서 자생하는 나물과 약초로 수익을 올렸지만 현재는 약초와 나물을 채집하는 사람은 볼 수 없다.겨울이면 굴을 캐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 또한 먹기 위해 캐는 것일 뿐 팔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대이작도와 소이작도에 어선 30여척이 있지만 대부분 어업 활동 보다는 관광객들을 위해 섬 주변을 오가며 낚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이런 변화는 어업과 농업 중심이던 섬사람들의 산업 방식이 관광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어업에서 관광으로 산업방식이 바뀌자 섬사람들의 생활도 여유로워졌고 감소하던 인구도 증가세로 바뀌었다고 한다.이작1리 강태무(47) 이장은 "2001년을 기준으로 인구가 감소세에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작1리는 5년 전 63세대에 150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강 이장은 이어 "지금은 민박과 펜션으로 인해 주민들이 연 3천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어업과 농업을 할 때에 비하면 배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이라고 귀띔했다.주변 섬들이 60대 이상 노년층의 분포 비율이 높은데 비해 이작도는 30~50대 연령층의 분포 비율이 높다는 것도 이작도 만의 특징이다.취재를 위해 섬을 찾았던 지난 1일 자월도에서 열린 자월면민체육대회에서 장년층이 많은 이작1리는 족구와 축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1위를 차지해 섬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이작도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인천연안부두와 이작도만을 오가던 뱃길이 대부도까지 확대되고 오고가는 배편도 하루 1회에서 4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부터다.배편이 늘자 사람들의 발길도 늘었다.섬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숙박료를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요금 표준을 만들어 섬을 찾는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요금만을 받고 있다고 한다.또 깨끗한 섬을 만들기 위해 하루 1회 이상 해안가를 중심으로 청소를 하고 있다.이런 노력의 결과 이작도는 한국관광공사가 매년 선정하고 있는 휴양하기 좋은 3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이작1리에서 펜션을 하고 있는 김철환씨는 "관광으로 섬이 풍요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섬을 찾은 분들이 깨끗한 바다와 어촌 체험 등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작도에서는 해수욕과 바다낚시 외에도 부아산 생태탐방로 산책, 조개 줍기, 후릿그물(강이나 바다에 넓게 그물을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두 끝을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방법)과 작살로 고기 잡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2일 이작1리 펜션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골마을 근교 작은풀해수욕장에서는 섬을 찾은 관광객들과 섬에 거주하는 어민들이 함께 후릿그물을 하고 있었다.관광객 최수화(53·여)씨는 "이작도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서 좋다. 섬에 오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인데 다양한 어촌 체험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대이작도 큰말에서 장골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삼신할매 약수터라는 곳이 있다.이작도 주민들에 의하면 삼신할매 약수물을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이작도 주민들은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지만 마을의 옛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약수터 일대를 깨끗하게 정비했다.지금은 25년 전부터 맥이 끊어진 당제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큰풀안해수욕장에서 100m거리에 있는 모래섬인 풀등을 보호하기 위해 해수면보호구역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민박과 펜션을 짓기 위한 개발도 이어지고 있다.또 섬 주변의 다양한 볼거리와 편의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대표적인 것은 부아산과 소리산을 잇는 등산로 개발과 옹진군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해양박물관 유치다.강태무 이장은 "관광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개발을 해야 하지만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이다. 주민들은 개발보다 자연 환경의 보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임순석기자 sswok@kyeongin.com

2008-10-14 김종화

[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울도

꽃게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나이 지긋한 아낙들의 주름진 손끝이 마냥 분주하다. 오랜만에 가을 꽃게가 풍어를 이루면서 서해 먼바다에 있는 인천의 한 작은 섬도 모처럼 활기를 되찾아가는듯 싶다. 척박한 땅에서 그물 손질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는 섬 주민들에게 꽃게 풍년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게 우리 밥 벌어먹이는거여. 논이 있어, 밭이 있어. 바다 속만 들여다보고 사는 것도 오래 전이여. 배도 진작에 다 팔아버려서."이러저리 뒤엉킨 그물을 풀어내는 한 노인의 넋두리에서 사연 많은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묻어난다.울도(蔚島).인천시 옹진군 덕적면에서 가장 먼바다로 나앉은 섬이다. 간간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낚시꾼을 제외하곤 좀처럼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않는 곳이다. 하루에 한번씩 덕적도에서 문갑도와 굴업도·백아도를 순항하는 객선이 울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편이다. 뭍에서 너무 멀어, 들어올 때는 힘들어 울고, 나갈 때는 섬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에 떠나기 섭섭해 울고 간다는 섬이다. 인근 섬 사람들은 이 곳을 '울섬'이라고 부른다.덕적도에서 낚시꾼 일행과 함께 울도를 향하는 배로 갈아탔다. 옅은 안개로 덮인 바닷길을 두 시간 남짓 갈랐을까. 저 멀리 울도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적에서 남서쪽으로 23㎞ 남짓 떨어져 있지만 덕적에서 출발한 객선은 문갑·굴업·백아도를 돌아 울도에 도착하다보니 두시간 뱃길이다.오랜만에 섬을 찾아온 외지 사람들의 모습에 꽃게잡이 그물을 손질하는 장기자(68) 할머니가 일손을 잠시 멈춘다."반가워여. 식사는 어떻게 하고 오셨어여?"식사부터 챙기는 인심이 넉넉하다.섬 마을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팔딱거리는 어른 손바닥만한 생선을 좌판에 깔아놓고 손님과 흥정을 벌이는 아낙들의 걸걸한 입담도, 바다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선들의 뱃고동 소리도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덕적초등학교 울도분교는 폐교된지 이미 오래고, 선착장에 홀로 서있는 주인 잃은 폐선의 모습은 쓸쓸하기까지 했다.하룻밤 묵을 집을 정하고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비탈진 언덕으로 작은 텃밭이 여럿 있다. 호박이나 깻잎 등을 기르는 것이 울섬 밭농사의 전부다. 그마저도 텃밭에는 크고 작은 자갈이 널려있다.울도는 삶이 척박해 섬에 들어온 사람치고 울지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지난 1989년 6월15일자 경인일보 지면에 그려진 섬 주민들의 삶도 갑작스런 흉년에 고단해 보였다."