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기생놀음에 날 새는줄 모르던 작사판

# 파시철이면 술집 100개 작부만 500명파시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집 이상이 생겼다. 한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500명이었다. 봄, 조기 파시철이 돌아오면 연평도에 고기·배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 상점과 색주가들이었다. 점포를 세내고 가건물을 짓고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색주가에서는 술을 비축하고 안주를 장만하고 작부들을 구해오고 한철 장사 준비로 들썩였다. 장사꾼은 흑산도 위도 파시를 거쳐 오는 이들도 있었고 한몫 잡아볼 심산으로 인천 등지에서 처음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 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다. 해변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어부들을 쫓는 철새' 혹은 '물새'라 불린 작부들은 연평도에 들어오면 사진과 증명서를 제출하고 면사무소에 등록을 해야 했다. 주점도 영업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무허가 주점이나 미등록 작부도 많았다. 400명의 작부가 등록을 하면 미등록된 작부가 200여명은 됐다.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목포옥·해주옥·군산옥·비금옥·위도집·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다. 해변 식당, 신선 요릿집 등 식당 간판을 단 집들도 이름만 식당이지 다들 색시장사를 했다. # 일제때는 연평도에 일본 기생에 카페까지일제때는 일본 유곽도 있었고 일본 기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조선인 업소는 60여개, 작부가 150여명이었다. 당시 연평도의 작부수는 해주시내보다 3~4배가 많았다. 1936년, 연평 파시에 신고된 요리점은 300개, 음식점이 53호, 카페도 1호가 있었으며 이발관 9개, 목욕탕 3개, 여인숙 5개, 대서소가 2개였다. 등록된 작부들이 95명, 예기는 5명이었다. 그때도 등록되지 않은 작부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파시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댔다. 쌀밥은 못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다. 파시때 연평도에서 유명한 술은 '박문주'라는 청주였다. 연평도 사람들이 용수박아 뜬 쌀 술이었다. 술의 빛깔이 꽃처럼 빨갛고 입에 척척 들러붙었다. 색주가에서 박문주는 됫술로 팔았다. 주민들은 쌀 한 말로 막걸리를 만들어서 팔면 쌀 한가마니 값을 벌었다.조기배가 정박하면 나이가 어린 화장이나 늙은 영자는 배를 지키고 뱃동사 6~7명이 술집으로 몰려갔다. 뱃동사들 틈에 색시들 2~3명이 앉아 술을 쳤다. 남자들 숫자에 비해 여자가 적으니 맘에 드는 색시를 차지하기 위한 주먹다짐도 흔했다. 색시들 중에는 장구 잘치고 창을 잘 하는 이들도 있었다. 고급술이라야 정종이나 박문주 정도였고 대부분은 막걸리나 소주였다. 안주는 생선탕이나 구이, 삶은 돼지고기 등이 상에 올랐다. # 거미줄 친 맥주병 섞어 바가지 씌우던 작사판고단한 뱃일에 지친 뱃동사들은 색주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몇 잔 못마시고 취해버렸다. 그러다 그대로 방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 다시 마시기도 했다. 뱃동사들은 돌아가며 쓰러졌다 일어나고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던 뱃동사들도 막판에는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그쯤 되면 거의 모든 뱃동사들이 취해서 쓰러져 그 자리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배임자가 술값을 계산하려고 색주가에 들르면 맥주병이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뱃동사들이 잠든 사이에 빈 맥주병을 가져다 두고 바가지를 씌운 것이다. 그중에는 거미줄이 처진 맥주병도 더러 있었다. 술집 주인은 밤새 거미줄이 처진 것이라고 우겼다. 그러면 선주도 별 수 없었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았다. 그것이 작사판이었다. 매번 선주가 술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선원들 자신이 돈을 내고 먹었다. 술 먹고 술값을 못내면 주인에게 덜미가 잡혀 갇히기도 했다. 그때는 선주가 와서 빼내주었다. 힘든 뱃일로 어렵게 번 돈을 술집에서 쉽게 탕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에는 한 푼도 가져다주지 못한 방탕한 어부의 아내들은 혼자 힘으로 아이들 기르며 생고생을 했다."밤새도록 술들 처먹고 돈 떨어뜨리고, 개가 돈다발을 물고 다니고 그랬는데 뭐." 봄철 파시때 '술집 누나들이 오면' 동네 아이들의 마음도 덩달아 설렜다. 어린 마음에도 예쁜 누나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면서 누나들의 담배 심부름도 해주곤 했다. 어떤 누나들은 개차반처럼 구는 손님들이 있으면 병을 깨고 덤벼들기도 했다. "파송을 치고 누나들이 떠나면 어린 마음도 쓸쓸해졌다." 조금때를 제외하면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큰 대목이었다. 그래서 연평 파시때면 "기생들이 갈바람 불라고 굿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보건소장은 1주일에 한 번씩 색주가를 돌면서 작부들의 성병 검사를 했다. 6·25 이후에는 연평도에 미군부대도 주둔해 있었다. 미군들도 색주가에 내려와 술을 마시고 가곤 했다. 화사하게 치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색시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밤낮 없이 술을 마시고 험한 사내들의 비위를 맞추고 몸까지 팔아야 했으니 파시가 끝날 때쯤이면 몸과 마음이 온통 만신창이가 됐다. 게다가 작부들 중에는 색주가의 포주에게 번 돈을 뜯기고 노예처럼 생활해야 하는 일도 흔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파송을 치면 미련없이 섬을 떠났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5-05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연평도 조기의 신, 임경업장군과 풍어제

#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조는 임경업 장군이 아니다!해주만 연안은 한강과 임진강·예성강 세 강물이 황해로 합류되는 지역이다. 이들 강에서 흘러온 토사가 형성한 얕은 모래갯벌과 풍부한 부유 물질은 조기떼에게 최적의 산란장을 제공했다. 연평도·소연평도·미력리도·갈리도·장재도·초마도 등 연평열도는 해주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남에서 올라온 조기떼는 모두 연평열도를 거쳐야 해주만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연평바다 조기는 이동 중 살이 올라 칠산바다의 조기보다 크고 기름졌다. 연평도 부근에 황금의 조기 어장이 형성된 것은 이런 지리적 요인때문이다.연평도에서 조기잡이는 안목바다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목바다의 당섬과 모니도 사이에는 자연둑인 '줄등'이 있다. 썰물이면 두 섬은 줄등으로 연결된다. 물살이 센 줄등에 주목망(柱木網)을 설치했다. 나무말뚝을 박아 그물을 걸고 조수에 밀려오는 조기떼를 잡는 것이 주목망이다. 옛날부터 안목어장에서 잡힌 조기는 크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길이가 보통 40~50㎝가 넘었다. 안목어장의 조기는 궁에 진상품으로 올라갔다. 안목뿐만 아니라 구지도 부근에도 썰물이면 줄등이 나타났다. 구지도 줄등에도 말뚝을 박아 그물을 쳤다. 봄 한철에만 7~8동의 조기를 잡았다. 그물에는 조기뿐만 아니라 홍어·도미·농어·복어 등이 대량으로 걸려들었다.