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6]에스케이-5 화섬산업에 진출

일본 데이진과 합작 수원에아세테이트원사 공장 설립최초 폴리에스터 동시 생산정부, 전량 국내 시판 변경'수요량 급증' 날개 돋친듯선경이 재벌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부터 화섬산업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듀퐁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실크처럼 부드러울 뿐 아니라 거미줄같이 가늘면서도 강철보다 강한 꿈의 섬유로 국내에는 1950년 6·25전쟁 때 미군병사에 의해 최초로 소개됐다. 어떤 옷감보다 질기고 가벼우며 세탁이 간편하다는 점에서 가정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1958년까지 국내에 시판되고 있는 나일론제품은 거의 외제 밀수품으로 국산은 1955년부터 태창직물에서 약간씩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경합섬주식회사 설립선경직물이 외제와 비슷한 수준의 나일론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12월부터였다. 1959년 3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산업자금 1만달러를 대부받아 사이징(Sizing) 설비를 도입해서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이 무렵 직물업계는 과잉공급으로 인한 불황에 시달린 데다 나일론 등 합섬직물 또한 외래품이 범람해서 국산직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0년의 4·19혁명은 설상가상이어서 대부분의 기업은 자금난과 판매난, 노사문제 등 소위 '삼난'으로 고전했는데 민주화 물결에 편승한 노사갈등은 특히 경영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선경은 노사분규 없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갔다.선경이 추진해온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차관 지불보증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66년 3월이었다. 당초 선경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 폴리에스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함에 따라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했다.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임에도 아세테이트원사 제조업은 국제적으로 사양산업화해 국내 기업들도 진출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적으로는 아세테이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차제에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가 가능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선경에선 아세테이트원사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 이또주(伊藤忠) 상사로부터 550만달러의 차관을 확보하고 1968년 3월 25일 아세테이트원사 공장을, 6월 10일에는 폴리에스터 공장의 기공식을 각각 거행했다. 폴리에스터 공장은 일본 데이진 측의 협조로 건설됐는데 공장건설 자금은 정부 보유불 694만 달러를 확보해서 조달했다. 당시 정부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국내원사 메이커 '1인자'1966년 6월에 자본금 1억원의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수원 정자동 600에 일본 데이진과 50대50 합작으로 건설한 아세테이트원사공장(일산 5.5t, 1968년 준공)의 본사로 설립된 것이다. 1969년 7월에는 건설 중인 폴리에스터공장을 모체로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산 7t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26%를 점해 국내 최대규모였다.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원사와 아세테이트원사를 동시에 생산하게 돼 국내 원사 메이커의 일인자로 부상했다.선경합섬에 대한 정부의 정책변화는 주마가편이었다. 당초 정부는 전량수출을 조건으로 선경에 폴리에스터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허가했으나 원사생산이 개시되던 1969년에 선경합섬이 생산하는 폴리에스터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하도록 변경했던 것이다.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이 급증한 결과 1968년의 원사수입량은 1967년 대비 114% 증가한 2천928t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수요량이 전년대비 92%가 증가할 예정이어서 국내수요도 턱없이 부족했던 때문이다.선경의 폴리에스터원사인 '스카이론'은 주름이 잘 지지 않아 세탁 후 다림질과 잔손질이 불필요해 국내 소비자들 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화섬산업에의 진출이 지방의 중소기업 선경으로 하여금 굴지의 재벌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은 폴리에스터를 생산하는 선경합섬을 설립, 공장을 가동해 원사 생산이라는 꿈을 마침내 이뤘다. /SK 제공

2019-07-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5]에스케이- 4 내수에서 수출 중심으로

'닭표 안감' 홍콩 최초 수출1962년 선경산업(주) 설립레이온능직 42만달러 계약'사업몰두'에 박대통령 방문1967년 183만달러 수출공로선경의 본격적인 도약은 1960년대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14일부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내 산업을 외래 사치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일환으로 외국산 면직물과 나일론 직물에 대한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위기국면에 있던 국내 섬유업계 형편이 점차 호전돼 갔다. 아울러 정부는 1961년 8월에 무역법을 제정해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선경은 1962년 4월에 '닭표' 안감 10만마(1만1천300달러 상당)를 홍콩에 처녀 수출했다. 이후 선경은 해외수출에 주력하기 위해 8월 1일에 자본금 1천만원의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종건의 아우 최종현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해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고 귀국,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형제 공동경영형인 최종건은 일을 저지르고 벌리는 반면 동생 종현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이어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부터 선경은 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최종현은 무역업무를 전담했다.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시행했다. 수출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홍콩에 출장을 가서 레이온능직 300만마(42만6천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녀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수출대금 42만6천달러 중 인견사 1천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천달러로 나일론원사의 구상무역허가를 신청했다. 구상무역이란 일명 바터무역으로 국제간의 물물교환 무역을 의미한다. 당시 나일론직물은 인기 절정이었으나 원사수입용 달러화 배정액수가 대폭 감소돼 1963년의 국내 나일론직물의 생산실적은 전년도 350만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해 나일론 생산업체 간에 나일론원사 수입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최종현은 수완을 발휘해서 원사수입 9만달러를 확보함으로써 선경은 일거에 8천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 가치로 약 40억원에 해당한다.이 무렵 선경의 최종건 사장은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 박정희 정부와 인연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최종건) 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시사저널', 2015.03.19, [新 한국의 가벌] #19)이병희(1926~1997)는 용인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8기)를 나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됐다. 서울분실장으로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 중 일부를 강제로 헌납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한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선경은 수출에 올인, 1967년 제3회 수출의 날에는 183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식산포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사업은 순풍의 돛을 단 듯 빠르게 확대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최종건의 동생인 최종현은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사진은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당시 선경합섬 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 /SK 제공

2019-07-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4]에스케이-3 선경직물 인수(하)

지가증권 13만환 모두 상환공동매수인 권리포기 확보중고 직기로 1·2공장 가동양복 안감 '닭표' 부통령상'봉황새' 히트 대기업 면모최종건은 부친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지원받아 차철순을 움직여 선경직물 인수준비에 착수한 결과, 1953년 7월 27일에 관재청으로부터 130만환에 불하를 허가한다는 것과 3주일 이내에 매각대금의 10%를 내고 계약을 체결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쌀 한 말은 1천환으로 계약금 13만환은 쌀 1천300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불하대금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자 방구현은 동업을 포기했다. 최종건은 차철순 소유의 지가증권을 계약금으로 충당하고 차후에 차철순에 상환하기로 했다.지가증권이란 정부가 농지 개혁 때 매수한 농지의 보상금 대신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 증권이다. 1953년 8월에 계약금 13만환은 지가증권으로 납부하고 나머지 금액은 10년 분할조건으로 선경직물 주식 50만주 중 황청화, 김덕유 몫(각각 100주씩 소유)을 제외한 49만9천800주를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계약했다.>> 타고 난 '보스 기질'이후부터 선경직물은 최종건 주도로 경영됐는데 운전자금은 선경직물의 고철을 팔아 확보한 돈으로 원사를 사들여 생산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전쟁 직후로 물자부족이 심각해 생산된 직물들은 생산과 동시에 전부 소진됐다. 최종건은 조업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생산에 매진한 결과 선경직물 인수 1개월여 만인 1953년 9월 30일에 차철순에 지가증권 13만환을 전부 상환하는 한편 공동매수인 권리 포기각서까지 확보했다. 27세 청년 최종건은 거의 적수공권으로 1만2천평의 선경직물 공장을 소유하게 됐다."최 회장은 보스 기질을 타고난 행동가였다. 최 회장은 공사현장에서도 종업원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종업원들과 노는 자리에선 전혀 상하를 가리지 않는 최 회장이었다. 막걸리 파티라도 열렸다 하면 다 같은 친구요, 형이요, 아우였다."(선경40년사<약사>, 54면)10월에 제1 공장 건물을 복구하고 선일직물과 동흥직물에서 중고 직기 60대를 구매해 설치했다. 1955년 8월에는 서울 휘경동 태창직물의 중고 직기 50대를 넘겨받아 제2 공장마저 복구했다. 선경에선 양복안감으로 쓰이는 인조견 능직을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복 안감은 대부분 재단 전에 물세탁을 해야 했으나 선경에서 생산한 제품은 물세탁 하지 않아도 됐기에 날개가 달린 듯 팔려나갔다. 이 무렵 국내 굴지의 인격직 메이커는 조선직물, 태창직물, 심도직물 등으로 선경직물은 지방에 소재한 중소기업에 불과했다.그러나 1955년 서울 창경궁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전국산업박람회'(10월 1일~12월 20일)에서 선경의 '닭표' 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전국 유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직기로 제3공장 건설한국섬유단체연합회 산하의 각 공장에서 출품한 면사와 면직물, 모직물, 인견 직물, 양단, 호박단, 빌로드, 아세테이트, 나일론 등 모든 섬유제품이 총망라된 가운데 '닭표' 안감이 인견부문에서 유일하게 상을 받은 것이다.당시 산업은행은 박람회에서 수상한 업체들에 기업육성자금을 융자해주었는데 대통령상에는 500만환, 부통령상에는 300만환 등의 장기저리 자금이 제공됐던 것이다. 선경은 융자금 300만환으로 악성고리채 100만환과 선경직물 매수대금 중 잔금 91만환을 상환하고 나머지 100만환으로는 고급견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일제 문직기(Jacquard) 25대를 발주해서 제3 공장을 건설했다. 문직기는 1930년에 프랑스의 자카드(Jacquard)가 발명한 것으로 만여 개에 달하는 종침(從針)과 횡침(橫針)의 조작으로 문양을 찍어내는 복잡한 직기이다.1956년 3월 24일에 선경직물주식회사로 설립 등기했다. 1958년 5월부터 시판을 개시한 '봉황새' 이불감이 전국적인 히트상품으로 급부상하면서 선경은 서서히 대기업으로 부상해갔다. 1958년 11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대부받은 ICA자금 4만5천달러로 문직기 50대와 염색가공 설비를 갖춘 제4공장을 오픈했다. 해방과 6·25전쟁이 초래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다 귀속기업 불하 그리고 엔지니어 출신인 최종건의 경영경험 등이 상승 작용함으로써 지방소재의 중소기업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선경직물은 1956년 설립 등기를 마친 후 1958년부터 '봉황새' 이불감이 전국적인 히트상품으로 떠오르면서 대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SK 제공

2019-07-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3]에스케이-2 선경직물 인수(상)

