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2]롯데-14 국내 최대의 석유화학

몸집 2배 현대유화 2003년 인수합병 글로벌경영 토대매출 1조대 KP케미칼 포함말레이 타이탄까지 M&A2017년 영업익 2조9276억2003년 6월 호남석유화학이 자기보다 몸집이 2배 이상인 현대석유화학(대산유화)을 6천억원에 인수했다. 현대그룹 계열의 현대석유화학은 충남 대산읍 대죽리 753번지에 연산 35만t의 프로필렌, 부타디엔, 스티렌모노머, 에틸렌글리콜 등을 생산하는 대단위 석유화학콤비나트로 1991년 10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대한 건설비 투자에다 공급과잉에 따른 매출부진으로 고전하던 중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뒤 1998년 12월말에는 채무액이 무려 3조2천억원에 이르렀다.>> '그룹 핵심' 롯데 케미칼현대그룹은 외환위기로 인한 유동성 애로로 고전 중이었는데 세계석유화학 경기가 최악인 것은 설상가상이었다.2001년 7월 12일 6천221억원의 유동성 긴급지원을 조건으로 대주주인 현대중공업(49.87%), 현대건설(11.63%), 현대종합상사(6.95%) 등이 출자지분에 대한 완전감자에 동의함에 따라 현대유화가 매물로 나왔다. 현대유화는 2000년 매출 2조2천156억원에 3천783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터에 2001년 1/4분기에만 372억원의 경상손실을 입은 상황이었으나 채권단의 긴급수혈로 부채총액은 2조6천억원으로 축소됐다.채권단은 덴마크 석유화학회사인 보레알레스와 LG화학 그리고 롯데의 호남석유화학 등과 매각협상을 벌였다. 이후 채권단은 현대석화를 LG화학과 호남석유화학에 분할 매각하기로 하고, LG화학이 현대석화 1단지를, 호남석유가 2단지를 각각 인수했는데 신규설비로서 효율성이 더 좋은 2공장을 인수한 호남석유가 선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대유화의 자산가치는 스티렌모노머(SM) 부문을 제외해도 2조8천억원으로 롯데는 대어를 낚았다.롯데는 석유화학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확정하고 2004년 11월에 호남석유화학이 KP케미칼의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으로부터 KP케미칼의 지분(53.8%) 및 경영권을 8천135억원에 인수했다. KP케미칼은 2001년 말 고합에서 유화 부문을 분리해 재상장된 기업으로 PTA(고순도텔레프레탈산 연산 10만t), PX(연산 70만t), 페트병용 수지(연산 40만t) 등을 생산해 2003년에는 매출 1조1천152억원을 기록했다. 매출규모가 1조4천억원 안팎이던 매출 2조3천억원대의 현대유화를 LG화학과 공동으로 인수한 데 이어 KP케미칼까지 인수, 호남석유화학은 매출 3조6천억원대의 초대형 유화업체로 부상했다. 2003년 기준 36개 롯데 계열사 중 1위인 롯데백화점(7조3천억원)에 이어 2위에 해당한다.>> LG화학과 어깨나란히200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경영에 역점을 둔 호남석유화학은 2010년 7월 말레이시아 최대의 석유화학업체인 타이탄케미칼을 인수했다. 타이탄케미칼은 말레이시아 산화프로필렌(PO) 시장의 40%, 인도네시아 폴리에틸렌(PE) 시장의 30%를 점유하는 등 16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해 동남아 시장에서 강력한 사업기반을 구축했다. 납사 및 LPG크래커 72만t을 보유한 것은 물론 말레이시아 조호바루공장이 HDPE/LDPE(56만5천t), OCU(11만5천t), PP(48만t), BD(10만t), 아로마틱(20만t)을, 인도네시아 메락공장이 HDPE/LDPE(45만t)의 공급능력을 갖췄다.그러나 타이탄케미칼 인수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타이탄은 말레이시아의 1호 통합 석유화학업체로 말레이시아정부 소속 투자기관인 PNB(Permodalan Nasional Berhad)와 대만계 미국 석유화학회사 Westlake와의 합작법인이 걸림돌이었다. Westlake가 타이탄 매각에 미온적이었다. 타이탄이 말레이시아 상위 30위권의 대형 상장사라는 점도 난관이었는데, 타이탄 매각작업이 노출될 경우 주주 및 임직원의 동요를 염려한 지배주주들은 호남석유화학의 정밀실사작업에 소극적이었다. 호남석유화학은 비공개 상황에서 인수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 3월 호남석유화학은 타이탄케미칼에 최종 매각의사를 타진하는 한편 그해 6월 실사를 개시했다. 2010년 7월 16일 타이탄케미칼의 대주주인 챠오그룹 및 말레이시아정부의 국가펀드 PNB와 타이탄케미칼 인수를 위한 주식 양수도 계약을 했다. 호남석유화학은 타이탄케미칼 주식 73%를 인수하고 말레이시아 증권거래법의 규정에 맞춰 27%의 잔여지분은 주식시장에서 공개매수해 그 해 11월 9일 인수절차를 완료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인수·합병 중 최대인 1조5천억원 규모의 M&A를 성사시킨 것이다.롯데케미칼(호남석유화학)은 롯데그룹 4개 사업부문의 하나인 화학부문의 핵심기업이다.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을 비롯 프로필렌, 부타티엔 등을 올레핀 제품과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의 아로마틱 제품 및 이를 원료로 한 합성수지, 합성원료, 합성고무 등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전문기업이다. 롯데첨단소재, 롯데정밀화학, 롯데엠알씨, 롯데케미칼타이탄, 롯데BP화학, 한덕화학, 엔스엔폴, 삼박엘에프티, 케피켐텍, 데크항공, 롯데미쓰이화학 등 수많은 화학계열 자회사를 거느린 중간지주회사이기도 하다. 롯데는 2015년 10월 삼성그룹에서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삼성SDI 케미칼부문 등을 인수해서 2016년에 롯데정밀화학, 롯데BP화학, 롯데첨단소재로 상호를 변경했다.롯데케미칼은 2017년 매출액 15조8천745억원에 영업이익 2조9천276억원을 실현해서 창사 이래 최대의 실적을 기록하며 업계 1위인 LG화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케미칼은 지난 2003년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국내 최대 석유화학의 입지를 다졌다. 사진은 당시 현대석유화학 대산공장 전경. /롯데케미칼 제공

2020-01-1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1]롯데-13 유통사업 해외확대

국내 시장 성장 한계 확인2007년 러·중 백화점 오픈2008년엔 인니 마트 진출2010년 산둥 TV쇼핑 인수호찌민 백화점 M&A 성공적 롯데는 2000년대에 유통부문 해외 확대에도 공을 들여 2007년 9월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최초로 백화점을 오픈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국내 업체 최초로 중국 베이징에 백화점을 개설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백화점 사업을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시장의 성장한계가 점차 확인된 탓이다.국내 백화점 업계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롯데가 점유 중임에도 전체 23곳 중 이익을 내는 점포는 서울 명동 본점과 잠실점, 부산점 등 4곳에 불과한 것이다.>> 대륙 창고형 할인점 공략롯데쇼핑은 슈퍼마켓 내지 창고형 할인점의 해외진출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신호탄은 2008년 5월에 중국 마크로(Makro)에서 마트 19곳을 1천615억원에 인수했다. 2009년 12월에는 중국 타임즈(Times)로부터 마트 57점포와 슈퍼 11곳을 7천300억원에 넘겨받았다. 2008년 11월에는 인도네시아 마크로로부터 마트 19점포를 3천900억원에 매입해서 새로운 구매력으로 부상 중인 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대한 진출을 개시했다. 신세계 이마트가 국내에서 유통 1위 자리를 끊임없이 위협 중인 데다 이마트가 선수를 쳐서 중국 공략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점도 롯데 유통부문의 해외진출을 자극했다.2010년에는 산둥 럭키파이 TV쇼핑(Shandong Luckypai TV Shopping)을 인수했다. 롯데는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 롯데홈쇼핑코(Lotte Home Shopping Co, 이하 LHSC)를 설립해 럭키파이 리미티드(Lucky Pai Limited, 이하 럭키파이)를 1천90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대금 중 1천200억원이 웃돈(영업권)이었다. 당초 럭키파이는 홈쇼핑 회사로 알려졌지만 정확히는 산둥 럭키파이 등 15개 회사 지분을 보유한 중간 지주회사다. 산둥 럭키파이 외에도 윈난 마일러 TV쇼핑 미디어(Yunnan Maile TV Shopping Media Co), 충칭 유지아(Chongqing Yujia Co) 등의 홈쇼핑 회사 지분을 49%씩 보유하고 있다. 롯데가 1천900억원을 투입해 럭키파이를 인수했지만 산둥·윈난·충칭 지역 3개 홈쇼핑 회사 지분의 절반을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中 홈쇼핑社 인수 난항롯데가 중국 홈쇼핑 회사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해 방관하는 동안에 산둥 럭키파이는 매출이 급감했고, 충칭 유지아는 2013~2015년 3년간 총 280억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롯데홈쇼핑은 중국 홈쇼핑으로부터 납품 대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롯데홈쇼핑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5억~6억원 씩 총 31억원의 상품을 산둥 럭키파이에 팔았지만, 납품대금을 현금으로 받지 못했다. 현금 대신 받은 채권은 지난 5년간 32억원 넘게 쌓여있다. 그 와중에서 롯데홈쇼핑은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붓고 있다. 업계에서는 "롯데가 중국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말까지 나왔다.2014년에는 베트남 호찌민시의 백화점인 다이어몬드 플라자의 주식 50%를 인수해서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이 빌딩은 지하층을 포함해 총 22층이며 2000년 8월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며 자본금은 6천만달러이다. 인수금액은 확인되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잘된 M&A로 평가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2000년대부터 유통부문의 해외 확대에도 공을 들였다. 영국 아르테니우스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타이탄 케미칼, 중국 럭키파이 인수 등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롯데그룹 제공

2020-01-0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0]롯데-12 2012년 '하이마트' 인수

