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소감]이명선, "홀로 서기를 마무리하며"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당선자 이명선.

2018-01-01 경인일보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홍정선 평론가·이인성 소설가, "정체성·존재에 대한 묵직한 성찰"

"SF적인 요소를 넣어 재밌으면서도 삶에 대한 근원적 문제에 접근하는 작품"'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위원들은 당선작 '린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등단작품이라고 보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이라는 호평을 내놓으며,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심사위원들은 총 148편의 응모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18편의 소설을 두고 별다른 의견차 없이 이중 5편을 다시 추렸다. 최종 심사에는 '린을 찾아가는 길' 외에도 '매일 빌리는 남자' '세신' '호랑나비와 춤을' 등 실험적 도전부터 정통 소설문법에 충실한 작품까지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올라왔다.먼저 '세신'은 화자를 관(棺)에 두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으로 풀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흘렀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호랑나비와 춤을'의 경우는 밑바닥 삶의 씁쓸한 풍경을 객관적 시선으로 담담하게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일 빌리는 남자'는 표절이 표절이 아니라 일종의 패러디나 오마주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러닉한 상황을 풍자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나 서술 방식이 너무 평면적이라는 한계가 지적되었다.심사위원들은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이민자의 삶이나 청년실업, 동성애 등 여러 세태를 반영하는 소설들이 다수 투고됐지만 문학적으로 설득력을 갖춘 작품은 많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문학적 실험이나 활기,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의지 등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외적으로 '린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기억을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유발시키려는 주제의식부터 만만치 않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꿈속으로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기억을 만들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가짜라는 반전을 통해 현실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고, 밀도 있는 구성과 세련된 문장으로 시종일관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호평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들은 소설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에게 고전에 대한 독서를 권했다. 많은 작품을 읽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이인성 소설가(왼쪽)와 홍정선 평론가(오른쪽)가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을 선정하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다. /김성주기자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김명인·김윤배 시인,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비극적 상황을 절제와 인내로 직시한 작품"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년 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총 1천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한순간 해변'과 '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김명인 시인(왼쪽)과 김윤배 시인(오른쪽)이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을 선정하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접수 완료]국내·외서 모여든 1306편 작품… 남녀노소 마침표 없는 문학열정

