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11] 문학동 376-4 한옥

ㄱ자 안채·ㄴ자 사랑채, ㅁ자 정원 둘러싼 모양… 질 좋은 소나무 '홍송' 사용주거용 주택, 2004년 식당으로 용도 바꿔 출입문·화장실 위치 등 상당수 변경개항기 이후 현대화 건축양식인 '튼 입 구(口)' 형태 전통한옥 ㄷ모양 벗어나원형 보존안돼 문화재 등록 못했지만 "사용자 목적에 맞게 변형된 집" 큰 의미시간이 흐르면 건축은 변한다. 삶의 양식 변화에 따라 건축도 변하고, 집의 모양도 달라진다. 집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 환경에 맞게 혹은 목적에 따라 집의 구조를 고치고, 자재를 덧대고 심지어 없애버리기도 한다. 옛집은 사람과 건축물의 변화를 묵묵히 담으며, 하나의 역사가 된다. 인천시 남구 소성로 326번길 4(문학동 376의 4)에 있는 한옥은 사용 목적에 따라 건물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고택이다. 건축물대장엔 이 건축물의 사용 승인 연도를 1943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전 거주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실제 건축 연도는 1910~1930년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건축물은 현재 인천의 '옛' 집의 명성보다 순두부가 일품인 '맛'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하대박물관이 2002년 발간한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보고서를 보면 이 집이 주거용으로 사용됐을 때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김 씨네 집은…북향집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로…'라고 기술된 부분을 보면 2002년까지만 해도 현재 화장실 위치에 있었던 문을 통해 집을 출입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안채와 사랑채를 각각 주인과 머슴들이 사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주인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안채가 있는 건물의 높이를 사랑채 건물보다 한 계단 높게 지었다고 한다.보고서를 작성했던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연구관은 "이 집이 지어졌을 당시엔 한옥보다는 초가집이 주변에 많았다"면서 "이 집은 마루나 서까래 등에 사용한 나무가 일반 소나무보다 질이 좋은 홍송(紅松)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꽤 재력을 갖춘 사람이 지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 집은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가 있는 곳에서 직선 거리로 200~300m 떨어져 있다. 자연스레 주민들의 거주 공간이 됐고 인천의 역사와 문화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러나 개항기를 전후해 인천의 행정과 주거의 중심이 지금의 중구청 인근으로 옮겨가며 이 지역은 서서히 쇠락한다. 이런 환경에서 소성로 326번길 4에 있는 이 집은 개항기 이후에 인천에서 현대화되어 가는 한옥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물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지난 14일 오후 이 건축물의 내·외부를 둘러봤다. 도로를 향해 난 미닫이 문 2개를 열고 들어서면 가운데 네모난 형태로 조성된 작은 정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좌우로는 각각 니은(ㄴ), 기역(ㄱ) 형태의 건물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위성사진을 통해 이 집을 내려다보면 건물의 구조가 미음(ㅁ) 형태를 하고 있다.과거 주거용으로 사용됐던 이 집의 내부 구조는 김상태(52)씨가 식당 영업을 하면서 그에 맞춰 변경했다. 김씨는 "2004년 가게를 열기 전 방 구조를 비롯해 출입문의 위치 등을 식당 운영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집의 출입문은 지금의 위치가 아닌 곳에 두 군데가 있었다. 김씨는 "지금은 주방으로 쓰고 있는 곳과 화장실이 있는 곳 등 두 곳에 출입문이 있었다"며 "주 출입문의 역할을 했던 대문의 위치는 현재 화장실 위치에 있는데 화장실을 만들면서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문은 식당을 하기 위한 리모델링 과정에서 두 건물 사이에 새로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건물의 출입문 형태는 주방 입구에 보이는 냉장고 뒤편에 남아 있는 출입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가게 출입문을 통해 들어와서 좌측을 보면 니은(ㄴ) 형태의 건물은 안방과 건넌방, 마루 등이 있다. 안방에는 부엌과 또 다른 마루가 붙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벽을 트면서 하나의 방이 됐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마루도 음식점을 열면서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건물 바깥쪽으로 2m 가량 확장했다. 또 음식점 출입문으로 들어와 우측에 있는 기역(ㄱ) 형태의 건물은 음식점 주방과 꺾인 형태의 방으로 돼 있다. 음식점 이전에는 지금 주방의 위치가 물건을 보관하는 광으로 사용됐으며, 출입문을 두고 사랑채와 마루, 문간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건축역사학자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이런 형태의 집들을 '튼 입 구(口)' 형태의 도시형 한옥이라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한옥의 형태가 개항기를 거치면서 전통 한옥의 형태인 디귿(ㄷ) 형태의 한옥을 벗어나 이 집처럼 튼 입 구 형태의 도시형 한옥으로 변모해 간다"며 "문화재적 가치를 따지기 보다는 과거 한옥의 건축 형태를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말했다.이어 "건물 정 가운데 있는 미음(ㅁ) 형태의 정원은 일본식 정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이며, 나무나 꽃들을 심어 원래 있었던 대문(현재 화장실) 밖에서 안주인이 생활하는 안채를 가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이 집은 수 년 전 인천시를 통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했으나, 원형의 모습을 거의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등의 이유로 문화재 등록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건축물이 과거 형태의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지만,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사람이 살면서 쓰임에 맞게 건축물을 변형해 가는 것이 오히려 '집'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시간이 흐르며 건축은 사람의 삶을 따라 변화해 '옛 집'이 된다. 인천시 남구 소성로 326번길 4(문학동 376의 4)에 있는 한옥은 사용 목적에 따라 건물이 변화한다. 한 때는 도시형 한옥이었던 이곳은 이제 인천에서 순두부가 맛있는 '맛 집'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진은 건축물의 전경 사진 드론촬영.인천시 남구 소성로 326번길 4(문학동 376-4) 한옥의 도면. 주거용을 사용할 때 방의 위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문간방 사이에 있는 문이 대문이다. /출처=인하대박물관 조사보고 제30책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인천시 남구 소성로 326번길 4(문학동 376-4) 한옥의 옛 대문. 현재는 음식점으로 개조하면서 대문의 위치는 바뀌었다. /출처=인하대박물관 조사보고 제30책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인천시 남구 소성로 326번길 4(문학동 376-4) 한옥의 안채에 있는 마루의 모습. 마루를 거실로 사용하면서 소파와 시계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인하대박물관 조사보고 제30책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옥의 미음(ㅁ) 형태의 정원.한옥의 안채와 마루의 모습.

2016-03-16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10]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

