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3]선박 안전 길잡이 도선사 (상)

500t이상 외항선 입출항할 때 탑승 의무화… 고대시대부터 관련 기록 존재무전기·레이더 활용 선원·예인선에 '방향·속도 지시' 갑문 통과·접안 도와인천항 긴 항로·빠른 조류·잦은 안개 까다롭기로 유명23년 경력 베테랑 옥덕용씨 "작업 끝내면 안도·홀가분"수십만t 규모의 선박이 그들의 손끝에서 움직인다. 승객 수천 명과 화물 수십만t의 안전이 그들 손에 달렸다. 배가 입출항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그들은 '도선사(導船士·pilot)'다.지난 15일 오후 인천 중구 역무선 부두에서 옥덕용(67) 도선사를 만났다. 1993년 도선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경력 23년의 베테랑 도선사다. 도선사는 항구에서 선박 입출항을 도와주는 '선박의 안전 길잡이'다. 우리나라 항구에 입항하는 500t 이상 외항선은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해야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주요 항구도 도선법에 따라 외항선에는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도선사의 역사는 기원전 1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부근)의 '다니아'라는 항구에서 도선 서비스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 도선 기록은 일본 교토의 승려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이 책에는 신라의 '유당사선'이 한반도 남해안을 통과할 때, 도선사가 승선했다고 기록돼 있다.조선 시대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조운(漕運, 현물로 거둔 조세를 선박으로 운반하는 일)의 경우 선박마다 도선에 능한 사람 2~3명을 승선시켜 지휘하게 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도선 서비스가 시작됐는데, 1937년 인천항에서다.여러 사람과 화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이다 보니 도선사가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도선사가 되려면 6천t 이상 선박에서 5년 이상의 선장 경력이 있어야 하며, 해양수산부가 주관하는 도선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6개월간 실무수습을 받아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 동안 외항선에서 근무한 옥덕용 도선사도 이 같은 절차를 거쳐 도선사가 됐다.이날 옥 도선사가 인천항에 입항시킬 선박은 중국 롄윈강(連雲港)에서 출발해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는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和諧雲港)'호다. 이 배는 길이 196m, 너비 28.6m인 대형 카페리선이다. 인천 내항에 위치한 제2국제여객터미널은 갑문을 통해서만 입항할 수 있기 때문에 도선 난도가 높다.옥 도선사를 실은 도선선(Pilot boat)이 역무선 부두에서 30분 정도 달려 팔미도 인근 해상에 도착하자 하모니 원강호가 보였다. 인천 내항이나 북항, 남항에 입항하는 선박은 팔미도에서 도선사가 탑승해야 한다. 도선선이 도착하자 하모니 원강호 승무원들이 도선사 출입구를 열어줬다. 도선사는 운항 중인 배에 탑승해야 하므로 승객들이 배에 오르는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다. 하모니 원강호처럼 별도 출입문을 이용하거나 줄사다리를 타고 10여m를 올라가야 한다. 옥 도선사는 "선박에 오르는 순간은 늘 긴장된다"며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어 갑자기 파도가 치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나마 카페리선은 승선 입구가 낮아 다행이지만, 초대형 유조선(VLCC, Very Large Crude oil Carrier)이나 컨테이너선은 줄사다리 하나에 의지해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배에 탑승하자마자 그는 승무원들과 함께 카페리선 맨 위 선교(브리지)에 위치한 조종실(휠하우스)로 향했다.이곳에서 만난 류치앙강(55) 선장은 "옥 도선사는 경력이 많아서 아주 능숙하다. 이미 여러 번 우리 배를 도선해 믿음이 간다"고 말하며 웃었다."인천항 VTS(해상교통관제센터) 여기는 하모니 원강호입니다. 15시 5분 도선사 승선했습니다."옥 도선사는 조종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천항 VTS에 승선을 보고한 뒤, 본격적인 도선을 시작했다. 선박 정보를 확인한 옥 도선사는 배의 방향과 속도를 선원들에게 지시한다. 옥 도선사는 "예전에는 해도(海圖)를 보고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월미산 등 특정 장소가 보이면 방향을 수정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레이더 등 선박 주행 설비가 잘 갖춰져 있어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천항은 도선이 매우 까다로운 항만으로 유명하다. 항로가 길고, 조류가 빠른 데다 안개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라며 "오늘은 날씨가 맑아 가시거리가 길고, 파도가 거의 없어 다행"이라고 설명했다.20분 정도 운항하자 갑문이 눈에 들어왔다. 베테랑인 옥 도선사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조수 간만의 차와 상관없이 하역 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든 36m 너비의 갑문은 최대 난코스에 해당한다.갑문이 가까워지자 카페리선을 도와줄 예선 '뉴캐슬'호가 선미(배 뒷부분)에 붙었다.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 카페리선은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야 갑문을 통과할 수 있다. 옥 도선사가 조종실 오른쪽 끝 창문으로 이동했다."뉴캐슬 밀 준비. 밀어. 뉴캐슬 슬로우. 좋아요. 일자로 계속 가고 있어요."배가 일자로 갑문에 진입하지 않으면 갑문 콘크리트 벽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게 옥 도선사 설명이다. 이 때문에 도선사 지시에 맞춰 선장과 승무원, 예선이 모두 힘을 합쳐야 갑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갑문 폭이 워낙 좁아 멀리서는 좌우 폭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며 "1m만 차이가 나도 갑문에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대 고비인 갑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배를 접안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다. 인천 내항은 다른 항만보다 부두가 좁고, 계류 중인 선박도 많아 갑문 통과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한다. 옥 도선사는 선박 좌우를 부지런히 오가며 양옆에 있는 자동차 운반선과 화물선과의 거리를 확인했다.승선한 지 2시간여 만에 하모니 원강호는 내항 4부두에 안착했다. 옥 도선사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배를 도선했지만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안도감과 홀가분함이 온몸을 감싼다"고 말했다.40여 년 동안 배를 탄 옥 도선사는 올해 말 정년 퇴임을 맡는다. 그는 인천항 도선사 43명 가운데 최고참이다. 그는 "항해사부터 선장까지 단계적으로 배를 타면서 현재 위치(도선사)에 이르렀다는 것, 항만시설 안전과 선박 운항 효율에 이바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퇴임하는 날까지 안전한 인천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인천 내항에 들어온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호를 부두에 안착하기 위해 무선으로 예선에 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길이 196m, 너비 28.6m인 대형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호가 36m 너비의 갑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하모니 원강호로 옮겨타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 (사진 오른쪽)와 류치앙강 선장이 인천항 갑문까지의 항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항해사부터 선장까지 단계적으로 배를 타면서 현재 위치(도선사)에 이르렀다는 것, 항만시설 안전과 선박 운항 효율에 이바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6-27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2]안전 서포터 '예선(曳船)'

수십만톤까지 이르는 화물선·크루즈·카페리 등 입항 도와갑문 통과·접이안, 1~5척 투입 밧줄 연결·정밀하게 이끌어1974년 갑문 준공이후 활약… 항만 성장 함께 중요성 늘어영종대교·연륙교 같은 해양건설현장 이동·지지 작업 맡아인천서 가장 많이 건조되는 예선, 선장의 절반도 인천 출신지난 10일 인천항 북항 SK인천석유화학으로 입항한 유조선 'Olympic Lotalty2'호는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화물선 중 규모가 가장 크다. 30만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이 배는 원유를 가득 채우면 선박 자체의 무게까지 30만t을 훌쩍 넘는다. 이 배는 길이는 336m, 너비 59m로 축구장 3개를 합한 것보다 크다. 자동차가 주차할 때에는 옆 차량 또는 벽·기둥과 일정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 것과 달리, 선박은 화물 하역과 승객 승하선 등을 위해 부두에 바짝 붙여 놓는다. 항만 종사자들은 이 같은 선박의 접안 방식을 '배를 붙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대형 선박을 어떻게 부두에 안전하게 붙일 수 있을까. 아무리 항해 실력이 뛰어난 선장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처럼 큰 배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부두에 딱 붙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예선(曳船)이다.예선은 선박의 접·이안을 도와주는 배다. 화물선과 크루즈, 카페리와 같이 규모가 큰 선박은 예선의 도움을 받아 접안한다. 선박과 예선을 줄로 연결한 뒤, 예선이 선박을 끌거나 밀어 부두에 붙인다. 선박 규모에 따라 1~5척의 예선이 투입되는데, C.VISION호와 같은 대형 선박에는 5척의 예선이 달라붙는다.지난 7일 오후 인천 중구 역무선 부두에서 예선 '한창1'호가 내항 5부두로 입항하는 6만t급 자동차운반선 'GLOVIS CONDOR'호의 입항을 돕기 위해 출항했다. 내항으로 입항하는 선박은 '인천대교에서 갑문까지 들어가는 과정'과 '갑문에 들어가서 부두에 접안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갑문은 수위를 조절하는 장치로, 선박의 안전한 통항을 위해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한 항만에 설치된다.GLOVIS CONDOR호가 인천대교를 통과하자 한창1호를 비롯한 예선 3척이 접근했다. 본선에서 얇은 밧줄을 던지자 예선 승무원들이 배에 있던 굵은 밧줄과 묶었다. 본선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더욱 단단하게 고정했다.본선과 예선들이 갑문 인근에 도착하자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갑문 너비는 34m, GLOVIS CONDOR호 폭은 32m다. 이 배는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선박이다. 갑문은 긴 네모꼴 수로 모양이다. 선박은 이곳을 일직선으로 통과해야 한다. 자동차 자동세차장 기계가 작동하기 전 자동차가 정확한 위치에 앞바퀴를 놓아야 하는 것처럼, 선박도 갑문을 통과하기 전 위치를 잡아야 한다.자동차의 경우 세차장 직원이 보통 자동차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선박은 본선과 연결된 예선 3척이 밀고 당기면서 본선의 위치를 잡는다. 이 작업은 본선에 탑승해 있는 도선사의 지휘에 의해 이뤄진다."한창 스톱!" 도선사의 명령이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다. 한창1호 김은수(28) 선장은 명령을 들었다는 의미로 "한창 스톱"이라고 말하고 선박을 멈춘다. 이어 "한창 밀 준비" "한창 밀고" "한창 스톱" 등의 지휘가 연이어 들려오고 김은수 선장도 명령에 따라 선박을 조작했다. 한창호 등 예선 3척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자 CONDOR호는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정위치'에 서게 됐다. 예선에서 CONDOR호 선측에 물을 뿌렸다. 갑문과 선박이 스칠 경우 마찰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CONDOR호는 무사히 갑문을 통과했고, 임무를 완수한 한창호는 역무선 부두로 향했다.김은수 선장은 "갑문 작업과 유조선 돌핀 작업은 정교함을 필요로 해 아무래도 긴장이 된다"며 "특히 돌핀 부두에 접안하는 유조선은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한다"고 말했다.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윤덕제 사무국장은 "예선은 전후좌우로 방향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특수 프로펠러를 장착하고 있다"며 "최근 건조되는 예선은 300t 안팎의 규모이지만 5천 마력 이상의 힘이 있다. 이는 1만t급의 선박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예선의 예는 '끌 예(曳)'자다. 말 그대로 끄는 선박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예인선과 예선을 혼용해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인선은 선박이나 구조물을 끌고 가는 선박을 일컫고 규모가 크다. 예선은 선박을 끌고 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선박의 접·이안을 도와주는 것을 주 용도로 사용한다.예선의 활용은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임금이 탄 선박을 호위하는 용도로 예선을 활용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3년(1779년) 8월 3일 기사에는 "임금이 용주(龍舟)에 타고 선상(先廂)의 장사(將士)와 용호영(龍虎營)의 장사는 용주의 왼편 예선(曳船) 밖에서, 후상(後廂)의 장사와 경기영(京畿營)의 기고(旗鼓)는 용주의 오른편 예선 밖에서 함께 용주를 끼고 거가를 호종하여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인천에서 예선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974년 갑문이 준공되고 나서다.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은 외국 선박들이 물밀듯이 몰려왔지만, 부두 시설이 열악했다. 이 때문에 선박이 부두에 정박하지 못하고 인천 앞바다에서 바지선을 통해 화물을 하역했다. 한국인 최초 세계 일주 선장이기도 한 배순태(1925~2017)씨는 저서 '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에서 "갑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외항에 닻을 놓고 바지를 이용하여 하역을 해 왔는데, 이런 하역 방식은 하역비가 몇 배나 더 들어갈 뿐만 아니라 작업의 효율성도 떨어져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위험하기까지 했다"고 했다.1974년 갑문이 운영을 시작했고, 갑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예선이 필수적이었다. 이후 남항, 신항 등 외항에 접안하는 선박들도 안전한 접안을 위해 예선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에만 해도 예선은 국가가 운영했다. 1975년 항만법이 개정되면서 민간에서도 예선을 운영할 수 있게 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예선이 인천에서 나왔다. 1975년 설립된 예선업체 (주)흥해는 우리나라 최초 예선 '은성호'를 건조해 인천에서 운영했다. 지금까지도 예선은 인천에서 가장 많이 건조되고 있다.예선은 바다 위에서 이뤄지는 건설사업에 활용되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인천에서는 인천대교, 영종대교 등 육지와 섬을 잇는 연륙교 건설사업과 항로 준설 등 해양 공사에 활용됐다. 해상에서는 건설자재와 장비를 동력이 없는 바지선에 두고 공사를 진행하는데, 바지선을 움직이거나 한곳에 고정할 때 예선을 사용한다. 예선 앞부분에 달린 고리와 바지선을 연결해 선박을 이동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흥해 박관복 전무는 "인천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간 예선을 건조한 곳이다. 지금도 예선을 건조하는 곳은 인천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인천의 예선업은 활황을 이뤘고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예선업에 많이 진출했다. 현재 예선업 선장 중 절반 정도가 인천해사고 출신이라는 것이 예선업계 설명이다. 인천에서 교육을 받은 선장이 인천에서 건조된 선박으로 인천항 일대를 운항하는 경우는 예선업이 유일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윤덕제 사무국장은 "항만이 점차 대형화되면서 예선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며 "특히 인천은 원유와 LNG 등 화학물질 운송 선박이 많이 드나들고, 자칫 잘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예선은 사고 예방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지난 7일 6만t급 자동차운반선 'GLOVIS CONDOR'호가 갑문을 통과하기 위해 예선의 도움을 받는 모습. 이날 '한창1'호를 비롯한 예선 3척은 도선사 지휘에 따라 CONDOR호와 로프로 연결한 뒤 선박을 밀고 끌면서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왔다.5천 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한창1호 기계실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한창1호를 운항하는 김은수 선장의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예선은 1970년만 해도 국가 설비였다. 항만법 개정으로 민간이 예선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한국 최초 민간예선인 '은성호' 모습. /(주)흥해 제공예선은 선박의 접이안을 돕는 것이 주 역할이지만, 다른 선박에 불이 났을 때 진압할 수 있는 '타선소화설비'를 갖추고 있다. 예선의 소방훈련 모습.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제공예선은 해상 건설 작업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예선은 바지선에 실려 있는 해상크레인 등 건설장비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제공

