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하채연·소설-전태호' 시상식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9일 오후 경인일보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이날 시상식은 김화양 경인일보 대표이사를 비롯해 김명인·김윤배 시인, 홍정선 평론가와 당선자,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이날 시 부문 심사위원을 맡은 김윤배 시인은 "하채연 당선자가 기존 시인이 걷지 않았던 길을 가는 모험과 도전 정신을 끝까지 가지고 가길 바란다"고 조언했다.이어 소설 부문 심사위원인 홍정선 평론가는 "소설은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실 너머의 세계를 끊임없이 상상한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현실을 더 낫게 바꾸기도 한다. 전태호 당선자가 앞으로도 타동사 연습을 꾸준하게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단편소설 '타동사 연습'으로 당선된 전태호 씨는 "우리는 책을 읽음으로써 타인을 접하고, 공동체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람이 돼서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며 글로 풀어내겠다"고 소감을 전했다.한편, 이날 단편소설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을, 시 부문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을 수여했다. /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9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9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당선자와 심사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시 부문 심사위원 김윤배 시인, 시 부문 하채연 당선자, 소설부문 전태호 당선자, 김화양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시 부문 심사위원 김명인 시인, 소설부문 심사위원 홍정선 평론가.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9-01-09 강효선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김명인·김윤배 시인, "사물 바라보는 시선 깊고 메시지 견고"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은 작가가 보여준 농익은 작품에 놀랍고 신선함을 느꼈다."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당선작을 '숲에서 깨다'로 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전하는 메시지가 견고하다고 호평하며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심사위원들은 올해 시 부문 응모작 총 1천423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30편의 시 중 6편을 다시 추려 평가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최종 심사에는 '곱슬의 방향', '가위 ', '호출신호, 창백하고 푸른 플라스틱', '걸리버여행기' , '구석의 깊이-비의 팔랭프세스트' 등 다양한 작품이 올라왔다. 올해 출품된 작품들은 주제에 있어 차별성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등 애도가 짙고 다소 어두운 주제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비롯해 실업, 경기침체 등 사회·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또 20~30대 젊은 응모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다.아쉬운 점도 지적됐다. 젊은 문학도들의 출품작들이 최근 유행하는 시의 경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심사위원들은 주로 생경하고 낯선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시를 비학적으로 전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줘 시 읽기가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그에 비해 하채연 당선자의 '숲에서 깨다'는 시의 짜임새를 갖추면서도 시인만의 깊은 세계관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선사했다. 새벽의 숲을 열어 재치는 해맑은 생각들이 긍정적으로 명랑하게 펼쳐있고, 숲에 존재하는 한 작은 개인이 우주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며 이미지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당선작을 포함해 응모된 작품 상당수가 어느 하나 크게 뒤처지는 것 없이 모두 고르게 작품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좌)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2019-01-01 강효선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소감]전태호, "언어로 할 수 있는 실험 정신 지켜 나가겠다"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때로 기억한다. 우연히 찍힌 내 사진에서 작중 주인공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서글픈 눈을 감추지 못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 표정을.작중 주인공이 되어 생활하는 동안 '절망'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백 번 문장을 읽고 나면 꿈에서까지 같은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나가라고, 나가라고" 외치던 그의 잠꼬대가 요즘도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당시 그가 내 손을 빌려 채운 글로 빼곡하다."외국어로 된, 그러니까 나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떠드는 기분이 어떤 건 줄 아세요?"예술 작품을 즐길 때는 얼마만큼 작가가 투영되어 있는지 눈여겨보곤 한다. 작중 인물과 작가가 일치할수록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나는 현재 몇 가지 이야기를 구상 중이고 또 어떤 건 쓰고 있다. 아직 역량이 부족해서, 때가 되지 않아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해서 머릿속에 묵혀둔 이야기도 어서 꺼낼 날을 기다려 본다. 모두가 좋아하는 글, 읽었을 때 남들이 안심하는 글, 탕아가 돌아오는 글은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언어로 할 수 있는 실험 정신을 지켜 나가겠다.늦었지만 심사위원 선생님께, 경인일보 관계자 분들, 나를 오래도록 지켜봐 온 사람들, 그리고 '타동사 연습'을 끝까지 읽어준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19-01-01 경인일보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총평]1646편 출품… 젊은 문학도 '뜨거운 열정'

30여 년 간 대한민국 신진작가 발굴에 앞장서 온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올해도 가능성 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하며 그 저력을 입증했다.경인일보는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과 심사숙고 끝에 ▲단편소설 부문-'타동사 연습(전태호)' ▲시 부문-'숲에서 깨다(하채연)' 등 2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특히 이번 신춘문예는 근래 들어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접수됐고 특히 20, 30대 젊은 문학도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지난해 11월 첫 공고가 나간 이후 총 1천 646편이 접수됐는데, 이 중 시는 1천423편, 소설은 223편이 출품돼 치열한 경쟁을 치러 문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체감케 했다.덕분에 예심과 본심에 참여한 심사위원들의 즐거운 고민도 늘었다. 특히 지난해에 비해 편수가 확연히 늘어난 소설부문은 김남일 소설가가 예심 심사위원으로 나서 옥석을 가렸고 홍정선 평론가와 정과리(본명·정명교) 평론가가 본심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최종작을 선정했다. 시 부문은 김명인·김윤배 시인이 심사를 맡아 작품을 엄선했다.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은 올해 신춘문예에 출품된 상당수 작품이 예년과 비교해 '문학의 짜임새를 갖춘 수준급 작품'이었다고 총평했다. 시상식은 오는 9일(수) 오후 3시 경인일보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부문별 심사위원, 당선자,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9-01-01 공지영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홍정선·정과리 평론가, "재미있는 비유로 세태 풀어나간 발상 신선"

"재미있는 비유를 통해 지금의 세태를 풀어나간 발상이 신선하다."2019 신춘문예 소설부문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예년보다 편수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읽을만한 소설의 구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의 고민이 깊었다.당선작인 '타동사 연습'은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심사위원에게 신선함을 안겼다. 소설은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생을 사는 젊은 세대의 단상을 주제 삼아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면서도 비판적 시각 또한 겸비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세태를 풍자하는 방식의 새로움을 높게 평가받았다. 주인공인 자기 자신이 타동사의 목적어로서만 기능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타동사로 비유하면서 힘있게 풀어나갔다.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홍정선 심사위원(평론가)은 "소설이란 것이 모두 아는 이야기가 주제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써나가는 방식의 차이로 다른 평가를 받는데, 그런 면에서 현 세태를 풀어가는 방식이 독창적이었다"고 평가했다.타동사 연습과 함께 최종 후보작으로 경쟁했던 '총부리'와 '불편한 골짜기'는 제법 소설다운 모습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주제가 진부하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잔인한 폭력성을 주제로 다룬 총부리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힘과 재미가 있지만,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가 특유의 도그마가 눈에 띄어 호불호가 가릴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 인공지능 로봇과 첫사랑을 주제로 한 불편한 골짜기의 경우 플롯은 색다른 맛이 있지만,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모이지 않으면서 소설이 주는 정서적 의미가 미약했다고 평가했다.이번 심사를 마친 심사위원들은 소설가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정과리 심사위원(평론가·연세대 교수)은 "많은 작품들이 세상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주관적 시각이 강하고, 이야기의 범위가 '나'에 한정됐다"며 "소설은 어디까지나 더불어 사는 세상의 이야기다. 경험의 폭을 넓히고 시야를 넓게 가지는 연습을 통해 보편적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지난 20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과리 심사위원(본명 정명교·국문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홍정선(왼쪽), 정과리 심사위원이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심사를 하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9-01-01 공지영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소감]하채연,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 타고 가는 기분"

돌아가신 할머니가 잘 영근 알밤 무리를 쌓아올리고 있는 꿈을 꾼 날, 고향에 가는 길에 당선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으로부터 이어진 긴 강, 시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고 긴 언어의 숲에서 제 나무 하나 찾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누군가 놓고간 전언을 받아든 기분이었습니다. 너무 소중해 조심히 받아들고 한참을 곱씹었습니다. 시 한 편이 너무 무거워 쩔쩔매던 밤들, 설익은 마음 탓에 쓰기를 주저했던 순간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쭈뼛쭈뼛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우리들일지라도 질기고 질긴 젖줄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도 잊지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가끔 세상이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볼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반짝하는 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착각이나 일렁임 같은 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그려 시 한 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 나라고, 너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개, 고양이, 동물, 숲, 나무, 풀잎 늘 사랑합니다. 늘 친구처럼 손잡고 시 이야기하는 엄마, 가족들 항상 고맙고 감사해요. 제겐 고마운 스승들이 많이 계십니다.고등학교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아흔 아홉개의 빛으로 빛나는 선생님, 동국대학교 선생님들, 박형준 선생님 부끄럽고 부족한 제 시 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곳에서 응원해주시는 지인들께도 두손 모아 감사를 전합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어도 시쓰는 우리라서 너무 행복해. 동국대학교 시분과 영원하길!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직도, 혹은 영원히 모를 시에게. 뜨고 다시 떠도 뜰 눈이 너무 많네요. 용기를 갖고 더 정진하겠습니다.

