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미사여구보다 빛난 '순수의 문학'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7일 오후 3시 경인일보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올해 27번째 진행된 신춘문예 시상식에는 심사를 맡은 김용만 소설가, 방민호 문학평론가, 최동호 고려대 교수, 김기택 시인, 이찬 평론가와 경인일보 송광석 사장 및 임직원, 내빈 등 60여명이 참석했다.소설부문 당선자 손솔지(25·서울시 구로구) 씨는 "이 순간이 나에게는 진짜 소설같다"며 "소녀처럼, 노인처럼 쓰겠다"는 짧지만 강렬한 수상 소감을 밝혔다.시부문에 당선된 장유정(52·회사원) 씨는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이런 결실을 맺게 돼 기쁘고 감사하다"며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배우고 쓰겠다"고 말했다.소설 심사를 맡은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문단을 따라가지 말고, 늘 자기 생각을 갖고 문장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대를 따라가길 바란다"고 조언했고, 시부문 최동호 교수는 "등단이 곧 시작이니 오늘은 많은 사람들과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고 내일부터는 더욱 매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송광석 사장은 심사위원들의 안목과 결정에 대해 "확신을 갖는 전문성에 놀랐다"며 "앞으로 경인일보 신춘문예를 더욱 널리 알리고, 그간 등단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이날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이, 시 부문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이 각각 수여됐다./민정주기자

2013-01-18 민정주

미사여구보다 빛난 '순수의 문학'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7일 오후 3시 경인일보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올해 27번째 진행된 신춘문예 시상식에는 심사를 맡은 김용만 소설가, 방민호 문학평론가, 최동호 고려대 교수, 김기택 시인, 이찬 평론가와, 경인일보 송광석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내빈 등 60여명이 참석했다.소설부문 당선자 손솔지(25·서울시 구로구) 씨는 "이 순간이 나에게는 진짜 소설같다"며 "소녀처럼, 노인처럼 쓰겠다"는 짧지만 강렬한 수상소감을 밝혔다.시부문에 당선된 장유정(52·회사원) 씨는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이런 결실을 맺게 돼 기쁘고 감사하다"며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배우고 쓰겠다"고 말했다.소설 심사를 맡은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문단을 따라가지 말고, 늘 자기 생각을 갖고 문장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대를 따라가길 바란다"고 조언했고, 시부문 최동호 교수는 "등단이 곧 시작이니 오늘은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고 내일부터는 더욱 매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송광석 사장은 "심사위원들의 안목과 결정에 대해 확신을 갖는 전문성에 놀랐다"며 "앞으로 경인일보 신춘문예를 더욱 널리 알리고, 그간 등단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이날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이, 시 부문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이 각각 수여됐다. /민정주기자

2013-01-17 민정주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최동호·김기택

본심에 오른 열 명의 작품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저마다 밤을 새운 듯한 치열한 절차탁마의 노력도 보였다.떨어뜨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정성과 노고는 커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품들의 완성도가 자유로운 시 쓰기를 즐기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집념으로 자신을 학대하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당선작의 모델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의 형태와 창작방법과 사유를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듯한 태도가 여러 작품에서 보였기 때문이며, 어떤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깨뜨리고 시 쓰기를 즐기면서 자유로워져야 남들과는 다른 개성도 나오고 새로움도 나올 수 있다. 창작은 이래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는 시 쓰기를 괴롭게 만들고 나아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고사시킬 수 있다.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당선을 축하한다.박복영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다'는 평범한 대상에서 서정적 미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관찰력과 자연스럽고 차분한 어조가 돋보였지만, 상투적인 직유와 동어반복이 많아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남시우의 '리어카 화단'은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꽃의 이미지를 거리의 풍경으로 변주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개하는 시적 인식과 형식이 상투적이었다.장서영의 '시소의 빨간 경사는 때때로 무료하다'는 당선작과 겨룰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상상력도 신선하여 호감이 갔지만, 신춘문예용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은 수준이 떨어져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2013-01-02 경인일보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장유정 (필명)

아무 것도 없이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허허벌판은 텅 비어있음과 벌거벗음, 집의 출발점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만들어줍니다.2009년 여름, 문예창작학회에서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상식 없이 따라나선 길, 주먹 크기만한 별들이 쏟아진다는 초원의 지도를 따라가는 버스는 열 몇 시간을 덜컹이며 달려갔습니다.지친 방문객들에게 별은 깜빡 졸다 놓쳐버린 공연이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엔 드문드문 말과 양떼의 무리와 게르! 간혹 건너편으로 오색 무지개가 떴고, 비가 왔고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의 노을이 붉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지붕 밑에 누워 아궁이 같은 난로에 불 지펴 잠이 들었습니다.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구조를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걸어 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 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계단, 단층뿐인 집.여행에서 돌아와 숨차게 써내려갔던 시.정확히 시가 무엇인지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조금만 더'라고 격려의 눈빛으로 일러주시는 김수복 지도교수님, 문학 지도를 펼치며 명작의 길을 안내하시는 박덕규 교수님, 늦은 나이에 '문학공부를 하는 것으로도 그래도 복이다' 하셨던 강상대 교수님, 수업시간에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철학적 눈빛으로 항상 물으셨던 이시영 교수님,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으로 예리한 김용희 교수님, 엉뚱함이 좋은 시를 쓰는 데 장점이 될 거라고 말하셨던 박샘, 시의 가지와 살을 냉정함으로 평해주는 혜숙샘, 처음 문학의 씨를 싹트게 해주셨던 경사대 교수님들과 동기들, 빛나는 시인과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 선배님과 동기들, 군포여성문학회 회원들, 사는 것에 항상 촌스러워도 따뜻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초등학교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아내의 자리를 불평 없이 보듬어 주는 남편과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던 엄마를 도리어 인정해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봅니다. 며칠 전, 두세 개의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엄마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지붕을 둘둘 말아 하늘로 가신 지 꼭 일 년 기일. 당선통보를 받고 먹먹했습니다.미성숙한 제 시 평가에 날개를 달아주신 최동호 교수님과 김기택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았다가 풀었다가 감고 감기는 실패처럼 둘둘 말았다가 펴는 시의 공간에 가구며 의자를 하나하나씩 들여놓도록 노력하겠습니다.#약력1962년 평택 출생. 현재 군포 거주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수료2007년 경기사이버문학상 입선

2013-01-02 경인일보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총평/문학, 우울로부터 끄집어낸 치유의 과정

삶의 권태와 우울에서 혹은 소매를 다 적셔버린 눈물에서 시작된 문학에의 열정이 세상에 닿아 당선작이 탄생했다.시부문 수상자 장유정(필명)씨는 지난 2004년 사는 것에 막연한 권태와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일만 할 때는 우울하고 권태롭던 일상이 일과 공부를 병행하게 되면서 행복해졌다. 시간을 쪼개 강의를 듣고 외부 강의도 쫓아다닌지 4년만에 장씨는 근로자문학제와 경기사이버문학상에 입선했다. 내친 김에 단국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그에게 시는 '발견과 치유의 시간'이다. 그는 "시는 내 안에 있는 상처와 고집과 편견을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이라며 "공간의 집으로서가 아니라 시의 집, 실내장식이 골고루 갖춰진 언어의 집을 축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손솔지씨는 수학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미치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고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며 '작가가 되고 싶다. 꼭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손씨에게 소설은 '매우 점잖고 새침한 애인'이다. '계속 궁금하고 알고 싶고,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하루라도 생각을 하지않을 수가 없는' 소설에 대해 그는 '한 알의 여자'에서 보여준 수려한 문체와 수식어를 다 감추고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그는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쓰고 싶다"며 "열심히 쓰고, 즐겁게 쓰고, 괴롭게 쓰고, 미친 것처럼 쓰면서, 먼 훗날에는 작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만한 진정한 소설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뭐든 열심히 하며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계획을 밝혔다.한편 2013경인일보 신춘문예는 120명이 663편의 시를, 140명이 145편의 단편소설을 접수했으며 이중 각 부문 8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당선자에게는 단편소설은 상패 및 원고료 500만원, 시는 상패 및 원고료 300만원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1월 중순 경인일보 본사에서 진행될 예정이다./민정주기자

2013-01-02 민정주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심사평/김용만·방민호

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심사자들을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수준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열 편이 올라왔는데, 이 가운데 세 편 정도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니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한 그 몇 분은 절대 낙심하지 말고 더 정진해서 소설가로서의 길을 잃지 말기 바란다.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두 사람의 심사자가 마지막까지 눈여겨 본 작품은 손솔지의 '한 알의 여자', 허윤실의 '미러', 조미해의 '마스카라', 김개영의 '봄의 왈츠', 김소연의 '루시드 드림' 등 다섯 편이다.'봄의 왈츠'와 '루시드 드림'은 작품을 쓴 사람들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봄의 왈츠'는 일종의 상황극인데, 직업 세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문제를 교수 또는 학교사회에서 찾아 압축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루시드 드림'은 요즘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과 절망을 하나의 예로써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봄의 왈츠'를 쓴 사람은 문장 수련이 이미 잘 되어 있는 반면 '루시드 드림'의 작가는 아직 더 많은 정진이 필요하다. 두 작품 모두 소설 속 사건이 하나의 예시 이상으로 퍼져나가는 울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깊이 논의하지 않고도 두 사람은 모두 '한 알의 여자'를 단연 당선작이라고 보았다. 당선작인 '한 알의 여자'는 우선 문장이 탄탄하다. 생략, 압축 등 감정의 절제를 통한 미적거리를 확보, 상징과 은유 등 미학적 장치를 통한 품격 제고, 장면 전환의 능숙한 솜씨 등이 무척 돋보인다. 삽화 또한 명료하고 참신한 압축미로 작품 형상화에 공헌하고 있다.무엇보다 이 작품을 쓴 이는 이 시대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여성 인물의 짓눌리고 변형된 자아 정체성을 통해 남성 중심적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드러낸 그 안목을 높이 살 만했다.만만찮은 작품을 선보인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문학에 정진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2013-01-02 경인일보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당선소감/손솔지