2018-06-20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1]인천항 순찰선

선박에 치명적 위협될 수 있는 폐그물·부이 제거 등 '항만 질서 유지' 역할1950년대 월미호부터 현재 해양5호까지 장비 좋아졌지만 임무 큰 변화없어인천항 성장과 함께 활동 범위 늘어나… 고된 일상에도 '안전 일조' 자부심인천항은 1883년 개항 이후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서해안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자 상업항으로 끊임없이 성장했다.컨테이너 부두 등의 기능을 뒤로하고 일부 공간을 시민 친수구역으로의 변신을 준비 중인 '내항', 원목·철재·사료용 부원료 등 산업 원자재 화물을 싣고 내리는 '북항', 컨테이너 부두와 돌핀부두 등이 있는 '남항' 등을 비롯해 국제여객터미널과 연안여객터미널 등을 갖춘 환황해권의 허브 항만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급속히 증가하는 컨테이너의 원활한 처리와 북중국 항만에 대응하기 위해 최첨단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송도 신항은 인천항을 동북아를 넘어선 세계적인 수준의 항만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이 될 전망이다. 하루에도 수백 척이 드나드는 인천항의 '선박 안전'을 확보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항로에 떠다니는 폐그물과 부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도 선박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매일 같이 인천항 주변 해역 곳곳을 직접 살피며 선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항만 순찰선'이 없어선 안 되는 이유다."북항 입구 부근 항로에 부이가 떠다닌다는 신고입니다. 신속히 확인 조치 바랍니다."북항 인근을 지나던 예인선에서 "없던 부이가 보인다"며 신고가 들어왔다. 인천항 남항 부근을 순찰하던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해양 5호'가 VTS 무전을 듣고 선수를 북항 쪽으로 급히 돌렸다. 10분여 만에 신고 해상에 도착한 해양 5호 앞으로 검은색 플라스틱 부이가 떠 있었다. 부이는 '항로' 안에 있어선 안 될 물품이다. 부이에 묶여있는 그물이나 밧줄 등이 선박 스크루에 감기면 선박 표류로 이어질 수 있어 관련 법상 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부이가 가까워지자 배를 몰던 15년 경력의 김남주(46) 항해사는 전팔근(47) 선장에게 키를 넘기고 갑판으로 나가 '삿갓대'를 집어 들었다. 삿갓대 혹은 삿대로 불리는 이 기구는 성인 키의 3배 정도는 돼 보이는 긴 대나무 장대 끝에 날카로운 꼬챙이와 갈고리를 단 기구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물건들을 걸어서 배 위로 올리기 좋게 만들어졌다. 해양 5호는 천천히 부이에 접근했다. 키를 쥔 전팔근 선장과 삿갓대를 든 김남주 항해사가 수신호로 부이를 건지기 좋은 위치에 배가 놓일 수 있도록 했다. 김남주 항해사가 삿갓대를 들어 능숙한 솜씨로 부이를 걸어 올리고, 부이에 걸린 그물을 잘라 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인근 해상에서만 3개 정도의 부이를 더 찾아 배 위로 수거했다. 순찰선 갑판이 금세 부이로 수북해졌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으로 된 부이처럼 비교적 작은 물체들은 직접 끌어 올리지만, 원목 같은 큰 물체는 대형 부유물을 실을 수 있는 해양환경공단의 '청항선'을 불러 치울 수 있도록 조치한다. 전팔근 선장은 "원목 부두에서 원목이 바다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장마철에는 냉장고 같은 큰 가전제품이 항로에 떠내려와 선박 안전의 위협 요소가 된다"며 "간혹 돼지나 소 같은 짐승 사체 등도 떠내려온다"고 했다.이어 "항로 상 불법 부이 단속 과정에서 부이를 설치한 어민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아 애로사항이 있다"고 했다. 신고 30여 분 만에 신고 내용을 처리한 해양 5호는 VTS 보고 후 다음 순찰지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전 선장과 김 항해사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상한 물체가 없는지 살피기 위해 연신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인천해수청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인천항 항만 순찰선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인천항의 항만 순찰선은 '월미호'였다. 10t 미만의 작은 목선이었는데,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레이더와 전자식 항해지도, 야간투시용 카메라 등 최첨단 장비가 갖춰진 요즘의 항만 순찰선과는 차이가 있지만 항로에 멈춰있는 선박을 이동하게 하고, 항로에서의 어업 활동을 제한하며, 제 속도에 맞춰 운항토록 하는 등 항만 내 운항 질서 유지 업무를 하는 순찰선의 역할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갑문이 세워지기 전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 인근의 하인천 부두를 중심으로 팔미도부터 영종도까지가 월미호의 담당 순찰 해역이었다. 선박 상부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노란 배'라는 별칭이 있었다고도 한다. 60년대엔 월미호가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어 성능이 개량되고 1970년대에는 그 역할을 '해룡호'가 담당했다. 1980년대 들어서 '해양 1호'가 도입됐다.최광철(66)씨는 1977년부터 2010년까지 34년간 인천항에서 항만 순찰선을 몰았다. 그는 "70~80년대만 해도 인천항 항로 주변으로 어민들이 그물을 쳐 놓으면 놀래미(노래미), 병어, 우럭, 주꾸미 등 다양한 어종을 많이 잡을 수 있었다"며 "때문에 불법으로 그물을 쳐 두는 어민이 많았다"고 했다. 이어 "불법인 만큼 대부분은 단속했지만, 사정이 딱한 경우는 '다음부터 하지 말라'고 경고 정도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단속을 하는 게 주된 업무인 만큼, 우리 배(순찰선)를 피하려는 어선이 많았다"며 "당시 인천항을 드나드는 배 숫자가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인천항 항로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최선을 다해 활동했다"고 했다.인천은 개항 이래 급속히 성장했다. 갑문이 들어서면서 인천항을 통한 해외 교역 규모는 더욱 커졌고,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한 땅엔 세계적 수준의 국제공항이 들어섰다. 배가 아니면 닿을 수 없었던 영종도엔 영종대교와 인천대교 등 두 개의 다리가 놓였고 송도·청라국제도시는 마천루를 형성하며 바다에서 바라보는 인천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인천항의 미래를 이끌 송도 신항이 들어섰고, 조만간 대형 크루즈 선박을 위한 전용 터미널도 갖춰진다. 이런 변화는 항만 순찰선이 감당해야 할 영역을 확장시켰다. 1980년대만 해도 1척이었던 인천항 항만 순찰선이 최근엔 4척으로 늘어났다.전팔근 선장을 비롯한 해양 5호 승무원들은 하루 한 차례 이상 인천대교 북쪽부터 영종대교 남쪽 해역까지 순찰하고, 정박 중일 때도 상황이 발생하면 출동해 조치한다. 힘든 일상일 수밖에 없지만, 인천항의 선박 안전 확보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순찰 활동을 멈출 수 없다. 김남주 항해사는 "바다 위에서 하는 일인 만큼 파도나 안개 등 변수가 많아 위험하지만, 인천항을 오가는 화물선 등 각종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며 활동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순찰선 해양 5호 안에서 김남주 항해사가 인천항 항로에 불법 부유물이 없는지 쌍안경으로 확인하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항로를 순찰 중인 해양 5호에서 본 인천항 모습. /경인일보DB김남주 항해사 등 해양 5호 승조원들이 '삿갓대'를 이용해 불법으로 설치된 부이를 건져 올리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항만 순찰선 '해양 5호'. /경인일보DB2011년 도입된 항만 순찰선 '해양 3호' 모습. /경인일보DB

2018-06-06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0]바다와 함께한 인천의 역사

삼국시대부터 국제항구 역할 하다 조선 쇄국정책 탓 작은 어촌마을로 축소1883년 개항이후 쏟아진 신문물… 급속한 변화로 인한 혼란·박탈감 등 겪어일제 수탈 목적 항만시설 근대화… 산업화 접어들면서 '해양 물류거점' 성장'남북관계 훈풍' 서해평화협력지대 중추 지역 큰그림 '가장 성장할 도시' 전망인천의 역사에는 '최초'가 많다. 유독 '바다'와 관련한 게 많다. 등대, 근대식 세관, 군함을 비롯해 지역경제 견인의 한 축이 된 컨테이너 부두까지. 여기엔 외세의 모진 수탈, 이질적 문물 유입으로 인한 혼란, 갯벌 매립에 따른 환경 파괴 등 아픔도 따랐다. 최근에는 남북 관계 훈풍으로 서해평화수역을 낀 도시로도 주목받고 있는 곳이 바로 인천이다. 15년 만에 인천에서 열리는 제23회 '바다의 날'(5월31일) 기념식을 맞아 '해양도시' 인천의 바다 이야기를 전한다.인천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공원'. 이 공원에서 옥련사거리 방면으로 조금만 걸으면 인천시 기념물 제8호 '능허대 터'가 나온다. 378년 삼국시대 고구려에 육로가 막힌 백제 근초고왕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 사신들이 출발한 '나루터'다. 근초고왕은 인천~덕적도~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라는 해상루트를 이용했다. 건널 능(凌), 빌 허(虛)자를 쓴 능허대의 어원은 '만경창파를 하늘로 날아오르듯 항해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시작한 교역 활동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거란, 여진,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도 인천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에 한국 국명이 꼬레아(Corea)로 알려지게 된 게 바로 이 시기다.고려시대 개경의 관문 역할을 하며 발전했던 인천은 조선이 개국하자 침체 상태로 빠져들었다. 조선왕조의 '쇄국정책'으로 서해 해상교통은 전면 금지됐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기까지 했다. 국제 무역항의 기능을 상실한 인천은 이후 수백 여년 동안 한적한 어촌 도시로 여겨졌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를 보면 인천 바다에서는 민어, 참치, 조기, 가물치, 오징어 등 다양한 어종이 올라왔다. 지금과 다른 것은 조기와 민어를 쉽게 볼 수 없게 된 것. 연평도는 조선 초기부터 1960년대까지 '조기'가 많이 잡혔다. 사업에서 빚을 진 선주들이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빚을 갚는다고 해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라는 뱃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1920~30년대 굴업도와 덕적도는 민어가 많이 잡혀 '민어 파시'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 이 물고기들은 수온 변화와 남획, 매립 등의 영향으로 인천 바다에서는 보기 힘들게 됐다.한적한 어촌 도시는 1883년 개항으로 크게 변모한다.'나는 이 항구에 한 벗도 한 친척도 불룩한 지갑도 호적도 없는 거북이와 같이 징글한 한 이방인이다.' <이방인>'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 어둠 속에 숨어서야 루비 싸파이어 에메랄드…… 그의 보석 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집니다.' <밤 항구>시인 김기림이 쓴 '길에서 - 제물포 풍경'(1939년)에서는 외지인들이 몰려와 어촌 지역의 정겨움은 사라지고 유혹, 사치, 풍요로움, 가난, 애환이 얽힌 도시와 근대적 문물의 상징인 철도와 인천역 대합실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중구 자유공원, 인천중동우체국(옛 인천우체국), 답동성당, 차이나타운 등이 모두 개항기에 조성됐다.일본의 강압으로 개항을 맞은 인천은 신문물의 '실험지'였다. 해관(세관), 감리서(개항장 관리 관청), 중·일 영사관과 조계지(외국인 치외법권 구역)가 들어서면서 이질적 사람과 문물이 급속하게 유입됐다. 지금 인천시민의 친수공간이자 대표 관광지인 '월미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일본은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고 1920년 해수욕장을 개장한 데 이어 수족관, 체육시설, 조탕(목욕탕) 등을 조성해 최대 규모의 유원지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과 일부 조선 상류층의 것이었을 뿐 토착민에게는 상대적 박탈감만 줬다.'수탈 극대화'가 최대 관심사였던 일본과 상인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레 인천 항만시설 근대화로 이어졌다.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가 최고 10m에 달하는 자연적 취약점을 갖고 있어 갑문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1911년 갑문식 선거 설비 공사를 시작해 1918년 준공했다. 인천항만공사가 편찬한 '인천항사'를 보면 당시 이중 갑문식 선거로 선박이 해수의 높이와 상관없이 출입하게 되면서 2천t급 기선 5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양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고 한다. 이후 4천㎡의 창고 건축과 같은 축항시설 확장과 각종 시설 도입 등으로 1939년 인천항 총 무역액은 1910년 대비 40배 증가했다.해방 직후인 1946년엔 한국 수입의 96%가 인천항에서 이뤄졌을 정도로 교역이 활발했다. 그러나 1950년 인천상륙작전으로 항만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최대 교역항 역할을 부산항에 뺏기는 수모를 겪었다. 1955년이 돼서야 복구된 인천항은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역시장 확대, 운송 수단 다변화 등으로 서해 물류 거점이 됐다. 1974년에는 한진, 대한통운의 민간 자본을 유치해 우리나라 최초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인천항에 개장했다.육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인천 바다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56년 발간한 '경기도지'는 인천항을 기점으로 하는 항로가 당진선, 목포선을 비롯해 총 12개 노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객선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건 물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다. 지금은 비록 섬 지역을 잇는 14개 항로만 있지만, 지난해 인천 연안여객선을 이용한 사람은 147만 1천여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인천 바다와 섬이 '관광지'로 모습을 바꿔가면서다.1990년에는 인천~웨이하이를 잇는 카페리 운항을 시작으로 한중 최초의 카페리 시대까지 열렸다.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인천~중국 카페리 항로는 10개다. 2016년 여객 수가 92만여 명에 달하는 등 '해상교통의 중심지' 명성을 잇고 있다.인천의 간척사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바다 이야기다. 고려시대 강화도 제포·와포에서 전시 군량미 확보를 위해 시작한 간척은 1980~2000년대 인천경제자유구역(송도·청라·영종) 등 신도시 조성을 위한 간척사업까지 이어지며 인천의 해안선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이 편찬한 '인천의 갯벌과 간척'을 보면 인천의 간척지는 주로 주택·항만·발전·공업용지로 쓰였다. 서구, 연수구, 중구는 도시용지 중 50% 이상이 간척으로 새롭게 건설된 땅이라고 한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은 직선이 되고 인천의 토지 면적은 넓어졌지만 김포갯벌, 송도갯벌, 남동갯벌이 대부분 사라지면서 멸종 위기 물새 서식지 훼손, 습지 생물 멸종, 갯벌 파괴 등의 환경문제가 생겼다.인천 바다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철책과 항만시설에 가로막혀 친수 공간을 누리지 못한 인천시민을 위해 철책 제거, 내항 8부두 개방, 경인아라뱃길·도서 지역 마리나 해양레저산업 활성화 등의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인천은 남북 관계 훈풍에 발맞춰 추진되는 서해평화협력지대의 중추 도시로의 도약도 준비하고 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인천은 환황해권 경제벨트의 핵심 도시가 되며, 통일 후 가장 성장하는 도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해권 물류 교통의 중심에서 철책을 넘어 평화의 상징이 되는 인천 바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사진/경인일보DB·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옹진군·화도진도서관·인천항만공사·인천시·위동항운 제공백제 378년(근초고왕27) 중국과의 교역 때 출발 나루터가 있던 연수구 옥련동 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조선 16대 인조대왕 14년 임경업 장군에 의해 연평도에서 조기를 처음 발견한 이후 해방 전후부터 1968년까지 연평도는 황금의 조기파시 어장을 이뤘다.1883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문호를 연 개항초기 제물포항의 모습.1918년 완성된 인천항갑문으로 배 1척이 들어오고 있다.월미도 해수욕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뒤편 조탕 건물.1990년 9월 한중 최초로 개설된 카페리 항로인 인천∼웨이하이 항로를 운항했던 '골든브릿지호'의 모습.2011년 송도 11공구 매립 현장에서 그물을 펴고 있는 어민과 갯벌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저어새의 모습.2015년 6월 송도국제도시 서남단에 개장한 인천 신항. 인천항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은 2005년 100만TEU, 2013년 200만TEU를 넘어선 데 이어 지난해 300만TEU를 달성했다.

2018-05-30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9]바다의 신호등 항로표지시설(下)

불빛·형상·음파·전파 이용 항로 알려주는 시설… 인천항에만 725개 설치8명으로 구성된 해수청 관리팀 태양 전지판·축전지 전압 정기적으로 체크스마트폰 앱 기술 도입·테스트 단계… 다양한 상태정보 간편하게 확인 가능100년넘는 역사 간직한 팔미도 등대·백암등표 등 지켜야할 '근대문화유산'지난 14일 오전 9시30분 인천항 역무선 부두에 안개가 걷혔다."오늘 작업 계획대로 진행합니다."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항로표지선 '인성2호' 이재철(41) 선장이 안개로 작업 여부가 불투명했던 항로표지시설 점검을 계획대로 진행한다고 동료들에게 알렸다.선장을 포함한 8명의 승조원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각자 필요한 짐을 챙겨 역무선 부두에 묶여 있는 배로 향했다.오전 9시50분. 모든 승조원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출항 전 선박 점검을 마쳤다. 항로표지선의 시동을 걸고 부두에 묶인 홋줄을 풀어 출항하기까지 20분이면 충분했다.출항 후 5분 정도 지났다."저 앞에 보이는 초록색 표지가 등부표라고 부르는 항로표지시설입니다. 배들에는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땅 위에 길이 있고 교통 표지판과 신호등이 있는 것처럼 바다 위에도 항로가 있고 그 길을 표시하는 시설이 있다. 이를 항로표지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등대가 바로 항로표지시설 가운데 하나다.항로표지 방식은 불빛과 형상을 이용하는 '광파표지', 형상과 색을 이용하는 '형상표지', 청각에 의한 '음파표지', 무선을 쓰는 '전파표지', 그 밖의 '특수신호표지' 등으로 나뉜다.광파표지에는 등대·등주·등표·등부표 등이 있고, 형상표지에는 입표·도표·부표 등이 있다. 음파표지는 전기혼·공기사이렌·모터사이렌·종 등이며, 전파표지는 라디오비콘·레이더비콘·위성항법정보시스템(DGPS) 같은 것들을 말한다. '등'이라는 글자가 있으면 야간에 불빛이 들어오는 항로표지고, '부'라는 글자가 있으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광파표지는 빛, 형상표지는 형태와 색깔, 음파는 소리, 무선은 전파를 이용한다고 보면 된다. 인천항에는 총 725(사설 표지 포함)개의 항로표지가 설치돼 있다.인천해수청은 정기적으로 관할 구역의 바다를 돌면서 331개 항로표지 시설을 점검하는 항로표지선 2척을 운영 중이다. 항로표지선 1척에는 항해사 3명과 기관사 3명 그리고 항로표지관리원 2명이 탑승하는데 이들이 한 팀을 이뤄 작업한다.이날 인성2호의 첫 점검 대상은 인천항24호 등부표였다. 멀리서 보면 자그마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적어도 어른 두 사람 키 높이를 넘어 보였다. 바다 위를 떠도는 것 같지만 바닥에 무거운 추가 있고 굵은 체인으로 연결돼 있어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이재철 선장이 인성2호를 조심스레 등부표에 가까이 댔다. 승조원들은 밧줄로 등부표와 배를 묶어 고정했다. 바다가 출렁거릴 때마다 등부표와 배가 부딪히며 '끼익'하는 소음을 일으켰다.신덕식(39) 항로표지관리원은 "오늘은 바다가 무척 잔잔한 날이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이 일도 할만할 텐데"라고 말하며 웃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 많다고 한다.빨간 구명조끼를 입은 신덕식 항로표지관리원은 등부표에 안전고리를 걸고 날쌘 몸놀림으로 등부표에 올라가 사다리를 타고 상부에 올라갔다. 등부표에 전력을 공급하는 태양전지판에 묻은 갈매기 배설물을 닦아내고 등명기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동시에 밑에서는 김진호(39) 항로표지관리원이 등부표에 올라 테스터기로 바닥에 깔린 축전지의 출력 전압을 체크했다. '14V(볼트)' 출력 전압을 확인하고 뚜껑을 닫았다."출력 전압이 낮으면 축전지를 교체해야 한다. 축전지 무게가 20㎏이 넘기 때문에 축전지 교체 작업도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고 김진호 항로표지관리원은 설명했다.점검을 마치고 다음 점검 대상인 인천항21호 등부표로 뱃머리를 돌렸다.항로표지선은 인천항21호 등부표에 가까이 접근해 엔진 출력을 낮췄다. 이번 점검은 방금 이전의 점검 방법과 딴판으로 이뤄졌다. 등부표에 배를 묶지도 않았고, 점검원이 올라타지도 않았다.대신 신덕식 항로표지관리원이 뱃머리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작동했다. 이 등부표는 최근 개발된 최신형으로, 현재 상용화하기 위해 테스트 중인 시설이다. 항로표지관리원의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방식으로 연결돼 등부표의 각종 상태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게 설계됐다.신덕식 항로표지관리원 스마트폰 화면에는 등부표 ID와 전압·전류, 램프 작동 상태, 축전지 전압, 배터리 잔량 등이 표시됐다. 스마트폰 앱으로 등명기 램프를 껐다 켰다 반복하면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는 간단하게 점검을 끝냈다.지금은 항로표지시설을 간편하게 스마트폰으로 점검하는 시대에 이르렀지만, 인천항에는 100년 넘는 세월을 버텨온 항로표지시설도 많다. 우리나라 최초 역사를 간직한 채 100년을 버텨온 팔미도 등대를 비롯해 벽돌로 쌓아올린 백암등표(1903년), 북장자서등표(1903년), 부도등대(1904년) 등이 있다. 모두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근대문화유산이다. 인천항 내항에 설치된 조류정보전광판(2005년)도 전국 최초로 설치된 항로표지시설이다.등대 전문가인 강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는 오랜 역사를 품은 인천의 이들 항로표지시설을 오래도록 지켜갈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인천 앞바다에는 돌을 다듬어 귀족풍으로 갈고 닦은 등대가 줄줄이 숨어 있으니 보물섬의 전설을 가슴에 묻어두고 길이길이 이어갈 일이다. (중략) 100주년의 회년을 넘어섰으니, 이제 200주년 회년까지 이어갈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주강현 著 '등대문화사' 中)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해상교통의 안전을 도모하고 선박 운항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바다에 설치해 선박의 지표가 되는 시설을 항로표지시설이라고 한다. 올해 3월 31일을 기준으로 인천항에는 정부가 설치한 331개의 항로표지시설과 민간이 설치한 394개를 포함해 모두 725개의 항로표지시설이 있다.바다 위 흔들리는 등부표 위에서 해야 하는 점검은 위험한 작업이어서 항로표지점검원 이외의 항로표지선 모든 승조원이 함께 돕는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신덕식 항로표지관리원이 등부표 태양전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오물을 닦아내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김진호 항로표지관리원이 등부표 바닥에 있는 축전지 전압을 전압계로 확인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최신형 등부표는 스마트폰에 설치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등부표의 작동 상태를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05-23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8]바다의 신호등 항로표지시설(上)