시 부문 1158편 ·소설 부문 148편 어머니·나이듦·풍경등 소재 많아'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시 1천158편, 단편소설 148편 등 총 1천306편이 접수됐다.지난 1987년 시작된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경기·인천지역에서 유일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달 1일부터 한달여간 공모를 받아 지난 2일까지 2개 부문의 접수를 완료했다.이번 신춘문예는 등단을 꿈꾸는 예비 문인은 물론 기성 문인들도 문을 두드렸으나 기성 문인들은 심사대상에서 제외됐다. 응모자들은 10대에서 7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문학에 열정을 지닌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지원했다. 해외 응모자들도 줄을 이었는데 중국, 미국은 물론 저 멀리 탄자니아에서도 원고를 보내왔다. 직업군도 다양해 학생, 군인, 목사, 대학교수, 경비원을 비롯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도 예비 문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시의 경우, 총 287명이 응모했으며 최연소 16세~ 최고령 72세였다. 특히 올해는 50대인 1960년대생 응모자의 비중이 높았다. '어머니'나 '나이듦' '꽃이나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고, '세월호'를 주제로 한 작품도 여럿 눈에 띄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여전히 우리 국민들에게 가슴 아픈 일로 남아있음을 보여줬다.단편소설은 총 144명이 원고를 보내왔으며, 이 역시 60년대생들의 참가가 돋보였다.신춘문예 당선자는 1·2차 심사를 거쳐 선정하며, 당선자와 당선작은 내년 1월 2일자 지면에 발표된다. 단편소설은 상패와 상금 500만원, 시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이 수여된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7-12-06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최은·시-성영희' 수상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9일 오후 경인일보 수원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단편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방민호 평론가, 김별아 소설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신달자 시인, 유성호 평론가와 송광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신달자 시인은 축사를 통해 "문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신춘문예처럼 화려한 등단은 없겠지만 지속적인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는 없어 오히려 등단 후의 길이 외로워지기도 한다"며 "그러나 그 외로움은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한 자산이 될 수 있으니 오늘의 큰 기쁨을 내면에 간직하고 정진하기 바란다"고 당선자들을 격려했다.단편소설 '켄의 세계'로 당선된 최은씨는 "재능이란 선척적이기보다 발견되고 선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저를 뽑아주신 분들이 후회하시지 않도록 증명해 보이겠다"는 소감을 남겼다.시 '미역귀'로 당선된 성영희씨는 "여기까지 오는 오랜 시간동안 힘이 돼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송광석 사장은 "훌륭한 작품을 보내주시는 많은 독자 여러분들, 심사위원분들께 모두 감사하다"며 "당선자 분들이 오늘을 시작으로 꿈을 널리 펼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9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소설 '켄의 세계'로 당선된 최은(왼쪽)씨와 시 '미역귀'로 당선된 성영희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9 민정주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당선작/최은 '켄의 세계'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것을 후회하기도 전에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승려처럼 성냥탑 쌓기에 열중하는…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게 두려웠다연희가 진정 바라는 건 충실한 신하인지 증명해보라는 성의일 것이다하지만 성형이라니…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나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귀족적 아이덴티티까지 코히시브젤처럼 이식할 병원을 알아봐야겠다진한 커피는 꼭 사약 같다. 켄은 사극에서 머리를 산발한 죄인들이 들이키는 흰 사발을 떠올리며, 진갈색 액체를 머금었다. 윽, 재떨이 헹군 물 같군. 감각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아직은 본능적으로 단 음료가 더 끌린다는 자각에서 켄은 거꾸로 자신의 나이를 상기한다. 달콤한 카페모카. 부드러운 카푸치노.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 상큼한 생과일주스. 커피 전문점에 파는 음료는 많고 많지만, 그게 그거다. 커피들의 이름은 외우긴커녕 틀리지 않고 발음하기도 힘들게 길지만, 어차피 모두 에스프레소 원액에 시럽을 넣거나, 휘핑을 얹거나, 캐러멜 드리즐을 뿌린 것들이다. 여자처럼. 켄은 여자의 머리가 길건 짧건, 치마건 바지건, 붉은 입술이건 맨 입술이건 기억하지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켄은 한 달 30일 중 29일은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때론 에스프레소 도피오 따위를 말할 때도 있다. 그건 그냥 그날의 날씨가 꿀꿀하기 때문인데, 같이 밤을 보낸 여자는 말한다. 켄, 넌 뭘 좀 아는구나. 켄이 대꾸 없이 입에 옅은 미소만 건 채 침묵하면, 여자들은 초조해하며 "출장 가서 특산물을 좀 샀어. 택배로 보내줄게." "쇼핑하던 차에 하나 고른 거야. 부담 갖지 마." 따위의 말들을 보따리장수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다. 켄에게 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잡동사니들을 파는 지하철의 할머니들이다.그에게 진정한 오르가즘이란 한 달에 딱 하루, 설탕이나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마실 때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그걸 자주 느끼기는 한다. 하지만 단 커피 음료를 마실 때 그는 진짜 사정射精 할 때보다 전율한다. 달콤한 액체를 최대한 음미하려 천천히 들이킬 때, 그의 입천장과 목구멍과 위 내벽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역시 여자보다 낫다!남창은 회사원만큼 힘들다. 반복 업무와 서비스 정신을 두루 요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만 환멸을 느낀다, 여느 노동자처럼. 한 달에 한 번, 단 커피를 마시는 날은 보너스 지급일이라 생각한다. 또, 드물게 이런 여자들이 있다. 성기 뿌리에서부터 척추와 정수리 끝까지를 단숨에 타고 올라, 전체를 빨아들여 버리는 듯한. 그런 여자들은 대개 미인은 아니다. 오히려 외양만으론 작은 직장에 다니며 맞벌이를 할 법한, 평범한 주부 같은 여자들이다. 그런 여자와 잘 때만 켄은 여자란 존재에 대해 새삼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또 그녀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들의 빨판 같은 질이 판단력까지 빨아들여버리는지, 같이 잘 때면 켄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그냥 놔두듯 나오는 대로 지껄이게 됐다. 이를테면 중학교 시절 땀내 나는 야구 유니폼을 입고 집으로 걸어올 때 금속 배트 끝이 아스팔트 표면에 퉁퉁 튕기는 진동에 대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첫 장에 아빠는 널 정말 사랑한다. 란 손글씨를, 어두워진 방에서 언제까지나 들여다보던 기억에 대해. 하지만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걸 후회하기도 전, 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 진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진심은 그가 쓰는 초박형 콘돔 끝에 고인 정액이었다. 그런 날들 중 하루, 바비를 만났다. 바비는 서로 허리를 감고 비틀대며 괴성을 지르는 무리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켄이 이쑤시개에 말라 비틀어진 오렌지를 꽂아 바비의 입가에 드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근래 보기 드문 칙칙함이다."빗어 넘긴 머리가 보랏빛으로 물든 동료가 저만치 앉은 바비를 턱짓하곤 낄낄거렸다. 동료는 술인지 물인지에 가슴팍이 젖어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른 동료가 단발머리 여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난 동료의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분위기는 질주하듯 달아올라 작은 룸은 우주로 쏘아질 것 같았다. 그 난리통에도 바비는 혼자 고즈넉한 정원에 앉아 있었다. 켄은 느슨해진 눈꺼풀로 바비를 뜯어보았다. 추녀. 튀어나온 광대뼈, 빗자루 털 같은 생머리, 거친 피부, 모지게 찢어진 눈, 엄청나게 큰 코를 갖고 있었다. 신체의 곳곳에서 건어물 냄새가 날 것 같은 여자. 켄에게 그런 종류의 여자는 무생물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행하는 승려처럼 성냥 탑 쌓기에만 열중하는 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진동하는 공기 속에 성냥개비 탑은 위태롭지만 재주 있게 쌓여, 어느덧 양주잔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가라오케가 흐느적대는 발라드로 바뀌자 사람들은 해산물처럼 미끈거렸다. 켄은 문득 끈적한 물속에 잠긴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바비의 성냥 탑이 무너질까봐 켄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수면 아래서 고개를 들듯 바비는 천천히 켄을 올려다봤다. "같이 나가죠."알코올에 들뜬 혀가 바람에 휘날렸다. 켄은 그날은 좀 쉬고 싶었다. 살갗이 양피지처럼 늘어진 여자의 팔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 안겨 있고 싶었다. "바비씨.""왜 날 바비라 부르지?""음.""네가 아는 여자 중에 바비가 있니?""아니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왜 바비냐면, 아름다워서." 나오는 대로 뱉고 픽 웃었지만 여자는 무표정했다. 바비는 켄 쪽으론 일별도 않고 탑 쌓기에만 열중했다."나가기보단, 들어가자.""어디로요?" "여기로." 바비의 검지는 우물 정 자로 쌓인 성냥 탑 속을 가리켰다. 개미들에게나 안락할 보금자리였으나, 떨리는 테이블 위에서도 의외로 굳건히 서 있었다. 성냥 탑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달뜬 열기와 교성들이 켄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갔다. 휘핑크림을 두텁게 쌓아올린 음료를 받아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날씬했다. 그녀들의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허리는 군더더기 없이 미끈했다. 하지만 켄은 그들을 사물처럼 그냥, 쳐다봤다.그 밤은 특이했다. 바비는 켄이 같이 잔 여자들 중 못생긴 걸로 세 손가락에 들었다. 켄은 그날 이상하게 허둥댔다. 그녀가 못생겨서는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바비가 손을 그의 등에 얹었다. "애쓰지 마." 거칠고 메마른 손처럼 그 말엔 무게감이 있어, 켄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비 속에서 그는 말했다."중학교 때요." "응." "벤치 끝에 앉아, 혹시 감독이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거든요? 해가 무섭도록 시뻘건 늦은 오후였어요. 난 엉덩이를 들썩대면서 2루 쪽을 보고 또 봤는데,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안타를 쳤니?" "아뇨, 결국 벤치만 지켰어요.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어요.""대부분이 그런 날이지.""견뎌야만 해요, 그럼?""난 그렇게 생각해." 순간 아, 짧게 소리 낸 켄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이런 실수 안 하는데. 아씨, 어쩌지." 콘돔을 착용하는 걸 잊었다. 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 게 두려웠다. "괜찮아, 난 불임이거든." 바비가 말했다. "그 말을 믿니?"도착한 바비가 말했다. 자연광 속에서 그녀의 외적 추함은 더 빛을 발했다. 그들이 만난 강남역 근처 카페는 영어 학원 근방이라 젊고 날씬한 여대생들이 바글거렸다. 이 넓은 카페 어디에도 바비 같은 여자는 바비뿐인 게 켄은 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신선하니까."상관없어요. 낳고 싶음 낳아요. 근데 책임은 못 져요. 내 처지 알잖아." "너같이 예쁜 아들 낳아 혼자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허튼 소리. 근데 오늘 왜 보자 했어요?""성냥 탑이 궁금하댔지." "내가요?"바비와 밤을 보낸 후에도 켄은 여자들에게 여러 번 몸을 묻었다. 그 밤들은 그 밤대로의 즐거움이 있었다. 성냥 탑 따위도 거의 잊었다. 하지만 켄은 바비의 손을 잡고 카페를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거릴 때, 켄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도 시선들을 흡수했다. 그는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땐 뿌듯하고도 불안했다. 내 날렵한 얼굴선과 큰 눈, 올라붙은 엉덩이와 날씬한 다리가 시선들을 언제까지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켄은 가끔 제 방 전신거울 앞에서 고장 난 오르골처럼 돌고 또 돌았다. 바비에게서 느껴지는 선선한 공기, 그건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사람의 초연함이었다. 켄은 그런 신선함을 맛본 적 없었다.그들은 외딴 절처럼 교교한 한낮의 모텔을 찾았다. 켄은 낡은 가죽 같은 바비의 피부를 만졌다. 하지만 바비의 속은 켄에게 달고 진득한 커피 같았다. "성냥 줄 수 있는지 인터폰으로 물어봐." 바비가 말했다. 켄은 팬티 바람으로 앉아 위태롭게 쌓인 탑의 좁게 얽힌 안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바비의 것과 달리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초조함에, 켄은 손날을 공중에 휘둘렀다. 벤치를 지키는 동안 해는 지고,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떨어진 성냥들을 바비는 가만 보았다. 켄은 머리를 창턱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거 계속 만들 작정이야?" 그는 눈을 감고 모텔 바닥을 아무렇게나 손가락질했다."응, 나는." 바비의 말이 먼 곳에서 울려오는 메아리 같았다.인터폰 속 남자가 대실 시간이 끝났다고 했다. 어지러운 머리로 눈을 뜨니, 침대 옆 원탁에는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완벽한 성냥개비 탑이 쌓여있었다. 나갈 때 카운터 직원은 켄이 혼자 들어왔다고 했다.***눈뜨고 홀을 한 번 둘러봤을 때,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에게 꽂히는 여자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무표정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어디에도 연희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 연희는 최고의 작품이다. 정확한 비례와 조화로 이루어진 새로운 생명체. 날렵한 버선코, 각이라곤 없는 얼굴, 랩을 씌운 듯 매끈한 상앗빛 피부. 안구 빼곤 전부 빚어진, 자연미 따위는 완벽으로써 가볍게 물리치는 신인류. 원시 부족처럼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저 여자들에겐 구시대의 유산이 역력하다. 좋게 말해 동양적이라 칭하는, 모로 찢어진 눈과 둥글게 퍼진 콧잔등, 억세 보이는 사각턱과 누르께한 피부. 아름답지 않은데 노력까지 않는 건 시대정신에 어긋난다. 노력은 문명이고, 우수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자산으로 검은 표범 같은 외제차나 삼천만원짜리 시계를 갖기 원하듯 연희도 그렇게 원했다. "그린티 프라푸치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이태리제 물소가죽 로퍼가 카운터로 매끄럽게 걸어갔다. 칠천오백 원씩 삼십 번, 오케이. 수익은 투자를 훨씬 넘어설 거다. 돌아보니 연희는 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 아래 길고 흰 종아리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저 다리에 로우 킥을 날려 부러뜨리고 싶다. 그 상상이 머리를 덮침과 동시에, 그는 음료를 내민 여자 바리스타에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영화 대사를 생각하며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볼이 발개졌다. 돌아와 컵을 내밀자, 연희는 인상을 쓰며 손이 젖으니 종이 냅킨을 감아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연희의 명령을 따랐다."집 옮기려고." "어디로? 설마 우리 집으로?" 그가 순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자, 연희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뭔 소리야, 뉴욕에 있는 내 아파트." "아…. 그냥 갖고 있지, 왜." 그는 연희가 물비린내 풍기는 천장이 경사진 욕실, 라면 면발이 말라붙은 냄비가 담긴 싱크대를 보고 경악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됐다."중동 쪽 이민자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들어오잖아." 연희가 빨대를 쪽쪽 빨았다."근데 오빠, 허리 사이즈 몇이랬지?" "늘 이십팔이지, 왜." "뱃살 좀 붙은 것 같은데." "이틀에 한 번 헬스 나가. 이런 몸매 흔치 않은 거 알잖아." "내가 뭐라 했었지?" 둘은 동시에 말했다. "비만은 미개다.""뉴욕 가기 전에 오빠 허리 1인치 늘면 바로 차버릴 거야.""그래그래, 오늘도 운동 갈게."그는 핸드폰을 치켜들고 홈 버튼을 셔컥, 셔컥 눌렀다. 연희는 시선은 짐짓 먼 데 두고, 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사진 속 연희는 내추럴하지만 자기 관리엔 충실하면서, 생활의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부티 나는 여자였다. 이것은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보는 연희의 모습이었다. 그는 실제 연희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 그는 헤어라인 시술을 받은 연희의 완벽하게 동그란 이마를 물끄러미 보다, 그녀의 지시대로 사진들을 어플로 편집한 후 전송했다. 연희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은 패션 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패션 디자인보단 외모와 집안이었다. 돈 있는 집안에서만 보낸다는 그 학교에도 연희처럼 둘을 겸비한 경우는 잘 없었다. 한편 그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입사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확률은 50%, 되거나 안 되거나. 자연계에서는 절대로 낮지 않은 확률을 놓칠 이유는 없었다.그는 그녀의 교만과 결핍을 읽었다. 머릿결과 피부엔 한 달에 각각 백만 원 넘게 투자하면서 사람 없는 데선 담배를 갈급하게 빨아대는 것, 사람들의 가십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즐기는 것. 그는 비뚤어진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부잣집 딸이라 그녀를 노렸다. 흠결 하나 없는 비단 같은 여자는 그가 닿을 수 있는 계급이 아니었다. 연희가 계급적 자부심을 깔고 마음껏 욕설을 뱉을 때, 창남인 그는 일부러 더 품위 있게 굴었다. 