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2012 경인신춘문예 시상식

2012-01-12 경인일보

[2012 경인신춘문예]총평

2012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그야말로 신예들의 돌풍이라 하겠다.통상 삶의 쓴맛 단맛을 다 알고, 연륜을 쌓은 중장년층의 당선이 주를 이룬 과거와 달리, 올해는 10대·20대 젊은 피들이 '2012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이름을 올리며 화려하게 등단했다.시부문은 고교 3학년생으로 예비대학생인 인천 강화군의 이승혁(19) 학생이 '우물이 있던 자리'로 당선됐으며, 소설은 오희진(25)씨가 '첫입'으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당선작으로 뽑혔다.이승혁 학생은 올해 강화고교 졸업예정으로 이미 학교에선 그 재능을 인정받은 상태다. 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수상 등 각종 대회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으며,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또한번 대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신춘문예에 공모할 당시 입시에 지쳐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있어 지난 한 해가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한다.소설부문 당선자 오희진씨는 전북 무주 출생으로 원광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그에게 글쓰기란 생활이자 삶의 기쁨이다. 사실 여느 청년들과 다름없이 그도 청년실업이나 장래에 대한 고민도 많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당선이 발표되기 얼마 전 취직에도 성공해 그는 이번 당선의 기쁨이 두 배가 됐다고 한다. 그는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내놓던 따뜻한 밥 한 끼의 느낌처럼 그러한 온도를 가진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한편 201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시 부문에 190명 779편, 소설부문에 124명 128편 등 총 907편의 작품이 접수돼 이 중 예선을 거쳐 시 36편, 소설 24편이 본심에 올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선자에게는 소설은 상패 및 원고료 500만원, 시는 상패 및 원고료 300만원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1월 중순 경인일보 본사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윤희기자

2012-01-01 이윤희

[2012 경인신춘문예]시 당선작

■ 시 당선작 : 우물이 있던 자리 (이승혁)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어린 나의 입 속으로 곶감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더는 담겨지지 않아요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저물녘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있었다(*강화읍의 마을주소)※ 시부문 당선소감/ 이승혁"고3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 이젠 진짜 내 이야기 시작할 때"지난 가을 내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제가 우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저녁 습작의 분량으로 쓰여지게 된 시, 그게 당선작이라니.우물, 아직은 내 기쁨의 표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되비춰지지 않는다. 미정인 채로 남아있는 대학 진로와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 겨울을 비집고 내가 어머니의 분노에 다급해질 때마다 숨어들던 어린 시절의 식탁 밑이 떠오른 건 또 왜일까. 지금은 어떠한 수사도 어떠한 문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내 본래의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먼 소년기때 조립하다가 중단된 서랍속의 장난감들과 저녁이면 하늘의 별 대신 아버지의 퇴근길 호프집 풍경에 고정시켰던 내 망원경, 형을 데리고 나서던 초등학교 뒷길, 문구사 아저씨의 색소폰 연주, 모두 내 시의 전리품이었음을 이제서야 실토한다.내 기쁨의 이면들을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옮겨본다. 입시에 눈이 빨개진 강화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길이든 걸었던 방황의 맨 마지막 코스였던 반지하에서 노래로 허기를 때우던 일행들, 입시의 기로에서 낭패에 빠질 때마다 투신 제의를 해오던 도시의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너희들이 있어 지난 한 해의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 이튿날이면 교과서 대신 또다른 종류의 천재를 부여해주시던 김영언 선생님, 묵묵히 걸음마 떼기를 기다려 준 가족들, 반항의 시간들을 지켜봐 주신 담임 선생님, 내 1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멘토가 되어주신 김종연 선생님께 감사를 올립니다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민용태 교수님, 김영철 교수님, 먼 길 가는 수사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약력1993년 인천 강화 출생.강화고등학교 졸업 예정.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 시부문 심사평/ 민용태·김영철"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 데 묶어… 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012-01-01 경인일보