20세기 초 日 강요 못이겨 처음 건설한 팔미도 등대 '제국주의 길잡이' 아픔한국전쟁 등 거치며 10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불밝히다 신등대에 바통 넘겨일반 주민은 없는 섬, 2009년 등대해양문화공간 조성되면서 민간에 첫 개방바다 위 깜깜한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등대. 어둠 속 길을 잃은 배에게는 안내자가 되고 길고 긴 항해를 마무리하는 배에게는 곧 찾아올 휴식을 알려주는 희망과 같은 존재다.인천 앞바다 팔미도에는 1903년 6월1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다. 지난 4일 오후 팔미도 등대를 찾았다. 팔미도 등대에 가려면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미리 일정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황금색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달린 196t급 유람선 '금어호'에 20여 명의 관광객과 함께 몸을 실었다. 오전 치과 진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다는 해군 병사도 있었다. 팔미도에는 등대를 관리하는 항로표지관리원과 군인만 산다. 일반 주민은 없다. 2009년 '등대해양문화공간'이 조성되면서 처음으로 민간에 개방됐다.배를 탄 지 1시간가량 지나 팔미도 부두에 도착하니 정창래(56) 팔미도 항로표지관리소장이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팔미도 등대의 정식 명칭은 '인천지방해양수산청 팔미도 항로표지관리소'로 정 소장과 다른 항로표지관리원 2명이 교대로 근무한다.등대에는 모두 3명이 일하는데, 20일을 근무하고 뭍으로 나와 9일을 쉰다고 한다. 1명이 쉬는 동안 섬에 남아 있는 2명이 상주하며 12시간씩 교대로 일한다.20일을 등대에 묶여 있다 보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정 소장은 "정말 큰 일을 제외하고는 가족이 아프거나 다치는 등 '아주 사소한' 일로 근무를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웃었다.정 소장은 1995년 공채로 입사한 지 23년이 됐다. 인천항부두관리공사에서 8년 정도 일했는데, 안정적인 공무원 신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친지의 권유로 입사하게 됐다.그는 등대에서 일하는 항로표지관리원들이 '등대지기'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살짝 귀띔했다. "전문 자격증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항로표지'라는 말은 일반인이 잘 모른다. '항로표지를 설치하고 이를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관리해 해상교통의 안전을 도모하고 선박 운항의 능률성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항로표지법을 보면 항로표지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법 2조는 항로표지를 '등광(燈光)·형상(形象)·색채·음향·전파 등을 수단으로 항(港)·만(灣)·해협(海峽), 그 밖의 대한민국의 내수·영해 및 배타적 경제수역을 항행하는 선박에 지표가 되는 등대·등표(燈標)·입표(立標)·부표(浮標)·안개신호(霧信號)·전파표지·특수신호표지 등을 말한다'고 정의한다.정 소장의 안내를 받아 등대보다 한참 아래에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등대로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다 보니 단층 목조 '팔미도 등대 옛 사무실' 건물이 눈에 띄었다.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03년 팔미도 등대 점등 이후 지어져 1962년 5월 사무실을 신축 이전하기 전까지 이용됐다. 이후에는 팔미도 주둔 해군 병사의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내부는 항로표지관리원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과 옛 등대일지, 시계, 통신기, 일본에서 만든 구형 테스터 장비 등으로 꾸몄다. 이 가운데에는 정 소장이 입사 직후 팔미도에 처음 발령받아 실제 사용했던 물건도 있다고 한다. 팔미도는 그의 첫 발령지이고 이번이 두 번째 근무다.사무실 안에 걸린 가족사진에 눈이 머무르게 됐다. 옛날에는 항로표지관리원 가족들이 등대에 함께 머무른 경우도 많았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자녀들이 섬을 나오면 인천 자유공원 근처에 있는 '등대직원합숙소'에서 돌봐줬다. 지금으로 따지면 직장어린이집과 비슷한 보육 시설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인천해수청 직원들의 관사로 용도가 바뀌었다.언덕을 마저 오르니 작은 등대와 큰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등대를 '구 등대'라고 부른다. 이 작은 등대가 1903년 6월1일 불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정 소장은 "등대와 붙어있는 돌담도 옛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큰 등대는 2003년 팔미도 등대 점등 10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 종합정비사업'에 따라 새롭게 지어진 '신 등대'다.팔미도 구 등대는 우리나라 항로표지의 효시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다. 2002년 2월4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됐다.그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항로표지의 설치와 관련 업무는 어떤 해사 업무보다도 일찍 근대화된 편이다.서세동점의 시기 인천항은 서양, 중국, 일본의 배들이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그 가운데 팔미도는 인천항 도착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섬이다.지도를 보면 금방 이해하게 된다. 배가 인천항에 들어오려면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덕적군도와 자월도를 지나 무의도와 영흥도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크게 바꿔야 하는데, 팔미도가 딱 뱃머리 방향을 바꾸는 '변침점'에 있다.서해 특히 인천 앞바다에는 무수한 섬과 암초가 있고, 또 조석 간만의 차가 컸다. 해류가 급격하게 변하고 해상 사고도 빈번했다.포항에는 우리나라 등대 역사가 망라된 국립 등대박물관이 있다. 전만희 국립 등대박물관 학예사는 "열강의 자국 선박들이 안전하게 조선을 드나들기 위해서는 등대가 필수적이었다. 열강은 조선에 등대를 요구했고, 팔미도에 등대가 만들어진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다"고 설명했다.우리나라는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팔미도·소월미도·북장자서·백암에 등대 건설에 들어가 1903년 6월 완공했다.우리나라 등대가 조선으로 몰려오는 세계열강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민속학자이자 해양문화사가인 등대 전문가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우리나라 등대를 '제국의 불빛'이라고 부르는 이유다.형님인 '꼬마 등대'와 100살 차이가 나는 아우인 '거대한 최신식 등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이색적으로 다가왔다.옛 등대와 지금 신식 등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은 전기로 작동하지만 과거에는 석유 연료로 등댓불을 밝혔다. 정 소장은 "선배들은 불을 밝히기 위해 매일 석유통으로 짊어지고 날라야 했는데, 눈이나 비라도 내리면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등대는 일몰 3분 후 점등해 일출 3분 전 소등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전에는 매번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야 해 번거로웠지만, 지금은 자동화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20년 치 일출·일몰 시각이 입력돼 있어 점등과 소등에 신경 쓸 일이 없다. "혹시 자동화 이전 시절에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경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정 소장은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웃었다.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대형 회전식 등명기와 전망대,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 위성항법보정시스템 기준국 등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특히 등대의 불을 밝히는 등명기는 국내 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까지 비추며 10초에 1번씩 번쩍인다.정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팔미도 등대'에서 근무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팔미도 등대가 10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을 밝혔고,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인 공헌도 했다"며 "제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팔미도 등대가 배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제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연안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40여분을 가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는 팔미도에 도착한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어두운 밤 바다에서 배들의 항로를 안내하는 팔미도 등대의 등명기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 사무실이 잘 보존 되어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1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어둠이 시작되자 정창래 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장이 등대 꼭대기에 있는 등명기를 점검 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05-16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7]뱃사람과 바다 날씨

태풍으로 생활 중심지까지 옮기던 어민들 '갈매기떼 강풍설' 등 특성 구전으로 전해19세기 말 각국 배 늘던 인천, 근대방식 관측 시작 … 日 필요에 따라 최신장비 갖춰기술 발전에도 안개·가시거리등 '사람 눈'에 의존… 세월호 참사 '안전' 뼈아픈 교훈"바람 강풍을 막아주고, 여해 끝이면 제쳐주고, 모래성이면 엎어 넘기고, 갈치바위를 넘겨주시고."주요 무형문화재 82-2호인 서해안풍어제 '소본향제석굿'의 한 구절이다. 서해안풍어제 김혜경 이수자는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하는 어민들의 소망을 표현한 부분"이라며 "만선을 기원하는 풍어제에서 바다 날씨 안녕을 바라는 것 자체가 뱃사람에게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뱃사람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날씨가 평온할 때는 물고기를 잡게 해주는 장소지만, 비바람이 불면 한순간에 배를 삼켜 버릴 수 있는 존재다. 뱃사람들의 안전과 만선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진행하는 풍어제에서 바다 날씨가 평온하기를 기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바다 날씨에 따라 어업의 중심지가 바뀌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까지 인천 '민어파시'의 중심은 굴업도였다. 1920년 굴업도 근해에서 민어어장이 발견되면서 성어기인 7~9월 전국 각지에서 어선 500여 척이 굴업도를 찾았다. 민어파시 때는 음식점·세탁소·목욕탕 등 선원들을 위한 임시 편의시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굴업도 민어파시는 1930년대에 들어서 덕적도에 그 명성을 내주게 됐다. 방파제 시설 등이 없는 자연항(自然港)이었던 굴업도는 1923년 8월13일 불어닥친 태풍으로 어선 63척이 완전히 파손되거나 행방불명됐고, 30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당시 경기도수산회의 공식 발표인데, 실제로는 어선과 인명 피해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규모 재난으로 인해 이듬해부터 인천 근해 어업기지는 덕적도 북리(北里)로 옮겨졌다. 조선총독부가 1937년부터 북리항을 개발하면서 민어파시의 중심지는 굴업도에서 덕적도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어부들은 어업 활동의 중심지까지 바꾸는 '날씨'를 나름의 방법으로 읽어냈다. 정남훈(69) 북성포구 어민회장은 "예전부터 갈매기 수십 마리가 높이 날면 3일 뒤에는 반드시 강풍이 불어온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정태진(47) 백령도기상대장은 "과거에는 기상 예보가 지금처럼 체계화돼 있지 않았다. 실시간 확인도 불가능했다"며 "이 때문에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기상 특성이 구전돼 내려오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방식의 해상 기상 관측이 가장 먼저 이뤄진 곳이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서울과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유로 세계 각국의 배들이 몰려왔다. 주로 무역선과 사람을 실어나르는 여객선이었는데,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도 많아서 좌초되거나 선박끼리 부딪혀 침몰하는 사고가 빈발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인천해관(현 인천본부세관) 총세무사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인천해관을 창설한 1883년 9월1일부터 정규적인 해양 기상 관측을 시작했다. 한수당연구원 한상복 원장(서울대 인류학 명예교수)은 "해관 개설 당시 인력 대부분은 중국해관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해관은 기상청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인력들이 날씨를 관측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기상관측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3시간 단위로 5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밤에는 관측이 이뤄지지 않았다. 해관 직원은 기압(氣壓)과 기온(화씨 단위), 바람의 방향과 세기, 상층부와 하층부의 구름 형태, 강수량 등을 관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상감이 지금의 기상청 역할을 수행했는데, 인천해관에서는 관상감에서 내놓는 자료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기상관측을 진행했다고 한다.일본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인천에 관측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서 전쟁이 처음 시작될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러시아 함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인천 앞바다의 날씨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인천 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를 세우고, 전쟁용 관측소를 구축한 주된 이유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는 배경에는 미리 측량한 해상 관측 정보가 주효했다는 게 당시 일본의 분석이었다. 관측소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은 인천의 임시 관측소를 헐고, 1905년 1월 응봉산 정상에 최신 시설을 갖춘 인천관측소를 정식으로 세우게 된다. 이후 이곳에서 우리나라 전역은 물론 연안, 태평양 심지어 일본 해역의 해상 기상도 관측했다고 한다.바다 날씨 관측은 수십 년 동안 '사람의 눈'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기온이나 기압, 풍향 등은 시대의 흐름이 바뀜에 따라 기계가 관측한 자료가 대신해 나갔지만 안개 상황에서의 가시거리 측정은 시정계 등 관측 장비보다 육안 관측에 의존했다. 안개는 바람을 타고 빨리 이동하기 때문에 가까운 지점에서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데다, 바다 습도에 의해 측정값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테면 인천항관제센터(VTS)에서 인천항 외측 방파제가 보이면 가시거리가 1마일(1.6㎞) 정도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는 식이다.이런 방식은 관측 지점과 측정 시각, 측정 방법 등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2014년 4월15일 오후 9시 세월호 출항 시점 기준으로 관측된 인천항 인근 시정 정보는 당시 해양수산부 소속 인천VTS 1천600m, 해운조합 운항관리실 500m 이상, 인천기상대 800m 등이었다. 해사안전법에 따르면 어선을 포함한 여객선의 경우 시정이 1㎞ 이내일 때 해양경찰서장이 출항을 통제한다. 인천기상대나 해운조합 운항관리실 기준이었으면 세월호는 출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호는 인천VTS의 가시거리에 따라 2시간 뒤 시정주의보가 해제되면서 출항했고 대참사를 당했다.현재 기상청은 모든 바다 날씨를 관측 장비를 이용해 측정하고 있다. 덕적도와 이작도, 풍도, 자월도, 장봉도에는 파고 부이를 설치해 파고와 풍향, 풍속 등을 관측한다. 논란이 됐던 가시거리 측정은 지난해부터 덕적도에 있는 해무 관측소의 영상(CCTV) 장비를 통해 예보되고 있다. 또 이를 토대로 인공지능(AI)이 해무의 발생 확률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수도권기상청 백령기상대는 오전·오후 8시15분 하루 두 차례 '레이윈존데'를 하늘에 날려 기압과 풍향, 풍속, 온도, 습도 등을 확인하고 있다. 레이윈존데는 지상부터 고도 35㎞까지 고도별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을 실시간으로 관측하는 장비다.뱃사람들은 기상 관측이 정교해지고, 안전 기준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불편해졌다고 한다. 예전보다 출항을 통제하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정남훈 어민회장은 "선원들의 인건비는 고정적으로 나가기 때문에 하루 조업을 나가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히 출항을 통제해야겠지만, 멀쩡한 날씨에도 조업을 못 나가는 날이 많다"고 아쉬워했다.인천지방해양수산청 등 출항 통제 기관들의 생각은 다르다. 인천해수청 관계자는 "안전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다는 게 기본 방침"이라며 "어민이나 섬 주민들이 불편을 겪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백령도기상대에서 직원이 기상관측용 풍선을 날리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서해5도 평화풍어기원제 띠뱃놀이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1883년 9월 1일 오전 6시부터 9월 9일 오후 6시까지의 해양기상관측자료. 당시 인천 해 관(현 인천본부세관)의 직원들은 기압(氣壓)과 기온(화씨 단위), 바람의 방향과 세기, 상층부와 하층부의 구름 형태, 강수량 등을 하루 5차례 관측했다. /한상복 한수당연구원 원장 제공

2018-05-09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6]인천과 포구(下)

