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유산을 찾아서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80]세계유산 구리 동구릉과 태조의 건원릉

공민왕릉 영향… 곡장·석물 변화봉분등 후대왕들과 차이 '과도기'건립당시 원형 잘 간직한 신도비미술사적·학술적인 가치 뛰어나세계유산 조선 왕릉 40기 중에서 31기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9기는 구리 동구릉 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동구릉은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5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인 목릉(穆陵), 21대 영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陵) 등을 포함한 능 9기가 있고, 그곳에는 17위(位)의 왕과 후비가 영면하고 있다. 이렇듯 동구릉에는 조선 전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왕릉들이 있어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왕릉의 규범이 된 건원릉이 있어 명실상부 조선 왕릉의 대표격이다. 건원릉의 조영을 담당한 사람은 박자청인데, 그는 공민왕릉과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만들었던 김사행의 제자였다. 이런 사실은 건원릉이 고려 왕릉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민왕릉의 양식을 본받아 축조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 한편 왕릉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1474년(성종 5)에 완성된 사실을 감안하면, 건원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에서 조선왕릉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건원릉은 고려 왕릉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다. 구체적으로 건원릉은 병풍석의 무늬나 문인석·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공민왕릉의 영향이 보이지만, 봉분 주위로 곡장을 새롭게 돌린 점, 석호와 석양의 배치에 변화를 준 점, 장명등 등 석물의 양식과 문양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점 등이다. 한편 건원릉은 이후 다른 왕릉과 비교할 때, 혼유석의 고석(鼓石)이 5개인 점, 석양과 석호가 다른 왕릉과 달리 배와 다리 사이가 메워져 있지 않는 점, 건원릉 정자각 위 오른쪽에는 다른 능과 달리 배위가 자리하고 있는 점,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점,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무성한 억새풀이 덮여 있는 점 등에서 차이가 보인다. 참고로 건원릉이 억새풀 봉분인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하여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로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태조의 신도비는 거북이 형상의 귀부에 비석을 올리고 그 위에 4마리의 용을 새긴 이른바 귀부이수형이다. 그리고 화강암으로 조각된 귀부는 수많은 연잎이 거북이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귀부를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는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에 건립된 최초의 신도비이며 양식과 장식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미술사적으로 빼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또 현존하는 왕릉 신도비 중에서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 사대부 신도비의 모본(模本)이 되고 있기에 학술적 가치가 남다르다. 참고로 조선시대 왕의 신도비는 세종까지만 건립하고, 그 이후부터는 왕의 생애와 치적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왕릉에는 신도비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동구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 마찬가지로 도심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개방시간도 새벽 6시부터여서 언제나 가볼 수 있고 수목이 우거진 평탄한 산책길을 제공하기에 걷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또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이 하루 3차례 있고, 초입에 '동구릉 역사문화관'이 있어서 조선 왕릉과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휴재 공지>경인일보와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는 지난 2015년 6월 30일부터 오늘까지 '경기도 문화유산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총 80회에 걸쳐 경기도의 문화유산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거나 경기도의 고유성을 밝힐 수 있는 유적을 선택하여, 그 내용과 가치를 매주 소개해 왔습니다. 그러나 경기문화재단 내부 사정상 연재가 당분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연재에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후일 연재가 속개될 때에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친근성과 가독성을 한층 더 갖추어 독자 여러분을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구리 동구릉 내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그의 신도비, 건원릉의 봉분에는 조선 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겨져 있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7-01-16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9]시흥 능곡동 신석기 마을유적과 빗살무늬토기

경기문화재연구원, 2007년 발굴서울 암사동 뒤잇는 '중기' 추정토기 7점 예술적·기술적 큰의미공원조성후 방치·상주인력 필요10년 전인 2007년까지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이었다. 그런데 이 암사동유적은 마을 전체가 발굴된 것도 아니었고, 시기도 기원전 4,000~3,5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 전기에 국한되어,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문화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암사동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197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이런 학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기도의 신석기문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 오늘 소개할 시흥 능곡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2007년 시흥시 능곡동 일원에 택지개발사업지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것으로, 과거 해안선에 인접했던 해발 30m의 작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말각방형의 주거지 24기가 정형성을 보이면서 확인되었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망치돌, 갈돌, 갈판, 화살촉, 굴지구 등과 같은 석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유적의 연대는 집자리 규모와 형태, 토기의 형식 등에 의거하여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2,500년)로 추정되었다.이 유적의 발굴로 신석기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게 되면 취락의 입지가 하천변의 충적대지에서 해안가의 구릉 지대로 옮겨간 사실, 당시 마을의 구조는 중앙의 공터를 중심으로 20~30호의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던 사실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출토유물 중에 어망추와 낚시 같은 어로도구가 전혀 출토되지 않은 반면에, 갈돌과 갈판 그리고 땅을 파기 위한 굴지구(掘地具)가 출토되어 농경이 생업경제였고 어로는 보조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유물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형태 복원이 가능한 7점의 빗살무늬토기였다. 몸통 전체에 단일의 문양만을 넣은 동일계 문양과 함께, 입술·몸통·바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문양을 넣은 구분계 문양도 함께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경기도에서 7점 이상의 신석기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없고, 구분계와 동일계가 함께 출토되어 능곡동 출토 빗살무늬토기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신석기 토기가 되었다.토기에는 인간이 처음으로 터득한 과학적 경험과 지식이 녹아 있다. 흙을 물과 반죽하여 손으로 빚으면 형태를 갖춘 용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학적 원리의 이해가 그것이다. 또 흙 반죽에 운모·석영·장석 등의 돌가루를 섞으면 견고해진다는 물리적 지식도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토기는 소조(塑造)의 지식이 적용된 것이며, 인간이 처음으로 '무에서 유'를 창출해 낸 이기(利器)이다. 한편, 빗살무늬토기의 경우 그릇 표면을 캔버스로 삼아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다.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태양, 비, 번개 등을 상징하는 것들을 새겨, 농작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도 담았다.이처럼 시흥 능곡동 유적이 지닌 고고학적 가치는 높고, 그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적·기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발굴 완료 후 원형을 그대로 보존, 현재는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최근에 복원된 주거지 몇 기만이 남아 있고, 유적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 해설이나 안내가 부족하다. 이는 우리나라 유적공원이 지닌 근본적 문제이며 일반인이 발굴유적을 멀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막대한 복원 비용이 투입된 유적공원들이 '사장(死藏)'의 수준으로 방치되고 있는 사실이 답답하다. 이에 경기도 전체의 유적공원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활용방안이 강구되었으면 한다. 시흥 능곡동 유적과 관련해서는 우선적으로 기존의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설명 내용을 대폭 보완·교체하고, 유적을 관리하고 해설할 수 있는 상주인력의 배치를 제안한다.시흥 능곡동 신석기 마을유적 출토 빗살무늬토기.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7-01-09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8]안양 석수동 마애종과 김중업박물관

고려전기 범종연구 학술적 가치스님도 새겨… 국내 유일 마애종공장터에서 '안양사지'도 발굴돼김중업 작품건물 '박물관화' 독특우리나라 지정문화재 가운데 불교문화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를 넘는다. 이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것도 있지만, 일반인이 볼 때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석탑의 경우 특별한 양식을 갖춘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런 것들이 흔하다. 경기도 지정문화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명분론을 빼고는 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다소 미흡한 것들도 있다.그에 비해 국가문화재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는 것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안양 석수동 마애종(安養 石水洞 磨崖鐘)'이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넓적한 바위에 종과 종각, 그리고 종치는 스님을 새겼다. 구체적으로 종은 사각형의 목조 결구에 쇠사슬로 매달아져 있으며, 윗부분에는 용의 몸체와 머리를 형상화한 용뉴와 중국종에는 없는 음향조절 기능의 음통(音筒)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몸통에는 사방구천(四方九天,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유곽과 종유, 연화문 당좌, 종 아래 부분의 하대(下帶) 등이 치밀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 종각의 기둥 위에는 화반(花盤)과 구름무늬를 중앙과 좌우에 새겨 단조로움을 피했다.이 마애종의 압권은 종매(타종 막대)를 잡고 종을 치려는 스님의 모습이 있는 점이다. 발까지 내려온 법의와 오른쪽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종각 속의 종과 일체가 되어 생동감을 더한다. 이 마애종은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스님의 조각으로 당대 법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종매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특별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이 유적은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 그만큼 희소성이 빼어나다. 또 종의 세부 표현이 치밀하여 고려시대 범종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기에 정감이 간다.해질 무렵 1000년 전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는 산사로 우리를 안내하기에 여타의 불교문화재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자아낸다.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예술 작품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이 마애종은 '안양 석수동 마애종'이란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안양사지 마애종'이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부여해야 할 듯하다. 이 마애종이 자리한 안양예술공원 내의 구(舊) 유유산업 부지에서 '안양사(安養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고려 태조 왕건의 후원으로 창건되었다는 안양사의 위치가 확인되었고, 이 마애종이 안양사 권역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안양사지 마애종'의 답사를 권한다. 안양시가 마애종이 속한 안양사지 권역을 유유산업의 이전 이후 부지를 매입하여 문화공간으로 변신해 놓았기 때문이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중심 사역의 면모가 드러난 안양사지가 정비되어 있고, 그곳에서 확인된 고고학적 정보와 출토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또 안양사 창건 이전에 있었던 중초사의 당간지주(보물 제4호)와 3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도 감상할 수 있다.한편,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를 대표하는 김중업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김중업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그와 그의 작품도 맛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박물관 건물은 유유산업의 건물 일부였던 김중업의 작품 자체를 리모델링한 것으로, 그가 설계한 유일한 공장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안양사지 마애종'은 안양사지가 발굴되었기에 그 가치가 배가되었다. 그리고 이런 성공은 안양시의 선진적 문화행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후화된 산업시설에 대한 이 좋은 사례는 우리가 앞으로 문화유산을 어떻게 대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점도 관람 포인트 중의 하나이니, 답사 시 염두에 두고 생각거리로 삼았으면 한다.우리나라 유일의 마애종인 '안양석수동마애종'.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7-01-02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7]오산 수청동 유적, 우리나라 최대 백제고분군

