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5)]국경과 공항 (上)

대기업·상장사 직원 한정 복수·상용여권일반인, 신원조회뒤 단수·방문용만 발급1983년부터 50세 이상·예치금땐 연간 1회#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삼면이 바다인 데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드나드는 사람 대다수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야 한다. 인천국제공항은 국경이 아니면서도 사실상 '대한민국 국경'으로 기능한다. 그러면 왜 인천공항을 사실상의 국경이라 칭할 수 있을까. 다음 2개의 통계를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2019년 4월 한 달간 우리나라 공항과 항만을 통해 출국·입국한 사람은 총 779만1천648명이다. 이 가운데 69.5%인 542만1천669명이 인천국제공항을 거쳤다.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이 기간 2위인 김해공항(87만4천31명)과 3위인 김포공항(38만953명)을 합한 수보다 4배 이상 많고, 같은 기간 인천항(13만4천292명)과 부산항(22만7천31명) 출입국자보다 15배나 많다.코로나19 팬데믹(세계 대유행)이 지구촌을 뒤덮은 현재 상황은 더욱 특수하다. 올해 4월 한국 출입국자는 19만3천322명으로 지난해 4월의 불과 2.4%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는데,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16만75명으로 전체의 82.8%를 차지했다. 이 기간 김해공항 출입국자는 250명, 김포공항 77명, 제주공항 536명, 대구공항 0명, 무안공항 0명, 청주공항 0명, 양양공항 0명이다. 전 세계 국경이 사실상 봉쇄된 지금의 시대는 인천공항을 거의 유일한 우리나라의 출입국 관문으로 만들어 버렸다.법적으로 '출국'과 '입국'의 기준은 출입국심사다. 출국심사를 통과한 후 여전히 인천공항 내 면세점을 쇼핑하더라도 이미 국경을 넘어 출국한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해 한국 땅을 밟았어도 입국심사를 마치지 않았다면 아직 입국하지 않은 게 된다.지난 21일 오전 10시 30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입국심사장은 항공편이 급감한 탓에 텅 비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 하루 평균 1천여 대의 항공기가 뜨고 내리던 평상시라면 공항에서 가장 붐비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날 하루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29대,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여객기는 28대에 불과했다. 출입국자는 4천256명뿐이었다. 현재 외국인 입국자는 휴대전화에 자가격리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뒤 국내 거주지를 확인해야만 정상적인 입국절차를 밟을 수 있다. 10명 안팎의 외국인이 출입국심사대가 아닌 별도의 테이블에 앉아 거주지 확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휑한 인천공항 출입국심사장은 전 세계적인 국경 봉쇄를 실감케 했다.인천공항 출입국관리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산하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이 담당한다. 전국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소속 공무원 2천500여 명 가운데 900여 명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에서 근무한다. 인천공항 출입국심사관만 600명 규모다. 최근 인천공항 출입국자가 크게 줄었다고 하더라도 출입국 관련 업무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인천공항 출국·입국 시스템은 출입국심사장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더욱 긴박하게 하루가 돌아간다. → 그래프 참조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과는 '통합국경관리시스템'을 통해 다른 국가에서 인천공항행 여객기를 타려는 승객의 탑승권 발권단계부터 입국자 정보를 분석하는 '탑승자사전확인시스템(I-precheking)'을 운영 중이다. 각 항공사로부터 승객 정보를 전송받아 국제테러범, 형사범 전력자, 분실 여권 소지자 등을 골라내 해당 국가 공항에서부터 인천공항행 여객기 탑승을 막는 방식이다. 지금은 중국이나 일본 등 코로나19 확산지역에서 출발하거나 경유한 승객의 한국행을 미리 차단하는 데 이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이날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과 사무실에서 만난 한 분석관은 통합국경관리시스템 상황판을 가리키며 "타국 공항의 탑승객 정보가 정보분석과로 전송돼 우범자 등 탑승 거부 결과를 항공사로 다시 통보하는 데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며 "현재는 평소의 10%도 되지 않는 정보를 분석하고 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더욱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출입국자 70% 이용 사실상의 '국경' 역할해외서 탑승전 정보분석… 형사범 등 막아코로나 이후… 확산지역 승객 차단 활용# 첨단 출입국시스템의 인천공항인천공항 출입국시스템은 국제적으로도 첨단을 달리고 있다. 탑승객이 항공기로 날아오는 동안에도 '사전승객정보분석시스템(APIS)'을 통해 세밀하게 분석해 출입국심사관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한다. 입국심사 때 출입국·외국인청이 취득한 외국인의 지문과 얼굴 등 생체정보를 축적해 계속 활용하는 '자동출입국심사시스템(SES)'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스템 개선·간소화는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심사관을 거치지 않는 자동출입국심사를 가능하게 했다.인천공항이 국제공항협의회(ACI)의 세계 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12년 연속으로 1등을 유지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출입국심사 대기시간이 다른 해외 공항보다 짧다는 평가였다. 황정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계장은 "과거처럼 여권이나 사증(비자)을 위조·변조해 출입국을 시도하는 것들이 많이 적발되자 최근에는 아예 신분을 세탁해 출입국심사를 통과하려는 경향이 대부분"이라며 "출입국시스템 첨단화는 절차 간소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국경을 계속해서 촘촘하게 짜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우리나라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간편하게 공항을 통해 국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지는 30년밖에 안 됐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까지 정부는 국민의 출입국을 일일이 통제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전에는 대기업이나 상장회사의 영업부장 이상 직위인 사람만 복수·상용 여권이 발급됐다. 또한 해외에 4촌 이내 가족이 있는 경우에 한해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쳐 일회용인 단수·방문 여권을 발급받았다. 정부는 1983년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1년 동안 200만원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씩 해외여행을 허용했다. 남북 분단과 냉전 상황이 이처럼 국경의 벽을 엄격하게 높인 이유였다.이 시기 여권을 받으려면 해외여행자교육과 보안교육을 필수로 이수해 '교육필증'을 신청서에 첨부해야 했다. 공무원의 해외출장은 총무처(현 행정안전부)의 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출장명령이 내려져야 가능했다. 출국자는 1차 출국심사 후 항공사에서 탑승권을 받을 수 있었고 보안검색, 세관신고 등을 거쳐 2차 출국심사까지 마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1980년대 이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른바 '시국사범' 등에 대한 출입국 규제를 수시로 요청했다고 한다. 출입국 규제자로 명부에 한 번 이름을 올리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출입국심사관들의 '규제자 명부'는 나날이 두꺼워졌다. 명부가 전산화되지 않은 때라 심사관이 직접 명부를 펼치면서 한 명씩 확인했다고 한다.1965년 이후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한때 외국인 출입국심사 절차가 간소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당시 22세)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인 출입국심사가 다시 강화됐다.당시 문세광은 다른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받고, 주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으로부터 관광 목적의 사증을 받아 입국했다. 여권 자체는 위조·변조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으로 가장해 입국한 것이다. 봉형 금속탐지기와 X-Ray 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공항에 도입됐다. 사건의 여파로 1973년 202만6천90명이던 출입국자는 1974년 188만333명으로 급감했다.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때 우리나라 전체 출입국자 2천264만명 가운데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77.6%인 1천759만명이었다. 지난해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6천679만명으로 20년 사이 우리나라 인구에 맞먹는 4천920만명이나 늘어났다. 환승객은 출입국자로 포함하지 않는데 지난해 인천공항 국제선 전체 이용객은 7천75만명이다. 여전히 국내 출입국자의 70% 이상이 인천공항을 거친다. 국경이 열리거나 닫히는 정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인천공항의 국경 모습도 '포스트 코로나'에서는 다시금 큰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관들이 지난 21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내 정보분석과 사무실에 있는 '통합국경관리시스템' 상황판을 보면서 한국 입국 예정자들의 정보를 살피고 있다.2018년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전 시험운영 모습.지난 21일 오전 찾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국심사장.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 텅 비어 있다.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57년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대한국민항공사(KNA·현 대한항공)의 서울~홍콩 간 국제노선 여객기의 탑승 수속을 밟고 있는 승객들. /국가기록원 제공애플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가 1983년 11월 방한했을 당시 입국신고서. 당시 28세 청년이던 스티브 잡스는 삼성전자 초청으로 한국을 찾아 74세인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회장을 만났다. 출처/대한민국 출입국심사 60년사

2020-05-27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4)]항공운송의 시초 '특송'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제'를 신봉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제가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신기할 것도 없지만 그때는 미제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항공기와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역만리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라도 누구나 인터넷 클릭만으로 1주일 안에 받아볼 수 있다. 비행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제를 갖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빠른 시간 안에 물건을 배달함'. 특송(特送)의 사전적 정의다. 세관은 특송을 DHL이나 페덱스(FedEx)와 같은 특송 물류업체를 통해 운송되는 '특급탁송물품'으로 정의한다. 특송업체를 통한다는 점에서 일반 수입화물과 구분된다. 동북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허브공항을 꿈꾸는 인천국제공항은 특송의 중심에 있다.우리나라에 특송 화물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 김포국제공항, 평택항 등 네 곳뿐이다. 전국 각지에서 주문하는 특송 물품은 반드시 이 4곳 중 한 곳을 거쳐야 한다. 인천공항의 비중은 이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전체의 약 80%나 차지한다. 특송화물의 수요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국제 항공 노선이 가장 활성화한 게 인천국제공항이기 때문이다. /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2020-05-20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4)]항공운송의 시초 '특송'

# 더 빠르게… 인간의 본능조선초 '특송사' 대마도와 정보교환항공기술 발달하며 우편수송 '혁명'안창남 유명해진 계기도 '우편비행'국내도 1929년 여객보다 먼저 시작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에 따르면 2019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반입된 특송 화물은 약 4천450만 건(수입신고 기준)에 이른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입 특송 물량의 약 79.5%를 차지한다. 인천항이 17.5%로 그 뒤를 이었고, 평택항이 2.7%, 김포공항이 0.3%였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의 수입 특송 물량만 합쳐도 우리나라 전체의 약 97%를 차지한다. 부산 시민이 인터넷을 통해 직접 해외 물품을 구매하더라도 인천을 통해야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해외 직구와 같은 전자상거래가 보편화한 시대에서 인천은 특송의 핵심이다.최근 특송은 대부분 전자상거래로 발생한다.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전체 수입 특송 화물 중 약 78%가 전자상거래로 인한 것일 정도로 그 비중도 커지고 있다. 최근 10년간 전자상거래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2010년 약 316만 건이었던 인천공항 전자상거래 특송 화물은 지난해 약 3천490만 건으로 9년 만에 10배 이상 급증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중국에서 1년 중 가장 큰 폭의 세일이 진행되는 '블랙 프라이데이'나 '광군절'이면 인천세관 특송통관국 직원들도 덩달아 바빠진다.지난달 29일 오후 1시께 찾은 인천국제공항 인천세관 특송물류센터. 연면적 약 3만5천㎡, 지상 4층 규모의 센터 1층에서는 작업자들이 항공 화물 컨테이너에서 특송 화물을 빼 컨베이어 벨트로 옮기고 있었다. 항공 화물은 ULD(Unit Load Device)라고 불리는 가로·세로 3m, 높이 2.5m 크기 전용 컨테이너로 운송된다. 얼핏 봐도 300개 이상의 짐이 실린 컨테이너 내부는 황토색의 골판지 택배 박스가 대부분이었고, 의류로 추정되는 흰색 포장지와 TV 등도 눈에 띄었다. 12개 라인을 통해 입고된 물품은 X-ray 판독기, 바코드 인식기를 지나 1층과 3층에 마련된 업체별 구역으로 옮겨졌다. 인천세관에 등록된 공항 특송 업체는 모두 195개다. 세관은 수입물품 선별검사시스템(C/S·Cargo Selectivity system) 등을 통해 수입 신고가 잘못되거나 마약 등 반입 금지 물품으로 추정되는 물품을 검사한다.같은 시각 3층에선 인천세관 특송통관국 소속 장현주(42·여) 행정관이 물품 검사에 나섰다. 통관 과정에서 300만원대 'C'사 명품 가방의 가격이 약 100만원으로 신고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00만원대와 300만원대의 가방은 개별소비세 등을 합쳐 적어도 20만원 이상의 세금 차이가 있다. 원산지를 속여 들여올 수도 있어 확인은 필수다. 장현주 행정관은 택배 상자를 개봉한 후 하얀색 포장 천에서 가방을 꺼내 안팎을 샅샅이 살폈다. 장 행정관은 이 가방의 수입 신고가 잘못된 것을 적발하고 30여만원의 관세를 부과했다. 장현주 행정관은 "가격을 잘못 신고하는 경우는 대부분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고의로 이뤄진다. 이제는 제품만 봐도 대략적인 가격대를 알 수 있다"며 "과거에는 주로 의류 등이 반입됐는데 최근에는 식료품이나 가구, 가전제품 등 그 종류가 정말 다양해졌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대부분이 특송으로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특송센터에 입고된 물품은 통관 절차가 끝나면 배송 업체를 통해 전국 각지로 배송된다. 인천세관 특송통관국이 공항에서 하루 처리하는 화물은 12만건이 넘는다.인천국제공항은 왜 특송의 핵심이 됐을까. 항공기는 빠른 배송을 요구하는 특송에 최적화한 수단이다. 예를 들어 미국 LA항에서 컨테이너 화물선을 이용해 인천항으로 물품을 수입할 경우 이동에만 통상 18일이 걸린다. 반면 항공기의 경우 LA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직항으로 1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LA항에서 출발한 화물선이 인천항에 닿기까지 항공기는 같은 거리를 30여 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셈이다. DHL이나 페덱스, UPS 등 세계적인 특송 업체들이 인천국제공항에 별도의 물류센터를 마련한 점만 봐도 중요성을 알 수 있다.물건을 빨리 옮기려는 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시작은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삼국 시대부터 활용된 봉수제도는 지방에서 발생한 시급한 군사 사안을 수도까지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특송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조선 초기 1443년(세종 25년) 조선과 대마도주가 무역에 관해 맺은 '계해약조'에 '특송사(特送使)'가 등장한다. 특송사는 규정된 사선(使船) 이외에 대마도주가 특별히 보고하거나 교섭할 일이 있을 때 조선에 파견하던 사절이다. 주로 조선 왕의 사망이나 즉위 때 파견돼 축하나 조문을 하는 등 외교적인 임무를 담당했다. '특별한'에 방점이 찍혀 있긴 하지만, 중요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특송과 유사한 면이 있다.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민간 생활에 쓰이면서 소식은 더 빨리, 더 멀리 전달됐다. 우편을 통해서다. 항공 기술이 민간수송 분야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제1차 세계대전 후 각국은 가장 먼저 우편 수송에 나섰다. 독일이 1919년 4월, 정기여객노선을 개설한 지 2달 만에 항공우편 수송을 시작했고 일본도 1920년대 우편 비행에 나섰다. 1925년 4월 21일 동아일보는 '일본 최초의 정기우편비행은 동경~대판(오사카), 대판~복강(후쿠오카) 2개 항로로 개시됐다', '대판~복강을 비상하는 항공기에는 봉서(封書) 122통, 엽서 331통 외 승객 1명이 탔다'고 보도했다. 최초로 한반도 상공을 난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1901~1930)이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제5회 현상우편비행대회' 때도 그의 항공기에는 300여 통의 우편물이 실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9년, 최초의 공항인 여의도 비행장이 경성 비행장으로 이름을 바꾼 뒤 여객 수송보다 우편 수송을 먼저 시작했다.# 전자상거래 주역 인천공항온라인 발달 '소식 → 물건' 축이동특송건수, 9년새 10배 이상 급성장"국가간의 온라인 거래 더욱 활성화""수도권 입지 '홈 베이스' 역할 부각"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비행기가 항공 우편 때문에 탄생했다는 시각도 있다. 동아일보는 1936년 3월 1일 '비행긔는 웨 생겻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오늘 아침 경성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그날로 동경(일본 도쿄)이나 대련(중국 다롄)에 배달된다는 것은 옛날 같으면 귀신의 장난으로 봤을 일"이라며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 까닭은 전쟁이나 손님, 짐 운반이 아니라 속히 보내고 싶은 편지를 빨리 전해 주려는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항공기를 운용하게 된 각국이 앞다퉈 우편 수송에 나선 점을 볼 때 이 같은 주장도 터무니없어 보이진 않는다. 인천국제공항에는 인천세관 산하에 '인천공항국제우편세관'도 있다. 국제우편도 세관의 감시 대상이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국제우편이나 특송화물도 마약 등 각종 밀반입 행위의 주요 루트가 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마약 탐지견이 지난 2018년 전국 세관에서 적발한 마약은 모두 263건인데, 이 중 95%(250건)가 인천국제공항 국제우편에서 발견됐다.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데서 시작된 특송은 인터넷과 항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물건 배송 중심으로 옮겨갔다. 지난해 인천공항 수입 특송 물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건강기능식품 등의 식료품(약 54%)이었다. 화장품(12%), 가전제품(5.6%), 의류(4.1%)가 그 뒤를 이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대부분 실생활에 밀접한 제품들이 특송으로 옮겨지고 있다. 특히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장은 특송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아마존'이나 중국 '알리바바' 등 거대 디지털 기반 유통 플랫폼이 글로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국가 간 전자상거래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최근 부산시가 전자상거래 물류센터 도입 연구에 나서는 등 특송 물류센터 유치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세청도 확대되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통관의 신속성과 부정확한 수입 신고에 따른 적정 관세 부과 사이에 균형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난해 관세청에서 실시한 '주요 관세당국 전자상거래 개편동향 연구'를 보면 전자상거래 수·출입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고도화, 통관 정보 시스템과의 연계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국제 특송의 핵심인 인천국제공항의 위상이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항공물류 전문가인 박용화 인하대 아태물류학부 교수는 "특송 화물의 주요 수요지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이를 취급하는 항공사들이 대부분 인천공항 노선을 운영하기 때문에 인천공항은 특송 화물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국가 간 온라인 거래가 더욱 활성화할 것은 자명한 사실로,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국제 주요 항공사들의 '홈 베이스'인 인천공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에서 반입되는 특송 화물은 인천본부세관 특송통관국을 거쳐야 한다. 지난달 2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인천본부세관 특송물류센터에서 인천세관 관계자들이 수입 신고된 특송 물품을 검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36년 3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비행긔는 웨 생겻나'라는 제목의 기사. 이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 까닭은 항공우편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20-05-20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3)]공항과 세관

