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2]현대-14 경영권 분쟁과 현대그룹 축소(하)

2011년 자동차그룹, 현대건설 인수최대주주로 계열社 지분 35%차지정몽구·의선 父子 글로비스 창업'경영권 편법 상속' 여론 호된 비판현정은, 자금난 현대상선 살리기 증권매각 불구 실패 경영권 넘겨 현대그룹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여러 개의 중견기업집단으로 재편성됐는데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은 약진을 거듭해서 2011년 4월 현재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55개 그룹 중 현대차그룹은 4위에, 현대중공업그룹은 6위에 각각 랭크됐다.국내 최대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의 채권단에선 현대건설 산하 비상장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과 철 구조물 전문 제작업체 현대스틸산업, 광주원주고속도로 건설, 관리 및 운영을 위한 제2 영동고속도로 외에도 현종설계, 부산정관에너지, 현대서산농장(아산만 매립지 운영업체), 현대씨엔아이, 경인운하, 현대건설인재개발원 등을 묶어 2011년에 재매각이 추진됐는데,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현대그룹(현정은)과 현대차그룹(정몽구)이었다.>> 중견기업집단 재편성현대그룹은 기존의 연고를, 현대차는 정주영 왕회장의 장자로서의 적통성을 각각 인수명분으로 내놓은 것이다. 인수가격을 현대그룹은 5조5천억원에, 현대차는 5조1천억원에 응찰했으나 결과는 인수대금을 더 많이 써낸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됐다.특히 현대그룹은 자금출처 문제에 시달렸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차입금 1조2천억원 등 대출금 세부계획을 제출하라는 채권단의 소명 요구에 현대그룹은 MOU가 체결된 상황에서 대출 관련 세부상황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며 버틴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그룹은 외환은행이 MOU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률적 권한 범위 내에서 적정하게 행동했는지 감독 당국에 조사를 요청함과 아울러 현대그룹 2개의 핵심 자회사인 현대상선 및 현대증권을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고발조치까지 했다. 결국 채권단은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고 현대자동차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 2011년 4월 1일 현대건설의 인수대금을 완납함으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2011년 8월 현대자동차가 현대건설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를 포함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등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약 35%다.현대차가 모태 기업인 현대건설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정몽구·의선 부자는 소규모 물류업체인 현대글로비스를 창업해 계열사들의 일감 몰아주기로 덩치를 키운 후 글로비스로 하여금 계열사 주식을 취득해 현대차그룹의 경영권을 상속하는 편법을 구사함으로써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삼성그룹의 3세 세습과 함께 세금을 거의 물지 않고 그룹을 통체로 세습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천44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현대전자(하이닉스)는 2011년 11월 11일 단독인수의향을 밝힌 SK텔레콤에 3조4천267억원에 인수됐다.>> 정회장 사후 5개로 나눠창업자 정주영 사후 현대그룹은 재벌서열 2위의 현대기아차그룹(정몽구), 6위의 현대중공업그룹(정몽헌), 17위의 현대그룹(현정은), 24위의 현대백화점그룹(정지선)과 현대산업개발(정세영의 장남 정몽규) 등 5개 그룹으로 분리됐다.이후 현대그룹의 규모는 더욱 위축됐다. 현정은 회장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2016년 3월에 현대증권을 KB금융지주에 매각했는데 동사는 1962년에 국일증권으로 설립돼 1977년 11월에 현대그룹에 인수돼 1986년에 현대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현대증권은 2016년 12월에 KB투자증권과 합병되어 KB증권이 됐다.그럼에도 현대상선을 회생시키지 못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겼다. 2016년 3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가 한국산업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76년 현대그룹의 계열사인 아세아상선으로 설립됐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이탈리아의 한 정유업체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해 납품했는데 발주업체가 하자를 이유로 한 척의 인수를 거부하자 차제에 현대그룹에서 이 배를 토대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이 회사를 세울 때 조언을 한 장본인이 현정은 회장의 부친인 현영원으로 당시 그는 신한해운을 운영하는 전문가였다. 현영원은 이를 계기로 1983년에 현대상선에 합류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이 분리되면서 현대그룹에 남은 계열사는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한 현대글로벌, 현대아산, 현대유엔아이, 현대엘앤알, 에이블현대호텔리조트, 현대투자네트워크, 현대경재연구원 등 10여개 업체로 2015년 21개 계열사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경영권 분쟁과 외환위기로 현대그룹은 중견기업집단으로 재편성됐는데, 창업자 정주영 회장 사후 현대기아차그룹, 현대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사진은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연합뉴스

2018-11-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1]현대-13 경영권 분쟁과 현대그룹 축소(상)

KCC, 지분 확보 '그룹 인수' 발표현대, '5%룰 위반' 제기 법에 호소금감위, 전량 처분 명령… '판정승'중화학 수출전담 종합상사도 분리정몽헌의 사망 직후 재계서열 15위로 축소된 현대그룹(정몽헌 계)이 경영권분쟁에 휘말렸다. 정몽헌 사후 2개월여 만인 2003년 10월 정몽헌의 처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의 총수로 취임했는데 말들이 많았다. 전업주부 출신의 경영자가 한계상황의 현대그룹을 잘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현정은은 호남의 대지주 출신 기업가 현준호의 손녀이자 현대상선 현영원 회장의 장녀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정몽헌과 가약을 맺은 뒤 가정주부로 일관해왔다.>> 현정은 그룹총수 취임그 와중에 현대그룹의 경영권분쟁이 불거졌는데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와 정몽헌의 삼촌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회장간의 다툼이었다. 발단은 정상영이 사모펀드(신한BNP파이라투신운용 등)를 이용, 10월부터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시숙부인 정상영 KCC회장이 현대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빠르게 늘려가면서 현대그룹을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탓이다. 범현대가의 지원을 받는 정상영 회장의 발 빠른 지분 확대에 현대그룹은 긴장했다.2004년 3월 15일 KCC측은 현대상선에 2천억원 규모 선박의 불분명한 소재와 강공자산 여부, 경쟁사 대비 10배에 달하는 외상매출채권, 거액의 대손처리 등 공개적으로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KCC가 5%룰을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문제 삼아 법에 호소했다. 당시 KCC가 현정은 모녀 측보다 지분을 훨씬 많이 확보했으나 상장법인의 경우 5% 이상을 보유한 자는 1% 이상 지분 변동이 발생했을 때 5일 이내 변동내용을 신고토록 했는데 KCC측에서 이를 위반했다며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소한 것이다. 결국 이 것이 문제가 돼 금감위가 2004년 2월 11일에 KCC에 대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경영권분쟁은 종식됐다. 2006년에는 현대그룹이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확보하면서 일단 판정승을 거뒀다. KCC는 경영권분쟁 10년만인 2014년에 현대상선의 지분을 전원 매각했다.현대그룹의 지배구조 취약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세간에선 이 사건이 '시숙부와 질부 간의 분쟁'으로 회자되기도 했다.2007년 4월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 26.68%를 매입해 최대주주가 되면서 이번에는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간에 경영권 분쟁이 야기됐다. 당시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 있었는데 현대그룹에선 유상증자 등을 통해 현대상선의 지분을 40% 넘게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방어했다.그 와중에서 현대종합상사도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갔다. >> 금융자회사들 분산이 회사는 1976년 현대그룹의 중화학부문 수출을 전담하는 무역업체로 설립돼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에서 생산한 선박, 자동차, 기계 등의 수출을 전담하다 1977년 12월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1년에는 국내 최초로 해외 자원 개발프로젝트인 호주 드레이톤 광산개발에 참여했으며 2000년에는 비제조업체로는 국내 최대인 수출 25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즈음해서 2003년에 채권단 품으로 떨어져 나갔다.한편 2004년에는 현대그룹의 금융자회사들인 현대투자증권과 현대투자신탁운용, 현대투자신탁 및 현대오토넷이 분리됐다. 현대투자신탁의 전신은 국민투자신탁으로 1982년 6월에 설립돼 국내 최초로 고객의 자금을 위탁받아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에 간접 투자하는 최신금융기법의 업체로 기관투자가로서의 역할을 한 뒤 1997년 현대그룹에 편입, 1999년에 현대투자신탁증권으로 변경됐다. 1997년 당시 종업원 수 1천여명에 매출액이 12조6천억원이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 푸르덴셜 금융그룹에 인수돼 푸르덴셜증권으로 상호가 변경된 뒤 2010년 6월 한화증권이 인수, 합병해서 한화투자증권으로 다시 변경됐다.내비게이션과 자동차용 전기, 전자부품, 에어백 등을 생산하는 현대오토넷은 2000년 2월에 설립돼 2002년 7월에 상장기업이 됐다가 2009년 6월 현대모비스에 합병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그룹은 정몽헌 사후 현정은 회장의 부임으로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KCC가 5%룰을 위반했다며 법에 호소, KCC로부터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현대그룹 본사 모습. /연합뉴스

2018-11-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0]현대-12 최대의 정경유착 의혹과 정몽헌 자살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의 계열분리는 정몽헌 지배의 현대그룹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됐다. 현대그룹 전반에 대한 시장의 불신과 건설경기 침체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또 막대한 금액을 북한에 송금한 상황에서 형제 기업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점도 요인이었다. 현대그룹의 해체위기가 고조되자 "2000년 4~5월 두 달간 삼성카드 2천억원을 포함,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의 돈줄이었던 현대상선에서 회수한 자금만 4천151억 원에 달해 단기차입금이 많았던 현대건설 계열은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3년 8월 6일, [秘話 국민의 정부]<31> ⑤현대家 왕자의 난(下))현대건설, 만기어음 결제못해 한계국책기관·금융권 33조 지원 불구건설·전자소유권 채권단에 넘어가>> 현대그룹 부도 직면 현대그룹의 부도위기로 2000년 5월 26일에는 종합주가지수(KOSPI)가 하루 동안 무려 42.87포인트가 빠지기도 했다.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29일 만기 어음 260억원을 결제하지 못하는 등 한계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정부는 2000년 11월 3일 부실기업 퇴출조치와 관련해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마련했다.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제때 상환하지 못할 때 해당 기업이 만기도래분 20%만 상환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대신 갚게 하는 것이다. 현대그룹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시장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현대건설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이듬해 3월 27일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정부가 유동성을 지원해 출자 전환하기로 결론 냈다. 그해 5월 18일 현대건설 주주총회에서 당초 채권단의 구상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회사채 신속인수제는 현대그룹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 5월부터 2002년 9월까지 국책기관과 금융권이 현대그룹에 지원한 금액은 총 33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이 자금은 주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에 쏟아 부었음에도 끝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소유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2001년 현대건설은 채권단에 의해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현대엔지니어링 등과 별도의 현대건설그룹을 이뤘다.2001년 3월 21일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사망했다. 항간에는 정 회장이 인생 말년의 향수병 때문에 추진했던 대북사업이 현대건설그룹을 붕괴시키고 말았다는 설이 돌았다. 현대상선 역시 대북송금을 위해 산업은행에서 빌린 4천억원을 갚느라 알짜 사업체인 자동차 운반선을 분리·매각했다. 현대아산은 사업 시작 이래 2000년 말까지 북한에 공식적으로 3억3천만달러를 지급하는 등 누적적자만 3억달러에 달했다.정몽헌은 2000년 '왕자의 난'을 통해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고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가 위기에 빠지자 정몽헌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현대아산 회장으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그 와중에 2002년 9월에는 금강산관광의 새로운 육로관광을 개시했다. 그러나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계동 본사사옥에서 투신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는 대북 불법송금과 정치권 비자금 제공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정치권 비자금 제공의혹 검찰조사남북정상회담前 '비밀 송금' 화근투신사건후 흐지부지 역사속으로>> 몽헌, 대북사업 전념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 간의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 13~15일)의 사전준비과정에서 현대그룹이 막대한 자금을 북한으로 몰래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 사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정부와 현대그룹이 공모해 불법으로 막대한 자금을 북한에 제공한 데에는 무언가 흑막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정부와 현대 모두 입장이 난처했지만 시원히 밝힐 수도 없었다. 북한 송금 내역 및 현대와 북한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한 협상 내용 내지는 송금 관련 북한 계좌 내역까지 공개될 경우 김대중 정부가 최대치적으로 자부한 햇볕정책 무산은 물론 자칫 정권붕괴까지도 점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스스로 엄청난 불법을 저지른 셈이니 말이다. 현대의 경우 돈의 출처가 밝혀지면 분식회계는 물론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비자금 제공 등 후폭풍 또한 일파만파여서 도저히 불감당이었을 것이다.('노무현자서전, 운명이다', 30판, 230~233면)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3년에 대북송금 의혹 특검에서 현대그룹이 북한에 송금한 금액은 현금 4억5천만달러와 5천만달러 어치의 현물 등 총 5억달러인 것으로 확인됐다.자금규모뿐 아니라 정부는 물론 북한 당국까지 연루된 희대의 정경유착사건이 불거지면서 현대그룹은 창업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몽헌의 사망과 함께 모든 것이 흐지부지된 채 이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금강산관광의 새로운 육로관광을 열었지만 대북 불법송금과 정치권 비자금 의혹을 남긴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이영하 현대아산 사장 등 임직원들이 지난 8월3일 금강산 현지에서 맹경일 아태 부위원장 등 북측 관계자 20여명과 함께 고 정몽헌 회장 15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는 모습. /현대그룹 제공=연합뉴스

