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5]에스케이-14 제약바이오사업 강화

국내 첫 후보물질 FDA승인대덕단지내 공장신설 생산2015년 독감백신 상용 성공BMS 원료의약품공장 인수美·유럽에 '판매 전초기지'SK는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차원에서 1993년부터 신약 연구·개발(R&D)사업을 추진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신약 후보 물질(파이프라인)을 미국 식품의약처(FDA)로부터 임상시험승인(IND)을 획득했으며 1999년에는 대전 대덕단지 내에 생산 공장을 신설하고 상업생산에 착수했다.SK케미칼은 2006년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대표이사에 취임한 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신약개발조직인 '라이프 사이언스'를 지주회사인 SK(주)에 직속화해서 그룹차원의 투자에 공을 들였다. >> 신약 연구·개발 추진2007년에는 국내의 세종공장에서 연속 반응공정 양산화에 성공한 뒤 2014년 세계 최초로 FDA 승인을 받았다. 1970년대 유공시절 석유화학 공정에 활용하던 기술을 의약품 생산에 적용한 것이다.2008년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2015년 세포배양 독감백신 상용화에 성공했다. SK케미칼 4가 백신(4종류 바이러스 예방)은 국내 제품 중 유일하게 3세 이상 전 연령층에 접종 가능할 정도로 차별성이 있었다. 2017년 4월에는 혈우병 치료제 앱스틸라(AFSTYLA)가 호주 식약처로부터 시판허가를 받았다.SK케미칼의 후신인 지주회사 SK(주)는 2011년에 사업조직을 분할해서 100% 자회사인 비상장의 SK바이오팜을 신설했다. SK바이오팜은 신약개발을 위한 대전 대덕연구단지 신약개발연구소와 글로벌 임상시험을 담당하는 미국 뉴저지 임상개발센터로 이원화돼 있다.설립 당해 연도인 2011년에 'SKL-N05(솔리암페놀)'의 임상 1상을 완료하고 미국 제약사 재즈에 기술 수출 및 공동개발을 통해 임상 3상 실험을 마무리하고 2017년 12월에 미국 재즈와 공동개발 중인 수면장애 치료제 'SKL-N05'의 FDA 승인신청을 완료했다. 'SKL-N05'는 연매출 1조원대의 선도의약품인 '자이렘'과 비교해 약효가 2배 이상 개선됨으로써 시장의 기대치를 높였는데 2019년부터 미국에서 본격 시판될 예정이다.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이 2017년 6월에 입사해서 실무경력을 쌓는 중인데 그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2015 SK바이오텍 설립한편 2015년에는 SK바이오팜으로부터 원료의약품 생산부문을 분리해서 새로 SK바이오텍을 설립했다. 2017년 6월 글로벌 제약사인 미국계의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의 아일랜드 스워즈 원료의약품 생산공장을 인수했다. 이 공장은 연산 8만1천ℓ의 의약품원료를 만들고 있는데 주요 원료의약품은 항암제, 당뇨 치료제, 심혈관제 등 고령화로 수요가 급증하는 품목이다. 스워즈공장은 BMS가 생산하는 합성신약 제조과정 중 난도가 가장 높은 공장으로 지난 10년간 SK에서 원료의약품을 납품해왔었다. 유럽은 북미와 함께 세계 의약품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인데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 중 유럽 본토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직접 보유한 곳은 SK바이오텍이 유일하다.2017년 10월 세종공장(2천562평) 준공을 통해 기존의 대전 대덕단지(16만 ℓ)를 포함해 총생산 규모를 32만ℓ로 확대하고 2018년 1월 미국에 마케팅법인을 설립해 미국과 유럽에 판매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1993년 처음 제약사업에 진출한 이래 25년 동안 수천억 원을 들이며 제약 및 바이오 사업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케미칼은 2006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백신사업을 시작하는 등 제약 바이오 사업을 강화했다. 사진은 2008년 1월에 신설한 바이오실. /SK케미칼 50년사 발췌

2019-09-1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4]에스케이-13 두번째 구속과 특별사면

김, SK C&C 주식담보 권유형제, 8회 걸쳐 1560억 대출펀드출자금을 개인적 사용재판부 "정당 이윤추구보다일확천금 노려 죄질 불량"2013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를 구속시켰다. 최태원은 징역 4년형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최 부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됐다."SK그룹 총수 최태원은 무속인 출신의 김원홍을 신뢰해 2003년경부터 선물옵션투자 위한 투자위탁금을 송금해 왔는데, 2008년 5월경 더 이상 투자할 돈이 없어 송금을 못하게 되자 김원홍은 당시 주식시장 상장이 논의 중이던 SK C&C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보라고 권유했고 최태원과 동생 최재원은 이 권유에 따라 저축은행에 SK C&C 주식을 담보로 8회에 걸쳐 1천560억원을 대출받았다. >> 최태원·재원 횡령 구속이후 최재원은 김원홍으로부터 '리먼사태가 좋은 투자기회'라는 투자 권유 받고 김준홍에게 SK C&C 주식담보 제공 없이 500여억원의 자금을 조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SK C&C 주식담보비율 과다 이유), 이 지시에 따라 김준홍은 SK(주) 계열사에서 천억원 단위의 새로운 펀드를 출자받고, 출자금을 베넥스자산운용의 계좌로 선지급 받아(최태원의 승낙을 받아 실행했다. 이에 따라 SKT, SK C&C에서 500억원씩 합계 1천억원 가량을 펀드에 출자하고 이를 베넥스자산운용에 선지급하기로 했다) 베넥스는 이 중 447억 원을 투자위탁금 명목으로 김원홍에 송금했다.그러나 김원홍은 위 투자금을 성실히 관리하지 않고, 이전에 28명에 이르는 사람으로부터 투자를 위탁받았다가 낸 손실을 최태원 형제의 돈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자신과 가족의 보험료 납부, 개인 채무 상환, 직원들에 대한 급여 지급, 친인척에 대한 생활비 지급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에 최태원 형제가 위탁한 펀드 출자금은 약속된 기한인 2008년 11월 말까지 돌려주지 못했고 이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최태원 소유의 SK C&C 주식을 담보로 저축은행들로부터 900억원을 대출받아 펀드설립기금으로 사용했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2018 국정감사 정책자료집-6면)재판부는 "최태원이 SK그룹 회장 지위를 악용해 자신의 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그룹 계열사로 하여금 1천500억원을 이 사건 펀드에 출자케 하는 방법으로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최태원은 최재원과 함께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기업경영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이로 인한 정당한 대가를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무속인 출신 김원홍이 신통력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일시에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믿고 일확천금을 추구하기 위해 범행이 비롯됐다는 점에서 죄질이 불량하다"며 특경가법상 횡령 등을 이유로 최태원에게는 징역 4년, 최재원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최태원은 구속수감 924일 만인 2015년에 8·15특별사면으로, 최재원은 3년3개월 복역 후인 2016년 7월 29일에 가석방됐다.(국회의원 채이배, '재벌범죄백서', 7면)>> 최회장, 924일만에 석방최태원은 2005년 6월 1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특경법(배임)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바 있다.김원홍 전 고문은 1961년 경주에서 태어나 1990년대 증권사에 근무하면서 높은 수익률 덕분에 '부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최 회장은 손길승 SK텔레콤 고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1998년 8월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회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최 회장은 최종현 회장 별세 이후 SK그룹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김원홍에게 투자를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관계자는 "당시 그룹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3조원의 돈이 필요했는데, SK C&C 주식을 팔아 지주회사인 SK(주)의 주식을 사려면 2조 원이 부족했던 것으로 안다"며 "김 씨를 통해 선물옵션 투자를 해서 현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재판부는 "이 사건은 김원홍의 간계(奸計)에 최 회장 형제가 속았거나 김원홍과 공동으로 범죄를 모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이데일리', 2013.07.17)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그룹 계열사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 났다. /연합뉴스

2019-09-0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3]에스케이-12 하이닉스 인수

채권단 지분 21.1% 넘겨에너지·SKT '내수' 감안수출업체 인수 '더 절실'공개매각 응찰 지지부진2011년 인수의향서 제출SK는 2000년대 들어 또다시 초대형 M&A(인수·합병)를 성사시켰는데 그것은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현대전자의 후신)의 경영권도 확보한 것이다. 하이닉스 채권단은 2011년 11월 11일 지분 21.1%를 SK텔레콤에 3조4천267억원에 넘긴 것이다. 하이닉스는 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 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천44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기업이다. 하이닉스를 인수해 종합IT그룹으로 변신시킨다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 주력인 SK에너지와 SK텔레콤이 내수기업임을 감안하면 수출업체인 하이닉스의 인수 당위성은 더 절실했다.SK하이닉스의 전신인 하이닉스반도체는 1949년에 설립된 국도건설(주)가 모체다. 현대그룹은 1983년에 반도체산업에 진출하면서 국도건설을 인수, 상호를 현대전자산업(주)로 변경했다.>> 초대형 M&A 성사현대그룹이 건설회사를 인수해 반도체회사로 전환한 것은 당시 국도건설이 이천에 30여 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전자는 이 땅에 반도체공장을 세우고 1985년에 256Kb D램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생산에 돌입했다.1992년에는 2세대 16Mb D램과 반도체 64Mb D램을 개발했으며 1995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b SD램을 개발하고 1996년 12월에는 기업을 공개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삼성과 현대, LG와 대우, SK 등 5대 그룹에 국한해 계열사들을 맞교환하는 이른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추진했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라고 판단해 기업 간에 서로 중복되는 투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됐는데 빅딜 대상사업으로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 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총 7개 업종이었다. 그러나 해당 그룹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1998년 정부는 전경련을 앞세워 구본무 회장에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부는 빅딜의 기본방향을 재계서열 순위가 앞서는 기업이 후순위 기업의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빅딜에 불응하는 기업에는 대출중단 등을 내세우며 압박했던 것이다. LG반도체는 1989년 5월 청주와 경북 구미에 생산시설을 갖춘 금성일렉트론으로 설립돼 1995년 LG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 효자 기업이었다. 1995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이 9천억원을 기록했다. LG가 승복하지 않자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의 주선으로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다. 이왕 포기하는 거 100%를 현대에 넘기겠다"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현대전자는 2000년 이후 반도체 가격 하락 등의 여파로 경영난에 직면했는데 2001년 3월 상호를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꿨다. 그해 5월에는 통신단말기사업부를 현대큐리텔로 분사하고 통신ADSL사업부는 현대네트웍스로 분사했다. 이 해 8월 현대그룹이 채권단에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경영권 포기 각서를 제출해 하이닉스반도체는 그룹으로부터 분리됐으며 2001년 10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의해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관리가 개시됐다. 2003년 5월 모바일용 초저전력 256Mb S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채권단은 2009년 9월부터 하이닉스반도체 공개매각작업에 착수했으나 응찰기업이 없어 지지부진하다가 2011년 6월 3차 매각 공고 시 SK텔레콤과 STX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STX는 인수 추진을 중단함으로써 11월 SK텔레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2012년 2월 14일 SK텔레콤은 하이닉스반도체의 총 발행주식의 21.05%를 보유하게 됐다고 밝혔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2011년 11월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이에 SK는 에너지·화학과 ICT에 이어 '반도체'라는 제3의 성장축을 구축했다. /SK 제공