죽마고우 박윤환과 '수리'부품없어 잦은 고장 '애로'공장 전체부지 1만2천평중차철순 지분 4천평 先매입귀속재산 공동명의로 제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계기로 선경직물은 여타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처럼 미군정청에 귀속되면서 관리인(경영책임자)에 황청화와 서울 마포의 거상(巨商)인 김덕유가 임명됐다. 당시 이들은 한국인으론 유일한 선경직물의 주주였다. 황청화와 김덕유는 총 주식 50만주(액면가 1 원(圓)) 중 각각 100주씩을 소유한 군소주주에 불과했으나 미군정법령 '적산관리요령'의 내용 중 '적산업체의 주주 또는 당해 적산업체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관리인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선임됐다. 귀속기업체들의 관리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권으로 치부돼 경쟁이 치열했는데 차후 적산기업체들의 헐값 민간불하에 관리인들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적산기업 불하는 해방 후 국내 기업가 배출의 최대 루트였다.>> 한국전쟁 '공장 폐허'선경직물은 1946년 2월부터 조업을 재개했는데 공장장은 황청하의 동생 황철하가, 총무부장에는 김덕유의 조카 표덕은이, 생산부장에는 21세의 청년 최종건이 각각 임명됐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경영자들이 철수함으로써 선경직물 공장의 기계설비 및 원재료의 안전관리가 초미의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 소유 공장의 경우 한국인 근로자들이 자주관리 형식으로 운영됐으나 기술 및 원료부족에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공장경영이 원활하지 못했던 터에 절도마저 기승을 부린 탓이었다. 선경직물에선 자체경비를 위해 선경치안대를 결성했고 최종건이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공로를 높이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1947년부터 직물업계의 호황으로 선경직물의 경영도 활성화됐다. 해방을 계기로 국내 일본계 기업들의 동시적인 생산중단에다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또한 단절돼 물자난이 극심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부터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함으로써 선경직물은 동력원을 확보하지 못해 조업에 차질을 빚었다.1949년 여름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퇴직하고 방직원료인 원사 거래로 재미를 보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으로 피난했다. 최종건이 1952년 5월에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선경직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거의 폐허 상태였는데 관리인 황청화와 김덕유는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직기 10~20여대 정도는 수리하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최종현은 벌말의 죽마고우인 박윤환과 함께 고장 난 직기들을 재조립했다. 부품들이 모자라 억지로 조립해 가동을 시도했으나 잦은 고장으로 애로가 많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최소경제운용단위인 직기 20대를 갖추었다.>> 방구현·차철순과 추진최종건은 방구현, 차철순과 함께 공동으로 선경직물 불하작업을 추진했다. 방구현은 최종건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많은 적산을 불하받아 큰돈을 벌어 '수원한량'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선경직물 공장부지 1만2천평 중 차철순의 지분 4천평을 우선 매입한 다음 귀속재산 우선 매입원을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제출하기로 했다. 선경직물은 설립 당시 차철순의 땅 1만2천평을 공장부지용으로 매입했는데 8천평에 대한 대금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5년 이내에 지불하기로 한 터여서 4천평은 여전히 차철순의 지분으로 등재돼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농지를 매수당한 자에게 귀속재산 매수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귀속재산 불하 규정이 있어 차철순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당시로써는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손에 넣는다는 것이 곧 큰 행운을 잡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귀속재산을 불하받아서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속재산은 으레 시가보다 싼 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으며 매수대금도 5년 내지 15년까지 장기분납이 가능했다. 매수계약금에 해당하는 1차 납부금도 매수총액의 10분의 1만 납부하면 됐으며, 게다가 매수대금은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는 농지증권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귀속재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선경40년사<약사>', 378면)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한국전쟁 폐허 속에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이 SK 역사의 시작이었다. /SK 제공

2019-06-2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2]에스케이-1 선경직물과의 인연

'선만주단'·'경도직물' 조합전시정비 '조선직물'로 흡수수도권 최대 '인견직' 생산제2공장 직보반 '조장' 승진'차질없는 생산' 책임 맡아선경직물은 1940년 10월에 수원역에서 서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수원시 권선구 평동 4에서 설립된 직물제조회사였다. 인구가 밀집한 평동은 일제강점기 때 대평정(大坪町)이라고 불렀다. 평동이란 이름은 이 일대가 너른 들판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벌말·벌리·들말·평리 등으로 불렸다. 공장 부지를 수원 시내에서 떨어진 벌말로 정한 이유는 이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서호천의 풍족한 자연수가 공장용수로 적합했기 때문이다.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공동으로 투자해 설립했는데 상호 '선경'은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머리글자인 '선'과 '경'을 조합한 것이다. 선만주단은 만주지역에 직물류를 수출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에서 설립된 일본인 포목상이었고 경도직물은 일본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견직물 제조업체였다. >> 1944년 부친권유로 입사간사이(關西) 혹은 긴끼(近畿) 지방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일찍이 아스카(飛鳥, 서기 552~645)시대부터 메이지유신(1868)에 따른 도쿄 천도 때까지 무려 1천300여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일본의 한국 및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였다.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 8천평과 공장건축비 및 기타비용을 부담했으며 경도직물은 직기 및 부대설비를 각각 현물 출자했다.중·일전쟁(1937~1945) 발발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일본상품시장도 덩달아 확대된 결과 중국 내에서 일본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선경직물이 설립될 무렵에는 국내 섬유업계도 호황을 누려 전국적으로 수많은 군소 직물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제직은 기술습득이 비교적 쉬운 데다 적은 자본으로도 쉽게 손댈 수 있는 업종이었다. 선경직물은 제1, 2공장에 기모도식(木本式) 직기 100여대와 염색가공 설비, 보일러, 기숙사 등을 완비하고 종업원 200여명(남자 약 40명)으로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3년 봄부터 인견과 시루빠(Silver)를 직조했다. 나날이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해서 작업반을 주야 2교대로 편성해 24시간 가동했다.SK그룹의 고(故) 최종건(1926~1973) 창업자도 이 무렵에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 최종건의 부친 최학배는 21세 때 결혼과 함께 바닷가인 수원군 팔탄면 해창리에서 수원 평동으로 이주, 그곳에서 대성상회를 개설하고 수원잠업 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는 한편 미곡상을 겸영했다. 이재에 밝아 사업이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선경직물공장을 건설할 때는 골재와 자재류를 납품하기도 했다. >> 수원소재 6개 공장 개편 최종건은 1926년 최학배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수원 평동 7에서 출생했다. 수원 신풍소학교를 거쳐 1944년 4월에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선경직물의 공무과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당시 그는 3급 기계정비사 자격증도 소지해서 취직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집 근처에 있는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선경직물은 1944년 8월에 수원의 다른 직물공장들과 함께 '전시기업정비령'에 의해 조선직물로 흡수됐다. 조선직물은 1934년에 안양에서 설립된 인견직 전문생산업체로 부지 4만1천평, 건물 9천100평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물공장 중의 하나였으나 안양공장은 일본 군용 항공기제조창으로 징발당했다. 전황이 일본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방산시설 확충차원에서 강제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대신 조선직물은 수원에 산재해있는 직물공장들을 전부 접수했는데 당시 수원에는 선경직물 외에 선일직물공장, 수원직물공장, 동흥직물공장 등 6개 공장이 있었다. 조선직물은 이들 직물공장을 접수함과 동시에 선일직물을 제1공장으로, 선경직물을 제2 공장으로 개편했다.이 무렵 최종건은 직보반 제 2조장으로 승진됐다. 2조장은 100여명의 제직조 여공들을 통솔하면서 주·야간 교대작업반을 편성, 운용해야 하고 생산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며 또한 품질관리도 책임져야 했다. 제직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53년 창립 무렵의 선경직물. 고 최종건 창업회장은 한국전쟁 중 폐허가 된 선경직물 건물을 복구해 재건하기로 결심, 건물 복구와 흩어진 부속품을 모아 직기를 재조립했다. /SK 제공

2019-06-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1]엘지-19·(끝) 정도경영의 흠집(?)

2007년부터 수천억원 거래102차례 '156억원 미신고'검찰, 14명 약식기소 벌금형"재벌가 봐주기의 끝판왕"구인회 직계비속만 70여명LG그룹의 '정도경영'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불거졌다. 구광모가 그룹 회장업무를 수행한 지 불과 4개월만인 2018년 9월 28일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수사부(최호영 부장검사)가 구 회장의 친부(親父)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과 삼촌 구본준 LG그룹 부회장, 고모 구미정 등 총수일가(특수관계인) 14명과 LG의 전·현직 재무관리팀장 2명 등 총 16명을 탈세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LG 일가는 2007년부터 10여년 동안 지주회사인 (주)LG와 LG상사 주식 수천억원 어치를 102차례에 걸친 장내거래를 통해 156억원을 탈세했다는 혐의였다.>> 보유주식 장내거래 고(故) 구본무 당시 회장과 그의 동생, 사촌 등 총수일가가 각각 보유한 주식을 서로 간에 수천 수십만 주씩 매매해온 것이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63조에는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간 지분거래는 거래액(4개월 치 평균가격)에 20%를 할증한 금액(경영권 프리미엄 반영)을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신고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장내가 아닌 장외거래의 경우 매매당사자가 공개되기 때문에 세금할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검찰은 LG측에서 특수관계인 간 거래 사실을 숨겨 양도세 포탈 및 통정매매 적발을 피하고자 장내거래했다고 단정한 것이다. 통정매매란 매수인과 매도인이 사전에 가격을 정해놓고 장내에서 일정 기간에 주식을 서로 매매하는 것으로 자본시장법 178조에는 시장을 교란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범법행위로 규정해서 통정매매를 금하고 있다."LG의 탈세 거래 관행은 2003년 지주회사 전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초에 구본무 전 회장을 비롯한 총수일가와 친인척 70여명이 LG 지분 44%를 함께 보유했다. 일종의 가족 공동 소유구조이다. 2018년 9월 현재 LG는 구광모 회장 등 일가친척 30명과 재단 2곳이 지분 45%를 나눠 보유하고 있다. 검찰은 LG가 자체적으로 경영권 방어에 필요한 필수 지분율을 46~48%로 정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주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특수관계인 간 거래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haojune@hani.co.kr, 2018-10-10)>> "도의적 책임있다" 지적검찰은 전·현직 재무관리팀장 2명만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하고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등 총수일가 14명은 약식기소했다. 약식기소는 검찰이 피의자에 대해 징역형보다는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때 법원에 약식명령을 청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정형은 벌금형뿐이며 공판절차도 없어 서류만으로 재판이 진행되는데 검찰은 오너 일가 14명이 탈세 목적의 거래를 사전에 인지하거나 혹은 주식매각 업무에 관여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시민단체 등에서는 검찰의 LG 기소를 극히 드문 희귀사례로 보고 '재벌 봐주기 끝판왕'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최근 10년간 재벌 총수 및 임직원 탈세 혐의에 대한 검찰의 구형량은 대부분 징역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LG그룹 경영권의 향배를 가를 수도 있는 엄중한 주식변동에 대해 총수일가의 지시가 없었다니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LG측은 "국세청과 검찰이 과거와는 다른 과세기준을 적용한 때문"이라고 항변했지만 LG 오너 일가는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머지않아 국내에서도 재벌의 4대 세습경영이 보편화 될 전망이다. 그러나 갈수록 재벌총수의 특수관계인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지분정리가 모호한 그룹에서는 오너 가족들 상호 간에 경영권 갈등문제가 점차 첨예해질 수도 있어 보인다. LG의 경우 구인회 창업자의 직계 비속들의 숫자만 70여명인 지경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사례들처럼 자연스럽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수순을 밟을 예정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재벌의 4세 경영이 보편화 되는 가운데 LG그룹도 구광모 회장 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연합뉴스