[2012 경인신춘문예]소설 당선작

■ 소설 당선작 : 첫입 (오희진)구는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뚜껑이었다. 짝이 맞는 솥을 찾느라 주변을 살폈다. 다섯 개의 철제 조리대가 디귿 자 형태로 배치된 공간이었다. 솥을 크기별로 분류해 놓은 조리대가 있었다. 구는 근방에 뚜껑을 두었다. 솥에 비해 나머지 도구는 정돈 상태가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교집합은 쉽게 눈에 띄었다. 조리대마다 빠지지 않는 밀방망이였다. 나무로 된 표면은 길이 들어 매끄러웠다. 밀방망이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도구가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구는 일련의 흔적이 낯설었다. 시간은 가만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가진 것을 번번이 망가뜨렸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시간이 무해하게 느껴졌다. 훤하게 열린 창밖으로 천변이 내려다 보였다. 운동복을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책로를 뛰어갔다. 입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흩날리는 밀가루 같았다. 구는 창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문가에서 기척이 났다."그대로 두세요."정이었다. 구는 인사를 잠시 잊었다. 정은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덩치가 큰 구에 비하면 난쟁이 같았다. 구는 내심 놀랐다. 마흔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더 들어 보였다. 백발 때문이었다. 이마를 드러내고 귀 뒤로 넘겨 빗은 머리카락은 희었다. 삼십 대를 막 지나왔다고 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정이 조리대 밑에서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꺼내주었다."저녁 먹었나요?""아니요.""먹고 가세요. 칼국수를 만들 거예요.""저, 실은 안 돼요."구는 식이장애 치료 센터에 드나들고 있었다. 어떤 강박증 환자에게 보도의 붉은 블록만 디뎌 걷는 것이 세계를 유지하는 기준이듯, 구에게는 국수를 먹지 않는 일이 그랬다. 이마저도 자각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이곳에 다다른 기분이 들었다. 국수는 그 모양이 길을 닮았다. 차이라면 언제고 끊어지기 마련이라는 것. 구는 국수라면 먹는 족족 토해냈다. '한 그릇 교실'은 국수를 만들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국수 연구소라고도 불렸다. 구는 이곳의 소장인 정을 소개 받았다. 비슷한 강박을 앓은 적이 있다고 했다."저는 나아질까요?""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선생님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먼저 말해주겠어요?"구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솥을 집었다. 양은으로 된 것이었다. 정은 솥에 다시마와 멸치를 한 줌 넣고 물을 받았다. 구는 가스레인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곧이어 불이 들어왔다. 그것은 신호 같았다.먹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고, 구는 말했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최후의 식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기다란 탁자가 카메라 앞으로 들어왔다. 햄버거를 가득 쌓은 접시가 머릿수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이라기보다 장식 같았다. 햄버거는 대회용으로 야채와 소스 같은 부재료를 뺀 것이었다. 고동색의 패티와 연갈색의 빵이 피라미드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일 분. 열 개 이상을 먹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반수의 참가자가 탈락했다. 참가자들이 나란히 섰다. 신호음이 울렸다. 구는 패티와 빵을 분리했다. 패티를 씹어 넘기며 빵에 물을 적셨다. 젖은 빵은 그대로 삼키면 되었다. 시계 초침보다 구의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 분이 다 지났다. 구는 열두 개를 먹었다. 참가자 뒤에 달린 전광판에 세 사람의 이름이 떴다. 방청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구는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익명의 가족을 상상했다. 사회자가 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구는 예선전을 무난하게 통과했다.'최후의 식신'은 먹기 대회였다. 모 대기업에서 자사 홍보의 일환으로, 외식상품권과 소정의 상금을 부상으로 걸고 시작한 행사였다. 매스컴을 탄 것은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최후의 식신'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획하면서부터였다. 주말 시간대에 편성되고 여러 식품업계의 광고가 따라붙으면서 우승 특전이 달라졌다. 상금이 수천만 원대로 뛴 것이다. 자연히 참가자가 늘었다. 구는 수백 명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다. '최후의 식신'에 나오기 전부터 식당 개업 행사나 지역 특산물 축제의 먹기 대회는 물론이고 홈쇼핑 식품 광고 보조출연부터 식품회사 신제품 시식 아르바이트까지, 먹는 일이라면 다 했다. 구는 맛이나 질을 따지지 않았다. 친지들의 집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먹는 것은 구에게 적응의 첫 관문이었다. 하지만 한 밥상에 둘러앉는다고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살이 붙을 뿐이었다. 구는 차츰 덩치가 커졌다.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 구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경우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영역에 있거나 어떤 면에서 그 영역보다 뛰어나거나. 각종 먹기 대회에 나간 것은 그때부터였다.푸드 파이터로서 구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먹기 대회도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스포츠였다. 구는 세 끼를 꾸준히 챙겨 먹었다. 대부분 포만감이 쉽게 오는 식이섬유 음식이었다. 공복 때에는 수시로 물을 마셨다. 이것은 위가 보관할 것이 많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단시간 내에 먹은 양으로 판가름을 내기 때문에 위의 크기를 늘리는 것은 중요했다. 먹는 방법 또한 승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다. 입만 바쁘게 움직인다고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속도만큼이나 음식의 성질 또한 중요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구는 음식을 바꿔가며 연습했다. 햄버거 빵에 물을 적시는 것도 이 때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음식에 구는 면역이 생겼다. 몇 차례의 우승은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음식이 있는 곳은 구에게 일터였다.구는 제작진이 지정해준 대기실에 들어갔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났다. 우욱. 이십여 명을 웃도는 참가자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늘씬한 여자가 검은 비닐봉지에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구와 같은 조로 예선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가까이에 있던 참가자들이 여자를 부축해 나갔다. 그대로 두었다면 다들 연달아 햄버거를 게워냈을 지도 몰랐다. 구는 축 늘어진 여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몸을 담보로 하는 만큼 몸을 망치는 일도 흔했다. 이윽고 제작진이 들어왔다. 앞으로의 시합 일정을 안내했는데, 합숙에 관한 것이었다. 토너먼트 때부터 합숙소 생활을 방송에 내보낸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사생활이 공개되는 부분에 대해 협조를 구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후의 식신'에 참가를 결정하며 동의한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일주일 후를 기약하며 돌아갔다. 대기실 안팎이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응원군으로 찾아온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구는 그들 사이를 총총 빠져나갔다.구의 짐은 옷가지 두어 벌이 다였다. 구는 외투를 걸치고 거울을 보았다. 타원형의 몸이 거울에 가득 찼다. 자신이 가진 전부가 몸에 담겨 있는 듯 했다. 그런 면에서 구의 엄마는 가진 것이 없었다. 구는 병석에 있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사람 같았다. 구는 이불을 들추어 그 마른 몸을 들여다보곤 했다. 마지막에 엄마는 얇은 흰색 천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구는 차마 천을 열어 보지 못했다. 몸에 용량이 있다면, 그것을 다 써버렸다는 뜻임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지금의 얼굴을 마주했다. 스스로가 커다란 서랍 같았다. 서랍에는 여태 먹은 음식이 남김없이 들어 있었다. 그 맛은 식탁에 홀로 남겨진 날을 연상케 했다. 구에게 맛이란 숫자였다. 햄버거의 맛은 일 분에 열두 개였다. 대회 기록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맛은 숫자가 됐다. 사과는 당도만을 본다면 십 점 만점에 6이었다. 질감이라든가 딱딱한 정도를 따진다면 7은 되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맛은 단 한 가지였다. 서랍의 맨 아래층에 든 국수가 그랬다. 구는 거울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한 준비였다.참가자 합숙과 함께 토너먼트가 시작됐다. 중계석이 마련된 촬영장은 예선전 때보다 규모가 컸다. 참가자는 열네 개 조를 이루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시합을 펼치고 일곱 명을 걸러내는 것이 이번 방송의 과제였다. 일주일 후에는 일곱 명 중 두 명, 그 다음 주에 또 두 명이 떨어지면 세 명만이 남는다. 결승 시합에서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것으로 '최후의 식신'은 막을 내릴 터였다. 구는 촬영장 뒤에서 세 번째 순서를 기다렸다. 상대는 구와 체격이 비슷한 중년의 남자였다. 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남자와 구는 높게 솟은 단상에 섰다. 밥그릇 모양의 탁자에는 각각 덮개를 덮은 접시가 있었다. 음식은 매번 달라졌다. 사회자가 단상을 가리킴과 동시에 조명이 번쩍거렸다. 구는 덮개를 들었다. 접시에는 한 개의 초밥이 놓여 있었다. 단상의 양쪽에서 이동식 조리대가 들어왔고, 요리사와 도우미가 등장했다. 조리대에는 완성된 초밥 백 접시와 여분의 재료가 벌여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오 분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구는 초밥을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생선살이 물컹하게 씹혔다. 남자는 초반부터 양손을 써가며 열을 올렸다. 반면에 구는 천천히 밥알을 씹었다. 요리사가 초밥을 완성하면 도우미가 빈 접시를 채웠다. 만들어 온 초밥은 금세 동이 났다. 구는 삼 분을 넘어서면서부터 속도를 붙였다. 사회자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시합은 끝났다. 구는 입가를 닦으며 전광판을 올려 보았다. 91. 남자의 기록이 먼저 떴다. 98. 방청석이 술렁였다. 구의 승리였다.숙소까지 따라온 카메라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꺼졌다. 일전에 구토를 했던 여자가 뒤풀이를 제안했다. 여자의 방에 일곱 명이 모였다. 토너먼트를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참가자였다. 자리를 잡는 동안 여자가 주전부리를 내왔다. 구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고생도 있었고, 환갑을 지났다는 정정한 노인도 보였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도 여자는 눈길을 끄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는 반듯했다."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여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낯이었지만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기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구는 재방송으로 본 여자의 인터뷰를 기억했다. 여자는 외모와 더불어 화제가 된 사연이 있었다. 배우를 지망하던 이력이었다. 푸드 파이터로 전향한 것은 안면근육마비장애가 오면서부터라고 했다. 인터뷰 끝에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입가의 흔들림이 클로즈업 됐다. 여자가 도전 과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피하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요?""딱히 없어요. 뭐가 나오든 다 비슷하니까요."구의 말에 사람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역시 강력한 우승후보답네요.""맞아요. 정말 잘 드시던 걸요.""저 말인가요?"구가 되물었다."못 따라잡겠던데요."여자의 말에 모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구는 잠시 먹먹해졌다."잘 먹어야 해."라면을 달라고 보채는 구를 타이르는 것은 엄마의 일과였다. 구는 편식이 심했다. 유일하게 가리지 않는 음식은 국수였다. 구의 엄마는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냈다.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다른 냄비에는 소면을 익혔다. 하얀 거품이 확 끓어오르면 찬물을 조금 부었다. 소면은 냄비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구는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앉은뱅이 상에는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명은 잘게 썬 김치와 깨소금뿐이었다.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그 앞에서 구는 라면을 잊었다. 김치의 작은 탑을 부수면 국물이 붉어졌다. 어설픈 젓가락질로 면발을 감아올리다 보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면발은 보드랍고 매콤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묵은 김치의 맛이 스미어 있었다. 그릇이 반쯤 비워지면 엄마가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마주 닿았다. 그때마다 구는 온몸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국수를 담은 그릇이 된 것 같았다. 메밀을 넣어 반죽하면 메밀국수, 녹차로 색을 내면 녹차국수, 멸치로 국물을 우리면 멸치국수, 들깨를 갈아 넣으면 들깨국수, 고기 고명을 얹으면 고기국수, 고추장을 뒤섞으면 비빔국수… 한 가지를 먹어 봤을 뿐이지만 모든 맛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국수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혼자가 된 구는 편식을 고쳤으나 국수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서랍의 맨 아래층, 겹겹이 불어난 살의 더미에 짓눌려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일곱 명과의 시합에서 구는 가까스로 다섯 명 안에 들었다. 도전 과제는 만두였다. 십 분 동안 젓가락으로만 집어서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갓 쪄내 뜨거운 온도가 시합의 변수였다. 구는 초반부터 혀를 데었다. 피는 얇은 만두라서 젓가락으로 집기도 까다로웠다. 그 와중에 여고생이 기권을 외쳤다. 또 다른 참가자가 한 개 차이로 밀려나고, 뒤처져 있던 구는 부전승으로 올라갔다. 결승전 진출자를 가리는 시합에는 닭튀김이 등장했다. 닭다리만을 튀겨낸 것이었다. 여자와 구는 막상막하였다. 노인까지 세 사람이 결승전 진출자로 확정되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의 승부를 예고하는 것으로 생방송은 끝이 났다. 조명이 관객석부터 차례로 꺼졌다. 불빛은 낮은 조도로 무대만을 비추었다. 촬영장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제작진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구는 손을 문지르며 옆을 보았다. 여자는 마른 수건을 얼굴로 가져갔다.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모습이 가느다란 선 같았다. 선은 조금씩 앞으로 구부러졌다. 구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세 사람만 남은 합숙소는 적적했다. 끼니를 거르겠다며 노인이 방으로 돌아간 후, 여자와 구는 합숙소를 나섰다. 죽을 먹기로 하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알은 체를 했다. 구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일부러 구석진 데를 골라 앉았다. 구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우는 걸 봤어요.""들켰네요."구는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저는요, 하고 운을 떼더니 여자는 극단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대사가 열 줄도 채 안 되는 배역을 주로 얻었다. 순간이나마 조명 아래에서 말문이 열렸을 때의 느낌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이렇게 살아도 만족해요. 그런데요."여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무대를 잊지는 못할 거예요."주문한 죽이 나왔다. 구는 묵묵히 숟가락을 떴다. 빈속에 뜨거운 죽이 치덕치덕 내려앉았다. 여자가 첫 무대를 기억하듯, 구의 서랍에는 국수가 있었다. 숫자가 될 수 없는 맛이었다. 다만 구는 그 기억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것이 여자와의 차이였다. 견고한 숫자의 벽이 무너진 것은 결승전 당일이었다.번화가의 광장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을 불러냈다. 구는 무대로 뛰어올랐다.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울렸다. 구의 위치는 가운데였다. 양옆으로 여자와 노인이 섰다. 그들 뒤로는 '최후의 식신'의 로고를 입힌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 사람을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가 비장하게 말했다."최후의 식신을 가려낼 마지막 음식입니다!"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장막이 걷혔다. 널따란 주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명의 요리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왼편에서는 양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여 뽑아냈고 오른편에서는 끓는 물에 익힌 면발을 빠르게 건져냈다. 하나같이 능숙한 솜씨였다. 주방 가운데의 탁자에는 국수를 한 사리씩 담은 그릇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세 사람에게는 십오 분이 주어졌다. 신호탄이 터졌다. 육수와 고명은 따로 없었다. 오로지 면발만을 먹어야 했다. 도우미가 날쌘 손놀림으로 세 사람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구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자와 노인은 이미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연출이 무대 밖에서 다급하게 팔을 흔들었다. 구는 허둥지둥 젓가락을 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구는 면발을 빨아들였다. 속도는 곧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구의 탁자에는 빈 그릇이 늘어갔다. 시합 종료까지 일 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구는 목이 막혀왔다. 다급히 물을 들이켰다. 덜커덕. 일순간 구의 입이 벌어졌다."물이 끓어요.""아, 내가 한 번 볼게요."정은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 뚜껑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구의 코를 자극했다. 멸치 국물이었다. 정은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불을 껐다. 솥에는 연둣빛의 말간 국물만 남았다. 정은 바가지를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바가지에 이어 칼, 도마, 밀방망이가 차례로 올라왔다. 끝으로 꺼낸 것은 밀가루였다. 정은 밀가루를 바가지에 붓고 소금을 약간 쳤다. 이따금 물을 약간씩 부어 가며 손을 움직였다. 춤을 추듯, 정의 몸이 흔들렸다. 파슬파슬하게 흩어진 덩이가 차츰 모아졌다. 반죽은 둥그렇게 덩어리졌다. 정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져 앞을 가렸다. 구는 정의 옆으로 다가갔다."불편하실 것 같은데요.""묶어줄래요?"정은 고무줄이 감겨 있는 손목을 내밀었다. 구는 고무줄을 빼 밀가루를 털어냈다. 정이 머리를 살짝 뒤로 뺐다. 구는 정의 백발을 가볍게 쥐었다. 머리카락은 얇은 데다 숱이 적었다. 국수 면발로 치면 한 줌에 불과했다. 가르마를 가로질러 목덜미까지, 구는 손빗으로 낮게 묶었다. 한 갈래의 머리카락은 등까지 길게 늘어졌다. 구는 정이 지나온 세월을 가늠했다. 밀가루 반죽을 늘이듯 길게, 혹은 짧게도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은 반죽의 반을 떼어 구 앞으로 밀어 놓았다. 