2019-09-0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2]에스케이-11 또다른 시련 '소버린 사태'

재벌구조해체 등 '공격 명분'최태원, 끝내 회장직 사퇴2008년 분식회계 혐의 구속MB, 78일만에 '특별 사면'자산 97조420억 재계 '3위'SK그룹은 또 다른 시련으로 고전했는데 2003년에 뉴질랜드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그룹의 모회사인 SK(주)(현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인수를 시도한 때문이었다. 최태원 회장이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되면서 SK(주)의 주가가 급락하자 소버린의 자회사인 크레스트는 자산 30조원의 SK그룹 장악을 시도했다. 1천768억원을 동원해 SK(주)의 지분 14.99%를 확보, 2대 주주로 급부상한 것이다. 워낙에 소버린이 지분을 빠르게 장악했던 나머지 '5% 지분 공시' 룰에도 불구하고 SK그룹은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다.2003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소버린 측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당시 최 회장 등 총수일가의 직접 지분은 1.39%에 불과했지만 결국 표 대결에서 최 회장 측이 승리했다. >> 지분 재빠르게 '장악'그 과정에서 지분확보 경쟁이 야기되면서 SK의 주가는 이전의 5천원 가량에서 2004년에는 3만~5만원 대로 급상승한다. 그리고 2004년 10월 소버린이 임시주주총회를 요구하고 2차 공세를 강화하자 SK의 주가는 무려 6만원대로 치솟았다.한편 지분확보 경쟁에서 소버린은 자신들의 SK그룹 공격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다. '재벌구조해체' 내지 '투명경영' 등을 내세운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소액주주와 SK 노조의 지분을 소버린에게 이양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소버린은 2005년 7월 SK(주)의 지분을 전량 처분, 8천억원 가량의 시세차익을 얻으며 '먹튀'하고 말았다. 수익률이 2년 만에 600%였는데 이로써 소버린사태는 마무리됐다.2004년 최태원은 SK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2008년에는 1조5천억원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됐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수감 78일 만에 그를 특별 사면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가짜 장부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표면화되면서 노무현 정부가 자진 신고할 경우 처벌을 면제해주는 식으로 분위기를 띄운 터여서 최태원 회장만 단독으로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 탓이다.금융감독위원회와 법무부는 2005년 3월부터 2007년 3월말까지 2년 동안 한시적으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분식회계를 바로 잡을 경우 형사처벌을 면제해주기로 했던바 자수한 기업 수가 총 200여 업체로 국내 상장기업(코스닥 포함) 1천600여사의 8분의 1에 해당했다. 더구나 2008년에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시작부터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표방하고 나선 점도 한몫 했다. SK의 분식회계는 국내 재벌들의 고질적인 파행경영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어서 의미가 크다. 정부는 기업 투명성 제고차원에서 분식회계, 허위공시, 주가조작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증권집단소송제를 2005년 1월부터 실시했다.>> 계열사 86개 '그룹 약진'그럼에도 SK그룹의 약진은 계속돼 2011년 4월에는 계열회사 수 86개에 자산총액이 97조42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5위에 랭크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한국전력 등 공기업을 제외하면 삼성, 현대차그룹에 이어 3위다. 1980년대를 경계로 삼성, 현대, LG, 대우 등 빅(big) 4와 나머지 재벌들 간에 양극화가 점차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SK가 톱(Top) 3에 진입한 것이 매우 이채롭다.분식회계로 하루아침에 파산한 미국의 엔론(Enron Corporation)과는 너무 대비된다.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엔론은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2월 2일에 별안간 공중분해 됐다. 2만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2000년 매출 1천110억달러를 달성한 세계 주요 전기, 천연가스, 통신 및 제지 기업의 하나로 '포춘(Fortune)'은 엔론을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엔론의 자산과 이익 수치는 대부분 가짜였다. 어떤 경우에는 엄청나게 부풀려졌으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인 것도 있었고 부채와 손실은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엔론의 실제 수익원은 이 회사의 모태인 노던 내추럴 가스뿐이었다.이 사건으로 당시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스 레이 회장과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은 연방법원에서 사기와 내부자 거래 등으로 각각 징역 24년4개월과 24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엔론의 외부 감사를 맡았던 미국의 5대 회계법인의 하나인 아서 앤더슨 또한 이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해 결국 파산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선진화된 경영 시스템인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경영 효율성과 재무 건전성을 높였다. /SK 제공

2019-08-2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1]에스케이-10 최대의 분식회계

화학·에너지·통신 골격 완성38세 약관 최태원 총수 선임2003년 계열사 59개 재벌3위주식 부당하게 맞교환 혐의회계장부 조작 '최회장 구속'1993년 3월에는 국내 최대의 에너지기업인 SK(주)가 쌍용그룹으로부터 국내 정유 시장 점유율 12.6%의 쌍용정유 지분 28.41%를 인수했다.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 매각과정에서 추가로 1조7천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됐는데 이를 정리하고자 알토란같은 쌍용정유를 매각했던 것이다. 이로써 국내 정유 시장은 종래 5사 분할체제(SK(주), LG정유, 쌍용정유, 한화에너지, 현대정유)에서 SK(주), LG정유, 현대정유 등 3사 지배체제로 단순화됐는데, 특히 SK(주)는 쌍용정유를 인수해 시장지배율이 36.2%에서 48.8%로 크게 향상돼 국내정유업계의 리더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호사다마라 했던가 또다시 위기가 도래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8월 26일 최종현 회장이 향년 68세로 사망한 것이다. 최종현 2대 회장은 친형인 최종건 창업주가 1973년에 향년 47세로 타계하면서 경영권을 물려받아 1980년에 유공(SK이노베이션)을,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인수해 화학과 에너지, 통신의 삼각편대의 SK그룹 골격을 완성했다. >> 최종현 회장 사망더구나 당시는 단군 이래 최대 국난·외환위기여서 매우 엄혹한 시기에 거함 SK호는 탁월한 선장을 잃었다.최종현 2대 회장 사망과 함께 3대 총수에는 38세의 약관이자 최종현의 장남인 최태원이 사촌 형제들을 제치고 선임됐다. 1960년생인 그는 국내에서 고려대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했다가 SK에서 경영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최종건 창업주의 3형제(윤원, 신원, 창원)와 최종현 2대 회장의 형제(태원, 재원) 등 5명의 사촌형제 회동에서 당시 외환위기 속에서 그룹을 이끌 적임자로 최태원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한경비즈니스' <No.1213, 2019.2.25.> 39쪽)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위로 4촌 형제 중 가장 배경이 좋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1999년 10월 SK상사(SK네트웍스)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연간 시장규모 4조원대의 의료용품 유통사업에도 진출했다. 의료정보분야 벤처기업인 비트컴퓨터, 메디다스, 전능메디칼 등과 제휴, 전자상거래를 통해 병원과 약국에 약품과 의료장비 등을 공급할 목적에서였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이동통신업계의 1위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의 코오롱과 포항제철 지분 51.19%를 인수했다. 이에 SK텔레콤은 국내 이동통신 시장점유율 60%를 장악, 최대의 독점업체로 도약했다.2000년 4월에는 한덕생명보험을 인수, 이미 인수한 국민생명과 함께 SK생명에 통합했다.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 여파로 부실화된 두원, 조선, 한국, 한성, 동아, 태평양, 국민, 한덕생명보험 등을 다른 기업들에 헐값에라도 인수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는데 그 일환으로 SK그룹이 한덕생명과 국민생명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SK는 평화은행 카드사업부를 인수해 새로 신용카드사업에도 진출했다.그 결과 SK그룹은 2003년 당시 계열사 수 59개에 자산 50조원의 재벌서열 3위로 도약했다. 대부분의 재벌이 외환위기로 축소경영 등 엄청난 시련을 겪는 상황에도 SK그룹만은 약진을 거듭했다. 이 무렵까지 SK그룹은 '비교적 모나지 않은 그룹이었다. 시류를 잘 타서인지 거대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일이 거의 없었고 재벌개혁을 화두로 꺼낸 현 정부 아래서도 늘 예봉을 비켜가고 있다. 다른 기업들과도 큰 마찰 없이 지내 왔다.'('뉴스메이커', 2001.2.15, 410호)>> 그룹 최대위기 직면그러나 SK그룹은 창업 50주년 즈음 최대 위기에 직면했는데 그 시작은 2003년 2월 최태원 회장이 전격 구속되면서부터였다. 최 회장이 비상장 계열사인 워커힐호텔 주식과 SK C&C가 보유 중이던 초우량 상장기업인 SK글로벌의 주식을 부당하게 맞교환한 혐의 등 때문이었다. 사유는 최태원 등이 워커힐호텔 주식 변칙증여와 SK증권 주식 이면 거래 등을 통해 SK C&C와 SK글로벌에 각각 716억원과 1천355억원 등 총 2천71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특히 이 사건은 진보성향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에 발발했기 때문에 주목 대상이었다. 이후 사정기관의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이 1조5천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사실도 확인됐다. SK글로벌은 2001년도 회계결산을 하면서 가공자산 계상 및 고의로 혹은 부주의로 회계장부에 누락시키는 부외부채 처리, 해외출자회사 평가손실 누락 등을 통해 1조1천881억원의 은행채무를 누락시키고 1천500억원 상당의 허위 매출채권을 만들어 이익을 부풀리는 등 총 1조5천587억원 상당을 분식회계 처리한 것이다. 1995년부터 그룹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일례로 SK해운은 2002년에 페이퍼 컴퍼니인 (주)아상 및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 등에 총 2천900억원을 빌려주고 그중 2천392억원을 연말에 손실로 처리한 것이 노출됐다. 이 때문에 SK해운은 700여억 원의 영입이익을 내고도 2천2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진풍경(?)이 야기됐다. SK그룹은 분식회계 등을 통해 조성한 자금 일부를 정치권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국내 기업 역사상 최대의 회계사기가 적발된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SK는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이 타계한 후 장남인 최태원이 사촌형제들을 제치고 3대 총수에 선임됐다. /SK 제공

2019-08-1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20]에스케이-9 이동통신 최강자로 군림

