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전 비극 진실 풀리나

 

[56년전 비극 진실 풀리나·10]마산행배의 학살

⑩마산행배의 학살“1950년 가을에 부역자로 몰려 교동지서에 수감됐다. 곧 인천 부두 앞 매우 큰 해군함 위로 옮겨졌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묶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배위에서 재판이란 게 진행됐는데, 매우 간단했다. 한명씩 이름을 부르고, 바로 선고를 했다. 죄목도 변론도 없고, 이름과 선고만 있었다. 약 200명 중 무기징역과 15년형을 받은 사람은 나를 비롯해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사형이었다. 마산에 도착한 뒤 배 아랫부분에 있었던 우리들 15명만 내렸다. 중간에 어디 들른 곳도, 머문 곳도 없었다.”강화 교동면이 고향인 한모씨의 증언이다. 한씨는 인천 앞바다 군함에서 소위 `선상재판'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수장되는 걸 직접 보진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하선하면서 해군들에게 `이송 중 사형이 집행됐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 군함의 종착지는 마산이었다. 이외에도 강화군에 사는 이모씨 등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천~마산간 배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마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그 뒤 전혀 소식이 없었다는 점도 일치한다.그렇다면 왜 하필 마산이었을까.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는 “수도권 일대에서 잡아들인 부역자 등을 마산과 대구형무소에 보내기 위해서 해로를 택했을 것”이라며 “학살지는 인천 앞바다였겠지만 희생자 중 인천사람은 일부고, 서울과 경기, 심지어 강원도에서 잡혀온 사람들까지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마산행 배에서 벌어진 학살은 인천 뿐 아니라 전국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하지만 인천지역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한 진실규명신청 중 이 수감자 이송 중 학살에 관한 것은 한건도 없다. 육지와 달리 고립된 바다 위 선상에서 이뤄진 학살은 해군 외 목격자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유족이 있다고 해도 `실종' 이외에 달리 추측할 방도가 없었을 터. 결국 이송 중 학살의 진실을 풀 수 있는 열쇠는 5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해자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셈이다.

2006-12-01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 풀리나·9]밝혀진 희생자수 '빙산의 일각'

⑨ 드러나는 피해 규모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가 현재까지 밝혀낸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는 강화에서만 1천명 이상.정확한 희생자 규모를 단정할 순 없지만 여러 문건, 유족 및 목격자 등의 증언을 통해 잠정적으로 추정한 희생자 수다. 유족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로 일명 `싹쓸이'가 자행된 점으로 미뤄 전쟁을 전후해 강화를 포함, 인천 전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규모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7일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이뤄진 시점은 크게 전쟁 전과 개전 직후, 북한점령기, 인천상륙작전 전후, 1·4후퇴 무렵부터 휴전 전까지로 구분된다. 이중에서도 인천에선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무렵에 가장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건과 증언 등을 통해 인천경찰서와 강화경찰서, 강화 사슬재·산이포·갑곶나루·옥계 등에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이 벌어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보도연맹 학살사건과 인천상륙작전 당시 무차별 폭격에 의한 학살, 1·4후퇴 무렵 부역자 학살 등은 전역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인지된다.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조금씩 학살사건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까진 `빙산의 일각'이란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항구를 끼고있는 인천이라 수장된 민간인들이 부지기수였다는게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감자를 이송하다 바다 위에서 벌인 학살에 대한 정확한 진실 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한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으로 한맺힌 절규가 터져나올 공간이 마련되자, 인천에서도 안타까운 목소리들이 서서히 응집되고 있다. 지난 24일 현재 시와 10개 구·군을 통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인천지역 진실규명신청은 지난 7월의 40여건에 비해 70% 이상 늘어난 70건에 달하고 있다. 이중 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가장 많은 47건을 차지하고 있다.지난 22일 신청서를 접수한 구자경(66·인천 남동구 도림동)씨의 “경찰이 불러서 나간뒤 실종된 아버지의 유해라도, 그게 어렵다면 언제 돌아가셨는지 정확한 기일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절규처럼, 가슴 아픈 사연들이 각각의 신청서마다 녹아있다.이제 남은 시간은 단 3일. 법이 개정되지 않는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조사가 다시 이뤄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싹쓸이가 벌어진 인천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접수된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하지만 56년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선 더 많은 유족과 목격자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06-11-28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8]'보도연맹학살' 인천서 첫 발생

