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0]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上)

1950년 겨울, 일곱식구 인천 화수동 거쳐 안산行겨우 숨은 방공호가 전쟁 중심부 이때 모친 잃어다시 인천으로 갔다가 먹고 살 걱정에 고향 복귀인민군 괴롭힘 너무 심해 강화도로 마지막 피란10대때 '인천노동사 큰 의미' 심도직물 공장 취직이후 대구·서울 등 섬유산업 중심에서 경력쌓아고려시대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한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 출신 이춘화(83)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무려 4번이나 피란살이를 했다. 그 뒤 10대 여공생활을 거친 할머니는 인천 동구 일명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옷 장사를 하고 있다. 4번의 피란과 10대 중반에 시작한 직물공장 여공생활, '양키시장'에서의 좌판 장사까지, 이춘화 할머니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원더우먼'의 삶 그 자체다.이춘화 할머니가 처음 피란을 나온 것은 1950년 겨울이었다. 벽란도 옆 '고미포'에서 돛단배를 타고 인천 화수동으로 왔다. 부모와 오빠 둘, 여동생 둘, 일곱 식구가 쌀이며 짐을 배에다 싣고 나왔다. 인천에서 오빠들은 학도병으로 지원 입대했다. 인천에서 머문 시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 중공군이 인천까지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경기도 안산까지 두 번째 피란을 떠났다. 국가기록원의 '6·25전쟁 제 3단계'를 보면 유엔군은 1951년 1·4후퇴로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했다. 할머니는 안산 '무찌리'라는 동네에 있는 민가 뒤 방공호에 숨어 있었는데, 피란지가 전쟁의 중심부였다고 기억했다. 방공호에 있으면 온종일 미군 비행기 쌕쌕이가 오가고 포탄이 떨어졌다. "피란을 간다고 한 건데 거꾸로 전쟁 속으로 들어간 거야, 아침에 (방공호에서) 나오면 포탄이 말이야 마당으로 한가득이야." 이때 할머니의 어머니가 그만 포탄에 맞아 돌아가시고 말았다.할머니는 당시 안산에서 중공군이 쏟아져 내려오는 장면도 목격했다. "중공군은 겨울이라 위장을 하려고 그런지 하얀색 이불을 뒤집어쓰고 왔어. 사람 수가 많아 보이려고 했는지 꽹과리를 치고 난리인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몰라."할머니가 피신한 마을에는 인민군들도 내려왔는데, 주민들에게 큰 해코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마을 주민과 한 인민군 장교가 잘 지냈다. 마을 주민들은 인민군에 밥을 해주고 사이 좋게 지냈다고 한다.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이 인민군 장교가 할머니 가족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줬다. 안산에서 전투가 계속되니 차라리 다시 인천으로 피하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은 수색(서울시 은평구 수색동 일원)을 거쳐 서울로 갈 것이라며 자신과 방향을 달리해 인천으로 가면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를 다니는 인민군이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가, 인천으로 가는데 산 쪽으로 가지 말고 밭이나 논두렁 가운데로만 가라고 했어. 길 양 끝에는 폭탄을 묻었다는 거야. 근데 진짜로 3일인가 있었는데 산에다 엄청나게 퍼붓더라고. 그 인민군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피란했지."할머니 가족은 인천에 있다가 먹고살 길이 막막해 도로 고향에 들어갔다. 이북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화수동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 초지로 갔다가, 벽란도와 가까운 산이포까지 걸어간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벽란도 고향으로 갔다. 세 번째 피란이었다. 할머니는 "이북에 가니까 다 말짱했다"고 했다. 고향에 간 할머니 가족은 예전처럼 농사를 지었다. 농사는 1951년 1~2월부터 6월까지 계속됐다. 그러다 인민군들이 너무 괴롭혀 어쩔 수 없이 네 번째로 다시 강화도로 피란을 나왔다는 것이 할머니의 얘기다. 인민군은 할머니 가족이 '이남 사람'이라며 분산 배치했다. 할머니는 동생과 함께 해주 근방까지 걸어가야 했다. 인민군은 벽란리 근처 '방개월'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둘씩 나눠 갈 곳을 말했다.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소총 개머리판으로 찍어 내리고는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 한 명과 한 조를 이뤘다. "왜정 때보다 더 많이 뺏어갔어. 거기다 계속해 강제로 교육을 받게 하고, 가족까지 나눠서 가라고 해서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 할머니가 강화도로 다시 피란을 나올 때는 강화도에 있던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 밀선을 탔는데 강화도에서 안전한지를 신호로 알려줬다. "강화도에서 횃불을 두 번 들면 '적군이 있다'는 얘기였고, 세 번을 들면 '아무도 없다'는 식이었지. 강화도 신호랑 물때랑 맞춰서 그렇게 강화도로 다시 갔어. 전쟁 속을 들어갔다가 전쟁 속으로 다시 나왔어. 전쟁 마당 마당 다 돌아댕겼네."4번째 피란 이후 이춘화 할머니는 강화도의 심도직물 공장에 다녔다. 할머니 나이 16~17살 때였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와 함께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터를 찾았다. 할머니가 심도직물 터에 발을 디딘 것은 66~67년 만의 일이다. 할머니는 '첫 직장' 심도직물 터 곳곳을 둘러보면서 잊고 지냈던 기억을 더듬었다. "심도직물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나 궁금하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공원으로 바뀌었네. 그려."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선원면에 살았는데, 매일 왕복 20리(약 8㎞) 길을 걸어 다녔다. 지금은 심도직물 터에 굴뚝만 남아 있는데, 그 옆의 비석에는 '이곳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할머니는 일할 당시(1953년 추정) 심도직물의 공장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기억했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할머니가 일했을 때보다 크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京畿事典)'을 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으로 돼 있다.강화군청이 심도직물 터에 설치한 표지판에는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고 돼 있다. 강화문화원에서 1976년 발행한 '강화사'는 심도직물,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심도직물 공장은 설립 초기였는데도 최신 기술이 도입돼 기계로 '뉴똥(비단의 일종)'을 짰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우리 옷감이야기 103(교문사)'이라는 책을 보면 1950~60년대 인조 뉴똥 생산이 이뤄지면서 의복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현대패션 110년'이란 책 역시 "1950년대 옷감은 한복감으로 고급에 속했던 실크, 즉 뉴똥이 인기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당시 뉴똥을 짜는 기계의 실이 끊어지거나 하면 그것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공장에는 이북출신이 많았고, 강화 본토박이도 있었어. 직원은 한 20명 정도 됐어. 당시 대부분 손으로 옷감을 짰는데, 기계가 짜는 것은 처음 봐서 신기했어. 뉴똥을 짜면 돌돌 말아서 서울 종로 4가에 가져다줬다고 해. 거기서 한복하고 이불껍데기하고 만들고 그랬던 것 같아."심도직물 터를 찾은 할머니는 완전히 10대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할머니는 심도직물 외에도 여러 직물 공장이 강화도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강화도는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다. 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강화도는 섬유산업 중심지 자리를 놓고 대구 등과 경쟁을 해야 했다. 할머니도 심도직물에서 1년 정도 일하다 다른 여공들과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침산동에 있는 '경방방직'이라는 업체였다. 이곳도 기계로 뉴똥을 짰는데 강화도 심도직물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컸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대구에서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보면 1954년 9월 대구에 제일모직이 설립됐고, 1956년에는 염색 가공공장이 준공했다. 할머니는 대구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다시 서울 청량리에 있는 한국 최초 나일론 공장 '태창방직'에서 2~3년 일했다.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한 축을 형성했던 섬유산업의 중심에 이춘화 할머니가 있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최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터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심도직물 굴뚝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일했던 10대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굴뚝.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02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9]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下)

구룡강 기슭 용강리 약산동대 유명김소월 외에 많은 문인들도 매료돼"강화도 고려산도 여기는 못따라가"고구려때 쌓은 성곽 철옹성의 고장3대가 살던 소림면 농사짓기 좋은 곳당시 냉면은 손님 접대용 귀한 음식잔칫집에 빠지지 않던 온반도 '자랑'핵시설 들어서 풍경 많이 변했을 듯# 이야기 하나실향민 명창식(98) 할아버지가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용강리(龍江里)를 떠난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다. 긴 세월에 많은 기억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게 있다. 고향의 '멋과 맛'이다.영변 용강리는 관서지방을 흐르는 청천강 지류인 구룡강이 흐르는 동네라서 붙은 지명이다. 구룡강 기슭에는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시 '진달래꽃'(1922)으로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가 있다. 약산동대는 제일봉(해발 488m), 동대, 학벼루와 거북바위 같은 기암괴석이 있는 곳을 통칭한다. "우리 집에서 구룡강을 건너면 약산이야. 여기저기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솟은 돌산인데,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면서 놀았어. 조금 커서는 나무하러 다녔어. 봄에 제일봉 꼭대기에 오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산 전체를 수놓았더라니까. 오죽하면 소월이가 약산 진달래를 노래했겠나."평북 구성 출신의 김소월뿐 아니라 여러 문인이 깎아진 절벽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에 매료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노자영(盧子泳· 1898~1940)은 기행문 '약산동대'에서 '붉고 붉고, 타고 타고, 만지홍(滿地紅) 만지적(滿地赤)의 동대로 가는 길이 모두 다 정열이요, 모두 불덩이가 아닌가'라고 극찬했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金億·1896~?)이 약산동대를 여행한 이후 제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이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1944)에 실렸다.'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흔하디흔한 진달래이지만, 어딜 가도 고향에서 핀 꽃만큼 아름답지 않은 게 실향민의 마음이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엘 가 봤는데 약산동대보다 못하다"고 했다. 영변은 약산동대를 낀 '철옹성(鐵甕城)'의 고장이기도 하다. 철옹성은 영변읍을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사방을 두른 둘레 14㎞, 높이 6~7m짜리 성곽이다. 고구려 때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계속 개축됐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약산의 험한 것은 동방의 으뜸이라'는 고기(古記)를 전하며 국방의 요충지로 꼽았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영변에 살 때 만해도 영변읍은 성곽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철옹성 안이 읍내였고, 장도 성 안에 섰어. 약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꼭 쇠로 만든 옹기 모양이었지. 산을 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야. 우리 동네서 40리(약 16㎞) 떨어졌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새벽에 장 보러 읍내 나가면 한밤중에나 돌아왔어."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평양에 머물던 선조(재위 1567∼1608)는 형세가 급박해지자 1592년 6월 다시 피란길에 올라 영변에 닿았다. '선조실록'의 임진년(1592년) 6월 13일 기사에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가고 관인 5~6명만 있을 뿐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임금의 철옹성 입성 장면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효종(재위 1649∼1659) 때 새로 고친 '선조 수정(修正)실록'에서는 삭제됐다. 선조는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를 명해 영변을 지키게 하고, 명나라가 코앞인 북쪽 의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한성, 성주, 충주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타고, 전주에 소장했던 실록만 남은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실록은 영변에 보관했다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강화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됐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울, 강화도, 영변, 봉화, 평창 등 5개 사고에서 나눠 관리했다. 조선 왕실 역사의 명맥을 잇는 데에 일조한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야기 둘명창식 할아버지는 'ㄷ'자 기와집에서 3대가 살았는데, 머슴을 둬야 할 정도로 집이 컸다. 8살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학교에 입학했고 혼자서 10리(3.9㎞)를 걸어 통학했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가정을 꾸리면서 'ㄷ'자 집에서 아래채를 증축해 'ㅁ'자 기와집이 됐다. 할아버지는 부인, 자녀와 함께 추가로 지은 아래채에서 지냈다고 한다. 구룡강 건너인 영변읍(철옹성)과는 달리, 할아버지 동네인 소림면은 땅이 넓고 비옥해 농사짓기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집마다 누에를 기르는 양잠 농사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조선 때부터 영변 주민들의 주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영변의 토산물을 오곡, 뽕나무, 삼(麻), 닥나무, 왕골, 배, 밤, 꿀, 옻, 석이(石耳), 오미자, 잣, 지초 등으로 적었다. 1530년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실(絲), 삼, 오미자, 인삼, 벌꿀, 잣, 사향(麝香), 자초(紫草) 등을 영변 토산물로 꼽았다. 실을 뽑아낼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는 양잠의 필수 작물이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평안도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어릴 적부터 먹었던 냉면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국민음식'이 된 냉면의 본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냉면을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이라고 전하며 '냉면은 관서지방의 냉면이 최고다'라고 평가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10대 시절이던 1920~30년대만 해도 냉면은 손님 대접할 때나 내놓는 귀한 음식이었다. 메밀면을 뽑는 국수틀을 가진 집도 마을에서 한두 집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변에서는 손님한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냉면 먹으러 가자는 뜻일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어. 하얀 동치미 국물에다가 메밀면을 말아먹기도 했어. 고기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낸 다음 식혀서 면을 말고 고기를 얹어 먹는 게 제일 고급이지. 소나 돼지가 귀해서 산에서 꿩을 잡아다가 육수를 내기도 했어."냉면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메밀면을 뽑는 작업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메밀가루는 점성이 별로 없어 잘 뭉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생몰년 미상)이 국수를 뽑는 과정을 그린 풍속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꾼 한 명이 거꾸로 사다리에 올라 받침대에 등을 대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국수틀을 누르며 면을 밀어내고 있다. 이게 바로 평양식 메밀국수 제조법이라고 한다.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영변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진한 메밀 냄새를 맡았던지 그때의 경험을 쓴 시 '북신-서행시초2'에서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고 읊었다. 백석은 1941년 '국수'라는 제목의 평안도 냉면을 소재로 다룬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중에서)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잔칫집에서 빠지지 않던 온반을 먹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은 생소한 평안도 음식인 온반은 푹 삶은 닭고기 육수에 각종 고명을 얹어 밥을 말아먹는 국밥의 일종이다. 이북식 잔치음식이라고 한다. 영변군 영변읍과 용강리가 속한 소림면 일대는 북한이 1960년대 초반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연구소를 조성했다. 이후 북한에서 핵물질을 생산하는 시설은 대부분 영변에 들어섰다. 고향 땅의 모습이 크게 변했을 거라는 게 명창식 할아버지의 걱정이다. "이젠 고향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가물가물해. 영변에 핵시설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데 어린 시절 귀한 별미로 먹던 냉면 맛이랑 온반 맛은 잊히질 않아. 마지막으로 진짜 고향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어."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평북 영변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과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약산동대. 특히 봄철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는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진달래가 만발한 사진은 남한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19세기 초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영변 철옹성 일대 지도. 성 왼쪽 아래 소림면(少林面)이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출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조선 말기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이 그린 메밀국수 면발을 뽑는 장면. 한글로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평양식 국수 제조 방식이다.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箕山),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

2017-07-26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8]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中)

큰아버지 명제세 선생 임시정부서 맹활약1919년 3·1운동 직후 2차 '만세운동' 추진강화도 출신인 유경근·윤종석과도 연결돼1920년대 조만식과 국산품애용운동 전개초대 심계원장 역임·전쟁 직후 납북 당해아버지 명제영 목사 영변교회 전도사 활동당시 담당 목사가 이후 강화 잠두교회 부임이동휘·조봉암이 다니던 곳… 민족애 영향아들 명창식 "후세에서 오래 기억됐으면…"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명창식(98) 할아버지의 집안 사람들은 인천 강화도 출신 독립운동가들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강화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감리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와도 묘하게 얽혔다. 할아버지의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명제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1910년대 초반 중국 톈진(天津)에서 무역상을 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무렵 톈진에서는 조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이 결성됐는데, 명제세는 부단장으로 참여해 단장까지 지냈다. 불변단은 결성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외곽단체로 편제돼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임시정부 '특파원' 역할을 했다. 명제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9월 톈진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 강화도 사람들이 자주 묵는 '조선여관'에서 지내면서 강화도 출신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과 시위운동을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유경근은 1905년 강화도 자택에 광창학교를 설립한 교육운동가이기도 했고, 잠두교회 분회를 지어 헌납한 종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진 못했다. 유경근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뒤였기 때문이다. 대동단원이자 세브란스의학교 3학년 학생이던 강화도 출신 윤종석(尹鍾奭·1896~1927)도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6권에 실린 윤종석의 당시 심문조서에 이 같은 명제세와 유경근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명제세는 이듬해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주요 간부를 잃은 불변단은 해산됐다. 불변단이 사라진 뒤 톈진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가 생겼다. 그중 하나가 사회주의 계열의 '고려국민회'다. 이는 강화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한 이동휘(李東輝·1873~1935)가 지원한 단체였다고 한다. 명제세는 1920년대 초중반에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해 국산품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큰아버지는 양복을 절대 안 입었고, 늘 선비처럼 길게 수염을 기른 채 하얀 한복만 고집하셨어.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지식하지 않고 호탕한 성격이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어.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와해된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 명제세 선생의 행적은 당시 신문이나 자료를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요시찰 인물로 지정돼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까지 일본 형사가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며 "영변에 탄광이 많은데, 해방될 때까지 탄광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월남해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결성을 주도한 정치조직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남한 정부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명제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감사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5월 북한 당국에 의해 고향 영변에서 쫓겨나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큰아버지가 장관급인 심계원장에 오르면서 현 서울역 옆에 있던 중앙청(1996년 철거) 인근에 관사가 제공됐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도 심계원장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머지않아 노량진에 집을 얻어 독립했다. "큰아버지는 심계원 공무원들한테 출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라고 지시했어. 감사업무를 하는 공무원이니까 외부에 나가서 밥 얻어먹지 말라는 뜻이거든. 너무 강직하셔서 아랫사람들한테는 영 인기가 없었지."명제세 선생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을 지키다가 납북됐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명제세의 아들이 김성칠을 찾아온 장면이 나온다. 1950년 8월 6일 일기를 보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의 납북에 대해 "정부는 부통령도 내버리고 외국사신들에게까지 충분한 연락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하는 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가) '40년 동안 일제의 몹쓸 착취와 닦달을 받고 나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가엾은 조선 사람들이 아닌가. 피차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어야지. 서로 칼부림질해서 함께 넘어져 죽을 까닭이 무엇이 있나'라고 하시며 순순히 포박을 받으셨다"고 말했다고 김성칠은 기록했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는 평북 영변에 살던 시절 감리교 영변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백학신(白學信·1899~?) 목사가 영변교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평북 용천 출신인 백학신 목사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영변교회 주관자로 있다가 1948년 강화도로 부임했다. 1949년부터는 잠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서 전한다. 백학신 목사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9월 말 강화도를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납북됐다. 1900년 설립된 잠두교회는 이동휘가 초창기 교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은 독립신문 기자 출신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같은 걸출한 인물이 담임목사를 맡았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도 어릴 적 잠두교회를 다녔다. 소설가 이원규가 쓴 '조봉암 평전'에서는 이동휘가 강조한 신앙을 통한 구국투쟁이 잠두교회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 같은 배경을 가진 교회를 다닌 어린 조봉암이 민족애와 조국애를 생각하게 됐을 거라고 했다. 죽산 조봉암은 1919년 3월 18일 강화읍에서 열린 '강화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같은 해 4월 중순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약 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평생 모은 할아버지 집안과 감리교회의 역사 관련 자료를 살필 정도로 배움의 열정이 남다르다. 명창식 할아버지를 세 번째 찾아간 지난 5일 오전 인천 남구 감리교 원로원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버지는 인천지구 평북도민회가 1997년 펴낸 '평안북도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취재기자에게 설명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가져온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큰아버지 명제세에 관한 대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인터뷰에 동석한 막내아들에게 "당장 책을 주문해달라"고도 했다. 실향민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영변에 대한, 집안에 대한 자료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룬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기억은 잊히겠지만, 자료는 오랜 시간 남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1990년 감리교 원로원에 입주하면서 인천과 첫 인연을 맺었다. 스스로 그 이전까지는 인천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삶과 삶에 얽힌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니 인천의 이야기와도 연결 지어졌다.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실향민 1세대의 이야기를 모으는 게 중요한 이유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옛날에 만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젠 몇 사람 남지 않았다"며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세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거기서 새로운 걸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사진/명창식 할아버지 제공·경인일보 DB·한국민족문화대백과명창식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에서 낡은 책을 꺼내 읽으며 집안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2017-07-19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7]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上)