노태우, 끝내 사돈기업 선정김영삼 설득에 최종현 반납대신 '한국이동통신' 인수일제 귀속기업 모체 재벌화 형제경영 성공 대표적 사례선경의 대박 행진은 1990년대에도 계속됐는데 계기는 1994년에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었다. 한국전기통신(현 KT)은 1984년에 소위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서비스 업무를 분리해서 자회사로 한국이동통신을 설립했다. 동사는 1988년부터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무선호출, 차량 전화, 휴대전화에 대한 수요가 점증하는 등 전도가 매우 유망했다. 정부는 이동전화서비스사업을 경쟁체제로 전환하기로 하고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작업에 착수했다. 1991년 7월 23일 국회에서 제2이동전화 사업자 선정기준을 담은 공중전기통신법과 전기통신기본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20C 마지막 대형사업제2 이동통신은 20세기의 마지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돼 선경(유공), 포항제철, 코오롱, 쌍용, 동양, 동부 등이 각축전을 벌인 결과 1992년 8월 20일에 유공과 한전, GTE, 보다폰 등 총 16개 업체로 구성된 대한텔레콤(주)가 최종 선정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제2 이동통신의 낙찰자가 포항제철과 코오롱 등의 컨소시엄인 신세기통신으로 변경됐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임기 말의 (노태우) 대통령이 재계 전체의 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대형사업의 사업자에 자신의 사돈 기업을 선정한 것이다. 이즈음 노태우와 주례회동을 하는 자리에서 나(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임기 말에 이동통신사업이란 막대한 이권을 사돈에게 주면 절대 안 된다고 얘기했다. 노태우는 오히려 '아니 모든 사람이 찬성인데 김 후보만 왜 반대 합니까'하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나는 8월 24일 오전 하이얏트호텔에서 최종현 회장을 만났다. 나는 최 회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현 대통령의) 사돈으로서 최 회장이 반납하는 길밖에 방법이 없습니다.'나는 내가 반드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번 노태우의 결정을 취소할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설득했다.-선경은 25일 오후 사업권 반납을 발표했다."('김영삼 회고록3', 2015, 309-310면)선경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과 노태우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은 노 대통령 취임 7개월 만인 1988년 9월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바 있다. 대신 선경은 선발기업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서 1997년에 SK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항간에는 신설예정인 신세기통신보다 이미 영업 중인 선발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라 판단했다. 한국이동통신은 1999년에 신세기통신마저 인수함으로써 국내 이동통신업계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재벌서열 3위 '급성장'선경은 1980년대 이후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서 급속하게 덩치를 키운 결과 2011년에는 삼성, 현대차그룹에 이어 재벌 서열 3위로 성장했다. 그 와중에서 선경도 국내의 여느 재벌처럼 정치권과의 유대를 돈독히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현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일해재단에 현대, 삼성, 대우, LG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액수인 28억원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장남 최태원의 장인인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30억원의 뇌물을 공여했다. 개발도상국의 성공한 기업에 있어 정치자금 수수는 계속기업화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것이다."SK그룹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88~1993년을 중심으로 전후 몇 년간 급속도로 성장했다. SK그룹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르는 데는 이 기간의 성장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SK그룹의 이동통신사업 진출, 허가, 한국이동통신 인수 등의 과정은 '살아 있는 권력의 사위'이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SK그룹 성장사에서 최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일요신문', 2017.07.24.)창업자 최종건이 적수공권으로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도약의 기초를 마련하고 동생 최종현은 이를 재계서열 3위의 SK그룹으로 발전시켰다. SK그룹은 한화, 두산, 해태, 동양, 하이트, 애경그룹 등과 함께 일제가 남겼던 귀속기업을 모체로 해서 재벌화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 선경은 현대, LG, 한진그룹 등과 함께 형제경영을 통해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이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1994년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최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며 첨단 ICT 분야에 본격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SK 제공

2019-08-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9]에스케이-8 유공 인수·(하)

해운회사 설립 유조선 취역 정유시설 울산항 원유 수송국내 최대 석유에너지 기업22개社 11개로 '대폭 축소'정부 체면 세운 '가지치기'선경은 알 사우디은행으로부터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1억달러의 차관을 도입해서 불하대금 671억7천800만원을 상환했다. 선경은 1982년 상호를 (주)유공으로 변경하고 1985년 대한석유의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해서 선경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전환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어서 특히 주목됐다.선경은 유공 인수를 계기로 국내 최대의 석유제품 판매업체인 (주)흥국상사의 경영권도 확보했다. 흥국상사는 1965년 2월 10일에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된 개인 사업체였다.>> 흥국상사 경영권 확보그러나 1969년 6월에 걸프가 586만달러의 현금차관을 공여하면서 전 주식의 25%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가 1972년 12월에 유공이 흥국상사의 전 주식을 인수해서 유공의 자회사화했던 것이다. 흥국상사는 1980년말 당시 매출액 2천104억원에 매출이익률 6.53%의 초우량기업이었다.1982년 1월에는 자본금 10억원의 유공해운(주)를 설립하고 그해 6월과 7월에 25만 톤급의 대형 유조선 '아나벨라'호와 '야스텔라'호를 파나마로부터 용선해서 취역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라두라누라항에서 원유를 선적해서 정유시설이 있는 울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아세아상선으로부터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인 '코리아스타'호도 용선해서 원유수송에 투입했다.해외유전개발사업도 이때부터 개시했다. 신규로 개발하는 예멘의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원유의 10%를 (주)유공이 가지기로 사전에 예멘정부와 컨소시엄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마리브유전은 1985년 11월부터 개발정 시추와 생산시설 및 수출송유관 건설 등에 착수해서 1987년 12월부터 본격생산에 돌입한 단기간 내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1988년 1월 20일 유공해운 소속의 'Y위너'호가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개발원유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했다.유공 인수와 함께 관련 수직다각화작업을 동시에 병행해서 선경그룹은 종래의 섬유재벌에서 국내 최대의 석유에너지 기업집단으로 전환했다. 더구나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 추세여서 에너지소비의 급신장은 불문가지여서 선경그룹의 비약은 이미 예고됐다.>> 계열사 정리작업 추진그 와중에서 계열기업 정리작업도 추진했다. 1980년 9월27일 정부는 대기업집단의 주력기업 전문화 정책을 단행, 재벌들의 문어발경영 해소를 촉구했다. 선경은 주력사업을 섬유와 석유사업에 한정하고 나머지 사업들은 정리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해외섬유(주)의 월곡공장은 (주)선경에서 인수하고 동천공장은 선경매그네틱(주)로 넘겼다. 선경복장(주)는 (주)선경에서 인수했으며 경영실적이 좋지 못한 선경반도체(주)와 선경머린(주)는 폐업했다. 선경기계(주) 및 선경목재(주)와 중소기업 업종인 (주)워커힐여행사, 워커힐교통(주), 선경식품(주), 선경유화(주)는 매각처분하고 자본참여 형식으로 계열화했던 영남방직(주)는 지분을 매각했다.선경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총 11개 기업을 정리, 계열기업 수가 종래 22개에서 11개로 대폭 축소함으로써 전두환 정부의 체면을 세워줬다. 형식 면에선 매우 파격적이었으나 내용 면에서는 영양가 없는 사업만 골라 가지치기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종현 선대회장이 내한한 사우디아라비아 야마니석유상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SK 제공

2019-08-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8]에스케이-7 유공 인수(상)

'포춘 159위' 국내 정유회사걸프사 철수로 민영화 방침원유 안정확보 최우선 조건삼성·남방개발 제치고 낙점항간에선 '노태우 개입' 루머선경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는데 최대 사건은 (주)선경이 1980년 12월에 국내 최대의 정유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에너지)의 합작선인 걸프사의 지분 50%와 경영권을 함께 인수한 것이다. 유공은 정부가 1962년에 설립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독점 정유회사로 1970년 6월에 미국의 걸프사가 지분 50%를 인수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 괄목할만한 성장유공은 1979년도 매출액이 1조1천200만원으로 단일 기업으로는 국내 최대일 뿐 아니라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1979년도 세계 500대 기업(미국기업 제외) 중 159위에 랭크된 세계적 규모의 정유업체였다. 당시 국내에는 호남정유, 쌍용정유, 현대석유, 경인에너지(한화에너지) 등이 있었으나 국영인 대한석유는 마켓 셰어 1위를 유지하는 리더기업이었다.유공의 민영화 방침이 공개된 것은 제5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0년 10월로 유공의 경영주체이던 미국의 걸프(Gulf)사가 그해 8월 19일자로 철수한 데 따른 후속조치였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경영성과가 신통치 못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1973년 10월 6일 중동전쟁 직후인 11월 6일에 걸프 측은 한국정부에 "(11월) 이후 한국에 원유공급량을 30% 감축하겠다"고 통보했다. 칼텍스(Caltex)는 10%, 유니온 오일(Union Oil)은 20%를 감량하겠다고 통보하는 등 전체적으로 국내의 석유공급량을 한꺼번에 22%나 삭감하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1차 석유파동 당시 OPEC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나라로 간주해 한국에 불이익을 준 것이다. 당시 한국은 중동에서 석유를 100% 수입해왔는데 이 또한 100% 미국계 정유사를 통해 들어오던 참이었다.(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 2010년, 223-4면)>> 사우디와 장기원유 계약1980년 초에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들에 원유도입을 허용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을 정부가 지원하는 내용의 석유수급 조절명령을 발동했다. 종래의 정부 베이스의 원유도입 방식에서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효성, 현대양행, 동아건설, 대한항공, 현대건설, 코오롱, 쌍용, 삼성 등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주)선경은 사우디와 장기원유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1980년 7월 17일부터 국내 정유업계에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이상과 같은 배경으로 1980년 11월 28일에 동력자원부는 걸프가 철수하면서 내놓은 유공주식 50%(2천375만1천771주)의 인수기업으로 (주)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삼성과 선경, 남방개발 등 3개 후보 기업들을 놓고 평가한 결과 선경에 낙점한 것이다. 정부는 유공의 경영권을 국내 기업에 넘기기로 했는데 최우선의 조건을 소요 원유의 장기 안정적 확보능력에 뒀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은 1973년 선경석유(주)를 설립하고 온산에 100만평의 정유공장 부지를 확보했으나 1차 오일쇼크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각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당시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개입해서 성사시켰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지난 1980년 11월 28일 동력자원부가 유공주식 50%의 인수기업으로 (주)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한 경인일보 기사. /경인일보DB