⑧ 드러나는 진실6·25전쟁 56년만에 정부가 아닌 시민의 힘으로 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지고 한달 남짓.그동안 다방면에서 수집된 자료들이 차츰 정리되면서 반세기 넘게 묻혀 있었던 진실들도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다.23일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조사활동을 통해 전쟁이 낳은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알려진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인천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다는 증거들을 찾아냈다.보도연맹 사건은 수도권 이남지역에서만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졌고, 그 시기도 1950년 7월 들어서 였지만 인천지역에선 이보다 앞선 6월말부터 자행됐다는 게 여러 문건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동시에 확인되고 있다.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종군기자였던 엘런 위닝턴의 1950년도 9월 기사를 증거로 들었다.`6월 29일과 7월 3일 사이 인천에서 1천800명이 살해됐다(Incheon:1,800 murdered between June 29 and July 3)'는 기록에는 `보도연맹'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 시기로 미뤄 충분히 인천지역 학살규모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엘런의 짧은 기록은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활동을 통해 찾아낸 해방일보 기사 및 관련자들의 증언, 다른 사료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목포대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 예비검속·학살사건의 배경과 구조'(2004)란 논문이 밝히는, 내무부 치안국장이 보도연맹 등 불순분자를 처리하기 위해 시도 경찰서에 지령을 3번 내린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는 “보도연맹 사건은 공식적으로 1950년 7월 3일 수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인민군은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된 뒤 1주일 가량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며 “그 시기 인천형무소 부두작업장과 경찰서 유치장에서 좌익들이 탈옥한 게 인천에서 보도연맹 학살을 촉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한편 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발굴한 미 국무부 주한대사관의 1950년 12월19일의 주간보고서는 우연찮게 서울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입증하고 있다. 이 보고서엔 `1950년 10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지방법원이 긴급명령1호에 따라 391명을 유죄판결하고, 이중 242명을 즉각 총살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0월 15일엔 서대문과 마포형무소 경비원들이 어린 소녀와 두 소년을 사형시켰다'는 기록과 함께 `UNCURK(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사형집행 검시를 한 결과, 아이들에게 확인사살 한 걸 밝혀냈다'는 충격적인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2006-11-24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7]마을특공대, 어머니·언니 불러내 총살

 6·25전쟁을 전후해 인천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경인일보 기획시리즈가 시작된 뒤 종종 관련 전화가 걸려온다. 그중엔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는 자신의 사연을 알려주려는 유족들의 전화도 있었다. 전쟁 뒤의 혼란과 약 30년간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꾹꾹 묻어놓고 살았던 한많은 세월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내고있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서 만난 임인호(69)씨와 조은순(70·여)씨 부부도 그들중 한 명이다. 이 부부는 6·25전쟁 당시 북한과 가까워 특히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던 강화군 교동(경인일보 3월 17일 1면 보도), 그 학살의 중심에 있었다. 임씨 집안에선 음력으로 1950년 11월 18일 밤 6촌 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두 7명이 희생당했다. 조씨 역시 하루 앞선 1950년 11월 17일 어머니와 언니를 잃었다. 당시 14살 소녀였던 조씨는 하루 아침에 어린 두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소녀가장이 됐다. 조씨는 “그날밤 함께 자고 있는데 마을 특공대가 어머니와 언니를 불러냈다”며 “아버지가 빨갱이였고, 월북했다는 걸 나중에 어른들에게 들었지만 어머니와 언니는 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어머니와 언니는 다음날 교동도 북쪽 끝 바머리(현 지석리) 해안에서 10여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숨진채 발견됐다. 조씨는 “시신들은 흙으로 대충 덮여있었고, 주위에 언니 고무신과 탄피들이 흩어져 있었다”며 “이 가슴속에 원한이 맺혔는지 그 모습을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잘 안된다”고 말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임씨는 호적등본을 꺼내 조씨 가족들의 이름을 확인시켜줬다. 그는 “이 사람이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건 처음”이라며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만 그 아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4후퇴를 전후해 교동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은 여러 유족들을 통해 전해진다. 교동지역 희생자들의 제삿날이 대부분 같은날 겹치는 것이다. 이날 이 부부의 증언으로 후퇴전인 음력 1950년 11월 17일(양력 12월 25일)부터 학살이 시작됐다는게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조씨가 빨갱이로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조준홍은 누구일까. 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최태육 목사를 통해 그가 일제시대 좌익계열 독립투사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최 목사는 “조준홍은 신간회 경서지회에서 활동하며 일제에 의해 최소 2번 이상 투옥됐었다”며 “월북한 건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6-11-21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6]빨갱이 낙인 찍혀 '떼죽음'

