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5·끝]맺음말

재단, 시·군 대표 목록 마련 풍성한 활동 자연물·역사인물·설화·유적 등 소개무궁한 활용 가능성 불구 학술적 연구·관심 부족… 민·관·학 체계적 사업 제안다양한 콘텐츠로 道 정체성 찾고 발전 시켜야… 전문가 "문화원형은 미래사업"'문화원형'은 '종자(種子)'다.경인일보는 올해 15차례에 걸쳐 경기도의 문화원형 상징물을 소개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가 진행한 '경기 31개 시군 문화원형 상징 선정 사업'과 함께했다. 경기문화재단은 지난 2010년부터 '경기 문화유산 원형 디지털화 사업'을 시작으로 문화원형 관련 사업을 이어왔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문화원형 관련 활동이 풍성하게 진행됐다. 재단은 경기도내 각 시·군을 대표할 문화원형 목록을 마련했고,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한신대학교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와 손잡고 학술대회, 심포지엄 등을 마련했다. 경인일보는 안성의 돌미륵을 시작으로 이천의 효양산 사슴설화, 고양 행주산성, 포천의 오성과 한음, 안산의 표암과 단원, 광명의 민회빈 강씨 등 자연물, 역사인물, 설화, 유적으로 구분된 다양한 형태의 문화유산을 문화원형 상징으로 소개했다. 또한 문화원형의 활용에 앞장선 일본 교토를 방문해 그들이 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를 엿보았다.가능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역의 문화유산 현황과 상징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듣고자 했다. 지역 문화원을 비롯해 지역주민과 학자, 역사 연구자 등을 만났다. 이들에게서 우리 문화유산이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희망의 말과 학술적 연구와 관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민·관·학이 협력해 균형적이고 체계적으로 문화원형 사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의 연구부족 상황을 우려해 지역학 연구단체를 활성화 하는 한편, 정책적으로 아카이빙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경기도는 지난해부터 '경기 새천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 천 년을 맞는 2018년을 앞두고 도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토크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내년에는 아이디어 플랫폼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새 천 년 맞이를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경기도의 상징물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를 일회성 행사로 끝낼 것이 아니라, 도민들이 집적 손으로 실감할 수 있고 후손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며 "상징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도민과 소통하고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문화재단과 학계가 나서 문화원형 사업을 벌이는, 경기도가 새천년을 맞이하며 상징물을 선정하려는 이유는 다음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경기학연구센터 윤여빈 센터장은 "문화원형을 찾고 상징물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하는 일은 경기도의 정체성을 찾고 발전시키는 일"이라며 "문화원형은 '종자'이고 모든 콘텐츠는 종자를 바탕으로 크지 않으면 외화내빈이 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윤 센터장은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다시 한 번 경기도의 문화 저력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경기도가 가진 문화원형 상징물은 우리의 정신이 농축된 유산으로, 그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하고 풍성하다"며 "이러한 전통이 미래고, 문화원형은 미래 사업이다"라고 강조했다.그는 덧붙여 "현실속에서 어떻게 콘텐츠를 지킬 것인지는 앞으로 남은 숙제"라며 "물을 주고 가꾸는 것은 공무원과 도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6-11-29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4]전문가 간담회

지난 16일 경기도 문화원형 발굴 및 활용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지훈 경기학연구센터 조사연구부장을 좌장으로, 신창희 경기학연구센터 전문연구원, 신광철 한신대학교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이동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이 참석해 문화원형을 통한 경기도의 정체성 확립과 콘텐츠 활용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문화원형이 제 기능을 하려면 연구와 보존, 활용 삼박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지역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이지훈 부장은 올해 경기도에서 진행된 관련 사업을 소개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경기학연구센터는 올해 4월부터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 손잡고 '31개 시·군 문화원형 100대 상징 선정'사업을 진행했다. 도내 시·군의 문화원형을 발굴해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해 고유성을 발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됐다. 이와 연계해 지난 9월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12월에는 '문화원형 상징 창의적 활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 부장은 "경기문화재단은 꾸준히 관련 사업을 진행했지만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풍부하게 다뤄졌다"며 "그간 발굴한 자료들을 토대로 각 시·군의 문화원형을 추출하고 본격적으로 논의했다"고 평했다. 신창희 연구원은 "경기학연구센터는 문화원형을 '인간의 보편적인 집단적 무의식이 각 사회의 전통·규범 등에 따라 특수하게 표현된 일종의 대리표상'으로 정의하고 이를 나타낼 구체적인 상징물을 선정한 것"이라며 "문화원형이라는 개념 자체가 관념적이라 얼른 의미가 와닿지는 않지만 문화자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이동준 사무국장은 "요즘은 많이 사용되는 말이지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실제 문화 향유자들과 괴리가 생길 수 있다"며 "이미 국내에서는 문화원형 콘텐츠 사업의 실패사례가 있다. 문화사업의 기본은 향유자의 손에 닿아야 한다"고 말했다.신광철 교수는 "문화원형이 우리사회에서는 다분히 중앙적 맥락에서 진행되다 보니 어느 순간 동력을 잃고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대표성을 강조하다 구체성을 놓쳤기 때문이다. 경인일보가 연재한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에서 구체적 맥락이나 지역민의 바람을 엿볼 수 있었다. 예컨대 '안성사람들이 돌미륵을 대하는 태도는 형제를 대하는 것과 같다'는 대목이 그런 것이다. 그 안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숨결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역적 맥락을 놓치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선정된 문화원형 상징이 지역성을 대표하고 지역민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느냐의 측면에서는 아쉬웠다는 의견이 있었다.김장환 사무국장은 "선정 목록 중에는 지역성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활용에 한계가 있는 것들도 보였다. 지역과 충분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며 "지역 문화 자원들에 대해서는 지역민들이 가장 잘 안다.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과 다각적인 시각, 큰 틀에서 고려돼야 한다"고 지적했다.이동준 사무국장은 "문화원형상징을 선정하기 앞서 가장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카이빙 작업"이라며 "관련 아카이빙이 마련돼 있으면 여러 정보들 속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담긴, 그 지역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지훈 부장은 아카이빙 구축이 문화원형 사업에 필요하다는데 동의하며 "원형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실되는 경우가 많아서 조사, 보존, 활용의 세가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단에서의 지속적인 사업추진도 필요하겠지만 각 지역에서의 관심과 학계에서의 연구도 필요하다"며 문화원형이 문화발전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제언을 이끌었다.신창희 연구원은 "관련 사업이 단발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지속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기획이 필요하다"며 "문화원형을 발굴하는 데서부터 문화원형이 지닌 상징성이 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것이 지역민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 까지를 사업의 완성으로 봐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김장환 사무국장은 "용인의 경우, 문화원형이 문화산업의 일환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콘텐츠를 개발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으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역의 문예진흥이다. 지역에 산재한 문화자산이 있는데 지역민도 잘 모른다.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너무나 거창하게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의 측면에 앞서 지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전통문화로서의 문화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신광철 교수는 "우리나라는 문화산업프레임에 갇혀있다. 문예부흥 다음에 킬러콘텐츠를 발굴해서 활용하는 건데 중간단계가 빠져있다. 콘텐츠만 남고 문화는 빠진 것"이라며 "지역문화재단에서 문화원형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드믄 일이다. 경기학연구센터는 관점과 연구내용을 만들면서 관념이 아닌 주민들이 느낄 수 있는 원형을 찾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 교내에서 문화원형과 콘텐츠 관련 수업을 신설해 운영해보니 어린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며 "세대, 의식적 격차를 줄이고 실생활에서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원형이 재현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 16일 경인일보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경기도 문화원형의 발굴과 활용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경기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깊이 있는 문화 콘텐츠를 향유하기 위해 문화원형의 활용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태교신기광주시 목현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한 천하대장군.

2016-11-22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3]일본 교토(Ⅱ)