2019-06-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0]엘지-18 계열사 정리 및 4대(代) 세습경영

사업군 '전자·화학' 단순화2017년 기준 재벌순위 '4위'계열사 68개 삼성보다 많아2018년 주총 등기이사 선임구본준, 경영일선서 물러나 2003년 12월에는 LG카드와 LG투자증권이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 넘겨졌는데 이는 LG카드의 부실경영 때문이었다.LG카드의 모체는 1985년 12월 세워진 '익스프레스 크레디트카드'다. 1987년 7월 코리안 익스프레스 신용카드를 인수해 1988년 3월에 엘지신용카드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그해 6월 금성팩토링을, 1998년 1월에는 엘지할부금융을 각각 흡수 합병해서 여신전문 금융회사로 면모를 갖췄으며 1999년 1월 LG캐피탈로 상호를 변경했다. 같은 해 6월 국내 카드업계로는 최초로 기업 간 전자상거래시스템을 구축했으며 2001년 9월에는 고객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주)LG카드로 상호를 변경했다.2002년 4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며, 2004년 1월 LG그룹에서 계열 분리돼 2007년 3월 (주)신한금융지주가 지분율 85.73%로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됐다. >> 2005년 분재(分財) 완료같은 해 10월 신한금융지주는 모회사의 주가 희석을 막고 자본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LG카드를 100% 자회사로 만들고, LG카드의 상장을 폐지한 뒤 LG카드의 상호를 (주)신한카드로 변경했다.한편 LG는 최후의 금융계열사인 LG투자증권마저 털어냈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1969년 1월 16일 한보증권(주)로 설립한 뒤 1975년 6월 생보증권을 흡수 합병해 대보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같은 해 9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3년 11월 럭키증권과 대보증권을 합병해 럭키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95년 3월 LG증권(주)로 상호를 바꿨다가 1999년 10월 LG종합금융(주)를 합병하고 LG투자증권(주)로 명칭을 변경했다.2004년 5월 LG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뒤 같은 해 12월 우리금융그룹 계열회사에 편입됐고, 2005년 3월 우리증권(주)에 흡수 합병된 뒤 그해 4월 우리투자증권으로 변경됐다. 2014년 6월에는 NH농협금융지주 계열회사에 편입돼 같은 해 12월에 NH투자증권으로 또다시 상호가 변경됐다.한편 LG그룹의 모든 분재(分財)작업은 2005년 GS그룹의 분리로 모두 완료했다. 덕분에 LG그룹의 사업군이 전자와 화학 위주로 비교적 단순화됐다. LG그룹의 재계순위 변동도 수반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7년 5월 1일 발표한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 순위를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363조원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한 가운데 2위 현대차 218조원, 3위 SK 170조원 등이었다. LG의 자산총액은 112조원으로 여전히 4위에 랭크돼 있다. LG의 계열기업 수는 68개로 삼성(62사), 현대차(53사)보다 더 많다. 재벌순위 7위를 차지한 GS그룹의 계열사 수는 LG보다 1개 많은 69사이다. LG는 수많은 피상속권자들에게 최하 수천억에서 최대 수십조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분재에도 불구하고 위상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이다.>> 거대 글로벌 그룹 도약열심히 좋은 제품을 만들어 매출을 올리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의 결과로 판단되나 다음의 기사는 재벌 오너 일가가 재산을 대물림하는 방법을 추정케 한다."GS그룹의 주요 규제 대상 계열사 중 하나인 보헌개발은 지난 2015년 매출 15억7천400만원 중 내부거래 비중이 99%에 이른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보헌개발 지분은 허서홍 GS에너지 상무(허광수 삼양인터내셔녈 장남)와 허세홍 GS글로벌 대표(허동수 GS칼텍스 사장 장남), 허준홍 GS칼텍스 전무(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의 장남으로 GS가 장손)가 각각 33.3%씩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규제대상 계열사인 옥산유통의 계열사 매출 의존도 역시 71.2%에 달했다. 옥산유통은 1997년부터 한국필립모리스와 상품 독점계약을 맺고 GS25 등에 담배를 공급하고 있다. 옥산유통의 매출은 2005년 1천52억원이었으나 2015년 7천123억원으로 7배 가까이 급증했다. 옥산유통의 지분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특수관계인 등이 51%를 보유하고 있다."('CNB저널', VOL.527, 2017.3.26.)2018년 LG그룹의 경영권이 또다시 바뀐다. 2018년 5월 20일에 3대 구본무 회장이 와병으로 타계, 경영권이 장남인 구광모 상무에 세습된 것이다. 구 회장은 1999년 금성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넘기는 고통을 감내했음에도 LG그룹이 초일류로 도약할 수 있는 2차 전지, LCD에 이은 올레드(OLED) 디스플레이와 차량 전장 사업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에 집중투자해서 매출 160조원대의 거대 글로벌 그룹으로의 도약을 이끌었다.1978년생인 구광모 상무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2004년에 구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겸손하고 소탈하다"는 평가의 구 상무는 서울 영동고를 거쳐 미국 로체스터 공대를 졸업하고 2006년에 LG전자 재경 부문 대리로 입사했다. 이후 미국 뉴저지법인, HE(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 HA(홈어플라이언스) 창원사업장 등에서 경영수업을 쌓은 후 2018년부터 LG전자의 미래 먹거리로 평가되는 B2B사업본부 부서장으로 옮겼다. 2018년 5월 17일에 열린 지주회사 LG의 임시주주총회에서 구 상무를 LG 등기이사로 올렸다.LG그룹은 창업 71년 만에 4대 세습경영체제가 개시됐다.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은 2019년 3월 15일 지주회사인 LG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이사선임에 배제돼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구본무 당시 회장의 투병 기간 동안 막내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이 그룹경영을 주도해 왔다. 조카인 구광모 신임회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배려차원이었다. 대신 구 부회장은 그룹고문으로 구광모 회장을 도울 예정이다. 구 부회장의 LG그룹 지분은 7.72%에 이른다. LG그룹은 1922년 희성그룹, 1999년 LIG그룹, 2000년 아워홈, 2003년 LS그룹, 2005년 GS그룹, 2006년 LF(구 LG패션)를 분리한 경력이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2018년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경영권을 승계받은 구광모 신임 회장. /연합뉴스

2019-06-0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9]엘지-17 계열분리(④ GS그룹 탄생)

2005년 3월 그룹 공식 출범장남 허창수 초대회장 선임공정위, 신규 기업집단 지정71개 비상장등 79개 계열사'가장 아름다운 동업' 평가 우리나라 재계 최대의 주목거리였던 LG그룹의 공동창업자인 구씨와 허씨 간의 계열분리는 동업 57년 만인 2004년에 이뤄졌다. LG그룹의 마지막 분할작업이 이뤄진 것이다.LG그룹의 모태는 1947년 1월에 세워진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이다. 락희화학의 공동창업주는 고 구인회 형제들과 구인회의 사돈이자 진주의 만석꾼 거부로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효주(曉州) 허만정이다. 구인회 창업주는 14세이던 1921년 허을수와 결혼해 6남 4녀를 뒀다. 두 가문은 1947년 창업 이래 LG그룹이 분리되던 2005년 1월까지 57년간 구씨 가문이 경영을, 허씨 가문이 안살림을 맡는 공동경영 형태로 LG그룹을 분쟁 없이 운영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분할 작업2004년 4월 13일 (주)LG 이사회는 업종전문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마지막 계열분리를 결정했는데 LG그룹 계열사들을 연관성이 작은 제조업 군과 유통업 군으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2004년 7월 (주)LG는 인적 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로 (주)GS홀딩스를 세웠다. 이에 근거해서 허씨 가문은 LG그룹으로부터 LG유통, LG홈쇼핑, LG칼텍스정유, LG파워, 서라벌도시가스, 해양도시가스 등 15개 계열사, 매출액 18조원의 사업군을 넘겨받아 GS그룹을 출범시켰다.GS그룹의 대표는 허씨 가문의 추대를 받은 고 허준구 회장의 장남인 허창수가 선임됐다. 허준구는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의 조카사위이다. 허준구가 구인회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LG 고문의 장녀인 구위숙 씨와 결혼한 것이다. 허준구는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뒀는데, 장남인 허창수가 GS그룹의 회장을 맡았다. 2005년 1월 LG그룹이 LG그룹과 GS그룹으로 법적 분리되면서 같은 해 2005년 3월 GS그룹이 공식 출범했다. 그해 4월 GS홀딩스 등 50개사를 거느린 GS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신규 기업집단에 지정됐다. GS그룹은 같은 해 11월 LG에너지(현 GS EPS)를 인수하고 2008년 8월 GS자산운용을 설립했으며 2009년 3월 (주)GS홀딩스에서 (주)GS로 상호를 변경했다. 같은 해 7월 (주)쌍용(현 GS글로벌)을, 2010년 11월 DKT(현 GS엔텍)를 각각 인수했다.2012년 1월 (주)GS가 보유했던 GS칼텍스의 주식 전부(GS칼텍스 지분의 50%)를 물적 분할해 사업형지주회사로 GS에너지를 설립했다. GS에너지는 2012년 6월 GS칼텍스(주)가 영위하고 있던 자원개발, 가스&전력, 녹색성장 사업을 비롯해 관련 자회사인 GS파워(주), (주)해양도시가스, 서라벌도시가스(주), GS퓨얼셀(주), GS나노텍(주), 파워카본테크놀로지(주), 살데비다코리아(주), GS플라텍(주), (주)삼일폴리머 등 9개의 자회사를 인수하고 에너지전문 사업형지주회사로 규모를 키웠다.>> 사업형 지주회사로 육성2013년 12월 STX에너지(주)의 주식 64.39%를 인수해 2014년 2월에 회사명을 (주)GS이앤알로 변경하고 GS그룹에 편입됐다. 2014년 말 기준으로 GS그룹이 자산 58조5천억원을 돌파했다. GS그룹은 2015년 3월 말 기준으로 비금융지주회사인 (주)지에스, (주)지에스리테일, (주)지에스글로벌, 지에스건설(주), 삼양통상(주), 코스모화학(주), 코스모신소재(주) 등 7개의 유가증권시장 상장회사, 코스닥시장 상장기업인 (주)지에스홈쇼핑, 사업형 지주회사인 지에스에너지(주), 지에스파워(주), (주)해양도시가스, 서라벌도시가스(주), 지에스퓨얼셀(주), 지에스플라텍(주), 지에스나노텍(주) 등 71개의 비상장회사를 포함해 총 79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주요기업인 GS칼텍스는 1967년 설립된 국내 최초 민간정유회사로 석유·윤활유·석유화학제품을 제조 및 판매하는 에너지 전문 기업이며 GS리테일은 GS수퍼마켓, GS25 등을 운영하는 유통업체다.GS그룹의 지주회사인 (주)GS의 최대주주는 허창수 회장 외에 허씨 일가다. 2015년 3월 말 기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허씨 49명이 46.37%를 보유 중이다."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형제나 가장 친한 친구 간이라 해도 결국은 의를 상하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 동업의 한계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LG그룹 구씨와 허씨 가문은 2세대 57년에 걸친 동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일반의 상식을 뒤엎었다. 한국기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업경영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2005년 업종전문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LG그룹과 분리된 GS그룹은 에너지, 발전, 유통, 무역, 건설, 서비스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게 됐다. 사진은 GS건설이 지난 2010년 4월 준공한 카타르 라판콘덴세이트 석유정제시설 모습. /GS건설 제공

