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30] 개항기 하역업체 사무실 '카페 팟알'

예전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건물현재 1층은 카페… 2~3층 다다미방일본식 점포 겸용주택 '정가' 양식문화유산 가치 커 '원형복원' 진행팥빙수 등 메뉴결정도 문헌 토대로민간 유일 '등록문화재' 성과 불구상업적성공에 모방건물 난입 '씁쓸'개항기 인천항에 노동인력을 공급했던 하역 업체의 사무실로 쓰인 '인천 구 대화조(大和組) 사무소'(등록문화재 567호)에는 현재 '카페 팟알(pot_R)'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개항장 일대인 인천 중구 관동1가 17에 있는 이 곳은 인천의 등록문화재 가운데 민간이 소유한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인천에 많이 남아있던 근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그 존재 가치를 제대로 알리기도 전에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거나 운이 좋게 남아있던 일부는 후대의 손에 의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축물이 본래 지어진 목적을 잃어버리고 본래 태어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두 경우 모두 건축물의 입장에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카페 팟알은 인천에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단순히 목숨을 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로 북적이며 사랑받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커피와 팥빙수, 나가사키 카스텔라로 유명한 '맛집'이자 근대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필수 답사 장소가 됐다. 성지(聖地)처럼 말이다. 이 건물은 카페 주인인 백영임(53) 씨의 손에 의해 지난 2012년 8월 문을 열었다. 해방 직전까지는 하역 업체인 대화조(大和組)의 사무실 겸 숙소로 쓰였다.1883년 제물포항이 문을 열고 무역항이 되며 해상 교역량이 늘어나자 짐을 배에서 부두로, 배에서 배로 옮기는 노동력도 필요했다. 대화조는 인부를 해운회사에 공급하는 업체 가운데 하나였다. 이 건축물은 일본 도시 상인들이 사용하던 일반적인 점포 겸용주택의 하나인 정가(町家, 마찌야) 형태의 건물이다.인천 일본 조계지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가 양식 건물로서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의 노동력 착취의 현장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하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층은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과 주방이, 2~3층은 다다미방이 차지하고 있다. 100여년 전에는 1층은 사무실로 2~3층은 노동자들의 숙소로 쓰였다.일본인의 관점에서 인천의 변화를 기술한 책 '인천개항 25년사'(1908년 6월 1일 발행)를 보면 이 회사와 회사 대표인 히로이케데시로(廣池亭四郞)에 관한 설명이 있다."히로이케데시로, 야마토조장(大和組長) : 히로이케는 메이지 18년(1885)에 인천으로 와서 당시 조운업을 하는 아카마조합(赤間組)에서 근무했다. 메이지25년(1892) 2월 6일 아카마조합을 야모토조합(大和組)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조장이 되었다. …(중략)…현재 하역부 100여명, 단평선(團平船) 10척, 삼판선(三板船) 7척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남포(南浦) 출장소를 설립해 취급하는 화물은 오사카상선(大板商船), 요시다조합(慶田組), 세창양행(世昌洋行) 그 외 내외선박 무역상 등의 위임을 받고 있다. 그는 후쿠시마(福島), 아사히(朝日) 두 조직과 서로 연합해 인천 노동사회의 큰 인물이 되었다."개항 이후 20년 동안의 인천의 변천사를 요약한 책 '인천번창기'(1903)의 부록 관민인명록의 '하역 구미(組)' 항목에도 이 대화조를 비롯한 8곳의 업체가 활동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조선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업체들의 통제 아래 부두에서 일하며 당시 무역을 장악한 일본인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제물포의 일본인은 현대적인 '신사' 들이고, 고기잡이나 노 젓기, 짐 나르기 등은 조선인에게 맡긴다. 조선인들은 짐꾼들이고 일본인들에게 봉사한다"(에르스트 헤세 바르텍의 '조선 1894년 여름')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항만·물류업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라며 "조선인 노동력의 착취로 비로소 제물포항이 근대 무역항으로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지난 25일 오후 2시 찾아간 팟알은 낮 기온이 30도를 넘어서인지 팥빙수와 시원한 음료를 찾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주말이면 숙제를 하는 건축학도와 답사 일행들로 붐빈다.대화조 사무소가 카페로 모습을 바꾸고 사람들과 만나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8월의 일이다. 인천 지역에 있는 시민문화운동조직인 '해반문화사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백영임씨는 지난 2009년께부터 이곳을 눈여겨봤다고 한다."문화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개항장 일대의 근대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졌고 건축물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죠."그는 관이 하지 못한다면 민간이라도 먼저 나서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민간이 먼저 나서 문화유산을 지켜가는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면 지자체도 자극받을 것이란 의도도 있었다. 그는 가치 있는 건물을 물색하던 중 이 건물을 발견했다. 무작정 집 주인을 찾아가 수년 동안 집주인을 설득한 끝에 2011년 8월 매입에 성공했다. 물론 건물을 매입하기까지 집주인을 설득하기 위한 지역 예술인과 학계 등 주변의 도움도 많았다.매입에 성공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930년대 즈음 건물인 줄로 알았던 이 건물이 꽤 오래된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 사이에 지어진 것임이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저 요즘 쓰임에 맞게 단순히 '리모델링'하려 했던 그의 계획은 제동이 걸렸다. 건축을 전공한 한 대학교수인 지인이 그 건물에 대해 '원형복원'에 가까운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강하게 권유했다. 결국 내부 구조를 살리고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원형복원'을 결심하고 이 일에 매달렸다. 나무 재료 하나, 돌덩이, 문고리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선별해 작업해야 했다. 자연스레 공사 기간은 길어졌다.건물의 활용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용도를 카페로 열기로 하고, 메뉴 선정에도 공을 들였다. 옛 문헌을 뒤져본 결과 팥빙수와 카스텔라가 많이 팔렸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지금의 메뉴를 결정했다. 음식뿐 아니라 개항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엽서 등 문화상품도 함께 판매했다. 백씨의 노력 덕에 팟알은 지난 2013년 등록문화재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해외 언론과 여행 매체에 이름도 오르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지만, 부작용도 나타났다. 팟알의 성공을 모방해 모양만 흉내를 낸 일본식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주변이 일본 영화 세트장처럼 변해가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다. 그는 "남아있는 건물을 복원하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을 굳이 새로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며 "올바른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커피와 팥빙수, 나가사키 카스텔라로 유명한 '맛집'이자 근대건축물 필수 답사 장소로 알려진 '카페 팟알(pot_R)' 전경.복원되기 이전에 촬영된 대화조 사무소 전경.예전에는 노동자들 숙소인 3층 방에서 창 밖으로 제물포항의 모습이 보였다고 전해진다.노동자들이 숙소로 썼던 2층 다다미방의 모습. 지금은 각종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시민문화운동조직인 '해반문화사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백영임씨가 운영하는 '카페 팟알' 1층 내부.개항 초기 발행된 엽서에 나타난 대화조 사무소(흰색 점선). 언덕 위에 청국영사관(현 화교학교)과 측으로 일본영사관(현 중구청) 정문의 모습이 보인다.

2016-07-27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29] 중구 월아천(객주가)

'ㅁ'형 한옥 구조 황해도 소나무 가져다 만든 대들보·서까래 '눈길'"손님방 8~9개 정도와 비밀공간 있었다" 누군가 숨겨준 역할한 듯1885년 인천객주상회 만들어 일본화폐 수취거부운동 벌이며 저항민족상인과 정보공유 계몽·개혁운동 펼쳐… "객주들 재평가 필요"1883년 일본에 의해 인천항이 강제 개항되면서 인천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봉건주의 체제로 운영된 '조선'에서 자본주의 세계와의 만남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 맞춰 일본 상인과 청국 상인,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사 등이 진출함으로써 외국상사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인천이 수도의 관문인 데다 상하이와 일본으로 항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선 대부분이 인천에 기항했기 때문이다. 1897년 교역 총액을 살펴보면 인천항의 총 교역량은 941만4천 달러로, 부산항 742만7천 달러, 원산항 212만5천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조선 무역에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셈이다.이처럼 인천항을 중심으로 수출입 화물이 급격히 늘어나자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客主)의 활동이 두드러졌다.객주(客主)란 전국의 상품 집산지에서 물건을 맡아 팔거나 매매를 주선하고 수수료를 받는 것은 물론, 화물의 보관이나 운송, 숙박업,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한 중간상인을 말한다. 요즘 상법으로 치면 대규모 위탁매매업자다.이러한 객주는 조선 후기부터 포구와 같은 교통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개항 뒤에는 인천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개항장에서 영업하던 객주는 내외국 상인들의 위탁판매를 통해 구문(口文)을 받는 한편, 어음의 인수와 할인 등의 금융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1897년 3월 독립신문에서는 인천항에서 적어도 80~90명의 객주가 활동하고 있었고, 같은 해 인천항 감리인 강화석의 보고서는 96명의 객주가 활동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이 때문에 인천 중구 내동을 중심으로 객주들의 가게인 '객주가'가 많아지게 됐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당시 중구 내동 주변에는 정미소나 객주가, 대규모 기와집 등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큰 집들이 몰려 있었다"며 "인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 내동 근처였기 때문에 당연히 벌어지는 현상이었다"고 설명했다.19일 당시 객주가였던 중구 내동에 위치한 '월아천'을 찾았다. 지금은 한식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등기부 등본상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당시 사진 등을 살펴보면 진짜 건축연도는 18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날은 폭염주의보가 내릴 만큼 더운 날이었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지난 2006년 이곳을 인수한 박정숙 사장은 "밖에서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는 날에도 우리 가게에는 항상 바람이 들어온다"며 "손님이 많지 않으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될 정도다"라고 설명했다.전형적인 'ㅁ'형 한옥 구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고, 본채·사랑채·꽃담으로 이뤄지는 궁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집안에 들어가니 굵은 대들보와 서까래가 눈에 띄었다. 집의 대들보와 서까래에 쓰인 나무는 황해도에서 공수한 소나무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못을 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잇고, 엮은 것도 이 집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박 사장은 "이 건물이 객주가로 사용됐던 것처럼 방이 많은 편이었다"며 "안방을 빼고 작은 평수의 손님 방이 8~9개 정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객주들이 상거래는 물론 지방 상인들이 인천에 와서 묵어가기 위한 숙박업까지 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집 바깥벽 쪽에는 3.3㎡도 안 되는 비밀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는 연결이 안 되고 건물 옆 3m 길이의 낭떠러지로만 나갈 수 있게 만든 숨은 공간이었다. 발견 당시 방바닥에 화문석이 깔렸던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누군가를 숨겨주기 위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이같이 대규모 주택을 소유하고 있던 당시 객주들은 계속된 일제의 상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개항장의 수출입상품은 대부분 자본력에서 앞선 외국 상인이 독점해 유통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885년 인천항의 객주들은 일본인 등 외국 상인에 대항해 지역 상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인천객주상회(인천 상공회의소의 전신)'를 만들었다. 이들은 1902년 '일본제일은행'이 부산과 인천 등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 화폐를 유통시키자 수취 거부 운동으로 이에 맞서기도 했다.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이들의 저항은 계속될 수 없었고, 1915년 조선총독부는 이들 단체를 강제적으로 해산했다.경인여자대학교 윤호(부동산학과) 교수는 "개항 당시 인천의 객주들은 민족상인들과 상업정보를 공유하고, 계몽과 혁신을 담당하며 자본을 집중해 일본 상인에게 대항했다"며 "이러한 이들의 활동은 전국의 민족 상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본 상인의 상권침탈에 저항하며, 민족상인들을 대상으로 계몽과 개혁운동을 전개한 이들의 활동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개항장 당시 객주 건물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월아천 내부 모습.①객주가로 사용된 실내 모습. ② 전형적인 'ㅁ'형 한옥 구조로 지어진 월아천. ③ 월아천은 솟을대문과 중문, 본채·사랑채·꽃담으로 구성된 궁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사진은 솟을대문 모습.

2016-07-21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28] 국내 최초 철도 출발지 '인천역'