전국 유일 '선상 생선시장' 파시 여는 북성포구수십년 단골 젓새우 등 사러 경기·서울서 발길화수·만석부두 1970~1980년대 '인천 경제 중심'기능 연안부두로 통합… 어시장·횟집 크게줄어30여척으로 줄어든 유선·어선들만 그자리 지켜인천 중구 북성포구의 파시가 올해에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파시(波市)는 바다나 부두에 있는 배 위에서 펼쳐지는 생선 시장을 말한다. 전국에서 파시가 열리는 곳은 북성포구가 유일하다. 전라도 등지에서 북성포구의 파시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꾸준히 찾고 있기도 하다.지난달 27일 낮 12시 인천 중구의 작은 포구인 북성포구. 파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등지에서 온 이들은 개인용 손수레를 끌거나 손에 양동이, 배낭, 스티로폼 상자 등을 들고 있다. 젓새우 등 수산물을 담기 위한 통을 준비해온 것이다. 많은 이가 젓갈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젓새우를 산다고 했다.이들은 배가 들어오자 한 줄로 서서 조심스럽게 배에 올라섰다. 선원들은 갓 잡아온 새우와 각종 생선을 배 위에 진열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가장 많이 잡힌 것은 젓새우. 젓새우 한 말의 가격은 1만5천원, 두 말을 사면 2만5천원이다.배 한 척이 포구에 접안할 때마다 20여명의 손님이 배에 올라섰고, 선원들의 손도 바빠졌다. 선원은 쉴 새 없이 새우젓을 통에 수북이 담아 손님에게 건넸다.인천 계양구에 사는 권근아(45·여)씨는 친척과 함께 북성포구에 처음 왔다고 했다. 권씨는 "이곳이 새우가 싱싱하고 저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며 "배에서 직접 판매하니까 믿을 수 있고 다른 데에 비해 30% 이상 저렴한 것 같다"고 말했다.서울 구로구에서 온 김춘자(72·여)씨는 젓새우 다섯 말을 샀다. 손수레와 배낭에 젓새우를 꽉꽉 담았다. 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새우젓을 담가서 자식들에게 주려고 한다. 김장 때 쓸 것"이라며 "10여 년 전부터 1년에 1~2차례는 이곳에 와서 새우를 산다. 다른 곳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더 사고 싶어도 들고 가기가 무거워 못 산다. 마음 같아서는 생선도 더 사고 싶지만 참았다"고 덧붙였다.이날 각 배에서 잡아온 새우는 150㎏ 안팎. 어민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획량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선원 박윤수(65)씨는 "이날 잡은 것은 새우가 대부분이고 간자미와 같은 생선은 양이 많지 않았다"며 "5월에는 어획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북성포구 파시는 역사가 길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 어민들의 이야기다. 올해 파시는 4월 중순에 시작했다. 물때에 맞춰서 열리기 때문에 1주일에 2~3일 정도 파시가 열린다. 토요일에는 200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북성포구는 '똥마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960년대 실향민들이 이곳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고, 공동화장실에서 나온 대변이 밀물을 만나 떠다닌 모습 때문이라고 한다.정남훈(69) 북성포구어민회장은 "예전에는 고기도 많았고, 전량을 선상에서 판매했다"며 "어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많이 떠났고, 어획량까지 줄면서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곳을 찾는 분들은 20년 이상 단골이 많다. 경기도 포천이나 서울에 사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소설가 양진채는 단편소설 '패루 위 고래'에서 "포구로 들어온 배는 일곱 척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포구이기는 했지만 골씨를 따라 배가 들어오는 광경. 싱싱한 생물을 배에서 바로 흥정해서 사는 모습 등을 구경하는 동안 못마땅한 모습이 사라졌다. (중략) 문득 똥바다요? 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동네의 바다가 똥바다로 불렸다는 걸 아는 사람 정도는 돼야 이 포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북성포구의 선상 판매만큼 인근에 있는 화수부두와 만석부두도 과거 대표적인 항구 역할을 했다.만석부두에는 영종도와 작약도 행 여객선이 다녔다.동아일보는 1976년 1월1일자 신문에서 "인천항 만석부두에서 영종도로 가는 여객선 선실은 세모(歲暮)를 맞아 섬 아낙네들이 사서 가지고 가는 짐으로 가득하다"며 "희뿌연 창으로 비치는 인천 앞바다에는 이따금 닻을 내린 육중한 화물선이 보일 뿐 겨울 바다는 쓸쓸하다. 느릿한 여객선. 십리 길에 25분이나 걸린다"고 보도했다.하지만 선착장 시설이 낙후돼 1976년 폐쇄되고, 그 기능이 연안부두로 통합됐다.만석부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인천 동구 만석동 일대에 자리한 주꾸미 음식점이다. 이곳에 주꾸미 집이 많은 이유는 1970~80년대 만석부두의 어선들이 주꾸미를 많이 잡았기 때문이다. 이 일대에서 '주꾸미 축제'가 열리기도 했으나, 어획량이 줄어들면서 축제도 사라졌다.화수부두는 인천의 대표적인 어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매일경제는 1974년 11월5일자 기사에서 "김장철을 앞두고 인천시의 새우젓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5일 인천 화수부두 젓갈시장에는 지난해 드럼당 1만7천원 정도 하던 새우젓이 2만1천원에서 2만3천원 사이에 거래되고 있다. 새우젓 가격이 크게 오른 이유는 올해 새우가 잘 안 잡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1982년부터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이관국(67)씨는 "이 동네가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되게 잘나갔다. 우스갯소리로 지나가는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인천 경제의 중심이었다"고 회상했다.그는 "당시 안강망을 하는 고깃배가 많았는데 보름에 한 번씩 이들이 부두에 돌아오면 음식점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연안부두가 생기고, 이곳에서 잡히는 고기가 줄면서 어민이 급격히 줄었다"고 말했다.북성포구와 만석·화수부두 어민들이 소속돼 있는 연안어촌계 강평규(68) 계장은 "북성포구와 만석부두, 화수부두의 시작은 전쟁 때 피난 온 실향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대 갯벌에서 바지락 등을 캐는 분들 중심으로 1966년 어촌계가 생겨났다"며 "한때 이 일대 배들은 유선과 어선 모두 100척에 달했지만, 지금은 30여 척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바다가 매립되고, 어획량이 줄어들면서 어민 수가 줄어들었다"며 "그래도 포구와 부두가 있는 것은 어민들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인천의 어업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북성포구가 포함된 열십(十)자 모양의 '십자수로'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十'자 안쪽 중에 위쪽 부분에 북성포구가 위치해 있으며, 십자 모양 넘어 위편에 화수부두가 있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이 바다 일부를 매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만석부두의 모습. 이 부두는 과거 작약도와 영종도 등지를 오가는 여객선이 다녔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어선만 부두를 이용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화수부두는 과거 인천의 유명한 수산시장이었다. 1970년대 신문을 보면 인천지역 수산물 가격의 등락을 보도할 때 화수부두 젓갈시장 새우젓 시세 등을 활용했다. /경인일보 DB지난달 27일 인천 중구 북성포구에 접안한 선박 위에서 선원들이 젓새우 등을 판매하고 있는 모습. 이날 서울과 인천 각지에서 젓새우 등을 사기 위해 5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갓 잡아온 수산물을 선상에서 판매하는 곳은 전국에서 북성포구가 유일하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5-02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5]인천과 포구(上)

황무지였던 소래포구,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 정착항로 표지 시설·전봇대 직접 설치하며 터전으로 일궈새우젓 등 1970년대부터 전국 입소문… 문학에도 등장최근 어획량 감소 위기 '국가어항' 지정되며 희망 살려인천 남동구 논현동 포구로. 소래포구와 어시장, 소래어촌계 등이 이 일대에 있다.작은 어선이 있고, 배들이 정박하는 물양장 앞에는 갓 잡아온 수산물이 판매된다. 강원도나 충청도 어촌에 있을 법한 모습이 펼쳐지는 곳이다. 포구와 접한 곳에 있는 어시장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소래포구와 어시장을 찾는 사람이 한 해에 2천만명이다. 새우젓과 꽃게를 사러, 회를 먹으러.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어시장은 상인과 손님의 흥정하는 목소리, 어시장이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젖은 바닥에서 나는 발소리, 인천 어느 바다에서 잡혀 왔을 물고기들이 살아 푸덕거리는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을 자아낸다. 도심에서 어시장을 거쳐 바다 쪽으로 향하다 보면 작은 바다와 어선, 각종 어구가 나타난다. 많은 이가 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어촌의 고즈넉함을 만끽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소래포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있다. 인근엔 아파트를 짓기 위한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는 '수인선'이 운행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소래포구가 '도심 속 포구'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이토록 활기차고 평화로운 소래포구의 시작엔 '수탈과 전쟁'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켜켜이 배어 있는 곳이 바로 소래포구다.소래포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전해진다. 과거 이 일대에서 생산된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수원에서 소래를 거쳐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고, 건설 현장과 염전에서 일하는 일꾼을 실어 나르기 위해 나룻배를 정박한 게 소래포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어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어업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실향민들이 소래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실향민 전규식(93), 박지화(90)씨 등 황해도에서 어업을 하던 이들이 이 지역에 터를 잡고 나무로 만든 작은 범선으로 고기를 잡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초. 실향민은 지금의 소래포구를 있게 한 뿌리라는 것이 소래 어민들의 이야기다.1996년부터 2000년까지 소래어촌계장을 맡았던 전익수(65)씨는 '소래포구 1세대 어민'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곳은 허허벌판에 작은 집 몇 채밖에 없는 작은 바닷가였다"고 말했다.실향민 등으로 구성된 어민들은 1963년 소래어촌계를 설립했다. 당시 등록된 어선은 28척으로 인근 마을까지 소래어촌계에 포함됐다고 한다. 그때는 어민들이 잡아온 고기를 팔 수 있는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일부는 포구 앞에서 판매했지만, 대부분은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수인선이나 경인전철을 이용해 서울과 인천항 등지로 가져가 팔았다.소래어촌계원 조인권(62)씨는 "60년대 초반 처음 이곳에 왔는데,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며 "움막 같은 몇 채의 집과 갯벌, 작은 목선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점차 마을이 커졌지만 1970년대까지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민들은 꼬불꼬불한 물길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제대로 된 항로표지시설도 없었다. 이 때문에 어민들이 직접 전봇대를 세우고, 뱃길을 표시하기 위해 대나무를 갯벌에 박아 넣기도 했다. 전익수씨는 "당시 한국전력에서 전기선은 연결할 수 있지만 전봇대를 세우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민들과 주민들이 함께 전봇대를 세웠다"고 말했다.소래포구는 1970년대 이후 어민이 점점 늘었다. 어민들이 직접 잡은 수산물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지금도 어업 활동을 하는 김남석(66)씨는 1978년 소래포구에서 어업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선착장이 없어 배의 동력으로 갯벌 위에 배를 올려 놓고, 장화를 신고 걸어서 뭍으로 와야 했다"며 "70년대 후반부터 방송과 신문에 소래가 소개되면서 찾는 이들이 급격히 많아졌다"고 했다.경향신문은 1981년 6월8일 "서해 경기해안의 미항인 소래항. 이곳은 올해 들어 관광객이 부쩍 늘어 비좁은 포구는 원색의 인파로 흥청거린다"며 "소래항은 싱싱한 해물이 많이 나 각종 공해에 찌든 도시민들이 마음 놓고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수도권어항으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소래포구의 주 어종은 '새우젓'이다. 아직도 소래 새우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 지금은 냉장시설이 잘 돼 있지만 1970~1980년대 소래 새우젓의 주 보관 창고는 부평동굴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인 관광지가 된 '광명동굴'도 소래포구 새우젓의 보관 장소였다. 김남석씨는 "당시 냉장시설이 미비했기 때문에 새우젓 대부분을 부평과 광명에 있는 동굴에 보관했다. 지금도 부평동굴을 냉장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며 "1980년대엔 250㎏짜리 새우젓 수천 통을 동굴에 저장했다"고 말했다.소래포구 새우젓은 문학작품에도 종종 등장한다. 시인 정세훈(인천민예총 이사장)은 '소래포구'라는 제목의 시에서 '휘몰아치던 서해 바닷 바람은 / 어머니 품안에 찾아들 듯 고요히 안겨오고 / 새우젓배들 너울너울 바람 타고와 / 끝없는 그리움처럼 줄 이어 새벽을 열었겠지'라고 했다.현재 소래어촌계에 등록된 어선은 256척이다. 2008년에 347척까지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있다. 소래포구 어민 절반 이하는 다른 지역에서 어업을 하다가 소래로 옮겨온 이들이다. 시흥, 안산, 인천 만석·화수부두 등지에서 소래로 왔다. 소래 어민이 늘어난 것은 개발사업 영향이 컸다.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시흥의 어민들이 소래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1974년 인천항 갑문이 준공되면서 만석·화수부두의 소형 어선들이 소래로 왔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온 이들도 있다.소래 어시장은 지속적으로 확장됐지만 소래 어민은 줄어드는 추세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바다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시화방조제 건설,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송도국제도시 및 인천 신항 건설 등이 소래 어민들의 조업에 영향을 미쳤다.고철남(54) 소래어촌계장은 "지속적인 매립사업으로 조업할 수 있는 바다가 축소됐다. 단순히 면적이 줄어든 것뿐 아니라 어획량도 많이 감소했다"며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갯벌 매립과 바닷모래 채취로 인한 생태계 변화가 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소래포구는 지난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고철남 계장은 "소래포구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건 어민들의 어업 활동이 바탕이 됐다. 하지만 어시장이 활성화된 것과 다르게 어업 시설은 굉장히 낙후됐다"며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만큼 소래의 낙후한 시설을 현대화하고, 어민들의 어업 활동이 보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활기차고 평화로운 소래포구의 지금을 있게 한 데에는 '수탈'과 '전쟁'이라는 아픔이 있었다. 실향민의 어업 활동을 시작으로 발전을 거듭한 소래포구는 주변에 아파트숲과 지하철이 연결돼 있어 '도심 속 포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드론을 활용해 찍었으며 소래포구 너머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80년대까지 소래포구는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물길을 표시하는 시설이 없어 어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어민들은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고, 이는 소래포구 발전의 바탕이 됐다. 사진은 어민들이 전신주를 세우고, 물길을 표시하기 위해 대나무를 갯벌에 박고 있는 모습. /전익수씨 제공1983년 소래포구 모습. 1980년대 초 소래포구에는 제대로 된 선착장이 없어 배를 갯벌 위에 세워 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래역사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8-04-25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4]인천항 연안여객선(下)

석모대교 개통 후 이용객 급감한 외포리 선착장유일한 정기선 삼보 12호, 섬주민들 마지막 보루서해5도 등 임산부 출산·응급 환자 이송·피난…수십년 실어나른 일상, 선원들 책임·사명감 느껴지난 6일 찾은 인천 석모도 석포 선착장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식목일이 지난 4월 초순이라는 시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추운 날씨와 강한 바람, 미세먼지는 선착장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했다. 지난해 석모대교가 개통하면서 외포리 선착장과 석모도를 연결하는 배편이 끊긴 이후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됐다.이곳에서 30년간 밴댕이젓과 순무김치 등을 팔아온 문유자(60·여)씨는 "그전엔 수시로 배가 다녀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물건도 잘 팔렸는데, 지난해 석모대교가 생기면서 이곳(석포)을 다니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며 "'나룻부리항시장'으로 새롭게 가꾸고 장사를 하고 있지만, 일부러 찾아야 하는 곳이 돼 오늘도 개시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강화 외포리 선착장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문도와 아차도, 볼음도로 향하는 '삼보12호'를 기다리는 차량 몇 대와 10여 명의 사람이 작은 대합실을 지키고 있었다. 삼보12호는 석모대교 개통 이후 외포리 선착장의 유일한 정기 여객선이 됐다.현대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 이수익의 시에 나오는 '새우깡을 좋아하는 갈매기들'은 여전히 선착장 주변을 맴돌며 '비루한 생의 곡예'를 하는 듯했다. 새우깡을 던져줄 사람들을 찾지 못한 그들에겐 왠지 모를 허기가 느껴졌다. 1987년부터 외포리 선착장을 지켜온 삼보해운의 최경락 상무는 "석모대교 개통의 직격탄을 맞았다. 직원 수를 기존의 절반 수준인 20여 명으로 줄였고 임금도 대폭 낮췄지만, 회사를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여객선 준공영제를 하게 되면 주문, 아차, 볼음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포함해달라는 건의를 군에 해 놓은 상황"이라며 "여객선에 대한 정부 지원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만난 차춘자(77) 할머니는 "한평생을 볼음도에서 살았다"며 "이 배(삼보12호)는 여전히 섬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라고 했다. 그는 "풍선(돛단배)을 타고, 연락선도 타던 시절보다 배 타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볼음도를 오가는 배가 더 자주 다녔으면 하는 바람은 늘 있다"고 했다.섬과 육지가 다리로 연결되고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운항을 멈추는 항로가 생기고 있지만, 차춘자 할머니의 말처럼 인천의 연안여객선은 여전히 중요한 교통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엔 섬과 육지를 잇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1980년대 후반만 해도 인천과 백령도를 오가는 배편이 일주일에 2~3회 정도에 불과했다. 시간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긴 10시간이나 걸렸는데, 백령도를 출발해 인천으로 향하던 배 안에서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휴가철 덕적도를 찾은 50대 남성이 인천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졌는데, 자동심장충격기를 활용한 선장 이하 선원들의 신속한 응급조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었던 2010년엔 놀란 주민들을 육지로 실어나르는 피난선 역할을 연안여객선이 했다.백령도와 연평도, 덕적도 등 섬을 연결하는 케이에스해운(주) 황성만 대표는 "섬 주민들이 자동차 부품을 구해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구해서 전해주고, 생필품 좀 사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서 정이 쌓였다"며 "섬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까지 많이 알게 됐다"고 했다. 연안여객선이 승객뿐만 아니라 정도 함께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해운업에 종사한 지 34년째라는 그는 배가 끊기면 섬을 오가는 주민과 관광객들의 발이 멈출 수밖에 없는 만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노선을 운항하는 게 필수라고 강조했다. 섬 주민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지금껏 해운업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인천 연안여객선에게 인명 사고의 아픔은 예외일 수 없었다. 1949년 10월 추석 전날 인천에서 강화도로 향하던 '평해호'(平海號)가 작약도 부근에서 전복돼 70여 명이 숨졌다. 당시 이 배에는 정원(50명)보다 4배 많은 200여 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1963년 2월엔 인천을 떠나 강화 교동도로 가던 '갑제호'가 유빙에 부딪혀 침몰하고 승객 6명이 숨진 사고가 발생했다. 1986년 11월에는 외포리를 출발해 석모도로 향하던 '카페리2호'가 전복돼 12명이 물에 빠져 숨지고 16명이 실종됐다.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 침몰 사고는 지난 16일 4주기를 맞았고, 추모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연안여객선 선원들의 고령화는 요사이 업계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토요일과 일요일, 명절 따로 없이 매일 운항해야 하고 바람 같은 기상 문제로 마음을 졸여야 하는 게 현실인 상황에서 젊은 직원들이 버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50명 가까운 선원이 근무하는 한 연안해운사의 경우, 근속 기간이 30년 이상 된 직원이 절반을 넘는다. 60세 정도가 그나마도 젊은 축에 든다고 한다.업계 한 관계자는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힘든 환경 탓에 젊은이들이 선원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며 "들어와도 몇 개월을 못 버티다 나간다"고 했다. 이어 "선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것도 선원 수급이 어려운 하나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는 "선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병역 면제 혜택을 주는 등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인책이 필요하다"며 "아니면 외국인 근로자라도 쓸 수 있도록 정부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이미지/아이클릭아트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가 개통하면서 강화 외포리 선착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삼보12호가 외포항에서 주문도와 아차도, 볼음도에 들어가는 승객들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석모대교 개통 직전 외포항에서 출발한 정기선이 석모도로 향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 정박중인 정기여객선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석모대교 개통전 강화와 석모도를 오가는 정기선에서 차량들이 나오는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과 백령을 잇는 여객선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4-18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3]인천항 연안여객선(上)

