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4]롯데-6 대재벌로의 도약

기시 노부스케 前수상 매개프로야구단 오리온스 인수現 총리대신 아베의 외조부1960년대 초 첫 만남 추정국교정상화 이후 위상 짐작1968년에는 나가다 마사이치(永田雅一)가 운영하던 일본 프로야구단 다이마이(大每)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했다. 모기업인 다이에이가 경영위기 상태였는데 1957~1960년 일본 수상을 역임한 일본 정계 우파 본류의 거물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의 매개로 신격호의 소유로 넘어온 것이다. 기시는 1920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상무성의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1939년 3월에는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해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일본 정계 거물과 인연1941년에 귀국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에는 도조 히데키(1884~1948) 내각의 상공대신에 취임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에는 연합군 측에 의해 A급 전범이 되었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후 정계에 진출해서 총리대신이 됐다.기시의 형인 사토 이치로는 일본해군 중장 출신이고 1974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1901~1975)는 기시의 친동생이었다. 기시의 본래 성씨는 사토였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에이사쿠는 형인 기시의 도움으로 일본 정계에 입문해서 1964년부터 1972년 9월까지 7년 8개월간 재임한 일본 최장수 총리이기도 하다. 또한 기시는 일본 최장수 외무장관을 역임한 아베신타로(1924~1991)의 장인으로 일본의 현 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적극 찬성혈혈단신의 식민지 백성인 신격호가 자신보다 무려 26세나 많은 기시 노부스케와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는 미스터리이다. 1990년대 말에 신격호는 "나와 기시 선생과는 3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다"고 고백한 터여서 기시와 신격호와의 첫 만남 시기는 대략 1960년대 초반쯤으로 추정된다.('신격호의 비밀', 175쪽) 고립무원의 이방인인 신격호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 기시 노부스케와 인연이 닿았다는 것은 롯데의 승승장구를 짐작하고도 남는다.신격호는 한국인으로는 유창순 전 국무총리,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박용학 전 무역협회장, 이승윤 전 부총리 등과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적극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박정희 개발독재의 유력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신격호는 한일회담 대표나 주일 한국 대사가 도쿄에 부임하면 개인 소유의 가루이자와 별장을 사용하도록 했다.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 반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가 교환됐다.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로 그는 박정희와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국교를 수립했다. 한일회담 성사에 막후에서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신격호의 일본과 한국에서의 향후 위상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지난 1968년 나가다 마사이치가 운영하던 일본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하는 등 대재벌로의 도약을 노렸다. /연합뉴스

2019-11-1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3]롯데-5 대재벌로의 도약 예정

메이지·모리나가제과 '아성'스위스출신 기술자 스카우트세계수준 새로운 제품 생산아이스크림·비스킷등 투자청량음료로 식품다각화 성공신격호는 롯데 껌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1961년에 초콜릿 제조 사업에도 착수했다. 추잉껌만으로는 기업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의 초콜릿 소비 증가도 한몫 거들었다. 일본인들은 집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주로 생과자나 '센베이'(일본 전통의 전병)을 내놓는데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초콜릿으로 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61년은 일본 내 소비문화 개화기를 맞아 정치인들이 '소득 배증'을 공약으로 내걸던 시기였다.>> 1964년 '가나' 첫 출시당시 일본의 초콜릿 시장은 메이지(明治)제과와 모리나가(森永)제과가 석권하고 있었는데 후발업체인 롯데가 이들의 아성에 도전한 것이다.초콜릿 산업은 과자 산업 중에서 '중공업 클래스'라 일컬어지는데 제조방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릿 시장을 석권하면 제과업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전체 과자류 소비 중에서 초콜릿 비중이 높다. 초콜릿이 '맛의 예술품'으로 불리는 이유이다.신격호는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부터 구상을 확실히 했다. 시작부터 국제수준의 신제품을 만들어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누르겠다는 전략이다. 1961년 11월 신격호의 밀명을 받은 노나카와 오토모리 두 사람은 산업시찰이란 명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초콜릿 제조기술자 스카우트 작업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밤낮으로 기술자와 기계설비를 물색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6개월 이상 노력한 끝인 1962년 7월에 스위스 태생의 초콜릿 기술자 막스 블락 스카우트에 성공했다. 1921년생인 블락은 유럽 초콜릿 업계에서 '무슈 블락'으로 불린 유럽 최고 기술자 중의 한 명이었다.도쿄만 입구 남단에 위치한 우라가시의 누마가게 지구에 3만3천평의 초콜릿 전문공장에 세계 최고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1964년 1월에 롯데초콜릿 제1호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출시했다. 가나는 세계 최고 품질의 카카오 콩을 생산하는 국가이다. 도쿄 민방TV 3국의 비어있던 스팟을 전부 매점해서 1주 단위로 500번의 CM(Commercial Message)을 반복해서 흘려보냈다. 스위스 고유의 악기인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으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 종합 과자 메이커 시도롯데는 추잉껌과 초콜릿으로 종업원 3천명에 연 매출액 700억엔 규모로 성장했다. 롯데의 PR전략은 성공했다.1968년 롯데는 종합 과자 메이커를 시도해서 사이타마현 사야마에 캔디 공장을 건설해서 1969년 9월에 준공했다. 초콜릿처럼 프랑스 캔디의 대명사 '봉봉' 제조명인인 조르주 보당을 스카우트해서 1969년 말부터 '코코롤'과 '초콜릿캔디'를 출시했다. 캔디 종류는 1975년 말까지 100종에 달했다.1972년 3월에는 아이스크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와 영국, 덴마크에서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아이스크림을 새로 선보이는 한편 1974년에는 비스킷 생산에 도전했다. 1973년 말 제1차 석유파동 여파로 고물가 속의 불경기 즉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국민경제 전체가 가라앉았음에도 투자에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의 연간 비스킷 소비는 1천400억엔으로 이윤은 적었지만 수요가 있는 안정상품인 것이다.사야마에 35억엔을 투입해서 공장을 건설하고 전문기술자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라이언 헌터를 초빙해 1976년 11월에 시제품을 선보였다. 1968년에 설립된 롯데물산에선 한국에서 인삼을 수입해 시판 중이었는데 1972년에는 대량의 인삼 재고가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이를 음료로 만들어 마시기 쉽게 100엔짜리 인삼드링크 캔 '진업'을 선보였더니 단기간에 소진됐다. 이를 계기로 롯데는 청량음료 생산 사업을 본격화해서 식품 다각화에 성공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 명예회장은 껌에 이어 1961년 초콜릿 제조 사업도 시작했다. 그 결과 1964년 1월 롯데초콜릿 제1호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출시했다. 사진은 현재의 롯데 가나 초콜릿. /롯데제과 제공

2019-11-1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2]롯데-4 '추잉껌' 세계 제패·(하)

천연치클로 고급화 승부수바브민트·스피아민트 출시소비자들 인기 '고공 행진'1959년 2월 '롯데상사' 설립세계최고 제품에 '도전장'롯데껌 출시로 가능성을 확인한 신격호는 우선 하리스부터 잡기로 했다. 하리스는 일본 패전과 함께 만주에서 철수한 일만식품 직원들이 가네보에서 자금을 융통해 1947년에 설립한 껌 메이커였다. 방적 공장은 제조과정에서 껌의 베이스가 되는 수지를 대량으로 토해낸다. 가네보에서 기술까지 지원받고 모리나가(森永)의 유통망을 이용함으로써 하리스는 단기간에 일본 껌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1955년 일본의 추잉껌 연간 생산액은 54억엔인데 하리스가 25억엔으로 1위이고 롯데는 12억엔이었다.>> 생산 1위 '하리스' 잡기신격호는 궁리 끝에 "미국 껌 원료는 천연치클이지만 하리스 껌은 합성수지로 만들었다. 하리스에 대항하는 데는 천연치클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합성수지보다 값이 비싼 천연 치클로 고급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겠다는 것이다.천연치클은 남미의 멕시코나 브라질 등에서만 생산됐는데 일본 정부는 당시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모 상사가 전기절연체 원료로 천연치클을 수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숙원인 천연치클을 확보해 이를 원료로 1954년 1월에 10엔짜리 '바브민트'를 출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20엔짜리 '스피아민트'까지 출시해 소비자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하리스에 대한 롯데의 우위가 점차 기정사실화하던 1959년 2월에는 자본금 1천만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했다. (주)롯데 판매부의 오사카지사, 후쿠오카지사, 나고야출장소, 삿포로연락소 등을 롯데상사의 지점으로 개편해서 통합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1961년에 롯데는 당당히 하리스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에 등극했다. 기회포착의 명수 신격호의 승리였다. 껌 제조 4년 만에 신격호는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껌 시장이 확대되면서 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1956년에는 세계최대의 껌 메이커인 미국 리글리가 일본에 상륙함으로써 롯데는 설립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는다. 신격호는 '세계 최고 껌 메이커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도 따라 잡기'로 결심했다.리글리의 출발은 창업자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W. Wrigley. Jr)가 1891년에 껌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리글리는 부친이 제조한 비누판매를 계기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도시를 전전하면서 비누 세일즈에 나섰는데 판매가 부진한 때는 베이킹파우더 같은 광고용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후 베이킹파우더의 수요가 비누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베이킹파우더 판매에만 전념했다. 그는 베이킹파우더를 더 많이 팔기 위해 껌 2통을 덤으로 끼워줬는데 소비자들에 껌이 훨씬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 1966년, 롯데의 승리최초의 리글리 껌 상표는 1892년에 나온 로타(Lotta)와 베서(Vassar)였다. 1년 뒤 리글리는 오늘날에도 판매되고 있는 브랜드인 주시프루트(Juicy Fruit)와 스피어민트(Spearmint)를 내놓았다. 그는 신문 광고와 대대적인 플래카드로 자신의 껌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또한 수많은 도시를 순회하며 판촉용 껌 선물 공세를 편 결과 1910년 캐나다, 1915년 오스트레일리아, 1927년 영국, 1939년 뉴질랜드 등에 현지공장과 지사를 설치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서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유럽을 석권하는 유명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롯데와 리글리는 일본의 껌 시장 석권을 위해 10여 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는데 1966년에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부터 롯데는 일본 껌 시장의 최대강자로 자리매김했다."젊은 시절엔 고학생이었으니까 학비나 벌면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엔 돈 버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을 탐탁잖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본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입니다."('신격호의 비밀', 175쪽)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당시 대히트송을 탄생시킨 롯데껌의 대표격인 주시후레쉬는 미국의 껌 메이커인 리글리와의 한판승부에서 이겨내며 일본 껌 시장의 최대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롯데제과 제공