청수사 길목 니넨자카 일대 복층 목조 '마찌야' 일본 美의 상징 관광객들 몰려대중이 주류인 '무로마치 문화' 시작된 곳… 주민들 경관·가옥 등 자발적 관리타워·공항 신설 마다한채 '상향식 건축물 규제'로 정부도 아낌없는 정책 지원청수사(기요미즈데라)로 이어지는 길목인 니넨자카 일대는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닮아있다. 구불구불하고 고즈넉하게 형성된 거리는 마치 시간을 돌린 듯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도보를 따라 마찌야 형태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마찌야는 일본의 전통 가옥으로 주로 복층 구조의 목조건물 양식을 띠고 있다. 민속촌과 다른 점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마을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민들은 전통 가옥에 거주하며 1층은 상점으로, 2층은 주거공간으로 활용한다. 옛 주거지가 잘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고 있어 전통적 향취와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 관광객이 하나둘 몰려들면서 니넨자카는 일본의 미(美)를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됐으며 매년 수많은 방문객이 다녀간다.카모가와 강변을 따라 형성된 기온 거리 역시 문화유산의 온전한 보전이 빛을 발한 장소다. 이곳에는 옛 가부키 극장, 요릿집 등 전통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길옆의 소화전부터 도보를 형성하고 있는 포석(납작하게 세공해 도로를 포장하기 위한 돌)까지 일본 중세시대에 놓인 것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기온에선 일종의 게이샤 수련생이라고 볼 수 있는 '마이코'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의 복장과 몸가짐 역시 전통 그대로여서 옛 거리와 함께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교토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며 원형으로서 기능한다. 오래도록 왕실의 보금자리와 수도의 역할을 해 온 일본 전통문화의 발원지이자 지금까지도 일본 문화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손으로 쥐어 만든 생선 초밥, 대나무를 활용한 실내장식, 나뭇잎과 어우러진 일본 음식, 자갈·모래와 조화를 이룬 초목이 만드는 정갈한 조경… 오늘날 일본의 전통문화로 연상되는 대표적인 풍경들의 원천을 찾아보면 그 끝은 결국 교토로 이어진다.교토가 간직한 전통문화의 출발점은 일본 중세인 13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세력이 득세한 가마쿠라 막부에 반발심을 가진 무사들이 세력을 모아 무로마치 막부를 형성하면서 지금과 같은 전통문화의 형태가 꽃을 피우게 됐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기득권인 무사 세력부터 민중까지 선종(복잡한 불교 교리를 도가적으로 간결하게 풀어 중국화한 불교, 종교라기보단 윤리강령에 가깝다)을 따르고 있었기에 계층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는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발전을 이끌어 한국·중국과는 다른 일본만의 독자적 문화 형태를 싹 틔웠다.이 시기에는 일본 최초로 민중이 문화 주류로 부상하기도 했다. 노(일본식 가면 음악극)와 교겐(노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중간에 삽입되는 일상 풍자. 일본식 코미디의 원류), 다도 등 무로마치의 대표적 문화는 다분히 대중 친화적이다. 현재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마을 축제나 본오도리(盆踊) 등의 연중행사와 1일 3식, 된장과 간장을 곁들이는 조리방식 등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양식도 모두 이 시기에 시작됐다. 현재의 교토는 이런 무로마치 문화가 시작된 장소이면서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인구 147만명이 살고 있는 일본 내 주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보통 '전통보존'과 '도시발전'은 쉽사리 공존할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교토는 대도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나 고층건물 대신 역사 유물과 어우러진 전통가옥을 잘 보존하는 방식으로 보존과 성장을 동시에 꾀하고 있다. 문화원형이 현재의 삶에 녹아들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이는 전통경관을 그대로 보존해 관리하기 위한 일본정부와 교토부·교토시의 정책이 뒷받침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통을 아끼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결과이기도 하다.지난 1966년 일본 정부는 문화재가 많고 경관보존 필요성이 높은 도시를 대상으로 고도보존법을 제정했다. 교토시는 1970년대부터 '시가지경관조례'를 제정해 미관지구 지정, 역사지구 보존, 옥외광고물 규제 등을 실시해오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전체 시가지의 최고 고도는 31m, 주요 문화재 주변은 15m 이하로 건축 높이가 제한된다.높이 뿐만이 아니다. 교토시는 전통건조물보존지구, 역사경관보전수경지구, 일대경관정비지구 등을 지정해 건축물의 디자인에도 제한을 뒀다. 마찌야 밀집지역에는 건축물의 모양과 재료, 색채 등을 정할 때도 미리 지자체와 상의하도록 했다. 지구의 특별한 정취와 분위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보통 철저한 규제는 주민들의 불편과 불만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토의 보존정책 대부분은 정부의 하향식 의사결정이 아닌 주민들의 자발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1970년대부터 지구별로 자치회를 만들어 건축물의 신축과 리모델링을 규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관광지구로서의 차별성을 꾀한 결과물로도 보이지만 교토 주민들 대부분의 마음 속에는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전통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마음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교토 시내에서 관광 가이드로 활동 중인 와사베 미야코씨는 "교토 사람들은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금의 도시풍경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고 있다"며 "설령 유적지 주변에 어떠한 호화시설을 지어준다고 해도 주민들은 반대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간사이지역진흥재단 요시다 타카시 팀장은 "정부가 도쿄타워와 비견될 교토의 랜드마크를 만든다며 지난 1964년 교토타워를 세울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교토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해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며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드나들기에 교토 인근에 공항을 신설하는 방안이 논의될 때도 교토 상공에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할 정도였다"고 말했다.이어 "결과적으로 교토가 일본 관광을 대표하는 도시가 된 밑거름이 됐지만, 그것은 도시를 사랑하고 전통을 보전하려는 주민들의 마음으로 인해 빚어진 부차적인 결과"라며 "이런 열성적인 분위기가 있으니 정부도 보존을 위한 정책을 아낌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글·사진=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교토 니넨자카 거리에서 바라본 호칸지.카모가와 강변을 따라 이어진 폰토초 거리의 밤풍경. 주점이 많아 밤까지 방문객이 많다.기온 거리 일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마이코의 출근길.니넨자카의 해질녘 풍경.

2016-11-15 권준우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2]일본 교토에서 본 문화원형의 의미

고궁·사원 모여있는 일본 옛수도 고루함보다 체험거리 넘쳐나청수사 흐르는 폭포수 물 마시기 '지혜·연애·장수' 기원 긴 줄'후시미이나리 타이샤' '헤이안 신궁' 주민 삶에 자연스레 녹아'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하는 이들에게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특히 문화원형의 경우 생성 과정에 대한 유래와 얽혀있는 이야기들을 알고 나면 이끼 낀 비석 하나, 깨진 기와 한 장도 특별한 의미로 느껴진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보존과 승계라는 문화원형 고유의 의미를 고려했을 때, 문화원형은 관련 상식이 있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어선 안된다. 몰라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설화가 서린 곳이어도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부족하다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역사적 가치 자체로도 소중한 것 아니냐는 반박이 뒤따를진 모르나, 그 가치를 평가하고 빛나게 하는 건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이다. 문화원형의 원활한 보존과 활성화를 위해선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 수 있는 '즐길 거리'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때문에 문화원형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몰라도 즐겁고, 즐기다 보니 알게 되는 것'이 되어야 한다.이웃 나라 일본은 그 사실을 진즉에 깨우친 듯하다.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와 비슷한 느낌으로 오래된 절과 고궁, 사원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전통이 있는 도시다 보니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고루하다.교토의 문화원형들 역시 각각의 사연과 설화들이 다양하다. 건축 양식부터 조경 방식까지, 제대로 알려면 사전지식이 필요한 곳들 투성이이다. 하지만 교토의 유적지에는 이곳이 사적 몇 호이고 누가 세웠으며 어떻게 사용됐는지 등이 쓰인, 우리나라에선 너무나 흔히 볼 있는 관광안내 입간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 자리에는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거리가 가득하다.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오미쿠지'다. 오미쿠지는 길흉을 점치기 위해 뽑는 제비를 뜻한다. 100엔을 내고 나무통을 흔들어 숫자가 적힌 막대기를 뽑은 뒤 숫자에 해당하는 서랍 안에 든 종이의 내용으로 길흉을 점치는 식이다. 오미쿠지는 일본 내 제법 이름있다 싶은 사찰이나 사원에 가면 어디든지 볼 수 있는데, 각 사찰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고 빌어야 할 기원의 종류도 다르기 때문에 장소별로 뽑는 맛이 있다. 유적지별로도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매년 300만 명 이상이 찾는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름 그대로 물이다. '기요미즈'란 맑은 물을 뜻하는데 이 사찰로 흐르는 오토와 폭포에서 유래됐다.본당 밑에는 폭포에서 갈라진 세 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각각 지혜와 연애, 장수를 상징한다. 긴 장대형 바가지로 흐르는 폭포수를 떠 먹으며 각 물줄기가 상징하는 의미를 기원하는 게 이 사찰의 전통이다. 재미있는 것은 욕심을 내 세 가지의 물을 다 마시면 불운이 따르기에 오직 두 가지만 선택해서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유쾌한 불문율이 있기에 오토와 폭포 앞은 물을 떠마시기 위해 수십m 줄을 늘어선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언제나 가득 찬다. 청수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슈신사'로 이어지는 입구가 보인다. 인연을 맺어주는 신을 모시고 있는 이곳은 사랑을 이뤄주는 신사로 유명하다. 이곳의 명물은 신사 앞에 10여m 거리를 두고 일렬로 놓인, '러브 스톤'으로 불리는 돌 한 쌍이다. 이 돌 앞에서 눈을 감은 채 맞은 편 돌까지 걸어간 뒤 돌 바로 앞에서 눈을 뜨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설화가 담겨 있다.청수사 시설관리 담당자 오토와 사토시씨는 "청수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경치를 즐기고 소원을 빌며, 기분좋은 시간을 만들기 위해 오는 것"이라며 "단풍철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레이저쇼도 진행하는데 아주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교토역 부근에 위치한 '후시미이나리 타이샤'도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가득 차있다. '여우신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곳을 상징하는 것은 4천 개가 넘게 이어진 붉은 기둥(토리이)이다.이곳은 농업과 상업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예부터 생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입장료는 무료이기에 이곳은 주민들의 산책로로도 자주 애용된다. 울창한 숲 속에서 눈을 사로잡는 붉은 기둥 길은 전 세계 사진작가들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머니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거대한 문인 '사쿠라몬'도 이곳에 있다.기둥이 이어진 산 초입부를 오르다 보면 전체 코스를 완주할 수 없는 바쁜 여행객들을 위한 작은 사당이 나오는데, 이곳엔 기원문을 적어 매다는 용도로 만들어진 작은 여우 얼굴모양 목각판이 있다. 이것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풍경도 나름 장관인데,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목각판에 기원문이 아니라 사람 얼굴, 여우 얼굴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려 매다는 것이 유행이 됐다. 그러다 보니 이젠 기원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방문객들이 그린 각양각색의 그림들이 벽을 메우고 있어 이것을 하나하나 보는 것이 또 다른 재미가 됐다.유적지보다 주변 조경을 더욱 부각한 곳도 많다. 교토가 일본의 수도로 자리한 1천100년의 역사를 기념해 지은 '헤이안 신궁'은 유난히 붉고 화려한 일본 유적지 중에서도 2중 기와와 화려한 처마가 유독 도드라지는 곳이다. 신궁 내부는 광장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넓어 봄철이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연인들도 많다.하지만 이 헤이안 신궁은 무료로 운영되는 반면, 신궁 내부에서 왼쪽으로 길이 난 '신엔'이란 이름의 정원에는 600엔의 입장료가 있다. 화려한 건축물보다 가꿔진 조경을 더 중요시하는 셈이다. 신엔 내부는 4개의 공간으로 분리돼 각각의 테마를 담고 있다. 호수와 어우러진 고목과 사찰, 이끼 숲 사이로 피어난 꽃 등 한적하면서도 정갈한 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휴식 같은 여행을 즐기고 있는 이들에게 헤이안 신궁이 옛 수도의 부귀와 쇠락을 상징하며, 두 명의 왕을 모신 사원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헤이안 신궁 안내담당자 코우키 카즈나리씨는 "헤이안 신궁 내부와 앞 광장은 가족들의 소풍과 산책, 휴식의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며 "사원의 역사나 모시고 있는 상징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온 사람은 드물고, 여러 차례 방문을 통해 이곳에 대한 애정이 싹튼 사람들이 자연스레 헤이안신궁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글·사진 =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4천개가 넘는 기둥이 끝없이 이어진 후시미이나리타이샤.청수사 입구.청수사 오토와 폭포 앞에서 방문객들이 물을 떠마시며 기원을 올리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사원에서 방문객이 손을 모으고 기원을 올리고 있다.관광객들이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사원 앞에 놓인 여우모양 목각판에 그림을 그려 매달아놓은 모습.헤이안신궁 안 정원인 '신엔'에서 본 중앙호수.헤이안신궁 '신엔'에서 관광객들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6-11-08 권준우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1]용인 사주당 이씨와 '태교신기'