구는 손을 씻고 조리대로 왔다. 반죽에 손바닥을 대자 밀가루의 탄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을 만지는 듯했다. 구는 반죽을 둥글리고 치댔다. 정은 다 된 반죽을 비닐로 감쌌다."이제 냉장고에 넣어둘 거예요.""얼마나요?""보통 하루는 숙성하는데, 오늘은 한 시간만 둘게요.""그래도 오래 걸리네요.""이야기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죠.""같이 먹어요."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강생 중 한 명이 손짓을 했다. 대여섯 명이 모여 앉은 조리대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정은 괜찮다고 말했다. 일 년 전부터 먹는 일 자체가 수월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거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강생들은 음식을 조금씩 덜어 맛보았다.휴대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정은 요리 학원에서 경리 업무를 봤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모두 가르치는 곳이라 야간반까지 운영했다. 뒷정리를 하다 보면 퇴근은 매번 늦어졌다. 혼자 사는 집은 버스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천변을 끼고 도는 노선이었다. 정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천변이 보이지 않는 길로 다니기 위해서였다. 걸어가자면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지나가야 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은 인파가 북적이는 길을 택했다. 도시의 소음에는 잔상을 묻어두기 쉬웠다. 하지만 한 시간 전의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강생의 목소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같이 먹을래?"마가린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은 둑길에서 저수지를 굽어보았다. 물가에 우거진 수풀은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스산했다. 저수지는 운동장만해서 호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때는 삼월이었다. 훨씬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쌀쌀한 날씨는 계속되었다. 하교한 뒤, 정은 둑길에서 한숨을 돌리곤 했다. 보육원으로 돌아가면 쉴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만 돼도 큰언니 구실을 해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함께 놀아 달라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칭얼댔다. 누군가가 돌본다고 채워지는 부재가 아니었다. 혼자인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아야 했다. 마가린의 등장은 그래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인사도 않는 동급생이었다. 정은 벌떡 일어났다. 둑길에 앉은 마가린은 가방에서 삼단찬합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은 먹다 남은 음식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소시지 반찬과 과일, 주먹밥이 담겨져 있었다. 마가린은 자신이 숟가락을 들고 정에게 젓가락을 주었다. 얼결에 정은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식사에 동참했다. 주먹밥은 잗다랗게 가루를 낸 김에 궁굴린 것이었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맛이 진하게 퍼졌다. 주먹밥의 단면은 누르스름했다. 간장으로 밑간을 한 것 같았다. 마가린은 정에게 물병을 건넸다."나 너 가끔 봤다. 여기 있는 거.""그래?""좋은 곳이야. 그치?""비 오는 날이 더 괜찮아.""그런 날은 대어를 낚을 수 있대.""처음 듣는 말인데.""아버지가 그랬어. 밤낚시를 다니셨거든.""너도 간 적 있어?""가끔. 이걸 얻어먹었지.""맛이 좀 특이하네.""아, 마가린 때문일 걸."도시락을 들고 나타난 동갑내기 소년의 호칭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둑길에서 만나곤 했다. 대개는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마가린은 도시락을 자주 남겨 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은 주먹밥일 때가 많았다. 주먹밥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정은 해거름의 식사가 기다려졌다. 계절이 바뀌면서 둑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녹음이 짙어지면서 삭막한 기운은 한층 물러갔다. 저수지에도 여름이 왔다. 장맛비가 연일 지겹도록 퍼부었다. 저수지의 물은 넘칠 듯 불어났다. 마가린은 밤낚시를 하자며 정을 졸랐다. 오랜만에 하늘이 갠 날이었다."내가 다 준비할게.""고기가 있긴 할까?""물이 있잖아.""물만 있는 것 같은데.""저수지를 그릇이라고 생각해 봐.""그릇?""밥상에 올라온 물그릇이다, 이렇게.""그 다음에는?""내 밥이 저절로 보인다는 거지.""그게 뭐냐, 싱겁게.""원래 낚시는 기다리는 맛이야."그날 밤, 찌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가린은 낚싯대를 드리운 채 꾸벅꾸벅 졸았다. 정은 그 옆에서 저수지를 내다보았다. 수면에는 둑길의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떠 있었다. 어두운 사위를 밝히기엔 충분한 빛이었다. 날벌레가 들끓었지만 그마저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정은 잠든 마가린을 바라보았다. 밤낚시를, 주먹밥의 비밀을, 허기가 나누어지는 공식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마가린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마가린의 말대로라면 저절로 보이게 되는 법이니까. 정은 자신의 그릇에도 물을 채우고 싶었다. 마가린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하게 스쳤다. 수면이 느리게 일렁였다. 딱 그만큼, 정은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기점이었다. 정의 그릇에는 어느덧 마가린이 들어와 있었다. 낚지 못한 물고기 대신 건져 올린 것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영근 마음이었다. 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저수지의 날씨는 첫 만남 당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해거름의 식사는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돌기 직전까지는.이른 아침부터 정은 학원 문을 열고 식재료를 주문했다. 학원에는 경리가 거들어야 할 업무가 꽤 있었다. 월요일 야간반처럼 수강생이 몰리는 수업에는 보조강사로 들어갔다. 사적인 심부름을 하는 날도 있었다. 학원장은 오전반에서 야간반까지 이어지는 수업 때문에 늘 바빴다. 정은 학원장을 대신해 경조사 부조를 전달한 일이 몇 차례 되었다. 정은 오전에 학원 업무를 서둘러 끝맺어야 했다. 지인의 국수전문점 개업식에 다녀오라는 학원장의 부탁이 있었다. 버스로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지방이었다. 정은 점심식사를 거르고 터미널로 향했다. 대합실은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은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은 일 년 전을 상기시켰다. 정은 억지로 눈을 붙여 보았다. 창가 좌석이라 괜스레 한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희끄무레한 빛이 감돌았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가을은 짧았다. 십일월 중순,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정은 교무실에 불려갔다. 담임교사가 한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다. 정은 그들 앞에 앉았다. 담임교사는 멋쩍게 운을 뗐다. 몇 가지를 물어 볼 테니 솔직하게 답하라는 말이었다. 질문자는 아주머니였다. 처음에는 학교생활과 방과 후 일과에 대해 물었다. 그때까지도 정은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마가린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에야 정은 알아차렸다. 마가린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본격적인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요즘 붙어 다니는 여자아이가 너인 것을 안다. 읍내에서 소문이 별로 좋지 않다. 야밤에도 단둘이 만난다고 들었다. 믿지 않지만 확인 차 알고 싶다. 임신을 했던 일이 사실인지 말해 달라. 교무실의 모든 눈과 귀가 한곳에 쏠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 정은 보호 받지 못했다. 동석하지 않은 마가린을 생각했다. 몰라도 되는 일은 모를 수 있었다. 그것이 마가린의 열아홉이었다. 정은 제 나이를 앞서 가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담임교사가 정을 채근했다. 헛소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한 마디로 족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정의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공식적인 면담은 끝이 났다. 교실로 돌아온 정은 모종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들은 사실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소문은 정을 끈질기게 따라올 터였다. 창가에 서 있던 마가린과 눈이 마주쳤다. 바깥에는 진눈깨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정은 교실을 뛰쳐나갔다. 가방도 챙겨 들지 않고 슬리퍼만 신은 채였다. 그대로 둑길까지 내달렸다. 교복이 안쪽까지 차게 젖어들었다. 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슬리퍼를 벗었다. 맨손으로 언 발을 한참 동안 주물렀다. 체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은 생기지도 않은 일에 수치심이 들었다. 이대로 온몸이 그냥 얼어붙었으면 싶었다. 그때였다. 마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을 부르고 있었다. 정은 수풀에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혼자이고 싶었다. 마가린은 비탈진 둑길을 한달음에 내려섰다. 정의 가방과 외투를 들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마가린은 슬리퍼를 금방 찾아냈다. 그러더니 손에 든 것을 내던지고 물가로 나아갔다. 마가린은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헤엄쳐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이 수풀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가린은 둑길로 되돌아오지 못했다.물귀신 같은 년. 마가린의 어머니는 저수지에서 부르짖었다. 정은 최초 목격자 진술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틀 만에 경찰서를 나섰다. 장례식이 치러진 뒤였다. 정은 그 후 세 달을 입방아 속에서 견뎠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던 날이었다. 정은 마가린과 밤낚시를 하던 그곳을 도망치듯 떠났다. 목적지는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매순간이 무의미한 소음으로 넘쳤으면 했다. 언제든 정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과거를 영영 파묻고 싶었다. 정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천변은 피하면 그뿐이었다. 거식증이 시작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화 불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증세는 점차 명확해졌다. 밥의 형태를 가진 것에는,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정은 죽이나 과일로 겨우 속을 달랬다. 별안간 구토 증세가 밀려오는 때는 허다했다. 주변에서는 장기 입원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은 속이 뒤틀려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거식증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진눈깨비가 그친 뒤에도, 정은 여전히 황폐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정은 약도를 펼쳐 들었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국수전문점이 있다는 동네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이었다. 약도대로 주택가에 들어섰지만 학원장이 일러준 상호명은 보이지 않았다. 간판이 없는 식당을 발견한 것은 골목길의 끄트머리였다. 막 개업했다고 보기에는 낡은 외관이었지만, 김이 서린 창에 나붙은 차림표만으로는 국수전문점이 분명했다. 정은 문을 열었다. 이인용 식탁 여섯 개로 꽉 차는 공간이었다. 안쪽 주방에서 주인 부부가 부산히 움직였다. 정은 머뭇거리며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머릿수건을 쓴 여자가 나타났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뒤따라 나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정에게 펼쳐 보였다. 무엇을 주문하실 건가요? 가지런한 글씨였다. 정은 주인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가 검지로 자신의 입을 가리킨 다음 손을 내저었다. 정은 봉투에 적힌 학원장의 이름을 내 보였다. 주인 부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듯 했다. 주인 부부는 목례를 하더니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은 긴 여정에 기운이 빠졌다. 숨을 고를 요량으로 잠시 문가에 기대었다. 주인 부부가 주방에서 양푼을 들고 나와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때였다. 양푼에 든 것은 국수였다. 정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국수전문점을 다시 찾아 볼 생각이었다. 문득 여자가 손짓을 했다. 정은 주인 부부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젓가락을 내밀었다. 남자가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젓가락을 받아든 정은 주인 부부 사이에 앉았다. 국수는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것이었다. 주인 부부는 식사를 시작했다. 후룩, 후룩, 후룩.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주인 부부의 식탁에도 소리가 있었다. 젓가락이 양푼 모서리를 튕겨 내거나 잔에 담긴 물이 연신 찰랑였다. 떠들썩한 식탁에서 정은 해거름의 기억을 되찾았다. 텅 빈 몸 안에 물이 서서히 차오름을 느꼈다. 마가린은 반복되는 허기처럼 떠오르곤 했다. 정은 종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살아가는 한 끝나지 않을 허기였다.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일 때였다. 주인 부부와 머리를 맞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입안에 신물이 고였다. 그 모든 물을, 정은 힘껏 삼켰다.정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냈다. 엄지로 힘주어 누르자 오목한 자국이 남았다. 정은 구에게 도마와 밀방망이를 주었다. 구는 반죽을 가장자리부터 밀어 폈다. 반죽은 도마 모서리에 걸칠 만큼 커다래졌다. 구는 밀방망이를 다시 정에게 넘겼다. 정은 들쑥날쑥한 두께를 평평하게 편 다음 반죽을 겹겹이 접고 칼질을 시작했다. 면발은 소면처럼 얇게 잘렸다. 그것을 면포를 깐 너른 쟁반에 놓고 밀가루를 살짝 뿌렸다. 칼질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그 박자를 유지하며 정은 조곤조곤 말했다."어떤 유목민은 새해 첫날, 집안 곳곳에 밀가루를 뿌린대요.""그게 무슨 뜻인데요?""만수무강을 바라는 거예요, 이 모양처럼."정은 면발 한 가닥을 들어 보였다. 구는 그것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가닥마다 삶의 기원이 담겨 있는 셈이었다. 정이 면발을 삶고 양념장을 준비하는 사이, 구는 고명을 만들었다. 먼저 달걀지단을 부쳤다. 다음으로는 김을 부수고 대파와 청양고추를 다졌다. 끝으로 손을 댄 고명은 김치였다. 구는 그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몸속에서 서랍이 일제히 덜컥거렸다. 구는 심호흡을 하고 칼을 잡았다. 도마에 김치 서너 줄기를 놓고 잘게 썰었다. 손끝에 빨갛게 물이 들었다. 그것은 언젠가 구의 얼굴빛과 닮아 있었다. 정은 두 개의 그릇 가득 칼국수를 담았다. 그 위에 구가 조그마한 원을 채우듯 고명을 조심스레 얹었다. 마무리는 양념장 한 숟가락이었다. 칼국수 두 그릇이 조리대에 가지런하게 놓였다. 구와 정은 비로소 마주앉았다."먹어요.""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요.""말해 봐요.""삼키지도 못했잖아요.""그랬지요.""근데 왜, 다시 먹을 수 있었어요?""잊고 싶지 않았으니까요."구는 고개를 낮게 떨어뜨렸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어제의 불행보다 눈앞의 온기가 지금은 더 가까웠다. 후룩, 후룩, 후룩. 정이 칼국수를 먹는 소리였다. 구는 젓가락을 쥐었다. 면발을 신중하게 감아올려 입에 넣었다. 그것은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랍의 맨 아래층으로 향하는 긴 통로가 천천히 열렸다. 구는 눈을 들어 정을 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맛있어요.※ 소설부문 당선소감/오희진 "밥 한 끼 같이 따뜻한 글 쓰겠습니다"금요일 저녁, 가까운 이들을 집에 부르곤 합니다. 어둑해지면 문간이 소란합니다. 빈손으로 오는 이는 없습니다. 즐겨 마신다는 술을 사오거나 어젯밤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답가를 준비해야겠지요. 나는 쌀을 안치거나 물을 끓이거나 야채를 볶습니다. 볶음밥, 덮밥, 스파게티, 카레… 음식은 대개 한 그릇짜리입니다. 더이상의 구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앉은뱅이 식탁에 둥그렇게 모여 앉습니다. 비로소 금요일 저녁이 시작됩니다.날이 밝아옵니다. 하나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때때로 홀로 술을 마시겠지요. 어두운 방에서 노래를 부르겠지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밥 한 끼의 온도를 간직한 채로요. 내가 쓰고 싶은 소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밥상머리에서 늘 기도해 준 가족들, 나를 희봉식당이라고 불러준 친구들, 허기진 밤을 나란히 지새운 문우들, 밥상의 기억을 나눠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설익은 이야기를 기꺼이 맛 보아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신춘문예라는 밥상을 마련해 준 경인일보에 감사드립니다.오래오래 쓰겠습니다. 한 그릇으로도 충분한 온기를 이어 가겠습니다.#약력1987년 2월 5일 전라북도 무주 출생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졸업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 서울 거주 ※ 소설부문 심사평/윤후명·장사선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작품… 미래 기대돼"소설가 윤후명 선생님과 내게, 1차 걸러진 24편의 소설이 각각 배달되었다. 이중 5편 정도는 문장 작법이나 소설의 기본 서술법이나 구성법 등이 미숙한 작품들로 우선 제외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정독에 들어갔다. 전체 플로트와 관계없는 무의미한 장식적 에피소드나 묘사 서사의 남발이 거슬렸다. 전형적이지 못한 캐릭터와 사건도 소설의 깊이를 담보할 수 없었다. 일상 경험에서 창작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좀더 진전된 실험의식을 지닌 경험 개척을 통해 창작에 나서야 할 것이다. 치열한 인생 현장 탐구와 고뇌가 동반될 때라야 비로소 명작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얻는데 힘들었던 제재라도 전체 소설과 밀접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거대 담론의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거대 담론에 대한 이해없이는 현실이나 미래를 투시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하여야 한다. 최종적으로 손에 남은 작품은 7~8편.이제 윤후명 선생님과 나는 토론에 들어갔다. 폭력의 악순환을 희망으로 극복하려 한 '옥수수밭 아코디언', 흡인력있는 문장력을 바탕으로 사랑과 우정이라는 진부한 제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응시하려한 '오후 세 시의 배웅', 그리고 '전어대가리'의 적나라한 서사와 거침없는 입담, '어디로 가야 하나요?'의 시의적절한 제재 선택, '다이빙'의 적절한 제재 배치와 언어 선택, 그리고 '첫입' 등은 우리 두 사람의 최종 선택을 매우 힘들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약간의 차이지만, '첫입'을 골랐다. '첫입'은 자칫 간과할 뻔했다. 얼핏 보면 초라한 '칼국수'에 불과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능력으로 육수를 우려내었고, 숙달된 손으로 정성스레 면을 뽑았다. "맛있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섭식장애 이야기를 통해 현대 인간사회에 늘어가는 트라우마의 대두와 회복을 보았다. 다만,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가 부족하고, 먹기 대회의 서술이나 대화가 적절하게 성격 창조나 플로트 전개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문제로 남는다. 다만 가능성만으로 미래를 기대해 보고자 한다.