2019-07-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7]에스케이-6 SK그룹 완성

최종현, 증자 재무구조 개선경산 신생공업사 인수 필두'쉐라톤 워커힐' 관광업 진출전자·토건·건설·제조업등수출유망中企 다각화 주력당시까지 선경은 섬유 중심의 수직 다각화 위주였을 뿐만 아니라 다각화 속도도 느렸다. 선경이 오늘날과 같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한 것은 1973년 창업주 최종건 사망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1973년에는 최종건의 사망과 함께 최종현이 선경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최종현은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래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증자를 단행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또 새로운 캐시카우의 개발 내지는 기업의 위험분산 차원에서 섬유 이외의 다각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에는 선경개발(관광)과 서해개발(조림), 스카이메리트(봉제),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등을 설립하고 극동창고를 인수하는 한편 영남방직의 경영에 참여했다. 수출에도 주력해 1976년에는 (주)선경(선경직물의 후신)이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다.>> 종합무역상사 지정정부는 ①수출실적 1억달러 이상 ②15개국에 100만달러 이상 수출 ③100만달러 이상 수출품목 15개 이상인 업체에 한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했다. 또한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를 육성하기 위해 1975년 12월 3일에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중소기업의 계열화를 적극 지원했다.선경도 삼성, 현대, LG, 금호그룹처럼 종합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평적 다각화에 주력했다. 1976년 1월 경북 경산에서 볼트, 너트, 톱니 등을 생산하는 자본금 10억원의 신생공업사를 인수한 것을 필두로 6월에는 서울 남대문로 5가 5-3의 동화빌딩(대지 230평, 지하 3층, 지상 9층)을 16억810만원에 구입해 본사사옥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본금 3억원의 선경기계를 선경산업의 자회사로 설립했으며 1973년 3월에는 선경개발이 서울 광진동에 지하 4층, 지상 18층(연건평 1만5천900평)의 특급호텔인 쉐라톤워커힐(540객실)을 개관해서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1961년 사단법인 워커힐이 창립됐고 1962년 국제관광공사에 인수돼 1963년 4월 호텔을 개관했다.한국에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미군을 유치하기 위해 세운 호텔로 '워커힐(Walker-hil)'이라는 명칭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 때 활약한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기리는 의미로 지어졌다. 1968년에는 파라다이스 카지노 워커힐을 개장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특급 관광호텔인 워커힐호텔이 국영기업에서 민영으로 거듭난 것이다.1976년 11월에는 자본금 1억원의 선경금속과 선경매그네틱을 각각 설립했는데 오디오 테이프 제조업체인 선경매그네틱은 당초 자본금 2억5천만원의 수원전자로 출범했었다. >> 다양한 기업군 흡수또 같은 달 대구시 북구 노원동에 소재한 자본금 5억6천만원의 신원산업유한회사도 인수했다. 신원산업은 1969년에 설립된 자전거 제조업체였는데 선경이 인수, 1977년 3월에 선경스마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7년 8월에는 토건업체인 협우산업을 4억6천만원에 인수해 선경종합건설로 재발족하고 그해 12월에는 동일 업종의 삼덕산업까지 인수해서 사세를 확장했다. 달러박스로 회자되던 중동건설특수 및 국내 부동산개발붐에 편승하고자 건설업에 진출한 것이다.1978년에는 전북 군산에 소재한 경성고무를 인수했다. 1932년에 이만수가 설립한 업체로 1936년에는 종업원 수 100명에 일산 500족 규모로 성장한 군산 유일의 한국인 소유 고무신제조업체였다. 초기에는 검정고무신만 생산했으나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표백기술을 적용한 흰 고무신뿐만 아니라 흑색 및 백색 운동화 등으로 제품의 다변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해방 무렵에는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서울 이남지역에서 최고인기를 누릴 정도로 성장했다. 경성고무는 식민지체제하에서 오로지 한국 민초들의 애호품인 고무신 생산에 주력해 민족자본으로 성장한 드문 케이스였다.1978년 7월에는 요트생산업체인 선경머린을 자본금 8천만원에 설립했다.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출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마구잡이식의 수평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서 나머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그 결과 선경은 현대, 럭키, 삼성, 대우, 효성, 국제, 한진, 쌍용, 한국화약에 이어 재계 10위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지난 1976년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되는 등 수출 선봉에 오르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기 위해 폴리에스터 원면을 선적하고 있는 모습. /SK 제공

2019-07-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6]에스케이-5 화섬산업에 진출

일본 데이진과 합작 수원에아세테이트원사 공장 설립최초 폴리에스터 동시 생산정부, 전량 국내 시판 변경'수요량 급증' 날개 돋친듯선경이 재벌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부터 화섬산업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듀퐁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실크처럼 부드러울 뿐 아니라 거미줄같이 가늘면서도 강철보다 강한 꿈의 섬유로 국내에는 1950년 6·25전쟁 때 미군병사에 의해 최초로 소개됐다. 어떤 옷감보다 질기고 가벼우며 세탁이 간편하다는 점에서 가정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1958년까지 국내에 시판되고 있는 나일론제품은 거의 외제 밀수품으로 국산은 1955년부터 태창직물에서 약간씩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경합섬주식회사 설립선경직물이 외제와 비슷한 수준의 나일론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12월부터였다. 1959년 3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산업자금 1만달러를 대부받아 사이징(Sizing) 설비를 도입해서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이 무렵 직물업계는 과잉공급으로 인한 불황에 시달린 데다 나일론 등 합섬직물 또한 외래품이 범람해서 국산직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0년의 4·19혁명은 설상가상이어서 대부분의 기업은 자금난과 판매난, 노사문제 등 소위 '삼난'으로 고전했는데 민주화 물결에 편승한 노사갈등은 특히 경영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선경은 노사분규 없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갔다.선경이 추진해온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차관 지불보증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66년 3월이었다. 당초 선경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 폴리에스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함에 따라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했다.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임에도 아세테이트원사 제조업은 국제적으로 사양산업화해 국내 기업들도 진출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적으로는 아세테이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차제에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가 가능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선경에선 아세테이트원사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 이또주(伊藤忠) 상사로부터 550만달러의 차관을 확보하고 1968년 3월 25일 아세테이트원사 공장을, 6월 10일에는 폴리에스터 공장의 기공식을 각각 거행했다. 폴리에스터 공장은 일본 데이진 측의 협조로 건설됐는데 공장건설 자금은 정부 보유불 694만 달러를 확보해서 조달했다. 당시 정부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국내원사 메이커 '1인자'1966년 6월에 자본금 1억원의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수원 정자동 600에 일본 데이진과 50대50 합작으로 건설한 아세테이트원사공장(일산 5.5t, 1968년 준공)의 본사로 설립된 것이다. 1969년 7월에는 건설 중인 폴리에스터공장을 모체로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산 7t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26%를 점해 국내 최대규모였다.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원사와 아세테이트원사를 동시에 생산하게 돼 국내 원사 메이커의 일인자로 부상했다.선경합섬에 대한 정부의 정책변화는 주마가편이었다. 당초 정부는 전량수출을 조건으로 선경에 폴리에스터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허가했으나 원사생산이 개시되던 1969년에 선경합섬이 생산하는 폴리에스터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하도록 변경했던 것이다.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이 급증한 결과 1968년의 원사수입량은 1967년 대비 114% 증가한 2천928t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수요량이 전년대비 92%가 증가할 예정이어서 국내수요도 턱없이 부족했던 때문이다.선경의 폴리에스터원사인 '스카이론'은 주름이 잘 지지 않아 세탁 후 다림질과 잔손질이 불필요해 국내 소비자들 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화섬산업에의 진출이 지방의 중소기업 선경으로 하여금 굴지의 재벌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폴리에스터를 생산하는 선경합섬을 설립, 공장을 가동해 원사 생산이라는 꿈을 마침내 이뤘다. /SK 제공

2019-07-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5]에스케이- 4 내수에서 수출 중심으로

'닭표 안감' 홍콩 최초 수출1962년 선경산업(주) 설립레이온능직 42만달러 계약'사업몰두'에 박대통령 방문1967년 183만달러 수출공로선경의 본격적인 도약은 1960년대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14일부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내 산업을 외래 사치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일환으로 외국산 면직물과 나일론 직물에 대한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위기국면에 있던 국내 섬유업계 형편이 점차 호전돼 갔다. 아울러 정부는 1961년 8월에 무역법을 제정해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선경은 1962년 4월에 '닭표' 안감 10만마(1만1천300달러 상당)를 홍콩에 처녀 수출했다. 이후 선경은 해외수출에 주력하기 위해 8월 1일에 자본금 1천만원의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종건의 아우 최종현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해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고 귀국,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형제 공동경영형인 최종건은 일을 저지르고 벌리는 반면 동생 종현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이어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부터 선경은 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최종현은 무역업무를 전담했다.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시행했다. 수출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홍콩에 출장을 가서 레이온능직 300만마(42만6천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녀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수출대금 42만6천달러 중 인견사 1천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천달러로 나일론원사의 구상무역허가를 신청했다. 구상무역이란 일명 바터무역으로 국제간의 물물교환 무역을 의미한다. 당시 나일론직물은 인기 절정이었으나 원사수입용 달러화 배정액수가 대폭 감소돼 1963년의 국내 나일론직물의 생산실적은 전년도 350만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해 나일론 생산업체 간에 나일론원사 수입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최종현은 수완을 발휘해서 원사수입 9만달러를 확보함으로써 선경은 일거에 8천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 가치로 약 40억원에 해당한다.이 무렵 선경의 최종건 사장은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 박정희 정부와 인연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최종건) 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시사저널', 2015.03.19, [新 한국의 가벌] #19)이병희(1926~1997)는 용인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8기)를 나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됐다. 서울분실장으로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 중 일부를 강제로 헌납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한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선경은 수출에 올인, 1967년 제3회 수출의 날에는 183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식산포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사업은 순풍의 돛을 단 듯 빠르게 확대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종건의 동생인 최종현은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사진은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당시 선경합섬 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 /SK 제공

2019-07-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4]에스케이-3 선경직물 인수(하)