올해 98세 인천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서 지내소림면서 대대로 풍헌 지낸 사회 지도층 가문해방직후 농촌청년훈련소·조선민주당서 활동공산당과 패싸움 연루돼 반동분자 낙인 감옥행이후 정치가였던 큰아버지 도움으로 '서울살이'전쟁때 한강다리 폭파로 집 부서져 피란길 올라종전이후 전국 곳곳서 37년간 목회자로서 살아목사였던 부친과 함께 농촌서 농업활성화 노력'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명창식(98) 할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군 소림면에서 태어났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이 쓴 시 '진달래꽃'(1922) 속 '영변에 약산(藥山)'을 낀 바로 그 동네다. 감리교 목사 출신인 명창식 할아버지는 1990년 은퇴한 뒤 인천 남구 주안동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원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1층짜리 단독주택인 원로원에 딸린 마당에는 각종 채소와 과일을 기르는 텃밭이 소담하다. 할아버지가 지내는 단독주택과 인근 다세대주택으로 구성된 원로원에는 은퇴한 목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100세가 넘은 원로도 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부인과 사별했고,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도 여기서 세상을 떴다.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교단 원로를 예우한다는 차원으로 1964년 인천 주안동에 전국에 하나뿐인 감리교 원로원을 마련했다. 원로원 땅은 해방 이후 감리교 목회자들이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적산(敵産)농지였다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낸 '해방 후 감리교 농촌선교사' 자료에 나온다. 감리교 직영농장을 운영하면서 농촌선교운동본부로 쓰다가 은퇴 목사를 위한 주택을 지었다. 태어난 평북 영변에서 지금의 인천에 이르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 집안에는 근현대사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정치인도 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역사교과서 속에나 나올 법하다.할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에 이미 가정을 꾸린 20대 중반이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영변 소림면에서 대대로 풍헌(風憲)을 지낸 사회 지도층이었다. 풍헌은 조선 때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지방자치기관인 향소에서 면 단위 행정을 맡은 지역 양반이다. 전답 60마지기(1만2천평)를 소유할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다. 또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다. 부친 명제영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영변에서 선교활동과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몸담았다. "원래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술고래였어. 유학자인 할아버지가 보다못해 '교회에선 술을 못 마시게 하니 교회에 나가라'고 해서 30대를 넘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셨지. 그때부터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셨어. 아버지가 평양신학교에 다닐 동안 장남인 내가 농사짓고 집안일을 봤어."명창식 할아버지도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평안북도에서 세운 농촌청년훈련소에 들어갔다. 당시 각 면에서 2명씩만 선발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엽부터 영변군 농회(農會·농협의 전신)에서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기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기술직 공무원이다. 논과 밭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양수기를 도입해 농업용수를 끌어온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남건국준비위원장인 조만식(曺晩植·1883~1950)이 1945년 11월 창당한 조선민주당에서 청년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선 해방 직후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건국운동이 활발했다.해방 직후만 해도 북한은 김일성(金日成·1912~1994)의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기독교도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조선민주당, 천도교 정당인 청우당 등 3개 정치세력이 협력하는 모양새로 정국을 이끌었다. 이들 정치세력은 1946년 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해 같은 해 3월 토지개혁 같은 주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토지개혁 이전인 1945년 말에 미리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줬다고 한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낸 '북한의 역사'를 보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할아버지 집안 같은 경우를 '애국지주'로 인정해 주택이나 농기구를 몰수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 소림면당에서 활동하면서 토지개혁도 농회에서 일했던 내가 앞장서서 했어. 집에 딸린 식구에 따라 남자는 100점, 여자는 70점, 아이는 50점으로 점수를 매겼어. 점수가 높은 순으로 토지를 할당해줬어. 산지는 나라 소유가 됐고. 왜정 때 일본놈들이 땅을 하도 꼼꼼하게 정리해놔서 그나마 수월했지."토지개혁은 북한 내 소위 지주계급의 저항을 불렀고, 조선민주당을 지지하던 상당수 지주와 자본가가 월남을 택했다. 조선민주당과 공산당 간 대립도 점점 심해지면서 물리적 충돌도 잦았다. 명창식 할아버지도 1946년 초 영변군에서의 조선민주당원과 공산당원이 벌인 패싸움에 연루돼 5개월 동안 평양 보안국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89년 평안북도민회에서 발간한 '평안북도 망향 40년사'를 보면, 이 사건으로 투옥된 영변군 조선민주당원 60명 명단에 명창식 할아버지가 포함돼 있다. "같은 동네에서도 민주당원이랑 공산당원은 사이가 나빴어. 나무로 창을 만들어서 서로 싸운다기에 내가 공산당 소림면 책임자랑 타협해 중재했는데도 보안국으로 들어오라는 거야. 싸움을 모략했다며 반동분자라고 나한테 뒤집어씌웠어. 그때부터 북한에서 살기 힘들어질 것 같더라고."할아버지를 평양 보안국에서 풀어준 이는 목사이면서 1970년대 북한 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정치인 강양욱(康良煜·1903~1983)이었다. 김일성의 외가 쪽 친척인 강양욱은 명창식 할아버지 부친의 평양신학교 3년 후배여서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 식구들은 1947년 5월 당국에 의해 "숙청당했다"며 집에서 쫓겨났다. 결국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4남매 중 셋째다. 둘째 형과 당시 시집간 막내 여동생은 북에 남았다. 할아버지는 당시 서울에 있던 큰아버지에게 의탁했다.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큰아버지 도움으로 명창식 할아버지는 난지도 농장을 관리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한강 하류에 있는 272만㎡ 규모의 범람원인 난지도는 당시 잡곡이나 콩·옥수수를 재배하는 밭이었다. 이후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의 쓰레기매립장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됐다.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노량진에 조그만 목조주택을 마련해 부모와 함께 살았다.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한 지 3일째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명창식 할아버지의 집이 마치 지진이 날 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흙으로 된 벽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고 한다. 한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를 폭파한 순간이었다. 이날 한강 다리 폭파로 피란길에 오르려 다리 위에 있던 민간인을 포함해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당시 미군 군사고문단은 추정했다. 미군은 6월 29일부터 이틀간 폭격기를 동원해 한강 다리에 맹폭을 가했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6월 27~28일 인민군이 막 점령하기 시작한 서울의 상황이 나온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였던 김성칠은 이때 일기에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대포알은 쉴새없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휘잉하고 하늘을 찢는 듯 공중을 나는 소리, 이어서 탕 하고 포탄의 터지는 소리. 저것이 백에 한번 추호라도 겨냥을 잘못하면 우리는 죽을 운명에 놓여있다'고 적었다. 서울이 포화에 휩싸이자 명창식 할아버지 식구는 피란길에 올랐다."이북에서 반동분자로 찍힌 데다가, 집도 부서져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경기도 이천의 교회로 갔다가 충남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내려갔지. 큰아버지만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되면서 사촌 형님이랑 둘이서 다시 상경했어. 큰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잡혀갔고, 노량진 집은 폭격 맞아서 흔적도 안 남았더라고."수복된 서울로 다시 올라온 명창식 할아버지는 1·4후퇴 때까지 중앙청(1996년 철거된 조선총독부·대한민국 초기 정부청사) 인근에서 미군 구호물자 배급일을 했다. 주로 밀가루를 주민들에게 나눠줬는데, 먹을 게 귀한 전쟁통이라 밀가루조차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서울대 교수조차 배를 곯는 상황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김성칠의 1950년 10월 18일자 일기를 보면, 한 동료 교수가 '처음엔 매 세대에 밀가루 한 포대씩을 나눠주느니, 쌀을 5홉씩 배급 주느니 말만 들어도 푸짐하더니 5홉이 2홉으로 줄고 2홉이 다시 1홉 4작으로 줄고 그거나마 뚝 끊어지고 (중략) 인제는 꼼짝없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이 되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를 따라 경북 김천에 있는 아천교회 전도사로 활동했고, 얼마 후 목사로 부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대구, 경북 경주, 충남 천안, 논산(강경)을 비롯해 전국을 돌며 37년간 목회자로 살았다. 전쟁 이후에도 농촌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아버지도, 나도 평생 농촌에서 목사를 지내면서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어. 1960년대까지도 농촌은 잘살지 못했거든. 연탄보일러도 직접 만들어서 교인들한테 나눠줬고…. 농촌을 살리고자 했던 그런 활동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돼."명창식 할아버지의 인생을 좇아가자니 인천의 이 원로원이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명창식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다./아이클릭아트

2017-07-12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6]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下)

'지산소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고향 기억집 앞서 합류해 줄맞춰 등교 '이북 스타일'과수원서 '진남포 명산물' 사과 따먹기도한국전쟁 후 마당에 '방공호' 새로 만들어'최고 명물' 제련소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동향' 최영애 할머니와 부모 소개로 결혼외할아버지 돌본다며 北에 남은 둘째누나아픈 동생 약 구해다 주던 '어머니 같은 분'美군함에 폭격당하는 마지막 모습 못잊어이호섭(76)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비석리(碑石里)다. 남포특별시 남부 '항구구역'에 위치한 도시로, 남포항에서 멀지 않다. 1·4후퇴 시기에 남한으로 피란 왔으니, 10대 이전의 고향 기억이 전부다.이호섭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줄을 맞춰 학교에 갔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집에서 학교까지 한 2키로(㎞)? 멀어야 3키로 정도 된 거 같아. 근데 개인적으로 학교에 못 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단체로 줄을 맞춰서 가야 해. 그게 이북 스타일이야."대문 앞에 나와 있으면 서너 명이 줄을 지어 온다. 대열이 집 앞에 다다르면,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 줄과 발을 맞춰 학교로 이동해야 한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때는 학생 수가 10여 명 정도 돼. 다른 곳에서도 (학생들이) 줄 서서 온다"며 "학교 정문 앞에서는 복장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이호섭 할아버지가 다니던 '지산소학교' 뒤편은 사과밭이었다. 할아버지는 "학교 뒤에 있던 과수원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사과를 따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진남포는 사과가 유명했다. 193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유치원 교사가 그 지방을 소개하는 '유치원에서 본 그 지방이야기'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유치원 교사 박옥향 씨는 "진남포를 사과의 산지라고 누구나 연상하지만 실로 사과가 많다"며 "송림이 자욱하게 들어서고 능금나무가 곳곳에 가득 서서 보기에 퍽 아름답다"고 했다. 남포지역 과수원 면적의 절반 이상은 사과밭이었다. 특히 이호섭 할아버지 고향이 있는 항구구역 등 남부와 중부지역에서 많이 산출됐다. 남포 사과는 알이 크고 맛이 좋아 그 지방의 명산물로 꼽혔다.'식민지 조선의 이주 일본인과 지역사회'(도미타 세이이치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2013년)에 진남포 사과 이야기가 나온다. 1905년 일본인이 야마모토촌(山本村)에서 사과 묘목을 가져와 조선인들에게 심게 한 것이 진남포를 사과 재배 산지로 만든 기원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비석리는 도시 변두리에 있었다. "비석리는 큰 동네였어. 조금 변두리였지만 시내와 같아. 인천으로 따지면 내가 사는 만석동이랑 비슷해. 도시인데 약간 사이드에 있는 거지."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거나 풀죽으로 때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초가집은 일(一)자 모양이었다. 부엌 1개와 방 2개로 돼 있었다. 마당에는 헛간, 장독대, 화장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면서 전에 없던 구조물이 생겼다. '방공호'다."전쟁 때 마당에 만들었어.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팠어. 어른 키로 한 키 반 정도는 팠을 거야. 그 위에 통나무를 얹어 놓고 흙 가마니를 높이 쌓았지."다행히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폭탄은 안 맞았지만, 미군 '쌕쌕이'(전투기)가 농토 위를 날아다니면서 움직이는 것만 보면 갈겨댔다"며 "미군이 마을 사람을 인민군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남포 앞바다에 전쟁포로를 빠뜨려 죽이고 달아난 것도 목격했다. 할아버지는 "전쟁 때 선창에 나갔다가 (인민군이) 포로들을 새끼줄로 묶어서 바다에 넣는 것을 봤다"며 "혼자 같으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열 명 이상을 묶어 놓았으니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진남포의 자랑거리 중에서는 제련소를 빼놓을 수 없다. 어마어마한 규모 하나로 명물이 된 것인데,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남한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2005년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남포에는 일제 침략자들이 대륙 침략을 위해 설치한 군수산업의 부속물이 많았다. 일제는 서해안 일대에서 생산한 쌀을 약탈하기 위해 제분소와 정미소를 설치했다. 유색금속광물 등 지하자원을 빼앗기 위해 제련소, 제강소 등 산업시설도 건립했다. 이들 시설은 남포항 주변에 집중됐다. 배를 이용해 쌀과 광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흰 연기를 내뿜는 커다랗고 높은 굴뚝은 아이들에게 신기하기만 했다. "남포제련소가 아시아에서 최고로 크다고 했어. 굴뚝이 얼마나 큰지, 전쟁 때 미군이 굴뚝을 쐈는데, 너무 커서 부러지지 않고 꺾였어." 이호섭 할아버지는 "제련소로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약 40명이 손을 잡아야 에워쌀 수 있을 정도로 굴뚝이 컸다"며 "남포에서는 제련소가 가장 큰 구경거리였다"고 덧붙였다.이호섭 할아버지의 외조부는 남포제련소에서 일했다. 철판에 도면을 작성하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한다.설악산 계조암에 가면 흔들바위를 흔들어 보듯, 남포제련소를 방문하면 굴뚝을 에워싸는 게 코스였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함께 평남도민회에서 활동하는 강일근(89·평남 용강군 금곡면) 할아버지도 이 같은 추억이 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굴뚝이 얼마나 큰지, 국민학생들이 재면 40~50명은 손을 잡아야 굴뚝이 잡힌다"며 "굴뚝이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흔들린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또 "굴뚝을 한 번 청소하면, 그 사람은 1년 내내 먹고 놀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해방 이듬해 3월 혼자서 38선을 넘어왔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기독교 가정이어서 그런지 해방 후에 우리 집이 숙청 명단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잡혀 죽으니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나를 이남으로 보냈다"고 했다. 이어 "이북에 남아 있으면 손이 끊기니까 나를 보낸 것"이라며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 부인 최영애(73)씨도 한국전쟁 때 진남포에서 피란 나온 실향민이다. 둘은 인천에서 양가 부모님 소개로 만나 1966년 결혼했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최영애 할머니 부부는 피란 과정과 인천에 정착한 시기가 같다. 최영애 할머니도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와 군산에서 살다 인천에 정착했다. 친정아버지는 시아버지처럼 진남포에서 뱃일을 했고, 인천에 와서는 대한제분 일을 했다. 양가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최영애 할머니 고향은 진남포 후포리(後浦里)로, 남편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영애 할머니는 "남편은 변두리, 우리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며 "집 근처에 중국인 학교와 간장공장, 극장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인천과 서울 거리가 꼭 진남포와 평양 거리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진남포는 '인천의 야구 영웅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1950년 인천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제8·9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 등 화려한 성적을 낸 김선웅(1919~1978), 11년간 국가대표를 지내고 삼미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을 지낸 박현식(1929~2005)이 진남포 출신이다.이호섭 할아버지의 부친은 씨름을 잘했다."아버지가 씨름 선수는 아니었어. 몸은 호리호리했는데 힘이 상당히 셌어. 손으로 쥐면 풀지 못할 정도였지. 그때는 원정 다니듯이 친구들과 함께 평양, 황해도 등을 돌아다니면서 씨름 경기를 했어."진남포 출신이면서, 영화 '친구'를 만든 곽경택 감독의 아버지인 곽인완(83) 씨의 회고록 '소의 눈물'에서도 소 싸움 뒤에 이어진 아이들의 씨름 얘기가 실려 있다.'소싸움이 끝나면 소고삐를 소뿔에 칭칭 감아 소를 산속에 풀어놓고 이번엔 아이들 씨름판이 벌어진다. 씨름이 끝나면 서너 명씩 떼를 지어 산속을 누비며 머루도 따 먹고 개암도 따서 까먹다가 오후 서너 시쯤 되면 이웃 동네 밭에서 콩이나 밀을 서리해 먹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9남매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만 함께 피란 나오지 못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둘째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1950년 12월 초, 이호섭 할아버지가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중공군·인민군을 피해 남포항을 떠나는 날이었다. 둘째 누나는 4살짜리 조카를 등에 업고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둘째 누나를 배에 태워야 한다며 남포항으로 되돌아가자고 애원했다. 배가 남포항을 빠져나왔을 때 황해도 쪽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들이 남포항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었다. 남포항은 순식간에 뻘겋게 불바다가 됐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둘째 누나는 몸이 불편한 외할아버지를 돌보겠다며 피란을 포기했었다. 당시 둘째 누나 나이가 23살이다. 출가했던 큰누나도 피란하지 못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둘째 누님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자고 한 적이 있는데, '살아 있겠느냐'며 단념하시더라고. 폭격하는 것을 봤으니 그럴 수밖에."이호섭 할아버지에게 둘째 누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에 걸린 적이 있다. 그때는 전염병에 걸리면 일본놈이 수용소로 잡아갔다"며 "둘째 누님이 약을 구해서 사과와 함께 삶아 먹였다"고 했다.1992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화물선 항로가 개설됐다. 언젠가 사람도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올 것이란 실향민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2010년 '5·24 대북 제재 조치' 이후 남북 교역의 해상 통로였던 인천~남포 뱃길은 끊기고 말았다. ■ 평안남도 남포와 인천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호섭(76) 할아버지와 최영애(73) 할머니 부부가 인천 동구 만석동 자택에서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부는 1·4후퇴 때 각각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왔다. 진남포에서는 서로 몰랐다. 양가 부모 소개로 인천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2007년 인천항 1부두에서 북한 남포항으로 출항 준비하는 트레이드 포춘호. /경인일보 DB

2017-07-05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5]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中)

인천서 철부선으로 대한제분 일하던 父기계설비 들어서 많은 인부와 함께 실직'항만하역산업 기계화'로 분쟁도 계속돼본인은 부두 앞 철공소서 배 부품 만들어군 제대후 한국기계서 열차바퀴 등 제작창립 80년 된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전신돈 벌기위해 1978년 해외 근로자로 진출배추·무농장 경영에 車정비업체 운영도2000년대 귀국 예전 일자리 인근서 살아1·4후퇴 때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난 이호섭(76)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5~6년 정도 살다가 인천으로 왔다. 인천에 온 이유는 아버지 직업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뱃일을 했던 아버지는 남포항에서 화물 수송용 범선(帆船)을 몰았고, 피란 후 군산항에선 군사·원조 물자를 배로 실어 날랐다. 인천에 온 아버지는 대한제분 일을 했다. 500t짜리 철부선(鐵艀船) '대한호'를 이용해 외항선에 있는 밀을 인천항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대한제분 직원은 아니고 그 밑에 있는 업체에 소속됐던 것 같아. 대한호는 엔진이 없어서 예인선이 끌고 다녔어. 처음에는 인부들이 가마니를 메고 다녔는데, 나중에는 기계가 일을 다 했어."대한제분은 1952년 창립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1950년대 대한제분 종업원 수는 1천여 명에 달했으며, 하루에 4천 부대의 밀가루를 생산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일본제분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대한제분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친 것은 1952년 12월 25일이다. 해방 이후 정부의 귀속사업체였던 공장을 불하받아 재건한 것으로, 한국전쟁 직후 국내 최대 규모의 제분공장이었다. 대한제분은 양곡을 하역·관리하는 자회사 '대한싸이로'를 1971년 5월 12일 설립했으며, 인천항에 국내 최초로 현대식 곡물 전용 자동하역시스템을 구축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때때로 아버지 일을 도왔다. 중구 북성동1가 '월미도입구삼거리'에 대한제분 인천공장 출입구가 있다. 그 왼편으로는 북성포구 가는 길이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북성)포구에 배를 대면 기계가 위에서 에어(air)로 밀을 빨아들였다"며 "인천에 왔을 때는 대한싸이로가 없었고, (지금) 큰길가에 있는 건물로 (밀이) 바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1960년대에는 '대한호'처럼 작은 크기의 부선이 많았다. 60년대 중반부터 배를 탔다는 예인선 '한성호' 홍두표(71) 선장은 "예전에는 작은 부선을 '고무신발짝'이라고 불렀다"며 "빠지(바지선)는 성냥갑처럼 생겨서 윗부분이 평평하지만, 부선은 겉에 철판 테두리가 있거나 가운데가 파여 있어서 현미나 강냉이 등을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뗏마'(작은 배 일종)를 타고 다니며 양곡을 도둑질하는 사람도 있었고, 갯벌에 떨어진 양곡을 체로 건져 부대에 담아 가는 '뻘치기'도 흔했다.이호섭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대한제분이 기계화 설비를 갖추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기계화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높였지만, 일자리를 빼앗았다. 특히 부두와 배에서 짐을 나르는 인부가 가장 큰 피해를 봤다. 당시에는 노자(勞者)라고 불렸다.'하역노동운동사(항운노동조합 111년사)'를 보면, 항만하역산업 기계화는 60년대부터 서서히 시작해 197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하역사들이 다투어 시설을 확충하고 장비를 도입하면서 기계화에 따른 분규는 빈번하게 발생했다. 인천은 1975년 제7부두 양곡 작업 기계화를 둘러싼 대한싸이로와 부두노조 인천지부 간 분쟁이 대표적이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화수부두, 한염부두, 객선부두 등 부두 앞에 있는 철공소에서 일했다. 배 엔진을 수리하고 부품 만드는 일을 했다."화수부두 철공소에서 월급 생활을 했지. 철공소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아. 옆에 조선소가 있었는데, 배 문제 때문에 그 조선소 사장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철공소가 있던 자리는 횟집 등 식당들이 차지하고 있다. 울퉁불퉁하고 흙먼지 날리던 도로는 포장도로가 됐다. 할아버지는 "당시 철공소 건물은 함석으로 돼 있었다"며 "그 앞이 지금은 다 매립됐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했다.화수부두에는 철공소가 꽤 많았다. 화수부두 덕영철공소 공장장 출신인 권태명(81)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화수부두에만 철공소가 8개 정도 있었다"며 "차츰차츰 없어지더니, 모두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했다. 또 "철공소에서 '야끼다마'(燒球·hot bulb, 통통배에 장착하는 엔진)를 설치하거나 수리하고, 부속품을 만들어 썼다"며 "배 엔진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철공소는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다.개풍군에서 태어난 권태명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인천으로 피란 와 철공소에서 일했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덕영철공소 자리에는 얼음 가게 '세창얼음'이 영업 중이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항구철공소'와 '광일철공소'에서도 일했다. 항구철공소는 객선부두가 있던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었고, 광일철공소는 월미도입구삼거리에서 월미도 방면으로 가는 코너에 있었다.항구철공소는 신태범(1912~2001) 박사가 쓴 '인천 한 세기'에도 잠깐 나온다. '소형선박과 공장이 늘게 되어 30년대에는 한국인에게도 철공소를 차릴 기회가 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공업학교를 마친 후 그곳에서 기술연마를 하고 돌아온 李河泳(이하영) 씨가 해안동에 금성철공소를 개업하여 곧 경인, 조선 등 일본인 철공소를 누르고 선박 수리 분야에서 단연 일인자가 됐다. 그 후 해안동에 항구철공소(黃學根), 칠복철공소(현존) 등이 늘어났다.'이호섭 할아버지에게 항구철공소 사장 이름을 묻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황 씨였다"고 말했다. 상호와 사장 성(姓)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같은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인천에 철공업소가 처음 생긴 것은 1892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오츠카철공장(大塚鐵工場)이다. 하지만 이는 대장간 수준으로, 본격적인 철공소가 생긴 것은 러일전쟁 직전 인천철공소(仁川鐵工所)라고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인천상공인명록(1936년판)을 근거로 쓴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에 따르면 당시 대장업·철공업 부문은 일본 업체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영업세액으로는 조선인 최경운이 경영하던 업체가 가장 높아, 일본인과 조선인 간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올림포스호텔 근처에서 동광철공소를 운영하는 길철근(70) 사장도 이호섭 할아버지 얘기처럼 항구철공소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길철근 사장은 "여기가 (객선부두) 부둣가였을 때, 철공소들이 배 엔진 보링 작업을 했다"며 "지금은 여기(동광철공소) 하나만 남았다"고 했다. 이어 "옛날에는 '배 못'(목선 조립에 들어가는 쇠못)을 만들었다"며 "목선이 다 없어지면서 닻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길철근 사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피란 나와 아버지 밑에서 철공소 일을 배웠고, 지금까지 가업을 유지하고 있다. 월미도입구삼거리 '광일철공소' 옆에는 한염부두(현재 8부두)가 있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한염해운이 소금을 부린다고 해서 한염부두라고 했어. 그때는 이 기다란 (곡물)창고도 없었어. 부두 건너편 노란색 건물(하이젤냉장보세창고) 있는 곳이 소금을 쌓아 놓았던 곳이고, 그 옆에 소금 창고와 공장들(동일아파트 자리)이 있었어"라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1965년 군에서 제대한 후 '한국기계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했다. 그곳에는 열차 바퀴와 프레임(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뼈대) 만드는 일을 했다.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자리가 줄고 철공소가 하나둘씩 사라졌지만, 이호섭 할아버지는 또 다른 일을 찾아 기계화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한국기계 위치는 그대로야. 두산인프라코어가 되면서 더 확장됐지. 내가 일했던 공장 건물도 그대로 있는데 뭐. 선반(旋盤) 작업장이 소형반·중형반·대형반으로 나누어지는데, 나는 대형반에 있었어."이호섭 할아버지는 "철공소에서 배운 기술로 한국기계에 들어갔다"며 "열차 바퀴와 프레임도 깎고, 주문이 들어오면 일반 산업기계도 가공했다"고 덧붙였다.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4일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소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기계 당시 자료 가운데 한 공원(工員)이 열차 바퀴를 만드는 사진이 있다. 그 사진 속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호섭 할아버지다. 이 사진을 본 이호섭 할아버지는 "내가 일했던 작업장이 맞다"고 했다.두산인프라코어의 시작점은 1937년 국내 최초 대단위 기계회사 '조선기계제작소'다. 인천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200t급 잠수함까지 만들었다. 이후 한국기계공업(1963년)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 회사를 1976년 대우실업(대우중공업)이 인수하면서 2005년부터는 두산그룹의 일원이 됐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한국기계공업에서 4~5년 정도 일하다가 서울에 있는 모토로라 회사로 이직했다. "선반으로 전화기 만드는 기계의 부품을 깎아 줬다"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1978년 이란에 해외 근로자로 나갔다. 이후 리비아에서 배추·무 농장을 경영해 큰돈도 만져보고, 케냐와 우간다에서 자동차 정비업체도 운영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고관절이 좋지 않아서 다 접고 2006년인가, 2007년쯤 귀국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분 인천공장, 옛 철공소 자리,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과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 '인천만석비치타운'에 살고 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호섭(76·사진 오른쪽) 할아버지가 인천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는 동광철공소 앞에서 이 공장 길철근(70)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일했던 '항구철공소'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길철근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직장 동료처럼 '팔미도 다방'에서 외상 커피를 마셨던 일, 배 엔진을 수리하러 가면 기관장이 술부터 권했던 일 등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두 분 모두 한국전쟁 때 고향을 떠나 피란 온 실향민이다.김식만 치과의사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에 실린 항구철공소 사진.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다음 날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 철공소 위치는 올림포스호텔 인근으로, 이호섭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장소와 일치한다. 할아버지는 사진을 보고 "올림포스호텔 밑에 있던 항구철공소가 맞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일할 때는 건물이 이렇게 낡지 않았다"고 했다. /김식만 치과의사 제공1960년대 한국기계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작업장 모습. 이곳에서 일했던 이호섭 할아버지는 "보통 하루에 (열차 바퀴를) 열댓 개 정도 깎은 기억이 난다"며 "외경(外徑)하고 내경(內徑)하고 깎고, 양쪽 바퀴를 잡아주는 프레임 가공 작업도 했다"고 말했다. /두산인프라코어 제공이호섭 할아버지는 1981~1986년 리비아 서북부 도시 '미스라타'에서 농장을 경영했다. 배추와 무를 재배해 리비아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에 팔았다. 농장을 하게 된 이유가 재미있다. "리비아 오일회사에서 근무할 때 현대건설 현장에 김치를 얻어먹으러 간 적이 있어. 김치를 양배추로 담갔는데, 맛이 별로였어. 배추와 무를 팔면 돈이 될 거 같더라고. 그러고 나서 한국에서 배추와 무 씨앗을 가져와 심었더니 잘 자라. 배추와 무를 키워서 현대, 대우, 삼성에 팔아 돈 좀 벌었어." '박정희시대와 중동건설1'(정성화 엮음, 도서출판 선인)을 보면, 1973년 12월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이 우리나라 중동건설 진출의 효시다. 우리나라는 1980년의 경우, 수주고가 무려 100억 달러를 넘기는 등 중동에서 미국 다음인 세계 2위의 수주 강국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호섭 할아버지 제공