새벽은 어린 신처럼 광폭하고 편협합니다. 잠든 이의 어깨에는 이슬비처럼 포근히 내리면서, 깨어있는 이의 어깨에는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다 놓습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새하얀 모니터 화면 앞에 앉아 야릇한 박자로 점멸하는 커서를 보고 있자면, 한순간 나는 바보천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몇 줄의 문장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승용차 사이드미러가 되었다가 옷가게의 기다란 오목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급기야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모든 글자를 지워버리게 만듭니다.참 이상하죠. 소설을 쓰지 않으면 급체한 듯 가슴속이 답답하지만, 막상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뾰족한 가시 하나가 가슴 끝에 꽂힌 것처럼 따끔하기까지 하니 그 답답증은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는 그 씁쓸함 속에 담긴 한 방울을 쾌락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러브레터를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들 말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바로 1초 전의 순간이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처럼, 나는 새하얀 화면을 마주한 그 순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설을 흠모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짝사랑의 고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다른 이가 써놓은 대작에 짜릿하게 전율하고 뜨겁게 질투하며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나면, 어김없이 내게도 구애의 순간이 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과처럼 내 마음은 철없이 어리고 유치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창피를 모릅니다. 미약(媚藥) 같은 새벽의 마법이 풀리고 또렷한 아침이 오면 유리 구두를 잃은 맨발로 가난한 문장 사이를 비척비척 거닐게 될지라도, 나는 결국 또 소설 앞에 마주 앉게 됩니다.할 수만 있다면 심사위원님들의 눈으로, 교수님의 눈으로, 동기의 눈으로, 엄마의 눈으로 내 소설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편식하는 제 숟갈 위에 생경한 반찬을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맛있게 먹고 제대로 소화하겠습니다. 튼튼한 소설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약력1989년 수원 출생. 현 서울거주수원여자고등학교 졸업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3-01-02 민정주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한 알의 여자'/손솔지

