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과 인천

 

[주한 미군과 인천·(10)끝·인천 떠난 미군 기억해야]미군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인천… '마지막 흔적' 캠프마켓 보존을

대부분 1960~1970년대 이전·철수빈자리 아파트 단지·공원 탈바꿈남은 건축물 활용방안 고민 과제인천의 요충지마다 미군기지가 있었다. 인천 미군기지는 대부분 1970년대 초반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미국으로 철수했다. 미군이 떠난 자리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거나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부평 한가운데에 있는 주한미군 군수보급기지인 '애스컴(ASCOM)'도 44만㎡ 규모의 캠프마켓만 남기고 대폭 축소됐다. 한때 인천을 채웠던 미군기지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지고 곧 반환될 캠프마켓 땅만 '주한미군과 인천'의 역사를 기억하게 됐다. 캠프마켓 땅 활용은 그 역사를 보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부대는 1971년에 떠났다. 그때까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던 월미도는 현재 유원지로 바뀌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 남구 용현동·학익동 일대에 있던 대규모 미군 유류저장소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 땅은 1968년 대한석유공사에 반환됐다. 1980년 선경(현 SK그룹)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면서 용현동 미군 유류저장소 부지도 SK 소유가 됐고, SK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건설했다. 이 자리에서 부평까지 미군 유류를 나르던 철도(주인선)는 폐쇄돼 일부 부지는 공원이 조성되기도 했다.부평 애스컴의 철수는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이어졌다. 애스컴이 나간 자리는 국방부가 대기업 건설사들에 매각해 대단지 아파트로 채웠다. 1985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 일대에 아파트만 100여 동이 들어섰다. 캠프마켓 바로 옆인 부영공원도 애스컴의 일부였다. 1973년 미군부대가 철수했지만, 곧바로 한국군 68경차부대가 주둔하다가 2002년에서야 공원으로 조성됐다. 캠프마켓은 2002년 확정된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라 현재 대부분 기능이 평택과 김천으로 이전했고, 주한미군에 공급할 빵을 만드는 베이커리시설만 남았다.캠프마켓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앞으로 인천 지역사회가 고민해 나갈 과제다. 인천시는 최근 캠프마켓 내부 건축물 118곳을 모두 보존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22곳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근대건축물로 추정된다. 캠프마켓 역사는 미군기지가 조성되기 이전 일본군 군수공장(조병창)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1959년 미군기지가 조성된 문학산 정상은 1970년대 초 미군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공군이 차지했다가 2015년 10월 개방됐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야간 출입이 통제된다. 문학산 정상 또한 인천 미군기지 역사가 얽힌 활용방안을 구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좋은 기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미군을 빼곤 인천이라는 도시를 설명할 수 없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27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9)환경오염 주범 미군기지]머물렀던 곳마다 발암물질로 뒤범벅

캠프마켓·문학산 등 상태 심각일부 고엽제 유출 의혹 제기도지역사회 '원인자 부담' 목소리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가 평택으로 이전하면 사실상 인천에서 미군부대가 완전히 떠난다. 하지만 미군기지 환경오염은 그 땅을 돌려받을 인천시민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문제로 남는다. 시민들은 토양과 지하수가 유류, 맹독성 발암물질로 심각하게 오염된 캠프마켓을 미군이 정화해야 한다는 '원인자 부담원칙'을 요구하고 있다.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공동 환경평가절차에 따른 환경조사 결과, 캠프마켓 토양에선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류와 유류, 중금속을 비롯한 각종 오염물질이 다량 발견됐다. 지하수 오염도 확인됐다. 앞서 2012년과 2014년 환경부가 민간단체와 공동으로 캠프마켓 주변지역 환경오염실태를 조사했을 때도 유류와 다이옥신류가 검출됐다. 특히 국내에는 아직 기준조차 없는 다이옥신류 유해물질이 큰 위협이다. 다이옥신류 물질은 독성이 강해 암을 유발할 수 있고, 동물의 지방조직을 통해 축적돼 음식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인체에 들어올 수 있다.