2018-10-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9]현대-11 왕자의 난과 현대그룹 분해

1997년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국내 최대 재벌 현대그룹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룹의 주력이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이었던 탓에 극심한 경기불황을 견뎌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진행된 경기침체는 후반기 들어 더 심해지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였다. 설상가상으로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이 유력시되던 김영삼 후보와 경쟁하게 돼 현대그룹은 김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세무조사와 대출규제 등 위축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그룹 주력분야 극심한 경기 불황DJ정부 들어 2차례 소떼 몰고 방북막대한 자금 투자 본격 대북사업>> 외환위기로 많은 변화 그러나 1998년 진보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는 듯했다. 정주영·몽헌 부자가 그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 떼 1천1마리를 몰고 직접 판문점을 통과해 입북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 물꼬를 텄다. 그해 10월 2차로 소 떼 방북 길에 오른 정주영은 27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향후 30년간 금강산 독점개발권을 확보, 11월 18일 오후 5시43분에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가 정주영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관광객 8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66명 등 총 1천365명을 싣고 4박5일 일정으로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해 금강산으로 향했다.1999년 2월 현대그룹은 북한 관련 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현대그룹은 주력사업을 대북사업으로 전환, 금강산관광단지를 개발하고 개성에는 대규모 경공업단지 조성계획을 세우는 등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 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에서의 냉전청산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북한에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리인이 필요했는데 현대야말로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은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한화에너지의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기는 등 현대그룹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외환위기로 그룹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대북사업도 교착상태에 빠졌다.그 와중인 2000년 3월 현대그룹은 초유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정주영의 아들들 간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다. 당시 병환이 깊었던 정 회장이 은퇴한 후 몽구(2째), 몽헌(5째) 형제간의 불안한 투톱(공동회장제)으로 운영하던 중 경영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몽구와 몽헌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일찍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몽구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2000년 3월 14일 정몽구 공동회장이 정몽헌의 최측근 심복이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보복성 인사가 최초의 시발점이었다. 다음날 정몽헌 공동회장이 인사보류를 지시하는 한편 3월 24일에는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정몽구의 공동회장 면직을 발표했다. 정몽구 '보복성 인사' 다툼 시발점몽헌, 다수계열사 확보… 그룹 장악몽준, 중공업·미포조선 등 '분리'>> 3부자 동반퇴진 발표5월 25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계열사 지분정리와 현대차 지분매입을 발표하자 다음날인 26일 현대 전 계열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그룹에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진 문책을 요구함으로써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 현대아산의 이사직을 포기하는 한편 5월 31일 정주영·몽구·몽헌 3부자 동반퇴진을 골자로 하는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했다.이 사건은 2000년 9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서비스 등 9개 계열사를 분리해서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재발족하면서 마무리됐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에 설립돼 1974년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승용차 '포니'를 생산해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외환위기 중인 1999년 3월 기아자동차와 아세아자동차를 한꺼번에 인수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가 됐다.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몽헌은 명실상부한 현대그룹의 2대 총수가 됐다. 또한 정몽헌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아산 등 수적으로 많은 계열사를 확보했다. 현대그룹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준 이 사건을 세인들은 '왕자의 난'으로 불렀다.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등을 분리해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현대백화점도 이때 독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사업의 일환으로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등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에 물꼬를 텄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연합뉴스

2018-10-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8]현대-10 금강산 관광과 정주영 대선 출마

정치권 압박에 '정계진출' 결심그룹 임직원·가족·계열사 동원김영삼·김대중 한판승부로 끝나'반재벌 정서' 16.3%득표로 낙선 1990년대 들어 현대그룹은 창업자 정주영의 정계 진출과 초유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첫째는 그의 정계 진출이었다. 국내에서 성공한 기업인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집권당의 국회의원으로, 그것도 사업과 정치를 겸하는 탓에 본업은 여전히 기업가이며 정치활동은 부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연세대 교수 출신의 오피니언 리더 김동길 목사와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정주영이 대표최고위원에 등극한 것이다. 그는 국내 정치역사상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재벌 총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통일국민당 창당국내 최고 재벌의 오너 경영인인 정주영은 대권 도전에 나선 이유에 대해 "5공화국(전두환 정권)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겠지만, 아우 인영이(한라그룹 창업자)가 옥고를 치르면서 창원중공업(두산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이다. 정주영 자신도 5공 집권 초기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때문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중 하나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압박을 정계진출의 직접동기로 지적한 것이다.노태우 전 대통령이 5공의 내무부 장관 시절 전두환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당시(1982~1983년 무렵)에는 많은 건설업자들이 정부가 통제 중인 아파트 분양가를 올려주지 않으면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정부가 상한선을 평당 112만~113만원으로 묶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시기에 누구라고 하면 금세 알 수 있는 기업인이 전(全) 대통령을 찾아와서 단가를 올려 달라는 업자들을 도적과 같은 자라 매도하면서 '양심대로 말하면 평당 60만원으로 지을 수 있다'며 양심선언 했다는 것이다.그 기업인이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는데 한 달 후 전(全) 대통령은 노태우 장관에게 '내가 그 영감(정주영 회장)한테 크게 속았소. 그 사람 큰일 저지를 사람이야. 벌써 몇 개 기업이 그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더군.'…. 정 회장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노태우 회고록(上卷)', 503~4면)국민당은 현대그룹의 임직원과 가족 및 협력사 등을 노골적으로 동원해 당원수 1천200만명을 확보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 출마에 대비했다. 11월 20일에 제14대 대통령선거 공고가 확정됐는데 후보군으론 유력주자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외에 김대중, 이종찬, 박찬종 등이었는데 정주영은 기호 3번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이 선거판의 주인공은 라이벌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판 승부로 정주영은 애초부터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원들 조차 외면처음부터 금권선거 시비가 불거진 데다 유권자들의 반재벌 정서가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민자당과 노태우 정부에서는 김기춘(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의 "우리가 남이가?" 등 대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해 12월 19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개표한 결과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득표율 42%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주영은 최종득표수가 380여만표(득표율 16.3%)에 그쳐 통일국민당 당원들조차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주영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하고 김동길 목사와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등극했다. 사진은 제14대 대통령선거 정주영 후보 벽보. /중앙선관위(사이버선거역사관)제공·연합뉴스

2018-10-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7]현대-9 최대 재벌 형성

반도체·컴퓨터 생산 LG등과 호각세중공업도 첨단·고부가가치화 착수서산에 1조원 들여 석유화학 설립백화점·광고등 서비스산업도 확대1980년대 현대그룹은 다른 재벌처럼 관광, 유통, 금융 등 서비스업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다각화했다. 또 해외 현지법인 설립 등 국제화에도 주력했다.1980년대 현대의 다각화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의 진출이다. LG, 삼성, 대우 등 경쟁 관계에 있는 재벌들에 비해 늦게 전자사업에 진출했으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현대전자는 1949년에 설립된 업체로 1983년 2월에 현대그룹에 인수됐다. 그해 11월부터 PC 등 컴퓨터를 생산하는 한편 반도체 등을 생산하기 위해 이천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1986년 10월에 준공했다. 이후 가전제품을 비롯한 반도체, 컴퓨터 생산에 매진해 단기간 내 선 주자들인 삼성, LG, 대우 등과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뒤늦게 전자사업 진출1986년 1월에는 현대마그네틱에 이어 1988년 2월 현대미디어시스템을 잇따라 설립, 소프트·하드웨어산업에 참여했으며 1989년 5월 생산설비 제어장비와 공정제어장치, 데이터통신 등을 목적으로 한 현대정보통신을 설립했다.둘째 중공업의 첨단화, 고부가화 사업에 착수했다. 1987년 9월 전자제어장치 및 연료 분사장치를 생산하는 현대케피코를 설립했다. 현대중전기는 1983년 2월 미국 Westing House사와 합작으로 한국산업서비스를, 1984년 3월에는 현대엘리베이터를 각각 설립했다. 1984년 11월 사우디 알자밀사와 합작으로 산업전자공장을 건설하고 1986년 6월 미국 GE사와 합작으로 한국전기동산을 설립했다.또한 1988년 7월 현대로봇산업을 설립해 공장자동화사업에도 진출했다. 1984년 10월 현대중공업 내에 로봇절단팀을 조직, 1985년 5월 일본의 (주)나찌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86년 2월 스포트로봇(8810AK) 1대를 생산해 최초로 현대자동차에 판매했다. 이를 기반으로 1988년 7월에 현대로봇산업을 세웠다.1988년 8월에는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했다. 1973년 5월 현대건설 소속 철탑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국내 설치된 송전탑은 일본에서 수입했다. 특히 초고압의 34만5천 볼트용 철탑은 국내제작이 불가했다. 현대건설은 초고압용 송전탑의 국산화 개발에 착수, 1973년 6월 34만5천 볼트용 송전탑을 국내 최초로 제작해 한국전력에 납품했다. 1977년 7월에는 사우디에 송전탑 3천641t을 수출하는 등 일취월장했다.1986년 9월에는 현대중장비산업을 세웠다. 현대중공업 중기사업부는 1985년 10월 일본 닛산사에 5년간 소형 굴삭기를 수출 계약하고 1986년 2월에는 미국 중장비제조회사인 Dresser사와 소형 크룰러 도저·로더를 10년간 OEM방식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1987년 1월에 4천300평의 공장을 준공하고 독립 법인화했다.셋째 석유화학산업의 진출이다. 현대그룹은 1988년 9월에 충청남도 서산에 1천175천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조2천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산 35만t의 프로필렌, 부타디엔, 스티렌모노머, 에틸렌 글리콜 등을 생산하는 계열 석유화학공장 등을 갖추고 현대석유화학을 설립했다.넷째 국제화의 추진이었다. 현대그룹의 국제화 추진은 1981년 1월 한국알라스카자원개발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또한 현대종합목재를 중심으로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가속화했다. 현대종합목재는 가구 등을 미국에 대량 수출했지만, 가구는 부피가 큰 탓에 포장비·운송료 등 물류 비용이 컸다. 더구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국내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두드러지면서 수출에도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차제에 현대종합목재는 미주지역에 대한 수출물량을 확대하기 위해 1982년 1월 미국에 현지법인 HFI(Hyundai Furniture Industries)를 설립했다. HFI는 1983년 1월과 1987년 8월에 미국 달라스와 로스엔젤레스에 각각 가구조립공장을 건설하고 1983년 1월에는 솔로몬 원목개발 현지법인(HTC: Hyundai Timber Company)을, 1985년 8월에는 말레이시아 현지법인(SHWI:Sime Hyundai Wood Industries)을, 1987년 7월에는 미국 하이포인트에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했다.>> 국제화 추진다섯째 백화점, 광고회사, 투자자문회사 등 서비스산업의 진출 확대다. 현대그룹은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그룹차원의 광고를 전담하기 위해 1983년 11월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을 설립하고 1986년 10월에는 연구용역 및 증권투자정보를 위해 현대사회경제연구원을 세웠다. 1987년 3월에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한무쇼핑을 설립하고 5월에는 설계용역전담사인 현대브라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1987년 3월에는 현대투자자문을 설립해 현대증권,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금융 등과 함께 금융소그룹을 형성했다. 1982년 2월에는 금전등록기, 계량기, 사무기기의 제조를 목적으로 현대테크시스템을, 1987년 6월에는 해운대리점인 현대물류를 각각 설립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은 1980년대에는 삼성그룹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80년대 다각화 사업을 시도하면서 현대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고, 이천에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2011년 SK그룹에 인수되면서 SK하이닉스로 변경됐다. /경인일보 DB