세관, 반입물품 세금부과… 경제발전 기여마약·총기 등 금지 품목 감시도 주요 업무최초 공항세관, 1929년 경성비행장에 설치인천공항, 관세청 인력 5천중 1200명 근무'세금 세(稅)','빗장 관(關)'. 세관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세관의 기본 임무는 국내로 반입되는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관세법도 그 목적을 '관세의 부과, 수출입 물품의 통관을 적정하게 하고 관세 수입을 확보해 국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명시한다. 세관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세 국경의 수호자로 공항이나 항만을 통해 우리나라로 반입되는 모든 물품을 감시한다. 마약, 불법 무기, 불량 먹거리 등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세관이 무기 반입을 막지 못한다면 정부가 각종 테러로부터 국민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세관의 임무는 국민의 안전, 치안문제와 직결돼 더욱 중요시된다.바다에서 시작한 세관의 역사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본격적으로 하늘길로 확대됐다. 현재 관세청 인력 구성을 봐도 인천국제공항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관세청에는 전체 약 5천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중 1천200여명이 인천국제공항에 몰려 있다. 단일 기관으로 가장 큰 규모다. 500여명이 있는 인천항보다 2배 이상 많다. 개항 초기 인천국제공항에는 870여명의 세관 직원이 근무했는데 특송·화물 물동량, 여객 수요량이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인력도 늘어났다. 우리나라 제일의 인천국제공항은 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이 지키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4시 30분께 찾은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전 세계가 난리 통인 가운데 승객 230여명이 탑승한 도하발 카타르항공 QR858 여객기가 도착했다. X-ray 검사를 마친 250여개의 여행용 캐리어가 짐 찾는 곳으로 나오자 인천세관 마약 탐지견인 블랙 래브라도 리트리버 '로드'가 모습을 나타냈다. 목줄을 착용한 로드는 '파트너'인 김직수(39) 탐지조사요원의 신호에 맞춰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여행용 캐리어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로드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김직수 요원은 손으로 캐리어를 두드려 다시 집중을 유도했다.로드는 짐을 기다리는 승객들의 휴대가방에도 코를 가져다 댔다. 김 요원은 이용객이 놀라지 않도록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라고 안내했다. 로드는 주로 벨트 한쪽 면을 수차례 왕복하며 돌아가는 모든 짐의 냄새를 맡았다. 마약 점검은 30분간 이어졌다. 2018년 7월부터 로드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직수 요원은 "매일 수하물에 마약을 숨긴 뒤 찾게 하는 훈련을 통해 후각을 유지하고, 마약을 찾아내면 놀이나 간식 등을 줘 필사적으로 찾아내게끔 훈련한다"며 "요원과 탐지견은 호흡이 상당히 중요해 한 번 파트너가 되면 탐지견의 임무가 끝날 때까지 '동반자'가 된다"고 말했다.인천국제공항을 통한 마약 밀반입은 인천세관의 주요 단속 대상이다. 공항에 대한 마약 단속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했다. 필로폰과 대마초 등의 마약이 국내에 퍼지면서 노태우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게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는 항만을 통한 밀반입이 주를 이뤘지만 1989년 전 연령에 대한 해외여행이 자유화하면서 공항은 밀반입을 노리는 자들의 새로운 표적이 됐다. 로드와 같은 마약 탐지견이 생긴 것도 이때다. 사람보다 후각이 1만 배 이상 뛰어나 마약을 찾는 데 제격인 마약 탐지견은 1989년 김포국제공항에 처음 배치됐다. 이듬해 세관에는 지금의 마약조사과와 같은 마약 전담 부서도 신설됐다. 현재 전국 현장에 투입된 마약 탐지견 42마리 중 23마리가 인천국제공항에 있다. 마약 탐지견은 지난해 전국 세관에서 모두 156건의 마약류를 적발했다.마약 밀반입은 인천국제공항 개항 초기부터 극성을 부렸다. 2002년에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시가 3억원 상당의 대마초 30㎏을 밀반입하려던 남아공 국적 남성이 가방을 버리고 달아났다가 붙잡히는 일도 있었다. 당시 경인일보 보도를 보면 이 남성은 자신의 가방이 세관의 정밀검사 대상으로 정해지자 분실물은 항공사에서 보관한다는 점을 악용해 입국장에 가방을 두고 인근 호텔로 도주했지만 세관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연간 7천만명에 달하는 국제선 이용객이 우리나라로 들고 오는 짐과 화물 역시 세관의 감시대상이다. 세관을 피하려는 꼼수가 갈수록 교묘해지는 탓에 이들을 적발하기 위한 세관의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다.7천만명 달하는 국제선 '마약 탐지견' 활용1950년 김포공항 '금불상 반출 미수' 시끌코로나 사태에 '마스크 불법 반출' 단속도세관의 수하물 검사는 비행기에서 짐이 내려질 때부터 이뤄진다. 모든 기탁 수하물은 계류장 세관 벨트로 옮겨져 인천본부세관 공항감시과의 X-ray 검사를 받는다. 수하물에 숨겨진 금괴나 불법무기 등은 대부분 이 과정에서 걸러진다. 세관은 X-ray를 통해 검사 대상 물품에는 노란색 실(검색 표시)을, 총기류 등 안보 위해 물품이 의심되는 수하물에는 빨간색 실을 붙이는 등 4가지 색으로 구분해 의심 수하물을 걸러낸다.인천세관은 또 입국장에 사복 감시원을 투입해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감시하기도 한다. 항공사로부터 도착 승객 명단을 사전에 입수한 뒤 축적된 내부 데이터를 활용해 우범 여행자를 분석하는 것도 밀반입을 막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설 때까지 끈질기게 세관의 감시가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렇게 인천공항에서 적발된 마약류는 2002년 111건에서 지난해 628건(14만7천여g)으로 늘었다. 실탄류도 2002년 434발에서 지난해 4천173발로, 도검류도 75개에서 408개로 증가했다. 적발 건수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반입 시도도 늘었다는 의미다. 인천세관이 공항에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공항에 세관이 처음 생긴 건 언제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인 여의도비행장에도 세관이 있었다. 1916년 건설된 여의도비행장은 1929년 4월 경성비행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항공기를 통한 우편수송을 정식으로 취급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여객수송도 본격화하고 당시 인천세관 산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 세관 격인 '경성비행장세관출장소'를 설치했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은 항공 수송 증가에 대비해 세관 설치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관문지요처에 세관비행장 설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소화 4년(1929년)부터는 대규모의 항공수송도 개시하게 되야 수송품의 취체(取締)를 필요로 할 경성여의도비행장은 항공 수송품의 검사지로서 시행규칙도 근근발포(近近發布)될 터이다'라고 보도했다.1950년 김포공항에서는 한 무역상이 국보와 유사한 높이 11㎝ 짜리 금불상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적발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50년 3월 1일, 무역상 박씨가 '외무부 비서실장' 명의로 된 서류 봉투에 금불상을 넣어 주일대표부 비서관에서 보내는 척 일본으로 빼돌리려다 김포공항 세관 검색대에서 걸린 것이다. 이 불상은 압수 후 국가에 귀속됐고, 현재는 '신수 200번 금동보살입상(사진)'이라는 이름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국보 제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과 형태가 유사해 같은 시기인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의 언론은 외무부와 박씨와의 연관 관계 등을 파헤치기 위해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50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에는 '탁송원인은 무엇?'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경향신문은 이 기사에서 "무역상과 탁송을 맡긴 이는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무엇 때문에 외무부 비서실장 명의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의아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며 "비서실장은 언급을 피하고 있어 석연치 못한 바가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 밀수자를 엄벌에 처하고 적발 세관원은 표창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역상과 외무부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우리나라 공항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한 세관은 갈수록 그 역할이 커지고 있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 국제 여객 기 준 세계 5위, 국제 항공 화물 물동량 세계 3위의 공항으로 발돋움했다. 공항을 통한 여객, 화물 물동량이 증가할수록 관세를 부과하고 밀반입 물품을 막아야 하는 세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할 터.최근에는 과세물품을 자진 신고하는 국민이 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공항을 통해 해외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어내야 하는 세관 신고서가 바로 자진 신고다. 해외나 국내 면세점에서 600달러를 초과하는 물품을 구매하면 세관에 신고해야 한다. 세관은 2015년부터 자진신고를 하면 관세의 30%(15만원 한도)를 감면해 주지만,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되는 경우 납부금액 40%의 가산세를 더 내도록 하고 있다. 인천본부세관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 휴대품 자진신고 건수는 지난 2015년 9만4천여건에서 2018년 20만7천여건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과세 물품을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돼 가산세를 부과한 경우는 2015년 6천600여건에서 2018년 2천200여건으로 줄어들었다.인천세관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사회 안전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는 만큼 마스크 불법 해외 반출을 막고, 수·출입 기업 지원에도 24시간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본부세관 소속 마약탐지견인 '로드'가 지난 8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짐 찾는 곳에서 마약 탐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천본부세관 제공2005년 인천국제공항 내 X-ray 판독실 모습. /인천본부세관 제공인천공항 입국장 세관 검사대 모습.1930년대 경성비행장 격납고 및 부속건물. 이곳 합동 청사에 우리나라 최초 공항 세관 격인 경성비행장세관출장소가 설치됐다. /서울본부세관 제공신수 200번 금동보살입상.

2020-05-13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2)]항로

# 대한민국 '항로 역사'1929년 첫 항로 대구~서울~평양~신의주1971년 국내 항공사 첫 미주 노선권 확보'인천' 153도시 취항… 2030년 300곳 목표'5·24조치'후 北 영공통과 막혀 우회해야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른 비행기는 그때부터 이름 그대로 비행(飛行)을 한다. 도착 공항의 활주로 품에 무사히 안기기 전까지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하늘길을 따라 날아야 한다. 도로가 필요한 자동차, 철길이 있어야 하는 기차와 달리 비행기는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비행기도 국제 협약과 나라별 국내법에 따라 반드시 정해진 길로만 다녀야 한다. 특히 남북 대치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군사적 이유에서 더더욱 그렇다. 한국항공협회 항공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정기 항로는 1929년 4월 1일 일본이 도쿄와 중국 다롄 간 항로를 만들면서 중간 기착지로 둔 대구~서울~평양~신의주 노선이다. 그해 6월 21일 서울~울산 단독 노선이 개설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개설한 정기 항로는 1936년 10월 신용욱이 설립한 조선항공사업사의 서울~이리 노선이다.대한항공이 본격적으로 민영항공시대를 열었던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국제 정기 항로는 일본 노선 3개와 방콕, 홍콩 등 아시아 항로가 전부였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주 항로는 1949년 맺은 한미항공협정에 따라 미국 항공사들이 독점했고, 유럽 노선도 없었다.1969년 한진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설립한 대한항공은 미국 진출을 위해 정부에 한미항공협정의 개정을 건의했고, 미국이 우리 정부의 협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항로 개설의 물꼬가 텄다. 1971년 3월 26일 호놀룰루를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노선권을 우리 정부가 확보했다. 이듬해 4월 19일 대한항공은 서울~도쿄~호놀룰루~로스앤젤레스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이어 1979년 뉴욕 노선을 취항했고, 미국 전역으로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대한항공은 동시에 유럽 항로 개설에도 적극 나서 1973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스위스 취리히(197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197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1980년)를 취항했다. 대한항공 50년사를 보면 7개 도시에 불과했던 국제선 취항지는 10년여 만인 1979년 15개국 20개 도시로 늘어났다.# 1983년 9월 1일 '격추'미·소대립기, KE007편 소련영공 침범사할린 상공서 미사일 269명 전원 사망관성항법장치 오작동 '경로 이탈' 추정美, 군용기술 공개… 오늘날 널리 활용미주 항로는 미국과 소련이 극렬히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탄생했다. 서울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가려면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 게 최단 거리 노선이었는데 당시 소련이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우회 항로를 이용해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뉴욕발 대한항공 여객기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에 격추당하는 비극적 참사가 발생했다.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KAL기 격추 사건이다.승객과 승무원 269명을 태우고 1983년 8월 31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KE007편은 다음날 오전 6시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앵커리지에 기착했다가 서울을 향해 비행하던 KE007편은 9월 1일 새벽 3시 26분 교신이 끊겼고,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항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도상에 미리 찍어둔 점과 점을 서로 연결한 길이다. 비행기는 이 점을 지나가며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이런 하늘 위의 무수히 많은 점을 '웨이포인트(Waypoint)'라고 하는데 1947년 설립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정한 위도와 경도로 이뤄진 특정 좌표다. 비행기는 관제사와 의무적으로 웨이포인트를 통해 항공기 위치 정보를 교신한다.KE007편은 알래스카에서 출발해 소련의 캄차카 반도 남쪽 해상에 있는 웨이포인트를 따라 비행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정상 항로에서 북쪽으로 100마일(160㎞)이나 떨어진 캄차카 반도 부근의 소련 영공을 통과해버렸다. 사할린 상공까지 뒤따라온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 2방에 민항기는 산산조각 나 바다로 추락했다.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한 참담한 사건이었다.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로 위치를 파악해 이동하는 자동항법기술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가속도와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을 이용해 위치를 0.01초 마다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관성항법장치의 오작동으로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비무장 민항기 격추와 관련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격추 사건을 계기로 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군사용으로 개발해 활용하던 GPS(위성항법장치)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했다. GPS는 위성과 수신기로 좌표를 구하는 방식이다. 냉전의 희생양이 된 우리 국적기는 GPS의 민간 도입을 불러왔고, 지금은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됐다. 관성항법장치는 오차 누적으로 항로를 이탈할 우려가 있지만, GPS는 전파교란에 취약하기 때문에 비행기에서는 두 기술이 모두 활용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로 미·소 갈등이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1989년 소련 영공 통과가 허용됐고, 1995년부터는 중국과 몽골의 영공도 개방됐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되고 한참이 지나고도 아직 막혀있는 하늘길이 있다. 바로 남과 북의 항로다.남북은 2007년 10·4 선언으로 백두산 관광에 합의하고, 서울(김포공항)과 백두산(삼지연공항)의 직항로 개설을 추진하기로 했으나 보수 정권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중단돼 있는 상태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이 다시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그해 11월 북한이 먼저 항공실무회담을 열어 영공 통과 등 신규 항로 개설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남북 정기 직항로만 없었을 뿐 남한의 비행기가 내륙을 제외한 북측 해상의 영공을 통과하는 무착륙 비행은 가능했었는데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단행된 5·24 조치로 이 길마저도 가로막혔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해 시간과 연료를 허비하고 있다. 영공을 통과하려면 해당 국가에 통과료를 내야 하는데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첨예했던 지난해 우리 국적기가 일본에 지불하는 영공통과료가 과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6월까지 대한항공 등 9개 국적 항공사가 일본에 지급한 영공통과료는 2천126억원이었다. 반대로 일본 항공사가 우리나라에 낸 통과료는 82억2천만원에 불과했다.남북은 서해와 동해에 항로를 개설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는데 급변하는 남북 분위기 탓에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북한에 지불해야 하는 영공통과료가 유엔의 대북 제재를 위반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남북 직항로는 남북 대화나 스포츠 이벤트, 문화공연 등 단발성 교류 사업과 이벤트 때마다 깜짝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남한에서 평양을 가려면 일단 중국을 들렀다가 북한 고려항공으로 갈아타야 한다. 2000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의 첫 평양 직항로 주인공은 1973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스웨덴의 총리였다. 2000년 5월 3일 당시 방북 중이던 스웨덴 페르손 총리 일행을 태운 특별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서해항로를 거쳐 인천공항에 들어왔다. 2001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는 소설가 황석영 등 방북단 394명이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순안공항을 향한 적이 있었다.2005년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이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의 북측 선수단·응원단 참가를 논의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찾기도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북한 선수단도 인천공항으로 입국했고, 2018년 2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찾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시는 남북 평화시대를 대비해 인천공항을 대북 교류 거점공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 기준 153개 도시를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가 106개로 가장 많고, 유럽 25개, 북미 15개 순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2030년까지 비아시아권 도시 100개를 포함해 총 300개 취항도시를 목표로 항공 네트워크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올해는 예기치 않게 불어닥친 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다.전 세계 국가의 국내선 중 승객을 가장 많이 실어나르는 항로는 다름 아닌 한국의 김포~제주노선이다. 국제 항공운송정보 사이트인 OAG(Official Airline Guide)가 지난달 23일 발간한 '가장 바쁜 경로 2020(Busiest routes 2020)'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김포~제주 노선은 좌석수 기준으로 1천742만6천873명이 이용했다. 이는 하루 평균 4만8천명에 달한다. 2위는 삿포로~도쿄(1천249만명), 3위는 후쿠오카~도쿄(1천140만명) 노선이다. 국제선 1위는 홍콩~타이페이 노선으로 796만명이다.가장 경쟁이 치열한 국제노선 10개 가운데 인천공항이 포함된 노선은 5개나 된다. 홍콩~인천, 다낭~인천, 인천~타이페이, 인천~오사카, 인천~도쿄(나리타)는 8~9개 국내외 항공사가 정기 항로를 개설해 운항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인천~도쿄의 운항 횟수는 연 1만4천828회나 된다.세계에서 가장 긴 국제 항로는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와 싱가포르를 잇는 노선으로 8천277마일(1만3천320㎞)이다. 가장 짧은 국제항로는 콩고공화국 브리자빌~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노선으로 겨우 13마일(20.9㎞)에 불과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1979년 3월 29일 대한항공 뉴욕 여객노선 취항식. /대한항공 제공1972년 4월 19일 김포국제공항 격납고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 태평양 상공의 여객기 취항을 기념하며 촬영한 사진. /대한항공 제공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에 의해 격추돼 추락한 뉴욕발 대한항공 여객기. /KTV국민방송 대한뉴스 화면 캡처

