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다시찾은 섬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장봉도

"이리 와봐요. 그래도 세마리는 먹고 가야지." 성진농원으로 가는 길을 묻던 중 바지락을 까던 할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벌려 갓 긁어낸 조갯살을 건네준다. 섬마을의 인심이 비강(鼻腔)을 넘나드는 배릿한 바다내음 만큼이나 진하게 느껴진다.몇마디 나누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데 기어코 세번째 바지락을 먹게 만든다."섬이니까 맛볼 수 있는거유. 육지에서는 어디 이렇게 싱싱한 바지락 먹어볼 수 있겠어?" 노인의 넉넉한 입담이 바지락 맛보다 더 간간하다.줄지어 늘어서 있는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北島面)의 열도(列島) 가운데 신도, 시도, 모도 등 연도교로 연결된 섬들과 달리 장봉도는 아직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인근의 '형제섬'들과 손을 맞잡지 못한 섬. 이 때문에 삼목여객터미널을 떠난 배는 신도선착장에 뱃머리를 댄 후 방향을 틀어 다시 30여분간 바닷길을 갈라야 한다.장봉선착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인어상이었다. 번쩍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크기에 순수 한국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인어상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장봉도의 앞바다에는 '날가지'라 불리는 유명한 어장이 있었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날가지 어장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인어 한마리가 걸렸다. 뱃사람들은 그 인어를 측은히 여겨 놓아주었는데 그 때부터 날가지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만선을 이뤘다는 전설이다. 뱃사람들은 인어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믿고 매년 그 인어를 위해 용왕제를 지냈다고 한다. 인어상을 등지고 돌아서 몇걸음 걸으니 이번에는 '맑은 물, 깨끗한 공기, 건강한 흙'이란 글귀 아래 장봉도가 '친환경농업 실천마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섬=어업'이란 등식이 머리속에 각인돼 있던 터라 다소 의아했다. 섬을 한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이 표지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섬이 길고(長), 봉우리(峯)가 많다하여 장봉이라 이름붙여진 섬 장봉도(長峯島)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3대어장 중 하나로 꼽혔다.조기, 민어, 청어 등 많은 물고기가 잡혔고 조석간만의 차가 큰데다 유기물이 풍부해 갯벌에는 예부터 갑각류나 조개류, 갯지렁이 등 생물이 다량으로 서식했다.그러나 무엇보다 장봉도를 유명하게 한 것은 '새우'였다. 장봉도는 1880년대부터 새우어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장봉도 출신으로 한들해수욕장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김현영(71)씨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장봉2·4리 일대 건어장에는 말린 새우가 넘쳐났고 새우를 취급하는 움막이 해변가에 수십채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어획량이 줄어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당시 장봉도의 새우는 홍콩과 일본에까지 수출됐다고 한다.돈이 풍부하다보니 술집도 즐비했다는 게 김씨가 전하는 장봉도의 옛 풍경이다.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것일까. 20~30년 전의 일인데도 장봉도에서 당시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실제로 옹진군 북도면사무소 장봉파출소에 따르면 장봉도 주민들(6월2일 기준 363세대 882명)의 생업분포는 농업 70%, 어업 20%, 관광업 10%로, 농업의 비중이 어업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섬을 둘러싸고 80㏊의 김 양식장과 15㏊의 굴 양식장 그리고 패류, 게, 소라, 낙지 등을 잡는 마을어업구역이 포진해 있을 뿐 아니라 장봉김과 상합 등은 여전히 장봉도의 특산물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주된 삶의 방식은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친환경 농업'이 섬을 특징짓는 키워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옹진군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2003년부터 전략적으로 장봉도에 친환경농법을 도입했다.그 중 대표적인 친환경 농법이 비료나 농약을 전혀 치지 않는 우렁이 농법이다. 벼를 심은 뒤 우렁이를 논에 풀어놓아 잡초를 갉아먹게 함으로써 유기농 쌀을 생산하는 농법이다. 이 농법은 지난 2005년 농림부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인증을 받았다.장봉4리 김강현(50)씨의 논을 찾았을 때 논 곳곳에서는 불그스레한 우렁이 알이 포도알처럼 벼에 붙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렁이가 농사를 대신하고 있는 셈으로 조용한 밤 귀를 기울이면 우렁이가 논의 잡초를 갉아먹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장봉도의 모든 논(32.5ha)에는 이처럼 우렁이가 서식하고 있다.6년째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김씨는 "우렁이 농법이라고 해도 이따금 김을 매고 논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하는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며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생산량은 줄었지만 판매 가격이 높아 전반적으로 소득이 증대했다"고 말했다. 장봉도의 특산물로 떠오르고 있는 '곰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봉도의 친환경 농산물이다. 장봉출장소 인근 곰취 재배농가에서 만난 조영덕 농촌지도사는 농약을 전혀 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비닐하우스에서 바로 딴 곰취를 씻지도 않은 채 먹어보라며 권했다. 곰발바닥을 닮은 이 푸성귀의 쌉쌀한 맛은 저절로 삼겹살을 떠올리게 했다. 장봉도에서 곰취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 10월부터로 올해 6월 친환경인증을 받았다. 북도면의 열도 가운데 신도와 시도가 '연인', '풀하우스', '슬픈 연가' 등 TV드라마의 세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면 장봉도는 이처럼 '친환경'을 콘셉트로 섬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물론 장봉도에도 TV 드라마 세트장이 설치돼 있기는 하다. 차인표와 조재현이 출연한 '홍콩 익스프레스'세트장이다. 그러나 이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은 뜸한 듯 했다.장봉도는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간직한 섬이다. 농진청 지정 체험농장인 성진농원을 운영중인 홍순일(69)씨는 "병자호란 당시 조정은 장봉도를 강화도 다음 피란지로 정하고 당상관을 보내 별궁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장봉도에는 별궁을 지키던 당상관의 묘비가 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장봉도는 역사적 교훈의 현장인 셈이다. 실미도 사건 당시 부대원들이 장봉도 주민의 배를 타고 인천까지 건너왔다는 사실도 흥미를 자아낸다.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가운데 모든 것이 넉넉해 보이는 섬 장봉도.그러나 이 섬에도 옥에 티는 있었다. 바로 인천국제공항의 항공기 소음이다. 해변가 마을에서 조개를 까던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항공기는 수시로 굉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면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노부부는 "저 놈들(항공기)은 밤이고 낮이고 돌아다닌다"며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나서부터 욕을 배웠다"고 말했다.외지인에게 선뜻 바지락을 건네는 순박한 섬사람들이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조금씩 변하는 것은 아닌지….장봉선착장 바닷가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릴 때 귓가에는 파도소리와 항공기 소리가 뒤엉키고 있었다.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08-06-10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연평도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연평바다로 돈 실러가세.