네자녀 낳아 키운 경험 토대 62세때 집필 '세계 최초 태교 전문서' 과학·현대성 주목목천 현감 아내로 25살에 용인으로 시집… 18세기 후반 사회변화 읽어낸 지식인 평가용인시 '인성·배려·존중의 태교도시' 비전… 힐링 숲·축제 등 진행 건강한 시민 육성胎敎爲本 師敎爲末 태교가 기본(本)이고 스승의 가르침은 끝(末)이다.父生之 母育之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며,師敎之一也. 스승의 가르침은 모두 한 가지다.善醫者 治於未病 의술을 잘하는 자는 병들지 아니하였을 때 다스리고,善斅者 斅於未生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에 가르친다.故 師敎十年 그런 까닭에 스승의 십 년 가르치심이未若母十月之育 어머니 열 달 기르심만 못하고母育十月 어머니 열 달 기르심은未若父一日之生 아버지 하루 낳아주심만 못하다.태교신기(胎敎新記)에 나온 말이다. 태교신기는 1800년에 쓰여진 태교전문서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사주당(師朱堂) 이씨(1739~1821)로, 여성이다. 태교에 관한 내용이니 여성이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여성이 책을 쓰는 일은 흔치 않았다. 사주당 이씨는 목천 현감 유한규의 아내로 25살의 나이에 청주에서 용인으로 시집왔다. 네 자녀를 낳아 키운 경험과 학문으로 쌓은 지식 등을 토대로 62세에 태교신기를 집필했다. 1801년 사주당의 아들 유희가 언해한 수고본이 성균관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태교신기는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태교의 이치를, 2장에서는 태교의 효험을 설명했다. 태교의 중요성과 구체적인 방법이 주를 이루고, 남편과 가족이 임산부의 태교를 위해 지켜야 할 것들도 일러두었다. 사주당의 개인사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남편 유한규와 아들 유희 등 주변 인물이 남긴 글에서 그녀의 성정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아들 유희가 쓴 '어머니 가장(家狀)'과 신작이 쓴 '사주당 묘지명'에 따르면, 사주당은 남편 없이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용인으로 들어가 변변한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구고 촛불도 없이 길쌈을 하는 고통스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먹이느라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딸들에게는 아궁이 불 때는 일을 시키지 않았고, 아들에게는 식량을 싸서 스승을 찾아 멀리 보내기까지 했다. 딸들은 모두 글공부를 해 '태교신기'의 발문을 쓸 정도의 문장을 갖추었고, 아들 유희는 훈민정음의 자모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류, 해설한 언문학자로 '언문지'등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남겼다. 사주당 스스로도 학문을 향한 열망이 컸다. 83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편지 한 묶음과 남편 목천공과의 성리문답, 내가 필사한 격몽요결은 입던 옷과 같이 넣어달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20살의 나이차에도 목천공과 사주당 부부는 함께 학문을 토론했고, 남편은 아내를 지지했다.태교신기에는 사주당의 지식인, 선각자로서의 면모가 함축돼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사주당이 18세기 후반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요구되던 시기에 누구보다 앞서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읽어낸 지식인이라고 평가한다. 여성들이 지닌 지혜나 지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이를 종합해 책을 써냈으며 그 책 안에는 당시에는 찾기 힘든 주체적이고 평등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녀는 누구나 태교를 하면 군자를 낳을 수 있다고 했고, 자녀를 기르는 초급 교육의 주체가 어머니라고 했다. 당시 유교적 가치관으로 여성이 교육에서 배제돼 있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주장이다. 이사주당기념사업회 박숙현 회장은 태교신기의 과학성과 현대성에 주목했다. 박 회장은 "사주당은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의학전문가이자 육아교육학자"라며 "태교신기는 육아 경험과 경서에 기반한 사상, 황재내경·동의보감 등의 한의서, 여성 교양서와 구전태교를 집대성한 세계 최초의 태교전문서"라고 평가했다. 또한 "태교가 한때 전통적인 것, 혹은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태교문화가 단절됐기 때문"이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태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산부인과·뇌과학 등 현대 의학이 제안하는 태교방법과 사주당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성내지 않고, 찬 곳에 앉지 않고, 나쁜 것을 보지 않는 것, 주변 사람이 임산부를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의 지침은 산모의 스트레스가 태아에 미치는 악영향을 방지한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박 회장은 "2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태교서지만, 음식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제외하고는 현재에도 유용하다"며 "태교의 본질은 인성과 건강이고 이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최초의 길잡이"리고 말했다.용인시는 2010년께부터 태교신기에 주목했다. 태교신기를 용인시가 가진 자원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인성·배려·존중의 태교도시'라는 비전을 세웠다. 용인시가 꿈꾸는 태교도시란 '태교신기의 근본가치인 인성존중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교육을 통해 건강한 시민을 육성하고 이를 위한 기반시설 및 사회적 환경을 구축해 모든 시민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세대 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도시'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2020년까지 태교도시 조성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모았다. 태교 및 인성함양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태교 숲 힐링 체험, 태교축제 등을 진행했다. 문화원형을 통해 도시 정책을 수립한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례로 남기위해서는 더 세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용인시 문화계 관계자는 "태교신기라는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태교도시를 만들려면, 축제나 행사도 좋지만, 문화적·역사적 토대를 다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용인시는 태교 및 인성함양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태교 숲 힐링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용인시 제공숲속마을 태교정원 생명의 터.(왼쪽)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태교신기. /용인시 제공(왼쪽부터) 조선 후기 여성인 사주당 이씨 묘역, 성균관대 도서관에 소장된 태교신기 수고본, 2016 용인문화유적전시관 기획전 포스터. /용인시 제공

2016-11-01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0]고양 행주산성

진주·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불려여인들이 전투에 참여 돌 날랐다는 '행주치마 설화'로도 유명시원한 한강 조망 볼거리… 매년 3월 행주대첩제 등 행사 다채임진왜란 발발한지 10개월여 왜의 기세가 막바지로 치닫던 1593년 2월, 전라도관찰사 권율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전란의 발톱이 전국을 할퀴고 간 상황에서 정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모인 병력은 수중의 관군 5천여 명과 승병 1천여 명이 전부,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백성과 아녀자들까지 끌어모았지만 전 병력은 채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반면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병은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필두로 3만여 군이었다.어린아이가 봐도 흑과 백이 명확한 상황. 그러나 권율 장군은 이기기 위한 준비를 했다. 토성에 목책을 대어 성벽을 이중으로 쌓고 은밀히 병사들을 성 안으로 옮겼다.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차게 했고, 민병들에겐 이번 전투에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음을 주지시키며 사기를 북돋았다.왜군은 이달 12일 채 동이 트기도 전에 제1 대장 고니시를 선봉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성 안의 조선군은 일제히 화포를 발사하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벼랑 뒤에 흐르는 강을 등지고 반대편 언덕에 목책을 세운 지형의 유리함에 1진은 전투 시작과 동시에 궤멸했다.곧이어 2군이 들이닥쳤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숨돌릴 새 없이 다시 3군이 달려들었다. 1~3군이 연이어 당하는 것을 본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4군을 선두에서 이끌고 진격해왔다. 아녀자들은 치마로 쉴새 없이 돌을 날랐고, 미리 준비한 물로 목책에 붙은 불을 껐다.마침내 일본군은 퇴각을 시작했다. 최소한의 인원 손실로 3배에 달하는 병력을 물리친 대승이었다. 그러나 권율은 대승에 만족하지 않고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해 130여 명의 목을 더 베어냈다. 이것이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행주대첩이다.오늘날 고양시의 대표적 사적지로 보존된 행주산성은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한적함을 간직한 채 덕양구 행주동에 자리해 있다.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해발 125m의 야트막한 산이다. 산성 입구에서 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산세는 이곳이 정말 혈투가 벌어졌던 현장이 맞는지 작은 의구심을 품게 할 만큼 일상적이고 조용하다.그러나 벼랑을 끼고 한강을 등진 행주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끝없는 전란을 지켜본 땅이다. 행주산성이 언제 축성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신라 간의 전투가 치열했던 당시 백제가 육로와 수로를 통제하기 위한 거점성으로 쌓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산성 관광안내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장검을 빼어 짚고 선 권율 장군 동상을 볼 수 있다. 주변으로는 관군과 승병, 민병과 아녀자 등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에 대한 소개가 동판으로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이해를 돕는다.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홍살문(궁전·관아·능·묘·원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빠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 있다. 문을 지나 5분 여를 걸으면 권율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충장사가 눈에 들어온다. 앞마당에는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행주산성 안에는 권율 장군을 기리는 대첩비가 3개 있는데 충장사 앞에 세워진 비석은 헌종 시절 지금의 행주대교에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권율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면서 함께 만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사당이 포탄에 불타 없어져 비만 행주산성으로 옮겨 왔다.충장사 위 대첩기념관에선 행주대첩도와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흔히 행주대첩의 무기는 여인들이 행주치마로 옮긴 돌을 가장 먼저 떠올릴 테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소질려포통, 대질려포통, 화차 등 당시로써 대단히 선진화된 무기들이 투입된 덕분이라는 사실이 미루어 짐작된다.행주산성 곳곳에는 행주산성과 행주치마 설화에 대한 소개문이 세워져 있다. 행주대첩에서 치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옷 위에 덧댄 자그마한 치마로 돌을 날랐다 해서 행주치마라 이름 붙여졌다는 설화다. 너무도 유명해 이젠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단순 속설이라는 분석이 학계에선 더욱 지배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행주대첩 훨씬 이전인 중종 12년(1517년)에 발간된 '사성통해'에 행주치마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며, 행주 자체는 오늘날의 뜻과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사용된 어휘기에 산성과 대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주산성 뒤편에는 여인들이 날라다 던지기 좋은 돌무더기를 쉽게 볼 수 있는 토양이 있어 전쟁 당시 행주치마를 활용한 여인들의 조력이 큰 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정상 부근에 세워진 덕양정에 다가가면 사방이 트인 한강 유역의 절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올림픽대로와 파주로 연결된 자유로가 강을 사이에 두고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론 평야 지대가 펼쳐져 높지 않은 산임에도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조망이 보는 이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산성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선 토성과 문터가 차례로 나와 전략 요충지로서 산성의 진면모를 제대로 볼 수 있다. 흙으로 형성됐지만 누구나 산성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경사도와 탄탄함은 시원한 조경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행주산성은 오늘날 고양시의 대표적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행주대첩이 있었던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제를 열고 있다. 또 행주산성의 이름을 딴 고양행주문화제는 올해로 29회를 맞았고, 행주산성 해맞이 축제, 휘호대회 등 다양한 행사도 이어지고 있다. 행주산성은 자유로와 이어진 접근성과 그 풍광 덕에 드라이브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양문화원 방규동 원장은 "행주산성은 국난극복의 상징이며 민족의 성지이자 삶의 터전"이라며 "행주산성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관련 보고서 발간, 뜻을 기리는 휘호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니 더 많은 국민이 민족의 얼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글 =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행주산성 정상에 위치한 행주대첩비와 대첩비각./고양시 제공권율장군 동상(왼쪽), 충의정 /고양시 제공(왼쪽부터)충장사 안에 모셔진 권율장군 초상화, 산성 조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덕양정,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일출. /고양시 제공