19세기 말부터 조곡·물품 이송 목적으로 활성화… 함경도·황해도까지 정기운항한국전쟁 이후 당진선·목포선 등 12개 지역 노선 운영 '주요 교통수단' 자리매김 자동차 보급·도로망 확충되면서 승객수 급감… 매일 오가던 항로 점차 사라져육지~섬 '주민·관광객 수송' 중요성 여전 최근 10년간 이용 규모 꾸준한 증가세인천과 인천의 섬을 잇는 관문인 인천연안여객터미널은 '설렘'과 '일상'이 혼재된 공간이다. 이곳을 매일 같이 드나드는 연안여객선은 터미널을 찾은 사람들의 설렘과 일상을 실어 나르며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는다.최근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만난 한지원(49·인천 남동구)씨는 "사진 모임과 함께 백령도를 가는데, 인천에 살면서도 백령도를 처음 가게 돼 설렌다"고 했다. 그는 "백령도의 기암괴석 같은 자연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면서 "주변에선 아무래도 북한과 가까운 지역이니 조심하라며 걱정을 많이 한다"고 했다.박경란(85) 할머니는 대합실에서 자월도행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진료차 나왔는데, 인천에 있는 자식 집에도 들러 며칠 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평생 자월도에서만 살았다"며 "겨울엔 배가 자주 끊겨 불편하지만, 아무래도 배도 커지고 훨씬 편리해져 다니기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출항 10분 전까지 개찰을 완료하오니 탑승을 서둘러 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에 따라 대합실 승객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여객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뛰, 뛰, 뛰'. 승객을 태운 여객선들은 큰 고동 소리를 울리며 부지런히도 선착장을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지금도 여전히 인천 섬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인 연안여객선의 출발점엔 연안해운업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의 목적은 사람보다는 물건을 실어나르기 위한 경우가 훨씬 잦았다. 정부가 운영한 연안해운은 1886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부터 해운 업무를 인수한 전운국(轉運局)이 해룡호, 광제호, 조양호 등 3척의 기선으로 지방의 조곡을 인천으로 운반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관영기업인 이운사(利運社, 1893년)가 창설돼 인천~마포 간 강운(江運)과 인천~ 군산 조곡 해운을 주요 업무로 삼았고 갑오개혁 이후 일본우선회사가 인천을 기점으로 전라도의 군산, 목포, 여수, 경상도의 삼천포, 마산, 부산, 염포, 함경도의 원산, 서포, 신포 등 지역까지 배를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이 시기 쌀과 하포(夏布), 면반물(綿反物), 동물 가죽, 대두 등의 인천항 반입이 활발했다고 한다. 군산과 목포에선 쌀이, 부산에선 생선, 해초, 솜, 직물 등이 반입됐다. 원산에선 명태 등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당시 인천항에서 연안해운 업무를 진행한 주요 민간선사는 대한협동우선회사, 통운하, 호리조운사 등이 있었다. 정부 관료였던 이윤용(대한협동우선회사), 인천의 유지(통운사), 일본인 호리부자(掘久太郞, 호리조운사) 등이 각각 설립했다.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인천~평양 간 정기 항로를 개설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 시기 연안무역선들의 규모는 파악할 수 있지만, 여객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는 부족하다.인천의 연안여객선 운항은 해방과 한국전쟁 등을 겪은 뒤 본격적으로 활성화된다. 인천에서 백령도와 덕적도, 연평도, 용유도, 대부도 등을 연결하는 지금도 익숙한 항로는 1950~60년대에도 있었다. 눈에 띄는 건 당시 인천에서 강화 교동도를 연결하는 뱃길은 물론, 인천과 충청권을 연결하는 정기적인 여객선이 운항했다는 점이다. 1956년 발간한 '경기도지'는 인천항을 기점으로 하는 항로가 당진선, 목포선을 비롯해 총 12개 노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여객선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건 물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30대 시절 충남 당진에서 뱃길로 인천을 종종 오갔다는 박영수(76·인천 남구)씨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서산의 구도포구와 명천포구, 당진의 한진포구와 외성포구 등에서 지금의 올림포스호텔 인근의 인천항을 잇는 4개 항로가 있었다고 했다. 1974년 인천항 제2선거 완공으로 지금의 연안여객터미널 자리로 여객선 부두가 이전하기 전 일이다.박씨는 "그때는 100명 정도 탈 수 있는 목선이 항로별로 하루 한 차례 정도 다녔고 당진에서 인천까지 8~9시간이 걸렸다"며 "당시에는 폭풍, 안개주의보 같은 게 없어 배를 타고 다니기가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70년대 들어서면서 200명 정도 타는 강선으로 바뀌어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팔미도 앞을 지나면 인천 쪽으로 눈에 띄는 건물이 올림포스 호텔 하나밖에 없었다"며 "당시엔 인천항 도크가 없어 올림포스 호텔 앞에 배가 닿았는데, 아직도 그때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1964년엔 인천에서 만리포를 거쳐 제주를 연결할 정기여객선 은하호가 취항했다. 은하호는 203t의 현대식 철선으로 길이가 40m, 너비 6.4m, 16노트의 빠른 속력을 가진 배였다. 정원은 210명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최대의 여객선으로 소개됐다. 요즘 큰 축에 드는 하모니플라워호(인천~백령)의 t수가 2천100t 정도니 10분의 1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인천과 제주 간 항로는 2014년 4월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운항이 전면 중단된 상황이다.육상교통의 발달과 차량 보급은 충남과 인천 간 뱃길을 없어지게 한 주된 요인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이래, 각종 도로망이 확충됐고 자동차 보급 대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꼬박 하루가 걸리던 게 차로 2~3시간 정도면 돼 인천~충남 간 여객선을 이용하려는 승객이 급격히 줄면서 결국 항로가 없어지게 됐다.인천의 여객선들은 지역과 지역이 아닌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역할로 축소됐지만, 그 중요성은 변함없다. 인천과 각 섬을 잇는 14개 항로가 지난 30여 년간 비교적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백령도와 연평도, 이작도와 장봉도 등을 연결하는 항로는 낙도보조항로로 분류됐다. 특히 운항에 11시간 걸리는 백령도와 6시간이 걸리는 연평도는 한 달 다섯 차례 정도 운항할 뿐이었다. 승객이 적어 정부가 여객선 운항에 필요한 비용을 대는 구조였던 것이다. 덕적도와 용유도, 대부도, 영흥도 등은 30년 전에도 선사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일반항로였다.시간이 갈수록 낙도보조항로 비중은 줄어들고 일반항로 비중이 커졌다. 그만큼 항로 수익성이 개선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의 설명이다. 80년대 14개 항로 중 8개 항로가 낙도보조항로였지만, 현재는 3개뿐이다. 백령도, 연평도, 이작도 등 낙도보조항로 노선이 모두 일반항로로 전환됐다. 항로 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령도에서 오전에 출발하는 배는 선사의 적자 문제 등으로 2014년부터 2년 6개월 여 동안 운항하지 못하는 등 운영상 어려움을 호소했었다.지난해 인천 연안여객선을 이용한 사람은 147만1천여명이다. 인천해수청은 연도별로 증감은 있지만, 최근 10년간 꾸준히 이용 규모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섬 지역 군 병력은 물론 정부와 자치단체의 요금 할인 정책 등으로 섬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는 점이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인천해수청 관계자는 "섬으로 가는 연안여객선은 여전히 중요한 교통수단"이라며 "연안여객선을 타고 섬으로 가는 승객들을 대상으로 한 운임 지원, 섬 관광 활성화 등의 영향으로 연안여객선 이용객 수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과 각 섬을 잇는 14개 항로를 오가는 연안여객선은 지난 30여년간 비교적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유지되며 현재까지 섬을 드나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사진은 백령발 여객선을 통해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한 승객들이 하선하는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4-11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2]인천의 해원양성 교육기관

일제에 의해 1919년 교육기관 설립1947년엔 국립해양대학 잠깐 둥지1981년 34년만에 선원학교 문열어1993년 국립인천해사고로 개편바로 취업시장에 투입되는 학생들인프라 부족 탓 타지서 승선 실습졸업후엔 업체 몰린 부산으로 떠나지역 전문가 배출, 국가 관심 필요"선장이 돼 맘껏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요."지난 3월23일 오전 10시께 인천 중구 북성동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실제 화물선 기관실처럼 꾸며진 선박 조종 시뮬레이션 교실에서 해사고 3학년 학생 4명이 배를 운항하는 실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비가 내리거나 다른 선박이 가까이 다가오고, 파도가 크게 몰아치는 등 다양한 가상 상황이 모니터에 연출됐다. 학생들은 선장, 항해사, 조타수가 된 것처럼 바다를 항해했다. "충돌 위험, 스타보드(Starboard) 10도(오른쪽으로 10도 타격)."'Hanjin Korea'라는 가상 화물선이 배에 급격히 다가오자 조타수가 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선장은 키(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를 오른쪽으로 급하게 틀었다. 항해사 역시 선박이 제 각도로 피했는지 끝까지 확인했다. 선박 충돌 사고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이날 선장을 맡은 이대영(3학년)군은 "실제 선박을 운항하는 것처럼 임하면 나중에 배를 안정적으로 잘 조종하는 선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학생들은 졸업 후 해기사 4급을 취득해 화물선, 무역선 등 선박 인력에 즉각 투입된다. 일부 학생은 이미 해운사 장학생으로 뽑혀 마지막 학기 실습을 마치면 바로 취업해 배를 몰기도 한다. 흥아해운 장학생으로 뽑힌 김민성(3학년)군은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 여행을 많이 하는 선장이 되는 게 꿈"이라며 웃어 보였다.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협동심이다. 인천해사고 교훈도 '협동'이다. 이 때문인지 인천해사고의 전신인 인천선원학교 출신은 선장, 기관사, 선원, 회사원 등 각자 다른 위치에서도 지금까지 동문회를 이끌어오는 등 남다른 우애를 자랑한다.인천선원학교는 턱없이 부족했던 선원 수급을 위해 정부가 1979년 설립해 준비 기간을 거친 뒤 1981년 개교했다. 1기부터 3기까지는 1년제로 운영됐으며 4기부터 3년제로 변경됐다. 12기부터 현재 인천해사고등학교 모습을 갖췄다. 100여 명이던 선원학교 학생 정원은 현재 360여 명까지 늘었다.선원은 선내에서 생활하면서 해상에 도사리는 각종 위험 속에 인명과 재화를 관리해야 해 군대처럼 엄격한 조직체계를 갖춘 게 특징이다. 인천선원학교 역시 군 조직과 비슷했다. 주말에 자유롭게 학교 밖을 나가기도 어려웠던 데다 취침 점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날 밤을 꼴딱 새울 정도로 군기가 셌다는 게 졸업생들 이야기다. 인천선원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10여 년 선원 생활을 한 임용선(53)씨는 "분위기가 거의 군대와 같았다. 주말에도 자유로운 출입이 통제돼 2m 높이의 담장을 통해 월미유원지에 놀러 온 외부 여성과 대화나 교제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학교 특성상 강한 체력과 인내심을 기르는 훈련이나 강도가 센 해난 훈련을 해 심신이 여린 학생들은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학생들은 학교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현재 학생들이 쓰고 있는 운동장과 조경수는 선원학교 1~3기 학생들이 조성한 것이다. 선원 수급 부족으로 학생들은 바로 취업 시장에 투입됐다. 이 때문에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규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던 학생들이 주로 입학했다고 한다.인천선원학교 이전 인천에는 일제가 설립한 '해원양성소(조선총독부 체신국 해원양성소 인천지사)'가 있었다.1845년 영국이 항해사와 기관사의 자격 조건으로 승선 경력 이외에 국가시험을 거쳐 해기사면장(海技士免狀)을 발급하기 시작하자 다른 나라에서도 차례로 해기사 제도를 시행했고 우리나라에도 1913년 해기사 면허제도가 도입됐다. 근대적인 선원 양성기관이 설립된 것은 인천의 해원양성소가 최초였다. 이는 현재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의 전신이다.1919년 7월 해원양성소를 세운 일제는 선원이 부족하자 신입생에게 징집 유예 등 혜택을 주며 선원을 뽑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해운 업계 일손이 부족하자 월급을 많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까다로운 시험·체격 기준과 일제에 대한 반발 등의 이유로 정작 선원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해원양성소는 인천항을 모항으로 한 '광제호(光濟號)'를 실습선으로 썼다. 고종 황제는 1903년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 군함인 양무호(揚武號)를 일본에서 도입했는데 유지비가 많이 들고 효율성이 떨어져 군함으로 쓰지 못했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대한제국 정부가 새로운 군함 발주를 계획해 일본으로부터 1904년 도입한 것이 광제호였다. 광제호는 무선 전신시설을 처음 장치한 군함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부 정치가 시작되면서 광제호는 군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쓰였다.당시 해원양성소를 나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렵고 비참한 상황에서 근무했다. 1926년 12월22일자 동아일보 '취직난 중에도 해원은 유부족'이라는 기사를 보면 '취직난은 누구나 동감하지만 해원계는 반대로 구인난을 겪고 있다. 조선 유일 해원양성소가 인천이며 당시 졸업생은 거의 조선 청년으로 근실하고도 박봉을 감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해원양성소는 1927년 부산 진해로 옮겨져 진해고등해원양성소로 개편됐으며, 1946년 진해해양대학이 됐다. 같은 해 인천에도 인천해양대학이 설립됐다. 이후 진해해양대학이 1947년 1월 인천으로 이전하면서 인천해양대학과 병합해 '국립해양대학'이 됐지만, 고작 4개월만인 5월 다시 군산으로 옮겨졌다. 이후 '해양도시' 인천에는 인천선원학교가 설립되는 30년 동안이나 선원 양성 전문기관이 없었다.해양도시이자 수도권의 관문인 인천은 최초의 철도대학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05년 5월 인천 제물포에 개교한 철도이원양성소(鐵道吏員養成所)마저 1907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인천은 철도 전문인 양성의 맥도 끊기게 됐다.선원의 업무는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해 여객과 화물을 보호·관리하는 것이다. 선박의 대형화·다양화와 기술 발달로 오늘날 선박 운항은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필요로 한다. 유능한 선원을 갖추는 것이 해양도시의 기본이며 곧 해양 경쟁력인 이유다. 그러나 인천은 해양 교육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부산은 국립한국해양대, 국립부경대 등이 있으나 인천에는 인천해사고와 인천해양과학고 등 중등교육기관이 전부다.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학생들은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 있는 실습선을 이용해 6개월간 승선 실습을 마친 뒤, 민간 해운회사에서 상선을 이용해 남은 6개월을 채우는 상황이다. 굵직한 해운 회사도 부산에 몰려 있다 보니 해사고 졸업생의 80%는 부산 소재 해운 회사에 취직한다.여기에 인천은 월미도 인근 지역을 개발할 경우 민간투자 등을 위해 해사고 이전이 필요하다는 주민·정치계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해기사에 대한 대체복무 특혜까지 없어질 위기에 처해 해원 양성 교육의 위축이 우려된다. 인천이 해양도시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해운 교육계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명식 해사고 교장은 "해운 산업이 지금은 위축됐지만 지금까지 대한민국 발전을 견인한 공이 크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는 중요한 산업"이라며 "해양 분야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들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학생들이 선박조종시뮬레이션실에서 가상 화물선을 인천항으로 인항하는 선박 운항 실습을 하고 있다. /국립인천해사고 제공인천해사고등학교 전경.인천해사고 학생들이 학교 내 수영장에서 해상훈련을 받고 있다. /국립인천해사고 제공국립인천선원학교 학생들이 해변에서 해상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 /국립인천해사고 제공국립인천선원학교 학생들이 실제 선박 기관으로 실습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국립인천해사고 제공

2018-04-04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1]해양 안보와 인천(下)

소규모 한국군으로만 수행한제2차 인천상륙작전재탈환한 시청에 남겨져 있던 김일성 초상화 아직도 생생'모른 척 돌아서 가면/가시밭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중략) 당신의 넋은 언제나/망망대해에서 뱃길을 열어주는/등대로 우뚝 서 계십니다 (후략)' -유연숙의 시(詩) '넋은 별이 되고' 일부연평해전·천안함 피격 일어난 인천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 정부와 별도로 진행전우의 죽음 직접 목격한 영웅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불행하게 만들어""그 누구도 다시 고통 받는일 있어선 안돼" 평화 유지할 '강한 군사력·안보' 강조지난 23일 오전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린 인천 월미공원 해군2함대사령부 기념비 앞. 인천지역 학생을 대표해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에 다니는 유태영(3학년)군이 헌시 '넋은 별이 되고'를 낭송하자 500여 참석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인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55명 해군 장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곳은 모두 인천이었다. '서해수호의 날'이 제정된 이후, 인천이 정부 행사와 별도로 3년째 자체 기념식을 치르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인천시는 '호국·보훈의 도시'를 선언하기도 했다.인천에서 전쟁을 치러낸 이들에게 인천의 바다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1950년 2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임관해 한국전쟁을 겪은 최영섭(90·예비역 해군대령) 해양소년단 고문에게 인천의 바다는 전쟁터였다.최 고문은 인천상륙작전과 대청도·소청도 탈환 작전 그리고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산증인이다. 그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 갑판사관 겸 항해사, 포술사로 해군 장교의 첫 함정 경험을 시작해 백두산함 함장, 충무함(DD-91) 함장, 51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해군대령으로 전역했다.특히 그가 겪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과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과 인천은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넘어갔다. 2차 인천상륙작전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던 1951년 2월10일 한국 해군·해병대가 소규모의 병력으로 벌인 작전이다."백두산함 등 6척의 함정과 각 함정에서 차출한 승조원 73명, 그리고 덕적도 주둔 해병대 1개 중대가 인천 동구 만석동(조선기계제작소 해안)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했죠. 1·4후퇴 후 한 달여 만에 인천을 재탈환한 것인데, 인천시청에 걸려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아직도 생생합니다."이 작전으로 적군 8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전차 1대와 야포 8문을 노획하는 전과도 올렸다. 작전 성공 이후 인천항을 통한 대규모 군수 지원이 가능하게 됐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재수복하고 영토를 다시 찾는 데 큰 기반이 됐다.한일 월드컵 경기가 열리던 2002년 6월29일 제2연평해전에 참전한 권기형(39) 예비역 하사에게도 인천 바다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당시 '참수리 357호'에서 M60 사수 임무를 맡았던 그는 "부사수인 후배 부사관 서후원 하사(당시 계급)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갑판에 무릎을 꿇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그는 당시 고속정 좌현에서 북한 경비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여서 북한 경비정 승조원들의 표정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굉음과 함께 팔과 어깨에 총탄을 맞고 갑판으로 튕겨 나갔다. 부사수로 그 대신 자리를 지킨 건 서후원 하사였다. 그는 서 하사가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죽음을 직감했다고 했다.그는 그때의 부상으로 8개월간 병상에 있다 전역했고, 현재는 해군 무기를 만드는 방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전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에겐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그는 "제2연평해전은 분명히 '승리한 전쟁'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불행이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무엇보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그의 바람은 단 한 가지. 그는 "1년 내내 기억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며 "딱 하루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군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달라"고 했다.곽진성(37) 예비역 해군 병장도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그날 K-2 소총수로 같은 장소에 있었다. 참수리 357호 함교가 그의 자리였다.전투가 끝나고 며칠간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분노의 감정만 가슴에 남아있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자 차츰 기억이 되살아났다."정장과 부정장이 쓰러져 있고, 갑판 위로 핏물이 흐르고,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시간이 퍽 오래 지났음에도 그는 그날을 이야기할 때마다 매번 힘들고 분하다고 했다. 최근 남북 관계가 급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도 복잡해진다. 통일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복잡하고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그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그날을 겪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또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런 비극으로 다시 고통받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바다를 지킨 인천 인물인천에는 해양 안보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 많다.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의 함장으로 알려진 신순성(1878~1944) 함장이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에서 4년간 근대식 항해교육을 받고 갑종 항해사 자격을 땄다. 구한말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도입해 나라의 무력을 키운다는 뜻의 양무호로 명명하고 신순성을 함장으로 임명했다. 신순성 함장은 일본에서 이 배를 이끌고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그는 두 번째 군함인 '광제호' 인수 작업도 맡았다.안병구(69) 제독은 한국 해군 제1번 잠수함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을 지낸 인물이다. 1949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중(16회), 제물포고(13회), 해군사관학교(28기)를 나왔다. 1988년 해군 잠수함사업단 요원으로 근무하던 중 1990년 장보고함 초대 함장으로 선발됐다. 승조원들과 함께 독일에서 2년 동안 잠수함과 관련한 교육 훈련을 받고 1992년 현지에서 장보고함을 인수했다. 2005년 전역할 때까지 잠수함 부대의 전대장, 전단장 등 잠수함 부대장을 역임했다.윤영하(1973~2002) 소령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과 벌인 제2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윤 소령(당시 대위)은 참수리 357호 정장으로 참전했으며, 그가 졸업한 인천 송도고등학교에는 흉상이 있다. 정부는 그의 희생에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23일 오전 인천시 중구 월미공원 해군2함대사령부 기념비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인천지역 학생 대표들이 헌화·분향을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제2차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3-28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0]해양 안보와 인천(上)

