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앵글 시즌1 성곽을 보다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10)이성산성]풀숲과 성벽 아래 어딘가··· 꿈처럼 스며든 찬란한 시절

6세기 중엽 쌓은 신라성 추정, 발굴 진행중총 둘레 1665m 달하고 내부엔 평탄한 지면대형건물 흔적 발견, 옛도시 중심지 가능성10 하남 이성산성무성한 녹음 사이로 옛 산성의 흔적들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퍼즐 조각 같이 흩어져 있다. 산성으로 발굴된 곳들은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다. 금암산과 객산에 둘러싸여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고, 성벽은 총총히 박힌 옥수수알인양 촘촘하게 쌓여 탄탄한 모양새다. 하남 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의 분기점이 되는 이성산 정상과 남동쪽 골짜기를 감싸안은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이성산성은 아직 발굴이 진행중이다. 한강 유역에 위치한 산성인 만큼 백제와 고구려, 신라 중 누가 주인일 것이냐를 두고 학계에서 설왕설래했지만, 6세기 중엽 축성돼 9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신라성이라는 설이 대세다. 총 둘레 1천665m의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성곽 중 규모가 큰 편이다. 특히 성 내부의 경사가 대부분 완만하고 평탄한 땅에 조성돼 있어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매우 넓었다. 병사들의 이동 경로도 다른 성곽에 비해 편의성이 돋보인다. 성벽 안 쪽에 5m 가량의 회곽도를 두었고 성이 급격하게 굽어지는 부분에는 별도의 치(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를 설치했는데, 너비가 12.5m에 달할만큼 넓게 축조했다. 이성산성은 최소 15개소 이상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른 산성에는 찾기 어려운 특징이다. 그 중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과 사직단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있어 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성산성이 옛 도시의 중심지였던 읍치성으로 축성됐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이성산성 동문지.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6개의 건물지 중 9각 건물지.장방형건물지,저수지 등이 내려다 보이는 이성산성(사적 제422호)

2017-07-03 공지영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9)죽주산성]제국도 감히 넘지 못한 성벽, 고목은 노병처럼 버티고 있었다

"한 명의 군사로 적을 막는다" 철옹성고려 후기 송문주, 몽골 침입 물리쳐성 안엔 장군 전공 기리는 사당 남아9 안성 죽주산성비봉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죽주산성은 좀처럼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으로 오랜 시간 우리 국토를 지켰다. 조선 선조 때 한음 이덕형은 임금에게 "죽주산성은 단 한 명의 군사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죽주산성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다. 고려 후기에는 송문주 장군이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이름을 날렸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백성들과 함께 죽주산성으로 피란한 그는 몽골군의 공격법을 미리 알고 기습해 물리쳤다.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송문주 장군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들을 유난히 총애하는 어머니 때문에 화가 난 그의 누이가 그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송문주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개성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밥 먹기 전에 돌아오고 누이는 밤부터 성을 쌓기로 하여 지는 사람이 죽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누이는 벌써 성을 다 쌓고 성의 남문을 달 때인데 개성에 간 송문주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누이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고 하라고 권했다. 누이가 팥죽을 먹고 성문을 달려 할 때 송문주가 돌아왔다. 누이는 어머니에게 속은 것을 알았으나 약속을 지켜 죽었다. 성 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사진 4)이 남아있다. 이밖에 성 안팎으로 많은 문화유적을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진전사찰(眞殿寺刹, 왕의 초상을 모신 전각이 있는 절)이었던 봉업사지와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등이다. 안성은 예로부터 대로가 나고 사람이 모여 살거리와 볼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이야깃거리도 많은 동네다. 산길을 따라, 성곽을 돌며 다채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비봉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호). 본성은 1.7㎞이고, 외성 1.5㎞, 내성 270m로 세 겹의 석성(石城)이다.안성 죽산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제97호).죽주산성 동문.송문주 장군 영각.