2016-10-25 권준우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9]안산 표암과 단원

'예원의 총수' 강세황, 안산 청문당 시절 중인이었던 어린 김홍도 제자로 인연 맺어호암미술관 소장한 '송하맹호도' 운치있는 소나무와 치밀한 호랑이 공동작업 '걸작'市, 18년째 미술제 진행·자료 체계적 연구수집… 도시전체 단원 인물관련 문화형성'처음에는 사능(士能, 김홍도의 字)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에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였고, 그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시문집 '표암유고'에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에 관해 쓴 내용이다. 강세황이 김홍도보다 서른 살쯤 많았고, 신분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직장 동료로,친구로 40년 세월을 함께하며 조선 후기 미술사에 업적을 남겼다.강세황은 명문가 출신의 18세기 대표 문인화가다. 그는 조선후기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시·서·화에 고루 뛰어난 삼절(三絶: 3가지 재주에 뛰어난 사람)로 칭송받는 한편, 서양화풍을 수용하고, 참신한 소재를 채택했고, 채색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추구했다. 그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를 그렸다. 조선의 문예부흥기로 불리는 영·정조시대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예원(藝苑)의 총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이며 시를 짓고 서예에도 능했다. 처남 유경종 등과 함께 안산 청문당(安山淸聞堂 , 경기문화재자료 제94호)에서 시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문예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 업적도 남겼으며, 61세 이후 관직에 진출해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기로소에 입소했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관서로 강세황의 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입소했다. 김홍도는 중인 신분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돼 20대 초반에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29세에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사포서 감목관이 됐다. 두 달 후 강세황이 같은 곳으로 발령을 받아 두 사람은 함께 근무했다. 30대의 김홍도는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로도 이름을 알렸다. 40대에는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에 가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왔고, 정조의 어진을 그려 중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충청도 연풍현감을 지냈다.김홍도는 외모가 빼어나고 성격은 자유분방했다. 음악도 즐겼고, 한시 짓기에도 능했다. 지필묵이 부족할 정도로 가난한 때도 있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가 조의룡이 쓴 '호산외사'에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안산문화원 이우석 팀장은 "관리로서도 유능하지는 않아 파직당했는데, 그 이후의 삶은 궁핍했다. 외아들 김양기에게 미술공부를 시킬 돈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들도 산수와 수목에 능한 화원이 됐다"고 말했다.강세황과 김홍도의 인연이 시작된 곳은 안산이다. 강세황은 30대 초반부터 30년 동안 처가가 있던 안산에 살았다. 김홍도는 젖니를 갈 무렵부터 그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두고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고 썼다. 당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화가인 강세황은 김홍도의 솜씨가 천부적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하맹호도'는 두 사람이 함께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강세황이 소나무를,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다고 한다. 소나무는 문인화풍으로 운치있게 표현됐고, 호랑이는 치밀하게 묘사돼 긴장감이 느껴진다. 김홍도는 '어살', '매해파행', '균와아집도' 등 안산 앞바다의 풍경을 그린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문화관광부는 1991년에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명명했다. 안산에서는 18년째 매년 10월 단원미술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 '단원전시관'으로 고잔동에서 개관한 단원미술관은 상록구로 자리를 옮겨 관련 전시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단원미술관 관계자는 "단원의 도시로 어울리는 문화·인문학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단원학술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단원에 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연구·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2년에는 김홍도의 호를 행정구역명으로 정해 '단원구'가 생겼다. 지난해에는 안산학연구원 주관으로, 청문당에서의 복날 모임을 그린 강세황의 작품 '현정승집도' 재연행사가 열리기도 했다.진준현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안산은 단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도시 전체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며 "안산에서 진행하는 세미나나 강연 등에 가면 안산시민들을 중심으로 단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한 "인위적일 수 있으나 지자체 공무원들부터 시작해 모든 관계자들도 이 분야에 익숙해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며 "이런 사업을 통해 문화원형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강세황 자화상. /안산문화원 제공강세황이 소나무를,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다는 '송하맹호도', 90.4×43.8㎝ /호암미술관 소장안산 청문당 전경. /안산문화원 제공강세황 '영통동 입구'-송도기행첩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위) ,강세황 '玄亭勝集' 1747년, 紙本水墨, 34.9×50㎝, 柳承鳳 소장. /안산문화원 제공김홍도 '거리의 판결'-행려풍속도병(왼쪽) , 김홍도 '타작'-행려풍속도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016-10-18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8]광명 민회빈 강씨

병자호란 화약조건으로 소현세자와 청나라 끌려가 '심양관'서 무역·국제 정세파악인조 독살 휘말려 사약·원손 형제 유배… 70여년 지난후 숙종때 '민회' 시호 내려져지역 문화유적 범주 넘어 볼모 생활 하던 중국에서의 행적 등 조사작업 필요 목소리누구나 인생에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화양연화든 비래횡화든, 인생길의 한굽이를 이루는 시간이. 그 시간은 인생을 바꾸고, 때로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1627년, 조선 인조 때 우의정 강석기의 딸은 소현세자 빈이 됐다. 가례를 올린 후 반포된 교서에는 '선인의 교훈대로 덕을 기준으로 하여 유순한 이를 힘써 구하였고, 조정에서 제신에게 물어서 명문가 출신을 얻었다'고 기록됐다. 강빈은 가례 10년이 되는 1636년 3월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을 낳았다.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의 기동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달렸다. 원손과 왕자들, 백관의 가족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무방비인 채로 함락됐다. 이듬해 1월에 강화성도 함락됐다. 강화도 수비를 맡았던 이들은 가장 먼저 도망쳤다. 강빈은 원손을 피신시켰다. 인조는 항복했다. 화약 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 심양에서 살았다. 청의 감시와 통제 아래 속환과 군사징발 등의 압박에 시달렸다. 소현세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사냥이나 참가하거나 청과 명의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강빈은 혼자 남아 심양관의 살림을 돌보아야 했다. 볼모로 끌려간 이들이 거주하는 심양관의 운영과 경비도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청이 식량과 일용품을 지급했지만, 몇 년 후부터는 농사를 지어 비용을 해결하라고 했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볼모 생활을 한 끝에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돌아온 아들 내외를 반기지 않았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낸 것은 자신을 입조케하고 세자를 왕으로 세우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병으로 급서했다. 인조는 원손이 있었지만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1646년 가을에는 자신의 음식에 독이 들었다며 강빈의 나인들에게 죄를 물었다. 심양에서 '잠도역위(몰래 왕위를 바꾸려 함)'의 음모를 꾸며 독약을 넣었다며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가두었다. 강빈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부친의 관직을 삭탈하고 모친과 오라비 4명을 죽였다. 원손 형제들은 제주도에 유배됐다.강빈에게 민회(愍懷)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70여 년이 지난 후인 숙종 44년이다. 숙종은 강빈이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가슴 아파하며 시호를 내렸다. 부친의 관작이 복위되고 형제들도 신원됐지만 강빈의 삶이 이제와 더 안타까운 것은 심양에서의 행적 때문이다. '심양장계', '심양일기' 등에 따르면 강빈은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 조선의 선진 농법으로 경작지에서 매년 큰 수확을 얻고, 청국과의 무역거래로 돈을 벌었다. 수입금을 당시 전쟁 포로로 끌려와 노예시장에서 매매되는 조선인들을 속환하는 데 사용해 많은 조선인을 구했다. 더불어 심양관은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인조실록'에도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돼있다. 볼모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강빈은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갔다. 1644년에 이들은 관소를 옮겼다. 명을 몰아낸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것이다. 북경에서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했다. 개방과 실용주의적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한편 명-청 교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꿈꾸었다. 유순한 덕을 갖추었던 세자빈은 불행하고 혼란한 시기에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성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조선의 신하들은 역모의 혐의가 없다는 간쟁에도 끝내 멸문지화를 당한 강빈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왕비가 되지 못해서, 여성이라서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강빈의 일생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남긴다. 최근 민회빈 강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다큐멘터리나 소설 등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 리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온동에 묘소·1903년 '영회원'으로 변경문화재청 관리 올해 사유지 매입 주변정비광명시 학온동에 민회빈 강씨의 묘소가 있다. 민회원으로 불렸으나 1903년 영회원(永懷園·사적 제 357호)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애기릉', '아왕릉'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치석된 석재와 기와조각이 있어 부속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이전에는 문화재청이, 2006년부터 2013년까지 광명시가 관리했다 현재는 다시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다. 올해 일부 사유지를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고 수목, 벌초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학계나 문화계의 관심에 비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강회빈 민씨를 지역의 문화유적, 국내 역사인물의 범주를 뛰어넘어 행적을 기리고 가치를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신춘호 대표는 "조선의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기록돼 강빈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우리 문화원형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라며 "강빈의 역사적 행적과 면모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볼모 생활을 하던 심양이므로 중국의 역사적 장소도 조사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심양으로 간 사람들의 연행로를 직접 오가며 당시의 유적을 연구한 신 대표는 "요즘은 관광하러 심양으로 가는 한국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중국의 고궁만 보고 오게 된다. 상해처럼 심양도 이국땅에서 우리의 역사성을 세울 수 있는 곳 중 하나"라며 "강빈의 연행길을 따라가면 당시의 국제정제와 한중관계, 무역과 사신들의 행적 등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 6일 오전 광명시 학온동에 민회빈 강씨인 강빈이 묻힌 사적 357호 광명 영회원(永懷園). 민회빈 강씨의 일생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 리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최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16-10-11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7] 의정부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이 효종 양녀로 바친후 청나라 도르곤과 결혼·6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와지역엔 실록과는 다른 '족두리 산소' 전설… 풍년 등 기원 '의정부 정주당 놀이' 전해져市·문화원 "가치 인정 이벤트 아닌 다양한 홍보" 2009년부터 본격 문화원형 사업 시작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국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슬픈 이야기이다. "청나라에서 공주가 예쁘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을 강요하자 효종(孝宗)께서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하시자 금림군(錦林君) 할아버지께서 효종(孝宗)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기 따님을 효종에게 바치자 기뻐하시며 궁중에 불러들여 술까지 같이 드셨다고 한다."금림군 이개윤의 자손은 여인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바쳐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바쳐졌고, 바쳐져서 한때 청의 실권자였던 도르곤의 첩이 됐다. 여인의 의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에 국혼을 청했다.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다. 효종에게는 딸이 여섯 있었지만 청에 '공주는 이제 2살에 불과해 국혼 대상이 될 수 없다' 고하고 종실, 또는 대신의 딸 중에서 대상자를 찾았다. 금림군 이개윤은 효종과는 먼 친척이었지만, 국혼의 여건을 갖추기 위해 효종과 5촌 형제로, 그 딸은 효종의 양녀로 입적했다고 꾸몄다. 효종은 이개윤의 딸에게 '의순공주'라는 칭호를 내렸다. '대의(大義)에 순종(順從)'한다는 뜻이다. 의순공주가 시녀들과 청으로 떠난 후 효종은 의순공주의 오빠 이준(李浚)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이수(李洙)를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삼았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 정실 중 으뜸 부인)이 된 지 7개월 만에 도르곤이 갑자기 사망했다.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수하장에게로 보내졌으나 1년 남짓 후에 그도 죽었다. 아버지 금림군은 청에 딸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청이 이를 허락해 의순공주는 6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의순공주를 맞이하는 조선의 표정은 착잡하고 비통했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치부였고, 조정은 의순공주의 환국이 또 다른 사단을 불러올까 걱정했다. 그래서 의순공주의 환국을 요청한 금림군을 삭탈관직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의순공주의 새로운 이름은 '환향녀(還鄕女)'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 썼지만, 절개를 잃은 여인이라고 비하하는 뜻에서 '화냥년'이라 불렸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모든 여인들의 이름이었다.실록의 기사에는 의순공주가 환국 후 6년을 살다 병들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27살이었다. 의정부 금오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다르다. '족두리 산소'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병자호란이 끝난 후 금오리에 사는 왕족 금림군의 딸이 왕명으로 청나라에 붙들려가다가 오랑캐 놈에게 정조를 짓밟히는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정주(定州)땅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몸은 물 속에 가라앉고, 쓰고 있던 족두리만 물에 떠올라 이것을 건져다가 부친에게 주었다. 이를 받은 금림군이 족두리로 의장(衣葬)장사를 지내고 묘지를 조성했다. 사람들이 이를 족두리 산소라고 부르며 나라 위해 죽은 공주를 애처로워 했다고 전해진다.의순공주의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졌고 아무도 그녀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슬퍼한 의순공주의 어머니는 날마다 천보산 꼭대기에 올라 정주 땅을 내려다보며 넋을 달랬다. 이곳을 정주당이라, 산봉우리는 공주봉이라 불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정주당은 폐허가 됐고, 공주도 잊혀졌다.한편, 전쟁이 끝나고도 조선의 고장들은 평화롭지 못했다. 전염병이 돌았고 흉년이 들었다. 금오리에도 횡액이 자주 발생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주지 않아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말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정주당 터에 올라가 제를 지냈다. 마을에 풍년이 들고 재해(災害)가 없어져 해마다 3월 초순 좋은 날을 택하여 제를 지냈다. 제가 끝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국수와 음식을 나눠먹고 온종일 신명나게 즐기던 풍습이 금오리에 전해 내려오는데 이것이 '의정부정주당 놀이'다. 의정부정주당놀이는 의순공주를 제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마을 풍물굿이다. 한국전쟁이후 중단됐던 것을 지난 2004년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돼 재연을 시작했다. 지금은 의정부문화원과 손잡고 매년 봄 열리는 지역 행사로 자리 잡았다. 날이 택해지면 제주를 선발하고, 마을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산가락, 상주가락을 연습한다.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돌며 제수를 추렴해 마을공동으로 제례를 마친 후 국수를 끊여 먹고 신명나게 놀며 화해와 화합을 청한다. 의순공주대제보존회의 의순공주 대제도 이 무렵 시 행사로 확대됐다. 장영순 만신이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고 의정부시의 평안을 기원하고자 1996년부터 시작한 전통굿이다.2005년 문화원이 문화원형 발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의순공주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지역 내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 문화원 관계자는 "문화원형을 발굴하기 위해 시놉시스를 공모했을 때 의순공주 이야기가 다수 거론됐다"며 "처음 정주당 놀이를 시작했을때는 의순공주 문중에서 불편함을 내비쳤지만 의정부 안에서 의순공주를 높이 평가하니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의정부시와 문화원은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의순공주를 주제로 문화원형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0년 '뮤지컬 의순공주'를 제작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을 때는 6천여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의정부시립무용단에서는 창작무용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문화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한차례 이벤트로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문화원 관계자는 "문화원형의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로 보다 적극적인 사업을 벌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라며 "다양한 홍보 아이디어를 통해 꾸준히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의순공주 묘. /의정부 문화원 제공의순공주 대제. /의순공주대제보존회 제공'의정부 정주당놀이'는 의순공주를 제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마을 풍물굿으로 2004년 지역청년들이 주축이 돼 재연하기 시작했다. /의정부 문화원 제공2010년 제작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던 '뮤지컬 의순공주'. /의정부 문화원 제공