2019-11-0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1]롯데-3 '추잉껌' 세계 제패·(상)

1948년 자본금 100만엔으로日정착 8년만에 '롯데' 설립마케팅 능력 탁월 '급성장'품질로 승부 연구에 공들여30억엔 시장 경쟁서 '생존'히까리연구소가 성업 중일 때 신격호에게 또 하나의 사업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는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일본에는 1945년 미군의 진주와 함께 초콜릿, 통조림, 담배, 추잉껌 등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1946년부터 풍선껌이 대유행했다. 어느날 풍선껌을 만드는 친구가 찾아와 신격호에게 풍선껌 제조를 권했다.>> '다크호스'로 부상당시 일본에서 풍선껌은 비행기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塗料)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바나나 냄새 비슷한 향료 등을 추가해서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가마솥과 요리용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는 350~400개의 풍선껌 제조업체들이 난립했다. 껌은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순이익이 판매가격의 50% 정도여서 사업성이 충분했다.24세 청년사업가 신격호는 1947년 4월부터 껌 제조에 착수했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원료조제의 정확성을 위해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했다. 그가 만든 2엔짜리 풍선껌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시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자신을 얻은 신격호는 풍선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한편 1948년 6월 28일에 종업원 10명에 자본금 100만엔의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사업목적으로 청량음료, 시럽류, 냉과, 냉동식품, 낙농, 화장품 및 치약, 구강청량제, 화공 약품, 의약품, 합성수지 제조가공 등이었다. '롯데'라는 상호는 신격호가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는 청년 신격호가 사모하던 상상 속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신격호가 낯선 일본 땅에 발을 디딘 지 8년째 되는 해이다. 초기 추잉껌 제조법은 유치했다. 신일본질소(주)에서 제조한 질소비닐을 껌의 베이스로 사용했는데 질소비닐에는 초산에틸렌 50%가 함유됐다. 설탕은 통제물자여서 대체품으로 사카린이나 사탕 대용물질인 둘찐을 사용했다. >> 설탕, 통제에서 풀려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주)롯데는 신격호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1948년 당시 일본에서는 '하리스' 추잉껌이 최고인기였다. 신격호는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삼각형 모양의 풍선껌에 대나무 파이프를 붙였다. 껌을 씹은 후 대나무 파이프 끝에 달아 입으로 불면 비눗방울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이어서 공전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롯데는 어느새 군소 메이커를 내치고 다크호스로 떠올랐다.1952년에는 제과업계의 숙원이 이뤄졌다. 설탕이 통제에서 풀린 것이다. 껌의 이상적인 품질은 껌 베이스 40%, 설탕 60%로 여기에 향료를 섞어 메이커별로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다. 신격호는 품질로 승부하기로 하고 연구에 공을 들였다. 이 무렵 일본의 추잉껌 시장은 30억엔이었는데 경쟁에서 살아남은 업체는 도쿄의 롯데와 킹토리스 등 5사와 나고야의 코엔, 일본푸드 등 5사, 그리고 오사카의 하리스, 릴리, 세이코 등 3사 등 대략 13개 업체가 살아남았는데 오사카의 하리스가 절대 강자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에게는 또하나의 사업이 주어졌는데 바로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사진은 롯데의 대표적인 추잉껌. /롯데 제공

2019-10-28 신창윤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0]롯데-2 주경야독과 사업의 시작

홀로간 도쿄서 알바·자취'성실' 눈 여겨본 하나미쓰'커팅오일 공장' 사업 제의미군기 잇단폭격에 문닫아종전후 재기 마음의 빚갚아신격호는 19세 때인 1941년에 아내를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도 벌고 못다 한 공부를 위해서였다. 부친은 그의 일본행을 반대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먼 친척으로부터 50엔, 사촌형 신병호에게 30엔을 빌리는 등 도일자금 83엔을 마련했다. 83엔은 당시 면서기의 2개월 치 봉급에 해당했다.도쿄에 도착한 신격호는 미리 연락해둔 그곳의 고향 친구들을 찾았다. 그들은 스기나미구(衫竝區)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 8장짜리 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 83엔 품고서 일본 유학신격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음날부터 우유 배달을 하는 한편 와세다(早稻田)중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었다. 당시 일본의 사학은 식민지 출신 유학생에 개방적이었다.이후부터 주경야독의 고학생 생활이 개시됐다. 친구의 하숙방에서 6개월쯤 얹혀살다 한 평 반짜리 방 하나를 얻어 독립했다. 틈날 때마다 간다 거리의 헌책방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독파했다. 당시 격호 청년의 고학생 시절을 지켜본 풍산그룹의 류찬우 회장은 "그 시절 신 회장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했다.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를 선택했다. "전쟁준비에 부산할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공과를 지망하게 됐는데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3류 문사(文士)쯤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이종재, '재벌이력서', 171쪽)>> 전당포주인 운명적 만남제2차 세계대전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4년에 그에게 사업기회가 주어졌다. 고학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신격호를 평소에 눈여겨봤던 전당포 및 고물상 주인인 60대의 하나미쓰가 어느 날 찾아온 것이다. 신격호는 한때 하나미쓰가 운영하던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신뢰했다.하나미쓰가 신격호의 근면함에 후한 점수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내가 참 부지런하다고 자찬하는 사람이거든. 살면서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둘 봤다. 관직에서는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이다. 롯데에서 20년간 신 회장이 일하는 걸 보니 새벽이든 밤이든 어찌나 부지런한지. 저러니까 혼자서 큰 기업을 일궜구나 싶더라고."(노신영 전 국무총리, '동아일보' 2016.1.4.)하나미쓰는 신격호에게 군수용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안했다. 커팅오일은 기계를 연마하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윤활유였다. 소요 자금 6만엔은 하나미쓰가 전액 출자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일류 회사원의 한 달 월급이 80엔에서 100엔 정도로 6만엔은 거액이었다.신격호는 하나미쓰의 제의를 받아들여 도쿄 오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서 사업에 착수했으나 가동도 하기 전에 미군 B29기의 포격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하치오지 부근에 새로 공장을 마련해 생산에 착수, 1년여 운영하는 동안 사업은 잘됐다. 그러나 이 공장 또한 미군기의 포격으로 문을 닫았다. 사업자금 6만엔은 고스란히 신격호의 빚으로 남았다.패전 후인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 오구보4의 82에 있는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숙소 겸 새 사업장을 차렸다. 전쟁 중 공습으로 절반 정도 파괴된 형편없는 벽돌집이었다. '히까리(光) 특수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사업에 착수했다.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했다. 오랜 기간 전쟁으로 생필품이 매우 부족해 신격호가 생산한 제품은 출하되자마자 순식간에 소화됐다. 납품과 수금을 위해 하루 평균 200곳의 납품처를 돌아다녀야 했지만 공장 운영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 엔을 전부 상환함은 물론 은인 하나미쓰 노인에게 이자로 집을 한 채 사주었다."신 회장은 이때 사업의 묘미를 터득했다고 한다. 즉 시의적절한 상품개발, 수요예측,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 등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6일 '人物탐구')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연합뉴스

2019-10-2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9]롯데-1 공부엔 뜻이 없었던 신격호