도심 주요지역을 미군기지가 차지했던 인천은 주한미군의 군수보급기지였다. 미군의 각종 군사장비나 군사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기름이 인천항으로 들어와 전국의 미군부대로 보급됐다. 주한미군에 복무했던 미국인 퇴역군인 필 스튜어트(Phil Stewart)는 2011년 인천을 찾아 부평미군기지에서 미군의 고엽제가 유출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캠프마켓에는 주한미군 폐품처리장(DRMO)도 있었기 때문에 오염 우려가 더욱 심각하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미군부대로 인한 환경오염은 부평만의 문제가 아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군 유류저장시설이 설치돼 있던 문학산 일대 토양과 지하수도 오염된 것으로 한국환경공단이 2014~2015년 조사한 결과 확인됐다. 군부대 이외에 화학물질 오염요인이 없는 문학산 일대에선 당시 공업지역 토양오염 기준의 3배가 넘는 벤젠이 검출되기도 했다. 문학산 인근 오염된 땅에서는 도시개발사업이 추진됐고, 지하철(수인선)이 깔렸으며, 인천아시안게임 경기장인 옥련국제사격장이 들어섰다. 지난해에는 대규모 미군 유류저장소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인 용현동 아파트 공사현장에서도 유류오염 토양이 발견됐다. 오염의 원인이 미군부대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관할 기초단체인 인천 남구와 아파트 시행사는 정확한 오염원을 밝히지 못했다.미군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 미군기지에서조차 환경오염을 책임지고 처리하거나 정화비용을 부담한 사례는 거의 없다. 캠프마켓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와 인천시 또한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선 유독 소극적이다. 그러나 미군기지 오염정화의 '원인자 부담' 목소리는 인천 지역사회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25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8)미군정기 문화 체육]전국 첫 공립박물관·스포츠 '화끈한 지원'

6·25때 사라진 시립박물관·예술관 유물·전시품 협조해방 직후 야구팀 훈련·용품 도움… 전국대회 싹쓸이해방 후 인천지역의 문화분야와 체육분야만큼은 다른 지역보다 활성화 했다. 이는 미군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 첫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은 미군정의 협조 아래 탄생했다. 한국 야구의 시발지인 '구도(球都)' 인천답게 해방 직후 미군과의 연이은 연습경기가 인천 야구팀을 전국 최강으로 성장시켰다.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지금의 중구 자유공원 인근인 송학동 1번지 세창양행 사택에 개관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포화로 소실됐다. 인천시립박물관 개관은 인천 출신의 한국 1세대 미술평론가인 석남(石南) 이경성(1919~2009) 선생이 주도했다.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경성 선생에게 인천 미군정 교육담당관 홈펠 중위와 통역관 최원영씨가 찾아왔다. 인천에 있는 향토관(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제의하기 위해서다. 인천시립박물관 탄생 과정은 이경성 선생이 1998년 자서전 격으로 쓴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 자세하다. 도쿄 유학시절부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뜻을 품던 이경성 선생은 1945년 10월 임홍재 인천시장으로부터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됐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시립박물관 설립에는 인천 미군정의 조력이 컸다. 인천 미군정 소속 홈펠 중위의 도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급 유물 19점을 빌렸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설득해 60점의 민속품도 모았다. 일본인 세관창고에 있던 유물을 문화재 반출금지를 내세워 확보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 후 미군기지로 바뀐 일본군 군수공장(조병창)에 있던 중국 송·원·명대 철제 범종을 극적으로 수습할 수 있던 것은 미군의 협조 덕분이었다. 이어 이경성 선생은 1947년 미군정의 주선으로 현 중구 항동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던 옛 영국영사관 건물을 인천시립예술관으로 탈바꿈했다. 고희동(1886~1965), 이상범(1897~1972), 배렴(1911∼1968) 같은 당대 일류 화가의 작품을 전시한 근대미술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 건물 또한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해방 이후 인천에서는 야구팀 '전인천군'이 창단했다. 지금으로 치면 직장인 야구단 격이지만, 인천 미군부대와의 연습경기를 발판삼아 국가대표급 실력을 자랑했다. 