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골동품 이야기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8]김동현과 고구려반가상 >3<

김동현은 이 반가상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꼈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얘기해도 돈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소문이 많이 났던 탓인지 한번은 금속 유물의 대수장가로 알려진 대구에 있던 오구라가 평양으로 그를 찾아왔다. 오구라는 이 불상을 가질 욕심에 당시 기와집 250채 값에 해당하는 50만원에 사고자했으나 김동현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수집한 금속 유물 모두와 이 불상을 맞바꾸자는 제의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할 정도로 욕심을 냈지만, 김동현은 그가 일본인이기도 해서 대꾸도 않고 버텨서 그를 포기하도록 했다고 한다.그런 가운데 해방이 되고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김동현은 월남하게 되었는데, 이 불상과 국보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구려삼존불상 등 몇 점의 골동품만을 품안에 넣고 도망나왔다. 그리고 6·25가 터지자 단신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가서 부두 노동자 일을 하면서도 이 불상만은 끝끝내 팔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골동계에 잘 알려져 있던 이병각(이병철의 형)이 이 불상을 탐내어 여러 차례 양도를 요구해 왔다. 그 당시는 김동현도 극도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고, 심지어 밥과 맨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우기까지 했던터라 웬만하면 팔아서 큰 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고구려반가상만은 임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팔아넘기거나 하지 않고, 비싼 돈을 물어가며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는가 보다. 그 누구도 꺾지 못했던 김동현 고집의 끝은 의외로 자신으로부터 나왔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김동현은 맹장수술을 받고 이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마 오랜 세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마음 고생하느라 속이 곪아터진 모양이다. 건강에 자신을 잃은 그는 누구보다 수백여점의 금속 유물들, 특히 고구려반가상과 고구려삼존불의 거취가 걱정이 되었다. 그때 마침 호암미술관에서 근무하던 필자가 우연한 기회에 김동현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돈에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고구려반가상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 곳이 필요했다. 80년대 초반 그는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금속 유물들을 호암미술관에 양도했다. 그런데 고구려반가상을 비롯한 몇점만은 내놓지 않은 채였다. 팔십을 넘기고 자식도 없이 늙은 아내만을 두고 있던 그로서는 믿을만한 상대가 필요하였고, 마침내 1990년대 초반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에게 이 명품 반가상과 몇점의 마지막 유물들을 인계하고 마음을 놓았다.

2007-03-21 경인일보

[명사와 골동품이야기·16] 김동현과 고구려반가상 >1<

16. 김동현과 고구려반가상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대는 정치가로부터 재물을 모으는데 온 정성을 바치는 재력가등등. 그런 가운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신념속에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필부필부들까지. 이번에 소개하는 김동현은 아마도 그런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부류에 속하면서 그 누구도 해내기 힘든 애국적인 일을 해낸 인물이 아닌가 싶다.김동현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골동계에서는 그가 매우 고집이 세고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입소문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김동현은 눈이 매우 밝은 금속유물 전문가로, 우리나라에 유일한 고구려반가상을 지켜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예사 사람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문제의 이 고구려반가상-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 뼘 남짓한 크기(높이 17㎝)의 금동불상-은 국내 유일의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으로 많은 이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반가상은 원래 평양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이 불상을 대뜸 알아보고 평생을 바쳐 그 학술적, 골동품적 중요성과 가치를 살리기 위해 한몸 바쳐 지켜온 이가 바로 김동현이다. 몸을 던져 이 불상을 지켜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 될 정도로 이 불상에 대한 김동현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했다.그 의미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주머니에 달랑 들어가는 한뼘 남짓한 크기의 불상이 무슨 대수며 어떤 굉장한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만하다. 사실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우연히 발견되어 무지나 무관심 때문에 사라져가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처럼 한 물건을 평생을 바쳐 지킨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미담이자 뉴스거리이다.1940년의 어느날 평양 남선동에 화천당이라는 골동가게를 내고 있던 김동현에게 인부 차림의 한국인이 보자기에 기와와 벽돌을 싸가지고 나타났다. 고구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에 명문이 있는 것도 있었다. 그 사람은 평양 외곽 평천리에 있는 일본 병기창에서 일하던 인부였다. 그는 막걸리값 정도를 기대하고 화천당을 찾은 길이었다. 김동현은 그에게 월급의 10배가 넘는 200원을 쥐어 주었다. 깜짝 놀라며 자리를 떴던 그가 며칠뒤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인사치레로 들고온 것은 놀랍게도 흙으로 뒤덮인 고구려불상이었다.김동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에게 당시 기와집 세채값인 거금 6천원을 넘겨주고 입조심을 당부했다. 당시는 일제가 눈이 뒤집혀서 평양지구를 훑을 때라서 여차하면 그대로 뺏길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일본인들이 김동현의 가게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다그쳐도 김동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버텼다. 왜냐 하면 그 불상이 어떤 급수의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섰고, 그리 하여 훗날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르른다.