2018-10-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6]현대-8 주베일 항만공사-20세기 최대 역사(役事)

당시 국가예산 25% 달하는 거금1976년 정식계약 정부 지급보증1970년대 33개업체 새로 계열화美경제지 500대기업중 98위 선정한국경제에 있어 1970년대는 천당에서 나락으로 그리고 다시 기사회생한 고난의 시기였는데, 계기는 1973년 10월부터 1975년 중반에 끝난 제1차 오일쇼크였다. 1973년 10월 6일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감산을 통해 유가를 무려 4배 이상 끌어올려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당시 한국은 아랍국들이 비 우호국으로 분류해 고통이 더 컸다. 1974년 하반기부터 수출부진과 고용감퇴, 경상수지 악화 등 거시경제지표들이 나빠지면서 당시 새로 추진한 정부의 100억달러짜리 중화학 공업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건설, 사우디 진출정부는 돌파구로 중동의 산유국을 지목했다.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값 인상으로 긁어모은 달러화로 대대적인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1974년 2월 16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제르 기획상과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협력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이란, 쿠웨이트, 바레인 등과 중동시장 접근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자본은 물론 기술마저 불량한 국내 건설업체들의 핸디캡을 커버하기 위해 해외 건설에 한해 물적 담보 없이도 정부가 대신 지급을 보증하는 내용의 '해외건설촉진법'을 마련해 중동건설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74년의 8천900만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5천100만달러로 급증했다. 1975년 3월에는 신원개발이 이란에서 4천76만 달러의 코탐사 항 확장공사를, 현대는 바레인에서 1억3천700만달러의 ASRY조선소 건설공사를 각각 수주했다.더욱 경이적인 사건은 현대건설이 1976년에 무려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공사기간 1976.6~1979.12)를 수주한 것이다. 워낙 공사규모가 큰 데다 한국 기업이 수주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국제적으로 큰 화젯거리였다.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해외 언론에선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소개했다. 당시 사우디는 경제개발에 착수했으나 항만이 부족해 주베일에 대규모 산업항을 축조했다. 해안으로부터 무려 12㎞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다 한가운데에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open sea tanker terminal) 건설사업으로 총 길이가 3.48㎞에 달해 그 모양이 꼭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해상활주로 같은 모양이었다. 정식계약은 1976년 6월 16일에 체결됐는데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섰다.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효과를 본 돌관경영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공사에 임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 OSTT의 철 구조물을 쪼개 89개의 재킷(jacket)으로 나눈 후 이를 한국의 울산조선소에서 제작 납품토록 했다. 재킷 한 개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웬만한 10층 건물 높이로 재킷 1개의 중량은 400~500t이었다. 문제는 사우디까지 운반하는 것이나 재킷의 덩치가 너무 커 화물선으론 운반이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1만5천800t급과 5천500t급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 그 위에 재킷 4, 5개씩 싣고 예인선으로 끌고 갔다. 3만2천여리를 19차례나 왕복하며 89개의 재킷 운반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는데 운반에만 총 35일이 소요됐다. 이 공사에만 총 25만명이 동원됐다.그러나 1977년 3월과 1979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공사 현장에서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환경 시정 등을 요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열악한 근로조건을 못 견딘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몰고 와서 사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 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폭동이라며 진압을 요청했고 사우디 정부는 즉각 방위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그룹 최대 확장기1970년대는 현대그룹 역사상 최대의 확장기로 평가된다. 이 기간 중 현대그룹은 총 33개 업체를 새로 계열화했다.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장비 등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직계열화가 특징이다. 현대그룹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1978년에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다.현대건설은 1960~1970년대 정부주도의 압축성장 시대를 맞아 건설에서 중공업으로, 하찮은 못에서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수직계열화작업을 통해 국내 정상의 건설기계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정부가 기획하고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 드라마에 현대는 주연배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건설은 1976년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해 큰 화제가 됐다. 사진은 주베일 산업항 준공 사진. /현대건설 제공

2018-10-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5]현대-7 해운업과 종합무역상사

불황속 투자 확대 15척 선박 발주첫 중동 정기운항 사업면허 취득그룹 생산제품·직물등 수출 대행1978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아현대그룹은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에 기반을 확보하고 이들 사업 일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타 산업을 중심으로 전방통합을 추구했는데, 그 첫 번째는 고려화학의 설립이었다. 계열사들의 점증하는 안료, 도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74년 7월 18일에 도료, 합성수지, 접착제, 안료의 제조판매를 목적으로 자본금 5천만원의 고려화학주식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또한 선박용 도료의 개발을 위해 1974년 12월 덴마크의 Hempels Marine Paints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생산에 착수했다. 이후 외국의 유수한 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품질향상을 도모하는 한편 제품을 다변화함으로써 그룹 내 각 계열사의 페인트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아세아상선 설립둘째는 해운업의 진출이었다. 아세아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은 1976년 3월 25일 자본금 2천만원에 26만3천500 DWT의 '코리아 선'호와 26만2천821 DWT의 '코리아 스타'호, '코리아 베너'호 등 3척의 VLCC로 설립됐다.1977년 5월에 곡물, 석탄, 광석물 등을 운반하는 살물선(Bulk Carrier) 아세아 1호와 2호를, 9월에는 청룡 1·2·3호 등 원양예인선단을 취항시켜 중동 건설현장까지 자재 운송을 전담케 했다.아세아상선은 국내 해운 불황 하에서도 투자를 확대해 1977년에는 제3차 계획조선에 참여, 제6차 계획조선까지 30만 GT에 달하는 15척의 선박을 발주했다. 또 1978년 4월에는 자본금 100억원으로 확대하고 6월에는 국내 처음으로 중동 정기항로의 운항 사업면허를 취득함으로써 1979년 3월 12일 제3회 '해운의 날'에 국내 최초로 '1억불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등 대형선사로 도약했다.셋째는 현대종합목재의 설립이었다. 현대건설은 1976년 12월말부터 중동건설현장용 제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울산에 제재소를 마련, 1977년 7월부터 수출가구공장을 가동하면서 1978년 1월에 금강목재공업을 설립했다. 1979년부터 '리바트가구'를 국내외에 공급을 개시하면서 점차 가정용 및 선박용 가구, 인테리어, 제재업으로 영업 종목을 다변화해 1980년 1월에 현대종합목재산업으로 변경했다.넷째는 현대종합상사의 설립이다. 1973년 벽두부터 국내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됐다. 막대한 외화자금이 소요되어 수출 중요성이 한층 제고됐다. 그러나 연말에 불거진 제1차 오일쇼크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등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정부는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고자 1975년 1월에 일본의 총합무역상사를 벤치마킹한 종합무역상사제를 실시했다. 지정요건은 해외 지사 10개 이상, 자본금 10억원 이상, 50만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7개 품목 이상을 보유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또한 종합무역상사에는 국내 업체들 간 국제 입찰 시 우선 지원함은 물론 원자재수입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부여했으며 파격적인 수출금융을 제공하는 등 당근을 제공한 것이다.1975년 5월 삼성물산이 제1호로 지정된 이후 대우실업, (주)쌍용, 국제상사, 한일합섬, 효성물산, 반도상사, SK, 삼화, 금호실업이 종합무역상사로 변신했다. >> 현대종합상사 태동1976년 현재 현대그룹의 전체 수출실적은 5억4천368만달러로 그해 12월 자본금 5천만원의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했다. 선박부품과 철구제품, 각종 기계, 공산품 원료와 제품, 건축자재와 화학제품, 운반용 기계 등 주로 현대그룹 생산제품과 직물, 편물, 봉제품, 피혁제품의 판매와 수출대행을 위해서였다. 1977년 10월에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1978년 2월 11일에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았다.1970년 4월에는 강원은행을, 1972년 2월에는 선일상선을 각각 인수했고 1973년 12월에는 현대정유판매를, 1976년 12월에는 시설대여 및 유가증권 매매를 목적으로 한 현대종합금융을 각각 설립했다. 1977년 7월에는 아산문화복지재단을, 10월에는 금강항공을 각각 설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해운업 진출을 위해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상선을 지난 1976년에 설립했다. /현대상선 제공