2019-01-01 경인일보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타동사 연습① /전태호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 띠고 있어서 소리가 크다 따라서 반드시 무언가를 괴롭힌다엄마·아빠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목적어 취급… 어깨는 티 안나게 움츠러들었다 제 방에 틀어박힌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동생도 평생 목적어에만 머물러소리가 크면 반드시 무언가를 괴롭힌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크다. 따라서 타동사는 반드시 무언가를 그러니까 목적어를 괴롭힌다.화요일타동사가 기능하려면 주어가 필요하다. 아빠는 아침부터 꽝 소리가 울리도록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신발을 벗자마자 집이 떠나가라 큰기침을 해댔고, 식탁이 쨍쨍대거나 말거나 유리컵을 함부로 내려놓았다. 내 방 바로 앞에선 신문지를 짜증스럽게 넘겼다. 나의 잠은 이미 타동사에 의해 깨어지고 머리맡의 유리창과 블라인드는 가늘게 흔들거렸다. 주황색 귀마개는 밤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타동사는 나를 이불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도로 눕게도, 냉랭한 방바닥에 납작 엎드리게도, 나중에는 그저 가만있게도 만들었다.아빠가 잠을 청하기 전까진 내 방에 있으면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빠는 오전 교양 프로그램을 틀고 볼륨을 어지간히도 키워 놓았다. 채널을 돌리면서 정치인을 헐뜯기도 하고 약 떨어진 리모컨을 손봐주고 나서는 거실 바닥을 발뒤꿈치로 쿵쿵 굴렀다. 배까지 움켜잡고 웃어 댈 즈음 엄마도 참다못했는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이어 나를 대신해서 빨리 좀 자라고 잔소리를 퍼부었고, 위아래 작업복을 벗긴 뒤 아빠를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 역시 스스로 주어라는 걸 알고 주어들처럼 행동했다. 나를 생각해서 나름 믹서나 그릇을 조심히 다루는 듯했지만 내 귀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슬렸다. 가스레인지 경고음을 무시하고 불을 켤 때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칼까지 곤두섰다. 부엌 쪽에서 소리가 잦아들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 엄마는 내게 식사하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제 밖이 위험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소리가 작으면 아무것도 괴롭히지 않는다. 자동사는 수렴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작다. 따라서 자동사는 아무것도 괴롭히지 않는다. 자동사도 기능하기 위해선 주어가 필요하다. 나는 살짝 목감기에 걸렸는지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그마저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창문 아래에 섰더니 부엌에서 국을 뒤적이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부엌 바로 옆으로 보이는 동생 방은 오늘도 굳게 닫혀 있었다. 아빠는 안방에서 코를 골았는데, 한 번씩 숨을 몰아쉬거나 컥컥 숨을 뱉을 때마다 내 귀는 쫑긋 섰다. 돌아서지는 못하고 고작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테이블 아래에 있던 페인트 붓과 롤러가 발에, 그러니까 털슬리퍼에 밟혔다. 엄마는 배고플 텐데 어서 밥부터 먹으라며 나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순순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된장찌개엔 지나칠 정도로 건더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숟갈에 뭐라도 걸릴라치면 나를 위해 따로 빼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엄마는 어질러진 페인트 도구까지 대신 정리해 주었다. 불러들인다든가 위한다든가 정리한다든가 하는 세 가지 행위 모두 타동사였다. 타동사는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한들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내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리고, 어깨는 티 안 나게 움츠러들었다. 엉덩이는 밥상머리에 붙박였다. 큰소리를 내지 않으면 비록 주어로 태어났을지언정 끝내 누군가의 목적어가 되고 만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목적어 취급했다.내 꼴은 회사에 속해 있는 동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처세술이랄까, 동기들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타동사를 구사하니,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금방 주어 자리를 하나씩 꿰찼다. 나는 딱히 밉보인 것도 아닌데 목소리 큰 주어들 틈에서 점점 작아지다 결국 목적어 자리로 밀려났다. 그래도 퇴사 직후에는 일부러 더 주어처럼 굴었다. 집안에서 입지가 흔들린다 싶을수록 목소리를 높였고, 고민 끝에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겠다고 밝혔더니, 어느 순간 엄마와 아빠의 입은 목적어처럼 떡 벌어졌다. 굳이 두 사람의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나는 일본 식자재 쇼핑몰을 운영 중인 지인으로부터 일감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동사로 큰소리치는 게 어려워졌다. 무역 거래 조건까지 공부해 가며 일에 파묻혀 지냈건만, 건당 수입은 기껏해야 커피 값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지인의 사업 악화로 나도 덩달아 빈둥빈둥 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어서 좋은 색싯감을 찾아야 할 텐데…… 라고 아빠가 한마디 던졌다. 술김에 건성으로 한 소리란 걸 알면서도 지금 누굴 놀리나 싶었다. 타동사 중에서도 놀린다는 표현은 유독 날을 세우고 있었다. 똑같이 타동사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짧은 사이 몇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내 말문은 콱 막혀 버렸다. 아빠는 비록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직장에서 꼬박꼬박 돈을 벌어왔다. 벌어오는 것은 틀림없는 타동사이다. 따라서 타동사는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반면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만으로는 돈을 거의 못 벌었다. 문득 세상만사가 거대한 문법에 의해 돌아가는 듯했고, 그날 이후로 내 입에선 큰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엄마는 옥상에 방수 페인트를 칠하려고 준비를 서둘렀다. 아빠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벽을 뚫을 기세로 코만 골았다. 물론 세탁기가 탈수를 돌릴 때는 아빠가 깨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졸아들었다. 나는 엄마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허겁지겁 욕실로 들어갔다. 변기 물을 내리고 몸을 씻는 동안엔 큰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내리거나 씻는 건 의심의 여지 없이 타동사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잠을 자거나 집을 비울 때에만 타동사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조용한 시간을 틈타 번역을 해야만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번역 중개 사이트 서너 군데에 유료로 멤버십 가입을 하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등록해 두었더니 조금씩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꾸준히 번역을 하고 돈을 벌면 눈치 안 보고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버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타동사이다. 아빠 몰래 타동사를 통장에 쌓아 두고 벼르다 보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노트북을 켠 뒤 의뢰인 메일을 열었다. 모니터 한쪽에는 인터넷 사전을 띄워 놓고 전문 용어로 된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삿포로 다시 이리 미소의 분석치에 관해서.표준치 색(Y%)은 27.5%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가공 시 작업자가 수치를 높이면 색(Y%)은 하얗게 변합니다. 반대로 낮추면 색(Y%)은 검게 변합니다. 파랗게 변색된 부분은 효모에 의한 발효 과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월 출하분의 색(Y%)은 26.2%로 기준치에 적정하다고 판단됩니다.번역을 해 놓고도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읽어낼 수 없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 내려가며 내 방식대로 정리하고 이해해 보려 했다. 우선, 작업자는 수치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색(Y%)의 수치는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작업자는 규정되어 있는 색(Y%)의 수치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게 된 것일까. 규정된 것을 높이거나 낮출 수는 있다. 그렇지만, 높이는 것을 규정될 수는 없다. 낮추는 것도 규정될 수 없다. 반면, 높이는 것을 규정할 수는 있다. 낮추는 것도 규정할 수 있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아까와는 다른 심장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색(Y%)은 왜 스스로 규정하지 않고 규정되기만 할까. 어째서 제 뜻과 상관없이 높아지고 낮아지는데 잠자코 있기만 할까. 타동사 때문이라고 납득은 하면서도 뭐랄까, 갑갑한 느낌을 견디다 못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머지 부분을 번역하고 있을 때 하품 소리를 듣고 말았다. 엄마가 현관문을 여는 바람에 그만 아빠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나의 온 신경이 자꾸만 바깥으로 쏠렸다. 아직 일이 남았는데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나는 다시금 자동사의 영역으로 내쫓겼다. 늘 그렇듯이 타동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전화기에 대고 귀청이 따갑도록 목청을 높였다. 그기 아이라 카이, 현장에 반장님 없능교? 그라믄 내가 내일 확인해 볼게예, 그라게심더. 통화를 마친 뒤에는 본인의 타동사를 과시하고 싶은지 엄마를 찾았다. 여보야 여서 일하는 젊은 아들 어뜬 줄 아나, 아침에 내 가면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기라, 반장도 내 없으믄 일이 안 된다 카더라. 억센 사투리로 된 아빠의 말은 절반도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매사에 둔감하고 무딘 점이 주어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빠는 대수롭잖은 일로 작업반 동료들을 들이받고, 집에 돌아와선 그걸 또 자랑삼아 떠벌리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데다 나이를 먹을수록 남의 말도 거의 안 들었다. 저러다 꼭 말을 함부로 하니까 오래 못 붙어 있는 거라고, 엄마도 가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어는 타동사로 목적어를 괴롭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 형세가 뒤집힌다. 타동사를 많이 가진 쪽은 무조건 주어 자리를 차지한다. 타동사를 적게 가진 쪽은 끝내 다 잃고 목적어 자리로 내몰린다. 일자리를 전전한다는 건 아빠의 타동사도 의외로 별 볼 일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자꾸만 입가가 실룩거리고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해가 저물고 화장실이 급해서 안달하던 차에 엄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코 골고 취침함. 내일 근무임. 엄마도 곧 취침. 가스레인지 위에 알탕 있음. 나는 우선 화장실을 다녀온 뒤 창가 블라인드를 끝까지 걷어 올렸다. 망설이다 노트북 단자에서 이어폰을 빼고 고막이 찢어지도록 볼륨을 높였다. 금속성 록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기도, 몸부림치듯 온몸으로 리듬을 타기도 했다. 나중엔 기지개를 쭉 켜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정리해 봤다.수요일현관 타일 바닥에다 딱딱 발뒤축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기침도 한바탕 터지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안전하게 닫혔다. 발소리 때문에 계단이 울렸지만 곧 잦아들었다. 시동이 켜지면서 밤새 얼어 있었을 경유차 엔진이 탈탈거렸다. 마모된 브레이크 라이닝 소음도 차츰 멀어졌다.나는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티브이를 켜고 낄낄 웃음을 터뜨리다 가죽 소파를 쓰다듬으며 햇빛 속에서의 자맥질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인기척을 느끼곤 주의 깊게 우리 집 전체를 둘러봤다.3층에는 내 방이 있고, 중앙으로 거실과, 여러 살림살이와, 부엌이 있고, 현관부터, 안방과, 화장실과, 여동생 방이 붙어 있다.2층에는 월세로 내놓은 빈 방과, 50대 남성 세입자가 있다.1층에는 40대 남성 세입자와, 60대 남성 세입자가 있다.아무래도 동생이 지금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듯했다. 그릇과 접시를 꺼내려고 찬장을 여는 순간, 급히 침묵이 만들어지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라 아빠가 있는 날에도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밤늦게 내가 전기밥솥을 열고 밥 한술을 떠먹거나, 흔적을 지우려고 잽싸게 설거지를 할 때, 화장실 변기에 앉아 힘을 줄 때면 동생 방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내가 알기로 동생은 평생 목적어 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다.한때 나는 월급을 받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동생에게 용돈을 줬다. 그러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는 잘 하고 있는지, 노량진에 보내 준다는데 왜 싫다고만 하는지 등을 빼놓지 않고 물었다. 아무리 물어도 자동사밖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나는 종종 동생 방 앞에서 귀를 대고 엿들었다. 잘못 들었길 바랐지만 동생은 의지박약 탓인지 책상 앞에는 붙어 있지 않고 늘 빈둥거리기만 했다. 바닥에 늘어지거나 쿠션 또는 인형에 파묻혀 있었고,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이면 게임이나 유튜브에 빠져 지냈다. 결국 공부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거라고 꾸짖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사 내에서 목적어 자리로 밀려났다. 요새도 아빠가 없는 날이면 엿듣기 위해 동생 방 앞으로 갔다. 하지만 이제는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그냥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생이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생은 돈을 못 버니까 큰소리를 못 냈다. 나 또한 용돈을 못 주니까 큰소리를 못 냈다. 주는 것은 타동사이다. 나로서는 역시 번역 일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뜨거운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시간을 들여 면도를 한 다음엔 온몸에 로션을 살뜰히 발랐다. 흰색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고 칼라를 빳빳하게 세우며 아까부터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더니 백시멘트 포대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어서 백색 가루를 한 바가지 덜어 놋쇠대야에 넣고 물을 부어 개기 시작했다."2층에 내려가 보니까 천장에 금이 갔나 봐. 곰팡이가 시퍼런 게 아주 엉망이더라. 엄마는 가서 시멘트 좀 바르고 올게. 시끄럽겠지만, 대못을 쳐서 천장을 좀 부술지도 몰라."나는 손 소독제를 손에 받아 비비면서 넌지시 물었다."도와줘?""아아냐, 네가 무슨."엄마는 어렵사리 꺼낸 나의 타동사를 단숨에 두 동강 내버렸다. 타동사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흩어졌다. 손쉬운 소일거리조차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현관 앞의 운동화와 슬리퍼도, 거실 건조대 위의 빨래도, 욕실 수납장 속 수건과 속옷도, 변기 옆 두루마리 화장지도, 음지 또는 양지에 있는 화분도 이미 엄마에 의해 질서가 잡혀 있었다. 엄마는 밖에서 발디딤용 나무 의자랑 흙손이랑 쇠망치 등을 챙겨 왔다. 방이 오랫동안 놀아서 그저께는 손수 찌든 때도 벗겨냈다. 하루하루 그렇게 2층에 세입자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층간소음 문제가 걱정되었다. 그럼에도 세입자는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월세를 받으면 엄마는 큰소리를 낼 수 있다. 게다가 엄마는 법적으로 우리 집을 가지고 있다. 받는 것도, 가지는 것도 타동사이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기만 할 뿐, 집을 가지지는 못했다. 두 개의 타동사는 한 개의 타동사보다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머지않아 나의 타동사까지 보태면 도합 세 개가 된다.엄마는 가급적 혼자 사는 남자를 세입자로 들였다. 한집에 둘 이상을 들일 경우 내 신경이 곤두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부부싸움이라도 벌이면 내 머릿속에는 집집마다 주어 자리를 놓고 다투는 광경이 그려졌다.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엄마와 아빠도 처음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났다. 당시 나는 유치원생이나 겨우 됐을까, 물론 이따위 문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전세 계약이 끝나고 아빠를 내가 사는 3층에 들인 결정에 대해선 어찌되었든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가뜩이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됐을 텐데, 어린 목적어 둘을 건사하겠다고 애쓰던 장면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사실혼 관계를 고집했다. 아빠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목적어를 낳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기만의 원칙에 따라 타동사를 지키고 있었다.엄마는 내려갈 채비를 거의 끝내고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미소와 울음을 동시에 머금은 채 말했다."마주쳐도 그냥…… 그냥, 무시해버려.""어어, 알았어."귀가 번쩍 뜨여서 잠시 머뭇거렸다. 당장 내 방으로 아니면 화장실로 내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런 대화가 동생 방에서도 들릴 것 같았다. 내가 목적어라는 사실을 엄마도 알고 아빠도 분명 알 테고 이제는 동생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엄마는 입을 삐죽이며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뭐.""알았어, 알았어.""요즘은 엄마도 할 말 다 해.""응, 알았으니까…… 알았어."내 가슴 한쪽이 우그러들었지만 일부러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차근차근 타동사를 모으는 중이라고,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중이라고, 제발 부탁이니 알아서 해결하게 좀 내버려 두라고, 말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타동사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는 타동사를 하나 갖고 있으니까 끈질기게 덧붙일 수 있었다."여긴 아빠 집도 아닌데, 뭐.""알았어. 그렇게 할게.""그래."가만히 서 있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엄마에게서 놓여나자마자 내 방으로 돌아와 차가운 방바닥에 퍼더앉았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한 번 현관문이 열리고 이번엔 동생이 우당탕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도저히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사회생활 당시처럼 주어들과 부딪치고 만다. 내려가는 건 마찬가지로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또 다른 →계속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9-01-01 경인일보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타동사 연습② /전태호