■ 소설 당선작 : 한 알의 여자(손솔지)여자의 어릴 적 꿈은 알사탕이 되는 것이었다. 어깨가 더 좁아지고 몸이 점점 더 조그마하고 달콤해져서 동글동글한 알사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왕이면 새하얗고 시원한 향이 나는 박하사탕이 되고 싶었다. 여자의 아버지가 삼겹살집에서 나올 때 카운터에 구비된 이쑤시개와 함께 한 움큼 쥐어오던 그 박하사탕처럼 작고 새하얗게. 아 달다, 아버지는 트림을 하며 만족한 듯 중얼거리곤 했다. 아 예쁘다, 참 작아. 여자가 레이스 달린 새하얀 원피스를 입을 때면 아버지는 꼭 칭찬했다. 아버지는 여자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하얀 레이스 자락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말랑말랑한 무릎을 조몰락거렸다. 그럴 때 여자의 바람은 간절해지곤 했다. 더 조그맣고 하얗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입속은 따뜻할 것이다. 아버지의 혓바닥은, 여자의 곱게 딴 머릿단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처럼 커다랗고 부드러울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입속에서 혓바닥에 이리저리 쓸리며 점점 녹아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그녀는 가끔 꿈속에서 알사탕이 되었다.꿈속에서 여자는 그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고부드럽게 금방 녹아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작아졌다.그녀는 가끔 꿈속에서 알사탕이 되었다. 그 꿈은 여자의 하얗고 보드랍던 뺨에 여드름 꽃이 필 무렵까지 계속 되었다. 꿈속에서 여자는 그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고 부드럽게 금방 녹아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작아졌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녀의 몸은 꼭 하루만큼 알사탕에서 멀어졌다. 줄어들길 바랐던 팔과 다리는 날이 갈수록 길고 가늘어졌고 거짓말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레이스가 누렇게 변색된 새하얀 원피스는 얼굴과 팔 한쪽만 끼어 넣어도 투득,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겨우 두 팔과 얼굴을 다 집어넣으면 치맛자락은 그녀의 팝콘같이 부푼 젖가슴에 뭉친 채로 걸려있었다. 여자는 새하얗게 되고 싶어 매일 칼슘 우유를 한 컵씩 마셨던 것을 후회했다. 여자가 억지로 치맛자락을 가슴 밑으로 끌어내렸을 때 투득, 투득, 원피스는 갈라졌다."안에 아직도 멀었어?"신경질적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여자는 빠르게 생리대를 뜯었다. 팬티를 입고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변기 안에 무겁게 가라앉은 생리 혈이 스멀스멀 변기구멍 쪽으로 새까맣게 몰려 기어갔다. 붉다 못해 검붉은 색이 나는 핏물은 분명 여자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여자는 매 달마다 보는 것이지만 그 붉은 빛깔이 못내 신기해서 허리를 숙여 변기 안을 구경했다. 금세 또 노크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아쉽게 변기 물을 내렸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동료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의 어깨를 툭, 치듯 스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여자가 다니는 회사에는 화장실 안에 변기가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한 쪽 벽에 웅크리듯 달라붙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는 여기저기 튄 물방울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지저분한 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씻었다. 이제 여자의 얼굴 어디에도 여드름의 흔적은 없었다. 가볍게 화장을 한 그녀의 뺨은 보드라워보였고 동그란 이마는 매끈했다. 여자는 목이 가늘고 피부가 하얘서 연분홍빛 블라우스가 잘 어울렸다. 알사탕이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전히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여자는 언제나 그늘을 찾아 앉아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피부는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얗다. 여자는 가슴이 팝콘처럼 부풀어버리고 나서부터 리본으로 장식된 브래지어만 입었다.여자의 교복 단추가 가슴께에서 힘겹게 잠길 때, 독서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은 여자에게 화이트를 빌렸다. 독서실 칸막이에 기대어 여자가 꾸벅꾸벅 졸 때쯤 남학생은 여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몰래 숨어들어간 여자화장실 가장 끝 칸막이에서 남학생은 속삭였다. 아 예쁘다. 꼭 선물 같아. 벌어진 여자의 교복 셔츠 사이로 꽃분홍의 리본이 보였다. 가슴 가운데에 리본이 붙어있는 그 브래지어는 여자가 가장 아끼는 속옷이었다. 남학생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개봉하는 설레는 손길로 브래지어 버클을 풀었다. 그 다음 달 여자의 생일에 남학생은 브래지어를 선물했다. 여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는 담겨있던 상자의 포장지와 똑같은 빨간색 도트무늬였다. 여자는 남학생이 떨리는 손길로 교복 단추를 끄를 때마다 다른 색의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를 입었다. 여자는 매일 매일 새로운 선물이고 싶었다. 남학생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화장실 문을 잠글 때 여자는 가슴이 벅찼다. 남학생은 매점에서 사먹는 푸딩보다 여자의 속살이 더 부드럽다고 속삭였다. 남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푸딩이었고 여자의 젖가슴은 그것보다 더 몰캉거렸다. 그 사실이 여자는 자랑스러웠다. 남학생은 수능 성적표가 나오자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연락하지 마, 이 싸구려 군것질 같은 년."색이 너무 싸 보이지 않아?"다른 동료의 옆자리로 와 앉은 동료는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치마에 닦으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아냐, 올봄에는 핫핑크가 유행이잖아. 그런가? 하고 되묻는 그 입술은 여자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지금 여자의 블라우스 안에 입은 브래지어에는 동료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의 리본이 달려있었다. 여자는 아직도 리본이 달린 속옷만 입었다. 여자는 이제 또 다른 남자를 위해 준비된 선물이었다."변 과장이 자꾸 입술을 쳐다보는 것 같단 말이야.""그 변태새끼가? 께름칙하다. 얼른 지워."티슈로 입술을 꾹꾹 지워내는 동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여자는 입모양으로 변태,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남자는 변태하기 전의 애벌레 같았다. 여자의 몸 위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디가 두껍고 자글자글 주름이 많았다. 틀림없는 애벌레였다. 검다 못해 푸른, 잎사귀 같은 그녀의 체모 사이를 그 손가락이 꿈틀꿈틀 기어갈 때 여자는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애벌레는 여자에게 생소했다. 어린 시절 여자의 집에는 언제나 화려하게 변태한 후의 나비들만이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쥐어준 사탕을 입에 넣으며 액자를 가리켰다. 내 원피스 같아요. 흰 배추 나비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각기 무늬가 다른 나비들은 날개 이곳저곳이 가느다란 핀에 찔린 채 액자 안에 살포시 정렬되어 있었다. 크기도 제각기고 개중에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큰 나비도 박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 나비 위로 덮인 유리에 손을 댈 수도 있었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해야 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액자들을 건드리면 무섭게 화를 냈다. 활짝 핀 꽃은 곧 져버려. 예쁘지가 않지. 가장 예쁠 때는, 피어나기 전이야. 그래서 가장 아름다울 때 찍어둬야 하는 거야. 아버지는 풍경 사진을 잘 찍었다. 그래서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다리가 긴 카메라 삼각대는 여자보다 키가 컸다. 아버지는 카메라 앵글을 잘 맞추기 위해 뜸을 들였다. 여자는 그 시간이 너무 심심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따라 요구르트 배달을 빨리 끝낸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아직 아버지는 앵글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방문 앞에 허물처럼 떨어져있던 여자의 원피스를 어머니가 주웠다. 우뚝 멈춰선 어머니의 발 앞에는 징검다리처럼 여자의 팬티가, 그 앞에는 레이스가 달린 여자의 양말이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알몸으로 아버지 방에서 어머니에게 끌려나온 이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아버지는 희귀한 나비를 찾아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여자는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여자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한 통도 보여주지도 않았고,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오지로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여자가 알사탕처럼 작고 달콤해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게 아닐까. 여자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예상에 더 확신을 갖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는 족족 여자를 끌어내렸고, 아버지의 방을 구경하러 가면 자꾸만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여자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누랬으니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아버지의 알사탕이 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여자는 지금도 그렇게 확신한다."변태는 식욕도 왕성해.""맞아, 그 먹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니까. 속이 울렁거려. 이게 무슨 회식이야. 저 혼자의 만찬이나 다름없지."여자가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와 손을 씻자 세면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던 동료 둘은 여자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담배연기를 서로 후욱, 뱉어냈다."너 봤어? 그깟 놈도 마누라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어디 꼽추 같은 게 애처가 흉내 내려고 회식자리에 떡하니 꽃다발이랑 과일 바구니를 옆에 두고. 먹기는 또 돼지같이 처먹고…."길게 이어지는 담배 연기에 콜록거리며 여자는 화장실을 나왔다. 시끌벅적한 테이블의 빈자리에 쏙 들어가 앉았다. 바로 앞자리에 마주앉아있는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왔다. 여자는 그 까무잡잡한 이마를 손으로 쓸어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소매가 맘대로 둘둘 접힌 팔뚝으로 제 이마를 쓱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열중해서 살점이 달라붙어있는 돼지 뼈를 쪽쪽 빨아먹는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곤 다시 뼈를 발라 먹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젓가락을 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어젯밤 여자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그건 남자의 버릇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빨아대며 중얼거렸다. 달다, 너무 달아. 여자는 순간 손가락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마주 비벼댔다.남자는 사래가 들려 쿨럭이며 입을 막았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 앞으로 물 컵을 쓱 밀어주었다. 남자는 잔기침을 하며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벗겨진 이마 위로 잘 빗겨져있던 적은 양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흘러내렸다. 남자는 여자가 밀어준 물 컵을 놔두고 다른 컵에 물을 따랐다. 남자는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여자가 아는 척 하는 것을 싫어했다.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적도 없었고 여자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럴 때에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옆에 놓인 꽃다발이나 과일 바구니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며칠 전에 태어났다는 남자의 셋째 아이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예쁜 이름이지? 아주 조그맣고 예뻐. 남자는 잠들기 전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여자아이는 말이야, 남자애들이랑 또 달라. 미스 안은 아직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품에 안는 느낌부터 다르다니까. 뭔가 좀 더 말랑말랑하고 향긋한 느낌이라고. 여자는 앞 접시에 담긴 감자를 젓가락으로 조그맣게 부수었다. 우리 집 여편네는 원래 몸에 살집이 좀 있어서, 내 딸도 그렇게 클까봐 걱정이야. 내 딸이 미스 안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좀 더 여리하게 클 것 아니야. 응? 남자는 모로 몸을 구부린 여자의 자그마한 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지."포식한 남자가 일어나며 말했다. 남자의 무릎 부근에서 두둑, 하고 뼈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다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남자는 옆에 놓았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부스럭거리며 챙겨 들었다."과장님, 정말 애처가십니다."사람들은 그 말에 웃거나 동의하는 말을 두어 마디 던져주었다. 남자는 쑥스러움과 귀찮음이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것들을 쳐다보았다."온통 붉은 것뿐이네요?"누군가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붉은 색을 좋아해. 남자의 말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장난 섞인 야유를 던졌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들린 것들을 바라보았다. 밑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붉은 장미들과 바구니 위로 튀어나온 탐스러운 사과 몇 알. 싱싱해 보이는 딸기들과 붉디붉은 석류. 과일들이 신선해서 바구니 위로 포장된 비닐 안쪽에는 축축하게 물기가 있었다.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아내만이 아니었다. 예뻐. 오늘은 꼭 작고 통통한 체리 같네. 무얼 바른 거야? 남자는 식성이 좋아 여자의 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었다. 여자는 입술 신경이 잔뜩 시려왔다. 핏물이 여자와 남자의 입안으로 섞여 넘어갔다. 아니야.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게, 석류가 확실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킥킥 꼬마같이 웃었다. 홍시 셔벗 먹어본 적 있어? 살짝 얼린 홍시가 시원하고 참 달아. 남자는 여자의 다리 밑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홍시에 대해서 얘기했다. 언제나 남자는 관계를 가질 때면 자신의 미각이 기억하는 음식들에 대해 묘사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보면 여자는 남자의 혀 아래에서 홍시 셔벗이 되었다가, 어린 양 스테이크가 되기도 했다가, 본 적도 없는 음식의 특제 소스가 되었다."이것 좀 잠깐 들어줘."얼떨결에 남자의 뒤에 서있던 여자는 두 손 가득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들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구두 뒷부분을 끌어 잡고 발을 끼워 넣었다. 몽환적인 장미향이 여자의 코밑으로 진하게 스쳤다. 여자는 품 안에 가득 껴안은 장미 다발 속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이렇게 화려한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다.졸업식 날 교문 앞에서 파는 시들시들한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내민 사람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다. 여자가 어머니보다 더 키가 커진 것에 비해 아버지는 그리 많이 늙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여자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가 채집한 나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지로 여행을 갔다던 아버지는 정말 희귀한 나비를 잡아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여태 채집한 나비 중에 가장 큰 나비였다. 하늘거리는 하늘색 스커트를 입고 해바라기 모양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손가락이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같았다. 밀가루와 계란에 흠뻑 젖은 교복을 입고 있던 여자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새장가 가는 건 그렇다 쳐도 그 계집애, 몇 살이라니? 그 애 부모는 그걸 허락했다니? 어머니는 고개를 묵묵히 숙이고 있었다. 여자는 방문을 닫았다. 문 안으로 할머니의 울음 섞인 신세 한탄이 새어 들어왔다. 그때 여자의 가슴 속에서 따갑게 불꽃같은 것이 튀었다.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여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이후부터 부쩍 말랐다. 말 수도 줄었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어머니는 미련했다. 아버지의 곁에서 여자를 자꾸 끌어내지만 않았어도 여자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더라면 여자는 더 부드럽고 달콤해졌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여자와 함께 뒷자리에 탄 남자동료가 내리고 그 뒤로 한참이나 더 떨어진 동네에 와서야 여자는 뒷자리에서 조수석으로 와 앉을 수 있었다. 여자는 조수석에 놓여있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뒷좌석으로 옮겼다."한 동안은 퇴근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해. 미스 안은 그동안 밀린 야근이라도 하던지 해. 여편네가 딸애 낳은 값으로 큰 루비 알이 박힌 반지를 사달래. 정말 지겨운 여자야. 미스 안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고개를 저으려다가 여자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두툼한 손가락이 달린 남자의 손은 참 커다랗다. 남자는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내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집어넣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주름이 잔뜩 진 손가락들이 여자의 여린 뒷목을 가만히 주물렀다. 예쁘다… 미스 안은 소박해서 참 귀여워.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여자의 머리칼이 휘어 감겼다. 그 손에 감기고, 그 손이 쓰다듬는 머리칼은 방금 씻어낸 상추 다발처럼 파릇파릇하고 생생하다.여자는 현관에 구두를 벗어놓고 들어와 바로 바구니의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달큰하고 끈적거리는 향이 금세 퍼졌다. 온통 새치름하게 붉은 과일들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여자는 딸기 꼭지를 하나 따내고 입속에 집어넣었다. 과즙이 가득한 딸기는 이에 쉽게 짓물렀다.사람의 손에 닿지 않게 높은 가지에 매달린 열매일수록 달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나는 쉽게 따먹을 수 있는 게 좋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봉긋 솟은 여자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난 좀 시큼하고 떫은 맛도 좋아하거든. 여자는 진득한 과즙을 목뒤로 삼켜내고 곧바로 딱딱한 석류 알을 집어 들었다. 톡톡, 두드리자 노크 소리가 날 정도로 껍질이 두꺼웠다. 여자는 부엌에서 과도를 가져왔다. 터진 배꼽 같은 꼭지부분으로 칼끝을 겨눴다. 꾹 찔러 넣어 금이 가게 벌려놓고 양 손으로 잡아 뜯었다. 투드득, 원피스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자글자글한 알맹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반투명한 핏빛이었다. 어떤 루비 보석보다도 영롱한 빛깔이었다.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서 여자는 혀를 내어 알맹이들을 입속으로 거뒀다. 탱탱한 알들을 토독, 토독 씹을 때마다 여자는 눈가를 찡그렸다. 시큼한 맛이 그녀의 혀에 자르르 흘러들었다.시큼하고 떫은 과일은 새로워서 좋아. 남자는 여자의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여자는 귓속으로 울리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내곤 자그마한 루비들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여자는 좀 더 새로워지고 싶다. 