마침내 연희는 불운 때문에 밑바닥 환경으로 추락했으나 인성만은 고결한 그에 대한 경계를 거두었다.갑자기 연희가 민첩한 동물처럼 척추를 세웠다. 시선을 따라가니, 유리창 밖 건널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작은 두상과 해사한 얼굴, 긴 다리. 이 동네에 저런 애들 널렸지, 그는 심상히 고개를 돌렸지만 연희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싶어.""뭐?" "갖고 싶다고, 저런 애." "야, 쟤랑 나랑 다를 게 뭐야. 그리고 저런 말라비틀어진 어린 애는 힘도 못 쓴다.""너." 연희가 만난이래 처음으로 그에게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그는 연희의 완벽한 치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집에 돌아온 그는 혜진이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아둔 유리 반찬통들을 꺼냈다. 호스트바를 찾는 유치원 선생을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재미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꽤 많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그가 여자들에게 몸을 팔며 사는 사실처럼. 혜진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앞치마를 자주 둘렀다. 혜진은 사랑스럽고, 요리도 잘 한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이란 낱말을 다섯 번만 발음하면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주는 혜진 같은 여자의 약함이 그는 싫었다. 이 세상의 지형도에서 약한 존재에 속하는 그는 연희의 강함을 원했다. 혜진이 만든 반찬을 집어먹으며, 그는 그녀가 식탁에 펼쳐놓고 간 잡지 기사에 시선을 던졌다.외모 가꾸기가 여성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 남성들도 바야흐로 무한 외모 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은행원 A(30)씨는 지난해 '중대 결심'을 내렸다. "상사분이 소위 호감형인 동기와 제 실적을 비교한 게 계기였어요. 그 친구의 비주얼이 계약 성사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하더군요. 이젠 남자에게도 외모는 '스펙'임을 절감했죠." A씨는 휴가 동안 '대변신'을 감행했다. 코 시술과 눈매 교정술, 턱 보톡스, 수염 레이저 제모, 눈썹 왁싱을 받았다. "처음엔 독한 놈이라 수군대던 동료들이 지금은 사내 메신저로 수술 정보를 슬쩍 물어 와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요즘 고객님들에게 지점 최고 미남으로 통용되기도 하고, 실적도 올랐어요. 대만족입니다."그는 생각에 잠겼다. 연희가 바라는 건 자신의 재력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연희가 진정 원하는 건 성의일 것이다. 네가 충실한 내 신하인지 증명해 봐. 하지만 성형이라니. 그는 피부과에서 레이저를 한 번 받은 것 외에 시술도, 수술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자신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 음.그는 핸드폰으로 기사 하단에 나온 병원 이름을 검색했다. 유명한 곳인 모양인지, 남자들의 아우성들 틈에 그 병원명이 간간이 끼어 있었다. "이마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주름 때문에 고민이에요. 필러, 레스틸렌, 보톡스 중 뭐가 나아요?" "휴가 동안 쌍꺼풀 예약해 놨는데,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여름이라 혹시 덧나지는 않을지…." " '도시락'입니다, 25년 동안 불려온 별명. 저도 이제 여친 사귀고 싶어요." 콤플렉스에 찬 놈들이 이렇게나 많은지는 몰랐네, 그는 코웃음쳤다."임동민님. 임동민님, 어디 계세요?" 푹신한 소파의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아 유리 테이블 위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곧 서른인 탓인지 이차를 나간 다음날엔 부쩍 피곤했다. 급하게 일어나다 무릎이 테이블 모서리를 쳐, 성냥들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스튜어디스의 것을 모방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허둥대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여직원이 인도하는 방에 들어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옷은 다르지만 방금 그 여직원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웃으며 앉아 있었다. "상담실장 박신영입니다. 차트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네요." 수완도 좋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는 유니폼 아래에서도 양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가슴을 안 보는 척 흘끗 보았다. "하긴 본바탕이 좋을수록 완벽해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죠. 원하시는 부위가 어디신지 짐작도 안 가지만요, 호호.""그럭저럭 만족은 하는데요. 좀 동안으로 이미지 변신을 해볼까 해서요.""그래요, 아주 갈아엎지 않으셔도 살짝만 터치해 주는 것만으로 확 달라지실 거예요. 워낙에 본판도 좋으시고, 저희 원장님이 또 동안 성형 쪽으로 전문이시잖아요.""이마에 보형물을 넣으면 어떨까 해요.""필러로 채우지 않으시구요? 보형물은 드물긴 하지만 물이 차고 두통이 오는 부작용으로 종종 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 병원은 양심이 있는 편이네, 그는 생각했다."필러는 계속 리터치 해야 된대서요. 휴가를 내기 힘든 직장이라." 사실 오늘 비번이라 성형외과에 상담을 올 수 있던 거였다. 낮에 잠을 충분히 자 두지 않으면 밤에 술을 마셔가며 춤추고 노래 부르기 힘들다. "여의도 증권가 같은 데서 일하시는 거예요? 이미지가 스마트하셔서." 박신영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을 때 노란 덧니가 드러났다. 그 작은 불완전성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박신영이 자신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의 치아는 라미네이트로 덧씌운 대리석이었다."남자 분들은 아무래도 계속 병원을 방문하는 것보단 한번 크게 고생하시는 걸 택하는 편이죠. 근데 동민님, 혹시 가슴 확대엔 관심 없으세요?""네? 전 남잔데요." 박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대기실 벽에 걸려 있던 코히시브 겔(cohesive gel)을 보셨나요?""여자들 가슴 수술에 쓰는 거잖아요." 그는 피부 밑에 든 그것을 만져본 적도 있었다. 촉감이 탱탱볼이나 젤 마우스 패드 같았다."맞아요. 하지만 남자분들의 대흉근 확대술에 사용되기도 하죠.""대흉근 확대술이요?""네, 코히시브 겔은 전 세계적으로 안전성이 널리 입증됐고, 실리콘보다 안전하면서 식염수보다 촉감이 훨씬 자연스럽죠. 팩 모양만 좀 달리 해서 남자분들 가슴 근육 보강용으로 작년 말 새로 출시됐어요. 미국과 브라질에서는 이미 대중화되는 단계구요, 저희 원장님이 한국엔 최초로 도입하셔서 요즘 강남을 중심으로 알음알음들 많이 찾아주시고 계세요.""별 게 다 있군." 무심히 말했지만 내심 강남에서 많이 온다는 말에 혹한 그의 앞에, 박신영이 책상에 놓여있던 클리어파일을 활짝 펼쳤다. 비포 사진들은 다 말라비틀어진 멸치인데 애프터 사진들의 가슴 근육들은 자신보다 우월해, 그는 이틀에 한 번씩 이를 악물며 바벨을 들어 올리는 자신의 노력이 허탈해졌다. "음, 이쪽도 안전이 보장된 건가요? 남자 가슴 확대술은 금시초문이라.""원리는 유방 확대술과 같은데 오히려 출산과 수유를 겪는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안정적이죠. 남성의 경우 보형물 생착도가 더욱 높고, 구축이 생길 위험은 낮고요.""여자분 눈으로 볼 때 제 가슴이 좀 빈약해 보이나요? 솔직히." 그는 박신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건배, 를 속으로 읊으며. 상담실장은 여느 여자들처럼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솔직히 키에 비해 흉곽이 살짝 빈약하신 게 옥에 티라면 티겠죠. 지금도 너무 완벽하시지만요." 박신영은 문자로 말했다. 곧 학생과 직장인이 몰리는 방학 및 휴가 시즌은 성수기라 수술비가 10% 오르는데, 이번 주 내로 예약하면 오르기 전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그는 친절한 상담에 감사했으며, 이 번호가 실장님의 개인 핸드폰 번호냐고 답문을 보냈다. "연예계 진출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병아리 같은 신입 셋이 새된 오마담의 목소리를 듣고 흥미로운 시선들을 던졌다. "목소리 낮춰." 그는 오마담을 툭 쳤다."연희년 때문에? 열녀, 아 열부 났다." "투자지.""그런 여자들, 남자가 허수아비 같이 구는 건 또 별로일 듯해 할 걸. 나도 예전에 다 맞춰줬다가 돈만 쓰고 차였잖아.""딴 년 낚음 돼." 그는 거울 앞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쳤다. 오마담이 애먼 보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비주얼이 겸손하면 몸놀림이라도 훈훈해라. 선수 형님들이 누님들한테 혀 쓰는 모양으로 꼼꼼히 닦아." 보이들은 호스트가 되고 싶어 찾아왔지만 외모가 한끝 부족해 잡일을 하는 애들이다. 가게 복도를 걸으면, 두꺼운 카펫 때문에 늘 까마득한 지하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는 방에서 가장 부유한 아줌마에게 열과 성을 다한 결과 2차를 성사시켰다. 아, 기 빨려. 모텔 입구에서 침을 탁 뱉은 그는 젖은 걸레가 된 기분이었다. 수술비와 일을 나가지 못하는 회복 기간에 들 생활비를 생각하면 허리가 부서지게 일해야 했다.사흘 뒤, 그는 명동의 한 호텔에서 박신영과 시간을 보낸 결과 추가 디스카운트를 얻어냈다."알겠어. 병원엔 내가 잘 말할게.""넌 이제껏 내가 본 여자 중 제일 예뻐. 진심이야." 박신영의 가슴이 감격해하는 척하는 그의 입술을 탄력 있게 튕겨냈다.호텔 문을 나서던 그는, 순간 이마 한가운데를 망치로 맞은 듯한 어찔함을 느끼며 발을 헛디뎠다."괜찮아? 수술 전엔 컨디션 조절 잘 해야 해.""아, 요 며칠 과로해서 그래. 증권 쪽이 워낙 야근이 많잖아." 박신영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 하고, 그는 택시 뒷좌석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수술 전까지 열심히 출근 찍어야 하는데 걱정이었다.그는 무남독녀인 연희의 부친이 조만간 국내 유수의 의류 업체를 인수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의류 쪽은 문외한이고 사업체를 물려 줄 아들이 없어, 연희를 외국 의상 학교에 유학을 보냈다고 했다. 그들은 경영 쪽으로 믿을 만한 남자 실무자가 필요했다. 그는 학교 때 나름 열심히 했던 경영학 전공 책들을 떠올리며, 연희에겐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세부에 간다고 말해둔 회복기 동안 부지런히 읽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의사, 간호사, 박신영이 관 속에 들어간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수술포 아래로 박신영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가능한 부작용은 근육 박리로 인한 과다출혈,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경련, 국소 감각 상실, 동의서에 사인하셨듯이 전신마취 과정에서의 심장마비입니다. 하지만 혈액검사와 심전도 테스트 결과 아무 문제없으신 걸로 나왔으니, 그냥 푹 주무셨다 일어나세요." 대답하기도 전 입에 마취 마스크가 씌워졌다. 코뚜레 걸린 소가 된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불덩이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진땀을 흘리며 돌아본 그의 입에 불덩이가 단숨에 흘러들어와,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용암 같은 뜨거움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위장이 불탔다. 꺽꺽거리는 그의 뺨을 누군가 후려쳐, 눈물 맺힌 눈을 겨우 뜨니 앳된 간호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박 붕대 때문인지 턱뼈가 부서질 것 같고, 졸아든 목구멍에선 피맛이 느껴졌다. 온몸이 절로 덜덜 떨리면서 심한 구역질이 일었다."마취 깨시면서 좀 춥고 역하실 거예요. 그래도 토하심 안 돼요. 힘들어도 참으세요.""무, 물…." "앞으로 다섯 시간은 물 드시면 안 돼요.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간호사는 물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적셔주고, 높이 매달린 플라스틱 원통 같은 것을 체크한 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침대 옆의 벨을 누르라고 하곤 나갔다. 무통주사약이 얼른 다 들어오길 바라면서, 그는 온몸을 떨며 개처럼 끙끙 앓았다. 방광에 압박이 느껴져 손을 침대 밖으로 뻗던 그는 비명을 질렀다. 턱에서 따닥, 불꽃이 이는 듯했다. 절개한 입 속에 고인 피를 빼 내는 피통의 고무호스가 눌린 거였다. 그는 흉근 확대술, 사각턱 절제, 이마 보형물 삽입, 코 높임술을 한꺼번에 받았다. 어차피 고생할 것, 한 큐에 끝내기로 했다. 코히시브 겔과 U자형 고어텍스 보형물, 귓바퀴 뼈와 녹는 실이란 이물질들이 그의 몸속에서 원래 조직에 미끈하게 달라붙기 위해 끊임없이 주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진통제를 계속 투여해도, 가슴과 앞턱이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 주기적으로 덮쳐왔다. 살짝 열린 화장실 문 밖에 링겔대를 잡고 선 간호사를 세워둔 채, 5분에 걸쳐 소변을 보던 그의 머리에 가족이 떠올랐다. 벽돌을 쌓아올린 지게를 지고 달팽이관 같은 좁은 가건물을 오르던 아버지와, 늘 허리가 아프다면서 구부정히 숙인 자세로 마트 바닥을 대걸레로 미는 어머니가. 오랜 시간 소변을 참은 요도가 아파 그는 좀 울었다. 인간의 회복력은 대단해, 입원 첫날 밤새 신음하던 그는 마지막 날엔 집에 가고파 몸이 근질거렸다. 방탄조끼 같은 가슴 보호대 탓에 입원할 때 걸치고 온 점퍼가 붕 떴다. 버스에 얼굴을 정통으로 들이받힌 환자 같은 몰골이었지만, 헥사메딘으로 양치를 하고 터진 입꼬리에 글리세린을 바르니 개운했다. 전날 밤 조용히 그의 병실을 찾았던 박신영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그는 피와 침과 소독약이 섞여 악취가 나는 붕대를 풀고, 여기저기 붙은 반창고를 재빠르게 떼어주는 간호사들의 손길에 정신없었다. "얼마쯤 지나야 사람 같을까요?""한 달은 느긋이 기다리세요." 병원의 서비스인 리무진 택시에 올라탄 그는, 백미러 속 자신을 보곤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차량 안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시킨 그는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오마담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었다.어제부터 출근한 애. 와꾸 상타침그는 입을 쩍 벌리다 통증에 억, 하며 입을 닫았다. 분명 연희와 카페에 있을 때 유리창 밖으로 본, 연희가 '갖고 싶다'고 한 그 남자애였다. 출국한 연희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는 역삼동의 좁은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출혈에 시달린 그의 의식에 아롱졌다. 그는 완벽한 신랑이었다. 결혼식은 좀 특이해, 연희는 거대한 성냥 탑 안에서 베일을 쓰고 기어 나왔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베일을 벗기자, 실리콘이 코끝을 뚫고 나온 박신영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애교스런 누런 덧니를 보이며 웃으면서 그의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지금도 너무 완벽하신데, 옥에 티예요. 이마가, 코가, 턱이, 가슴이, 피부가,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깨어난 그는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나란히 입국장에 선 몇몇 여자들이 그를 곁눈질했다. 그래, 마음껏들 봐. 아까 거울로 확인한 그의 모습은 자신이 봐도 아그리파 같았다. 그는 여자들을 외면하고, 코트 주머니 속을 더듬어 까르띠에 상자를 확인했다. 그건 단순한 반지가 아니었다.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자, 새 삶을 열어줄 마법 열쇠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리를 한번 흔들고, 꽃다발을 고쳐 쥐었다. 손에 밴 땀에 꽃을 싼 셀로판지가 바삭거렸다. 그때 카트를 밀고 나오는 연희를 보았다. 그는 손부터 번쩍 들었다. 아직 뻐근한 가슴 통증을 참으며 열심히 손을 흔드니, 연희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황급히 걸어 나가는데, 환히 웃던 연희가 카트를 옆으로 꺾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후리후리한 남자가 연희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남자의 실루엣이 왠지 낯익은 것 같았다. 허겁지겁 그들을 쫓아간 그는 간신히 연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어머, 뭐야?" 짝! 뺨에 얼얼한 통증이 일고, 눈앞이 순간 까맣게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그의 뇌리엔 황망함보다 턱뼈에서 박리된 근육이 아직 완전히 안 붙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똑같은 선글라스 너머로, 연희와 키 큰 남자는 뺨을 감싸 쥔 그를 구제 불능의 치한처럼 쳐다봤다."동민씨?" 연희가 경악했다. "아는 사람?" 연희 옆의 남자가 무심히 물었다."너는?"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연희 옆에 선 남자는 분명 그때 그 카페 유리 밖에 있던 놈, 오마담이 반색하던 그의 직장 동료이기도 한 녀석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부 밑 실리콘 보형물들이 열기를 내며 주인을 피날레로 몰고 갔다. 고통 없인 성취도 없다. 마지막에 와 모든 걸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연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까르띠에 상자를 내밀었다. "설마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 대박이다.""넌 빠져." 그가 남자에게 일갈했다."근데 우리 주제를 알아야죠, 선배님." "동민씨, 결혼하면 일 나가기 힘들지 않겠어?"연희와 남자의 비아냥을 듣고,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야, 니가 옆에 낀 이 자식도 똑같이 몸 파는 놈이야. 아직 붓기가 다 안 빠져 그렇지, 두 달만 지나면 이 새끼보다 내가 훨씬 나을 거라니까? 어차피 싸구려들이랑 놀 바엔 너한테 더 정성들이는 싸구려를 택해. 성의는 돈으로 살 수 없으니."얘는 못 오를 나무는 안 쳐다봐 좋아.""못 오를 나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연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연희의 얼굴은 정말 드높은 탑처럼 멀고 고고했다. "가게에서랑 연희씨한테 형 얘긴 대충 들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인상적이다. 참고할게요, 그 자세는." "됐고, 가자, 내 마르티즈. 아, 동민씨. 호박즙 많이 먹어. 안 먹는 것보단 나을 거야." 연희와 남자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몇몇 사람들이 흘끗 보았다.그는 공항 출구로 걸어 나가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정말로,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실제로 산소가 몸에 안 들어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붓기가 가라앉으면 재수술 받을 병원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바비'의 남자친구 '켄'처럼, 외모뿐 아니라 늘 구김 없는 미소를 짓는 귀족적인 아이덴티티까지 실리콘과 코히시브 젤처럼 이식해 주는 병원을. 휘청거리는 그의 앞을 추월한 사람들이 택시를 가로채 빠르게 달아났다. 붓기와 흉살을 낱낱이 드러내는 밝은 햇빛 속, 온몸이 붕 뜨듯 어지러웠다. 큰 수술 시 과다 출혈로 인한 후유증 중 하나, 일시적 빈혈일 거라 생각하며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성영희