2017-06-28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4]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上)

1·4후퇴때 부친 '범선' 타고 가족과 떠나해주서 南으로 향할때 인민군 추격 당해우여곡절 끝에 인천 화수부두 정박 불구곡식 빼앗기고 배는 물자수송 강제 동원결국 군산서 5년 머물다 '다시 인천으로'해상 교류 활발 '진남포~인천항~군산항'부친 뱃일따라 이동 장소만 바뀌었을 뿐1941년생 이호섭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다. 평양의 '관문' 남포항이 있는 항구 도시다.남포시(1952년 개명), 남포직할시(1979년 〃), 남포특급시(2004년 〃)를 거쳐 2010년에 남포특별시가 됐다. '남포'는 남쪽에 있는 포구마을이라는 뜻이다.일제가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를 누르고 남포에 상륙했다고 해서 '남포' 앞에 '진압할 진(鎭)'자를 붙여 사용했다. '진남포'는 그러니 일본식 이름이다.남포항은 1904년 한반도와 만주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러일전쟁 때 일제의 군사기지가 되는 아픔도 겪었다.이호섭 할아버지의 부친은 뱃일을 했다. 80t짜리 화물 수송용 범선(帆船)의 선장이었다. 나무로 만든 돛단배이지만, 당시에는 꽤 큰 편에 속했다고 한다."일본 놈이 만든 배야. (해방 후) 그놈들이 놓고 간 건지 이북 놈들이 빼앗은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본 말로 '하시끼'라고 불렀지. 바람으로 간다고 해서 풍선(風船)이라고도 했어."할아버지는 자꾸 '하시끼'라고 했는데, 이는 거룻배를 뜻하는 일본어 '하시케'(はしけ)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그렇게 굳어진 게 아닌가 싶다.하지만 거룻배는 '돛이 없는 작은 배'라는 뜻이어서 범선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할아버지의 부친은 진남포 앞바다에 외항선이 들어오면, 그 배에 있는 벼와 조 등의 화물을 남포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반대로 남포항에서 바다에 떠 있는 외항선으로 화물을 옮기기도 했다.당시 대형 선박들은 얕은 수심 때문에 남포항 입·출항이 어려워 범선을 이용해 해상에서 항구까지 화물을 옮겨야 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배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름은 '대동호'였다. 길이는 50~60m이고, 너비는 13~14m, 높이는 3m 정도 됐다. 가운데가 짐을 싣는 자리다. 선수와 선미 안쪽에 침실이 있었고, 조타실은 없었다."외항선은 주로 소련에서 많이 왔어.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이지만 범선을 몰고 대동강까지도 올라가고 그랬더라고. 평양에 다녀왔다는 얘기도 들었어."이호섭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큰 배의 선장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며 "대동호는 북한 정부에 소속된 화물선이고, 아버지는 직원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끝없이 밀리기만 하자 참전한 유엔군은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끼어들며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서울 이남 지역까지 철수했다. 이름하여 1·4후퇴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부친이 몰던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난 게 바로 이때다."아버지가 부두에 배를 대고 집에서 식구를 데리고 나왔지. 근데, 부두에 나와 보니까 배에 한 260명은 타 있더라고."배에는 벼 또는 조를 담은 가마니도 있었다. 배가 사람과 화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리라고 한다고 해서 내릴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대로 출항해야 했지. 아버지가 벼는 그냥 두고, 조는 바다에 던지라고 하셨어. 그러니 배가 조금 뜨더라고."이호섭 할아버지는 미국 군함이 황해도 쪽에 정박해 있고, 비행기가 공중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연기를 뿜어냈다고 했다. 이때가 유엔군의 진남포 철수작전이 이뤄진 12월 3~6일 사이였던 듯하다. 국방군사연구소가 1996년 12월 펴낸 '한국전쟁(中)'을 보면, 1950년 12월 초순 진남포에는 평안도 지방 피란민들이 밀어닥쳤다. 이 지역 철수 작전을 담당한 한미 해군은 4일 피란민 중 3만 명은 해상으로, 2만 명은 육로로 철수시켰다.진남포를 떠난 배는 황해도 해주에 잠시 들렀다. 식수 등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해주를 떠나려고 할 때 인민군을 만났다. 이들은 "곧 전쟁이 끝나니까, 피란을 가지 말고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인민군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뱃머리를 돌리는 배도 있었다."이북 놈 새끼들이 발동선(통통배)을 타고 다니면서 '피란 가지 말라'고 하는 거야. 우리 배에는 돌아가지 말자는 사람이 많았어. 마침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지."'대동호'는 이 센 바람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배가 남쪽으로 움직이자, 인민군이 탄 발동선이 따발총을 쏘며 쫓아왔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바람이 세게 부니까 (엔진 단 발동선도) 우리를 못 쫓아왔다"며 "바람이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고 했다. 또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배 바닥에 엎드리라고 하고서, 자신은 선 채로 키(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장치)를 놓지 않았다"며 "아버지가 뱃일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가족 모두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피란민을 가득 실은 배는 인천 팔미도까지 왔다. 그곳에 있던 미군 함대가 보트를 보내 '대동호' 내부를 수색하더니 "군산이나 부산까지 가야 안전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늘은 조류와 바람 때문에 남쪽으로 못 간다. 인천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미군을 설득해 화수부두에 배를 댔다. 남포에서 화수부두까지 오는 데 약 1주일 걸렸고, 화수부두에서는 3~4일간 있었다. 일행 중에는 "고향과 가까운 인천에서 전쟁 끝나는 것을 기다리겠다"며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지난 8일 이호섭 할아버지와 함께 그 화수부두 현장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화수부두 주차장에서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쪽을 가리키며 "우리 배가 저쪽 동국제강 쪽에 있었어. 그때는 돌로 축대를 쌓아 놓았지. 물길도 지금보다 좁았던 거 같아"라고 했다.화수부두에 있을 때, 진남포에서 싣고 온 벼를 군(軍)과 경찰에 징발당했다. 외항선에 실려 소련으로 갈 식량이기 때문에 적군의 재산이라는 게 징발 이유다. 경찰은 벼를 빼앗으면서 "수고했다"며 일부를 남겨 주기도 했다. 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군이 배에 남아 있던 벼 가마니를 깡그리 빼앗아갔다. 위협을 느낀 아버지는 "벼를 다 가져가도 좋으니 우리 가족만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대동호'는 군수물자 수송에 강제 동원돼 군산으로 떠나야 했다."월미도로 배를 옮겼어. 이것저것 싣더라고. 그러더니 경찰이 우리 배에 탔고, 엔진이 달린 고기잡이배 두 척이 우리 배를 군산까지 끌고 갔지."이호섭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군산항에서 석탄, 쌀, 휘발유 드럼통 등 해외에서 온 군수·원조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진남포에서 일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5년 정도 살다가 인천으로 올라왔다.진남포에서 해주를 거쳐 인천, 군산에서 다시 인천으로. 한국전쟁 이후 할아버지 삶의 경로는 서해 바닷길과 이어져 왔다.서해 항구 도시 인천, 진남포, 군산은 과거부터 해상 교류가 활발했다. 그중 인천이 핵심 기지였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5월 편찬한 '인천개항25년사'에 잘 나온다.1890년대 후반 인천과 무역이 가장 활발한 곳은 진남포와 군산항이었다. 가세 와사부로는 이 책에서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재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며 "진남포에서 수입·수출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고 했다. 또 "지난해(1907년) 군산항과 진남포 부근은 완전히 인천항의 세력 범위로 간주돼 지점 출장소를 설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인천항 인근에서 선구점을 운영한 일본인 무라타니 기찌조우(村谷吉藏), 무역상 시바타 마고베에(柴田孫兵衛) 등 인천 거류 일본인이 진남포에 지점을 둔 경우가 적지 않았다.해운 분야에서는 일본인 호리 리키다로(堀力太郞)가 운영한 '호리상회'를 빼놓을 수 없다. 손태현 한국해양대 명예교수의 글을 엮은 '한국해운사'를 보면, 호리상회는 1897년 기선을 사들여 평양~만경대~진남포~인천~군산을 운항했다. 손 교수는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육상교통이 불편했다"며 "인천~군산선, 인천~진남포선은 대량의 세곡 수송량이 있는 항로였다"고 했다. 호리 리키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을 인천에 설립하고 운영한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의 아들이기도 하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한강수로는 1900년에 경인철도가 개통하기까지 인천항에 거점을 두고 평양, 진남포, 군산, 목표 등 연안해운을 운영하던 호리상회가 독점하고 있었다"며 "호리상회도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이 개통하자 해운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했다. 호리상회는 1906년 말 해운업을 폐업했다. 물론 여기에는 러일전쟁에 동원된 자사 선박 여러 척이 러시아 군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승무원이 숨지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이유도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호리상회는 1910년 2월 일본우선주식회사의 대리점을 맡아 운영하는 등 1912년 초까지 해운업의 끈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이호섭 할아버지가 군산에서 인천으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직장이었다. 아버지는 500t급 무동력 철선 '대한호'를 이용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외항선에서 대한제분까지 밀을 실어 날랐다. 부친은 남포항, 군산항, 인천항 등 장소만 바뀌었을 뿐 서해 부두에서 배를 부렸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인천에서 구한 첫 직장은 배를 수리하고 부품을 만드는 철공소였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사진/해군 제공이호섭 할아버지가 인천 화수부두 공영주차장에서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쪽을 가리키며 피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4후퇴 때 아버지 배를 타고 고향 진남포를 떠난 이호섭 할아버지는 화수부두에 잠시 머물렀다. 할아버지는 "지금은 매립이 돼서 담으로 돼 있지만, 옛날에는 돌 축대가 쭉 쌓여 있었다"고 했다.

2017-06-21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3]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下)

■첫째형 '오타후쿠 솜공장'새 일자리 인천 젊은층 몰려 현재 남구 숭의동 일대 위치인천서 사다 준 농구화 추억■둘째형 '이북장사·인삼농사'4명의 형 중 가장 잊지 못해돈 벌어 중·고·대학 보내고강화 정착도 도와 고마움 커■셋째형 '고려정미소'일본이 세운 정미업 시작점아마 권투 전국대회 우승자구락부 운영 친선전도 주선■용산동 용수산 밑자락 고향 마을은?결혼식 풍경 이색… 손님마다 상 하나씩 내놔부인 김기희 할머니 개성보쌈김치 솜씨 자랑35m폭포 돌 던져 넘긴 실력 투수이력 밑바탕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의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상하리 만큼 인천과 인연이 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 이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부터 인천의 중요 경제현장을 할아버지의 형들이 누벼 왔다. 할아버지에게는 위로 형들이 4명이나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첫째 형이 해방 전에 인천의 '오타후쿠와타'에서 일했다고 했다. 일본어 '와타(わた)'가 솜이나 목화를 뜻하니 솜 공장이다. 또 둘째 형은 전쟁 직후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하고 인삼 농사를 지었다. 셋째는 해방 전 '고려정미소'에서 일하면서 권투를 했다고 했다.넷째 형은 국내 유명 건축가라고 했다. 동생도 한 명 있어 모두 6형제였다. 이들 중 홍순주 할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인천 경제사의 중요 축을 이루는 분야에서 일했다. 솜 공장과 정미소, 인삼 재배가 그것이다. 첫째와 둘째 형은 일제강점기에 개성에서 제물포 개항장으로 건너 와 직장을 구하고 인천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이는 당시 새로운 일자리가 넘쳐나던 인천에 개성과 같은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이기도 하다.할아버지의 첫째 형(홍순경)이 일했다는 '오타후쿠' 솜공장은 할아버지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그 상징마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예전에는 유명했던 모양인데, 지금 그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스치듯 언급돼 있고, 당시 신문 기사 몇 꼭지가 보일 뿐이다.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에 따르면, '오타후쿠'의 정식 명칭은 '오타후쿠 면(綿) 주식회사 조선공장'이다. 이곳은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정회원은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에 본사를 두고 인천에 한반도 진출 거점으로 마련한 지점 성격이어서 회원사 자격은 얻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도 세금은 꽤 많이 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공장의 규모는 당시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동아일보' 1935년 4월 16일자에는 '인천 면(綿) 공장 17일 기공'이란 제목 아래 ''오다후구' 솜 공장이 인천부외 장의리(仁川府外 長意里)에 설치된다'는 단신기사가 실렸다. 역시 같은 신문 1935년 8월 17일자는 '오다후구' 면 공장이 9월 초부터 본격영업을 시작할 것과 공립 직업소개소에서 15세부터 22세 사이의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직공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이듬해인 1936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이 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 공장이 전소됐음을 보도했다. 기사는 여직공이 250명가량이었으며, 대개가 12~13세 처녀들로 이들은 직장 잃은 설움에 방성통곡하며 길을 헤매고 있다고 전했다. 또 '동아일보' 1937년 12월 8일자에는 12월 6일 오후 1시 20분경 부내 대화정 '오다후구' 솜 공장에서 불이 나, 10여 분 만에 진화했다는 기사가 실렸다.'오타후쿠' 솜 공장과 관련한 이들 몇 안 되는 신문기사는 기사의 양은 적지만 참 많은 것을 보여준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에 불과한 어린 여자 아이들이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또는 집안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솜 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뿌연 먼지 속에서 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오다후구' 솜 공장은 인천 '장의리'에 있다가 큰불이 난 뒤 '대화정'으로 주소를 이전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동네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향토사가 이훈익(1916~2002) 선생의 '인천지명고(仁川地名考)'에 따르면, 장의리(長意里)는 지금 남구 숭의동 일대로 일제 강제병합 이전에는 '장천리(長川里)'였다. 이것이 1906년에 장천리, 여의리(如意里), 독각리(獨脚里)로 나뉘었다가 1937년 1월 15일자로 대화정(大和町)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숭의동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1일부터 써왔다. '대화정'은 일제가 서울의 필동을 비롯한 전국 여러 도시의 마을에 붙인 특색 없는 지명 중 하나이다.홍순주 할아버지는 큰형이 이 '오타후쿠' 솜 공장에서 경리 업무를 맡았다고 기억했다. 큰형은 이 공장의 여직공과 결혼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개성중학교 3학년 때 큰형이 인천에서 사다 준 농구화를 신고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개성에서는 그런 신식 농구화를 구할 수가 없어서 친구들이 그 신발만 보아도 다들 기가 질릴 정도였다고 한다.셋째 형(홍순일) 역시 인천 입장에서 큰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일제 강점기 인천 경제의 동력이었던 정미업계에 종사했다. 셋째 형이 다닌 곳은 '고려정미소'였다. 형은 또 권투 실력이 뛰어났다고 할아버지는 회고했다. 아마추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 1940년대 초반 서울의 시공관에서 결승전이 펼쳐졌는데 함흥 출신 선수와 맞붙어 우승을 차지해 조선선수권 보유자가 되었다고 했다. 한반도 최고 실력의 셋째 형은 정미소에 다니면서 인천에서 권투구락부(클럽)도 직접 운영했다고 했다. 셋째 형은 젊을 때인 한국전쟁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에 인천 권투구락부 선수들을 개성으로 데리고 와서 개성의 권투구락부 소속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셋째 형이 다니던 '고려정미소'는 일제 강제병합 이전에 일본이 세웠으며 인천 정미업계의 시작점에 위치한다. 해방 이전에는 설립자 리키타케 헤이하치(力武平八)의 이름을 따서 '리키타케(力武)정미소'였다. 나중에 동생인 리키타케 카지로(力武嘉次郞)가 뒤를 이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1904년 8월 설립한 리키타케정미소는 1930년 기준으로 정미 기계를 29대나 들여 놓아 하루 처리 능력이 현미 500석, 정미 1천600석이나 되었다. 당시 인천의 16곳 정미소 중 최대 규모였다. 1914년 동생이 넘겨받은 뒤에 방화에 의한 정미소 화재로 위치를 중구 사동에서 신흥동으로 옮겼다. 인천에 와 있던 일본인들이 1933년에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정미소가 몇 곳 안 되던 인천의 정미업은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해 일본인이 늘어나고 만주 방면으로의 판로가 개척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인천의 정미업계에서 '리키타케정미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리키타케정미소는 최소한 1933년 이전에 리키타케물산주식회사(力武物産株式會社)로 업종을 확대했던 듯하다. 그 한복판에 홍순주 할아버지의 셋째 형이 있었다. 인천시립도서관인 율목도서관이 리키타케의 별장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고려정미소라고 바꿨다.홍순주 할아버지는 4명의 형 중 나이가 열두 살이나 많은 둘째 형님을 잊지 못한다. 개성에서 지물포 같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냈고, 강화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정착하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다. 부친을 어릴 적에 여읜 할아버지에게는 마치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개성 용산동에서 태어났다. 용수산 밑자락의 마을이다. 개성의 풍습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느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결혼식 풍경을 꼽았다. 잔치가 벌어지는 신랑 집에 찾아오는 손님마다 한 사람에 상을 하나씩 차려냈다고 했다. 잔칫상이나 그릇을 전문적으로 빌려주는 가게가 있을 정도로 상이나 그릇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는 거지들이 득실거릴 때인데, 거지들이 와도 하객처럼 사람마다 상을 따로 내줘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잔칫집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집에서는 미리 손을 써서 거지 떼의 점령을 막았다고 한다. 개성의 거지왕 이름을 돈을 주고 빌리는 방법이었다. '김헌영', 그때의 거지왕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이름을 크게 써서 대문 밖에 붙여 놓으니 정말로 거짓말같이 거지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할아버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더 늦기 전에 젊은이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결혼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솜씨를 '둘째 동서'를 통해서 전수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성보쌈김치 만드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도 개성보쌈김치는 참으로 특이하다. 배추부터가 다르다. 몸통이 길쭉한 개성 배추가 따로 있었다. 그걸 옆으로 여러 토막으로 잘라내서는 갖은 양념을 넣는다. 들어가는 양념이 많아 전문가가 해도 하루에 50개밖에 쌈을 만들지 못할 정도라고 할머니는 말했다.홍순주 할아버지의 기억력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싶을 만큼 뛰어났다. 할아버지는 개성의 중경(中京)소학교를 나왔는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리 반장을 했다고 했다. 그게 다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으로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입학하자마자 선생님이 기억력 테스트를 했는데 거기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나았던지 생각하지도 않은 반장이 됐다.홍순주 할아버지는 개성의 이곳저곳 생각나지 않는 곳이 없다. 중학생 시절에는 개성에서 60리가량 떨어진 천마산 줄기의 대흥산성 북문 박연폭포까지 소풍을 가고는 했다. 물줄기 높이가 35m 정도 되는데 폭포 밑에서 위로 돌멩이를 던져 폭포를 넘기는 학생은 할아버지가 유일했다고 한다. 개성사범학교(6년제 개성중학교 본과)에서 야구팀 투수를 맡았던 것도 이런 이력에서 출발한다. 개성사범학교는 1946년 경기도립으로 세워졌다. 전쟁을 겪으며 학교가 피란해 1952년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2003년에 다시 인천교대에서 경인교대로 바꿨다. 개성사범 동기 중에는 인천교대 부속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친구가 아직도 인천에 살고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그동안 두 차례 정도 개성 관광을 시도했는데 실제로 갈 수는 없었다. 더 늙기 전에 개성을 한 번 다녀왔으면 하는 게 홍순주 할아버지의 소원이다.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홍순주 할아버지가 자택에서 개성에서의 어린 시절과 피란 이후의 삶, 형제들에 얽힌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40년대 초반 아마추어 전 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홍순주 할아버지의 셋째 형(홍순일)이 권투 포즈를 취했다. 할아버지는 이 사진을 아직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홍순주 할아버지가 1949~1950년 봄 사이, 개성사범학교 본과 3학년 시절 개성 만월국민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의 사진. 할아버지의 젊을 적 모습 뒤로 개성 시내가 훤히 보인다. 초가집들이 즐비하다.인천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1933년에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홍순주 할아버지의 셋째 형이 다녔다고 하는 '리키타케(力武)정미소' 사진과 그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홍순주 할아버지가 교생실습한 개성 시내에 있던 만월국민학교 교정 모습.