나당연합군·서구열강 침략·천안함 피격등끊임없는 무력 충돌 '평화 유지' 중요 장소1945년 창설한 해군, 이듬해 인천에 첫기지한국전쟁 전 몽금포작전으로 北 기지 타격인천 바다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남과 북이 맞닿아 있는 바다의 경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에서는 남북의 무력 충돌이 빚어졌고,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인천 바다가 해양안보와 국가안보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얘기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인천 바다는 우리나라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인천 바다를 이야기할 때 전쟁이라는 단어뿐 아니라 평화를 함께 언급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매년 3월 네 번째 금요일은 '서해수호의 날'이다. 정부는 서해에서 끊이지 않았던 무력 충돌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자 '서해수호의 날'을 정해 기념하고 있다.■ 전쟁의 아픔이 서린 인천 바다인천 바다는 전쟁의 역사를 품고 있다.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대군을 이끌고 인천 바다를 통해 백제를 침공했다. 덕적군도의 하나인 소야도(蘇爺島)의 이름은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정박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소정방이 진을 쳤다는 '담안'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바다를 통해 조선을 침략해 강화도를 점령·약탈한 병인양요가 있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 조선이 서구 열강과 한반도에서 대결한 첫 전쟁이다. 1871년에는 조선과 미군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역사상 첫 교전을 벌인 강화도 손돌목 전투로 시작된 신미양요가 있었다.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또한 인천이 핵심 지역이었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다.1950년 9월15일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의 바다로부터 팔미도 등대와 주변 섬을 장악하며 시작됐다.1999년 6월15일에는 정전협정 이후 발생한 남북의 첫 해상 교전인 제1연평해전, 3년이 지난 2002년 6월29일에는 6명의 해군이 전사한 제2연평해전이 벌어졌다. 2010년에는 46명의 해군 장병이 바다에 잠들게 된 천안함 피격 사건, 2011년에는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도발이 있었다.■ 인천의 해군주권을 가진 나라가 반드시 갖춰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다에서의 전쟁을 막아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해군력이다. 특히 인천은 우리나라 해군의 역사(史)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다.우리나라 해군은 1945년 11월11일 손원일 제독이 창설한 해방병단(海防兵團)으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해군은 첫 기지를 인천에 창설했다. 해방병단이 창설된 이듬해 4월15일 가장 먼저 인천기지를 설치한 것이다.현재 인천을 지키고 있는 해군 부대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 예하에 있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이하 인방사)다. 인방사가 속한 해군 제2함대사령부는 앞서 말한 인천기지가 모체다.인천기지는 해군이 성장하며 함께 이름과 규모를 바꾼다. 인천기지는 1949년 6월1일 인천경비부로 승격해 인천특정해역사령부를 거쳐 1973년 7월1일 제5해역사령부, 1986년 제2함대사령부로 재창설된다. 1999년 11월13일 인천을 벗어나 경기도 평택으로 기지를 옮겼다. 인방사는 항만방어대, 항만방어전대, 201방어전대 등으로 부대 이름을 바꿔오다 2함대가 평택으로 자리를 옮긴 1999년 7월1일 인천에 남은 부대가 지금의 인방사가 됐다.1946년 4월15일 설치된 인천기지는 미군 선발대에 의해 꾸려졌다. 초대 군사영어학교 교장이었던 리스(Rease) 미 육군 소령이 월미도의 용궁각을 기지 청사로 정하고 임시로 기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진해에서 선발된 60명의 해방병단 대원들이 인천으로 파견돼, 미군으로부터 수리·운전·통신기술 등을 배운 후 4월23일 인천기지를 정식으로 인수했다. 초대 인천기지사령관은 백진환 정위(현재의 대위)가 맡았다.인천기지는 해군의 첫 기지라는 타이틀뿐 아니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최초의 해군 관함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념하고 발전한 해군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행사였다.1946년 인천 앞바다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인수한 9척의 함정이 편대 기동훈련을 선보였는데, 손원일 총참모장의 안내로 이승만 대통령이 기함에 탑승해 이를 지켜봤다. 정부각료와 국회의원, 시민들도 편대 기동훈련을 참관했다.인천기지는 우리나라 군 처음으로 한국전쟁 이전 진행된 대북 작전인 '몽금포 작전'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몽금포 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49년 8월17일 해군이 북한군 기지로 특공대를 보내 다수의 병력을 사살하고 함정을 파괴한 작전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아래 진행된 이 작전에서 특공대원 20명이 함정 6척을 타고 북한 몽금포항에 침투해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나포했다. 또 북한군 1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앞서 언급한 관함식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인천에 있던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의 전용선을 북에 도둑맞은 것을 응징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해군 창설 초기 좌익 승조원들에 의해 함정 4척이 납북되고 9척이 납북미수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북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어 감행된 작전이었다. 인천 월미공원에는 몽금포 작전 전승비가 세워져 있다.1·2대, 미군서 인수해 1978년·1994년 퇴역해군 차기 호위함 3대, 유도탄·어뢰등 무장■서북도서 수호자 '3대의 인천함'우리나라 해군 함정 중에는 인천의 이름을 딴 전투함이 여럿 있었다. 역대 3척의 '인천함'이 인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바다를 누볐다.1대 인천함(AKL-902)은 1944년 건조된 미국 해군의 경수송함을 한국 해군이 1951년 9월10일 인수한 것으로, 1978년 4월1일까지 운용됐다.2대 인천함(DD-918)은 전투함이다. 이 함정 역시 미국 해군으로부터 도입한 것으로, 승조원 280여 명이 탑승하고 33.2kts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944년 3월 건조된 함정이며, 1974년 1월25일 취역해 1994년 12월30일 퇴역했다.3대 인천함은 현재 활동 중인 해군의 첫 차기 호위함인 인천함(FFG-818)이다. 해군은 서북 도서의 행정을 관할하는 인천광역시에서 이름을 따 '인천함'으로 명명하며 서해 NLL과 서북 도서 방어 의지를 피력했다. 대함유도탄 방어 무기와 함대함 유도탄, 어뢰 발사대 등 국내에서 개발한 향상된 무기 체계를 탑재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건조해 2011년 4월29일 진수식을 갖고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전력화 기간을 거쳐 7월 배치됐다. 3대 인천함은 2013년 8월 인천시와 자매결연을 했다. 글·사진/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몽금포작전 기념비3대 인천함(FFG-818) /해군본부 제공1대 인천함(AKL-902·사진 위)과2대 인천함(DD-918)

2018-03-21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9]선박건조 기술자 (下)

조수간만 차 크고 수심 얕아 큰 배 건조 어려워…100여년 전에도 지원 목소리러일전쟁 직후 지역 최초 업체 등장… 중일전쟁 영향 선박 부품 제작 본격화1970년대 국제실업·한라중공업 같은 대규모 업체 영종도 둥지 '전성기' 맞아영종하늘도시등 개발사업 탓 자리 잃은 기술자, 조선소 따라 타 도시로 떠나인천 앞바다를 떠다니는 수많은 선박은 어디서 만들어지고 수리할까? (주)디에이치조선 전성선(58) 대표는 "어선 정기검사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수리는 이곳에서 하지만 대부분 전남 목포 등 다른 지역에서 하고 있다"며 "중형 이상의 선박은 중국이나 부산에서 수리한다"고 했다.인천에 규모가 큰 조선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으로 배를 옮기는 것이다.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데다 수심도 깊지 않아 대규모 조선소가 있기 어려웠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1990년 11월 인천 영종도 인천조선소(한라중공업, 현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열린 컨테이너선 명명식에서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재 인천조선소의 여건이 간만의 차이가 10m 이상 나고 조선소 부지가 협소해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 건조는 물론 수리를 원만히 할 수 없다"며 "불리한 여건을 타파하고 대(對) 해외 전수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소를 남해안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라중공업은 이듬해 전남 영암 조선소 부지를 사들여 1996년 이전했다.이 같은 상황은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1932년 인천상공회의소는 조선총독부에 '인천에서도 대형 선박이 건조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냈다. 인천상의는 청원서에서 '인천지역 조선소는 소형선 수리도 어렵다 보니 인천의 배들이 부산이나 중국 다롄(大連), 일본에 가서 수리하거나 건조하고 있다. 이는 인천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막심한 손해이니 인천에서도 배를 건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인천지역 조선업 관계자들의 목소리는 1900년대 초반 인천에 조선소가 처음 설립된 이후 꾸준히 제기됐다.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를 보면, 인천지역 최초의 조선소는 러일전쟁 직후 건립된 '마쓰다 조선소(光田造船所)'다. 이곳에서 소형기선을 만들었다고 인천부사에 기록돼 있다. 1910년대에는 조선 자본으로 만들어진 인천 최초의 조선소 '인천철공소(仁川鐵工所)'가 문을 열었다. 인천철공소는 인천 내항 1부두와 갑문 사이에 있던 '사도'라는 섬 주변을 매립해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0t 미만의 배를 만들고, 500t 미만의 배를 수리했다. 당시에도 대형 선박 건조가 어려워 인천상공회의소는 조선총독부에 이러한 부분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인천에서 선박 부품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다. 대륙 진출에 중점을 뒀던 일본은 인천에 선박 부품 제작과 조선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1937년 6월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다. 배석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쓴 논문(일제시기 조선기계제작소의 설립과 경영)에 따르면 조선기계제작소에서는 소형선 엔진으로 사용하던 200마력과 380마력 '야끼다마'(燒球·hot bulb) 엔진을 주로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한 엔진은 해방 이후에도 어선 등에 부착돼 사용됐다.해방 이후 침체기를 맡았던 인천지역 조선업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인천상의 120년사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인천에는 국제실업과 인천조선공업 등 대규모 조선업체가 있었다. 국제실업은 4천500t급, 인천조선공업은 2천400t급 선박을 건조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1977년에는 한라중공업이 인천 영종도에 인천조선소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일했던 김광국(51)씨는 "인천조선소에서 일하는 직원만 200명이 넘었고, 배를 만드는 장소는 초등학교 운동장 4~5개를 합친 것만큼 컸다"며 "이곳에서 4만t급 선박까지 만들었다"고 기억했다.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뿐만 아니라 배를 수리하는 철공소도 많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를 중심으로 철공소가 많았다.1982년부터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이관국(67)씨는 "80년대에는 만석부두와 화수부두가 인천의 중심이었다"며 "지나가는 강아지도 1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이곳(화수부두)에 배를 대는 어선이 수백 척에 달했다"며 "큰 조선소에서는 어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에 있는 철공소가 모든 수리를 담당했다"고 했다.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에서 3살 때부터 사는 정연관(70)씨는 당시 이곳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정씨는 "대우중공업(조선기계제작소 후신)에서 나오는 엔진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어선이나 목선에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고장이 나면 수리비가 너무 비쌌다"며 "철공소에서 엔진과 비슷한 모형으로 부품을 만들어 어민들에게 팔았다"고 했다.세월이 지나 철공소가 있던 자리는 횟집 등 식당들이 차지하고 있다. 울퉁불퉁하고 흙먼지가 날리던 도로는 포장도로가 됐다. 연안부두가 생기면서 어선들이 옮겨가고, 어획량이 줄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어선들도 운항하지 않게 됐다. 배가 떠다니지 않으니 자연스레 철공소도 사라졌다. 정씨는 "만석부두 입구 주변 지역이 지금은 다 매립됐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다"며 "옛날에는 화수부두와 만석부두에 20여 개의 철공소가 있었지만, 차츰차츰 없어지더니 모두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했다.인천조선소가 1996년 전남 영암으로 이전하고 2007년 영종하늘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영종도에 있던 대형 조선소들도 문을 닫게 됐다. 이들이 있던 자리는 호텔이 들어서거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현재 인천에는 만석부두와 화수부두 주변에 6개 조선소만 남아 있다. 영종도 조선소에서 일하던 기술자 일부는 만석부두·화수부두로 옮겨왔지만, 대부분은 조선소를 따라 전남 목포나 부산 등 다른 도시로 떠났다. 인천에서 선박 건조 일을 하는 사람은 100명 남짓일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인천에 남아 있던 중소형 업체들은 2006년 서구 청라국제도시 인근 거첨도 앞 해상을 매립한 부지(17만5천㎡)에 선박 수리·조선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소음과 분진 등 환경 피해를 우려하는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추진이 어려운 상황이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데다 수심도 깊지 않아 대규모 조선소가 있기 어려웠다. 인천 앞바다를 떠다니는 수많은 선박 중 어선 정기검사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수리는 인천에서 하지만 대부분 전남 목포 등 다른 지역에서 하고 중형 이상의 선박은 중국이나 부산에서 수리한다. 14일 오후 인천시 동구 만석동 태항 조선소에서 선박 수리작업을 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10년대 '인천철공소(仁川鐵工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 사진 하단에 보이는 사도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용하 전 인천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제공/아이클릭아트큰 조선소에서는 어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수부두에 있는 철공소가 수리를 담당했다. 어선 수리를 하던 철공소들이 자리 잡았던 화수부두.

2018-03-14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8]선박건조 기술자(上)

설계에 따라 절단된 철판조각 정밀하게 용접… 따로 조립한 선수와 합쳐 제작1990년대 초반까지 인근 마을 먹여살린 조선소, 중국시장 성장 탓 상황 기울어후임 기술자 구하기 힘들어져 "인천에서도 배 만들었다는 사실 기억해 줬으면"'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폴리탄' -박팔양 '인천항' 中에서'배'라는 단어는 '사람이나 짐 따위를 싣고 물 위로 떠다니도록 나무나 쇠로 만든 물건'이라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예로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지금은 대형 조선소가 있는 경남 거제시나 울산 등이 '조선업 도시'로 유명하지만, 인천도 1908년 지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설립된 이후 많게는 20여 개의 조선소가 배를 만들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는 인천에서 소형 잠수함까지 건조된 적이 있다.지난달 26일 인천 동구 화수부두에 있는 (주)디에이치조선을 찾았다. 인천 지역에는 현재 6개의 조선소가 있는데 모두 만석부두와 화수부두에 있다. 이곳에서 만난 김광국(51)씨는 20여 년 전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서 인천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김씨는 "삼촌이 인천에 가면 배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올라왔다"며 "지금은 '인천에 무슨 조선소가 있나'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예전에는 인천에도 유명한 조선소가 꽤 많았다"고 말했다.이날 현장에서는 160t급 예인선의 바닥 부분을 조립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인천 지역 한 예선업체에서 주문한 것이다. 디에이치조선 전성선(58) 대표는 "수십억 원이 넘는 선박을 미리 만들어 놓고 팔리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며 "주문이 들어오면, 본격적인 설계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설계 이후에는 도면에 따라 강판을 절단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과거에는 조선소 한쪽에서 산소절단기를 이용해 강판을 잘라냈지만, 10여 년 전부터는 외부 공장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이렇게 가져온 강판은 용접을 통해 이어 붙이게 된다. 이날 김씨는 뒤집어진 선체 바닥 부분에 올라가 용접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씨는 "선박은 수백 개의 조각을 하나하나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며 "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용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아무리 설계가 좋아도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머리카락 한 올만큼 구멍이 생긴다면 그 배는 금방 가라앉고 만다"고 덧붙였다. 4명의 직원은 엔진 등 선박 부품이 들어갈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먼지를 빼내기 위해 환풍기를 계속 돌리고 있지만, 작업장에 들어가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었다. 김씨는 "여름이면 배 안의 온도가 48도까지 올라간다"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이러한 작업을 마치고 나면 용접한 부분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지금은 그라인더(연삭기)를 이용해 이른바 '용접똥(슬래그)'을 잘라내지만, 예전에는 망치로 두드려 하나씩 떨어트렸다.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박 건조 수요가 많았던 1990년대 초반까지 조선소가 밀집된 이 동네 주민들의 겨울철 주 수입원이었다고 한다.동구 만석동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여순초(60·여)씨도 겨울이면 항상 조선소에서 일했다. 여씨는 "겨울이면 어민들은 배를 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소에서는 겨울이 되면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고 말하며 당시를 회상했다.힘이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씨와 같은 여성들도 조선소에서 일을 많이 했다. 배를 한 척 만들려면 40~50명의 근로자가 필요한데 그중에서 10명 정도는 여자였다는 게 여씨의 설명이다. 여씨는 "한겨울에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고 했다. "조선소는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선체를 잘못 만지면 철판에 손이 달라붙을 정도였다"고도 했다.용접을 마친 선체는 따로 조립한 선수 부분과 합쳐져 바다로 나가게 된다. 김씨는 "예전에는 눈으로 확인했지만, 요즘에는 선박 안전을 위해 X-레이 검사도 실시한다"고 했다.지금은 대부분 선박이 강화플라스틱(FRP)이나 철재로 만들어지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목선을 만드는 사람이 많았다. 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드는 사람을 '배 목수'라고 불렀는데 바닷가 주변 지역에는 마을마다 꼭 한 명 이상의 배 목수가 있었다는 게 주민들 설명이다. 만석동에 사는 정연관(70)씨는 "1980년대 중반까지 만석부두 입구에는 배 목수에게 나무를 파는 목재 야적장이 있었다"며 "배 목수들은 이곳에서 나무를 받아 부두 근처에서 커다란 배를 만들었다"고 했다. 또 "그 시절에는 배를 만들면 동네 사람들이 구경도 하고 때로는 농담도 하면서 참도 같이 나눠 먹었다. 배를 진수하는 날이면 다들 모여서 축하해주고,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거들어주기도 했다"고 했다.현재 대형 조선소들이 수주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서 디에이치조선 같은 소형 조선소도 설 자리를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김씨는 "대형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려면 작은 배들이 달라붙어 근로자들을 실어주고, 필요한 장비도 날라줬다"며 "대형 선박 건조가 주춤하다 보니 작은 배에 대한 수요도 없어졌다"고 했다. 이어 "소규모 바지선 등 그나마 소형 조선소에서 만들던 배들도 전부 중국 쪽으로 넘어갔다"고 덧붙였다.조선소들은 몸집을 점점 줄여나가고 있다. 디에이치조선도 상시 근무하는 현장 직원은 5명뿐이고, 선박을 수주받으면 일용직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조선소에서 일하겠다는 기술자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 대표는 설명했다. 전 대표는 "우리 현장에서 가장 어린 기술자가 48살이다. 바다에 있는 배를 육지로 올리는 작업을 하는 기술자는 일흔 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후임자를 구하지 못해 아직도 일하고 있다"고 했다.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먼지로 인한 민원 때문에 주거 지역과 가까운 조선소는 더 힘들어지고 있다. 김씨는 "인천 지역에서 배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면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삼성이나 현대 등 대형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작은 곳에서도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기억해줬으면 한다. 이것이 마지막 바람"이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6일 인천 동구 화수부두에 있는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160t급 예인선의 뒤집어진 선미 부분에서 한 근로자가 강판과 강판을 이어붙이는 전기용접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지난 겨울 바닷가 조선소 야외 작업장에서 한파를 몸으로 이겨내며 작업했던 근로자들이 다소 풀린 날씨 속에 배 선체를 만들기 위한 용접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디에이치조선 전성선(58) 대표가 뒤집어진 채 건조 중인 배 밑바닥에서 작업 중인 근로자에게 작업설명을 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도면에 따라 강판을 절단해 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수많은 용접작업 등을 거쳐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160t급 예인선.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3-07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7]인천항 택시 '통선' 드라이버