지가증권 13만환 모두 상환공동매수인 권리포기 확보중고 직기로 1·2공장 가동양복 안감 '닭표' 부통령상'봉황새' 히트 대기업 면모최종건은 부친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지원받아 차철순을 움직여 선경직물 인수준비에 착수한 결과, 1953년 7월 27일에 관재청으로부터 130만환에 불하를 허가한다는 것과 3주일 이내에 매각대금의 10%를 내고 계약을 체결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쌀 한 말은 1천환으로 계약금 13만환은 쌀 1천300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불하대금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자 방구현은 동업을 포기했다. 최종건은 차철순 소유의 지가증권을 계약금으로 충당하고 차후에 차철순에 상환하기로 했다.지가증권이란 정부가 농지 개혁 때 매수한 농지의 보상금 대신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 증권이다. 1953년 8월에 계약금 13만환은 지가증권으로 납부하고 나머지 금액은 10년 분할조건으로 선경직물 주식 50만주 중 황청화, 김덕유 몫(각각 100주씩 소유)을 제외한 49만9천800주를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계약했다.>> 타고 난 '보스 기질'이후부터 선경직물은 최종건 주도로 경영됐는데 운전자금은 선경직물의 고철을 팔아 확보한 돈으로 원사를 사들여 생산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전쟁 직후로 물자부족이 심각해 생산된 직물들은 생산과 동시에 전부 소진됐다. 최종건은 조업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생산에 매진한 결과 선경직물 인수 1개월여 만인 1953년 9월 30일에 차철순에 지가증권 13만환을 전부 상환하는 한편 공동매수인 권리 포기각서까지 확보했다. 27세 청년 최종건은 거의 적수공권으로 1만2천평의 선경직물 공장을 소유하게 됐다."최 회장은 보스 기질을 타고난 행동가였다. 최 회장은 공사현장에서도 종업원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종업원들과 노는 자리에선 전혀 상하를 가리지 않는 최 회장이었다. 막걸리 파티라도 열렸다 하면 다 같은 친구요, 형이요, 아우였다."(선경40년사<약사>, 54면)10월에 제1 공장 건물을 복구하고 선일직물과 동흥직물에서 중고 직기 60대를 구매해 설치했다. 1955년 8월에는 서울 휘경동 태창직물의 중고 직기 50대를 넘겨받아 제2 공장마저 복구했다. 선경에선 양복안감으로 쓰이는 인조견 능직을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복 안감은 대부분 재단 전에 물세탁을 해야 했으나 선경에서 생산한 제품은 물세탁 하지 않아도 됐기에 날개가 달린 듯 팔려나갔다. 이 무렵 국내 굴지의 인격직 메이커는 조선직물, 태창직물, 심도직물 등으로 선경직물은 지방에 소재한 중소기업에 불과했다.그러나 1955년 서울 창경궁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전국산업박람회'(10월 1일~12월 20일)에서 선경의 '닭표' 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전국 유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직기로 제3공장 건설한국섬유단체연합회 산하의 각 공장에서 출품한 면사와 면직물, 모직물, 인견 직물, 양단, 호박단, 빌로드, 아세테이트, 나일론 등 모든 섬유제품이 총망라된 가운데 '닭표' 안감이 인견부문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은 것이다.당시 산업은행은 박람회에서 수상한 업체들에 기업육성자금을 융자해주었는데 대통령상에는 500만환, 부통령상에는 300만환 등의 장기저리 자금이 제공됐던 것이다. 선경은 융자금 300만환으로 악성고리채 100만환과 선경직물 매수대금 중 잔금 91만환을 상환하고 나머지 100만환으로는 고급견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일제 문직기(Jacquard) 25대를 발주해서 제3 공장을 건설했다. 문직기는 1930년에 프랑스의 자카드(Jacquard)가 발명한 것으로 만여 개에 달하는 종침(從針)과 횡침(橫針)의 조작으로 문양을 찍어내는 복잡한 직기이다.1956년 3월 24일에 선경직물주식회사로 설립 등기했다. 1958년 5월부터 시판을 개시한 '봉황새' 이불감이 전국적인 히트상품으로 급부상하면서 선경은 서서히 대기업으로 부상해갔다. 1958년 11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대부받은 ICA자금 4만5천달러로 문직기 50대와 염색가공 설비를 갖춘 제4공장을 오픈했다. 해방과 6·25전쟁이 초래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다 귀속기업 불하 그리고 엔지니어 출신인 최종건의 경영경험 등이 상승 작용함으로써 지방소재의 중소기업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직물은 1956년 설립 등기를 마친 후 1958년부터 '봉황새' 이불감이 전국적인 히트상품으로 떠오르면서 대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SK 제공

2019-07-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3]에스케이-2 선경직물 인수(상)

죽마고우 박윤환과 '수리'부품없어 잦은 고장 '애로'공장 전체부지 1만2천평중차철순 지분 4천평 先매입귀속재산 공동명의로 제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계기로 선경직물은 여타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처럼 미군정청에 귀속되면서 관리인(경영책임자)에 황청화와 서울 마포의 거상(巨商)인 김덕유가 임명됐다. 당시 이들은 한국인으론 유일한 선경직물의 주주였다. 황청화와 김덕유는 총 주식 50만주(액면가 1 원(圓)) 중 각각 100주씩을 소유한 군소주주에 불과했으나 미군정법령 '적산관리요령'의 내용 중 '적산업체의 주주 또는 당해 적산업체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관리인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선임됐다. 귀속기업체들의 관리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권으로 치부돼 경쟁이 치열했는데 차후 적산기업체들의 헐값 민간불하에 관리인들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적산기업 불하는 해방 후 국내 기업가 배출의 최대 루트였다.>> 한국전쟁 '공장 폐허'선경직물은 1946년 2월부터 조업을 재개했는데 공장장은 황청하의 동생 황철하가, 총무부장에는 김덕유의 조카 표덕은이, 생산부장에는 21세의 청년 최종건이 각각 임명됐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경영자들이 철수함으로써 선경직물 공장의 기계설비 및 원재료의 안전관리가 초미의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 소유 공장의 경우 한국인 근로자들이 자주관리 형식으로 운영됐으나 기술 및 원료부족에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공장경영이 원활하지 못했던 터에 절도마저 기승을 부린 탓이었다. 선경직물에선 자체경비를 위해 선경치안대를 결성했고 최종건이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공로를 높이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1947년부터 직물업계의 호황으로 선경직물의 경영도 활성화됐다. 해방을 계기로 국내 일본계 기업들의 동시적인 생산중단에다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또한 단절돼 물자난이 극심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부터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함으로써 선경직물은 동력원을 확보하지 못해 조업에 차질을 빚었다.1949년 여름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퇴직하고 방직원료인 원사 거래로 재미를 보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으로 피난했다. 최종건이 1952년 5월에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선경직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거의 폐허 상태였는데 관리인 황청화와 김덕유는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직기 10~20여대 정도는 수리하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최종현은 벌말의 죽마고우인 박윤환과 함께 고장 난 직기들을 재조립했다. 부품들이 모자라 억지로 조립해 가동을 시도했으나 잦은 고장으로 애로가 많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최소경제운용단위인 직기 20대를 갖추었다.>> 방구현·차철순과 추진최종건은 방구현, 차철순과 함께 공동으로 선경직물 불하작업을 추진했다. 방구현은 최종건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많은 적산을 불하받아 큰돈을 벌어 '수원한량'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선경직물 공장부지 1만2천평 중 차철순의 지분 4천평을 우선 매입한 다음 귀속재산 우선 매입원을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제출하기로 했다. 선경직물은 설립 당시 차철순의 땅 1만2천평을 공장부지용으로 매입했는데 8천평에 대한 대금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5년 이내에 지불하기로 한 터여서 4천평은 여전히 차철순의 지분으로 등재돼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농지를 매수당한 자에게 귀속재산 매수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귀속재산 불하 규정이 있어 차철순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당시로써는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손에 넣는다는 것이 곧 큰 행운을 잡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귀속재산을 불하받아서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속재산은 으레 시가보다 싼 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으며 매수대금도 5년 내지 15년까지 장기분납이 가능했다. 매수계약금에 해당하는 1차 납부금도 매수총액의 10분의 1만 납부하면 됐으며, 게다가 매수대금은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는 농지증권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귀속재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선경40년사<약사>', 378면)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한국전쟁 폐허 속에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이 SK 역사의 시작이었다. /SK 제공

2019-06-2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2]에스케이-1 선경직물과의 인연

'선만주단'·'경도직물' 조합전시정비 '조선직물'로 흡수수도권 최대 '인견직' 생산제2공장 직보반 '조장' 승진'차질없는 생산' 책임 맡아선경직물은 1940년 10월에 수원역에서 서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수원시 권선구 평동 4에서 설립된 직물제조회사였다. 인구가 밀집한 평동은 일제강점기 때 대평정(大坪町)이라고 불렀다. 평동이란 이름은 이 일대가 너른 들판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벌말·벌리·들말·평리 등으로 불렸다. 공장 부지를 수원 시내에서 떨어진 벌말로 정한 이유는 이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서호천의 풍족한 자연수가 공장용수로 적합했기 때문이다.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공동으로 투자해 설립했는데 상호 '선경'은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머리글자인 '선'과 '경'을 조합한 것이다. 선만주단은 만주지역에 직물류를 수출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에서 설립된 일본인 포목상이었고 경도직물은 일본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견직물 제조업체였다. >> 1944년 부친권유로 입사간사이(關西) 혹은 긴끼(近畿) 지방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일찍이 아스카(飛鳥, 서기 552~645)시대부터 메이지유신(1868)에 따른 도쿄 천도 때까지 무려 1천300여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일본의 한국 및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였다.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 8천평과 공장건축비 및 기타비용을 부담했으며 경도직물은 직기 및 부대설비를 각각 현물 출자했다.중·일전쟁(1937~1945) 발발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일본상품시장도 덩달아 확대된 결과 중국 내에서 일본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선경직물이 설립될 무렵에는 국내 섬유업계도 호황을 누려 전국적으로 수많은 군소 직물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제직은 기술습득이 비교적 쉬운 데다 적은 자본으로도 쉽게 손댈 수 있는 업종이었다. 선경직물은 제1, 2공장에 기모도식(木本式) 직기 100여대와 염색가공 설비, 보일러, 기숙사 등을 완비하고 종업원 200여명(남자 약 40명)으로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3년 봄부터 인견과 시루빠(Silver)를 직조했다. 나날이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해서 작업반을 주야 2교대로 편성해 24시간 가동했다.SK그룹의 고(故) 최종건(1926~1973) 창업자도 이 무렵에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 최종건의 부친 최학배는 21세 때 결혼과 함께 바닷가인 수원군 팔탄면 해창리에서 수원 평동으로 이주, 그곳에서 대성상회를 개설하고 수원잠업 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는 한편 미곡상을 겸영했다. 이재에 밝아 사업이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선경직물공장을 건설할 때는 골재와 자재류를 납품하기도 했다. >> 수원소재 6개 공장 개편 최종건은 1926년 최학배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수원 평동 7에서 출생했다. 수원 신풍소학교를 거쳐 1944년 4월에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선경직물의 공무과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당시 그는 3급 기계정비사 자격증도 소지해서 취직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집 근처에 있는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선경직물은 1944년 8월에 수원의 다른 직물공장들과 함께 '전시기업정비령'에 의해 조선직물로 흡수됐다. 조선직물은 1934년에 안양에서 설립된 인견직 전문생산업체로 부지 4만1천평, 건물 9천100평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물공장 중의 하나였으나 안양공장은 일본 군용 항공기제조창으로 징발당했다. 전황이 일본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방산시설 확충차원에서 강제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대신 조선직물은 수원에 산재해있는 직물공장들을 전부 접수했는데 당시 수원에는 선경직물 외에 선일직물공장, 수원직물공장, 동흥직물공장 등 6개 공장이 있었다. 조선직물은 이들 직물공장을 접수함과 동시에 선일직물을 제1공장으로, 선경직물을 제2 공장으로 개편했다.이 무렵 최종건은 직보반 제 2조장으로 승진됐다. 2조장은 100여명의 제직조 여공들을 통솔하면서 주·야간 교대작업반을 편성, 운용해야 하고 생산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며 또한 품질관리도 책임져야 했다. 제직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3년 창립 무렵의 선경직물. 고 최종건 창업회장은 한국전쟁 중 폐허가 된 선경직물 건물을 복구해 재건하기로 결심, 건물 복구와 흩어진 부속품을 모아 직기를 재조립했다. /SK 제공

2019-06-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1]엘지-19·(끝) 정도경영의 흠집(?)