2007-03-05 경인일보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2]김재원과 광개토대왕 그릇 <3>

'국강상'은 토지를 넓힌 광개토대왕의 시호이자 수식어이다. '국강상'이란 시호는 백제 근초고왕에게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도 같이 썼다. 대왕의 호칭은 '호태왕'이라고 불렀다. 왕도 아니고 대왕도 아닌 클 태(太)자 '태왕'이라니! 고구려인의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태왕뒤에 붙은 '호우(壺우)'는 제사지낼 때 쓰는 제기그릇의 형태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이 고분의 별명이 '호우총'이 되었다. 맨 끝에 붙은 '십(十)'자는 열이 아니라 그릇의 끝에 붙인 제작자의 기호로 추측한다.호우총에서는 그 외에도 칠기가면이 나왔다. 전에는 그 용도를 잘 몰라서 황금눈을 가진 악귀를 쫓는 방상씨가면으로 추정했으나, 최근에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물을 복원해본 결과 화살통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호우총에 묻힌 사람은 누구일까?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왕자중에서 왕이 되지 못한 진골귀족중의 어느 한사람일 것이다. 혹시 복호(卜好)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는 아닐까 추측해본다.여당(黎堂) 김재원은 함경도 지경의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국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찍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의 뮌헨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벨기에에 유학하여 중국 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카알 헨쩨 교수밑에서 고고학을 연구했다. 오랜 외국생활 때문에 외국어(영어, 독일어)가 유창해서 국내파 학자들의 통역관같은 역할을 즐겨 맡았다. 우리 학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후진의 양성이 최우선이라는 소신 때문에, 일찍부터 많은 젊은 학자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휘하에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줄을 이었다.여당은 깨끗한 전문가의 표본이었다. 그의 집에는 돈될만한 물건들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박물관장만 25년을 했으니 웬만 하면 집에 도자기나 서화 혹은 발굴품이 있으려니 생각되지만, 그는 단 한점도 용납하지 않았다. 청빈의 귀감이다. 또 발굴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호우총으로 발굴대상을 결정한 것도 그의 이러한 소신과 함경도고집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주변에서는 경주지역에서 제일 큰 고분인 속칭 봉황대를 파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그는 훗날 지식이 크게 발전할 때를 대비해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해서 관철시켰다.호우총의 발굴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후대의 발굴에 많은 교훈을 준 발굴이었고, 신라고분은 파기만 하면 국보가 쏟아진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크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경주일원을 비롯하여 달성, 영천, 동래, 창령등 옛신라의 영토내에서는 어디를 파보아도 신라유물이 풍족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런 신라고분에는 경주중심지에 보이는 왕릉으로부터 왕족 혹은 진골귀족이나 지방토호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구성원의 무덤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호우총에서는 금동관과 함께 금제관장식, 은제허리띠장식, 세환귀고리 등 진골귀족이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들과 광개토대왕이름이 들어간 청동제호우와 귀면이 장식된 화살통 무쇠솥 등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당시 신라귀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김재원 관장은 이 광개토대왕그릇 1점의 발굴성과를 올린 사실 하나만 갖고도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의 한부분을 채우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2007-01-15 경인일보