잦은 결석 신통치 않은 성적언양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큰아버지 '신진걸' 학비대줘울산농업보습학교 겨우진학말수 적고 신중 '바둑' 즐겨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辛格浩)는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에서 20여㎞나 떨어진 산골 마을인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377에서 농부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경부고속도로 언양 나들목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울산 방향으로 약 6㎞쯤 가면 울산공업단지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대암호 부근에 있다. 그는 8세 때인 1929년 4월 4년제이던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33년에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란 이름으로 제5회 졸업생이 됐다. 1933년 4월에 읍내에 있는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의 5학년에 편입했는데 당시 그의 학업성적은 57명 중 42등이었다.>> 산골마을 5남5녀 '맏이'"그는 클라스 메이트들보다 나이가 2~3세 어렸을 뿐 아니라 통학 거리가 물막이고개 너머로 나 있던 당시의 지름길로 다니더라도 왕복 40리가 넘어 어린 나이에 통학만으로도 힘에 부쳤는지 모른다.(등하교 거리 때문에 무리해서 그랬던 것일까. 5학년 한 해 동안 '병'으로 30일간이나 결석했다.) 6학년 때의 성적은 더욱 떨어졌다. 일본어, 산술, 일본사, 지리, 창가 성적은 10점 만점에 각 5점이고 조선어 성적은 4점이었다. 6학년 때도 30일간 결석했다. 이번에는 '병결이 아니라 무단결석'이었다."(정순태, '신격호의 비밀' 1998, 지구촌, 55쪽)신격호는 공부엔 별로 뜻이 없었던 모양이었다.1935년 3월 언양공립보통학교의 제20회 졸업생이 된 신격호는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요즘의 중고등학생에 해당하는 농업학교 학생이 한 마을당 1~2명 정도이고 고보(高普) 학생은 1개 면에 1~2명에 불과할 정도였다.무위도식하던 신격호는 큰아버지 신진걸(辛鎭杰)이 학비를 대주어 1936년 4월 언양에 있던 울산농업보습학교(현재 언양중학교)에 진학했다. 본관이 영산인 신격호의 집안은 400년 동안 이곳에 뿌리를 내렸지만 증조부 때부터 가산이 기울었다. 신격호의 조부는 슬하에 장남 진걸과 차남 진수 형제만 뒀는데 진걸은 이재에 밝았을 뿐 아니라 인물도 걸출했다. 경남도청 소재지이던 진주에서 고학으로 신학문을 배운 진걸은 울산군 재무과 측량기사를 거쳐 상남면장을 지냈다. 1919년 퇴직과 함께 부동산 매매업으로 치부해서 논 100마지기를 소유해 둔기마을 제1의 부자가 됐다.신격호의 부친 진수는 상속받은 재산도 별로 없는데 다 금전에도 담백한 사람이었다. 신격호 집안의 재력에 대해 울산농업보습학교의 학적부에는 '논 15두락, 밭 35두락, 산림 8반보, 기타 250엔 등으로 생활정도는 보통'으로 기록돼 있다. 이 정도 규모이면 중농에 해당하나 10남매를 양육해내기에는 벅찼을 것이다.('신격호의 비밀', 60쪽) >> 기술직 말단 '양털깎기'2년제였던 울산농업보습학교에서도 학업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별로 크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으며 행동도 신중했는데 특히 그는 바둑을 즐겼다.('신격호의 비밀', 5천159면)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신격호는 18세 되던 해에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한 살 아래인 상남면(현 상동면)의 노순화(盧舜和)와 결혼하면서 경남 양산 통도사 인근의 경남도립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다. 기술직 최말단으로 업무는 양털 깎기와 양돈 등인데 박봉이어서 가난을 면치 못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는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주군에서 5남5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롯데는 모기업인 롯데제과가 설립되면서 기업의 서막을 열었다. /롯데 제공

2019-10-1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8]에스케이-17(끝) SK 그룹 일대기

선친 타계후 열린 가족회의장남 최태원에 지분 몰아줘20주년, 329만주 대거 넘겨동생 최창원 부회장은 제외지배구조 변화 무관함 강조SK그룹은 1953년 섬유에서 출발해 사업의 중심을 에너지, 이동통신, 반도체 등으로 주력사업을 바꾸면서 성장을 도모했다. 2018년 9월 기준 SK그룹의 공정자산은 213조2천50억원으로 1위 삼성, 2위 현대차에 이어 재계서열 3위에 랭크됐다. SK그룹은 정상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대박의 행운(?)을 잡으며 급부상한 나머지 항간에는 정경유착 의혹들이 난무했었다.SK그룹은 오너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재 SK그룹의 경영권이 창업 2세대로 넘어왔지만 아직은 계열분리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SK그룹은 사촌 간에 경영을 분담하고 있다 .>> 사촌 간 '경영 분담'최종건 창업주의 둘째 아들이자 실제 장남 역할을 하는 최신원 회장이 SK네트웍스를, 3남 최창원 부회장은 SK 디스커버리(SK케미칼)와 가스, 건설 등을 독자 경영하고 있다. 최신원 회장은 가스레인지, 식기세척기, 가스오븐레인지, 산업용 송풍기, 환경설비, 정수기 등을 생산하는 동양매직을 2016년 11월에 인수해 SK매직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동양매직은 1985년에 동양시멘트의 기계사업부를 모체로 탄생했으나 동양그룹 해체와 함께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SK 품에 안긴 것이다. 최신원은 2017년에 LPG 충전사업 및 충전소 등을 최창원 부회장 계열의 SK가스에 넘겼다. 최종건 창업주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에 지병으로 향년 49세로 사망했다.고(故) 최종현 2대 회장은 슬하에 2남 1녀를 뒀는데 장남 태원은 SK그룹의 회장을, 차남 재원은 SK E&S의 부회장을, 장녀 기원은 행복나눔재단의 이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간의 역할분담도 주목거리다. 최 수석부회장은 SK텔레콤 등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2013년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2016년 7월 29일 수감생활 3년 3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최재원은 구속 전까지는 SK네트웍스 이사회 의장과 SK E&S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주요 계열사에 대한 보유 지분은 거의 없다. 1998년 선친 타계 이후 열린 가족회의에서 리더십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속 지분을 모두 형인 최태원 회장에게 넘기기로 했기 때문이다.2018년 11월 최태원 회장은 친족 23명에 대략 1조원 규모의 SK(주) 주식 329만주(4.68%)를 깜짝 증여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SK家 3세들에 쏠린 눈"회장 취임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성원해준 친족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다. 계열분리나 지배구조 변화와는 무관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세간에는 오너일가의 대규모 주식증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하지 않다. 최태원 회장의 주식 수증자 23명 중 최창원 부회장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사촌 형인 최신원 회장에게 280여억원 상당의 주식 10만주를 증여했었다. 참고로 최창원 부회장은 SK디스커버리의 최대주주(40.18%)로서 독자경영체제를 갖추고 있다.3세 경영문제도 눈길을 끈다. SK가(家) 3세들의 경우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의 외아들인 최영근(SK케미칼 지분 1.46% 보유)은 SK그룹 계열사인 SKD&D에서 경영수업 중이다. 그는 2019년 4월 3일 마약(액상 대마)을 상습적으로 흡입한 혐의로 구속돼 인천지법 재판에 회부됐다. 최신원 회장의 외아들인 최성환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1981년생인 최성환은 2009년 SKC에 입사했으며, 현재 지주사인 SK(주)에서 사업포트폴리오 부문 상무로 재직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은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학교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잠시 SK그룹에 몸을 담았다가 현재는 퇴사한 상태이며 둘째 딸 최민정은 해군 장교로 근무하다 중국의 투자회사에 근무 중이며 장남 최인근은 미국 브라운대에 재학 중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그룹은 섬유에서 출발해 사업의 중심을 에너지, 이동통신, 반도체 등으로 주력 사업을 바꾸면서 성장했다. 사진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19 이천포럼' 행사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인공지능 등 혁신기술 활용, 딥 체인지 가속화에 관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SK 제공

2019-10-0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7]에스케이-16 용인 원삼면 최대 반도체단지

448만㎡ 10년간 120조 투자D램·차세대 메모리 4개라인2024년 완공… 협력사 입주최대 10만명이상 일자리도'中 굴기' 효과적 견제 가능SK가 용인시 원삼면 일대 448만㎡(135만평)에 향후 10년 동안 총 120조원을 투자해서 연산 100조원대의 '반도체 특화클러스터'를 건설하기로 했다. 2019년 2월 21일 SK그룹이 주도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인 용인일반산업단지가 반도체부지 조성을 위한 투자의향서를 용인시에 제출한 것이다. 부지 평탄작업이 끝나는 2022년부터 D램과 차세대 메모리 4개 라인 건설에 착수해서 2024년에 완공하기로 했다. 국내외 장비, 소재, 부품 협력사 50여 업체도 함께 입주한다. 계획대로 투자가 이뤄질 경우 1만7천여 직접고용 및 협력업체까지 감안하면 최대 10만명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추정된다.>> '특화클러스터' 조성 그동안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위해 용인뿐만 아니라 이천, 충북 청주, 경북 구미 등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SK하이닉스가 용인시를 선택한 이유는 인근인 화성시 기흥에 세계 최대의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 공장 17곳을 중심으로 500여 장비 및 부품 협력업체들이 대거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용인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연구원들의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대상이었다. 우수 인재 확보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반도체분야에서는 서울과의 거리가 중요한 변수인 것이다.문재인 정부의 수도권 규제 완화 첫 번째 사례인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가 정부의 심의를 통과했다. 국토교통부는 2019년 3월 15일 열린 국토부 수도권정비실무위원회에서 용인에 조성되는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에 대한 산업단지 공급물량 추가 공급(특별물량) 심의를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실무위원회는 정비위원회 전 단계지만 보통 실무위를 통과하면 정비위원회는 무리 없이 통과해 사실상 본회의의 성격이 짙다. 또한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는 2019년 3월 18일부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2022년 3월 22일까지 이 구역에서 토지를 거래하려면 용인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고 계약을 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허가를 받을 때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SK하이닉스는 기존의 이천공장과 충북 청주 사업장에도 투자를 지속한다. SK하이닉스 본사가 위치한 이천공장은 부지 122만㎡에 2개 라인이 가동 중인데 추가로 M16라인 구축과 연구개발동 건설 등에 약 10년간 20조원 규모를 투자할 계획이다. 한편 청주공장에는 2018년부터 가동 중인 M15의 생산능력 확대를 포함해 약 10년간 35조원을 투자한다.청주공장은 LG그룹의 금성반도체가 1988년 9월에 청주시 흥덕구 향정동 1에 지은 반도체공장으로 'SK하이닉스'의 시발점이다. 1989년 8월 금성일렉트론이 당시 금성사 소속이던 청주공장을 인수해서 금성일렉트론㈜로, 1995년 1월에는 LG반도체㈜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청주공장은 1999년 10월 외환위기 때 국가 차원의 빅딜과정에서 1983년에 설립된 현대전자에 흡수 합병되어 고전했다. 2001년 8월에 현대그룹에서 분리되어 독자경영을 하다 2012년 3월에 SK하이닉스로 변경된 것이다.>> '트라이앵글' 제조거점이로써 SK는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반도체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용인시에 최대 규모의 반도체특화단지가 건설되면 경기 남부지역은 삼성전자의 기흥 반도체공장과 이천시의 SK하이닉스공장을 연결하는 세계최대의 '반도체 트라이앵글' 제조거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2018년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은 86조원으로 세계 1위이며 SK하이닉스는 40조원으로 세계 3위였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도 효과적인 견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향후 10년간 총 120조원을 투입해 세계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건설하기로 하고 용인시 원삼면 일대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경인일보DB

