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0(끝)]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下)

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황윤걸(85)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다.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 안석리로 개편됐다가 1958년 온천군 안석리가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자수성가했다. 부친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본가가 있는 최씨네 집성촌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했다.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98)과 그의 장인 정천익(생몰년 미상)이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이다. 목화 재배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점차 평안도와 황해도 등 전국으로 퍼졌다. 1475년 성종 6년 4월27일자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평안도에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목화는 백성들의 옷감인데 남쪽에서만 생산되고,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평안도 등에 목화씨를 보내 백성들이 재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고, 성종은 목화씨를 이들 지역에 보내 심게 한 후 관찰사에게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여성의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도 이뤄졌다. "여자들이 물레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틀로 천을 짜야 하니까 바쁘지. 우리 동네는 겨울철에 남자들이 애를 봐야 했어."최촌 남자들은 겨울철에 윷놀이를 많이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방 안에 모여 앉아 팥알의 절반을 쪼개 윷놀이를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팥으로 하는 윷놀이지. 바쁜 부녀자들 도와줘야 하니까 남자들이 등에 애를 업고 윷놀이를 했다"고 말했다.겨울철에는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어 만들었는데, 고향에서는 냉면이 아닌 '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겨울에 목화 일을 도와주면 냉면으로 밤참을 주는 집이 있어. 동치미 국물에 면은 메밀이지. 이북 곡식은 풀기가 많아서 메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돼. 추운 날씨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먹었었지. 웬만한 집에는 면 뽑는 기계가 있었어."할아버지는 '칼국수'와 '노티'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향의 칼국수는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로 만들었으며, 큰손님이 왔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병의 일종인 '노티'는 추석 때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장가루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만들면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게 된다"며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가 명절 때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고 했다.작가 황석영은 지난 2001년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평양 출신의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며느리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을 당시 평양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노티를 주면서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요즈음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이남 것은 과일도 밭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 황석영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황석영은 위도나 기후상 이북 지방의 작물 맛이 월등한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했다"고 여긴다.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ㄷ'자형 벽돌집이었다. 흙집과 초가집에서 살다가 부친이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동향집이며 안채·사랑채·부엌·광·외양간·뒷간으로 이뤄졌다. 'ㄷ'자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 고구마 등의 곡식은 안방에 보관했다고 한다."농사지은 거 밖에 못 내놔. 얼어버린다고. 안방 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그 안에 고구마를 뒀지."1997년 나온 '평안남도지'를 보면, 1938년 강서군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채소는 고구마다. 강서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평남 16개 시·군 가운데 용강군 다음으로 많았다.할아버지 고향은 밤도 유명했다. 평남 함종은 밤이 많이 나는 곳으로, 여기서 나오는 밤을 '함종밤'이라고 했다. 최영전씨가 쓴 '한국민속식물'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나는 함종밤은 알이 잘고 단 약밤으로, 중국 종의 감율(甘栗)이다. 함종밤은 속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특징이 있다."그게 함종밤이야. 유명하다고. 크지도 않은데 까면 잘 벗겨져. 푸석푸석하지 않고 차지면서 달아. 한 달 정도 둔 뒤에 발로 누르면 밤알이 쑥쑥 나와. 닦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지."황윤걸 할아버지 고향 '안석리'는 바닷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다와 가깝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둥이 낚시를 많이 다녔다. 조개도 많이 잡았다"며 "겨울철에 논에서 썰매를 타는데 물에 많이 빠졌다. 바닷가 옆이라서 염분 때문에 딱딱하게 얼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해 바닷가에서 놀았던 추억 때문인지 강화도에 가면 고향에서 낚시했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2대 독자다. 일제강점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 마을 근처에 개교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등교육을 받아서, 한국전쟁 때 잠시 인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있었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1883~1950)도 평남 강서군 출신이다. 고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조만식 전기(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발간사에는 강서군에 대한 설명이 있다.'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평안도에서 교육 열풍이 가장 크게 불어 닥친 곳이 바로 강서 일대였다. 강서 지방은 스스로 개화하고 근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도 컸지만 교육의 힘이 더욱 컸다.'평양 출신 시인 양명문(1913~1985)은 함종을 찾았다가 밤나무골에 있는 한 연못을 보고 시(詩) 한 편을 얻었다. '샘가에서'라는 시다.'푸른 산 솟은 밑에 솟는 맑은 샘 / 복숭아 꽃이파리 샘물에 떨어지니 / 그 옛날의 네 모습이 샘물 위에 그려진다 / 아 지나간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여 / 아롱진 가지가지 감격에 찬 그때 일이 / 내 가슴에 펴오른다 내 가슴에 사무친다''샘가에서'는 평남 안주 출신의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사랑을 받았다.황윤걸 할아버지 가족은 조모, 부모, 누나, 여동생 3명 등 모두 8명이었다. 하지만 혼자 월남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에 소속돼 평남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휴전 한 달 전에 남한에 왔다. 동키 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지 못했다. 북한 땅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그냥 피란 나온 것도 아니고 서해안에서 작전하며 다닌 유격군 출신인데, 이산가족을 찾아? 이북에서 말하는 제일 악질분자가 바로 나야." 할아버지는 "내 신분이 노출됐을 거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밤에 기도를 하고 자. 우리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거지."황윤걸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 아프면 그냥 고향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좋아했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최촌 마을의 청년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고향을 떠나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남했다. 인천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것보다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자신 때문에 이북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본 것 같아 죄스럽다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딱 한 장 남은 사진! 황윤걸 할아버지는 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잘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신정면에 있는 신정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선수를 했다. 이 사진은 강서군에서 주최한 배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촬영한 것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1948년이나 1949년이라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군(郡)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학교에 와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한편, 신정면은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에 편입되면서 폐지됐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12-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9]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中)

8남매 둔 황인옥씨 부부 친아들처럼 챙겨평남부대·육군 복무하다 건강 탓에 제대부친 따라 몇년간 부평 벽돌공장서 일해당시 사택을 본적으로, 회사 주소와 일치브로커 통해 의정부 미군부대서 15년 근무이후 서울 수유리서 통닭집 열어 큰돈 벌어인천으로 터전 옮기자 장사안돼 다시 서울로1980년에 돌아와 우유 보급소·대리점 운영도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앞바다 섬에서 동키 평남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황윤걸(85) 할아버지는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에 왔다. 약 400명의 대원이 용유도에 왔는데, 이 중 절반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황윤걸 할아버지 등 나머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부대가 육군에 편입될 때까지 용유도 24인용 막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용유도에서 새로운 부모님을 만났다. 1911년생 황인옥 씨 부부다."부대가 주둔해 있으려면 주민들 협조가 필요하잖아. 면장도 지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이 마침 황씨야. 그래서 나랑 결연이 됐어. 부모가 된 거야." 황윤걸 할아버지는 "슬하에 8남매가 있었는데, 나까지 9명이 됐다"며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처럼 잘 챙겨주셨다"고 덧붙였다.그때는 용유도와 영종도가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염전과 농경지 조성을 위한 소규모 매립만 있었는데, 1992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대규모 매립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됐다. 영종·용유지역은 기존 토지 면적보다 매립된 토지 면적이 더 크다. '인천 중구사'에 따르면, 1990년대 국가사업으로 공항과 배후 신도시 건설이 이뤄지면서 4천813만5천㎡ 규모의 해안 매립이 시행됐다. 이 일대에서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조성, 영종2지구 개발 등 지금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돌다리가 있어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 전망대 아래쯤에 돌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뒤 505수송단 자동차대대에서 계속 군 생활을 하다가 간부후보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던 중 건강에 문제가 생겨 1955년 9월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는 인천 부평으로 왔다. 새 아버지 황인옥 씨가 부평 벽돌공장에 취직하면서 가족이 용유도에서 부평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부개동 벽돌공장에 총무로 계셨어. 연와공장이라고 하는데,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이 엄청 컸어."황윤걸 할아버지도 벽돌공장을 다녔다. 기술이 없어서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을 했다."그때는 먼저 삽자루를 쥐는 놈이 일을 하는 거야. 새벽 4시쯤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창고로 뛰어가는 거지. 지금으로 따지면 일당을 받는 거야."할아버지 본적은 부평구 부개동 120번지로 돼 있다. 황인옥 씨 집 주소를 본적으로 정한 것인데, 이는 부평연와주식회사 주소와 일치한다. 황인옥 씨 가족이 벽돌공장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공장 주소와 황윤걸 할아버지 본적이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벽돌사'라는 책에는 연도별 연와공장 현황이 정리돼 있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일했던 '부평연와합자회사'는 최성순 씨가 1946년 경기도 인천시 부개동 120번지에 설립한 것으로 돼 있다.벽돌공장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생겼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좋은 흙과 인력을 활용해 벽돌을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일종의 자원·노동력 착취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불하를 받아 운영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벽돌공장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휴전 이후 복구 작업이 이뤄지면서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리게 됐다.인천 최초 벽돌공장은 1906년 4월 아키타(秋田)가 창립한 '추전상회요업부'다. 주소는 경기도 인천 비랑리로 돼 있다. 지금의 남구 용현동이다. 이후 1920년 4월 산야정(山野井)요업공장, 1932년 2월 인천요업주식회사, 1939년 4월 조선요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벽돌공장이 생겼다.이들 공장에서 나온 벽돌은 인천 개항장 일대의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인천의 건축'에 따르면 1889년 인천에서 길성(吉盛)이라는 청국인 건축청부업자가 벽돌 성형기를 반입해 서구식 벽돌을 제조했다고 한다. 청국과 각국공동거류지에는 연와 또는 석재 혹은 철재로 견고하게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각국조계장정 제2조)이 있었다. 건축 자재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1910년 이후 건축용 재료로 벽돌의 대량 제조가 가능해졌다.부평연와합자회사는 한국인이 운영한 인천의 첫 벽돌공장이다. 1947년에는 차태열 씨가 간석동 542번지에 조선요업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한국적벽돌주식회사, 한국적연와주식회사, 한국적연와공업주식회사 등으로 상호가 변경되기도 했다. 1971년 북구 작전동에는 한일연와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구산동에 중앙병원(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있지? 그 근방에서 벽돌 만드는 모래가 나왔다고. 4명이 한 조가 돼 덤프트럭에 싣는 거지. 그때는 일반 트럭이 없으니까 군에서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트럭이 나왔어." 모래를 한 차 가득 실을 때마다 마패를 1개씩 줬다고 한다. 이것을 사무실에 주면, 보름 또는 한 달 단위로 계산해 돈을 줬다.벽돌공장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처럼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부터, 벽돌을 굽는 사람, 차에 벽돌을 싣거나 내리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는 1955년 부평연와합자회사 직원 수가 102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부평지역 기업체 가운데 종업원 수가 가장 많다."상하차 작업은 벽돌 5장을 한 번에 던지고 받는거야. 맨손으로 하면 손바닥을 다치니까 자동차 타이어 튜브로 장갑을 만들어 썼어. 여자들은 '다대기'라고 해서 판때기로 벽돌을 두들겨 모양 잡는 일을 했지."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던 곳은 신도시 개발 등 택지개발사업으로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됐다. 부평연와합자회사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 북쪽에 있었다. 부평동중 인근 백영아파트와 대촌공원 자리에 사택이 있었다. 흙을 쌓아 놓고 흙벽돌을 만들던 공장 자리는 부개여고와 부개주공아파트가 차지했다. 가마 터에는 상일고와 웅진플레이도시가 들어섰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포함한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사택이 두 군데 있었다. 벽돌공장 위쪽 대부분이 논인데, 부천 상동 쪽으로 마을이 하나 있었다"며 "(인천과 부천 경계) 도로 가운데에는 수리조합에서 만든 개울이 있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벽돌공장 일을 그만두고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면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했는데, 황인옥 씨가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일수쟁이에게 빌려 마련해줬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1971년까지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서울 수유리에 통닭집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미군 부대를 15년 가까이 다니면서 집을 못 샀어. 근데 통닭집을 해서 4년 만에 수유리에 집을 산 거야. 생맥주를 함께 팔기 잘했지."처음에 7평짜리 가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4년 만에 31평까지 확장했다.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가 점포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권리금을 두둑하게 받고 그곳을 떠났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77년 인천 남구 주안동 인천법원·검찰청 도로 맞은편 건물 상가에 통닭집을 차렸다. 주안주공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의 1층 코너 점포를 얻은 것이다. 집(주안주공 64동 501호)도 샀다. 하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상권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서울과 인천은 수준이 다른 거야. 인천사람들은 통닭을 안 먹더라고. 또,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죄다 석바위 쪽으로 가는 거야."통닭과 술장사로는 매출이 오르지 않자 점심에 순두부백반과 찹쌀막걸리를 팔았다. 하지만 석바위 사거리 상권을 이길 수는 없었다."석바위 쪽이 번창했지. 양주 파는 집도 있고, 생활필수품도 거기 다 있었으니까. 석바위가 신흥도시라고 해서 중구와 동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사 왔어. 그때는 석바위가 엄청 커지는 줄 알았다고."법원·검찰청은 남구 학익동으로 이전했고, 공장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엔 2016년 3월 인천가정법원과 인천광역등기국이 들어섰다. 5층짜리 연탄 난방의 주안주공은 고층 아파트(더월드스테이트)로 재건축됐고, 할아버지의 점포가 있던 곳에는 17층짜리 주상복합(보미리즌빌) 건물이 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주안동 가게를 접고 서울에서 가구장사를 하다가 1980년 여름 인천에 다시 왔다. 서울우유 인천지구 구월보급소를 맡으면서 인천에 다시 정착한 것이다.할아버지는 간석동 희망백화점 인근에서 7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구월동 길병원 근처에 건물을 지어 1995년까지 직접 서울우유 대리점을 운영했다. 지금도 그 건물에 살고 있다."지금 시청 있는 곳은 배나무 과수원이었어. 주변에 인분을 모아 놓는 곳이 있어서 '똥고개'라고 했지. 구월주공, 상인천여중, 길병원 매점·식당에 우유를 납품해서 장사가 잘됐어."구월주공은 재건축을 통해 9천 세대에 가까운 대단지로 변했고, 상인천여중이 있던 곳에는 상인천초등학교가 들어왔다. 길병원은 본관을 중심으로 확장해 구월동에 '의료 타운'을 형성했다.할아버지는 도시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매제가 명절 때면 소래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했는데, 지금은 다 개발되고 없어지지 않았어? 요즘은 명절에 갈 곳이 없대. '형님은 고향이 있어 부러워요'라고 하더라고. 구글 지도로 고향(평남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을 봤더니 건물만 바뀌었지 마을 형태는 변하지 않았어.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갈 수 있지. 갈 수 있어."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의 장소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다. 이 사거리 북쪽에 벽돌을 만드는 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었다. 황윤걸(85) 할아버지는 이 벽돌공장에서 모래와 흙을 덤프트럭에 싣는 일을 했다. 인천 부평과 경기도 부천 경계에 개울이 있었고, 그곳에서 목욕도 했었다고 한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1955~1957년 당시 벽돌공장 생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1980년대 부평연와합자회사 벽돌막 모습. /부평역사박물관 제공황윤걸 할아버지가 부평연와합자회사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1955년 9월 군에서 제대한 후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

2017-12-2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8]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上)

한달간 환자 시늉하는 등인민군 되기 싫어 도망다녀노동당원인 담임선생님과전세 따라 서로의 피신 도와사범학교 들어가 신분 세탁교사 생활하다 월남 성공취라도 평남부대 대원으로환경 열악 위험한 작전수행가족들 두고 내려온 탓전쟁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향 인근 부대에 잔류전쟁이 길어질 줄도 모르고1953년 6월 용유도에 도착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황윤걸(85) 할아버지. 1951년 11월 고향에서 피란을 떠났는데, 한국휴전협정 한 달 전에야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1951년 겨울과 1953년 여름 사이의 오랜 기간, 황윤걸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민학교 교사 생활, 유격대원 활동 등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살이었다.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녔다.한 번은 '인민군 동원 지도원'과 싸움이 붙었고, 목 부위를 크게 다친 것처럼 속여 한 달 동안 환자 시늉까지 했다.부친은 인민군을 속이기 위해 3일마다 한 번씩 동네 의원에 가서 아들의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유엔군과 국군이 황윤걸 할아버지 마을을 거쳐 북쪽을 향해 진격했고,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노동당원이었던 담임선생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피란을 가자니 도중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거 같고, 자기 집으로 가자니 잡힐 것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은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계셨거든. 낮에는 내가 인민군에 안 가려고 파놓은 땅굴에, 밤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다"고 했다.담임선생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에서 통행증을 여러 장 끊어 담임선생에게 줬고, 담임선생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그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 치안대 직인이 찍힌 통행증 5~6장과 함께 보자기에 고구마와 밤 등 먹을거리를 싸서 드렸지."운명의 장난인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산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단다."집에 갔더니 안방에 담임선생님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치안대 생활을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야. '사흘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인민군에 잡히지 말고 있어'라고 하시고 떠나셨지."이틀 만에 담임선생이 다시 왔다. 담임선생은 "인민군에 잡히지 않으려면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야 한다"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신분 세탁'을 하기로 한 것이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 추천으로 1951년 3월 인민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학생이 40~50명 정도 됐어. 그 당시에 강의실이 어디에 있어, 동네 교회에서 수업을 받았지. 8월까지 교육을 받고 9월에 발령받았어. '어느 학교에 가겠냐'고 물어보기에 (치안대 활동 전력이 탄로 날 수 있어서) 고향에서 먼 곳을 희망했지."할아버지는 한 인민학교 4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이름만 학교이지 교실도 없고 학생도 몇 안 됐다."1학년은 어느 부락, 2학년은 어디 교회 등 지역을 정해주는 거야. 나도 교회에서 수업을 했는데, 학생이 있어야지.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학생을 모집하러 다녀야 했어."그렇게 2개월 정도 생활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연락이 왔다. 월남하려면 며칠까지 어디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학교 교감에게 "주민등록 주소를 인민교원양성소에서 학교로 옮기러 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약속한 장소로 떠났다. 접선 장소는 인민교원양성소 반대편에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어 먼 길을 왔건만, 그곳엔 월남을 안내하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그날 월남을 돕겠다는 사람이 내가 안 온다고 누나네 집으로 찾으러 갔다는 거야. 그래서 그날 월남하지 못했어."월남에 실패한 황윤걸 할아버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밤늦은 시간 험한 산을 다시 넘어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기회가 왔다. 할아버지는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0월28일 연락을 받고 다음 날 동창 집에서 만났다"며 "나 말고도 국군 패잔병 2명, 반공인사 등 10명 정도가 더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지뢰를 피해 월남하는 배를 탔다"고 했다.엔진이 없는 작은 목선이었다. 밤 11시에 30명 정도가 배에 탔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풍랑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배는 다음 날 오후 8시께 섬에 도착했다. 진남포 남서쪽에 있는 '취라도'라는 섬이다."아침에 일어나니까 밥을 주는데, 안남미 밥이야. 석유 냄새까지 나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 토할 거 같아서 세 끼를 굶었어."황윤걸 할아버지는 이튿날 심사를 받고 유격대원이 됐다.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것이다. 노인, 여성, 아이 등 노약자는 연대본부가 있는 황해도의 '초도'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동키 평남부대는 적지를 드나들며 식량 확보, 반공인사·피란민 구출, 인민군 주둔지 기습 등의 작전을 벌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1951년 3월 중순 백령도에 동키 제9부대가 창설됐다. 평남 지방에서 온 치안대원 등 반공인사와 청년들로 구성됐다. 동키 제9부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식량, 무기와 탄약, 무전기 등을 받아 초도에 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취라도와 덕도 등에 파견대를 보내 작전을 수행했다.취라도에는 약 30명의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 황윤걸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작전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은 안남미가 전부였는데, 겨울철에는 보급로가 끊겨 그마저도 먹기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소금이 반찬이었다. 새우젓이랑 밥을 먹으면 진수성찬"이라며 "담요가 부족해서 3명이 1장을 덮고 자고, 해안가에 떠내려온 나무로 불을 땠다"고 회상했다. 또 "피복 보급을 51년인가 52년에 처음 받았다. PW라고 적혀 있는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입었던 옷이었다"고 했다.작전은 위험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인민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거나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경우도 많았다."저수지를 폭파하려고 대원들이 들어갔는데, 분대장이 인민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은 거야. 대원이 부상당한 분대장을 업고 오다가 또 '꽝'하고 지뢰가 터졌어. 분대장은 다리 하나를 잃고, 대원은 한 눈의 시력을 잃었지."1953년 4월께 덕도에서는 새로 지급된 무기(무반동포)를 시험하던 중 조작 미숙으로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대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안병기 대대장 등 5~6명이 중상을 입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초도에도 백령도 백사장처럼 비행장 같은 곳이 있었다"며 "안병기 대대장은 초도에서 남한으로 후송하던 중 비행기에서 숨졌다. 나중에 부대에 온 유품 손목시계에는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억했다.평남부대에는 여성 대원도 있었다. 그녀들의 임무는 식사 준비, 빨래, 부상병 치료 등이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사는 김찬일(86, 평남 강서군 함종면 계산리) 할머니도 평남부대원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취라도에 왔다. 김찬일 할머니는 "아버지가 치안대 활동을 해서 고향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며 "섬으로 내려와 대원들의 작전을 도왔다"고 했다. 또 "주먹밥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안남미는 부스러진다"며 "보급품이 부족해 탄띠를 풀어 남자 대원들의 속옷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찬일 할머니는 휴전 후 인천에 정착했다. 역전에서 짐 나르는 일, 이 집 저 집 다니며 허드렛일도 하고, 인천항 부두 앞에 떠 있는 원목의 껍데기를 벗겨 내다 팔기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중순 미군의 LST(상륙함)를 타고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 부근에 내린 것으로 기억했다. 한국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무렵에야 남한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동키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이듬해 2월까지 200여 명의 대원과 용유도에서 훈련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평남부대 전우회 D-9 1호 회원이다. "80년대 초반에 유격군연합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사무실을 찾아가서 평남부대에서 왔다고 했더니, 평남부대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 부대 옆에 안용부대 D-12라고 있었어. 여기 회장인 안용호씨와 사무국장 변철준씨가 인우보증을 서 등록할 수 있었지."황윤걸 할아버지는 1954년 용유도에서 헤어진 전우들을 수소문해 찾아 모았다. 그렇게 해서 60여 명의 대원을 참전유공자로 등록해줬다.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숨진 대원 등 전사자 9명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하는 일에도 앞장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조모, 부모님, 누나, 그리고 여동생 3명을 고향에 두고 혼자 월남했다. 고향과 가까운 섬에 주둔하면서 작전 수행을 위해 고향 근처를 드나들었지만, 집에는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에 잡히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물론 가족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곁에 있으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황윤걸 할아버지는 "취라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동키 평남부대에 남아 있기로 했다"며 "전쟁이 끝나면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전쟁 때 고향 근처 해변에서 목선을 타고 진남포 서남쪽에 있는 작은 섬 '취라도'로 내려왔다. 여기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황윤걸 할아버지는 적지를 드나들며 작전을 수행했다. 동키 제9부대는 백령도에 창설됐으며, 황해도 '초도'에 연대본부를 뒀었다. 취라도는 '상취라도'와 '하취라도'가 있는데, 동키 제9부대 파견대는 '상취라도'에 있었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가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닌 일, 인민학교 교사 생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 활동 등 한국전쟁 당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2-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7]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下)