국내 M&A시장 '대어' 꼽혀유진그룹·선종구 매각 합의2018년 현재 전국 463개 매장14개 물류·11개 서비스센터전용 자재터미널 1개 운영롯데는 2012년에는 국내 M&A 시장의 대어로 꼽히던 최대 가전제품 양판점인 하이마트를 인수했다. 하이마트는 대우그룹의 위장계열사에서 출발했는데 당시 정부는 제조업체가 자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 때문이었다. 대우는 1974년에 대우전자를 설립해서 카스테레오를 수출하다가 1983년에는 '무지개 세탁기'로 유명세를 탄 대한전선의 가전부문을 인수하면서 선발주자인 LG전자, 삼성전자와 국내 가전 시장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롯데쇼핑이 넘겨 받아김우중 당시 회장은 대우제품은 물론이고 국내외의 모든 전자제품도 함께 취급하기를 희망했다. 1987년 6월 대우 임직원 등의 명의로 국내 최초의 종합전자 유통업체인 한국신용유통을 설립했다. 1989년에는 일본의 생활가전 및 컴퓨터 주변기기업체인 조신(Joshin)전기와 기술제휴를 해서 용산 전자랜드 1층에 '하이마트' 1호점을 오픈했다.1999년 대우그룹 해체 후 김우중 회장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당시 대우전자 선종구 판매총괄본부장이 차명주식 전부를 자신 명의로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는 한편 한국신용유통을 대우전자의 국내 판매조직과 통합해서 1999년 12월에 하이마트로 상호를 변경하고 종업원지주회사로 바꿨다. 같은 해에 하이마트는 전국 200여개 직영점과 전국 1일 배송시스템을 구축했다. 2000년 7월에는 새로 인터넷 쇼핑몰(www.e-himart.co.kr)을 오픈하는 등 영업을 강화해서 연매출 1조2천억원을 돌파했다. 2003년 5월 전국 직영 서비스센터를 가동했고, 같은 해 9월에는 하이마트로지텍(주)를 설립했다. 2004년 5월 전자유통업계 최초로 IP기반의 CTI 콜센터를 열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팔린 상품에 대한 정보를 판매와 동시에 기록해서 판매정보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체계인 POS시스템을 도입했다. 2007년 7월 모바일 사업(휴대폰 유통)을 시작했다.>> 8년 연속 '브랜드 1위'2007년 사모 펀드 어피니티파트너스에 지분 일부가 넘어간 뒤 하이마트홀딩스를 합병했고, 몇 달 뒤 유진그룹에 넘어가 유진그룹이 1대 주주, 선종구가 2대 주주가 됐다가 2008년에 유진하이마트홀딩스를 합병했다.2009년 3월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의 전자전문점 4년 연속 1위 브랜드로 선정됐다. 2010년 12월 전자제품전문점으로는 최초로 매출 3조원을 돌파했으며 2011년 6월에는 한국거래소에 상장했다.그 와중에서 최대주주인 유진그룹과 선종구 2대 주주 간에 갈등이 불거져 양측이 함께 주식을 롯데에 매각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소유 및 경영권이 롯데로 넘어갔다. 2012년 10월 롯데쇼핑이 하이마트를 인수하고, 회사명을 롯데하이마트(주)로 바꾸었다. 2013년 3월 한국산업의 브랜드파워(K-BPI)에서 전자전문점 부문 8년 연속 1위에 선정됐다. 2018년 현재 전국에 463개 매장, 14개소 물류센터, 11개소 서비스센터 및 서비스전용 물류센터인 자재터미널 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2012년 국내 M&A 최대 가전제품 양판점인 하이마트를 인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롯데하이마트 제공

2019-12-3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9]롯데-11 2세 경영으로 전환

신격호의 '황제 경영' 탈피전문경영인 체제 전환 선언10년간 10조투입 35개 인수투자액 1조 이상 4곳 달해2015년엔 재계 5위로 상승국내의 최대 재벌들은 대체로 창업1, 2세대에 의해 완성됐다. 적수공권의 창업자들이 탁월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모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후 창업2, 3세들은 이를 기반으로 적극적인 다각화를 통해 몸집을 부풀렸다. 급속히 외형을 확대한 나머지 재무구조가 취약해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방화 확대에 따른 외생변수는 더욱 치명적이어서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재무구조가 취약한 2세 경영의 민간기업들이 특히 직격탄을 맞았다.롯데그룹은 신격호 창업주가 1946년 일본에서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또한 1967년 한국에서 롯데제과를 설립한 이래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단독경영으로 일관했다. >> 2011년 그룹회장 취임그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1942년생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다. 신영자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31세 때인 1973년 롯데호텔 이사로 경영진에 참여했지만 주변적 존재였다. 막내딸 신유미는 1972년 제1회 '미스롯데' 출신의 서미경의 소생으로 아직은 약관이어서 대권수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신격호와 둘째 부인인 시게미쓰 하츠코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 신동주와 차남 신동빈이 유력한 총수 승계후보자였다.1954년생인 신동주는 일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90년에 일본 롯데그룹 이사로 인연을 맺은 뒤 2003년에는 한국의 롯데쇼핑 이사를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한·일 롯데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광윤사 대표이사이다.신동주보다 한 살 아래인 신동빈은 1977년에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MBA를 이수한 후 1981년부터 8년간 일본 노무라증권에 근무하다가 형인 신동주보다 2년 빠른 1988년에 일본 롯데상사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1990년에 호남석유화학(롯데케미칼)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국 롯데에 발을 디뎠다. 1997년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으며 2004년 10월에는 한국 롯데그룹의 중심적 존재인 호텔롯데의 정책본부장에 취임했다. 2011년 2월 신격호가 총괄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면서 신동빈이 롯데그룹의 회장에 취임했다. 신동빈은 2018년말에 단행한 임원인사로 세대교체를 마무리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신동빈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손가락 경영'으로 대표되는 황제경영에서 탈피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신동빈은 예절을 중시하며 인간미 넘치는 성격으로 알려졌다. 임직원들 간에 신망도 두텁다.>> 국내외 M&A 본격작업신동빈이 2004년 정책본부장이 되면서 롯데의 국내외 M&A 작업이 두드러진다. 2014년까지 10년 동안 인수한 기업수 35개에 인수금액만 10조원으로 매년 평균 3.5개씩 인수한 셈이다. 인수금액이 1조원 넘는 곳만 하이마트, GS리테일의 백화점과 대형마트, 말레이시아 타이탄, KT렌탈 등 4곳이며 대한화재와 두산주류DB(롯데주류)도 굵직한 인수사례로 꼽힌다. 이 중 22개(63%)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08~2010년에 인수했는데 신동빈의 평소 지론은 '배팅은 불황에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2014년 9월 일본 오릭스와 함께 국내 물류 2~3위인 현대로지스틱스 지분을 인수하고 2015년 2월 11일에는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사업권 입찰에서 6조4천200억원을 질러 호텔신라를 제치고 가장 많은 사업권을 획득했으며 2015년 2월 18일에는 국내 1위 렌터카 업체인 KT렌탈(옛 금호렌터카) 본 입찰에서 경쟁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약 1조원을 써내 최종 승리했다.그 결과 롯데그룹의 계열사 수는 2004년 36곳의 재계순위 7위에서 2015년에는 74개의 재계 5위로 상승했으며 매출액은 2004년 23조원에서 2015년 83조원으로 3.6배나 신장됐다. 롯데그룹은 유통과 화학이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데 롯데는 인수합병으로 외형을 키운 대표사례로 평가된다.최근 롯데의 몸집 불리기 1등 공신은 신동빈 회장인데 그의 M&A의 특징은 미래 산업에 대한 선제투자와 해외진출이다. KT렌탈 인수가 대표적으로 신동빈은 카렌털과 카셰어링 사업이 큰 흐름인 공유경제와 맞아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항간에는 "신동빈 회장이 소극적이고 정적인 컬러가 강했던 롯데그룹의 DNA를 공격적이고 진취적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평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1997년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신동빈은 2004년 10월 호텔롯데의 정책본부장에 취임한 뒤 2011년 2월 신격호가 총괄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롯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사진은 지난 11월 롯데백화점 강남점에서 진행된 '더콘란샵'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신동빈(오른쪽 2번째) 회장. /연합뉴스

2019-12-2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8]롯데-10 국내 최대의 유통재벌

2002년 미도파백화점 인수한화마트·스토어24개 매입우리홈쇼핑 지분 53.03%도2010년초반 유통부문 강화'세븐일레븐'으로 업계총괄2000년대 이후의 다각화는 그간에 벌여 놓은 사업의 외연적 확대였는데 첫째, 유통사업 확장으로써 시작은 2002년 7월에 롯데쇼핑이 경쟁업체인 미도파백화점을 5천420억원에 대농그룹으로부터 인수한 것이다. 미도파백화점은 일제 하인 1938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정자옥(丁字屋) 명동점으로 출발한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귀속재산화해서 경영진이 자주 바뀌었다가 1969년 5월에 대농그룹 창업자인 박용학이 무역협회 지분 40%를 2억원에 인수해 상호를 미도파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이후 미도파는 신세계, 화신, 신신백화점과 함께 서울 장안의 대표 백화점으로 성장, 재계순위 34위인 대농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자리매김했다. >> 전국 5400개 매장 운영대농은 지방의 주요 도시에 지점을 확대하는 등 외형적 확장에 주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96년 결산에서 2천931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외화내빈의 처지로 전락했다.신동방그룹이 미도파백화점에 대한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면서 미도파의 주가는 1996년 말 1만2천원에서 1997년 3월 초 4만5천원까지 급등했다. 전경련 회장단이 미도파에 대해 광범위한 공동지원을 약속하자 그동안 꾸준히 주식을 매수해 왔던 성원건설이 보유지분을 모두 미도파에 매각하면서 적대적 M&A는 미도파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조달하다가 미도파는 부도가 나서 롯데쇼핑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롯데쇼핑은 2003년 11월에 한화그룹 계열의 한화마트와 스토어 24개 점포를 1천700억원에 인수했으며 2006년 8월에는 당시 뜨는 업종인 홈쇼핑에 진출하고자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의 지분 53.03%를 4천667억원에 인수했다. (주)우리홈쇼핑은 2001년 5월 29일 (주)아이즈비전, (주)경방, (주)행남자기 등의 공동출자로 설립됐고 같은 해 9월 인터넷 쇼핑몰 우리닷컴(woori.com)을 오픈했다. 2003년에는 스카이라이프 위성방송 사업을 개시했으며 2005년 1월에는 대만과의 합작법인인 TV홈쇼핑 방송을 개국했다.롯데쇼핑 유통사업부문인 롯데슈퍼는 2007년 3월 호남지역에서 16개 점포를 운영 중인 빅마트의 점포 14개를 800억원에 인수했다. 빅마트는 2006년에 1천200억원의 매출을 올린 호남지역의 다크호스였는데 당시 롯데슈퍼는 수도권과 충청권 중심으로 53개 점포를 운영 중이어서 영호남 지역 공략을 통한 업계 1위인 GS슈퍼마켓(점포수 85곳)을 따라잡은 것이 지상 과제였다. 또한 롯데슈퍼는 롯데그룹 유통부문에서 가장 실적이 저조한 터여서 빅마트 인수가 롯데슈퍼 재무구조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2001년 4개 점포로 시작한 롯데마트는 2006년까지 매년 적자행진 중이었다. 한편 2007년 10월에는 슈퍼마켓 5개를 운영하고 있는 나이스마트를, 2010년 2월에는 GS리테일로부터 백화점 3곳과 마트 14곳을 각각 인수했다.>> 프랜차이즈시장 주도2010년 1월에는 롯데면세점이 애경그룹 계열의 AK면세점을 2천800억원에, 같은 해 2월에는 롯데쇼핑이 GS리테일의 백화점·마트 부문을 1조3천억원에 각각 인수해서 기존의 유통부문을 크게 강화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부문은 편의점사업의 급성장이었다.국내 프랜차이즈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편의점과 제과점, 피자전문점, 치킨점 등이 모두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기반을 닦았다. 24시간 전천후로 영업하는 편의점의 성장이 특히 괄목했다. 국내에 편의점이 새로 선보인 것은 1980년대 초부터이나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해외 유명 브랜드와의 제휴를 통해 선진적인 경영기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편의점들이 등장했는데 1989년 5월 세븐일레븐 1호점(올림픽선수촌점)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훼미리마트, LG25(현 GS25), 바이더웨이, 미니스톱 등의 브렌드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300여 개의 매장을 전개했다.편의점은 종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구멍가게에 레스토랑 및 중소형 매장 등을 겨냥한 판매시점관리(POS, Point of Sales) 네트워크를 설치해 리테일세일 혁명을 초래했다. 유통업계의 선두주자인 롯데는 1994년에 세븐일레븐을 인수해서 코리아세븐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편의점사업을 총괄케 했다. 코리아세븐은 2010년 1월에 업계 4위인 바이더웨이를 2천740억원에 인수해서 전국에 무려 5천400개의 매장을 전개한 결과 연매출액 2조원대의 국내 최대 편의점업체로 성장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유통사업을 확장하면서 재벌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롯데는 1994년 세븐일레븐을 인수해서 코리아세븐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편의점 사업을 총괄했고, 1998년에는 롯데마트를 설립했다. /롯데그룹 제공