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썰물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장군은 황해바다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는 신당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존재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전설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신앙 또한 그렇다. 임경업 장군이 어떻게 임 장군 신이 됐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부질없다. 신앙은 논증을 필요로 하지않기 때문이다.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다.# 풍어제연평면사무소 뒷동산, 임경업 장군 사당. 임 장군 신을 모시던 당집은 새로 단장된 뒤 더이상 당이 아니다. 어부들과 황해바다 섬사람들의 신, 임 장군을 모신 신전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 신전은 조선의 충신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 됐다. 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장군도는 간 곳이 없고 사당안에는 관복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래도 사당은 여전히 수많은 만신들의 성지다. 사당 입구 당산나무 가지에는 오색 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과거 연평도의 풍어제는 두 종류가 있었다. 연평도 주민 모두의 안녕을 비는 큰 고사(대동굿)는 주민들이 추렴하여 모셨고 뱃고사는 선주 개인들이 모셨다. 뱃고사는 개인굿이지만 큰 고사에 버금가는 규모로 행해졌다. 연평도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해 임 장군 당에서 큰 고사를 지냈다. 마을굿이지만 그래도 굿의 중심은 배를 부리는 선주들이었다. 고사가 시작되면 조업 나갈 배들은 당 앞에다 깃대를 꽂았다. 제일 먼저 깃대를 꽂는 선주가 가장 많은 조기를 잡는 '장원'을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깃대를 꽂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큰 고사는 3일씩 이어졌다. 제물은 쌀과 소·돼지고기, 떡시루 등이 올려졌다. 출어 전에 선주들은 각자 자신의 배에서도 고사를 지냈다. 뱃고사는 배임자들이 개별적으로 모셨다. 선주들이 자기 배의 깃발을 들고 당으로 가서 돼지고기와 떡시루·과일 등을 올렸다. 이것이 배 연신굿(영신굿)이다. 배 연신굿은 임 장군 뿐만 아니라 용신, 배 선왕인 물애기씨, 여러 지역의 대감 신들을 청하여 모시는 굿이었다. 굿은 선주 부인이 날짜를 받아 무당에게 요청했다. 출어를 앞둔 선원들은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굿을 하기 이틀 전부터는 선원들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서 잠을 자며 바닷물에 목욕재계를 했다.배 연신굿을 준비하며 선주는 배 안에다 만장기(삼색기)와 오색기 등 온갖 깃발을 달았다. 깃발 중 단연 으뜸은 임경업 장군기였다. 광목에다 임 장군을 그려 넣은 깃발을 배의 제일 높은 깃대에 매달았고 그 밑에는 '장대바리'라는 긴 무명천을 늘어뜨렸다. 굿은 뱃사람들이 먼저 배안의 부정을 푼 뒤에야 무당이 배에 올라가 주관했다. 선원 중 원로인 영자가 배의 이물부터 고물까지 사방으로 다니며 부정한 것을 몰아내는 의식을 행했다. 영자는 큰 바가지에 숯을 담고 솔가지로 찍어 뿌리면서 주문을 외웠다."인 부정에 누린 부정, 비린 부정, 피 부정에 상문 부정, 누추한 부정이야." 무당은 배 안에서 여러 신들을 청하는 신청울림을 한 뒤 임 장군 당으로 당산맞이 굿을 하기 위해 이동했다. 임 장군 당으로 가는 행렬은 장군기를 든 사공(선장)이 가장 선두에 서고 무당과 선주, 제물을 진 사람, 선주부인, 뱃동사들의 순으로 뒤따랐다. 당산에 이르면 제물과 향을 바치고 당산맞이 굿을 시작했다. 굿은 부정풀이와 초감흥, 영정물림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의 섬들은 기독교의 세가 강했다. 그래서 어업을 하는 사람들과 교인들간에 마찰도 잦았다. 어떤 때는 기독교인들이 굿을 못하게 방해를 놓기도 했다. 기독교를 믿더라도 배를 부리는 선주는 굿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만큼 토속 신앙이 뿌리 깊었다. 그래서 기독교인 선주들 중 일부는 다른 교인들의 눈을 피해 인천 문학동 등지로 나가 굿을 하고 오는 일도 있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4-28 정진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7]인심좋던 평양사람, 쫌팽이 서울사람

# 파송치고 심 댔다연평 어장에서 여름이 시작되면 조기잡이는 파송 치고 선주와 선원들은 심을 댔다. 한철 어로가 끝나는 것이 '파송'이고 임금을 정산하는 것이 '심 대기'다. 조기잡이 배 선원들의 임금은 월급제가 아니라 '짓 나누기'였다. 이익을 분배하는 것이 짓 나누기다. 연평도의 풍선(風船) 안강망 배는 3 대 7제, 기계배는 4 대 6제였다. 안강망 배는 선주가 매출 이익의 7짓(7할)을 가져가고 나머지 3짓(3할)을 선원들이 나눠 가졌다. 어구를 제외하고 선상 생활에 소요되는 식량을 비롯한 여러 물품을 '식구미' 혹은 '식고미'라 했다. 어장이 끝나 파송을 치고 입항을 하면 배임자(선주)는 정산을 보고 총 어획고에서 '식구미'를 제한 다음 선원 몫으로 3짓을 떼어 주었다. 그 3짓에서 선원들은 각자의 몫을 분배받았다. 선원들 중 사공은 뱃동사들보다 두 배 정도 몫이 많았다. 선원들이 배에 타기 전 선주는 선원들에게 '용'을 주었다. 선용, 선도지라고도 하는 일종의 선불금이다. '용'은 보통 쌀 세 가마니 정도. 선원들 몫의 3짓을 나눌 때 선원들은 각자가 쓴 용은 제하고 분배받았다. 1959년 봄 파송 때 연평도의 어떤 어부는 5만원까지 벌기도 했다. 쌀 한 가마가 3천800원 할 때였으니 아주 큰 돈을 손에 쥔 것이다. #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하지 황해도 도지사 안 한다"상고선에 조기를 팔지 않은 어선들은 조기를 가득 싣고 연평도 포구로 입항했다. 조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업조합에서 사이렌을 울렸다. 만선을 한 배들은 흰 광목으로 선체를 두르고 북을 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어선들은 모두 쇠와 징, 북 등을 갖추고 다녔다. 안개 속에서 신호용으로 쓰기도 하고 뱃고사를 지내거나 귀항할 때 풍물을 울리는 데도 사용했다. 대낮부터 색주가에서 술을 푸던 객주나 여관에서 노심초사하던 선주들도 사이렌 소리를 듣고 서둘러 포구로 달려 나왔다. 배에서 조기를 내리는 일은 부두 노조원들의 몫이었다. 어업조합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면 서울 마포의 경강상인들이나 평양, 개성, 인천의 객주들은 중매인을 시켜서 조기를 낙찰받았다. 조기를 살 때 가장 약삭빠르게 구는 사람들은 서울의 객주들이었다. 평양 사람들은 대체로 값을 후하게 쳐 주었다. "평양 사람들이 크게 놀았지 서울 사람들은 좀팽이 같았어." 서울의 객주들은 무조건 싸게만 사려고 들었지만 평양의 객주들은 밑지지 않을 성만 싶으면 조기를 구입했다. 평양 객주들은 대인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싸게 사기 위해 너무 약삭빠르게 굴던 서울 객주 중에는 경매가 끝날 때까지 조기를 전혀 낙찰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상고선도 마찬가지였다. 평양 사람이 선주인 상고선이 와야 값을 후하게 받았다. 황해도에 본부를 둔 어업조합에 연평출장소가 생긴 것은 1934년. 일제하에서 어업조합은 절정의 호경기를 누렸다. 조합 직원들이 20명이 넘었고 봄 파시 때는 임시 직원만 30~40명씩 더 썼다.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하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 할 정도로 조합 간부들은 부와 권세를 누렸다. 조기 파시가 시작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어선들이 모두 어업조합에 신고를 하고 신고비를 납부했다. # 연평도 굴비 말리기조기를 매입한 객주들은 인부들을 사서 간통에 조기를 절인 뒤 해변가에 널어 말렸다. 