연평도 30㎞ 거리… 할아버지는 서쪽 온동리에 살아젓새우 많이 잡혀 말리거나 젓갈 담가 국내·외 유통외침 방어 진보 위치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용매도 회담 앞두고 터진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망둥어에 소주한잔으로 여생 보내 "신도가 제2 고향"차학원(76) 할아버지의 고향 용매도(龍媒島)는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이다. 과거부터 황해도 해주의 일부 지역이었던 용매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 때에는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중종(1531년)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해주목(海州牧)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설치됐고 그 영역은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 69리요,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다'고 했다. 용매도는 1938년 해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황해도 벽성군이 만들어지면서 벽성군 소속이 됐다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 놓이면서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소속이 됐다. 연평도와는 30㎞ 떨어져 있다.1942년생인 차학원 할아버지는 벽성, 연백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청단군이지만 복잡한 이력이 귀찮은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이라 대답했다. 1986년 이곳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용매도민회도 회칙에 공식 명칭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도민회'라 칭하고 있다.용매도는 동쪽의 진동리(鎭洞里)와 서쪽의 온동리(溫洞里), 섬 중앙의 한동리(寒洞里) 3개 마을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한동리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동산과 온동산이 황룡(龍)이 뒤틀어져 암룡과 숫룡이 맺어 있는(媒) 모양이라고 해 용매도라고 칭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온동리에서 살았다. 온동리는 300가구에 1천300여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온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여러 부속 섬 중에 육읍도(陸邑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곳이다. 겨울철에 아낙들이 건너가 며칠씩 굴이나 바지락을 캐오면 수입이 쏠쏠했다. 이곳은 여러 날 묵어가면서 일하는 곳이라고 해 '묵골'이라고 불렀다. 묵골은 바로 할아버지가 장봉도로 피란을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묵골의 서남쪽으로 있는 귀염도, 소렴도에서는 주꾸미가 많이 잡혔다. 낚싯줄에 소라 껍데기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 놓으면 주꾸미가 산란을 하러 소라껍데기에 들어가 잡혔다고 한다."묵골은 연평도 방향에 있는 조그만 섬이었는데 원래는 노인네 한두 분밖에 안 사는 작은 동네였어. 여자들과 어린애들이 망둥어도 잡고 상합도 잡으며 사는 조용한 섬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됐지."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가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 배를 부렸다. 할아버지는 "해산물이 흔하디흔했지만 그중에서도 젓새우가 가장 유명했지. 그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한강 마포나루까지 새우젓을 팔러 나가기도 했어"라고 말했다.용매도 앞바다 어장에서는 6~7월에 새우가 많이 잡혔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일 자는 "해주군 청룡면 룡매도는 새우의 산지로서 해마다 생산고가 1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막 새우의 어획 시기인데 금년도는 특히 기후의 순조로 예년에 없는 풍산(豊産)을 보게 되어 앞으로 생산 예상고가 평년보다 약 오할 이상이나 증가 될듯하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의 부역 노동자 하루 평균 임금이 80전(1원=100전)이었으니 엄청난 생산량인 셈이다. 새우는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가 먹는 것도 일반적이었지만 용매도 사람들은 새우를 쪄서 말린 뒤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말린 새우는 가루로 만들어 '미원'처럼 국물에 넣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고 한다. 용매도에는 1920~30년대 새우 건조 작업장이 40~50군데 생겨나기 시작했다.용매도의 새우젓은 한강 마포나루를 통해 육지로도 유통됐다. 마포는 양화진, 서강과 더불어 조선 초기 한강 하류의 항구로 발전했다. 그 마포는 삼남지방의 양곡이 모이는 곳이었고, 서해안의 소금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황해도와 인천, 강화 지역의 새우젓 배가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일제시대 무렵이다. 서울시가 1985년 발간한 '한강사(漢江史)'는 "경인선의 부설로 한강의 선운(船運)이 활발치 못하게 되었으나 일제 때 이곳 마포는 서해에서 유입되는 새우젓 배의 선창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6·25 동란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휴전선으로 인하여 서해에서 마포강으로 배가 직접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평도 어장과 가까워 조기가 많이 나 조기잡이 배도 마포를 오갔다.용매도는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다. 외침을 방어하는 진(鎭)이나 보(堡)가 용매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주목 내에는 '진보(鎭堡)'가 있었는데 그중 '용매량진'은 섬 가운데 있었고, 옛날에는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한 명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호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진을 다스리는 무장을 일컫는다. 조선조 수군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예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큰 진을 관장했다. 그 밑에 동첨절제사와 만호가 관할하는 진이 있었다. 용매도에는 봉수(烽燧)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해주와 연평도를 이어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이 같은 군사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국전쟁 때도 남북은 용매도를 두고 끝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휴전을 앞두고 철수령이 내려지면서 북한의 차지가 됐다.이런 용매도에서 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기 전 첫 비공식 회담을 용매도에서 가졌다. 지금도 공식 기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비사(秘史)처럼 전해지지만 일명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용매도 회담'이다. 할아버지는 고향 용매도를 이야기할 때 남북회담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밝힌다며 2015년 출간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용매도 회담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은 황태성에 대한 자료와 그의 친손녀인 황유경씨 등 유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 따르면 1961년 9월 28일 첩보부대 HID 소속 강성국 중령과 김석순 대위가 배를 타고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용매도에 갔다. 이들은 사실 '가짜 군인'으로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시의원을 지낸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첩보 훈련을 받고 회담 전 북한의 의중을 떠보는 임무를 수행하러 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회담은 성과가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다.1997년 용매도민회가 낸 용매도지(龍媒島志)에는 용매도회담의 장면을 각색해 극적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비공식 회담의 합의사항도 나오는데 '서울과 평양에 각각 상대방의 비공식 대표부를 둔다', '대표위원의 교환은 유도(강화도 앞의 한강하구 섬)에서 한다'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반대로 북한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죽마고우였던 황태성을 남파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용매도 회담 이전부터 남한에 와있던 황태성은 1961년 10월 15일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 그러니까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를 통해 고위층과 접촉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종필은 대공수사 인력에게 검거를 지시했고 황태성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 황태성은 재판에서 자신의 남하(南下)를 "남한에서 간 (용매도 회담)밀사에 대한 환례(還禮)"라고 주장했지만, 2015년 중앙일보가 엮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김종필은 이를 "육군첩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가 정보수집을 위해 자체적으로 벌인 대북 공작"으로 규정했다. 또 "중앙정보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용매도에서 비밀스러운 남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차학원 할아버지는 용매도에 산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직장을 잡아 인천에 나와 살면서도 늘그막에 굳이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신도에 자리 잡은 것도 어쩌면 섬 용매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일군 신도4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낚시로 잡은 망둥어를 깨끗이 손질해 빨랫줄에 널어 바닷바람에 말리는 일이 낙이다. 잘 말린 망둥어를 노릇노릇 구워 소주 한 잔 걸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함께 피란 나온 어르신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1세대가 사라지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지만, 나라도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기를 섞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는 신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여생을 보내려고."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는 300가구 1천300여명이 사는 용매도 서쪽에 위치한 온동리에 살았다. 사진은 동쪽 진동리 마을 전경.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온동리 거무녕뿌리에 있는 마을 주민들. 뒤에 보이는 섬이 소렴도다. /용매도지 제공용매도 앞바다에서 잡은 젓새우를 말리는 건하장 모습. /용매도지 제공

2017-12-06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6]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中)

1960년대 초반 사진 DP점 '미광사' 취직숙식 해결돼 현상·인화작업 배우며 일해입대후 통신소대 배치 엉뚱한 지시 받아'남양사'로 불법 파견… '사진 업무' 수행결국 군인신분 민간인 행세로 체포 당해이후 베트남전 앨범제작위해 파병길 올라맹호부대 전쟁사 담긴 앨범 아직도 '간직'제대후 DP점 운영하다 목재사에서 새삶용매도 출신 실향민 차학원(76)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려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땅 9천900㎡을 맨손으로 일궜지만, 정작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땅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인천 도심으로 넘어가 싸리재에 있는 사진 DP점(店) '미광사(美光社)'에 취직했다. 'DP점'은 현상(現像·Developing)과 인화(印畵·Printing)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상은 필름에 담긴 잠상(潛像)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고, 인화는 종이로 사진을 뽑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E(확대·Expansion)'까지 더해 'DP&E'라고 했지만, 흔히 DP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DP점은 현상·인화만 하는 곳이라 가게에서 사진을 직접 찍은 뒤 현상·인화를 해주는 사진관과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된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에 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뭍으로 나왔다.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 최인진이 1999년에 낸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 신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수용한 것은 1882년 개화기 청년을 이끌고 중국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이 처음이다. 사진이 도입되기 전에도 '사진'이라는 말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9권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상(像)에 대한 찬(贊)'이라는 시에서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라는 글귀를 '하필사진(何必寫眞)'으로 썼다. '베낄 사'에 '참 진', "실물의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그린다"는 뜻이다. 지금의 '사진(Photography)'이란 개념은 1863년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영한 조선시대 문인 이익의(1794~?)가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초창기 사진기는 일명 '어둠상자(暗箱)'라고 불리는 대형 사진기였는데 검정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식이었다. 이후 사진기가 소형화 돼 휴대할 수 있는 크기가 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롤 필름' 사진기가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전후다. 미국의 코닥(Kodak)이 대중적이었고 독일의 라이카(Leica)가 최고급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DP점에서 일할 때는 캐논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어. 라이카는 지금 자동차로 치면 벤츠급이었지. 돈 많은 사람만 카메라가 있던 시절이니까"라고 말했다.미광사는 지금의 중구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인근 옛 상업은행 맞은 편에 있었다. 주인은 따로 있고 동료 1명과 함께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 작업을 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다른 DP점은 하인천 '신호양행', 경동의 '군성양행' 정도였다. 대부분 DP를 하면서도 인화지와 필름을 팔고, 사진 약품 따위를 함께 파는 가게였다.미광사의 주 고객은 자유공원의 '출사원(出寫員)' 10여 명이었다. 꽃 피는 봄이나 낙엽이 지는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이면 자유공원에서 출사원이 찍어주는 사진이 전부였다. 사진 인화는 명함판(2×3인치), 중판(3×4), 대판(5×7) 등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사진을 인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중판 한 장에 20원 정도였지만 출사원은 손님들에게 몇 백 원씩 받으며 이문을 챙겼다. 수학여행철이나 소풍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DP점에서 이틀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뽑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미광사에서 몇 해 일하다가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와 1964년 9월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원주통신훈련소에서 '보이스병'(무전병) 교육을 수료해 자대에 배치됐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 1연대 본부 통신소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대 날짜를 세기도 어려운 신병 시절 뜻밖의 임무가 찾아왔다. 당시 통신대장 서모 대위가 사진광이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사진 DP점 근무 경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 대위는 갓 전입한 할아버지에게 휴가를 준 뒤 고향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엉뚱한 지시를 했다. 신병이 자대 배치 일주일 만에 휴가를 받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워 부대 인근 사진 DP점 '남양사'로 데려갔다. 남양사 사장은 경찰 간부 출신으로 역시 사진에 취미를 두었다가 퇴직 후 아예 DP점을 차린 경우였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남양사에 파견 보냈다. 당시 통신부대는 민간 통신 교환 업무도 수행했는데 외부로 파견을 보냈다고 적당히 서류를 꾸민 것이다. 할아버지를 직원으로 부려 먹고 남양사 사장이 서 대위에게 어떤 대가를 지급했는지는 모를 일이다.처음에는 머리가 짧아 암실에서만 근무하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대놓고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당시 홍천여고에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는데 젊은 총각이라 인기가 좋았지. 월급을 안 받아도 편하게 생활을 하니까 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라고 회상했다.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할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어느 날 밤 사단 사령부 감찰대에서 남양사에 들이닥쳤다. 늦은 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감찰대원들이 할아버지를 체포해 지프에 태워갔다. 불법 파견돼 민간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서 대위도 공범 신세가 됐다.할아버지를 구원해 준 것은 남양사 사장이었다. 그는 홍천경찰서 경무과장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화당 관리장을 했다. 원래 정당은 면 단위 이하 행정구역에는 정당 기구를 둘 수 없는데 공화당은 면에 '관리장'을 두고 공공연하게 활동을 했다. 관리장이라는 완장을 찬 남양사 사장은 감찰대에 전화 한 통으로 할아버지를 꺼내왔다. "남양사 사장이 전화를 안 해줬으면 그날로 바로 영창에 갔겠지. 그때 관리장이 제일 '끗발'이 좋을 때였어. 서 대위도 징계를 안 받고. 옛날이야 그랬겠지만 지금도 뭐 뇌물이니 비리들이 많잖아."자대로 복귀한 할아버지는 1965년 9월 베트남 전쟁 파병(파월) 길에 올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베트남전쟁 연구총서'를 보면 수도사단은 1965년 월남파병 전투부대 1진으로 선정돼 그해 9~10월 베트남으로 떠났다. 수도사단은 부대 재창설 수준의 개편을 거쳐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에 병력을 보냈다. 총인원 1만3천672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전기 등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기재계'에 소속됐다. 월남에 가서도 할아버지는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보실에서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데 할아버지를 차출해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진병과 각 중·소대 통신병이 사진을 찍어오면 필름을 현상해 인화한 뒤 한국으로 보냈다. 편집은 귀국한 뒤 마무리했다.할아버지가 보여준 흑백사진 앨범은 맹호부대 베트남 전사(戰史)의 축소판이었다. 파병 준비 훈련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여의도 환송식 장면, 부산항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부대원들의 모습, 베트남 '퀴논'에 상륙하는 장면과 전투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각 작전마다 사살 인원과 적 무기 노획 등 전과(戰果)를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우리 군에 사살된 일명 '베트콩(월남민족해방전선)'의 시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날것 그대로 담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에는 "1965. 10. 28. 수색중대 전방 10m까지 전급하여 사살된 베트콩 2명"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또 네이팜(Napalm)탄의 공중폭격으로 정글과 마을이 불타는 장면, 헐벗은 전쟁 난민들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1960년대 전쟁 속 베트남의 일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많이 수록됐다. 1966년 6월 24일 앨범 편집후기를 쓴 앨범 편집자 권병주 중위는 "우리들이 흘린 땀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앞으로의 영광스런 역사발전에 밑거름이 되리라. 이런 뜻에서 미흡하나마 이 조그마한 파월기념앨범이 지닌 뜻은 크다"고 했다. 이 앨범은 파월 1진 맹호부대 1연대 간부와 병사들 전원에게 배포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앨범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1967년 12월 월남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음 해 3월 제대했다. 할아버지는 제대하면 남양사에서 일해달라는 주인의 말에 다시 홍천으로 갔다. 그리고 남양사 주인의 사촌 처제를 소개받아 결혼해 홍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양사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1973년 드디어 DP점을 따로 차려 독립했다. 말은 독립이었지만 사실 남양사의 자회사 개념의 사업이었다. 홍천 버스 회사 한편에 사무실을 내고 필름이나 인화지, 만년필을 팔면서 사진 DP도 했다. 할아버지 가게에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밤에 남양사에서 작업을 한 뒤 낮에 손님들에게 사진을 줬다. 하지만 내기 당구와 노름에 한눈을 팔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결국 사업을 접고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와서 선창산업이라는 목재회사에 취직해 통나무 제재 일을 했다. 이후 삼미사 원목반에 들어가 나무 수입 관련 업무를 했다. 삼미가 망하면서 주식회사 중동이라는 목재사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5년간 촉탁직으로 더 일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북도면 신도4리 집에서 일출 사진을 찍는다. 영종도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해가 할아버지네 집 앞의 나무에 걸리는 때가 포인트다. 사진 DP점을 했지만 정작 사진기에 대한 욕심은 없어 조작이 간단한 스마트폰이 최고의 사진기란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맹호부대 1연대 본부 통신소대 단체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맹호 파월부대 1진이 1965년 10월 베트남 퀴논 해변에 상륙한 직후 찍은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홍천에서 사진 DP점을 했을 당시 인화한 사진 중 하나. 반공의식을 다지는 1970년대 군민승공대회 모습이다.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DP점 취직을 위해 북도면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길에 찍은 부두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할아버지가 인화한 사진으로 만든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

2017-11-29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5]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上)