당선통보를 받는 순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귀를 경험했습니다. 수화기 반대쪽 귀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이 순간이 제발 꿈으로 빠져 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깜깜하게 닫혀 있던 귀를 열고 그 안쪽에 싱싱한 해조류 한포기 착생하는 듯 짭조름한 눈물이 고였습니다. 돌에서도 꽃이 필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미역귀, 바짝 마른 미역귀를 물에 담그면 양푼 가득 푸른 바다는 수돗물에서도 탱탱하게 부풀곤 했습니다. 그건 마지막 숨결들을 풀어 놓는 일, 마르기 전의 물살을 기억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몸을 원래대로 부풀리는 일, 잊지 않겠습니다. 시란 세찬 물길 속에서 소용돌이로 붙어사는 미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흔들릴수록 어지럽고 어지러울수록 세찬 파도가 더욱 그리운 돌미역 같은 것. 귀를 잃고 난청을 앓는 돌과 바짝 마르면서 웅크린 미역귀처럼 다시 파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최종심에서 탈락하면서 깜깜하게 닫혀가던 내 귀에 천 번은 더 흔들려야 비로소 한 줄기 물살로 피어나는 미역귀처럼, 귀를 열고 다시 겸허해지라는 파도의 전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은 뒤늦은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길고 험한 파도를 지나 기도하는 삶을 선택한 저에게 찾아온 응답이 순은으로 아름답군요. 부족한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인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시 쓰는 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마지막손을 꼭 쥐어주셨던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가장 먼저 이 영광을 드립니다. 시 쓴다고 아내로 엄마로 부족하기만 했던 저에게 묵묵히 응원의 힘을 실어준 남편과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시 심사평/신달자 시인·유성호 평론가