모갈 증기기관차 도입 1897년 착공 2년만에 노량진~인천역 33.8㎞ 1시간30분대 연결일제강점기 서울역과 달리 신축 안해… 주로 화물 취급 '교통요충지' 기능 작았던 탓수인선 개통 불구 간이역 분위기 그대로 유지… 종착역 특성 탓 영화 등 촬영지 인기(전략)…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 오르더라…(후략).최초의 국문신문인 '독립신문'은 대한제국이 철도의 시대로 진입하는 순간을 이같이 표현했다. 기사는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거물'이란 이름의 육중한 모갈(Mogul) 증기기관차가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굉음과 함께 노량진을 떠나 제물포로 출발한 순간을 묘사했다. 기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2년 6개월 만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노량진~인천역(당시 제물포) 간 33.8㎞를 1시간30분 만에 연결했다. 당시 도보로 12시간 걸렸던 것을 10시간 넘게 단축시키면서 인천과 서울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1899년 우리 철도 역사의 시작이며, 117년 동안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인천항, 차이나타운 등의 주변 변화상을 지켜봤을 인천역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에 찾았다.현 경인선의 인천역사(驛舍)는 수도권 전철 개통 전으로, 일반 열차가 다니던 시절인 1960년에 지어졌다. 1900년 지어진 첫 역사는 건평 300㎡였다. 첫 인천역사는 서울역에서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서울역은 1900년 33㎡짜리 목조 바라크(Barrack)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 짓고 '남대문 정거장'이라 부른 것이 시초다.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이 증대되면서 새 역사 건립을 추진, 1922년 6월 착공해 1925년 9월에 준공했다. 이 건물이 현재 신 역사 옆에 자리한 구 서울역사이다.신축 전 서울역은 인천역사 보다 작은 규모였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역사는 신축되지만, 인천역사는 그렇지 못했다.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 재능대 교수는 역의 성격에서 역사의 신축 여부가 결정된 것으로 봤다. 그는 "구 서울역사가 신축되고, 부산·평양 등의 역사도 상당한 규모로 건설됐다"면서 "인천역은 사람보다는 화물을 주로 처리하는 역이었으며, 교통 요충지로서의 기능이 작았기 때문에 신축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1960년에 지어진 현재 인천역사는 774.9㎡로, 크지 않은 규모다. 인천역은 여객보다는 인천항을 통해 화물을 취급하기 위해 부두를 따라 선로가 부설되어 있다. 역사는 작지만, 전용선·지선을 포함해 총 1천315량의 화차(貨車)를 수용할 수 있도록 구내는 넓다.인천역은 수도권의 여타 전철역과 달리 간이역 분위기를 풍긴다. 인천항까지 직선 거리로 300m 정도로 가깝다보니 전철에서 내리면 바다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곳이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역을 찾은 날엔 플랫폼과 선로에서 내뿜는 열기로 인해 바다의 정취를 느낄 수는 없었다.지난 2월 27일 수인선 송도~인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인천역은 현대적 느낌의 역사로 재탄생할 걸로 예상됐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가 새로 만들어지는 데 그쳤다. 간이역 분위기를 내는 기존의 역사는 그대로 유지됐다. 인천역의 독특한 분위기는 영화와 드라마, CF 등의 배경에서도 표출된다.영화 '엽기적인 그녀' 전반부의 남자 주인공(차태현)과 여자 주인공(전지현)이 만나 지하철을 함께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인천역이다. '엽기적 그녀2'에서도 인천역 광장 씬이 있다. 또한,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채상태 인천역장은 "우선 종착역이기 때문에 열차 운행 종료 후 촬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며, 지선이 많다 보니 인천역 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어서 촬영지로 종종 선택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인천역은 수인선 개통 전인 지난해 12월 내부 리모델링을 했다. 천장과 바닥, 창틀, 문을 비롯해 역사 지붕에 역명판을 LED로 교체했다. 인천역의 하루 열차 운행량은 평일 기준으로 경인선 262회, 수인선 166회, 화물 열차 4회 등 432회다. 수인선 개통 이후 승객 수도 2배 가까이 증가했다.채 역장은 "차이나타운과 동화마을 등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주말 승객이 많이 늘었다. 앞으로 승객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종착역이기 때문에 취객 사고, 수인선 개통 후 지상과 지하를 잇는 에스컬레이터의 사고 등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수년 전부터 복합역사 건립에 대한 계획이 나오고 있지만, 국토부 승인을 얻어야 하는 부분과 민간 사업자가 나서야 되는 부분 등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경인선과 수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먼 길을 달려온 경인 전철이 출발 신호음과 함께 뜨거운 선로 위를 따라 다시 길을 나선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① 최초의 기관차 모갈1호. 모갈1호는 철도개통시 사용된 첫 열차를 견인한 증기기관차다. 미국 브룩스사에서 4대가 제작된 후 반제품으로 운송해 1899년 인천에서 조립됐다.② 초기의 인천역사. 여객의 운송보다는 화물운송과 철도운영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설에 한정됐다. 300㎡ 규모였다.③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 멀리 월미도가 보인다.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 刊)·인천시립박물관 제공④ 인천역 광장에 있는 한국철도 탄생역 표지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관차인 모갈1호를 본 떠서 만들어졌다. 옆면에 우리나라 철도 탄생과 그로 인한 변화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현재 역사는 1960년에 지어졌으며, 지난해 12월 내부 리모델링을 통해 천장과 바닥·창틀·문을 새로 교체했다. 또한 역명판도 LED로 교체했다.여객보다는 인천항을 통한 화물을 취급하기 위해 부두를 따라 선로가 부설됐기 때문에 역사는 작다. 하지만 종착역이어서 전동차의 주박용 선로와 전용선·지선을 포함해 총 1천315량의 화차(貨車)를 수용할 수 있도록 구내는 넓다. 때문에 선로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CF 등의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2016-07-13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27] 신포동 재즈클럽 '버텀라인'

1983년 문 연 '한국 3대 재즈클럽' 중 한 곳1910년대 셔츠 등 팔던 '후루다 양품점' 자리일본식 기와 합각지붕에 외관은 서양식으로내부에 기둥 안세운 '왕대공 트러스 구조' 희귀높은 천장·흙벽 탓 소리 깊어 연주가들에 인기LP판 수천장·턴테이블 등 '빈티지' 감성 더해푸른 빛이 짙은 재즈의 선율이 100년도 넘은 역사를 품은 근대건축물 안에서 공명한다.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23에 위치한 '버텀라인(Bottom line)'은 개항기인 1900년대 초께 지은 일본식 상가주택 2층에 자리한 재즈클럽이다. 1983년 문을 연 이후 33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버텀라인은 건물의 나이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재즈클럽 중 하나다. 버텀라인 건물에는 1910년대 인천의 대표적인 상점 가운데 하나인 '후루다(古田) 양품점'이 있었다. 양품점이란 셔츠, 넥타이, 모자, 지갑 등 값비싼 서구 물품을 파는 상점이다. 인천 제물포는 1883년 개항으로 인해 서구 문물이 우리나라로 가장 빨리 들어오는 통로였다. 중국과 일본에 진출해 있던 유럽이나 미국의 상사, 중국인, 일본인 등이 제물포로 몰려와 사업을 펼치면서 상업이 번성했다. 후루다 양품점은 1920년대 중구 내동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대동상회(大東商會)'에 밀리기 전까지 인천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상점이었다고 한다. 후루다 양품점 맞은 편에는 '오카다(岡田) 시계점'이 있어 축음기와 음반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전해진다.건축물의 형태와 구조에서 당시 최신 유행이 소비되던 공간인 양품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일본식 기와를 올린 합각지붕에 3층짜리 목조건물인 버텀라인은 개항기 다른 상점과는 달리 외관을 서양식으로 꾸몄다. 서양식 건축양식이 선진적이고 세련됐다고 인식한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반영돼 상점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부 또한 근대 상가 건축물에서 찾아보기 드문 독특한 구조라는 게 건축 전문가들의 평가다. 건물 지붕틀은 중앙에 수직재를 중심으로 직선의 목재를 삼각형으로 조립, 하중을 분산시켜 지탱하게 하는 왕대공 트러스(king post truss) 구조다. 건물 내부에 기둥을 사용하지 않아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할 수 있는 공법이다. 국내에 있는 근대 공공건물에서는 왕대공 트러스 구조를 사용한 경우가 있지만, 근대 시기에 왕대공 트러스 공법으로 지은 상가건물은 희귀해 버텀라인이 건축가나 건축학도들의 단골 답사코스가 되기도 한다.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는 "일본식 근대 상가주택은 1층에서 장사하고 2층은 주거공간으로 쓰는 게 보통"이라며 "트러스 구조로 2층에 기둥을 넣지 않은 점으로 볼 때 2층도 주거공간이 아닌 상점으로 쓰였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근대 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재능대학교 교수는 "버텀라인 건물은 세월이 흐르며 다소 변형되긴 했지만, 일본식 근간으로 서양식 건축양식을 도입한 사례"라며 "근대 건축물로서 가치도 크다"고 했다. 근대건축물과 재즈의 결합이 풍기는 고풍스럽고 '블루지(bluesy)'한 분위기에 매료된 국내외 유명 재즈 연주자들은 자청해서 버텀라인 공연을 하고자 한다. 올 10월 국내 재즈페스티벌 공연을 위해 방한할 예정인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재즈 베이시스트 앙리 텍시에 호프(Henri Texier Hpoe)도 허정선 버텀라인 대표에게 먼저 연락해 버텀라인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높고 단단하게 짜인 천장과 황토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주는 그 울림부터가 다르다는 게 재즈 연주자들의 평가다. 허정선 버텀라인 대표는 "기계적으로는 고급 음향시스템을 갖추고 있진 못하지만, 이곳에서 공연한 뮤지션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소리의 울림이 깊어 연주가 매우 만족스럽다는 것"이라며 "높은 천장과 흙벽 등 자연적인 건축 소재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허정선 대표는 "근대 건축물이라는 운치 있는 연주공간에서 공연하고 싶어하는 욕구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래 손님으로서 버텀라인을 자주 찾았던 허정선 대표는 1993년 이곳을 인수해 23년째 운영하고 있다. 바깥쪽으로 유리창을 낸 것을 제외하면, 건물에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굳이 인테리어에 공들이지 않아도 벽면을 가득 메운 수천장의 LP판과 30년 넘은 턴테이블 등이 근대 건축물의 목조와 어우러져 '빈티지(vintage)'한 감성을 자아냈다. 지난 1일 밤 버텀라인에서 만난 단골손님인 사진작가 김보섭 씨는 "100년이 넘은 건물도 역사지만, 30년 넘게 인천을 대표하는 재즈클럽으로 남아있는 버텀라인 자체도 이제는 역사"라며 "앞으로도 그 역사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재즈클럽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33년째 꾸준히 찾고 있는 중·장년층은 물론 최근에는 젊은층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서로 다른 세대가 음악을 매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근대 건축물이라는 것이 버텀라인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라는 게 허 대표의 생각이다. 허정선 대표는 "버텀라인이란 이름은 첫 번째 주인이 미국 뉴욕에 있는 유명한 재즈클럽 이름을 딴 것인데, 세계적인 고층 빌딩 숲인 뉴욕 맨해튼에도 군데군데 허름한 재즈클럽 같은 옛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며 "버텀라인도 세월이 지나고, 인근이 개발되더라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는 근대 건축물이자 문화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푸른색 또는 붉은색 조명이 근대 목조건축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원래 건물 내부 중앙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었지만, 건물의 나이를 고려해 철제 기둥 하나를 보완했다.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23에 위치한 '버텀라인' 외부 전경.주인장조차 몇 장인지 정확히 모르는 수천장의 LP판을 진열한 바.국내외 유명 뮤지션들이 자청해서 공연하고 싶어하는 버텀라인의 무대건물 2층 버텀라인 입구로 오르는 목재 계단.

2016-07-06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26] 중구 남북동 '조병수 가옥'

현 주인 고조할아버지가 지은 'ㅁ' 형태… 섬 치고는 큰 규모조씨 일가 안채 거주… 사랑채는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로사람이 계속살면서 보존해온 탓 긴 세월 집 본연의 기능 유지외부인 접근쉬운 담장 밖 사랑채, 독립운동 모의 장소로 쓰여'옛집'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함께 그곳에서 산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면 학문적 측면과 함께 기능적 관점에서도 집 본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옛집으로서,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 본연의 기능적 역할과 더불어 건축 당시의 양식, 시대상 등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집 중 하나다. '조병수 가옥'은 1890년 영종도와 분리된 섬이었던 용유도에 지어졌다. 이 집은 현 주인인 조병수(71) 씨의 고조할아버지인 고(故) 조형규 씨가 지었다. 이 집은 1997년 7월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등록됐다. 지금은 조 씨와 자녀 등 6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다.지난 25일 조 씨의 집을 찾았다. '조병수 가옥'은 인천 중구 영종도 용유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1㎞가량 떨어진 숲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집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산맥이 흐른다. 대문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선조들이 집을 지을 때 가장 선호한 장소라는 것이 집주인의 설명이다.조 씨는 "어른들한테 전해 듣기로는 고조할아버지께서 용유도에 터를 잡으시면서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서는 밖이 잘 보이는 곳을 찾은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며 "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조병수 가옥'은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거 형태인 트인 미음(ㅁ)자 구조다.정문에서 바라볼 때 기역(ㄱ)자 형태의 건물 두 채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의 집이다. 건물 두 채 사이의 빈 공간은 천장이 없는 마당이다.안채 왼쪽에는 부엌과 다락방이 있다. 거실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과 맞닿은 3개의 방이 있고 우측에는 조 씨의 방이 배치돼 있다. 안채에는 조 씨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대문이 있는 사랑채는 현재 여행객들이 머무르며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여행자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조 씨는 "이 집이 내륙에 있는 집들과 비교할 때 큰 형태는 아니지만, 용유도가 섬인 점을 고려하면 섬에 있는 다른 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집"이라고 설명했다.또 조 씨는 "집이 오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육지에서 떨어진 섬에 있었다는 지리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사람이 계속 집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사람이 집에 살면서 낡은 부분은 고쳐나가고, 손을 봤기 때문에 이 집도 무너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조병수 가옥'의 특징 중 하나는 집의 경계라고 볼 수 있는 담장이 사랑채 건물보다 안쪽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도병욱 동국대학교 불교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옛집들은 대문의 개념을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 단계의 문 정도로 인식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며 "조병수 가옥과 같이 바깥채(사랑채) 건물이 담보다 밖에 있다는 것도 앞마당 전체가 자기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사랑채가 바깥에 배치돼 앞쪽으로 별도의 담장이나 문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며 만나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조병수 가옥'은 1919년 3·1 운동과 맞물려 용유도에서 일어난 3·28 독립운동을 모의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조 씨의 당숙 뻘 되는 조명원은 서울에서 1919년 3·1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뒤, 용유도로 들어와 이 집의 사랑채에서 조종서·문무현·최봉학 등과 함께 비밀 항일투쟁단체인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해 용유도 3·28 독립운동 등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유도 3·28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조명원 등 혈성단이 주축이 돼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한 만세 시위운동이다. 현재 '조병수 가옥'에는 조 씨 일가가 안채에 거주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한옥체험 형태의 숙박업소인 '오가물 게스트하우스'로 운영 중이다. 오가물은 조병수 가옥이 있는 지역 일대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조 씨는 "이 집은 1890년에 지어진 이래 사람들이 계속 살면서 집의 생명도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외국인들을 비롯해 한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한옥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도병욱 연구원도 "조병수 가옥은 섬이었던 용유도에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기와집이 지어졌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당시 배를 이용해 집을 짓는 목재나 기와 등을 옮겨온 점 등으로 미뤄 집주인이 상당한 재력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고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조병수 가옥은 사람이 계속 살면서 건물이 유지됐다는 데 보다 큰 의미가 있다"며 "조병수 가옥이 단순히 오래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의 기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시 중구 남북동에 위치한 '조병수 가옥'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옛집으로, 집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산맥이 흐르며, 대문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선조들이 선호했던 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조병수 씨의 선조들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한 뒤 남긴 가족사진.조병수 가옥은 지어질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주거 형태인 트인 미음(ㅁ)자 구조이다.집의 경계라고 볼 수 있는 담장은 사랑채 안쪽과 연결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조병수 가옥 안채의 마루에 서재처럼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016-06-29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25] 알렌 별장 터(옛 인천전도관)