2019-09-3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6]에스케이-15 가습기 살균제 연루의혹

국내첫 '가습기메이트' 개발영유아에 집중… 10곳 고발환경부, 원료 유해성 제기케미칼 前대표 등 재판넘겨SK는 가습기 살균제 소동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란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로 영유아가 사망하거나 폐 손상 등 심각한 건강 피해를 본 사건이다. 의료계가 어린이들의 원인 미상 급성 간질성 폐렴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2월이었다. 1~2세 아기 10여명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급성 폐질환으로 입원하고 70~80%가 폐기흉과 폐 섬유화가 발생하는 등 상태가 나빠져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 괴질은 2006년 말~2007년 초에 다시 집단 발생했고 2007년 말에도 나타났으나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착수한 것은 2011년 4월부터였다. 늑장대응의 몰매를 맞았던 질병관리본부는 같은 해 8월 원인 미상의 폐 손상은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2016년 5월 기준 사망 266명을 포함 1천848명이 넘는다. 특히 피해는 임산부와 영·유아에 집중됐다.>> 폐손상 등 사망자 속출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폐 손상 사망자의 4명 중 1명이 4세 이하의 영유아인 것으로 조사됐다. 치사율도 남아 42%, 여아는 70%에 달하는 등 4세 이하의 유아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은 2015년 12월 자체 조사를 근거로 1천87만명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 이중 최대 227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국내에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선보인 해는 1994년이다. SK케미칼(당시 유공, 현 SK디스커버리)이 1994년 국내 최초로 '가습기메이트'라는 상품을 개발했다. "물에 첨가하면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세균을 완전히 살균해 준다", "세계 최초",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등의 광고를 했다. 이 시기 생산·판매된 제품은 옥시레킷베킨저의 '뉴가습기당번' 외에도 롯데마트, 애경산업, 이마트, 홈플러스, 코스트코, 세퓨·아토오가닉·아토세이프·GS 등에서 생산한 제품까지 20종에 이른다. 1994~2011년까지 17년간 20개 종류의 가습기 살균제가 판매됐고 연간 60만개 정도가 사용된 것으로 파악됐다.질병관리본부는 2011년 11월 11일 가습기 살균제 수거 명령을 내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에 가습기 살균제를 허위로 안전하다고 표시했다는 이유로 옥시레킷벤키저 5천만원, 홈플러스 1천만원, 버터플라이이펙트(세퓨) 100만원 등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항간에는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빚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2012년 8월에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 제조업체 10곳을 형사 고발했으나 검찰은 '피해 조사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를 미뤘다. 2014년 피해자와 가족 102명이 옥시레킷벤키저 등 14개 제조회사를 살인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에선 2016년 1월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옥시와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제조·유통사를 압수 수색하는 등 수사에 나서 역학조사 이후 5년 만에 다시 주목을 받았었다.검찰이 SK와 애경산업에 수사를 본격화한 것은 형사고발 7년 후인 2019년부터였다. 2019년 2월 13일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SK케미칼(SK디스커버리)로부터 원료를 제공받아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만들어 애경산업에 납품한 SK의 하청업체 필러물산 대표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했다. '가습기메이트'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 당시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피해자를 냈지만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에서 제외된 때문이었다. >> 올해 4월 수사 재개검찰의 SK 수사 이전까지 유해성이 입증된 원료는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와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뿐이었다. 그러나 환경부가 2018년과 2019년 초에 SK와 애경산업 등이 만든 '가습기 메이트'의 원료인 CMIT(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 MIT(메틸아이소틸졸리논)도 인체에 유해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2019년 4월 1일 SK케미칼의 부사장 1명을 연구보고서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 재판에 넘겼다.그동안 SK가 은폐해 왔던 '가습기 메이트' 독성실험결과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확인됐다. SK케미칼의 전신인 (주)유공은 1994년에 '가습기 메이트'를 개발하면서 같은 해 10월부터 3개월간 서울대 수의대 이영순 교수팀에 흡입 독성 실험을 맡겼다. 당시 이 교수팀은 실험쥐를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쥐의 백혈구 수 변화가 확인돼 '가습기 메이트'가 인체에 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보고서를 SK측에 전달했었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보고서는 1995년 초에 나왔지만 가습기 메이트는 이미 1994년부터 시판을 개시했다는 점이다.가습기 살균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2015년에 환경부는 SK측에 이 교수의 연구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2016년에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같은 자료 제출을 명했지만 SK측에서는 자료가 없다고 버티다가 추후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SK케미칼이 보고서 사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2019년 7월 23일 서울지검 형사2부는 사건 발생 8년여 만에 SK케미칼 전 대표 등 4명, 애경산업 전 대표 등 5명, 필러물산 전 대표 등 2명, 이마트 전 임원 등 2명, GS리테일 전 팀장 1명 등 책임자 34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번 재수사를 통해 2016년 첫 사법처리 당시 처벌을 피했던 관련자들이 대거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가습기 살균제 소동에서도 피해가지 못했다. 사진은 가습기 참사 구제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집회 모습. /경인일보 DB

2019-09-2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5]에스케이-14 제약바이오사업 강화

국내 첫 후보물질 FDA승인대덕단지내 공장신설 생산2015년 독감백신 상용 성공BMS 원료의약품공장 인수美·유럽에 '판매 전초기지'SK는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차원에서 1993년부터 신약 연구·개발(R&D)사업을 추진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신약 후보 물질(파이프라인)을 미국 식품의약처(FDA)로부터 임상시험승인(IND)을 획득했으며 1999년에는 대전 대덕단지 내에 생산 공장을 신설하고 상업생산에 착수했다.SK케미칼은 2006년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대표이사에 취임한 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신약개발조직인 '라이프 사이언스'를 지주회사인 SK(주)에 직속화해서 그룹차원의 투자에 공을 들였다. >> 신약 연구·개발 추진2007년에는 국내의 세종공장에서 연속 반응공정 양산화에 성공한 뒤 2014년 세계 최초로 FDA 승인을 받았다. 1970년대 유공시절 석유화학 공정에 활용하던 기술을 의약품 생산에 적용한 것이다.2008년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2015년 세포배양 독감백신 상용화에 성공했다. SK케미칼 4가 백신(4종류 바이러스 예방)은 국내 제품 중 유일하게 3세 이상 전 연령층에 접종 가능할 정도로 차별성이 있었다. 2017년 4월에는 혈우병 치료제 앱스틸라(AFSTYLA)가 호주 식약처로부터 시판허가를 받았다.SK케미칼의 후신인 지주회사 SK(주)는 2011년에 사업조직을 분할해서 100% 자회사인 비상장의 SK바이오팜을 신설했다. SK바이오팜은 신약개발을 위한 대전 대덕연구단지 신약개발연구소와 글로벌 임상시험을 담당하는 미국 뉴저지 임상개발센터로 이원화돼 있다.설립 당해 연도인 2011년에 'SKL-N05(솔리암페놀)'의 임상 1상을 완료하고 미국 제약사 재즈에 기술 수출 및 공동개발을 통해 임상 3상 실험을 마무리하고 2017년 12월에 미국 재즈와 공동개발 중인 수면장애 치료제 'SKL-N05'의 FDA 승인신청을 완료했다. 'SKL-N05'는 연매출 1조원대의 선도의약품인 '자이렘'과 비교해 약효가 2배 이상 개선됨으로써 시장의 기대치를 높였는데 2019년부터 미국에서 본격 시판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이 2017년 6월에 입사해서 실무경력을 쌓는 중인데 그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2015 SK바이오텍 설립한편 2015년에는 SK바이오팜으로부터 원료의약품 생산부문을 분리해서 새로 SK바이오텍을 설립했다. 2017년 6월 글로벌 제약사인 미국계의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의 아일랜드 스워즈 원료의약품 생산공장을 인수했다. 이 공장은 연산 8만1천ℓ의 의약품원료를 만들고 있는데 주요 원료의약품은 항암제, 당뇨 치료제, 심혈관제 등 고령화로 수요가 급증하는 품목이다. 스워즈공장은 BMS가 생산하는 합성신약 제조과정 중 난도가 가장 높은 공장으로 지난 10년간 SK에서 원료의약품을 납품해왔었다. 유럽은 북미와 함께 세계 의약품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인데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 중 유럽 본토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직접 보유한 곳은 SK바이오텍이 유일하다.2017년 10월 세종공장(2천562평) 준공을 통해 기존의 대전 대덕단지(16만 ℓ)를 포함해 총생산 규모를 32만ℓ로 확대하고 2018년 1월 미국에 마케팅법인을 설립해 미국과 유럽에 판매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1993년 처음 제약사업에 진출한 이래 25년 동안 수천억 원을 들이며 제약 및 바이오 사업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케미칼은 2006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하는 등 제약 바이오 사업을 강화했다. 사진은 2008년 1월에 신설한 바이오실. /SK케미칼 50년사 발췌