(중략) 연평바다에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잡아 들이자. 뱀자(배임자)네 아즈마이 정성적에 연평바다에 도장원 했네. 나갈적엔 깃발로 나가고 들어 올적엔 꽃발이 되었네.(후략)"조기 파시(波市)로 유명했던 섬 연평도(延坪島). 이제 '만선의 바다'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바다의 풍요를 만끽했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향수일까? 그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섬사람들은 지난 2003년 10월 '배치기 소리'라는 비문을 세웠다. 조기를 배에 퍼 실을때 불렀다는 뱃노래는 무척이나 구수하게 들린다. 섬 남쪽 끝, 절벽과 바로 맞닿은 비석은 그 높은 곳에서 황금어장을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하다.인천서 바닷길로 92㎞ 떨어진 서해 최북단 연평도는 조기를 빼놓고 거론할 수 없는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반영하듯 지금도 섬 곳곳에는 '조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왕조 16대 인조 14년 안목어장 일대에서 가시나무를 이용, 조기를 대량으로 잡아들인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을 제향하는 '충민사'가 대표적이다. 남부리엔 2001년 지어진 '조기박물관'이 자리잡아 1968년 동해와 황해 접적해역(接敵海域)에 어로한계선이 그어지기 전 화려했던 시절을 재조명하고 있다. 입구의 비석은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총 3천척 이상 선박이 조기의 대군(大群)을 쫓아 부동하여 일대해전과 같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지금 대·소연평도에서 조업중인 크고 작은 선박이 통틀어 60여척에 불과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섬 전체가 조기로 뒤덮이는 장관을 이뤄 풍어기에 열리는 이곳의 파시(생선시장)는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기도 했다. 연평도는 대중가요에도 등장하는데 대중가수 최숙자씨는 1959년 사라호 태풍때 희생된 조난 어부들을 배경으로 한 '눈물의 연평도'를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풍어의 상징이었던 연평도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명성을 차츰 잃게 된다. 어장 축소에 따른 어자원의 고갈이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과 어부들을 상대로 한 비싼 술집들이 수십여 곳에 달했고 어떤 이들은 돈을 쓰러 육지로 나가기까지 했지." 북한 해주가 고향으로 6·25때 피란온 유광삼(77)씨가 전하는 풍요로웠던 당시의 생활상은 이제 빛바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조기잡이에서 비롯된 '풍요의 시대'가 지나고 60년말 섬 사람들의 생계 방식은 굴, 해조류 등 채취형으로 바뀌었다. 그 가운데 해태(김) 양식은 도입된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0년전 경인일보가 연재한 기사에는 해태 양식이 자취를 감추게 된 배경이 잘 기록돼 있다.당시 보도에 따르면 동원광업(주)가 1983년 후 줄곧 연간 20만t의 티탄을 생산해 내던 소연평도 광산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1989년 광물을 실으러 왔던 선박이 심한 파도에 밀려 접안시설에 부딪혀 침몰한 것이다. 이때 선박에서 유출된 기름이 온 양식장을 뒤덮었고 다 자라지도 못한 김(해태)은 아예 쓸모가 없어졌다.이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연평도는 '꽃게 시대'를 열게 된다.조기가 주 수입원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초 연평어장의 어종이 조기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 식탁에서 비싼 몸값을 자랑하고 있는 꽃게를 비롯 민어, 장어, 삼치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그러나 워낙 조기가 유명세를 탔던 시기라 다른 것들은 빛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80년대 말 일본 등지에서 연평꽃게를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원산지에서 조차 외면당했던 '밥 도둑(?)'은 해외 수출이 부쩍 늘어나며 덩달아 국내에서도 전성기를 맞았다. 더욱이 어획 물량이 워낙 많았던 터라 '동네 개들이 돈, 즉 꽃게를 물고 다닐 정도였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부유한 낙도(落島) 마을은 이때까지만 해도 조기 및 꽃게를 제외하곤 외부에 그 속내를 공개하지 않다가 1999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해군간의 충돌로 뉴스의 초점이 됐다. 6월 15일 바로 '연평해전(延坪海戰)'이 일어났다. 동·서 해상의 실질적인 경계선을 놓고 수십년간을 지속해온 갈등의 '시한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날 북한 경비정 4척은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 20여척과 함께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 남쪽 2㎞ 해역까지 침범을 강행했다. 우리나라 해군은 곧장 고속정과 초계함 등 10여척을 투입했고, 오전 9시7분과 20분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충돌시켜 밀어내는 과정에서 교전으로 확대됐다.승리를 거둔 우리 군(軍)은 장병들의 무훈을 기리는 뜻에서 전장이 바라 보이는 당섬에 전승비를 건립했다. 꽃게를 두고 벌어진 남북간의 싸움은 그 뒤로 3년만에 동일 지역에서 유사 형태의 '서해교전(西海交戰)'을 야기하며 우리 역사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연평도는 북한 부포항과 불과 10㎞ 떨어져 군사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전체 7.28㎢ 면적의 80% 이상에 군 시설물이 들어섰고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섬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남쪽을 뺀 대부분이 군사 통제구역이라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한데 몰려 있다.아직까지 섬은 외지인의 때를 타지 않았다는 평이다. 사람의 손길이 덜 미친 것은 취약한 해상교통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여객선은 1일 1회 운항으로 2시30분이 걸리는 씨플레인호 및 주2회, 1회 왕복하는 골든진도호, 미래해운이 각각 배정돼 인천과 연평도를 잇고 있지만 짙은 안개가 시계(視界)를 가리거나 거센 파도가 치는 등 일기가 불순한 경우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짓는 가구는 극히 소수다. 황금어장을 둔 덕이다. 그러나 2000년 즈음 상황이 급반전됐다.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사이 주인을 잃은 해역에 제3자인 중국 어선이 등장한 것이다.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는 수백여척의 불법 선박들은 각종 자원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였다. 2002~2003년에는 절정을 이뤄 800여척의 중국 어선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씨를 말리는 '쌍끌이 어로작업'을 벌이고 있다. 서해에 조기가 오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꽃게가 대신하는듯 보였으나 이도 잠시였다. 요즘 바다로 나간 연평 어업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빈 그물을 끌어 올리고 있다. 40년 넘도록 배를 탄 박종문(72)씨는 "동료 중에는 목돈을 타서 부인이 기다리는 집에 쌀 두·서너말 안겨주고 색시집을 다니기도 했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꽃게가 안잡혀 생계가 걱정될 정도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그의 얼굴엔 좋은 시기를 보낸 아쉬움과 근심이 가득했다.이제나 저제나 꽃게가 돌아올까 까맣게 탄 어부의 마음은 이제 빚더미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어망정비, 선원고용 등 선박 한 척을 운용하는데 들어가는 매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은행권에 손을 빌린 것이다. 이런 불가피한 선택은 수년째 반복되면서 섬 사람들의 정신까지 피폐화시키고 있었다. 저 멀리 평안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팔도 각지에서 수천척의 어선이 조기떼를 쫓아 연평도 앞바다를 메우던 시절이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북녘땅 바로 앞 연평도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만선의 바다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사진/임순석기자·sseok@kyeongin.com