■최초의 '한옥 성당' 한국문화에 스며든 서양종교 { 강화성당 : 1900년 강화읍에 세워져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으로도 불린다 } ■최초의 '민초 성당' 평신도 힘으로 세운 십자가 { 온수리성당 : 1906년 온수리에 신축… 2003년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아 } 교회나 성당, 사찰 등의 종교 건축물에는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인천 강화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은 100년 전 모습을 거의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두 성당은 개항기 근대 한국에 유입된 외국 종교 가운데 하나인 성공회의 한국 정착 과정과 당대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축물이다.전통 한옥기법 외형·서양식 내부 조화이뤄종·태극·연꽃 문양 등 불교 사찰 닮은 모습건축재료 백두산 적송·강화산 화강암 사용#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으로도 불린다. 1900년 지어진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242호)인 이 성당은 언뜻 보면 불교 사찰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성당 외부는 한식 기와가 얹혀진 전통 한옥 양식이다. 외관에 비해 성당 내부는 서양의 교회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에 따라 지어져 서구 기독교가 한국 문화를 거스르지 않고 토착화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영국 성공회는 초기 선교 거점으로 강화를 택했다.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된 지역인 스코틀랜드 서안의 아이오나(Iona)처럼 한국의 성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성공회는 같은 선교지역에서 다른 교단과 마찰을 일으키며 경쟁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강화도는 여타 종교의 선교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지역이기도 했다.강화성당은 1890년 성공회를 전파한 찰스 존 코프(1843~1921) 주교에 의해 지어졌다. 성공회의 강화도 선교는 1893년 영국인 워너 신부가 갑곶리에서 작은 초가집을 사들이며 시작된다. 후임으로 온 트롤로프 신부가 강화성내로 선교본부를 옮겨 전도활동을 펼치다 교세 확장에 따른 필요로 1900년 11월 15일 지금의 성당이 건축된다. 현재 성당이 자리 잡은 터는 배 모양으로, 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5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40간 규모로 지어졌다.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 고건축 기법을 따랐지만, 내부는 서양식 방식을 택했는데, 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 최초로 한옥양식을 도입한 성당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서양종교와 한국문화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강화성당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당의 정문에서도 이 땅과 어울리려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성당 중앙문 정문에는 태극무늬가 발견되고 그 무늬 안에 십자가 모양을 새겨 넣었다. 성당의 종을 보관하는 '종각'의 기능을 하는 내삼문에 있는 종은 사찰의 범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의 서까래에서도 연꽃문양을 볼 수 있다. 강화 성당의 목재는 백두산의 적송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 백두산의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옮겼다. 경복궁 재건으로 서울 주변의 목재가 부족하자 멀리 백두산에서 찾았다고 한다. 재단이나 세례대 등에는 강화산 화강암이 사용됐다.성당의 유리나 벽돌은 일본, 중국 등에서 들여왔고 성당에 있는 4개 출입문은 영국에서 보내왔다.4대가 넘게 강화에서 살고 있는 강종훈(60) 신도회장은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이라는 점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매년 4만명이 성지순례 차 오고 있다"며 "이러한 성당의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의사 로스 헌신적 의료선교 덕에 교세성장전통문화 존중 자발적인 헌금·참여 이끌어목구조 형식 한국형 교회건축양식 큰 의미# 교인들의 힘으로 지은 최초의 성공회 성당 온수리성당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온수리 성당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52호로, 1906년 지어졌다. 단아하고 아담한 한옥 양식이 보존된 한국형 교회건축양식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7년 인천시문화재자료 15호로, 2003년에는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온수리 성당 역시 강화읍 성당과 마찬가지로 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온수리 성당은 오로지 이 지역 평신도들의 힘으로만 지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성당은 선교단체나 교단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의 힘으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성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성공회가 강화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너 신부가 먼저 강화읍 갑곶이에서 고아와 거지들을 추스르며 교리와 신앙을 심었다. 1897년 로스가 난저골로 불리던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약국)를 설치하고 진료사업과 함께 선교사업을 전개했다. 1898년 1월부터 9개월간 여러 마을의 242가정을 돌아보면서 3천528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난저골은 온수리 장터에서 1㎞정도 떨어진 곳으로 그 이전부터 천주교인이 은거했던 지역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로스는 초기 이곳과 강화읍을 왕래하면서 진료 사업을 계속하다 1900년에는 이곳으로 완전히 이동해 진료와 전도사업에 전력했다.의사 로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환자들이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치료를 받으러 왔고 그를 찾아온 환자는 대체로 신자가 됐다고 한다.로스의 의료 활동에 힘입어 1906년에는 영세 희망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교세가 성장했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그해 쓰던 성당을 헐고 새로 15간의 성당을 건축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교인들의 열성과 특별헌금으로 원래 교구가 계획한 규모보다 약 배가 늘어난 27간의 전통 한옥으로 성당을 만든다. 로스의 헌신적인 의료선교 활동에 자극받은 평신도들이 땅을 기증하고 특별 헌금을 내어 마련된 건축비로 새 성당을 짓게 된 것이다. 온수리성당의 건축은 강화읍성당이나 다른 지역의 교회와 달리 시작에서 축성까지 평신도들의 힘으로 이뤄낸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이다. 온수리성당은 전통 목구조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9칸으로 용마루 양끝에는 십자가가 보인다. 건물 정면 처마 밑에는 연꽃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진흙 연못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성서적 의미를 담았다.온수리성당 김영희 관할사제는 "전통문화를 존중하며 정착하려는 성공회의 노력으로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며 "이러한 노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① 성공회 강화성당의 내부 ② 뒤에서 바라본 성공회 강화성당 ③ 강화성당 건립 초기(1906년)의 강화읍 전경(출처: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④ 성공회 온수리성당 내부 ⑤ 바깥에서 바라본 온수리성당의 모습 ⑥ 항일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르다 1945년 감옥에서 순국한 온수리성당 신도 김여수(마태) 독립운동가 순국비.

2016-03-09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9] 제물포고등학교 '성덕당'

노후·학생 수용 이유 3차례 철거론 힘실려동문들 학교 정체성 무너질까 강당 지켜내적벽돌쌓기 구조 일본식 권위적 외관 특징해방후 3·1운동 학생대표 길영희교장 부임명사 강연·학생들 자유토론 장소로도 쓰여"일제강점기 잔재 아닌 품고 가야할 역사"오래된 학교 건물은 보전이 어렵다. 예전에 지어진 학교 대부분은 지금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 부동산 개발 대상지에 포함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안에 위치한 노후화 된 건물은 붕괴 위험성이 제기돼 학생들의 안전상 철거의 대상이 된다.1935년에 건립된 제물포고등학교 '성덕당(등록문화재 제427호)'도 이 같은 이유로 3차례 철거 위기를 맞았다. 1991년과 1997년에는 건물이 낡고 좁아 전체 학생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덕당을 없애고, 새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동창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2008년에는 인천시교육청 안전점검 결과, 시설물의 안전도가 C등급(중점관리대상)인 것으로 확인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성덕당이 일본인들을 위해 일제가 만든 인천 중학교 부속건물이라는 것도 철거 입장을 내세운 사람들의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물포고 동문들과 지역문화재 위원들을 중심으로 '제고 강당 보존 추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들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해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총무를 맡았던 김윤식(10회 졸업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낡은 일제시대 건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반드시 품고 가야 할 역사라는 생각에 보전을 추진했다"며 "강당까지 사라지면 제물포고의 정체성이 무너질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제물포고는 1935년 설립된 5년제 일본인 학교인 인천부립중학교를 광복 후 인수한 것으로 처음에는 인천중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학생수 증가와 맞물려 1954년 제물포고는 인천고등학교의 부설고등학교가 됐다. 성덕당은 인천부립중학교가 개교할 당시 만들어진 건물이다.건축물 대장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기재돼 있지만 성덕당은 콘크리트에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적벽돌쌓기 구조'로 지어졌다. 망사르드(지붕 속에 공간을 만들어 다락 등으로 사용하는 건축 방식) 구조로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쌍대공 트러스트(지붕틀에 기둥을 세우는 것) 구조로 돼 있는 것으로 최근 조사 결과 밝혀졌다.건축가 김호성씨는 '2011년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에서 발표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의 건축 특성' 논문을 통해 "적벽돌쌓기 구조의 건물들은 정면 중앙에 포치형의 주출입구를 두고, 출입구와 출입구 상부를 붙임기둥·화강석 돌림띠·페디먼트(장식 벽돌)·벽면구획 등으로 장식해 권위적인 외관을 연출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전문가들은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에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지난달 29일 제물포고 성덕당을 찾았다. 강당 내부에 들어서자 얼마 전 있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사용됐던 의자가 눈에 띄었다. 학교 관계자는 "면적이 좁아 전체 학생이 참여하는 행사는 진행하기 어렵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학년별 간담회 장소로는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강단 양 옆에는 '학식(學識)은 사회(社會)의 등불', '양심(良心)은 민족(民族)의 소금'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난 60년 동안 무감독 시험 전통을 이어간 제물포고 학생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문구다. 김윤식 대표이사는 "내가 학교에 다니던 60년대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 ·흐르는 땀이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 '위선최락(爲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이라는 사자성어가 강단 양 옆에 붙어 있었는데 전교생이 아침 조회 때마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며 "전국 최초로 무감독 시험을 치르는 인천 최고의 학교에 다니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당 내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중앙 기둥이 없는 형태로 지어졌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형태로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이 때문에 당시 대규모 실내 집회 장소가 없었던 인천 지역의 큰 행사는 무조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1956년부터 13년 동안 제물포고 교사로 근무한 심재갑 '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은 "학교 행사는 물론이고, 전국 웅변대회가 매년 개최될 정도로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고 말했다.건립 초기 성덕당에선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강연이 많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에 앞장섰던 길영희 선생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대쪽같은 훈시장소로 탈바꿈했다.또 현상윤, 설의식, 장이욱, 변영태, 유진오, 백낙준, 함석헌 등 당대 석학들의 강연도 펼쳐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심 고문은 "길영희 선생이 당시 명사들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제물포고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을 위한 명사 강연을 많이 벌였다"며 "1960년도 졸업식에서는 그 해 사망한 조병옥 박사의 추모식을 진행할 만큼 인천 시민들에게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고 했다. 김 대표이사도 "독재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모든 학교에서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많았지만 성덕당 안에서 만큼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열렸다"며 "인천 지역 민주주의의 광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장소다"고 전했다.시대가 흐름에 따라 제물포고 구(舊) 교사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이제 예전 제물포고를 추억할 수 있는 건물은 성덕당 밖에 남지 않았다. 김 대표이사는 "운동장에 있던 인천중 건물과 제물포고 본관이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깝다. 학생 수가 늘어 사용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건물을 보수하면 충분히 오랜 기간 보전할 수 있었던 건물"이라며 아쉬워했다. 이어서 그는 "지금 남아있는 성덕당이라도 잘 보전해 인천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며 "낡았다고 무조건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가치와 추억을 살릴 수 있도록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35년 설립된 인천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인 성덕당. 콘크리트에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적벽돌쌓기 구조'로 지어졌고, 지붕은 쌍대공 트러스트(지붕틀에 기둥을 세우는 것) 구조로 돼 있다.원안 사진은 제물포고 상공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성덕당 모습.성덕당 실내 모습. 강단 양 옆에는 '학식(學識)은 사회(社會)의 등불', '양심(良心)은 민족(民族)의 소금'이라는 교훈이 적혀져 있다.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에 앞장섰던 길영희 인천 제물포고 초대 교장.