농사가 거의 없는 이곳에서 주민들은 오로지 게잡이에 매달려 살림을 꾸리지만 특히 올해는 흉어라 걱정이 여간 아니다. 게가 잘 잡혀야 뱃일이 많아지고 따라서 그물손질 따위의 뒷일도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올해는 출어비도 미치지 못할 만큼 빈 그물을 건지는 일이 허다하다.(이하 생략)"20년사이 섬 주민들의 삶은 더 쇠잔해진듯 했다.그 전까지만 해도 울도에는 50~60t급 꽃게잡이 어선이 다섯 척 넘게 있었다. 육지에 따로 집을 사놓을 정도로 남부럽지 않았다.다른 섬에서 온 어선들까지 울도에 그물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 배를 타지않는 부녀자들은 어구 손질만으로도 한 해에 수천만원씩 소득을 올렸다.그러나 거듭된 바다 흉년 탓에 외지로 빠져나가는 섬 주민들이 하나둘씩 늘어만 갔다.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합해 160명 안팎에 이르던 인구는 현재 4분의1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어선도 이제는 우럭과 놀래미 등을 잡기 위한 3t급 이하 낚싯배 몇 척이 전부가 돼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꽃게잡이 어선 한 척도 조업에 나갔던 적이 오래 전 일이다. 부녀자들의 일감이던 그물 손질은 생명줄과도 같은 울섬 주민들의 주된 생계 수단이 됐다.섬에서 대대로 살아온 어촌계장인 정광성(73)씨는 "보통 빚을 지고 배를 짓는데 꽃게가 딱 끊기니까 견디지 못하고 망한 선주가 여럿 있다"면서 "집까지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말했다.고된 삶때문이었을까. 노인들은 대부분 울도가 한창 번성했던 때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일제 강점기 당시 새우잡이로 유명했을 때는 뱃사람치고 울도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연평도 다음 가는 어장으로 평가받는 시절이었다. 외지 사람들의 잦은 발길에 작은 마을에는 '색시집'으로 불리는 술집도 70~80군데나 있었다.고인이 된 정의석(당시 81세)씨가 20년 전에 울섬을 찾은 당시 취재기자에게 한 말이다."울섬 주변에선 새우를 많이 잡았지요. 일정 때부터 였으니까 한 50년쯤 된 것 같은데, 그때가 울섬 생긴 이래 최고로 잘 살았던 때 같아요. 덕적 돈은 다 울섬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울섬 주위에서 잡은 새우는 근처의 지도(池島)에서 말려 포장한 뒤 중국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새우가 흔적을 감추다시피했지요."그물 손질을 하던 정현희(71) 할머니도 새우잡이가 성했던 어린 시절의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내가 꼬맹이였을 때는 새우가 말도 못하게 많었어. 예전같으면 새우잡이 소리에 밤잠을 못잘 정도였으니께."20년 전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도 있다.뭍으로 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덕적도와 울도를 연결하는 객선이 최근 5~6년 전부터는 격일제에서 매일 한차례씩 운항한다. 당시 5만원은 가져야 육지를 갔다온다는 말도 있었다. 울도에서 덕적도를 거쳐 인천 연안부두까지 갔다오는 뱃삯이 5만원 정도 들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은 옹진군에서 요금을 지원하고 있어 반값이면 충분하다.물이 넉넉해진 것도 섬 마을의 큰 변화다.20년전만 해도 울도는 가뭄이 한번 들면 당장 마시고 써야할 물이 부족해 가슴을 조여할 때가 많았다. 바위 틈에서 나오는 물을 마을 어귀에 있는 우물에 모아 나눠쓰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하수를 뚫어서 넉넉하게 물을 쓰지는 못해도 생활에는 전혀 불편이 없다.마을을 거닐던 한 노인은 턱없이 물이 부족했던 옛 기억때문인지 "항시 틀어놓으면 물이 딸리니까 최대한 아껴 쓴다"고 말했다.최근 울도는 또 한번의 큰 변화가 일고 있다.울도가 태풍 등 기상악화로 인한 어민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서해안 조업 어선의 대피장소 중간 보급기지 기능을 갖춘 어항으로 확장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동(東)방파제와 서(西)방파제 공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고, 물양장 공사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현재 밀물이 들어올 시간에는 객선을 정박하는 선착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덕적도로 나가는 객선을 기다리며 전날 어촌계장인 정광성씨가 꺼낸 말을 떠올렸다."울도의 울(蔚)자는 왕성한 기운을 뜻하지요. 옛날 노인들은 새우잡이가 성하기 오래 전에 보리로 연명하던 시절이 있어 살기 어려워 울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울도 앞바다의 어족이 항상 풍성하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울도를 찾게 되면 어선으로 넘쳐나는 항을 볼 수 있을 겁니다."사진/임순석기자 sswok@kyeongin.com

2008-09-30 임승재

[창간 48주년 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세어도

주위가 수역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 국어사전에서 찾은 '섬'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외롭고 육지의 일부라서 서러운 곳 또한 섬이다.다리가 놓이고 바다가 매립되면서 더 이상 이런 표현들로 설명할 수 없는 섬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섬은 채워지지 않은 모자란 그 무엇이다. 세어도로 가는 행정선을 타러 동구 만석부두로 가는 내내 이런 생각들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인천에서 세어도를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인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는 느낌처럼 세어도도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2월 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전기가 공급됐다는 소식이 지역과 중앙 언론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섬에 모자란 무언가가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이 섬으로 들어가는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주민들이 수십년째 큰 불편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이 '도심속의 오지 세어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세어도의 행정구역상 주소는 인천광역시 서구 원창동이다. 조선시대 부평군 서곶면에 속해 있다 1917년 부천군에 편입된 후 1945년 해방과 함께 인천으로 바뀌게 된다. 인천 지역 대부분의 섬이 옹진군과 중구에 속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세어도는 주소부터 지역 다른 섬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안개 때문에 뜨지 못한다던 세어도 행정선이 약속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만석부두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어도는 오가는 민간 여객선이 없어 하루에 한 번꼴로 운행하는 행정선이 주민들의 '발' 노릇을 한다. "지금 들어가야 아무도 없을 텐데…. 다들 농어 잡으러 바다에 나갔어. 우리도 추석은 쇠야될 것 아녀." 세어도에서만 4대째를 살고 있다는 행정선 선장 채수정(55)씨가 배에 오르자마자 한마디했다.세어도 사람들의 주 소득원은 농어잡이다. 6월에서 10월까지 한 달에 다섯 번꼴로 출항해 농어를 잡는다. 사람 팔뚝만한 크기의 농어는 ㎏당 2만5천원씩을 받는데 이 값이 10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또 섬 인근에 바다를 메워 인천공항이 들어서고 육지와 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등이 세워진 다음부턴 물길이 바뀌어 예전처럼 농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채씨는 "인천공항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한 번 나가면 농어 200㎏씩은 잡아 애들 공부시키고 다 했는데 지금은 하루 꼬박 조업해도 2~3마리밖에 잡지 못한다"며 "이젠 여기서 농어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배가 만석부두를 출발하자 북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부발전소와 동부제강 등 대형 산업시설들이 모여있는 항만을 빠져 나와 20여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수많은 차들이 시원스레 달리고 있는 영종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 교각 아래를 지나 10여분을 더 간 후에야 흐릿하게 세어도가 보이기 시작했다.