2008-05-27 강승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신도·시도·모도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갑판 위는 단체 관광객, 연인, 가족 단위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내 갑판 위에서는 새우깡 한봉지로 갈매기와 사람이 어우러졌다. 사람과 차량을 함께 태운 세종1호가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자 갈매기도 배와 사람을 따라잡으며 덩달아 섬으로 향한다.아이들은 새우깡을 정확히 낚아채는 갈매기가 마냥 신기한 듯 갑판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미처 새우깡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의 표정에선 아쉬움이 역력하다. 섬으로 가는 배는 평화로웠다.배가 섬에 도착하기까지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0여분 걸렸을까? 삼목여객터미널을 떠난 배는 어느새 신도선착장에 뱃머리를 대고 있었다.신도, 시도, 모도.옹진군 북도면(北島面)의 열도(列島) 중 연도교로 연결된 섬들이다. 북도면에는 신도와 시도, 모도, 장봉도가 마치 일본땅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중 올망졸망한 섬들이 서로 손을 맞잡듯 다리로 연결되면서 이제는 하나의 섬으로 변해버린 곳이 신도와 시도, 모도다. 그러나 섬의 명칭이 다르듯 이들 섬은 역사 또한 달리하고 있다.신도(信島)는 조선왕조 말엽인 1880년께부터 이곳에서 화염(火鹽)을 제조했다해서 '진염'으로 불렸다. 이어 1914년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순박함과 성실성을 섬이름에 반영, 믿을 신(信)자와 섬 도(島)자를 따서 신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시도(矢島)의 시(矢)는 활을 의미하는데 그 배경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엽 강화군 마리산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받던 군사들이 시도를 목표로 정해 활쏘기 연습을 한 것이 섬 이름의 유래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시도는 '살섬'으로도 불린다.모도(茅島)의 유래는 어찌보면 섬 고유의 특징과 가장 밀접해 있다. 조선왕조 말엽 1875년께 김포군 통진에 살던 차영선이란 사람이 고깃배를 몰고 와 모도 앞에서 조업을 했다. 그러나 어망을 가득 채운 것은 고기가 아닌 풀뿌리(띠)였고 조업을 하지 못한 그는 모도에 정착했다. 띠 모(茅)자가 섬이름에 들어간 것은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이들 3개 섬이 속해있는 북도면은 고려 현종 9년 강화군 제도면에 속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통합에 따라 부천군에 편입됐다. 이어 1995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도면은 '북쪽에 있는 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섬내에서 가장 큰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의 이전사(史)는 일면 흥미를 자아낸다. 당초 면사무소는 모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22년 신도로 이전했고 다시 1942년 북도면의 중앙지역이라 할 수 있는 시도로 옮겼다. 3개 섬이 사이좋게(?) 번갈아가면서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셈이다. 현재 면사무소는 시도에 둥지를 틀고 있다. 20년전만 해도 이들 섬은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1988년 경인일보가 연재한 섬·섬·섬 시리즈의 시도 편에서는 시도를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한적한 어촌'으로 소개하고 있다.당시 보도에 따르면 주민들이 자녀들 학교 문제 등으로 인천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외지 사람들이 섬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마을에는 식당과 여관을 겸업하는 집이 유일하게 한 곳 있었는데 어쩌다 외지에서 손님이라도 올 때면 대접하기가 마땅찮은 면사무소나 지서 등에서 식사준비를 부탁하게 된 것이 식당 간판을 달게 된 유래였다. "하루종일 있어도 지서 앞을 지나는 사람이 서너명일 때도 있다"는 당시 북도지서장의 말은 당시 이들 섬이 얼마나 한적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신도 선착장을 지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동산 사무실이었다. 공항 건설과 맞물려 2000년께부터 부동산 사무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고 한다. 이제는 거래도 끊기고 부동산 열기 또한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도로를 주행하는 동안 수시로 마주치는 부동산 사무실의 간판에서는 조용한 작은 섬조차 비켜가지 않는 개발 열풍의 단면이 엿보였다.무엇보다 신도·시도·모도는 연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섬 곳곳, 경치가 뛰어난 곳마다 TV 드라마 세트장이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섬의 콘셉트가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도에는 드라마 '연인'의 세트장이, 시도에는 드라마 '풀하우스'와 '슬픈연가'의 세트장이 각각 들어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세상과 단절됐던 조그만 섬이 TV라는 미디어 매체에 힘입어 육지 사람들에게 '낭만의 섬'으로 각인된 것이다.풀하우스 세트장 인근에서 만난 한 관광객은 "여자 친구와 추억거리를 만들고 싶어 섬을 찾았다"며 "드라마를 무척 재미있게 봤는데 실제로 촬영 현장을 찾으니 드라마의 여운을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이들 세트장은 민간이 운영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세트장이 입장료(5천원)를 받으면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풀하우스 세트장 관계자에 따르면 주말이면 300여명의 관광객이 세트장 인근 수기해변을 찾으며 이중 100여명은 입장료를 내고 세트장 내부를 관람한다고 한다.신도와 시도가 드라마 세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면 모도는 배미꾸미 해변의 조각공원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배미꾸미의 조각공원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조각에 관한 것'을 주제로 조각가 이일호씨의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볼거리는 이 뿐만이 아니다. 김중배 북도면 부면장은 "드라마때문에 섬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미 신도·시도·모도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해변 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간직한 아름다운 섬이었다"며 "특히 영종도에 공항이 들어서고부터는 구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인천국제공항의 야경이 일품으로 꼽히는 등 자연과 야경이 어우러진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를 반영하듯 이들 섬에는 꾸준히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져 지난해의 경우, 5만7천여명의 관광객과 1만9천여대의 차량이 섬을 다녀갔다.이들 섬이 관광지로 떠오르기까지에는 각 섬을 잇는 연도교와 섬을 일주할 수 있도록 조성된 도로 등 기본 인프라가 한 몫을 했다. 특히 2개의 연도교는 관공서 이용 등에서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2002년과 2005년 각각 준공한 시·모도 연도교, 신·시도 연도교는 해가 지면 가로등 불빛이 바다풍경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다른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풀하우스 세트장에서 슬픈연가 세트장으로 이어지는 산길 등 일부 구간은 아직 정비가 되지않은 상태로 한 여성 운전자가 차량 밑부분이 파손돼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3개 섬을 합쳐야 10㎢(신도 7.1㎢, 시도 2.5㎢, 모도 0.8㎢)를 겨우 넘는 섬. 그러나 이들 섬은 저마다 개성있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진/임순석기자·sseok@kyeongin.com

2008-05-13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무의도