2016-10-04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6] 과천 효자 최사립

모친 돌아가시자 3년간 여묘살이·부친 슬픔 달래려 날마다 친척 일가 불러 대접과천동에 위치한 '효자 정려' 市 향토유적 지정·묘소는 용인시 남사면으로 이장2009년부터 '입지 효문화 예술축제' 추모… 정조 효행 관련 '무동답교놀이' 유명우리나라 문화유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효'다. 예부터 효는 귀한 것이라, 효행에는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상을 내렸다. 상은 왕이 내린 벼슬인 때도 있었고, 하늘이 내린 복인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효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기렸다. 그 덕분에 효행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많다.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부친의 입 안에 흘려넣어 살렸다는 효자, 홀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부잣집에 스스로 팔려간 효녀,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어린 자식을 호랑이 먹이로 내어 준 효부의 이야기는 언제나 놀라우면서도 또한 익숙하다. 그들은 효자, 효녀, 효부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전해지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효행과 효심이다. 효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선조들은 이름 대신에 효의 정신이 모두에게 깃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이름난 효자, 효녀, 효부는 있었다.과천 막계에서 출생한(1505~?) 입지 최사립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소학(小學)을 행동 강령으로 삼고 부모를 섬겼다. 평소 술을 좋아하던 부친이 병을 얻었다. 추운 겨울 약을 써도 낫지 않았는데, 부친은 최사립에게 "내가 칡꽃을 먹으면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칡은 흔한 식물이지만, 칡꽃은 한여름에 볼 수 있다. 최사립은 칡꽃을 구하려 애썼지만 구하지 못했다. 그는 정한수를 떠놓고 신령에게 기도했다. 정성이 하늘에 닿아 죽어있던 칡넝쿨이 방 벽을 타고 뻗어 들어와 꽃을 피웠다. 이 꽃으로 갈화탕을 만들어 부친에게 드리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 부친이 임종하기 전 몹시 수박을 먹고 싶어 했지만 끝내 구해드리지 못했다. 때문에 최사립은 남은 평생 수박을 먹지 않았으며 수박을 볼때마다 몹시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가 아플 때도 그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어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묘 옆에 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홀로 남은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기위해 날마다 친척 일가를 불러 모아 술과 고기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남아있다.지극한 효성은 왕에게 전해졌다. 경기도 관찰사 윤은필은 중종에게 장계를 올려 효자문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중종 때 참의로 추증되었으며 선조때 정려(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함)를 받았다. 최사립의 아들 최덕순도 효성이 지극하여 선조 때 정문이 세워졌으며, 손자 최기 역시 인조때 정려를 받아 3대에 걸쳐 정려가 세워졌다. 효자 정려는 과천시 과천동에 있으며, 과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최사립의 묘소는 이장돼 용인시 남사면에 있다. 효는 근래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귀하다. 예전만큼 효의 가치가 높지 않다. 효 보다 귀한 것이 많아졌다. 전통적 개념의 효 문화는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현대생활과 맞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최사립이 정성으로 피운 칡꽃은 지금의 상식에는 어긋나,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효에 관한 이야기는 드물어졌고, 효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그렇다. 한국효문화센터 최종수 이사장은 중국 유학자 장재(張載)가 말한 효의 정의를 들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효의 진짜 모습을 설명했다. 그는 "장재는 모든 사람이 나의 동포요, 나의 동반자이니 그들을 보호하고 살피는 것은 자식으로서 공양하는 것이요 이를 즐겁게 여기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효라고 했다"며 "효의 덕목을 넓게 해석해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돌보는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했다"고 말했다. 또한 "모두에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대에 맞는 효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고 했다.과천에 있는 한국효문화센터는 지난 2009년부터 매년 '입지 효문화 예술축제'를 열어 최사립 선생을 추모하고 효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과천은 정조의 효행과 관련된 무동답교놀이도 유명하다.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과천의 부락민들이 무동놀이를 펼쳐 그의 효행을 찬양하고 능행길을 환송했는데, 무동 놀이에 다리밟기인 답교놀이가 결합한 민속놀이가 과천무동답교놀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명백이 끊어진 것을 1981년 민속학자와 지역민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28일 열리는 8회 입지효문화예술축제는 효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생활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바른 인성으로 갖도록 하는 체험 프로그램에 중점을 두었다. 최 이사장은 "청소년들의 효의식을 조사하면 과반수가 효도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이 어떤 건지 모른다고 답한다"며 "요즘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실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르신께 공수하고 인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 효를 주제로 한 토론의 장을 열고, 세대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더 나아가 효를 주제로 하는 어린이 동화를 제작하고, UCC 및 음반을 제작하고, 학생들이 3D펜을 이용해 만들 전래놀이 게임을 선보이기도 했다. 전문공연단체와 손잡고 벽상갈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무용극도 개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최 이사장은 "효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그 덕을 나눌 수 있다는 진리다. 세월이 변해도 낡거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며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고,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는 일이 효"라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효자 최사립 정문. /한국효문화센터 제공칡꽃. /한국효문화센터 제공입지 효문화 예술축제. /한국효문화센터 제공최사립 묘표./한국효문화센터 제공

2016-09-27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5]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과 원효대사 이야기