2020-05-06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1)]활주로

이·착륙 '마의 11분' 안전 핵심항공기 하중 지탱 포장두께 1m 넘어표면은 매끄럽되…또 미끄러우면 안돼눈·비 등 악천후에도 마찰계수 0.4 이상 유지작은 노면 이물질도 사고 가능성차량 운행자들 'FOD' 의무 수거해야음파·엽총 활용 '버드 스트라이크' 예방백령도 '사곶해변' 세계적 희귀 천연 활주로활주로(滑走路)는 비행기에 있어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존재다. 비행기가 그 품을 떠나는 순간이 운항과정에서 가장 위험하다. 그 품에 살포시 안겼을 때 승객들은 드디어 안도하게 된다. 활주로를 뜨고 내리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활주로는 한자 말 그대로 미끄러져 달리는 길을 말한다. 좋은 이륙과 훌륭한 착륙은 이 미끄러짐에 있다. 미끄러지듯 날아오르고, 미끄러지듯 내려앉아야 한다. 비행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을 꼽으라면 단연 활주로다.활주로는 이 세상 어떤 도로보다도 단단하다. 500t이 넘는 항공기가 시속 200㎞ 안팎의 속도로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받는 하중을 견뎌야 한다. 이 때문에 일반도로의 두께는 15~30㎝이지만 활주로는 몇 배 더 두껍다. 인천공항 활주로의 포장두께는 105㎝에 이른다. 하중을 견디는 것 외에도 안전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 우선 활주로 표면이 매끄러워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미끄러워도 안 된다. 매끄러우면서도 미끄러우면 안 된다니,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공항 운영기관들은 항공기의 이·착륙에 적합한 마찰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쓴다. 인천공항은 지난달 모두 7차례에 걸쳐 마찰력 정기측정을 진행했다. 전문적인 용어를 쓰자면, 마찰력은 0~1μ(마찰계수)로 표현되며, 1에 가까울수록 마찰력이 커 제동하기에 좋고 0에 가까울수록 미끄러워 제동거리가 길어진다. 인천공항의 이번 측정에서는 평균 0.78μ를 기록했다. 지극히 정상 수준이다. 마찰력이 0.6 이하로 떨어지면 유지보수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 비가 오거나 눈이 왔을 때에도 마찰력을 측정하는 데 0.4 이상을 유지하도록 한다. 0.26 이하가 되면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활주로에는 항공기 이·착륙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 FOD(Foreign Object Debris)는 활주로 있는, 제거해야 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FOD를 제거하는 것은 공항 안전에 중요한 요소다. 인천국제공항에는 3개의 활주로가 있다. 제1·2활주로의 길이는 3천750m, 제3활주로는 4천m다. 항공기는 이·착륙할 시기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때다. 이륙할 때 3분, 착륙할 때 8분을 '마의 11분(critical eleven minut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항공기가 활주로에서 주행하는 거리는 이륙할 때가 더 길고, 활주로가 받는 하중은 착륙할 때가 더 크다. 항공기는 뜨기 위해 양력을 받아야 하는 데 충분한 속도가 필요하고, 착륙할 때는 속도를 줄인다. 대형 항공기인 A380은 이륙할 때 3천m, 착륙할 때 2천100m가 필요하다. 활주로는 이륙할 때 필요한 길이와 착륙할 때 받는 하중을 모두 만족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이나 착륙한 뒤에 이동하는 도로를 유도로(taxiway)라고 한다.인천공항에서도 활주로나 유도로 FOD 제거작업이 수시로 이뤄진다. 활주로 외에도 계류장 등 항공기와 가까운 곳에서 운행하는 차량과 장비가 1만여대에 이른다. 차량에서 떨어진 나사나 볼트, 장비 등이 바닥에 있으면 항공기가 이동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작은 것들이라고 해도 항공기가 이·착륙할 때 바퀴와 부딪쳐 튕겨 나가게 되면 주변의 장비나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인천공항 계류장 등을 오갈 수 있도록 허가받은 차량의 운전자는 FOD를 발견하면 의무적으로 수거해야 한다.인천공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FOD는 무엇일까. '타이어 찌꺼기'라고 한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 타이어 바퀴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생긴 마찰열로 인해 타이어 일부가 녹아 활주로에 달라붙는 것을 타이어 찌꺼기라고 한다. 인천공항공사는 고압의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바닥에 붙은 타이어 찌꺼기를 정기적으로 제거한다. 인천공항공사 유덕기 운항안전팀장은 "지금은 고무제거를 위해서 첨단장비를 활용하지만 오래전에는 활주로를 관리하는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활주로에 달라붙은 고무를 제거하기도 했다"고 이야기했다. 인천공항은 다행히 FOD로 인한 항공기 사고는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인천공항을 운영하는 인천공항공사는 항공기 안전을 위해 FOD 수거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한다. 이·착륙시설에 대한 점검을 하루 4차례 진행하고, 계류장 등을 순찰하며 과속을 하거나, 장비 사용 후 이를 방치하는 등의 규정 위반자를 적발해 낸다. 유덕기 팀장은 "활주로와 유도로, 계류장 등 접근이 제한된 공간인 '에어사이드'에서 공항 운영기관은 안전관리부터 사건·사고 등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한다"며 "공항 안전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항공기 운항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요소는 '새'다. 사람이나 육상동물은 지상에서 통제가 가능하지만, 하늘을 나는 새는 막기가 쉽지 않다. 공항에 새들이 날아다니고, 그 새들이 항공기에 부딪히거나 엔진으로 빨려들어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새로 인한 항공기 사고, 버드 스트라이크다. 이들 새가 각 공항 당국의 골칫덩이 중 하나다.인천공항도 연간 10건 안팎의 버드 스트라이크가 발생한다. 운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적도 한 차례 있는데, 2014년 3월 필리핀항공 여객기가 이륙 후 조류 충돌로 인해 엔진이 손상됐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회항해야 했다. 외국에서도 조류 충돌로 인한 항공기 운항 장애가 잇따르고 있다.인천공항공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류를 퇴치하기 위해 힘쓴다. 조류들이 싫어하는 음파를 내보내는 '음파퇴치기'를 도입했고, 엽총으로 공항으로 들어오는 조류를 내보내기도 한다.활주로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항공기는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1867~1912)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1871~1948) 형제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는 1903년 12월 17일 조종이 가능한 비행기를 제작해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 이때 항공기를 띄웠던 곳은 평평한 모래바닥이었다. 이곳이 최초의 활주로인 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활주로는 항공기가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일 뿐이었다.하지만 모래바닥은 항공기를 이륙시키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다. 항공기의 무게를 못 이기고 모래에 바퀴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빠르고, 더 무거운 항공기 개발이 이뤄지면서 뜨고 내리는 전용장소인 '공항'이 생겨났다. 그 공항에서 활주로는 핵심시설이 되었다. 1916년 건설된 여의도비행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다.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됐으며, 활주로와 격납고로만 이뤄졌다. 이때 활주로 길이는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한국항공협회에 따르면 1930년대 각 비행장의 활주로는 500~750m였다. 대구비행장이 500m였고, 여의도에 있는 '경성비행장'이 750m로 가장 길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항공기의 크기·무게에 비례한다. 항공기가 무거울수록 이륙하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긴 거리를 내달려야 하고, 착륙할 때도 제동할 때까지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운항했던 항공기는 탑승인원이 10명이 채 되지 않았고, 무게는 10t 안팎에 불과했다. 폭과 길이도 현재 여객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주로 포장된 도로에서 항공기가 뜨고 내리지만, 평평하고 단단한 모래바닥이 활주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인천 옹진군 백령도 사곶해변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천연활주로다. 석영 성분의 모래가 두껍게 쌓여 이뤄진 사곶해변은 썰물 때가 되면 길이 2㎞, 폭 200m의 평평한 모래 바닥을 드러낸다. 길게 펼쳐진 이 해변은 한국전쟁 때 UN군이 활주로로 이용했다. '옹진군지'는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이고 천연비행장으로 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바넷 월리스 로버트(Barnet Wallis Robert)'가 직접 찍어 옹진군에 제공한 사진은 사곶해변에 착륙한 항공기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 이곳은 활주로로 쓰이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헬기 이·착륙 장소로는 활용되기도 한다.전 세계 모든 공항에 활주로가 있고, 이 활주로에는 모두 이름이 있다. 활주로 이름은 활주로의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지는 데 이름만으로도 그 기능을 알 수 있다. 공항 활주로 양 끝에 표시된 숫자와 알파벳이 활주로 이름이다. 이름을 짓는 기준은 방위각이다. 전체가 360도인 방위각 중 끝자리를 떼어낸 것이 활주로의 이름이다. 활주로 각도가 150도라면 15라고 표기되며, 그 정반대는 180도가 더해지기 때문에 33이 되는 식이다. 활주로 이름은 조종사에게 중요하다. 항공기 조종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공항의 활주로 이름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인천공항 활주로 마찰력을 측정하는 모습. /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 활주로 전경. 인천공항은 모두 3개의 활주로가 있다. 1·2활주로의 길이는 3천750m, 3활주로는 4천m다. /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한국전쟁 참전군인인 '바넷 월리스 로버트(Barnet Wallis Robert)'가 1950년도에 촬영한 사곶해변에 항공기가 착륙해 있는 모습. 로버트 가족은 이 사진을 2003년에 옹진군에 기증했다. /옹진군 제공

2020-04-22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0)]인간, 하늘을 날다·(下)

첫 비행사 여성 권기옥·남성은 이윤호1922년 안창남 '금강호' 고국방문 비행일본서 우수한 성적 면허 '스타덤' 올라같은해 인천서 운행… 소감 수기로 남겨'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난 이는 누구일까?'그리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한반도 상공의 첫 비행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인물과 처음으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우리나라 조종사도 다르다. 한반도라는 '장소'에 방점을 두느냐, 한반도 사람이라는 '인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최초 비행'의 주인공은 달라진다.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동력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04년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서는 러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제물포해전이 발발했다. 비행기가 등장한 1900년대 초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먹잇감이 돼 있었고, 곧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비행이라는 당대 최첨단 기술을 자력으로 도입할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그럼에도 '항공 여명기'라 불리는 20세기 초 한반도 상공에도 비행기는 떴다. 조선인에게는 쉽사리 비행이 허락되진 않았다. 그래서 일제에 협력하면서 당국의 허락을 얻어 비행하거나 일본을 벗어나 저항하기 위해 비행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여느 분야가 그랬듯 우리나라 항공산업과 공군은 항일·친일이 뒤섞여 있었다.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일본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1877~1944)와 그의 제자가 처음으로 한반도 땅에서 비행기로 날았다. 나라하라 산지는 1913년 4월 3일부터 3일간 서울 용산연병장에서 시험비행했다. 그가 제작한 50마력짜리 '나라하라식' 비행기를 탔다. 당시 조선인 6만명이 몰렸다고 한다.1950년 4월 공군본부가 발간한 월간 '공군' 창간호를 보면, 1914년 일본군의 중국 칭다오 공격 때도 일본 비행기가 수차례 한반도를 오갔다. 1917년 9월에는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서 스미스(Arthur Roy Smith·1890~1926)가 조선을 찾아 서울, 평양 등지에서 곡예비행쇼를 선보였는데, 이 비행쇼에 매료된 여러 젊은 조선인이 훗날 우리나라의 초창기 비행사로 성장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한반도 상공을 난 조선인 비행사는 독립운동가 안창남(1901~1930)이다. 서울 출생인 안창남은 1919년 도일(渡日)해 도쿄 오구리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이후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1년 5월 일본 제국비행협회 첫 민간 비행사 시험에 응시한 안창남은 3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해 일본의 민간 비행면허번호 '2번'을 달았다.이듬해 11월 안창남은 지금으로 따지면 '택배 빨리 보내기 대회'인 도쿄~오사카 간 현상우편비행대회에 참가해 악조건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일본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조선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동아일보 주최로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성사됐다.1922년 12월 금의환향한 안창남은 같은 달 10일과 13일 여의도비행장에서 '금강호'를 이끌고 역사적인 고국 방문 비행행사를 열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 조선 총독도 행사에 참석했다. 금강호는 당시 보통 비행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비행기였다고 하는데, 부품을 해체한 뒤 도쿄에서 인천항을 통해 배로 싣고 들여와 다시 조립했다.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2019년 쓴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을 보면, 안창남은 5만 군중이 운집한 여의도비행장에서 1천m 고도에 도달해 서울 시내를 돈 뒤 '거꾸로 내리박히다 다시 두어 번 가로 재주넘는 묘기' 등 특수비행을 선보였다.여의도 비행이 끝난 13일 안창남의 다음 행선지는 인천이었다. 안창남은 처음으로 인천 상공을 비행한 조선인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당시 인천은 어땠을까. 안창남은 1923년 1월 1일 발간된 잡지 '개벽' 제31호에 기고한 수기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인천에서는 200m의 저공비행을 하였으므로 시가 길거리에 모여 서서 쳐다보고 손뼉을 치는 모양까지 자세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온 것을 알고 공설운동장에 이르는 세 갈래 신작로로 달음박질하면서 모여드는 것까지 보여서 나는 그것을 보고 반갑고 기꺼운 미소를 금치 못하였습니다.'옛 인천기상대를 지나 인천공설운동장 상공을 지난 안창남은 분명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와 주변 섬들을 보았을 터다. 그 섬들이 훗날 인천국제공항으로 '상전벽해'가 될 줄을 안창남은 상상이나 했을까. 일제가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던 인천이 안창남의 서울 다음 행선지로 낙점된 것은 선전 효과를 고려하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1923년 9월 도쿄에서 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될 뻔한 안창남은 이듬해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1930년 4월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비행기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안창남이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었다. 항공역사를 연구하는 이윤식 작가가 2012년 펴낸 '항공독립운동과 임도현 비행사'를 보면, 재미교포 이윤호(Lee George)가 1918년 3월께 미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비행훈련을 받고 있다는 신한민보 기사가 있고, 1919년 1월 2일자 신한민보는 이윤호가 조종사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고 보도했다. 1920년대 조선인 비행사 중에는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나온 장덕창(1903∼1972)과 신용욱(1901∼1961), 중국에서 훈련받은 군 비행사 서왈보(1886~1928), 중화민국 공군 장교로 활동한 최용덕(1898~1969)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는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이다.항일운동 최용덕 등 7인 공군창설 주역김정렬·박범집은 '일제육사 장교' 출신1948년 첫 민간 항공사 '대한국민공사'도산·국영화… 조중훈 인수 '대한항공'1920년대 우리나라 비행장은 용산연병장, 여의도비행장, 평양육군비행장이 있었다. 1930년대에 울산비행장, 대구비행장, 청진비행장, 광주비행장, 신의주비행장, 함흥비행장, 나리·오산·해주·강릉불시착장 등이 추가됐다. 김포국제공항의 전신인 김포비행장은 1942년 개장했다. 인천 부평에 있던 군수기지인 일본 육군 조병창에도 헬기 전용 비행장이 있었다. 모두 일본의 군사적 목적으로 조성됐다.조선과 일본 간 정기항공편도 있었다. 월간 '공군' 창간호를 보면, 1927년 6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항공법을 시행하고 1929년 9월부터 한일 간 1주일에 3회씩 여객수송을 시작했다. '항공독립운동과 임도현 비행사'에서 소개한 해방 전 민간항로는 '도쿄~진해~하이난다오', '도쿄~울산~대구~경성~평양~신의주', '도쿄~울산~경성~함흥~톈진' 등이다. 일본 국적 항공사인 일본항공이 이들 노선을 운영했다.조선인으로는 앞서 언급한 신용욱이 운영한 조선항공사업사가 1936년 '경성~이리~광주' 정기항로를 개척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항공사업사의 '경성~중국 하이난다오' 간 국제노선을 전쟁에 징용된 조선인 수송을 전담하도록 했다.일본 본토가 미군 폭격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1944년 10월 신용욱 주도로 군수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 시기 기업가 박흥식(1903~1994)이 주도한 또 다른 군수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도 창립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신용욱은 1948년 10월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대한국민공사'를 설립해 항공사업을 이어갔다. 1962년 경영악화로 도산한 대한국민공사는 국영기업인 '대한항공공사'로 바뀌었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대한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대한항공은 그렇게 태어났다.해방 후 공군 창설은 일본군 장교 출신과 항일운동가 출신인 '7인의 간부'가 주도했다. 항일운동가 출신은 최용덕과 이영무(1905?~?)다. 국무총리까지 오른 김정렬(1917~1992), 박범집(1917~1950)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항공부대 장교였고, 장덕창 등은 민간 비행학교 출신 베테랑 조종사였다.태평양전쟁 때 일본 항공 전대 소속으로 참전한 김정렬은 1993년 출간된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서 일본 육사 출신, 소년비행학교 출신, 일본 학사장교 출신, 지원병 출신, 중국군 출신, 일본 항공대 군무원 출신, 일본 민간 항공사 출신, 국내 항공분야 종사자 출신이 대한민국 공군 창설 작업에 참여했다고 했다. 김정렬은 해방 직후 비행사 90여명, 3년 이상 경력의 정비사 300여명 등 항공분야에 약 500명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기 공군은 육군 산하 항공기지부대로 있다가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연락기 20대에 병력 1천600명 규모였다.항공 여명기의 '전설'로 남은 안창남은 애석하게도 해방 후 항공산업과 공군을 일으켜 세울 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군은 월간 '공군' 창간호에서 "오늘날 독립된 대한을 보지 못한 채 또는 독립된 우리 공중을 날아보지 못하고 불행히도 비행기 사고로서 이역의 이슬이 되신 선배 또는 일본의 전쟁으로 전사한 동포"로 안창남 등을 부르며 대한민국 공군과 항공계 발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행사 화보. 이 행사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했다.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1935년 중국 공군에 복무할 당시 사진으로 알려졌다. 출처/월간 '공군' 2014년 6월호우리나라 첫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의 중국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동로항공사령부 비행사 위임장. 권기옥은 중국 공군에서 10여년 동안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출처/국가기록원'고국 방문 비행' 당시 비행기 '금강호'에 오른 안창남 사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22년 12월 11일자 신문에 실렸다. 출처/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2020-04-15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9)]인간, 하늘을 날다·(上)