'섬의 형태가 마치 옷깃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장군의 모습과 흡사하다'.무의도(舞衣島)의 지명 내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기억되지만아직껏 무슨 연유로 그런 사연을 지녔는진 확실치 않다.다만, 춤출 무(舞)와 옷 의(衣)자로 표기돼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20년 전 그 섬은 인천 연안부두에서 하루 한 차례 운항하는 배를 타고서 1시간 넘게 달려야 다다를 수 있었다.꼬박 1시간이 소요되는 뱃길은 그마저도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면 발이 묶여 버렸다.그만큼 외지 사람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낙후 또는 고립의 정도가 심각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섬 모습은 너무 변해버려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다.지난 14일 옛 기사를 들고 무의도로 향했다. 연안(沿岸) 선착장이 아닌 공항고속도로를 지나 용유도와 이어진 연륙교를 건넜다. 둑을 쌓아올려 만든 이 연륙교는 지난 2000년 이곳에 세워 놓았던 주민 차량이 불어난 물에 침수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생겨났다. 여객선을 잠시 기다리는 잠진도 선착장에선 무의도가 손에 다가올 만큼 너무도 가까웠다.잠시 후 도착한 거대 몸집의 '무룡1호'는 기다리던 인파와 차량까지 태웠다. 최대 정원 299명에 승용차 기준 40대의 수용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선박은 뱃머리를 돌려 5분쯤 물살을 가르는가 싶더니 이내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래했던 과거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편리한 교통수단 덕택에 매년 무의도 주민 3만~4만명이 섬과 육지를 다녀갔다.4개의 통과 9반으로 구성된 무의도는 올 4월 현재 369가구, 767명이 살고 있다. 행정구역은 1973년 옹진군에 속했다 16년 뒤인 1989년 현재의 인천 중구로 편입됐다.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9.43㎢의 대무의도와 1.22㎢ 소무의도 2곳뿐이며 실미도, 매랑도, 사렴도, 팔미도, 해녀도 등 5개 부속 도서는 무인도다.배에서 내린 큰무리는 말 그대로 '무리를 크게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을 일컬으며 무의동 북쪽에 위치한 9통을 뜻한다. 인근서 24시간 편의점을 운영 중인 신순일(57)씨는 22년째 같은 업종을 꾸려왔다. 세월의 흐름처럼 당시 7㎡ 구멍가게가 이처럼 현대식으로 바뀐 것이다. 도심에서 살다 1985년 섬에 정착한 신씨는 낮은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린 가옥이 전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포장도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섬을 통틀어 경운기 1~2대뿐이라 리어카가 주요 운송 수단이었단다. 1998년 아스팔트가 덮이기 시작했고 현재 3집당 자가용 1대꼴로 보유 차량이 120여대에 달한다.간조 때인 오전 11시, 갯벌 위로 여러척의 배가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하게 훼손된 목선도 가끔 눈에 띄었다. 이런 모습에서 현지 주민의 생계수단 변화가 엿보였다. 20년 전 기사는 '농업, 어업이 주종으로… 새로운 소득사업으로 손대고 있는 것이 김양식'이라고 소개했다. 김양식의 명맥은 10년을 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바로 영종도에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소멸 보상이 이뤄졌고 2000년께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최점호 중구 무의지소장에 따르면, 과거 어자원이 풍부한 탓에 근해 조업에 나섰던 선박들이 30여척 규모였으나 이젠 10분의 1로 줄었다. 대부분이 굴, 바지락, 낙지 등 맨손어업에 종사 중이며 농사는 자급자족에 모자라지 않게만 생산한다고 덧붙였다.관광산업의 도입이 가장 두드러진다. 섬이 하나의 테마로 꾸며졌을 정도다. '천국의 계단' '칼잡이 오수정' 등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TV 전파를 타며 전국에 알려진 하나개 유원지는 전국 20대 우수 해수욕장에 이름이 올라있다. 반원형태로 펼쳐진 은빛 백사장은 고운 모래 입자가 특징이다. 1984년 30대의 젊은 나이에 당시 이장일을 봤던 최종관(59)씨는 내년이면 환갑을 바라보지만 줄곧 해수욕장 번영회원으로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최씨가 기억하는 1990년대의 하나개는 식수조차 공급되지 않았고 간이 화장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네 청년들 한두 명이 물을 길어 손님을 받다 어느샌가 마을 구성원들이 참여하면서 상업·숙박시설이 자리잡았다.굽어진 길을 돌아가면 무의도보다 더 유명한 실미도(實尾島)가 있다. 바로 1천만 관객시대를 이끈 영화의 배경지다. 1968년 청와대를 노리고 국내에 침투했던 북한 특수부대 124군의 보복 차원에서 창설된, 북파부대원 684부대의 실제 훈련이 이뤄졌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이다. 하루 두 번 썰물 때 갯벌이 다리를 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지역별로 특성화 체험마을 조성이 한창이다. 남동쪽 10통, 개안마을엔 '까치놀섬마을'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로 세분화시켜 자연을 경험하는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갖췄다. 이기준(45) 대표는 "멀리 수평선 위로 황금빛 석양이 잠기는 장관을 감상하며 고향의 정을 듬뿍 담아가길 바란다"고 소개했다. 중구가 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는 포내어촌마을 관광지는 올 상반기 중에 착공을 앞두고 있다. 전통 생활문화에 도시민 휴양공간을 접목, 어업 외 소득증대와 경제 활성화 도모를 목적으로 한다.발걸음을 옮기던 중 40여명의 등산객과 마주쳤다. 이날 평일에도 불구하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찾아 경기도 구리에서 단체로 방문했단다. 이들이 향한 '호룡곡산(虎龍谷山)'은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해발 245로 꼭대기에 오르면 승봉도(昇鳳島), 자월도(紫月島), 소무의도(小舞衣島) 등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고령사회의 모습은 이곳에서 더욱 완연했다. 따라서 노인 인구가 주민 상당수를 차지하는 섬의 교육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었다. 단 한 곳뿐인 정식 교육기관 용유초교 무의분교는 5학급에 학생 7명뿐이다. 교사를 포함한 교직원은 총 4명으로 학생 수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제 때인 1937년 설립돼 1954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인가, 미래 꿈나무를 양성하다 개교 52주년을 맞아 분교장으로 다시 통합됐다. 낡은 건물은 이제 리모델링을 거쳤고 수업을 받는 책상마다 최신 컴퓨터가 보급됐다. 그러나 섬 한쪽에선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보상을 노린 개발붐에 천혜 조건을 가진 무의도는 곳곳에서 맨살을 드러낸 것이다. 공사장비가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내고 굴곡을 가진 임야는 무분별하게 파헤쳐졌다. 남쪽 끝자락의 샘꾸미 뒤로 수십여 채의 건물 신축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앙상한 뼈대를 지닌 가건물로 외형상 투기를 노린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채 한 달이 안 걸려 완성된다는 게 공사장 인부의 설명이다.조용한 섬마을이 투기장으로 전락한 것은 지난해 7월 인천시가 용유·무의 일대를 전면 수용방식의 개발 예정지로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미 무의도의 90% 이상이 외지인에게 넘어갔다. 흉흉해진 인심을 반영하듯 이날도 외제 승용차 등 고급 차량이 자주 목격됐다. 광명선착장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는 50여 가구 남짓 소무의도엔 그나마 아직 개발 열병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최종관씨는 "수용한다는 게 다 빼앗겠다는 거지. 70~80세 먹은 노인들이 뭍에 가서 뭘 하면서 살 수 있겠어"라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태어난 고향에서 누구 간섭도 받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라며 "자갈과 모래가 깔린 비포장 길을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다니던 그때가 좋았다"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사진/임순석기자·sswok@kyeongin.com

2008-04-22 강승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영흥·선재도 下