'매홀 = 수원' 정설 뒤흔드는 발굴한성백제시대 무덤 500여기 분포출토 유물중 1500여점 국가 귀속오산시 박물관 추진 반가운 행보백제시대 경기도 서남부 지역, 특히 수원·화성·평택·안산 등지의 행정 거점은 어디였을까? 또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매홀(買忽)'은 과연 어디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대부분의 백과사전류에서는 지금의 수원을 '매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설은 오산 수청동 유적(烏山 水淸洞 遺蹟)이 발굴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세교신도시를 개발하면서 발굴된 유적으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005년 11월에 착수하여 2008년 12월에 완료했다. 발굴 결과 한성백제시대의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지하에 움을 파서 무덤칸을 만들고 무덤 주변에 도랑을 돌린 토광묘의 한 형식)가 330여 기 확인되었는데, 이미 파괴된 무덤과 공원지역으로 지정돼 조사가 이뤄진 무덤들을 합해 총 500여 기의 무덤이 약 9만9천㎡의 범위 내에 밀집 분포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에 귀속된 것만 해도 1천567점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또 167기의 무덤에서 총 7만 6천여 점의 구슬이 출토돼 "마한 사람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았는데 옥구슬로 옷을 치장 하거나 목걸이와 귀걸이를 사용했으며, 금·은·비단은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고 기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입증해 줬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의 백제 무덤에서는 아주 드물게 출토되는 갑옷과 마구가 함께 출토됐으며, 백제의 무기 체제를 밝힐 수 있는 대도, 철모,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됐다. 특히, 중국 동진(東晋)에서 제작된 청자반구호와 금동제 화살통이 발견돼 이 수청동 유적의 정치적 위상을 가늠케 해줬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백제고분군이다. 또 그 조성기간이 250년 이상이나 되고 다종다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돼 백제의 문화상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고고학적 정보를 제공해 줬다. 아울러 학술적으로는 백제의 묘제와 편년을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줬고, 삼국시대 유리의 제작방식과 사용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그리고 삼국시대 경기 서남부의 중심지역이 오산 수청동 일대일 가능성이 타진됐고, 이를 통해 문헌 속의 '매홀'이 지금의 수원지역이 아니라 오산지역일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판단은 유적지 주변 일대에 매홀초등학교와 매홀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사실, '매'의 의미가 물과 연결되고 유적지가 자리한 곳이 수청동이라는 점, 바로 인접해 독산성이 자리하고 읍치(邑治)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실 등으로 뒷받침된다.이렇듯 오산 수청동의 세교신도시 일대는 삼국시대 경기 서남부 지역의 행정 거점이었고, 그것은 오산 수청동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이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런데 발굴이 완료된 이후 수청동 유적의 존재는 희미해졌고, 출토 유물을 포함한 고고학적 자료들은 사장(死藏)의 수준이다. 이런 현실에서 오산시가 오산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관·전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그 공감대 형성을 위한 공청회를 지난 9일에 개최했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다. 이를 계기로 수청동 출토 유물이 빛을 발해 진정한 경기도의 문화자산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경기도가 '한성백제의 바탕'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됐으면 한다.

2016-12-26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6]명승 제10호 삼각산과 북한산성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개의 뿔'국립공원 지정 후 북한산으로 불려개국의 영산 빼어난 자연경관 간직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당위성북한산성이 자리한 삼각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명승 제10호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지정 명칭은 '삼각산', 분류는 자연유산 중 자연명승, 지정구역은 27만4천143㎡이고 지정일은 2003년 10월 31일이다.삼각산은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고 지리적으로는 한양 도성의 진산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다. 또한 삼각산은 한북정맥의 마지막 정점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풍수적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도선, 신경준, 김정호 등 역대 걸출한 역사지리학자들에 의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당으로 손꼽혔다.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제사를 지낸 후 진흥왕순수비를 세운 곳도 이 삼각산이다. 아울러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왕사 무학대사가 만경봉에 올라 나라를 다스릴 도읍터를 정했다는 속설도 있다. 어쨌든 삼각산이 '개국의 영산'임은 분명하며, 삼각산의 등정은 중원을 장악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현재 명승 삼각산의 지정 구역은 백운대·인수봉·만경대만을 포함하지만, 원래 삼각산은 현재 북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 더 나아가서는 북한산국립공원 지구 중에서 도봉산 지구를 제외한 우이령 남쪽의 산괴를 말한다.이 북한산성이 자리한 곳을 지금은 북한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바라볼 때 백운대·만경대·인수봉이 세 개의 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을 가리킬 때에는 북한산으로, 명산대천의 하나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될 때에는 삼각산이라 했다. 또 자연자원이 중심 주제일 때에는 삼각산으로, 인문자원을 서술할 때에는 북한산 혹은 북산(北山)이라 말했다.이렇듯 원래 삼각산이었으나 북한산성의 축조 이후부터 '북한산'이 혼용되다가,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조사보고서'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북한산 일대에 대한 유적조사에 대한 결과를 1917년 '경기도고양군북한산유적조사보고서'로 보고하면서 일반적으로 북한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삼각산과 도봉산 일대를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 명명하게 되면서 삼각산이란 본명은 사라지고 북한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명 이외에 불리던 일명이 본명을 대신하게 된 셈이다. 따라서 북한산성이 자리한 곳을 지칭할 때에는 '삼각산 북한산성'으로 하는 것이 더 학술적이라 할 수 있다. 북한산은 유개념(類槪念, 전체 개념)이고 삼각산은 종개념(種槪念, 개별 개념)이기 때문이다.명승 제10호 삼각산을 품고 있는 곳이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이다. 그리고 삼각산은 수려한 산세와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또 국가제사의 대상이었고 풍수지리적 명당이었으며 한양 도성의 진산으로 숭배되었던 곳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수도권의 한복판에 있다. 북한산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덧붙여 북한산성 전체 면적 527만㎡ 중에서 99.3%인 523만㎡는 경기도 고양시 땅이다. 경기도가 북한산성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드는 데에 발 벗고 나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북한산성 전경.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2-19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5]안성 양성향교·덕봉서원·정무공 오정방고택