2018-09-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4]현대-6 철강 산업으로의 확대

같은해 8월 현대종합상사에부실 '대한알미늄공업'등 흡수국내외 건설경기 호조 자재 품귀철근·파이프류등 직접 생산 조달현대는 철강, 알루미늄 등 소재산업에도 진출했는데, 현대가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 인천제철의 인수로부터 비롯됐다. 인천제철은 중·일전쟁 중인 1938년 9월 23일 진남포에서 일본 이화학흥업(理化學興業), 이연금속(理硏金屬), 주우금속(住友金屬) 등이 자본금 1천300만원(圓)을 출자해 설립한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철강, 알루미늄, 마그네슘, 기타 각종 금속을 제조 판매하다가 해방 후 귀속재산 돼 1953년 인천공장을 모체로 대한중공업공사로 재발족됐다. >> 소재산업 진출당시 시설은 1천200마력 압연기와 건물 4천443평, 미가동 기계공작물 34점 등이었다. 연산 12만t의 평로(平爐), 15만5천t의 분괴중형, 1만5천t의 박판설비로 재가동한 대한중공업은 1962년 11월에 인천중공업으로 개명됐다.인천중공업은 1964년 9월에 제철설비를 분리해 선철 연산 12만t의 인천제철을 설립했다. 이후 두 회사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정부는 1970년 4월에 인천중공업을 인천제철에 합병시켜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관리했다가 부실기업 정리차원에서 1978년 6월에 현대중공업에 인수됐다.현대종합상사도 1978년 8월에 부실기업 인수전에 참여, 대한알미늄공업과 한국불화공업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대한알미늄은 국내 최초의 알미늄 제조업체로서 당초 한국알미늄으로 출발했다. 한국알미늄은 원료인 보크사이트의 확보 곤란과 기술부족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지자 1973년 7월 19일에 한국산업은행과 프랑스의 Pechiney사 간에 50대50의 비율로 합작 투자해 자본금 20억6천900만원의 대한알미늄공업으로 재발족됐다.생산능력은 연산 1만7천500t으로 전해공장, 주조공장, 전극공장 외에 수전설비, 알루미나 저장설비 등 각종 중장비를 갖췄다. 전해공장은 알루미나를 알루미늄으로 만드는 곳으로 120기의 전기로에서 연산 1만7천500t을 생산했다. 주조공장은 6t 용해로 2기, 4t 1기, 주조기 2기, 균열로 2기를 갖추고 전해공장에서 용탕 상태로 넘어오는 알루미늄을 제품별로 주조했다. 생산되는 제품은 일반 알루미늄괴인 ingot, 새시 재료인 압연 billet, 전선제조용 wire bar, slab 등이었다.국내 알루미늄산업이 낙후된 것은 원료인 보크사이트가 전혀 생산되지 않는데다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한알미늄은 여전히 생산부진 및 경영부실을 면치 못하다가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78년 10월 18일에 현대종합상사가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했다.>> 1975년 현대강관 설립현대가 건설, 중공업에 특화하면서 자체수요가 엄청난 강관의 직접조달도 시도, 1975년 3월에 현대강관을 설립했다. 현대강관은 자본금 2천만원의 소규모 업체인 경일산업을 모체로 해 출발했는데 경일산업은 철근, 못, 철선 등을 생산해 현대 계열사들에 공급했다. 1977년에는 강관사업부를 신설했으며 압연공장을 선재공장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1978년에는 요트제조사업에도 진출했다.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건설경기가 호조를 보여 철강재 수요가 급증했다. 그중에서도 철근 파이프류는 극심한 품귀 현상이 야기돼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물량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압연사업부는 남목철재로, 요트사업부는 경일요트로, 선재공장은 울산선재로 독립시키는 한편 경일산업은 강관사업만 전념했다. 1978년 7월 7만6천평의 부지에 강관공장을 건설, 연산 26만t의 설비를 확보하고 외경 2분의 1~12인치의 강관제품을 생산했다. 1980년 5월 13일에는 자본금 70억원의 현대강관으로 개명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78년부터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현대종합상사의 세계 무역 품목 가운데 하나인 철강제품. /현대종합상사 제공

2018-09-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3]현대-5 엔진사업과 조선업 진출

스위스 등과 기술도입계약 체결전기부 만들어 중전기사업 시작1973년 3월 26만톤급 1호기 가동 전용도크 완성 선박 수리·개조도현대엔진도 이 무렵에 설립됐다. 국내 엔진제조사업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했으나 1970년대 중반까지 소형의 농, 공용 및 자동차용 디젤엔진을 외국 업체와 제휴해 생산하는 정도였다. 선박용도 연근해 어선용 디젤엔진 정도만 생산했을 뿐 대형 디젤엔진의 생산은 전무했다.1976년 7월 현대중공업 내에 엔진사업부를 신설해 선박용 엔진 생산을 전담하면서부터 현대는 새로운 엔진사업에 참여했다.>> 현대엔진 설립현대엔진은 1976년 7월 중화학투자조정정책에 따라 6천 마력 이상의 대형 디젤엔진 실수요자로 선정받고 스위스의 Sultzer, 덴마크의 B&W, 독일의 MAN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1977년 3월부터 현대중공업 인근 6만여평의 부지에 엔진공장을 건설했다. 또한 일본의 고베제강, 영국의 Meehanite, 프랑스의 Pielstick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79년 6월에 신한해운이 발주한 9천380마력의 엔진 1호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코바 담수설비용 펌프 75대(1천273만달러)를 수주해 선박용 엔진전문업체로 출범했다. 당초 내연 기관 및 터빈, 축수, 동력전달장치, 금형, 주물의 제조에서 선박용 주기관, 보조기관, 의장품 제조, 산업설비 수출입업, 펄프 제조 등으로 다변화했으며 1981년에는 중전기 제조도 겸했다.현대중전기 및 경일 요트산업의 설립도 주목된다. 현대중공업의 중전기사업은 1972년 현대중공업 내에 전기부와 전장부를 신설하면서부터였다. 이들 부서는 변압기의 수리, 설치, 전장품의 선박에 탑재업무 등을 수행했다. 그 후 전기기기의 대형화, 고급화가 급속히 추진돼 1977년 2월 현대중공업은 전기부를 중전기사업본부로 확대 개편했다. 1977년 5월 독일 Siemens와 중전기 전반에 대한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 그해 6월에 3천630평 규모의 배전반공장을 건설하고 1978년 11월에 자본금 60억원의 현대중전기로 발족됐다. 또 1979년 1월에는 경일산업의 요트사업부를 분리해 경일요트산업을 설립했는데 요트 및 FRP 어선 등을 건조하는 소규모 조선회사였다.>> 울산조선소 건설 추진현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 진출도 서둘렀다. 1969년 1월에 일본 미쓰비시와 합작·추진하면서 1970년 3월 1일 현대건설 내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선합작이 실패하자 1971년 9월 영국 A&P Appledore와 기술협조 및 선박판매 협조계약을 체결했다. 그해 10월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으로부터 4천800만달러의 차관자금을 확보하고 1972년 3월부터 울산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1973년 3월에 26만t급의 1호기를 완공하고 조선소를 정식으로 가동, 1973년 12월 28일에 자본금 1억원의 현대조선중공업을 설립했다. 최대건조능력 70만 DWT, 연 26만t급 선박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울산조선소 완공에는 내자 114억원과 외자 4천만달러가 소요됐다. 완공 초기 인력규모는 기술직 450명, 사무직 240명, 기능공 6천여명 등이었다.차재에 조선용 기자재(플랜지)의 국내제작에도 도전했다. 국내 조선경기 호황과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으로 플랜지가 대량으로 수요됐으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는데 현대중공업이 1974년 7월 15일에 일본 플랜지 메이커인 스미토모, 세오, 마루다까 등과 합작해서 울산철공을 설립했던 것이다. 울산철공은 각종 규격의 플랜지를 제작해 그해 11월부터 국내 판매 및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6년 3월에 상호를 한국프랜지공업으로 변경했으며 1979년 4월에는 기계, 조선, 산업설비부문을 추가했다.현대미포조선소는 1975년 2월 현대중공업이 일본 가와자키와 합작해 자본금 12억원으로 설립하고 울산 하전만에 수리조선 및 선박개조를 전문으로 하는 국제규모의 도크건설에 착수했다. 설립 초기 수리전용 도크를 확보하지 못해 현대중공업의 건조도크를 이용했으나 1977년 3월에 40만DWT급과 15만DWT급 수리전용 도크 2기를, 1978년 12월에 15만 DWT급 도크 1기를 완성해 선박수리 및 개조작업에 착수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에도 진출해 큰 성과를 거뒀다. /현대중공업 제공

2018-09-0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2]현대-4 현대자동차의 탄생

첫 출시 '코티나' 소비자들 호평독자기술 생산 '포니' 대박 터트려전차종 사후관리·부품 직접 제작현대정공, 밸브류·주조품도 양산현대는 중공업 진출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최대 사건은 완성차사업의 진출이었다. 국내외 건설공사와 주월 한국 군부대의 영내 세탁사업 등을 통해 확보한 거금으로 울산공업단지 내에 1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67년에 자본금 5천만원의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포드사로부터 부품을 수입해 1968년 국내조립 승용차 '코티나'를 출시했다. 당시 선발기업인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한 '코로나'승용차를 '새나라'란 브랜드로 국내시장을 석권했는데 여기에 현대차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룹 양날개 자리매김중형세단 '코티나'는 출발부터 소비자들의 호평으로 점차 국내시장을 잠식한 결과 현대자동차는 1972년 자동차산업 '4원화 방침'(현대, 기아, 신진, 아세아자동차로 완성차업체 4원화)이 확정될 때까지 급속하게 성장해서 현대건설과 함께 그룹의 양 날개로 자리매김했다.이 무렵 현대자동차는 또 하나의 대박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1974년 현대가 독자기술로 생산한 '포니'승용차였다.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로 미쓰비시의 1천238㏄ 직렬 4기통 엔진에다 후륜구동형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든 국가가 됐다. 판매를 개시한 1976년에만 1만726대가 판매돼 포니의 시장점유율은 43.6%를 기록했다. 포니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한국이 장차 자동차 강국으로 도약하는 전조였다.현대차의 양산이 본격화하면서 1974년 2월 26일에는 포니를 비롯한 전 차종의 사후관리를 위해 자본금 2천500만원의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설립했다. 급증하는 자동차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합부품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1977년 6월 25일에 자본금 2천500만원의 고려정공을 설립했다.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휠, 범퍼 생산시설과 1개 컨테이너 생산라인을 인수해 출발한 고려정공은 그해 7월 1일 자본금을 5천만원으로 증자하고 현대정공으로 변경했다.>> 현대차서비스 설립현대정공은 자동차부품의 제조 판매, 운반기기 및 구조물과 부품제조판매, 주물 제조 판매 뿐만 아니라 밸브류와 주조품 양산에 돌입했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수출경기 호조로 컨테이너수요가 격증하자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인수받은 울산 제1공장에 육상용 및 조선용 밸브를 생산하는 밸브플랜트와 컨테이너 생산시설을 설치했다. 현대정공은 월 1천대의 컨테이너와 150t의 밸브 등 주조폼 생산을 본격화했다.이후 다양한 컨테이너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등 사업규모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1980년에는 현대자동차로부터 특장차량의 특장부문작업을 이관받아 보랭차, 탱크로리, 더블캡 등의 생산도 겸했다. 1981년 4월에는 울산선재와 남목철재를, 1982년 7월에는 경일 요트산업을 각각 흡수했다. 현대의 자동차사업은 완성차공장에서 출발해 AS 및 자동차부품 제조 등으로 다변화함으로써 현대차의 경쟁력을 점차 제고해 나갔다.한편 현대중공업은 1978년 현대차량을 설립했다. 국내 중차량공업은 1960년대에 기차 바퀴와 대차(臺車)를 생산하기 시작해 1970년대에는 객·화차를 제작하는 정도였다. 현대중공업은 국방용 특수차량인 중기제품과 철도차량 제조사업을 추진하면서 전담 사업부서를 설치하고 1976년 3월에 방위사업체로 지정받았다.그러나 현대중공업은 기관차 제작기술이 없어 1977년 5월 스웨덴 ASEA와 전기기관차에 대해 GE사와는 디젤기관차에 대해 각각 기술제휴하고 1977년 12월말 228억원을 투입, 창원기계공단 내에 대지 15만 평을 확보해서 건평 2만5천평의 기관차공장을 준공하고 1978년 10월에 자본금 5억원의 현대차량을 설립한 것이다. 1979년 1월부터 기관차제작에 착수해 출력 3천300마력, 최고설계속도 155㎞/h의 GT-26CW형 기관차인 국산 1호기를 생산한 이후 특수 중기의 생산판매,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 전동차, 객화차, 일반기계 제조업으로 사업영역을 점차 확대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사로부터 부품을 수입해 1968년 국내 조립한 승용차인 '코티나'의 생산 모습. /현대자동차사 제공