2019-09-1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4]에스케이-13 두번째 구속과 특별사면

김, SK C&C 주식담보 권유형제, 8회 걸쳐 1560억 대출펀드출자금을 개인적 사용재판부 "정당 이윤추구보다일확천금 노려 죄질 불량"2013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를 구속시켰다. 최태원은 징역 4년형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최 부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됐다."SK그룹 총수 최태원은 무속인 출신의 김원홍을 신뢰해 2003년경부터 선물옵션투자 위한 투자위탁금을 송금해 왔는데, 2008년 5월경 더 이상 투자할 돈이 없어 송금을 못하게 되자 김원홍은 당시 주식시장 상장이 논의 중이던 SK C&C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보라고 권유했고 최태원과 동생 최재원은 이 권유에 따라 저축은행에 SK C&C 주식을 담보로 8회에 걸쳐 1천560억원을 대출받았다. >> 최태원·재원 횡령 구속이후 최재원은 김원홍으로부터 '리먼사태가 좋은 투자기회'라는 투자 권유 받고 김준홍에게 SK C&C 주식담보 제공 없이 500여억원의 자금을 조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SK C&C 주식담보비율 과다 이유), 이 지시에 따라 김준홍은 SK(주) 계열사에서 천억원 단위의 새로운 펀드를 출자받고, 출자금을 베넥스자산운용의 계좌로 선지급 받아(최태원의 승낙을 받아 실행했다. 이에 따라 SKT, SK C&C에서 500억원씩 합계 1천억원 가량을 펀드에 출자하고 이를 베넥스자산운용에 선지급하기로 했다) 베넥스는 이 중 447억 원을 투자위탁금 명목으로 김원홍에 송금했다.그러나 김원홍은 위 투자금을 성실히 관리하지 않고, 이전에 28명에 이르는 사람으로부터 투자를 위탁받았다가 낸 손실을 최태원 형제의 돈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자신과 가족의 보험료 납부, 개인 채무 상환, 직원들에 대한 급여 지급, 친인척에 대한 생활비 지급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에 최태원 형제가 위탁한 펀드 출자금은 약속된 기한인 2008년 11월 말까지 돌려주지 못했고 이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최태원 소유의 SK C&C 주식을 담보로 저축은행들로부터 900억원을 대출받아 펀드설립기금으로 사용했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2018 국정감사 정책자료집-6면)재판부는 "최태원이 SK그룹 회장 지위를 악용해 자신의 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그룹 계열사로 하여금 1천500억원을 이 사건 펀드에 출자케 하는 방법으로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최태원은 최재원과 함께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기업경영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이로 인한 정당한 대가를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무속인 출신 김원홍이 신통력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일시에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믿고 일확천금을 추구하기 위해 범행이 비롯됐다는 점에서 죄질이 불량하다"며 특경가법상 횡령 등을 이유로 최태원에게는 징역 4년, 최재원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최태원은 구속수감 924일 만인 2015년에 8·15특별사면으로, 최재원은 3년3개월 복역 후인 2016년 7월 29일에 가석방됐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 7면)>> 최회장, 924일만에 석방최태원은 2005년 6월 1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특경법(배임)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바 있다.김원홍 전 고문은 1961년 경주에서 태어나 1990년대 증권사에 근무하면서 높은 수익률 덕분에 '부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최 회장은 손길승 SK텔레콤 고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1998년 8월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회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최 회장은 최종현 회장 별세 이후 SK그룹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김원홍에게 투자를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관계자는 "당시 그룹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3조원의 돈이 필요했는데, SK C&C 주식을 팔아 지주회사인 SK(주)의 주식을 사려면 2조 원이 부족했던 것으로 안다"며 "김 씨를 통해 선물옵션 투자를 해서 현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재판부는 "이 사건은 김원홍의 간계(奸計)에 최 회장 형제가 속았거나 김원홍과 공동으로 범죄를 모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이데일리', 2013.07.17)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 났다. /연합뉴스

2019-09-0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3]에스케이-12 하이닉스 인수

채권단 지분 21.1% 넘겨에너지·SKT '내수' 감안수출업체 인수 '더 절실'공개매각 응찰 지지부진2011년 인수의향서 제출SK는 2000년대 들어 또다시 초대형 M&A(인수·합병)를 성사시켰는데 그것은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현대전자의 후신)의 경영권도 확보한 것이다. 하이닉스 채권단은 2011년 11월 11일 지분 21.1%를 SK텔레콤에 3조4천267억원에 넘긴 것이다. 하이닉스는 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 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천44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기업이다. 하이닉스를 인수해 종합IT그룹으로 변신시킨다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 주력인 SK에너지와 SK텔레콤이 내수기업임을 감안하면 수출업체인 하이닉스의 인수 당위성은 더 절실했다.SK하이닉스의 전신인 하이닉스반도체는 1949년에 설립된 국도건설(주)가 모체다. 현대그룹은 1983년에 반도체산업에 진출하면서 국도건설을 인수, 상호를 현대전자산업(주)로 변경했다.>> 초대형 M&A 성사현대그룹이 건설회사를 인수해 반도체회사로 전환한 것은 당시 국도건설이 이천에 30여 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전자는 이 땅에 반도체공장을 세우고 1985년에 256Kb D램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생산에 돌입했다.1992년에는 2세대 16Mb D램과 반도체 64Mb D램을 개발했으며 1995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b SD램을 개발하고 1996년 12월에는 기업을 공개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삼성과 현대, LG와 대우, SK 등 5대 그룹에 국한해 계열사들을 맞교환하는 이른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추진했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라고 판단해 기업 간에 서로 중복되는 투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됐는데 빅딜 대상사업으로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 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총 7개 업종이었다. 그러나 해당 그룹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1998년 정부는 전경련을 앞세워 구본무 회장에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부는 빅딜의 기본방향을 재계서열 순위가 앞서는 기업이 후순위 기업의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빅딜에 불응하는 기업에는 대출중단 등을 내세우며 압박했던 것이다. LG반도체는 1989년 5월 청주와 경북 구미에 생산시설을 갖춘 금성일렉트론으로 설립돼 1995년 LG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 효자 기업이었다. 1995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이 9천억원을 기록했다. LG가 승복하지 않자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의 주선으로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다. 이왕 포기하는 거 100%를 현대에 넘기겠다"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현대전자는 2000년 이후 반도체 가격 하락 등의 여파로 경영난에 직면했는데 2001년 3월 상호를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꿨다. 그해 5월에는 통신단말기사업부를 현대큐리텔로 분사하고 통신ADSL사업부는 현대네트웍스로 분사했다. 이 해 8월 현대그룹이 채권단에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경영권 포기 각서를 제출해 하이닉스반도체는 그룹으로부터 분리됐으며 2001년 10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의해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관리가 개시됐다. 2003년 5월 모바일용 초저전력 256Mb S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채권단은 2009년 9월부터 하이닉스반도체 공개매각작업에 착수했으나 응찰기업이 없어 지지부진하다가 2011년 6월 3차 매각 공고 시 SK텔레콤과 STX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STX는 인수 추진을 중단함으로써 11월 SK텔레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2012년 2월 14일 SK텔레콤은 하이닉스반도체의 총 발행주식의 21.05%를 보유하게 됐다고 밝혔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2011년 11월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이에 SK는 에너지·화학과 ICT에 이어 '반도체'라는 제3의 성장축을 구축했다. /SK 제공

2019-09-0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2]에스케이-11 또다른 시련 '소버린 사태'