신선하고 산뜻해지고 싶다.우리 엄마는 날 낳을 때 태몽으로 복숭아 꿈을 꿨대. 산 속에 복숭아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대. 근데 그 복숭아가 얼마나 뽀얗고 탐스러운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대. 웃기지. 남자애를 낳는데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그런 건 너 같은 여자애를 낳을 때 꿔야 하는 건데. 남학생은 그렇게 속삭이며 여자의 교복 치마 속으로 손을 뻗었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여자의 엉덩이를 쥐어본 남학생은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늦봄 무렵 여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너를 잊을 수가 없어.독서실 근처의 공원으로 밤늦게 남학생을 다시 만나러 갔을 때, 여자는 남학생이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는 떨어진 벚꽃 잎과 흙이 묻은 치마를 털어내 다리에 꿰었다. 나무에 기대어서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학생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끔 그립긴 한데, 넌 너무 빨리 질려.여자는 앙상하게 사과 뼈대만 남겨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바구니 속의 모든 과일을 해치웠다. 포만감은 곧장 편안한 수면으로 연결된다. 남자는 모텔 침대에서 여자의 맨 허리를 끌어안고 잠이 들 때면 두어 번 세게 흔들어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텅 빈 주스 통이 탕 탕 거실 바닥에 몇 번 튀며 굴러갔다. 여자는 팔 다리를 쭉 펴고 거실 가운데에 누웠다. 씻고 싶지도 않았고 스타킹을 벗고 싶지도 않았다.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나이가 있으니 별 수 없겠지만 여기저기 축축 쳐지고 그나마 쓸모 있는 구석이라곤 거기 하나 뿐이야. 그 여편네는 참… 애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미스 안으로 갈아치우는 건데. 여자는 묵묵히 남자의 양말을 벗겼다. 입가에 적포도주가 말라붙은 남자가 힘겹게 숨을 뱉어내자 여자는 넥타이도 풀어주었다. 빠르게 잠속으로 빠져드는 남자는 본능적으로 단 맛을 찾아 혀를 내밀어 입가를 닦아냈다.적 포도. 여자는 발딱 눈을 떴다. 빈 바구니와 부스러기처럼 널린 장미 꽃잎 사이에서 핸드백을 찾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동네 슈퍼로 조급하게 걸어와 여자는 지갑을 꺼내들었다. 주인아저씨는 여자가 들기 쉽게 포도를 세 상자씩 노끈으로 묶어 여자의 양 손에 쥐어주었다. 손이 무거워진 상태로 슈퍼에서 나오던 여자는 다시 뒤돌았다. 다른 과일들 사이에서 붉은 알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톡 터진 입 끝을 야릇하게 벌린 석류 한 알을 핸드백에 넣고서야 여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여자는 다시 차근차근 입속으로 열매들을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포도 껍질을 벗겨내고 포도 씨도 발라서 모아놓았다. 그러나 포도를 다섯 송이 째 상자에서 꺼냈을 때부터 송이를 손에 든 채로 한 알씩 똑 똑 따서 씹어 삼켰다. 껍질도 씨앗도 모두 달게 삼켰다. 목 뒤로 까슬까슬하게 넘어가는 씨앗을 느끼며 여자는 우스운 상상을 했다. 뱃속에 모인 씨앗들이 꿈틀거리며 움트는 상상이었다. 여자는 씨앗이 자라서 포도 알 같은 것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왕이면 포도 알보다는 석류 알갱이들처럼 더 작았으면 좋겠다. 더 조그맣고 더 많은 알맹이들이 무수히 많이 자랐으면 좋을 것이다. 세포처럼 작고 많은 그것들은 이로 씹을 때마다 토독, 탁, 타닥, 제각기 소리를 내며 터질 것이다. 어떤 것은 새큼하고 어떤 것은 순하디 순하게 달고 어떤 것은 놀랄 정도로 신 맛이 난다면. 어떤 혓바닥이라도 그 새로운 맛을 모두 핥아먹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손바닥이 온통 과즙으로 끈적끈적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금세 반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다.안 돼, 잃으면 안 돼.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동그란 공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나는 순진한 년이 좋아. 여자가 탄 버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여자는 차창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걔는 진짜 순진해. 아냐, 순진한 게 아니라 머리가 텅 텅 빈 것 같아. 뇌가 쪼그라든 대신에 젖가슴만 부풀었나봐. 오토바이에 등을 기댄 채 남자애들은 꼭 까마귀 떼같이 웃었다. 그 중 한명은 붉은 도트무늬로 포장된 상자를 세 상자 안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여자가 탄 버스는 그 속옷가게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빨래 건조대에 걸린 속옷들은 명확히 어머니와 여자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속옷은 늘 민무늬의 흰색이거나 칙칙한 살구 색이었다. 시장 거리에 널린 채로 파는 그것들은 전혀 창피하거나 비밀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여성이 봐도 여성스럽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것을 입을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정말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놔두고 여자에게만 연락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러 오렴. 아버지의 손은 여전히 컸고 자상했다. 여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버지는 여자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옛날에는 무릎에 앉힐 수 있을 정도로 귀여웠는데 어느새 이렇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찍어둬야 해. 그리 많이 늦지는 않았어. 여자는 비좁은 아버지의 사진관 구석에 스웨터를 벗어 놓았다. 싸늘한 공기에 맨살이 노출되자 팔뚝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사진관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액자 속에는 하나 같이 뽀얀 뺨을 가진 아기들의 돌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새뽀얗고 토실한 뺨들이 꼭 동글동글한 알사탕 같아서 여자는 그 액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 이걸로 머리를 틀어 올려서 고정시켜. 아름다운 부위를 가리면 안 되니까. 커다란 나비의 것이 분명할 흐린 물색의 머리끈으로 여자는 머리를 묶어 올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날개처럼 양 팔을 벌려봐. 여자의 아버지는 신중한 눈으로 여자의 몸을 훑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가까이의 팔뚝 안쪽 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연한 살은 쉽게 여자에게 촉감을 전했다. 아, 예쁘다. 그래, 아직 예쁜 부분이 남아있구나. 기특하다.아, 하는 만족스런 아버지의 감탄사는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여자는 감격으로 눈 안쪽이 뜨겁고 축축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여자와 달리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콧구멍에서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서 뜸을 들였다. 그녀를 좀 더 예쁘게 다듬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자의 몸을 찰흙처럼 부드럽게 반죽했다. 차가운 바닥에 여자의 엉덩이가 닿고 등뼈와 뒤통수가 닿았다. 찬 기운은 설레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살이 닿는 부분의 바닥은 오히려 곧 온기로 미지근해졌다. 다만 뒤통수만이 좀 시리다고 느껴질 때쯤, 잠가놓았던 촬영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팔에 닿는 여자의 반대편 손바닥은 끈적끈적한 것이 바짝 말라붙어 거칠한 느낌이었다. 팔을 움직이자 바닥에 말라붙은 포도 씨에 팔뚝 살이 쓸려 따가웠다. 여자는 포도 껍질에 미끄러졌다가 다시 바닥을 짚고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복부에 거북하고 답답한 느낌이 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과식했던 지난밤을 생각했다. 거실 벽시계 큰바늘은 이미 한 시를 지나있었다. 여자는 이미 출근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회사 어느 자리에 앉아있더라도 남자는 여자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창가의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화초 화분 같은 것이어서 대부분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여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홀쭉해서 허리띠가 남아돌던 그녀의 복부가 팽팽하다. 팽팽한 정도가 아니라 눈에 띄게 도드라져있다. 그러나 일단 참기 힘든 요의가 자꾸만 밑으로 쏠려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은 여자는 순간, 짜릿함과 함께 가볍게 몸을 떨었다. 녹녹하고 미지근한 지린내가 변기에서 올라온다. 그녀는 팬티에 달라붙은 생리대가 새하얀 것을 보곤 다리를 좀 더 벌려 다리 사이로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누는 오줌은 빛깔이 진했다. 그러나 변기 안에는 가라앉은 핏물이 조금도 없었다. 생리를 시작한 지 오늘이 이틀 되는 날이었다. 보통 그녀의 생리 주기는 일주일을 조금 넘는다. 이틀째는 핏물의 농도와 그 양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희한한 일이다. 여자는 고개를 더 숙여 변기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몸이 안 좋은 날이어도 하루만에 생리가 끝나지는 않았다. 여자의 생리 혈은 유난히 핏빛이 진하고 철분 냄새가 비릿하고 지독했다. 그녀가 자전거 보조 바퀴를 빼고 처음으로 신나게 집 앞 거리를 달렸던 날, 안장에서 내리던 순간의 그 냄새를 여자는 잊을 수가 없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분홍색의 안장에는 붉은 핏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이제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얌전하게 걸어야 해. 어머니는 물에 락스를 풀어 여자의 치마를 담그며 말했다. 여자는 그 독한 소독내에 코를 틀어막으며 화장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대야에 물이 점점 묘한 색으로 오염되는 것을 구경하며 여자는 어째서? 하고 생각했다. 남자애와 너무 가까이에 앉거나 몸싸움을 하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안 돼. 어째서? 여자는 날이 갈수록 목소리가 거칠게 변하는 남자애들이 좋았다. 어머니는 얼룩덜룩한 여자의 치마를 건져내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잃는 건 쉬워. 너무 쉬워. 대야에서 쏟아진 불그죽죽한 구정물이 하수구로 끌려들어갔다.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뭔가 시원한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이미 불룩한 배는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아도 충분해보였지만 여자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시원한 냉기가 피어나왔다. 여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싱그러운 포도 향이 살랑살랑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는 간밤에 사온 포도들을 야채 칸에 넘치도록 넣어놓은 것을 기억해냈다. 기쁜 마음으로 야채 칸을 열었다.촬영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비의 손에는 보온 도시락 통이 들려있었다. 흰색 털실로 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아버지가 흰 원피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비도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아버지는 나비를 허벅지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진 않을까. 여자의 자리였던 그 허벅지 위에.그 짧은 순간 여자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비를 올려다보았다. 나비의 손에서 그 묵직한 도시락 통이 턱, 무겁게 떨어졌다. 그제야 여자의 아버지는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며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뺨에서 목을 타고 주륵, 빠르게 진물 같은 게 흘렀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눈동자는 축축함으로 번들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잔뜩 일그러진 아버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딸애가 변했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로워서 여자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 귀엽던 딸애가… 창녀처럼 달려들었어.냉장고 경고음은 지친 듯 끊어졌다. 불 꺼진 냉장고 앞에 앉아서 여자는 훅, 숨을 내쉬었다. 아예 부엌 바닥으로 들어낸 야채 칸 안에는 이제 포도 가시만이 잔뜩 남아있다. 야채 칸 구석에 떨어져 박힌 포도 한 알을 떼어내 입속에 넣는 것을 끝으로 이제 포도 알은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동그란 언덕 같은 배 위에 왼팔을 걸쳤다. 몰라보게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여자는 두 손바닥을 청진기처럼 배 위에 올렸다. 여자의 심장박동과는 또 다른 소리였다. 다른 것이 살아있는 소리였다.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 일정한 울림은 여자가 여태 들어본 어느 소리보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여자는 조심스레 배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녀는 뱃속에 가득 들어찬 그 무언가가 아주 싱싱하다는 걸 느꼈다. 여자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남자는 아, 하고 그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여자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울컥 넘어오는 감격을 삼켜내며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내 뱃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꿈틀거려요!"남자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여자는 그 시간을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뱃속에 무언가가 둥지를 틀었다면 그것이 남자 자신의 씨앗일 것을 알았다. 남자는 갓난아이까지 합해서 애가 셋이다. 남자는 찡얼거리는 애 울음소리에 밤을 지새웠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빼곡하다."병원에 가. 떼어버려. 돈을 줄 테니까."미스 안, 남자는 그녀를 부르고는 훅 콧김을 불었다. 여자의 귀에 닿은 수화기에서 콧김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부서졌다."혹시, 뭔가를 바란다거나.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도 마."알아들어? 왜 대답을 안 해?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 뱃속에 있는 무언가는 매우 싱싱하다. 새롭다. 남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이다. 남자는 지금 이 싱그러운 느낌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여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입술을 벙긋거리고만 있었다. 남자는 작게 욕지기를 뱉어냈다."…좋아, 지금은 바쁘니까 액수는 나중에 협상해. 너도 똑같아. 요물 같은 년."여자는 끊긴 전화기를 들고 뚜 뚜 뚜 이어지는 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남자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는 숨 쉬기가 버거워 블라우스를 벗었다. 브래지어 버클도 끌렀다. 골반 밑을 꽉 조이는 치마도 벗고 뜯어지기 일보직전인 팬티스타킹도 뜯어냈다. 고무줄이 극한까지 늘어난 팬티를 마지막으로 벗고 나니 여자는 홀가분해졌다. 부풀어 오른 배와 가슴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부풀면 몸매가 둥그렇고 부드럽게 이어질 것이다. 분명 뱃속에는 싱그러운 알맹이들이 옥시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역시 껍질과 함께 씨앗까지 모두 먹기를 잘했다. 그 자잘한 알갱이들은 모두 제각기 탱글탱글 잘 여물 것이다. 더 부풀려서― 여자는 뭔가 더 채울 게 없을까 냉장고를 올려다보았다.냉장고 중앙 칸에 석류 한 알이 오롯이 담겨있다. 여자는 냅다 팔을 뻗어 석류를 쥐었다. 불그스름한 빛깔이 처녀의 뺨처럼 새치름하니 비밀스럽다. 여자는 속삭이듯 벌어진 석류의 입가에 양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렸다. 뚝, 겨우 금이 갔다. 과도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거기까지 기어가기에 여자의 몸은 이제 너무 무거웠다. 여자는 더 악력을 주었다. 그러던 중 배꼽 부근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져 배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심하게 튼 자신의 배꼽은 한겨울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마치 곧 피어날 꽃봉오리처럼, 심하게 불거져 나온 참외배꼽을 구경했다. 여자는 그녀의 가느다란 검지로 슬쩍 배꼽 위를 어루만졌다. 근질근질한 기운을 참기 힘들어졌다. 결국 여자는 살살 배꼽 위를 긁다가 어느 순간 강하게 손톱에 힘을 주었다. 투득! 살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반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뱃속에 가득 차있던 것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큼하고 달달한 향이 그녀를 에워쌌다. 안 돼,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동그란 공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허벅지로 배를 꾹 막은 상태로 다리를 꾹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은 거친 손바닥들이 전해주던 뜨거운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목을 잡아 올리고 허벅지 살을 밀어젖히던 강한 아귀힘은 금세 그녀를 지치게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스스로를 감싸 안은 팔은 매우 여리고 온기마저 미지근했다. 앙상한 종아리를 휘감은 그녀의 팔이 얇디얇은 끈처럼 그녀를 상냥하게 휘감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내 안에 포근히 담겨본 적이 있던가. 어느 순간 그녀는, 온 몸에서 울리는 스스로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마음 속 소란이 잠잠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박동은 느린 클래식처럼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고 그녀의 머리통과 팔뚝과 발은 천천히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녀는 혈관을 흐르는 핏물 색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그녀가 진정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처음에 남자는 그녀가 싱그러운 사과 같아서 그녀를 꾀었다. 조금씩 상해서 지금처럼 짓무르기 전에 빨리 여자를 버렸어야 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싱싱함이 생명이다.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 주차를 하곤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너무 많은 돈을 원하면 싸대기를 몇 대 갈겨서라도 수술실로 끌고 갈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알고 있는 여자는 꽤 순한 편이어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 조금만 겁을 줘도 될 것이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남자는 괘씸해져 현관문을 몇 번 발로 뻥 뻥 찼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는데 너무도 쉽게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는 참 헤프다. 혼자 사는 주제에 문도 잠그질 않았다.현관문을 열자마자 과일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남자는 코를 틀어막고 안으로 들어섰다. 꼭 남자의 아내가 생리를 할 때 화장실에 뿌리던 향수 냄새 같았다. 비릿하고 어딘가 달큰한 냄새는 남자를 숨 막히게 했다. 거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포도 씨와 껍질, 먹다 남은 사과, 장미 꽃잎과 같은 쓰레기가 널려있다. 남자의 눈에 익숙한 과일 바구니가 비어있다. 저걸 혼자 다 먹은 건가? 돼지 같은 년.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문이 열려있다."…혹시 거기 있어?" 남자는 냉장고 문 쪽으로 다가간다. 냉장고 칸이 밖으로 나와 있고 포도를 먹고 남은 찌꺼기들이 널려있다. 더러운 광경에 남자는 눈가를 찌푸렸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발걸음을 돌리려던 남자는 다시 냉장고 쪽으로 가까이 갔다. 더러운 과일 찌꺼기들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이게 뭐지? 보석인가?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눈이 닿은 곳에는, 새하얀 박하사탕 한 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2013-01-02 경인일보