2017-06-14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2]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中)

1900년대초 재배 시작 해방직후까지 '미미'개성인삼 근원은 경상·전라서 전파 '추측'이북장사 접은 둘째 형따라 농사 뛰어들어아내도 초교 교사 그만두고 밭일 뒷바라지거름 만들고 종삼 키우기 등 만만찮은 작업개성·강화는 인삼 재배 넘어 상호보완 관계껍질 깎는 일거리 등 후한 인심 동네서 인기도둑 들끓어 삼포마다 관리자 두고 밤 순찰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휴전 되던 해에 강화에 정착한 뒤로 가장 오래 한 일은 인삼농사다. 20년 정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강화인삼의 명성이 높았던 데는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 출신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강화에 많이 살게 된 이유가 크다.이들이 있었기에 개성 인삼의 전통이 그대로 강화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강화군청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서에서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다만, 1980년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인삼 재배지역의 형성과 전파에 관한 연구-강화도를 중심으로')속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강화도의 인삼재배가 개성인들의 왕래에 의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그 최초 시작점을 1903년으로 밝히고 있다.이때가 논문에서 말하는 1차 강화도 인삼재배의 시기이다. 2차는 홍순주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의 피란민들이 강화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논문에서 인용한 1973년도 전국 삼업조합별 인삼 경작면적을 보면, 강화는 홍삼재배면적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홍삼과 달리 백삼은 금산 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강화는 2위였다. 이 시기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한참 인삼농사를 지을 때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강화에서의 인삼 재배는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1948년 해방 후 국내 첫 문화원 잡지로 창간된 '강화'에 당시 강화군청 간부 공무원이 낸 기고문에는 강화지역의 인삼 재배 현황을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이 기고문에 붙은 강화 지역의 '밭 종합이용면적 상황표'에 따르면 밭의 총면적 4천15정(町) 중 인삼 재배 면적은 고작 36정에 불과하다. 보리가 2천739정으로 가장 많았고, 채소가 850정, 감자가 160정, 과수 95정, 밭벼 30정, 묘목 5정, 기타 100정 따위였다. 당시 강화도에서의 인삼 재배가 그리 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그러면 세계적 명성의 개성 인삼은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을까.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조선 후기에 경상도 산간이나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개성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지만 명쾌하게 결론은 짓지 못하고 있다. 개성의 향토사학자 송경록이 지은 책 '개성 이야기'에서도 '개성 지방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인삼을 재배하였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도 뚜렷하게 개성인삼의 근원을 드러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가장 실감나게 개성인삼의 시초를 밝히고 있는 것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이다. 의적 장길산의 후원자가 되는 개성상인 박대근과 전라도 화순에서 올라온 가난한 모녀(母女)가 극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인삼 재배 기술이 개성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모녀가 지니고 있던 전라도의 산삼 재배 기술과 개성의 자본이 만나 새로운 개성인삼이 되었다는 게 작가 황석영의 기발한 풀이이다.홍순주 할아버지가 인삼 농사에 뛰어든 것은 역시 강화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둘째 형(홍순형)이 삼포(蔘圃)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2살이나 많은 형님은 상편(1일자 9면 보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휴전 직후 '이북장사'를 3년 정도 하다가 군부의 내부갈등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그 뒤 삼포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홍순주 할아버지는 원사(原絲) 장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 종로 4가에 가서 실을 떼어다가 강화 장터에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강화에 직물산업이 발달해 집집마다 직조를 하다시피 할 때였다. 2년 정도 했는데 이문을 남기지는 못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당신이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즈음에 5살 아래인 김기희 할머니와 결혼을 했다. 1957년이었다. 인천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인 강화도 합일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김기희 할머니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알땅(불량배와 비슷한 의미)이어서 식구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결혼을 반대했다"면서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장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결혼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었고 곧바로 집안에서 인삼 일 뒷바라지를 했다.인삼 농사는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삼밭에 거름을 주고, 삼을 심어 관리하고, 종삼(種蔘)을 키우고 하는 일이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4~5년근에서 씨앗을 채취해서 종삼을 만들고, 그걸 깨끗한 모래에 섞어서 아침저녁으로 100일 동안 물을 주고 하는 그 작업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종삼을 심는 삼포에 주는 거름이 중요하다. 그 거름을 만들기가 또한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좋은 거름은 3가지를 섞어야 한다고 했다. 구벽토, 구재, 가답이다. 오래된 집터나 벽에 붙은 흙이 구벽토이고, 솥이나 굴뚝, 방고래 같은 곳에 쌓인 검댕이 구재이다. 또 낙엽이나 콩 썩은 것이 가답이다. 이런 것들을 구해서 거름을 만들어 삼밭에 냈다. 이게 바로 전통 개성 방식의 인삼재배법의 일단이다.해방 직후부터 인삼 재배에 있어서 강화와 개성은 아예 한 몸이 되었다. 1946년 10월 16일자 '자유일보'는 '강화인삼 산지 개성 관내로 편입'이란 기사를 실었다. 강화인삼조합에서 전매국 지정 구역으로 편입해 달라고 오랫동안 요구해 결국 개성 관내로 구역이 편입되었고 강화인삼조합은 해산을 했다는 내용이다.개성과 강화도는 인삼 재배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고려 때는 개성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개성의 일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한 강화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그 점은 강화고려역사재단이 첫 번째 학술총서로 펴낸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에 상세하다. '개성부원록'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가 프랑스군에게 침략을 당하자 개성의 백성들로 원군을 구성해 강화를 수복하기 위해 출정한 기록이다. 개성 사람들이 강화 주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강화와 개성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 집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끊이지 않았다. 캐낸 삼 껍질을 깎는 백삼 작업에 여성들이 서로 달려들었다. 할아버지네 집은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이 든 할머니들이 일하기 수월하게 도와주었으며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를 가진 아낙들에게도 일거리를 주었다. 다른 집에서는 노인들이나 애가 딸린 부인들은 받지를 않았다. 할머니들은 손에 힘이 부족하여 인삼 형태가 얽혀 있는 것은 깎기가 어려웠다. 그런 것을 '악바리'라고 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그 '악바리'들을 일하러 온 할머니들에게서 덜어주는 대신에 사람을 더 썼다. "악바리 몇 개씩만 덜어내도 할머니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나중에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많이 얻었던 모양이야."그렇게 오랜 세월 쌓인 할아버지네 인심은 선거에서 표로 나타났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1972년 12월, 당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도전한 적이 있다. 이때 2명을 뽑는 강화읍에서는 5명의 후보가 나섰는데 여기서 홍순주 할아버지가 최다 득표를 했다. 1976년 발간된 '강화사'에 따르면 당시 선거에서 홍순주 할아버지는 강화읍 투표자 7천948명 중 2천212표를 획득해 2위 당선자(1천742표)와의 표차가 500표 가까이나 되었다.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이 다들 강화 토박이였는데 홍순주 할아버지만 외지인이어서 선거운동이 더욱 힘이 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강화지역에서 여러 가지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할아버지는 또 강화지역 젊은이들의 결혼식 주례를 도맡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주례 선 것만 여태 1천 쌍이 넘는다고 했다.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 부부가 말하는 백삼 깎는 장면은 개성이 고향인 소설가 박완서의 회고에서 그대로 펼쳐진다. 박완서의 산문집 '두부'에는 고향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속에 백삼 깎는 장면이 생생하다. '수매한 인삼을 백삼으로 만들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때가 가정부인들이 빈부나 지체를 가리지 않고 부업에 나서는 때이다. 조합 너른 마당에 큰 맷방석에다 인삼을 산처럼 쌓아놓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대나무칼로 인삼 껍질을 벗긴다. 한 맷방석에 아홉 명, 열 명 혹은 열한 명씩 둘러앉는다.'이렇게 만들어진 인삼은 비싸게 거래되었다. 그만큼 도둑도 많이 끓었다. 홍순주 할아버지 역시 도둑을 많이 맞았다고 했다. 인삼이 4년근이 지나면서 각 삼포마다 관리자를 내세워 야간 순찰도 돌고 하는데도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인삼 밀매도 오래된 이야기이다. 조선 말에는 인삼밀매범의 목을 쳐 내걸기도 했다. 1866년 8월, 개성에서 몰래 인삼을 매매한 2명이 붙잡혔는데 이들은 서울로 압송돼 즉시 효수되었다. 193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홍삼 밀매범 인천에서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강화에 사는 사람이 홍삼 35개를 갖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인삼이 국가적으로 귀하게 다루어졌다는 얘기다. 1894년부터 1897년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속에는 당시 인삼이 조선에 얼마나 중요한 재화였는지가 자세히도 그려진다. '인삼은 한국의 수출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또한 세입의 중요한 원천이다. 내가 제물포를 떠날 때 탔던 증기선에서는 14만 달러 어치의 인삼을 위탁 판매하고 있었다.'개성인삼의 강화도 전파자 홍순주 할아버지의 집 거실에는 30년 넘은 인삼주가 몇 병 있다. 커다란 술병 속에 담긴 오래되고 잘 생긴 인삼들이 홍순주 할아버지와 김기희 할머니의 인삼에 얽힌 이야기에 곰삭은 맛을 더해주는 듯싶다.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바로잡습니다지난 1일자에서 보도한 '실향민 이야기-홍순주 할아버지' 상편 기사와 관련, 홍순주 할아버지의 이름이 취재 기자의 잘못으로 인하여 '황순주' 할아버지로 다르게 나갔습니다. 홍순주 할아버지와 가족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홍순주 할아버지가 지난 5월 24일 강화읍 갑룡초등학교 부근의 예전에 농사짓던 인삼밭을 찾아 인삼재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이 밭에서 인삼을 재배하지 않는다.홍순주 할아버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결혼 전 합일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과 함께 한 모습. /김기희 할머니 제공강화도 주민들이 삼포에 인삼을 심는 모습. /경인일보 DB

2017-06-07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1]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上)

서울서 대학 다닐때 전쟁 발발 휴전 후 고향 갈 수 없게 돼 강화에 자리 잡아 개성상인 유명세 한창수 회장과 둘째형이 각각 맡아 운영… 배로 1.8㎞ 북한 드나들어 군 당국 보호하에 서로 첩자 보내기도 "장사꾼이 이중간첩 노릇" 이승만 정권 군부 '돈 줄' 불구 군내부 갈등 탓 오래 못가 개인훈련으로 온갖 운동 섭렵 '민간 특공대' 잡고 강화 '주먹' 평정도남한과 북한이 물물교환을 한다? 꽉 막힌 요즘 남북관계에서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교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참혹했던 한국전쟁 직후 남과 북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얘기를 개성이 고향인 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해 주었다. 그러니까 휴전이 있고 나서 1950년대 중반 3년 정도 남과 북이 강화도와 개풍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남북교역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이북장사'라고 불렀다. 지난 5월 9일 강화도 자택에서 첫 인터뷰를 지켜보던 홍순주 할아버지의 부인 김기희(85) 할머니는 이것저것 자꾸만 캐묻는 기자가 할아버지 얘기를 의심이라도 한다고 여겼는지 부엌으로 가서는 참나리 그림이 선명한 법랑 그릇을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이 법랑이 이북장사할 때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지금도 쓴다고 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1학년이었다. 당시는 5월 입학이었으니 대학 새내기 생활 2개월째였다. 1951년 초 군에 입대했다. 통신병이었는데 최전선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휴전이 되었지만 더 이상 고향 개성에는 갈 수가 없었다. 전쟁 전 개성은 38선 이남이었는데 휴전이 되면서 그만 개성이 휴전선 이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형님이 자리를 잡은 강화를 찾았고, 지금껏 살고 있다.이북장사는 12살 터울이 지는 둘째 형(홍순형)이 했다. '대영상사'라는 이름을 단 어엿한 회사였다. 읍내에 사무실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그 형에게서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이북장사'는 두 패가 맡아서 했다. 할아버지네 '대영상사'와 또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유명했던 서울 을지로 입구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1919~2000)이다.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한국전쟁 직후 '이북장사' 대목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 개성 출신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묶은 '개성상인'이란 책에 한창수 회장도 들어가 있는데 거기에도 강화도 '이북장사' 부분은 빠져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한창수 회장이 강화에서 돈을 번 뒤 서울로 가서 을지로 개성상회를 열었다고 했다. 한창수 회장이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할 때는 '개성상회'와 같은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고 그냥 강화읍 서문 밖 개인 주택을 하나 세 얻어서 살림집 겸 사무실로 썼다고 했다.휴전 직후 남북을 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인이 어떻게 서로의 물품을 교환하는 장사를 할 수가 있었을까. 이 '이북장사'는 군(軍) 당국이 뒷배를 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홍순주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대영상사' 쪽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던 김창룡 당시 육군 특무부대장이 밀어줬다. 한창수 회장의 뒤에는 다른 기관이 있었다. 북쪽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남한에서는 페니실린 같은 의약품과 신발, 옷가지 따위를 싣고 갔고, 북에서는 원산 북어, 명천 다시마, 은수저 따위의 물건이 넘어왔다. '이북장사'는 배로 이루어졌다. 강화에서는 철산리 산이포에서 출발했으며 개풍의 영정포나 해창포를 드나들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와 해창포는 직선거리로 1.8㎞, 강화에서 북녘 땅을 잇는 최단거리 코스다. 배는 밤에만 움직였다. 언제 돌아올지는 기약이 없었다. 1주일도 걸렸고, 한 달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북장사'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장사였다. 위험한 만큼 이문도 많이 남았다. 남북의 군 당국은 서로 '이북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상대방의 정보를 캐냈다. 물건을 싣는 그 배에 서로 간첩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군 당국에서는 간첩이 타고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화에서는 검거하지 않았다. 그 간첩이 강화에서 뱃길로 인천 괭이부리 쪽 부두에 내린 뒤에야 검거했다. 이렇게 해야 '이북장사' 하는 사람이 밀고자 신세를 면하기 때문이었다."여기 철산리에서 개풍군 영정포를 가는 거지. 들어갈 때는 한국물건을 갖고 가서 나올 때는 거기 물건을 싣고 나왔어. 지금으로 치면 한 번 갈 때 한 2천만원어치 가져가서는 그쪽 물건과 바꿔 팔면 곱절도 더 남았던 것 같아. 그때 강화에는 기관이라는 기관은 다 들어와 있었거든. 그 배로 서로 첩자를 보내고는 했지. 어떻게 보면 '이북장사'하는 사람이 이중간첩 노릇을 한 거지."'이북장사'로 강화에서 돈을 번 뒤 서울로 뜬 사람은 한창수 회장 말고도 또 있다. 남쪽에서 가져간 물건 중에 제일 많은 게 약이었는데 이 약을 독점 공급한 이가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제약업계의 큰 별로 불리던 서흥캅셀 창업주 양창길 회장(1923~2016)이다. 양창길 회장이 강화읍에서 고려약방을 내고 약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북장사'를 하는 양대 산맥이 모두 개성 사람이니 약을 대는 곳도 개성 출신인 양창길 회장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당시 강화에는 고려약방 이외에 십자당약방이 한 곳 더 있었다고 홍순주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강화에서의 은밀한 '이북장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개성상인들에게 귀한 밑천이 된 셈이다. 군부 세력에게는 뒷돈이 되기도 했다. 그 '이북장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홍순주 할아버지는 '이북장사'가 끊어진 게 군 내부 갈등 때문이었다고 했다. 원용덕 헌병사령관 쪽에서 김창룡 특무부대장을 칠 때 '이북장사'도 타깃이 됐다고 했다. 헌병대가 들이닥쳐 이북에서 가져 온 물건을 죄다 압수해 갔다고 했다.할아버지 둘째 형의 '이북장사'를 밀어줬다는 김창룡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도 이북실향민이었다. 현대사를 다룬 책들은 대개가 그를 친일파 군인의 대표주자로 거론한다. 일본과 한국의 만주 군맥(軍脈)을 다룬 책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는 만주국 또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나 헌병으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인물로 김창룡을 소개한다. 이 책에 따르면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으로 있으면서 3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한 죄로 해방 후 북한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호송 도중 도망쳐 남한으로 내려와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어 군 내부 좌익 색출로 이름을 떨쳤다. 최근 나온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이란 책에서 저자 신복룡 교수는 김창룡의 별명이 'Snake Kim'이었다고 소개했다. 아마도 빨갱이 색출에 유난한 능력을 발휘했기에 그렇게 별명이 붙었음직하다. 이런 김창룡도 같은 일본군 출신 원용덕 헌병사령관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1950년대 편 3권'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 원용덕의 헌병대와 김창룡의 특무대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고 사찰기관 상호간 경쟁을 유도하면서 사찰기구의 독점을 방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군부에 파벌을 키워 서로를 견제토록 했다. 이 견제에 김창룡이 걸린 듯하다. 하지만 김창룡의 '이북장사'가 적발됐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1950년대 중반 전쟁 직후 강화도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남한 땅에 있던 군부대라는 군부대는 강화에 소속 부대를 주둔시켰고, 정보기관은 정보기관대로 강화에 상주했다. 북한군 복장을 하고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는 군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었다. 북파공작부대 같은 특수부대였다. 그 군인들이 제대한 뒤 머무는 곳도 강화였다. '민간 특공대' 격으로 생활하던 그들은 술만 먹었다 하면 여기저기서 주먹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리곤 했다. 이들을 맨주먹으로 제압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홍순주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주먹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은 강화를 주먹으로 주름잡던 '민간 특공대원'을 돌려차기 한 방에 쓰러뜨린 일화가 퍼지면서다. 그 얘기가 나간 뒤로는 누구도 할아버지를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할아버지는 체구가 큰 편은 아니다. 키 167㎝에 몸무게 55㎏ 정도다.할아버지가 강화의 유명한 주먹을 거꾸러뜨린 것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고향 개성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싸움의 기술을 연마한 '낭중지추'의 숨은 고수였다. 할아버지가 중학교 2학년 시절, 해방되던 해 봄에 교실에서 시비가 붙었다. 쉬는 시간 교실에 혼자 남아 책을 읽고 있는데 완장을 찬 주번이 나가라면서 발길로 툭툭 찼다. 홧김에 그 주번 학생을 때려주었다. 그 친구는 며칠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그 뒤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권투부장 일행이 찾아왔다. 그 주번이 분풀이하기 위해 권투선수를 부른 터였다. 할아버지는 그 권투선수에게 많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그날 이후로 공부보다는 동네 뒷산에 올라 운동하는 것에 집중했다. 산을 뛰어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나무 가지 위로 깡통 같은 것을 매달아 놓고 점프하면서 발차기를 하거나 집 뒤에 있던 방공호 모래 가마니를 주먹으로 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1년 정도는 계속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만능 스포츠맨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높이뛰기, 장대높이뛰기, 넓이뛰기, 100m 같은 여러 육상종목의 대표선수로 뛰었다. 고등학교 때는 야구도 했다. 싸움과 육상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역대 유명 주먹들 중에도 육상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경우가 많다. 조성식 기자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란 책을 보면, 육상이 싸움에 필수적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맨손 주먹 1인자 조창조 편'에서 맨손으로 붙어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조창조 씨가 바로 초등학교 때 육상 선수였다. 여기서 조 씨는 싸움도 뛰는 게 뒷받침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홍순주 할아버지가 갖춘 싸움의 기본이었다.강화의 알아주는 '주먹'이 된 할아버지는 이후 초등학교 교사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강화에서 수많은 사회단체에서 활약했다. 또 선출직으로 뽑히기도 했다. 개성인삼을 강화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개성출신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도 철산리 평화 전망대에서 지척으로 보이는 북녘땅을 가리키며 휴전 직후 남·북을 오가며 물물교환하는 '이북장사'를 설명하고 있다.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 평화전망대에 설치된 위치도에서 개풍군 해창포를 찾아 가리키고 있다.고등학교 야구 선수 시절 홍순주 할아버지.'이북장사'를 하던 둘째 형에게 받은 물건중에 유일하게 남은 법랑 그릇을 보여주고 있는 홍순주 할아버지.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도 평화 전망대에서 경인일보 정진오 기자에게 이북장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2017-05-31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0]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下)

