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50·끝]에필로그

옛집 등 48곳에 스민 생활의 흔적 되짚어인천시 "근대 건축물 보존·활용방안 추진"문화유산 재조명 의미있는 성과 이끌어내기꺼이 문열어 취재에 응해준 이들에 감사주거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의식주가 언급되듯이, 주택은 인간을 위한 피난처 즉 셸터(shelter)로서 태곳적부터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진화하면서 인간의 생활욕구도 변화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그 그릇이 되는 공간에 영향을 미쳐 형태를 결정하는 동인이 되었다.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임창복 저, 돌베개 간) 중에서.집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닌 여타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집으로 인해 계절에 대처할 수 있게 됐으며 정착할 수도 있었다. 건축은 곧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하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100년 전 건축물은 몇 채 남아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의 쓰라린 역사가 배어 있다는 이유 혹은 개발 논리에 치여서 근현대사의 흔적들은 사라져 갔다.경인일보의 2016년 연중기획 '(인천)고택 기행'은 이 같은 아쉬움 속에서 기획됐다. 인간 삶의 궤적이 스며든,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과 우리 삶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말로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 thereafter they shape us)."를 꼽는다.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0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지을 것을 약속하면서 한 연설의 일부분이었다.'고택 기행' 취재팀의 5명의 기자들은 올해 48곳의 근대 건축물과 옛집의 문을 두드렸다. 옛집에 들어선 기자들은 해당 건축물에 스민 인간의 삶의 흔적을 좇았다. 한반도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가장 급격했던 인천의 모습을 지켜봤을 건축물과 그곳을 거쳐간 시민의 삶을 들여다 본 것이다.연재의 마무리에 대해 고민하던 11월 초 인천시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시는 보존가치가 큰 근대건축물을 발굴해 보존·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것. 당시 시는 각 군·구로부터 취합한 근대건축물 210곳을 조사했는데, 이 중 등록문화재 지정이 가능한 20곳을 선정했다. '고택 기행'에 소개됐던 남구 학익동 OCI 사옥(극동방송 옛 사옥과 사택·1955년 건립), 동구 금곡동 조흥상회(1955년 건립), 중구 경동 싸리재(1920년대 건립), 중구 용동 옛 인천흥업주식회사(1938년 건립), 강화군 1928 가옥(황씨고택·1928년 건립) 등 5곳이 포함됐다.시는 이를 통해 근대문화유산을 재조명하고 근대건축물들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관련 행정가들과 학자들이 꾸준히 모니터링 하면서 의미 있는 건축물들을 시민 가까이에서 보다 오래 보존·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오래된 건물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잘 지은 건물도 사람의 손길이 멀어지면 금방 폐가가 된다. 행정가와 학자는 물론 시민들이 우리 지역의 옛 건축물들을 통해 인천을 들여다보는 색다른 경험을 자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기꺼이 문을 열고 취재에 응해준 옛 건축물들의 문을 닫고 돌아서야 하는 시간이다. 올 초 '고택 기행'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물음인 "옛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와 살았던 집들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에 대한 답은 독자 여러분들께 맡긴다. 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사진 = 경인일보 DB100여년 전 묻어둔 타임캡슐을 여는 심정으로 진행한 1년여간의 여정이 마무리됐다. 지역 건축물에 투영된 지역민들의 삶을 확인했을때 알 수 없는 희열을 경험했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주변의 옛집을 통해 인천을 들여다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6-12-28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49]부평향교

한때 인천을 거느리던 도시… 행정·국방 주요 역할1127년 창건 인천향교처럼 조선시대 중·고등학교홍살문→외삼문→명륜당·동재·서재 순으로 배치그 뒤 대성전엔 공자 등 5성위·유학선현 25위 봉안현재의 인천은 과거의 '원인천' '부평' '강화' 등 3개 지역이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인천'이라는 지명은 1413년 조선 태종이 현재 인천의 일부를 '인천군'으로 명명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됐고, 강화군은 940년 고려 태조 23년 '강화현'이 설치되면서 강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부평의 이름은 고구려 때 주부토에서 통일신라 때 장제군,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940년 수주, 1150년 안남도호부, 1215년 계양도호부, 1308년 길주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310년 부평부, 1413년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가 된다.고려 현종 때 원인천 지역은 수주에 속했던 소성현이었다. 부평은 지방관이 파견됐던 고을이었던 반면, 인천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현재와는 다르게 부평이 인천을 아래에 거느리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당시 부평은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인천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를 담당하는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사기지 도시 구축계획에 따라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 부평은 따로 도호부가 설치됐을 정도로 독립된 역사를 간직한 도시였다. 인천이 문학산을 주산으로 하는 해양 권역에 자리 잡은 곳이라면 부평은 계양산을 주산으로 하는 내륙의 넓은 평야를 거점으로 한다.이 때문에 부평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행정이나 국방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오래전부터 한양에 인접한 드넓은 평야지대인 데다 항구와 인접한 곳으로 바다와 내륙의 접점에서 벌이는 수많은 행정이나 사업의 본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인천 남구 문학동에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것처럼 계양구 계산동 부평초등학교에는 '부평도호부청사'가 남아있다. 남구 관교동에 당시 공교육을 담당하던 '인천 향교'가 있었듯이 계양구 계산동에는 '부평향교'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20일 인천 계양구 계산동에 위치한 부평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12호)를 찾았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시설로 '향촌(지방)에 있는 학교'라는 뜻이 있다. 당시 서울에는 향교가 아닌 사부학당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했다.부평향교는 1127년 계양산 남쪽에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6년 병자호란으로 불에 탔고, 1688년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원래는 입구인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을 통해 들어가는 구조로 돼 있지만, 홍살문과 외삼문 사이에 소방도로가 생기면서 외삼문이 실질적인 문이 됐다.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 역할을 하는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돼 있다. 이곳에서 70명의 학생이 숙식을 해결하며 과거 준비를 했다고 한다.명륜당 뒤에 위치한 내삼문(內三門)을 지나면 대성전(大成殿)이 나온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와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비롯한 유학의 선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앞에는 수령 1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의 모든 향교나 서원 등 교육기관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공자가 처음 제자들을 모아 강의했던 곳이 은행나무 아래였기 때문이다. 부평향교는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 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 배치로 구성돼 있다. 유교적 이념에서 보면 옛 성현들이 앞에 있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뒤에 있어야 하지만 전국 향교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부평향교관리재단 관계자는 "우리나라 향교는 대부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앞쪽이 낮고, 건물 뒤편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이에 앞쪽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면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이에 대지 경사에 맞춰 건물 간 위치를 설정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이처럼 번성했던 향교는 조선 중기 이후 사액 서원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대와 비교해보면 자립형 사립고가 생기면서 부잣집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가지 않고, 사립고로 몰리는 형태가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향교는 교육 공간보다는 제향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갖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고 부평과 인천은 하나로 합쳐졌다. 인천항 주변에는 개항 초기 항구를 중심으로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기 시작됐고,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시가지는 부평 등 내륙으로 더 넓어졌다. 도시의 확장으로 문화가 다른 두 곳이 하나가 됐지만, 10여 년까지만 해도 부평과 인천은 서로 섞이지 못했다. 인천 부평지역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자라온 '부평 토박이'들은 같은 인천시(市)에 살면서도 자신을 '인천사람'이 아닌 '부평사람'이라고 외지인들에게 소개했다. 바닷가 인천사람과 내륙에 가까운 부평사람은 분명 달랐고, 서로가 낯설어 구분 짓는 일이 반복되며 습관이 돼 버린 것이다.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부평이 인천에 편입된 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둘을 구별하는 것이 많이 퇴색됐지만, 아직 일부에서는 서로 녹아들지 못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며 "이제는 열린 생각을 갖고 하나의 인천으로 힘을 합쳐야 할 시기가 됐다"고 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시 계양구에 위치한 부평향교는 1127년 계양산 남쪽에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6년 병자호란으로 불에 탔고 1688년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교육공간으로 사용된 명륜당(明倫堂) 모습.제향 공간으로 사용된 대성전(大成殿) 모습.부평향교의 입구인 홍살문(紅箭門) 모습.동재·서재는 학생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과거 준비를 한 공간으로 배치돼 있다.대성전에는 5성위(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와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비롯한 유학의 선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2016-12-21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48]관동갤러리

한개 동을 나눈 일본식 연립주택 '나가야'개항이후 속속 들어선 목조건축물 중 하나도다 관장이 두 채 사들여 살림집·일터로2013년 인천 정착 자국 추억 떠올라 '애착'가급적 재료·흔적 살려 살아있는 집 구현1883년 개항 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도시 인천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삶의 터전이었다. 일제시대 인천부 청사로 쓰인 인천 중구청 인근에도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집들이 지어졌다. 중구 청사와 3~4분 거리의 '인천관동갤러리' 건물 역시 평범한 일본 사람들이 살던 생활 공간으로 지어졌다.처음 일본인의 손으로 지어졌던 이 집은 공교롭게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 한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도다 이쿠코(57·여)씨의 살림집이자 일터로 쓰이고 있다. 관동갤러리의 주소는 인천시 중구 신포로31번길 38(관동2가 4-10)로 갤러리 이름의 '관동(官洞)'은 도로명 주소를 쓰기 이전 이 집의 주소인 법정동 관동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로명 주소 시행으로 쓰이지 않게 될 '관동'이라는 지명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겠다는 도다 관장의 세심한 배려로 붙여진 이름이다.지난 13일 이곳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가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 골목인지 저쪽 골목인지 다시 확인해야 해 찾기가 쉽지 않았다.통상적으로 갤러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눈에 띄게 지어져 동네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지만 이 갤러리는 주변 주택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돌출 간판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외벽도 화려한 장식 대신 회색 철판으로 얌전하게 꾸며져 있다.정면에서 보면 왼쪽 건물이 도다 부부가 사는 살림집이고 오른쪽이 갤러리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이 부부는 왼쪽 살림집을 2013년 3월 인수해 살다가 다음 해 1월 오른쪽 집을 추가로 사들여 1년여의 공사를 거쳐 갤러리로 꾸몄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지만, 이 집은 6채가 나란히 붙어 지붕과 벽을 함께 쓰는 한 동의 건물로 지어졌다. 번호를 붙이면 부부가 사는 곳은 2·3번째 집이다.이렇게 한 동을 여러 채의 집으로 나눈 이러한 건물 형식은 '나가야(長屋)'라고 한다.1883년 개항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인천에는 일본 조계지를 중심으로 많은 일본식 목조 건축물이 지어졌다. 현재 중구청인 인천부 청사 앞은 '혼마치(本町)'라 불린 번화가로 은행과 상점이 있었다. 옛 엽서를 보면 이 일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거리엔 2층 기와집 목조 주택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교토나 도쿄 등 일본의 전형적인 도시 경관과 흡사했다. 격자 모양으로 도로를 배치해 택지를 구분하고 길과 맞닿은 '마치야(町屋)'라고 하는 목조주택 건물이 들어섰다.마치야는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살면서 일도 하던 '직주일체(職住一體)' 도시형 주택이다. 마치야는 단독형과 연립형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관동갤러리처럼 한 동의 건물을 몇 개 집으로 나눈 연립형식을 '나가야(長屋)'라고 한다.한양대 건축학부에 재직했던 도미이 마사노리 건축가는 나가야가 1600년대 중반 즈음 교토에 근무하는 하급 무사들의 주거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에도 시대엔 도시 서민주택 형식으로 널리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건축가 도미이 마사노리씨는 1년을 투자해 이 집의 역사를 밝히고 원래 구조를 살리며 주인의 용도에 맞게 고쳤다.왼쪽 살림집 내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지만 오른쪽 갤러리를 재생하는 작업은 엄청난 공을 들여야 했다. 도미이씨는 '살아있는 집,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집'을 구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급적 모든 재료를 거의 다시 살렸고 전 주인의 흔적들도 그대로 남겼다. 갤러리 곳곳에는 깨진 타일 벽체와 가스배관, 구멍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이 집의 역사는 어림잡아 9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축물대장에는 1939년 신축으로 나와 있지만, 이 집의 재생공사 과정에서 합판을 뜯어보니 1924년(大正 13년) 1월 19일 발행한 경성일보가 붙어있었다. 이 집과 비슷한 인근 다른 주택에서는 1932년(昭和 7년)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된 것을 보면 1920~3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도다 관장의 남편은 사진작가 류은규씨로 부부가 인천에 정착한 것은 지난 2013년 5월의 일이다.한국에서 결혼해 20년 동안 아파트 생활을 한 부부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고 한다. 도다 관장은 집이 바뀌면 전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마는 도시 아파트에 대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때마침 아들이 곁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자 그들은 공항이 가깝고 근대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인천으로 옮기기로 하고 집을 찾아 나섰다.2013년 1월부터 중구 일대에서 집을 수소문하던 도다 관장은 1개월여가 지나고 부동산중개업소 소개로 우연히 이 집을 알게 됐다. 그는 처음 집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유년 시절 그가 일본에서 살았던 집과 똑같은 형태의 집을 인천에서 만난 것이다.그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이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깨어났다"며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 집이 내 집이구나'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옛 기억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긴 복도가 나오고 복도 오른쪽으로 방이 배치돼 있었다. 복도 끝은 부엌이었고 마당과 창고가 있었던 전형적인 나가야 형식이었다.도다 관장뿐 아니라 이곳을 찾는 다른 일본인들도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도다 관장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살았거나,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똑같은데, 이런 집이 어떻게 바다 건너 한국 땅 인천에 있는지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를 설명하게 될 수 밖에 없다"며 "근대 역사를 배우지 못하고 자란 일본인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관동갤러리 건물은 여러 세대가 지붕과 벽체를 공유하는 전형적인 '나가야(町屋)' 형식의 일제시대 서민 주택이다. 왼쪽은 관장 부부가 사는 살림집으로, 오른쪽은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다락으로 두 집 관통하는 대들보2층 천장 합판을 뜯어 지붕이 보이도록 개방한 뒤 바닥을 보강해 서재로 꾸몄다. 다락 공간이 각 세대 구분 없이 이어지며 큰 대들보가 두 집을 관통한다.재생공사 당시 목조보강 계획도 /인천관동갤러리 제공