2019-05-2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8]엘지-16 계열분리(③ 판토스레드캡·LS그룹)

'럭키' 처음쓴 구정회 자손들물류·여행업계로 승승장구1995년 금성계전·기전 합병산전·예스코등 7개사 중심통신등 각 분야별 사업 주력LG그룹 계열의 글로벌 종합물류기업인 범한판토스와 여행알선업체인 (주)레드캡투어는 구인회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구정회 자손들의 몫이었다. 구정회는 창업 초기부터 형제들과 힘을 합쳐 LG그룹의 초석을 닦는데 기여해 LG전자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면서 '럭키'라는 상호를 처음 붙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1978년에 타개했다.판토스는 1977년 물류기업인 (주)범한흥산으로 설립돼 1992년 범한종합물류(주)로 상호를 바꿨다가 2006년 (주)범한판토스로 그리고 2017년에는 (주)판토스로 변경한 LG그룹의 계열사다. 동사는 2016년 현재 매출액 3조원에 종업원 1천500여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LG상사가 51%의 주식을 확보해 최대주주다.2017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SDS, 현대글로비스와 판토스의 내부거래비중이 높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이 기업들의 내부거래비중 삼성SDS 87.8%, 현대글로비스 66.9%, 판토스 69.8% 등이다.>> 3형제몫 파생사 재발족(주)레드캡투어는 여행알선과 렌터카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여행업체로 모체는 1977년 세워진 범한흥산으로 구인회 회장의 조카인 구자헌 회장이 창업했다. 범한흥산은 초기 해외 항공권 판매를 주력 사업으로 했다가 1982년 여행 알선업 허가를 받았다. 이후 범한흥산을 범한종합물류와 범한여행 두 개 회사로 분리해 1992년 12월 22일 범한여행을 정식 설립했다. 2006년 코스닥에 상장했고 상호를 레드캡투어로 변경했다. 판토스와 레드캡투어는 여전히 LG그룹 계열사로 분류돼 형식적으론 완전히 분가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LS그룹LS그룹은 2003년 구인회 창업주의 셋째 태회, 넷째 평회, 다섯째 두회 등 3형제 몫으로 떼어준 LG의 계열사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재발족한 파생그룹이다. LG로부터 분가할 때 LS전선, LS산전, LS니꼬동제련, LS엠트론, E1, 예스코 등을 분할 받았다.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사상 최초로 시도된 지주회사체제인 (주)LG의 공식출범과 같이 한다. 같은 해 11월 LG전선, LG-Nikko동제련, LG-Caltex가스, 극동도시가스 등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계열분리 승인을 받아 LG그룹에서 분리됐다.LS그룹의 모기업이자 지주회사는 (주)LS다. LS의 모체는 1962년 5월 15일 설립된 한국케이블공업(현 LS전선)이다. 한국케이블공업은 1969년 10월 금성전선으로, 1995년 LG전선으로, 2005년 LS전선으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LS그룹의 또 다른 축인 LS-Nikko동제련은 1936년에 설립된 장항제련소에서, 가온전선은 1947년 9월 설립된 국내 최초의 전선회사인 국제전선(1996년 희성전선으로 사명 변경)에서, LS산전은 1974년 설립된 럭키포장(1987년 금성산전으로, 1995년 LG산전으로 상호 변경)에서 각각 출발했다.>> LG전선그룹 집단지정LG산전은 1995년 9월 금성계전(주)와 금성기전(주)를 합병했다. 예스코의 전신인 극동도시가스는 1981년 3월에, E1의 전신인 여수에너지(1991년 호유에너지로, 1996년 LG-Caltex 가스로 사명 변경)는 1984년 9월에 각각 설립됐다. 2004년 3월 LG-Caltex가스가 E1으로 사명을 바꾸고, 같은 해 4월에는 LG전선, LG산전, LG-Nikko동제련, 희성전선, E1, 극동도시가스 등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LG전선그룹으로 집단지정을 받았다.2004년 9월 희성전선의 상호를 가온전선으로 바꾸고 같은 해 12월에 LG전선이 진로산업을 인수했다. 2005년 3월에는 LG전선, LG산전, LG-Nikko동제련의 상호를 각각 LS전선, LS산전, LS-Nikko동제련으로 바꾸고 CI(기업 이미지 통합) 선포식을 했다. 기업명 LS는 리딩 솔루션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LG+GS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2006년 3월 극동도시가스의 사명을 예스코로 바꾸고 같은 해 4월에는 안양에 LS그룹 사옥 및 RnD복합센터를 기공했다. 2007년 E1은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를 인수했다. 2008년 7월 LS전선(주)를 존속법인인 (주)LS와 신설법인인 LS전선(주), LS엠트론(주)로 분할하고 (주)LS는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했다. 같은 해 11월 LS엠트론은 대성전기를 인수해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에 진출했다. 2009년 6월 LS산전은 자동화업체 메트로닉스(현 LS메카피온)를, 9월 홍치전기(현 LS홍치전선)를 각각 인수했다.LS그룹은 LS전선, LS산전, LS-Nikko동제련, LS엠트론, E1, 예스코, 가온전선 등 주력 7개사를 중심으로 전력송배전&통신, 에너지, 오토메이션, 소재, 기계&부품 분야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LS그룹 구자홍 회장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주)LS의 대표이사 회장, 이사회 의장을 겸임 중이다.LS그룹은 (주)LS, LS전선(주), LS엠트론(주), 대성전기공업(주), LS산전(주), LS-Nikko동제련(주), (주)예스코, E1, (주)LS네트웍스, 가온전선(주) 등 국내 49개사, 해외 47개사 등 총 96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S그룹은 2003년 LG그룹에서 전선과 금속 부문이 계열분리해 형성됐다. 사진은 전력송변전·배전, 통신 케이블. /LS그룹 제공

2019-05-2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7]엘지-15 계열분리(② LIG그룹·LB인베스트먼트와 아워홈)

서비스등 6개 계열사 보유LIG넥스원, 방위산업 주력LB, 금융자본으로 출발해점차 '산업자본' 영역 확대유통, 식품서비스부문 진출 LG그룹 역사상 2번째 계열분리는 구인회 창업주의 바로 밑 동생인 구철회의 자손들이 1999년에 LG화재해상보험을 분리해서 LIG그룹으로 재발족한 것이다. 구철회는 1975년에 사망했다. LG화재는 1959년 1월 범한해상보험(주)로 설립된 뒤 1962년 6월 범한해상화재보험(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0년 4월 LG그룹의 전신인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됐으며 1976년 6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2년 7월 범한화재해상보험(주), 1988년 6월 럭키화재해상보험(주)를 거쳐 1995년 6월 LG화재해상보험(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96년 6월 INI(International Network of Insurance)에 가입해 국제 보험서비스망을 구축했다. 1999년 11월 LG그룹 계열에서 분리, 2006년 4월 LIG손해보험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나 2015년 6월 KB금융지주에 인수돼 또다시 KB손해보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구철회 자손들 분가1999년 LG그룹 계열분리의 신호탄이 된 LIG(전 LG화재)는 당시 정부의 '5대 그룹 생명보험사 진출 금지' 정책에 맞물려 분리됐다. 한때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들어 손해보험-생명보험을 영위하려 했던 LG그룹은 생명보험사업이 좌절되면서 LG화재를 독립시키려 했고 고 구철회 회장 일가가 이를 받아들여 순조롭게 분가가 이뤄졌다.LIG그룹은 지주회사인 (주)LIG를 중심으로 방위산업, IT, 서비스 부문에 총 6개의 주력 계열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원래 LIG의 I가 보험(Insurance)을 뜻하는 의미도 있고 LG화재보험이 모태였지만 현재 생명보험(현 DGB생명), 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등이 모두 타사로 매각돼 회사 명칭과 달리 보험업 계열사는 없다. 2016년 현재 LIG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LIG넥스원이다.용인시 마북동에 본사를 둔 LIG넥스원은 1976년 금성정밀공업(주)로 창업한 이후 LG정밀, LG이노텍, 넥스원퓨처 등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2007년 4월 LIG넥스원으로 바꿨다. 동사는 정밀타격무기체계를 비롯해 감시정찰무기체계, 지휘통신무기체계, 전자전체계, 항공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8년 대한민국 방위산업 매출 1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육해공 전 분야의 무기체계에 대한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LB인베스트먼트와 아워홈2000년 3월 LG벤처투자는 구인회의 4남인 구자두에 상속됐다. 1996년 LG창업투자로 설립, 계열분리 후 2008년에는 펀드 운용액이 2천500억원에 이르는 LB인베스트먼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동사는 KTB네트워크, 제미니투자, 동양인베스트먼트, CJ창업투자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국내 벤처캐피털이다.>> 국내 대표적 벤처캐피털LB인베스트먼트는 2005년 마이크로스케일(주)를 인수해 2006년 1월 회사명을 엘비세미콘(주)로 변경했다. 동사는 2000년 2월에 반도체 칩 및 패키지의 설계 서비스, 수동소자의 제조, 조립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돼 2001년 6월 평택공단에 플립칩 범핑 공장을 준공했고 8월에는 8인치 골드 범프(Gold Bump) 기술을 개발했다. 2006년 12월 미국 IBM의 싱가포르 테스트사업부를 인수하고 이곳에 미국과 대만 등에 이어 8, 12인치 솔더범핑 전용 라인을 갖추고 양산에 들어갔다.2008년 1월 COG 타입 패키징을 양산했고 12월에는 플립칩 패키지 기술(Cu post bump)을 개발했다. 2009년 3월 글라스 웨이퍼(Glass Wafer) 위 재배열 기술을 개발했다. 2010년 7월 글로닉스(주)를 인수했고 2011년 1월에는 코스닥시장에 주식을 상장했다. 2011년 7월 TGV(Through Glass Via) 기술을 이용한 수동소자 내장형 이미지센서 패키지를 개발했으며 2012년 6월에는 12인치 범핑 라인을 구축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당초 금융자본으로 출발해 점차 산업자본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한편 같은 해 9월에는 LG유통의 식품서비스(FS)사업부를 분리해 3남인 구자학에 넘겼는데 구자학은 이를 모체로 '아워홈'이란 상호로 재발족했다.LG그룹은 1984년부터 식자재 공급사업을 시작해 87년에는 급식사업으로 영역을 넓혀 서울 여의도의 LG트윈타워 사원식당에 납품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1993년에는 대전 EXPO의 공식 식당운영 사업권자로 선정, 1997년 급식부문 ISO 9002인증을 획득했다.서울 강남구 메리츠타워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아워홈 전시관, 위탁급식, 식품유통, 식자재 유통, 공장 및 물류센터 등 전국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사업영역은 식품사업, FS사업, 외식사업, 식재사업이다. 식품사업에서 아워홈은 '행복한 맛남'의 식품제조 브랜드를 갖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IG그룹은 지주회사인 (주)LIG를 중심으로 방위산업, IT 등 총 6개 주력 계열사를 두고 있다. 사진은 LIG넥스원의 유도무기분야인 천궁의 모습. /LIG넥스원 제공