[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7]손재향과 세한도 >1<

소전(素筌) 손재향(孫在馨, 1903~1981)은 추사 김정희이래 아주 빼어난 글씨를 남겼던 서예인이다. 만일 그가 글씨에만 전념했더라면 추사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으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말년에 정치에 발을 담그고 나서부터 글씨도 명예도 다 놓쳐버린 아까운 인물이다.전라남도 진도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이미 선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그림과 글씨에서 걸출한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타고난 재주에다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서화골동계에 뛰어들어 당대 최고의 수장가이자 감식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세검정근처에 멋진 한옥을 지어 사랑방과 대청에 서화를 걸어놓고 감상하기를 즐겨하는 멋쟁이 풍류객이었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특히 좋아해서 글씨는 물론이고 추사의 전각작품과 함께 인장등 추사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즐겨 모아들였다.그는 우리 서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어느날 간송 전형필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간송이 골동은 나보다 낫지만 서화는 나만 못할 것이다." 골동은 도자기나 불상등을 말하고 서화는 옛그림과 글씨류를 일컫는 말인데, 수집열이나 수집하는 방법도 간송은 조용하고 끈기있게 처리하는 데에 비해 소전은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를 일본에서 찾아온 일이다.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린 자조적인 문인화로 개인의 이익만을 좇는 세태속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에게 지조를 지켜준 제자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칭송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화가도 아닌 서예가인 추사가 그린 세한도가 왜 그토록 유명한 그림이 되었을까. 세한도(歲寒圖)는 매서운 추위와 을씨년스런 쓸쓸함을 나타낸 그림이다. 대개 그림은 잘 그려 유명해지는 그림도 있긴 하지만, 때로는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그리거나 초보자가 그리듯이 못그린 그림이 더 빛을 발하는 때가 있다. 세한도는 그런 그림으로, 극도로 절제된 화면을 통해서 지조를 세워 고고하게 지내는 꼿꼿한 선비정신을 추위를 견디는 노송과 잣나무에 비유하여 거칠게 그려낸 것이다.추사의 역작 세한도는 그림의 내용만큼 산전수전 다 겪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예조참의를 거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부친 김노경(1766~1840)의 일로 안동김문의 탄핵을 받아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그는 1840년 다시 제주도로 8년간의 길디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2006-12-10 경인일보

[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 3]

