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2]현대-24(끝) 현대중공업(하-지주회사체제로 전환)

고강도 구조조정 비주력부문 매각3조5천억원 현금 확보 '90% 달성'부채비율, 2017년 90%까지 줄여 2016년은 국내조선업계에 최대의 시련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장기불경기 탓에 세계적으로 해운 물동량이 크게 줄면서 조선업계에 타격을 준 것이다. 중소 조선소들이 줄줄이 폐업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중공업도 매출부진에 따른 재무구조 악화로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현대중공업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비주력부문 매각을 통한 부채비율 축소와 함께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3조5천억원 규모의 현금 확보를 목표로 2016년 6월 보유 중인 현대자동차, KCC, 포스코 등의 주식과 유휴 부동산들을 매각했다. >> 글로벌 금융위기 맞아또 현대종합상사, 현대기업금융, 현대기술투자, 현대자원개발을 계열 분리해 총 2조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현대삼호중공업 프리IPO(4천억원), 현대미포조선의 현대로보틱스 지분 매각(3천500억원) 등으로 2017년에만 총 1조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경주, 울산, 목포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현대호텔의 지분 100%를 2천억원에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의 금융업 철수 방침에 따라 하이투자증권 매각을 추진하고 현대커민스, 독일 야케법인, 중국 태안법인, 미국 현대아이디얼전기 등 비핵심사업을 정리해 목표인 3조5천억원의 90%가량을 달성했다. 덕분에 부채비율이 2016년 1분기 말 134%에서 2017년 상반기에는 90% 중반까지 줄어 업계 최고의 재무건전성을 확보했다.한편 현대중공업의 인적분할을 통해 조선과 해양플랜트를 담당하는 현대중공업(존속법인)과 전기 전자 시스템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 건설장비 사업을 전담하는 현대건설기계와 로봇메이커인 현대로보틱스 등 4사 체제로 쪼개 현대로보틱스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착수했다. 2016년 12월에 분사를 완료한 '현대중공업 그린에너지'와 '현대글로벌서비스'까지 포함하면 총 6개 계열사로 재정비한 것이다. 당시 현대중공업의 지분은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0.15%를, 현대미포조선이 7.98%를 지배했으며 현대중공업은 현대삼호중공업의 지분을 94%, 현대삼호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의 지분 42.3%를 보유하고 있었다.('한경비즈니스' NO.1126)그 와중에 현대중공업에 대한 '자사주의 마술' 시비가 불거졌다. 2017년 2월 27일에 개최된 회사분할 승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에 현대중공업 노조가 분할반대 목청을 높인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분할 목적은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분율을 높여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3세 세습을 위한 사전준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지분 8.07%)이 분할에 찬성함으로써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 전환작업은 2017년 4월에 완료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지분 '10.15%'회사분할 '자사주의 마술' 시비도2016년 4월 기준 기업집단 '12위'>> 새로운 의결권 확보지주회사로 전환된 현대로보틱스는 인적분할에 따른 '자사주의 마술'에 의해 현대중공업그룹에 대한 13.4%의 새로운 의결권을 확보했다. 정 이사장은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현대로보틱스의 지분을 25.8%까지 늘렸고 그룹에 대한 지배력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현대로보틱스가 자사주 13.4%를 보유함은 물론 자회사가 된 현대중공업에 대해서도 같은 지분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CNB저널' VOL. 553)'자사주의 마술'이란 기업이 인적분할을 할 경우 지주회사는 본래 갖고 있던 자사주와 동일한 비율로 신설 회사에 대한 지분을 자동으로 확보하게 되는데, 이 경우 지주회사는 신설회사에 대한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사주 마법'을 빌미로 오너들의 지배력이 편법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사주 마법'은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의 핵심과제로 부상했다.김종훈 의원(울산 동구)은 2017년 7월 6일 "현대중공업은 자사주 의결권 제도가 갖는 허점을 이용해 회사를 인적 분할함으로써 대주주의 지분율을 크게 높였는데 이는 법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고 정의에도 어긋난다. 공정위가 엄정히 조사해 재벌 일가가 편법, 탈법을 통해 얼마만큼의 이득을 얻었는지를 국민 앞에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이러한 사례를 막으려고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제윤경 의원 등이 인적분할 전에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거나, 인적분할시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등의 규제 법안을 이미 발의한 상태다. 법이 개정되면 자사주를 활용할 수 없어 지주회사 전환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다. 지주회사가 보유해야 할 자회사(손자회사) 지분율(상장사 기준)을 현재 20%에서 30%로 올리고, 부채비율도 현재 200%에서 100%로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2001년 정주영 창업주의 사망을 계기로 여러 개의 기업집단으로 분리됐다. 2016년 4월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를 보면 자산총액 기준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은 삼성에 이어 2위, 현대중공업그룹은 12위, 현대백화점그룹 29위, 현대 30위, KCC그룹 39위, 현대산업개발 56위에 각각 랭크돼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중공업은 2017년 지주회사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하며 지배력을 높였다. 사진은 현대중공업이 콜롬비아에 친환경 엔진 발전소를 완공한 모습. /현대중공업 제공

2019-01-2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1]현대-23 현대중공업 (상-종합중공업체로 성장)

미포만에 50만t급 조선소 준공1974년 '1억달러 수출의 탑' 수상정몽준 사장 취임후 계열사 합병 조선, 해양, 플랜트, 건설장비 등을 주업으로 하는 현대중공업의 모태는 1970년 3월 현대건설 내에 설치된 조선사업부다.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현대그룹에 조선소 설치를 권유한 때문이다. 조선사업부는 같은 해 9월 영국 조선회사였던 A&P 애플도어 및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 및 판매 협약하고 그해 12월 정부로부터 현대울산조선소 사업계획을 승인받았으며 이듬해인 1971년 2월 그리스 리바노스(Livanos)사에 26만t급 원유운반선 2척을 3천95만달러에 수주하는 등 초스피드로 진행됐는데, 다음과 같은 비화(秘話)가 있다.>> '조선사업부'로 시작1970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부지를 울산 미포만 백사장으로 확정하고 영국 최대의 버클레이즈은행을 찾아 4천300만달러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이 은행은 현대의 기술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정 회장은 버클레이즈은행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정 회장은 지갑에서 500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 그 속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며 끈질기게 롬바톰 회장을 설득해 바클레이즈로부터의 차관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영국 정부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이 통과되어야 차관이 실현되는데 여기서 또다시 제동이 걸린 것이다. ECGD는 정 회장에게 신조선 공급증명을 요구한 것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대외차관사업이 부실해질 경우 영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수소문 끝에 생면부지의 인물인 그리스 썬 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에게 매달려 리바노스(Livanos)사로부터 26만t급 원유운반선 2척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1973년 12월 현대건설 조선사업부를 분리해서 현대조선중공업(주)로 설립하는 한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으로부터 혼성차관 5천14만달러와 내자 74억원을 투입해 1974년 6월 울산 미포만에 최대건조능력 50만t급의 초대형 조선소를 준공하고 11월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가 한 치 앞도 예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룩한 쾌거여서 더욱 돋보였다. 1975년 4월에는 수리 전문 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소를 설치하고 1976년 2월 정부로부터 엔진사업을 승인받은 뒤 그 해 7월 엔진사업부를 출범시켰다. 1977년 중전기사업부와 기관차사업부를 발족시켰다.1978년 2월 상호를 현대중공업(주)로 변경하고 같은 해 8월 기관차사업부를 현대차량(주)로 분리 독립시켰으며 1979년 2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선을 건조했다. 1980년 4월 한국형 구축함 1호를 진수했으며 1982년 5월 정주영 회장의 6남 정몽준이 제4대 사장에 취임했다. 현대중공업은 1981년 현대특수화학, 1985년 현대해양개발, 1986년 현대종합제철, 1989년 현대엔진공업, 1993년 현대철탑산업, 현대로보트산업,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산업 등을 각각 합병했다.국내 첫 7천t급 '세종대왕함' 진수세계 최대 19만t급 쇄빙선 개발'글로벌 500대기업' 9년연속 선정>> 2002년 현대그룹서 분리2000년 3월에는 정주영 명예회장 아들들 간에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는데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면서 각 계열사가 분리 독립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중공업은 2002년 2월 계열사였던 현대미포조선과 함께 현대그룹으로부터 공식 분리돼 현대중공업그룹으로 재출범했다. 최대주주도 현대상선에서 정주영의 6남인 정몽준으로 바뀌었으며 2002년 5월에 현대중공업이 삼호중공업을 인수했다. 2004년 12월 선박 설계와 검사를 전담하는 미포엔지니어링을, 2008년에는 물류 전문기업인 (주)힘스를 각각 세웠다. 2006년에는 잠수함인 '손원일함'과 4천500t급 구축함인 '최영함'을 각각 진수했다. 2007년 5월 한국 최초로 7천t급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을 진수했다. 2008년 CJ그룹 계열사였던 CJ투자증권을 인수해 하이투자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2009년 현대종합상사, 2010년 현대오일뱅크 등을 잇따라 인수해 현대중공업그룹의 계열사로 편입했다. 2011년 2월 세계 최초로 선박 1천700척을 인도했고, 8월 세계 최대 19만t급 쇄빙 상선을 개발했다. 2012년 5월 세계 최고 효율의 SE태양전지를 개발하고, 2014년 2월 세계 최초로 '바다 위 LNG 기지' 건조에 성공했으며, 11월에는 건설장비 굴삭기가 영국에서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2015년 5월 누계기준 세계 최초로 선박 2천척을 인도했으며, 같은 해 8월 미국의 경제지 '포춘'지로부터 '글로벌 500대 기업'에 9년 연속으로 선정됐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중공업의 모태는 1970년 3월 현대건설에 설치된 조선사업부로 시작됐다. 현대중공업은 이후 꾸준히 발전하며 한국 조선업을 세계 1위로 이끈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제공