2017-06-26 민정주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8)당성]바다 건너 떠난 배 돌아오지 않으니 기다림은 세월 이고 땅 속에 잠들어

삼국시대 중국 오가던 해상 실크로드 관문, 신라가 차지하며 통일 발판성황당 헐자 망해루 터·4차 발굴서 유물 1천여점… 많은 부분 묻혀있어8 화성 당성지난해 가을부터 반 년 동안 진행된 4차 발굴조사가 끝나면서 당성에는 오랜만에 고즈넉한 여유가 흐른다. 당성은 백제 시절에는 당성군으로, 고구려 시절에는 당성으로 신라가 차지한 뒤에는 당항성으로 불렸다. 무슨 이름으로 불렀든, 삼국은 당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신라는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당성 지역이 필요했다. 또한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676년 삼국을 통일하는 발판이 된 중요한 지역이다. 가장 먼저 축성된 성벽은 구봉산 정상에서 봉화산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테뫼형으로 축조됐다. 테뫼형이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일정 공간을 돌린 형태다. 테뫼형은 보통 성벽이 7∼8부 능선을 따르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에 흰 띠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정상부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해 신라 말에 구봉산 동북쪽 능선을 따라 포곡식 성벽을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 쪽에는 수구터가 있다. 수구터 안쪽에는 지금도 샘이 있어 물이 사철 나온다. 서벽에 연한 정상부에는 노목이 우거진 숲이 있고 여기에 성황당이 있었다. 발굴조사를 위해 성황당을 헐자 망해루인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드러났다. 먼 바다를 내다보던 산성의 망해루가 성황당이 됐다. 내다보는 사람의 마음에 담겼던 것들은 아직 많은 부분 묻혀있다. 발굴조사는 1990년대부터 시작돼 1차 조사에서 성벽과 건물지, 2차에서 동문지, 명문기와 40여점이 발견됐다. 지난 4차 발굴조사에서 다수의 유구와 유물 1천여 점을 확인하면서 당성이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음을 재입증하게 됐다. 조차는 12차까지 계획돼 있다. 아직 초반인 것이다. 앞으로 당성이 무엇을 더 내보일 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둘레 1천200m. 지난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됐다.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화성 당성 현장.구봉산 당성내 자리잡고 있는 사찰 신흥사. 1934년에 창건됐다.

2017-06-19 민정주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7)파사성]달아나는 저 강물 부러워… 산위를 흐르는 역사에 발을 담근다

신라 파사왕 축성 알려져, 2천년간 수차례 수·개축정상 서북쪽 아래 암벽에 '마애여래상' 사찰터 짐작유성룡 승군 동원 보수·빼어난 경치 감탄 詩로 남겨7 여주 파사성산의 굽잇길과 강 위로 곧게 뻗은 다리가 서로 마주 본다. 산과 강의 조화가 오가는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운다. 조선의 명재상 유성룡은 파사성의 경치를 두고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게 굽어 돈다. 봄바람은 날마다 끝없이 불어오고 지는 꽃잎은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날린다'는 시를 남겼다. 지금 우리가 파사성을 거닐며 정취에 취하고 선인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과 같은 시간을 그도 지나왔던 것이다.파사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알려졌다. 신라 파사왕(80~112) 때 축성해 파사성이라 명명했다는, 그래서 산 이름도 파사산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대 파사국의 옛터라는 말도 전해 내려온다. 2천여 년 전의 옛이야기가 전해지는 만큼 파사성의 역사는 오래됐다. 오래됐으나 낡지 않고 오랫동안 쓸모와 위용을 간직했다. 축성 이후 수차례 수·개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초창기의 성벽과 이후 수리를 거친 성벽이 명확히 구분된다. 성의 정상부에서 서북쪽 아래에는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상 조각이 남아있다. 이 마애불 부근에 평평한 대지가 있고 그 아래서 기와편이 수습됐다. 파사성과 관계 있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임진왜란 때는 유성룡의 뜻으로 승군장 의엄(義嚴)이 승군을 동원해 둘레 1천100보의 산성을 수축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파사성은 산길과 물길을 동시에 내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한강 이남을 지켜왔다. 오랜 시간과 인간의 노력과 잘 벼른 물질의 퇴적이 성을 지금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단단함이 파사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락한 휴식을 준다. 볕이 더 강해지고 잎이 더 무성해질수록 그럴 것이다.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에 걸쳐져 있는 파사성은 사적 제251호로, 신라 제5대 임금 파사왕 때 처음 쌓은 석축산성으로 전해진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져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새로 꼽히며 가장 높은 곳은 6.25m, 낮은 곳은 1.4m가량 된다. 둘레는 1천800m 정도다.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파사성 서북쪽 옆산의 정상 아래에는 암벽을 수직으로 깎아 5.5m 높이의 불상을 새겼다. 이 불상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인 양평상자포리마애여래입상(楊平上紫浦里磨崖如來立像)이다. 상당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모습이다.파사성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남한강.파사성 남쪽 성벽.