⑥ 강화 사슬재 학살사건지난달 27일 오후 1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종합운동장 옆 야산의 한 고갯길. 강화에서 사슬재라고 부르는 곳이다.강화사람들은 현재의 도로가 뚫리기 전 초지에서 배를 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한다.사슬재 어귀에 서자 고개 위로 뻗은, 차 한대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 너비의 비포장길이 눈에 들어왔다.길을 따라 100여m 올라갔을까. 56년전 이곳에서 벌어진 학살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안장섭(82)씨가 손짓을 했다.안씨는 “여기쯤에 교통호가 있었다”며 고갯길을 따라 도랑처럼 쭈욱 파여 있는 구덩이를 가리켰다. 그는 “새벽 1시께 20명 정도의 민간인들을 2명씩 묶어서 이곳으로 끌고와 앞줄부터 차례대로 구덩이에 집어넣고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면서 “내 차례에 손목에 묶인 끈을 풀고 호를 뛰어넘어 그대로 도망쳤는데 뒤에선 총알이 쏟아졌다”고 기억을 더듬었다.안씨는 특사령으로 인천형무소에서 풀려나 강화로 건너오자마자 다시 소년대에 붙잡혔다. 길상면우체국에 감금돼 있다 끌려간 곳이 사슬재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이 주위는 나무를 모두 베어 허허벌판이었다. 교통호는 삽 한자루 정도 깊이에 너비는 1m가 넘었다.몹시 추웠던 1951년 1월 초의 어느 밤. 안씨 혼자 그렇게 살아남았고, 그의 사촌형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희생당했다.안씨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밥숟가락이라도 들기 위해 땅을 판 것 뿐이지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면서 “살기 위해 다들 부역을 한 건 마찬가지인데 누군 죽이고, 누군 빨갱이로 낙인찍혀 죽어야했다”고 목소리를 떨었다.이 구덩이가 56년전의 바로 그 교통호였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고, 깊이가 채 50㎝도 안돼 보였다.하지만 여러 유족들은 사슬재의 이 구덩이를 1·4후퇴를 전후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장소로 지목하고 있다.당시 이곳에서 매형의 시신을 찾았던 서덕창(69)씨는 `1951년 1월 7일'이란 학살날짜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서씨는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처참했다”면서 “다음날 수십m 길이의 교통호는 150명 정도의 희생자들로 꽉 차있었고, 그중엔 노인과 여자들, 심지어 아기들까지 있었다”고 치를 떨었다.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50년 12월 부역자에 대한 특사령이 내려졌다. 죄를 사하는 조치였지만 대상자 명단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게까지 전달, 오히려 특사령이 아닌 학살령이 되고 말았다. 사슬재 뿐 아니라 불은면 광성보 등 포구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오후 3시 사슬재를 내려오는 길. 안씨는 “매년 한두번 정도 이곳에 오지만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며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것도 불과 몇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6-11-02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5]"희생자 핏물길까지 넘쳐…"

⑤ 강화署 민간인 학살사건지난 22일 오전 11시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강화경찰서 앞.전화를 받고 처음엔 몇번이나 거절했었던 윤모(66)씨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6·25전쟁 당시 그의 아버지는 경찰서에 수감돼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숨졌다.윤씨는 “난 10살이었기에 아버지가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며 “후에 깨달은 뒤 그때 생각을 하면 사나흘간은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거의 오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눈이 쌓여 무릎까지 퍽퍽 빠지던 그 추운 겨울. 그의 어머니는 경찰서 안을 뒤져 수많은 희생자 중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윤씨가 기억하는 56년전의 경찰서는 현재 본관 자리가 탄약고였고, 지금의 별관 자리에 기와집처럼 생긴 본관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치장 같은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윤씨는 “인천교도소에 2개월 수감됐다 무죄로 풀려나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바로 경찰서로 끌려갔다”면서 “아버지의 죄라면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총부리를 피하기 위해 방공호를 팠던 것 뿐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32살의 젊은 나이에 그의 어머니와 7남매를 두고 아버지는 떠났다. 가장들이 그렇게 숨진 뒤 남은 가족들의 고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윤씨는 “죄없는 주민들을 왜 끌어다 죽여야 했는 지 내 손으로 꼭 밝히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윤씨는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음력으로는 1950년 12월 10일, 양력으로 1951년 1월 18일이었다.1·4 후퇴 뒤 인민군이 다시 강화도를 점령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1951년 2월 15일자 노동신문은 `1951년 1월 18일 3시경 북한군이 3대의 상륙정에 나눠 타고 진입해 강화를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화사(江華史)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걸로 미뤄 군경의 후퇴를 전후해 경찰서에 수감돼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당시 학살 규모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윤씨는 “어머니 등 어른들은 200명 정도가 이곳에서 숨졌다고 했다”면서 “핏물이 흘러 지금 서있는 여기(정문 앞 도로)까지 흘러넘쳤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윤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서에서 살아나온 생존자가 1명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인적사항과 소재 등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38선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는 6·25전쟁 당시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던 지역이다. 인천지역민간인학살을연구하는모임이 파악한 학살사건만 10건 가까이 된다. 이 모임 관계자는 “이보다 광범위하게 학살이 자행됐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56년이 지난 지금 확실한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젠 유족과 목격자들이 나서줘야 한다”고 말했다.