2016-12-14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47]애관극장

정치국이 1895년 세운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협률사'가 전신외부 1960년 건축 모습 '그대로' 벽돌조 단층서 수차례 걸쳐 증축지역 학생들 만남의 장소로 이름 떨친 경동에 남은 유일한 극장1883년 개항 이후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일본·중국 등 인근 국가를 비롯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사람이 몰리는 곳에 음식점이나 술집, 공원 등 유흥시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1888년 응봉산 일대에 자리 잡았고, 대불호텔이나 공화춘, 중화루 등 대형 식당들도 이 시기에 차례로 문을 열었다.1901년 당시 내리교회에서 근무하던 존스 목사(한국명 조원시)는 회고록에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7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수 개의 교회단, 수 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93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해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이보다 앞서 인천에 자리 잡은 극장은 지금의 애관극장에 세워진 '협률사(協律舍)'다. 협률사는 당시 인천 최고의 부호로 불렸던 정치국(1865~1924)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의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것이다.협률사는 1908년 이인직이 개관한 원각사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으로 알려진 조선 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협률사'(協律社·인천의 협률사와 한자가 다름) 보다 앞선 1895년에 설립됐다. 강덕우 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1895년 당시 인천 거주 일본인이 4천148명이었고, 서울은 1천939명이었다"며 "당시 극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울보다 빨리 인천에 극장이 생겼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향토사학자인 최성연은 1959년 '개항과 양관 역정'에서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愛館)의 전신으로서, 청일전쟁(1894~1895) 중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밝혔다.이 같은 협률사는 개관 당시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다. 매일 '박첨지', '흥부놀부전'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창극이나 신파연극 심지어는 아직 명맥이 유지되고 있던 남사당패의 공연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특히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명 연극인들이 많았다. 인천 주안 출신 배우 서일성(1906~1950)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연출가 정암을 배출하기도 했다.지난 5일 인천 중구 경동에 있는 애관극장을 찾았다.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이름이 '축항사(築港舍)'로 바뀌었다가 1926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애관'으로 다시 개명됐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된 것이다.현재 애관 극장은 1926년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손실되고, 1960년 개보수를 마치고 4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개관한 데 이어 2004년 전면 개보수를 통해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었다.애관극장 외부는 1960년 건축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돌로 마감된 외부는 곳곳에 모자이크 타일이 장식돼 있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부터 현재까지 몇 번의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애관극장은 설립 당시 벽돌조 단층 건물에서 2층으로 수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증축이 이뤄졌다.1960년대 인천에 영화붐이 일어났다.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경동은 시네마거리로 불릴 정도로 극장이 많았다. 동방극장을 비롯해 문화, 미림, 오성, 인영, 인천, 인형, 키네마, 현대극장 등 인천 지역 대부분 극장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우리나라 영화예술의 꽃을 피운 토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애관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연주회장으로도 명성이 있었는데 20세기 최정상급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레너드 번스타인(1916~1990)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애관극장 앞은 인천 지역 학생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였다. 당시에는 놀 거리나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애관극장이 있는 경동에서 만나 영화도 보고 음식을 먹었다"며 "특히 애관극장은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시기에는 아침부터 나가야 겨우 저녁 영화 티켓을 구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하지만 지금 경동을 지키고 있는 극장은 애관극장밖에 없다. 키네마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은행이 들어섰고, 동방극장이 있던 곳은 공영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김 전 대표는 "아무래도 개인 기업이기 때문에 지자체가 나서서 지키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지만, 인천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을 허무하게 흘려보내 너무 아쉽다"며 "마지막으로 남은 애관극장이라도 지자체가 보전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것을 지키는 것이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애관극장의 현재 내부 모습.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손실되고, 1960년 개보수를 마쳐 4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개관한 데 이어 2004년 전면 개보수를 통해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탈바꿈 했다.극장 정문에 붙은 애관극장 연혁표.

2016-12-07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46]동일방직 의무실

서정익이 적산공장이던 동양방적 인수 '동일방직' 설립한옥형태 단층 목조건물 불구 전통·서양·일본식 '복합'소설 '인간문제' 대동방적 모델이자 女노동운동의 산실직접연관 없지만 근·현대 노동사 매개체 보존가치 높아일제강점기 인천은 대규모 공업지대가 조성되면서 전국에서 일거리를 찾는 인파가 몰린 산업도시였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천의 주요 도시 성격 중 하나다.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 조선이연금속, 조선화약공판 등 일본기업의 대규모 공장들은 일제강점기 말 '군수보급기지'로 활용됐다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미군정청에 귀속됐다. 미군정은 해방과 함께 일본이 남기고 간 이른바 '적산(敵産)공장'의 운영을 한국인 관리인을 내세워 이어갔다. 이승만 정권의 적산기업 민영화 방침으로 이들 관리인이나 기업인이 적산공장을 인수했고, 상당수는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있던 일제강점기 대규모 방적업체인 동양방적 인천공장도 적산공장이 되면서, 1955년 당시 동양방적공사 이사장 서정익(1910∼1973)이 인수해 동일방직을 설립했다. 서정익 전 동일방직 사장은 1932년 나고야공업고등학교 방직과를 졸업한 일본 유학파이자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다.서 전 사장의 조부는 개항기 조선인 상권수호활동에 앞장선 상인단체인 '인천신상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서상빈(1859∼1928)이고, 아버지는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 이사를 지내며 일본인 기업주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한 서병훈(1888∼1949)이다. 한때 종업원 수만 1천600여 명에 달했던 동일방직은 최근 인천공장의 사업규모를 대폭 축소하긴 했지만, 인천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토종기업 가운데 하나다. 만석동 동일방직 인천공장 내에는 공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한옥 형태의 건축물이 있다. 195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건물은 신입사원 교육실과 의무실로 쓰였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다. 약 258㎡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인 동일방직 의무실은 우리나라 전통양식, 서양식, 일본식이 복합돼있는 독특한 구조다. 지붕선과 기와, 창살문양 등은 한옥양식을 썼지만, 지붕틀과 기둥의 형태·배치, 주출입구 포치(porch), 복도 등 건물 내부구조는 일본건축양식이다. 주출입문은 한옥의 방문과 비슷한 미서기문인데에 반해 현관과 연결된 복도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건물의 높은 층고는 서양식 건축물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동일방직에는 의무실의 혼재된 건축양식에 대한 자료나 이를 알고 있는 관계자가 없다. 동일방직 의무실의 건축양식에 대해선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 견해다. 첫째는 일제강점기까지 지배적이던 일본식 건축양식에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전통양식을 점차 되찾아가는 과도기적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해방 이후에도 일본식으로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일본식 기와를 구하지 못해 한옥 기와로 대체했을 가능성도 있다. 근대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동일방직 의무실은 해방 이후 변화하는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동일방직 의무실 안에는 오래된 인체해부도나 1994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 제작한 '국민건강생활지침' 액자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신입사원 교육실로 쓰인 방도 인천공장이 노동자들로 북적였을 때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동일방직 인천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한 여성 직원은 "1970~1980년대 직원이 많을 때는 수십 명 이상의 신입사원이 의무실 건물에서 수습교육을 받았다"며 "직원이 줄면서 건물을 교육실과 의무실로 쓰지 않게 됐다"고 했다. 동일방직 의무실은 자연환경·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민간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2014년 주최한 '나의 사랑 문화유산 캠페인'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 노동운동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이유다.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소설가 강경애(1906~1944)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의 모델이다. 식민지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과 당시의 노동운동을 생생히 그렸다. 무엇보다도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산실이다. 동일방직노조는 1972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부장을 탄생시켰다. 1978년 2월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자 사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조합원들에게 분뇨을 끼얹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똥물사건' 이후 단식 농성 등 투쟁을 벌인 노동자 126명을 사측이 해고했고, 전국의 노동계가 동일방직 사건 해결을 위한 집회에 나섰다. 동일방직 해직노동자들이 1978년 만든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노동자 문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동일방직 의무실은 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동양방적이나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하지만 인천 경제사는 물론 근·현대 노동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 주장이다. 사유재산이지만, 빈 건물로 남겨두기 보다는 인천의 경제사나 노동사와 관련한 활용방안이 고려돼야 할 필요가 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5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방직 의무실은 우리나라 전통양식, 전통양식을 모방한 서양식, 일본식 건축기법이 섞였다.동일방직 인천공장에 있는 설립자 서정익 전 사장 동상.주출입구 포치는 일본식이나, 출입문은 전통양식인 미서기문으로 처리했다.의무실 내부에는 과거 사용했던 인체해부도나 국민건강생활지침 액자, 철제 사물함 등이 그대로 남아 의무실 분위기를 내고 있다.동일방직 내 옛 기숙사 건물 담벼락에는 건축연도가 불분명한 초소형태의 낡은 건축물이 있다. 기숙사에 사는 직원들의 월담 등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동일방직 신입사원들이 수습교육을 받던 공간. 입사상담도 동일방직 의무실 건물에서 이뤄졌다.

2016-11-30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45]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우물 적고 수질 나쁜 인천 개항이후 물확보 비상일본인들이 상수도 건설 본격화 하면서 세워져수도국산 위치 제수밸브 보호 콘크리트 시설물돔지붕·첨탑 장식 등 외부와 달리 내부는 '단순'송현근린공원으로 재탄생 관광 자원화 큰 의미상수도 시설은 근대 도시가 갖춰야 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이다.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시설인 송현배수지의 1908년 준공은 인천사(史)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었으며 타지역에 비해 수질 또한 나빴다고 한다.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 확보가 최대 숙원으로 떠올랐다. 일제 때 발간된 '인천부사'와 1973년 발간된 '인천시사'에는 개항 이후 인천의 물 사정에 대해 이처럼 언급돼 있다."한때 인천 상수도 시설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재정은 여의치 않아 문학산 계곡에 수원지를 마련하고 수도 시설을 하려 했으나, 그 규모가 너무 적다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선박 급수도 초기에는 풍도에서 하였으나 후기에는 북성동에 우물 5개를 파서 그 수요를 전담케 하였다."이 같은 노력에도 불편함은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전국적으로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인천 거주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상수도 건설 계획이 본격화됐다. 1905년 나카지마(中島銳治·1858~1925) 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 공사에 착수, 1908년 송현배수지 시설이 준공됐다. 이어서 한강 연안 노량진에 있었던 수원지 정수시설이 1910년 10월 준공돼 그해 12월부터 급수가 시작됐다.수원지는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 지역은 서울 4대문 안과 용산, 인천 등 3개 지역이었다.당시 인천부청 조사에 따르면, 수도가 공급된 지 2년 후인 1912년 말 인천시민 중 수도 혜택을 받은 가구는 2천143가구로, 전체 가구의 2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여전히 우물에 의존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급수 인구는 7만명에 달했지만, 노량진 수원지의 취수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영등포 지역의 급수를 위한 송수관 연결 공사를 마친 데 이어 1917년 한강 인도교에 400㎜ 굵기의 철관을 가설하는 등의 대책을 통해 인천의 수도 공급률을 8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이후 인구 증가로 인해 노량진 수원지를 확장하고, 1940년에는 부평에 가압 펌프장을 설치해 9천t이던 1일 송수량을 1만6천t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수요 증대에 대한 대비가 늦어지면서 해방 이후 격일제 급수가 실시되는 등 물 공급이 지역 최대 화두로 다시 떠올랐다.'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 刊)에선 지역 원로의 말을 인용해 '1940년대 후반 격일제로 물을 공급할 무렵 일반 시민은 물론 소규모 공장이나 가내수공업을 하던 이들은 공장 가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일손을 놓기 일쑤였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100년이 넘는 인천의 수도사(史)를 떠올리면서 늦가을에 인천 동구 수도국산의 송현근린공원을 찾았다.과거 배수지는 언덕 위에 설치됐다. 물을 높은 곳에 두어서 위치 에너지를 이용해 각 가정으로 보냈던 것이다. 송현배수지는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라 불리던 야트막한 산(해발고도 56.8m 지점)에 자리 잡았다. 배수지시설이 들어선 후부터 이 산은 수도국산(水道局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부지면적 3만6천780㎡의 송현배수지는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었다.송현근린공원 한 편에 자리 잡은 송현배수지 제수변실(制水弁室·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108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에 가기 위해선 준공 당시 구조물로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을 주두로 장식한 철제 대문을 지나 화강석으로 만든 23개의 장대석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공원이 조성된 현재에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주변의 산책로들을 이용해도 된다.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형 건물이다. 상부는 돔 지붕으로 처리하고 첨탑으로 장식돼 있다. 또한, 출입문 좌우에는 장식 몰딩을 설치하고 상부에도 활 모양의 석재 몰딩을 달아 고전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출입구 위쪽 벽면에는'백 번 흐르면 만 번 빛난다'는 뜻의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외관에 비해 내부는 매우 단순하다. 내부 벽과 천장에는 장식이 없고, 마룻널을 깔아 마감한 바닥에는 지하 밸브와 연결된 쇠막대, 이를 좌우로 돌리기 위한 핸들이 전부다.제수변실 내부에 대단한 것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기대감은 산산이 무너졌다.제수변실에서 나와 시선을 주변으로 옮기니 공원을 산책하는 인파가 시선에 들어온다. 평일 낮이었지만, 인근 주민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공원을 거닐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근대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근대수도시설을 공원이나 기념관으로 조성하는 사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근대수도시설이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건 송현배수지가 처음이었다"면서 "근대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현대생활로 끌어들이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인천은 다른 지역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글 = 김영준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인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형 건물이다. 상부는 돔 지붕으로 처리하고 첨탑으로 장식돼 있으며 출입문 좌우에는 장식 몰딩을 설치하고 상부에도 활 모양의 석재 몰딩을 달아 고전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외관에 비해 내부(오른쪽 작은 사진)는 단순하다. 장식은 일체 없으며 지하 밸브와 연결된 쇠막대, 이를 좌우로 돌리기 위한 핸들이 전부다.우리나라에서 근대수도시설이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건 송현배수지가 처음이다. 근대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근린공원으로 인천 동구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송현배수지 제수변실 23개의 장대석 계단과 함께 철제 대문도 준공 당시 구조물이다.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을 주두로 장식했다.철제 대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돌계단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계단은 100년이 넘는 세월과 함께 가을 낙엽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송현근린공원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공중에 부양한 형태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작은 개울로 흘러 내려가서 다시 순환하는 구조다. 여름에는 어린이들의 물놀이터로 변신한다.