제중원 설립자 호러스 알렌 서양식 별장 자리공사로 취임 1897년 착공 가능성 설득력 높아촬영장소로만 가끔 활용… 찾는 이 거의 없어매국노 이완용 조카 이명구 등 여러사람 거쳐1956년 신흥종교 단체 매입 인천전도관 신축1980년대는 한국예루살렘교회가 차지해 사용9명 공동소유 사유지 불구 '활용안 모색' 필요경인전철 도원역 인근 허름한 주택이 몰려있는 언덕 위에는 낡은 교회 건축물이 50여년 전부터 흉물처럼 자리 잡고 있다. 달동네 꼭대기에 있어 인천의 중·동·남구 지역 구도심의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보이는 이 건물은 인천 사람들의 기억에 '숭의동 109번지(실제 지번은 107번지)'라는 지번과 더불어 '전도관'이나 '예루살렘교회'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가면 서양식 주택인 '알렌 별장'이 자리를 잡고 개항기 인천을 내려다보던 자리이기도 했다.지난 21일 인천 남구 숭의동 107번지에 있는 이 건물을 찾았다. 교회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건물 뒤편에 유일한 통로인 녹이 슨 철문으로 된 출입구가 있었다. 철문에는 '사유지로 무단출입을 금하며 관계자외 무단출입시 이전에 파괴된 시설에 대하여도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라는 경고성 문구가 붙어 있었다.문이 잠겨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개들이 나타나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금세 경계를 푼 개들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담장 안 교회 부지에 폐목재와 깨진 유리조각 등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건물 1층 빈 공간은 헌 옷을 재활용해 판매하는 회사가 사용하고 있었다.이 업체 대표 이시형(51·가명)씨는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나 말고도 주방가구 제조업체 한 곳이 이곳을 사업장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인천 토박이라는 이씨는 "이 주변 동네가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험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비행 청소년조차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 돼 버렸다"며 "개인적으로 값싸게 쓸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고향 인천에 아직도 폐허처럼 남겨진 곳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고 덧붙였다.폐허가 된 이곳은 이젠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 가끔 사용될 뿐, 찾는 이는 거의 없다.과거 이곳에는 교회 건물 대신 20세기 초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소유의 그림 같은 서양식 별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남구가 발행한 역사문화총서 도시마을생활사 숭의동·도화동편에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숭의동 107번지의 세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돼 있다.책에 따르면 알렌은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로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고 고종의 신임을 받아 전담 의사이자 정치 고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189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해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 총영사, 공사 등을 역임하고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조선과 미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별장이 지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착공시기는 그가 공사로 취임한 1897년 7월 이후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고 한다.도시마을생활사 편찬에 참여한 이영미 박사(인하대 사학과 강사)는 "별장이 지어진 시기에 대해 1890년~1893년 정도로 언급되고 있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다"며 "공사가 되기도 전에 별장을 지었을 가능성보다는 그가 일인자가 된 후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알렌이 별장을 버리고 떠난 뒤에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향토사학자 고 최성연 선생이 쓴 저서 '개항과 양관역정'에는 이 곳을 '공사 집', '선교사 집', '의사 집', '이명구 별장', '서병의 별장' 등으로 불렀다고 나와있다.우선 이명구(1892~1975)는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다. 그는 대원군 집권기에 활약한 관료 이호준(1821~1901)의 서자인 이윤용(1858~1926)의 외아들이다.이명구가 이완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는 것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이명구 다음으로 이 건물을 차지한 사람은 서병의(1893~1945)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의 대상인 서상집의 장남이자 초창기 축구 심판이었다고 한다.알렌 별장은 학교의 교사(校舍)로도 자주 사용됐다. 1930년대 말 이 별장은 학교로 모습을 바꾼다. 이순희(1905~?)는 영화여고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삼남매를 낳은 후 이혼하고 1936년 불우한 소녀 3명을 데리고 별장에서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시작한다. 1938년 남동생과 함께 별장과 대지를 매입해 학교를 확장하고 계명학원은 4년제 소학교가 됐고 학생수가 70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최성연 선생의 책에는 이곳이 경찰전문학교와 중앙대학교 무선고등학교로도 사용됐던 것으로 나온다. 뒷받침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마을 인근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1956년에는 교회로도 모습을 바꾼다. 박태선이 창시자인 신흥종교 단체가 이 건물을 매입한다. 인천은 이 신흥종교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도시였다. 인천전도관은 건물을 250만원에 매입해 기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올렸다. 그해 12월 991.7㎡ 규모로 예배당을 완공했고, 이듬해 2층을 올렸다고 한다.이 교회는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78년까지 20여년간 자리를 지켰다. 이 종교단체는 부천에 '신앙촌'이라는 집단 거주지도 만드는 등 교세가 성장하다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으며 기울기 시작한다.인천전도관이 떠난 후에는 또 다른 종교단체가 이곳을 차지한다. 오늘날 예수중심교회로 불리는 한국예루살렘교회다. 이 교회는 이초석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는 귀신 축출, 기복주의를 강조하며 정통 기독교와 입장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아 교단에서 제명된 것으로 전해진다.1980년대 세워진 이 교회는 매년 성장을 거듭해 1988년에는 5천명, 1991년에는 1만명으로 교세가 확장된다. 1990년도에는 서울로 진출한다.일요일이면 예배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초대 남구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마을 주민 정창근(82)씨는 "28인승 버스 30대가 매일 좁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느라 기존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며 "하루는 예배가 있는 날 동네에 불이 났는데, 버스들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 소실되는 일이 빚어져 마을 주민들의 민원이 극에 달했다"고 당시 기억을 전했다.이 부지는 현재 개인 9명이 공동 소유한 사유지인 탓에 지자체가 개입할 여건이 안된다.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숭의동 107번지 일대는 서울로 가던 길목이었던 데다, 인천 전역이 보이는 훌륭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재력가의 별장으로, 또 종교시설 부지로 선호됐던 장소적 특성을 지닌다"며 "민간 소유의 부동산이긴 하지만 민간과 관이 함께 활용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미국 공사 알렌(1858~1932)의 별장이 있던 숭의동 107번지 일대의 풍경. 사라진 별장 대신 옛 인천전도관과 예루살렘교회의 성전으로 사용됐던 교회 건물만이 오랫동안 버려진 채 흉물스럽게 남아있다.먼지가 뿌옇게 쌓인 건물 2층 예배당 내부의 모습이 썰렁하다. 건물 주변으로 폐목재, 깨진 유리가 나뒹굴고 있다.지금은 소실된 알렌 별장의 옛 모습. /인천시립박물관 제공언덕 위에 자리한 교회 건축물 외관.

2016-06-22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24] 인천 영화초등학교

제물포 여성 선교 맡은 선교사 '벵겔' 주도십시일반 건축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초교백두산 소나무 사용 2층 나무바닥 원형보존교회 건축물풍 4개의 다락·외곽 지붕 특징一자 대신 'ㅁ' 평면 증축 획기적 교육시설日강점기 서울 명문사학 진학 유일한 통로김활란·서은숙 등 수많은 교육선구자 배출1892년 당시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 여성 선교에 중점을 두기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이와 함께 황해도 곡산 출신 미망인 백헬렌이 내려와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었던 인천인들은 미국에서 찾아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아주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여성들은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었고, 당시 벵겔은 전도부인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런데 벵겔의 눈에 전도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보였다. 이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익혔고, 찬미가도 더 잘 불렀다. 벵겔은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초등학교의 시작이다. 13일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있는 영화초등학교 본관을 찾았다. 1911년 세워진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669㎡ 규모의 벽돌 건물로 만들어졌다. 학교 건립비용은 싸리재에 있던 교사의 매각대금과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목재 사업을 하던 콜린스의 기부금 1천 달러, 그리고 인천지역 여성신도들이 삯 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모은 헌금으로 충당됐다.무더운 날씨였지만 학교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초등학교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의 이성진 교사는 "벽돌로 지어진 외벽과 내벽에 세 뼘 정도의 공간을 둬 내부에 진흙과 석회를 발라 습기를 빨아들이고, 외부 온도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게 설계됐다"며 "이 때문에 여름에는 바깥 온도보다 4~5℃ 정도 낮은 기온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는 성서연구와 기독교 교육을 목적으로 교회 내에 설치하는 전형적인 주일학교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1층 바닥은 콘크리트로 돼 있고, 2층은 목재 마루로 만들어졌다. 2층 나무 바닥은 1911년 건립 당시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백두산에서 공수해온 적송을 사용했는데 추운 북쪽 지방의 나무들이 워낙 단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도 바닥 곳곳에는 옹이를 잘라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영화학교가 백두산 소나무를 쓴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의 슬픈 단면이 엿보인다. 이성진 교사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두 차례에 걸친 경복궁 증축 사업을 벌이면서 서울과 인천, 경기도 지역의 소나무들을 모조리 자재로 사용했다"며 "할 수 없이 영화학교는 당시 목재 수송이 용이했던 백두산의 나무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2층의 나무 마루는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게 됐다.건물 3층은 다락방으로 'ㅅ'자 형태의 내부에 서까래를 노출 시켰다. 특히,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던 이곳은 십자형 평면으로 설계돼 종교적 의미를 가미했다고 한다. 건물 지하에는 당시 인천 지역 학교로는 최초로 조개탄을 사용해 공동 난방을 하는 보일러실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본관은 학교 건축물의 외형으로는 드물게 영국 성공회의 교회 건축물 풍으로 지어졌고, 4개의 다락이 들어선 3층 실내구조와 외곽 지붕구조는 특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현재 남아있는 영화초등학교 본관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건물 내부 구조를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했는데 이는 요즘에도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아주대학교 건축학부 전유창 교수는 2009년 '한국교육시설학회지'에서 발표한 '창영초등학교 및 영화초등학교' 논문을 통해 "영화초등학교는 현재 편복도로 기능적이고 획일화된 현재의 교육시설과 대비된다"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평면 계획적 적합성과 공간의 풍부함은 현대에 건축되는 융통성 없는 기능 위주의 학교 건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1920년대 당시 조선인들의 교육열이 들끓었지만, 조선총독부는 1면 1학교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교육을 받아 지식인으로 성장해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영화학교는 인천 지역 여학생들이 서울의 명문 사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성진 교사는 "영화학교는 미북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였기 때문에 서울의 '경성 여실'이나 '배화 학당', '진명 여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교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며 "1930년대 말에는 학생 수가 400명이 넘을 정도로 학교가 커졌다"고 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유아 교육 개척자 서은숙,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 초대학장 김애마, 피아노 연주가 김영의 등 한국 사회의 선구자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었다. 이성진 교사는 "인천의 근대 여성교육은 영화학교에서 시작됐고, 그것을 선도한 사람은 벵겔이었다"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졌던 가부장제를 혁파하고, 여성도 남성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실제 수많은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를 배출한 곳이 영화학교"라고 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영화학교 창립 당시 교직원(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 백헬렌)./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 모습(사진 오른쪽)과 현재 사용 중인 본관 모습.