유완식과 김선웅, 장영식 등 인천 야구 1세대를 주축으로 한 '전인천군'은 1947년 5월 제2회 4대 도시(인천·부산·광주·대구) 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고, 같은 해 전국지구대표 야구쟁패전, 월계기대회, 전국체전까지 우승을 싹쓸이했다.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렵던 시절, 이들의 야구용품은 미군으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인천 신흥초등학교에서는 인천농구협회가 주최한 '제1회 전인천 농구대회'가 열렸다. 인천 7개 팀과 함께 미군선발팀과 중국인팀이 참가해 국제대회를 방불케 했다. 농구의 본향에서 온 미군선발팀이 결승전에서 인천의 철마팀과 맞붙어 42대 28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대중일보가 1946년 5월 6일자 신문에 보도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21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7)미군 범죄]시민들 '억울한 희생' 가해자 처벌조차 못해

검문 거부 이유 대낮에 길거리서 총 난사기름 훔치다 걸린 병사 되레 경찰에 총격피해 잦은 기지촌, 자치회 만들어 시위도사건사고 지금도 매년 200~300건 줄이어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30만명을 넘긴 주한미군 규모는 1970년대 초까지도 5만~8만명 수준을 유지했다. 미군은 한국 주둔 초창기부터 각종 범죄도 많이 저질렀다. 도심 곳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인천지역은 특히 미군 범죄와 각종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여성과 어린 아이가 희생되기까지 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는데, 정작 가해자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인천 화수동에 사는 명해철(21)씨가 대낮에 길거리에서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미군이 검문한다며 명씨에게 멈추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그대로 도망쳤다는 게 총을 쏴 사살한 이유다. 이 사건은 대중일보 1947년 3월 12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인천역에서 휘발유를 훔치던 미군을 체포하려다 오히려 그 미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진 만석동파출소 임완철(23) 순경사건(대중일보 1947년 1월 23일자), 미 헌병의 한국인 부녀 윤간사건(1947년 1월 31일자) 등이 미군정 시기 인천에서 발생한 대표적 미군 범죄다.한국전쟁 이후에는 부평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 주변 기지촌에서 미군 병사가 기지촌 여성을 살해하는 비극도 종종 일어났다. 1969년 5월 부평 기지촌 셋방에 살던 25세 여성이 목에는 전깃줄이 감기고, 온몸이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20세의 미군 병사가 이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1968년 9월 6일 새벽 인천 중구 관동의 한 여관방에서 미 헌병대 소속 밀러(21) 상병이 강모(21·여)씨에게 총을 발사해 숨지게 한 사건이 동아일보 1968년 9월 6일자에 보도됐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동아일보는 전했다.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군 병사의 폭력과 강력사건이 계속되자, 1960년대 말 부평 기지촌 여성들이 '자치회'를 조직해 미군부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어린아이가 미군의 총에 맞는 참극도 있었다. 1957년 7월 6일 인천 남구 용현동 미군 유류저장소(POL)의 송유관에 올라앉아 놀고 있는 김용호(3)군이 미군 도날드 파세트(19) 이병이 쏜 총을 맞고 희생됐다. 미군 자체 조사 결과 '오발'로 판명돼 파세트 이병은 미군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57년 8월 25일에는 용현동의 저수지에서 수영 중이던 조병길(18)군에게 송유관을 경비하던 미군이 총을 난사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군은 왼쪽 손과 우측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국 숨졌다. 1962년 6월에는 인천 작전동에 사는 김용상(9)군이 미군의 '지프'에 치여 중상을 입었고, 이듬해 6월 부평 새나라자동차공장(현 한국지엠 인천공장) 앞에서 신명주(5) 양을 미군 '쓰리쿼터' 트럭이 들이받아 신양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교통사고가 났다.지금은 인천에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만 남기고 미군부대 대부분이 철수해 미군 범죄가 지역사회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주한미군 범죄는 2014년 263건, 2015년 269건, 2016년 295건, 올해 7월 기준 170건으로 여전히 매년 200~300건가량 발생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주한미군 10명 중 7명이 기소를 피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20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6)기지촌과 혼혈아]병사 유흥·향락의 해방구… 또다른 '위안부' 잉태하다