2019-01-1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90]현대-22 현대백화점

울산 현대쇼핑센터 1977년 개설1984년 본사 압구정동으로 이전2011년까지 지방에 잇따라 오픈 사업기반이 하드웨어 중심인 현대그룹이 소매업 중심의 유통산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8년 2월 27일 경일육운(주)의 설립에서 비롯됐다. 경일육운은 건설장비의 수리·임대를 목적으로 현대건설의 자회사로 설립됐다가 1970년 4월에 휴업 중이었으나 1971년 6월 15일 강릉비치호텔, 세운상가, 금강휴게소 등을 운영하기 위해 금강개발산업(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롭게 출발했다. 1974년 4월 정주영 창업주의 3남 정몽근이 제2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현대건설 보유 주식 30%까지 넘겨받은 금강개발은 현대건설의 자회사에서 벗어나 그룹 계열회사로 지위가 격상됐다. 정몽근은 1987년 2월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했고 1989년 8월 금강개발의 주식이 상장됐다.>> 금강개발, 소매업 진출금강개발이 종합소매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77년 7월 울산에 현대쇼핑센터를 개설하면서였다. 1982년 백화점사업부를 신설했고 1984년에는 본사를 서울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다. 1985년 12월 현대백화점 본점이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단지에서 영업을 개한 이래 1988년 9월에는 서울 무역센터점, 같은 해 12월에는 서울 반포레저타운(반포점)을 각각 오픈했다.이후 세력권을 지방으로 확대해 인천 부평점(1991.2), 부산점(1995.8), 서울 천호점(1997.8), 울산점(1998.3), 광주점(1998.6), 서울 신촌점(1998.7), 울산 동구점(2000.8), 전남 영암의 현대하이퍼렛(2001.4), 서울 미아점(2001.8), 서울 목동점(2002. 8)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2002년 현대백화점이 신설 회사로 출범한 이후에는 부천 중동점(2003.8), 일산 킨텍스점(2010.8), 대구점(2011.8)이 개관됐다. 반면 부평점(2003.7), 반포점(2005.1), 삼호점(2006.8) 등 3곳은 폐쇄됐다.한편 금강개발산업은 1999년 4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했으며, 금강개발은 같은 해에 현대리바트를 인수했다. 국내 최대의 가구메이커인 현대리바트는 당초 현대건설의 가구사업부를 분리해 현대종합목재로 설립한 것이다. 리바트가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1999년이다. 2006년(5.15% 지분)부터 꾸준하게 주식을 매입한 퍼시스그룹이 2010년 리바트의 지분율을 14.08%까지 높이자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그린푸드를 통해 11.84%의 지분을 매입했으며, 이듬해 지분율을 23.1%까지 끌어올리면서 최대주주로 올라섰다.2000년 4월에는 (주)현대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정주영 창업주의 직계 중에서 가장 먼저 현대백화점이 계열분리 된 것이다. 2001년 4월 현대백화점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처음 지정받았는데, 집단 순위는 26위, 계열회사는 15개였다.2007년 자산총액 2조원 경영 양호시장점유율 롯데이어 '2위' 차지정지선 '지분율 17.32%' 최대주주>> 호텔·휴게소 '회사분리'2001년 1월에는 호텔 및 휴게소사업이 분리돼 신설회사 (주)호텔현대로 이관됐으며, 2002년 11월 1일 현대백화점이 두 회사로 분할됐다. 즉 백화점사업은 동명의 회사(현대백화점)를 신설해 담당하도록 했으며 여행, 유니폼생산, 임대, 법인사업 등 비(非) 백화점부문은 존속회사가 담당하도록 하되 회사명은 (주)현대백화점H&S(현대H&S)로 변경했다.정몽근은 2000년부터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장남 정지선은 2004년에 현대백화점의 최대주주가 됐으며, 2007년에는 백화점 회장 겸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1974년생인 차남 정교선은 2005년부터 백화점 기획조정본부 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해 2009년에는 사장으로 승진했다.2000년 이후 현대백화점은 양호한 경영실적을 보이고 있다. 자산총액은 2007년 2조원을 넘어선 후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자본금, 매출액, 영업이익 등도 신설회사 첫해인 2003년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당기순이익의 경우는 증가속도가 매우 빨라 2005년과 2008년에 각각 1천억원과 2천억원을 돌파했다. 2010년 3월 백화점업계의 시장점유율은 롯데 52.7%, 현대 25%, 신세계 22.3% 등이다.2010년 3월 현대백화점의 최대 주주는 정지선(17.32%)이며, 현대H&S(12.41%), 정몽근(3.37%) 등을 포함하는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은 37.41%이다. 대표이사는 정지선(회장), 경청호(부회장), 하병호(사장) 등 3명이며, 정몽근은 미등기명예회장, 정교선은 기획조정본부 미등기사장이다. 2010년 4월 현대백화점그룹의 계열회사는 29개이며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대규모사기업집단 중 34위이다. 2012년 3월 백화점 수는 모두 13개이며 전체가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백화점은 1968년 경일육운(주)를 모태로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현대백화점 제공

2019-01-0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9]현대-21 현대기아차

울산공업단지에 10만평 부지 마련1968년 年 3500대 생산공장 착공국내최초 자체모델 '포니' 만들어 정주영 창업주는 울산공업단지 내에 10만평의 자동차공장 부지를 마련하는 한편 1967년 12월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합작해 자본금 5천만원의 현대자동차(주)를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아우 정세영을 임명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신진자동차(대우GM의 전신)는 일본의 토요타자동차와 기술 제휴해 생산한 코로나를 '새나라'란 상표로 국내 승용차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 전망이 밝은 것으로 판단한 포드는 국내 진출을 결심하고 1966년 4월부터 국내 기업들과 접촉 중이었는데 현대가 참여하면서 손을 잡은 것이다.>>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신생업체인 현대자동차가 자본의 회임 기간이 가장 긴 대형 산업에서 그것도 선발기업들과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갖기 위해선 토요타보다 한발 앞선 자동차 메이커와의 협력은 불문가지였다.1968년 5월부터 울산공단 내에 연산 3천500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착공했다. 파트너 포드와의 사이에 부품비율을 국산 대 외국산비율을 21대79로 하는 '자동차 조립기술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1월에 '코티나 1600D'를 생산했다. 이후부터 현대자동차는 신진자동차의 시장을 잠식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정부는 1972년 국내 자동차산업을 현대, 기아, 신진, 아세아 등으로 4원화하는 내용의 자동차산업 '4원화 방침'을 발표해 진입 장벽을 강화했다.1976년에는 국내 최초로 자체 모델인 '포니'를 생산해 한국 자동차역사의 신지평을 열었다. 이후 '포니신화'에 힘입어 1984년에는 포니 생산 대수가 50만대를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캐나다에 수출했다.이후 현대자동차는 1985년 엑셀, 1986년 그랜저, 1988년 소나타, 1990년 스쿠프, 엘란트라 등 상품의 다변화는 물론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현대가 자체개발한 알파엔진을 출시하고 갤로퍼를 생산했다. 1994년 엑센트, 1995년 아반떼, 1996년 다이너스티, 스포츠카 티뷰론을 시판했으며, 전 차종 생산 누계가 1천만대를 돌파했다. 1997년 터키 공장을 준공하고 아토스를 생산했다. 1998년에는 EF쏘나타, 그랜저XG를 생산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좌초한 선발업체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 국제 공개입찰'의 제3차 입찰에서 최종 낙찰자로 현대자동차가 확정돼 같은 해 12월 기아자동차 주식 51%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1999년 3월 현대그룹에 편입됐다.1996년 전차종 생산 1천만대 돌파좌초된 기아주식 51% 인수 계약'왕자의 난' 정몽구 자동차로 분가>> 1999년 기아차 그룹 편입기아자동차의 전신은 1944년 12월 세워진 경성정공이다. 경성정공의 설립자는 김철호 회장이다. 김 회장은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자전거 기술을 배웠다. 오사카 소재 삼화공장을 인수해 자전거 부품 너트와 볼트를 만들어 성공했다. 1944년 고국으로 돌아와 자전거 부품 제조공장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에서 국내 최초 국산 자전거인 삼천리호를 출시했다. 1952년 2월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62년 일본 마쓰다자동차와 기술제휴해 배기량 356㏄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했다. 이 차는 '삼륜차', '딸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1974년 마쓰다자동차의 파밀리아의 차체를 바탕으로 국산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를 탄생시켰다. 1976년 10월 아시아자동차공업을 인수했고 1981년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았다. 당시 소형승합차 봉고 코치는 '봉고 신화'를 창조하며 기아산업의 주력 차종이 됐다. 이후 승합차 베스타, 소형승용차 프라이드 등을 출시했고, 1990년 3월 현재의 회사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과당경쟁에 따른 적자누적 및 전문경영체제에 따른 도덕적 해이 등으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7년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4월 회사정리절차가 시작됐다.이후 현대자동차는 1999년 트라제XG, 베르나, 에쿠스 등으로의 제품 다변화 및 국내 최초로 자동차용 연료전지를 개발했다. 그러나 2000년 3월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인 소위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주영 창업주의 2남인 정몽구 공동회장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의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분가했다.2013년 기준 현대자동차는 세계 100대 브랜드 중 하나로, 판매량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다. 국내 3개 공장(울산, 아산, 전주)을 비롯해 미국, 터키, 체코, 러시아, 브라질, 인도, 중국 등에 현지 생산법인을, 세계 18개국에 판매법인을 두고 있으며, 승용차 13종, RV차량 5종, 그 외 택시 및 트럭 13종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연구소로는 미국디자인센터, 미국기술연구소, 유럽기술연구소 및 유럽디자인센터, 인도기술연구소, 일본기술연구소가 있다. 2014년 3월 기준 최대주주는 현대모비스로 20.78%이며, 정몽구 회장은 5.17%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회사는 총 57개사로, 이 중 상장회사는 기아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등 11개사이며, 비상장회사는 현대파워텍,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엠코 등 46개사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합작해 자동차 회사로 탄생했다. 사진은 국내 최초로 자체 모델로 개발된 '포니'가 수송차에 실려있는 모습. /현대자동차사 제공

2018-12-3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8]현대-20 현대산업개발

1986년 한라·한국도시개발 합병1999년 정세영 장남 몽규 회장 취임같은해 8월 현대그룹서 계열 분리정주영 회장의 형제 중 마지막까지 큰형을 보좌하며 현대그룹을 키운 이가 넷째인 정세영(鄭世永, 1928~2005)이다. 그는 고려대를 졸업한 후 일제 시대에 신문기자로 활동했으며 미군정기(1945~1948)에는 미군의 통역관으로 종사했다.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65년 태국의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연결하는 42번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건설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과 함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했으며 1976년에는 남미의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포니를 수출하면서 '포니 정'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1999년에는 종합건설업체인 현대산업개발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민간 주택건설 '1위'1976년 3월에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건설의 주택사업부를 분리해서 설립했다. 한국도시개발은 현대그룹 내에서 주택건설을 전담해 현대아파트를 공급해온 주택전문 건설사다. 설립 초기 서울 강남의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전국에 현대아파트를 주도적으로 건설해 왔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는 민간부문 주택건설실적 1위 기업으로 대한민국 아파트 문화 전파에 앞장서 왔다. 1977년 10월에는 창업주 정주영과 정인영 형제가 공동으로 한라건설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처음부터 토목공사와 플랜트, 해외사업에 집중하며 국내에서 삼천포 화력발전소 등 다수의 발전소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도로, 간척 및 항만사업 등의 토목사업과 더불어 다양한 건축공사를 수행했다. 해외사업도 활발히 벌여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잔 시멘트 플랜트 공사를 시작으로 중동과 동남아 지역에 진출해 도로, 건축, 플랜트 등 해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1986년 11월에 한라건설(주)와 한국도시개발(주)를 합병해서 현대산업개발(주)로 재발족했다. 1990년 5월에는 국내 최초로 아파트 입주자 사전 점검제를 실시했고, 1994년에는 ISO9001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을 획득했다.1996년 10월에 기업을 공개해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99년에는 정세영의 장남 정몽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같은 해 8월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됐다. 이후 현대산업개발그룹으로 성장하는 한편 대한민국 최대 실적을 보유한 주택에서부터 초고층빌딩, 대공간구조물, 도로 및 교량, 항만, 플랜트 등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활발히 사업을 영위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내 최고의 디벨로퍼로서 주택업계의 정상을 고수하며 건축, 토목, 플랜트 등의 분야에서도 활발히 사업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유화사업부를 발족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혀가며 성장해온 것이다. 2000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산업개발이 대규모집단으로 지정됐다.주택분야 최대실적 업계정상 고수사업영역 확대 '대규모집단' 지정2015년 시공실적 3조9천억 '10위'>> 통합브랜드 '아이파크'2000년 2월 (주)대우로부터 대우로얄즈 프로축구단을 인수해 3월 프로축구단 부산아이콘스를 창단했으며 4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산업개발이 대규모기업집단 소속회사로 지정됐다. 2001년 2월 '2001 디지털 경쟁력 향상대회 건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10월에는 주거용과 상업용 건축물 브랜드를 '아이파크(I'PARK)'로 통합했으며 2006년에는 영창악기제조(주)를 인수했다.영창악기의 창업자 김재섭(1919~2002)은 일찍이 일본의 피아노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며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1956년 11월 귀국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설립한 악기전문 업체다. 영창이란 상호는 창업주의 두 형인 김재영과 김재창의 이름을 따 작명한 것이다. 2004년 2월 피아노 내수시장 점유율 55%로 1위를 차지했으며 2012년에는 한국능률협회의 고객만족도(KCSI) 피아노 부문 1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펜더 스콰이어(Squier)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를 제조, OEM 공급했고, '페닉스(Fenix,여우)'라는 브랜드로 어쿠스틱 기타, 전기 기타 및 베이스 기타를 제조한다.현대산업개발은 2015년 3조9천203억원의 실적을 올려 국토교통부가 선정하는 시공능력평가 10위에 선정됐다. 주요 사업은 ①토목, 건축, 포장, 철강재설치, 전기냉난방공사업 ②항만건설업 및 준설업 ③조경공사업 ④전기 및 전기통신공사업 ⑤소방설비공사업 및 정비업 등이다. 현대산업개발그룹의 지배회사이며 계열회사에 현대EP(주), (주)아이콘트롤스, (주)아이서비스(주), 아이앤콘스(주), 아이투자신탁운용(주), 현대아이파크몰(주), 아이파크스포츠(주), (주)아이앤이, 호텔아이파크(주), 남양주아이웨이(주), 영창악기(주), 평택동방아이포트(주), 웰컴에듀서비스(주) 등의 국내 기업과 현대(삼하)공정소료유한공사, 천진영창악기유한공사, 천진영창강금주건유한공사, 영창노스아메리카 등의 해외 현지법인이 있다.(두산백과)/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세영 회장은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해 전세계에 수출을 하면서 '포니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은 현대산업개발이 2008년 5월 개관한 포니정홀의 모습. /현대산업개발 제공