2017-06-12 민정주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6)강화산성]굴하지 않은 섬의 절개, 다시 일어선 성의 기개

1232년 대몽항쟁 위해 축성 시작몽골 요구로 허물었다 쌓는 풍파1677년 강화유수 허질 석성 개축구한말 양요 등 외세침략 견뎌내6 강화도 강화산성처음엔 토성(土城)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어느새 석성(石城)이 되었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일대에 자리한 강화산성(江華山城) 얘기다.성을 에워싼 묵직한 돌들만큼이나 묵직한 세월과 역사를 품고 있는 강화산성. 산성의 남쪽 성벽 장대에 오르니 강화읍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면서 산성에 오르기 전 짧게나마 살펴봤던 산성의 축조 배경이며, 몽골의 요구(1270년)로 헐렸다가 다시 개축되기까지 수많은 풍파를 이겨낸 산성의 역사가 파노라마 돌듯 펼쳐졌다. 강화산성은 구한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만큼 감회가 남달랐다.강화산성이 세워진 것은 1232년 고려 23대 고종이 몽골의 2차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본격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1234년부터라고 한다. 산성은 내·외·중성으로 구성된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이었으나 1677년 강화 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석성으로 쌓아올렸다. 1709년에 강화 유수 박권이 다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이어졌다. 1973년에는 남문, 2004년에는 동문이 복원돼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성이기 때문일까. 6월의 신록과 어우러진 성곽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성곽을 이루는 돌들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같다. 산 아래 펼쳐진 강화읍,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 여느 산성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특히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북한의 송악산도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모습까지 눈에 담지 못한게 아쉽기만 하다. 산성을 걷는 나들길도 잘 조성돼 있어 초록 무성한 숲길을 걸으며 성곽에 켜켜이 스며든 역사를 나도 모르게 그려보게 됐다. 한편 강화산성은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됐다.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길이는 7.1㎞에 이르며 4대문, 암문, 수문 그리고 북장대, 남장대를 비롯한 장대가 있다. 사진은 남장대.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화산성 남문. 안파루라 불리며 조선 숙종 37년 건립됐다.강화 석수문은 조선시대의 수문으로 길이 10m, 높이 3.8m, 너비 4m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세 개의 수문으로 돼 있다.연무당 옛터.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었던 연무당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다.

2017-06-05 이윤희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5)설봉산성]불꺼진 봉화대 눈 멀고, 탐내던 군왕들 스러지고… 바람아 옛 이야기나 들려주렴

삼국시대 정치 군사 요충지백제가 터 잡고 신라가 증축설봉산 능선 따라 계곡 감싸조선시대엔 한성 진입 거점5 이천 설봉산성매끈한 성벽이 산길을 휘감아 뻗어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벽이 정교하고 견고해 보여 마음이 놓인다. 젊어서의 성곽은 강직하고 고집이 셌을 것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무성해진 푸른 잎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녹음 사이에서 돋보인다. 이천 설봉산 7부 능선을 따라 축성된 설봉산성은 칼바위를 중심으로 계곡을 감싸고 있다. 이 천혜의 산성은 삼국의 역사를 품고 있다.삼국시대에 이천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시대와 고구려 점령기를 거쳐 신라가 한강유역까지 진출한 이후로는 신라의 중요한 정치 군사상 요지로 자리 잡았다. 서로를 피해갈 수 없는, 만나는 자리였다. 설봉산성의 터는 백제가 잡고, 신라가 증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성의 하부에서는 백제 토기 등 백제의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흙으로 메워진 중간 깊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매장돼있었다. 이는 학계의 뜨거운 이슈가 됐다. 백제는 토성만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90년대 후반 백제 유물이 출토되면서 설봉산성은 백제도 석성을 축조했다는 주장의 강력한 증거가 됐다. 이천에는 유난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삼국의 군사가 모여들었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한성 진입의 거점 역할을 했다. 사람이 모이는 만큼 이야기들이 쌓이고 넘치도록 쌓인 이야기가 사람을 끌어 들인다. 가벼운 바람 한 줄기가 불어갔는데 나뭇잎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이천 설봉산성은 사적 제423호로 지정됐으며, 이천시 사음동과 관고동에 걸쳐 위치한다. 해발 394m인 설봉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해발 325m 봉우리의 7부에서 9부능선을 중심으로 축조됐다. 둘레 1천79m의 테뫼식 산성이며 면적은 8만5천880㎡이다.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설봉산성의 명소로 꼽히는 '칼바위'설봉산성 내에서 가장 높은 평탄대지인 '남장대지'터설봉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영월암(映月庵). 신라 문무왕 때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2017-05-29 민정주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4)독산성]쌀로 씻긴 말 전설 흐르고, 나그네 초록에 목 축이네