접대여성 '양공주' 1700여명 달해정부, 성매매 묵인 '외화벌이' 이용폭행·살해사건 등 범죄피해 빈번미군과 혼혈아, 차별·입양 문제도미군기지 주변 기지촌은 철저하게 미군 병사들의 '유흥과 향락'을 목적으로 조성됐다. 그중에서도 인천 부평미군기지 맞은편의 기지촌은 한때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기지촌에는 영어 간판을 단 술집과 클럽이 넘쳐났고,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한국 여성들이 살았다. 미군 PX물품을 취급하는 양품점이나 미용실도 있었다. 기지촌은 수많은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졌고, 미국 대중음악 전파 등 우리나라 문화에 끼친 영향도 컸다. 하지만 주한미군 병사들의 '해방구' 역할을 한 기지촌이 인천에 남긴 상처 또한 지워질 수 없는 역사다. 인천 부평에 있는 신촌(新村·부평3동 일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지촌이 형성된 지역이다. 미군이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주해 부평 일본군 조병창(군수공장)을 접수, 주한미군 보급수송본부로 활용하면서부터 미군기지 맞은편인 신촌에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한국인 여성들이 몰렸다. 이들은 '양공주'라 불렸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평에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이 조성돼 도시 자체가 미군기지화하면서 기지촌은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부평역사박물관의 학술총서 '부평 신촌'에는 1950년대 말 부평에 미군 병사를 접대한 기지촌 여성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1천500명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부평 이외의 인천 지역에는 200명이 따로 있었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부평 신촌에는 미군 병사가 출입하는 '클럽'이 20곳 넘게 성업했다. 이곳에서 미군 병사들은 술 마시고, 음악과 춤을 즐기고,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여성들을 관리하는 포주도 존재했다. 신촌 골목골목에 있는 기지촌 여성의 셋방에서 성매매가 이뤄졌다. 지금도 부평 신촌 일대에는 부엌과 다락을 갖춘 단칸방 4~5개가 길게 늘어선 독특한 형태의 주택이 남아있다. 기지촌 여성들의 셋집이다. 미군은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로 취급했다. 한국정부는 1961년부터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하면서도, 같은 해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해 기지촌 여성의 성매매를 사실상 묵인하고 '외화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다. 기지촌 여성이 미군에게 살해당하거나 다치는 사건도 빈번했다. 미군 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차별문제도 심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혼혈아동은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해외로 입양되곤 했다. '해외 입양인의 대부'라 불리는 인천 덕적도 출신 서재송(88) 할아버지처럼 1960년대부터 50년 넘게 덕적도, 동구 송현동, 부평구 부평동 등에서 혼혈아를 비롯한 고아들을 돌보며 새로운 삶을 찾아주기 위해 애쓴 이도 있다. 인천 미군부대를 다룬 문학작품에는 양공주와 혼혈인 자녀가 단골로 등장한다. 소설가 오정희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9살 아이의 시선으로 쓴 단편 '중국인 거리'(1979) 속에선 월미도 미군부대 흑인병사를 상대하는 메기언니와 메기언니의 딸인 백인혼혈 제니가 인천차이나타운에 산다. 이원규가 1987년 발표한 단편소설 '겨울새'는 부평 기지촌 여성과 그의 혼혈인 아들이 주인공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17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5)미군 기반 성장한 기업]군수품 수송한 한진 '인천판 아메리칸 드림'

6·25로 쓰러진 회사 재기… 베트남전 거쳐 재벌 반열에한화 등 대기업들 미군정 귀속한 日공장 운영하며 창업인천 도심 한복판을 꿰찬 미군기지를 보고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꿈꾼 기업가들이 인천에 있었다. 인천에서 태동한 한진그룹의 창립자 조중훈(1920∼2002) 회장이 그중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했던 인천지역 공장을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사업의 기틀을 다진 대기업도 여럿이다.