2018-12-24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7]현대-19 위성그룹-'KCC'(하·현대그룹과 다툼·화학발전)

현대상선 2천억 규모 선박 소재경쟁사 대비 10배 외상매출채권대손처리 등 분식회계 의혹 제기 KCC자원개발은 정 회장에게 '조광료' 명목으로 2003년 1억8천819만9천원의 광업권 사용료를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3억2천379만7천원, 2005년 8억8천246만2천원을 지급했다. 2006년부터는 기타비용으로 처리해 그해 6억340만원, 2007년 5억4천758만2천원, 2008년·2009년 각각 5억4천935만7천원, 2010년 6억1천323만1천원 등 지난 8년 동안 43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업권이 결국 정몽열 사장의 '돈 줄' 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열 사장이 헐값에 매입한 가격이기에 훗날의 시세차익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여진다.(http://blog.naver.com/wolyo2253)>> 시숙부-질부 재산싸움KCC자원개발은 2013년 매출 376억원, 영업이익 20억원, 당기순이익은 1억원으로 계열사 간의 일감 몰아주기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KCC자원개발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으로 꼽혀왔다. 2013년 KCC자원개발의 매출 중 KCC와의 거래 규모가 79%를 차지했으며 2014년에도 82%의 비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5년 2월부터 본격 시행된 '총수일가 사익 편취 금지 규정'은 ▲연간 내부 거래 규모가 200억원보다 많거나 ▲전체 매출액에서 내부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12% 이상인 대기업집단 계열사를 규제 대상으로 분류한다. 단 대상은 상장사 기준으로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30% 이상, 비상장사는 20% 이상인 계열사로 국한했다.지주회사격인 KCC가 2015년 9월 18일 KCC자원개발을 흡수합병했다. KCC는 내부거래 비율을 낮추기 위해 KCC자원개발의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을 3% 이하로 낮추거나 내부거래비중을 30% 이하로 내리는 대신 KCC자원개발을 흡수합병하는 편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KCC의 KCC자원개발 흡수합병은 정몽진 회장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KCC자원개발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된 셈이다.(글로벌이코노믹, 2015-12-11)KCC그룹은 '시숙부와 질부 간의 재산권 다툼'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정몽헌 사후 2개월여 만인 2003년 10월 정몽헌의 처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의 총수 취임을 계기로 경영권분쟁이 불거졌는데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와 정몽헌의 삼촌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회장 간의 다툼이었다. 발단은 정상영이 사모펀드(신한BNP파이라투신운용 등)를 이용, 10월부터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시숙부인 정상영 KCC회장이 현대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빠르게 늘려가면서 현대그룹을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탓이다. 범 현대가의 지원을 받는 정상영 회장의 발 빠른 지분 확대에 현대그룹은 긴장했다. 2004년 3월 15일 KCC측은 현대상선에 대해 2천억원 규모 선박의 불분명한 소재와 강공자산 여부, 경쟁사 대비 10배에 달하는 외상매출채권, 거액의 대손처리 등 공개적으로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KCC가 5% 룰을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문제 삼아 법에 호소했다. 당시 KCC가 현정은 모녀 측보다 지분을 훨씬 많이 확보했으나 상장법인의 경우 5% 이상을 보유한 자는 1% 이상 지분에 변동이 발생했을 때는 5일 이내에 변동내용을 신고토록 했는데 KCC측에서 이를 위반했다며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소한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돼 금감위가 2004년 2월 11일 KCC에 대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종식됐다. 2006년에는 현대그룹이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합하면서 일단 판정승을 거뒀다. KCC는 경영권분쟁 10년만인 2014년에 현대상선의 지분을 전원 매각했다.엘리베이터지분 매각 명령 받아2004년 2월11일 경영권분쟁 종식계열사 7곳 자산 10조4천억 '31위'>> 美 실리콘제조업체 인수KCC는 2018년 9월 13일 미국의 글로벌 실리콘 제조업체 모멘티브 퍼포먼스 메티리얼즈를 30억달러(약 3조5천억원)에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역대 한국기업의 해외 M&A 거래 중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80억달러), 두산인프라코어의 밥켓 인수(49억달러)에 이어 3번째로 큰 거래다.KCC는 모멘티브 인수가 완료되면 글로벌 실리콘시장에서 미국의 다우 듀폰, 독일의 바커 등과 함께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 기업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함은 물론 실리콘 사업은 향후 KCC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입지를 굳힐 것으로 기대된다.KCC그룹의 주요 사업 분야는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이다. 유기화학 분야에선 도료, 폴리염화비닐(PVC), 실리콘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무기화학 분야에서는 건축자재, 유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울산, 언양, 여천, 여주, 전주, 문막, 아산, 세종, 대산, 김천 등지에 생산시설이 있다. KCC그룹은 (주)케이씨씨건설, (주)금강레저, 케이씨씨자원개발(주), 코리아오토글라스(주) 등 27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7년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리스트에 의하면 KCC그룹은 계열사 수 7곳에 자산총액은 10조4천660억원으로 31위에 랭크돼 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KCC그룹의 주요 사업분야는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으로 도료, 실리콘, 건축자재, 유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부산조달청 청사 및 비축창고 옥상 활용 744㎾p급 태양광 발전 설치 모습. /KCC제공

2018-12-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6]현대-18 위성그룹-'KCC'(상·금강으로의 출발)

1967년 국내 지붕재시장 30% 과점사세확장 힘입어 공장 수원 이전화학·건설·레저부문 사업 진출도정상영, 2000년이후 경영권 넘겨2014년 산업브랜드 '창호재 1위' 석회석 광업권 헐값매각 의심받아 정주영은 1958년에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근대적인 슬레이트공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슬레이트란 시멘트(85%)와 석면(15%) 등을 반죽해서 압착 성형한 후 경화시켜 만든 천연 또는 인조형의 얇은 판으로 지붕재료이다. 정주영의 막내 동생 정상영은 약관인 22세부터 금강스레트의 설립은 물론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맏형 정주영이 막내 동생 몫으로 설립한 만큼 이 회사는 처음부터 정상영이 독자경영을 한 것이다. 정상영은 1959년 5월 18일에는 이사로, 1960년 9월27일에는 대표이사로 등재했다. 정주영이 막내 동생의 경영능력을 믿은 때문이다. 설립초기부터 연평균 80%씩 급신장해 1967년에는 국내 지붕재시장의 30%를 점유하는 과점업체로 성장했다. >>정상영 22세때 금강스레트 설립 관여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과 함께 농촌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전통적 농가주택인 초기집의 지붕재료를 볏짚 대용으로 슬레이트를 사용한 것이다. 1969년에는 새로운 상품 개발과 사세확장에 힘입어 공장을 수원역 인근으로 옮기고 밤라이트와 나무라이트 등 불연성 건축재와 단열재를 생산하는 종합건자재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암면, 석고보드, 판유리 등 제품다변화를 추구했다. 1970년 새마을운동 시작과 함께 슬레이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금강스레트공업의 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1973년에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정상영은 금강스레트를 착실히 키워 1974년 7월에는 경남 울산에서 도료,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고려화학을 설립하고 1976년에는 금강스레트공업의 상호를 (주)금강으로 바꿨다. 1985년에는 고려화학의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며 1989년 6월에는 (주)금강의 건설사업 부문을 분리해 금강종합건설(KCC건설의 전신)을 세웠다. 또한 같은 해 8월에 금강레저를, 1990년 (주)고려시리카를, 1996년 금강화학(주)을 각각 신설했다. 2000년에는 주력 기업인 금강과 고려화학을 합병해서 상호를 금강고려화학으로, 2005년에는 다시 (주)KCC로 바꿨다. 2001년에는 프로농구단 KCC이지스를 창단했는데 모체는 1977년에 창단된 현대전자 실업농구단이다. 현대전자 실업농구단은 1997년에 프로 농구가 출범하면서 대전을 연구지로 한 현대 다이넷 프로농구단으로 승격됐다. 1999년 대전 현대 걸리버스로 팀 이름이 변경됐으며, 2001년 5월에는 KCC가 대전 현대 걸리버스 농구단을 인수하면서 연고지를 대전에서 전주로, 팀 이름을 전주 KCC 이지스로 변경해서 재창단한 것이다. 2000년 이후 정상영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2세들에게 넘겼다. 장남 정몽진은 2000년 고려화학과 금강이 합병할 때 그룹 회장에 취임했으며 차남 정몽익은 2006년부터 KCC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다. 3남 정몽열은 2002년 케이씨씨건설 사장에 선임돼 회사를 이끌고 있다. 2002년 3월 코리아오토글라스(주)에 안전유리사업부를 영업양도하고, 중국현지법인 금강화공북경유한공사를 세웠다. 2004년 11월 (주)이케이씨씨를 흡수합병했다. 2006년 9월 터키 현지법인, 9월 인도 현지법인에 이어 2007년 6월 베트남 현지법인을 세웠다. 7월에는 충남 대산에 대죽 2공장을 준공했다. 2008년 5월 폴리실리콘 파일럿공장을 신설했다. 2010년 11월 아르케솔라(주)를 흡수합병했다. 2011년 12월 '7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2012년 12월 선박도료, VI용 세라믹 3개 부문이 세계일류상품에 선정되었다. 2013년 5월 KAM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2014년 4월 '2014 한국 산업 브랜드 파워(K-BPI) 창호재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그룹 편법경영 시비도 그러나 그 와중에서 KCC그룹은 편법경영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KCC자원개발(구 고려시리카)은 강원도 영월군 북면의 석회석 광업권을 1995년 1월 한일석회제조로부터 매입한 뒤 이를 2000년 3월 14일에 정상영 회장의 3남인 정몽열에게 800만원에 매각했다.(2000년 KCC자원개발 감사보고서) 헐값매각 시비의 발단이다.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 사장이 취득한 광업권의 매입가격이 석연치 않은 부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20년 전이기는 하지만 800만원에 광업권을 매각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KCC자원개발은 모기업인 KCC가 지분 60%를 확보하고 있으며 나머지 40%는 정몽진 KCC 회장(38.6%), 정상영 KCC 명예회장(1.263%), 정몽익 KCC 사장(1.263%), 정몽열 KCC건설 사장(0.037%) 등의 순으로 오너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또한 KCC자원개발의 최대주주인 KCC의 지분은 정몽진 회장(17.76%), 정상영 명예회장(10.0%), 정몽익 사장(8.81%), 정몽열 사장(5.29%) 등이 보유하고 있어 KCC자원개발은 사실상 정씨 일가의 지배 하에 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주)금강은 1958년 8월 현대건설 제1호 자회사인 금강스레트공업(주)를 설립했다. /KCC제공