2016-06-15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23] 청학동 외국인묘지

1883년 매장 시작 '한국 최초 외국인묘지'영국 등 11개국 66명 묘석 형태 각양각색한국전 UN묘지와 달리 개항역사에 '뿌리'랜디스 박사 등 근대화 기여 인물들 잠들어중국·일본인묘지와 다른 밝은 분위기 이색연내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 '체계적 관리'6월 6일 현충일, 부산발 기사들의 주요 공간은 UN기념공원이었다. 학생들부터 정치인까지 현충일과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기념공원을 찾아 전몰용사들을 추모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과거 UN묘지로 불렸던 부산 UN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4만여명의 UN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사령부가 조성했으며, 그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전국 각처에 가매장됐던 UN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했다. 1955년 우리 국회는 UN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UN에 영구 기증했고, UN도 이 묘지를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UN이 선정한 유일한 성지이기도 하다.부산 UN기념공원의 뿌리가 한국전쟁에 닿아 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묘지인 '청학동 외국인묘지'는 개항과 뿌리를 함께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 산 53의 2에 있는 청학동 외국인묘지는 인천 중구 북성동에 있던 외국인묘지를 1965년 5월 25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한국최초 인천최초'(역사자료관 刊)에 따르면, (북성동 외국인묘지의) 최초 매장이 1883년 7월로 되어 있다. 대략 8천평(2만6천여㎡) 정도의 넓이였는데, 1941년 철도 부지로 5천평(1만6천500㎡) 정도 수용되고, 나머지에 묘역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남은 곳도 주위가 개발되면서 1965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 6월 초 한낮에 청학동 외국인묘지를 찾았다. 언덕의 북쪽 면에 자리한 위치적 특성과 울창한 나무들로 인해 강한 햇살은 상당 부분 차단됐다.인천가족공원 2단계 조성사업에 따라 연내 부평으로 이전될 예정인 청학동 외국인묘지는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은 아니다. 정기적(1년에 한차례 정도)으로 찾는 묘소 몇 기를 제외하고는 관리 소홀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나무와 풀이 무성했으며, 그 사이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이 그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인천의 개항기와 근대화 시기를 경험하고 최후를 맞이해 이곳에 묻힌 66명(영국인 21, 미국인 14, 러시아인 7, 독일인 6 등 11개국)의 이양인들은 그렇게 정돈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평소 참배하러 오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묘지에 길과 계단으로 이뤄진 산책로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66명의 거처는 그들이 생전에 겪었을 경험들 만큼이나 다양했다. 이름이 다르고, 생몰연대가 다르듯 묘석의 형태도 묘지석에 쓰인 글귀도 모두 다르다.평범한 작은 십자 묘석, 둥근 원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는 형태의 켈틱 십자가, 오벨리스크처럼 뾰족한 돌 조각상도 있다. 안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석실이 있는 묘당도 있다.묘지석에 쓰인 글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천의 근대화에 기여했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성 누가병원을 설립하고 수많은 인천 사람들에게 서양 의술의 혜택을 주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한 엘리 바 랜디스(1865~1898) 박사의 묘도 그중 하나다. 랜디스 박사의 묘엔 십자가형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마치 조각품을 설치해 놓은 듯 이국적 정취를 느끼게 한다.또한, 청국 외교관 출신으로 인천해관에서 일을 하면서 구한말 외교 분야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우리탕(吳禮堂·1843~1912)의 묘비도 있다. 그는 송학동에 '오례당'이라는 화려한 독일식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이 건물은 당시 존스톤 별장과 더불어 인천항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우리탕은 30년 가까이 별장에서 살다가 1912년 세상을 떠난 후 인천에 묻혔다. 별장도 소실됐다. 우리탕 보다 20세나 적은 스페인 태생의 부인 아밀리아도 바로 옆에 잠들어 있다. 제물포구락부에서 플라멩고를 춘 것으로 알려진 아밀리아는 남편보다 24년 더 살다가 남편 곁에 묻혔다. 두 사람의 묘는 철제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이 밖에도 개항 후 인천에서 해외 무역을 주도했던 독일계 세창양행의 헤르만 헹켈, 타운센드 상회의 월터 타운센드 등도 잠들어 있다.인천에는 청학동 외국인묘지의 전신인 북성동 외국인묘지 외에도 중국(청)인묘지, 일본인묘지가 각각 따로 있었다.조계지 협약이 이뤄지기 전인 1860년대부터 외국인묘지가 하나둘 형성되고 있었다. 나라 간의 협약(조계지 협약) 이전에 이곳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외국인들이 묻힐 장소가 있어야 했다. 사람이 살 집이 필요하다면 죽은 자의 거처도 마련돼야 했던 것이다.특히 석상으로 장식하고 공원처럼 꾸며서 산책할 수 있었던 외국인묘지는 우리를 비롯해 동양권의 시선으로 봤을 때 무척 특이한 것이었다.'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刊)에 외국인묘지와는 달랐던 중국인묘지와 일본인묘지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부분이 있다.도화동 옛 인천대 정문 일대의 청인 묘지는 여기저기에 지어 놓은 빨간 벽돌의 묘각이 기이한 데다 대낮에도 인적이 뜸해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그들은 장사를 지낼 때 예외 없이 누런 빛깔의 가짜 종이돈을 무덤 앞에서 무수히 불태웠다. 이승에서의 가난과 한을 서러워하며 저승길에서나마 노자 돈을 원 없이 쓰라며 통곡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략)… 율목동의 일인묘지에는 그 자세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기괴하게도 한국인 마을 한가운데 일본인들의 묘지와 화장장까지 설치했다. 한동안 이곳에는 밤중에 도깨비불이 나돈다고 하여 초저녁부터 사람들이 얼씬조차 안 했다.주택과 마찬가지로 묘지 또한 다양한 매장문화를 통해 각국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청학동 외국인묘지 현장 답사를 마치고 정문을 나서는 데, 우연하게 마주친 주민 이상훈(45)씨는 "외국인묘지는 다양한 국가의 매장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역사교육 현장으로 의미가 크다"면서 "조만간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한다고 해 아쉽지만, 보다 잘 관리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청학동 외국인묘지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에 맞춰 평범한 작은 십자 묘석, 둥근 원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는 형태의 켈틱 십자가, 오벨리스크처럼 뾰족한 돌 조각상도 있다.일제때 북성동에 있던 외국인 묘지로 잘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1965년 청학동으로 이전했다.(사진 왼쪽) 1965년 당시 묘지의 이장을 돕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 /'격동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 刊) 중에서

2016-06-08 김영준

결혼식에도 '단복' 입은 강화도 보이스카우트

일제강점기 강화도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 사진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강화도 소년들이 남다른 민족의식과 높은 교육열을 보였다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근대한옥인 '강화 남문 1928가옥'(황씨 고택)의 소유주 최성숙(61·여)씨는 1930년 이 집에서 촬영한 결혼식 사진을 1일 경인일보에 처음 공개했다. 사진 속 신랑과 신부 주위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국제 소년단체인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소년 4명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준비(ㅈㅜㄴㅂㅣ)'라는 글자가 적힌 보이스카우트 휘장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데, '조선 소년군 강화본부(朝鮮 小年軍 江華本部)'라고 적혀있다. 조선 소년군은 1922년 창설한 한국보이스카우트의 시초로, 1937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소속된 소년들의 활동이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선 소년군 강화본부는 1926년 7월 창설했다. 조선 소년군의 지도자인 독립운동가 조철호(趙喆鎬·1890∼1941)가 같은 해 6월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던 중이라 조직세가 위축됐을 때다. 그러나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조선 소년군 강화본부 발단식에는 주민 500여 명이 참석해 축하회를 베풀며 강화도를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전국 각지의 조선 소년군 본부가 강화도에서 연합야영대회를 개최하는 등 강화가 보이스카우트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강화도에는 청년단체와 소년단체 활동이 두드러졌다. 청년단체들은 종교단체와 함께 강화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조선 소년군 강화본부를 비롯한 5개 소년단체도 토론회, 강연회 등을 열며 경기도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연구됐다. 강화 길상보통학교 학생들은 6·10 만세운동 당시 등교 거부 운동을 하다가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탄압받아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화도 소년들은 결혼식에도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입고 올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석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서양종교 유입이 빠르고 다양했던 강화도 주민들이 다른 지역보다 개방적이고,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계몽운동으로 교육열이 높았기 때문"이라며 "일제강점기 강화주민들의 의식과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제강점기 강화도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 사진. 1930년 촬영한 결혼식 사진 속 신랑과 신부 주위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국제 소년단체인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소년 4명이 눈길을 끌고 있다. /최성숙씨 제공

2016-06-01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22] 강화도 1928가옥

황씨 후손으로부터 도예가 최성숙씨가 매입원형 복원작업 진행… '체험 프로그램' 계획다락에 서양 발코니 같은 난간 설치돼 눈길헤링본 무늬 마룻바닥·에칭기법 유리문 등영국풍 양식 결합된 누마루·대청마루 '독특'황씨 사위 김근호, 전기공급·전화설치 한몫김주경과 인연 강화찾은 백범 기념사진 남겨전문가 "인천시 특성인 문화융합 건축 사례"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신문리 326)에 있는 이른바 '강화 남문 1928가옥'(황씨 고택)은 전통과 근대문물이 만난 '문화융합지대 인천'을 상징하는 근대한옥이다. 명칭 그대로 1928년에 건립된 이 집은 40년 가까이 빈집으로 방치됐다가 최근 새 주인을 만났다. 그전까지는 굳게 잠긴 대문 안을 들어가 본 사람이 많지 않아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8가옥이 건립된 당시에는 이미 서양 또는 일본 건축양식이 한옥에 스며든 때다. 이 집 역시 전통한옥의 외양을 갖췄지만, '이국적인 디테일'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래 집주인은 건립 당시 강화도 부농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황국현이다. 그와 관련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행적을 알긴 어렵지만, 고급 목재(백두산 잣나무)를 사용한 당시로선 최신식 주택을 지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1920~30년대 이 집에서 찍은 결혼식이나 잔치 사진에 등장하는 식구들의 말끔한 용모가 이를 뒷받침한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집안 식구끼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는 자체가 '부의 상징'이다. 그래서 강화사람들은 이 집을 '황부잣집'이라고도 불렀다. 1928가옥은 80년 넘게 황국현의 후손이 소유했다. 집주인이 바뀐 것은 2012년 말 도예가 최성숙(61·여) 씨가 황국현의 후손으로부터 집을 매입하면서다. 자연보호·사적보존을 위한 국제 민간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회원이기도 한 최성숙 씨는 강화도 일대에서 은퇴 후 머물기 위한 한옥을 4년 가까이 찾다가 이 집을 만났다. 그는 4년째 1928가옥을 건립 당시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황국현의 후손을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다. 최성숙 씨는 "88년이란 세월을 유지해온 집을 하루아침에 손댄다면 금방 망가질 것"이라며 "최소한 5년 이상은 집에 살아보면서 어떻게 복원하고 유지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1928가옥은 본채(사랑채), 문간채, 별당채, 곳간채로 구성돼 있었으나,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았다. 아직 실측하지 않아 정확한 건축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지 991.7㎡(300평)에 본채가 132.2㎡(40평) 면적이라고 한다. 본채는 'ㄱ'자 한옥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방과 누마루가, 왼쪽에는 2칸으로 나뉜 안방이 있다. 부엌 위에는 상당한 규모의 다락이 있는데, 다락 외부에는 전통한옥에선 찾아보기 힘든 서양의 발코니 같은 난간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다. 개방된 공간인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단 것도 근대한옥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928가옥의 누마루는 영국풍이 결합됐다. 헤링본(herringbone) 무늬의 마룻바닥과 에칭기법(부식법)으로 다양한 문양을 낸 크리스털 유리문 등은 모두 영국식이다. 그런데 누마루에서 사랑방으로 통하는 들문은 전통 문살에 창호를 바른 우리식이다. 1900년 강화읍에 한옥성당을 지은 영국 성공회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헤링본 무늬 마룻바닥은 대청마루에서도 나타난다. 건립 당시 사진을 보면, 이 집의 지붕은 기와가 아닌 초가지붕이었던 점이 수수께끼다. 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당시 최신 인테리어를 적용한 한옥의 지붕이 초가지붕이었던 것에 대해 현 집주인 최성숙 씨는 "주변 대부분 주택이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를 애써 드러내지 않는 겸손의 의미로 초가지붕을 올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며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1928가옥에 얽힌 수많은 강화도 이야기는 집의 매력을 더한다. 이 집의 본래 주인이던 황국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고 한다. 황 씨의 첫째 사위는 김근호(金根鎬·1907~?) 씨로 선박회사인 동양기선 전무와 배재학당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1934년 강화도에 처음 전기를 공급하고 전화를 설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수공업 형태로 이뤄지던 강화도 직물산업이 근대적 기틀을 갖추고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김근호 씨는 일제강점기 강화도에서 활발했던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서울 자택에서 북한군에게 피랍된 것으로 알려진 김근호 씨는 2012년 정부 6·25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납북자로 공식 인정됐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1946년 11월 강화도에 방문했다가 1928가옥 앞에서 지역 유력인사들과 찍은 사진도 아직 남아있다. 김구는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를 했다. 당시 강화도에 사는 김주경(김득경)은 재산을 탕진하며 김구 구명 운동에 나섰다. 인천감리서에서 탈옥한 김구는 1900년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도에 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3개월간 강화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해방 후 귀국한 김구가 가장 먼저 수소문을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김주경이다. 해방 후 김주경과 관련한 사람들을 찾아 강화에 온 김구가 김주경의 집이 있던 자리에 지은 1928가옥을 찾은 것이다. 강화도는 김구가 독립운동가 유완무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바꾼 곳이기도 하다. 집주인 최성숙 씨는 조만간 1928가옥에 대한 '한옥 문화체험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해 집에 대한 소개와 집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낼 계획이다. 그는 "예약을 통해 정해진 시간에 제한된 인원에게 집을 공개할 생각"이라며 "집의 원형과 역사를 함께 보존해 100년을 넘어 200년을 버텨낼 한옥으로 가꿀 것"이라고 했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인천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문화융합을 건축으로 구현한 사례"라며 "건축물 자체는 물론 살았던 사람에 대해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강화군 강화 남문 1928가옥 전경.대청마루에는 창문틀을 표구화한 그림 여러 장이 붙어있다. 근대 이후 한옥 대청마루는 거실 또는 응접실 역할을 하면서 서구식 주거양식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황국현의 장례식 모습. 1930년대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집의 지붕은 기와가 아닌 초가라는 게 눈길을 끈다. /최성숙 씨 제공1928가옥 누마루는 전통한옥양식에 영국풍 유리창과 마룻바닥이 가미된 특징을 보인다.2층 다락방 외관도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졌다. 다락의 규모는 일반적인 한옥보다 크다.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11월 강화도 방문 때 1928가옥에 들러 지역 유력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2016-06-01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21] 인천기상대 옛 창고