바위·미역이 엮은 바다풍경 '우리모습'2017년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높아져가는 경인일보에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많은 작품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단에서 주류를 형성한 시풍을 답습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언어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것도 썩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시의 좌표를 새롭게 개척해가려는 생성적 면모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해서 읽은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강성애, 고은진주, 김기란, 김문숙, 나혜진, 성영희, 오세정, 이동우, 임상갑, 하예주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영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당선작으로 결정된 성영희 씨의 '미역귀'는,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줄기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활용하여 인생론적 깊이를 드러낸 수작이다. '귀'로 살아가는 미역은 비록 깜깜한 청력을 가졌을지라도 언제나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이다. 그런데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난청을 앓게 되고, 그렇게 바위와 미역이 구성하는 바다 풍경이 잠에서 깬 귀를 열어 다시 햇살을 읽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쫑긋쫑긋' 삶의 이치를 듣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은유해준다. 다른 출품작들도 균질적인 성취를 보여 크게 믿음이 갔다. 더욱 성숙한 시편들로 경인일보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구체성과 심미성을 갖춘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한 사례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심사위원신달자(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심사위원 신달자(왼쪽) 시인과 유성호 평론가가 출품작을 살펴보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심사평/김별아 소설가·방민호 평론가

신인의 패기 '호스트바' 정면으로 다뤄"욕망과 교환의 세계를 묘파한 수작."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심지어 일말의 개연성도 없이 지독히 작위적인 하급이다. 이런 마당에 기어이 쓰는, 쓸 수밖에 없는 소설이라니! 161편의 응모작 중 심사자들이 마지막에 논의한 작품은 4편이다. '시취의 기록'은 문장이나 표현은 안정적이나 소재들이 분산되어 명료한 주제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불분명한 복선 등 혼란스러운 디테일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초대'는 안정된 문장에 소설적인 구조를 갖췄으나 결말 처리가 미흡하고 주제가 이야기를 앞서 끌고 나가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포근하고 복슬복슬한'은 있고도 없는 '토끼'를 잡는 헛짓을 통해 대기업이라는 조직의 허상을 드러낸 우화다. 일단 잘 읽히고 세부적인 장면 묘사가 생생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경영논리의 야만성을 드러내기에는 비유와 상징이 허술하고 철지난 것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켄의 세계'는 이를테면 황석영의 1974년 작 '장사의 꿈'의 2016년 판으로, 근래에 뜻하지 않게 온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엿보게 된 '호스트바'와 '선수'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전망과 출구를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욕망과 교환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파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인다운 패기와 신인답지 않은 성실성이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세상은 중하고 급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고 많은 소설들이 세상보다 뒤처진 채 허덕거린다. 시대와 세태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촉수를 곤두세우고 다만 반걸음이라도 세상을 앞서 나가려 애써야 마땅할 터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당선자를 포함한 모든 쓰는 이들의 용맹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김별아(소설가)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교수)심사중인 김별아(왼쪽) 소설가와 방민호 평론가.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총평

일상속 소재 끈질긴 관찰과 상상 즐겨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최은의 단편소설 '켄의 세계'와 성영희의 시 '미역귀'다.소설 심사위원들은 예·본심 모두 고심을 거듭했다. 160여편의 원고를 거듭 살펴본 후에 '켄의 세계'를 선택했다. 방민호 심사위원은 "자신의 세계를 잘 세워 올린 소설"이라며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고 평했다. 당선자 최은 씨는 소설쓰기를 시작한 지 2년 남짓 된 신예로, 직장에 다니면서 쓰고있다. 최씨는 "출판사에 다닌 경험이 있어 책과 가까웠고, 소설강좌를 들으면서 쓰기 시작했다" 며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들 중 마음에 담기는 것에 상상력을 더해 소설로 만드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시부문 당선자 성영희 씨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시쓰기를 좋아했다고 밝혔다.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라며 "현재는 국문학 공부를 하며 시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 일상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소재로 한 생활시를 즐겨 쓰던 그는 식탁 위에 오른 미역귀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상상했다. 성 씨는 "고향이 바다라 바다를 소재로 한 시가 많았다. 바다에서 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시에 담겼다"고 말했다.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2017-01-01 민정주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당선소감/최은

정신없이 바쁘던 오후, 진동하는 핸드폰을 보고도 못 받았다. 일하는 데가 창구라 개인 전화는 편히 못 받는 편이다. 곧이어 울리는 회사 전화는 재깍 받아, 매번 하는 똑같은 멘트를 읊었다. 말하며 그간 신문사 기자 고객은 못 접해봤다고 생각하는데, 당선 소식이었다. 그날 오후는 업무 실수를 하지 않았나 두 번, 세 번 살펴봐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어떤 식으로든 거의 쭉 돈을 벌어왔다. 모든 사회인이 그렇듯 때론 똥밭을 구른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이 좋았다. 자신의 어떤 것을 세계에 내다 팔며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은 그 자체 지고의 예술이다. 운 좋게 진짜 예술의 영역에 첫 발을 내딛게 됐지만, 평범한 직장인일 수 있는 사람이 예술도 잘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예술은, 좋은 글은 눈먼 채 천상을 더듬는 태도가 아닌 눈이 빠질 정도로 세상을 노려보고, 때론 흙바닥에 혀를 대는 용기이기 때문이다.설탕과자 같은 글, 반대로 단순한 천박과 잔인을 쿨함이라 착각하는 글, 남들 다 살기 힘든데 자기연민이 뚝뚝 흘러넘치는 글, 자족이 소통보다 앞서는 글, 쓰나마나한 글은 안 쓸 거다. 이 화려한 영상 시대에 글이라는 지난 세기의 표현 방식을 붙들고 있다는, 그래서 더 잘해야 한다는 좌표 파악에서 늘 출발할 것이다. 기계처럼 바지런히 써 석(石) 중에 옥(玉)을 독자 분들께 최대한 빨리 내밀고 싶다.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강영숙 선생님, 격려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17-01-01 경인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소설-김환·시-김이솝 수상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21일 오후 수원 인계동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단편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노희준·진연주·서진연 소설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최동호·이승하·권성훈 시인과 송광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단편소설 '폭발'로 당선된 김환씨는 "졸작을 뽑아주셔서 감사하다. 쉬지 않고 쓰겠다"는 소감을 남겼다.소설부문 노희준 심사위원은 "세차장에서는 겨울에 찬물을 쓰는데, 그 이유는 추울 때는 더운물이 더 빨리 얼기 때문"이라며 "문학의 길을 걷다 보면 힘들 때가 많겠지만, 겨울의 찬물처럼 쓰길 바란다"고 전했다.시 '대봉'으로 당선된 김이솝씨는 "상을 받는 자리가 아니고, 시세계의 신내림을 받는 자리라 생각한다"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시부문 최동호 심사위원은 박목월 시인의 말을 인용해 "좋은 작품을 쓰더라도 세상이 쉽게 알아주는 것은 아니다"며 "당선자들 모두 크고, 넓고, 높이 나아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송광석 사장은 축사를 통해 "문학계와 언론계가 모두 어렵다보니 신춘문예를 하다가도 그만두는 신문사가 많지만, 아무리 세상이 척박해도 신문사로서의 공적기능을 다하기 위해 신춘문예를 포기할 수 없다"며 "당선자들은 시인으로, 소설가로 오늘 다시 태어난 것이므로 힘차게 문학의 길을 정진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소설부문 상금 500만원, 시 부문 상금 300만원이 수여됐다.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21일 오후 경인일보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시 '대봉'으로 당선된 김이솝(왼쪽)씨와 단편소설 '폭발'로 당선된 김환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6-01-21 민정주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폭발/김 환