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은 1945년 인천 중구 해안동의 한 창고에서 '한진상사'란 간판을 내걸고 트럭 1대로 운수회사를 차렸다. 2년 후 한진상사는 보유 트럭이 10여 대로 늘어날 정도로 성장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트럭은 군에 징발되고 사무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조중훈 회장은 전쟁 이후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미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에 뛰어들어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미군 군수물자 수송과정에서 물자를 훔치거나 빼돌리는 경우가 빈번해 미군은 한국인 운수업자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중훈 회장이 미군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따낸 비결은 운송 도중 발생한 사고를 모두 한진상사가 책임지는 '책임제 수송계약'이었다.한진상사는 1957년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미군과의 사업을 기반 삼아 1960년 1년 동안 22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를 정도로 사세를 확장했다. 이 무렵 조중훈 회장은 주한미군 공군기지 순환버스(콘트랙트 버스) 운영사업에도 발을 뻗었다. 조중훈 회장의 미군 공군기지 버스사업은 경인일보 연중기획 시리즈 '실향민 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8월 31일자 9면 보도)에서 실향민 김은중(83) 할아버지가 증언한 내용인데, 조중훈 회장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도 나오지 않는다. 조중훈 회장은 미군과의 인연을 발판으로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베트남에서 미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에 참여한다. 한진은 1971년까지 베트남에서만 1억5천만달러를 벌어들여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미군은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남한을 통치하면서 일본이 버리고 간 적산(敵産)공장을 미군정청 재산으로 귀속했다. 미군정은 한국인 관리인을 내세워 공장을 운영했는데, 인천에 있던 대규모 적산공장들은 여러 대기업의 모체가 됐다. 인천 남동구 일대에 있던 조선유지주식회사 인천공장은 한화그룹 창립자 김종희(1922~1981) 회장이 미군정으로부터 관리인으로 임명됐다. 화약공장인 조선유지 인천공장은 한화그룹의 모체인 한국화약을 설립하는 기반이 됐다. 동구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 인천공장도 일본의 동양방적이 전신이다. 동일방직을 설립한 서정익(1910∼1973) 사장은 해방 후 미군정이 임명한 동양방적의 관리인이 됐다. 당시 서정익 사장은 동양방적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다. 그는 1955년 정부로부터 동양방적을 인수받아 동일방직을 일궜다. 인천 동구에 있는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제철 인천공장도 일본 적산공장에서 출발한 대기업이다. 국내 대기업 역사는 미군정 시기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11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4)주민 삶 파고든 PX경제]물자 빼돌리고 훔치고 '양키시장' 형성

1950년대말 군수품 60% 유출항만 주변·부평 애스컴 중심옷·식품·건축재등 지역 퍼져중앙시장 명성 양면적 영향해방을 맞은 뒤 미군이 남한을 다스렸지만, 서민들의 경제사정은 일제강점기와 다를 바 없었다. 미군정이 일본의 행정·경제·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갖다 썼기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곧 혼란기가 시작됐다.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민생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너나없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던 시절, 인천 도심 한복판을 차지한 미군부대에 수많은 사람이 밥줄을 걸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인천 사람도 많았다. 미군부대 PX(Post Exchange·군 매점) 물자가 시중으로 흘러나와 '양키시장'을 형성하기도 했다.특히 인천은 인천항과 부평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을 중심으로 한 주한미군 군수보급기지였다. 인천항과 항만 주변 PX창고, 애스컴을 비롯해 미군 물자가 빠져나올 경로가 많았다. 인천 미군부대에서 일한 한국인 근로자나 미군 병사를 상대한 여성들에 의해 미군 물자가 새는 경우도 있지만, 조직적인 암거래 또한 성행했다. 미군 병사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물품을 유출하기도 했다. 의류, 통조림, 담배, 커피, 화장품은 물론 건축자재까지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Made in USA'를 인천 바닥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부평 애스컴 내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빈 깡통들을 펴서 지붕을 만든 판잣집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년)'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 미군부대 PX에서 취급하는 물자의 60%가 시중에 유출됐다고 추정했다. 