영흥도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여객선이었다. 때문에 영흥도에 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정성'을 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 피서철 연안부두에서 영흥도로 향하는 여객선은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풍기며 풍성함을 연출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피서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인천에서 자취를 하는 고등학생 아들에게 '엄마표' 밑반찬 꾸러미를 건네주고 배에 올라탄 어머니는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연안부두를 바라보며 방금 헤어진 자식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영흥대교, 선재대교의 개통으로 영흥도는 섬 아닌 섬이 됐다. 육지의 이곳 저곳을 넘나들 듯 섬과 육지를 자동차로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영흥도는 여전히 섬이다. 바다를 가로질러 가야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오히려 바다를 세번 지나야 한다. 인천에서 영흥도에 갈 경우, 우선 장장 11㎞에 달하는 시화방조제를 지나 선재대교를 건넌 뒤 마지막으로 영흥대교를 가로질러야 한다. 섬에 도달하는 수단이 여객선에서 자동차로 교체된 것은 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섬을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도시화의 여파로 섬의 모습이 많이 바뀌기는 했으나 영흥도엔 여전히 섬의 정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피서철에나 볼 수 있었던 관광객들이 이제는 평일에도 해변을 거닌다.영흥도를 찾은 날 섬의 한 들판에서는 주부들이 비닐봉투를 들고 냉이를 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천에서 왔다는 김모씨는 "배를 탈 필요없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시원한 공기도 마실 수 있어 즐겨 영흥도를 찾는다"고 말했다.역시 영흥대교와 선재대교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관광통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특히 다리에 진입하는 순간 선착장과 고깃배들이 어우러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영흥대교는 영흥도의 새로운 관광자원 시설물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한 터였다. 이 다리는 밤에도 일곱색깔 무지갯빛을 발산하고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매혹적인 모습을 연출한다.십리포 해변을 비롯, 100여년이 넘는 노송지대가 자리잡고 있는 장경리 해변, 농어가 많이 잡혔다는 농어바위, 영흥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국사봉 등은 영흥도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들. 국사봉은 조선 건국후 고려의 왕족들이 영흥도로 몸을 피해 이곳에서 나라를 생각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여승이 건립했다는 통일사와 수산물직판장과 영흥화력 에너지파크 등도 영흥도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역시 십리포 해변이다.총길이 1㎞, 폭 30의 이 해변은 왕모래와 작은 자갈로 이루어져 여느 해수욕장에서 느끼기 어려운 다소 특이한 해변의 정취를 전달하고 있었다. 밤에는 인천국제공항의 찬란한 조명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해준다고 한다. 십리포 해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소사나무 군락지.해변 후면에 형성돼 있는 이 군락지는 150여년 된 우리나라 유일의 소사나무 군락지로 이 곳의 소사나무는 1997년 인천시로부터 시보호수로 지정됐다.소사나무가 이곳에서 군락을 이뤄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은 나름 흥미롭다. 당초에는 주민들이 해풍을 막기 위해 소사나무를 심었는데 이제는 소중한 산림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십리포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 캠프가 설치돼 있던 곳으로 인천상륙작전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는 데 초석 역할을 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장병과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등이 전투에 참여했는 데 작전 기간 중 청년방위 대원들이 703 함대의 함포지원 아래 북한의 대대급 병력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한다. 영흥도에 세워져 있는 해군영흥도 전적비는 해군 영흥지구 전투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방위대원 14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십리포를 벗어난 뒤 효자문이 세워져 있다해서 들러본 한 전통가옥은 우리 전통문화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되다시피한 이 집은 영흥도에서 거의 유일한 전통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병든 어머니의 입에 넣자 어머니가 기적같이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이집에 세워진 효자문의 유래이다. 이 집에는 초대 재무장관을 지냈던 김도현씨의 누이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7~8년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리 건설로 영흥도와 하나가 된 선재도 또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해서 선재도(仙才島)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이 섬엔 500여년 된 팽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선재도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측도는 밀물때면 선재도와 분리되고 썰물때는 차량 및 도보로 통행이 가능한 이색적인 모습을 연출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이처럼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는 영흥·선재도지만 관광지로서 한층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만만찮다.우선 피서철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여름철 심할 경우엔 시화방조제에서부터 영흥도까지 20㎞ 구간이 꽉 막힐 정도라고 한다. 영흥면사무소에 따르면 연간 영흥도를 찾는 관광객은 120만여명으로 성수기 유동인구는 하루에 2만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영흥대교가 왕복 2차선에 불과한 터라 교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영흥대교 양편의 인도 가운데 한곳을 없애고 1개 차선을 추가로 확보, 가변차선으로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영흥대교를 건너는 사이, 다리를 질주하는 차량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영흥도를 찾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가 개통되면서부터인데 영흥도를 관광지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흥대교가 이제는 물리적 한계에 직면해 애물단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주민들은 또 위락시설이나 편의시설이 부족한 것도 영흥도가 관광지로 새롭게 도약하는데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꼽고 있다.김기순 영흥면 주민자치위원장은 "앞으로 영흥도의 먹거리는 관광산업이 돼야 할 터인데 영흥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회나 칼국수를 먹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고작"이라며 "위락시설 등의 부족으로 즐길거리가 없고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게 흠"이라고 말했다.이런 와중에서도 영흥도가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은 상당히 팽배한 듯 했다.이와 맞물려 현재 영흥도에서는 납골시설 설치 문제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모 업체가 영흥면 내리 수천㎡의 부지에 대규모 납골시설을 설치하려 하자 주민들이 "종합해양관광권 개발 예정지역에 납골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가 생기고, 사람들이 찾고, 산이 깎인 자리에 펜션이 들어서고, 이제는 관광지로서의 탈바꿈이 한창인 영흥도. 다음에 이 섬을 찾았을 때 섬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2008-04-08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영흥·선재도 上