작은 섬에 황해도 육지 피란민들 몰려 새우잡이 배로 수송 1·4후퇴때 부모와 동생들 먼저 떠나고 곡식 지키다 노모 모시러 온 청년따라 노모 대신 '작은 배' 타고 南으로 거처 옮겨 다니느라 국민학교 4학년만 4번 다녀 천주교 지원으로 '공생조합' 만들어 수십만 평 간척"매일같이 돌·흙짐 지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인천서 정년퇴직 후 돌아와… 당시 땅은 다 팔고 없어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닿는 섬 신도(信島). 일명 '삼형제섬'이라 불리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시도(矢島)·모도(茅島)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신도선착장을 빠져나와 차량으로 1㎞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도4리다. 올해 10월 기준 57가구, 인구 126명의 작은 마을 신도4리에 펼쳐진 너른 논과 폐염전이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의 실향민 차학원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고 신도에 정착해 맨손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2년생 말띠, 일흔 여섯이다.전쟁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발발했다. 황해도 육지의 피란민들이 용매도로 밀려왔고 작은 섬은 난민촌이 됐다. 용매도 청년들은 '난민수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우잡이 배로 난민들이 원하는 곳까지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등 남쪽 섬과 군산, 목포 등지로 수송했다.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용매도민회가 1997년 발간한 '용매도지(龍媒島誌)'는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는 가족과 자식을 찾는 소리,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는 비명소리, 먼저 배에 오르려다 바닷물에 빠져 텀벙대며 허우적거리는, 어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해변가에 버려둔 채 홀로 배에 오르는 비정한 장면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쟁 직후 용매도에는 북한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 조직은 상주하며 사상 교육을 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는 "선생들이 수업은 안 가르치고 맨날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가르쳤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조국, 우리는 자유조선 꽃다발에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내가 아직도 가사를 안 까먹었어"라고 말했다.고향을 지키고 있던 용매도 주민들은 1·4후퇴 때에야 피란 행렬에 동참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한 곡식을 그냥 두고 가기가 영 아까웠다.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피란시키고 꼭 다시 돌아오겠으니 곡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마을에는 '고향을 어찌 떠나냐'며 끝내 피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주로 남았다. 이들은 밀물이면 바닷물이 차 섬이 되고 썰물이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용매도 끝자락 '묵골'이 안전하다며 이곳에 모여 살았다.차학원 할아버지는 할머니, 고모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뱃길이 막혔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1951년 여름 용매도에 한 청년이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나타났다. 노모를 두고 장봉도로 피란한 청년이 혼자 노를 저어 어머니를 모시러 온 거였다. 청년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노모는 고향을 못 떠난다며 버텼다. 아들과 한창 실랑이를 하던 이 노인은 어르신들 틈에서 그 광경을 보던 차학원 할아버지를 지목하며 "너는 어리고 남자니까 나 대신 이 아저씨를 따라가라"고 했다. 청년이 타고 온 배는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마을 주민 누구도 자기가 대신 타겠노라 나서지 않고 당시 11살이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모의 희생으로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가게 된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배를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수첩에 그려 준 배는 앞이 뾰족했고 뒤에서 노를 젓는 식이었다. "밤새 물살을 갈라 장봉도에 도착했지.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도착했을 때 매미가 울더라고. 할머니가 오이 먹으면 멀미 안 한다고 오이를 챙겨주셨으니 여름이 확실해."장봉4리 해안가 백사장에는 피란민들이 한데 모여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난민촌에서 먼저 피란 온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다. 황해도 피란민 대부분 인천 만석동에 모여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2달여 뒤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만석동으로 무작정 떠난 할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괭이부리마을 움막집에 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있는 장봉도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다가 신도에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드는 피란민 정착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을 하는 신도4리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가 18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한군데 있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를 4학년으로만 4번이나 다녔다. 용매국민학교 4학년 때 피란했고 아버지를 찾아 인천 만석동에 와서 축현국민학교 4학년을 다녔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니느라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했다. 장봉국민학교도 4학년에 편입했다가 신도로 건너가느라 유급했다. 그리고 신도에서 와서야 국민학교를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 신도국민학교 12회 졸업생인 할아버지는 동창들보다 나이가 4~5살 많다.1996년 옹진군이 발행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따르면 신도4리는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가 실향민이 모여 살아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新村)이라고 불렀다. 실향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다 보니 난민정착사업소의 구제사업 인가를 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구제회(NCWC·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는 개간을 하는 실향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곡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신도4리뿐 아니라 영종도, 시흥 등에도 실향민들이 조합을 결성해 갯벌을 메웠다. 1958년 3월 31일 경향신문에는 "천주교구제회가 65개소의 농지개간, 염전개발 등 거주민 1만 세대에 대해 매달 쌀, 밀가루, 옥수수 1만 포대를 자활하는 날까지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2006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행한 '교회사연구(26집)'도 "NCWC가 1955년부터 미공법(PL) 480호에 따른 잉여 농산물 공여가 시작되면서 응급 구호에 사용됐던 양곡이 개간 사업, 정착 사업 지원용으로 사용돼 1955년부터 1963년까지 8억8만464파운드의 양곡이 지원됐다"고 설명하고 있다.신도4리 실향민들은 '공생조합'이라는 이름의 조합을 결성했다. 말 그대로 '서로 도우며 함께 살자(공생·公生)'는 의미였다. 당시 150가구 수백 명의 실향민이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수십만 평의 땅을 만들었다. 한 집에 배당되는 땅은 3천 평씩이었다. 조합원들은 긴 제방을 쌓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혔다.지난 16일 오후 3시께 공생조합이 만든 신도4리 방조제를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다. 바다 너머 영종도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이는 곳이다. "싸리나무로 만든 지게를 짊어지면 양옆에서 두 명이 삽으로 흙을 퍼다가 쌓아줬어. '구루마'(손수레)도 없이 그저 지게로 옮겨 실어 '뚝매기(둑막이)'를 했지. 그때 천주교에서 구호를 많이 해주니까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늘어났어." 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당시 선착장이 있던 '하머리'와 섬 아랫자락에 있는 '고두구지'에서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왼쪽을 바라보며 "저기 보이는 곳이 하머리인데 돌산에 다이너마이트를 박고 폭파해 돌을 떼어냈어. 도구도 없이 장갑 하나만 끼고 돌을 날랐어"라고 설명했다. 옹진군향리지는 "매일같이 나가 돌과 흙짐을 지고 갯벌에 빠지면서 등에 못이 박이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일했다"며 그들의 처절함을 소개했다.땅을 만들고 나서는 3천 평씩 나눠 갖는 일이 문제였다. 산 쪽에 붙어 민물을 많이 머금은 땅은 좋았고 바닷가 쪽 땅은 소금기가 있어 땅의 질에 편차가 컸다. 결국 제비뽑기로 좋은 땅 하나 나쁜 땅 하나씩 2필지를 나눠 가졌다. 할아버지 땅의 토지 이력(5천94㎡)을 확인해보니 신규등록일(매립 준공)이 1964년 7월 3일이었다. 1989년 12월 발행한 '옹진군지(甕津郡誌)'의 염전 현황에 신도4리 염전의 준공일은 1964년 9월 19일로 돼 있다.신도4리 주민들은 새로 얻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일반 땅의 절반밖에 수확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염전 사업자에게 땅을 팔고 육지로 떠나기도 했다. 정착사업을 위한 매립이 끝나 천주교구제회의 양곡 지원도 끊겼다. 누구 산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육지에 내다 팔았다. 나무를 한 짐 실어주면 보리쌀 한 됫박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고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신도로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할아버지는 그때 받은 2필지를 모두 팔았다. 1필지는 아버지가 일찍이 팔았고, 나머지 1필지는 할아버지가 5년 전 아들, 딸들 결혼시키느라 팔았다고 한다. 2017년 5월 기준 이 땅의 개별공시지가는 1평(3.3㎡) 당 22만5천원이다. 실거래가는 더 비싼데 5년 전 판 땅은 평당 42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든 재산이다.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다가 정년퇴직한 뒤 신도에 돌아왔다. 예전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은 사라져 같은 용매도 출신 고(故) 서상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고쳐 살고 있다. 기자가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마침 서상호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가 할아버지네를 찾아왔다. 이들 부부도 신도4리에 살고 있다. 텃밭 농사 얘기며 말린 생선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신문기자가 와서 예전에 공생조합 얘기하고 있었어…"라고 하니, 부부는 "우리 아버지가 그 얘기 잘 아시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을 받았다. 한때 150가구였던 실향민은 1990년대 후반 20여 가구로 줄었고, 지금은 할아버지네를 포함해 몇 가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1세대 어르신이 살아 계시는데 귀가 어두워 공생조합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들은 이제 남지 않았지. 아마 신도4리 실향민 1세대도 내가 마지막일 거야."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공생조합이 만든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방조제 위에 올라 실향민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둑을 세운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 뒤쪽으로 보이는 언덕이 방조제 쌓는 돌을 구하던 '하머리'지역이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자신의 집에서 피란 생활과 신도4리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용매도에서 장봉도로 피란할 때 탔던 배의 모양.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 수첩에 직접 그렸다.

2017-11-22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4]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下)

선교회활동 덕에 2003년 조평통 초청 '방북' 생존 알고도 밝히지 못해 어렵게 만남 성사신평휴게소서 재회 어릴적 얼굴 없어 '어색'동생이 할아버지 목 뒤 큰 점 알아보고 "확신""당시 단천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전씨 집성촌서 가장 큰집 농사도 짓고 '유복''지하의 박물관' 광산과 수력발전소로 유명'고향의 맛' 가자미식해는 지금도 즐겨먹어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는 2003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이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정식 초청을 받아 평양 등지를 방문했고, 꿈에 그리던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폭설로 도로가 막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고향 땅은 밟지 못했지만, 함경남도 함흥과 원산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여관인 '신평휴게소'라는 곳에 가서 사촌동생을 만났다. 피란 나올 때는 생존해 있었던 부모님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동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생사라도 알게 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진성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부모를 기리는 추도 예배부터 드렸다. 그동안에는 생사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부모님을 추모(追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할아버지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활발한 사회활동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천세광병원에서 나온 뒤에도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한민족통일선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단체가 북한 양로원, 고아원 등에 다년간 지원한 고마움의 표시로 조평통이 할아버지 등 4명을 공식 초청했다. 할아버지는 "기도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 따른 결과로 1985년부터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게 된 실향민은 전체로 따져봤을 때 극소수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지난해 발간한 '이산가족 70년(1945~2015)'을 보면 상봉을 요청한 이산가족 13만 명 가운데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실제 상봉의 기회를 가진 사람은 5천 명 내외로 전체의 4% 미만에 불과하다. 특히나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통해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받은 할아버지는 2003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평양과 함경남도 원산, 함흥, 영흥 등지를 방문했다. 할아버지 집에는 김일성 생가, 김일성·김정일 선물관, 묘향산, 평양개선문 등에서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방북 때 가족을 만나보지 못할 뻔 했는데, 북한 당국에 애원해서 뒤늦게 기적적으로 사촌동생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처음에 "가족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수십 대에 걸쳐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에 살았다. 꼭 살아있을 테니 찾아달라"며 애원하자 막판에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던 거다. 할아버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삼촌과 사촌동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북한 당국에 이야기할 수는 없었던 터였다.할아버지보다 10살 밑인 사촌동생을 신평휴게소에서 만났다. "잠깐만 몸을 피했다 돌아오겠다"며 고향 집을 떠난 지 53년 만이었다. 할아버지가 피란을 갈 때 코흘리개 어린이였던 동생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릴 적 얼굴이 없어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색한 표정을 짓던 동생은 느닷없이 할아버지의 목을 보더니 "맞다"는 말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할아버지 목덜미에는 큰 점이 있는데, 이를 알아본 것이다. 친척들은 언젠가 남한에 간 전진성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목에 난 점을 보면 된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인 데다 장손이라 친척들이 피란 간 할아버지의 생사를 늘 궁금해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어렵게 만난 동생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줬다. 할아버지는 동생을 만나기 전 묵고 있던 고려호텔 지하 기념품점에서 여러 물건을 사고, 차고 있던 시계와 반지까지 동생에게 끼워줬다. 할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에 입고 있던 코트와 모자까지 벗어줬다.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실향민들이 많다. 북한을 직접 방문해 가족을 만난 전진성 할아버지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올해 9월 발표한 '이산가족 상봉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2017년 8월 31일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천221명 가운데 사망자가 54.2%(7만1천145명)에 달해 생존자(6만76명, 45.8%)를 크게 넘어섰다.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절절한 사연은 가슴을 울린다. 분단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호철(1932~2016·함경남도 원산 출신)이 1973년 낸 단편소설 '이단자(4)'의 주인공 현우가 북에 있는 동생에게 쓴 편지(신문 지상편지)에는 가족을 향한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 그때 네 나이 열다섯, 내 나이 열아홉이었다. 지금은 내 나이 갓 마흔이요, 네 나이 서른여섯이로구나. 아, 서른여섯 살 먹은 너, 네가 서른여섯 살이나 먹다니. 아무리 애를 써도 열다섯 살 먹은 네 얼굴만 떠오르지, 서른여섯 살 먹은 네 얼굴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몹쓸 꿈치고는 너무도 긴 꿈이어서 참으로 허망하구나. 서른여섯 살 먹은 너와 만날 일이, 갓마흔 된 내 얼굴을 너한테 보일 일이 기쁘기 이전에 어쩐지 끔찍스럽고 처연해지기부터 하는구나.(…중략…) 내가 나오던 그때, 할아버지는 일흔셋인가였으니까 이미 저 세상으로 가셨겠지. 살아 계신다면 아마 아흔너댓이 될 것이다. 쉰이 못 되시던 아버지 어머니도(가만, 한참 따져봐야겠다) 일흔 살 안팎이겠구나. 누나들, 그리고 우리의 귀염둥이 누이동생, 아, 그애도 이제 서른 살이로구나! 모두 안녕들 하시냐. 청탁에 못 이겨 쓰다보니까 정말로 새삼스럽게 목구멍이 막혀오고 가슴이 막힌다. 이만 줄이겠다……."할아버지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고향집인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 392번지'에는 찾아가지 못했지만, 고향의 현재 모습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촌 동생은 고향 마을에는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 '토성촌'에 있던 가옥은 모두 사라지고 인근에 있는 '화장'이라는 지역에 일자로 지어 놓은 집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동생은 "화장의 양지바른 곳에 일자로 집을 지어줬다"고 했다.할아버지는 고향 장내리는 '마당 장(場)'이라는 이름대로 넓게 퍼진 지형이었다고 기억했다. 고향 땅 주위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고 했다. '백마산'이라는 이름의 모래산이 있었고, 산을 넘으면 넓은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쪽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99~2005년 공동으로 편찬한 '조선향토대백과'는 장내리를 "북부와 서부가 그리 높지 않은 야산들로 되어 있으며 남동부의 동해 가까이에는 사취와 모래언덕이 분포되어 있다"고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장내리의 토질은 쌀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밭에서 조, 수수, 감자, 피 등을 키웠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장내리 토성촌은 전씨 집안(본가 강원도 정선)이 수십 대에 걸쳐 살아온 집성촌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할아버지네였다. 할아버지의 조부(祖父)는 한의사였고, 아버지는 크게 농사를 지어 집안은 유복했다. 당시 학비가 비싸 다니기 힘든 전문학교(북청전문학교 잠업과)를 다니기도 했다.당시 단천은 광산과 수력발전소가 유명했다. 할아버지는 "마그네사이트, 은, 유화철 등을 생산하는 광산과 허천강을 따라 큰 수력 발전소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에서 1968년 펴낸 함경남도지의 단천군 편을 보면 단천은 '지하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원 매장량이 많았다. 함경도지에는 단천군의 광업에 대해 "세계 제1의 36만톤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마그네사이트, 북두일면 용장광산을 위시하여 검덕의 구리, 납, 아연, 동양 최고의 코발트, 금, 운모, 철광, 신풍광산의 인탄석과 유화철, 석면, 카드미움, 사금, 은, 옥석, 흑연 등 유수한 지하 보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2008년 발행한 통일학 연구총서 '남북한 환경정책 비교연구'는 단천 마그네사이트광에 대해 "노출된 것만도 길이가 7천600m, 깊이가 2~100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이라고 했다. 함경남도지는 허천강수력발전전력을 '일명 단천수력발전소'라고 칭하며 "일제 재벌의 투자로 당시 조선 최대의 발전량을 과시한 발전소"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고향 단천에서 먹었던 음식으로는 콩과 쌀을 갈아서 만든 '콩떡'과 가자미, 좁쌀, 고춧가루, 무채 등을 버무린 뒤 숙성시켜서 만드는 '가자미 식해'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속을 다 꺼낸 동태에다가 두부와 생선 내장 등으로 만든 순대를 넣은 '통시미'도 생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되는 고향의 음식이다. 할아버지는 "1년에 2번은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 있는 '단천식당'을 찾아 고향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 아바이마을에서 사온 가자미식해를 냉장고에서 꺼내 보여주면서 "항상 먹을 수 있게 떨어질 때쯤 되면 다시 주문한다"고 말했다.단천식당 사장 윤복자(78·여) 할머니의 딸 김채현(50)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단천이라 단천식당으로 이름 짓고 고향음식을 만든 것이 50년이 넘었다"며 "아버지는 생전에 단천에서 추울 때 먹을 게 없어서 겨울을 대비한 감자로 만든 냉면이나 가자미식해 등을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북에서 만드는 방식 그대로 음식을 하고 있는데, 고향 음식을 맛보러 실향민분들뿐만 아니라 '새터민'들도 많이들 온다"고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2003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가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나 큰절을 받고 있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지난 2003년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났을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사진은 사촌동생이 할아버지 목에 있는 점을 확인한 뒤 "형이 맞다"며 좋아하는 모습이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사촌동생과 함께 신평휴게소에 온 북한 단천시 대표자와 악수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 옆에 서있는 동생은 할아버지의 외투와 모자를 쓰고 있다.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12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옷을 얇게 입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위원으로 있었던 '한민족통일선교회'가 조평통으로부터 받은 초청장.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15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3]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中)

1960년대 동부동장 맡아 공직생활 '첫 발'노점상 계도·장마철 굴포천 범람 애먹어10년뒤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으로 새출발지역 첫 CT 도입 등 '대표 의료기관' 성장병원비 비싸 진료 못받던 환자들 안타까워1982년 세광병원 창설멤버로 참여하기도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88) 할아버지는 30여 년간 인천의 동사무소 행정과 의료 현장 최일선에서 일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천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으로 볼 수 있는 인천기독병원(중구 율목동)에서 사무장(총무과장)으로 일하다가 인천세광병원(남구 주안동) 창설 과정에 참여한 할아버지는 1970~80년대 인천 지역의 의료환경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기억의 창'이기도 하다. 인천지역의 의료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기간 의료행정 경험은 소중한 사료가 된다.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동 사무소 동장으로 행정 일을 시작했다. 1961년 부평1동 동부동(현 부평4동)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동부동은 부평시장 등 상권이 발달해 1960년대 부평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다른 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동부동이 컸다"며 "직원 수도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부평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7년 발행한 '부평사'를 보면 1962년 12월 경기도 인천시 부평출장소 관할인 부평1동 동부동은 면적이 2.253㎢이었고, 3천121가구, 인구수가 1만6천857명이었다. 부평 지역 다른 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부평시장은 1962년 공설상설시장으로 설치됐고, 계속해 번창해 1971년 5월에는 사설시장인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부평자유시장의 대지 면적은 1천201㎡, 건평이 1천756㎡, 점포 수가 47개였다. 부평시장의 경우 미군부대와 연결돼 있었고, 1973년 미군이 대대적인 철수를 한 뒤에도 부평수출공단의 근로자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성황을 이뤘다. 휴일이나 명절 때면 '궤짝에 돈을 담기 바빴을 정도'로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당시 동 사무소 동장은 새마을운동이나 예비군, 민방위 등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는데, 동네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도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초중반 동부동장을 지냈다. 이때 시장 길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상 문제가 심각해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노점상으로 인해 자동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통행도 어려울 정도였는데,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 단속도 어려워 이들을 '계도'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부평시장 노점상 문제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 1971년 8월 27일자에는 부평시장 노점상인 500여 명이 철거하러 나온 인천시 북구청 직원 80여 명과 경찰관 50여 명에게 돌을 던져,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중후반에는 부평1동 서부동장으로 활동했는데, 이때는 장마철이면 굴포천이 범람해 직접 모래포대를 쌓는 일까지 해야 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동장 일을 하다가 다른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서 1970년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에 지원했다. 당시 사무장 채용 요건이 교회에 다닐 것, 공직 경험이 있을 것, 병원근무 경험이 있을 것 등 3가지였는데, 할아버지는 모든 요건을 충족했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다니던 부평 연합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했었다. "기독병원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해서 그날로 일을 시작했어."1952년 인천시 중구 율목동 237에 설립한 인천기독병원은 설립 초기 피란민 진료소 역할도 담당했다. 병원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기독병원'이라는 간판뿐만 아니라 '북한피난민연합회 진료소'라는 간판이 걸렸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京畿事典)'은 기독병원을 설명하면서, '약 40년 전(1919년께) 감리교 선교부 경영 인천부인병원으로 개설 후 왜정 말기에 폐쇄되었다가 8년 전에 인천기독병원으로 재출발하여 금일에 이르렀다'고 했다.기독병원은 이후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당시 인천의 대표 의료기관으로 급성장했다. 1956년부터는 수련의가 들어왔고, 1958년에는 정부로부터 전공의 과정 신설 허가를 받으면서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기독병원 설립 당시 인천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의료기관으로는 인천도립병원, 인천적십자병원, 동양방직 부속병원 정도가 있었고, 성모자애병원(현 인천성모병원)은 1955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길병원은 전신인 이길여산부인과의원이 1958년 개원했고,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법인설립허가는 1979년 이뤄졌다. 인하대병원의 경우 1996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기독병원은 인근에 있는 도립병원(인천시 중구 신흥동 2가)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독병원이 환자 선호도 면에서 앞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나온 '인천의료원 70년사'에 따르면 이 병원의 전신인 인천도립병원의 1959년 병상 가동률은 44.5%, 기독병원이 60%였고, 1961년에는 각각 34.2%, 57.4%였다.이후 인천기독병원은 1969년 180병상, 1975년 250병상, 1981년 409병상으로 지속 확장한다. 이 병원이 지난 2003년 발간한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기독병원은 경기도 일원 의료기관 가운데 가장 먼저 최신 의료기기를 들여놔 충청도, 전라도 등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 환자들도 많이 찾았다. 1953년에는 X-Ray 기계가 도입됐고, 1980년부터는 컴퓨터 단층촬영기(CT)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CT는 웬만한 병원은 설치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고가여서 보건복지부는 인천, 경기 지역의 여러 병원에 인천기독병원의 장비를 공동 이용해달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CT를 도입한 것은 기독병원이 최초였다. 당시 최신식 의료기술을 자랑했다"며 "병원에서 대한방직, 대우전자 등 인천지역 주요기업들의 건강진단을 다 맡는 등 인천을 대표하는 의료기관이었다"고 말했다. 인천기독병원 이종철 총무팀장은 "인천기독병원의 CT 도입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보다도 빨라서 세브란스 환자들이 CT를 찍으러 기독병원에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1979년부터 인천기독병원 부근에서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 온 박차영(67)씨는 "당시 인천기독병원 인근에는 은행이 2곳이나 있었고 극장에 예식장 등이 있었다"며 "지금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가겠지만, 당시 기독병원 주변이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전진성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1970년대에는 의료보험 적용이 제대로 안 돼 병원비가 비싸다 보니 기독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5년 12월 발행한 '보건복지 70년사'를 보면 의료보험제도는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으로 도입됐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77년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당연 적용 방식으로 시행됐다. 그 후 점차 대상이 확대되면서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된다. 할아버지는 기독병원 총무과장으로 있으면서 병원비가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사람을 도와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을 때는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안 죽을 사람도 죽었다고, 병원비를 못 내서 진료받다가 환자가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어. 미수 병원비도 엄청나게 쌓이고 그랬지."의료보험 제도가 확대 시행된 뒤에는 기독병원의 환자 수가 크게 늘기도 했다. '보건복지 70년사'에 따르면, 의료보험 제도가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기 시작한 1978년 기독병원의 외래 환자 수는 12만5천839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 가까이 증가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기독병원에 있다가 전의철 부원장과 함께 1982년 5월 인천세광병원(현 인천사랑병원) 창설 멤버로 참여해 세광병원에서 10년간 일했다.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전의철 부원장은 1965년 9월 귀국해 진료를 맡았다. 그는 감리교 십자군 장학생으로 미국 대학에서 유학을 마쳤는데, 현지 병원이 유리한 조건으로 머무를 것을 요청했는데도 인천기독병원에 복직했다고 돼 있다. 174개 병상으로 개원한 세광병원은 1990년 진로그룹이 인수했다. 이때 노조가 심하게 데모하는 등 사측과 갈등이 심해졌고, 이 때문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오게 됐다. 인천사랑병원 관계자는 "의료운동을 벌여오던 '신문청년의사'그룹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세광병원을 고용 승계 조건으로 인수해 1998년 11월 28일 인천사랑병원으로 문을 열었다"고 소개했다.할아버지의 부인 박미자 할머니(83·황해도 옹진 출신)는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인천의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할아버지는 8일에도 할머니 곁을 지켰다. 할머니는 수년째 중증근육무력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최근 급성패혈증으로 인해 병세가 위중해져 중환자실 신세까지 지게 됐다. 그동안 4차례 진행한 인터뷰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간 뒤로는 취재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달 30일 잡아놨던 인천기독병원, 인천사랑병원 등의 현장 취재에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 할아버지는 지난주 경인일보 연중기획 상편 기사가 나간 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지인 여러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할머니 간병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힘들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이북5도민회 인천지구 함경남도민회 회장으로 받은 대통령 포장증을 가리키고 있다.인천세광병원 개원식 모습. 왼쪽 4번째가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1983년 인천세광병원 직원수련회 모습. 왼쪽에 사회를 보는 사람이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안에서 근무하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기독병원 총무과장 재직 시절 병원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지금의 인천기독병원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왼쪽에서 5번째)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8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2]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上)