조선시대 유교이념 전파 중심도시화 진행 안돼 '원형' 간직한적한 전원 풍경 '힐링 답사'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인의예지로 대표되는 유교 이념을 백성에게 교화, 전파하고자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를 '1읍 1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배치하였다. 한편 조선의 정치 운영은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여러 붕당(朋黨)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들 붕당은 서원을 매개로 한 학연과 지연에 기초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읍치(邑治)가 있던 곳에는 대부분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명현을 배출한 지역에는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향교는 공립기관인 까닭에 지금의 시·군·읍·면 소재지에 주로 위치하며, 서원은 향촌을 기반으로 한 사립기관인 까닭에 비교적 경관이 빼어난 한적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는 곳이고, 서원은 선현을 봉사(奉祀)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맞게 서원과 향교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중심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나즈막한 야산의 경사면을 따라 전면의 낮은 곳에 명륜당이, 배후의 높은 곳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가 기본적인 배치였다.건축사적으로 볼 때, 명륜당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이 일반적이고, 대성전은 정면 3칸의 맛배지붕이 기본인데 죽은자가 머무는 곳이기에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을 창호가 없이 벽체로 조성한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향교의 경우 제향공간 내에 서원에는 없는 동무와 서무가 대성전의 좌우에 배치되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향교와 서원에는 어김없이 은행나무가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경기도는 명유현사(名儒賢士)와 고관대작이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한 조선유학의 중심지였고 그런 이유로 서원과 향교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향교와 서원들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그리고 최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하여 제자리를 벗어나 신축되거나, 원형을 벗어나 복원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실정에서 원위치에 자리하면서 원형을 상대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오늘 소개할 양성향교(陽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와 덕봉서원(德峰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이다. 양성향교는 조선시대 양성현(陽城縣)에 설치된 관립기관이고, 덕봉서원은 경기도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을 지낸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액을 받아 창건된 사립기관이다.양성향교는 양성현 치소(治所)와 바로 인접한 구릉 위의 완만한 경사지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갖추었다. 다만 중심건물인 명륜당과 대성전만 갖추었을 뿐, 동재와 서재·동무와 서무와 같은 기본시설은 물론 장서각·고직사·전사청 등의 부속시설도 없는데, 이는 교육기능을 상실한 조선후기 향교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양성향교의 대성전에는 다른 향교에는 없는 벽화가 퇴칸에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인 덕봉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건축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경내에 일반적인 서원에는 없는 정려각이 있는 점과, '양곡집(陽谷集)' 2권 4책과 1681년 김창협(金昌協)이 그린 오두인의 화상 1점 등을 소장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 배향인물인 오두인이 성장하고 학문을 닦은 장소인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安城貞武公吳定邦古宅,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이 인접해 있는 점도 남다르다. 이 오정방고택은 사랑채과 안채를 한 몸으로 지으면서도 내외를 구별하고 세부 치목 수법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들 유적이 위치한 양성면 소재지 일대는 경기도 남부에서 드물게도 도시화가 별로 진행되지 않은 곳으로, 전원의 풍경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양성향교가 있는 곳은 한적하여 편안한 기분을 안겨주며, 덕봉서원에서 바라보는 한천(漢川) 유역의 들판은 시원한 전망을 선사한다. 또 정무공오정방고택이 자리한 덕봉마을은 지난 400여 년간 문과급제자 20명을 배출시킨 풍수지리적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유적은 반경 1.5km 내에 인접해 있어 이동의 부담도 없다.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기 위한 답사코스로, 힐링을 위한 여행지로 권해 본다.덕봉서원 명륜당(좌)과 양성향교 대성전(우)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2-12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4]맹사성의 묘

강남·분당과 가까운 광주에 위치고위관료에 엄격 청렴한 성품 탓벼슬자리 절반이상이 좌천·유배무덤도 소박 고관대작 석물 없어이 어수선한 시국과 일그러진 권력자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그의 생애와 치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글 즉 졸기(卒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맹사성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방으로 모시고 윗자리에 앉혔다.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배웅하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이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그였지만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고위관료에게는 엄격했다. 그는 조선의 군왕 중에서 가장 무자비했던 태종 치하에서 26년 4개월간 벼슬자리를 하였는데, 그 절반인 13년 2개월 동안 좌천·파직·유배를 당하였다. 태종의 처남인 민공생을 공격하다가 공주목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후, 세종이 한번 보자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무고로 처리되자 그 잘못을 끝까지 지적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성석린·하륜 등 태종 측근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100대의 곤장을 맞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청백리였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청빈을 잘 대변해 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안 곳곳에 물이 새서 의관이 모두 젖게 되었다. 병조판서가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물건들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고향에 내려갈 때에는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했으며,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녔다. 한편, 성품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었고, 음악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또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의 생전에는 온양까지 찾아가 자주 문안을 드리고,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죽만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자였다.그의 무덤은 '맹사성선생 묘'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호를 딴 고불산(古佛山)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번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에 위치한다. 봉분은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장방형(長方形)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선전기 봉분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봉분 앞에는 화관석(花冠石) 묘표(墓表)가 세워져 있으며, 묘역 앞의 좌우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앞의 호석, 묘비, 문인석만이 원래의 석물이고, 묘역 내의 옥개형 비석, 상석과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등은 1959년 이후 후손들이 새롭게 설치한 것들이다. 한편 묘소 우측 500m쯤에는 흑기총(黑麒塚)이 있는데, 이것은 맹사성이 즐겨 탔던 검은 소의 무덤으로 그가 죽자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화재적 측면에서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 연잎을 양식화한 묘표의 형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가늘고 좁으며 망부석과 비슷한 눈을 가진 문인석 등은 15세기 전반의 석물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어쨌든 맹사성 묘는 청렴하게 살았던 그의 일생과 소박한 인품을 반영하듯, 고관대작의 무덤에 일반적으로 있는 신도비·장명등 등과 같이 재력이 요구되는 석물이 없다.그의 무덤은 우리나라 권력의 핵심들이 살고 있는 서울의 강남, 성남의 분당 등에서 가깝다. 스스로 공복이라 공언하는 그들이 맹사성의 무덤을 참배하고, 그의 삶을 반추하면서 '공직자의 자세와 책무'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무덤 주변은 한적하여 호젓함을 즐기기에도 적합하다.조선전기 묘제를 보여주는 맹사성 무덤의 호석(왼쪽), 묘표(가운데), 문인석(오른쪽).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2-05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3]오성과 한음 이야기와 용연서원

전래되는 이야기 23건중 7건 배경'한음' 학문수양 '오성' 고이잠든곳 道문화재돌봄단, 미화·보수관리 시민관심 부족 답사프로그램 제안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그러던 중 오성이 약혼을 하였다. 옛날 양반들은 약혼하고도 부인될 사람을 못 만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성도 약혼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하루는 한음이 오성에게 말하기를 "네 부인될 사람에게 말을 시키면 내가 한턱을 내고, 말을 못 시키면 네가 한턱을 내라"고 해서, 오성이 "그러마" 하고 둘은 내기를 했다. 오성은 "그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작대기를 들고 날 때려죽인다고 쫓아만 오너라" 하니, 한음이 작대기를 들고 "이놈, 때려죽인다"고 쫓아갔다. 오성은 계속 쫓기다가 자기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대청 마루에 서 있던 자기 약혼녀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부인 나 좀 살려주쇼!" 하니, 약혼녀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약혼을 했으면 겉만 봐야지 속까지 볼랍니까?"라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한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고 한다.어릴 적 동화책으로 읽었던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이들 모두 포천에 연고가 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그의 외가가 포천 자작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왕래했고 포천을 대표하는 인물인 양사언과 교유했다. 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인 용연서원(龍淵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포천에 자리하고 있다. 오성(鰲城)으로 더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한음보다 포천과 더 인연이 깊은데,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포천에 정착하여 살았고, 그의 무덤(경기도 기념물 제24호)과 배향서원인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이 현재 포천에 있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에 전해지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 23건 중에서 7건이 포천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실도 그들이 포천과 인연이 깊다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오성과 한음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함께 '이성(李姓)의 삼상(三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모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들은 우국충정의 정신과 제세안민의 자세로 공무를 처리했고, 공과 사를 엄정하게 구별하고 중립적 태도를 취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않았던 것으로 호평 받고 있다. 또한 청백리 정신 등으로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특히 두 사람은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30여 년간 깊은 우정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우정은 한음이 먼저 세상을 뜨자, 오성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도와준 일화를 통하여 가늠할 수 있다. 어쨌든 오성과 한음은 우리나라 최고의 '우정 아이콘'으로 상징화되어 있음이 분명하다.현재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도문화재돌봄사업단은 경기도 소재 600여 곳의 문화재를 환경미화·보수관리하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용연서원·화산서원·이항복의 묘소를 비롯하여 이덕형의 묘와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89호, 양평 소재) 등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현장을 찾아 주변을 청소하고 훼손된 부분에 대한 간단한 보수를 하고 있다. 또 화재와 기타 재난에 대비한 예찰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문화재의 근본적 보존을 위한 전문적인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지난 11월 17일에는 위의 사진에서처럼 용연서원의 기단부를 전 단원이 참가하여 직무 교육을 겸해 전통적인 기법으로 보수작업을 하였다. 이처럼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지원 아래 돌봄사업단은 선현들의 유적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에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다.그런데 이들 문화재에 대한 활용은 낙제점이다. 극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들 유적을 찾는 이는 매우 드물다. 무덤은 그들의 정신과 덕행을 선양하는 데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배향서원은 교육적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공들여 관리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경기도가 한때 실시했던 서원·향교 활성화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또 오성과 한음의 우정과 의리, 청백리 정신, 공명정대, 멸사봉공 등을 젊은 세대에게 전파하는 답사프로그램의 운영도 제안해 본다. 활용되지 않는 문화재는 영속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이항복의 배향서원인 용연서원(좌)과 경기도문화재돌봄사업단의 기단보수 작업 모습(우).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1-28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2]포천 인평대군 묘와 신도비, 그리고 치제문비