2016-11-23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44]초연다구박물관

다도 교육 박영혜 관장이 매입 후 2015년 꽃차 박물관으로 문 열어리모델링 과정 상량문 발견… 서까래·대들보 오래된 집 짐작게 해2층 높이가 1층보다 높고 한 건물 안에 여러가구 밀집 일본식 민가1883년 개항과 함께 일본, 중국 그리고 서양의 문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인천의 곳곳이 채워졌다.인천항을 통해 들어 온 배에는 이방인뿐 아니라 그들이 입는 옷과 음식, 문화, 생활습관 등이 함께 실려있었다.우리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국의 문물이었지만, 인천을 찾은 이방인들에겐 모든 것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방인들이 들여온 문물 가운데 주거 문화는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주거 문화가 급격히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의 주거 양식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서양의 주거 방식과 결합해 정착했다.인천 개항장 일대에는 외국인 거류지별로 각 국가의 특색이 반영된 주택이 들어섰고, 지금은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 당시의 숨을 품은 일부 건물들만이 남아있다.특히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개항 때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자국식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이후 이들이 떠난 뒤 남은 주택들은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남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역사의 흔적이 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인천 중구 신포로 39번길 8-1(송학동 3가 5-38) 적산가옥 가운데 하나를 활용해 꽃차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초연다구박물관을 찾았다.성인 남성 무릎 높이의 시멘트 담장 한가운데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정원을 따라 벽돌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올라 박물관의 문을 열면 울긋불긋 꽃차들이 담긴 병으로 채워진 한쪽 벽면을 마주하게 된다.초연다구박물관은 인천에서 다도(茶道)를 교육하던 박영혜 관장이 지난 2014년 우연히 이 집 앞을 지나가다 발견해 매입하게 됐고, 내부를 다시 꾸며 지난 2015년 초 문을 연 공간이다. 건물 외벽은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나무로 외벽을 둘러 깔끔하다. 오래된 건물임을 알기 위해선 2층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 2층 천장을 살펴보면 서까래와 대들보가 이 집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 건물은 193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 관장은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천장에서 흰 종이에 싸인 오각형 모양의 상량문을 발견했다. 앞면에는 '소화7년10월(昭和七年十月)', 뒷면에는 '봉상동식(奉上棟式)'이라고 적혀 있었다. 집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진 않지만 가주(家主), 신주(神主) 등이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건물이 안전하게 지어지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 상량문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박 관장은 "오랫동안 집을 관리하지 않아서인지 집 안의 자재들이 대부분 썩거나 거의 쓰지 못 할 정도였다"며 "상량문을 발견하면서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게 됐고, 집의 오래된 먼지들을 벗겨내고 새로운 자재들로 채워나가면서 집의 모양새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건물은 1층과 2층이 나무 계단으로 이어져 있고, 2층의 높이가 1층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형태를 띠고 있다. 박 관장은 "큰 도로를 향해 난 출입문을 통해 1층이 연결돼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부엌이 있었다"면서 "집 중앙에는 복도가 나 있어 큰 도로를 향해 방 3개가 나란히 나 있고, 미닫이 형태의 문이 있었다"고 리모델링 전의 모습을 설명했다. 또한 "측면으로 난 출입문을 통하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고, 2층에는 화장실과 방이 4개가 있었다"면서 "화장실에 맞닿은 방은 신당처럼 꾸며져 있었다"고 덧붙였다.이 집은 일본식 주거 형태 중 하나인 나가야(長屋) 주택 형태로 지어졌다. 나가야 주택은 한 건물 안에 여러 가구가 밀집해 거주하는 일본식 다세대 주택이라 할 수 있다.나가야 주택인 초연다구박물관은 당초 3채의 집 중 하나였다고 한다. 박 관장은 3채의 집(건물)을 모두 매입할 계획이었지만 마지막 집의 주인을 찾을 수 없어 매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박 관장은 3개의 건물 가운데 2개를 매입하고, 중간에 있던 건물을 모두 헐어 일본식 후정(後庭)으로 조성했다. 박물관 뒤로 난 문을 열고 나가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석탑과 한옥 기와로 둘러싼 정원이 나타난다.그는 "이 집이 처음엔 들어오기 싫을 정도로 내부가 너무 망가져 있었는데, 조금씩 손을 보고 고쳐나가면서 지금의 이 모습이 됐다"며 "이 건축물이 전통 한옥처럼 정교하게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가꿔 나가면서 집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일본에서 건축사를 전공한 재생건축 전문가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는 "나가야 주택은 지금도 일본의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민가 주택"이라며 "개항과 함께 인천을 찾은 사람들의 주거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을 것이고, 넓지 않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연립주택과 같은 나가야 주택이 개항장 일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초연다구박물관엔 9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찾았는데, 상량문에 적힌 글귀를 보고 한 목소리로 "소화7년(1932년)에 지어진 집이 이렇게까지 오래 보존되고 있다는 게 놀랍다"고 감탄을 했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초연다구박물관(인천 중구 신포로 39번길 8-1)은 세로로 긴 직사각형 2층 건물로 현재는 다구(茶具·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도구)를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은 일본인이 지난 1932년 지으면서 건 상량문이 발견됐으며, 해방 이후 적산가옥으로 남아 주택으로 일정 기간 활용됐다. 이 집은 일본식 연립주택인 나가야(長屋) 주택으로, 비슷한 형태의 집 3채가 이어져 있다.초연다구박물관은 현재 차를 끓여 마시는데 필요한 도구를 전시한 박물관과 꽃 차를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물관 1층으로 들어가면 수십 종의 꽃 차들이 병에 담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초연다구박물관은 건축 당시엔 3채의 일본식 연립주택이 이어진 나가야(長屋) 주택 형태였지만, 박영혜 관장이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 하면서 중간의 건물을 허물고 정원을 만들었다. 왼쪽 사진은 초연다구박물관의 모습이며, 오른쪽 사진은 초연다구박물관이 나가야 주택으로 건축됐을 때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건물이다.

2016-11-16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43]해광사(옛 화엄사)

6개 종파 포교위해 절 많이 세워… 도시개발 과정 대부분 사라져개항장은 땅값 비싸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운 답동 일대 자리잡아한국 사찰과 달리 門 없이 진입… 대웅전 1990년대 철거돼 아쉬움전쟁 희생자 등 위패도 안치 "일본 사찰 배치 잘보여줘 관리 필요"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외국인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믿던 종교도 같이 들여왔다. 일각에서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가장 먼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종교였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 때문에 부산이나 원산, 인천 등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한 지역들은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불교, 프랑스에서는 천주교, 미국에서는 감리교, 중국인들은 중국의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들여왔다. 이에 따라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에는 답동성당을 비롯해 내동성당, 내리교회, 중화 기독교 교회 등이 잇따라 세워지게 됐다.그중에서 가장 활발히 포교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 불교다. 당시 일본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이 당시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연관돼 있다.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유신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도 막부 정권과 오랜 세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을 후원했다. 이에 새로 만들어진 유신 정부는 당연히 불교계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불교 역사상 유례없는 탄압을 받게 됐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일본 불교계는 정치권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한다. 해외 포교를 위해 포교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세를 염탐해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당시 해외 이주와 식민지 개척 정책을 펼치던 유신 정부와 불교계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진종·정토종·일련종·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인천 등 개항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파됐다. 이에 전국에는 이들 6개 종파에 의해 167개의 사찰이 설립되게 됐다. 당시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인천의 사정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일본은 철도와 도로부설, 토지조사사업 등 수탈을 위해 각종 사업을 벌였고, 인천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주 일본인에게 유리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행정 구역을 개편해 나갔는데 현재의 인천 중구 답동 일대를 '사정(寺町)'이라고 불렀다.이 일대에는 1899년 '진종'에서 개창한 '동본원사(東本願寺)'를 비롯해 일련종의 '묘각사(妙覺寺)', 정토종의 '인천사', 조동종의 '화엄사' 등의 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능대학교 손장원 교수는 "당시 도심 지역이었던 신포동 등 개항장 일대는 땅값이 비쌌기 때문에 큰 규모의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우면서 비교적 외곽에 위치한 이곳에 밀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이 당시에 만들어진 사찰 대부분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그중 '화엄사'만이 '해광사'로 이름을 바꾸고 아직도 남아있다.7일 오전 인천 중구 신흥동 1가에 있는 '해광사'를 찾았다. 이 절은 1908년 8월 29일 조동종의 사찰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건설된 전형적인 사찰 구조를 띠고 있다.우리나라 전통 사찰 건축 방식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야 대웅전에 도착할 수 있는 구조로 배치돼 있다. 그러나 당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 사찰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별도의 문(門) 없이 곧바로 마당과 대웅전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부분 사찰은 본당과 고리(승려의 거주 장소로 부엌의 기능을 겸하는 건물)를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다른 별도의 시설은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1915년 8월 16일 제정된 '신사원규칙(조선총독부가 규정한 사찰 건립 기준)' 4조에는 '사원에는 본당과 고리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규정돼 있다.부산대학교 이미나 교수는 2012년 발표한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침투와 한국 사찰건축의 변화'라는 논문에서 "포교를 위해 기존에 유치돼 오던 일본인 거류지 도심 내에 별원과 포교소를 설립해야 했으므로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짧은 시간에 포교를 확대해 나가야 했고, 본산에서 자본과 기술력 등을 지원받아야 했기에 최소의 시설만을 인가 해 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혔다.아쉽게도 해광사 대웅전으로 사용됐던 본당은 1990년대 중반 철거돼 없어진 상태다. 건립 초기부터 남아있는 건물은 본당 뒤 편에 위치한 '명부전'이 유일하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해광사 명부전은 일반적인 사찰과 다르게 벽돌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해광사 주지 스님인 화진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는 고리로 사용하던 건물을 해방 이후 능해 스님이 명부전으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인천 지역 오래된 절인 만큼 이곳에서는 많은 위령제가 열렸다. 1950년 4월 6일 경향신문은 '작년 추석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평해호 사망자 130명에 대한 위령제가 열렸다'고 보도했고, 1953년 12월 1일에는 '6·25 전쟁에서 희생된 조일윤 대위 등 526명이 해광사에 안치됐다'고 밝혔다. 지금도 해광사 명부전 내부에는 한국 전쟁 희생자 등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손장원 교수는 "해광사는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 배치를 보여주는 인천의 유일한 사찰"이라며 "아쉽게도 개별적인 건물의 특색은 없지만, 사찰 건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건물이기 때문에 지자체 차원에서의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08년 8월 29일 조동종의 사찰로 만들어진 해광사 명부전.인천 중구 답동 일대는 일본 사찰이 많다는 이유로 '사정(寺町)'이라고 불렸다. 사진은 현재의 답동 일대 전경.(왼쪽)해광사 대웅전 정면에 위치한 석탑. 사찰 내부의 구조물들은 건축 당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해광사 명부전 내부 전경. 한국전 당시 희생됐던 국군 장병들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왼쪽)해광사 진입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석축이 아직도 남아있다.1990년대 중반 철거된 해광사 대웅전. 전형적인 일본 사찰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광사 제공