2012 경인신춘문예 시상식

2012-01-12 경인일보

[2012 경인신춘문예]총평

2012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그야말로 신예들의 돌풍이라 하겠다.통상 삶의 쓴맛 단맛을 다 알고, 연륜을 쌓은 중장년층의 당선이 주를 이룬 과거와 달리, 올해는 10대·20대 젊은 피들이 '2012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이름을 올리며 화려하게 등단했다.시부문은 고교 3학년생으로 예비대학생인 인천 강화군의 이승혁(19) 학생이 '우물이 있던 자리'로 당선됐으며, 소설은 오희진(25)씨가 '첫입'으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당선작으로 뽑혔다.이승혁 학생은 올해 강화고교 졸업예정으로 이미 학교에선 그 재능을 인정받은 상태다. 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수상 등 각종 대회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으며,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또한번 대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신춘문예에 공모할 당시 입시에 지쳐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있어 지난 한 해가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한다.소설부문 당선자 오희진씨는 전북 무주 출생으로 원광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그에게 글쓰기란 생활이자 삶의 기쁨이다. 사실 여느 청년들과 다름없이 그도 청년실업이나 장래에 대한 고민도 많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당선이 발표되기 얼마 전 취직에도 성공해 그는 이번 당선의 기쁨이 두 배가 됐다고 한다. 그는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내놓던 따뜻한 밥 한 끼의 느낌처럼 그러한 온도를 가진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한편 201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시 부문에 190명 779편, 소설부문에 124명 128편 등 총 907편의 작품이 접수돼 이 중 예선을 거쳐 시 36편, 소설 24편이 본심에 올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선자에게는 소설은 상패 및 원고료 500만원, 시는 상패 및 원고료 300만원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1월 중순 경인일보 본사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윤희기자

2012-01-01 이윤희

[2012 경인신춘문예]시 당선작

■ 시 당선작 : 우물이 있던 자리 (이승혁)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어린 나의 입 속으로 곶감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더는 담겨지지 않아요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저물녘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있었다(*강화읍의 마을주소)※ 시부문 당선소감/ 이승혁"고3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 이젠 진짜 내 이야기 시작할 때"지난 가을 내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제가 우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저녁 습작의 분량으로 쓰여지게 된 시, 그게 당선작이라니.우물, 아직은 내 기쁨의 표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되비춰지지 않는다. 미정인 채로 남아있는 대학 진로와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 겨울을 비집고 내가 어머니의 분노에 다급해질 때마다 숨어들던 어린 시절의 식탁 밑이 떠오른 건 또 왜일까. 지금은 어떠한 수사도 어떠한 문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내 본래의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먼 소년기때 조립하다가 중단된 서랍속의 장난감들과 저녁이면 하늘의 별 대신 아버지의 퇴근길 호프집 풍경에 고정시켰던 내 망원경, 형을 데리고 나서던 초등학교 뒷길, 문구사 아저씨의 색소폰 연주, 모두 내 시의 전리품이었음을 이제서야 실토한다.내 기쁨의 이면들을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옮겨본다. 입시에 눈이 빨개진 강화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길이든 걸었던 방황의 맨 마지막 코스였던 반지하에서 노래로 허기를 때우던 일행들, 입시의 기로에서 낭패에 빠질 때마다 투신 제의를 해오던 도시의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너희들이 있어 지난 한 해의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 이튿날이면 교과서 대신 또다른 종류의 천재를 부여해주시던 김영언 선생님, 묵묵히 걸음마 떼기를 기다려 준 가족들, 반항의 시간들을 지켜봐 주신 담임 선생님, 내 1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멘토가 되어주신 김종연 선생님께 감사를 올립니다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민용태 교수님, 김영철 교수님, 먼 길 가는 수사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약력1993년 인천 강화 출생.강화고등학교 졸업 예정.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 시부문 심사평/ 민용태·김영철"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 데 묶어… 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012-01-01 경인일보