개항맞물려 수송등에 날씨정보 중요해져1883년 인천해관에 관측기구 설치가 시초日·中 기상실황 통신청취 수기기록 예보일기도 보관 기상대 옛 창고 '역사관' 활용원호형으로 된 결원아치 네덜란드식 축조동시대 건축물보다 '독특·정교' 가치높아날씨는 예나 지금이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가운데 하나다. 날씨가 중요한 정보이지만, 자연 현상인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기란 슈퍼컴퓨터도 불가능하다. 이에 날씨는 예보(豫報) 또는 예측(豫測)이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측우기가 발명되고, 하천의 수위를 재는 수표(水標)가 개발되는 등 기상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인천은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aul Georg von)가 1883년 9월 1일 인천해관에 기상관측기구를 설치하고, 하루 5번씩 기상을 관측할 것을 지시하면서 국내에서 최초로 기상 관측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에서 최초로 기상 관측을 하게 된 배경은 개항과 맞물려 있다. 개항과 함께 인천항으로 화물이나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선 기상 예측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는 것이 인천 향토사학자들의 중론이다.국내의 기상학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인천기상대는 지난 2013년 10월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정상인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서로 61(인천 중구 전동 25의 59)에 신축됐다. 인천기상대 신청사는 7천840㎡ 부지에 지상 2층(979㎡) 건물과 관측장소(490㎡) 등을 갖추고 있다.인천기상대의 옛 건물은 사라졌지만 1923년 4월 준공된 인천기상대 창고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지난 23일 오후 찾은 인천기상대 창고는 빨간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건물로, 건물 정면에 아치형 흰색 출입구 2개와 측면 양쪽에 직사각형 창문 2개 등이 있었다. 지붕은 초록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형태다. 현재 실내는 날씨체험관·기상대역사 등으로 구성돼 '인천기상대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창고 앞에는 "이 건물은 반원보다 작은 원호형으로 된 결원아치가 있는 네덜란드식(혹은 영국식)으로 축조되었고, 또한 출입구 위의 눈썹지붕을 지지하는 까치발은 동시대 건축물과 비교해도 독특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이 창고와 인천기상대에 대해서는 1957년 당시 인천측후소(현 인천기상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방순태(86)씨에게 들을 수 있었다. 방씨는 "인천측후소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통신시설이나 기상관측장비가 없어서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보내주는 기상실황을 통신장비로 듣고 일일이 수기로 기록했다"며 "이렇게 기록된 인천의 기상정보를 서울기상대로 보내면 서울에서 인천지역을 포함해 기상예보 방송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이어 "수기로 기록한 일기도(날씨 등을 기록한 기록물)는 빨간 벽돌 창고에 보관했었다"고 했다.방씨는 1949년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해 통신 특기를 받아 6·25전쟁 등에 참전한 뒤 1957년 1월 제대했다. 제대 직후 인천기상대에서 통신기술을 갖춘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사했다고 한다.그는 "관측 장비가 충분하지 않아 기상정보를 일본 등으로부터 통신장비를 이용해 받아야 했는데 통신장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직원이 거의 없었다"며 "군대에서 익힌 통신기술을 바탕으로 기상관측을 공부하면서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이어 "인천측후소에 당시 소장을 비롯해 10명이 근무했는데 2인 1조로 나눠 오전 3시와 9시, 오후 3시와 9시 등 4번에 걸쳐 기상정보를 통신장비로 듣고 일기도에 작성했다"고 했다.그는 인천측후소에서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일기예보가 틀리면 여지없이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방 씨는 "지금처럼 팩스나 인터넷을 이용해 일기 예보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기상대 건물 앞에 세워진 철탑 안테나 2개에 헝겊을 매달아 예보를 했다"며 "날씨가 맑으면 사각형의 흰색 천을 걸고, 구름이 끼는 날이면 사각형의 녹색 천을 걸었다. 풍향은 삼각형 천에 색깔을 넣는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날씨를 알렸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러던 어느날 맑은 날이 예상돼 흰색 천을 걸었는데 오후부터 비가 쏟아졌고, 시민들이 기상대로 찾아와 온갖 항의를 했었다"고 회고했다.방씨는 인천측후소가 있던 자리에 대한 변천사를 말해주며 "1947년 친구가 일했던 인천측후소를 찾았을 땐 관측소, 창고, 목조건물 등을 비롯해 천체를 관측했던 천문관측 망원경도 있었다"며 "전쟁이 끝나고 입사했을 땐 폭격 때문인지 망원경은 흔적도 없었고, 건물들도 많이 훼손돼 있었다"고 설명했다.이어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기상관측을 위해 주변에 건물을 설치할 수 없어 산 정상에 있는 관측소 건물을 제외하면 주변에는 전부 임야였다"며 "측후소를 담당하는 정부의 부처가 바뀔 때마다 학교, 기관 등에 땅을 전부 내줘 인천측후소가 지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해관에서 하던 기상관측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기상 관측을 했던 인천은 1905년 1월 현 인천기상대 자리에 임시관측소 건물을 신축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기상업무를 시작한다. 이어 해방 직후까지 인천은 중앙기상대의 역할을 수행한 도시였다. 그러나 1953년 중앙기상대가 서울에 신설되면서 인천에 있던 중앙기상대는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을 바꾼다.인천기상대 건물은 1984년 12월 원통형으로 지어져 수십 년 간 인천시민들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지만, 이 건물은 지난 2013년 지금의 형태로 신축됐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빨간 벽돌로 쌓아 올려 결원아치 등 네덜란드식으로 축조된 인천기상대 옛 창고 외관.현재 날씨체험관 등으로 구성돼 '인천기상대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인천기상대 옛 창고 실내모습.방순태(맨 오른쪽)씨가 인천기상대 동료들과 함께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 왼쪽 뒷편에 흰색의 옛 인천기상대 건물이 보인다. /방순태씨 제공인천기상대 상공에서 본 모습. 현재 사용 중인 기상대와 관측시설 창고까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1928년 지어진 돌계단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2013년 신축된 인천기상대 모습.

2016-05-25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20] 답동성당

팔각형 돔 형태 종탑… 첨탑 뾰족한 고딕 양식 아닌 보기드문 '로마네스크'마리아와 예수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 벽면 장식좁은 주차장 등 주변 정리안돼 고풍스러운 분위기 망쳐 "문화가치 살려야"인천시 중구 답동 가톨릭회관 옆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정상에 다다르면 이국적인 교회건물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인천 근대 종교 건축물의 형님 격인 답동성당이다.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을 언덕에 지어진 답동성당은 개항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등 격동의 역사와 인천의 변화를 지켜보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답동성당에 가면 언제나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해 답사온 일행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이 성당은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 꼽힌다.지난 13일 성당을 찾아가 1992년부터 성당에 출석하고 있다는 홍순영(59) 평신도 자문위원의 안내를 받아 성당을 둘러봤다. 이날도 역시 여주에서 왔다는 답사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성당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처음 성당을 만나면 고풍스럽고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움에 누구나 압도된다. 홍 위원은 "역사적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성당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다"며 "때문에 지역의 관광명소로, 신자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했다. 성당은 1897년 지어진 초기 성당에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개축해 1937년 준공됐다. 198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천주교 답동교회가 발행한 '답동대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제물포로 불리던 인천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홍 요셉(Joseph Wihelem) 신부가 파견돼 1889년 7월 1일 제물포교회를 창설하고 포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홍 신부는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지역에 정착한 민종황(요한) 일가한테 지금의 땅을 싼값에 기증받아 부지를 마련해 성당건축을 계획했다. 그러나 홍 신부는 곧 신학교로 전임해 완성된 성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초대 홍 요셉 신부에 이어 두 번째 본당 신부로 부임한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 바오로(Emille LeViel)였다. 그는 자선행위를 통해 교세를 확장했다. 조선 관리에게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할 허가를 받아 병들고 부상당한 공장 노동자와 짐꾼들을 돌보는 등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애를 썼다.답동성당이 세워진 것은 제3대 서 요셉(Joseph Maraval)신부 시절인 1897년 7월. 이때 비로소 지금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1937년 완공된 지금의 성당은 서울 혜화동 성당의 초대 신부였던 시잘레 신부가 설계했다.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큰 종탑이 있고, 좌우로 작은 종탑이 하나씩 있다. 팔각형의 받침돌 위에 원형 기둥 8개가 서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돔을 얹은 모습이다.이는 우리나라에 지어진 성당 가운데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태다. 답동성당과 전북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을 제외하면 천주교 전교 초기 지어진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당은 첨탑이 뾰족한 고딕양식이다.고딕 양식은 중세 서유럽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이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고딕 양식이다.홍 위원과 함께 종탑 안으로 들어가니 3개의 종이 보였다. 홍 위원은 "종탑에 균열이 생겨서 종이 울리지 않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하루 3차례,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6시에 종지기가 치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며 "성당 주변 사람들에게 시계나 다름없었다"고 했다.그에게서 종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일제는 광복 직전 이 성당 3개의 종을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며 가져가려 했다. 성당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다른 지역 성당에서 종을 헌납하자 버티기 힘들어졌다. 당시 성당의 신부는 기발한 제안을 해 위기를 모면한다.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종은 해방과 더불어 무사히 성당에 되돌아왔다.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무척 아름답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세히 보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처럼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겨 있는 그림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 등을 찾아볼 수 있다.홍 위원은 "이 그림이 추상적인 모양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며 "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자들이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고 했다.스테인드글라스 창 옆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있다.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세밀하게 묘사된 조각은 성당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더한다.1937년 6월 30일 축성식이 열렸지만, 당시 성당에는 성당에 꼭 있어야 하는 14처 조각이 없었다. 당시 인천부 협의원인 장광순(프란치스코)씨는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일금 1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서양에 14처 조각을 주문했다. 1937년 11월 1일 이를 성당에 부착하고 신자들이 모여 축하했다.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답동성당은 건축 당시 한동안 인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랜드마크'였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금은 상가건물 속에 묻혀 성당 구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또 주차장이 협소한 탓에 고풍스런 성당이 주차된 차량으로 둘러싸여 성당의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 현재 답동성당 주변을 관광 자원화 하는 사업이 지자체에 의해 추진 중인데 이 기회에 이러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다른 지자체가 성당의 건축·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잘 가꾸어가고 있는 데 반해 답동성당은 그렇지 않아 늘 아쉬움이 많다"며 "성당 주변이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신중하게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사적 287호 답동성당은 1897년 지어진 초기 고딕양식 성당에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개축해 1937년 준공됐다. 전교 초기에 지어진 국내 성당 가운데 로마네스크양식은 보기 드물다.제대부의 벽면 푸른 도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조화를 이룬다.스테인드글라스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걸려있는 14처 조각이 보인다.종탑 내부의 모습.1900년 4월 17일 답동성당 종축성식. /천주교인천교구 제공1916년 답동성당의 모습. 지금과 달리 뾰족한 종탑의 모습이 보인다. /천주교인천교구 제공

2016-05-18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19] 인천역사자료관

포목 독점으로 돈 번 '코노 다케노스케'1901~1916년 송학동에 별장 건립 추정대문 석조 기둥·정원만 아직까지 보전1960년대부터 관사로 쓰다 2001년 개방역사자료관으로 80여년만에 시민 맞아근현대 역사벨트 구심점으로 자리매김입구에는 석조 기둥으로 대문을 세우고 내부 통로 좌·우측엔 돌계단을 배치 길 양쪽 일본 귀족의 상징인 금송 줄지어 심어 호화로운 정원을 꾸며 세를 과시했다. 심지어 충남 보령 사찰에 있는 3층 석탑 빼앗아 장식하고 100년이 흐른 지금도 수려함 간직한 일본산 방울 철쭉까지 가져다 심었다.조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에 따라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항구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돈이 몰리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재화들은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재화를 축적한 외국인들은 인천 곳곳에 거대한 별장을 만들었다.러일전쟁으로 번 돈을 인천에 가져와 여러 사업을 한 '아끼다 쯔요시(秋田 剛)'의 호화로운 생활 흔적이 남아있는 저택은 건물과 정원이 아름다워 '추전어전(秋田御殿)'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평안도 지역 금광을 소유한 동양합동주식회사 재정책임자였던 미국인 '데쉴러(David W.Deshler)'는 동양식 주택 여러 동과 함께 한 채의 서양식 건물을 세우고, 넓은 일본식 정원이 있는 저택을 관사로 사용하기도 했다.현재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코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 별장도 이 당시 지어진 호화로운 일본식 별장이다.코노 다케노스케는 1895년 평양에서 무역과 잡화상 운영을 하다가 1896년 동학농민운동을 피해 인천에 와서 포목, 석유, 밀가루 등을 취급하는 상점을 개설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인천역사자료관 강덕우 연구원은 "코노 다케노스케는 인천 지역 포목을 독점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라며 "당시 일본에서 포목을 100원에 가져왔다면 조선에는 500원에 판매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이러한 방법으로 인천 지역 돈을 긁어모은 코노 다케노스케는 송학동에 대규모 별장을 지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본국에서는 지위를 높이거나 재산을 모으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이 때문에 조선에서 많은 돈을 벌면 대규모 저택을 짓는 것으로 세를 과시했다"고 했다.지난 3일 인천역사자료관을 찾았다. 건물 입구에는 석조 기둥으로 만들어진 대문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석조 기둥은 코노 다케노스케가 별장을 만들 당시부터 남아있던 것이라고 한다. 별장의 건립연도와 관련된 기록은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제물포 구락부와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건물이 있는 사진에 별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1901년에서 191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대문을 지나자 커다란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정원은 코노 다케노스케가 만든 것이 아직 보전되고 있는 것으로 인천에서 큰돈을 벌었던 그는 전형적인 일본 귀족의 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대문에서 건물로 이어지는 좌·우측의 돌계단을 나란히 배치했고, 길 양쪽으로는 일본 귀족들의 상징적인 나무인 금송(金松)을 줄지어 심었다.이 외에도 코노 다케노스케는 자신의 정원이 인천에서 손꼽히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했다. 1916년에는 충청남도 보령의 한 사찰에서 3층 석탑을 강제로 빼앗아 정원을 장식했다. 이 석탑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돼 있으며, 2008년 보령시는 해당 석탑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정원 곳곳에는 일본이 원산지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일부 지역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방울 철쭉(낙엽 철쭉)을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 정원을 꾸몄다. 이 때문에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려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돈으로 우리 땅에서 누린 일본인들의 호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안타깝게도 코노 다케노스케가 만든 별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해방 후에는 별장 건물을 허물고 서양식 주택이 만들어져 '송학장'이라는 댄스홀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아쉽게도 당시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인천시는 1966년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12대) 시장의 지시로 송학장을 매입해 369㎡의 한옥 건물을 지어 인천시장 관사로 이용했다. 강 연구원은 "당시 인천시장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관사로 쓰이던 신흥동에 있는 '인천 부윤 관사'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부터 반일 감정이 높아지면서 관사를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많아졌다"며 "고급 주택지가 밀집해 있고, 당시 인천시청(현 중구청)과 가까운 현재 건물은 최적의 입지 조건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개축공사 계획은 윤 시장 재임 시절에 세워졌지만 다음 시장인 신충선 시장부터 공관을 사용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공관 폐지' 공약을 내세운 최기선 시장이 당선되면서 2001년부터 인천시 역사자료관으로 문을 열어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이 기간에 이곳에 머물렀던 시장은 17명에 달했다.강 연구원은 "시청이 이전하면서 시장 공관이 중구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고, 공관을 개방해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응봉산 기슭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지 80여 년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셈이다"고 했다.이 후 현재까지 역사 자료관은 매년 3만 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시민 휴식 공간 뿐만 아니라 인천역사를 발굴하고 수집, 정리 및 연구하는 인천 역사학의 본산으로 그 자리를 잡았다. 이와 함께 주변 개항사박물관, 인천근대건축자료관, 인천근대문학관, 짜장면박물관, 중국인거리, 개항장 등 인천 근현대 역사벨트를 형성하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이처럼 힘겹게 시민들에게 개방된 장소이지만 인천 근현대사의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다 보니 이곳을 다른 용도로 개발하려는 시도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3년에는 인천시가 이곳을 리모델링해 국빈 맞이용 장소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시민들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손 교수는 "그동안 시민들의 베일에 싸였던 공간이 수십 년만에 개방됐다. 이를 일부 사람들만 이용하도록 하는 것은 시민들의 품에서 그 공간을 또 빼앗는 행위"라며 "인천 역사를 위한 기관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30년대 '코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큰 사진)와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의 대문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인문학센터장 제공인천 개항 이후 인천지역 포목을 독점한 것으로 알려진 코노 다케노스케가 지은 호화로운 일본식 별장터 모습. 당시 별장은 해방 이후 허물어졌다.코노 다케노스케 별장 정원의 현재 모습.별장 정문 모습. 현재도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현재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6-05-11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18] 강화도 '용흥궁'