잘 마른 굴비들은 서울이나 개성, 평양, 인천 등지로 팔려 나갔다. 황해도의 재령, 신천 방면 사람들도 굴비를 많이 사 갔다. 조기절이는 탱크가 해안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조기를 절이는 간통은 시멘트를 이용해 네모난 수조처럼 만들었다. 크기가 보통 집 한 채만 했다. 조기는 보통 2~3일 정도 간통에 절인 뒤 꺼냈다. 바위나 자갈밭은 햇볕에 잘 달구어져 조기가 쉽게 말랐다. 조기 절이고 말리는 일은 주민들이 품삯을 받고 했다. "품팔이 할 일이 많으니까 다른 장사에 머리를 잘 안 썼다." 영광굴비와는 달리 연평도 굴비는 엮어서 말리지 않고 꾸덕꾸덕 말린 뒤에 한 뭇씩 엮었다. 큰 것은 10마리가 한 뭇이고 작은 것은 20마리였다. 잘 마른 굴비를 방망이로 때려서 생으로 찢어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봄에 잡히는 알 밴 조기를 오사리(곡우사리) 조기라 했는데 오사리 조기로 만든 굴비는 최상품으로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기계배들이 조기잡이 배의 주류가 되면서부터 연평도에서 굴비 말리는 풍습도 사라져 갔다. 상고선이나 어선들이 조기를 얼음에 재서 직접 인천으로 운반해 갔고 연평도 굴비 말리기도 막을 내렸다.# 그물에 '갈' 입히기나일론이 나오기 전까지 그물은 면사였다. 일제 때는 면사를 타래로 사다가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물을 직접 뜨게 한 뒤 들기름을 먹여 사용했다. 그물의 벼릿줄이나 닻줄은 칡덩쿨로 만들어 썼다. 면사는 쉽게 부식되고 잘 끊어졌다. 그런 면사를 질기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 '갈'을 입혔다. 갈은 일종의 염색, 코팅이었다. 참나무 껍질을 푹 끓이면 물엿처럼 고아지는데 그것을 굳힌 것이 '갈'이다. 외지에서 온 선주들은 연평도의 갈 가마를 임대해 썼다. 연평도의 옛 어선 사진 중 긴 돛대에 그물을 걸어 놓은 것이 갈 먹인 그물을 말리는 풍경이다. 하얀 면 그물에 처음 갈물을 들이면 빨갛게 변하고 그물도 빳빳해졌다. 그물은 보통 서너 틀을 예비로 더 싣고 다녔다. 조업 중 그물이 끊어지거나 손상이 생기면 즉각 교체했다. 면사를 사용하던 시절 갈 가마의 장작이나 난방, 어선의 조리용으로 베어낸 땔감들 때문에 연평도의 산은 벌거숭이가 되어 갔다. 나일론 그물의 등장과 함께 갈물 들이기는 사라졌다. 나일론 그물은 면사보다 3배 이상의 어획고를 올렸다. 기계배와 나일론 그물, 어군탐지기의 등장은 조기의 어획량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그것이 결국 조기 어장의 고갈을 앞당기는 주범이 됐다. 기술의 축복이 기술의 재앙으로 돌변한 것이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4-14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6]목선에서 장작불로 밥 해먹고 바닷물로 세수하고

# 해상시장, "그냥 때려잡아요. 때려잡아."조기잡이 어장에서 어선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배가 상고선(商賈船)이다. 상고선은 운반선이자 중간상이었다. 조기잡이 선단 대부분이 돛단배(帆船)일 때부터 상고선은 기계배였다. 어장에서 잡은 조기는 즉석에서 매매됐다. 그물을 걷어올린 배는 '호기'를 찔렀다. 장대에 매단 깃발이 호기다. 그러면 가장 먼저 발견한 상고선이 달려오고 흥정이 이루어졌다. 해상시장, 말 그대로 파시가 섰다. 상고선은 목포, 인천, 영광 등 사방에서 왔다. 파시 내내 어선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조기 값은 무조건 '현찰 박치기'. 상고선은 다량의 현금을 싣고 다니며 거래가 성사되면 즉석에서 대금을 건넸다. 어선과 상고선 간에 더 받고 덜 주기 위한 흥정은 뭍의 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유리한 쪽은 상고선이었다. 어선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풍선(帆船)이 대부분이었으니 조기를 싣고 뭍까지 팔러 갈 수가 없었다. 가격이 불만족스러워도 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상고선은 깃대가 선 것을 보면 "저기 조기 있다"고 외치며 달려왔지만 어부들은 상고선을 도둑놈들이라고 욕했다. "그놈들이 다 도둑놈들이다. 조금만 주자하면서 달려와. 그냥 때려잡아요. 때려잡아."기계배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상고선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어선들은 조금 때가 되면 7~8시간 거리의 인천으로 직접 싣고 나가 하인천 부두의 어물상에 조기를 넘겼다. 하지만 어물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어선들은 상회에게도 약자였다. 상회에서는 선주들에게 전도금(출어비용)을 대주기 때문이다. 상회는 조기를 넘겨받아 '깡'(수협 공판장)에서 위판을 대행해 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선주들은 수수료와 상회에서 빌린 전도금을 떼고 난 금액을 손에 쥐었다. 1960년대 자루그물로 잡은 안강망배의 조기는 크고 작은 것들이 뒤섞여서 한 동에 쌀 한 가마, 그물코가 균일한 자망배에서 잡은 조기는 씨알이 굵어서 한 동에 쌀 두 가마 정도를 받았다. 조기 한 동, 천 마리가 쌀 한두 가마 값밖에 안될 정도로 조기 값이 쌌으니 선주들은 웬만해서는 큰 이익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자본이 없는 선주들은 상회 주인인 객주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상회 주인만 좋은 일 시켰다.' 중간상들만 큰 이익을 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가 끓어도 목욕은 꿈도 못 꾸던 선상생활뱃사람들은 한번 조업을 나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동안 배에서 생활했다. 그때는 쌀과 식수,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술, 담배 등의 식료품과 화덕, 장작 등을 가득 실었다. 선상생활에서 쌀만큼이나 귀한 것이 물이었다. 물을 담는 탱크는 스기나무(삼나무)로 만들어 배에 싣고 다녔다. 보통 세 드럼 분량의 크기였다. 하지만 탱크의 물은 음식을 하거나 식수로만 사용됐다. 물탱크는 연평도에 입항 했을 때 보충했다. 선상에 있는 동안 선원들은 옷은 갈아입지 못했다. 그래서 선원들 몸속에는 늘 이가 득실거렸다. 세수는 바닷물로 했고 세탁은 섬에 내렸을 때 개울에 가서 했다. 안강망 배의 경우 선상에서의 잠은 늘 쪽잠이었다. 6시간 간격으로 그물을 걷어야 하니 두세 시간 일하고 두세 시간 자고, 또 틈틈이 잠을 잤다. 식당은 선실 뒤에 붙어 있었다. 식당에는 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었고 화장은 하루 세끼 그곳에서 장작불을 때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대부분은 조기 틈에 걸려든 잡어로 매운탕을 끓이거나 소금을 뿌려 구웠다. 생선은 물리도록 먹었지만 김치는 항시 부족했다. 출어 때 싣고 온 김치는 일찍 떨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귀항 무렵이면 가장 먹고 싶은 것이 김치였다. 조기는 반찬으로도 잘 먹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자신들의 몫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생선이 흔해서 꽃게나 아귀 따위는 생선 취급도 안하고 버렸다.힘든 선상생활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나친 음주는 안전이나 조업에 지장을 주는 까닭에 출어할 때 배에다 한말들이 탄자(오지독)나 퍼런 대병 '와룡' 소주 몇 병 정도만 실었다. 조기 거래가 이루어지면 상고선에서 소주 한 되 씩을 건네주기도 했다. 돛단배들은 호야불(가스불)로 등을 밝혔고 기계배들은 발전기를 돌려 전깃불을 켰다. 억센 남자들끼리 좁은 공간에서 몇 달 씩 생활하다보면 사소한 일 때문에 크게 다투는 일도 잦았다. 다 같이 고생하는데 힘든 일을 기피하는 약삭빠른 사람들이 한 둘은 꼭 있었다. 그 것을 참다못한 선원이 시비를 걸면 싸움이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상 생활에서 유일한 취미생활은 라디오. 배마다 라디오가 한 대씩은 있었다.