예전에 인천 연안부두는 영흥도(靈興島·인천시 옹진군 영흥면)의관문이었다.연안부두에서 영흥도를 잇는 배편(왕복)은하루에 두 번 있었고,95t급의 여객선은1시간40분 동안물길을 가르며 32㎞ 떨어진 영흥도에 닿았다.영흥도에 뱃머리를 대기 전여객선은 잠시 선착장 앞을 맴돌았다.영흥도와 지척에 있는선재도(仙才島)의 주민들을 태우기 위해서다.여객선이 바다 위에 머물면선재도 주민들을 태운종선(從船·큰 배에 딸린 작은 배)이여객선 옆구리에 붙었고주민들은 마치 구조선을 만난 '보트 피플'처럼여객선으로 몸을 옮겼다.인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주기 위해 바리바리 싼 밑반찬 꾸러미를 손에 들고 배에 오른 아주머니, 생필품을 사기 위해 인천으로 향하는 아저씨, 모처럼 '대처'로 단체관광을 떠나는 주민들이 여객선의 주요 승객이었다. 본격적인 피서철에는 주민들과 관광객이 뒤엉켜 배안에선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이제 영흥·선재도 주민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영흥화력발전소 건설과 맞물려 선재도와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길이 550m, 너비 13.3m의 선재대교에 이어 길이 1천250, 너비 9.5의 영흥대교가 2000년과 2001년 잇따라 개통하면서 여객선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달라진 것은 여객선이 사라졌다는 점 뿐만이 아니다. 여객선은 어쩌면 영흥·선재도에 불어닥친 변화의 극히 작은 상징에 불과하다. 영흥대교와 선재대교의 개통으로 영흥·선재도가 섬 아닌 섬으로 바뀌면서 섬사람들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이다.고려말에 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가솔들을 거느리고 고생 끝에 섬에 들어와 목숨을 보전했다는 익령군 왕기의 군호인 '영'(靈)자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다시 흥했다는 '흥'(興)자를 붙여 '영흥'이라 불리는 섬.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품고 육지와 격리됐던 영흥도는 이제 영종·용유도와 더불어 서해 앞바다의 섬 중에서 가장 큰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는 섬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섬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역시 영흥화력발전소다. 수도권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영흥화력발전소는 2004년 12월에 1, 2호기가 준공된데 이어 현재는 3, 4호기가 추가로 착공, 건설중이다. 변화의 주역인 영흥대교와 선재대교 또한 당시 한국전력공사 영흥화력건설처가 영흥화력발전소 진입도로 공사의 일환으로 건설했다. 아울러 기본지원금 550억원을 포함해 1천억원 가까운 지역발전기금이 10여년동안 섬에 투입되면서 섬의 곳곳을 변화시켰다. 영흥·선재도가 육지와 연결된 이후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25.39㎢(영흥·선재도, 부속 섬을 포함한 영흥면 전체 면적)의 섬 전체가 급속도로 도시화됐다는 점이다. 이제 영흥도에는 각종 편의시설을 비롯, 유흥주점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승용차, 승합차, 화물차 등 자동차 수만도 1천652대에 달한다. 총 가구수 1천965가구에 맞먹는 규모다. 영흥도 토박이로 영흥면장을 지낸 뒤 2006년 정년 퇴임한 김기순 영흥면 주민자치위원장은 "다리가 놓아지기 전에는 막 출산을 하려는 임산부나 응급 환자가 생기면 소방본부에 헬기 지원 요청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주민들의 생계수단도 많이 바뀌었다.전에는 주민들이 주로 고기잡이나 김 양식, 농업에 종사했으나 지금은 총 1천965가구 가운데 농가는 406가구, 어가는 446가구로 전체 가구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43%만이 섬의 전통적 생업 수단을 이어가고 있다. 임승복 영흥면장은 "주택 건설 등으로 농지가 감소하면서 벼농사를 짓는 주민도 매년 줄어 2006년 1만4천가마였던 정부양곡매입(추곡수매)량이 2006년 1만1천가마로 3천가마 줄었다"고 말했다. 영흥도의 특산품이었던 육쪽마늘도 자가 소비용으로 재배하는 정도다. 대신 10여년 전부터 포도농사가 성행하면서 현재 포도밭이 50㏊에 이른다. 지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아 평균 3.3㎡ 당 1만원에 불과하던 땅값이 45만~50만원으로 뛰었고 진두선착장, 장경리해수욕장 일대는 200만~25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민이 소유하고 있는 비율은 20%선에 불과하다. 어선이 유어선으로 교체된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20여년전 영흥도에는 15t급 안강망 어선이 목포 앞바다에까지 내려가 해파리, 새우, 조기 등을 잡아왔다. 한번 고기잡이를 떠나면 보통 6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 진두선착장에서는 20년전의 어선보다 훨씬 작은 7t급 유어선들이 낚시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100여척에 달하는 이들 유어선은 이따금씩 고기잡이에 나서기도 하나 주꾸미나 민꽃게를 잡는 정도다.이같은 생업 수단의 변화는 다리 개통후 급속히 증가한 외지인의 유입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외지인들에게 자극받은 주민들이 서비스업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흥미로운 것은 모텔등 고급 숙박시설은 주로 외지인이 운영하고 민박집은 대부분 토박이들이 운영한다는 점이다. 영흥면사무소에 따르면 영흥면 관내에 모텔·여관은 27개, 민박집은 43개, 일반음식점은 155개에 달한다. 다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인천에 국한됐던 생활권도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있는 시흥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선재도에는 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일종의 대형 비디오방인 '멀티 시네마'가 성업중이다.어쨌거나 이곳 주민들은 다리가 개통되고 나서의 변화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듯 했다.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영흥화력발전소에서 홍보요원으로 근무중인 한 여직원은 "영흥화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섬이 많이 발전했고 토착민들도 발전소에 많이 취업해 일하고 있다"며 "특히 학자금 및 컴퓨터 등 교육기자재를 발전소로부터 지원받는 등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그런가하면 20여가구는 발전소로부터 기금을 지원받아 영흥농산영농조합을 꾸려 느타리버섯, 새송이버섯 등 각종 버섯을 한창 재배중이다.반면, 섬마을 고유의 넉넉했던 인심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한 주민은 "옛날에는 다른 집에 놀러가 '닭이나 한마리 잡아먹읍시다'라고 말하고 그 집에서 키우는 닭을 함께 잡아먹는 등 서로 마음만큼은 넉넉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토박이와 실향민, 외지인으로 확연히 구분돼 서로 선을 긋는 주민들의 성향도 영흥·선재도의 특징 중 하나. 친목모임이나 경조사에서 이러한 성향은 더욱 뚜렷해진다고 한다.이처럼 다리가 생기고 사람들이 뒤엉켜 살고 삶이 바뀌는 사이 섬 자체도 모습을 바꾸고 있다. 시화방조제 등 주변 개발사업의 영향으로 조수의 흐름이 바뀌고 유속이 빨라지면서 내7리의 해변은 갯벌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조용했던 섬이 북적거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주민도 더러 있다."휴가철에 관내 시찰을 할때면 간혹 논에서 일을 하다 '김 면장 저 다리 끊어버려!'라고 말하는 어르신도 있었지요. 평생 조용하게 살아온 분들한테는 급작스런 섬의 변화가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김기순 주민자치위원장의 말 속에서 육지로 변한 뒤 개발 열풍에 휩싸인 섬의 또다른 일면이 드러나고 있었다. 사진/임순석기자·sswok@kyeongin.com

2008-04-01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용유도