항구 자유롭게 이동하며 식료품 이송·돌핀부두 줄 작업 등 임무 수행주택사업 영향으로 수십시간씩 대기하던 1990년대 인천항 '전성기'부두시설 확충 탓 체선 현상 사라져… "점점 역할 줄어들어" 아쉬움 정해진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기차·지하철 등과 달리 택시는 출발 지점과 목적지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택시는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육상 교통수단이다. 바다에서 택시 기능을 하는 것은 '통선'(通船)이라고 불리는 작은 배다. 통선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에 식료품 등 물건을 운송하거나, 선박이 육상에 접안하지 못할 경우 선원들을 육상에 데려다 준다. 육상에 있는 선원이 바다에 있는 선박으로 이동할 때도 통선을 이용한다.통선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응급환자 이송, 줄 작업 등 여러 가지다. 통선은 급하고 필요한 일을 대신해 준다는 의미에서 '바다의 퀵서비스'라고도 불린다.지난 20일 오후 3시 인천 중구 관공선부두에서 통선 '해주5호'가 출항했다. 이날 해주5호가 맡은 역할은 인천항 북항 SK부두에 접안하는 유조선 'ST.KATHARINEN호'의 접안을 돕는 것. 컨테이너선 등 다른 선박과 달리 유조선은 원유 등을 하역하기 때문에 돌핀부두라고 불리는 말뚝형 구조물에 접안한다. 돌핀부두는 구조상 안벽으로 돼 있는 부두보다 충격에 약하다. 이 때문에 통선이 본선에서 줄을 넘겨받아 부두에 전해주는 과정을 거친다. 인천은 남항, 북항, 한국가스공사 인천 LNG기지 부두 등에서 돌핀부두가 운영되고 있다.이날 해주5호에 탑승해 줄 작업을 한 김영철(68) 부장은 1970년부터 인천항에서 통선 일을 했다. 통선 선장으로서 배를 운항하고, 갑판원 역할도 하는 등 통선과 관련해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이날은 '줄 작업'을 맡았다. 해주5호가 인천항 북항에 다다르자 ST.KATHARINEN호가 예선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두에 접근하다가 30m 정도 앞에 멈춰 섰다. 김영철 부장의 손짓에 해주5호 김순석(73) 선장이 선박을 본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해주5호가 다가오자 본선에 있던 선원은 팔목만한 두께의 로프를 내려보냈다. 김 부장은 이 줄을 갈고리로 낚아채자마자 재빠르게 통선 갑판 위에 있는 구조물에 걸었다. 김 부장은 김 선장을 향해 뒤로 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본선을 향해서는 "slowly!"(천천히)라고 크게 외쳤다. 배가 움직이니 천천히 줄을 풀라는 의미다. 해주5호가 부두와 가까워지자 김 부장은 부두에서 내린 줄을 본선에서 내린 줄과 연결했고, 부두에서는 이를 도르래를 이용해 끌어올렸다. 김 부장은 이러한 작업을 4차례 반복했고, 이날 2대의 통선이 모두 일곱 가닥의 줄을 배달한 뒤에야 접안이 완료됐다.김 부장은 "부두 직원과 본선 선원, 통선 선장,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의 호흡이 맞아야 안전하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며 "줄이 너무 많이 풀려서 바다로 가라앉으면 배의 스크루에 걸릴 수 있다. 이 외에도 곳곳에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인천항에는 해주5호 등 7척의 통선이 있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에 등록된 통선업체는 4곳이지만 실질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김 부장이 속해 있는 해주조기공업 등 2곳에 불과하다고 한다.통선은 시대에 따라 이름과 역할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오래전부터 육지와 선박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해왔다.개항기 선교사이자 배재학당 설립자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도 인천에 발을 내딛기 위해서 통선을 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가 아펜젤러의 일기와 보고서 등을 토대로 펴낸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개항 당시 인천항의 모습을 상세히 담고 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5일 메모에 'S. Maru'호는 제물포항에 닻을 내렸다. 거룻배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중략) 아내와 나는 거룻배를 탔다. 상륙하는 데 약 1시간이 걸렸다. 썰물로 물이 빠져서 제물포항으로부터 기선은 1.5마일쯤 뒤에 정박해 있기 때문이다'고 남겼다. 아펜젤러는 당시 통선 역할을 한 나룻배를 타고 인천에 '상륙'한 것이다.김탁환과 이원태가 쓴 소설 '아편전쟁'에서도 인천항이 묘사된다. '인천은 수심이 얕고 아직 부두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상선이 곧바로 바닷가에 닿지 못한다오. 바닥이 평평한 짐배가 나가서 상선에 붙소. 승객과 상품을 짐배에 옮겨 싣는 게요'.통선은 바다 위 선박과 부두를 오가는 배라는 점에서 부두시설과 연관이 깊다. 개항기만 해도 인천항(당시 제물포항)에는 제대로 된 부두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통선은 사람뿐만 아니라 화물을 나르는 데에도 활용됐다. 하지만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이 만들어지면서 화물을 나르는 기능은 없어졌다. 대신 통선은 해상에서 부두 접안을 기다리는 선박과 육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인천항에 선박이 몰려들어 '교통체증'이 가장 심했던 때는 1990년으로 기록돼 있다.해양수산부가 1999년 펴낸 '수도권 항만 기능정립·재정비계획'을 보면, 수도권 화물의 인천항 폭주로 인천항의 체선·체화 현상이 가장 심했던 때는 1990년이다. 그해 체선율은 48.2%였다. 체선율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12시간 이상 대기한 선박의 비율을 말한다. 1990년엔 100대 중 48대가 12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인천항의 체선율은 전국 항만 중 가장 높았으며, 당시 평균 체선 시간은 70시간 정도로 길게는 1주일 이상을 바다에서 대기해야 했다.체선이 심했던 것은 대규모 주택공급 정책과 연관이 깊다.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으로 시멘트 등 건설자재들이 대거 인천항으로 수입됐기 때문이다. 이때 고양 일산, 성남 분당, 안양 평촌, 군포 산본, 부천 중동 등 5대 신도시가 개발됐다. 인천에서는 연수구 선학동과 동춘동 일대 '연수지구'가 개발됐다.'인천항을 사랑하는 800모임' 남흥우 회장((주)천경 경인지역 본부장)은 "지금으로 치면 당시엔 내항으로 들어오기 위해 배들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 셈"이라며 "시멘트 등을 싣고 온 선박들이 인천항에 오기 위해 아우성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통선은 바다에 떠 있는 선박의 선원들을 위해 물과 식료품 등을 공급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활황이었다. 대기하고 있는 선박에 응급환자가 생기면 육지로 이송하는 것도 통선의 역할이었다.김 부장은 "90년대에는 하루에 5~6차례 나가기도 했다"며 "하루 종일 배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배 안에서 식사와 잡일을 담당하는 '화장'이 있었고 선장과 기관원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선장 혼자 나가기도 한다. 줄 작업을 할 때만 2명이 나간다"고 말했다.2000년 이후 인천 남항, 북항, 신항이 잇따라 들어섰다. 부두시설 확충은 체선율을 낮췄고 통선업이 위축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통선의 수와 활용도가 줄었다. 해주조기공업은 3척의 통선을 운용하고 있는데, 1주일에 출항하는 횟수가 15차례 안팎에 불과하다고 했다. 선박이 바다에서 대기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인천항의 체선율은 1%대에 그친다. 1990년대처럼 선원을 운송하고, 식료품 등을 전해주는 일은 많이 줄었다. 이날 작업처럼 '돌핀부두 줄 작업'과 선원의 출입국 수속을 위해 선박 대리점 직원을 배에 옮겨주는 역할을 주로 한다.김 부장은 그래도 통선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바다에서 많은 일이 이뤄지고 있다. 통선은 화려하지 않지만 선원과 선박을 위해서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며 "통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점점 그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영철 부장이 유조선 'ST.KATHARINEN호'에서 내려받은 줄을 통선에 설치된 구조물에 연결하고 있다. 이날 김 부장은 모두 4가닥의 줄을 연결하며 유조선의 접안을 도왔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통선 '해주5호' 김순석 선장이 김영철 부장의 손짓에 선박을 뒤로 이동시키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통선 '해주3호'가 유조선 ST.KATHARINEN호에 가까이 붙어 부두와 연결할 줄을 내려받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중구 항동 관공선부두에 정박해 있는 통선.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지난 20일 '해주5호'와 함께 줄 작업을 하기 위해 출항하고 있는 해주3호의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2-28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6]건강안보 최전선 지키는 검역관

국립인천검역소, 메르스·에볼라·사스 같은 '해외 감염병 국내 유입 차단' 하루 10여척 달하는 여객선 위생·진료 내역·승객 체온 체크 등 시간 빠듯해방후 전재동포·北 피랍민은 물론 외국서 보낸 수재물자도 꼼꼼히 점검치사율은 높지만 치료법은 알려지지 않아 사회적인 공포감을 확산시켰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15년, 메르스가 인천항을 통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립인천검역소 검역관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2014년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도, 앞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신종인플루엔자A(H1N1) 등 감염병이 해외에서 유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염병 국내 유입 차단의 최전선엔 항상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국립인천검역소가 있었다.지난달 22일 오후 2시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 보안구역 내 검역대. 마스크를 착용한 국립인천검역소 검역관들의 시선은 중국 산둥성 시다오(西島)에서 온 '화둥 펄 8호' 승객들의 열 상태를 체크하는 모니터에 고정돼 있었다. 이 모니터는 열 감지 카메라와 연결돼 있는데, 체온이 37.5℃ 이상인 승객이 지나가면 경고음을 내도록 설계돼 있다. 경고음이 울린 승객은 체온계로 다시 한 번 몸의 열 상태를 확인하고, 이상이 있는 것으로 판정되면 격리 조치 후 역학 검사 등을 진행하게 된다. 이 배의 검역을 맡은 신동혁 검역관은 "감염병에 걸리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발열"이라며 "입국자들의 열 상태를 확인하는 일은 검역의 가장 기본적인 일 중 하나"라고 했다.이 배가 출발한 중국은 검역감염병 오염지역으로 분류돼 있다. AI(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이 가능한 만큼, 철저한 검역이 필요하다. 올 1월1일 기준으로 가나 등 아프리카 34개국, 중국 등 아시아·중동 11개국, 가이아나 등 아메리카 14개국이 검역감염병 오염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콜레라와 페스트, 황열, 메르스 등 감염병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는 게 검역소의 주된 역할이다.검역관들은 승객들이 내리기 전 직접 배에 올라 여객선의 위생 상태를 확인한다. 검역관들의 확인이 없으면 화둥 펄 8호 승객들은 배에서 내릴 수 없다.승선한 검역관들은 '선박보건상태신고서'와 선내 의사(선의·船醫)로부터 의약품 처방전 기록, 승객건강확인서 등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화장실과 주방 등에서 감염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체를 채취하는 것도 승선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사망자 확인 등 10여 가지 항목에 대한 점검도 필수다. 3만5천t급의 화둥 펄 8호와 여기서 내린 승객과 선원 418명의 검역을 마치는 데 1시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검역 현장에 함께 있던 정유진 검역관은 "인천검역소에선 하루에 보통 10여 척의 여객선과 화물선을 상대로 검역 활동을 한다"며 "연일 계속되는 검역에 피곤하기도 하고 감염병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도 부담이지만, 감염병 유입을 막는다는 사명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검역은 감염병이나 해충 등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만과 공항에서 선박·항공기 등 운송수단과 여객 및 화물 등을 검사, 소독, 조사하는 업무를 의미한다. '해외 감염병의 국내 유입 차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검역소에선 여객선과 화물선 등 사람과 화물을 대상으로 검역을 진행한다. 동물과 식물은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검역을 담당한다.검역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6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40년 이탈리아의 한 항구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프랑스 배에서 내리려는 선장과 선원을 막아섰다. 당시는 유럽에서 전염성이 강하고 사망률도 높은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승객과 선원 중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40일 동안 배에 머무르다 아무 일이 없으면 그때 내리라는 것이 이 직원의 설명이었다. '해외 감염병의 국내 유입 차단'을 위한 그의 조치는 '검역'의 시작이 됐다.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개념의 국제검역이 시작된 것은 개항 이후인 1885년 무렵이었다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당시 콜레라가 유행하자 정부가 각 개항지에 관리를 파견해 검역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역장정(瘟疫章程)'은 감염병 유행지에서 온 선박을 정박시키고 승객과 승무원을 검사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내 최초의 검역 지침이었다.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온역장정은 근대적 개념의 검역 관련 내용을 담은 최초의 외교문서라고 할 수 있다"며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1대 원장을 맡았던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이 당시 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검역 대상에서 빠지려는 각국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각국 공사관들은 외교적, 상업적 이해와 충돌할 수 있는 온역장정을 둘러싸고 조선 정부와 대립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외국 병선(兵船)은 검역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병선을 일종의 치외법권 대상으로 인정한 것이다.인천항은 중국, 일본과의 문물 교류가 왕성했다. 이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 감염병이 발생하거나 유행할 경우, 검역은 더욱 엄격해졌다. 1921년 10월20일자 동아일보는 '인천에서도 검역'이라는 제하 기사에서 '경기도 위생계가 만일을 염려해 인천항 검역소에 장기(長崎·나가사키), 하관(下關·시모노세키) 등지에서 직접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에 대해 일제히 검역을 실시하도록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온 선원 가운데 괴질 보균자가 발견돼 인천에서도 이 일대에서 온 선박의 검역을 강화하라는 내용이다. 일본 후쿠오카에선 괴질(1922년)이 발생했고, 중국 산둥성은 천연두(1925년), 상하이에선 콜레라(1926년) 등이 유행했다. 인천 검역 당국은 늘 긴장해야 했다. 인천은 1943년 세관이 관장하던 검역 업무가 해운항만청 부두과로 이관되면서 검역 업무가 본격화됐고, 해방 후인 1946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소속으로 검역 업무가 이관되는 과정에서 인천해양검역소가 발족했다고 국립인천검역소는 설명했다.인천항은 해방 후 일제에 끌려갔다 귀국하는 전재동포들의 주요 귀환 지점이었고, 외국 무역선이 활발하게 화물을 실어 나르는 항만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두 검역은 필수였다. 1949년 중국 내전으로 중국 피란민들이 인천항에 입항할 때도, 검역을 거쳐야 했다.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은 "산둥성 등에서 내전을 잠시 피하자는 생각으로 인천에 들어왔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에 머물게 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북한에 피랍됐다 귀환하는 어민들도 예외는 없었다. 1981년 납북됐다가 강제 억류 244일 만에 인천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제2태창호 선원 17명, 1984년 북한적십자회가 인천항으로 보내온 쌀 등 각종 수재물자에 대해서도 검역은 이뤄졌다.국립인천검역소는 현재 인천항뿐만 아니라 평택항과 청주국제공항의 검역 업무까지 맡고 있다. 국립인천검역소 관계자는 "검역은 국민의 건강 안보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며 " 감염병의 국내 유입을 막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2일 오후 2시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 입국장 보안구역 내 검역대에서 국립인천검역소 검역관들이 중국 산둥성 시다오(西島)에서 온 국제여객선 '화둥 펄 8호' 입국 승객들의 발열 상태를 체크하는 등 검역을 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승선한 검역관이 '선박보건상태신고서'와 선내 의사(선의·船醫)로부터 의약품 처방전 기록, 승객건강확인서 등을 확인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여객선 창고에서 식자재를 살펴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주방 싱크대에서 감염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체를 채취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검역관이 승객들이 내리기 전 직접 여객선의 위생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승선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2-21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5]관세국경 수호자 세관 검색팀장