할아버지가 지도에 고향 모습 그려 눈길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 해서 '나무리벌'피란 떠날 때까지 아버지 정미소서 일해소설가 형님 글에 집·음식 유복함 드러나아내 손맛 북한 전통음식 '김치밥' 그리워한반도 대표 곡창지대 쌀알 길고 맛 좋아일제 한일합작 회사 앞세워 토지 빼앗아김소월 詩에 착취당한 소작농 슬픔 담아 이어 재령 출신 나석주는 폭탄으로 '항거'자작농 쌀도 수출 명목으로 헐값에 판매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91) 할아버지의 집에는 크지 않은 지도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행정구역만 나와 있는 백지에다 할아버지가 강이며 논이며 마을이며 직접 그려 넣었다. 몇 해 전 아들이 인터넷 위성사진을 출력해 벽에 붙여준 적이 있었는데 옛날 집이며 논이며 다 사라져 버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며 본인이 기억나는 대로 그렸다.할아버지의 고향 재령군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너른 평야에서 질 좋은 쌀이 생산되는 재령벌은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고 해 '나무리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재령군 북쪽 북률면에서 동강(재령강)과 서강이 만나는데 할아버지네 집은 서강쪽에 있는 서호면 신환포리다. 집에서 철교를 건너 강 맞은편 신천에 할아버지네 정미소와 논이 있다. 서호면 남쪽이 재령읍인데 할아버지는 읍내의 명신중학교를 다녔다. 지도 속 집과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할아버지는 1946년 12월 집안 소개로 역시 재령 출신 아내와 결혼하고 피란을 떠날 때까지 정미소를 운영하는 아버지 일을 도왔다.할아버지는 6남매 중 둘째인데 두 살 위 맏형이 바로 예총 인천지부장을 지낸 소설가 김창황이다. 김창황의 수필집 '고향'에는 재령 나무리벌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친다. 이 중 '생가(生家)'라는 글에는 할아버지네 집의 유복함이 잘 드러난다. 마을 이름도 '대부촌(大富村)'이었다.'서남쪽으로 재령강이 흐르고, 정방산 노적봉과 서쪽으로 구월산 사황봉이 우뚝 솟은 나무리벌 나의 고향 대부촌은 모두 합해야 50호가량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부락이다. 사각으로 채목한 목조건물이지만 앞뒤 채로 나누어 온돌방이 7, 8개나 되고 헛간도 넓게 꾸며졌다. 앞에는 1천평을 훨씬 넘는 뜰이 펼쳐져 있다.'김창황은 이 글에서 자신이 6살 때 아버지가 대부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분가했다고 했으니 할아버지네가 서호면 신환포리 부근에 따로 자리 잡은 것은 김창일 할아버지가 4살 때인 193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입구(口)자 모양의 큰 집 마당 가마솥에는 항상 일꾼들을 위한 생선국이 끓고 있었고 사랑방에도 사람이 넘쳐났다"고 기억했다. 농번기 때면 동강과 서강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교량에 일을 찾는 사람들이 몰려 인력시장을 형성했다고 한다.사랑방에 귀한 손님이 오면 놋쟁반에 소고기와 채소를 보기 좋게 담아 육수를 부어가며 전골처럼 먹는 평안도 음식 '어복쟁반'도 대접했다고 한다. 어복쟁반은 머리를 맞대고 큰 쟁반을 기울여가며 먹는 음식이라 둘러앉은 사람들이 친분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되는 음식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데 '어복'이라고 부른 것은 '우복(牛腹)'을 잘못 발음하면서 전해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할아버지가 남한에 와서도 즐겨 먹은 음식은 '김치밥'이다. 김치밥은 불린 쌀에 잘게 썬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어 밥을 지은 뒤 양념장과 섞어 먹는 북한 전통음식이다. 할아버지는 2010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김치밥이 너무 먹고 싶어 직접 만들려고 나선 적도 있다. 하지만 재령 김치밥은커녕 정체불명의 밥만 짓고 말았다. 김치밥 생각이 나면 아내가 그립고, 아내 생각이 나면 김치밥이 더욱 그립다.나무리벌은 재령군 북부와 신천군, 안악군에 걸친 곡창지대다. 재령쌀은 쌀알이 길고 밥맛이 좋아 진상미로 사용됐다.조선 영조 27년(1751년) 쓰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 황해도 편에는 "황주, 봉산, 서흥, 평산, 안악, 문화, 신천, 재령 이 여덟 고을은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았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 강 동쪽, 서쪽 언덕에는 모두 물을 사이에 두고 긴 둑을 쌓았으며 둑 안쪽은 모두 벼 심은 논이다. 바라다보아도 끝이 없어 중국의 소호 지방과 같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낟알이 길고 성질이 차져서 다른 지방 쌀과 다르다. 그러므로 내주(內廚·임금과 왕비의 음식을 마련하는 주방)에서 어공(御供·임금에게 바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은 이 지방 쌀뿐이다"고 나온다.1992년 2월 21일 정원식 당시 총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나눈 대화에서도 재령 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북한은 방북단에게 재령 쌀을 대접했는데 김 주석은 재령 출신인 정 총리에게 "재령 쌀이 좋아요. 조선 때도 재령 나무리벌 쌀을 가져다 먹었다지. 재령은 우리나라에서 쌀농사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요"라고 했다.김창일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유명한 평야가 평안도 열두삼천리벌, 황해도 나무리벌, 옹진벌, 연백벌, 전라도 만경벌인데 그 중에 나무리벌이 제일 유명해. 나무리벌에서 나는 쌀은 따로 1등급, 2등급, 3등급을 매기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지. 어차피 다 1등급인데 등급을 매겨서 뭐해. 그만큼 쌀이 좋아"라고 말했다.좋은 쌀을 생산해내는 나무리벌은 일제 양곡 수탈의 표적이 됐다. 일본은 1908년 농업, 토지매매·임대·관리 등의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회사)라는 한일합작 회사를 설립했다. 우리나라는 20만주 가운데 30%인 6만주를 토지로 출자했는데 전체 출자토지 2천433정보 중 재령 지방 논이 1천235정보로 절반을 넘었다. 일제는 일본인을 재령으로 이주시켜서 쌀을 생산하게 했고 국유지에서 소작을 했던 농민들에게는 고율의 소작료를 떼어갔다. 동척회사는 실제로 45%의 소작률을 내세우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70%가 넘게 소작료를 받기도 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나무리벌의 소작농들은 1924년 대대적인 소작쟁의를 벌였다. 이때 나온 시가 동아일보 1924년 11월 24일자에 실린 김소월의 '나무리벌의 노래'다.'나무리벌의 노래'는 지금도 일제 수탈에 대한 항거를 빼어나게 묘사한 작품으로 꼽힌다. 수탈당한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 시베리아로 이주해야 했던 당시 시대 상황을 그렸다. 척박한 만주땅과 기름진 나무리벌이 대비된다.1926년 12월 28일 토지수탈을 상징하는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나석주(1892~1926)가 바로 재령 출신이다. 동척회사의 양곡 수탈을 직접 목격한 그는 안악 출신인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독립투사가 됐다. 이 사건은 보도가 금지됐으나 일제가 게재금지를 해제한 이듬해 1월 13일 동아일보 호외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백주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동척과 식은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야 일거에 7명 저격'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이 달렸다.김창일 할아버지 집은 자작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된 쌀을 모두 일본에 팔아야 했다.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농지를 개량해 쌀 생산량을 늘리고 증산된 쌀의 60~70%를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나무리벌에도 개간 사업이 활발히 진행됐고 안녕수리조합, 재녕수리조합 등이 설립됐다. 하지만 쌀 생산량 증가율보다 수출 증가율이 더 높았다. 김창일 할아버지네도 약간의 쌀값을 받기는 했으나 수출이라는 개념보다는 강제로 빼앗아 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수탈을 당했다."그때 재령 쌀은 모두 동경(東京·도쿄)으로 가게 돼 있었어. 진남포에서 500명이 탈 수 있는 연락선이 들어오면 신환포리에서 쌀을 싣고 요코하마항으로 가는 거지. 황해도에서 나는 쌀이 200만t 정도 되는데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신환포리로 다 모이게 돼 있어. 일본 사람들이 나무리벌 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고 했어."일본으로 쌀을 보낼 때는 현미로 보냈다고 한다. 쌀을 모두 도정해서 배에 실으면 이동하는 동안 수분이 날아가서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논에도 전기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수한 쌀을 잘 건조시켰다가 도정해 현미를 만들었다.수확한 쌀은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할아버지네는 일제 몰래 쌀을 빼돌려 평양에 내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야미(やみ)'라고 했는데 '뒷거래'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재령 쌀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아 웃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평양에 내다 팔았다.할아버지네는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북한 토지개혁의 대상이 되면서 몰수 됐다. 땅을 잃고 고향을 잃은 것을 이제 와 아까워 하면 무엇 하겠는가. 오직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울 뿐이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언젠가 중국 쪽 인맥을 거쳐 재령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 정도만 확인한 적도 있다. 북한군 소좌를 했던 동생(김창설)이 전쟁 후 안악군에 있는 농장에 생존해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창일 할아버지가 인천 중구 용동 집에서 자신이 직접 그린 고향 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7-05-24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9]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中)

임시직 얻은 뒤 절차 거쳐 임용돼당시 낙하산 많은 탓 後시험 치러만국공원 움막집 철거가 첫 업무실향민 아픔 알기에 보상 신경 써선인학원 백인엽 장군과 일화도경인고속도로 '입김 있었다' 증언체전성공 공로 국장 승진 앞두고둘째 아들 긴급조치 위반해 퇴임고향 그리움 달래는 망배단 있고현충탑 위치한 수봉공원 큰 의미황해도 재령군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91)는 전쟁이 끝난 뒤 인천에 자리 잡아 공무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김창일 할아버지는 1954년 김정렬 인천시장에게서 임시직을 얻은 뒤 다시 공무원시험 절차를 거쳐 정식 임용됐다. 당시 인천시청이 30명을 모집했는데 300~400명이 응시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할아버지는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 지금의 '공시족'처럼 공무원시험 책을 달달 외웠다고 한다. "국어 시험도 보고 역사 시험도 보고 영어는 조금만 할 줄 알면 됐던 것 같아. 그때도 공무원시험 책이 있어서 그것만 보고 외웠지. 시험을 본 다음에는 면접도 보고 지금이랑 비슷했던 것 같아."요즘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상한 '공시족'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 9년(958년)때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전에는 관직을 신분에 따라 나눠 갖거나 천거하는 식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쓴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우리나라는 옛날에 과거 제도가 없었는데 고려 광종 때에 주(周)나라 사람 쌍기가 사신을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과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칙령에 따라 관료를 시험으로 뽑았다.한국전쟁 전후 혼란했던 시기 뒷배경이나 인맥을 이용해 공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정부가 무능한 공무원을 걸러내기 위해 재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선(先)취업 후(後)시험'인 셈이다.동아일보 1953년 2월 5일자는 "수많은 공무원 중에는 권력과 재력 등 배경의 힘으로 고위고관의 정실인사로써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는 무능력한 자들이 허다함에 비추어 고시 위원회는 전국 20만명에 달하는 국가공무원에 대하여 일제히 전형 시험을 실시한다"고 보도했다. 따지고 보면 김창일 할아버지도 시장 추천이라는 인맥으로 공직에 입문해 시험으로 정식 임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할아버지가 인천시청 공무원이 돼 처음 맡은 업무는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에 우후죽순 들어선 피란민 촌을 철거해 정비하는 일이었다. 피란민들이 아무렇게나 땅을 파고 살았던 움막집은 화재 우려도 있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 대상이 됐다. 할아버지는 같은 처지인 피란민을 내쫓는 일이 마뜩잖았지만 그렇다고 지시받은 업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할아버지가 했던 자유공원 정비 사업은 당시 인천시청이 발행한 '인천공보(仁川公報)'에 기록돼 있다. 인천시립 미추홀도서관에 보관된 1953년 6월 3일자 '인천공보'에는 '만국 공원 주변 바락크 철거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바락크(barrack)는 군대 막사나 임시로 지은 건물을 뜻하는데 보통 피란민의 움막집을 그렇게 불렀다. 휴전 1개월 여 전의 상황을 전해주는 이 기사는 "만국공원 주변에 피난민 토막집이 무려 119건에 달하고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공원유지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피란민촌 철거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시는 무단건축물을 자진 철거하면 학익동 소재 시유지에 대토를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이때는 표양문 5대 인천시장 재직(1952년 5월~1954년 2월) 당시다. 할아버지가 1954년 2월 김정렬 시장이 취임한 이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니 만국공원 피란민 철거 사업은 표양문 시장 때 시작해 김정렬 시장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움막을 철거하면 다시 새로운 움막이 들어서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실향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움막을 짓고 버티는 이들을 매정하게 내쫓지는 못했다."보상을 해야 하니까 자유공원에 가서 움막집이 몇 채 있는지 그림을 그려 파악을 했는데 다음날 나가보면 또 몇 채가 더 늘어나 있는 거야. 땅을 파고 나무 주워다가 기둥 몇 개 세워 놓은 다음에 가마니를 깔고 드러누우면 그게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거지. 그래도 그 사람들 전부 보상해서 내보냈어."그렇게 피란민이 떠난 자유공원에는 표양문 시장 때부터 계획했던 아동 유희장(놀이터)이 들어섰다. 인천공보 1955년 7월 25일자는 "인천시가 미군대한원조(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의 자재원조를 받아 만국공원에 그네, 미끄럼틀 등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1957년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맥아더장군 동상이 들어섰다.김창일 할아버지는 1967~1968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주변 지역 구획정리 사업을 감독할 당시 공사현장 주변의 선인학원 이사장인 백인엽 장군이 자신의 사무실에 매일 같이 드나들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경인고속도로는 당시 국가 주도 사업이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치단체가 주체가 돼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고속도로건설사업에 선행되는 구획정리사업 등이 지자체 몫이었다. 한국전쟁의 영웅인 '쓰리스타' 출신 장군이 실향민인 말단 인천시 공무원에게 절절매는 모습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내가 건설과에 있을 때 경인고속도로 총 관리를 하는데 경인고속도로 경계를 측량하니까 선인학교 그러니까 지금 인천대학(제물포 캠퍼스)이 잘려가게 됐다고. 근데 백인엽이가 지프를 타고 내려와서는 하는 얘기가 '야 학교 잘리면 안 되는데 남겨달라. 학교 피해서 가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 가는 길로 된 거지."경인고속도로 자리가 선인재단의 입김 때문에 틀어졌다는 세간의 소문이 당시 그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인 김창일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김창일 할아버지는 공직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수봉공원 현충탑 건립 사업이라고 했다. 1970년대 초반 할아버지가 인천시청 공보실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당시 인천의 전쟁 유가족들은 서울 동작구 현충원까지 가서 참배해야 할 정도로 불편을 겪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현충탑 건립 사업을 맡아 처리했다."그때 수봉공원 사업 부지가 안동권씨 일가 공동묘지 부지였는데 서울까지 가서 계속 설득했지. 결국 구획정리 사업을 하고 남은 체비지와 바꾸는 조건으로 땅을 샀어. 예산이 부족하니까 내가 건설과에 있을 때 경인고속도로 공사했던 동아건설이랑 신흥산업 불러다 나중에 공사 줄 테니까 불도저 몇 대 가져와서 땅 좀 밀어달라고 시켰지. 그땐 내가 얘기하면 다 됐어."현충탑은 기단 5.45m, 탑신 14.7m, 총 20.15m 높이로 인천 출신 한국 전쟁 전몰장병 379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할아버지는 1972년 현충탑을 세운 뒤 대한전몰군경유족회로부터 감사패와 공로패를 받았다. 이 패는 지금 할아버지의 집에 고이 모셔져 있다.승진을 목전에 둔 1970년대 후반 할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공직생활을 접어야 했다. 둘째 아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다. 인천시 새마을과장이던 할아버지는 1978년 10월 인천체전 성공 개최 공로자로 인정받아 국장 승진을 예약하고 일본으로 공로여행을 가려던 참이었다. 이때 천주교 인천지역 대학생연합회 간부였던 둘째 아들이 인하대에서 유신헌법 철폐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5월 13일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정부비방이나 학생들의 집회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한 사람 외에도 그가 속한 단체까지 처벌하도록 했다. 공무원 아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고 하니 주변의 눈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창일 할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의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힘을 썼다. 인천시장 출신 유승원 국회의원을 찾아가 탄원서를 부탁해 공화당 의원들의 탄원을 받았고 둘째 아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풀려난 뒤 사직서를 쓰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안기부의 압력에 따른 일종의 '권고사직'이었다.할아버지가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가계는 부인이 도맡아야 했다.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할아버지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인천 중구 신흥동 일대에서 '돈놀이'를 해 재산을 불렸다. 부인은 남편 모르게 모은 돈으로 중구 용동 지금의 동인천길병원 맞은편에 있는 낡은 목조 기와집을 사서 헐고 1982년 4층짜리 여관 '동보장'을 지었다. 4층은 살림집으로 쓰고 나머지는 여관으로 썼는데 뱃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퇴직 후 김창일 할아버지는 양정과장 이력을 살려 대한곡물협회 인천시지회 사무국장을 했고 이후 인천시 축구협회 부회장, 직장 새마을운동 인천시협의회 감사, 인천지검 소년선도위원으로 활동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동보장 4층 살림집에 산다. 부인은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집 이곳저곳에는 공무원 재직시절이나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받은 각종 상패가 놓여 있다. 할아버지는 가끔 아들의 부축을 받아 수봉공원을 찾는다.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는 현충탑이 있는 곳이고 자신을 공직에 입문시켜 준 김정렬 시장의 공적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망배단까지 있으니 수봉공원이야말로 김창일 할아버지의 인생이 녹아있는 곳이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남구 수봉공원에 있는 현충탑. 김창일 할아버지가 1972년 인천시청 공보실에 근무할 당시 인천 출신 한국전쟁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시설이다.◀ 김창일 할아버지가 인천 중구 용동 집에서 공직생활과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받은 각종 상패를 보고있다.◀ 1953년 6월 3일자 인천공보에 실린 자유공원 피란민 철거 기사.1982년 지금의 동인천길병원 맞은편에 세운 4층짜리 여관 '동보장'. 김창일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건물 4층 살림집에 거주하고 있다.

2017-05-17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8]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上)

300마지기 논 유복한 집안 둘째 도련님北 '농지 몰수' 토지개혁과 현물세 반발총살 위기 속 지인 도움에 홀로 '평양行'정세 좋지 않아 고향 친구따라 부산으로남겨진 가족은 인민군 동생덕에 살아남아형·아내 피란 소식에 인천 왔지만 못찾아유격대에 뜻모아 북한침투 죽을 고비넘겨아내와 극적 상봉후 정착위해 공무원 택해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91)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이미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가족을 등지고 홀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1926년 2월생인 김창일 할아버지는 재령군 서호면 신환포리에 300마지기 논과 정미소를 가지고 있는 유복한 집안의 둘째 도련님이었다.정미소가 곡창지대인 안악과 신천, 재령이 만나는 곳에 있어 할아버지의 집에는 늘 일꾼이 넘쳐났다.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할아버지가 전쟁 전 고향을 떠난 이유는 1945년 해방 이후 들어선 북한 정권의 토지개혁에서 출발한다.'농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세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불로(不勞)지주로부터 농지를 무상 몰수해 소유권을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역사문화연구소가 낸 '북한의 역사'를 보면 당시 북한의 전체 경지면적 182만98정보 가운데 55.4%에 해당하는 100만8천178정보가 몰수됐다.김창일 할아버지 집안의 논도 몰수 대상이었다. 졸지에 땅을 빼앗긴 지주들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반대했지만 많은 수의 소작농들은 토지개혁을 환영했다.이렇게 토지개혁으로 땅을 얻은 가난한 농민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 세력이 됐다.월북작가를 비롯한 지식인 계층도 북한의 토지개혁을 찬양해 힘을 더했고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지주들은 반동분자가 되었다. 1946년 북한으로 넘어간 소설가 이태준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쓴 소설 '농토'를 통해 해방 후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북한 농촌사회의 모습을 그려냈다."왜놈들만 물러갔으면 뭘 허는 거유? 세상이 공평하게 돼야지. 조선놈끼리 또 압제나 허구 또 착취나 하는 세상이면 우리 같은 건 밤낮 마찬가지지 뭐요? 토지개혁은 누구나 먼저 사람으루 똑같은 사람이 되구, 누구나 다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터 닦는 거요 이게!" 소설 주인공인 소작농 억쇠가 토지 개혁의 취지를 설명하며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땅을 빼앗긴 김창일 할아버지네 집안은 현물세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동아일보가 1949년 1월 연재한 '이북독재의 현실'이란 타이틀의 기획 시리즈를 보면 북한은 자작농에게서 쌀의 25%를 현물세로 받아가고 부역에 강제 동원했다. 현물세로 거둔 쌀은 대부분 소련으로 흘러갔다는 기사도 있다. 가혹한 현물세와 부역을 견디지 못해 반항한 지주들은 처형당하거나 탄광으로 끌려갔다. 현물세는 땅을 뺏긴 지주계급이나 새로 땅을 얻은 농민들이나 마찬가지 고충이었다.재령군민회가 1999년 편찬한 '재령군지'에도 "8·15 해방과 함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해 한 약탈행위는 천인공노할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백성을 괴롭힌 것은 현물세라는 명목으로 양곡을 수탈해간 것이다. 1946년 (재령군) 신원면사무소에는 농민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양곡이 창고마다 가득 차 있었고 기타 노적한 것은 5천여 가마니나 있었다. 소련군은 매일 기차와 군용트럭으로 운반해 가져가는 바람에 면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한 군민회원의 증언이 나온다. 그 회원은 또 "의혈청년들이 현물세 창고와 벼 5천 가마에 기름을 붓고 방화했다가 체포돼 주동자가 사형을 당했다"고 회고했다.땅을 빼앗긴 지주들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월남을 선택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이 논의됐는데 우익세력이 우위를 점하면서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 대신에 1949년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농지개혁법)을 단행했다.정확한 시기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김창일 할아버지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어느 날 북한의 토지개혁과 현물세에 반발했다가 내무서에 끌려가 총살을 당할 처지에 몰렸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생명의 은인이 나타났다. 내무서의 간부급 직원이 몇 년 전 할아버지를 중매까지 해준 집안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내무서 간부는 할아버지를 밤에 몰래 풀어줬고 평양으로 가는 통행증도 써주었다. 곧바로 해주로 달아난 김 할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고향 재령에 부모와 형제, 부인을 남겨두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평양에서 홀로 전쟁을 맞았다.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에 성공한 국군은 1950년 10월 19일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했다. 평양시청 앞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고 이승만 대통령이 그해 10월 30일 평양 땅을 밟았다.지인의 소개로 평양의 구두공장에서 일하며 숨어지내던 할아버지도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마음에 평양시청 앞으로 나갔다. 프랑스 '르 피가로'지 특파원 세르주 브롱베르제(Serge Bromberger·1912~1986) 등 한국전쟁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에 따르면 당시 평양 사람들은 집 안에 걸어뒀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았다. 또 봇짐에 허리 휜 여자들이 평양시청에 몰려들어 북한 군복 속의 오리털을 빼내 가져가느라 오리털이 발목까지 찼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인파 속에서 고향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월남했던 친구가 국군이 돼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평양 탈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공군의 가세로 다시 수세에 몰린 국군은 후퇴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함께 내려가자는 군인 친구의 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행선지는 부산이었다."친구가 정세가 좋지 않으니 함께 후퇴하자고 했지. 부산으로 가기 전에 집에 한 번 들르려고 했는데 혹시 나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까 봐 가보지 못했어. 내가 온다는 소식이 어찌어찌 전해져 집에서 소까지 잡았다고 하는데. 국군이 된 친구네 집 가족들은 모두 몰살당했다고 하더라고."뒤늦게 만난 아내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재령에 남겨진 김창일 할아버지의 가족들도 반동분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큰 고초를 당할 뻔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3살 터울이 지는 동생이 북한군 소좌여서 살아남았다고 한다."나중에 보니까 동생 창성이가 원래는 원산농대에 진학해 소련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전쟁통에 못 가고 인민군 소좌가 됐어.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인민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나타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많고 땅을 지켜야 한다며 동생과 함께 북한에 남았고 형과 형수, 아내가 1·4 후퇴 때 피란을 했지."부산으로 간 할아버지는 친구를 따라 국군 장교를 꿈꾸었다. 당시 부산 동래에는 육군종합학교가 있었는데 초급장교 숫자가 부족해져 장교를 모집 중이었다고 한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1·2기 생도들이 임관을 하기도 전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다수 전사한 상황이었다.육군사관학교 나종남 교수가 쓴 '6·25전쟁 초기 육사 생도 참전전투 연구'에 따르면 임관을 불과 20여 일 앞둔 육사 생도 1기와 입교한 지 20여 일밖에 안 된 2기 생도 530명이 전쟁에 동원됐고 이 가운데 200여 명이 전사했다."전쟁에서 소위가 부족해지니까 모집을 많이 해 군인을 할까 고민했지. 부산에 같이 내려간 친구가 교관을 했는데 도리어 (전쟁에) 나가면 죽는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포기했지."할아버지는 형과 아내가 인천으로 피란 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즉각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가족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인천에 있는 고향 사람들과 유격대를 결성해 황해도의 섬 초도로 넘어갔다. 동료들이 북한에 침투 작전을 갔다가 줄줄이 전사했지만 할아버지는 살아남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지금의 인천 동구 송림동 수도국산 피란민 촌에서 헤어진 아내를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아내는 피란 이후 수도국산에 따로 정착해 친정부모를 모시고 행상을 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물건을 잘 팔아주던 어느 집 안주인이 자기 아들과 아내를 맺어주려고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나는 못 찾아도 형님네 가족은 만날 것이다"며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동향 사람에게 물어물어 형을 만난 할아버지는 부인이 형네 집과는 따로 떨어져 인천 어딘가에 산다고 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할아버지는 피란민들이 많은 길거리부터 샅샅이 훑었다. 수도국산 쪽에서 아내를 봤다는 말을 듣고 거리를 헤매던 중 그야말로 드라마처럼 아내를 길에서 찾았다.할아버지는 인천에 이미 자리를 잡은 아내 곁을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54년 할아버지는 안정적인 공무원의 길을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무작정 인천시청을 찾아가 당시 김정렬 시장(1907~1974)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시장 비서진들이 할아버지를 막아서느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 소리를 듣고는 김정렬 시장이 나와서는 할아버지를 만나줬다."먹고 살아야겠으니 일자리 하나 얻을 수 있겠냐"는 당돌하고도 엉뚱한 질문에 김정렬 시장은 할아버지에게 건설과 계약직 업무를 내주었다. 당시 군복무를 겸해서 정부 기관 연관 일을 하던 차여서 김정렬 시장이 선뜻 일자리를 줬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직 자리를 얻은 할아버지는 이후 정식 채용절차를 거쳐 인천시청 말단 공무원으로 계속 일하게 됐다."사실 안정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 가장 컸지만 그때는 공무원들이 정보가 빨랐기 때문에 북한 소식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을까 해서 공무원을 했지. 공무원 월급도 박봉이라 아내가 여기저기 일을 하러 다니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어."북한의 반동분자에서 인천시청 공무원이 된 할아버지는 20여 년 동안 인천시청에서 공보실장, 사회과장, 새마을과장, 양정과장 등을 지냈다. 퇴직 30년이 지난 그는 지금도 '공직생활'을 일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느낀다고 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재령군 출신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가 인천 중구 용동 자택에서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17-05-10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7]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이인창 할아버지(下)