20년 전인 1988년 인천시 중구 용유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그해 11월14일 용유도와 영종도를 잇는 연륙도로가 준공된 것이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이 연륙도로의 준공으로 인해 용유·영종도의 주민들은 같은 생활권에 속하게 됐다. 1984년 10월 착공, 바다 한가운데를 막아 4년만에 완공된 이 도로는 길이 4.3㎞, 높이 4, 노폭 7 규모로, 당시 50억5천8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하부에는 사석을 쌓아 조류의 흐름을 막고 상단에는 50㎝의 방파벽을 설치, 파도나 해일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등 심혈을 기울인 해상도로였다.같은해 경인일보에 연재된 '섬·섬·섬'시리즈 용유도 편에서는 이 연륙도로가 용유도 및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잘 보여준다.당시 보도에 따르면 주민들은 준공식에서 "용유도가 생긴 이래 최대의 경사일 뿐 아니라 지금부터는 육지 주민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은 주거환경속에서 풍요로운 미래를 기약하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인천에서 사업을 하는 김영강(당시 42세)씨가 "가족들과 함께 연륙도로를 넘어 고향을 찾은 일이 꿈만 같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모세의 기적에 버금가는 느낌을 받았을 당시 섬사람들이 정서가 엿보인다.그러나 이 연륙도로의 수명은 10여년에 불과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공사와 맞물려 1999년 2월23일 폐쇄된 것이다. 20여년이 지난 3월18일 오전, 다시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양편에 펼쳐진 바다는 매립돼 멀리에서 비행기가 이착륙을 하고 있었다. 연륙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영종~용유간 연륙도로'라고 새겨진 표지석만이 연륙도로의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먼지를 제거하고 나서야 글씨를 알아볼 수 있는 이 표지석은 용유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었던 당시 시멘트 10만 포대, 철근 215t, 10.5t 덤프트럭 4만여대분인 30만㎡의 돌이 투입돼 도내 단일공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연륙도로도 바다가 아예 육지로 변하는 천지개벽 앞에서는 역사의 한조각 추억에 불과했다. 흥미로운 것은 연륙도로 건설후 연륙도로를 따라 송전탑을 세워 전기를 끌어오면서 주민들이 공사비의 일부를 부담했는데 지금까지도 부담금을 내고 있다는 점. 물론 10원, 20원의 작은 금액이지만 주민들은 고지서에 찍힌 부담금 내역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낄 터이다. 4대째 영종도에서 살고 있다는 구충회 덕교7통장은 "연륙도로가 준공될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용유도가 이렇게 바뀔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며 "연륙도로가 없어진지 10여년이 되는데 연륙도로로 인해 세워진 전기시설 부담금을 아직도 낸다니 한편으론 웃음이 나온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로 인해 영종도와 함께 '섬아닌 섬'으로 변한 용유도.바다에서 보면 용이 노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유(龍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섬은 예전부터 해수욕장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다.해안 곳곳에 자연적으로 생긴 모래사장은 여름철 해수욕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을왕리 해수욕장은 인근 해수욕장중에서도 명소로 꼽힌다. 인천에서 가까운 지리적 여건에다 군데군데 솟아난 바위들이 주위의 경관과 어울려 해수욕장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왕산해수욕장, 선녀바위 해변, 용유해변, 마시안 해변 등도 멋진 풍광을 자랑해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다. 행정구역은 리가 동으로 바뀐 것 외에 공항 건설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며 을왕동, 남북동, 덕교동 등 3개 동에 1천800여세대 3천46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제 영종도는 또한번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다.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관광지로의 개발이다.을왕리해수욕장에는 최적의 비즈니스 환경과 고품격 휴양시설을 자랑하며 올해부터 회원 모집에 들어간 골든스카이 인터내셔널 리조트가 점차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올해 9월 준공될 예정인 골든스카이 리조트는 총 사업비 1천여억원이 투입돼 대지면적 1만4천478㎡, 연면적 3만2천980㎡에 지하 6층, 지상 9층 규모로 건설되며 본관동과 테라스 시설을 넓게 갖춘 테라스 콘도동, 대형(4~5인용) 스파시설을 갖춘 스파텔 콘도(본관동) 등의 시설이 들어선다. 주변에도 예전에 볼 수 없던 호텔 등이 들어서 해수욕장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 상태. 특히 지난해 인천시와 독일 캠핀스키(Kampinski) 그룹이 용유·무의도를 대규모 관광단지로 개발하기 위한 기본협약을 맺으면서부터는 조용하던 섬이 부쩍 들썩거리고 있다. 관광단지 개발에 따른 기대감이 섬 전체에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외지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떴다방과 전문 투기꾼들이 활개를 치고, 보상을 노린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등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이같은 개발열풍은 을왕동 일대를 중심으로 논위에 또는 포도밭 옆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는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섬마을 학교(인천용유초등·중학교)에 방음벽이 설치된 것도 서해 앞바다 섬 가운데 용유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지금 용유도에선 24.575㎢의 섬 전체가 공사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최근에는 캠핀스키 국내 법인의 공동대표가 횡령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등 용유·무의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인천시와 주민들간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국제적인 휴양지로 탈바꿈하기 위해 갖가지 진통을 겪고 있는 용유도엔 개발에 따른 기대감과 실망, 섬 고유의 정서와 섬마을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 여기에서 파생되는 섬의 정체성 혼란에 주민들의 애환까지 한꺼번에 녹아있었다. 이처럼 개발열풍이 한창인 용유도에서 옛 섬의 모습을 찾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20여년 전만해도 용유도 해수욕장 인근에는 땅콩밭이 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민들은 벼를 심기가 마땅찮은 곳에 땅콩을 심었고 가을이면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까지 나서 땅콩을 수확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이제 섬에서 거의 유일한 땅콩밭으로 알려진 왕산동 김숙자(72·여)씨의 1천600여㎡ 땅콩밭을 찾았을 때 김씨는 "이제 땅콩을 심을 데가 없어 땅콩농사를 접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논이었던 곳, 밭이었던 곳에 온통 건물이 들어서는 용유도의 개발열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17세 때부터 용유도에서 살아왔다는 김씨는 관광단지 개발로 토지가 수용되면 보상을 받고 강화로 이사를 할 계획이다. 공기가 좋다는 게 남은 여생의 보금자리로 강화를 택한 이유. 평생 맑은 공기를 맡으면서 살아온 섬사람이 맑은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려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사진/임순석기자·sswok@kyeongin.com

2008-03-18 임성훈

[창간 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프롤로그