거인이 오고 있다큰 소리를 내는 그의 의중은 알수없다기다리며 거울 위에 자화상을 그렸다 매번 왜곡되는 거울회화像을 고정하는 기계장치를 달때거인의 발소리가 달려왔다그의 귀에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출 수 없는 흥분이 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그는 신이 나서 좁은 방 안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거인이 왔다! 이번에야말로 분명 거인이다! 쿵쿵대는 이 소리가 거인의 발소리가 아닐 리가 없다!”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또한 처음보다 훨씬 더 규칙적이었다. 거인이 일정한 속도로 한 걸음씩 도시를 가로질러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거인이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든 그는 거인의 선택과 처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인의 거대한 발바닥이 자신의 집 창문을 캄캄하게 가릴 때까지 채 몇 분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 그는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일정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반갑게 거인을 맞이할 목적도 있었지만, 주체할 바 없이 끝내주는 기분을 자신이든 주변이든 무엇이든 바꿔놓음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만끽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쾅!”“이런! 다 왔다! 거의 다 왔어!”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거인이 발걸음을 내딛자,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정말 숨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어 그는 거인처럼 성큼성큼 온 방안을 빠르게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두 팔을 있는 대로 크게 흔들며 발로는 방바닥을 있는 힘껏 굴러가면서 십 수 걸음을 걷고 나자 두 발 뒤꿈치가 금세 아파왔다. 거인의 걸음은 그만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뒤꿈치를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웃음만은 결코 멈출 수 없어 그는 고통의 신음 중간중간에 환희의 깨웃음을 간헐적으로 섞어 넣었다. 그러나 여유를 너무 부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제 거인의 다음 발걸음은 내 차례다.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발로 그는 절뚝거리며 빠르게 창문으로 걸어가서 커튼에 바싹 귀를 댔다. 아니, 귀가 문제가 아니다. 거인이 내디딜 다음 발이 내 집의 창문이라면 귀가 아니라 눈으로 캄캄해질 내 창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한 신체로 인해 밤과 같이 어두워질 창 너머로 다가오는 거인을 내 눈으로 똑똑히 맞이해야 한다. 그는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버티고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몇 초 뒤 자신에게 거인이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바로 지금일 것이다! 빛을 가리고 거인이 막아선 내 방은 바로 지금 어둠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 거인은 바로 내 방 창문 앞에 있어야만 한다!커튼을 뚫고 들어온 빛 때문에 부릅뜬 두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 그는 더 이상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내 눈을 벌린 채로 창문 앞에 서 있는 짓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충혈된 두 눈을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혹시 덩치 큰 누군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문질러 대는 중간중간에 그는 곁눈질을 간헐적으로 창쪽에 해댔다. 그러나 밖은 여전히 밝았다. 고통이 잦아들자 그는 옷을 도로 갈아입고 벽에 기대앉아 거인의 발걸음 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에도 거인이 아니라면 대체 그 큰 소리는 어디로부터 매번 들려오는 것일까. 규칙적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거인 말고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결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마땅한 원인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창문이 깨졌다면, 누군가가 던진 돌 아니면 날아가다가 갈피를 못 잡고 들이받은 새의 대가리가 원인이다. 돌이 공으로 대체되거나 새의 대가리가 새의 옆구리로 대체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창문을 깬 것이 어쨌든 창문을 향해서 날아온 어떤 것 때문이라는 원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일 분여 가까이 깜박이지 않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 때문이다. 빛이 바늘이나 손가락으로 대체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 어쨌든 눈을 향해 들어온 어떤 것 때문이라는 원인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동일한 이유로, 규칙적이고 큰 소리는 의심할 바 없이 거인이 낸 것이며, 특히 이 경우는 거인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있는데 창문 앞에서 빛을 막아서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리는 절대로 그냥 나지 않는다. 소리는 반드시 소리 내는 것이 있어야 나는 법이다. 작은 소리는 작은 것에서, 큰 소리는 큰 것에서 난다. 작은 것은 작은 소리를, 큰 것은 큰 소리를 낸다. 이 분명한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예외적인 경우는 사람이 만든 것 중 일부밖에 없다. 예컨대 총이나 폭탄이 그렇다. 그것들의 크기는 그것들이 내는 소리의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작다. 하지만 사실 이 경우도 그것들을 그렇게 만든 과학의 힘이 크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창밖의 그 소리를 총이나 폭탄이 낸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희박하다. 총이 내는 소리는 일단 창밖의 소리에 비해 현실적으로 너무 작다. 그러면 폭탄이 남는데, 폭탄은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터질 일이 없다. 게다가 걸을 수 있는 존재가 내는 발소리만큼 규칙적으로 터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전쟁이 났다면 불규칙적으로 여기저기서 크기가 다른 폭발음이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므로 전쟁은 나지 않았고 따라서 폭탄도 터지지 않았다. 인간이 제작한 이 예외적 결과물들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큰 소리는 큰 것에서, 작은 소리는 작은 것에서 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이 제작하지 않았고 큰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는 존재는 거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자명하게 도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만 있고 거인은 없다. 거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일까. 그래서 소리는 방에까지 들릴 만큼 크지만, 그리고 조금씩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는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아설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은 것일까. 결코 나를 향해 걸어오지는 않으면서, 부단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거인의 의중은 과연 무엇일까.기다리는 일이 생활이 되면서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정신의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일에도 절대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조바심을 내지 않으면 조바심을 낼 단 하나의 자유를 박탈당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국면에서 단 1그램도 박탈당하지 않은 정신과 행위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거인이 걷기 시작하면 박탈당했던 단 하나의 자유, 오직 이 조바심을 낼 자유만이, 박탈당해 있었으므로 더욱 마음껏 해방과 흥분을 만끽하며 정신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버리는 만큼,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거나 일단 들리면 거인이 한시라도 빨리 와주기를 기다리는 일이 오직 생활이 된 그는 결국 조바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대개 조바심을 내는 바람에 그르치게 되는 모든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와 마땅하고 당당하게 조바심을 내도 좋을 일에 조바심을 낼 자유를 모두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놀라운 능력을 획득한 소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동일한 일과 시간의 반복으로부터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의 출현과 불규칙적이고 비정기적인 시간의 도래는 인간의 정신에 조바심을 불어넣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을 매사에 들뜨게 만들어서 하는 일마다 기어코 그르치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악마의 숨결이다. 이쪽 저쪽으로 방정맞게 옮겨 앉으며 양쪽 귓구멍으로 쉴 새 없이 숨을 불어넣는 악마를 제풀에 지치게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오직 심드렁하고 무심하게 똑같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것뿐이다. 반복이 자유를 주며 이 자유는 곧 조바심을 내지 않는 자유, 조바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획득되는 자유다. 거인은 그에게 바로 이 자유를 줬다. 발걸음 소리라는 결론과 ‘따라서’ 분명히 있음이라는 원인 사이에 ‘그러나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유예가 가로놓이면서 기다림의 일상이 시작되었으며, 기다림의 일상은 ‘그래도 언젠가는’ 이라는 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매번 반복되어갔다. 반복되는 일상의 규격 안에서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안도와 진실로 조바심을 내지 않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조바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을 어떤 일에 쉽게 실망하거나 애석해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만큼, 그 역시 이번에도 창문을 캄캄하게 가리지 않은 거인에 대하여 일말의 아쉬운 감정 없이 도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사실 그에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기다림의 일상적 시간을 무엇으로든 메우는 편이 자신이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거인을 더 잘 기다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는 오로지 순수하게 거인을 기다리는 행위로만 일상을 반복해왔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으나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골몰할 다른 일을 찾아 안달을 낼 필요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본디 모든 위대한 발견이란 무심한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우연한 계기로 촉발되는 법이다. 그에게 우연한 발견은 바로 회화의 작업, 특별히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기다리는 내내 맞은편 옷장에 붙은 전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는 무심코 자화상을 그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발견해냈는데, 이 발견이 곧바로 기다리는 시간을 메우는 새로운 노동 행위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수성 펜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그대로 따라 그리면 세계의 어떤 자화상보다도 더 정확한 자신의 얼굴을 몇 번이고 다시 그려낼 수 있다는 발견은, 말 그대로 회화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우연한 발견일 뿐이었다. 놀라운 일은 실제 회화의 작업 직후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그가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가 그어나가고 있는 선을 자꾸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있는 그의 솜씨가 부족해서 그의 그림과 거울 속의 그가 일치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놀라움의 이유는 거울 속의 그를 그리려고 그가 최초의 선을 긋기 시작하자마자 거울 속의 그가 의도적으로 그의 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 확실히 거울 속의 그의 움직임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번번이, 매번 다른 속도로, 게다가 다분히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추적하는 그의 펜을 회피하고 있음을 그가 분명하게 알아차릴 정도로 거울 속의 움직임이 크기 때문이었다. 회피하는 얼굴을 추적하는 펜은 당연히 얼굴의 조화와 비례를 무너뜨렸으며 그 결과로 자화상은 언제나 그의 얼굴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졌는데, 딴에는 그것이 큐비즘의 특징적인 일면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기도 해 한편으로 그는 얼굴을 한참 벗어나 있는 자신의 자화상에 꽤나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동일한 그림을 단 한 편도 생산해내지 않는 진정한 예술 행위의 발견, 이 불일치의 경험이 기다리는 시간을 회화의 작업으로 메우게 한 계기였으며 회화의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그로 하여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다.한 편의 그림을 막 끝낸 그는 늘 그랬듯이 거울을 향해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웃음의 순간, 이 웃음이 결코 진실로 만족스러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거울 속의 그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억지스러운 웃음이 맹렬한 소유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강렬한 불만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라는 사실 역시 그는 바로 알았다. 하루에도 수백 편씩, 그 오랜 시간 자화상을 그려왔으나 자신은 언제나 최후의 한 편만을, 그것도 거울 위에서만 감상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게다가 거울 위에 그려지는 자화상은 거울 이외의 다른 사물처럼 손에 쥐거나 옮길 수 없으므로 결국 자신이 그린 그림들 중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는 것. 나의 예술과 노동의 행위로 생산된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다름 아닌 내가 조금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억지스러운 웃음조차 웃을 수 없게 했다. 거인의 발걸음 소리와 같은 괴성을 거울을 향해 무려 백여 차례나 질러댄 다음에야 그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수천, 수만 번이나 지워 없애버린 지금까지의 그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그리는 나의 모든 그림을 소유할 방법을 강구해내는 것인데, 답은 하나뿐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종이나 직물 위에 그려지는 만큼 나의 자화상도 종이나 직물 위에 그리면 된다. 하지만 나의 특유한 발견은 거울에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니, 일단 거울에 자화상을 먼저 그린 다음 뒤가 얼핏 비치는 종이를 거울에 대고 거울에 그린 자화상을 그대로 따라 그리면 그리는 족족 나의 그림을 소유할 수가 있다. 이제부터는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릴 때 이전보다 좀 더 진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종이 위에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린 그림을 따라 그리기 용이해진다. 소유가 가능해진만큼 이제부터 그는 보다 진지하게 회화의 작업을 수행해 나가기로 했다. 작품을 사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화된 그 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예술가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능력과 권리를 동시에 가지게 된 지금 나는 응당 모자람 없는 예술가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분명 앞으로 그것에 부합하는 예술가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넓어서 어떤 책임과 사명도 모조리 끌어안고도 족히 남을 예술가의 정신은 무엇보다 진지해야 한다. 거울 위의 회화라는 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할 회화 기법의 발견자요 개척자에게 요구되는 진지함의 강도는 유래 없이 강력할 것이다.강도 높은 진지함을 요구받는 예술가의 정신이 그에 합당한 보다 차원 높은 예술을 창작하고 생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소유의 권리를 가진 예술가의 그 의무란 현재의 극복과 고양을 통해서만 이행될 수 있다. 요컨대 예술가는, 그는, 지금보다 더한 회화의 기법을 고안해내야 하고 지금보다 더한 회화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더 진지해진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그가 선택한 진지함의 방법은 거울에 그려내는 그림의 왜곡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화가의 의지와 의식을 통해 감각적인 세계의 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그리는 방식은 이미 전통의 영역에 속해 있다. 거울에 비친 상을 왜곡된 상태로 거울 위에 그린 다음 그것을 베껴내는 방식은 그러므로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방법론적인 혁신을 시도하는, 지극한 예술 생산의 기법이다. 여기에 왜곡의 정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것, 그것이 예술가로서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그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러다가도, 그가 거울 속의 그를 그리기 시작하면 그는 그의 펜이 그리고자 하는 궤적을 지속적으로 배반하며 거울 위에 그려낸 그의 얼굴을 그와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 왜곡을 보다 강렬한 왜곡으로 만드는 회화의 기법, 왜곡에 왜곡을 더해서 왜곡을 더 왜곡시키는 그 ‘더’의 기법,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생각했다. 왜곡에 왜곡을 더함으로써 왜곡을 더 왜곡시키려면, 그렇다, ‘더’하면 된다! 왜곡을 ‘더’ 왜곡시키려면 더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더 할 것은 더하면 될 일이지 다른 무엇이 그보다 더 제격이란 말인가! 예술의 소유에다 그에 걸맞은 진지함까지 더해버린 자신에 대한 감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를 전율시켰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더할 것인가? 무엇이 왜곡의 정도를 현재보다 더 해줄 수 있을까? 그는 빠르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단박에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 다른 어떤 사물을 더한 것보다 항상 더 더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의 시선이 콱 박혀 있는 지점에 놓여 있는 바로 저것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계였다. 기계라 해도 어떤 복잡성 자체만을 정지된 채 대변하는 사물이 아니라, 태엽을 감았다 놓으면 움직이는 인형과 그 바로 옆에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음악이 나오면서 발레리나가 빙글빙글 도는 모형, 둘이었다. 움직이는 것들을 더하는 것보다 더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움직이는 기계 둘을 나의 얼굴 옆에 더해 놓은 다음 그것들을 작동시켜 움직이게 한다. 그러면 거울 속의 두 기계도 따라 움직인다. 내 얼굴을 먼저 그려 일정한 왜곡의 큐비즘적 성과를 거둔 다음, 거울 속의 움직이는 기계 둘을 거울에 따라 그린다. 거울의 기계가 실제의 기계를 거울의 내가 나를 배반하듯이 배반한다면 그것대로, 하지 않는다면 또 그것대로 나는 왜곡에 왜곡을 더하는 예술적 진지함을 성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기계의 움직임을 거울에 그리는 것 자체가 정지된 사물의 정지성을 그리는 것보다 더 사물의 왜곡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기계의 움직임을 펜으로 추적하는 동안 그 움직임이 실제의 움직임을 배반한다 해도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한 결과는 동일하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거울 회화의 일종의 동역학, 내가 발견하고 성취한 거울 회화의 큐비즘적 동역학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엄청난 예술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체없이 그는 작업에 착수했다.거울의 그림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기계 둘을 더함으로써 심각한 수준의 왜곡이 발생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림은 더욱 심오하고 진지한 예술의 경지를 표현해내고 있었다. 3차원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계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이 만만하지는 않았으나, 만만한 일은 애초에 예술가에게 할당된 몫이 아니므로 그는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인내의 성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아직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업, 예술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야 할 단계가 남아 있다. 그는 거울에 종이를 대고 거울의 그림을 베끼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소유가 처음이라 그런지 베껴내는 선이 많아질수록 그의 마음 속에 묘하고 벅찬 감격이 조금씩 들어찼다. 다 베낀 그림을 멀찍이 놓고 처음 바라보는 순간, 감격은 결국 포화상태를 넘어 눈물과 함께 밖으로 넘쳐흘렀다.“진정 내 것이다! 처음 가진 진정한 내 것이다! 너 이외의 모든 처음은 모두 처음이 아니다! 오직 너만 진정한 나의 처음이다!”자신이 창조해낸 진정한 예술 작품 앞에서 그는 포효했다. 수만 번의 거울 그림 끝에 탄생한 최후의 결실이자 앞으로 탄생할 수만 점의 그림을 예비하는 최초의 성과였다.“제목을 붙여야 한다!”그래야만 소유가 완전히 마무리된다! 눈물 너머에서 그의 첫 작품이 강력하게 그것을 요구하며 어른거렸다. 어떤 제목을 붙여야 할까? 나의 처음에 어울리는 마땅한 이름이 무엇일까? 제목은 작품의 내용이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작품을 곧장 지시하는 손쉬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화가의 그림이란, 예술가의 예술작품이란 모름지기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항상 조금 더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덜 가지고 있거나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감상할 이유가 없다. 그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아채버린 작품은 감상이 끝난 즉시 폐기되고 만다. 예술 작품에는 도무지 모를 것이 있어야 하며 모를 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모를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제목이 내용을 곧장 지시하지 않게 하는 것, 제목과 내용의 거리를 최대한 멀게 하는 것은 모를 것을 영원히 모를 것으로 남게 하는 훌륭한 하나의 방법이다. 제목과 작품 사이에는 수수께끼의 다리가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림에 따라 다리를 놓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그림이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제목을 붙인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내 방의 부분을 그림으로 옮긴다고 할 때, 거울 속에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그림에는 ‘1064-시간의 변형’ 등의 제목을 붙여야 다리가 놓인다. 반대로 그림이 어떤 대상을 비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는 그 대상을 직접 언급하는 제목을 붙인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내 방의 부분을 그림으로 옮길 때, 거울 속에서 왜곡이 일어난다면, 그 그림에는 ‘방의 구석’과 같은 제목을 붙이면 다리가 놓인다. 이 경우에 그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제목을 붙여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감상자들에게 일정한 힌트를 줘야만 도무지 모를 것이 오히려 더 잘 도무지 모를 것으로 남기 때문에 대상을 직접 언급하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낫다. 모를 것은 알 듯하지만 도무지 모를 때 더 모를 것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내 첫 작품의 제목을 붙이면 된다. 따라서 그는 ‘발레리나와 인형이 있는 자화상’으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첫 소유물에 제목을 붙일 수 있었다.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에 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매 작품마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것뿐이다. 비록 거울의 내가 매번 새로운 왜곡을 실현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똑같은 대상을 여러 다른 버전으로 반복해서 그려내는 것도 물론 정진의 훌륭한 실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다른 대상을 그림으로써 예술 세계를 넓히고 예술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는 것이 언제나 정진의 궁극적인 방향과 실천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거울의 그림을 베끼더라도 결코 거울에만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기로 한다. 상이한 그림의 지속적인 산출, 매번 과거를 배반하는 변형의 생산. 이것이 이제부터 진정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나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 될 것이다. 그는 무섭게 그림에 몰두해 들어갔다. 좌절과 고뇌와 도약의 시간을 경과한 뒤 마침내 자기 예술의 특정한 사상과 방향성을 획득한 예술가의 역량은, 그것을 작품에 표현하기 위한 구차한 방법들을 일일이 고민하지 않아도 예외 없이 분명하게 그것이 그렇게 창조되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결과로 예술가를 끌고 간다. 그의 예술 행위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어떻게 그릴 것인지 하는 고민들, 상이함과 변형의 생산과 관련된 일련의 방법적 모색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기계처럼 자동적이었다.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그는 단박에 원근 기법을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 그의 멱살을 끌어당긴 것과 같이 불쑥 거울 바로 앞에까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뒤에 배치된 기계들과 자신의 얼굴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입체감을 형상화했다. 다음 그림에서는 반대로 뒤로 쭉 빠진 다음 기계들을 거울에 밀착시킨 상태로 원근을 조성했다. 이때는 물론 긴 막대기에 펜을 붙여 그림을 그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는 했으나 원근 속에서 두 그림이 표현해내는 차이의 성과를 고려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일한 대상들을 번갈아 전경과 배경에 배치함으로써, 그렇게 그려진 두 그림을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그림은 전혀 다른 두 리듬의 상호 간섭을 생산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그는 그것을 해냈다.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그는 단박에 기계들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분해해서 순수 기계 장치만을 자신의 옆에 배치했다. 기계 자체, 태엽 장치 자체의 순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야겠다는 의지와 요구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했을 때의 효과와 차이가 어떠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행위였으나 그림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다른 예술성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왜곡된 자화상 옆에서 순수한 기계성을 강변하고 있는 사물들은 그림 속의 인물을 그 기계적 의미로서 끝없이 간섭한다. 그 간섭은 도무지 모를 의미로 남음으로써 그림의 낯선 지평과 깊이를 일거에 획득한다.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그는 그것을 해냈다. 자동화된 예술가로서 그는 거기에 또한 원근 기법을 조합했고, 소실점을 향해 자신과 두 기계를 거울 속에 앞으로 나란히 배치했으며, 자신의 옆 얼굴과 두 기계를 사선으로 배치함으로써 구도의 파괴를 시도하는 데에까지 거칠 것 없이 쇄도해 갔다. 모든 것이 가능했으며, 모든 것이 현실화되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었고, 예술은 그가 한 모든 것이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어느 순간, 자동화된 예술가로서 그는 수백 점의 그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정진은 그러나, 끝을 모르는 법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예술가에게 그 동안 해왔던 모든 것에 대한 번복을 종용한다. 거울에의 의존을 줄이고자 했던 그 때 이미 그에게 끝없는 정진과 진정한 번복의 맹아가 자리 잡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그는, 거울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성취와 성과를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취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 도사리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느닷없이 제기된 질문 앞에서 그의 정신은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거울에 비친 나와 사물만을 그려야 하는가? 왜 거울이 보여주는 상을 베끼기만 해야 하는가? 이 정도의 예술적 능력을 가진 자가 더 이상 거울에 의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들은 자신에게 결국에는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질문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울 그림의 발견을 가능케 한 재능과 지금까지 중단 없이 발전해 온 예술적 능력의 결말에 순전히 개인의 역량만으로 생산될 예술품에 대한 예술가의 탐욕이 배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예정된 서사다. 결말에서 다시 완전히 새로운 도입을 감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끝나지 않을 서사를 새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숙명이요 사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내가 발견한 거울 그림을 과감하게 부정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성과를 폐기 처분함으로써 그것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었던 그 믿음을 보란 듯이 추월해버려야 한다. 위대함을 초월하는 더 강한 위대함을 새로운 예술로서 과시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나로 하여금 부정과 번복의 위대한 성공을 직감하게 한다. 한껏 고양된 나의 예술적 능력은 한시라도 빨리 거울을 버릴 것을 나에게 재촉하고 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베낄 이유가 없다.“이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나만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위대한 예술가요 화가다. 위대한 화가는 결코 거울 위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거울을 노려보며 그는 천천히 두 기계 장치를 작동시켰다. 기계가 움직이자 거울 속의 그가 움직이는 두 기계 가운데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 노려보며 그는 펜을 움켜쥐고 종이를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를 노려보고 있는 거울 속의 그를 그리기 위해 그가 최초의 선을 종이에 그으려는데, 그 때였다.“쾅!”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초식동물처럼 그의 목이 오른쪽 창문으로 홱 돌아갔다. 폭발음이었다. 잠깐의 시간 뒤 소리는 또 들려왔다.“쾅!”그가 벌떡 일어났다.“거인이 왔다! 이번에야말로 분명 거인이다! 쿵쿵대는 이 소리가 거인의 발소리가 아닐 리가 없다!”“쾅!”“쾅!”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또한 처음보다 더 규칙적이었다. 거인이 일정한 속도로 한 걸음씩 도시를 가로질러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거인이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든 그는 거인의 선택과 처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인의 거대한 발바닥이 자신의 집 창문을 캄캄하게 가릴 때까지 채 몇 분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 그는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일정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반갑게 거인을 맞이할 목적도 있었지만, 주체할 바 없이 끝내주는 기분을 자신이든 주변이든 무엇이든 바꿔놓음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만끽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쾅!”“이런! 다 왔다! 거의 다 왔어!”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거인이 발걸음을 내딛자,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정말 숨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어 그는 거인처럼 성큼성큼 온 방안을 빠르게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두 팔을 있는 대로 크게 흔들며 발로는 방바닥을 있는 힘껏 굴러가면서 십 수 걸음을 걷고 나자 두 발 뒤꿈치가 금세 아파왔다. 거인의 걸음은 그만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뒤꿈치를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웃음만은 결코 멈출 수 없어 그는 고통의 신음 중간중간에 환희의 깨웃음을 간헐적으로 섞어 넣었다. 그러나 여유를 너무 부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제 거인의 다음 발걸음은 내 차례다.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발로 그는 절뚝거리며 빠르게 창문으로 걸어가서 커튼에 바싹 귀를 댔다. 아니, 귀가 문제가 아니다. 거인이 내디딜 다음 발이 내 집의 창문이라면 귀가 아니라 눈으로 캄캄해질 내 창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한 신체로 인해 밤과 같이 어두워질 창 너머로 다가오는 거인을 내 눈으로 똑똑히 맞이해야 한다. 그는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버티고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몇 초 뒤 자신에게 거인이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바로 지금일 것이다! 빛을 가리고 거인이 막아선 내 방은 바로 지금 어둠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 거인은 바로 내 방 창문 앞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이것은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득달같이 거울 앞으로 달려간 그는 펜과 종이를 품에 부둥켜안고서 창문을 향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지금은 안 돼!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안 돼! 왜 지금이야 왜! 나는 더 이상 거인이 내릴 결론이나 처분 따위 필요 없어! 나는 내 그림을 그려야 해! 완전한 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쾅!”창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겁에 질린 쥐새끼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방 구석 여기저기를 잽싸게 쏘다녔다. 거인의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눈 하나와 팔 하나 이외의 모든 신체를 거인에게 내줄 수 있다! 그래, 거인의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 거인은 자신의 신체만큼 보폭도 크니 거인의 첫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음 발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일어나서 창문의 커튼을 홱 젖혔다. 수십만 발의 화살처럼 빠르고 육중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거인을, 거인의 걸음을 보아야만 거인의 발을 피할 수 있다! 창문 앞에 서서 그는 빛으로 가려진 시야가 확보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눈앞에 거인은 없었다. 그는 성큼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창 밖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지만, 어디에도 거인은 없었다. 분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고 직전에는 창문이 떨리기까지 했는데, 거인은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시작하고, 펜과 종이를 움켜쥔 두 손의 힘이 풀리는 듯하던 그 때, 그러나,“쾅!”하고 폭발음이 다시 터졌다.“도대체 이게 뭐야! 거인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쾅!”폭발은 이제 그의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쾅!”게다가 밖에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쾅!”이제 폭발의 보폭은 그물처럼 촘촘하고 좁아졌다.“쾅!”소리와 소리의 간격 속에 숨으려던 그의 시도는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쾅!”폭발은 마치 쥐새끼같은 그의 걸음을 좇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쾅!”순간 그는 결코 폭발의 처분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그는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두 기계 사이에 서 있는 그가 그를 마주보았다. 움켜쥐고 있던 펜과 종이를 그는 놓아버렸다. 거울 속의 그도 그렇게 했다.“쾅!”결국 마지막 폭발은 그 안에서 일어났다. 그는 터져 버렸다. 터져 버리는 그를 거울 속의 그가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끝>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5-12-31 경인일보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소감/김 환