마지막 배 '매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거제로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같은 배 타고 피란몇십리 걸어 도착 "하룻밤 묵었다면 잡혔어""기중기 달린 어망에 담겨 승선" 증언 눈길장승포 초교·어망창고에 머물다 자원 입대대구 육군본부 행정병때 송해와 함께 근무부대행사 때마다 남다른 입담 자랑해 기억제대 후 부평서 결혼 60년 세월 떠나지 않아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전진성(88)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을 나왔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1만4천여명)을 구한 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를 보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중 부산, 일본 등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날에는 인천항에 들어와 탄약, 탱크 등을 해군 상륙함정(LST)에 실어줬다. 흥남철수 당시에는 부산에 제트기 연료를 운반한 뒤 작전에 투입됐다.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이 배를 탔고, 경남 거제에 온 지 2년 만인 1953년 1월 문 대통령을 낳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와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군사전문가들은 흥남철수작전을 현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Operation Dynamo)과 비교한다. 덩케르크 작전으로 33만8천명의 영국, 프랑스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는데, 흥남철수작전으로는 유엔군 10만 명뿐만 아니라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은 민간인 10만 명도 구출됐다. 두 작전은 모두 흥행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는 국내에서만 2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흥남철수작전은 역대 2위 누적 관객(1천420만명)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황덕호 명예회장은 '흥남철수작전 역사서 아! 흥남철수' 축사에서 "덩케르크에서는 피란민 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완전무장을 하고 상당한 기동성을 갖춘 정예대군이 오히려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철수하기에 바빴던 철수작전이다. 반면 흥남철수작전은 군 병력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한 10만여 민간인이 군과 거의 동수로 함께 철수한 인도주의적 작전이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전진성 할아버지는 고향인 단천에서부터 무릎 높이까지 오는 눈길을 뚫고 쉼 없이 걸어 흥남철수작전의 행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경도 피란민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흥남부두로 몰렸다. 할아버지는 "중간에 하룻밤을 묵기라도 했으면 중공군에 잡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새벽 동네에 주둔하던 국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친척 3명과 함께 보따리를 싸 들고 단천항구로 갔다. 할아버지는 단천항에 출발하는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함경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화물열차를 탈 수 있었고, 북위 40도선에 있는 '퇴조'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흥남항까지 밤새 20리 길을 걸었다.당시 흥남부두에는 이미 10만 명이 넘는 많은 피란민이 몰려있었다. 당초 미군은 흥남항을 통해 군 병력만 철수시킬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민간인까지 함께 상륙함정과 화물선 등에 실어 피란을 시키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흥남철수 작전이 '현봉학 박사'라는 사람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당시 미군을 설득해 민간인들을 구출한 흥남철수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 대탈출'에서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 등을 설득해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흥남항구에 있으면서 미군 병력 철수를 위해 직접 군수물자를 실었다가 민간인을 태우기 위해 다시 각종 물자를 내리는 일을 했다.당시 가공식품 깡통 등 각종 군수물자를 항구에 내려놓은 뒤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모두 불살랐다고 했다. 접안시설도 이용할 수 없도록 모두 부숴버렸다.김훈의 장편소설 '공터에서'에도 이 같은 흥남철수 과정이 묘사돼 있다. "미군은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작정이었다. 미군의 철수 계획은 중공군의 졸병도 알았고 피난민들도 알았다. 미군은 피난민들의 승선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흥남항으로 몰렸다. 북청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중략)… 미군이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다는 소문은 발표도 없이 퍼져 나갔다. 수송선들이 모래 위로 선수를 들이밀고 철문을 열었다. … 손을 잡아라. 허리띠를 붙들어 …(중략)… 마지막 폭격기들이 항모로 돌아왔다. 항구 안에 남아 있던 구축함이 16인치 포로 흥남부두를 부수고 접안 시설을 부수었다. 함포가 부두를 부술 때 민간인들도 부두에 모여 있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서 부두도 산맥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기 속으로 포탄은 계속 날아갔다."당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란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다.피란민들이 배의 외벽을 따라 내려온 줄을 타고 경쟁하듯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은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담겨 배에 끌어올려졌다고 했다. 피란민들이 어망에 실려 올려졌다는 얘기는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각종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증언이다."나는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탄 것 같아. 25~30명 정도가 어망에 타서 어떤 사람은 거꾸로, 어떤 사람은 가로로 처박혀서 어망에 실렸던 것 같아. 아니 그렇게 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다음 날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정박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하선 허가를 받지 못했고, 성탄절인 12월 25일 거제도의 작은 포구 장승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뒤 장승포항 주변의 국민학교에서 잠시 추위를 피했다. 이때 머문 학교의 이름은 '장승포초등학교'로 1921년 개교한 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교사(校史)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650명이다. 이 학교 정원욱 교무부장은 지난 10월 31일 전화통화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왔을 당시 장승포항 주변에 국민학교는 장승포초등학교가 유일했다"며 "피란민들이 우리 학교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낸 김찬수 씨가 쓴 '내가 겪은 6.25'를 보면 당시 거제도에는 수만 명이 몰리면서 대규모 피란민 촌이 만들어졌다. "밤에 보니 주변 언덕과 높은 곳에 불빛이 휘황찬란하여, 개발하기 얼마 전의 서울 돈암동 산꼭대기의 판자촌 야경같이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불을 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할아버지는 이후 어망창고에서 열흘 정도 있다가 연초면에 있는 학교에서 방위군 신청을 받아 자원입대를 했다. 전문학교(북청농업전문학교 잠업과)까지 나온 할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자 감찰부에서 조서를 받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방위군이 해산된 뒤에는 '창설 멤버'로 제주도 육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제주도 모술포에 훈련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직접 돌을 메다 날라서 훈련소 벽을 쌓고 사실상 우리가 만들었지. 당시 훈련소장이 백인엽 장군이었어. 변변한 총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 총 대신에 대나무 죽창을 들고 훈련을 받았으니까.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아."할아버지의 증언은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 나와 있는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대한 설명과 일치했다. 서귀포문화대전은 육군 제1훈련소에 대해 "당시 백인엽 준장을 소장으로 1951년 3월 21일 창설되어 1956년 1월 해체되기까지 5년간 50만여명의 신병을 배출해 냈다. 신병들은 대체로 1개월 정도 훈련받고 전장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할아버지는 훈련소를 거쳐 부산에 있는 보충대대에서 통신학교로 배치를 받았고, 훈련을 거쳐 대구 육군본부에 있는 통신감실로 발령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사행정과 소속으로 일종의 행정병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때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가 된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무선통신사였는데, 이때도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다. 부대 안에서 열린 웅변대회나 연극대회 무대에 송해가 올라 농담을 시작하면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송해가 했던 대표적 농담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자를 꺼내서 빨랫줄을 만든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 듣기에는 농담치고는 다소 '살벌'한데, 이때는 배꼽을 잡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오민석 교수가 쓴 '송해 평전'에도 송해가 통신학교 무선부를 거쳐 대구 육군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고 돼 있다. 송해는 군 생활 중 3군 종합 콩쿠르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군예대(軍藝隊)가 자신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올 때마다 송해가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임시 휴가증을 끊어 군예대의 위문 공연장에도 자주 불려 나갔다고 한다. 전진성 할아버지의 기억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오민석 교수는 송해가 제대 후 함께 군 생활을 한 장세균이라는 사람을 따라 '부천 싸전거리'에 와서 두부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전진성 할아버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세균이라는 사람이 현재 인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우체국 송신소에 있었고, 송해도 이곳에서 함께 일하다가 유랑극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든 간에 송해는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던 것만은 분명하다.할아버지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강원도 원주에 있던 1통신단으로 전입됐다가 1954년 5월 제대를 한 뒤 부평으로 왔다.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만나던 아내가 부평에 있는 연합병원(현재 세림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부평에서 1955년 7월 결혼을 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세림병원은 1940년 부평역 앞에서 부평의원으로 문을 열었고, 1963년 5월에 병원이 증축되면서 부평연합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현재 세림병원 부지(청천동 302)에 새로 건물을 지어 병원을 이전했다. 할아버지도 연합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부평에서 살고 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 부평구에 있는 자택에서 피란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은 폭파되고 있는 흥남시가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사진은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하고 있는 피란민들.지난 2005년 경남 거제도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를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1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1]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下)

용당포항 조성 이후 1930년대 고속성장누정 '부용당' 위치한 도청 인근에 살아황해도 행정중심이자 최대 '조기' 산지뱃길 30㎞ 연평도, 인천 편입전 해주권평양과 함께 '냉면 본산'으로 꼽히기도김구·안중근 고향… 장길산 주요 무대소설 속 인물·상권 남·북이 얽히고설켜실향민 호성신(81)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도청 소재지 해주시(海州市)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황해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뉘었고, 도청도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에, 황해남도는 해주시에 따로 뒀다.하지만 호성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황해도 실향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북도'와 '남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6년 당시의 해주는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해주 남단 바다인 용당포(龍塘浦)에 근대 항만을 조성하는 축항공사가 마무리된 1930년 10월 이후부터,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같은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용당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수탈기지'가 됐기 때문이다.항만 조성에 이어 용당포항을 중심으로 황해도지역 철도망이 해주에 집결했다. 일본은 용당포항 조성 이전까지 황해도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이나 평안도 진남포를 통해 수탈해갔다.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를 보면, 해주 인구는 1930년 2만3천820명에서 1935년 3만447명, 1940년 6만2천651명으로 급증했다. 1930년대 인구 증가율로만 따지면 162.6%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살던 해주시 선산동도 황해도청이 멀지 않은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수였다고 한다."여기저기 건축 공사가 많아서 아버지 목수 일도 호황이었어. 논밭은 시내 외곽으로 가야 볼 수 있었고, 우리 동네는 기와집 촌이었어. 도로가 닦이면서 동네에 오거리가 생기기도 했지. "당시 황해도청은 옛 해주읍성 자리인 부용동에 있었다. 할아버지 옛집이 있던 선산동의 북동쪽이다. 도청 앞 연못에는 1500년(연산군 6년)에 건립된 누정(樓亭)인 '부용당(芙蓉堂)'이 있었다. 앞채는 연못 가운데에 'ㄱ'자형으로 지었고 뒤채는 연못 바깥에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했다. 부용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가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1593년 8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달여간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선조가 친필(어필·御筆)로 '부용당'을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는 기록도 '정조실록'에 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할 땐 아주 운치가 좋았고 절경이었다"며 "보통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부용당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부용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았다. 북한은 그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해주에 살던 당시에는 용당포 쪽으로 대규모 시멘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우베(宇部)시멘트회사가 설립한 '조선시멘트회사'로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7년 6월부터 가동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5일자 신문을 보면, 조선시멘트회사 해주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57만t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현재까지도 해주는 북한의 최대 시멘트 생산기지이고, 제철·제강, 제지, 섬유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다. 해주항은 인천세관에서 관할했다.해주의 공업도시화로 항만 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1940년 8월 인천세관 해주지서가 신설됐다. 해주는 조선 때부터 황해도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州)'라고 설명한다. 부용당 같은 화려한 누정이 해주 관청 앞에 있었던 것도 지금의 도지사 격인 황해도 관찰사가 해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해주는 한때 국내 최대 조기 산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가 1945년 11월까지 황해도 해주의 섬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해주의 토산물로 가장 먼저 조기를 소개하며 '남쪽 연평평(연평도)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으로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나온다. 조선 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평도 조기잡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전국 최대 규모의 '파시(波市·해상시장)'로 번성했는데, 남획이 심해지면서 1960년대 말부터 조기의 씨가 말랐고 결국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황해도지편찬위원회가 1981년 발간한 '황해도지'에는 1940년 해주의 조기 어획고는 2만8천986t으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고 나온다. 연평도와 해주까지의 거리는 뱃길로 약 30㎞, 연평도와 인천 간 거리는 뱃길로 122㎞다. 연평도는 남북 분단과 함께 경기도를 거쳐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조기파시로 한때 돈이 넘쳐나던 연평도에서 "연평어업조합장 했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는 김삼소(金三笑)의 '돈실러가세'를 신춘 민요 당선 기사를 실었다. '가세나 가세나 돈실러 가세나 해주 연평 섬에 돈 실러 가세나 봄이면 조기 한 철 황금물결이 섬바위에 넘실넘실 손짓을 하네 에헤이요 닻 감아라 돛을 달아라.'호성신 할아버지는 해주시장에 조기가 가장 많았고, 조기 못지않게 까나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자 황해도민회 임원이기도 한 송용순(97) 할머니를 찾았다.할머니는 20대 중반까지 해주 시내에 살다가 1947년 서울로 피란을 왔다고 했다. 송용순 할머니는 "조기철이면 연평에서 올라온 굴비를 사가려고 용당포에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용당포 근처만 가도 굴비냄새가 났다"며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소작인에게 쌀과 함께 굴비를 봉급으로 줬을 정도로 흔했다"고 회상했다.조기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났다. 해주는 평양과 함께 냉면의 본산으로 꼽힌다. 해주냉면은 메밀에 전분을 섞어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굵고,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쓰는 게 특징이다. 백령도의 사곶냉면이 바로 '해주식'이라는 게 음식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양과 해주가 냉면으로 유명한 까닭은, 두 지역 모두 각 도의 중심지로서 '기방(妓房)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고, 냉면은 기방에서 양반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냉면열전'(2014)이란 책은 분석한다. 양반들이 주로 먹던 냉면은 근대 이후 서민층으로도 확산해 1934년 기준 해주에는 냉면 전문점 67곳이 성업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 ~1618)은 우리나라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해주의 별미로 해조류인 '참가사리', '황각', '청각'을 꼽았다. 최영년(崔永年·1859~1935)이 1925년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숭어, 잉어, 조기, 도미 등을 구운 뒤 갖가지 채소, 버섯, 당면을 넣어 끓인 전골인 '승가기(勝佳妓)'를 해주의 명물이라고 했다. 해주가 마냥 풍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 박만정(朴萬鼎·1648~1717)이 1696년(숙종 12년) 3월부터 두달여간 황해도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했을 당시를 일기로 쓴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2015, 서해문집)'를 보면, 신분을 숨긴 박만정 일행이 해주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와집이 연이어 있어 부촌 같아 보였으나, 흉년이 심해 인심도 야박했다. 박만정은 해주를 포함한 황해도 곳곳에서 기아에 허덕이다 못해 얼굴이 부어오른 백성들의 몰골을 목격한다.해주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고향이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해주읍 서쪽에 80리 떨어진 백운방(白雲坊) 텃골'이라고 고향을 설명했다. 10대 후반의 김구는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동학군 선봉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김구는 황해도 동학교도 대표단으로 뽑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제2대 동학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을 만나기도 했는데, 일행은 이때 해주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해주먹(海州墨)'을 선물했다고 한다. 해주산 송연(松煙·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지난 9월 2일부터 두 달 가까이 호성신 할아버지 취재가 이뤄지는 동안 할아버지의 고향 자랑은 명승지, 토산물, 음식, 산업, 인물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도 해주 출신인데 깜빡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기자를 붙잡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조선의 3대 도둑 중 하나인 장길산(張吉山)의 일대기를 그린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한양과 그 주변, 황해도 등지가 주요 무대다. 강화와 교동 또한 소설에서 많이 언급되고, 백령, 대청, 연평 등 서해5도도 아우른다. 소설 초반부터 장길산을 중심으로 강화에서 장사에 눈을 뜬 송상(松商) 박대근, 해주의 신복동 패거리, 용당포의 선상(船商) 임유학, 연평 출신의 뱃사공 우대용을 비롯해 인천과 황해도가 연관된 주요 인물들이 얽히고설킨다. 강화, 개성, 해주 용당포 같은 한강 하구 연안의 해상물류거점을 둘러싼 상권 다툼이 소설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설 '장길산' 속 배경이 남북으로 갈린 지금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다. 백범 김구와 소설 '장길산'의 흔적을 따라 인천과 해주를 오가며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호성신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통일되긴 다 틀린 것 같다"면서도 "멀지 않은 고향 땅인데 꼭 한번은 다시 밟아보고 싶다"고 소망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한국전쟁 이전으로 추정되는 해주시 전경. 출처/'황해도지'(1981)축항공사를 끝낸 해주 용당포항. 출처/'황해도지'(1981)한국전쟁 때 소실된 해주 부용당의 옛 모습. 북한은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은 부용당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부용당 너머로 황해도청 청사 건물도 살짝 보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7-10-25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0]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中)