'일체유심조' 유학길 포기 소요산에 자리 '자재암 설화' 전해져휴식처였던 원효폭포·속세인연 끊는다는 속리교… 곳곳에 흔적동두천문화원, 지난해부터 지역 명물 108계단 '108문화제' 행사청량폭포에서 시작된 다천약수 '다도의 원류' 다양한 연구 필요원효대사와 해골물 일화. 남루한 기연을 통해 돈오의 경지를 연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로 시공과 불문(佛門)을 초월해 인구에 회자돼 왔다. 만일 원효가 해골물의 기연 없이 당나라 유학 여정을 예정대로 마쳤다면 그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에 머물지 궁금하다. 다만 그가 유학을 강행했다면 소요산에 깃든 원효 스토리 대부분도 유실됐으리라 추측해보니 다행이지 싶다.신라 진덕여왕 시대인 660년, 그는 더 큰 배움을 위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비바람이 몰아쳤고, 험로에 놓인 그들은 근처 동굴로 몸을 피했다가 목마름에 동굴 속 물로 목을 축였다. 그러나 잠에서 깬 원효는 그토록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주체할 수 없는 매스꺼움에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그 순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의 깨달음을 얻었다.이로부터 1천여 년이 흘렀다. 우리는 여전히 원효의 깨달음을 높이 사며 현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과연 이게 다일까. '깨달음'은 때론 무척 덧없다. 아무리 명백한 진리여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그 깨달음을 일생 동안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다.이는 원효대사도 마찬가지였다. 불가에 귀의한 신분으로 요석공주와 혼인을 올린 것이 그가 깨달은 일체유심조의 결단인지, 단지 번민에 사로잡힌 결과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깨달음을 종착지로 삼은 게 아니라 끊임없이 번민에 시달려온 그의 일생을 되짚어 봤을 때, 그것 역시 번민과 깨달음이 오가는 한 과정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원효대사가 현인인 이유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번뇌와 싸워왔기 때문이다.원효대사가 유학길을 포기하고 동두천 소요산에 자리를 잡았을 때의 일이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토막에 정좌하고 명상을 하던 원효대사의 귀에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제됐던 마음에 한순간 일렁임이 생긴 그때 한 여인이 다급하게 토막의 문을 두드렸다. 비바람을 피하게 해 달라는 여인의 간청에 그는 갈등을 느꼈지만, 폭풍우에 여인을 그냥 둘 수 없어 결국 안으로 들였다.화톳불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여인이 원효에게 비에 언 자신의 몸을 녹여달라 부탁했다. 그도 역시 사람, 마음 한 편에 색정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해골물의 교훈을 되뇌며 여자를 목석으로 생각하려 마음먹었지만, 날이 밝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해골물과 달리 눈앞의 여인은 실재했다. 굳어졌다 생각한 마음은 자그만 바람에도 흩어져버릴 정도로 쪼개지고 파여갔다. 결국 원효는 고개를 저으며 여인을 내버려둔 채 비바람 속으로 뛰쳐나왔다. 번뇌를 던지듯 옷을 벗고 옥류폭포에 몸을 담갔다. 그러나 여인은 곧 폭포까지 따라왔다. 참다못한 원효는 여인에게 소리쳤다. "너는 대관절 누구인데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그러자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스님을 유혹하다뇨.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그 순간 원효의 머리 속에 깨달음의 경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여인을 목석이라고 여기겠다는 일체유심조의 도리엔 한계가 있었다. 사물을 보며 새로이 생겨나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자 원효는 캄캄했던 주변의 사물이 제 빛을 찾듯 빛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여인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로 변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원효대사는 그 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해 절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 이것이 소요산 자재암에 얽힌 설화다.자재암 일대에는 원효대사가 번뇌와 싸워온 흔적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요산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나무와 어우러진 웅장한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올라가면 원효대사가 수도 중 내려와 휴식을 취했다고 알려진 원효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다. 폭포 옆 석굴에는 작은 삼존불이 자리해 사람들의 염원을 묵묵히 듣고 있다. 원효폭포 오른쪽에는 자재암으로 이어지는 다리인 속리교(俗離橋)가 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낸다는 의미다. 폭포수를 건너게끔 조성된 다리는 조용한 산중 속 서로에게 건네는 불자들의 합장과 어우러져 경건함을 자아낸다. 다리를 건너면 소요산의 명물인 108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단을 오르며 백팔번뇌를 하나하나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두천문화원과 자재암은 지난해부터 원효대사의 뜻을 이어 매해 신정으로부터 108일이 되는 날을 맞춰 '108 문화제'를 열고 있다. 108개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각각의 의미를 되뇌고 번민을 떨친다는 의미다. 108계단을 오르면 윤회의 가르침을 형상화 하고 있는 해탈문이 나온다. 연꽃과 만다라, 법륜 등으로 장식된 문에는 종이 매달려 있어 계단을 오른 이가 종을 울리며 깨달음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동두천문화원 박용철 사무국장은 "108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몇 분 남짓이지만 각각의 의미를 새기며 걷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불교의 교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우러진 산세를 느끼며 걷는 길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해탈문을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원효대사가 정좌하고 마음을 다스렸다는 원효대다. 평평한 암석 위에 자세를 고쳐잡고 앉으면 폭포를 아래에 둔 탁 트인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왜 원효대사가 번뇌를 다스릴 수행의 장소로 이곳을 택했는지 알만 하다.산길을 따라 좀 더 오르면 절로 이어지는 마지막 관문인 극락교(極樂橋)와 함께 산세에 파묻힌 듯한 자재암의 안락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재암의 규모는 크지 않다.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고, 그나마 특이하다면 천연 동굴 속에 마련된 사찰인 나한전이 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절의 형태는 원효대사의 깨달음과 묘하게 닮았다. 자연과 다른 듯 묘하게 섞여 있고 인위적인 향 냄새보다는 바로 옆 옥류폭포에서 실려오는 풀과 바람의 향이 절을 메우고 있다.박 사무국장은 '자재암과 얽힌 원효대사의 생애는 깨달음의 확인이 아닌 번뇌와 싸운 역사'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재암을 찾는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깨달음의 기회를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쌓을 수 있는 마음의 정진을 찾으러 오는 것"이라며 "마음 속에 고민과 갈등이 있는 사람이 그에 대한 해결을 꾀한다기 보다는 안식을 찾기 위해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원효대사와 자재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지만 자재암 청량폭포를 시작으로 흐르는 다천약수가 다도(茶道)의 원류라는 사실은 아직 일부 문인들 외엔 언급되거나 문화원형으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글 =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소요산 자락을 따라 우뚝 솟은 기암인 독성암(獨聖巖)이 골짜기 속에 파묻힌 자재암을 굽어 내려보고 있다. 아래로는 천연암굴인 나한전이, 오른쪽으로는 보살의 시험에 번뇌를 느낀 원효대사가 몸을 담갔다는 옥류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우물처럼 깊게 팬 협곡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높이 솟은 독성암, 고즈넉한 자재암과 어우러져 시원한 경치를 뽐낸다.해탈문(解脫門). 백팔계단 가장 윗부분에 자리하며 계단 하나하나에 담긴 번뇌를 이겨내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상징한다.원효대(元曉臺). 해탈문을 넘어 위치한 천연 암석으로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위해 정진했던 자리다. 원효폭포를 시작으로 산줄기와 정맥이 한눈에 들어온다.자재암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불교에서 말하는 건물의 개념)다.속리교(俗離橋). 원효폭포 오른쪽에 위치하며 자재암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백팔계단 입구. 해탈문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며 각 계단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의 의미가 담겨있다.

2016-09-20 권준우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4] 포천 오성과 한음

역사적 사실에 유적들, 풍부한 이야기 더해 전승… 지자체서 축제·거리 조성 등 적극적 활용 나서야동화책 한 권 넘는 어린시절 에피소드 진실과 다르지만 일화 실록에 기록 '대표적 우정'이항복 할아버지·아버지 터전, 이덕형 외가 인연… 사후 유생들이 화산·용연서원 모셔市 마스코트로 2000년부터 캐릭터 제작·한영안내판등 표시 '오성과 한음의 고장' 홍보# 옛날 옛적, 포천에 한 소년이 살았다. 소년의 집에는 감나무가 있다. 감나무 가지는 담장을 넘어 옆집 마당으로 뻗어 자랐고, 그 가지에서도 감이 열렸다. 옆집 대감네는 마당으로 넘어온 감을 차지했다. 소년은 대감의 방문 앞으로 갔다. 창호지를 뚫어 자신의 팔을 대감의 방안으로 밀어넣고 물었다. "이 주먹은 누구의 주먹입니까?" 대감은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대답했고 소년은 감나무의 감을 돌려받았다.# 소년은 친구와 함께 놀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가 급히 이들은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농부의 처가 밭두렁에서 소변을 보았는데, 밭 주인이 화를 내며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싶지 않으면 황소를 바치라 했다는 것이다. 밭 주인은 고을 세도가인 황대감이었고, 사또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똘똘하기로 소문난 두 사람에게 농부는 황소를 빼앗기지 않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소년과 친구는 꾀를 냈다. 둘은 황대감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황대감은 길을 막고 싸우는 두 사람에게 싸우는 이유를 물었다. 소년이 말했다. "제가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두렁에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이 친구가 말하기를, 여기다 오줌을 누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말리지 않겠습니까? 하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그냥 오줌을 누려고하는데 끝끝내 말려서 제가 바지에 오줌을 싸버렸지 뭡니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황 대감은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소년이 다시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황대감은 그 길로 되돌아가 농부에게 황소를 돌려주었다.오성과 한음 두 사람에 관한 어린시절 에피소드는 동화책 한 권을 채울만큼 많다. 동화책 속에서는 짓궂은 오성이 한음을 자주 골탕먹이지만, 두 사람은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죽마고우다. 흔히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설화다. 설화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이며, 꾸며진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렇다.오성의 이름은 이항복(1556~1618)이다. 호는 백사(白沙)이나 오성부원군에 봉해져 오성대감으로 불리었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 보냈으나 곧 학업에 열중했다. 25살 가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지냈다. 우의정과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한음의 이름은 이덕형(1561~1613)이다. 호는 한음(漢陰)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성품이 점잖아 총각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무살 되는 해 3월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 지냈다.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설화 연구가 이병찬 대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항복과 이덕형이 친분을 쌓기 시작한 것은 1580년부터라고 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급제했다.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다. 두 사람은 성향은 달랐지만 뜻을 함께했고, 서로를 존중했다. 어릴 적 친구는 아니지만, 우정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 교수는 "두 사람의 일화는 실록에도 기록이 돼 있고, 설화로는 문헌설화가 70여편, 구비설화는 90~150평 정도 전해진다.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많은 설화가 전해지는 것은 매우 드물다"며 "설화 속 두사람의 성격은 실제와 비슷하다. 이덕형은 젠틀한 성격의 훈남이었고, 수재인데다 모범생이었다. 문헌 설화에도 한음(이덕형)이 장난을 쳤다는 내용은 없다. 반면 이항복은 영정의 표정에서도 짓궂은 면모가 드러난다. 선조도 그의 해학적인 성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단지 두 사람의 우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어 수많은 설화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아니다. 설화가 친구사이의 장난과 놀이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꾀와 협동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에서도 이항복과 이덕형은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하면 이순신과 유성룡만 기억하지만, 오성과 한음도 그들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명나라 원군 파병을 요청하자는 데 뜻을 같이한 오성과 한음은 위험천만한 먼 길을 서로 가겠다고 다투었다. 결국 외교력이 출중한 한음이 길을 떠났다. 행정에 강했던 오성은 전쟁의 상처를 살피며 내치에 힘썼다. 한음은 유성룡과 함께 상시군사훈련체계를 확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설화에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바람이 담겨있다.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도 그렇다. 두 사람에 관한 설화는 제각각의 형태로 전국에 퍼져있는데, 그 중 포천이 오성과 한음을 시의 마스코트로 삼았다. 이항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포천에 살았고, 이덕형은 외가가 포천이었다는 인연을 내세운 것이다. 이들 사후에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祠宇)를 세워 화산서원에 이항복을, 용연서원에 이덕형을 모셨다. 이항복의 묘소와 신도비도 포천 가산면에 있다. 포천시는 2000년부터 오성과 한음의 캐릭터를 제작해 인쇄물과 환영 안내판 등에 표시하며 포천이 오성과 한음의 고장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그러나 이 교수는 아직 이러한 활용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원형을 상징화하고 활용하는 것은 교훈, 교육적 가치 외에도 여러 장점이 있지만,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별로 없다"며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과 남겨져 있는 여러 가지 유적들, 거기에 더해서 풍부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므로 관련 축제나 박물관 및 거리조성 등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포천시 제공포천시가 제작한 오성과 한음 캐릭터. /포천시 제공오성과 한음이 사후에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祠宇)를 세워 화산서원에 이항복을, 용연서원에 이덕형을 모셨다. 사진은 용연서원 전경. /포천시 제공오성 이항복 선생을 모신 화산서원. /포천시 제공경기도 기념물 24호인 이항복 선생 묘. /포천시 제공