인천항 입·출항 50척중 2~3대 선별 불시점검선실·엔진실 등 벽틈·환풍구 빠짐없이 살펴수상한 움직임 선박, 직접 배 운전하며 순찰선원 강한 반발에도 '경고 메시지' 예방 효과경제성장기 외국물품 수십배 가격에도 불티사치품·건강식품·마약·농산물 밀수로 몸살미·영·호주 등 '안보 업무 강화' 세계적 추세바다 넘어 하늘길까지 '경제·안전' 보호 한몫국경을 오가는 물품에 관세를 매기는 곳, 바로 세관(稅關)이다. 명칭에 있는 '세(稅)'자 때문에 세금을 걷는 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무역 규모가 커지고 관세의 비중은 낮아지면서 각 나라의 세관은 마약, 무기, 밀수로부터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경인항부터 영흥항까지 바다의 관문을 지키는 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은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지난달 31일 오전 9시께 인천항 제1국제여객부두. 중국에서 온 카페리(화객선)가 인천항에 들어오자 인천세관 인천항감시과 강정수(49) 계장(검색팀장)과 직원 8명은 선박 불시점검을 위한 출동 채비에 나섰다. 이 카페리는 2016년 12월 세관이 적발한 '개항 이래 최대 국제 금괴밀수(423㎏, 200억 원 규모) 사건'과 관련된 선박이다. 중국 단둥을 오가는 이 선박에서 일하던 조리사는 개인 선실에 금괴를 숨겨 수차례 빼돌렸다가 끝내 붙잡혔다. '우범선'으로 분류된 이 선박은 이날 인천세관의 불시점검 대상이 됐다."여기가 선실입니까?" 선박에 들어서자 강 계장은 선원이 머무는 선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쏘리(Sorry)." 긴 항해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 선원이 많다 보니 양해를 구하고 점검을 시작했다. 심하게 벌어진 벽 사이 틈, 열리지 않는 서랍, 유난히 깨끗한 환풍기, 풀려 있는 볼트.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엔 강 계장의 손이 닿았다. 그렇게 5~6개 선실을 확인한 강 계장은 식당, 창고, 여객실을 차례로 살폈다. 강 계장은 천장과 벽을 손으로 계속 두드렸다. 소리가 다르면 무언가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기관장이 있는 기관실도 점검을 피할 수 없었다. 강 계장은 손전등을 들고 기름 냄새와 모터 소리가 꽉 찬 깜깜한 기관실을 샅샅이 점검했다. 총톤수 1만6천여t 선박 점검은 1시간30분이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강 계장은 "선박 규모가 큰 만큼 구조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최근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마약, 밀수, 테러 등 우려가 있어 혹시 비밀 창고가 있는지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감시과 직원들은 하루에 인천을 통해 입·출항하는 50여 척의 선박 중 2~3대를 선별해 이같이 불시점검을 벌인다.선박 검사 후엔 해상 순찰도 나선다. 강 계장은 지난 20여 년간 인천세관에서 해상 감시정을 운항한 정장이기도 하다. 감시정은 다른 배와 바짝 붙어 있거나 방수팩으로 꽁꽁 묶은 물품을 해상에 띄우는 등 '수상한' 배가 있는지 감시한다. 이날 오전 11시께 탄 감시정은 '남궁억호'다. 1883년 6월16일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 개관 이후 이듬해 문을 연 '경성총해관'의 직원이자 독립운동가 한서(瀚西) 남궁억의 이름을 땄다. 인천해관에서 근무한 최초 조선인은 남궁억의 '동문학' 동기인 홍우관이다. 동문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로, 남궁억과 홍우관은 이곳에서 1년간 영어를 배운 후 해관에서 근무했다. 감시정은 남궁억호 외 우리나라 최초 군함의 이름을 딴 '광제호', 인천의 옛 지명을 딴 '미추홀호' 등 모두 3대다. 강 계장은 "단속 일을 하다 보면 선원들과 다투기도 하고 민원이 심하게 들어오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그러나 항상 우리가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인식을 주고 범죄를 예방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인천세관이 이렇게 감시 태세를 놓지 않는 이유는 뭘까. 강화도, 태안, 수원까지 상권을 형성했던 인천항은 1911년까지 한국 무역의 50% 이상이 이뤄진 항구였다. 서울과 가까워 현재까지도 외국 상인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세관의 역사를 보면 인천항은 개항 후 해방 전까지는 열강의 각축전으로, 해방 후엔 밀수로 몸살을 앓았다.강화도조약으로 인천의 문을 연 일본은 무관세 무역을 강요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맞서 1878년 부산 인근에 두모진해관을 설립해 수세를 하려 했지만 일본의 거센 항의로 3개월 만에 폐쇄됐다. 정부는 뒤늦게 총세무사에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f), 인천해관장에 영국인 스트리플링(A.B. Stripling)을 고용하고 1883년 인천해관을 세워 처음 세수 업무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었다.그러나 관세 자주권을 잡으려 했던 우리 정부의 의도와 달리 해관은 오랜 기간 외세에 휘둘렸다. 청국 정부는 자국 상인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를 압박해 2년여 만에 뮐렌도르프를 끌어내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미국인 메릴(Henry F. Meril)을 총세무사 자리에 앉혔다. 해관에 고용됐던 서양인의 월급은 청국에서 지급했는데, 이는 해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조치였다. 1896년에는 세력이 강해진 러시아가 영국인 총세무사를 해임하게 하고 러시아인을 부임케 했다가 영국의 강력한 반발로 1년 만에 다시 영국인 총세무사가 부임하는 일도 있었다. 1907년에는 일본이 세관관제개정을 공포해, 중국식 명칭인 인천해관을 인천세관으로 바꾸고 세관의 실효적 지배를 시작했다. 인천세관은 개관 64년 만인 1947년에야 비로소 한국인 세관장(김준덕)을 맞았다.무역선이 많아지면서 밀수도 점점 늘어났다. 밀수된 물품들은 동인천 양키시장, 신포동 의류가게, 부평 기지촌 등지에서 불티나게 팔리며 상권을 형성했다.1960년대 인천항은 다이아몬드, 진주, 시계, TV 등 사치품 밀수가 극심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 밀수돼 온 냉장고, 카메라 등 가전제품은 우리 산업에 큰 타격을 줬다. 정부는 밀수를 폭력, 탈세, 마약과 함께 '사회 4대 악(惡)'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6월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제정해 밀수하는 자를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세관 직원에도 적용됐다. 1962년 2월1일자 경향신문은 시계 '에니카' 340개를 밀수하려 한 선원을 부정 통관시켜 주려 했던 세관 직원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밀수를 시도한 선원이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훨씬 큰 처벌이었다.경제성장 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던 1970년대 말은 건강 보조식품과 마약 밀수가 활개를 쳤다. 이 시기 인천세관에서 근무한 이염휘(72) 한국관세협회 인천지부장이 실제로 적발했던 '파나마 국적 외항선 중국 선원 밀수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1979년 12월28일 경기신문(현 경인일보) 보도를 보면, 파나마 국적 외항선 중국 선원 24명이 수차례에 걸쳐 인천항으로 우황청심환, 해구환, 녹용 등 10억 원어치를 밀수해 구속됐다. 이 지부장은 "중국 선원들은 비밀 창고 2개에 밀수품을 숨겨왔는데 대부분이 가짜였다"며 "그땐 외국 물품이라고 하면 수십 배의 웃돈이 붙어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말했다.1980~1990년대는 참깨, 고추, 바나나, 오렌지 등 농산물 밀수가 많았다. 농산물 관세는 예나 지금이나 100% 이상 관세가 붙었는데, 수출용 원재료를 수입하는 것은 관세가 붙지 않았다. 이를테면 업자들은 바나나 잼을 만든다며 바나나를 수입한 후, 반은 그냥 팔고 잼에는 향료를 넣어 수출하는 '합법적' 밀수를 벌였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카페리가 활성화된 후에는 중국 보따리상의 밀수입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어선과 컨테이너 화물을 통한 마약·짝퉁 밀수입도 끊이지 않고 있다. 밀수 규모는 1965년 7천여만 원에서 2013년 8천억 원대까지 커졌다.이 지부장은 "지금이야 첨단 장비로 조사하지만 옛날 직원들은 직감과 제보에 의지해 오로지 맨몸으로 밀수꾼을 잡아들였다"며 "어지러웠던 시절 세관 직원은 경제와 안보를 지키는 최전방에 있었다"고 회상했다.미국은 9·11테러 이후 세관을 국토안보부 산하에 두고 CBP(Customs and Border Protection)로 명칭을 바꿨다. 영국, 호주 등의 국가에서도 세관 이름에는 '보더(Border·국경)'가 들어간다. 세관의 국경 보안 업무는 이미 세계적 추세다. 인천항 입항 외항선 8천여 척, 세수 20조 원대. 135년 역사의 인천세관은 이제 바다 국경뿐만 아니라 하늘 국경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키고 있다. 인천해관·세관의 역사를 연구한 '자타 공인' 세관사 전문가 김성수(53) 울산세관 감시과장은 '세관의 역사를 왜 연구하느냐'는 질문에 "세관이 근대사 발전과 우리 삶의 안전을 지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남기고 싶다"고 답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지난달 31일 오전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 부두에 정박한 중국발 카페리(화객선)에 승선한 인천본부세관 인천항감시과 강정수 계장과 직원이 엔진룸 깊숙한 곳에 있는 창고에서 밀수 불시점검을 하고 있다. '우범선'으로 분류된 이 선박은 이날 인천세관의 불시점검 대상이 됐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인천본부세관 인천항감시과 직원들이 선박 불시점검에 앞서 철두철미한 점검을 다짐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인천본부세관 인천항감시과 강정수 계장이 직원들과 세관감시정에 올라 해상에 정박한 선박 불시점검을 위해 긴급출동을 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감시과 직원들이 카페리 엔진조정실에서 엔진룸 설계도를 보며 점검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1980년대 인천 중구 신포동 상가 인근에 붙은 밀수 단속 현수막.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2016년 12월 인천세관이 적발한 423kg 상당 국제 금괴밀수 조직 사건에 사용된 금괴 밀수 조끼.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1960~1970년대 인천세관 직원이 몰수품을 폐기하고 있는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인천본부세관 제공

2018-02-07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인천 신항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45m 상공 한 평 남짓 조종실, 선박-야드 트랙터 쉴새 없이 컨 날라300만TEU시대 연 김세중 기사 "쉬워보이지만 섬세한 작업 고된 일"'국내 1호 컨 전용부두 인천항' 신항 STS 크레인 등 보면 격세지감세계 항만들과 컨 처리·속도 경쟁, 올해 '330만TEU 달성' 큰 그림무역과 수출입 동향 등의 소식을 전하는 TV 경제 뉴스를 볼 때마다 화면을 통해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영상이 있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빼곡히 쌓여있는 컨테이너 터미널의 모습과 거대한 크레인이 긴 팔을 바다로 뻗어 배에서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모습이다. 마치 하나의 상징처럼 이러한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수출과 수입이 이뤄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컨테이너 터미널이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1월 12일 오후 찾아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은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등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수출입 전초기지인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는 우리가 흔히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 또는 컨테이너 크레인(Container Crane)으로 부르는 STS(Ship To Shore) 크레인이다.컨테이너 터미널은 크레인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배치되어 있다.컨테이너 크레인을 조종하는 기사야말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인력이다. 수출입 항만 물류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SNCT 김세중(42) STS 반장을 이날 만났다. 김 기사는 지난해 인천항의 300만 번째 컨테이너를 하역한 사람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난해 인천항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은 처음으로 300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를 넘었다.김 기사는 1천700TEU급 컨테이너 화물선 'NordClaire'호에서 컨테이너를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자 부품 등 원·부자재를 주로 실은 이 배는 컨테이너 239개를 내린 뒤, 215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출항할 예정이었다.김 기사는 45m 높이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크레인을 조작한다. 조종석 바닥은 투명한 유리로 돼 있어, 크레인 아래에 있는 컨테이너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크레인은 배 위에 있는 컨테이너를 집어 올려 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트럭 모양의 '야드 트랙터'에 올려놓는다. 야드 트랙터는 이 컨테이너를 터미널 안쪽의 넓은 곳으로 옮긴다. 컨테이너를 배에 싣는 작업은 반대의 순서로 진행된다. 야드 트랙터가 부두 근처로 컨테이너를 싣고 오면 컨테이너 크레인이 집어 배 위에 놓는다.김 기사는 크레인을 능숙하게 조종해 배 위에 있는 컨테이너를 야드 트랙터 위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내려놓았다. 그는 SNCT 소속 기사 중에서 '생산성'이 높은 기사로 인정받는데, 그는 한 시간에 63개의 컨테이너를 내린 적도 있다고 했다. 능숙함 때문에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형 뽑기'보다 조작이 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대형 크레인을 움직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는 "고공 크레인 작업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작업이면서 동시에 섬세함까지 요구된다"며 "2시간 이상 작업하는 것이 금지돼 있을 정도"라고 했다.컨테이너를 옮기려면, 고공에 매달린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크레인의 긴 팔(붐)을 따라 앞뒤로 10~40m씩 움직이기를 수백 차례 반복해야 한다. 몸은 매번 녹초가 된다. 하역 작업을 진행하면 무게가 달라져 화물선의 높이가 변하는 것은 물론 선수(배 앞부분)와 선미(배 뒷부분)의 높이가 달라 경사가 생기는데, 이를 잘 파악해 크레인을 조작해야 한다.베테랑인 그도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 컨테이너 화물선 갑판의 해치(덮개)를 옮기는 작업이다. 김 기사는 "해치를 옮길 때는 선박의 구조물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작업해야 한다"며 "작업 과정에서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위험 요소를 제거한 뒤 작업을 재개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 큰 손실을 보게 된다"고 했다. 컨테이너를 빨리 싣고 내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작은 사고에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지금 각국 항만은 컨테이너를 빨리 싣고 내리기 위해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컨테이너'라는 철제 상자가 항만 물류에 상용화된 것은 불과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현대화된 컨테이너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운송업자 말콤 맥린(Malcom McLean)이다. 마크 레빈슨(Marc Levinson)이 쓴 'THE BOX'라는 책을 보면 1956년 4월26일 유조선을 개조한 '아이디얼X호'라는 배가 알루미늄으로 만든 35피트(약 10m) 길이의 상자 58개를 미국 뉴저지에서 휴스턴으로 5일 만에 운반한 것이 컨테이너 운송의 시작이다.세계적 석학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 컨테이너를 '세계 경제사를 바꾼 대혁신적 발명품'이라고 불렀고, 포브스는 컨테이너를 실제 화물 운송에 이용한 말콤 맥린을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인물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인천항은 대한민국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 관련 역사가 깊다.세계 항만 하역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컨테이너 하역 장비 등이 부두에 설치·운영됐다. 일반 잡화의 컨테이너화로, 컨테이너 운송 구조도 '문전에서 문전까지'(door to door)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도 현대화된 하역 장비를 갖춘 컨테이너 전용부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이 같은 시대적 추세에 맞춰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이 인천항 내항 4부두 컨테이너 전용부두다. 이 부두는 1974년 5월10일 인천항 선거와 함께 준공됐다.2008년 인천항만공사가 펴낸 '인천항사'를 보면 4부두의 시설과 하역 능력은 5만t급 1선석을 포함해 5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다. 컨테이너 크레인 3기(30t)가 설치됐으며, 27만 개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인천항 갑문과 4부두 컨테이너 전용부두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해운항만청이 1986년 발행한 '항만편람'에는 1969년 인천항에서 처리한 컨테이너 개수가 2천437개로, 부산항의 944개를 크게 앞섰다는 통계도 있다.대한민국 정부 공인 최초 도선사인 배순태(1925~2017) 전 (주)흥해 회장의 자서전 '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에도 인천의 컨테이너 부두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인천항 갑문이 준공식을 한 달여 남짓 남겨두고 있을 무렵의 이야기이다.'준공 전 시험운전의 대상으로 한진 부두에 설치될 컨테이너 갠트리 크레인을 선적한 중량물 운송선 여수호의 선거 내 입항이 결정됐다. (중략) 당시 책임자였던 부청장인 김준경 씨는 만사 제쳐 놓고 매일 나를 찾아와 도선을 맡아달라고 졸라 대기 시작했다. (중략) 여수호가 최초로 갑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1974년 3월27일 내가 올라탄 여수호의 브리지에는 밝은 햇살이 비쳤다.'지금과 같이 대형 STS 크레인을 갖춘 컨테이너 터미널이 조성되기 전에는 앵글 크레인(이동식 육상 크레인)에 와이어를 걸어 작업했다. STS 크레인과 앵글 크레인은 생산성 부문에서 3배 이상 차이가 난다.1970년대 후반부터 인천항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한 SNCT 김갑태(59) 기사는 "앵글 크레인은 지상 인력도 4~6명이 필요해 지금 현대화된 STS 크레인과 비교하면 작업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며 "인천항 신항의 STS 크레인을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에서는 선광과 한진이 각각 컨테이너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컨테이너 크레인은 총 14대가 설치돼 있는데, 1대 가격이 100억 원에 달한다. 중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 컨테이너 크레인의 90% 정도를 공급하고 있다.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지난해 인천항이 처리한 컨테이너는 304만8천516TEU로, 올해 컨테이너 처리 목표는 330만TEU다.김세중 기사는 "컨테이너 크레인 안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기도 했다. 그만큼 추억이 많다"며 "인천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이 증가했다는 뉴스나 언론 보도가 내 소식처럼 반가웠다"고 했다. 이어 "아내와 세 자녀도 아버지가 수출입 현장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며 "컨테이너 처리량이 400만, 500만을 넘어설 때까지 인천항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SNCT). 45m 높이의 컨테이너 크레인(Container Crane) 조종석에서 김세중 크레인 기사가 투명한 유리로 돼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크레인을 조종, 선박에 쌓여있는 컨테이너를 하역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컨테이너 크레인을 이용해 하역되는 컨테이너가 운반차량에 실리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빼곡히 쌓여있는 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부두에 즐비하게 서 있는 컨테이너 크레인들이 수출·입 컨테이너 선적과 하역 작업을 쉴새 없이반복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조종석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는 김세중 크레인 기사.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1-31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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