크고 작은 기지 광범위하게 분포… 옷·음식 등 경제 영향력주둔 초기부터 범죄·기지촌 조성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미군 장교 운전수·배차담당·중장비 하역감독 등 20년 일해월미도·중부서 자리 해상수송부 등 옛 위치 하나 하나 짚어부대 규모·기능 등 체계적 정리 없어… 할아버지 증언 의미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81) 할아버지는 21살 되던 해인 1957년부터 20년 가까이 인천에 있는 미군부대 여러 곳에서 근로자로 일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장교 운전수로 시작해 미 해군 해상수송부 장교 운전수, 부평미군부대 차량 배차담당,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을 차례로 맡았다."참 팔자가 좋았던 시절이야. 미군부대에서 장교를 상대하니까 혜택도 많고,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고. 덕분에 보라색 양복 쫙 빼입고 신포동에서 오토바이 타고 다녔지."인천은 항만을 낀 데다 수도권이라서 해방 직후부터 곳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선 '미군기지의 도시'였다. 군사장비와 시설을 운용하는 데 필수인 기름부터 미군 병사들이 먹는 빵까지 대부분의 미군 군수물자는 인천에서부터 전국의 미군기지로 퍼져나갔다. 미군 전용철도도 거미줄처럼 도시에 깔렸었다. 이렇다 보니 호성신 할아버지 같은 미군부대 근로자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미군부대 경제'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다. "옷, 음식, 약품까지 미군 PX물자가 어마어마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미군부대 출입증이 비싸게 거래됐어. 미군 기름창고에서 기름 빼돌리는 사람도 많고, 기지촌에 양색시도 많았고…. 솔직히 미군 때문에 먹고 산 사람이 인천에 많아."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초기부터 발생한 미군 범죄나 기지촌 조성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항 부근과 월미도부터 남구 숭의동, 용현동, 학익동, 문학산 일대까지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부평지역은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을 비롯한 미군부대가 대거 몰려있어 '애스컴 시티'라 불리며 도시 자체가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캠프마켓(Camp Market)'과 강화도에 극히 소규모 부대만 남았을 뿐이고, 그 미군부대 터는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바뀌었다.미군의 한반도 상륙 출발점은 1871년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인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이어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인천항에 몰린 환영 인파에 일본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해 2명이 숨졌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승전국인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에게 발포한 불법 총격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당한 인천시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이들은 이틀 후 두 사람의 사망자를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무력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주한미군 규모는 1948년 5월 기준으로 약 3만명에 달했다. 인천항 주변과 일본군 군수기지인 부평 조병창도 미군이 접수했다. 다음은 소설가 이원규가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인천을 다룬 장편소설 '황해'(1992)에서 묘사한 해방 후 인천항 주변 풍경이다. '인천항은 온통 미군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도 중부의 보급항 구실을 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구리배라고 부르는 수송선들이 큰 입을 벌려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고, 외항에는 구축함과 순시선들이 떠 있었다. (중략)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매달리며 어떻게들 배웠는지, 헤이 지아이 넘버원 기브미 추잉껌, 기브미 쪼코레트, 하며 따라붙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5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연합군의 상륙지점 중 하나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미군이 '징발'해 미군부대를 구축, 미군이 떠나간 1971년까지 2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월미도에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1957년부터 2년 정도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지난 추석 명절 직전인 9월 29일 호성신 할아버지와 월미공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옛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월미공원 정문이 바로 미군부대 정문이었다고 한다. 현 미추홀 전통문화음식연구원 건물 자리는 장교 숙소였고, 주요 시설은 전통공원이 조성된 자리에 몰려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공원 내 동물원이 할아버지가 장교 차량 운전수로 근무하며 주로 머물던 수송대(모터풀·Motor pool) 터라고 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월미도 수송대의 부대명은 미 제202수송대대다.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쓰리쿼터(3/4t) 트럭 같은 군용차가 아니라 포드(Ford) 승용차였다.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 피엑스(post exchange·군부대 매점), 짐나시움(gymnasium·체육관)도 갖췄고 없는 게 없었어. 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은 100명쯤 됐던 것 같아."월미도 미군부대에는 미군 병사의 각종 법무를 처리해주는 법무사무소(Legal office)도 있었다고 한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이 리걸 오피스에서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현호라는 한국사람이 리걸 오피스 사무원으로 일해 영어로 전화받으면서 타이프도 쳐서 유명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회상했다. 소설가 오정희는 1979년 발표한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월미도 미군부대 인근 인천차이나타운을 그렸다. 소설 속 미군 병사는 호기심으로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동네 꼬마들을 향해 칼을 던지며 놀려댔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갈보'라고 칭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그 가옥에 거처하면서 미군 병사를 상대했다. 소설 '중국인 거리'처럼 미군 병사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실제로 다수 있었다.호성신 할아버지는 현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둔 미 해군 해상수송부(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 동안 미 해군 부대장의 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는 부대장을 포함해 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항에 미 군함이나 군용수송선이 들어오면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할아버지 설명이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 바로 옆에는 미 헌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인근에 있었다. 근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맞은편 선구점 거리에는 'US호'라는 간판을 단 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스낵바도 영업했다고도 했다. 중구 수인사거리에 있는 삼익아파트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미군 PX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서 '미제 군수품'이 민간으로 많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에 120곳이 넘는 미군 PX에서 취급한 물품의 60%는 시중으로 흘러나갔다고 추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나도 해군 중령 자동차 시트 밑에 물건을 숨겨다가 밖으로 뺐다"며 "화수동에 집을 지을 때는 흑인 병사가 각종 건축자재를 갖다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 유류저장소(POL)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문학산 정상은 1959년부터 미군이 차지하다 1979년 한국군 공군이 인수했고, 2015년에야 개방됐다. 분단과 인천 미군부대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쓴 인천 출신 이원규(70) 작가는 "부평미군부대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맥주 깡통을 펴서 집 지붕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양공주도 100명 넘게 봤다. 미군부대에서 경비로 일한 외가 친척이 준 미군 워커는 고등학교 내내 신고 다녔다"며 "미군부대는 인천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고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부평 애스컴으로 자리를 옮긴 호성신 할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다가 차량 배차담당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애스컴 앞은 전부 색시촌과 맥주홀로 쫙 깔려있었다"며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따로 놀았다"고 했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도 신촌이라 불린 부평미군부대 앞에 대해 '서부영화에 나오는 미국 개척도시보다 더욱 미국적이었고, 밤의 여인들의 숫자는 한때 2천명을 훨씬 상회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애스컴에서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1949년 미군 철수~한국전쟁 발발 사이는 제외)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1958년 애스컴 편입)가 '징발'해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나뉘어 운영됐다. 미군용부두 내에는 미군 공병부대도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미군이 미군용부두를 '징발 해제'해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넘어온 때는 1971년 6월이다. 인천에 미군부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미군부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흔치 않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단편적이나마 되살려낸 인천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근무했던 월미도 미군부대 내 장교 숙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천항과 월미도 일대에 있었던 미군부대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작성 연도 미상). 월미도에 검은 사각형으로 표기된 미군부대 건물 배치 현황은 호성신 할아버지 기억과 상당히 일치한다. 할아버지가 장교 운전수로 근무했던 미 해군 해상수송대(MSTS)를 비롯해 미 헌병대, 공병부대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시절 받은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 호성신 할아버지.

2017-10-1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9]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上)

목수였던 부친, 넉넉한 형편 불구부녀자 희롱 등 심해져 월남 결심개성구호소 거쳐 인천으로 '이주'전쟁 터져 목포에 잠시 머물기도고교땐 짝사랑 따라 서울로 통학졸업 후 미군부대 운전기사 취직영어공부 덕에 정식 군무원 '승진'영진공사로 옮겨 바레인서도 일해대한항공 '인연' 고속버스 기사로이후 30년째 고령에도 택시 몰아황해남도 해주에 살던 호성신(81) 할아버지는 1947년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 때 잠시 전남 목포로 피란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고향을 떠나온 70년 세월을 한동네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운전사이다.인천에 80대 이상 고령의 택시운전사는 호성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14명뿐이다. 할아버지의 운전 내력을 보자니 첫 근무지였던 인천 미군부대 역사까지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현장인 바레인에서도 일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주시 선산동 28은 황해도 도청 인근의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집 짓는 목수였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았다.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주둔하고 정세가 급변하자, 단란했던 할아버지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병사가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초등학생이던 10살 때 일이다."1946년 여름이 지나서부터 소련군이 해주에 엄청나게 들어왔나 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도 빼앗고 부녀자들 희롱하고 횡포가 심했어. 소련군 병사가 우리 집에 막 들어와 어머니를 해코지하려고 해서 부엌으로 숨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결심했지. 아버지가 (해방 전에)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근무하며 어울린 것도 월남한 이유 중 하나야."호성신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봄에 새벽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울 속에 돈을 숨겼고, 어머니도 배에 전대를 차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았다. 그게 할아버지 식구가 가지고 내려온 전 재산이다. 군인이던 친척이 식구들을 체포해 가는 것처럼 꾸며 해주 남쪽 바닷가인 용당포로 데려가 줬다고 한다. 친척이 미리 준비해준 조그만 목선을 얻어탔다. 바지락을 싣는 배였다. 배 밑에 어머니와 남매가 숨었고,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저어 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질퍽질퍽한 갯벌에 배가 닿은 뒤 남한 경찰 2명에게 발견됐다. 남한 경찰은 할아버지 식구를 개성에 있는 월남인 수용소인 개성구호소로 보냈다. 1946년 중반 북쪽이 토지개혁 같은 체제정비를 본격화하면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온 이북 출신 주민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개성,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설치해 북쪽 주민들을 며칠간 머물게 하고 전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1947년 4월 말 기준으로 월남 인구가 45만명을 돌파했다고 동아일보는 1947년 5월 31일자에서 보도했다. 당시 인천에도 5만 명 넘는 북한 출신 주민이 정착했다. 같은 시기 수도 서울로 유입된 북한 주민은 약 11만2천명이었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태동한 대중일보는 인천에 실향민이 몰리자 개성으로 특파원을 보내 구호소를 취재하기도 했다.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는 실향민들이 대개 옹진에서 배를 타고 청단으로 건너와 기차를 타고 토성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고 실향민 이동 경로를 파악해 보도했다. 개성구호소는 미군 천막을 치고 내부에는 접이식 침대가 2열로 놓여 있었다. 천막 수는 총 82개인데, 한 천막에 35~40명을 수용했다. 구제품은 거의 '운라(UNRRA·연합국구제부흥기관) 구제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실향민들은 대부분 침구와 옷가지를 준비해 내려왔고, 현금도 1천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대중일보는 전했다.호성신 할아버지네는 개성구호소에 4일 정도 머물다가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이주해 판잣집에 살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다시 목수 일을 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송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6·25가 일어나자마자 월미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지금 있는 선창산업 공장 쪽에서 화물선 타고 많이들 피란길에 올랐어. 이북 출신이 많았을 거야. 원래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목포에서 멈췄지. 목포역 앞에 있던 커다란 창고가 피란민 수용소였는데, 5개월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수동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어. 아버지가 목수 일감 찾으면서 빵 장사도 하고, 담배도 말아서 팔고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어."전쟁통에 인천으로 돌아온 호성신 할아버지는 1947년 허섭(許燮·1925~2010)이 설립한 성광중학교를 다녔다. 남구 도화동 선인중학교의 전신인데, 할아버지가 학생일 때는 동구 만석동 현 삼화제분 인천공장 자리에 있었다. 허섭은 성광중학교로 출발해 1953년 재단법인 성광학원을 설립, 인천에서 성광고등학교, 성광고아원도 운영했다. 그러다 갑자기 1950년대 중후반 군 장성인 백인엽(白仁燁·1923~2013)에게 성광학원을 넘겼다. 이때 출범한 게 한때 국내 최대 사학으로 이름을 떨친 선인학원이다. 이 선인학원은 나중에 사학비리가 문제가 돼 진통 끝에 사회환원 조치됐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성광학원 설립자 허섭을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성광학원을 백인엽이 인수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던 듯하다.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009년 쓴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1956년 여름 허섭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백기완 소장은 '그즈음 그분은 준심(정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이 못살게 굴어 손수 일군 인천 성광고아원과 성광상업선배울(고등학교)을 빼앗기고선 서울 마포 구석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터라'고 언급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경제적 보탬을 준 허섭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짝사랑했던 동네 여학생이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간다기에 함께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학생과는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취직할 때 써먹을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57년 초반 인천시청(현 중구청) 쪽 시내에서 월미도 미군부대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팻말을 봤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호성신 할아버지도 냉큼 돗자리에 앉았는데,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월미도 미군부대 소속 장교 차량 운전기사로 뽑혔다. 당시 미군부대 한국인 근로자는 부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고용했다. 부산 미군기지에서 1954년부터 20년 동안 일한 박원찬 씨가 1978년 쓴 수기 '미군과의 20년'을 보면, 부산에서도 매일 미군부대 정문 앞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어 오전 10시마다 나오는 인사담당 직원을 기다렸다고 한다. 미군부대 장교와 한국인 인사담당 직원이 정문 밖으로 나오면 구직자들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고 치고 하면서 소란도 벌어졌다.호성신 할아버지는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장교 운전기사로 2년 정도 일한 뒤 인천항에 파견된 미 해군 군사고문실로 일터를 옮겼다.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두고 미 해군 대령 1명을 포함해 부대원 8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 해군 군사고문실에서 10년 동안 미 해군 대령의 차량을 몰았다. 이후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에서 차량 배차를 담당하다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정식 군무원(Government Service)인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모터풀(Motor pool·수송대) 드라이버에서 시작해 군용차 디스패처(Dispatcher·운행관리원),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하기까지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어. 문법책 달달 외운 끝에 승진시험에 딱 붙었지. 말뿐 아니라 글까지 영어로 쓸 줄 아는 한국인 미군부대 근로자가 흔치 않을걸."인천항에서 주한미군 군수물자 하역작업은 영진공사와 국제실업이 하청을 맡았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인천항 중장비 하역작업 때 미군 소속은 나 하나뿐이라 타임 스케줄도 내가 다 짰다"며 "하청업체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신포동 기생집을 데려가려고 애도 많이 썼지만,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애스컴이 대폭 축소된 이후인 1970년대 말 영진공사에 입사해 중동 바레인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에 '중동붐'이 한창일 때인데, 바레인 항만에서도 중장비 배차과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19일자는 인천을 기반으로 둔 영진공사가 물류산업 분야 최초로 바레인과 항만·공항 하역계약을 독점 체결해 하역요원 800명을 현지로 파송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1976년 중동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바레인 간 정기노선을 취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최전방에 있던 호성신 할아버지는 바레인 현지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직해 항공기 기내식 총괄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1년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대한항공 임원 소개로 한진고속 소속 고속버스 기사가 됐다. 1987년까지 부산, 대구, 포항, 마산 등지를 사고 없이 달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내무부장관 또는 교통부장관 표창이 있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어 할아버지도 혜택을 봤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올 5월 국가로부터 25년 무사고 표창을 받은 할아버지는 "착오가 있어 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론 30년6개월 경력의 무사고 택시운전사"라고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수송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로 외국인 감독을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영어 실력에 외국인 감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8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택시운전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해남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피란 후 70년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대중일보 개성구호소 특파원 취재 보도-북한 실향민이 몰린 개성구호소를 특파원이 현장취재한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이었다.1969년 촬영된 인천내항 미군 전용부두 잔교. 호성신 할아버지는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에서 미국 중장비 하역감독을 맡아 인천내항에서 일했다. 출처/인천항사(2008·인천항만공사)

2017-10-11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8]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下)

성진항 인근 단층집서 농사일 / 정어리 많이 잡혔는데 기름부터 담았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친구들과 먹던 '섭죽' 못잊어 / 마천령·망양정 함께 다녔던 그들은 인천서 만났지만 먼저 떠나추석 앞두고 수봉공원 망배단 찾을 예정 "통일이 아니어도 고향 방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김상국(87)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1·4후퇴 시절인 1950년 12월 피란을 떠났으니, 20년 정도 고향에서 살았다. 부친은 농사일을 했다."여러 농사를 지었지. 그때 당시에는 농토가 어느 정도 있었어. 부유한 것은 아니고 중간쯤 됐던 거 같아. 자작 농사지, 소작 준 것은 없단 말이지. 소작 준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해서 해방 이후에 고생 좀 했어."김상국 할아버지 집은 성진항 인근에 있었다. 부친이 나무로 만든 단층집이었다. 방 3개, 부엌 1개, 마루 1개. 그리고 마당에는 조그마한 텃밭과 창고가 있었다. 집에서 성진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성진항을 보면 무역항과 어항이 있는데, 나는 어항 쪽에 살았어.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그 동네에는 배 타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해산물로 명태, 정어리, 임연수어, 고등어, 섭(홍합과 조개) 등을 꼽았다. 할아버지는 "바다와 가까워서 명태, 고등어 등 생선이 밥상에 올라왔다"며 "우리 어렸을 때는 정어리가 무지하게 많이 잡혔다. 정어리로 기름도 짜고, 그냥 조려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정어리는 다양한 곳에 쓰였다. 일본 저널리스트 다케쿠니 도모야스가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쓴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를 보면, 정어리는 주로 유비(油肥)로 가공됐다. 정어리기름에서는 화약과 의약품의 원료인 글리세린이 나왔다. 지방산은 비누·초·도료·마가린의 원료가 됐으며, 찌꺼기는 비료와 사료로 쓰였다.전쟁통에 정어리만큼 수난(?)을 겪은 물고기도 없을 듯하다. 몸에서 짜낸 기름은 물론이고, 그 기름을 담고 있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됐다.정어리기름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는 등 군수 자재였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정어리 어획을 '중점 조업 목표'로 정하고 정어리잡이 어선에 중유를 집중적으로 공급했다. 또 날정어리 식용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등 화약 원료를 얻기 위해 정어리기름 생산을 중요시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정어리기름을 담아 놓는 탱크가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일본놈들이 그 탱크까지 뜯어갔다"며 "철이 부족하니까 밥그릇 등 닥치는 대로 다 빼앗아 갔다"고 했다.성진에는 큰 규모의 제강소가 있었다. 제강소는 인천의 한국지엠 공장처럼 성진 지역경제의 큰 축이었다."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고주파공장이 성진에 있었어. 왜정 때부터 있었지. 일본놈이 운영했어. 여기서 만든 철을 성진항과 기차를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지. 지금도 가동이 되고 있을 거야."제강소 명칭은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이며, 지금은 '성진제강연합기업소'라고 한다.1945년 성진중학교 1학년이었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41년 만에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눈 책이 있다. '그때 우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나일성·사가에 다다시 공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고주파공장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사가에 다다시는 "고주파공장 때문에 일본 사택들이 많이 세워져 일본인 소학교와 큰 백화점이 성진시내에 생겼다"고 했고, 나일성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기차역(신성진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임원·정직원·공장노동자를 위한 사택만 1천800호에 달했으며, 이들을 위한 구락부·병원·학교·공중목욕탕까지 설치됐다. '신 북한 지리지'(배기찬 지음, 1994년)를 보면 성진제강연합기업소는 북한 전체 제강·제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도 성진중학교 졸업생이다. 이 책 저자들이 32년생과 33년생이니, 할아버지가 이들보다 2~3살 많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매형은 고주파공장에서 기중기 기사로 일했었다. 할아버지는 "해방된 후에 소련에서 고주파공장 기계를 많이 가져갔다"며 "해방 후에 일본 기술자들이 다 도망가니까 공장 돌리는 법을 몰라 한참 중단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소련군을 '로스케' '마우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여자를 괴롭히고 물건을 강탈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섭죽'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성진 바다 밑에서 캔 섭 조개는 커. 친구들이랑 집에서 가져온 쌀을 함께 넣어 죽을 쑤어 먹고 그랬지. 한번은 조개를 잡았는데 조그마한 진주가 들어 있어서 집에 가져간 기억이 있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부둣가에서 장기도 뒀다"며 "낮잠을 자고 있는 어르신들 옆에서 일부러 '장이요!' '멍이야!'라고 소리칠 정도로 장난도 심했다"고 했다.함경북도지편집위원회가 2001년 발간한 '함경북도지' 성진시 편에는 섭죽이 나온다. 이 책은 "이것(섭)을 따다가 임연수어 같은 생선을 잡아 된장, 고춧가루, 소주, 마늘, 과일 약간에다 쌀을 씻어 죽을 끓이면 그야말로 별미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일품"이라고 섭죽을 소개했다.김상국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곳은 마천령과 망양정이다. "마천령이 아흔아홉구비야. 높이도 꽤 있지. 가을에는 마천령 단풍이 아주 유명해. 소풍도 거기로 갔어. 망양정이라고 있는데, 거기 올라가면 바다를 쫙 내려다볼 수 있었지."망양정은 500m 높이의 절벽에 있는 정자다. 등대와 측후소가 있었고, 러일전쟁 때는 포대로 이용됐다. 1929년 시멘트로 다시 세워졌다.함경도 출신 여류 시조시인 오신혜(1913~1978)는 '망양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망양정(정자)에서 본 풍경을 노래한 시다. '(상략) 근방의 인가들이 눈 아래 깔려있고 / 몇 십길 절벽 밑에 만경창파 아득하니 / 한덩이 구름을 타고 바다 위에 뜬 듯하이. // 기빨을 날리면서 돛단배들 흩어지고 / 파도에 풍류맞어 갈매기떼 춤을 출제 / 우렁찬 평화의 곡에 귀가 절로 기운다. (하략)'성진에서 태어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1908~?)도 '망양정-어린 꿈이 항해하던 저 수평선'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정자가 무너져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고, 정어리기름으로 바다가 오염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글이다. 김기림은 이 글에서 "인천이라고 하면 월미도, 목포라고 하면 유달산, 원산이라고 하면 명사십리. 그렇게 각각 배 맞은 풍경이 있으나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항구 성진에 망양정조차 없었으면 실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근년에는 정어리 공장이 들어앉아 고기 기름에 바닷가는 아주 더러워져서 보잘것없는 우중에 저수장이 되면서부터 해안 일대를 완전히 콘크리트로 포장을 했다. 인제는 아이들도 갈매기도 더 모여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로맨티시즘은 추방을 당했다"고 했다. 김기림은 인천항과 인천역의 모습을 담은 연작시 형태의 '길에서-제물포 풍경'을 남기고 인천 문인들과 교우하는 등 인천과도 가까웠다.인천 월미도 역시 일제강점기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도 변했다. 인천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문학평론가인 김동석(1913~)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월미도 풍경처럼, 이곳에서 바라본 석양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수직의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둘씩 해안가를 차지하고, 기후변화와 산업화로 바다 환경이 나빠진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김상국 할아버지에게는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 '임영록'과 '김현덕'이 있다. 우연일까. 김상국 할아버지를 비롯한 '삼총사' 모두 인천에 정착했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함께 피란 내려온 임영록 할아버지는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김현덕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살다가 삼촌이 전무로 있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모두 인천에 모였건만, 김상국 할아버지는 친구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인천에 살면서 종종 만났지. 가끔 대포도 한잔하고 그랬어. 영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산소까지 함께 다녀왔었는데, 꿈에 그리던 고향도 못 가보고 병에 걸려서 떠났지." 김상국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친구(김영록) 아버지의 배(어선 '성진호')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나왔었다.10월 4일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명절 때 고향 생각이 가장 많이 나. 이때쯤 되면 누가 집에 오고, 산소에 제사를 지내러 언제 가겠다는 것부터 다 생각이 나지." 할아버지는 "위로 형이랑 누나가 1명씩 있고,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내가) 세 살 아래 여동생(김월성)을 가장 예뻐했다.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일가친척이 고향 성진에 모여 추석 명절을 보내고 망양정에 올라 성진 앞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는 올해도 글렀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추석을 앞두고 인천 남구 수봉공원 망배단에서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릴 예정이다.할아버지는 "형과 누이, 동생들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며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고향 방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사진 가운데), 임영록(아래), 김현덕(위) 할아버지가 고향 성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현덕 할아버지가 피란 때 가지고 온 사진을 김상국 할아버지가 복사해 간직하고 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옷차림이 고등학교 교복이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성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김상국 할아버지 제공김상국 할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는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다. 성진항은 1899년 군산, 마산과 함께 개항한 곳으로 원산에 버금가는 항구였다. /출처 '가야할 산하'(민족통일중앙협의회, 1987)