재벌구조해체 등 '공격 명분'최태원, 끝내 회장직 사퇴2008년 분식회계 혐의 구속MB, 78일만에 '특별 사면'자산 97조420억 재계 '3위'SK그룹은 또 다른 시련으로 고전했는데 2003년에 뉴질랜드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그룹의 모회사인 SK(주)(현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인수를 시도한 때문이었다. 최태원 회장이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되면서 SK(주)의 주가가 급락하자 소버린의 자회사인 크레스트는 자산 30조원의 SK그룹 장악을 시도했다. 1천768억원을 동원해 SK(주)의 지분 14.99%를 확보, 2대 주주로 급부상한 것이다. 워낙에 소버린이 지분을 빠르게 장악했던 나머지 '5% 지분 공시' 룰에도 불구하고 SK그룹은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다.2003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소버린 측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당시 최 회장 등 총수일가의 직접 지분은 1.39%에 불과했지만 결국 표 대결에서 최 회장 측이 승리했다. >> 지분 재빠르게 '장악'그 과정에서 지분확보 경쟁이 야기되면서 SK의 주가는 이전의 5천원 가량에서 2004년에는 3만~5만원 대로 급상승한다. 그리고 2004년 10월 소버린이 임시주주총회를 요구하고 2차 공세를 강화하자 SK의 주가는 무려 6만원대로 치솟았다.한편 지분확보 경쟁에서 소버린은 자신들의 SK그룹 공격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다. '재벌구조해체' 내지 '투명경영' 등을 내세운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소액주주와 SK 노조의 지분을 소버린에게 이양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소버린은 2005년 7월 SK(주)의 지분을 전량 처분, 8천억원 가량의 시세차익을 얻으며 '먹튀'하고 말았다. 수익률이 2년 만에 600%였는데 이로써 소버린사태는 마무리됐다.2004년 최태원은 SK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2008년에는 1조5천억원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됐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수감 78일 만에 그를 특별 사면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가짜 장부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표면화되면서 노무현 정부가 자진 신고할 경우 처벌을 면제해주는 식으로 분위기를 띄운 터여서 최태원 회장만 단독으로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 탓이다.금융감독위원회와 법무부는 2005년 3월부터 2007년 3월말까지 2년 동안 한시적으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분식회계를 바로 잡을 경우 형사처벌을 면제해주기로 했던바 자수한 기업 수가 총 200여 업체로 국내 상장기업(코스닥 포함) 1천600여사의 8분의 1에 해당했다. 더구나 2008년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시작부터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표방하고 나선 점도 한몫 했다. SK의 분식회계는 국내 재벌들의 고질적인 파행경영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어서 의미가 크다. 정부는 기업 투명성 제고차원에서 분식회계, 허위공시, 주가조작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증권집단소송제를 2005년 1월부터 실시했다.>> 계열사 86개 '그룹 약진'그럼에도 SK그룹의 약진은 계속돼 2011년 4월에는 계열회사 수 86개에 자산총액이 97조42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5위에 랭크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한국전력 등 공기업을 제외하면 삼성, 현대차그룹에 이어 3위다. 1980년대를 경계로 삼성, 현대, LG, 대우 등 빅(big) 4와 나머지 재벌들 간에 양극화가 점차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SK가 톱(Top) 3에 진입한 것이 매우 이채롭다.분식회계로 하루아침에 파산한 미국의 엔론(Enron Corporation)과는 너무 대비된다.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엔론은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2월 2일에 별안간 공중분해 됐다. 2만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2000년 매출 1천110억달러를 달성한 세계 주요 전기, 천연가스, 통신 및 제지 기업의 하나로 '포춘(Fortune)'은 엔론을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엔론의 자산과 이익 수치는 대부분 가짜였다. 어떤 경우에는 엄청나게 부풀려졌으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인 것도 있었고 부채와 손실은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엔론의 실제 수익원은 이 회사의 모태인 노던 내추럴 가스뿐이었다.이 사건으로 당시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스 레이 회장과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은 연방법원에서 사기와 내부자 거래 등으로 각각 징역 24년4개월과 24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엔론의 외부 감사를 맡았던 미국의 5대 회계법인의 하나인 아서 앤더슨 또한 이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해 결국 파산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선진화된 경영 시스템인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경영 효율성과 재무 건전성을 높였다. /SK 제공

2019-08-2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1]에스케이-10 최대의 분식회계

화학·에너지·통신 골격 완성38세 약관 최태원 총수 선임2003년 계열사 59개 재벌3위주식 부당하게 맞교환 혐의회계장부 조작 '최회장 구속'1993년 3월에는 국내 최대의 에너지기업인 SK(주)가 쌍용그룹으로부터 국내 정유 시장 점유율 12.6%의 쌍용정유 지분 28.41%를 인수했다.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 매각과정에서 추가로 1조7천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됐는데 이를 정리하고자 알토란같은 쌍용정유를 매각했던 것이다. 이로써 국내 정유 시장은 종래 5사 분할체제(SK(주), LG정유, 쌍용정유, 한화에너지, 현대정유)에서 SK(주), LG정유, 현대정유 등 3사 지배체제로 단순화됐는데, 특히 SK(주)는 쌍용정유를 인수해 시장지배율이 36.2%에서 48.8%로 크게 향상돼 국내정유업계의 리더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호사다마라 했던가 또다시 위기가 도래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8월 26일 최종현 회장이 향년 68세로 사망한 것이다. 최종현 2대 회장은 친형인 최종건 창업주가 1973년에 향년 47세로 타계하면서 경영권을 물려받아 1980년에 유공(SK이노베이션)을,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인수해 화학과 에너지, 통신의 삼각편대의 SK그룹 골격을 완성했다. >> 최종현 회장 사망더구나 당시는 단군 이래 최대 국난·외환위기여서 매우 엄혹한 시기에 거함 SK호는 탁월한 선장을 잃었다.최종현 2대 회장 사망과 함께 3대 총수에는 38세의 약관이자 최종현의 장남인 최태원이 사촌 형제들을 제치고 선임됐다. 1960년생인 그는 국내에서 고려대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했다가 SK에서 경영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최종건 창업주의 3형제(윤원, 신원, 창원)와 최종현 2대 회장의 형제(태원, 재원) 등 5명의 사촌형제 회동에서 당시 외환위기 속에서 그룹을 이끌 적임자로 최태원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한경비즈니스' <No.1213, 2019.2.25.> 39쪽)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위로 4촌 형제 중 가장 배경이 좋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1999년 10월 SK상사(SK네트웍스)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연간 시장규모 4조원대의 의료용품 유통사업에도 진출했다. 의료정보분야 벤처기업인 비트컴퓨터, 메디다스, 전능메디칼 등과 제휴, 전자상거래를 통해 병원과 약국에 약품과 의료장비 등을 공급할 목적에서였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이동통신업계의 1위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의 코오롱과 포항제철 지분 51.19%를 인수했다. 이에 SK텔레콤은 국내 이동통신 시장점유율 60%를 장악, 최대의 독점업체로 도약했다.2000년 4월에는 한덕생명보험을 인수, 이미 인수한 국민생명과 함께 SK생명에 통합했다.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 여파로 부실화된 두원, 조선, 한국, 한성, 동아, 태평양, 국민, 한덕생명보험 등을 다른 기업들에 헐값에라도 인수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는데 그 일환으로 SK그룹이 한덕생명과 국민생명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SK는 평화은행 카드사업부를 인수해 새로 신용카드사업에도 진출했다.그 결과 SK그룹은 2003년 당시 계열사 수 59개에 자산 50조원의 재벌서열 3위로 도약했다. 대부분의 재벌이 외환위기로 축소경영 등 엄청난 시련을 겪는 상황에도 SK그룹만은 약진을 거듭했다. 이 무렵까지 SK그룹은 '비교적 모나지 않은 그룹이었다. 시류를 잘 타서인지 거대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일이 거의 없었고 재벌개혁을 화두로 꺼낸 현 정부 아래서도 늘 예봉을 비켜가고 있다. 다른 기업들과도 큰 마찰 없이 지내 왔다.'('뉴스메이커', 2001.2.15, 410호)>> 그룹 최대위기 직면그러나 SK그룹은 창업 50주년 즈음 최대 위기에 직면했는데 그 시작은 2003년 2월 최태원 회장이 전격 구속되면서부터였다. 최 회장이 비상장 계열사인 워커힐호텔 주식과 SK C&C가 보유 중이던 초우량 상장기업인 SK글로벌의 주식을 부당하게 맞교환한 혐의 등 때문이었다. 사유는 최태원 등이 워커힐호텔 주식 변칙증여와 SK증권 주식 이면 거래 등을 통해 SK C&C와 SK글로벌에 각각 716억원과 1천355억원 등 총 2천71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특히 이 사건은 진보성향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에 발발했기 때문에 주목 대상이었다. 이후 사정기관의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이 1조5천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사실도 확인됐다. SK글로벌은 2001년도 회계결산을 하면서 가공자산 계상 및 고의로 혹은 부주의로 회계장부에 누락시키는 부외부채 처리, 해외출자회사 평가손실 누락 등을 통해 1조1천881억원의 은행채무를 누락시키고 1천500억원 상당의 허위 매출채권을 만들어 이익을 부풀리는 등 총 1조5천587억원 상당을 분식회계 처리한 것이다. 1995년부터 그룹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일례로 SK해운은 2002년에 페이퍼 컴퍼니인 (주)아상 및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 등에 총 2천900억원을 빌려주고 그중 2천392억원을 연말에 손실로 처리한 것이 노출됐다. 이 때문에 SK해운은 700여억 원의 영입이익을 내고도 2천2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진풍경(?)이 야기됐다. SK그룹은 분식회계 등을 통해 조성한 자금 일부를 정치권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국내 기업 역사상 최대의 회계사기가 적발된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이 타계한 후 장남인 최태원이 사촌형제들을 제치고 3대 총수에 선임됐다. /SK 제공

2019-08-1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0]에스케이-9 이동통신 최강자로 군림