2019-05-1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6]엘지-14 계열분리(①희성그룹 탄생)

경영승계 '장자 상속' 원칙2남 '구본능' 일찌감치 분가폴란드·中·베트남·이집트에현지법인 세우며 '글로벌화'2016년 9개 계열사 거느려 재산을 조금이라도 지닌 여염집의 경우에도 재산상속 관련해 피상속자들 간에 불미스러운 사례들이 비일비재한데,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재벌 상속의 경우 이해당사자들 간에 갈등이 불거짐은 당연(?)해 보인다.국내의 경우 재벌 대물림과 관련한 '형제의 난' 등이 종종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LG그룹은 1947년 창업해 이제는 70년이 넘은 기업이 됐다. 그동안 그룹의 경영권이 창업자 구인회에서 아들 구자경과 손자 구본무로 계승되는 등 창업 3세대에 걸쳐 세습경영 됐는데, 특히 이 재벌은 사업개시부터 구인회의 6형제 및 사돈인 허씨 혈족들까지 수많은 동업자가 경영에 관여했던 탓에 그룹 재산 분할이 주목받았다.>> 1996년 '희성금속' 독립구인회의 형제만 해도 철회, 정회, 태회, 평회, 두회 등 6명에다 이들의 아들과 딸 등 만해도 무려 57명이다. 그룹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허씨 집안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국내 여타 재벌들 같았으면 벌써 공중분해 됐을 터인데 LG그룹은 아직까지 분재와 관련해 불미스런 루머가 단 한 건도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스터리하다.- 희성그룹 탄생LG그룹에서의 최초 계열분리는 1996년 1월에 2대 총수 구자경의 2남 구본능이 희성금속을 떼어내어 독립한 것이다. 창업 반세기만이어서 여타 그룹에 비해 매우 늦었다.희성금속은 도금재, 본딩와이어(Bonding Wire), 접점, 디스플레이용 투명전극 타깃(ITO Target)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구자경 회장은 첫째 본무, 둘째 본능, 셋째 본준 등 아들 3형제를 슬하에 뒀는데 LG그룹의 경우 경영권 승계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2남인 구본능이 일찍부터 분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는 희성금속 외에도 국제전선(현 가온전선)과 한국엥겔하드(주)(현 희성촉매), 상농기업(주)(현 희성전자), (주)원광(현 희성화학), 진광정기(현 희성정밀) 등 6개사를 분리해 희성그룹으로 재발족했다. 구본능은 부산의 경남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해 LG전자 이사와 희성금속 감사, 상농기업 부사장 등을 거치며 착실하게 경영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주력기업인 희성전자의 모체는 1957년 8월에 설립된 삼영수지공업사이다. 삼영수지는 1974년 10월 상남기업(주)로 법인 전환한 뒤, 1982년 상농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85년 5월 국내 최초로 자동전압전환 장치 전기보온밥솥을 개발해 출시했다.>> 지주회사役 '희성전자'희성전자는 1999년 진례공장을 준공하면서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용 BLU(Back Light Unit) 사업에 진출했다. 2002년 9월 중국 난징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Co.,LTD.)을 설립했으며 2003년 5월 희성전자(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같은 해 8월 TFT-LCD용 모듈의 양산을 개시했다. 2005년 9월 폴란드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Poland SP.Z.o.o)을 세웠으며 2006년 11월 10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2008년 10월 중국 쑤저우에 현지법인(Heesung Electronics Co.LTD)을 설립하고, 이듬해 7월 LED 칩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중국 광저우에, 2014년에는 중국 옌타이와 이집트에, 그리고 2015년에는 베트남에 각각 현지법인을 세우는 등 글로벌 시대를 대비했다.희성그룹 내에서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희성전자는 TFT-LCD의 핵심 부품인 백라이트유닛(BLU)과 LCM(모듈), TSP(터치스크랜패널) 등을 생산하는 업체다. 생산제품의 60%가량을 LG디스플레이에 공급한다. 대구공장 및 대구2공장과 파주공장을 가동하고 있다.희성그룹 계열사에는 희성전자(주), 희성금속(주), 희성촉매(주), (주)희성화학, 희성정밀(주), 삼보E&C, 희성피엠텍(주), 희성소재(주), 희성폴리머 등 9개사가 있다. 2016년 12월 말 기준 희성전자의 최대주주는 구본능 회장이며, 보유 지분은 42.1%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희성그룹의 계열사 중 한 곳인 희성전자(주)는 1999년 진례공장을 준공하면서 TFT-LCD용 BLU사업에 진출했다. 사진은 희성전자가 지난 2002년 9월 중국 난징에 현지법인을 설립할 당시의 조감도. /희성전자 제공

2019-05-0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5]엘지-13 국내최초 지주회사체제 전환과 2차전지 세계1위

CI·EI 합병 '(주)LG' 신설생명과학, 15년만에 원위치구본무, 충전식 건전지 관심2013년 결국 세계시장 석권GM·볼보등 주문액 36조원 지주회사란 자회사들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 그룹 전체에 대한 명실상부한 지배권을 가진 회사를 지칭한다. 지주회사의 종류는 순수지주회사와 혼합지주회사가 있는데, 순수지주회사는 자회사들에 대한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데 비해 혼합지주회사는 자회사 관리 외에 다른 사업들을 영위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기업조직이다. 지주회사는 자산총액이 1천억원 이상, 자산총액 중 자회사 주식가액합계 비율이 50% 이상 돼야 한다.국내 지주회사제도가 도입된 것은 정부가 외환위기 수습차원에서 재벌의 오너경영인에 대한 책임을 묻고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기위해 도입됐다. 1999년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지주회사제도를 합법화했다. 대주주는 지주회사 (주)LG의 주식만 보유해 포트폴리오 관리에만 주력하고, 자회사는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으로 개별 사업에 전념하는 틀을 만든 것이다. >> 재벌지배구조 개혁작업그동안 한국 대기업 오너경영인들은 극히 적은 주식지분으로 다수의 계열사들을 지배하고자 순환출자 등을 이용해 지배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막대한 규모의 채무경영이 가능했던 탓이다.정부의 재벌지배구조 개혁작업에 가장 먼저 호응한 대기업집단은 LG그룹이었다. LG그룹은 2003년 3월 1일 국내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LG화학을 지주회사인 LGCI와 사업자회사인 LG화학과 LG생활건강으로 분리하고, LG전자는 지주회사인 LGEI와 사업자회사인 LG전자로 분할한 후 LGCI와 LGEI를 합병한 통합지주회사 ㈜LG를 새로 만든 것이다. (주)LG는 LG전자와 LG화학 등 49개의 계열사들을 자회사 혹은 손자회사로 거느리게 됐다. LG가 용이하게 지주회사로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계열사들 간 순환출자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외환위기 때 시가총액이 크게 낮아져 자회사의 주식 매입도 용이해진 때문이었다.LG는 차세대 먹거리인 생명공학에 공을 들였는데 LG는 지주회사 전환을 앞둔 2002년 바이오사업을 총괄하는 LG생명과학을 설립했다. 2003년에는 국산 신약 최초로 '팩티브'를 미국에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바이오, 동물, 진단의약품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분사 15년만인 2016년 9월 LG생명과학을 LG화학의 사업부로 원위치했다. LG는 그 이유로 미래 먹거리 사업에 대한 효율적인 투자를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의 최대치적 중의 하나는 '2차 전지'다. LG화학의 2차 전지사업은 구 회장이 연구개발을 제안한 1992년 이후 20여 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LG의 주력 사업으로 성장한 사례다.한번 쓰고 버리는 일반 건전지를 1차 전지, 충전을 통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건전지를 2차 전지(rechargeable battery)라 부른다. 2차 전지는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전화, 캠코더 등 모바일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전기자동차의 핵심소재로서 부가가치가 높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와 함께 21세기 '3대 전자부품'으로 꼽힌다. 세계적인 2차 전지 종주국은 일본으로 1980년대 초부터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2차 전지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키웠다.>> 새로운 먹거리 '전지사업'국내에서 2차 전지사업에 최초로 손을 댄 기업은 LG화학이다. 1992년 당시 구본무 부회장은 영국 출장길에서 우연히 충전식 건전지를 접했다. 구 부회장은 전지사업을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로 판단하고 귀국길에 충전식 건전지 샘플을 가져와 계열사이던 럭키금속에 연구개발을 주문했다. 수년간 투자했음에도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시제품이 나오는 데만 5년이 소요될 만큼 개발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2천억원 이상 적자를 내기도 했다. 사내에서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며 임직원들을 다독였다.구 회장의 투자는 사업착수 20년만인 2013년에 결실을 보았다. 국제 시장조사업체인 네비건트 리서치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제조업체 경쟁력 평가'에서 LG화학을 세계 1위 기업으로 평가한 것이다. LG화학은 수주물량 포함 세계 1위다. GM, 포드, 볼보 등 전 세계에서 받은 주문액만 36조원에 이른다. LG화학은 한국의 오창과 미국 홀랜드, 중국 난징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 종주국인 유럽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2017년 폴란드 남서부 브로츠와프 인근에 축구장 5배 크기(4만1천300㎡)의 배터리 생산공장을 완공했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앞으로는 2차 전지가 LG그룹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화학은 1992년부터 2차 전지사업을 시작해 20여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은 뒤 2013년 마침내 '경쟁력 평가'에서 세계 1위의 결실을 맺었다. /LG화학 제공

2019-04-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4]엘지-12 빅딜과 LG디스플레이 설립(하)