2018-12-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5]현대-17 위성그룹-'성우'

1997년 네 아들에게 경영 물려줘시멘트·레저 두축 꾸준하게 성장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鄭順永, 1922~2005)은 한양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현대자동차공업에 입사했으며, 1950년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겨 전무와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 12월 현대건설의 시멘트사업부를 갖고 나와 현대시멘트를 차렸는데 현대시멘트는 70~80년대 도로 및 아파트 등의 건설붐을 타고 급성장했다. 현대시멘트 영월공장은 1994년엔 연산 700만t 규모의 대형 공장으로 거듭났다. 정순영은 현대시멘트를 모기업으로 해서 다각화에 박차, 1975년 9월에는 용접봉, 카바이트, 자동차부품 등을 생산하는 현대종합금속을 설립했다. >> '순영' 별도 그룹 형성1985년 5월 화물운송업체인 현대종합상운을 설립했으며 1987년 5월에는 드럼, 디스크, 허브 등의 자동차 부품용 주물을 생산하는 서한정기를, 1989년 2월에는 미국 벤딕스사와 합작해서 시트벨트, 에어백 등을 생산하는 서한벤딕스를 각각 설립했다. 현대종합상운은 현대그룹의 물류를 담당했으며 서한정기 및 서한벤딕스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부품납품을 통해 대규모 레저타운을 건설하고 이를 경영하기 위해 성우종합레저를 설립함으로써 관광업에도 진출했다.성우그룹은 1990년 당시 매출액 2천38억원의 중견 재벌로 부상했다. 정순영은 현대그룹으로부터 분가한 후 10년 만에 별도의 기업집단을 형성했는데 성우그룹 또한 한라그룹처럼 모체인 현대그룹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재벌화한 것으로 추정된다.1995년부터 성우그룹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정식 명칭은 현대시멘트·성우그룹이다. 정순영 회장은 1997년 그룹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네 아들에게 바통을 넘겼다. 큰아들 몽선이 그룹을, 둘째 몽석은 현대종합금속을, 셋째 몽훈은 성우전자를, 넷째 몽용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물려받았다. 정몽선이 경영을 총괄하던 성우그룹은 시멘트와 레저를 두 축으로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했다.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건설경기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성우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공장에 재고가 쌓이고, 수주도 급격히 감소해 일감이 떨어진 것이다. 자회사 성우종합건설이 시공하려던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프로젝트도 난관에 봉착하며 채무보증을 섰던 약 8천억원도 묶이면서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 모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시멘트와 함께 성우그룹의 또 다른 성장축이었던 661만㎡ 규모의 강원도 횡성 현대성우리조트도 결국 매각했다. 지금은 신안그룹 품으로 넘어가 '웰리힐리파크'로 이름이 바뀌었다.장남 '몽선' 2015년 회장직 내놔차부품 제조업 '현대성우홀딩스'2016년기준 연매출 519억원 기록>> 4남 '몽용' 그룹 맥 이어가부친으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장남 정몽선은 총수가 된 지 20년이 채 못 된 2015년에 현대시멘트 이사에서 해임된 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KEB하나은행이 24.43%로 대주주인 현대시멘트는 현재 사모펀드(PEF)와 일부 대형 시멘트회사들이 인수를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주의 4남인 정몽용 회장이 현재 자동차 부품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현대성우홀딩스로 그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현대성우홀딩스(주)의 전신은 1987년 자동차부품 제조·판매회사로 설립됐던 서한정기(주)다. 1995년 5월 상호를 성우정공(주)로 변경하고, 10월 성우 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정순영 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의 4남인 정몽용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00년 6월 모그룹인 성우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신청하고, 상호를 성우오토모티브㈜로 변경했다. 이후 타이거넷(주), 성우메탈테크(주), 현대에너셀(주), 성우로지스틱스(주) 등을 연달아 흡수 합병했다. 2013년 5월 현대성우오토모티브코리아㈜로 상호를 바꿨다가 2015년 5월 현대성우홀딩스(주)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다.자동차 부품 전문업체로, 주요 제품은 자동차용·산업용 부품, 알로이 휠, 배터리 등이다. 2000년 미국 앨라배마에 성우USA를 설립하고 2008년 중국 룽커우에 연간 200만대 규모의 휠 공장을 완공하면서 글로벌 생산체제를 구축했으며,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쿄에 해외사무소를 두고 있다.2016년 기준 연간 매출액은 519억원, 영업이익은 480억원, 당기순이익은 473억원이다. 최대주주는 10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정몽용 회장이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 회장이 세운 성우그룹은 자동차 부품 등을 생산했으며, 외환위기 후 지난 2015년 5월 현대성우홀딩스(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사진은 알로이 휠 공정 모습. /현대성우홀딩스 제공

2018-12-03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4]현대-16 위성그룹-'한라' (하)

최대 車부품업체 외국계에 넘어가한라중공업은 정부가 현대에 맡겨건설 중심으로 '경영 정상화' 성공 외환위기 여파는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기계에도 미쳤다. 1980년 2월 아트라스제지를 만도기계로 상호를 변경한 것인데 1997년 한라그룹이 좌초하면서 1998년 만도기계는 수원지방법원에 낸 화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1998년 11월 기업 회생을 위한 화의인가 결정을 받았다. 1999년 경주공장을 프랑스 발레오사에, 아산공장을 UBS에 각각 매각했다. 아산공장은 이후 만도공조(주)로 사명을 바꾸고 김치냉장고 딤채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1999년 11월 만도기계는 (주)만도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 출범했다. 회사의 지분 70%는 미국 체이스맨해튼 컨소시엄으로 넘어갔으며 2000년 2월에는 주식이 상장 폐지됐다.>> 만도기계 '매각' 결정한편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현대중공업에 5년간 한라중공업(삼호조선)에 대한 경영을 맡겼다. 5년 뒤 한라중공업이 정상화되면 현대중공업을 우선 매수대상자로 선정한다는 조건이었다. 1998년 한라중공업의 원활한 매각을 위해 한라중공업이 섰던 채무보증을 떼어내고 자산과 부채만 이전해 가교(架橋)회사인 RH중공업을 새로 설립했다. RH란 상호는 당시 한라중공업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던 미국계 투자회사인 로스차일드와 한라중공업의 영문 이니셜을 딴 것으로 RH중공업은 1999년에 삼호중공업으로 변경됐다. 현대중공업은 삼호중공업을 2002년에 정식으로 인수해 2003년 현대삼호중공업으로 또다시 바꿨다.만도기계를 매각한 한라는 이후 한라건설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 경영을 정상화했다. 한라건설은 1994년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95년에는 서해안고속도로 공사를, 1997년에는 목포 신외항공사를 개시했으나 그해 12월 계열사 빚보증 탓에 부도 처리됐다. 1998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이 한라건설의 화의신청을 받아들여 기업회생에 나선 후인 1999년에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4천억원의 채무를 모두 갚았다.2008년 1월 한라그룹은 KCC, 산업은행, 국민연금관리공단 등과 함께 한라건설컨소시엄을 형성해 지분 72.4%를 사들이며 모기업이었던 만도를 다시 인수했다. 이때 한라건설이 컨소시엄의 주력기업으로 참여해 만도를 계열사로 편입한 것이다. 10월에는 독일의 헬라와 합작으로 만도헬라 일렉트로닉스를 설립했다. 2009년 7월 PSA(푸조-시트로엥)에 캘리퍼 브레이크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만도는 상장 폐지된 지 10년 만인 2010년 5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다시 상장했다. 12월에는 만도의 자동차 전자제어장치인 'ABS/TCS'가 대한민국 100대 기술로 선정됐다. 2011년 1월 독일 브로제사와 자동차부품 합작사를 세웠다. 4월에는 폭스바겐으로부터 총 2천억원 규모의 브레이크 제품 수주에 성공했다. 7월에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 기업인 (주)이폴리머를 인수했다. 그해 12월 만도의 영상기반지능형조향장치가 지식경제부로부터 제10회 으뜸기술상을 수상했다.2008년 모기업 '만도' 다시 인수2010년 상장폐지 10년만 재상장홀딩스 등 지주회사 3개로 재편>> (주)만도 설립 인적분할2013년 6월 세계 100대 자동차 부품업체 가운데 만도가 46위에 선정됐다. 한라그룹은 2013년 9월 한라건설을 (주)한라로 바꾸고 2014년 7월에는 만도를 인적 분할해서 존속법인이자 지주회사로 한라홀딩스를 세우고, 자동차 부품 제조 및 판매업을 하는 신설회사로 (주)만도를 설립하는 인적분할안을 통과시켰다. 9월에 새로 출범한 한라홀딩스는 자회사의 사업내용을 지배·경영지도·정리·육성하는 지주사업과 브랜드·상표권 등 지적재산권의 관리업, 국내외 광고 대행업, 광고물 제작·매매 등을 사업 목적에 추가했다. 또 시스템 개발 및 통합(SI), 운용(SM) 사업과 소프트웨어 개발·임대업, 정보통신기기 관련업도 사업 목적에 새로 올렸다.2015년 3월 말 기준 한라그룹은 지배회사인 (주)한라를 포함해 64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이 중 상장회사는 한라그룹의 지주회사인 (주)한라홀딩스, (주)한라, (주)만도 등 3개사이며, 비상장회사는 한라마이스터(유), 한라아이앤씨(주), 한라엔컴(주), 목포신항만운영(주), 한라개발(주), (주)한라세라지오, 한라오엠에스(주) 등 61개사다. 건설사업 부문에는 한라, 한라엔컴, 대한산업, 한라개발, 한라오엠에스, 한라세라지오가 있고, 자동차사업 부문에는 만도, 한라스택폴,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 만도브로제, 만도신소재가 있다. 유통/서비스 사업부문에는 한라마이스터와 목포신항만운영 등의 회사가 있다. 2015년 3월 말 기준 (주)한라의 최대주주는 한라그룹의 회장인 정몽원이며, 보유 지분은 23.16%다.(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기업, 굿모닝미디어)1997년 외환위기 와중에서 30대 재벌기업의 3분의 1이 좌초됐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한라는 사망판정을 받았다가 되살아난 특이한 경우다. 한라는 회생 과정에서 구조조정에 필요한 외국 자금을 적기에 조달받아 '검은 머리 외국인'논란을 빚기도 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한라그룹은 외환위기로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인 만도기계를 매각했지만, 2008년 한라건설컨소시엄을 통해 다시 만도를 계열사로 편입시켰다. 사진은 만도가 개발한 전기자전거 풋루스 국외 전시회 모습. /만도 제공