가문이 역모로 몰린 철종, 대표적인 왕족 유배지 강화에 머물던 '잠저'즉위후 권위 세우려 신축 '宮으로 승격' 가옥기능 없는 일종의 기념관전형적 조선후기 사대부 살림집… 유교적 격식 잘갖춘 경기지방 한옥철종 부친의 5대손 이해승 후손 소유 불구 친일 소송중 정부서 가압류인천 강화도는 역사 속에서'몽골군의 침략을 피한 39년간 고려의 전시수도','조선 임금의 보장처(保藏處·왕이 피난하는 곳)'로서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강화도는 '대표적인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왕이나 왕족은 30명이 넘는다. 고려의 수도 개성이나 조선의 수도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감시와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다.조선 제25대 임금 철종(哲宗·재위 1849~1863)은 14세부터 왕위에 오르게 되는 19세까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집안이 역모에 몰렸기 때문인데, 죄인이 왕에 등극한 것은 고려와 조선역사를 통틀어 유일하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는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潛邸)' 용흥궁(龍興宮·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이 남아있다. 잠저는 새로 나라를 세우거나 반정으로 임금에 추대된 왕족, 임금이 아들을 두지 못해 종실에서 왕위를 잇도록 추대한 왕족 등이 임금이 되기 전 궁궐 바깥에 살던 민가를 일컫는다. 보통 임금이 된 후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잠저를 다시 지어 용흥궁처럼 '궁(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재위 1392∼1398)의 함흥 본궁(本宮)과 개성 경덕궁(敬德宮)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잠저는 대부분 서울에 있었으나, 제26대 고종(高宗·재위 1863~1907)과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이 살던 운현궁(雲峴宮) 정도만 현재까지 서울에 남아있다. 용흥궁이 잠저로서 희소성을 지니는 이유다. 철종은 기와집인 지금의 용흥궁이 아닌 초가집에서 형제·친척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용흥궁은 철종이 즉위하고 4년이 지난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존 초가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철종이 임금으로 지목되자 서울로 모시기 위해 강화도로 온 봉영(奉迎·왕을 모시는 것) 책임자인 판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은 강화유수 정기세의 아버지로, 부자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용흥궁 대문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비탈길 동쪽 골목 안에 위치한 용흥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대부 살림집 유형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궁이기 때문에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내전,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는 외전이라고도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는 경기지방 한옥에서 볼 수 있는 'ㄱ자형'으로 집의 거의 모든 부분이 유교(주리론)적 법규를 모범적으로 따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기와지붕 구성물 중 하나인 처마도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사랑채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안채는 땅을 상징해 네모나게 처리한 것도 눈길을 끈다. 용흥궁 보수를 맡았던 문화재 보수 전문가 태인석(飛건설 대표) 씨는 "서울 운현궁처럼 화려하고 규모가 큰 잠저는 아니지만, 유교적 격식을 아주 잘 갖추고 당시 가장 좋은 목재를 써서 만든 집"이라며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등을 적어둔 글)을 보면 30~35년 주기로 보수를 했으나, 실제 사람이 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용흥궁은 임금의 집인 까닭에 건축한 이후 다른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든 일종의 기념관인 셈이다. 일반적인 조선 사대부 살림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양반'이 머무는 사랑채가 나오고 '안주인'이 있는 안채를 사랑채 뒤편에 배치한다. 사랑채가 외부인으로부터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용흥궁은 사랑채를 안채 뒤편 구릉 위에 지은 특이한 구조다. 왕이 머무는 사랑채의 권위와 전망을 고려해 언덕 위에 배치한 것이다. 각 방에 딸린 툇마루가 적다는 점에서도 용흥궁이 사람이 살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용흥궁은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1785~1841)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1890~?)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은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대표적인 친일인사다. 용흥궁은 정부가 제기한 친일재산 환수 관련 소송이 진행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가압류한 상황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철종실록'에 실린 철종이 승하한 뒤 명순왕후가 쓴 행록(行錄)을 보면, 철종이 강화도에 살 때 동네에 행실이 못되고 사나운 사람이 있어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언사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는데 보위에 오른 뒤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당시 강화유수가 철종을 감시하는 것이 매우 가혹해 집안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생각했는데, 임금이 되고 나서 그가 승지 후보에 오르자 낙점했다는 얘기도 실려있다. 철종의 너그러운 성품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지만, 강화도 시절 철종의 처지가 그만큼 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몰락한 왕족이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은 당시 실세인 외척 세도가문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1849년 헌종이 자식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뜨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서 유배 중인 왕족 이원범(철종)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했고, 불과 4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권력의 실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는 철종이 즉위하고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철종은 수렴청정이 끝난 후 왕권 확보 노력도 했으나, 끝내 세도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위 후반기를 넘기며 국정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그는 결국 강화도를 떠나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인 1863년 33살의 나이에 이질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세도정치에 억눌려 임금으로서 권위만 있지 그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철종의 생애. 겉으로는 번듯하지만 집으로서 기능하지 못한 용흥궁과 무척이나 닮았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철종어진 원본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3분의1 가량이 불에 타 소실돼 1987년 당시 한국전통미술인회 회장 최광수 박사에 의해 복원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16-05-04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17] '수탈의 거점' 일본 은행들

'인천 최초 은행' 일본 제1은행 개설 이후1900년대초 일본계 금융업체 20여개 달해일본인 거주 중심 '본정통' 3개 은행 위치19세기 '서구식 건축 양식' 고스란히 담겨세 사람은 대불호텔을 지나서 은행거리로 접어들었다. 일본제1은행과 일본제18은행이 개점하면서 이 넓은 길은 '은행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중략)…왜나막신을 신은 일본인들로 붐비는 은행거리로 다시 접어들었다. 여름에 개점 예정인 제58은행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초상집과 감옥의 서글픔 따윈 낄 자리가 없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열망이 건물과 함께 우뚝했다. - 김탁환의 소설 '뱅크' 중에서일본은 조선 경제 침탈을 위해 은행을 앞세웠다. 조선 상인들은 개항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일본 상인들에게 밀려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1899년 개성, 서울, 인천 상인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한천일(天一)은행'을 세웠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러일전쟁 시기인 1905년까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 '뱅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인 천일은행 탄생을 소재로 삼았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뱅크'에선 치열한 돈줄 쟁탈전이 전개된다. 소설에서 그려진 것처럼 19세기 말 한반도에서 벌어진 열강들의 세력 다툼에서 실권을 쥔 일제는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잇단 화폐개혁, 토지몰수, 토지를 담보로 한 대출, 미곡 탈취 등은 일제가 경제 수탈의 수단으로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애용한 정책이었다.경제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한 일본계 금융 기관이 인천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개항된 1883년이다. 그해 11월 인천지역 최초의 은행인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개설됐다. 이 은행의 주요 업무는 한국산 금 매입과 해관세 취급이었다. 일본 상인에 대한 대출 등으로 업무가 확장되자 1888년 9월 인천지점으로 승격됐으며, 한 달 후에는 서울에 인천지점의 출장소를 두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천에 일본 상인이 늘고 거래량도 급증하자 1890년 10월 제1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냈다. 또, 1892년 7월 인천전환국에서 주조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주목적으로 제58은행도 인천에 지점을 열었다. 이어서 일본의 보험회사들도 잇따라 인천에 진출하는 등 1900년대 초 조직적으로 건너와 인천에 문을 연 일본계 금융업체는 2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모여 살던 거류지의 중심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현재 인천 중구청 정문 앞 신포로 23번길을 따라 수십m 사이에 일본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인천의 본정통은 경제 침략의 본거지로 보면 된다"면서 "개항 이후 세관이 설립되고, 물품이 오고 가면서 자금의 결재에 은행이 필요했으며, 요충지에 일본 은행들이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100여년 전 우리 경제 수탈의 상징인 인천의 일본 은행들은 19세기 일본이 받아들인 서구식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1899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 제1은행의 설계자는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다. 모래와 자갈, 석회를 제외한 벽돌, 석재, 시멘트 및 목재 일체의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이 석조 건물이 세워지기 전 제1은행은 서양식 목조 2층의 외벽에 페인트칠을 한 건물에서 영업했다.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에서 건물의 전체적 외관은 주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구성한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있다. 출입문 상부에 반원 아치(Arch)를 틀었으며, 주출입구 상부의 지붕에는 르네상스풍의 돔(Dome)을 올려놓았다. 넓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내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 구조체를 지지하도록 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건물 출입구 상단에는 조선은행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는 제1은행이 식민지 시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승격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해방 후 한국은행이 그 역할을 이어갔지만, 옛 흔적은 고스란히 남았다.1890년대 인천에 살고있는 일본인의 절반가량은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두고 설립된 제18은행은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천에 첫 해외 지점을 냈다.이 건물은 기단을 석조로 처리한 뒤 벽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붙여 전체적으로 석조물로 보이도록 했다. 지붕형식은 모임지붕이며, 일본식 기와로 마감됐다. 일본 제1은행과 제58은행 인천지점이 금고를 본관 외부에 설치한 것과 달리 이 은행의 금고는 내부에 설치돼 있다.제58은행은 대외 상거래가 가장 활발한 오사카(大阪)에 본점을 두었던 은행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호인 이 건물의 벽돌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프랑스풍의 건축물로 초기 양식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이 건물은 석조기단과 발코니, 도머창, 맨사드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들 세 은행이 정치 자금의 융자와 해관세의 취급, 한일 양국의 국고금 취급 등에서 특허를 받으면서 인천 개항장은 한국 금융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한일병합 이후 모든 제도와 업무가 서울 중심으로 변해감에 따라 각 은행 지점들도 본부를 서울로 옮겨 갔다. 이에 따라 인천의 은행들도 그 기능을 축소하면서 기본적인 금융업무만을 보는 곳으로 정체됐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인천지역 금융 판도를 바꿔놓은 큰 사건이다. 100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세 은행의 건물은 금융기관을 비롯해 각종 기관의 사옥으로 사용됐다. 현재 제1은행과 제18은행은 인천 중구청이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제58은행 건물은 중구요식업조합이 사무실로 쓰고 있다.지역의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현장 체험 학습장으로 인기를 끌면서 평일 하루에 500~800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개항박물관과 근대건축전시관은 주말에는 외지에서 인천을 찾은 단체 관광객과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 100여년전 역사를 전하고 있다.조우성 관장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58은행 건물의 경우 공공의 자산으로써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인천시가 건물을 사들이기 힘들다면 지역 독지가가 구입 후 시에 기탁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면서 "지역의 근대 문화재들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면서 문화 자원화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이름에 숫자가 들어간 이유1872년 실시된 일본의 국립은행조례에 의해 인가된 허가번호에 따라 각 은행을 '제00국립은행'으로 명명한데 따른 것이다. 국립이지만, 국가가 운영한 것은 아니고 국가의 통제를 받는 민간업자가 설립해 운영했다. 1~153번까지 있었고, 이들 은행은 서로 인수와 합병을 거듭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인천에 진출했던 세 은행 중 제1은행과 제58은행은 현재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미주보은행)됐으며, 제18은행은 옛 명칭으로 영업하고 있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30년대 인천 본정통 모습. 사진 오른편에 일본 제1은행이 보이며 중앙쪽에 제58은행 지붕과 그 앞에 제18은행 지붕이 보인다. /인천 한중문화관 제공

2016-04-27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16] 인천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