노태우, 끝내 사돈기업 선정김영삼 설득에 최종현 반납대신 '한국이동통신' 인수일제 귀속기업 모체 재벌화 형제경영 성공 대표적 사례선경의 대박 행진은 1990년대에도 계속됐는데 계기는 1994년에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었다. 한국전기통신(현 KT)은 1984년에 소위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서비스 업무를 분리해서 자회사로 한국이동통신을 설립했다. 동사는 1988년부터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무선호출, 차량 전화, 휴대전화에 대한 수요가 점증하는 등 전도가 매우 유망했다. 정부는 이동전화서비스사업을 경쟁체제로 전환하기로 하고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작업에 착수했다. 1991년 7월 23일 국회에서 제2이동전화 사업자 선정기준을 담은 공중전기통신법과 전기통신기본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20C 마지막 대형사업제2 이동통신은 20세기의 마지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돼 선경(유공), 포항제철, 코오롱, 쌍용, 동양, 동부 등이 각축전을 벌인 결과 1992년 8월 20일에 유공과 한전, GTE, 보다폰 등 총 16개 업체로 구성된 대한텔레콤(주)가 최종 선정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제2 이동통신의 낙찰자가 포항제철과 코오롱 등의 컨소시엄인 신세기통신으로 변경됐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임기 말의 (노태우) 대통령이 재계 전체의 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대형사업의 사업자에 자신의 사돈 기업을 선정한 것이다. 이즈음 노태우와 주례회동을 하는 자리에서 나(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임기 말에 이동통신사업이란 막대한 이권을 사돈에게 주면 절대 안 된다고 얘기했다. 노태우는 오히려 '아니 모든 사람이 찬성인데 김 후보만 왜 반대 합니까'하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나는 8월 24일 오전 하이얏트호텔에서 최종현 회장을 만났다. 나는 최 회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현 대통령의) 사돈으로서 최 회장이 반납하는 길밖에 방법이 없습니다.'나는 내가 반드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번 노태우의 결정을 취소할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설득했다.-선경은 25일 오후 사업권 반납을 발표했다."('김영삼 회고록3', 2015, 309-310면)선경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과 노태우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은 노 대통령 취임 7개월 만인 1988년 9월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바 있다. 대신 선경은 선발기업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서 1997년에 SK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항간에는 신설예정인 신세기통신보다 이미 영업 중인 선발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라 판단했다. 한국이동통신은 1999년에 신세기통신마저 인수함으로써 국내 이동통신업계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재벌서열 3위 '급성장'선경은 1980년대 이후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서 급속하게 덩치를 키운 결과 2011년에는 삼성, 현대차그룹에 이어 재벌 서열 3위로 성장했다. 그 와중에서 선경도 국내의 여느 재벌처럼 정치권과의 유대를 돈독히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현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일해재단에 현대, 삼성, 대우, LG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액수인 28억원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장남 최태원의 장인인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30억원의 뇌물을 공여했다. 개발도상국의 성공한 기업에 있어 정치자금 수수는 계속기업화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것이다."SK그룹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88~1993년을 중심으로 전후 몇 년간 급속도로 성장했다. SK그룹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르는 데는 이 기간의 성장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SK그룹의 이동통신사업 진출, 허가, 한국이동통신 인수 등의 과정은 '살아 있는 권력의 사위'이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SK그룹 성장사에서 최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일요신문', 2017.07.24.)창업자 최종건이 적수공권으로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도약의 기초를 마련하고 동생 최종현은 이를 재계서열 3위의 SK그룹으로 발전시켰다. SK그룹은 한화, 두산, 해태, 동양, 하이트, 애경그룹 등과 함께 일제가 남겼던 귀속기업을 모체로 해서 재벌화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 선경은 현대, LG, 한진그룹 등과 함께 형제경영을 통해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이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1994년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최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며 첨단 ICT 분야에 본격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SK 제공

2019-08-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9]에스케이-8 유공 인수·(하)

해운회사 설립 유조선 취역 정유시설 울산항 원유 수송국내 최대 석유에너지 기업22개社 11개로 '대폭 축소'정부 체면 세운 '가지치기'선경은 알 사우디은행으로부터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1억달러의 차관을 도입해서 불하대금 671억7천800만원을 상환했다. 선경은 1982년 상호를 (주)유공으로 변경하고 1985년 대한석유의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해서 선경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전환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어서 특히 주목됐다.선경은 유공 인수를 계기로 국내 최대의 석유제품 판매업체인 (주)흥국상사의 경영권도 확보했다. 흥국상사는 1965년 2월 10일에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된 개인 사업체였다.>> 흥국상사 경영권 확보그러나 1969년 6월에 걸프가 586만달러의 현금차관을 공여하면서 전 주식의 25%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가 1972년 12월에 유공이 흥국상사의 전 주식을 인수해서 유공의 자회사화했던 것이다. 흥국상사는 1980년말 당시 매출액 2천104억원에 매출이익률 6.53%의 초우량기업이었다.1982년 1월에는 자본금 10억원의 유공해운(주)를 설립하고 그해 6월과 7월에 25만 톤급의 대형 유조선 '아나벨라'호와 '야스텔라'호를 파나마로부터 용선해서 취역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라두라누라항에서 원유를 선적해서 정유시설이 있는 울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아세아상선으로부터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인 '코리아스타'호도 용선해서 원유수송에 투입했다.해외유전개발사업도 이때부터 개시했다. 신규로 개발하는 예멘의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원유의 10%를 (주)유공이 가지기로 사전에 예멘정부와 컨소시엄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마리브유전은 1985년 11월부터 개발정 시추와 생산시설 및 수출송유관 건설 등에 착수해서 1987년 12월부터 본격생산에 돌입한 단기간 내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1988년 1월 20일 유공해운 소속의 'Y위너'호가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개발원유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했다.유공 인수와 함께 관련 수직다각화작업을 동시에 병행해서 선경그룹은 종래의 섬유재벌에서 국내 최대의 석유에너지 기업집단으로 전환했다. 더구나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 추세여서 에너지소비의 급신장은 불문가지여서 선경그룹의 비약은 이미 예고됐다.>> 계열사 정리작업 추진그 와중에서 계열기업 정리작업도 추진했다. 1980년 9월27일 정부는 대기업집단의 주력기업 전문화 정책을 단행, 재벌들의 문어발경영 해소를 촉구했다. 선경은 주력사업을 섬유와 석유사업에 한정하고 나머지 사업들은 정리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해외섬유(주)의 월곡공장은 (주)선경에서 인수하고 동천공장은 선경매그네틱(주)로 넘겼다. 선경복장(주)는 (주)선경에서 인수했으며 경영실적이 좋지 못한 선경반도체(주)와 선경머린(주)는 폐업했다. 선경기계(주) 및 선경목재(주)와 중소기업 업종인 (주)워커힐여행사, 워커힐교통(주), 선경식품(주), 선경유화(주)는 매각처분하고 자본참여 형식으로 계열화했던 영남방직(주)는 지분을 매각했다.선경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총 11개 기업을 정리, 계열기업 수가 종래 22개에서 11개로 대폭 축소함으로써 전두환 정부의 체면을 세워줬다. 형식 면에선 매우 파격적이었으나 내용 면에서는 영양가 없는 사업만 골라 가지치기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종현 선대회장이 내한한 사우디아라비아 야마니석유상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SK 제공

2019-08-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8]에스케이-7 유공 인수(상)

'포춘 159위' 국내 정유회사걸프사 철수로 민영화 방침원유 안정확보 최우선 조건삼성·남방개발 제치고 낙점항간에선 '노태우 개입' 루머선경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는데 최대 사건은 (주)선경이 1980년 12월에 국내 최대의 정유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에너지)의 합작선인 걸프사의 지분 50%와 경영권을 함께 인수한 것이다. 유공은 정부가 1962년에 설립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독점 정유회사로 1970년 6월에 미국의 걸프사가 지분 50%를 인수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 괄목할만한 성장유공은 1979년도 매출액이 1조1천200만원으로 단일 기업으로는 국내 최대일 뿐 아니라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1979년도 세계 500대 기업(미국기업 제외) 중 159위에 랭크된 세계적 규모의 정유업체였다. 당시 국내에는 호남정유, 쌍용정유, 현대석유, 경인에너지(한화에너지) 등이 있었으나 국영인 대한석유는 마켓 셰어 1위를 유지하는 리더기업이었다.유공의 민영화 방침이 공개된 것은 제5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0년 10월로 유공의 경영주체이던 미국의 걸프(Gulf)사가 그해 8월 19일자로 철수한 데 따른 후속조치였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경영성과가 신통치 못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1973년 10월 6일 중동전쟁 직후인 11월 6일에 걸프 측은 한국정부에 "(11월) 이후 한국에 원유공급량을 30% 감축하겠다"고 통보했다. 칼텍스(Caltex)는 10%, 유니온 오일(Union Oil)은 20%를 감량하겠다고 통보하는 등 전체적으로 국내의 석유공급량을 한꺼번에 22%나 삭감하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1차 석유파동 당시 OPEC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나라로 간주해 한국에 불이익을 준 것이다. 당시 한국은 중동에서 석유를 100% 수입해왔는데 이 또한 100% 미국계 정유사를 통해 들어오던 참이었다.(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 2010년, 223-4면)>> 사우디와 장기원유 계약1980년 초에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들에 원유도입을 허용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을 정부가 지원하는 내용의 석유수급 조절명령을 발동했다. 종래의 정부 베이스의 원유도입 방식에서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효성, 현대양행, 동아건설, 대한항공, 현대건설, 코오롱, 쌍용, 삼성 등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주)선경은 사우디와 장기원유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1980년 7월 17일부터 국내 정유업계에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이상과 같은 배경으로 1980년 11월 28일에 동력자원부는 걸프가 철수하면서 내놓은 유공주식 50%(2천375만1천771주)의 인수기업으로 (주)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삼성과 선경, 남방개발 등 3개 후보 기업들을 놓고 평가한 결과 선경에 낙점한 것이다. 정부는 유공의 경영권을 국내 기업에 넘기기로 했는데 최우선의 조건을 소요 원유의 장기 안정적 확보능력에 뒀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은 1973년 선경석유(주)를 설립하고 온산에 100만평의 정유공장 부지를 확보했으나 1차 오일쇼크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각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당시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개입해서 성사시켰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지난 1980년 11월 28일 동력자원부가 유공주식 50%의 인수기업으로 (주)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한 경인일보 기사. /경인일보DB