마젤란 3년걸린 '세계일주' 오늘날 48시간안에1903년 라이트 형제, 36m 비행후 '압도적 단축'1차 세계대전 기간 유럽 '군용기'로 폭발적 보급전쟁 통해 빠른 발전… B-29, 일본에 원폭 투하전투기 기술 도입… 민간항공 '점보기 시대'로7월 15일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국가(미국)에 외교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보빙사 일행은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항했고, 열차로 갈아탄 끝에 인천을 떠난 지 두 달여 만인 9월 18일 뉴욕에 당도했다. 2020년 4월 현재 인천국제공항에서 뉴욕 JFK공항까지는 대한항공이 운항하는 초대형 여객기 A380(에어버스)을 타면 직항으로 14시간20분이 걸린다. 인천~뉴욕 간 직항로는 약 1만1천㎞다.두 달과 열네 시간, 137년 사이 세계를 이토록 좁힌 건 비행기다. 우리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 사이에 인천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는 시대를 너무도 당연한 듯 여기는데, 코로나19 팬데믹(세계 대유행)으로 하늘길이 막힌 요즘은 '날지 못하는 인간'의 고립감이 어떠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bal Harari)는 2015년 펴낸 '사피엔스'에서 지난 500년 동안의 과학혁명을 이렇게 설명한다.'16세기 이전에는 지구를 일주한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상황은 1522년에 바뀌었다. 마젤란의 배가 7만2천㎞를 항해한 끝에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항해에는 3년이 걸렸으며, 탐험대의 거의 전원이 희생됐다. (중략) 1873년에 쥘 베른은 필리어스 포그라는 부유한 영국인 모험가가 세계를 80일 만에 일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 이야기를 썼다. 오늘날에는 중산층 정도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48시간 만에 쉽고 편안하게 지구를 일주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혁명의 핵심은 '시간의 단축'이다. 인류가 기원전 3천500년~3천년께 바퀴를 발명해낸 것도 작은 힘으로 빠른 시간에 물건을 나르거나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말 자동차 발명과 그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대중화된 자전거도 기원전에 등장한 바퀴로부터 이어진 과학혁명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로스(Icaros)처럼 비행은 인간의 오랜 욕망이었다.비행기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1867~1912)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1871~1948), 이른바 라이트 형제는 정확히 설명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유인 동력 비행기'를 날리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자전거포를 운영하기도 했던 라이트 형제의 초기 비행기는 대부분 부품을 자전거에서 동원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기는 최대 출력이 12마력인 엔진을 동체에 달아 2개의 프로펠러를 가동하게 하는 날개 폭 12m에 길이 6m 크기의 '플라이어'(Flyer)다. 1903년 12월 17일 오전 처음 성공한 비행에서 11㎞/h 속도로 12초 동안 36m를 날았다.라이트형제 이전에도 하늘을 나는 사람들은 있었다. 1783년 최초의 열기구와 수소기구가 하늘에 떴고, 그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탄 열기구가 22m를 날아올라 비행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이용해 떠오르는 비행선의 시대였다. 프랑스 파리에 살던 브라질인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Alberto Santos-Dumont·1873~1932)이 비행선 개발자 겸 조종사로 유명했는데, 그가 1899년 길이 20m짜리 1인승 비행선으로 에펠탑 주위를 선회하는 게 파리에서 가장 큰 볼거리였다. 산투스두몽이 공중에서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는 게 위험해서 당대 최고의 보석세공사 까르띠에(Cartier)가 고안해 전달한 시계가 바로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다. 오늘날 명품 브랜드가 된 그 까르띠에도 결국은 하늘을 나는 데서 탄생했다. 라이트 형제를 필두로 한 동력 비행기가 상업성을 인정받은 때는 형제가 1908년 유럽으로 건너가 잇따라 시험 비행을 성공한 이후부터다.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신기한 볼거리'에서 '전쟁의 주력'으로 실용화한다. 시험 비행으로 유럽을 순회한 라이트 형제의 목적도 결국은 군납품 계약이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발행인 폴 호프먼(Paul Hoffman)이 2003년 쓴 '광기의 날개'를 보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 유럽국가들이 보유한 항공기는 약 700대에 불과했다. 전쟁 초기에는 비무장 정찰기로 썼다. 그러다 한 조종사가 상대편 비행기에 권총을 쏘기 시작했고, 곧 비행기에 기관총을 달았다. 1914년 8월 독일군 타우베(Taube) 단엽기가 파리의 한 기차역에 소형 폭탄 5개를 투하하면서 '공중 폭격'도 시작됐다. 이때 프랑스 여성 1명이 사망해 첫 폭격의 희생자로 기록에 남았다.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라이트 형제가 유럽에서 시험 비행한 지 10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220마력의 엔진에 최대 속도 220㎞/h까지 낼 수 있는 군용기가 등장했다. 이 기간 전쟁 참여국이 생산한 군용기는 약 18만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성장시킨 항공기술은 곧바로 민간수송분야에 적용됐다. 1919년 2월 독일이 2인승 정찰기를 개조한 복엽기로 정기여객노선을 개설했고, 4월부터 항공우편 수송을 시작했다. 그해 8월 영국도 런던~파리 간 정기 여객기를 띄웠는데, 런던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구름 위에 솟은 에펠탑을 보고 목적지를 식별했다.당시 비행사들은 육안으로 항공기를 몰아야 했다. 항공수송사업 경쟁은 위험을 무릅쓰고 야간비행까지 강행하게 했다. '어린왕자'(1943)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1900~1944)도 비행사 출신이다. 생텍쥐페리가 1931년 발표한 자전적 소설 '야간비행'을 보면 조종사들이 밤에 운전하는 것을 얼마나 힘겨워 했는지 알 수 있다.'엄청난 바람에 맞서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떠도는 저 희미한 불빛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빛도 아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감지되는 아주 미세한 어둠의 농도 변화이거나 눈이 피곤해서 생긴 착시 현상이었다.'현재와 비슷한 모습의 근대적인 여객수송기는 193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1933년 보잉사가 개발한 B-247(10석), 록히드사가 개발한 L-10(객석 10석)이 상용화됐고, 유나이티드항공사 등 여객기를 운항하는 항공사가 본격적으로 민간항공 노선을 운영했다. 여성들로 구성된 최초의 항공기 승무원도 이때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민간 여객기는 52석 규모까지 성능을 향상했다.항공기술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다시금 전환점을 맞았다. 참전국은 일일이 그 이름을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형화·고속화한 다양한 기종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경쟁적으로 개발해 전장에 투입했고,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위협을 가했다. 비행기 속도를 700㎞/h 이상으로 끌어올린 '제트엔진'과 '레이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입됐다. 미국 보잉사는 '슈퍼 하늘의 요새'(Super fortress)라 불린 폭 43m, 길이 30m에 무게가 64t에 달하는 당시 초대형 폭격기인 B-29를 개발했다.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가 바로 B-29다.이 거대한 폭격기가 대형 민간 여객수송기의 뿌리다. 보잉사는 B-29 폭격기를 기본으로 설계한 여객기 377 스트라토크루저(Stratocruiser)를 1947년 7월 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을 거치면서 각국 신형 전투기들의 성능이 극대화 되었다. 특히 1990년대 걸프전쟁은 영미권 국가의 F-14, F-15, F-16, 스텔스 전투기 등 최신 군용기의 성능 시험장이 됐다. 전쟁이 비행기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민간 항공기는 그 뒤를 따라가는 구조가 반복됐다.1940년대 군용기에 도입된 제트엔진이 1950년대 들어서는 보잉의 B-707, 더글러스의 DC-8 등 민간 여객기에도 탑재됐다. 1960년대 말에는 제트엔진을 단 중·단거리 수송기가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기차여행보다 항공여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었다. 현재 인천국제공항을 오가는 B-747(500여석), A380(650여석) 등 이른바 '점보기'는 여객기가 점점 대형화한 결과다. 수천년 동안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인류는 1903년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비행하게 되었는데, 그 66년 뒤인 1969년 우주를 날아 달에 착륙했다. 인간이 욕망한 바는 결국 과학으로 실현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류조차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 특히 항공기술의 발전이 전쟁과 군비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역사상 처음으로 '유인 동력 비행기'를 날리는 데 성공한 인물들인 윌버(오른쪽), 오빌 라이트 형제. 이들이 1908~1909년 유럽을 순회하며 첫 유인 동력비행기 시험 비행을 선보이는 모습(사진 오른쪽).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2020-04-08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8)]우여곡절 '인천공항' 이름표

1992년 신공항 명칭공모 '세종' 최다 득표서울·아리랑 등에도 밀려 '인천' 8위 불과1995년 '영종' 결정… 시민단체 반대 운동"변경" 60만명 요구 서명… 현재 이름으로인천국제공항이 지난달 29일 개항 19주년을 맞았다. 문을 연 지 19년,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의 관문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이용객들은 그렇게 '인천'을 기억한다. 그래서 공항의 이름은 '이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 각국의 공항 이름은 그 소재지 명칭이나 그 나라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따는 게 일반적이다. 대부분은 인천공항처럼 도시 이름을 붙이고 있다.인천국제공항에 '인천'이라는 이름표는 쉽게 단 게 아니다. 인천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았다. 인천국제공항 명칭 논의가 시작된 건 1992년부터다. 1990년 영종도 신공항 건설 계획이 확정된 뒤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는 1992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신공항 명칭 공모를 실시했다. 공모 결과 586종, 1천644건의 이름이 모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참여자가 너무 적었다. 1천644건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건 101표를 받은 '세종공항'이었다. 국제공항인 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인 세종대왕의 이름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위는 70표를 얻은 '서울공항'이 차지했고, '아리랑공항', '새서울공항' 등이 뒤를 이었다. '인천공항'은 8위(30표)에 그쳤다. '영종공항'이 6위(54표)로 인천을 앞선 게 눈에 띈다.공모 결과가 발표되자 인천 지역이 들끓었다. 인천시의회가 신공항특별위원회를 꾸려 1992년 7월부터 신공항 명칭에 '인천'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천 지명이 배제될 경우, 신공항 건설 저지 운동까지 펼치겠다고 했다. 국내 최대 공항이 건설되는 땅인 '인천'을 상징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듬해 정부는 공모 당선작 없이 ▲인천공항 ▲세종공항 ▲서울·영종공항 등 3편의 가작만을 발표했다.1995년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의 명칭 결정을 앞두고 경인일보는 신공항의 명칭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1995년 1월 23일자 신문을 보면, "'인천과학아카데미' 대학 등 학계에서도 인천의 국내외적인 인지도, 지역 이름을 따르는 공항 명칭의 통상적 기준, 영문 발음·표기상의 문제, 주민 여론·지역 정서 등을 고려해 인천국제공항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인천의 경우 6·25 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등으로 국내·외적 인지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영문 표기상으로도 양호하다"고 보도했다. 다른 후보인 세종은 외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은 데다 지역 대표성이 없고, 영종의 경우 발음 및 표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적절치 않다고 했다.하지만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은 1995년 1월 26일, 공항명칭 선정 심사위원회를 열고 신공항의 명칭을 '영종국제공항'으로 정했다. 영종이라는 이름이 건설 초기부터 널리 알려졌고, 지역성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인천 시민들은 '인천'이라는 명칭을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해 4월, 인천기독교연합회총회·인천YMCA 등 시민 단체들은 '인천국제공항 명칭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영종국제공항' 명칭 제정에 반대했다. 1995년 4월 19일자 경인일보에는 "시민 자존심 '영종' 용납 못해"라는 제목의 위원회 창립총회 개최 기사가 실렸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당시 심정구 국회의원 등을 비롯해 심상길 인천시의회 의장, 최기선 전 인천시장, 이종인 인천상의 부회장 등 5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해 인천국제공항 명칭 제정을 촉구했다. 이때 최기선 전 시장은 1994년에 터진 '북구청 세무비리'와 관련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명칭 변경을 촉구하는 인천 시민 동의까지 받았는데, 이에 서명한 시민이 약 60만명에 달했다. 당시 인천시의 인구가 약 235만명(KOSIS 국가통계포털 기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민 4명 중 1명이 '인천국제공항'을 위해 적극 나섰던 셈이다.신공항 명칭은 당시 초대 민선시장 선거를 앞둔 후보들에게도 최대 현안이었다. 초대 민선 인천시장 후보로 나선 최기선·신용석·강우혁 등 3명의 후보는 영종국제공항으로 정해진 이름을 '인천국제공항'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결국 건설교통부는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의 결정을 뒤집고 1996년 3월 21일 수도권 신공항의 명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확정, 발표했다. 건설교통부는 전 세계 공항의 90% 정도가 지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공항이 소재한 인천시의 이름을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영종국제공항'은 국제적 인지도가 낮고, 발음도 어려워 피했다고 덧붙였다.정부 발표로 신공항을 둘러싼 명칭 공방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세종국제공항 명칭추진위원회'까지 꾸려 명칭 선정 이후에도 공항명 변경을 주장했고, 인천 지역 사회도 이에 대응하는 대책위를 구성해 인천국제공항의 명칭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결국 개항을 1년여 앞둔 2000년 건설교통부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에 공항명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제출해 마무리 지었다. 현재 인천을 오가는 모든 항공권에는 인천국제공항의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공항코드인 'ICN'이 표기돼 있다. 인천 영문(INCHEON)의 알파벳 첫 글자인 I와 중간의 C, 마지막 N의 조합이다.2006년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이계진 의원은 인천국제공항의 명칭을 '인천-세종국제공항'으로 바꿔야 한다며 인천국제공항공사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인천의 90여개 시민단체는 '인천지역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시민협의회'를 구성해 이런 움직임에 맞섰고, 다시 한 번 '인천국제공항'을 지켜냈다.'서울 인천국제공항' 소재지 국제표기 논란 市 제외 요구에도 아시아나 안내방송 유지세계 4만여개 공항 대부분 '지역명칭' 사용"이름짓기도 서비스상품 브랜딩 과정 일부" 2011년부터는 인천국제공항을 둘러싸고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 정부가 발간하는 항공정보간행물(AIP), ICAO, IATA 등에 '서울'로 등록된 인천국제공항의 소재지를 인천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서울시가 강서구에 있는 김포공항의 이름을 서울공항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설교통부는 2000년, 공항 이용 승객이 많은 중심 도시의 이름을 소재지로 명시하는 것이 국제 관례라며 ICAO 등에 서울을 인천국제공항의 소재지로 등록한 바 있다. 소재지는 서울, 공항명은 인천국제공항인 '서울 인천국제공항'이 된 것이다. 인천시는 국내 항공사에도 '서울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안내 방송에서 '서울'을 제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대부분의 항공사가 이를 수용한 상황이다. 대한항공뿐 아니라 진에어, 티웨이항공 등 대부분 저비용항공사 역시 서울 인천국제공항이 아닌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서울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 방송하는 국내 항공사는 아시아나항공이 유일하다. 인천시는 올해 아시아나항공에도 재차 안내방송 변경을 요구할 계획이다. 인천시 항공정책팀 권정은 주무관은 "인천은 인구 300만에 경제자유구역까지 형성돼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해외 교류가 많아져 서울로 안내할 경우 인천을 찾는 외국인들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며 "올해 하반기, 이 같은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아시아나항공에 다시 한 번 서울이 아닌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장기적으로 해외 항공사에도 요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도쿄 나리타공항이나 하네다공항처럼 IATA 등에 등록된 소재지와 공항명을 함께 안내하고 있는데, 인천국제공항도 이와 같은 경우"라며 "안내방송에 서울도 함께 방송하는 것은 오히려 고객에게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세계 대부분 공항이 인천국제공항과 같이 지역 이름을 공항명으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7개 모든 공항의 이름이 지역명으로 돼 있다.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대구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등이다. 라이트 형제가 1909년 미국 메릴랜드 주에 건설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으로 알려진 '칼리지 파크(College Park)' 공항도 지역명을 공항 이름으로 정했다. '칼리지 파크'는 메릴랜드 주 중부 지역 이름이다. 북한의 주요 국제공항인 '평양 순안국제공항'도 지명을 활용했다. 유명인의 이름을 딴 공항도 적지는 않다.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등이 대표적이다.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의 경우, 1948년 개항할 때는 뉴욕국제공항으로 지명을 공항 이름으로 정했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1963년 명칭을 변경했다. IATA 공항코드도 현재는 이름의 약자를 딴 'JFK'로 쓰고 있다. 영종도와 같이 섬에 건설돼 그 섬의 이름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홍콩의 국제 관문인 '홍콩 첵랍콕(Chek Lap Kok) 국제공항' 등이다. 첵랍콕은 홍콩의 서부 해역에 있는 섬으로, 1998년 개항과 동시에 섬 이름을 공항명으로 쓰고 있다.한국항공대 이상학 경영학부 교수는 "마케팅 측면에서 볼 때 공항의 이름을 짓는 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의 서비스 상품을 브랜딩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며 "지역 입장에서는 당연히 공항 이름에 지역명을 넣고 싶어 하고, 공항 입장에서는 항공사나 승객 유치를 위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명칭을 쓰려고 열을 올리기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 조정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한국항공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4만 개가 넘는 공항이 있다. ICAO가 공항코드를 부여한 공항이다. 한국항공협회가 2년 주기로 발간하는 항공연감의 주요 공항을 보면, 공항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전 세계 7천300여개의 주요 공항 중 약 23%(1천700여곳)가 미국에 몰려 있다. 반대로, 공항이 없는 주권 국가도 있다. 가톨릭 교황국인 바티칸시국, 입헌군주제 국가인 유럽의 리히텐슈타인 등이다. 바티칸시국으로 가려면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을 이용해야 한다.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2007년 1월 18일 오전 인천 송도라마다호텔에서 '인천국제공항 명칭변경 추진관련 대책 간담회'가 열렸다. '인천지역경쟁력강화를위한범시민협의회' 주최로 진행됐으며,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 박창규 시의회 의장, 김정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지역 국회의원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참석했다. /경인일보DB경인일보 1995년 1월 23일자 1면에는 "영종도건설 신공형 명칭, '인천국제공항' 바람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천 지역사회에서는 인천의 국내외 인지도, 지역이름을 따르는 공항명칭의 통상적 기준 등을 고려해 인천국제공항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인천국제공항 전경. 활주로 인근에는 인천국제공항을 나타내는 'INCHEON'이 표시돼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경인일보DB