2019-12-1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7]롯데-9 유통 중심의 다각화

잠실 롯데월드 백화점 매출업계 전체매출액 30% 차지신문사 인수·편의점업 진출컴퓨터·정보통신사등 설립2000년 인천공항면세점 오픈롯데제과가 국내 제과업계의 정상에 올라선 것은 1979~1980년이었다. 1945년 해방 이래 국내 제과업계를 석권하던 해태제과와 동양제과와의 경쟁에서 롯데는 1980년 매출액 1천억원을 달성해 업계 수위에 랭크됐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제과공급업체로 지정되는 등 1986년에는 매출액 2천억원을 돌파했다.신격호의 사업다각화 노력은 1980년대 들어 더욱 적극화됐다. 1980년에는 식품저장을 목적으로 롯데냉동(주)를 설립하고 사진감광제 메이커인 한국후지필름(주)를 인수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주)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켰으며 광고대행업체인 (주)대홍기획과 롯데물산도 설립했다. 1985년 2월에는 옛 산업은행 부지에 35층의 롯데백화점 신관을 착공해 1988년에 개관했다.>> 1980년대 적극 다각화또 11월 12일에는 서울 잠실의 대지 2만3천평에 호텔, 백화점, 쇼핑몰, 스포츠센터 등을 아우르는 롯데월드를 오픈한 결과 1991년에는 롯데백화점 매출이 1조5천억원을 기록, 업계 전체매출액의 30%를 점할 정도로 도약했다.1984년 5월에는 (주)호텔롯데부산을 설립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서면의 옛 부산상고 부지 1만7천60평을 348억원에 사들여 이 자리에 지상 41층, 지하 5층 규모에 900여객실을 갖춘 '호텔롯데 부산'과 롯데백화점 부산점을 1996년 12월 오픈했다. 1986년에는 국내 최초 민자역사이자 지하 5층, 지상 8층, 연건평 2만6천평의 서울 영등포역사 운영을 목적으로 (주)롯데역사를 설립했는데 당시 특혜시비가 불거졌다.잠실의 제2롯데월드도 주목받았다. 이 땅은 1979년에 율산그룹이 부도로 도산하면서 (주)한양의 소유였는데 1981년 '88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되면서 전두환 정부는 잠실지구에 대규모 관광위락시설 건설을 계획하고 이 부지를 롯데에 넘겼다. 1987년 5월에 롯데는 공공자산인 석촌호수(서호) 개발권마저 확보했다. 또 1987년 12월 12일에 롯데월드 맞은편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일대의 서울시 소유 채비지 2만6천평도 불하받았다. 당시 입찰에는 롯데만 참가했는데 매입 가격은 시가의 절반인 819억원이었다. 신격호가 낙찰 한 달 전인 11월에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독대한 바 있다. 훗날 전두환 비자금수사에서 신격호는 이때 50억원을 직접 건넸다. 전두환 대통령이 롯데에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한겨레신문', 2016.6.25.)1990년대에는 비관련 다각화에도 주력해 1990년 5월에는 부산지역 유수의 지방 일간 신문인 국제신문을 인수했으며 1994년 10월에는 (주)코리아세븐을 인수해서 편의점사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 11월에는 부산할부금융을 설립해 새로 금융업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1996년 10월에는 롯데리아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합자해서 자본금 15억원의 롯데로지스틱을 설립했다. 계열사들의 물류비 절감과 유통부문 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이었다.>> 1990년대 '비관련' 확대1996년 12월에는 전산 용역 및 컴퓨터와 컴퓨터 주변기기의 도소매·소프트웨어 개발을 목적으로 롯데텔레콤(현 롯데정보통신)을 설립했다. 1998년 1월 정보통신부에 등록하고 별정통신사업을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롯데제과(주), 롯데호텔, (주)롯데리아의 정보시스템을, 2000년 인천국제공항 1, 2청사 면세점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같은 해 한국후지필름(주),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롯데칠성의 정보전략계획(ISP)과 업무 프로세스 재설계(BPR)를 완료했다. 2001년 전자세금계산서 공인인증 서비스를 시작하고 롯데쇼핑의 재무 및 구매시스템을 구축했다. 2002년 부설 정보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2004년 12월 롯데전자(주)와 합병하면서 자본금을 42억원으로 증자했다. 2007년 롯데그룹의 통합정보센터를 열고 신통합시스템과 롯데쇼핑 재해복구시스템(DR)을 구축했다.2017년 11월 1일을 기점으로 기업분할을 실시했다. 물적 분할을 통해 투자부문은 롯데아이티테크(주)로 신설되고 사업부문은 기존 롯데정보통신(주)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존속 법인으로 남았다. 분할 후 투자부문은 자회사 관리, 신규사업 투자 등을 펼치고, 사업부문은 IT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1997년 7월에는 세계적 아케이드게임 개발 및 운영업체인 일본의 (주)세가 엔터프라이즈와 50대 50 합작으로 자본금 110억원의 (주)롯데세가를 설립했다. 일본의 (주)롯데는 1990년에 일본 제과업계 최정상 기업으로 성장해서 일본 200대 기업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 집단화 했다. 신격호가 일본에서 쌓은 재력과 신용으로 30여년간 30억여 달러를 투입해서 완성한 한국의 롯데그룹은 1997년 현재 계열사수 29개사, 종업원수 3만5천여명에 매출액 9조원으로 국내 10위에 랭크됐는데 그룹 총매출액의 60% 이상을 서비스업종에서 벌어들이는 등 전형적인 부동산 및 유통전문 그룹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의 사업다각화는 1980년대 들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주)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켜 국내 프로야구 발전에도 기여했다. /롯데 제공

2019-12-0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6]롯데-8 롯데그룹 형성·(하)