돈 버는 것은 타동사이다 큰소리를 낼 줄 알면 처음 얼마 동안 두려워지지 않아엄마·동생이 사라지자 목적어·주어가 아닌 나는 문장 밖 문법 너머에 있었다괴롭히지 못하면 타동사는 기능 상실한다… 결국 주어도 기능을 상실한다주어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주어들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두려워진다. 그런데 나와 같은 처지의 동생은 대체 어떻게 계단을 내려간 걸까. 엄마는 내가 소리 때문에 내려가지 못한다고 어느 정도 맞게 짚어 냈다. 하루는 아빠가 없을 때 나를 거실로 내보내고 계란판처럼 생긴 차음재와 스펀지 같은 흡음재를 가져왔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엄마는 방음 장치를 내 방 벽과 문에 설치해 주었다. 달라진 내 방 앞에서 좀처럼 입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또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서 고맙다고 멋쩍게 속삭였다. 엄마는 난생처음으로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맸다. 고마워한다는 건 어찌됐든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한들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나는 잠깐이지만 주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괴롭힌 셈이다. 요즘도 엄마가 번역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줄 때, 월세를 받아서 일본어 원서를 사줄 때, 결과물에 깊은 관심을 가져줄 때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두려워졌다. 나는 엄마를 괴롭혀서 조금이나마 얻은 타동사로 몸을 일으켰다. 쥐어짜듯 방문을 닫고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이 열리자마자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웹 브라우저가 열리자마자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포털사이트가 열리자마자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함이 열리자마자 의뢰인 메일을 열었다. 다른 의뢰인 메일도 열었다. 더 이상 고마워하지도 두려워지지도 않을 때까지 의뢰인 메일을 죄 열어 보다 첨부 문서 여럿 가운데 하나를 열었다. 파일명은 '일본 고용법'으로 대충대충 훑어보다 잠시 손을 놓았고, 다시 페이지를 쭉쭉 넘기다 시선을 끄는 조항을 골라 읽었다.제 7 장 정년퇴직 및 해고(정년 등)제 38 조직원의 정년은 만 65세로 하고 정년에 이른 날이 속하는 달의 말일을 가지고 은퇴한다.(퇴직)제 39 조전 조항(제38조)에서 정하는 것 외에, 직원이 다음 중 하나에 해당하는 때에는 퇴직한다.① 퇴직을 청원 회사에서 승인된 때 또는 퇴직 원을 제출하고 14일이 경과한 때.② 기간을 정하여 고용되는 경우 그 기간이 만료된 때.③ 사망했을 때.다시 넘기려다 말고 정년퇴직에 관한 조항을 한 번 더 읽었다. 혹시나 해서 아빠의 나이를 따져 봤지만 아무리 하여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대략 예순에서 예순둘 사이로 어림잡았는데, 다 떠나서 아빠는 오늘 당장 퇴직할지도 몰랐다. 아빠는 하루걸러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면 무수히 많은 주어들과 부딪친다. 처음에는 싸워 이길지 몰라도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두려워진다. 법적 구속력을 지닌, 그 거대한 타동사 앞에서는 다들 납작 엎드린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나마 하나 있던 타동사마저 잃게 된다. 그러면 나랑 동생처럼 목적어 자리로 밀려난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나 싶으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천장만 올려다봤다. 아무리 엄마의 타동사라 할지라도 나와 동생과 그리고 아빠까지 건사할 수는 없었다. 몸부림치며 미쳐 날뛸 것만 같은 기분을 죽을힘을 다해 억눌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다시 마우스를 이리저리 놀려 보았다. 관련 정보를 죄 열어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액 결제로 논문 몇 편과 기사 몇 토막을 받아 열었더니, 하나같이 우리나라 정년퇴직 기준은 만 60세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방문을 확 열어젖히고 번역 중이던 문서를 닫았다. 문서가 닫히자마자 메일을 닫았다. 메일이 닫히자마자 메일함을 닫았다. 메일함이 닫히자마자 포털 사이트를 닫았다. 포털 사이트가 닫히자마자 웹 브라우저를 닫았다. 웹 브라우저가 닫히자마자 노트북을 닫았다. 너무 많이 열고 닫았더니 타동사가 바닥났다.어지러워져서 침대에 누웠다. 눈앞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온몸이 차가워지고 오슬오슬 떨렸다. 몇 푼 안 되는 타동사를 모으는 족족 이렇게 다 써버릴 셈이야? 그러면 하나든 둘이든 커다란 타동사는 결코 거머쥐지 못할 거야. 결코 거머쥐지 못할 거야. 거머쥐지 못할 거야. 못할 거야. 못해. 못해. 못해. 못해. 못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못. 못. 못. 못. 못. 못. 못.못. 못.못.못.못. 못. 못. 못. 그기 아이라 카이. 못. 못. 못. 못. 못. 여보야 요새 젊은 아들.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어뜬 줄 아나?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현장에 반장님 없능교? 못. 못. 못. 못. 못. 못. 반장도 내 없으믄.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일이 안 된다 카더라. 못. 못. 못. 그라믄 내가.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내일 확인해 볼게 예. 못. 못. 못. 못. 못. 못. 아침에 내 가면 눈만.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껌뻑껌뻑하고 있는 기라.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그라게심더. 못. 못. 빨리 잠 좀 자라고. 못. 못. 못. 못. 아아냐, 네가 무슨. 못. 못. 못. 마주쳐도 그냥 무시해버려.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배고플 텐데 어서 밥부터 먹어. 못. 못. 못. 못.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아아냐, 네가 무슨. 못. 못. 못. 못. 못. 못. 요즘은 엄마도 할 말 다 해.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아아냐, 네가 무슨. 못. 못. 여긴 아빠 집도 아닌데 뭐.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2층에 금이 갔나 봐.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대못을 쳐서.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천장을. 못. 못. 못. 못. 못. 못. 아아냐, 네가 무슨. 못. 못. 못. 못. 부술지도 몰라.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책장 못. 못. 못. 못. 못. 못. 못. 책장 서랍장 못. 못. 못. 못. 못. 책장 조명 방문 못. 못. 못. 책장 공기청정기 라디에이터 못. 못. 못. 침대 나 의자 책상 못. 못. 못. 못. 못. 옷걸이 노트북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블라인드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못 목못요일 못머릿속이 밤새 울린 탓에 목부터 어깻죽지까지 결렸다. 옆집은 아침부터 공사를 하려는지 자재를 연신 옥상으로 나르기도 하고 괄괄한 목소리로 한바탕 웃기도 했다. 반면 여기 집안에서는 어쩐 일인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미 나를 괴롭히고도 남았을 아빠 차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냉장고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아빠가 지금 내 방에다 귀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문손잡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나는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방광이 터질 것만 같아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방바닥에 누웠다가 꿇어앉았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일어났다. 그때 방문이 꼭 안 닫혀 있었는지 바람결에 홱 열렸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뒤에 있던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엄마가 현관문을 닫다 말고 이쪽으로 달려왔다."저런, 안 다쳤니?""응."햇살이 현관과 거실을 지나 내 방을 잠깐 기웃거렸다. 아빠의 신발이나 청색 작업복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고, 대신 둘둘 말린 하얀색 벽지와 신문지만 눈에 들어왔다."배고프지? 어서 와 밥 먹어.""응."엄마는 내게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냄비에 밀가루 풀을 쑤기 시작했다."내일은 하루 휴가 신청했다고 사람들이랑 술 마신대. 오늘은 거기 기숙사에서 잘 거고."비로소 입맛이 돌고 밥이 목에 넘어갔다. 아빠가 없어지니까 아빠의 타동사도 사라졌다. 이제 1층부터 3층까지 우리 집은 엄마의 타동사가 차지했다."글쎄, 집에 사람들을 끌고 온다는데, 미쳤어? 안 된다고 했지.""어어, 근데 옆집은 방수 공사하나 보네.""응? 아 그러게. 강판으로 옥상을 덮을 건가 봐. 남자 여럿이 엄청 낑낑대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여자 혼자서 참 대단하지?"엄마는 부엌 창으로 옆집을 힐끔거리며 신나게 주걱을 저었다. 집안에서 다른 주어와 부딪칠 일 없으니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다시 입맛이 달아나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식탁에서 일어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넋이 나간 채로 변기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다리가 저려 오는 것도 한참 만에 느껴졌다. 그때 톱니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동생 방 문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방문이 빠끔히 열리고 믿기지 않았지만 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잠이 덜 깬 듯한 느려 터진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아직도, 뭐가, 남았어?""응. 엄마는 내려가서 도배 좀 하고 올게."동생의 하품이 길게 이어졌다."엄마아, 그걸, 혼자서, 다 하려고?"한다는 건 타동사이므로 순식간에 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동생이 갑자기 주어로 느껴지고 화장실에 숨어 있는데도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는 바로 전 동생의 말을 받았다."그럼, 혼자 하지.""그래도……""아니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조용히 해."타동사가 한 번 더 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 와중에도 나는 누가 화장실 문을 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바로 어제 두 동강 나버린 나의 타동사도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엄마는 방문을 닫으면서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추우니까 나갈 때 따뜻하게 입어. 오후에 아르바이트 마치면 꼭 전화하고."귀가 한순간에 뜨이면서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돈을 벌면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버는 것은 타동사이다. 큰소리를 낼 줄 알면 처음 얼마 동안은 두려워지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나를 깎아내릴 때도 두려워지지 않는다. 동생도 곧 내게 용돈을 주는 건 아닐까, 공무원 시험은 아예 때려치운 걸까, 아니면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됐지만 조금 뒤엔 전부 부질없는 짓으로 여겨졌다.맥이 풀린 채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여닫히고 엄마가 계단을 내려갔다. 곧이어 또 현관문이 여닫히고 동생이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 모두 발소리 때문에 계단이 울렸지만 곧 사라졌다. 엄마가 없어지니까 엄마의 타동사도 사라졌다. 동생이 없어지니까 동생의 타동사 역시 사라졌다. 타동사가 남김없이 사라지자 나는 더 이상 목적어가 아니었고, 물론 여전히 주어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럼에도 있었다. 문장 밖에 있었고 문법 너머에 있었다.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타동사가 집안을 흔들어 댔다. 옆집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집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나는 다시 문법에 사로잡히면서 문장 속 목적어 자리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공사 도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어쩐지 그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듯했다. 작은 부엌 창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환풍기 파이프를 타고 소리가 들어왔다. 엄마는 계단을 내려갔기 때문에 옆집 주어와 부딪치고 말았다."저기 아주머니, 내 집에다 덮개도 맘대로 못 씌워요?"엄마도 스스로 주어라는 걸 알고, 똑 부러지게 따지고 들었다."여기 좀 보세요. 배수관 구멍을 우리 집 쪽으로 내시면 안 되죠.""아니, 여기가 아주머니 댁이에요? 예? 아주머니 댁이냐고요.""물이 우리 집 보일러실로 떨어지잖아요. 저러면 또 곰팡이 슬 텐데, 우리는 어떡해요.""어디요, 뭐, 보일러실이요?""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네 담벼락 끝에만 스칠까 말까구만.""……"옆집 주어가 엄마의 타동사를 두 동강 냈는지 더 이상 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서 있지 못할 만큼 숨이 가빠지고 피가 마르더니 팔다리는 따로 놀았다. 높이는 것을 규정될 수는 없다. 낮추는 것도 규정될 수 없다. 반면, 높이는 것을 규정할 수는 있다. 낮추는 것도 규정할 수 있다. 나는 규정할 수 있다고 소리 내어 읊조려 봤다. 덕분에 전에 없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몸이 커 보이게 황급히 항공 점퍼를 찾아 걸치고 현관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설마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진 건 아니겠지. 옆집 주어가 엄마를 목적어로 만든 건 아니겠지. 갔는데 타동사가 날아오면 어떻게 맞받아치지. 그때 황소바람이 창문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어찌 손쓸 새 없이 현관문도 재빨리 닫아 버렸다. 다시 현관문을 열면 되는데,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이 잠겨서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타동사도 없이 갔다가 우스운 꼴만 될 것 같았다. 당장 계단조차 내려갈 수가 없었다. 마침 거실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 경찰밖에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가까워졌다. 그림자 하나가 창가에 어른거렸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똥줄이 타들어 가고 있을 때 뜻밖에도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아휴, 사람들이 왜 그러냐."엄마는 질렸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다행히 어디 잘못된 데도 없어 보였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뭐가 우리 집 쪽으로 넘어온 거지?""응. 말이 안 통해서 잠깐 기다려 보시라 하고, 아빠한테 전화했네.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아빠가 설명하니까 그제야 알겠다더라."우두커니 서 있는데 느닷없이 오금이 저려 왔다. 옆집 주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빠는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타동사를 갖고 있었다. 타동사 단 하나로 옆집 주어를 단숨에, 그것도 전화 한 통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덤빌 테면 덤벼 보라고 실은 나를 두고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엄마는 속이 다 후련한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월세를 받으면 엄마는 지금보다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법적으로는 이미 우리 집도 가지고 있다. 받는 것도, 가지는 것도 타동사이다. 아빠는 돈을 벌어올 뿐만 아니라 실은 집도 잘 지킨다. 도합 네 개의 타동사는 당연히 큰소리를 낼 수 있다. 아빠는 돈을 못 벌어오게 되어도 집은 꾸준히 잘 지킬 것이다. 도합 세 개의 타동사는 여전히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동생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곧 월급도 받을 것이다. 나만 떨어져 나왔구나 싶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마워했다. 아빠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하고 또 고마워해서 차라리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고마워했다.금요일보스턴백을 어깨에 메고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구둣주걱을 사용해서 운동화를 신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으며 시리도록 청량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밤새 내린 비로 대리석 특유의 냄새와 촉촉한 부엽토 냄새가 올라왔다. 파르스름한 가로등 불빛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몇 계단 아래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집어 베란다 위에 올려놓았다. 간밤에 유명인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힐끗 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다간 아빠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내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로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밤새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평생 목적어로 사느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생각보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져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문을 열고 집 앞 언덕을 내려가며 발소리를 크게도 작게도 내보았다.낯선 동네라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제대로 찾아왔다. 간판 끄트머리에 맺힌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걸 보았다. 여기 단층짜리 직업소개소 앞에는 빈 승합차 한 대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물기가 없는 장의자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잔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새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 패기 있게 타동사를 연습해 보았다."일은 아무거나…… 다시, 아아, 몸 쓰는 일은 뭐든 자신 있습니다. 장점은 큰 목소리입니다. 여기서 멀리…… 아니, 기숙사 생활도 괜찮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지금쯤이면 아빠가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올라왔을 것이다. 엄마도 동생도 이제 막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으로 미루어 앞으로 일어날 일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소리가 크면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크다. 따라서 타동사는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하지만 목적어가 사라지면 괴롭히지 못한다. 괴롭히지 못하면 타동사는 기능을 상실한다. 타동사가 기능을 상실하면 결국 주어도 기능을 상실한다. <끝>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9-01-01 경인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소설 황윤정 "날 채찍질하기 위해 써"… 詩 이명선 "시는 내 인생 전환점"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0일 오후 경인일보 수원본사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이날 시상식은 단편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홍정선 평론가·이인성 소설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김윤배 시인, 김화양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로 당선된 황윤정씨는 "당선작은 나를 채찍질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소설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 80대 화자와 미래 시점, 3인칭 시점 등을 시도했다"며 "이 소설을 쓰면서 평생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또 시 '한순간 해변'으로 당선된 이명선씨는 "시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시를 풀어가면서 나 자신에게 숨겨져있던 목소리를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며 "앞으로도 좋은 시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인이 되겠다"고 전했다.김화양 사장은 "문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수많은 갈등이 증폭되는데 사회를 정화시키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 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며 "30여년간 한해도 빠지지 않고 신춘문예를 열어온 경인일보의 열정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배출된 문인을 애착해달라. 이번 당선자들도 작품활동에 매진해달라"고 당선자들을 격려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10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로 당선된 황윤정씨(왼쪽)와 시 '한순간 해변'으로 당선된 이명선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01-1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총평]1306편 투고 예비문인 '열정의 장'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이명선의 시 '한순간 해변'과 황윤정의 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이다. 시 부문 심사위원들은 예·본심 원고를 거듭 살피고 고민한 끝에 '한순간 해변'을 선택했다. 김윤배 심사위원(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며 "좋은 시인을 선발했다"고 평가했다. 소설 부문 심사위원들도 본심에 올라온 단편소설을 며칠간이나 면밀히 살펴 '린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이인성 심사위원(소설가)은 "관심을 끄는 작품이 여럿 있었지만 높은 완성도로 유독 눈에 띈 작품"이라며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기대가 크다"고 했다.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시 1천158편에 소설 148편 등 총 1천306편이 접수됐다. 10대에서부터 70대 응모자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 문학에 열정을 가진 예비 문인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시 부문 본심에는 40, 50대의 응모자들의 작품 비중이 높았다. 오랜 기간 시를 대했던 흔적이 드러난 작품이 많아 대체로 완성도가 높았다. 다만 새로운 도전이 아쉬웠다는 평이다. 최근 이슈가 된 굵직한 사회 문제가 많았음에도 이를 다룬 시가 적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심사위원들은 사유의 대상이 사회에서 개인으로 좁아졌다는 것이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세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했다.소설 부문에서도 현 세태가 읽혔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짧고 빠르게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익숙한 세대의 모습이 서사적 구성력의 부족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고전에 대한 독서가 필요하다며 어떤 것에 감동을 받고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는 연습, 문학적 설득력을 찾아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특정한 경향이 없이 각자 여러 소재를 통해 이 시대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많아 앞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2개 부문 당선작 발표