반도체 넘기고 'LCD' 고수합작 'LG필립스LCD' 출범세계 첫 HDTV 52인치 개발2008년 사명변경 법인 독립LG전자 '37.9%' 지분 소유빅딜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만 가중시킨 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작업은 실패로 마무리된 바 있다.LG가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넘긴 데 대해 당시 항간에는 현대의 대북사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정부의 강권에 마지못해 승복했던 구본무 회장은 이후부터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2011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거의 10여 년 동안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LG는 반도체를 현대에 넘기는 대신 현대전자의 반도체 이외의 전자부문 인수와 함께 나머지는 현금으로 받아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덤으로 데이콤(LG유플러스)까지 인수했다.>> 결국 실패로 끝난 '빅딜'한편 1998년 구 회장은 정부 주도의 반도체 빅딜 논의로 반도체사업의 유지가 불확실해지자 그동안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추진해오던 'TFT-LCD(초박막 액정표시 장치)' 사업을 따로 분리해 별도의 'LG LCD'를 설립했다. 당시 정부와 현대전자는 LG반도체에서 LCD사업을 분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구 회장이 "이번 빅딜은 반도체 사업의 빅딜이지 LCD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해 뜻을 관철시켰다.덕분에 반도체는 현대로 넘겼지만 LCD는 지켰고, 분리 직후인 1999년 5월 LG는 필립스로부터 국내 민간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16억달러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3개월 후엔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LG디스플레이의 모태는 1985년 2월 세워진 금성소프트웨어이다. 1987년 1월 금성사(현 LG전자) 중앙연구소에서 TFT-LCD 개발에 착수해 1993년 9월 LG전자 내 LCD사업부를 설립하고 1995년 9월 구미 LCD 1공장, 1997년 12월 구미 LCD 2공장을 준공했다.1998년 12월에 연간 매출 5억달러를 넘어섰다. 1999년 6월에는 LG전자에 소프트웨어 관련 사업을 양도하고 같은 해 8월 LG필립스LCD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2000년 7월 구미 LCD 3공장, 2002년 3월 구미 LCD 4공장을 각각 준공했다. 2002년 12월에는 세계 최초로 HDTV용 52인치 TFT-LCD를 개발했다. HDTV는 기존의 TV보다 5~6배 이상의 해상도를 갖고 있어 고화질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TV 시스템이다. 2003년 5월 중국 난징에 제1모듈공장, 2004년 제2모듈공장을 준공했다.>> 구미·파주에 공장 준공2004년 7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한국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같은 해 8월 구미 LCD 6공장을, 2006년 1월 파주 LCD 7공장을 각각 준공했다. 2007년 3월 폴란드 모듈 공장, 2008년 4월 중국 광저우공장을 준공했다. 2006년 3월 세계 최초로 HDTV용 100인치 TFT-LCD를 개발했으며 업계 최초로 차세대 휴대폰용 TFT-LCD를 개발했다. 그러나 2008년 2월 LG필립스LCD의 기술제공사인 네덜란드 필립스가 지분매각에 나서자 같은 해 3월 LG디스플레이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8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로 독립한 이후엔 LCD 패널 등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고 연간 약 25조원의 LG디스플레이는 2013년 현재 경북 구미(6개) 및 파주(2개)에서 총 9개의 LCD 패널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중국의 난징 및 광저우,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모듈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로 4세대, 5세대 패널 공장과 세계 최대 6세대, 7세대 패널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2013년 9월 말 기준 LG전자가 37.9%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전자는 2002년 12월 세계 최초로 HDTV용 52인치 TFT-LCD를 개발하는 등 디스플레이 부문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세계 최초 55인치 TV용 OLED 패널 양산 모습. /LG전자 제공

2019-04-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3]엘지-11 빅딜과 LG디스플레이 설립(상)

4대재벌 엄청난 '부채비율'그룹간 반발로 '빅딜 난항'정부, 대출중단 내세워 압박가전, 삼성과 갈수록 격차2015년 영업익 '25배 이상'1997년 말 느닷없이 국내에 도래(?)한 외환위기의 국민경제적 충격은 엄청났다. 최정상의 대우그룹을 비롯해 국내 30대 재벌의 3분의 1이 부도로 좌초하거나 공중분해 됐다. 전국적으로 2만2천여개의 기업이 도산했는데 그중 흑자도산 기업 수만 해도 7천여 곳을 헤아린다. 덕분에 250만여명의 근로자들이 실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고전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높은 부채비율이 화근이었다. 4대 재벌의 부채비율은 1998년 말 기준 삼성그룹(275.7%), 현대그룹(449.3%), LG그룹(341%), SK그룹(354.9%) 등이었다. 계열사들 상호 간에 서로 빚보증해서 은행자금 등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수법으로 몸집을 불렸던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충격'당시 초미의 국가적 과제는 기업들의 부채축소로써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작업의 목적으로 재벌들 상호 간에 대형 사업체들을 맞교환하는 식의 빅딜(big deal)작업을 강제로 단행했다.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라고 봤기 때문에 기업 간에 서로 중복되는 투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빅딜은 1998년 9월 4일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 됐는데 빅딜 대상은 삼성, LG, 대우, 현대, 한진 등 5대 그룹에 국한하고 대상사업으론 반도체(현대전자+LG반도체), 석유화학(삼성종합화학+현대석유화학+외국자본), 발전설비(현대중공업+한국중공업), 항공(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 자동차(기아 유찰시 현대, 대우, 삼성 간에 조정), 철도차량(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 정유(한화에너지+현대정유) 등 7개 업종이었다.그러나 해당 그룹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각각 흡수했으며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등 3사를 통합해서 한국우주항공(KAI)을 설립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1998년 정부는 전경련을 앞세워 구본무 회장에게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부는 빅딜의 기본방향을 재계서열 순위가 빠른 기업이 하위 기업의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하고 빅딜에 불응하는 기업에는 대출중단 등을 내세우며 압박했다. >> 반도체사업 이원화LG반도체는 1989년 5월 청주와 경북 구미에 생산시설을 갖춘 금성일렉트론으로 설립돼 1995년에 LG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 효자 기업이었다. 1995년 한 해 동안에만 순이익이 9천억원을 기록했다. LG가 승복하지 않자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의 주선으로 1999년 1월 6일 구본무 회장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다. 이왕 포기하는 거 100%를 현대에 넘기겠다"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현대전자에 인수된 LG반도체는 2001년 3월에 (주)하이닉스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하고 8월에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다. 2012년 2월 SK텔레콤(주)이 최대주주가 된 뒤 3월에 SK하이닉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 결과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와 현대 하이닉스로 이원화됐으며 가전 부문은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대우일렉트로닉스)로 삼원화됐다.이를 계기로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LG전자 간에는 갈수록 외형의 격차가 벌어졌다. 2015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200조6천500억원, 영업이익 26조4천100억원인데 비해 LG전자는 매출액이 56조원5천90억원에 영업이익은 1조1천923억원에 불과하다. 매출액은 4배 이상, 영업이익은 25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97년 외환위기는 국내 기업들의 빅딜을 단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 반도체 중복 투자로 LG반도체는 현대반도체에 지분을 넘겼다. 사진은 1984년 금성반도체가 국내 최초로 8bit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한 모습. /LG그룹 제공

2019-04-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2]엘지-10 이동통신시장 참가

1997년부터 '019'로 서비스데이콤·파워콤 계열사 편입002패밀리·국제팩스 개시2012년 와이파이존 전면무료세계최초 LTE전국망 구축1990년대 국내 이동통신산업은 새로 발돋움하면서 대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다. 1994년 1월 20세기의 마지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되던 한국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SK텔레콤이 한국통신의 사업파트너로 선정됐다. 항간에는 SK가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기업인 탓에 선정됐다는 부정적 여론도 파다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장녀 노소영과 SK그룹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1993년 실시한 제2 이동통신 선정작업에는 코오롱과 포스코의 컨소시엄인 신세기통신이 선정됐으며 1996년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에선 KT프리텔, 한솔엠닷컴, LG텔레콤이 뽑혔다. PCS방식은 2세대 디지털 이동통신과 유사하지만 높은 대역폭과 주파수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기존 시스템보다는 높은 풀질의 음질을 제공할 수 있고 데이터 전송속도에서도 장점이 있어 화상서비스 등의 부가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었다. >> PCS사업자 첫 선정그러나 높은 주파수 대역으로 인해 많은 기지국을 세워야 하고 고속주행 자동차에서 통화품질이 안 좋다는 단점도 있다. 1997년 국내에서 시작된 PCS방식의 이동통신은 2000년 CDMNA2000을 시작으로 3세대 이동통신이 시작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시장에서 사라졌다.통신업체인 LG유플러스의 전신은 1996년에 설립된 LG텔레콤이다. 1997년 1월 LG텔레콤은 PCS 식별번호로 019를 받아 서비스를 시작했다.2000년 1월 데이콤, 2003년 12월 (주)파워콤이 각각 LG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주)파워콤은 '한국전력공사가 통신사업을 해선 안 된다'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전력의 통신사업부문을 분리해 2000년 1월 26일에 설립한 것이다. (주)파워콤은 종합유선방송 전송망 사업자로 지정되고, 2월에는 전기통신 회선설비 임대사업 기간통신사업자 허가를 받았다. 최대주주인 한국전력은 그해 7월 24일 (주)파워콤 민영화 계획으로 보유 주식 10.5%를 경쟁입찰 방식으로 20개사에 매각했다. 포항제철(주), SK텔레콤(주), (주)신세기통신 등이 낙찰받아 주주로 참여했다.2002년 12월 16일에는 (주)데이콤을 인수해 LG계열사로 편입했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방송공사, 삼성전자, LG반도체, 오리콤, 대우통신 등 27개 업체가 주주로 참여해 한국데이타통신(주)를 설립했다. 체신부에 의해 정보통신 업무 허가와 공중통신 사업자 및 행정 전산망 전담업체로 지정받고, 1983년 세계 33개국과 연결하는 국제 공중정보통신망을 개통했다. 1984년 국내 공중정보통신망(데이콤 네트)을 개통한 뒤 특정통신회선 업무·화상형 '천리안' 상용 서비스, 신용카드 정보시스템 서비스 등을 개시했다. 1988년 올림픽 종합정보통신망(INS)을 개발해 서울올림픽 때 운영했다.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다중매체 간에 국내외 교신이 가능한 MHS방식의 '데이콤 메일 400'이라는 소프트웨어 자체개발에 성공해 1989년 7월부터 시판하기 시작했다.>> 국제전화 60개국 확대1991년에는 상호를 (주)데이콤으로 바꾸고 1992년에는 국제전화서비스 지역을 60개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국제전화 002패밀리서비스, 국제팩스서비스도 개시했다. 1994년에는 저궤도 위성통신사업에 참여했으며, 1996년에는 시외전화서비스를 개시하고 한솔PCS 컨소시엄에 참여, PCS 사업권을 획득했다. 1997년에는 시내전화 사업권을 획득하고 하나로통신(주)를 설립, 시외전화 사전선택제를 실시했다.2003년 2월에는 (주)LG데이콤이 (주)파워콤의 지분 45.5%를 취득해 파워콤을 LG그룹의 계열로 편입했다. 2005년 개별 가정을 대상으로 초고속 인터넷 엑스피드(XPEED)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단기간에 100만 가입자를 확보했고, 이어 IPTV myLGtv, 인터넷 전화 myLG070을 서비스했다. 2006년 상호를 (주)파워콤에서 (주)LG파워콤으로 변경했고, 2008년 11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한편 LG텔레콤의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2004년 600만 명, 2006년 700만 명을 각각 돌파했다. 2008년에는 주식을 코스닥시장에서 증권거래소로 옮겨 상장했으며 2010년 1월 LG텔레콤은 국제전화와 시외전화 서비스업체인 LG데이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LG파워콤을 흡수 합병했다. 통합 법인은 6월 회사 이름을 (주)LG유플러스로 바꿨다.LG유플러스는 2010년 12월에는 LTE 장비공급업체로 선정됐으며 2011년 7월에는 4G LTE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2012년 2월 와이파이존을 전면 무료 개방하고, 3월에는 세계 최초로 LTE 전국망을 구축했다. 2013년 7월 세계 최초로 '100% LTE' 상용화에 성공하고 LTE-A 서비스를 개시했으며 그해 12월에는 모바일 간편결제 페이나우(Paynow)를 출시했다. 2014년 6월 사물인터넷 아이오티(IoT, Internet of Things)기술로 스마트 무인 사물함을 구축하고, 'U+미디어플랫폼'을 출시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통신업체인 LG유플러스의 전신은 1996년 설립된 LG텔레콤이다. 1997년 LG유플러스는 PCS 식별번호로 019를 받아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LG전자가 내놓은 '옵티머스 시크(Optimus Chic, 모델명: LG-LU3100)'. /경인일보 DB