사과 유명한 북청서 대대로 땅 많은 집안1945년 부친 갑자기 떠나고 가세 기울어생계위해 북청공흥자동차 트럭조수 취직후치령 넘어 삼수군·갑산군 주 1회 왕래논농사 못짓고 오랑캐·풍토병 탓 '귀양지'김소월 詩엔 '고립된 처지' 빗대는 소재로日강점기 휘발유 사용금지로 목탄차 보급힘·속도 모자라 고개 넘어가는 길 애먹어"남한엔 없는 경관 다시한번 보는 게 소원"실향민 이인창(88) 할아버지 고향은 한반도 북부 교통요충지인 함경남도 북청군이다. 이북에서의 할아버지 삶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고향 북청 말고도 또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첩첩산중 오지라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이다. 북청군에서 북쪽으로 약 170㎞ 떨어진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 내륙의 삼수군과 갑산군 일대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10대 후반부터 화물트럭 조수로 일하며 북청에서 삼수갑산을 밥 먹듯 오갔다. 험하디험한 산길을 달리던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이인창 할아버지는 북청군 북청읍 죽평리 전주 이(李)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읍내와는 불과 3리(1.18㎞)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심지이고, 대략 300세대 정도가 거주했다고 한다. 북동쪽으로 함남 덕성군, 이원군과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大德山·해발 1천461m) 골짜기 아래에 있는 마을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북청 사과는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을 재배하기 시작해 당시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북청 사과 맛에 반한 김일성이 1960년대 이 일대에 대대적인 사과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매일경제 1972년 8월 30일자 '대한민국신문통신공동취재단 북한 방문기'에는 "김일성 수령님의 북청 교시 이래 야산을 대대적 개발해 사과밭을 만들었다"며 "모든 인민이 사과를 먹을 수 있다"고 북측 안내원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남한 기자들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한 적십자 제1차 본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의 초청으로 방북했다.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는데, 할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땅이 많아 전부 소작을 줬다. 집은 정지방(정주간)이 있는 북부지방 '기억(ㄱ)자'형 기와집에 방이 5개였다. 조부모와 부모, 3형제가 살기에 넉넉했다고 한다. 한반도 북부지방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정지방은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는 방으로 추운 겨울철 실내작업을 위해 마련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손이라 집에 베틀, 기름 짜는 틀, 발로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 두부 틀 같은 기구가 다 있어서 마을 친척들과 공동으로 썼어. 작은할아버지가 서당에서 훈장을 지냈지. 1990년대 중반 지인을 통해 중국을 거쳐서 북한 소식을 듣기로는 김일성이가 고향에 있던 옛집이며, 서당 건물이며 싹 다 헐고 사과농장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1945년 12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이듬해 3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함흥사범학교에 다니던 당시 18세의 이인창 할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북청공흥자동차주식회사 화물트럭 조수로 들어갔다. 북청공흥자동차회사 사장인 방의석(方義錫·1895~1958)은 일제 때 한반도 북부지역 운수업을 독점한 뒤 서울지역 운수업까지 진출해 '조선의 자동차 왕'으로 불렸다. 친일 행적으로 1949년에는 남한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취직할 당시 회사가 화물트럭 30여 대, 버스 20여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 이야기의 무대는 삼수갑산으로 바뀐다. 할아버지는 1주일에 한 번 꼴로 북청에서 개마고원 내륙을 연결하는 '후치령(厚峙嶺)'을 넘어 삼수갑산에 갔다. 삼수군과 갑산군은 본래 함경도였으나, 북한이 행정구역을 신설·개편하면서 현재는 양강도에 속해 있다. 삼수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16~18℃에 달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갑산은 평균 해발이 1천300m나 되는 산간벽지다. 조선 중기의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삼수갑산을, 오랫동안 여진(女眞)에 점거돼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고 사람이 살지 않다가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비로소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만호부는 고려 때 군사요새다. 삼수갑산은 예로부터 중죄인의 귀양지였다. 논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라 화전(火田)에서 기장, 콩, 보리, 조 등 잡곡만 길렀다. 오랑캐의 침범도 잦았고, 풍토병이 창궐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연산군일기'에는 1496년(연산군 2년) 5월 삼수갑산에 전염성 열병이 번져 300명이나 목숨을 잃자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갑산군 인구가 891명, 삼수군 인구가 348명으로 나오는데, 이 지역 인구 4분의1 이 전염병으로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삼수갑산이 '죽음의 땅'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을 터이다. 오죽하면 '죽을 때 죽을망정 할 말을 해야겠다'는 의미를 담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할 말은 한다'는 속담이 만들어졌을까.그럼에도 국가적으로는 접경지역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삼수갑산을 비우기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6개월 뒤인 1496년 11월 '삼수갑산은 전에 유행병으로 사람이 다 죽어 국가에서 부득이 백성을 옮겨 채우자는 것이기 때문에 죄 있는 자를 먼저 옮기려 한다'며 외지부(外知部)와 그 가족들을 삼수갑산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 조선 때 돈을 받고 송사(訟事)를 대신 맡은 사람들로 일종의 변호사 같은 직업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초까지 백성 사이에 일어난 소송을 처리하는 관원을 도관지부(都官知部)라 했다. 외지부는 정식 관원인 도관지부가 아닌데도 바깥(外)에서 그러한 행세한다고 붙은 명칭이다. 당시 나라에서는 '법률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해 법을 남용해서 옳고 그름을 변경하고 어지럽게 한다'는 등의 이유로 금지했다. 적발될 경우 온 가족이 삼수갑산까지 쫓겨나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벌을 받아야 했다. 단절과 고립의 상징, 삼수갑산은 시(詩)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34년 11월 '신인문학'에 발표된 국민시인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마지막 작품도 '삼수갑산'이 소재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붓을 꺾고 술독에 빠져 지내던 김소월은 33세 나이로 요절하기 한 달 전,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된 자신의 처지를 삼수갑산에 빗댔다. 김소월의 유고시집 '소월시초'(1939년 발간)에도 수록된 이 시의 제목은 '차안서삼수갑산운(次岸曙三水甲山韻)'으로, 스승인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이 1933년 8월 '삼천리'에 발표한 시 '삼수갑산'의 운(韻)에 맞춰 새로 쓴 시다.'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시집 '소월시초' 중 '차안서삼수갑산운' 중에서)이인창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연료를 휘발유에서 목탄으로 개조한 '목탄 화물트럭'을 타고 삼수갑산 가는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하면서 일본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때문에 민간 차량의 휘발유 사용을 금지했다. 대신 일본은 1939년 8월 목탄을 태우는 드럼통을 기존 차량에 달아 숯을 연소해 얻은 가스로 움직이는 차량을 개발해 민간에 보급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938년식 훠어드(포드·Ford) 트럭에 주로 고등어를 싣고, 후치령을 올랐어. 아흔아홉 고개라고 부를 정도로 꼬불꼬불하고 높은 길을 목탄트럭이 헐떡거리면서 올랐지. 화통에 목탄을 채워서 수수로 불을 붙이면, 목탄이 타면서 나오는 가스로 피스톤을 움직였어. 목탄 한 가마니에 150리(약 59㎞)쯤 갔을 거야. 나는 조수였는데 몇 미터 올라가면 뒷바퀴에 나무막대기를 괴어 밀고, 몇 미터 올라가면 또 막대기를 괴고 하는 식으로 고개를 넘었어. 길이 무지 험해서 그땐 트럭 조수는 힘이 좋아야 했지."목탄차는 휘발유를 연료로 쓰는 차량보다 힘과 속도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은 '고종 캐딜락을 타다'란 책에서 '높은 고개를 만나면, 어찌나 느린지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빨랐을 정도였다'고 목탄차를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오가던 삼수갑산은 당시에도 제대로 생긴 집이 드물고, 먹을 거라고는 감자와 보리밖에 없는 오지였다. 얇은 돌로 기와를 올린 오두막집이 대부분이고, 버스·화물사업소를 제외하면 근대식 건축물이 아예 없었다. 들쭉으로 담근 '들쭉술'이 유명한데, 김일성이 즐겨 마셨다는 북한의 대표적인 명주이기도 하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포도보다 알이 작은 들쭉밭이 야산 여기저기에 널렸다"고 기억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 ~1618)은 우리나라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들쭉의 산지를 갑산으로 꼽으면서 '맛은 정과(正果·과일 등을 꿀에 조려 만든 전통과자)와 같고, 다음에 나오는 포도(蒲桃) 이하는 모두 이만 못하다'고 평했다. 허균이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咸悅·익산의 옛 지명)에서 1611년에 쓴 '도문대작'은 조선 최초의 음식·식재료 품평서로 알려져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면 한글로 볼 수 있다."남한에는 후치령, 삼수갑산처럼 험한 데가 없어. 중국에나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그런 천혜의 경관은 못 봐.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젊은 시절 죽도록 고생하면서 넘었던 그 고개를 다시 넘어보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이야."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실향민 이인창 할아버지가 목탄 화물트럭을 타고 한반도에서 가장 오지 중의 오지라는 삼수갑산을 넘나들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1940년대 목탄 화물트럭/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제공

2017-05-03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6]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이인창 할아버지 (中)

제대후 서울버스 기사 취직 '마포~홍릉' 운행군용 트럭 버스로 탈바꿈한 재생자동차 몰아당시 운수회사는 개인車 공동출자 형식 운영금품갈취 깡패 기승… 전차 폐지후 승객 넘쳐1920년대말부터 인천·월미도서 서울행 다녀인천~서울 구간 '지정좌석제' 최초 도입 눈길한진그룹도 트럭 1대로 인천서 수송업 시작회사임원 거쳐 은퇴후 부평 정착 "고향같아"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부대원으로 참전했던 실향민 이인창(88) 할아버지는 제대 후 서울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취직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부터 군 생활까지 쭉 운전했다는 것을 아는 친척이 버스회사를 소개해 줬다.이인창 할아버지가 서울 땅을 밟았을 때는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5년 봄이다. 전쟁통에 자동차 대부분이 부서져 시내에서는 군용차가 아니면 자동차를 구경하기 어려웠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이 쓴 책 '고종 캐딜락을 타다'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까지 남한에서만 1만6천여 대에 달했던 자동차는 약 80%가 파손돼 전쟁 직후 군용차를 제외하면 고작 4천여 대만 남았다. 그만큼 대중교통이 귀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마포 종점에서 출발해 종로·청량리·동대문을 거쳐 홍릉까지 가서 마포로 되돌아오는 버스를 몰았어. 그때 시내버스는 전부 정비소에서 미군 재무시(GMC) 트럭을 개조한 거야. 엔진이랑 차대를 떼다가 도라무깡(ドラムかん·드럼통의 일본말)으로 만든 껍데기를 씌웠어. 도라무깡을 달구면서 망치로 살살 펴서 지붕이니 문짝이니 만들었고, 의자도 다 조립했지. 3개월이면 기가 막히게도 버스 한 대가 뚝딱 나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재주가 참 좋아."전후 폐허 속에서는 자동차를 제작할 만한 원자재도, 공장이나 기계 설비도, 자금도 없었다. 차량이나 부품을 수입해서 쓰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서울 등 대도시로 몰리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싣고 다닐 차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할아버지가 운전한 일명 '재생자동차'는 그런 상황에서 나왔다.1950년대 말까지 전국의 정비업소와 운수회사들은 미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해체하고, 쓸만한 부품을 골라내 재활용하는 과정을 거쳐 자동차로 재생했다. 제너럴 모터스가 생산한 2.5t짜리 군용 'GMC 트럭'은 40~50인승 버스로 탈바꿈했고, 중형인 '쓰리쿼터(3/4t) 트럭'은 '합승택시'라 불린 12~25인승 버스로 변신했다. 어려웠던 당시는 새로운 물자를 구하긴 어려웠지만, 폐품은 풍부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휴전까지 3년여간 우리나라에 들어온 군용차는 총 3만8천75대라고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지원사'에 나온다.군용차들이 전쟁의 와중에 폐차되거나 수리 도중에 부품이 민간으로 흘러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류를 담은 드럼통은 차체로 활용했고, 군용차의 천막 지붕이나 군용텐트는 짚과 용수철을 넣어 차량 시트로 썼다. 이런 재생자동차는 1962년 11월 일본 자동차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한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인천 부평에 설립되기 전까지 국내 자동차산업을 이끌었다. 이른바 '일본제 국산차'인 새나라자동차는 부평공장에서 2천770여 대를 생산했으나, 외화낭비 지적과 면세 특혜논란 등으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3년 7월 문을 닫았다. 이후 소형·대형버스를 제작하던 신진공업사가 '신진자동차공업(주)'로 확대돼 1966년 옛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에 터를 잡고,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어 소형차를 생산했다. 신진자동차는 현대자동차(1966년 설립), 아시아자동차(1968년 설립) 등과 함께 1970년대 '국산차 삼국시대'를 열었고,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꿨다가 대우그룹이 인수해 1983년 대우자동차가 됐다. 현재 대우차 부평공장의 주인은 대우그룹 부도사태로 2002년 대우자동차를 흡수한 한국지엠이다.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전쟁 후 우리 자동차산업은 제너럴모터스(GM)사의 미군 GMC 트럭 개조에서 출발해 일본제 조립차를 거쳐 전 세계에 수출하는 자동차를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자동차의 본향인 인천에 현재 국내 기업이 아니라 1950년대처럼 또다시 제너럴모터스(한국지엠)가 들어서 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50년대 시내버스 운수회사는 한 사람이 경영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각자 소유한 버스를 공동출자하는 형식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일종의 '지입제'인데, 버스가 곧 지분이었다. 이인창 할아버지도 계를 조직해 마련한 돈으로 개인소유 재생 시내버스를 사서 몰고 다녔다. 차비를 받는 안내원 겸 정비원인 조수는 할아버지가 직접 고용했다. 당시 버스기사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는 깡패도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7년 12월 8일자 신문에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한 시내버스회사 주차장에 깡패 7~8명이 나타나 술값을 요구하며 버스 4대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고, 직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나온다. "자유당 정권이라 깡패들이 우글우글했어. 마포 종점에서도 깡패들이 하도 버스를 뜯어먹어서 내가 대표로 나서서 협상했어. 버스에서 신문을 파는 권리를 주는 대신 상납금을 줄여달라고 하니까 그놈들이 승낙하더라고."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의 주요 대중교통수단이던 전차수요는 전쟁 이후 점점 줄다가 1968년 노선이 전면 폐지됐다. 1974년 지하철이 개통하기 전까지 시내버스는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이었다. 서울의 중심 노선을 달리던 이인창 할아버지의 버스도 '러시아워'때면 승객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좌우간 안내원이 사람이 꽉 차서 숨을 못 쉴 정도로 버스에 승객을 밀어 넣었으니까…. 신촌에서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많이 탔는데, 커브를 돌 때마다 남자들한테 치이니까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지."인천의 대중교통 버스는 언제부터 운행하기 시작했을까. 적어도 1920년대 말부터 인천에서 서울을 오간 버스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28년 6월 18일자에는 경성(서울)에 사는 임씨라는 사람이 경성~인천 간 버스영업을 처음으로 허가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기사는 '경인 간으로 말하면 매일 12회 기차 발차가 있지만, 오히려 불편을 느낄 만큼 교통이 빈번할 터인데, 이제 뻐스 통행으로 경인 간 교통이 한층 원활케 할 모양이라더라'고 전했다. 이듬해에는 경성과 월미도 간 버스도 개통했는데, '기차와 경쟁하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월미도는 바닷물을 호텔 앞에 가둬 만든 '조탕(朝湯)'이라는 시설로 수도권 인기 관광지였다. 특히 당시 월미도는 '유흥'과 '불륜'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 월미도까지 경인철도를 타고 가느냐, 버스를 타느냐의 문제는 '속도'와 '비용' 간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1934년 2월 13일자에 낸 '경인뻐스로 철도국이 두통'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경성~월미도 간 버스 운임은 63전이고, 철도 운임은 70전이라 훨씬 빠른 기차를 버리고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1934년 쓴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주인공 구보가 경성역에서 애인과 함께 월미도로 놀러 가는 동창을 만난다. 아마도 구보의 동창은 애인에게 체면을 차리고 싶은 마음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한 버스보다는 기차를 택했을지 모른다. 소설 속 구보는 이렇게 상상한다. '이러한 시각에 떠나는 그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를 그곳에서 묵을 게다. 구보는 문득, 여자의 발가숭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애무할 그 남자의, 야비한 웃음으로 하여 좀 더 추악해진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그리고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기차처럼 좌석을 지정해 버스표를 파는 '지정좌석제 버스'가 전국에서 처음 도입된 노선도 인천~서울 간 버스다.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趙重勳·1920~2002) 회장이 1961년 8월 주한미군에서 2년마다 교체하는 통근용 버스를 불하받아 지정좌석제 버스사업을 시작했다. 만원버스나 만원열차에 시달리던 인천시민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한국 수송의 거목(巨木)이라 불리는 조중훈 회장이 일군 한진그룹은 인천에서부터 그 뿌리를 뻗어 나갔다. 조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5살 나이에 인천 중구 해안동의 한 창고에 '한진상사'란 간판을 달고, 트럭 1대로 수송업을 시작했다. 주로 인천항에 드나드는 화물을 실어날랐다. 5년 뒤에는 종업원 40여 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조중훈 회장은 1996년 낸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인천을 새로운 사업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중국과의 교류를 겨냥해 무역업에 뛰어들려는 생각에서였다"며 "인천은 한강 유역에 걸쳐 있는 수도의 관문으로, 각종 산업물자가 조달되는 곳이었다"고 했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1970년대부터 버스회사 노선 상무를 맡아 임원으로 올라서면서 운전대에서 손을 놨다. 할아버지는 환갑이 지나 은퇴한 뒤 1992년부터 인천 부평구에 정착했다. 아들이 부평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부인을 만난 것도 인천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당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에서 감독 일을 하고 있었다.할아버지는 1950년대 버스회사 취직 전 군대에서 상관이던 사람의 사업을 잠시 도운 적이 있다. 인천 화수부두에서 새우젓 등을 떼다가 서울 중부시장이나 가락시장에 팔았는데, 화수부두 단골 순댓국집 사장이 장모가 되었다."장모님이 된 순댓국집 사장님이 나를 착실하다며 좋게 봤어. 이북에 가족을 두고 왔으니 자기 딸과 서로 위로하고 살아보라고 직접 중매를 섰지. 딸 시집살이할 걱정 없어서 혈혈단신인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몰라(웃음).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은퇴하고 인천으로 내려와 여태까지 살고 있어. 이젠 인천이 고향 같고 편해."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인창 할아버지가 옛사진이 담긴 낡은 앨범을 뒤적이며 1950년대 버스기사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1950년대 말 이인창 할아버지(사진 오른쪽)가 구입해 몰고 다녔던 서울 시내버스. 미군용 GMC 트럭 엔진과 차대 등에 드럼통을 펴서 만든 외관을 씌운 '주문제작방식'의 재생 자동차다. 노선번호가 없이 '마포~홍능'이라고 적힌 버스는 지붕 모서리 쪽에도 유리창을 낸 디자인이 독특하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멋을 내려고 버스제작 주문을 할 때 지붕에 창을 낸 건데, 나중에 서울시에서 승객이 위험하다고 금지했다"고 말했다. 사진/이인창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이인창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운수회사 동료의 버스 앞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진. 이인창 할아버지 소유 버스와는 외관이 다르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서울 마포종점에 있는 운수회사 주차장 인근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서울시내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인창 할아버지 제공

2017-04-27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5]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이인창 할아버지 (上)