2018-11-26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3]현대-15 위성그룹-'한라' (상)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형제들은 총 6명으로 장남 정주영 밑으로 인영·순영·세영·신영·상영 순인데, 신영은 1962년 독일유학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정주영의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자는 '부도옹(不倒翁)' 정인영(1920~2006)이다. 1989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사업을 확장, 재계의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정주영보다 5살 아래인 인영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6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YMCA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2년 동안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영어과에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76년 현대양행 설립 경영 전념안양공장 '만도기계'로 독립시켜국내 최대 자동차부품업체로 성장>> 인영, 별도사업 시작 1947~1951년까지 동아일보·대한일보 기자를 지냈고, 6·25전쟁 때는 미군 공병대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형 정주영이 운영하던 현대건설에 미군이 발주한 공사를 수주하도록 도왔다. 1951년 정주영의 요청으로 현대상운(주)에 입사해 1953년까지 전무이사를 지냈다. 1953년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겨 1969년까지 부사장을,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사장을 맡았다.정인영이 별도의 사업을 영위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9월 스푼·나이프·포크 등을 만드는 (주)현대양행을 군포에 설립하면서부터였다. 현대양행은 1969년부터 자동차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68년에는 아트라스제지(주)를 설립했다.1976년 현대건설 사장에서 물러나 현대양행 경영에 전념하면서 1977년 인천조선(주)를, 1978년 한라시멘트(주)를 각각 설립했다. 또 현대양행에 발전설비 생산을 추가, 세계은행(IBRD) 차관 8천만달러와 국민투자기금 등을 투입해 1976년에 창원기계공업단지 내 160만평 대지 위에 세계 최대 공장건설에 착수했다.그러나 공급능력 과잉에 따른 발전소 수주물량 부진과 자금난으로 현대양행 창원공장 건설이 중단된 상태에서 1980년 전두환 정부 출범과 함께 단행한 중화학 투자조정으로 창원공장이 정부에 귀속됐다. 정부는 1980년 10월 창원공장을 별도로 운영하는 한국중공업(주)를 설립한 뒤 2000년 두산그룹에 매각, 2001년에 두산중공업(주)로 상호가 변경됐다.이후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자동차부품 중심으로, 군포공장은 건설중장비 메이커로 각각 성장했는데 안양공장의 기계사업분야를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기계(주)로, 건설을 담당했던 자원개발부를 한라자원으로 각각 독립시켰다. 1980년 2월에 아스트라제지의 상호를 만도기계(주)로 변경했다. 만도기계는 1970~1980년대 자동차산업의 붐을 타고 현대자동차 등에 대한 납품을 통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부품업체로 성장했다.한라자원은 1982년 만도기계 공장증설공사를 맡았고 1986년에는 평택에 한라공조의 공장을 지었으며 1990년에는 한라건설(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라건설은 1994년에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95년에는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를, 1997년에는 목포 신외항공사를 개시했으나 그해 12월 계열사 빚보증 탓에 부도 처리됐다.시멘트·건설·금융등 영역 넓혀자금사정 불구 무리한 사업 확장1997년 12월 부도 '35년만에 붕괴'>> 현대그룹에서 독립정인영은 만도기계의 성장에 힘입어 1976년 12월 인천 항동에서 한라중공업을 설립했다. 선박, 철 구조물, 집진설비 제작 등을 영위할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이를 계기로 1977년에 정식으로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그는 1978년 1월에 한라시멘트를 설립하고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에서 시멘트생산에 착수했다. 1980년 7월에는 한라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진출했고 1986년 3월에는 자동차히터, 에어컨 등을 생산하는 한라공조를 설립했으며 1988년 9월에는 한라창업투자를 설립해 금융업에도 진출했다.1996년 당시 한라그룹은 모기업인 만도기계를 비롯해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한라건설, 한라창업투자 등 총 16개 계열사가 5조2천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1997년 기준 한라그룹은 자산총액 6조6천400억원으로 재벌순위 12위에 랭크됐다.하지만 한라는 무모할 정도의 공격경영은 계속했다. 인천조선은 1990년에 한라중공업으로 바꿨고 1996년에는 전남 영암군에 150만t 규모의 조선소(삼호조선)를 건설했다. 현대, 삼성, 대우 등 조선소들이 공급과잉으로 '제 살 깎기 경쟁'이 한창인데 건설했던 것이다. 삼호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한라중공업은 1996년 485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금융부채는 1996년 1조8천억원에서 불과 1년만인 1997년에는 2조5천억원으로 급증했다.또한 한라그룹은 열악한 자금 사정에도 1997년에 전남 대불공단 내 제지공장을 완공하는 한편 재생타이어공장, 정보통신, 금융사업 등 무리할 정도로 신규사업에 착수했다. 영국 웨일즈에 대규모 중공업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비롯 독일(펄프공장), 터키(신문용지 및 차량부품공장), 프랑스(천연가스사업), 인도네시아(자동차부품 및 펄프공장) 등 해외사업에도 주력했다.정인영은 1997년 1월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그룹 경영권을 둘째 아들 정몽원에게 물려줬지만, 1997년 한라그룹의 부채총액은 6조5천억원에 이르러 30대 재벌 중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가장 높았다. 한라는 1997년 12월 6일 부도 처리되면서 창업 35년만에 붕괴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주영 회장의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정인영 회장은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사업을 확장하는 등 재계의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은 한라그룹 홈페이지의 역사관 모습. /한라그룹 제공

2018-11-1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2]현대-14 경영권 분쟁과 현대그룹 축소(하)

2011년 자동차그룹, 현대건설 인수최대주주로 계열社 지분 35%차지정몽구·의선 父子 글로비스 창업'경영권 편법 상속' 여론 호된 비판현정은, 자금난 현대상선 살리기 증권매각 불구 실패 경영권 넘겨 현대그룹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여러 개의 중견기업집단으로 재편성됐는데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은 약진을 거듭해서 2011년 4월 현재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55개 그룹 중 현대차그룹은 4위에, 현대중공업그룹은 6위에 각각 랭크됐다.국내 최대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의 채권단에선 현대건설 산하 비상장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과 철 구조물 전문 제작업체 현대스틸산업, 광주원주고속도로 건설, 관리 및 운영을 위한 제2 영동고속도로 외에도 현종설계, 부산정관에너지, 현대서산농장(아산만 매립지 운영업체), 현대씨엔아이, 경인운하, 현대건설인재개발원 등을 묶어 2011년에 재매각이 추진됐는데,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현대그룹(현정은)과 현대차그룹(정몽구)이었다.>> 중견기업집단 재편성현대그룹은 기존의 연고를, 현대차는 정주영 왕회장의 장자로서의 적통성을 각각 인수명분으로 내놓은 것이다. 인수가격을 현대그룹은 5조5천억원에, 현대차는 5조1천억원에 응찰했으나 결과는 인수대금을 더 많이 써낸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됐다.특히 현대그룹은 자금출처 문제에 시달렸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차입금 1조2천억원 등 대출금 세부계획을 제출하라는 채권단의 소명 요구에 현대그룹은 MOU가 체결된 상황에서 대출 관련 세부상황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며 버틴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그룹은 외환은행이 MOU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률적 권한 범위 내에서 적정하게 행동했는지 감독 당국에 조사를 요청함과 아울러 현대그룹 2개의 핵심 자회사인 현대상선 및 현대증권을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고발조치까지 했다. 결국 채권단은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고 현대자동차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 2011년 4월 1일 현대건설의 인수대금을 완납함으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2011년 8월 현대자동차가 현대건설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를 포함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등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약 35%다.현대차가 모태 기업인 현대건설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정몽구·의선 부자는 소규모 물류업체인 현대글로비스를 창업해 계열사들의 일감 몰아주기로 덩치를 키운 후 글로비스로 하여금 계열사 주식을 취득해 현대차그룹의 경영권을 상속하는 편법을 구사함으로써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삼성그룹의 3세 세습과 함께 세금을 거의 물지 않고 그룹을 통체로 세습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천440억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현대전자(하이닉스)는 2011년 11월 11일 단독인수의향을 밝힌 SK텔레콤에 3조4천267억원에 인수됐다.>> 정회장 사후 5개로 나눠창업자 정주영 사후 현대그룹은 재벌서열 2위의 현대기아차그룹(정몽구), 6위의 현대중공업그룹(정몽헌), 17위의 현대그룹(현정은), 24위의 현대백화점그룹(정지선)과 현대산업개발(정세영의 장남 정몽규) 등 5개 그룹으로 분리됐다.이후 현대그룹의 규모는 더욱 위축됐다. 현정은 회장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2016년 3월에 현대증권을 KB금융지주에 매각했는데 동사는 1962년에 국일증권으로 설립돼 1977년 11월에 현대그룹에 인수돼 1986년에 현대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현대증권은 2016년 12월에 KB투자증권과 합병되어 KB증권이 됐다.그럼에도 현대상선을 회생시키지 못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겼다. 2016년 3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가 한국산업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76년 현대그룹의 계열사인 아세아상선으로 설립됐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이탈리아의 한 정유업체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해 납품했는데 발주업체가 하자를 이유로 한 척의 인수를 거부하자 차제에 현대그룹에서 이 배를 토대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이 회사를 세울 때 조언을 한 장본인이 현정은 회장의 부친인 현영원으로 당시 그는 신한해운을 운영하는 전문가였다. 현영원은 이를 계기로 1983년에 현대상선에 합류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이 분리되면서 현대그룹에 남은 계열사는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한 현대글로벌, 현대아산, 현대유엔아이, 현대엘앤알, 에이블현대호텔리조트, 현대투자네트워크, 현대경재연구원 등 10여개 업체로 2015년 21개 계열사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경영권 분쟁과 외환위기로 현대그룹은 중견기업집단으로 재편성됐는데, 창업자 정주영 회장 사후 현대기아차그룹, 현대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사진은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연합뉴스

2018-11-1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1]현대-13 경영권 분쟁과 현대그룹 축소(상)

KCC, 지분 확보 '그룹 인수' 발표현대, '5%룰 위반' 제기 법에 호소금감위, 전량 처분 명령… '판정승'중화학 수출전담 종합상사도 분리정몽헌의 사망 직후 재계서열 15위로 축소된 현대그룹(정몽헌 계)이 경영권분쟁에 휘말렸다. 정몽헌 사후 2개월여 만인 2003년 10월 정몽헌의 처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의 총수로 취임했는데 말들이 많았다. 전업주부 출신의 경영자가 한계상황의 현대그룹을 잘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현정은은 호남의 대지주 출신 기업가 현준호의 손녀이자 현대상선 현영원 회장의 장녀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정몽헌과 가약을 맺은 뒤 가정주부로 일관해왔다.>> 현정은 그룹총수 취임그 와중에 현대그룹의 경영권분쟁이 불거졌는데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와 정몽헌의 삼촌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회장간의 다툼이었다. 발단은 정상영이 사모펀드(신한BNP파이라투신운용 등)를 이용, 10월부터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시숙부인 정상영 KCC회장이 현대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빠르게 늘려가면서 현대그룹을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탓이다. 범현대가의 지원을 받는 정상영 회장의 발 빠른 지분 확대에 현대그룹은 긴장했다.2004년 3월 15일 KCC측은 현대상선에 2천억원 규모 선박의 불분명한 소재와 강공자산 여부, 경쟁사 대비 10배에 달하는 외상매출채권, 거액의 대손처리 등 공개적으로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KCC가 5%룰을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문제 삼아 법에 호소했다. 당시 KCC가 현정은 모녀 측보다 지분을 훨씬 많이 확보했으나 상장법인의 경우 5% 이상을 보유한 자는 1% 이상 지분 변동이 발생했을 때 5일 이내 변동내용을 신고토록 했는데 KCC측에서 이를 위반했다며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소한 것이다. 결국 이 것이 문제가 돼 금감위가 2004년 2월 11일에 KCC에 대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경영권분쟁은 종식됐다. 2006년에는 현대그룹이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확보하면서 일단 판정승을 거뒀다. KCC는 경영권분쟁 10년만인 2014년에 현대상선의 지분을 전원 매각했다.현대그룹의 지배구조 취약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세간에선 이 사건이 '시숙부와 질부 간의 분쟁'으로 회자되기도 했다.2007년 4월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 26.68%를 매입해 최대주주가 되면서 이번에는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간에 경영권 분쟁이 야기됐다. 당시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 있었는데 현대그룹에선 유상증자 등을 통해 현대상선의 지분을 40% 넘게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방어했다.그 와중에서 현대종합상사도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갔다. >> 금융자회사들 분산이 회사는 1976년 현대그룹의 중화학부문 수출을 전담하는 무역업체로 설립돼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에서 생산한 선박, 자동차, 기계 등의 수출을 전담하다 1977년 12월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81년에는 국내 최초로 해외 자원 개발프로젝트인 호주 드레이톤 광산개발에 참여했으며 2000년에는 비제조업체로는 국내 최대인 수출 25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즈음해서 2003년에 채권단 품으로 떨어져 나갔다.한편 2004년에는 현대그룹의 금융자회사들인 현대투자증권과 현대투자신탁운용, 현대투자신탁 및 현대오토넷이 분리됐다. 현대투자신탁의 전신은 국민투자신탁으로 1982년 6월에 설립돼 국내 최초로 고객의 자금을 위탁받아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에 간접 투자하는 최신금융기법의 업체로 기관투자가로서의 역할을 한 뒤 1997년 현대그룹에 편입, 1999년에 현대투자신탁증권으로 변경됐다. 1997년 당시 종업원 수 1천여명에 매출액이 12조6천억원이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 푸르덴셜 금융그룹에 인수돼 푸르덴셜증권으로 상호가 변경된 뒤 2010년 6월 한화증권이 인수, 합병해서 한화투자증권으로 다시 변경됐다.내비게이션과 자동차용 전기, 전자부품, 에어백 등을 생산하는 현대오토넷은 2000년 2월에 설립돼 2002년 7월에 상장기업이 됐다가 2009년 6월 현대모비스에 합병됐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그룹은 정몽헌 사후 현정은 회장의 부임으로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KCC가 5%룰을 위반했다며 법에 호소, KCC로부터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현대그룹 본사 모습. /연합뉴스