이병철과 진사주전자 [3]이병철 회장이 특히 아꼈던 소장품으로는 진사주전자 외에 청자상감국모란문매병, 그리고 가야금관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이 주전자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혹시라도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하여 절대로 오리지널 유물을 직접 꺼내보지 않고, 그대신 모조품을 만들어 그것을 가까이 두고 즐거움에 대신하곤 하였다. 그리고 이 주전자를 전시하도록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30밀리 방탄유리로 진열장을 만들도록 하여, 만일 있을지도 모를 사고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가 일주일에 한두번씩 용인의 별장에 들를 때마다 호암미술관에 들러서 그 주전자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그러면,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청자진사주전자의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일까? 이제부터 문제의 주전자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청자는 크게 나누어 비색청자, 상감청자 기타 등으로 분류될 수 있고, 시대로는 11~12세기의 비색청자, 13~14세기의 상감청자로 대별된다. 고려말의 상감청자는 기법이나 시문방법 등이 그대로 조선시대로 이어져 조선초의 분청사기로 그 전통이 계승된다.이 진사주전자는 기타계열의 청자로 기법상의 전통은 비색청자로부터 받았지만, 조형수법이나 진사채색의 활용 등 청자로서는 후기의 수법을 보인다. 거기에다 함께 나왔다고 전해지는 일괄유물들이 상감청자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실존인물 최항의 묘지석도 나와 있어서 학계에서는 13세기이후의 연대를 설정하고 있다.우리나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불교를 도입하여 국교로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융성하던 시기가 고려말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우리 미술품중에는 불교의 중심소재가 되었던 연꽃이 활용된 유물들이 무척 많았다. 연꽃은 진흙속에서 자라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까닭으로 해서 불교미술품 어디서나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부처가 앉아 있는 대좌나 건물의 기와장식 혹은 단청장식 등등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도처에서 볼 수 있다.불교가 최고조로 꽃피웠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런 현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청자는 처음부터 절에서 사용되는 기물들을 조달하기 위해서 생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속에 있었다.이 회장이 수집한 이 청자진사주전자도 장식의 기본은 연꽃을 이용하고 있어서 고려사회의 불교취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주전자는 표주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몸통 전체를 화사하게 피어 오르는 연꽃을 표현하고 있다. 연꽃잎은 내부를 음각으로 장식하고 외곽선을 진사채색으로 밝게 처리하였다. 몸통의 상단은 연꽃 줄기를 껴안고 있는 어린 동자를 조각하고 손잡이와 뚜껑에는 개구리를 조각하여 운동감을 살리려고 하였다.조형적으로는 물론이고 제작수법 등으로 보아 두개가 있을 수 없는 고려 무단정권의 실력자가 썼던 `명품 주전자'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병철의 품속으로 찾아가 오늘의 삼성미술관에 당당하게 진열되어 뭇사람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게 되었다.

2006-11-13 경인일보

[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 ·2]

이병철과 진사주전자 [2]사실여부를 떠나, 요즘도 재벌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백지수표가 건네졌다는 것이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곤 하는데, 당시 골동계에서는 이 청자매입건이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강화도 일원의 고려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청자주전자는 해방후에 알려진 문화재계 최대의 사건이었다. 고려말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였던 최충헌의 손자, 최항(崔沆, ?~1258)의 묘지석, 그리고 다른 몇점의 청자들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이 주전자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그 첫째 이유가 이 물건을 보고 급히 김 박사 등 주변의 자문을 구한 이병철 회장이 장아무개에게 백지수표를 건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두 번째는 진사가 발려진 청자로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완벽한 청자라는 사실에 있었다. 속칭 진사라고 불리는 붉은 색의 채색안료인 이산화동(CuO2)으로 장식되어 있는 이 청자주전자는 엄청난 양의 진사채색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보통 골동가에서는 진사장식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값이 엄청나게 뛴다. 이 주전자에는 연꽃잎의 가장자리를 따라 화려하게 진사가 채색되어 있어, 진사채의 사용량만 하여도 여느 도자기는 따라올 엄두도 못낼 만큼의 명품이었다.이 회장은 이 진사에 크게 마음이 끌려 나중에 도자기를 알 만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진사주전자를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였고, 특히 진한 닭피처럼 시뻘겋게 물든 진사기법이 중국보다 몇백년이나 앞서 있었다고 굳게 믿었다. 학술적으로 볼 때, 이 진사주전자는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최항의 묘지석과 함께 입수되었기 때문에,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명품임이 분명하다. 또한 기술적으로 보더라도, 반짝이는 유약층 바로 아래에 깔려 있는 진사는 700도 정도의 고온에서도 쉽사리 휘발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쉽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님은 분명했다.집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이 진사주전자를 청자재현 전문가(석봉 조무호)에게 의뢰하여, 그 유약의 색깔이나 진사의 발색을 원작에 가깝게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기대하였던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그는 요즘 기술이 옛날 고려때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진다고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재현기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요즘 만드는 기술로 옛날의 청자맛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그 불타는 진사의 발색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맛을 풍기고 있으니까, 재현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유명세를 탔던 진사주전자는 1970년대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드디어 공개적으로 일반에게 그 화사한 자태를 선보이게 된다. 이병철 회장의 아호인 호암을 따서 `호암소장의 문화재전시'라는 타이틀로 열렸던 이 전시회는 대그룹 삼성회장 개인의 수집품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회장은 이후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개인소장의 미술품 거의 대부분을 기증하였으며, 이어서 1982년 오늘의 호암미술관을 세우고 이 진사주전자는 국보133호로 지정되어 호암미술관 소장품의 간판유물이 되었다.