2020-04-01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7)]단절된 섬 이어준 대교

영종대교, 초기 인천공항 유일 접근로 역할인천대교, 2009년 개통후 인천도심 가까이제3연륙교, 청라 연결 5년뒤 완공목표 추진市, 신도~강화도~해주·개성 '평화도로' 구상공항물류 시너지… 국가도로망 반영 협의중'다리(橋)'는 바다와 강,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인연을 맺어주거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해 주는 것을 '다리를 놓는다'고들 한다.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육지와 단절된 섬이었다. 지금이야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타고 아무 때나 섬과 육지를 오갈 수 있지만, 옛날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영종도는 다리가 놓이면서 내륙 생활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제1연륙교인 영종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통해 서울과 직접 연결됐고, 제2연륙교인 인천대교는 제2경인고속도로를 통해 인천·경기 남부권과 이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설 제3연륙교는 경인고속도로와 연결될 예정이다.영종도는 또 하나의 다리를 꿈꾸고 있다. 바로 남과 북을 잇는 서해평화도로다. 이는 구조물로서의 다리이기도 하지만, 끊어진 남북관계를 다시 연결해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영종도와 인천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게 인천공항이듯이 남북의 중매쟁이도 바로 공항이 될 것이다. 인천공항이 있기에 영종도를 중심으로 한 다리들은 남북간 인적·물적 교류의 핵심 인프라가 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 위치도 참조1990년 6월 인천 영종도가 수도권 신공항 입지로 확정되면서 다리 건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섬을 육지와 연결하는 연륙교 계획과 함께 서울 도심에서 공항까지 45분 이내 도착을 목표로 한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됐다. 2000년 11월 22일 개통한 영종대교는 인천공항 개항 초기 유일한 접근로였다. 우리나라 사회간접자본시설(SOC) 역사상 최초로 민자 사업으로 진행됐다. 영종대교는 공항과 경기도 고양을 연결하는 36.6㎞ 길이의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해상 구간이다. 인천 중구 운서동과 서구 경서동을 잇는 길이 4.42㎞의 다리를 49개의 교각이 떠받치고 있다. 상층엔 도로, 하층엔 철로(공항철도)가 놓여 흔하지 않은 복층 구조 다리라는 점이 특징이다. 11개 건설사의 출자로 설립된 민간사업시행자인 신공항하이웨이(주)가 총 사업비 1조7천342억원(육상구간 포함)을 투입해 건설했다.인천 송도국제도시와 공항을 연결하는 인천대교는 2009년 10월 16일 개통했다. 총 길이가 21.348㎞에 달하고 이 가운데 해상구간이 12.34㎞로 영종대교의 약 4배다. 사업비는 민자구간 1조5천201억원, 국가사업 구간 8천628억원을 합해 총 2조3천829억원에 이른다. 해상구간은 민자사업자인 인천대교(주)가 맡았고, 육상 연결도로는 한국도로공사가 시행했다.인천대교는 처음에는 해저터널로 계획됐지만, 막대한 비용과 오랜 공사 기간, 유지 관리 어려움이 걸림돌이 됐다. 1995년 11월 경인일보는 제2연륙교 해저터널의 타당성을 짚어보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이런 이유 때문에 해저터널보다는 해상교량 방식이 더 낫다는 여론이 우세했다.초기 인천공항 접근 교통망은 서울 편의 위주로 짜였기 때문에 정작 인천시민들은 개항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인천대교의 개통은 인천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이동을 더 수월하게 했다. 그저 '제2연륙교'로만 불리던 무명의 이 다리는 송도국제대교, 황해대교 등의 명칭이 거론됐으나 여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인천대교'라는 이름을 얻어 인천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하게 됐다.영종대교와 인천대교의 건설은 그야말로 바다에 길을 내는 험난한 토목 사업이었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 사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도의 기술력과 장비, 인력, 예산이 필요했다. 두 다리는 당시 토목기술의 '끝판왕'격이었다.아주 오래 전, 다리는 냇가에 큰 돌덩이 등을 놓은 징검다리나 통나무 다리 등 원시적인 형태로 시작했고 아치 형태의 교량부터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축조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꼽히는데 이는 석조 아치교다.다리는 하중을 어떻게 분산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건너는 구간이 짧다면 널빤지 형태의 구조물만 얹으면 되지만 거리가 길면 휘어질 우려가 있어 중간중간 교각을 놓아야 한다. 교각 사이 폭은 가까울수록 안정적이나 이 경우 선박이 다닐 수 없고 물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기술이 바로 주탑과 케이블을 이용해 교각 사이를 크게 벌리는 현수교와 사장교 방식이다.영종도 북단에 위치한 영종대교는 대형 선박이 많이 운항하지는 않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인천대교는 사정이 달랐다. 인천항의 무역선과 여객선의 항로를 가로지르는 노선이어서 인천대교 하부를 선박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하늘길을 열자고 바닷길을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인천대교는 일반적으로 30~50m인 교각 사이 폭을 800m까지 벌리기 위해 '사장교' 방식을 도입했다. 주탑에서 대각선으로 뻗어 나온 케이블의 수평력이 다리의 상판을 지탱해 휘어짐을 막는 방식이다. 인천대교의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높이 225m '역 Y자' 형태의 두 개의 탑과 케이블은 장식용이 아니라 다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주탑 간격 300m의 영종대교는 '현수교' 방식으로 지어졌다. 현수교는 사장교처럼 주탑과 케이블로 구성됐지만, 케이블이 대각선인 사장교와 달리 수직으로 설치된 게 다른 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금문교)'가 대표적인 현수교다.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앞바다의 특성상 두 대교의 건설은 바다와의 싸움이었다. 영종대교는 일부 해상구간에 차수막을 설치하고 물을 완전히 뺀 다음에 육상 구간처럼 공사했다. 그러나 인천대교는 물막이 작업 없이 해상에서 파일을 박고 육상에서 미리 만든 구조물을 얹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천t의 장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달린 바지를 띄워 공사를 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에서 처음 선보이는 방식이었다.인천대교 사업에 참여한 (주)유신 구조부 이경훈 부사장(토목구조기술사)은 "바지 같은 해상장비를 바다에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 놓고 그 위에 육상에서 사용하는 장비를 실어 기초공사를 해야 했는데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인천대교는 당시에는 국내에 없던 설계방식이 도입됐고, 빠른 진행을 위한 최적화 공법이 적용됐다"고 말했다. (주)유신은 영종대교의 기본 설계를 맡았고, 인천대교의 설계·시공 감리를 했다.이 부사장은 또 "인천대교의 해저터널이 무산된 이유는 경제성과 공사 기간 문제도 있었지만, 깊이 40m 이하로 들어가기 위한 경사도가 잘 나오지 않아 물리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영종도에는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에 이은 제3연륙교 건설이 추진 중이다. 제3연륙교 사업은 영종과 청라를 연결하는 길이 4.6㎞의 교량 건설 사업이다. 청라와 영종 경제자유구역 사업을 맡은 LH가 제3연륙교 건설비 5천억원을 조성원가에 반영해 2005년부터 건설을 추진했으나 15년째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제3연륙교 건설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운영하는 민자 사업자에 손실을 끼칠 수 있어 손실 보상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이유가 컸다. 현재 실시설계 용역이 진행 중으로 2025년 하반기 개통이 목표다.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기존의 고속도로망과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영종도에서는 3개의 연륙교 외에도 남북 평화시대를 대비한 대형 프로젝트가 최근 그 첫발을 내디뎠다. 바로 서해평화도로 1단계 사업인 영종~신도 간(3.8㎞) 다리 건설 사업이다. 서해평화도로는 영종도와 신도(옹진군 북도면), 강화도를 다리로 연결하고, 더 나아가 해주와 개성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연결하는 사업이다. 인천시는 4월 1단계 구간 설계·시공을 위한 업체 선정에 착수해 올해 말에는 착공할 예정으로 2단계 구간인 신도~강화도 구간(11.1㎞)이 '제2차 국가 도로망 종합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국토교통부와 협의 중이다. 서해평화도로의 구상은 바로 인천공항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개성공단과 같은 북녘의 공간이 남쪽의 인천항과 인천공항 등의 뛰어난 물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배용환 인천시 도로과장은 "국가 계획에 서해평화도로가 반영되면 인천에서 김포를 거치지 않고 영종도를 통해 강화도, 더 나아가 북한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진다"며 "1단계 사업인 영종~신도 구간부터 차질없이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주탑 사이에 상판을 연결하기 전의 인천대교 공사 현장 모습. 총 길이 21.348㎞의 인천대교는 52개월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9년 10월 16일 개통했다. /인천대교(주) 제공영종대교의 낮. /신공항하이웨이(주) 제공영종대교의 밤. /신공항하이웨이(주) 제공제2연륙교(인천대교)의 해저터널 방식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분석한 경인일보 1995년 11월 23일자 지면.