인천 출신 소설가 이원규가 유년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1993년 쓴 중편소설 '까치산의 왕벌'에는 인천 미군부대 보급물자를 빼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항만에서 보급품을 가득 싣고 나온 트럭들이 이삼십 리쯤 인천시내를 뚫고 지나가는 동안 적어도 십여 군데에서 눈독을 들이고 덤비게 마련이다. 그중 까치산 고개는 숭의동 왈패들의 정해진 공격 장소였다. 고개를 올라가느라 차들이 기를 쓰며 숨을 헐떡이는 순간 벌떼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상자를 훔쳐 달아나곤 했다'.인천항과 남구 용현동에 있던 미군 유류저장소(POL)를 잇는 송유관에서 목숨을 걸고 몰래 기름을 빼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1957년에는 용현동 유류저장소로 연결되는 송유관에 올라앉은 3살짜리 아이를 미군이 기름 도둑으로 오해하고 총격을 가해 아이가 숨지는 비극이 빚어질 정도였다.미군부대를 빠져나간 각종 물자는 시장에서 거래됐다. 1930년대 동구 배다리 인근에 형성된 중앙시장(송현 자유시장)은 미군 주둔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미군 물건을 취급하는 '양키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전쟁 후 1950년대 후반까지도 옷감이 부족해 국산 양복이 흔치 않았는데, 미군 군복을 염색해 양복처럼 고쳐 입는 일명 '마카오 복지(服地)'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잘 팔렸다고 한다. 인천사람들 삶에 파고든 미군부대 PX물자가 지역경제에 끼친 영향은 좋든 나쁘든 매우 컸다. 미군부대가 일상 가까이에 있던 시절을 산 사람들은 미군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10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3)도시 뒤덮은 군부대]인천항~부평 軍 벨트 '사실상 미국땅'

한반도 최대 조병창 그대로 접수월미도·문학산등 요지 눌러앉아병력·물자 전국 공급 '심장' 역할원주인 주민들, 수십년간 밀려나미군부대는 한때 인천을 뒤덮다시피할 정도였다. '미군기지들의 단지화'로 하나의 도시를 형성한 부평지역, 중구·남구지역 주요 도심, 인천항, 월미도는 물론 고려 수도를 품었던 강화도의 진산(鎭山) 고려산과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진산인 문학산 정상까지 미군부대가 눌러앉았다. 인천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곳곳이 사실상 '미국 땅'이 되어버렸다. 원래 땅 주인인 인천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 땅을 밟지 못했다. 이때 인천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출입구이자 병력과 물자를 전국의 미군기지로 뿌리는 심장 역할을 했다. 인천항과 월미도에서부터 인천 주요 도심을 거쳐 부평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까지 '미군기지 벨트'가 형성된 이유다.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진주해 부평에 있는 당시 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 주한미군 보급수송본부로 썼다. 1949년 6월 잠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가 한국전쟁 때 돌아온 미군은 부평에 '캠프마켓', '캠프하이예스', '캠프그란트', '캠프타일러', '캠프아담스', '캠프해리슨'을 비롯한 미군기지들을 조성하고 '애스컴시티(ASCOM City)'라 명명했다. 각 미군기지에는 보급창, 주한미군 신병보충대, 주한미군 야전병원(121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수십 개의 단위부대가 주둔한 군수보급기지였다. 주한미군 교도소도 애스컴시티에 있었다.부평 남쪽으로 백운역 일대부터 북쪽으로 한국지엠 인천공장 근처까지 조성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모두 미군기지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부평지역 미군부대가 용산과 평택 등지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축소된 캠프마켓만 남았다. 아직도 캠프마켓에서는 주한미군에 보급하는 빵을 만드는 시설이 가동된다. 캠프마켓은 인천에 마지막 남은 '미국 땅'이다. 애스컴시티는 일본군 군수공장이던 일제강점기부터 인천항과 연결돼 있었다. 이 때문에 주한미군의 보급항인 인천항도 미군이 일부 차지해 1971년까지 미군전용부두로 사용했다. 인천항 주변으로는 미 육군과 해군을 비롯한 항만지원부대가 주둔했다. 현재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월미도 또한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1971년까지 미군부대가 있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 통로인 인천항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인천항으로 들어온 미군 식량·피복·유류 등은 인천항 주변 곳곳에 조성한 미군 창고에 보관됐다. 