2006-11-06 경인일보

[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

 한국박물관의 발전을 위해 30여년간의 외길을 걸어온 이종선 경기도박물관장이 말하는 `명사와 골동품'에 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매주 월요일 지면을 통해 독자들을 찾아갈 이 관장의 이야기에는 골동품과 얽힌 명사들의 숨은 이야기들이 진솔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서울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대학원(박사과정)에서 고고학과 선사원사학(박물관학)을 전공한 이 관장은 70년대초 경주 고적발굴조사단 초기 일원으로 신라고분과 인연을 맺은 뒤 황남대총 남분, 천마총, 금관총 등이 왕릉임을 밝히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편집자 주〉내가 재계의 거목 이병철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30여년전 지금의 삼성본관 28층 집무실에서였다. 그는 아주 곱게 늙은 편이었지만, 눈빛은 매우 날카롭고 차갑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한번 일을 벌여 놓으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한 타입이다. 그런 든든한 바탕위에서 오늘의 삼성이 태어났고, 삼성이 있기까지에는 경영인 이병철이 뿌려놓은 탄탄한 기초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기업중의 기업', `기업의 육사'로 불리는 이병철의 삼성에는 몇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무조건 `돈 안먹기'이다. 옛날 `돈병철'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던 그는 돈먹은 직원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그냥 잘랐다. 그런 신조 때문에 그는 처신이 깨끗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고(故) 김원룡(전 서울대교수, 고고학) 박사를 무척 좋아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김 박사의 의견을 듣고 유물 구입이나 건립준비중이던 박물관사업 결정에 참고하였다. 김 박사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고 최순우 관장이나 이경성 전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이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할을 함께 하고 있었다.항상 어딘가 차갑고 무섭게 느껴지는 그런 그에게도 사춘기 소년같이 여리고 감성적인 면이 있었다. 와세다대학을 다녔던 전전의 일본세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가 보기에는 일본문화를 좋아하고 거기에 깊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핑크색 와이셔츠와 멋쟁이 콤비양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수요회'라는 골프모임을 주도하였는데, 경방의 김용완 회장이나 전 국무총리 김준성, 화가 월전 장우성 등이 그 멤버였다.그의 취미는 골프와 미술품수집이었고, 양쪽 모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골프는 홀인원을 몇 번 했을 정도의 실력이었고, 미술품수집은 주된 소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가 언젠가 미술품수집을 하게 된 동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그는 뛰어난 상재를 발휘하여, 젊은 나이에 대구에 삼성상회(지금의 삼성물산)를 설립하여 거부로의 첫발을 딛게 되었다.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미술품을 주고 받기도 하고, 주로 대구지역의 서화가들의 작품들을 한 두점씩 모으게 되었고, 차츰 그 분야가 다른 쪽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살아 있는 서예인의 작품에서 옛날 고서화쪽으로, 또 도자골동쪽으로 다시 현대미술품으로까지 관심이 바뀌면서 대상이 확대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특유의 집중력이 발동하여 규모와 수준을 크게 늘려나가게 되었다.당시만 하여도 지금처럼 재테크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아서, 그가 골동품수집을 한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그의 집에는 골동품을 소개하려는 발길이 줄을 이었다.그중에도 특히 장아무개라는 거간이 이 회장의 신임을 톡톡히 얻고 있었고, 그가 이 회장에게 소개한 청자진사주전자는 훗날 호암컬렉션의 백미를 이루게 된다. 이 청자주전자의 입수는 세간의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유명한 ‘백지수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진사가 발려진 청자주전자라는 점이었다.

2006-10-30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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