2006-09-26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4]"억울한 동생죽음 풀어달라"

④가정동 유엔군機 추락사건지난 12일 인천시 서구 가정동 120 일대, 1951년 이재관(당시 17살)씨가 전투기 추락에 의해 사망했던 그 자리. “이 곳이에요. 재관이가 이 논바닥에서 일하다 전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죽었어요.” 형 이윤근(78)씨가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형도 죽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동생이 어머니(조순분씨·1999년 사망) 모시고 살아보겠다고 손발에 `분토'(똥을 섞은 흙)를 묻혀가며 발버둥치다 죽은 그 자리예요.”1951년 10월 어느 날 오후, 가정동 `간데말'(가운데마을)에 `쌕쌕이'가 날아왔다. 총성 한번 울리지 않았던 평화로운 이 마을에 회색 전투기(윤근씨와 비행기 추락 목격자 함경국(75)씨는 이 비행기를 유엔군 전투기라고 했다)가 검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지금 공천사거리에서 가정오거리 쪽으로 날던 전투기가 `털털' 기계 고장음을 내며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1분 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조종사가 전투기 밖으로 솟아올랐다. 조종사가 미리 탈출한 것이다.그러나 전투기는 그대로 간데말 한 논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전투기 추락 목격자 경국씨는 “재관이는 추락 지점 인근 하천에서 볏단을 말리던 중이었어요”라고 했다. 7남매 중 큰 형인 재근씨(1950년 사망)가 우익 청년단체에서 일하다 6·25때 인민군에게 총살당했고, 둘째 형 윤근씨마저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때였다. 바로 다음 아들인 재관씨가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이끌고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하던 때였다. 전투기는 곧바로 재관씨를 덮치지 않았다. 하지만 추락하면서 큰 바람을 일으켜, 갑작스런 전투기 출현에 놀라 하천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재관씨를 50여m 떨어진 논바닥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재관씨가 널부러진 논 주변에서 굉음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전투기 잔해들이 재관씨 몸을 파고 들었다. 재관씨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숨졌다고 경국씨가 말했다.전투기 폭발 하루 뒤, 경찰관 십여명이 유엔군조사단을 이끌고 현장에 왔다. 그러나 경찰은 재관씨 가족에게 가족사항 등 일반적인 질문만 했고, 답변을 유엔군에게 전한뒤 마을을 떠났다. 재관씨 가족과 이웃의 “어디서 온 비행기냐. 왜 이 곳에 떨어졌느냐”는 물음엔 묵묵부답이었다. 경찰이 며칠뒤 다시 간데말에 왔다. 그러나 주민들이 주워간 전투기 잔해를 압수한 뒤 돌아갔다. 더이상 마을을 찾지도 않았다.어머니는 재관씨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느 곳에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사망신고가 이뤄진 것은 고등학교(당시 인천기계공고)에 다니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윤근씨가 제대한 뒤. 1953년 제대후 윤근씨는 경황이 없어 죽은 해보다 1년 뒤인 1952년에 동생이 사망했다고 신고했다.윤근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투기 추락과 동생의 죽음을 우리 군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수차례 전투기 추락에 관한 자료를 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오래된 일이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윤근씨는 8년 전 어머니 임종자리에서 반드시 동생의 죽음을 밝혀내겠다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 해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동생 죽음에 대한 원인 규명을 간곡히 부탁했다. “어머니는 재관을 그리며 한 평생을 눈물로 보내셨다”며 “군에 있어 동생 죽음을 보지 못한 무능한 형이 가장 노릇을 한 어린 동생을 죽게 한 원인을 지금이라도 밝혀내야 한 맺힌 어머니가 지하에서 눈을 감으실 것 아니겠냐”고 했다.