2012-01-01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시부문]심사평/안도현·장석남

[경인일보=]오다정씨의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은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시다. 이 분의 시에는 우선 어려운 말이 없다. 시에 어려운 말을 쓰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런데 본심에 올라온 시가 대개 그러한 시였다. 시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삶을 노래하자는 것이므로 문장이 헛갈리거나 하면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누가 끙끙거려가면서까지 시를 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을 건 다 있다. 행과 행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사유의 도약은 읽는 사람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당선작은 은유와 상징, 환상, 그리고 우리네 생활이 적절히 조율된 수작이라 할 만하다. 가령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에서 연과 연 사이의 바다를 보라! 게다가 '반 토막만 남겨진 배'는 우리를 금세 이 세상 저편으로 싣고 가지 않는가. 더불어 '굽이굽이' , '進進', '뾰족뾰족' 등등 적절히 배치한 리듬은 시의 맛을 크게 살려준다. 이만한 '언어'와 '사유'라면 당선작으로 충분했다. 최근 회자되는 장광설의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상쾌한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최인숙씨의 '무지개' 와 허영둘씨의 '고요를 잘 살펴보면' 등이었다. 모두 잘 짜여진 작품들로 읽혔으나 굳이 단점을 들라면 너무 기성품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서툴지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새롭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아쉽게 내려놓게 됐다. 이 분들 역시 훗날 좋은 시인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2011-01-03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시부문]당선소감/오다정