죽평리 '전주 李씨 집성촌'서 10대 후반부터 트럭 조수로 일해인민군 징집 후 탈출해 국군 자원입대 '인민유격대' 쫓는 운전병 맡아문경 총격전 못잊어… 참수한 시체중에는 고향 전화국 근무 아가씨도 있어 '충격'당시 동료들과 친목회 조직 아직 매월 한차례 만나 40여명서 9명으로 줄어 '씁쓸'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이인창(88) 할아버지는 10대 소년 시절부터 화물트럭을 몰았다. 한반도에서 오지 중의 오지라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이 무대였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 토벌부대 소속 운전병으로 소백산맥의 전장을 누볐다. 전후 서울에서 미군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를 운전해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현대사를 관통했다. 은퇴하고 나서는 인천 부평구에 정착해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이인창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죽평리의 '전주 이(李)씨' 집성촌이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건축설계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 아버지가 해방 직후 세상을 뜨자 가세가 기울었다. 이 무렵 10대 후반이던 할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북청의 한 운수회사에 취직해 화물트럭 운전기사 조수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20살 청년이던 할아버지도 인민군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9월이 조금 지나서였나, 인민군 한 무리가 북청읍에 와서 내가 타고 있던 트럭을 세우고 '조수 내려와'라며 강제로 끌어내렸어. 지나가는 젊은 사람은 무조건 붙잡더라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진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으니까 인원이 많이 모자라서 막 끌고 가나보다 싶었지."함흥에 집결해 있던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는 와중에 인민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돌아간 고향 땅은 전쟁의 포화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한국군이 북청군으로 진격하기 전 '이승만 만세'라는 문구로 시작해 '태극기를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나오는 집은 폭격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 교전이 길어진 탓에 삐라를 뿌린 지 일주일 만에야 한국군은 할아버지 고향을 점령했다. "국군의 북청 진격이 늦어져서인지 우리 마을에서만 8명이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는데, 그중에는 일가친척도 있었어. 인민군들이 어린아이들한테 '너희 집에 태극기 만들었느냐'고 묻고 다니면서 국군 부역자라는 죄를 씌울 사람을 색출했다는 거야. 고향 마을은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고…. 참 끔찍한 기억이야."이인창 할아버지는 한동네 사는 또래 청년 17명과 함께 곧장 한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신병 훈련을 받던 도중 중공군 개입으로 이남으로 철수해야 했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서 훈련을 마친 할아버지는 1951년 초반 육군 제2사단 예하 제10경비대대에 배치됐다. 이북 출신 장병이 많았다고 할아버지는 얘기했다. 문경새재를 비롯해 경북 문경, 상주, 안동, 영주 등 소백산맥 일대 빨치산을 토벌하는 게 제10경비대대의 임무였다. 화물트럭 운전 경력을 가진 할아버지는 대대장 운전병을 맡았다.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말로, 비정규군 유격대를 뜻한다. 게릴라(guerrilla)와 같은 의미다. 한반도 이남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군사조직을 갖춘 북한계열의 빨치산인 조선인민유격대가 전국 산악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에는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이현상(李鉉相·1906∼1953)이 이끈 남부군(남반부 인민유격대)이 유명했다.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섞여 있었다. 국방부 추산에 따르면 1950년 10월에는 1만5천여 명 규모까지 확대됐으나, 남한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1952년 11월 1천300여 명까지 줄었고, 휴전 이후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빨치산 토벌작전은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펼쳤다. 할아버지가 속한 부대는 빨치산 부대가 지나갈 만한 통로에 구멍을 파놓고 매일 매복을 했다. 빨치산 부대와 마주쳐 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흔치는 않았다. 그러나 산간지대에서의 게릴라 전술에 익숙한 빨치산 부대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 이동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초긴장 상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빨치산 부대는 첩첩산중에 숨어들어 발자국조차도 남기지 않아서 추적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어. 산 아래 마을 어느 집에 소가 한 마리 없어지면 분명히 빨치산이 와서 가져갔다는 얘긴데, 소 한 마리를 잡아도 피 한 방울 남기지 않는 거야."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빨치산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일종의 금기였다. 빨치산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우태(李愚兌·1922~1997)가 1988년 발표한 최초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에서는 ▲똥오줌을 함부로 누어놓으면 그 온도로 빨치산이 지나간 시간과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눈 위를 걸을 때는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밟아야 수십 명이 지나간 발자국이 두세 사람 발자국처럼 보인다 ▲능선을 걷는 사람 그림자는 밤중이라도 뚜렷이 눈에 띈다는 등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행동수칙이 등장한다. 총기 오발을 할 경우 즉결 처분이 원칙이었다고 한다.이처럼 빨치산들은 산속에 은신하려고 불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해 생쌀을 씹어 허기를 채우기 일쑤였다. 언 땅에 누워 잠을 청했기 때문에 배탈이 잦았다고 한다. 그런데 빨치산 사이에선 총알에서 화약을 꺼내 먹으면 배탈에 즉효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우태는 '남부군'에서 "총탄마다 폭약의 모양과 효능이 약간씩 달라 무슨 탄이 제일 잘 듣는다는 소문까지 났다"며 "하두들 총탄을 까먹으니까 나중에는 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회고했다.이인창 할아버지는 1952년 7월께 문경 은성탄광 부근에서의 전투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제10경비대대 소속 2개 중대가 빨치산 14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11명을 사살하고, 3명은 생포했다고 한다. 한국군은 8명의 부상자가 났다. "사령부에서 사살한 공비의 목을 잘라 보내라고 했나 봐. 시체 5구의 목을 잘라서 상자에 담아 대구 육군본부로 보냈어. 참수한 시체 중에는 고향 북청군 전화국에서 근무하던 아가씨가 끼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아무튼 그때 공로로 부대원들이 훈장도 받고, 돼지도 잡아다가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그랬어."험준한 산지의 극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빨치산과 토벌대 간 전투는 어느 전장보다도 치열했고, 이미 죽은 적의 목을 베어 참수할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참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난 처형 수단이자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의 상징이다.조선 때에는 일명 '망나니'라 불리는 '회자수'가 참수형을 집행했다. 사형수 중에서 다른 죄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망나니는 자연히 자신의 사형집행이 미뤄지는 혜택을 받게 된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는 해주의 간상배(奸商輩) 신복동 패거리를 징벌한 장길산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망나니로 전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살인죄로 투옥돼 망나니가 된 우대근이란 인물은 장길산에게 "참말 못할 짓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가 끔찍한 일이오. 일테면 제 목숨 부지하겠다고 남의 목을 치는 사람 백정인 셈이우"라고 한탄한다.한국군이나 경찰이 빨치산을 참수한 사례는 이인창 할아버지의 증언뿐이 아니다.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에는 국군이나 경찰이 유격대원(빨치산)을 생포하면 주민들을 모아놓고 논두렁이나 산기슭에서 총살하기 일쑤였는데, 미군 고문관들에게 토벌 실적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잘라갔다는 내용도 있다.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말미에는 수류탄으로 자폭한 빨치산 염상진의 목을 토벌대가 고향으로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이틀이 지난 벌교역 앞마당에는 사람의 목 하나가 내걸렸다. 폭이 육십 센티 정도고, 길이가 이 미터 정도 되는 나무판이 받침목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졌고, 그 꼭대기에 머리카락 위로 모아 묶은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로 붙은 종이에는 큼직큼직한 글씨들이 씌어 있었다.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한국전쟁 이전에도 있었다. 동아일보 1950년 4월 14일자 신문을 보면, 한국군 부대가 경북지역 빨치산을 지휘하던 이호제를 사살하고 "이를 확인코자 시체에서 목을 잘라 군 당국에 이송했다"고 나온다. 이호제의 빨치산 부대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열 군인들이 1948년 10월 무장봉기한 '여순(전남 여수·순천)사건' 이후 남한에서 조직돼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직전 군과 경찰에 의해 토벌됐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휴전협정 이후 토벌대에서 제주도에 있는 육군 훈련소로 근무지를 옮겨 간부 차량을 운전했다. 제주도에서 1년가량 더 복무하다가 제대했다. 제10경비대대에 함께 복무했던 사람들끼리 친목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매월 28일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모인다. 회원은 40여 명이었는데, 현재는 세상을 뜨거나 몸이 불편해 9명만 친목회에 나오고 있다고 한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실향민 이인창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소백산맥 일대 빨치산 토벌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한국전쟁 때 빨치산 토벌부대 운전병들과 사진을 촬영한 이인창 할아버지(맨 왼쪽). 빨치산 토벌부대 일반병사에겐 주로 M1소총이 지급됐는데, 운전병은 칼빈(Carbine) 소총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이인창 할아버지 제공이인창 할아버지(사진 오른쪽)가 한국전쟁 때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동한 빨치산 토벌부대 대대장 운전병으로 근무하던 모습.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미군 '쓰리쿼터(3/4t) 트럭'이었다고 한다. /이인창 할아버지 제공지리산에서 활동하다 1951년 12월12일 구례 포로수용소로 잡혀온 빨치산과 그 가족들. 출처/주한미군 기지관리 사령부

2017-04-19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4]평안북도 용천군 출신 이형근 할아버지 (下)

반공포로 출신이라 이산 상봉 신청못해육군 근무경력도 있어 식구들 피해 우려무역회사 운영 부친 영향 중국서 살기도압록강 하구 드넓은 평야·염전으로 유명2004년 용천역 열차폭발로 알려진 지역일제때 수탈·물자수송 목적 '철도' 발달팔뚝만한 '조기' 잡혀 용암포 어시장 유명기독교 전파·경제적 풍요 탓 교육열 높아1915년 서당 104개 1930년 유치원 설치도해방후엔 소련군 수탈 이어져 고통 계속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출신 실향민 이형근(88) 할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강제 동원돼 전장(戰場)에 내몰렸다가 미군의 포로가 됐다. 포로 석방 이후엔 국군에 자진 입대해 인천항 인근 육군 병참기지창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 인연으로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 후 동인천역 앞길에 자그마한 전기상회를 차려 전기통신 자재를 납품·시공하는 회사로 키웠다. 포로 생활이 몹시 힘에 겨웠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덕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은 면했다. 인천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남모르는 혼자만의 고통도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한으로 남아 가슴 한편에 구멍을 뚫었다."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생각도 하지 않아. 브로커 시켜서 겨우 가족을 찾았지. 3년 전 중국까지 가서 통화를 했어. 뭐 있겠어. 한참 울었지. 살아 있는 날까지 잘살라고 한 게 마지막 통화였어."반공포로 출신, 특히 남한에서 군 복무를 한 실향민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않는다고 한다. '못한다'는 표현이 맞는 듯, 행여 이북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전쟁에서 인민군으로 싸우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남한에 번듯이 살아 있는 게 알려지면, '반동분자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도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싣지는 못하고 그저 용천까지만 언급하기로 한다.이형근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해 몇 년간 중국에서 산 적이 있다"며 "(아버지는) 무역을 하시니까 중국어와 영어도 잘하셨다"고 했다. 용천군은 중국과 가깝다. 철도 등 교통이 발달해 왕래가 어렵지 않았다. 중국 대륙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을 중심으로 양시선(신의주~양시~남시), 다사도선(양시~용암포~다사도) 등의 철도 노선이 있었다. 1904년 3월 23일 개항한 용암포에서는 배가 떴다."용천군이 뭔가 하면, 2004년 용천역 열차 폭발사고 알지? 그게 용천이야. 그때 많이 죽었어. 그래서 모금 운동도 벌였잖아."용천군에 철도가 발달한 이유가 있다. 일본이 쌀과 소금을 빼앗고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다. 용천은 압록강 하구에 펼쳐진 평야와 염전이 유명하다."용천에는 인천 소래와 같은 염전이 있어. 이북에서 가장 큰 염전이지. 그래서 소금 염(鹽)자를 써서 '염주군'(1952년 12월 용천군과 철산군 일부를 합쳐 신설한 지역)이라고도 하잖아. 용천벌(용천평야)은 우리나라에서 3~4번째로 넓은 평야야."철도는 쌀·소금 수탈과 전쟁의 수단이었다. 일본인이 만든 회사 불이흥업은 용천에도 불이농장(不二農場)을 만들어 쌀과 노동력을 착취했다. 일제는 곡물검사소와 정미소까지 운영했다. 어찌 보면 인천과 비슷한 처지였다. 일제는 인천항을 통해 쌀과 소금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호남에도 불이농장이 있잖아. 그게 일본놈 회사인데, 용천에도 있었어. 노동 착취가 심했어. 쌀이 100가마 나오면 70가마는 일본놈에게 바치고 30가마밖에 못 먹었어. 지주한테도 줘야 하니까 30가마도 안 되는 거지 뭐."평북 출신 장충식(85) 단국대 이사장은 대하소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를 썼는데, 주요 배경이 용천이다. 그의 소설은 용천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용천군은 평안북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로서 산세가 아름다우며 물이 맑고, 예로부터 북방 방어의 요충이며 대륙 진출의 전초 지역이었다. 용천군은 압록강 하류에서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광활한 황해 바다와 접하고 있어서 농수산 자원이 풍족하고 지형이 평야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옥토로 생활 수준이 풍요로운 고장이었다.'쌀과 소금 다음으로 용천에서 유명한 것을 꼽자면 '조기'일 것이다. 용천 앞바다는 인천 연평도처럼 '조기 어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강현(62) 제주대 석좌교수는 저서 '조기에 관한 명상'에서 "용천 용암포 근역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으며 서쪽의 마안도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섬이다. 밑으로는 반선열도가 이어져서 조기떼가 몰려든다"며 "군 소재지인 용암포는 어시장으로 유명했다"고 했다. 용암포와 부라면 선리동의 어시장에서는 해산물 등이 거래됐으며, 용암포 어시장은 4월부터 11월까지 매일 열렸다.경향신문은 1985년에 '분단 40년-다시 가야 할 우리의 산하'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는데, 그 10회째가 '용천군'이다. 기사 내용 일부를 옮겨 본다."용암포구 어시장에서 할아버지가 사오신 조기가 두름으로 엮어져 처마 밑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우리의 집들이 오손도손 모여 살았습니다. (중략) 오늘도 며느리가 구워 올린 굴비를 볼 때마다 '남기지 말고 많이 먹어'라며 굴비의 살점을 발라내어 주시던 오마니의 정겨운 냄새가 가슴으로 저며 들어 왈칵 되살아나는 우리의 고향, 용천입니다."용천 출신으로 군민회장도 지낸 평안북도중앙도민회 이인범(82) 사무총장은 "용천의 조기는 팔뚝 만하다. (나는) 해방 이후 남한으로 왔는데, 고향에서의 기억 때문에 모든 조기가 그렇게 큰 줄 알았다"며 "조기를 소금에 절여 부엌 그늘에 매달아 놓고 1년 내내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세종실록지리지' 용천군 편에도 조기가 나온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삵가죽·수달피(水獺皮)·옻·족제비털·어교(魚膠)·동(銅)·철(鐵)·지초(芝草)요, 약재(藥材)는 감출(甘朮)이며,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麻)·닥나무·왕골·배·밤이요, 토산(土産)은 밴댕이(蘇魚)·조기(石首魚)·민어·준치·홍어·넙치·세린어(細鱗魚)·오징어·상어·큰새우·굴·도아조유(島阿鳥油)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어교는 대구 등 물고기의 부레를 말린 것, 지초는 버섯의 일종, 감출은 엉겅퀴과에 속하는 약초를 말한다. 도아조유는 사다새(펠리컨·pelican)의 기름이란 뜻으로, 피부병 등을 치료하는 데 쓰였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는 사다새 기름이 음식창(陰蝕瘡, 음부에 생기는 부스럼)과 옹종(癰腫, 큰 종기)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귀한 진상품이었던 사다새 기름은 남획 등으로 인해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에는 '사다새가 평안도에도 희귀했다'는 기사가, '선조실록'에서는 '내의원이 평안도 사다새 기름을 때맞추어 올려보내지 않는다고 하여 글을 내려 독촉하자고 청하였는데, 민폐가 극심할 것이니 아직 하지 말라고 전교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잡지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 실린 '평북의 산업, 농·공·상·축·임·광'이란 제목의 글에서도 조기를 중요 수산물로 꼽기도 했다.용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던 지역이다. 이형근 할아버지의 아버지·어머니도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서당을 거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했다."내가 보통학교 들어가기 전 일이야. 아버지가 큰 초가집을 사서 서당을 만들었어. 그렇게 해놓고 중국으로 가셨는데, 서당 선생이 그렇게 무서웠어. 그때는 어머니 분통 덮개에 모래를 담아서 한자를 쓰고 지우고 했어."김효전(1945년 용천 출생) 동아대 명예교수가 펴낸 '용성지'(龍城誌)를 보면, 용천은 교육열이 대단해 신식 학교도 많았지만, 야학도 번창했다. 일제는 평북 최초로 용암포에 일본인 전용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5년 용천군의 서당 수는 104개로 평북 내에서 가장 많았으며, 1930년에는 유치원도 설치됐다. 교육열이 높은 이유로는 '기독교 전파'와 '경제적 부(富)'를 들 수 있다. 용천노회(老會, 목사와 장로 대표 모임)가 1928년 평북노회에서 분리돼 신설됐는데, 군(郡)에 하나의 노회가 조직된 곳은 당시 평북은 물론 전국에서 용천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만큼 교회와 교인이 많았다는 얘기다. 용천은 쌀과 소금, 농·수산물이 많다 보니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자녀를 중국이나 일본 등 해외로 유학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이형근 할아버지는 용골산성(고구려시대 산성)이 유명하다고 했다. 용골산성이 있는 용골산은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산에는 더덕과 도라지 등이 널려 있었다. 산세는 험했다. 높이 올라가면, 사람이 못 들어갈 정도로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밤에는 산에 사는 '승냥이'와 '삵' 같은 짐승이 마을로 내려와 닭 등 가축을 물어 가기도 했다.일본의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용천 주민들의 고통은 계속됐다. 해방 후 용천에 주둔한 소련군의 수탈이 일본인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일본놈이 착취하고, 해방이 되니깐 마찬가지로 소련이 다 가져갔어. 그래서 해방 다음 해에 기근이 온 거야. 오죽했으면 김일성 장군을 '죽장군'이라고 불렀겠어." '죽장군'은 매일 풀죽만 먹인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란다.이형근 할아버지는 "우리 용천, 그리고 황해도 재령이랑 연백, 평남 신안주 삼천리벌은 엄청 큰 곡창 지대"라며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면 참 살기 좋은 곳인데, 내 생에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출신 실향민 이형근(88) 할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조기 회유도. 주강현 저서 '조기에 관한 명상'(한겨레신문사, 1998)에서 발췌.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경향신문 1985년 8월 10일자 12면에 실린 캠페인성 기획기사 '분단40년-다시 가야 할 우리의 산하 ⑩용천'. 용천의 중요 수산물 '조기'를 소금에 절인 뒤 줄에 엮어 말린 굴비 모습이 인상적이다.

2017-04-1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3]평안북도 용천군 출신 이형근 할아버지 (中)

9병참기지창서 유류 보급… 기름 도둑 들끓어 직접 송유관 폐쇄하기도제대후 동인천역 앞 노점으로 시작 '전기상회' 차려 주안역쪽 확장·이전전화국·경찰서와 '거래' 전화기 판매도… 인부 사망사고 겪고 공사 접어평북 용천(龍川)군 출신 실향민 이형근(88) 할아버지는 약 2년 8개월간 부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했다. 1953년 9월 육군에 자진 입대했다. 애국심이라기보다는 밥을 먹여주는 곳이 군대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배치된 곳은 인천항 인근 병참기지창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다시 인천 땅을 밟았다. 전쟁통에 부산 포로수용소로 갈 때 인천항이 출발지였다."인천항 그 자리를 몇 년 만에 다시 온 거야. 그 부대에서 4년 정도 근무했어. 아직도 거기를 못 떠나. 말하자면 제2의 고향이지."할아버지가 있던 부대는 육군 제9병참기지창으로, 식량·피복·유류 등을 중부전선 부대에 보급했다. 도로와 철길을 기준으로 인천항(내항) 부두 쪽에는 미군 부대가 있고, 그 맞은편에 제9병참기지창이 있었다. 할아버지 숙소는 지금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였다.중구 신흥동에는 일본인들이 만든 정미소가 많았다.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는 '가토(加藤)정미소'였으며, 그 옆 대림아파트 부지는 '오쿠다(奧田)정미소' 자리다. 지금 할아버지가 사는 곳은 수인사거리 인근 경남아너스빌 아파트다. 여기는 '리키다케(力武)정미소'(광복 후 고려정미소로 변경)가 있던 곳이다. 개항 후 인천은 쌀 집산지 역할을 했다. 1880대 후반부터 송학동, 신흥동, 북성동, 만석동 등지에서 일본 자본 중심의 정미업이 성했다. 특히 항만과 철도 인프라 이용이 편리한 신흥동은 정미업을 하는 데 있어 최적의 장소였다.작가 현덕(1909~?)의 단편 소설 '남생이'는 1930년대 미곡 수출항이었던 인천항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노마'의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는데, 부두에서 낙정미(落庭米)를 쓸어 모으는 일부터 시작한다.지금도 이마트 동인천점 주변에는 빨간 벽돌 건물 몇 채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빨간 벽돌이 전부 우리 피복창고였어. 이런 창고가 강원연탄 있는 데까지 쭉 있었지. 옛날 왜정 때 일본놈들 미곡창고 아니갔어. 내가 사는 아파트도 창고였어."중부전선에 보낼 피복과 유류 등 군 보급물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부대 앞으로 2개의 철길이 지나고 있었다. "미군 보급물자가 제2도꾸(dock)에서 내려서 하역장으로 오지. 군사보호구역이라서 (부두를) 민간이 못 썼어. 미군 관할이야. 여기서부터 수인역까지 전부 미군이 관리했어."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7월 펴낸 '인천항사'에 따르면 해방 후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가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구분됐다. 인천 미군항은 1971년 6월 폐쇄됐다. 그해 4월 30일자 경향신문은 '해방 후 미군이 화물선 전용항으로 사용하던 인천 미군항이 오는 6월 30일 폐쇄돼 한국정부에 이양된다'고 보도했다.이형근 할아버지는 군부대에서 유류 보급을 담당했다. 남구 용현동 미군 유류보급창(POL, 현 SK스카이뷰 아파트)에 있는 유류를 중부전선 부대에 보내는 행정업무였다.송유관에서 기름을 빼내는 '기름 도둑'도 참 많았다. 결국 송유관을 폐쇄했다."파이프라인을 내가 철폐했어. 송유관이 4개가 있었어. 경유 2개, 휘발유 2개. 그런데 여기서 기름을 보내면 3분의 1은 도둑을 맞으니 골치가 아팠어. 그래서 미8군과 협의해서 라인을 없앴지."송유관은 드럼통을 이용한 화차(貨車) 수송 방식으로 변경됐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빈 드럼통을 미군에 반납해야 거기에 유류를 다시 담아 보내주는데, 빈 드럼통 회수가 안 되었다. 미국 유류회사에서 "드럼통이 없으면 기름을 줄 수 없다"고 나왔다. 파악해 보니 드럼통 30만 개가 부족했다."우리가 화차로 도람(드럼통)을 100개 보내주면 50개는 팔아먹는 거야. 기름을 팔아먹어도 공도람은 가져와야지. 도람까지 주고 온 거야. 나중에 생각해 보니 빈 드럼통을 펴서 버스 철판을 때우는 데 사용했던 거야."용현동 POL에서 큰불이 나 기름 수만 통이 탄 적이 있다. 이때 불에 그을린 드럼통을 펴서 중구 도원동 공설운동장 담장을 두른 일화는 경인일보가 펴낸 책 '인천인물 100人' 정용복(1910~1977) 편에 자세히 나온다.이형근 할아버지는 군 생활을 할 때 부대 옆에 있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위문편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인천여상 옆에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기관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군복 다림질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고 한다. '인천여상 칠십년사'에는 한국전쟁 이후 학교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인천항과 가까이 있던 인천여상은 전쟁 후에도 400여 명의 피난민이 교사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운동장에 고사포(高射砲) 부대가 남아 있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몰래 학교를 들락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미군 헌병이 여선생님을 '양공주'로 오인해 연행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제대 후 동인천역 앞 하꼬방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송판을 대고 자리를 만들었지. 노점 비슷하게 했어. 여기 전부 노점상이었어."노점에서 돈을 모은 할아버지는 인근에 '신전사'(新電社)라는 이름의 전기상회를 차렸다. 형광등과 전기 부속품, 전기통신 자재를 팔았다고 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전파상과 조명가게가 밀집해 있다. 할아버지의 신전사 자리에는 '신흥전기'라는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는 노점들이 역전 앞 큰 길가 쪽에 있었어. 굴다리 밑도 전부 노점상이었어. 이것을 양조장 건물 뒤로 옮겨 놓은 거야. 그리고 나중에 양조장 건물을 분할해서 팔았지."이형근 할아버지는 동인천역 앞에서 60년대 후반까지 장사를 하다가 주안역 쪽으로 가게를 옮겼다. 전기통신 자재 납품과 공사 물량이 늘어나면서 가게를 확장·이전했다.할아버지의 고객은 전화국과 경찰서였다. 전화국에 전기통신 자재는 물론 전화교환원이 쓰는 방석부터 심지어 은행(은행나무 열매)까지 납품했다. 전화번호를 공개 추첨 방식으로 배당할 때, 은행알에 번호를 적어 통에 넣으면 신청자들이 뽑았다고 한다. 당시 은행알 추첨 방식은 중학교를 배정하거나 전국체전 대진표를 짤 때와 같이 다양한 곳에 활용됐다. 동아일보 1984년 9월 6일자 신문에는 '체전 대진 첫 컴퓨터 추첨'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대진표 작성 방법이 은행알에서 컴퓨터 추첨으로 바뀌는 시기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대진 추첨은 종래의 은행알 추첨이 3시간 이상 소요되던 것에 비해 단 1분이면 모든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 그러나 이날 체육회 측은 너무 싱겁게 대진 결과가 나오면 시·도 임원들이 허탈감에 빠진다고 진단, 일부러 한 종목씩 추첨을 해 1시간 반 동안을 끌었다'는 내용이다.할아버지는 전화기를 판 적도 있는데, 당시 전화 1대 놓으려면 집 1채 값만큼 비쌌다고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다. 대통령비서실이 1970년 5월 15일 작성한 '전화행정 쇄신 방안'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면, 인천지역 전화 가설료는 정부 고시가격의 217%에 달했다. 사거래 시장에서의 전화값은 훨씬 비쌌다. 경향신문 1970년 3월 19일자에는 체신부 장관과의 방담이 실렸는데, 기자는 전화 1대 값이 집값과 맞먹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 걱정이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선일보도 1973년 11월 18일자 사설에서 '사거래 되고 있는 전화값은 서민들의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만큼 치솟았다'고 했다.'한국전기통신 100년사'는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인천지점을 우리나라 최초 전화 가입자로 기록하고 있다. 인천전화소가 교환 업무를 시작한 1903년 2월 17일 본점과 인천지점 간 통화가 이뤄졌다. 초기 가입자는 5명으로 공적 성격이 강한 단체였다. 1905년 4월 말 기준 인천 가입자는 28명으로,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1950년대 후반 인천전신전화국은 신포동 인천우체국 건물에 있었는데 1964년 9월 중구 신흥동(현 옹진농협 건물 자리)에 사옥을 건립했다가 1983년 9월 남구 숭의동 현 KT 숭의지사 자리로 이전했다."전화국이 인천우체국 2층에 있다가 지금 신흥동 농협 자리로 갔어. 근데 그곳이 갯바닥이야. 전화국 기계가 좀 무거워? 자꾸 주저앉는 거야. 길가에 큰 차가 지나가면 전화국 2층이 울릴 정도였어. 할 수 없이 헐었어." 매립지에 지은 건물이 내려앉았다는 얘기다. '인천시 중구사'를 보면 신흥동 사옥 터는 1910~1945년 사이에 공유수면 매립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할아버지는 1972년 1월 백령도에서 인부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재기 불능 상태였어.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주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 그나마 신용 하나는 있어서 자재 납품은 계속할 수 있었어. 그때 이후로 공사는 접었어."할아버지는 1999년 12월 말 신전사 간판을 내렸다. 일흔 넘은 노인네다 보니 관공서 젊은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전화기 판매·수리부터 전기통신 자재 납품에 공사까지 40년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한순간도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 게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평북 용천군 출신 실향민 이형근 할아버지가 인천시 중구 신흥동 빨간벽돌 창고(일본인들이 만든 정미소자리) 앞에서 창고가 인천 미군항 피복창고로 사용됐다며 군부대에서 유류보급을 담당했던 군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이형근 할아버지가 장사를 시작한 동인천 전파상 상점들 앞에서 당시 전화 1대를 놓으려면 집 1채 값만큼 비쌌다고 설명하고 있다.1930년대 인천항 백미 선적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1965년 인천전신전화국 자동전화 개통식. /국가기록원 제공