2016-03-02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8] '제물포 구락부'

벽돌조 2층 '일본식 합각·맨사드 지붕' 양철 마감외국인 문화·경제 거점… 근거없는 내부복원 씁쓸박물관·문화원 이어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매년 페스티벌 열어 국가간 우호증진 제역할 찾아1883년 제물포란 이름으로 개항한 국제도시 인천은 전통도시의 쇠락과 정반대로 일본의 배려 아래 잘 나가는 신흥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중략)… 근대적인 시가지와 대형갑문 등의 축항시설, 측후소, 공원 등이 들어선 인천은 20세기 초부터 '근대화의 별천지'로 자리 잡았다. -노형석 저 '모던의 눈물 모던의 유혹' 중에서(생각의나무 刊)개항 이후 인천은 '양관(洋館)의 도시'였다.인천 최초의 양관은 자유공원 야생 조류장 터에 자리잡았던 세창양행 숙사(宿舍) 건물로, 1883년 세창양행을 설립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온 세 명의 독일 상사원 숙소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화로 소진됐다. 우리나라 호텔의 효시로, 인천에서 문을 연 대불호텔이 지어진 연대는 확실치 않다. 아펜젤러 목사가 묵은 날짜가 1885년 4월이었음을 볼 때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불황을 겪으면서 중국인에게 팔렸다. 새 주인은 건물을 개조해 청(淸)요리집 중화루로 용도 변경했다. 이 건물은 1978년 6월 철거됐다. 대불호텔 건너편에서 상점을 하던 중국인 이태(怡泰)라는 사람도 스튜어드호텔을 지어 외국인을 상대로 운영했다. 이 건물도 한국전쟁 때 함포 사격으로 파괴됐다.이밖에 주한 미국 전권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의 별장,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의 별장, 제물포구락부 등은 당시 인천은 물론 국내 랜드마크로 꼽히던 양관들이었다.이 중 제물포구락부 만이 현존해 있다. 제물포구락부는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의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1년에 건립됐다.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Ivanovich Seredin Sabatin·러시아)이 설계한 이 건물은 벽돌조 2층 건물(지상 1층, 반 지하 1층)로 연면적은 386.8㎡이다. 지붕 형태는 일본식 합각(合閣)지붕과 맨사드(Mansard)지붕으로 처리했으며, 마감 재료는 양철을 사용했다.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 근대 건축'에서 제물포구락부의 외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제물포구락부의 정면은 가로와 세로방향으로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됐다. 세로방향으로는 가운데 부분을 약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맨사드지붕으로 처리해 변화감을 연출했다. 또한 정면의 중앙부와 오른쪽 부분에 설치한 창문 상부는 페디먼트(Pediment) 장식을 두었지만, 좌측 창문 상부는 평아치로 처리했다. 손 교수는 전체적인 대칭성에서 변화를 주기 위해 설계자가 의도했을 것으로 봤다. 이 같은 요소들은 일반 대중에게 여타 건물들과 차별된 느낌을 줬을 것이다.건물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이 마련됐고, 외부에 테니스 코트도 있었다. '근대화의 별천지'인 제물포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외국인 무역상들과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치인들에게도 책을 읽고, 당구·테니스를 치고, 나아가 술과 함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방한 이유야 어떻든 타향살이에 지친 외국인들에게 제물포구락부는 위로와 함께 웃음을 제공했을 것이다.1914년 외국인 거주지역인 각국(各國) 조계(租界·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구역)가 철폐되자 제물포구락부는 시대 조류에 따라 여러 차례 사용자와 용도가 변경됐다.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이었던 제물포구락부는 일본 재향군인회관, 부인회관 등으로 사용됐다. 이 시기에 건물의 명칭이 현재의 것으로 굳어졌다. '제물포클럽'이 본 명칭이었으나, 일본인들이 자국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칭한 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했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용됐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했다.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시설도 수차례 변경됐다. 내부 형태를 추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외관은 사진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근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현재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1950년대 촬영된 사진을 보면 주출입구는 건물 정면에, 부출입구는 건물 오른편에 있다. 건물 정면의 주출입구 계단은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기록을 통해 밝혀진 건물의 시설과 구조를 봤을 때, 제물포구락부는 외국인들의 문화·경제적 거점이었으며,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며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내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원된 현재의 모습은 아쉽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중국의 상하이구락부를 참조했다고 하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비워두는 게 문화재 복원의 기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1993년 7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제물포구락부는 현재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설립 당시 '문화 교류의 장' 역할을 했던 이 건물은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현재도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인천광역시문화원연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제물포구락부에선 인천국제문화교류페스티벌이 2012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지난해 행사의 경우 일본, 터키, 중국, 이란, 인도, 독일, 멕시코 등 7개국이 참여해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교류했다.천광식 제물포구락부 관장은 "제물포구락부는 각종 유물을 소장하고 소개하는 유물 전시관이 아닌 100여 년 전 외국인들의 교류장으로써, 일상과 다른 옛 흔적과 느낌을 받아가는 곳"이라며 "이 공간에서의 역사성을 살려 대한민국 인천과 해외 국가 간의 우호증진, 전통문화와 현대·미래가 조화를 이루는 교류의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했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① 한국전쟁 직후의 제물포구락부 모습(사진 상단). 현재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는 없으며, 건물 전면의 주출입구를 볼 수 있다. ②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된 1970년 즈음의 제물포구락부. 건물 앞에 도로가 생기면서 건물 전면의 주출입구가 없어졌다. ③ 일제 강점기 외국인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제물포구락부의 지붕이 잘 드러난다. 지붕 색깔이 다르며, 난로 연통도 보인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제공개항 이후 각국 조계가 설정되고, 그 안에 공원(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자리 잡은 건 당시 시대적 추세였다고 볼 수 있다. 더해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인 외국인들은 그네들끼리 교류하고 쉬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으며, 제물포구락부를 건립했다.1950년대 촬영된 사진을 보면 주출입구는 건물 정면에, 부출입구는 건물 오른편에 있다. 건물 정면의 주출입구와 계단은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이며, 자유공원과 연결된 계단이 있는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제물포구락부는 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시설도 수차례 변경됐다. 내부 형태를 추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옛 모습은 알 수 없다. 현재 이 공간에선 역사성을 살려 대한민국 인천과 해외 국가 간의 우호증진, 전통문화와 현대·미래가 조화를 이루는 교류의 장이 수시로 열리고 있다.