2019-04-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1]엘지-9 3세 경영시대 개막과 그룹명칭 변경

냉전종식등 '脫이데올로기'세계 각국 '무한 경제경쟁'OECD가입등 국제위상 ↑전 계열사명 'LG'로 통일해외시장 고려 'CI 재정비'1990년대 세계는 지난 1세기가량 지속된 냉전체제 종식과 글로벌라이제이션시대 개막으로 특징지어진다. 1989년 11월 통일 독일 탄생 및 그해 12월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동서 간 냉전체제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탈(脫)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세계 각국은 무한의 경제경쟁에 직면했다.>> 국내외 경영환경 '급변'국내적으론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을 계기로 전국에서 '선(先) 성장, 후(後) 분배'의 개발철학에 반발하는 사회운동이 절정을 이루면서 산업 민주화가 정착됐다. 인플레이션의 확대재생산이 초래한 부동산불패 신화까지 기세해 고비용-저효율의 저성장시대가 초래된 것이다.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다자간협상)의 타결은 또 다른 변수로 한국 정부는 1996년에는 국내 증권시장과 유통시장을 전면개방하고 그해 9월에는 국제결제은행체제(BIS)에, 10월에는 국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각각 가입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을 업그레이드했다.국내·외적으로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크게 변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계기로 럭키금성그룹은 1995년 1월에 그룹의 명칭을 'LG'로 변경했다. Lucky의 'L'과 Gold Star의 'G'를 조합해 'LG'로 작명한 것이다. 1984년 그룹 계열에 있는 광고회사인 LG애드가 발족하면서 처음으로 'LG'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LG카드 및 LG 트윈스 등으로 LG라는 명칭은 그룹 내에서 점차 확대됐다.1995년 LG그룹으로의 명칭변경을 계기로 럭키·금성·럭키금성·반도 등이 혼재돼 있던 각 계열사의 명칭을 전부 LG로 통일했다. 수출 지향형 제조기업으로서 해외시장을 고려한 CI 재정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구자경 회장 퇴임의사한편 1995년 2월 22일 오전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구자경 당시 LG 회장(현 명예회장)은 "21세기에 LG가 세계 초우량기업이 되려면 젊고 의욕적인 사람이 그룹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며 퇴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업자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손이자 구자경 회장의 장남인 고 구본무가 국내 정상의 LG그룹 제3대 회장에 취임한 것이다.1975년 (주)럭키(현 LG화학)의 과장으로 입사한 구 회장은 심사과장·수출관리부장·유지총괄본부장 등을 맡았다. 1981년 금성사(현 LG전자)의 이사로 승진한 구 회장은 일본 주재 상무,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왔다. 입사 15년째인 1989년 그룹 부회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그룹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5년이 더 지난 1995년에 마침내 그룹의 총수가 된 것이다.급변한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에 부합하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고객 가치 혁신으로 LG를 한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사진 왼쪽)과 LG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어낸 고 구본무 제3대 회장. /LG그룹 제공

2019-04-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100]엘지-8 국제화·첨단화·금융자본화(하)

美 헌츠빌에 컬러TV 공장獨 VCR 유럽 진출 교두보사우디 PVC레진 세계최대자금조달 쉽게 '금융' 확충프로야구 'LG트윈스' 창단 LG그룹은 해외 진출도 돋보였는데 생산거점 현지화 위주의 국제화 작업은 1981년 9월 미국 헌츠빌에 컬러TV 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총 550만 달러를 들여 공장을 완공한 후 1982년 10월부터 컬러TV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시설투자비 6천700만 마르크를 들여 독일 보름스시에 연산 40만대의 VCR과 연 30만대의 컬러TV 생산 시설을 마련해 유럽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을 뿐 아니라 1984년 6월에는 미국 첨단연구개발 전진기지인 실리콘밸리에 UMI를 설립했다. 신제품 개발 내지는 기존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한 첨단기술 확보가 절실했던 탓이다.>> 생산거점 해외 현지화(주)럭키는 1984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합작(SABIC 85%:럭키 9%:금성사 6%)해 자본금 1억2천600만 달러의 NPC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설립했다. SABIC은 5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에틸렌 등 화공제품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기업체였다. NPC는 VCM과 PVC의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1986년에 준공한 생산공장은 연산 VCM 30만t과 PVC 레진 20만t의 생산능력을 확보했는데 PVC 레진 공장은 세계최대 규모였다.이 무렵 LG그룹의 현지생산거점 확보는 주로 주력기업인 금성사를 중심으로 추진됐는데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의 수입규제에 대항하고 국내의 재벌규제 강화 등 점차 열악해지는 국내 경영여건을 감안한 글로벌 다각화로 추정된다.금융부문에 대한 확충도 주목됐다. LG그룹은 1980년 6월에 부산투자금융을 인수하고 1983년 11월에 럭키증권이 대보증권을 인수 합병해 규모를 확대했으며 1982년 9월에는 금성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장차 그룹 계열사들의 기업공개를 통한 직접금융 확대와 규제 일변도의 은행 의존적 자금조달방식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LG그룹 산하에 금융 소그룹이 마련된 것이다.또한 1981년에는 럭키개발이 기업공개를 단행했고 1984년 7월에는 엘지애드를 설립해 그룹의 광고업무를 전담했으며 1983년 11월에는 럭키스포츠를 설립해 스포츠 레저사업에도 진출했다. 1990년 4월에는 안진제약을 인수해 럭키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5월에는 럭키화이바그라스(럭키오웬스코닝)를, 6월에는 럭키훽스트(주)를 차례로 설립했다. 럭키훽스트는 1993년 1월 럭키석유화학에 통합됐다. 같은 해 9월에는 럭키에폭시(주)를 설립하고 12월에는 희성산업이 편의점사업에 진출했다. 1991년 1월 희성산업을 LG유통(현 GS유통)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2년 8월에는 'LG25' 100호점을 열었다.>> 스포츠·레저부문 진출1990년에는 프로야구단 'LG트윈스'를 창단했다. 국내 프로야구는 1981년 11월 한국프로야구위원회(KPBC)의 발족으로부터 비롯됐다.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츠(부산),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OB 베어스(대전) 등 6개 구단으로 출범, 1982년 3월 27일 서울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KBO 리그가 본격화했다. 프로야구는 갈수록 인기가 커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들의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그 와중인 1989년에 MBC가 누적되는 적자로 청룡 야구단을 매물로 내놓았다. 프로야구위원회에서는 그해 10월에 삼성과 재계 수위를 다투는 현대그룹에 매각대금 80억원에 인수를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 정주영 회장이 매각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이유로 결제를 거부해 매각 작업이 무위로 끝난 것을 럭키금성 측에서 인수의사를 밝혀 1990년 1월에 최종인수계약을 체결해 구단 명칭을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변경했다.LG그룹은 1980년대에 수직 및 수평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 조만간 맞닥뜨릴 개방화, 금융화, 세계화 시대에 대비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금성사는 1976년 2월 TV생산 100만대를 돌파(사진 왼쪽)한데 이어 1977년 8월에는 19인치 컬러TV 양산을 시작했다. /LG그룹 제공

2019-03-2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9]엘지-7 국제화·첨단화·금융자본화(상)

장항제련소 최대주주 경영권 확보한국종합화학 나주공장 넘겨 받아美합작 건축자재 실리콘공장 건설전자·의료기기·반도체업계 진출 LG그룹의 약진은 재벌규제가 개시된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1981년 9월 서울 여의도에 연건평 4만8천평에 지상 34층의 쌍둥이빌딩을 착공했고 1982년 12월에는 유서 깊은 한국광업제련(장항제련소)의 경영권을 확보했다.장항제련소는 일제 하인 1934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국내에서의 금 생산증가를 획책할 목적하에서 국영기업으로 설립한 조선제련에서 비롯됐다. 1935년부터 충남 장항에 대규모 제련소를 건설하고 금 생산에 착수했으나 해방 이후 상공부 직영업체로 국유화돼 국영기업체로 운영된 뒤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됐다.>> 여의도 쌍둥이빌딩 착공이후 소유권이 한국산업은행, 대한전선, 풍산금속 등으로 이전되는 와중에 명칭도 삼성 광업, 한국광업제련 등으로 변경됐다. 1982년 온산동제련소와의 통합을 계기로 50%의 유상증자를 단행했으나 대주주인 대한전선과 풍산금속은 투자 매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 증자에 참여치 않았다. 대신 LG그룹이 증자분 62억1천210원을 부담, 한국광업제련(현 LS니꼬동제련)의 최대주주(53.7%)가 됐다.1984년 3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공장을 인수해 (주)럭키의 사업부문을 확충했다. 나주공장은 호남비료의 제2 질소비료공장으로 설립·운영하다가 1982년 5월 한국종합화학의 옥탄올공장으로 전환했지만 경영 부실로 정부는 이 공장을 분리해 (주)럭키에 매각했던 것이다. 당시 (주)럭키는 제품생산에 필요한 옥탄올의 안정적 확보가 절실했으나 새로 공장을 건설할 경우 최소 500억원 이상의 건설비와 공사기간만 2년여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인수 당시 나주공장은 옥탄올 연 5만5천t, 부탄올 연 1만여t, 이소부탄올 연 7천200t의 최신설비를 갖춘 공장이었다. (주)럭키는 나주공장을 인수함으로써 원료인 옥탄올의 안정적인 공급은 물론 옥탄올, 플라스틱 가소제, 플라스틱 원료, 플라스틱 가공공장을 수직적으로 결합, 국제적 규모의 종합화학 메이커로 도약하게 됐다.(주)럭키는 1984년 9월에 미국 유수의 화공업체인 Dow Corning사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서 럭키-DC실리콘을 설립하고 청주공장 내에 시설용량 2천700t의 실리콘공장을 건설했다. 건축자재인 실리콘의 국내제조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생산기술과 원료는 다우코닝사가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실리콘은 첨단의 화공제품으로 197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된 이래 수요가 증가일로에 있는 등 유망사업이었다. 더구나 장기적으로 원료인 Polymer 및 Monomer까지 생산할 수 있어 매력이 큰 때문이었다.>> 다양한 사업영역 확대1985년 6월에는 호남정유가 여수에너지와 정우에너지를 인수해 규모를 확대했으며 1986년 7월에는 럭키 소재가 대성 에탄올을 인수했다. 여수에너지와 정우에너지는 국내에 LPG를 독점적으로 수입하는 업체였으며 대성 에탄올은 주정(酒精)인 에틸알코올(에탄올)을 생산하는 업체이다. 한편 전자부문도 확충됐다. 1980년 7월 금성자판기를 설립하고 1983년 10월에는 금성전선이 한국중공업 경기도 군포공장을 인수합병해서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1986년 9월에는 일본 히다찌(日立電機)와 합작해 금성히다찌시스템도 설립했다. 그 와중에서 첨단산업에의 진출도 획책하여 1984년 2월에 금성전선이 금성광통신을 설립했다. 그해 3월에 금성통신은 의료기기 첨단화 및 전자화 시대에 대비해 금성의료기를 설립했다. 금성반도체는 미국 하니웰사와 컴퓨터제조기술 도입계약을 체결, 1984년 5월에 금성하니웰을, 1987년 1월에는 미국 EDS와 합작으로 STM(Systems Technology Management Co.)을 각각 설립한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은 1981년 9월 서울 여의도에 쌍둥이빌딩을 착공하는 등 국제화를 위한 약진을 계속했다. 사진은 럭키금성트윈타워 준공식 모습. /LG그룹 제공