[경인일보=]노래를 듣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따라도 불러 봅니다. 그러다가 잠잠히 그저 듣기만 합니다. 세상에 노래는 얼마나 많던가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의 순정을 다해 노래해 왔던걸까요. 그들의 노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노래는 왜 이렇게도 못생겼을까요? 그런데도 거기 누군가는 제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좀 귀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못생긴 노래에 담은 지극한 순정함과 곡진함을 당신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외로움에 지쳐 저의 노래들이 시들기 전에 말입니다 다르게 말 할 줄 몰라서, 다른 말을 배우지 못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자들에 죽어라고 나의 세상들을 구겨 넣고 앉았었던 저를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못생긴 노래를 힘을 다해 부르고 앉은 저를, 저의 지난 날들을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저의 기억이 혹여 당신의 기억인 걸까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빚을 쓰는 것이라고만 믿어 왔던 제가 떠나 온 자리는 너무 먼 곳이어서 이젠 처음 빚을 냈던 자리로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제가 절 무너뜨렸던 걸까요?보세요, 정신의 가장 차가운 바닥에 나를 쓰러뜨렸던 당신, 몇 번이고 꺾이면서도 무릎을 털며 일어서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주저앉히곤 했던 당신, 삼엄한 당신, 다정한 당신, 그리고 우스운 당신, 오늘은 저를 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가족이 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아버지 어머니, 형부 양웅식 큰언니 김종민, 영원한 마음속의 은사, 민해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 지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었던 미선언니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연옥, 용옥, 향선. 모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밝은 눈으로 늙은 미래를 축복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열심을 다해 노래부르리라 다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1965년 경기도 포천 출생송곡여고 졸업, 국민대 시창작과정 수료현 동두천시 거주, 분식점 운영

2011-01-03 경인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역경 딛고 당선 '40대 여성 파워'

[경인일보=]올해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은 40대의 두 여성이 차지했다.지난달 21일 치러진 '2011 경인일보 신춘문예' 최종 심사에서 전북 전주에 사는 김경나(본명 김미경·40)씨가 소설 '비단길'로 당선됐으며, 시부문에서는 동두천에서 거주하고 있는 오다정(본명 김정심·46)씨의 '중세국어 연습 혹은 그림'이 당선작으로 뽑혔다.김경나씨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간 은행원으로 일한뒤 가정주부로 생활하다 뒤늦게 원광대 문예창작과에 입학, 만학의 의지를 불태우며 소설과 시 등을 공부했다. 김씨는 "어렸을적부터 가정사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어 이런 경험담을 꼭 소설로 쓰고 싶어 문학을 공부했다"며 "앞으로 더욱 정진해 황순원 같은 훌륭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시부문의 당선자 오다정씨는 학창시절 백일장 대회를 휩쓸며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농사일과 학원강사, 분식점을 운영하는 등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른이 돼서야 국민대에 개설된 평생교육원 과정을 통해 시 창작이론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여러 스승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시세계를 정립하게 됐다.오씨는 "시는 나에게 있어 평생의 빛같은 존재"라며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글쓰기를 가르치며 언젠가는 내 작품을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번 당선으로 문인으로서의 당당한 자격을 얻게돼 기쁘다"고 말했다.한편 이번 2011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시 부문에 207명 851작품, 소설부문에 107명 115작품 등 총 966작품이 접수됐으며, 이중 예선을 거친 소설 11편, 시 20편이 본심에 올라 최종 당선작이 결정됐다.시상식은 오는 13일 오후 2시 경인일보 본사에서 열리며 소설 당선자에게는 500만원, 시 당선자에게는 300만원의 상금이 각각 수여된다.

2011-01-03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소설부문]심사평/임철우·김형경

[경인일보=]최종심에 올라온 열 한 편의 작품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선보이면서도 일정한 완성도를 성취하고 있었다. 많이 써 본 솜씨에 숙련의 기미들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적 구성 측면에서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소설은 이야기를 뼈대로 이루어지지만,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 소설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 그것을 바탕으로 직조해내는 플롯,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주제 등이 개연성있게 조화될 때 소설이 완성된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최종적으로 검토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오금숙의 '날개'는 이상의 '날개'를 깔끔하게 패러디한 작품이나, 원본을 넘어서는 자기만의 세계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영서의 '오버행 구간'은 취업난, 루저 등을 소재로 하여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으나 문제를 구조적인 틀 속에서 읽어내는 시각이 부족했다. 박경서의 '안드로메다'는 공들여 쓴 매끈한 작품이지만 구태의연한 소재와 자의식 과잉의 문체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졌다. 김의경의 '웰컴 투 더 바우하우스'는 현실의 한 지점을 생동감있게 포착한 점은 흥미로우나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고 주제를 향해 이야기를 수렴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비단길'은 국도변에서 만난 세 인물의 갈등 관계를 통해 우리 생의 유랑과도 같은 본질을 한 켜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역량이 뛰어나고, 이야기속에 숨길 것과 드러낼 것을 적절히 엮어가며 끝까지 긴장을 유지시키는 능력도 돋보였다. 삼자 갈등에서 항용 예견하게 되는 상투적 결말을 파괴하면서 제시되는 클라이맥스의 의외성이 요술처럼 주제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보는 일도 즐거웠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문장이나 표현 장치에서 디테일에 좀더 신경썼으면 하는 점이다.

2011-01-03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소설부문]당선소감/김경나

[경인일보=]철학 수업을 듣고 있다가 연락을 받았습니다. 수업 주제가 '죽음'이었는데 전화를 받자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어찌된 일인지 제가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설은 저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죽음…? 그런 소설을 왜 쓰느냐고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죽음을 떠올리면 저는 안경을 쓴 것처럼 소설이 더 잘 보였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소감에 죽음을 쓰고 있는 지금, 이 감각을 저는 즐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선이 이런 저 자신을 일깨워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제 안에서 고통을 끌어내 준 스승 윤후명 선생님께 깊은 신뢰를 전합니다. 야생마같다며 붙들어 앉히고 저를 글 쓸 수 있게 해준 큰 은인입니다. 불안해하는 저에게 헌신적인 안정을 보여준 생오지 문순태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글 속에 많이 보였음에도 더 큰 부분을 보아준 저의 급한 성격까지 품어준 두 분 심사위원께도 깊이 고개 숙입니다.모두 고맙습니다. 제 마음속 지인들, 가족들, 전화로 넋두리를 받아주고 제 마음을 아껴주는 이십년지기 친구 현량이에게도 포옹 전합니다. 저를 감당해주는 희생의 대명사 남편에게 이 기쁨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시인들에게 따뜻한 눈빛을. #약력1971년 전북 김제 출생학산고등학교,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현 전북 전주시 거주, 가정주부