막강 자본·질좋은 상품 제공선진화 마케팅 전략등 주효1979년 특급 호텔롯데 신축백화점·패스트푸드업 진출식품·유통등 복합기업 형성롯데제과는 1970년대 급속히 다각화했다. 1970년 10월 껌과 과자 포장에 필요한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해 롯데알미늄으로 개명하고 1973년 11월에는 공해방지 시설업체인 롯데기공과 오디오 생산업체인 롯데파이오니아를 각각 설립했다. 1974년 1월에는 사무기기 메이커인 롯데산업과 11월에는 그룹의 무역창구인 롯데상사를 설립했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국내 최대의 청량음료 메이커인 칠성사이다를 인수, 롯데칠성음료로 개명했다. 1978년 1월에는 한일향료(현 롯데식품)를 설립했으며 2월에는 삼강하드 아이스크림을 인수해 롯데삼강으로 변경했다. 4월에는 롯데햄우유를 설립했다. 후발주자인 롯데제과는 막강한 자본과 질 좋은 상품 제공, 선진화한 마케팅 등으로 단기간에 업계 정상에 올랐다.>> 롯데제과 '업계 정상'한편 이 무렵 롯데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신사업에 진출했다. 1973년부터 시작된 관광진흥정책에 따라 서울을 중심으로 호텔신라 등 국제수준의 매머드 관광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1970년 11월 13일 신격호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신격호에게 서울의 요지인 소공동의 반도호텔을 불하해 줄 테니 국제규모의 호텔을 지어 경영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해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석했던 이후락 주일대사가 쿡쿡 찌르면서 '이 자리에서는 예라고 대답만 하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도리 없이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제발전으로 관광수요가 증가할 것이 예상되는 데다 정권차원에서 밀어주겠다는 데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아사히신문' 1988.6.5) 이날 청와대 면담은 제과업체 롯데가 호텔과 유통재벌로 탈바꿈하는 출발점이었다. 1974년 6월 금싸라기 땅인 반도호텔 매각작업에 롯데만 단독 응찰해 41억9천800만원에 낙찰받았으며 박정권의 지원으로 반도호텔 옆의 국립도서관도 확보했다. 근처의 아서원 소유권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원을 받아 손쉽게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지상 38층 지하 3층의 객실 1천20실의 특급호텔인 호텔 롯데를 신축, 1979년 10월에 완공했다. 1978년 9월 마산의 크리스탈 관광호텔을 인수, 롯데크리스탈호텔로 명명했다.1978년에 평화건설을 인수, 롯데건설로 변경했는데 중동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서 롯데의 유통업 진출도 성사됐다."롯데는 당초 신축 중인 롯데호텔 옆에 9층짜리 부속건물을 짓겠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막상 건물이 올라가면서 25층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용도도 처음에는 투숙객을 위한 쇼핑공간(1, 2층)이었지만 완공을 앞두고는 '백화점(1~7층)과 임대사무실'로 변했다. 당시는 도심 인구집중 억제정책이 강력히 실시되던 때여서 대규모 백화점은 허가될 수 없었다. 하지만 허락하고 싶어 하는 박정희의 의중을 읽은 서울시 한 공무원이 명칭을 '쇼핑센터'로 바꾸는 꾀를 냈다.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숨지기 몇 시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오후 '롯데쇼핑센터'를 재가했다."('마천루' 롯데의 성장동력은 권력이었다, '한겨레신문', 토요판, 2016.6.25)>> 새로운 사업 진출1979년 11월에는 호텔롯데 옆에 국내 최대규모의 롯데백화점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패스트푸드 체인업체인 롯데리아도 설립했다. 전두환 정부도 박정희 정권만큼 롯데의 뒤봐주기에 적극적이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국보위는 소공동 산업은행 부지를 롯데에 넘겨주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롯데는 이 땅에 주차장이 아니라 호텔 신관을 건축해서 호텔객실과 백화점 면적을 대폭 확대했다. 시내 중심가에 명물인 롯데타운이 생겨났다. 롯데그룹 성장을 견인하는 삼두마차인 제과, 호텔, 쇼핑체제를 완성한 것이다.롯데는 이 무렵에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1970년대 말의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국영 한국종합화학의 자회사인 호남에칠렌과 여수석유화학 그리고 한국 정부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50대 50 비율로 합자한 호남석유화학이 주도하고 있었다. 호남석유화학은 에칠렌(연산 35만t)을 베이스로 폴리에칠렌, 폴리프로핀 등의 석유화학제품의 대규모 공장을 전남 여천공단에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정부는 석유화학공업 민영화 정책의 하나로 이 회사의 정부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정부 지분 불하를 놓고 롯데와 현대그룹이 경쟁했으나 롯데가 1979년 1월에 정부 지분 40%를 160억원에 매입했다. 1997년 3월 롯데는 일본 미쓰이그룹이 보유 중이던 이 회사의 지분 33%중 23%를 마저 인수해서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한국롯데는 1967년에 창업한 지 10여년만에 기업 인수 및 설립 등을 통해 식품, 호텔, 유통, 건설, 전자, 관광, 중화학분야에서 다각화를 통해 복합기업군을 형성함으로써 1970년대 말에는 10대 재벌에 진입했다. 롯데그룹은 식품, 유통, 서비스업 등 자본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업종을 중심축으로 해서 복합기업집단을 완성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1970년대부터 다각화를 시작했다. 1973년 롯데 호텔을 설립했으며 1974년에는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해 롯데칠성음료로 개명했다. 사진은 롯데 호텔 설립 당시의 모습. /롯데 제공

2019-12-0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5]롯데-7 롯데그룹 형성·(상)

자본금 3천만원·사원 500명중견기업 '롯데제과' 설립인연깊은 유창순 회장 추대공장2개 가동… 갈월동 '껌'양평동, 빵·비스킷등 생산대부분의 국내 재벌들은 창업에서부터 대규모 기업집단을 형성할 때까지 국내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토착 자본이다. 그러나 롯데는 창업주 신격호가 일본에서 맨주먹으로 창업해 그곳에서 형성한 부와 경영기법을 국내에 도입해서 재벌을 형성한 독특한 이력의 기업집단이다. 또한 롯데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각각 사업기반을 구축한 유일무이한 그룹이기도 하다.롯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65년 12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부터였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단절된 한국과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신격호의 모국 투자소련과 중국 중심의 동북아지역 공산화 확대의 저지 대안으로 미국은 한·미·일 3각 안보체제 구축을 구상했다. 미국은 이를 실행하고자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집요하게 종용했다.1961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 의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국내에선 기업인들이 국교 정상화를 강하게 요구했다.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 전신)가 중심이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 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외화 확보에 혈안이 됐었는데 대안으로 일본 자본을 국내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국내에 일본 자본의 진출이 격증했다.신격호의 모국 투자는 1965년 12월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진행됐다.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신격호에게 한국의 기간산업에 투자해줄 것을 종용했다. 신격호는 내심 고국에서 제철사업을 구상해 일본 가와사키제철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사업계획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으나 당시 박정희 정부는 제철업 국영화 논리를 폄으로써 신격호의 제철업 구상은 수포로 돌아갔다.신격호의 모국 투자는 제과업으로 결정됐다. 1965년 전후에 일본의 롯데는 제과업으로 이미 소비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신격호는 형제들 간에 골육상쟁을 겪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신격호의 바로 밑 동생인 철호는 1959년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을 설립하고 둘째 아우 춘호를 끌어들여 껌과 캔디, 비스킷, 빵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신격호가 모국에서의 사업 발판을 마련할 목적으로 기존의 (주)롯데와 롯데공업을 정리하려하자 동생들이 크게 반발했다. >> 형제들간 갈등 심화주식 지분문제로 신철호가 신격호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등 형제간의 갈등이 첨예화됐다. 그 결과 신철호는 캔디와 비스킷 부문을 분리해서 새로 메론제과를 설립했으며 춘호는 라면제조업체인 롯데공업을 차려 각각 분가했으나 신격호가 '롯데'란 상호 사용을 불허하는 바람에 (주)농심으로 변경했다.1967년 4월 3일 신격호는 국내의 (주)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하고 새로 자본금 3천만원의 롯데제과(주)를 설립했다. 기능직 사원 350명과 일반직 사원 150명 등 500여명의 중견기업으로 출발했는데 신격호는 사장을, 넷째 동생 준호는 기획실장으로 제조와 영업을 총괄했다. 롯데제과 회장에는 유창순(劉彰順, 1918~2010)을 추대했는데 그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사해서 1951년에는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격호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유창순은 이후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전략수립에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1982년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롯데제과는 제1, 2공장 등 2개의 공장을 보유했는데 갈월동의 제1 공장에선 껌을, 양평동의 제2 공장에선 빵과 비스킷, 캔디, 캐러멜 등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 제과업계는 동양제과, 해태제과 등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해태제과는 1945년 10월에 민후식, 신덕발, 박병규, 한달성 등 4명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131의 귀속기업인 영강제과를 공동으로 인수해서 키운 기업이다. 동양제과는 이북출신의 기업인 이양구가 서울 용산구 문배동 30-10의 귀속기업을 1956년 7월에 인수해서 키운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 명예회장은 1967년 4월 새로 자본금 3천만원으로 롯데제과(주)를 설립했다. /롯데제과 제공

2019-11-2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4]롯데-6 대재벌로의 도약

기시 노부스케 前수상 매개프로야구단 오리온스 인수現 총리대신 아베의 외조부1960년대 초 첫 만남 추정국교정상화 이후 위상 짐작1968년에는 나가다 마사이치(永田雅一)가 운영하던 일본 프로야구단 다이마이(大每)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했다. 모기업인 다이에이가 경영위기 상태였는데 1957~1960년 일본 수상을 역임한 일본 정계 우파 본류의 거물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의 매개로 신격호의 소유로 넘어온 것이다. 기시는 1920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상무성의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1939년 3월에는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해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일본 정계 거물과 인연1941년에 귀국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에는 도조 히데키(1884~1948) 내각의 상공대신에 취임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에는 연합군 측에 의해 A급 전범이 되었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후 정계에 진출해서 총리대신이 됐다.기시의 형인 사토 이치로는 일본해군 중장 출신이고 1974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1901~1975)는 기시의 친동생이었다. 기시의 본래 성씨는 사토였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에이사쿠는 형인 기시의 도움으로 일본 정계에 입문해서 1964년부터 1972년 9월까지 7년 8개월간 재임한 일본 최장수 총리이기도 하다. 또한 기시는 일본 최장수 외무장관을 역임한 아베신타로(1924~1991)의 장인으로 일본의 현 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적극 찬성혈혈단신의 식민지 백성인 신격호가 자신보다 무려 26세나 많은 기시 노부스케와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는 미스터리이다. 1990년대 말에 신격호는 "나와 기시 선생과는 3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다"고 고백한 터여서 기시와 신격호와의 첫 만남 시기는 대략 1960년대 초반쯤으로 추정된다.('신격호의 비밀', 175쪽) 고립무원의 이방인인 신격호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 기시 노부스케와 인연이 닿았다는 것은 롯데의 승승장구를 짐작하고도 남는다.신격호는 한국인으로는 유창순 전 국무총리,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박용학 전 무역협회장, 이승윤 전 부총리 등과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적극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박정희 개발독재의 유력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신격호는 한일회담 대표나 주일 한국 대사가 도쿄에 부임하면 개인 소유의 가루이자와 별장을 사용하도록 했다.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 반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가 교환됐다.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로 그는 박정희와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국교를 수립했다. 한일회담 성사에 막후에서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신격호의 일본과 한국에서의 향후 위상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는 지난 1968년 나가다 마사이치가 운영하던 일본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하는 등 대재벌로의 도약을 노렸다. /연합뉴스