2020-03-25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지반침하 우려 제기 속 성공적 건설일본 제치고 '벤치마킹' 사례로 꼽혀바다 위에 건설한 인천국제공항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술력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바다를 메운 땅에 건설했지만 지반 침하 등의 문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반면 일본 간사이국제공항은 지반 침하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토목 실패 사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인천공항 지반공사 설계를 맡았던 (주)유신 최인걸 인천지사장은 "간사이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토목공사 실패 사례로 평가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건축물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세계 공항에서도 간사이공항처럼 문제가 불거진 공항은 거의 없다"고 했다. (주)유신은 인천공항 건설사업 설계와 감리 업무를 수행했으며, 당시 최 지사장은 기술본부장을 맡고 있었다.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인 '마르퀴스 후즈 후'와 영국케임브리지국제인명센터(IBC)에서 발행하는 '세계 100대 엔지니어'에 등재된 토목 전문가다. 최 지사장은 "인천공항 개항 이전부터 지반 침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시료 채취와 분석 등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그는 2000년 일본에서 열린 '지반공학 국제심포지엄(ISLT·International Symposium Lowland Technology)'에서 인천공항 건설 과정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미국, 유럽, 동남아 등 각국에서 온 학자들이 참여했고, 인천공항을 완성한 한국 건설산업의 우수한 기술력에 찬사를 보냈다. 반면 행사에 참여한 일본 학자들은 예상보다 빨리 침하하는 간사이공항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내진 설계 등 토목 부문 기술력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간사이공항은 10m 넘게 침하했다.그는 "인천공항의 성공적인 건설이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며 "대한민국의 토목 기술은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말했다.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석인 연구위원은 "지반 침하 문제는 간사이공항을 대표적인 토목 실패 사례로 거론하는 주요 이유"라며 "우리 인천공항을 간사이공항과 견주었을 때 그 성과는 더욱 극명하다"고 했다. → 연중기획 12면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20-03-18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첨단공법 과시 영종도 대공사1992년부터 공항면적의 82% 매립 공사200만대 착륙 불구 예상침하 절반 안돼11m 내려간 '日 간사이공항 섬'과 대조'4개의 섬' 생활권 묶여… 인근섬도 변화"교통환경 나아졌지만 교류기회는 줄어"'인천국제공항, 일본을 부끄럽게 하다!'일본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국제공항 지반은 건설 당시보다 11m 이상 내려앉았다. 간사이공항은 육지에서 5㎞ 떨어진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인공섬 위에 건설됐으며, 1994년 개항했다. 매립 공항이라는 점 때문에 침하는 설계 때부터 예상됐으나, 침하 속도와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예상대로라면 50년에 걸쳐 진행될 침하 폭이 조성 6년 만에 이뤄졌다. 속도는 더뎌졌으나 지금도 매년 침하가 이뤄지고 있다.인천국제공항도 바다를 메워 조성됐다. 간사이공항의 사례 때문에 인천공항도 부지 선정 때부터 개항 때까지 지반 침하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대체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공항 부지로 인천 영종도가 선정된 것은 1990년 6월 14일이다. 설계를 거쳐 1992년 11월 1단계 부지조성공사가 시작됐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메우는 공사가 뼈대였다. 인천공항 전체 부지면적 5천619만8천600㎡ 중에서 해상면적은 82%에 해당하는 4천600만㎡에 달했다. 특히 활주로, 계류장, 관제탑 등 인천공항 주요 시설들은 모두 해상 부분에 위치하는 것으로 설계됐다.공항은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만큼, 큰 하중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견고해야 한다. 하지만 인천공항이 해상을 매립해 들어선다는 이유로 지반 침하 주장이 불거졌다. 특히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경파괴와 지반침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2000년 1월, "공사가 시작된 92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은 '갯벌을 매립해 공항을 건설했을 때 과연 첨단공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부등침하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었다"며 "영종도 공항은 너무나 넓은 면적에 두터운 뻘층이 다양한 양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어떨까. 인천공항은 개항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각의 우려처럼 지반 침하 등의 문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991년부터 2020년 2월까지 인천공항 활주로 누적 침하량은 0.042~2.9㎝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인천공항 토목 설계 회사가 예측한 침하 폭 7.5㎝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20년이 흘렀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안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도로와 계류장의 침하량도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항공기의 무게는 보통 승객과 화물까지 더하면 200~300t에 달한다. 그렇게 무거운 항공기가 시속 200㎞ 넘는 속도로 하강하다 굉음과 함께 활주로에 바퀴를 붙인다. 2001년 개항부터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린 항공기는 총 200만대다. 이륙까지 포함한 운항횟수는 400만회를 넘었다.인천공항의 안전성은 침하가 급격히 이뤄지는 일본 간사이공항과 비교되고는 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석인 연구위원은 "간사이공항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지반이 침하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며 "개항 6년 만에 여객빌딩 주변 지반이 12m 침하되고, 다른 곳도 평균 11m 가라앉아 '부등침하'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인천공항 건설 시에도 이러한 침하의 우려가 있었으나 침하와 관련한 아무런 문제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설계업체인 (주)유신의 최인걸 인천지사장은 인천공항 설계와 감리를 맡아 1995년부터 2001년 인천공항 개항 때까지 기술본부장을 맡았고 그 현장에 있었다.최 지사장은 "인천공항은 침하를 막기 위해 지반조사 등을 정밀하게 진행했고, 각 지질의 성질 등을 파악해 지반 침하를 막기 위한 첨단 방법을 동원했다"며 "안전하면서도 세계적인 공항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면 지금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인천공항 조성 경험을 일본에서 소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일본 사가대학교에서 열린 지반공학 국제심포지엄에서 인천공항 사례를 발표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인천공항의 건설 기술에 대해 감탄했다"며 "간사이공항 침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 학자들이 부끄럽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1천년의 인천 해상매립 역사고려 강화도 천도후 식량확보 위해 메워김구, 젊은시절 일제 인천항 축조 동원도월미도·송도·남동·주안산단 등 '옛 바다'인천공항 입지 선정부터 안전성 우려가 제기된 만큼, 부지 조성 단계부터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지반조사는 부지조성구간 전체를 대상으로 2천300개소에서 시추조사를 진행했고, 3만2천212회의 현장시험과 2만7천267회의 실내시험을 거쳤다. 연약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강관파일 3만2천여 개를 박았다. 강관파일은 일렬로 세우면 1천682㎞에 달한다. 서울과 부산을 2차례 왕복할 수 있는 길이이다.인천공항 건설을 위해 메워야 하는 바다는 만조 시 평균 수심이 1~2m로 얕았다. 그 규모는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해당한다. 이 너른 바다를 메우기 위해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총 길이 17.3㎞의 방조제를 쌓았다. 방조제로 막은 바다에 5m 두께로 1억8천만㎥ 토사를 부어 부지를 조성했다. 토사는 신불도와 삼목도의 산과 용유도 오성산을 깎아 마련했다. 이 때문에 100m를 넘던 이들 산의 높이는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 부족한 토사는 인근 바다에서 채취했다. 인천은 바다 매립과 관련해서는 1천년의 경험을 갖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도시이다. 그동안 꾸준히 바다를 메워 도시를 확장·발전해 왔다. 고려시대부터 바다를 메웠고, 그 땅은 농경지로, 공업단지로, 신도시로, 공항과 항만으로 활용되어 왔다.고려시대 강화도는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만들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가 개성에서 강화도로 이전됐고, 강화에 급격한 늘어난 주민들의 식량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임금 고종이 몽골 침입 20여 년 뒤인 1256년 2월, 매립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제포(梯浦)와 와포(瓦浦)에 둑을 쌓아 좌둔전(左屯田)으로 삼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는 우둔전(右屯田)으로 삼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매립을 위한 인력 동원 방식과 자금 조달 방안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바다를 매립해 생긴 땅은 농경지로 활용했다. 이후에도 매립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강화 석모도와 송가도를 이어 매립지가 만들어졌다. 현재 인천 지도를 보면 매립지가 도시 전체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인천 중구 월미도는 소월미도와 합쳐졌다. 일제강점기 때 김구는 인천 앞바다를 매립해 만든 인천항 축조 공사에 동원됐다. 인천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남동국가산업단지, 주안국가산업단지도 과거엔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장인 수도권매립지, 각종 국제기구와 글로벌 기업들이 운영되고 있는 송도국제도시도 바다 위에 세워졌다. 인천의 주요 시설 다수가 매립지 위에 조성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인천공항 조성을 위한 바다 매립은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영종도와 용유도 등 각 섬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은 한 생활권으로 묶이게 됐다. 염전 등 바다와 관련된 직업이 대부분이었던 섬마을은 '공항 도시'로 바뀌었다. 이는 주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종도 서북쪽에 위치한 장봉도와 신도, 시도, 모도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인천공항 조성 공사가 시작되기 전 이들 섬 주민들은 뭍으로 가기 위해 탄 배는 연안여객터미널이 종착지였다.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올 때는 그 반대였다. 이 배는 세어도,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등 여러 섬을 거쳤고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한 번 운행하는 데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영종도와 용유도가 매립되면서 이 뱃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됐고, 연안부두보다 가까운 곳에 삼목선착장이 조성됐다. 삼목선착장은 매립으로 영종도와 합쳐지기 전 삼목도 자리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배 타는 시간은 30분으로 줄었다. 배 운항횟수도 기존엔 하루 1차례에 불과했으나 16차례로 늘어났다. 교통 환경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연안부두 등 기존에 배를 타기 위해 들렀던 지역과는 왕래가 줄어들었다.장봉도 주민 박광국 씨는 "이제는 장봉도 주민들이 연안부두를 갈 이유가 없어졌다. 생활 권역이 바뀌게 된 것"이라며 "과거엔 선착장에서 주민들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에 탄 채로 배에 오르기 때문에 주민들과 교류하는 풍경은 없어졌다"고 했다.인천공항 건설은 주민들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과거 삶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도 됐다. 인천 삼목도와 신불도 등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인천공항의 건설을 계기로 문화재 조사가 진행됐다. 1차 발굴조사는 1995년 9월부터 1996년 9월까지 진행됐다. 그 결과 삼목도에서 신석기 후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는 등 서해 연안 도서 지역의 선사 문화를 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영종도 열병합발전소 예정지와 용유도 지역에서 진행된 2차 발굴조사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만 모두 1만여 점에 이른다. 현재도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인천공항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유물 조사 결과 영종도는 국내 최대 신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운서동 한 지점에서 유물이 58기 나왔고,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서울 암사동 유적(30기), 안산 신길 유적(24기), 시흥 능곡 유적(26기) 등과 비교해도 월등히 많다"며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도 전기 신석기 시대로서 한반도 신석기 시대 주거문화 연구를 위한 표준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고 설명했다./정운기자 jw33@kyeongin.com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인천공항 부지를 항공촬영한 사진. 인천공항 매립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준다.인천공항 부지조성 공사 현장.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 건설을 위해 방조제를 쌓고 바다를 막는 '물막이'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2020-03-18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5)]섬마을, 금싸라기 땅이 되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매립 공항 건설"교통부 부인에도 외지인 몰려들어 투기그해 1분기에만 땅값 70% 넘게 올라가개발정보 유출·대기업 소유 등 의혹도1990년 6월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확정됐을 때 작은 섬마을이던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는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몇 년 전부터 소문이 돌면서 이미 땅값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을 계획한 일정과 예산에 맞춰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정부'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바다를 그냥 내어줄 수 없다는 '주민' 간 보상문제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투기꾼들'까지 가세하면서 영종도에는 욕망이 들끓는 부동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정부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 가장 큰 사회적 관심거리이자 걸림돌은 보상문제이다. 오죽하면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에도 철거 보상이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경복궁 영건일기'(19세기 말·일본 와세다대학 소장)를 토대로 지난해 12월 펴낸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보면, 1865년(고종 2년) 4월 한성부가 경복궁 주변 기와집 85칸, 초가집 592칸, 임시가옥 10칸 반에 한 칸당 각각 10냥, 5냥, 2냥씩 철거 보상금을 지급했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무상으로 몰수할지를 두고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보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이때부터 이듬해까지 경복궁을 둘러싼 기와집 1천872칸, 초가집 2천553칸, 임시가옥 77칸 등 총 4천502칸에 달하는 민가가 보상금을 받고 철거됐다. 당시 경복궁 중건사업을 위해 전국에서 거둬들인 돈은 83만4천266냥이었는데, 이 가운데 4%인 3만3천833냥을 보상비로 썼다. 1865년 경복궁 공사에 참여한 담모군(일꾼)과 장인(기술자)은 역할에 따라 하루 품삯으로 2.5~4전을 받았다. 당시 화폐 단위로 10전은 1냥이다.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복궁 중건은 당시 국가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최대 건설 프로젝트였다. 둘 다 그만큼 시급하고 절실했다. 이들 프로젝트 모두 사업대상지의 주민 협조가 필수 불가결한 과제였다.인천공항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총 5천619만㎡ 부지가 필요했다. 대부분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매립해 확보했고, 보상이 필요한 사유지는 944만5천㎡로 계획됐다. 영종·용유지역 일부에 삼목도와 신불도 전체를 포함하는 면적이다. 바다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주민들의 어업권 보상도 이뤄졌다.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전신 격인 한국공항공단(현 한국공항공사)은 1991년부터 2001년 2월까지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토지 보상을 진행했다. 이 기간 총 보상금은 2천686억원인데, 워낙 장기간에 걸쳐 집행했기 때문에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보상금 규모를 환산하기는 어렵다.한국공항공단이 공식적인 보상절차에 돌입하기 전부터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에는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인천시 순시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3월 8일 새해 연두방문 차원으로 인천시청을 찾아 "수도권 지역의 제2국제공항을 인천의 영종도나 인근 바다 매립지에 건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990년 6월 교통부의 확정 발표가 있기 무려 1년 3개월 전이다.교통부는 노 대통령이 언급한 지 이틀 만에 '영종도 공항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대통령 발언 직후 하루 수백명의 외지인이 영종도로 몰려들어 땅을 사들였다. 속칭 '떴다방'(불법 임시 중개시설)이 성행하면서 '가짜 개발 구상도'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1989년 6월 각종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그해 1분기 영종도와 용유도 땅값은 전년도 4분기보다 70.42%나 급등해 전국 최고 수준의 오름세를 보였다. 이때 서울 강남구 땅값이 전년도 4분기보다 30.97% 오른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이다. 1990년 8월 평화민주당 토지투기조사위원회는 영종도와 용유도 전체 토지 가운데 73%가 외지인 소유라고 주장하며 개발정보가 사전에 유출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대기업 소유라고 평민당은 주장했다.주민들 대책위 꾸려 공단과 협상 나서공유수면 매립 어업권도 단계적 보상어선사재기 횡행·"금액 적다" 소송도영종도 일대 섬 주민들도 1990년대 들어서 섬별, 마을별로 보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한국공항공단과의 보상협의를 준비했다. 정부는 공시지가보다 다소 높은 보상금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실거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낮다고 반발했다. 경인일보 1992년 1월 4일자 신문을 보면, 영종도 운서동 주민들은 "공항부지 중 외지인 소유 43필지 12만여평의 평당 보상가 4만~5만원은 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임의시가 10만원 선의 절반에 못 미친다"며 "교통부가 현지 주민들은 제쳐 두고 현실감이 덜한 외지인을 대상으로 우선 보상협의에 나선 것은 계략"이라고 반발했다.삼목도 쪽 인천공항 기공식 부지도 주민 반발에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1992년 9월 개최하려던 인천공항 기공식이 11월로 미뤄지기도 했다. 1996년 5월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주민대표로 참석한 강영복(85)씨는 김영삼 대통령 바로 옆에서 함께 발파버튼을 눌렀다. 강영복 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보상 잘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잘 못 받았다고 대답했다"며 "대답을 들은 대통령이 주민들을 더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보상협의 과정은 어땠는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삼목주민보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유건호(63) 중구농협 조합장에게 들어봤다. 그의 가족은 6대째 삼목도와 영종도에서 살고 있다. 유건호 조합장은 "주민보상대책위가 13번에 걸쳐 자체적으로 토지 감정평가를 받아서 한국공항공단과 협상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평당 7만원 부르던 땅을 수십만원까지 올려 보상받았다"며 "땅만 갖고 따지는 게 아니라 농작물, 돼지나 소 같은 가축을 두고도 한바탕 씨름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인천공항 보상이 전국적인 '롤모델'이 됐는지 전국의 국책사업 예정지 주민들이 유건호 조합장에게 '제대로 보상받는 법'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안국제공항 예정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는 그 지역 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압력을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인천공항 건설로 섬 전체가 수용되기 전까지 삼목도에는 200여 가구가 살았다. 적게 보상받은 사람이 3천만원, 많게는 100억원 넘게 보상금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삼목도 사람들은 마을 농악계도 활발하고, 자체 장학회도 운영할 정도로 끈끈했다고 한다. 유건호 조합장은 "대책위에 브로커가 끼려고도 했지만, 주민들이 워낙 단결이 좋아서 끝까지 스스로 협상했고 내부 분쟁도 적었다"며 "삼목애향회와 삼목장학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인천공항은 4개의 섬 일대 공유수면을 매립해 건설했기 때문에 어업에도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991년부터 어업 피해 조사용역을 진행하기 시작해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어업권 보상에 나섰다. 보상지역은 영종·용유뿐 아니라 옹진군 북도면 장봉도와 신·시·모도, 강화와 김포 일대까지였다. 바지락, 굴 등을 양식하는 '면허어업' 990억원, 어선과 어구를 이용하는 '허가어업' 197억원, 맨손으로 어패류를 채취하는 '신고어업' 127억원이 보상금으로 집행됐다. 인허가 절차 없이 어업활동을 했던 무면허·무허가·무신고 어업 관련해서도 보상대상으로 선정해 총 242억원을 보상했다. 일부 어민들은 보상금이 낮게 책정됐다며 인천공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노인 상대 '금전 요구' 협박전화 많아도박으로 돈 날리고 막노동판 전전도초기 공항직원과 주민 '미운정 고운정'어업권 보상을 노린 '어선 사재기'도 적지 않았다. 경인일보 1990년 8월 29일자 신문을 보면, 당시 중구청에 등록된 어선은 영종지역 어촌계 78척, 용유지역 어촌계 141척 등 모두 219척으로 연초보다 30척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빚을 내서라도 강화도나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폐선 직전의 어선을 1척당 500만~1천500만원씩 주고 사들였다. 물론 대부분은 조업활동을 하지 않고 정박시켜 놨다.영종·용유지역 어민들은 보상 대상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보상금이 무더기로 지급됐다고 인천수협 등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천지검은 1993년 7월 어업 보상 대상자 선정 경위 등을 수사한 결과, 보상금 총 8억5천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무자격자에게 지급한 어촌계장 등 5명을 구속했다.보상받은 주민들이 마냥 행복한 삶을 살진 않았다. 노인들이 사는 집을 골라서 "손주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알고 있다"며 돈을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협박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보상금으로 영종도 땅을 다시 사는 주민도 상당수였는데, "건축허가가 나면 땅값이 10배 이상 뛸 것"이라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쓸모없는 땅을 수십억원씩 주고 샀다가 빈털터리가 된 사람도 많았다. 50대 영종도 토박이 주민은 "2006년 12월에 2차 토지보상을 받고, 이듬해 설 명절에 안 싸운 집이 없을 정도로 가족·친척 간 갈등이 많았다"며 "보상받고 강원랜드에서 하루에 1억원씩 날리면서도 '잘 놀았다'고 떵떵거리던 주민이 지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보상협의 과정에서 정부와 주민 간 오해를 푸는 데는 강동석(82)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역할이 컸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강동석 전 장관은 1994년 출범한 신공항건설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인천공항 건설공사를 주도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냈다. 강영복 씨는 "강동석 장관이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면서 항상 공단 직원들에게 주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주문하곤 했다"며 "인천국제공항공사 초기 직원들은 현장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보상이 끝난 이후에도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94년 10월 27일 인천국제공항 건설현장 인근에서 영종·용유·삼목·신불 주민 700여명이 상여를 앞세워 보상 등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으로 섬 전체가 수용된 삼목도의 초대 보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강영복 씨(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1996년 5월에 열린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주민대표로 참석해 김영삼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 바로 옆에 서서 발파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강영복 씨에게 보상은 잘 받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 제공