2018-11-0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80]현대-12 최대의 정경유착 의혹과 정몽헌 자살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의 계열분리는 정몽헌 지배의 현대그룹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됐다. 현대그룹 전반에 대한 시장의 불신과 건설경기 침체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또 막대한 금액을 북한에 송금한 상황에서 형제 기업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점도 요인이었다. 현대그룹의 해체위기가 고조되자 "2000년 4~5월 두 달간 삼성카드 2천억원을 포함,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의 돈줄이었던 현대상선에서 회수한 자금만 4천151억 원에 달해 단기차입금이 많았던 현대건설 계열은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3년 8월 6일, [秘話 국민의 정부]<31> ⑤현대家 왕자의 난(下))현대건설, 만기어음 결제못해 한계국책기관·금융권 33조 지원 불구건설·전자소유권 채권단에 넘어가>> 현대그룹 부도 직면 현대그룹의 부도위기로 2000년 5월 26일에는 종합주가지수(KOSPI)가 하루 동안 무려 42.87포인트가 빠지기도 했다.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29일 만기 어음 260억원을 결제하지 못하는 등 한계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정부는 2000년 11월 3일 부실기업 퇴출조치와 관련해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마련했다.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제때 상환하지 못할 때 해당 기업이 만기도래분 20%만 상환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대신 갚게 하는 것이다. 현대그룹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시장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현대건설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이듬해 3월 27일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정부가 유동성을 지원해 출자 전환하기로 결론 냈다. 그해 5월 18일 현대건설 주주총회에서 당초 채권단의 구상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회사채 신속인수제는 현대그룹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 5월부터 2002년 9월까지 국책기관과 금융권이 현대그룹에 지원한 금액은 총 33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이 자금은 주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에 쏟아 부었음에도 끝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소유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2001년 현대건설은 채권단에 의해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현대엔지니어링 등과 별도의 현대건설그룹을 이뤘다.2001년 3월 21일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사망했다. 항간에는 정 회장이 인생 말년의 향수병 때문에 추진했던 대북사업이 현대건설그룹을 붕괴시키고 말았다는 설이 돌았다. 현대상선 역시 대북송금을 위해 산업은행에서 빌린 4천억원을 갚느라 알짜 사업체인 자동차 운반선을 분리·매각했다. 현대아산은 사업 시작 이래 2000년 말까지 북한에 공식적으로 3억3천만달러를 지급하는 등 누적적자만 3억달러에 달했다.정몽헌은 2000년 '왕자의 난'을 통해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고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가 위기에 빠지자 정몽헌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현대아산 회장으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그 와중에 2002년 9월에는 금강산관광의 새로운 육로관광을 개시했다. 그러나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계동 본사사옥에서 투신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는 대북 불법송금과 정치권 비자금 제공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정치권 비자금 제공의혹 검찰조사남북정상회담前 '비밀 송금' 화근투신사건후 흐지부지 역사속으로>> 몽헌, 대북사업 전념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 간의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 13~15일)의 사전준비과정에서 현대그룹이 막대한 자금을 북한으로 몰래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 사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정부와 현대그룹이 공모해 불법으로 막대한 자금을 북한에 제공한 데에는 무언가 흑막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정부와 현대 모두 입장이 난처했지만 시원히 밝힐 수도 없었다. 북한 송금 내역 및 현대와 북한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한 협상 내용 내지는 송금 관련 북한 계좌 내역까지 공개될 경우 김대중 정부가 최대치적으로 자부한 햇볕정책 무산은 물론 자칫 정권붕괴까지도 점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스스로 엄청난 불법을 저지른 셈이니 말이다. 현대의 경우 돈의 출처가 밝혀지면 분식회계는 물론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비자금 제공 등 후폭풍 또한 일파만파여서 도저히 불감당이었을 것이다.('노무현자서전, 운명이다', 30판, 230~233면)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3년에 대북송금 의혹 특검에서 현대그룹이 북한에 송금한 금액은 현금 4억5천만달러와 5천만달러 어치의 현물 등 총 5억달러인 것으로 확인됐다.자금규모뿐 아니라 정부는 물론 북한 당국까지 연루된 희대의 정경유착사건이 불거지면서 현대그룹은 창업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몽헌의 사망과 함께 모든 것이 흐지부지된 채 이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금강산관광의 새로운 육로관광을 열었지만 대북 불법송금과 정치권 비자금 의혹을 남긴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이영하 현대아산 사장 등 임직원들이 지난 8월3일 금강산 현지에서 맹경일 아태 부위원장 등 북측 관계자 20여명과 함께 고 정몽헌 회장 15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는 모습. /현대그룹 제공=연합뉴스

2018-10-29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9]현대-11 왕자의 난과 현대그룹 분해

1997년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국내 최대 재벌 현대그룹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룹의 주력이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이었던 탓에 극심한 경기불황을 견뎌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진행된 경기침체는 후반기 들어 더 심해지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였다. 설상가상으로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이 유력시되던 김영삼 후보와 경쟁하게 돼 현대그룹은 김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세무조사와 대출규제 등 위축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그룹 주력분야 극심한 경기 불황DJ정부 들어 2차례 소떼 몰고 방북막대한 자금 투자 본격 대북사업>> 외환위기로 많은 변화 그러나 1998년 진보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는 듯했다. 정주영·몽헌 부자가 그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 떼 1천1마리를 몰고 직접 판문점을 통과해 입북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 물꼬를 텄다. 그해 10월 2차로 소 떼 방북 길에 오른 정주영은 27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향후 30년간 금강산 독점개발권을 확보, 11월 18일 오후 5시43분에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가 정주영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관광객 8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66명 등 총 1천365명을 싣고 4박5일 일정으로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해 금강산으로 향했다.1999년 2월 현대그룹은 북한 관련 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현대그룹은 주력사업을 대북사업으로 전환, 금강산관광단지를 개발하고 개성에는 대규모 경공업단지 조성계획을 세우는 등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 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에서의 냉전청산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북한에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리인이 필요했는데 현대야말로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은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한화에너지의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기는 등 현대그룹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외환위기로 그룹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대북사업도 교착상태에 빠졌다.그 와중인 2000년 3월 현대그룹은 초유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정주영의 아들들 간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다. 당시 병환이 깊었던 정 회장이 은퇴한 후 몽구(2째), 몽헌(5째) 형제간의 불안한 투톱(공동회장제)으로 운영하던 중 경영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몽구와 몽헌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일찍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몽구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2000년 3월 14일 정몽구 공동회장이 정몽헌의 최측근 심복이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보복성 인사가 최초의 시발점이었다. 다음날 정몽헌 공동회장이 인사보류를 지시하는 한편 3월 24일에는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정몽구의 공동회장 면직을 발표했다. 정몽구 '보복성 인사' 다툼 시발점몽헌, 다수계열사 확보… 그룹 장악몽준, 중공업·미포조선 등 '분리'>> 3부자 동반퇴진 발표5월 25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계열사 지분정리와 현대차 지분매입을 발표하자 다음날인 26일 현대 전 계열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그룹에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진 문책을 요구함으로써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 현대아산의 이사직을 포기하는 한편 5월 31일 정주영·몽구·몽헌 3부자 동반퇴진을 골자로 하는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했다.이 사건은 2000년 9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서비스 등 9개 계열사를 분리해서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재발족하면서 마무리됐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에 설립돼 1974년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승용차 '포니'를 생산해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외환위기 중인 1999년 3월 기아자동차와 아세아자동차를 한꺼번에 인수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가 됐다.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몽헌은 명실상부한 현대그룹의 2대 총수가 됐다. 또한 정몽헌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아산 등 수적으로 많은 계열사를 확보했다. 현대그룹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준 이 사건을 세인들은 '왕자의 난'으로 불렀다.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등을 분리해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현대백화점도 이때 독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사업의 일환으로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등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에 물꼬를 텄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연합뉴스

2018-10-22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8]현대-10 금강산 관광과 정주영 대선 출마

정치권 압박에 '정계진출' 결심그룹 임직원·가족·계열사 동원김영삼·김대중 한판승부로 끝나'반재벌 정서' 16.3%득표로 낙선 1990년대 들어 현대그룹은 창업자 정주영의 정계 진출과 초유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첫째는 그의 정계 진출이었다. 국내에서 성공한 기업인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집권당의 국회의원으로, 그것도 사업과 정치를 겸하는 탓에 본업은 여전히 기업가이며 정치활동은 부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연세대 교수 출신의 오피니언 리더 김동길 목사와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정주영이 대표최고위원에 등극한 것이다. 그는 국내 정치역사상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재벌 총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통일국민당 창당국내 최고 재벌의 오너 경영인인 정주영은 대권 도전에 나선 이유에 대해 "5공화국(전두환 정권)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겠지만, 아우 인영이(한라그룹 창업자)가 옥고를 치르면서 창원중공업(두산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이다. 정주영 자신도 5공 집권 초기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때문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중 하나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압박을 정계진출의 직접동기로 지적한 것이다.노태우 전 대통령이 5공의 내무부 장관 시절 전두환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당시(1982~1983년 무렵)에는 많은 건설업자들이 정부가 통제 중인 아파트 분양가를 올려주지 않으면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정부가 상한선을 평당 112만~113만원으로 묶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시기에 누구라고 하면 금세 알 수 있는 기업인이 전(全) 대통령을 찾아와서 단가를 올려 달라는 업자들을 도적과 같은 자라 매도하면서 '양심대로 말하면 평당 60만원으로 지을 수 있다'며 양심선언 했다는 것이다.그 기업인이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는데 한 달 후 전(全) 대통령은 노태우 장관에게 '내가 그 영감(정주영 회장)한테 크게 속았소. 그 사람 큰일 저지를 사람이야. 벌써 몇 개 기업이 그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더군.'…. 정 회장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노태우 회고록(上卷)', 503~4면)국민당은 현대그룹의 임직원과 가족 및 협력사 등을 노골적으로 동원해 당원수 1천200만명을 확보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 출마에 대비했다. 11월 20일에 제14대 대통령선거 공고가 확정됐는데 후보군으론 유력주자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외에 김대중, 이종찬, 박찬종 등이었는데 정주영은 기호 3번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이 선거판의 주인공은 라이벌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판 승부로 정주영은 애초부터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원들 조차 외면처음부터 금권선거 시비가 불거진 데다 유권자들의 반재벌 정서가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민자당과 노태우 정부에서는 김기춘(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의 "우리가 남이가?" 등 대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해 12월 19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개표한 결과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득표율 42%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주영은 최종득표수가 380여만표(득표율 16.3%)에 그쳐 통일국민당 당원들조차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정주영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하고 김동길 목사와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등극했다. 사진은 제14대 대통령선거 정주영 후보 벽보. /중앙선관위(사이버선거역사관)제공·연합뉴스