단편소설 : 황윤정 '린을 찾아가는 길'시 : 이명선 '한순간 해변'신진문학가들의 등용문으로 지난 1987년부터 그 역할을 해온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올해에도 대한민국 문단을 이끌어갈 신인을 발굴·선정했다. 경인일보는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과 심사숙고 끝에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영광의 주인공으로 ▲단편소설 부문-'린을 찾아가는 길(황윤정)' ▲시 부문-'한순간 해변(이명선)'을 당선작으로 뽑았다.이번 당선작들은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문을 두드린 전국의 수많은 문청(文靑)들 작품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냈고, 그 결과 경인일보를 통해 등단의 길을 열게 됐다. 소설부문은 홍정선 평론가와 이인성 소설가가 본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148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옥석을 가렸고, 시부문은 김명인·김윤배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나서 1천158편의 시 가운데 작품을 엄선했다.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은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이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고 입을 모았다.앞서 지난해 11월 첫 공고가 나간 이후 총 1천306편의 작품이 접수돼 어느 해보다 예비 문인들의 참여가 뜨거웠다. 시상식은 오는 10일(수) 오후 3시 경인일보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부문별 심사위원, 당선자, 그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1989년 시 당선' 김인자 시인,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문학의 깊은맛 알게해준 힘

시인 김인자(사진)에게 글 쓰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이 일상이었고,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김인자 시인은 1989년 제3회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시인이 됐다. '등단'이라는 통과의례를 지나 시인이 됐다고 인정받았지만, 그는 늘 '자발적 아웃사이더였다'고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89년도에 수원 경인일보 바로 근처에 살았고, 구독자이기도 해서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난 사범대 출신이고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적이 없어 확신이 없었죠." 그저 지켜만 보다가,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쓴 시가 바로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겨울여행'이다. 첫 시도였는데 당선이 돼 기쁨보다는 얼떨떨했단다. "문학을 짝사랑하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당선작으로 뽑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이후 시집, 산문집 등을 내고 여러 활동을 했지만, 늘 부족한 나에게 회의가 들었어요."슬럼프를 이겨내려고 그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인이자 여행가로 김인자의 발걸음이 시작됐는데, 그는 지금까지 17권의 책을 썼다. 시인으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사과나무가 있는 풍경' '대관령에 오시려거든' 등 전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며 쓴 에세이는 2년 연속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등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시작이 그랬듯 지금도 나는 늘 아웃사이더에요. 혼자 헤쳐나가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문학의 깊은 맛을 보게 해 준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문학은 배워서 되는 것도 있지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쳐나가는 길도 있어요. 무조건 주류를 쫓기보다 내 생각대로 멈추지 말고 자유로이 쓰세요."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1989년 시 당선' 김인자 시인

2018-01-01 공지영

[경인일보 신춘문예]'1988년 시조 당선' 홍승표 시인, 배우지 않아 자유로운 글… 자신만의 생각·개성 담길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됐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간직한 꿈 하나쯤 있다. 홍승표(사진)경기관광공사 사장에게 '시인'은 그런 꿈이었다.그날, 경인일보로부터 온 전화 한 통은 꿈을 이룬 날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연세대학교 전국 남녀 문예콩쿨에서 시조로 장원을 했어요. 글 쓰는 일을 좋아했고, 공부도 해보고 싶었죠.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저히 대학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됐어요. 그러던 중 공무원 시험에 덜컥 합격했고 그 길로 공무원이 됐지만 글을 쓰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글 쓰는 재주 덕에 다행히(?) 공직 생활도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를 쓰는 일부터 시작했다. "1986년에 처음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시작해 첫 해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조를 써냈는데 아깝게 최종 결심에서 떨어졌어요. 마침 다음해 대선이 한창인 때라 일이 비교적 한가해 틈틈이 시조 쓰기를 계속했죠." 신춘문예 당선작 '새벽, 숲길에서'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는 동이 트기 전 광교산에 올라 시상을 떠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공무원과 시인,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직업을 병행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시를 썼다. 정식으로 글을 배운 적은 없지만, 글을 쓰는 일은 그의 일상이고 낙이었다. "저는 오히려 글을 배우지 않은 게 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배웠다면 그 풍을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었을 거에요. 그런 것에서 자유롭다 보니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즐길 수 있었어요."그는 등단 때부터 지금까지 서정시를 고집했다. "경기도 광주 시골에서 태어난 촌놈이라 그럴지 몰라도, 자연에서 받는 대단한 영감을 바탕으로 서정시를 쭉 써왔어요. 나만의 생각, 나만의 개성이 담긴 글을 쓰도록 노력하세요. 인위적인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덧붙여 후배에게 당부했다. "신춘문예가 대표작이 돼선 안됩니다. 많이 쓰고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1988년 시조 당선' 홍승표 시인

2018-01-01 공지영

[경인일보 신춘문예]'2001년 소설 당선' 나여경 소설가, 삶 자체가 창작의 원동력… 인생이 지속되는 한 '쓸것'

"아웅다웅 살고 있는 우리네 삶 자체가 창작의 힘, 신문은 소설가에게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하는 최상의 자료다."지난 2001년 단편소설 '금요일의 썸머타임'으로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나여경(사진)작가. 소설집 '불온한 식탁'과 '포옹', 여행산문집 '기차가 걸린 풍경'으로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제11회 부산작가상 수상에 이어 지난달에는 제10회 백신애 문학상 수상하며, 문단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이외에도 작가와사회 편집장, 부산소설가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요산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부산작가회의·부산소설가협회 이사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등단 소식을 듣고 이윤기·현길언 당시 심사위원께 감사 전화를 드렸을 때가 생생하다"며 "故 이윤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제발 펜을 놓지 말고 열심히 쓰세요' 이 한마디가 떠오른다"고 했다. 나 작가는 "글을 쓰다 보면 대부분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언제나 마음 흡족한 글만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글의 신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경인일보 신춘문예 후배들에게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쓰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의무"라며 축하의 말을 대신했다.신문에서 우연히 구스타프말러에 관한 기사를 보고 영감을 받아 당선작이자 처녀작 '금요일의 썸머타임'을 썼다는 그는 "삶 자체가 내 창작의 힘"이라며, "사람과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지만 인생사가 지속되는한 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더 나은 작품에 대한 목마름을 얘기하는 나여경 작가는 "아직도 쓰고 싶은 이야기 몇 가지가 내 안에 꿈틀대며 끓고 있다"며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날 것을 약속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2001년 소설 당선' 나여경 소설가

2018-01-01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눈을 떴다. 파란색을 약간 섞어 바른 핸디코트 벽 위에 걸린 시계로 눈이 간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부끄러움 없이 투명 유리 안에서 몸을 섞고 있다. 커튼 밑 부분을 잡고 젖혀본다. 벌어진 틈만큼 직사각형의 네모난 햇빛이 열 두 평 오피스텔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깊은 숨을 쉰다. 초등학생처럼 색색의 옷을 입은 행거에 걸린 옷걸이들이 보인다. 어젯밤 벗어놓은 흰색 원피스가 허리를 꺾은 모습 그대로 그 위에 가로질러 누워있다. 원피스를 내려 기다란 타원형의 전신거울로 다가가 몸에 대어본다. 거울 속의 여자가 웃고 있다. 브이자로 파인 목과 민 소매, 샤넬라인의 원피스는 빛을 받아 한층 하얗다. 어제는 금요일이었다. 나는 금요일마다 나이트 클럽에 간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창가에 놓인 허브는 오늘도 싱싱하다. 허브, 읊조려 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바람이 인다. 외로움의 냄새를 잡아먹는 향이라고 주문을 걸며 사다놓은 허브가 바람에 무게를 실으며 하느작거린다. 몸을 일으켜 싱싱한 허브잎사귀를 똑, 똑 소리나게 딴다. 파인애플민트향의 허브가 물 속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녹색 향을 뱉기 시작한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초록빛 허브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남은 허브잎사귀를 욕조에 떨어뜨리고 더운물을 받는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욕조에 소금가7루를 솔솔 뿌려 넣는다. 거실바닥에 신문을 길게 펼친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신문보기다. 손님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 스포츠란까지 꼼꼼히 읽는다. 신문 귀퉁이 박스란에 구스타프 말러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릴 때의 반복되는 정신적 외상은 뇌의 발달에 영향을 주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증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외상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수단중의 하나가 '반복 강박'이다. 두려움의 대상과 관련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집착 행동이 반복 강박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작곡가다. 십사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아홉 명의 형제가 반복적으로 죽는 충격적인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간직된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반복하며 극복하려는 집착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행위, 그것은 작곡이었다. 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가위를 찾는다. 가위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캇터칼로 신문의 박스 기사를 오린 뒤 수첩 속에 끼워 넣는다. 신문을 펼쳐 놓은 채 욕실로 들어간다. 욕조에 몸을 누인다. 감은 눈꺼풀 위로 찬 물방울이 떨어져 순간 움찔한다. 바다 속 깊은 곳에 둥실 떠있는 느낌이다. 따뜻한 물 속에서 하릴없이 흘러 다닌다. 저 어디쯤,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못하고 물방울이 된 인어가 살고,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가 살고 있는 용궁이 있지 않을까. 발목에 물컹, 무언가가 닿는다. 온몸에 은빛 가루를 덮어쓴 갈치다. 내 키보다 더 큰 갈치가 몸을 일자로 세우고 물결을 가르며 내게 다가온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입술을 달싹일 수 없다. 갈치에 몸이 감긴 나는 깊숙이 깊숙이 가라앉는다. 숨 쉴 수 없어 손사래를 치다 머리가 어딘가에 쿵하고 부딪힌다. 물의 온기에 깜빡 잠이 들었던가. 머리를 흔들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물살을 떨치며 욕조에서 일어선다. 은색가루 대신 배와 허벅지에 허브잎사귀가 붙어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몸을 헹구고 물기를 닦는다. 샤워코롱을 온몸에 스프레이 한다. 창문을 활짝 연다. 태양은 여전히 작열하고 있다.담요를 뒤집어쓴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담요를 벗는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다시 담요를 뒤집어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던 풍욕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몸이 바람을 잘 받아들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오래 묵은 비린내를 큰 숨을 쉬며 내보낸다. 암환자나 깊은 병을 앓는 이들이 몸 속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는 민간요법인 풍욕. 엄마는 지금도 풍욕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잠든 밤 마루에 서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풍욕을 할 때의 엄마는 평화로워 보였다. 엄마가 어떻게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생선을 팔고 있기에는 너무 예뻤다. 철이 들면서 엄마에게 나는 늘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손톱청소 도구와 매니큐어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와 신문 위에 놓는다. 손톱의 반달모양 위로 약간씩 비집고 나온 살점을 깨끗하게 민다. 손톱 주위의 지저분한 살점은 손톱깎이로 잘라내고 줄칼로 긴 손톱을 맵시있게 다듬는다. <2001년 소설부문 당선작-나여경, 금요일의 썸머타임 일부>저 숲의 적막속에서 한 生의 불씨를 당겨/純銀의 매듭을 풀고 알몸으로 깨인 넋이/이제 막 피를 吐하며 둥지트는 이 새벽.//외곬 달아나다 못다챙긴 깃털들이/觸手의 귀 곧추잡고 비늘터는 어둠 저 끝/오늘도 한기둥 나무로 서서 다시묻는 내 안부여.//빛으로 서는 餘白 둘레 둘레 잎 모우고/부채살 이우는 가지 무지개빛 새살이 돋아/그 맥박 거친 숨소리 결 고르는 쪽 빛 하늘.//태고의 허물벗고 다시 서는 오늘앞에 /이제 막 깨어난 눈빛 새筍돋는 풀꽃 바다/숲은 숲, 바다는 바다 아~꺼지지 않는 생명이여. <1988년 시조부문 당선작-홍승표의 詩새벽, 숲길에서><1> 가을 내내 나를 옭아 맨/비밀한 느낌 어디가고/북간도 어디쯤에 있을 나/찾아낼 일이다/그대 영혼 사이 오만하게 스치는/칼바람 볼 일이다/창자에 낀 어둠, 쌓이는 먼지/방금 가슴을 밟고 지나는/포크레인의 흉악한 음성 들을 일이다/후지필름 통안에서 질식사한 개미 한 마리/뚜껑 사이 바스라진/더듬이의 슬픔 볼 일리다/다급한 외침에도/구원은 느린동작으로 오고 있음을/똑똑히 알 일이다/자유는 무한이 될수 없음을 안/서른 넷의 물적증거 소멸할 일이다 <2> 옥상위엔 순백의 자유가 펄럭인다/그리움은 대로를 직진하고/물구나무 선 거리가 나를 압도한다/바닥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고/빙벽엔 발가벗은 내가 부동으로 서 있다/무섭다, 곡기끊긴 사랑과 결박당한 눈물/꿈은 역마살이 끼었는가/뿌리까지 얼게하는 카랑한 냉기/가슴엔 빙산 갈라지는 소리/통사정해도 되돌릴수 없는 시간 쌓이고/오물까지도 저리게 하는 바람/새벽은 내게 간통녀 되기를 강요하고/새들은 날개를 잃었다/회색의 풍선 하나가/지하로 곤두박질한다/모두가 수혈을 기다리는 사람 뿐/우체부는 발길을 끊고/전화는 수리 중/밤은 그뭄 밤,/누군가의 흐느낌 소리 들어야하는 밤도/이미 쉼표는 아니다. <1989년 시부문 당선작 김인자의 詩겨울여행>[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2018-01-01 경인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32년의 발자취 …