2016-11-09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42]조선기계제작소 사택

1937년 설립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 전신근무자 수천명 주택난 해소위해 공급한 숙소대부분 철거됐거나 일본식에서 한국식 '변형'송현·화수동에 간부·노동자·기술자 주택 형태조선인 노동력 수탈 근로보국대 합숙소도 의미일본 전시 노동자 주택계획 파악 재조명 필요인천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는 1930년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조선기계제작소, 동양방직, 도쿄시바우라전기 등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섰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인천으로 모여들었고, 일본인들도 공장을 경영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1940년대 군수공장 역할을 하면서 설비를 확장한 조선기계제작소에만 5천여 명이 일했다고 한다. 만석동, 화수동 일대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당시 관공서에서 직원과 일반주민을 위해 주택단지(관영주택)를 공급했고, 공장들은 노동자 기숙사 등 사택을 지었다. 1930~1940년대 등장한 공장 사택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철거됐거나 일본식 건물이 우리나라 건물로 변형됐다. 원형의 모습을 제법 간직하고 있는 몇몇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 있는 공장 사택들은 일제가 남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당시 인천의 산업형태를 가늠케 하는 근대산업유산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지난달 29일 오전 이성진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와 동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공장 사택을 답사했다. 다양한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이 눈에 띄었다.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은 송현동과 화수동에 간부급 직원이 살던 집과 노동자가 살던 집 등으로 나뉘어 남아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1937년 설립된 회사로 인천 만석동에 자리 잡았다. 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의 전신이다. 광산용 기계와 선박 기계를 주력으로 생산했고, 1943년 일본 육군의 잠수함 건조 명령으로 조선소로 전환하게 됐다. 공장의 확충에 따라 인력도 자연스레 증원됐는데, 이에 따라 동구 화수동과 송현동에 근로자 숙소 99동을 신축했다. 일본인 숙소는 54동, 조선인 숙소는 45동이었다. 송현동에는 1940년대 초반 지은 2층짜리 일본식 목조 주택들이 있다. 이성진 대표는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일반직원이 아닌 간부급 직원이 생활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건물 외벽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타일을 붙여 건축 당시 모습이 변형됐으나, 지붕 쪽 환기구 등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방식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송현동 솔빛마을 아파트단지로 걸음을 옮기자, 조선기계제작소 노동자들이 살던 병렬식 연립주택이 나왔다. 모두 8개 동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쪽 2개 동이 철거된 상황이다. 집집이 다닥다닥 붙은 송현동 노동자 사택은 1940년대 노동자를 위해 공급된 대표적인 집단주택의 형태다. 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탓에 자재가 부족해지면서 효율적으로 많은 노동자를 거주시킬 집이 필요했다. 대부분 20㎡가 넘지 않는 좁은 면적이며 공동화장실을 썼다. 지금은 증축 등이 이뤄져 외부 모습은 원형을 찾기 어려우나, 내부는 당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집이 많다고 한다. 일본의 전시(戰時) 노동자 주택 건설 계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실측조사 등 학술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성진 대표는 "노동자 사택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수도국산 아래까지 대규모로 조성됐던 것으로 보인다"며 "산 쪽으로 갈수록 주거환경이 나빠졌고, 산 아래는 판자로 지은 '하꼬방'이었다는 게 당시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일한 노동자의 얘기"라고 말했다. 기술자들이 살던 곳으로 알려진 화수동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은 1937년 공장 건설 초기에 공장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구조는 거실과 방 3개에 화장실을 따로 갖춘 현대식 주택이다. 같은 연립주택이지만, 전시체제에 지은 송현동 노동자 사택과는 대조적이다. 1960년대부터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이경모(77) 씨에 따르면, 이곳으로 이주해올 당시 한국기계공업(두산인프라코어) '과장급'들이 동네에 많이 사는 부촌이었다고 한다. 화수동 조선기계제작소 사택 인근에는 최근까지도 조선기계제작소 근로보국대 합숙소가 남아있었다. 근로보국대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한 노역조직이다. 근로보국대 합숙소는 중앙을 관통하는 복도 좌우로 연달아 비좁은 방이 있는 구조이고, 복도 끝에는 공동 화장실과 식당이 있었다. 일제의 수탈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던 근로보국대 합숙소는 최근 철거돼 인천 동구가 공영주차장을 조성했다. 이성진 대표는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었다"며 "근대산업유산에 대한 가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선기계제작소 사택 이외에도 인천 동구 일대에는 도쿄시바우라전기(현 도시바) 인천공장 사택, 조선철도 공작창 사택, 동양방적(동일방직) 의무실, 조일장유주식회사 공장 등 근대산업유산이 즐비하다. 이 지역 근대산업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조사와 함께 중장기적인 보존·활용방안 등 재조명 작업이 시급한 상황이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6-11-02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41]미쓰비시 줄 사택

부엌·방 2개 등 이어진 형태… 우물·화장실은 공용아침마다 '뒷간' 전쟁에 옆집 코 고는 소리 다들려강점기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사택으로 지어져1942년 경영악화로 미쓰비시에 공장과 함께 넘어가조선인 직원 1천명 달했지만 임금도 제대로 못받아이후 미군부대 근무자·무명 밴드들 모여들어 '북적'인천시 부평구에 삼릉(三菱)이라는 지명이 있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동수역 3번 출구에서 부평2동주민센터 방향으로 5분 가량 걷다 보면 나오는 동네가 삼릉이라고 불린다.삼릉이란 일제강점기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 물자를 제작했던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한자어로, 현재도 이 일대에선 이 지명을 이용한 상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삼릉은 미쓰비시 기업의 로고인 '세 개의 마름모'를 의미한다. 지난 24일 오전 10시께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미쓰비시 줄 사택 일대를 찾았다. 2m 정도 높지 않은 지붕들이 줄지어선 이곳은 태풍이라도 불면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건물은 가로 10m, 세로 30m 가량 되는 넓이의 직사각형 형태로 이어져 10가구가 한 건물에 촘촘히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한 가구 당 30㎡도 채 안 되는 공간인 것이다. 주택 곳곳엔 무너진 지붕과 구멍 뚫린 외벽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자아내고 있었다.미쓰비시 줄 사택은 하나의 건물에 10개의 가구가 이어진 연립 건물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줄 사택(社宅)'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0개 가구가 살 수 있는 연립 건물이 10개가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사택은 87채가 전부다.이 건물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건물의 한쪽 끝 칸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해 둬 주민들이 이용했다. 또 공용 우물이 있어 지하수를 퍼 올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건물 내부를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가면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 하나, 다다미로 된 작은 방 하나 등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다.1955년 미쓰비시 줄 사택에서 태어난 김재선(61) 씨는 "나무 골격으로 돼 있는 건물이 줄지어 쭉 이어져 있었는데, 집 구조는 부엌과 방 두 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었다"며 "집 안에 7~8명이 모여서 살았는데 좁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김 씨는 "당시 어른들은 대부분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집들이 붙어 있고 천장은 쭉 이어져 있다 보니 옆 집 싸우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 등이 그대로 다 들렸다"고 했다. 또 1965년 생으로 5살 때 이 줄 사택으로 이사를 온 이모(51) 씨는 "가장 끝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쓰려면 아침마다 전쟁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또 한 달에 한 번 화장실 오수를 푸는 날은 온 동네에 냄새가 돌았었다"며 "집이 길가보다 조금 낮게 돼 있어서 비가 오면 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다"고 설명했다.이 줄 사택은 당초 미쓰비시가 세운 것은 아니다. 미쓰비시 이전에 1912년 부산에서 세워진 히로나카상회(弘中商會)가 1924년 경성으로 이전하면서 기계판매와 수리를 겸하는 공장을 세웠고, 이후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을 세워 제2공장인 부평공장을 건설하면서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살 수 있는 사택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히로나카상공의 종업원은 1939년 말 사원 38명, 공원 1천180명 등 모두 1천495명에 달했다. 공원 가운데 부평공장에만 1천88명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부평공장에는 기술자양성소와 숙련공 양성을 위한 공원양성소도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잇따른 공장확장과 수익률 저하 등에 따른 경영문제로 1942년 부평공장을 당시 600만 원을 받고 미쓰비시중공업에 양도한다.미쓰비시는 히로나카상공의 부평공장을 인수해 1천여 명에 달하는 근로자가 일하는 미쓰비시제강 상인천제작소를 운영하는데, 이 때 히로나카상공이 세웠던 사택도 같이 넘겨 받았다.이 사택들은 두 곳으로 구분돼 있는데 경인선 남쪽으로 구(舊)사택과 신(新)사택 등으로 불린다. 구사택은 히로나카상공이, 신사택은 미쓰비시제강이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신사택이 있던 곳에는 일부 단독사택과 양성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철거됐다.군수기업이었던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은 1천여 명에 달했으나 이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미쓰비시 줄 사택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미군이 부평을 차지하면서 미군 부대의 일을 하며 사는 한국인들과 무명 밴드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이들은 플로어 밴드(Floor Bands), 하우스 밴드(House Bands), 오픈 밴드(Open Bands) 등으로 불리며 미군 영내 클럽과 부대 주변 클럽들을 오가며 음악 활동을 했다고 한다.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미쓰비시 줄 사택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군수 기업이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인력이 필요했고, 그 인력이 머물 수 있는 거주공간을 마련한 사례"라며 "공용화장실 등을 볼 때 고급 주거 환경은 아니었으나, 돈 없고 힘 없는 시절 한국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한편 부평역사박물관은 부평 일대에서 일본 기업들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노역 수준이나 실생활 조사 결과를 올 해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줄 사택이라고 부르는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일대의 집의 전경 모습이다. 각 건물에는 10가구의 집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87가구만 남아 있다. 이 사택에서 살던 사람들은 히로나카상공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에서 근무했던 조선인들이었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던 공간으로 변모해갔다.줄 사택은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주를 하지 않게 되면서 지붕과 건물 외벽들이 무너져 방치돼 있는 곳이 많다 .

2016-10-26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40]중구 경동 169 '싸리재'

의료기기상 박차영씨 리모델링카페 문 열어 지역명소로 가꿔작업중 오래된 목재·벽체 발견공사기간·비용 늘려 한옥 보존단층에서 1930년 2층으로 증축한옥 개량해 상점 활용 큰 의미LP판·서적·축음기·카메라 등박물관 연상케하는 실내 '눈길'인천 사람들이 '싸리재'라고 부르는 언덕길이 있다.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배를 타고 인천항에서 내린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싸리재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인천 중구 경동 사거리에서 애관극장을 거쳐 배다리로 넘어가는 길이 이어지는 싸리재는 이제는 택시 운전기사들에게서도 점점 잊히고 있는 낯선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싸리재를 배다리방향으로 걷다 보면 길가 왼편에 '싸리재'라는 간판이 걸린 상점을 만날 수 있다. 이 상점을 '카페'나 '커피 전문점'으로 부르거나 '문화공간' 등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이곳 주인은 그냥 '싸리재'라는 이름만 붙였다.인천 중구 경동 169번지에 있는 상점 싸리재는 의료기기 상을 하던 박차영(66)씨가 내부를 다시 꾸며 지난 2013년 10월 문을 연 공간이다. 이 싸리재에서는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오래된 책을 읽어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따금 열리는 문화·예술 관련 강의를 들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근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답사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명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건물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이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오래된 한옥임을 알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목재 등과 벽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이 집은 미음(ㅁ)자 형태로 지여진 1900~192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형태의 전형적인 도심형 개량한옥"이라며 "부지면적이 넓었던 전통 한옥과 달리 좁은 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지어진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말했다.이 건물의 이력을 확인해보면 토지대장에는 1911년부터 기록이 시작되고 건축물대장에는 1920년 9월 9일 신축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0~19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애초 건물은 단층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길가와 닿아있는 미음(ㅁ)자 한변은 2층으로 되어있다. 2층 건물에 있는 상량문이 1930년에 증축한 사실을 알려준다.1930년에 증축된 1~2층의 건축 양식을 보면 일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 한옥의 방식도 아닌 여러 방법이 혼재되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전문가들은 한옥을 개량해 2층 상점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이 집의 가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배 전시교육부장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인 '축현'이 개항 이후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보면 싸리재 길은 인적이 드문 작은 시골 길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싸리재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시점은 이 고개가 개항장에서 서울 가는 길로 이용되면서부터"라고 설명했다. 또 "개항장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조계 외곽인 조선인 마을을 잠식해 갔고, 그곳의 조선인들은 싸리재 너머로 밀려났는데, 밀려난 조선인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매일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며 "이 길은 개항장 안팎으로 형성된 번화가와 고개 너머 가난한 조선인 마을을 이어주는 통로이자 경계가 됐다"고 덧붙였다.지난 18일 이 싸리재 고갯길을 지키고 있는 상점 '싸리재'를 찾았다.이 공간에는 오래된 LP 레코드판, 고서적, 축음기, 스피커, 카메라 등이 가득해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상점 주인 박씨는 직접 모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주변 지인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다고 한다.박씨는 이 자리에서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하며 제법 큰 돈도 만졌다. 병원 등 거래처를 관리하는 영업사원을 여럿 두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IMF를 겪으며 내리막을 걸었다. 혼자 겨우겨우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오던 박씨는 카페 문을 열기로 하고 2013년 공사를 시작했다. 박씨가 처음부터 오래된 한옥을 보존하고 가치 있게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장사를 시작하려 건물을 수리하던 중 집의 내력과 마주하면서부터 일이 커졌다. 건물을 뜯어내니 오래된 목재와 벽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함부로 공사해선 안 되겠다 싶어 전문가를 찾아갔다."일이 커졌죠. 20일로 계획했던 공사 기간은 5개월로 늘어났고, 공사비용도 애초 980만원 견적에서 7천만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갑자기 오래된 한옥을 살려보겠다는 저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미쳤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공사 내내 들리던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공사가 끝나고 가게 문을 열자 탄성으로 바뀌었다. 박씨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는 "아름다운 보석이 보석함에 있을 때보다는 누군가가 그 보석을 썼을 때 더 빛이 발하는 법"이라며 "개인적인 욕심에 공간을 만들긴 했지만, 이 곳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또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천에 이런 공간 하나쯤은 오랜 시간 계속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명소로 가꿔가겠다"고 덧붙였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중구 경동 169번지에 있는 '싸리재'의 정면(왼쪽 사진)과 후면. 1900년대 주거용으로 지어진 도심형 개량한옥이다. 싸리재 길에 사람의 왕래가 늘자 상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1930년 건물 일부를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① 주방과 의료기기 판매점 등으로 사용하는 1층② 천장의 목재가 잘 드러나는 2층의 모습③ 위 아래층을 연결하는 계단 벽면에 있는 책꽂이에 전시된 구형 사진기④ 명품 스피커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⑤ 박차영 사장이 도보여행에 사용한 지도와 메모⑥1911년 Victor사가 생산한 나팔 축음기 ⑦ 2층 벽면에 진열된 문예지들의 초판본/아이클릭아트