2019-11-1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3]롯데-5 대재벌로의 도약 예정

메이지·모리나가제과 '아성'스위스출신 기술자 스카우트세계수준 새로운 제품 생산아이스크림·비스킷등 투자청량음료로 식품다각화 성공신격호는 롯데 껌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1961년에 초콜릿 제조 사업에도 착수했다. 추잉껌만으로는 기업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의 초콜릿 소비 증가도 한몫 거들었다. 일본인들은 집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주로 생과자나 '센베이'(일본 전통의 전병)을 내놓는데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초콜릿으로 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61년은 일본 내 소비문화 개화기를 맞아 정치인들이 '소득 배증'을 공약으로 내걸던 시기였다.>> 1964년 '가나' 첫 출시당시 일본의 초콜릿 시장은 메이지(明治)제과와 모리나가(森永)제과가 석권하고 있었는데 후발업체인 롯데가 이들의 아성에 도전한 것이다.초콜릿 산업은 과자 산업 중에서 '중공업 클래스'라 일컬어지는데 제조방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릿 시장을 석권하면 제과업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전체 과자류 소비 중에서 초콜릿 비중이 높다. 초콜릿이 '맛의 예술품'으로 불리는 이유이다.신격호는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부터 구상을 확실히 했다. 시작부터 국제수준의 신제품을 만들어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누르겠다는 전략이다. 1961년 11월 신격호의 밀명을 받은 노나카와 오토모리 두 사람은 산업시찰이란 명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초콜릿 제조기술자 스카우트 작업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밤낮으로 기술자와 기계설비를 물색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6개월 이상 노력한 끝인 1962년 7월에 스위스 태생의 초콜릿 기술자 막스 블락 스카우트에 성공했다. 1921년생인 블락은 유럽 초콜릿 업계에서 '무슈 블락'으로 불린 유럽 최고 기술자 중의 한 명이었다.도쿄만 입구 남단에 위치한 우라가시의 누마가게 지구에 3만3천평의 초콜릿 전문공장에 세계 최고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1964년 1월에 롯데초콜릿 제1호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출시했다. 가나는 세계 최고 품질의 카카오 콩을 생산하는 국가이다. 도쿄 민방TV 3국의 비어있던 스팟을 전부 매점해서 1주 단위로 500번의 CM(Commercial Message)을 반복해서 흘려보냈다. 스위스 고유의 악기인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으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 종합 과자 메이커 시도롯데는 추잉껌과 초콜릿으로 종업원 3천명에 연 매출액 700억엔 규모로 성장했다. 롯데의 PR전략은 성공했다.1968년 롯데는 종합 과자 메이커를 시도해서 사이타마현 사야마에 캔디 공장을 건설해서 1969년 9월에 준공했다. 초콜릿처럼 프랑스 캔디의 대명사 '봉봉' 제조명인인 조르주 보당을 스카우트해서 1969년 말부터 '코코롤'과 '초콜릿캔디'를 출시했다. 캔디 종류는 1975년 말까지 100종에 달했다.1972년 3월에는 아이스크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와 영국, 덴마크에서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아이스크림을 새로 선보이는 한편 1974년에는 비스킷 생산에 도전했다. 1973년 말 제1차 석유파동 여파로 고물가 속의 불경기 즉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국민경제 전체가 가라앉았음에도 투자에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의 연간 비스킷 소비는 1천400억엔으로 이윤은 적었지만 수요가 있는 안정상품인 것이다.사야마에 35억엔을 투입해서 공장을 건설하고 전문기술자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라이언 헌터를 초빙해 1976년 11월에 시제품을 선보였다. 1968년에 설립된 롯데물산에선 한국에서 인삼을 수입해 시판 중이었는데 1972년에는 대량의 인삼 재고가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이를 음료로 만들어 마시기 쉽게 100엔짜리 인삼드링크 캔 '진업'을 선보였더니 단기간에 소진됐다. 이를 계기로 롯데는 청량음료 생산 사업을 본격화해서 식품 다각화에 성공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 명예회장은 껌에 이어 1961년 초콜릿 제조 사업도 시작했다. 그 결과 1964년 1월 롯데초콜릿 제1호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출시했다. 사진은 현재의 롯데 가나 초콜릿. /롯데제과 제공

2019-11-1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2]롯데-4 '추잉껌' 세계 제패·(하)

천연치클로 고급화 승부수바브민트·스피아민트 출시소비자들 인기 '고공 행진'1959년 2월 '롯데상사' 설립세계최고 제품에 '도전장'롯데껌 출시로 가능성을 확인한 신격호는 우선 하리스부터 잡기로 했다. 하리스는 일본 패전과 함께 만주에서 철수한 일만식품 직원들이 가네보에서 자금을 융통해 1947년에 설립한 껌 메이커였다. 방적 공장은 제조과정에서 껌의 베이스가 되는 수지를 대량으로 토해낸다. 가네보에서 기술까지 지원받고 모리나가(森永)의 유통망을 이용함으로써 하리스는 단기간에 일본 껌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1955년 일본의 추잉껌 연간 생산액은 54억엔인데 하리스가 25억엔으로 1위이고 롯데는 12억엔이었다.>> 생산 1위 '하리스' 잡기신격호는 궁리 끝에 "미국 껌 원료는 천연치클이지만 하리스 껌은 합성수지로 만들었다. 하리스에 대항하는 데는 천연치클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합성수지보다 값이 비싼 천연 치클로 고급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겠다는 것이다.천연치클은 남미의 멕시코나 브라질 등에서만 생산됐는데 일본 정부는 당시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모 상사가 전기절연체 원료로 천연치클을 수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숙원인 천연치클을 확보해 이를 원료로 1954년 1월에 10엔짜리 '바브민트'를 출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20엔짜리 '스피아민트'까지 출시해 소비자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하리스에 대한 롯데의 우위가 점차 기정사실화하던 1959년 2월에는 자본금 1천만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했다. (주)롯데 판매부의 오사카지사, 후쿠오카지사, 나고야출장소, 삿포로연락소 등을 롯데상사의 지점으로 개편해서 통합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1961년에 롯데는 당당히 하리스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에 등극했다. 기회포착의 명수 신격호의 승리였다. 껌 제조 4년 만에 신격호는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껌 시장이 확대되면서 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1956년에는 세계최대의 껌 메이커인 미국 리글리가 일본에 상륙함으로써 롯데는 설립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는다. 신격호는 '세계 최고 껌 메이커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도 따라 잡기'로 결심했다.리글리의 출발은 창업자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W. Wrigley. Jr)가 1891년에 껌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리글리는 부친이 제조한 비누판매를 계기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도시를 전전하면서 비누 세일즈에 나섰는데 판매가 부진한 때는 베이킹파우더 같은 광고용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후 베이킹파우더의 수요가 비누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베이킹파우더 판매에만 전념했다. 그는 베이킹파우더를 더 많이 팔기 위해 껌 2통을 덤으로 끼워줬는데 소비자들에 껌이 훨씬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 1966년, 롯데의 승리최초의 리글리 껌 상표는 1892년에 나온 로타(Lotta)와 베서(Vassar)였다. 1년 뒤 리글리는 오늘날에도 판매되고 있는 브랜드인 주시프루트(Juicy Fruit)와 스피어민트(Spearmint)를 내놓았다. 그는 신문 광고와 대대적인 플래카드로 자신의 껌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또한 수많은 도시를 순회하며 판촉용 껌 선물 공세를 편 결과 1910년 캐나다, 1915년 오스트레일리아, 1927년 영국, 1939년 뉴질랜드 등에 현지공장과 지사를 설치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서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유럽을 석권하는 유명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롯데와 리글리는 일본의 껌 시장 석권을 위해 10여 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는데 1966년에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부터 롯데는 일본 껌 시장의 최대강자로 자리매김했다."젊은 시절엔 고학생이었으니까 학비나 벌면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엔 돈 버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을 탐탁잖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본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입니다."('신격호의 비밀', 175쪽)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당시 대히트송을 탄생시킨 롯데껌의 대표격인 주시후레쉬는 미국의 껌 메이커인 리글리와의 한판승부에서 이겨내며 일본 껌 시장의 최대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롯데제과 제공

2019-11-0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1]롯데-3 '추잉껌' 세계 제패·(상)

1948년 자본금 100만엔으로日정착 8년만에 '롯데' 설립마케팅 능력 탁월 '급성장'품질로 승부 연구에 공들여30억엔 시장 경쟁서 '생존'히까리연구소가 성업 중일 때 신격호에게 또 하나의 사업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는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일본에는 1945년 미군의 진주와 함께 초콜릿, 통조림, 담배, 추잉껌 등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1946년부터 풍선껌이 대유행했다. 어느날 풍선껌을 만드는 친구가 찾아와 신격호에게 풍선껌 제조를 권했다.>> '다크호스'로 부상당시 일본에서 풍선껌은 비행기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塗料)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바나나 냄새 비슷한 향료 등을 추가해서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가마솥과 요리용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는 350~400개의 풍선껌 제조업체들이 난립했다. 껌은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순이익이 판매가격의 50% 정도여서 사업성이 충분했다.24세 청년사업가 신격호는 1947년 4월부터 껌 제조에 착수했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원료조제의 정확성을 위해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했다. 그가 만든 2엔짜리 풍선껌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시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자신을 얻은 신격호는 풍선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한편 1948년 6월 28일에 종업원 10명에 자본금 100만엔의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사업목적으로 청량음료, 시럽류, 냉과, 냉동식품, 낙농, 화장품 및 치약, 구강청량제, 화공 약품, 의약품, 합성수지 제조가공 등이었다. '롯데'라는 상호는 신격호가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는 청년 신격호가 사모하던 상상 속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신격호가 낯선 일본 땅에 발을 디딘 지 8년째 되는 해이다. 초기 추잉껌 제조법은 유치했다. 신일본질소(주)에서 제조한 질소비닐을 껌의 베이스로 사용했는데 질소비닐에는 초산에틸렌 50%가 함유됐다. 설탕은 통제물자여서 대체품으로 사카린이나 사탕 대용물질인 둘찐을 사용했다. >> 설탕, 통제에서 풀려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주)롯데는 신격호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1948년 당시 일본에서는 '하리스' 추잉껌이 최고인기였다. 신격호는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삼각형 모양의 풍선껌에 대나무 파이프를 붙였다. 껌을 씹은 후 대나무 파이프 끝에 달아 입으로 불면 비눗방울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이어서 공전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롯데는 어느새 군소 메이커를 내치고 다크호스로 떠올랐다.1952년에는 제과업계의 숙원이 이뤄졌다. 설탕이 통제에서 풀린 것이다. 껌의 이상적인 품질은 껌 베이스 40%, 설탕 60%로 여기에 향료를 섞어 메이커별로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다. 신격호는 품질로 승부하기로 하고 연구에 공을 들였다. 이 무렵 일본의 추잉껌 시장은 30억엔이었는데 경쟁에서 살아남은 업체는 도쿄의 롯데와 킹토리스 등 5사와 나고야의 코엔, 일본푸드 등 5사, 그리고 오사카의 하리스, 릴리, 세이코 등 3사 등 대략 13개 업체가 살아남았는데 오사카의 하리스가 절대 강자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에게는 또하나의 사업이 주어졌는데 바로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사진은 롯데의 대표적인 추잉껌. /롯데 제공

2019-10-28 신창윤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0]롯데-2 주경야독과 사업의 시작