시·시조·소설·동화신인 71명 배출지역·나이 뛰어넘어 '공정한 심사'최연소 이승혁·최고령 김진기 '화제'안은순 등 문단 중견작가 자리매김지난 198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의 첫 공고가 나간 이래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올해(2018 신춘문예)로 32번째를 맞았다. 30여년간 총 71명의 문인이 경인일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많은 당선자들이 꾸준히 창작활동을 펼치며 한국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초창기(1986~199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소설과 시, 시조 등 3개 부문에서 공모를 진행해 신인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93년 시조를 대신해 동화부문을 신설하고, 1995년까지 3년간 당선작을 뽑아 문인을 배출했다. 1994년에는 당선자 23명의 작품 126편을 모아 사화집((詞華集) '우리시대는 文學的이다'(경인신춘문학회)를 펴냈다.지난 30여년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남녀노소,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문학청년의 등용문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해왔다. 지난 2010년 시 부문에 당선된 김진기씨는 당시 73세라는 응모 나이로 그해 '전국 신춘문예 최고령 당선자'라는 타이틀을 얻고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씨는 2012년 시집 '차우차우'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최연소 당선자는 2012년 당시 인천 강화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승혁씨로 시 '우물이 있던 자리'로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심사를 맡은 민용태 시인은 '어린 나이 답지 않은 성숙한 시적 감수성을 지녔다. 황지우 시인의 초기작을 보는 듯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1989년 등단한 김인자 시인은 시뿐 아니라 여행에세이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독자들과 공감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인일보에 '천사의 다른 이름을 찾아서…세상의 아이들'을 연재하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 독자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지난 2001년 단편소설 '금요일의 썸머타임'으로 당선된 나여경 작가는 창작집 '불온한 식탁'과 '포옹', 여행 산문집 '기차가 걸린 풍경' 등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1992년 소설부문 당선자인 안은순 작가는 등단 20년만인 2012년 첫 소설을 발표하며 식지 않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한국문단에 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김현영·홍명진·심은섭 작가도 경인일보가 배출한 대표적인 작가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 32년의 발자취…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린을 찾아가는 길