최첨단 설계와 공법으로 조성됐다는 영종대교와 인천공항, 바로 여기서 몇 ㎞ 떨어지지 않은 곳에 200년 만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다는 세어도가 있다.세어도 선착장 주변에는 농어를 잡으러 나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온 조그만 배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부부로 보이는 이들은 섬으로 들어오는 시간도 아까운 듯 배 안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우리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고 가. 나도 빨리 농어 잡으러 가야 해서 집에서 한 끼 먹는데 같이 들자고." 채씨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동네 언덕에 오르자 해안을 따라 빛바랜 슬래브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 뒤편 해안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영종대교의 모습과 마을의 빛바랜 슬래브 지붕들이 대비되면서 이곳 세어도 주민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듯했다. "20년 전만 해도 여기에 송현초등학교 분교도 있었고 1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섬에서 농어를 잡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한 30명밖에 없어. 그땐 사는 건 불편해도 바지락이며 민어, 농어가 많이 잡혀 돈 걱정은 안했지." 채씨는 라면을 먹으며 옛날 얘기를 했다.그러나 채씨는 "지난해 전기가 들어오고 구청에서 급수시설도 해줘 몸은 편해졌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밥을 먹은 후 동네를 한바퀴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한낮 마을은 조용했다. 다들 농어를 잡으러 나간 탓에 마을은 노인 2~3명이 지키고 있었다.10여분이면 동네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조그만 섬이지만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루를 다 들어도 못 들을 듯했다. 40여년 전에 충청도에서 세어도로 시집와 지금껏 살고 있다는 오향환(76) 할머니는 전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몇 년 전만 해도 전기가 안 들어와 발전기를 돌려 썼는데 발전량이 부족하다 보니 가전제품이 고장나기 일쑤였다"며 "그나마 지금은 텔레비전이라도 마음껏 볼 수 있어 심심하진 않다"고 했다.오 할머니는 "발전기고 뭐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엔 동네 끝 해변가에 있는 우물에 김치를 싸서 보관했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김치 건지러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동북아 허브도시를 자처한다는 인천, 그 속의 작은 섬 세어도는 마치 이제 막 깨어나 도시 문명의 혜택을 받는 원주민들이 사는 곳 같았다. 세어도의 행정구역은 서구지만 서구지역에 마땅한 선착장이 없어 5분이면 올 수 있는 섬을 동구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40여분이나 돌아가야 한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육지 생활권은 대부분 동구 지역이다. 장을 보러 갈 때도 동구 송현시장이나 중앙시장 등을 찾는다고 한다.지역과 중앙 언론에 이 문제가 몇 번 언급된 후 관할 구청과 군부대가 서구 지역에 선착장 부지를 찾기 위해 협의하고 있지만 반년이 다 되도록 뚜렷한 해결점을 내놓지 못해 섬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 또 세어도 인근은 군사 취약지역으로 묶여 있어 선착장 건설은 물론 밤에 사람들의 왕래도 통제돼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어도 통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오현(55)씨는 "언론에 몇 번 나오면서 세어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때론 이런 관심 때문에 뜻하지 않은 오해가 생겨 상처를 받기도 한다"며 "마을이 발전하고 외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오후 4시가 다 돼 농어를 잡으러 갔던 채씨가 돌아왔다. 새벽 4시부터 나가 조업했다는 채씨가 이날 잡은 농어는 한 마리. 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다시 만석부두로 돌아가기 위해 행정선에 올라탔다. 채씨가 하루종일 일해 잡은 농어의 배를 가르고 있었다. "기자양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농어맛은 보고 가야지."농어회 몇 점과 소주 한잔을 먹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세어도 상공 위로는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날아올랐고 영종대교에는 수많은 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9-16 김명호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자월도

섬의 밤바다에 설레는 연인들이 휴대폰 카메라의 불꽃을 터뜨린다. 빛은 또다른 빛을 만나 새로운 빛을 만든다. 달빛은 포말에 부서지고, 부서진 빛의 조각들은 바다 위에 흐드러진다. 어느 불꽃놀이가 이보다 더 화려할까. 불꽃의 몸부림에 눈이 시릴 지경인데, 파도 소리 마저 빛의 여운을 머금었다. 연인들을 시샘하는지… 자월의 파도는 어느덧 육지를 향해 진한 입맞춤을 시도한다.'자월'(紫月)이란 이름의 유래는 달빛과 무관하지 않다.조선시대 자월도로 귀양살이를 하러 온 어떤 이가 첫날 밤 신세 한탄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침 보름달이 떠 달빛이 유난히 밝은데 갑자기 달이 붉어지더니 바람이 일어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는 하늘도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 주는가 싶어 그때 이곳의 이름을 자월도라 지었다고 한다.당시 귀양온 이가 바라보는 달과 피서철 섬을 찾은 연인들이 바라보는 달은 분명 같을진대 그 느낌은 전혀 다른 듯하다.'옛 정취 그윽한 메밀꽃 마을'.인천 앞바다의 섬을 소개하는 '섬·섬·섬' 시리즈가 경인일보에 연재되던 20년 전, 당시 자월도를 이렇게 표현했다.낮은 야산이 많고 물이 부족해 당시 자월도에선 가뭄을 덜 타는 메밀이나 보리가 농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마당에 깔아놓은 메밀을 도리깨로 두드리는 모습은 자월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밀 타작' 풍경이었다.그럼 지금은…. 자월도는 인천과 32㎞ 떨어진 군도(郡島) 중 하나로 연안부두에서 뱃길로 1시간 30분 가량이면 닿을 수 있는 섬이다. 면적이 7.1㎢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해 있는 승봉도, 대이작도, 소이작도 등 4개의 유인도와 동백도 등 9개의 무인도 중 가장 큰 섬이다. 이들 섬 중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주민수도 가장 많아 자월면 전체 525 가구(1천86명, 6월 말 기준) 가운데 절반 이상인 275가구가 자월도에 둥지를 틀고 있다.20년이 지난 후에 둘러 본 자월도에서 메밀의 흔적은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대신 그 자리를 고추나 수수 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득이 높은 농작물을 선호하다 보니 80년대부터 고추 등 대체작물이 자월도에서 메밀을 밀어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지금 자월도에서는 고추와 수수, 조 등 5가지 곡물을 건강웰빙식품으로 재배해 '자월도 오곡'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다.