2006-08-16 김장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3]"서너명씩 굴비꿰듯 묶어 총으로 쏴"

③ 영흥도 민간인 희생사건뜨거운 태양이 식을 줄 모르고 내리쬐던 7일 오후 1시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십리포해수욕장.해무 사이로 영종도가 마주보였고, 오른쪽으로 인천 월미도가 흐릿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56년 전 그해 여름. 이 좁은 바다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연합군 함대가 속속 모여들었다. 영흥도 주민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함대가 이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었다. 그 중에는 주민들이 난생 처음 본 미 해군의 거대한 항공모함도 있었다.영흥도 주민들에 따르면 연합군 함대가 들어올 당시 섬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다. 이후 연합군이 섬을 점령했고, 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소위 `빨갱이'라 불리던 사람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박모(70)씨는 “해군 등이 7~8명을 굴비 꿰듯 손을 뒤로 묶어 줄줄이 끌고 간 뒤 육골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걸 봤다”며 “죽은 사람들을 골짜기에 밀어넣고선 흙으로 대충 덮어버리고 갔다”고 말했다. 학살당한 사람들이 묻혔다는 육골은 현 영흥중학교 옆으로 난 비포장 길을 200m 가량 따라 올라간 곳이었다. 지금은 가운데 부분에 흙이 가득 쌓여 골짜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박씨는 지난 1970년대 통계에서 제방을 만들다 다량의 유골이 출토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현재의 십리포해수욕장이었다. 해변 바로 뒤 제방에서 6·25 때 희생당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골이 나왔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해수욕장 옆으로 멀리있는 바위산 귀퉁이를 가리키며 “저곳이 진여”라고 말했다.진여는 육골, 통계와 함께 영흥도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영흥도 주민 신모(72)씨도 당시의 처참했던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웅덩이 앞에 일렬로 세운 뒤 총을 한발 쏴 2~3명을 관통시켜 죽이고, 다시 또 한발 쏴서 몇명을 죽이고 그랬다”면서 “영흥주민들은 아니었고, 대부분 외지에서 끌어다가 죽인 것 같다”고 말했다.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해 해군의 임시본부가 이 섬에 있었기에 외지인들이 많이 잡혀왔을 것이란 공통된 의견을 밝혔다. 주민들이 알려 준 예전 임시본부는 십리포에서 영흥중학교로 가는 길에 있었다. 육지와 선재도, 대부도에서 잡혀온 인민군과 그 부역자들이 이곳에서 취조를 받은 뒤 학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영흥도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었다. 인민군에 이어 미군과 해군, 대한청년방위대 등이 연이어 상륙하며 섬 분위기는 극도로 냉랭해졌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이다. 때문에 작은 오해나 말 실수 하나로 바로 총살이 이뤄지기도 했다.주민들은 우리 해군의 총에 죽은 주민 임모씨와 미군과 의사소통이 안돼 어이없이 총살당한 김모씨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을 섬에서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 육지로 나가서 살고 있다고 섬 주민들은 말했다.

2006-08-08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2]6·25 혼란속 아군에 형님 잃은 김종완웅