"섬은 물위로 솟아오른 육지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보다 더 큰 땅덩어리와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단절된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동시에 섬마다 저마다의 특성과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독자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1988년 7월7일 경인일보가 장기기획시리즈 '섬·섬·섬'을 시작할 때의 프롤로그 서두다.경인일보는 당시 인천과 경기 앞바다의 섬들을 훑으며 저마다 다른 섬들의 특성과 가치, 개성을 지면에 담아냈다.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강산이 두번 바뀌는 동안 섬들도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섬은 매립으로 인해 이제 흔적만을 남겨놓고 있고, 어떤 섬은 연륙교가 연결되면서 배를 탈 필요 없이 자동차로 갈수 있는 사실상의 육지로 변했다.쾌속선이 취항하면서 뱃길이 짧아지기도 했다. 관광지 조성계획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섬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섬에서는 환경파괴라는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도 했다. 꽃다운 젊음을 앗아간 서해교전으로 비극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그런가 하면 핵폐기장 등 정부 정책과 맞물려 주민간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아직까지 상흔이 남아있는 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섬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섬이 싫어 육지로 떠난 이들이 IMF구제금융사태로 먹고 살기가 어려워 되돌아올 때에도 섬은 아무말 없이 그들을 보듬었다.그리고 여전히 안보의 요충지로, 또는 어업의 전진기지로,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섬으로 저마다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있다.경인일보는 '섬·섬·섬'시리즈 20주년을 맞아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향해 다시한번 돛을 올린다. 서해안을 해안선으로 갖고 있는 인천에는 옹진군 관내 100개, 강화군 관내 27개, 중구 관내 14개 등 141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에 떠있다. 이중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만도 38개(옹진군 25개, 강화군 9개, 중구 4개)에 달한다.'바다위의 인천'인 섬을 찾아 섬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그 섬의 가치와 특성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2008-03-04 임성훈

[창간48주년기획 20년만에 다시찾은 섬]영종도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영종도는 서해상에서 그리 주목받는 섬이 아니었다. 영종도는 1988년 7월7일부터 경인일보에 연재된 '섬·섬·섬'시리즈의 첫회를 장식한 섬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눈여겨 볼만한 점이 별로 없었던 이 섬은 하나의 사건으로 갑자기 유명해진 적이 있다. 이른바 '전경환 사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그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에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새마을연수원이 제5공화국 비리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세인의 관심이 영종도에 쏠린 것이다.그러나 이후 영종도는 다시 평범한 섬으로 돌아왔다. 새마을 연수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재)지도자육성재단이 설립한 인천연수원이 들어서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영종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한 곳이 되리라는 것을 예견한 이는 없었다. 20년전 당시 영종도의 주민은 2천7가구에 8천49명에 불과했고 섬과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하루 12번을 인천 월미도와 영종도를 왕복하는 카페리선이 전부였다. 당시 영종도의 총 면적은 46㎢로, 산을 끼고 들판이 펼쳐진 모습은 여느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이었으며 배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마땅히 찾아갈만한 곳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전천후 최첨단 에어포트인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의 관문으로 자리매김한 섬.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영종도의 대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어찌보면 영종도는 공항이 들어설 '운명'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송나라 서근이라는 대신이 영종도 경원정에 들렀을 때 푸른 하늘에 제비들이 떼지어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제비가 많은 섬이라 하여 자연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인천국제공항이 하늘에서 '제비가 떼지어 날던' 영종도와 '용이 놀던'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바다를 매립해 들어섰다는 점은 흥미를 자아낸다. 이제는 제비 대신 비행기가 영종도의 하늘을 '접수'한 셈이다. 인천국제공항은 정부가 1990년 3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개펄 등 약 15㎢를 매립, 약 50㎢ 규모의 수도권 새국제공항을 건설하기로 확정한지 11년 만인 2001년 3월29일 전천후 해상공항으로서 24시간동안 항공기의 이착륙은 물론 미래형 초음속·초대형 항공기가 운항되는 최첨단 공항으로 탄생했다. 최종단계(4단계) 사업이 마무리되는 2020년께에는 연 53만회 운항으로 1억명의 승객이 이용하게 된다. 이처럼 공항이라는 첨단 시설을 품으면서 급속히 탈바꿈한 섬을 둘러보는 것은 한편으로는 경이로운 일이었다.지난달 29일 영종도가 '섬·섬·섬'시리즈를 통해 경인일보 지면에 모습을 드러낸 지 20년만에 영종도를 찾을 때는 영종대교를 이용했다. 다리와 신공항고속도로의 건설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종대교기념관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더니 이내 창 밖으로는 갯벌과 바다가 펼쳐졌다.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영종도는 이 다리 하나 만으로도 이미 섬이 아니었다.영종대교를 지나 공항북로를 따라가다 보니 공항건설로 겨우 흔적만을 유지하게 된 '삼목도'(三木島)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면적 4.74㎢로, 영종도와 연륙도로로 연결된 섬이었으나 인천국제공항 건설로 인해 육지화되면서 비행기 이착륙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에 대비, 항공 장애구릉 높이인 52m까지 절토작업이 벌어진 '사라진' 섬이다. 삼목도 인근에는 열병합발전소가 자리를 잡아 달라진 섬의 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있었던 신불도도 마찬가지로 야산 약 95만8천450㎡(29만평)에 스카이72 골프장이 조성되면서 섬으로서의 모습을 감추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는 섬의 구석구석이 한눈에 들어오는 확트인 경관이 인상적이었다.그러나 공항을 제외하고 영종도에서 접할 수 있는 '신세계'는 역시 공항신도시였다. 오피스텔과 아파트, 대형 할인마트, 고속전철역(운서역) 등이 어우러진 공항신도시는 이 곳이 과연 바다였나 하는 경이로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운남·운서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향하는 구도로 곳곳에서는 슬래트 지붕의 옛 주택가와 비닐하우스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옛 섬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도시로 치면 구도심에 속했던 운남지구 등은 경제자유구역청과 관광호텔 등이 들어선 가운데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맞물려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이곳에서 만난 주민 김모(44)씨는 "예전에는 3층 이상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이제 영종도의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구읍 배터도 그나마 영종도의 본래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갈매기들이 떼지어 날아다니는 가운데 인근 어시장에서는 카페리호를 이용해 섬을 방문한 관광객들과 상인들간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영종도 땅 1천884만㎡를 신도시로 만드는 영종하늘도시 개발사업이 추진중으로 사업이 본격화하면 어시장이 철거되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어시장에서 해산물을 팔았다는 박모(52·여)씨는 "평생을 여기에서 벌어 먹고 살았는데 보상이 생각보다 적게 나와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변화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 듯 했다.영종도에서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은 수령 1천300년이 넘은 용궁사(龍宮寺)의 느티나무가 아닐 듯 싶다. 둘레가 5~6는 될 듯한 이 느티나무는 신라 문무왕 때에 원효대사가 백운사(白雲寺)란 이름으로 세운 유서깊은 절 용궁사와 함께 영종도를 지켜왔다. 더이상 급변하는 세월을 감당하기 버거운 탓인지 이제는 쇠약해져 생기를 잃어가는 느티나무를 뒤로 하고 또하나의 '섬 아닌 섬' 용유도로 향했다.

2008-03-04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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