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해질녘 라디오에서 고향 노래라도 흘러나오면 남녘에서 온 선원들은 노을보다 얼굴이 더 붉어졌다. 떠나온 고향 두고 온 가족들, 그리움에 목이 멨다. # 선주는 뱀자, 선장은 '사공', 선원은 '뱃동사'연평도에는 본토박이보다도 해주의 대수압도, 소수압도, 육섬, 거첨도 등지에서 피란 나오며 배를 끌고 온 선주들이 더 많았다. 조기잡이 배는 풍선이나 기계배를 막론하고 평균 8명이 승선했다. 조업 가능한 최소 인원이었다. 선주가 선장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고용 선장을 썼다. 선주는 배임자 혹은 뱀자라 했고, 선장은 사공 혹은 사궁이라 했다. 일반 선원은 뱃동사 혹은 뱃동서라 불렀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동사(同事)라 한 것이다. 선원들에게는 역할에 따라 이물사공, 고물사공, 화장 등의 직책이 주어졌다. 뱃머리인 이물에서 일하는 이물 사공은 가장 경험이 많은 '영자'가 맡았다. 화장은 평상시에는 조업을 거들다 밥 때가 되면 밥 짓는 일을 하는 배의 막내였다. 선원들 중 선장을 했거나 배를 탄 경험이 많은 나이든 선원을 '영자(永者)'라 했다. 길게 앉은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이어서 영자라 불렀으며 특별대우를 했다. 선장보다 대접을 더 받는 영자도 많았다. 선장도 경험 많은 영자의 말은 들었다. 영자는 원로였지만 배안의 자잘한 일은 도맡아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배의 구조나 어구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가 미리 대처한 것이다. 영자는 한시도 쉴 틈 없이 배를 수리하고 어구들을 손 봤다. 신입들은 무엇을 해야 할 줄 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뱃사람들은 대부분 영자를 존중했지만 개중에는 "저 놈의 영자 영감탱이" 하며 영자를 무시하는 젊은 선원도 있었다.선주가 선장을 겸하지 않는 배에는 임시 선주인 '이목 배임자'를 세웠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4-07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

# 아귀를 닮은 안강망 그물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에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들이자 ('연평도 배치기 소리' 중에서) 구한말 안강망(鮟鱇網) 어선이 도입된 이래 연평도에서는 1960년대 초까지도 조기잡이 어선은 안강망 어선이 주류였다. 안강망은 물살이 빠른 곳에서 자루그물을 조류에 밀려가지 않게 고정해 놓고 물고기들을 조류의 힘에 의하여 강제로 함정에 빠뜨려 잡는 함정 어법이다. 연평도 조기 파시 때 안강망 어선들은 바람을 동력으로 가는 풍선(風船·돛단배)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시절에도 기계배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6·25 이후에야 안강망 어선들의 기계화가 진척되었다. 1960년대, 어선들이 본격적으로 기계화하면서 안강망 어선들도 대부분 기계배로 바뀌었다. 안강망 어선의 본 고장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지방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출어한 어선들이 연평 어장에 안강망을 처음 들여온 것은 1904년경. 하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그물이 자주 파손되어 손해가 많았다. 나가사키 어선들은 한동안 안강망을 철수했다가 서해안의 조류에 맞게 개량한 뒤 1908년 무렵부터 다시 안강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안강망 어법은 급속히 조선의 어선들로 퍼져 나갔다. 안강망은 일본어 '앙꼬(鮟鱇)'에서 왔다. 그물 모양이 '앙꼬어'(아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안강망 배는 50발(한 발은 1m60㎝)쯤 되는 자루그물의 끝을 닻에 매달아 바다 속으로 던져 바닥에 고정시킨 뒤 조류에 떠밀려 그물 입구로 들어온 조기떼를 포획했다. 사람 입술 모양의 그물 입구는 암해의 침력과 수해의 부력에 의해 열고 닫힌다. 암해는 참나무로 묶어 돌을 매단 뒤 밑으로 가라앉히고 수해는 굵고 긴 통대를 십여 개씩 묶어서 위로 띄웠다. 물에 뜨는 수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굵은 참대를 일본에서 수입해 썼다. 조업은 조금 때를 빼고 내내 계속됐다. 닻에 고정시킨 안강망 그물은 주야로 하루 네 번씩 물이 벙벙한 '감참'(간조, 만조) 때 물을 봤다. 조류의 흐름이 멈추는 때라야 물살의 저항 없이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망선에서 안강망, 자망, 유자망 어선으로 변천풍선(風船)인 안강망 배는 두 폭의 돛을 달고 다녔다. 안강망 배는 흔히 중선(中船) 배라고도 했는데 대선과 소선의 중간 크기 배란 뜻이다. 경기지방에서는 네 발에서 다섯 발 반까지 길이의 배를 중선이라 했다. 돛은 배 중심의 허릿대에 큰 돛을 달았고 배 앞쪽 이물대에 작은 돛을 달았다. 철저히 바람에만 의지해야 했으니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배들이 소연평도까지 왔는데도 남풍이 안 불어 주면 꼼짝없이 몇 날이고 연평도로 가지 못하고 붙들려 있어야 했다. 배에는 큰 노가 두 개 있었지만 '안타까워서 노질을 할 뿐' 덩치 큰 배가 움직일 리 만무했다. '바람 길이 터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닻 주고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안강망 배와 함께 연평어장을 누빈 또 하나의 주인공은 걸그물을 사용한 자망(刺網) 배와 흘림 걸그물을 사용한 유자망(流刺網) 배였다. 1960년대 들어 면사그물을 대신한 나일론 그물의 보급으로 자망과 유자망 어선들이 늘어났다. 자망은 수건 모양의 그물을 물 속에 수직으로 펼쳐서 닻으로 고정시킨 뒤 물고기들이 그물코에 꽂히게 하는 어법이다. 자망 배는 새벽에 그물을 놨다가 오후 3~4시경에 거둬들였다. 유자망은 그물을 닻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물결을 따라 흘려보내서 그물코에 물고기들이 꽂히게 하여 잡아들이는 어법이다. 안강망 어선이 도입되기 전 연평도에서 조기잡이 배는 망선(網船)이었다. 선수가 뭉툭하고 규모가 큰 망선은 이동이 쉽지 않았다. 돛은 허릿대와 이물대 외에도 뱃머리에 야거리대라는 작은 돛까지 세 개를 달고 다녔다. 새끼줄과 칡넝쿨로 만들어진 그물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망선에는 보통 삼사십 명이나 되는 선원들이 승선해야 했다. 그에 비해 안강망 어선은 가벼운 면사 그물을 사용한 덕에 7~8명의 선원으로도 충분히 조업이 가능했다. 1930년경에는 안강망 배에 밀려 망선은 자취를 감췄다.# 바다 속에 쟁기를 주다바다에서의 조업은 물때에 좌우된다. 밀물과 썰물의 들고 남이 큰 때를 사리(大潮)라 하고 작은 때를 조금(小潮)이라 한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을 이루는 음력 보름과 그믐에 조차가 가장 큰 것은 달의 인력과 태양의 인력이 합해지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직각을 이루면 태양의 힘 때문에 달의 당기는 힘이 약해진다. 조수가 거의 없는 이때를 조금이라 한다. 보름 간격으로 조금과 사리가 교차한다. 일반적으로 조금은 음력 5~9일 사이와 20~24일 사이의 물때다. 나머지 기간은 사리 물때로 본다. 조수의 활동이 활발한 사리 때는 물살이 빠르고 조수의 활동이 미약한 조금 때는 물살의 흐름이 약하다. 조기잡이 어선들의 조업은 대체로 사리 물때에 이루어졌다. 물살의 흐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강망 어선의 조업은 조수의 흐름에 크게 좌우된다. 안강망 어선은 물살의 흐름이 거의 없는 조금 때는 조업을 할 수 없다. 물살이 빠른 사리 때를 기다려 조업에 나섰다. 자망이나 유자망 배는 조금 때도 조업이 가능했지만 조금 때는 조기가 잘 잡히지 않는 탓에 조업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물살이 약해 조기들이 그물에 꽂히지 않았던 것이다.