◈INCHEON MAIN CUSTOMS history붉은 벽돌로 된 단층… 처마·창테두리 등 15~16세기 르네상스 양식수인선 길목 철거 위기에 2013년 40m 떨어진 현 자리로 해체·이전한쪽벽 원형 그대로 떼어내 복원… 증축 전면길이 최초 형태로 축소1883년 설치 후 화재·폭격 소실 이어져 현재 청사는 아홉번째 건물인천 중구에 최근 개통한 지하철 수인선 신포역 2번 출입구는 인천세관의 옛 창고 한 쪽 면을 본 떠 만든 생김새로 시민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인천세관의 옛 창고는 수인선 철로가 계획된 길목에 있어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역 사회와 학계 등이 이 창고를 인천항 개항의 항만유산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결국 이 창고는 본래 위치에서 40m 가량 떨어진 곳에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고, 문화재청은 지난 2013년 10월 이 창고와 부속건물 세 동을 등록문화재 제569호로 지정했다.19일 오후 찾은 인천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 건물은 인천항 개항기에 지어진 건축물의 양식과 유사하게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단층 건물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인천세관 옛 창고는 지난 2013년 해체·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입구를 기준으로 우측면은 원형 그대로 떼어 내 복원됐다.창고는 주 출입문이 좌측면에 있었고, 보조 출입문이 전면에 있었는데 복원하는 과정에서 좌측면 입구는 막고 우측면과 같은 형태로 복원했다. 건물의 전면 길이는 증축을 거쳐 23.6m로 늘어난 상태였지만, 복원을 하면서 1911년 최초 건립 형태인 14.49m로 축소됐다.창고를 증축한 흔적은 국가기록원이 보유하고 있는 '인천세관부속연와창고증축기타공사지내창고설계도(1915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고는 전면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고, 건물의 처마와 창 테두리 장식 등은 15~16세기에 발달한 르네상스 양식이라고 한다. 창고 측면 좌·우 벽면 끝은 기둥 상부에 사각형 석판을 올리고, 그 위에 둥근 형태의 장식을 뒀다. 측면 상단 부분에 있는 물결무늬 장식도 눈에 띄었다. 창고 내부는 이전·복원하면서 내부 벽면에 나무를 덧댔고, 바닥에는 나무로 마루를 설치했다.부속동 모두 단층으로 옛 선거계 건물과 화물계 건물 등 2개 동이다. 옛 선거계 건물은 인천항 갑문을 운영하는 직원들이 머물던 건물로 창고, 인천세관 식당 등으로도 활용됐다고 한다. 화물계 건물은 정면 출입구 상부에 인조석으로 아치 형태로 디자인해 변화를 줬다. 이 건물은 현재 경비실로 사용되고 있다.인천세관의 역사는 인천 개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조선은 관세행정과 해관 운영 등에 경험이 없는 탓에 1882년 청나라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aul Georg von)를 총세무사로 고용하며 청나라식 관세 제도를 도입한다.이에 세관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해관(海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서양인들에게 낯선 조선의 항구 도시 인천은 청나라의 발음을 따라 'JENCHUAN'으로 알려졌다.이 같은 사실은 초기 해관의 통계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해관연보(1885~1893)'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천해관 통계를 'JENCHUAN' 항목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틀어쥐며 일본식인 세관(稅關)으로 변경된다.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한 뒤 같은 해 6월 16일 인천 중구 항동 1가 1번지(현 파라다이스호텔 인근)에 목조 형태의 단층 건물이 세워지며 세관과 연을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최근 세관 역사를 발굴하고 있는 김성수 서울본부세관 감사계장은 이 같은 설을 뒤엎는 주장을 했다.그는 1883년 4월 일본군인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가 제물포 일대를 그린 지도에 나타난 해관의 위치와 러시아인으로 기술사(Engineer)인 베코프스키(Vladimir S. Bekofsky)가 그린 인천 청국조계지 평면도의 '옛 세관 건물(Old Customs House)' 위치가 일치한다는 것이다.이 위치는 첫 청사로 알려진 파라다이스호텔 인근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현재 차이나타운과 인천역 사이 인근이라고 한다.이 사실이 인정될 경우 그 동안 첫 번째 청사로 알려진 곳은 두 번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천세관의 파라다이스호텔 인근 청사는 1885년 7월 화재가 발생해 소실됐고, 곧 그 자리에 건물을 재건했다. 이어 1907년 해안 쪽으로 2층 목조의 임시청사를 지었다.1911년 인천세관은 다시 초기 청사가 있었던 옛 올림프스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우측으로 기역(ㄱ) 자 형태의 세관 건물을 짓는다. 첫 청사가 인정될 경우 인천세관의 다섯 번째 청사다. 이 건물의 도면은 국가기록원이 갖고 있는 '인천세관청사분석실화물검사장설계지도(1911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후 인천세관 청사는 1926년 건물 전체를 해체하여 지금의 인천항 내항 1문 인근으로 옮긴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천세관 청사는 폭격에 사라졌고, 이에 세관은 인천 중구 사동에 임시로 세관 건물을 확보해 5~6년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인천세관은 다시 청사를 1959년 8월 현재 인천항 내항 1문 인근으로 옮겨 새로 짓는다. 인천세관이 인천에 둥지를 튼 지 여덟 번째 청사다.이어 지난 1989년 현재의 인천항 3문 입구 옆 인천 중구 항동 7가 1-18로 신축 이전계획이 확정되어 옮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초창기 인천해관의 직원들은 수출입통관 등 세관 고유업무 이외에도 제물포 조계지 도시계획, 기상 관측, 우편사업, 검역 등 정부행정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고 한다.세관의 역사를 발굴하고 연구해 온 김성수 서울본부세관 감사계장은 "인천세관은 개항 역사를 따라 위치를 옮겨가며 정부의 주요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종합청사 역할을 했다"며 "개항의 역사를 함께 한 인천세관의 옛 창고와 부속동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세관 옛 창고는 1911년 인천 올림프스호텔(현 파라다이스 호텔) 인근에 지어졌다. 이 창고는 1926년 인천항 내항 1문 인근으로 옮겨진 뒤 최근 수인선 지하철 공사를 위해 40m 가량 옮겨져 복원됐다. 사진 우측에 있는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사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면에 상단 물결무늬 장식이 눈에 띈다.부속동 1 '선거계 건물'인천세관의 옛 선거계 건물은 인천항 갑문을 운영하던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붕은 누수가 심해 천막으로 덮어놨다.부속동 2 '화물계 건물'인천세관의 옛 화물계 건물은 세관 화물 검사를 담당하던 직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입구 상부 인조석이 눈에 띈다. 현재는 인근의 세관 창고 경비실로 사용하고 있다.인천세관 옛 선거계 건물의 내부 모습. 현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내부의 벽과 천장 등이 훼손돼 있다.인천세관 옛 창고 측면에 있는 철재 창의 모습.인천세관 옛 창고 내부 천장을 지지하는 트러스의 모습.

2016-04-20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15]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 빌딩)

1925년 세워진 해운회사 건물로 수년 후 사옥 확충때 신축된듯장식주의·모더니즘 결합 1930년대 '4층 근대건축물' 현존 유일1918년 축항 완공으로 우편국 등 주요 건물들 들어선 새 중심지 향토기업 선광이 인수… 1층에 미술관 만들어 개방 '가치' 더 해1883년 개항 이전까지 인천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비록 강제된 개항이었지만 항구가 열리자 이곳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들어왔고, 항구 주변으로는 돈과 사람이 몰리며 인천도 근대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인천 중구 중앙동 4가 2-26에 있는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은 일제시기의 번성했던 인천항 주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인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4층 구조의 근대건축물로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고층 구조의 건축물이라는 가치도 있다.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해운회사의 사무실로 쓰였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1년판)에는 닛센해운(日鮮海運(株))은 해륙 운송업, 중개업, 대리업과 그에 부대한 일체의 사업을 벌이는 업체로 1925년 10월 16일 지금의 주소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돼있다. 회사 설립 당시에는 현재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으며, 각종 사진과 자료 등을 봤을 때 수년 후 사옥을 확충하면서 새롭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늦어도 1932년 10월 이전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조선신문사가 발간한 책 '인천의 긴요문제'에는 현재 건축물의 사진이 그대로 수록돼 있다. 이 책이 발행된 시점은 1932년 10월로 인쇄도 같은 달 이뤄졌다.하지만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의 항공 사진을 보면 지금 건물이 있던 자리에 모양이 다른 일본식 3층 건물이 확인된다. 이 항공사진에선 인천부청(현 인천 중구청 자리로, 일제시기의 인천시청) 자리에 일본 인천영사관 건물 모습이 보인다. 기록을 보면 인천부청 신청사는 인천영사관을 허문 자리에 1932년 8월 19일 착공했다. 때문에 이 사진은 그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이다. 튼튼해 보이는 1층 위에 나머지 2~4층이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은 형태다.1층의 외벽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벽돌로 마감됐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굵은 띠를 둘러 층을 구분했다. 요즘 짓는 고층 아파트 건물이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저층에 띠를 두르거나 짙은 색으로 마감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보면 된다. 2·3층은 같은 모양으로 이어지다 4층에서는 모양이 달라진다. 4층 각각의 모서리 부분을 잘라낸 듯한 모양으로 위에서 보면 십(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빛이 잘 들게 하고 빗물 유입을 막는 공간인 '드라이 에어리어'가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벽으로 덮여 있다. 건물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상태로 변했다.현재 건물 1층은 신축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2~4층의 외벽을 마감하고 있는 타일은 언제 마감된 것인지 정확지 않다. 장식주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결합한 1930년대 초기 사무소 건축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4층 근대건축물이다. 민간이 세운 4층 규모의 근대건축물은 보기 드물다. 민간회사의 사무실 건물을 높이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땅의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근대 건축물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철근과 콘크리트 등 당시 건축 자재는 지금보다 상당히 비싼 재료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수평으로 확장하지 않고, 수직으로 높이 지었다는 것은 당시 지가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그 일대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이 자리가 당시 경제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인천의 긴요문제'는 이 일대를 '인천의 현관'으로 묘사하고 있다."축항(築港) 앞 대로 - 바닷길로 인천에 입항하여 부두에 내리면 전방 좌우에 인천세관, 오사카상선회사 지점,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 지점, 인천우편국 등의 큰 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이 인천의 현관으로서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큰 대로는 이것을 거점으로 서쪽으로 인천역에 이어져 있다. 전면의 르네상스식 근대건축물은 인천우편국이다."무역항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통관 기관인 인천세관을 비롯해 서신 교류를 할 수 있는 우편국 등의 시설과 해운회사 사무소 등이 들어서며 항만 경제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인천항이 무역항으로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사건은 물때와 상관없이 배들이 인천항을 드나들 수 있게 갑문식 선거를 갖춘 '축항'의 완공이다. 이 토목공사는 1911년 착공해 1918년 마무리되는 대공사였는데, 선광미술관 일대는 축항 완공 이후 새롭게 형성된 중심지였다.인천항의 축항 완공 이전까지는 이곳과 1㎞가량 떨어진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근에 항만의 주 출입구가 있어 그 주변이 중심지 역할을 했다.인천항은 개항 당시는 자연항이었기 때문에 큰 선박은 직접 부두에 배를 붙일 수 없어 작은 배들이 여객이나 화물을 부두로 운송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차츰 방파제와 선박계류시설인 잔교 등을 갖춘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인천 축항이 건설되며 인천항은 부산항 다음으로 많은 화물을 처리하는 중요 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며 "자연스레 축항건설 이후 항만관련 기관이 옮겨가며 새롭게 중심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세월이 지나면서 이 건물은 공교롭게도 인천항을 중심으로 성장한 향토기업 선광이 사용해오다 지금은 이 회사가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을 위해 설립한 선광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선광문화재단은 지난 2013년 이 건물의 1층을 미술관으로 꾸며 지역 문화·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황순형 선광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인천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을 인천에서 성장한 향토기업이 인수해 공익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며 "소중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인 만큼 잘 보존하고 활용하겠다"고 말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중구 중앙동 4가 2-26에 있는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은 일본 강점기 번성했던 인천항 주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인천의 향토 하역사인 선광이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을 위해 만든 선광문화재단의 사무실과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현재는 이용하지 않고 있는 건물 주 출입구. 가장자리에 설치된 장식이 특이하다.지난 2013년 6월 건물 1층 전체를 갤러리로 꾸며 지역 작가들의 전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1932년 조선신문사가 발간한 책 '인천의 긴요문제'에 수록된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 /출처=인천의 긴요문제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 수록된 항공사진. 이 사진에서는 지금의 건물이 아닌 일선해운의 옛 건물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인천부사1929년 제작된 인천부관내도. 사진 속 붉은 도로가 사람과 물자 이동이 가장 빈번한 도로로, 닛센해운 빌딩은 도로와 인접해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2016-04-13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14] 수인선 송도역사