2016-02-24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7] 옛 드림보트클럽 '부평 부일식당'

정부가 '양공주' 성매매 묵인·외화벌이 수단 활용1950년대 클럽거리 형성 1970년대 중반까지 호황백인전용 술집 '1층 무대·테이블-2·3층 룸' 형태1983년 대폭 리모델링… 바닥재·계단 등은 그대로"현대사에서 잊혀진 역사… '시대상징' 복원해야"가게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이 바뀌고 그 쓰임새를 달리한다. 그래서일까? 건물에 얽힌 옛 기억이 금세 잊히곤 한다. 특히 옛 건물이 대부분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선 도심지에서 지역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인천 부평구 부평3동에 있는 부일식당은 1950~70년대 이 일대에 번성했던 기지촌과 미군클럽거리를 기억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1980년대까지 드림보트(Dreamboat)클럽이 자리했던 부일식당에서는 미군클럽과 '양공주' 또는 '양색시' 등으로 불린, 미군을 상대한 한국 여성으로 상징되는 기지촌의 상흔을 찾을 수 있다.인천 부평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미군기지가 들어선 지역이다. 일본이 1939년 부평 한가운데에 조성한 육군 조병창(군수공장)을 해방 직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이 그대로 접수했고, 애스컴(ASCOM·미 제24군수지원단)이 주둔해 기지화했다. 1949년 6월부터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철수했던 1950년 9월까지 고작 1년 3개월을 제외하고, 비록 그 규모가 축소되긴 했으나, 2016년 2월 현재까지 부평 일부는 다른 나라의 땅으로 남아있다. '신촌'이라 불린 부평 미군기지 맞은 편에는 기지촌이 생겨났다. 기지촌 문화의 중심인 클럽은 음악을 틀고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는 미군의 유흥공간이면서 양공주를 만나는 장소였다. 외국인만 상대할 수 있는 '특수관광업'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면서 면세주를 팔았다. 부평역사박물관이 지난해 한 학술조사에 따르면, 한때 신촌 일대에는 20여 곳의 미군 클럽이 성업했다. 미군 주둔 이후 생기기 시작한 클럽은 애스컴이 현재의 캠프마켓(Camp Market)으로 축소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이뤘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미군기지 땅이던 '2001아울렛 부평점' 건너편부터 경원대로를 따라 부평공원 쪽으로 드림보트클럽, 홍콩홀, 그린도어클럽, 아리랑클럽, 신일홀, 신장홀, 세븐클럽, 서브달러클럽, 맘보홀, 신세계클럽 등이 줄지어 영업하며 클럽거리를 형성했다. 부평미군기지가 축소되자 미군클럽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199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 미군이 떠난 땅에 아파트단지 등이 조성되면서 신촌 클럽거리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철거되고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드림보트클럽이 있던 부일식당 건물이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일식당은 약 190㎡ 면적의 1층 공간과 43㎡의 2·3층 공간을 가진 3층짜리 건물이다. 드림보트클럽이 영업할 당시 1층은 춤을 추는 무대와 10여 개의 테이블로 구성돼 있었고, 2·3층은 방으로 된 술집이었다. 이 일대 옛 건물 대부분이 불법 건축물이었다가 나중에 등록돼 언제 지은 건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일식당 사장 한정철(77) 씨는 1983년 이곳에 식당을 차리면서 건물 내부를 대폭 리모델링했는데, 클럽 바닥재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은 그대로 남겼다. 한정철 씨는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1960년대 초 애스컴 55보급창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했다. 그는 "군 생활을 할 때에도 신촌 일대는 미군들이 가는 클럽, 바버샵(이발소), 테일러샵(양복점), 미용실 등이 가득했다"며 "상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양색시들이 열댓 명씩 세 들어 사는 주택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드림보트클럽은 백인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드림보트클럽 바로 옆에는 흑인 전용 클럽인 송도홀이 있었다. 백인 전용 클럽에는 재즈와 로큰롤 음악을, 흑인 전용 클럽에는 소울 음악을 즐겨 틀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드림보트클럽은 밴드가 라이브 연주도 했다. 양공주들은 클럽에 가서 미군을 만났다. 이들은 인근 포주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미군을 데려와 성매매했다. 가구가 귀한 시절이었지만, 양공주의 방에는 꼭 침대가 있었다고 한다. 1969년 4월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양공주가 미군과 하룻밤을 치르는 대가로 받는 돈은 시간에 따라 3~15달러 정도였다. 또는 매달 일정하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계약 동거 형태로도 미군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옛 드림보트클럽 화장실 문에는 'USE RUBBERS ALWAYS ITS THE BEST WAY TO KEEP FROM GETTING V.D. ASK THE MANAGEMENT BEFORE YOU GO OUT WITH A GIRL(성병을 예방하는 최선은 콘돔을 사용하는 것. 여성과 나가기 전 매니저에게 문의하시오)'이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또 양공주들은 미군 내 매점(PX)에서 '양키시장'이라 불린 부대 밖 암시장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 1950년대 말 경기도 내 기지촌에는 양공주 5천 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 가운데 부평이 1천5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지만, 양공주에 대해선 묵인하고 '관리'를 했다. 이들이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1961년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 관리 사업계획'을 시행하고, 양공주가 경찰서 여경반에 등록해 매주 2회씩 성병 검진을 받도록 했다. 양공주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다치는 사건도 많았다. 1969년 5월 부평 기지촌 셋방에 살던 25세 여성이 목에는 전깃줄이 감기고, 온몸이 칼로 난자돼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20세의 미군 병사가 이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화대를 요구하며 동침을 거절했다는 게 여성을 살해한 이유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양공주들이 자치회를 조직해 미군기지에서 시위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1969년 9월 드림보트클럽에서는 미군과 양공주 간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움을 중재하려던 자치회장이 미군에게 머리채를 잡혀 미군부대 안으로 끌려 들어가려고 하자 양공주 100여 명이 부대 정문으로 몰려가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부평미군기지 땅이 80여 년 만에 반환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부평 기지촌 역사의 중심에 있던 미군은 대부분 떠났고, 클럽 주인이나 양공주 출신들이 공개적으로 당시를 회고하는 일은 거의 없다. 관련 연구자들은 "기지촌이 부끄럽고 더럽다는 이유로 현대사에서 잊혔다"고 표현한다. 부평 신촌지역을 연구한 김현석 (사)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강점기 조병창에서부터 미군 주둔까지 시대를 상징하는 기지촌을 역사 속에서 복원해야 한다"며 "기지촌의 흔적으로서 부일식당 건물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라고 말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드림보트클럽 자리에 식당이 들어서면서 건물 내부는 대폭 개·보수됐지만, 바닥재와 기둥은 클럽 때 그대로다.옛 드림보트클럽 모습. 바로 옆에는 흑인 전용 클럽인 송도홀이 있다. 드림보트는 백인만 들어가던 클럽이었다고 한다. 출처/nandupressfocus드림보트클럽 화장실 문에는 '성병을 예방하는 최선은 콘돔을 사용하는 것. 여성과 나가기 전 매니저에게 문의하시오'라는 영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출처/nandupressfocus부평3동(신촌) 일대에는 기지촌일 당시에도 있었던 주택들이 남아있다. 양공주들은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옛 드림보트클럽 평면도. /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2016-02-17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6] 극동방송 옛 사옥·사택