특히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 일대에는 대규모 미군 유류저장소(POL)가 있었고 '캠프유마', '캠프레노' 같은 유류저장소를 관리하는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미군이 쓸 기름을 수송하기 위한 송유관이 철도를 따라 지상에 깔리기도 했다. 남구 숭의동 일대에도 '캠프에딘버러' 같은 미군부대가 있었으나,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부대의 기능과 규모를 자세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문학산 정상은 미군이 1959년 기지를 조성해 1970년대 초까지 주둔했다. 이후 한국군 공군이 차지했다가 지난 2015년에야 시민에게 개방했다. 문학산 꼭대기에는 미사일통제소가, 인근 봉재산에는 미사일 기지가 있었는데 2005년 영종도로 이전했다. 강화 고려산 꼭대기에는 미군 통신부대가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고려산 아래에 일명 '양공주'들이 모여 살 정도로 미군부대 규모가 컸다는 게 강화 토박이들의 얘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2-04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2)한반도 운명 바꾼 3번의 상륙]침략 - 점령 - 희생

첫 교전 신미양요 '살육과 약탈'해방 직후 인천항 통해 총독부행日서 통치권 인수과정 '한국 소외'6·25 전쟁땐 '인천상륙작전' 무대전세 뒤집었지만 도시는 '초토화'미군의 한반도 최초 상륙지는 인천 강화다. 1871년, 미군은 강화도에 상륙해 상대가 되지 않는 조선군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였다. 신미양요다. 그 70여년 뒤인 해방직후 인천항,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미군이 전개한 3번의 '인천 상륙'은 그때그때 목적을 달리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마다 한반도의 운명은 춤을 추었다.미군의 첫 한반도 상륙의 목적은 '침략'이었다. 1871년 4월 14일(음력)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손돌목 해역으로 들어온 미군 함대와 조선군이 교전을 벌였다. 열흘 뒤인 4월 23일, 미군은 군함과 최정예 해병대를 이끌고 초지진 상륙을 시도했고, 덕진진과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미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사흘 동안 어재연(1823~1871)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군이 전사했고, 민가는 미군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됐다.한국과 미국의 역사상 첫 교전이자 유일한 교전인 신미양요는 이같이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신미양요 수년 전에 일어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침몰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문호개방을 위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강화도는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다. 강화를 비롯한 인천 앞바다가 서구열강과의 전장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다.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끈 미군은 인천항을 통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한반도에 진주해 북위 38도선 남쪽 지역을 '점령'했다. 해방 후 미군의 인천항 상륙 과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시각이 드러난다.상륙 당일에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에 나온 군중에게 일본 경찰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인물인 권평근(1900~1945) 등 2명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들을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됐다.미군 상륙에 앞서 몽양 여운형(1886∼1947)을 비롯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하지 중장은 상륙 이튿날인 9월 9일 서울에 있는 일본 총독부로 곧장 향했다. 이날 일본으로부터 한반도의 38도선 남쪽지역을 넘겨받는 조인식을 가졌다. 일제강점이 공식적으로 끝난 이날 조인식에선 미군정의 개막을 알리는 미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은 주인공이 아니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9월 15일 '구원'을 기치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불리했던 한국전쟁의 초반 전세를 역전했다. 구국의 상륙작전 성공에는 인천의 희생이 뒤따랐다. 아군과 적군의 포격전으로 인천 도심은 초토화됐다. 미군이 상륙 전 사전정지작업을 위해 월미도에 퍼부은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다. 인천항 등 주요 도시기반시설과 수많은 민가가 폭격을 맞아 박살이 났고, 산은 깎이고 벌거숭이가 됐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7-11-30 박경호