현재와 같이 어군 탐지기가 없었던 과거 조기잡이 배들은 울대(대통)를 바다에 넣어 조기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기떼를 쫓았다. 조기는 산란 직전에 울었다. 같은 종의 물고기들끼리는 소리로 의사전달을 하는 능력이 있다. 민어는 개구리처럼 꽉꽉 울었지만 조기 우는 소리는 바람이나 소나기 퍼붓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기를 비롯한 민어과의 어류들은 부레의 벽에 있는 근육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는데 위협을 느꼈을 때나 산란 시기에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낸다. 조기 철이면 연평도가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 못 이룬 것은 그 밤, 조기들이 무리지어 교배와 산란을 하며 고통과 환희로 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선들은 조기떼를 찾으면 '쟁기'를 줬다. 그물을 내리는 것을 '쟁기 준다'고 했다. 조기가 많을 것 같은 해역을 찾은 사공이 닻을 내리고 '여기주자'하면 뱃동사들은 합심하여 '쟁기'를 줬다. 쟁기를 준다는 표현은 농사를 제일로 치는 농경사회의 뿌리 깊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강망 배들은 그물을 걷어올려 그물 끝에 묶은 줄을 풀어내 조기를 털었고, 자망 배들은 그물을 올린 뒤 걸려든 조기를 하나씩 따냈다. 자망 배들이 하루 한 번 물을 보는 데 비해 안강망 배들은 하루 네 번 물이 들고 나가는 때마다 물을 봤다. 안강망 그물에 든 고기가 너무 많아 자루를 들어올리기 어려우면 자루가 긴 뜰채인 '테'로 퍼 날랐다. '테'는 젊은 선원들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운이 좋으면 안강망 배 한 척이 한 물때에 백이삼십 동까지도 잡았다. 조기 배들은 십여 일을 바다 위에서 생활하다 조금 때가 되면 연평도로 들어갔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3-31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4]4월 초파일은 연평도 조기 생일

# 돛대 하나로 연평도에서 흑산까지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의 바닷물고기다. 조기(助氣)란 이름은 사람의 원기 회복을 돕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흑조기, 꽃조기, 참조기, 백조기, 보구치, 수조기, 부세, 눈강달이, 황강달이, 민어, 민태 등이 모두 조기류의 물고기다. 참조기는 황금조기, 노랑조기란 별칭처럼 몸 빛깔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다. 과거 연평 어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것은 이들 참조기떼다. 회유성 어종인 조기떼는 해마다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기나긴 산란여행을 떠난다. 조기떼는 한반도 서해 산란군과 함께 중국 산둥반도 연안, 양쯔강 북부, 남부 산란군 등 4개의 산란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산란군은 겨울에는 동중국해에서 월동을 한 뒤 봄이면 산란장으로 회유한다. 한국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서해 산란군은 2월 초부터 북상하는데 2월 하순이면 흑산도 근해에 도달한다. 그래서 흑산 바다는 가장 먼저 형성되는 조기어장이었다.# 순배 술이 돌던 흑산도 파시연평도의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돛단배(風船)들도 조기떼를 쫓아 흑산도 어장까지 내려갔다. 보통 '정월 보름 밥 먹으면' 출어가 시작됐다. 하늬바람을 기다려 순풍에 돛달고 남으로 향했다. 바람이 제 때만 불어주면 연평도에서 흑산도까지도 이삼일이면 충분했다. 더러 바람 운이 나쁘면 열흘 이상씩 걸리기도 했다. 바람이 배를 잘만 밀어주면 당일에 흑산도까지 직행하는 일도 있었다. 기계배가 생기면서부터는 뱃길이 단축됐다. 흑산 어장에는 전국 각지의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었다.조기잡이 배들이 몰려오면 흑산도에 파시가 서고 색주 집들은 어부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분 냄새에 회가 동한 선원들은 못이기는 척 색시들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했다. 목숨 걸고 머나먼 바다까지 조업 나왔지만 많은 어부들은 주색에 빠져 돈을 모을 수 없었다. 집에 가져다주는 것은 출어 전에 선주에게 선도지로 받은 쌀 두세 가마가 전부였다. 아내는 찬바람 속에 굴 깨다 살림 사느라 고생하는데 돈 벌러 나간 서방들은 어렵게 번 돈을 색주가에서 다 탕진했다. 조기잡이 배들은 흑산도 어장에서 두 달 정도 조업을 하다가 음력 3월 초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이면 조기떼도 칠산 어장에 도착해 산란을 시작했다. 영광의 칠산이나 위도 어부들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조기떼의 도착을 알아챘다. 칠산 어부들은 철쭉꽃이 피면 조기가 칠산 바다에 도달한 것을 알았고 위도 어부들은 마을의 살구나무 고목에 살구꽃이 활짝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나타난 것을 알아챘다.# 청(靑)골, 연평도 조기어장의 관문위도 근해를 통과해 북상한 조기들 중 이른 놈들은 3월 하순이면 벌써 연평도 앞바다에 당도했다.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떼를 쫓아 칠산어장과 위도, 안마도, 어청도, 석섬 바다로 올라오며 조기를 잡았다. 늦은 무리도 4월 초파일이면 모두 연평도 해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연평도에서는 4월 초파일을 '조기 생일'이라 불렀다. 청골은 조기가 연평어장으로 들어오는 문턱이었다. 5월 초·중순의 입하, 소만 사리 무렵이면 남쪽에서 올라온 조기떼가 안흥 바깥의 '멍디기'를 지나 청골 바다를 통해 연평어장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망종 때까지 4사리, 두 달 남짓 연평어장에서의 조기잡이가 이어졌다. 청골로 들어오는 조기는 금방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많이 잡기는 어려웠지만 처음 잡는 조기라 가격이 높았다. 연평 바다로 들어오는 조기들은 씨알이 굵어졌고 하나같이 기름지고 살이 올랐다. 연평 조기를 최상품으로 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입하 사리 무렵이면 조기떼가 구월이 안골까지 들어갔다. 가장 좋은 조기어장인 구월이 안골 바다에서는 자리다툼도 심했다. 연평 바다로 북상한 조기떼는 4월 하순에서 5월 하순까지 연평도 인근 바다에서 산란을 하며 머물렀다. 연평도 조기의 주 어장은 연평도 북서쪽 4~5㎞ 인근 바다였다. 연평보다 북서쪽으로 돌출한 황해도 구월반도 아래 바다와 등산이(등산곶) 앞 바다가 황금어장이었다. 구월이 안골이나 등산이 바다는 작은 여와 모래 갯벌이 발달해 산란장으로 최적지였다. 해주만과 옹진반도, 연백의 수래 포구 등지에서 씻겨 내려오는 토사가 조기의 주식인 동물성 플랑크톤의 풍부한 먹이가 돼 주었기 때문이다.# 조기떼가 천둥만 빵빵거리면 없어져그 밖에도 조기떼는 닭섬 바깥 골이나 밭새, 고래안골, 물발이 세서 무서운 용호도 근처의 학골 바다, 거첨도, 뱅여섬(뱅여골) 등지에서도 많이 잡혔다. 운이 좋은 배들은 닭섬 바깥 골에서 한 물때에만 무려 '130동을 잡기도 했다'. 망종 무렵(6월초)이면 다시 조기떼의 이동이 시작됐다. 조기떼가 연평 어장으로 들어올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알을 까고 나갈 때는 "하늘에서 천둥만 빵빵거리면 없어져 버렸다". 한마디로 천둥번개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다. 조기떼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쫓아가 잡을 엄두도 못 냈다. 그와 동시에 연평 어장의 조기잡이도 끝났다. 산란장에서도 살아남은 조기떼는 평북의 운무도, 서차도, 대화도를 지나 신의주 앞바다 사자도 해역까지 북상해 마지막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거기서 더 북상한 조기들은 중국 다롄(大連)앞 바다를 거처 산둥성 근해를 돌아 남하했다. 