[2012 경인신춘문예]소설 당선작

■ 소설 당선작 : 첫입 (오희진)구는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뚜껑이었다. 짝이 맞는 솥을 찾느라 주변을 살폈다. 다섯 개의 철제 조리대가 디귿 자 형태로 배치된 공간이었다. 솥을 크기별로 분류해 놓은 조리대가 있었다. 구는 근방에 뚜껑을 두었다. 솥에 비해 나머지 도구는 정돈 상태가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교집합은 쉽게 눈에 띄었다. 조리대마다 빠지지 않는 밀방망이였다. 나무로 된 표면은 길이 들어 매끄러웠다. 밀방망이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도구가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구는 일련의 흔적이 낯설었다. 시간은 가만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가진 것을 번번이 망가뜨렸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시간이 무해하게 느껴졌다. 훤하게 열린 창밖으로 천변이 내려다 보였다. 운동복을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책로를 뛰어갔다. 입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흩날리는 밀가루 같았다. 구는 창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문가에서 기척이 났다."그대로 두세요."정이었다. 구는 인사를 잠시 잊었다. 정은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덩치가 큰 구에 비하면 난쟁이 같았다. 구는 내심 놀랐다. 마흔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더 들어 보였다. 백발 때문이었다. 이마를 드러내고 귀 뒤로 넘겨 빗은 머리카락은 희었다. 삼십 대를 막 지나왔다고 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정이 조리대 밑에서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꺼내주었다."저녁 먹었나요?""아니요.""먹고 가세요. 칼국수를 만들 거예요.""저, 실은 안 돼요."구는 식이장애 치료 센터에 드나들고 있었다. 어떤 강박증 환자에게 보도의 붉은 블록만 디뎌 걷는 것이 세계를 유지하는 기준이듯, 구에게는 국수를 먹지 않는 일이 그랬다. 이마저도 자각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이곳에 다다른 기분이 들었다. 국수는 그 모양이 길을 닮았다. 차이라면 언제고 끊어지기 마련이라는 것. 구는 국수라면 먹는 족족 토해냈다. '한 그릇 교실'은 국수를 만들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국수 연구소라고도 불렸다. 구는 이곳의 소장인 정을 소개 받았다. 비슷한 강박을 앓은 적이 있다고 했다."저는 나아질까요?""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선생님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먼저 말해주겠어요?"구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솥을 집었다. 양은으로 된 것이었다. 정은 솥에 다시마와 멸치를 한 줌 넣고 물을 받았다. 구는 가스레인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곧이어 불이 들어왔다. 그것은 신호 같았다.먹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고, 구는 말했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최후의 식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기다란 탁자가 카메라 앞으로 들어왔다. 햄버거를 가득 쌓은 접시가 머릿수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이라기보다 장식 같았다. 햄버거는 대회용으로 야채와 소스 같은 부재료를 뺀 것이었다. 고동색의 패티와 연갈색의 빵이 피라미드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일 분. 열 개 이상을 먹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반수의 참가자가 탈락했다. 참가자들이 나란히 섰다. 신호음이 울렸다. 구는 패티와 빵을 분리했다. 패티를 씹어 넘기며 빵에 물을 적셨다. 젖은 빵은 그대로 삼키면 되었다. 시계 초침보다 구의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 분이 다 지났다. 구는 열두 개를 먹었다. 참가자 뒤에 달린 전광판에 세 사람의 이름이 떴다. 방청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구는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익명의 가족을 상상했다. 사회자가 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구는 예선전을 무난하게 통과했다.'최후의 식신'은 먹기 대회였다. 모 대기업에서 자사 홍보의 일환으로, 외식상품권과 소정의 상금을 부상으로 걸고 시작한 행사였다. 매스컴을 탄 것은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최후의 식신'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획하면서부터였다. 주말 시간대에 편성되고 여러 식품업계의 광고가 따라붙으면서 우승 특전이 달라졌다. 상금이 수천만 원대로 뛴 것이다. 자연히 참가자가 늘었다. 구는 수백 명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다. '최후의 식신'에 나오기 전부터 식당 개업 행사나 지역 특산물 축제의 먹기 대회는 물론이고 홈쇼핑 식품 광고 보조출연부터 식품회사 신제품 시식 아르바이트까지, 먹는 일이라면 다 했다. 구는 맛이나 질을 따지지 않았다. 친지들의 집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먹는 것은 구에게 적응의 첫 관문이었다. 하지만 한 밥상에 둘러앉는다고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살이 붙을 뿐이었다. 구는 차츰 덩치가 커졌다.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 구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경우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영역에 있거나 어떤 면에서 그 영역보다 뛰어나거나. 각종 먹기 대회에 나간 것은 그때부터였다.푸드 파이터로서 구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먹기 대회도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스포츠였다. 구는 세 끼를 꾸준히 챙겨 먹었다. 대부분 포만감이 쉽게 오는 식이섬유 음식이었다. 공복 때에는 수시로 물을 마셨다. 이것은 위가 보관할 것이 많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단시간 내에 먹은 양으로 판가름을 내기 때문에 위의 크기를 늘리는 것은 중요했다. 먹는 방법 또한 승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다. 입만 바쁘게 움직인다고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속도만큼이나 음식의 성질 또한 중요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구는 음식을 바꿔가며 연습했다. 햄버거 빵에 물을 적시는 것도 이 때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음식에 구는 면역이 생겼다. 몇 차례의 우승은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음식이 있는 곳은 구에게 일터였다.구는 제작진이 지정해준 대기실에 들어갔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났다. 우욱. 이십여 명을 웃도는 참가자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늘씬한 여자가 검은 비닐봉지에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구와 같은 조로 예선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가까이에 있던 참가자들이 여자를 부축해 나갔다. 그대로 두었다면 다들 연달아 햄버거를 게워냈을 지도 몰랐다. 구는 축 늘어진 여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몸을 담보로 하는 만큼 몸을 망치는 일도 흔했다. 이윽고 제작진이 들어왔다. 앞으로의 시합 일정을 안내했는데, 합숙에 관한 것이었다. 토너먼트 때부터 합숙소 생활을 방송에 내보낸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사생활이 공개되는 부분에 대해 협조를 구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후의 식신'에 참가를 결정하며 동의한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일주일 후를 기약하며 돌아갔다. 대기실 안팎이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응원군으로 찾아온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구는 그들 사이를 총총 빠져나갔다.구의 짐은 옷가지 두어 벌이 다였다. 구는 외투를 걸치고 거울을 보았다. 타원형의 몸이 거울에 가득 찼다. 자신이 가진 전부가 몸에 담겨 있는 듯 했다. 그런 면에서 구의 엄마는 가진 것이 없었다. 구는 병석에 있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사람 같았다. 구는 이불을 들추어 그 마른 몸을 들여다보곤 했다. 마지막에 엄마는 얇은 흰색 천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구는 차마 천을 열어 보지 못했다. 몸에 용량이 있다면, 그것을 다 써버렸다는 뜻임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지금의 얼굴을 마주했다. 스스로가 커다란 서랍 같았다. 서랍에는 여태 먹은 음식이 남김없이 들어 있었다. 그 맛은 식탁에 홀로 남겨진 날을 연상케 했다. 구에게 맛이란 숫자였다. 햄버거의 맛은 일 분에 열두 개였다. 대회 기록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맛은 숫자가 됐다. 사과는 당도만을 본다면 십 점 만점에 6이었다. 질감이라든가 딱딱한 정도를 따진다면 7은 되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맛은 단 한 가지였다. 서랍의 맨 아래층에 든 국수가 그랬다. 구는 거울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한 준비였다.참가자 합숙과 함께 토너먼트가 시작됐다. 중계석이 마련된 촬영장은 예선전 때보다 규모가 컸다. 참가자는 열네 개 조를 이루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시합을 펼치고 일곱 명을 걸러내는 것이 이번 방송의 과제였다. 일주일 후에는 일곱 명 중 두 명, 그 다음 주에 또 두 명이 떨어지면 세 명만이 남는다. 결승 시합에서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것으로 '최후의 식신'은 막을 내릴 터였다. 구는 촬영장 뒤에서 세 번째 순서를 기다렸다. 상대는 구와 체격이 비슷한 중년의 남자였다. 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남자와 구는 높게 솟은 단상에 섰다. 밥그릇 모양의 탁자에는 각각 덮개를 덮은 접시가 있었다. 음식은 매번 달라졌다. 사회자가 단상을 가리킴과 동시에 조명이 번쩍거렸다. 구는 덮개를 들었다. 접시에는 한 개의 초밥이 놓여 있었다. 단상의 양쪽에서 이동식 조리대가 들어왔고, 요리사와 도우미가 등장했다. 조리대에는 완성된 초밥 백 접시와 여분의 재료가 벌여져 있었다. 제한시간은 오 분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구는 초밥을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생선살이 물컹하게 씹혔다. 남자는 초반부터 양손을 써가며 열을 올렸다. 반면에 구는 천천히 밥알을 씹었다. 요리사가 초밥을 완성하면 도우미가 빈 접시를 채웠다. 만들어 온 초밥은 금세 동이 났다. 구는 삼 분을 넘어서면서부터 속도를 붙였다. 사회자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시합은 끝났다. 구는 입가를 닦으며 전광판을 올려 보았다. 91. 남자의 기록이 먼저 떴다. 98. 방청석이 술렁였다. 구의 승리였다.숙소까지 따라온 카메라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꺼졌다. 일전에 구토를 했던 여자가 뒤풀이를 제안했다. 여자의 방에 일곱 명이 모였다. 토너먼트를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참가자였다. 자리를 잡는 동안 여자가 주전부리를 내왔다. 구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고생도 있었고, 환갑을 지났다는 정정한 노인도 보였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도 여자는 눈길을 끄는 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는 반듯했다."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여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낯이었지만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기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구는 재방송으로 본 여자의 인터뷰를 기억했다. 여자는 외모와 더불어 화제가 된 사연이 있었다. 배우를 지망하던 이력이었다. 푸드 파이터로 전향한 것은 안면근육마비장애가 오면서부터라고 했다. 인터뷰 끝에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입가의 흔들림이 클로즈업 됐다. 여자가 도전 과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피하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요?""딱히 없어요. 뭐가 나오든 다 비슷하니까요."구의 말에 사람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역시 강력한 우승후보답네요.""맞아요. 정말 잘 드시던 걸요.""저 말인가요?"구가 되물었다."못 따라잡겠던데요."여자의 말에 모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구는 잠시 먹먹해졌다."잘 먹어야 해."라면을 달라고 보채는 구를 타이르는 것은 엄마의 일과였다. 구는 편식이 심했다. 유일하게 가리지 않는 음식은 국수였다. 구의 엄마는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냈다.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다른 냄비에는 소면을 익혔다. 하얀 거품이 확 끓어오르면 찬물을 조금 부었다. 소면은 냄비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구는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앉은뱅이 상에는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명은 잘게 썬 김치와 깨소금뿐이었다.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그 앞에서 구는 라면을 잊었다. 김치의 작은 탑을 부수면 국물이 붉어졌다. 어설픈 젓가락질로 면발을 감아올리다 보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면발은 보드랍고 매콤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묵은 김치의 맛이 스미어 있었다. 그릇이 반쯤 비워지면 엄마가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마주 닿았다. 그때마다 구는 온몸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국수를 담은 그릇이 된 것 같았다. 메밀을 넣어 반죽하면 메밀국수, 녹차로 색을 내면 녹차국수, 멸치로 국물을 우리면 멸치국수, 들깨를 갈아 넣으면 들깨국수, 고기 고명을 얹으면 고기국수, 고추장을 뒤섞으면 비빔국수… 한 가지를 먹어 봤을 뿐이지만 모든 맛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국수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혼자가 된 구는 편식을 고쳤으나 국수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서랍의 맨 아래층, 겹겹이 불어난 살의 더미에 짓눌려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일곱 명과의 시합에서 구는 가까스로 다섯 명 안에 들었다. 도전 과제는 만두였다. 십 분 동안 젓가락으로만 집어서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갓 쪄내 뜨거운 온도가 시합의 변수였다. 구는 초반부터 혀를 데었다. 피는 얇은 만두라서 젓가락으로 집기도 까다로웠다. 그 와중에 여고생이 기권을 외쳤다. 또 다른 참가자가 한 개 차이로 밀려나고, 뒤처져 있던 구는 부전승으로 올라갔다. 결승전 진출자를 가리는 시합에는 닭튀김이 등장했다. 닭다리만을 튀겨낸 것이었다. 여자와 구는 막상막하였다. 노인까지 세 사람이 결승전 진출자로 확정되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의 승부를 예고하는 것으로 생방송은 끝이 났다. 조명이 관객석부터 차례로 꺼졌다. 불빛은 낮은 조도로 무대만을 비추었다. 촬영장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제작진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구는 손을 문지르며 옆을 보았다. 여자는 마른 수건을 얼굴로 가져갔다.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모습이 가느다란 선 같았다. 선은 조금씩 앞으로 구부러졌다. 구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세 사람만 남은 합숙소는 적적했다. 끼니를 거르겠다며 노인이 방으로 돌아간 후, 여자와 구는 합숙소를 나섰다. 죽을 먹기로 하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알은 체를 했다. 구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두 사람은 일부러 구석진 데를 골라 앉았다. 구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우는 걸 봤어요.""들켰네요."구는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저는요, 하고 운을 떼더니 여자는 극단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대사가 열 줄도 채 안 되는 배역을 주로 얻었다. 순간이나마 조명 아래에서 말문이 열렸을 때의 느낌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이렇게 살아도 만족해요. 그런데요."여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무대를 잊지는 못할 거예요."주문한 죽이 나왔다. 구는 묵묵히 숟가락을 떴다. 빈속에 뜨거운 죽이 치덕치덕 내려앉았다. 여자가 첫 무대를 기억하듯, 구의 서랍에는 국수가 있었다. 숫자가 될 수 없는 맛이었다. 다만 구는 그 기억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것이 여자와의 차이였다. 견고한 숫자의 벽이 무너진 것은 결승전 당일이었다.번화가의 광장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회자가 세 사람을 불러냈다. 구는 무대로 뛰어올랐다.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울렸다. 구의 위치는 가운데였다. 양옆으로 여자와 노인이 섰다. 그들 뒤로는 '최후의 식신'의 로고를 입힌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 사람을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가 비장하게 말했다."최후의 식신을 가려낼 마지막 음식입니다!"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장막이 걷혔다. 널따란 주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명의 요리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왼편에서는 양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여 뽑아냈고 오른편에서는 끓는 물에 익힌 면발을 빠르게 건져냈다. 하나같이 능숙한 솜씨였다. 주방 가운데의 탁자에는 국수를 한 사리씩 담은 그릇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세 사람에게는 십오 분이 주어졌다. 신호탄이 터졌다. 육수와 고명은 따로 없었다. 오로지 면발만을 먹어야 했다. 도우미가 날쌘 손놀림으로 세 사람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구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자와 노인은 이미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연출이 무대 밖에서 다급하게 팔을 흔들었다. 구는 허둥지둥 젓가락을 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구는 면발을 빨아들였다. 속도는 곧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구의 탁자에는 빈 그릇이 늘어갔다. 시합 종료까지 일 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구는 목이 막혀왔다. 다급히 물을 들이켰다. 덜커덕. 일순간 구의 입이 벌어졌다."물이 끓어요.""아, 내가 한 번 볼게요."정은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 뚜껑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구의 코를 자극했다. 멸치 국물이었다. 정은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불을 껐다. 솥에는 연둣빛의 말간 국물만 남았다. 정은 바가지를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바가지에 이어 칼, 도마, 밀방망이가 차례로 올라왔다. 끝으로 꺼낸 것은 밀가루였다. 정은 밀가루를 바가지에 붓고 소금을 약간 쳤다. 이따금 물을 약간씩 부어 가며 손을 움직였다. 춤을 추듯, 정의 몸이 흔들렸다. 파슬파슬하게 흩어진 덩이가 차츰 모아졌다. 반죽은 둥그렇게 덩어리졌다. 정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져 앞을 가렸다. 구는 정의 옆으로 다가갔다."불편하실 것 같은데요.""묶어줄래요?"정은 고무줄이 감겨 있는 손목을 내밀었다. 구는 고무줄을 빼 밀가루를 털어냈다. 정이 머리를 살짝 뒤로 뺐다. 구는 정의 백발을 가볍게 쥐었다. 머리카락은 얇은 데다 숱이 적었다. 국수 면발로 치면 한 줌에 불과했다. 가르마를 가로질러 목덜미까지, 구는 손빗으로 낮게 묶었다. 한 갈래의 머리카락은 등까지 길게 늘어졌다. 구는 정이 지나온 세월을 가늠했다. 밀가루 반죽을 늘이듯 길게, 혹은 짧게도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은 반죽의 반을 떼어 구 앞으로 밀어 놓았다. 