임진왜란때 물이 없다 얕잡아본 왜군권율장군 쌀로 말 씻겨 '물 풍부' 속여백성들 희생없이 적군 퇴각 지혜 빛나4 오산 독산성 흙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한쪽으로는 탁 트인 일대의 전경이 펼쳐진다. 산성은 멀리 내다보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곳에 오르는 누구나 먼 곳까지 보게 된다. 시선의 끝은 하늘까지 닿는다. 5월의 맑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곳의 시선으로 독산성을 앵글에 담았다. 담고보니 다른 산성과는 다르다. 지금까지 보았던 성곽은 키보다 높은 성벽을 손으로 만지며 걷게 됐다. 독산성을 걷다 성곽을 찾게 됐다. 어디가 성곽일까, 한참을 둘러보았는데 딛고 선 그 길이 성곽이다. 길처럼 이어진 성곽 위를 유유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여유가 어려있다.독산성에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말을 씻어 왜군을 물리쳤다는 '세마대지'의 전설이 전해진다. 산 위에 있는 진지는 물이 부족했다. 왜군은 이를 알았지만 여기까지였다. 권율은 이를 이용한 꾀로 그들의 전의를 물리쳤다. 왜군은 물이 부족한 벌거숭이 산에 진을 친 조선군을 얕잡아보았다. 권율은 그 산 꼭대기 정상에 흰 쌀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쌀로 말을 씻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조선군을 보고 있을 왜군에게 흰 쌀은 쏟아지는 물처럼 보였으리라. 왜군은 성 안에 물이 풍부한 줄 알고 그 길로 퇴각했다. 그렇게 권율은 백성들의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난한 전쟁의 한 부분을 이겨냈다. 이야기를 떠올리며 성을 걸으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진다. 머리 위엔 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발 아래는 푸름이 무성한 숲과 도시가 서 있다.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경기 오산시 지곶동에 위치한 독산성(禿山城·사적 제140호)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권율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던 산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았던 성이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곳으로 도성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로 꼽힌다.임진왜란 때 왜군이 독산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 조롱하다 권율장군이 쌀로 말을 씻겨 왜군이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해 퇴각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세마대지. 쌀로 말을 씻긴 곳이라 해 '세마대'라고 했다.백제고찰 보적사(寶積寺). 세마산 독산성 내에 위치하며 401년 백제(백제 아신왕 10)에서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2017-05-22 공지영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3)남한산성]왕이 나가고 세월은 빈 틈을 메웠다

병자호란 47일 항전 부침 견뎌삼국시대 쌓은 주장성 토대 추정해발 500m 성곽 12㎞ 달해3 남한산성역사의 굴곡 한 번 온몸으로 견뎌내지 않은 성곽이 있을까. 5월의 푸른 신록을 감싸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면, 그 어느 성곽보다 견고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레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 성곽 본연의 목적까지 의심하게 된다. 해발 500m가 넘는 곳에 위치해 성곽 전체의 길이가 11.76㎞인 남한산성이 도성을 지키려는 방어의 목적이 아닌 수려한 자연에 화룡점정을 찍기 위한 건축이 아닌지 장난스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하지만 한없이 평화로웠을 것만 같은 남한산성도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 요충지로 자리해오면서 수많은 부침을 겪어왔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꿋꿋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 왔다.특히 조선시대인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의 공격을 피해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어 47일간 항전을 벌인 일은 남한산성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이 때문에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책도 나왔고, 창작뮤지컬도 제작됐으며 조만간 영화로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결사항전의 장소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러한 굴곡이 스토리가 돼 문화콘텐츠로도 사랑받고 있다.이곳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 현재 남한산성의 토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인조 4년(1626)에 축성을 완성하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에 봉암성, 한봉성을 쌓는 등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경기 광주, 성남, 하남에 걸쳐 자리한 남한산성을 아울러 보니 산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청량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전하고 있는지 새삼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한편 남한산성은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됐고, 1971년 3월 17일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제158호),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① 남한산성은 해발 500m 넘는 곳에 위치한 산성으로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자리한다.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②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3년(1625)에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된 남한산성 행궁(行宮). ③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수어장대. ④ 국가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 성곽의 전체 길이는 11.76㎞로 지난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바 있으며 오늘날 시민들에게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2017-05-15 이윤희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2)고양 행주산성]나라를 지켜낸 토성, 그 아래 드러난 석성… 누가 알았으랴 이 굳은 심지를