미국식 빨간벽돌 외벽·초록색 기와지붕·미닫이 붙박이 가구 특징서울 이전 1967년까지 행사 중계도… 현재 사옥 OCI 노조가 사용전문가 "근대화가 남긴 산업유산… 공공 문화시설로 재활용해야"인천 남구 학익동 580의 1. OCI 인천공장의 본관 뒤, 하얀 수증기를 내뿜는 공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작은 마을'이 있다. 빨간 벽돌과 초록 기와, 지붕 위로 솟아오른 굴뚝 그리고 봉긋하게 올라선 언덕으로 이어진 작은 길과 정원을 갖춘 이곳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해외 방송을 송출했던 극동방송(옛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의 사옥 한 채와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 일곱 채가 있다.지난 4일 오후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을 인천 지역 사회에 알렸던 (사)인천사연구소의 김상태 소장, 허은심 전임연구원 등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OCI 인천공장의 본관 뒤, 회색 벽돌의 담 안쪽에 조성된 이 '마을'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사택 세 채와 오른편에 사택 네 채가 보인다. 이어 작은 정원을 끼고 형성된 원형 교차로 형태의 길을 따라 왼쪽으로 향하면 국내 첫 해외 송출 방송국인 극동방송 옛 사옥이 있다. 김 소장은 "2010년께 인천역에서 시작하는 철길을 따라 걷던 중 OCI의 전신인 동양화학공업까지 이어진 철길 끝에서 이 건물들을 발견했다"며 "'극동방송 50주년 화보사(史)' 등을 통해 이곳이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 사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은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이 첫 방송을 송출한 1956년보다 1~2년 앞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한국에서 방송국 개소 준비를 하던 선교사 일행은 직접 벽돌과 시멘트 등을 이용해 사옥과 사택을 지었다. 미국의 벽돌 건물 양식을 적용해 빨간 벽돌로 외벽을 세웠으며, 초록색 기와를 이용해 지붕도 올렸다.현재 건물은 1959년 동양화학공업이 인천 남구 학익동 일대를 매입하면서 임원진 숙소, 노동조합 사무실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 개·보수를 했지만, 외부는 건축 당시의 형태를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극동방송 옛 사옥은 OCI 노동조합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바다 쪽으로 창을 낸 큰 방에 스튜디오가 설치돼 방송을 녹음했다고 한다. 사옥의 실내엔 맞닿아 있는 방의 벽을 뚫어 하나로 합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보였다.건물 입구 뒤쪽으로 돌아가니 실내와 건물의 다른 외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출입문과 유리 창틀이 있었다.함운식 OCI 노조위원장은 "노조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방을 일부 개조하고, 일부 벽은 벽지 등으로 막으면서 처음 형태의 모습과는 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선교사들이 주거한 사택은 2층에 세모난 다락방을 갖춘 여섯 채와 지하 1개 층을 포함한 건물 한 채 등 모두 일곱 채다.허은심 연구원은 "인천 동구 여선교사합숙소가 기숙사 형태의 건물이었다면, 이곳은 가족단위로 건물을 지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건물 내부는 미닫이 형태의 붙박이 가구들이 배치돼 있고, 다락방과 2층 등으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이 있다.김정하 OCI 인천사업부 관리팀장은 "(극동방송이 서울로 사옥 이전 후) 사택 일곱 채에 공장장을 비롯 임원 8명의 가족이 각각 보증금 500여만 원과 관리비 일부를 내고 살았었다"면서 "임원들의 부인들이 대문을 열면 마주쳐야 하는 공장 근로자들 때문에 도통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생활했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이 이곳을 찾아왔으나 지금은 찾지 않는다"고 덧붙였다.조수진 씨의 논문 '극동방송의 대북방송 연사연구 - 1956년 개국부터 90년대 말까지'를 비롯한 관련 논문에는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의 건립 과정, 초창기 극동방송의 방송 환경 등이 잘 나타나 있다.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은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소속의 선교사들이 지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상업방송을 하던 톰 왓슨(Tom Watson) 선교사는 1950년 밥 존스 대학(Bob Jones University)에 설교하러 왔다가 한인 유학생 강태국(한국성서대학교 설립자) 씨를 만난다. 왓슨은 강 씨로부터 "한국에 와서 직업방송 대신 복음방송을 시작해 줄 것"을 부탁받고,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의 개국 준비를 한다.그는 1954년 7월 27일 당시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허가를 받아 김포공항과 부천 사이의 여월리에서 전파 송신 설비를 설치하고 시험방송을 하지만, 김포공항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에 전파장애를 일으킨다는 문제점이 지적돼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다.극동방송 창사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86년 한국을 찾은 톰 왓슨은 극동방송의 한 방송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방송사 위치는 내가 플로리다에 있을 때 엔지니어에게 배운 것인데, 염분이 있는 바다에 안테나가 있으면 강력한 전파를 송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 학익동은 당시 바다에 면해 있었다. 인천 지역 사회는 이들이 갯벌에 안테나를 세울 수 있도록 학익동 간석지 일부를 무료로 제공했다. 갯벌에는 133m 높이의 안테나가 세워졌다. 1956년 12월 23일 오후 5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손수 세운 한국복음주의방송국 사옥에서 호출부호 HLKX, 주파수 1천230㎑의 첫 방송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송출 방송이 인천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선교단체가 주도한 방송인 만큼 북한·중국·러시아 등 한반도 인근의 공산권 국가들에 선교와 자유주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으로 방송을 송출했다.1962년 7월에는 인천 북성동 3-8에 연주소(演奏所·방송 등을 제작하는 곳)를 신설했다. 학익동 사옥은 송신소(送信所·방송 등을 내보내는 곳)로 활용했다.극동방송은 1964년 9월 인천에서 개최된 제45회 전국체육대회의 생중계, 1966년 6월 제2회 인천시민의 날 특집방송, 인천항 제2선거 기공식 준공 방송 등을 중계했다.그러나 1967년 12월 23일 극동방송은 인천을 떠나 서울 마포구에 새로운 터를 잡게 된다. 1980년대 말 인천 학익동 바닷가에 서 있던 안테나도 사라졌다.인천에서 활동 중인 김정숙 건축사는 "OCI 인천공장 내에 있는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 등은 인천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남겨진 산업유산이자 근대 건축물"이라며 "지역의 역사성 등을 반영한 산업유산으로 활용해 공공 문화시설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시와 업체 등이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남구 학익동 580의 1 일대에 조성된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 전경.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소속의 선교사들은 사옥 한 채와 사택 일곱 채 등을 짓고,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을 설립해 대한민국의 첫 해외송출 방송을 했다. 극동방송 옛 사옥과 사택은 바닷가를 면하고 있는 인천 학익동에 위치해 있었다.(작은 사진/극동방송 제공)극동방송 옛 사옥의 현재 모습. 지금은 OCI의 노동조합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톰 왓슨 등 선교사 일행이 극동방송 옛 사옥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극동방송 제공극동방송 옛 사택의 실내 모습.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이곳은 OCI 전신인 동양화학공업의 인천공장장을 비롯 임원진 가족들이 거주했다. 미닫이 형태의 붙박이 가구들이 배치돼 있는 모습.

2016-02-10 신상윤

[인천 고택기행·5] 중구 경동 127 '한옥'

◈새주인 '건축재생 전문가' 이의중씨원형보존 잘된 큰 규모 고급재료 특징불편함 감수 한옥 매력에 끌려 이사와◈前주인 故 조인흡 인천탁주 5대 회장11개 회사 강제통합후 기틀잡은 인물은행 사택이던 곳에 1959년부터 살아◈건축물대장 처음 이름 올린 정창모씨근업소·경상친목총회 신문기사 등장영남상인 중심 미곡중개업체와 연관건축은 역사를 품고 있다. 특히 사람이 머물렀던 옛집은 더욱 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인천시 중구 개항로 96번길 11(경동 127)의 1942년에 지어진 한옥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집에는 옛 건축물에 현대적 감각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건축재생 전문가 이의중(37)씨 가족이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살고 있다.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생활한 이씨와 그의 가족이 경험해 보는 첫 번째 한옥이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옥에 살기로 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 집과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이 집은 인천 사람들이 '싸리재'라고 부르는 언덕길 인근에 있다. 인천 경동사거리에서 애관극장 앞을 거쳐 배다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인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싸리재라고 불렀다. 옛날 이곳에는 싸리나무가 흔했다고 한다.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배를 타고 와 인천항에서 내린 사람들은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싸리재를 넘어야 했다. 지금 인천 중구의 법정동 가운데 하나인 경동은 이 싸리재를 품고 있는데,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 해서 서울 '경(京)'자를 따왔다.최근 이씨를 만나 그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그는 싸리재에서 밤나무골이라 불린 율목동(栗木洞)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을 향해 걸었다.미장원 옆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작은 철문 앞에 멈춰선 그는 열쇠를 꺼냈다. 머릿속에 그린 한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문을 열자 한 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좁은 진입로가 나타났고, 자갈이 깔린 좁은 길을 3~4m 더 들어서자 번듯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기와는 시멘트로 바뀌었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덧대었지만, 전체적인 틀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어른 키 두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높은 천정이 실내임에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사용된 목재들도 잘 남아 있어 누가 보더라도 잘 지어진 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내부 구조는 디귿(ㄷ) 형태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과 부엌이 나란히 붙어있는 좌우가 대칭된 모습이었다. 뒷마당이었던 곳은 지금은 지붕을 얹어 주방으로 고쳐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특이했다.그는 "옛 모습이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는데, 근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과 달리 이 한옥은 규모가 크고 고급 재료를 사용해 지어진 점이 특이하다"고 했다.집 구경이 끝나고 나서 그는 이전 집주인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두고 간 사진첩과 건축물대장 등 부동산 관련 서류들을 펼쳐놓으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그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까지 이 집에 살았던 주인은 인천의 대표 막걸리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탁주의 5대 회장인 고(故) 조인흡(1919~2015)이었다. 조 회장은 경기도약사회 3·4대(1959년 10월~1961년 10월) 회장(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인천 관교동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경성약전(서울대 약대)을 나와 인천 율목동에 있던 경기도립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했다. 약사를 그만둔 뒤에는 배다리 인근에 '합동약국'을 개업했다.그는 약국을 접고 관교동 일대에 있던 탁주 공장인 부천양조를 인수한 후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합리화 정책에 따라 인천에 있던 11개 지역 탁주 회사가 통합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출범한 인천탁주의 주주가 됐다.그는 인천탁주의 5번째 회장으로 1979년부터 1995년까지 일하며 회사의 기틀을 잡아 놓았다. 전국 최초의 쌀막걸리인 소성주와 멸균 '테트라팩' 막걸리인 '농주'를 개발해 해외에 수출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정규성 인천탁주 현 대표는 조인흡 회장에 대해 "11개 회사가 강제로 합쳐진 통합 회사의 경영을 안정화 시키며 기술 개발에도 노력하는 등 인천탁주의 기틀을 닦아 놓은 분"이라고 했다.조 회장의 아내는 전순비 인천YWCA 명예이사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녀는 40년 이상을 이 단체에 속해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첫째 딸은 조윤희 서울바로크합주단 이사장이고 첫째 사위는 박진 전 국회의원이다.조 회장의 가족은 1959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그 이전에는 인근에 있던 상업은행 인천지점 직원들의 사택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병원 인근에 있던 상업은행 인천지점 자리에는 지금 대형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다.이 고택의 건축물대장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인 정창모씨의 이야기도 흥미롭다.1922년 동아일보 1월21일 '근업소정기총회' 기사를 보면 정씨가 회원 명단에 등장한다. 1922년 동아일보 5월 5일자 신문에 게재된, 인천에 사는 경상도 인사로 조직된 '경상친목총회' 모임이 열렸다는 기사에도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근업소(권업소)는 1906년 대한제국 상공부의 허가를 받고 설립된 미곡중매업체로 수수료를 받고 일본인 상인에게 쌀을 중개하는 업체였다. 향토사학자인 신태범 박사가 쓴 '인천한세기'에는 권업소에 대해 "일어에 능통한 부산에서 올라온 영남 상인이 중심이 되어 1906년 조직한 미곡중개업체였다. 율목동은 권업소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부산 등 영남사람이 주로 모여 있었다"고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인천 중구 율목동은 경동과 북쪽으로 맞닿아 있다.건축역사학자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근대 도시형 한옥들은 건물 자체의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질 때 빛을 발한다"며 "이들 주택을 잘 보존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면 충분히 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중구 경동 127에 있는 한옥의 내부 전경. 대들보와 부재료들이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건축재생 전문가 이의중(37)씨 가족이 지난해 가을부터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시멘트기와를 얹고 편의를 위해 유리 창호를 덧댔다.건물 측면(남쪽)과 후면(동쪽)의 모습.경동 127 한옥 평면도 /이의중 (주)건축재생공방 대표 제공'온돌방1' 문을 열고 바라본 거실.