2017-09-27 조재현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7]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中)

오산비행장 시절 후임병 처조카와 결혼현재 요양병원인 신신예식장서 식 올려당시 포토존 활용 야외정원은 아직 남아전역후 남구청 자리 교대 앞 문방구 열어17년간 숭의2동 10통장도 함께 맡아 일해쓸쓸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들 장례도 치러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온 김상국(87) 할아버지. 전쟁통에 고향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를 떠난 그는 군 제대 후 인천에 정착했다. 처가가 인천에 있어서였다. 1952년 9월 공군에 입대한 김상국 할아버지는 대구, 서울, 진해, 강원도, 오산 등지를 돌며 1972년까지 20년을 군에 있었다. 결혼은 1959년에 했다."오산비행장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지금의 처고모부가 우리 부대 신병으로 들어왔어. 당시 내가 이등상사였으니까 고참이었지. 한양대 기계과를 나온 분인데, 2년 정도 같이 있으면서 나를 잘 봤는지 '결혼해야 하지요?'라고 묻더라고."그 후임병이 인천에 사는 자신의 처조카를 소개해 결혼했다. 장인어른은 인천세무소 직세과장이었다. 결혼식은 인천 중구에 있는 신신예식장에서 올렸다. "토요일에 결혼했어. 그때 토요일에는 세무소가 오전만 근무할 때가 아니요. 그런데 직세과장 딸이 결혼한다고 해서 세무소 전체가 근무를 하지 않았어. 세무소장이 주례를 봤지."당시 신신예식장 인기는 대단했다. 신신예식장 사진부에서 약 33년(1959~1992) 동안 일한 정창근(84) 할아버지는 "사장 이름이 장광순인데, 돈이 많았다. 일본사람 사택을 사서 예식장으로 꾸민 것"이라며 "1년에 1천500쌍 정도는 식을 올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1966년 신신예식장에 근무할 때 결혼을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 옆에 생긴 크라운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며 "70년대 중반인가? 건물을 새로 지은 뒤에도 최고로 잘나갔다"고 했다. 예식장 직원의 결혼식조차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는 얘기다. 신신예식장 측은 밀린 예식을 빨리빨리 진행하기 위한 묘수를 꺼냈다. 건물 밖에 포토존을 설치한 거다. 정창근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가족·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신신예식장의 특징인데, 사실은 다음 팀이 몰려오니까 빨리 예식 자리를 빼주기 위해서 정원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이라고 했다. 청춘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던 신신예식장 건물은 지금 노인요양병원이 됐지만, 결혼 기념사진을 찍던 작은 야외 정원은 아직도 남아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그렇게 인천과 인연이 닿았다. 아내도 인천 토박이는 아니다.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한국전쟁 때 가족이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인천은 함경북도 총각과 황해도 처녀를 맺어주었다. 둘 다 실향민 신세였지만, 아내는 가족이 함께 피란 나온 터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덜했다고 한다."마누라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지 않았어. 가족이 다 나왔으니까.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집 그거 못 찾겠어? 기억 속에 다 있는데."김상국 할아버지는 1972년 제대 후 처갓집이 있는 인천으로 와서 지금 남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교육대학(현 경인교대) 앞에 문방구를 차렸다. 그 많은 장사 가운데 문방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만히 보니까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가 가장 안전할 거 같은 거야. 1972년부터 한 12년 동안, 그러니까 1984년까지 했네. 크게 성하라고 해서 '대흥문방구'라고 이름을 정했지."인천교육대학의 전신은 1946년 5월 설립된 개성사범학교(경기도립 3년제)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인천교대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인천에 정착했다는 공통점도 있다.'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1946~2016)'에 따르면 1946년 5월 23일 설립된 개성사범학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졌다. 1951년 9월 부산시 괴정동에서 춘천사범학교와 함께 연합사범학교로 개교했다. 경기·인천지역이 어느 정도 수복되자 1952년 4월 잠시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신입생을 모집한 뒤, 인천숭의국민학교에서 개교했다. 그해 6월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53년 4월 인천시로부터 숭의동 땅을 기증받아 교지를 확보했다. 70년사는 "당시 전황으로 개성이 수복되기 어려운 상태였고, 휴전 성립의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었다. 학교의 운영 면에서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개성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개성보다는 인천에 사범학교를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인천 남구청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에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여우실 일대를 학교 부지로 내놓았다. 김경하(1911~1967, 초대 인천시 교육위원)가 개성사범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희사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남구청 종합민원실 자리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가 있던 곳이다. 김경하는 6선 국회의원이자 제11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은하(1923~2003)의 형이다. 김은하 전 의원 아들 근영(57, 인천경실련 공동대표) 씨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 학교(현 숭의초등학교) 건립에 기여하신 적이 있다"며 "교대 부지는 큰아버지(김경하) 등 아버지 형제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인천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인천교육대학 발족 ▲1982년 4년제 대학 승격 ▲1990년 계산동 캠퍼스로 이전 ▲1993년 인천교육대학교로 교명 변경 ▲2003년 경인교육대학교로 개칭 ▲2005년 경기캠퍼스 개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교 이름을 경인교대로 바꾸고 경기캠퍼스를 설립한 이유가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시행된 이후, '경기교대 설립'은 경기도지사 출마자들의 대표적인 공약이 됐다. 경기도와 도교육청, 인천시와 시교육청, 인천교대가 해결 방안을 찾은 게 교명 변경과 경기캠퍼스 설립이었다.문방구 고객은 교대생이 아닌 1957년 4월 개교한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마누라하고 같이 문방구를 봤지. 우리 가게 가까이에 '광문당'이라는 문방구가 먼저 있었어. 문방구는 방학, 주말 때문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어. 학생 수도 적었거든."대흥문방구는 지금으로 보면 남구청 건물과 인천중앙교회 사이 골목에 있었다. 지금은 1층에 사진관을 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 경쟁 상대였던 광문당은 남구청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당시에는 부속국민학교를 '부국'이라고 줄여서 불렀는데, '부'자가 부속의 부(附)가 아닌, 부자의 부(富)라고 말할 정도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부국 학생들 가정은 생활 수준이 우리와 달랐어. 당시에도 자가용을 타고 오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교복을 입었는데, 얼굴이 희고 피부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문방구에선 이것저것 다 팔았다. 도화지 등 학용품부터 체육복과 실내화,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손버릇이 나쁜 아이들이 있어서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국산 호치키스(스테이플러)가 없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거 사다 놓았어. 그런데 한참 쓰다 보면 어느 날 없어지는 거야. 탐내는 아이들이 있었던 거지."부국 24회(1983년 2월 졸업) 권혁신(47) 씨는 대흥문방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권씨는 "학교 주변에 광문당 등 문방구가 3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흥문방구였다"고 했다. 또 "학교는 부모님이 흰색 공인가? 검은색 공을 뽑으면 입학할 수 있는 추첨 방식이었다"며 "다 부잣집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집안이 어느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문방구를 운영하면서 통장 일도 봤다. 문방구는 1984년까지 운영했고, 숭의2동 10통장은 1989년까지 약 17년간 맡았다.숭의동에도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인천시사(1993년 발간)'를 보면, 1952년 말 인천 인구(25만6천751명)의 51.1%인 13만1천128명이 구호대상자였다. 구호대상자 가운데 6만3천433명(48.4%)이 피란민이었다. 숭의동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말 숭의동 지역 구호대상자 5천561명 중 2천987명(52.9%)은 피란민이다."지금도 구청 주변에 하꼬방들이 있어. 피란민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집이라고 해봤자 하꼬방이라고 조그마한 곳이지. 그곳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거야."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돈을 걷어 실향민 어르신의 장례를 치른 적이 3번 정도 있다"며 "좀 살만한 집에 가서 얼마 좀 보태달라고 해서,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서울 코엑스로 일을 다닌 적도 있다. 선광공사(현 선광) 일을 맡아 코엑스 행사장에 전시품을 설치했다."숭의동에 인천항 지게차 운전수들이 많이 살았어. 우리 10통에 사는 운전수 소개로 코엑스 일을 하게 됐지. 선광공사에 취직한 건 아니고, 그냥 밑에서 '일당벌이'를 한 거야."할아버지는 "선광공사에서 코엑스 전시 일을 맡았다가 (수익이) 별로니까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기억했다. 선박 하역회사 선광이 한때 전시품 설치 대행사업을 하기도 했다.1968년부터 1998년까지 선광에서 근무하면서 전시 업무도 맡았던 오대영(78) 할아버지는 "(선광은) 76년부터 77년까지 약 2년간 서울 여러 곳에서 전시 업무를 했다"며 "일본에서 전시품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이것을 코엑스로 운반해 조립·설치했고, 전시회가 끝나면 전시품을 분해한 후 상자에 넣어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했다. 또 "(일본에서 전시품을 배로 싣고 오는) 고려해운이 선광에 소개해줬고, 1~2년 정도 선광이 하다가 다른 업체에서 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청 인근 한 건물 앞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약 12년(1972~1984) 동안 운영한 '대흥문방구'가 이 건물 자리에 있었다. 당시는 단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사범학교 당시의 캠퍼스(인천시 숭의동, 1952~1962)인천교육대학 본관(인천시 숭의동, 1975) 출처/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인천 중구 옛 신신예식장 건물에 있는 야외 정원 모습. 신신예식장은 김상국 할아버지가 1959년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야외 정원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게 특징이었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어, 환자와 문병객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인천 남구청 청소년수련관 앞 화단에 세워진 경인교육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표지석. '1957년 준공한 이 건물은 좋은 선생님의 초심을 키운 곳이요, (중략) 근대문화유산으로서도 보존가치가 큰 자랑스러운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17-09-2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6]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上)

인민군 소집앞둔 아들 떡 해주려던 모친온가족 집밖에 있을때 미군 포격에 숨져본인은 밭의 소 쫓으려 나왔다가 화 면해슬퍼할 겨를도 없이 국군부대 경비 맡아중국군 개입에 전세 역전 군인따라 후퇴北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던 '흥남철수'민간인 신분이라 친구네 배 타고 부산行영도 피란민촌서 막노동하다 미군부대로김상국(87) 할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한 성진(城津)시다. 지금은 김책(金策)시라고 부른다. 김책(1903~1951)은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로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숨지자 그의 고향을 '김책'으로 개칭했다.한국전쟁 당시 김상국 할아버지는 20살이었다. 성진 시내에서 부모님과 여섯 남매가 함께 살았다."함경북도, 성진시, 성남동, 47번지, 3호. 바닷가 쪽이지." 할아버지는 기억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고향 집 주소를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기억은 생생했다. 어린아이가 아닌 청년 시절에 홀로 피란을 떠난 터라, 그만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클 수밖에 없다."친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한 20리 떨어진 촌에 사셨어. 전쟁이 나서 온 가족이 할아버지 집으로 피란을 갔는데, 미군이 폭격을 할 때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김상국 할아버지가 인민군 소집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머니는 아들을 군에 보내기 전에 떡이라도 해주겠다며 부엌에 계셨다. 형과 누나, 동생들은 밖에서 놀고 있었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조부와 부친은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방안에서 밖을 내다보니까 소가 밭의 곡식을 먹는 것이 보여. 그래서 소를 쫓아내려고 나가봤지. 소를 밭에서 떼어놓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미군의 폭격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에게 떡이라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족의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잔해 속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겨우 찾아냈다. 전쟁 중이라서 아버지와 친척 몇 명이 간단하게 장례를 치른 뒤 시신을 밭에 묻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어머니를 보내야 했다."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울지도 못했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 장례? 올 사람도 없고. 돌아가신 그 이튿날 바로 밭에 묻었어….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거지. 그래서 나는 죄 많은 놈이야."소 덕분에 살아남게 된 김상국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성진을 점령한 육군 수도사단에서 경비를 서게 됐다. "국군이 성진까지 들어온 거야. 그래서 인민군 소집은 면했지. 우리 매형이 치안대에서 뭐를 맡았는데, 수도사단 부대 앞에서 경비를 서라고 하더라고."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38선 북쪽으로 진격했다. 군사 전문가 남도현이 쓴 '끝나지 않은 전쟁 6·25'에 따르면 유엔군은 10월1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선두로 세워 38선을 돌파했다. 유엔군 지휘부는 전력을 둘로 나눠 북진했다. 서부전선은 낙동강에서 북진해 온 미 제8군이 제1군단과 제9군단, 국군 제2군단을 지휘하도록 했다. 함경도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지휘를 맡겼다. 국군 수도사단은 10월17일 함흥·흥남을 탈환한 데 이어 28일 성진을 확보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상국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10월 중하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총 쏘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어. 그냥 총을 메고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는 거야. 우리는 잘 모르니까 부대 안에서 군인들이 '들여보내'라고 하면 들여보내고 했지."경비 서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군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했다. 김학준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10월25일 한국군과 중국군 사이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며 "맥아더 사령관은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국군과 함께 LST(상륙함)를 타고 흥남부두로 왔다. 당시에는 흥남부두로 이동하는 이유를 몰랐다. 흥남부두에 도착해 군인과 피란민이 모이는 것을 본 후에야 '후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피란'이었다. 경비를 섰을 뿐이지 군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는 군인과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했다.당시 흥남부두 광경은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은 '한국전쟁통신'에 잘 나온다. '해 질 무렵에 나는 황폐한 흥남을 보러 갔다. 눈발이 희끗희끗 내리고 있었고, 군대가 자신들을 포기할까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절망감은 이 도시 못지않게 처량했다.' 'LST 한 정이 부두에 나타나 육지와 배를 오가며 군중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보초들의 인솔을 받으며 폭력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막기 어려울 정도로 군중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도선마다 만원이었다. 과적한 도선은 곧장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흥남철수 때 약 1만4천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저술가이자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는 이 배 선원의 기억과 당시 자료를 토대로 '기적의 배'를 출간했다.'흥남으로 가는 피란민들은 폭격과 기총사격을 당했다. 비행기들이 미국기였는지 소련기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총사격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거의 자식들과 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는 이 책에서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봤다.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수히 따랐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 육군 제7사단 제32전투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으며, 10만t의 제트 연료를 일본 도쿄에서 흥남 부근 공항으로 운반하러 왔다가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하게 됐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흥남부두에서 미 군함이나 상선이 아닌 친구(임영록) 아버지의 배 '성진호'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임영록이랑 경비를 함께 섰었어. 이 친구 아버지가 어선 선장인데, 우연히 흥남부두에서 만난 거야. 친구 아버지 배를 타고 결국 부산까지 간 거지."군인 10만5천명, 피란민 10만여명 등 약 20만명을 흥남에서 거제도로 옮긴 흥남철수작전은 12월24일 완료됐다. 김상국 할아버지가 40여 명과 함께 탄 '성진호'는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났다."엔진이 달린 배라서 3~4일 정도 걸려서 부산 영도다리 밑에 내렸지. 영도극장(1946년 건립된 항구극장의 착각으로 보임. 영도극장은 1958년에 생겼음)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서 하룻밤을 잤는데,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더라고." 해방 후 처음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이북에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거나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한다.부산 영도에 도착해서야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 처음에는 막막했어. 부산에 와서 혼자가 되니까 그제야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 그전에는 당장 내가 살아야 하니까 생각이 덜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부산 영도 피란민촌에 방 하나를 얻고 부두에서 드럼통 굴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미군의 군수물자를 나르는 노동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드럼통 미는 사람은 대부분 피란민이었다"며 "피란민이 가장 힘든 드럼통을 옮기고, 부산 토박이들은 다른 것을 날랐다"고 했다.영도구청이 발간한 '보물섬 영도이야기 스토리텔링 100선'에 따르면 1·4후퇴 당시 주로 함경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영도에 많이 정착했다. 이들은 미군 군사·원조물자 포장 자재인 '보루박스'(골판지)와 음료수 깡통을 펴서 하꼬방을 만들었다. 영도다리 아래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교하촌'(橋下村)이 생기기도 했다. 작품 '흰소' '가족' 등으로 유명한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의 화가 이중섭(1916~1956)도 1951년 12월부터 1953년 3월까지 영도 등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했다.영도 출신 가수 현인(1919~2002)은 부산에 정착한 함경도 피란민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굳세어라 금순아'다. 이 노래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전쟁통에 피란민들은 "헤어지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1934년 준공된 영도다리(옛 부산대교, 현 영도대교)는 국내 최초 연륙교로 유명했다. 실제 이곳에서 이산가족을 찾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 차디찬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란민도 적지 않았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부두에서 막노동하다 미군 부대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부두에서 100원을 벌었다면, 우두머리에게 30원 떼어 주고 70원으로 밥값과 방값을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어. 그래서 아는 사람 소개로 미군 부대에 들어갔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설거지와 심부름을 했다"며 "식당에 취직하니까 끼니 걱정은 없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시 남구 함경북도도민회 사무실에서 한국전쟁 흥남철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를 실은 배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 도착했다. 영도다리는 1934년 준공된 도개식(跳開式) 교량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피란민의 애환과 고향·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는 곳이다. /부산 영도구 제공

2017-09-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5]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下)