2007년부터 수천억원 거래102차례 '156억원 미신고'검찰, 14명 약식기소 벌금형"재벌가 봐주기의 끝판왕"구인회 직계비속만 70여명LG그룹의 '정도경영'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불거졌다. 구광모가 그룹 회장업무를 수행한 지 불과 4개월만인 2018년 9월 28일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수사부(최호영 부장검사)가 구 회장의 친부(親父)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과 삼촌 구본준 LG그룹 부회장, 고모 구미정 등 총수일가(특수관계인) 14명과 LG의 전·현직 재무관리팀장 2명 등 총 16명을 탈세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LG 일가는 2007년부터 10여년 동안 지주회사인 (주)LG와 LG상사 주식 수천억원 어치를 102차례에 걸친 장내거래를 통해 156억원을 탈세했다는 혐의였다.>> 보유주식 장내거래 고(故) 구본무 당시 회장과 그의 동생, 사촌 등 총수일가가 각각 보유한 주식을 서로 간에 수천 수십만 주씩 매매해온 것이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63조에는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간 지분거래는 거래액(4개월 치 평균가격)에 20%를 할증한 금액(경영권 프리미엄 반영)을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신고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장내가 아닌 장외거래의 경우 매매당사자가 공개되기 때문에 세금할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검찰은 LG측에서 특수관계인 간 거래 사실을 숨겨 양도세 포탈 및 통정매매 적발을 피하고자 장내거래했다고 단정한 것이다. 통정매매란 매수인과 매도인이 사전에 가격을 정해놓고 장내에서 일정 기간에 주식을 서로 매매하는 것으로 자본시장법 178조에는 시장을 교란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범법행위로 규정해서 통정매매를 금하고 있다."LG의 탈세 거래 관행은 2003년 지주회사 전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초에 구본무 전 회장을 비롯한 총수일가와 친인척 70여명이 LG 지분 44%를 함께 보유했다. 일종의 가족 공동 소유구조이다. 2018년 9월 현재 LG는 구광모 회장 등 일가친척 30명과 재단 2곳이 지분 45%를 나눠 보유하고 있다. 검찰은 LG가 자체적으로 경영권 방어에 필요한 필수 지분율을 46~48%로 정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주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특수관계인 간 거래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haojune@hani.co.kr, 2018-10-10)>> "도의적 책임있다" 지적검찰은 전·현직 재무관리팀장 2명만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하고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등 총수일가 14명은 약식기소했다. 약식기소는 검찰이 피의자에 대해 징역형보다는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때 법원에 약식명령을 청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정형은 벌금형뿐이며 공판절차도 없어 서류만으로 재판이 진행되는데 검찰은 오너 일가 14명이 탈세 목적의 거래를 사전에 인지하거나 혹은 주식매각 업무에 관여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시민단체 등에서는 검찰의 LG 기소를 극히 드문 희귀사례로 보고 '재벌 봐주기 끝판왕'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최근 10년간 재벌 총수 및 임직원 탈세 혐의에 대한 검찰의 구형량은 대부분 징역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LG그룹 경영권의 향배를 가를 수도 있는 엄중한 주식변동에 대해 총수일가의 지시가 없었다니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LG측은 "국세청과 검찰이 과거와는 다른 과세기준을 적용한 때문"이라고 항변했지만 LG 오너 일가는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머지않아 국내에서도 재벌의 4대 세습경영이 보편화 될 전망이다. 그러나 갈수록 재벌총수의 특수관계인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지분정리가 모호한 그룹에서는 오너 가족들 상호 간에 경영권 갈등문제가 점차 첨예해질 수도 있어 보인다. LG의 경우 구인회 창업자의 직계 비속들의 숫자만 70여명인 지경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사례들처럼 자연스럽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수순을 밟을 예정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재벌의 4세 경영이 보편화 되는 가운데 LG그룹도 구광모 회장 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연합뉴스

2019-06-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0]엘지-18 계열사 정리 및 4대(代) 세습경영

사업군 '전자·화학' 단순화2017년 기준 재벌순위 '4위'계열사 68개 삼성보다 많아2018년 주총 등기이사 선임구본준, 경영일선서 물러나 2003년 12월에는 LG카드와 LG투자증권이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 넘겨졌는데 이는 LG카드의 부실경영 때문이었다.LG카드의 모체는 1985년 12월 세워진 '익스프레스 크레디트카드'다. 1987년 7월 코리안 익스프레스 신용카드를 인수해 1988년 3월에 엘지신용카드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그해 6월 금성팩토링을, 1998년 1월에는 엘지할부금융을 각각 흡수 합병해서 여신전문 금융회사로 면모를 갖췄으며 1999년 1월 LG캐피탈로 상호를 변경했다. 같은 해 6월 국내 카드업계로는 최초로 기업 간 전자상거래시스템을 구축했으며 2001년 9월에는 고객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주)LG카드로 상호를 변경했다.2002년 4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며, 2004년 1월 LG그룹에서 계열 분리돼 2007년 3월 (주)신한금융지주가 지분율 85.73%로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됐다. >> 2005년 분재(分財) 완료같은 해 10월 신한금융지주는 모회사의 주가 희석을 막고 자본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LG카드를 100% 자회사로 만들고, LG카드의 상장을 폐지한 뒤 LG카드의 상호를 (주)신한카드로 변경했다.한편 LG는 최후의 금융계열사인 LG투자증권마저 털어냈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1969년 1월 16일 한보증권(주)로 설립한 뒤 1975년 6월 생보증권을 흡수 합병해 대보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같은 해 9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3년 11월 럭키증권과 대보증권을 합병해 럭키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95년 3월 LG증권(주)로 상호를 바꿨다가 1999년 10월 LG종합금융(주)를 합병하고 LG투자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다.2004년 5월 LG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뒤 같은 해 12월 우리금융그룹 계열회사에 편입됐고, 2005년 3월 우리증권(주)에 흡수 합병된 뒤 그해 4월 우리투자증권으로 변경됐다. 2014년 6월에는 NH농협금융지주 계열회사에 편입돼 같은 해 12월에 NH투자증권으로 또다시 상호가 변경됐다.한편 LG그룹의 모든 분재(分財)작업은 2005년 GS그룹의 분리로 모두 완료했다. 덕분에 LG그룹의 사업군이 전자와 화학 위주로 비교적 단순화됐다. LG그룹의 재계순위 변동도 수반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7년 5월 1일 발표한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 순위를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363조원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한 가운데 2위 현대차 218조원, 3위 SK 170조원 등이었다. LG의 자산총액은 112조원으로 여전히 4위에 랭크돼 있다. LG의 계열기업 수는 68개로 삼성(62사), 현대차(53사)보다 더 많다. 재벌순위 7위를 차지한 GS그룹의 계열사 수는 LG보다 1개 많은 69사이다. LG는 수많은 피상속권자들에게 최하 수천억에서 최대 수십조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분재에도 불구하고 위상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이다.>> 거대 글로벌 그룹 도약열심히 좋은 제품을 만들어 매출을 올리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의 결과로 판단되나 다음의 기사는 재벌 오너 일가가 재산을 대물림하는 방법을 추정케 한다."GS그룹의 주요 규제 대상 계열사 중 하나인 보헌개발은 지난 2015년 매출 15억7천400만원 중 내부거래 비중이 99%에 이른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보헌개발 지분은 허서홍 GS에너지 상무(허광수 삼양인터내셔녈 장남)와 허세홍 GS글로벌 대표(허동수 GS칼텍스 사장 장남), 허준홍 GS칼텍스 전무(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의 장남으로 GS가 장손)가 각각 33.3%씩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규제대상 계열사인 옥산유통의 계열사 매출 의존도 역시 71.2%에 달했다. 옥산유통은 1997년부터 한국필립모리스와 상품 독점계약을 맺고 GS25 등에 담배를 공급하고 있다. 옥산유통의 매출은 2005년 1천52억원이었으나 2015년 7천123억원으로 7배 가까이 급증했다. 옥산유통의 지분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특수관계인 등이 51%를 보유하고 있다."('CNB저널', VOL.527, 2017.3.26.)2018년 LG그룹의 경영권이 또다시 바뀐다. 2018년 5월 20일에 3대 구본무 회장이 와병으로 타계, 경영권이 장남인 구광모 상무에 세습된 것이다. 구 회장은 1999년 금성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넘기는 고통을 감내했음에도 LG그룹이 초일류로 도약할 수 있는 2차 전지, LCD에 이은 올레드(OLED) 디스플레이와 차량 전장 사업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에 집중투자해서 매출 160조원대의 거대 글로벌 그룹으로의 도약을 이끌었다.1978년생인 구광모 상무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2004년에 구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겸손하고 소탈하다"는 평가의 구 상무는 서울 영동고를 거쳐 미국 로체스터 공대를 졸업하고 2006년에 LG전자 재경 부문 대리로 입사했다. 이후 미국 뉴저지법인, HE(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 HA(홈어플라이언스) 창원사업장 등에서 경영수업을 쌓은 후 2018년부터 LG전자의 미래 먹거리로 평가되는 B2B사업본부 부서장으로 옮겼다. 2018년 5월 17일에 열린 지주회사 LG의 임시주주총회에서 구 상무를 LG 등기이사로 올렸다.LG그룹은 창업 71년 만에 4대 세습경영체제가 개시됐다.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은 2019년 3월 15일 지주회사인 LG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이사선임에 배제돼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구본무 당시 회장의 투병 기간 동안 막내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이 그룹경영을 주도해 왔다. 조카인 구광모 신임회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배려차원이었다. 대신 구 부회장은 그룹고문으로 구광모 회장을 도울 예정이다. 구 부회장의 LG그룹 지분은 7.72%에 이른다. LG그룹은 1922년 희성그룹, 1999년 LIG그룹, 2000년 아워홈, 2003년 LS그룹, 2005년 GS그룹, 2006년 LF(구 LG패션)를 분리한 경력이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2018년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경영권을 승계받은 구광모 신임 회장. /연합뉴스