홀로간 도쿄서 알바·자취'성실' 눈 여겨본 하나미쓰'커팅오일 공장' 사업 제의미군기 잇단폭격에 문닫아종전후 재기 마음의 빚갚아신격호는 19세 때인 1941년에 아내를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도 벌고 못다 한 공부를 위해서였다. 부친은 그의 일본행을 반대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먼 친척으로부터 50엔, 사촌형 신병호에게 30엔을 빌리는 등 도일자금 83엔을 마련했다. 83엔은 당시 면서기의 2개월 치 봉급에 해당했다.도쿄에 도착한 신격호는 미리 연락해둔 그곳의 고향 친구들을 찾았다. 그들은 스기나미구(衫竝區)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 8장짜리 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 83엔 품고서 일본 유학신격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음날부터 우유 배달을 하는 한편 와세다(早稻田)중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었다. 당시 일본의 사학은 식민지 출신 유학생에 개방적이었다.이후부터 주경야독의 고학생 생활이 개시됐다. 친구의 하숙방에서 6개월쯤 얹혀살다 한 평 반짜리 방 하나를 얻어 독립했다. 틈날 때마다 간다 거리의 헌책방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독파했다. 당시 격호 청년의 고학생 시절을 지켜본 풍산그룹의 류찬우 회장은 "그 시절 신 회장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했다.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를 선택했다. "전쟁준비에 부산할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공과를 지망하게 됐는데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3류 문사(文士)쯤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이종재, '재벌이력서', 171쪽)>> 전당포주인 운명적 만남제2차 세계대전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4년에 그에게 사업기회가 주어졌다. 고학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신격호를 평소에 눈여겨봤던 전당포 및 고물상 주인인 60대의 하나미쓰가 어느 날 찾아온 것이다. 신격호는 한때 하나미쓰가 운영하던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신뢰했다.하나미쓰가 신격호의 근면함에 후한 점수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내가 참 부지런하다고 자찬하는 사람이거든. 살면서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둘 봤다. 관직에서는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이다. 롯데에서 20년간 신 회장이 일하는 걸 보니 새벽이든 밤이든 어찌나 부지런한지. 저러니까 혼자서 큰 기업을 일궜구나 싶더라고."(노신영 전 국무총리, '동아일보' 2016.1.4.)하나미쓰는 신격호에게 군수용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안했다. 커팅오일은 기계를 연마하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윤활유였다. 소요 자금 6만엔은 하나미쓰가 전액 출자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일류 회사원의 한 달 월급이 80엔에서 100엔 정도로 6만엔은 거액이었다.신격호는 하나미쓰의 제의를 받아들여 도쿄 오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서 사업에 착수했으나 가동도 하기 전에 미군 B29기의 포격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하치오지 부근에 새로 공장을 마련해 생산에 착수, 1년여 운영하는 동안 사업은 잘됐다. 그러나 이 공장 또한 미군기의 포격으로 문을 닫았다. 사업자금 6만엔은 고스란히 신격호의 빚으로 남았다.패전 후인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 오구보4의 82에 있는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숙소 겸 새 사업장을 차렸다. 전쟁 중 공습으로 절반 정도 파괴된 형편없는 벽돌집이었다. '히까리(光) 특수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사업에 착수했다.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했다. 오랜 기간 전쟁으로 생필품이 매우 부족해 신격호가 생산한 제품은 출하되자마자 순식간에 소화됐다. 납품과 수금을 위해 하루 평균 200곳의 납품처를 돌아다녀야 했지만 공장 운영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 엔을 전부 상환함은 물론 은인 하나미쓰 노인에게 이자로 집을 한 채 사주었다."신 회장은 이때 사업의 묘미를 터득했다고 한다. 즉 시의적절한 상품개발, 수요예측,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 등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6일 '人物탐구')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연합뉴스

2019-10-2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9]롯데-1 공부엔 뜻이 없었던 신격호

잦은 결석 신통치 않은 성적언양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큰아버지 '신진걸' 학비대줘울산농업보습학교 겨우진학말수 적고 신중 '바둑' 즐겨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辛格浩)는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에서 20여㎞나 떨어진 산골 마을인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377에서 농부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경부고속도로 언양 나들목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울산 방향으로 약 6㎞쯤 가면 울산공업단지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대암호 부근에 있다. 그는 8세 때인 1929년 4월 4년제이던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33년에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란 이름으로 제5회 졸업생이 됐다. 1933년 4월에 읍내에 있는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의 5학년에 편입했는데 당시 그의 학업성적은 57명 중 42등이었다.>> 산골마을 5남5녀 '맏이'"그는 클라스 메이트들보다 나이가 2~3세 어렸을 뿐 아니라 통학 거리가 물막이고개 너머로 나 있던 당시의 지름길로 다니더라도 왕복 40리가 넘어 어린 나이에 통학만으로도 힘에 부쳤는지 모른다.(등하교 거리 때문에 무리해서 그랬던 것일까. 5학년 한 해 동안 '병'으로 30일간이나 결석했다.) 6학년 때의 성적은 더욱 떨어졌다. 일본어, 산술, 일본사, 지리, 창가 성적은 10점 만점에 각 5점이고 조선어 성적은 4점이었다. 6학년 때도 30일간 결석했다. 이번에는 '병결이 아니라 무단결석'이었다."(정순태, '신격호의 비밀' 1998, 지구촌, 55쪽)신격호는 공부엔 별로 뜻이 없었던 모양이었다.1935년 3월 언양공립보통학교의 제20회 졸업생이 된 신격호는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요즘의 중고등학생에 해당하는 농업학교 학생이 한 마을당 1~2명 정도이고 고보(高普) 학생은 1개 면에 1~2명에 불과할 정도였다.무위도식하던 신격호는 큰아버지 신진걸(辛鎭杰)이 학비를 대주어 1936년 4월 언양에 있던 울산농업보습학교(현재 언양중학교)에 진학했다. 본관이 영산인 신격호의 집안은 400년 동안 이곳에 뿌리를 내렸지만 증조부 때부터 가산이 기울었다. 신격호의 조부는 슬하에 장남 진걸과 차남 진수 형제만 뒀는데 진걸은 이재에 밝았을 뿐 아니라 인물도 걸출했다. 경남도청 소재지이던 진주에서 고학으로 신학문을 배운 진걸은 울산군 재무과 측량기사를 거쳐 상남면장을 지냈다. 1919년 퇴직과 함께 부동산 매매업으로 치부해서 논 100마지기를 소유해 둔기마을 제1의 부자가 됐다.신격호의 부친 진수는 상속받은 재산도 별로 없는데 다 금전에도 담백한 사람이었다. 신격호 집안의 재력에 대해 울산농업보습학교의 학적부에는 '논 15두락, 밭 35두락, 산림 8반보, 기타 250엔 등으로 생활정도는 보통'으로 기록돼 있다. 이 정도 규모이면 중농에 해당하나 10남매를 양육해내기에는 벅찼을 것이다.('신격호의 비밀', 60쪽) >> 기술직 말단 '양털깎기'2년제였던 울산농업보습학교에서도 학업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별로 크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으며 행동도 신중했는데 특히 그는 바둑을 즐겼다.('신격호의 비밀', 5천159면)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신격호는 18세 되던 해에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한 살 아래인 상남면(현 상동면)의 노순화(盧舜和)와 결혼하면서 경남 양산 통도사 인근의 경남도립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다. 기술직 최말단으로 업무는 양털 깎기와 양돈 등인데 박봉이어서 가난을 면치 못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는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주군에서 5남5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롯데는 모기업인 롯데제과가 설립되면서 기업의 서막을 열었다. /롯데 제공

2019-10-1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8]에스케이-17(끝) SK 그룹 일대기

선친 타계후 열린 가족회의장남 최태원에 지분 몰아줘20주년, 329만주 대거 넘겨동생 최창원 부회장은 제외지배구조 변화 무관함 강조SK그룹은 1953년 섬유에서 출발해 사업의 중심을 에너지, 이동통신, 반도체 등으로 주력사업을 바꾸면서 성장을 도모했다. 2018년 9월 기준 SK그룹의 공정자산은 213조2천50억원으로 1위 삼성, 2위 현대차에 이어 재계서열 3위에 랭크됐다. SK그룹은 정상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대박의 행운(?)을 잡으며 급부상한 나머지 항간에는 정경유착 의혹들이 난무했었다.SK그룹은 오너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재 SK그룹의 경영권이 창업 2세대로 넘어왔지만 아직은 계열분리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SK그룹은 사촌 간에 경영을 분담하고 있다 .>> 사촌 간 '경영 분담'최종건 창업주의 둘째 아들이자 실제 장남 역할을 하는 최신원 회장이 SK네트웍스를, 3남 최창원 부회장은 SK 디스커버리(SK케미칼)와 가스, 건설 등을 독자 경영하고 있다. 최신원 회장은 가스레인지, 식기세척기, 가스오븐레인지, 산업용 송풍기, 환경설비, 정수기 등을 생산하는 동양매직을 2016년 11월에 인수해 SK매직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동양매직은 1985년에 동양시멘트의 기계사업부를 모체로 탄생했으나 동양그룹 해체와 함께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SK 품에 안긴 것이다. 최신원은 2017년에 LPG 충전사업 및 충전소 등을 최창원 부회장 계열의 SK가스에 넘겼다. 최종건 창업주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에 지병으로 향년 49세로 사망했다.고(故) 최종현 2대 회장은 슬하에 2남 1녀를 뒀는데 장남 태원은 SK그룹의 회장을, 차남 재원은 SK E&S의 부회장을, 장녀 기원은 행복나눔재단의 이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간의 역할분담도 주목거리다. 최 수석부회장은 SK텔레콤 등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2013년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2016년 7월 29일 수감생활 3년 3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최재원은 구속 전까지는 SK네트웍스 이사회 의장과 SK E&S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주요 계열사에 대한 보유 지분은 거의 없다. 1998년 선친 타계 이후 열린 가족회의에서 리더십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속 지분을 모두 형인 최태원 회장에게 넘기기로 했기 때문이다.2018년 11월 최태원 회장은 친족 23명에 대략 1조원 규모의 SK(주) 주식 329만주(4.68%)를 깜짝 증여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SK家 3세들에 쏠린 눈"회장 취임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성원해준 친족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다. 계열분리나 지배구조 변화와는 무관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세간에는 오너일가의 대규모 주식증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하지 않다. 최태원 회장의 주식 수증자 23명 중 최창원 부회장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사촌 형인 최신원 회장에게 280여억원 상당의 주식 10만주를 증여했었다. 참고로 최창원 부회장은 SK디스커버리의 최대주주(40.18%)로서 독자경영체제를 갖추고 있다.3세 경영문제도 눈길을 끈다. SK가(家) 3세들의 경우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의 외아들인 최영근(SK케미칼 지분 1.46% 보유)은 SK그룹 계열사인 SKD&D에서 경영수업 중이다. 그는 2019년 4월 3일 마약(액상 대마)을 상습적으로 흡입한 혐의로 구속돼 인천지법 재판에 회부됐다. 최신원 회장의 외아들인 최성환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1981년생인 최성환은 2009년 SKC에 입사했으며, 현재 지주사인 SK(주)에서 사업포트폴리오 부문 상무로 재직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은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학교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잠시 SK그룹에 몸을 담았다가 현재는 퇴사한 상태이며 둘째 딸 최민정은 해군 장교로 근무하다 중국의 투자회사에 근무 중이며 장남 최인근은 미국 브라운대에 재학 중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그룹은 섬유에서 출발해 사업의 중심을 에너지, 이동통신, 반도체 등으로 주력 사업을 바꾸면서 성장했다. 사진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19 이천포럼' 행사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인공지능 등 혁신기술 활용, 딥 체인지 가속화에 관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SK 제공