기와얹은 곡장 전형적 사대부 무덤경기도 신도비중 으뜸가는 조형미치제문비는 조선후기 문화 잘반영원형보존도 잘돼 '사적' 승격 필요2016년 현재, 경기도기념물은 전체 183건 중에서 무덤이 91건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전국 신도비의 70% 정도는 경기도에 분포하고 있다. 이렇듯 경기도는 조선시대 묘제의 중심지이고, 고관대작의 묘는 경기도에 더욱 밀집해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 고위관료들이 현실적인 여건상 주로 경기 지역에 그들의 터전을 정한 데에 있다고 판단된다.문화재 지정은 크게 역사성, 희소성, 예술성, 학술적 가치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런 기준으로, 경기도에서 지정한 묘와 신도비를 평가해 볼 때, 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묘와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 치제문비(致祭文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인평대군 묘는 기와를 얹은 곡장(曲墻)으로 둘러싸여 있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 합장된 단분(單墳)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 한 쌍씩 배치하였다. 묘역 뒤 오른쪽에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오른쪽 아래에 판석을 깔았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의 일반적인 규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한 것으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웅장·화려하여 경기도 소재 신도비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치제문비는 효종·숙종·영조·정조가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 비문으로 모두 2기인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네 분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이런 인평대군 묘역의 문화재를 문화재 지정 기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술성: 인평대군은 효종이 매우 아끼던 동생이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재위 기간에 돌아갔으니 효종이 인평대군의 묘와 신도비의 조성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인평대군 묘의 석물과 신도비는 왕실 소속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 확실하고,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 무덤의 석물로는 최고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에서도 웅대하고 장중하다.학술성: 인평대군 신도비의 받침돌은 거북의 몸체에 용의 머리를 한 귀부형이고, 머릿돌은 쌍룡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형이며, 비신의 재료는 화강암 계통이다. 이에 비해 치제문비는 건물의 기단을 모방한 받침돌에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올렸고 비신의 재료는 단단한 오석이다. 이런 비석의 재료와 형식의 차이는 우리나라 신도비의 양식 변화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치제문비는 건물 형태를 양식화하여 낙수로 인한 훼손을 최소화하였으며, 오석을 사용하여 비문의 마멸이 거의 없다. 단순과 실용을 강조하는 조선후기의 문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역사성: 인평대군은 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했고 1640년 볼모로 청에 갔다가 이듬해 풀려 귀국하였으며, 1650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현재 '송계집', '산행록' 등의 저서와 '산수도',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고백도(古栢圖)' 등의 작품이 전한다. 무엇보다도 고종과 순종이 그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이렇듯 인평대군은 역사적 인물로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희소성: 인평대군 묘역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묘의 전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석비 중에서는 비교적 희귀한 편에 속하는 치제문비도 묘역 내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소재 사대부 묘의 석물들이 이러저런 이유로 후대에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허다한 사실을 감안할 때, 원형이 잘 보존된 드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인평대군 묘역은 풍수지리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요건을 갖춘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가 좋다는 것은 좋은 경관을 갖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평대군 묘 역시 주변 일대가 개발되어 풍광이 훼손되긴 했지만, 전망은 시원하고 빼어나다. 이참에 경기도 지정문화재인 인평대군 묘와 신도비, 치제문비를 묶어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승격을 추진할 것을 제안해 본다.인평대군의 묘(왼쪽), 신도비(가운데), 치제문비(오른쪽). /경기학연구센터 제공

2016-11-21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1]경기소리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 명창

12개 노래로 구성된 민속 성악곡이창배 사사·묵계월 선생 뒤이어1999년 도무형문화재 지정·활동대중화 위해 경기창극단 설립 꿈예로부터 경기지방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일컬어 경기소리라 한다. 이 경기소리 중에서 민중들이 애창하던 노래를 경기민요, 전문소리꾼이 불렀던 것을 경기잡가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잡가(雜歌)란, 가곡·가사와 같은 긴 사설에 노랫가락을 실어 부르는 민속적인 성악곡을 말한다. 이런 잡가는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유입된 신파음악과 트로트가 들어오기 이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대중음악이었던 바, 가사의 내용도 다양하고 표현도 직설적이며 발성도 굵고 힘찬 편이다. 잡가는 지역을 기준으로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기잡가로 나뉘고, 성격에 따라 12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긴잡가와 휘몰이잡가로 구분된다. 이중 긴잡가는 경기 12잡가로도 불리며,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경기좌창(京畿坐唱)이라 일컫기도 한다. 음악적으로 볼 때, 경기잡가는 맑고 청아하며 아주 담백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6박 장단의 반복으로 경쾌하고 힘찬 기운이 있다. 그리고 목을 잔잔히 떨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이고, 누르는 목·끊는 목·조이는 목을 적재적소에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에 뛰어난 기량을 갖추어야만 노래의 참맛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경기 12잡가의 전통과 예술혼을 잇고 있는 명창이 오늘 소개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본명 임정자, 1943년생)이다. 과천의 '광대집안'에서 태어나, 1964년 우리나라 잡가의 정통맥을 이은 이창배 명창에게서 사사받으면서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1975년부터 경기민요(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의 보유자인 묵계월 선생의 지도를 받아 그의 첫 전수장학생이 되었으며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 1990년에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경기도립국악단 악장이 되어 고향인 경기도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경기도 땅에 전승·보급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어쨌든 경기소리의 적통을 제대로 계승한 경기도 사람이 경기도민을 위하여 귀환하여 경기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1년 '(사)한국경기소리 보존회'를 결성하고 다양한 공연활동을 통하여 경기소리의 보존과 계승, 대중적 보급, 현대적 활용과 활성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다. 구체적으로 매년 다양한 레퍼토리의 정기공연과 국립국악원에서의 기획공연, 소외층을 위한 찾아가는 공연 등을 왕성하게 펼쳐 왔으며, 과천 소재 경기소리전수관을 거점으로 후학 양성과 경기소리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2년부터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의 이사장을 맡아 경기도 무형문화재의 발전을 이끌고 있으며, 이 총연합회를 통하여 매년 '경기무형문화재대축제'를 개최하여 경기도 무형문화재의 선양에 앞장서고 있다. 명창은 경기소리의 명맥이 제대로 계승되고, 경기 12잡가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소리가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길 바라고 있다. 또한 경기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창작작품이 무대에 자주 올려지길 꿈꾸고 있다. 또 국립창극단과 같은 성격의 '경기창극단'의 설립을 염원한다. 경기소리에 대사·연기·무대 등이 가미되어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길 바라며, 이를 뒷받침할 전문단체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소리는 경기도의 전통문화 중에서 경기도의 정체성 즉 경기성이 강한 장르이다. 경기소리의 노랫가락과 박자에는 경기인의 정서와 성정이 녹아 있어, 투박하고 거칠지 않은 반면에 세련·섬세·경쾌하다. 또 왕실문화와 민중예술의 중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격조가 있으면서도 난해하지 않다. 아울러 대중가요의 원조격이므로 일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요소도 있다. 이런 경기소리가 점차로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 명창은 마음이 편치 않고, 할 일이 태산 같아 어깨는 무겁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해는 서서히 지고 있는 셈이다. 경기소리의 보존과 계승 책무를 그와 유관 단체에만 전가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경기도의 무형자산이자 문화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마침 2017년도 예산안이 경기도의회에서 편성 중이다. 도의회, 경기도 관계부서, 경기문화재단이 마음을 모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고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주었으면 한다. 참고로 경기학연구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센터자료'와 '영상자료'를 연이어 클릭하면 그의 소리를 듣고, 경기소리와 긴잡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 임정란 명창.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1-14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0]경기도의 선정비와 매국노 민영준의 영세불망비