또 한 차례 남쪽 머나먼 바다로의 기나긴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3-24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3]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는 연평도

# 해주 문화권이었던 연평도황해는 한국에서는 서해지만 중국의 방위로는 동해다. 태평양의 일부이기도 한 황해는 중국 동부 해안과 한반도 서부 해안 사이의 바다다. 황해는 평균 수심 44, 최대 수심 90로 세계의 수많은 바다 중에서도 수심이 얕기로 유명하다. 황해 바닥은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의 암반이다. 지질학자들은 그 당시 황해가 호수가 있는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와 같은 황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만5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기후가 따뜻해진 때문이다. 빙하가 녹자 넓은 들판에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황해가 형성됐다. 황해 지역이 '상전벽해' 되면서 대륙의 일부였던 연평도 또한 섬이 되었다.한반도 유사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문화권이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30㎞.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다. 연평도에서 1.6㎞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난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되어버렸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이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 세로 2.7㎞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룬다. 망망대해의 작은 섬들이 오랜 세월 모진 풍랑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무인도인 당섬과 모이도, 책섬, 구지도 등은 서로가 서로의 방파제가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스스로를 지켜왔던 것은 아닐까. 여객선이 들고나는 포구는 당섬에 있다. 근래까지도 무인도였던 당섬은 연도교로 어미섬과 이어져 대연평도로 편입되었다. 당섬 뱃머리에서 마을 입구까지는 5리 길이 조금 못 된다. 연평 마을 앞바다의 갯벌은 드넓다. 간조시에는 당섬, 거문여, 용위, 책섬, 군두라이 등의 무인도와 여, 줄 등까지 바닥이 훤히 다 드러난다.# 세종 때부터 조기어장으로 이름난 연평도100여년 전까지 연평도의 포구는 현재의 연평항이 아니라 북쪽 해안의 대나루 포구(大津)였다. 해주나 옹진 방면으로 오가는 배들이 모두 이 대나루 포구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철책선에 가로막혀 사람도 배도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지만 그때는 연평도산 굴비를 실은 배들도 모두 대나루 포구에서 출항했을 것이다.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세종 때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 연평도(延平島) 대진(大津) 남쪽에 있는데, 물길이 30리이다. 산연평도(山延坪島)는 대진 남쪽에 있는데, 물길이 45리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조기산지가 연평도 대나루 남쪽바다 어장이었다 하니 이는 안목어장을 일컫는 듯하다. 1815년에 편찬된 '규합총서'에서도 빙허각 이씨가 팔도의 특산물 중 하나로 연평도의 조기(石魚)를 들 정도로 연평도 조기는 조선시대 내내 이름났지만 대규모 조기잡이가 시작된 것은 구한말부터다. 조기배들이 몰려들면서 조기 파시의 역사도 시작됐다. 파시란 본래 어장에서 직접 생선을 사고파는 해상시장을 뜻했지만 점차 어장 부근의 섬이나 포구에서 생선과 생필품 등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확장되어 갔다. 파시의 특징은 한시성과 유동성이다. 조기 같은 어류의 이동에 따라 어선들이 이동하고 그와 함께 어업근거지를 중심으로 임시시장이 서는 것이다. 연평도를 비롯해 위도, 흑산도 파시 등이 서해안 3대 조기파시로 가장 이름 높았다. 일제 때는 이들 파시 외에도 해남 어란진, 군산 연도, 어청도, 보령 녹도, 강화 아차도 등 서남해 곳곳에 파시가 섰었다.# 파시가 아니라 작사(作詐)우리는 과거 연평도에 형성됐던 임시 시장을 파시라고 부른다. 하지만 파시는 근래 들어 사용된 말이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라 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한다. '작사'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다.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이다. 옹진군 향토지는 작사를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전투구, 연평 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연평 작사의 주인공은 조기잡이 어부들과 술파는 작부들이지만 그들은 무대에 선 배우였을 뿐 진짜 이익을 챙기는 제작자와 감독은 따로 있었다. 전주(錢主)와 객주, 색주가 주인, 선주들이 그들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수백억의 조기 군단이 연평도 근해를 찾아왔다. 조기 떼가 몰려오면 연평 바다는 순식간에 수천척의 배들로 가득 찼다. 덩달아 연평도에도 파시가 섰다. 파시는 3월 하순부터 망종 무렵인 6월 초까지 두 달 남짓 계속됐다. 당섬에서 연평도까지 "한배를 타면 천배를 건너다닌다" 했다. 파시 때 연평도는 사흘 벌어 일 년 먹는다 할 정도로 돈이 넘쳤다. 종이보다 돈이 흔해서 종이가 없으면 급한 대로 돈으로 밑을 닦고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봄 산란철 조기들은 칠산어장을 비롯한 기수구역을 따라 연평도로 몰려온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구역(강어귀)에는 강물에서 흘러온 영양분이 풍부하다. 햇볕 따뜻한 봄이면 이 영양분들 덕에 플랑크톤의 번식이 활발해진다. 플랑크톤을 먹이로 조기들은 살이 찌고 기름이 올라 산란장까지 가는 동안 최대의 영양상태가 된다. 조기떼가 연평도 근해와 해주만 일대 바다에 당도해 산란을 시작하는 것은 수심이 낮고 넓은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어 산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조기들은 달이 뜰 때 떼를 지어 집단으로 산란하기도 한다. 암컷조기의 산통이 시작되면 수컷은 암컷의 배를 자극시켜 산란을 돕는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그 알에 방사를 해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연평 해주 인근 바다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어린 조기떼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곳은 깊은 바다에 비해 포식자가 적고 플랑크톤이 많아 알에서 깨어난 어린 물고기들이 안전하게 영양을 섭취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어린 조기들이 자라면 만선을 꿈꾸는 어부들의 꿈도 영글어 갔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3-20 글·사진/강제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서해안을 바늘로 꿰라면 꿴다

# 제주 한림항, 전국 최대 조기 산지2008년 10월 30일 오후, 제주 한림항은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들로 꽉 들어차 빈 틈이 없다. 조업에서 돌아온 어선들은 배의 냉장창고에서 조기 상자들을 내린다. 조기들은 수협 위판장으로 옮겨져 새벽 경매를 기다린다. 선원들은 또 한번의 출어를 위한 그물 손질에 바쁘다. 39t, 380마력의 추자도 선적 유자망 어선 봉신호에서는 9명의 선원들이 일한다. 