2018-08-2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1]현대-3 압축성장시대의 기수

1973년 울산 쇼핑센터 운영 등관광·서비스부문 중심축 역할서빙고·압구정동 현대APT 건설 분양목적 '현대산업개발' 설립도"(정주영 회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가 그 한 예다. 당시 400억원의 예산으로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음에도 정 회장은 하겠다고 나섰다. 용지(用地)를 무리하게 싼값으로 수용하고, 기반이 약해 완공 후 보수비용이 건설비보다 몇 곱절 많이 들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를 닦아 산업발전의 동맥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대규모 정부발주 토목 및 건설공사는 현대가 참여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현대가 급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 회장이 장관들을 자기 회사의 간부 정도로 여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노태우 회고록(上卷)', 2011, 502면)>> 사업 다각화 추진정주영 회장의 경영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정 회장은 이 무렵부터 현대의 다각화 작업을 활성화시켰다. 1968년 2월 27일 자본금 1천만원의 경일운수를 설립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자재 수송용 화물트럭 임대를 위해서였다. 1970년 8월에는 충북 옥천의 금강유원지를 개발해 상호도 금강개발로 변경하고 강릉비치호텔(동해관광호텔)을 인수했으며 1973년부터 울산조선소 내 식당위탁관리와 울산쇼핑센터를 운영하는 등 현대그룹의 관광, 서비스업 부문 다각화의 중심축으로 역할을 했다. 1969년 4월 11일에는 현대콘크리트를 설립했다. 현대건설에 각종 콘크리트관, 블록, 벽돌 등을 공급하는 소규모회사였으나 1976년 4월 9일에 동서산업으로 변경됐다.현대엔지니어링은 1973년 5월 현대건설 기술사업부를 모체로 출발했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보다 고차원의 종합기술지원과 해외건설사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기술용역전문업체로 독립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1974년 2월 11일에 현대건설 기술사업부를 분리하여 자본금 1천만원의 현대종합기술개발로 발족했다가 1980년 11월 중화학투자조정정책의 일환으로 한라엔지니어링을 합병해 1982년 3월 20일에 현대엔지니어링으로 변경됐다.동서산업은 1969년 4월 11일에 설립한 현대콘크리트로부터 비롯됐다. 현대건설에 각종 콘크리트관, 블록, 벽돌 등을 공급하는 소규모회사였던 현대콘크리트는 1971년 12월말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현대건설에 흡수돼 콘크리트제조공장으로 유지됐다. 1975년 9월 1일부로 자본금 2천500만원의 벽제콘크리트로 재분리돼 운영되다가 1976년 4월 9일에 동서산업으로 변경됐다.>> 국내 아파트문화 주도한국도시개발은 현대건설의 주택사업을 분리해 설립됐다. 현대건설은 1973년 초부터 주택건설작업을 본격화해 서빙고 현대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을 건설하면서 국내 아파트문화를 주도했다. 이후 주택건설경기가 조성되면서 현대건설은 주택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현대건설 주택사업부를 모체로 해 1976년 3월 25일에 자본금 2천만원의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토목건축업과 부동산 매매, 임대를 목적으로 출범했는데, 1976년 6월에는 남지산업을 흡수해 자본금을 2억1천700만원으로 확대하고 주택건설 전문업체로 거듭났다.한국포장건설은 1976년 3월 골재와 아스콘을 생산하던 현대건설 관악중기공장 소속의 관악석산을 분리해 설립한 도로 포장 전문업체다. 자본금 1천만원에 크러셔 1대와 100t 아스팔트플랜트 1대의 시설을 갖추고 출발한 한국포장건설은 골재와 아스콘을 생산해 주로 현대그룹 각 계열사에 납품하면서 성장했다. 같은 해 7월에 한국정수공업으로부터 토건업면허를 인수하고 1977년 12월 포장공사업 면허를 취득해 건설업에 참여했다. 또한 그해 3월 토건 및 도로포장 건설을 주력업종으로 하는 고려산업개발을, 1975년 12월에는 알루미늄 창호자재의 생산을 목적으로 현대알미늄을 각각 설립했다.한라건설과 현대산업개발도 설립했다. 한라건설은 1977년 10월 14일에 현대양행이 해외건설사업을 목적으로 자회사(자본금 15억원)형태로 설립한 회사였다. 1978년 3월 29일에 한라개발을 흡수해 군납업, 해외 전기공사업, 중기 대여업, 항만준설 공사업, 포장공사업 등을 수행하는 종합건설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현대양행이 정부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한라건설은 현대양행으로부터 분리, 현대그룹의 계열사로 존속됐다. 1977년 10월에는 토목건축 및 아파트 분양을 목적으로 현대산업개발을 설립했던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81년 12월 현대건설이 준공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현대건설 홈페이지 제공

2018-08-2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0]현대-2 현대건설과 경부고속도로

1966년 베트남 캄란만 준설 수주'빨리빨리'등 돌관경영으로 완공태국 고속도로건설 경험 높은 평가1968년 16개업체중 최대구간 시공호사다마라 했던가. 정주영도 1960년 4·19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건설업체 중 국고 환원통보를 받은 업체는 대동공업, 중앙산업, 삼부토건, 극동건설, 흥화공작소, 대림산업, 현대건설 등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삼부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과 현대건설 등은 부정축재자 처벌이란 예봉(銳鋒)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더욱 발전한다. 반면 '건설 5인조' 그룹의 선두를 달리던 대동공업과 중앙산업은 사정(司正)의 집중적인 표적이 돼 점차 퇴조했다.>> 해외진출 시도이후 현대는 다각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첫 시도는 1962년 9월 현대양행의 설립이었다. 건설부문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보다 수준 높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현대양행(두산중공업의 전신)을 설립했던 것이다.1963년 6월에는 내자 5억원과 AID차관자금 등 외자 425억달러를 동원해서 충북 단양에 대규모 시멘트공장(연산 20만t)을 건설했다. 1959년 당시 문경시멘트와 동양시멘트가 연 41만t을 생산했으나 수요는 45만t으로 수요초과상태였다. 정주영은 1958년에 충북 단양군 매포면에 있는 석회광 5개 광구를 1억3천여만환에 매입하고 건설공사에 착수, 1964년 7월에 완공했던 것이다. 1968년에는 연산 40만t으로 확대(내자 3억5천만원, 외자 310만달러)하고 1970년 1월에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를 독립시켜 현대시멘트(주)로 발족했다. 이후 현대시멘트는 종래 현대건설의 자체조달체제에서 벗어나 일반시판 위주로 전환했는데 1973년 5월에는 미국수출입은행 등으로부터 1천65만달러의 차관을 도입, 연산 120만t의 대형 시멘제조업체로 성장했다.한편 현대는 설립 이래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도했는데 계기는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1965년 2월 2천명의 한국군이 파병된 것이다. 처음에는 육군 공병부대 위주였으나 이후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대 등 전투병 위주로 증원됐다. 미국 정부는 그 대가로 한국기업들의 베트남 진출기회를 제공했는데 이를 계기로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했다. 그 와중에서 현대건설은 국내 최초로 1965년 9월에 태국의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큰 손해를 봤으나 국내건설업체들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1966년 1월에는 베트남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 돌관경영으로 공사를 완공했다. '불가능은 없다'와 '빨리빨리', '대충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적 경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캄란에서 15㎞ 떨어진 방오이의 주택건설공사도 수주했으며 주월 미군 대상의 세탁사업도 병행했다. 자동세탁기 16대와 디젤발전기 6대, 스팀보일러 2대 등을 구입해 나트랑, 퀴논, 캄란 등에 7개의 세탁공장을 설치, 1966년 한 해 동안 건설 및 세탁사업 등으로 총 100만여달러를 벌어들였다.>> 국내 최대 재벌 도약현대건설은 1968년 2월에 착공된 서울~부산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고속도로 건설경험이 전무했던 정부는 계획 초기부터 현대건설을 참여시켰는데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공사경험을 높이 산 탓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에는 육군을 비롯해 현대, 대림, 동아, 삼부, 극동 등 국내 굴지의 16개 건설업체가 참여했으며 최대 구간을 시공한 업체는 현대건설이었다. 서울~수원 공구를 비롯한 전장(全長) 4차선 428㎞ 중 40%를 현대건설이 담당한 것이다. 착공 2년5개월만인 1970년 7월에 완공됐는데 총 공사비는 429억원이 소요됐고 현대건설이 수주한 금액만 전체 공사금액의 20.51%인 87억9천600만원이었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통해 얻은 이익은 3억3천만원에 불과했으나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은 국내 최대의 재벌로 도약하게 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건설은 1968년 서울~부산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해 전체 428㎞중 40%를 책임졌다. 사진은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경인일보DB

2018-08-1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9]현대-1 '현다이' 신화의 탄생