2016-09-06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3] 광주 엄미리 장승

병자호란 이후 '수호신앙' 기억과 경험으로 제작 전승 '서울70리·수원70리' 이정표 역할… 세월따라 키 줄어88올림픽 선수촌 장식·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기도2년마다 장승제·'문화적 가치' 학계·언론 관심 높아"전국에서 변질이 제일 안된 데가 여기야. 옛날 그대로지."광주 장승이 유명한 이유를 물었더니 공재범(78) 할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서 일평생을 산 공씨 할아버지는 뭣때문에 장승에 대해 물어보느냐고 통박을 주면서도 장승자랑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우리 장승이 잘 생겼어. 예전에 아버지랑 당숙이랑 공주가서 장승깎기를 했는데 우리가 1등을 하고 왔어. 다른 데는 이도 엉성하고 사나워 보이기도 하는데, 엄미리 장승은 수염도 달고, 얼굴에 칠도 하고. 저기 산에 아주 빨간 흙이 나오는 데가 있어. 그걸 물에 개서 칠하면 비가 와도 씻겨내려가지를 않아. 다른 데서는 하고 싶어도 못하지. 그 흙이 여기서만 나니까."공씨 할아버지는 88올림픽 때도 엄미리에서 깎은 장승을 선수촌에 세웠고, 김포공항에 엄미리 장승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엄미리 장승은 한국 목장승의 대표로 인정돼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엄미리 어귀와 동네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길목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마주보고 서있다. 엄미리 사람들은 장승을 친숙하게 대하면서도 경외한다. 개인이 장승을 깎아 내다 파는 일이 없고, 마을 아이들도 장승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장승은 한국민속문화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문헌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유래를 알기 어렵다. 사찰이 거대한 소유지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그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세워졌다는 설도 있고 솟대나 선돌, 서낭당과 같이 한민족의 토착신앙이라는 설도 있다. 광주 장승의 유래도 마찬가지지만, 공씨 할아버지는 윗대로부터 전해 들은 유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조왕 때 중국놈들이 남한산까지 내려와 항복한 장군들 다 죽이고 나중에 염병까지 돌아서 동네사람들이 다 죽어나갔대. 노인들이 무속인한테 가서 살 대책을 물었더니 장승을 깎아서 마을 입구에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면 낫는다고 해서 그렇게 하니까 정말 환자들이 나았다는거야. 그게 낫는 병이 아닌데. 그게 시작이었으니까 벌써 한참 됐지. 그 뒤로는 전쟁이 나도 이 마을에서는 다친 사람도 없고 집 한 채도 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병자호란이후 시작된 산신제와 장승제는 일제시대 순사들의 핍박에도, 전쟁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음력 2월 초에 산신제와 장승제가 열렸다. 한겨울을 피하되, 경칩이 되기 전 날을 잡는 것은 부정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개구리나 뱀이 돌아다니지 않을 때 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을 때. 산신제가 열릴 때는 사람들도 행동을 조심하고 출입도 삼가하지."제일이 잡히면 산에서 오리나무를 골라 베어온다. 아름드리 나무에 장정 두서넛이 붙어서 하루종일, 혹은 이틀씩 깎아낸다. 만드는 방법이 따로 없이 장승을 앞에 두고, 새로 베어온 나무에 본을 그려서 옛것과 똑같이 깎는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낫을 이용해 나무껍질을 벗기고, 사모와 입이 될 부분을 톱과 도끼로 잘라낸다. 어느 정도 형체가 완성되면 대패로 나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눈을 그리고 사모대에 격자무늬를 넣는다. 몸통에는 먹으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쓴다. 아랫부분에 서울 70리, 수원 70리, 이천 70리라고도 쓴다. 옛날 보부상이나 과거시험보러 가던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매털풀로 수염을 달아 완성한다. 새로 깎아낸 장승은 가장 오래된 장승 자리에 세운다. 장승은 시간이 갈수록 키가 줄어든다. 밑동이 썩으면서 내려앉는 것이다. 장승의 키를 보면 언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새 장승을 세우고 제를 지낸다. 제관이 잔을 올리고 삼배한다. 집사가 장승 밑동에 술을 부으면 제관이 다시 삼배한다. 제의를 모두 마치면 통북어를 새로 세운 솟대에 창호지로 묶어 단다. 참석한 사람들은 음복한 후 철상한다. 엄미리 장승의 제작방법은 기억과 경험으로 전승됐다. 외지에 나가서 살던 자식들도 장승제가 열리는 날이면 광주로 돌아온다. 장승과 전혀 상관 없이 살다가도 그날은 장승을 깎는다. "여기는 다 그냥 깎는거야. 집집마다 연장 없는 집이 없어. 낫이며 도끼며 끌이며. 그냥 잡으면 깎는거지."그러나 세월이 피해가는 곳은 없고, 1988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옛 길이 끊겼다. 서낭당과 장승이 있던 곳으로 도로가 났고, 사람들은 도로를 따라 도시로 떠났다. 장승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믿음도 희미해졌다. "알지. 미신 그까짓거 뭐 대단하다고. 밝은 세월에 미신을 따라가려고 하냐고 하고, 애들도 반기지 않고 그래서 한 4~5년 장승제를 안했지. 산신제는 아주 안지내고."요즘은 장승제를 2년에 한 번씩 한다. 장승제를 부활시킨 것은 김영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었다. "한동안 젊은 사람들 중에 나서서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안 하게 됐어요. 70~80 되신 어르신들이 하기에는 힘든 일이니까요. 그러나 마을의 자랑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잊혀지는게 안타까워서 청년들이 다시 나선 거지요."요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장승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평일에 하던 장승제를 음력 2월 첫번째 일요일에 연다. 장승을 만들 때 쓰는 연장도 전기톱이나 전기대패를 써서 제작 시간을 줄였다. 지난해 열린 장승제는 경기문화재단과 광주문화원, 엄미리 마을이 공동 주관해 마을 행사가 아닌, 광주시 행사로 치러졌다. 학계나 언론의 관심도 높았다.문화원 관계자는 "엄미리 장승제는 수도권에서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는 민속문화로 장승의 모양이나 장승제 진행 방법 등 문화적 가치가 매우 커 그동안 학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며 "잘 전승될 수 있도록 다각도로 노력할 것" 이라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마을을 지키고 있는 수호신 장승. 평안과 지역분들의 무병을 기원하기 위해 2년에 한번 지내는 엄미리장승제는 제례의식을 370년동안 치르고 있다.①퇴촌면 우산리 천하대장군.② 중부면 엄미리 천하대장군.③ 목현리 천하대장군.④ 퇴촌면 우산리 지하여장군.⑤ 중부면 엄미리 지하여장군.⑥ 목현리 지하여장군.광주시 목현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입술에 붉은색을 칠한 천하대장군.

2016-08-30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2 ] 이천 효양산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