2016-02-03 김성호

[인천 고택기행·4] 인천 중구청

1883년 일본이 세운 서양식 목조 건축물인 '영사관' 자리인천부청사로 사용되다 광복후 1985년까지 시청사 활용잘 보존된 외관에 비해 증축·새단장 탓 내부 원형 사라져전쟁때 '반동 숙청' 상흔도… 4·19이후 민주화 항쟁지로우리나라에서 현대건축물의 시원을 이끈 것은 '개항'이다. 개항이 이뤄지면서 유입된 외국인들은 자신의 사업이나 거주를 위해 자국의 건축물을 이 땅에 세우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서양식 건물을 세운 국가는 일본이었다. 강화도조약을 근거로 1880년 원산에 자국의 영사관을 지었으며, 1883년 인천영사관, 1884년에 부산영사관을 세웠다. 세 곳에 지어진 건물들은 모두 의양풍(疑洋風·일본 목수들이 서양식 건물을 흉내낸 목조 건축) 양식의 2층 건물이었다.인천영사관은 인천 최초의 양관(洋館)이었다. 벽돌과 목재 등 주요 건축자재 전부를 일본에서 수입해 건립된 인천영사관은 1906년 2월부터 이사청(理事廳)으로 변했다. 영사관 기능에서 벗어나 통치기구가 된 것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인천부청으로 사용됐다. 건물은 1932년 8월 새로운 부청을 짓기 위해 헐렸다. 이때가 지금의 인천 중구청이 착공된 시기이다. 착공 이후 모두 6번의 설계변경을 거쳐 1933년 6월 준공했다. 지하층과 지상 2층의 인천부청사가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가 쓴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간향미디어랩 刊)에 따르면 새 부청사는 간소화된 1930년대 근대주의(모더니즘) 건축 양상을 띠고 있다. 벽돌조이며, 스틸새시 창문을 설치하고 외벽은 타일로 마감됐다. 수평의 긴 띠창, 커튼월(Curtain Wall) 기법의 유리창 등에 모더니즘 양식이 강하게 표현됐다. 또한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 스크레치 타일은 당대에만 볼 수 있었던 특징이다. 준공 이후 본관 좌우에 동·서별관을 증축했는데, 정확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는 상태이다. 1964년 8월에는 본관을 3층으로 중축했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 경기도 인천시청사, 인천직할시청사(1981~85)로 이용됐으며, 이후 중구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 중구청사는 건립 이후 지금까지 관공서로만 사용돼 외관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반면, 지속적인 증축과 대대적인 새 단장으로 내부 원형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개항장의 중심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근대를 거치며 인천 행정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중구청사는 건축의 미(美)와 함께 인천시민의 삶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지역의 한 원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우리 근현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로 인천 중구청을 표현했다.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고 수일 동안 인천부청사에서 시커먼 연기가 타올랐다고 한다. 당시 본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일본인들이 떠나기 직전에 자신들의 악행이 기록된 문서들을 태우면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일본인들의 증언도 있었다"면서 "정신대를 비롯해 각종 징용과 징병 등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은 곳에서 저지른 악행들을 숨기려고 모든 관련 문서들을 태우고 돌아갔다"고 말했다.광복 후, 38선이 그어지고 황해도 쪽에서 피란민들이 대거 인천으로 몰려왔다. 시청 인근 학교에 피란민들을 수용했는데, 당시 인천시청사 앞 광장에 커다란 가마솥을 가져다 놓고 밥을 지어서 주먹밥 등을 피란민들에게 배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당시 지주와 공무원 등 공산당에 반하는 인물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됐던 공간도 인천시청사였다. 북한체제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인사들은 청사 지하에 갇혔으며, 청사 앞에선 공개 처형도 진행됐다.조 관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문인이었으며,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낸 조수일 선생)께 들은 이야기를 해줬다. "당시 모 통신사 지사장 자리에 계셨던 선친도 시청 지하에 갇혔다고 해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과거 사무실 직원으로 데리고 있던 사람이 공산당 간부였고, 그 사람이 몰래 도와줘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해요. 이후 현재 용현동 부근에 숨어있다가 배를 타고 화성(송산)으로 가서 남쪽으로 피란 가셨습니다."9·15 인천상륙작전 이후 시가전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은 인천시청은 1960년 4·19 의거를 기해선 민주화 항쟁지로 변모했다.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는 조 관장은 "주로 데모는 동인천과 경동사거리 등에서 이뤄졌다"면서 "성명서 낭독 등 상징성이 있는 행사들은 인천시청사 앞에서 열렸다"고 회상했다. 이어서 "행사들 중 학생들이 직접 작성해서 인천시청사 앞에서 낭독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조 관장은 1985년 인천직할시청의 현 남동구 구월동 이전에 대해선 아쉬웠다고 했다."당시 지역민의 동의가 없었어요. 시청이 이전하면 도시 공동화 현상이 예상됐으며, 실제로 나타났죠. 이후 구청장들의 노력으로 현재 많이 활성화됐지만, 아쉬움을 표시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인천 중구청사는 2006년 4월에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됐다.유용한 내부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의 활동 공간으로 존재하는 건축은 외관이 갖는 형태와 색채가 모여 또 다른 차원의 도시 공간을 연출한다. 어떤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활동을 하면 그 공간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은 상호 관계의 문화이자 예술, 산업이다. 인천 중구청사는 이 같은 건축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건립 이후 관공서로만 사용된 인천 중구청사는 외관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반면 지속적인 증축과 대대적인 새 단장으로 내부 원형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천 행정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중구청사는 건축의 미(美)와 함께 인천시민의 삶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건물 후면에는 붉은 벽돌이 드러나 있다.① 개항과 함께 1883년 인천에 건립된 일본영사관. /인천 중구청 제공 ②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맞아 축하 현수막이 인천시청에 걸렸다. ③ 인천을 방문한 미국 버뱅크시의 컴튼 시장 내외를 인천시청에서 환영하고 있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제공/아이클릭아트장식이 많지 않은 건물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입구의 원형 창 장식이다. 일장기를 형상화했다는 설도 있다.