2019-03-1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8]엘지-6 계열사수 2배로 신장

락희화학 '럭키'로 상호변경면 메리야스 국내 최대 생산日 합작 전기·전자부문 진출중동붐 특수 해외건설 설립대형슈퍼등 1400억대 매출1969년 12월 창업주 구인회 사망 당시 LG그룹은 화학, 전기, 전자, 무역, 언론 등 총 11개 기업군을 거느렸다. 삼성·현대그룹에 비해 계열사 수가 극히 적어 초라해 보인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의 업종이 주력인 화학과 전자 등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금성사는 삼영수지(합성수지성형물), 성예사(목제부품류), 성철사(철제부품류), 성아사(정밀부품), 성요사(전자부품), 성주사(제품양산용 주물) 등 9개의 중소부품업체를 설립해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경영했다.구자경이 2대 총수로 등장한 이후 첫 다각화는 1970년 4월 범한화재해상보험을 서정귀와 공동 인수한 것이다. 새로 가동한 호남정유의 원유 수송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분산이 주된 이유였다. >> '범한화재해상' 첫 인수1972년에 락희화학을 (주)럭키로 상호를 변경하고 울주군 언양면 망양리 338일대 11만평을 매입해서 1979년까지 하이타이, DOP, 솔비톨, 옥당 등 대단위 울산공장을 완성했다. 1974년 7월에는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 510평의 공장을 확보하고 럭키포장(주)를 설립했다. 편직기 50대를 설치하고 부산 동래공장에서 생산하는 레자(인조가죽) 소재인 면 메리야스를 월 300대씩 임가공했는데 당시 단일공장으론 국내 최대였다. 또 LG그룹은 전남 여천의 제3 석유화학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1978년 3월 자본금 1억원의 럭키석유화학을 설립했다. 그해 11월 럭키석유화학이 나프타분해공장과 저밀도 폴리에틸렌공장 건설 실수요자로 선정돼 1979년 4월 저밀도 폴리에틸렌사업을 전담할 목적으로 럭키폴리케미칼(주)를 설립했다.한편 이 무렵에는 전기 전자 부문에 대한 다각화 작업도 전개했다. 1970년 8월 금성사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 금성알프스전자를 설립했으며 12월 금성전기를 설립했다. 금성전기는 금성사와 금성통신으로부터 반송통신장치, 무선통신분야의 시설 및 영업권을 인수받아 전문화했다. 1971년 2월 금성전공을 설립해 전력 및 통신용 전선, 케이블판매업을 영위하다가 1975년 2월 희성산업으로 개명하고 사업 종목에 구룡광산 운영을 추가했다. 희성산업은 1978년 4월부터 그룹 내 홍보, 선전을 전담하는 House Agency(광고주의 자본 하에 있어 그 기업의 지배를 받는 광고대행사)로 재출발했다. 1971년 6월 22일에는 금성사의 투자로 설립된 부품공급 전담사인 성음사를 해체하고 대신 일본 포스터전기와 50대50으로 합작해 자본금 1억3천만원의 금성포스터를 설립했다. 라디오 및 TV용 스피커와 부품 등을 생산해 미국, 일본 등지에 수출할 목적으로 생산능력은 연 30만개였다.1974년 6월 일본 후지전기와 합작해 금성계전을 설립했다. 산업용 전기기기사업의 전문화를 위해 금성통신에서 분리·설립한 것이다. 1976년 1월 서울 중구 도동 1가 3에 있는 삼주빌딩을 대우그룹으로부터 매수해 그룹 사옥으로 활용했으며 2월에는 금성정밀을 설립해 정밀기계분야에도 진출했다.1978년 5월에는 에스컬레이터 등 승강기류 및 전동 공구를 생산하던 서통전기를 인수해 신영전기로 개명하고 승강기를 비롯한 중전기기분야에 참여했다. >> 첨단산업시대 대비 시작또 금성사는 서통그룹의 서통전기를 비롯한 서통전자, 서통정밀 등 3사의 주식 316만7천900주를 31억3천500원에 매입했다. 서통전자는 인수 직후 희성전자로 상호 변경해 1년간 운영한 뒤 1980년 7월 4일부로 해산했고 서통정밀은 인수 직후 해체됐다.1978년 6월 2일에는 금전등록기 전문생산업체인 서흥전기의 발행주식 중 45.2%인 14만2천831주를 1억5천639만9천945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금전등록기 사업전망 불투명과 재무구조 악화로 1982년 12월에 해체했다. 1979년 9월에는 금성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첨단산업시대를 대비했다.화학 및 전기 전자 이외의 다각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71년 6월 한국광업제련(장항제련소)을 대한전선과 공동 인수하고 10월에는 부산문화TV방송을 인수했으며 1973년 6월에는 국제증권을 설립했다. 학교법인 연암학원은 1974년 3월에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는데 1977년 3월에는 연암축산전문학교(현 연암대학)로 승격됐다.한편 중동건설특수가 절정을 이룬 1977년 10월에는 해외 건설 수주를 위해 럭키해외건설을 설립했다. 1978년 2월에는 럭키개발이 세계산업을 인수·합병해 국내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또 1978년 10월 럭키엔지니어링을 설립, 토건 관련 소그룹을 형성했다.이때 LG그룹은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1974년 유통업 근대화 및 대형화를 목표로 한 대통령 지시각서에 의해 대기업들의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그해 12월 럭키슈퍼체인(주)를, 1975년 9월에는 럭키체인스토아(주)를 각각 설립해 소매점의 연쇄 점화를 도모했다. 1976년 럭키슈퍼체인과 럭키체인스토아를 통합해 럭키체인(주)로 재발족, 대형 슈퍼마켓과 소형연쇄점을 종합관리했는데 서울과 안양, 의정부 등 총 11개의 대형슈퍼마켓과 체인점 20개소가 매출 1천400억원대를 기록했다.LG그룹은 구자경이 총수로 부상하면서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69년 11개 계열사에서 1979년에는 23개로 증가했다. 1970년대는 LG그룹 창업 이래 가장 활발한 다각화기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그룹은 1970년부터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계열사수를 늘렸다. 사진은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 설립 사진. /LG그룹 제공

2019-03-1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7]엘지-5 최정상 기업집단의 완성 '호남정유 설립'

정부, 정유시설 확충 관심'민간주도 추진' 소문돌자해외기업과 차관도입 계약국제신보 사장 내세워 설득1966년 최종 실수요자 선정 1960년대에는 제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점차 경제 규모가 확대됐다. 이에 따라 전기, 석탄, 석유 등의 에너지 소비도 점증해서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종래 석탄 중심에서 열효율이 높은 석유 중심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유시설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가동했는데 1965년 한 해 동안 20억원의 초과이윤을 누려 관심이 집중됐다. 정유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차제에 정부는 제2 정유공장 건설을 구상했는데 이 공장은 처음부터 민간 주도로 추진하기로 했다. >> '석유중심 정책' 전환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기업들은 LG, 롯데, 한국화약 등이었다. LG는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 받기 위해 1965년 가을에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계획서에는 정유 사업은 물론 납사 분해, 폴리에틸렌 생산공장을 비롯한 석유화학공장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연 매출 30억원에 불과한 락희화학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으며 정부에 의하여 거부됐다."('럭키40년사', P.34)LG는 재차 사업권을 얻기 위해 기존 사업계획서를 변경, 정유 사업으로 사업범위를 한정하고 경영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1966년 2월에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3천만달러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별도로 미국 Mobil사와 원유공급 및 운영자금 500만달러의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1966년 5월 정부는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한 결과 LG그룹의 호남정유를 비롯, 롯데그룹의 동방석유, 판본방직의 삼남석유, 한국화약의 삼양개발, 한양대재단의 한양석유 등 6개 기업이 응모했다.>> 제2 정유공장 신설 지정이 기업들은 공히 '해외 석유메이저들과 연결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안을 제출했는데 한화계열의 삼양개발은 미국 스켈리와 일본 스미토모(住友)를 합작선으로, 롯데의 동방석유는 일본의 이토추와, 판본의 삼남석유는 미국 썬오일 및 컨티넨탈 등과 연계했다. 대한증권의 삼양석유는 일본 일면(日綿)과, 한양대의 한양석유화학은 미국 스텐다드와 각각 연결했다. 호남정유(현 GS 칼텍스)는 LG그룹이 국제신보를 인수하면서 사장으로 영입한 서정귀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상대로 설득전을 전개했다. 그는 대구 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4, 5대 민의원을 역임하고 재무부 및 정무차관을 거친 지식인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 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러나 실수요자 선정이 임박할 무렵에 호남정유의 합작 선인 미쓰이물산이 삼성그룹의 한비(韓肥) 밀수사건에 연루돼 국내 여론이 좋지 않자 호남정유는 합작 선을 미국의 칼텍스로 전환했다. 1966년 11월 17일에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치열한 각축전도 종료됐다.1967년 5월 15일에 미국 칼텍스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LG그룹은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항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 사범 동창인 서정귀의 활약이 호남정유 실수요자 선정에 결정적이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LG는 호남정유를 내세워 1966년 5월 정부의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선정되면서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급부상했다. /GS칼텍스 제공

2019-03-04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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