2019-10-0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7]에스케이-16 용인 원삼면 최대 반도체단지

448만㎡ 10년간 120조 투자D램·차세대 메모리 4개라인2024년 완공… 협력사 입주최대 10만명이상 일자리도'中 굴기' 효과적 견제 가능SK가 용인시 원삼면 일대 448만㎡(135만평)에 향후 10년 동안 총 120조원을 투자해서 연산 100조원대의 '반도체 특화클러스터'를 건설하기로 했다. 2019년 2월 21일 SK그룹이 주도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인 용인일반산업단지가 반도체부지 조성을 위한 투자의향서를 용인시에 제출한 것이다. 부지 평탄작업이 끝나는 2022년부터 D램과 차세대 메모리 4개 라인 건설에 착수해서 2024년에 완공하기로 했다. 국내외 장비, 소재, 부품 협력사 50여 업체도 함께 입주한다. 계획대로 투자가 이뤄질 경우 1만7천여 직접고용 및 협력업체까지 감안하면 최대 10만명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추정된다.>> '특화클러스터' 조성 그동안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위해 용인뿐만 아니라 이천, 충북 청주, 경북 구미 등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SK하이닉스가 용인시를 선택한 이유는 인근인 화성시 기흥에 세계 최대의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 공장 17곳을 중심으로 500여 장비 및 부품 협력업체들이 대거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용인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연구원들의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대상이었다. 우수 인재 확보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반도체분야에서는 서울과의 거리가 중요한 변수인 것이다.문재인 정부의 수도권 규제 완화 첫 번째 사례인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가 정부의 심의를 통과했다. 국토교통부는 2019년 3월 15일 열린 국토부 수도권정비실무위원회에서 용인에 조성되는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에 대한 산업단지 공급물량 추가 공급(특별물량) 심의를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실무위원회는 정비위원회 전 단계지만 보통 실무위를 통과하면 정비위원회는 무리 없이 통과해 사실상 본회의의 성격이 짙다. 또한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는 2019년 3월 18일부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2022년 3월 22일까지 이 구역에서 토지를 거래하려면 용인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고 계약을 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허가를 받을 때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SK하이닉스는 기존의 이천공장과 충북 청주 사업장에도 투자를 지속한다. SK하이닉스 본사가 위치한 이천공장은 부지 122만㎡에 2개 라인이 가동 중인데 추가로 M16라인 구축과 연구개발동 건설 등에 약 10년간 20조원 규모를 투자할 계획이다. 한편 청주공장에는 2018년부터 가동 중인 M15의 생산능력 확대를 포함해 약 10년간 35조원을 투자한다.청주공장은 LG그룹의 금성반도체가 1988년 9월에 청주시 흥덕구 향정동 1에 지은 반도체공장으로 'SK하이닉스'의 시발점이다. 1989년 8월 금성일렉트론이 당시 금성사 소속이던 청주공장을 인수해서 금성일렉트론㈜로, 1995년 1월에는 LG반도체㈜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청주공장은 1999년 10월 외환위기 때 국가 차원의 빅딜과정에서 1983년에 설립된 현대전자에 흡수 합병되어 고전했다. 2001년 8월에 현대그룹에서 분리되어 독자경영을 하다 2012년 3월에 SK하이닉스로 변경된 것이다.>> '트라이앵글' 제조거점이로써 SK는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반도체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용인시에 최대 규모의 반도체특화단지가 건설되면 경기 남부지역은 삼성전자의 기흥 반도체공장과 이천시의 SK하이닉스공장을 연결하는 세계최대의 '반도체 트라이앵글' 제조거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2018년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은 86조원으로 세계 1위이며 SK하이닉스는 40조원으로 세계 3위였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도 효과적인 견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향후 10년간 총 120조원을 투입해 세계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건설하기로 하고 용인시 원삼면 일대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경인일보DB

2019-09-3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6]에스케이-15 가습기 살균제 연루의혹

국내첫 '가습기메이트' 개발영유아에 집중… 10곳 고발환경부, 원료 유해성 제기케미칼 前대표 등 재판넘겨SK는 가습기 살균제 소동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란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로 영유아가 사망하거나 폐 손상 등 심각한 건강 피해를 본 사건이다. 의료계가 어린이들의 원인 미상 급성 간질성 폐렴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2월이었다. 1~2세 아기 10여명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급성 폐질환으로 입원하고 70~80%가 폐기흉과 폐 섬유화가 발생하는 등 상태가 나빠져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 괴질은 2006년 말~2007년 초에 다시 집단 발생했고 2007년 말에도 나타났으나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착수한 것은 2011년 4월부터였다. 늑장대응의 몰매를 맞았던 질병관리본부는 같은 해 8월 원인 미상의 폐 손상은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2016년 5월 기준 사망 266명을 포함 1천848명이 넘는다. 특히 피해는 임산부와 영·유아에 집중됐다.>> 폐손상 등 사망자 속출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폐 손상 사망자의 4명 중 1명이 4세 이하의 영유아인 것으로 조사됐다. 치사율도 남아 42%, 여아는 70%에 달하는 등 4세 이하의 유아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은 2015년 12월 자체 조사를 근거로 1천87만명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 이중 최대 227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국내에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선보인 해는 1994년이다. SK케미칼(당시 유공, 현 SK디스커버리)이 1994년 국내 최초로 '가습기메이트'라는 상품을 개발했다. "물에 첨가하면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세균을 완전히 살균해 준다", "세계 최초",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등의 광고를 했다. 이 시기 생산·판매된 제품은 옥시레킷베킨저의 '뉴가습기당번' 외에도 롯데마트, 애경산업, 이마트, 홈플러스, 코스트코, 세퓨·아토오가닉·아토세이프·GS 등에서 생산한 제품까지 20종에 이른다. 1994~2011년까지 17년간 20개 종류의 가습기 살균제가 판매됐고 연간 60만개 정도가 사용된 것으로 파악됐다.질병관리본부는 2011년 11월 11일 가습기 살균제 수거 명령을 내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에 가습기 살균제를 허위로 안전하다고 표시했다는 이유로 옥시레킷벤키저 5천만원, 홈플러스 1천만원, 버터플라이이펙트(세퓨) 100만원 등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항간에는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빚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2012년 8월에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 제조업체 10곳을 형사 고발했으나 검찰은 '피해 조사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를 미뤘다. 2014년 피해자와 가족 102명이 옥시레킷벤키저 등 14개 제조회사를 살인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에선 2016년 1월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옥시와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제조·유통사를 압수 수색하는 등 수사에 나서 역학조사 이후 5년 만에 다시 주목을 받았었다.검찰이 SK와 애경산업에 수사를 본격화한 것은 형사고발 7년 후인 2019년부터였다. 2019년 2월 13일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SK케미칼(SK디스커버리)로부터 원료를 제공받아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만들어 애경산업에 납품한 SK의 하청업체 필러물산 대표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했다. '가습기메이트'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 당시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피해자를 냈지만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에서 제외된 때문이었다. >> 올해 4월 수사 재개검찰의 SK 수사 이전까지 유해성이 입증된 원료는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와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뿐이었다. 그러나 환경부가 2018년과 2019년 초에 SK와 애경산업 등이 만든 '가습기 메이트'의 원료인 CMIT(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 MIT(메틸아이소틸졸리논)도 인체에 유해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2019년 4월 1일 SK케미칼의 부사장 1명을 연구보고서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 재판에 넘겼다.그동안 SK가 은폐해 왔던 '가습기 메이트' 독성실험결과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확인됐다. SK케미칼의 전신인 (주)유공은 1994년에 '가습기 메이트'를 개발하면서 같은 해 10월부터 3개월간 서울대 수의대 이영순 교수팀에 흡입 독성 실험을 맡겼다. 당시 이 교수팀은 실험쥐를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쥐의 백혈구 수 변화가 확인돼 '가습기 메이트'가 인체에 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보고서를 SK측에 전달했었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보고서는 1995년 초에 나왔지만 가습기 메이트는 이미 1994년부터 시판을 개시했다는 점이다.가습기 살균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2015년에 환경부는 SK측에 이 교수의 연구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2016년에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같은 자료 제출을 명했지만 SK측에서는 자료가 없다고 버티다가 추후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SK케미칼이 보고서 사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2019년 7월 23일 서울지검 형사2부는 사건 발생 8년여 만에 SK케미칼 전 대표 등 4명, 애경산업 전 대표 등 5명, 필러물산 전 대표 등 2명, 이마트 전 임원 등 2명, GS리테일 전 팀장 1명 등 책임자 34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번 재수사를 통해 2016년 첫 사법처리 당시 처벌을 피했던 관련자들이 대거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가습기 살균제 소동에서도 피해가지 못했다. 사진은 가습기 참사 구제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집회 모습. /경인일보 DB

2019-09-2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5]에스케이-14 제약바이오사업 강화