미군차량엔진 교체·일제차 개조1년후 건설에도 진출 '승승장구'1957년 美군사시설 확충 급성장자유당 정권과 커넥션은 불보듯창업자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은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논밭 4천여 평을 경작하던 중농(中農) 정봉식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고향 인근 송전소학교 졸업 후 부친을 도와 농사짓다가 가난한 농촌생활에 염증을 느껴 18세 때인 1932년에 가출, 인천의 항만하역장, 철도공사판 등을 전전하다 서울 인현동 소재의 쌀가게 복흥상회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배달원생활 4년만인 1936년 신용을 담보로 주인에게 가게를 인수받아 경일상회란 쌀가게를 개업했다. 운영은 잘 됐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전국의 쌀가게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쌀가게 정리그도 쌀가게를 정리하고 1940년 서울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란 자동차 수리공장을 3천500원(圓)에 이을학, 김명현 등과 공동으로 인수했으나 개업 25일 만에 공장이 화재로 전소,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삼창정미소로부터 다시 3천500원을 차용, 신설동 뒷골목의 조그만 대장간을 빌어 무허가 자동차정비공장을 차리고 수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소비자의 편리를 도모하는 등 기발한 방법으로 경영, 호황을 누렸다. 수리공장 운영 3년 만에 부채를 청산하고 약간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업정비령'이 발동돼 1943년 정주영의 정비공장은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합병됐다.1946년 4월 중구 초동 106의 적산 대지를 불하받아 자동차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미군병기창의 차량 엔진 교체 및 중고 일제차 개조작업에 매진하는 한편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사(현대건설의 전신) 간판을 더 달았다. 건설업 마진이 자동차 수리에 비해 높은 데다 공사판을 전전했던 경험도 있어 사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명으로 건축업을 했는데 첫해 매출액 1천530만원을 기록했다.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자본 3천만원(75만원 불입)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6·25전쟁이 발발, 부산으로 피난했다. 정주영은 부산에서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주목해 첫째 아우 정인영(鄭仁永, 1920~2006)을 끌어들였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정인영은 해방 직후부터 주한미군 통역으로 활동해왔다.현대건설이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은 1950년 10월 서울 대학로의 전 서울대학교 법대 및 문리대 건물을 개조, 미8군 전방기지사령부 본부 막사를 설치하는 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전국의 미군기지 건설공사 수주에 주력했고, 현대건설이 독점하면서 공사 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배 정도로 대박이었다. 환차익이 준 이익은 보너스였다. 1950년 1천800원대(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천500대 1로, 1952년에는 6천대 1로 뛰었다.이 무렵 미군 공사뿐만 아니라 국내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긴급복구공사에도 참여했다. 1951년 2월 서울이 재수복되면서 전략물자수송 및 군사작전을 위한 긴급복구공사와 전재 복구공사가 발주됐는데 현대건설은 주로 교량복구공사에 참여했다.한편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화폐가치를 100대 1로 절상하고 화폐단위도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전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대건설은 1955년 1월에 자본금을 1억환으로 증자하는 등 건설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당시 1천여 개의 건설업체들이 난립했는데 대동건설, 조흥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 등이 선두그룹을 형성, '건설 5인조'로 회자됐다. 1957년 현대건설의 수주액은 5억3천900만환으로 도급순위 9위였다. 그러나 1957년 7월부터 시행된 미군의 핵무장화 등 주한미군 증강정책에 따른 반영구적인 각종 군사시설 확충으로 건설업은 또다시 활기를 띠어 현대건설의 미군수주액은 1957년의 171만달러에서 1959년에는 281만달러 등으로 급성장했다.>> 현대건설 부상이후부터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는데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7년 9월 한강 인도교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국내 최대의 정부공사였던 인도교 복구공사는 굴지의 건설업자들이 장·차관 등 고위관료들까지 동원해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했는데 현대는 응찰결과 2순위였다."1위 가격을 써낸 흥화공작소의 가격을 본 내무부 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의사가 없는 것 같다'면서 2위인 현대로 낙찰했다.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뒀고 '건설 5인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현대건설35년사Ⅰ')현대건설이 다각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7월 현대상운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정부는 부산진역 부근에 외자 창고를 신축하고 창고 보관업무를 현대건설에 대행했는데 조건은 정부가 현대에 월 200만환의 보관료를 준다는 것이었다. 부산 중앙동 4가15-3 제2 부두에 연건평 2천167평의 외자 창고를 건설하고 매월 받는 보관료 200환은 현대건설의 운용자금으로 전용했다.현대건설은 설립 10여년에 대형 건설업체로 부상했다.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당시 건설수주가 관급 공사 위주였던 점을 고려할 때 자유당 정권과의 커넥션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현다이(Hyundai)'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아내 변중석 여사와 촬영한 정주영 회장의 모습. /경인일보DB

2018-08-0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8]삼성-20(끝) 대표적 위성그룹(하) 신세계

1963년 동화백화점 인수 간판 바꿔1997년 삼성그룹서 계열분리 완성호텔·물류·정보통신사업등 진출정용진·정유경 남매 책임경영 체제신세계그룹의 모기업인 (주)신세계는 1930년 10월 24일 일본 최대 백화점인 미쓰코시 경성지점으로 탄생해 1945년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영업하다 1963년 11월 삼성에 인수돼 신세계백화점으로 간판을 바꿨다.1967년 6월 국내 최초로 할인판매를 했고 1969년 7월 처음으로 신용카드 결제방식을 도입했으며 1979년 8월에는 국내 최초로 모니터 제도를, 1983년 6월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근대적 호텔인 웨스틴조선호텔을 인수했다. 조선호텔은 인천의 대불호텔, 서울의 손탁호텔에 이어 설립된 근대식 호텔로, 1967년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에서 인수했는데 아메리칸항공과 합작해 1968년에 재건축했다. 1979년 아메리칸 항공으로부터 지분을 인수, 1982년 웨스틴조선호텔로 변경했다. 1995년 신세계가 웨스틴의 지분을 100% 확보하고 독자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신세계는 1984년 5월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을 개점한 뒤 1985년 8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6년 신세계백화점 특판사업부 케이터링사업팀 소속으로 식자재 납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전신은 1979년에 설립된 한국신판(주)이다. 1992년부터 신세계백화점 내 직원식당 운영에 착수하고 1995년 2월 (주)신세계케이터링으로 상호를 변경한 뒤 7월에 별도 법인으로서 새롭게 출범했다.1996년 서울 청담고교를 시작으로 위탁급식 사업에 진출했으며 2001년에는 코스닥에 상장했다. 2003년 (주)훼미리푸드를 계열회사로 편입시키고 2004년 미국 U.S.푸드서비스와 식자재 매입 및 국내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2006년 사업 확대와 함께 상호를 (주)신세계푸드로 변경했다.그 와중에 계열분리작업도 병행했다. 신세계는 1991년부터 삼성그룹으로부터의 계열분리 작업을 추진, 1997년에 완성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5녀인 이명희의 몫으로 분리된 것이다.1991년 3월 (주)디자인신세계를 설립했다. 1997년 신세계건설(주)로 상호를 변경한 후 일반건설업·전문소방시설공사업·전기공사업 면허를 취득하면서 종합건설업체로 발전했다. 1993년 11월에는 국내 최초 이마트 창동점을 개점하면서 대형 할인점 시대를 열었다. 2004년 8월 온라인 쇼핑몰인 이마트몰도 개설했고 2010년 11월에는 기존의 이마트보다 품목수를 적게 취급하는 대신 대용량의 상품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창고형 형태의 대형마트인 이마트 트레이더스를 개점했다. 2011년 11월 킴스클럽마트((주)에브리데이리테일)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한 뒤 이듬해 2월 슈퍼마켓 사업부문(에브리데이 등)을 (주)에브리데이리테일에 양도했다.1995년에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을 설립했는데 이는 1980년 10월 25일에 설립된 한국유통산업연구소가 모체다. 신세계그룹 내 패션 비즈니스 전문기업으로 해외 유명 브랜드를 국내에 직수입해 유통채널을 통해 판매하는 해외패션 부문과 자체 브랜드상품을 기획, 생산, 유통하는 국내패션부문, 2010년 6월 신세계 이마트 부문에서 양수한 라이프스타일 사업부문으로 구분하고 있다.신세계백화점은 1997년 11월에 인천점을 열었으며 1996년 12월에는 국내 할인점 최초로 이마트 물류센터를 열었다. 1997년 2월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해외 점포인 이마트 상하이점을 개점하고 같은 해 9월 (주)스타벅스커피코리아를 설립했다.신세계는 정보통신사업에도 손을 댔다. 1997년에는 (주)신세계I&C를 설립하고 같은 해 7월 C&G테크아트를 합병했다. 1972년 신세계백화점 전산실을 모태로 태동한 회사로, 1997년 법인으로 설립되기 이전부터 유통정보기술(IT)분야에서 사업 이력을 갖고 있다.1969년 7월 신용카드 제도를 도입하고, 1984년 판매 시점 정보관리 시스템(POS)을 도입했으며, 1994년 PC를 통한 홈쇼핑을 시작했다.2001년 3월 (주)신세계백화점에서 (주)신세계로 상호를 변경하고, 2002년 11월 중국 상하이 구백그룹과 합작 계약했다. 2004년 3월 강남점 퀸즈몰을 열었으며, 2005년 6월 신세계첼시를 설립했다. 2007년 3월에 죽전백화점을 개점하고 6월에는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을 선보였다.2007년 대한민국의 유통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로부터 A3(안정적) 신용등급을 획득했다. 2008년 12월 신세계마트(월마트코리아)를 흡수 합병하고 2009년 3월 세계 최대 백화점인 부산의 센텀시티백화점을 개점했고 2013년 3월 (주)조선호텔이 상호를 (주)신세계조선호텔로 변경했다.2014년 9월 말 기준 최대주주는 이명희이며 보유 지분은 17.30%다. 2대 주주는 이명희의 장남인 정용진으로 7.32%를 소유하고 있다. 2016년 들어 오너 3세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백화점 백화점부문 총괄 사장이 각자 보유한 신세계와 이마트 지분을 전량 맞바꾸면서 남매가 핵심 계열사를 나눠 맡는 책임경영 체제를 마련했다. 신세계그룹은 2016년 현재 계열사 수 34곳에 자산총액이 29조1천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 18위에 랭크돼 있다. 한전 등 공기업을 제외한 순위는 11위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신세계가 지난 2009년 세계 최대 백화점으로 탄생시킨 부산 센텀시티점. 1층 센텀광장에 슈퍼카가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2018-07-3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7]삼성-19 대표적 위성그룹(중) 한솔그룹

故 이병철 1965년 새한제지 인수신문용지 50%가량 공급 괄목성장1991년 장녀 이인희몫 분리 독립다양한 사업 진출 총자산 5조3천억한솔그룹의 주요 사업은 제지, 금융, 전자, IT, 화학, 생명공학 등이다. 1965년 삼성그룹의 고(故) 이병철 창업자가 1965년 1월 18일에 새로 설립한 새한제지공업(주)를 인수해 전주제지(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2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전주제지는 초창기 10만평에 달하는 논과 밭, 황무지를 갈고 닦아 초지기 1∼5호기까지 가동하며 국내 신문용지의 50%가량을 공급할 만큼 괄목 성장했다.그러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완화, 소유 분산, 업종 전문화 등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1989년 들어 대기업이 영위하는 사업 중에서 중소기업형 분야 정리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서 전주제지는 결국 1991년 10월 이병철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의 몫으로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했다.전주제지 또한 기존의 재벌에서 분리된 파생그룹의 경우처럼 독립과 함께 다각화 작업을 전개했다. 1992년에 상호를 한솔제지로 바꿨고 장항공장과 대전공장을 신축하고 한솔화학, 한솔개발을 잇따라 설립했다. 이후 한솔포렘, 한솔파텍, (주)한솔 등을 설립했으며 1993년 10월에는 종합건설업체인 영창무역(주)를 인수, 한솔건설(주)로 변경했다. 영창무역은 2010년 경기침체 영향으로 유동성 위기를 맞아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으나 2011년 12월 파산했다.1994년에는 동창제지를 인수해 한솔판지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그해 한솔화학(한솔케미칼)이 영우화학을 인수하고 한솔유통을 설립했으며 종합금융업체인 동해종합금융을 매입해 한솔종합금융으로 이름을 바꿨다. 같은 해 3월 (주)대아상호신용금고를 인수, 1995년에 (주)한솔상호신용금고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솔상호신용금고는 1972년 2월 삼아무진(주)로 설립돼 1974년 5월 (주)할부전업대아상호신용금고, 1982년 5월 (주)대아상호신용금고로 변모해 1992년 8월에 코스닥시장에 등록했다. 2002년에는 상호저축은행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주)한솔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2008년 6월 부산·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부산 동광저축은행을 자회사로 편입했으며 2009년 2월 코스닥시장에서 상장을 폐지하고 2014년 10월 (주)부산에이치케이저축은행을 흡수합병했다.1995년에는 (주)한국마벨을 인수해 한솔전자(주)로 간판을 바꿨다.2000년 4월 LCD(액정표시장치) 사업 강화를 위해 백라이트(Backlight) 사업에 착수하고 2003년 3월 한솔LCD(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2010년 3월 LED용 웨이퍼 업체인 (주)크리스탈온을 흡수합병하고 그해 12월 한솔테크닉스(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솔그룹이 국내 30대 기업집단에 처음 진입한 1996년에는 영우통상(주)를 인수해서 1997년에 한솔유통을 합병해 상호를 한솔CSN(주)로 변경하고 같은 해 6월 사이버 쇼핑사업에 진출했으며 2000년대 들어 군산항 컨테이너 부두 운영을 개시했다. 2004년에 인터넷쇼핑몰(CS클럽)을 양도하는 한편 2007년부터 중국과 인도, 베트남, 미주 등지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2014년 5월 한솔로지스틱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1996년 8월에는 제2이동통신 사업 관련 PCS사업권을 획득해 자본금 2천억원의 한솔PCS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97년부터 한솔PCS '018' 상용서비스를 개시하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7월에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전주공장의 신문용지 및 중질지 사업부문의 영업을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팝코(PAPCO)에 양도했다. 또 종금업체인 한솔종합금융을 정리하고 한솔개발이 레저타운인 오크밸리를 개장했다. 2000년 한솔화학이 한솔케미언스로 이름을 바꾸고 생명공학 기업으로 전환했다. 2001년 8월 종속회사인 팬 아시아 페이퍼를 매각하고, 2003년 9월에는 한솔파텍의 특수지 사업을 양수했다.2007년에는 한솔라이팅을 설립하고 그해 9월에는 종이유통업체인 서울지류유통을, 2009년 1월에는 문구용 종이제품 제조업체인 아트원제지를 매입했으며 2011년 2월 골판지업체인 대한페이퍼텍, 2013년 9월 덴마크의 감열지 및 라벨지 제조업체인 샤데스(Schades), 2014년 9월 네덜란드의 라벨 가공 및 유통업체인 텔롤(Telrol)을 차례로 인수했다.2015년 1월 회사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지류 사업 부문을 분할해 새로운 한솔제지(주)를 설립하고, 존속법인(투자 담당)의 상호를 한솔홀딩스로 바꿨다. 신규 설립된 한솔제지는 2015년 6월 한솔페이퍼텍의 공주사업소 자산을 양수하고, 같은 해 8월 독일의 지류 가공 및 유통업체인 알앤에스(R+S Group GmbH)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했으며 2017년에는 한솔아트원제지를 인수 합병했다.한솔그룹은 2016년 기준 20개 계열사에 총자산 5조3천억 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순위 63위에 랭크돼 있는데 주요 계열사들로는 소재사업군에 한솔제지, 한솔아트원제지, 한솔페이퍼택, 한솔홈데코, 한솔테크닉스, 한솔케미칼이 있으며, 솔루션사업군에 한솔EME, 한솔신택, 한솔 CSN, 한솔개발, 한솔PNS, 한솔인티큐브 등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한솔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한솔케미칼 전경. /한솔그룹 홈페이지 제공