소설의 등 뒤에 아무 것도 없는 채로, 아무 것도 없게 쓰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래와 기원은 서사를 분명한 목적지에 이르는 길 위를 걸어가도록 손쉽게 강제한다. 안락한 강제성 안에서 서사는 쓰는 자의 오직 물리적일 뿐인 노력과 의지와 수고에 정확히 부합하는 줄거리만을 자신의 몸으로 가진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것으로 끝이다. 서사를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소설 안에서 서사를 정지시켜야 한다. 쓰는 자의 기억과 기대조차도 일말의 소환될 여지가 없이 정지된 서사는 쓴다는 행위, 쓰고 있다는 것, 그렇게 써 있다는 것 자체를 소설 요소의 가장 우위에 놓는다. 정지된 서사는 정지되어 있으므로 당도할 분명한 목적지를 갖지 않는다. 도무지 이를 데가 없는 길 위에 있는 서사는 그 순간, 하나의 이미지, 혹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 서사로서 소설의 핵심이다.소설의 등 뒤에 아무 것도 없는 채로, 아무 것도 없게 쓰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동시에 그것이 끝이다. 시작과, 그것과 동일한 끝 사이에서 쓰는 자는 오로지 주사위 놀이만을 할 뿐인 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나의 글을 읽어 준 타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심사위원들에게 더없이 감사하다. 그리고 언제나 나와 함께 그가 서 있었으며, 지금도 서 있다.김환