선원 대부분이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봉신호 선주 김석만씨는 "서해안을 바늘로 꿰라면 꿸 정도로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는 50년 전부터 배를 탔다. 흑산도와 위도, 법성포, 연평도 파시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다. 그는 연평과 칠산 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질 때까지 거르지 않고 다녔다. 나중에는 흑산도나 가거도 등지로 옮겨가며 조기를 잡았다. 그가 조기파시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물코가 74㎜ 이상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52㎜를 쓴다. 어린 새끼들도 잡힐 정도로 그물코가 작아졌다. 과거 칠산·연평 어장의 조기잡이 철은 봄이었다. 하지만 제주의 조기잡이는 가을인 9월부터 본격화된다. 첫 출어때는 8시간이 넘게 걸리는 동지나해의 252해구까지 조업을 나간다. 9월 중순이면 조기떼가 3시간 거리인 231해구까지 올라온다. 10월이면 제주와 가거도, 흑산도, 홍도, 추자도 근해까지 몰려든다. 그때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기들은 그 바다에 머물며 살아간다. 6월부터는 조기들이 자취를 감추고 8월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동지나해로 회귀하는 것이다. 어선들은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 가장 많은 어획량을 기록한다. 어부들에게는 '된 대목'인 이때 총 어획고의 80% 이상을 올린다. # 추자도,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밤 10시, 한림수협 위판장은 조기 선별작업이 한창이다. 다음 날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위판 시간전에 작업을 끝내야 한다. 지게차가 조기들을 선별대까지 옮겨주면 여성 노동자들이 분류 작업을 한다. 조기들은 크기에 따라 75마리, 130마리, 깡치, 깡깡치 등으로 분류되어 나무 상자에 담긴다. 깡치는 상자당 155~160마리, 깡깡치는 그 보다 더 작은 조기들을 이르는 말이다. 130마리짜리도 몸길이가 20㎝가 못되는 2년 미만의 어린 조기들이다. 2008년 10월 31일 새벽, 한림수협에서는 130마리짜리 참조기가 상자 당 6만1천~7만4천원 사이에 낙찰됐다. 제법 굵은 75마리짜리는 상자 당 35만~39만원. 깡치는 2만9천~3만3천원. 깡깡치는 1만9천~2만1천원에 불과하다. 조기가 멸치 값보다 못하다. 한림수협 77번 중매인 조문형(63)씨에 따르면 추자도 근해에서 참조기가 대량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부터다. 트롤 어선들도 조기를 잡지만 근래 4년동안은 유자망 어선이 조기를 가장 많이 잡는다. 어선들이 어군 탐지기를 이용해 동지나해까지 쫓아내려가 조기를 잡고 또 제주·흑산 근해에서 중간 길목을 막고 잡아들이니 칠산이나 연평도까지 올라갈 조기는 더이상 없다. 과거에는 상자 당 50마리도 흔했는데 지금은 가장 커봐야 75마리다. 한림수협에서 위판된 조기들의 90% 이상은 법성포로 가서 영광굴비가 된다고 중매인은 귀띔한다. "굴비로 엮어야 마진이 남지요. 이 단가로 노량진 수산시장 가서는 본전도 못해요."# 조기 선별에 날이 새는 위판장2008년 11월 1일, 상추자도 대서리. 추자항 주변 물양장에서는 조기 따는 작업이 한창이다. 연안유자망 어선 해창호(7.03t)도 부두에 정박 작업중이다. 품팔이를 나온 마을 여자들과 선원들 12명이 일렬로 서서 배에 실린 그물을 뭍으로 끌어당기며 조기를 딴다. 조기들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추자도 역시 올해 조기는 잘다. 오늘 해창호의 어획량은 200여상자. 그물에서 따낸 조기들은 깨끗이 세척한 뒤 얼음물에 한 시간 남짓 재워둔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 후에는 다시 꺼내 나무상자에 넣고 얼음을 채운다. 하루 정도 지나면 조기의 몸이 더욱 노란 빛깔로 변한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해창호 선주 부인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 해창호 선장 겸 선주 지의석(55)씨는 30년동안 배를 탔다. 96년 4월, 배를 새로 지으면서 횡간도의 박수무당을 모셔다 뱃고사를 지내고 뱃서낭을 모셨다. 추자도 어업의 신인 최영 장군 사당에도 일 년에 한 번씩 제를 올린다. 배를 새로 짓게 되면 기존의 배에서 모시던 뱃서낭을 내려 불살라버리고 다시 모신다. 뱃고사는 첫 출어때 한 번 지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장이 잘 안되는 경우 몇 차례 더 지내기도 한다. 처음 잡힌 생선은 뱃서낭께 바친다. 배에 사고가 나면 무엇보다 먼저 뱃서낭을 바다로 던진다. 그래야 인명 피해가 없다고 믿는다. 배를 지켜내지 못한 뱃서낭은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때만 신이다. 섬사람들은 신에 대해서도 주체적이다. 우리의 토속 신앙은 고통을 주는 신까지도 신으로 떠받들어야 하는 서양의 종교에 비해 얼마나 합리적인가.추자도 조기 유자망 어업이 시작된 것은 20년 전. 추자수협에서는 그 무렵 삼치잡이를 하던 삼치 유자망 어선들을 모두 조기 유자망 어선으로 바꿨다. 인구 3천명이 못되는 작은 섬 추자도에서 조기잡이로 올리는 어획고는 연간 400억원. 추자도는 가히 조기의 섬이다. 추자수협에서는 추자도에서 위판되는 조기의 70% 가량을 직접 구매해 굴비로 가공한다. 하지만 굴비는 옛날처럼 마른 굴비가 아니다. 요즈음 나오는 작은 조기들을 과거처럼 겨우내 해풍에 말리는 방식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는 까닭이다. 냉풍 건조기로 말리거나 한 두 시간 햇볕에 널어 물기를 뺀뒤 급랭시켜 보관한다. 영광 굴비를 만드는 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늘 모자란 곳아직 추자도에는 조기잡이 금어기가 없다. 조기의 씨알이 작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선주들이 그물코의 크기도 제한하고 자체 금어기도 설정하자고 논의중이지만 여전히 크든작든 많이만 잡겠다는 선주들이 있어서 결정이 쉽지 않다. 작은 조기들이 일시에 많이 잡히면 제대로 처리 못해 썩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값이 싼 작은 조기들은 수지가 맞지 않아 그대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선주들은 수입도 못 올리면서 조기의 씨알을 말리는 어리석은 어로가 결국 제 발등을 찍게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지라 걱정이 크다. 금년은 작년(2007년)보다 조기의 씨알이 더 작아졌다. 작년만 해도 상자당 130마리짜리가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했으나 올해는 130마리 상자가 30% 이하로 줄고 150~180마리 상자가 대부분이다. 조기 풍어가 추자도 경제에 활기를 주고 있지만 어린 조기의 씨를 말리는 이런 무분별한 조기잡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추자 바다에서 멸치가 잡히지 않는 것도 불길한 징조다. 멸치와 함께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자하(작은 새우)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조기나 방어들이 예년에 비해 살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업의 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수산 전문가들도 흑산도와 제주 근해 참조기 풍어는 참조기의 자원량 증가와는 무관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1974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조기는 9만4천t이 잡혔지만 그후 급격히 줄기 시작해 1984년부터는 1만t 미만으로 떨어졌다. 2007년에는 7천여t에 불과했다. 