퇴임 지방관 공과 무관하게 건립관아 중심으로 '비석 거리' 형성조선후기 사회명암 반영된 유적조선시대는 수령의 인품과 치적을 새겨 기린 선정비(善政碑)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선정은 정치를 잘했다는 것으로 불망비(不忘碑), 애민비(愛民碑), 청덕비(淸德碑), 청백비(淸白碑), 공덕비(頌德碑) 등으로 호칭했는데, 칭송의 의미를 담은 두 개 이상의 단어를 합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방행정의 중심인 관아 주변에 세웠고, 선정 여부를 불문하고 지방관을 지낸 인물을 대상으로 세우는 것이 관례화된 만큼 그 수량이 수십여 기를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선정비가 세워진 곳은 이른바 '비석 거리'가 되었다.조선시대 선정비는 처음에는 백성을 아끼고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대상으로 건립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례화되어 명예를 위하여 거짓으로 비를 세우거나 아랫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비를 세우게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선정비 자체가 가렴주구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선정비를 분석한 논문을 보면 선정비에 기록된 수령 중에서 선정비에 걸맞은 이력을 가진 인물은 20%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있다.구체적으로 북한산성의 선정비 28기를 두고 보더라도, 주인공의 행적이 밝혀진 7명 중에서 신명순(申命淳)과 이규원(李奎遠)은 선정비에 어울리는 인품과 치적을 지녔으나, 북한산성 내 승병대장이었던 성능(聖能)을 비롯하여 김병기(金炳冀), 김문근(金汶根), 민겸호(閔謙鎬), 민영준(閔泳駿), 이유수(李惟秀) 등은 비리에 연루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산성의 경리사(經理使)를 맡았던 민영준(閔泳駿, 1852~1935)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들 수 있다. 그는 1891년에 북한산성 책임자로 임명돼 성곽을 보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는데,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주역이었다.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에는 민영준을 "정권을 훔쳐 농간을 부리며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고 평가해 놓았다. 변신을 거듭한 민영준은 뒷날 친일파의 앞잡이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럼에도 그가 거쳐 간 곳마다 선정비가 세워졌으며 용인 마북리에 소재한 그의 영세불망비에는 '비독어국 뇌급어민(?篤於國 賴及於民)' 곧 "나라의 크나큰 도타움에 백성들이 힘입었네"라고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조선시대 경기(京畿)에는 목(牧) 1, 도호부(都護府) 8, 군(郡) 6, 현(縣) 26 총 41개의 지방통치기구가 있었다. 또 북한산성의 총융청, 남한산성의 수어청,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의 사옹원 분원 등의 특수기관도 있었다. 이런 경기 소재의 관청에는 수령이나 책임자가 파견되었고 그들이 떠날 때에는 재임 시의 공과와는 무관하게 선정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 전역에는 관아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선정비가 무리지어 있고, 이런 까닭에 선정비는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이라 단정할 수 있다.이렇듯 선정비는 가장 흔하면서도 조선후기 사회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지방관의 착취와 폭정 아래에서 숨죽여 살면서도, 재물을 마련하여 그들의 악정을 선정으로 칭송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충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인물의 경력을 연구할 수 있는 금석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선정비들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 활용은 낙제점이다. 이런 현실에서 '경기도 소재 선정비 종합 현황집'의 발간, 선정비 속의 인물 연구, 선정비를 통해 본 경기도의 수령, 선정비의 형식과 변천, 선정비의 역사적 의미와 생산적 계승 등과 같은 조사와 연구는 물론, 문화콘텐츠의 생산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북한산성 선정비군(사진 왼쪽)과 용인 마북동 소재 민영준 영세불망비(오른쪽).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1-07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9]북한산성의 승영사찰과 부왕사지

불교조직 동원 축성·운영 도와350여 승군 주둔하며 소문 지켜병영·사찰 공존 희소가치 높아조선 숙종은 1674년 즉위하자마자 북한산성을 축성코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와 같이 군왕이 도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북한산과 같은 천연의 요새에 산성을 쌓아서 도성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북한산성의 축조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도성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북한산성의 축성과 같은 대역사를 벌이면 민생을 피폐하게 한다는 것을 반대의 이유로 들었다. 또 병자호란 이후 청과 맺은 정축약조(丁丑約條) 즉 성곽을 쌓지 않겠다는 항복 조건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산성의 신축보다는 도성을 수축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이런 갑론을박이 37년간이나 이어져,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이 되어서야 축성에 들어가게 된다. 축성은 중앙군단인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분담하여 실시됐는데, 이들과 함께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돼 건축물의 조영과 성벽의 축조를 도왔다. 또 축성이 완료된 이후에는 승군의 병영인 북한치영(北漢緇營)을 두어 정규군을 보조, 북한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돕도록 했다. 어쨌든 임진왜란 이후 조선정부는 부족한 정규군의 숫자를 승병으로 보충하고, 또 탄탄한 불교 조직과 그들의 숙련된 기술을 산성의 축조와 운영에 적절히 이용했는데, 북한산성은 그런 의승(義僧) 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북한치영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승영사찰(僧營寺刹,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 13개가 소속되어 있었고, 이를 중흥사에 주석한 팔도도총섭이 통솔하게 하였다. 조직은 도총섭 아래에 중군(中軍), 좌우별장(左右別將), 천총(千摠), 파총(把摠), 좌우병방(左右兵房) 각 1명,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명 등을 두었는데 군대 조직과 별 차이가 없었다. 승군은 350명이었는데 초기에는 각 도의 승려들 가운데 차출해 2개월씩 복무토록 하다가, 나중에는 돈으로 대납토록 했다.북한치영은 북한산성의 수비와 운영을 총괄하던 관성소(管城所)와 삼군문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는데, 현재 승영사찰들이 암문(暗門)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문은 삼군문이 맡고 소문(小門)은 승영사찰에서 담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북한산 유람기를 보면 사대부들은 승영사찰에서 숙박하였고, 이들에 대한 길안내와 술심부름을 승려들이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간행)에 기록된 북한산성의 무기 현황을 보면 그들에게도 화포와 조총은 지급했지만, 화약과 실탄은 지급하지 않았던 사실이 확인된다.북한산성 내 13곳의 승영사찰 가운데 원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부왕사지이다. 누각지 등 현재 드러난 흔적들로 미루어 볼 때,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한흥사지(漢興寺址)의 배치와 흡사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흥사지의 발굴결과로 미루어 보면 수행공간과 병영(兵營)이 분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고, 병영에는 무기고·창고·막사가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런 추정을 근거로 부왕사지에 대한 발굴과 복원을 제안한다.북한산성의 축조와 운영의 한 축이었던 승영사찰의 역할을 알리고, 탐방객에게 색다른 역사 교육의 장을 제공하며, 병영체험과 사찰체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북한산성내의 삼군문 유영과 승영사찰은 희소적 가치도 높다. 그리고 그중에서 훈련도감 유영과 부왕사지는 각기 우리나라의 중앙군단의 군영과 조선후기의 승영사찰을 대표하며, 둘 다 원상이 잘 남아있다. 북한산성 행궁과 함께 이 둘을 복원하여 잘 활용한다면 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일제강점시기에 촬영한 중흥사가 폐허로 변하기 전의 사진(왼쪽)과,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 13곳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부왕사지(오른쪽).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0-31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8]경기만서 모습 드러낸 영흥선(靈興船)

2010년 옹진군 인근 해역서 발견수중 발굴 전용인양선 최초 투입품질 높은 도료 '황칠' 발굴 눈길매장문화재 발견 신고 가치 확인지난 2007년 한 어부가 주꾸미를 낚아 올렸는데, 흥미롭게도 주꾸미의 빨판에 청자대접이 붙어 올라왔다. 이에 어부는 관련기관에 문화재 발견 신고를 했고, 다음 해인 2008년 고려청자가 인양된 충청남도 태안 마도 및 대섬 일대에 대한 수중발굴이 이루어졌다.조사결과 나주, 해남, 장흥 등지에서 거둔 곡물과 강진의 청자를 싣고 가다 1208년에 난파된 배의 잔해와 함께, 청자·도기류·목간·곡물·젓갈·닻돌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는 청자매병을 비롯한 최상품의 청자들도 다수 있었다.당시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매장문화재 발견신고자에 대한 보상은 직접 발견한 유물에 대해서만 지급되었다. 만약 홍길동이 자기 밭에서 신라시대 토기 5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 주변에 발굴이 이루어져 다른 유물이 500점 출토되었다 해도 홍길동은 신고한 5점에 대해서만 보상을 받아야 했고, 그 상한액도 2천만원으로 한정됐다.이런 규정 때문에 '주꾸미가 걷어올린 고려청자'를 신고했던 어부에게 문화재청이 줄 수 있는 포상금은 2천만 원을 넘을 수 없었다. 그의 신고로 인해 고려청자가 1만여 점이나 출토되었고, 그 값어치가 200억~300억원 정도인 데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했다. 이에 국회 문화관광위 국정감사에서 이를 지적했고, 그 결과 문화재청은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발견신고품에 대한 보상금 이외에 일종의 보너스격인 포상금을 지급키로 했으며, 지급 최고 한도액을 2천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그래서 그 어부는 국가로부터 1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몇 년이 흘러 2010년,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인근 해역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두 사람이 청자대접 4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중 윤모씨는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객 중에 고고학자가 있어서 그에게 발견 유물의 처리 문제를 의논했다. 유물을 처음 접한 고고학자는 4점의 청자가 포개진 상태였다는 이야기들 듣고서는 바로 난파선의 유물일 것이라 직감하고 발견신고의 절차를 알려주는가 하면, 수중발굴전문기관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도 별도로 발견 사실을 알려주었다.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중 발굴 전용인양선이 투입되어 조사가 진행됐다. 발굴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고대목선과 그 내부에서 황칠(黃漆)일 가능성이 높은 도료와 쇠솥 등을 발견하고 선박 주변에서 고려자기 600여 점을 수습하였다. 이후 영흥선(靈興船)으로 불리는 이 난파선은 해양에서 발굴된 최초의 통일신라시대 선박이라는 사실만으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중국에도 알려질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던 황칠의 발견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과적으로 관심 어린 신고로 국가적으로 유익한 문화자산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이처럼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영흥선 발굴에서는 최상품의 도자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학술적 가치는 높았지만 재화적 가치는 낮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상금 1천만 원이 확정되어 발견신고자 2명에게 각각 500만 원씩 지급되었다. 참고로 남의 토지에서 문화재를 발견해 신고할 경우에는 발견자는 포상금의 50%만을 받고 나머지는 토지 소유자에게 지급된다.우연히 문화재를 발견하면 마땅히 관계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호기심에 주변을 파서도 안 되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법으로 정한 기한 즉 7일 이내에 신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발견 유물을 기념품으로 삼기 위하여 집안에 두거나 골동품으로 팔기 위해 인사동 등으로 가져가서도 안 된다. 물론 일반인이 골동품업자를 상대로 제값을 받기도 사실상 어렵다.만약 매장문화재를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은닉 또는 처분하거나 현상을 변경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니 발견 즉시 시·군의 문화재 담당 부서나 문화재청에 바로 신고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무지와 탐욕으로 패가망신하기보다는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택함이 현명하겠다. 운 좋으면 돈과 명예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경기만 영흥도 섬업벌 부근 난파선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왼쪽 사진)과 황칠(黃漆).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0-24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7] 하남 미사리 유적과 여자형 주거