2016-01-27 김영준

[인천 고택기행·3] 창영초등학교

서울 3·1운동 소식에 학생들 나흘간 '동맹휴학' 저항… "인천지역 교육사 이정표"전형적 옛 학교 건축양식 보존가치 一자 복도·커다란 창문 감시 목적 일본식 운영건물 외벽 곳곳 시멘트 덧칠, 경찰 임시청사 사용시 부역자 처벌 '총탄 자국' 가려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83년 강제로 개항된 인천항 일대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은 지금의 창영동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사람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사는 지역인 철도 북쪽에 위치한 조계지 일대를 북촌, 남쪽 조선인 마을이 밀집된 지역은 남촌이라고 불렀다.북촌과 비교하면 남촌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장마철이 되면 마을과 도로가 모두 진흙밭이 됐고, 배설물도 제때 처리해주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다. 아이들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인 밀집지역에는 일본인 자녀의 교육을 위한 일본인 아사히 소학교(인천심상보통학교·현 인천신흥초등학교)가 개항과 동시에 세워졌지만 20년이 넘는 기간 조선인 마을에는 제대로 된 학교가 없었다. 이에 당시 남촌 주민들은 인천부윤(일제 강점기 인천부의 행정수령)에게 학교 건립을 요구했고,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게 됐다. 이 학교가 인천 창영초등학교다.15일 오전 배다리 등 인천 동구 일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와 함께 인천 동구에 위치한 창영초등학교를 찾았다. 교문을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세워진 2층 건물이 맞아주었다. 건물 앞쪽에는 이곳에서 인천 3·1운동이 시작됐다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1919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은 서울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3월 6일부터 나흘 동안 동맹휴학을 결정했다.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시작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이에 일제 경찰은 학교 측을 압박해 교사들이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3학년 학생 김명진과 이만용 등은 학교 건물로 침입해 교사들이 일본 경찰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고 전화기를 파손시키며 맹렬히 항거했다. 이성진 교사는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는 공부를 좀 한다는 인천의 조선인들 모두가 이 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이었고, 희망이었다"며 "이곳에서 3·1운동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현재 남아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922년에 만들어졌다. 학교를 처음 설립할 때도 주민들의 성금을 모았지만 새로운 건물을 신축할 때도 당시 인근 주민들이 200원을 모아 비용을 지원했다고 한다.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Arch)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했고,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 창을 만들어 놓았다.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을 쓴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1920~30년대의 학교 건축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며 "학교의 특성상 옛날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경우가 많아 역사적으로 보전할 가치가 높다"고 평했다.건물에 들어서자 一(일)자 형태의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교실 복도 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 학교들의 특징이다. 조선인들을 쉽게 관리하고, 수업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할 목적 때문이라고 한다.이 때문에 당시에는 모든 학교에 반드시 일본인 교사를 한 명 이상 배치하도록 했다. 조선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학교였지만 철저히 일본식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학교에 다녔던 김석배(29회 졸업)씨는 창영초등학교 100년사 회고록에서 "5학년부터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모든 학생들은 국어(일본어) 상용정책으로 학교 내에서는 조선어로 말을 하는 것을 금했다. 어쩌다가 실수로 조선어가 튀어나오면 이를 들은 학생의 고발로 실수한 학생의 이름이 벽에 붙게 됐고, 벌점을 매겨 학업성적표에 반영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건물 외벽을 살펴보니 곳곳에 시멘트로 덧칠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이곳은 경기경찰총국 임시 청사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후 1·4후퇴 때, 보도연맹에 참여했던 부역자를 처벌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이성진 교사는 "시멘트는 부역자를 처리하면서 생긴 총탄 자국을 가리기 위해 바른 것"이라며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곳에서만 200여 명의 부역자가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전쟁이 끝난 뒤, 학교 주변에는 빈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학교에 다녔던 박차영(62)씨는 "학교 앞에 꿀꿀이죽 골목이 있었는데 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것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나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립학교라는 자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박씨는 "우리 학교 아이들은 일본인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흥초등학교를 '쪽바리 학교'라고 불렀다"며 "어떻게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잘 살았던 신흥초 아이들에 대한 질투심이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학교에 다닌다는 자존심이 더욱 강했다"고 웃으며 말했다.창영초 구(舊) 교사는 20여 년 전부터 수업을 위한 장소로는 활용되지 않고 있다. 마룻바닥이고, 오래된 건물인 탓에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측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실시했으며, 특별실 등으로 교사를 활용할 계획이다. 20세기 초반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학생들이 수업을 받던 교실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게 되는 셈이다.이성진 교사는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지역 최초의 공립학교로서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라며 "이러한 점을 더욱 부각할 수 있는 작업이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다. 인천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3·1운동, 광복, 그리고 6·25전쟁까지 한국 근대사를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 역사적으로 보전할 가치가 높다.수업을 알릴 때 쓰이던 종.여러 번의 증축으로 특이한 모습을 갖게 된 초등학교 내부 계단.특별실에 전시된 학교 연혁.6·25전쟁 당시 생긴 피탄자국.일제강점기 당시의 특징이 남아 있는 복도 모습.창영초등학교의 100년을 기념한 창영백년비.학교에서 사용했던 옛날 음향기기.