구는 손을 씻고 조리대로 왔다. 반죽에 손바닥을 대자 밀가루의 탄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을 만지는 듯했다. 구는 반죽을 둥글리고 치댔다. 정은 다 된 반죽을 비닐로 감쌌다."이제 냉장고에 넣어둘 거예요.""얼마나요?""보통 하루는 숙성하는데, 오늘은 한 시간만 둘게요.""그래도 오래 걸리네요.""이야기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죠.""같이 먹어요."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강생 중 한 명이 손짓을 했다. 대여섯 명이 모여 앉은 조리대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정은 괜찮다고 말했다. 일 년 전부터 먹는 일 자체가 수월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거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강생들은 음식을 조금씩 덜어 맛보았다.휴대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정은 요리 학원에서 경리 업무를 봤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모두 가르치는 곳이라 야간반까지 운영했다. 뒷정리를 하다 보면 퇴근은 매번 늦어졌다. 혼자 사는 집은 버스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천변을 끼고 도는 노선이었다. 정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천변이 보이지 않는 길로 다니기 위해서였다. 걸어가자면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지나가야 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은 인파가 북적이는 길을 택했다. 도시의 소음에는 잔상을 묻어두기 쉬웠다. 하지만 한 시간 전의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강생의 목소리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같이 먹을래?"마가린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은 둑길에서 저수지를 굽어보았다. 물가에 우거진 수풀은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스산했다. 저수지는 운동장만해서 호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때는 삼월이었다. 훨씬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쌀쌀한 날씨는 계속되었다. 하교한 뒤, 정은 둑길에서 한숨을 돌리곤 했다. 보육원으로 돌아가면 쉴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만 돼도 큰언니 구실을 해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함께 놀아 달라고,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칭얼댔다. 누군가가 돌본다고 채워지는 부재가 아니었다. 혼자인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아야 했다. 마가린의 등장은 그래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인사도 않는 동급생이었다. 정은 벌떡 일어났다. 둑길에 앉은 마가린은 가방에서 삼단찬합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은 먹다 남은 음식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소시지 반찬과 과일, 주먹밥이 담겨져 있었다. 마가린은 자신이 숟가락을 들고 정에게 젓가락을 주었다. 얼결에 정은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식사에 동참했다. 주먹밥은 잗다랗게 가루를 낸 김에 궁굴린 것이었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맛이 진하게 퍼졌다. 주먹밥의 단면은 누르스름했다. 간장으로 밑간을 한 것 같았다. 마가린은 정에게 물병을 건넸다."나 너 가끔 봤다. 여기 있는 거.""그래?""좋은 곳이야. 그치?""비 오는 날이 더 괜찮아.""그런 날은 대어를 낚을 수 있대.""처음 듣는 말인데.""아버지가 그랬어. 밤낚시를 다니셨거든.""너도 간 적 있어?""가끔. 이걸 얻어먹었지.""맛이 좀 특이하네.""아, 마가린 때문일 걸."도시락을 들고 나타난 동갑내기 소년의 호칭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둑길에서 만나곤 했다. 대개는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마가린은 도시락을 자주 남겨 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은 주먹밥일 때가 많았다. 주먹밥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정은 해거름의 식사가 기다려졌다. 계절이 바뀌면서 둑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녹음이 짙어지면서 삭막한 기운은 한층 물러갔다. 저수지에도 여름이 왔다. 장맛비가 연일 지겹도록 퍼부었다. 저수지의 물은 넘칠 듯 불어났다. 마가린은 밤낚시를 하자며 정을 졸랐다. 오랜만에 하늘이 갠 날이었다."내가 다 준비할게.""고기가 있긴 할까?""물이 있잖아.""물만 있는 것 같은데.""저수지를 그릇이라고 생각해 봐.""그릇?""밥상에 올라온 물그릇이다, 이렇게.""그 다음에는?""내 밥이 저절로 보인다는 거지.""그게 뭐냐, 싱겁게.""원래 낚시는 기다리는 맛이야."그날 밤, 찌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가린은 낚싯대를 드리운 채 꾸벅꾸벅 졸았다. 정은 그 옆에서 저수지를 내다보았다. 수면에는 둑길의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떠 있었다. 어두운 사위를 밝히기엔 충분한 빛이었다. 날벌레가 들끓었지만 그마저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정은 잠든 마가린을 바라보았다. 밤낚시를, 주먹밥의 비밀을, 허기가 나누어지는 공식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마가린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마가린의 말대로라면 저절로 보이게 되는 법이니까. 정은 자신의 그릇에도 물을 채우고 싶었다. 마가린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하게 스쳤다. 수면이 느리게 일렁였다. 딱 그만큼, 정은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기점이었다. 정의 그릇에는 어느덧 마가린이 들어와 있었다. 낚지 못한 물고기 대신 건져 올린 것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영근 마음이었다. 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저수지의 날씨는 첫 만남 당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해거름의 식사는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돌기 직전까지는.이른 아침부터 정은 학원 문을 열고 식재료를 주문했다. 학원에는 경리가 거들어야 할 업무가 꽤 있었다. 월요일 야간반처럼 수강생이 몰리는 수업에는 보조강사로 들어갔다. 사적인 심부름을 하는 날도 있었다. 학원장은 오전반에서 야간반까지 이어지는 수업 때문에 늘 바빴다. 정은 학원장을 대신해 경조사 부조를 전달한 일이 몇 차례 되었다. 정은 오전에 학원 업무를 서둘러 끝맺어야 했다. 지인의 국수전문점 개업식에 다녀오라는 학원장의 부탁이 있었다. 버스로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지방이었다. 정은 점심식사를 거르고 터미널로 향했다. 대합실은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은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은 일 년 전을 상기시켰다. 정은 억지로 눈을 붙여 보았다. 창가 좌석이라 괜스레 한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희끄무레한 빛이 감돌았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가을은 짧았다. 십일월 중순,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정은 교무실에 불려갔다. 담임교사가 한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다. 정은 그들 앞에 앉았다. 담임교사는 멋쩍게 운을 뗐다. 몇 가지를 물어 볼 테니 솔직하게 답하라는 말이었다. 질문자는 아주머니였다. 처음에는 학교생활과 방과 후 일과에 대해 물었다. 그때까지도 정은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마가린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에야 정은 알아차렸다. 마가린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본격적인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요즘 붙어 다니는 여자아이가 너인 것을 안다. 읍내에서 소문이 별로 좋지 않다. 야밤에도 단둘이 만난다고 들었다. 믿지 않지만 확인 차 알고 싶다. 임신을 했던 일이 사실인지 말해 달라. 교무실의 모든 눈과 귀가 한곳에 쏠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 정은 보호 받지 못했다. 동석하지 않은 마가린을 생각했다. 몰라도 되는 일은 모를 수 있었다. 그것이 마가린의 열아홉이었다. 정은 제 나이를 앞서 가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담임교사가 정을 채근했다. 헛소문임을 증명하는 것은 한 마디로 족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정의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공식적인 면담은 끝이 났다. 교실로 돌아온 정은 모종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들은 사실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소문은 정을 끈질기게 따라올 터였다. 창가에 서 있던 마가린과 눈이 마주쳤다. 바깥에는 진눈깨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정은 교실을 뛰쳐나갔다. 가방도 챙겨 들지 않고 슬리퍼만 신은 채였다. 그대로 둑길까지 내달렸다. 교복이 안쪽까지 차게 젖어들었다. 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슬리퍼를 벗었다. 맨손으로 언 발을 한참 동안 주물렀다. 체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은 생기지도 않은 일에 수치심이 들었다. 이대로 온몸이 그냥 얼어붙었으면 싶었다. 그때였다. 마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을 부르고 있었다. 정은 수풀에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혼자이고 싶었다. 마가린은 비탈진 둑길을 한달음에 내려섰다. 정의 가방과 외투를 들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마가린은 슬리퍼를 금방 찾아냈다. 그러더니 손에 든 것을 내던지고 물가로 나아갔다. 마가린은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헤엄쳐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이 수풀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가린은 둑길로 되돌아오지 못했다.물귀신 같은 년. 마가린의 어머니는 저수지에서 부르짖었다. 정은 최초 목격자 진술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틀 만에 경찰서를 나섰다. 장례식이 치러진 뒤였다. 정은 그 후 세 달을 입방아 속에서 견뎠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던 날이었다. 정은 마가린과 밤낚시를 하던 그곳을 도망치듯 떠났다. 목적지는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매순간이 무의미한 소음으로 넘쳤으면 했다. 언제든 정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과거를 영영 파묻고 싶었다. 정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천변은 피하면 그뿐이었다. 거식증이 시작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화 불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증세는 점차 명확해졌다. 밥의 형태를 가진 것에는,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정은 죽이나 과일로 겨우 속을 달랬다. 별안간 구토 증세가 밀려오는 때는 허다했다. 주변에서는 장기 입원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은 속이 뒤틀려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거식증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진눈깨비가 그친 뒤에도, 정은 여전히 황폐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정은 약도를 펼쳐 들었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국수전문점이 있다는 동네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이었다. 약도대로 주택가에 들어섰지만 학원장이 일러준 상호명은 보이지 않았다. 간판이 없는 식당을 발견한 것은 골목길의 끄트머리였다. 막 개업했다고 보기에는 낡은 외관이었지만, 김이 서린 창에 나붙은 차림표만으로는 국수전문점이 분명했다. 정은 문을 열었다. 이인용 식탁 여섯 개로 꽉 차는 공간이었다. 안쪽 주방에서 주인 부부가 부산히 움직였다. 정은 머뭇거리며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머릿수건을 쓴 여자가 나타났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뒤따라 나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정에게 펼쳐 보였다. 무엇을 주문하실 건가요? 가지런한 글씨였다. 정은 주인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가 검지로 자신의 입을 가리킨 다음 손을 내저었다. 정은 봉투에 적힌 학원장의 이름을 내 보였다. 주인 부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듯 했다. 주인 부부는 목례를 하더니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은 긴 여정에 기운이 빠졌다. 숨을 고를 요량으로 잠시 문가에 기대었다. 주인 부부가 주방에서 양푼을 들고 나와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때였다. 양푼에 든 것은 국수였다. 정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국수전문점을 다시 찾아 볼 생각이었다. 문득 여자가 손짓을 했다. 정은 주인 부부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젓가락을 내밀었다. 남자가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젓가락을 받아든 정은 주인 부부 사이에 앉았다. 국수는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것이었다. 주인 부부는 식사를 시작했다. 후룩, 후룩, 후룩.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주인 부부의 식탁에도 소리가 있었다. 젓가락이 양푼 모서리를 튕겨 내거나 잔에 담긴 물이 연신 찰랑였다. 떠들썩한 식탁에서 정은 해거름의 기억을 되찾았다. 텅 빈 몸 안에 물이 서서히 차오름을 느꼈다. 마가린은 반복되는 허기처럼 떠오르곤 했다. 정은 종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살아가는 한 끝나지 않을 허기였다.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일 때였다. 주인 부부와 머리를 맞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입안에 신물이 고였다. 그 모든 물을, 정은 힘껏 삼켰다.정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냈다. 엄지로 힘주어 누르자 오목한 자국이 남았다. 정은 구에게 도마와 밀방망이를 주었다. 구는 반죽을 가장자리부터 밀어 폈다. 반죽은 도마 모서리에 걸칠 만큼 커다래졌다. 구는 밀방망이를 다시 정에게 넘겼다. 정은 들쑥날쑥한 두께를 평평하게 편 다음 반죽을 겹겹이 접고 칼질을 시작했다. 면발은 소면처럼 얇게 잘렸다. 그것을 면포를 깐 너른 쟁반에 놓고 밀가루를 살짝 뿌렸다. 칼질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그 박자를 유지하며 정은 조곤조곤 말했다."어떤 유목민은 새해 첫날, 집안 곳곳에 밀가루를 뿌린대요.""그게 무슨 뜻인데요?""만수무강을 바라는 거예요, 이 모양처럼."정은 면발 한 가닥을 들어 보였다. 구는 그것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가닥마다 삶의 기원이 담겨 있는 셈이었다. 정이 면발을 삶고 양념장을 준비하는 사이, 구는 고명을 만들었다. 먼저 달걀지단을 부쳤다. 다음으로는 김을 부수고 대파와 청양고추를 다졌다. 끝으로 손을 댄 고명은 김치였다. 구는 그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몸속에서 서랍이 일제히 덜컥거렸다. 구는 심호흡을 하고 칼을 잡았다. 도마에 김치 서너 줄기를 놓고 잘게 썰었다. 손끝에 빨갛게 물이 들었다. 그것은 언젠가 구의 얼굴빛과 닮아 있었다. 정은 두 개의 그릇 가득 칼국수를 담았다. 그 위에 구가 조그마한 원을 채우듯 고명을 조심스레 얹었다. 마무리는 양념장 한 숟가락이었다. 칼국수 두 그릇이 조리대에 가지런하게 놓였다. 구와 정은 비로소 마주앉았다."먹어요.""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요.""말해 봐요.""삼키지도 못했잖아요.""그랬지요.""근데 왜, 다시 먹을 수 있었어요?""잊고 싶지 않았으니까요."구는 고개를 낮게 떨어뜨렸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어제의 불행보다 눈앞의 온기가 지금은 더 가까웠다. 후룩, 후룩, 후룩. 정이 칼국수를 먹는 소리였다. 구는 젓가락을 쥐었다. 면발을 신중하게 감아올려 입에 넣었다. 그것은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랍의 맨 아래층으로 향하는 긴 통로가 천천히 열렸다. 구는 눈을 들어 정을 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맛있어요.※ 소설부문 당선소감/오희진 "밥 한 끼 같이 따뜻한 글 쓰겠습니다"금요일 저녁, 가까운 이들을 집에 부르곤 합니다. 어둑해지면 문간이 소란합니다. 빈손으로 오는 이는 없습니다. 즐겨 마신다는 술을 사오거나 어젯밤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답가를 준비해야겠지요. 나는 쌀을 안치거나 물을 끓이거나 야채를 볶습니다. 볶음밥, 덮밥, 스파게티, 카레… 음식은 대개 한 그릇짜리입니다. 더이상의 구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앉은뱅이 식탁에 둥그렇게 모여 앉습니다. 비로소 금요일 저녁이 시작됩니다.날이 밝아옵니다. 하나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때때로 홀로 술을 마시겠지요. 어두운 방에서 노래를 부르겠지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밥 한 끼의 온도를 간직한 채로요. 내가 쓰고 싶은 소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밥상머리에서 늘 기도해 준 가족들, 나를 희봉식당이라고 불러준 친구들, 허기진 밤을 나란히 지새운 문우들, 밥상의 기억을 나눠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설익은 이야기를 기꺼이 맛 보아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신춘문예라는 밥상을 마련해 준 경인일보에 감사드립니다.오래오래 쓰겠습니다. 한 그릇으로도 충분한 온기를 이어 가겠습니다.#약력1987년 2월 5일 전라북도 무주 출생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졸업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 서울 거주 ※ 소설부문 심사평/윤후명·장사선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작품… 미래 기대돼"소설가 윤후명 선생님과 내게, 1차 걸러진 24편의 소설이 각각 배달되었다. 이중 5편 정도는 문장 작법이나 소설의 기본 서술법이나 구성법 등이 미숙한 작품들로 우선 제외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정독에 들어갔다. 전체 플로트와 관계없는 무의미한 장식적 에피소드나 묘사 서사의 남발이 거슬렸다. 전형적이지 못한 캐릭터와 사건도 소설의 깊이를 담보할 수 없었다. 일상 경험에서 창작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좀더 진전된 실험의식을 지닌 경험 개척을 통해 창작에 나서야 할 것이다. 치열한 인생 현장 탐구와 고뇌가 동반될 때라야 비로소 명작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얻는데 힘들었던 제재라도 전체 소설과 밀접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거대 담론의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거대 담론에 대한 이해없이는 현실이나 미래를 투시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하여야 한다. 최종적으로 손에 남은 작품은 7~8편.이제 윤후명 선생님과 나는 토론에 들어갔다. 폭력의 악순환을 희망으로 극복하려 한 '옥수수밭 아코디언', 흡인력있는 문장력을 바탕으로 사랑과 우정이라는 진부한 제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응시하려한 '오후 세 시의 배웅', 그리고 '전어대가리'의 적나라한 서사와 거침없는 입담, '어디로 가야 하나요?'의 시의적절한 제재 선택, '다이빙'의 적절한 제재 배치와 언어 선택, 그리고 '첫입' 등은 우리 두 사람의 최종 선택을 매우 힘들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약간의 차이지만, '첫입'을 골랐다. '첫입'은 자칫 간과할 뻔했다. 얼핏 보면 초라한 '칼국수'에 불과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능력으로 육수를 우려내었고, 숙달된 손으로 정성스레 면을 뽑았다. "맛있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섭식장애 이야기를 통해 현대 인간사회에 늘어가는 트라우마의 대두와 회복을 보았다. 다만,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 대한 구체적 형상화가 부족하고, 먹기 대회의 서술이나 대화가 적절하게 성격 창조나 플로트 전개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문제로 남는다. 다만 가능성만으로 미래를 기대해 보고자 한다.