전매국 염전 목수였던 아버지물 끌어올리던 수차도 만들어창고부터 제염도구까지 '뚝딱'생활력 좋은 모친은 약방 운영약사자격 없어 제조 아닌 판매1948년 연안중학교로 진학…당시 영어담당 박상준 교사 등학교 출신 유격대서 많이 활약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았던 곳인심 넉넉한 고향 가끔 그리워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염전에서 제염 도구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고향 생각을 하면 넓은 소금밭과 평야, 항상 넉넉했던 마을의 인심이 떠오른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소속 염전 목수로 일했다. 목수는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가업이라고 했다. 전매국은 일제강점기 소금과 담배, 인삼류의 전매 사무를 담당한 곳이다. 일제는 생산성이 낮은 우리 전통방식인 자염(煮鹽) 대신 천일염(天日鹽)을 통해 소금 생산성을 높이려고 했다. 소금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관영으로 염전을 운영했고 소금의 유통까지 담당했다.우리나라 천일염은 1907년 주안염전이 처음이었고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연백에는 1939년 염전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건너간 1943년 연백염전의 규모는 1천250정보(町步)였다.염전에 무슨 목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당시 천일염전에서는 목수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소금생산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도구를 만들려면 목수가 꼭 필요했다.할아버지는 부친이 수차를 만들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서 움직이는 수차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던 것으로 기억해요."수차는 염전에 물을 대는 기구다. 1차 증발 과정을 거친 함수가 저장된 '해주'에서 소금결정지로 물을 끌어올릴 때 쓴다. 물레방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수차를 '무자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물을 자아 올린다고 해 이름 붙였다고 한다. 박호석이 쓴 '한국의 농기구'를 보면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물자새',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는 '자애'라고도 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무자위는 지름이 180㎝ 되는 나무 바퀴에 판자로 된 날개 19장을 바퀴 주위에 경사지게 배치했다. 무자위의 아랫부분을 물에 잠기게 설치하고 한 사람이 올라서서 비스듬히 세운 기둥을 잡고 날개를 밟아 내리면, 사람의 무게에 의해 바퀴가 돌고, 바퀴의 날개는 물을 쳐서 밀어 올린다. 올려진 물은 판자로 만든 물길(홈통)을 따라 흘러나온다. 무자위가 끌어올릴 수 있는 물은 1시간에 50~60t정도였다고 한다. 무자위가 있기 전에는 2명이 1조가 돼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렸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시인'으로 유명한 박형진은 그의 책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에서 두레박과 무자위를 함께 소개하면서 "소 같은 사람도 맞두레질을 한 날은 저녁 밥숟갈 놓자마자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져서 잘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인천 출신 시인 유종인이 쓴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에도 수차 얘기가 나온다. 그는 수차를 '염전의 두레박'으로 요즘의 펌프 구실을 했다고 소개한다. 수차를 밟는 염부의 모습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두레박질보다 쉽다 한들 뙤약볕 아래 허벅지가 터질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차를 돌리는 염부도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모습은 시인 김중석이 '수차'라는 시에서 형상화 했다."아무리 내딛고 올려 밟아도 제자리이지만//평생 그 걸음으로//수차를 밟는 염부//등을 뚫고 소금이 맺힐 때까지//염전은 자기 살을 태운다//아픈 시늉도 없이//수차 또한 삐걱이며 돌고 또 돌고 돌아//전라(全裸)인 바닷물이 여름 내내 땡볕에 피말려 소금을 만들어내는//아, 쓰라림의 환희//번쩍이는 건 발밑에 있다//놀라워라, 있다//죽을 때까지 그 걸음으로 내딛는 염부와//고통의 제자리거름 밑에서 아픈//시늉도 없이 돌고 도는 수차 밑에//땡볕이."무자위는 198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전력이나 엔진을 사용한 양수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수차를 보기 어렵지만, 인천의 소래생태공원에 있는 염전에서는 여전히 전통식 수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계를 사용하면서 전력에 의한 감전사고가 종종 발생하거나 기름이 새기도 했다. 이리 되면 그 소금의 질은 보나 마나다. 인간이 손발을 써 정성을 다하는 데에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담기게 마련이다.염전에서 목수가 만들어야 하는 제염 도구는 소금 결정지에서 천일염을 모으는 채염 장비가 있다. 이중 고무래는 목재로 된 넉가래에 타이어를 덧대 만든 도구다. 결정지 바닥에 밀착시켜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다 보면 소금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오른다. 큰 것을 대파, 작은 것을 소파라고 했다.소금을 운반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목수의 몫이었다. 장대 양옆에 바구니가 달린 운반도구 강고(목도)는 외발수레로 발전했고, 지금은 레일카를 이용해 손쉽게 운반한다고 한다. 소금창고를 만드는 큰 작업부터 손 도구를 만드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염전에는 목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전쟁 때는 인천 숭의동의 영국군 부대에서 목수로 일했고 인천에 정착한 뒤에도 신포시장에서 목수 일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다재다능했다. 처음에는 소달구지에 이동식 방앗간을 달아 이집저집 끌고 다니며 쌀을 빻아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과 함께 집 한 켠에서 약방을 운영했다. 정식 약사가 아니라서 약을 제조하지는 않았지만, '제중약방(製衆藥房)'이란 간판을 내걸고 약을 팔았다. 집이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근처여서 장사도 그럭저럭 잘됐다.2006년에 나온 '경기도약사회 50년사'를 보면 한약방이 중심이었던 우리나라 약업계에 서양 의약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부터다. 일본인들은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에 약방을 세우고 약업계를 장악했다. 초기에는 비누, 치약으로 시작했지만 약품과 화학물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지금의 약사라고 할 수 있는 약제사가 처음 등장한 때는 일본인 유미스리(弓削龍藏)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부산 제생의원에 근무하기 위해 들어온 1885년이다. 그는 일본 약제사면허증 2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10년까지 50여 명의 일본인 약제사가 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약국을 개설한 사람은 일본에서 약제사 자격증을 따 1910년 서울 종로3가에 인수당 약국을 세운 유세환이다.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인 이정재가 1913년 종로 낙원동에 삼우당약국을 세웠고, 그 뒤로 약국이 줄줄이 늘었다.할아버지네 '제중약방'은 약사 자격이 없어 소분과 제조를 하지는 못하고 '매약(賣藥)'만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자격시험이 존재했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격을 얻어 약방을 운영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그때도 소화제는 활명수가 있었고, 머리 아플 때는 아스피린, 만병통치약은 다이아찡이었어요. 피란 때 어머니가 약을 많이 챙겨왔는데, 돈이 궁하면 약을 조금씩 팔아다가 살림에 보태서 썼어요."지금도 '부채표'로 유명한 동화제약의 활명수는 1897년 9월 서울에 세워진 동화약방이 만든 소화제다.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만든 약으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이라는 뜻이다. '한국기업 성장 100년사'를 보면 "계피 4그램, 정향 3그램, 감복숭아씨 6그램을 침출기에 넣고 적포도주 150그램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간 침출시킨 뒤, 이 침출액에 다시 박하니 0.15그램, 장뇌 0.03그램을 넣고 백설탕 40그램과 증류수 70그램을 가한 후 잘 혼합해 용해한 후에 여과시켜 60밀리리터 작은 병에 담는다"고 활명수 제조법이 나온다. 활명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유명하다는 약방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1910년 '부채표'를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했다. 이밖에 해방 직후 미군이 상비약으로 가지고 들어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에 잘 드는 약이었는데 변변한 약이 없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서양 약을 처음 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없던 때라 뭐든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할아버지는 해성면 해남리에 있는 해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연안읍에 있는 연안중학교로 진학했다. 해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연백 내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부모님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연안중학교는 해방 이후 부족한 교육시설을 늘리는 방침에 따라 1946년 5월 개교한 신설학교였다. 전쟁 후 학생들과 함께 반공유격대를 꾸려 북한에 대항했다가 미 8240부대에 편입된 강화 교동 울팩부대를 지휘한 박상준 여단장이 바로 연안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다. 박상준 여단장은 휴전 이후 비정규군이었던 8240부대원들을 흡수한 육군 8250부대 제2연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고 195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내가 전쟁 때 있었던 8240부대에 연안중학교 영어를 가르쳤던 박상준 선생님도 있었어요. 나는 그분이 선생님이니까 아는데 그분은 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죠. 그래도 연안중학교 출신들이 전쟁 때 유격대로 많이 활약했어요."김은중 할아버지는 태어난 곳은 강화이지만 연백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북5도민회 강화군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연백은 먹을 게 풍족해서 동네에 거지가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추수 후에 남은 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때는 찹쌀떡을 만들어도 팔뚝 만하게 만들어 먹고 부족함이 없었죠.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연백 염전에서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9-06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4]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中)

美 유격대서 익힌 영어로 고교 편입 대학 준하는 인천대숙 법학과 수료 제무시 트럭 개조 버스회사 취직 우연히 만난 부대 장교 소개로 공군기지 순환버스 사업 시작 한진에 일감 빼앗기고 이후 연이어 사업 실패 전쟁 등 대비 정부 비상계획 업무 맡아 법원으로 옮기고 인천지법서 퇴직 법무사 자격 얻어 '지금까지…'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미 공군부대를 상대로 운수사업을 했다.이후 법원 공무원으로 일하다 법무사 자격을 얻어 30년 넘게 강화에서 법무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던 해 가을 고향에서 못다 이룬 학업을 마치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3학년 때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1953년 가을, 서울 숭문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20세 때였다. 미군 부대에서 유격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 도움이 컸다. 숭문고는 1906년 경성야학교에서 출발해 숭문상업중학교, 숭문고등학교로 발전한 역사가 오래된 학교다."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교장실에서 특별면접을 봤는데 당시 서기원 교장이 영어를 잘한다고 입학을 허락해 줬죠. 그렇게 3학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했어요. 인천 집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타고 다녔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대숙'이라는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대숙은 당시 대학설치기준령이 정한 대학의 조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기능을 하는 교육기관이었다.할아버지는 학교법인 청운학원이 운영하는 인천대숙 법학과를 수료했다. 인천대숙은 1976년 학원비리를 이유로 교육 당국에 의해 폐교 조치 됐다.1960년대 초반 일자리를 알아보던 김은중 할아버지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서울의 한 버스 회사에서 내근으로 일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이 회사는 군용 트럭에 철판을 덧대 버스를 만들어 운행했다."미군 '제무시' 트럭 후레임을 가져다가 도라무통 철판으로 겉을 둘러싼 버스였어요. 좌석도 요즘 지하철처럼 긴 좌석을 양쪽으로 마주보게 놨죠. 답십리에서 숙명여대, 효창공원까지 다니는 노선이었어요."할아버지가 말한 '제무시' 트럭은 미국 자동차회사 GM 브랜드 중 하나인 GMC가 생산한 트럭을 일컫는다. GMC를 일본식 '지-에무-시' 발음과 유사한 '제무시'로 불렀다. 카고트럭이라고도 하던 GMC CCKW(2.5t)는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한국지엠 쉐보레 공식 인터넷 블로그는 CCKW가 1941년 첫 출시돼 60만대가 생산됐다고 전한다. 91.5마력의 6기통 가솔린엔진에 6개 바퀴가 모두 구동되는 6륜 구동식이었다. 현대자동차가 1997년 창사 30년을 맞아 쓴 사사(社史) '도전 30년, 비전 21세기'는 "한국전쟁으로 모든 공업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오히려 우리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줬다. UN군이 가지고 들어온 엄청난 군수물자와 각종 자동차 부품, 그리고 토막 난 미군용 폐차와 드럼통들이 천막공장으로 들어가면 이내 그럴듯한 자동차가 되어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 쟁탈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다. 버스회사 대표가 군용 제무시를 뒤로 빼돌렸다가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1일자에는 "육군제15범죄 수사대는 19일 하오 6시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XX교통회사 사장 최OO를 '장물취득' 및 '증회' 혐의로 구속하였다. 최씨는 전방 모 부대에서 부정 유출된 군용 GMC '후렘' 7개를 23만환으로 사서 '뻐스'로 개조하였으며 수사원을 1만환짜리 보증수표로 매수하려 한 것이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할아버지는 버스를 수리하려고 서울 미도파 백화점 인근의 한 정비소를 찾았다가 과거 8240부대에서 알게 된 육군 통역장교(대위)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서울의 버스회사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칠 뒤 미5공군사령부 계약처장인 모 중령을 소개했다. 미 공군이 한국에 있는 공군기지를 순환하는 버스운행을 민간에 맡기려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콘트랙트(contract·계약) 버스'였다.할아버지는 고모부와 회사 임원들에게 콘트랙트 버스 사업을 하자고 설득해 제무시 버스 16대를 투자받았다. 버스 내부는 기존 2열 좌석식에서 요즘의 좌석버스식 구조로 변경했다. 콘트랙트 버스는 오산비행장을 근거지로 김포비행장, 김해비행장 등 전국의 비행장을 오가거나 비행장 내부를 순환하는 노선 등 다양했다. 계기판에 찍힌 거리(마일)에 따라 돈을 받았다. 마일 당 계약금액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기억했다.1년 단위 계약으로 4년 동안 콘트랙트 버스를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당시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에게 일감을 빼앗기고 말았다. 1960년대 중반이다. 구식 제무시를 운영하던 할아버지 앞에 조중훈 회장은 신식 일본제 '이스즈(いすず)'버스를 갖고 나왔다. 1916년 설립된 이스즈는 일본 자동차 회사 중에 가장 오래됐다. 지금도 버스와 트럭, 디젤엔진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한진그룹의 전신 한진상사는 1945년 조 회장이 트럭 1대로 시작한 운수회사다. 한진상사는 전후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미군 보급물자 수송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 8군과의 수송계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957년 주식회사로 성장했고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연평균 300% 급신장을 거듭해 1960년 1년 동안 22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르렀다. 이 무렵 미 공군부대 콘트랙트 버스 사업에까지 발을 뻗었다는 김은중 할아버지의 얘기는 조중훈 회장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를 들여오면서 관세법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64년 7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해 1월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 50여 대를 군납용 명목으로 한대에 2천 달러에 무관세로 들여왔다. 원래는 시가 8천 달러의 버스였다. 하지만 한진은 이 중 15대를 군용이 아닌 경인노선에 투입해 막대한 관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 경인노선에 버스를 투입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관세포탈은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당시 미군 관련 수송사업에 엄청난 이권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 회장이 미군 부대와 연줄도 있었던 것 같고, 뭐 경쟁해서 떨어진 거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때 계속 미군과 인연을 맺으며 운수회사를 발전시켰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죠."한진은 이후에도 미군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쟁 병력·물자 수송 사업(용역 군납)에 뛰어들어 신흥재벌로 급성장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충로 박사가 쓴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를 보면 한진은 1966년 5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1억1천646만3천185 달러의 베트남전쟁 관련 사업 실적을 거뒀다. 이는 전체 용역 군납의 50%, 한국이 베트남 특수를 통해 얻은 수익의 11.5%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로써 한진은 '월남재벌'로까지 일컬어지게 된다.할아버지는 제무시 버스를 다른 버스회사에 팔고 영등포에서 옷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 중수 사업을 했는데 사기를 당해 한 푼도 못 건지고 엄청난 손해만 입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사건을 부처님을 위해 '중수불사(重修佛事)'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연이은 사업실패로 돈을 다 잃은 할아버지는 평소 알고 지내던 법무부 과장의 소개로 중앙청 총무처에 들어가 비상계획 업무를 했다. 비상계획은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정책이다. 지금도 매년 8월이면 을지연습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민·관·군 합동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만약에 전쟁이 나면 정부부처는 어디로 이동하는지 관공서는 어떻게 피란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관리하는 부서였어요."할아버지는 중앙청에 있다가 법원에도 비상계획 업무가 생기면서 대법원 소속이 됐다. '법원 공무원정원에 관한 규칙' 연혁을 살펴보면 1969년 9월 대법원 조직에 비상계획이라는 업무가 처음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전국 판사의 정원이 455명, 직원이 2천94명일 때였다. 지금은 판사 3천214명, 직원 1만5천755명으로 크게 늘었다. 법원 조직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할아버지도 인사이동 조치 돼 일선 지방법원 재판부의 계장으로 근무했다. 대전, 수원지법 등에서 민사·가사·형사재판 업무 등을 하다 1980년대 인천지법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다. 당시 인천지법은 지금의 인천 남구 학익동이 아닌 남구 주안동 석바위 지금의 인천가정법원 자리에 있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1986년 법원에서 퇴직하면서 사법서사 자격을 얻었다. 사법서사는 지금의 법무사를 말하는데 1990년 법무사법이 생기면서 사법서사의 명칭이 법무사가 됐다. 당시 관련법은 검찰·법원 주사보 7년 이상의 경력 또는 검찰·법원 사무관 5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사법서사 자격을 인정했다. 할아버지는 석바위 법원 근처에 사무실을 내려고 했으나 지인들의 권유로 출생지인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법무사협회가 1997년에 펴낸 '법무사 100년사'를 보면 1986년 가입한 인천 소속 법무사 명단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온다. 벌써 30년 전이니 피란 이후 절반 가까운 인생을 법무사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은중 할아버지는 지금도 강화군청 앞에서 법무사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지난 29일 인천 강화군청 인근 자신의 법무사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김종호기자 kjh@kyeongin.com위 사진은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 때 사용된 미 군용트럭 '제무시(GMC)'. 전후 운수회사들은 제무시 프레임에 철판을 덧대 버스로 개조했다(출처/한국지엠 쉐보레). 아래는 1950년대 서울 지역에 운행되던 '제무시(GMC)' 버스.김은중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석바위 시절의 인천지법. 오른쪽이 법원, 왼쪽이 검찰청이다. /인천지검 제공

2017-08-30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3]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上)