2018-07-2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6]삼성-18 대표적 위성그룹(상) CJ

제일제당, 국내최초 설탕 생산 수출1993년 삼성그룹 계열분리후 다각화엔터테인먼트등 다양한 사업 진출이재현회장 특별복권 靑교감 정황중심기업인 CJ(주)는 삼성그룹의 고(故) 이병철 창업자가 1953년 8월에 설립한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에서 비롯됐다. 동사는 1953년 11월 국내 최초로 설탕을 생산한 이래 1958년에는 밀가루 생산으로 업종을 확대했으며, 1960년대에는 국내 최초로 설탕을 수출하고 화학조미료 사업에도 진출, 선발기업인 미원(현 청정원)과 함께 시장을 양분했다. 1965년 4월에는 '백설' 브랜드를 선보였으며 1975년 11월 종합 조미료 '다시다'와 1977년 12월 핵산 조미료 '아이미'를 각각 출시해 국내시장을 석권했다. 1991년 12월에는 국내 식품업계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달성하며 식품 리더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1993년 6월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이후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 1995년 제일C&C(CJ올리브네트웍스 IT부문)와 제일제당건설(CJ건설)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사업에도 진출해서 1996년 5월에는 제일제당그룹으로 재발족했으며 12월에는 'CGV'의 설립과 함께 멀티플렉스 사업에도 진출했다. 식품, 외식, 건설, 문화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한 제일제당그룹은 1999년 4월에 처음 국내 30대 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2000년에는 CJ엔터테인먼트와 푸드빌(현 CJ푸드빌), CJ푸드시스템(현 CJ프레시웨이)등을 설립하고 당시 국내에 새로 선보이기 시작한 TV홈쇼핑업체인 39쇼핑(현 (주)CJ오쇼핑)을 인수해 점차 종합생활문화 그룹으로 변모했다. 2002년 10월에는 그룹의 명칭을 CJ그룹으로 변경하고 베트남과 중국, 일본, 인도, 미국 등 해외 각국에도 진출해 활발하게 현지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2002년 8월에 발족한 복수방송채널 사업자 CJ미디어(주)는 2006년 10월 종합오락채널 'tvN'을 개국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2007년 9월 CJ(주)를 지주회사로 전환하고 CJ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2011년 3월에는 종합 콘텐츠 기업인 CJ E&M을 새로 설립했으며 12월에는 국내 최대의 물류기업인 대한통운(주) 금호그룹으로부터 인수, 2013년 4월 상호를 CJ대한통운(주)로 변경했다. 당시 삼성그룹 또한 대한통운 인수에 관심을 보여 언론에선 삼촌(이건희)과 조카(이재현) 간의 갈등 부각에 집중했었는데 결국 삼성은 대한통운 인수를 포기했다. 세간에는 이를 계기로 삼성과 CJ그룹간의 틈이 더 벌어진 것으로 평가했었다. 2012년 1월에는 이동통신 서비스 '헬로모바일'을 출시하며 통신사업에 진출함은 물론 무한경쟁시대에 부합하는 글로벌 문화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해 2012년 10월에는 미국 LA에서 한류문화페스티벌 'KCON'을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2015년 2월에는 CJ문화창조융합센터를 개관하기도 했다.한편 그 와중에 CJ그룹의 이재현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2013년 5월부터 2개월 동안 CJ그룹 비리를 수사했다. 이 회장이 그룹 임직원들과 공모해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국내외에 차명으로 관리하면서 546억원을 탈세하고 963억원 상당의 국내외 법인자산을 횡령함은 물론 이재현 회장의 개인 부동산 구입 과정에서 해외 법인에 56억원의 손해를 입힌 사실 등을 밝혀낸 것이다.2013년 7월 1일 서울중앙지법 김우수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이 있고 증거인멸 및 도망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이 회장이 구속 수감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최초의 재벌총수 구속이었다.삼성가의 장손인 이 회장이 구속된 직접적 계기는 이병철 선대 회장이 물려 준 차명 재산이었다. 차명 재산으로 주식을 거래하면서 500억원이 넘는 세금을 포탈했다는 주요 혐의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2009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똑같은 수법으로 1천억원이 넘는 세금을 탈세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 검찰은 차명 재산 운용 과정에 불법 행위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명재산과 관련해 삼성가 가운데 처벌받지 않은 곳은 신세계그룹이 유일했다.(TV조선, 2013.07.02.)이재현 회장은 2016년 8월 13일 정부의 4천876명에 대한 광복절 71주년 기념 특별사면의 일환으로 석방됐다. 이 회장은 특별복권도 됐는데 이와 관련해 청와대와 CJ 간에 사전교감이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국정농단 수사와 관련한 박영수 특검이 확보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 수석비서관의 업무 수첩 2015년 12월 27일 자에 박근혜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이재현 회장 도울 일 생길 수 있음"이라 적힌 메모를 확인한 것이다.(2017.1.16. '코리아포스트' 김진우 기자)CJ그룹에는 본사인 CJ(주)를 포함, 총 국내외 337개 계열사가 속해 있다. 식품 및 식품서비스, 생명공학, TV홈쇼핑 등 신유통과 엔터테인먼트·미디어 등으로 구분되며 주요 관계사로는 CJ제일제당, CJ푸드빌, CJ프레시웨이, CJ씨푸드, CJ헬스케어, CJ오쇼핑, KX홀딩스, CJ대한통운, CJ올리브네트웍스, CJ E&M, CJ CGV, CJ헬로비전, CJ건설 등이 있다. CJ그룹은 2016년 기준 계열사 수 62곳에 자산총액 24조7천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19위에 랭크돼 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공기업을 제외한 순수 민간대기업 순위는 12위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7-1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5]삼성-17 글로벌 삼성의 최대위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정서미르·K스포츠·崔에 433억 뇌물전경련 탈퇴·미래전략실 해체지주사 전환계획 전면 백지화40조원 가량 자사주도 소각키로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로 2017년 2월 17일 구속 수감된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녀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최태민 목사의 3녀 최순실이 무단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의 설립에 관여해서 이 재단들을 사유화했다는 내용이다. 재단법인 미르는 대한민국의 전통문화 원형 발굴, 문화 브랜드 확립, 문화예술 인재 육성 등을 목적으로 30개 대기업으로부터 총 486억 원의 기부금을 받아 2015년 10월 27일에 설립했으며 재단법인 케이스포츠는 2016년 1월 18일에 설립됐다. 2016년 7월 26일 TV조선이 양 재단의 모금과정에서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이후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1년여 앞두고 중도에 사퇴했음은 물론 그 여파로 투옥됐다.삼성의 80년 역사에서 사상 최초로 총수가 구속됐다. 삼성은 경영권 3세 승계에 따른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지주회사 전환을 준비해 왔던바 박영수 특검은 이재용 부회장이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찬성을 얻고자 미르, K스포츠재단 및 최순실 등에 433억원의 뇌물을 제공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에 대해 주목했다.이 부회장은 제일모직의 주식지분이 23%인데 비해 삼성물산은 한주도 없었다. 또한 이재용의 삼성전자 지분 0.6%에 비해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4%나 보유하고 있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면 이재용이 큰 투자(?) 없이 천문학적인 207조원의 글로벌 삼성그룹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의혹이 일었다.삼성물산의 지분 7.12%를 확보한 미국계 벌처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의 합병비율 1대 0.35는 삼성물산의 주주들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라며 합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 도화선이었다. 삼성물산의 자산가치가 제일모직에 비해 현저히 높을 뿐 아니라 당시는 삼성물산의 주식가치가 낮은 시기라는 것이다. 제일모직은 2013년 12월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 패션 부문을 인수해 2014년에 제일모직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으로 자산 규모가 9조5천억원인 반면 삼성물산은 29조5천억원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삼성물산의 1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삼성의 흑기사로 나선 결과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제당의 합병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국회와 특검의 최순실 게이트 진상조사과정에서 키맨(keyman)인 국민연금의 홍완선 기금운용 본부장이 합병성사 전에 이재용을 비밀리에 만났다는 점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으로 인해 6천여억원의 손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삼성은 이병철 창업주가 손수 만든 전경련 탈퇴에 이어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미래전략실까지 해체했다. 매주 수요일에 열렸던 사장단 회의도 없앴다. 또한 2017년 4월에는 경영권 승계의 최종 단계인 지주사 전환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고, 이 부회장 지배력을 높이는 데 사용할 것으로 여겨졌던 40조원 가량의 자사주도 소각하기로 했다. 이른바 '자사주의 마술'이란 것이다. 기업들이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기업을 인적 분할하는데 이 과정에서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가 인적분할을 통해 의결권 있는 주식으로 바뀌곤 한다. 이를 통해 총수일가 등은 대주주와 주식을 교환해 돈 들이지 않고도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이 같은 편법을 막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제윤경 의원이 인적분할 전에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거나 인적분할시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등을 골자로 하는 규제 법안을 발의한 상태였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 후보 시절 규제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7-0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4]삼성-16 3세 경영체제로 전환