2018-10-15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7]현대-9 최대 재벌 형성

반도체·컴퓨터 생산 LG등과 호각세중공업도 첨단·고부가가치화 착수서산에 1조원 들여 석유화학 설립백화점·광고등 서비스산업도 확대1980년대 현대그룹은 다른 재벌처럼 관광, 유통, 금융 등 서비스업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다각화했다. 또 해외 현지법인 설립 등 국제화에도 주력했다.1980년대 현대의 다각화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의 진출이다. LG, 삼성, 대우 등 경쟁 관계에 있는 재벌들에 비해 늦게 전자사업에 진출했으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현대전자는 1949년에 설립된 업체로 1983년 2월에 현대그룹에 인수됐다. 그해 11월부터 PC 등 컴퓨터를 생산하는 한편 반도체 등을 생산하기 위해 이천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1986년 10월에 준공했다. 이후 가전제품을 비롯한 반도체, 컴퓨터 생산에 매진해 단기간 내 선 주자들인 삼성, LG, 대우 등과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뒤늦게 전자사업 진출1986년 1월에는 현대마그네틱에 이어 1988년 2월 현대미디어시스템을 잇따라 설립, 소프트·하드웨어산업에 참여했으며 1989년 5월 생산설비 제어장비와 공정제어장치, 데이터통신 등을 목적으로 한 현대정보통신을 설립했다.둘째 중공업의 첨단화, 고부가화 사업에 착수했다. 1987년 9월 전자제어장치 및 연료 분사장치를 생산하는 현대케피코를 설립했다. 현대중전기는 1983년 2월 미국 Westing House사와 합작으로 한국산업서비스를, 1984년 3월에는 현대엘리베이터를 각각 설립했다. 1984년 11월 사우디 알자밀사와 합작으로 산업전자공장을 건설하고 1986년 6월 미국 GE사와 합작으로 한국전기동산을 설립했다.또한 1988년 7월 현대로봇산업을 설립해 공장자동화사업에도 진출했다. 1984년 10월 현대중공업 내에 로봇절단팀을 조직, 1985년 5월 일본의 (주)나찌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86년 2월 스포트로봇(8810AK) 1대를 생산해 최초로 현대자동차에 판매했다. 이를 기반으로 1988년 7월에 현대로봇산업을 세웠다.1988년 8월에는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했다. 1973년 5월 현대건설 소속 철탑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국내 설치된 송전탑은 일본에서 수입했다. 특히 초고압의 34만5천 볼트용 철탑은 국내제작이 불가했다. 현대건설은 초고압용 송전탑의 국산화 개발에 착수, 1973년 6월 34만5천 볼트용 송전탑을 국내 최초로 제작해 한국전력에 납품했다. 1977년 7월에는 사우디에 송전탑 3천641t을 수출하는 등 일취월장했다.1986년 9월에는 현대중장비산업을 세웠다. 현대중공업 중기사업부는 1985년 10월 일본 닛산사에 5년간 소형 굴삭기를 수출 계약하고 1986년 2월에는 미국 중장비제조회사인 Dresser사와 소형 크룰러 도저·로더를 10년간 OEM방식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1987년 1월에 4천300평의 공장을 준공하고 독립 법인화했다.셋째 석유화학산업의 진출이다. 현대그룹은 1988년 9월에 충청남도 서산에 1천175천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조2천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산 35만t의 프로필렌, 부타디엔, 스티렌모노머, 에틸렌 글리콜 등을 생산하는 계열 석유화학공장 등을 갖추고 현대석유화학을 설립했다.넷째 국제화의 추진이었다. 현대그룹의 국제화 추진은 1981년 1월 한국알라스카자원개발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또한 현대종합목재를 중심으로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가속화했다. 현대종합목재는 가구 등을 미국에 대량 수출했지만, 가구는 부피가 큰 탓에 포장비·운송료 등 물류 비용이 컸다. 더구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국내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두드러지면서 수출에도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차제에 현대종합목재는 미주지역에 대한 수출물량을 확대하기 위해 1982년 1월 미국에 현지법인 HFI(Hyundai Furniture Industries)를 설립했다. HFI는 1983년 1월과 1987년 8월에 미국 달라스와 로스엔젤레스에 각각 가구조립공장을 건설하고 1983년 1월에는 솔로몬 원목개발 현지법인(HTC: Hyundai Timber Company)을, 1985년 8월에는 말레이시아 현지법인(SHWI:Sime Hyundai Wood Industries)을, 1987년 7월에는 미국 하이포인트에 현지법인을 각각 설립했다.>> 국제화 추진다섯째 백화점, 광고회사, 투자자문회사 등 서비스산업의 진출 확대다. 현대그룹은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그룹차원의 광고를 전담하기 위해 1983년 11월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을 설립하고 1986년 10월에는 연구용역 및 증권투자정보를 위해 현대사회경제연구원을 세웠다. 1987년 3월에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한무쇼핑을 설립하고 5월에는 설계용역전담사인 현대브라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1987년 3월에는 현대투자자문을 설립해 현대증권,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금융 등과 함께 금융소그룹을 형성했다. 1982년 2월에는 금전등록기, 계량기, 사무기기의 제조를 목적으로 현대테크시스템을, 1987년 6월에는 해운대리점인 현대물류를 각각 설립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은 1980년대에는 삼성그룹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80년대 다각화 사업을 시도하면서 현대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고, 이천에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2011년 SK그룹에 인수되면서 SK하이닉스로 변경됐다. /경인일보 DB

2018-10-08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6]현대-8 주베일 항만공사-20세기 최대 역사(役事)

당시 국가예산 25% 달하는 거금1976년 정식계약 정부 지급보증1970년대 33개업체 새로 계열화美경제지 500대기업중 98위 선정한국경제에 있어 1970년대는 천당에서 나락으로 그리고 다시 기사회생한 고난의 시기였는데, 계기는 1973년 10월부터 1975년 중반에 끝난 제1차 오일쇼크였다. 1973년 10월 6일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감산을 통해 유가를 무려 4배 이상 끌어올려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당시 한국은 아랍국들이 비 우호국으로 분류해 고통이 더 컸다. 1974년 하반기부터 수출부진과 고용감퇴, 경상수지 악화 등 거시경제지표들이 나빠지면서 당시 새로 추진한 정부의 100억달러짜리 중화학 공업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건설, 사우디 진출정부는 돌파구로 중동의 산유국을 지목했다.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값 인상으로 긁어모은 달러화로 대대적인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1974년 2월 16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제르 기획상과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협력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이란, 쿠웨이트, 바레인 등과 중동시장 접근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자본은 물론 기술마저 불량한 국내 건설업체들의 핸디캡을 커버하기 위해 해외 건설에 한해 물적 담보 없이도 정부가 대신 지급을 보증하는 내용의 '해외건설촉진법'을 마련해 중동건설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74년의 8천900만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5천100만달러로 급증했다. 1975년 3월에는 신원개발이 이란에서 4천76만 달러의 코탐사 항 확장공사를, 현대는 바레인에서 1억3천700만달러의 ASRY조선소 건설공사를 각각 수주했다.더욱 경이적인 사건은 현대건설이 1976년에 무려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공사기간 1976.6~1979.12)를 수주한 것이다. 워낙 공사규모가 큰 데다 한국 기업이 수주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국제적으로 큰 화젯거리였다.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해외 언론에선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소개했다. 당시 사우디는 경제개발에 착수했으나 항만이 부족해 주베일에 대규모 산업항을 축조했다. 해안으로부터 무려 12㎞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다 한가운데에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open sea tanker terminal) 건설사업으로 총 길이가 3.48㎞에 달해 그 모양이 꼭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해상활주로 같은 모양이었다. 정식계약은 1976년 6월 16일에 체결됐는데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섰다.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효과를 본 돌관경영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공사에 임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 OSTT의 철 구조물을 쪼개 89개의 재킷(jacket)으로 나눈 후 이를 한국의 울산조선소에서 제작 납품토록 했다. 재킷 한 개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웬만한 10층 건물 높이로 재킷 1개의 중량은 400~500t이었다. 문제는 사우디까지 운반하는 것이나 재킷의 덩치가 너무 커 화물선으론 운반이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1만5천800t급과 5천500t급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 그 위에 재킷 4, 5개씩 싣고 예인선으로 끌고 갔다. 3만2천여리를 19차례나 왕복하며 89개의 재킷 운반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는데 운반에만 총 35일이 소요됐다. 이 공사에만 총 25만명이 동원됐다.그러나 1977년 3월과 1979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공사 현장에서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환경 시정 등을 요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열악한 근로조건을 못 견딘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몰고 와서 사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 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폭동이라며 진압을 요청했고 사우디 정부는 즉각 방위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그룹 최대 확장기1970년대는 현대그룹 역사상 최대의 확장기로 평가된다. 이 기간 중 현대그룹은 총 33개 업체를 새로 계열화했다.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장비 등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직계열화가 특징이다. 현대그룹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1978년에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다.현대건설은 1960~1970년대 정부주도의 압축성장 시대를 맞아 건설에서 중공업으로, 하찮은 못에서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수직계열화작업을 통해 국내 정상의 건설기계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정부가 기획하고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 드라마에 현대는 주연배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건설은 1976년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해 큰 화제가 됐다. 사진은 주베일 산업항 준공 사진. /현대건설 제공

2018-10-01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5]현대-7 해운업과 종합무역상사