2011-01-03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비단길/김경나

[경인일보=]노인이 냄새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끄응, 노인이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화장실의 깊은 악취가 바람을 타고 내가 있는 곳까지 흘러 들어왔다. 가슴이 땀에 푹 젖은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차가 오고 있니."문을 반쯤 열어두고 있으면서도 노인은 자꾸 내게 물었다. 땀에 젖은 흰 머리카락이 이마에 내려와 들러붙었다. 바람이 또 불어왔다. 사주 봐드립니다. 빈 사과 박스를 뜯어 쓴 글자가 바람에 쓰러져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빈 공터 옆 수돗가에 앉아 메밀 국수를 끓이던 나는 고개를 들고 국도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길엔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는 길이 보였다. 논과 밭으로 이어진 국도변은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노인과 내가 있는 곳은 폐업한 자동차공업사 안이었다. 노인이 이곳을 사거나 임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나가다 텅 비어 찾아든 것이다.쌀이 떨어진 지가 꽤 되었다. 국수에서 옅은 진흙 색깔 물이 우러났다. 나는 국수가 익었는지 한 가닥을 잡아 끊어 먹어보았다. 잘 익었다. 씻어낸 국수를 양은냄비에 담고 찬물에 담가둔 병두유를 국수 위에 부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콩국수였다. 지팡이를 든 노인이 검은자위 없는 눈을 불안하게 뜨며 화장실을 나왔다. 변비 때문인지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나는 손님들에게 맛보이려고 잘라 놓은 수박에서 한 점을 떼어 노인의 국수 안에 넣었다."곧 장마인데 너는 걱정도 안 되느냐. 장마가 지면 손님들은 찾질 않는다.""손님도 안 오는데 수박을 팔라고요?"나는 삐딱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남자 앞에서는 더 그랬는데, 그 버릇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곧 큰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수박들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노인은 공업사 마당에 수박을 쌓아놓고 길을 지나는 손님에게 팔았다. 그것으로 수박점도 치곤 했다. 하지만 노인의 신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가끔씩 정신은 딴 곳에 있었다. 며칠 전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 과부라는가 하면 아들이 대학 입시에 붙겠느냐고 묻는 손님에게 곧 죽을 운이니 큰 굿을 하라는 말도 했다. 주역, 당사주, 명리학 같은 점들이 있는데 누가 수박점을 보러 올까. 그래도 간혹 나같은 사람이 있긴 했다. 이곳에 처음 온 날 노인에게 점을 쳤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오던 손님도 너를 보면 도망치겠구나. 분을 바르거라."눈 먼 노인은 앞을 다 보는 듯 이야기했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북어처럼 꾸덕꾸덕 마른 걸레를 주며 먼지를 뒤집어쓴 수박들을 닦으라고 했다. 기울고 있는 해이지만 아직 따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노인의 그림자는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 같은 그림자를 나는 애써 외면했다.노인이 수돗가에 빈 그릇을 내려놓고 앉았다.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 호스에 머리를 갖다 댔다. 그러더니 물 수압이 낮다며 투덜거렸다. 차가 오느냐고 노인이 금방이라도 물을 것 같아 나는 국도 길을 바라보았다. 앉아 있던 노인이 일어나더니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지팡이로 퉁퉁 두드려보고는 천천히 들어갔다. 변기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변기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노인이 한손으로 변기 밸브를 내리자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기분이 좋은지 아 시원하다, 라고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나는 설거지 그릇들을 그대로 둔 채 쌓여 있는 수박들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나도 모르게 노인을 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 오고 있느냐, 또 내게 물을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검은 선까지 읽어야 한다. 눈이 있으니 넌 그것까지 봐야 해."머리에 묻은 물을 화장실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노인이 말했다. 능구렁이에다 순 사기꾼이라고 한 번은 내가 쏘아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노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끄응, 소리가 또 들려왔다. 나는 골라놓은 수박 위에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선을 들여다보았다. 노인은 점칠 때 하우스 수박이 아닌 노지 수박을 꼭 썼다. 수박 속에 박혀 있는 검은 씨들을 점자 읽듯 손으로 더듬어가며 손님의 사주를 읽곤 했다."생긴 모양으로 사주를 읽고 있구나. 갈라보기 전에는 그 안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야. 안을 봐야 한다. 수박 속은… 끄응, 그 사람의 살아온 길이니까. 물론 사주를 잘 타고 난 사람도 있다."나는 못들은 척 노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대부분의 수박은 그저 먹을만 하지만 어떤 것은 끄응, 쉰내를 풍긴다. 속은 괜찮은데 껍질이 두꺼운 것도 있어. 꼭지가 떨어진 것도 있고 백태가 낀 듯 허옇게 보이는 먹지 못할 것도 있다."수박을 반으로 갈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촘촘하게 씨가 박혀 있었다. 씨들은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처럼도 보였다."씨가 없는 수박이 나올 때는 끄응, 그 사람이 곧 죽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게 좋다. 가만있어야 해. 자칫 다칠 수가 있다. 죽으려고 하는 자는 물귀신처럼 상대를 끌어가지."나는 크고 겉모양새가 좋아 보이는 사람들보다는 어딘가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나 같은 사람들을 더 자주 보아왔다. 내 가족들이 그랬다. 팔려고 내놓은 수박처럼 국도변에 모여 있으면 아무도 사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꼭지조차 잃어버리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한 수박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려보았다. 수박에도 마음이 있겠지.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차가 와요."나는 벌떡 일어났다. 샛길에서 차가 한 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이 피어나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 있던 노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끄이익. 낡은 봉고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졌다. 볼이 부어 보이고 얼굴빛이 좋지 않은 사내였다."수박이 달고 맛있다오."가늘게 몸을 떨며 노인이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이 공업사 노인이 임대한 거 아니면 창고 하나 씁시다. 다 같은 처지 아니오."갑작스런 말에 노인이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벌써 반 정도 남은 쌀 포대를 수박들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사내가 봉고차 안에 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힘이 드는지 식은땀을 흘렸다. 다 떨어진 침낭과 가방 몇 개뿐인 데도 그랬다. 사내가 창고 안에서 나온 것은 한참 뒤였다. 간판을 든 사내는 낡은 의자를 가져와 그것을 발판 삼아 봉고차 위로 올라갔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성인용품'. 노인은 사내가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봉고차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노인이 알고 있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바람에 화장실 문이 텅, 하고 닫혔다. 다행히 노인은 그 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이 나올 듯하다 다시 들어갔다. 노인이 또 몸을 떨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나는지 중심을 잃을 것 같던 노인이 내가 있는 수돗가 쪽으로 위태롭게 걸어왔다. 땀에 젖은 노인이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겁이 덜컥 났다. 노인의 말문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소정아."붙잡힌 손목을 노인의 손에서 빼냈다.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버지였다. "네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노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질 않았던가. 내 마음속 같은 어둠이 수돗가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만나게 되면 갑자기 나는 기운이 빠졌다. 신기가 들어온다며 노인이 아버지 목소리를 곧잘 내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붙잡아두고 싶어 노인이 아버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같이 살지 않아 나는 아버지 목소리도 몰랐다. 그래도 노인의 목소리가 싫지 않아 나는 그대로 듣곤 했을 뿐이었다.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다시 내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림자를 거울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일까. 거울 같은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너무 들여다보아 거울 안에 들어 있던 내가 떠나버린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내 자신은 이미 떠나고 없고, 거울에 비친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인 것 같았다.노인의 몸 떨림이 다행히 잦아들었다. 더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표정 없이 쭈그리고 앉아 그릇들을 찬물에 씻었다. 흘러나오는 물에 엉덩이 부근이 젖어들었다. 몸이 추웠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랬다. 노인이 휘청거리며 수도 호스를 잡아 또 머리에 갖다 대고 있었다. 얼굴이 다시 피어났다. 노인이 웃자 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 나는 노인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는 어딘가 정신 나간 짓을 해도 나이 많은 노인은 아버지처럼 나를 버리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겠지. 나에게 있어 노인이란 뜻은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라는 뜻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었다. 왜 세상의 아버지들은 젊은 것일까. 죽어서까지도 힘이 센 존재는 내 아버지뿐인 듯 했다. 노인은 음메에에에, 우는 하얀 양같이 나를 가끔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노인과 있으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한 여자처럼 노인을 무작정 믿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착한 여자란 말이 싫었다. 착한 여자란 말이 나는 꼭 기다리는 여자라는 뜻 같았다. 그래서 나쁜 여자가 되는 게 더 좋았다. 나쁜 여자란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어쩐지 흑과 백 같아서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다만 떠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나 자신에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친하지도 않은 노인과 왜 이곳에 있는지 그런 의문이 일어났다. 그날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쯤에 가 있을까. 가지 못한 목적지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다.그 날 나는 화장실이 급했었다.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고 말았다. 헤드라이트를 켠 버스가 묵은 트림 소리를 내며 사라져갔고, 그 순간 바람을 타고 낯익은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고향의 풀냄새였다. 마음 깊은 불안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풀숲 한가운데 있는 화장실은 다 죽어가는 듯 쿰쿰한 냄새를 풍겼다. 삐걱이는 문을 열었다. 독한 기운이 눈으로 파고 들어왔다. 문이 닫히지 않아 나는 열어둔 채 변기에 쭈그리고 앉았다. 구석에 한 뭉치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오돌토돌한 느낌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은 점자였다. 누가 점자책을 찢어 화장실 종이로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일까.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국도변은 불빛 한 점 없었다. 고장난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란 대나무가 보였다. 하늘로 뻗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내 잠이 깼으니 사주나 보고 가."수박점 치는 노인이었다. 고향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는 맹인 점쟁이였다. 발밑에서 딸각, 하는 소리가 났다. 돌이 내는 소리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소리가 나는 돌을 바닥에 깔아둔 것일까. 막차가 올 때까지 한두 시간 기다리느니 점을 볼까.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사주는 점쟁이의 기가 맑은 아침에 보는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아픈 게 아홉수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수박점은 어떻게 치는 것일까. 이제 서른을 넘어선 지금 나는 대나무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세상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점을 보려고 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기운을 드러내 보이고 답까지 준다는 말인가. 나를 세상에 내놓은 어머니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일이었다."수박을 한 통 들고 와."수박 값은 따로 내야 한다고 했다. 조금 전에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공업사 앞으로 수박들이 만들어낸 듯한 작은 산이 보였다. 모양이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 품에 안았다.사무실 안은 어두웠다. 그 안에 또 작은 방이 하나 있는 게 보였다. 정자체로 쓴 글씨 종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수박 씨로 당신의 운명을 점칩니다.'나는 전등 스위치를 켰다. 좁은 방 안에서 예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기다렸다. 솜이 터져 나온 방석 위에 앉았다. 나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다. 불에 그슬려 끝이 오그라든 플라스틱 큰 쟁반이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딘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라곤 방 안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수박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조용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싸고 흔한 음식처럼 어려서 질리게 먹었던 것이다. 답을 보기 위해선 그러나 참아야 했다. 근방에서는 그래도 유명한 노인이었다. 문득 노인이 띠와 태어난 시를 물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 같았다. 노인은 점자책도 보면서 신기로 수박점도 친다고 했다. 점자책을 펼친 노인이 또 헛기침을 했다."무엇이 궁금해 왔니."노인은 반말이었다. 어두운 방안 때문에 나도 모르게 더 긴장이 되어 목소리가 잠겼다. 하지만 신기를 보고 싶어 말을 아끼는 것도 있었다. 노인이 내 수박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직 반으로 가르지도 않았는데 살아온 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노인이 수박을 반으로 갈랐다. 씨들 사이로 붉은 속살이 길을 내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약간의 백태가 있는 창백한 인생, 손수건으로 닦아내어도 또 다시 젖던 어머니의 인생 그리고 내 인생…."다른 여자가 있어."나는 참고 있던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 말은 오래 전에 어느 점집에서 어머니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처럼 노인의 말을 믿는 척 하며 믿지 않았다. 사랑은 거대한 도시처럼 나를 집어들어 삼키곤 했다. 왜 나는 혼자가 되어 부메랑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차를 타보니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가족도 고향도 잊은 채 지내오질 않았던가. 얼굴이 바람에 쓸리듯 시렸다. 고향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일까."사막으로 가고 있군."다른 사람도 아닌 노인에게서 들으니 쓸쓸함이 더 밀려왔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수박의 씨들을 점자 읽듯이 짚어나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마음속에 떠올렸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노인의 말 때문이었을까. 내 가슴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노인의 검은자위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수박 씨 두 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싶었다. 나는 반으로 갈라진 수박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씨 안에 선인장이 보이고 노인의 눈에서 모래 같은 점자가 보였다. 점자 같은 모래언덕이 사막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무실 안 창문에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어두운 구름뿐이었다. 별과 달이 보이지 않았다. 비단길로 향하다가 왜 이곳으로 흘러들었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나 자신도 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서른 둘을 짊어진 내가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서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었으므로 이제 나가야 했다. 곧 버스가 올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유열(幽咽)한 인생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어쩌면 누군가 내가 떠도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도 같았다. 버리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줄 보금자리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아침부터 물이 나온다고 했으니 우선 수돗가에 있는 물로 쌀을 씻어라."어느새 노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집에 가야 해요.""집이 어딨다구. 화장실을 깨끗이 해놓아라.""가야 한다니까요.""