2019-06-0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9]엘지-17 계열분리(④ GS그룹 탄생)

2005년 3월 그룹 공식 출범장남 허창수 초대회장 선임공정위, 신규 기업집단 지정71개 비상장등 79개 계열사'가장 아름다운 동업' 평가 우리나라 재계 최대의 주목거리였던 LG그룹의 공동창업자인 구씨와 허씨 간의 계열분리는 동업 57년 만인 2004년에 이뤄졌다. LG그룹의 마지막 분할작업이 이뤄진 것이다.LG그룹의 모태는 1947년 1월에 세워진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이다. 락희화학의 공동창업주는 고 구인회 형제들과 구인회의 사돈이자 진주의 만석꾼 거부로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효주(曉州) 허만정이다. 구인회 창업주는 14세이던 1921년 허을수와 결혼해 6남 4녀를 뒀다. 두 가문은 1947년 창업 이래 LG그룹이 분리되던 2005년 1월까지 57년간 구씨 가문이 경영을, 허씨 가문이 안살림을 맡는 공동경영 형태로 LG그룹을 분쟁 없이 운영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분할 작업2004년 4월 13일 (주)LG 이사회는 업종전문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마지막 계열분리를 결정했는데 LG그룹 계열사들을 연관성이 작은 제조업 군과 유통업 군으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2004년 7월 (주)LG는 인적 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로 (주)GS홀딩스를 세웠다. 이에 근거해서 허씨 가문은 LG그룹으로부터 LG유통, LG홈쇼핑, LG칼텍스정유, LG파워, 서라벌도시가스, 해양도시가스 등 15개 계열사, 매출액 18조원의 사업군을 넘겨받아 GS그룹을 출범시켰다.GS그룹의 대표는 허씨 가문의 추대를 받은 고 허준구 회장의 장남인 허창수가 선임됐다. 허준구는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의 조카사위이다. 허준구가 구인회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LG 고문의 장녀인 구위숙 씨와 결혼한 것이다. 허준구는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뒀는데, 장남인 허창수가 GS그룹의 회장을 맡았다. 2005년 1월 LG그룹이 LG그룹과 GS그룹으로 법적 분리되면서 같은 해 2005년 3월 GS그룹이 공식 출범했다. 그해 4월 GS홀딩스 등 50개사를 거느린 GS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신규 기업집단에 지정됐다. GS그룹은 같은 해 11월 LG에너지(현 GS EPS)를 인수하고 2008년 8월 GS자산운용을 설립했으며 2009년 3월 (주)GS홀딩스에서 (주)GS로 상호를 변경했다. 같은 해 7월 (주)쌍용(현 GS글로벌)을, 2010년 11월 DKT(현 GS엔텍)를 각각 인수했다.2012년 1월 (주)GS가 보유했던 GS칼텍스의 주식 전부(GS칼텍스 지분의 50%)를 물적 분할해 사업형지주회사로 GS에너지를 설립했다. GS에너지는 2012년 6월 GS칼텍스(주)가 영위하고 있던 자원개발, 가스&전력, 녹색성장 사업을 비롯해 관련 자회사인 GS파워(주), (주)해양도시가스, 서라벌도시가스(주), GS퓨얼셀(주), GS나노텍(주), 파워카본테크놀로지(주), 살데비다코리아(주), GS플라텍(주), (주)삼일폴리머 등 9개의 자회사를 인수하고 에너지전문 사업형지주회사로 규모를 키웠다.>> 사업형 지주회사로 육성2013년 12월 STX에너지(주)의 주식 64.39%를 인수해 2014년 2월에 회사명을 (주)GS이앤알로 변경하고 GS그룹에 편입됐다. 2014년 말 기준으로 GS그룹이 자산 58조5천억원을 돌파했다. GS그룹은 2015년 3월 말 기준으로 비금융지주회사인 (주)지에스, (주)지에스리테일, (주)지에스글로벌, 지에스건설(주), 삼양통상(주), 코스모화학(주), 코스모신소재(주) 등 7개의 유가증권시장 상장회사, 코스닥시장 상장기업인 (주)지에스홈쇼핑, 사업형 지주회사인 지에스에너지(주), 지에스파워(주), (주)해양도시가스, 서라벌도시가스(주), 지에스퓨얼셀(주), 지에스플라텍(주), 지에스나노텍(주) 등 71개의 비상장회사를 포함해 총 79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주요기업인 GS칼텍스는 1967년 설립된 국내 최초 민간정유회사로 석유·윤활유·석유화학제품을 제조 및 판매하는 에너지 전문 기업이며 GS리테일은 GS수퍼마켓, GS25 등을 운영하는 유통업체다.GS그룹의 지주회사인 (주)GS의 최대주주는 허창수 회장 외에 허씨 일가다. 2015년 3월 말 기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허씨 49명이 46.37%를 보유 중이다."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형제나 가장 친한 친구 간이라 해도 결국은 의를 상하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 동업의 한계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LG그룹 구씨와 허씨 가문은 2세대 57년에 걸친 동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일반의 상식을 뒤엎었다. 한국기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업경영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2005년 업종전문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LG그룹과 분리된 GS그룹은 에너지, 발전, 유통, 무역, 건설, 서비스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게 됐다. 사진은 GS건설이 지난 2010년 4월 준공한 카타르 라판콘덴세이트 석유정제시설 모습. /GS건설 제공

2019-05-2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8]엘지-16 계열분리(③ 판토스레드캡·LS그룹)

'럭키' 처음쓴 구정회 자손들물류·여행업계로 승승장구1995년 금성계전·기전 합병산전·예스코등 7개사 중심통신등 각 분야별 사업 주력LG그룹 계열의 글로벌 종합물류기업인 범한판토스와 여행알선업체인 (주)레드캡투어는 구인회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구정회 자손들의 몫이었다. 구정회는 창업 초기부터 형제들과 힘을 합쳐 LG그룹의 초석을 닦는데 기여해 LG전자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면서 '럭키'라는 상호를 처음 붙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1978년에 타개했다.판토스는 1977년 물류기업인 (주)범한흥산으로 설립돼 1992년 범한종합물류(주)로 상호를 바꿨다가 2006년 (주)범한판토스로 그리고 2017년에는 (주)판토스로 변경한 LG그룹의 계열사다. 동사는 2016년 현재 매출액 3조원에 종업원 1천500여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LG상사가 51%의 주식을 확보해 최대주주다.2017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SDS, 현대글로비스와 판토스의 내부거래비중이 높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이 기업들의 내부거래비중 삼성SDS 87.8%, 현대글로비스 66.9%, 판토스 69.8% 등이다.>> 3형제몫 파생사 재발족(주)레드캡투어는 여행알선과 렌터카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여행업체로 모체는 1977년 세워진 범한흥산으로 구인회 회장의 조카인 구자헌 회장이 창업했다. 범한흥산은 초기 해외 항공권 판매를 주력 사업으로 했다가 1982년 여행 알선업 허가를 받았다. 이후 범한흥산을 범한종합물류와 범한여행 두 개 회사로 분리해 1992년 12월 22일 범한여행을 정식 설립했다. 2006년 코스닥에 상장했고 상호를 레드캡투어로 변경했다. 판토스와 레드캡투어는 여전히 LG그룹 계열사로 분류돼 형식적으론 완전히 분가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LS그룹LS그룹은 2003년 구인회 창업주의 셋째 태회, 넷째 평회, 다섯째 두회 등 3형제 몫으로 떼어준 LG의 계열사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재발족한 파생그룹이다. LG로부터 분가할 때 LS전선, LS산전, LS니꼬동제련, LS엠트론, E1, 예스코 등을 분할 받았다.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사상 최초로 시도된 지주회사체제인 (주)LG의 공식출범과 같이 한다. 같은 해 11월 LG전선, LG-Nikko동제련, LG-Caltex가스, 극동도시가스 등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계열분리 승인을 받아 LG그룹에서 분리됐다.LS그룹의 모기업이자 지주회사는 (주)LS다. LS의 모체는 1962년 5월 15일 설립된 한국케이블공업(현 LS전선)이다. 한국케이블공업은 1969년 10월 금성전선으로, 1995년 LG전선으로, 2005년 LS전선으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LS그룹의 또 다른 축인 LS-Nikko동제련은 1936년에 설립된 장항제련소에서, 가온전선은 1947년 9월 설립된 국내 최초의 전선회사인 국제전선(1996년 희성전선으로 사명 변경)에서, LS산전은 1974년 설립된 럭키포장(1987년 금성산전으로, 1995년 LG산전으로 상호 변경)에서 각각 출발했다.>> LG전선그룹 집단지정LG산전은 1995년 9월 금성계전(주)와 금성기전(주)를 합병했다. 예스코의 전신인 극동도시가스는 1981년 3월에, E1의 전신인 여수에너지(1991년 호유에너지로, 1996년 LG-Caltex 가스로 사명 변경)는 1984년 9월에 각각 설립됐다. 2004년 3월 LG-Caltex가스가 E1으로 사명을 바꾸고, 같은 해 4월에는 LG전선, LG산전, LG-Nikko동제련, 희성전선, E1, 극동도시가스 등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LG전선그룹으로 집단지정을 받았다.2004년 9월 희성전선의 상호를 가온전선으로 바꾸고 같은 해 12월에 LG전선이 진로산업을 인수했다. 2005년 3월에는 LG전선, LG산전, LG-Nikko동제련의 상호를 각각 LS전선, LS산전, LS-Nikko동제련으로 바꾸고 CI(기업 이미지 통합) 선포식을 했다. 기업명 LS는 리딩 솔루션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LG+GS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2006년 3월 극동도시가스의 사명을 예스코로 바꾸고 같은 해 4월에는 안양에 LS그룹 사옥 및 RnD복합센터를 기공했다. 2007년 E1은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를 인수했다. 2008년 7월 LS전선(주)를 존속법인인 (주)LS와 신설법인인 LS전선(주), LS엠트론(주)로 분할하고 (주)LS는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했다. 같은 해 11월 LS엠트론은 대성전기를 인수해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에 진출했다. 2009년 6월 LS산전은 자동화업체 메트로닉스(현 LS메카피온)를, 9월 홍치전기(현 LS홍치전선)를 각각 인수했다.LS그룹은 LS전선, LS산전, LS-Nikko동제련, LS엠트론, E1, 예스코, 가온전선 등 주력 7개사를 중심으로 전력송배전&통신, 에너지, 오토메이션, 소재, 기계&부품 분야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LS그룹 구자홍 회장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주)LS의 대표이사 회장, 이사회 의장을 겸임 중이다.LS그룹은 (주)LS, LS전선(주), LS엠트론(주), 대성전기공업(주), LS산전(주), LS-Nikko동제련(주), (주)예스코, E1, (주)LS네트웍스, 가온전선(주) 등 국내 49개사, 해외 47개사 등 총 96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S그룹은 2003년 LG그룹에서 전선과 금속 부문이 계열분리해 형성됐다. 사진은 전력송변전·배전, 통신 케이블. /LS그룹 제공