양잠과 양봉도 마찬가지다.20년 전만 하더라도 양잠과 양봉은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자월도의 명품 소득원이었고 주민들은 이를 통해 상당한 소득을 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월3리의 경우, 34가구 중 절반인 17가구 가량이 양잠농가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메밀과 마찬가지로 섬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단지 강태원씨 농가 한 곳만이 가업 형태로 양잠과 양봉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산의 저가 물량공세에 따른 파장은 섬마을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메밀과 보리, 양잠, 양봉이 주요 농업 소득원이었다면 어업 소득원은 굴과 바지락, 김 양식이 주를 이뤘었다.이중 그래도 지금까지 비교적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굴이다. 자월도 주변에는 야생굴이 많아 솜씨가 좋은 사람이면 하루에 4~5근은 너끈히 땄었다. 자월면사무소에 따르면 지금도 150여가구가 굴을 채취, 인천을 비롯 수도권에 공급하고 있으며 연간 평균 1천500여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김양식은 섬의 노령화와 맞물려 사라지고 말았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육지로 떠나면서 섬에 남은 노인들이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김양식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의 가격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주민들이 김양식에서 손을 뗀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바지락 또한 서해의 여느 섬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변화와 맞물려 예전처럼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는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바지락 캐기가 성행했던 예전에 비하면 비교할 바가 아니다. 더욱이 자월도의 바지락은 이제 주민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재미삼아 바지락을 캐는 관광객들이 가세했기 때문이다.장골해변 인근에서 만난 박길난(73·여)씨는 "물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에 몇시간씩 굴을 캐는데 한달을 캐도 세금도 못낸다"고 말했다.굴을 제외하고는 섬의 전통적인 어업소득원이 자취를 감추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무엇 때문일까? 우선 섬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진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자월도는 섬 자체가 거대한 민박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펜션과 민박집이 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이 찾아 상권이 형성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펜션과 민박집이 들어서면서 비록 소규모지만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기도 한다. 자월도의 현재 생업 분포는 펜션·민박 등 관광업이 40% 정도로 가장 많고 농업과 어업이 각각 3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펜션·민박이 성행하고 있는 것은 피서철 특수도 특수지만 자월도에서의 낚시가 큰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동서로 길게 형성된 자월도의 남쪽엔 장골해변, 큰말해변 등 해수욕장이 발달해 있고 북쪽에는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갯바위가 많이 분포해 있다.마바위, 진부리, 하니포, 떡바위, 작은장불, 굴부리 등의 갯바위는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물론 선상낚시를 즐기는 관광객들도 있으나 갯바위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훨씬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월도의 슈퍼마켓이나 매점 등에서는 대부분 대나무로 만든 1회용 낚시대와 미끼, 낚시도구들을 판다.낚시의 명소로서 자월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섬 관광의 기존 틀도 크게 바뀌었다. 여름에 반짝 사람들이 찾는 섬이 아니라 겨울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3계절 관광지로 변한 것이다.현남식 자월면장(현 관광문화과장)은 "지난해의 경우, 낚시 성수기인 9월부터 10월말까지 주말에 평균 1천500여명(자월면 전체로는 5천여명)의 관광객이 자월도를 찾았다"며 "이로 인해 숙박업소들이 여름 피서철보다 낚시 성수기인 가을에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그러나 이같은 변화는 소득의 양극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섬에 안겨 주고 있다. 외지인들이 많은 돈을 들여 고급형 펜션을 짓고 관광객들이 이들 펜션에 몰리면서 기존 가옥을 민박집으로 운영하는 원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으나 외지인과 원주민간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자월도 토박이인 한 주민은 "자월도의 그 많은 펜션과 식당 가운데 토박이가 운영하는 펜션은 4개, 식당은 1개에 불과하다"며 "외지인이 운영하는 펜션과 경쟁하느라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시설을 개선하다 어려움에 처한 주민도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섬이 도시화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월도 깊은 곳에는 이처럼 자본의 논리가 침투한 흔적이 자리잡고 있었다.어쨌거나 단순히 관광객 입장에서 볼 때 자월도는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아름다운 풍광에 해수욕, 낚시 등 섬에서 할 수 있는 놀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바지락, 낙지, 소라 등을 잡을 수 있어 해양체험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이를 입증하듯 피서철의 끝자락 자월도 해변에는 연인들보다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훨씬 더 많았다.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8-19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백아도

"섬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복잡한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여행객들의 심정이 각기 다르겠지만 섬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죠."백아도(白牙島)에서 태어난 송진호(58) 선장. 인천 덕적도를 모도(母島)로 한 인근 도서에 하루 한 차례 닻을 내리는 해양호의 키를 잡고 있다. 이 배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14년째 접어든다. 문갑, 굴업, 울도 등 고만고만한 섬을 돌면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고 한다. 청춘을 바다에 바친 그는 이제 고향을 지척에 두고 근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적면 일대 섬 주민들의 손과 발 역할을 하는 해양호에 몸을 실은 이들은 서로가 낯설지 않다. 전체 도서를 합쳐봐야 인구가 많지 않을 뿐더러 송 선장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약한 빗줄기가 내리던 지난 7월 중순, 해양호가 출항에 나섰다.선박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자 금세 파도가 거칠어졌고 정원이 고작 80명에 그치는 작은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던 오전과 완전 딴판이다. 배를 탄 10여명의 승객은 갑판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굴업을 지나 외곽 섬에 3개의 붉은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 백아도에 살던 남매간의 이뤄질 수 없는 애달픈 사랑을 간직한 '선단여'다. 