② 덕적도 피란민 희생사건56년 전 6·25 전쟁 통에 네살 터울의 형을 잃은 김종완(72)옹은 형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입술을 떨었다.반세기가 넘은 형 죽음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동생의 가슴은 이제 재만 남았다.전쟁 당시 16살이던 동생은 칠순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렸다.“인민군을 피해 집을 떠난 형 대신 돌아온 건 우리 해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 한마디였을 뿐 형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아직도 자세한 경위를 알지 못해요. 내가 죽은 뒤라도….”지난 1일 오후 1시30분. 인천 중구 항동 라이프비치아파트단지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김옹을 만났다.김옹은 형의 얘기를 듣고 싶다는 전화를 받은 뒤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었다며 밖에 나와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오래전 일이지만 전쟁의 상처는 계속되고 있는 듯 둘째 형 종우(당시 20세)씨의 얘기를 꺼내는 김옹은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했다. “시신도 찾을 수 없었고, 장례도 치르지 못했어요. 남은 건 가족들의 눈물과 회한 뿐이에요.”그의 기억 속에 있는 형은 가난한 섬에서 태어나 고생만 하던 착한 어민이었고 인민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다.56년 전인 그해 여름. 인천 중구 관동 경찰국 식당에서 일했던 형 종우씨는 인민군을 피해 고향집이 있는 중구 용유도로 몸을 피했다. 당시 젊은 혈기에 공산군을 막겠다는 동네 청년들과 함께 목선을 타고 무기를 가지러 떠났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회항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내무서원은 청년들을 모두 체포했고, 종우씨는 간신히 빠져나와 숨어 지내다 우리 해군이 점령한 덕적도로 가기로 결심, 노젖는 조그만 목선에 몸을 싣고 용유도 덕교해변을 떠났다.김옹은 “덕교해변에서 눈에 들어올 듯 보이는 덕적도로 떠난 형이 무사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때 덕교해변을 떠나던 형을 본 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6·25전쟁이 일어난 뒤 고향인 중구 용유도 주민들은 덕적도로 많이 피란을 갔다”며 “인민군을 피해 덕적도로 간 형을 우리 해군이 배에 태워 바다로 데리고 간 뒤 총살했고, 그대로 바다에 버렸다는 말을 동네사람들에게 전해들었다”고 말했다.“9·28 서울수복을 전후해 어느날 경찰서장과 해군 장교옷을 입은 두 명이 집에 찾아왔어요.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들은 어머니에게 `죄없는 사람을 죽여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어요.”김옹은 “아마도 간첩이나 인민군이란 누명을 씌워 죽였을 것 같다”며 “다른 건 필요없지만 왜 죽어야 했는지라도 밝혀 형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해군 기록에는 분명 무언가 남아있을 것이란 게 김옹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가 진실화해위원회에 형의 죽음을 신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인천지역 민간인학살을 연구하는 모임은 “인천 앞바다의 섬들은 38선과 맞닿아 있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이라며 “이원규의 소설 `황해'와 이세기의 시집 `먹염바다' 등에도 덕적도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학살됐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이희환 인하대 국문과 강사는 “인천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지만 사건의 실체조차 감을 잡기 힘든 상황”이라며 “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06-08-03 김창훈

[56년전 비극 진실풀리나·1]생존주민 '고향뺏긴 恨 어쩌나'

① 월미도 원주민 희생사건지금은 육지로 탈바꿈했지만 월미도는 당초 어촌마을을 낀 평화로운 섬이었다. 주민들은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월미도의 비극은 한국전쟁과 함께 찾아 왔다. 그리고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 종전 후 지금까지 고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죽을 때가 되면 고향이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여….”지난 21일 월미산 입구에서 만난 윤정여(79·여)씨는 “남편이 평생을 월미도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다 지난해 먼저 세상을 떴는데 나도 곧 그럴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13일 새벽 5시.유엔군의 공군기 1개 편대(4대)가 월미도 상공에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기름통과 네이팜탄이 비오듯 쏟아졌고 월미도는 이내 불바다로 변했다.“새벽시간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사람은 그냥 고스란히 타죽었어. 당시 80여가구가 살았는데 사람들이 허둥지둥 속옷바람으로 뛰어나오고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지.”당시 19세였다는 이범기(74·남구 주안2동)씨는 “비행기가 사람만 보이면 기총사격을 해대는 통에 갯벌에서 펄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숨죽여 있었다”며 금찍했던 순간을 회고했다.월미도가 이처럼 집중포화의 표적이 된 것은 월미도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오후에 폭격이 잦아들자 인천으로 피신했던 원주민들은 월미도와 인천을 연결한 다리를 통해 잿더미로 변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가매장하는 등 사태수습에 들어갔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15일 새벽 5시 인천상륙작전이 본격 전개되면서 주민들은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끝이었다.며칠 후 다시찾은 월미도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주민들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미군들의 통제로 다리 앞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어 주민들은 월미도 입구부터 지금의 대한제분 앞까지 판자촌락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터라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굶기를 밥먹듯 했다.“미군부대가 철수하면 고향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역대 인천시장들의 말만 믿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이 많은 주민들이 세상을 등졌다.미군이 철수하면서 주둔한 국군 제2함대사령부까지 지난 2001년 평택으로 이전했는데도 현재 생존해 있는 주민들에게 고향은 꿈속에서나 남아있다. 주민들이 살았던 지역에 공원조성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원주민들은 군사지역으로 묶인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40여가구는 인천에 머물면서 귀향을 기다리고 있다.“다른 보상은 필요없어. 죽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보금자리에서 다시 살수 있게만 해달란 것이여.”유경예(82·여)씨는 “가슴의 한을 풀어달라고 시청에 갔는데 순사들이 시장실에 못들어가게 했다”고 말했다. 청원경찰을 `순사'라고 부르는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2006-07-24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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