강화 송해면 태생 부친따라 연백으로 '이주'1·4후퇴때 강화도 피란… 일 찾아 인천으로인력시장서 미군트럭에 실려가 유격대 배치오키나와로 간뒤 낙하만 70차례 고강도 훈련"사람 죽이는 법 배워 죽어도 모르는 소모품"8240부대는 미군·국군도 아닌 애물단지 전락이중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대는 존재도 몰라정전 직전 서울로 전입… 2008년 '참전' 인정한국전쟁을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한국군은 얼마나 될까. 황해도 연백군 출신의 김은중(83)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목숨을 건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58년 창설한 우리나라 육군 특수전사령부보다도 먼저 오키나와에서 공수 낙하훈련을 받았다.1934년 5월 10일 강화군 송해면에서 태어난 김은중 할아버지는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로 이주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연백군으로 넘어가 염전에서 일했다.전쟁은 할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강화도로 다시 내려와 누나 집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흉년이 심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연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51년 1·4후퇴 때 다시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리고는 또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동구 송현동 쪽방촌에 방을 하나 얻어 둘이서 살았다.할아버지는 인천항에서 군수 물자 하역일을 했다. 지금의 인력시장처럼 아침에 인천항에 나가 있으면 미군들이 일자리를 배정해주고 급여로 쌀 한 됫박을 줬다고 한다. 10대 후반이던 그때 김은중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미군 트럭에 실려가 특수부대원이 됐다. 아마 1951년이었을 게다. 여느 때처럼 쪽방촌 집에서 나와 배다리, 동인천역을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길이었다."열댓 명이 쭉 걸어가는데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몇 대 세워 놓고 '유(You), 유, 유, 컴 히어(Come here)'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미군 부대에 일하러 가는 줄 알고 트럭에 올라탔어요. 그런데 트럭이 서울로 가더라고. 아버지에게 소식도 못 전하고 끌려갔죠."노량진을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 용산 부근에 도착했던 듯하다. 미군은 할아버지를 철창에 가두더니 '바리깡'을 가져와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선 군복과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주고는 미8군사령부 산하 유격대로 편성했다. 이른바 군번 없는 군인, 미군이 한국인 반공의용청년을 모아 만든 8240부대였다.할아버지는 남양주 덕소로 이동해 몇 개월 훈련을 받다가 1952년 봄 여의도 비행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C-46 수송선을 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몇 시간 뒤 내렸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날씨, 오키나와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중대 규모의 한국인 병력 100여 명은 산 중의 훈련장에 갇혀 외출도 외박도 없이 근 1년을 훈련만 받았다.할아버지는 기초적인 군사 훈련과 함께 낙하산 훈련, 무술, 인마살상, 폭파 등 그야말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국에서 간단한 제식, 사격 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병기'가 되는 훈련이었다. 할아버지의 훈련 얘기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에 나온 특공대 684부대의 훈련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은밀히 북파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도 같았다. 젓가락이나 쇠꼬챙이로 급소를 찔러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고, 유도, 검도, 태권도 같은 동양 무술도 배웠다. 끼니는 전투식량 '씨-레이션'이었고, 쉴 틈도 없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휴 맥매너스(Hugh McManners)가 쓴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는 한국전에서는 소규모 정예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정찰과 상륙, 폭파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게 됐다고 설명한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수송기에 타 3천 피트 상공에서 낙하하는 훈련을 70차례 받았다. 낙하 도중에 낙하산을 펼치는 지금의 특전사 고고도 낙하훈련과는 많이 달랐다. 낙하산 고리를 수송선에 걸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낙하를 하다가 잘못 착지한 동료가 목이 뒤로 꺾여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이야 지상으로 착지한 뒤에는 펼쳐진 낙하산을 다시 접는 정비부대가 따로 있지만 당시 오키나와에는 낙하산 정비부대가 없어 펼쳐진 낙하산을 모아 한꺼번에 하와이로 보냈다고 한다.현재 특전사사령부는 예하 특수전교육대 특전장비정비부대에서 낙하산을 포장한다. 강하훈련을 마친 대원들이 낙하산의 먼지를 털고 훼손 등 이상유무를 확인해 반납하면 11단계의 과정을 거쳐 포장병 3인 1조가 돼 낙하산을 다시 접는다. 강하하는 대원들의 목숨과 직결된 작업이다 보니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한다고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특전장비정비부대는 매년 2만9천여개의 낙하산을 정비한다. 1년에 각 부대에서 이 만큼의 공수 훈련을 한다는 의미다.특전사라고 하면 '검은 베레모'를 떠올리지만 할아버지는 '팔각모'를 썼다고 기억했다. 공수훈련을 하면 주어지는 휘장은 동그란 모양에 푸른색 유엔 표식이 있고, 그 위에 낙하산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별도의 부대 마크는 없었지만 소매 안쪽에 부착된 유엔군 표식이 신분을 증명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미군 상사는 할아버지를 '쟈니 킴'이라고 불렀다."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웠어.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린 소모품이었어. 많이들 죽어 나갔지. 죽으면 그냥 땅에다 묻어버리는 거야. 고향 생각이 안날 정도로 정말 쉴 틈도 없이 극한 훈련을 받았어요."낙하훈련 중 목이 꺾여 죽거나 다른 훈련을 하면서 맞아 죽기도 한 8240부대 소속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군의 존재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8240부대 전우들이 많은데 오키나와에서 같이 훈련했다는 전우들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나도 소식이 궁금해요. 암암리에 운영된 부대였기 때문에 아마 기록에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라고 말했다.우리나라 군인이 오키나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육군 특수전사령부 연혁에서 처음 등장하는 데 그게 1958년 4월이다. 그해 4월 1일 용산에서 창설된 특전사 제1전투단 창설대원들은 보름 뒤부터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았다.연합뉴스 국제부 김선한 기자가 쓴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 X'는 이들은 한국전 실전 경험이 있는 미 육군 제1, 제77 특전단 소속 요원들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특수전사령부는 1951년 2월 창설된 미8군 소속 제1공수 유격연대, 즉 8240부대를 모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도 나온다.할아버지는 왜 멀리 오키나와까지 가서 특수훈련을 받았을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령이 되면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다. 전후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가 쓴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을 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투기와 수송기들은 오키나와 기지에서 한국으로 출동했다. 오키나와 주둔부대는 대부분 한국 전장으로 이동해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보병부대가 오면 오키나와에 도착해 3주간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됐다.미8240부대 산하 백호유격부대(동키3~4연대)에서 미국 고문관으로 전투에 참가한 벤 S. 말콤(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쓴 '백호부대 유격전사'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유격작전과 관련해 근무하고 있는 미군은 장교 22명과 사병 37명이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도의 전투능력이 필요한 특수부대 양성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들에게 맡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특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지만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2015년 일본 방위성 방위백서를 보면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 육군 제1특수부대(공수) 제1대대와 제3해병기동전개부대 사령부 등 6개의 육·해·공군 기지가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순안비행장 침투작전을 준비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이 쓴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에 따르면 전쟁 기간 한국에 있는 8240 유격대는 4천445회의 개별 작전을 수행했고, 작전활동의 93.7%가 황해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시됐다. 유격대는 휴전 전까지 6만9천명의 적 살상, 5천 정의 무기노획, 2천700대의 차량노획 및 파괴, 3천800t의 식량노획, 80개의 교량 파괴 등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3~10배 정도 과장됐다는 것이 존스홉킨스대 연구실의 설명이다.할아버지는 정전협정이 이뤄지기 직전 오키나와를 떠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한 부대로 전입했다. 자신에게 쟈니 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미군 상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미 8240부대는 전쟁 이후 미군에도 한국군에도 속하지 않은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8240부대는 편성 당시부터 한국인에 대한 신분을 '군인'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다.이후 미국과 한국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8250부대로 편입돼 우리나라 국방부의 통솔을 받게 됐다. 하지만 우리 국방부는 이들은 육군으로 배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탈영이 일어났다.할아버지는 8250부대로 편입되기 전 특수부대를 떠났다. 한국군 소속으로 복무한 적은 없지만 징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을 인정받아 2008년 9월 29일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오키나와 특수부대에서 죽음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 특수부대는 한국전쟁 유격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에게 수여하는 호국영웅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23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2]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下)

교통·물류 중심지로 신문물 빨리 접해어릴적 기차 타고 개성에 소풍 갈 정도예성강 하류 위치… 민간 무역도 활발고려시대 수도와 송나라간 교류 통로드넓은 곡창지대 배고픔 모르고 자라연백 온천욕으로 피부병 완치 일화도상인들과 10여년전 '개성관광' 다녀와정몽주 피살 선죽교 등 변함없어 놀라이춘화(83) 할머니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碧瀾渡)는 교통·물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서해 바닷길을 따라 들어온 배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거치게 마련이었다.이 벽란도는 개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물류·교통의 허브였다.할머니의 유년시절에도 고향 앞바다에는 조기, 새우를 잡는 배가 널렸고, 화물선도 많이 다녔다. 개성과 벽란도는 철도로도 연결됐다.중간에는 토성역(개풍역)이 있었다. 할머니는 교통 여건이 좋은 곳에 산 덕분인지 '국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소풍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10살 때는 배를 타고 인천에서 열린 친척의 환갑잔치에 오기도 했다. 월미도 근방이었는데 배를 타고 5시간 정도가 걸린 듯싶다.할머니는 당시 벽란도가 인천에 비해서도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고 했다."일정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왔고, 고향집 근처 방개월에는 금을 빻는 공장도 있었어. 발전이 빨랐던 거지." 금을 가공하던 금점(金店)이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벽란도는 뛰어난 입지 덕분에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의 통로 역할을 했다. 벽란도를 굽이도는 강의 이름 '예성(禮成)'도 '교빙(交聘)의 예(禮)가 성립(成立) 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편에는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를 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송나라 휘종(徽宗) 국신사(國信使)로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1091~1153)도 예성항(벽란도)을 통해 개성으로 갔다. 당시 금(金)이 고려와 송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육로가 막혔다. 바닷길도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전라남도 근해에 왔다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서긍은 3개월 동안 고려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고려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겼는데, 이곳에 당시 '예성항'의 풍경도 담았다. 서긍은 예성항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왕의 조서를 봉안하고, 하루를 묵은 뒤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당시 항구에서 이뤄진 송나라 국신사에 대한 예(禮)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조류를 따라 예성항에 이르자 정사·부사는 신주(神舟)로 옮겨 탔다. 낮 12시쯤(午刻) 정사·부사가 도할관·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采舟)로 조서(詔書)를 봉안했다. 1만 명 되는 고려인들이 병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으로 들어갔다."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를 보면 고려시대 벽란도에서는 민간 차원의 무역도 활발했다. 송나라 상인 '송상'은 사실상 고려 왕실이 지정하고 관할하는 항구인 예성항에 도착해 개경 등지를 무대로 장사를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송나라 상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렸다. 당시 예성강을 통해 출입하던 송나라 무역상 중에는 '하두망(賀頭網)'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성강 주변에서 체류하는 동안 절세의 미인을 보고는 반해버렸다. 그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낸 하두망은 바둑에서 일부러 지고는 많은 재물을 잃었다. 뜻밖의 횡재에 마음이 동한 남편은 결국 아내까지 걸게 됐고, 하두망이 아내를 차지하게 됐다. 하두망은 배에서 미인을 범하려 했지만, 아내는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배가 빙빙 돌며 나가지 않았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절부가 있기 때문'이라 했고, 하두망은 배를 돌려 미인을 내려놓고 가게 됐다 한다.이 얘기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로 당시 고려인들에게 널리 불렸다. 남편이 아내를 보내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노래가 '전편'이고, 아내가 배에서 내리면서 부른 한이 서린 노래가 '후편'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시인 정포(1309~1345)가 지었던 시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예성강곡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같은 청산이 배 창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벽란도 일대에는 예성강을 따라 펼쳐진 드넓은 평야도 있어 곡창지대를 이뤘다. 이춘화 할머니의 가족도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철이면 학교도 못 가고 온종일 일을 하고는 했다. 농번기면 온 가족이 함께해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일당을 주고 전라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을 부렸다. "고향 주변이 모두가 평야였지. 연백평야 끄트머리였는데 평야가 정말 넓었어. 쌀이 많이 나와서 유년시절에 배고팠던 기억은 없어."할머니는 유년 시절 연백군에 있는 온천에 갔던 기억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연백에는 연안온천과 배천온천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할머니도 피부병이 도졌는데 연안온천에서 10일간 온천욕을 하고 완치됐다. "어른들 말이 거기가 물이 좋다 그랬어. 옴이 와서 머리도 헐어서 옷을 입지 못할 정도가 됐는데 열흘을 (온천욕을) 하고 왔더니 깨끗이 없어졌어. 그때 약이 있겠어, 민간요법으로 하다가 안 돼 온천에 갔더니 바로 나았던 거지."온천은 지금 대중탕의 모습과 흡사했는데, 탕에는 호랑이 모습의 조형물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물을 식혀서 씻어야 했다. 탕에 들어갈 때는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온천은 연안읍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온정면 금성리에 있었다. 황해선 연안온천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황해도지'는 "부근에는 특히 토탄이 많이 나며 온천은 이러한 토탄지대에서 솟아나는데, '루마지스' '피부병' '부인병' '치질' 등에 모두 특효가 있다고 해 원근(遠近)에서 욕객이 답지한다. 욕탕의 설비가 완전하고 여관 등의 시설도 갖추어 있어 유숙, 휴양에 불편이 없다. 본도의 남부지성에 위치해 전의 고려조의 수도 개성에 가까웠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배천온천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도 소학교 교사였던 19살 때 배천온천에서 옴 치료를 했다고 회고했다. 이희승의 고향은 경기 개풍(출생은 경기도 시흥)으로, 서울에서 수학하다 낙향(落鄕)한 뒤 사립 소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에서 "배천온천은 후에 유명한 온천으로 발전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 시설이 없는 자연 그대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유년시절 개성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할머니가 본 개성의 첫인상은 '하얗고 환하다'는 느낌이었다. 밭과 논도 잘 정리돼 있었다. 이 같은 느낌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처음 송도(개성)를 봤을 때 느꼈던 바 그대로다. 박완서는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려고 고향 경기도 개풍군에서 걸어 송도까지 갔다. 박완서는 당시 고개 위에서 내려다본 송도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 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 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砂質)이어서 길이나 바위가 유난히 흰 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그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이춘화 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함께 장사하는 이북 실향민 상인들과 10여 년 전 개성관광을 다녀왔다. 60여 년 만에 개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놀라웠다. 유년 시절에 봤던 선죽교나 박연폭포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라워 했다. "선죽교에 갔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아놨다는 거였어. 어렸을 때는 핏자국이 그대로 있다고 신기하다며 발로 비비고 그랬는데, 개성관광 때는 그렇게는 못하게 해놓은 거지. 우리 같았으면 개발하고 그랬을 텐데 그대로더라고."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찍은 사진을 보니 선죽교 옆에 세워져 있는 '선죽교 비'의 글자도 또렷했다. 이 비의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한다. 선죽교는 1392년 정몽주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 피살된 장소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는 취재팀과 함께 고향 땅 지척의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전망대에 있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북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피란 때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도 둘러봤다. 예전 나루터는 사라지고 해안 경계 철책이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철책가에는 '지뢰매설지역 위험'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북쪽의 대남방송이 손님을 맞이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변했다"며 "다시 또 북에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1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피란 때 배를 타고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에서 고향인 벽란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개경과 예성항. 출처/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이춘화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 선죽교비에 '善竹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평양집 할머니 제공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직접 찍은 선죽교의 모습. /평양집 할머니 제공이춘화 할머니가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고향 벽란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6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1]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中)

남편 제대금으로 좌판 3개 사 50년째 장사1930년대 조성 정식명칭은 송현 자유시장철거 후 다시 재건 미군 물건 팔면서 '명성'군복 자체가 패션이던 시절 가장 많이 팔려당시 한달 수익이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군복 염색 안하고 팔면 '불법' 벌금 물기도부대물건 줄어 미제 청바지 등 수입품 대체의류산업 발전 등으로 쇠퇴… 명맥만 유지경인전철 동인천역 4번출구(북광장) 오른편에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가 있다. 한눈에 봐도 지은 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이 거래됐다고 해서 '양키시장'으로 불렸다. 인천 동구가 행정 명칭으로 정한 이름은 '송현 자유시장'이다. 양키시장은 1930년대에 조성됐다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골목을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춘화 할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이곳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직업 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서울 청량리 '태창방직' 공장에 다녔다. 결혼 뒤에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살았다. 1966년께 남편은 대위로 제대를 했는데 제대금이 15만원이었다. 당시 15만원이면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양키시장의 좌판 3개를 샀다. 당시 집안 식구들이 인천 동구에 살아 양키시장과 인연이 닿았다. 양키시장은 주식회사 형태로 돼 있어 회사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좌판 계약을 했다. 가게 이름은 '은영사'로 정했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올해로 51살이 됐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이야기하다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장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세월이 오래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재고나 팔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매일같이 허탕이다.양키시장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시장으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됐다. 양키시장이 생기기 전인 1890년대에 중구 신포동에는 어물전(생선전)이 있었다. 채소를 취급하는 '푸성귀전'도 있었다. 신태범의 책 '인천 한 세기'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이곳(신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현재 인천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신포시장의 전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양키시장 자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는데, 1925년 매립됐다고 한다. 인천학연구원에서 기획한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라는 책에 따르면, 1937년 이 자리에 '송현일용품시장'이 들어섰다가 194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전술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미국이 1945년 3월 일본 도쿄에 '소이탄(시가지와 밀림을 태우는 목적으로 개발한 포탄)'을 이용한 공격을 했고, 목조건물이 많았던 일본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소이탄 공격으로 인한 화재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시가지를 중간중간 공터로 만드는 일명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인천의 경우 만석동, 송현동 일대에 3곳이 지정됐는데 양키시장 자리가 포함됐다. 해방 후 제물포상인보존회의 주도로 시장 재건이 추진됐고, 노점상들은 송현동 100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소성자유시장자치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등에서 시장으로 물건이 흘러들었고, 미군 물건을 팔면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도 양키시장과 신포동 일대의 시장 성장사가 잘 설명돼 있다. 전국적으로 이 같은 양키시장이 많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인천과 대구의 양키시장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인천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 됐다. 시장 골목골목에 인파가 몰려 제대로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이 미어졌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50만~7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 중 1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한 달이면 250만원 이상을 벌었다.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정도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교육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도 샀다.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 것은 군복이었다. 1960년대는 국내 옷감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은 그 자체가 유행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군복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80년대까지도 군복을 구하러 시장에 오는 사람이 많았다.우리의 현대 의류 역사를 정리한 책 '현대패션 110년'은 195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경향을 군복으로 설명한다. "군용담요는 겨울옷을 만드는 원단이 되었고, 미군의 털양말은 어린이용 스웨터로 활용되었으며, 카키색의 군복 바지는 몸뻬로 개조되었다. 염색한 군담요 의상과 군 점퍼, 미처 염색이 끝나지 않은 카키색 군복을 줄여서 수선한 바지, 그리고 군화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었다. 미군 군수물자에 찍힌 'UN'이나 'U.S.A.'라는 글자는 염색을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군 담요에 물감을 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으면 'U.S.A'라는 글자가 비쳐 나와 그 옷 주인의 별명이 'U.S.A.'라고 불리는 웃지 못할 서글픈 추억도 있었다."양키시장에서는 군복 이외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이 팔렸다. 할머니도 군복 이외에 미군 군화, 반합 등을 팔았다고 했다. 다른 상인들은 통조림, 담배, 과자를 팔고 시장에는 암달러상도 있었다. 할머니는 이들 물품이 인천 부평의 '캠프마켓'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도 문산, 동두천 등 수도권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도 흘러왔다고 했다.동아일보 1955년 5월16일자는 당시 양키시장의 물품이 어떻게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오는지 4단계로 구분해 소개했다. 미군 육지 수송을 할 때 빼돌리기, PX에서 빼돌리기, 미군 부대 출입하는 개인이 가져오기 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한국에 수송되는 단계에서 대량으로 빼돌린다고 했다. "흔히 '양키' 물건은 미군인들이나 또는 미군부대에 드나드는 한국인 종업원 등에 의해서 새 나오고 구호품 등에서 시장에 흘러나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이 방면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물론 약간의 양키 물건은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빼내오는 소위 '얌생이'에 의해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소비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양키' 물품은 도저히 그러한 미미한 공급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첫째 단계가 미군 수송선에서 물품이 양륙(揚陸)될 때 그 방면의 요로와 사전 연락이 있은 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감쪽같이 집더미만한 (때로는 반톤급) 짐 덩어리가 괴짝으로 송두리째 옆으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조고만 발동선이 동원되고 때로는 한번 덤벙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깥 세상에 나오게도 된다."당시 군복을 그대로 입을 경우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전점퍼나 전투복 상의를 검은색으로 염색해 팔았다. 전투복 하의를 염색한 '스모루바지'도 인기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사이즈가 '스몰(small)'밖에 없어 스모루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대패션 110년'은 "시장골목은 염색집으로 넘쳐났고, 드럼통 염색 솥은 수증기를 뿜으며 쉴 새 없이 군용물자를 삶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일부러 모자를 찢어 다시 재봉틀로 누벼 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역시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었다"고 했다.이춘화 할머니는 염색하지 않은 옷을 팔다가 여러 차례 단속을 당했다. 단속되면 옷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 한 달 치 수익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상인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미군 헌병이나 경찰이 와서 군복을 뺏어가고 그랬지. 뭐 알려주는 것도 없어. 갑자기 와서 다 뺏어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군복을 많이 내놓지 않고 다른 데 숨겨 놓기도 하고 그랬어."방일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생활 100년·옷'에도 이 당시 단속 풍경이 그려진다. "관공서에서 군복 군화 등 미국 구호 물자를 일반인에게 배급하였는데, 배급하는 것 외에도 도난품이 많아져 경찰 당국으로선 큰 두통거리였다. (중량) 미군 원조 물자 구제품을 염색하는 전문 염색점이 서울 청계천변에 생기기도 하였다. 군용 기름 드럼통에 검정물을 끓여서 카키색 군복을 물들이는 곳이 즐비하고, 방파제로 쌓아 놓은 돌 위에 염색한 옷을 말리는 광경은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의 풍속도였다."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군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청바지, 체육복 등도 팔았다. 일주일에 2번은 전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양키시장까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할머니와 같은 상인이 많아 역전에서 보따리를 든 사람의 탑승을 막기도 했다.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이 봉고차를 빌려다 장을 보게 됐고, 나중에는 택배로도 물건을 받아보게 됐다"고 했다.양키시장에서는 인천항을 통해 뱃사람들이 가져온 미제 청바지도 팔았다. 일본서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점퍼도 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오는 소위 '짝퉁'도 많았다. 해외 스포츠 브랜드 등이 많았다. 인천학연구원이 낸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는 "1970~80년대 부평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의 없어졌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 물건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양키시장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들, 소위 말하는 짝퉁을 파는 시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가짜 메이커도 좋다고 학생들이 찾아 입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가짜를 입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국내 의류산업이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양키시장은 경쟁력을 잃어갔던 거다. 2000년대 초반 단행된 '수입소화물규제'로 중구 항동 제2국제여객터미널 통해 수입상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오던 물건의 제한량이 40㎏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시장 쇠퇴의 원인으로 꼽힌다.지금은 시장에 있는 90여 개 좌판 중 절반은 비어 있다.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이북 출신이 절반 이상으로 수십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장사를 그만두거나 세상을 떠났다. 양키시장에서 여전히 장사하는 실향민은 할머니를 포함해 3명뿐이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50년 넘게 인천 동구 송현동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춘화 할머니가 가게에 진열된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춘화 할머니의 가게 '은영사'. 할머니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예뻐서 지었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09 홍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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