잠시 후 1시간이 걸려 도착한 목적지에는 반기는 이도, 반가운 사람도 없었다. 외부 발길이 뜸한 섬 분위기를 설명하는 듯했다.선착장에서 배분열(75) 할머니를 만났다. 불혹을 넘긴 노총각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배 할머니는 큰말에 산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한때 주민들이 몰려 살아서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현재 9가구에 16명이 전체 인원이다. 12가구, 15명이 살고 있는 작은말은 이곳 반대편에 있다.20년 전 연재된 경인일보 기사에서, 작은말을 더 큰 동네로 소개한 것과 달리 인구는 큰말이 많다. 발전소 직원 4명이 여기에 숙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큰말 입구에는 지난 2000년 5월 준공된 내연발전소가 있다. 발전소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 전에도 백아 주민들은 전력 공급에 불편을 겪지 않았는데 이는 1990년 중반까지 해군 부대가 주둔했기 때문이다.발전소장 차준덕(47)씨에 따르면, 산을 다져서 시설물을 갖춘 해군 8×××부대는 낙도에 각종 혜택을 안겨줬다. 전기를 비롯해 군(軍)의 레이더기지는 일반 가정에서 유선 전화기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군인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덕적 서포초교 백아분교도 문을 열었다.1996년 단계적으로 해군 철수와 함께 백아도는 점차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장병이 떠난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았고 학생 수요가 없는 학교는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군의 도움으로 매년 수확의 기쁨을 맛본 논 농사는 황폐해졌다. 노인들 자력만으로 가꾸기 힘든 논에는 무성하게 잡초가 뒤덮였다. 옹진군 보건소 집계에서 섬에 거주하는 주민 연령이 평균 65세에 이르는 데서 초고령 사회임을 확인할 수 있다.마을 이장 고용현(70), 신풍금(67)씨 부부는 작은말에 산다. 이 마을에 닿는 유일한 수단은 걷는 것이다. 전신주를 따라가라는 배 할머니의 설명대로 산을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사람 발길이 드물었던지 인도 구분이 확연하지 않다. 습한 산길의 바위 모퉁이에 온통 빨간색으로 단장한 게들과 마주쳤다.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물을 훔쳐 먹는다고 이름 붙여진 바로 '도둑게'다. 집게 다리까지 3~4㎝도 안 돼 보인다. 30분쯤 산을 내려오니 도로 공사가 멈춘 현장에 닿았다.섬 외곽을 잇는 회주도로는 2006년 초 착공됐지만 아직 준공까지 절반가량 공정이 남았다. 토지주 반대와 예산 부족 등으로 이미 세 차례의 중단을 경험했다.군은 올해 7억3천만원의 사업비를 앞서 확보했으며 곧 공사를 재개해 내년 상반기 중으로 개통한다는 계획이다. 작은말 어귀에는 신축 보건진료소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한결같이 빨간 페인트로 칠해진 지붕 사이로 한 가구만이 파란색이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이 집에 고 이장 부부가 산다."20년 전에는 꽃게 그물을 손질하면 못해도 1년에 수천만원은 손에 넣었지. 인천을 떠난 수십척의 조업선이 며칠을 묵으면서 섬 사람들에게 일감을 줬어."고 이장은 돈이 넘쳐났던 시절을 회상했다. 이마저도 서해 전반에 불어닥친 흉어기로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경작지를 늘리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임야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워낙 컸고 소규모 토지는 지나치게 척박했기 때문이다.1년을 꼬박 땀 흘려야 수확이 가능한 쌀 농사는 아무도 짓지 않는다. 여기서 소비되는 쌀의 전 물량은 외지에서 모두 사온다. 낚싯배가 아닌 근해조업이 가능한 어선 또한 1척이 있지만 바다로 나간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하기 힘들다.여느 섬들과 달리 백아도에서는 아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큰말에서 태어난 발전소 총무과장 이철호(34)씨는 과거 인천공항에서 근무하던 지금의 부인 김재화(26)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외부와의 단절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20살 새색시는 아무 탈 없이 1남1녀를 키우고 있다. 성격이 좋아서인지 힘든 일상에도 불만을 내색하지 않는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재준(5)·수민(3)이가 있다.백아에서 태어난 남매는 무척이나 건강하다. 아직껏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단다. 하늘색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는 게 취미인 재준이는 '어부'가 꿈이란다. 산과 바다만을 접하고 자란 때묻지 않은 순수함 때문일까. 오빠의 뒤를 따르던 수민이는 낯선 이들의 접근을 경계하는 듯했다.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총총걸음으로 엄마 재화씨 뒤에 숨어 버렸다.연말이 되면 남매는 섬을 떠날 예정이다. 내년 6살이 되는 재준이가 유치원에 가야 하는데 이곳엔 교육시설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아이들을 위해 부득이하게 당분간 떨어져 살기로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과 따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철호씨는 벌써 그리움이 앞선다.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게 될 아이들의 모습은 예전 섬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던 군 부대와는 또 다른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듯싶다. 한순간의 기억보다는 섬을 지탱하는 활력의 부재로 다가설 수도 있겠다.백아에서 태어난 어린 남매가 10년이 지난 먼 훗날, 고향을 찾는다면 그들을 기억하는 어르신들로 면적 1.75㎢의 작은 섬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을지도 모르겠다.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8-05 강승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굴업도

1996년 한 민간업체가 '누드비치'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던 굴업도(掘業島). 이보다 2년 앞서 정부는 이곳을 핵폐기물 처분장의 최적지로 꼽고 다음해 지정·고시까지 마쳤었다. 최근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섬 전체를 관광단지화하려고 발빠른 행보에 나서고 있다.특정 섬을 두고 발생한 각종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국내에서 전례가 없는 최초이거나 파격적인 시도라는 점이다. 둘째, 재정상으로 막대한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개발을 적극 반대하는 여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굴업도는 지금껏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옛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해의 섬 중 특히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외부 손길이나 변화의 모습을 꺼려하는 굴업도는 취재진에게조차 쉽사리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달 초 1차로 나선 장도에서 도중 하차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굴업도로 향하는 직항편이 없어 부득이 덕적도를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해상에 지독하게 깔린 안개로 덕적 일대 자도(子島)를 순회하는 '해양호' 운항이 불가하다는 게 선사측의 일방적 통보였다. 더욱이 당시 기상 상태로는 이튿날 역시 화창하게 갠 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천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지난 15일 다시 채비를 갖췄다. 