2016-10-19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39]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개항이후 日 해운회사들 속속 진출인천항 물류운송 독점업체 중 한곳공공시설 아닌데 원형 보존돼 의미현재 아트플랫폼 사무·자료실 활용입구 상부 그리스 신전처럼 '의양풍'평면 같은 모임지붕 단일 트러스로사무실 바닥 공기통로로 습도 조절해방후엔 항만 관련 업무용 건물로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은 국제 물자운송의 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인천항에서 강화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항구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에 따라 인천에는 일본 해운 회사들의 본점 혹은 지점이 설치됐다.호리 리키타로가 세운 호리 기선회사 본점을 비롯해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 인천지점, 오사카상선 인천지점 등은 회사소유 기선(汽船)으로 인천항의 물류운송을 독점했다. 이들의 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에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선박으로도 사용됐다.현재 도쿄에 본사를 두고 해운업을 계속하고 있는 일본우선주식회사는 1886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인천지점 건물로 인해 인천시민에겐 익숙한 사명(社名)이다.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 중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종교 시설과 공공시설이 아닌 민간 소유의 건물이 이렇게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43호로 지정됐다.현재엔 내부 리모델링 후 복합문화공간 인천아트플랫폼의 사무실과 자료실로 활용되고 있다.한양대 건축학과 동아시아 건축역사 연구실이 펴낸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기록화조사보고서'에선 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인천 중구 해안동 1가 9에 1883년 4월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됐다.1885년 10월에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돼 일본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되자, 1886년 7월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는 인천지점으로 승격됐다.'인천사정'에 따르면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가 인천지점으로 승격되던 때 지금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또한, 현재 건물은 벽체가 타일로 마감되어 있으나, 과거의 사진 자료와 '인천사정'의 기록 등에선 건립 당시엔 붉은 벽돌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빨간 색깔 벽돌조의 큰 건물 몇 동이 인천항 해안의 정면에 우뚝 솟아서 제물포 일대의 장관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일본우선회사의 인천지점이다. 메이지 16년(1883년) 4월 우편기선 미쓰비시 회사 부산지점의 출장소로 이곳에 처음 설치된 후, 메이지 18년(1885년) 10월 공동운수회사와 합병을 결정하고 이를 일본우선회사가 인계하였다. 메이지 19년(1886년)에 일본거류지 1호지에서 6호지에 이르는 대지에 점포, 창고와 사택 신축에 착수하여 8월 2일에 완성하여 지금의 가옥이 만들어졌다.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 '인천사정' 중에서1899년에는 지배인 1명, 점원 3명 등 모두 4명의 직원이 근무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건물의 대지면적은 396.7㎡이며, 단층인 건물의 연면적은 244.63㎡이다. 19세기 말 업무용 건축물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며, 건축재료는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최근 인천아트플랫폼에 취재 협조를 구한 후 건물을 찾았다. 한중문화관 방향의 건물 정면은 좌우 대칭으로 처리됐다. 좌우 대칭을 강조하기 위해 출입구 상부는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두드러지는 특색인 페디먼트(Pediment)로 처리된 의양풍(儀洋風)의 건물이다. 세로 방향의 창문을 두어 수직성을 강조했고, 정면부 지붕에는 패러핏(Parapet)을 설치해 앞에서 보면 평 슬라브(Slab) 건물로 보이지만, 실제는 모임지붕의 건물이다. 일본에서 펴낸 '일본우선 변천'에 따르면 지붕구조에 사용된 트러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평면을 단일 트러스로 구성했다.천장 위에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된 목재함과 이와 연관된 내벽 구성으로 인해 독특한 평면 형태를 띠고 있다. 입면 구성에 있어서 서양 고전건축 중에서도 도릭 양식(Doric Order)을 모방한 절충주의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 당시인 1880년대 후반의 창호와 조적(組積)벽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사무실 안쪽에 설치된 커다란 금고는 회사의 규모를 알려주는 듯했다. 20㎝ 정도의 두꺼운 철제문을 단 금고는 2~3평 정도의 큰 규모였다. 건물 뒤를 봤을 때 2층 형태이기 때문에 사무실 지하 공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하실은 없다. 다만, 사무실 바닥 쪽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어서 이를 통해 사무실 전반에 알맞은 습도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호리 기선회사, 조선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1924년) 등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에는 동화실업주식회사, 천신항업, 대흥공사 등 항만관련 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근대 해운 및 유통 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인 것이다.근대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이 일대 건축물이 주로 은행이나 관공서 등이었던데 반해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격식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회사의 업무용 건물이라는데 의미가 있다"면서 "근대기 사무소 건축양식을 알려주는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일제강점기에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호리 기선회사, 조선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1924년) 등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에는 동화실업주식회사, 천신항업, 대흥공사 등 항만관련 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근대 해운 및 유통 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이다.건물의 지하실은 없으며, 사무실 바닥 쪽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내부 모습. 높은 천장이 눈에 띈다.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의 금고. 20㎝ 가량의 철제문과 2~3평 정도의 규모로 되어 있다.일제강점기 인천항을 통해 일본의 군수물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의 좌측 상단에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이 잘 드러나 있다. 점포 건물 외에도 현재 남아있지 않은 창고와 사택 등도 보인다.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

2016-10-12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38] 짜장면 박물관 '공화춘'

1900년대 초 선린동 위치한 '산동회관'처음으로 메뉴에 짜장면 올린 중식당부두서 일하던 中 산둥지방 중국인들간단하게 끼니 때우려고 만들어 먹어외벽 모자이크 타일 변화과정 보여줘2층은 마당을 방들이 둘러싼 '합원식'中전통건축에 서양기법 결합 큰 의미1983년 폐업이후 관리안돼 내부 훼손인천항이 개항한 1880년대 인천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많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상권을 침탈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과 중국의 상인이나 조선인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온 서양인도 있었지만, 단지 돈을 벌 목적으로 인천에 자리 잡기 시작한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온 쿠리(苦力·하역 인부)들도 있었다.시인 박팔양은 '인천항'이라는 시에서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로 붐비던 부두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인천항 부두에서 일하던 산둥 지방 중국인들은 부둣가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저임금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차오장멘(炒醬麵)', 우리나라 말로는 짜장면이다. 인천 중구 '짜장면 박물관' 관계자는 "초기 짜장면은 삶은 국수에 된장과 채소를 얹어 비벼 먹는 화교들의 '고향음식'이었다"며 "돈을 벌기 위해 인천에 온 산둥지방 화교들이 고향 생각이 간절할 때 많이 요리해 먹던 음식이었다"고 설명했다.이렇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짜장면은 고급 중식당들의 메뉴에 이름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중국 요리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1900년대 초 중구 선린동 근처에 있었던 '산동회관'은 이 짜장면을 처음으로 메뉴에 올린 중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나라 조계지인 중구 선린동 주변에는 중국인 무역상을 위해 '항잔'(창고업을 겸한 중매업)이라는 상점이 많았는데 '산동회관'도 그중 하나였다.'산동회관'을 세운 우희광(于希光·1886~1949)은 1912년 중국 신해혁명(1911년)이 일어나 청조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공화국 원년의 봄'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게이름을 바꿨다. 바뀐 가게 이름은 짜장면을 처음으로 판매한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共和春)'이다.27일 오전 지금은 중구 짜장면 박물관이 조성된 공화춘을 방문했다. 당시 산동회관은 현재 짜장면 박물관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의 장소인 중구 선린동 38로 옮겨 온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17년 현재의 장소인 선린동 38의1 건물을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명의 화교가 공동으로 매입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4년 7월의 인천지역 화교 상인 명부에 중화요리점으로 공화춘이 등재된 점으로 미뤄 공화춘은 이르면 1917년께, 늦어도 1934년께는 지금의 장소에서 중화요리점 영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공화춘 외부는 현재에도 건축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돌로 마감된 외부는 곳곳에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돼 있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부터 현재까지 몇 번의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전형적인 중국식 중정형 건물의 특색을 갖고 있는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붉은색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계단은 연회장과 출입구를 이어주던 것으로 당시 공화춘은 1층은 주방으로 사용됐고, 2층은 연회장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공화춘이 당시 고급 중화요리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김윤식 인천 문화재단 대표는 "인천시청이 현재 중구청 자리에 있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화춘은 인근에 중화루와 함께 고관대작들만 출입하는 최고급 중화요리점이었다"며 "경인지방 5대 중화요리점으로 명성을 유지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공화춘 2층은 합원식(合院式)으로 만들어졌다. 베이징에서 광둥까지의 민가 대부분의 건물에서 활용된 '합원식' 구조는 가운데 마당을 방들이 둘러싼 형태로 돼 있다. 현재 공화춘도 가운데 계단을 여러 곳의 방이 둘러싼 구조로 돼 있다. 건물 내부 기둥과 벽, 문 등에 운문(雲文), 용문(龍文), 봉황문(鳳凰文) 등 길상 문양과 수(壽), 복(福), 록(綠), 희(禧), 춘(春), 하(夏), 추(秋), 동(冬) 등의 문자 문양을 사용하는 등 중국 산둥지방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식을 했다. 하지만 왕대공 목조 트러스 구조로 돼 있고, 영국식 벽돌쌓기 등 당시 서양에서 많이 사용되던 건축 기법이 사용되기도 했다.한양대 건축학과 한동수 교수는 2008년 발표한 '인천 선린동 공화춘의 건축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공화춘은 서양의 건축기법과 중국 전통건축기법이 결합돼 만들어진 유일한 청국 조계지 건물로 그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공화춘 내부는 초창기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영업을 목적으로 하는 식당이었던 탓에 중화요리점 운영 당시에도 내부 수리가 많이 이뤄졌고, 지난 1983년 가게 문을 닫은 직후 장기간 방치되면서 건물 내부가 많이 훼손된 탓이다. 다행히 지난 2006년 인천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고, 2012년 짜장면 박물관이 만들어지면서 보전과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강덕우 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당시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던 데다 개인이 소유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내부가 변경되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건물이 철거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1983년 가게가 폐업할 당시에 지자체에서 관심을 갖고 나섰으면 더 잘 보전돼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짜장면을 처음으로 메뉴에 올린 중식당 '공화춘(共和春)'은 서양의 건축기법과 중국 전통건축기법이 결합돼 만들어진 유일한 청국 조계지 건물로 평가된다. 사진은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공화춘 건물로 현재는 짜장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1950년대 공화춘 전경. /인천 역사자료관 제공당시 공화춘 내부를 재연한 짜장면 박물관 모습.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과거 공화춘 간판 모습.