돌풍의 시작은 '2041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의 글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아이엠 트립의 광고문구가 입에 텁텁하게 남아 맴돌았다필립은 요즘 '아이엠 트립(IM Trip)'에 푹 빠졌다. 아이엠 트립은 일종의 환각제였다. 영어 단어 이매지너리(imaginary)의 앞 글자 두 개를 따서 붙여진 이름인 만큼 말 그대로 '상상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아이엠 트립이 처음으로 시판된 건 이천 오십 칠년이었는데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광고를 본 대중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광고 문구는 대략 이랬다. '당신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 약을 복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잠들기 전 캡슐 형태의 아이엠 트립을 하나 먹는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장면을 집중하여 떠올린다. 그러면 잠이 드는 동시에 그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실제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타임 워프 개발은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진했다.) 아이엠 트립이 선사하는 상상 속의 과거는 굉장히 현실 같았다. 보통의 꿈처럼 맥락 없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냄새, 맛, 촉감까지도. 그렇게 선연하게 재생되는 과거의 어느 날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번 살아보는 것. 그게 바로 아이엠 트립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학적으로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결론이 났다 할지라도, 그리고 국가가 허락하는 수준이라 할지라도 환각 작용이 주된 효능이었기에 아이엠 트립은 출시되자마자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 몇 가지 마약이 합법화된 뒤로 아이들도 쉽게 그것을 구할 수 있게 되어 환각으로 인한 교내 사건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던 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USNS(United Space Network Service)를 이용하여 종로 근처의 아이엠 트립 본사 앞에서 판매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SNS를 쓰던 스마트 세대 이후 등장한 스페이스 세대는 시간을 넘나들지는 못하지만 공간을 넘나드는 데에 성공한 첫 세대였다. 그들은 국가 분쟁을 막기 위해 제한된 지역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USNS를 통해 마음대로 체크인하곤 했다. 당연히 시위는 매일 열릴 수 있었다. 날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마약 합법화라는 이슈에 편승해 시민들을 홀려 돈을 버는 기업'이라며 회사 측을 비난했다. 연이은 시위에 결국 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그런 기회주의적인 마인드로 제품을 출시한 게 아니며 그저 스페이스 세대가 아직 이루지 못한 '시간에 대한 통제'를 조금이나마 이루려는 시도였다고 밝혔다. 회장이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을 때 기자회견은 아쉽게도 바로 끝났다. 누군가 그곳의 위치를 USNS에 슬쩍 흘려서 항의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러나 짧은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드디어 일각에서 아이엠 트립을 구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거였다. 그 움직임은 대중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분명 합법인데도 밀거래라도 하듯 아는 이를 통해서만 약을 건네받곤 했고 그마저도 겁이 났는지 USNS에 비밀 채팅방을 만들어 거래하는 장면을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으려 애썼다. 심지어 김진오라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아이엠 트립을 구매한 사실을 들켜 직장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소개되면서 아이엠 트립과 관련한 커뮤니티는 갈수록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는 놀랍게도 한순간에 극적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아이엠 트립을 먹었다고 밝힌 사람들의 생생한 후기가 여러 차례 포터넷(Post-Internet)을 휩쓴 탓이었다. 돌풍의 시작은 한 사이트에 올라온 '2041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쓴이는 말했다. 아이엠 트립으로 어머니가 죽은 해로 돌아가 그때 당시 지키지 못했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고, 자신은 아이엠 트립을 먹은 걸 후회하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다시 복용할 거라고. 드라마에나 자주 나올 법한 스토리였다. 달리 말하자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할 만큼 언제든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스토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임종'은 식상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소재였으므로. 그 글은 포터넷 유저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많은 이들이 글쓴이가 태그해둔 어머니의 묘지에 체크인하여 꽃과 함께 뒤늦은 조의를 표했고 동시에 아이엠 트립을 향한 관심을 드러냈다. 점점 포터넷 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oooo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이 베스트 순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후기들은 진위 여부를 두고 언제나 시끄러웠다. 실제로 과거에 돌아가는 게 아닌, 오롯이 사용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그 경험 속에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남기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상상의 경험을 진짜로 겪은 거라고 한들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며 거짓으로 꾸며낸 거라고 한들 가려낼 방법도 없었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맡긴 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럴 수밖에. 어쨌든 믿는 사람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후기는 올라왔고 어느덧 아이엠 트립은 확실하게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 회사 측이 발표한 판매량만 봐도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더 이상 유저들은 숨어서 아이엠 트립을 사지 않았다. 이제는 오픈된 장소로 당당하게 체크인하여 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직장에서 잘렸었던 청년, 김진오가 누군가의 지적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사람들은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집회를 열어 부당 해고의 철회 및 개인 선택의 자유를 주장했다. 필립이 그 집회에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우연보다는 실수에 가까웠다. 여든이 갓 넘은 필립은 (아무리 지금이 여든 정도로는 어디 가서 노인 취급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시대이긴 하지만) 워낙 스마트 세대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USNS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체크인 장소를 잘못 입력하곤 했다. 단순히 예전처럼 글자로 주소를 입력하는 거라면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지만 USNS는 3D 화면을 눈앞에 띄워놓고 그 속에 걸어 들어가 양손으로 거리를 확대, 축소하여 최종 목적지를 터치해야 했기에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조금 서툴 수밖에 없었다. 버벅대며 겨우 성공하거나, 자식에게 부탁하거나, 그냥 포기하거나. 세 가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필립은 그 중 첫 번째, 혼자서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힘들게라도 성공하는 타입이었다. 다른 노인들처럼 도움을 구할 자식도 없거니와 만약 자식이 있었다 해도 딱히 필립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부탁할 일은 없을 거였다. 필립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본인의 부족한 깜냥을 쉽게 인정하고 포기할 사람도 아니어서 항상 조금 버벅대더라도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게 하면 (아주 가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가까스로 해내곤 했다.하지만 그날은 영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필립이 교장 직을 맡고 있는, 시에서 가장 큰 펫스쿨(pet-school)의 입학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천 십년대 후반만 해도 다섯 가구 당 한 집 정도만 반려동물과 같이 살았었는데 어느 순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의 수가 그렇지 않은 가구 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자연스럽게 펫 시장 역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것이 바로 펫스쿨이었다. 과거에는 반려동물을 펫스쿨에 보내는 게 유난 떠는 일이라며 손가락질까지 받곤 했으나 이제 펫스쿨은 엄연히 국가 차원에서 의무화한 일종의 공식적인 교육 제도였다. 이천 사십년 대 후반, 동물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고 난 뒤 수많은 동물들의 이야기가 그 기계를 통해 번역되며 곳곳에서 인간 사회의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성난 대중의 반응에 정계는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동물권 보장을 시대의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곧 여러 제도를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① 모든 반려동물은 가까운 펫스쿨에서 최소 일 년 간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 이상은 재량에 맡긴다. ② 입학 시기는 반려동물의 종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존재한다. ③ 교육 및 훈련은 동물권을 박탈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인간을 따르기 위한 훈련은 세부 교칙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된다. ④ 보호자도 보호자로서 필요한 과정을 밟아야 반려동물이 정식으로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펫스쿨에서는 반려동물들을 직접 가르칠 펫티처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관리할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래서 은퇴한 선생님들을 여러 요직에 앉히기 위해 데려갔는데 필립도 그런 케이스였던 셈이다. 사실 처음에 필립은 교장 직을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펫스쿨 의무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교직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학교든 동물 학교든 마찬가지였다. 거의 오십 년을 꼬박 학교에 매달려 있다가 퇴직한지 겨우 몇 달째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쉬고만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지쳐버린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필립이 은퇴하던 해에 학교 폭력으로 학생 한 명이 옥상에서 뛰어내린 거였다. 그때 교감이었던 필립이 소식을 들은 건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필립은 하얗게 센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기다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소리쳤다. "왜 하필이면!" 그 짧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 뒤에 생략된 말은 뻔했다. 왜 하필이면 올해인 것인가! 왜 하필이면 내가 교감으로 재직 중일 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가! 필립은 오십 년의 교직 생활을 별 탈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사건을 덮었다.그런 상황을 겪고 난 뒤였으니 필립이 펫스쿨 교장 직을 거부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청을 받았을 때 놀랍게도 필립은 조금 망설였고 세 번째에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필립 본인에게 그 변심은 갑작스러운 변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필립은 몇 달째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찾아간 학생의 장례식에서 학생의 영정 사진을 본 뒤로 계속 그랬다. 대부분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모른 채 학교를 이끌어가던 필립이었건만 영정 사진 속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교감실의 청소를 맡았던 학생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기억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는 얼굴이라 잠시 기이한 기분이 들었을 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뇐 그 문장 뒤에 생략된 말은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나서 필립은 매일매일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곤한 상황에서도 도무지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매번 악몽을 꾸었으나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일어나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피로만 쌓여갈 뿐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하면 제일 좋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시기를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가장 타당한 원인은 장례식일 수밖에 없는데 필립은 그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은 사건은 맞지만 이미 여차여차 수습된 사건이기도 하기에 계속해서 꿈자리가 사나워 고생하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상태는 더 심해졌고 심지어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보내는 날도 더러 생겼다. 필립은 마침내 불면증의 유일하고도 유력한 원인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사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였다. 펫스쿨 교장 직을 수락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마음의 변화였다. 비록 사람 학교에서의 역할은 끝났지만 이렇게 다시 학교라는 공간에 불려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부채 의식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그렇게 펫스쿨의 교장이 된 필립은 학교에 몹시 전념했다. 단순히 집과 교장실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모든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학생들과 직접 소통하려고 애썼다. 펫스쿨이라고 해도 막상 겪고 보니 이전의 사람 학교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냥 동물일 뿐, 얌전한 학생도 있었고 활발한 학생도 있었으며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당연히 극성스러운 학부모들도 있었다. 일에 열정적으로 빠지자 필립이 악몽을 꾸는 빈도는 다행히 낮아졌다. 아주 가끔 다시 잠을 설치는 경우가 생기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음 날에 학생들과 더 많이 지내면 당분간은 괜찮았다. 이런 생활을 하고 있던 필립에게 펫스쿨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입학식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교장인 자신이 직접 그럴 필요는 없는데도 필립은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고 각각을 배정된 반으로 안내하여 반장 선거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신입생 중 하나가 탈출을 꾀했다.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학교를 빠져나간 거였다. 펫스쿨 공식 계정으로 USNS에 긴급 공지 글이 올라갔다. '이름: 사라, 나이/학년: 6개월(1학년), 종: 강아지(슈나우저/사진 첨부). 