국내 첫 후보물질 FDA승인대덕단지내 공장신설 생산2015년 독감백신 상용 성공BMS 원료의약품공장 인수美·유럽에 '판매 전초기지'SK는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차원에서 1993년부터 신약 연구·개발(R&D)사업을 추진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신약 후보 물질(파이프라인)을 미국 식품의약처(FDA)로부터 임상시험승인(IND)을 획득했으며 1999년에는 대전 대덕단지 내에 생산 공장을 신설하고 상업생산에 착수했다.SK케미칼은 2006년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대표이사에 취임한 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신약개발조직인 '라이프 사이언스'를 지주회사인 SK(주)에 직속화해서 그룹차원의 투자에 공을 들였다. >> 신약 연구·개발 추진2007년에는 국내의 세종공장에서 연속 반응공정 양산화에 성공한 뒤 2014년 세계 최초로 FDA 승인을 받았다. 1970년대 유공시절 석유화학 공정에 활용하던 기술을 의약품 생산에 적용한 것이다.2008년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2015년 세포배양 독감백신 상용화에 성공했다. SK케미칼 4가 백신(4종류 바이러스 예방)은 국내 제품 중 유일하게 3세 이상 전 연령층에 접종 가능할 정도로 차별성이 있었다. 2017년 4월에는 혈우병 치료제 앱스틸라(AFSTYLA)가 호주 식약처로부터 시판허가를 받았다.SK케미칼의 후신인 지주회사 SK(주)는 2011년에 사업조직을 분할해서 100% 자회사인 비상장의 SK바이오팜을 신설했다. SK바이오팜은 신약개발을 위한 대전 대덕연구단지 신약개발연구소와 글로벌 임상시험을 담당하는 미국 뉴저지 임상개발센터로 이원화돼 있다.설립 당해 연도인 2011년에 'SKL-N05(솔리암페놀)'의 임상 1상을 완료하고 미국 제약사 재즈에 기술 수출 및 공동개발을 통해 임상 3상 실험을 마무리하고 2017년 12월에 미국 재즈와 공동개발 중인 수면장애 치료제 'SKL-N05'의 FDA 승인신청을 완료했다. 'SKL-N05'는 연매출 1조원대의 선도의약품인 '자이렘'과 비교해 약효가 2배 이상 개선됨으로써 시장의 기대치를 높였는데 2019년부터 미국에서 본격 시판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이 2017년 6월에 입사해서 실무경력을 쌓는 중인데 그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2015 SK바이오텍 설립한편 2015년에는 SK바이오팜으로부터 원료의약품 생산부문을 분리해서 새로 SK바이오텍을 설립했다. 2017년 6월 글로벌 제약사인 미국계의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의 아일랜드 스워즈 원료의약품 생산공장을 인수했다. 이 공장은 연산 8만1천ℓ의 의약품원료를 만들고 있는데 주요 원료의약품은 항암제, 당뇨 치료제, 심혈관제 등 고령화로 수요가 급증하는 품목이다. 스워즈공장은 BMS가 생산하는 합성신약 제조과정 중 난도가 가장 높은 공장으로 지난 10년간 SK에서 원료의약품을 납품해왔었다. 유럽은 북미와 함께 세계 의약품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인데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 중 유럽 본토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직접 보유한 곳은 SK바이오텍이 유일하다.2017년 10월 세종공장(2천562평) 준공을 통해 기존의 대전 대덕단지(16만 ℓ)를 포함해 총생산 규모를 32만ℓ로 확대하고 2018년 1월 미국에 마케팅법인을 설립해 미국과 유럽에 판매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1993년 처음 제약사업에 진출한 이래 25년 동안 수천억 원을 들이며 제약 및 바이오 사업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케미칼은 2006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하는 등 제약 바이오 사업을 강화했다. 사진은 2008년 1월에 신설한 바이오실. /SK케미칼 50년사 발췌

2019-09-1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4]에스케이-13 두번째 구속과 특별사면

김, SK C&C 주식담보 권유형제, 8회 걸쳐 1560억 대출펀드출자금을 개인적 사용재판부 "정당 이윤추구보다일확천금 노려 죄질 불량"2013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를 구속시켰다. 최태원은 징역 4년형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최 부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됐다."SK그룹 총수 최태원은 무속인 출신의 김원홍을 신뢰해 2003년경부터 선물옵션투자 위한 투자위탁금을 송금해 왔는데, 2008년 5월경 더 이상 투자할 돈이 없어 송금을 못하게 되자 김원홍은 당시 주식시장 상장이 논의 중이던 SK C&C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보라고 권유했고 최태원과 동생 최재원은 이 권유에 따라 저축은행에 SK C&C 주식을 담보로 8회에 걸쳐 1천560억원을 대출받았다. >> 최태원·재원 횡령 구속이후 최재원은 김원홍으로부터 '리먼사태가 좋은 투자기회'라는 투자 권유 받고 김준홍에게 SK C&C 주식담보 제공 없이 500여억원의 자금을 조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SK C&C 주식담보비율 과다 이유), 이 지시에 따라 김준홍은 SK(주) 계열사에서 천억원 단위의 새로운 펀드를 출자받고, 출자금을 베넥스자산운용의 계좌로 선지급 받아(최태원의 승낙을 받아 실행했다. 이에 따라 SKT, SK C&C에서 500억원씩 합계 1천억원 가량을 펀드에 출자하고 이를 베넥스자산운용에 선지급하기로 했다) 베넥스는 이 중 447억 원을 투자위탁금 명목으로 김원홍에 송금했다.그러나 김원홍은 위 투자금을 성실히 관리하지 않고, 이전에 28명에 이르는 사람으로부터 투자를 위탁받았다가 낸 손실을 최태원 형제의 돈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자신과 가족의 보험료 납부, 개인 채무 상환, 직원들에 대한 급여 지급, 친인척에 대한 생활비 지급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에 최태원 형제가 위탁한 펀드 출자금은 약속된 기한인 2008년 11월 말까지 돌려주지 못했고 이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최태원 소유의 SK C&C 주식을 담보로 저축은행들로부터 900억원을 대출받아 펀드설립기금으로 사용했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2018 국정감사 정책자료집-6면)재판부는 "최태원이 SK그룹 회장 지위를 악용해 자신의 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그룹 계열사로 하여금 1천500억원을 이 사건 펀드에 출자케 하는 방법으로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최태원은 최재원과 함께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기업경영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이로 인한 정당한 대가를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무속인 출신 김원홍이 신통력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일시에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믿고 일확천금을 추구하기 위해 범행이 비롯됐다는 점에서 죄질이 불량하다"며 특경가법상 횡령 등을 이유로 최태원에게는 징역 4년, 최재원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최태원은 구속수감 924일 만인 2015년에 8·15특별사면으로, 최재원은 3년3개월 복역 후인 2016년 7월 29일에 가석방됐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 7면)>> 최회장, 924일만에 석방최태원은 2005년 6월 1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특경법(배임)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바 있다.김원홍 전 고문은 1961년 경주에서 태어나 1990년대 증권사에 근무하면서 높은 수익률 덕분에 '부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최 회장은 손길승 SK텔레콤 고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1998년 8월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회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최 회장은 최종현 회장 별세 이후 SK그룹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김원홍에게 투자를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관계자는 "당시 그룹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3조원의 돈이 필요했는데, SK C&C 주식을 팔아 지주회사인 SK(주)의 주식을 사려면 2조 원이 부족했던 것으로 안다"며 "김 씨를 통해 선물옵션 투자를 해서 현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재판부는 "이 사건은 김원홍의 간계(奸計)에 최 회장 형제가 속았거나 김원홍과 공동으로 범죄를 모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이데일리', 2013.07.17)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 났다. /연합뉴스

2019-09-0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3]에스케이-12 하이닉스 인수

채권단 지분 21.1% 넘겨에너지·SKT '내수' 감안수출업체 인수 '더 절실'공개매각 응찰 지지부진2011년 인수의향서 제출SK는 2000년대 들어 또다시 초대형 M&A(인수·합병)를 성사시켰는데 그것은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현대전자의 후신)의 경영권도 확보한 것이다. 하이닉스 채권단은 2011년 11월 11일 지분 21.1%를 SK텔레콤에 3조4천267억원에 넘긴 것이다. 하이닉스는 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 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천44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기업이다. 하이닉스를 인수해 종합IT그룹으로 변신시킨다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 주력인 SK에너지와 SK텔레콤이 내수기업임을 감안하면 수출업체인 하이닉스의 인수 당위성은 더 절실했다.SK하이닉스의 전신인 하이닉스반도체는 1949년에 설립된 국도건설(주)가 모체다. 현대그룹은 1983년에 반도체산업에 진출하면서 국도건설을 인수, 상호를 현대전자산업(주)로 변경했다.>> 초대형 M&A 성사현대그룹이 건설회사를 인수해 반도체회사로 전환한 것은 당시 국도건설이 이천에 30여 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전자는 이 땅에 반도체공장을 세우고 1985년에 256Kb D램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생산에 돌입했다.1992년에는 2세대 16Mb D램과 반도체 64Mb D램을 개발했으며 1995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b SD램을 개발하고 1996년 12월에는 기업을 공개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삼성과 현대, LG와 대우, SK 등 5대 그룹에 국한해 계열사들을 맞교환하는 이른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추진했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라고 판단해 기업 간에 서로 중복되는 투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됐는데 빅딜 대상사업으로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 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총 7개 업종이었다. 그러나 해당 그룹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1998년 정부는 전경련을 앞세워 구본무 회장에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부는 빅딜의 기본방향을 재계서열 순위가 앞서는 기업이 후순위 기업의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빅딜에 불응하는 기업에는 대출중단 등을 내세우며 압박했던 것이다. LG반도체는 1989년 5월 청주와 경북 구미에 생산시설을 갖춘 금성일렉트론으로 설립돼 1995년 LG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 효자 기업이었다. 1995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이 9천억원을 기록했다. LG가 승복하지 않자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의 주선으로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다. 이왕 포기하는 거 100%를 현대에 넘기겠다"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현대전자는 2000년 이후 반도체 가격 하락 등의 여파로 경영난에 직면했는데 2001년 3월 상호를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꿨다. 그해 5월에는 통신단말기사업부를 현대큐리텔로 분사하고 통신ADSL사업부는 현대네트웍스로 분사했다. 이 해 8월 현대그룹이 채권단에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경영권 포기 각서를 제출해 하이닉스반도체는 그룹으로부터 분리됐으며 2001년 10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의해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관리가 개시됐다. 2003년 5월 모바일용 초저전력 256Mb S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채권단은 2009년 9월부터 하이닉스반도체 공개매각작업에 착수했으나 응찰기업이 없어 지지부진하다가 2011년 6월 3차 매각 공고 시 SK텔레콤과 STX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STX는 인수 추진을 중단함으로써 11월 SK텔레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2012년 2월 14일 SK텔레콤은 하이닉스반도체의 총 발행주식의 21.05%를 보유하게 됐다고 밝혔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2011년 11월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이에 SK는 에너지·화학과 ICT에 이어 '반도체'라는 제3의 성장축을 구축했다. /SK 제공

2019-09-02 이한구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