2016-09-28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37] 교동도 대룡시장

일본식 건물 중심으로 1층 점포 신·증축 통해 규모 키워이발소·약국·양복점 등 60년 세월 상인과 함께 나이들어시장 호황기 들어선 '방석집' 자리는 대부분 빈채로 방치고향 돌아갈 날 기다리던 1세대 하나 둘 세상 떠 활력잃어신발가게·문구점 이어 마지막 시계방도 빈 점포로 남아역사·문화적 가치 보존위해 시장 활성화 대책 마련해야도심 속 전통시장 대부분은'시설 현대화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아치형 비 가림막을 씌우고, 각 점포를 복제품처럼 리모델링해 개성을 잃은 지 오래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대룡시장은 태어날 적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통시장이다.시장 건물들은 딱히 새 단장을 하지 않은 채로 60년 넘게 가게를 지켜온 상인들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대룡시장은 국내 대표적인 실향민 장터다. 한국전쟁 때 교동도에는 황해도 연안지역에서 3만여 명의 피란민이 내려왔다고 한다.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동도에 머물며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으나, 남북 분단의 현실이 그들을 '실향민'으로 만들었다. 실향민 상당수는 교동도를 떠났지만, 고향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들은 섬에 남아 삶의 터전을 일궜다.교동도에서 농사 지을 땅이 없는 실향민들은 생계수단으로 장사를 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장마당이 지금의 대룡시장으로 커갔다. 40곳 남짓한 점포가 들어선 시장 건물들 대부분도 한국전쟁 이후 지어졌다.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에도 교동도에서는 꽤 큰집에 속하는 2층짜리 일본식 주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룡시장 한가운데인 시장사거리를 중심으로 2층 다다미방이 딸린 일본식 건축물 3채가 점포로 쓰이고 있다.대룡시장은 일본식 건축물 양옆으로 1층짜리 점포를 다닥다닥 증축·신축해가며 규모를 키웠다. 시장사거리 안쪽으로도 1층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곳곳에 시장골목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교동면사무소가 읍내리에서 대룡시장이 있는 대룡리로 옮겨지면서 시장 일대가 섬의 중심지가 됐다. 현재 면사무소는 교동초등학교 근처에 신축해 이전했는데, 시장 안에는 옛 면사무소 건물이 남아있다. 옛 면사무소 건물 옥상 철탑에 달린 낡은 대민방송용 확성기들이 눈에 띈다. 실향민들이 대룡리에 많이 모여 살게 된 까닭도 한국전쟁 때 피란민 연락소가 대룡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교동도에는 장터가 없었다. 교동도 주민들의 생활권은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이어서 큰 장터가 있는 연안읍으로 장을 보러 갔다. 교동도에서 연백군은 배를 타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고, 썰물 때는 헤엄쳐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다. 섬마을의 낡아빠진 건축물들이 모인 공간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대룡시장은 건물마다 자리 잡은 오래된 가게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진정한 가치를 발산하고 있다. 이발소, 정육점, 잡화점, 시계방, 약국, 양복점, 신발가게, 철물점, 다방 등 저마다 수십 년의 연륜을 물씬 풍기는 가게들의 낡음에서 정겨움이 묻어났다. 1·4후퇴 때 연백군에서 피란 나온 80대 할머니가 지키고 있는 대룡잡화점 마루 밑에는 작은 아궁이가 있어 추운 겨울도 날 수 있다. 교동도 토박이인 나의환(85) 할아버지가 5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동산약방에서는 가게와 나이가 같은 유리창 달린 하얀색 약장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의환 할아버지는 "과거 시장이 클 때는 약국이 다섯 군데나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약방만 남았다"고 했다. 대룡시장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 근대화사업이 활발하던 1970년대에 호황을 누렸다. 교동도 곳곳에서 저수지와 방조제 공사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섬에 건설인력이 대거 몰렸다고 한다. 현재 3천명이 조금 안 되는 교동도 인구가 1975년에는 1만1천200여 명에 달했다. 대룡시장 골목골목에는 여성 접대부를 거느리는 일명 '방석집'이 10곳 넘게 있었고, 여인숙도 많았다고 한다. 방석집이 있던 시장 골목 안쪽 건물들은 현재 대부분 비어있는 채로 방치돼 있는데, '미자네', '엔젤식당' 등 당시 가게이름으로 추정되는 간판들만 덩그러니 건물에 붙어있다. 대룡시장 한가운데에는 1970년대 호황기 때 지어진 시장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자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옛 교동상회 건물이 있다. 당시 '교동에서 살 수 없는 물건은 교동상회에서 사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상점으로 '교동도의 백화점' 역할을 했다고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1층에는 빵집이, 2층에는 다방이 영업을 하고 있다. 대룡시장을 이끌어온 주역인 실향민 1세대들이 최근 하나둘씩 세상을 뜨면서 시장이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연백군에서 피란 나온 신발가게 주인은 지난해 봄 별세해 가게 문이 닫혔다. 인근에 있는 황해도 출신 노부부가 운영하던 문구점도 2014년부터 주인을 잃은 빈 점포로 남아있다. 교동도의 마지막 시계방을 운영하던 황세환(1939년생) 할아버지는 올해 4월 세상을 떴다. 시계방 출입문 유리 위에는 누군가가 황 할아버지를 추억하기 위해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종이를 붙여놨지만, 문이 굳게 잠긴 가게 안에는 각종 시계와 수리기구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백식 냉면을 파는 대풍식당 같은 일부 가게는 실향민 2세대가 이어받아 계속 운영하고 있지만, 앞으로 대룡시장에는 빈 점포가 점점 늘어날 우려가 크다. 시장을 보존하고 활성화할 대책이 시급한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동도에 유일하게 남은 양복점 주인 전경수(75) 할아버지는 "시장을 지켜온 실향민들이 돌아가시면서 가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몇 년 후에는 시장의 수명이 다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교동도 토박이이자 향토사학자인 한기출 교동역사·문화발전협의회장은 "가게마다 옛 추억과 실향민의 사연이 깃든 대룡시장은 후세를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자산"이라며 "늦기 전에 대룡시장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보존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국내 대표적인 실향민 장터인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수십 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 중 대룡잡화점국내 대표적인 실향민 장터인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수십 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 중 왼쪽부터 동산약방, 옛 교동상회, 교동이발관국내 대표적인 실향민 장터인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수십 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 중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성양복점, 철물점 , 일본식 건축물에 들어선 신발가게, 시계방

2016-09-21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36] 강화 솔정리 고씨가옥

방앗간·양조장 운영 집안에 창고가 있을 정도 전통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 더해 가림막 설치해놓은 우물·서양식 목욕시설 눈길 아궁이 구멍있는 지과거 농촌에선 '방앗간'과 '양조장'을 부(富)의 상징으로 여겼다. 곡식이 귀했던 시절, 누렇게 익은 볍씨가 하얀 쌀로 태어나는 방앗간과 쌀겨로 구수한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장은 풍요로움을 의미했던 것이다. 강화도와 같이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에도 방앗간과 양조장이 부를 대표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강화도에는 홍씨, 김씨, 고씨 등 3대 부잣집으로 일컫는 부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방앗간과 양조장을 운영했던 강화 고씨(高氏)가 살던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도 이 중 하나다. 인천 강화군 강화대로 674번길 23의 4(송해면)에 위치한 고씨 가옥은 강화고인돌체육관에서 강화대로를 따라 600여m를 가다 송해우체국을 지나 우측으로 200여m를 가다 보면 넓은 대지 위에 있다. 이 집은 강화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 등으로 인삼 무역을 했던 고(故) 고대섭이 1941년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지난 2일 오전 고대섭의 증손자 고영한(34) 씨로부터 고씨 가옥에 대한 상세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인삼무역을 하면서 중국, 일본 등을 비롯해 서울·개성·제주도 등 국내외를 많이 다니셨다고 들었다"며 "이 집은 증조부께서 어느 날 개성에 사업차 방문을 했다가 봤던 집이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고씨 가옥은 목조로 지어진 주택으로,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도입됐다는 평가를 받는다.고씨 가옥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이어진 담장을 따라 좌·우측 등 3면에 문을 냈고, 안쪽으로는 마당을 중심에 두고 '기역(ㄱ)'자 형 안채와 '니은(ㄴ)'자 형 사랑채 등이 둘러싼 '미음(ㅁ)'자 한옥을 하고 있다.솟을대문과 맞닿아 있는 곳에는 과거 방앗간으로 사용했다는 청색 슬레이트의 지붕 건물이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니은(ㄴ)'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타나는데, 사랑채에 있던 누마루는 수십 년 전 화재로 소실됐다.고씨 가옥을 지을 때 사용한 돌과 상량문 등의 목재는 황해도에서 공수했다고 한다. 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집을 짓기 위해 건축 재료를 전부 황해도에서 배로 실어 날랐다고 하더라"며 "당시 건축 자재를 실어 날랐던 사람들에게 '배를 타고 오는데 이 집을 지을 터에서 도깨비 불빛이 올라와 돈을 많이 벌겠구나 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고씨 가옥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에 중정(中庭)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다. 또 다다미가 깔렸던 일본식 다실(茶室)도 있다. 마당에는 깊이가 10m가량의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기역(ㄱ)'자 형태의 가림벽이 세워져 있었다. 이 가림벽은 외부에서 우물에서 빨래 등을 하는 여성들을 볼 수 없게 가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고씨 가옥의 특징 중 하나는 땅을 2m가량 파낸 후 지은 점이다. 기단 아래에 펼쳐진 지하 공간에는 각 방마다 놓인 온돌을 데우는 아궁이 구멍이 있었으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집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고씨 가족은 한국 전쟁 당시 지하에 숨은 뒤 내려오는 계단을 철문으로 봉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아울러 고씨 가옥의 별채에는 서양식 목욕시설도 설치돼 있는데, 설치연도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지름 1.5m 규모의 무쇠솥이 마치 지금의 현대식 욕조와 같은 역할을 했다. 건물 밖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울 수 있었다.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방앗간을 하신 뒤로 양조장, 인삼재배, 직조공장 등을 크게 하면서 사업이 번성했다고 옛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강화도에 이 정도의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집을 대궐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도윤수 동국대학교 불교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은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기존 강화에 토착 세력이 거주했던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부유한 건축 양식이 눈에 띈다"며 "창문이나 난간 등에 장식을 한 것들이 서울이나 개성 등 특정 지역의 부유한 상인들의 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식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화의 기존 민가들은 집 안에 창고를 들일 만큼 집을 크게 짓지 않았는데, 고씨 가옥은 담장 내 방앗간과 양조장 등을 운영했던 건물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강화도가 고인돌과 돈대를 중심으로 한 관방유적 등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내륙과 달리 선사시대 때부터 강화에서는 건축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며 "강화에 있는 주택들을 개별 건축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했는지 조명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씨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 양식이 혼합되면서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지난 2006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강화 3대 부잣집의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 방앗간, 양조장, 인삼무역, 직조장 등을 운영했던 고(故) 고대섭 씨가 건축한 집이다. 이 집은 담장으로 둘러싼 건물을 중심으로 앞과 좌, 우 양 쪽에 3개의 창고 건물이 지어져 있어 당시 집주인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왼쪽 흑백사진은 고대섭 씨가 운영했던 양조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개성에 있는 한옥을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씨 가옥은 화려한 창틀과 별도의 목욕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미뤄봤을 때 고대섭 씨가 상당한 재력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중정, 대청 등이다.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개성에 있는 한옥을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씨 가옥은 화려한 창틀과 별도의 목욕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미뤄봤을 때 고대섭 씨가 상당한 재력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욕실, 안방과 부엌 등이다.

2016-09-07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35] 옛 인천흥업주식회사(중구 용동 152-6)

병원·새마을금고 등으로 사용 현재는 '살림집'사무실로 쓰던 2층은 천장도 뜯겨진채 텅 비어당시 '인천 부자' 최승우·장석우·장광순 등…어떻게 운영했는지 정확한 자료 찾기 힘들어가치 제대로 연구 안됐지만 원형 보존돼 다행역사적 가치가 있어 후대에 의해 관리되며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그 가치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모습을 보존하며 가치를 만들어가는 건축물도 있다. 인천 중구 용동 152-6에 있는 '인천흥업주식회사' 건물이 후자의 경우다.용동 '큰우물'에서 인천기독병원 방향으로 난 언덕길을 20여m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행인의 발길을 붙잡는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에는 '인천흥업○○회사'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역사적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 잠시 서 있으면 발길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에 담아 가는 행인의 모습을 쉽게 만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인천지역 향토사나 근대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개인 블로그라면 어디서나 이 건물의 바깥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건물의 내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18일 이곳(중구 용동 152-6)을 찾아갔다.지금은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엔 행정사 유한규(79)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거절하던 유씨를 어렵게 설득한 끝에 그로부터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유씨가 이 건물을 매입한 것은 벌써 20여년 전인 1979년의 일로, 그가 520만원을 들여 이 건물의 주인이 된 후로 현재까지 건물 주인이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개인이 활용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해 보이는 이 건물을 무슨 이유에서 매입했는지 물었다. 그는 "인천에 옛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하나 둘 사라지고 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 건물을 구입하게 됐다"고 답했다. 또 인천의 부자였던 장광순씨의 부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유씨는 옛 체신부 전신전화국 도수계 촬영기사로 20년가까이 근무했는데, 벌이가 괜찮았고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도수계 촬영기사는 전화국이 전화 가입자의 전화이용요금을 매기는 근거가 되는 전자식 기계인 '도수계(콜미터)'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기록을 남기는 게 주요 업무였는데, 그가 담당한 곳이 많을 때는 10여곳이 넘었다고 한다.그의 안내를 받아 건물 1~2층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지금 1층은 유씨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살림집으로 이용하기 전에는 병원과 새마을금고 등이 이 공간을 사용했다고 했다. 건물 2층은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었는데, 큰 회의실과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텅 비어있고 바닥과 천장이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유씨는 건물 2층의 촬영만을 허락했다. 그는 "건물을 매입한 이후 손을 댄 곳이 거의 없다"며 "여건이 허락지 않아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이 건물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분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지금 이 건물에는 '인천흥업○○회사'라는 글자가 남아있지만 떨어진 두 글자는 '주식'인데, 10여년전 떨어진 것을 유씨가 보관하다가 분실했다고 한다.옛 토지대장을 확인해 보면 이 건물(부지)의 최초 주인은 '인천흥업주식회사'로 나오며 1938년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두 번째 주인으로 '재단법인 경기도 향교재단'이 1974년부터 소유했고, 이후 유씨가 1979년 경기도 향교재단으로부터 이를 매입하며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인천흥업주식회사는 서민을 상대로 대출을 하며 돈을 굴리던 금융회사다. 1937년판 조선은행주식회사조합요록을 보면 인천흥업주식회사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기록을 보면 인천흥업주식회사는 금융신탁 업종의 회사로 설립일이 1935년 11월 16일, 대표자는 최승우, 회사 목적은 '담보대부, 신용대부, 기타 금융업 일체'로 나와 있다.발행 주식수는 3천주로 주주의 인원은 49명, 주요 주주로는 최승우(520), 장석우(357), 장광순(332), 인천물산객주조합(330), 정희조(296)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주주들의 이름과 인천흥업주식회사와 관련된 기록은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의 '옛 인천의 부자는 누구 누구?' 편에서 언급된다."…우리 부자를 찾아보자. 재산 50만원을 최고로하고, 최저 10만원 정도의 부자를 차례로 든다면, 심능덕 씨를 필두로 구창조, 장석우, 최승우, 정치국, 정영화, 정순택, 유군성, 주병기, 주명서, 장세익 씨 등이다. (중략) 자본금 2만원과 은행 대부금 2만원으로 10여명의 부호들이 1백원에 대한 하루의 이자를 6전으로 융자를 했던 간이 고급 금융 기관인 '인천신용조합'이 닭전거리(지금의 신포동)에서 간판을 걸고 군림했었으니 일제하의 우리 부호들이 얼마나 미약했었던가를 엿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주인도 바뀐 채 '인천흥업주식회사'라는 음각 간판만이 용동 '크라운예식장' 옆 2층 건물에 달려 있을 뿐, 쓸쓸하게 역사의 변천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인천흥업주식회사의 주주인 장석우, 최승우, 장광순 등의 이름이 고일 선생의 저서에 '인천 부자'로 언급되고 있고 인천신용조합이 인천흥업주식회사로 이름과 주인이 바뀌었다고 나와 있다.주주들을 설명하자면 최승우는 인천동산학교의 설립자로 양조장을 운영해 부를 쌓았고, 장석우는 인천박문학교 전신인 소화학교 설립자로 포목상을 운영해 지역 부자가 됐다고 한다. 장광순씨는 장석우씨의 장남이다.하지만 아쉽게도 인천의 부자로 알려진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인천흥업주식회사를 세우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물이 아직도 모습을 유지하며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전문위원은 "이 건물에 대해 정확히 연구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척 다행으로 여겨진다"며 "이 건물이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또 어떤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잘 관리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중구 용동 152-6에 위치한 '인천흥업주식회사' 건물로 109.1㎡의 대지에 연면적은 128.93㎡로 지어진 지상 2층 조적조 함석지붕 건물이다. 손장원의 책 '다시쓰는 인천 근대 건축'에는 "인천미두취인소,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1930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건물 윗면에는 정면과 좌우측에 패러핏(건물 상단 가장자리를 보호하는 벽)을 설치해 함석 지붕이 감춰져 있어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면에서 보면 함석 지붕이 보이며 건물 2층 내부는 비어있다.인천 중구 용동 152-6에 위치한 '인천흥업주식회사' 건물로 109.1㎡의 대지에 연면적은 128.93㎡로 지어진 지상 2층 조적조 함석지붕 건물이다. 손장원의 책 '다시쓰는 인천 근대 건축'에는 "인천미두취인소,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1930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건물 윗면에는 정면과 좌우측에 패러핏(건물 상단 가장자리를 보호하는 벽)을 설치해 함석 지붕이 감춰져 있어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면에서 보면 함석 지붕이 보이며 건물 2층 내부는 비어있다./아이클릭아트