오전 10시 경 보호자의 손을 벗어남.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리 멀리는 못 나갔을 거라 추정. 많은 제보 바람.' 글이 올라가자마자 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제보가 쏟아졌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그 제보 속에 찍힌 곳으로 곧바로 체크인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다 살펴봤으면 그 다음 장소로 체크인하고 그런 식이었다. 필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자신의 USNS를 켜 성큼성큼 3D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제보된 장소 중 하나를 과감하게 터치했다. 평소에는 수십 번 망설임 끝에 이루어졌을 모든 움직임들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필립은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 '아이엠 트립을 복용할 자유를!' 하고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 사이로 체크인하게 되었다.필립은 아이엠 트립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그런 비슷한 이름 때문에 세상이 조금 시끄럽다고,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얼떨결에 집회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그 집회가 어떤 집회인지 관심 없었다. 원하던 장소가 아닌 곳에 체크인 됐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이런 곳에 학생이 숨어든다면 찾기 힘들겠구나 하는 걱정만 들었다. 그저 사라의 이름을 외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필립의 눈에 누군가가 들고 있던 아이엠 트립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아이엠 트립의 포장에 쓰여 있는 광고 문구가 필립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 필립은 다리가 무언가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후회, 미련, 아쉬움……. 장례식에서 본 학생의 영정 사진이 머릿속을 스쳤다. 필립은 아이엠 트립을 들고 있는 사람의 팔을 붙잡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보시오. 이게 대체 무슨 약이오?" 사실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필립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번엔 어쩐지 치솟는 궁금증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다행히 아이엠 트립의 대단히 열성적인 유저였던 그는 필립의 질문에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약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포터넷을 휩쓸었던 후기들부터 본인이 직접 겪은 경험들까지 이야기하며 필립에게 아이엠 트립으로 상상의 시간 여행을 꼭 하기를 거듭 권했다. 그러고는 목적지를 터치할 필요 없이 바로 내재된 체크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USNS용 체크인 칩 하나를 선심 쓰듯 건네주었는데, 그러면서 이곳에 가 자신의 이름을 대면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필립은 자신의 오른손에 놓인 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칩을 완전히 감싸며 주먹을 한번 힘 있게 쥐었다가 다시 서서히 폈다. 솔직히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필립은 평소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믿지 않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칩을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됐소.' 하고 운을 떼려는 순간 필립의 초점이 칩이 아닌 칩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손에 맞춰졌다. 평생 매끄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비참하게 쪼그라든 볼품없는 손이었다. 조금 전에 중얼거렸던 아이엠 트립의 광고 문구가 텁텁한 입 속에 남아 미련하게 맴돌았다. 필립은 재차 주먹을 쥐었다. 그는 굳게 쥔 필립의 주먹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필립은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사라를 찾았다는 펫스쿨 계정의 공지가 올라와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참 동안 집회 현장을 서성거렸다.삼일 뒤, 필립은 결국 USNS에 칩을 꽂고 거래처로 이동했다. '체크인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문구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막상 YES를 눌러 아이엠 트립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자 구매는 생각보다 쉬웠다. 물론 약을 샀다고 해서 바로 복용한 건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또다시 삼일이 지나고 나서야 필립은 드디어 처음으로 아이엠 트립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침대에 앉아 캡슐 형태의 아이엠 트립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일종의 환각제에 의존해야한다는 점이 꺼림칙해 다시 한 번 갈등했지만 마침내 아주 천천히 캡슐 하나를 삼켰다. 필립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장면을 떠올렸다. 처음 학생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던 바로 그때를. 최대한 집중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당시 따사로운 햇볕이 교감실을 내리쬐고 있었고 필립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고 당황한 표정의 몇몇 교사들이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필립이 한 마디 하려는데 어쩐지 교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명은 심지어 울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 큰일 났어요. 학생 한 명이……." 현실은 몇시간일 터인데 상상의 과거는 며칠씩 흘렀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이 YES에 닿았다"뉴스 못보셨어요?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필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아이엠 트립이 선사하는 상상 속의 과거로 들어왔음을. 자각은 어렵지 않았다. 전해들은 대로 모든 감각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햇볕의 따스함과,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깬 자신의 심장 소리, 손에 배인 땀, 선명하게 보이는 교사들의 표정, 더없이 뚜렷하게 들리는 울음소리까지. 이보다 현실적일 순 없었다. 필립은 양손을 비벼 땀을 없애며 아이엠 트립은 상상의 여행이 아닌 타임 워프를 가능하게 만드는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신뢰도 높은 모든 후기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실제로 바뀐 과거는 없었음'을 알리고 있었다.이는 아이엠 트립 회사 측에서 공식 발표한 주의사항과도 똑같았다.) 그저 얼떨떨해하던 필립이 정신을 차린 것은 탁자 위 공간에 설치해둔 3D 시계를 보았을 때였다. 시계는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필립이 익히 알고 있는 순간이었다. 필립은 실제로 과거의 당시에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던 시계를 보며 오십 년의 교직 생활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소리쳤었다. 왜 하필이면!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필립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상의 여행이든 타임 워프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과거로 왔다. 그것도 밤마다 좀 더 괜찮은 과거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한 뒤에 돌아온 과거였다. 수없이 상상했던, 좀 더 나은 과거를 만들어볼 기회가 온 셈이었다. 필립은 돌아온 과거 속에서 이번에는 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조사에 응하여 학교 폭력을 일삼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가려내기를,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기를 지시했다.그리고 교무 회의를 열어 은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은 교직 생활 동안 학교 폭력을 없애기 위해 학생들 곁에서 최선을 다하겠으며 다른 선생님들도 성실히 돕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과거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현실에서 잠든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일 터인데 상상 속의 과거는 며칠씩 흘러갔다. 그 며칠 동안 필립은 죽은 학생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리저리 발로 뛰었다. 펫스쿨의 교장이 된 뒤 학교에 전념했듯이, 그렇게 애썼다. 그리고 이번에도 학생의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마주했다. 필립의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은 상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필립은 매일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던 말을 드디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미안하네. 정말 미안했네."필립은 눈을 떴다. 동시에 필립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을 미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장례식장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거였다. 현실인데도 오히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상상 속의 과거보다 더 현실감이 없는 거 같았다. 필립은 한참이나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자신이 새로 만든 과거의 순간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상기시켰다. 기껏 바꾼 과거가 상상에 불과하다니 아무래도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과거 속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그래도 어쨌든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했던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그렇게 할 걸.' 했던 행동들을 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었기에. 필립은 눈물로 베개가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필립이 아이엠 트립에 푹 빠진 건 그때부터였다. 하루에 적어도 하나씩은 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 찝찝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남아 있던 사건을 다시 찾아갔다. 매일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었다. 어쩔 땐 천구백팔십 년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께 버릇없이 굴었던 날을 다시 살아보기도 했고, 어쩔 땐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통령을 탄핵했던 이천십 년대 후반의 어느 날로 돌아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보기도 했다. 또 어쩔 땐 이천삼십 년대 초반에 있었던 세계 여성 혁명의 날에 직접 참여하여 여성들을 비롯한 유색 인종, LGBT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행진하기도 했으며, 어쩔 땐 이천사십 년대 초반에 머물며 그때 당시에는 진짜로 성공할 줄 몰랐던 USNS에 과감하게 투자해보기도 했다.새로 만들어보고 싶은 과거의 순간은 생각하면 할수록 많이 떠올랐다. 필립의 다이어리는 돌아가고 싶은 언젠가의 날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모든 날들을 다시 살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은 상상 속의 과거가 끝나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연속해서 아이엠 트립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필립은 그 모호해진 경계가 마음에 들어 더욱 자주 상상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필립은 어느 순간 자신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지도 않았었고 자신의 잘못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립뿐만 아니라 아이엠 트립을 복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하여 바꾸겠다는 의지였으므로 자주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상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성격은 바뀌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그렇게 성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초래한 '새로운 과거'는 아무리 새로워봤자 결국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속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현실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내적 변화가 있든 없든 자신이 만들어낸 그 '진짜' 삶의 흔적을 언제까지나 떠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필립이 이를 인지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한 이천 육년으로 돌아갔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초보 선생 특유의 서투름과 어설픔으로 저질렀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실수들을 만회해보고자 필립은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엠 트립을 하나 먹고 누웠다. 그리고 가장 만회하고 싶은 기억의 장면을 집중하여 떠올려 당시로 돌아갔다. 몇 번을 겪어도 현실처럼 생생한 감각에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렇게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젊음을 다시 한 번 누리는 느낌이라 더 좋았다. 그런데 얼추 원하던 대로 상상 속 과거의 일부를 완성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도 필립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동료 선생으로 필립이 짝사랑하던 여자였다. 필립은 여태껏 아이엠 트립을 먹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이 없는 다른 주변 환경에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았을 때, 필립은 교실에 있었고 그녀는 운동장에 있어 둘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었는데도 필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거의 습관처럼.실제로 과거에도 필립은 멀리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곤 했었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워낙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애초에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정하기까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인정하고 나서도 고백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감당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냥 짝사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딱히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가까워지면 더 좋아하게 될 터였는데 예전의 필립에게 그런 감정의 변화는 그리 달가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빨리 전근을 가버렸다는 점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일한지 일 년 만에 필립은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근무지가 멀어지면 그대로 끝일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비로소 조금 후회했다. 자신이 감당하기 싫어 포기한 경우의 수는 어쩌면 자신의 소심함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한들 필립에게는 뒤늦게라도 연락처를 알아내 친해질 그런 용기마저 없었다. 후회되어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감정이란 건 식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거였다.