이날도 옅은 해무가 깔려 불안감이 커진 상태였으나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는 승객들의 모든 바람이 그랬던지 2시간 넘게 이동한 끝에 굴업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인천에서 직선 거리로 60㎞가량 떨어진 굴업도는 덕적(德積)을 모도(母島)로 서포3리가 행정구역의 공식 지명이다.바닷길로는 서해 최북단 연평도에 비해 3분의 2 수준이지만 오히려 멀게 느껴지는 것은 불편한 교통편 때문이다. 굴업도 주민을 실어 나르는 해양호는 하루 한 차례, 정해진 시각에만 돛을 올린다.그나마 격일제로 다니던 상황에서 많이 개선됐다. 20년 전 경인일보가 연재한 기사에서 "날이 궂거나 배가 고장이라도 나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보름에서 한 달까지 뱃길이 끊어진다. 섬 밖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쩌다 섬을 찾으러 마음 먹다가도 오가는 일에 겁을 내 주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체 면적은 1.72㎢ 남짓으로 동서로 분리된 두 개의 섬이 모래사장으로 연결돼 있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망망대해를 접하고 있는 이 해변은 굴업도를 처음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명물이다.마을은 반월 형태의 해수욕장 뒤로 몰렸는데 주민등록상 거주자는 20가구 37명이다. 꽤 많은 수치지만 실제 섬에는 절반가량인 10가구 24명이 머물 뿐이다. 대부분이 환갑을 훌쩍 넘긴 노부부라 오순도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섬 내부를 구분하는 명칭은 상당수가 옛 주민들로부터 전해져 아직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단다. 온통 억새 군락이 형성된 서쪽에는 초지가 무성하게 뒤덮였는데 이전 생계수단이던 땅콩 재배를 중단하면서 풀이 사람의 키만큼 자라난 것이다.동북쪽에선 붉은 색을 발하는 해변이 손짓한다. 너무 한적해서 그런지 언제 사람의 발길이 닿았었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전체가 100 이내 구릉으로 이뤄진 굴업도에서 최고점은 122의 덕물산(德物山)이다.20년 전 경인일보 지면에 등장했던 이성근(73)씨 부부는 같은 자리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지난 1980년 초대 이장을 거친 이씨는 "과거 먹을 물이 귀해서 옹달샘을 파기도 했지만 금세 말랐다"며 "이장을 맡은 다음해부터 지하수 사업을 벌여 3곳의 수원(水源)을 찾았다"고 지나온 삶을 뒤돌아봤다.굴업도가 3곳의 천혜 해수욕장을 갖고서도 그간 관광지로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다. 이후 식수가 풍부하다 보니 가정마다 한철 장사로 민박집을 열었다. 돈벌이가 꽤 짭짤했던지 고된 농사를 차츰 줄여갔다.이씨는 "여름에만 손님을 받아도 여느 직장인들 연봉보다도 많은 때가 있었지. IMF 때 잠깐 줄어들긴 했는데 요즘 다시 좋아지고 있어. 올핸 손주들 용돈이라도 넉넉하게 줄 수 있겠어"라며 밝게 웃었다.이씨의 설명처럼 굴업도는 대대로 땅이 척박한 터라 농사를 지어도 결실을 보기 어려웠다. 모래땅에서 억척스럽게 자란 땅콩은 1960년을 기해 수확량이 확연히 감소했고 이젠 식구들이 먹고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텃밭에서 기른다. 섬에서는 태양빛으로 발전기를 돌린다. 이 기계가 들어오기 이전인 2002년까지는 조그만 창고에다 발전시설을 놓고 각 가정에서 당번을 정해 운영했다고 한다. 오후 6시부터 고작해야 5시간 내에 멈추고 말았기에 지금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은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섬 전체에서 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 대지가 0.1%에 그쳐 사람이 발 붙이고 살기 힘든 조건이다. 나머지 98%는 임야가 차지하는데 이런 이유로 야생에서 뛰노는 검은 염소와 꽃사슴이 자주 발견된다. 1983년께 인근 울도에서 염소 10마리를 사다가 방목했는데 굴업도로 흘러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 개체 수가 불어나 지금은 얼마나 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사람의 손을 떠난 25년의 세월 동안 새끼가 새끼를 낳아 완전한 야생동물이 된 것이다.굴업도의 또 다른 특징은 섬 전반에서 드러나는 암석해안이다. 바다와 맞닿은 곳에 파도로 침식된 절벽 파식대와 소금을 머금은 바닷바람에 침식된 해식대가 주변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물이 빠지면 연결되는 목섬, 일명 토끼섬은 기묘한 형태의 절벽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1994년 12월 조용하던 섬 마을을 발칵 뒤집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정부의 원자력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계획이다. 그 해 발간된 경인일보에 따르면, 국내 부존자원의 절대 부족으로 에너지 수급정책의 방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력 공급의 50%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원자력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었다. 당시 정부는 5가구 9명이 살던 무인도나 다름없던 굴업도를 최적지로 꼽았고 인천 시민은 물론 국민들의 이목이 굴업도에 쏠렸다. 이어 방사능 유출사고와 농산물 판로 중단 등을 우려하는 인근 덕적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대대적 반대 물결이 일어났다.경찰에 연행되는 시민이 속출했고 급기야는 시위를 벌이던 한 노모(老母)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악화일로로 접어들던 사태는 11개월이 흘러 언제 그랬냐는 듯 원점으로 되돌아갔다.1995년 2월 핵폐기장 낙점 발표로부터 9개월 뒤 섬내 2곳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면서 계획 자체가 완전 백지화된 것이다.그러나 그때 아픔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굴업도가 핵폐기장 후보지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로 섬에 새겨져 있다."그곳은 몇몇 주민들과 바닷새와 서풍에 쏠리는 모래 언덕들만이 잔잔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무공해의 작은 섬일 따름이었습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저서 '굴업도의 평화를 위하여'에 표현된 굴업도다.2년 전부터 굴업도가 다시 어수선해졌다. CJ그룹이 해양관광단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CJ그룹은 부지 조사를 거쳐 현재 98%가량 부지 매입을 끝마쳤다. 지금까지 섬을 변화시키겠다는 계획들은 번번이 무산됐다. 굴업도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또는 과오를 반복하는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옛 사진엽서에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보석같은 섬'으로 소개된 굴업도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시샘을 하나 보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7-22 강승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덕적도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와서 놀더라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가더라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다시 굴업도로 해걸음을 넘길 때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이전(以前)이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 - '덕적도 시-1 해질녘' 전문1991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덕적도 출신 시인 장석남이 그린 고향 덕적도다.덕적도에 뿌리를 내린 '아버지'가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해걸음을 넘기는 역사의 흐름속에서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고 그리고 있다.지난 3일 오전 9시30분, 인천 연안부두에 대기 중이던 모든 여객선이 짙은 안개로 결항됐다. 이곳 부두에서 남서쪽으로 77㎞ 떨어진 덕적도. 