동서남북 시야 확 트인 요충지덕양산 정상 둘러싼 진지 구축삼국시대 추정 석성 발견 주목철제무기 치열했던 역사 증거예쁘게 난 오솔길 같기도 하다. 길을 따라 걸으면 주변의 경관이 시원스레 한 눈에 들어온다. 녹음이 내리기 시작한 행주산성은 임진왜란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 행주산성은 둔덕 같은 토성 아래 오래 숨겨두었던 것을 살짝 드러내 보였다. 황토 흙 아래 석성이 있었다.그동안 토성으로 알려졌던 행주산성에서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 사람들은 맨 손으로 이 성을 쌓아 올렸을 테니 성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이기도 하다.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을 둘러싸고 진지를 구축했다. 산세가 험하지도, 고도가 높지도 않은 이 곳에 성을 쌓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늘 위에서 바라보니 이 곳 지형의 비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행주산성은 절대 뺏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 였다. 덕양산을 둘러싸고 드넓게 펼쳐진 평야는 시야 확보에 유리했을 것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경계하며 언제든 적을 무찌를 준비가 돼 있었을 테다. 석성과 함께 발견된 철제 무기들도 치열했던 수 천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행주산성은 저 강 건너, 수도를 지키기 위한 최전방 방어선이 됐다.긴 세월 속에 묻혔던 역사의 비밀이 이제 막 풀리기 시작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치마폭에 돌을 나르던 아낙네들의 눈물, 그 너머에 존재했던 누군가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몫이다.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으로 알려졌던 행주산성에서 최근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 발견된 석성은 그동안 9세기 무렵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의 흔적만 전해졌던 행주산성의 실증 유물의 역사를 5~6세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다. 성은 동서로 약간 긴 형태로 1㎞ 가량의 테뫼식 산성이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행주대첩비국가사적 제56호인 행주산성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 발굴현장.행주대첩과 관련한 시청각 자료가 있는 충의정.

2017-05-01 공지영

[하이앵글 시즌Ⅰ 성곽을 보다·(1)수원 화성]우리를 닮은 듯 굳게 물린 돌들의 연대… 도시를 감싼 너른 품

200여년 세월 견딘 원형 그대로 간직행궁~창룡문 잇는 가로망 '수원 골격'서울 통하던 '장안문' 백성 행복 의미'팔달문' 중앙에 門 사람·물자의 통로위에서 보면 전체가 보인다. 전체가 보인다고 제대로 사물을 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올려 보는 것이나 마주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움직임과 변화를 드러낸다. 보는 이의 마음도 달라진다. 굽어보는 전체는 순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 굽어본다는 말에는 '돌보아 주려고 사정을 살핀다'는 뜻이 담기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경인일보는 '하이앵글'을 통해 경기와 인천의 산하와 도심 풍경을 내려다 볼 것이다. '하이앵글'이 첫 번째로 담은 것은 성곽. 성(城)은 역사다. 성곽의 유려함과 그곳에 새겨진 선현들의 발자취를 담아본다. ┃편집자주수원 화성에는 4개의 각루가 있다. 성곽 내에서도 높은 위치에 세워진 각루는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도 하지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기도 하다. 서북각루에 올라 상공을 향했다. 내내 뿌옇던 하늘은 먼지가 걷혀 오랜만에 새파랐다. 파란 하늘 위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화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조대왕의 '효' 사상이 함축된 성으로도 칭송받지만, 수원 화성은 축성 당시 원형이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훼손되지 않은 건 성곽만이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수원천이 북수문(화홍문)을 따라 여여히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은 현재 도시의 주요 골격으로 남아있다. 약 6㎞에 달하는 성곽을 따라가면 4개의 성문이 보인다.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을 잘 배합한 독특한 성으로 모든 건조물이 제각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서울로 통하는 장안문은 정문이다. 장안은 수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도 담고있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석축 위에 1층 누각을 만들었다. 특히 화서문 편액은 초대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사통팔달'의 의미를 지닌 팔달문은 사람과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중앙에 문을 낸 것이 특징이다.200년 전 축성된 수원 화성 속에서 여전히 우리 삶은 계속되고 있다. 도시 사이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도 활기차다. 하늘에서 바라보니, 화성을 중심으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된 행궁동의 풍광이 자랑스럽다.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1796년(정조 20) 7월 19일 완성된 수원화성(水原華城) 성곽 내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이 있으며,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으로 화성에서 처음 등장했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1789년(정조 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된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華城行宮).

2017-04-17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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