석기시대부터 고고학 자료 풍성온돌·식기, 동북·중국 문물 수용한강 따라 분포 '지역 특성' 대변서울 근교 라이브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으로 유명한 하남 미사동에는 하남 미사리 유적(국가사적 제269호)이 자리하고 있다. 유적은 한강 중상류의 남북 4㎞, 동서 1.5㎞의 타원형 섬인 미사리(지금은 미사동)의 강변 쪽을 따라 발달한 자연 제방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유적에 대한 조사는 서쪽 지류에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만들면서 동쪽 본류의 수량이 늘어나자 섬의 동쪽 일부를 잘라 강폭을 넓히는 한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이 계획되면서 1988~1993년에 걸쳐 실시됐다.조사 결과,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마을유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마을 내부에서는 움집 형태의 집터, 창고 기능으로 추정되는 고상식(高床式) 건물지, 저장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 구덩이, 불을 피워 조리를 했던 화덕자리 등이 발굴되었고, 그 숫자는 466기에 달했다. 이와 함께 백제시대 문화층에서는 상하로 중복된 밭 유구가 상층 4천700여 평, 하층 1천700여 평 규모로 발굴되었다. 이렇듯 미사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유구가 시간 순으로 광범위한 범위에서 확인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畿甸) 지역의 마을이 발전해 온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고, 그런 까닭에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마을유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미사리유적에서 가장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는 여자형(呂字形)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장방형 집자리의 전면(全面)에 지금의 현관에 비유될 수 있는 소규모의 출입시설이 있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평면형태가 한자 '여(呂)'자와 유사하다.(사진 왼쪽) 구조상 지하를 파서 주거공간을 만들고 지표면에 출입 공간을 조성하였다. 대형의 경우 규모는 약 90㎡(약 27평) 정도로 청동기시대의 대형 주거지 60㎡와 비교할 때 규모에서의 현저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내부에는 벽체를 따라 'ㄱ'자 모양의 온돌을 꺾어서 설치했고, 집자리의 중앙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노지(爐址)를 마련했다. 유물로는 돗자리 문양을 전면에 시문한 둥근 바닥의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이런 여자형주거지에 설치된 온돌은 외줄이지만, 우리나라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온돌의 시원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또한 그런 온돌의 원조 지역이 연해주라는 사실은, 우리의 온돌문화와 주거문화가 동북지방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반면에 토기는 낙랑토기를 본떠서 만들었는데, 이는 식기(食器)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주거지의 규모는 우리나라 전용 면적으로 볼 때 지금의 소위 33평 아파트보다 큰 규모이다. 이런 사실은 기원후 2세기 무렵에 이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추정케 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런 여자형주거지는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한강 본류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한국고대 경기지역의 고유성을 대변해 주는 특징적인 가옥 구조이기도 하다.미사리 유적은 우리나라 취락발달사를 보여주는 유적이자 선사·고대 경기인의 주거와 생활 문화를 간직한 유적이다. 그런데 지금 미사리 유적이 소재한 하남 미사동으로 가 보라. 문화재 안내판을 제외하고는 유적의 존재를 알리는 어떤 문화시설도 없다. 미사리 유적은 대단위 마을 유적이다. 그것도 경작지를 갖춘 마을 유적이다. 한강을 끼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중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와 연결되어 있어 접근성도 탁월하다. 이런 유적에 백제인의 삶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백제마을을 재현하고, 2천여 년 전의 농경을 복원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로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하여 국민들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한다. 사적이기에 국가적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수도권이라는 두터운 수요층이 있기에 최적의 관광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유적이 지닌 문화콘텐츠가 풍부하기에 얼마든지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유적의 규모와 내용면에서 하위에 있는 서울의 암사동 유적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가 하며 적극적으로 정비·활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미사리 유적의 여자형 주거지(좌)와 유적지 현황.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10-17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6]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 사적 제422호)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한 '둘레 1.9㎞' 성곽13회 발굴조사… 목간발견으로 지방관직제·문서행정 확인나무·천 등 유물 썩지않고 출토… 문화재적 가치 조명 필요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정복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군사적·행정적 거점에 견고한 산성을 새롭게 쌓았다. 오늘 소개할 이성산성도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된 산성 18곳 중 하나로, 신주의 행정소재지 즉 치소(治所)에 쌓은 둘레 1.9km의 성곽이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삼국후기부터 통일신라말기까지 경기도청이 자리했던 곳이 하남의 이성산성인 셈이다.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지금까지 13차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6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쌓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사이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던 사실,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성 내부의 조사에서 정면 17칸의 대형건물지, 8각·9각·12각 등 특수 건물지를 비롯한 20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한 대형 저수지가 2곳 발굴되어 군현(郡縣) 단위에 쌓은 산성보다는 위상이 높은 성곽임이 드러났다.유물은 토기, 철기, 기와, 목기 등 3천500여 점 이상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저수지에서 다른 목간 37점과 함께 출토된 '무진년' 목간('戊辰年' 木簡)이다. 이 목간에는 무진년(608년) 정월 12일 새벽에 남한성(南漢城) 도사(道使)가 수성(須城)의 도사와 촌주(村主)에게 내린 행정 명령이 묵서(墨書)로 적혀 있었다. 이 목간의 발견으로 이성산성이 당시에 남한성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신라의 지방관직 제도뿐만 아니라 문서행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또한 성 내부에서 벼루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 출토품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벼루가 90여 점에 불과하고, 그중에서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54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성산성에서 문서행위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이들 벼루의 다량 출토는 이성산성이 신주의 치소라는 추정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한편 이성산성에서는 8각형과 9각형의 다각형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여기서 8각 건물지는 중심부에 4개의 둥근돌이 세워져있어 사직단(社稷壇)으로, 9각 건물지는 9라는 숫자가 하늘을 상징하는 숫자임을 들어 천단(天壇)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건물지는 이성산성 내에서 국가적 제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함께 토제·철제로 만든 말 모형 17개가 매납된 의례유구도 확인돼 이성산성 내에서 벽사적 제의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대형의 저수지 2곳의 바닥면에는 지속적으로 수분이 공급되었고 그 결과로 유기물에 해당되는 나무빗, 나무 얼레빗, 나무 팽이, 박바가지, 칠기, 나무 인형, 나무 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의 유물들은 썩지 않고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다른 성곽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 유기질의 일상용품이기에 통일신라시대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이렇듯 이성산성은 신라후기부터 통일신라말기까지 경기지역의 군사, 행정, 신앙, 건축, 생활문화에 관한 다양하고도 귀중한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이성산성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비·복원한 산성과 산성 내의 문화재 안내판, 그리고 인터넷 포털의 간단한 유적 설명에 불과하다. 이성산성이 지닌 문화콘텐츠에 비하여 소략하기 그지없고, 이런 까닭에 도민들은 이성산성의 문화재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유적지도 역사교육의 장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하여 '사이버 이성산성'의 제작을 제안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산성에 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가 제공될 수 있는 블로그 정도면 충분하다.이성산(해발 209m)의 능선을 따라 계곡을 끼고 쌓은 길이 1.9km의 이성산성.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 제공