실제 운항시간이 1시간도 채 안 되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후 배편의 출항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기상이 점차 호전됐고 탑승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리자 꼬박 3시간 넘게 기다린 지루함도 잠시, 이들의 얼굴에는 섬으로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스쳤다.덕적도(德積島)는 '덕을 많이 쌓았다'라는 풀이와, 크고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의 우리말 '큰물섬'을 한자화했다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8개 유인도와 34개의 무인도로 형성된 군도(群島)의 중심. 선박이 닻을 내린 도우선착장은 과거 인근 소야도를 건너기 위한 나루터였다. 이날도 한 무리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려는 종선이 여객선을 기다리며 일찌감치 정박 중이었다."우럭 1㎏에 3만원, 도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산으로 정말 싼 거예요."좌판에 생선 몇 마리를 깔고 흥정을 벌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로 포구는 금세 활기가 넘쳤다. 배가 들어오는 시각에 맞춰 운행되는 순환 버스가 시동을 걸고 손님을 맞았다. 차가 5분쯤 달렸을까. 왼편으로 면사무소가 보였다. 3개의 리(里)로 구분되는 덕적도 행정구역중에서 중심지인 바로 진리(鎭里)다. 보건소, 농협 등 각 기관이 몰려 있다.특히 섬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꼽히는 덕적초·중·고교가 이곳에 자리했다. 지금은 유치원부터 통합 운영되지만 개교 시기는 모두 다르다. 공립초교가 1933년 문을 연 이후로 1955년과 1979년에 각각 중학교, 고교가 그 뒤를 이었다. 섬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공부하고 뛰노는 장소이다. 올해까지 초교는 총 2천942명, 중학교 2천290명, 고교 38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차츰 육지로 떠나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 2008년도 입학생이 전 과정을 통틀어서 32명에 그친 데서 확인할 수 있다.학교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해당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백년도 넘을 듯한 노송(老松)이 주변 울타리를 만들었고 너머로 엿보이는 푸른 바다 모래땅엔 분홍 빛깔의 해당화가 수줍게 폈다. 600여 그루의 해송은 그 빼어난 자태 덕분에 국내 몇 안 되는 보호림이다."얼마 전까지 이웃 동네를 오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죠. 내년께 회주도로가 완공되면 마을간 자동차로도 다닐 수 있어요."20년 전 경인일보 연재 기사에서, 이장용(당시 54세)씨가 언급한 군도 정비사업은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착공 20년이 넘도록 소야~능동선(9호선), 진리~북리선(10호선)등 섬 한 바퀴를 도는 연장 24.8㎞ 2개 노선 가운데 일부 구간이 미포장으로 남은 것이다.진리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면 밭지름해변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길을 안내한다. 부드러운 황금빛 모래사장을 감상하다 뒤를 돌아보면 나는 새의 형상을 빗댄 비조봉(飛鳥峰)이 솟아 있다. 292로 그다지 높진 않지만 적송림의 울창한 숲 꼭대기에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정자가 장관이다.군도 9호선으로 맞닿은 서포리는 100년 개장의 역사를 간직한 해수욕장으로 더욱 유명하다. 서해에서는 보기 드문 자연상태의 해변을 노송 1천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 길이가 2㎞, 남·북 간의 폭은 넓게 600에 달한다. 섬 내에 다양한 편의·숙박시설이 집중돼 휴양객이 즐겨 찾았다. 과거 경인일보는 썰물 때에도 여전히 고운 모래가 드러나는 백사장 때문에 으뜸 피서지로 서포리를 소개했다.이러한 단골 명소도 시설 노후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갈수록 휴양객이 감소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바가지 요금'이 방문객들의 외면을 부추겼다. 김성현 덕적면 산업담당은 "여름철 외지인에게 숙소를 통째로 빌려주고 목돈을 만지겠다는 분위기가 퍼졌었다"며 "때문에 장사치들은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려받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면에서 집계한 통계수치를 보면 연간 관광객 수는 1999년 7만9천93명으로 최대를 이루다가 그 다음해 6만1천526명으로 급감했으며 2005년엔 3만5천887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매년 치솟는 선박 이용료도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다.서포리의 또 다른 특징은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예로부터 험한 산세와 평야를 찾아보기 힘든 자연환경으로 농업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어업이 발달해 덕적도의 어선들이 강경, 논산, 평택 등지로 조기, 새우젓을 싣고 가 농산물로 바꿔왔다. 인천시립박물관의 덕적군도 학술조사에 따르면, 덕적의 숙원은 쌀을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1960년 갯벌 매립이 첫 시작된 후로 몇 차례 중단을 거듭하다가 1974년 최분도 신부가 이 일을 맡으면서 본격 착수됐다. 서쪽 끝 벗개라고 불리는 마을앞 바다를 막아 안쪽으로 논을 만든 것이다. 1982년 완공으로 새로 생겨난 개척지는 70만여㎡로 식량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최 신부의 도움 덕에 덕적은 천주교와 인연이 깊고 동네 어귀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섬은 사방이 바다지만 어촌계는 북리(北里) 한 곳이다. 지리적으로 수심이 깊고 어종이 풍부했던 탓에 한때는 9천여명이 모여살 만큼 번창했다.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던 꽃게 어장이 차츰 동(東)중국해로 바뀌면서 지금 어선들은 인천을 모항으로 삼고, 여기에선 그물을 손질한다. 아직 꽃게와 관련된 소일거리는 섬 인구의 42%, 382가구의 주 소득원이기도 하다. 북쪽에 위치한 능동자갈마당은 크고 작은 자갈이 빽빽하게 깔려 있어 주변 기암괴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1994년 12월 조용하던 섬 전체가 들썩이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핵 폐기물 처분장으로 인근 굴업도를 검토 중이며 과학기술처는 같은 달 22일 부지 낙점에 따른 공식 발표를 한 것이다. 방사능 유출사고와 농산물 판로중단 등 생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덕적 주민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어났고, 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돼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11개월이 흐른 뒤 굴업도 두 곳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며 정부 계획은 완전 백지화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굴업도와 덕적 주민 간의 찬반을 둘러싼 감정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세상사의 어지러움과 번뇌가 오늘도 서해 물살에 떠밀려와 송림 우거진 모래밭에서 놀다 가는 덕적도도 여느 섬들처럼 주민들도 줄어들고, 찾는 이도 많지 않은 섬으로 외로움 속에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7-08 강승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석모도