일제 수탈위해 건설 1990년 중반까지 운행… 유일하게 남은 역사선로와 평행 배치 넓은 창문 특징 '강점기 표준설계' 그대로 적용업체서 임대해 사용… 요즘 보기드문 철도 급수탑도 녹슨채 방치문화재 지정 지지부진 속 인천구간 재개통돼 '보전 필요성' 지적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 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중략…)가을에 그 작고 낡은 기차는 어차피 노을 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윤후명 저 '협궤열차' 중에서(책 만드는 집)지난 2월 수인선 송도역∼인천역 구간이 폐지된 지 20년 만에 재개통했다. 내년 12월 한대앞역~수원역 구간이 완공되면 인천에서 수원까지 52.8㎞의 수인선이 모두 이어지게 된다.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조그마한 크기의 동차(動車)가 있었다. 열차의 레일 간격은 762㎜로 국제 표준 궤(1천435㎜)의 절반에 불과했다. 수원과 인천을 오가며 궤간 너비가 표준보다 좁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수인선 협궤열차로 불렀다. 이 열차는 1937년 일제의 쌀·소금 수탈 수단으로 처음 건설됐지만, 광복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약 50년 동안에는 서민들의 발 역할을 했다.하지만 1970년대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수인선의 화물과 여객이 크게 줄었고, 1973년 11월 종착역인 남인천역(수인역)이 폐쇄됐다. 이후 수원~송도 구간만 운행하다 1977년부터 화물 운송이 중단됐고, 1995년 12월에는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여객 운송마저 멈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협궤열차가 운행을 중단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섭섭해 했다. 하지만 경제성 논리에서 협궤열차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열차가 폐지되면서 수인선의 역사(驛舍)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종착역이었던 남인천역(수인역)은 일찌감치 사라져 터만 남아 화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용객이 가장 많았던 소래역도 몇 년 전 철거되고 시내버스 종점이 됐다.지난 1일 수인선 역사 중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옛 송도역사를 찾았다. 1937년 수인선 개통과 함께 만들어진 송도역은 1973년 남인천역이 폐쇄됨에 따라 20여 년 동안 수인선 인천지역의 시종착역 역할을 했다. '송도'라는 지명은 섬처럼 생긴 곳에 소나무가 많다는 의미로 일본이 붙인 것이다.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도시 규모에 따라 갑(50~60평)·을(48평)·병(38평)·정(30평) 등 크기에 맞춰 역사를 설계했다. 송도역사의 규모는 125㎡(38평)로 당시 중소도시에 많이 세워지던 '병형'으로 설계됐다. 개통 당시 송도 지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1985년 7월부터 1988년 1월까지 송도역장을 지낸 박철호(73)씨는 "내가 역장을 처음 맡았을 때는 이미 승객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음에도 주말에는 1량을 더 달아 3량으로 운행할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며 "출퇴근 시간에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많이 이용했고, 주말에는 소래포구를 가는 사람들이나 나들이객이 역을 많이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주말이면 역 앞에서는 송도 갯벌에서 잡은 해산물이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농산물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렸다"며 "짐을 나눠 들고, 중매가 이뤄질 정도로 협궤열차 안에는 정이 있었다"고 덧붙였다.역사는 철도와 평행하게 배치됐고, 선로를 조작하는 운전실은 철도가 잘 보이는 직각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일제강점기의 철도역사 표준설계도의 특징이 그대로 적용됐다. 이와 함께 철도 방향으로 돌출시키고 넓은 창문을 배치해 기차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과거 많은 사람이 이용했던 송도역이지만 현재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이었다. 역사 정면에 쓰인 '송도'라는 두 글자 이외에는 이곳이 옛 송도역이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었다.인천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철도 급수탑(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도 녹이 슨 채 방치되고 있었다.그나마 이곳을 임대해 쓰고 있는 업체에서 건물 주변 정리를 하고 있어 쓰레기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로 보였다. 하지만 역사 내부는 여러 임대 업체들을 거치면서 수차례 변경돼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수인선 인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수인선을 다시 떠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곳곳에서 수인선 역사가 문화재로 보전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근대 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협궤열차 역사이고, 소래철교와 더불어 인천 지역에서 수인선을 추억할 수 있는 둘뿐인 시설물"이라며 "송도역 인근에 위치한 '철도 급수탑'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철제 급수탑인 점도 이를 보전해야 할 이유"라고 설명했다.이 때문에 지난 2012년부터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계속됐지만, 아직 지지부진하다. 게다가 도시개발사업지구에 송도역 일부 부지가 포함된 상황이다. 만약,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는다면 옛 소래역처럼 개발 논리에 밀려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손 교수는 "송도역사(驛舍)의 내부가 많이 변형됐기 때문에 건축학적 보전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수인선 관련 시설,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마지막 협궤열차라는 것은 충분히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이어 그는 "현재 위치가 아닌 바로 옆으로 이전하더라도 송도역사는 반드시 보전돼야 한다"며 "이것이 수인선을 이용하던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37년 수인선 개통과 함께 만들어진 송도역. 1973년 남인천역이 폐쇄됨에 따라 20여 년 동안 수인선 인천지역의 시종착역 역할을 했다. /사진작가 김용수씨 제공수인선 폐쇄 이후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옛 송도역사 모습.수인선 송도역∼인천역 구간이 폐지된 지 20년이 지나 최근 재개통했다. 사진은 현재의 수인선 송도역사 모습.

2016-04-06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13] '우정의 상징' 舊 인천우체국

백범의 사형집행 막아낸 서울~인천 전화개통 등통신 발달의 중요성 절감케한 수많은 사화 간직월남 권유로 1884년 우정총국 인천분국 문 열어조선 통신기관 탈취한 일본이 지금 자리에 신축원형기둥·외벽 거친 돌 마감 등 '절충주의' 양식예산 부족으로 '외부 보수' 못해 흉한 모습 방치2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영에 수감됐다. 수감 1년 후 사형을 선고받은 백범은 사형 집행 당일 정부의 사면을 알리는 급전(急電)을 받으며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다. 집행 당일 서울-인천 간 전화가 개통됐으며, 그 덕택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의 일화는 통신의 중요성을 절감케 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근대 통신 도입 과정에 얽힌 수많은 사화(史話)를 간직한 인천은 근대 통신사(史)의 시발지였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근대 통신 수단은 우편으로, 그 시발지 또한 인천이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는 1880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4개월간 머무르며 일본의 우편제도를 배웠다. 월남은 일본의 우편제도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우체국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해 국내 우편제도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84년 조선 조정은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열면서 월남을 초대 분국장으로 임명했다. 우정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인천분국 창설 당시 우정총국의 일본인 고문이었던 오비 사케아키는 서신을 보내 "우정(우편행정)은 참으로 공적으로 보나 사적으로 보나 천고에 없던 편리한 방법입니다. 경하스런 마음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신중한 마음으로 직무를 집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서울과 인천의 우편업무는 20여일 만에 중단됐다.그 이전인 1882년 일본은 자국민의 통신 편의를 위해 영사관(현재 인천 중구청 자리) 내 설치한 간이 우체국에서 우편 업무를 취급했다.1891년 서울에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를 설치하면서 일본 통신기관이 늘기 시작했고, 1894년 국내 일본 우편국 수는 29개로 늘었다.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인천시민을 위한 우편 업무는 인천우체사(郵遞司·경동 225번지)가 1895년 설립되면서 시작된다.3년 뒤 인천우체사는 내동 10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우편국의 철폐를 요구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조선의 통신기관을 탈취했다. '우체사'의 명칭도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뀐다.일본의 인천우편국(구 인천우체국)은 1923년 현재의 자리인 인천 중구 항동 6가 1로 신축 이전했다. 우체국 영선계에서 건축을 담당했으며, 착공에서 준공까진 1년이 걸렸다.평일 오전에 찾은 구 인천우체국(현 인천중동우체국)은 다소 한산했지만, 항동 교차로 면에 좌우로 펼쳐진 듯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면서 행인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지붕 일부만이 파손됐을 뿐 거의 온전히 살아남은 인근의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인 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행정 관서 중 가장 웅대한 건물이었다.모서리에 돌출된 출입구를 통해 실내로 들어서면 여느 우체국과 똑같은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연수동으로 이전한 후 건물은 대수선 공사를 하고 인천중동우체국으로 이어지고 있다.인천중동우체국 관계자는 "대수선 공사를 하기 전 건물 내부는 전부 목재였다"고 했다. 낡은 목재들을 떼어내고 현대식 마감재로 내부를 보완한 것이다.건물 외부는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하다.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Eclecticism) 양식을 단순화했다. 사거리에 면한 모서리에 낸 주출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둥머리 없는 작은 기둥을 여러 개 받치면서 돌출시켰다. 당시 관공서 건물은 대체로 둥근 돔 모양의 탑옥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에서는 생략됐다.또한 면을 거칠게 다듬는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 기법을 활용한 화강암 기단 위에 벽돌로 쌓은 뒤 모르타르로 마감해 2층 석조 건물의 외관을 연출했다. 근대 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주 출입구를 사거리에 면한 모서리에 두고 그곳을 정면으로 처리한 방식은 다음 블록에 있었던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건물과 같다"면서 "다른 점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의 입구는 모서리의 곡선을 따라 설치했고, 인천우체국의 입구는 앞으로 돌출시키고 직선형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이어서 "그리스 양식에서 나타나는 원형 기둥, 르네상스 양식의 거친 돌로 마감한 기단부에서 절충주의 양식이 보인다"고 덧붙였다.구 인천우체국은 1982년 3월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문화재로 지정되고 만 34년이 흐른 현재, 건물 외부 표면은 군데군데 일어나 있다. 칠이 벗겨져서 떨어진 부분도 있으며, 수포가 생긴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것도 많다. 문화재로 지정됐기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 없으며, 일반 페인트가 아닌 가격이 몇 배는 비싼 특수 페인트로 칠해야 하는 점 등이 보수에 발목을 잡고 있다.현재 인천시에 문화재 관련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소 수년 동안은 이같이 흉물스런 모습을 더 봐야 한다.우정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인천우체사 시기의 주요 업무는 인천의 우편물과 서울의 우편물을 교환해 집배하는 것이었다. 경인선 철도 개통 이전까지 인천우체사와 한성우체사의 우전인(郵傳人)은 매일 오전 9시에 우편낭을 메고 오류동까지 걸어갔다. 두 우전인은 오후 1시께 오류동에서 우편낭을 교환해서 돌아갔다.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이 걸린 행보였다.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우편낭에 담긴 지역민의 수많은 사연과 함께 인천 우전인들의 애환을 품고 있는 건물이다. 질곡의 인천 우정사(史)를 간직하고 있는 구 인천우체국의 외부 보수는 이른 시간에 해결돼야 할 것이다.최연주 인천중동우체국장은 "인천우체국은 우리나라 우편업무를 잉태한 중요한 곳이며, 선배 우정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스민 곳"이라고 설명했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3년 우편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은 근대식 건물로서 당시의 행정관청으로 웅대한 규모였다. 건립 당시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1949년 8월에 인천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연수동으로 이전한 후 건물은 대수선 공사를 하고 인천중동우체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 모습.수인선 신포역에서 접근할 때 만나는 모서리이다. 좁고 긴 수직 창문선들과 어울려 나눔의 변화를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칠이 벗겨진 벽면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2016-03-30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12] 도원동 부영주택

강점기 병참기지화로 노동자들 살 집 부족하자 주택단지 계획인천 행정관청 첫 공급 도시계획 상징 한옥 3채·개량 1채 남아1942~1948년 죽산과 가족 거주… 정치가 길 들어선 중요한 시기2011년 무죄판결 불구 관심 사그라들어 공공차원 보존 필요성◈죽산의 맏딸 조호정씨가 부영주택 단지에서 기억하는 아버지그곳엔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것 같다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오지 못했고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아버지는 유독 로맨틱 영화를 좋아했다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실제로는 정도 많고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일제 강점기 지방관청인 인천부청(仁川府廳)은 지금의 중구 도원동,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등에 도시계획에 따른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인천지역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가 확장하면서 생긴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당시 인천부가 직접 지어 분양한 집을 '부영(府營)주택'이라 부른다. 지금의 '시영(市營)아파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인천 중구 도원동 12 일대에는 산비탈에 2m 남짓 높이의 축대를 쌓아 지은 부영주택 3채가 나란히 있다. 1940년 건립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이야 낡은 한옥쯤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인천의 지방행정관청이 처음으로 계획을 세워 공급한 인천 도시계획 역사의 상징이다. 또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인천 출신으로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간첩으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하고도 50년이 넘어서야 그 누명을 벗게 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 선생이 1940년대 살았던 집으로써 인천에 남은 죽산의 유일한 흔적이기도 하다.# 인천 첫 단지 분양주택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 식민지 정책을 '병참기지화' 방향으로 바꾼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인천은 군수품 생산과 수송을 위한 군수공업단지로 성장하게 되는데, 각종 공장이 확장·신설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인천으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살 집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인천부는 1939년 '소(小)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단지 분양주택 건설을 논의, 1940년 '도산(桃山)주택'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부영주택을 도원동에 지었다. '도산'은 도원동의 옛 지명인 '도산정(桃山町)'에서 가져왔다. 인천시립박물관의 2014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천부가 작성한 '인천부영주택조성계획서'에서 부영주택 계획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력 확충에 수반되는 각종 공장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이에 필요한 인적자원인 공장노무자는 증가를 보이기 때문에 주택의 품귀를 초래한다. 각종 중요 산업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하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본 계획을 세워 300호를 건설하고자 하며, 부평을 포함한 병참기지로 장차 산업도시로서 목적달성상 크므로 국책에 부합 기의에 입각한 조치다."인천부가 도원동 부영주택을 건설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비슷한 기관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단지주택 공급계획을 수립한 1941년보다 빠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2014년 조사에서 1940년대 위성사진 등을 분석해 도원동 부영주택은 총 28동이 지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부영주택은 도원동을 시작으로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부평구 부평동 등에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원동 부영주택은 대부분 철거됐고,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와 일본식 개량주택 한 채만 남았다. 한옥은 지하 1층, 지상 1층짜리 건물로 158.7㎡ 대지에 건축 면적은 78㎡이다. 마루와 방 2칸, 부엌이 딸린 구조다.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 조사에 참여한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 지방관청이 주도해 지은 한옥은 보기 드물뿐더러 일본이 한옥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주택"이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 부영주택과 죽산 조봉암죽산 조봉암은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도원동 부영주택에 살았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8) 씨와 죽산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이 죽산이 살던 집이다. 20채가 넘는 인근 부영주택이 헐리는 동안 다행히도 죽산이 살던 집은 아직 헐리지 않은 것이다. 죽산이 도원동에 살던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가 해방을 맞고 공산주의에서 전향, 본격적으로 정치가의 길을 걸으면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중요한 시기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조호정 씨를 만나 죽산의 도원동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부영주택으로 이사 왔을 당시 조호정 씨는 중구 답동 박문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죽산은 벼를 찧을 때 나오는 겨를 공급하는 인천비강업조합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조 씨는 "(부영주택 단지에)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며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고, 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조 씨는 해방 전에는 집으로 죽산을 찾아온 경찰의 위협이 무서웠고, 해방 후 격동기 속에서는 공산주의 진영과 갈등을 빚으며 싸우는 게 불안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학생이라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갈등도 많고 (정치적인) 싸움도 많이 했다는 건 알았다"고 했다. 조 씨는 죽산이 도원동 집에서 키우던 '샤리'라는 애완견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곤 하던 모습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샤리'는 죽산이 좋아하던 할리우드 인기 아역배우 셜리 템플(Shirley Temple)에서 딴 이름이다. 조 씨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며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죽산이 살았던 부영주택을 인천시 등이 공공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사건(일명 진보당 사건)에서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공소사실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죽산 재조명 바람'이 불면서 부영주택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죽산이 누명을 벗은 지 5년이 지난 현재는 그러한 관심이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인천시가 '인천 가치 재창조'의 일환으로 '인천 인물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인천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인천의 인물' 코너에서는 여전히 죽산 조봉암이 태어난 해를 1898년으로 틀리게 표기했다. 인물 소개도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처형됐다"에서 끝을 맺으며 그의 무죄 판결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현재 남아있는 도원동 부영주택(한옥) 3채 중 한 곳은 빈집이다. 전문가들은 이 빈집이 건축 당시 구조와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죽산 조봉암이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살았던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조호정 씨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죽산의 도원동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살던 부영주택이 보존돼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활용됐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6-03-23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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