2016-08-31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34] 오래된 해안동 창고들 '문화 거점으로'

1907년 창고업자 등장붉은 벽 삼각지붕 형태규모 차이 있지만 비슷아트플랫폼 공연장에한국근대문학관 이어아카이브 카페 빙고도얼음창고서 '환골탈태'인천 중구 해안동은 개항 후 오랫동안 서구 문물 도입의 전초기지였다. 바다와 연계된 항만도시와 전통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업도시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인천의 도심 역할을 해왔다. 이 일대는 세계 열강이 통상의 목적을 가지고 자유롭게 거주하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특정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결정된 지역으로서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된 곳이며, 아직까지 독특한 건물 양식들과 도시계획의 흔적들이 잔존해 있는 장소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이러한 인천의 근현대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인천문화재단 5주년 백서' 중에서1883년 인천항의 개항 이후 개항장(해안동) 주변에는 당대 들어선 근대 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붉은 벽돌에 삼각형 지붕을 한 창고 건물도 이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인천에서 처음으로 건설된 창고는 1884년 마쓰비시 기선회사의 창고이다. 1890년 인천미두취인소가 창고를 만든 뒤 많은 창고들이 지어졌다. 하지만 당시 건설된 창고는 각 업체의 화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창고를 임대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인천에 창고업자가 출현한 것은 1907년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인천출장소가 설치되면서부터다.1919년에는 일본인이 주축이 된 인천창고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듬해 인천창고주식회사는 조선실업은행 인천지점을 매수했으며, 1924년 조선실업은행 인천지점이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으로 통합되면서 지역 창고업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이 독점했다.1930년부터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가 대주주가 돼 창립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가 창고업을 독점했다. 1943년 운송면허를 얻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61년 한국운송주식회사를 흡수했으며, 이듬해 대한통운주식회사 인천지점으로 탈바꿈했다.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인천지점은 21개 동(7천484.3㎡·2천264평)의 창고를 소유했다. 그 밖에도 당시 은행과 해운업자, 개인 소유의 창고가 56개 동(2만5천401.8㎡·7천684평)에 달했다고 한다.인천에 지어진 창고들은 규모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의 C동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은 대한통운 창고를 리모델링 한 것이다. 건물의 기본 구조와 내부공간을 원형대로 유지하되, 복원보다 보수에 비중을 둔 리모델링을 거쳐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건물의 건축연대에 대한 건축대장의 기록은 1948년이지만, 지역 학계에선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유추한다.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 재능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인천 근대 건축'에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매립 이후 부두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이 건물을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손 교수는 "이 일대는 1899년 5월 말에 매립됐고, 매립지 1만3천223.3㎡(4천평) 중 절반에 해당하는 6천611.6㎡(2천평)를 창고와 시장 부지로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이 건물도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건물은 적벽돌로 벽체를 구성하고 지붕은 트러스를 올렸다. 현재 대한통운 창고를 리모델링한 C동 공연장을 비롯해 인천아트플랫폼은 13개 동의 건물로 이뤄졌으며, 공연과 전시, 공방, 예술인 레지던시 등의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C동 공연장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건물들도 예전 건물과 같은 붉은 벽돌 재료를 사용하고 옛 건물의 형태를 적용해 일관되게 꾸민 인천아트플랫폼의 거리는 2009년 완공되었는데도 오래전부터 있었던 동네인 것처럼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하다.인천 중구청으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두고 인천아트플랫폼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근대문학관도 옛 창고 4개 동을 리모델링해서 2013년 탄생했다. 4개 동 중 기획전시실로 쓰이는 건물은 1892년에 지어졌다. 그 옆 상설전시실 건물 두 동도 1930~1940년대에 건립됐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창고는 연대 미상이다. 이들 창고 건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쌀 창고, 김치 공장 등으로 쓰임새가 다양하게 변했으며, 현재 우리 근대 문학의 보고로 현대인들과 조우하고 있다.인천아트플랫폼과 한국근대문학관을 설계한 황순우 (주)건축사무소 바인 대표는 "100년이 넘은 건물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닌 과거 일상의 삶을 담으면서 또 다른 100년을 목표로 재생시키고 싶었다"면서 "서양과 동양, 중앙과 지방이라는 갈등 구조 속에서 이뤄진 근대화(시간과 관계 속에서 충돌한 예술)와 함께 동시대 예술을 다룰 수 있는 공간 등 다의적 공간으로 두 공간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인천 중구 신포동의 아카이브 카페 '빙고(氷庫)' 또한 1950년대 얼음 창고가 환골탈태한 경우이다. 얼음 창고의 1층은 아카이브 카페, 2층은 건축재생공방이 자리잡고 있다. 건축재생공방 이의중 대표와 함께 그의 부인 이규희씨는 카페 사장을 맡고 있다. '빙고'를 함께 운영하는 부부가 거주하는 집은 '인천 고택기행' 5편에서 소개된 중구 경동 127 한옥(경인일보 2월4일자 9면 보도)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오래된 것들은 향수를 자극한다. 첨단 건축의 세련된 문화 공간 보다 옛 창고를 개조한 공간은 그래서 더욱 살갑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00년이 넘은 것으로 사료되는 인천 중구 해안동의 대한통운 창고는 건물의 기본 구조와 내부공간을 원형대로 유지한 리모델링을 거쳐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사진 왼쪽부터 대한통운 창고를 리모델링한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 내부, 인천아트플랫폼 공사 전인 2000년대 인근 거리 모습. 사진 가운데 대한통운 창고의 원형이 잘 드러나 있다. /인천문화재단 제공(위쪽부터 반시계방향으로) 100년이 훌쩍 넘은 창고 건물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쌀 창고, 김치 공장 등으로 쓰임새가 다양하게 변했다. 특히 운반 트럭 등에 의해 수차례 긁히고 부스러져 표면이 거칠고 색도 흐릿하다. 건물은 우리 근대문학과 함께 100여년 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옛 창고 4개 동을 리모델링해서 문을 연 한국근대문학관 내부, 한국근대문학관 공사 전인 2010년 즈음의 모습. /인천문화재단 제공

2016-08-24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33] 인천 여선교사 기숙사(갬블홈)

미국 감리교회 '선교기지'였던옛 경인가도 우각로에 들어서現 창영감리교회 복지관 활용빨간벽돌 외벽에 북유럽 지붕서양식 창틀에 전통양식 눈길당시 조선인 목수가 적용한 듯영화 유치원 설립 '헤스 부인' 등1942년까지 수십명 거주 큰의미인천 동구 창영동과 숭의동을 잇는 고갯길은 과거 '쇠뿔고개'라고 불렸다. 옛날 인천 사람들은 이 고개가 흡사 구부러진 소의 뿔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도 이 일대는 '우각로(牛角路)'라는 도로명 주소가 사용되고 있다. 쇠뿔고개는 개항 당시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이들의 주요 통로였다. 인천항에 내린 사람들은 중구 내동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싸리재와 배다리를 지나 쇠뿔고개를 넘어 서울로 향했다. 향토사학자 신태범 박사는 그의 저서인 '인천 한세기'에서 '내동에서 싸리재를 거쳐 쇠뿔고개를 넘는 길이 옛 경인가도(京仁街道)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서양 문물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됐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의 별장이 고개를 따라 세워졌고, 1897년에는 경인철도 기공식도 열렸다. 1907년에는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도 우각로를 따라 연이어 만들어졌다.이와 함께 미국 감리교회의 인천 선교기지로 활용됐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황해도 연안과 해주, 인천 강화와 영흥·덕적·교동, 경기도 남부지방 등의 선교 여행이 봉쇄돼 제물포와 부평, 부천, 영등포 등 내륙전도에 힘썼기 때문이다. 1900년대 들어 내리예배당이 늘어나는 교인들로 인해 새로운 예배당을 만들던 시기, 이곳에 예배당이 만들어졌고,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은 이곳에 영화학교를 지었다. 기독교 관련 시설이 많아지면서 이곳에 상주하는 선교사들도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자 교회는 이 선교사들의 거처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현재의 인천세무서 자리에 남선교사 기숙사를, 창영감리교회 후문에는 여선교사 기숙사를 만들었다.16일 우각로에 위치한 여선교사 기숙사를 찾았다. 빨간 벽돌과 파란 양철 지붕, 지붕 위로 솟아오른 굴뚝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정원을 갖춘 이곳은 주변 도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선교사들의 기숙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는 당시 비누를 만들어 큰 돈을 벌었던 미국 'P&G(The Procter & Gamble Company)'사의 매리 갬블(Mary Gamble)부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의 기부로 1905년 기숙사를 건축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1906년 한국여선교회가 미북감리교로 보낸 연례 보고서에 "지난해 11월 갬블홈에 입주했다. 신시내티 지부 갬블부인의 후원으로 건축됐다. 갬블홈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모를 정도다. 갬블홈은 단단히 지은 2층 벽돌조 건축물로 3명의 여선교사가 거주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공간이다. 제물포 합숙소는 앞으로도 유용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고 명시하며 갬블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해방 이후 인천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으로 활용되던 이 건물은 지난 2003년부터 창영감리교회가 인수해 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면서 건물 목적에 맞게 개·보수를 진행했지만, 외부는 건축 당시의 행태를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벽돌 건물 양식을 적용해 빨간 벽돌로 외벽을 세웠지만 지붕 형태는 북유럽 형식으로 눈이 많이 와도 쌓이지 않고 그냥 흘러내리도록 하기 위해 뾰족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지하 기초와 외부 계단이 대리석으로 돼 있어 표면에서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 석공들의 다양한 취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내부 창틀의 경우, 사찰 창틀 문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인 목수들이 서양식 창틀을 만들면서도 전통창틀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여선교사 기숙사는 건축 당시, 우각리 언덕 위의 빨간 벽돌집으로 멀리 바다가 보일 정도로 동화 속의 집이었다. 이에 시조시인 최성연씨는 1959년 발간한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이곳을 '선교사들의 별천지'라고 표현하며 "'영화여자국민학교 동쪽 민긋한 언덕 위에 낡은 형식의 2층 벽돌집(양관) 한 채가 조초롬히 앉아 있다. 20년 전만 해도 윤이 짜르르 흐르는 잔디밭이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고, 멋지게 손질된 수목들 사이에 세 채의 양관(여선교사 기숙사·남선교사 기숙사·아펜젤러 사택)이 삼각형의 정점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안타깝게도 현재 이 건물은 창영감리교회 기념관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준비 중이기 때문에 이날은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과거 기록 등을 살펴보면 'ㄷ'자 형태로 된 건물 내부는 각 실이 복도로 이어져 있고, 1층에는 대규모 거실이 만들어져 있어 이곳에서 모임 등이 열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의 극동방송 사옥이 가족 단위 선교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독신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였던 셈이다.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고,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1942년까지 이곳에는 수십 명의 미국 여선교사들이 거주했다.이들 중 3대 영화학교 교장을 지냈던 마가렛 헤스(Margaret Hess)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인천지역에 큰 공헌을 했다. 1913년부터 1940년까지 27년 동안 인천에서만 선교 사업을 벌였던 헤스는 인천 최초로 영화 유치원을 설립하고, 교통 수단이 부실했던 시기에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 지역에까지 작은 배를 타고 구호활동을 벌여 '헤스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주변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기독병원 간호부장이었던 덴마크 출신의 코스트럽(Alfrida Kostrup)은 부평 계양지방에서 의료와 수해 때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유아진료소를 개소하기도 했다.배다리 등 인천 동구 일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는 "'갬블 홈'은 인천 지역 선교와 여성 근대화 운동의 모태가 됐던 곳"이라며 "지금이라도 인천시에서 이를 다시 매입, 보전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창영감리교회 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여선교사 기숙사 전경.1905년 만들어진 인천 여선교사 기숙사. 메리 갬블 부인의 기부금으로 건축됐기 때문에 '갬블 홈'으로 불렸다.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 제공인천 여선교사 기숙사 1층 거실. /인천 동구 제공도원동에서 건너다 본 창영동 일대(1938년). /인천 동구 제공