2015-12-31 경인일보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류보선 교수·노희준 소설가

모든 미학은 아슬아슬함을 추구한다. 표면장력이랄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완벽한 결함’이나 ‘불가능성의 증명’에 가깝다. 종종 절묘하게 모자란 상태가 극대화된 긴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본심에 올라온 응모작은 쉽게 분류됐다. 안정성이 뛰어난 작품과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 전자가 골고루 잘하지만 이렇다 할 특기는 없는 모범생의 성적표 같았다면, 후자는 무림으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용기와 내공이 불안한 문하생의 대련 같았달까. 취향 판단으로 흘러서는 안되겠기에 둘 사이의 간극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까다로운 심사였다. 그럼에도 안주보다는 모험에, 현상태보다는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자는 쪽으로 협의가 이루어졌다.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아홉 편이었다.‘이제는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인터뷰의 형식으로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변성과 허구성을 버무리려는 의도까지는 좋았으나 그 과정에서 톤이 흔들린다. 블랙코미디의 도입은 자구책일뿐 해결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특정 기성작가의 작품경향이 엿보인다는 점도 당선작으로 뽑기를 망설이게 했다.‘요한의 사례’는 교차시점을 사용하여 사실의 광기가 아닌 진술의 광기가 어떤 식으로 확산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구조를 갖추었으나 그에 걸맞은 스토리의 참신성을 확보하지 못하여 점차 클리셰로 함몰되어가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두 작품 모두 자신의 힘을 감당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해머를 날려버리는 회전던지기 선수를 보는듯했달까.‘폭발’은 실험적인 서사구조를 떠받치기에 충분한 진지함과 치열함을 갖추고 있었다. 적당히 비워놓음으로써 형상화하는 핍진성의 측면에서도 세월이 엿보였다. 다만 이러한 내적질서를 감안할 때 결말에 반복해 등장하는 거인은 실망스럽다못해 생뚱맞았다. 결말만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뽑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심사위원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노희준(소설가)류보선(왼쪽) 교수와 노희준 소설가가 소설부문 평가를 하고 있다.

2015-12-31 경인일보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소감/김이솝

빗방울이 차갑게 공중에 붐비고 있습니다. 8층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김이솝이 아닌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하기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찾아와 평생 열병을 앓게 하고 시 중독자로 만들어 버리더니 이젠 아예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시 내림의 형벌을 가하고 맙니다.그러나 나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처와 역사와 시간의 긴 타래 속에서 더 고뇌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내립니다. 시가 나를 구원해 준 것처럼 내 시가 아파하는 모든 사람, 사물,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소통되는 시를 쓰겠습니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쓰겠습니다.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신미균 시인님, 이진명 시인님, 임동윤 시인님, 문정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사랑 회원님들, 서교동 시의 도반,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미천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경인일보 담당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앞으로 좋은 시 쓰겠습니다!■ 약력 1962년 대전출생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현재 (주)해외인증센터 근무김이솝

2015-12-3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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