2016-10-10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5] 연천 전곡리유적과 주먹도끼

좌우대칭·일정한 가로세로 비율체계화된 공정있어야 제작 가능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단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술성 지녀연천 전곡리 유적(사적 제268호)은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Greg Bowen)이 처음 발견한 이후 10차례 이상 발굴 조사된 구석기유적이다. 유물은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현무암 대지 위에 형성된 깊이 약 3~8m 정도의 퇴적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는 4천점 이상인데, 그중에서도 주먹도끼가 단연 돋보인다. 유적의 연대는 약 30만년 전후에 현무암 대지가 형성된 사실과 퇴적층이 만들어지는 데에 걸린 시간을 감안하여 20만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어 대부분의 교과서와 교양도서에서는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고고학회가 펴낸 '한국고고학 강의'라는 개론서에서는 여러 가지 과학적인 분석을 근거로 들어 10만년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다는 주장을 소개하면서 유적의 정확한 편년 설정을 유보하고 있는 입장이다. 어쨌든 이 유적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아프리카의 아슐리안 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상이 전곡리 유적과 그곳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인 주먹도끼에 대한 일반적인 사전적 설명이다. 주먹도끼는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고 크기가 크든 작든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일정하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정형성을 띠고 있으며 규격화되어 있다. 이런 주먹도끼를 만들기 위해서는 돌감의 선택, 기본적인 형태 만들기, 세부적인 잔손질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전 공정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어야 만족스러운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마음 속에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그런 설계도에 따라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손놀림이 있어야 제작이 가능하다. 아동심리발달 단계에서 12세 정도가 되면 '형식적 조작기'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런 '형식적 조작기' 수준의 인지능력, 즉 추상적인 개념에 대하여 논리적·체계적·연역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능력이 있어야 주먹도끼처럼 3차원적이며 대칭적인 물건을 만들 수 있다. 더 나아가 형식적 조작 능력을 갖추었을 경우, 언어적 지능이 비로소 발달하게 된다. 결국 주먹도끼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추상적 개념을 할 수 있으며 그런 추상적 관념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볼 때, 주먹도끼가 지금으로부터 150만년 전 제작되었다는 것은 호모 에렉투스 단계에, 우리 인류는 유인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주먹도끼는 전면(全面)을 가공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손에 잡히는 부분은 원래 대로 두고, 날 부분만을 가공한 경우가 절대적이다. 또 잔손질을 정교하게 가하지 않은 편이어서 거칠고 투박하다. 이런 까닭에 아프리카·유럽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비하면 초라한 편이다. 이는 그쪽의 재질이 정교한 조작이 가능한 플린트(flint, 입자가 매우 고운 부싯돌)를 소재로 삼은 데에 비하여, 우리는 석질이 단단하여 마음먹은 대로 모양을 낼 수 없는 규암(硅巖)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전곡리유적 출토 주먹도끼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선사시대 유물이다. 그런데 이 유물에 대한 가치는 전기구석기시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는 주먹도끼가 동아시아의 끝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실에만 집중되었다. 그러나 주먹도끼는 그 자체만으로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며, 호모 에렉투스 단계에 인간이 입체적 사고와 추상적 관념을 지녔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유럽 문화와는 다른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렇듯 유물 1점이 지닌 가치는 넓고도 깊은데, 지금 우리의 역사 교육은 유물이 지닌 민족사적 가치에만 편중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문적인 연구 성과를 흥미롭게 가공하여 일반대중에게 제공하는 노력이 요구되며, 그런 작업들이 충실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저절로 깊어질 것이라 믿는다.전곡리 선사유적 주먹도끼.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 제공

2016-10-03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4]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과 흔암리식 토기

두만강·연해주 토기·주거 특징 경흥대로·발해만 등 통해 유입경기도에서 다시 남부로 '전파'선사시대부터 '허브' 역할 수행고고학에서 유적이나 유물의 이름을 지을 때 처음 발견된 곳이나 가장 대표적인 장소를 본 따서 명명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의 가락동식 주거지, 역삼동식 토기 등이 그것이다. 오늘 소개할 흔암리식 토기도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경기도기념물 제155호)에서 확인되어 붙여진 이름이다.흔암리식 토기는 겹아가리에 구멍무늬와 빗금 장식이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15세기~기원전 6세기)의 토기 양식을 말하며, 분포는 금강 중상류를 제외한 남한 전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이른다. 여기서 토기의 아가리 부분 즉 입술 주변을 돌아가며 구멍을 뚫은 스타일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의 토기 양식이므로, 흔암리식 토기의 속성 중의 일부는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한강유역 신석기 문화에 동북지방의 영향이 크게 확인되지 않는 점과 흔암리식 토기의 시작이 청동기시대 전기인 사실을 연결할 때, 양 지역 사이의 문화 교류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성백제기 경기도를 대표하는 집자리로 여(呂)자형·철(凸)자형 주거지가 있다. 구조적으로 네모난 주거지의 입구를 돌출시켜 출입시설이나 부속실을 마련한 것이 특징적이며, 주거 내부에는 난방과 조리를 위한 터널형 노지(爐址)를 갖추고 있다. 이들 주거지도 중국 길림성 동부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내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도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역의 토기 스타일과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경기 문화의 형성에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의 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런 문화의 전파는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이 구획한 6대로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흥대로(慶興大路, 한양에서 함경도 경흥까지의 대로)와 엇비슷했을 듯하다. 그 이유는 근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한강유역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북상하여 철령을 넘어서 동해안을 끼고 두만강 유역으로 가는 길이 인마(人馬)와 물자(物資)의 이동에 가장 적합한 교통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복속 세력인 말갈도 이 길을 통하여 백제를 노략질하려 왔고, 진흥왕도 한강 유역을 점령한 다음, 이 교통로를 따라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경기도에 살았던 선사와 고대 사람들은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문화(혹은 초원문화)의 영향과 함께 서북지방을 경유한 요녕 지방의 문화도 받아들였으며 발해만을 통하여 중국 중원의 문화도 수용했다. 그리고 이들 문화를 융합시켜 '한강 스타일'을 만들어 한반도 남부로 파급시켰다. 이처럼 경기 지역은 다양한 문화들이 모여드는 결절지(結節地, 문물이 집중되는 곳)였고 새로운 문화의 생산지(生産地)였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의 공급지(供給地)였다. 인체에 비유하면 심장이었고 차바퀴로 말하자면 허브였다. 지방시대가 열리면서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자 지역학이 발달하고 있다. 경기도 역시 경기도의 고유성 즉 경기성(京畿性)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경기성에 선사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문화의 허브'로서의 경기도의 특성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의 대륙문화뿐만 아니라 북방의 초원문화가 유입되어 경기지역의 문화원형이 되었던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청동기시대의 흔암리식 토기(왼쪽)와 한성백제기의 여(呂)자형 주거지.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 제공

2016-09-26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3] 안성 도기동 유적과 파주 덕진산성