넌 운명이 나와 얽혀 있으니 어디로 갈 생각은 말아라."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나. 지금 나간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바람이 휘잉 소리를 내며 나를 밀어냈다. 어쩌면 이제 내가 어머니를 어딘가에 버려두고 있었다."씨앗은 땅에 뱉어야지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느냐. 나와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뜬 별과 달도 나를 버리고 떠난 것 같았다. 나의 떠돎은 종착역이 있을까. 나는 지쳐 있었고 배가 고팠다. 나는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넌 운명이 나와 얽혀 있으니 어디로 갈 생각은 말아라.' 노인이 했던 말이 나에게는 너를 버리지 않으마, 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버스가 내게서 떠나고 있었다."차가 오고 있니."수돗가에 앉은 노인이 또 내게 물었다. 귀찮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석 달째 나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아니 내가 어쩌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노인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버스가 두어 대 지나갔다. 사내가 창고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고장난 물세차기 앞에서 멈췄다. 그것은 가동되지 않는 고물이었다.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연장통을 들고 나왔다. 이제 창고를 치우는 것도 잊고 물세차기를 고치겠다는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손전등을 비추어 주거라."노인이 말했다. 어둠이 자동차공업사를 감쌌다. 나는 컴컴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물건들은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손전등을 켰다. 빛이 나의 턱을 타고 쭉 올라왔다. 거울 속의 나는 나쁜 여자였다. 손전등을 끄자 거울 속의 나는 사라졌다. 몇 분도 안 되어 사내가 물세차기를 고쳤다. 국도 길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한 장씩 뜯어져 있던 화장실 안 점자 종이가 바람을 타고 공업사 마당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누구의 인생이 바람에 날아가다 떨어져 마당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일까. 손가락으로 볼록한 부분을 더듬었다. 꿈인 듯 다시 눈앞으로 사막이 보였다. 낙타들이 네 다리로 사막을 읽어나가며 터덜터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뱀과 선인장도 있지만 나는 사막에 살고 있는 것들 중에서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인 사구가 마음에 들었다. 사막의 점자였다. 사구는 곰보자국이 있는 노인의 얼굴 같기도 하고 송송 뚫린 내 가슴 속 같기도 했다. 바람이 내 얼굴과 가슴을 휩쓸었다. 어느 순간 잠잠해지면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고요는 계절처럼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모래들이 깊은 곳 안으로 들어와 욕망처럼 나를 흔들었다.손전등으로 국도변을 비추어보았다. 다시 턱을 향하여 손전등을 올려보았다.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껐다. 탁, 하고 켜자 국도변 샛길 풀들이 놀란 듯 더 불쑥 자라났다. 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톱만한 불빛이 하늘거리며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반딧불이였다. 뒤를 돌아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가스버너 위에서 라면이 끓었다. 양이 많아 보이게 하려고 뚜껑을 일부러 열지 않은 채 면이 불기만을 기다렸다. 가스버너 불을 껐다. 하지만 라면에 넣을 계란도 파도 없었다. 어제는 호박을 따려다가 밭주인한테 모진 욕을 들었다. 오죽하면 뭔가를 넣고 싶은 마음에 풀이라도 뜯어서 넣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나마 사내가 준 쌀로 밥을 반 냄비 해놓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노인이 나오고 있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어디 있는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봉고차 있는 곳을 흘낏 나는 바라보았다."라면이 불었지 않니."노인이 큼큼, 냄새를 몇 번 맡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사내가 봉고차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붙들고 있었다. 속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내는 화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했던지 걸음을 늦추었다. 첫인상도 어딘가 장이나 간 쪽의 건강이 안 좋아보였다. 죽을 끓여줄 걸 그랬나 싶었다. 얼굴은 호랑이도 잡아먹게 생겼는데 어찌된 일인지 몸은 부실했다. 그때였다. 젓가락을 든 노인이 젓가락을 놓치는 것이었다. 노인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진동으로 눈까지 뒤집혔다."소정아.""라면이나 먹어요."나는 퉁을 주었다. 노인은 나와 있을 때만 신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가 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하나 찾아 꺼내왔다. 사내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뜸이 덜 든 뜨거운 밥을 몇 수저 퍼서 물에 섞어 버너 위에 올렸다. 끓다가 언제 불이 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맨밥보다야 나았다. 사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거나 딱히 가야할 이유도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에게 죽 그릇을 들이밀어 주었다."고맙소."사내가 말했다.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하는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갑자기 생각난 듯 또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 비운 그릇들을 치우려는데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모처럼 배불리 밥을 먹은 날이었다. 노인은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옆 수돗가에 앉아서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했다.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 왔는지 사내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를 지나친 사내가 노인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밥을 잘 먹었다는 감사 표시인가? 생각보다는 예의가 있는 사내였다. 비디오 같았다. 하긴, 사내가 줄 것은 이것 밖에 없을 것이었다.별이 뜬 밤이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노인은 일찍 잠이 들었다. 노인이 낮에 비디오 제목을 내게 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헛기침만 연방 할 게 뻔했다. 정작 그 비디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나였다. 소리를 줄이고 전등을 껐다. 볼륨을 더 줄였다.화면은 차 안이었다. 남녀가 그 안에서 서로 진한 애무를 하고 있었다. 불 꺼진 사무실 창문 밖에서 별이 나를 향해 눈웃음을 치는 것 같았다. 화면이 차 밖을 비추었다. 어? 나도 모르게 그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보이는 비디오 화면도 공간이 세차장이었다. 물론 화면 속 세차장은 지금 내가 있는 곳보다 현대식이고 깨끗했다. 공간이 세차장이라서 그런지 화면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화면 속 여자가 차안의 등을 켰다. 그러자 화면 속의 남자가 말했다.'전등 꺼.''너무 어둡잖아.'물세차기 소음이 여자와 남자의 말을 삼켰다. 큰 소음이 났다. 비디오 속 남자가 여자를 깊숙이 누르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들고 죽은 닭처럼 있어. 남자가 또 말했다.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걸레들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누가 무엇이 흔들리는지 모를 정신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몸 또한 젖어들었고 그때 노인이 몸을 뒤척였다. 볼륨을 더 줄였다. 국도 길에 널려 있는 돌처럼 지내왔던 나였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니 갑자기 술 마신듯 몸이 달아올랐다.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공업사 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악취가 풍겼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깊고 아득한 웅덩이 같았다. 따뜻한 몸만큼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있을까. 몸과 몸이 포개지면 많은 것들이 흔들리면서 일렁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만큼 사람을 붙잡아두는 것이 있을까. 나는 어쩌면 그 사랑이 두려워 더 멀리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변기 안으로 몸을 깊숙이 숙이고 아아아, 메아리 소리를 내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대답하는 것도 같았다. 몸이 또 달아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술기운이 빠지듯 충동도 서서히 가라앉겠지. 가라앉는다는 생각이 또 나를 서글프게 했다.포르노 비디오는 '순간'이 지나면 그 뒤부터는 지루해졌다. 예전에 이런 비디오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화면 속 모습도 어쩐지 슬펐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비디오 속 남녀는 어찌나 남을 속일 줄 모르던지 그들은 마치 지겨운 직장에 출근한 사람들 같았다. 몸을 섞으며 나오는 남녀의 신음은 삶의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바뀌었었다. 지금 화면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남녀 주인공도 어쩐지 내 귀에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이 들려왔다. 아직도 내 몸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약도 아니었다.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슬픈 비명을 듣고 있을 사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밤은 길었고 눈이 감기지 않았다. 별처럼 사내들을 하나씩 헤아리며 잠이 들고 싶었다. 잠이 깊이 들지 않아 자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또 잠들었다. 비디오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비몽사몽 상태에서 눈을 뜨니 비디오는 꺼져 있었다. 신음소리는 꿈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아직 아침은 아니었다. 별들도 잠든 새벽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인이 검은자위 없는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여명이 노인과 나를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노인도 깊이 잠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노인은 늘 같은 눈이었다. 그래서 변함이 없었다. 화면을 보지 못해 소리만 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 한 켠이 시렸다. 노인은 거울 앞에 앉아 더러운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창문이 닫혀서인지 방안은 퀴퀴한 냄새도 나고 더웠다. 노인이 입을 달싹거렸다."내 마음을 아니?"나는 듣고도 안 들은 척 했다. 죽어서야 나는 몸이 따뜻해질 것 같았다. 다른 죽은 이들은 차갑게 식어 있는데 나는 죽어서야 따뜻해지는 운명인 모양이었다."왜 사막인 거냐. 그곳은 그저 모래뿐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환상일 뿐이야.""고향이 없으니까요."나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화장실은 더러웠고 풀들은 내 몸을 베기라도 할 듯 나보다 더 독해져 있질 않았던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사막일까. 누군가 붙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울고 싶었지만 누군가 저 세상 밖에서 또 울고 있을 테고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죽으면 차가워지는 것일까. '다 비웠으니 뜨거워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노인에게 묻고 싶었다. 수박 한 통을 낙타에 싣고 모래언덕을 더듬어가는 내 모습이 안 그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점자를 더듬으며 사막 한가운데로 가고 싶었다. 그 끝이 있을까. 어쩌면 나는 바람에 날려 온 마당에 떨어진 한 장의 점자처럼 내 생을 어딘가에서 버리게 될 것이다. 내 몸에도 점자가 있었다. 수박처럼 여자의 몸에도 씨가 있고 검은 선이 있는데 여자뿐 아니라 사람은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읽지 못하는 서로를 그렇게라도 더듬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두려워한 사랑도 나를 붙잡아두지 못했다. 그 사랑도 물처럼 나에게서 흘러갔을 뿐이었다. 그 순간 작고 하얀 양 같은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몸집은 하룻밤 사이에 더 작아져 내가 품에 안아야 할 것 같았다."네 잘못이 아니다."노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내게서 그걸 기대했는지 노인이 몸을 떨고 있었다. 흔해빠진 영화 대사같이 아득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힘이 셌다. 운명은 내게 어디론가 흘러가라고 말하고 있었다.비디오 속의 남녀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귀가 밝은 노인은 내가 옷 벗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노인은 몇 배의 귀와 마음으로 세상을 다 보고 듣고 있는 것 같았다.노인이 몸을 움찔했다. 내 몸을 더듬어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노인의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왔다. 얼굴에서부터 방향을 잡아가도록 해주고 싶었다. 노인의 손이 따뜻했다. 신기가 들어와 몸을 떠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늘게 떨었다. 나는 노인의 흘러내린 흰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나는 이대로 죽고 싶었다.'내 목을 부러뜨려주겠어요?'노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나보다 아주 오래 산 노인의 손에서 죽으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노인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름답다' 라는 말은 얼마나 추상적이던가. 나도 모르게 다시 노인의 손을 잡았다. 노인은 점자를 더듬듯 내 인생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지친 감은 눈과 마른 입술, 내 깊지 않은 쇄골을 더듬어 살아온 깊이가 얼마쯤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내 몸의 점자를 읽어주었으면 싶었다. 몸에도 중심점이 있었다. 몸에는 무수한 선들이 뻗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키우기 나름이었다. 어떤 이들은 제 몸을 키워 별이 되고 우주가 되었다. 노인이 아이처럼 울었다.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노인도 나처럼 세상이 두려운 것 같았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의 바람이 손으로 더듬듯 나를 읽고 있었다. 바람이 노인처럼 머뭇거렸지만 수줍어하며 나를 읽고 있는 시간 문득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곧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앞으로 더 혼자가 되겠지. 옷을 입은 나는 공업사 밖에 나와 있었다. 사내가 세운 간판은 아직도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사내는 밤새 슬픈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봉고차로 가 조용히 열린 차 안을 바라보았다. 볼이 불룩한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잠들어 있었다. 얇은 군용담요 하나만 몸에 덮었다. 사내는 고향이 있을까. 말이 없는 사내라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사내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언가에 떠밀리듯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날이 오겠지. 봉고차 안에는 사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보자 놀란 닭이 벼슬을 더 세웠다. 어디서 온 닭일까.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논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근처의 닭 농장에서 떨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그 순간 닭이 날갯짓을 하며 TV 위로 올라갔다. 닭을 보고 놀랄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디오는 저 혼자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이 봉고차 안을 조금씩 채웠다. 사내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올 것이란 걸 알기에 별이 더 깊이 잠들어 있는 게 아닐까. 별이 잠들어 있을 때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사막을 지나갔다. 나처럼 결핍되고 아픈 사람들이 가는 슬프고 아름다운 비단길.'차가 오고 있니.'끊어질 듯 가늘고 약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인이 마당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말리고 있는 수박 씨앗들이 보였다. 나는 씨앗들을 손에 한움큼 쥐었다. 바깥 공기가 시원했다. 멀리서 라이트를 켜고 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가 출렁일 때마다 라이트 불빛도 따라서 움직였다. 노인의 신기가 내 몸 안으로까지 옮겨 들어온 모양이었다. '자동차공업사 주인이 와요.''네가 그걸 아니?'마치 노인이 내 옆에서 묻는 것 같았다. 아침이 희미한 웃음을 안개처럼 지어보였다. 노인이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노인도 차 소리를 듣고 차가 오는 쪽을 보고 있겠지. 정말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노인일까. 차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강하게 쏘며 다가왔다.국도변으로 걸어 나갔다. 첫 버스는 언제 올까. 비척거리며 버스정류장을 지나쳤다. 인연은 고무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질겨서 길도 한없이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기억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싶어 걸어가다 보면 다시 인연이길 불러주며 무언가가 나를 기다렸다. 다시 만나게 된 인연처럼 바람이 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수박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인연이라면 노인도 사내도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겠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 대답해줄 수 있다면…. 나는 더 부드러워진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음메에에 양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점자가 있는 모래 언덕을 향해 나는 나아가고 있었다.