2019-05-2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7]엘지-15 계열분리(② LIG그룹·LB인베스트먼트와 아워홈)

서비스등 6개 계열사 보유LIG넥스원, 방위산업 주력LB, 금융자본으로 출발해점차 '산업자본' 영역 확대유통, 식품서비스부문 진출 LG그룹 역사상 2번째 계열분리는 구인회 창업주의 바로 밑 동생인 구철회의 자손들이 1999년에 LG화재해상보험을 분리해서 LIG그룹으로 재발족한 것이다. 구철회는 1975년에 사망했다. LG화재는 1959년 1월 범한해상보험(주)로 설립된 뒤 1962년 6월 범한해상화재보험(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0년 4월 LG그룹의 전신인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됐으며 1976년 6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2년 7월 범한화재해상보험(주), 1988년 6월 럭키화재해상보험(주)를 거쳐 1995년 6월 LG화재해상보험(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96년 6월 INI(International Network of Insurance)에 가입해 국제 보험서비스망을 구축했다. 1999년 11월 LG그룹 계열에서 분리, 2006년 4월 LIG손해보험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나 2015년 6월 KB금융지주에 인수돼 또다시 KB손해보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구철회 자손들 분가1999년 LG그룹 계열분리의 신호탄이 된 LIG(전 LG화재)는 당시 정부의 '5대 그룹 생명보험사 진출 금지' 정책에 맞물려 분리됐다. 한때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들어 손해보험-생명보험을 영위하려 했던 LG그룹은 생명보험사업이 좌절되면서 LG화재를 독립시키려 했고 고 구철회 회장 일가가 이를 받아들여 순조롭게 분가가 이뤄졌다.LIG그룹은 지주회사인 (주)LIG를 중심으로 방위산업, IT, 서비스 부문에 총 6개의 주력 계열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원래 LIG의 I가 보험(Insurance)을 뜻하는 의미도 있고 LG화재보험이 모태였지만 현재 생명보험(현 DGB생명), 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등이 모두 타사로 매각돼 회사 명칭과 달리 보험업 계열사는 없다. 2016년 현재 LIG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LIG넥스원이다.용인시 마북동에 본사를 둔 LIG넥스원은 1976년 금성정밀공업(주)로 창업한 이후 LG정밀, LG이노텍, 넥스원퓨처 등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2007년 4월 LIG넥스원으로 바꿨다. 동사는 정밀타격무기체계를 비롯해 감시정찰무기체계, 지휘통신무기체계, 전자전체계, 항공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8년 대한민국 방위산업 매출 1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육해공 전 분야의 무기체계에 대한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LB인베스트먼트와 아워홈2000년 3월 LG벤처투자는 구인회의 4남인 구자두에 상속됐다. 1996년 LG창업투자로 설립, 계열분리 후 2008년에는 펀드 운용액이 2천500억원에 이르는 LB인베스트먼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동사는 KTB네트워크, 제미니투자, 동양인베스트먼트, CJ창업투자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국내 벤처캐피털이다.>> 국내 대표적 벤처캐피털LB인베스트먼트는 2005년 마이크로스케일(주)를 인수해 2006년 1월 회사명을 엘비세미콘(주)로 변경했다. 동사는 2000년 2월에 반도체 칩 및 패키지의 설계 서비스, 수동소자의 제조, 조립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돼 2001년 6월 평택공단에 플립칩 범핑 공장을 준공했고 8월에는 8인치 골드 범프(Gold Bump) 기술을 개발했다. 2006년 12월 미국 IBM의 싱가포르 테스트사업부를 인수하고 이곳에 미국과 대만 등에 이어 8, 12인치 솔더범핑 전용 라인을 갖추고 양산에 들어갔다.2008년 1월 COG 타입 패키징을 양산했고 12월에는 플립칩 패키지 기술(Cu post bump)을 개발했다. 2009년 3월 글라스 웨이퍼(Glass Wafer) 위 재배열 기술을 개발했다. 2010년 7월 글로닉스(주)를 인수했고 2011년 1월에는 코스닥시장에 주식을 상장했다. 2011년 7월 TGV(Through Glass Via) 기술을 이용한 수동소자 내장형 이미지센서 패키지를 개발했으며 2012년 6월에는 12인치 범핑 라인을 구축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당초 금융자본으로 출발해 점차 산업자본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한편 같은 해 9월에는 LG유통의 식품서비스(FS)사업부를 분리해 3남인 구자학에 넘겼는데 구자학은 이를 모체로 '아워홈'이란 상호로 재발족했다.LG그룹은 1984년부터 식자재 공급사업을 시작해 87년에는 급식사업으로 영역을 넓혀 서울 여의도의 LG트윈타워 사원식당에 납품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1993년에는 대전 EXPO의 공식 식당운영 사업권자로 선정, 1997년 급식부문 ISO 9002인증을 획득했다.서울 강남구 메리츠타워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아워홈 전시관, 위탁급식, 식품유통, 식자재 유통, 공장 및 물류센터 등 전국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사업영역은 식품사업, FS사업, 외식사업, 식재사업이다. 식품사업에서 아워홈은 '행복한 맛남'의 식품제조 브랜드를 갖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IG그룹은 지주회사인 (주)LIG를 중심으로 방위산업, IT 등 총 6개 주력 계열사를 두고 있다. 사진은 LIG넥스원의 유도무기분야인 천궁의 모습. /LIG넥스원 제공

2019-05-1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6]엘지-14 계열분리(①희성그룹 탄생)

경영승계 '장자 상속' 원칙2남 '구본능' 일찌감치 분가폴란드·中·베트남·이집트에현지법인 세우며 '글로벌화'2016년 9개 계열사 거느려 재산을 조금이라도 지닌 여염집의 경우에도 재산상속 관련해 피상속자들 간에 불미스러운 사례들이 비일비재한데,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재벌 상속의 경우 이해당사자들 간에 갈등이 불거짐은 당연(?)해 보인다.국내의 경우 재벌 대물림과 관련한 '형제의 난' 등이 종종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LG그룹은 1947년 창업해 이제는 70년이 넘은 기업이 됐다. 그동안 그룹의 경영권이 창업자 구인회에서 아들 구자경과 손자 구본무로 계승되는 등 창업 3세대에 걸쳐 세습경영 됐는데, 특히 이 재벌은 사업개시부터 구인회의 6형제 및 사돈인 허씨 혈족들까지 수많은 동업자가 경영에 관여했던 탓에 그룹 재산 분할이 주목받았다.>> 1996년 '희성금속' 독립구인회의 형제만 해도 철회, 정회, 태회, 평회, 두회 등 6명에다 이들의 아들과 딸 등 만해도 무려 57명이다. 그룹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허씨 집안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국내 여타 재벌들 같았으면 벌써 공중분해 됐을 터인데 LG그룹은 아직까지 분재와 관련해 불미스런 루머가 단 한 건도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스터리하다.- 희성그룹 탄생LG그룹에서의 최초 계열분리는 1996년 1월에 2대 총수 구자경의 2남 구본능이 희성금속을 떼어내어 독립한 것이다. 창업 반세기만이어서 여타 그룹에 비해 매우 늦었다.희성금속은 도금재, 본딩와이어(Bonding Wire), 접점, 디스플레이용 투명전극 타깃(ITO Target)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구자경 회장은 첫째 본무, 둘째 본능, 셋째 본준 등 아들 3형제를 슬하에 뒀는데 LG그룹의 경우 경영권 승계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2남인 구본능이 일찍부터 분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는 희성금속 외에도 국제전선(현 가온전선)과 한국엥겔하드(주)(현 희성촉매), 상농기업(주)(현 희성전자), (주)원광(현 희성화학), 진광정기(현 희성정밀) 등 6개사를 분리해 희성그룹으로 재발족했다. 구본능은 부산의 경남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해 LG전자 이사와 희성금속 감사, 상농기업 부사장 등을 거치며 착실하게 경영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주력기업인 희성전자의 모체는 1957년 8월에 설립된 삼영수지공업사이다. 삼영수지는 1974년 10월 상남기업(주)로 법인 전환한 뒤, 1982년 상농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85년 5월 국내 최초로 자동전압전환 장치 전기보온밥솥을 개발해 출시했다.>> 지주회사役 '희성전자'희성전자는 1999년 진례공장을 준공하면서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용 BLU(Back Light Unit) 사업에 진출했다. 2002년 9월 중국 난징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Co.,LTD.)을 설립했으며 2003년 5월 희성전자(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같은 해 8월 TFT-LCD용 모듈의 양산을 개시했다. 2005년 9월 폴란드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Poland SP.Z.o.o)을 세웠으며 2006년 11월 10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2008년 10월 중국 쑤저우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Co.LTD)을 설립하고, 이듬해 7월 LED 칩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중국 광저우에, 2014년에는 중국 옌타이와 이집트에, 그리고 2015년에는 베트남에 각각 현지법인을 세우는 등 글로벌 시대를 대비했다.희성그룹 내에서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희성전자는 TFT-LCD의 핵심 부품인 백라이트유닛(BLU)과 LCM(모듈), TSP(터치스크랜패널) 등을 생산하는 업체다. 생산제품의 60%가량을 LG디스플레이에 공급한다. 대구공장 및 대구2공장과 파주공장을 가동하고 있다.희성그룹 계열사에는 희성전자(주), 희성금속(주), 희성촉매(주), (주)희성화학, 희성정밀(주), 삼보E&C, 희성피엠텍(주), 희성소재(주), 희성폴리머 등 9개사가 있다. 2016년 12월 말 기준 희성전자의 최대주주는 구본능 회장이며, 보유 지분은 42.1%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희성그룹의 계열사 중 한 곳인 희성전자(주)는 1999년 진례공장을 준공하면서 TFT-LCD용 BLU사업에 진출했다. 사진은 희성전자가 지난 2002년 9월 중국 난징에 현지법인을 설립할 당시의 조감도. /희성전자 제공

2019-05-06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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