2016-01-20 김주엽

[인천 고택기행·2]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

'한옥에 가까운 중국식 건물' 양국 양식 공존평소 개방않고 협회임원 신년인사회 장소로제사용품 등 수십년 된 물건 많은 '보물창고'화교 출신 '미스차이나' 이수영씨 방문 흔적도인천의 오래된 이웃 "문화와 전통 기록 필요"인천 중구 선린동 8가(차이나타운로55번길 19). 인천화교협회와 인천화교학교를 모두 아우르는 3천957㎡ 면적의 이 땅은 130년 넘게 '하나의 지번'을 줄곧 유지하며 한국 화교의 역사를 보듬고 있다. 선린동 8가는 주말마다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없는, 흔히 짜장면 거리로 알려진 북성동 일대 '지금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약간 비켜있는 곳이다. 중국 음식점들이 길게 늘어선 짜장면 거리로 향하다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4~5대를 이어 이 땅에 사는 인천 화교 사회의 중심지이자 인천차이나타운의 본래 모습을 간직한 공간이다. 선린동 8가 인천화교협회 건물 뒤편에는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던 회의청(會議廳)이 있다. 초대 청나라 영사로 부임한 가문연(賈文燕)이 1910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일종의 회의실인데, 정말 회의를 했던 공간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건물 이름으로 용도를 추측할 뿐이다.회의청은 현재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은 채 비어있고, 새해 첫날 인천화교협회 임원들이 모여 신년인사회를 하고 있다.1882년 임오군란 당시 리훙장(李鴻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할 때 함께 들어온 군역상인 40여 명이 한국 화교의 시발점이다. 이후 조선이 개항한 이듬해인 1884년 4월 청나라가 관리하는 치외법권 지역인 청국조계가 인천 개항장에 설정되면서 청국영사관도 세워졌다. 청국영사관에는 본청, 순포청(경찰서), 전보국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존하는 건물은 회의청이 유일하다. 청국영사관 본청은 현재의 인천화교학교 유치원 자리 인근으로 추정된다. 지난 6일 오후 30년간 인천화교학교 교사를 지낸 화교 왕청덕(74) 씨와 함께 회의청을 찾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천 화교들과 교분을 쌓으며 인천화교학교 아카이빙(기록보존) 작업 등을 해온 사진작가 서은미 씨도 동행했다. 회의청의 생김새는 한국과 중국이 교차하는 화교의 삶과 닮았다. 한국과 중국의 건축양식이 섞여 있는 것이다. 회의청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린 벽돌건물이다. 기와는 건축 당시의 것이 아니라 개보수 과정에서 교체한 것이다. 중국 건축을 연구하는 홍기택 건축가는 "중국 특유의 붉은색 창살 무늬 등 외양 때문에 언뜻 중국풍 건물로 보일 수 있다"며 "하지만 처마 끝이 날아가는 듯한 한옥의 특징 등이 있어 한옥에 가까운 중국식 건물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회의청 안으로 들어가면 화교들이 재물신으로 모시는 관공(관우)의 초상화와 신주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해상무역상들의 수호신인 마조상도 눈에 띈다. 과거 파라다이스인천 호텔 자리에 마조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업 중심의 인천 화교 사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회의청은 인천 화교들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각종 제사 용품이나 중국 전통 악기 등 내부에 있는 어느 것 하나 50년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이날 동행한 왕청덕 씨는 거실에 있는 원형 탁자를 건드리며 "이것은 100년도 넘었다"고 했다. 이어 왕 씨는 관우 초상화를 가리키며 "저 그림을 훔쳐가면 3대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회의청 거실에 전시된 인천 화교의 옛 사진 가운데 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했다. 1961년 대만에서 '미스 차이나'로 선발돼 같은 해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를 차지한 이수영(당시 18세) 씨가 인천화교학교를 방문한 장면이다. 이수영 씨는 1944년 인천에서 태어나 1950년대 중반 인천화교학교를 졸업한 뒤 대만의 대학교에 진학했다. 1962년 미스 차이나로 금의환향한 이수영 씨는 17일 동안 전국을 순회했고, 당시 대통령이 되기 전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인인 육영수 여사까지 만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수영 씨의 일정을 연일 보도할 정도로 화제였다. 회의청 내부는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에 방이 하나씩 있는 구조다. 왼쪽 방은 화교들의 국적인 대만(중화민국)을 건국한 쑨원(孫文)을 기념하는 전시실이다. 오른쪽 방은 1960~70년대 인천 화교 청년회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다. 당시 사용했던 물품이나 문서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벽 한편에는 1978년 제59회 전국체육대회를 인천에서 개최한 것에 대해 인천 화교 청년회가 물심양면으로 애써 줘서 감사하다며 원병의 인천시장이 수여한 감사장이 걸려 있다. 회색 철제 책상에는 청년회의 옛 이름인 '한국인천화교청년반공구국회'가 새겨져 있다. 당시 '반공'은 한국사회는 물론 화교학교를 통해 대만식 반공교육을 받아온 한국 화교사회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회의청 옆에는 언덕 위에 세워진 인천화교학교가 있다. 회의청과 화교학교를 구분 짓는 높은 돌담에 시멘트를 바른 흔적 세 군데가 있는데, 다름 아닌 방공호 입구다. 방공호는 화교학교 운동장 안쪽까지 파여있을 정도로 넓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화교학교 학생들이 자꾸 들어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1980년대 입구를 막았다고 한다. 인천 화교들은 음력설인 춘절에 인천차이나타운의 유일한 중국절 겸 사당인 의선당(義善堂)에서 축제를 벌인다. 이에 앞서 인천화교협회 임원들은 매년 양력 1월 1일 회의청에서 제사를 지내며 신년하례회를 갖고 있다. 인천 화교의 관청이던 청국 영사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회의청은 인천 화교 사회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1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인천화교협회 사무실에는 '本固枝榮'(본고지영)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있다. 1992년 봄 중국 산둥성 룽청시의 한 단체에서 선물 받은 서예작품인데,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번성한다'는 뜻으로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연꽃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신념으로도 읽힌다. 인천화교협회 직원 왕윤령(55·여) 씨는 "다른 국적(대만)을 갖고 있지만, 고향의 마음은 항상 내가 사는 이곳(인천차이나타운)"이라며 "회의청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교는 지난 130여 년 동안 인천의 오랜 이웃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조명은 아직 부족하다. 최근 인천화교학교 아카이빙 작업을 마치고 책으로 엮은 서은미 씨는 "화교는 항구도시·공업도시로서 외부에서 여러 사람이 유입돼온 인천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며 "인천 화교가 계승하고 있는 문화와 전통 등 사라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록이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했다./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중구 선린동 8가 인천화교협회 건물 뒤편에 위치한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던 회의청(會議廳) 전경.회의청 내부 모습. 인천화교협회 임원들은 매년 양력 1월 1일 회의청에서 관공(관우)에게 제를 올리며 신년 인사회를 하고 있다. 평소에는 별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고 비어있다.회의청에 마련된 인천화교청년회 사무실. 현재는 사무실로는 쓰지 않으나, 1970~80년대 당시 각종 상패나 문서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남아있다.인천차이나타운 출신으로 '미스 차이나'에 선발된 이수영 씨가 1962년 모교인 인천화교학교를 방문한 사진. /인천화교학교 제공회의청 옆에 있는 방공호 입구. 1980년대 안전상 이유로 시멘트를 발라 막아놓았다.1954년 인천화교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당시 학교 정문 사진. 화교학교 중앙에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됐다. 청국 영사관의 정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화교학교 제공

2016-01-13 박경호

[인천 고택기행·1] 프롤로그 : 건축은 온몸으로 역사를 말한다

건물은 삶의 궤적 스며있는 공간日강점기 상처·개발논리에 치여근현대사 흔적들 사라져 ‘아쉬움’인천지역 옛집·건축물 50곳 선정문을 열고 들어가 생활상 엿보기전문가 통해 건축적 가치 재조명◈인천의 근현대사제물포 개항 이후외국인들 모여들기 시작일제강점기때는항만·군사기지 들어서고철도·천일염전 등장해방후 미군이 들어왔고전쟁후 휴전선 그어지며실향민·빈민들 자리잡아21세기 들어서는국제공항이 건설되고경제자유구역엔UN 기구들이 둥지 틀어적자생존의 법칙은 적어도 건축의 역사에서 만큼은 지켜지지 않는다. 건축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남았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 가치와 중요성이 높아진다. 건축은 온몸으로 역사를 보여주고 시대를 증언한다. -‘청춘 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최예선·정구원 저, 모요사 간) 중에서.건축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연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곧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신체조건)을 지닌 여타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겐 자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다. 인간의 보호막과 같은 역할을 건축물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건축물로 인해 인간은 계절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됐으며 정착할 수 있었다. 건축물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가 된 것이다.20세기 최고 건축가 중 한 명인 루이스 칸(Louis Kahn·1901~1974)은 ‘건축물에는 건축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건축물엔 건축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말로, ‘건축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이처럼 건축물은 단순히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 삶의 궤적이 스며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인천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과 고택(옛집)에는 인천의 근대 시기를 거쳐 현대화 되기까지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시간이 멈춘 박제된 풍경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경인일보가 2016년 연중기획 대주제를 ‘(인천)고택 기행’으로 정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아이러니하게도 100년 전 건축물은 몇 채 남아있지 않다. 그 이전의 문화재들은 다양한 노력과 방법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근대의 유산들은 기억 저편으로 묻히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쓰라린 역사가 배어 있다는 이유 혹은 개발 논리에 치여서 그렇게 근현대사의 흔적들은 사라져 갔다. 우리의 역사 또한 아쉽게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모든 도시가 흐르는 시간을 타고 변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인천만큼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는 드물다.근대 이후만 놓고 본다면, 1883년 제물포 개항과 함께 한적하던 어촌에 외국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항만이 건설되고 군사기지가 조성됐다. 철도가 놓였고, 최초의 천일 염전이 만들어졌다. 해방이 되어선 미군이 들어왔으며, 전쟁 후에는 휴전선이 그어지며 고향을 등진 실향민과 먹고살기 위해 전국의 빈민들이 모여들었다.21세기 들어 국제공항이 건설되고, 경제자유구역에는 UN 기구들이 둥지를 틀었다. 100여년 전 외세에 의한 강제적 국제도시화를 겪은 인천이 자발적으로 국제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경인일보 기자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인천지역의 근대 건축물과 고택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 공간과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이다. 건축적 가치가 있는 대상에 대해선 지역 건축분야 전문가의 견해를 통해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지역 주민의 삶이 묻어나는 옛집에선 거주자와 인터뷰를 통해 그 역사와 인생을 드러낼 것이다. 인천을 말하고, 인천의 도시 특성을 이야기할 것이다.인천의 원도심이었던 중·동구 지역을 비롯해 원도심과 다른 문화권이었던 부평구, 강화·옹진군 등의 곳곳에는 근대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번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개항장 일대를 둘러봤다. 한국 최초의 도시계획에 의해 일본, 청국 등 각국 조계지가 조성됐으며,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이었던 곳이다. 외교·무역·상업의 각축장이었다.이 일대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건축물만 해도 우체국과 은행, 옛 창고, 기상대, 제물포구락부, 중구청, 종교 관련 공간 등 다양했다. 옛집으로 인천을 이야기하기 위해 인천의 다양한 특성을 담고 있는 집과 근대건축물들을 선별해야 했다. 지역 향토사학자와 건축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 50곳을 선정했다. 취재반의 기자들은 선정한 옛집과 관련한 각 분야의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 그 집의 거주자들을 만나고 있다.옛집을 취재한 기자들이나 그 곳에서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 거주자들 모두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독자들 또한 우리 주변의 공간과 그 곳에서 살아온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인천을 들여다 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옛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와 살았던 집들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이번 기획을 통해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내려 노력할 것이다./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과 고택(옛집)에는 인천의 근대 시기를 거쳐 현대까지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시간이 멈춘 박제된 풍경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다. 지난 5일 인천 근대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구 개항장 거리의 근대건축물인 옛 조선은행건물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6-01-06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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