역사적 인물들의 일대기 드라마틱하게 접목 '선녀와 나무꾼'과는 다른 결말서필·서눌 등 집안 3대 모두 정승 이름 떨쳐… 서신일 묘자리 '최고의 명당'금송아지·금베틀 설화 이천의 무한 가능성… 내달 '서희문화제' 자부심 계승# 사슴 한마리가 황급히 나무꾼에게 달려오더니, 사냥꾼이 쫓아오니 숨겨달라고 애원했다. 사슴의 몸에는 화살이 박혀있었다. 나무꾼은 사슴을 숨겨주고 사냥꾼에게는 사슴이 저쪽으로 갔다고 말해 사냥꾼을 따돌렸다. 은혜 갚은 사슴이야기의 전반부다. 전래동화 '선녀와 나뭇꾼'에서는 목숨을 구한 사슴이 나무꾼에게 선녀가 목욕하는 연못의 위치를 알려준다. 나뭇꾼은 선녀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는다. 이천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결말은 이와 다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覺)' 등의 옛 문헌에도 소개되어 있는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들의 일대기와 접목돼 보다 생생하고, 드라마틱하다.사슴을 구해준 사람의 이름은 서신일이다. 그는 여든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서 씨에게 "그대가 구한 사슴은 나의 아들"이라며 "곧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아이를 얻게 될 것이며 자자손손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 달 후 정말로 아들이 태어났다. 천수를 다한 서 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슴이 다시 나타나 상주의 옷자락을 물고 이끌었다. 상주는 사슴이 안내한 곳에 서 씨의 묘를 썼다. # 서 씨의 아들은 고려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정민공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성품이 곧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임금에게라도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치를 좋아하는 광종이 신하들에게 금으로 만든 술잔을 하나씩 선물했는데, 서필은 받지 않았다. 왕이 사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신이 비록 재상 자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평소 임금님을 잘 보필하지 못한 터에, 이제 금 술잔을 내려 주시니 더욱 황공하고 분수에 넘치는 일입니다. 의복과 그릇의 쓰임에는 각각 구별이 있어야 하고, 사치와 검소한 정도에 따라 나라의 치란(治亂)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만일 신하들이 모두 금 그릇을 쓴다면 임금님께서는 장차 어떤 그릇을 쓰시겠습니까?" 라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필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둘째 아들 서희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피한방울 흘리지않고, 외교력만으로 나라를 구했다. 소손녕은 고려가 거란의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어 침입했음을 밝혔다.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요양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해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했다. 서희의 언사와 기개를 본 거란은 싸우지 않고 철병했다. 서희는 그 후로도 북진을 개척해 고려의 국방력을 튼튼히 하는데 힘썼다.서희의 아들 서눌(徐訥) 또한 정종때 높은 관직에 오른 문신이다. 이처럼, 3대가 모두 정승의 지위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치고, 그 후손들이 번창해 이천 서씨 가문의 일대 중흥을 일으켰다. 후손들은 이 모든것이 신일이 사슴을 구해준 은덕이며, 사슴이 잡아준 신일의 묘자리가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여겼다. # 서신일의 묘가 있는 곳은 이천 효양산이다. 200m가 안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천 사람들에게 효양산은 '우주산'이다. 그만큼 효양산에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도 많고, 보물과 명당도 많다. 가장 잘 알려진 보물은 금송아지다. 중국 황제가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대야에 금송아지가 보였다. 점쟁이는 이 금송아지가 효양산에 있다고 일렀다. 황제는 금송아지를 몰래 가져오라며 신하를 보냈다. 이천 작별리에 다다른 신하는 머리가 하얀 노인에게 효양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노인은 "이 길을 계속 걸으면 오천 고을이 나오는데, 오천 고을을 지나 억만리를 가서 다시 이천장을 지나가면 억억다리가 있지. 억억다리를 건너면 구만리벌판이 나오는데 그 건너편에 있는 산이 효양산"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덧붙였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중국으로 장사를 가셨는데 하도 오지 않으셔서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못 만났고, 이 지팡이도 원래 두 자가 넘었는데 다 닳아서 손바닥만큼 짧아졌소." 이 말을 들은 신하는 금송아지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 노인은 금송아지를 지키려는 효양산 산신령이며, 금송아지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효양산에는 이 베틀로 짠 옷을 입으면 사람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하늘을 날게 된다는 '금베틀'과 무엇이든 그릇에 담는대로 가득 찬다는 '화수분'도 있다.이천문화원 이동준 사무국장은 "구만리뜰이나 억억다리 등은 모두 이천에 실제하는 지명으로, 이런 설화들은 이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보물에 관한 설화가 보물의 효험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천의 미래도 사람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천시는 2005년부터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를 열어 청소년과 시민들이 고장의 전설과 역사를 알게하고, 화합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올해부터는 '서희문화제'로 이름을 바꿔 9월 10일 서희테마파크에서 개최한다.이천시의회 김하식 의원은 "전설문화축제는 효양산이 있는 부발읍에서 읍단위의 작은 행사로 시작됐다. 읍민들과 초등학생들의 백일장을 치르며 서희선생의 외교능력을 통해 화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이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주변 지역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전설과 문화적으로도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효양산과 서희선생이라는 인물은 이천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 할 만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전 국민이 참여하도록 대상을 확대했다. 앞으로 이천의 문화원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사슴의 보은으로 태어난 서필. 그의 둘째 아들인 고려 최고의 협상가 서희 선생의 고향인 이천시 마암리 효양산 자락에 서희테마파크를 조성해 1000년 전 거란 80만 대군을 담판협상으로 무찌른 서희 선생의 애국·보국 정신을 되새기도록 했다.1 사슴을 숨겨 사냥꾼을 따돌린 서신일2 사슴의 보은으로 여든의 나이에 아이를 낳은 서신일.3 서희선생이 18세에 과거급제해 금의환향.4 거란의 80만대군 고려 침략.5 적장 소손녕과의 역사적인 담판.6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힌 서희.

2016-08-23 민정주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 안성 돌미륵

대부분 고려때 건립된 미륵상 지역내 16개·유허지도 2곳 있어… '투박·단순·거대' 특징죽산에 머물던 궁예 미륵불상 건립과 연관·험상궂지않은 삼존불 구도 국사암 뒤쪽 자리희망의 신앙으로 수용… '코 갈아 마시면 득남' 등 민중 염원 더해진 많은 이야기 전해져사슴을 살려준 나무꾼의 후손은 훗날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오성과 한음은 조선시대 명신이지만, 우리 기억에는 재치와 익살꾸러기로 남아있다. 비만 오면 우는 청개구리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본 친숙한 이야기다.그러나 이 이야기의 발원지가 경기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인일보는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경기도의 숨겨진 문화유산을 찾아 나섰다. 경기학연구센터는 올해 '경기도 31개 시·군 문화원형 상징 선정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 문화의 원형이 되는 유산을 찾고, 유산의 가치를 현재에 되살릴 방안을 모색한다. 이로써 천년 경기의 문화저력을 재발견하고 경기도의 위상을 현양하고자 한다. 본지는 15차례 대표 문화원형을 소개한다.┃편집자주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여름 한낮에, 누군가 생수 한 병을 두고 갔다. 그보다 더 일찍 차려졌을 떡이며 과일이 상한데 없이 정갈하다. 태평미륵 제단 앞은 사철 정성이 모인다. 오가던 마을주민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도 있고, 주변 식당을 찾아온 객들이 멀리서 발견하고 구경 오기도 한다.태평미륵의 정식명칭은 매산리 석불입상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37호다.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3.9m의 석조 보살상으로 고려 초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눈이 길고 입은 작다. 목에는 번뇌, 업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에 비해서 체구는 다소 작고, 좁은 어깨는 조금 처져있다. 두 손의 구부러진 모양이 두드러져 보인다. 사찰에서 보던 불상과는 다르게 투박하고 단순하고, 거대하다. 이것은 안성 미륵의 특징이다.태평미륵은 여수에서 용인까지 이어지는 17번 국도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오래전에는 한양에서 부산까지 연결된 영남대로의 길목이었던 곳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누구나 잘 볼 수 있을 만큼 큰 돌미륵이 서 있다. 안성은 예로부터 돌미륵의 고장으로 알려졌다.안성에는 16개의 미륵불상이 남아있다. 유허지도 두 곳이 있다.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안성에 유독 돌미륵이 많은 것은 지역적 특성과 더불어 불교의 전파과정과 연관이 있다. 안성은 온갖 것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남에서 개성이나 한양을 가려면 안성을 지나야 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다. 갓도 고쳐 쓰고, 여장도 다시 꾸리던 곳이다. 매일 장이 서고, 사람이며 물건이며 돈이 넘쳤다. 통로라는 것이 그렇듯,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남쪽 경계선이었고 삼국시대 영토 싸움이 숱하게 벌어졌다.그리고 궁예가 있었다. 궁예는 안성 죽산에 머물며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궁예미륵 불상이 건립된 것은 이와 연관이 있다. 안성문화원 소병성 부원장은 "삼국사기 궁예전에 따르면 궁예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법명을 지어 사찰을 순례했다"며 "안성은 신라 못지않게 불교가 성장했는데 이는 궁예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궁예미륵의 정식명칭은 석조삼존불상이다. 기솔리 국사암에 있다. 국사암은 법상종의 사찰로 쌍미륵사에서 국사봉쪽으로 2km정도 오르면 나타난다. 암자 뒤쪽으로 세 미륵상이 서 있다. 궁예미륵이라고 하지만 험상궂지는 않다. 크기도 작고 단순하게 조각돼있다. 중앙에 궁예를 둔, 삼존불의 구도를 지니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쌍미륵사에는 거대불상 한 쌍이 사찰을 굽어보고 있다. 두 미륵석불입상 중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미륵을 남미륵이라 부른다. 5.4m 높이에 둘레가 4m에 이른다. 남쪽에 있는 날씬한 미륵은 여미륵이다. 여미륵도 높이가 5m, 둘레가 3m다. 중생의 모든 불안을 없애 주고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손모양을 하고 있다.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천 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중생을 구제할 미륵이 오면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해,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인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은 8만4천 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미륵불신앙은 우리나라에서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됐다. 백성들은 국가의 풍요와 안락을 미륵에게 빌었던 것이다.고려시대부터 시작된 미륵신앙에는 더 깊은 민중의 염원이 더해지면서 많은 이야기를 지니게 됐다. 대농리석불입상(대농리 미륵)에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의 위치를 옮기려 하니 오히려 미륵 불상이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안성땅에 힘이 세고 큰 장수가 있었는데 실수로 아양미륵을 다치게 해 전장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백성들이 미륵에게 가졌던 경외감을 드러낸다. 돌미륵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지금까지 연구된 바로는, 안성미륵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나말려초(羅末麗初)의 미륵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궁예와 연관돼 독특한 안성의 미륵불상으로 발전했다. 거대불의 특징은 고려초기 불상의 일반적 특징이고 발이 땅에 묻혀있는 것이 미륵불상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형태가 소박하고 서민적인 것은 안성미륵이 지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호국정신과 결합된다는 점 또한 안성미륵신앙의 특징이다. 태평미륵에 얽힌 이야기 중 하나로 1235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산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던 송문주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평미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성 미륵에 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고, 그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소병성 부원장은 '안성 사람들이 돌미륵을 대하는 태도는 형제지간과 같다'며 돌미륵의 가치를 설명했다.그는 "매일 같이 있으니 특별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무심한 것 같지만 전혀 거리감없이 친근한 존재"라며 "60대 이상의 안성 사람치고 돌미륵 앞에서 손 한번 안 모아보고, 고개 한 번씩 안 숙여본 사람 없고, 1년에 한두 번은 향불을 피운다"고 전했다. 이어 "돌미륵을 향한 마음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이고 돌미륵은 안성의 역사, 종교, 민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안성의 문화원형으로서 더 연구하고 가치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1 안성 기솔리 국사암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세 미륵상은 궁예가 안성 죽산에 머물며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며 정식명칭은 석조삼존불상이다. 코부분이 없는 이유는 코를 긁어 가루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때문이다.경기도 유형문화재 37호인 매산리석불입상.궁예미륵쌍미륵사의 거대 불상인 쌍미륵쌍미륵

2016-08-16 민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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