관방유적 위주 가장 많이 분포돼한반도서 가장 중요한 지역 증명파주~안성, 출발점과 종착점 의미두 곳 모두 '국가사적 지정' 신청고구려는 475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역을 차지한다. 현재까지 세종 남성골 산성과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군사시설은 고구려가 금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입증해 준다.또 충주의 중원고구려비는 남한강 유역도 고구려가 지배하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리고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668년 멸망 때까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대치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이처럼 고구려는 경기도 지역을 거의 200년 동안 지배했고, 남한지역에서 고구려유적이 가장 집중해 있는 곳도 경기도이다. 경기도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국경 방비를 위해 설치한 군사시설인 관방유적(關防遺蹟)이 절대적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이 대표적이다. 현재 이들 모두는 발굴이 이루어져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 상태이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안성 도기동 유적은 2015년 9월에 발굴로 확인된 목책성(木柵城)으로, 목책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설치했던 흔적인 구덩이가 일정한 열을 맞추어 발굴되었다. 구조는 흙을 쌓아 올린 둔덕인 토루(土壘)를 중심으로 안쪽에 1열, 바깥쪽에 2열로 목책을 설치했는데, 안팎 목책의 간격은 4.5∼5m로 드러났다. 발굴조사단은 토루의 주변에서 짧은목 항아리, 사발,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고,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남성골 고구려 산성과 축조 방법이 흡사한 점을 들어, 이 도기동 유적을 고구려 목책성으로 최종 판단했다. 그리고 학계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금강 일대까지 진출한 증거로 보았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주둔하지 않고 돌아가 백제가 계속 한강 일대를 점유했다는 학설이나, 백제가 웅진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력을 회복하여 고구려를 한강 이남에서 축출했다는 학설 등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했다.덕진산성(경기도기념물 제218호)은 연천의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축성되었던 고구려 성곽으로, 다른 고구려 성곽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에 전면적인 개축이 이루어지고 조선 광해군 때에 외성(外城)이 추가된 이중 구조를 지닌 산성이다. 1992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래 21세기가 되어서야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를 통하여 고구려가 처음 축조한 다음 1차 수축을 하였고, 신라가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다시 쌓았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 고구려가 축성한 사실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고구려 기와와 토기가 다량 발굴되었다.안성 도기동 유적은 충청도와 가까운 안성천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덕진산성은 고구려 유적 중에서도 임진강 최하류에 위치하며 민통선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유적 사이에는 고구려 유적이 선상으로 분포한다. 이런 고구려 유적의 분포양상은 고구려군의 남진로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북진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대군의 이동로였으며, 지금도 간선도로의 구실을 하고 있다.파주 덕진산성과 안성 도기동 유적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 즉 국가 사적 지정을 신청해 둔 상태이다. 두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될 경우, 우리는 경기도를 종단하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고구려 유적의 출발점과 종착점에 사적을 두게 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경기옛길 사업과 연계하여 '고구려 대장정'사업을 제안해 본다. 학계의 전문가들이 복원해 둔 고구려 남정로(南征路)를 따라 고구려를 직접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청소년과 도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경기도는 옛 삼국시대 고구려 유적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고, 삼국간의 국운을 건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을 차지한 나라는 국가 발전의 최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국가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역이 바로 경기도였음을 상기시켜, '국가 근본의 땅(國家根本之地)'이라 불렸던 경기도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고구려 목책성인 안성 도기동 유적(왼쪽)과 고구려 산성인 파주 덕진산성. /경기문화재단 제공

2016-09-19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2] 용인 구성 할미산성과 보정동 고분군

고구려와 달리 점령지 직접 지배주요 거점 산성·고분군 발굴 의미집수시설 등 장기항전 준비 확인매장문화재 발굴 인식 개선 필요신라는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553년에는 백제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한강 하류까지도 차지하는데, 고구려와는 달리 영토와 백성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정복지역의 행정적·군사적 요충지에 산성을 쌓아 점령지 지배를 굳건하게 했으며, 신라의 정복활동으로 복속한 가야인과 기존의 신라인들을 한강 유역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아울러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 신라가 한강유역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했다.이런 신라의 정복지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은 고고학적 증거로 잘 남아있는데, 경기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의 산성과 고분군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남 이성산성, 이천 설봉산성, 양주 대모산성, 포천 반월산성, 고양 고봉산성, 파주 봉서산성, 교하 오두산성, 여주 파사성, 안산 성태산성, 오산 독산성 등을 포함한 18개의 신라산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고분군으로는 신라산성과 인접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현재까지 파주 성동리 고분군, 용인 보정동 고분군, 화성 백곡리 고분군, 여주 매룡리 고분군 등이 발굴되어 알려져 있다.신라 산성과 고분군은 경기도의 주요 행정거점과 군사요충지에 축성되었는데, 이들이 자리했던 지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경기도 행정중심지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경기도 통치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시점이 신라후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경기지역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반영해주고 있는 유적이 용인시 구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용인 할미산성(경기도 기념물 제215호)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사적 제500호)이다. 할미산성은 전체 둘레가 651m 정도에 불과한 작은 산성이지만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물을 모아두기 위한 대형의 집수(集水)시설, 제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팔각형 건물지의 존재를 보여주는 초석 등이 발굴됐으며,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굽다리접시와 단선(單線) 문양의 기와가 출토됐다.용인 보정동 고분군에서는 80여 기의 고분이 발굴됐는데, 시신을 묻는 매장주체부는 주로 횡구식석곽으로 추가장(追加葬)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유물은 굽이 달린 장경호를 포함한 전형적인 신라후기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는데 경주지역에서 생산한 품질이 좋은 상품(上品)과 그것보다는 제작기술이 다소 떨어지는 현지생산의 토기가 섞여 있었다. 한편 묘지를 선택할 때 기존의 백제 고분군이 있던 곳을 피했던 점도 확인됐다.이상의 발굴성과를 통하여 신라는 백제지역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선영(先塋)을 보호함으로써 유화정책을 펼쳤던 점, 그러면서도 문화적으로 신라의 장례습속을 강요하여 현지민의 신라화(新羅化)를 모색했던 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새로운 거점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하고자 했던 점 등을 알 수 있다. 또 읍치의 배후에 피난성을 만들어 환란(患亂)에 대비했으며, 그곳에 집수시설을 만들어 장기항전을 준비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치성을 드렸던 사실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경주 주변의 무덤양식, 매장의식, 토기제작기법 등이 그대로 확인돼 신라문화의 이식(移植)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점도 발견할 수 있다.이 모든 것은 고고학적 발견과 그에 대한 해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헌자료에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는 신라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고고학이 만들어낸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행위에 대한 문화재조사를 의무화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지정·보호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재의 지정을 사유권의 침해만으로 보는 시각에 여론이 전도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 매장문화재의 발굴이 개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만으로 취급받지 않길 바란다. 도시화로 인한 경관의 파괴를 막아주는 강력한 수단이 문화재 보호일 수 있고, 가뜩이나 부족한 지역의 역사를 풍부하게 해 주는 것도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서 비롯되며, 건조한 역사에 볼거리를 제공하여 '한국사의 시각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이 유적과 유물이기 때문이다.◀용인 할미산성의 성벽(왼쪽)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2016-09-12 경인일보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1] 경기도 근·현대 산업문화유산 '금성 텔레비전 VD-191'

영상매체시대 진입 '첫 흑백TV'요즘 화폐가치로 200만원 '고가''전자통신 발달 중요 역할' 이유2013년 8월, 문화재로 이름올려일반인들의 상식선 안에서 문화유산은 '문화재보호법' 제2조 제1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모든 것을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당초 근대 건조물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등록문화재 제도의 범위도 넓어져 왔다.1999년 은밀하게 진행된 국도극장 철거 공사를 시발점으로 사회 각계에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에 2001년 7월 등록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 당시에는 그 대상이 근대 건조물에 한정되었다. 어찌되었건 등록문화재제도의 도입을 통해 '근대 건조물=식민잔재'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게 된다. 2005년 7월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등록문화재의 대상을 건조물과 시설물 중심에서 지정문화재로 보호하기 어려운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까지 확장한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는 현대 산업사의 산물을 문화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8월 LG 인화원(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소재)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성 텔레비전 VD-191'이 당당하게 등록문화재 제561-1호로 등록된다.이 텔레비전은 1966년 금성사에서 제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 텔레비전이다. 화면 크기는 19인치이며, 12개의 진공관으로 능동회로를 구성하여 증폭·검파·동기분리·음성 및 영상신호 증폭 등의 기능을 가졌다. 수동으로 채널을 선택하는 기계식 튜너를 사용하였고, 콘크라스트 조정 단자와 볼륨 조정 단자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제품에 따라 받침다리를 설치하여 고급 가구의 이미지를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초호화 가전제품이었다.금성사(현재 LG 전자)가 1968년 11월 동아일보에 낸 광고에 따르면 텔레비전 VD-191을 5개월 혹은 10개월 월부로 구입할 수 있었다. 5개월 월부로 구입할 시에는 당시 가격으로 7만345원이었고, 10개월 월부일 시에는 7만3천15원이었다. 1968년 7만3천원이 요즘 화폐 가치로 200만원 가까이 되니 그 당시 이 제품이 얼마나 고가의 제품이었는지 짐작이 가며, 또한 당시의 전자통신 기술이 집약된 전자제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은 텔레비전 VD-191의 문화재 등록 사유로 전자통신 기술과 산업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산업 디자인의 역사적 측면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점을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가 영상매체 시대로 진입하게 한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한다.텔레비전 VD-191의 문화재 등록의 의미는 첫 번째 현대적 산업유산이 문화재로서의 지위를 받았다는 것과 두 번째 현대의 동산유물이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번외의 의미로 50·60대에게 그 당시로 추억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유산이 반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다는데 있다.아쉽게도 텔레비전 VD-191가 소장되어 있는 LG 인화원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지 않다. 이곳에는 '금성 라디오 A-501(등록문화재 제559-1호)', '금성 냉장고 GR-120(등록문화재 제560호)', '금성 세탁기 WP-181(등록문화재 제562호)' 등 다수의 산업유산을 소장하고 있어 그 아쉬움이 더하다. 가능하다면 LG 인화원의 전시공간이라도 시민들에게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우리나라 산업 발전사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금성 텔레비전 VD-191. /문화재청 제공

2016-09-05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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