2020-03-11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4)]인천국제공항 입지

#1960년대 '신공항론' 대두일제 '대륙침략' 기항지 여의도공항 건설1939년 김포에 '군용'… 해방후 관문 역할항공수요 급증… 대체지 낙점 20여년 걸려#처음부터 영종은 아니었다1989년 4차 타당성조사까지 이름 안올라소음피해·공사비 적고 서울 접근도 용이환경훼손 논란에도 시화지구 제치고 선정소금 굽던 섬마을 인천 영종도가 왜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는지는 과거의 선정 과정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천국제공항의 성공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천이 아닌 곳에 공항이 들어선다는 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의 영종도 유치는 한반도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수도권 관문도시 기능을 타고났던 인천의 숙명이기도 했다.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은 영종도와 마찬가지로 섬에 지어졌다. 일제는 1916년 서울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해 비행장을 건설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한강의 사구(沙丘)로 도심과 단절돼 소나 키우던 작은 섬이었다. 용산과 노량진 등 당시 경인철도가 설치된 서울의 요충지와 인접해 있으면서 인적이 드문 여의도는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다.1916년 6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용산철교의 하류 한강중의 대사주(大砂洲) 여의도는 71만평의 대사원(大沙原)인데 사구상(沙丘上) 100여호의 농촌은 6월 말로 전부 퇴거케 하야 목하 과반수는 철퇴하얏는데 다수는 영등포 부근의 시흥군 관내에 이주하는 중이며 차지(此地)는 군용지로 심히 고가로 매수한 것이라더라"는 기사가 실렸다.초기 여의도공항은 간이 비행장에 가까웠다. 이후 일본에서 항공 관련 법령이 제정됐고, 1929년 노량진~여의도 사이 도로 개설 사업이 완료되면서 격납고와 대합실 등 제법 공항의 모습을 갖췄다. 1㎞ 길이의 노량진~여의도 간 도로는 지금으로 치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도심과 공항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했다.여의도공항은 좋게 말하면 동북아 '허브공항' 역할을 했지만, 이는 일제의 침략 거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중간 기항지 역할을 했던 거였다.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이런 굴곡진 역사를 가진 여의도공항에 장준하 등 임시정부 선발대가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해방 조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도 C-47로 여의도 땅을 밟았다. 지금의 여의도공원 자리다.여의도를 시작으로 평양과 대구, 신의주, 함흥, 청진, 울산 등 6개 지역에 간이 비행장이 설치됐고, 1939년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이 역시 군용으로 만들어졌다. 김포공항은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였는데 지금은 서울에 편입됐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돼 공항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77년 신설된 강서구로 재배치됐다.김포공항 자리는 너른 평야였다. 도심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등을 통해 서울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여의도공항의 기능을 흡수했고, 이때부터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2001년까지 대한민국 하늘길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 건설 필요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김포공항은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확장됐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가 1951년 유엔군에 의해 길이 2천468m, 폭 45m의 활주로로 다시 태어났다.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항공수요를 전담하다시피 한 김포공항은 1960년 후반부터 수요가 급증하고, 대형기가 취항함에 따라 수도권 신공항 건설이 정부 과제로 떠올랐다. 30년 전 인천 영종도가 수도권 신공항으로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4차례에 걸친 타당성 조사와 경기도 남부권 간척지 시화1·2지구와 경쟁 끝에 1990년 6월 영종도가 낙점됐다.1969~1970년 실시된 1차 타당성 조사에서는 미국의 공항전문 업체가 김포공항 확장과 수원 이전 방안을 검토했다. 이때만 해도 해안에 공항을 짓는 것은 수도권 교통망이나 경제·기술 여건상 엄두도 못 낼 사업이었다. 그러나 수원은 도심권 소음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결국 김포공항 확장이 최종안으로 채택됐다. 정부는 1980년까지 청사 건립과 활주로 확장 등 1·2단계 확장 사업을 진행했다.수도권 신공항 후보지 2차 조사는 1979~198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맡았다. 1990년이면 김포공항이 한계에 다다를 것이란 예측 속에 반월공단 인근 해변인 군자 지역, 시화 간척지 일부와 육지를 포함하는 남양지역, 이천 평야지대, 수원 군(軍) 공항 등이 거론됐다. KIST는 군자 지역을 최적지로 건의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주요 공군 기지인 수원·오산의 군용기 항로와 겹쳐 충돌 위험이 크다며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대안이었던 이천도 당시 식량 자급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논밭 훼손을 우려하는 여론이 일었고, 상수원 오염 문제도 있었다. 결국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김포공항 3단계 확장을 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지어졌다.정부는 곧바로 3차 타당성 조사에 착수했다. 1982~1983년 국내외 업체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신공항 후보지를 재조사했다. 조사대상은 수원, 이천, 오산, 평택, 아산, 천안, 청주 등으로 충청권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조사 결과에서는 평택, 이천 지역이 우수하다고 나왔으나 정치권 입김이 작용해 서울과 124㎞나 떨어진 청주 군 공항이 선정됐다. 국토 균형개발과 수도권 인구 분산 논리였다. 청주공항은 대통령에까지 보고돼 추진됐으나 결국에는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이 아닌 중부권 공항으로서 역할이 축소됐다.1988년 초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도권 신공항 문제가 다시 불을 지폈다. 김포공항 주변 소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추가 확장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정부는 소음피해가 없고, 24시간 운영이 가능한 해안 또는 해상에 수도권 신공항을 짓기로 하고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때 처음 인천의 외딴 섬 영종도의 이름이 등장했다.1989년 정부는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신공항의 조건을 크게 6가지로 정했다. 조건은 ▲단계별 확장이 가능한 부지 ▲공항도시 개념 도입 ▲육해공 복합운송 기지화 ▲소음피해 해소 ▲24시간 운영 ▲아시아 최대 허브 기능 등이었다.4차 타당성 조사는 1989~1990년 국내외 공항 전문 용역사의 합작으로 진행됐다. 입지선정의 정책적 기준이 6가지였다면 기술·경제적 기준은 10가지였다. 공역과 장애물, 기상, 지형, 접근성, 환경, 토지이용, 확장, 지원시설 확보, 건설비 등이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경기·충청권 22개 후보지에 대한 예비 조사를 했고, 이를 7개로 압축한 뒤 영종도와 시화1·2지구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두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는 갯벌이라는 점에서 유사했고, 여러 조건이 비슷했으나 결국 영종도가 최종 낙점됐다.영종도는 시화지구에 비해 소음 피해가 적었고, 수심이 2m 더 낮아 공사비가 적게 들었다. 특히, 공역 부문에서 시화는 수원·오산 군 공항의 영향을 받았다. 서울 기준 접근성도 영종도는 50㎞, 시화는 70㎞ 거리였고, 영종도는 미개발지인 서울 북부와 김포를 관통하는 전용도로 개설이 쉬웠으나 시화는 영등포와 안산 신도시 등 기존 도심을 가르는 도로를 건설해야 했다. 영종도는 기존 김포공항과의 연계도 용이했고, 시화는 주변에 농공단지가 개발될 계획이라서 공장 매연이 안개처럼 시정을 악화할 우려가 있었다. 정부는 1990년 6월 14일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 3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영종도를 후보지로 결정했다.반대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환경단체와 입지 탈락지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있었고, 대책위까지 구성돼 여론전을 펼쳤다. 이들은 "김포공항과 중복되고, 공항 규모가 지나치게 크며 매립공사와 연약지반 보강 등 건설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에서 입지로서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철새 도래지와 갯벌 훼손 등 환경파괴 논란이 일었고, 경인 축 교통난을 이유로 '서울에서 영종도까지 3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인천공항 개항 이후 눈 녹듯 사라졌다.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인천공항 입지 선정 당시만 해도 여러 우려가 제기됐지만, 20년째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불식이 됐다"며 "영종도는 섬과 섬을 매립해 만든 넓은 땅을 활용한 활주로 확장 가능성이 풍부하고, 도심과 떨어져 24시간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영종도는 '에어포트'뿐 아니라 레저, 쇼핑, 관광까지 가능한 '에어시티' 개념으로 성장했다"며 "만일 시화지구로 선정이 됐다면 공단 때문에 여러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영종도는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대외 요충지였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 경기도 강화부 편에는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들이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며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강화도)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나와 있다.지종학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입장에서 보면 남북통일을 가정했을 때 서해안 섬(영종도)이야말로 글로벌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며 "지금은 접경지역이라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강화도 한강하구(조강)를 다니지 못하지만, 통일이 되면 반드시 서해안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국제공항 입지선정 일지▲1969~1970 제1차 수도권 신공항 타당성 조사 → 김포공항 1·2단계 확장▲1979~1980 제2차 타당성 조사 → 김포공항 3단계 확장▲1982~1983 제3차 타당성 조사 → 중부권공항(청주) 신설▲1987. 7 교통부 장관, 김포공항 소음피해 해결 근본 대책 수립 지시▲1987. 12 교통부, 해안지역 신공항 건설 건의▲1988. 2 노태우 정권 출범 후 수도권 신공항 건설 재논의▲1989~1990 제4차 타당성 조사 → 영종도, 시화1·2지구 최종 후보지 선정▲1990. 6 신공항 건설 입지로 영종도 확정신구 관문공항·후보지 위치도최초의 공항인 서울 여의도 비행장의 1930년대 전경. /서울역사편찬원 제공1990년 신공항 입지 선정을 위해 영종도에 설치한 기상관측소. /한국교통연구원 제공1992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영종도 신공항 기공식. /국가기록원 제공

2020-03-04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소금생산 역사 체계적 조명 필요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 염전은 영종도 경제의 한 축이었다. 영종도의 염전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다. 소금 생산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고려시대부터 현대적 방식까지 염전의 역사를 꿰고 있는 곳이 바로 영종도다. 하지만 염전의 흔적은 자꾸 사라지고 있고, 옛일을 기억하는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한반도 소금 생산의 역사를 한데 보여줄 수 있는 영종도, 좀 더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영종도에 있던 '건대염전'은 건국대학교가 조성했다. '건국대학교 70년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소개된다. 영종도 주민 이정국씨의 할아버지는 염전 축조 기술자였는데 건대염전 공사를 맡아 진행했다. 공사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염전을 관리했고, 대를 이어 아들(부친)도 염전에서 일했다. 1980년대 염전 일부를 매입했다가 되팔았다. 이정국씨는 건대염전 축조와 관련해 교도소 수감자들이 공사에 동원됐다고 했다. 그는 "염전 공사 때 재소자들이 동원됐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건국대가 어떻게 수감자를 공사에 동원했는지 알 순 없지만,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다"고 했다. 영종도 주민 김홍일씨도 "당시 죄수들이 염전 공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퍼져 있었다"고 했다.주민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수감자들이 민간 학교재단 염전 축조 공사에 동원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염전 축조와 관련해 수감자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련 기록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영종도 염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영종도 염전 대부분이 1950~1960년대 조성됐고 20여 년 전에 폐쇄되면서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 수도 줄어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고, 기록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영종도 주민 허재봉씨는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매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영종지역을 조명하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20-02-26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고려 이곡 '소금 굽는 연기'… 영종염전 천년 증언現 주안국가산단 자리 1907년 국내 첫 천일염 생산영종 '자염' 쇠퇴… 1950년대부터 천일염전 들어서한국전쟁후 정착 실향민, 염전개척 공동주 되기도대이어 수십년 '염부' 주민들… 소유 대부분 외지인홍대·건대도 운영… 인천공항 건설로 대부분 폐쇄1곳만 남아 옛방식 고수… 씨사이드파크에 체험관영종도는 명실상부한 '공항도시'다. 영종도에서는 인천국제공항을 매개로 물류, 관광, 항공 등 다양한 분야의 경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4개의 작은 섬이었던 영종·용유지역(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은 '염전'이 최대 경제 축이었다. 영종도 주변 갯벌은 수심이 얕아 둑을 쌓고 매립해 염전을 만들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매립방식의 천일염전 이전부터 영종도는 염전의 땅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영종도는 소금 생산지였다. 고려 후기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의 시와 산문을 엮은 '가정집(稼亭集)'에 영종도의 염전 얘기가 전한다."가는 도중에 자연도에 들러서 /뱃전을 치며 한가로이 읊조리노라 / 갯벌은 전자(篆字)처럼 꼬불꼬불 무늬 지고 / 돛대는 비녀처럼 배 위에 꽂혀 있네 / 가까이 물가에 비끼는 소금 굽는 연기요 / 멀리 산 위로 떠오르는 바다의 달이로다"자연도(紫燕島)는 영종도의 옛 이름이다. '소금 굽는 연기'라는 대목에서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염(煮鹽)은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영종도에서 자염 방식의 소금 생산은 1천년 가까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1940년대에도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1936년생 김홍일씨는 "소학교(초등학교)때 만해도 장작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송산(현 중구 중산동)에 있었고, 화력염전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화력염전'은 장작을 때서 바닷물을 끓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화력 좋은 장작을 구하기 위해서는 근처에 울창한 산림이 필요했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 천일염전이 생겨나면서 화력염전은 밀려났다. 김홍일씨는 "화력염전이 있었던 곳은 송산동 한 곳뿐이었으며, 화력염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고 곳곳에 천일염전이 들어섰다"고 했다.바닷물을 끌어들인 뒤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염'방식이 국내에서 처음 도입된 곳은 인천이다. 1907년 인천에 '주안염전'이 운영됐다. 현재 미추홀구 주안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 지역에 세워진 주안염전은 국내 최초의 천일염 염전이었으며, 196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폐쇄됐다. 현재는 주안국가산업단지가 운영되고 있다.자염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천일염전은 1950년대부터 영종도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도 염전을 조성해 운영할 정도였다.'건국대학교 70년사'를 보면 "1953년 5월 1일 (중략) 경기도 부천군 영종면 운남리 바닷가에 85정보(1정보는 9천917㎡)에 달하는 염전을 축조하기로 결의했다"며 "영종도가 면적도 넓고 교통상으로나 축조공사를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1954년 축조공사가 완료돼 가장 우수한 염전이 완공된 것"이라고 돼 있다. 건대 염전이 있던 자리는 현재 '씨사이드파크'가 운영되고 있다. 염전은 대부분 기능을 잃었지만, 염전 체험관이 운영되면서 염전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영종도 염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이후 영종도에 많은 실향민이 정착했고, 이들은 염전을 축조하기도 하고 소금을 생산했다. '영종용유지'는 "영종도에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사장이 여러 곳 있어 전쟁 난민들이 모여들었다"며 "운서리 삼목도에는 황해도 출신의 김형찬 씨를 선두로 한 염전 매립 공사 종사 세대 70호, 운서리 삼목도에는 평북 출신의 현기인씨를 선두로 한 염전 매립 공사 세대 40호, (중략) 각각 정착하여 지역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고 했다.경향신문 1959년 3월 16일 자에는 '永宗島(영종도)서 再生(재생)의 길 얻은 避難民集團(피난민집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피난민들이 일년반 동안에 걸친 천주교 구제회의 원호를 받고 그 여력으로 7천만환에 상당하는 염전의 공동주가 되어 이제는 집을 제외하고 한세대에 32만환의 기적을 갖게 된 한 피난민집단이 서해 앞바다 조그만 섬 위에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고 있다"고 영종도 피난민의 염전 조성을 보도했다.지난 21일, 영종도에서 50여년간 일한 박병기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1933년생 박병기씨는 20대 중반부터 염전에서 일했다. 그는 영종도에 피난민 '염부'가 많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워 주민 허재봉씨와 며느리 차경자씨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했다. 그는 1950년대 말 홍익대학교가 만든 '금단 염전'을 조성할 때부터 2000년대 초 폐쇄될 때까지 50여 년 동안 한 곳에서 일했다. 그는 "삼목도 쪽에 있는 염전을 '정착지 염전'이라고 불렀고, 실향민들이 많았다"며 "영종도에 있는 다른 염전에도 실향민들이 많았다. 실향민들이 주로 거주한 곳은 삼목도와 신불도였다"고 기억했다.박병기씨가 일하는 50여 년간 염전에서 일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긴 나무 양쪽에 소금을 담은 통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는 '목도'방식으로 소금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수레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경운기로 바뀌었다. 그는 "5월 송홧가루가 날릴 때 소금이 가장 많이 났고,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고 했다.박병기씨 아들과 며느리도 염전에서 일했다. 가족들이 모두 염전에서 일한 것이다. 며느리 차경자 씨는 "결혼할 때 남편이 목도 일 때문에 한쪽 어깨만 솟아 있어서, 결혼식 예복을 맞추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이어 "'비설거지'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면 소금물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한쪽으로 옮기는 일인데, 이 때문에 '외양간에 있는 소는 비를 안 맞게 하고 염부는 비를 맞고 일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차경자씨는 "나를 비롯한 마을 대부분 여자는 염전 판에 장독 깨진 조각을 깔아놓는 '깽팔이'라고 부르는 일을 했다"고 했다.영종도 주민 수백 명이 염전에서 소금을 내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염전의 주인은 대부분 외지인이었다고 한다. 영종 주민들은 '임금 근로자'로서 일을 했다. 이정국씨는 "영종도에 염전이 20여 개 있었지만, 영종도 주민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몇 곳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염부들은 일정 임금을 받으며 일하다가 나중에는 소금이 팔린 대로 받는 일종의 '성과급' 형태로 바뀌었다. 전국 소금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염전으로 인한 수익이 악화했기 때문이다.'건국대학교 70년사'는 "천일염전은 수익성이 적고 효율적인 재산관리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처분하기로 결의했다"며 "1982년 2월 매도 허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종도에서 가장 큰 염전은 '금홍염전'과 '건대염전'이었다고 한다. 금홍염전은 현재 영종하수종말처리장에서 인천대교 방면 일대다. 인천공항이 건설되면서 염전은 폐쇄됐다. 다만 염전이 있던 자리는 아직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일부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1960년대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염전이 운영됐다고 한다. 허재봉씨는 "작은아버지가 중산동에서 개인 염전을 운영했다. 다른 기업 염전과는 비교하기 힘든 작은 염전이었다"며 "당시만 해도 작은 개인 염전이 많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없어졌다"고 했다.현재 영종·용유도에서 염전이 운영되는 곳은 '동양염전'이다.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따서 '늙목염전'으로 불렸다. 동양염전이 있는 용유도는 삼목도 쪽 바다를 제외하고는 인천공항 건설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직 소금창고 등 염전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매년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동양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700t이다. 전년도 생산량 550t보다 늘었다. 동양염전은 4명의 염부가 일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 소금을 내는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동양염전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옛날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다. 국내 천일염전이 대부분 결정지 바닥에 PVC장판이 깔려 있는데 동양염전은 타일 모양의 판이다. 과거에는 장독대 깨진 것을 깔았다가 타일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동양염전을 관리하는 천덕기 씨는 "1980년대 초반에 사용했던 시설 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 영종도와 용유도에 염전이 많았는데 지금은 우리만 남았다"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옛 건대염전을 복원해 운영하는 씨사이드공원염전체험장. 건국대학교가 조성한 건대염전은 이후 매각되면서 금홍염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60년대 영종도 운서리에 있던 삼덕염전의 모습. 1966년도 인천운서국민학교(현 인천운서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 스캔. / 인천운서초등학교 제공자료/영종역사관 제공영종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염전인 동양염전. 동양염전은 지난해 700t의 소금을 생산했다. 1970년대에는 늙목염전이라고 불렸다.인천공항 하수종말처리장 인근에 있는 옛 금홍염전 터. 뒤에 보이는 산 바로 앞까지 염전이 이어졌다고 한다. 타일 조각 등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2000년대 초 금홍염전 모습. 금홍염전은 영종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김홍일씨가 여러 장 찍은 사진을 파노라마 방식으로 이어붙인 것을 재촬영했다. /김홍일씨 제공인천공항 하수종말처리장 인근에 있는 옛 금홍염전 터. 뒤에 보이는 산 바로 앞까지 염전이 이어졌다고 한다. 타일 조각 등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20-02-26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2)]네 개의 섬 영종