올해는 조기 어획고가 다시 1만5천t까지 늘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러한 추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흑산도나 제주 근해에서 잡히는 조기의 90% 이상이 2살 미만이며 평균 몸길이는 14~16㎝에 불과하다. 과거에 비해 시기가 당겨졌다해도 조기들이 산란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몸길이 21.7㎝) 이상은 성장해야 한다. 지금처럼 어린 새끼들에 대한 남획이 계속 된다면 흑산이나 추자 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연평도와 칠산 어장에서 조기가 멸족한 길을 추자도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대해 눈 감는 선주들의 욕심이 줄지않는 한 희망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히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언제나 모자란 곳이다. /공동기획 : 경인일보·인천문화재단 IFAC/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3-05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 수백억 조기군단이 몰려오던 연평도

경인일보가 인천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인천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나선다. 우선 인천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 세 가지를 정했다. 파시(波市)와 자장면, 기차다. 먼저 파시와 자장면의 이야기를 매주 연재한다.파시는 여행가이자 시인인 강제윤씨가 맡는다.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황금 시장으로 불리던 연평도 조기 파시와 덕적, 소래 등 인천의 대표적 파시의 옛 모습을 다시 추억해 보고, 당시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는다. 타 지역의 파시도 둘러본다. 인천의 대표 음식이 된 자장면. 자장면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인천 화교(華僑)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연세대 유중하 교수와 인천대 송승석 교수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인천에서 시작된 자장면을 통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미국 등 전세계 면(麵)에 얽힌 이야기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된다.인천은 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기차가 다닌 도시다. 경인선. 참 많은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학생들의 통학수단이자 사교 공간이 되고, 서울에 일터를 둔 직장인과 장사꾼에게 없어서는 안될 교통시설이었다. 수인선도 있다. 일제 강점기 경기도 곡창지대의 곡물 수탈의 수단이 되기도 한 수인선은 오랫동안 멈춰 있다가 최근 다시 철길을 잇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인선과 수인선 등 인천의 기차 이야기는 경인일보 특별 취재팀이 맡는다. 기차 이야기는 올 하반기에 시작된다.경인일보와 인천문화재단이 펼칠 파시와 자장면, 기차 이야기는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미래를 가늠케 할 역사적 기록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연재가 끝난 뒤엔 다큐에세이 형식의 책자로 묶어 낼 계획이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다. 영광의 칠산 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그때는 동해의 명태만큼이나 황해에도 조기가 지천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바다에는 조기가 '버걱버걱' 했다.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는 은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 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이 파시(波市)다.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 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다. 1910년에 벌써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다.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어선 2천척과 운반선, 상선 등을 합해 무려 5천여척의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나 됐다. '동아일보'는 1946년 봄, 연평 바다에서 무려 297억 마리의 조기가 잡힐 것 같다는 예상 기사를 내보냈다.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명에 달했다.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평 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다. 혹시나 돌아올까 기다리는 어부들도 있었지만 몇 해가 지나도 조기떼는 소식도 없었다. 조기가 떠나자 배도 사람도 더 이상 연평도를 찾아오지 않았다. 조기떼의 소멸과 함께 구한말 시작된 연평도 조기파시도 끝났다. 조기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연평도 어장에는 조기떼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월 따라 사람은 늙어가고 조기 파시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인들마저 이승을 떠나고 나면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조기파시의 기억들을 복원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금 조기들은 동지나해에서 출발해 한반도 서해안을 회유하던 습성을 바꿔 추자도나 흑산도, 가거도 근해까지만 회유한다. 그 사이 조기의 어획량은 대폭 줄었고 굴비는 서민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가의 음식이 돼버렸다. 수조기나 부서, 백조기 등이 노란 물감을 먹고 조기나 굴비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근년 들어 다시 조기가 대량으로 잡히고 있다 한다. 조기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씨알들이다. 조기는 제주와 추자도, 가거도와 흑산도, 홍도 근해에서 어획된다. 영광만이 아니라 추자도와 제주에서도 자체 건조한 굴비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연평도 조기파시'다. 하지만 '파시'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는 없는 곳, 이미 사라진 목적지를 찾아가는 여행. 여행은 필연적으로 시간여행이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타임터널을 통과해야 할 터, 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노인들, 과거에서 온 조력자들의 도움만으로 가능할까. 조기 파시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조기의 등이라도 타고 시간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목포와 군산, 부산, 여수 등지로도 조기배가 들어온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새로운 조기잡이의 메카는 제주 한림과 추자다. 나는 타임터널을 찾아 제주행 비행기에 서둘러 몸을 실었다. /공동기획 : 경인일보·인천문화재단 IFAC/글·사진 : 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2-26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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