하지만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이 우연히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필립은 그 감정이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월이 흘러 예전처럼 감정의 형태가 견고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것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여전히 특유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후회이자 미련이자 아쉬움이었고 또한 그리움이었다.필립은 그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과거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새로운 과거 속에서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필립은 혼자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이엠 트립을 이용하여 만들어내는 개별적인 상상의 과거들을 하나의 상상으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가설 하나를 입증해야 했다. '상상 속에서 바뀐 과거도 자신의 의식 혹은 무의식 아래 저장된 일종의 실제 기억이므로, 아이엠 트립을 통해 실제 과거가 아닌 가짜 과거로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필립은 제일 먼저 그녀가 전근 가던 날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그녀가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필립은 마치 펫스쿨 입학식 때 학교를 빠져나갔던 사라를 찾으러 갈 때처럼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 앞에 서자 정말 현실인 것처럼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났다.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달아오른 얼굴로, 하지만 과감하고 당당하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담당하던 학년도 다르고 평소에는 친하지도 않았던 필립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꽤 당황하는 거 같았다.필립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도 그녀의 표정에 묻어나는 당황스러움도 무척이나 생생했다. 필립의 '진짜' 기억에 충분히 각인될 만큼. 다행히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곧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필립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 필립은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고 그녀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하면 되죠." 필립은 드디어 가설을 입증해보기로 했다. 아이엠 트립을 먹고 자리에 누웠을 때 그녀와 연락을 이어가던 상상 속의 어느 날을 집중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가설은 옳았다.아무리 환상이라고 한들 선연한 인상을 지닌 채 의식 속에 각인된 일종의 경험이었기에 필립은 상상 속에서 그녀와 연락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필립의 개별적 상상이 필립의 의도 아래에서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던 셈이다.새로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대한 과거 속에서 필립은 실제로 젊었던 필립보다 용감했고 배려심이 있었으며 또한 대범하고 너그러웠다. 물론 종종 원래 필립의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필립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참 다른 사람인 거 같아." 그 순간 필립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젊어진 자신의 손이 보였다. 분명 삼십 대의 피부로 돌아왔는데도 왠지 쭈그러든 노인의 피부를 보는 것 같았다. 필립은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마음은 항상 이랬어." 어쨌든 그렇게 좀 더 괜찮은 성격으로 거듭난 필립은 그녀와 순탄한 연애 시절을 보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예쁜 딸도 얻었다. 필립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딸의 고른 숨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벅차올랐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딸의 호흡을 따라했다. 딸이 숨을 들이쉬면 필립도 숨을 들이쉬었다. 딸이 숨을 내쉬면 필립도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함께 호흡한 뒤 필립은 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필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필립에게 다가온 그녀가 필립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필립은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 잔뜩 목이 멘 채 중얼거렸다. "린. 린이라는 이름이 좋겠어." 언젠가 딸이 있다면 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이제 필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엠 트립에 완전히 빠졌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상상 속의 과거에서 그녀와 린과 함께 지냈다. 심지어 과거의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은 현실과 같지 않아서 하룻밤을 누워서도 여러 계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필립은 그렇게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보냈다. 점점 필립에게 현실과 상상의 구분은 무의미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필립은 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리 많이 사뒀다고 여겼는데 언제 다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처 정리를 못해 지저분한 책상 위를 서둘러 헤집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남은 약은 없었다. 필립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왜 하필이면!" 애가 탔다.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과 그녀는 막 린의 유치원 학예발표회에 함께 가려던 참이었다. 얼른 약을 먹고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와 린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립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USNS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며칠 째 결근 중이었기에 대부분 펫스쿨 측에서 온 메시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메시지를 무시한 뒤 필립은 아이엠 트립 거래처가 내재된 체크인 칩을 USNS에 꽂았다. 곧 자주 가서 익숙한 배경이 3D 화면 속에 펼쳐졌고 '체크인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문구가 떴다. 필립은 망설이지 않고 화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YES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터치하기 직전, 린이 나중에 자라서 자신에게 최신 기계에 대해 가르쳐주는 모습을 상상했다.분명 다급했는데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제 더 이상 필립은 뭐든 혼자 물고 늘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가락이 YES에 닿았다.거래처는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다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무리지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했고 자연히 전체적인 분위기도 아주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필립에게는 아이엠 트립을 당장 사는 게 더 중요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라는 글자가 새겨진 삼 층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부터 필립은 아이엠 트립의 VIP고객이 되었다. 항상 조금 더 할인된 가격으로 그리고 조금 더 적은 대기 시간으로 약을 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조용해야 할 VIP 전용 층도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과연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필립은 그나마 덜 바빠 보이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포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필립의 물음에 직원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오히려 본인이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아, 혹시 뉴스 못 보셨어요?" 필립이 머리를 긁적이자 직원은 설명하기가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좌우를 살폈다. 그러곤 곧바로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 필립은 김진오, 하고 두어 번 중얼거렸다.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필립의 머릿속에 익숙한 구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 그랬다. 이제는 아이엠 트립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김진오, 그가 죽은 거였다. 그래서 아이엠 트립 측에서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곧바로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았다. 그제야 어리둥절했던 직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포터넷은 온통 그 사건으로 도배되어 떠들썩했다. '아이엠 트립 후유증? 김진오 자살의 세 가지 의문점.' '환각제 유통 이대로 괜찮은가.' '아이엠 트립 측, 확실한 증거 없어. 루머 법적 대응할 것.' '반대세력 오늘 저녁부터 다시 집회 열 듯.' 종합해보면 직장으로 다시 복귀한 김진오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계속 아이엠 트립을 복용해왔고 최근 보름 동안 무단결근을 했으며 어제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이엠 트립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진오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뚜렷한 인과성이 없으므로 결정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필립은 포터넷 상단에 뜬 '김진오의 마지막 영상'이라는 제목을 눌렀다. 누군가와의 영상 통화 기록처럼 보였다. 김진오의 얼굴은 알려진 바와 다르게 굉장히 초췌했다.다크서클도 짙고 수염도 깎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거칠게 매만지며 김진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돈 노 후 아이 엠 애니 모어(I don't know who I am any more). "평소처럼 처방받으시는 거죠?" 필립은 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사 곳곳에는 '진실은 밝혀진다.'라는 문구가 적힌, 아이엠 트립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회사 측 입장과는 별개로 이런 사건이 생기면 매출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확실히 보통 때보다 손님 수가 훨씬 적었다. 그나마 VIP층은 변화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필립은 조금 전 지나왔던 아래층을 떠올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사람들 대부분이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수많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긴 했다. 필립은 문득, 언제부터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모를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부드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초라한 노인의 손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주먹을 폈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누군가의 절규가 삼 층을 가득 메웠다. 필립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속옷만 입은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었다."빨리! 빨리 달란 말이야! 지금 당장 가야해……." 여자의 머리는 자다 일어난 것처럼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같았다. 그저 비틀대며 빨리! 만을 외쳤고 호흡곤란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딘가 아슬아슬하다고 느낄 무렵 여자는 결국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여러 명이 재빨리 여자에게 달려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은 자신의 호흡까지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밭은 숨을 거듭 내뱉었고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필립은 흐느끼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사실 필립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한들 앞으로도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죄책감에 휩싸이리라는 것을. 학생의 죽음보다 자신의 은퇴를 더 걱정했던 과거의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이 세상에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상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들을 만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있는 힘껏 애를 써 봐도 그녀와 린의 존재는 끝끝내 환상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 과거는 아무리 생생하고 뚜렷해도 결국 '만약에'라는 가정 속에서만 성립하는 신기루일 수밖에 없었다. 없어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건 '진짜' 삶의 흔적뿐이었다. 이제껏 쌓아올렸던 여러 추억이, 그리고 새롭게 바랐던 미래가 필립의 마음속에서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필립은 괜찮은지 묻는 직원에게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기 위해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막 운을 떼려던 차에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요, 호흡하세요! 하나 할 때 들이쉬고 둘 할 때 내뱉으세요! 하나! 둘! 하나! 둘! 다시 필립의 눈길이 여자 쪽을 향했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똑같은 박자로 호흡을 유도하고 있었다.필립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박자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한참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필립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린의 고른 숨소리를, 린의 호흡을 따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덧없이 무너진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더없이 벅차올랐던 그 시간을. 필립은 어쩐지 텁텁한 입 안을 마른 침으로 축이고 또 축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역시 딱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김진오에 관한 뉴스는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여자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이엠 트립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예고한 집회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필립은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약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필립은 속으로 직원의 말을 되뇌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그러곤 약 봉투를 든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지 제대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필립은 왠지 모를 아득함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끝내 오므라들지 못한 주먹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끝>

2018-01-0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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