2016년 삼성전자 등기이사 되면서기존 재벌회장들과 '차별화' 시도차세대 먹거리 바이오의약품 도전바이오시밀러 '제2의 반도체' 전망1999년 10월 5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 발언이 주목됐다. 김 의원은 "이재용씨는 현재 삼성전자 주식 102만6천188주 2천63억원 어치를 갖고 있고, 삼성SDS 주식 88만6천669주 1천215억원, 삼성에버랜드(제일모직으로 상호 변경) 지분 31.4%인 1조6천억원 등 총 2조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계열사가 부당한 이익을 제공하는 부당내부 거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재용이 1995년 부친인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0억8천만원을 증여받아 증여세 16억원을 뺀 나머지 44억8천만원으로 삼성의 비상장 계열사들의 주식을 사들여 4년 만에 2조원대의 대자산가가 됐다는 내용이었다.1996년 12월 에버랜드가 전환사채(CB) 125만4천여주를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등에게 배정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에버랜드 주식은 8만5천원에 거래된 적도 있었으나 이 남매는 7천700원에 이를 배정받아 주식으로 전환했다.그 결과 이재용은 에버랜드의 지분 20.7%를 확보해 최대주주가 됐다. 에버랜드는 이후 삼성그룹의 지주(持株)회사로 떠올랐고 이재용은 사실상 삼성의 경영권을 손에 넣었다. 이후부터 이재용 남매는 삼성계열사들의 주식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재산을 눈덩이처럼 부풀렸다.2007년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은 에버랜드가 1996년에 급하게 전환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히면서 CB 발행을 의결한 삼성에버랜드 이사회는 무효라고 선고했다. 전문 경영인에 불과한 허태학, 박노빈 등이 특정인에게 전환사채를 몰아서 배정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긴 것은 이사의 권한을 벗어나는 행위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조선일보' 2007년 5월 29일)이재용의 에버랜드 주식 편법인수에 대해선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았으나 이 문제는 향후 삼성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예정이었다.1997년 10월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삼성의 부당한 경영권세습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삼성그룹을 상속받았던 사례들까지 주목됐다. 1987년 11월 이병철 창업주 사망 당시 삼성그룹은 32개 계열사에 종업원 수 15만명, 11조원 이상의 자산에 17조원 넘는 매출액을 기록했으나 유족들이 신고한 상속재산은 237억2천300만원으로 상속세액은 150억1천800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삼성은 1965년 4월 삼성미술문화재단 설립 이래 2000년까지 무려 10여개의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명분으로 이병철 창업주 재산의 상당 부분을 이들 공익법인에 넘긴 때문이었다. 공익법인이 탈세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1993년말 정부는 공익법인이 특정 회사에 대해 일정한 비율을 초과하는 지분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초과 부분에 대해선 상속 및 증여세를 물리는 내용의 상속세법을 개정했으나 효과는 별로였다.1998년 9월 참여연대는 자체 발간한 '공익법인백서'를 통해 재벌들은 공익재단이 누릴 수 있는 각종 혜택을 이용해 계열사 지배수단으로 삼거나 상속, 증여세 포탈수법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삼성을 '상속의 귀재'로 평가했다. 이재용은 2015년 5월 15일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선임됐다.한편 2001년 2월 28일 저녁 이건희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외아들 재용의 경영 참여를 공식화했다.1968년생인 이재용은 이 회장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 경영학석사,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박사과정에서 e비즈니스를 전공했는데 당시 그는 에버랜드(지분율 25.1%)를 통해 지주회사 격인 삼성생명의 지배권(지분율 19.3%)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재용은 이건희 회장의 언급 직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2009년 삼성전자 부사장을 거쳐 2012년 12월에는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하는 등 경영수업을 받던 중인 2014년 5월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면서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총수가 됐다.한편 삼성은 반도체, 전자에 이은 차세대 먹거리를 바이오의약품으로 정하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이 2009년 130조원에서 2014년에는 200조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업계에선 바이오시밀러 산업을 '제2의 반도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바이오시밀러란 특효가 만료된 기존의 바이오신약과 유사한 성분 및 효능을 갖도록 만든 복제 단백질 의약품을 의미한다.2011년 인천 송도신도시에 생산거점을 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2012년에는 바이오시밀러 R&D업체인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연이어 설립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류마티스관절염 등의 치료제인 '베네팔리(국내명 브렌시스)를 2015년에 처음 시장에 선보인 이후 2016년에는 수출 등으로 1천17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바이오의약품의 생산을 전담하는 삼성바이로직스는 총 8천500억원을 투자해서 생산능력을 36만 리터로 제고해 선발업체인 스위스의 론자(26만 리터), 독일의 베링거잉겔하임(24만 리터)을 제치고 단숨에 세계 1위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공장 완성에 박차를 가했다. 삼성에선 신성장동력인 바이오의약사업을 이재용 3대 총수예정자의 최대 업적으로 만들고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한편 이재용은 2016년 9월 12일 삼성전자의 등기이사가 되면서 기존의 재벌총수들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기존의 오너 경영인들은 쥐꼬리 지분으로 그룹 전체의 경영을 전횡하면서도 법적으론 비등기이사여서 경영책임을 면했던 것이다. 이재용이 등기이사가 된 것은 2016년 2사분기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스마트폰 갤럭시S7 배터리 폭발이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글로벌 삼성에 치명타로 작용할 수도 있었는데 수습차원에서 이재용이 삼성전자의 경영을 책임지겠다고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해 3분기 삼성전자 실적은 전년 동기대비 매출은 9.06%, 영업이익은 29.63% 감소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7-0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63]삼성-15 반도체신화의 그늘(下)

권경유착 상상초월 로비상납고리1995·2002·2007년 사건도 견뎌내한화와 선대회장 간 신뢰 밑바탕화학·방산서 2조원대 빅딜 성공삼성은 이 땅의 재벌비리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자유롭지 못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식으로 삼성은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이자 명실상부한 재계의 리더라는 이유로 추정되지만 그럼에도 '관리의 삼성'답게 잘 견뎌냈다. 그러나 이건희가 2대 총수로 취임한 이후 비리혐의 뉴스가 과거보다 더 자주 불거졌는데 시작은 1995년 11월 검찰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100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1995년 11월 16일 구속됐으나 이 회장은 1996년에 불구속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 1997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사면됐다.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선거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유력 대선주자 이회창 후보를 내세워 재집권의 꿈을 키웠는데, 선거자금 불법조성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 후보측에서 LG로부터 150억원 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가득 채운 트럭을 받은 것을 비롯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으로부터 각 100억원씩 수수하는 등 총 823억원의 뇌물을 거둬들였다는 혐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벌들의 정치권에 대한 뇌물 상납에 국민들이 경악한 것이다. 이후 검찰의 조사과정에서 삼성은 한나라당에 324억원, 민주당에 21억원, 자민련에 15억여원을 무기명 채권으로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2007년 10월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발표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조성의혹 폭로는 압권이었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출신의 김 변호사는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해 2004년 8월 퇴사할 때까지 7년 동안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으로 근무했었다. 당시 그는 삼성의 비자금 규모가 10조원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당시에도 김 변호사 명의의 은행계좌에만 김 변호사가 모르는 현금이 50억원 이상 보관돼 있다고 했다. 해외 비자금은 추정조차 불가능하다고도 했다.(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2010년, 36~37면)같은 해 11월 26일에는 삼성물산의 해외지점들이 SDI(삼성전관)와 비자금 조성에 관한 합의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삼성물산 런던지점의 경우 해외에서 메모리를 100원에 사온 뒤 SDI에 120원에 팔아 1원은 대행 수수료로, 나머지 19원은 비자금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노컷뉴스', 2007년 11월 26일)삼성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해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 형태로 숨기고 있으며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권력기관에 로비를 해왔다고도 했다. 이후 특검(조준웅 변호사)의 수사결과 4조5천억원 가량의 이건희 회장 차명재산이 드러나며 조세포탈혐의가 밝혀졌다. 당시 삼성 측에선 이병철 선대회장이 남긴 유산으로 미처 실명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김용철 변호사 폭로사건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삼성의 차명재산 사건은 이건희 회장 형제간의 법적 다툼으로 비화됐는데 발단은 삼성가의 장손인 이맹희 제일사료 회장이 2012년 2월 14일에 서울중앙지법에 삼성생명 주식 824만여 주와 삼성전자 주식 등 7천억원 상당의 재산을 반환하라고 소송한 것이다. 창업자가 남긴 삼성의 여러 차명주식을 이건희가 독식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이맹희 회장이 차명주식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2011년 6월 당시 이건희 회장 측에서 "특정 상속인이 차명재산을 실명 전환하는 시점에서 다른 상속인들이 자신의 상속 지분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고 서명날인을 요청한 때문이었다.이 사건은 이건희 회장의 형제간은 물론 조카 등까지 가세해 집안 분쟁으로 확대됐고 이후 청구금액은 최종 4조849억원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2014년 2월 서울고법 민사14부가 '제척기간 경과' 등의 이유로 원고(이맹희) 패소 판결을 내림으로써 종결됐다.2014년 11월에는 삼성과 한화그룹간의 2조원대 화학 및 방산부문 빅딜이 화제가 됐다. 11월 6일 삼성테크윈의 지분 전량인 32.4%와 삼성종합화학의 지분 57.6%를 한화에 넘기기로 계약한 것이다. 상장사인 삼성테크윈은 8천400억원에 (주)한화로, 삼성종합화학은 1조600억원에 한화케미컬과 한화에너지가 공동으로 인수했다.경남 울산과 충남 서산 석유화학단지 내에 근거를 둔 삼성종합화학의 전신은 삼성에 엄청난 시련을 주었던 한국비료이다. 한국비료는 삼성이 건설했으나 한비사건으로 1967년 정부에 헌납됐다. 1994년 2월 정부는 75개 정부투자기관 및 출자회사의 민영화를 단행했는데 한국비료도 매각대상이었다. 당시 한비의 지분은 산업은행(34.6%). 삼성(30.2%), 동부그룹(30.8%) 등으로 삼성과 동부그룹 간에 인수경쟁이 치열했으나 1994년 7월 15일 공개경쟁입찰에서 한국비료는 삼성에 낙찰됐었다.삼성테크윈은 영상보안장비(CCTV), 칩마운터(반도체 칩 장착장비), 가스터빈 및 K-9 자주포 등을 생산해 2013년에는 매출 2조6천298억원에 영업이익 960억원을 시현했는데 삼성테크윈은 삼성탈레스의 지분 50%를 지닌 탓에 한화는 탈레스의 공동경영권까지 확보했다. 삼성탈레스는 2000년 삼성과 프랑스 탈레스인터내셔널이 50대50 지분으로 설립한 기업이다. 구축함의 전투지휘체계, 레이더 등 감시정찰장비 등 방산 전자업체로 2013년 매출 6천176억원, 영업이익 206억원을 달성했다.한편 삼성테크윈은 삼성종합화학의 지분 23.4%와 한국항공우주산업 지분 10%도 보유한 탓에 한화그룹은 삼성종합화학 지분 총 81%를 확보했다. 이건희 회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 간의 오랜 신뢰가 빚은 결과로 한화는 이를 통해 방위사업과 석유화학분야의 국내 1위로 도약하게 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2018-06-25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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