2016-08-17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32] 교동향교

성균관 입학위한 '소과 응시' 준비하던 곳中서 온 공자상, 개경 옮기기전 임시 봉안명륜당·동재 서재 뒤 대성전 '건축적 위계'대성전 서쪽 '성전약수' 가뭄에 말라 씁쓸높은 교육열에 영향… 유림회 활동도 활발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교동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는 고려 때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孔子)의 상(像)을 모신 한국 유교의 성지다. 향교는 유교이념을 보급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자 유교의 선현들에게 제례를 올리는 제향공간이다. 16세기 중엽부터 생긴 서원은 향교와 기능은 유사하나,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차이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을 서당 등에서 천자문 같은 기초 학문을 익힌 뒤 향교에서 당시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한 소과(小科) 응시준비를 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인 1127년 교동도 화개산 북쪽에 건립됐다가, 조선 영조 17년인 1741년 화개산 남쪽인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려 인종은 교동향교를 지을 당시인 1127년 전국 곳곳에 향교를 건립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향교를 세운 첫 기록이다. 교동향교는 889년의 역사를 지닌 초창기 향교로서도 의미가 크다. 고구려는 국립교육기관인 태학을 운영하는 등 유학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지만,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때다. 유학자 안향(安珦·1243~1306)은 고려 충렬왕 12년인 1286년 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베이징)에 가서 공자와 주자(朱子)의 상을 그리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우리나라로 들여왔다. 안향이 그려온 우리나라 최초의 공자상을 수도 개경으로 가지고 가기 전 임시 봉안(奉安)했던 장소가 바로 교동향교다. 이후 안향은 김문정(金文鼎) 등을 보내 원나라에 가서 선현들의 상과 제기(祭器)를 구해오도록 하고, 이 또한 교동향교에 임시 봉안했다. 교동향교에 임시 봉안했던 공자상 등은 1303년 개경으로 모셔진 것으로 알려졌다. 공자와 유교 성현을 받드는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는데, 교동향교는 처음으로 공자를 모셨다 하여 '수묘(首廟)'라 불렸다. 공자상이 맨 먼저 교동향교로 들어온 까닭은 서해에서 배를 타고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교동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교동도를 군사요충지이자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만들기도 했다. 교동도에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중국 사신을 응접하는 중간 기착지인 대빈창(待賓倉)이 있었다. 교동향교가 생기기 전에도 중국 사신이 공자에게 제를 올리던 문묘가 있었다. 교동향교는 1741년 화개산 남쪽의 현재 위치로 옮긴 이후 9차례 중수했다. 향교를 옮긴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관청이 화개산 북쪽인 구읍리에서 남쪽의 읍내리로 옮기면서 향교도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인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 역할을 한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됐다. 명륜당 뒤로는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가장 높은 축대에 위치해 건축적 위계를 확실히 하고 있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무·서무가 축대 아래 좌우로 배치돼 있다. 동재 뒤쪽 구석에는 제기고가 있다. 향교건축에서는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공간이 뒤에 있는 구성을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라 하는데, 교동향교는 이를 모두 충족하는 전형적인 유교식 건축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대지 경사에 맞춰 건물 간 위치를 설정하고, 기단이나 계단을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은 중앙 2칸에 강의실 격인 당(堂)을 두고, 좌우에 방을 만든 팔작지붕 건물이다. 제향공간인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와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비롯해 유학의 선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교동중학교는 1954년 개교 당시 학교건물이 없어 3년 동안 향교의 동무와 서무를 교실로 쓰기도 했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대부분 향교의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공자를 모신 향교 입구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동향교 하마비 문구는 독특하게도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이다. 수령과 군사 우두머리인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조선 때 교동도에는 경기·충청·황해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는 등 수도 한성을 지키는 해상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섬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 대부분은 군인이었다. 교동향교 하마비가 다른 지역 향교와 다른 이유다. 향교 대성전 서쪽에는 '성전약수'라는 이름의 약수터가 있다. 이 물을 마시고 '문성(文成)'을 이룬 사람이 많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안타깝게도 교동지역 가뭄으로 3년 전부터 약수터에 물이 말라버렸다. 교동도는 우리나라 유교의 초창기부터 유서 깊은 향교를 둔 만큼 예로부터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동도를 '문향(文鄕)'이라고도 칭했다. 교동도 토박이이자 향토사학자인 한기출 교동역사·문화발전협의회장은 "교동에서는 집집마다 가장이 전부 유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 사람들이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황해도나 경기도 지역에도 교동 출신 훈장이 많았다고 한다"며 "현재도 교동 출신 중에는 관료나 정치인보다 교육자가 더 많다"고 말했다. 교동향교는 유림회 활동도 인천의 다른 향교보다 활발한 편이다. 교동유림회 회원은 약 150명인데, 교동면 인구가 3천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적잖은 숫자다. 향교는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에 1년 중 가장 큰 제사의식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매달 초하루(음력 1일)에는 분향례를 지낸다. 유림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석전대제 등 제사 때마다 제관이 매번 바뀌는 것도 교동향교의 특징이다. 교동향교 책임자인 방형길 전교는 "매달 초하루 분향례에만 20~30명 유림이 오고, 주말이면 향교에 나와 서예 등 방문객 체험프로그램을 돕는 사람도 많다"며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유교의 성지로서 순례자들도 많이 찾고 있어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이용되는 향교 중 하나"라고 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교동향교는 우리나라 향교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문격 외삼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공간인 동재·서재가 나온다.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경사를 이용해 기단을 쌓아 높이 올려 건축적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배치돼 있다.1 옛 학생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소과'를 치러야 했다. 지방 학생들은 소과 준비를 위해 향교 명륜당에서 공부했다.2 공자를 비롯해 유교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내부.3 교동향교의 책임자인 방형길 전교가 제례를 지낼 때 입는 전통복장을 살피고 있다. 교동향교는 현재까지도 제례 등 유림회 활동이 활발하다.

2016-08-10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31] 배다리 '조흥상회'

쌀·잡화·제수용품 등 공급처평행사변형 독특한 구조 뒤편마당까지 갖춘 한옥 붙어있어목 좋은 자리 '장사 잘되던 집'지역의 흥망성쇠와 운명 함께오래 방치되다 다시 활기 찾아배다리 역사 전시관으로 활용1940~1960년대 인천의 번화가를 꼽으라면 동구 배다리 일대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천 송현초등학교와 중앙시장 인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대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일컫는다. 배다리가 있는 인천 동구 일대는 인천항 개항과 맞물려 일본군들이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에 주둔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배다리 시장에서 중앙시장으로 변화해 가며 인천 동구 배다리 일대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에서 가장 목이 좋은 장소에 '조흥상회'가 있었다. 가게 주인 고(故) 조종택 씨가 조(趙) 씨 일가의 번영(興)을 바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조흥상회는 쌀과 각종 잡화를 팔기도 했고, 제기·과일·과자 등 제수 용품을 팔았다고도 전해진다. 가게 위치도 좋았을 뿐 아니라 이름 덕분에 조흥상회는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조흥상회 건물은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 경인선 철길 아래 인근에 있다. 지금은 배다리안내소, 요일가게, 나비날다(책방) 등이 조흥상회를 대신해 건물에 들어선 가운데, 이 곳을 찾는 시민과 외지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지난달 27일 오후 배다리안내소의 주인장 청산별곡(별칭을 본명 대신 사용)의 소개를 받아 건물을 둘러봤다.이 건물 2층 상단부에 적힌 '조흥상회' 네 글자가 간판 역할을 했으며, 외벽은 인근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민트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조흥상회 건물은 평행사변형 형태의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건물 안쪽으로 연결된 문을 통하면 조흥상회 뒤편에 가려진 한옥 한 채가 나타난다.청산별곡은 "조흥상회 건물이 밖에서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잘 볼 수 없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사각형 형태의 한옥이 붙어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종택 씨가 가게 운영은 바깥 건물인 조흥상회에서 하고, 안쪽 건물인 이 집에서 거주했다고 들었다"며 "얼마 전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지인들과 함께 거주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한옥은 4개의 방과 거실, 작은 마당, 우물 등도 갖추고 있다.조흥상회의 초창기 모습은 기와를 올린 2층 건물이라고 전해진다.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나, 미군 노릅 파이어(Norb-Faye) 씨가 1948년 촬영한 사진 가운데 조흥상회 건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조흥상회 2층은 한옥의 안채와 연결된 방을 비롯한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랑채 등의 용도로 활용됐으나, 지금은 타로점과 뜨개질 공방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일부 공간은 조흥상회 건물이 한동안 폐허처럼 방치돼 있을 때 남겨졌던 그릇과 재봉틀, 조흥상회 영수증 등 근현대 생활물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또 조흥상회 건물 옆에는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창고가 있는데, 이 창고 상량문에 적힌 '1956년' 문구를 통해 건축 연도를 추측할 수 있다. 창고는 당초 2층 건물이었지만, 청산별곡이 1층과 2층 사이를 터 천장을 높였다고 한다. 지금은 매일 주인이 바뀌어 운영되는 '요일가게'로 사용되고 있다. 조흥상회의 옛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배다리 삼거리에서 '배다리 솥 주물'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오정신(74) 사장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오 사장은 18세(1963년) 때 배다리 인근에서 작은 할아버지로부터 솥 가게 일을 배웠고, 1966년부터는 조흥상회 1층에서 '배다리 솥 주물' 가게 운영을 시작했다.오 사장은 "배다리에서 조흥상회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며 "빨간 벽돌 창고에서는 제수용 과자, 옥춘(설탕 녹여 만든 과자), 약과 등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오 사장은 조흥상회 건물 1층에 한 칸을 세 내 '배다리 솥 주물' 가게 운영을 했다. 그는 "조종택 사장 내외가 가게를 싸게 내 준다고 해서 조흥상회 건물 1층에서 솥 장사를 시작했다"며 "당시 배다리 인근은 중앙시장을 비롯해 조흥상회와 우리 가게까지 어느 하나 안 되는 가게가 없었다"고 회상했다.오 사장은 "조흥상회 건물은 2층까지 벽돌을 쌓아 올려 인근에서 이 정도 규모를 찾긴 어려웠다"며 "2층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일본식 다다미방 모양의 방이 있고, 한쪽 방에는 제기용품이나 과일, 과자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25년가량 조흥상회 건물에서 솥 장사를 하던 오 사장은 조 사장이 가게세를 계속 올리는 바람에 배다리 인근 가게를 전전하다 지금의 위치로 이사했다고 한다.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조흥상회는 인천 동구 배다리 일대에서 가장 좋은 자리로 소문이 난 곳에 위치해 있어 그 일대의 흥망성쇠와 길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조흥상회 건물은 배다리 일대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장기간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된다. 청산별곡이 지난 2012년 건물에 입주하면서 조흥상회 건물은 다시 한 번 손님 몰이를 하고 있다.청산별곡은 "조흥상회는 한동안 온갖 쓰레기들이 방치돼 있어 거의 죽은 집과 다름없었다"며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전 주인들이 버리고 간 근현대 생활 물품들이 발견됐고, 지금은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공개돼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인천의 '배다리'는 과거 헌책방 거리로도 유명했는데, 배다리 안내소와 요일가게, 서점 등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배다리가 부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동구 배다리 초입에 위치한 조흥상회(趙興商會)는 조(趙) 씨 일가의 번영(興)을 바라며 이름을 붙였다고 알려졌다. 조흥상회는 과거 쌀, 제수 용품, 잡화 등을 팔며 배다리를 찾는 사람들 명소였다. 간판만 남기고 사라진 그 자리에 지금은 배다리 안내소, 요일가게, 나비날다(책방) 등이 입점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조흥상회 건물 뒤편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초록색 기와를 얹은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조흥상회 2층 일부 공간은 근현대 인천 일대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하는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이다.조흥상회 옆에 붙어 있는 빨간 벽돌 창고 내부의 모습. 과거 물건을 보관했던 장소가 지금은 매일 가게 주인이 바뀌는 요일가게로 활용되고 있다./아이클릭아트

2016-08-04 신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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