2011-01-03 경인일보

"새내기 문인의 깊은 성찰에 따뜻한 박수를…"

[경인일보=김선회기자]예비문인들의 등용문인 '201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20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올해로 24회째를 맞은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는 시 부문 당선자인 김진기(73)씨와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전영일(41)씨를 비롯해 심사위원, 송광석 경인일보 사장 및 임직원, 내빈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소설부문의 심사를 맡은 구효서·이혜경씨는 축사를 통해 "소설 당선작인 전영일씨의 '아내의 화단'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며 "당선자가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균형감각과 품격을 지닌 작품"이라고 평가했다.시 부문을 심사한 정호승·정수자씨는 "김진기씨의 시(詩) '차우차우'는 시가 갖고 있는 본질적 특성인 은유를 통한 삶의 육화, 진정성 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며 "앞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시를 더욱 많이 써주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전영일씨는 수상소감을 통해 "부족한 작품에 많은 격려를 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리고, 무엇보다 철없는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진기씨는 "기자와 방송국직원, 사업가로 활동하다 시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인생 4모작의 마지막 수확이라 할 수 있다"며 소감을 밝혔다. 송광석 경인일보 사장은 "당선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경기·인천지역에서 유일하게 개최되는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져 훌륭한 문인들을 더욱 많이 배출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전영일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이, 시 부문 당선자 김진기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이 각각 수여됐다.

2010-01-20 김선회

[경인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 - 김진기

일요일 아침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좀처럼 흥분을 모르던 내 단단한 노하우가 맥없이 빗장을 풀고 말았다."감사 합니다."남들은 "그 나이에 무슨 시 공부냐? 편히 지내지"하며 핀잔 반 충고 반 던지곤 했다. 그러나 아득한 꿈은 나를 지금에야 불러냈다. 대학에서 4년간 국문학 공부를 한 나는 배고픈 시인의 길을 버리고 현실을 좇아 취업을 택했다. 3년 전 다시 여유를 찾아 시에 매달리게 된 것은 4년 동안 공부한 문학의 애착이 아까워서였다. 나는 국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가 좋았다.그러나 시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이 쪽은 결코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복병, 선수마다 꺼내든 무기가 달랐다. 같은 말을 표현하는데 표현하는 방법이 신출귀몰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수없이 망설였다. 아직도 정확한 길은 모른다. 남들이 하루 5시간을 자면 나는 4시간을 자야 하고 남들이 하루에 시 10편을 읽으면 나는 15편을 읽어야 한다. 나는 지금에 머무르지 않겠다. 뒤 돌아보지 않겠다. 기축년 한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인생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나를 기특하게 보신 것 같다. 태백산 검용 소물이 흘러 한강의 젖줄이 되듯 내 고향의 맑은 마음도 시처럼 흐를 것이다. 항상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면 조건 없이 도와준 인간미 풍기는 여러 선생님들의 정이 생각난다. 그리고 객지에서 동분서주하는 내 아내와 중국의 큰 아들 내외와 손자 동주, 싱글 의 둘째 아들 모두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 특히 미숙한 내 글을 뽑아 불씨를 당겨 준 경인일보 관계자와 심사 위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약력1937년 강원도 태백산 출생동국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졸업전 대한일보 기자, 춘천 문화방송 부장현 태림인더스트리(주) 명예회장

2009-12-31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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