[주한 미군과 인천·(1)프롤로그]70년 미군기지도시의 성장과 상처

1945년 해방직후부터 자리 잡아거대한 군시설 지역경제 큰 영향기지촌·범죄·환경오염등 문제도평택 이전 앞두고 관계 돌아보기인천은 주한미군의 가장 오랜 주둔지다.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에 진주해 북위 38도선 남쪽 지역을 접수했다. 그 직후 미군은 인천 부평에 있는 한반도 최대 규모의 일본군 군수공장(조병창)을 보급기지로 전환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으로 확대했다. 지금까지도 70년 넘게 부평 땅을 차지하고 있는 44만㎡ 규모의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는 옛 애스컴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수도 서울에 인접한 데다가 항만까지 낀 인천은 지정학적으로 '미군기지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월미도에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30년 넘게 미군이 주둔했다. 인천항에서는 애스컴과 연계한 미군전용부두가 30년 넘도록 운영됐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의 대규모 유류저장소가 있었고, 미군이 쓸 기름을 수송하는 '파이프'가 도심을 가로질렀다. 미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철도가 거미줄처럼 깔렸다. 인천의 진산(鎭山)이라 불리는 문학산 정상에도 산을 깎아 미군부대를 조성했다. 이 밖에도 인천 곳곳에 미군부대가 눌러앉았다. 수많은 인천사람이 미군기지에서 근무해 먹고살았고,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PX물자가 수많은 인천사람의 생계를 책임졌다. 미군을 상대로 한 사업을 기반 삼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인천기업도 있다. 그만큼 '미군 경제'가 인천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다.하지만 미군이 인천에 남긴 상처 또한 깊다. 미군기지 주변에 조성된 기지촌, 기지촌에서 미군 병사를 상대한 여성들과 혼혈아 문제, 살인이나 강도를 비롯한 미군 범죄 등은 한국정부조차 손대기 어려운 문제였다.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과 유류 등으로 뒤범벅된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으로 남았다.주한미군이 인천에서 완전히 철수할 날이 멀지 않았다. 평택미군기지 조성작업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인천 도심에 유일하게 남은 미군기지인 캠프마켓의 평택 이전 시점도 내년 말께로 가닥이 잡혔다. 최근 환경부가 캠프마켓 내부 환경오염이 복합적이고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오염 치유비용을 누가 댈 것인지'가 한·미 간 미군기지 반환 협상의 막판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군이 오염시킨 해외 미군기지 땅을 스스로 책임진 적은 없지만, 인천 지역사회에선 미군의 '원인자 부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1949년 6월부터 한국전쟁까지 1년여 동안 잠시 철수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미군은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70년 넘게 인천에 주둔하고 있다. 미군은 무엇을 위해 인천에, 나아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을까.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미군이 주둔한 인천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감내한 희생은 무엇일까.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거나 차지했던 인천 땅에 애초 미군기지가 없었다면, 그 풍경은 지금과는 어떻게 달랐을까. 오염된 캠프마켓 정화부담은 누구의 몫일까.경인일보는 이 같은 질문을 품고 인천의 주한미군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희미해지는 주한미군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내년이면 인천의 품에 안길 부평미군기지 땅을 어떻게 맞을지, 어떻게 가꾸어 후대에 물려줄지 생각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애증의 공간-주한미군의 가장 오래된 주둔기지인 인천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전경. 지금까지도 70년 넘게 부평 땅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인천사람이 미군 경제에 의지해 살아왔지만, 미군이 인천에 남긴 상처 또한 깊게 기억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11-28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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