2019-07-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7]에스케이-6 SK그룹 완성

최종현, 증자 재무구조 개선경산 신생공업사 인수 필두'쉐라톤 워커힐' 관광업 진출전자·토건·건설·제조업등수출유망中企 다각화 주력당시까지 선경은 섬유 중심의 수직 다각화 위주였을 뿐만 아니라 다각화 속도도 느렸다. 선경이 오늘날과 같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한 것은 1973년 창업주 최종건 사망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1973년에는 최종건의 사망과 함께 최종현이 선경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최종현은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래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증자를 단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또 새로운 캐시카우의 개발 내지는 기업의 위험분산 차원에서 섬유 이외의 다각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에는 선경개발(관광)과 서해개발(조림), 스카이메리트(봉제),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등을 설립하고 극동창고를 인수하는 한편 영남방직의 경영에 참여했다. 수출에도 주력해 1976년에는 (주)선경(선경직물의 후신)이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다.>> 종합무역상사 지정정부는 ①수출실적 1억달러 이상 ②15개국에 100만달러 이상 수출 ③100만달러 이상 수출품목 15개 이상인 업체에 한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했다. 또한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를 육성하기 위해 1975년 12월 3일에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중소기업의 계열화를 적극 지원했다.선경도 삼성, 현대, LG, 금호그룹처럼 종합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평적 다각화에 주력했다. 1976년 1월 경북 경산에서 볼트, 너트, 톱니 등을 생산하는 자본금 10억원의 신생공업사를 인수한 것을 필두로 6월에는 서울 남대문로 5가 5-3의 동화빌딩(대지 230평, 지하 3층, 지상 9층)을 16억810만원에 구입해 본사사옥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본금 3억원의 선경기계를 선경산업의 자회사로 설립했으며 1973년 3월에는 선경개발이 서울 광진동에 지하 4층, 지상 18층(연건평 1만5천900평)의 특급호텔인 쉐라톤워커힐(540객실)을 개관해서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1961년 사단법인 워커힐이 창립됐고 1962년 국제관광공사에 인수돼 1963년 4월 호텔을 개관했다.한국에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미군을 유치하기 위해 세운 호텔로 '워커힐(Walker-hil)'이라는 명칭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 때 활약한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기리는 의미로 지어졌다. 1968년에는 파라다이스 카지노 워커힐을 개장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특급 관광호텔인 워커힐호텔이 국영기업에서 민영으로 거듭난 것이다.1976년 11월에는 자본금 1억원의 선경금속과 선경매그네틱을 각각 설립했는데 오디오 테이프 제조업체인 선경매그네틱은 당초 자본금 2억5천만원의 수원전자로 출범했었다. >> 다양한 기업군 흡수또 같은 달 대구시 북구 노원동에 소재한 자본금 5억6천만원의 신원산업유한회사도 인수했다. 신원산업은 1969년에 설립된 자전거 제조업체였는데 선경이 인수, 1977년 3월에 선경스마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7년 8월에는 토건업체인 협우산업을 4억6천만원에 인수해 선경종합건설로 재발족하고 그해 12월에는 동일 업종의 삼덕산업까지 인수해서 사세를 확장했다. 달러박스로 회자되던 중동건설특수 및 국내 부동산개발붐에 편승하고자 건설업에 진출한 것이다.1978년에는 전북 군산에 소재한 경성고무를 인수했다. 1932년에 이만수가 설립한 업체로 1936년에는 종업원 수 100명에 일산 500족 규모로 성장한 군산 유일의 한국인 소유 고무신제조업체였다. 초기에는 검정고무신만 생산했으나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표백기술을 적용한 흰 고무신뿐만 아니라 흑색 및 백색 운동화 등으로 제품의 다변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해방 무렵에는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서울 이남지역에서 최고인기를 누릴 정도로 성장했다. 경성고무는 식민지체제하에서 오로지 한국 민초들의 애호품인 고무신 생산에 주력해 민족자본으로 성장한 드문 케이스였다.1978년 7월에는 요트생산업체인 선경머린을 자본금 8천만원에 설립했다.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출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마구잡이식의 수평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서 나머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그 결과 선경은 현대, 럭키, 삼성, 대우, 효성, 국제, 한진, 쌍용, 한국화약에 이어 재계 10위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지난 1976년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되는 등 수출 선봉에 오르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기 위해 폴리에스터 원면을 선적하고 있는 모습. /SK 제공

2019-07-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6]에스케이-5 화섬산업에 진출

일본 데이진과 합작 수원에아세테이트원사 공장 설립최초 폴리에스터 동시 생산정부, 전량 국내 시판 변경'수요량 급증' 날개 돋친듯선경이 재벌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부터 화섬산업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듀퐁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실크처럼 부드러울 뿐 아니라 거미줄같이 가늘면서도 강철보다 강한 꿈의 섬유로 국내에는 1950년 6·25전쟁 때 미군병사에 의해 최초로 소개됐다. 어떤 옷감보다 질기고 가벼우며 세탁이 간편하다는 점에서 가정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1958년까지 국내에 시판되고 있는 나일론제품은 거의 외제 밀수품으로 국산은 1955년부터 태창직물에서 약간씩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경합섬주식회사 설립선경직물이 외제와 비슷한 수준의 나일론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12월부터였다. 1959년 3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산업자금 1만달러를 대부받아 사이징(Sizing) 설비를 도입해서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이 무렵 직물업계는 과잉공급으로 인한 불황에 시달린 데다 나일론 등 합섬직물 또한 외래품이 범람해서 국산직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0년의 4·19혁명은 설상가상이어서 대부분의 기업은 자금난과 판매난, 노사문제 등 소위 '삼난'으로 고전했는데 민주화 물결에 편승한 노사갈등은 특히 경영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선경은 노사분규 없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갔다.선경이 추진해온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차관 지불보증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66년 3월이었다. 당초 선경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 폴리에스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함에 따라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했다.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임에도 아세테이트원사 제조업은 국제적으로 사양산업화해 국내 기업들도 진출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적으로는 아세테이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차제에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가 가능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선경에선 아세테이트원사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 이또주(伊藤忠) 상사로부터 550만달러의 차관을 확보하고 1968년 3월 25일 아세테이트원사 공장을, 6월 10일에는 폴리에스터 공장의 기공식을 각각 거행했다. 폴리에스터 공장은 일본 데이진 측의 협조로 건설됐는데 공장건설 자금은 정부 보유불 694만 달러를 확보해서 조달했다. 당시 정부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국내원사 메이커 '1인자'1966년 6월에 자본금 1억원의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수원 정자동 600에 일본 데이진과 50대50 합작으로 건설한 아세테이트원사공장(일산 5.5t, 1968년 준공)의 본사로 설립된 것이다. 1969년 7월에는 건설 중인 폴리에스터공장을 모체로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산 7t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26%를 점해 국내 최대규모였다.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원사와 아세테이트원사를 동시에 생산하게 돼 국내 원사 메이커의 일인자로 부상했다.선경합섬에 대한 정부의 정책변화는 주마가편이었다. 당초 정부는 전량수출을 조건으로 선경에 폴리에스터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허가했으나 원사생산이 개시되던 1969년에 선경합섬이 생산하는 폴리에스터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하도록 변경했던 것이다.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이 급증한 결과 1968년의 원사수입량은 1967년 대비 114% 증가한 2천928t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수요량이 전년대비 92%가 증가할 예정이어서 국내수요도 턱없이 부족했던 때문이다.선경의 폴리에스터원사인 '스카이론'은 주름이 잘 지지 않아 세탁 후 다림질과 잔손질이 불필요해 국내 소비자들 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화섬산업에의 진출이 지방의 중소기업 선경으로 하여금 굴지의 재벌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폴리에스터를 생산하는 선경합섬을 설립, 공장을 가동해 원사 생산이라는 꿈을 마침내 이뤘다. /SK 제공

2019-07-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5]에스케이- 4 내수에서 수출 중심으로

'닭표 안감' 홍콩 최초 수출1962년 선경산업(주) 설립레이온능직 42만달러 계약'사업몰두'에 박대통령 방문1967년 183만달러 수출공로선경의 본격적인 도약은 1960년대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14일부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내 산업을 외래 사치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일환으로 외국산 면직물과 나일론 직물에 대한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위기국면에 있던 국내 섬유업계 형편이 점차 호전돼 갔다. 아울러 정부는 1961년 8월에 무역법을 제정해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선경은 1962년 4월에 '닭표' 안감 10만마(1만1천300달러 상당)를 홍콩에 처녀 수출했다. 이후 선경은 해외수출에 주력하기 위해 8월 1일에 자본금 1천만원의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종건의 아우 최종현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해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고 귀국,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형제 공동경영형인 최종건은 일을 저지르고 벌리는 반면 동생 종현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이어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부터 선경은 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최종현은 무역업무를 전담했다.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시행했다. 수출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홍콩에 출장을 가서 레이온능직 300만마(42만6천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녀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수출대금 42만6천달러 중 인견사 1천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천달러로 나일론원사의 구상무역허가를 신청했다. 구상무역이란 일명 바터무역으로 국제간의 물물교환 무역을 의미한다. 당시 나일론직물은 인기 절정이었으나 원사수입용 달러화 배정액수가 대폭 감소돼 1963년의 국내 나일론직물의 생산실적은 전년도 350만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해 나일론 생산업체 간에 나일론원사 수입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최종현은 수완을 발휘해서 원사수입 9만달러를 확보함으로써 선경은 일거에 8천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 가치로 약 40억원에 해당한다.이 무렵 선경의 최종건 사장은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 박정희 정부와 인연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최종건) 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시사저널', 2015.03.19, [新 한국의 가벌] #19)이병희(1926~1997)는 용인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8기)를 나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됐다. 서울분실장으로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 중 일부를 강제로 헌납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한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선경은 수출에 올인, 1967년 제3회 수출의 날에는 183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식산포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사업은 순풍의 돛을 단 듯 빠르게 확대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종건의 동생인 최종현은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사진은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당시 선경합섬 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 /SK 제공

2019-07-08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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