석모도는 3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섬이다.행정안전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발표한 '2008 휴양하기 좋은 섬 베스트 30'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인천에서는 석모도 포함, 대이작도, 덕적도, 대청도 등 4개 섬이 베스트 30에 선정됐다.행안부와 관광공사는 "최근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고 바다여행 수요가 늘면서 천혜의 관광자원인 국내 섬 3천여 개 가운데 1%를 엄선해 '휴양섬 베스트 30'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강화군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을 때, 섬에 가까워질수록 '베스트 섬'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됐다. 선착장에서부터 줄곧 동행한 갈매기들과 정이 들만 하니 어느덧 석모도다. 7분이나 걸렸을까? 배에서 내려 석포리 선착장을 따라 오르니 목선을 한 채 올려놓은 듯한 음식점 간판이 눈에 띈다. 맞은편 석모도 농수산물 젓갈시장에선 상인들과 관광객들의 흥정이 어우러지면서 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거대한(?) 섬 강화도에 딸린 석모도는 '섬 속의 섬'이었다. '휴양섬 베스트 30' 선정 과정에서는 문화유적·경관 등 볼거리와 독특한 별미·향토음식 등 먹거리, 조개잡이·갯벌체험·하이킹 등 체험거리, 숙박 등 편의시설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다고 한다. 과연 석모도는 베스트 휴양섬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갯벌에 맨발로 걸어 들어가 조개를 잡는 등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민머루 해수욕장', 서해낙조가 일품인 국가어항 '어류정항'과 초보자의 낚시터로 유명한 '장구너머항', 가족 동반 산행지로서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받으며 산과 바다의 정취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해명산, 한국의 3대 관음 성지로 널리 알려진 '보문사' 등은 석모도의 대표적인 관광코스다.이중 보문사는 고(故) 육영수 여사가 범종을 기증할 정도로 즐겨 찾았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바람에 석모도로 향하는 최단 경로인 강화읍~양도~외포리 구간 도로가 다른 구간 도로보다 먼저 포장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삼산면 주민자치위원회 안세옥 위원장은 "1960년대 후반 보문사로 향하는 육영수 여사와 같은 배를 탄 적이 있는데 영접을 나온 군부대 관계자들에게 육 여사가 '나는 사적인 일로 왔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당부하는 소리를 들었다"며 "국모로서 추앙받을 만하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석모도에는 먹거리도 풍부해 구수하고 찰진 밥맛을 자랑하는 석모도 쌀을 비롯, 잡는 시기 또는 담근 시기에 따라 오젓, 육젓, 추젓, 동백, 하젓 등으로 이름은 물론 용도 또한 다양한 '밥도둑' 새우젓, 소주 안주로 일품인 밴댕이와 병어 등은 지역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밴댕이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어류정 인근 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어민들이 그물을 들어올리다 끊어야 할 정도로 많이 잡혔다고 한다. 석모도가 영화 '시월애'의 촬영지였다는 사실은 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대변하고 있다. 이른 새벽 해명산에 오르면 석모도가 얼마나 빼어난 풍광을 가진 섬인지 실감할 수 있다. 안개 위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듯한 착각 속에 아침 안갯속의 능선을 종주하다 보면 석모도 인근에 점점이 박혀있는 섬들은 물안갯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산이다. 그러나 이처럼 풍부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석모도의 전부는 아니다.이제 이 섬은 그 어느 섬보다 역동적인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하늘로 십수까지 치솟았다는 온천수는 석모도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온천수가 나오는 매음리 일대에서는 20여 가구가 온천수로 난방을 하고 있었으며 수온이 최고 70~80도에 달한다는 온천수를 이용해 계란을 삶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강화군은 해명해수온천 개발, 용궁온천랜드 개발 등 온천을 활용한 관광·휴양형 개발계획을 추진중이다.또 매음리 114의 10 일원 폐염전 79만4천㎡를 활용해 18홀 규모의 골프장 및 콘도미니엄과 골프장을 조성하는 '삼산 석모도 골프장 조성사업'도 2009년 준공을 목표로 본격화하고 있다. 복합다기능 어항으로 개발중인 어류정항 앞바다에서는 공사와 맞물려 일부 방파제가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류정항은 해양 관광 유통 기능을 갖추고 기상 악화시 어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긴급 대피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석모리 산 154의 1 일원 128㏊와 산 89 일원 54㏊에서는 각각 자연휴양림 조성사업과 수목원 조성사업이 추진중으로 지난 3월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이 완료된 상태다.이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주민들도 한껏 고무되는 듯했다."20년전 석모도가 화력발전소 건립 예정지로 떠올랐을 때 당시 화력발전소를 유치하지 않은 것을 통탄하는 주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 화력발전소를 유치했더라면 지역 발전이 훨씬 앞당겨졌으리라 생각하는 것이지요."안세옥 위원장의 말 속에서는 지역 발전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읽혀졌다.이처럼 주민들 사이에서 섬 개발에 따른 기대감이 높은 것은 그동안 석모도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역사·문화의 고장에 걸맞지 않게 낙후성을 면치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강화군은 2006년도 기준으로 재정자립도 13.5%, 지역내 1인당 총생산(GRDP) 1천11만6천원으로 지역낙후도 지수가 전국 170여개 지자체 가운데 하위권에 속한다. 이러한 강화군 내에서도 석모도가 중심인 삼산면 지역은 상대적으로 더욱 낙후된 실정이다.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석모대교 건설을 지역발전을 보다 앞당길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었다.내가면 외포리와 삼산면 석포리를 잇는 석모대교(삼산연륙교) 건설사업은 이미 수립된 상태로 오는 2015년까지 663억원이 투입돼 길이 2.22㎞, 폭 12 규모로 건설될 예정이다.그러나 주민들은 석모도를 찾는 관광객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통정체로 인한 불편이 가중되고 있고 특히 2012년께에는 온천개발, 휴양림 조성, 어항 개발 등 각종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관광 및 휴양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석모대교 건설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석모대교건설 추진위원회 김영태 위원장은 "석모도는 우리나라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섬으로, 석모도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섬에도 다리가 놓여졌는데 2015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많은 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며 "처음 석모대교 건설에 반대했던 주민들도 상당수 석모대교 건설을 반기고 있고 석모대교의 조기 건설은 이제 석모도의 최대 숙원사업으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변화의 길목에 서 있는 석모도. 어쩔수 없이 45.6㎢ 크기의 이 섬은 앞으로 모습을 달리하고 2천300여명 주민의 삶도 큰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섬 곳곳에서 발산되는 역동성이 섬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섬을 빠져나왔다.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6-24 김종호·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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