불황속 투자 확대 15척 선박 발주첫 중동 정기운항 사업면허 취득그룹 생산제품·직물등 수출 대행1978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아현대그룹은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에 기반을 확보하고 이들 사업 일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타 산업을 중심으로 전방통합을 추구했는데, 그 첫 번째는 고려화학의 설립이었다. 계열사들의 점증하는 안료, 도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74년 7월 18일에 도료, 합성수지, 접착제, 안료의 제조판매를 목적으로 자본금 5천만원의 고려화학주식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또한 선박용 도료의 개발을 위해 1974년 12월 덴마크의 Hempels Marine Paints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생산에 착수했다. 이후 외국의 유수한 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품질향상을 도모하는 한편 제품을 다변화함으로써 그룹 내 각 계열사의 페인트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아세아상선 설립둘째는 해운업의 진출이었다. 아세아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은 1976년 3월 25일 자본금 2천만원에 26만3천500 DWT의 '코리아 선'호와 26만2천821 DWT의 '코리아 스타'호, '코리아 베너'호 등 3척의 VLCC로 설립됐다.1977년 5월에 곡물, 석탄, 광석물 등을 운반하는 살물선(Bulk Carrier) 아세아 1호와 2호를, 9월에는 청룡 1·2·3호 등 원양예인선단을 취항시켜 중동 건설현장까지 자재 운송을 전담케 했다.아세아상선은 국내 해운 불황 하에서도 투자를 확대해 1977년에는 제3차 계획조선에 참여, 제6차 계획조선까지 30만 GT에 달하는 15척의 선박을 발주했다. 또 1978년 4월에는 자본금 100억원으로 확대하고 6월에는 국내 처음으로 중동 정기항로의 운항 사업면허를 취득함으로써 1979년 3월 12일 제3회 '해운의 날'에 국내 최초로 '1억불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등 대형선사로 도약했다.셋째는 현대종합목재의 설립이었다. 현대건설은 1976년 12월말부터 중동건설현장용 제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울산에 제재소를 마련, 1977년 7월부터 수출가구공장을 가동하면서 1978년 1월에 금강목재공업을 설립했다. 1979년부터 '리바트가구'를 국내외에 공급을 개시하면서 점차 가정용 및 선박용 가구, 인테리어, 제재업으로 영업 종목을 다변화해 1980년 1월에 현대종합목재산업으로 변경했다.넷째는 현대종합상사의 설립이다. 1973년 벽두부터 국내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됐다. 막대한 외화자금이 소요되어 수출 중요성이 한층 제고됐다. 그러나 연말에 불거진 제1차 오일쇼크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등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정부는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고자 1975년 1월에 일본의 총합무역상사를 벤치마킹한 종합무역상사제를 실시했다. 지정요건은 해외 지사 10개 이상, 자본금 10억원 이상, 50만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7개 품목 이상을 보유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또한 종합무역상사에는 국내 업체들 간 국제 입찰 시 우선 지원함은 물론 원자재수입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부여했으며 파격적인 수출금융을 제공하는 등 당근을 제공한 것이다.1975년 5월 삼성물산이 제1호로 지정된 이후 대우실업, (주)쌍용, 국제상사, 한일합섬, 효성물산, 반도상사, SK, 삼화, 금호실업이 종합무역상사로 변신했다. >> 현대종합상사 태동1976년 현재 현대그룹의 전체 수출실적은 5억4천368만달러로 그해 12월 자본금 5천만원의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했다. 선박부품과 철구제품, 각종 기계, 공산품 원료와 제품, 건축자재와 화학제품, 운반용 기계 등 주로 현대그룹 생산제품과 직물, 편물, 봉제품, 피혁제품의 판매와 수출대행을 위해서였다. 1977년 10월에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1978년 2월 11일에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았다.1970년 4월에는 강원은행을, 1972년 2월에는 선일상선을 각각 인수했고 1973년 12월에는 현대정유판매를, 1976년 12월에는 시설대여 및 유가증권 매매를 목적으로 한 현대종합금융을 각각 설립했다. 1977년 7월에는 아산문화복지재단을, 10월에는 금강항공을 각각 설립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해운업 진출을 위해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상선을 지난 1976년에 설립했다. /현대상선 제공

2018-09-17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4]현대-6 철강 산업으로의 확대

같은해 8월 현대종합상사에부실 '대한알미늄공업'등 흡수국내외 건설경기 호조 자재 품귀철근·파이프류등 직접 생산 조달현대는 철강, 알루미늄 등 소재산업에도 진출했는데, 현대가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 인천제철의 인수로부터 비롯됐다. 인천제철은 중·일전쟁 중인 1938년 9월 23일 진남포에서 일본 이화학흥업(理化學興業), 이연금속(理硏金屬), 주우금속(住友金屬) 등이 자본금 1천300만원(圓)을 출자해 설립한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철강, 알루미늄, 마그네슘, 기타 각종 금속을 제조 판매하다가 해방 후 귀속재산 돼 1953년 인천공장을 모체로 대한중공업공사로 재발족됐다. >> 소재산업 진출당시 시설은 1천200마력 압연기와 건물 4천443평, 미가동 기계공작물 34점 등이었다. 연산 12만t의 평로(平爐), 15만5천t의 분괴중형, 1만5천t의 박판설비로 재가동한 대한중공업은 1962년 11월에 인천중공업으로 개명됐다.인천중공업은 1964년 9월에 제철설비를 분리해 선철 연산 12만t의 인천제철을 설립했다. 이후 두 회사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정부는 1970년 4월에 인천중공업을 인천제철에 합병시켜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관리했다가 부실기업 정리차원에서 1978년 6월에 현대중공업에 인수됐다.현대종합상사도 1978년 8월에 부실기업 인수전에 참여, 대한알미늄공업과 한국불화공업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대한알미늄은 국내 최초의 알미늄 제조업체로서 당초 한국알미늄으로 출발했다. 한국알미늄은 원료인 보크사이트의 확보 곤란과 기술부족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지자 1973년 7월 19일에 한국산업은행과 프랑스의 Pechiney사 간에 50대50의 비율로 합작 투자해 자본금 20억6천900만원의 대한알미늄공업으로 재발족됐다.생산능력은 연산 1만7천500t으로 전해공장, 주조공장, 전극공장 외에 수전설비, 알루미나 저장설비 등 각종 중장비를 갖췄다. 전해공장은 알루미나를 알루미늄으로 만드는 곳으로 120기의 전기로에서 연산 1만7천500t을 생산했다. 주조공장은 6t 용해로 2기, 4t 1기, 주조기 2기, 균열로 2기를 갖추고 전해공장에서 용탕 상태로 넘어오는 알루미늄을 제품별로 주조했다. 생산되는 제품은 일반 알루미늄괴인 ingot, 새시 재료인 압연 billet, 전선제조용 wire bar, slab 등이었다.국내 알루미늄산업이 낙후된 것은 원료인 보크사이트가 전혀 생산되지 않는데다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한알미늄은 여전히 생산부진 및 경영부실을 면치 못하다가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78년 10월 18일에 현대종합상사가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했다.>> 1975년 현대강관 설립현대가 건설, 중공업에 특화하면서 자체수요가 엄청난 강관의 직접조달도 시도, 1975년 3월에 현대강관을 설립했다. 현대강관은 자본금 2천만원의 소규모 업체인 경일산업을 모체로 해 출발했는데 경일산업은 철근, 못, 철선 등을 생산해 현대 계열사들에 공급했다. 1977년에는 강관사업부를 신설했으며 압연공장을 선재공장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1978년에는 요트제조사업에도 진출했다.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건설경기가 호조를 보여 철강재 수요가 급증했다. 그중에서도 철근 파이프류는 극심한 품귀 현상이 야기돼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물량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압연사업부는 남목철재로, 요트사업부는 경일요트로, 선재공장은 울산선재로 독립시키는 한편 경일산업은 강관사업만 전념했다. 1978년 7월 7만6천평의 부지에 강관공장을 건설, 연산 26만t의 설비를 확보하고 외경 2분의 1~12인치의 강관제품을 생산했다. 1980년 5월 13일에는 자본금 70억원의 현대강관으로 개명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78년부터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현대종합상사의 세계 무역 품목 가운데 하나인 철강제품. /현대종합상사 제공

2018-09-10 이한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73]현대-5 엔진사업과 조선업 진출

스위스 등과 기술도입계약 체결전기부 만들어 중전기사업 시작1973년 3월 26만톤급 1호기 가동 전용도크 완성 선박 수리·개조도현대엔진도 이 무렵에 설립됐다. 국내 엔진제조사업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했으나 1970년대 중반까지 소형의 농, 공용 및 자동차용 디젤엔진을 외국 업체와 제휴해 생산하는 정도였다. 선박용도 연근해 어선용 디젤엔진 정도만 생산했을 뿐 대형 디젤엔진의 생산은 전무했다.1976년 7월 현대중공업 내에 엔진사업부를 신설해 선박용 엔진 생산을 전담하면서부터 현대는 새로운 엔진사업에 참여했다.>> 현대엔진 설립현대엔진은 1976년 7월 중화학투자조정정책에 따라 6천 마력 이상의 대형 디젤엔진 실수요자로 선정받고 스위스의 Sultzer, 덴마크의 B&W, 독일의 MAN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1977년 3월부터 현대중공업 인근 6만여평의 부지에 엔진공장을 건설했다. 또한 일본의 고베제강, 영국의 Meehanite, 프랑스의 Pielstick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79년 6월에 신한해운이 발주한 9천380마력의 엔진 1호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코바 담수설비용 펌프 75대(1천273만달러)를 수주해 선박용 엔진전문업체로 출범했다. 당초 내연 기관 및 터빈, 축수, 동력전달장치, 금형, 주물의 제조에서 선박용 주기관, 보조기관, 의장품 제조, 산업설비 수출입업, 펄프 제조 등으로 다변화했으며 1981년에는 중전기 제조도 겸했다.현대중전기 및 경일 요트산업의 설립도 주목된다. 현대중공업의 중전기사업은 1972년 현대중공업 내에 전기부와 전장부를 신설하면서부터였다. 이들 부서는 변압기의 수리, 설치, 전장품의 선박에 탑재업무 등을 수행했다. 그 후 전기기기의 대형화, 고급화가 급속히 추진돼 1977년 2월 현대중공업은 전기부를 중전기사업본부로 확대 개편했다. 1977년 5월 독일 Siemens와 중전기 전반에 대한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 그해 6월에 3천630평 규모의 배전반공장을 건설하고 1978년 11월에 자본금 60억원의 현대중전기로 발족됐다. 또 1979년 1월에는 경일산업의 요트사업부를 분리해 경일요트산업을 설립했는데 요트 및 FRP 어선 등을 건조하는 소규모 조선회사였다.>> 울산조선소 건설 추진현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 진출도 서둘렀다. 1969년 1월에 일본 미쓰비시와 합작·추진하면서 1970년 3월 1일 현대건설 내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선합작이 실패하자 1971년 9월 영국 A&P Appledore와 기술협조 및 선박판매 협조계약을 체결했다. 그해 10월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으로부터 4천800만달러의 차관자금을 확보하고 1972년 3월부터 울산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1973년 3월에 26만t급의 1호기를 완공하고 조선소를 정식으로 가동, 1973년 12월 28일에 자본금 1억원의 현대조선중공업을 설립했다. 최대건조능력 70만 DWT, 연 26만t급 선박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울산조선소 완공에는 내자 114억원과 외자 4천만달러가 소요됐다. 완공 초기 인력규모는 기술직 450명, 사무직 240명, 기능공 6천여명 등이었다.차재에 조선용 기자재(플랜지)의 국내제작에도 도전했다. 국내 조선경기 호황과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으로 플랜지가 대량으로 수요됐으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는데 현대중공업이 1974년 7월 15일에 일본 플랜지 메이커인 스미토모, 세오, 마루다까 등과 합작해서 울산철공을 설립했던 것이다. 울산철공은 각종 규격의 플랜지를 제작해 그해 11월부터 국내 판매 및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6년 3월에 상호를 한국프랜지공업으로 변경했으며 1979년 4월에는 기계, 조선, 산업설비부문을 추가했다.현대미포조선소는 1975년 2월 현대중공업이 일본 가와자키와 합작해 자본금 12억원으로 설립하고 울산 하전만에 수리조선 및 선박개조를 전문으로 하는 국제규모의 도크건설에 착수했다. 설립 초기 수리전용 도크를 확보하지 못해 현대중공업의 건조도크를 이용했으나 1977년 3월에 40만DWT급과 15만DWT급 수리전용 도크 2기를, 1978년 12월에 15만 DWT급 도크 1기를 완성해 선박수리 및 개조작업에 착수했다./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현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에도 진출해 큰 성과를 거뒀다. /현대중공업 제공

2018-09-03 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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