2012-01-01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시부문]심사평/안도현·장석남

[경인일보=]오다정씨의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은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시다. 이 분의 시에는 우선 어려운 말이 없다. 시에 어려운 말을 쓰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런데 본심에 올라온 시가 대개 그러한 시였다. 시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삶을 노래하자는 것이므로 문장이 헛갈리거나 하면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누가 끙끙거려가면서까지 시를 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을 건 다 있다. 행과 행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사유의 도약은 읽는 사람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당선작은 은유와 상징, 환상, 그리고 우리네 생활이 적절히 조율된 수작이라 할 만하다. 가령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에서 연과 연 사이의 바다를 보라! 게다가 '반 토막만 남겨진 배'는 우리를 금세 이 세상 저편으로 싣고 가지 않는가. 더불어 '굽이굽이' , '進進', '뾰족뾰족' 등등 적절히 배치한 리듬은 시의 맛을 크게 살려준다. 이만한 '언어'와 '사유'라면 당선작으로 충분했다. 최근 회자되는 장광설의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상쾌한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최인숙씨의 '무지개' 와 허영둘씨의 '고요를 잘 살펴보면' 등이었다. 모두 잘 짜여진 작품들로 읽혔으나 굳이 단점을 들라면 너무 기성품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서툴지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새롭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아쉽게 내려놓게 됐다. 이 분들 역시 훗날 좋은 시인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2011-01-03 경인일보

[2011경인신춘문예 시부문]당선소감/오다정

[경인일보=]노래를 듣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따라도 불러 봅니다. 그러다가 잠잠히 그저 듣기만 합니다. 세상에 노래는 얼마나 많던가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의 순정을 다해 노래해 왔던걸까요. 그들의 노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노래는 왜 이렇게도 못생겼을까요? 그런데도 거기 누군가는 제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좀 귀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못생긴 노래에 담은 지극한 순정함과 곡진함을 당신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외로움에 지쳐 저의 노래들이 시들기 전에 말입니다 다르게 말 할 줄 몰라서, 다른 말을 배우지 못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자들에 죽어라고 나의 세상들을 구겨 넣고 앉았었던 저를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못생긴 노래를 힘을 다해 부르고 앉은 저를, 저의 지난 날들을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저의 기억이 혹여 당신의 기억인 걸까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빚을 쓰는 것이라고만 믿어 왔던 제가 떠나 온 자리는 너무 먼 곳이어서 이젠 처음 빚을 냈던 자리로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제가 절 무너뜨렸던 걸까요?보세요, 정신의 가장 차가운 바닥에 나를 쓰러뜨렸던 당신, 몇 번이고 꺾이면서도 무릎을 털며 일어서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주저앉히곤 했던 당신, 삼엄한 당신, 다정한 당신, 그리고 우스운 당신, 오늘은 저를 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가족이 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아버지 어머니, 형부 양웅식 큰언니 김종민, 영원한 마음속의 은사, 민해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 지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었던 미선언니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연옥, 용옥, 향선. 모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밝은 눈으로 늙은 미래를 축복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열심을 다해 노래부르리라 다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1965년 경기도 포천 출생송곡여고 졸업, 국민대 시창작과정 수료현 동두천시 거주, 분식점 운영

2011-01-03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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