2017-04-05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2]평안북도 용천군 출신 이형근 할아버지 (上)

스무살 청춘 반 강제로 인민군 지원부대해체 후 미군에 잡혀 포로 신세"굶주림과 갈증 오죽하면 핏물 마셔"평양형무소 '화재'후 인천에 끌려와부산·거제 옮겨 다니다 수용소 탈출 우연찮게 민의원 김정실 집에 '피신'"친부모보다 잘해준 분들 잊지 못해"육군에 자진 입대… 이때 인천 배치전기통신회사까지 세우고 자리 잡아인민군 포병, 반공포로, 육군 병참기지창 이등중사(하사), 전기상회 사장.1929년 평안북도 서북부지역 용천(龍川)군에서 태어난 이형근(88)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동원됐다가 미군 흑인 병사에게 잡혀 포로가 됐다. 평양, 인천, 거제도,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거쳐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할아버지는 풍파를 만난 배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반도 서북단인 고향 용천에서 부산까지 너무 먼 길을 왔다. 전쟁이 멈췄을 때 그에게 남은 건 몸뚱이뿐이었다. 아니,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갈 곳 없는 이형근 할아버지는 호구지책 삼아 육군에 자진 입대했고, 인천항이 보이는 육군 병참기지창에 배치됐다. 인천은 그렇게 제2의 고향이 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동네에 산다. 동인천역 앞에서 전기상회를 운영하고, 통신 관련 사업도 하면서 4명의 딸을 키웠다.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 이형근 할아버지는 평북 용천 고향에 있었다. 20살이었다. "그날 비가 왔어. 전쟁이 난 거야. 그때까지도 인민군에 안 나갔어. (남북이)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할 때인가? 병력이 부족하니까 인민위원장이 '이형근 동무는 왜 인민군에 안 가는 거야'라고 독촉하더라고."할아버지는 그해 8월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지원했다. 아버지는 동족끼리 싸우는 전쟁에 자식을 내보낼 수 없다며 아들의 인민군 입대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나 혼자 살겠다고 마냥 도망 다닐 수만은 없었다."인민군이 총을 메고 나를 잡으러 다니는 거야. 말이 자율적 지원병이지 강제 동원이나 다름없어. 우리 가족을 너무 못살게 구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나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어."이형근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포병이 됐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보병이 돼 3일간 총 쏘는 방법만 배운 뒤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신의주에 있는 부대에서 76㎜ 포를 담당했는데, 중졸이라고 금방 부분대장도 달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할아버지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심지어 총을 쏴 본 적도 없다.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벌일 때까지 거리 측정법만 배웠다.UN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10월 9일 평양까지 탈환하자, 할아버지가 있던 부대는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다 결국 해체됐다. 그의 머릿속엔 고향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황해도 신계군 한 산골짜기 마을에서 사복을 빌려 입고서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평양 인근에서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깜둥이가 트럭을 갑자기 세워. 나를 불러 세우더니 모자를 벗기는 거야. 머리가 짧으니까 트럭에 올라타래."당시 미군은 누가 북한군이고 한국군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똑같은 동양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짧은지 긴지를 보고 인민군 여부를 파악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제3대대 제10중대 제2소대 임경섭(3등병조) 분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을 구분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사투리' '얼굴빛' '머리카락 길이'다. 그는 "사투리, 구릿빛 얼굴, 짧은 두발에 의해서 적의 무리들은 쉽사리 구분됐다"고 했다.이형근 할아버지와 동향(同鄕)인 백세룡 할아버지도 인민군으로 있다가 포로 생활을 했다. 백세룡 할아버지는 '인천 이북도민 발자취 망향 60년史'에 쓴 글에서 "남신의주 상업학교에서 8월 7일부터 약 12일간 기초훈련을 받은 후 대구의 팔공산 전장에 배치됐다"며 "우리 신병에겐 총이 지급되지 않고 수류탄만 두 발씩 줬다"고 했다. 또 "(포로 석방 이후) 1·4 후퇴 때 국군을 따라 남하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며 "아버님은 생전에 어머니와 동생을 고향에서 못 데리고 온 자책으로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백세룡 할아버지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재작년 생을 마감했다. 이형근 할아버지보다 세 살 아래인 그는 인천에서 목재회사를 다니고 양돈사업을 했다고 한다.이형근 할아버지가 처음 수감된 곳은 평양형무소다. 이곳에 갇힌 지 3일 만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포로가 죽었다."밤 10시쯤인가, 갑자기 '불이야! 불이야!' 하는 거야. 엄청 죽었어. 포로 놈들 중에 몰래 담배를 가지고 있는 놈이 있었던 거 같아."반공포로 출신 김태일 씨가 쓴 '거제도 포로수용소 秘史(비사)'에도 평양형무소 화재 사건이 나온다. '어느 날, 우리들을 내일 더욱 남쪽으로 이동시킨다는 통보가 왔다. 그런데 그날 밤 공교롭게도 형무소에 화재가 발생했다. 자물쇠가 잠긴 감방 속에 갇혀있던 많은 포로가 불에 타 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김태일 씨는 중공군 개입으로 UN군과 한국군의 후퇴가 임박하자 포로 후송이 귀찮아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형근 할아버지의 기억이 좀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미8군 기록에는 1950년 11월 5일 포로 1명이 담배를 태우다 불이 발생해 포로 46명이 숨진 것으로 돼 있다.포로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가장 큰 고통은 갈증이었다. 오죽하면 핏물까지 마셨을까. 형무소 건물 사이마다 해자처럼 물길을 만들었는데, 인민군들은 그곳에 시체를 던져 넣었다."인민군 아이들이 후퇴하면서 반동분자를 다 쏴 죽이고 갔어. 거기에 처넣어서 물보다 사람이 더 올라와 있었지. 손바닥으로 시체를 밀어젖히고 엎드려서 핏물을 마셨어.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 형무소 안에 물이 있을 수가 없잖아. 미군이 탱크로리로 대동강에서 물을 퍼 오는데, 그것으론 밥하기도 모자라."이형근 할아버지가 처음 발을 디딘 남한 땅은 인천이다.평양형무소가 불에 타자 그는 평양의 한 방직공장에 며칠 머물다 기차에 실려 인천으로 왔다. 흥남철수작전(12월 15~23일) 직후라고 했다.할아버지는 인천항 인근 기차역에 내려 걸어서 인천소년형무소까지 끌려갔다. 지금 남구 학익동에 있는 인천구치소 자리다. 1938년 3월 문을 연 인천소년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로수용소로 쓰였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포로를 얼마나 잡아다 놨는지 주변이 다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야전용 천막이었다"며 "거기서 며칠을 지내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고 말했다.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 포로가 크게 늘었다. UN군의 수용소 포로 통계 자료에 따르면 그해 9월 1만819명이던 인민군 포로는 10월 6만2천678명, 11월 9만8천143명 등 큰 폭으로 증가했다.조성훈이 쓴 '한국전쟁과 포로'를 보면 인천소년형무소는 2천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 수가 크게 늘어 2개 동이 더 건설됐다.이형근 할아버지는 부산 서면수용소를 거쳐 거제도 수용소에 수감됐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 대립이 심화하자, 반공포로들은 부산 가야수용소, 인천 부평수용소 등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는 가야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1958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 때 수용소를 나와 도망쳤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인천 부평포로수용소는 이튿날에나 포로들의 탈출이 이뤄졌는데, 육군본부의 '6·25사변 후방전사' 자료에 따르면 미군이 경비를 강화한 탓에 42명이 숨지고 6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수용소를 벗어난 이형근 할아버지는 잡히지 않기 위해 사람이 많은 부산 시내로 뛰어들어갔다. 무조건 큰 집만 찾아다녔다고 한다."일본식 집인데 엄청 큰 집이야. 새벽 4~5시쯤 됐나? 문을 발로 차니까 할머니가 나왔어. 사연을 얘기하니까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이형근 할아버지가 피신한 곳은 1950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남 고성군 지역에서 당선된 김정실(1904~1969)의 집이다. 할아버지는 기자의 수첩에 '아버님 金正實 의원, 어머니 金禹安(김우안)'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 집 신세를 잊지 못해. 고향에 계신 친부모보다도 나에게 잘해 줬어"라고 했다.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이형근 할아버지는 김정실 의원 집에서 몇 개월 지내다 군에 자진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은 뒤 부대 배치를 받은 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는 인천항 근처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유류를 중부전선 부대에 보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제대 후에는 동인천역 앞 무허가 하꼬방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전기통신 회사까지 차렸다.이형근 할아버지는 통일안보중앙협의회 인천시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 대부분이 반공포로 출신이다. 원래 감투 쓰는 것을 싫어하는데, 최고령자라서 회장을 맡게 됐다고 한다. "다 죽었어. 내가 제일 고령자야. 인천만 정회원이 500명 가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몇 명 남았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아."이형근 할아버지는 "모임에는 30명 정도 나오는데 그중 절반은 마누라들"이라며 "우리 회원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고 그 빈자리를 부인들이 채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난 이형근(88) 할아버지는 반공포로 출신이다. 포로 석방 후 육군에 자진 입대해 인천의 한 부대에 배치됐다. 그 이후로 인천을 떠난 적이 없다.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① ② 포로들에게 포로수용소 관계자가 설명을 하고 있는 광경(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③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195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처/거제시(미국 국가기록원)

2017-03-2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1]황해도 연백 출신 고구한 할아버지 (下)

해성면 해남리 고향 동네는 100여명 모여살던 고씨 집성촌최대 곡창지대답게 부친도 맨손으로 논과 밭 수천평 일궈염전은 '염전로동자구'로 불려… 위성사진으로 봐도 장대평야서 많이 나온 '토탄'은 타 지역 연료난 해결에도 도움고구한(81) 할아버지는 지금도 고향 집 주소를 기억하고 있다.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 한율동 269번지. 고향 동네에는 100여명이 살았는데, 고씨 집성촌이었다. 동네 남쪽으로는 드넓은 염전이 있었고 하천이 마을을 휘돌아 서해로 나갔다. 앞바다는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을 드러냈다. 갯벌에서 소라를 잡아 깬 뒤 그물에 달아 던지면 물고기가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대나무로 만든 대 끝에 그물을 붙여 얕은 바닷물 속을 밀고 다니는 '사도질'을 했는데, 금세 망둥이나 새우를 잡아냈다. '사도질'은 아마도 손잡이가 길고 국자처럼 생긴, 고기 잡는 그물인 '사둘'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고향 앞바다에서는 강화도 교동 등 인근에서도 배를 끌고 나와 물고기를 잡을 정도로 어장이 풍성했다."고기가 엄청나게 많아. 낚시질도 잘되고 투망도 잘되고, 미끼를 던지면 망둥이나 숭어 이런 것이 엄청나게 달려들었지. '모찌'라 부르는 숭어 새끼는 물들어올 때 '자자자착'하면서 뛰어다니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아." 연백은 곡창지대로도 유명했다. 30년간 소래포구에서 쌀 장사를 한 할아버지는 자신 있게 연백쌀이 최고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중요 곡창지대로 '연백평야'가 여러 번 등장한다.동아일보 1949년 4월28일자는 "해방 후 해마다 봄이 되어 파종기를 당하면 연 100만석을 산출하는 연백평야(延白平野)"라고 전한다. 동아일보는 1937년 9월12일자 '연백기자단(記者團) 설립'을 알리는 기사에서 "연백은 황해, 연해양수리조합의 몽리면적 2만여 정보(二萬餘町步)의 옥토가 연백평야에 가로 놓이고 미산지로서 전 조선적 곡창인 동시에 인구팽창과 아울러 급진적 발전 도정에 있는 신흥지대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 전쟁 후 남한에서는 쌀값이 폭등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남한 땅이었던 연백평야가 북한으로 넘어간 것을 꼽기도 했다.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합쳐져 1914년 연백군이 됐다. 주위의 평야지대는 쌀의 품질이 좋아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고구한 할아버지 가족도 연백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주로 조와 밀을 많이 심었다. 조를 수확한 뒤에는 콩을 심는 이모작을 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물려받은 것도 없이 남의 논에서 일을 시작해 3천여 평의 논과 2천여 평의 밭을 일궜다."그때는 장남한테만 재산을 줬어. 큰아버지는 재산을 받아서 머슴을 두고 일하고, 서당 선생도 하고 했는데, 밑에 4형제는 아무것도 못 받았어. 아버지는 남의 논에서 일하면서 번 것으로 땅을 사기 시작해서 논밭을 사고 집을 사고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참 대단해. 장사를 하신 것도 아니고 온전히 노동으로만 땅을 사셨으니까."연백에서는 소금도 많이 생산됐다. 할아버지 고향 마을이 있는 연백 해성면(海城面) 일대가 염전이었다. 할아버지는 고향 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드넓은 염전과 염전에서 일하는 인부가 머무는 사택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 염전은 지금은 '염전로동자구'로 불린다.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은 황해남도 연안군 해남리를 "1958년 (황해남도 연안군 해남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염전로동자구를 신설했다"고 소개한다.연백염전은 당시 국내 염전 가운데 가장 넓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는 1939년 11월1일자에서 1천670정보(町步) 면적의 연백염전 조성 공사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선 안에서 제일 큰 염전이 출현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완공했을 때는 그 규모가 약간 작아지기는 했는데 그 거대함은 지금 위성사진으로 봐도 장대하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이라는 책에는 1943년 황해도 연백군에 완성된 천일염전 규모가 1천250정보라고 나와 있다.남한 땅에 속했던 연백염전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귀속되면서 남한에서 천일염전 개간이 본격화됐다. 전국 소금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연백염전을 전쟁통에 잃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염전을 개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950년대 초 전라남도 신안과 무안 등에서 천일염전이 개발됐다. 일제강점기 관(官) 염전을 제외하고 서해안의 천일염전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세워진 것이다. 한국전쟁 중 정부는 염전 확대, 소금 생산을 위해 '염증산5개년계획(1952~1956)'을 수립했다.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은 염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노동력을 채웠다.고구한 할아버지도 피란을 나와 강화 석모도에서 염전 개간하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소래포구에 왔을 때 소래 일대에 조성된 소래염전 인부 대부분이 실향민 출신이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할아버지는 연백염전과 소래염전의 운영 방식이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소래염전 바닥에는 '타일' 같은 것을 깔아 소금 결정이 맺히기 쉽게 했는데, 연백염전에는 특별히 깔린 것이 없었다. "소래에는 타이루 같은 거를 까는데 연안염전(연백염전)은 바닥이 좋았나봐 그냥 맨바닥이었어." 일제시기에는 염전의 바닥이 흙으로 된 '토판'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옹기조각을 까는 '옹기판'과 '타일판'으로 10여 년 사이에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할아버지 가족에게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연백염전이 마냥 반가운 존재만은 아니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서로를 믿고 챙겼는데, 염전이 생긴 뒤에는 마을에 도둑이 들 정도로 동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평안도나 전라도 지방에서 염전에 일하러 많이들 왔어. 이 사람들 오고 나서는 도둑만 생기는 거야. 집 앞에 땔감도 훔쳐가고, 동네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다 잘라다가 땠어. 기르는 닭 같은 것도 많이도 훔쳐갔어."당시 염전 인부는 노동의 대가로 쌀을 받기도 했지만, 연료 토탄(土炭)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토탄은 석탄의 일종인데 탄이 묻힌 깊이가 석탄보다 깊지 않고, 묻힌 기간도 짧다. 당시 연백의 넓은 평야에서 토탄이 많이 났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연백에서 생산되는 토탄은 서울 등 다른 지역에도 공급돼 연료난 해결에 큰 도움을 줬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28일자는 "금융조합연합회에서는 추위에 울고 있는 세궁민들을 위해서 연백군 일대에서 채취되는 약 600만 개의 토탄을 서울시로 운반하여 염가로 배급하는데 이리되면 각하(刻下) 핍박한 연료사정은 약간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황해도중앙도민회가 지난 2012년3월 1일 펴낸 '황해민보'에 실린 '내 고향 황해도' '연백군편'을 보면 연백평야에서는 1m 이하 지하층에서 토탄(연료)이 광범위하게 채굴돼 주민들의 연료로 쓰였고, 명산물로 다른 지역에 공급되기도 했다.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가 2008년 4월 펴낸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에는 연백 출신 실향민 여럿이 토탄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 담겼다. 차세룡 할아버지는 "특산품으로 토탄이 산출되는 곳인데 땅을 한 5m 정도 파면 토탄이 나오는데 그것을 캐서 논두렁에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회고했다.고구한 할아버지 고향에는 나지막한 산도 있었는데 '봉화산'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산이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안도호부편'을 보면 연안에는 5개 '봉수(烽燧)'가 있었다. 이 중 할아버지가 말하는 봉화산은 각산(角山) 봉수인 것으로 추정된다. 각산 봉수는 서쪽으로는 백석산(白石山), 동쪽으로는 배천군 봉재산(鳳在山)에 응했다고 기록돼 있다. 남쪽으로는 경기도 교동현 수정산(修井山)과 응한다. 이는 조선 후기 각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전국 읍지 '여지도서'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하다. 황해도지는 각산에 대해 "옛날 연안, 배천의 경계요 경기도 강화군의 교동도로 건너가는 요진이었다. 고려사 중에 보이는 사실로, 공민왕 7년(서기 1358) 3월에 왜(倭)가 각산성에 침구(侵寇)하여 와서 전선(戰船) 30척(隻)을 불태웠다는 각산성은 이곳을 말하는 것이다. 산상에 봉화대가 있었기 때문에 산명을 봉화산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지금 봉화리의 지명도 여기서 연기(綠起)된 것이다"고 했다.할아버지가 회장을 맡고 있는 고향 동네 향우회 이름도 봉화산의 이름을 따 '봉화회'다. 회원 수가 100여 명으로 조그만 동네 향우회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회원 수가 많다. 매년 정월 초이튿날과 하지(夏至)에 2번 정기적으로 모인다. 1960년대 인천, 시흥 등에 사는 사람이 서로 연락이 되면서 모이기 시작했다. 1세대 실향민은 벌써 여럿이 세상을 떴고, 실향민 2세대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향우회에서는 돈을 모아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에 있는 산 약 2만㎡(6천평)를 샀다. 하성면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지역이다."죽어서라도 한곳에서 고향 사람이 같이 있자고 해서 향우회에서 공동으로 산을 샀어. 거기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막내가 묻혀 있어."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동아일보 1947년 11월 28일자에는 연백군에서 채취한 토탄 600만개를 서울시로 운반해 저렴한 가격에 '세궁민'에 배급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2017-03-22 홍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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