본래 영종·삼목·신불·용유도로 나뉘어 이어진 섬과 섬… 구읍뱃터 모여 육지로신불도, 영종도 남서쪽 500m 거리 위치실향민·원주민마을 분리 130여가구 살아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원래 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등 네 개의 섬이었다. 공항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 이들 네 개의 섬을 하나로 만들었다. 옛날 네 섬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었다. 작은 섬 마을이 하루 1천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하늘도시'로 변했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의미인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영종도와 딱 들어맞는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그 옛날 섬마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좇아가 보자.영종도가 신공항 건설 장소로 결정된 것은 1990년이다. 육지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지만 섬과 섬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영종도와 삼목도는 도로로 연결돼 있었고, 영종도와 신불도는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도로라고 해야 좁디좁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거리가 많이 떨어진 용유도와 삼목도도 도로로 연결돼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도로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 섬 주민들이 육지로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곳은 영종도 구읍뱃터 한 곳이었다.1968년생 이정국 씨는 영종 운남리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하늘도시로 편입돼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7일 만난 그는 영종중학교 인근 공원이 자신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건설 관련 일을 하는 그는 인천공항과 하늘도시 건설 과정에도 참여했다. 영종도가 바뀌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셈이다. 삼목도와 연결된 도로의 영종도 지역 초입 마을을 '진등'이라고 불렀다. 바다가 메워지는 바람에 마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은 다 없어졌지만, 그 연륙도로와 연결된 작은 길은 아직 남아있다. 이정국 씨는 옛 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스카이72 골프장 인근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건물로 안내했다. 이 앞을 지나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너머 보이는 작은 길이 삼목도와 연결 도로로 이어지던 곳이라고 했다. 이정국 씨는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쪽으로 쭉 다리가 있었고, 삼목도에 다다르면 양쪽으로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고 했다. 다리에서 진등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은 모두 하늘도시 3·5공구로 편입됐다.신불도는 영종도에서 남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돼 있는 영종 지역은 '벌미'라고 했다. 벌미와 신불도 사이는 염전이었고,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된 길이 난 곳은 현재 BMW 드라이빙센터 뒤편이다. 도로 표지판에서는 옛 지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1962년생인 이광만 씨가 태어난 곳은 신불도다. 지난달 30일 만난 이광만 씨는 자신이 태어난 집이 있던 위치를 현재 BMW드라이빙센터 건너라고 설명했다. 신불도는 130여 가구가 살던 작은 섬마을이었다. 90년대 초반 공항 건설로 인해 이주가 시작되기 전 신불도 주민들은 염전 종사자가 10여 가구, 나머지는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주로 벼농사를 지었으며, 고구마와 감자도 심었다. 어민들은 꽃게, 새우, 숭어 등을 잡았다. 절반 정도는 집에서 먹었고, 나머지는 판매했다. 활어를 보관할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말려서 먹거나 팔았다고 한다. 꽃게는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삼목도, 영종·용유 사이 주민왕래 고리1988년 다리 개통전까지 징검다리 건너용유女, 영종男과 결혼땐 "시집 잘갔다"간조때 드러났던 '장군바위' 아직 그대로삼목도 주민들도 신불도와 마찬가지로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이들 섬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정착했다.이광만 씨는 "신불도는 작은 섬이지만 실향민이 모여 사는 곳과 원주민 마을이 분리돼 있었다"며 "실향민들이 사는 동네를 '바깥 동네', 원주민 마을을 '안 동네'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광만 씨 부친도 황해도에서 넘어온 실향민이고 '바깥 동네'에 살았다.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8년 발간한 '영종용유지'는 "전쟁 직후 영종도에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사장이 여러 곳에 있어 전쟁 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신불도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신불IC'라는 이름으로 그 자취를 안내한다. 신불도에 있던 산을 서풀산이라고 했다. 신불도의 옛 이름인 '서풀'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인천공항 건설하면서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서풀산을 깎아낸 흙과 돌을 골프장을 짓는 데 썼다. 지금도 그 산은 있는데 그 높이가 절반 정도로 낮아졌다. 이광만 씨는 "서풀산에는 다른 산보다 바위와 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용유도는 남쪽에 있는 무의도와 가깝지만 삼목도를 고리로 영종도와 이어져 있었다.1935년생인 김홍일 씨는 1960~1970년대 모습이 훤히 떠오른다. 과거 영종도의 유일한 사진관이었던 '영종사진관'을 운영했던 그는 영종 지역 곳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김홍일 씨는 "예전에는 용유도와 삼목도는 징검다리로 건너다니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1980년대에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징검다리는 물이 빠진 간조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지와는 왕래가 적다 보니 영종도 주민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용유도 주민과 영종도 주민이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잦았다. 영종도가 용유도보다 컸다. 그래선지 용유도 여성이 영종도 남성과 결혼하면 "시집 잘 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영종도(삼목도)와 용유도를 잇는 긴 다리는 1988년 개통됐다. 지금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과 제2여객터미널 사이에 있는 관제탑 부근이다. 다리는 자취를 감췄으나 다리와 연결되는 도로는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관제탑 방향으로 다리가 있었다. 지난 3일 1948년생 허재봉 씨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허재봉 씨는 "과거에는 이 일대가 전부 바다였다"며 "이 일대에서 굴 양식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재봉 씨는 "80년대만 해도 용유도 주민들이 육지에 나가 소를 팔기 위해 십여 마리씩 끌고 영종도에 온 뒤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며 "용유도 주민들은 뭍으로 나가기 위해서 영종도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농수산물을 팔기 위해 갖고 나가는 이들이 우리 집에서 많이 묵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가 바다였다는 얘기를 상상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바다에 있던 장군바위는 남아 있다. '호텔 오라'에서 공항서로를 넘으면 도로보다 지대가 낮은 부지가 나온다. 그 한가운데 7~8m 높이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바다에 있던 이 바위는 간조 때만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허재봉 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서려 있어서 저 바위는 없애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이 마치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듯이 보여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입한 왜구들이 겁에 질려 침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영종용유지'는 "공민왕 원년과 29년, 30년에 왜구들이 자연도와 덕적도 등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그때도 용유도만은 왜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고 장군바위 설화를 전한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사진/김용국·조재현기자 yong@kyeongin.com영종도 구읍뱃터 전경. 현재의 영종도는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영종도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섬 주민들은 육지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영종의 구읍뱃터를 이용했다. 현재도 사진 뒤편에 보이는 월미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한다.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구읍뱃터에 정박해 있는 어선 '건진호'. 1980년대 영종도 어민들은 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다. 주민들은 이 배를 이용해 섬과 섬 사이를 오가고, 물건을 나르기도 했다. 이 배의 진수식 때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영종도가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을 때의 모습과 인천공항 건설 완료뒤 매립으로 바뀌게 된 섬의 해안선(주홍색 선).구읍뱃터의 옛 모습.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건설되기 전 구읍뱃터에서 타는 여객선은 영종도 주민들이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과거 구읍뱃터에서 여객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영종도와 삼목도를 잇던 도로가 있던 자리.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삼목도가 나왔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롯데면세점 물류창고 자리가 삼목도가 있던 곳이다. 영종도 주민 이정국 씨가 길을 설명하고 있다.장군바위는 그 형상이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 용유도 앞 바다에 있었으나,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 바다가 매립되면서 장군바위가 서 있는 곳도 육지가 됐다.

2020-02-19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내년 개항20년' 한국의 관문, 과거·현재·미래 들여다본다

인천 영종도가 공항 부지로 결정된 지 30년이 지났다.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지는 내년이면 꼭 20년이 된다. 그 사이 인천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비상했다. 지난해 인천공항은 연간 40만 회의 운항기록을 세웠다. 오고 간 여객은 7천만 명을 넘어섰다. 개항 이후 최대 실적이었다. 국제여객 7천만 명 기록은 세계 5위 규모에 해당한다. 국제화물 운송 규모는 276만t이다. 이는 세계 3위 수준이다. 인천공항에서는 하루 평균 1천100편가량의 국제선이 뜨고 내린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나들목이다. 인천공항에서 일하는 상주 직원만 7만8천여 명이다. 경제효과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난 2018년 제2터미널을 개장한 인천공항의 생산유발 효과는 10년 뒤면 13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올 1년 동안,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섬마을 풍경에서부터 공항 조성 과정, 그리고 공항 운영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 연중기획으로 싣는다. 국내외 공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문학적으로 담아낸다는 각오다. 매주 1회씩 찾아갈 이번 시리즈에 독자들의 응원을 당부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대한민국 대표 공항인 인천국제공항 제 2여객터미널을 배경으로 대형 항공기들이 착륙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국제공항은 내년이면 개항 20년을 맞는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나들목인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사진은 영종도 북측방조제 인근에서 3분 간격으로 연달아 착륙하는 항공기를 다중노출로 촬영).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20-02-12 정진오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제비 대신 비행기 드나드는 '영종'… 세계를 잇는 공항은 운명이었다

고려시대 기록부터 '자연도'로 불려와제비 많고 해질녘 자줏빛 하늘서 유래이규보의 '계양망해지' 한대목 등장도대한민국 대표 공항, 인천국제공항은 태초부터 비행장의 기운을 타고난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예로부터 자연도(紫燕島)라 불렸다. 자줏빛 제비의 섬이란 의미다. 겨울이 지나고 봄의 소식을 물고 오는 제비는 늘 반가움의 대상이다. 자연도란 이름은 고려시기에 비로소 등장한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주로 유배의 섬으로, 또한 왜적들이 약탈 대상으로 삼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를 찾았던 중국 사신의 눈에 자연도는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중국 송나라 때 문신 서긍(徐兢)은 1123년 바닷길 서해안 루트를 따라 개성을 방문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 '고려도경'이란 방대한 분량의 견문 보고서를 왕에게 올렸다. 여기에 자연도 이야기가 자세하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도 많다.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는 외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공간이었다. 고려 제일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계양산에서 조망한 자연도 이야기는 그의 문집에 남아 아직도 전한다. 1219년 여름부터 1220년 여름까지 1년여 동안 계양부사로 있었던 이규보의 그때 시선은 꼭 80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 5일 오후 3시 계양산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을 품고 있는 영종도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겨울은 강추위 없이 지나간다는 얘기를 했는데 입춘이 지나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한반도를 덮쳤다. 인천지역도 모처럼 영하 10℃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를 가리는 중국발 미세먼지를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춥지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던 차였다. 그렇게 오른 계양산. 영종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마침 비행기 한 대가 영종도 북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흥도 쪽 하늘에서는 비행기 두 대가 잇따라 고도를 낮추며 영종도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어디인지를 비행기들은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도심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오른 산에서는 보상이라도 해 주는 듯 훤히 펼쳐 보여주었다. 저 멀리 덕적군도에서부터 영흥도, 무의도, 영종도, 삼목도, 시도, 모도, 장봉도, 강화도 등 여러 섬들이 인천 앞바다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송도와 영종을 잇는 인천대교의 우뚝한 주탑 사이에 역사의 섬 팔미도가 자그맣게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처음 만일사(萬日寺)의 누대(樓臺)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사승(寺僧)이 와서 바라보는 일을 돕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자연도(紫燕島)·고연도(高燕島)·기린도(麒麟島)입니다"하고,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경도(京都)의 곡령(鵠嶺), 저것은 승천부(昇天府)의 진산(鎭山)·용산(龍山), 인주(仁州)의 망산(望山), 통진(通津)의 망산입니다"하며, 역력히 잘 가르쳐 주었다."이규보의 작품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에 전하는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의 한 대목이다. 제목처럼, 계양산에 올라 바다를 보면서 느낀 감흥을 적었다. 지금은 만일사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드넓은 갯벌을 매립해 청라신도시를 건설하고 수도권쓰레기매립지를 조성한 탓에 바다가 좁아졌다. 큰 배도, 파도도 보이지 않는다. 돛대를 단 작은 배는 더더욱 볼 수가 없다. 스님이 가리켰다는 자연도에는 제비 대신 비행기가 드나든다. 고연도는 어떤 섬을 말하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다만, 기린도는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군 기린도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다. 연평도보다도 멀리 있는 창린도 옆 기린도가 계양산에서 눈에 잡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 시절에는 매의 눈처럼 멀리 볼 수 있다는 몽골인과 같은 놀라운 시력을 가져서 거기까지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800년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인간은 하늘도 탁하게 했지만 스스로의 눈도 참으로 많이 퇴화시켰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다들 근시안이 되어 버렸다. 송나라 사신대접·군례의식 장소 활용당시 경원정·제물사 필수코스로 꼽혀이곡의 詩, 소금생산지로서 일면 묘사인천국제공항은 세계 각국 190여 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들락거리는 외교의 최일선 공간이기도 하다. 12세기에도 그랬다. 송나라 사신 서긍 일행은 개성 도착 직전인 1123년 6월 9일 영종도(자연도)에 들렀다. '고려도경' 속 '자연도' 항목을 보자."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幕屋) 수십 간을 지었고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제비가 많기 때문에 섬의 이름에 제비를 넣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자줏빛은 어찌 나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해질녘 영종도의 하늘빛을 말함이리라. 영종도의 석양은 유난히 붉다 못해 자줏빛이다. 그때 나는 제비는 영락없는 자줏빛깔이다. 옛 사람들은 지명을 정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운치가 있었다. 자줏빛과 관련해 의미 있는 기록이 '고려도경'에 또 전한다. 고려 정부는 외국 사절들에게 자연도에서 군부대 사열 같은 군례(軍禮) 의식을 보여주었다. 서긍은 이 부대의 지휘자를 '육군 산원 기두(六軍 散員 旗頭)'라 칭했으며, 자연도에서 처음 보았다고 썼다.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인 이 사람은 다리 모양의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자주색 무늬의 비단옷을 입었다고 표현했다. 자줏빛 제비의 섬에서 자줏빛 군복을 입은 군대 인솔자라니. 자줏빛과 영종도의 관계가 새삼스럽다.태초부터 비행장 기운 타고난 터일까오늘날 인천공항 들어선 '외교 최일선'옛모습 희미하지만 190여개 도시 연결고려시대에는 송나라를 비롯한 외국 사신들에게 음식 접대가 극진했던 모양이다. 음식은 10여 종이나 마련했고, 국수가 먼저 나왔고 해산물은 무척 진기했다고 서긍은 기록했다. 그릇은 금과 은을 많이 썼으며 청색 도기(고려자기로 보임)도 섞여 있었다고 했다.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한 쟁반이나 소반을 썼다고 한다. 사신 대우가 무척 융숭했다. 그 가운데서도 원칙이 있었다. 딱 3일 동안만 음식을 제공했으며, 풍랑이 일어 배가 떠나지 못하더라도 3일이 지난 뒤에는 음식을 더 이상 갖다 주는 일이 없었다. 고려의 외교 수칙이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영종도에는 경원정과 함께 제물사(濟物寺)라는 절도 있었다. 제물사는 송나라 사신들이 꼭 방문해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서긍 이전에 송나라 사신 중에 송밀(宋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를 방문했다가 자연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제물사에서는 이 송밀의 제사를 모셨던 모양이다. 그 뒤로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들은 꼭 자연도 제물사에 들러 송밀의 무덤에 절을 올리고, 제사를 받드는 승려들에게 식사를 베풀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자연도가 대중국 교류의 핵심 거점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인천공항처럼.16세기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자연도를 설명하면서, 고려 후기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가다가 자연도를 지나며, 삿대를 치고 한 번 한가하게 읊조린다. 갯벌은 구불구불 전자(篆字) 같고 돛대는 종종 꽂아 비녀와 같도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 바다 달은 먼 멧부리에 오른다. 내가 배 타고 노는 흥이 있어 다른 해에 다시 찾기를 약속한다."이곡의 시를 통해 나타난 자연도는 경원정과 제물사라는 외교적 공간 이외에도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소금 생산지였다는 점이다. 소금은 전시와 같은 비상상황에는 쌀값과 맞먹는 가치를 띤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시기 염전을 무척 귀하게 다루고 군부대 소금 배급에 공정을 기했다. 이곡의 시에 비춰보면 영종도에는 고려 시기에 대규모 염전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요즘 같은 천일염 시스템이 아니라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이었다. 그걸 소금 굽는다고 했다. 땔나무가 엄청나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자염 생산은 바닷가에 있으면서 산림이 울창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수도와 가깝고 나무가 많은 영종도가 소금 생산지로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인천공항은 대한민국 최대의 경제적 가치를 뽐내는 공공재로 성장했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계양산에서 바라본 영종도가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지난 5일 오른 계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을 품고 그 품에서 막 떠나 힘차게 이륙하는 여객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2020-02-12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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